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창에게 보냄 정묘년(1927) 與宋基滄 丁卯 그대는 이갈이 하던 동자시절에 신학문을 버리고 머리를 기르며 성현을 공부하겠다던 분이 아니셨던가요? 또 성동(成童 15세) 시절에는 먼저 유자(儒者)의 옷을 입어서 여러 유생들의 본보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이미 어려운 일이거늘, 눈 쌓인 한겨울에 울부짖으며 먹지 않고 홀로 백리를 걸어 스승의 환난에 달려와 함께 죽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런 사람을 어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인재가 사라진 시절에 하늘이 이 사람을 낸 것은 뜻이 있어서이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영주산(瀛洲山) 아래 우덕리(優德里) 송씨 가문에서 위인이 나왔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크게 어긋나 그대처럼 청고하고 독실한 자질로 갑자기 스스로 암흑의 땅에 빠지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바야흐로 긴 밤 책을 송독할 때는 금 쟁반에 옥 젓가락 소리가 들렸고, 종이를 펴서 문사를 토해낼 때는 바람이 세차게 일고 물이 용솟음치는 형세여서 장차 천하의 문장을 들어 홀로 독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개월동안 먼지더미에 경전을 묶어 보관하고, 여름 내내 파리 떼 나는 소굴에서 썩은 나무와 썩은 담장이 되어버렸는가요? 참으로 사람은 지혜롭기가 쉽지 않고, 사람을 안다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내가 여러 제자들과 교학 상장할 때에 그대를 믿을 만하다고 여겨 이름을 기창(基滄)이라 하였고, 자(字)를 이경(以敬)이라 한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또한 운기(運氣)이지 인력(人力)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분수가 박복한 소치일 터이니, 마음의 근심이 은하수처럼 유장합니다. 《시경》에 이르길 "사람들의 생각이 많은 것은 각각 까닭이 있다."77) 라고 했는데, 이제 그대가 이 학문을 버리고 다른 학문을 도모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요? 그대가 부랑한 것을 쫓고 잡란한 것을 일삼는다 해도 결코 최악의 지경까지 이르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염려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대가 신학문을 한다고 해도 풍부(馮婦)가 천고의 웃음거리가 되었다78)는 사실은 잘 알 것입니다. 만일 또 그대가 학업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다스린다고 하면 어버이의 바람은 학업에 있지 결코 집안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어느 때에 통쾌하게 삼백주(三百州)가 회복되는 것을 볼까?"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풍진 세상에 발을 내딛어 크게 바라는 바를 추구하고자 하는데, 그에 앞서 "초당의 봄잠을 충족하는 것이 아닌가?"79)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공업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학문의 본지가 있은 연후에 볼만한 것이 있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태공(太公)이 목야(牧野)를 청명하게 한 것도 "경의(敬義)를 따르면 길하다.80)"라는 서책에 근본했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천하삼분 계책도 "영정(寧靜) 담박(澹泊)"의 훈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 주자(朱子)는 "진정한 영웅은 전전긍긍하는 신중한 자세에서 만들어진다."라고 한 것도 미더운 말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재략(才略)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말했으니, 그대와 나의 경우는 본래 품수 받은 자질이 다만 경전에 힘쓰고 심신을 선하게 하여 윤리강상(倫理綱常)을 부축하고 도학(道學)을 밝힐 수 있는 것뿐입니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만약 이 학문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나서면 세도(世道)에 공이 있는 것이 흔천동지(掀天動地)의 공업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그대가 어찌 모르는가요? 아! 그대의 뜻이 과연 여기(학문)에 있는 것인가? 저기(공업)에 있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삼년 동안 스승과 제자의 우의에 절실한 아픔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 폐간에서 나오는 말을 개진하는 것이니, 그대가 번연히 길을 바꾸어 더욱 용감히 나아간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편지를 다시 돌려보내십시오. 나는 천금의 옥벽을 헤진 빗자루와 동일하게 보는 처지에 던져버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장차 편지를 안고 스스로 슬퍼하면서 그대를 강호에서 잊을 것입니다. 汝在齠齔, 非棄新學而長髮讀聖賢書者乎? 又在成童, 非先著儒服爲諸生效法者乎? 此已是難事, 而隆冬積雪, 號泣不食, 隻行百里, 赴師難而誓同死者, 何處更覯? 吾以爲當此人材寥寥乏日天生此人, 其或有意乎? 又以爲瀛洲山下優德里, 宋氏之門, 有偉人者出乎, 孰料其事有大謬? 以若淸高篤實之姿, 遽自陷於窣窣沓沓之地, 方其永夜誦讀, 金盤玉筯之聲, 展紙吐辭, 風迅水湧之勢也.若將擧天下之文而獨擅之, 胡爲乎累月塵堆, 束閣經傳, 長夏蠅窩, 朽木糞土之爲乎? 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也.念吾相從諸子, 以汝爲可侍, 名以基滄, 字以以敬, 蓋有深意存也.今乃若此, 是亦運氣而非人力歟, 抑亦賤子分薄之致歟.心之憂矣, 河漢其長.詩云人之善懷, 亦各有行, 今汝之舍此而他圖者, 志果安在? 使汝欲遂浮浪事雜亂, 吾知其汙不至此, 不須慮也.使汝欲更理新學, 馮婦之偉千古所笑, 汝所知也.欲輟業而幹蠱, 則親之所欲, 在此而不在彼也.吾嘗見汝詩, 有何時快復三百州之句矣.無乃出脚風塵, 求所大欲, 先足此草堂春睡也乎.蓋雖掀天揭地事業, 必有學問爲之本地, 然後有可觀者.故太公之牧野淸明, 本於敬義吉從之書, 孔明之三分籌策, 本於寧靜澹泊之戒.朱子所謂眞正大英, 雄自戰兢臨履做來者, 其信矣.夫雖然, 此以才略可爲者言, 若汝與我者, 合下稟質, 只可劬經傳淑身心, 扶倫綱明道學而已.雖然若能於此, 透關出場, 其有功世道, 曾不下掀揭事業.此箇義諦, 汝豈未知? 噫! 汝之志, 果在此乎在彼乎? 吾不得以知之.但三年師生之誼, 有切痛痒之關, 陳此瀝肝之言, 如得幡然改轍, 一倍勇進則幸矣.不然此紙還以見歸.吾不欲以千之璧, 投諸視同弊箒之地.將抱此自傷, 而伊人則可忘江湖也. 사람들의……있다 《시경》 〈재치(載馳)〉에 "여자가 그리움 많은 것은 또한 각기 도리가 있거늘.〔女子善懷, 亦各有行.〕"에서 나온 말이다. 정현(鄭玄)과 주자(朱子)가 '선(善)'을 '다(多)'로 풀이하였다. 풍부(馮婦)가……되었다 "진(晉)나라 풍부(馮婦)가 호랑이를 잘 잡았는데, 마침내 좋은 선비가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를 보자 팔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리며 절제할 바를 알지 못했다. 《맹자》 〈진심(盡心)〉 초당의……아닌가 제갈량이 일찍이 융중(隆中)에 은거하고 있을 때 읊은 시에 "초당에 봄잠이 넉넉하니, 창밖의 해는 더디기만 하구나. 큰 꿈을 누가 먼저 깰까? 평소 내 스스로 아노라.[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에서 의미를 취했다. 경의(敬義)를……길하다 "군자는 경으로써 안의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의 일을 바르게 하니, 이렇게 경과 의가 확립되어서 그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