전현광 전 정축년(1937) 田玄狂傳【丁丑】 전사위(田士猬) 군의 휘는 일중(鎰中)으로 구산 선생(臼山先生)167)의 손자이며 정재공(靜齋公)의 차자(次子)이다. 행동이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현동(玄洞)에 거주하기에 호를 현광(玄狂)이라 하였다. 군은 성품이 얽매이지 않고 기가 굳세어 일찍이 법도로 자신을 검속하지 않았으며 비록 귀인이나 명사를 보더라도 비굴한 모습이 없었으며 부귀한 자 보기를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이처럼 대하였다. 또한 말이 곧아서 사람의 허물을 보거든 즉시 마주하고서 꾸짖으니, 이로 인해 사람들이 대부분 미워하였다. 외모를 보면 거칠고 소략하다고 마땅히 이를 만하지만 의를 보는 것이 대단히 정밀하여 중론이 분분할 때는 홀로 대단히 좋은 단서를 제시하여 끝내니, 이로 인해 문장을 지으면 또한 그와 같았다.오진영(吳震泳)168)이 스승을 속여 원고를 고친 일이 일어나자 스승 집안의 여러 손자들 가운데 오진영을 변호하는 자가 많았으며 심한 경우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직 군은 부친의 뜻을 좇고 공의(公議)를 따라 변석에 힘을 쏟았으니, 그 문장이 많은데 뜻이 대단히 엄격하고 문사가 대단히 마땅하여 우리의 기를 돋우고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은 타인들이 미칠 수 없었다. 처음에 오진영이 스승의 도장을 몰래 날인하여 파리에 글을 보낼 때 선사는 재앙과 모욕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염려하여 자진할 도구를 마련하고서 변고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 때 군이 크게 외치면서 "우리 조부가 만일 화를 면하지 못한다면 도장을 몰래 날인한 자는 머리를 베고 배를 가를 것이로되 그 죄는 그래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지경에 이르자 또다시 속여서 고친 것에 대해 극력 성토하니, 그러므로 오진영이 두루 살펴보고 더욱 그 무리들과 함께 온 힘을 쏟아 지칠 정도로 허물을 찾아 참소할 거리를 만들어169) 하지 못할 말이 없었다.군은 천부적인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 부지런히 책을 읽지 않아도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니, 글을 지으려 붓을 잡으면 곧바로 써 내려가 미리 구상한 자와 같았다. 그러나 글이 완성되면 미진한 곳이 있나 생각하여 반복하여 자세히 살폈으니, 살피고 나면 끝내 고칠 곳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산문은 비록 문사와 이치가 모두 훌륭하더라도 모름지기 풍신(風神, 감염력)이 좋아야 비로소 잘 된 작품이며, 시는 새로운 의사가 있어야 바야흐로 시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매번 시를 지을 때는 진부한 말이 없도록 힘썼으며 산을 깎아내듯 생각을 깊이 하였다. 대개 시는 산문만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의미를 잘 담아낸 곳은 아름다운 것이 많았으니, 예를 들면 "새봄 경치에 시 천 수, 고국의 산하에 눈물 만 줄기.[新春物色詩千首, 舊國山河淚萬行]"라는 구절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타인의 시를 평할 때는 보이지 않는 허점이나 아주 작은 잘못도 군의 눈에서 피할 수 없었으니, 친한 관계인 경우는 자세하고 정밀하게 가르쳐주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싫증을 내지 않고 더욱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부형처럼 군을 친애하였다.군은 비록 행동을 검속하지는 않았지만 부정한 일을 저지른 자는 자신을 더럽힐 듯하여 멀리하였다. 바둑이나 장기 같은 것은 또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남의 집에 들어가면 먼저 책을 살펴보았는데 만약 처음 보는 책이 있다면 날이 저물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다 읽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으니, 대개 군의 강기박문(强記博文)은 이런 벽(癖)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현재 국중 선비라고 일컫는 아무개 등은 실제로는 모두 둔재이다. 