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884년 사문계(私門稧)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甲申四月 甲申四月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84년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문중 계원들에게 분배한 계문서 1884년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문중 계원들에게 분배한 계문서이다. 이때 도조로 받은 곡식이 모두 17석 18두이다. 이를 석당 9냥씩으로 몇 사람에게 분배해 주니 모두 150냥2전이다. 이중 백 냥은 4월 21일에 큰댁으로 올려 보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사견에게 보냄 을해년(1935) 與田士狷 乙亥 선장(先丈)께서 돌아가신 일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달 10일에 나의 아우가 완주(完州)에서 와서 말하기를, "정재 어른이 어제 저녁에 별세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듣고는 경달(驚怛)52)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의(情義)로 헤아려보면 곧바로 달려가고 싶은데,53) 손에 부조할 것도 없고 내 자신 여행갈 노자도 없어서, 조금 며칠을 기다려서 동행할 사람과 약속을 하고 또 돈도 마련하려 했습니다만 또 모두 어긋났습니다. 비로소 29일에서야 최여중(崔汝重)과 나란히 가서 영궤(靈几)에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형께선 계시지 않았습니다. 저의 비통한 사사로운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아아! 지난 겨울에 형이 저의 집에서 병으로 신음할 적에 항시 말씀하시기를, "가대인(家大人)께서 정력이 더욱 그르쳐져서 아마도 오래 세상에 계시지 못할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서 탄식을 그치지 않으셨지요. 이 말이 오래지 않았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한 기운(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감응하여 먼저 당신의 마음과 말에 조짐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이후부터는 만사가 다 그만이거니와, 가장 중요한 일은 중간에 겪었던 영남과 음성의 허다한 파란으로 앞날에 선자(先子)에게 바라던 허다한 뒷일을 어찌하여 잊고 갑자기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애형께서 집촉(執燭)54)한 날에 저에게 보낸 답서의 초안에 그것이 마지막 글씨라는 것을 알고서 마음이 측연하였습니다. 그 잊지 않고 눈을 감지 못한다는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무릇 이러한 나머지 사건들은 모두 애형의 신상에 남아있습니다. 현재 어버이를 위해 가장 절실한 급무는 평일의 문자를 수습하여, 이로써 선자를 위한 변무의 설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대처가 미진한 것까지 개수하고 보완하고 엄호한 연후에, 허물을 감추고 덮어야 이에 효(孝)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많을 것이라 여겨지니, 이것이 참으로 크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애형께선 어떻게 대처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난 섣달에 선장이 편지를 음성에 투서하여 음성과의 교유를 끊었는데, 애형께서 여기기를 "이미 일찍이 주토하였으니, 교절한 지가 본디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편지를 보내 절교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인지라 차라리 그 혈당(血黨)55)을 배척하여 교절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 당혈을 끊으면 음성을 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형이 했던 이러한 일은 매우 엄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건대, 선장이 하는 바가 정히 그 마땅함을 얻어서 임종의 큰 절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때 편지를 보내 미처 교절할 경황이 없었다면 무엇으로써 음성과의 교절을 증명하여 저 원수를 풀라는 입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56) 이것은 다행입니다. 다만 연보 초안은 미처 일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중반 이후는 저에게 이어서 완성하기를 부탁했는데, 그 편지가 여전히 상자에 있습니다. 만약 일찍 책임을 맡겼더라면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어찌 사양했겠습니까?57) 지금은 뜻밖에 변괴가 속출해서 국세가 전환되었으니, 이 일이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애형은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계신지요? 대저 몸이 있은 연후에 집상(執喪)58)할 수 있고, 가히 선인의 일을 전술할 수 있습니다. 애형의 현재 병세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급히 다스려 몸을 잘 보호하고 중책을 맡아서 큰 효를 마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先丈哭事, 何言何言.去月十日家弟自完來言, 靜齋丈以昨晨下世.聞之驚怛, 不知所云.揆以情義,卽欲匍匐, 而手無賻物, 身無行資, 稍待幾日, 約件辦金, 而又皆牴牾.始以二十九日, 與崔汝重聯行慟哭于靈几而兄則不在, 悲悵之私, 又如何可言.噫昨冬兄在獘廬吟病中, 常言家大人精力益敗, 似不久世, 奈如之何.仍中夜起坐, 歔欷不已.此言未幾, 果至於斯.豈其一氣相感, 先兆於心言歟.今焉而後萬事已矣, 最是中間所經嶺陰許多波瀾,前頭所望先子許多後事,何能忘棄而遽歸.哀兄執燭日所送答弟書草認是絶筆而讀之心惻.知其不忘而不瞑者在也.兄此餘案總在哀兄身上.而目下爲親最切急務,在收拾平日文字, 使爲先子辨誣之說, 不至泯滅.幷與有事以來, 處之未盡者, 而爲之改補掩蓋之然後, 乃得爲孝.然想多有事不由已者矣, 此實大難.未知哀兄何以處之.客臘先丈之投書絶陰也, 哀兄以爲旣曾討之, 絶固久矣.今復書絶是自辱, 不如斥絶其血黨.絶其黨則絶陰不待言.此甚嚴正然以今觀之, 先丈所行正得其當, 而可謂臨終大節.如其未遑, 何所證其節陰而杜彼解仇之口耶.是則幸矣.惟是年譜草, 未及了役, 是爲恨事.中半以後, 託弟續成, 書猶在篋.使早委責, 弟雖不敏, 亦何敢辭.今焉變出不意, 局勢頓換, 不知此事竟如何爾.哀兄於此, 又何以爲心.大抵有身然後可以執喪, 可以述先.哀兄現祟, 不可謂輕.惟望亟治, 善保身任重責以終大孝.幸甚. 경달(驚怛) 남의 부모님이나 가까운 손윗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깜짝 놀라는 것이다. 포복(匍匐) 《예기(禮記)》〈단궁 하(檀弓下)〉에 "상사(喪事)가 나면 부복(扶服)해서 도와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부복은 엎어지고 자빠지면서도 급히 가야 한다는 포복(匍匐)과 같은 뜻이다. 《예기》 〈문상(問喪)〉에도 "포복해서라도 가서 곡(哭)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집촉(執燭) 임종을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예기》〈단궁 상(檀弓上)〉에 증자(曾子)가 병들어 누웠을 때 동자가 구석에 앉아 촛불을 들었다는 말이 있다. 혈당(血黨) 오진영을 따라 다니는 무리, 잔당을 말한다. 해구(解仇)를 풀라는 입들 중립파이다. 호파와 영파 원수끼리 화해하라고 종용하는 파를 말한다. 원수를 풀라는 쪽에선 전사견의 아버지가 언제 음성과 교절한 적이 있느냐 옛날부터 성토해왔으므로 교절한 것과 다름없다(전사견의 생각) 작년 섣달 죽기 전에 확실히 편지를 보냈다. 그러니 아들의 생각처럼 교절한 것이면 굳이 편지를 안보내도 된다고 한 그 말은 매우 엄정했다. 그러나 후창의 생각은 지금에 와서 저 중립파의 입을 막을 증거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확실히 보낸 편지가 있으니 간재 집안 쪽에서 생각할 때는 확실히 우리 호남 편이다. 만약……사양했겠습니까 전사견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전사견에게 대필 편지를 쓰게 하였던 것 같다. 연보 속간을 후창에게 맡긴다고 하여, 정서되지 않은 연보 초안을 후창에게 보낸 정황이다. 집상(執喪) 부모의 상사에서 상제로서의 예절을 지키는 일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사견에게 답함 을해년(1935) 8월 答田士狷 乙亥 八月 오늘 들으니 박애(朴哀)59)가 끝내 상경해서 김씨(金氏)를 맞이해서 정사(精舍)에 거처하게 하면서 그로 하여금 그 조부의 문자를 찬술하게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일전에 형과 내가 지켜보면서 신중하게 고한 것이 참으로 간절했는데, 제가 이에 이 말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는 말입니까?창암 어른은 일생동안 선사를 높이 섬긴 것이 문인들도 가히 미칠 바가 아닙니다. 사후의 큰일60)은 이에 스승을 배반하는 사람의 수중에서 나오니 이에 어찌 개탄스럽지 않습니까? 명절 전에 함재(涵齋)61) 어른께서 저에게 전언하여 말씀하시기를 "유영선(柳永善)62)이 와서 사과하기에, 내가 이미 원한을 풀었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다만 김씨에 붙은 자를 토벌하는 것이 사사로운 원한인줄만 알고, 오진영이 무인(誣印)하고 난고(亂稿)한 것을 조장한 것이, 사문의 공적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유영선이가 함께 어른께 와서 사과할 때에 마땅히 함재어른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네가 만약 현천(玄仟)에 사죄하려 하거든, 비록 나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일이 이곳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가을에 권순명(權純命)63)과 화해한 실수는 오히려 창졸간이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와 같이 사람들이 분명히 고한 것을 들은 후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어른께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니 오늘날 이 의(義)를 누구와 함께 더불어 말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한번 탄식합니다. 今聞朴哀竟上京, 邀金處知精舍, 俾撰其祖文字云.日前兄我守而告之者,何等恳切, 而渠乃不有之此快耶.蒼丈一生尊事先師, 有非門人之可反.而身後大事, 乃出於倍師人手中, 寧不慨歎.節前涵齋丈傅言於弟曰, 柳永善來謝過, 吾已解仇, 是伹知黨金之討之爲私仇, 而不知助震誣印亂稿之爲師門公仇也.當其來謝也, 當曰爾若謝罪玄仟, 則雖不謝過於吾可也云矣.惜乎其事不出此也.昨秋解權之失, 猶可諉之倉卒未思.今復如此於聞人明告之後何哉.此丈而猶復如此, 此日此義, 誰可與語.爲之一欷. 박애(朴哀) 부모님 상 중에 있는 박씨를 말한다. 큰 일 조부의 문자인 행장을 찬술하는 일이다. 함재(涵齋) 김낙두(金洛斗)이다. 유영선 유영선(柳永善, 1893~1960)은 호가 현곡(玄谷)이며 艮齋 田愚의 제자이다. 권순명 권순명(權純命, 1891~1974)은 호가 양재(陽齋)이며 艮齋 田愚의 문인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사견에게 보냄 을해년(1935) 10월 與田士狷 乙亥 十月 일전에 희숙(希淑)64)을 석동(席洞) 묘제에서 만났습니다. 