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화국통정변유무년표》의 서문 《中華國統正變有無年表》序 세상에서 정통(正統)이라 인식하는 것은 오직 천하를 통합한 때문이고, 그 통합이 바른지 바르지 않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어진 덕을 지닌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 기술이 이와 같고, 문장가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는 어느 겨를에 일일이 거론하겠는가. 오직 주자만이 이를 되돌려 바로잡았으니, 예를 들면 촉한(蜀漢)을 제(帝)로 삼고 위(魏)를 축출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다 바로잡지 못했으니, 예를 들면 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송(宋)이 천하를 얻은 것이 바르지 않음에도 정통이 될 수 있었고, 동주(東周)의 임금들이 정통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대저 《시경》에서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은 것을 정풍(正風)ㆍ정아(正雅)라 하고, 성정의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을 변풍(變風)ㆍ변아(變雅)라 한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 예를 들면 제왕이 바름으로 천하를 얻은 것을 정통이라 하고, 바름으로 얻지 못한 것을 변통(變統)이라 하니, 방정학(方正學 방효유(方孝孺))이 명명한 것과 같은 것이 당연히 바꿀 수 없는 의론이다. 이것은 비록 주자가 정한 것과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주자의 뜻을 적용한 것이니, 촉한을 제로 삼고 위나라를 축출한 것이 이것이다. 만약 《강목(綱目)》143)을 편정(編定)한 날에 명백하게 진술했다면 빙그레 웃으며 따르지 않았을 줄 어찌 알겠는가.혹자가 이르기를,"당ㆍ송과 같은 선정(善政)과 인덕(人德)으로도 또한 변통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하니, 답하기를,"바르지 않으면 비록 있더라도 매우 아니고, 인덕과 선정이 비록 일컬을 만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천하를 얻음이 이미 정대함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변통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이는 《시경》의 변아가 비록 현인과 군자의 충직하고 온후하며 가엾게 여기는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끝내 그 이름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 이름 때문에 아울러 인덕과 선정을 취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잡겠다."144)라고 하였으니, 구구한 내가 이글을 짓는 것은 이름과 호칭 사이에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을 부쳐 공자와 주자의 뜻을 체득하기 위해서이다. 世之認正統者, 惟以其統合天下, 不問其正不正. 溫公之賢德筆史如此, 東坡之文章著論如此, 餘何暇枚擧哉? 惟朱子反之正焉, 如帝蜀而黜魏是也. 然猶未盡正, 如秦、晉、隋、唐、宋之得天下不正, 而得爲正統, 東周君之不得爲正統, 何也? 夫《詩》之得性情之正者, 謂之正風、正雅, 不得性情之正者, 謂之變風、變雅. 準此而例之, 帝王之得天下以正者, 謂之正統, 得不以其正者, 謂之變統. 如方正學所名, 當爲不易之論. 此雖異乎朱子所定, 實用朱子之意, 卽帝蜀黜魏是也. 如使編定《綱目》之日, 明白陳達, 安知不莞爾而從之乎? 或曰: "以若唐、宋之善政仁德, 亦可入於變統乎? " 曰: "不正, 雖有, 甚否, 德政雖有可稱, 其得之旣不出於正大, 則不得不歸於變統. 此如《詩》之變雅, 雖出於賢人君子忠厚惻怛之意, 終難得易其名也. 誰復有以其名而幷不取其德政乎?" 孔子曰: "必也正名. " 區區之編此書者, 所以寓勸懲於名號之間而體孔、朱之意云爾. 강목(綱目)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으로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주희(朱熹)가 강목 체제로 바꾸어 편찬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반드시 …… 바로잡겠다 《논어집주》 〈자로(子路)〉 제3장에 "자로가 말하기를,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우선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라고 하였다.〔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라는 내용이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대암서사에서 여러 군들에게 주는 서문 【당시 최재용의 손자 동선과 김락춘이 나를 따라 학문하였다. 병자년(1936)】 臺巖書社贈諸君序【時崔載鏞孫東宣、金洛春從余遊. 丙子】 학문을 하는 것은 인도(人道)를 배우는 것이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의 학자들은 얻는 바가 있다고 해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는 바가 없다고 해서 학문을 그만두지도 않았고, 알려지는 바가 있다고 해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지는 바가 없다고 해서 학문에 게으르지도 않았으며, 단연코 도를 구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으니, 이는 참으로 그러했다.다만 사람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신체를 갖추고 있어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주(周)나라 때에 빈흥(賓興)의 예145)가 있자 선비들이 학문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진(秦)나라 때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있자 사람들이 모두 학문을 꺼려했으니, 이는 인지상정이고,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아, 오늘날의 학자들은 모욕을 받고 해침을 당하니, 세상에 용납 받지 못하는 것이 어찌 진나라 시대를 기다린 뒤에만 화가 되겠는가. 제군들은 이러한 때에 도리어 경전을 끌어안고 깊은 산 속에서 머리를 맞댄 채 나에게 청하여 학문을 묻고, 제군들은 나이가 매우 적어서 아직 공부를 쌓고 뜻을 정립한 시기가 없음에도 이러한 일을 잘 해내고 있으니, 어찌 하늘로부터 얻은 본성이 남다른 점이 있어 맹자가 일컬은 호걸의 부류에 버금가지 않겠는가.나는 학문에 대해 스스로 터득한 바가 없기에 제군들의 요청에 응답할 수 없지만, 생각건대 운수에는 막힘과 형통함이 있고 때에는 어둠과 밝음이 있어 막힘이 극도에 이르면 형통하고, 어둠이 극도에 이르면 밝아지게 되는데, 지금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7일 뒤 양이 진동하고 오성(五星)이 규성(奎星)의 자리에 모이는 운수가146) 머지않은 날에 회복되어 도를 배우는 몸에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직접 보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설사 운수가 막힌 시대라 하더라도 선비의 이른바 명리(名利)는 볼 수 있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먼 훗날에 있는 것과 가까운 시기에 있는 것 등의 구별이 있으니, 집안과 나라에 처해서는 훌륭한 명성이 드러나고 조정에 있게 되어서는 두터운 봉록을 누리는 것은 형통하고 밝은 시대를 만났을 때에 볼 수 있는 것으로 가까운 시기에 있는 것이며, 도가 이에 높아져서 백세토록 우러러보고 가르침이 후세에 전해져서 천하가 은택을 입는 것은 막히고 어두운 시대를 만났을 때에 보지 못하는 것으로 먼 훗날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쇠퇴한 세상에서 얻는 것이 도리어 성대한 시대보다 큼이 있고, 세상이 더욱 쇠퇴하고 곤궁함이 더욱 심해지면 후세에 드러나는 것이 더욱 클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이 도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그런데 오늘날의 업신여김과 해침을 돌아보지 않는 제군들은 얻음이 없는 옛사람과 같을 뿐만이 아니라 분발하여 도에 뜻을 둔 자들이니, 절로 응당 위하는 바가 없되 학문을 권면하고 학문에 힘쓴다면 반드시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명리의 말에 가탁하여 번거롭게 고하겠는가. 다만 오늘날 사람들은 애초에 교화(敎化)가 없으면 곧 금수(禽獸)가 된다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아 학문에 힘써 도를 구하지 않고, 아울러 사물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이치를 몰라 몸을 닦아 천명을 기다리지 않으며, 더욱이 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먼 훗날에는 큰 명리가 있게 되는 줄 모르고 한갓 가까운 때에 볼 수 있는 작은 명리만을 추구한다. 때문에 이러한 말로 깨우쳐 주어서 돌아가 학문에 근면하지 못하는 예전의 동반자에게 고하게 하니, 또한 납약자유(納約自牖)147)의 뜻이다. 학문을 하는 방법은 제군들이 읽는 경전에 있으니, 또한 나에게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學者學人道, 非求名利也. 是故古之學者, 不爲其有所得而勸, 故不爲其無所得而廢; 不爲其有所聞而勤, 故不爲其無所聞而怠, 斷然惟以求道爲心, 此固然矣. 但人具血肉之身, 便有自私之理. 故周有賓興之禮, 而士無不學; 秦有焚坑之禍, 而人皆諱學. 此人之常情, 勢之必然也. 嗚呼, 今之學者, 受侮見害, 不容於世者, 豈待秦世而後爲禍哉? 諸君乃以此時, 抱經聚首於萬山之中, 請余問學, 諸君年甚少, 尙未有積功定志時節而能辦此, 豈得於天者有異, 而孟子所稱豪傑流亞歟? 余於學, 自無所得, 無以爲對. 但惟運有否泰, 時有晦明, 否極則泰, 晦極則明. 今旣極矣, 安知七日之雷、五星之奎, 行將有復, 而親見尊榮於學道之身乎? 借使否也, 士之所謂名與利者, 有可見不見在近在遠之別, 處家邦而彰令譽, 在廟堂而享厚祿, 此遭泰明之可見而在近者也; 道尊於此而百世仰止, 敎垂諸後, 而天下蒙澤, 此値否晦之不見而在遠者也. 然則衰世之所得, 反有大於盛時, 而世益衰、困益甚, 則發於後者益大矣. 蓋人之見道衰而不學者, 由不知此理也. 余於學, 自無所得, 無以爲對. 但惟運有否泰, 時有晦明, 否極則泰, 晦極則明. 今旣極矣, 安知七日之雷、五星之奎, 行將有復, 而親見尊榮於學道之身乎? 借使否也, 士之所謂名與利者, 有可見不見在近在遠之別, 處家邦而彰令譽, 在廟堂而享厚祿, 此遭泰明之可見而在近者也; 道尊於此而百世仰止, 敎垂諸後, 而天下蒙澤, 此値否晦之不見而在遠者也. 然則衰世之所得, 反有大於盛時, 而世益衰、困益甚, 則發於後者益大矣. 蓋人之見道衰而不學者, 由不知此理也. 若諸君之不顧今之侮害, 不啻若古之無得而已, 而奮發志道者, 自應無所爲, 而勸斯勤斯, 必有事在, 吾何敢託於名利之說而瀆告之? 顧今之人, 初不念無敎卽獸之戒, 而勉學求道, 幷不知物極必反之理, 而修身俟命, 尤不知有不見、在遠名利之大者, 而徒求可見、在近名利之小者. 故爲此說而喩之, 俾歸而告舊日同伴之不勤學者, 亦納約自牖之意也. 至於爲學之方, 有諸君所讀經傳在, 亦不須問余 빈흥(賓興)의 예 인재를 추천하는 예절로, 향대부(鄕大夫)가 그 고을의 소학(小學)에서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여 국학(國學)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들을 전송할 때에 빈객(賓客)으로 예우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周禮 地官 司徒》 7일 …… 운수 원문의 '7일(七日)'의 '일(日)'은 '월(月)'을 뜻하는 것으로, 7개월 만에 양효(陽爻)가 아래에서 하나 생겨남을 말한다. 이는 《주역》 〈복괘(復卦)〉에 "그 도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한 데서 온 말이다. 오성이 규성에 모인다는 것은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별이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의 자리에 모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문운이 크게 번창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ㅇ이다. 이는 송 태조(宋太祖) 건덕(乾德) 5년에 오성이 규성의 별자리에 모인[五星聚奎]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복자(卜者)가 인재가 많이 배출될 조짐이라고 점친 데에서 온 말이다. 납약자유(納約自牖) 상대방이 잘 알고 있어 받아들이기 쉬운 곳으로 이야기하여 차츰 깨닫도록 인도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감괘(坎卦)〉육사(六四)에 "인군에게 아뢸 때에는 인군이 밝은 곳으로부터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納約自牖, 終无咎.