만약 우리들이 조금 여력이 있어서 그 정도 공부하였다면 어찌 그들 정도에서 그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조선 오백 년 동안 단연코 다른 사람은 없으니 학문에 일생의 심력을 쏟아 부은 사람은 다만 우리 조부인데, 마땅히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손꼽기가 어렵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다소의 의견 가운데 성리, 학술, 정치에 관련된 것을 세 권의 책으로 저술하여 후대의 지식이 있는 자를 기다릴 것이니, 능히 성공할 지는 잘 모르겠다."라 하였다.군은 숙질(宿疾)을 앓았으니 병자년(1936년) 가을에 우리 집에서 머물며 요양하였다. 밤에 일어나 신음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 병의 빌미는 부조가 속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형제처럼 벗하는 그대가 바로잡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 해 11월 18일 전주의 우사(寓舍)에서 타계하였으니, 향년 46세이었다. 두 아들로 창기(鬯淇)와 은기(殷淇)를 두었다. 정축년(1937년) 봄에 내가 조자정(趙子貞), 최여중(崔汝重)과 함께 손주택(孫周澤)을 동반하고서 군의 영연(靈筵)에 곡을 하였는데, 당시 두 아들은 자리에 없었고 군의 종질 세기(世淇)가 맞이하였다. 곡과 조문의 예를 마치자 군의 부인인 정씨가 문안에 서 있다가 세기에게 말하기를 "너의 종숙부가 임종할 때 후창(後滄) 선생을 보기 원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라고 하고는 곧 두 아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면서 말하기를 "훗날 우리 집에 사문(斯文)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후창 선생에게 찾아가 처리하라 하였으니, 너는 이 말을 후창 선생에게 고하라."라고 하였다. 이른바 후창은 바로 나이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였으니, 면결(面決)하지 못해 죽은 이나 산 사람이나 아쉬움을 남긴 것이 한스럽다.군은 큰 기에 콧날이 높았으며 마른 얼굴에 성긴 수염을 지녔으니 그 조부와 대단히 비슷하다. 모습이 비슷하니 재주 또한 비슷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만일 힘써 공부할 여건이 되었다면 공자 문하의 자사(子思)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곤궁하게 굶주리며 떠돌아 다녔으며 생애 또한 짧았구나. 비록 그러나 조부가 당한 큰 무고를 씻어 내고 대의를 밝혀 후대로 하여금 대종사(大宗師)가 됨에 의심이 없게 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논한다면 자사(子思)가 되지 못한 것은 애석하지만 또한 이것으로 위로가 된다.삼가 생각건대 예전에 선사의 편지를 받들었을 때 "전에 일중을 가르치니 광자(狂者)170)와 같았다. 이것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그대가 인정하였으니, 스스로 부끄럽고 한편으로 다행하다."라고 하였다. 군이 중행군자(中行君子)는 되지 못하더라도 광자가 된 것은 선사께서도 또한 다행으로 여겼다. 오진영이 비록 신임(辛壬) 연간의 원고에서 이 편지를 빼버렸으나 군에게 어찌 손상이 되며 저에게 어찌 이익이 되리오, 다만 그의 시기와 악독함을 드러낼 뿐이다. 오호라! 군은 행실이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아 현광이란 호에 걸맞게 되었지만, 또한 그 행실이 큰 뜻과 말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현광이 되는 바이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증석(曾晳)이 계무자(季武子)가 죽었을 때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으며, 오이 밭의 김을 매다가 오이 뿌리를 다치니 큰 몽둥이로 때렸는데,171) 그 행위를 보면 유문의 법도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공자가 얻고 싶어 했던 광자로 인정하였으며 증삼(曾參)은 칠십 제자의 반열에 들었다. 