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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孺人) 김씨(金氏) 묘갈명 –병서(幷序)- 孺人金氏墓碣銘【幷序】 내가 삼가 기억해 보건대 옛날 내가 겨우 10세가 되었을 때 선군(先君)께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를 계승하였고, 시집간 여자들도 현명함과 열행(烈行)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많았는데 근래에는 최준수(崔焌秀) 공 배언(拜言)의 배필이 된 너의 대고모(大姑母)가 특히 그렇다."라고 말씀하시고, 또 기억해 보건대 최씨 어른 아무개가 선군에게 "제가 어릴 적에 종숙모(從叔母)께서 남편이 병에 걸려서 허벅다리 살을 베어 낼 때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는 두려워서 떨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사람이 칼에 다쳐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 번번이 이전 일이 생각나서 기가 요동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선군이 말씀하신 너의 대고모와 아무개 어른이 말씀하신 종숙모가 바로 이 유인 김씨이다. 나는 나이가 어려 무지할 때였는데도 진실로 이미 선군 및 최씨 어른의 말씀을 마음으로 이해하였고, 장성해서는 이전에 듣지 못한 유인의 행실과 사적에 대해 더 듣게 되었다.대저 사람에게 아름다운 행실이 있으면 비록 시대가 멀고 교분이 소원하더라도 그를 위해 포양(褒揚)하고 논찬(論贊)하는 법인데, 하물며 내가 유인과 친족이고 시대가 가까움에 있어서이겠는가. 이에 글 한 편을 지어 후세에 전해 흠모하는 마음을 담으려고 한 지 오래였다. 어느 날 유인의 손자 최정렬(崔政烈)이 그의 선고(先考)가 지은 가장(家狀)과 송사(松沙) 기공(奇公 기우만(奇宇萬))이 기술한 유사(遺事)16)를 나에게 보여 주고 묘갈명을 청하니, 나는 이에 평소의 뜻을 이루게 된 것을 기뻐하여 사양하지 않고 행적을 서술한다.유인은 태어나면서 몸집이 풍만하고 컸으며 단정하고 장중하였다. 15세에 부친상과 조부 상을 함께 당했을 때는 슬픔을 극진히 하고 궤전(饋奠)을 정성스럽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최공에게 시집가서는 최공이 병을 많이 앓아 누차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유인의 정성스러운 간호에 힘입어 번번이 효험이 있었다.훗날 다시 병이 심해져 이미 혼절하였는데 유인이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었으나 효험이 없자 다시 손가락을 째어 또 똑같이 하니 점차 의식이 깨어나고 기가 회복되었다. 이에 오른쪽 허벅다리를 베어 탕을 끓여 올리니 회생하였다. 이윽고 공이 다시 위태로워지자 왼쪽 허벅다리를 베어 똑같이 하니 완쾌되어 10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50세에 남편 상을 당하고 장지가 20리 밖에 있었는데 여묘(廬墓)하려고 이미 상차(喪次)를 만들었으나 다른 사람이 "부인이 여묘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만두었다.시부모가 살아 계실 때 섬기지 못한 것을 항상 한으로 여겨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으니, 1년 동안 자주 뵙고 속절(俗節)과 생신에도 반드시 옷과 음식을 갖추어 올려 노년에 이르러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고비(考妣)의 기일에는 제물(祭物)을 마련해 보냈다. 아들 광각(光珏)이 요절하자 아내 고씨(高氏)가 수절(守節)하였는데 유인이 이를 가엾게 여겨 더욱 은의(恩誼)를 베풀고 고씨도 효성스럽고 공손하게 섬기니 고부(姑婦)가 서로 마음이 맞아 매우 사이가 좋았다. 광각은 최공의 전 배필의 소생이고 며느리도 시어머니보다 겨우 몇 살 어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유인이 며느리를 잘 대우하여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 더욱 삼간 것이다."라고 하였다.식견이 통명(通明)하여 사리(事理)를 말하면 대체(大體)를 알았고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의(義)에 맞는 견해를 잃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옛날의 서적이나 역사서에 기록된 어질고 효성스러운 인물의 일과 행실을 말하면 기쁘게 듣고 마음에 잊지 않았으며, 우리나라 명문가와 훌륭한 사람들의 계파에 이르러서도 모두 상세히 설명하였다.재산이 자못 넉넉하였는데 만년에 이를 담당할 사람이 없어서 전곡(錢穀)의 수량과 길사와 흉사에 드는 비용을 직접 관리하고 살펴 정연하게 조리가 있었다. 베풀기를 좋아하여 유인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리는 이웃 마을 사람이 10여 집이었다. 비복(婢僕)17)에게도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고 고르게 옷과 음식을 주니 모두 부인을 경애하고 우러르며 경외하여 복종하였다. 고종 정해년(1887, 고종24) 12월 26일에 졸(卒)하였으니, 태어난 순묘(純廟) 신사년(1821, 순조21) 8월 19일부터 누린 수명이 67년이다. 묘소는 옥산(玉山) 뒤 해좌(亥坐) 언덕에 있다.김씨의 본관은 부령(扶寧 부안(扶安))이다.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구(坵)는 도덕과 문장으로 고려 때 이름이 드러났다. 고려 말기에 군사(郡事) 광서(光叙)는 망복(罔僕)의 절개18)를 지켰다. 본조에 들어와 매죽당(梅竹堂) 종(宗), 죽계(竹溪) 횡(鋐)은 도학(道學)으로, 참봉(參奉) 정길(鼎吉)은 충의(忠義)로 모두 세상에 알려졌으니, 유인의 8세 이상 선조이다. 조부 인성(麟成)은 효성으로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부친 유죽헌(幽竹軒) 석규(錫圭)는 비범한 자질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다. 모친은 여산 송씨(礪山宋氏) 석현(錫顯)의 따님으로 도봉(道峰) 세정(世貞)의 후손이고 효부(孝婦)로 알려졌다. 대개 유인 같은 분이 태어난 데에는 진실로 가문과 관계가 있다.최씨는 전주(全州)의 명망 있는 종족으로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다. 본조의 증(贈) 참판 덕촌(德村) 희정(希汀)은 학행(學行)과 충훈(忠勳)이 있었고, 그 후손은 대대로 충효를 서로 계승하였다. 유인은 덕촌의 12세손부(世孫婦)가 되었으니 유인이 시집간 곳이 또한 마땅함을 얻었다.아들 한 사람과 딸 네 사람을 낳았는데 아들은 병성(秉星)이고, 사위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인 행주(幸州) 기우번(奇宇蕃),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울산(蔚山) 김요경(金堯敬),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손인 연일(延日) 정해심(鄭海心), 하서의 후손인 울산 김만주(金晩柱)이다. 손자는 광각의 양자로 나간 경렬(暻烈), 희열(喜烈), 정렬(政烈), 진열(鎭烈), 성렬(成烈), 승렬(承烈)19), 호열(鎬烈)이다. 외손은 기준도(奇駿度), 김흥중(金興中)․김현중(金玄中)․김택중(金宅中), 정영원(鄭榮源)이다.아, 유인의 실제 행적은 유사와 천장(薦狀) 및 《삼강록(三綱錄)》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진실로 나 같은 친족의 말은 필요 없다. 오직 여러 번 그치지 않고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다리를 베어 낸 일은 남편을 섬기는 큰 절조인데 선배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헤아려 보면 또 도를 아는 군자는 어떻게 볼지 모르겠다.그러나 내 생각에 이 말은 자식이 이효상효(以孝傷孝)20)하는 경우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부인이 남편에 대해서는 의(義)를 위주로 삼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未亡人)이라 칭하니, 이는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했다는 말이다. 죽는 것도 오히려 당연한데, 하물며 남편을 위해 몸은 훼손해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어버이를 위하는 것과 남편을 위하는 것의 차이를 정할 수 있으며, 유인의 행실이 순수했음을 볼 수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위해 열행 있었으니 孝親烈夫이것이 유인의 큰 행적이네 是其大者은혜로운 덕과 밝은 식견 지녔으니 德惠識明온갖 선이 갖추어졌도다 衆善備也옛날의 명철한 부인과 비교하면 視古哲媛유인은 이러한 반열에 들리라 若是之班누가 묘갈명을 지었는가 誰其銘墓이 귀손21)이 지었네 有玆歸孫행여 아첨하지 않았으니 庶不阿好내 말을 믿을 수 있으리 可信其言 澤述竊記昔甫就傅時, 先君有言, 曰: "吾家世以文學行義相繼, 女適人亦多以賢烈聞, 而近則汝大姑爲崔公焌秀拜言之配者尤焉。" 又記崔丈某氏語先君曰: "吾少日適見從叔母, 夫病刲股時, 血淋漓狀, 恐懼戰栗不已。自後見人刀傷血流處, 輒思前事, 氣爲之動。" 先君所稱汝大姑, 某丈所稱從叔母, 卽此孺人金氏。余在幼騃, 固已心識先君及崔丈語矣。及長, 益聞孺人行治之前所未聞者矣。夫人有懿行, 雖在時遠而分疎, 尙爲之欽賞而論贊, 况余於孺人, 爲屬之親時之近者乎! 思欲立一文, 傳後而寓慕者久矣。日, 孺人孫政烈, 以其先考撰家狀、松沙奇公述遺事1)示余, 而請墓銘, 余乃喜遂素志, 不辭而敘之。曰: 孺人生而豊偉端莊, 年十五遭父祖偕喪, 能盡哀慽誠饋奠, 人咸異之。及歸崔公, 崔公多病累濱危, 賴孺人誠救輒效。後復病革旣絶, 孺人斷指注血, 無效, 再裂指亦如之, 漸覺氣復, 於是割右股湯進, 回甦。已而復危, 割左股亦如之, 乃得快復以延十年之壽。五十當晝哭, 葬在二十里外, 欲廬墓, 已作喪次, 人以爲"婦人廬墓, 非禮", 遂止之。常以不逮事舅姑爲恨, 專誠事母, 一歲累覲, 俗節晬辰, 必具獻衣食, 至老不倦, 考妣諱辰, 備送粢牲。子光珏夭, 妻高氏守義, 孺人憐之, 加以恩誼, 高亦事以孝謹, 姑婦相得甚宜。光珏, 崔公前配出, 婦又少姑僅數歲, 人皆稱"孺人之善視其婦, 以致事姑愈謹"。識解通明, 談事理知大體, 遇事難決處, 不失義見。人言往古書史賢孝事行, 喜聞而心不忘, 至於我東名家先德派系, 亦皆詳說之。貲産頗饒, 而晩年無人幹當, 錢穀之數, 吉凶之費, 親自管視, 井井有條。喜施與, 鄰里待而擧火者十數家。於俾・(婢)僕, 幷施恩威, 均給衣食, 無不愛戴而畏服者。高宗丁亥十二月二十六日卒, 距其生純廟辛巳八月十九日, 壽六十七。墓在玉山後亥坐原。金氏貫扶寧。平章事文貞公坵, 以道德文章顯于麗。麗季, 郡事光敘, 守罔僕之節。本朝梅竹堂宗、竹溪鋐, 以道學; 叅奉鼎吉, 以忠義, 俱聞於世, 孺人八世以上。祖麟成, 孝聞表宅。考幽竹軒錫圭, 有異資純行, 妣礪山宋氏, 錫顯女, 道峰世貞后, 以孝婦聞, 蓋其所生固係於世類。崔氏全州望族, 文成公阿后。本朝贈叅判德村希汀, 有學行忠勳, 其後世以忠孝相承。孺人爲德村十二世孫婦, 則其所歸亦得宜矣。擧男一人、女四人, 男秉星, 女壻幸州奇宇蕃, 蘆沙正鎭孫; 蔚山金堯敬, 河西麟厚后; 延日鄭海心, 松江澈后; 蔚山金晩柱, 河西后。孫暻烈, 光珏系男, 喜烈、政烈、鎭烈、成烈、▣◀(承)烈、鎬烈。外孫奇駿度、金興中․玄中․宅中、鄭榮源。嗚呼! 孺人實蹟, 具載遺事、薦狀及《三網之錄》, 固無待乎親屬如余者之言。惟是斷指刲股, 再四而不已者, 爲事夫大節, 而揆以先輩所論不一, 則又未知知道君子作如何觀? 然余則以爲此以人子以孝傷孝者言。若婦人之於夫則主義, 故夫死, 稱未亡人, 謂其當死而不死也。死且猶當, 况於其夫, 行毁不至死之事者, 不亦宜乎? 斯可以定爲親爲夫之異, 而見孺人之行純也。銘曰: 孝親烈夫, 是其大者。德惠識明, 衆善備也。