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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오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姜良五 辛巳 초봄에 존형의 형제가 우리 고조의 성휘(姓諱)를 사실이 아닌데도 기록하여 존형의 선조의 문인이라 연원도에 써놓았기 때문에 만나기도 하고 편지도 보내어 여러 차례 힐난했습니다. 존형은 이미 우리 고조의 이름을 뺀 뒤에 발간하겠다는 말을 하였는데, 존형의 동생이 또 비용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어렵다 하기에 저는 또 심지어 고조의 이름을 지우는 것을 허락했으니, 의리로나 형세로나 마땅히 시일이 지체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믿고 다시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른 집에서 그 책을 보니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한 것이 여전히 옛날처럼 그대로 있었으니, 비로소 존형의 형제가 한 번도 개정할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 고조의 자손은 비록 매우 졸렬할지라도 또한 백여 명 이하는 아니니 어찌 차마 선조의 수치를 좌시하며 편안하게 일없이 지낼 수 있겠습니까? 아주 큰 불행이라 할 것입니다. 존형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엔 허위로 조상을 높이다가 신명에게 죄를 짓고, 마침내는 또 비용을 꺼리다가 죄를 면하지 못했으니, 어찌 매우 생각이 없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뒷마무리를 잘하여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할 책임은 오직 존형의 형제에게 있으니 빨리 도모하시기를 바랍니다. 春初以執事兄弟冒錄鄙高祖姓諱, 爲貴先祖門人於淵源圖, 以面以書, 累度相詰. 執事既有拔出改刊之言, 令弟又以費夥爲難, 則澤述又至有墨抹紙塗之許, 以義以勢, 宜不容時日稍緩, 故信此不復慮矣. 今見那冊於人家, 則其所冒錄依舊自在, 始知執事兄弟, 曾不以改正爲意也. 世上天下寧有是事? 鄙高祖子孫雖甚孱劣, 亦不下百餘人, 豈忍坐視祖先之羞辱, 而晏然無事乎? 其爲不幸大矣. 執事試思之, 始既以虛僞尊祖, 得罪於神明, 終又憚費而不免其罪, 豈非不思之甚者乎? 雖然, 善後歸正之責, 惟在於執事兄弟, 幸亟圖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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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 공부한 여러 제자들에게 고함 【1925년 12월 10일】 告從學諸子 【乙丑十二月十日】 성현(聖賢)의 학문은 대륜(大倫)과 대의(大義)을 다할 뿐이니, 책을 읽는 것은 이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군들이 따라 배운 사람은 나이고, 나의 스승은 간옹이니. 오늘날 나의 일은 간옹의 대의를 밝히고 스승과 제자의 대륜를 다하는 것이다. 군들은 내가 오늘 한 말을 잊지 말고 부지런히 힘쓰고 전전긍긍하여 혹시라도 대의와 대륜에 죄를 짓지 말라. 이것이 간옹의 가르침을 받들어 성현이 전한 것을 실추시키지 않는 것이다. 聖賢之學, 盡大倫大義而已, 讀書者, 所以明此也. 君輩之所從學, 吾也, 吾之師, 艮翁也. 今日吾事, 所以明艮翁之大義, 盡師生之大倫也. 君輩毋忘吾今日之言, 孜孜兢兢, 無或得罪於義倫也. 此所以奉承艮翁之敎而不墜聖賢之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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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오헌명 【경인년(1950)】 三梧軒銘 【庚寅】 전날의 삼괴당(三槐堂)이 昔三槐堂,지금은 삼오헌(三梧軒)이네. 今三梧軒,전날과 지금 둘 다 삼인데 今昔三三,그 담은 뜻은 서로 다르네. 所志各般,회나무 밑에서는 공경을 기다리고210) 槐期卿相,오동나무 심고서는 봉황을 기다리니, 梧待鳳鸞,공경은 고귀한데 卿相固貴,봉황은 현명하네 鳳鸞維賢.고귀한 벼슬아치는 사람으로 말미암고 仕貴由人,고귀한 양민은 하늘을 본받아서네. 良貴則天,오동은 회나무에 견주어 보면 以梧視槐,크고 작음이 현격히 다르니, 大小殊懸,누가 그것을 처마 밑에 심었나, 誰其軒之,들녘 밭 이랑에 숨은 그대로세. 野圃隱君,문미에 오동 편액 몇 련 걸어 扁之于楣,그 자손 권면하려 한다네, 以勖其孫,누가 그를 위해 명문 지었나 誰其銘之,후창의 김택술 이라네. 金澤述云. 昔三槐堂, 今三梧軒, 今昔三三, 所志各般, 槐期卿相, 梧待鳳鸞, 卿相固貴, 鳳鸞維賢, 仕貴由人, 良貴則天, 以梧視槐, 大小殊懸, 誰其軒之, 野圃隱君, 扁之于楣, 以勖其孫, 誰其銘之, 金澤述云。 회나무……기다리고 회나무는 삼공(三公)을 상징하는데, 주(周)나라 궁정 밖에는 회나무 세 그루가 서 있어 삼공이 천자를 배알할 때 세 회나무를 마주하여 섰다 한다. 《周禮·秋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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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백 창식의 자사 【경오년(1930)】 崔光伯【昌植】字辭 【庚午】 수재 최창식(崔昌植)에게 崔秀昌植,관을 얹고 자(字)를 붙임에 旣冠而字,삼가 광백(光伯)을 주니 余欽光伯,창대한 빛의 뜻을 취하였네. 取昌光義.효제(孝悌)가 지극하여 孝弟之至,사해에 빛을 뿌렸으니 光于四海,성인 요순(堯舜)의 길은 堯舜之道,다만 효제일 따름이었네. 孝悌而已.이제 저 효(孝)와 제(悌)는 維孝若悌,무엇으로 힘쓸 것인가 何以用力,가로되 성(誠)과 경(敬)이니 曰誠與敬,이것이 힘좋은 손잡이이네. 是爲樞極.처음 가정에서 시작하여 始乎家庭,끝내는 성현을 이루니 終作聖賢,길이 계명(誡命)에 부응하여 永言配命,하늘의 복을 받으라. 受福于天.창대하고 광휘 빛내고 昌乎光乎,노력하며 시들지 말지어다. 勉哉無替,최씨 가문의 창대한 광휘 崔門昌光,나는 굳게 믿고 바라리라. 我執左契. 崔秀昌植, 旣冠而字, 余欽光伯, 取昌光義。 孝弟之至, 光于四海, 堯舜之道, 孝悌而已。 維孝若悌, 何以用力, 曰誠與敬, 是爲樞極。 始乎家庭, 終作聖賢, 永言配命, 受福于天。 昌乎光乎, 勉哉無替, 崔門昌光, 我執左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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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경 갑열에게 답함 임신년(1932) 答崔元敬 甲烈 壬申 이전에 이미 그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편지가 와서 또 그대의 품은 뜻을 상세히 알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만 나를 칭찬하는 곳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제가 위축되어서 불안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집안끼리 친분이 있어 아부하는 것이라 의심할까 두렵습니다. "자질이 둔하고 기질이 게을러 스스로 병통으로 여겨서 그것을 변화시키기를 추구한다."라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반성이 절실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자 하는 성대한 뜻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대개 이 병통은 사람마다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궁구하여 말하자면, 그대가 비록 현명하지만 제 생각에도 그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겸손에서 모두 나온 것만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대개 공통으로 근심하는 병에는 또한 공통으로 다스리는 약제가 있습니다. 듣건대 "총명예지(聰明睿知)가 모두 공경으로부터 나온다."92)라고 하였고, "군자가 위엄이 있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진다"고 하였습니다.93) 총명하면 둔한 자도 변화되고 강하면 게으른 자도 변화됩니다. 이미 밝아지고 강해지면 이것이 곧 중용의 지극한 공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경(敬)이라는 글자는 유문(儒門)에서 항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자가 범상하게 여겨서 기특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것이 미혹된 것입니다. 대개 사람이 통환의 병통을 매우 근심하지 않는다면 통치의 약도 매우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끝내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을 날이 가까운 것입니다. 