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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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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이공 전 병자년(1936) 晩翠李公傳【丙子】 공의 휘는 광우(廣雨), 자는 복일(復一), 자호는 만취(晩翠)로 한국 호남(湖南) 담양(潭陽)의 월산리(月山里)에 거주하였다. 이씨는 계통이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고려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본조에 들어와 세자 빈객(世子賓客) 석손(碩孫)159)은 장릉(莊陵, 단종)의 변란160) 때 담양에 은거하였다. 5대조 삼락당(三樂堂) 명석(命錫)은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161)을 스승 삼았으니, 학문에 연원이 있었다.부친은 선비 성종(誠鍾) 공이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를 자질을 지녀 겨우 이를 갈 나이에 이미 성인과 같았으며 스승에 나아가서는 학문이 날로 발전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집안 일을 도맡아 농사를 지었는데, 이윽고 조금 풍족해지자 종가를 위해 제전(祭田)을 사고 사당을 세웠으며, 또한 의전(義田)을 두어서 가난한 친척의 초상과 장례, 혼인에 보태주었다. 외조와 서당 선생을 위해 돈과 밭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며 영원히 모실 건물을 세웠다.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면서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하였으며, 궁핍한 이들을 구휼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들을 거둬 길러서 혼인하여 살림을 꾸리게 하였다. 떠도는 아이들을 교육하여 학문을 이루게 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쓰는 것은 대단히 검소하여 몸에는 장물(長物)162)이 없었으며, 다만 경사(經史)를 즐겼다.세상이 변란을 겪은 이후에 도학이 어두워진 것을 마음 아파하여 선왕(先王)과 선성(先聖)이 서로 전수한 옛날의 법칙을 굳건하게 지켜 자질(子姪)이 신학을 가까이 하는 것을 엄하게 금하였으니, 일체의 법문이 확고하여 꺾을 수가 없었다. 오호라! 시운이 한없이 악화되어 변고가 날로 심해져 저들이 우리 백성들의 머리를 깎으려 하니 공은 옛날 지켜오던 머리카락을 지켰다. 마침내 위협을 가하고 시배(時輩)들이 희희낙락하며 도왔으니, 공은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고 하여 강요하거늘 공은 더욱 엄격하게 거절하였다. 강요를 할수록 더욱 엄격하게 거절하니, 이와 같은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공은 이에 면할 수 없음을 알고서 가묘에서 통곡한 뒤 선친의 묘소에 절을 올리고 친척들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모욕을 받으며 사는 것은 의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여러 날을 곡기를 끊다가 약을 마시고 타계하였다. 바로 갑술년(1934년) 10월 19일로 나이 67세였으니, 이에 사람들이 모두 공을 절사(節士)라고 칭송하였다. 나는 애당초 공을 알지 못하는데, 백 리를 가서 그 영연(靈筵)에 곡을 하고 두 아들 상운(相運)과 상호(相瑚)에게 조문하였다. 상호는 더욱 전아하고 신중하니, 그 부친의 전형을 볼 수 있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천하에 도가 없으면 몸을 바쳐 도리를 위해 죽는다.'163)라고 했으니, 대개 도 밖에는 몸이 없는데 몸을 지닌 사람이 도를 그 밖에 있다고 여긴다면 사람이라 이를 수 없다. 도는 무엇인가. 몸에 있어서는 예의며 천하에 있어서는 중화이다. 세상이 망극한 때를 만나 중화의 제도를 지킬 수 없다면 이는 몸에 예가 없으며 도의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공이 머리카락을 지키다가 죽은 것이다.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긴다.'164)라고 하였으니, 공의 평소 행실을 보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킴이 이 이에서 근본 하였으며 한 때 비분강개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성인이 남루한 옷으로 송을 지나간 일165)에 대해 도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의심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주자는 '차분하게 하라는 건 참 좋은 말이지만 거기서 나쁘게 한번 변하면 구차한 안일함이 된다.'166)고 하였는데, 대개 성인이 아니면 방비해야 할 걱정을 근심하지 않으니, 매우 다급한 일을 겪다가 지켜야 할 바를 잃어버린 자를 나는 또한 많이 보았다. 공이 걱정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는가." 公諱廣雨, 字復一, 自號曰晩翠, 居韓國湖南潭陽之月山里.李氏系出慶州, 在麗文忠公益齋先生, 大顯于世.本朝世子賓客碩孫, 莊陵之變, 遯于潭.五世祖三樂堂命錫師遜齋朴公光一, 學有淵源.父, 士人誠鍾公, 生有異質, 甫齔己如成人, 就師而學日長.以家貧, 幹蠱服田, 旣而稍饒, 爲宗家置祭田立祠堂, 又置義田, 助給貧族之喪葬婚姻.爲外祖及塾師, 以金以田, 立享祀永遠之具. 開門接賓, 一以誠款, 幷賙其窮乏, 收養無託之孤, 經紀婚産, 敎育流離之子, 以至學成非一二.自奉甚約, 身無長物, 惟以經史自樂.自世變以後, 痛道術晦盲, 益守先王先聖相傳舊規, 嚴禁子姪勿近新學, 一切法門, 有確乎不可拔者.嗚呼, 時運罔極, 變故日甚, 彼欲薙, 守舊人髮, 竟加脅勒, 時輩又樂助之, 以公爲民望强之, 公拒之嚴, 愈强愈嚴, 如是者累矣.公知不可免, 痛哭家廟, 拜省先墓, 行訣族戚, 語人曰: "與其受辱而生, 不若守義而死", 遂絶食累日, 仰藥而逝, 乃甲戌十月十九日也, 而年六十七, 於是人咸稱公爲節士.余初不識公, 越百里哭其靈, 吊其二子相運相瑚, 瑚尤雅飭, 其父典型可見.論曰: "孟子有言, '天下無道, 以身殉道', 蓋道外無身, 身而外道, 不可謂人.道者何, 在身則禮義, 在天下則華夏.世値罔極, 華制不得守, 則是身無禮而外於道矣, 此公所以保髮而殉者也.有子曰: '本立而道生', 觀其生平制行, 足以知終節之本於是, 非出於一時慷慨者流也. 或有以聖人微服過宋之事, 疑其未盡道者, 非也.朱子曰: '從容雖是好題目, 一變則爲苟偸', 蓋非聖人, 則防慮不患, 其過倉卒而失其所守者, 余見亦多, 公之所慮, 不亦宜乎." 이석손(李碩孫) 자는 사언(士彥), 호는 돈암(遯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세종 때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단종이 손위(遍位)하자 장인 박연생(朴衍生)과 함께 담양(潭陽)의 월산(月山)에 은거(隱居)했다. 장릉의 변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가리킨다.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1655~1723.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사사하였다. 숙종 때 천거되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왕자사부(王子師傳)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산수를 즐기다가 영조 때 죽었다. 저서에 《손재집(遜齋集)》 《나소변무(羅疏辨誣)》 《진호문답(晉湖問答)》 《만덕창수록(晩德唱酬錄)》 등이 있다. 