희숙이 말하기를, "현암(玄巖)으로 가서 김상(金庠)65)을 만나 그에게 문장을 다시 고쳐 사죄하라고 고한즉, 김씨가 말하기를 '일을 하고 싶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오늘날 오진영이가 나의 동정을 엿보아서 장차 어찌하려고 하니, 내가 경솔하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상사의 이 말은 다 칭탁(稱托)66)하는 말입니다. 단지 고치지 않을까를 근심할 뿐이지, 만일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오진영이도 간재가 스승이므로 장차 무슨 말로 죄를 짓겠습니까?희숙이 또 말하기를, "박인규(朴仁圭)가 나의 책상에서 형님께서 김상사를 언급한 편지를 보고 낯빛을 바꾸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후창이 어찌하여 우옹(尢翁)67)을 폄하한 전일중(田鎰中)과 더불어 친후하단 말인가요?'였습니다"라고 희숙이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온 조선을 움직여서 대사(大事)를 거행하여 평일에 이루지 못한 것을 기어이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두렵고 두렵습니다.또 책상 위에 있던 편지글에서는 다만 그 고친 것이 명백한 것을 보고서 대응한다고 말했는즉, 본래 가히 노할 일이 아닌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더욱 두려워할만 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실제로 우옹을 폄하했다면 어찌 그 사람을 직접 성토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과 친한 자가 김씨를 논하기를 기다려서 아울러 성토하겠습니까? 그러니 실제로 그런 일이 없고 단지 불과 우옹을 머리에 이고서 김씨를 보호하는 패자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옹을 모독하고 희롱하는 죄를 어디에다 귀결시켜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고, 실제로 통분할 일입니다.희숙이 또 말하기를, "현암에 가서 들어본즉, 형님께서 박진호(朴震鎬)에게 김씨의 문장을 받지 말라는 말을 권해서 윗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우리들이 당일에 신중히 고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고 또 심지어는 그 말이 쓰이지 않을까 우려하여 도리어 조소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렇게 행했던 것은 진실로 창암 선생을 위한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가 생각했던 대로 명월주(明月珠)68)를 암실에 던졌다면 누가 그 보배로움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만 번 남에게 비웃음을 받더라도 부끄러운 바가 없고, 도리어 비웃은 자들의 식견이 없음을 제가 비웃었습니다. 양가의 교분이라든지 유명간의 믿음이라든지 사실관계가 어떠한가를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사람을 기극(忌克)69) 할 지경으로 귀결시키니 어찌 이런 자는 운수를 모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희숙이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희숙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진호(震鎬)70)에게 인척의 교분은 그만두더라도, 교학의 의리가 창장에게 있다고 칭한 즉, 간재의 문하에 출입한 지 30년에 도의로써 서로 믿는 것이 늙거나 젊다고 하여 차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스승의 일로 인하여 창장과 함께 음적의 화를 입은 즉, 실로 생사에 있기 어려운 연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대신 창암의 집안 행장을 초안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진호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나에게서 구하여 이미 집안 행장문을 유실하고 다시 저에게 청해서 제가 그를 위해서 다시 행장문을 본초가 없어진 이후에 완성해주어서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서로 관련됨이 이와 같아서 이로 인해 문장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논급했습니다. 또 연전에 오진호가 그 조부의 문자를 모씨의 집안에서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집안은 간옹의 일에 불만이라는 것을 말해서 만류시켜 그친 일이 남아있습니다. (희숙에게 일러 말한 끝부분에 " 표시를 해야하는데 차직 힘듭니다)지금 정성으로 간옹을 섬기는 것이, 문인과 다름없던 창암이었습니다. 그 사후의 문자를 간옹 생전에는 스승으로 섬기다가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는 홀연히 배신하고 떠난 여흥 김씨에게 문자를 청하니, 어찌 모른 척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을 보듯이, 냉담하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오진호 조부의 원고 일은 저에게 방문하여 질의한 즈음에 있었습니다! 김씨의 집안은 높고 문장도 아름답습니다. 오진호가 이를 사모하여 그리했겠지만 그러나 유독 삼세(三世)의 교분과 우의, 장초가 관련된 정리는 김씨가 능히 먼저 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지 않았는지요.71)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그만이지, 아울러 가히 말할 수 있는 정리까지 생각지 아니하고 비웃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비록 오진호가 여전히 나이가 적어서 깊이 말할 것이 없지만, 모든 이러한 말들은 어찌 일어나야 할 때에서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다시 희숙이 말하기를, "내 또한 처음에 듣고서 형님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였을까? 하고 의심을 하였는데 이제 편지를 받고 보니 진실로 옳고 옳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오형께서는 박인규(朴仁圭) 등이 연명하여 편지하는 것에는 일종의 의사(意思)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또 선사의 문인인 김진식(金璡植)의 이름이 끼어있는 것이 뜻밖의 변고라 여겼기 때문에 다소의 개탄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나, 예로부터 국가의 변란은 항상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나라 왕실의 관채(管蔡)72)의 일부터도 그러했습니다. 어찌 유독 오늘뿐이겠습니까?금일 오진영과 김용숙의 변란이 나온 것은 선사의 가까이에서 나왔으니, 어찌 김진숙을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이 일 때문에 즐거움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위정척사의 기가 꺾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무락자저'는 전사견이 보낸 편지의 말입니다. 유경조(柳景肇)가 말하기를, "김중옥(金仲玉)이 김종현(金鐘賢)이가 논한 〈음작정절사전(陰作鄭節士傳)〉73)을 보고 말하기를 '독서 삼십년에 다만 취모(吹毛) 몇 자74) 만을 보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75) 이것은 자정(子貞)이 친히 묶어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정에게 말하기를, "내가 중옥이 과연 이런 말을 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군자가 치지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정밀히 살펴 밝게 구별하여 겉과 안을 통관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밖에서부터 두루 뭉실하게 본다면 양묵(楊墨)의 인의(仁義)가 덕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한자(韓子)의 박애(博愛)가 인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맹자는 그것을 이단이라고 배척했고, 주자는 논하여 한유를 도를 알지 못한다고 논했습니다. 그러니 사람 말에 조금 허물이 있는 것을 밖으로 터럭으로 덮어 능히 볼 수 없다고 하면, 어찌 독서가 귀할 것이 있겠습니까?76) 단지 억지로 끝을 두어 억지로 허물을 찾는다면, 심술(心術)에 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행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신컨대 제가 아무리 낮다고 하여도 이 정도까진 이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독서 수십 년에 터럭 이면의 허물을 살피지 못한 자와 그 허물이 있는 것을 알고도 터럭을 취해서 억지로 돕는 자를 싫어합니다. 또 천하가 중화(中華)인데도 유자들이 능히 천하를 중화로 만들지 못하고 이적(夷狄)으로 가게 했다는 오진영의 설은 그 허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가히 엄폐할 터럭도 없음에도 엄폐만을 일삼으니 또한 마땅히 어떠하였겠습니까? 日前過希淑於席洞墓祀.希言往見金庠於玄巖, 勸其改告由謝罪, 則曰此非不欲爲, 但今吳震泳伺我動靜, 將欲如何. 吾不敢率爾.希言止此此是稱托之辭.只患不改苟能改之吳將何辭而罪之.希又言朴仁圭於獘案,見兄主語及金庠之書, 變色大怒曰, 後滄何以與貶尢翁之田鎰中親厚.希言止此 此非欲動全鮮擧大事. 期遂平日之未遂耶. 可怕可怕.且鄙書只言觀其改之明白而應之, 則元非可怒者, 而猶如此尢可怕也.雖然有人而實貶尢翁, 則何不直討其人. 而待其所親者論金事而幷討耶.可知其無實事,而不過戴尢翁爲護金之干牌也.然則侮弄尢翁之罪,何所歸乎.非可怕而實可痛也.希又言往玄巖聞之, 則兄主勸朴震鎬勿受金文之言, 爲衆笑囮.噫吾輩當日守告而不憚煩, 至慮其言不見用反見嘲笑, 而猶且爲之者, 亶出於爲蒼巖一念矣.果然如其所料, 投明月於暗室, 孰知其爲寶今雖萬被人笑.實無所愧, 反笑笑之者之無見也.不思兩家之契分, 幽明之相信, 及事實關係之如何, 而遽歸人於忌克之科, 豈非不知數者耶.余謂希曰, 吾於震鎬, 戚分姑舍, 而稱有敎學之誼於蒼丈, 則出入艮門三十年, 道義相信, 不以老少而有間.以至於因師事而同受陰禍, 實有死生難忘之故.故代草家狀之文.震不於他而求吾, 旣又遺失狀文, 再請於吾, 吾乃爲之再成狀文於無本草之候, 而不憚勞.相關如此, 因而論及受文, 在所當然.且年前震欲受其祖文字於某家.吾爲言其家不滿艮翁事而止之, 己事在焉.今以誠事艮翁, 無異門人之蒼巖.身後文字,請於師事艮翁生前,而忽然倍去山頹後之驪金也, 豈容越秦視而不爲之一言乎.况在震以祖稿事,訪余質疑之際乎.金之地閥高矣, 文章美矣.震雖慕此而然, 然獨不念三世契誼, 狀草關係之情理.非金之所能先乎.不用忠告則不用已矣,幷不思可言之情而笑之者何哉.雖震尙年淺不足深言, 几此云云, 豈非起於起處乎.希曰吾亦始聞而疑兄主胡至如是, 今承所喩誠然誠然.嗚呼吾兄以朴仁圭等聯書, 有含一種意思,而先師門人金璡植之參名.爲意外之變故.致多少慨歎.此非不然.然從古以來家國之變.常起於肘腋之下.自周室管蔡事而已然.何獨今日乎.今日吳金之變出, 已出於先師之肘腋, 何論金璡植乎.皆不足以此無樂而自沮於衛闢.無樂自沮來書語.柳景肇言金仲玉見金鐘賢所論陰作鄭節士傳曰, 讀書三十年, 只學得吹毛覓疵.此子貞親聞而傳者也.弟謂子貞曰, 吾雖未知仲玉果有此言, 然君子之致知窮理, 貴在精察明辨, 通貫表裡.若自外泛觀, 則楊墨之仁義, 非不爲德, 韓子之博愛非不爲仁, 而孟子斥之以爲異端, 朱子論之以爲不知道.若人言之有疵者, 外爲毛掩而不能見, 則烏足貴乎讀書哉.但有意吹覓,則有害心術.故君子不爲也.吾自信汙不至此矣.