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음행기 【신사년(1941)】 安陰行記 【辛巳】 안음은 안의(安義)의 옛 이름이고 지금은 함양군에 속해 있다. 옛날, 아버님 벽봉(碧峯)공께서는 품은 마음이 맑고 너르셨는데 늘 말씀하시기를, "뜻이 맞는 두 서너 사람과 함께 좋은 산수를 유람하는데, 종이 두루마리[詩軸]를 만들어 인부의 품에 가득 안기고 아울러 붓ㆍ먹ㆍ벼루를 동자 등에 지워서, 아름다운 절경 만나면 곧 소회를 펼친 시를 지어 번갈아 수창(酬唱)한다. 그러면서 집에 돌아갈 줄을 잊는다면 그 어찌 즐겁지 않으랴!"고 하셨다.또 이어 말씀하시길, "안의현의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105)은 물과 돌이 남쪽 지방 가운데 가장 이름이 나서, 명현(名賢)과 달사(達士)들이 발걸음을 머무르고, 시인과 가객들이 완상하는 곳이라 한다. 이곳을 참으로 유람해보고 싶은데 미처 하지 못하였다."고 하셨다.아아! 선군계서는 평생 멀리 떠나는 것을 경계하시다가 중년에 수명을 다하시어,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어찌 그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님의 백 가지 중 하나도 못 닮았지만, 유독 산수를 좋아하는 것에는 약간 닮은 점이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비록 빈 겨를이 생겨도 어찌 차마 기뻐하며 선군께서는 미처 못 하셨던 것을 하며 즐기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이 어찌 선비들이 유람하고 구경할 시절인가? 그래서 가는 길이 경유하고 친구들이 요구하여 그럴 기회가 있어도 하지 못 한 것이 여러 번이다.그런데 생각해보니 사람들의 집안에서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시대의 형세가 꼭 다 같지는 않다. 그러면 의리와 관계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 형세에 따라 하는 것이 아마도 죄가 되기까지는 않을 것이다. 또 오늘날 산수는 어찌 다니며 구경만 하는 것인가? 이 또한 높은 봉우리나 깊은 골짜기에서 분기를 토하고 애달픔을 씻어내는 것에 불과하니, 마치 옛 사람이 말한 바의 동쪽 언덕에올라 휘파람 불고106), 황량한 언덕에서 통곡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돌려 금강산, 두류산, 변산, 서석산의 승경들을 모두 거쳐 구경하고 돌아왔는데, 특히 안음에서는 아버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 여러번 마음이 가 뒤돌아 보았다. 대방(帶方 남원)에 사는 족인 성헌(惺軒) 어른이 항상 내게 말하기를, "세 골짜기의 승경을 찾아가는 것은 소원은 아저씨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 골짜기107)란 화림동(花林洞)ㆍ심진동(尋眞洞)ㆍ원학동(園鶴洞)을 말하는데, 바로 위에서 말한 서상동과 북상동이다.작년 가을에 내가 성헌께 가서 앞서의 약속을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병이 난지 여러 삭이 되어 문 밖 출입을 못하셨다. 그래서 다만 길게 탄식하고 돌아왔다. 금년 사월 보름이 지나 남원의 산서(山西)에 갔다가 친구 사유 이한응(士裕李漢膺) 군을 방문했다. 이군은 나이 사십인데 수구(守舊)하였고 시문에 능하였다. 이야기가 세 계곡의 승경지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겨우 백여 리였다. 곧 두 사람의 뜻이 일치하여, 19일에 소매를 나란히 하고 길을 나서 준령을 세 개 넘고 내동(內洞)108)의 가곡(佳谷)에 가서 잤다. 20일에 준령을 두 개 넘어 추천(秋川)에 다다르니 곧 안의의 서상동으로 이른바 화림동이었다. 