〕"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21 卷之二十一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기 記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25 卷之二十五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행장 行狀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입암 손공 행장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笠巖孫公行狀 공의 본관은 경상도(慶尙道) 밀양부(密陽府)이다. 고조의 휘는 책(策)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수주 목사(樹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비는 원주(原州) 이씨로 공인(恭人)이다. 증조부의 휘는 계경(季敬)으로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비는 ■씨로 유인(孺人)이다. 조부의 휘는 의화(義和)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냈다. 비는 ■씨로 숙인(淑人)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민(敏)이니, 통훈대부로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지냈다. 비는 금산 김씨(錦山金氏)로 숙인이다.성렬(聖烈) 손동선(孫東宣) 군이 그 집안 부로(父老)의 명을 받들어 나에게 와서 청하기를 "선조 입암공(笠巖公)의 행적이 오래되어 대부분 산실되었으니 진사 이언복(李彦復) 공의 행장이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소략함을 면치 못합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 공이 지은 신도비도 이에 기초하여 지었으므로 또한 그러합니다. 근래 제가(諸家)가 편찬한 《동사계고(東史繼考)》와 《국조실록(國朝實錄)》을 보니 자세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별도로 한 행장을 만들어 그것으로 작가에게 글을 부탁하고 비석에 드러내며 문서로 저술할 것을 도모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람에 대한 그러한 글을 결코 감당할 수 없으나 공을 참으로 평소에 흠모하였으며 게다가 우리 선조 군사공(郡事公) 외손녀의 아들이니, 글을 지어 내 이름을 의탁하는 영광이 있으며 정의(情誼) 또한 마땅히 다져야 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예전 행장과 비문, 역사와 실록을 참고, 교정하면서 다만 사실만을 기록하였고 마지막에 나의 견해를 덧붙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행장을 완성하였다.공의 휘는 비장(比長), 자는 영숙(永淑)이며, 입암은 그의 호이다. 손씨는 그 선조가 중국에서 나왔으니, 손승린(孫承麟)이란 분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구사(仇史)에 정박하였는데, 지금의 경주(慶州)이다. 손구례(孫俱禮)는 신라를 도와 그 공으로 모량부대인(牟梁部大人)이 되었다. 세대가 흘러 효자 손순(孫順)이 나왔는데, 곽거(郭巨)와 같은 지성2)으로 아이를 묻다가 종을 얻었는데, 이에 왕이 집과 쌀을 하사하여 모친을 봉양하였다. 중시조 손긍훈(孫兢訓)은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도와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지고 밀양(密陽)을 채읍으로 삼았으니, 인하여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여러 대를 지나는 동안 모두 벌열이었으니, 태학사(太學士) 손빈(孫贇)은 북쪽 정벌에 공을 세워 밀양군(密陽君)에 봉해졌다. 이 분이 판도 판서(版圖判書) 손광(孫洸)을 낳으셨다. 또 4대를 지나 목사(牧使) 손귀린(孫貴麟)이 나왔으니, 이 분은 수주공(樹州公)이다. 이분의 손자로 공에게 증조가 되는 은덕공(隱德公)이 비로소 부안에 거주하였는데, 3대가 지나 공이 탄생하였다. 공은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10여 세에 경서와 제자백가의 책을 환하게 이해하였다. 약관에 성균관에 올랐는데, 세조(世祖) 임오년(1462년)에 주상께서 사정전(思政殿)에 행차하여 공을 불러서 읽고 있던 책을 강하게 하고서 세자로 하여금 듣게 하였으며, 이윽고 임금에게 올리던 보리밥을 하사하였다. 갑신년(1464년)에 주상께서 온양(溫陽)에 행차하여 과거를 여니, 사론이 '이번 시험에 타도의 선비는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밖으로부터 엄하게 금하니, 공은 시를 지어 시험장에 내던졌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문단의 여러 장수가 온양에 진을 쳤는데 文林諸將陣溫陽용과 범이 내달리고 날아올라 전장에서 다투네. 龍虎奔騰走戰場도망간 병졸에 어찌 한신처럼 걸출한 이 없으랴 亡卒豈無韓信傑소하는 모름지기 한중왕에게 고해야 하네.3) 蕭何須告漢中王주상께서 직접 시를 읽고서 하교하여 '금지한 타도의 선비들도 모두 허락하라.'라 하니 공이 마침내 을과(乙科)에 합격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사간원으로 승진하여 벼슬길에 이름을 떨쳐 명성이 자자하였다.성종(成宗) 원년 경인년(1470년) 4월에 3품 이하 시강하는 신하 가운데서 선발하여 집현전의 고사를 모방하여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문장을 작성하는데 대비하라고 명하니, 공은 수찬(修撰)이 되어 부제학(副提學) 김지경(金之慶),4) 직제학(直提學) 유권(柳睠), 전한(典翰) 임사홍(任士洪), 응교(應敎) 김계창(金季昌),5) 부응교(副應敎) 최경지(崔敬止),6) 교리(校理) 노공필(盧公弼),7) 홍귀달(洪貴達),8) 부교리(副校理) 김극검(金克儉),9) 정휘(鄭徽), 수찬(修撰) 최숙정(崔淑精),10) 김종직(金宗直), 부수찬(副修撰) 김윤종(金潤宗), 남계당(南季堂),11) 채수(蔡壽)12) 등과 번(番)을 나눠 번갈아 숙직을 하면서 날마다 세 번씩 임금을 접견하여 책의 깊은 뜻을 강론하고 임금의 교화를 보필하였으니, 조정의 다른 신하들이 모두 부러워하면서 '영주에 오른 학사'13)라고 일렀다.술을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그러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거듭 명하여 임금의 총애와 영화로움을 길이 보이니, 공과 제학사들은 술에 취해 기쁨에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 다음날 성은에 감사하며 시를 올렸는데, 거듭 외람되이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시니, 이로부터 더욱더 학문을 연마하여 성은을 갚기를 기약하였다. 간간이 동료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과 학문으로 서로 도움을 주며 시를 수창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주상께서 또한 양성지(梁誠之)14)에게 명하여 여러 학문을 천문, 풍수, 율려, 의학, 음양, 사학, 시학의 일곱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에 6명을 두었는데, 나이가 젊은 문신을 각 부분에 배치시켰다. 이에 공은 음양문에 배치되었고 김점필재는 시학문에 배치되었다.신묘년(1471년)에 검토관(檢討官)이 되어 지방에서 돌아왔는데, 주상께서 민간의 질고를 물으시니 공은 전라도 조운(漕運)에서 수군을 부리는 폐단에 대해 아뢰었다. 병신년(1476년)의 중시(重試)에 갑과에 합격하여 전첨(典籤)에서 직급이 승진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에서 홍문관으로 옮겼으며 승정원에 들어갔다. 이 해 8월에 주상께서 경연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론하다가 '대성(臺城)에 유폐(幽閉)된 양나라 군주15)가 채소를 먹다가 그마저 다 떨어지자 이에 계란을 먹었다.'는 부분에 이르러 시종신에게 이르기를 "부처를 믿음이 효과가 없는 것을 이에 더욱 잘 알 수 있다."라고 하니, 공이 참찬관(參贊官)으로 참여하여 대답하기를 "불교를 저처럼 좋아하다가 재앙을 이처럼 받았으니, 후대의 임금은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믿는 것은 그 말이 이치에 가깝고 화복의 말이 쉽게 사람을 미혹시키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아뢰기를 "지금 법에 정전(丁錢)을 바쳐야 바야흐로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데, 수령들은 도첩의 유무를 묻지 않고 승려로 받아줍니다. 그러므로 돈을 내는 사람은 백에 한 둘도 없으니, 이 때문에 승도는 날로 늘어나고 군액은 날로 죽어듭니다."라 하였다. 주상께서 "이는 하루아침에 다 개혁할 수 없다."라고 하자, 다시 대답하기를 "이미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속히 제거해야 합니다. 또한 원각사(圓覺寺)는 마땅히 헐어버려야 하는데, 더구나 위병으로 문을 지키게 합니까."라 하였다.이 해 또 예문관 부제학(藝文舘副提學)이 되어 소장을 올려서 재앙을 막는 방법을 논하면서 네 개의 조목을 아뢰었다. 첫 번째는 대간의 말을 즐겨 따르고 훈척들이 국법을 흔들게 놔두지 않게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조정 안팎의 여러 벼슬아치 가운데 나이가 어려 학문이 깊지 않은 자는 모두 학문에 나아가게 하고 학문이 이뤄진 뒤에 임무를 맡기는 것이며, 세 번째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깊이 생각하여 평안도에 사신의 행차할 때 정해진 법 이외의 짐을 지거나 실어서 나르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며, 네 번째는 중들에게 식량을 대주는 비용을 혁파하여 거둬들이고 정병(正兵)이 절 문을 지키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정유년(1477년) 8월에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16)가 화를 내고 동부승지(同副承旨) 홍귀달(洪貴達)이 팔을 휘두르고 눈을 무섭게 뜨고서 '너'라고 부르며 꾸짖으니, 공은 대사간(司諫)으로서 그들의 무례함을 논박하였다. 10월에 승지로 있으면서 기신재(忌辰齋)의 글 첫머리에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조선국왕 성 아무개.'라고 일컫는 것을 보고서 대단히 놀라 기신재를 파하라고 청하니, 주상이 '보살계제자'라는 말을 없앴다. 11월에 유구국(琉球國)에서 원숭이를 바치자 또다시 승지로써 아뢰기를 "신이 알기로는 전하께서는 완호(玩好)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는데, 사관이 '태복시에서 원숭이를 기른다.'라고 적는다면, 훗날 전하께서 기이한 구경거리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확신하겠습니까."라 하였다.계묘년(1483년) 3월에 정희왕후(貞熹王后)17)가 승하하자, 5월에 주상께서 빈전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행하니 백관들이 곡하였다. 공이 부호군(副護軍)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대행대비의 시호를 보니, 깊이 생각하여 능히 성취한 것을 '정(貞)'이라고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함에 공이 있는 것을 '희(熹)'라고 하니, 두 글자의 뜻이 비록 모두 아름답지만 다만 공효의 실상만을 드러내고 덕성의 아름다움은 나타내지 못하니 온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을사년(1485년) 7월에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을 편찬하여 진상하니 비단 한 필을 하사받았다. 이후로 두어 해 동안 부안현 요리(蓼里)에 집을 지어 영귀(咏歸)라 편액하고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혔다.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18)과 대단히 친하였다. 매계(梅溪) 조위(曺偉)19)가 임지로 떠날 때 이별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쓸쓸한 이 신세 시서에 그르쳤나니 蕭條身世誤詩書한 평생 세상과 맞지 않음을 스스로 웃는다. 自笑平生向世疏요리에서는 매양 새 안검20)을 만날 것이고 蓼里每逢新按劎뇌계에서는 다행히 옛 지어21)에 힘입으리. 㵢溪幸賴舊知魚새벽 별은 희미한데 항상 서로 그리워하니 晨星落落長相望세월은 하염없이 흘러 이미 7년 지났네. 歲月悠悠已七除만일 걸상 마주앉아 잠깐 내게 묻는다면 對榻片言如問我늙어가며 담박한 것 다만 처음과 같다 하리. 晩來淡薄只如初이 시는 대개 은거하려는 생각22)을 읊은 작품이다.공은 마침내 요리에서 타계하여 요리의 북쪽 7리에 있는 갈촌(葛村)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판서 최여달(崔汝達)의 따님이다. 묘는 합봉하였다. 아들로 세기(世基)는 참봉(參奉)이며, 세주(世柱)와 세우(世佑)가 있고, 딸들은 송은손(宋殷孫), 최세준(崔世俊), 윤은찬(尹殷贊), 이광보(李光輔) 등에게 시집갔다. 