視古哲媛, 若是之班。誰其銘墓? 有玆歸孫。庶不阿好, 可信其言。 송사(松沙)……유사(遺事):《송사집(松沙集)》 권49에 실려 있는 〈유인 김씨 유사(孺人金氏遺事)〉를 가리킨다. 비복(婢僕):원문은 '俾僕'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俾'를 '婢'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망복(罔僕)의 절개: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절개를 뜻한다. 상(商)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기자(箕子)가 "상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하와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승렬(承烈):원문은 '▣烈'이다. 《송사집》 〈유인 김씨 유사〉에 근거하여 '烈' 앞에 '承'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효상효(以孝傷孝):효성이 지극한 나머지 부모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지나치게 하여 병이 나거나 죽는다는 뜻이다. 귀손:여자가 자신의 조카의 아들을 칭하는 말이다. 《爾雅 釋親》 孺人金氏遺事 松沙先生文集卷之四十九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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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유인 최씨 묘갈명 병서 孺人崔氏墓碣銘【幷序】 부인이 목숨을 버려 절조를 수립하는 것을 열행[烈]이라 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절하는 것을 정절[貞]이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절조를 수립하는 열행만 칭송하고 수절하는 정절이 어려운지 모르며, 사별한 뒤에 수절하는 것이 어려운 줄만 알고 생이별한 뒤에 수절하는 것 역시 어려운 줄 모르니, 요컨대 정론이 아니다.당(唐)나라 가직언(賈直言)이 영남(嶺南)에 귀양 가자 그 아내 동씨(董氏)가 머리를 비단으로 싸매고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20년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다.22) 이것이 바로 생이별한 뒤의 수절로, 왕 절부(王節婦)23)가 《여범(汝範)》 〈정렬(貞烈)〉 편에 이 고사를 실어 목숨을 버려 절조를 수립하는 것과 동등하게 보았으니 오직 이것이 정론이다.우리 마을에 유인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있는데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며 판관(判官)을 지낸 증(贈) 참판 덕촌(德村) 희정(希汀)의 10세손이다. 부친은 영모(永模)이고,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김택려(宅麗)의 딸이다. 최씨는 철종(哲宗) 경술년(1850, 철종1)에 태어났다. 어려서 비범한 자질이 있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평택(平澤) 임기태(林基兌) 공에게 시집갔다.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을 공경으로 받들어 규문(閨門)이 화목하고 엄숙하니 온 집안이 크게 기뻐하였다.무자년(1888, 고종25) 봄에 임공이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아울러 소식도 없어, 유인이 어린 네 아들을 데리고 남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에 곡기(穀氣)를 끊고 죽으려 하자 아들이 울면서 "어머니가 죽으면 아들은 어떻게 성장하여 아버지를 찾겠습니까?"라고 고하니, 유인이 선뜻 마음을 돌리고 울면서 아들에게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내가 살아 있으면 네가 성장하여 네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내가 죽으면 너는 성장할 수 없고 네가 성장하지 못하면 네 아버지는 영영 찾을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니 네 말이 참으로 옳다."라고 하였다.이에 부지런히 길쌈하여 집안의 생계를 꾸렸는데 세시 명절이 되면 남편이 입을 새 옷을 만들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비록 채소일지라도 맛이 있으면 또한 찬장에 보관해 두고 기다렸다. 매일 조석으로 하늘에 기도할 때마다 목 놓아 슬피 우니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였다.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면 바람과 눈을 맞으며 뜰에 서서 "이런 때 남편이 객지에서 겪는 괴로움이 어떠할까?"라고 하였다. 평상시에는 따뜻한 곳에 거처하지 않고 배불리 먹지 않아 항상 자신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하였다. 남들 대할 때는 후하였고 빈궁한 사람에게는 더욱 마음을 썼으니 객지 생활하는 남편의 곤궁함을 상상하여 남에게까지 은혜가 미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시부모의 기일에는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는데 몹시 연로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효성으로 봉양하고 남은 정성이고, 또한 남편을 대신하여 공경을 더욱 지극히 한 뜻을 알 수 있다. 남을 만나 볼 때는 정답게 웃으며 이야기한 적이 없고, 본가의 지친(至親)은 만나 보기 드물고 어려운데도 역시 기뻐하는 뜻을 안색과 말에 드러내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남편을 그리워하는 한이 천성이 되어서 비록 기뻐할 만한 일을 보더라도 그것이 기쁜 일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만년에 병이 심해지자 손자인 승옥(承玉)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네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행적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는데 내가 죽기로 맹세했으면서 죽지 않은 이유는 네 아버지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끝내 할아버지를 찾게 하려고 해서였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장성한 뒤 더욱 부지런히 찾아도 찾기가 더욱 요원해져서 마침내 초심을 저버릴 줄 누가 알았겠느냐. 아득한 천지에 이 한이 어찌 다하겠느냐. 지금 그 나이를 계산하고 타고난 체질을 헤아려 보면 전혀 살아 있을 리가 없다. 또 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나도 곧 죽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는 일이 궁하고 희망이 끊어졌으니 네 할아버지를 위해 상복을 입고 제사를 행하라. 또 마을 뒤에 제단(祭壇)을 쌓고서 그 곁에 나를 장사 지내고 세시마다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라."라고 하였다.병자년(1936) 10월 17일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87세이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현명한 부인이 서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정읍군(井邑郡) 고부면(古阜面) 죽산리(竹山里) 뒤쪽 산기슭 모좌(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임공의 제단은 그 서쪽에 있다.아, 유인은 이런 사변을 당하여 수절한 정절이 당나라의 동씨와 아름다움이 같았으나 남편이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은 차이와 행운과 불행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유인이 조석으로 하늘에 기도하고 몸은 따뜻한 곳에 거처하지 않고 배불리 먹지 않기를 50년 동안 하루처럼 지속한 일은 비단 동씨가 20년 동안 머리를 싸매고 남편을 기다린 것에 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여범》의 속편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유인의 사적과 행실에 대해 마땅히 기록할 것이고, 고금의 평가 역시 장차 그 사이에서 저울질할 것이다.이뿐만 아니라 손자에게 일이 궁하고 희망이 끊어졌으니 이후에는 상과 제사를 치르고 부부의 묘소와 제단을 반드시 같은 곳에 마련하라고 명한 것은 변고를 만나 의를 얻고 시의에 따라 예에 부합하였으니 예와 의로 볼 때 유인의 식견 또한 높다. 마을 사람들이 칭한 '현명한 부인[賢媛]'이라는 말도 역시 자연스러운 공론임을 볼 수 있다.아들은 재호(在鎬)이고, 딸은 김해(金海) 김사범(金士範)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승옥, 승언(承彦), 승연(承衍), 한봉(漢鳳)24)이고, 증손은 선동(善東)이다. 임승옥이 장차 묘갈을 세우려 하여 유인의 오빠의 손자인 최민열(最敏烈)에게 가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고 함께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유인은 나에게 선군의 이모의 딸이다. 이 때문에 그 일을 익히 들었는데 지금 가장을 통해 더욱 상세한 내용을 알았기에 마침내 가장을 살펴본 다음 글을 완성하고 명(銘)을 이어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두악의 서쪽 죽산의 남쪽이 斗嶽西兮竹山陽현명하고 정절을 지닌 부인 최씨의 묘소라네 賢貞婦兮崔氏藏후세를 감화하고 인륜과 강상 부지하였으니 風來世兮扶倫綱사녀가 지나가면 이곳을 서성이리 士女過兮爲彷徨 婦人之損生立節, 謂之烈; 一心守節, 謂之貞。然人皆稱立節之烈, 而不知守節之貞爲難; 知守節於死訣之後者爲難, 而不知守節於生離之餘者亦難, 要非定論也。唐賈直言謫嶺南, 其妻董氏封髮以待夫歸, 二十年不施膏沐, 是乃生離之守節, 而王節婦載之於《女範》之書〈貞烈〉之篇, 與損生立節同科, 惟此爲論定矣。吾鄕有孺人全州崔氏, 文成公阿后, 判官、贈叅判德村希汀十世孫。考永模, 妣靈光金氏, 通政宅麗女。生以哲宗庚戌, 幼有異質, 及笄, 歸于平澤林公基兌。養舅姑以誠; 奉君子以敬, 閨門和肅, 一家大悅。戊子春, 林公有事, 出外而不還, 幷無音信, 孺人率其穉子四, 求不得, 乃絶穀欲死, 其子泣告曰: "母死, 子何以生長求父乎?" 孺人幡然回心, 泣謂子曰: "汝言良是。吾在汝長, 汝父可求, 吾死則汝無以長, 汝不能長, 則汝父永無可求之道, 汝言良是。"於是勤於紡績, 以爲家業, 歲時名節, 裁成夫子新衣, 以待其歸, 雖蔬菜, 有異味, 亦庋閣而待之。每日晨夕祝天, 涕泣悲咽, 人不忍見。風寒雨雪, 則露立于庭曰: "此時夫子, 客苦何如?" 平居不溫處不飽食, 常若罪戾在己。待人則以厚, 貧窮者尤加意焉。可見想像夫子旅瑣之困而惠及於人矣。舅姑諱辰, 夜不交睫, 隆老不解, 是固孝養餘誠, 而亦見代夫子, 益致其敬之意。見人未嘗笑語款洽, 本家至親, 稀見濶逢, 亦無喜意見於色辭, 蓋思念夫子之恨, 習與性成, 雖見可喜, 而自不知其爲喜也。臨年病革, 謂孫承玉曰: "昔年, 汝祖不還, 而求之未得也, 吾誓死而不死者, 欲待長成汝父, 俾竟求得, 夫孰知汝父旣壯, 求之愈勤, 而得之愈遠, 遂負初心哉? 悠悠天地, 此恨曷極? 今計其年壽, 料其稟質, 萬無生存之理。