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견에게 보냄 을해년(1935) 10월 與田士狷 乙亥 十月 일전에 희숙(希淑)64)을 석동(席洞) 묘제에서 만났습니다. 희숙이 말하기를, "현암(玄巖)으로 가서 김상(金庠)65)을 만나 그에게 문장을 다시 고쳐 사죄하라고 고한즉, 김씨가 말하기를 '일을 하고 싶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오늘날 오진영이가 나의 동정을 엿보아서 장차 어찌하려고 하니, 내가 경솔하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상사의 이 말은 다 칭탁(稱托)66)하는 말입니다. 단지 고치지 않을까를 근심할 뿐이지, 만일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오진영이도 간재가 스승이므로 장차 무슨 말로 죄를 짓겠습니까?희숙이 또 말하기를, "박인규(朴仁圭)가 나의 책상에서 형님께서 김상사를 언급한 편지를 보고 낯빛을 바꾸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후창이 어찌하여 우옹(尢翁)67)을 폄하한 전일중(田鎰中)과 더불어 친후하단 말인가요?'였습니다"라고 희숙이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온 조선을 움직여서 대사(大事)를 거행하여 평일에 이루지 못한 것을 기어이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두렵고 두렵습니다.또 책상 위에 있던 편지글에서는 다만 그 고친 것이 명백한 것을 보고서 대응한다고 말했는즉, 본래 가히 노할 일이 아닌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더욱 두려워할만 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실제로 우옹을 폄하했다면 어찌 그 사람을 직접 성토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과 친한 자가 김씨를 논하기를 기다려서 아울러 성토하겠습니까? 그러니 실제로 그런 일이 없고 단지 불과 우옹을 머리에 이고서 김씨를 보호하는 패자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옹을 모독하고 희롱하는 죄를 어디에다 귀결시켜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고, 실제로 통분할 일입니다.희숙이 또 말하기를, "현암에 가서 들어본즉, 형님께서 박진호(朴震鎬)에게 김씨의 문장을 받지 말라는 말을 권해서 윗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우리들이 당일에 신중히 고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고 또 심지어는 그 말이 쓰이지 않을까 우려하여 도리어 조소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렇게 행했던 것은 진실로 창암 선생을 위한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가 생각했던 대로 명월주(明月珠)68)를 암실에 던졌다면 누가 그 보배로움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만 번 남에게 비웃음을 받더라도 부끄러운 바가 없고, 도리어 비웃은 자들의 식견이 없음을 제가 비웃었습니다. 양가의 교분이라든지 유명간의 믿음이라든지 사실관계가 어떠한가를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사람을 기극(忌克)69) 할 지경으로 귀결시키니 어찌 이런 자는 운수를 모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희숙이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희숙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진호(震鎬)70)에게 인척의 교분은 그만두더라도, 교학의 의리가 창장에게 있다고 칭한 즉, 간재의 문하에 출입한 지 30년에 도의로써 서로 믿는 것이 늙거나 젊다고 하여 차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스승의 일로 인하여 창장과 함께 음적의 화를 입은 즉, 실로 생사에 있기 어려운 연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대신 창암의 집안 행장을 초안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진호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나에게서 구하여 이미 집안 행장문을 유실하고 다시 저에게 청해서 제가 그를 위해서 다시 행장문을 본초가 없어진 이후에 완성해주어서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서로 관련됨이 이와 같아서 이로 인해 문장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논급했습니다. 