세기의 아들로 대로(大老)와 충순위(忠順衛) 중로(重老)와 한림(翰林) 숙로(叔老)가 있다. 세주의 아들로 근로(謹老)가 있다. 세우의 아들로 판결사(判決事) 계금(繼錦)이 있다. 송은손의 아들로 홍관(洪寬)이 있다. 최세준의 아들로 륜(崙)이 있다. 윤은찬의 아들로 종원(宗元)과 종형(宗享)이 있다. 이광보의 딸은 진사 김관(金綰)에게 시집갔다. 대로의 아들로 참봉 홍우(弘祐)와 진사 홍복(弘福), 그리고 홍정(弘禎)이 있다. 중로의 아들인 홍적(弘績)은 대교로 호는 도봉(道峰)인데 을사년에 시사(時事)를 곧바로 쓴 일로 귀양을 가서 죽었으며, 홍륜(弘綸), 홍서(弘緖), 홍계(弘繼)는 모두 진사이며, 그리고 홍업(弘業)이 있다. 숙로의 아들로 별제(別提) 홍록(弘祿)의 호는 한계(寒溪)인데 임진왜란 때 태조의 진영을 옮겨 봉안하였으며 《열조실록(列朝實錄)》을 완전히 보호한 공이 있다. 근로의 아들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인 대남(大南)이 있다. 계금의 아들로 진사인 순량(舜良)이 있다.삼가 일찍이 논하건대, 공은 일찍이 문장을 성취하여 이른 나이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으니, 이는 천부적인 재주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홍문관 부제학, 예문관 직제학, 좌우 승지와 동부승지,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것은 모두 청현직(淸顯職)으로 이 또한 문학과 중망으로 이룬 것인데, 임금의 계책을 빛내고 임금의 덕을 성심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논하는 자들이 문장은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법도를 따르고 학문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로를 얻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당시에 어찌 그러한 까닭이 없겠는가.그러나 공의 마음에 답답한 것이 있으니, 도가 밝지 못한 것은 이단이 해치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불교가 가장 심하다. 공이 조정에 서서 의논한 것으로 강의와 대문(對問)부터 진언과 소차(疏箚)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지닌 것과 말로 드러낸 것은 오직 맹자(孟子)가 말한 '힘써 그 임금을 이끌어서 도에 합하게 한다.'23)는 것에 해당하는데, 그에 해당하는 큰일은 바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다. 오호라! 불교의 해로움은 천여 년이 되었기에 성종의 시대에도 그 폐단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니, 조정의 높은 관리로 통유(通儒)라고 일컬어지는 자가 '태극의 위에 있는 무극은 불도가 바로 이것이다.'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이 때에 공은 우뚝하게 견해를 견지하고 강건하게 올바름을 지켜 첫째도 불교는 배척해야 하고 둘째도 불교는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배척함을 그치지 않았으며, 군주로 하여금 불교에 관한 많은 것을 혁파하게 하였으니 사문에 공을 세운 것이 크다.또한 기미를 보고서 일어나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니, 도에 본 것이 있지 않는 자는 이렇게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동한 말기에 어진 선비가 많았으나, 초연히 당고(黨錮)의 화를 면한 자는 몇 사람 되지 않는다. 다만 공은 욕되지 않고 위태롭지 않은 이치를 분명하게 알아 하루아침에 기러기처럼 높이 날아 그물에서 벗어나니, 무오년 제현들로 하여금 손색이 있게 하였다. 이는 소광(疏廣)이 소망지(蘇望之)가 당한 재앙을 일찍 멀리한 것이니,24) 어찌 더욱 어렵지 않으랴.이 두 가지 사실에서 공의 학문이 옛날 현인의 심법에서 전수받은 것이 있음은 속일 수 없다. 마땅히 그가 집에 거처할 때와 세상에 살아가면서 남긴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행실을 많이 기록으로 남겼을 것인데, 이미 큰 난리를 겪었고 거듭 화마를 당하여 저술이 흩어지고 잃어버렸기에 그 증거가 아득하다. 예전 행장에서 효성과 우애는 천부적이었다는 한 구절 이외에 조금도 그 대략을 드러낼 수 없으며, 심지어는 생졸년도 없으니 탄식을 견딜 수 있으랴.다만 다행히도 역사책에 실려 있고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것이 해와 별처럼 분명하며, 조정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남김없이 다 드러났으니, 옛사람의 일을 논하는 자들은 이것으로 미뤄 짐작한다면 크고 작은 삶 전체를 거의 두루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발자취를 이어 도봉(道峰)의 어짊과 한계(寒溪)의 충절이 나왔다. 도봉은 초은(楚隱) 승경(承憬)을 낳았는데 또한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으니, 그가 덕행을 마음으로 깨쳐서 타인에게 미치며 나아가 후손에게 전한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한갓 명성과 지위, 업적만이 환하게 빛난 것이 아니니, 오호라 훌륭하도다. 本貫, 慶尙道密陽府.高祖諱策, 文科, 樹州牧使, 妣原州李氏恭人.曾祖諱季敬, 隱德不仕, 妣■氏孺人.祖諱義和, 通訓大夫行丹城縣監, 妣■氏淑人.考諱敏, 通訓大夫行谷城縣監, 妣錦山金氏淑人.孫君聖烈東宣奉其門父老命, 來請于余曰: "先祖笠巖公事行, 舊多遺逸, 有進士李公彦復狀, 而固不免疎略, 松沙奇公宇萬神道碑, 因是而作, 故亦然.近得見諸家所編《東史繼考》·《國朝實錄》, 詳其所未詳, 竊欲別成一狀, 以之謁文作家, 顯之于碑, 著之于牒, 願有以圖之也." 余自惟以人以文, 決非可堪, 然公固平日所景仰, 且吾先祖郡事公外孫女之子, 名可託榮, 誼亦當講.以是辭不得, 終遂以舊狀與碑及史與錄, 參互訂定, 惟實是從, 末附己見, 以成文曰: "公諱比長字永淑, 笠巖其號也.孫氏, 其先蓋出中國, 有承麟浮海而東泊仇史, 今慶州.有俱禮佐新羅, 爲牟梁部大人.傳至孝子順, 有郭巨至誠, 埋兒得鍾, 王賜第米養母.中祖兢訓, 佐麗太祖南征, 封廣理君, 食采密陽, 仍貫焉.歷累世皆顯閥, 太學士贇, 北征有功, 封密陽君, 生版圖判書洸.又四傳而至牧使貴麟, 是爲樹州公.考隱德公始居扶安, 三世而公生焉.穎悟出人, 十餘歲經子百家, 靡不通解, 弱冠登上庠.世祖壬午, 上御思政殿, 召公講所讀書, 使世子聽之, 仍賜御膳麥飯.甲申, 幸溫陽設科, 士論謂'今試他道士勿許入.' 自外嚴禁, 公作詩投獻試庭, 詩曰: "文林諸將陣溫陽, 龍虎奔騰走戰場.亡卒豈無韓信傑, 蕭何須告漢中王." 上親覽下敎'禁止幷許他道士.' 公竟得擢乙科, 入槐院陞柏府, 敭于名塗, 聲譽蔚然.成宗元年庚寅四月, 命選三品以下侍講之人, 倣集賢殿故事, 以備顧問製作, 公爲修撰, 與副提學金之慶·直提學柳睠·典翰任士洪·應敎金季昌·副應敎崔敬止·校理盧公弼·洪貴達·副校理金克儉·鄭徽·修撰崔淑精·金宗直·副修撰金潤宗·南季堂·蔡壽, 分番更直, 日承三接, 講劘奧義, 協贊聖化, 同朝搢紳, 莫不跋羡, 謂之登瀛學士.宣醞賜樂, 申命圖繪, 永示寵榮, 公與諸學士醉歡舞蹈.翼日謝恩進詩, 重叨嘉獎, 自是益加淬礪, 期於報答.間與同僚金佔畢齋, 麗澤相資, 唱和相屬.是歲上又命梁誠之, 分諸學爲天文風水律呂醫學陰陽史學詩學七門, 門置六人, 以年少文臣配之, 公配陰陽門, 金佔畢配詩學門.辛卯, 爲檢討官自外還, 上問民間疾苦, 公奏全羅漕運役水軍之弊.丙申重試, 闡甲科, 以典籤陞秩, 由軍資監正移玉署東壁入銀臺.是年八月, 上於經筵講《綱目》, 至'臺城之閉, 梁主蔬茹皆盡, 乃食鷄子.' 謂侍臣曰: "佛之無驗, 於此益可見矣." 公以參贊官對曰: "好佛如彼, 而受禍如此, 後之人主, 可以鑑矣, 而猶信之者, 以其言近理, 而禍福之說, 易以惑人也." 因奏曰: "今法納丁錢, 方許爲僧, 而守令不問度牒有無, 故納錢百無一二, 是以僧徒日增, 軍額日減." 上曰: "此不可一朝盡革." 對曰: "旣知之, 當速去之.且圓覺寺, 在所當毁, 况使衛兵把門乎." 是月又爲藝文舘副提學, 上疏論弭災之方, 條陳四事, 一曰, 樂從臺諫, 勿以勳戚而撓國法.二曰, 中外庶官, 年少不學者, 幷令就學, 學成而後任之.三曰, 深念邦本, 以袪平安一道使行時法外駄載之弊.四曰, 革收廩僧之費, 罷正兵寺門之守.丁酉八月, 都承旨玄碩圭怒, 同副承旨洪貴達攘臂怒目, 至稱'爾汝'而罵之, 公以大司諫, 駁其無禮.十月, 以承旨奏忌辰齋疏頭稱'菩薩戒弟子朝鮮國王姓諱.' 見之甚駭, 請罷之, 上命去'菩薩戒弟子'語.十一月, 琉球國獻猿公, 又以承旨奏曰: "臣知殿下絶意玩好, 而太史書之曰: '太僕畜猿.' 安知後日不謂殿下好奇玩乎." 癸卯三月, 貞熹王后昇遐, 五月, 上詣殯殿行朝奠, 百官哭臨, 公以副護軍上箚曰: "大行大妃之謚, 大慮克就曰'貞', 安民有功曰'熹', 二字義雖皆美, 只著功令之實, 未見德性之善, 似爲未安." 乙巳七月, 與達城君徐居正等, 編進《東國通鑑》, 蒙賜叚子一匹.自是以後, 數歲築堂于同縣蓼里, 扁以咏歸, 決意休退.與兪㵢溪好仁甚相好, 其別曹梅溪偉赴任詩曰: "蕭條身世誤詩書, 自笑平生向世踈.蓼里每歎新按劒, 㵢溪幸賴舊知魚.晨星落落長相望, 歲月悠悠已七除.對榻片言如問我, 晩來淡泊只如初." 此蓋筮遯之作也.竟卒于蓼, 葬于蓼北七里葛村乙坐原, 配淑夫人全州崔氏, 判書汝達女, 墓合封.男世基參奉, 世柱·世佑, 女適宋殷孫·崔世俊·尹殷贊·李光輔.世基男, 大老, 重老忠順衛, 叔老翰林.世柱男, 謹老.世佑男, 繼錦判決事.宋婿男, 洪寬.崔婿男, 崙.尹婿男, 宗元·宗享.李婿女金綰進士, 大老男, 弘祐參奉, 弘福進士, 弘禎.重老男, 弘績待敎號道峰, 乙巳直書時事謫卒, 弘綸·弘緖·弘繼, 幷進士, 弘業.叔老男, 弘祿別提號寒溪, 壬辰亂有移奉太祖眞像, 保全《列朝實錄》之功.謹老男, 大南掌樂院正.繼錦男, 舜良進士.竊嘗論之, 公之夙就文章, 早捷重試, 自是天才之絶異.弘文副學藝文直提左右同副承旨吏曹參議成均館大司成司諫院大司諫之歷盡淸顯, 亦惟文學重望, 有以致之, 而黼黻皇猷, 啓沃君德, 故論者謂文追遷固軌轍, 學得程朱門路, 此其當時, 豈無所以然哉.抑余有所槩于中者, 道之不明, 異端害之而佛爲甚.公之立朝議論, 自講義對問, 至奏啓疏箚, 心心所存, 言言所發, 惟孟子所謂'務引其君而當道'者是已, 而其大者在乎斥佛, 嗚呼, 佛之爲害, 千有餘年, 宣陵之世, 弊猶未祛, 同朝大官稱爲通儒者, 至有太極之上有無極, 佛道是也之說矣.于斯時也, 公卓然持見, 介然守正, 一則曰佛可斥, 再則曰佛可斥, 斥之不已, 而使君上多所革罷, 其有功斯文大矣.且夫見幾而作, 不俟終日, 非有見乎道者不能.是以東漢之末, 賢士多矣, 超然免於黨錮者, 無幾人焉.惟公洞見不辱不殆之理, 一朝鴻擧, 迴脫網外, 使戊午諸賢有遜色, 此疏廣所以早遠望之之禍者, 豈不尤難哉.于此二者, 公之學有所受於古賢心法者, 不可誣也.宜其居家處世之嘉言懿行, 亦多可書, 而旣經大亂, 重以回祿, 著述散亡, 徵佐遙邈.舊狀孝悌天性一節外, 不少槩見, 甚則生卒無年, 可勝歎哉.惟幸竹帛之載, 金石之藏, 昭如日星, 朝著偉蹟, 畢見無餘, 尙論者以此而反隅, 則全體巨細, 庶可周知.繩公之武而有道峰之賢, 寒溪之忠.道峰生楚隱承憬, 又殉節壬亂, 其德行之得之心及乎人, 而傳諸後承者, 亦可見矣.不徒爲名位事業之炳烺已也, 於虖盛哉."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로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다. 고종 18년(1881)에 조정에 행정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 소수(湖南疏首)라 불리었다. 명성 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키는 등 항일 운동을 하였다. 곽거와 같은 지성 후한(後漢)의 효자 곽거가 가난한 형편에도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마침 아내가 아들을 낳아 세 살이 되었을 때 노모가 항상 자기 밥을 덜어서 손자를 먹이곤 하였다. 그러자 곽거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가난해서 어버이 봉양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우리 함께 저 자식을 묻어 버립시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소." 하고, 아내와 함께 아이를 안고 가서 땅에 묻으려 하였다. 땅을 2척 남짓 파내려 가자 갑자기 황금이 가득한 가마솥〔金釜〕 하나가 나타났는데, 그 솥 위에 "하늘이 효자 곽거에게 내린 것이니, 관청에서도 빼앗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취할 수 없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아이 묻는 일을 중단하고 바로 돌아와서 어버이도 잘 봉양하고 아이도 잘 기를 수 있었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411》 도망간……하네 소하(蕭何)가 한 고조(漢高祖)에게 한신(韓信)을 여러 차례 추천하였는데도 중용하지 않아 한신이 도망치자, 이 소식을 듣고 소하가 고조에게 미처 아뢸 겨를도 없이 한신을 쫓아가서 데려왔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여기서는 과거를 보지 못한 거자(擧子) 가운데 한신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김지경(金之慶) 1419~1485. 본관은 선산, 자는 유후(裕後),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대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475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수령의 탐학을 처벌하고 성책을 보수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1485년에는 신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배려로 한직인 호군에 제수되었다. 김계창(金季昌) ?~1481. 