통환의 병은 천하의 큰 병이고, 통치의 약은 천하의 영약입니다. 때문에 좋은 의사는 통치의 약으로 통환의 병을 구제합니다. 유문(儒門)의 병을 다스리는 것도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이제 그대가 약을 구하면서 경(敬)이라는 글자를 버리고는 다른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미 보았던 소릉(昭陵)이라 여겨서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前旣獲覩雅儀, 書來又詳志蘊, 何幸如之.但稱鄙人處, 太不停當.不惟鄙之瑟縮不安, 竊恐人之疑左右何好於通家之親也.至以質鈍氣慢自病而求其變化, 則省切學勤之盛可仰, 蓋此病人所通患.究而言之, 左右雖賢, 意亦有近似者, 非盡出於撝謙也.夫通患之病, 亦有通治之藥.蓋聞敬則聰明睿知, 皆由此出.又聞君子莊敬則日强, 聰明則鈍者燮矣, 强則慢者化矣.旣明且强, 乃中庸之極功也.雖然敬字爲儒門之所常談, 故聞者恬常而不之奇, 此惑也.夫人不甚憂通患之病, 不甚貴通治之藥, 此所以病終不療而死亡無日也.通患之病, 天下之大病, 通治之藥, 天下之靈藥.故善醫者, 以通治之藥, 救通患之病.儒門之治病, 何獨異也? 今於左右之求藥也, 未有舍敬字而可以他圖者, 幸勿以已見昭陵而忽之如何. 총명예지(聰明睿知)……나온다 《논어집주》 〈헌문(憲問)〉에서 주자가 장하주(章下註)로 인용한 정이의 말씀으로 "총명예지가 모두 이 공경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로써 하늘을 섬기고 상제에 제향하는 것이다.[聰明睿知皆由是出, 以此事天饗帝.]"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군자가……하였습니다 "군자가 장중하고 공손하면 날로 더욱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 《예기》 〈표기(表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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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 정장에게 답함 을축년(1925) 11월 答惟夢鄭丈 乙丑十一月 편지에, "스승을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대의가 있는 바다.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각수(刻手 간행 업자)에게 대신 인가 받게 해서 간행하기를 청한 것은 용서하고 오진영의 편지를 대신 초안한 것을 성토함에 미쳤으니, 선사를 무함한 죄를 자복하지 않고 있는 저 오진영이 옆에서 보고 의혹하는 바가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을 접하고 일을 처리함에 미쳐 반드시 천리(天理)를 다하여 한 터럭의 사심도 없어야 한다." 하신 말씀은 우러러 의리가 엄정하고 마음이 공평하여 지극한 의론이 같은 무리를 훨씬 뛰어넘었음이 있음을 알겠으니, 진실로 경복하는 바입니다. 다만 제가 충심을 올리는 사사로운 마음에 있어 삼가 자임하는 것이 간혹 무겁지 않고 사실을 근거하는 것이 간혹 상세하지 않고 남을 꾸짖는 것이 간혹 너무 높아서 자신을 처신하고 남을 대하는 도리에 십분 지극한 논의가 부족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외람되게도 이렇게 갖추어 다 말씀드리니 부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청도(淸道)의 간역(刊役)98)이 모든 문하(門下)와 공적으로 함께 도모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큰 문제는, 심혈을 기울인 스승의 원고를 원수에게 넘겨 인가를 구걸한 것이니, 정말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의 주모자뿐만 아니라 바른 말로 꺾어 깨뜨리지 못하는 자와 억지로 구차하게 동조하는 자까지 모두 마땅히 공적인 의론으로 성토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인이 죄를 지은 사안인 만큼 구차하게 동조한 자가 후회하여 등을 돌리고, 주모한 자가 깨달아서 그만둔다면 이에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어떤 일종의 거리낌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자가 감히 스승을 끌어들여 사람들의 공격을 막고 자기 죄를 벗어 스승에게 전가하려는 마음을 내서는 무함하고 증명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선사의 밝고도 빛나는 의리가 애매하고 어둡다는 의심을 받게 하였으니, 문인의 의리 상 마땅히 변론하고 성토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이전에 구차하게 동조한 사람이라도 진실로 피하고 혐의하여 성토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맑고 깨끗한 우리 어른의 처음부터 청도의 간역에 관여하지 않은 의리로 만약 그 대열에 끼기에는 부족하다며 겸손히 물러나 '앞장서 밝히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 하는 대의를 자임하지 않으신다면 스승의 의리가 밝혀지기 어렵고 공적인 논의가 행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도(世道)의 근심을 우리 자신에게 돌이켜 구해도 또한 옮길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청도 사람들이 아예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니, 스승을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혐의가 크게 불안해서일까요? 각수가 대신 인가 받게 해서 간행하기를 청한 문제는 한 번 현동의 선사 묘소에 고하고 한 번 많은 사람들을 수긍시켜서 스스로 자신의 죄를 자복했을 뿐만 아니라 은행나무 아래에서 독대했다는 말은 원래 대신 초안을 쓴 자가 지어내 제 입에서 나오고 제 손으로 쓴 것입니다. 각수가 대신 인가 받게 해서 간행하기를 청한 자가 애초에 이른바 선사께서 홀로 앉아계실 때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다른 서적이 각수가 대신 인가 받게 하고 대신 초안을 쓴 것과는 나란히 논할 수 없습니다. 또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선사께서 일찍이 인가 받을 뜻이 있으셨다."【오진영이 정재에게 대답한 말】, "선사께서 말씀하시는 즈음에 인가 받을 뜻을 내비치셨다."【오진영이 송병진에게 대답한 말】, "선사께서 일찍이 업자가 대신 인가를 받으면 저자는 관련이 없으니 깊이 구애할 필요가 없다고 지시하셨다."【오진영이 이자승에게 답한 편지】, "선사께서는 인의를 홀로 하지 않으셔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오현수언(五賢粹言)》과 예설(禮說)을 인가 받아 간행하게 하셨다."【오진영이 김용승에게 답한 편지】라는 말들은 오진영이 모두 한 말이고 최병심과 성기운이 말한 것은 없으니, 한 쪽을 놔두고 한 쪽을 성토함에 있어 자연 올바른 척도가 있을 것입니다. 강성하고 사나운 저 오진영이 끌어다 핑계대며 무함한 죄를 자복하지 않는 것은 이미 말할 것이 없으니, 옆에서 보고 의혹하는 바가 또한 여기에 있다면 더욱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천리를 다하여 터럭만큼의 사심도 없는 것은 성현의 성대한 덕이니, 학자가 진실로 이것을 표준삼아서 터럭만큼이라도 감히 스스로 용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 만약 반드시 우리가 이치를 다하고 사심이 없기를 기다린 뒤에야 스승을 높이고 도를 보호하는 의리를 밝힐 수 있다고 하며, 또 반드시 의리를 다하지 못하고 사심을 없애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스승을 높이고 도를 보호하는 의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주자의 이른바 "사람마다 성토할 수 있으니 반드시 성현일 필요는 없다."는 가르침이 천고에 바뀌지 않는 기준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 어른께서는 다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어제 다시 어른께서 현동의 첨좌(僉座)에게 보낸 편지에 "선사의 대고(大稿)는 차라리 발간하지 않을지언정 바름을 잃은 상태로 발간할 수는 없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니, 대의가 환하게 밝혀진 것이 중천에 해가 뜬 것과 같아서 많은 사악한 무리가 그 형체를 숨길 수 없고 세도가 의지할 바가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러러 존경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이길 길이 없을 뿐입니다.