준령의 길이 험해 절뚝거리는 늙은 다리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터였지만 그래도 능히 버텨 넘긴 것은 종전에 유람을 원했던 마음으로 이겨낸 것이었는데, 스스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이 그 이른바 마음에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하는 것이었을까? 이틀간의 길에서 사유(士裕)와 시 몇 편을 창화(唱和)하였다.추천(秋川)이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족인 상집 김형돈(庠集金炯敦)을 찾아갔는데 마침 집에 없었으니 탄식한들 뭐하겠는가. 이 사람은 평소 의기가 있어 지난해에 의병 이석용(李錫庸)이109) 대구 감옥에서 죽자 빈한한 형편에도 가서 호상(護喪)하며 천리 길을 반장(返葬)110)해 오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었다. 그래서 영남과 호남의 사람과 선비들 모두가 찬탄하며 우러러보았다. 내가 오랫동안 그를 만나보기를 바랬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며, 족인으로서의 정의(情誼)뿐만은 아니었다. 이제 공교로운 엇갈림을 탄식하는 것은 이처럼 의로운 선비가 우리 종족 중에 있는데 생전에 한 번도 못 만날까 걱정해서였다. 이틀 밤을 재미없이 보내서가 아니었고, 완상(玩賞)을 이끌어줄 이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 아들 인철(璘喆)이 예의를 분명하게 차리고 접대함이 은근하여 또한 그 의방(義方)이 본래 온 데가 있음을 알수 있었다.다음 날 부근의 볼 만한 데로 이구평(尼丘坪)이라는 곳에 갔는데 세상에서 일컫기를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장래의 명당이라 하였다. 지대가 높고 평평하여 장유형(長乳形)111)을 이루면서 조금 기울어져 있다. 국세(局勢)는 빙 둘러 싼 환포형(環抱形)112)에 수구(水口)113)가 잠겨있고 안산(案山)이114) 정면에 마주하였는데, 다만 주룡(主龍 주산(主山)의 줄기)이 타고 오르지는 못하여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당국(當局)115)을 살펴보니 기상(氣像)이 썩 명랑하지 않으니, 내 생각에는 땅의 운세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하다. 사방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와서 새 터를 잡았다가 모두 패가하고 되돌아가서 빈 집과 무너진 가옥 몇 개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이 함께 세운 공자 사당 또한 퇴락하여 보존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22일 추천(秋川)을 출발하였다. 주인을 못 본 서운함에 시 한 수를 남겨 마음을 표현했다. 이로부터 남쪽으로 20리 가서 봉전리(鳳田里)에116) 이르렀는데 전씨의 거연정(居然亭)이117) 시냇물 속의 암석 위에 있어 마치 물 위에 배가 떠 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절벽 위에 숲이 무성하고 그늘이 넓고 짙어 당을 덮고 있었다. 돌 사이 푸른 못에서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앉아 있는 자리에 끼쳐오고 사면이 푸른 바위인데다 가벼운 안개가 옷을 적시니 싸늘해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현판에는 고산 임헌회(鼓山任憲晦)118)의 기문, 연재 송병선(淵齋宋秉璿)119)과 심석재 송병순(心石齋宋秉珣)120) 형제의 시가 있어 읽고 읊으며 그윽한 회포를 풀어내 보았다. 사문(斯文)도 상실되고 도(道)도 폐해지고 성세는 멀며 사람이 죽어 없어진121) 때를 당하여 선배들의 성명과 문자를 잠깐이라도 보니 또한 저절로 매우 기쁘고 마치 좋은 시절에 친히 가르침을 받는 듯했다.연재와 심석재 시에 대해 차운한 시 한 수를 썼다. 