吾則又惡夫讀書數十年, 不能察毛裡之疵者, 與夫知其有疵而取毛强掩者也.且此天下華而儒不能華天下卽夷之說, 其疵易見, 幷無可掩之毛者,而專事掩覆, 則其心術又當如何哉. 희숙(希淑) 후창의 족제이다. 김상(金庠) 김씨 성을 가진 성균관 유학생으로 김용숙을 말한다. 칭탁(稱托) '핑계'를 이르는 말이다. 우옹(尢翁) 우암 송시열을 말한다. 명월주(明月珠) 《사기》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 같은 좋은 보배를 몰래 길 가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이유 없이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기극(忌克) 다른 사람의 재능(才能)을 시기하여 꺼리고 능멸하는 것이다. 진호(震鎬) 오진영의 아우인 오진호인 것 같다. 오진호가……않았는지요 창암이 죽은 후 간재를 비판했던 김씨의 글을 받았다면 죽은 창암이 받아들었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관채(管蔡)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다. 주공의 동생들로서 중앙 정부에 반감을 품고 마침내 은(殷)의 반경(盤庚)과 더불어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켰다. 음작정절사전(陰作鄭節士傳) 음인이 지은 정절사전이다. 취모(吹毛) 몇 자 남의 허물을 억지로 찾아내는 것을 이른다. 아마 남을 비판하는 소리가 많았던 것 같다. 유경조……했습니다 오진영이가 쓴 《정절사전》이 있고, 오진영이가 쓴 이 책을 김종현이가 논하였다, 즉 오진영이가 쓴 책을 김종현이가 논하고, 김중옥이가 김종현이 논한 글을 보았다. 그러니……있겠습니까 이 말은 김중옥의 말을 찬성한 것으로, 김중옥은 오진영을 비판한 사람이다. 남의 허물 있는 말을 터럭으로 덮어 볼 수 없는 것이라면, 독서가 귀할 것이 없다. 독서가 귀한 것은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허물을 지적해 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여우 석하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李汝禹 碩夏 ㅇ辛酉 택술(澤述)은 품격이 저열하고 학문이 거칠어서 다른 사람보다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찌 오형께서 지금 시대의 현인과 호걸의 높은 덕과 넓은 학업을 나에게 장려하시면서 정함(庭函)81)의 아래에서 들었다고 한 것을 어찌 뜻했겠습니까? 저는 이 점에 있어 장차 어떤 말로 사례해야 하겠는지요. 형이 잘못이라고 여긴다면, 그 선생 장자의 가르침은 어찌 잘못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 사람이 아님을 어찌하겠는지요. 이는 아마도 제가 내면의 덕을 버리고 겉만을 꾸미며 실질을 제거하고 화려한 것에만 나아갔기 때문에, 선생 장자께서 그것에 속임을 받아서 우연히 소시(所試)의 칭찬82)을 두어서 그 장래를 기약한 것뿐입니다.83)형께서 미처 말의 뜻을 잘 살피지 못하고, 현재 성취된 실제적인 미덕으로 오인하였습니다. 이는 저의 입장에서 진실로 스승과 부친을 속이는 것이 되거니와, 형의 입장에서도 또한 소홀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남몰래 스스로를 닦아서 소박하고 진실한 덕을 짊어질 것을 제가 마땅히 힘쓸 터이니, 정밀하게 살피고 밝게 살펴서 사람 칭찬을 구차하지 않는 것은 형도 가히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을 구하는 은근한 뜻은 당신의 깊은 마음에서 나와서, 요컨대 겉으로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형에게 만일 가히 규간할 허물이 있거나, 가히 보완할만한 흠궐이 있다면 어찌 감히 침묵하여 취용(取容)하여 스스로 선유(善柔)84)의 죄에 빠지겠습니까? 다만 제가 형을 보건대 덕의 모습이 화락하고 뜻과 행동이 돈실하고 언론은 상세합니다. 저처럼 노둔한 재주로 쫓아갈 바가 아니거늘85) 또 어찌 감히 억지로 드러나지 않은 허물과 흠결을 찾아서 구차히 꾸짖는다는 비판을 취하겠습니까? 굳이 저에게 말을 구하신다면, 또한 정밀하게 살피고 사람을 구차히 칭찬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불과 단지 이 사람을 잘못 칭찬한 것으로 인하여 당신께 개진할 따름입니다, 이 일 이후로도 또 어찌 알겠습니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있어서 가히 옥(玉)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고, 반딧불같이 작은 불빛이 햇빛을 도울 일이 없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편지에서 "자기를 버리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기 바랍니다."86)라는 훈계를 주셨는데, 진실로 증세를 진단하여 약제를 투여하고 굶주림을 가련히 여겨서 식량을 진휼한 것과 같으니, 우리 형의 진실된 마음이 있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은 충고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벗이 있으니, 어찌 은혜를 새기고 의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형 또한 어찌 저의 병폐를 모두 알아서, 작은 악과 숨겨진 사특함까지 한 번 쓸어서 없애겠습니까? 오로지 훗날 더 자세히 살펴서 더 맹렬하게 다스려 줄 것을 바랍니다.대저 우리들이 서로 닦고 서로 힘쓰게 해서 세한(歲寒)을 기약해야지, 어찌 갑자기 짧게 편지를 오고가는 사이에 효과를 질책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붕우지간의 도리가 상실된 지가 오래입니다. 저 아침에는 금란지교(金蘭之交)87)와 같다가 저녁에 풍파(風波)를 일으킨 자들은, 진실로 친구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명색이 유문의 도의로써 교유한다고 이름 하는 자들도 책선(責善)88)하고 잘못을 보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더 나아가서는 칭찬하여 그 장점을 치켜세우다가, 물러나서는 비난하면서 단점을 드러내는 자는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잔인하고 이치를 해치는 것이 또한 매우 극에 달했습니다. 심지어는 혹 의론이 합치되지 않는 점으로 인하여 서로 병장기를 쓰는 일까지 이르게 되니, 풍속을 해치고 세상에 화를 끼치는 것이 더욱 참혹합니다.저는 비록 불초하지만 이러한 무리들을 보기를 기슬(蟣蝨)89)보다도 더 천하게 여기고 치아(鴟鴉)90)보다 더 미워합니다. 제 마음으로 이미 미워하니, 어찌 차마 제 자신이 친히 이러한 일을 범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세풍(世風)에 구속되고 습속에 익숙해져서91) 혹 그렇지 않기를 기약하지만 그럴 경우도 있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형과 더불어 따로 맹세와 훈계를 세워서 혹여라도 끝내 소인의 교유로 귀결되지 않기를 생각합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저와 같은 마음이라 즐겨 들을 것이라 여깁니다.본심(本心)이란 이치에 합치되어서 과불급(過不及)이 없다는 명칭입니다. 다 이치에 합치되지 않아서 과불급이 있다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비록 도심(道心)이라 할지라도 본심이 되지 못하고, 모두 이치에 합치되어서 과불급이 없다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인심이라 할지라도 본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를, 《중용(中庸)》 서문에서는 본심을 인심과 도심을 공통하여 말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혹 그대의 견해와 합치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澤述品劣學踈, 最出人下者也.何圖吾兄以當世賢豪德崇業廣, 見獎謂是聞諸庭函之下.弟於此將下辭以謝之.謂兄之誤也, 其於先生長者之敎,何不誤也.則弟非其人何.此殆弟遺內飾外, 去實就華, 先生長者爲其所欺, 偶有所試之譽, 而期其將來.兄未及諦察語意, 認以爲見成之實美也.是則在弟固爲誣罔, 而在兄亦不免踈忽也, 要之闇然自修, 朴實負荷, 弟當勉勵, 精審明察, 譽人不苟, 兄可留意歟.求敎之勤, 認出肝膈赤衷, 要非皮面白談.兄苟有過可規闕可補者, 安敢噤默取容, 自䧟於善柔.但以弟見兄, 德容之和睟, 操履之敦實, 言論之詳覈.有非弟十駕之追者, 又何敢强覓過闕於未形, 以取苟訾之譏哉.無已則亦惟曰精審明察, 譽人不苟, 不過因誤獎此漢而陳之己矣.繼此以往, 又安知不有他山之石.可資攻玉, 螢火之爝, 倘助日光乎.蒙惠舍已愼獨之戒, 誠診證投藥, 憫飢賑粮, 不有吾兄實心, 惡能忠告乃爾.有友若此, 寧不鏤恩服義.雖然兄亦安得盡知弟病, 纖惡隱慝, 一刷刷下.專仰異日察地細而洽之猛耳.大抵吾輩交修胥勖,歲寒以之,何可遽責效於造次往復之間耶.噫友道之哭久矣.彼朝金蘭而夕風波者,固不足道也.名爲儒門之道義交者, 不惟不責善補過而已, 乃有進而潝潝然推其長, 退而訿訿然揚其短者, 比比焉.其忍心害理, 亦已極矣.甚或至於因議論之不合, 成戈戟之相尋, 傷風禍世, 尢其慘矣.弟雖無似, 視此輩不啻賤之若蟣蝨,惡之若鴟鴉.心旣惡之,豈忍身親犯之.雖然世風之囿, 俗習之憤, 或不免不期然而然者, 故思欲與吾兄另立誓戒, 毋或終歸小人之交也.仰想同情而樂聞也.本心者,合於理而無過不及之名也.以其未盡合理而有過不及者言,則雖道心不得爲本心,以其盡合於理而無過不及者言,則雖人心亦得爲本心.故曰庸序本心通人道心而言.未知此或合於盛見否. 정함(庭函) 정은 부친을 말하고 함은 스승을 이른다. 즉 부친과 스승이다. 《논어》 〈위령공〉에 "만약 칭예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은 시험해 봄이 있는 것이다.〔如有所譽者,其有所試之矣.〕"라고 하였다. 이는……것 뿐입니다 이 말은 '선생 장자께서 나의 겉모습만 보고 한번 칭찬한 말을 두어서 앞으로 현호(賢豪)가 될 것이라고 기약만 둘 뿐'이라는 것이다 선유(善柔) 《논어》〈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세 가지이며, 해로운 벗이 세 가지이니, 곧고 진실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며, 편벽되고 아첨을 잘하고 말만 잘하면 손해가 된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라고 하였다. 저처럼……아니거늘 본문의 십가(十駕)는《순자》〈수신(修身)〉에 "천리마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노둔한 말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그 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則亦及之矣.〕"라고 한 말에서 인용하였다. 자기를 버리고……바랍니다 근독(謹獨)은 홀로를 삼가는 것으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남이 보지 않는 유독(幽獨)의 곳에서 조심하는 것과 남이 모르고 자신만이 아는 은미(隱微)한 마음을 삼가는 것이 있다.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숨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세미한 것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라고 하였다. 금란지교(金蘭之交) 매우 두터운 친교를 뜻하는 말로,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다. 단금지교와 지란지교를 합한 말이다. 책선(責善) 상대방에게 선행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책선은 붕우 사이에 적용되는 도리이다. 부자가 책선하는 것은 은의(恩義)를 해치는 것 가운데 큰 것이다.〔責善, 朋友之道也. 父子責善, 賊恩之大者也.〕"라고 하였다. 기슬(蟣蝨) 사람에 기생하는 이[虱]로서 옷엣니와 머릿니를 통틀어 일컫는다. 이와 서캐이다. 치아(鴟鴉) 솔개와 갈까마귀이다.