且汝父已亡, 吾將死矣。今焉而後, 事窮望絶, 爲汝祖服喪行祭, 又築壇里後, 葬我其傍, 歲時同日祭之。" 以丙子十月十七日卒, 享年八十七。鄰里驚嘆曰: "賢媛逝矣。" 葬于井邑郡古阜面竹山里後麓某坐原。林公祭壇在其西。嗚呼! 孺人遭此事變, 其守節之貞, 與唐之董氏齊美, 而其夫之歸與未歸、幸與不幸之異也。然孺人之晨夕祝天, 身不溫飽, 五十年如一日, 不但爲董氏封髮二十年之比, 則後有續編女範之書者, 於孺人事行, 宜有所處, 而古今品藻, 亦將有權度於其間矣。不寧惟是, 其命以事窮望絶, 而後行喪祭, 內外墓壇, 必於同所者, 處變而得義, 因宜而合禮, 禮義所在, 其見識亦高。鄰里所稱賢媛之稱, 亦見其爲自然之公論也。男在鎬, 女金海金士範。孫承玉、承彦、承衍、漢鳳, 曾孫善東。承玉將樹墓碣, 託孺人兄孫敏烈爲狀, 而偕來請銘。孺人於余爲先君從母之女, 以是稔聞其事, 而今因狀而益知詳, 遂按狀成文, 而繼之以銘曰: 斗嶽西兮竹山陽, 賢貞婦兮崔氏藏。風來世兮扶倫綱, 士女過兮爲彷徨。 당(唐)나라……않았다:가직언이 영남으로 귀양갈 적에 아내와 이별하면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니 내가 떠나면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말고 속히 재가하시오."라고 하였는데 동씨가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끈으로 묶은 다음 비단으로 감싸고서 가직언에게 "당신의 손이 아니면 비단을 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0년이 지난 뒤 가직언이 집에 돌아오니 동씨의 머리에 감싼 비단이 그대로 있었는데 가직언이 그 비단을 풀고 머리를 감으니 동씨의 머리가 모두 빠졌다. 《新唐書‧ 列女傳 ‧賈直言妻董》 왕 절부(王節婦):명(明)나라 때 사람으로 왕정중(王正中)의 아내인 유씨(劉氏)이다. 시집간 뒤 4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으나 평생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였다. 《王節婦劉氏碑陰書》 한봉(漢鳳):문맥에 근거할 때 앞에 '外孫'이 빠진 듯하다.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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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의인 홍씨 묘갈명 병서 宜人洪氏墓碣銘【幷序】 송(宋)나라 속수 선생(涑水先生 사마광(司馬光))이 "며느리는 집안이 이로 말미암아 흥성하거나 쇠락하게 되는 존재이다."25)라고 하였는데 논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합당한 말이라고 하였다. 천 년 뒤에 건상(巾箱) 안에서 말 한마디를 얻었는데, 속수 선생의 말과 은연중에 부합26)하면서도 한층 더 진실하고 절실하였다. 그 말에 "집안의 흥망은 며느리에게 달렸으니, 며느리가 현명하지 않으면 가정교육이 독실하지 못하다. 나는 딸 다섯을 두었는데, 이런 문제를 모두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식견과 행실이 어찌 뛰어나지 않겠는가. 바로 호남 임실현(任實縣)의 유인(孺人)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그 사람이다.지금 의인 남양 홍씨(南陽洪氏) 휘 교희(敎熙)는 권씨의 장녀이다. 부친은 재기(在祺)이니 호은(湖隱) 연(淵)의 후손이다. 홍씨는 18세에 평해(平海) 죽헌(竹軒) 황종팔(黃鍾八) 공에게 시집을 갔으니, 황공은 이재(頤齋) 선생 윤석(胤錫)27)의 5세손이자 한천(寒泉) 재학(在學)의 아들이다.의인은 일찍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자식의 직분에 부지런하였고, 시집가서는 부도(婦道)를 다했다. 집안이 청빈하여 쌀과 보리를 나누어 밥을 지은 다음 쌀밥은 어른에게 올리고 보리밥은 자녀와 달게 먹었다.시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의인이 약을 전담하여 잠시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고, 죽을 쑤는 데 쓰는 쌀을 씻느라 손톱이 다 벗겨지니 시어머니의 성품이 엄하였는데도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였다. 동서 간에 화목하고 공경히 대하니 집안이 절로 엄숙하였고, 비복(婢僕)에게 허물이 있으면 온화한 말로 잘 타일러 기어코 잘못을 뉘우쳐 고치게 하였다.아들과 조카가 밤에 글을 읽으면 매번 음식을 나누어 주고 이어 "집안의 자손이 독서를 멀리하면 무엇을 하려고 하겠느냐. 재화를 탐하고 의(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반드시 부지런히 공부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버리지 말라."라고 경계하였다.남편이 손님 만나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수십 사람을 초대하였으나 마음을 다해 음식을 제공하였는데 비록 끼니가 지난 뒤라도 다시 밥을 짓기를 꺼리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집에 손님이 끊어지면 볼 만한 것이 없다. 진실로 좋은 손님이 있으면 하루에 열 번 밥을 짓더라도 나는 수고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길쌈에 힘써, 집안에 혼인하는 남녀가 많았으나 베 한 자를 사지 않아도 충분하였고, 시부모를 염습(殮襲)할 때 사용할 수의(壽衣)도 모두 손수 짜서 마련하였다. 대개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려, 편안히 자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멀쩡한 옷이 없는 채로 20년을 하루처럼 살아 이에 가계(家計)가 조금 여유로워졌다.융희(隆熙) 정미년(1907, 순종즉위) 9월 27일 43세에 졸(卒)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하여 말하기를, "어진 부인이 서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정읍군(井邑郡) 소성면(所聖面) 춘수리(春水里) 불등치(佛燈峙) 곤좌(坤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아들은 상익(尙翼), 휴익(休翼), 환익(奐翼), 건익(鍵翼)이고, 딸은 울산(蔚山) 김상태(金相泰), 수원(水原) 백남용(白南用), 나주(羅州) 오영수(吳翎洙), 진주(晉州) 정태환(鄭台煥)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은 영구(榮九), 완구(浣九)28)이고, 딸은 전주(全州) 이강언(李康彦)의 아내이다. 차남의 아들은 경구(炅九)이고, 딸은 탐진(耽津) 최순환(崔順煥), 신평(新平) 송익수(宋益洙), 전주 이용▣(李容▣)의 아내이다. 삼남의 아들은 용구(瑢九), 준구(駿九)이다. 사남의 아들은 양구(亮九), 억구(檍九)이고, 딸은 전주 이병연(李秉淵), 울산 김진수(金鎭洙), 창녕(昌寧) 성▣▣(成▣▣)의 아내이다. 사위 백남용의 아들은 상기(祥基), 한기(漢基)이고, 사위 오영수의 아들은 병근(秉根)이고, 사위 정태환의 아들은 재철(在哲), 재홍(在洪)이다. 내외 자손이 모두 30여 명인데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아, 성대하도다! 이는 하늘이 의인의 현명함과 선(善)에 보답한 것이니 "집안의 흥망성쇠가 며느리에게 달렸다."라는 말이 옳지 않은가.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서는 윤리가 땅에 떨어져 의인의 아름다운 행실 같은 것은 전혀 볼 수 없다. 한 집이 쌓여 한 세상이 되니 그렇다면 온 세상의 쇠망을 알 수 있다. 속수옹과 권 유인의 말에 또 어찌 감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황건익이 가장을 가지고 나에게 묘갈명을 요청하였는데 나는 의인이 세도(世道)를 바로잡을 현명한 부인임을 이미 믿고 의인이 종신토록 시어머니를 봉양하느라 잠시도 겨를이 없었던 것이 나의 선자(先慈) 최씨(崔氏)와 비슷한 점이 있는 데 거듭 감동하였기에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행적을 서술하고서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매 母訓是受남편 집안 번창하였으니 夫家是昌부인의 도를 다하는 것은 婦道之盡오히려 의인의 일상이었네 猶是厥常의로 아들을 면려하고 勖子以義당에 손님 가득하길 바랐으니 願賓滿堂이 넓고 큰 도량 보면 見斯遠大남은 운수 한량없네 餘運未量울창한 저 불등치는 鬱彼燈峙여사의 안식처이니 女士攸藏지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疇不過者공경을 표하고 서성이리 致敬彷徨 有宋涑水先生有言, 曰: "婦者, 家之所由盛衰。" 論者以爲至言。後千載而得一言於巾幃中, 則與之合・(暗)暗・(合), 而更進一格眞切。其言曰: "人家興亡在婦人, 而婦人之不賢, 家庭敎育之不篤, 吾有五女, 皆可免矣。" 此其所見所行, 豈不卓乎哉? 卽湖南任實縣孺人安東權氏, 其人也。今宜人南陽洪氏諱敎熙, 權氏長女。其考在祺, 湖隱演後。年十八歸于平海氏竹軒黃公鍾八, 頣齋先生胤錫五世孫, 寒泉在學子。宜人早承母訓, 勤於子職, 及歸, 婦道是盡。家力淸貧, 分炊米麥, 米進於所尊, 惟麥, 己與子女甘之。姑久癠, 專擔藥餌, 暫不替人, 淅磨粥米, 爪甲盡禿。姑性嚴而稱孝婦。和敬妯娌, 家內自肅。婢僕有過, 溫言善喩, 期至悔改。子姪夜讀, 每以食物分給, 仍戒之曰: "人家子孫外讀書, 有何所欲? 不過貪貨財、作非義而已。必須勤做, 毋替令名。" 夫子喜賓客, 日致數十, 盡心供饋, 雖飯後, 不憚再炊, 常曰: "家絶賓客, 無可觀。苟有嘉賓, 一日十炊, 吾不勞也。"務紡績, 男女婚嫁多矣, 一尺布不貿而足, 舅姑時月之制, 皆出手織。蓋勤儉治家, 寢不穩, 食不甘, 衣無完, 二十年如一日, 而調度稍裕矣。年四十三卒以隆熙丁未九月二十七日。人皆嘆惜曰: "賢婦人逝矣。" 葬于井邑郡所聲面春水里佛燈峙坤坐原。男尙翼、休翼、奐翼、鍵翼, 女適蔚山金相泰、水原白南用、羅州吳翎洙、晉州鄭台煥。長房男榮九、浣◀(九), 女全州李康彦妻。次房男炅九, 女耽津崔順煥、新平宋益洙、全州李容▣妻。三房男瑢九、駿九。四房男亮九、檍九, 女全州李秉淵、蔚山金鎭洙、昌寧成▣▣妻。白婿男祥基、漢基, 吳壻男秉根, 鄭壻男在哲、在洪。內外子孫摠三十餘人, 而繁不盡錄。嗚虖盛矣哉! 此天所以報宜人賢善, 則所謂"人家興亡盛衰在婦人"者, 不其然乎? 顧今之世, 倫理墜地, 如宜人懿行, 絶不可覯矣。一家之積爲一世, 則擧世之衰亡, 可知已, 又安得不感慨乎涑水翁、權孺人之言也? 鍵翼抱家狀, 要余銘墓, 余旣信其爲淑世之賢媛, 重感其終身奉姑, 不獲暫暇者, 有似乎吾先慈崔氏也, 遂不辭而敘而銘。曰: 母訓是受, 夫家是昌。婦道之盡, 猶是厥常。勖子以義, 願賓滿堂。見斯遠大, 餘運未量。鬱彼燈峙, 女士攸藏。疇不過者? 致敬彷徨。 며느리는……존재이다:《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은연중에 부합:원문은 '合暗'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暗合'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윤석(胤錫):1729~1791.