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부 김씨 전 병자년(1936) 烈婦金氏傳【丙子】 내가 태인(泰仁) 주산리(舟山里)에 절부(節婦)가 있다고 들은 지가 이미 몇 해가 되었다. 이번 봄에 그 마을을 지났는데, 마을 사람 김순거(金舜巨)는 노성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나를 위하여 절부의 일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절부는 강진(康津) 김영환(金水煥)의 아내이며 울산(蔚山) 김태환(金台煥)의 딸이다. 이윽고 시집오니 시부모는 돌아가셨으니, 남편의 숙부 숙모 모시기를 시부모 모시는 것처럼 하여 향촌에 이름이 났다. 남편이 병이 들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남편이 죽게 되자 예에 맞게 초상을 거행하였다.같은 마을에 최진문(崔進文)이란 자가 익명으로 편지를 던져 절부의 마음을 시험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이름을 적어 다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의 글이 무욕(誣辱)에 가까웠다. 이에 절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서 칼을 품고 그에게 달려가니,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도망가자 칼을 던져도 닿지 않았다. 이에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고 돌아왔는데, 불타오르는 마음이 거세어 원통함을 씻을 수가 없었다. 한번 죽어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로 마음먹고서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음독할 뜻을 보였지만 실패하여 사람들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 당시는 설날을 맞아 죽도록 힘든 몸을 일으켜서 음식을 장만하여 시부모와 남편의 영전에 올렸다. 다음날 다시 강한 독약을 먹고서 남편의 숙부와 숙모에게 고하기를 "남편이 죽었는데 구차하게 오늘까지 목숨을 유지한 것은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운명이 기구하여 이렇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였으니,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주머니에 화폐 15원과 장자에 비단 약간이 있으니 훗날 아들을 위해 쓰십시오."라고 부탁하고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유인의 나이는 28살이며 아이는 7살이었다.내가 듣고서 슬퍼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큰일이며,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지극한 정이다. 지금 왕성한 나이에 어린 아들을 버리고 죽으니 어찌 하고 싶은 바가 살고 싶은 것보다 더한 것이 있고 사랑한 바가 아들보다 심한 것이 있지 않으랴. 절부 같은 이는 다만 천하에 한 개 '의(義)'만 알고 이른바 자신과 아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고금 사대부 가운데 이름난 자를 낱낱이 헤아려보아도 오히려 이것을 하기는 어려운데, 이에 외딴 시골 한 부인이 능히 하였으니, 내가 이에 슬퍼하면서 마지않고 장한 일이라 여기기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수환(水煥)의 숙부 아무개가 본군의 사림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천양하고 기록을 보내 나에게 보여주니, 그 글이 순거의 말과 부합한다. 그 글에서 또한 '수환의 모친 의성 김씨 또한 18살에 과부가 되어 절개를 굳게 지키다가 타계하였다.'고 하였으니, 대개 절부의 절개는 참으로 그 자체로 뛰어난데, 한 집안에 시모와 며느리가 함께 절개를 지킨 아름다운 행실이 있으니, 오호라 훌륭하도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생각건대 절부의 죽음은 대단히 급격한 것으로, 저놈의 무욕(誣辱)을 들어 고을에 드러내고 관가에 알려서 만일 깨끗하게 무욕을 씻었다면 절로 죽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행동하여 무욕을 씻지 못하였다면 그 때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자들이 이른바 '강구해야 할 중도(中道)'에 해당하니,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개 세상이 쇠퇴하고 이치가 막힌 이후로 세력가(勢力家)가 행세한 것이 오래되었다. 지금의 향촌에 어찌 공론이 있으며, 지금의 관가에 어찌 공법(公法)이 있으랴. 세력가가 반드시 시비를 모호하게 하여 옳고 그름이 없어져서 다만 저놈의 무욕을 돕고 유인의 원한만 늘게 하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겠는가. 그러므로 나쁜 것을 예방할 때는 지나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말며 의리에 맞는 행동을 할 때는 엄격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야 하니, 절부는 일찍 이것에 대해 본 것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저 진문이란 놈을 보건대 마을에서 으스대면서 살아도 누가 머라 하는 사람이 없으며 절부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그러하니, 더구나 그 당시에랴. 오호라! 절부는 이에서 보면 현철한 여인이로다." 余聞泰仁舟山之里, 有節婦焉者, 已年所矣.今春過其里, 里人金舜巨, 老成信實人, 爲余道節婦事甚詳.節婦, 康津金水煥妻, 蔚山金台煥女.旣歸, 舅姑不在, 事夫之叔父母如舅姑, 譽著鄕井.夫嬰疾, 殫誠救護, 及當晝哭, 執喪如禮.同里有崔進文者, 匿名投書, 欲試節婦心而不得, 則再書書名, 辭涉誣辱, 節婦不勝義憤, 懷刃赴彼, 彼知罪奔躱, 擲刃不及, 乃打破其家産什物而歸, 燬心萬回, 寃不得雪, 決以一死自明, 裁一封書, 示志飮毒不中, 被人急救.時値正朝, 扶死執爨, 薦舅姑奠夫靈, 翌日再服重毒, 告夫之叔父母曰: "夫亡而苟延今日者, 待兒子稍長矣.命道崎嶇, 遭此莫雪之辱, 不若死之爲愈.囊有貨幣十五圓·箱帛若干, 他日用於兒子." 言託而逝, 時年二十八, 兒生七歲矣. 余聞而悲之曰: "死生, 人之大事, 愛子, 人之至情.今以盛年棄幼子而死之, 豈非以所欲, 有甚於生, 所愛, 有甚於子乎.若節婦者, 只知天下有一箇義字, 而不知有所謂身與子者矣.歷數今古士夫之顯名者, 猶難乎此, 乃以窮閭一婦人而能之, 余於是又不悲而壯之不已." 已而水煥之叔父某, 以本郡士林闡揚, 狀來示余, 其文與舜巨言相符, 其文又言'水煥之母, 義城金氏, 亦十八而孀, 苦節而終', 蓋節婦之節, 固自卓異, 而一家二節, 姑婦濟美, 嗚呼盛哉.論曰: "有謂節婦之死太遽, 擧彼誣辱, 暴之于鄕, 訴之于官, 如得雪白, 自無事乎死.如其未然, 死且未晩, 此乃學者所謂'講求中道'者, 似然而實不然.蓋自世衰理遏, 而勢行也久矣, 今之鄕黨, 豈有公論, 今之官司, 豈有公法.勢必糊塗是非, 無皀無白, 適足以助彼之誣, 而增此之寃, 安知其不然乎.故防慮不患其過, 裁義惟恐不嚴, 節婦蓋早見於此矣.今觀彼進文者, 揚揚州里間, 而莫敢誰何, 節婦死而猶然, 而况於當日乎.嗚呼, 節婦於是乎哲媛矣."後滄先生文集卷之二十五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