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정기 【임진년(1952)】 棲巖亭記 【壬辰】 대저 오직 이름난 사람이 이름난 곳에 정자와 누각을 짓고 주인이 되어야만 비로소 이름난 정자와 이름난 누각이 된다. 그렇지 않고 범문정(范文正)이 주인이 되지 않으면 비록 악양루(岳陽樓)가 있다 하더라도 한갓 파릉(巴陵)의 아름다운 풍경일 뿐이고, 육일옹(六一翁)이 주관이 되지 않으면 비록 제정(滁亭 취옹정(醉翁亭))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여러 봉우리 가운데 숲이 우거진 골짜기일 뿐이다.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니, 오늘날이라고 해서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내가 나라 가운데 알고 있는 것으로 논하면 교남(嶠南 영남(嶺南)) 함안군(咸安郡) 의사(義士) 조공(曹公)의 서암정(棲巖亭)이 이것이다. 그 사람으로 말하면 연재(淵齋) 송문충 선생(宋文忠先生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으로, 충효와 지조, 절개가 있고, 학문과 도의(道義)를 이루었으니, 이름난 사람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지역으로 말하면 여항산(艅航山)79)이 그 신령함을 길러주고, 평암(平巖) 마을이 그 터전이 되었으며, 앞에 긴 시냇물이 흘러 산수의 경치가 아름답고 깨끗하며, 구름과 안개가 깊고 그윽하니, 명승지라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이름난 사람과 이름난 곳이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하니, 이름난 정자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손과 문인들이 공을 위해 이 정자를 짓고, 공이 이곳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공의 풍모를 들은 사람이 이곳에 올라 보고 즐기면서 이와 같이 공공연하게 칭송하고 찬미하는 것이 당연하다.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과 지역, 정자를 궁구하면 주객의 구분이 있다. 중니(仲尼 공자)는 참으로 따로 거처하는 장소가 없었고, 회옹(晦翁 주희(朱熹))은 비록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었지만, 그가 대현(大賢)이 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았으니, 지금 이 정자는 진실로 객 중의 객이고, 이요(二樂)의 관람과 동정(動靜)의 이치80)도 또한 참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실상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나는 이 정자에 거처하면서 선조의 일과 선사의 학문을 이어 받아 계승할 자손과 문인, 이 정자에 올라 공의 유풍을 느끼고 생각할 나라 사람과 후배들이 또한 먼저하고 나중에 할 바를 알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바로 성인 문하의 스승과 학생이 바로 철저하게 궁구해야 할 의론이니, 잘 살펴보는 자는 이 정자를 중시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夫惟名人作亭樓乎名區而主之, 乃爲名亭名樓, 不然而無范文正以主之, 雖有岳樓, 徒然巴陵之勝狀, 無六一翁以主之, 雖有滁亭, 只是諸峯之林壑.古來然矣, 今豈有異? 以余國中所知者論之, 嶠之南咸安郡義士曹公之棲巖亭是已.之人也, 以淵齋 宋文忠先生門人, 有忠孝志節, 成學問道義, 可不謂名人乎? 之地也, 艅航之山毓其靈, 平巖之里作其址, 前有長溪, 泉石芳潔, 雲霞幽深, 可不謂名區乎? 名人名區, 相得益章, 可不謂名亭乎? 宜乎子孫門人爲之卜築斯亭, 而公之藏修乎斯也.聞公之風者, 登臨觀賞, 而公誦贊美藉藉之若斯也.雖然, 人、地與亭, 究有賓主之分.仲尼固未聞別業之居, 晦翁雖有武夷精舍, 然其爲大賢, 不在此焉.今玆之亭固賓之賓也.二樂之觀、動靜之理, 亦非其眞, 乃其實有在焉.吾意其子孫門人之居斯亭而紹述、邦人後生之登斯亭而感想者, 宜亦知所先後也.然此乃聖門師生直窮到底之論, 則善觀者, 勿謂不重視斯亭也. 여항산(艅航山)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에 위치한 산이다. 이요(二樂)의 …… 이치 《논어》 〈옹야(雍也)〉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니, 지혜로운 사람은 활동적이고 인한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인한 사람은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 知者樂, 仁者壽.〕"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