장물 진(晉)나라 왕공(王恭, ?~398)이 아버지를 따라 회계(會稽)에서 서울로 왔을 때 친한 벗 왕침(王忱)이 그를 찾아갔다가 그가 깔고 앉은 6자 너비의 대자리를 보고는 달라고 하였다. 왕공은 그가 떠난 뒤에 즉시 대자리를 거두어 보내주고 자신은 언치를 깔고 앉았다. 뒤에 왕침이 이를 알고 매우 놀라자 왕공이 "나는 평소에 남는 물건이 없네.〔吾平生無長物〕"라고 하였다. 《晉書 卷84 王恭列傳》. 좋은 물건이 없다는 의미이다. 천하에……죽는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도로써 몸을 따르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몸으로써 도를 따르나니, 도로써 남을 따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天下有道 以道殉身 天下無道 以身殉道 未聞以道殉乎人者也〕"라고 하였다. 유자가……생긴다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이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일단 확립되면 도가 자연히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효제가 바로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할 것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다. 《論語 學而》 성인이……일 공자가 송(宋)나라를 지나가려 하자 사마환퇴(司馬桓魋)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죽이려 하므로, '변복을 하고 송나라 땅을 지나갔다.[微服而過宋]'라는 고사이다. 《孟子 萬章上》 주자는……된다 이 말은 주자가 아니라 우암 송시열이 한 말이다. 《송자대전》 권29 〈여이사심(與李士深)〉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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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광 전 정축년(1937) 田玄狂傳【丁丑】 전사위(田士猬) 군의 휘는 일중(鎰中)으로 구산 선생(臼山先生)167)의 손자이며 정재공(靜齋公)의 차자(次子)이다. 행동이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현동(玄洞)에 거주하기에 호를 현광(玄狂)이라 하였다. 군은 성품이 얽매이지 않고 기가 굳세어 일찍이 법도로 자신을 검속하지 않았으며 비록 귀인이나 명사를 보더라도 비굴한 모습이 없었으며 부귀한 자 보기를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이처럼 대하였다. 또한 말이 곧아서 사람의 허물을 보거든 즉시 마주하고서 꾸짖으니, 이로 인해 사람들이 대부분 미워하였다. 외모를 보면 거칠고 소략하다고 마땅히 이를 만하지만 의를 보는 것이 대단히 정밀하여 중론이 분분할 때는 홀로 대단히 좋은 단서를 제시하여 끝내니, 이로 인해 문장을 지으면 또한 그와 같았다.오진영(吳震泳)168)이 스승을 속여 원고를 고친 일이 일어나자 스승 집안의 여러 손자들 가운데 오진영을 변호하는 자가 많았으며 심한 경우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직 군은 부친의 뜻을 좇고 공의(公議)를 따라 변석에 힘을 쏟았으니, 그 문장이 많은데 뜻이 대단히 엄격하고 문사가 대단히 마땅하여 우리의 기를 돋우고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은 타인들이 미칠 수 없었다. 처음에 오진영이 스승의 도장을 몰래 날인하여 파리에 글을 보낼 때 선사는 재앙과 모욕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염려하여 자진할 도구를 마련하고서 변고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 때 군이 크게 외치면서 "우리 조부가 만일 화를 면하지 못한다면 도장을 몰래 날인한 자는 머리를 베고 배를 가를 것이로되 그 죄는 그래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지경에 이르자 또다시 속여서 고친 것에 대해 극력 성토하니, 그러므로 오진영이 두루 살펴보고 더욱 그 무리들과 함께 온 힘을 쏟아 지칠 정도로 허물을 찾아 참소할 거리를 만들어169) 하지 못할 말이 없었다.군은 천부적인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 부지런히 책을 읽지 않아도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니, 글을 지으려 붓을 잡으면 곧바로 써 내려가 미리 구상한 자와 같았다. 그러나 글이 완성되면 미진한 곳이 있나 생각하여 반복하여 자세히 살폈으니, 살피고 나면 끝내 고칠 곳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산문은 비록 문사와 이치가 모두 훌륭하더라도 모름지기 풍신(風神, 감염력)이 좋아야 비로소 잘 된 작품이며, 시는 새로운 의사가 있어야 바야흐로 시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매번 시를 지을 때는 진부한 말이 없도록 힘썼으며 산을 깎아내듯 생각을 깊이 하였다. 대개 시는 산문만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의미를 잘 담아낸 곳은 아름다운 것이 많았으니, 예를 들면 "새봄 경치에 시 천 수, 고국의 산하에 눈물 만 줄기.[新春物色詩千首, 舊國山河淚萬行]"라는 구절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타인의 시를 평할 때는 보이지 않는 허점이나 아주 작은 잘못도 군의 눈에서 피할 수 없었으니, 친한 관계인 경우는 자세하고 정밀하게 가르쳐주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싫증을 내지 않고 더욱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부형처럼 군을 친애하였다.군은 비록 행동을 검속하지는 않았지만 부정한 일을 저지른 자는 자신을 더럽힐 듯하여 멀리하였다. 바둑이나 장기 같은 것은 또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남의 집에 들어가면 먼저 책을 살펴보았는데 만약 처음 보는 책이 있다면 날이 저물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다 읽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으니, 대개 군의 강기박문(强記博文)은 이런 벽(癖)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현재 국중 선비라고 일컫는 아무개 등은 실제로는 모두 둔재이다. 만약 우리들이 조금 여력이 있어서 그 정도 공부하였다면 어찌 그들 정도에서 그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조선 오백 년 동안 단연코 다른 사람은 없으니 학문에 일생의 심력을 쏟아 부은 사람은 다만 우리 조부인데, 마땅히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손꼽기가 어렵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다소의 의견 가운데 성리, 학술, 정치에 관련된 것을 세 권의 책으로 저술하여 후대의 지식이 있는 자를 기다릴 것이니, 능히 성공할 지는 잘 모르겠다."라 하였다.군은 숙질(宿疾)을 앓았으니 병자년(1936년) 가을에 우리 집에서 머물며 요양하였다. 밤에 일어나 신음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 병의 빌미는 부조가 속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형제처럼 벗하는 그대가 바로잡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 해 11월 18일 전주의 우사(寓舍)에서 타계하였으니, 향년 46세이었다. 