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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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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5년 이종남(李鍾南) 금전 보관증 고문서-증빙류-증서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李鍾南 李龍淳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李鍾南 李龍淳 李鍾南 (印), 李大淳 (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5년 2월 21일에 이종남이 이용순에게 발급한 금전 보관증 1915년 2월 21일에 이종남이 이용순에게 발급한 금전 보관증이다. 보관하는 금전의 액수와 지급규정 및 당사자 등이 기재된 문서이다. 보관 금액은 2원이다. 이 금액은 정정당당하게 보관하는 것인 바, 이 증서를 휴대하고서 도착하는 즉시 내주기로 약정하였다. 보관주는 이종남이며, 입회인은 이대순이다. 보관을 위탁한 사람은 이용순이다. 보관주와 입회인은 이름 아래에 날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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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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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5년 이용순(李龍淳) 금전 차용증 1 고문서-증빙류-차용증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李敎英 李龍淳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李敎英 李龍淳 李敎英 (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5년 2월 21일에 이용순이 이교영에게 차용한 금전에 대한 증서 1915년 2월 21일에 이용순이 이교영에게 차용한 금전에 대한 증서이다. 이 증서는 금액과 상환기한 및 방법 등을 명기하여 차용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한글과 한자를 병용하여 썼다. 금액은 3원50전이다. 먼저 이 금전을 차용한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변제 기한은 1915년 10월 15일로 약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서로 걸지 않기로 하고, 연 이자는 3할로 하였다. 본 약정에 따라 본 이자와 함께 기한 내에 지체 없이 갚기로 하고 이 금전차용증 1장을 작성하여 교부한다는 것이다. 이 차용증에 대해 증주(證主)는 이교영이며, 차용인은 이용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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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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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17년 이의순(李毅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丁巳二月九日 李毅淳 丁巳二月九日 李毅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60_001 1917년 2월 9일에 족손 이의순이 족조인 모에게 산소의 일을 할 목수의 식주를 정하는 일에 대하여 논의한 간찰 1917년 2월 9일에 족손 이의순(李毅淳)이 족조인 모에게 편지를 받자마자 보낸 답장이다. 묘(墓)의 일이 급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목수의 식주(食主)를 주막에서 먹는 것으로 정했다고 하는 말이 맞는지 묻고, 그 사이 이해(利害)를 따져서 견주어 보았기 때문에 저 사람에게 실지로 말하기는 어려운데 잘 말했다. 산에서 급히 다시 식주를 정하면 만약 좋지 않아도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급하게 거행하더라도 논책(論責)은 면할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하여 어찌 하나의 규각(圭角)이라도 찾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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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기 【병자년(1936)】 彌勒記 【丙子】 미륵(彌勒)은 석불(石佛)의 별명이다. 석씨(釋氏)는 허무를 숭상하였으니, 그의 말 중에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게 된다면 곧 여래(如來)를 보게 된다."81)라는 말이 있다. 형상을 형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음에도 또 불상(佛像)과 사탑(寺塔)을 많이 만들어 먼 훗날까지 오래도록 전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형상을 형상으로 여기는 것이 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허무를 숭상한다면 이런 이치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한즉 그 숭상하는 바가 실제적인 체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사물의 형상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과 행적이 서로 어긋남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정읍군(井邑郡) 망제산(望帝山) 내 대암(臺巖) 마을에 손뼘으로 재었을 때에 길이가 19뼘이고, 둘레가 12뼘이 되는 석불 한 구가 엄숙하게 나무 숲 사이에 세워져 있는데, 돌담으로 둘러져 있고 앞에 등대석(燈臺石)이 있으며, 거주하는 사람이 항상 깨끗하게 청소하여 남녀가 기도할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대체로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이희맹(李希孟) 문안공(文安公)이 이곳에 기도하여 높은 벼슬을 얻고서 석관(石冠)을 더하였다고 한다. 이공은 국초(國初)와 매우 멀지 않은 사람이니, 고려 때부터 이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에는 불교를 숭상하여 사찰(寺刹)이 민간에 두루 퍼져 있었으니, 이곳이 스님들의 거주지였고, 이 불상이 스님들이 만든 것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아, 석씨의 학문은 진실로 망령되거니와 사물에 가탁하여 오래도록 전하는 것도 또한 비루하다. 그러나 이따금 불상이나 사탑, 옛 유적으로 인하여 비록 금지되고 파멸되는 때를 만났을지라도 오히려 부흥할 수 있었으니, 나는 저 이른바 허무를 숭상한다는 것이 끝내 있음을 숭상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없고,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게 된다는 말이 한갓 큰 소리를 쳐서 사람을 속인 것임을 알겠다. 彌勒者, 石佛之別名也.釋氏尙虛無, 其言有曰: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不相其相也, 蓋若此矣.而又多作佛像寺塔, 爲久遠計, 則相其相又無加乎此者, 何也? 無乃尙無之無是理也, 則其所尙者, 未見實得而反爲物相所累. 故自不免心跡之相戾也歟.井邑郡 望帝山中臺巖之里有石佛一, 度以指尺, 長爲十九, 圍爲十二者, 儼然立樹林間, 繞以石垣, 前有燈臺石, 居人尙掃除淸潔, 以備男女祈禱.蓋不知何代何人所造, 世傳李文安公 希孟, 禱此得顯官, 爲作石冠而加之.李公距國初不甚遠, 則想自麗以前已有.是時崇佛, 寺刹遍民間.此地爲僧居, 此佛爲僧造也無疑矣.噫, 釋氏之學固妄矣, 託物傳久亦陋矣.然往往因佛塔古跡, 雖當禁止破滅之時, 猶足以復興焉.吾知其彼所謂尙無者, 竟脫不得崇有, 而諸相非相卽見如來之云, 徒爲大言而欺人也. 만약 …… 된다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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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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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 1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12.5.7 (大正)12.5.7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보성(寶城) 소인이 날인된 60원 92전의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 1923년 보성(寶城) 소인이 날인된 60원 92전의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이다. 