남쪽을 보니 한 걸음 쯤에 또 정자가 있어 가 보니 '군자'라는 편액122)을 써서 달았다. 금곡 송래희(錦谷宋來熙)의123) 시가 있고 또 전씨의 것도 있었다. 비록 거연정과 지척의 거리에 있지만 경치와 운치는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마치 풍수(風水)를 보는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습이 바뀐다는124) 것일까? 다시 남쪽으로 5리쯤 가 동호정(東湖亭)에125) 이르렀는데 또한 경치가 뛰어난 곳이고 장(章)씨가 지었다. 인철이 여기까지 전송와서 작별하고 돌아갔다. 서상동 구경은 여기서 끝난 것이다. 북상동 수승대(搜勝臺)의 기이한 절경이 세 계곡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인철에게 물어보니, 여기서 60리 정도의 거리라 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구경하지 않고 놓아두겠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거리가 조금 멀고 같이 온 이군이 오랫동안 머무르기 어려운 형편이었고, 또 이끌고 가 설명하며 흥취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근처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부득이 거기 가보기를 그만두었다. 아! 훗날 안문(雁門)의 불우함을126) 보상받을 그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구나.이로부터 동남쪽으로 나아가 안의의 옛 치소(治所)를 돌아보았는데, 광풍제월루(光風霽月樓)가 가히 볼 만했다. 생각해보니 이 곳은 한문장(韓文章)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燕巖朴趾源) 공이 목민관으로 있던 곳이다. 그래서 관청 건물이나 누정에 기문ㆍ제영 문자를 많이 걸었을 터이지만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격변 끝에 탈 없이 보전되지 못하였다. 지금은 그것을 찾아 볼 길이 없어, 다만 강산을 그리고 읊는 감흥으로 배회하며 바로 떠나가지 못 하였다. 다시 서남쪽으로 20리를 가서 덕곡리(德谷里)에 다다르니, 길 옆에 경수정(敬授亭)이 있는데 고려말의 충신인 덕곡 조승숙(德谷趙承肅) 공이 은거하면서 가르치던 곳이다. 그 종노릇 하지 않은 절개127)가 우리 할아버지 군사공(郡事公)128)과 하나임을 생각하여 오언절구 시를 지어 감상을 적었다. 개평(介坪)으로 건너가 정일두(鄭一蠹),129) 노옥계(盧玉溪)가130) 태어나 자란 곳을 물어 알아보고, 효리(孝里)로 가서 동문인 정재경(鄭在璟)131)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져서 여관에서 잤다.다음날 가서 정재경을 그의 새로 지은 거처 문산재(文山齋)에서 만났다. 문산재는 너럭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위쪽으로 작은 시내를 끼고 있고, 구조가 정채롭고 간결하였고, 기와를 덮었다. 몸을 깃들이고 마음을 기르기에 딱 좋은 장소여서 그 만년의 맑은 복을 축하해줄 만하였다. 그가 이끄는 대로 남계서원(灆溪書院)132)을 봉심하고, 강당에서 잠시 쉬고 나서, 다시 풍영루(風咏樓)에 올랐다. 두류산의 천 겹 봉우리와 큰 강의 외로운 배133) 같은 선생의 기상을 생각하며, 당시에 도를 아직 펼쳐보지도 못하고 먼저 사화의 그물망에 걸린 악운에 마음이 아파, 고개를 들었다 떨구며 목이 멜 듯하였다. 남계서원 옆에 청계사(淸溪祠)라는134) 사당이 보였는데 이는 탁영 김일손(濯纓金馹孫)의135) 영령을 모시기 위해 십 수년 전에 건립되었다 한다. 김일손은 평소 정여창을 따라 강론하였고 사화를 당하여 체포된 곳이다. 아! 저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 무리의 죄는 진실로 용납될 수 없으니, 그 때 점필재(佔畢齋 金宗直)가 어떤 글을 지은 것과 김일손이 그 글을 내보인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136) 사람을 시켜 곧바로 하늘에 물어보고 싶다. 