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황장연 전 병자년(1936) 黃長淵傳【丙子】 벗 오영호(吳永鎬)는 목포(木浦)에 임시로 살고 있는데,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거주하는 마을의 황 효자(黃孝子)는 행실이 대단히 뛰어나니, 오랑캐들177)이 뒤섞여 사는 지역에 재물을 어지러이 다투는 속에서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내가 듣고서 마음속에 담아 두었는데, 후에 그의 행실을 기록하여 보낸다.효자의 이름은 장연(長淵)으로 그 선조는 장수(長水) 사람 익성공(翼成公) 희(喜)의 후손이다. 대대로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송산리(松山里)에 거주하였는데, 가난에 내몰려 목포부(木浦府) 연동(蓮洞)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성품이 본래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이 어른 같았다. 집밖에 있을 때 좋은 맛난 음식이나 좋은 과일을 얻으면 먼저 맛보지 않고 품고 돌아와 드렸다. 어릴 때 학교에 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고용살이를 하면서 품삯을 받아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친이 병을 앓아 3년 동안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약과 맛있는 음식을 부친이 원하는 대로 바쳤으며 탕약은 반드시 한밤중 정화수에 담가두었다. 집이 공장과 약간의 거리가 있어서 낮에 틈을 내어 자주 찾아뵈었으며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려 넣었고 넓적다리를 베어 죽을 끓여 드렸는데, 110여 일이 지나서 돌아가셨다. 상례와 장례는 신식을 따르지 않고 고례를 따랐으며, 정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몸을 상하였다. 새벽마다 비바람과 서리, 눈을 피하지 않고 일어나는 즉시 묘에 문안을 드리고서 공장으로 일하러 갔다. 생선과 고기는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밤에는 사실(私室)에서 자지 않았다. 당시 그는 28세였는데, 그 아우 남연(南淵)도 또한 효성이 깊다고 한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람이 비록 타고난 선행이 있으나 학문에 종사하여 도리를 정밀하게 선택하고 견고하게 지키지 않으면 맞닥뜨린 상황에 처한 바와 사는 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지금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목포는 어떤 지역이며 그 곤궁함은 또한 어떠한가. 그러나 이 사람은 일찍이 배우지 않았어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모에 효도하여 살았을 때 섬기거나 죽었을 때 슬퍼함에 시종 더욱 정성을 다하였으니, 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행록에서 말한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럽다.'는 말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공자가 '다만 상지(上智)는 변하지 않는다.'178)라 하였는데, 나 또한 '오직 독실한 효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손가락을 찢거나 넓적다리를 자른 것은 선배들이 비록 중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지성이 아니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선비들이 의를 강론하는 날에 특별히 논하는 것이 옳다." 吳友永鎬僑居木浦, 過余言'所僑村黃孝子事行卓異, 顧此卉氈雜居之地, 貨利紛競之中, 乃有此人, 豈不難哉.余聞而心識之, 後又錄送其行曰: "孝子名長淵, 其先長水人翼成公喜后.世居海南郡花山面松山里, 爲貧窮所迫, 轉居木浦府之蓮洞.性本至孝, 自幼事親如成人, 在外得良饌美果, 不先入口, 懷而歸獻.早未就學, 每傭於工場, 受直金以奉兩親.其父得疾, 三年委臥床褥, 藥餌甘旨, 依願無闕, 湯藥必沒夜半井華水.家距工場稍遠, 晝間亦乘隙頻省, 疾革裂指往血, 割股煮粥, 過百十一日而歿.喪葬不遵新式而從古禮, 哀毁過節, 每晨不避風雨霜雪, 卽起省墓, 往傭於工場, 魚肉一不近口, 夜不寢私室.時年二十八, 其弟南淵, 亦有孝行云." 論曰: "人雖有所執之善行, 非從事學問而擇之精守之固者, 不能不隨所値所處所居, 而有所變移, 常情也.今夫此世何世, 木浦何地, 其貧窮又何如, 而斯人也, 未嘗爲學, 而能一意孝親, 生事死哀, 始終益勤, 非出於天性, 其能之乎.行錄所謂'性至孝'者, 信不誣矣.孔子曰: '惟上智不移', 吾亦曰: '惟篤孝不移', 若夫裂指割股, 先輩雖言其過中, 然非至誠, 決不能爲矣.此則別論於士子講義之日, 可也." 오랑캐들 전구(氈裘)는 모전(毛氈)으로 만든 갖옷인데, 북쪽 오랑캐를 가리킨다. 훼복(卉服)은 풀옷으로, 남쪽 오랑캐를 가리킨다. 목포에 여러 서양인들이 모여든 것을 말한다. 오직……않는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가 없다.〔唯上知與下愚 不移〕"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노진택 전 정축년(1937) 魯鎭澤傳【丁丑】 나는 사람들의 선행을 기록하기 좋아하는데, 시골의 일반 백성들에 대해 천진에 맡겨 꾸미지 않는 것을 귀하에 겨이고 그들의 자취가 사라져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더욱 그들에 마음을 쏟는다. 친척 낙춘(洛春)이 나에게 와서 책을 읽으며 자신이 사는 파산리(巴山里)에 노진택(魯鎭澤)이란 사람이 조부를 잘 섬기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진택이 겨우 10살 무렵에 그 부친을 여의었다. 