두 아들로 창기(鬯淇)와 은기(殷淇)를 두었다. 정축년(1937년) 봄에 내가 조자정(趙子貞), 최여중(崔汝重)과 함께 손주택(孫周澤)을 동반하고서 군의 영연(靈筵)에 곡을 하였는데, 당시 두 아들은 자리에 없었고 군의 종질 세기(世淇)가 맞이하였다. 곡과 조문의 예를 마치자 군의 부인인 정씨가 문안에 서 있다가 세기에게 말하기를 "너의 종숙부가 임종할 때 후창(後滄) 선생을 보기 원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라고 하고는 곧 두 아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면서 말하기를 "훗날 우리 집에 사문(斯文)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후창 선생에게 찾아가 처리하라 하였으니, 너는 이 말을 후창 선생에게 고하라."라고 하였다. 이른바 후창은 바로 나이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였으니, 면결(面決)하지 못해 죽은 이나 산 사람이나 아쉬움을 남긴 것이 한스럽다.군은 큰 기에 콧날이 높았으며 마른 얼굴에 성긴 수염을 지녔으니 그 조부와 대단히 비슷하다. 모습이 비슷하니 재주 또한 비슷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만일 힘써 공부할 여건이 되었다면 공자 문하의 자사(子思)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곤궁하게 굶주리며 떠돌아 다녔으며 생애 또한 짧았구나. 비록 그러나 조부가 당한 큰 무고를 씻어 내고 대의를 밝혀 후대로 하여금 대종사(大宗師)가 됨에 의심이 없게 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논한다면 자사(子思)가 되지 못한 것은 애석하지만 또한 이것으로 위로가 된다.삼가 생각건대 예전에 선사의 편지를 받들었을 때 "전에 일중을 가르치니 광자(狂者)170)와 같았다. 이것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그대가 인정하였으니, 스스로 부끄럽고 한편으로 다행하다."라고 하였다. 군이 중행군자(中行君子)는 되지 못하더라도 광자가 된 것은 선사께서도 또한 다행으로 여겼다. 오진영이 비록 신임(辛壬) 연간의 원고에서 이 편지를 빼버렸으나 군에게 어찌 손상이 되며 저에게 어찌 이익이 되리오, 다만 그의 시기와 악독함을 드러낼 뿐이다. 오호라! 군은 행실이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아 현광이란 호에 걸맞게 되었지만, 또한 그 행실이 큰 뜻과 말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현광이 되는 바이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증석(曾晳)이 계무자(季武子)가 죽었을 때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으며, 오이 밭의 김을 매다가 오이 뿌리를 다치니 큰 몽둥이로 때렸는데,171) 그 행위를 보면 유문의 법도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공자가 얻고 싶어 했던 광자로 인정하였으며 증삼(曾參)은 칠십 제자의 반열에 들었다. 지금의 현광을 논하는 자들은 문득 유자 법도의 밖에서 스스로 노닌 것으로 그를 무시하는데, 이를 증씨와 비교하면 어떻겠는가."나와 현광은 재주의 총명과 아둔함은 상대가 되질 않고 도량의 넓고 협소함은 또한 다른데, 한결같이 법도의 길을 따르게 하려고 하고 한결같이 비루함에 얽매인 선비가 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면 행동거지가 마치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서로 반대여서 서로 싸우는 사람처럼 말이 어긋났을 것인데, 그런대도 시종 우호가 좋은 것은 나는 그의 곧고 신실한 것172)에 도움을 받고 그는 나의 교묘하게 계교하지 않음을 취한 것이다. 8~9년 전에 현광이 나에게 약속하기를 '피차간에 손을 바꿔서 전을 짓자.'고 하였는데 미처 실천하지 못하였다. 지금 이 전을 완성함에 만약 현광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저 내용은 맞고 저 내용은 틀렸다."라고 하여 말을 들은 즉시 곧바로 고쳤을 것이니, 마치 초상화를 그리는 자가 사람의 지적을 듣고서 진본(眞本)을 완성하는 것과 같이 하였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슬프도다. 그러나 모방해 본 뜨는173) 졸렬함으로 모과를 던져 줌은174) 만년에 있었으나 용면175)의 뛰어남으로 경거(瓊琚)의 보답은 영원히 받을 희망이 없으니 훗날 저승에서나 요구할 수 있으리라. 더욱 더 슬플 따름이다. 田君士猬, 諱鎰中, 臼山先生之孫, 靜齋公之次子, 自以行不掩言而居玄洞, 故號玄狂.君性不羈氣岸高, 未嘗以繩墨自檢, 雖見貴人名士, 無卑屈態, 視富者若無有, 又口直, 見人有過, 輒面折之, 由是人多疾之.觀其外, 宜謂麤略, 至見義理却精細, 衆論紛然, 獨據極端究竟, 因而爲文, 亦如之.及吳震泳誣師改稿事, 作師門諸孫多護吳, 甚者至不可說, 惟君遵父志從公議, 討辨是力, 其文蓋多, 而義極其嚴, 辭極其當, 足以增吾氣, 驚彼膽者, 人不可及.始震之冒署師銜, 投書巴里也, 先師慮禍辱不測, 至備自盡具待變, 君大言之曰: "吾祖如不免禍, 冒署者可斬頭剮腹, 而罪猶餘." 至是又力討誣改, 故震周視之, 益甚與其徒, 疲勞吹覓, 增成箕錦, 無所不至.君天才超越, 少不勤讀, 然能博覽强記, 爲文操筆立書, 若宿構者然.然文成, 慮有未盡, 反復詳審, 審己亦竟無加點處.常曰: "文雖辭理俱盡, 亦須風神好始得, 詩則有生新意思, 方始詩." 每爲詩, 要無陳語, 窮思若鑿山然.蓋詩不如文, 然意到處, 多絶佳者, 如'新春物色詩千首, 舊國山河淚萬行'之句, 膾炙人口.評人詩文, 隱疪纖纇, 毫莫逃眼, 在相親則爲之詳示精點, 於少輩尤懇懇不倦, 受惠者親愛如父兄.君雖不檢束, 涉不正者, 若浼焉.至如碁博, 亦不近, 平居手不釋卷, 入人家先求冊子, 若初見者, 則至日夕鷄晨, 不了不輟, 蓋其强博以有此癖故也.嘗曰: "今所稱國中士某某, 其實皆鈍才, 使我少有餘力及此, 豈若彼而止." 因曰: "國朝五百年間, 斷然無他, 盡一生心力於學問者, 惟我祖考, 宜爲最選, 其難矣乎." 每喟然曰: "吾有多少意見, 欲以有關性理學術政事者, 著書三冊, 以待後之知者, 未知其能成乎否." 君抱宿疾, 丙子秋, 留養弊廬, 夜起呻吟, 謂余曰: "吾疾祟, 父祖受誣, 兄弟相友, 可治之乎." 竟以是年十一月十八日, 終於全州寓舍, 壽四十六, 有二子鬯淇殷淇.丁丑春, 余與趙子貞·崔汝重, 介孫君周澤, 哭君之靈, 時二子不在, 君從姪世淇對, 哭吊禮訖, 君內子鄭氏, 立門內語世淇曰: "汝從叔臨終, 願見後滄先生而不可得", 則召二子而前曰: "他日吾家有事關斯文者, 則往問後滄先生而處之, 汝其以此告於後滄先生也." 所謂後滄, 卽余也. 聞之絶悲, 恨不得面訣而致憾幽明也.君長身隆準, 瘦面疎髥, 酷似其祖, 貌之所似, 才亦如之, 固理也.如使力學, 尼門之思, 在玆矣.惜乎, 其窮餓棲屑, 年又促之, 雖然惟其祖大誣是雪, 大義是明, 俾百世不疑其爲大宗師, 執此而論, 惜其未然者, 亦可慰也.竊念昔承先師之書, 有曰: "前喩鎰中, 狂者一流, 此老夫不及知, 而君許之, 自愧且幸", 君雖不得爲中行, 其爲狂者, 先師亦幸之矣.震雖削出此書於辛壬之稿, 於君何損, 於渠何益, 只見其猜險也已.嗚呼, 君旣行不掩言, 所以止於玄狂, 亦以其有行不能掩之大志言, 所以爲玄狂也.夫論曰: "曾晳, 季武子死, 倚門而歌, 鋤瓜傷根, 撾之以大杖, 觀其擧措, 絶不似儒門規模, 猶許以孔子所欲得之狂者, 而參在七十子之列.今之議玄狂者, 輒以自放儒規外外之, 以之視曾氏爲何如也." 余與玄狂, 才之聰鈍不敵, 量之濶狹亦異, 一欲只循塗轍之跡, 一欲不作拘陋之儒, 行止反對, 如燕越, 言語衝突, 若爭鬪然, 而終始交好者, 我資其有直諒之益, 彼取我無機變之巧.八九年前, 玄狂約余, 以'彼此換手爲之立傳', 而未及踐矣.今於是傳之成, 若玄狂而在, 必曰: "某處中某處錯", 隨聞隨改, 若寫照者之聽人指摘以成眞本, 而不可得, 悲夫.雖然畫葫之拙, 木爪之投, 晩此有之而龍眠之竗, 瓊琚之報, 則永無可望, 他日可索之於泉臺也乎.重可悲夫. 