또 연전에 오진호가 그 조부의 문자를 모씨의 집안에서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집안은 간옹의 일에 불만이라는 것을 말해서 만류시켜 그친 일이 남아있습니다. (희숙에게 일러 말한 끝부분에 " 표시를 해야하는데 차직 힘듭니다)지금 정성으로 간옹을 섬기는 것이, 문인과 다름없던 창암이었습니다. 그 사후의 문자를 간옹 생전에는 스승으로 섬기다가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는 홀연히 배신하고 떠난 여흥 김씨에게 문자를 청하니, 어찌 모른 척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을 보듯이, 냉담하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오진호 조부의 원고 일은 저에게 방문하여 질의한 즈음에 있었습니다! 김씨의 집안은 높고 문장도 아름답습니다. 오진호가 이를 사모하여 그리했겠지만 그러나 유독 삼세(三世)의 교분과 우의, 장초가 관련된 정리는 김씨가 능히 먼저 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지 않았는지요.71)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그만이지, 아울러 가히 말할 수 있는 정리까지 생각지 아니하고 비웃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비록 오진호가 여전히 나이가 적어서 깊이 말할 것이 없지만, 모든 이러한 말들은 어찌 일어나야 할 때에서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다시 희숙이 말하기를, "내 또한 처음에 듣고서 형님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였을까? 하고 의심을 하였는데 이제 편지를 받고 보니 진실로 옳고 옳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오형께서는 박인규(朴仁圭) 등이 연명하여 편지하는 것에는 일종의 의사(意思)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또 선사의 문인인 김진식(金璡植)의 이름이 끼어있는 것이 뜻밖의 변고라 여겼기 때문에 다소의 개탄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나, 예로부터 국가의 변란은 항상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나라 왕실의 관채(管蔡)72)의 일부터도 그러했습니다. 어찌 유독 오늘뿐이겠습니까?금일 오진영과 김용숙의 변란이 나온 것은 선사의 가까이에서 나왔으니, 어찌 김진숙을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이 일 때문에 즐거움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위정척사의 기가 꺾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무락자저'는 전사견이 보낸 편지의 말입니다. 유경조(柳景肇)가 말하기를, "김중옥(金仲玉)이 김종현(金鐘賢)이가 논한 〈음작정절사전(陰作鄭節士傳)〉73)을 보고 말하기를 '독서 삼십년에 다만 취모(吹毛) 몇 자74) 만을 보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75) 이것은 자정(子貞)이 친히 묶어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정에게 말하기를, "내가 중옥이 과연 이런 말을 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군자가 치지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정밀히 살펴 밝게 구별하여 겉과 안을 통관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밖에서부터 두루 뭉실하게 본다면 양묵(楊墨)의 인의(仁義)가 덕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한자(韓子)의 박애(博愛)가 인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맹자는 그것을 이단이라고 배척했고, 주자는 논하여 한유를 도를 알지 못한다고 논했습니다. 그러니 사람 말에 조금 허물이 있는 것을 밖으로 터럭으로 덮어 능히 볼 수 없다고 하면, 어찌 독서가 귀할 것이 있겠습니까?76) 단지 억지로 끝을 두어 억지로 허물을 찾는다면, 심술(心術)에 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행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신컨대 제가 아무리 낮다고 하여도 이 정도까진 이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독서 수십 년에 터럭 이면의 허물을 살피지 못한 자와 그 허물이 있는 것을 알고도 터럭을 취해서 억지로 돕는 자를 싫어합니다. 