당시 그 조부의 나이가 일흔이었으며 아우는 젖먹이였는데, 밖으로 가까운 친척이 없었으며 안으로 집안 살림을 꾸려갈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 모친이 과부로 안방을 지키면서 아이들이 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세월이 살처럼 흘러 진택이 이윽고 장성하여 아내를 두었는데, 늙은 조부는 아직도 집에 있었다. 진택은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여 고용살이를 하면서 술과 고기를 이바지 하였으니 이십 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집안의 전곡(錢穀)은 반드시 조부에게 맡겨두었으며 사용할 때 아뢰고 가져갔으니, 늙어서 가사를 맡길 나이181)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작은 출입이나 하찮은 물품이라도 아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모두 고하였다. 이윽고 조부가 정신이 혼미하여 대소변의 실수를 하여 옷과 자리가 더러워지고 냄새가 났는데, 진택이 일 때문에 밖에 있으면 그 아내와 아우가 앞 다퉈 청소하고 깨끗하게 세탁하였으니, 이는 집안사람들이 모두 진택의 효성에 감화된 것이다."라 하였다.내가 듣고서 감탄하기를 "진택이 가정의 교육과 문자를 배웠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지만 능히 이와 같은데, 이와 같은데도 또 찬양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말한 '천진에 맡긴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전함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효자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효손이 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은 어째서인가. 친함으로 말하자면 조부는 부친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부를 잘 섬김은 참으로 효가 되지만 아들을 잃은 조부를 잘 섬기는 것은 더욱 큰 효가 되니, 어째서인가. 죽은 부친의 다하지 못한 효를 대신 다하는 것은 조부에 효도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부친에 효도하는 것이다. 내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하에 조부에 효도하면서 그 부모에 불효한 자는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노군이 그 모친을 잘 모시는 것은 지금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미뤄서 알 수 있다. 오호라! 내가 26살에 선친을 여의고 조모를 모신 것이 모두 8년이었는데, 94살의 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셨다. 뜻을 받들고 맛난 음식의 봉양을 뒤미처 생각하면 노군에 부끄러움이 많다. 이를 쓰면서 감개에 젖은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余好記人善行, 於村閭匹庶, 貴其任眞不餙, 惜其跡泯無傳, 尤致意焉.宗人洛春來余讀書, 爲說其所居巴山里人魯鎭澤善事祖父事曰: "鎭澤甫十餘, 喪其父.時有祖年七十, 弟在乳, 外無强近之親, 內無幹家之人, 惟其母煢然守帷, 待兒子長成.歲月荏苒, 鎭澤已壯有室, 老祖尙在堂, 鎭澤極其孝養, 以至行傭而供酒肉, 二十年如一日.家中錢穀, 必任置其祖, 用時稟告持去, 不以其老傳而自專, 少出入微細事, 一皆告之, 不差尺寸.旣而其祖神昏, 有失便溺, 衣席臭汙, 鎭澤執役在外, 則其妻與弟掃除澣潔, 爭先爲之, 是則家人皆感化鎭澤之孝也." 余聞之歎曰: "未聞鎭澤有庭訓之襲文字之識, 而能如是, 如是而又無人贊揚之者, 余所謂'貴任眞而惜無傳'者, 此也." 論曰: "孝子固難, 而孝孫尤爲難, 何也.以親言之, 則祖不如父也, 善事祖, 固爲孝, 而善事喪子之祖, 尤爲孝, 何也.代盡亡父未盡之孝者, 非惟孝祖而亦爲孝父也.余故曰: '天下未有能孝其祖而不孝其父母者'也.若魯君之善事其母, 今雖不言, 可以推知矣.嗚呼, 余於弱冠有六, 背先子奉祖母, 凡八年, 壽九十四而卒, 追念志物之養, 有愧魯君多矣.書此而不勝感歎云. 늙어서……나이 '노전(老傳)'은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70세를 '노(老)'라고 하며 이때에 가사(家事)를 아들에게 전한다.〔七十曰老而傳〕"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지선 전 李止善傳 이지선(李止善)은 나와 같은 마을 사람이다. 집안이 대단히 가난하여 살림을 꾸려갈 수 없을 정도였는데, 부모가 늙고 병들어 남의 집에서 품 팔아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갔다. 맛난 음식을 얻으면 품에 넣어 돌아가 부모에게 올렸으며, 얻은 담배도 또한 가져가 바쳤다. 일한 돈으로 부모의 식량을 마련하였으니, 십 수 년을 이처럼 하였다.30살이 되어도 장가를 들지 못하자 어떤 사람이 권하기를 "천지 만물도 모두 짝이 있는데, 더구나 사람이랴. 아들을 위해 아내를 두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부모가 능력이 없으면 내가 마땅히 스스로 해야 하니, 그대처럼 곤궁한 자는 집을 떠나 세용(歲傭)을 하여 재물을 모아서 아내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제대로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지선이 "내가 집을 하루 떠나면 부모는 하루를 굶으며 이틀을 떠나면 이틀을 주리게 되니, 오래 되면 부모는 목숨을 보존할 수 없다. 내가 어찌 차마 아내를 두기 위해 부모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여겨 '그가 비록 집을 떠나더라도 산 사람은 입에 거미줄 칠 이치가 없는데, 저가 고집을 피워 신세를 그르친다.'