남계를 떠나 함양읍에 도달하니 이미 정오였다. 고운 최치원의 숲[孤雲林]137) 안에 들어 더위를 피하니 이는 세상에서 함양 십 리 숲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서쪽으로 30리 가 길에서 족인 형원(炯元)을 만나 그 집에서 잤다. 집은 백전면 평리에 있는데 곧 상집(庠集)의 재종동생이다.다음날 봉현리(鳳峴里)에 이르러 여러 족인들을 방문했다. 여기 사는 족인이 20호 쯤이다. 전에 연재(淵齋) 문인이었던 낙상 김응문(洛相金應文), 낙종김윤중(洛鍾金允仲) 두 사람은 영남 우도의 망사(望士)인데 모두 이 마을에 산다. 지금 비록 그 명성을 이어가는 이가 없으나 또한 모두 능히 삼가고 지조를 지켜 옛 가문의 규범을 잃지 않았는데, 나를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술과 밥을 차려주는데 그 정이 가히 손에 잡힐 듯했다. 이리하여 봉현에 유숙하였다.25일, 준령을 두 개 넘어 장수(長水)의 노단리에 이르러 묵었다. 다음날 마치(馬峙)138)를 넘어 산서 마평에 이르르니 곧 사유 이한응(士裕李漢膺)이 사는 곳이다. 다음날 비가 와서 이한응의 종숙 서산 이풍호(瑞山李灃鎬) 어른을모시고 평온이 담화하고 함께 그 선인의 문집을 보며 보존할 것과 산삭(刪削)할 것을 상의하였다. 29일 마평을 떠나 5월 3일 집에 돌아왔다.이번 여행은 비록 세 골짜기를 두루 다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소원을 이루었고, 화림동을 간 일착도 안 한 것보다는 현명했다. 우리들을 위해 오늘 분기를 토하고 애상(哀傷)한 마음을 씻어내는 밑천으로 삼기에 족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다. 옛날 순임금이 요임금을 애모하여 어쩌다가는 담장 앞에서도 그 모습이 보이고, 국물 위에서도 그 모습이 비쳐 보였다고 하는데, 이 말은 사모함이 지극하면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는 것이다. 불효한 나는 늘 생각하기를,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못 해보셨는데, 나는 지금 이번 여행으로 아버님이 평생에 못 하신 것을 마침내 하고 있구나 하였다. 그러니 어떻게 아버님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산을 보고 물을 보았겠는가. 그런 즉 이 여행은 죄가 되는 데에 이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의 기운으로 감통(感通)하는 선군으로서는 흔연히 기뻐하고 좋아하셨을 지도 모른다. 나는 이리하여 특별히 선군을 생각하며 안음 여행기를 쓴다. 安陰, 安義古號, 今屬咸陽郡。 昔我先君碧峯公衿懷淸曠, 常曰: 與二三同志行遊好山水, 裁成軸紙, 盈一抱者, 幷中山之穎, 絳縣之玄, 端州之石, 載小奚背, 遇佳絶處, 輒賦詩暢懷, 迭相唱酬。 如是而忘歸, 豈不樂哉! 因又曰: 聞安義縣西上洞北上洞, 水石爲南中最, 名賢達士之所留跡, 騷人韻客之所翫賞, 是固所願遊而未能也。 嗚呼! 先君平生戒在遠遊, 壽止中身, 所願竟止於未能, 可勝痛哉! 竊念小子於先君百不一肖, 特於山水之好有畧同者, 然於孤露之後, 雖有暇及之勢, 豈忍自幸遂先君之所未能以爲樂? 矧乎今之日, 豈士子遊觀時哉! 以是道途所經, 知舊所要, 雖有其梯, 而未能焉者亦累矣。 但念人家父子所遭時勢未必皆同, 則除事關義理者外, 自當各隨其勢而爲之者, 恐不至爲罪。 且今日山水, 是遊觀也歟? 亦不過吐氣洩哀於高峯絶磵之際, 如古人所謂東皐舒嘯, 荒岡痛哭而已。 又以是回却前心, 如金剛、頭流、邊山、瑞石之勝旣皆歷覽而歸, 尤於安陰, 以先君有言, 每眷眷焉。 帶方族惺軒翁常謂余曰: 三洞探勝, 願與叔同焉。 三洞者, 花林洞、尋眞洞、園鶴洞, 卽上所謂西上洞、北上洞也。 昨年秋, 余至惺軒, 意其踐前約, 則病已數朔, 不能出門, 只自悵歎而歸矣。 今年四月望後, 過南原山西, 訪舊知李君士裕【漢膺】。 李今年四十, 守舊而能詩文者, 語及三洞之勝, 則此去僅百餘里。 