본관은 창원, 자는 세 번(世蕃)이다. 1478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좌부승지 ·우승지 ·도승지를 역임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시문과 경사에 능통하고, 외교문서 작성과 문풍진흥에 공헌하였다. 최경지(崔敬止) ?~1479.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화보(和甫)이다. 1479년(성종 10)에는 홍문관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시문에 뛰어났다. 노공필(盧公弼) 1445~1516.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이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 2년 뒤 중종반정으로 우찬성(右贊成)에 영경연사(領經筵事)로 특진하고, 1507년(중종 2) 1차 사절이 실패했던 중종의 승습(承襲)에 관한 승인을 명나라에 가서 얻어내고 귀국, 중추부영사(領事)가 되었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함허정(涵虛亭),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올랐다. 1479년(성종 10) 도승지로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廢妃)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좌참찬으로서 왕의 난정(亂政) 10여 조목을 들어 간(諫)하다가 좌천당하였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던 도중 단천(端川)에서 승명관(承命官)에게 교살당하였다. 김극검(金克儉) 1439~1499. 본관은 김해, 자는 사렴(士廉), 호는 괴애(乖崖)이다. 1491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한때 언로(言路)를 주도하였다. 149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중국 명나라에 다녀온 뒤 한성부 우윤과 좌윤, 호조참판이 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학식이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다. 최숙정(崔淑精) 1433~1480.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趙遙齋) ·사숙재(私淑齋)이다. 1470년 승문원 교리로서 춘추관기주관을 겸직,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한때 탐학한 관리라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부제학이 되었다. 노사신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했다. 남계당(南季堂)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희정(希正)이다.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역임할 때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 성종이 직접 글을 내려 격려하고 포상하였다. 1486(성종 17) 겸 사헌부집의(兼司憲府執義)이 되었으며 안변부사(安邊府使)를 거쳐 1493(성종 24)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채수(蔡壽) 1449~1515.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懶'는 보통 '라'로 읽어 '나재'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의 문중에서는 본음인 '란'으로 읽어 '난재'로 표기한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이석형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에서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1478년 응교(應敎)가 되어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좌천시켰다.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함창(咸昌)에 은거하여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산경(山經)·지지(地誌)·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저서에 《난재집(懶齋集)》 2권과 고전소설 《설공찬전(薛公贊傳)》이 있다. 영주에 오른 학사 '등영주(登瀛洲)'의 준말로, 영주는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태자로 있을 때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등 18인을 학사(學士)로 삼아 정사를 자문하자,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영주에 올랐다고 비유하였다. 《新唐書 卷102 褚亮列傳》 양성지(梁誠之) 1415~1482.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이다. 우리나라 지지(地誌)에 조예가 깊어 단종 때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세조 때 《팔도지리지》와 《동국지도》를 편찬했다. 1481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하고 각종 서적의 인쇄 · 출판을 건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초서에 능했다. 대성에……무제 양 무제에 대해서는 《자치통감》 권162 〈양기(梁紀)〉에 보인다. 참고로 양 무제에 대한 평으로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11월 3일 야대(夜對)에서 사독관 신치운(申致雲)의 말이 주요하다. 즉 "양 무제는 영웅호걸의 재주를 갖고 있었고 지려가 높고 넓었으며, 혈기의 욕심을 끊어 버리고 주색(酒色)이나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고, 독서를 하고 소찬(素饌)을 하면서 오로지 부처를 숭상하였으니, 그의 뜻이 단지 복전(福田)의 이익을 구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불학(佛學)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와는 별개의 일로 산하(山河)와 일월(日月)을 환상(幻像)으로 보아 천하 국가를 외물(外物)로 여기니, 불학을 숭상하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후경(侯景)이 이르자 상하가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끝내는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습니다."라 하였다. 현석규(玄碩圭) 1430~1480.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덕장(德璋), 호는 청단(淸湍),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정직과 청렴으로 공사(公事)를 잘 처리하여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평안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청원으로 임기가 끝난 후 1년간 더 재직하고 어의(御衣)를 하사받았다. 정희왕후 세조(世祖)의 왕비로 예종이 죽은 뒤에 성종을 왕위에 앉히고 대왕대비로서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 또는 뇌계이다. 147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ㆍ문장ㆍ서예에 뛰어나 삼절(三絕)로 꼽혔다. 매계(梅溪) 조위(曺偉) 성종 때의 학자(1454~1503)로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도승지를 역임하고 대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어 무오사화 때 유배되어 죽었다. 저서에 ≪매계집≫이 있다. 안검 《사기》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서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 같은 좋은 보배를 몰래 길 가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이유 없이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여기서는 조위가 자주 시를 보낸다는 의미이다. 지어 장자(莊子)와 그의 친구 혜자(惠子)가 호수(濠水)의 다리 위에서 노닐 때,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나와서 조용히 노니,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일세.[鯈魚出游從容 是魚樂也]"라고 하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알겠는가.[子非魚 安知魚之樂也]"라고 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유호인과 함께 참된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다. 은거하려는 생각 '서둔(筮遯)'은 점을 쳐서 둔괘가 나왔다는 말로 은거하려는 생각을 가리킨다. 《주역》 둔괘(遯卦)의 전(傳)에 이르기를 "둔(遯)은 음(陰)이 자라나고 양(陽)이 사라지니, 군자가 은둔하여 숨어 지낼 때이다."라고 하였다. 힘써……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군자가 임금을 섬길 때는 그 임금을 힘써 이끌어 정도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君子之事君也 務引其君以當道〕"라 하였다. 소광이……것이니 소망지는 전한(前漢)의 제10대 황제인 선제(宣帝) 유순(劉詢) 때부터 측근으로 중용되고 있던 중서령(中書令) 홍공(弘恭)ㆍ중서복야(中書僕射) 석현(石顯) 등의 중서(中書) 환관(宦官)들과 대립해 실각했다. 홍공(弘恭)ㆍ석현(石顯) 등의 환관(宦官)들은 대립하던 소망지(蕭望之)를 모함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소광은 선제(宣帝) 때의 태자 태부(太子太傅)를 지냈는데, 황태자였던 원제(元帝)가 12세에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통달하자 태자 소부(太子少傅) 소수(疏受)에게 "내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고, '공(功)을 이룬 뒤에는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道)이다.'라고 한다. 지금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러 높은 벼슬에 오르고 명예를 확립하였는데, 이와 같은데도 떠나지 않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주 방공의 행장 정묘년(1927) 西洲房公行狀【丁卯】 공의 성은 방씨(房氏)로 휘는 두재(斗載), 자는 망여(望汝), 호는 서주(西洲),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윗대에 휘 계홍(季弘)이란 분이 있는데, 고려 개국 공신으로 지위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에 올랐다. 그 후 8대 동안 벼슬아치가 연이어 나왔으니, 휘 사량(士良)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이 분은 휘 구성(九成)을 낳았으니, 구성은 남원(南原)에서 아내를 얻어 이로 인해 주포촌(周浦村)에 거처하게 되었으며, 벼슬은 정산 현감(定山縣監)에 그쳤다. 이분이 휘 순문(恂文)을 낳았으니, 순문은 경기도 수운판관(京畿道水運判官)을 지냈다. 이분이 휘 귀화(貴和)를 낳으니,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이분이 휘 한걸(漢傑)을 낳으니, 한걸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25)이 그의 묘지(墓誌)를 썼으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응현(應賢)으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증조의 휘는 덕화(德驊)이다. 조부의 휘는 원정(元井) 호는 지족와(知足窩)로 문과에 합격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부친의 휘는 명엽(明燁) 호는 주일와(主一窩)로 진사였다. 부인은 창녕(昌寧) 조씨 감역(監役) 황(熀)의 따님이다. 주일의 아우의 휘는 명흡(明熻)이며, 그 부인은 여주 이씨(驪州李氏 ) 별제 지일(志一)의 따님으로 공의 생부모이다.공은 숙종(肅宗) 을유년(1705년)에 태어났는데, 자태가 청수하고 자질이 뛰어났다. 어려서 어버이를 섬김에 때에 맞게 혼정신성(昏定晨省)하였으며 부드러운 낯빛으로 부모의 뜻을 받들었다. 17살에 독자로써 백부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이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로써 장사와 제사를 지냈는데, 정성과 의식이 모두 잘 갖춰졌다. 후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또한 부친상처럼 지냈다. 