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이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인이다. 1759년(영조3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直長)·별제(別提)를 거쳐 익위사(翊衛司)의 익찬(翊贊)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3) 목천 현감(木川縣監)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 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 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처음에는 이학(理學)에 힘쓰고 《주역(周易)》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저서로는 《이재유고(頤齋遺稿)》, 《이재속고(頤齋續稿)》, 《이수신편(理藪新編)》, 《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완구(浣九):원문은 '浣'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浣' 뒤에 '九'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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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명 墓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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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포 양공 묘명 계미년(1943) 晩浦楊公墓銘【癸未】 만포 양공은 晩浦楊公휘는 태환 자는 기숙으로 台煥期叔남원이 본관이니 系出南原대대로 고귀한 가문이지 世爲華閥고려 때 경문은 在麗敬文지영월군수이고 知郡寧越이시는 대제학을 以時大學수생은 직제학을 지냈네 首生直學심지 굳센 이씨는 烈烈李氏남쪽으로 와서 절조를 온전히 지켰네29) 南來全節배는 연산군 시절에 培逮燕山초연히 돌아가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30) 超然歸潔구암에서 도를 즐거워하며 樂道龜巖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네 不就徵辟공준과 사민이 公俊士敏훌륭한 행적 계승하고 繩厥偉蹟양호와 쌍매31)는 養浩雙梅정과 당이 우뚝 솟았네 亭堂屹屹고조는 하기이고 高祖夏基증조는 진욱이며 曾惟鎭郁조부는 덕원이고 大父德源언근이 부친이라네 彦根考曰대를 이은 품행이 連世行誼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네 作人矜式모친은 언양 김씨니 妣彦陽金그 부친은 양열이네 其父陽烈대개 공은 태어나면서 蓋公之生위의 단정하고 자질 빼어났으니 端儀秀質효성와 우애는 천성이고 孝友根天시와 예를 수학하였네32) 詩禮傳業검약으로 몸을 단속하고 儉約持身성신으로 남을 대하였으며 誠信接物후진을 기르고 後進是育선대의 가르침 계승하였네 先謨是述안빈하고 분수 지켜 安貧守分영화와 복록 부러워하지 않고 不慕榮祿강호에서 느긋하게 지내며 優遊江湖평생토록 유유자적하였네 卒歲自適어진 자는 반드시 장수하는 법이라 仁者必壽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니 有隕天爵인릉과 홍릉 참봉이었네 仁洪二陵이것이 공의 생몰일세 是其生卒건지산 기슭에 乾芝之麓네 자 봉분이 있네 有崇四尺고령 신씨가 高靈之申시집 왔으니 歸來之出현량한 부인이라 齊體賢良규방이 엄숙하였네 閨壼肅肅곤, 은, 풍, 겸은 坤殷澧謙'재' 자 더해 돌림자로 삼았으니 加在爲列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 四子其肖가업 이어 실추시키지 않았네 克家無失딸은 김난흠과 女金蘭欽유훈에게 시집갔고 柳壎之室현대는 이씨 사위이며 鉉大惟李규열은 설씨 사위라네 奎烈則薛로, 락, 우, 하와 魯洛禹夏록, 해, 준, 율과 祿海駿汩보, 옥, 순, 무 등 保玉舜武많은 손자들이 재롱부렸네 衆孫繞膝모두 '석' 자 더했고, 皆加以錫대와 종은 '옥' 자 돌림이며 戴鍾惟玉증손 훈영은 曾孫薰永적통이라 특별히 기록하노라 以適特錄아, 공의 현명함은 嗟公之賢가장에 자세하니 有狀備悉성선과 사단을 我聞性善나는 들어서 안다네 四端以識근원이 깊은 물은 其源深者말류가 맑은 법 其流湜湜번창한 후손에게서 有後昌蕃조상의 덕을 알겠네 乃見祖德이것으로 공의 사람됨 징험하면 以此徵公이치가 어긋나지 않을 터이니 厥理不忒이에 명을 지어서 是庸作銘천억 년 후세에 보이노라 示諸千億 晩浦楊公, 台煥期叔。系出南原, 世爲華閥。在麗敬文, 知郡寧越。以時大學, 首生直學。烈烈李氏, 南來全節。培逮燕山, 超然歸潔。樂道龜巖, 不就徵辟。公俊、士敏, 繩厥偉蹟。養浩、雙梅, 亭堂屹屹。高祖夏基, 曾惟鎭郁。大父德源, 彦根考曰。連世行誼, 作人矜式。妣彦陽金, 其父陽烈。蓋公之生, 端儀秀質。孝友根天, 詩禮傳業。儉約持身, 誠信接物。後進是育, 先謨是述。安貧守分, 不慕榮祿。優遊江湖, 卒歲自適。仁者必壽, 有隕天爵。仁洪二陵, 是其生卒。乾芝之麓, 有崇四尺。高靈之申, 歸來之出。齊體賢良, 閨壼肅肅。坤殷澧謙, 加在爲列。四子其肖, 克家無失。女金蘭欽, 柳壎之室。鉉大惟李。奎烈則薛。魯、洛、禹、夏, 祿、海、駿、汩。保、玉、舜、武, 衆孫繞膝。皆加以錫, 戴、鍾惟玉。曾孫薰永, 以適特錄。嗟公之賢, 有狀備悉。我聞性善, 四端以識。其源深者, 其流湜湜。有後昌蕃, 乃見祖德。以此徵公, 厥理不忒。是庸作銘, 示諸千億。 심지 굳센……지켰네:이씨는 양수생의 부인이다. 양수생이 요절한 뒤, 개가시키려는 부모의 뜻을 거절하고 임신한 상태로 남원으로 내려 왔다가 훗날 피난하여 순창(淳昌)에서 살았다. 《陶菴集 進士楊公墓碣》 배는……하였으니:양배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겪은 이후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頤齋遺藁 故處士龜巖楊公,進士梅堂楊公合傳》 양호와 쌍매:양호는 양홍(楊洪)의 호인 양호정(養浩亭)으로, 양공준의 아들이자 양사민의 아버지이다. 쌍매는 양사민의 호인 쌍매당(雙梅堂)이다. 시와 예를 수학하였네:아버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에 공자의 아들 리(鯉)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자 공자가 "시를 읽었느냐?"라고 물으니 리가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하기에 공자가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라고 일러 주고, 또 "예를 배웠느냐?"라고 묻자 리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하기에 공자가 "예를 배우지 않으면 행동을 할 수 없다."라고 한 데에서 연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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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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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8년 안겸수(安謙洙)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同治七年十一月卄九日 安謙洙 同治七年十一月卄九日 安謙洙 전라남도 보성군 증인 3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8년 11월 29일에 안겸수(安謙洙)가 논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1868년 11월 29일에 안겸수(安謙洙)가 논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이다. 유래해온 논을 여러 해 동안 벼를 받다가 상채(喪債)와 아우의 부채를 갚고자 본군 문전면 덕봉촌 전평 등(登)·우(優) 양자 4두락지 부수(負數) 10복(卜)4속(束)을 전문(錢文) 160냥을 받고 3년 내에 환퇴하기로 하고서 방매한다고 하였다. 답주와 증필(證筆), 증인이 기재되어 있는데, 답주는 안겸수이며, 증필은 박한표, 증인은 이군서와 김처용이다. 답주 이하 모두의 이름 아래에는 수결이 있는데, 답주는 상중이라 착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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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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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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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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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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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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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진에게 답함 무자년(1948) 答金寅鎮 ○戊子 제가 처음으로 좌하를 만나서 덕기(德氣)가 흘러넘치고 언사가 안정된 것을 보고 금세의 평범한 벼슬아치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접하고 사랑을 받음에 미쳐서 좌하가 밀암선생(密庵先生)의 6세손임을 알았으니, 늦게 태어나서 전철(前哲)을 만나 뵙지 못했으나 오히려 그 후손을 본 것을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또 다행스럽게도 말년에 한 명의 좋은 벗을 얻었다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좌하에게 있어서 저는 본디 인척간의 친의도 없었고 지란의 세교도 없었는데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천리 멀리 편지를 보내어 죽을까 염려하고 살아난 것을 축하하면서 주밀하고 진지한 정을 다했으니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시경》 〈연연(燕燕)〉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선군(先君)을 생각하라는 말로써 과인을 권면하도다."했으니, 이처럼 학문이 끊어진 시대를 만나 존선조(尊先祖) 밀옹에 대한 그리움이 좌하에게 있어 어찌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저같이 지극히 누추한 자일지라도 좌하께서 "저 사람은 학문에 대하여 늙어 장차 죽더라도 다른 뜻을 가지지 않을 것이니, 혹여 선배의 풍서(風緒)를 조금이라도 이어서 7개월에 회복하는 씨앗118)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깊이 사랑하고 지극히 격려해주셨습니다. 오직 깊이 사랑하고 지극히 격려해준 까닭으로 기대와 격려가 너무나 공정하지 못했고, 기대와 희망이 분수를 넘어서는 것을 깨닫지 못하셨습니다. 이제 만약 그런 일들을 일일이 들어서 사양하고 회피한다면 도리어 외부사람들이 들을까 두렵기 때문에 우선 멈추었습니다. 미처 잘라내지 않아 남겨진 풀뿌리와 같은 것은 빨리 없애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좌하의 뜻이 있는 곳을 어찌 감히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 질병이 갑자기 이와 같이 되었으니, 사랑하고 격려해줌에 보답할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밀옹집》의 교감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자를 교정하는 것은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니, 이를 통해 문집 전체를 통독하여 사법(師法)을 얻는다면 진실로 또한 좌하가 은혜를 끝까지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僕始遇座下, 見其德氣流露, 言辭安定, 意其非今世常調人. 及接辭承欵, 知其爲密庵先生之六世孫, 則既以生晚未及前哲, 而猶及見後人爲幸. 