고 여겼다. 심지어는 기롱하여 업신여기는 자까지 있었는데, 오직 조자정(趙子貞)은 이 사람은 효자라고 하고서 조금 물품을 보내 보살펴 주었다.내가 이에 오랫동안 감탄하면서 "지금 윤리가 무너져서 비록 부유하여 편안하게 지내는 자들도 파도에 휩쓸리듯 그 부모를 잊고서 돌아보지 않는데, 이 사람은 가난 속에서 고생하면서도 다만 부모만 생각하고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으며 아울러 아내를 두는 급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천성적으로 효성이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사람들이 오히려 이것으로 기롱하고 업신여기는 구설로 삼으니, 오호라! 인심의 변함과 천리가 어두워짐에 더욱 상심할 뿐이다."라 하였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지선의 효는 참으로 숭상할 만하다. 다만 맹자가 말하기를 '불효가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이 없는 것이 제일가는 불효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순 임금이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아내를 얻었는데,182) 권하거나 기롱하는 자의 견해가 만약 이에서 나왔다면 또한 이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 순 임금이 고하지 않고 아내를 얻은 것은 고하지 않았을 뿐이니 부모에 무슨 해를 끼쳤는가. 만약 지선이 집을 떠났다면 부모는 목숨을 보존하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목전의 부모를 지키지 못하면서 훗날의 효자를 후손으로 두려 하겠는가. 만일 목숨을 유지했더라도 그것은 요행에 불과하니 천리의 올바름이 아니며 인심의 편안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에게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칠 때 다만 눈앞의 도의를 구하게 하며 훗날의 이익을 계교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 한다." 李止善, 余同里人.家極貧窮, 無以爲生, 父母老且病, 傭人家日食.有美饌則懷歸獻親, 所得烟草, 亦如之.直金以供親粮, 如是十數年.年三十, 未娶, 人有勸者曰: "天地萬物, 皆有其偶, 况於人乎.爲子有室, 父母之心, 然父母不能, 我當自爲, 盍觀如汝之窮者, 離家作歲傭聚財, 以至有室乎.汝殆未思也." 止善曰: "吾離家一日, 則親有一日之餓, 二日則有二日之餓, 久則親必不保矣, 吾何忍圖有妻子而見親之不保乎." 人多悶其癡呆以爲'渠雖離家, 生人無蛛絲罥口之理, 渠自執迷, 誤却身世', 至有譏侮者, 獨趙子貞謂是孝子, 略有賙護.余爲之感歎者, 久曰: "今倫理壞敗, 雖富厚安平者, 滔滔皆忘其親而不顧, 惟斯人空乏勞苦之中, 但知有親而不知其身, 幷不念室家之急務, 非性於孝者能然乎.然而人猶有以此作譏侮之資者, 嗚呼, 人心之變, 天理之晦, 更可寒心." 論曰: "止善之孝, 固可尙矣.但孟子有言, '不孝有三, 無後爲大.' 故舜不告而娶, 勸譏者之見, 若出乎此, 則不亦有理乎.余曰: '否, 不然, 舜之不告, 則不告而已矣.於親何損.使止善而離家, 則親不可保矣, 焉有不保親於目前, 而求有後於他日之孝子乎.如或得保, 不過爲徼倖, 非天理之正, 人心之安矣.故君子敎人處事之方, 只求當下之道義, 不計後日之功利也.'" 맹자가……얻었는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그중에 후사를 잇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 순 임금이 부모에게 아뢰면 장가갈 수 없어서 아뢰지 않고 장가갔으니, 이는 후사를 두지 못할까 염려해서였다. 그래서 군자는 부모에게 아뢴 것과 같다고 여겼다.[不孝有三, 無後爲大. 舜不告而娶, 爲無後也. 君子以爲猶告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유인 김씨 전 경진년(1940) 孺人金氏傳【庚辰】 유인 김씨는 관향이 부령(扶寧)으로 고려 명현 문정공(文貞公) 구(坵)183)의 후손이다. 학생 인성(麟成)의 증손이며 석규(錫圭)의 손녀이며 경순(景淳)의 따님이다. 증조와 부친은 효성으로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았으며, 조부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 통정(通政) 택려(宅麗)의 따님으로, 철종 경술년(1850년)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20살에 의성 김귀재(金貴載)에게 시집갔으니, 정민공(貞敏公) 지수(地粹)의 팔대 손부가 된다. 유인은 18세에 부친을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였으며 모친을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자매간에 우애하였다. 시집을 가게 되자 시부모를 존숭하고 남편에게 공경하였으며 동서간에 화목하였다. 30여 세에 남편이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러 넣어주었으나, 끝내 목숨을 구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평생 근심을 머금고 한번도 이를 보이지 않았으며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울러 남의 집에 오가는 것도 끊었는데, 다만 한 달에 한 번 모친을 찾아뵈었으니 이마저도 노년 이후의 일로 가까운 거리에 살았기 때문이다.아들이 없어 남편의 조카 진렬(鎭冽)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두 딸은 파평 윤상국(尹相國)과 광산 김오수(金鰲洙)에게 시집갔다. 