저들에게 모록(冒錄 거짓 기록)을 당한 것이 어찌 우리 어른뿐이겠습니까? 죽은 지 이미 3년이 된 이석승(李鍚升)도 면하지 못했으니, 이른바 '천하에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한바탕 웃고 박수칠 일입니다. 所示中, "爲師辨誣, 大義所在, 何可已也? 及赦請代, 討代草, 彼之不服, 傍觀所惑在此, 及接人處事, 必其有以盡天理無毫私之喩", 仰認嚴正之義, 公平之心, 極致之論, 有迵出等夷者, 誠所敬服.但在區區獻忠之私, 竊恐自任也, 有或不重, 據實也, 有或未詳, 責人也, 有或太高, 於自處處人之道, 有欠十分盡頭之論也.猥此備陳, 幸垂察焉.夫淸役之不謀全門公共, 猶是小事, 大之欲將心血所注底師稿, 投所讐而乞認, 誠不可說.非惟幾箇人主謀者, 凡不能正言折破, 及黽勉苟同者, 幷宜遭討於公議也.然此係門人之罪, 苟同者, 悔而背之, 主謀者, 悟而罷之, 斯可已矣.乃有何許一種無忌憚者, 敢生援師禦人, 脫罪嫁師之心, 誣之證之, 不一而足, 使先師皜皜炳炳之義, 受䵝䵝昧昧之疑.凡門人之義當辨討, 在所不已, 則雖前日之苟同者, 固不可避嫌而不討也, 况以吾丈淸淸椘椘, 初不關淸役之義, 若退托於不足齒數, 而不自任倡明何可已之大義, 則非惟師義之難明, 公議之不行, 爲世道之憂, 反求乎己, 無亦有遷.淸人都無一言相及之, 怒加之於爲師辨誣人之嫌之大不安者乎? 請代者, 非但有一告玄阡, 一服衆中, 而自首其罪; 杏下之說, 元是代草者之白撰, 出自自口, 錄自自手.請代者.初不參於所謂獨坐之時, 則固不可與他書之請代代草者, 比並論也.且非獨此也.曰: "先師曾有認意"【吳對靜齋說】, 曰: "先師帶著認意於言語之際"【吳對宋秉眞說】, 曰: "先師嘗敎業者代認著者無關, 不必深拘"【吳答李子乘書】, 曰: "先師仁義不獨, 使人認印粹言禮說"【吳答金容承書】等說, 吳之總有, 而崔成之所無也, 則一捨一討, 自有權衡.彼之強項悍戾, 援托不服, 已是無謂, 傍觀之所惑, 亦在乎此, 則尤所未喩也.盡天理無毫私, 聖賢之盛德也, 學者固準的乎是, 一毫不敢自恕.若謂必待吾之盡理無私, 然後可明尊師衛道之義, 又必以人之不能盡理無私, 不與其尊師衛道之義, 則朱子所謂, "人人得討, 不必聖賢"之訓, 不得爲千古不易者矣.未知吾丈, 復以爲如何.昨又讀丈與玄洞僉中書, 先師大稿, 寧可不刊, 不可失正而刊之語.則大義明彰如日中天, 群邪莫逃, 其形而世道其有所賴, 區區不勝景仰之私爾.爲彼冒錄, 豈獨吾丈? 沒已三年之李鍚升, 亦且不免, 所謂'天下無所不有者'此耶? 可笑可拍. 청도(淸道)의 간역(刊役) 청도는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을 말한다. 간재 사후에 간재의 아들인 전화구(田華九) 및 오진영(吳震泳), 최병심(崔秉心) 등의 제자들이 모여 경북 청도군에 간소(刊所)를 마련하고 간행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때 일제에 인가를 받아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는 간재의 유언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각수에게 대신 인가를 받게 해서 간행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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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 김장찬모에게 답함 경술년(1925) 答希菴金丈酇謨 ○庚戌 성현의 경전 중에 나오는 허다한 인(仁) 자는 이치의 이름으로 말한 것도 있고, 마음의 작용으로 말한 것도 있으니, 마땅히 각각 그 입언의 뜻을 따라서 보고 파악해야지 피차를 비교하여 명실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대학》의 '문왕의 오지(五止)'99)는 '지어지선(止於至善)'100)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인(仁), 경(敬), 효(孝), 자(慈), 신(信) 다섯 가지는 지선의 조목입니다. 주자가 "지선은 바로 사리의 당연한 극치이다." 했으니, 이것이 어찌 일찍이 터럭만큼이라도 마음의 작용을 범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치는 공부에 이르면 바로 마음의 작용이니, 사문이 인경(仁敬) 이하 다섯 가지를 오로지 성리로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논어》의 '충신독경(忠信篤敬)'101)과 《소학》의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102)와 《중용》의 '지인용(智仁勇)'103)과 《서경》 서문의 '덕인경성(德仁敬誠)'같은 것들은 모두 덕행심법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말한 것이니, 다시 상층의 공부는 없습니다. 만약 그치는 것이 이와 같은 인(仁) 자가 된다면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일이 바로잡아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聖賢經傳中, 許多仁字, 有以理之名言者, 有以心之用言者, 當各從其立言之意看破, 不可擬比彼此以混名實也.大學'文王之五止', 是釋止於至善之義, 而仁敬孝慈信五者, 卽至善之條目也.朱子曰: "至善卽事理當然之極", 此何嘗犯一毫心之用耶? 至於止之之功, 則乃心之用也, 師門之以仁敬以下五者言性理者此也.若乃論語之忠信篤敬, 小學之知仁聖義忠和, 中庸之知仁勇, 書序之德仁敬誠, 皆以德行心法之已成者言, 更無上面用功.如止之之爲此等仁字, 皆可謂以心之用言者也.伏乞一一回訂焉. 문왕의 오지(五止) 오지는 다섯 가지 그친 것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 전3장에서 주 문왕(周文王)의 덕을 찬미하며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부친이 되어서는 자에 그치고, 국인과 사귐에는 신에 그쳤다.(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子止於孝 爲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라고 한 말을 압축한 것이다. 지어지선(止於至善) 《대학장구(大學章句)》 경 1장의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라고 하였는데 지극한 선에 그친다는 뜻이다. 충신독경(忠信篤敬)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서 있을 때는 충신 독경이 앞에 와 있음을 볼 수 있고 수레에 탔을 때는 충신 독경이 멍에에 기댐을 볼 수 있어야 하니, 이와 같은 뒤에야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라 했는데, 《논어집주(論語集註)》에 "그것이란 충신과 독경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其者, 指忠信篤敬而言〕"라고 하였고, 또 "충신과 독경에 대하여 잊지 말고 계속 생각하면서 어디에 있든 간에 항상 눈에 보이는 것처럼 해야 한다.〔其於忠信篤敬, 念念不忘, 隨其所在, 常若有見〕"라고 하였다.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 《소학(小學)》 〈입교(立敎)〉에 나오는 말로, 만민을 교육하는 향삼물(鄕三物)의 하나인 육덕(六德)의 조목이다. 지인용(知仁勇)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천하에 공통된 도가 다섯인데, 이것을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형제와 벗의 사귐, 이 다섯 가지는 천하에 통하는 도이다. 지(智)ㆍ인(仁)ㆍ용(勇) 이 세 가지는 천하(天下)의 공통된 덕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五者 天下之達道也 知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 一也〕"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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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 김장에게 답함 경술년(1925) 答希菴金丈 庚戌 인, 경, 효, 자, 신 다섯 가지를 마음의 작용으로 해당시키는 것은 제 견해에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제 견해로는 주자가 이 다섯 가지를 사리의 당연한 극치로 여겼기 때문에 성리로 해당시킨 것입니다. 존자의 가르침에 "이치와 하나가 되는 마음도 이치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으로 해당시켰다." 