又以幸獲一良朋於暮年也. 至於座下之於僕, 素無瓜葛之親誼, 亦非芝蘭之世交, 而纔聞病報, 千里走書, 慮死祝生, 極其周摯, 亦何以故?《詩》不云乎? "先君之思, 以勗寡人", 當此絕學之時, 尊先祖密翁之思, 在座下豈其不切? 雖如僕之至陋者, 尊意以爲彼之於學, 老將死而不他, 則或可少續先輩風緒, 而作七日種子歟? 故愛之深而勗之至也. 惟其愛勗之深至, 故不覺期獎之太沒稱停, 待望之過點分數. 今若枚舉而謝避, 則還恐外人之聽聞, 故且已之. 如留草本之未及綯削者, 亟滅之如何? 雖然, 尊意攸在, 豈敢不念? 顧賤疾遽如此, 未知圖報愛勗之有日否也.《密翁集》校勘, 何敢當? 但帝虎之辨, 所不敢辭, 而因以通讀全部, 得有師法, 則實亦座下之卒惠也. 7개월에……씨앗 《주역(周易)》 〈복괘(復卦)〉 괘사(卦辭)에 "칠일 만에 되돌아오니, 갈 데가 있는 것이 이롭다.〔七日來復, 利有攸往〕" 했는데, 7일(日)의 일(日)은 월(月)의 뜻으로서 7개월 만에 음양이 서로 왕래 소장하다가 동짓달에 하나의 양(陽)이 발생하는 것을 이른다. 이는 양도(陽道)가 회복되는 시초로, 암울한 시대가 가고 문명의 시대가 오거나 소인의 득세가 끝나고 군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상징한다. 전우(田愚)가 "이 아이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실로 7개월 만에 회복될 씨앗입니다. 제가 본래 사도(師道)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 어찌 후배를 권면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此雖年少, 實七日復之種子. 愚固非有師道, 亦豈無奬勸後進之心〕"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2 〈답신백삼(答愼伯三) 원성(元晟) ○갑인(甲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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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집서구에게 답함 신묘년(1951) 答黃舜輯 瑞九 ○辛卯 지난번에 별도로 말을 전하는 사람이 내가 음당(陰黨, 오진영 측)이 화해를 청한 것을 거절한 일은 지나치다 여기고서 "저 사람이 원고를 발간한 것은 공은 공이다"라고 운운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공적을 숭상하고 의리를 하찮게 여기는 자의 말이니 우리 성학(聖學) 문정(門庭)에서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맹자는 "하나의 불의를 행하여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동중서는 "의를 바르게 하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다" 했으며, 정명도는 "공을 계산하지 않는 것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이다119)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저 사람이 원고를 발간한 것은 공이 아니라 죄임에 있어서랴? 만약 저 사람이 유서를 따르고 《화도수정본》을 따라서 발간했다면 어찌 그 공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즉 인가(認可)받았다고 할 때는 인가 받으라 분부하였다고 속였을 뿐만이 아니고, 원고를 혼란케 함에 있어서는 고치거나 숨기는 것을 멋대로 행했을 뿐만이 아닙니다. 스승을 불의에 빠뜨리고, 스승의 본뜻을 애매하게 만들며, 더욱이 사림을 일망타진하고, 스승의 손자를 잡아 가두어서 발간의 일을 완성했으니, 이 어찌 죄를 성토하지 않고 공적을 인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외부사람들은 그 곡절을 깊이 알지 못하여 성토하는 뜻을 궁구하지 않고 고변(考辨)의 기록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말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최근에 정제(貞齋) 친구 김씨와 권 모씨가 새로 혼인을 하고는 항상 나에게 권씨(권순명)의 화해를 들으라고 권하면서 "내가 그와 함께 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가(권씨) 만약 죄를 후회하고 깃발을 돌려 오씨를 성토한다면 불가할 것도 없다"하니, 최근에는 벗 정제가 다시는 권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맹자는 요순, 이윤, 공자에서부터, 아래로는 백리해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힘을 다하여 속임을 변론했습니다. 생각건대, 고명하신 당신은 간옹을 비록 스승으로 섬기지는 못했을지라도 진실로 존경하고 사모하며 좇아 배워서 성명이 큰 원고에 실려 있는데 하물며 사문(斯文)의 적을 사람마다 성토함에 있어서랴? 외부사람이라 자처하지 말고 안과 밖으로 춘추필법을 실천하기 바랍니다. 이 편지를 동생과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向於別路所傳人, 有以我絕陰黨請和爲過, 而曰"彼之刊稿功則功矣"云云. 此尚功下義者之說, 吾聖學門庭, 容此不得. 孟子之"行一不義得天下不爲", 董子之"正義不謀利", 明道"不計功是正法眼藏". 且况彼之利稿匪功伊罪者乎? 使彼遵遺書, 依手本而刊之, 孰不與其功? 乃出認不啻誣以認教, 亂稿不啻恣行改竄. 陷師不義, 昧師本旨, 加以綱打士林, 縛囚師孫以成之, 是可不討罪, 而與功乎? 外人不深知其曲折, 不究討斥之旨, 不見考辨之錄. 故有此云云爾. 鄙近貞齋金友, 權某之新姻也, 常勸我聽權和而曰"吾當與之俱來." 余曰"渠若悔罪, 回旗討吳, 則無不可," 近則貞友不復勸矣. 昔孟子之於堯舜伊孔, 下逮百里奚之事, 皆盡力辨誣. 念高明之於艮翁, 雖未及師事, 實尊慕從學, 名載大稿, 况斯文之賊, 人人得討者乎? 幸勿以外人自處, 而只用皮裹春秋也. 此紙願與令弟同看. 정법안장(正法眼藏) 불가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세계, 또는 더 이상의 경지가 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말한다. 우주를 밝게 비추는 것을 안(眼), 모든 덕을 포함하는 것을 장(藏)이라 하며, 정법(正法)은 이 안과 장을 구비하는 것이다. 석가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강설할 때 연꽃을 꺾어 들자 대중이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는데, 이에 석가가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ㆍ열반묘심(涅槃妙心)ㆍ실상무상(實相無相)ㆍ미묘법문(微妙法門)ㆍ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맡기노라."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연등회요(聯燈會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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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4 後滄先生文集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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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기완에게 보냄 무인년(1938) 與李元浩起完 ○戊寅 오래전부터 명성을 우러러보았는데 매번 만나지 못했다는 근심이 간절하던 차에 최근에 노정(路程)이 귀향(貴鄕)을 지나게 되어 문하에 이르러 덕스런 모습을 뵐 수 있었습니다. 이미 뵈었다는 기쁨을 또한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이전에는 만나지 못해 근심하고 이후에는 만나서 기뻐했으니, 이런데도 왜 우리 당이 더욱 외롭게 되었습니까? 벗이 서로 도와 덕과 학업을 이룰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처에 학사가 있다고 들었지만, 그 사람을 통하여 자신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이것은 근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만나서 강론하여 유익함이 있도록 도와주고 보좌하여 터득함이 있도록 독려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형은 밖으로는 덕스런 모습이 화기애애한 기운을 드러내고 안으로는 밝은 식견이 시비를 엄격히 분별하며, 인의(仁義)를 겸하고 강유(剛柔)를 갖췄으니 진실로 금세의 만나기 드문 사람입니다. 간옹이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다'107)고 칭찬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던 것입니다.저 같은 사람은 큰일을 해내고자 하는 뜻은 있지만 재주가 너무 졸렬하고, 현명함과 강인함이 부족하여 맞닥뜨리는 상황마다 잘못을 범하여 막혀버리고, 국량이 좁아서 타인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현자는 저를 버리고 뭇사람들은 저를 원수로 삼아서 거의 이 세상에 행세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형만이 한번 만남에 오랜 친구와 같으며, 매우 후대하여 닭을 잡아주고 쌀밥을 차려주며, 피차 조금의 차이도 두지 않아 시문의 비평을 구하며, 이별에 임해서는 조만간에 한번 왕림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잘 모르겠으나, 저같이 못난 사람이 어떻게 당신께 이와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까? 또한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피차간에 서로 느낌이 이미 이와 같았다면 오직 바라는 것은 더욱 실덕(實德)으로 권면하고, 실효(實效)로 기약하여 이런 사귐이 후세에 할 말이 있게 하고, 한번 방문하여 한바탕 말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니, 대단히 바라는 바입니다. 久仰聲聞, 每切未見之憂. 頃因路出貴鄉, 得以詣門觀德, 既見之喜, 又何可量? 夫前之憂後之喜, 何以故今吾黨益孤? 麗澤無所矣. 如聞某處有學士, 而無以須其人以資成己, 則此不可爲憂乎? 及其既見, 而將講之有益, 責輔之有得, 則如之何不喜? 而况吾兄, 外而德容著和睟之氣, 內而明識嚴是非之辨, 仁義并而剛柔備, 實今世之所罕覯者乎. 艮翁稱以天資近道者, 良有以也. 如弟者志欲有爲, 材太劣焉, 明剛不足, 而觸處失錯見滞, 量狹而不能容物. 以故賢者棄之, 衆人仇之, 殆無以行乎世矣. 獨吾兄一面如舊, 待之甚厚, 而加鷄稻之設, 與之無間, 而求詩文之評, 至於臨別, 而有從近一枉之約, 未知無似何以得此於高明? 亦可異也. 雖然, 彼此相感, 既得如此, 則惟願益以實德相勉, 實效相期, 使此契有辭於後, 無歸於一番過從, 一場說話而止, 深所望焉.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다 《간재집(艮齋集)》에는 이원호에게 한 말은 안 보인다.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다"라는 말은 《간재집(艮齋集)後篇》 권1 〈답류문여(答柳文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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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범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房玉範 丙寅 소자[小子, 제자(弟子)]라는 호칭은, 아, 이 무슨 말입니까? 