유인은 성품이 염결하여 비록 대단히 가난하여 굶주렸지만 조금도 의리에 맞지 않는 물건은 취하지 않았으며 아들과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또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대개 종신토록 가난하며 홀로 지내는 정상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신축년(1901년) 7월 8일 돌아가시니 향년 52세로, 아무 산 아무 좌에 장사지냈다. 이웃에서 혀를 차고 안타까워하면서 "열부가 떠나갔구나."라고 하였으며, 모친은 탄식하면서 "우리 딸의 용모가 비록 아름답지는 않지만 실로 현철한 여인이다. 어찌 다만 효열로써만 논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에서 유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돌아가신 지 3년 뒤에 사림에서 그 행실을 문서로 천거하여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오호라! 유인은 나의 둘째 고모이다. 기억하기로 예전 내가 14살 때 계재(溪齋)에서 시도(詩道)를 익힐 때 우연히 높은 등수에 올랐는데, 여러 사람들이 나를 에워싸고 말에 태워 앞뒤로 빽빽하게 따라오면서 그 시를 크게 외위며 나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유인의 문 앞을 지나 나의 집에 이르도록 유인은 나와 보면서 희색을 띄었으며 다음날 심부름꾼을 보내 더욱 힘쓰라고 권면하였으니, 참으로 나를 깊이 사랑하였다. 지금 묘문(墓文)을 지어서 행실과 치적을 자세히 기술하여 훗날 비석을 새기는 데 대비하려 하였으나. 그 후사가 된 아들과 장손이 모두 죽어 더불어 의논할 자가 없다. 그러므로 다만 작은 소전을 지었으나, 당시의 추천한 문서도 또한 볼 수가 없기에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대략 서술하여 이에 그친다.경진년 유인의 기일에 쓰다. 孺人金氏, 籍扶寧, 高麗名賢文貞公坵后.學生麟成曾孫, 錫圭孫, 景淳女, 曾祖及考孝聞表宅, 祖有文行.妣, 靈光金氏通政宅麗女, 以哲廟庚戌某月日生.年二十歸義城金貴載, 爲貞敏公地粹八世孫婦.孺人十八, 喪父致哀毁, 孝事母友弟妹.及適人, 尊舅姑敬夫子和妯娌, 三十餘, 夫病革, 斷指注血, 竟不救, 平生銜恤, 一不啓齒, 不參衆會, 幷絶往還, 惟課月見母夫人, 亦向老後事而居近故也.無男, 取夫之從子鎭冽爲后, 有二女, 適坡平尹相國·光山金鰲洙.孺人性廉潔, 雖極寒餓, 毫不取非義物, 子與婦不適意, 亦無言, 蓋其終身貧窮煢獨之狀, 何可盡言.以辛丑七月八日卒, 壽五十二, 葬于某山某坐.隣里嗟惜曰: "烈婦逝矣." 母夫人歎曰: "吾女貌雖不揚, 實哲媛也, 豈但以孝烈論哉." 斯可以知孺人矣.沒後三年, 士林狀薦其行, 載《三綱錄》.嗚呼, 孺人, 余仲姑也.記昔余年十四, 肄詩道溪齋也, 偶居高等, 衆擁余乘馬, 前後簇行, 歌咏其詩, 以爲榮.過孺人門至余家, 孺人出觀有喜色, 翌日專至而申勉之, 眞愛之深也.今欲爲撰墓文, 細述行治, 以備他日顯刻, 然其所後子及長孫俱沒, 無可與論者.故只得立一小傳, 而當時薦狀, 亦不可得見, 略書親所見聞者, 止此云爾.庚辰歲孺人諱辰書. 김구 1211~1278.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말기의 학자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 《북정록》을 지었으며, 우간의대부, 정당문학·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통문관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장용·유경 등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실록을 찬수하고, 《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열부 김씨 전 병자년(1936) 烈婦金氏傳【丙子】 내가 태인(泰仁) 주산리(舟山里)에 절부(節婦)가 있다고 들은 지가 이미 몇 해가 되었다. 이번 봄에 그 마을을 지났는데, 마을 사람 김순거(金舜巨)는 노성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나를 위하여 절부의 일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절부는 강진(康津) 김영환(金水煥)의 아내이며 울산(蔚山) 김태환(金台煥)의 딸이다. 이윽고 시집오니 시부모는 돌아가셨으니, 남편의 숙부 숙모 모시기를 시부모 모시는 것처럼 하여 향촌에 이름이 났다. 남편이 병이 들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남편이 죽게 되자 예에 맞게 초상을 거행하였다.같은 마을에 최진문(崔進文)이란 자가 익명으로 편지를 던져 절부의 마음을 시험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이름을 적어 다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의 글이 무욕(誣辱)에 가까웠다. 이에 절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서 칼을 품고 그에게 달려가니,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도망가자 칼을 던져도 닿지 않았다. 이에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고 돌아왔는데, 불타오르는 마음이 거세어 원통함을 씻을 수가 없었다. 한번 죽어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로 마음먹고서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음독할 뜻을 보였지만 실패하여 사람들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 당시는 설날을 맞아 죽도록 힘든 몸을 일으켜서 음식을 장만하여 시부모와 남편의 영전에 올렸다. 다음날 다시 강한 독약을 먹고서 남편의 숙부와 숙모에게 고하기를 "남편이 죽었는데 구차하게 오늘까지 목숨을 유지한 것은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운명이 기구하여 이렇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였으니,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주머니에 화폐 15원과 장자에 비단 약간이 있으니 훗날 아들을 위해 쓰십시오."