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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안의 시에 차운하다 20수 次汝安詩 【二十首】 장부가 큰 일을 하고자 한다면 丈夫欲有爲마음이 갈 바501)를 먼저 정해야지 先定心所之우뚝하도다 동로수502)여 卓哉東魯叟이미 열다섯 때부터였구나 已自十五時나는 마흔 여섯인데 而我四十六이에 뜻을 세웠다고 감히 말하랴 敢謂立在玆단지 마땅히 가야 할 길은 아니 但知當行路이를 구하며 다시 의심치 않았네 求此不復疑돌아보매 바람과 서리 급해지니 回首風霜急만년의 절조 더욱 스스로 지키리 晩節益自持보라 저 봉해의 북쪽 睠彼蓬海北아득한 계화산이로다 蒼茫繼華山산은 푸른데 사람503)은 이미 멀어져 山碧人已遠감회 서글퍼서 차마 말을 못하네 感愴未忍言그래도 도는 추락하지 않아 猶有道不墜위로 사천년을 이었다네 上紹四千年진중한 평소의 가르침을 珍重平日敎신중히 전하길 맹세하네 兢兢誓相傳송산 언덕에서 천 번 눈물을 훔치고 松隴千掬淚연곡의 묘도504)에 만고의 정 느끼네 蓮阡萬古情훌륭한 절조는 말속에 모범 되셨고 懿節範末俗여사505)는 꽃다운 이름을 남기셨네 女士留芳名소완506) 시가 내 마음을 알았으니 小宛獲我心나아준 분을 욕되게 하지 않으리 願無忝所生늙건 젊건 오직 공평한 도리 있으니 老少惟公道백발 되었다고 놀랄 필요 없다네507) 雪鬂不須驚다만 온전히 돌아가는508) 날 기다려 直待全歸日자식의 직분을 이내 이루리라 子職乃可成올빼미가 나의 집을 부수고509) 鴟梟毁我室즐겁게 장난치며 하늘을 나네 嬉戱戾天飛뒤흔드는 풍우에 둥지 잃은 새는 漂搖失巢者방황하고 탄식하며 슬퍼한다네 彷徨歎以悲외로운 봉황은 어디에 있는가 孤鳳何處在단산510)이 서로 의지하길 원하네 丹山願相依배불리 먹는 것은 바라지 않으니 飽哺非所欲빙빙 날면서 돌아갈 곳 잊었구나 翶翔却忘歸마침내 비바람 진정되고 會當風雨定폭염도 응당 사그라지리 虐燄亦應衰원컨대 동지들과 더불어 願與同志者세한의 마음511) 어기지 말세 歲寒不相違내 집은 천태산 아래 我屋台山下맑고 깨끗해 소란한 속세 벗어났네 瀟灑出塵喧멀리 보니 하늘이 아득함을 알겠고 望遠知天逈객이 적으니 땅이 외졌음을 깨닫네 客少覺地偏맑은 밤에 향을 사르고 앉으니 淸宵燒香坐밝은 달이 절로 오가는구나 明月自往還게다가 책 속에 옛사람 있으니 更有卷中人참 뜻을 함께 말할만 하다오 眞意堪共言잘못은 작은 잘못도 제거해야 하고 非可去小非옳음은 참된 옳음을 구해야 하네 是當求眞是실정보다 과한 명예 도리어 두려워하고 還怕過情譽완전을 구하다 받는 비방512) 꺼리지 말라 勿嫌求全毁옳음과 그름 칭찬과 비방 사이에서는 是非毁譽間오직 의를 따를513) 뿐이네 惟義與比爾이런 까닭에 군자의 도는 所以君子道비단옷에 홑옷을 덧입은 것처럼 날로 드러나네514) 日章絅尙綺천대산에 무엇이 있는가 台山何所有절로 뭉게뭉게 피는 흰구름이지 白雲自英英때로 산집의 창 옆으로 내려오니 時傍山窓下무정한 것이 가장 다정하다네 無情最多情바위 위에 앉은 손님을 맞아 迎客石上坐다시 작은 덮개 되어 기울여주네 復作小蓋傾이것을 가지고 누구에게 줄꼬 持此贈誰人태반은 불평으로 우는515) 이에게지 太半不平鳴봉우리 개이면 더욱 사랑스러워 晴峯還可愛상쾌한 기운이 주렴에 스며드네 爽氣入簾生시냇가 솔은 늦도록 푸르름 머금고 澗松含晩翠골짜기 난은 꽃다운 자태 품었구나 谷蘭抱芳姿종일토록 유독 절로 향기 발하고 竟日獨自薰해를 다하도록 가지를 변치 않네516) 終歲不改枝이 물건들 아끼는 이는 누구던고 誰歟愛此物물건도 기이하고 사람도 기이하네 物奇人亦奇그것을 아낌은 또 무엇 때문인가 愛之亦何爲천성이 무위하기517) 때문이네 性也無爲爲너와 애오라지 함께 돌아가려니 與爾聊同歸외물의 속박으로 어찌 제어하랴 物累孰能羇산중엔 달력도 없는데 山中無曆日꽃잎은 졌다 다시 피네 花葉落復開멀리 동계옹518)을 추억하니 緬懷桐溪翁예나 지금이나 회포는 같구나 古今同一懷속인이 어찌 아는 게 있겠는가 俗子有何知타괴519)를 배운 나를 비웃구나 笑余學打乖샘 있으니 의지해 내가 물을 긷고 有泉資我汲산 있으니 빌려서 내가 깃든다네 有山借我棲도도히 흐르는 게 모두 탁류지만 滔滔皆濁流어찌 차마 진흙탕을 휘젓겠는가520) 安忍掘其泥바다와 산은 절로 높고 양양한데 海山自峨洋고상한 곡조는 뉘와 함께 할까521) 高調誰與諧중천에 걸려있는 해와 달은 中天懸日月만고토록 항상 길을 잃지 않지 萬古常不迷한 이치가 마치 순환하듯이 一理如循環원래 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네 原無往不回어려서부터 노력을 하지 않아 從少不努力얼마나 많이 초년에 잃었던가 幾多失東隅이렇게 만년522)의 날에 이르렀으니 迨此桑楡日어찌 늘그막에 수습할 걸 생각지 않으랴 盍思收晩途힘써 노력하여 빨리 정도로 돌아가서 策勵亟歸去그물과 함정에 몰리지 않게 해야하네 免敎罟阱驅목전에 날이 부족하지만 目下日不足통틀어 계산하면 넉넉히 남음이 있네 總計裕有餘편안한 집523)이 여기에 있음을 아니 安宅知在此이를 버려두고 다시 어디에 살겠는가 舍之更何居예로부터 영재가 몇이던고 古來幾英材중도를 얻는 게 가장 어렵네 最難得中道이 때문에 광견자524)를 所以狂狷者선니525) 늙은이가 취하셨다네 見取宣尼老무성한 강아지풀526)이 되기보다는 與爲稂莠盛차라리 말랐어도 좋은 싹 되리라 寧作佳苗槁지금의 군자들은 어떠한가 如何今君子사람들이 좋게 말해주길 바라네 要令衆道好맹인이 기와와 돌527)을 얻고도 瞽者得瓦石만족하면서 보배로 여기는구나 充然以爲寶위대하도다 중용의 덕이여 大哉中庸德명과 성528)이 표리를 꿰뚫었네 明誠貫裏表구렁의 깊이가 몇 척이 되더라도 溝壑深幾尺지사는 신념을 잊지 않는다네529) 志士不忘時나는 제나라 우인을 사랑하노니 我愛齊虞人정으로 부르자 죽음으로 마다했지530) 旌招以死辭누가 생생하는 이치531)가 孰知生生理도리어 다시 여기에 있음을 아는가 還復在於玆무덤532)에선 성인도 일어나지 못하니 九原聖不作사람들의 의심 풀어주기도 어렵구나 難將解衆疑늙은 용이 깊은 못에서 굶주릴지언정 老龍餒九淵어찌 미꾸라지 뱀장어의 능멸 받으랴 寧受鰌鱔欺청컨대 그대는 하늘을 보라 請君看太虛뜬구름 가는 대로 맡겨둔다오 浮雲任所之결백했던 초나라 대부533) 皎皎楚大夫슬프게도 역경을 만났네 堪嗟遭逆境하의534)에 가을 서리 옅게 젖고 荷衣秋霜薄천년토록 우러러 홀로 깨었네 千載仰獨醒참소하던 근상535)의 무리들은 儳儳靳尙輩제 모가지를 잘도 보존했구나 好得保首領근심과 울분이 노래로 터지고 憂憤發爲歌변풍536)이 붓537)에서 나왔네 變風發毛穎자양의 붓이 영예롭게 기리니538) 袞褒紫陽筆해와 달이 찬란함을 다투도다 日月爭炳炳방공은 한나라 말에 은거하면서 龐公隱漢末성부에는 발을 딛지 않았지539) 城府足不至풍도와 운치가 얼마나 높았던가 風韻一何高지금까지도 사람을 취하게 하네 至今使人醉밭갈이 멈추며 때로 다시 쉬고 釋耕時復休밭둔덕에서 자리를 나누어 앉네 隴上班坐次유업이 이런 편안함이었으니540) 遺業此爲安만금인들 어찌 귀하게 여기리오 萬金奚足貴누가 현명한 안목541)을 갖추어 何人具隻眼무미한 맛을 알 것인가 識得無味味날마다 차조술542)에 취하고 日日醉秫酒시상543)엔 전택이 있네 柴桑有田宅초연했던 도연명 선생은 超然淵明子처사로 이름과 자취 남겼네 處士留名跡취하려 해도 내겐 술 없고 欲醉我無酒백 묘544)의 밭도 없는데 亦無田畝百되레 청한한 아취 자랑하니 還詑淸寒趣고인에 비해 생색을 더했네 視古添生色귀거래사를 읽고 나니 讀罷歸來辭먼 훗날에도 애석하구나 曠世堪可惜진나라 정545)이 백성을 어둡게 하려 秦政昧黔首선비를 묻고 또 경전을 불태웠으니546) 坑士復焚經앉아서 융절아547)로 하여금 坐令隆準兒집안을 변화시켜 제업 이루게 했네548) 化家帝業成보잘것없는 숙손통549)은 區區叔孫通제례작악하여 존귀하게 해주었네550) 制作猶尊榮지금 세상 사람은 무슨 마음인가 何心今世人가정에서부터 독서를 금하는구나 禁讀自家庭이를 스스로 분서갱유한다는 것이니 是謂自焚坑이를 생각하면 슬피 울만하구나 念之可哀鳴하늘이 빨리 성인을 낳아주길 원했던 願天早生聖옛 사람551)이 나의 마음을 알았구나 古人獲我情사마천은 강회를 떠다녔고552) 馬遷浮江淮종각은 장풍을 탔었지553) 宗慤乘長風일찍부터 사방의 뜻554) 품고 夙抱四方志자나깨나 잊지 않았다네 不忘寤寐中시대는 어지럽고 명운조차 궁하니 時亂命且窮행적도 답답하여 통하지 못한다오 足跡鬱未通쓸쓸한 창동리에서 寥落滄東里걸어놓은 강궁555) 헛되이 저버렸네 虛負懸桑弓저 우뚝 솟은556) 태산이여 泰山高節彼꼭대기에 오르려해도 길이 없구나 陟巓無由得진실로 정상에 올라보지 않았다면 苟不陟上巓미혹되지 않았다고 누가 허여하리 孰能許不惑이와 기는 체와 용으로 나뉘고 理氣分體用사람과 사물은 통과 색으로 말미암네557) 人物由通塞명쾌하도다 석담자558)여 明快石潭子바로 동국에서 으뜸임을 알겠노라 正識冠東國같고 다름을 어찌 족히 말하리오 異同何足說차라리 침묵을 지켜야 하리559) 寧可守玄黙내가 듣건대 옛날의 군자는 我聞古君子원래 벼슬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나560) 元非不欲仕오직 그 도를 따르지 않으면 惟其不由道한 갓 자기를 잃는 것이라네 所以徒失己노재 허문정은 魯齋許文正천고의 수치 면치 못했지561) 不免千古恥어찌 학식을 안고 豈如抱學識깊이 숨어 향리에서 늙음만 같았으랴 深藏老州里암담해라 관구562)가 뒤집히고 黲黲倒冠屨문란해라 기강이 사라졌구나 棼棼蔑綱紀몇이나 되는 유문의 제자들이 幾箇儒門子실족하고 스스로 그치지 못했나 失脚不自止손잡고 함께 돌아갈 수 없으니 携手未同歸나의 마음 스스로 믿어야 하리 吾心庶自恃지극한 정은 말하지 않는 중에 있으니 至情在不言말 하고자 하면 이미 진정이 아니라네 欲言已非眞후대에 났어도 마음은 옛 도를 좇으니 生晩心追古세속이 야박해도 기는 절로 순박하네 俗薄氣自淳상체의 뜰563)에 기뻐하는 사람 있으니 棣園喜有人즐겁고 화락함564)이 날로 새로우리라 湛樂日相新어찌 이리도 동으로 서로 떠도는가 夫何西復東궁귀565)가 포악한 진나라보다 심해서지 窮鬼甚暴秦한 말의 곡식도 서로 나눌 수 없어 斗粟未相分때로는 솥에 먼지가 필 지경이네 有時釜生塵단지 부친과 스승 저버릴까 두려워 但恐負父師글을 부쳐 서로 걱정하고 힘써야지 寄書胥憂勤아행566) 시를 탄식하나니 嘆息我行詩얹제나 나의 친애함을 회복할까 何日復我親고해의 파도는 걱정하지 않으나 未愁苦海濤가없는 나루터가 아득하구나 渺渺無涯津보배 뗏목567)은 무슨 물건인고 寶筏云何物나는 유자의 건 하나 있다네 我有一儒巾언덕에 오를 날이 있으리니 登岸知有日스스로 구제하고 남도 구제하리 自濟兼濟人 丈夫欲有爲, 先定心所之.卓哉東魯叟, 已自十五時.而我四十六, 敢謂立在玆.但知當行路, 求此不復疑.回首風霜急, 晩節益自持.睠彼蓬海北, 蒼茫繼華山.山碧人己遠, 感愴未忍言.猶有道不墜, 上紹四千年.珍重平日敎, 兢兢誓相傳.松隴千掬淚, 蓮阡萬古情.懿節範末俗, 女士留芳名.小宛獲我心, 願無忝所生.老少惟公道, 雪鬂不須驚.直待全歸日, 子職乃可成.鴟梟毁我室, 嬉戱戾天飛.漂搖失巢者, 彷徨歎以悲.孤鳳何處在, 丹山願相依.飽哺非所欲, 翶翔却忘歸.會當風雨定, 虐燄亦應衰.願與同志者, 歲寒不相違.我屋台山下, 瀟灑出塵喧.望遠知天逈, 客少覺地偏.淸宵燒香坐, 明月自往還.更有卷中人, 眞意堪共言.非可去小非, 是當求眞是.還怕過情譽, 勿嫌求全毁.是非毁譽間, 惟義與比爾.所以君子道, 日章絅尙綺.台山何所有, 白雲自英英.時傍山窓下, 無情最多情.迎客石上坐, 復作小蓋傾.持此贈誰人, 太半不平鳴.晴峯還可愛, 爽氣入簾生.澗松含晩翠, 谷蘭抱芳姿.竟日獨自薰, 終歲不改枝.誰歟愛此物, 物奇人亦奇.愛之亦何爲, 性也無爲爲.與爾聊同歸, 物累孰能羇.山中無曆日, 花葉落復開.緬懷桐溪翁, 古今同一懷.俗子有何知, 笑余學打乖.有泉資我汲, 有山借我棲.滔滔皆濁流, 安忍掘其泥.海山自峨洋, 高調誰與諧.中天懸日月, 萬古常不迷.一理如循環, 原無往不回.從少不努力, 幾多失東隅.迨此桑楡日, 盍思收晩途.策勵亟歸去, 免敎罟阱驅.目下日不足, 總計裕有餘.安宅知在此, 舍之更何居.古來幾英材, 最難得中道.所以狂狷者, 見取宣尼老.與爲稂莠盛, 寧作佳苖槁.如何今君子, 要令衆道好.瞽者得瓦石, 充然以爲寶.大哉中庸德, 明誠貫裏表.溝壑深幾尺, 志士不忘時.我愛齊虞人, 旌招以死辭.孰知生生理, 還復在於玆.九原聖不作, 難將解衆疑.老龍餒九淵, 寧受鰌鱔欺.請君看太虛, 浮雲任所之.皎皎楚大夫, 堪嗟遭逆境.荷衣秋霜薄, 千載仰獨醒.儳儳靳尙輩, 好得保首領.憂憤發爲歌, 變風發毛穎.袞褒紫陽筆, 日月爭炳炳.龐公隱漢末, 城府足不至.風韻一何高, 至今使人醉.釋耕時復休, 隴上班坐次.遺業此爲安, 萬金奚足貴.何人具隻眼, 識得無味味.日日醉秫酒, 柴桑有田宅.超然淵明子, 處士留名跡.欲醉我無酒, 亦無田畝百.還詑淸寒趣, 視古添生色.讀罷歸來辭, 曠世堪可惜.秦政昧黔首, 坑士復焚經.坐令隆準兒, 化家帝業成.區區叔孫通, 制作猶尊榮.何心今世人, 禁讀自家庭.是謂自焚坑, 念之可哀鳴.願天早生聖, 古人獲我情.馬遷浮江淮, 宗慤乘長風.夙抱四方志, 不忘寤寐中.時亂命且窮, 足跡鬱未通.寥落滄東里, 虛負懸桑弓.泰山高節彼, 陟巓無由得.苟不陟上巓, 孰能許不惑.理氣分體用, 人物由通塞.明快石潭子, 正識冠東國.異同何足說, 寧可守玄黙.我聞古君子, 元非不欲仕.惟其不由道, 所以徒失己.魯齋許文正, 不免千古恥.豈如抱學識, 深藏老州里.黲黲倒冠屨, 棼棼蔑綱紀.幾箇儒門子, 失脚不自止.携手未同歸, 吾心庶自恃.至情在不言, 欲言已非眞.生晩心追古, 俗薄氣自淳.棣園喜有人, 湛樂日相新.夫何西復東, 窮鬼甚暴秦.斗粟未相分, 有時釜生塵.但恐負父師, 寄書胥憂勤.嘆息我行詩, 何日復我親.未愁苦海濤, 渺渺無涯津.寶筏云何物, 我有一儒巾.登岸知有日, 自濟兼濟人. 마음이 갈 바 뜻[志]를 가리킨다. 《논어》 〈위정(爲政)〉에 공자가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자립하였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라고 한 데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마음이 가는 바를 뜻이라고 한다.[心之所之謂之志]"라고 하였다. 동로수(東魯叟) 공자(孔子)를 말한다. 동로(東魯)는 공자가 출생한 중국 동쪽의 노(魯) 나라를 말한다. 사람 김택술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로, 만년에 계화도(繼華島)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산 …… 묘도 원문의 '송롱(松隴)'은 후창의 부친 묘소가 있는 곳이고, '연천(蓮阡)'은 모친의 묘소가 있는 곳을 말한다. 김택술의 〈생일날 감회를 쓰다[生朝感題]〉 시에 "구로의 은혜 생각하니 눈물이 의건을 적시네. 일찍 송산의 언덕을 소제하고 멀리 연곡의 묘도 바라보네. 내 부친은 군자유셨고 내 모친은 현명한 여사이셨네.[念及劬勞恩 有淚滿衣巾 早掃松山隴 遠瞻蓮谷阡 我父君子儒 我毋女士賢]"라고 하였다. 여사 김택술의 모친을 말한 것이다. 소완(小宛)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서 너를 낳으신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고 하였다. 형제가 각각 노력하여 부모를 욕되게 함이 없기를 경계한 말이다. 늙건 …… 없다네 두목(杜牧)의 〈송은자(送隱者)〉에 "세간의 공평한 도리는 오직 백발이라, 귀인의 머리라고 일찍이 봐준 적이 없었네.[公道世間惟白髮, 貴人頭上不曾饒.]"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온전히 돌아가는 원문의 '전귀(全歸)'는 몸을 훼손하지 않으며 욕되지 않게 생을 마치는 효성을 말한다. 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이 "부모가 자식을 온전히 낳아주셨으니 자식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가야 효도라고 이를 수 있으니, 몸을 훼손하지 않으며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온전히 한다고 이를 수 있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라고 하였다. 