이를 우편으로 수령자에게 보내면 지정된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교환하는 우편환(郵便換)이다. 한문과 일본어 혼용체이다. 기호번호 난에는 번호가 찍혀 있다. 뒷면에는 위체료 및 기타 요금에 관한 사항이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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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 2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12.2.13 (大正)12.2.13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보성(寶城) 소인이 날인된 20원의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 1923년 보성(寶城) 소인이 날인된 20원의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이다. 이를 우편으로 수령자에게 보내면 지정된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교환하는 우편환(郵便換)이다. 한문과 일본어 혼용체이다. 기호번호 난에는 번호가 찍혀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요금이 기재되어 있다. 뒷면에는 위체료 및 기타 요금에 관한 사항이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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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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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8 卷之二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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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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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송사천광엽에게 보냄 을축년(1925) 與宋士千光燁 乙丑 옛사람은 "저 사람이 나를 한번 스승으로 삼으면, 그 평생의 성패와 영욕을 모두 내가 책임진다"28)고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스승이 제자를 이와 같이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식을 남에게 맡긴 경우에도 그 평생의 성패와 영욕을 역시 마땅히 그 자식으로 하여금 스승과 함께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님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지난번에 형님의 아들이 저를 완산(完山)에서 만났을 때, 어린 나이에 먼 길을 오느라 병을 앓은 나머지 감기까지 걸렸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형님은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아들이 홀로 떠나게 맡겨두고는 "스승에게 달려가는 것은 어려운 의리이고,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러한 아버지에 그러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형님의 부자가 이와 같이 후하게 성패와 영욕을 나와 함께 하였으니, 내가 원래 성패와 영욕을 형의 아들과 같이 하려던 마음을 어찌 감히 더욱 힘쓰지 않겠습니까? 이에 저의 마음을 열어 보여드리니 살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昔人云: "彼一師我, 其平生成敗榮辱, 俱我任之." 余謂: "非但師之視弟如此, 託子於人者, 其平生成敗榮辱, 亦當令其子共之." 若兄者 可謂其人也.向日令子見余完山也, 穉齡遠程, 病餘觸寒. 人不堪其憂, 兄乃少不動念, 任其隻行曰: "赴師難義也, 死生有命." 乃知有是父有是子也. 既荷兄家父子之同我成敗榮辱, 若是其厚, 則我之元來同令子成敗榮辱之心, 尢豈敢不勉乎? 茲以披赤, 幸照亮. 옛사람은……책임진다 이 구절은 김택술이 《간재집(艮齋集)前篇》 권4 〈시김동훈(示金東勳)〉에 나와 있는 글을 보고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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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중에게 답합 정해년(1947) 答金箕重 ○丁亥 편지에서 언급한 계유년에 의리를 처결한 것은 평소 함양한 것이 바르다는 점으로 보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고, 자결할 때 지은 모든 문장이 또 모두 굳세고 빛나며 슬프고 씩씩하니 백세의 지사들을 경계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무후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 역시 "청강(晴岡, 金晁)이 자결했을 때 지은 모든 문장을 읽고 호연지기를 떨치지 않는 자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라 하겠습니다. 示及癸酉處義, 以平日所養之正, 宜其如此, 而自訣諸作, 又皆毅烈悲壯, 可以警發百世志士. 昔人云: "讀武侯出師表而不下淚者, 無人心也." 吾亦曰: "讀晴岡自訣諸作, 而不奮浩氣者, 無人心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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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졸설 【1939년】 百拙說 【己卯】 마음은 두 갈래로 쓸 수 없고, 재능은 겸하여 이룰 수 없다. 이 때문에 세상 물정에 능숙한 자는 마음공부에 졸렬하고, 이익을 꾀하는데 능숙한 자는 이(理)를 밝히는데 졸렬하다. 세상의 권세와 이익은 백 가지 일 뿐만이 아니고 내 심신의 이치는 다만 하나인데, 돌아보면 사람들은 모두 많은 것에 능숙하고 적은 것에 졸렬하니 또한 이상하다.그러나 오직 최군 여중(汝重)136)은 그렇지 않고 백 가지에 졸렬하고 한 가지에 능숙하려고 하여,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곳을 '백졸(百拙)'로 편액(扁額)하였으니, 마음을 쓰는 것과 재능을 이루는 것에 대해 경중(輕重)해야 할 것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게다가 백 가지에 졸렬한 자는 비록 당장에는 부족할지라도 합산하면 항상 여유가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한 가지에 능숙한 재능이 있으면 간결함으로 번다함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백졸은 거의 여기에 가까우니, 나는 백졸이 졸렬하지 않음을 알겠다. 心不可兩用, 才不能兼成. 是故巧於世情者, 拙於心功, 巧於謀利者 拙於明理. 世間勢利不啻百途, 吾身心理只是一途, 顧人皆巧其多, 而拙其少亦可異也. 惟崔君汝重則不然, 欲其拙於百而巧於一, 扁其居以百拙, 其於用心成才, 可謂知所輕重矣. 且夫拙於百者, 雖不足於目前, 而統算則常裕如, 何也? 有一巧之能, 以簡制煩爾. 今百拙庶幾於斯, 吾知其百拙不拙. 여중(汝重) 최태일(崔泰鎰, 1899~?)의 자이다. 호는 백졸(百拙), 본관은 전주이고, 간재 전우의 제자이다. 저서에 《백졸사고(百拙私稿)》 5권 3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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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죽(筇竹)의 명207) 【경오년(1930)】 笻銘 【庚午】 계찰(季札)은 주나라를 가 보았고208) 季札適周,진량(陳良)은 북쪽에 가 배웠는데,209) 陳良學北,너는 금강산을 유람하며 爾到金剛,기암절벽을 모두 밟았지. 歷盡奇絶.산지의 드문 특산품이라서만 豈獨本産,귀한 물건이라 일컬음 아니고, 乃稱物貴,공효는 천리 여로에 보이고 功在千里,광채가 아홉 마디에 더해가며, 光增九節,흙 속 등걸을 펴고 구부려 矯揉土藤,기념의 글자 지져 새겼으니, 紀念之烙.누구일까 이 물건 얻은 이는 誰歟得此,새록새록 마음에 들어 기뻐하니, 沾沾自悅,아끼는 건 너의 천연의 모습이니 愛爾天形,겉 이름은 없는데 꽉 찬 속 알맹이. 無名有實. 季札適周, 陳良學北, 爾到金剛, 歷盡奇絶, 豈獨本産, 乃稱物貴, 功在千里, 光增九節, 矯揉土藤, 紀念之烙, 誰歟得此, 沾沾自悅, 愛爾天形, 無名有實。 공죽(筇竹)의 명 공죽장(筇竹杖) 즉, 공죽으로 만든 지팡이를 노래한 명문이다. 공죽은 남쪽 지방의 대나무의 일종인데, 마디가 높고 속이 꽉 차서 지팡이를 만드는 좋은 재료로 사용되었다. 