라고 부탁하고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유인의 나이는 28살이며 아이는 7살이었다.내가 듣고서 슬퍼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큰일이며,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지극한 정이다. 지금 왕성한 나이에 어린 아들을 버리고 죽으니 어찌 하고 싶은 바가 살고 싶은 것보다 더한 것이 있고 사랑한 바가 아들보다 심한 것이 있지 않으랴. 절부 같은 이는 다만 천하에 한 개 '의(義)'만 알고 이른바 자신과 아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고금 사대부 가운데 이름난 자를 낱낱이 헤아려보아도 오히려 이것을 하기는 어려운데, 이에 외딴 시골 한 부인이 능히 하였으니, 내가 이에 슬퍼하면서 마지않고 장한 일이라 여기기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수환(水煥)의 숙부 아무개가 본군의 사림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천양하고 기록을 보내 나에게 보여주니, 그 글이 순거의 말과 부합한다. 그 글에서 또한 '수환의 모친 의성 김씨 또한 18살에 과부가 되어 절개를 굳게 지키다가 타계하였다.'고 하였으니, 대개 절부의 절개는 참으로 그 자체로 뛰어난데, 한 집안에 시모와 며느리가 함께 절개를 지킨 아름다운 행실이 있으니, 오호라 훌륭하도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생각건대 절부의 죽음은 대단히 급격한 것으로, 저놈의 무욕(誣辱)을 들어 고을에 드러내고 관가에 알려서 만일 깨끗하게 무욕을 씻었다면 절로 죽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행동하여 무욕을 씻지 못하였다면 그 때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자들이 이른바 '강구해야 할 중도(中道)'에 해당하니,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개 세상이 쇠퇴하고 이치가 막힌 이후로 세력가(勢力家)가 행세한 것이 오래되었다. 지금의 향촌에 어찌 공론이 있으며, 지금의 관가에 어찌 공법(公法)이 있으랴. 세력가가 반드시 시비를 모호하게 하여 옳고 그름이 없어져서 다만 저놈의 무욕을 돕고 유인의 원한만 늘게 하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겠는가. 그러므로 나쁜 것을 예방할 때는 지나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말며 의리에 맞는 행동을 할 때는 엄격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야 하니, 절부는 일찍 이것에 대해 본 것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저 진문이란 놈을 보건대 마을에서 으스대면서 살아도 누가 머라 하는 사람이 없으며 절부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그러하니, 더구나 그 당시에랴. 오호라! 절부는 이에서 보면 현철한 여인이로다." 余聞泰仁舟山之里, 有節婦焉者, 已年所矣.今春過其里, 里人金舜巨, 老成信實人, 爲余道節婦事甚詳.節婦, 康津金水煥妻, 蔚山金台煥女.旣歸, 舅姑不在, 事夫之叔父母如舅姑, 譽著鄕井.夫嬰疾, 殫誠救護, 及當晝哭, 執喪如禮.同里有崔進文者, 匿名投書, 欲試節婦心而不得, 則再書書名, 辭涉誣辱, 節婦不勝義憤, 懷刃赴彼, 彼知罪奔躱, 擲刃不及, 乃打破其家産什物而歸, 燬心萬回, 寃不得雪, 決以一死自明, 裁一封書, 示志飮毒不中, 被人急救.時値正朝, 扶死執爨, 薦舅姑奠夫靈, 翌日再服重毒, 告夫之叔父母曰: "夫亡而苟延今日者, 待兒子稍長矣.命道崎嶇, 遭此莫雪之辱, 不若死之爲愈.囊有貨幣十五圓·箱帛若干, 他日用於兒子." 言託而逝, 時年二十八, 兒生七歲矣. 余聞而悲之曰: "死生, 人之大事, 愛子, 人之至情.今以盛年棄幼子而死之, 豈非以所欲, 有甚於生, 所愛, 有甚於子乎.若節婦者, 只知天下有一箇義字, 而不知有所謂身與子者矣.歷數今古士夫之顯名者, 猶難乎此, 乃以窮閭一婦人而能之, 余於是又不悲而壯之不已." 已而水煥之叔父某, 以本郡士林闡揚, 狀來示余, 其文與舜巨言相符, 其文又言'水煥之母, 義城金氏, 亦十八而孀, 苦節而終', 蓋節婦之節, 固自卓異, 而一家二節, 姑婦濟美, 嗚呼盛哉.論曰: "有謂節婦之死太遽, 擧彼誣辱, 暴之于鄕, 訴之于官, 如得雪白, 自無事乎死.如其未然, 死且未晩, 此乃學者所謂'講求中道'者, 似然而實不然.蓋自世衰理遏, 而勢行也久矣, 今之鄕黨, 豈有公論, 今之官司, 豈有公法.勢必糊塗是非, 無皀無白, 適足以助彼之誣, 而增此之寃, 安知其不然乎.故防慮不患其過, 裁義惟恐不嚴, 節婦蓋早見於此矣.今觀彼進文者, 揚揚州里間, 而莫敢誰何, 節婦死而猶然, 而况於當日乎.嗚呼, 節婦於是乎哲媛矣."後滄先生文集卷之二十五 終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26 卷之二十六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2년 이병원(李秉元)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申十一月十日 李秉元 壬申十一月十日 李秉元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2년 11월 10일에 아우 이병원이 형님에게 《주례》 한 책이 부족하여 애석하다고 하고, 책값을 보내고 시렁에 쌓아둔 책도 보낸다고 한 간찰 1932년 11월 10일에 아우 이병원(李秉元)이 형님에게 각종 책자를 잘 받았는데 《주례》 한 책이 부족하여 애석하다고 하고, 책값을 보내고 시렁에 쌓아둔 책도 보낸다는 편지이다.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자신은 날마다 어지러운 가운데 각종 책자를 잘 받아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다만 《주례(周禮)》 한 책이 부족하여 애석하다고 하였다. 