《禮記 祭義》 올빼미가 …… 부수고 악인이 선인을 해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원문의 '치효(鴟鴞)'는 간악한 사람을 비유한다. 《시경》 〈치효(䲭鴞)〉에 "올빼미야 올빼미야, 이미 내 새끼를 잡아먹었으니, 내 집마저 헐지 말지어다. …… 내 둥지가 위태롭고 위태롭거늘 비바람이 뒤흔드는지라 내 울부짖는 소리를 급히 하노라.[鴟鴞鴟鴞! 旣取我子, 無毁我室. …… 予室翹翹, 風雨所漂搖, 予維音嘵嘵.]"라고 하였다. 단산(丹山) 봉황이 산다는 전설적인 산 이름으로, 단혈(丹穴)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단혈의 산에 …… 새가 사는데, 그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 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丹穴之山 …… 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라고 하였다. 세한의 마음[歲寒] 처지가 곤궁해도 지조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하였다. 완전을 …… 비방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예상치 못한 칭찬도 있고, 완전함을 구하려다가 받는 비방도 있다.[有不虞之譽, 有求全之毁.]"라고 하였다. 의를 따를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하여 전적으로 고집함도 없고 끝까지 거부함도 없어서 의를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라고 하였다. 비단옷에 …… 드러나네 내면의 덕이 있으면 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경(絅)'은 홑옷이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히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불평으로 우는[不平鳴] 불만스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대체로 시인들을 지칭한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대체로 사물이 화평함을 얻지 못하면 우나니, 본래 소리가 없는 초목을 바람이 흔들어서 울게 하고, 본래 소리가 없는 물을 바람이 출렁이게 해서 울게 한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 草木之無聲, 風撓之鳴, 水之無聲, 風蕩之鳴.]"라고 하면서, 맹동야가 시를 잘 지은 것을 '잘 울었다[善鳴]'라는 말로 평하였다. 해를 …… 않네 소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름을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무위하기[無爲] 특별한 까닭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동계옹(桐溪翁) '동계(桐溪)'는 정온(鄭蘊, 1569~1641)의 호이다.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저서에 《동계집》이 있다. 타괴(打乖) 세상과 어그러지는 일을 하는 것이다. 송나라 소옹(邵雍)이 〈안락와중호타괴음(安樂窩中好打乖吟)〉이란 시를 지어 자신이 세상과 어긋나는 삶을 살면서 유유자적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도도히 …… 휘젓겠는가 혼탁한 세태에 동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원문의 '도도(滔滔)'는 흐르는 강물처럼 모두 나쁜 데로 휩쓸려가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때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조정에서 쫓겨난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어부가 굴원에게 "세상 사람이 다 탁하거든 어찌하여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뭇사람이 다 취했거든 어찌하여 술지게미를 먹고 묽은 술 마시지 않는가?[世人皆濁, 何不掘其泥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醨?]"라고 하였다. 바다와 …… 할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원문의 '아양(峨洋)'은 아양곡을 말하는데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타고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 곡조다. 거문고의 명인인 백아가 높은 산을 연주하면 친구인 종자기가 "태산처럼 우뚝하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을 연주하면 "강하처럼 양양하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뒤에 벗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거문고의 현(絃)을 모두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초년에 …… 만년 원문의 '동우(東隅)'는 해가 뜨는 곳이고, '상유(桑楡)'는 해가 지는 곳이다. 그래서 동우는 인생의 초년을, 상유는 인생의 만년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장군(將軍) 풍이(馮異)가 적미병(赤眉兵)과 싸울 때, 처음에는 패주했다가 나중에 적을 격파하자, 광무제(光武帝)가 "동우에는 잃었으나 상유에 수습하였다.[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했던 고사(故事)가 전한다. 《後漢書 卷47 馮異列傳》 편안한 집[安宅] '인(仁)'을 뜻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 슬프다.[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不居, 舍正路而不由, 哀哉.]"라고 하였다. 광견자(狂狷者) '광(狂)'은 기개가 높은 반면 말을 함부로 하여 언행이 일치하지 못하는 자이고, '견(狷)'은 의지가 굳어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반면 고집이 세어 변통하지 못하는 자를 이른다. 《논어》 〈자로(子路)〉에 "중도의 선비를 얻어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 할 것이니,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하였다. 선니(宣尼) 공자(孔子)를 말한다. '선니(宣尼)'는 한(漢)나라 평제(平帝) 때 공자에게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추시(追諡)한 데서 공자를 가리킨다. 《漢書 卷 12 平帝紀》 강아지풀[稂莠] 논에 자라는 해초(害草)인데 쓸모없는 잡초를 말한 것이다. 기와와 돌[瓦石] 가치가 없는 물건을 말한다. 명과 성[明誠] 진실함과 밝음을 말하는데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1장에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明]을 성(性)이라 이르고 명(明)으로 말미암아 성(誠)해짐을 교(敎)라 이르니, 성(誠)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誠)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하였다. 지사는 …… 않는다네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가 죽더라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수도 있음을 잊지 않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가 잘릴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였다. 정으로 …… 마다했지 정도가 아니면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할 때 우인(虞人)을 정(旌)으로 불렀으나 우인이 오지 않자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는)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수도 있음을 잊지 않고 용사는 머리가 잘릴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다.'라고 칭찬하셨으니,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취하셨는가? 합당한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은 것을 취하신 것이다.[昔齊景公田, 招虞人以旌, 不至, 將殺之.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孔子奚取焉? 取非其招不往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대부를 부를 때는 정(旌)을 사용하고, 우인을 부를 때는 피관(皮冠)을 사용하게 되어있으므로, 우인이 가지 않은 것이다. 생생(生生)하는 이치 '생생(生生)'은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하늘의 이치를 가리킨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한다.[生生之謂易]"라고 하였다. 무덤 원문의 '구원(九原)'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대부(卿大夫)의 묘지가 있던 곳으로, 무덤을 뜻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조문자가 숙예와 더불어 구원을 구경하였는데, 문자가 말하기를 '죽은 이들을 만약 일으킬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따라 돌아갈까.' 하였다.[趙文子與叔譽觀乎九原, 文子曰: 死者如可作也, 吾誰與歸?]"라고 하였다. 초나라 대부[楚大夫] 전국시대 초나라의 충신인 간의대부(諫議大夫)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은 간언(諫言)을 올렸다가 쫓겨나 강가에서 지내다가 죽었다. 하의(荷衣)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은자의 옷을 뜻한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소사명(少司命)〉에 "연잎 옷에 혜초 띠 매고 갑자기 왔다가 홀연히 떠나가네.[荷衣兮蕙帶, 儵而來, 忽而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근상(靳尙) 초회왕(楚懷王)의 총애를 받던 상관대부(上官大夫)이다. 굴원을 질투한 나머지 왕에게 참소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변풍(變風) 굴원의 시를 가리킨다. '변풍'은 본래 《시경》의 문체(文體)의 하나로, 당시 각국(各國)의 민요 따위를 모은 것으로 주남(周南)ㆍ소남(召南)과 십삼열국풍(十三列國風)을 합하여 모두 15개 국풍(國風)으로 되어 있는데, 정(正)ㆍ변(變)으로 구분하여 주남ㆍ소남을 정풍(正風), 패풍 이하 빈풍까지 13개국의 국풍을 변풍(變風)이라고 한다. 붓 원문의 '모영(毛潁)'은 붓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서 토끼털로 만든 붓을 역시 의인화하여 "모영은 중산 사람이다. …… 동곽에 사는 놈을 준이라 하는데, 재빨라서 잘 달린다.[毛穎中山人也, …… 居東郭者曰㕙, 狡而善走.]"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양의 …… 기리니 주희(朱熹)가 굴원의 시를 높이 평가한 것을 말한다. '자양(紫陽)'은 주희의 별호이다. 주희는 《초사집주(楚辭集註)》의 서문(序文)에서 "굴원은 그 뜻과 행동이 비록 더러 중용(中庸)에서 벗어난 점이 있어서 본받을 것은 못되지만, 모두 충군(忠君)ㆍ애국(愛國)의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였다. 방공은 …… 않았지 '방공(龐公)'은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방덕공(龐德公)으로, 현산(峴山) 남쪽에 살면서 성시(城市)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뒤에 처자를 데리고 평생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였다. 유업이 이런 편안함이었으니 부귀와 영달을 초탈한 것을 말한다.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방공(龐公)을 찾아가서 무엇을 자손에게 남겨 주겠느냐고 묻자 방공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주는데 이제 나만은 편안함을 남겨 주겠습니다."[世人皆遺之以危, 今獨遺之以安.]"라고 하였다. 《後漢書 逸民列傳 龐公》 현명한 안목 원문의 '척안(隻眼)'은 선림(禪林)의 용어로, 범부의 육안(肉眼)이 아니라 진실한 정견(正見)을 갖춘 혜안을 말한다. 차조술 차조로 빚은 술로, 진(晉)나라 때의 처사 도연명(陶淵明)이 마시곤 했다. 그의 시 〈화곽주부(和郭主簿)〉에 "차조 찧어서 좋은 술 빚고, 술 익으면 나 혼자 따라 마시네.[舂秫作美酒, 酒熟吾自斟.]"라고 하였다. 시상(柴桑) 도연명(陶淵明)이 팽택현령(彭澤縣令)을 하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돌아와 은거한 곳이다. 백 묘 본래 백 묘(百畝)는 정전법(井田法)에서 한 사람의 가장(家長)이 받는 토지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작은 농토를 의미한다. 진나라 정[秦政] 진시황(秦始皇)을 말하는데, 그의 이름이 정(政)이다. 선비를 …… 불태웠으니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말한다. 진 시황 때 이사(李斯)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박사관(博士官)의 직책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서 및 백가의 서책들을 모두 모아 불태우도록 의논을 올려서, 진시황으로 하여금 모든 서책을 불사르게 하였으며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게 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융절아(隆準兒) '융절(隆準)'은 콧날이 높다는 말로,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고조의 사람됨이 콧날이 높고 용의 얼굴이었다.