지금의 현광을 논하는 자들은 문득 유자 법도의 밖에서 스스로 노닌 것으로 그를 무시하는데, 이를 증씨와 비교하면 어떻겠는가."나와 현광은 재주의 총명과 아둔함은 상대가 되질 않고 도량의 넓고 협소함은 또한 다른데, 한결같이 법도의 길을 따르게 하려고 하고 한결같이 비루함에 얽매인 선비가 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면 행동거지가 마치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서로 반대여서 서로 싸우는 사람처럼 말이 어긋났을 것인데, 그런대도 시종 우호가 좋은 것은 나는 그의 곧고 신실한 것172)에 도움을 받고 그는 나의 교묘하게 계교하지 않음을 취한 것이다. 8~9년 전에 현광이 나에게 약속하기를 '피차간에 손을 바꿔서 전을 짓자.'고 하였는데 미처 실천하지 못하였다. 지금 이 전을 완성함에 만약 현광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저 내용은 맞고 저 내용은 틀렸다."라고 하여 말을 들은 즉시 곧바로 고쳤을 것이니, 마치 초상화를 그리는 자가 사람의 지적을 듣고서 진본(眞本)을 완성하는 것과 같이 하였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슬프도다. 그러나 모방해 본 뜨는173) 졸렬함으로 모과를 던져 줌은174) 만년에 있었으나 용면175)의 뛰어남으로 경거(瓊琚)의 보답은 영원히 받을 희망이 없으니 훗날 저승에서나 요구할 수 있으리라. 더욱 더 슬플 따름이다. 田君士猬, 諱鎰中, 臼山先生之孫, 靜齋公之次子, 自以行不掩言而居玄洞, 故號玄狂.君性不羈氣岸高, 未嘗以繩墨自檢, 雖見貴人名士, 無卑屈態, 視富者若無有, 又口直, 見人有過, 輒面折之, 由是人多疾之.觀其外, 宜謂麤略, 至見義理却精細, 衆論紛然, 獨據極端究竟, 因而爲文, 亦如之.及吳震泳誣師改稿事, 作師門諸孫多護吳, 甚者至不可說, 惟君遵父志從公議, 討辨是力, 其文蓋多, 而義極其嚴, 辭極其當, 足以增吾氣, 驚彼膽者, 人不可及.始震之冒署師銜, 投書巴里也, 先師慮禍辱不測, 至備自盡具待變, 君大言之曰: "吾祖如不免禍, 冒署者可斬頭剮腹, 而罪猶餘." 至是又力討誣改, 故震周視之, 益甚與其徒, 疲勞吹覓, 增成箕錦, 無所不至.君天才超越, 少不勤讀, 然能博覽强記, 爲文操筆立書, 若宿構者然.然文成, 慮有未盡, 反復詳審, 審己亦竟無加點處.常曰: "文雖辭理俱盡, 亦須風神好始得, 詩則有生新意思, 方始詩." 每爲詩, 要無陳語, 窮思若鑿山然.蓋詩不如文, 然意到處, 多絶佳者, 如'新春物色詩千首, 舊國山河淚萬行'之句, 膾炙人口.評人詩文, 隱疪纖纇, 毫莫逃眼, 在相親則爲之詳示精點, 於少輩尤懇懇不倦, 受惠者親愛如父兄.君雖不檢束, 涉不正者, 若浼焉.至如碁博, 亦不近, 平居手不釋卷, 入人家先求冊子, 若初見者, 則至日夕鷄晨, 不了不輟, 蓋其强博以有此癖故也.嘗曰: "今所稱國中士某某, 其實皆鈍才, 使我少有餘力及此, 豈若彼而止." 因曰: "國朝五百年間, 斷然無他, 盡一生心力於學問者, 惟我祖考, 宜爲最選, 其難矣乎." 每喟然曰: "吾有多少意見, 欲以有關性理學術政事者, 著書三冊, 以待後之知者, 未知其能成乎否." 君抱宿疾, 丙子秋, 留養弊廬, 夜起呻吟, 謂余曰: "吾疾祟, 父祖受誣, 兄弟相友, 可治之乎." 竟以是年十一月十八日, 終於全州寓舍, 壽四十六, 有二子鬯淇殷淇.丁丑春, 余與趙子貞·崔汝重, 介孫君周澤, 哭君之靈, 時二子不在, 君從姪世淇對, 哭吊禮訖, 君內子鄭氏, 立門內語世淇曰: "汝從叔臨終, 願見後滄先生而不可得", 則召二子而前曰: "他日吾家有事關斯文者, 則往問後滄先生而處之, 汝其以此告於後滄先生也." 所謂後滄, 卽余也. 聞之絶悲, 恨不得面訣而致憾幽明也.君長身隆準, 瘦面疎髥, 酷似其祖, 貌之所似, 才亦如之, 固理也.如使力學, 尼門之思, 在玆矣.惜乎, 其窮餓棲屑, 年又促之, 雖然惟其祖大誣是雪, 大義是明, 俾百世不疑其爲大宗師, 執此而論, 惜其未然者, 亦可慰也.竊念昔承先師之書, 有曰: "前喩鎰中, 狂者一流, 此老夫不及知, 而君許之, 自愧且幸", 君雖不得爲中行, 其爲狂者, 先師亦幸之矣.震雖削出此書於辛壬之稿, 於君何損, 於渠何益, 只見其猜險也已.嗚呼, 君旣行不掩言, 所以止於玄狂, 亦以其有行不能掩之大志言, 所以爲玄狂也.夫論曰: "曾晳, 季武子死, 倚門而歌, 鋤瓜傷根, 撾之以大杖, 觀其擧措, 絶不似儒門規模, 猶許以孔子所欲得之狂者, 而參在七十子之列.今之議玄狂者, 輒以自放儒規外外之, 以之視曾氏爲何如也." 余與玄狂, 才之聰鈍不敵, 量之濶狹亦異, 一欲只循塗轍之跡, 一欲不作拘陋之儒, 行止反對, 如燕越, 言語衝突, 若爭鬪然, 而終始交好者, 我資其有直諒之益, 彼取我無機變之巧.八九年前, 玄狂約余, 以'彼此換手爲之立傳', 而未及踐矣.