하셨는데, 삼가 제 생각에는 일이 만약 이치에 맞으면 정미한 심을 리의 당연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의 모습이 공손하고 발걸음이 신중한 것과 조적거처(粗跡去處)도 리의 당연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이 다섯 가지는 주자가 이미 사리의 당연한 극치라고 했고 명덕과 신민의 표준은 바로 그칠 데를 아는 것으로,104) 집주(集註)의 '마땅히 그쳐야 할 바의 경지'105)인 것입니다. '사물에 나아가 궁구하는 것〔格物〕'은 집주의 '사물 이치의 지극한 곳〔物理之極處〕'으로, 전2장의 '지극함을 쓰지 않는 데가 없다.106)〔無所不用其極〕'는 '극(極)' 자이니, 이는 단지 천연의 본래 있는 이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이를 알고 궁구하고 사용하여 '즙희경지(緝煕敬止)'107)의 공부에 이른 연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仁敬孝慈信五者, 以心之用當之者, 不能無疑於淺見也.蓋淺見以朱子以此五者, 爲事理當然之極.故以性理當之.尊誨謂 "與理爲一之心, 亦可謂理之當然, 故以心之用當之." 竊以爲事苟合理, 非惟精微之心, 可謂理之當然, 如手容恭足容重粗跡去處 亦可謂理之當然也.但此五者, 朱子旣謂事理當然之極, 而明德新民之標的, 則是乃知止, 集註所當止之地也, 格物, 集註物理之極處也.傳二章無所不用其極之極字也, 此只可謂天然自在之理而已.至於知之·格之·用之, 敬止之功, 然後始可謂心之用耳. 명덕과……것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 경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에 있으며 지선에서 그치는 데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하였는데, 집주에 "명명덕과 신민을 모두 마땅히 지선의 경지에서 그쳐서 옮기지 말아야 한다.〔明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之地而不遷〕"라고 한 것을 말한다. 마땅히 그쳐야 할 바의 경지 《대학장구(大學章句)》 경(經) 1장(章)의 '지지(知止)'에 대한 주(註)에 "지(止)란 마땅히 그쳐야 할 바의 경지, 바로 지선이 있는 곳이다.〔止者, 所當止之地, 即至善之所在也〕"라고 하였다. 지극함을 쓰지 않은 데가 없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전2장에 보인다. 즙희경지(緝煕敬止)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의 "깊고 원대한 문왕이여, 아, 언제나 광명하시고 공경하여 머무신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 한 데서 온 말로, 문왕의 덕을 찬탄한 것인데, 이것은 《대학(大學)》 전삼장(傳三章)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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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답함 答悅齋蘇丈 癸酉十二月 계유년(1933) 12월물으신 영당(影堂)56)의 일은, 제가 10월 그믐에 신헌(愼軒)의 편지를 얻어 논의가 이 일에 미쳤는데, 호남과 영남에 모두 통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답장에 이르기를, "음성 오진영의 무리에게 통보하여 의논하는 것은 의리상 매우 온당하지 않다. 저들이 선사의 큰 것을 들어 무함하고 훼손하는데, 우리가 마침내 저들과 작은 것들에 대해 일을 함께 한다면 어찌 어긋나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들으니 나옹(懶翁)과 신재(愼齋) 두 어른이 가까운 읍을 두루 다니며 이미 성금할 기록을 받았으니, 성금을 받는 행위가 이 일를 의논하기 전에 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근래에 두 어른을 뵙고서 그 뜻을 알아보았는데, 이른바 의리에 대해서 그다지 명쾌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결론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른은 스승을 무함한 자와 함께 도모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니, 이치를 보는 것이 밝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 바름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며 제 의견과 같음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下詢影堂事, 澤述於十月晦間, 得愼軒書, 議及此擧, 而有湖嶺皆通如何之問.答謂, "通議陰黨, 義甚未安, 彼方擧先師之大者, 而誣毀之, 吾乃與之同事乎小者, 豈不舛乎?" 俄聞懶愼二丈, 周行近邑, 已受誠金之錄, 夫孰知其受金之行, 乃在議事之先乎? 此見二丈, 探其意, 則於所謂義者, 殊不明快, 未知如何究竟也.吾丈之不欲與誣師者同謀, 仰見見理之明, 守義之正, 而深幸淺見之同也. 영당(影堂) 초상을 모시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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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올림 上悅齋蘇丈 丙子 병자년(1936)지난 가을에 음성 오진영이 편찬한 《정절사전(鄭節士傳)》을 보니, 후론(後論) 가운데 그가 주장한 말이 상식적이지 않고 추잡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친구 전사견(田士狷)과 상의하여 논의를 세웠으며, 근래에 또 음성에서 온 변증서(辨證書)의 글을 반박하였습니다. 이에 함께 기록하여 올리니,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쪽이 이미 사문의 죄인이고 보면 그가 주장하는 말의 득실은 마땅히 경중을 따질 것도 없어서 변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저들의 무리가 나라 안에 가득하여 견식과 문장이 선사보다 낫다고 그를 높이고, 심지어 간옹의 문집은 고치고 첨가한 진주본이 나온 뒤에야 완벽하게 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기까지 하니, 그 잘못된 말이 어찌 사람들을 믿게 하고 세상을 해롭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의리에 있어서는 그의 이른바 견식과 문장 가운데 큰 병폐가 있는 것을 보는 대로 반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문장과 식견을 아울러 취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한 연후에 사도(師道)를 보호하고 세교(世教)를 부지하는 최선이 될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존장의 뜻은 어떠신지요? 昨秋, 見陰震所撰, 鄭節士傳, 後論中語, 其所立言, 有非常醜差者.故與田友士狷商議立論, 近又有駁破自陰來辨證書之文矣.茲并錄呈, 下覽若何? 蓋彼旣爲師門罪人, 則其立言得失, 宜若無所輕重, 而不足辨者, 但其徒黨, 充滿域中, 尊之以見識文章優於先師, 至有謂艮翁之稿, 待晉印改添而後, 得爲完善者, 則其言之失, 豈不足以信人而害世乎? 在吾輩之義, 其所謂見識文章之有大害病者, 隨見駁破, 使人知并與文識而無足取, 然後乃爲衛師道扶世敎之盡善也.未知尊意, 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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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재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崔欽齋 丙寅 화도수정본은 결코 예기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에 저는 서로가 자세히 알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현동본(玄洞本)입니다. 존자께서는 제가(諸家)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도판(新都板)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도판은 인가를 받은 것이니, 절대로 우리들이 마땅히 취하여 읽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소장본은 우리 것이 아니니, 신도판에 들어가지 않았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반드시 현동본을 많이 베껴서 나누어 소장한 이후에 우리의 의리를 지키고 우리 것을 만든다면 허물도 없고 근심도 없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手本決無不虞之喩, 竊悶其不相悉也.鄙之所慮者, 玄本也, 尊乃以諸家藏新都板當之, 都則認也, 決非吾輩之所當取讀.他藏則非吾有也.安知不收入於都而不復出耶? 必多寫玄本, 分藏然後, 守吾義, 作吾有, 可以無累無虞焉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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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 병태의 자사 【을해년(1935)】 金元中【炳泰】字辭 【乙亥】 저 땅 아래 하늘 있는 태괘(泰卦)295)는 惟地天泰,그 덕성이 중(中)을 숭상하고, 厥德尙中,사람의 도리에다 미루어 보면 推之人道,그 역시 중(中)을 잡음에 있으니, 亦在執中,동족의 아들 김병태(金炳泰)에게 族子炳泰,원중(元中)을 자로 붙여주네. 