[高祖爲人, 隆準而龍顔.]"라고 하였다. 집안을 …… 했네 유방이 일개 집안을 변화시켜 나라를 창건하고 황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보잘것없는 …… 숙손통은 '숙손통(叔孫通)'은 진(秦)나라에서 벼슬하다가 한 고조 유방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에 임명된 사람이다. 한나라 초기에 숙손통이 조정의 의례(儀禮)를 새로 제정하고자 하여, 노나라의 유생 30인을 불렀다. 그중에 두 유생은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고, 숙손통에게 말하기를 "공이 섬긴 군주는 열 군주에 이르는데, 모두 아첨으로 섬기어 친귀를 얻은 것이다. 공의 행위는 옛 도에 합치하지 않으니, 우리는 가지 않을 것이다. …… 공은 어서 가 버려서 우리를 더럽히지 말라.[公所事者且十主, 皆面諛以得親貴. 公所爲不合古, 吾不行. …… 公往矣, 無汚我!]"라고 하였다. 제례작악하여 …… 해주었네 숙손통이 왕조의 조제(朝制)와 전례(典禮)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마침 장락궁(長樂宮)의 낙성식을 마치고 모든 신하가 질서정연하게 하례하는 것을 보고는 한 고조가 "나는 오늘에야 황제의 존귀함을 알게 되었다.[吾乃今日知爲皇帝之貴也.]"라고 하였다. 《史記 叔孫通列傳》 하늘이 …… 사람 후당(後唐)의 명종(明宗)을 말한다. 오대(五代) 때에 혼란이 극에 달하자, 명종이 매일 밤마다 궁중에서 향을 사르고 하늘에 축원하기를 "저는 오랑캐인데 난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추대되었습니다. 원컨대 하늘이 어서 빨리 성인을 내셔서 만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원하였다.[某, 胡人因亂, 爲衆所推, 願天早生聖人, 爲生民主.]라고 하였다. 《通鑑節要 卷49 後唐紀 唐 長興4年》 사마천은 강회를 떠다녔고 '마천(馬遷)'은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의하면, 사마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 20세에는 남쪽으로 강수(江水)와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랐다가 우혈(禹穴)을 탐방하고 구의산(九疑山)과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등지를 여행하였고,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옛날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지역에서 강학(講學)을 하며 공자(孔子)의 유풍을 익혔다고 한다. 종각은 장풍을 탔었지 '종각(宗慤)'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 좌위장군(左衛將軍)을 지낸 인물로, 어렸을 때 숙부 종병(宗炳)이 포부를 묻자 "장풍을 타고 만리의 거친 물결을 헤쳐 보는 것입니다.[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하여, 헌걸찬 기백과 원대한 뜻을 밝혔다. 그는 과연 뒤에 진무장군(振武將軍)이 되어 큰 공훈을 세우고 조양후(洮陽侯)에 봉해졌다. 《宋書 卷76 宗愨列傳》 사방의 뜻 원문의 '사방지(四方志)'는 천하를 경영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3년 조에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제(齊)나라에 이르자 제 환공(齊桓公)이 그를 장가보내 주고 말 20필을 주니, 중이가 안주하였다. 그의 시종들이 중이와 제나라를 떠나려고 뽕나무 밑에서 계책을 논하였는데, 누에를 기르는 여자가 뽕나무 위에서 그 말을 듣고 중이의 아내 강씨(姜氏)에게 고하였다. 강씨가 누에를 기르는 여자를 죽이고 중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사방을 경영할 뜻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누설할까 봐서 죽였습니다.[子有四方之志, 其聞之者, 吾殺之矣.]'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강궁 원문의 '상궁(桑弓)'은 뽕나무로 만든 강한 활로, 남아의 큰 포부를 비유한 것이다. 《예기》 〈사의(射儀)〉에 "남자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 여섯 개로 천지와 사방을 쏘니, 천지와 사방은 남자가 일할 곳이기 때문이다.[男子生, 桑弧蓬矢六, 以射天地四方, 天地四方者, 男子之所有事也.]"라고 하였다. 저 우뚝 솟은[高節彼] '절피(節彼)'는 산이 높은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 절남산(節南山)〉에 "우뚝 솟은 저 남산에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네.[節彼南山, 維石巖巖.]"라고 하였다. 절(節)은 주희의 주에 "산이 높은 모양이다.[高峻貌]"라고 하였다. 통과 색으로 말미암네 사람과 사물은 차이는 기(氣)가 통하느냐 막히느냐로 구분된다는 의미이다. 주희(朱熹)의 《대학혹문(大學或問)》 권1 〈경 1장(經一章)〉에 "그 이치로써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원이니 참으로 사람과 물에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없고, 기로써 말하면 바르고 통하는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된다.[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라고 하였다. 석담자(石潭子) 이이(李珥)를 가리킨다. 석담(石潭)은 본래 황해도 해주(海州)에 있는 지명인데 이이가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였다. 침묵을 지켜야 하리 원문의 '현묵(玄默)'은 한(漢)나라의 양웅(揚雄)의 말을 원용한 것이다. 양웅이 조용히 들어앉아 《태현경(太玄經)》을 초(草)하고 있을 때, 혹자가 도가 아직 깊지 못해서 곤궁한 게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그러자 양웅이 〈해조(解嘲)〉를 지어 "오직 적막함만이 덕을 지키는 집이다. …… 나는 묵묵히 홀로 나의 태현을 지킬 뿐이다.[惟寂惟寞, 守德之宅. …… 黙然獨守吾太玄.]"라고 하였다. 《漢書 卷87 揚雄傳》 옛날의 …… 아니나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사람이 일찍이 벼슬하지 않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나 또한 올바른 도를 따르지 않음을 미워하였으니 그 도를 따르지 않고 가는 것은 구멍의 틈을 뚫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古之人, 未嘗不欲仕也, 又惡不由其道, 不由其道而往者, 與鑽穴隙之類也.]"라고 하였다. 노재 …… 못했지 노재(魯齋) 허문정(許文正)은 송말 원초의 학자인 허형(許衡)이다. 경전(經傳)ㆍ자사(子史)ㆍ예악(禮樂) 등에 정통하고 특히 정주학(程朱學)을 신봉했는데, 한족(漢族)이자 학자이면서 원 나라에 벼슬한 것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잇달았다. 조선에서도 동묘(東廟)에 허형의 위패를 모셨는데, 효종과 숙종 때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배향된 허형을 문묘에서 출향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다. 숙종은 번거로운 문제가 야기됨을 이유로 거론하지 말라고 처분을 내렸다. 관구(冠屨) 머리에 쓰는 관과 발에 신는 신으로, 상하(上下)나 존비(尊卑)를 비유한 것이다. 상체의 뜰[棣園] 화목한 형제를 비유한 것이다. '체(棣)'는 《시경》 〈소아 상체(常棣)〉 시를 가리킨다. 이 시는 형제간의 우애를 읊은 작품이다. 즐겁고 화락함 원문의 '담락(湛樂)'은 형제간에 화목한 것을 말하는데, "형제간이 화합하여, 화락하고 즐겁네.[兄弟旣翕, 和樂且湛.]"라고 하였다. 《詩經 常棣》 궁귀(窮鬼)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일찍이 자신을 괴롭히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궁귀(窮鬼)를 쫓아 버리겠다는 뜻으로 〈송궁문(送窮文)〉을 지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아행(我行) 《시경》 〈아행기야(我行其野)〉를 말한다. 인척들과 서로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을 기롱하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미상이다. 보배 뗏목 불교에서 불법(佛法)을 보배 뗏목[寶筏]이라 하는데, 이는 중생(衆生)에게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게 해주는 보배로운 뗏목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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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가석 문생들의 계회 시에 차운하다 次可石門生契會韻 가석공의 덕과 학문이 날로 새로웠으니 石公德學日新新한 계를 단란히 이뤄 얼마나 가르침 받았나568) 一契團成幾坐春천지가 어찌 운수를 회복함이 없다 하리 天地豈云無復運장부들은 장차 큰 일 하는 사람 되리라 丈夫且作有爲人권규569)를 힘쓰며 강습에 도움 주고570) 勸規勤處資麗澤동지571)들 같이하며 덕스런 이웃 접하네 聲氣同時接德隣이제부터 남녘 고을에 좋은 일 더해지니 從玆南鄕添好事훗날에 참된 판향572)을 잃지 않겠구나 他年莫失瓣香眞 石公德學日新新, 一契團成幾坐春.天地豈云無復運, 丈夫且作有爲人.勸規勤處資麗澤, 聲氣同時接德隣.從玆南鄕添好事, 他年莫失瓣香眞. 가르침 받았나 원문의 '좌춘(坐春)'은 스승의 훈도와 덕화(德化)를 뜻한다. 송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뵙고 돌아와 "광정이 춘풍 속에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光庭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4》 권규(勸規) 학문을 권하고 충고하는 것이다. 강습에 도움 주고 원문의 '이택(麗澤)'은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못이라는 뜻으로,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동지 원문의 '성기(聲氣)'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에서 나온 말로, 뜻이 맞는 벗을 말한다. 판향(瓣香) 스승을 흠앙하는 의미를 담아 사르는 향이다. 북송(北宋) 진사도(陳師道)의 〈연국 문충공 집에서 육일당의 도서를 보고[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라는 시에 "지난날 한 가닥 판향을 올리었거니, 공경히 증남풍을 위한 것이네.[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는 구절이 보인다. 증남풍은 증공(曾鞏)으로 진사도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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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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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사견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田士狷 甲戌 춘간(春間)의 한번 이별은 묘연(渺然)하기가 꿈만 같습니다. 소식을 받을 길이 없으니 슬픈 마음을 어찌 그칠 수 있겠습니까? 근자에 선사집(先師集) 습유(拾遺)50)를 편간한 것을 들은 것 같습니다. 과연 그랬는지요? 저는 형에게 이미 충성을 바치지 못했습니다. 〈문인록〉의 간행에 대해서도 그 허물을 보고 규간(規諫)51)하여 거의 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끝내 그만 둘 수 없게 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한번 음성의 무함(誣陷)가 나온 뒤로 우리들이 유훈을 근거하여 저들의 무함(誣陷)를 변토하였고, 또한 유훈을 지켜서 자기의 직분을 다했으니, 이러한 의리를 익숙히 강론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형세를 헤아려보면 인의가 없었다면 뚜렷한 이치가 없은즉, 형의 이 거사는 또한 무슨 마음이었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세기(世基)가 마지막에 존장(尊丈)의 여지가 없다고 배척한 것은 어찌 용동(龍洞)의 간행에 참여했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존장이 앞에서 실수하고 형은 또 뒤를 이어서, 저들의 입을 꺼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이 뿐만 아니라 저들이 유훈을 가리켜 여노(女奴)의 석서(石書)하는 습관이라고 지목한 것이 어찌 천고의 절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만약 여러 자손들 중에 한사람이라도 간재의 유훈을 지키는 이가 없다면 아울러 방관자들이 좌담한 것까지 거짓된 유훈으로 비견되지 않을 것이 거의 드물 것입니다. 어찌 더욱 통분하지 않는가요? 형의 고견은 제가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께서도 자부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혀 의리가 어떠한가를 묻지 아니하고, 영세하고 조각난 문자를 원집과 속집 외에 수집하여 인쇄하려고 하는 것은 심히 어떤 부득이한 까닭이 있어서 입니까?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적이 보건대 동지 제공들이 대부분 모를 잘라서 둥글게 하고, 다시 옛 의견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의 마음이 심히 불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한 몸이 고립되어 돕는 이가 없음을 느껴서, 항시 가슴이 사나워지고 그것을 밖으로 풀지를 못합니다. 