항상 생부가 후사가 없는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이에 대해 말이 미치면 곧바로 눈물을 흘렸으며 매번 기일을 만나면 더욱 애통하게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효성이다. 이를 미뤄 집안을 바르게 하고 종족을 보존함에 모두 법도가 있었으니, 이로써 한 가문을 이루고 구족(九族)을 화합함에 효성과 조심스러움으로 널리 알려졌다.여러 번 크고 작은 향시에 합격하였다가 기묘년(1699년) 과적(科賊)의 변란26)이 일어나게 되자 과거를 그만두기로 결정하였다. 붕우 가운데 그 까닭을 묻는 자가 있으면 답하기를 "나의 재주가 그렇게 대단히 나쁘지 않고 나의 힘이 아직 과장에 드나들 수 있지만, 이는 대단히 나쁜 구리 냄새27)와 같으니 맡고 싶지 않다."라 하고는 마침내 경전과 성리에 깊이 몰두하였다. 문순공(文純公)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28) 공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깊고 정밀한 이치를 파고들고 연마하여 조예가 더욱 깊어졌으니, 추구한 것은 인의의 정묘함과 천인의 깊은 이치가 아님이 없었다. 후진들을 가르침에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고 모두 문하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정성을 다해 인도하였다.그가 학자들에게 가르치기를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구하는 것이다. 격물치지도 자신이 하는 것이며, 성의도 자신이 하는 것이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도 또한 자신이 하는 것이다. 자신의 뜻이 진실되지 못하면 어찌 자신을 이루며, 자신이 하는 일이 진실되지 못하면 어찌 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랴. 밖에 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다가 안에 들어오면 방종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선을 좋아하지 않고 악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일을 처리함에 잘못을 저지르고서 그 허물을 덮으려 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에 힘쓰고 그의 뜻에 아부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밖에 사물을 대응함에 모두 공교롭게 꾸민다면 무엇을 한들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이에 경계하고 이에 잘 살펴서 정신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삼는 것이 옳다. 학문의 종지는 하나로써 꿰뚫는 것이니, 《중용》의 '성신(誠身)'과 《대학》의 '성의(誠意)'는 바로 자신을 속이지 않는 뜻이다. 성(誠)과 경(敬)은 서로 필요하니 원래 안팎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한 시대의 명사들로, 판서 민진장(閔鎭長), 감사 민진원(閔鎭遠), 참판 김우항(金宇杭), 감사 이진휴(李震休), 참판 이익수(李益壽) 등이 공과 교유하면서 시를 수창하고 학문을 문답하였는으니, 모두들 공이 왕의 계책을 보좌할 것이라 기대하였다.공은 병술년(1766년) 7월 11일에 타계하였으니 62세의 수를 누렸다. 주포의 송곡(松谷) 두 번째 높은 봉우리 임좌(壬坐)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여광(汝鐄)의 따님으로,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태관(泰觀)과 태윤(泰潤)이다. 세 딸은 안세복(安世復), 나경천(羅景天), 이수흥(李洙興)에게 시집갔다. 큰 아들은 입양한 윤보(允寶)와 안극겸(安克謙)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작은 아들은 출계한 윤보와 문과에 합격한 윤익(允翼), 윤경(允慶) 등 세 아들과 박민동(朴敏東), 김방(金磅), 조윤탁(曹允鐸)에게 시집간 세 딸을 두었다. 사위 안세복은 아들로 창재(昌再)와 창의(昌毅)를 두었고, 두 딸은 백신원(白信源), 유증범(柳增範)에게 시집갔다. 사위 나경천은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충좌(忠佐)와 위좌(渭佐)를 두었다.공은 온 몸에 덕스런 모습이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넘치며29) 바라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일며, 평소의 말은 정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니 다가가면 심취하게 된다. 평소에 의대(衣帶)를 단정하게 하고 무릎을 모으고 단정하게 앉아 한 점 방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학문은 진실무위(眞實無僞)를 위주로 하였으니, 〈위학진위도(爲學眞僞圖)〉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보였다. 지은 문장은 비록 부섬(富贍)하지만 다만 뜻이 통하는 것에 주안하고 문장 조탁을 일삼지 않았다. 저술한 〈수청설(水淸說)〉, 〈조수설(潮水說)〉 등은 득의의 작품이며, 〈병계가부설(病戒可否說)〉은 세상에 대해 탄식한 것이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서주의 풍월은 본래 티끌이 없으니 西洲風月本無塵이곳에서 소요하며 봄을 즐기누나. 這裡盤桓樂有春허튼 영화 이르지 않으니 몸이 어찌 욕되랴 浮榮不到身何辱문득 태고의 희황 사람이 되누나.30) 便作羲皇太古人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남아 평소 큰 일 이루려는 뜻 지녔으니 男子平生將大爲문장의 여기는 모름지기 일삼지 않노라. 文章餘技不須爲가난을 즐김은 현인을 따르는 일이니 安貧自是遵賢事어찌 구구하게 속세에 몰두하랴. 何用區區世冗爲이 시를 보면 공의 생각을 대략 알 수 있다.오호라!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와 이백 년이 떨어졌는데, 그 유풍과 여운이 아직도 고을 사람들의 존모하여 외우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 가장(家狀)이 뒤늦게 후대에 나와 소략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는데, 지금 공의 6대손 환영(煥永)씨가 두 조카 동규(東圭)와 동진(東珍)을 보내 나에게 그 덕을 드러낸 글을 청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찌 자세한 행적을 찾아서 상세하게 논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내가 지족와와 주일와 및 공의 유고를 교열하였으니, 대개 방씨의 학문과 행실은 3대에 걸쳐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는데, 공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 선사 간재(艮齋) 전우(田愚)31) 선생께서도 일찍이 공의 학문은 전적으로 의리를 위주로 하였다고 하니 제대로 평가하신 것이다. 이에 감히 가장 및 유고에 나타난 사실에 대략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편차한다. 公姓房氏, 諱斗載字望汝號西洲, 南陽人.上世有諱季弘, 高麗開國功臣, 位至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其後八世, 冠冕相繼, 有諱士良, 寶文閣直提學.生諱九成, 受室南原, 仍居周浦村, 官止定山縣監.生諱恂文, 京畿道水運判官.生諱貴和, 俱中生進, 官戶曹佐郞.生諱漢傑, 副司直, 盧蘇齋銘其墓, 公五世祖也.高祖諱應賢, 李月沙銘其碣.曾祖諱德驊.祖諱元井號知足窩, 文科典籍.考諱明燁號主一窩, 進士, 妣昌寧曹氏監役熀女.主一弟諱明熻, 驪州李氏別提志一女, 其本生也.公生於肅廟乙酉, 形貌淸秀, 才質超異, 幼而事親, 定省以時, 愉婉承順.年十七, 以獨子出爲伯父後, 是歲丁外艱, 葬祭以禮, 情文俱備, 後遭內艱, 亦如前喪.常以生父無後爲至恨, 語及輒流涕, 每當諱辰, 尤極哀痛, 此公之孝也.推而至於正家保族, 皆有法度, 是以行成一門, 歡洽九族, 以孝謹風聞.累中大小鄕試, 至己卯科賊之變, 決意廢擧.朋知有問者, 答曰: "吾才不至全疎, 吾力尙可出入場屋, 惟銅臭甚惡, 不欲聞也." 遂寓樂經傳性理.從學于玄石朴文純公之門, 鉤深硏精, 造詣益邃, 所求者, 無非仁義之妙, 天人之蘊.敎誨後進, 不問親疎, 皆許入門, 懇懇誘掖.其訓學者曰: "學之道無他, 求之於己也.格致己也, 誠意己也, 修齊治平, 亦己也.己之意不誠, 惡乎成其己, 己之事不誠, 惡乎食其效.居外飭躳而處內放肆, 則是自欺也.不善善而惡惡, 則是自欺也.處事乖戾而欲掩其過者, 是自欺也.務悅於人而阿附其意者, 是自欺也.其他事物之應, 皆由巧飭, 則安往而不自欺也.誠能警戒於是, 察識於是, 以爲喚醒之方, 則可也.學問宗旨, 一以貫之, 《中庸》誠身, 《大學》誠意, 莫非母自欺意思, 誠敬相須, 元無表裡矣." 一代名流, 如閔判書鎭長·閔監司鎭遠·金叅判宇杭·李監司震休·李參判益壽, 無不與之交遊, 唱酬答問, 皆期公爲黼黻王猷云.卒於丙戌七月十一日, 壽六十二, 葬于周浦松谷第二高峰壬坐, 配光山金氏汝鐄之女, 墓祔.公左1)二男, 泰觀·泰潤, 三女, 安世復·羅景天·李洙興.長房系男允寶女安克謙.次房男允寶出后, 允翼文科, 允慶, 女朴敏東·金磅·曹允鐸.安壻, 男昌再·昌毅, 女白信源·柳增範.羅婿, 男忠佐文科, 渭佐.公德容晬盎, 望之可愛, 雅言誠信, 卽之心醉.平居整朿衣帶, 斂膝端坐, 無一點安肆之態.爲學一以眞實無僞爲主, 作〈爲學眞僞圖〉以示意.其爲文雖富贍, 但主辭達, 不事雕繪.所著若〈水淸說〉〈潮水說〉, 其自得也, 若〈病戒可否說〉, 其慨世也.嘗有詩曰: "西洲風月本無塵, 這裡盤桓樂有春.浮榮不到身何辱, 便作羲皇太古人." 又曰: "男子平生將大爲, 文章餘技不須爲.安貧自是遵賢事, 何用區區世冗爲." 觀此詩文, 槩知公之所存也.嗚呼, 今去公世, 爲二百年所, 遺風餘韻, 尙徵於鄕邦人誦慕, 但其家狀晩出, 不免有疏略之歎, 今於公六世孫煥永, 遣二姪東圭珍, 請余狀德也, 何能追詳而備論乎.曾余校閱知足主一及公遺稿, 蓋房氏文行, 三世濟美, 至公益著, 而先師田艮齋先生, 嘗稱公文爲專主於義理, 可謂得當矣.乃敢略據家狀及見於遺稿者, 撰次如右云爾.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ㆍ여봉노인(茹峯老人)ㆍ암실(暗室)ㆍ이재(伊齋)이다.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 기묘년 과적의 변란 기묘년 과거는 숙종 25년(1699) 가을에 단종(端宗)을 복호(復號)한 것을 경하하여 베푼 과거를 가리킨다. 이 해 겨울에 과옥(科獄)이 일어나 여러 사람이 형(刑)을 받고, 파방(罷榜)까지 하였으나, 동왕(同王) 36년(1710)에 이르러 부정에 직접 관련된 사람 외에는 모두 복과(復科)시켰다. 나쁜 구리 냄새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것을 풍자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최열(崔烈)이 500만 전(錢)을 바쳐 삼공(三公)의 하나인 사도(司徒)의 지위에 오르자, 당시 사람들이 구리 냄새가 난다고 기롱한 '최열동취(崔烈銅臭)'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2 崔駰列傳 崔寔》 현석 박세채 숙종 때의 문신(1631~1695)으로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이다. 성리학자로서 숙종 20년(1694)에 좌의정이 되었고, 황극 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심학지결(心學至訣)≫, ≪이학통록(理學通錄)≫ 등이 있다. 덕스런……넘치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에는 환하게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넘쳐흐르며 온몸에 퍼져서 온몸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게 된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喩.〕"라고 하였다. 태고의……되누나 희황은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그 시대의 백성들이 근심 없이 순박하고 한적하게 살았으리라 하여 은자들이 자칭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하였다. 도연명이 여름에 북창 아래 누워 있다가 맑은 바람이 불어오자 스스로 복희씨 시대의 사람이라 하였는데, 이백(李白)이 이를 차용하여 지은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에서 "소금은 본래 줄이 없고, 술 거를 땐 갈건을 사용하지.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누워, 스스로 태곳적 사람이라 하네.〔素琴本無絃 漉酒用葛巾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라 하였다. 간재 전우 구한말의 학자(1841~1922)로 초명은 경륜(慶倫)ㆍ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ㆍ추담(秋潭)ㆍ간재(艮齋)이다. 임헌회의 문인으로, 만년에 전라도 계화도(界火島)에서 후진을 많이 길러 내어 우리나라 유문(儒門)의 최후의 대종(大宗)이라 이른다. 