구산 선생 간재 전우(1841~1922)의 호이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참소할 거리를 만들어 '기금(箕錦)'은 작은 허물을 부풀려서 다른 사람을 참소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항백(巷伯)〉에 이르기를, "조금 문채가 있는 것으로, 이 자개 무늬 비단을 이루었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 하고, 또 "조금 벌어진 것으로, 남쪽의 기성을 이루는도다.〔哆兮侈兮 成是南箕〕"라고 하였다. 광자 광자(狂者)는 큰소리는 잘 치는데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하지 못할 바에는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라고 하였다. 증석이……때렸는데 증석은 계무자(季武子)가 죽었을 때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맹자가 이르기를, "금장이나 증석이나 목피(牧皮)와 같은 자들이 공자께서 말씀하신 광(狂)이다." 하였다. 《孟子 盡心下》 일찍이 증삼(曾參)이 부친 증점과 함께 오이 밭을 김매던 도중에 실수로 오이 뿌리를 끊자 증점이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증자가 땅에 쓰러져 실신했다가 깨어났는데,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순(舜)과 고수(瞽瞍)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작은 회초리를 들면 화가 풀릴 때까지 다 맞고, 큰 몽둥이를 들면 얼른 피해 달아나야 한다.〔小棰則待過 大杖則逃走〕"라고 증자를 타이른 일화가 전한다. 《孔子家語 六本》 곧고 신실한 것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고 손해되는 벗이 셋이 있으니, 정직하고 신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고 하였다. 모방해 본 뜨는 '화로(畫葫)'는 의양호로(依樣葫蘆)의 준 말로 새로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과거의 것만 본뜨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한림학사 도곡(陶穀)이 오랜 기간 한림원에서 발휘한 자신의 재질을 자부하면서 지위가 낮은 것에 불만을 품고 은근히 승진을 바라고 있던 중에, 태조(太祖)로부터 "그가 지은 글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지어 놓은 것을 살짝 말만 바꾼 것일 뿐이다.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매달린 조롱박을 보고 그럴듯하게 본떠서 그려내는 것[依樣畫葫蘆]'일 따름이니, 그가 힘을 쓴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라는 핀잔을 받자, 스스로 옥당(玉堂)의 벽에 이 내용을 반추(反芻)하면서 원망하는 시를 지어 붙여 놓았는데, 태조가 이 시를 보고는 중용하지 않으려는 뜻을 더욱 굳혔다는 고사가 전한다. 《東軒筆錄 卷1》 모과를 던져 줌 원래는 상대방이 보내 준 아름다운 시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못난 작품을 가리킨다. 《시경》 〈목과(木瓜)〉에 이르기를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아름다운 옥으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용면 북송 후기의 화가인 이공린(李公麟)의 호로 그의 자는 백시(伯時)이다. 원부 3년 (1100) 신경통으로 퇴직하고, 고향 용민산에 은거, 그림에 전념했다. 가장(家藏)의 법서∙명화를 배웠으며, 서는 진 행 초를 잘 하였고 화는 고개지(顧愷之), 육탐미, 장승요 등에게서 배워, 백화의 안마(鞍馬) ∙ 불상 ∙ 인물을 잘 그렸고, 산수화에도 뛰어나 '송화 중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 북송 중기까지 별로 거들떠보지 않던 오도현류의 백화(白畫) 인물화를 부흥하여 문인화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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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태경 전 병자년(1936) 金泰卿傳【丙子】 김태경(金泰卿)의 휘는 천용(千容)으로 나의 친척이다. 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자모(慈母)를 따라 부안(扶安)에서 고부(古阜) 달천(達川) 외가가 있는 마을로 이사하였다. 열 대여섯이 되어 모친이 앉은뱅이로 폐인이 되자 태경은 밥을 지어서 올렸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타인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아침밥을 지을 때 모친의 점심밥까지 함께 지어서 갔으며 낮이 되면 따뜻한 밥을 얻어서 집으로 가 바꿔 먹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주인이 그 효성을 가상하게 여겨 두 그릇의 점심밥을 준비해 주었다. 모친의 옷은 자주 세탁하여 사람들이 그 더러움을 볼 수 없었으니 십 년을 한결같이 하였다가 아내를 둔 이후에 그만두었다. 이에 미곡상이 되어 쌀가마를 지고 매며 고생하였는데, 몇 해가 지나 조금 살림이 펴게 되자 모친은 배부르게 편안히 지내다가 돌아가셨다.공은 본성이 자애롭고 착하여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남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자신이 그러한 듯 여겼다. 일찍이 흉년에 저축한 것을 털어서 한 지역의 대단히 가난한 자들을 구하니, 그 지역 사람들이 나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50살이 되어도 아들이 없자 어떤 사람이 집을 고쳐 지어 길한 방향을 향하면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여, 목재가 이미 갖춰지고 일하는 날짜도 정해졌다. 그 때 문득 변산(邊山)의 증조 이하의 친족 묘가 있는 종인의 산판(山坂)이 장차 타인의 소유로 매각된다는 말을 듣고서 "이 산이 한번 세도가에 들어가면 우리 선조의 묘소는 잘 보존되기를 기약할 수 없다. 집을 지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그 방술은 믿기 어려우며, 비록 참으로 믿을 만하다 하더라도 일에는 급하고 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마땅히 집 짓는 것을 그만두고 저것을 도모해야 하니, 만약 운명이 있다면 후에 응당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에 집을 지을 돈을 가져다가 산을 샀다. 이것은 내가 목도한 것이다. 임신년(1932년) 2월 9일에 타계하였는데, 아들이 없이 타계하였기에 종질 낙연(洛淵)을 후사로 삼았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태경은 행위는 다른 것은 누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집을 짓는 것을 그만두고 산을 산 것은 하기 어려운 일이다. 대저 아들을 낳은 것은 사람의 큰 바람이다. 방술을 믿는 것은 일반 사람이라면 면하기 어려운 것이며,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은 사람들이 서로 남에게 미루기 십상이다. 이에 일생 동안 한 가지 바람이었던 길이 후손에게 전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친척들이 함께 하여 홀로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빠른 시일에 성취하였으니, 이는 학문하며 도를 강론하는 선비는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태경은 능히 하였다. 