형이 만약 저의 말을 또 들어주지 않는다면 저는 마땅히 산에 들어가서 두문불출하며 교유를 그치고, 붓을 불사르며 사문(師門)의 일을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길이 초목과 더불어 짝이 되겠으니 능히 이 고충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春間一別, 渺然如夢.音信莫憑, 悵仰何已.似聞近圖編刋先師集拾遺, 果然否.弟於兄旣忠未效.於門人錄之刋, 見過相規.迄可止之, 而今又終不能已者, 抑何心哉.一自陰誣之出, 吾輩據遺訓而辨彼誣, 守遺訓而盡己分, 此義非不講之熟矣.諒今之勢, 無無認淸楚之理, 則兄之此擧, 亦何心哉, 吾不可得以知也.世基之最後斥尊丈以無餘地者,豈非以參龍刋故耶.尊丈失之於前,兄又繼後而不憚彼口何也.不寧惟是,彼輩之指遺訓爲女奴石書習,豈非千古絶痛.乃使衆子孫無一人守者,則幷與?觀坐談而不歸之僞遺訓者鮮矣,豈不尢可痛乎.兄之高見非惟弟所不反,亦兄所自許.今乃都不問義理若何,欲收印零文片字於原續之外者,有何甚不得已之故.怪事怪事.竊見同志諸公多刓方爲圓, 非復舊意見.非惟心甚不滿, 亦覺身孤無助, 常懷惡而不能遺也.兄若又不見聽,則當入山杜門,息交焚筆,不復言師門事.而長與樵牧爲伍矣, 幸能諒此若哀否. 습유(拾遺) 빠뜨린 글을 말한다. 규간(規諫) 옳은 도리로써 임금이나 웃어른의 잘못을 고치도록 말하는 것으로 간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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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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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8년 김평곤(金平坤)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光緖四年十月十四日 金平坤 光緖四年十月十四日 金平坤 전라남도 보성군 金平伸 외 1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78년 10월 14일에 김평곤(金平坤)이 밭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1878년 10월 14일에 김평곤(金平坤)이 밭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이다. 유래해온 밭을 여러 해 동안 갈아먹다가 이사하게 되어 본군 문전면 교촌 마을 아래의 피약동 부(婦)자 피모(皮牟, 겉보리) 2두락지 부수(負數) 3복(卜)4속(束)을 전문(錢文) 100냥에 영영 방매한다고 하였다. 전주는 한량 김평곤이며, 증필은 한량 양재방이다. 매득자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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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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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이당(李鐺)의 소유토지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李鐺 李鐺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이당(李鐺)의 소유토지 현황을 기록한 장부 이당(李鐺)의 소유토지 현황을 기록한 장부이다. 가지번(假地番)과 면적으로 구분하여 일곱 곳의 현황을 적어놓았다. 아래와 옆에는 면적당 가격을 적어놓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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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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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지적도(地籍圖)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지적도(地籍圖) 지적도이다. 산(山)120림(林) 아래에 좌우로 길게 퍼져있는 토지를 주홍색으로 칠해 표시하였다. 글씨와 선이 흐려 분간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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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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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이기두(李箕斗)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嘉善大夫行龍驤衛護軍)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箕斗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箕斗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먼저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을 취득하였다. 그 직후에 또 임명된 관직이 통정대부이다. 가선대부는 문관의 품계로서 종2품의 하계(下階)이다. 행(行)은 행수법(行守法)이라는 인사 규정의 하나로서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경우 관직 앞에 이 글자를 붙인다. 용양위호군은 중앙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하나인 용양위에 소속된 정4품의 무관직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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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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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李元浩 乙卯 망운시(望雲詩)를 보내주시니, 멀리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이보다 앞서 진실로 형이 문단의 거벽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웅장하게 주제를 구성하고 정밀하게 다듬으며 빛나게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에 이처럼 구비되어 있음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장차 위축되어 물러나 피할 겨를이 없는데 다시 뛰어난 작품으로 한발(旱魃, 가뭄의 귀신)을 꾸짖고 비를 내릴 신룡(神龍)을 감동시켜 한 번 하토(下土)에 비를 뿌려주기를 바랐으니 이것이 어찌 시 제목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또한 생각해볼 때, 옛날에 영웅호걸로 진나라 황제가 달을 꾸짖고108) 노양(魯陽)이 해를 휘둘러 되돌아가게 했다109)는 일들은 원래 이치를 벗어난 세속의 이야기에 속합니다. 오직 문공 한유의 정치하고 진실한 문장만이 형산의 구름을 몰아내고110) 조주의 악어를 길들였으니111) 이것은 믿을 만하지만, 이를 본받고자 한다면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두지 말라고 한다면, 하늘을 공경한 시인의 뜻을 체득하여 온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하늘을 감동시켜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도록 하는 것이 역시 하나의 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인(學人)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그 공경함을 쓰는 도리이니, 애오라지 이런 뜻을 받들어 화답합니다. 그러나 어찌 시라고 하겠습니까. 진실로 못난 사람의 평범한 말이니, 부디 비웃지 않으시겠지요? 望雲詩見惠, 深感不遐. 前此固知兄之爲詞林巨擘, 而不圖意匠之雄, 鍊工之精, 出色之燁, 若是其備也. 如弟者, 將畏縮退避之不暇, 乃復以雄篇傑作, 呵旱魃動神龍而一霑下土望之, 是豈著題語哉? 且念古之雄傑, 如秦帝之喝月․魯陽之揮日, 元屬理外野說, 惟韓文公精誠文章, 開衡山之雲, 馴潮州之鳄, 此則可信, 而欲效嚬, 則非其人焉. 無已則體詩人敬天之意, 欲與擧世之人, 恐懼修省, 以冀感天悔禍, 亦一事也. 此爲學人無時無處不用其敬之道, 聊將此意奉和, 然豈詩乎哉? 眞陋生常談, 幸不見哂否? 진나라……꾸짖고 당나라 때 시인 이하(李賀, 790~816)의 시 〈진왕음주(秦王飮酒)〉에서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달을 꾸짖어 거꾸로 가게 하는구나, 은빛 구름 촘촘히 덮힌 궁궐은 환하기만 하구나〔酒酣喝月使倒行, 銀雲櫛櫛瑤殿明〕"라 했다. 노양(魯陽)……했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노양공(魯陽公)이 한(韓)나라 군대와 한창 전투하던 중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창을 휘둘러서 태양을 90리나 뒤로 물러나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 형산의……몰아내고 한유의 시에 "내가 찾아온 것은 마침 가을비 내리는 계절이라, 음기가 어둑하건마는 씻어낼 맑은 바람도 없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없이 기도를 올리니 뭔가 반응이 있는 듯도, 신명이 어찌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는가. 조금 있자 운무가 개며 드러나는 뭇 봉우리, 쳐다보니 우뚝하게 창공을 버티고 서 있구나.〔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默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靜掃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 하였다. 《한창려집(韓昌黎集)》 권3 〈알형악묘수숙악사제문루(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공의 정성이 형산의 구름을 걷히게 할 수는 있었지만, 헌종의 미혹을 돌릴 수는 없었다. 〔公之精誠 能開衡山之雲, 而不能回憲宗之惑〕" 하였다. 조주의……길들였으니 당 헌종(唐憲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나갔는데, 그곳 악계(惡溪)에 사는 악어(鰐魚)가 백성들의 가축을 마구 잡아먹어서 백성들이 몹시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한유가 마침내 직접 가서 〈악어문(鰐魚文)〉을 지어 악계에 던졌더니, 바로 그날 저녁에 시내에서 폭풍과 천둥벼락이 일어나고, 며칠 후에는 물이 다 말라서 악어들이 마침내 그곳을 떠나 60리 밖으로 옮겨가 더 이상 조주에는 악어의 폐해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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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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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원호에게 답함 신사년(1941) 答李元浩 辛巳 근래에 받은 정중서(鄭重書)의 시는 의리를 명확하게 보고 의론을 공평하게 가졌으니, 진실로 제가 평소에 소망한 것과 부합되는 것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나를 아는 것이 깊고,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원대하며, 나를 경계하는 것이 간절하고 나를 가르치는 것이 지극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것은 십 몇 년 동안 뜻을 같이 한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처음 얻은 것으로, 덕을 사랑함으로써 충고하여 이끌어주는 데에 본래 법도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으니, 제가 덕 있는 사람을 친애하여 부족한 점을 닦아 인을 보충하는 이익을 얻기 바라는 것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비록 못났을지라도 어찌 감격하여 부합되도록 도모할 줄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른바 도를 믿고 덕을 넓히며 의리를 정밀히 하여 우뚝 태산 같이 높은 산이 된다고 한 것은 수준이 너무 높아서 결단코 저같이 못난 사람이 희망하여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것은 장차 어떻게 해야 합니까?'믿는 것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고 하신 말씀은 실질적 이치로는 그렇다 하지만 기세에 막힌 경우에는 또한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자가 어찌 도를 믿고 덕을 넓히고 의리를 정밀히 하여 태산 같이 높은 산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육씨(육구연) 한명이 있어서 그와 대립하여 오늘날까지도 시비가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의심과 믿음이 반반인데 하물며 오늘날 후생(後生)에 있어서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나의 재주와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의리를 밝게 분별함에 마음을 다하여 제자의 직분을 닦음으로써 굽어보고 우러름에 부끄럼이 없기를 구할 따름입니다. 잘 모르겠으나, 어떻습니까?최근에 《남당집(南塘集)》을 읽어 보니 '마음에 우열이 있다'고 논하면서 "성인의 마음은 청기가 모여 허령하고 중인의 마음은 탁기가 모여 허령하다"112)라고 말했으니, 이것이 우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마다 똑같이 청기를 얻어서 마음이 된다면 어찌 성인과 바보의 구별이 있습니까? 또한 고려 때 신씨와 왕씨의 구분을 논하면서 "옛날부터 황제와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기간의 길고 짧은 것은 모두 나라를 취득한 방법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로부터 비롯된다. 