欽以元中.도(道)는 정심하고 미묘하여 道惟精微,그 중(中)을 알기 어려우니, 難識者中,어떻게 그것을 알아볼까 識之以何,격물(格物)하고 치지(致知)함에 있네. 在格致中.격물이 지선(至善)에 이르면 格到至善,곧 그 중(中)을 볼 것이고, 卽見其中,집중(執中)이 원숙함에 이르면 中到熟處,천지의 조화에 참여하리니, 參天地中,그 단서의 첫머리를 물어 問厥端始,경전 속에서 찾아 보소. 求經傳中. 惟地天泰, 厥德尙中, 推之人道, 亦在執中, 族子炳泰, 欽以元中。 道惟精微, 難識者中, 識之以何, 在格致中。 格到至善, 卽見其中, 中到熟處, 參天地中, 問厥端始, 求經傳中。 태괘(泰卦) 《주역》의 〈태괘(泰卦)는 땅[地] 밑에 하늘[天]이 있어 지천태괘(地天泰卦 )라고 말하는데, 그 〈상사(象辭)〉에 "하늘과 땅이 사귀는 것이 태이다.[天地交泰]"라고 하였는데, 천지의 기운이 크게 통하여 만물이 생장(生長)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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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포28) 知止浦 봉래산을 등지고 푸른 바다 낀 채 俯臨滄海背蓬山산과 바다 중간에 한가로운 곳 얻으셨네 山海中間得地寬밀물 물러가니 물고기와 새우 물가에 가득하고 潮退魚鰕堆ㅁ渚가을 깊어가니 감과 밤이 상자 가득 쌓이네 秋深柿栗積箱盤높고 낮은 촌락들은 안개와 노을 속에 있고 高低村落烟霞裏멀고 가까운 서재들은 소나마 잣나무 사이에 있네 遠近黌齋松柏間지포옹께서는 머물 곳을 아셨기에 云是浦翁知止處지금 순박한 풍속으로 완악한 이들 청렴하게 하네29) 至今淳俗可廉頑 俯臨滄海背蓬山,山海中間得地寬.潮退魚鰕堆ㅁ渚,秋深柿栗積箱盤.高低村落烟霞裏,遠近黌齋松柏間.云是浦翁知止處,至今淳俗可廉頑. 지지포 고려의 문인 김구는 일찍이 중서시랑 평장사의 직책에서 물러나 고향 선학동(仙鶴洞)으로 돌아가 인근 변산포에서 새로운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이곳을 '지지포'라고 하였다. 완악한……하네 맹자가 "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이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이는 흥기하게 된다." 하였다. 《孟子 萬章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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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 장렬 에게 줌 贈崔性武【長烈】 이십 년을 태악 동쪽에서 성장하여 卄載生長台岳東견문과 도량은 아직 넓지는 못하다네 見聞器局未能洪어리석은 마음이나 옛사람과 같아지려 하고 痴心欲與前人合졸렬한 성품이나 속된 무리를 따르지 않았네 拙性難隨俗輩同책상 마주할 땐 흰 해를 버리는 것55) 도리어 미워하고 對案還憎抛白日스승을 따를 땐 봄바람에 앉은 일56) 헛되이 저버렸지 從師虛負坐春風절실하게 교분 맺어 서로 권면함이 뜻 없지 않지만 切偲相勉非無意어찌 공연히 부끄러운 마음만 드는지 其柰空空反愧中 卄載生長台岳東,見聞器局未能洪.痴心欲與前人合,拙性難隨俗輩同.對案還憎抛白日,從師虛負坐春風.切偲相勉非無意,其柰空空反愧中. 흰……것 세월을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백일(白日)'은 시간 또는 세월을 말한다. 봄바람에……일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춘풍(春風)'은 '춘풍화우(春風化雨)'의 준말로 훌륭한 교육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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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보 해선 와 익부 해붕 및 성무가 다시 와서 글을 읽는 것에 사례하며 謝吳允寶【海璿】翼夫【海鵬】及性武復來讀書 적막한 초당 말끔하게 쓸고서 草堂寂寂掃如淸높은 선비 문에 이르니 생기가 곱절이라 高躅臨門倍色生만남이 어긋나고 더디다 섣달 되어 깜짝 놀라고 逢著差遲驚歲暮얘기를 다 못했는데 어느덧 등불 밝았네 言談未盡到燈明이름 있는 강산을 어찌 잊을까 名區泉石何相諼티끌 가득한 세상 길 신중하여 나가지 마시게 世路風塵愼莫行감사하게도 예전 교유가 지금 다시 이어지니 多謝舊遊今復續같이 공부했던 삼여57)의 정을 이기지 못하겠네 三餘同榻不勝情 草堂寂寂掃如淸,高躅臨門倍色生.逢著差遲驚歲暮,言談未盡到燈明.名區泉石何相諼?世路風塵愼莫行.多謝舊遊今復續,三餘同榻不勝情. 삼여 글 읽기에 좋은 세 가지 여가(餘暇)로, 한 해의 나머지인 겨울, 하루의 나머지인 밤, 때〔時〕의 나머지인 흐리고 비오는 시간을 말한다. 《三國志 卷63 魏書 王肅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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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2 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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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귀재기 【무인년(1938)】 夜歸齋記 【戊寅】 동생(董生) 소남(召南)이 동백산(桐柏山) 속에 은거할 때에 아침에는 나가 밭을 갈고, 저녁에는 돌아와 독서를 하니, 창려(昌黎) 한자(韓子 한유(韓愈))가 그 일을 노래하여 칭찬하고 그와 짝할 이가 없다고 탄식하였다.75) 그런데 1200여 년이 지난 뒤에 수산(壽山) 오병수(吳秉壽)가 죽산(竹山) 아래 벽송동(碧松洞)에 은거할 때에 밭을 갈고 또 독서하는 것이 한결같이 동생이 했던 것과 같았으니, 바로 그와 짝하였고, 이른바 '야귀재(夜歸齋)'라는 곳은 그가 독서했던 곳이다. 그래서 그의 벗인 나 김택술이 그를 위해 그 사실을 서재의 벽에 기록하여 말하였다."대저 사람이 밭을 갈지 않으면 굶게 되고, 학문을 학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니,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넓은 천하에 어찌 양쪽 모두를 겸하여 다스린 자가 적겠는가. 그런데 한자(韓子)가 유독 동자(董子)만을 일컬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의 품행과 도의, 재주와 기량이 관작과 봉록을 누릴 만하였음에도 밭을 일구는 속에서 곤궁하게 지냈기 때문에 탄식하고 찬미한 것이다.지금 수산의 가정에서의 행실이 순박하고 도타운 것에 대해서는 참으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거니와 재주와 기량에 대해서는 동생과 견주어서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서경》에 '효도하고 우애하여 정사에 베푼다.'라고 하였고, 또 내가 일찍이 그가 집에 거처하는 방법을 보고 그 다스림이 관직에 이행시킬 만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생과 수산이 모두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공적을 이룸에 대해서는 굳이 단정해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오직 논할 것이 있다면 동생은 뜻을 잃는 것에 대한 울적한 마음을 면치 못하여 연(燕)과 조(趙) 지방에 갔지만76), 수산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밭에서 일하며 자기 힘으로 먹고 사는 가운데 털끝만큼도 기미를 드러내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어찌 다만 그와 짝하는 데에 그칠 뿐이겠는가. 비록 그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한자의 붓을 얻어 이름이 천 년의 세월동안 드러났지만, 수산은 나의 졸렬한 글을 만나 썩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비록 그렇지만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으니, 한자가 동생을 찬미할 때에 단지 '책을 읽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반드시 '옛사람의 책을 읽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옛사람이란 누구인가? 