遂兩意一致, 以十九日聯袂登程, 踰峻嶺三, 抵內洞佳谷而宿。 二十日, 踰峻嶺二, 抵秋川, 卽安義西上, 而所謂花林洞也。 嶺峻路險, 老脚蹣跚, 宜不堪其苦, 而猶能支過者, 以從前願遊之心勝, 而不自知也。 豈亦所謂心有所好樂, 則不得其正者耶? 兩日間, 道中與士裕有唱和幾篇。 至秋川者, 爲訪族人庠集【炯敦】, 而適不在家, 何歎如之? 斯人也, 素有義氣, 昔年義將李錫庸之沒大邱監獄也, 以貧寒之勢, 爲其護喪, 千里返葬, 間關盡瘁。 嶺湖人士莫不欽仰。 余久所願見者, 以此也。 非但爲族誼爾。 今歎巧違者, 以若此義士之在吾宗族者, 恐生前之無一面, 非爲信宿之無味, 況翫賞之無指導也! 其子璘喆, 禮數分明, 接待殷勤, 亦見其義方有所也。 翼日行尋近處可觀, 所謂尼丘坪, 世稱將來名基冠國中者也。 當處高平, 成長乳而少傾斜, 局勢環抱, 水口關鎖, 案山正對, 但主龍未及乘, 尋不知如何。 而察其當局, 氣像殊不明朗, 意者地運未回歟? 四方有力人來占新基者, 皆敗家還去, 但有空家破屋幾處, 衆所共建之夫子廟亦頹落而難保矣。 二十二日發秋川, 悵不見主人, 留詩一首以表情。 自是南行二十里, 至鳳田里, 有全氏居然亭者, 在川澗中巖石上, 宛若舟泛水上。 入其中, 則岸上茂林繁陰罨堂, 石間綠潭冷氣逼座, 四面蒼壁輕嵐濕衣, 凜乎其不可留也。 板上有鼓山任先生記, 宋淵齋心石兄弟詩, 且讀且咏, 發舒幽抱。 當此文喪道廢世遠人亡之日, 乍見先輩姓名文字, 亦自喜甚, 宛若親承謦欬, 於無恙日也。 有次淵心韻一首。 見南便一武許, 又有亭, 往觀則扁以君子, 而有宋錦谷【來熙】詩, 亦全氏有。 雖與居然亭同在咫尺, 景狀韻致十不及一。 所謂如看風水移步換形者亦此耶? 又南行五里, 至東湖亭, 亦勝處, 而章氏有也。 璘喆送至于此而別去。 蓋西上洞之觀則止於此矣。 曾聞北上洞搜勝臺之奇絶爲三洞之首, 而問於璘喆, 則此去爲六十里, 豈其欲舍之而不觀? 顧念距離稍遠, 同伴李君勢難久淹, 且無近處人指引說明助發興致者, 以故不免罷其行。 噫! 未知他日補鴈門之踦者, 有其梯歟? 自此東南行, 歷安義舊治, 有光風霽月樓可觀。 念此地乃有韓文章大家燕巖朴公【趾源】字牧處, 凡於官廨樓亭, 想多記題文字, 而滄桑之餘能保無恙否? 無由搜觀, 但興江山文藻之感, 而徊徨不遽去也。 西南行二十里, 至德谷里, 路傍有敬授亭, 麗末忠臣德谷趙公【承肅】隱居敎授處。 念其罔僕之節, 與吾祖郡事公一體, 作詩五絶, 以述感想。 過介坪, 詢知鄭一蠹、盧玉溪生長之跡, 欲前進孝里訪同門人學岡鄭乃薰【在璟】, 而迫昏宿旅舍。 翌日往見乃薰於新築文山齋。 齋臨盤石, 上夾以小澗, 結構精灑而覆以瓦, 正好棲身養心之所, 可賀其晩年淸福也。 已而聽乃薰指引, 奉審灆溪書院, 少憩于講堂, 又登風咏樓。 想先生頭流千疊、孤舟大江之氣像, 傷當日道未及行, 先罹禍網之惡運, 俯仰上下, 誠可於邑。 灆院之傍見有淸溪祠, 云是濯纓妥靈而十數年來所建者, 濯纓平日從一蠹講論, 而遭禍時逮捕處也。 噫! 彼光墩輩罪固不容, 而當日佔畢之作某文, 濯纓之布某文者, 誠何意也? 令人直欲作天問也。 離灆院抵咸陽邑, 已午天矣。 納凉于孤雲林中, 是世所稱咸陽十里林, 而孤雲手植者。 西行三十里, 道遇族人炯元, 宿于其家。 家在柏田面坪里者, 乃庠集再從弟也。 翌日至鳳峴里, 訪僉族人。 族人居此者, 可二十戶。 前者淵齋門人應文【洛相】、允仲【洛鍾】兩氏, 爲嶺右望士者, 皆出此里。 今雖無繼其風聲者, 亦皆能謹拙操守, 不失古家規模, 見余喜甚。 輪致酒飯, 其情可掬。 因留鳳峴。 二十五日, 踰峻嶺二, 至長水魯壇里宿。 翌日又踰馬峙, 至山西馬坪, 卽士裕所居。 翌日雨, 陪士裕從叔瑞山丈【灃鎬】穩談, 同看其先集, 商議存刪。 二十九日, 離馬坪, 以五月三日歸家。 是行也, 雖不能徧觀三洞, 畢償夙願, 花林一著猶賢乎已。 而爲吾輩, 今日吐氣洩哀之資則足矣。 且在余則又有異者, 昔舜之慕堯, 或見於墻, 或見於羹, 此言思慕之至, 無時而不如見也。 余之不孝, 其念先君雖不能如此, 然今於是行之遂先君平日所未能者也。 安得不思我先君, 或見於山, 或見於水也? 然則是行不惟不至爲罪, 其在一氣感通先君之靈, 安知其不亦欣然而喜幸也耶? 余於是特以先君之思作安陰行記。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 서상동은 안의현 서쪽 끝에, 북상동은 북쪽 끝에 있다. 동쪽 언덕……불고 도연명(陶淵明)이 쓴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고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물 굽어보며 시를 짓는다.