《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 "사람은 가축을 잡아먹고, 사슴은 풀을 뜯어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솔개와 갈까마귀는 쥐를 좋아한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인가?〔民食芻豢, 麋鹿食薦, 蝍蛆甘帶, 鴟鴉嗜鼠, 四者孰知正味?〕"라고 하였다. 본문의 분(憤)은 관(慣)의 오류인 것 같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여우에게 보냄 임술년(1922) 與李汝禹 壬戌 적막한 물가92)에 가히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없고, 단지 밭 사이에 늙은 농부를 따라서 날마다 농사일을 하니, 도리어 학도들을 모아놓고 허튼 변론을 일삼은 자보다 진실함이 있다는 것을 가끔 느낍니다. 해가 저물고 나면 호미를 메고 돌아오면서93) 말하기를, "오늘도 가히 공짜 밥을 먹지 않았다고 이를만하다"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삼연옹(三淵翁)94)이 "세간만사는 모두 허위요, 오직 봄날에 소를 끌고 가는 소리만 약간이나마 사람의 뜻을 굳건하게 한다"는 말을 읊으며 내 자신을 견주곤 합니다.백수(白水)에 사는 양공(楊公)은 그 학문은 논의가 독실하고 행동은 더욱 진실하며, 문사에 통달했으며 이치가 더욱 수승(殊勝)95)합니다. 참으로 천상(泉上)의 덕망과 지혜가 높은 제자요, 남녘의 으뜸가는 학자입니다. 학업을 마치고 남긴 문집이 나를 일깨움이 매우 많습니다. 저 태극(太極)은 기(氣)를 겸하고 신(神)은 태극이고, 하늘에는 세 가지 기가 있으며, 또는 마음은 이기(理氣)를 합친 것이라든지, 지각(知覺)과 지용(智用)의 여러 학설에 이르러서는 후학의 의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일찍이 듣건대 교감자의 안목이 문집을 짓는 이보다 높은 연후에 교감의 일을 이룰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 교감하는 일은 천루(淺陋)한 제가 전혀 감당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미 무릅쓰고 맡았으니, 의심나는 대목에 산정(刪定)할 곳을 띠지로 표시하여 본가의 재결을 기다리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본 문장 가운데 큰 논의로써, 편(篇)마다 문장마다 대부분 이런 뜻96)이기 때문에 이것을 생각하면 크게 작자의 본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듣건대, 남의 문집을 교감하는 자는 임의대로 산정하고 제거하여 본래의 면목을 허물어뜨려선 안 됩니다. 만일 이를 멋대로 산정하고 범하여 본래 면목을 없애면, 이는 교정자의 문집이지 작자의 문집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 또한 이치가 있습니다. 제가 이 문집에 대해 감히 첨삭하지 못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입니다. 그러니 그대의 고견으로는 어떻게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암경(巖卿)97)이 갑자기 고인이 되셨다는데 이 어찌된 일일까요? 그 외의 학문에 정미한 곳은 비록 내가 깊이 다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우리 당의 빼어난 선비이거늘, 오늘 이 지경이 되었다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만시(挽詩) 한 편을 보냈으니 조만간 혹 당신께서도 볼 수 있겠습니다. 寂寞之濱, 無人可與語者, 惟逐田間老農, 曰有所事, 覺得反有實於聚徒浮辯者.日旣暮, 荷鍤而歸曰, 今日可謂不素食矣.時誦三淵翁世間萬事, 都是虛僞, 惟春日野中叱牛聲, 差强人意之語, 以自况耳.白水楊公, 其學也論篤而行益實, 辭達而理尢勝.信乎其爲泉上高足, 南中巨擘.卒業遺集, 警發弘多.至如太極兼氣, 神爲太極, 天有三氣, 心合理氣, 知覺智用諸說, 則不無後學之疑矣.嘗聞校讐者眼目, 高於作者然後.乃可濟事, 是役也萬非淺陋之可堪者.然旣已冒當, 則籖刪疑案, 俟本家裁決, 似無不可.但此爲本集中大議論, 篇篇章章多, 是此義, 此而剛却, 大非作者本旨.抑又聞之, 校人文集者, 不可任意剛抹, 壞却本來面目.如其犯此, 是校正者之集, 非作者之集, 此言有理.弟於是集, 不敢籤剛者, 亦此意也.未知高見以爲如何.巖卿遽作古人, 此何事耶.他精微去處, 雖不可深悉, 大抵是吾黨秀女, 令焉至此, 安得不悼惜也.曾有挽詩一篇送往, 早晩或及雅覽也. 적막한 물가 본문의 '寂寞之濱'은 보통 자기가 사는 곳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해가……돌아오면서 《시경(詩經)》〈채미(采薇)〉에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해 또한 저물리로다.〔曰歸曰歸, 歲亦莫止.〕"라는 구절과, "옛날에 내가 길을 떠날 때에는, 버들가지가 휘휘 늘어졌는데, 지금 내가 돌아올 때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도다.〔昔我往矣, 楊柳依依. 今我來思, 雨雪霏霏.〕"라는 구절이 나온다. 삼연옹(三淵翁) 조선 숙종 때의 시인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을 가리킨다. 김창흡은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의 주리설과 이이의 주기설을 절충하였다. 수승(殊勝) 뛰어나고 훌륭함을 이른다. 가장 빼어난 일로 세상에 희유하리만큼 아주 뛰어남이다. 이러한 뜻 태극(太極)은 기(氣)를 겸하고 신(神)은 태극이고, 하늘에는 세 가지 기가 있으며, 또는 마음은 이기(理氣)를 합친 것이라든지, 지각(知覺)과 지용(智用)의 여러 학설을 말한다. 암경(巖卿) 허업(許業, 1883~1922)이다. 기우만, 곽종석, 전우를 금세의 장덕으로 여겨 알현하였다. 1922년(임술년) 2월 24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선영에 묻혔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17 卷之十七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05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梧秋旬七 尹璂燮 東床 乙梧秋旬七 尹璂燮 東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5_001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25년 윤재진(尹在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梧月十七日 尹在晉 乙梧月十七日 尹在晉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40_001 1925년 7월 17일에 족질 윤재진이 수신자의 안부를 물은 후에 가을바람이 점점 서늘해지면 학문하는 여가에 한 번 왕림해 달라고 한 간찰 1925년 7월 17일에 족질(族姪) 윤재진(尹在晉)이 수신자의 안부를 골고루 물은 뒤에, 자신은 점점 게을러져서 전진(前進)함에 가망이 없어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탄식한들 어찌하겠는가 하고, 오직 다행인 것은 긴 여름 이래로 거듭 숨이 막히는 것은 면했다는 것이다. 가을바람이 점점 서늘해지면 학문하는 여가에 부디 한 번 왕림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주백종락에게 답함 정해년(1947) 答金周伯 宗洛 ○丁亥 일전에 형님께서 오사익(吳士益)과 함께 보낸 안부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최근에 권모씨가 방문하여 나에게 간재선생을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는 통문에 서명할 것을 청하기에 내가 후창과는 서로 상의했냐고 물으니, 권씨가 미처 하지 못했다고 하였소. 내가 지척 간에 있는데 어찌하여 미처 하지 못하였느냐고 말하였으나 마음속으로 몹시 이상하게 여겼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형님이 우리 문하에서 발생한 호남과 영남의 시비에 대하여 일찍이 대강 들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 곡절을 깊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남에서 주장하는 것은 선사께서 간행을 인가하는 교시를 하였고, 유서는 위조되었다고 하면서 스승의 원고를 고쳐서 어지럽게 만들고 끝내 간행을 인가받는 것이고,【권순명은 오씨와 강씨가 고소한 변고에 검찰국에 가서 그들의 증인이 되었다】호남에서 주장하는 것은 스승의 무함을 분별하고 원고의 혼란을 바로잡으며, 유훈을 지켜서 원고를 베껴 받들어 보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얼음과 숯처럼 서로 의견이 상반되어서 양립할 수 없게 된 지가 20여년이나 되었습니다.몇 해 전에 영남으로부터 시비를 덮어두고 화해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의논하러 오지 않는 것은 바로 거절하면서 만나주지 않을까 두려워서인데 그들은 "우선 미처 만나지 못했다"고 말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게 거짓을 꾸며 속입니까? 저의 의리로는 저 무리들이 마음을 고쳐 죄를 인정하기 전에는 절대 함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받는다면 마땅히 "도의는 중대한 사안이고 사후의 문집 간행은 사소한 사안인데 저들이 이미 스승의 큰 것을 깨뜨렸으니 어찌 작은 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과 화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피차간의 시비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前承尊駕同吳士益枉存, 語弟曰"近權某見訪, 請余參名, 爲艮翁建祠通文, 余問已與後滄相議乎? 權曰姑未及, 余曰咫尺之地, 有何未及也? 然心甚恠之云云." 此盖兄於鄙門湖嶺是非 雖曾畧聞, 尚不深知其曲折故也. 盖嶺之所主謂先師有認教, 謂遺書偽造, 改亂大稿而終於認刊也.【權於吳姜告訴之變, 往檢局爲其證人】湖之所主, 辨師誣, 正稿亂, 守遺訓而鈔出奉藏也. 水炭相反, 不能兩立者, 爲二十餘年.年前自嶺有盖是非講和之請, 而竟不得矣. 今不來議者, 正恐拒不相見, 乃曰"姑未及." 何其糊塗而詐僞也? 在吾之義, 則彼輩革心服罪之前, 斷不與同事. 被人問則當曰"道義大者, 後事少者, 彼既破師大者, 則安可爲成其少者, 而合之乎云矣?" 於此益可見彼此之是非也, 未知兄以爲如何?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 書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노동에게 보냄 경신년(1920) 與金聖九 魯東○庚申 저는 일찍이 그대가 순씨(筍氏)의 용1)이며 사씨(謝氏)의 보배2)라고 들었는데, 진실로 묘령(竗齡)의 영재로서 그 재주와 뛰어난 식견과 돈독한 행실이 이와 같이 탁월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를 채워 전진한다면 사씨의 보배나 순씨의 용도 비루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유문(儒門)에서 석진(席珍)3)을 중시하고 문명의 세계에서 현룡(見龍)4)을 우러르니, 한 집안의 경사스러운 복은 굳이 축하할 필요도 없고, 축하할 만한 것은 세도(世道)에 다행스럽다는 것입니다. 아, 도가 천하에 밝혀지기 어려운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여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기 어렵고, 의론의 동이(同異)가 부류에 따라 달리하여 공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과불급의 차이 때문에 대도가 실행되지 못하고, 의론의 동이에 대해 자신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정밀한 의리가 항상 어둡습니다. 