이 때문에 '하기 어려운 것'이라 이르는 것이다. 이른바 '비록 혹자는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겠다.'176)는 것을 나는 이 사람에게서 보았다. 한편 또 생각건대, 태경은 평소 나와 진심으로 좋아하여 무릎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해가 지는 것을 몰랐으니, 대개 내가 학문이 있다고 잘못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비록 좋아하는 상대가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마음은 학문을 좋아함에서 나왔으니, 마음이 이미 학문을 좋아하면 행실도 반드시 도에 가까운 것은 이치의 자연스러움이다. 그렇다면 태경은 또한 배우지 않았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金泰卿, 諱千容, 余宗人也.幼喪父隨慈母, 自扶安移居古阜達川外親之里.至成童, 母病躄爲廢人, 泰卿炊飯供之, 貧甚, 傭於人家, 朝炊時幷作母午飯而去, 及午取溫飯歸家, 易食之以爲常, 主人嘉尙其孝, 爲之備二盂午飯.母之衣裳, 頻頻澣濯, 人不見其汙, 十年如一日.及至有室然後已.乃爲米穀商, 擔負作苦, 數年得稍紓, 母享安飽而歿.性慈善喜施與, 見人飢寒, 若己有之.嘗於儉歲, 傾貯以救一坊極貧者, 坊人立木碑頌德.年五十而無子, 人言改作室向吉, 方生貴子, 材木旣備, 設役有日矣.忽聞曾祖以下族葬所在宗人山坂之在邊山者, 將賣却爲他人所有曰: "此山一入勢家, 吾先墓難必安保, 作室生子, 其術難信, 雖眞可信, 事有緩急, 當舍此而圖彼, 若有運命, 後當生子", 乃移作室金以買山, 此余所目覩.以壬申二月初九日卒, 以無子而卒, 以從姪洛淵繼後.論曰: "泰卿之行也, 其他可能也, 罷作室而買山者, 是難能也.夫生子, 人之大欲, 信術, 常情不免, 而衆共之事, 人之所相推托者也.乃遽舍一生單望永久傳後之謀, 亟成諸族一般非所獨當之事, 此學問講道之士所難能, 而泰卿能之, 是以謂之難也.所謂'雖曰未學, 吾必謂之學'者, 余於斯人見之矣.抑又念泰卿平日, 與余心好, 促膝相話, 不覺日移, 蓋誤認余有學而然也.雖所好者, 非其人, 乃其心出於好學, 心旣好學, 則行必近道, 又理之自然.然則泰卿, 亦可謂未學而好學者歟." 비록……하겠다 《논어》 〈학이(學而)〉에서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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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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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답함 答小心黃丈 庚午 경오년(1930)용동본은 선사의 수본(手本)과 고증하여 분별해보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을 들어보니, 전고는 원고에 따라 출판했다고 할 수 있으나 후고는 따져보지 않고 첨가하여 넣기도 하고 진주본의 혼란함을 따르기도 하여 크게 진면목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용동 사람들의 소행은 스승을 무함한 한 가지 사항을 제외하더라도 유훈을 어기고 원고를 어지럽힌 등의 일이 진주 사람들과 동일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동래 여조겸이 중립(中立)의 간악함을 논했는데, 마치 요즈음 우리 문하의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말인 것 같습니다. 지금 기록하여 보여주신 것은 아무개, 아무개 등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어 그들의 간담을 깨뜨릴 만하고, 보여주신 오진영의 일은 날마다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었는데, 어느 일이나 있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지산(志山) 김공의 아들 성구(聖九)가 말하기를, "오진영은 일생 학문을 하여 사림을 음해하고 헐뜯는 것으로 끝을 맺었으니, 좋고도 좋은 마무리라 할 수 있다." 했는데, 이제 또 평장(平葬)33)을 하여 조모의 유해를 잃어버렸는데도 편안하게 보통 사람과 똑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 역시 좋은 마무리에 해당하는 한 가지 일이니, 안이나 밖이나 공으로나 사로나 모두 갖추어져 흠결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龍本, 未及考辨於手本, 然聞其內容, 則前稿可謂依原稿刊出, 後稿則無難添入, 或從晉亂, 大失本面云.蓋龍人所爲, 除誣師一欵以外, 其違訓亂稿等事, 與晉一也, 復何言哉? 東莱論中立之奸, 似爲近日吾門依違者, 準備語也.今蒙錄示, 可使之聞於某某諸人, 破其奸膽也, 吳事之示, 日聞其不聞, 無事不有者也.志山金公之子聖九言: "震泳一生學問, 以構訴士林成終, 可謂好好結局." 今又平葬而失祖母骸, 晏然同平人, 此亦好結局一事, 可謂內外公私具備無欠也. 평장(平葬)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매장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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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에게 답함 갑술년(1934) 答李愼軒 甲戌 일찍이 보니, 선사께서 마땅히 개정할 문자가 있으면 반드시 문하에 있는 사람에게 묻거나 혹은 편지로 각처에 상의한 후에 정했으며 홀로 개정하여 원고를 수정한 적은 없었습니다. 전재(全齋 임헌회)의 비문을 개정한 본은 본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날을 의논하여 묘도의 비석에 새긴 것이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으니 원고를 수정한 여부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른의 편지에 "다른 글 중에 개정하고 미처 수정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화도수정본14)이 혹 그런 것 같다." 하였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전재의 비문이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뭇사람이 개정한 것을 알았던 일을 미루어 다른 글이 홀로 개정하여 아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고 여깁니다. 무함을 변론한 사람의 말을 문집에서 빼고 싶어서 너무 엄중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저 음성 오진영의 재앙이 치성할 때 몇몇 사람들의 목숨을 어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오늘날 준비해 놓은 자결할 약이 아직도 상자 속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데 반드시 빼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겠지요? 曾見先師有當改文字, 詢及在門, 書商各處, 然後定, 未嘗獨自改定而釐稿.若全齊碑之改本, 自是僉議累日, 顯刻墓道, 人人皆知者, 稿本釐否, 不須論.尊喩"他文之有改, 而未及釐正, 華本似或然之"云, 未然.鄙意以爲正可推此全碑僉議衆知之改, 知他文之無獨改無知者之理矣.欲除去辨誣者之語, 謂爲太重, 亦何意也? 彼陰禍之方熾也, 幾人性命, 豈意得保? 今日準備自裁之藥, 尚在篋中, 若是而不當謂必欲除去乎? 