왕씨가 신씨에게 멸망을 당하고, 우리 조선이 신씨에게서 나라를 취득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바르게 얻어서 국운이 신령스럽고 오래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잘 모르겠으나, 이 설은 어떻습니까?제가 생각할 때, 마음에 과연 우열이 있다면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장의 주에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허령불매하고, 마음이 발한 것에 따라 마침내 밝혀 그 처음을 회복한다"113)는 설은 어떻게 조처합니까? 국조(國祚)의 장단이 과연 나라를 바르게 얻었냐의 여부와 관계가 있고, 심지어 이것을 가지고 왕씨냐 신씨냐를 변론한다면 나라를 순정(純正)하게 얻은 명나라가 오히려 나라를 바르게 얻지 못한 당나라와 송나라의 국운의 길이에 미치지 못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고견으로 꺼리지 말고 분석하여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頃所拜承鄭重書詩, 有以見見義之明․持論之公, 固副平日之所望者. 又以見知我者深, 期我者遠, 而戒我者切, 教我者至. 是則初得於十數年來同人往復中者, 始知以德之愛忠告之導, 自有法門. 而區區所以親近有德, 望其獲攻闕輔仁之益者, 不爲虛矣, 顧雖無似, 豈不知感而欲圖副也? 但所謂信道弘德精義, 而屹然爲泰山喬嶽者, 地位甚高, 决非如我無似者之所可企及, 此將奈何?至於信仰在此, 不在彼之云, 實理則然, 而氣勢所障, 亦有不盡然者. 朱子豈不是信道弘德精義之泰山喬嶽, 乃有一陸氏者與之角立, 而至于今是非未定, 而疑信相半, 况於今後生乎? 此又無如之何矣. 只當不關吾材地, 不問人信否, 盡其心於明辨義理, 而修弟子之職, 以求俯仰無愧而已, 未知如何? 比觀《南塘集》, 有論心有優劣, 而曰"聖人之心, 清氣聚而虛靈; 衆人之心, 濁氣聚而虛靈," 此其有優劣也. 若人人同得清氣以爲心, 則何以有聖愚之別? 又論麗朝辛王之辨, 而曰"自古帝王享國長短, 皆由於得國之正不正. 王氏滅於辛氏, 而我朝取之於辛氏, 故得之正而國祚靈長." 未知此說何如? 鄙意心果有優劣, 則《大學》明德註, 人得乎天, 虛靈不昧, 因發遂明, 以復其初之說, 何以區處? 國祚長短, 果係於得國正否, 而至以是辨其爲辛爲王, 則得之純正之明, 反不及得之不正之唐宋者何也? 幸以高見勿憚剖示焉. 성인의……허령하다 한원진은 "성인의 마음은 청기가 모여 허령하므로 항상 리를 자각하고, 중인의 마음은 탁기가 모여 허령하므로 항상 사욕을 자각한다〔聖人之心, 淸氣聚而虛靈, 故常覺於理, 衆人之心, 濁氣聚而虛靈〕"라고 말하였다. 《남당집(南塘集)》 권15 〈여참신부(與沈信夫)〉. 사람이……회복한다 《대학장구(大學章句)》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욕(人慾)에 가려지면 때로 어두울 경우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하여야 한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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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에게 답함 병술년(1946) 答李元浩 丙戊 물으신 '연제(練祭) 후에 부판(負版), 벽령(辟領), 최(哀)를 제거하지 않는 것'은 간옹(전우)뿐만이 아니라 전옹 임원회부터 이미 그러했습니다. 전옹은 "소상(小祥)에 부판, 벽령, 최를 제거한다는 것은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이 《가례》를 따른 것이다. 내가 일찍이 《가례》를 따랐다가 최근에 다시 생각해보니 《의례》를 따라 제거하지 않는 것이 더욱 좋겠다."라고 말했고, 간옹은 "주자가 말년에 《서의(書儀)》에서 대공 이하의 부판, 벽령, 최를 제거한 것은 속례(俗禮)로서 옳지 않다고 하셨으니【군신복의에 보임】 《가례》의 연복의 제도는 마땅히 아직 확정되지 않은 논의라고 해야 한다.【여기까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벽령은 바로 '적(適)'이라는 것입니다. 《의례》 〈상복〉편 기문의 가공언(賈公彦) 소(疏)에서는 "'적'이라고 명명한 것은 애척(哀戚)의 감정이 오로지 돌아가신 부모 때문에 기인하여 나머지 일을 아울러 생각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114)라고 말하였습니다. 《의절(儀節)》에서는 "'최(衰)'라는 것은 꺾는다[摧]는 뜻이니, 효자가 슬퍼서 마음이 꺾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부판에 대해서는 미처 고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효자가 부친을 여읜 것을 죄를 지은 것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이런 것으로 논해보면, 만약 연제를 지내고 이 세 가지 물건을 제거한다면, 이것은 오로지 부모의 상에 기인했다는 뜻, 슬퍼하며 죄를 지었다는 뜻이 처음에는 있었지만, 끝날 쯤엔 없는 것이 되니, 삼년을 마치도록 제거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공복 이하의 상복을 입는 대상은 부모의 상을 당한 효자에게 비교할 것이 아니니, 《서의》와 《가례》에서 '세 물건인 부판․벽령․최를 갖추지 않는다'는 내용이 예의에 맞는 것 같은데, 주자가 말년에 무엇 때문에 속례라 비난했습니까? 당초에 《의례》의 오복(五服)에서는 모두 세 물건을 갖추고 있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대상은 또한 친상(親喪)에 비할 바 아니니, 《서의》와 《가례》에서 대공으로부터 그 이하는 사용하지 않고, 기년복의 경우에 세 물건을 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성인이 예를 만든 뜻은 세 물건을 오로지 효자를 위해서만 설치한 것이 아니니, 위의 '오로지 부모에게 기인했다'는 등의 설과 같은 경우는 다만 이것으로 오복의 슬픈 정을 나타내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마땅히 친상의 연제 이후에 제거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기년복, 대공복, 소공복, 시마복에서도 모두 마땅히 써야 한다는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어떠합니까? 자세히 고증하여 답장해 주시기 바랍니다.편지의 말미에 운운한 것은 저의 뜻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들[일본]을 축출한 것은 대부분 열강의 힘이긴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헤이그에서의 뜨거운 피와 하얼빈에서의 우레 같은 폭탄은 일본을 축출하는 뿌리이고, 워싱턴에서의 외교와 중경에서의 임시정부는 일본을 축출하는 줄기이며, 상해에서의 열 명의 장교를 오살시킨 것과 일본 동경에서 부거(副車)를 잘못 맞힌 것은 일본을 축출하는 줄기이고, 갑신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일본을 축출한 열매이니, 어찌 일본을 축출하는 것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이미 쫓겨났다면 나라는 진실로 저절로 존재하게 되거늘 또한 어찌 나라를 세우는 것이 오히려 늦었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오히려 국정을 주도하는 사람이 늦었을 뿐이니, 우리들이 자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맞고도 맞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비록 일찍이 정치에 종사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이를 그만두고 돌아와야 하니, 이제 어찌 본디 포부도 없는 사람이 문밖에 나서서 일이 아직 안정되기 전인 정당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所詢練後不去負版․辟領․衰, 非惟艮翁, 自全翁已然. 全翁曰: "小祥去負版․辟領․哀衰, 備要․便覽從家禮也, 愚嘗從家禮, 近更思之, 從儀禮不去尢好." 艮翁曰: "朱子晚年以書儀大功以下之去負版․辟領․衰, 爲俗禮而非是者【見君臣服議】, 則家禮練服之制, 當爲未定論矣【止此】." 盖辟領即適也.〈喪服〉記疏曰: "適者哀戚之情, 適緣於父母, 不兼念餘事."《儀節》曰: "衰者摧也, 以孝子有哀摧之志." 負版未及考. 然亦似以孝子喪親爲負罪也. 以此論之, 若練而去此三物, 是適緣父母哀摧負罪之意, 有始無終也. 其終三年不去, 明矣. 大功以下, 非孝子之比, 則《書儀》《家禮》之不備三物者, 似得禮意, 而朱子晚年何以俗禮非之? 當初《儀禮》之五服, 皆備三物者, 何也? 朞服亦非親喪之比, 而《書儀》《家禮》之只從大功以下不用, 朞服則存之, 又何也? 抑聖人制禮之意, 三物非專爲孝子設, 如上適緣父母等說, 但以此表五服之哀情歟. 然則今當非惟不去於親喪練後, 於朞功緦皆當用之, 又明矣, 如何如何? 幸細考而囬示焉.書末云云, 鄙意不盡然. 彼之逐去, 大都是列強之力, 以在我者言之, 海牙之熱血, 哈爾之轟雷, 逐日之植根也, 華蝢之外交, 重慶之臨政, 逐日之抽幹也, 上海之鏖斃十將, 日京之誤中副車, 逐日之逹枝也, 甲申之正式宣戰布告, 逐日之結實也, 豈可槩謂逐不自我? 彼既逐去, 則國固自在矣, 又何云建國猶遲? 但猶遲主國政之人爾, 吾流自重之云, 極是極是. 如弟者, 雖使曾已從政, 猶當致事而歸, 今豈可以素無抱負之人, 出門外, 參事未定前政黨中耶? 勿慮勿慮. '적'이라고……의미이다 가공언(賈公彦)의 소(疏) '云適者 以哀戚之情指適緣於父母不兼念餘事'에 대하여 《구사당선생속집(九思堂先生續集)》 권3 〈최부판벽령설(衰負版辟領說)〉의 송희준 번역은 "적(適)은 슬픈 마음을 지적(指適)함이니, 부모로 인해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適者, 指適, 緣於父母, 不念餘事〕" 하였다. 《상변통고(常變通攷)》 권9 〈상복제도총론(喪服制度總論)〉의 벽령(辟領) 부분의 한국고전의례연구회 번역은 "적(適)은 슬퍼하는 마음이 부모에게로 향하여 감으로 인하여 다른 일을 겸하여 생각하지 못함이다.〔適者, 以哀戚之情, 指適緣於父母, 不兼念餘事〕" 하였고, 대공이하무부판벽령최(大功以下無負版辟領衰) 부분의 번역은 "적은 부모에게 향하여 가는 마음 때문에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음이다.〔適者, 指適緣於父母, 不念餘事〕"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DB〉 그런데 송(宋)나라 섭숭의(聶崇義)가 편찬한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 권15의 '左右辟領, 謂之適者, 以哀戚之情, 當有指適, 緣於父母, 不兼念餘事, 以示四處皆有悲痛'이라는 구절을 참고하면, '지적(指適)'은 '귀결', '쏠림', '지향'의 뜻인 듯하다. 그러면 가공언의 소는 "적(適)이라고 명명한 것은 슬퍼하는 마음이 한곳으로 귀결되기 되기 때문이니, 부모로 인하여 다른 일을 아울러 생각하지 못한다."라고 이해해야 할 듯하다. 김택술은 '적(適)'을 '오로지', '단지'라고 이해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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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선덕의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洪文善德義 ○戊辰 저는 거칠고 졸렬하여 사람들이 함께 하려 하지 않는데 좌하가 잘못 들음으로 인하여 자식을 보내 학문을 묻게 하고, 이어서 사랑하는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칭찬이 지나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함께 생기니 감사함을 느낄 겨를도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들으니, 그 아버지가 땔나무를 쪼개면 그 자식은 메고 온다115)고 했고, 훌륭하게 활을 만드는 집안의 자식은 반드시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116) 했습니다. 좌하께서 땔나무를 쪼개고 활을 만든 것을 좌하의 자식이 본보기로 삼는 근본으로 사용하기를 대단히 바라니, 이것이 이른바 부친이 창업함에 자식이 계승한다117)는 것인데, 누추한 제가 어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인물이 묘연한 시대에 세도의 책임이 훌륭한 후배에게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저는 훌륭한 당신의 자식에게서 바라는 바가 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편지를 주고받는 초기이지만 이런 진실된 속마음을 터놓고 말씀을 드려서 의로운 가르침을 돕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를 바라니, 혹시라도 간곡히 헤아려 꾸짖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僕粗朴迂拙, 人所不齒, 乃被座下誤聽, 遣子問學, 繼賜寵牘, 稱詡過當, 慙懼并作, 不遑知感. 竊嘗聞其父析薪, 其子負荷, 良弓之子, 必學爲箕. 深願座下之析薪爲弓, 用資令胤柯則之本, 是則所謂父作子述, 淺陋者何與之有? 當此人物眇然之時, 世道之責, 不於後來之秀而誰哉? 鄙於令胤望之也深. 故雖於往復之初, 進此心肝之語, 冀助義教之一端, 或可曲諒不讁否? 그……온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7년의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아들이 등에 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훌륭하게……배운다 세업(世業)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키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하였다. 부친이……계승한다 공자(孔子)가 문왕(文王)에 대해 "근심이 없었던 분은 문왕뿐일 것이다. 왕계를 아버지로 삼고 무왕을 아들로 삼았으니, 아버지가 시작하자 아들이 계승하였다.〔無憂者, 其惟文王乎. 以王季爲父, 以武王爲子, 父作之, 子述之〕"라고 하였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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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구 민열에게 보냄 을해년(1935) 答崔以求 敏烈 乙亥 나의 문장을 그대가 전할 만하다고 여겨서 선사(繕寫)하여 소장하려고 한다는데 아마도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건데 본디 문장에 재주와 식견도 없고 또 힘을 쏟아 붓지도 않았습니다. 