지금 그대는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은 재주로 편당도 없고 치우침도 없는 마음을 보존하고 있으니, 도를 밝히는 일에 있어서는 절반 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를 행하는 사람도 또한 학문을 좋아해야 하고, 공평한 마음을 지닌 사람도 또한 반드시 견해를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자질은 아름다운데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큰 도를 깨우치기 어려우니 이것이 근심거리이고, 마음은 공평한데 견해가 바르지 않으면 쇳덩이를 은이라 부르게 되니 이것이 두려운 점입니다. 그렇다면 재주가 치우쳐 중도를 잃은 자, 스스로 옳다고 하여 이치에 어두운 자와 더불어 똑같이 도를 밝힐 수 없는 데에 귀결됩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견해를 바르게 하는 바탕이 되고 견해가 바른 것은 학문을 좋아한다는 증거입니다. 학문을 좋아하여 하나의 이치도 궁구하지 않음이 없는 수준에 이르고, 견해가 바르게 되어 터럭만큼도 오차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도를 밝힌 지극한 공이요, 우리 유자들의 능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일생의 많은 일들 중에서도 큰일이니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힘쓰기를 바라니 그대는 이를 도모하기 바랍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학문을 논하자면 빙산의 일각처럼 초라하고 그림속의 떡처럼 실질이 없으며, 그 병폐를 말하자면 구멍이 백 개이고 상처가 천개입니다. 외람되게 교유하게 되었으니, 경계의 말을 기다릴 겨를도 없어야 합니다. 다만 그대에게 일시의 금란지교(金蘭之交)5)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세한송백(歲寒松柏)6)을 의탁하기 때문에 참람됨과 망령됨을 깨닫지 못하고 먼저 작은 정성을 바쳐 애오라지 종신토록 학업을 권면하고 과실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너그럽게 헤아리고 꾸짖지 않기를 바랍니다. 僕曾聞足下爲荀氏之龍、謝氏之寶, 實未圖竗齡英材, 超識敦行, 若是其卓卓也.充此而進, 謝寶荀龍, 陋矣奚道? 儒門之席珍是重, 文明之見龍是仰, 一家慶福不須賀, 所可賀者世道幸.鳴呼, 道之難明於天下也久矣.知愚之過不及也, 而中行之難得, 同異之殊倫也, 而公心之罕覯.過不及之差也, 故大道不行; 同異之自是也, 故精義常晦.今足下以不偏不倚之材, 存無黨無偏之心, 其於明道也, 思過半矣.然中行矣, 又須好學; 公心矣, 又須正見.質美而不好學, 則大道難聞是患; 心公而見不正, 則喚鐵作銀可畏, 其與偏材之失中、自是之昧理者, 同歸於不能明道一也.蓋好學者, 所以爲正見地也; 見正者, 乃好學之驗也.好學而至於無一理之不究, 見正而至於無一毫之或差, 然後始可謂明道之極功、吾儒之能事.此是一生大小大事, 不容不加勉者, 故敢以仰勗, 惟足下圖之.至如僕者, 論其學則氷山畵餅, 語其病則百孔千瘡, 既蒙辱交, 宜俟箴砭之不暇, 而特於足下不欲以一時之金蘭相擬, 惟歲寒之松柏是託.故不覺僭妄, 先效微忱, 聊作終身業勸過規之地, 惟冀恕究不讁. 순씨의 용 후한(後漢)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인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왕(荀汪),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전(荀專)을 가리킨다. 이 여덟 사람이 모두 재덕(才德)이 출중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팔룡(八龍)이라고 일컬었다. 《후한서(後漢書)》 권62 〈순숙열전(荀淑列傳)〉이후 다른 사람의 재주 있는 자제를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사씨의 보배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의 자질들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훌륭한 자제가 많음을 뜻한다. 《진서(晉書)》 권79 〈사현전(謝玄傳)〉 석진(席珍) 좌석 위에 앉아 있는 보배[席上之珍]라는 뜻으로, 아름답고 뛰어난 재주와 학문이 있는 유자(儒者)를 뜻하는 말이다. 《예기(禮器)》 〈유행(儒行)〉에 "선비는 자리 위의 보배를 갖추어 두고 나라의 초빙을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 以待聘〕" 하였다. 현룡(見龍) 아직 뜻을 얻지 못한 인재를 상징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이효(九二爻)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아야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 하였다. 금란지교(金蘭之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니, 그 날카로움이 쇠를 절단한다. 마음을 함께하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다. 세한송백(歲寒松柏) 추운 계절을 꿋꿋이 견뎌내는 절조(節操)를 말한다. 추운 계절에도 늘 푸른 송백처럼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간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경신년(1920) 答金聖九 庚申 편지에서 말한 것을 받들어 살펴보니 지행이 해이하여 빼어난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스스로 겸양하는 의례적인 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하여 보탬이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면, 이를 통하여 참된 마음을 바쳐서 서로 함께 하는 일단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뜻을 굳건히 세워서 해이해지지 않게 하고 행실을 독실이 정진시켜 느슨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어찌 학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어찌할 수 없이 이치와 의리를 드러내는 것은 미약해지고 은미해졌으며 기욕의 폐단은 강성해지고 무성해져서, 하루아침에 분발한다고 한들 긴 시간 동안에 안이하게 지낸 것을 이길 수 없고, 천리를 가는 배는 항상 대부분 도중에 그쳐서 잠시 뜻을 세웠다가도 곧바로 해이해지고 또 잠시 나갔다가도 곧바로 느슨해지는 사이에 유유한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이것은 천고의 공통된 근심거리입니다. 제가 옛날 약관이었을 때 뜻한 바와 행한 바는 비록 말할 것은 못되지만, 일찍이 옛사람에 뜻을 두고 배우려 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매번 마음속으로 스스로 믿어 말하기를 "옛날에 특별히 통달한 사람은 비록 일찍 성취했다 하더라도 모두 장성한 이후에 세운 것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약관의 젊은 나이이니 또한 십여 년의 공부를 한다면 옛사람을 따라잡는 데 있어서 반절은 된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식간에 십 년이 흘러서, 가만히 내가 한 말과 행위를 옛사람이 30세 때 했던 성취와 비교해보니, 언덕이 태산과 화산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후회하고 한탄하며 "내가 가졌던 옛날의 지행은 진실로 대부분 해이해졌다."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며, "옛 사람들이 덕을 완성한 것은 대부분 40세 때나 50세 때였으니, 내가 비록 몇 년 어그러졌으나 이제라도 힘써 정진한다면 오히려 미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선이 될 금단의 소식은 아직 없고 서릿발 같은 흰 머리가 먼저 침범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40세 전에는 아득하고 망망하였으니 한문공(한유)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묘한 도와 정미한 의리는 비록 기미를 살피고 마음에 깨닫고 싶으나 이미 젊은 날의 총명이 아니요, 중임과 대업은 비록 멀리 끝까지 궁구하고 싶었을지라도 장년의 역량이 없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지난날에 떠돌며 논 것을 슬퍼하고 초심에 부합하기 어려움을 개탄하여, 때때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레가 뒤집힌 이후에 큰 길을 살피는 것이니 팔이 부러지기 전에 좋은 의사를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이 한량이 경험한 바를 거울과 경계로 삼아서, 세월이 많다는 것을 믿는다 말하지 말고, 지극한 도를 듣기 어렵다는 것을 항상 두려워하여, 더욱 큰 뜻에 힘을 쓰고 큰일을 궁구하여, 가깝게는 부모의 유체를 보존하고, 멀리는 성현의 일맥을 잇기를 바랍니다. 저는 비록 때를 잃었지만, 속으로는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나 삼대 속의 쑥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대에 대해 얼굴은 비록 새로이 알았을지라도 마음만은 옛날부터 사귄 것 같습니다. 헛된 칭찬으로 사람에게 아첨하고 싶지는 않고, 거듭 참된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준다는 비유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다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해하여 잘 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奉審書中所自道, 有志行懈弛, 無以聳拔等語, 知是出自撝謙例語.然既係下問而求益者, 則請得以因此, 而效實心相與之一端也.夫志之欲其堅立而不懈, 行之欲其篤進而不弛, 豈不是學者之所願? 終無奈理義之發弱而微, 氣欲之蔽強而繁, 一日之奮發, 不能勝長時之燕晏, 千里之輈, 常多半途之廢, 乍立乍解乍進乍弛之間, 悠悠歲月不待我矣, 此千古之通患也.僕之昔在弱冠也, 所志所行, 雖不足道, 亦未嘗不欲古之人是志是學, 每有自恃于中者曰: "往昔特逹之人, 雖云夙就, 皆壯而後有立焉.我尚弱而少矣, 且用十許年工夫, 其於追古人也, 思過半矣." 焂忽之間, 十霜已周, 靜把己之云爲, 視古人三十時所就, 則懸乎若丘垤之於泰華矣.乃自悔懊曰: "我向來志行, 固多解弛也." 然猶有所自慰者曰: "古人之成德, 多在於四十五十, 我雖蹉, 却幾年迨此, 勉進尚可及也." 孰知金丹無信霜白先侵? 四十前茫茫蒼蒼, 非獨韓文公然也.竗道精義, 雖欲研幾悟, 心而已, 非少日之聰明.重任大業, 雖欲遠致極究, 而奈無壯年之力量, 悼往日之游泛, 慨初心之難副, 有時乎泫然而泣下.覆轍之後, 坦途亦審, 折肱之前, 良醫何求? 幸足下以此漢之所經歷者爲鑑戒, 勿謂富年之可恃, 恒懼至道之難聞, 益勵大志, 勉究大事, 近以成父母之遺體, 遠以紹賢聖之一脈也.僕雖失時, 竊願爲驥尾之蠅, 麻中之蓬也.僕於足下, 面雖新知, 心惟舊交.既不欲以虛譽媚人, 而重有感於實心相與之喩, 不覺罄竭至此, 想亦見諒而樂聞也.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聖九 辛酉 "현명하고 도량이 넓으며 치우치지 않는 사람은 집사 한 명뿐이다."고 하였는데, 어쩌다가 현명한 견해가 있는 당신에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어리석고 비루하여 사람들 중에 가장 못났는데, 다만 타고난 성격이 가볍고 재빨라서 한두 가지 얻어들은 것이 있으면 곧장 감히 강론의 말석에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터득한 것이 없기 때문에 또 감히 자신도 독실하게 믿고 타인을 급박하게 배척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을 즐겨 말하는 그대가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현명하고 도량이 넓다는 것으로 저를 잘못 칭찬한 것이니, 사실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 제가 다른 사람을 속인 죄입니다.