계찰……가 보고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공자(公子) 계찰(季札)이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周)나라의 예악을 참관하였다.《春秋左傳.襄公29》 진량……배웠지 《맹자》 〈등문공(滕文公)〉편에, 남방인 초나라의 진량(陳良)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배우러 북쪽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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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문 흥술의 자사 【무진년(1928)】 金士聞【興述】字辭 【戊辰】 백대에 우뚝히 서 계신 이, 성현이 아니던가? 군자의 덕의 풍화, 그러하지 않던가? 그 풍화를 듣고 일어나는 자, 선비가 아니던가? 사문(士聞)으로 자를 삼아 족제 김흥술(金興述)의 덕을 드러내는 것 또한 이런 까닭이 아니겠는가? 사문은 두 귀를 기울이되 다른 소리는 듣지말고, 오직 수사(洙泗)293)와 낙민(洛閩)294)의 풍화만을 쫑긋하여 듣고 기쁘게 받아들여서, 그 즐거움에 취하여 깨어나지 마시기를 나는 바라노라. 어쩌다 우렁찬 광풍이 귀밑에 닿아서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고 밝게 들을 것을 어기어 어두운 허물을 지을 것이 나는 아직 걱정되누나. 들으시라, 듣기에 힘쓰시라! 奮乎百世之上者, 非聖賢乎? 君子之德風, 不其然乎? 聞其風而興者, 非士乎? 士聞之爲族弟興述表德者, 其以此乎? 吾願士聞兩耳側時無他聲, 但有風自洙泗洛閩來者, 聳然而聽, 翕然而受, 怡然醉而勿醒。 還恐狂風之一到耳根轟轟, 聞不當聞, 而違思聰而咎不明也。 聞乎, 其勉哉! 수사(洙泗) 중국 산동성(山東省)을 흐르는 두 강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이름인데, 이곳에서 공자와 맹자가 일으킨 유학을 가리켜 쓰인다. 낙민(洛閩) 북송시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와 남송시대 민(閩 : 福建省)의 주희(朱熹)가 일으킨 성리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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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16년 안산 소재 산소 사초비용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丙辰十月二十七日 丙辰十月二十七日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6년 10월 27일에 안산 소재 산소 위아래의 묘소 사초에 대한 비용 분배 내역을 기록한 장부 1916년 10월 27일에 안산 소재 산소 위아래의 묘소 사초에 대한 비용 분배 내역을 기록한 장부이다. 사초 역정(役丁)의 고가(雇價)와 제수(祭需), 행원자비(行員資費), 위답 증명비, 행원 유연비(留連費) 등 도합 250냥에 대한 세목이 기록되고, 행원의 이름이 있다. 그 다음에는 가천과 석동 등 각지에 사는 종원의 명단이 기재되고, 1인당 분배액수와 수전유사(收錢有司)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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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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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사성훈에게 보냄 경신년(1920) 與田思誠壎○ 庚申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의 취지서(趣旨書) 중에 제 이름이 기재된 것은 좌하의 엄호로부터 나왔다 합니다. 저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은 이미 이 일에 대해 영향을 줄만 하지 않으니, 좌하가 사람을 잘못 추천하여 공의에 누를 끼친 것은 진실로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여러 사람이 당사자를 승낙하지 않았는데, 그 이름을 억지로 기재해 넣은 것은 아마도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저는 궁핍하게 살면서 농사일을 하여 골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어떻게 멀리 여러 사람들의 뒤를 좇아서 미력한 힘을 바치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형세상 미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 이름만 넣고 그 일을 친히 하지 않더라도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면 명실이 부합하지 않으니 저는 부끄러운 짓이라 생각합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좌하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고하여 그 단체의 문서를 발간할 때 제 이름을 삭제하여 천한 사람의 분수를 편안히 해주십시오. 그것이 시종 저를 사랑하는 은혜일 것입니다. 人道公議趣旨書中, 賤名見錄出, 自座下所保云. 鄙之無似, 既不足爲輕重於此事, 則座下之謬薦人而累公議, 固失藻鑑之明, 諸公之不承諾於當人, 而冒錄其名, 恐亦未爲妥當. 且澤述竆居服田, 滾汩自遣, 何能遠追諸公之後, 庸效微力? 此又勢所不及也. 如曰存其名而不親其務, 亦無傷云爾, 則名實之不副, 竊有恥焉. 切乞座下爲告諸公, 凡干社中文字, 刪出賤名, 以安賤分, 始終相愛之惠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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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소 서장병갑에게 답함 계해년(1923) 7월 答近小徐丈柄甲 ○癸亥七月 이전에 받은 편지에서 최병심(崔秉心)의 비문(碑文)94)에 대해 악을 편든다고 의심하셨는데, 일이 사실과 어긋나니, 군자가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됨95)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계화도에서 뵙고 대략 의리와 사실을 들어 아뢰었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쯤은 이미 훤히 알아 마치 구름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보는 것 같겠지요? 아니면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중에 있으십니까? 제가 어른에 대해 비록 노소(老少)의 다름은 있으나 삼가 도의로써 서로 기대하고자 합니다. 이제 심술(心術)과 크게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 어찌 서로를 알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우러러 받들어 질정하니, 대략 더불어 설파해 주셔서 답답함을 풀어주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前承下狀, 疑以黨惡於崔碑.事涉爽實, 不免'君子一言之不知.' 故頃於華拜, 略擧義理事實, 以稟白矣.未審今已快悟, 若披雲覩青? 抑尙在信疑之間耶? 澤述於丈, 雖有老少之異, 竊欲以道義相期.今於心術大關, 豈容不相悉之至此乎? 茲以仰質, 略與下破, 開鬱至望. 최병심(崔秉心)의 비문(碑文) 최병심이 간재를 대신하여 지은 〈율헌최공신도비문(栗軒崔公神道碑文)〉을 말한다. 율헌은 최병심의 선조 최득지(崔得之, 1379~1455)의 호이다. 오진영이 이 비문에 대해 〈편질동문제공(徧質同門諸公)〉에서 신도비문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라의 법도를 어겼고 식자들의 시비를 범했다."라고 비난하여 양측의 갈등이 심해졌다. 군자가……됨 이 말은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나온다.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되기도 하니,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君子一言以為知, 一言以為不知, 言不可不愼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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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기 【갑술년(1934)】 惺軒記 【甲戌】 고요한 가운데 어둡지 않은 것을 성(惺)이라 일컬으니 별이 밤에 밝게 빛나기 때문에 별 성(星) 자를 따른 것이다. 불가에서는 "주인공아 깨어있는가?"82)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개 유가와 불가는 비록 다르지만 모두 고요함의 공력이 있다. 그러므로 주자는 "그 도가 되는 까닭은 다르지만, 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깨어있게 하는 것은 똑같다."83)고 말했다. 율곡옹이 학문에 대해 논의한 데 이르러서도 '성성이란 어둡고 혼미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을 계승했다. 