今於是傳之成, 若玄狂而在, 必曰: "某處中某處錯", 隨聞隨改, 若寫照者之聽人指摘以成眞本, 而不可得, 悲夫.雖然畫葫之拙, 木爪之投, 晩此有之而龍眠之竗, 瓊琚之報, 則永無可望, 他日可索之於泉臺也乎.重可悲夫. 구산 선생 간재 전우(1841~1922)의 호이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참소할 거리를 만들어 '기금(箕錦)'은 작은 허물을 부풀려서 다른 사람을 참소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항백(巷伯)〉에 이르기를, "조금 문채가 있는 것으로, 이 자개 무늬 비단을 이루었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 하고, 또 "조금 벌어진 것으로, 남쪽의 기성을 이루는도다.〔哆兮侈兮 成是南箕〕"라고 하였다. 광자 광자(狂者)는 큰소리는 잘 치는데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하지 못할 바에는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라고 하였다. 증석이……때렸는데 증석은 계무자(季武子)가 죽었을 때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맹자가 이르기를, "금장이나 증석이나 목피(牧皮)와 같은 자들이 공자께서 말씀하신 광(狂)이다." 하였다. 《孟子 盡心下》 일찍이 증삼(曾參)이 부친 증점과 함께 오이 밭을 김매던 도중에 실수로 오이 뿌리를 끊자 증점이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증자가 땅에 쓰러져 실신했다가 깨어났는데,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순(舜)과 고수(瞽瞍)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작은 회초리를 들면 화가 풀릴 때까지 다 맞고, 큰 몽둥이를 들면 얼른 피해 달아나야 한다.〔小棰則待過 大杖則逃走〕"라고 증자를 타이른 일화가 전한다. 《孔子家語 六本》 곧고 신실한 것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고 손해되는 벗이 셋이 있으니, 정직하고 신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고 하였다. 모방해 본 뜨는 '화로(畫葫)'는 의양호로(依樣葫蘆)의 준 말로 새로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과거의 것만 본뜨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한림학사 도곡(陶穀)이 오랜 기간 한림원에서 발휘한 자신의 재질을 자부하면서 지위가 낮은 것에 불만을 품고 은근히 승진을 바라고 있던 중에, 태조(太祖)로부터 "그가 지은 글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지어 놓은 것을 살짝 말만 바꾼 것일 뿐이다.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매달린 조롱박을 보고 그럴듯하게 본떠서 그려내는 것[依樣畫葫蘆]'일 따름이니, 그가 힘을 쓴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라는 핀잔을 받자, 스스로 옥당(玉堂)의 벽에 이 내용을 반추(反芻)하면서 원망하는 시를 지어 붙여 놓았는데, 태조가 이 시를 보고는 중용하지 않으려는 뜻을 더욱 굳혔다는 고사가 전한다. 《東軒筆錄 卷1》 모과를 던져 줌 원래는 상대방이 보내 준 아름다운 시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못난 작품을 가리킨다. 《시경》 〈목과(木瓜)〉에 이르기를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아름다운 옥으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용면 북송 후기의 화가인 이공린(李公麟)의 호로 그의 자는 백시(伯時)이다. 원부 3년 (1100) 신경통으로 퇴직하고, 고향 용민산에 은거, 그림에 전념했다. 가장(家藏)의 법서∙명화를 배웠으며, 서는 진 행 초를 잘 하였고 화는 고개지(顧愷之), 육탐미, 장승요 등에게서 배워, 백화의 안마(鞍馬) ∙ 불상 ∙ 인물을 잘 그렸고, 산수화에도 뛰어나 '송화 중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 북송 중기까지 별로 거들떠보지 않던 오도현류의 백화(白畫) 인물화를 부흥하여 문인화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