치우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경우는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유문(儒門)이 찢어지고 의론이 대립되었는데, 윗사람은 이미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일의 시비와 말의 득실을 규명하지 않고, 자기 스승에게서 나왔다면 높이고 떠받치는 것이 너무 지나쳐 태산과 화산도 오히려 낮다고 의심하고, 다른 문하에서 나왔다면 씻어내고 불어내는 것이 너무나 가혹하여 단점이 혹시라도 숨겨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제가 깊이 미워하면서 통렬하게 징계하는 것입니다. 조석으로 덕을 살펴서 시종 바뀌지 않는 것은 어찌 그대가 저에게만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도 이것입니다.화도(華島)7)의 차서(車書)8)에 대해 지난번에 줄곧 의심했던 것은 그것이 다만 서로를 친애하는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에게 여쭈자 과연 생각한 바와 같았지만, 선생은 '그 편지에서 한 말이 너무나 무거우니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유자가 삭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자결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가 의를 취했는지를 여부를 허여할 뿐입니다. 일찍이 선생에게 여쭈었는데, "비록 문묘에 배향할 수는 없어도 사숙(私塾)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가능하다."9)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숙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허여했는데, 어찌 일찍이 그 의리를 인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한 번 삭발을 당한 것이 모두 쓸모가 없다."는 말은 아마도 전한 사람의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겁탈을 당하여 자결한 열부(烈婦)에 관한 글을 《약재집(約齋集)》에서 삭제한 것은 혹 한결같이 찬양만 하고 억양(抑揚)과 포폄(褒貶)의 뜻이 없기 때문입니까? 《약재집》을 교정할 때 유영선(柳永善)이 명을 받아 삭제했으니, 유영선이 일찍이 "때때로 한 번씩 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항상 편치 않다."라고 하였습니다.'청나라 유자[淸儒]' 운운한 것은 마땅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여 여쭈어야 합니다만 질문한 본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본래 명나라 사람인데 청나라 유자가 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본래 청나라 사람으로서 청나라 유자가 된 자입니까? 국초의 청나라 유자를 말한 것입니까? 또는 나라를 세우고 오래 시간이 지난 뒤의 청나라 유자를 말한 것입니까? 또한 청나라 유자가 스스로 처신한 의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후세 사람이 청나라 유자를 처리하는 의리입니까? 다음 편지에서 다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明洪不偏, 執事一人"之喩, 何以得此於明見? 殊不可曉.自惟昏滯隘陋, 最出人下, 而但姿性輕儇, 才有一二口耳之得, 輒敢傾瀉於講論之末.然惟其無實得也, 故又不敢信己篤而排人急.是故足下樂道人善, 而未及細察, 誤以明且洪稱之, 實則非足下之誤也, 乃僕欺人之罪也.至於不偏之云, 非曰能之, 而願學焉者也.近世儒門岐裂, 議論角立, 上既不免, 而下益甚焉.不究事之是非、言之得失, 出自其師, 則尊戴太崇, 嫌泰華之猶卑; 出於他門, 則洗吹太苛, 恐疵瘢之或隱, 此僕所深惡而痛懲者也.朝夕觀德, 終始不替, 豈惟足下之所望於僕? 僕之望於足下者亦此也.華島車書向固疑, 其爲只謝相愛之意, 及稟先生則果如所料, 而但以那書命語太重, 爲未穩云矣.儒者被削自裁者, 許其取義與否.曾己稟質師門, 答謂雖不可從享文廟, 而祭之私塾則可也.既許其祭之私塾, 則何嘗不與其義乎? 乃知"一被削都無用"之語, 蓋傳者之過也.若其删"遇劫自裁之烈婦"文字於《約齋集》者, 或以其一味贊揚, 而無抑揚褒貶之意故耶?《約集》之校也, 柳永善承命删出, 而柳嘗言"時一念此, 心常不安"云矣."清儒"云云, 當依敎轉稟, 而不詳發問本意, 謂自明人而爲清儒者耶? 本清人而清儒者耶? 謂國初之清儒耶? 立國久後之清儒耶? 且謂清儒自處之義耶? 後人處清儒之義耶? 後囬更示爲仰. 화도(華島)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간재가 이곳에 정착하여 수학을 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차서(車書) 車氏가 보내온 편지를 이른 듯하다. 비록……가능하다 간재는 "선비가 삭발당하여 자살하는 것은 욕을 당한 부녀와 의리가 동일한 것이니, 그 문도들이 사숙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가능하다.〔士子被削而卽自裁者.亦宜與受辱婦女同一義理.其門徒祭之私塾則可〕"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17 〈華島漫錄〉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聖九 辛酉 간옹(艮翁)이 유자가 삭발을 당하여 자살하는 것10)을 의론한 설은 지난번 편지에 대략 이미 제기해 말하였으니, 보시고 다 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천근하고 비루한 저는 진실로 정밀한 의리를 더불어 논하기에 부족하지만 만일 반드시 한 말씀을 해주기를 바란다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삭발을 당하여 자살한 자는, 그 덕망과 품행이 높은지 낮은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천시하는 마음은 과연 진실하고 간절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상시 말마다 반드시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고, 일마다 반드시 중화를 따르고 오랑캐를 등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삭발을 당할 때 정색하고 엄한 말로 거절하였으니, 마땅히 하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사람들의 위협이 우레와 같고 날카로운 칼날은 번개와 같음에 속수무책이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니 어쩔 것입니까? 이때에는 만약 만 명을 당할 힘이 있지 않으면 비록 성인의 큰 덕이라 할지라도 아마도 역시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또 분노와 수치심을 깊이 품고 즉시 한 번 죽는 것으로 스스로 밝혔으니, 그 심사의 명백하고 곧음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겉모습이 억지로 바뀐 것을 이유로 더 나아가 절개를 잃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논하여 그로 하여금 너무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김씨의 일과 같은 경우는, 죽음에 임했을 때 쓴 한 장의 유언과 의론하는 자들의 조소를 모두 아직 보지 못했으니, 제가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 다만 보내온 편지를 참작하고 제 소견으로 헤아려 본다면 김씨의 잘못은 죽음에 임했을 때 쓴 유언에 있지 않고, 아마도 자결이 너무 늦은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의론하는 자들의 비웃음은 삭발을 당하여 자결한 것에 있지 않고 아마도 삭발 이후에 의리를 너무 크게 말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대가 보기에 다시 이를 다시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艮翁所論儒者被削自死之說, 向書畧已提陳, 想經覽悉.至於淺陋, 固不足與議於精義, 而如欲言之無已, 則有一焉.蓋彼被削自死者, 未論其德望品行之或高或下, 其尊華賤夷之心, 則果眞切矣.是其平日, 言言必華夷之辨別, 事事必華夷之向背也.方其被削也, 正色嚴辭之拒斥, 宜亦無所不至矣.其柰衆脅如雷, 利械如電, 束手無策, 求死不得何? 當此之時, 如非有萬夫不當之力, 雖聖人之大德, 恐亦無如之何也.彼又深懷憤恥, 即以一死自明, 是其心事白直, 無少疑也.若以外形之強變, 進而歸之失節, 豈非論人太苛, 令人太冤乎? 至若金氏事, 其臨死之一紙、論者之嘲笑, 俱未及見, 吾何敢知? 但參之來書, 揣乎鄙見, 金氏之失, 不在於臨死之一紙, 恐在於自裁之太晚也.論者之笑, 不在於被削而自裁, 恐在於削後之大談義理也.未知盛見復以爲如何. 간옹이……것 간재는 "삭발을 당하고 대의를 말하는 자는 그 가소로운 것이 여기에 있지 훗날 자결하는 데에 있지 않다. 성구는 매우 마땅하다고 운운하는데 이는 좋다. 그 대인의 뜻도 그러한가?〔被削而談大義者, 其可笑在此, 非在後日自裁. 聖九甚當甚當之云, 善矣, 未知其大人之意亦然耶〕"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7 〈답김택술(答金澤述)〉.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화림동131)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사유 【한응】과 이별하며 주는 서문 【신사년(1941)】 花林洞歸路贈別李士裕【漢膺】序 【辛巳】 산과 강에서 바람 쐬고 시 읊는 즐거움에 대해 공자가 증점(曾點)을 허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자신이 태산(太山)과 동산(東山)을 유람하기까지 하였으니,132) 옛 현인들은 대체로 그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자가 형악(衡岳 형산(衡山))과 여부(廬阜 여산(廬山))에 오르고, 율곡(栗谷)과 농암(農巖)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또 그 중에 드러난 것이니, 이렇게 유람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증점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선유(先儒)가 진실로 이미 말했고, 공자와 주자, 율곡, 농암도 그 도가 똑같으니, 성현을 배우는 자라면 어찌 그에 대한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또한 긴장만 하고 이완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완만 하고 긴장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었으니133), 긴장과 이완 사이에 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 번씩 유람하고 즐기는 것이 일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이 내가 사유와 함께 화림동에 간 이유이다. 그런데 몽매한 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나더러 선비로서 교만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이러한 때에 의리상 어찌 태사공(太史公)의 장대한 유람을 배울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러한가? 어찌 그렇겠는가. 상전벽해처럼 시대가 바뀐 뒤로 인심이 완전히 변하고 온 세상이 혼탁해져서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없는데, 태고의 모습을 보존하고 본연의 맑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은 오직 산수뿐이다. 