[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는 실의ㆍ체념하며 소요하는 뜻으로 썼다. 세 골짜기 화림동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에 있는 계곡, 심진동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계곡으로 용추계곡이라고도 하며, 원학동은 수승대(搜勝臺) 계곡이라고도 한다. 이 셋을 합쳐 안의의 세 골짜기라고 한다. 내동(內洞) 남원군 남생면(南生面)이었다가 지금은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이며, 안골로도 부른다. 이석용(李錫庸) 1878-1914. 초명은 이갑술(李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전라북도 임실 출신으로서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숨어 살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혔다. 2년 여 동안 대구 감옥에 있다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제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지내는 일. 장유형(長乳形) 땅의 형세가 마치 여인의 젖이 길게 늘어진 모양을 이룬 것을 말한다. 환포형(環抱形) 물이 명당으로부터 멀리 우회하여 감싸 안은 형세를 말한다. 수구(水口)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멀리 돌아 흘러서 하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좋은 혈(穴)을 이루는 조건의 하나이다. 안산(案山) 무덤의 혈 앞에 마주보는 산. 여기서는 이구평과 마주 대하고 있는 산을 말한다. 당국(當局) 해당 국(局)의 형세를 말한다. 풍수에서의 국(局)은 혈(血 정기가 흐르는 곳)과 사(砂 혈 주위의 형세)를 합친 것이다. 봉전리(鳳田里)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를 말한다. 거연정(居然亭)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화림동계곡에 있다.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모옥으로 지어 강학하던 곳이었다. 임헌회의 〈거연정기문〉 송병선의 〈거연정중수기문〉 등이 있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성리학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전우(田愚)의 스승이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 본관은 은진,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대전시 회덕 출신으로,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병순의 형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행되고 국권이 강탈당하자 자결하였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며, 송병선의 아우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었고,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사문도……없어진 주자가 쓴 〈소학제사(小學題辭)〉에 '세대는 멀어지고 사람은 죽고 없다.(世遠人亡)'는 어구가 있다. 김택술이 살았던 때가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성대했던 때는 멀어졌고 인걸들이 없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군자라는 편액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화림계곡에 있는 군자정이다. 