이에 '성성(惺惺)'이란 두 글자는 유학에서 하나의 대관(大關)이니 이에는 다른 말이 없다.지금 성헌(惺軒) 김공은 아침저녁으로 이를 염두에 두고 사는 곳에 편액으로 써서 걸어두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는 공부하는 데에 매우 절실했던 것이다. 그 절도와 기상은 선배들이 논했던 '가볍게 비춰 살펴보며84) 밝은 빛이 사방을 꿰뚫는다.'는 부류이니, 응당 애써 공부하고 체험한 바가 있었을 터임은 내가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내가 듣건대, 고요하면서 지각이 어둡지 않으면 움직이면서 품절(品節)이 어긋나지 않는다 한다. 대개 품절이 어긋나고 맞는 것은 일념의 기미 사이에 있어서, 사람이 미리 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고, 반드시 몸을 움직이고 일에 시행한 연후에야 어긋남과 맞음이 모두 다 드러나게 된다. 공은 유현(儒賢)의 가문에서 배우고 임천(林泉) 사이에 숨어 살았다. 평소의 행동에 의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적었으니 고요함의 공력을 바탕으로 지녀 거처에 걸린 편액의 의미에 능히 부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듣건대, 공은 배우면서는 항상 못 미칠 것을 걱정하고 덕은 만년에 더욱 높았다고 한다. 공의 지향으로 보면, 마땅히 자신이 능한 바에 안주하지 않고 그 이르지 못한 바를 늘리지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고요함이 성성하여 지극한 중(中)에 이르고, 움직임이 절도에 맞아 지극한 조화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 사고의 직분을 모두 갖추고 평소에 바라던 바를 이루었던 것이다.아! 위나라 무공(武公)은 나이가 많아서도 경계의 시 〈억(抑)〉편을 듣고,85) 공자는 성인이었지만 《주역》 공부 마치기를 소원으로 가졌다.86) 공은 연로하여서도 현철하니 아직도 더 애써 보실 만하다. 靜中不昧之謂惺, 星夜明, 故從星。 佛家言: 主人翁惺惺否? 敬是常惺。 惺法, 上蔡亦有語。 蓋儒佛雖殊, 俱有靜功。 故朱子曰: 其所以爲道則異, 所以喚醒此心則同。 至於栗翁論學, 則繼之以惺惺無昏昧之說。 於是乎惺惺二字爲儒學一大關, 而無異辭焉。 若今惺軒金公之日夕念玆, 至揭以扁居, 則其亦切於爲學者歟! 其節度氣象, 前輩所論輕輕照顧、炯炯四徹之類, 自應有用功體驗者矣, 吾不贅焉。 但竊聞靜而知覺不昧, 則動而品節不差. 蓋品節差中, 已在一念幾微之間, 而有非人之得以盡知者, 必待動之以身, 行之於事, 然後差中畢見。 公學於儒賢之門, 隱居林泉之間, 生平行動鮮不由義, 足以見靜功有素, 而能副扁居者。 但又竊聞學常恐其不及, 德彌高於晩節。 以公之志, 宜不安於己能, 而不增其未至也。 必也靜不昧, 而至於致中, 動中節而至於致和, 然後盡顧思之分職, 而酬平日之願念矣。 噫! 衛武之耄焉, 而進抑戒之詩, 孔子之聖焉, 而有卒易之願。 公雖老且賢尙可以加勉。 주인공아 깨어있는가 주자는 〈경재잠(敬齋箴)〉을 설명하면서 "서암화상(瑞巖和尙)은 날마다 '주인공아 성성(惺惺)히 깨어 있는가?[主人翁惺惺否]'하고 묻고 또 스스로 '성성하다[惺惺]'라고 대답한다."고 하고,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못한다."고 하였다. 그 도가……똑같다 주자가 서암화상의 일을 언급했을 때 누군가 질문하자 대답한 말을 채용하였다. [或問: 佛氏亦有此語.曰: 其喚此心則同, 其爲道則異.吾儒喚惺此心, 欲他照管許多道理.佛氏則空喚惺在此, 無所作爲, 異處在此。] 가볍게……살펴보며 이이가 성을 논하면서 "미발할 때의 기상을 가볍게 살펴보면 학문에 나아가고 마음을 기르는데 유익하다.[輕輕照顧未發時氣象, 則於進學養心,必有益。]"고 하였다.《聖學輯要》〈修己第二中〉 위 나라……듣고 춘추 시대 위 무공(衛武公)이 80이 넘은 나이에 자신을 경계하는 내용의 시 《시경》〈억(抑)〉편을 짓고 신하들을 시켜 날마다 곁에서 낭송하게 하였다 한다. 《국어》〈초어(楚語)〉 공자……가졌다 공자가 말년에 "내가 몇 년을 더 살아서 마침내 《주역》을 배운다면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고 했다. 《논어》〈술이(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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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재기 【갑술년(1934)】 一松齋記 【甲戌】 마음 하나에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는데 서민(庶民)은 어둡고, 오직 군자만이 알아서, 그것을 따라 덕을 이룬다. 다른 물건에 견주어보면 그 이치가 서로 비슷한 것이 있는데, 내가 비유해 볼 수 있다.당초에 방환정(房煥正) 공87)은 한 그루 반송이 큰 서까래와 작은 문설주 등의 재목감을 다 갖추었음을 보고, 그것을 가져다 은거하는 곳에 세 칸 집을 지었는데, 다른 나무는 쓰지 않았다. 심지어 죽은 후에 쓸 관의 널빤지에도 그것을 썼다. 이것은 군자가 덕을 이루는 것과 비슷하니, 한 마음 안에 효제(孝悌)ㆍ충신(忠信)과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 등이 모두 갖추어진 도리를 따른 것이며, 마음 밖의 다른 것을 빌리지 않았던 것이다.지금 용성(龍城)의 영촌(嶺村)에 있는 일송재(一松齋)가 바로 그 때 지은 것이다. 내가 일찍이 한번 그 집에 이르렀는데 공의 아들 동규가 나에게 그 일을 말해주며 기문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인(仁)을 잘 행하는 자는 외물로 인하여 자신을 살피고, 사람을 잘 보는 이는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을 안다. 듣건대 공은 집안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조행이 있어 종족과 향당의 법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일찍부터 공으로 하여금 성찰과 격물치지로 인을 행하는 공부에 힘쓰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공이 한 마음을 따라 온전한 덕을 이루어 낸 것이 마치 소나무 하나로 온 집을 지은 것과도 같음을 알겠다. 만약 자손들이 공의 집 짓기에서 깨우침을 얻어 덕을 이루고 선조를 빛나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곧 방씨의 일송재가 장차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이에 기문을 쓴다. 一心而具衆理, 庶民昧焉, 惟君子知之, 循之以成德。 就物而譬之, 理有相類者, 吾得以喩之。 始房公煥正相一株盤松, 棟樑之大, 扂楔之細, 材悉備者, 取以作燕處三架屋, 而不用他木。 至於身後壽板, 亦取用於是。 其亦有似乎君子之成德, 循一心中孝弟忠信修齊治平悉具之理, 而不假乎外也。 今龍城嶺村之一松齋卽當日所構者, 余嘗一至其家, 公之子東圭爲余道其事而請記之。 余惟善爲仁者因物而省身, 善觀人者推小而知大。 聞公有正家惠物之行, 爲宗黨法, 早使公致力於省格爲仁之學, 吾知其能循一心成全德, 若相一松而作全屋也。 若子孫取譬於公之作室, 有以成德而光先人, 是則房氏之一松齋將有辭於天下後世矣。 是可以記之。 방환정(房煥正) 호는 면강(勉强)이며,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 영촌마을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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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재기 【갑술년(1934)】 蒙養齋記 【甲戌】 정종섭(鄭宗燮)군이 월악산 아래 재실을 지어 그 아버지가88) 늘그막에 기거할 곳으로 삼고서는 칠사(七舍)89)의 길을 달려와 내게 말하였다: "아버님께서 일찌기 스스로 호를 짓고 구산(臼山 田愚의 호) 어른께서 그것을 위한 설(說)을 지어주셨습니다. 그 호 몽양(蒙養)의 편액을 재실에 걸었는데, 아들인 저는 그것을 기록하고자 합니다."내가 말하기를 "구산 어른의 호설(號說)은 간략하지만 그 내용을 다 갖추었다. 그런데 무엇 하러 기문을 다시 쓰겠는가? 꼭 써야 한다면, 그 호설을 따라가 뜻을 부연하여 마치 경(經)에 전(傳)을 붙이듯 해보면 괜찮을까?대개 몽(蒙)이란 어리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양육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늙어서도 어린이를 자처하며 양육을 바라는 것은 왜인가? 주인장은 옛날의 현자도 소학 동자(小學童子)90)를 자칭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아! 늙은이도 여전히 양육을 바라는데 하물며 혼몽한 어린이에 있어서랴. 이는 실로 스스로를 길러서 혼몽한 선비를 기르고자 함이니 그 뜻이 원대하구나!《주역》의 전에 이르기를, 어릴 때 바름으로써 기르는 것이 성인이 되는 공부91)라고하였다. 어린이가 성인(聖人)이 되고자 한다면 기르지 않을 수 없고, 기르는 것도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름이란 무엇인가? 성리(性理)를 하늘에서 받아 마음에 갖춘 것,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다 마음이 있고 성(性)을 지녔으니, 이 마음으로써 이 성을 배우면 그 바름을 잃지 않음이 마땅하다. 