左는 生의 오자인 듯하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용강 송공의 행장 경인년(1950) 折衡將軍僉知中樞府事龍岡宋公行狀【庚寅】 어느 날, 송흥진(宋興鎭) 군이 광산(光山)에서 찾아와서 자신의 5대조 용강공(龍岡公)의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는데, 그의 족형 우진(宇鎭), 사익(士翼)이 함께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사익은 단정한 선비이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랴. 이에 가장(家狀)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공의 휘는 인하(寅夏), 자는 군칠(君七)이며, 그 선조는 홍주(洪州) 사람이다. 시조의 휘는 계(桂)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세상에서 은둔하여 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았던 두문동(杜門洞) 제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에 들어와 휘 평(枰)은 별시위(別侍衛)를 지냈으며, 휘 기손(麒孫)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휘 구(駒)는 열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청덕비가 세워졌다. 휘 정황(庭篁)은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으며, 휘 제민(齊民)은 호가 해광(海狂)으로 임진란 때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등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휘 타(柁)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또한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이상이 공의 5대조이다. 휘 수(燧), 연(烻), 석견(錫堅), 해흠(海欽) 등은 공으로부터 위로 4대인데, 대대로 학문과 행실이 갖추었다. 선비(先妣)는 함평(咸平) 노씨 일(鎰)의 따님으로 덕과 지식을 갖추었으며, 규방의 법도가 엄정하였다.공은 경종(景宗) 갑진년(1724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육적(六籍)과 제자백가를 많이 외웠으며 이따금 중요한 뜻을 초선(抄選)하여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는 법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길 때 뜻과 몸을 모두 잘 받들었고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어버이가 병이 나면 변(便)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여, 병이 나으면 이에 그만 두었다. 술(戌)과 자(子)년 가을에 거듭 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애곡(哀哭)하며 가슴을 치다가 기절한 것이 여러 차례이며, 염습을 하고 빈소를 차리며 음식을 올려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힘써서 예에 맞춰 거행하였다. 이윽고 장사 지낸 뒤에 묘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곡을 하니 눈물이 흐르는 곳에 풀이 시들었으며 무릎을 댄 곳은 구덩이가 파였다. 손수 심은 소나무가 묘소를 덮어 보호하고 온 산이 울창하였는데, 병충해가 잎을 갈아먹어 사람의 힘으로는 금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이 글을 지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숲을 돌아다니며 울부짖으니, 문득 까치 떼가 날아와 벌레를 쪼아대니 얼마 되지 않아 충해가 멈췄다. 산 아래 사람들이 지금도 미담으로 전하고 있다.일찍이 한양에 들어가 교유하던 사람들을 두루 만났는데, 모두 그의 풍모와 위의를 사랑하고 그 국량을 중시하면서 "호남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일찍이 한번도 권문세가에 가까이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강론하고 의를 행함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도사(道司)가 선비를 추천할 때 공도 또한 그 안에 들어갔다.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법으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니, 정조 을묘년(1795년)이었다. 공은 덕이 없는데 성은을 받았다고 여겨 황공하며 감격한 뜻을 자주 시문에 드러내었다.등룡산(登龍山) 아래 선영의 곁에 집을 지어 용강정사(龍岡精舍)라 편액한 뒤에 서적을 사서 쌓아두고서 날마다 고을의 벗이나 이웃의 제자들과 학문과 예에 대해 논하였으니, 세상에 득실이나 영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손수 가문의 규범 한 권을 써서 해마다 한 번 제사 지내는 제수와 친족의 집과 관의 재목을 직접 심은 소나무 숲에서 마련하게 하였으니, 정연하게 조리가 있어 대대로 지켜 쇠퇴하지 않고 그대로 지키게 하였다.신유년(1801년)에 공의 나이 78세였는데, 아름다운 안색에 학 같은 머리카락이어서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다. 숙부인과 해로하여 자손들이 회근연(回巹宴)을 여니 많은 사우들이 시로 읊어 감탄하였다. 향년 81세인 순조 갑자년(1804년) 정월 2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광주(光州) 대촌면(大村面) 등룡산 북쪽 산기슭 곤좌(坤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은 철원 주씨(鐵原周氏) 욱(頊)의 따님으로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공보다 4년 뒤에 돌아가셨으니, 묘는 분토산(粉土山) 유향(酉向)에 있다. 세 아들은 일영(日榮)과 일제(日躋)와 일선(日璿)이다. 장남은 아들이 없어 의규(懿奎)를 양자로 들였다. 둘째는 심규(心奎), 대규(大奎), 생규(生奎)를 낳았다. 셋째는 도규(道奎), 출계한 의규, 내억(來億), 내만(來萬)을 낳았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공은 천성에 바탕한 효도로 봉양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으며, 선영의 소나무를 잘 길러 신령한 까치를 감동시켜 벌레를 쪼아 먹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으며, 실제의 학문으로 도를 강론하여 스스로 즐겨 도사의 추천을 받았으며, 선을 쌓은 몸으로 수작(壽爵)의 영광과 회근(回巹)의 경사를 누렸으니, 이는 참으로 공의 덕을 징험할 수 있다. 해광 선생(海狂先生)32)이 〈만언소(萬言疏)〉, 〈와신기(臥薪記)〉, 〈명경제대책(明經濟大策)〉, 〈복수대의(復讐大義)〉 등을 저술하였지만 그 뜻을 행하지는 못하였는데, 선생으로부터 공까지는 6대로 유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공이 한양에 들어가 벗들을 두루 만난 것은 선생의 뜻 아님이 없다. 당시 교유했던 이들이 공의 국량을 중시하였으니 또한 의리와 계책을 행할 수 없지 않았는데, 한번도 권문세가를 찾아가지 않은 것은 자신을 굽혀 쓰이기를 구하지 않는 선생의 법문이다. 이것은 선조의 뜻과 일을 계술하는 효도가 되니 더욱 기록할 만하다. 日, 宋君興鎭, 自光山來, 謁其五世祖龍岡公狀行文, 因其族兄宇鎭士翼共爲介.士翼莊士也, 吾何敢辭諸.乃按家狀而敘之曰: "公諱寅夏字君七, 其先洪州人.始祖諱桂, 以高麗侍中, 麗亡遯居罔僕, 杜門洞諸賢之一也.入韓朝, 有諱枰, 仕爲別侍衛, 諱麒孫司憲府監察, 諱駒歷郡十二, 皆有淸德碑.諱庭篁, 文科, 弘文正字, 諱齊民號海狂, 壬辰亂, 與金文烈高忠烈倡義旅, 贈司憲府持平.諱柁, 宣武原從功臣, 亦贈持平.公之五世以上.諱燧烻錫堅海欽, 其四世, 世傳文行, 妣咸平魯氏鎰女, 有德識, 閫範嚴正.公以景宗甲辰生, 自幼聰敏, 六籍百家, 多所通念, 往往抄選要義, 爲修身治家之用.事親志體俱養, 愛敬備至, 親癠嘗糞祝天, 癠平乃已.戌子秋, 荐遭兩喪, 哭擗絶蘇者屢, 而斂殯饋奠, 必自强如禮.旣葬, 廬墓, 晨夕伏哭, 淚處草枯, 膝處坎成.手植松庇幽宅, 滿山蓊蔚, 而蟲災傷葉, 人力莫禁, 公爲文祭神, 巡林號哭, 忽有群鵲來啄, 不日災息, 山下人至今傳爲美談.嘗入京周觀交遊, 皆愛其風儀, 重其器局曰: "湖南乃有此人也." 然不曾一近權門, 歸來故山, 以講學行義爲樂.至於道司薦士, 公亦與焉, 朝家以優老典, 授以折衡將軍僉知中樞府事, 時正祖乙卯也.公以無德受恩, 惶恐感激之意, 屢見於詞章.築室登龍山下先塋側, 扁曰'龍岡精舍', 貿貯書籍, 日與鄕朋隣子, 論文談禮, 若不知世間有得喪榮辱焉.手寫門規一卷, 歲一薦祀之供, 族人屋棺之材, 自手植松中辨給, 井井有條, 俾世守無替.辛酉之歲, 公年七十八, 韶顔鶴髮, 望若神仙, 淑夫人偕老, 子孫爲設回巹宴, 士友多以詩咏歎之.享年八十一, 而純祖甲子正月二日終, 墓光州大村面登龍山北麓坐坤原.配鐵原周氏頊女, 生與公同年, 歿後公四年, 墓粉土山酉向.三男, 日榮·日躋·日璿.長房無男, 懿奎繼.二房生心奎·大奎·生奎.三房生道奎·懿奎出·來億·來萬.曾玄以下不錄.嗚呼, 公以根天之孝, 養送以禮, 護養丘松, 感靈鵲啄蟲之異, 以實地之學, 講道自樂, 得道司之薦, 以積善之躳, 致壽爵之榮, 回巹之慶, 是固所以徵公之德也.海狂先生著〈萬言疏〉〈臥薪記〉〈明經濟大策〉〈復讐大義〉, 而不得行其志, 自先生至公六世, 而澤猶不斬, 其入京周觀, 未嘗非先生之志也.當時交遊, 重其器局, 則亦未嘗無義與策之可行, 而一不近權門者, 先生不枉己求售之法門也.是爲繼述先祖志事之孝, 而尤可書者也." 해광 선생 이름은 제민(齊民)으로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호방한 성격에 구속을 싫어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梁山龍)·양산숙(梁山璹)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다시 김덕령(金德齡)의 의병군에 가담하였다. 김덕령이 옥사하자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였다. 또,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으나 이것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되어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구술당 김공 행장 병자년(1936) 構述堂金公行狀【丙子】 공의 휘는 용헌(龍憲), 자는 덕중(德中), 호는 구술당(構述堂)이다. 언양(彦陽) 김씨는 계통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여섯 번째 아들에서 나왔다. 휘 선(鐥)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대로 세상에 크게 드러났으니, 휘 취려(就礪)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휘 전(佺)은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익대(翊戴)이다. 휘 변(賆)은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시호는 문신(文愼)이다. 휘 윤(倫)은 좌의정(左議政)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휘 경직(敬直)은 본조에 들어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으니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휘 복생(福生)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휘 윤(潤)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보성 군수(寶城郡守) 휘 약흠(若欽)에 이르러 한양에서 호남의 고부(古阜)로 이사하여 거처하였으니, 비록 존귀하고 현달함은 이전보다 덜하였지만 또한 벼슬아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충효와 예의로 군수에게 알려졌다.5대인 봉사 휘 선명(善鳴)은 광해군(光海君) 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인륜이 무너진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6대인 도헌(蹈軒) 휘 태운(泰運)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강화가 맺어진 뒤에 벼슬하지 않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혔다. 이로부터 대대로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국려(菊廬) 휘 용(墉)은 상을 당해 여묘 살이를 하였는데, 국화가 묘 앞에서 자랐다. 송곡(松谷) 휘 만상(萬祥)은 어버이 병에 하늘에 기도하여 곧바로 기이한 효과를 보았다. 현곡(玄谷) 휘 명(溟)은 성리에 잠심하였으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영모재(永慕齋) 휘 주성(柱成)은 효성으로 뇌우를 감동하여 송충이를 쓸어버리는 기이한 일이 있었으며, 또한 학문으로 이름이 났다. 지금까지 공의 증조 이상이다.조부의 휘는 신(賮) 호는 성재(省齋)로, 효성과 학문은 선조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다. 부친의 휘는 재행(栽行)이다. 생부의 휘는 재영(栽瑛) 호는 송암(松菴)으로 내행이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중형(仲兄)이 일찍 죽어 후손이 없자 공으로 그 뒤를 잇게 하였다. 