《팔자백선(八子百選)》 값 2원(圓)은 올려 보내고, 《예기(禮記)》와 《좌전(左傳)》을 보내 주셔서 매우 감사하다고 하였다. 자신이 보내는 책은 불필요해서 시렁에 쌓아두었던 것으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보낸다고 하고, 《주서(朱書)》 한 권도 첨부하니 군더더기는 아닐 것이라면서 받은 책과 보낸 책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별지가 있는데, 각 책의 가격을 적어놓았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918년부터 1922년까지의 천금록(千金錄)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戊午 戊午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식리(殖利)의 현황을 기재해놓은 장부인 천금록(千金錄)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식리(殖利)의 현황을 기재해놓은 장부인 천금록(千金錄)이다. 각 시기별로 대부 금액(계돈)과 차용인, 날짜, 상환 금액 등을 차례로 기재하였다. 차용인 옆에는 보증인 이름을 적어놓기도 했으며, 여러 곳에 도장을 찍어놓기도 했다. 또 미수기계전(未收記稧錢)이라 하여 계돈을 아직 갚지 않은 현황을 기재해놓았다. 표지에는 임술년(1922)의 조와 식리의 총액을 추기해놓았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922년 남석(藍石)의 조(租) 방매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壬戌正月日 壬戌正月日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2년 정월에 남석(藍石)의 조(租) 8석을 방매한 장부 1922년 정월에 남석(藍石)의 조(租) 8석을 방매한 기록이다. 매득자 이름, 조의 수량, 금액, 날짜 등이 기재되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단숙명 【최광호를 계칙함. 을축년(1925)】 端肅銘 【戒崔光鎬 乙丑】 너의 몸을 단정히 하고, 端爾躬,너의 얼굴을 엄숙히 하라. 肅爾容.너의 뜻을 평안히 하고, 安爾意,너의 기운을 누르라. 降爾氣.너의 음성을 조용히 하고, 靜爾聲,너의 행동을 서서히 하라. 徐爾行.의관(衣冠)을 깨끗이 하고, 潔衣巾,정신을 맑고 밝게 하라. 爽精神.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玆無得,어디에다 힘을 쓰랴. 惡乎力.너의 멋진 모습을 키우라. 壯爾帥,너의 얽힌 장애를 깨뜨려라. 破爾累.인자와 현능을 가까이 하고, 親仁賢,글 읽고 책 보는데 애쓰라. 劬簡編.처음부터 부지런히 하고, 始勤止,끝까지 그치지 말라. 終無已. 端爾躬, 肅爾容; 安爾意, 降爾氣; 靜爾聲, 徐爾行; 潔衣巾, 爽精神。 玆無得惡乎力, 壯爾帥破爾累, 親仁賢劬簡編, 始勤止終無已。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상지명 【최재천에게 증정함. 병인년(1926)】 尙志銘 【贈崔在千 丙寅】 어여쁘다 너의 어린 나이, 嘉乃妙齡,열 서너댓 살206) 되었구나. 間乎象勺,안연(顔淵)은 스승을 모셨고, -안연은 14세에 공자 문하에 왔다-淵逮從師,【顔子十四歲從孔門】공자님은 학문에 뜻을 두려하셨다. 尼將志學.먼 옛 사람들 돌아보며, 緬惟古人,향기로운 발자취 따라가지 않을 텐가. 盍追芳躅,다루지 말 것은 자질이고, 不及者質,높이 올릴 것은 의지이다. 可尙者志.지극한 의지로 기(氣)를 움직이고 志至動氣,철인의 가르침을 밝게 보이라. 哲訓昭示,전일한 의지로 정신을 응집하고 志專疑神,현자의 격언을 끝까지 다 이루라. 格言究致,움직인 다음에 고여 응집하고 旣動乃凝,자질이 변하여 조화로워진다 質變純如.저 공자와 안연 또한 維尼若淵,어찌 다를 바가 있었으랴! 豈在他歟?오호라, 의지로다! 於乎志乎,이를 높이 올릴지라. 其尙只且. 嘉乃妙齡, 間乎象勺, 淵逮從師【顔子十四歲從孔門】, 尼將志學。 緬惟古人, 盍追芳躅, 不及者質, 可尙者志, 志至動氣, 哲訓昭示, 志專疑神, 格言究致, 旣動乃凝, 質變純如。 維尼若淵, 豈在他歟? 於乎志乎, 其尙只且。 열 서너댓 살 원문은 '상작(象勺)'인데, 상(象)은 15세, 작(勺)은 13세를 말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나이 열셋이면 음악을 배우고 시를 외우며 작(勺)의 춤을 춘다. 성동(成童 : 15세)에는 상(象)의 춤을 춘다.[十有三年, 學樂誦詩, 舞勺. 成童舞象。]"이고 하였다. 《시경》의 시는 노래 가사인데, 상(象)은 시 〈유청(維淸)〉의 곡이고, 작(勺)은 〈작(酌)〉의 곡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경가 상길의 자사 【병인년(1926)】 朴敬可【相吉】字辭 【丙寅】 태만하면 멸망이 의당하고 怠則滅可,공경하면 길상이 의당하니, 敬則吉可,천년 이어온 단서(丹書)291)의 도리 丹書千秋,누가 그것을 의당하다 않으리. 孰不曰可.사람이 살면서 길상 얻으려면 人生獲吉,지극한 서원이 그것을 허가하리 至願攸可,어찌 스스로 공경하지 않아 胡不自敬,구하면서 못 얻을 길을 고집하랴. 求必未可.'공경하라' 이 한 방도 敬之之方,성현 가르침의 지극한 길이니, 聖訓至可,고요함 속에 지니고 길러서 靜而存養,내 안이 곧으면 이미 얻은 것이니,292) 直內旣可.움직임 속에 보고 살펴서 動而省察,지니고 일삼음 역시 얻으리니, 執事亦可,이를 일러 길상을 구함이라 하니 斯謂求吉,경(敬)이 아니면 얻지 못하네. 非敬莫可.길상 구하는 박상길의 자는 朴相吉字,경(敬)으로 얻으니 경가(敬可)가 맞네. 敬可是可,부지런히 애쓸지니 勉哉勉哉,경가(敬可)여 경(敬)하여 얻으라. 敬可敬可. 怠則滅可, 敬則吉可, 丹書千秋, 孰不曰可。 人生獲吉, 至願攸可, 胡不自敬, 求必未可。 敬之之方, 聖訓至可, 靜而存養, 直內旣可。 動而省察, 執事亦可, 斯謂求吉, 非敬莫可。 朴相吉字, 敬可是可, 勉哉勉哉, 敬可敬可。 