전부터 보내오신 편지마다 선생(先生)이라는 글자가 있었으니 옛날 학사(學士)중 연장자를 선생이라고 한다는 글이 있었고,65) 지금 세속에 이 풍조가 성행하니 감히 대뜸 감당하지는 못하더라도 크게 괴이하게 여길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오래전부터 바꿀 수 없는 일정한 내력이 있는 두 글자를 함께 써서 갑자기 오늘날 편지에서 저를 부를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설사 당신과 제가 실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유익함이 있더라도 이미 선사를 선생이라고 불렀으면 타인을 선생이라고 재차 불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하루도 실제로 사제(師弟)였던 적이 없는데 그저 향모하는 지성스러운 마음만으로 이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니 어찌 감당하겠습니까?당신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것은 선사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은 뒤 문하의 연소자들이 노성(老成)한 이들에게 학업을 마치더라도 더 이상 사제라는 명칭으로 부르지 말라."라고 가릉(嘉陵)과 김(金), 류(柳)의 일을 거론하는 김에 전거(前車)의 귀감66)으로 삼으셨으니 지금도 그 말씀이 귀에 남아 있습니다. 부디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小子之稱, 惡是何言? 前此來函, 每有先生字, 意謂: "古有學士年長者之文, 且今俗此風盛行, 則雖不敢遽當, 亦不須大怪矣." 孰謂其幷以遠有來歷一定不易之二字, 忽稱於今書? 雖使高明與吾, 實有敎學相長之益, 旣已稱於先師, 則不當再稱於他人, 況未曾有一日師弟之實, 而徒以向慕之勤, 有此妄擧, 何所當乎? 高明之所以致此, 以其不曾聞先師之訓也. 我死之後, 及門年少雖卒業于老成, 勿爲復以師弟之名相稱, 因擧嘉陵、金․柳事, 爲前車之鑑, 至今言猶在耳. 千萬已之已之. 학사……있었고 맹자와 송경(宋牼)이 석구(石丘)에서 만났을 때 송경이 맹자에게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대해 조순손(趙順孫)이 "학사 중 연장자이므로 선생이라고 하였다."라는 주석을 달았다. 《孟子 告子下》 전거의 귀감 《순자(荀子)》 〈성상(成相)〉에 "앞 수레가 넘어졌는데 뒷 수레가 모르니 언제 다시 깨달을까?"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선인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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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의 여러 사람들에게 답함 임술년(1922) 10월 答淸道諸人 壬戌十月 경신년(1920) 9월 제가 계화도(繼華島)에 들어가 선생께 "옛날에 쓰신 선친의 전문(傳文)83)을 묘표(墓表)로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청하고서 이어 본초(本草)를 드리니, 선생께서 한 번 다 보시고 "다행히 그 체제가 묘표로 삼을 만하니 고치겠다."라고 하시고, 또 "그렇다면 문고(文稿)에도 옮겨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마침 밤이 깊어 김귀락(金龜洛)에게 본초에 주필(朱筆)로 전(傳)자는 묘표(墓表)자로 고치고 찬(贊)자는 명(銘)자로 고치게 하였으나 문고에는 미처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일이 생겨 급히 떠났습니다. 허나 스승의 명을 받았는 데다가 개정본이 있었으므로 줄곧 의심없이 자신하였고, 김확재[金確齋, 김학수(金鶴洙)]어른께서 묘표를 쓰는데 이름을 빌려주셨습니다.신유년(1921) 여름 그 연유를 희경[禧卿, 유영선(柳永善)]에게 알려서 문고에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희경은 그저 저의 말을 믿고 선생의 앞에서 의심없이 떼어 옮겼는데, 선생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라고 하셨습니다. 희경이 제가 한 말을 선생께 말씀드리자, 선생께서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종현(鍾賢, 김택술(金澤述))이 어찌 했겠는가? 이는 반드시 내 허락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어찌 굳이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이하는 희경의 편지에 있는 말입니다.】고경[顧卿, 권순명(權純命)]이 계화도에서 와서 이 일을 제게 말하기에, 제가 개정본을 고경에게 보여주고 사실대로 모두 말하였습니다. 고경이 그 연유를 가서 여쭙자 선생께서 그때서야 깨달으시고 제게 편지를 보내어, "옛날 지은 선공의 전찬(傳贊)은 지금 이미 묘갈명으로 고치고 다른 부분은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또 확재가 묘비에 글을 쓰는데 이름을 빌려주었다면 내가 감히 고사(固辭)할 수 없으니 나중에 사고(私稿)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가 전찬(傳贊) 2자를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뒤에 보낸 편지에는 묘비에는 표(表)로 새기고 사고에는 전편(傳編)에 그대로 두고 주(註)를 더하라는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한마디도 간절히 여쭙지 못하였고 전의 끝에 주를 달았는지 않았는지도 몰랐습니다.지난번 계화도에서 각처의 선비들에게 부음(訃音)을 알릴 때 문고를 꺼내 보니 전 말미에 첨가한 주는 있는데 묘비와 문고를 구별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경신년 초의 명과 신유년 초의 편지대로 되돌리신 것인가?"라고 생각하고서 희경에게 "주어(註語)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알리자 희경이 즉시 "그렇다면 옮기는 것이 맞다."라고 하여, 이에 희경이 편(編)을 옮기고 제가 전찬 2자를 고쳤습니다. 목록에 "묘표에 옮겨 넣었다[移入墓表]." 4자도 희경이 썼습니다. 당시 순재[舜在 성기운(成璣運)] 및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으니 애당초 제가 멋대로 고친 것이 아닙니다.대저 선생의 주는 실로 묘비에 표로 새기고 문고에는 전편에 넣으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애당초 선친에게 인색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을 난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을 지을 때 및 작년 가을에 보낸 편지에 모두 이 말이 있습니다.】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은 처음에 "묘비에 표로 새기고 문고에는 전편에 넣으려는 것은 듣자하니 선생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나 끝내 표편(表編)에 넣었고 순재는 처음에 "선생께서 왜 제목을 고치지 않으셨을까?"라고 말한 뒤로는 또한 다른 말이 없었으니, 어찌 모두 사사로운 친분에 이끌려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뜻밖에 갑자기 여러분들의 편지를 받으니 매우 황송하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자리에 형중[亨仲, 이종택(李鍾宅)]과 경보[敬父, 김종희(金鍾熙)]도 참여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당시에는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다가 지금에서야 근거를 끌어다 세워 호도(糊塗)한 잘못이라도 있는 양 저를 몰아가니 너무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개 오늘날 우리들이 피차를 막론하고 어찌 스승의 문고가 완전무결하기를 바랄 뿐만이 아니겠습니까? 허나 스승의 명이 이미 그러하였으니 선친의 글은 전편에 그대로 두는 것이 본디 온당합니다. 이는 선친에게 아무런 보탬이나 손해가 없으니 제가 어찌 감히 다른 마음을 먹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헤아려주십시오.청도에서 당시에 오진영이 "이 주어(註語)를 보면 누가 표편에 넣자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운운하여 이런 까닭에 앞뒤로 두 개의 논의가 있었으니 스스로 죄송한 마음에 보내는 답장입니다. 이 편지에서 "결국 표편에 넣기로 하였습니다."라고 한 말은, 마땅히 끝 부분에 "이 주어를 보면 '누가 표편에 넣자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표편에 넣기로 정했습니다."라고 해야 했는데, 문장이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흠입니다. 대개 훗날 저쪽에서 이를 꼬투리 잡아 말할 줄 생각 못했으므로 더 유념하여 살피지 않아서 이런 허술함이 있게 된 것입니다.계해년 가을 권순명이 편지로 "제가 신유년 겨울에 문고에는 전편에 그대로 두고 본가는 표로 고쳤다는 편지를 이미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전(本傳) 아래 또 친필 주해가 있으니 혹시 다시 처분이 있을 듯합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대개 유영선은 이미 주어를 보고서 옮기는 것이 맞다고 하여 옮기면서 '묘표에 옮겨 넣었다.[移入墓表]' 4자의 친필도 함께 옮겼습니다. 오진영도 '이 주어를 보면 누가 표편에 넣자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결정하였습니다. 권순명은 끝내 친필로 주해를 달았다는 이유로 다시 처분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당초에 전을 표편에 넣는 것은 본디 그들도 같이 보고서 공정하게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진영은 제가 선친의 전에 농간을 부리다가 탄로나서 수정받았다고 하면서 원수로 여기니 그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아, 그 험악한 마음씨를 어찌 제가 감당하겠습니까? 【추기하였다.】 庚申九月 澤述入華島 請于先生曰: "昔年下筆先人傳文, 願改作墓表." 因以本草獻之, 先生一覽畢曰: "幸其體裁可作墓表, 其改之也." 且曰: "然則文稿亦當移定也." 時値夜久, 只令金龜洛就本草, 以朱筆, 改傳字爲墓表字、改贊字爲銘字, 文稿未及移定. 而翼朝有故急出, 而旣承師命, 且有改定本, 故一向自信無疑, 又得確齋金台寫表借銜矣. 辛酉夏, 以其由告禧卿, 使之移稿, 禧卿但信澤述言, 於先生前, 無疑割移. 先生曰: "胡爲而然?" 禧卿以澤述言白, 先生曰: "余所不許, 鍾賢豈爲之? 是必有余諾, 然亦何必乃爾?"【余所不許以下, 禧卿書中語.】 顧卿自華島來, 以其事語澤述, 澤述以改定本示顧卿, 具告以實. 顧卿以其由往稟, 先生始悟, 下書澤述曰: "昔年所作先公傳贊, 今旣以碣銘, 而它不易一字. 且又得確台丈寫書借銜, 則愚未敢固辭, 而俟後就私稿, 不得不改傳贊二字也." 後番下書, 則以墓刻用表私稿仍傳添註之意, 敎之. 故更無一言懇稟, 而傳末之註不註, 亦不知之矣. 向者, 華島通訃于各處謁文家也. 出見文稿, 則傳末有添註, 而無墓與稿區別之語. 故意"先生其復庚申初命、辛酉初書歟?" 乃告禧卿曰: "註語如此." 禧卿卽曰: "然則移定可也." 於是禧卿移編, 澤述改傳贊二字, 目錄中移入墓表四字, 亦禧卿筆. 其時舜在及諸人, 皆在座, 初非澤述擅改也. 大抵先生之註, 雖實出於表墓傳稿之意, 初非有慳惜於先人, 特以防他人之難處也.