화도수정본 전우가 직접 수정하고 편집한 문집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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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심에게 보냄 신유년(1921) 與崔欽齋 辛酉 삼가 들으니, 군주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여 여전히 상복을 입고 계시다 하는데, 이를 옛 근거에 증명해보면 송나라의 현인들이 휘종과 흠종에 대하여 한 것과 왕부(王裒)가 그 아버지에게 한 것 같은 경우에 일찍이 원수를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복을 벗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만약 원수를 가슴 아파하여 상복을 계속 입고 있다면 거처하고 출입하며 말하고 웃으며 음식을 먹는 것부터 일체의 세상일에 답하고 사물에 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평상시와는 크게 다르게 하여 거의 폐인과 같게 한 이후에 명실이 상부할 것입니다. 복수는 기약이 없고 인사는 다단하니 어찌 다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존자의 처지는 노인을 모시고 있어 봉양을 해야 하니 분명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고, 혼례와 제사도 얼마 안 있어 있을 터인데, 일마다 얽매이고 장애가 있다면 대처하기 어려울까 걱정입니다. 부디 다시 생각하여 재단하시기 바랍니다. 竊聞, 痛君讐之未復, 尚爾持服云, 蓋證之古據, 如宋賢之於徽欽, 王裒之於其父, 未嘗以讐未復, 而服不除.且若痛讐而持服, 則自居處出入言笑飲食, 以至一切酬世應物, 必大異於平常, 而殆同乎廢人, 然後乃爲名實相副, 復讐無期, 人事多端, 此豈不更難矣乎? 況如尊之地, 奉老就養, 必無方矣.續卺承祀, 將有日矣, 恐節節掣礙, 區處難下也.幸再思而裁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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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온재 진호의 자사 【기사년(1929)】 朴韞哉【珍浩】字辭 【己巳】 옥은 보배이니 玉爲寶,함궤에 담아두고 韞于櫝;유사(儒士)는 진귀하니 儒有珍,덕을 품고있네. 韞其德.덕은 옥에 견주니 德比玉,옛 현철의 말씀이네. 聞先哲.박진호(朴珍浩)는 朴珍浩,그 자질 온윤(溫潤)하여 溫其質,온재(韞哉)를 자로 주노니 欽韞哉,그 취한 뜻이 절실하네. 取義切.옥을 잘 간직하지 않으면 玉不韞,기와 자갈에 가까워지고 視瓦石;덕을 잘 지니지 않으면 德不韞,기량(器量)이 비루하고 협소하네. 器陋狹.간직하고 기다리면 藏而待,그 값이 억을 넘고 價不億;쌓았다가 풀어 펴면 積而發,큰 공업(功業)을 이루네. 富有業.사위의 덕을 드러내며 表甥德,장인은 힘써 격려하니 舅用勖,바라건대 돌아보며 생각하고 庶顧思,노력하며 지치지 말기를. 勉無射. 玉爲寶, 韞于櫝; 儒有珍, 韞其德。 德比玉, 聞先哲。 朴珍浩, 溫其質, 欽韞哉, 取義切。 玉不韞, 視瓦石; 德不韞, 器陋狹。 藏而待, 價不億; 積而發, 富有業。 表甥德, 舅用勖, 庶顧思, 勉無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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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지포 선생25)의 묘를 참배한 뒤 느낀 바 있어 2수 拜先祖止浦先生墓有感【二】 송경에선 불교의 세가 하늘 닿을 듯였으나 松京佛學勢滔天큰 도로써 능히 원각편을 배척하셨네26) 大道能排圓覺篇사악한 말들 지금처럼 온천지 가득하니 邪說如今盈宇內옛 현인이 중천에서 일어나지 않음이 한스럽네 昔賢恨未起重泉왕의 호복 보고 어찌 예법 가볍게 여기냐 하시니 見王胡服禮何輕당당히 탄핵하여 오랑캐 담을 서늘하게 하셨네 彈劾堂堂賊膽驚몇 무리가 지금 강씨의 자손인가27) 幾輩而今康氏子바라건대 고려사에 김 선생을 보시게나 請看麗史金先生 松京佛學勢滔天,大道能排圓覺篇.邪說如今盈宇內,昔賢恨未起重泉.見王胡服禮何輕?彈劾堂堂賊膽驚.幾輩而今康氏子,請看麗史金先生. 지포 선생 고려시대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를 말한다. 큰……배척하셨네 최항(崔沆)의 명으로 지은 《원각경(圓覺經)》 발문에 김구가 시를 썼는데, 이 시가 최항의 뜻을 거슬렸다하여 좌천된 사건을 말한다. 몇……자손인가 원문 '강씨(姜氏)'는 태조의 계비(繼妃)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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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복지 환영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房福之煥永 ○丙寅 방장산(方丈山)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자는 편지의 말씀은 저도 오랫동안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래로 마음이 상쾌해지며 산들산들 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오히려 한편으로는 예전에 선사를 모실 적에 함께 구경 가자고 이끌었을 때 병공(炳公, 김준영)을 따라 나서지 못했던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이제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마음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일은 한번 기회를 놓치면 뒤에는 이와 같이 쉽게 도모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형과 저는 모두 노쇠하였으니 어찌 늙기 전에 나란히 한번 천왕봉(天王峰)과 반야봉(般若峰)의 정상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方丈風咏之喻,是積營而未得者.聞來心爽,習習欲風,却恨曾被先師待時同賞之挽而不得追炳公之躅也.至今二十年餘,未嘗不往來於心.凡事一失機會,後不易圖有如此者.念兄我俱衰矣.安得迨未老前聯袂,一上天王、般若之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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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 족숙에게 올림 을축년(1925) 11월 上涵齋族叔 乙丑十一月 조카가 스승을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망과 후회가 없습니다. 다만 아직 완비되지 못한 스승의 원고를 수습하는 일과 시비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는 일을 어떤 사람에게 부탁해야 할까요? 전에 정재(靜齋 전화구)를 만났을 때 저에게 "뒷일이 막막함을 면할 수 없다." 하였는데, 때로 한번 씩 생각하면 또 막연하여 한번 씩 한숨을 쉽니다. 姪爲師致死, 少無怨悔, 但師稿之收拾未備也, 是非之詳記顚末也, 屬之何人? 