그러나 세상 사람 중에 어리석어 밝지 못한 이들이 많으니, 왜 그런가?구하면서 합당한 정성[誠]이 없고 배우면서 제 방도를 쓰지 않으면, 마음의 지각이 성명(性命)의 이치에 통달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전해주는데 두번째 하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전해주지 않는다.92) 비록 점 치는 사람들의 말이지만 학자가 도(道)를 구함에 있어서도 미루어 생각해 볼만하다. 만약 지극한 정성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실히 생각하고 명료하게 강구하며 이른바 그 바름[正]을 구한다면, 마음의 영대(靈臺)가 본래 갖춘 그것에 신묘하게 통달하여 서둘지 않아도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이다.93) 이 어찌 시초(蓍草)로 점괘 뽑고 신명(神明)께 물어 응답을 얻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은가?이는 곧 양정(養正)의 공부에 노소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니, 구산 어른의 남은 논의를 보충하기에 족할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 아버님께 인사드리고 아뢰어서, 괜찮겠다 하시거든 이것을 몽양재(蒙養齋)의 기문으로 걸어두소. 鄭君宗燮築齋月岳山下, 爲其大人晩暮燕居所。 走七舍, 謂余曰: 大人用曾所自號, 臼山翁爲之說者, 扁齋以蒙養, 子其記之。 余曰: 臼翁說畧而盡矣, 記復何爲? 無已則就其說, 衍其義, 若經之有傳, 可乎? 蓋蒙者, 穉也。 穉之待養, 固也。 老而處蒙, 而欲其養, 何哉? 以古之賢者, 猶稱以小學童子, 主人翁已言之矣。 噫! 老而猶欲其養, 況穉蒙乎? 此實自養而養蒙士者, 其意遠哉! 在易之彖曰: 蒙以養正, 聖功也。 蒙而欲作聖, 不可以不養, 養之又不可以不正。 正者何? 性理之受乎天而具於心者, 是已。 人皆有心有性, 以此心學此性, 宜不失其正。 而世之人多蒙然不明者, 何? 求之不以其誠, 學之不以其方, 心之知覺不能通乎性命之理也。 初告再瀆, 瀆則不告, 雖爲筮者言, 學者之於道, 亦可以反隅矣。 若至誠一意, 愼思明講, 以求所謂正者, 以心之靈通乎所固具者也, 不疾而速。 豈不若揲蓍掛策, 叩神明而得其應哉? 此乃養正之功無間老少, 而足以補臼翁餘論者。 君其歸告於唱喏之際, 如蒙謂然, 請揭此爲蒙養齋記。 아버지 정태환(鄭泰桓)을 말한다. 1865~1937, 본관은 진양, 자는 용구(用九), 호는 몽양(蒙養)이며 함평군 월야에서 태어났다. 전우의 제자이다. 칠사(七舍) 210리로 82.5KM정도의 거리이다. 일사(一舍)는 대개 30리를 말하는데, 옛날 군대가 하루동안 갔던 거리가 이 정도였다고 한다. 《蒙養齋遺稿》 서문에 '몽양 정공이 함평의 월악에 은거했다.[蒙養鄭公隱居咸平之月岳。]'는 내용을 보아, 몽양재가 있는 월악산 아래란 함평 월야면 월악리이다. 함평에서 김택술이 있던 정읍까지의 거리이다. 몽양재는 鄭泰桓(1865-1937)을 말한다. 소학 동자(小學童子) 김굉필(金宏弼)은 평생 동안 《소학》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소학 동자'라고 하였다. 어릴 때……공부 《주역》몽괘(蒙卦)의 단사(彖辭)에 "어릴 때 바름을 기름은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고 하였다. 처음에는……전해주지 않는다 몽괘(蒙卦)의 괘사(卦辭)에 "처음 점친 바는 말해준다. 두번 세번 하면 혼잡해진다. 혼잡하면 말해주지 않는다.[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는 말이 있다. '독(瀆)'은 '濫, 褻, 混雜' 등으로 풀이된다. 신묘하게……것이다 《주역》〈계사전(繫辭傳)〉에 "신묘한 까닭에 서둘지 않아도 신속하고 행하지 않아도 이른다.[唯神也故, 不疾而速, 不行而至。]"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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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당기 孝堂記 효당(孝堂)이란 무엇인가? 효자의 집이다. 효자는 누구인가? 밀양 박씨이고 이름은 종순(宗淳)이며 자는 군화(君和)라는 사람이다. 이름과 자(字)로 말하지 않고 호로 부르는 것은 옛날부터 근거가 있다.무릇 사람이 이름이 있는데도 자(字)를 붙이는 것은 그 이름을 삼가기 위함이다. 그 사람이 덕행이 있어 현저하면 그 자도 아울러 삼가기 위해, 혹은 그 덕행을 일컫고 혹은 사는 마을로 부르기도 한다. 도잠(陶潛)94)의 정절(靖節), 왕통(王通)95)의 문중자(文中子), 주돈이(周敦頤)96)의 염계(濂溪), 정호(程顥)97)의 명도(明道), 정이(程頤)98)의 이천(伊川), 주인궤(朱仁軌)의 효우(孝友)99), 주희(朱熹)의 회암(晦庵)100), 방효유(方孝孺)의101) 정학(正學) 등이 이것이다.지금 박공의 덕을 칭하면서 그가 사는 당실(堂室)에 대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는 어찌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일없는 바를 행하는 것이102) 아니겠는가! 이는 실로 이른바 상의하지 않고 저절로 일치한 것이니, '아이들도 군실(君實)을 말한'103) 것이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아버지가 당(堂)을 지으려 준비하자 그 아들이 그것을 받들어 당을 지은 것이다. 박씨의 선대는 충효로 저명한데, 공이 그것을 계승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당실을 지은 것104)이다. 이제 공의 후예들이 증수(增修)하고 단청(丹靑)하면 이 효당(孝堂)이라는 이름을 대대로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계사년 삼월 하순에 부안 사람 김택술이 효당(孝堂)의 기문을 지어 공의 현손인 운서(雲瑞)에게 고하며 격려한다. 孝堂者, 何? 孝子之堂也。 孝子, 誰? 密陽朴公諱宗淳, 字君和其人也。 不名不字, 而稱號而呼其人, 古有據乎! 曰: 有夫人名而字之, 所以欽其名也。 如其人有德行表著, 幷欽其字, 或稱其德行, 或稱所居之里。 如陶元亮之靖節, 王通之文中子, 周茂叔之濂溪, 程伯子之明道, 程叔子之伊川, 朱仁軌之孝友, 朱元晦之晦菴, 方孝儒之正學, 是也。 今於朴公之稱德於所居, 室堂而呼之也, 豈不爲名正言順, 而行其所無事乎? 此所謂不謀而同, 兒童誦君實也。 抑余竊念若考作堂, 厥子肯堂。 朴氏之先世著忠孝, 公旣繼作室而肯堂矣。 若公後昆增修而丹雘之, 則孝堂之號雖世呼之, 未爲不可云爾。 癸巳窉月下旬, 扶安金澤述作孝堂記, 以告公之玄孫雲瑞而勖之。 도잠(陶潛) 진(晉)나라 때 사람으로, 자가 원량(元亮)과 연명(淵明)이고 오류(五柳)선생 및 정절(靖節)선생으로 부른다. 팽택령(彭澤令)을 하다가,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시골뜨기에게 허리를 굽힐까보냐!" 하며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했다. 왕통(王通) 수나라 때 학자로, 자신의 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들이 '문중자(文仲子)'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 주돈이(周敦頤) 송나라 때 학자로,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애련설(愛蓮說)〉로 유명한 성리학의 비조이자 문학가이다. 정호(程顥) 송나라 때 학자로,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이다. 동생 정이(程頤)와 함께 주돈이의 제자이며, 낙학(洛學)으로 불리는 북송 이학(理學)의 기초를 놓았다. 정이(程頤) 송나라 때 학자 정호의 아우로서, 자는 정숙(正叔)이고 이천(伊川)선생으로도 부른다. 주인궤(朱仁軌) 당(唐)나라 때 학자로, 자는 덕용(德容)이며, 효우(孝友)선생으로도 부른다. 주희(朱熹) 송나라 때 학자로, 자는 원회(元晦)ㆍ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방효유(方孝孺) 명나라 때 학자로, 자는 희직(希直)ㆍ희고(希古), 호는 손지(遜志)이며, 한중부(漢中府) 학교 '정학(正學)'의 교수를 하여 정학선생이라 불린다. 일없는 바를 행하는 것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우 임금이 물을 흘러가게 한 것은 그 무사한 바를 행하심이니, 만약 지혜로운 이가 또한 그 무사한 바를 행하면 그 지가 또한 크다 하겠다.[禹之行水也, 行其所無事也, 如智者亦行其所無事, 則智亦大矣。]"라는 말이 있다. 곧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치대로 행하기 때문에 마치 일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아이들도……말한 박공의 인덕을 아이들도 알았다는 말이다. 군실(君實)은 송나라 때 학자 사마광의 자(字)이다. 소식(蘇軾)이 사마광에 관해 쓴 시에서 "아동들도 군실을 말하고, 하인들도 사마를 아네.[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司馬溫公獨樂園〉]" 라고 하였다. 