바로 그가 평소에 일컬은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주공(周孔)이 이들이고, 그 책은 모두 천명(天命)의 정미(精微)한 깊은 뜻과 인사(人事)ㆍ윤리(倫理)의 떳떳한 도,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의 덕,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효험을 밝히기 위한 것들이었으니, 그 귀결을 요약하면 또 모두 근본으로부터 말단에 이르렀고, 내면을 중시하고 외면을 경시하였으되 동생의 학문은 이러한 옛사람의 책에서 힘을 얻는 것이 깊지 못하였다.수산이 만약 맑고 향기로운 서재의 창문 앞과 긴 밤을 밝혀주는 등불 아래에서 조용히 앉아 낭랑하게 외고 은미하게 읊조리며 깊이 사색하고 묵묵히 궁구하여 옛사람의 책에서 꺼림칙한 느낌이 없이 환하게 이치에 맞아 실제적인 견해가 되게 하고, 흔연하게 도를 터득하여 실제적인 소유가 되게 하며, 그것을 몸에 행하여 실제적인 덕이 되게 하고, 일에 조처하여 실제적인 업적이 되게 하여 순수하게 그것을 온전히 하고 우뚝하게 그것을 높게 한다면 실제를 보존한 바에 이름이 어찌 드러나지 않겠는가. 장차 오늘날과 훗날의 군자 중에 실제를 숭상하는 자가 일어난다면 공공연하게 수산의 이름을 칭송하며 길이 할 말이 있게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에 나의 글이 수산으로 인해 전해지는 것도 또한 동생이 한자로 인해 이름이 전해진 것과 같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구한 내가 바라는 것이다." 昔有董生 召南, 隱居桐柏山中, 朝出耕田, 夜歸讀書, 昌黎 韓子歌其事贊之, 而歎其無與儔矣.後千二百年餘而得吳壽山 秉壽, 隱居竹山之下碧松之洞, 耕且讀焉, 一如董生之爲, 則乃其儔也, 而所謂夜歸齋者, 其讀書所也.友人金澤述爲之記其事於齋壁曰: "夫人不耕則餒; 不學則昏.旣不可以偏廢, 則以天下之廣, 豈其少兼治者? 而韓子獨稱董子, 何哉? 以其行義才器, 可以享爵祿而困于耕, 故嗟歎而美之也.今壽山之內行淳篤, 固人無異辭, 至於才器, 未知比董生何如? 而《書》云: '孝友, 施於有政.' 且吾嘗見其居家之理, 而知其治可移於官矣.然彼此旣皆不見用, 而成績則有不必斷論者.惟是董生, 不免鬱鬱於失志, 至有燕、趙之行; 壽山則不然, 初無毫末幾微之色於服田食力之中.由是言之, 豈特其儔而已? 雖謂之過焉, 可也.然而董生得韓子之筆, 而名著千秋; 壽山遇余下劣之文, 而不能以不朽, 是可恨也.雖然, 有一焉.韓子之贊董生也, 不但曰: '讀書.' 而必曰: '讀古人書.' 古人者何? 卽其平日所稱堯、舜、禹、湯、文、武、周孔是也.其書也, 皆所以明夫天命精微之蘊、人事倫理之常、格致誠正之德、修齊治平之效.要其歸, 則又皆自本而至末, 重內而輕外, 而董生之學, 則不深得力於此故爾.壽山如能靜坐於淸齋芸牕之前、永夜篝燈之下, 朗誦微吟, 潛思黙究, 於古人之書, 犁然合理而爲實見, 欣然得道而爲實有, 以之行諸身而爲實德, 措諸事而爲實業, 純乎其全也, 巍乎其崇也, 則實之所存, 名豈不彰? 將今與後之君子, 有尙實者作, 公誦壽山之名, 而永有辭也必矣.於是乎余文之因壽山而傳, 亦當如董生之因韓子而傳名也, 此正區區之願爾. 동생(董生) 소남(召南)이 …… 탄식하였다 당나라 덕종 때 동소남이 진사과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주경야독하면서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자, 그의 벗 한유가 〈동생행(董生行)〉ㄹ르 지어 "아! 동생이여. 아침이면 나가 밭 갈고, 밤이면 돌아와 옛사람의 책을 읽도다. 종일토록 쉬지 못하였으니, 혹은 산에서 나무하며, 혹은 물에서 고기 잡네.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당(堂)에 올라 안부를 물으니, 부모는 근심스러워하지 않고, 처자식은 원망하지 않도다.〔嗟哉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동생은 …… 갔지만 한유가 지은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에 "연(燕), 조(趙) 지방은 옛날부터 강개하여 비장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일컬어졌습니다. 동생(董生)은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나 연이어 유사(有司)에게 인정받지 못하여 뛰어난 재능을 지닌 채 답답한 마음으로 이 지방에 가시는데, 그곳에는 반드시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을 것임을 나는 압니다.〔燕趙古稱多感慨悲歌之士. 董生擧進士, 連不得志於有司, 懷抱利器, 鬱鬱適玆土. 吾知其必有合也.〕"라는 내용이 보인다.《昌黎集 卷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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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덕재기 【기묘년(1939)】 求德齋記 【己卯】 내가 일찍이 전연심(田鍊心 전희순(田煕舜)) 어른에게 부풍(扶風 부안)의 근고(近古) 김공(金公) 재현(載賢)에 관한 일을 듣고 그분의 효성에 대해 매우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그 분의 다른 일이야 잘할 수 있겠지만, 부친과 조부 두 대를 위해 본군의 구덕리(求德里)에 묘지를 사기 위해 먹고 살기도 어려운 곤궁함 속에서 거금을 마련한 일과 장사를 지낸 뒤에 생활로 바쁜 가운데에 달마다 두 번씩 묘를 살핀 것은 잘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며, 나머지 평소 언행도 또한 선한 모습이 많았다. 내심 스스로 감탄하며 효는 덕행 중에 으뜸이고, 선은 복을 받는 터전인 까닭에 덕이 있는 자는 창성하고, 선을 행한 자는 상서로운 일이 있는 것이 하늘의 도이니, 반드시 어진 자손이 대대로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 나가는 복을 누릴 것으로 여겼다.그런데 하루는 김행신(金幸信)과 김문신(金文信) 두 군이 창주(滄洲 창동(滄東)) 가로 나를 찾아와서 새로 지은 묘재(墓齋)의 편액과 기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니, 두 군은 바로 효자의 아들이고, 묘재는 구덕 마을 언덕에 효자가 생전에 지으려다가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이에 앞서 했던 말이 들어맞았음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말하기를,"이와 같은 일이 있다니, 하늘은 믿을 수 있구나. 뿌리를 배양하면 가지가 창달하는 것을 어찌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적에 온갖 고난을 겪으며 정성을 다한 것은 오늘날 재물을 소유하고 기쁨을 누리도록 뿌리를 배양한 것이고, 오늘날 눈앞에 우뚝 솟은 묘재는 옛적에 마음으로 계획했던 것이 이루어져 가지가 창달한 것이다."하고서 이에 공경히 답하였다."《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70)라고 하였다. 이 재실이 이루어진 것은 선친을 생각하고 뜻을 계승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을 인하여 더욱 공경과 생각을 다하여 자기의 덕을 진취시킬 것을 구하고 선친의 효와 선행 전체를 계승하는 것은 분수에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묘재를 명명하는 것은 다른 데에서 구해서는 안 되고 지역의 이름을 인하여 '구덕'이라 편액하는 것이 마땅하다.대저 덕이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어 본디 자기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인데, 단지 물욕에 의해 해를 당하여 상실되었을 뿐이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세상에 물욕에 가리지 않고 선조를 사모하여 재물을 사용하고 선조의 일을 잘 계승하는 것을 군처럼 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본디 가지고 있는 덕을 상실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고, 선친의 덕을 계승하는 데에 거의 반절 이상은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효자라 일컫지 않을 수 있겠는가.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모두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71)라고 하였고, 또 '요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다.'72)라고 하였으니, 만약 힘써 나아갈 수 있다면 비록 덕을 이루어 선친을 현양하는 대효(大孝)가 되는 데에 이른다 하더라도 또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이 재실에 거처하면서 엄숙한 정성을 다하고, 선조의 묘에 절을 올리며 서글픈 감회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은 대씨(戴氏)의 〈제의(祭義)〉73)와 후산(後山)의 〈사정기(思亭記)〉74)에 이미 다 실려 있고, 산과 언덕, 풍수의 형세라든지 묘재의 칸 수와 구조 등은 이 재실에 오른 자라면 저절로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니, 모두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직 덕을 구하는 일로 그 이름을 취한 뜻을 드러내 고하였으니, 돌아가 이 말을 게시하여 재실의 기문으로 삼아도 또한 충분할 것이다." 