向見靜齋, 言鐘賢"不免後事茫蒼", 時一念之, 又曠然一欷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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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윤명 영환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鞠潤明瑛煥 ○甲戌 오늘날 인심은 망극하고 의리는 꽉 막혀 음성의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하고 원고를 고치는 변고에 대해 같은 목소리로 변론하고 성토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록 이전에 이미 변론하고 성토했던 사람 중에서도 점차 지키던 것을 바꾸어 처음에는 한 명의 괴수만 제거하고 나머지 무리들과는 소통하자는 의론이 있다가 얼마 후에는 한 명의 괴수까지도 소통하자는 의론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다면 선사의 억울함은 끝내 설욕되어 밝혀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존형만이 우뚝 변하지 않고 변론하고 성토하기를 더욱 엄하게 하셨으며, 잠깐 만나 말을 나누는 사이에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견해를 바꿔주니 진실로 높이 우러르는 바입니다. 지난겨울에 처신하신 바는 의리가 곧고 말이 씩씩하여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강직하게 확립된 것을 알아 억지로 구속할 수 없게 하셨으니, 비록 옛사람의 완전한 절개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항상 벗들을 대해 존형의 일을 말하며 동문의 빛이라고 스스로 축하했습니다. 절개를 지키고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리이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다시 식견이 밝은 것에 관계됩니다. 매번 절개를 지키는 자를 보면 식견이 밝지 못해 오점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컨대 이미 능한 것으로 스스로 만족해하지 마시고 반드시 명확하게 분별하는 공부에 더욱 힘을 써서 원만하고 아름다운 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見今人心罔極, 義理晦塞, 陰人誣師改稿之變, 不惟不肯齊聲辨討, 雖前日已行辨討者之中, 稍稍變其所守, 初有除一魁而通餘黨之論, 旋復作并通一魁之論, 如此則先師之冤枉, 終無雪白之日矣.此將柰何? 惟尊兄卓然不變, 辨討愈嚴, 至於立談之間, 使人發蒙而改見, 誠所景仰.昨冬所處, 又義直辭壯, 使異類, 知其剛立, 不可強勒, 雖古人全節, 何以加此? 常對知舊, 道尊兄事, 自賀同門生光.蓋守節辨誣, 同是一義, 而辨誣更係識明.每見守節者, 以識不明, 以致玷累者多.願勿以已能而自足, 必須加勉於明辨之功, 以成圓美之德, 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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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族弟希淑 甲子 저들은 영남의 인간(認刊)9)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는데, 이는 진실로 사공(事功)을 중시하고 도의를 따지지 않은 것이다. 만일 영남의 인간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면 우리 선사의 글자와 구절 하나하나가 충심과 혈성을 쏟았거늘, 간행반포를 청원한다면 결단코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유서가 되어 영원히 먼지와 좀 사이에 매몰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뒤늦게 차가워진다. 彼邊以嶺認刋之不順就爲恨, 此眞事功爲重而不計道義者, 苟嶺認刋之順就也.已我先師字字句句, 瀝忠漉血, 請願刋布, 決是自辱之遺書, 將永埋沒塵蠹之中矣.念到于此心, 爲之追寒. 인간(認刊) 간재의 문집을 일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간행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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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완선 전 병자년(1936) 姜完善傳【丙子】 강완선(姜完善)은 전주부(全州府)의 자산가로, 전 흥해 군수(興海郡守) 아무개의 서자이다. 흥해 군수가 죽었을 때 완선은 어렸다. 군모(君母)179)의 적형(嫡兄)이 그를 무도하게 대하여 마침내 쫓아내게 되었으니, 완선은 구걸하며 자랐다. 본래 재주를 지녀서 스스로 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취직하여 봉급을 받아 집안의 살림을 일으켰다. 그 적형의 집이 가산을 탕진하여 남은 것이 없게 되자 완선은 그 형 대함에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여 밭과 집을 사서 거처하게 하였다. 자주 가산을 탕진하였는데 그 때마다 재물을 주었다. 나의 벗 전사견(田士狷)이 나를 위해 이와 같은 내용을 말해주었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완선의 일은 도리로써 말한다면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니, 맹자가 말한 '성냄을 감추지 않으며 원망을 묵히지 않는다.'180)는 것이 이것이다. 다만 일반 사람은 이런 것에 참으로 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그 처지가 남과 다름에랴. 더구나 지금처럼 경박한 세상임에랴. 더구나 신학에 물든 몸임에랴. 그러나 사람이 이에 능히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드물게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러므로 크게 써서 드러낸다." 姜完善, 全州府貲産家, 前興海郡守某庶子也.興海沒也, 完善幼, 其君母嫡兄待之無道, 竟至逐出, 完善乞丐得長.有才性, 自入學校卒業, 就職有俸, 立家有産.其嫡家蕩敗無餘, 完善待其母兄, 極其誠敬, 爲買田宅居之, 數破其産, 輒賑給.余友田士狷爲余道如此.論曰: "完善之事, 以道理言之, 宜其如此, 若孟子所謂'不藏怒宿怨', 是也.但常情於此固已難事, 况其處地, 有異於人乎, 况於今世澆薄之日乎, 况以染習新學之身乎.然而人也, 乃能此, 此非罕覯者乎.余故特書表章之." 군모 서자(庶子)가 아버지의 적처(適妻)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의례》 〈상복〉의 주에서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군모는 아버지의 적처이다."라고 하였다. 《儀禮注疏 卷11 喪服》 성냄을……않는다 이 말은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순 임금의 이복동생인 상(象)이 아버지 고수(瞽瞍)와 함께 순을 죽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지만, 순 임금이 천자가 되어 아우 상을 유비(有庳)에 제후로 봉하고 부귀하게 해 주었는데, 상은 불인(不仁)하여 관리로서의 자질이 안 되었기 때문에 다른 관리를 파견하여 대신 다스리게 하고 세금만 상에게 바치는 방식으로 하였다. 이에 대해 맹자는 "어진 사람은 아우에 대하여 노여움을 마음에 숨겨 두지 않으며, 원한을 가슴속에 남겨 두지 않고 그를 친애할 뿐이다. 친하게 여긴다면 그를 귀하게 하고 싶고, 사랑한다면 그를 부유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仁人之於弟也, 不藏怒焉, 不宿怨焉, 親愛之而已矣. 親之, 欲其貴也, 愛之, 欲其富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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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선조 유적의 시에 차운함 次金氏先蹟韻 열사의 곧은 충성은 물가에서 드러나고 烈士貞忠著塞河판관의 깨끗한 절조 고향으로 돌아가네 判官淸節歸田里천 년 아름다운 자취 있는 광산 집안 千秋懿蹟光山家키와 가죽옷195) 이어받는 일 어찌 가볍게 하랴 繼述箕裘敢忽爾 烈士貞忠著塞河,判官淸節歸田里.千秋懿蹟光山家,繼述箕裘敢忽爾. 