아버지의……지은 것 《서경(書經)》〈대고(大誥)〉편에 "그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방법을 갖추어 놓았는데, 그 아들이 집터[堂]를 돋우려 하지 않으면, 어떻게 집을 세울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이것을 '作室而肯堂'이라고 압축하여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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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음행기 【신사년(1941)】 安陰行記 【辛巳】 안음은 안의(安義)의 옛 이름이고 지금은 함양군에 속해 있다. 옛날, 아버님 벽봉(碧峯)공께서는 품은 마음이 맑고 너르셨는데 늘 말씀하시기를, "뜻이 맞는 두 서너 사람과 함께 좋은 산수를 유람하는데, 종이 두루마리[詩軸]를 만들어 인부의 품에 가득 안기고 아울러 붓ㆍ먹ㆍ벼루를 동자 등에 지워서, 아름다운 절경 만나면 곧 소회를 펼친 시를 지어 번갈아 수창(酬唱)한다. 그러면서 집에 돌아갈 줄을 잊는다면 그 어찌 즐겁지 않으랴!"고 하셨다.또 이어 말씀하시길, "안의현의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105)은 물과 돌이 남쪽 지방 가운데 가장 이름이 나서, 명현(名賢)과 달사(達士)들이 발걸음을 머무르고, 시인과 가객들이 완상하는 곳이라 한다. 이곳을 참으로 유람해보고 싶은데 미처 하지 못하였다."고 하셨다.아아! 선군계서는 평생 멀리 떠나는 것을 경계하시다가 중년에 수명을 다하시어,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어찌 그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님의 백 가지 중 하나도 못 닮았지만, 유독 산수를 좋아하는 것에는 약간 닮은 점이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비록 빈 겨를이 생겨도 어찌 차마 기뻐하며 선군께서는 미처 못 하셨던 것을 하며 즐기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이 어찌 선비들이 유람하고 구경할 시절인가? 그래서 가는 길이 경유하고 친구들이 요구하여 그럴 기회가 있어도 하지 못 한 것이 여러 번이다.그런데 생각해보니 사람들의 집안에서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시대의 형세가 꼭 다 같지는 않다. 그러면 의리와 관계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 형세에 따라 하는 것이 아마도 죄가 되기까지는 않을 것이다. 또 오늘날 산수는 어찌 다니며 구경만 하는 것인가? 이 또한 높은 봉우리나 깊은 골짜기에서 분기를 토하고 애달픔을 씻어내는 것에 불과하니, 마치 옛 사람이 말한 바의 동쪽 언덕에올라 휘파람 불고106), 황량한 언덕에서 통곡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돌려 금강산, 두류산, 변산, 서석산의 승경들을 모두 거쳐 구경하고 돌아왔는데, 특히 안음에서는 아버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 여러번 마음이 가 뒤돌아 보았다. 대방(帶方 남원)에 사는 족인 성헌(惺軒) 어른이 항상 내게 말하기를, "세 골짜기의 승경을 찾아가는 것은 소원은 아저씨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 골짜기107)란 화림동(花林洞)ㆍ심진동(尋眞洞)ㆍ원학동(園鶴洞)을 말하는데, 바로 위에서 말한 서상동과 북상동이다.작년 가을에 내가 성헌께 가서 앞서의 약속을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병이 난지 여러 삭이 되어 문 밖 출입을 못하셨다. 그래서 다만 길게 탄식하고 돌아왔다. 금년 사월 보름이 지나 남원의 산서(山西)에 갔다가 친구 사유 이한응(士裕李漢膺) 군을 방문했다. 이군은 나이 사십인데 수구(守舊)하였고 시문에 능하였다. 이야기가 세 계곡의 승경지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겨우 백여 리였다. 곧 두 사람의 뜻이 일치하여, 19일에 소매를 나란히 하고 길을 나서 준령을 세 개 넘고 내동(內洞)108)의 가곡(佳谷)에 가서 잤다. 20일에 준령을 두 개 넘어 추천(秋川)에 다다르니 곧 안의의 서상동으로 이른바 화림동이었다. 준령의 길이 험해 절뚝거리는 늙은 다리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터였지만 그래도 능히 버텨 넘긴 것은 종전에 유람을 원했던 마음으로 이겨낸 것이었는데, 스스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이 그 이른바 마음에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하는 것이었을까? 이틀간의 길에서 사유(士裕)와 시 몇 편을 창화(唱和)하였다.추천(秋川)이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족인 상집 김형돈(庠集金炯敦)을 찾아갔는데 마침 집에 없었으니 탄식한들 뭐하겠는가. 이 사람은 평소 의기가 있어 지난해에 의병 이석용(李錫庸)이109) 대구 감옥에서 죽자 빈한한 형편에도 가서 호상(護喪)하며 천리 길을 반장(返葬)110)해 오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었다. 그래서 영남과 호남의 사람과 선비들 모두가 찬탄하며 우러러보았다. 내가 오랫동안 그를 만나보기를 바랬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며, 족인으로서의 정의(情誼)뿐만은 아니었다. 이제 공교로운 엇갈림을 탄식하는 것은 이처럼 의로운 선비가 우리 종족 중에 있는데 생전에 한 번도 못 만날까 걱정해서였다. 이틀 밤을 재미없이 보내서가 아니었고, 완상(玩賞)을 이끌어줄 이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 아들 인철(璘喆)이 예의를 분명하게 차리고 접대함이 은근하여 또한 그 의방(義方)이 본래 온 데가 있음을 알수 있었다.다음 날 부근의 볼 만한 데로 이구평(尼丘坪)이라는 곳에 갔는데 세상에서 일컫기를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장래의 명당이라 하였다. 지대가 높고 평평하여 장유형(長乳形)111)을 이루면서 조금 기울어져 있다. 국세(局勢)는 빙 둘러 싼 환포형(環抱形)112)에 수구(水口)113)가 잠겨있고 안산(案山)이114) 정면에 마주하였는데, 다만 주룡(主龍 주산(主山)의 줄기)이 타고 오르지는 못하여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당국(當局)115)을 살펴보니 기상(氣像)이 썩 명랑하지 않으니, 내 생각에는 땅의 운세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하다. 사방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와서 새 터를 잡았다가 모두 패가하고 되돌아가서 빈 집과 무너진 가옥 몇 개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이 함께 세운 공자 사당 또한 퇴락하여 보존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22일 추천(秋川)을 출발하였다. 주인을 못 본 서운함에 시 한 수를 남겨 마음을 표현했다. 이로부터 남쪽으로 20리 가서 봉전리(鳳田里)에116) 이르렀는데 전씨의 거연정(居然亭)이117) 시냇물 속의 암석 위에 있어 마치 물 위에 배가 떠 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절벽 위에 숲이 무성하고 그늘이 넓고 짙어 당을 덮고 있었다. 돌 사이 푸른 못에서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앉아 있는 자리에 끼쳐오고 사면이 푸른 바위인데다 가벼운 안개가 옷을 적시니 싸늘해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현판에는 고산 임헌회(鼓山任憲晦)118)의 기문, 연재 송병선(淵齋宋秉璿)119)과 심석재 송병순(心石齋宋秉珣)120) 형제의 시가 있어 읽고 읊으며 그윽한 회포를 풀어내 보았다. 사문(斯文)도 상실되고 도(道)도 폐해지고 성세는 멀며 사람이 죽어 없어진121) 때를 당하여 선배들의 성명과 문자를 잠깐이라도 보니 또한 저절로 매우 기쁘고 마치 좋은 시절에 친히 가르침을 받는 듯했다.연재와 심석재 시에 대해 차운한 시 한 수를 썼다. 남쪽을 보니 한 걸음 쯤에 또 정자가 있어 가 보니 '군자'라는 편액122)을 써서 달았다. 금곡 송래희(錦谷宋來熙)의123) 시가 있고 또 전씨의 것도 있었다. 비록 거연정과 지척의 거리에 있지만 경치와 운치는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마치 풍수(風水)를 보는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습이 바뀐다는124) 것일까? 다시 남쪽으로 5리쯤 가 동호정(東湖亭)에125) 이르렀는데 또한 경치가 뛰어난 곳이고 장(章)씨가 지었다. 인철이 여기까지 전송와서 작별하고 돌아갔다. 서상동 구경은 여기서 끝난 것이다. 북상동 수승대(搜勝臺)의 기이한 절경이 세 계곡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인철에게 물어보니, 여기서 60리 정도의 거리라 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구경하지 않고 놓아두겠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거리가 조금 멀고 같이 온 이군이 오랫동안 머무르기 어려운 형편이었고, 또 이끌고 가 설명하며 흥취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근처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부득이 거기 가보기를 그만두었다. 