余嘗從鍊心 田丈, 聞扶風近故孝子金公 載賢事, 甚詳之孝也.其他可能, 其爲父祖兩世, 買佳城於本郡之求德里, 辦鉅金於艱食困苦之中, 旣葬月再展省於營生奔走之際者爲難能.其餘平日言行, 亦多善狀.竊自感嘆以爲孝者德之首; 善者福之基, 故有德者昌; 作善者祥, 天之道也, 其必有賢子孫繼述之餘慶乎.日有金幸信、文信二君, 訪余於滄洲之上, 以其新成墓齋, 請扁而記之.二君乃孝子之子, 齋卽求德阡孝子生前營置而未就者.余於是又自幸前言之有中而曰: "有是哉, 天可諶也.盍觀夫根培而枝達乎? 昔日之艱苦盡誠, 今日有財爲悅之根培也; 今日之眼前突兀, 昔日心上經綸之支達也." 乃敬復之曰: "《詩》不云乎? '無念爾祖, 聿修厥德.' 是齋之成, 旣出於念親繼志, 則因而益致敬念, 求進己德, 而繼其孝善全體, 是分所當然.名齋不可以它求, 因其地而扁以求德宜矣.夫德者, 人所得於天而固有乎己, 但爲物欲害之而喪焉.顧今之世, 有能不蔽物欲, 而慕先用財, 善述人事, 如君者幾人? 卽此一事, 可見不喪固有, 而於繼先德也, 思過半矣, 可不謂之孝乎? 孟子曰: '人皆可爲堯舜.' 又曰: '堯舜之道, 孝悌而已.' 若能勉而進之, 則雖至爲成德顯親之大孝, 又豈異事乎? 若夫居是齋而致僾肅之誠, 拜先壟而興悽愴之感, 戴氏之於〈祭義〉、後山之於〈思亭〉, 已盡之, 岡巒風水之勢、結構間架之制, 登是齋者, 自應目覩, 皆不須論.惟以求德之事, 發其取名之義而告之, 歸而揭是說爲齋記, 亦足矣." 너의 …… 닦을지어다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구절이 보인다. 사람은 …… 있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조(曹)나라 군주의 아우인 조교(曹交)가 "사람은 모두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될 수 있다 하니, 그러한 이치가 있습니까?〔人皆可以爲堯舜, 有諸?〕"라고 묻자, 맹자가 "그러하다.〔然.〕"라고 대답한 내용이 보인다. 요순의 …… 뿐이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구절로, 요순과 같은 성인의 도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인륜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대씨(戴氏)의 제의(祭義) 대씨는 한(漢)나라 때 후창(后蒼)에게 의례(儀禮)를 전수받은 대덕(戴德)과 그의 조카 대성(戴聖)을 가리키고, 〈제의(祭義)〉는 《예기(禮記)》의 편명이다. 대덕이 전한 예 85편을 《대대례》라 하고, 대성이 전한 예 49편을 《소대례》라고 하는데, 현재 《예기》라 하는 것은 《소대례》를 가리킨다. 후산(後山)의 사정기(思亭記) 후산은 북송(北宋)의 문장가 진사도(陳師道)의 호이고, 사정기는 진사도가 지은 글로 자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나 재실에서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10 思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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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암기 惕菴記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에서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한다."라고 하였고, 《論語》 첫 장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즐겁다[悅]'라는 것은 '기쁘다[喜]'라는 뜻이고, '두려워하다[惕]'라는 것은 '근심하다[憂]'라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둘로 나누어 사용할 수 없으니, 힘쓰고 두려워하는 낮과 저녁, 배우고 익히는 때와 때는 동일한 때인데, 어찌하여 동일하지 않은 기쁨과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이는 칡뿌리를 씹을 때처럼 반드시 쓴 맛이 다 없어진 뒤에 단 맛이 느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반드시 혼자 있을 때를 삼간 뒤에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해지는 즐거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대저 도리는 지극히 은미하고,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위태로우며, 사물은 지극히 번다하니, 지극히 위태로운 마음으로 번다한 사물을 접하면서 지극히 은미한 도리에 부합하기를 구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주자는 도는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 "군자의 마음은 항상 공경과 두려운 마음을 보존한다."라고 하였고78), 간옹 선사(艮翁先師 전우(田愚))는 도가 본래 지극히 은미하기 때문에 성인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나 같은 소자가 어찌 공경과 경계의 마음을 그만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조사문(趙斯文) 수경(受卿)은 집에 척암(惕菴)이라 편액하고 힘쓰는 사람이니, 나는 척암이 멀게는 주자의 뜻을 생각하고, 가깝게는 선사의 마음을 체득하여 처음에는 힘쓰고 힘쓰면서 때때로 반성하고 두려워하여 얻지 못한 것을 내버려 두지 않고, 중간에는 점차 교화하여 충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지막에는 생각하지 않아도 얻고 힘쓰지 않아도 도에 맞아서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易》乾之九三曰: "君子終日乾乾, 夕惕若." 《論語》之首章曰: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悅喜意也, 惕憂意也.人心不可兩用, 乾惕之日夕與學習之時時, 同一時也, 而烏得有悅惕之不一也? 此如喫葛根然, 必苦盡而後甘來.故必愼獨而後有廣胖之樂也.夫道理至微, 人心至危, 事物至繁.以至危之心, 接事物之繁, 而求合於至微之道, 豈不難乎? 是以朱子謂道不可離而曰: "君子之心, 常存敬畏." 先師艮翁, 以道本至微, 聖無不惕, 矧余小子柰何息敬戒? 趙斯文 受卿, 扁室惕菴而勖之者也.吾願惕菴, 遠思朱子之意, 近體先師之心, 始焉勉勉, 時時省惕, 不得不措, 中焉漸次化之, 使中心喜悅, 終焉不思而得, 不勉而中, 使無事之可惕焉. 주자는 …… 하였고 《중용장구》 제4장 주희 집주에 "도는 떠날 수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는 것이다.[道不可離, 人自不察. 是以有過不及之弊.]"라는 내용이 보이고, 제1장 집주에 "군자의 마음은 항상 공경과 두려운 마음을 보존하여 비록 보고 듣지 않을 때라도 또한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천리의 본연함을 보존하여 잠시도 도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君子之心, 常存敬畏, 雖不見聞, 亦不敢忽, 所以存天理之本然,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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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김낙두) 족숙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涵齋族叔 甲子 지난번 편지에, "군사(郡事) 부군(府君)108)의 유적을 추모하여 감개의 뜻을 매우 지극히 하였는데, 길이 보존할 방도를 생각하고 있다." 하셨으니, 백번 받들어 읽음에 효를 생각하는 마음이 끝없음에 우러러 감복하였고 또 나의 마음을 먼저 알아챘음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기미를 알아보는 것을 명철(明哲)이라 이르고 발자취를 고상히 하는 것을 달절(達節)109)이라 하니, 일을 만나 의리를 취하여 몸을 잃지 않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부군이 고려의 세가로 종실인 창녕군의 사위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뜻을 굽혀 높은 벼슬과 많은 복록을 취하는 데에 마음을 두었다면 주머니속의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시사가 어찌해볼 수 없음을 환히 알았으나 차마 종국(宗國)이 망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고 또 망복의 뜻110)을 보존하는 것이 중대하다고 여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도리를 다하여 선왕에게 의로운 뜻을 바쳤으니111) 그 의리는 기자의 명이(明夷)112)이며 그 자취는 노중련(魯仲連)의 동해(東海)113)와 같으니, 포은(圃隱), 목은(牧隱) 제현들이 나라를 위해 죽거나 발자취를 감춘 것에 비교해볼 때, 명성과 지위의 한미하고 현달함이 비록 같지 않음은 있으나 그 보존하고 실천한 것은 똑같이 나라를 근심한 열렬한 절의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위로 고인을 논하는 자들의 입에서 우열이 논해질 수114) 있겠습니까? 