키와 가죽옷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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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이복용(李福容)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大正九年 陰十一月 十一日 李福容 李冕容 大正九年 陰十一月 十一日 李福容 李冕容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0년 음력 11월 11일에 이복용이 백산 아래의 대조(垈租) 사건에 관한 건으로 이면용에게 보낸 간찰(簡札) 1920년 음력 11월 11일에 이복용이 백산 아래의 대조(垈租) 사건에 관한 건으로 이면용에게 보낸 간찰(簡札)이다. 한자와 한글을 혼용해서 썼다.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발신자인 족제(族弟)는 일양하며 물경동의 산소도 안녕하다고 하였다. 말씀드릴 것은 백산 아래의 대조(垈租) 사건에 대한 것이다. 정사년과 기미년조는 이미 받아서 이식하고 있으나, 무오년조는 묘지기 이도순이 물경동의 제종과 상의하여 7대조의 시사(時祀)에 내준 비용이 약소함에 따라 제종이 각각 몇 두씩 내놓고, 해당 도조 1석2두를 추가로 넣었으나 종계 설립을 칭탁하고서 지급하지 않는 것은 이미 다 말씀드렸다. 그런데 지난 6월 아드님이 올라왔을 때에도 서로 상의한 바, 이달 시사 때 본 이자를 독촉하니, 각각 자손을 위하는 것은 일반이라 하고서 영영 지급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고민스럽다. 이 문제를 살핀 후에 해당 사건을 묘지기 이도순에게 통지하여 독촉해서 받아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말미에는 한글로 쓴 추신이 있다. 누차 독촉하자 묘지기가 최치복을 주려고 하였다는 등 광언망설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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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답함 기사년(1929) 答田士狷 己巳 편지를 받으니 스스로를 평한 말씀이 비록 위겸(撝謙)27)의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또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소인(小人)들이 미워하고 범부(凡夫)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법도를 바꾸어서 합치할 수가 없고, 저들이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그대로 방임할 뿐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 정상적인 길을 벗어나서 병이 될까 두려워 한즉, 제가 비록 안으로 반성하여 허물이 없다 할지라도28) 군자에게서 미움과 두려움을 얻은 것이 혹 지혜와 인에만 전력하고, 의젓하게 임하는 것은 소홀히 하며 쉽게 하는데 있다면, 이것은 끝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볼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형이 만약 능히 이 점에 있어서 만일 이와 같이 하면 병이고,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약이 된다29)라고 하는 훈계를 한다면 더욱 뜻을 더하십시오. 承惠自評之語, 雖出於撝謙之意, 亦不敢絶不謂然也.彼小人之惡之也, 凡夫之懼之也, 吾不可以改度而合之, 任彼之惡懼而己.惟君子之恐其逸出軌轍而病之, 則吾雖內省而不疚, 其所以得此於君子者, 或在於專力知仁忽易莊涖之由, 則終有不可視爲無事者.兄若能於此知如此是病不如此是藥之訓, 一倍加意焉. 위겸(撝謙) 《주역》 〈겸괘(謙卦) 육사(六四)〉에, "겸손함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撝謙.]"라고 하였다. 제가……할지라도 내성불구(內省不疚)는 자기의 내면을 살펴 흠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 "내성불구하다면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內省不疚 夫何憂何懼〕"라고 하였다. 형이……약이 된다 《朱子大全 卷64》 . 주희(朱熹) 의 〈혹인(或人)에게 답한 편지〉에, "이와 같음이 병이 됨을 알면 이처럼 하지 않는 것이 약이 된다."라고 하였다.〔如此是病, 卽便不如此,是藥.〕"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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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중일동건에게 답함 계해년(1923) 答蔡中一東建 癸亥 전에 보낸 편지를 받았었는데 정다운 편지를 재차 받으니 깊이 아끼시는 마음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겠습니까? 아, 우리가 아끼는 것이 어찌 헛된 것이겠습니까? 구하는 바는 의기를 함께 하는 것이니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된다면 고금으로 시대가 다르고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불과 탁자를 함께 쓰고 편지가 끊이지 않더라도 정다운 교분이라고 한다면 맞지만 뜻을 함께 한다고 한다면 틀립니다.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자의 인(仁), 맹자의 의(義), 정자의 경(敬), 주자의 성(誠)이 아니겠습니까? 구하여 얻은 것이 같다면 아끼는 마음이 이에 더욱 깊어질 테니, 어찌 매우 통쾌하고 흡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청수(淸秀)하고 돈실(敦實)한 당신께 바라는 바가 깊습니다. 그러므로 천년 뒤에도 도의(道義)를 지키기를 기약하고 같은 시대의 글벗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자 이를 위하여 속마음을 토로하니, 헤아려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보내주신 시는 살펴보니 착실하게 공을 들였습니다. 허나 현재 심제(心制) 중이어서 받들어 화답할 수 없어서 한탄스러운데, 비평과 윤색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부족한 제가 보기에 온당치 않은 부분을 대략 거론하여 보내오니, 다시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旣荷前書, 再奉情函, 非相愛之深, 烏能致此? 噫, 吾人相愛, 豈徒爾哉? 所求者聲氣之同, 聲氣苟同, 古今之殊、朔南之遠, 猶朝暮遇也. 其未然, 雖衾卓相聯、赫蹄不絶, 謂之情交則可, 同志則非也. 吾人之所求者何? 孔仁、孟義、程敬、朱誠者非耶? 求之而所得者同, 則相愛者, 於是乎愈深, 豈非多少快洽乎? 區區於高明之淸秀敦實, 所望者深, 故欲相期於千載, 而不作幷世文友而止, 爲此吐蘊, 想見諒領會也. 盛詩可仰, 實實用功. 見在心制中, 未由奉和悵悵. 批潤何敢? 略擧未安於鄙見者以呈, 幸更裁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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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 형복에게 고함 【1925년 12월 10일】 告長兒炯復 【乙丑十二月十日】 예전에 물들여진 습관을 혁파하고 새로운 덕으로 나아가거라. 죽으려할 때의 말을 너는 소홀히 여기지 말거라. 革舊染, 進新德. 將死言, 爾毋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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