아! 훗날 안문(雁門)의 불우함을126) 보상받을 그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구나.이로부터 동남쪽으로 나아가 안의의 옛 치소(治所)를 돌아보았는데, 광풍제월루(光風霽月樓)가 가히 볼 만했다. 생각해보니 이 곳은 한문장(韓文章)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燕巖朴趾源) 공이 목민관으로 있던 곳이다. 그래서 관청 건물이나 누정에 기문ㆍ제영 문자를 많이 걸었을 터이지만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격변 끝에 탈 없이 보전되지 못하였다. 지금은 그것을 찾아 볼 길이 없어, 다만 강산을 그리고 읊는 감흥으로 배회하며 바로 떠나가지 못 하였다. 다시 서남쪽으로 20리를 가서 덕곡리(德谷里)에 다다르니, 길 옆에 경수정(敬授亭)이 있는데 고려말의 충신인 덕곡 조승숙(德谷趙承肅) 공이 은거하면서 가르치던 곳이다. 그 종노릇 하지 않은 절개127)가 우리 할아버지 군사공(郡事公)128)과 하나임을 생각하여 오언절구 시를 지어 감상을 적었다. 개평(介坪)으로 건너가 정일두(鄭一蠹),129) 노옥계(盧玉溪)가130) 태어나 자란 곳을 물어 알아보고, 효리(孝里)로 가서 동문인 정재경(鄭在璟)131)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져서 여관에서 잤다.다음날 가서 정재경을 그의 새로 지은 거처 문산재(文山齋)에서 만났다. 문산재는 너럭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위쪽으로 작은 시내를 끼고 있고, 구조가 정채롭고 간결하였고, 기와를 덮었다. 몸을 깃들이고 마음을 기르기에 딱 좋은 장소여서 그 만년의 맑은 복을 축하해줄 만하였다. 그가 이끄는 대로 남계서원(灆溪書院)132)을 봉심하고, 강당에서 잠시 쉬고 나서, 다시 풍영루(風咏樓)에 올랐다. 두류산의 천 겹 봉우리와 큰 강의 외로운 배133) 같은 선생의 기상을 생각하며, 당시에 도를 아직 펼쳐보지도 못하고 먼저 사화의 그물망에 걸린 악운에 마음이 아파, 고개를 들었다 떨구며 목이 멜 듯하였다. 남계서원 옆에 청계사(淸溪祠)라는134) 사당이 보였는데 이는 탁영 김일손(濯纓金馹孫)의135) 영령을 모시기 위해 십 수년 전에 건립되었다 한다. 김일손은 평소 정여창을 따라 강론하였고 사화를 당하여 체포된 곳이다. 아! 저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 무리의 죄는 진실로 용납될 수 없으니, 그 때 점필재(佔畢齋 金宗直)가 어떤 글을 지은 것과 김일손이 그 글을 내보인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136) 사람을 시켜 곧바로 하늘에 물어보고 싶다. 남계를 떠나 함양읍에 도달하니 이미 정오였다. 고운 최치원의 숲[孤雲林]137) 안에 들어 더위를 피하니 이는 세상에서 함양 십 리 숲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서쪽으로 30리 가 길에서 족인 형원(炯元)을 만나 그 집에서 잤다. 집은 백전면 평리에 있는데 곧 상집(庠集)의 재종동생이다.다음날 봉현리(鳳峴里)에 이르러 여러 족인들을 방문했다. 여기 사는 족인이 20호 쯤이다. 전에 연재(淵齋) 문인이었던 낙상 김응문(洛相金應文), 낙종김윤중(洛鍾金允仲) 두 사람은 영남 우도의 망사(望士)인데 모두 이 마을에 산다. 지금 비록 그 명성을 이어가는 이가 없으나 또한 모두 능히 삼가고 지조를 지켜 옛 가문의 규범을 잃지 않았는데, 나를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술과 밥을 차려주는데 그 정이 가히 손에 잡힐 듯했다. 이리하여 봉현에 유숙하였다.25일, 준령을 두 개 넘어 장수(長水)의 노단리에 이르러 묵었다. 다음날 마치(馬峙)138)를 넘어 산서 마평에 이르르니 곧 사유 이한응(士裕李漢膺)이 사는 곳이다. 다음날 비가 와서 이한응의 종숙 서산 이풍호(瑞山李灃鎬) 어른을모시고 평온이 담화하고 함께 그 선인의 문집을 보며 보존할 것과 산삭(刪削)할 것을 상의하였다. 29일 마평을 떠나 5월 3일 집에 돌아왔다.이번 여행은 비록 세 골짜기를 두루 다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소원을 이루었고, 화림동을 간 일착도 안 한 것보다는 현명했다. 우리들을 위해 오늘 분기를 토하고 애상(哀傷)한 마음을 씻어내는 밑천으로 삼기에 족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다. 옛날 순임금이 요임금을 애모하여 어쩌다가는 담장 앞에서도 그 모습이 보이고, 국물 위에서도 그 모습이 비쳐 보였다고 하는데, 이 말은 사모함이 지극하면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는 것이다. 불효한 나는 늘 생각하기를,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못 해보셨는데, 나는 지금 이번 여행으로 아버님이 평생에 못 하신 것을 마침내 하고 있구나 하였다. 그러니 어떻게 아버님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산을 보고 물을 보았겠는가. 그런 즉 이 여행은 죄가 되는 데에 이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의 기운으로 감통(感通)하는 선군으로서는 흔연히 기뻐하고 좋아하셨을 지도 모른다. 나는 이리하여 특별히 선군을 생각하며 안음 여행기를 쓴다. 安陰, 安義古號, 今屬咸陽郡。 昔我先君碧峯公衿懷淸曠, 常曰: 與二三同志行遊好山水, 裁成軸紙, 盈一抱者, 幷中山之穎, 絳縣之玄, 端州之石, 載小奚背, 遇佳絶處, 輒賦詩暢懷, 迭相唱酬。 如是而忘歸, 豈不樂哉! 因又曰: 聞安義縣西上洞北上洞, 水石爲南中最, 名賢達士之所留跡, 騷人韻客之所翫賞, 是固所願遊而未能也。 嗚呼! 先君平生戒在遠遊, 壽止中身, 所願竟止於未能, 可勝痛哉! 竊念小子於先君百不一肖, 特於山水之好有畧同者, 然於孤露之後, 雖有暇及之勢, 豈忍自幸遂先君之所未能以爲樂? 矧乎今之日, 豈士子遊觀時哉! 以是道途所經, 知舊所要, 雖有其梯, 而未能焉者亦累矣。 但念人家父子所遭時勢未必皆同, 則除事關義理者外, 自當各隨其勢而爲之者, 恐不至爲罪。 且今日山水, 是遊觀也歟? 亦不過吐氣洩哀於高峯絶磵之際, 如古人所謂東皐舒嘯, 荒岡痛哭而已。 又以是回却前心, 如金剛、頭流、邊山、瑞石之勝旣皆歷覽而歸, 尤於安陰, 以先君有言, 每眷眷焉。 帶方族惺軒翁常謂余曰: 三洞探勝, 願與叔同焉。 三洞者, 花林洞、尋眞洞、園鶴洞, 卽上所謂西上洞、北上洞也。 昨年秋, 余至惺軒, 意其踐前約, 則病已數朔, 不能出門, 只自悵歎而歸矣。 今年四月望後, 過南原山西, 訪舊知李君士裕【漢膺】。 李今年四十, 守舊而能詩文者, 語及三洞之勝, 則此去僅百餘里。 遂兩意一致, 以十九日聯袂登程, 踰峻嶺三, 抵內洞佳谷而宿。 二十日, 踰峻嶺二, 抵秋川, 卽安義西上, 而所謂花林洞也。 嶺峻路險, 老脚蹣跚, 宜不堪其苦, 而猶能支過者, 以從前願遊之心勝, 而不自知也。 豈亦所謂心有所好樂, 則不得其正者耶? 兩日間, 道中與士裕有唱和幾篇。 至秋川者, 爲訪族人庠集【炯敦】, 而適不在家, 何歎如之? 斯人也, 素有義氣, 昔年義將李錫庸之沒大邱監獄也, 以貧寒之勢, 爲其護喪, 千里返葬, 間關盡瘁。 嶺湖人士莫不欽仰。 余久所願見者, 以此也。 非但爲族誼爾。 今歎巧違者, 以若此義士之在吾宗族者, 恐生前之無一面, 非爲信宿之無味, 況翫賞之無指導也! 其子璘喆, 禮數分明, 接待殷勤, 亦見其義方有所也。 翼日行尋近處可觀, 所謂尼丘坪, 世稱將來名基冠國中者也。 當處高平, 成長乳而少傾斜, 局勢環抱, 水口關鎖, 案山正對, 但主龍未及乘, 尋不知如何。 而察其當局, 氣像殊不明朗, 意者地運未回歟? 四方有力人來占新基者, 皆敗家還去, 但有空家破屋幾處, 衆所共建之夫子廟亦頹落而難保矣。 二十二日發秋川, 悵不見主人, 留詩一首以表情。 自是南行二十里, 至鳳田里, 有全氏居然亭者, 在川澗中巖石上, 宛若舟泛水上。 入其中, 則岸上茂林繁陰罨堂, 石間綠潭冷氣逼座, 四面蒼壁輕嵐濕衣, 凜乎其不可留也。 板上有鼓山任先生記, 宋淵齋心石兄弟詩, 且讀且咏, 發舒幽抱。 當此文喪道廢世遠人亡之日, 乍見先輩姓名文字, 亦自喜甚, 宛若親承謦欬, 於無恙日也。 有次淵心韻一首。 見南便一武許, 又有亭, 往觀則扁以君子, 而有宋錦谷【來熙】詩, 亦全氏有。 雖與居然亭同在咫尺, 景狀韻致十不及一。 所謂如看風水移步換形者亦此耶? 又南行五里, 至東湖亭, 亦勝處, 而章氏有也。 璘喆送至于此而別去。 蓋西上洞之觀則止於此矣。 曾聞北上洞搜勝臺之奇絶爲三洞之首, 而問於璘喆, 則此去爲六十里, 豈其欲舍之而不觀? 顧念距離稍遠, 同伴李君勢難久淹, 且無近處人指引說明助發興致者, 以故不免罷其行。 噫! 未知他日補鴈門之踦者, 有其梯歟? 自此東南行, 歷安義舊治, 有光風霽月樓可觀。 念此地乃有韓文章大家燕巖朴公【趾源】字牧處, 凡於官廨樓亭, 想多記題文字, 而滄桑之餘能保無恙否? 無由搜觀, 但興江山文藻之感, 而徊徨不遽去也。 西南行二十里, 至德谷里, 路傍有敬授亭, 麗末忠臣德谷趙公【承肅】隱居敎授處。 念其罔僕之節, 與吾祖郡事公一體, 作詩五絶, 以述感想。 過介坪, 詢知鄭一蠹、盧玉溪生長之跡, 欲前進孝里訪同門人學岡鄭乃薰【在璟】, 而迫昏宿旅舍。 翌日往見乃薰於新築文山齋。 齋臨盤石, 上夾以小澗, 結構精灑而覆以瓦, 正好棲身養心之所, 可賀其晩年淸福也。 已而聽乃薰指引, 奉審灆溪書院, 少憩于講堂, 又登風咏樓。 想先生頭流千疊、孤舟大江之氣像, 傷當日道未及行, 先罹禍網之惡運, 俯仰上下, 誠可於邑。 灆院之傍見有淸溪祠, 云是濯纓妥靈而十數年來所建者, 濯纓平日從一蠹講論, 而遭禍時逮捕處也。 噫! 彼光墩輩罪固不容, 而當日佔畢之作某文, 濯纓之布某文者, 誠何意也? 令人直欲作天問也。 離灆院抵咸陽邑, 已午天矣。 