이로 보면 세상 사람은 무상하지만, 산수는 무상하지 않다. 이에 정(情)이 있는 것은 무상하고, 정이 없는 것은 무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정이 있는 것을 버리고 정이 없는 것을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시에 이른바 '세상의 교제하는 도가 무정물에 있네.[世間交道在無情]'134)라는 것이 나보다 먼저 이러한 점을 알았던 것이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더욱 이러한 유람이 없을 수 없다.옛적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구름 낀 산림 속으로 떠나 은둔했던 것이나 명나라 말기에 여러 현인들이 황량한 언덕에서 통곡했던 것들이 모두 이러한 것들인데, 성현의 절의와 많은 행적들을 버려두고 태사공 한 가지 일만을 들어서 조롱하는 저 사람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이것으로 그 조롱에 해명하고, 또 우리들이 앞에서 말한 성현의 바람 쐬고 시 읊는 즐거움과 이완시키고 긴장하는 데에 도가 있는 것, 유람하고 즐기는 데에 일이 있는 것 및 교제의 도가 무정물에 있는 것, 은둔하고 통곡했던 것 등의 뜻을 배우고자 하는 데에 체득한 바가 없이 단지 조롱자의 말을 실증시킬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 글을 지어 서로 더불어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는다. 山水風咏之樂, 孔子非惟與點, 親自有泰山、東山之遊焉. 古之賢者, 蓋莫不然. 至於朱子之衡岳ㆍ廬阜、栗谷ㆍ農巖之金剛, 則又其著者. 此何以故? 曾點之樂, 先儒固已言之. 孔、朱、栗、農, 其揆一也. 學聖賢者, 豈無意乎? 且也張而不弛, 文、武不能, 弛而不張, 文、武不爲, 弛張之間, 有道存焉. 故一遊一豫, 無非事者. 此吾與士裕有花林之行也. 昧者不知, 謂我士驕而曰: "當此時, 義豈可學太史公壯觀也?" 噫, 其然? 豈其然乎? 滄桑之後, 人心百變, 擧世混濁, 無可與語者, 其存太古之顔, 帶本淸之色者, 惟山與水. 是則世人無常, 而山水有常. 乃知有情者無常, 而無情者有常, 吾寧可舍有情而取無情焉? 古詩所謂世間交道在無情者, 先獲之矣. 當此日也, 尤不可以無此行. 昔梅月堂之放遯雲林, 明末諸賢之痛哭荒岡, 皆是也. 彼之舍却聖賢節義、許多已迹, 擧一太史公事而嘲之者, 亦獨何心? 旣以此解其嘲, 又恐吾輩於所謂欲學聖賢風咏之樂、弛張有道、遊豫有事及交在無情、放遯痛哭之意, 無有所得, 而適以實嘲者之言. 故作是序, 以爲相與反省之資. 화림동 경상남도 함양군의 안의면 월림리 일대에 걸쳐있는 계곡으로, 농월정(弄月亭)ㆍ동호정(東湖亭)ㆍ거연정(居然亭)ㆍ군자정(君子亭) 등의 정자가 있는 곳이다. 산수(山水)에서 …… 유람하였으니 《논어》 〈선진(先進)〉에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말하자, 공자가 그 기상에 감탄을 하며 "나는 점과 함께 하겠다.〔吾與點也.〕"라고 허여한 것과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노(魯)나라 동산(東山)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太山)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긴장만 …… 것이니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긴장만 하고 이완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완만 하고 긴장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니, 한번 긴장하고 한번 이완하는 것은 문왕과 무왕의 도이다.〔張而不弛, 文武弗能也, 弛而不張, 文武弗爲也. 一張一弛, 文武之道也.〕"라는 구절이 보인다. 세상의 …… 있네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14 〈답송운장(答宋雲長)〉에 "강가의 가을 산이 나를 싫어하지 않으니, 세상의 교제하는 도가 무정물에 있네〔江上秋山不相厭, 世間交道在無情.〕"라는 구절이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태하당계안의 서문 【무자년(1948)】 台下堂契案序 【戊子】 옛적에는 위로 정치가 융성하고 아래로 풍속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권면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선에 교화되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와서는 정치와 풍속이 모두 쇠퇴하여 백성들이 흥기하여 행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이에 뜻이 있는 자가 이를 근심하여 백성들을 이끌고 감발시킬 방법을 생각하였으니, 여남전(呂藍田)이 덕업을 서로 권면한 향약(鄕約)115)과 같은 것이 이것이고, 향약을 간략히 하여 계(契)를 만든 것으로는 근대의 문회계(文會契)와 위친계(爲親契), 존사계(尊師契), 목인계(睦婣契) 등이 있다. 대체로 모두 서로 수양하여 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니, 또한 성대한 일인데, 오늘날의 태하당계안(台下堂契案)과 같은 것은 더욱 말을 하면 듣기에 흡족하였다.태하 거사(居士) 심관국(沈觀國)은 경재(敬齋)의 문인으로, 연옹(淵翁 김창흡(金昌翕))을 사숙하여 은거한 채 영달을 구하지 않았고 인륜을 좋아하였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그의 덕과 선에 감복하였다. 지난번에 고을의 나이 어린 수십 사람이 그의 자제와 조카, 친족과 인척에게 나아가 서로 함께 돈을 갹출하고 계를 세워 노년을 부양할 물자를 돕고, 일제히 당중(堂中)에 모여 격언(格言)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의 몸을 지키는 부절로 삼았으니, 무릇 이 계에 들어간 사람으로 자제와 조카들에게는 어버이를 위하는 계가 되고, 문도에게는 스승을 위하는 계가 되며, 친족과 인척에게는 화목의 계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어른을 공경하는 계라 이르는 것도 또한 괜찮을 것이며, 강론하고 예를 펴는 것으로 총괄하여 말하면 또한 문회계라 이를 수 있다. 한 가지 일을 행함에 많은 선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는 실로 영주(瀛洲 정읍) 남쪽의 아름다운 풍속이라 하겠다. 그러나 태하당의 덕이 아니면 어찌 이런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돌아보건대, 지금 서양의 물결이 우리나라에 밀려 들어와 떳떳한 인륜이 무너져 없어진 것은 전에 없던 일로, 국정(國政)의 초창기에 바로잡을 겨를이 없었는데, 여러 군이 먼저 효도와 공경, 신뢰와 화목의 도를 닦는 데에 이처럼 근면하니, 이로 말미암아 나아가서 고을에서 도로, 도에서 나라로 점점 다른 사람에게 미쳐 간다면 어찌 아름다운 풍속이 융성해지고 절로 교화되는 나라가 될 징조가 되지 않을 줄 알겠는가. 그렇지 않고 유명무실하거나 시작은 있되 끝이 없다면 여러 군들에게 수치일 뿐만 아니라, 태하당에게도 누가 됨이 적지 않을 것이니, 힘써야 할 것이다.나는 태하당과 어렸을 적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늙어서는 더욱 친하게 지냈기에 그 일을 기쁘게 듣고서 계안의 서문을 지었다. 古者, 治隆於上, 俗美於下, 人不待勸而自化於善. 降及後世, 政俗俱頹, 民之興行者鮮矣. 於是有志者憂之, 思所以導率感發之方, 若呂藍田德業相勸之鄕約是也. 自鄕約而畧之以爲契, 則有近世之文會契、爲親契、尊師契、睦婣契. 蓋皆欲交修而歸善, 亦盛事也. 若今日之台下堂契案者, 尤言足聽聞也. 台下居士 沈觀國, 以敬齋門人, 淵翁私淑, 隱居無求, 愛好人倫. 人多服其德善. 迺者鄕黨年少數十人, 就其子姪、族戚, 相與醵金樹契, 助暮年扶養之資, 齊會堂中, 服膺格言, 作自身持守之符. 凡入玆契者, 在子姪則爲爲親, 在門徒則爲尊師, 在族戚則爲睦婣, 其餘則謂敬長之契亦可, 總其講論敍禮而言, 則亦可謂文會契也. 行一物而衆善備, 是固瀛南風俗之美. 然非台下之德, 烏能致此? 顧今西潮東盪, 彛倫喪敗, 前所未有, 國政草創, 不遑救正. 諸君能先修孝敬信睦之道, 其勤如此. 由此而進, 漸及於人, 自鄕而省, 自省而國, 安知不爲兆於隆美自化之域乎? 不然而存名去實, 有始無終, 不惟諸君之可恥, 其爲累於台下也不少矣, 勉之哉. 余與台下少相知而老益親, 喜聞其事而序其案. 여남전(呂藍田)이 …… 향약(鄕約) 여남전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학자인 여대림(呂大臨, 1046~1092)으로, 그는 산서성(山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살면서 자신의 형제인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과 함께 향촌(鄕村)을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만들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채성만【동필】에게 주는 서문 【뒤에 동건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중일이다. 병인년(1926)】 贈蔡聖萬【東必】序 【後改名東建, 字中一. 丙寅】 내가 일찍이 천하의 물을 살펴보건대, 졸졸 흐르는 샘물이나 콸콸 쏟아지는 계곡물부터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과 세차게 흐르는 하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줄기와 물갈래가 혹 멀리 돌아 흐르기도 하고 혹 가까이 곧바로 흐르기도 하면서 비록 각기 다르게 흐르지만, 그 귀착한 곳을 궁구해 보면 천 번 만 번 휘돌고 굽이져 흐르되 반드시 동쪽 바다로 모여들었다.또 일찍이 옛적의 성현(聖賢)과 절열(節烈)을 살펴보건대, 세상의 모든 험담과 칭찬, 영광과 치욕, 기뻐할 만한 것과 슬퍼할 만한 것, 상도(常道)와 변도(變道)에서부터 도랑에 버려지고 목숨을 잃은 것에 이르기까지 비록 만나는 바가 만겁토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의리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로 만 번 굽이져도 반드시 동해로 흐르는 것은 물의 본성이고, 만겁토록 의리에 귀의하는 것은 선비의 분수이다.아, 물은 사사로운 정이 없는 사물이기에 아래로 흘러 나아가고 동해로 귀의할 때에 스스로 주저함이 없고, 스스로 그침이 없이 자연의 본성을 따라 쉽게 흘러간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 밖으로는 기호와 안일에 이끌리고, 안으로는 지혜와 기교, 계략과 요량이 발생하기 때문에 천사만종(千駟萬鍾)116)과 도거정확(刀鋸鼎鑊)117)이 앞에 번갈아 다가올 때에 평탄한 한 줄기의 바른 길을 어리석게도 보지 못하니, 이것이 어짊과 절개를 얻기 어려운 이유이다.돌아보건대, 지금은 천하가 혼란하여 이욕(利欲)이 하늘까지 넘쳐나고, 의리가 땅을 쓴 듯 사라져서 마침내 자식이 번번이 부모를 버리고, 신하가 번번이 나라를 팔며, 제자가 번번이 스승을 모함하는 것을 마치 다반사처럼 여기고, 사람들도 또한 태연하게 바라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의 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채군 성만(蔡君聖萬)의 거처가 송정천(松汀川) 가에 있는데, 대저 송정(松汀)의 냇물이 줄기차게 장구히 흘러 밤낮을 쉬지 않고 동진강(東津江)118)으로 들어가니, 성만이 항상 이 냇물을 따라 거닐고, 이 냇물에서 씻으면서 사물을 보고 감흥을 일으키는 바에 어찌  스승으로 삼아 본받을 것이 없겠는가. 바라건대 성만은 홀로 가는 뜻을 떨쳐 이 일을 향해 전력하여 의리와 이욕을 매우 미세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변별하고, 그릇됨과 올바름을 칼로 자르듯 구분하여 만겁토록 의리에 귀의한 현절인(賢節人)이 되게나. 나는 이미 바다에서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보았고, 또 사람에게서 고상한 선비인 성만을 보았으니, 성만이여! 힘쓸지어다. 