【作傳時及昨秋下書, 皆有此語.】 石農之始謂刻表傳稿, 聞是先生意云, 而終入於表, 舜在之初有先生何不改題之說而後, 亦無他辭者, 豈皆牽於顔私而爲之哉? 料外忽承僉狀, 雖甚惶愧. 然向日座上亨仲、敬父皆參在, 何故黙無一言, 今乃引立援據, 歸人於有若糊塗之科, 殊不可曉也. 蓋今日我輩, 無論彼此, 豈不但欲師稿之盡善歟? 師命旣然矣, 則先人文字, 仍置傳編, 自是穩貼. 此於先人無所增損, 澤述豈敢有貳見乎? 伏惟僉諒.淸道當日, 吳謂: "觀此註語, 孰不以爲入表?"云云, 所以有前後貳論, 自悚之答書也. 此書中終入於表, 當作"終曰: '觀此註語, 孰不以爲入表?' 而定入於表." 而文不詳備是欠, 蓋未料後日彼邊之執此爲言, 故不加意察之, 而有此疏漏也. 癸亥秋, 權純命書有曰: "此漢辛酉冬, 旣傳文稿仍傳本家改表之下書, 然本傳下, 又有親筆註解, 則恐或更有處分."云云, 蓋柳旣見註語謂"移定可也"而移之, 幷有移入墓表四字之親筆, 吳又謂"觀此註語, 孰不以爲入表"而決定矣. 權終以親筆註解謂更有處分. 當初傳之入表, 自是渠輩同見公決者, 而今吳謂余幻弄父傳而綻露見釐正, 而作仇, 則渠輩又同然一辭, 吁其險心, 何可當也?【追識】 선친의 전문 김택술의 선친은 벽봉(碧峰) 김낙진(金洛進)으로 《간재집(艮齋集)》 〈김벽봉전(金碧峯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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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의 여러 사람들께 답함 계해년(1923) 答淸道諸人 癸亥 아무개들이 아룁니다. 10월에 보내신 답장에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옛날에는 감춰졌다 지금 드러나 앞뒤로 차이가 있다고 반복해서 깨우쳐주신 것으로도 이미 감사한데 곧바로 친절하게 미혹된 부분을 지적하셨으니,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무어라 사례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이 삼가 생각건대 천리와 인정은, 진실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기수(氣數)가 기승을 부려 드러나고 감춰지는 차이가 있고 진실로 동일한 것이지만 시기에 따라 같고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무릇 간재의 사고(私稿)를 간행하자는 거사가 벌써 심상(心喪)을 지내는 3년 동안 있었으니 영전이나 묘소에 간소(刊所)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어찌 천리와 인정에 지극히 합당하여 의석(議席)에서 준엄하게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처음 발의는 붕우(朋友)인 정평언[平彥, 정형규(鄭衡圭)]가 익산(益山) 현동(玄洞)에 간소를 설치하여 옛날 자공(子貢)이 시묘살이했던 의리84)를 붙이고자 하였는데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의 난처하다는 말 때문에 그만 두었습니다. 두 번째 발의는 예동(禮洞)의 김우(金友)가 계화도에서 재무를 관장하고자 했는데 아들 경부(敬父)와 다투어 정지하였습니다. 세 번째 발의는 영, 호남의 사람들이 다시 상의하려고 했는데 석농이 고함치고 손을 휘둘러 이루지 못했습니다. 네 번째 발의는 김석린(金錫麟)이 계화도에서 사고를 교정하려고 했는데 유희경이 당돌하다고 논척하여 이날까지 못했습니다. 천리와 인정이 ▦▦▦않고자 하여도 기세에 가려졌으니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같다는 것은 인심이 같은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억지로 똑같게 한데서 나왔습니다.호남에서는 걱정 없이 간행할 수 있다는 보장은 영남에서는 일제에 인가(認可)받는 근심을 넘어야 한다는 점에 비할 수 없으니 여막을 지키면서 간소를 설치하는 것은 의리에도 부끄러움이 없고 예에도 합당하니 이에 천리와 인정이 다시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 억지로 똑같이 한 것과 달리 참으로 인심이 똑같은 데서 나올 것입니다.석농이 대의(大議)를 말하고 순재가 업무를 맡았으니 누가 중망(衆望)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겠습니까? 간행하자는 논의를 낸 이는 본디 발인(發靷) 전 천백 인 중에 있었고 간소를 영남에 보내자는 이는 반우(返虞) 뒤 수십 인 중에 있었으며, 영남으로 사고를 보내는 경우는 선사의 친아들 정재[靜齋, 전화구(田華九)]도 미처 몰랐으니 아마 모두 동의하시는 가운데 끝내 동의하지 않는 분이 있고, 급박하지 않은 가운데 끝내 갑작스러운 점이 있는 듯합니다.지난 섣달의 경장(更張)은 과연 잘못된 거행이었으니, 도(道)로 스승을 섬기는 데 합당하였다면 과감하게 결정하여 속히 진행해야지 곧바로 다시 상의한 것은 과연 무슨 의도입니까? 사고를 받들어 전적으로 진행한다고 이미 편지에 썼다면 화합하는지 순응하는지를 막론하고 단지 신의를 지키려고 해야 하는데 끝내 예월(輗軏)의 경계85)를 면치 못한 것은 또 어째서입니까?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지엽(枝葉)이지 본질적인 논의가 아닙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국가의 일로 따지자면, 가령 반드시 임금을 떠난 뒤에야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경우 혹 그렇지는 않겠지만 임금을 따르며 나라를 보존하는 경우와 어찌 같겠으며, 가령 반드시 여막을 떠난 후에야 사고를 완성할 수 있는 일의 경우 혹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거양득(一擧兩得)으로 천리를 온전히 체득하고 인정을 두루 흡족하게 하는 경우와 어찌 같겠습니까?여러 공들께서 아마도 회답해주시리라고 밤낮으로 바란 지가 오래되었는데 답장에서 너희는 너희 갈길 가고 우리는 우리 갈길 간다는 결안(結案)이 갑자기 나올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저로 하여금 멍하게 어찌할 바 모르게 하니, 저희들이 이에 또한 더 이상 어찌하겠습니까? 그저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그동안 스승이 몸소 정리한 사고대로 묘재(墓齋)에서 간역을 시행하여 속히 활자로 인쇄하여 일을 끝마칠 계획입니다. 혹여 가르침을 어기고 제 멋대로 하는 점을 헤아리어 깊이 탓하지 않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某等白. 承十月惠覆, 以天理人情之今昔隱顯、先後異同, 反復詰喩, 旣以仰感, 指迷旋切, 愧悚莫省所謝也. 雖然, 鄙等竊以爲天理、人情, 固顯然底, 而氣之所乘, 有隱現之殊, 固同然底, 而時之所隨, 有異同之分也. 夫刊稿之擧, 旣在心喪三年內, 則設於靈前或墓下, 豈非天理人情之至當而峻發於議席哉? 初發而鄭友平彦之欲設於玄洞, 以寓古人築場之義也, 則爲石農難處之說而罷之: 再發而禮洞金友之欲爲掌財於華島也, 則爲其子敬父所爭而止之: 三發而嶺、湖諸人之欲再作商議也 則爲石農之所喝揮而未成: 四發而金錫麟之欲校稿於華島也, 則爲柳禧卿之斥以唐突而不得于斯時也. 天理人情 雖欲不▦, 爲氣勢所蔽, 而顯行得乎? 然則其所謂同者非人心之所同然, 出於不得已之强同也. 及其有湖刊之保無憂慮而不比嶺之涉於認累, 則守廬而設刊, 於義無愧, 於禮爲得, 於是乎天理、人情益復顯. 然而貳於向之强同者, 乃眞出於人心之同然也. 石農之發大議, 舜在之受幹務, 孰敢以爲不合衆望也? 但刊議之發, 固在於發引前千百人中, 而刊所之之嶺, 乃在於返虞後數十人中, 其送稿於嶺也, 至如先師親子靜齋, 而亦未及知, 則恐僉同之中, 終有未同者存也: 不遽之中, 終有卒遽者存也. 客臘之更張, 果涉錯擧, 則已如其合於以道事師也, 宜乎勇決而速行之, 其旋爲更商者, 果何意也? 奉稿專進, 旣筆之於書, 則勿論其洽和與順應, 但要信義之是守, 而竟不免輗軏之戒者, 又何也? 雖然, 此皆枝葉而非本之論也. 請以來書所喩國家事質之, 如必離君而後可存宗社, 則已或其未然, 孰若從君而存國也? 如必離廬而後可完稿事, 則已或其未然, 孰若一擧兩得而爲全體天理、周洽人情也乎? 諸公之庶幾回見, 日夜望之者久矣. 豈意其我邁爾征之結案, 忽發於盛敎也? 使人惘然而失圖也, 鄙等於此, 亦復奈何? 只得奉先師遺訓, 依前後稿親定本, 設役於墓齋, 亟圖活印而竣事矣. 倘蒙恕其違敎自專而不深罪之, 則幸甚. 자공이 시묘살이했던 의리 익산 현동은 전우의 초장지(初葬地)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지만, 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예월의 경계 예월은 수레와 우마(牛馬)를 연결해주는 장치인 멍에, 끌채 등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공자는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큰 수레에 예(輗)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이 없으면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신의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없다고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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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답함 병진년(1916) 答人 丙辰 보내신 편지에서, "사람은 태어나 성(性)이 똑같고 심(心)과 기질(氣質) 또한 본디 똑같은데, 다만 용처(用處)에서 심, 기질이 성을 주재하지 않아서 천년 동안 완전한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고, "본디 선한 심과 본디 맑은 기를 보존하여 용(用)을 가지런히 하여 체(體)와 합한다."라고 하셨는데, 제 견해는 이 부분에 속으로 헤아려볼 점이 있습니다."심, 성, 기질은 만인이 본디 같다."라고 한 이상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높고 낮은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처에서 심, 기질이 성을 주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용(用)이란 것이 과연 이것이 무엇이기에 모두 똑같은 셋 가운데서 차이를 스스로 만듭니까?예전에 이로 인하여 설을 얻었었습니다. 성은 무위(無爲)한 것이므로 순수하고 지극히 선하여 성인과 범인이 똑같은 바입니다. 심은 유위(有爲)한 기이니 본디 선하지만 흘러서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근본을 말하면 모두 똑같지만 말단을 말하면 다름이 있습니다. 기질에 이르면 기가 드러나 작용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근본은 청수(淸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음양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초기를 말했을 뿐이니, 유기(游氣)가 형질을 이룬 뒤에는 청탁(淸濁)과 수박(粹駁)이 만 가지로 고르지 않습니다.온갖 고르지 않은 물건으로 천하의 온갖 일을 대응하면 가벼이는 어긋나고 무겁게는 패악스러운 변고가 있을 터이고, 본디 선한 마음이라는 것도 따라서 직분을 잃어 순선한 성을 받들어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용처에서 성을 주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찌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용이 어긋나는 과실을 논하자면 기질의 구애(拘礙)로 심이 잘못 응대하게 되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주자께서 "부여받은 기질이 고르지 않아 성에 갖춰진 바를 알아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87)"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찰하여 사욕을 이기는 방도를 논하자면 모두 이 마음이 주인이 되어 반드시 기질을 따르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자께서 "학문하여 크게 유익한 것은 스스로 기질 변화를 구하려는 데 있다.88)"라고 하였습니다.