納凉于孤雲林中, 是世所稱咸陽十里林, 而孤雲手植者。 西行三十里, 道遇族人炯元, 宿于其家。 家在柏田面坪里者, 乃庠集再從弟也。 翌日至鳳峴里, 訪僉族人。 族人居此者, 可二十戶。 前者淵齋門人應文【洛相】、允仲【洛鍾】兩氏, 爲嶺右望士者, 皆出此里。 今雖無繼其風聲者, 亦皆能謹拙操守, 不失古家規模, 見余喜甚。 輪致酒飯, 其情可掬。 因留鳳峴。 二十五日, 踰峻嶺二, 至長水魯壇里宿。 翌日又踰馬峙, 至山西馬坪, 卽士裕所居。 翌日雨, 陪士裕從叔瑞山丈【灃鎬】穩談, 同看其先集, 商議存刪。 二十九日, 離馬坪, 以五月三日歸家。 是行也, 雖不能徧觀三洞, 畢償夙願, 花林一著猶賢乎已。 而爲吾輩, 今日吐氣洩哀之資則足矣。 且在余則又有異者, 昔舜之慕堯, 或見於墻, 或見於羹, 此言思慕之至, 無時而不如見也。 余之不孝, 其念先君雖不能如此, 然今於是行之遂先君平日所未能者也。 安得不思我先君, 或見於山, 或見於水也? 然則是行不惟不至爲罪, 其在一氣感通先君之靈, 安知其不亦欣然而喜幸也耶? 余於是特以先君之思作安陰行記。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 서상동은 안의현 서쪽 끝에, 북상동은 북쪽 끝에 있다. 동쪽 언덕……불고 도연명(陶淵明)이 쓴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고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물 굽어보며 시를 짓는다.[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는 실의ㆍ체념하며 소요하는 뜻으로 썼다. 세 골짜기 화림동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에 있는 계곡, 심진동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계곡으로 용추계곡이라고도 하며, 원학동은 수승대(搜勝臺) 계곡이라고도 한다. 이 셋을 합쳐 안의의 세 골짜기라고 한다. 내동(內洞) 남원군 남생면(南生面)이었다가 지금은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이며, 안골로도 부른다. 이석용(李錫庸) 1878-1914. 초명은 이갑술(李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전라북도 임실 출신으로서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숨어 살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혔다. 2년 여 동안 대구 감옥에 있다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제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지내는 일. 장유형(長乳形) 땅의 형세가 마치 여인의 젖이 길게 늘어진 모양을 이룬 것을 말한다. 환포형(環抱形) 물이 명당으로부터 멀리 우회하여 감싸 안은 형세를 말한다. 수구(水口)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멀리 돌아 흘러서 하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좋은 혈(穴)을 이루는 조건의 하나이다. 안산(案山) 무덤의 혈 앞에 마주보는 산. 여기서는 이구평과 마주 대하고 있는 산을 말한다. 당국(當局) 해당 국(局)의 형세를 말한다. 풍수에서의 국(局)은 혈(血 정기가 흐르는 곳)과 사(砂 혈 주위의 형세)를 합친 것이다. 봉전리(鳳田里)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를 말한다. 거연정(居然亭)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화림동계곡에 있다.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모옥으로 지어 강학하던 곳이었다. 임헌회의 〈거연정기문〉 송병선의 〈거연정중수기문〉 등이 있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성리학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전우(田愚)의 스승이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 본관은 은진,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대전시 회덕 출신으로,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병순의 형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행되고 국권이 강탈당하자 자결하였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며, 송병선의 아우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었고,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사문도……없어진 주자가 쓴 〈소학제사(小學題辭)〉에 '세대는 멀어지고 사람은 죽고 없다.(世遠人亡)'는 어구가 있다. 김택술이 살았던 때가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성대했던 때는 멀어졌고 인걸들이 없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군자라는 편액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화림계곡에 있는 군자정이다. 전세걸(全世杰)과 전세택(全世澤)이 정여창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에 지었다고 한다. 거연정과 1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송래희(宋來熙) 1791-1867. 자는 자칠(子七). 송준길 후손. 《한비자집해》 〈유도(有度)〉편에 '처음에 알고 있다가 발걸음을 이동하여 풍경이 바뀌니 방향을 알지 못한다.[在始未必不知, 移步換形, 遂不能見。]'는 말이 있다. 동호정(東湖亭)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있는 정자.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했다는 동호 장만리(東湖 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9대손인 장재헌 등이 주도하여 1890년 경에 지었다. 안문(雁門)의 불우함 한나라 때 단회종이 안문 태수(雁門太守)에서 면직되고 서역으로 부임하게 되자 친구인 곡영(谷永)이 '빨리 돌아온다면 안문에서 면직된 불우함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한서(漢書)》 권70 〈단회종전(段會宗傳)〉 종노릇……절개 멸망한 나라의 신하가 의리를 지켜 새로운 왕조나 나라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조를 의미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때 기자(箕子)는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我罔爲臣僕。]"고 했다. 《書經》〈微子〉 군사공(郡事公)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령(扶寧)이고, 평장사(平章事) 김구(金坵)의 현손이며,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를 하였다. 정일두(鄭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으로 귀양 갔고, 갑자사회 때 부관참시 당했으나, 중종 때 복권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노옥계(盧玉溪) 노진(盧禛, 1518~1578)으로,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이다. 정재경(鄭在璟) 1881~1948, 자는 내훈(乃薰), 호는 학강(學岡)이다. 전우의 제자이며, 문집으로 《학강유고》가 있다. 남계서원(灆溪書院) 함양군 수동면에 있으며, 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져 사액 서원이 되었다. 두류산……외로운 배 정여창의 유일하게 전해오는 다음 칠언절구의 말을 인용하였다. "냇버들 바람에 나부껴 가벼이 한들거리고, 사월의 화개동엔 벌써 보리 가을이구나. 두류산 천만 봉을 두루 다 유람하고, 외로운 배 다시 띄워 큰 강 모래톱으로 내려가네.[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洲。]" 청계사(淸溪祠) 원래 1495에 김일손이 유생을 가르친 청계정사의 터에 1921년에 세운 사당이다.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점필재……넣은 것 김일손이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스승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을 말한다. 고운림(孤雲林) 함양에 있는 숲으로, 신라의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이 심어 만든 것이라 하며, 천년숲으로도 부른다. 마치(馬峙)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마평(馬坪)에서 번암면 국포리로 넘어가는 길목의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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