부군께서 하신 이런 일은 이치를 따른 것이고 분수를 다한 것이니, 단지 눈앞의 당연함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어찌 몸과 집안의 이익과 재앙 및 후손들의 흥망을 계산했겠습니까?그러나 나 같은 후손은 지극한 은혜와 두터운 덕을 부군에게 특별히 입은 것이 있습니다. 우왕과 창왕 때에 나라에 일이 많아서 종신대신들을 일망타진하였습니다. 창녕군 한 집안도 죽거나 귀양을 다 갔는데, 만약 부군이 기미를 봄이 밝지 못하고 물러남이 용감하지 못했다가 결국 한번 죽음을 힘써서 그것 때문에 멸족이 되었다면, 우리 김 씨 수천 명 종족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겠습니까? 부군의 의리를 더욱 믿지만 의리는 홀로 의리가 될 수 없고 인과 더불어 행해야만 넉넉하여 구차스럽지 않습니다. 오직 성씨가 바뀌어 나라가 교체되는 때에【역성의 때】 사서에 궐문이 많고 문장 또한 꺼리는 것이 있어서 기전 송헌은 아득하여 징험하기 어려우니 단지 "망복의 뜻을 지니고 온전히 관향으로 돌아왔다"는 여덟 글자만이 쓸쓸이 예전 보첩 중에 있으니 그 후손들의 한스러움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매우 다행스럽게도 만수산115)의 충의록이 나와서, 부군이 여덟 번 판사를 지냈다는 것과 두문동 72현116)과 한 몸으로 도를 같이 했다는 것이 《충의록》중에 찬란히 빛나니, 공자의 옛집 벽의 문서117)와 범백숭의 무덤인형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옛 보첩중의 여덟 글자와 부절처럼 딱 맞아서 비로소 지극한 보배는 땅속에 묻혀 있을 수 없고, 신비한 물건은 하늘이 아낌없이 응하고, 실덕(實德)과 지행(至行)은 오래될수록 더욱 빛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두문동 72현은 조정에서 높이 포장하고 사림이 공적으로 칭송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명성이 자자하지만, 우리 선조의 의행과 고절은 사라져서 오백 년 동안 들리지 않으니 이것은 후손들이 널리 고증하고 근거를 대어서 힘을 다해 천양(闡揚)하지 못한 탓이니, 후손들도 똑같이 과실이 있는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러 탄식하였습니다. 선조의 아름다움을 선양하는 것은 진실로 몸을 신칙하여 덕을 전진시키고, 서로 닦으며 힘을 써서, 효자들의 효도가 다함이 없도록118)함에 달려있지, 선조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상언(上言)하여 정려문을 하사하는 은전을 받고, 묘도문자를 청하여 묘를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날 성현의 충효성덕과 대절은 전모119) 전기 이하로부터 두루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찍이 세도를 위한 급급한 하나의 큰일이 아님이 없었는데 하물며 회옹(晦翁)이 '불인하다 책망한 것'과 우암(尤庵)이 '자식의 도리를 찬미한 것'은 진실로 편지에서 인용한 것과 같음이 있으니, 자손이 친절히 해야 할 업무에 있어서는 세도의 책임보다 급한 것이 있습니다. 이전에 겨를이 없어서 진실로 고증을 자세히 하지 못하고 충분히 징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회옹이 기롱한 것을 장차 무슨 말을 하여 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제 강산이 변했으니 정려를 세워 표창하는 것은 이미 옛날의 광경입니다. 다만 문장으로 드러내는 한 가지 일만이 있을 뿐인데, 대인의 큰 덕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문필가들이 그 사람에 대해 쓰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어찌해야 합니까? 嚮敎書, "追慕郡事府君遺蹪, 極致感慨之意, 思有以圖不朽." 百回擎讀, 旣以仰服孝思之無竆, 又以幸我心之先獲也.竊嘗聞, 見幾之謂明哲, 高蹈之謂達節, 遇事取義而不失身者次之.府君以麗氏世家, 爲宗室昌寧君壻, 少有意於俯取峻秩鉅祿, 將囊探芥拾之易易也.乃灼知時事之不可爲, 而不忍坐視宗國之淪喪, 且爲所存罔僕志之重且大.爲歸鄕, 自靖獻于先王, 其義則箕子之明夷也, 其跡則魯連之東海也, 視圃牧諸賢之或殉或遯, 名位之微顯, 雖有不同, 其所存所履之, 同出於惻怛節烈, 豈容軒輊於尙論之口哉? 蓋府君之此擧也, 循理也, 盡分也, 只見當下之當然而已, 豈計身家之利禍, 來裔之興替? 부군(府君) 죽은 아버지나 남자 조상에 대한 존칭이다. 달절(達節) 보통의 규범에 구애되지 않으나 절의에 맞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15년 기사에 "성인은 천명(天命)에 따라 행동할 뿐 분수에 구애받지 않고, 다음가는 현인은 분수를 잘 지키게 마련이고, 그 아래 어리석은 사람은 분수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聖達節 次守節 下失節)"라고 하였다. 망복지지(罔僕之志) 망국의 신하로서 충절 의리를 지켜 새로운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절개의 의미. 《서경(書經)》 〈미자편(微子篇)〉에, 기자가 "은이 멸망을 하더라고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겠다"〔商其淪喪 我罔爲臣僕〕는 내용에서 유래된 것이다. 자정자헌(自靖自獻) 사람마다 각자 자신의 도리를 다하여 선왕께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서경(書經)》 〈미자편(微子篇)〉에 나오는 말이다. 기자의 명이(明夷) 《주역(周易)》 〈명이괘(明夷卦) 육오(六五)〉의 "육오는 기자가 밝음을 감춤이니, 곧게 지킴이 이롭다.〔六五 箕子之明夷 利貞〕"에서 나온 말로, 은(殷)나라가 무도(無道)할 때 기자(箕子)가 밝음을 감추어 화를 면하면서도 곧음을 지킨 것을 말한다. 노중련(魯仲連)의 동해(東海) 노중련은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사람이다. 유세(遊說)하는 사람이 진(秦)나라를 황제로 떠받들자고 하자, 노중련이 말하기를, "저 진나라는 예의(禮義)를 버리고 수공(首功)을 숭상하는 나라이다. 만일 진나라를 황제로 받든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겠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권83 〈노중연추양전(魯仲連鄒陽傳)〉 우열이 논해질 수 원문의 '헌지(軒輊)'는, 수레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헌(軒)이라 하고,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을 지(輊)라 하는데, 망령되이 우열을 논하는 것을 말한다. 만수산(萬壽山) 개성 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두문동 72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두문동에 들어가서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72인. 두문동 태학생(太學生) 72인이라고도 불렀다. 공벽(孔壁) 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 노 공왕(魯恭王)이 집을 확장하는 공사를 하는 중에 공자의 구택(舊宅)을 허물자 벽 속에서 《상서(尙書)》,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이 나왔는데, 모두 선진(先秦)의 과두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한다. 선류불궤(善類不匱) 석류불궤(錫類不匱)의 오기인 듯하다. 석류(錫類)는 길이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뜻으로 효자를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의 "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는지라, 영원히 복을 받으리로다.〔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전모(典謨) 전은 《서경(書經)》의 요전, 순전이며, 모는 대우모, 고요모, 익직 등의 편을 가리킨다. 이것은 모두 제왕의 도리와 치국이 대도를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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