나아가 유학자의 이치가 뛰어난 문장으로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지도 못했고, 물러나 문인의 기교있는 말로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장차 누구에게 보일 것이며 누구에게 전하겠습니까? 대저 고금의 문장에 진력했던 자들에 대해서도 육일옹(六一翁 구양수)은 오히려 다 사라졌다고 슬피 탄식했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오직 맹자(孟子), 한유(韓愈),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 네 현인의 문장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 전해지는 실체를 궁구해보면,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변별했고, 한유는 노자와 불가를 변별했고, 주자는 육상산(陸象山 육구연)을 변별했고, 송시열은 흑수(黑水)1)를 변별했으니, 이처럼 이단을 변별한 것을 제이의(第二義)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오씨와 김씨가2) 무함(誣陷)과 배신의 변을 일으켜 사도(師道)가 밝혀지지 못함을 통분해하고 사벽(辭闢)3)할 사람이 없음을 개탄하여 허다한 심력을 소비해 수많은 문장을 썼습니다. 확연한 효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단을 물리치는 무리라는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많이 양보할 수 없어서 스스로 맹자, 한유, 주자, 송시열 네 현인의 마음을 본받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 맹자께서 우(禹)임금, 주공(周公), 공자, 삼성의 공을 이은 것도 실로 이점(이단을 물리친 것)에 있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의 학문은 하나도 성취한 바가 없지만 오직 이 일만큼은 가히 손에 쥐고 선사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간옹의 도가 끝내 어두워질 이치가 없으니, 나의 변문도 사라지지 않을 것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태양 빛에 의지하고 천리마 꼬리에 붙어서 함께 비추고 아울러 이르는 것도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밖의 부수적인 글들은 오직 변문에 의지해 함께 전해질 것입니다. 그대가 써서 소장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점을 보셨기 때문이겠지요. 鄙文君以爲可傳, 欲繕寫而藏之, 恐不必爾也.自念於此, 素無才識, 又不致力.進不得爲儒者理勝之文之裨蓋世敎退, 不得爲文人巧麗之辭之悅人耳目.將誰觀而誰傳? 夫以古今盡心於文字間者, 六一翁猶發泯滅可悲之歎, 况如余者哉? 惟是孟韓朱宋四賢之文, 傳至于今炳炳如也.而究其可傳之實, 則辨楊墨, 辨老佛, 辨象山, 辨黑水者, 不可作第二義看矣.吾於吳金誣倍之變, 痛師道之不明, 慨辭闢之無人, 費了許多心力, 立了許多文字.廓如之效, 雖不能奏, 言距之徒, 曾不多讓, 自以爲法孟韓朱宋四賢之心. 如孟子承禹周孔三聖之功者, 實在於此.又自以爲平生爲學, 無一所就, 惟此事可以藉手見先師也.噫! 艮翁之道, 無終晦之理, 則吾之辨文, 亦可保其不泯.所以依光附尾, 同照并致者, 又在於此.而外此漫著, 惟賴辨文而并傳歟.君之欲寫藏而備不虞者, 其有見於此耶. 흑수(黑水) 윤휴를 가리킨다. 윤휴가 살았던 경기 여주(驪州)의 '여(驪)' 자가 '검은 말 여' 자로 검다는 뜻이 있고 거기에 여강(驪江)이 있으므로 윤휴를 배척하는 측에서 그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오씨와 김씨 간재의 문인이었던 오진영과 김용승으로 보인다. 사벽(辭闢) 말로 밝혀 물리친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양자운(揚子雲)이 이르기를 '옛날에 양주와 묵적이 정도(正道)를 막으므로 맹자가 말로 밝혀 물리쳐서 환하게 터놓았다.[古者楊墨塞路 孟子辭而闢之廓如也]'"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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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구에게 보냄 을해년(1935) 與崔以求 乙亥 지난날 돌아오는 길에 당신의 족형인 원숙(元淑)씨를 방문했습니다. 원숙이 이르기를 '그대의 집례(執禮)와 여묘(廬墓)가 나의 가르침에서 흥기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근래에 지은 〈과족제최효자여묘(過族弟崔孝子墓廬)〉라는 시를 보여주며, 그 가운데 "'상(喪)을 만나서 예를 행하는데 어진 기풍이 있다(丁憂執禮有仁風)'라는 구절에서 말하는 어진 기풍은 실로 그대 후창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내가 "이 무슨 말인가요? 나의 행의(行義)는 진실로 남을 교화시킬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집안 대대로 효성이 지극하고 거상(居喪)을 잘하는 가풍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어찌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을 버리고 타인의 가르침에 흥기되어서이겠습니까? 그것은 형께서 잘못 아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이 말은 이미 실질을 잃은 것인즉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러했던 까닭은 그대가 나를 오랫동안 종유하여 깊이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해 생각해보건대 그대가 만일 처음도 잘하고 마지막 끝도 잘 맺어서 세상에 이름이 거론되기를 소련(小連)과 대련(大連)5)처럼 한다면 어찌 나에게도 영예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대가 만일 정문(情文)6)을 다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뒷말을 두게 된다면 나에게도 어찌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이미 그렇다 하고, 또 생각해보니 집상(執喪)의 예를 다해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효 가운데 한 가지 일이요, 학문을 하여 덕을 세워서 부모가 남겨주신 몸을 성취하는 것은 효의 전체입니다. 그러니 치우치거나 온전히 다하는 사이에 소효(小孝)와 대효(大孝)가 갈리는 것입니다. 지금 심산 외로운 여막 가운데서 만 가지 인연을 끊고 오직 어버이 효도 일념만을 자석이 남쪽을 가리키듯 할 것입니다. 같은 효라고 하면 어찌 편소한 효만 일삼고 온전하고 큰 효는 힘쓰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삼년간 독례(讀禮)7)의 여가에 경전을 읽고 의리를 생각하고 궁구하여 많은 근본자리를 세운다면 일생동안 덕을 세우고 몸을 닦는 효에 있어서도 힘쓰기 쉬울 것이니, 그렇게 하는 일이 지극히 옳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남들이 나에게 이택(麗澤)8)의 공이 많다고 할지라도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가르침의 근원을 묻는다면 그것은 옛날 구산옹(臼山翁)9)의 교화를 친히 받들어 흥기한 것임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별지)조석(朝夕)의 곡(哭)은 생전의 혼정신성(昏定晨省)을10) 본뜬 것입니다. 혼정신성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니 조석의 곡도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묘(廬墓)에는 묘소에 궤전(饋尊)이 없는데 조석의 절까지 아울러 없앤다면, 이는 끝내 종일토록 묘소에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조석으로 묘소에 올라갈 때에는 마땅히 절하고 곡을 해야 합니다. 이 절하고 곡하는 선후는 소학(小學)에 "왕부(王裒)가 조석으로 절하고 꿇어앉아 비통하게 호곡했다."라는 문장에 근거함을 볼 수 있습니다. 向日歸路, 訪貴族兄元淑氏.淑謂哀之執禮廬墓爲興賤子之風.因出其近作〈過族弟崔孝子墓廬〉詩, 丁憂執禮有仁風之句曰, 此所謂仁風, 實指後滄而言.余曰惡是何言? 吾之行義, 固無可以風人者.設有之, 其家自有篤孝善居喪之世風.安得舍其世風而興他人風? 兄誤矣誤矣.蓋此言旣失實際, 則不必再道.但其所以來此, 則豈非以哀從我久而信之深也乎.因此而思之, 哀能克始有終, 稱名於世若小大連之爲, 則豈不有榮於我乎? 又反此而思之, 哀若未盡情文, 人得以議其後, 則於我亦豈好聞乎? 此旣然矣, 抑又念之, 執喪盡禮以報劬勞之恩, 孝之一事, 爲學入德以成親之遺身, 孝之全體.偏全之間, 大小分矣.今於深山孤廬之中, 萬緣潛息, 惟有孝親一念如鐵指南.等是孝也, 豈容徒事偏小而不勉全大乎? 須於三年讀禮之暇, 看取經傳, 念究義理, 立得幾多本地, 其於一生立德成身之孝, 庶易爲力, 至可至可.苟如是也, 人 謂我麗澤有功, 不欲多讓.若問風之所自, 自是舊日親承臼山翁之風而興之者, 有不可誣也, 如何如何?(別紙)朝夕哭, 是象生時定省.定省不拜者, 朝夕哭亦當無拜.然至於廬墓, 墓旣無饋尊, 而并無朝夕拜, 則是終日無拜於墓也.其可乎? 朝夕上墓當拜哭.拜哭先後, 據小學王裒朝夕拜跪悲號之文, 可見. 소련(小連)과 대련(大連) "소련과 대련이 거상을 잘하여 3일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3개월을 해이하게 하지 않고, 1년을 슬퍼하고, 3년을 걱정하였는데, 이들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예기(禮記)》 〈잡기(雜記)〉 정문(情文) 내용과 형식으로, 예를 들면 제사(祭祀)에 있어서 조상을 사모하는 것은 정(情)이고, 제사를 드리는 의식(儀式)은 문(文)에 해당한다. 독례(讀禮) 거상(居喪) 중에는 상례 및 제례와 관련된 예서(禮書)만 읽어야 해서 상중에 있음을 말한다. "장사 지내기 전에는 상례를 읽고, 장사 지낸 뒤에는 제례를 읽는다.[未葬讀喪禮, 旣葬讀祭禮.]"《예기(禮記)》 〈곡례(曲禮)〉 이택(麗澤)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성장해 감을 뜻한다. 구산옹(臼山翁) 구산은 간재 전우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혼정신성(昏定晨省)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예기》 〈곡례(曲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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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유 한응에게 답함 경오년(1930) 答李士裕 漢膺 庚午 내가 처음 여행하던 숙소에서 그대를 만났을 때에 단결한 용모와 청아한 자태, 굳은 지조와 화락한 말을 보니 타고난 유자(儒者)의 기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대와 며칠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경도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간에 어찌 이처럼 좋은 자질의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이는 반드시 마음속에 뜻으로 숭상함이 있을 것이니 함께 도에 나아갈만한 자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마음으로 흠복하고 거의 일 년이 지나도록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홀연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니 스스로 말하길 '일찍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을 하고 싶어 주경야독 하였고, 근자에는 객지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도를 향한 일념이 불길처럼 타올라 스스로 그만두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편지를 받들고 세 번 탄식하기를 "이러했구나! 이 사람이" 하면서,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었고 궁함을 당해 뜻이 더욱 견고해졌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대를 얕게 알았을 것입니다. 아! 나 또한 25세 이후로 농사지으며 독서하면서 온갖 곤고를 겪은 세월이 7년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가업을 그르쳐서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나이가 젊고 힘이 강해서 정신을 가다듬어 독서에 정진할 시기인데, 농사일로 몸을 수고롭게 하고 먹고 살아야할 계산이 마음을 어지럽힌 것이 이처럼 오래된다면, 학문을 쌓고 학업을 늘리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금일에 이르도록 '오류(汙流)들을 부끄러워하여 함께 하지 아니하고 구학(溝壑)을 가리켜 잊지 않는 뜻'을 대략이나마 세운 것은 일찍이 곤궁을 당하던 날의 힘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제 온 편지를 읽어보니 나와 그대가 겪었던 일과 뜻한 바가 너무나 흡사하여 이미 동병의 탄식이 절실합니다. 처음에 더불어 도에 갈만하다고 여겼던 자가 끝내 함께 돌아갈 수 있어서 더욱 다행으로 여깁니다. 아! 천하에 얻기 어려운 것이 동지인데, 이미 동지를 얻었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힘쓰게 하여 이른바 도학을 구하고자 생각지 않는다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진실한 마음은 성심(誠心)입니다. 옛날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원성을 가르칠 때에12) 성심으로 하였고 망언하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그대의 편지에서 '나를 선생 대군자라 칭하고 쇄소(灑掃 물 뿌리고 비로 쓰는 일)의 일을 제공하겠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나의 실제 모습을 마주하면 진실로 실질과 맞지 않는 망언이 될 것입니다. 