단서(丹書) 붉은 새[赤雀]가 물고 왔다는 상고(上古)의 도(道)를 적은 글로서, 주(周) 무왕(武王)이 등극한 후 옛 황제(黃帝)•전욱(顓頊)의 도(道)가 남아있는가를 묻자 상보(尙父)가 단서에 적혀 있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공경하라……얻은 것이니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공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 외면을 방(方)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는 구절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23년 이대순(李大淳) 우편물 수령증 4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12.5.7 趙壽煥 李大淳 (大正)12.5.7 趙壽煥 李大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이대순(李大淳)이 조수환(曺壽煥)에게 보낸 우편물의 수령증 1923년 이대순(李大淳)이 조수환(曺壽煥)에게 보낸 우편물의 수령증이다. 인쇄물이며, 상란 위에 우편물수령증(郵便物受領證)이라 되어 있다. 항목으로는 수령인씨명, 차출인숙소씨명, 우편물구별, 인수번호, 우편료, 중량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수취인은 조수환이며, 차출인은 복내면 시천리에 사는 이대순이고 도장을 날인하였다. 일부인(日附印)에는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있다.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23년 이대순(李大淳) 우편물 수령증 5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12.8.23 趙壽煥 李大淳 (大正)12.8.23 趙壽煥 李大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이대순(李大淳)이 조수환(曺壽煥)에게 보낸 우편물의 수령증 1923년 이대순(李大淳)이 조수환(曺壽煥)에게 보낸 우편물의 수령증이다. 인쇄물이며, 상란 위에 우편물수령증(郵便物受領證)이라 되어 있다. 항목으로는 수령인씨명, 차출인숙소씨명, 우편물구별, 인수번호, 우편료, 중량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수취인은 조수환이며, 차출인은 복내면 시천리에 사는 이대순이고 도장을 날인하였다. 일부인(日附印)에는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팔은동 삼형제를 위로하며 갑자년(1924) 慰金聖八殷東三兄弟 ○甲子 예서(禮書) 이외에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산천이 달라지며 삼강이 끊어지고 문란해진 것이 아! 오래 되었습니다. 절개와 행실이 우뚝하고 돈독한 선비와 덕이 훌륭한 이들이 죽어서 이미 다 사라졌으니, 신령한 빛이 드높고 지주(砥柱)처럼 우뚝한 사람으로는 오직 선영감(先令監)이 계실 뿐입니다. 병환이 비록 점점 깊어진다 하더라도 정신은 날마다 또렷하고 얼굴빛은 옥처럼 깨끗하니 생각건대 8,90세까지 수를 누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세도(世道)가 의지할 것이 있어 마침내 하늘이 되돌아오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루 저녁에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아마 하늘이 끝내 이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은 듯합니다. 크게 놀라고 대단히 애달프니 천하를 위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말할 겨를이 없었습니다.삼가 생각할 때, 여러 상주들의 효성스런 마음은 천성으로 타고났으니, 어버이를 잃은 슬픔과 국가를 위한 고통으로 어린 아이처럼 울어 간과 폐가 타들어 가는 상황을 마치 눈으로 목격한듯하여 말하자니 슬프고 슬픕니다. 삼가 듣자니, 몸을 해칠 정도로 슬퍼하는 것을 경계하고 가업을 잘 잇는 것이 효라고 합니다. 여러 상주들은 충의에 힘써 세상을 바로잡거나 학문을 궁구하여 도를 제창함으로써 선영감의 뜻과 사업을 빛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른과 아이들의 큰일이니 전도가 이미 아득하고 책임이 또한 무겁습니다. 얼굴이 시커멓고 수척하여 뼈만 앙상함으로써 목숨을 먼저 상하게 하여 일생의 큰 성취를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간절한 소망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禮書之外 夫復何言? 山異河改, 綱絕維紊, 吁亦久矣! 卓節敦履, 搢紳長德, 喪逝已盡, 巋其靈光, 矻其砥柱, 惟先監在爾. 患節雖云侵尋, 神精日朗, 顏彩玉潔, 意其克享耄期. 既今世道之有賴, 終得天返之復覩, 忽焉一夕箕騎遽啟, 豈天終無意乎斯世也耶? 大驚深怛, 實爲天下公私不暇道也. 伏想僉哀執孝思根天, 風樹之悲, 家國之痛, 嬰哭孺泣, 肝乾肺焦, 如在目撃, 言之慽慽. 竊聞毀瘠是戒, 繼述爲孝, 惟僉哀執, 或勵忠義而匡世, 或究學問而倡道, 用光先令監志事. 是大小大事, 而前途既遠, 其任且重. 勿以靣墨骨立, 先傷厥生, 有妨一生大就. 區區不勝懇望之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가석기 【임신년(1932)】 可石記 【壬申】 가석(可石) 박공(朴公)은 옛 마을에서 석담(石潭)이라 일컬어진 것으로 인하여 꿈에 어떤 대인 선생(大人先生)이 지금의 호를 써서 바꿔 주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 호로 삼았다. 그러나 대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한 내려준 호가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기에 그의 벗인 나 김택술이 그 의미를 풀이하여 말하였다."'석(石)'은 단단하고 굳센 물건이며, '가(可)'는 허여한다는 말이네. 