余嘗觀乎天下之水矣. 涓涓㶁㶁之泉澗, 以至滔滔浮浮之江河, 支支派派, 或遠或近, 雖各不同, 究其歸, 則千回萬折, 而必朝宗于東海. 又嘗觀乎古之賢聖節烈人矣. 凡世間毁譽榮辱, 可欣可慽, 若常若變, 以至於溝壑喪元, 雖所遭萬劫之不同, 莫不歸乎義. 蓋萬折必東, 水之性也; 萬劫歸義, 士之分也. 嗚呼, 水無情私之物, 其就下而歸東也, 無自沮焉, 無自息焉, 順其性之自然而易如也. 至於人則不然, 嗜好安佚牽乎外, 智巧計量生乎內. 故當其千駟萬鍾、刀鋸鼎钁之迭臨乎前也, 坦然一條正路, 矇不見焉. 此其賢與節之難得者乎. 睠今天下淆亂, 利欲之滔天, 義理之掃地, 乃至於子輒棄父, 臣輒賣國, 弟輒陷師, 若茶飯然, 而人亦恬視不怪. 世道至此, 寧不寒心?蔡君 聖萬之居在松汀川上. 夫松汀之水, 滾滾長逝, 不舍晝夜, 入于東津. 聖萬之所常沿斯濯斯者, 覽物起興, 豈無所師法者乎? 願聖萬奮獨往之志, 專力向此事, 銖精乎義利之辨, 刀截乎邪正之分, 作萬劫歸義之賢節人也. 吾旣於海而見必東之水矣, 又將於人而見聖萬之高士也. 聖萬乎勉哉. 천사만종(千駟萬鍾) 많은 녹봉을 비유하는 말로, 말 네 마리를 사(駟)라 하고, 쌀 6석(石) 4두(斗)를 1종(鍾)이라 한다. 도거정확(刀鋸鼎鑊) 원문의 '鼎钁'은 문맥에 근거하여 '钁'을 '鑊'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도거정확은 죄수에게 형벌을 가하거나 사형을 시킬 때 사용하는 기구로, 도(刀)는 궁형(宮刑)에 쓰는 칼이고, 거(鋸)는 월형(刖刑)에 쓰는 톱이며, 정확(鼎鑊)은 사람을 삶아 죽이는 가마솥이다. 동진강(東津江)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풍방산에서 발원하여 전라북도 남부를 북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군 태원【인수】에게 주는 서문 【신미년(1931)】 贈李君 台元【仁洙】序 【辛未】 주(周) 나라는 후직(后稷)과 공유(公劉)가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지 수백 년이 지나고,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에 이르러 왕업의 자취를 닦기 시작하였으며, 문왕(文王)에 이르러 더욱 크게 성대해져서 비로소 천명을 받았다. 때문에 《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새로워졌도다."135)라고 하였다.이군 태원(李君台元)은 선대 소심재(小心齋)로부터 산오(山塢)와 남강(南岡)을 거쳐 대인(大人) 양산(陽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식과 문장을 쌓고 몸가짐과 행실을 닦아 후대 자손이 대유(大儒)로서의 자취를 밟는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비록 집안과 나라의 차이가 있고 대소가 같지 않지만, 그 쌓아온 자취로 말하면 또한 한 집안에서 있어서 주나라에 해당한다. 태원이 만약 덕행을 성대히 쌓고 유학(儒學)을 대성하여 선조를 빛낼 수 있다면 어찌 이씨(李氏) 집안의 문왕이 될 수 없겠으며, "이씨는 비록 오래된 집안이지만, 그 덕은 새로워졌도다."라는 노래가 어찌 시인에 의해 지어지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그대를 위해 말해 보겠다.《시경》에서 또 말하지 않았는가. "오직 이 문왕만이 조심하여 공손하고 삼가셨네."136)라고 하였고, 또 "거룩하신 문왕이여, 아, 끊임없이 공경을 밝히셨네."137)라고 하였으니, '공경[敬]'이라는 한 글자가 대체로 평생의 본령이었다.《서경》에 "문왕은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고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었네."138)라고 하였고, 전(傳)에 "문왕은 도를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139)라고 하였으니, '근면[勤]'이라는 한 글자가 또 공부의 시작과 끝이었다.아, 문왕과 같은 생지안행(生知安行)140)의 성인으로도 오히려 '공경'과 '근면'이라는 두 글자를 버릴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학문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공경'을 학문의 본체로 삼고, '근면'을 학문의 작용으로 삼아야 하니, '공경'이 아니면 학문을 통괄할 수 없고, '근면'이 아니면 학문을 이룰 수 없다.맹자가 "문왕을 본받으면 반드시 천하에 정사를 하게 될 것이다."141)라고 하였는데, 나도 또한 "학문하는 사람이 문왕의 '공경'과 '근면'을 본받는다면 반드시 천하에 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겠다.태원은 진실로 학문에 근면한 사람이니, 내가 '근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공경'은 성학(聖學)의 근본이 되는 핵심으로 쉽게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래서 그가 말을 구할 때에 '공경'과 '근면'을 함께 들어 힘쓰게 하여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게 한다. 周自后稷、公劉厚民安邦累百年, 而至太王、王季, 肇基王跡, 又至于文王而益大以盛, 始受天命. 故《詩》不云乎? "周雖舊邦, 其命維新. " 李君 台元, 自先世小心齋以下, 歷山塢、南岡, 而至其大人陽山, 皆種學績文, 飭躬修行, 以基後昆大儒之迹. 雖家國有殊, 大小不同, 語其所以積累者, 則亦人家周邦也. 台元如能盛其德大其儒, 用光祖先, 則豈不得爲李門之文王? 而李雖舊家, 其德維新之頌, 安知不作於詩人乎? 吾請爲子申之. 《詩》又不云乎? "維此文王, 小心翼翼. " 又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 敬之一字, 蓋其平生本領. 《書》曰: "文王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 傳曰: "文王望道, 如未之見. " 勤之一字, 又其始終工夫. 噫, 以文王生知安行之聖, 猶舍不得敬、勤二字, 况在學者乎? 敬以爲其體, 勤以爲其用, 非敬無以統之, 非勤無以成之. 孟子曰: "諸侯師文王, 必爲政於天下. " 吾亦曰: "學者師文王之敬、勤, 必成德於天下矣. " 台元固勤於學者, 吾不須贊, 但敬爲聖學原腦而有未易言者. 故於其有求也, 幷擧敬勤而勖之, 俾其不偏云爾. 주나라가 …… 새로워졌도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오직 …… 삼가셨네 《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보인다. 거룩하신 …… 밝히셨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문왕은 …… 없었네 《서경》 〈무일(無逸)〉에 보인다. 문왕은 ……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들을 볼 때에 다친 데가 있지 않은가 걱정하였으며, 도를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文王視民如傷, 望道而未之見.〕"라는 구절이 보인다. 생지안행(生知安行) 태어나면서부터 알고[生而知之], 편안하게 행한다[安而行之]는 말로, 성인의 자질을 뜻하는 말이다. 《中庸章句 20章》 문왕을 …… 것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문왕을 본받으면 큰 나라는 5년, 작은 나라는 7년이면 반드시 천하에 정사를 하게 될 것이다.〔師文王, 大國五年, 小國七年, 必爲政於天下矣.〕"라는 구절이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도형에게 주는 서문 【을해년(1935)】 贈李【道衡】序 【乙亥】 사람들은 항상 도(道)와 문장을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지극한 경지에 미쳐서는 도 또한 문장이고, 문장 또한 도이니, 이것을 둘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행위가 선(善)을 다한 것을 지극한 도[至道]라 이르고, 말이 이치를 다한 것을 지극한 문장[至文]이라 이르니, 문장은 도에 근본하고, 도는 문장에 나타난다. 도가 아니면 문장이 근거할 바가 없고, 문장이 아니면 도가 밝혀질 수 없다. 그러므로 행위가 선을 다한 자는 지극한 문장을 지니고, 말이 이치를 다한 자는 지극한 도가 있다.시험 삼아 살펴보건대, 육경(六經)과 사자(四子)142)의 문장은 말이 이치를 다하였으니, 그 차례는 사계절과 같고, 그 작용은 물이나 불과 같으며, 그 앎은 귀신과 같다. 때문에 그 화려한 빛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해와 별처럼 빛나니, 당우 삼대(唐虞三代) 성현(聖賢)의 지극한 도가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또 살펴보건대,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 시대 작가들의 문장은 쟁쟁하게 울림이 있고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치를 다한 문장을 법으로 삼아 비교하면 도를 터득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터득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흠결이 사이사이 나와서 교훈으로 삼기 어려우니, 어찌 도가 지극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나는 그래서 "양웅(楊雄)이나 왕수인(王守仁)의 문장과 같은 것은 문장이되 문장이 아니고, 창려(昌黎 한유(韓愈))나 여릉(廬陵 구양수(歐陽修))의 문장과 같은 것은 문장이되 지극하지 못하니, 천하의 지극한 문장을 구한다면 오직 육경과 사자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문장을 배우는 자들은 오직 한ㆍ당 이후의 작가만을 사모하고, 옛 성현의 글에서 돌이켜 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극한 문장으로 배우지 않고, 도와 별개로 여기기 때문이다.우리 무리 중에 이군 도형(李君道衡)은 도와 문장을 배우는 자로, 두 가지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자이다. 이는 뜻이 진실한 준사(儁士)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숭상케 하였다. 그러나 도와 문장이 하나인 줄 모른 채 문장에서 문장을 구하고 도에서 구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때문에 이 말을 지어 주어서 지극한 도를 얻어 행위가 선을 다한다면 말이 이치를 다한 지극한 문장이 그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한다. 도에 들어가는 방법과 선을 다하는 술책은 선현의 글 속에 갖추어져 있으니, 돌아보건대 내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바라는 바가 같기에 그와 더불어 서로 힘쓰면서 일생을 마치기를 바란다. 人恒道道與文, 余謂及其至也, 道亦文, 文亦道, 二之則不是. 行盡善之謂至道, 言盡理之謂至文, 文本乎道, 道見乎文, 非道則文無所據, 非文則道無以明. 故行盡善者有至文, 言盡理者有至道. 試觀六經四子之文, 言之盡理, 其序如四時, 其用如水火, 其知如鬼神. 故其光華發於外者, 日星如也. 非唐虞三代聖賢之至道, 其何能爾? 又觀漢、唐、宋、明作家之文, 非不鏘然有聲, 燁然而光. 律之以理盡者, 舍曰無得乎道者, 其云有得者, 亦罅漏間出, 難以爲訓, 豈非道之未至而然乎? 余故曰: "若楊雄、王守仁之文, 文而非文也; 若昌黎、廬陵之文, 文而未至者, 求天下之至文, 其惟六經四子乎. " 然而今之學文章者, 惟漢、唐後作家之是慕, 不反求之於古聖賢書, 何哉? 曰學之不以至者而二之於道也. 吾黨中李君 道衡, 學道與文者而二者之至焉者. 是志誠儁士也, 令人欽尙, 尙恐不知道與文之爲一, 而求文於文, 而不求於道也. 故爲此說而贈之, 俾知得至道而行盡善, 則言盡理之至文, 在其中也. 若其入道之方, 盡善之術, 具在聖賢書中. 顧余雖不才, 所望則同, 願與之交勖而終身焉. 육경(六經)과 사자(四子) 육경은 《주역》ㆍ《시경》ㆍ《서경》ㆍ《춘추》ㆍ《예기》ㆍ《악기》를 말하고, 사자는 사서(四書), 즉 《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을 말한다.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