비는 이천(利川) 서씨(徐氏) 취학(就學)의 따님이다. 문화(文化) 유씨(柳氏)의 따님이 공의 생모이다.공은 정조 을묘년(1795년) 12월 29일에 고부(古阜)의 송산리(松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여러 대에 걸쳐 쌓은 덕을 계승하고 돈후한 자질을 품부 받았다. 입으로 시와 예의 글을 외우고 마음에는 영화와 이익의 생각을 끊어버렸으며, 다만 의리를 숭상하고 실질을 힘썼으며, 모든 행위가 사군자(士君子)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 적었다. 그 중에서 가장 주안한 것은 정성을 다해 선조를 받드는 것을 평생의 큰 일로 삼았으니, 이른바 '효도가 백행의 근원이며 인을 행하는 근본이란 것'을 공이 실제로 실천하였으며 이에서 여러 선들이 나왔다.부친과 조부를 장사지낼 곳을 여러 해 동안 구하였으니 멀리는 7사(舍)33)를 벗어나기도 하였는데, 묘소를 정한 곳은 끝내 길지를 택하였다. 대종, 소종계를 만들어 부지런히 그 일을 주관하여 재물을 불려서 논 20마지기 이상을 사들였다. 해마다 소작세를 거둬서 각처의 친진(親盡)34)한 묘소를 지키거나 제사지내는 도구를 넉넉하게 준비하여 오래 유지할 방도로 삼았다. 도헌(蹈軒) 이하 여러 선조의 전할 만한 행적은 천 리에 발을 부릅뜨더라도 문장을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청하여 묘소에 비석을 세웠으니, 석물(石物)을 갖추지 않는 묘소가 없었다. 방친의 조상에게도 또한 각각 제전(祭田)을 마련하였으니, 모든 선조를 섬기는 일에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을 갖춰 유감이 없게 하였다. 또한 나머지를 미뤄서 종족 가운데 빈궁한 자의 혼인과 장례, 교육의 비용으로 나눠 지급하였으며, 이를 전하여 전례(典例)로 삼게 하였으니, 대개 그가 종신 근검하여 이미 자신의 업을 이루었고 인하여 종물(宗物)을 넉넉하게 한 것은 참으로 이렇게 했기 때문이다.만년에 직접 집터를 잡아 자손들이 대대로 전하며 거처할 곳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좋은 터라고 하였으니, 그가 풍수지리까지 두루 통달함이 이와 같았다. 조목으로 가법을 정해 매번 여러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고하였으니, 그 요점을 들어보면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를 돈독하게 하며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학문에 힘쓰며 교만과 사치를 버리고 부지런하고 우졸함을 지킨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이 친족을 보존하고 집안을 바로잡은 대략이다. 맹자는 "군자는 창업수통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잇게 한다."35)고 하였으니 공을 김씨 일문에 후대에 이어 나갈 통서(統緖)를 드리운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 그르겠는가. 지금 비록 바다가 뽕밭으로 변한 세상이지만 선조를 생각하고 자신의 뿌리에 힘쓰면서 정성을 다해 엄숙하게 공경하여 세속과 다르게 행하매, 사람들이 '송산의 김 아무개'라고 칭송하니 이에서 공을 알 수 있을 것이다.철종 경신년(1860년) 9월 14일에 공이 돌아가셨으니, 정읍군(井邑郡) 내산면(山內面) 원덕리(院德里) 안산 토지등(兎只嶝) 해좌(亥坐)의 언덕이 공의 묘소이다. 첫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한응(漢膺)의 따님으로 공과 합봉하였으며, 둘째 부인은 연안 이씨 도풍(度豊)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와 같은 언덕에 있다. 아들 세열(世烈)은 준수하고 총명하고 강단이 있어서 능히 집안을 잘 다스렸으니, 첫 부인의 소생이다. 세훈(世勳)은 효행이 있었으며, 막내는 세형(世亨)이다. 딸들은 여흥(驪興) 민주호(閔周鎬)와 충주(忠州) 박원항(朴源恒)에게 시집갔다. 이상은 둘째 부인 소생이다. 세열의 아들로 진사 원석(源錫)은 의를 좋아하고 어진 이를 존모하여 더욱 집안의 명성을 날렸다. 봉석(奉錫)과 홍석(弘錫)과 기석(璣錫)이 있는데, 기석은 남의 후사가 되었다. 세훈의 아들로 형석(炯錫)이 있고, 딸들은 문화(文化) 유병철(柳炳喆), 연일(延日) 정희원(鄭喜源), 해평(海平) 윤계선(尹桂善)에게 시집갔다. 세형은 기석을 양자로 들였고, 딸들은 전주(全州) 이호선(李鎬善), 전주(全州) 최경렬(崔暻烈), 울산(蔚山) 김희수(金希洙), 의령(宜寧) 남정옥(南廷玉)에게 시집갔다. 사위 민주호의 아들은 영욱(泳旭)이며, 사위 박원항의 아들은 판주(判柱)와 정주(定柱)가 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공이 타계한지 지금 팔십 년이나 오래 되었다. 이미 당시에 행장을 짓지 못하였으니 용모와 기상을 상상할 수 없으며 언론과 사적도 또한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지금 공의 증손 한경(漢鏡), 현손 구상(求相), 5대손 성학(成學)이 나에게 행장을 청하니, 참으로 죽은 뒤에 진영(眞影)을 뒤미처 그림에 그 비슷한 모습을 얻기 어려운 것과 같다. 더구나 나의 졸렬한 문장으로 말인가. 그러나 동향의 후생으로 유풍에 대해 익숙히 들었으며 정의(情誼) 또한 사양할 수 없다. 이에 《세보》 중에 기록한 것과 여러 후손들이 구전한 것을 선술(選述), 편차한 뒤 글을 지어서 입언가가 재택하기를 대비한다. 公諱龍憲, 字德中, 號構述堂.彦陽之金, 系出新羅敬順王第六子.諱鐥以麗太祖外孫, 封彦陽君.歷世大顯, 有諱就礪, 平章事, 謚威烈.諱佺, 平章事, 謚翊戴.諱賆, 集賢殿學士, 謚文愼.諱倫, 左議政, 謚貞烈.諱敬直, 入本朝大提學, 贈右議政, 謚忠敬.諱福生, 工曹典書.諱潤, 吏曹參判, 至寶城郡守.諱若欽, 自漢師居湖南之古阜, 雖貴顯遜于前, 亦簪組不絶, 而以忠孝禮義聞郡守.五世而奉事諱善鳴, 光海時棄官居鄕, 痛彛倫之斁傷.六世而蹈軒諱泰運, 丙子亂擧義旅, 媾成後不仕, 明春秋大義, 自是連世行誼.菊廬諱墉, 遭艱廬墓, 菊生墓前.松谷諱萬祥, 親癠禱天, 輒得奇效.玄谷諱溟, 潛心性理, 遊學于遂庵權先生門.永慕齋諱柱成, 孝感雷雨, 致剝掃松蟲之異, 亦以學問著名, 公之曾祖以上也.祖諱賮號省齋, 孝學承先懿.考諱栽行.生父諱栽瑛號松菴, 內行淳篤, 仲兄早歿無嗣, 以公系後, 妣利川徐氏就學女.文化柳氏女, 其所生也.公以正廟乙卯十二月二十九日, 生于古阜之松山里第, 承積累之世德, 稟敦厚之天資, 口講詩禮之文, 心絶榮利之念, 惟義是尙, 惟實是勉, 動靜云爲, 有不遵士君子規模者蓋募.而最是竭誠奉先爲生平大致, 則所謂孝爲行源仁本者, 公實有之, 而爲衆善之出也.父祖葬地, 積年求之, 遠則出七舍之外, 佳城之占, 竟多獲吉.立大小宗契, 勤幹殖聚, 買得水田二十頃以上, 歲收佃稅, 優備各處親盡內外墓守護享祀之具, 爲久遠計.蹈軒以下累位之行治可傳者, 趼足千里, 謁文名家, 顯刻斧堂, 儀物之備, 則無墓無之.至傍親位, 亦爲各置祭田, 凡於先事, 旣皆豊美無憾.又推羨餘, 分助宗族貧窮者婚葬敎學之用, 傳以爲例, 蓋其終身勤儉, 旣致己業, 因贏宗物者, 亶爲此用也.晩年親占宅基, 爲子孫傳世之居, 人咸稱爲名基, 其旁通堪輿之術如此.條定家法, 每會衆子姪告之, 大要若曰: "正倫理, 篤恩義, 誠祭祀, 勤學問, 去驕奢, 守謹拙." 此又公保族宜家之略也.孟子曰: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公謂之垂可繼之統於金氏一門者, 非耶.今雖滄桑變遷之餘, 念先務本, 恂恂秩秩, 異於俗習者, 人稱松山之金, 斯可以知公矣.哲廟庚申九月十四日, 公之考終, 井邑郡山內面院德里案山兎只嶝亥坐原, 其藏也.前配延安李氏漢膺女祔公合封, 後配延安李氏度豊女, 公墓同原.男世烈, 秀偉明斷能克家, 前配出, 世勳, 有孝行, 世亨.女適驪興閔周鎬·忠州朴源恒後配出.長房男源錫進士, 好義慕賢, 益揚家聲, 奉錫·弘錫, 璣錫出系.次房男炯錫, 女文化柳炳喆·延日鄭喜源·海平尹桂善.三房系男璣錫, 女全州李鎬善·全州崔暻烈·蔚山金希洙·宜寧南廷玉.閔壻男泳旭, 朴婿男判柱·定柱.曾玄以下不盡書.嗚呼, 距公之沒, 爲八十年之久矣.旣未及狀行於當日, 則容貌氣像, 不可以想度, 言論事蹟, 亦無有詳說者.今於公之曾孫漢鏡玄孫求相五代孫成學之請余狀也, 正如身後之追寫眞像, 難得其髣髴, 矧以余之文拙乎.然爲同鄕後生, 習聞遺風, 而誼亦有不敢辭者.乃摭述《世譜》中所錄及諸後孫口傳, 纂次成文, 以備立言家裁擇之資云爾. 사(舍) 거리 단위로 일사는 30리이다. 친진 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된 것을 이른다. 군자는……한다 《맹자》 〈양혜왕하(梁惠王下)〉에 보이는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회재 근호에게 보냄 기사년(1929) 與朴晦哉 根浩 己巳 편지에서 '지난날 심화(心火)가 있었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말한 '불길이 없는데 뜨거운 것'으로서 그대처럼 아름다운 자태와 맑은 흉금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요컨대 반드시 일시적인 유소(有所)의 매임이52) 있어서 급절하게 마음을 쏟아내기 어려워 그것을 심화가 발작한 것으로 인식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오래도록 청소하지 않아 더욱 치성하게 되면 어찌 끝내 우려가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마음은 신명이 머무르는 집으로, 본디 담일(湛一)하고 허명(虛明)하여 허다한 사물이 그 사이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치를 따라 마음을 순히 길러서 그 신체를 온전히 하고 그 마음의 작용을 잘 이끌어낸다면 백행(百行)과 만선(萬善)이 도도하게 흘러 강하가 바다에 도달하는 것처럼 될 터이니, 어찌 맹렬히 타오르는 횃불과 석탄덩이 같은 사물이 있겠습니까? 오장(五臟)을 오행(五行)에 분속시키면 심(心)은 불에 해당합니다. 고로 경영하여 계산하는 바가 있어서 큰 욕망이 있는데 오래도록 이루지 못한 경우와, 사랑하고 기대어 평생 의지하는데 하루아침에 잃게 되는 경우에 번민과 조급증이 뜨거운 불길로 타올라 유황, 인, 땔감, 석유 등의 물질이 없어도 오장이 타서 작열(灼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사가 원지(遠志), 창포(菖蒲) 등의 청량한 약재로 다스리니, 그것이 본디 병을 치료하는 관례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성현의 문정(門庭)에 또한 한 가지 청량한 약제가 있어서 탕전(湯煎 탕약)과 도규(刀圭 병 고치는 기술)를 기다리지 않고도 한 번에 쓸어 없앨 수 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의 청량한 약제는 무엇일까요? 독서하여 이치를 밝히고, 이치를 따라 분수에 안주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자가 "세간의 만사는 잠깐 사이에 변멸(變滅)하니 모두 흉중에 담아둘 것이 없다. 오직 독서하고 궁리하는 것만이 궁극의 법이 된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주자가 이른바 세상만사란 모든 성색(聲色), 취미(臭味), 궁실(宮室), 의복(衣服)으로서 하나같이 응당 경영하고 애련의 마음이 쉽게 발생하는 것들이니, 심화라는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이 훈계를 읽어보면 책을 펴서 이치를 완미하여 그 힘을 얻을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먼저 흉중에 청쾌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저 이른바 독서궁리(讀書窮理)는 또 어찌 백발이 되도록 경전에 골몰하여 종신토록 애쓰는 것뿐이겠습니까? 대개 이 네 글자 "독서궁리(讀書窮理)" 중에는 심신(心身) 안팎의 일과, 가국(家國)의 멀고 가까운 허다한 사업이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늘 "자고로 도리를 알지 못하는 영웅은 없다"라고 하였고, 옛 훈계에도 "진정한 대 영웅은 전전긍긍(戰戰兢兢), 여림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薄氷)53) 가운데서 만들어진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은 모두 정확하고 간절한 의론으로 매번 암송할 때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을 흔들어 분발을 느끼게 합니다. 부족한 나를 돌이켜보면 비록 백발이 성성하지만 여전히 배로 더욱 힘써서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겠다."라는 소원이 있는데, 하물며 그대처럼 젊고 건장하여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어찌 잠시라도 무관심하여 진실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방해가 있다고 하여 평소에 가졌던 뜻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대개 이 학문과 세도(世道)를 일으킬 책임은 그대 같은 미래 세대에게 희망이 있으니, 부형(父兄)은 자재를 믿고 스승과 웃어른은 후생을 기약합니다. 그러니 선진(先進)을 계승하여 일어나는 자가 있지 않다면 우리의 도는 거의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보잘 것 없는 내가 세한(歲寒)의 마음을 기약함이 다른 사람이 아닌 그대에게 하는 까닭입니다. 만일 이런 나의 고심을 헤아려주지 않는다면 나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모름지기 곧바로 행장(行裝)을 꾸려서 이곳으로 와 서로 교학상장하여 여러 해 동안 학업을 온당하게 닦는다면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向日心火之喩, 是何謂也? 