간절히 청하건대 향후 편지를 보낼 때에는 이런 넘치는 칭찬은 삭제하시고, 정성스럽고 진정으로 교유하여 함께 귀숙(歸宿)할 곳을 찾는 것이 매우 옳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건데 귀숙할 곳 또한 쉽게 찾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평생토록 몸가짐에 있어서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밝게 착안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용기 있게 발걸음을 디딘 연후에 거의 참된 경지의 소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대와 몇 건의 서약을 세우고자 합니다. 궁리(窮理)는 절근(切近)한 것을 먼저하고 현원(玄遠)을 멀리합시다. 마음 닦는 것은 작은 악(惡)도 끊고 은독(隱獨)을 삼갑시다. 자기를 닦는 것은 허명을 멀리하고 실덕을 힘씁시다. 가정을 다스리는 것은 근검에 힘쓰고 영리추구를 그치며, 세상을 부지하는 것은 윤리를 숭상하고 물욕과 이익을 낮추며,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문사를 경시하고 경학을 중시합시다. 이로 말미암아 추구해나가서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13)면 비록 진리에 딱 들어맞지 않더라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僕始遇高明於旅次也, 見其端潔之容, 淸雅之態, 介然之操, 藹然之言, 天來是儒者氣像.與之語數日, 不覺傾倒.以爲世間安得有好資質若此? 是必中有志尙, 可與適道者也.心固欽服, 蓋經歲而未嘗暫忘也.忽承辱牋, 奉審自道早孤欲學, 中兼耕讀, 近作舘苦之狀, 而向道一念, 如火益烈, 自有不可遏者.僕奉簡而三歎曰, 有是哉! 若人也, 於是乎益知其自幼絶異之質, 蓋信其當窮益堅之志, 微此書, 吾猶淺知夫若人也.噫! 僕亦二五以後, 且耕且讀, 備經困苦爲七年者.爲其失怙敗業奉老艱食故也.此正年壯力强致精劇讀之時, 而犂鋤之役勞其身, 粟帛之筭撓其心, 若此之久, 其不能積學而富業也審矣.雖然至于今日, 粗立羞汙流而不同, 指溝壑而不忘之志者, 未始非當日困衡之力也.今讀來書, 僕與高明所遭所志, 恰恰相似.旣切同病之歎.復辛始之可與者終之同歸矣.嗟乎! 天下難得者同志也, 旣得同志, 而不思所以實心交勗以求所謂一箇道學, 豈不可惜? 夫實心者誠心也.昔溫公敎元城以誠也以不妄語爲先.今惠書之稱僕以先生大君子供灑掃之役等說, 果當於僕之眞狀而爲誠實不妄之語乎.切乞向後書來, 刪却此等溢獎, 斷斷以眞情相, 與同尋歸宿之地, 至可至可.僕又竊念歸宿之地, 非容易可尋.須於生平行己處事, 明著眼, 專著心, 勇著步然後, 庶可識眞境所在.今欲與高明立數件誓約曰: 窮理則先切近而後玄遠.治心則絶纖惡愼隱獨. 修己則遠虛名而勉實德.理家則務勤儉而息營求.扶世則尙倫理而下物利. 敎人則輕文辭而重經術.由此求之, 不得不措則雖不中不遠矣.高明以爲如何? 사마온공……때에 사마온공은 송(宋)나라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3)으로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 부른다. 원성은 북송의 명신인 유안세(劉安世, 1048~1125)로 그가 원성 사람이므로 그렇게 칭한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宋史》에 〈劉安世列傳〉이 있다. 얻지……않는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대 얻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有不思, 思之, 不得不措也.〕"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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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병노】을 전송하는 서문 【갑자년(1924)】 送李君【炳魯】序 【甲子】 "맹자 뒤에 태어나 성인의 도를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친 사람으로 공이 창려 한자(昌黎韓子)119)보다 더 큰 사람이 없는데, 맹자의 도통을 계승한 자를 거슬러 올라가 논할 때에 한자를 논하지 않고 주(周)ㆍ정(程)120)을 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답하기를,"그의 문장이 너무나 성대하기 때문입니다."하니, 내가 말하였다."이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문장은 도학이 숭상하는 바가 아니지만, 또한 버리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 도통을 계승할 수 있다면 문장의 성대함이 비록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하더라도 어찌 병통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잠시 틈을 내줄 수 있다면 그 이유를 말해보겠네.대저 한자의 문장은 기운이 창성하고 뜻이 잘 전달되며, 이치가 명확하고 의미가 장대하였으니, 비유하면 순풍을 만난 돛대이고 잘 달리는 말의 발굽이며, 해처럼 빛나고 못처럼 깊네. 한자가 삿된 학설을 배척한 것은 마치 용문(龍門)을 뚫고 구하(九河)를 소통시킨 것121)처럼 확연히 통하고 흡연히 안정되었네. 문장으로 인해 도를 밝히고, 도가 밝혀짐에 문장이 더욱 드러났으니, 서로 병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서로 도움이 되었네. 그러니 문장의 성대함이 도통을 계승하지 못한 것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아, 한자의 문장은 진실로 성대하였으니, 주ㆍ정이 미치지 못한 바이고, 세도(世道)에 대한 한자의 공이 또한 위대하였으니, 어찌 대번에 주ㆍ정보다 낮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 도통이 한자에게 있지 않고 주ㆍ정에게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네.성인의 도는 격치(格致)122)를 귀하게 여기고 실천을 요체로 삼는데, 애석하게도 한자는 이 두 가지를 궁구하지 않았네.123) 때문에 성삼품(性三品)124)을 말한 것은 도의 근원을 알았다고 할 수 없고, 서장(書狀)을 투척하여 천거를 구한 것125)은 자중하는 도리를 알지 못한 것이네. 이것이 맹씨(孟氏)의 도통을 접하지 못한 이유이네.오늘날 선비 중에 문장을 가지고 놀며 조충소기(雕蟲小技)126)를 공교롭게 하는 자는 실로 말할 것도 없고, 대가(大家)의 법도를 좇아 답습하며 백세토록 화려한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한자에 뜻을 두지 않는 자가 없네. 한자는 진실로 호걸스러운 선비이니, 한자에 뜻을 둔 것을 나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네. 다만 한갓 그의 못처럼 깊고 고색창연한 문장만을 기뻐하되 성인의 학문을 보호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 공적이 되는 줄 모르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의 공적이 사문(斯文)에 있음을 알고서 사모하되 도통을 계승하지 못한 데에 이유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네.그래서 나는 한자에 뜻을 둔 세상의 선비들이 문장이라면 내가 대적할 수 있고, 공적이라면 내가 맡을 수 있으며, 또 격치와 실천에 착수하여 한자가 궁구하지 못한 것을 궁구하되 정밀하고 익숙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네. 이와 같이 한다면 한자의 문장을 문장으로 삼고, 주ㆍ정의 도를 도로 삼아서 도통이 진실로 나에게 있게 될 것이니, 문장도 또한 도에서 빛남이 있지 않겠는가."나를 따라 공부한 이군 병노(李君炳魯)는 도학에 뜻을 두었고, 아울러 문장을 닦는 자이기에 그가 돌아갈 때에 특별히 이러한 말을 주어서 문장이 비록 도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도통이 문자에 있지 않고, 공이 비록 도를 보호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실천을 지극히 다하는 것이 성인의 도가 됨을 알게 하였다. 後孟子而明聖道、闢異端者, 功莫尙乎昌黎 韓子, 而尙論繼孟子統者, 不于韓而于周、程, 何哉? 曰: "爲其文章之太盛也. " 曰: "是何傷哉? 文非道之所尙, 亦非其所棄, 苟可以繼其統, 文之盛, 縱不足增美, 庸可以爲病乎? 請得間而爲之說. 夫韓子之文, 氣昌而辭達, 理明而意長, 譬如風檣駿蹄, 日皦淵深. 韓子之斥邪說, 如鑿龍門而疏九河, 廓然而通, 翕然而定, 因文而明道, 道明而文益彰, 不惟不相病, 實爲之相資. 文盛之於統不繼, 奚涉哉? 噫, 韓子之文, 固盛矣, 或周、程之所未逮也. 韓子世道之功, 亦偉矣, 何遽讓乎周、程? 然其道統之不于韓而于周、程者, 厥有由焉. 聖人之道, 以格致爲貴, 踐履爲要, 惜乎韓子之未究乎此二者也. 故說性三品, 未足爲知道之源, 投書求薦, 不知其自重之道. 此其所以未接乎孟氏之統也. 今之士之操弄觚墨、雕蟲小技之是工者, 固不足道, 其欲追步大家軌範, 彰華聞于百世者, 擧莫不志乎韓子. 韓子誠豪傑之士, 志韓子, 吾不曰'不可', 但徒喜其淵然蒼然之文, 而不知閑聖闢異之爲功, 則未可也; 知慕其功在斯文, 而不究其不繼統之有由, 亦未可也. 故余欲世之志韓子者, 文乎其能吾敵矣, 功乎其能吾任矣, 又能實下手於格致踐履, 究韓子之所未究而精熟之. 是則文韓子之文, 道周、程之道, 道之統, 固在我矣, 文亦不于道有光乎. " 從余遊者李君 炳魯, 志於道而兼治文者, 於其歸也, 持此說而贈之, 使知文雖資乎道, 而道之統不在文; 功雖足以衛道, 而必極踐履之爲聖道. 창려 한자(昌黎韓子) 당나라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한유(韓愈)로, 창려는 그의 호이다. 주(周)ㆍ정(程) 주는 주돈이(周敦頤)를, 정은 정호(程灝)와 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용문산(龍門山)을 …… 것 우(禹) 임금이 이 아홉 물줄기의 길을 내어 범람을 막은 일을 말하는 것으로, 《사기(史記)》 권87〈이사열전(李斯列傳)〉에 "우 임금이 용문을 뚫고 구하를 소통시킬 때에 손발이 부르트고 얼굴이 누렇게 초췌하였다.〔禹鑿龍門, 疏九河, 手足腁胝, 面目黧黑.〕"라는 구절이 보인다. 격치(格致) 격물(格物)ㆍ치지(致知)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인 격물ㆍ치지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한다. 애석하게도 …… 않았네 한유는 〈원도(原道)〉에서 《대학》의 '팔조목'을 언급하면서 격물ㆍ치지를 제외시켰다. 성삼품(性三品) 한유는 〈원성(原性)〉에서 "성의 품등에는 상중하 세 가지가 있다. 상품은 선할 뿐이고, 중품은 인도하여 위나 아래로 가게 할 수도 있으며, 하품은 악할 뿐이다.〔性之品有上中下三, 上焉者善焉而已矣, 中焉者可導而上下也, 下焉者惡焉而已矣.〕"라고 하여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주장하였다. 《昌黎文集 卷11》 서장(書狀)을 …… 것 〈위인구천서(爲人求薦書)와〈상재상서(上宰相書)〉 등을 말한다. 《古文眞寶 後集》 조충소기(雕蟲小技)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美詞麗句)로 문장만을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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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군 중립【남주】에게 주는 서문 【기사년(1929)】 贈白君中立【南柱】序 【己巳】 "자사(子思)의 곁에 사람이 없다."에서의 사람은 보살피고 뜻을 전달하는 사람이고, "목공(繆公)의 곁에 사람이 없다."에서의 사람은 유지하고 보호하는 사람이니127), 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다.백군 중립(白君中立)이 나에게 편지를 부쳐 선생 곁에 사람이 없을까 근심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물품을 공급하고 심부름을 담당하는 평범한 사람이 내 곁에 없음을 말한 것이겠는가. 아마 학문에 힘쓰고 도를 구하여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음을 말하였을 것이니, 중립의 근심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근심이 아니라, 바로 학계에서 공공으로 근심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한갓 근심할 줄만 알고 근심을 제거하는 방도를 모르면 안 될 것이다.중립도 또한 일찍이 내 곁에 있다가 지금은 비록 한가로운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지만, 그대의 마음과 힘을 전일하게 하고, 그대의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등을 단정하게 하여 예전에 스승에게 배운 것으로 그대의 앎을 이루고, 그대의 실천을 채워가면서 날마다 위로 도달해 마지않을 수 있다면 나와 그대가 비록 북과 남으로 멀리 떨어져 일 년쯤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신이 함께 나아가고 마음이 함께 모여서 화락한 즐거움이 종고(鍾鼓)와 금슬(琴瑟)이 한 자리에서 연주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중립이 날마다 내 곁에 있으면서 무리를 따르고 대열을 쫓되 일정함이 없이 하다 말다 하면서 큰 새가 날아오거든 활을 쏘아 잡을 것만 생각한다면 학문을 강론하고 설명하는 것이 책상 위에서 떠들썩하게 일어나고, 절을 하고 읍을 행하는 예절이 술잔과 제기 앞에서 어지럽게 행해진다 한들 한갓 형식일 뿐이고 즐거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만약 더해져서 열이 되고 백이 된다면 나의 귀를 시끄럽게 하고 나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함으로써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게 될 것이니, 또한 어찌 내 곁에 사람이 있기를 바라겠는가.중립이여! 다른 사람이 스승의 곁에 있기를 구하지 말고 스스로 몸이 아닌 마음으로 스승의 곁에 있을 방법을 꾀하여 그대부터 먼저 행함으로써 이와 같은 자가 많아진다면 나는 날마다 형체가 없는 데에서 서로 성장하는 즐거움을 얻어서 외롭지 않을 것이니, 이 글을 중립에게 주는 것이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無人乎子思之側之人, 伺候道達之人; 無人乎繆公之側之人, 維持調護之人, 一是凡衆之人; 一是賢智之人也. 白君 中立寄余書, 以無人乎先生之側爲憂. 此豈謂供給使令凡衆人之無吾側哉? 蓋云力學求道希賢智者之無有也. 中立之憂, 非爲一人之私, 乃爲學界公共而憂之也. 雖然, 徒知憂之, 而未知所以去憂之方, 則未也. 中立亦嘗在乎吾側矣. 今雖索居燕處, 能專爾心力, 端爾視聽, 將前日所受乎師長者而致爾知實爾踐, 日進上達而不已焉, 則吾與子雖朔南遠而歲年睽, 神與之往, 心與之會, 融融之樂, 若鍾鼓琴瑟之作於座矣. 