전세걸(全世杰)과 전세택(全世澤)이 정여창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에 지었다고 한다. 거연정과 1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송래희(宋來熙) 1791-1867. 자는 자칠(子七). 송준길 후손. 《한비자집해》 〈유도(有度)〉편에 '처음에 알고 있다가 발걸음을 이동하여 풍경이 바뀌니 방향을 알지 못한다.[在始未必不知, 移步換形, 遂不能見。]'는 말이 있다. 동호정(東湖亭)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있는 정자.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했다는 동호 장만리(東湖 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9대손인 장재헌 등이 주도하여 1890년 경에 지었다. 안문(雁門)의 불우함 한나라 때 단회종이 안문 태수(雁門太守)에서 면직되고 서역으로 부임하게 되자 친구인 곡영(谷永)이 '빨리 돌아온다면 안문에서 면직된 불우함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한서(漢書)》 권70 〈단회종전(段會宗傳)〉 종노릇……절개 멸망한 나라의 신하가 의리를 지켜 새로운 왕조나 나라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조를 의미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때 기자(箕子)는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我罔爲臣僕。]"고 했다. 《書經》〈微子〉 군사공(郡事公)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령(扶寧)이고, 평장사(平章事) 김구(金坵)의 현손이며,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를 하였다. 정일두(鄭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으로 귀양 갔고, 갑자사회 때 부관참시 당했으나, 중종 때 복권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노옥계(盧玉溪) 노진(盧禛, 1518~1578)으로,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이다. 정재경(鄭在璟) 1881~1948, 자는 내훈(乃薰), 호는 학강(學岡)이다. 전우의 제자이며, 문집으로 《학강유고》가 있다. 남계서원(灆溪書院) 함양군 수동면에 있으며, 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져 사액 서원이 되었다. 두류산……외로운 배 정여창의 유일하게 전해오는 다음 칠언절구의 말을 인용하였다. "냇버들 바람에 나부껴 가벼이 한들거리고, 사월의 화개동엔 벌써 보리 가을이구나. 두류산 천만 봉을 두루 다 유람하고, 외로운 배 다시 띄워 큰 강 모래톱으로 내려가네.[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洲。]" 청계사(淸溪祠) 원래 1495에 김일손이 유생을 가르친 청계정사의 터에 1921년에 세운 사당이다.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점필재……넣은 것 김일손이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스승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을 말한다. 고운림(孤雲林) 함양에 있는 숲으로, 신라의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이 심어 만든 것이라 하며, 천년숲으로도 부른다. 마치(馬峙)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마평(馬坪)에서 번암면 국포리로 넘어가는 길목의 고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