또 천하가 중화(中華)인데도 유자들이 능히 천하를 중화로 만들지 못하고 이적(夷狄)으로 가게 했다는 오진영의 설은 그 허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가히 엄폐할 터럭도 없음에도 엄폐만을 일삼으니 또한 마땅히 어떠하였겠습니까? 日前過希淑於席洞墓祀.希言往見金庠於玄巖, 勸其改告由謝罪, 則曰此非不欲爲, 但今吳震泳伺我動靜, 將欲如何. 吾不敢率爾.希言止此此是稱托之辭.只患不改苟能改之吳將何辭而罪之.希又言朴仁圭於獘案,見兄主語及金庠之書, 變色大怒曰, 後滄何以與貶尢翁之田鎰中親厚.希言止此 此非欲動全鮮擧大事. 期遂平日之未遂耶. 可怕可怕.且鄙書只言觀其改之明白而應之, 則元非可怒者, 而猶如此尢可怕也.雖然有人而實貶尢翁, 則何不直討其人. 而待其所親者論金事而幷討耶.可知其無實事,而不過戴尢翁爲護金之干牌也.然則侮弄尢翁之罪,何所歸乎.非可怕而實可痛也.希又言往玄巖聞之, 則兄主勸朴震鎬勿受金文之言, 爲衆笑囮.噫吾輩當日守告而不憚煩, 至慮其言不見用反見嘲笑, 而猶且爲之者, 亶出於爲蒼巖一念矣.果然如其所料, 投明月於暗室, 孰知其爲寶今雖萬被人笑.實無所愧, 反笑笑之者之無見也.不思兩家之契分, 幽明之相信, 及事實關係之如何, 而遽歸人於忌克之科, 豈非不知數者耶.余謂希曰, 吾於震鎬, 戚分姑舍, 而稱有敎學之誼於蒼丈, 則出入艮門三十年, 道義相信, 不以老少而有間.以至於因師事而同受陰禍, 實有死生難忘之故.故代草家狀之文.震不於他而求吾, 旣又遺失狀文, 再請於吾, 吾乃爲之再成狀文於無本草之候, 而不憚勞.相關如此, 因而論及受文, 在所當然.且年前震欲受其祖文字於某家.吾爲言其家不滿艮翁事而止之, 己事在焉.今以誠事艮翁, 無異門人之蒼巖.身後文字,請於師事艮翁生前,而忽然倍去山頹後之驪金也, 豈容越秦視而不爲之一言乎.况在震以祖稿事,訪余質疑之際乎.金之地閥高矣, 文章美矣.震雖慕此而然, 然獨不念三世契誼, 狀草關係之情理.非金之所能先乎.不用忠告則不用已矣,幷不思可言之情而笑之者何哉.雖震尙年淺不足深言, 几此云云, 豈非起於起處乎.希曰吾亦始聞而疑兄主胡至如是, 今承所喩誠然誠然.嗚呼吾兄以朴仁圭等聯書, 有含一種意思,而先師門人金璡植之參名.爲意外之變故.致多少慨歎.此非不然.然從古以來家國之變.常起於肘腋之下.自周室管蔡事而已然.何獨今日乎.今日吳金之變出, 已出於先師之肘腋, 何論金璡植乎.皆不足以此無樂而自沮於衛闢.無樂自沮來書語.柳景肇言金仲玉見金鐘賢所論陰作鄭節士傳曰, 讀書三十年, 只學得吹毛覓疵.此子貞親聞而傳者也.弟謂子貞曰, 吾雖未知仲玉果有此言, 然君子之致知窮理, 貴在精察明辨, 通貫表裡.若自外泛觀, 則楊墨之仁義, 非不爲德, 韓子之博愛非不爲仁, 而孟子斥之以爲異端, 朱子論之以爲不知道.若人言之有疵者, 外爲毛掩而不能見, 則烏足貴乎讀書哉.但有意吹覓,則有害心術.故君子不爲也.吾自信汙不至此矣.吾則又惡夫讀書數十年, 不能察毛裡之疵者, 與夫知其有疵而取毛强掩者也.且此天下華而儒不能華天下卽夷之說, 其疵易見, 幷無可掩之毛者,而專事掩覆, 則其心術又當如何哉. 희숙(希淑) 후창의 족제이다. 김상(金庠) 김씨 성을 가진 성균관 유학생으로 김용숙을 말한다. 칭탁(稱托) '핑계'를 이르는 말이다. 우옹(尢翁) 우암 송시열을 말한다. 명월주(明月珠) 《사기》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 같은 좋은 보배를 몰래 길 가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이유 없이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기극(忌克) 다른 사람의 재능(才能)을 시기하여 꺼리고 능멸하는 것이다. 진호(震鎬) 오진영의 아우인 오진호인 것 같다. 오진호가……않았는지요 창암이 죽은 후 간재를 비판했던 김씨의 글을 받았다면 죽은 창암이 받아들었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관채(管蔡)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다. 주공의 동생들로서 중앙 정부에 반감을 품고 마침내 은(殷)의 반경(盤庚)과 더불어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켰다. 음작정절사전(陰作鄭節士傳) 음인이 지은 정절사전이다. 취모(吹毛) 몇 자 남의 허물을 억지로 찾아내는 것을 이른다. 아마 남을 비판하는 소리가 많았던 것 같다. 유경조……했습니다 오진영이가 쓴 《정절사전》이 있고, 오진영이가 쓴 이 책을 김종현이가 논하였다, 즉 오진영이가 쓴 책을 김종현이가 논하고, 김중옥이가 김종현이 논한 글을 보았다. 그러니……있겠습니까 이 말은 김중옥의 말을 찬성한 것으로, 김중옥은 오진영을 비판한 사람이다. 남의 허물 있는 말을 터럭으로 덮어 볼 수 없는 것이라면, 독서가 귀할 것이 없다. 독서가 귀한 것은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허물을 지적해 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