使中立日在乎吾側, 隨羣逐隊, 作輟無常, 鴻鵠將至, 思授弓繳而射之, 則講說騰乎几案, 拜揖紛乎樽俎, 徒爲文具, 未足以爲樂矣. 如此者, 若加而爲十百, 則將聒聒乎吾耳, 擾擾乎吾心, 不勝其苦而走之也, 亦奚願有人乎吾側哉? 中立乎, 無求別人之在師長側, 自圖所以在師長側之以心而不以身, 從子先之, 而若是者衆, 則吾將日獲相長之樂於無形, 而不見其孤也. 是爲中立賜, 顧不大歟? 자사(子思)의 …… 사람이니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날에 노나라 목공은 자사의 곁에 자신의 성의를 전달해 줄 사람이 없으면 자사에 대하여 편안히 여기지 못하였고, 설류(泄柳)와 신상(申詳)은 목공의 곁에 보좌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그 몸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다.〔昔者, 魯繆公無人乎子思之側, 則不能安子思, 泄柳、申詳無人乎繆公之側, 則不能安其身.〕"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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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유고》 서문 《可石遺稿》序 맹자가 이미 당세의 군자를 얻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말하기를, "옛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천고의 사람과 벗한다."128)라고 하였고, 양웅(揚雄)도 또한 현 시대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후대의 자운(子雲)을 기다렸으니129), 아, 고금 상하에 자기를 알아주는 한 명의 사람을 얻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것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은 것130)이 진실로 이 때문이다.옛적을 추억하건대, 나와 공은 요행히 같은 세상에 태어났고, 학업도 또한 유학으로 같았기에 서로 다투어 따르고 쫓으면서 글을 주고받고 술잔을 나누는 즐거움에 유람하며 완상하는 정취를 더하여 경전(經傳)의 대지(大旨)와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을 변별하고 분석하는 이치에 이르렀으니, 나는 공이 군자다운 사람임을 알아보고서 스스로 지기(知己)라 이르며 후대의 자운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눈 깜짝할 사이에 공은 이미 구천(九泉)에 있고, 나도 또한 노쇠하였으니, 난세에 선인 군자(善人君子)를 얻기 어렵고 잃기 쉬울 뿐만 아니라, 친구와 지기가 시들어 떨어지는 것이 어찌하여 이와 같단 말인가.얼마 뒤에 유고(遺孤) 진호(珍浩)가 부친이 평생토록 저술한 것들을 모아 나에게 주고 교정하게 하니, 내가 교정과 편찬을 마치고 진호에게 주면서 말하였다."훌륭하다! 옹의 문장이여. 대저 문장을 알기 어려움은 사람을 알기 어려움만 못하니, 이른바 문장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오히려 능숙하게 통달했는지도 모르는데, 사람에 대해 또한 어찌 참으로 군자인지 알 수 있겠는가. 지난날 지기라 일컬으며 자운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자못 스스로를 속인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아, 옛적에 알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에 알게 되었고, 당시에 보지 못했던 것을 죽은 뒤에 보게 되었으니, 공으로 보면 후대의 자운 한 명을 얻게 되어 구천에서 유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도 또한 알지 못했던 잘못을 조금이나마 보상하여 종자기와 백아의 풍모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 것인가? 훗날 이 문집을 보는 사람들이 그의 간결한 시문(詩文)을 보고서 의론이 바르고 확실함을 자세히 살핀다면 거의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孟子旣難得當世君子而曰: "尙友千古. " 楊雄亦未見現代知己, 以待後世之子雲. 嗚呼, 古今上下, 得一知己, 若是之難耶? 鍾子期死, 伯牙不復彈琴, 良以是也. 夫憶昔余與公, 幸生一世, 業亦同儒, 爭相追逐, 文墨杯酒之歡, 加以游賞之情, 以至辨柝經傳大旨、天人性命之理. 吾知公爲君子人, 而自謂知己, 不待後世之子雲也. 於焉轉眄之頃, 公已九原, 而余亦衰老矣. 不惟亂世善人君子, 難得易失, 而朋舊知己之凋落, 何如是也? 未幾, 遺孤珍浩, 輯厥考生平著作, 投余而較之. 余旣校旣編, 授珍浩而告之曰: "善哉! 若翁之文. 夫文之難知, 不若人之爲難知, 而所謂文者, 吾尙未知其能達焉, 人亦安知其眞爲君子耶? 向稱知己焉, 不待子雲者, 殆不近於自誣耶? 噫, 昔年之所未知也, 而知之於今日, 當時之所不見也, 而見之於死後. 不惟公之得一後世子雲, 可以無憾於九泉之下, 而在余亦可以少償不知之過, 而無愧於鍾、伯之風也耶? 後之覽是集者, 見其詩文之簡, 而委議論之正且確, 庶知余言之不誣也. " 옛 …… 벗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 세상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면 다시 옛 시대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는 구절이 보인다. 양웅(揚雄)도 …… 기다렸으니 양웅은 전한 시대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자운은 그의 자이다. 한유(韓愈, 768~824)의 글에 "양웅이 《주역》에 비겨서 스스로 《태현경(太玄經)》을 짓고 나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비웃자,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나오면 반드시 이 글을 좋아할 것이다.〔世不我知無害也, 後世復有揚子雲必好之.〕'라고 했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唐宋八大家文抄 卷4 與馮宿論文書》 종자기(鍾子期)가 …… 것 춘추 시대에 백아(伯牙)가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좋구나. 우뚝 솟은 것이 태산 같도다.〔善哉! 峩峩兮若泰山.〕"라고 하고, 백아가 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좋구나. 물이 넘실넘실하는 것이 강하 같도다.〔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하여 그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더 이상 없음을 한탄하며 거문고 줄을 끊고 버려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해진다.《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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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용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金孺定 滽 丁卯 편지에서 "경솔함을 바로잡고 나쁜 습관을 고치는데 능치 못하다."라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근자에 학문을 근심하는 절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천품은 일반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맹자가 이른바 "사람됨이 욕심이 적은 자"에 해당하니 어찌 근심이 그 같이 이르렀습니까? 혹 근심할 것이 있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타고난 자질의 허물이며 공부에 힘씀이 소홀해서 뿐이겠습니까? 또한 부족한 내가 본디 가르치는 방법이 없고, 정성과 힘이 부족한 소치 때문일 터니 그 점이 매우 부끄럽고 계면쩍을 따름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여사인(呂舍人 여본중)이 "지도하여 인도하는 것은 스승의 공이요. 가만히 경계하는 것은 벗의 임무이며, 뜻을 결단하여 나아가는 것은 모름지기 자기의 힘을 써야지 타인에 기대서는 어려운 것이다."라고 이르지 않았습니까?49) 그러니 집에 있거나 멀리 유람하든 간에 모두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스스로를 격려함에 달려 있으니 스승이나 벗에게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십분 노력하여 견문(見聞)이나 문사(文辭)에 주력하지 말고 존성극치(存省克治)50)를 임무로 삼아, 돌아오는 날에는 몇 단계 정진되었음을 징험해주기 바랍니다. 대저 홍의(弘毅)51) 두 글자는 선비가 덕을 세우는데 수레바퀴, 날개와 같은 것이니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만히 보건대, 그대는 홍(弘)은 가능하나 의(毅)는 혹 부족한 듯합니다. 옛 현인이 말하길 "극기(克己)는 모름지기 자기 성(性)이 치우쳐서 극복하기 어려운 곳부터 이겨 나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또 "두통에는 머리에 뜸을 하고, 각통(脚痛)에는 다리에 뜸을 한다."라고 했으니, 만약 분신용발(奮迅聳拔)하고 각고인내(刻苦忍耐)하여 천리를 홀로 나아가면서 화복(禍福)을 따지지 말고, 한숨이 남아 있을 때까지 도의(道義)를 잊지 않는다면 그것이 의(毅)의 시종(始終)입니다. 이것이 그대의 약석(藥石)이 될 것이니 시험 삼아 뜻을 더해 한번 복용해 봄이 어떻겠습니까? 所喩矯輕革汙之未能, 可見近日憂學之切.然君之天分, 較諸夫夫, 正孟子所謂爲人寡慾者, 何至憂之若此? 雖或有可憂者, 豈但君稟質之疵? 功力之踈, 亦由淺拙, 素無敎術, 幷之誠力致然, 是爲媿歉.雖然呂舍人不云乎? 指引師之功, 從容規戒, 朋友之任, 決意而往, 直須用己力, 難仰他人.不論在家與遠遊, 總在自策自勵, 依靠師友不得, 須十分努力.勿以聞見文辭爲主, 以存省克治爲務, 驗取歸日進得幾格也.夫弘毅二字, 士子立德之輸翼, 闕一不得.竊觀高明弘則可能, 毅或不足.昔賢曰克己須從性偏難克處, 克將去.又云頭痛炙頭, 脚痛炙脚, 若乃奮迅聳拔, 刻苦忍耐, 千里獨往, 不計禍福, 一息尙存, 不忘道義, 此毅之始終而可作高明藥石也.試加意服之如何? 여사인(呂舍人)……않았습니까? 《소학》 〈가언(嘉言)〉 "[夫指引者, 師之功也, 行有不至, 從容規戒者, 朋友之任也. 決意而往, 則須用己力, 難仰他人矣.]" 존성극치(存省克治) 본성을 보존하면서 사사로운 욕심이나 그릇된 생각을 이겨 내어 물리치는 것이다. 홍의(弘毅) 《논어》 〈태백(泰伯)〉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士不可以不弘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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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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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영유재의 시에 차운하다 次永裕齋韻 세속에 모범되는 돈독한 성실로 막힌 식견573) 깨뜨리니 範俗敦誠破面墻진가의 정자574)만 온전히 향기로운 건 아니네575) 甄家亭子未全芳영유재 경영은 응당 변산576)과 더불어 쌓여가고 經營應與邊山積그것을 지킴은 장차 좌해577)와 함께 장구하리라 保守將同左海長용의 비늘 같은 솔과 회나무 천년토록 늙어가고 千歲龍鱗松檜老말갈기578) 같은 한 봉분에 제물이 향기롭구나 一封馬鬛苾芬香환륜의 선송579)이 먼 후손에게까지 내려왔으니 奐輪善頌來雲裔유후580)의 마음이야 어찌 직손 방손이 다르랴 裕後心何異直傍 範俗敦誠破面墻, 甄家亭子夫全芳.經營應與邊山積, 保守將同左海長.千歲龍鱗松檜老, 一封馬鬛苾芬香.奐輪善頌來雲裔, 裕後心何異直傍. 막힌 식견 원문의 '면장(面墻)'은 이치에 어두워 꽉 막히고 고루하다는 뜻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백어에게 말하기를 '너는 〈주남〉과 〈소남〉을 공부했느냐? 사람이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담장에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子謂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라고 하였다. 진가의 정자 진씨(甄氏) 집안의 사정(思亭)을 말한다. '진가(甄家)'는 송나라 때 진씨(甄氏) 집안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의 집안은 원래 서주(徐州)의 부호였는데 그의 대(代)에 이르러 집안이 가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라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마련하여 함께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집을 지었다. 이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진가의 …… 아니네 영유재가 진가의 정자에 못지 않다는 뜻이다. 변산(邊山) 전라북도 부안군 서해안에 돌출한 반도이다. 좌해(左海) 중국에서 볼 때 동해, 조선에서 볼 때 황해로 조선을 지칭한 것이다. 말갈기 원문의 '마렵(馬鬣)'은 말갈기 모양으로 만든 봉분(封墳)의 모양을 말한다. 《예기》 〈단궁(檀弓)〉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예전에 공자께서 '내가 보건대, 봉분을 당처럼 쌓은 것이 있고, 제방처럼 쌓은 것이 있으며, 하나라 때의 가옥처럼 쌓은 것이 있고, 도끼처럼 쌓은 것이 있다. 나는 도끼처럼 쌓는 것을 따르겠다.'라고 하셨는데, 바로 세속에서 이른바 말갈기 봉분이라고 하는 것이다.[昔者, 夫子言之曰, 吾見封之若堂者矣, 見若坊者矣, 見若覆夏屋者矣, 見若斧者矣, 從若斧者焉, 馬鬣封之謂也.]"라고 하였다. 환륜의 선송 영유재의 원운시(原韻詩)를 가리킨 것이다. 원문의 '환륜(奐輪)'은 건물의 낙성식 때 쓰는 말로 건물의 규모가 웅장하고 성대하다는 뜻이다. 《禮記 檀弓下》 유후(裕後) 명예나 업적을 후손에게 넉넉하게 남기는 것을 말한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 일을 제어하고 예로 마음을 제어하여 후세에 넉넉하게 남겨 주어야 한다.[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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