공은 단단하고 굳센 사람이니, '석'이라 허여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하네. 그 마을에서 예전 일컬음도 또한 우연이 아니고, 자나 깨나 예전 시대의 현인을 생각하여 지하에서의 명령이 있게 된 데에 이른 것이네. 이미 그 덕을 헤아려 실제에 맞는 호를 내려 주고, 아울러 혐의를 피하여 현인을 공경하는 예를 온전히 갖추게 한 것도 또한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이 신(神)을 감동시킨 결과이니, 대인 선생은 참으로 석담(石潭) 이 선생(李先生 이이(李珥))일 것이네.삼가 생각건대, 그 능력을 허여하되 부족한 것을 권면하는 것은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뜻이지만, 신이 '가석'이라 고해준 뜻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듯하니, 내가 청컨대 그 깊은 뜻을 대신 드러내 보겠네.대저 돌 가운데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옥이지만, 옥도 또한 돌이네. 단단하고 굳센 것만으로도 비록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는 양질의 옥이 된 뒤에야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네. 이는 군자가 강직하고 굳세며 견고하고 강인한 의지로 의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민연(泯然)하여 마음이 인(仁)에 편안한 것만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네.공은 잘하는 것과 부족한 것 사이에서 의당 스스로 힘쓸 바를 알았고, 마침내 신의 은혜를 누렸으니, 꿈이 실제의 일이 아니라고 하여 그 호를 삼은 자도 미혹하고, 그것을 풀이한 자도 미혹하다고 의심을 두는 것은 고루한 일이네. 대저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본 것에 대해 실제의 일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지금 가석이 현인을 사모하는 정성으로 꿈에 석담을 만난 것을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석담은 우리나라의 성인이니, 바로 돌 가운데 옥이네. 석담을 사모하고 석담을 꿈꾸며 그 가르침을 받들고 그 덕을 스승으로 삼았으니, 어찌 공이 돌에서 옥이 되는 데에 이미 반 이상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인하여 이를 기록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네." 可石 朴公, 因舊里稱以石潭, 夢有大人先生, 書今號而改錫, 故受而居之.然不知大人之爲誰, 亦莫知所錫之爲何意也.友人金澤述解之曰: "石者堅剛之物, 可者許與之辭.公堅剛人也, 許之以石, 固其宜也.其里其稱舊, 亦非偶, 而寤寐前哲, 至有冥詔.旣量其德, 而錫以當實之號, 幷使避嫌而備全敬賢之禮, 亦一至諴感神之致也.大人先生, 其眞石潭 李先生乎.竊惟許其能而勉不足, 聖賢敎人意也, 神告可石之意, 恐不止此, 吾請替發其蘊.夫石之至美者爲玉, 玉亦石也.堅剛雖曰美矣, 必爲良玉之溫潤, 然後至焉, 有似乎君子之剛毅堅忍, 不犯乎義, 猶不若粹然泯然, 心安於仁也.公於能與不足之間, 宜知所以自勉, 而卒享神惠也, 有疑以夢者非眞, 居其號者迷也, 解之者亦迷也, 則固矣.夫孔子之夢見周公, 未聞有以非眞疑之者.今以可石慕賢之誠而豈不信夢拜石潭? 石潭東方聖人, 乃石中玉也.慕石夢石, 承其敎師其德, 豈非公自石至玉之思過半者乎? 因記而俟之."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86년 유인 송씨(孺人宋氏) 정부인(貞夫人)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孺人 宋氏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孺人 宋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유인 송씨를 정부인에 추봉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유인 송씨를 정부인에 추봉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송씨는 이기두의 처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렇게 남편이 관직을 취득할 경우에 처는 남편의 관직에 준하는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유인은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가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때 추봉된 작위가 정부인이다. 정부인은 외명부(外命婦) 중 문무관의 적처에게 내리는 정・종 2품의 위호이다. 정부인 앞의 증(贈) 자는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릴 때 붙이는 글자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추봉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남편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비(妣)는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외명부조에서 봉작(封爵)은 남편의 관직을 따른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金錢借用證書一金六圓六拾錢也 但利息은 月三割의 比價로 定홈右金圓은 借用ᄒᆞᆫ 事가 確實인 바 返濟期限언 大正四年舊乙卯十月十五日로 約定이되 貴處에 迷惑을 相掛치안코 右限에 並本利ᄒᆞ야 無滯備報ᄒᆞ기로 金錢借用證書一張如件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右證主 李敎川 (印) 李相馝處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