此正朱子所謂不火而熱者, 以賢美姿淸襟, 豈有是耶? 要必不免爲一時有所之係, 而難於急切放下, 認以爲心火之發也.然此念久不掃淸, 而益以熾盛, 則安保其終無慮也? 蓋心者神明之舍, 本自湛一虛明, 不容許多物介其間.苟順而養之, 全其體而達其用, 則但見百行萬善, 混混流出, 若江河之達海, 安有一般燄燄烈烈, 燎把炭槐樣物事哉? 惟其以五臟分屬於五行, 則心乃屬火.故有營爲計較, 大欲所在而積久未遂者, 及愛憐依恃, 生平所賴而一朝見失者, 則煩悶燥輕, 烈擧熾楊, 無硫燐柴油等物, 而五內己焚灼矣.醫者乃以遠志菖蒲等淸凉之劑治之, 此固治病之例方.然殊不知吾聖賢門庭, 亦自有一副淸凉之劑, 不待湯煎刀圭而一掃掃下者也.所謂聖門淸劑何也? 讀書而明理, 循理而安分是也.朱子不云乎? 世間萬事, 須臾變滅, 擧不足置胸中.惟有讀書窮理爲究竟法, 所謂世間萬事, 凡聲色臭味宮室衣服, 一應營爲, 愛憐易生, 心火者非此乎? 試讀此訓, 不待展卷玩理得其力, 而先覺胸膈之淸快也.夫所謂讀書窮理, 又豈但皓首窮經矻矻終身而已乎? 蓋此四字中包括身心內外, 家國遠近許多事業.故人有恒言曰, 自古無不識道理底英雄, 古訓又曰眞正大英雄, 從戰兢臨履上做出來.皆的確懇切之論, 每一詠誦, 使人足以興感奮發也.顧玆陋劣, 雖顚髮星星, 尙有一倍加勉不得不措之願, 况如賢之年富力强, 可以一日千里者, 豈可片刻伈俔, 有妨於造眞境而負夙志乎? 蓋斯文世道之責, 有望於來許者, 在父兄侍子弟, 在師長期後生.不有繼先進而作者, 吾道不幾乎熄乎? 此區區所以歲寒相期者, 不于他而于賢也.如不諒此苦心, 雖謂之負余可也.須卽理裝賁枉, 互相長益, 穩做歲月之業, 甚幸甚幸. 유소(有所)의 매임 《대학》 〈정심수신장(正心修身章)〉 "[心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則不得其正, 有所好樂則不得其正, 有所憂患則不得其正.]" 전전긍긍(戰戰兢兢), 여림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薄氷)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은 듯이 하라.[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는 구절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나익부 인상에게 보냄 을축년(1937) 與羅益夫 仁相 乙丑 공자께서 광견(狂狷)을 칭찬한 것은 중행(中行)의 선비를 얻기 어려움을 탄식한 것입니다. 나는 "사람은 시대에 따라서 낮아지고 풍습은 세상을 따라 비속해져서, 오늘날 인재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중도보다 과하다고 칭해지는 자가 중도에 귀결된다."라고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대도(大道)가 어두워지고 이해(利害)의 길이 밝아져 유자(儒者)의 무리 가운데도, 일종의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평평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은 인물들이 있어서, 도(道)와 의(義)는 궁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편리함만 차지하면서 중도에 거처한다고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 또한 그를 중도로 여기는데 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 오늘날 말하는 중행(中行)의 선비는 고대에 말하는 향원(鄕原)입니다. 대저 광자(狂者)는 지나치게 고대하고, 견자(狷者)는 지나치게 개결하여 진실로 중도를 넘는 재질입니다. 다만 오늘날 스스로를 낮게 여기는 습관과 혼란한 풍습이 어지럽게 세상에 가득차서 그들이 아니면 벗어나 도에 합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광견자(狂狷者)가 오늘날 나온다면 중행의 인재로 허여할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하, 은, 주 삼대의 시절에 선비를 구하면 오직 명예를 좋아할 것을 걱정하고, 삼대 이하에서 선비를 구하면 오직 명예를 좋아하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라고 했으니, 이 또한 같은 뜻입니다. 감히 스스로 생각하건대 폐단을 구제할 뜻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공자 평상의 가르침과 말은 다르지만 뜻은 일치하지 않음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대처럼 과격하지도 않고 순하지도 않으며, 소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재질은 진실로 얻기 어려운 자질입니다. 다만 그대가 오늘날의 세상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말로 힘쓰게 해서 떨치고 일어나 용감하게 나아가 한번 도약해 뛰쳐나가는 힘을 내가 돕고자 합니다. 孔子之稱狂狷, 歎中行之難得也.余謂人以代降, 風隨世卑, 至于今日人材, 則其所稱過中者, 乃可以歸乎中也.何者? 大道晦, 利害之塗明, 儒流之中, 乃有一種非寒非熱不平不仄低人物, 不究道義, 自占便宜者, 居之以中而不疑, 人亦疑其爲中.噫! 今之所謂中行, 古之所謂鄕原也.夫狂者過於高大, 狷者過於介潔, 固過中之材也.但今卑小之習, 混汙之風, 汨汨盈世, 非此無以脫出而揆諸道.吾故曰有狂狷者, 出於今日, 乃可許以中行之材也.古人云求士於三代之上, 惟恐其好名, 求士於三代之下, 惟恐其不好名, 亦此意也.敢自謂其捄弊之意, 未始不與過猶不及平常之訓, 殊言而一致也.君之不激不循, 匪樸匪華之材, 誠難得也.但在今世也故, 以此說勗之, 助振發勇邁一躍躍出之力.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복 다음 날 한씨 산재에서 자정과 함께 더위를 피함 中伏翼日韓氏山齋同子貞避暑 초각에 바람 부니 더운 기운 얼마 남지 않아 草閣飄然暑氣殘가슴 속은 여전히 세속의 티끌 허락치 않네 襟期未許世塵干청산은 마치 늘 약속한 것처럼 기다리고 靑山如待常時約황권은 여기저기 편안하게 따르도다 黃卷相隨到處安멋진 나무 맑은 바람에 매미는 시원하게 울고 秀木風淸蟬語爽긴 하늘 걷힌 구름에 제비는 멀리 날아간다 長空雲捲鷰飛寬매우 고마운 은근한 뜻 나를 일으키니 起余多謝殷勤意아우의 풍류 함께 어울리기 충분하구나 果弟風流足一團 草閣飄然暑氣殘,襟期未許世塵干.靑山如待常時約,黃卷相隨到處安.秀木風淸蟬語爽,長空雲捲鷰飛寬.起余多謝殷勤意,果弟風流足一團.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16년 주소동일증명원(住所同一證明願) 고문서-증빙류-증명서 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李宜容 蘇萊面長 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李宜容 蘇萊面長 경기도 부천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6년 12월 9일에 변경 후의 주소가 이전과 동일함을 증명해줄 것을 청한 것에 대해 소래면장이 이를 증명해주는 문서 1916년 12월 9일에 변경 후의 주소가 이전과 동일함을 증명해줄 것을 청한 것에 대해 소래면장이 이를 증명해주는 문서이다. 변경 전의 주소는 부천군 소래면 무지동 3통9호인데, 후에는 무지동(茂芝洞)이 무지리(茂芝里), 3통9호가 273번지로 바뀌었다. 리명(里名)으로의 변경은 1915년 4월 1일의 행정구역 실시의 결과이며, 번지수로의 변경은 1915년 9월 1일의 소래면고시 제1호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변경사실에 대해 증명해줄 것을 청원한 것이다. 청원자는 소래면 무지리 273번지 거주자인 이의용(李宜容)이며, 피청원자는 소래면장이다. 이 청원에 대해 소래면장은 상위(相違) 없음을 증명한다고 하는 증명서를 이의용에게 발급하였다. 당시 소래면장은 남길우(南吉祐)였다.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16년 이의용(李宜容) 인감증명원(印鑑證明願) 고문서-증빙류-증명서 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李宜容 蘇萊面長 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李宜容 蘇萊面長 경기도 부천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6년 12월 9일에 이의용이 청한 인감증명에 대해 소래면장이 이를 증명하는 문서 1916년 12월 9일에 이의용이 청한 인감증명에 대해 소래면장이 이를 증명하는 문서이다. 이의용은 인감증명을 청하였는데, 흰 종이에 인감도장을 찍고 주소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 273번지와 생년월일인 개국 482년 12월 20일생임을 명기하여 부착하고서, 사용하는 인감이 상위 없음을 증명해달라고 소래면장 남길우 앞으로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면제233호로서, 인감대장을 검토해 인감이 상위 없음을 증명한다고 하는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인감은 1914년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그동안 본인 서명을 확인하는 제도로서 이용되어왔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여와(女瓦) 등 기와 수량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각 집안별로 여와(女瓦) 등 기와의 수량을 적어놓은 간단한 낱장 문서 각 집안별로 여와(女瓦) 등 기와의 수량을 적어놓은 간단한 낱장 문서이다. 집안은 성내댁 등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여안 및 어려움을 함께한 집안의 자제들에게 고함 【1925년 12월】 告汝安及同難家子弟 【乙丑十二月】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바름을 얻고서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57)"라고 하였으니, 이 가르침이 우리들이 오늘날 사용하기에 딱 맞는 말이다. 만약 부형(父兄)을 위해 어려움을 구하려는 자가 통문을 고치고 화해를 구걸하는 일을 멋대로 한다면 부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형을 죽이는 것이다. 曾子曰: "吾得正而斃焉, 斯而已矣." 此訓吾輩正合今日用. 若爲父兄救難者, 擅行改通乞和之事, 則非所以救父兄也, 乃所以戮父兄也. 내가 …… 그만이다 증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비단자리를 깔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동자가 대자리로 바꾸기를 청하자, 증자가 불편한 몸을 일으켜 대자리로 바꾸면서 "내 무엇을 바라겠는가. 내 바름을 얻고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吾何求哉? 吾得正而斃焉. 斯已矣.〕"라고 한 말이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둘째와 셋째 두 아우에게 고함 【1925년 12월 10일】 告仲叔二弟 【乙丑十二月十日】 가난을 편히 여기고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면서 자식을 가르치고 조카를 훈도하며, 큰 절개를 힘써 지키고 자질구레한 일에는 관여하지 말게나. 安貧食力, 敎子訓姪, 務持大節, 無關瑣屑.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정명 【최백렬에게 증정함. 신미년(1931)】 靜精銘 【贈崔白烈 辛未】 마음은 고요하기를 바라고 心欲其靜,학업은 정밀하기를 바란다 業欲其精,고요하지 않으면 들뜨게 되니 不靜則浮,도(道)를 응시할 수 없고, 道無由凝,정밀하지 않으면 거칠어지니 不精則粗,리(理)를 밝힐 수 없네. 理何能明,하나의 병통과 하나의 덕에 一病一德,거취를 삼가고 조심해야 하니, 去就必欽,천하를 다 모은 구정(九鼎)211), 九牧之鼎,백 번 담가 벼린 강철, 百鍊之金,애써 이와 같이 공 들이면 用功若此,성인 되는 것도 먼 일 아니네. 作聖尺尋,한번 소홀함에 이르고 나면 一涉疏忽,시루에 물 붓는 모양 되리니, 注水漏鬵,나의 바늘 잠언 아프게 들어 我箴劄痛,너의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爾其銘心. 心欲其靜, 業欲其精, 不靜則浮, 道無由凝, 不精則粗, 理何能明, 一病一德, 去就必欽, 九牧之鼎, 百鍊之金, 用功若此, 作聖尺尋, 一涉疏忽, 注水漏鬵, 我箴劄痛, 爾其銘心。 구정(九鼎) 중국 하(夏)나라의 우(禹) 임금이 구주(九州)의 수령에게서 동을 거두어 주조(鑄造)한 큰 솥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크고 무거운 권위를 상징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성근명 【최창식ㆍ최현식에게 증정함. 신미년(1931)】 誠勤銘 【贈崔昌植賢植 辛未】 참됨[誠]은 하늘의 도리이고 誠爲天道,부지런함은 성인의 공력이니, 勤是聖功,부지런히 애쓰면 굳고 세어지고 用勤剛健,참됨을 생각하면 밝고 통하리니, 思誠明通.밝고 통하며 굳고 세면 旣明且剛,이를 일러 성인ㆍ철인이라 하니, 斯謂聖哲,재질이 무디다 말하지 마소 莫曰才鈍,증자는 노둔함으로 성취하였네. 曾以魯得.순일한 한마음으로 나아가면 一心所到,쇠와 돌이라도 뚫을 것이고, 可透金石,애써 제 때마다 부지런하면 務厥時敏,내내 닳아 지치지 않으리. 來來不竭.재능은 공경함에서 나오나니 才由敬出,정자의 가르침에 말하였네. 程訓可質,오오, 우리 젊은 사람들 嗟嗟小子,부지런히 애쓰며 지치지 마소! 勉哉無射. 誠爲天道, 勤是聖功, 用勤剛健, 思誠明通。 旣明且剛, 斯謂聖哲, 莫曰才鈍, 曾以魯得。 一心所到, 可透金石, 務厥時敏, 來來不竭。 才由敬出, 程訓可質, 嗟嗟小子, 勉哉無射。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