그렇지만 기질이 사람에 따라 같지 않음은 마치 흙탕물은 맑은 층과 탁한 층이 다양하고 철이 섞인 은은 순정한 부분과 불순한 부분이 들쑥날쑥한 것과 같아서, 상지(上智)는 순은과 맑은 물이고 하우(下愚)는 질이 나쁜 철과 진흙덩어리입니다. 무도(無道)한 자들을 제외하고, 현자 이하로 천고에 위대하고 독실한 선비들 중에 평생 심력을 쌓아 변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고자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유기가 두터워 맑게 하지 못하여 더 이상 음양의 화생(化生)을 회복할 수 없게 됨을 끝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처음의 기는 그 성취를 궁구해보면 지극히 넓고 높고 정미하고 깊지만 끝내 약간의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다른 나머지들은 논할 겨를 없고 도량이 협소한 백이(伯夷), 공손치 않은 유하혜(柳下惠), 뛰어난 재기의 맹자(孟子)에 이르러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이로써 말하자면, 보내신 편지에서 본심과 본기를 보존하여 체에 합하고 용을 가지런히 하기 어렵다는 말씀이 더욱 분명합니다.【이하 빠짐.】 來喩謂: "人生性同, 心與氣質亦本同, 特於用處, 心、氣質之不宰於性, 而千載無完人." 又謂: "保其本善之心、本淸之氣, 齊其用而與體合." 淺見於此有商量于中者矣. 旣曰: "心、性、氣質, 萬人本同." 則宜無聖、狂高下之殊, 而又曰: "特於用處, 心、氣質之不宰於性" 所謂用者, 果是何物, 而自作差異於三者皆同之中也? 嘗因此而得其說焉. 夫性者, 無爲之物也, 故純粹至善而聖、凡之所同也. 心者, 有爲之氣也, 其本雖善, 而流或爲惡, 語其本則皆同, 語其末則有異也. 至於氣質則氣之克著, 而見於作用者也. 其本雖曰淸粹, 此以二氣化生之初而云爾, 逮夫游氣成質之後, 則淸濁粹駁, 有萬不齊. 將有萬不齊之物, 以應天下之萬事, 乃有輕差重悖之變, 所謂本善之心者, 從而失職, 而不能奉循乎純善之性. 來喩所謂用處之不宰乎性者 豈非此也? 蓋論用差之失, 則以氣質之拘而致心之錯應, 故朱子曰: "氣稟不齊, 不能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 論省克之方, 則都管此心作主而必令氣質聽順, 故張子曰: "爲學大益, 在自求變化氣質也." 雖然, 氣質之隨人不齊, 如帶泥之水淸濁多般、和鐵之銀純雜相錯, 上智之純銀․淸水、下愚之惡鐵․泥塊. 除是不道, 自賢者以下, 千古俊偉篤實之士, 積生平心力, 欲其化而入聖者, 何限, 而終無奈得乎游氣者重而澄淸不得, 無以復陰陽化生. 厥初之氣, 究其所就, 雖極博高精深, 終未免帶些氣質, 他餘不暇論. 至於伯夷之隘、柳下惠之不恭、孟子之英氣, 可知已. 末由此言之, 來喩所謂保本心、本氣, 而齊用合體之難者, 尤較然也.【以下缺】 부여받은……못한다 이는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인용하였다. 학문하여……있다 이는 《장자전서(張子全書)》 권12 〈어록(語錄)〉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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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1 卷之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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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득 종열 이관 일섭에게 드림 을해년(1935) 與崔以得宗烈 以貫一燮 乙亥 지난번 그대들의 형이 산려(山廬)에서 돌아왔을 때 총총히 지나쳐 가서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깁니다. 형은 홀로 묘에서 슬퍼하고 아우는 집에서 영혼을 받들어 선대의 업을 보존하여 형의 뜻을 안정시키니 일문의 세 효자가 자취는 다르나 마음은 같으니 어찌 찬탄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옛날 진백상(陳伯常)은 스스로 경작하면서 아우 평(平)은 자유롭게 학문하게 하여 끝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육자정(陸子靜) 형제는47) 여섯 사람인데, 세 사람은 집안일을 하고 세 사람은 유학을 하여 송나라의 명가(名家)가 되었습니다. 이제 양애(兩哀 어머니 상중인 두 형제)께서 형을 대신해 집안일을 다스려 형으로 하여금 예를 다하는 효자로 완성시키는 것은 가히 진씨와 육씨로 하여금 옛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진씨(陳氏)와 육씨(陸氏)는 반평생의 일이고, 그대들은 삼년의 일이니 오랜 세월 지속은 어렵고 짧은 세월은 쉬우니 그 차이가 어찌 현격하지 않겠습니까? 짧은 세월은 쉽지만 오랜 세월은 지속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인정입니다. 그러나 오래지속하기 어렵다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삼년 또한 오랜 세월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처음과 끝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서 형에게 선조를 받들면서 집안을 지키는 근심을 초래시킨다면 어찌 다시 진륙(陳陸)의 죄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순임금은 대성인임에도 그 신하가 오히려 오만하지 말라는 경계를 진언했습니다. 비록 그대들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의리상 일가나 다름없기 때문에 정을 쓰는 것이 부득불 여기에 이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디 이러한 마음을 깊이 헤아리기 바랍니다. 向自令兄山廬而歸, 悤悤戞過, 至今爲恨.兄專哀于墓, 弟奉靈于家, 保先業安兄意, 一門三孝, 迹殊心同, 豈勝贊嘆? 昔陳伯常耕, 縱弟平遊學, 終致卿相.陸子靜兄弟六人, 三人治産業, 三人遊學爲宋名家.今兩哀之替兄治家, 俾成盡禮之孝子者, 可使陣陸二氏不得專美於古也.雖然陳陸是半生事, 兩哀是三年事, 久近難易, 豈不懸乎? 但易暫而難久人情也.自其難久而言, 則三年亦長遠歲月.萬之一始終不克, 以致令兄奉靈保家之憂, 則豈不更爲陳陸之罪人乎? 夫以大舜之聖, 其臣猶進傲慢之戒.雖知兩哀之無是理, 誼同一家, 自不得不用情至此.幸幷深諒焉. 육자정(陸子靜) 형제 남송의 사상가인 육구연(陸九淵, 1139~1192)과 육구령(陸九齡, 1132~1180) 형제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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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관에게 보냄 병인년(1926) 與崔以貫 丙寅 이 일(학문의 길)은 모름지기 전일한 지극정성과 오랜 시간의 접속 공부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붙잡듯 한 연후에 성취가 있게 될 것입니다. 닭이 만약 둥지를 벗어나고 고양이가 혹 다른 곳을 본다면, 계란은 곧 부패하고 쥐는 곧바로 달아날 것입니다. 이제 그대가 둥지를 벗어나고 다른 곳을 본 것이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나는 아무래도 그대가 알과 쥐를 잃을까 걱정됩니다. 대저 질병이 오는 것은 성현도 면치 못한 것으로 비록 어찌할 바가 없으나, 이불을 안고도 덕을 성취한 것은 고인이 이미 능한 바이니 고인의 그러함이 또한 느낌을 일으킵니다. 그런 즉 병이 심하거나 조금 나은 중에 힘쓸 바를 알 수 있습니다. 듣자하니 그대의 질병이 차도가 있게 된지 몇 십일 되어서 먹지 못하거나 누워있는 데는 이르지 않아 여전히 문밖에 나가 손님을 맞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곳 청정하고 밝은 서창아래 사우(師友)와 서적(書籍)들 가운데로 오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완쾌되지 못한 증세를 보양하고, 한편으로는 혼우한 마음을 맑게 하지 아니합니까? 그리고 늘 먼지 나는 길거리 파리가 들끓는 좁은 집에서 농사이야기와 아이들 떠들썩한 곳에서 정신과 기운이 막혀 펴지 못하고 심지(心志)가 쇠퇴해 쓰러질 듯 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그대의 뜻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흑암으로 들어가서 유학이 진멸하게 된 것은 배우는 자가 싫어하는 것이 빌미가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가르치는 자가 게으른 소치입니다. 세상을 돌아보건대 자식을 가르치는데 정성을 다하는 자도 이미 많지 않거늘, 어찌 아우를 가르치는데 힘을 다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위에서 지탱해주고 아래에서 받쳐주어 배우는 자가 궁핍하지 않도록 그대의 형처럼 동서로 자문을 구하며 완비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우 된 자가 만일 진지한 정성과 접속한 공부를 써서 그 형의 마음을 체인하지 못한다면 아우노릇도 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학문의) 일은 그대에게 한 가지 무거운 짐으로 한 순간도 게으를 수 없는 것인즉 병든 몸을 부축하고 번뇌를 맛볼 즈음에라도 요컨대 마땅히 일삼아서 잊지 않는 뜻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형의 계란을 부화시키고 쥐를 붙잡으라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크게 마땅할 것입니다. 此事要須有一團眞至精誠, 長時接續工夫.如鷄抱卵, 如猫捕鼠, 然後有成.鷄若離窠, 猫或放視, 卵便腐而鼠便逸矣.今君之離窠放視, 不其久乎? 吾竊慮夫君之卵鼠也.夫疾病之來, 聖賢之所不免, 雖無如之何, 然擁衾而成德.古人之所已能, 亦可以興感.然則或劇或差之間, 可以知所勉矣.聞君之疾向蘇數旬, 不至於减食委床, 尙可以出門對客.則何不來此凈境明牕師友書籍之中? 一以調養未快之證, 一以澄淸昏擾之心? 長處乎巷蠅窩農談兒喧之間, 使神氣湮鬱而不宣, 心志委靡而欲頹, 誠不知其意所在也? 今世入長夜, 儒學殄滅者, 不但學者厭之之爲崇, 亦敎者倦之之攸致.環顧一世, 盡誠於敎子者, 已不多得.更安有竭力於敎弟, 上支下築, 學資不乏, 東咨西諏, 社事以完如令兄者乎? 爲弟者如不用眞至精誠接續工夫以體其兄之心, 雖謂不足爲人弟, 不爲過矣.此爲君一副重擔, 不容一息少懈者, 則雖於扶病喫惱之際, 要當有有事勿忘者存.以毋負父兄化卵獲鼠之望焉, 丕宜丕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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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487) 關王廟 삼분488) 당일에 영웅의 기풍 떨쳤는데 三分當日振英風사당489)이 어찌하여 이 곳에 있는가 廟貌胡爲在此中의기는 천년토록 산악처럼 무겁고 義氣千秋山岳重제향은 한 몸처럼 화이가 같아서라네 苾芬一體華夷同오나라 병탄과 위나라 섬멸은 평생의 뜻이요 呑吳殲魏平生志붉은 얼굴에 긴 수염490) 용모 변치 않았지 赤面長髥不改容동녘 땅의 비린내 먼지491)가 요즘 이러한데 東土腥塵如許日위령으로 큰 공적 드러내는 걸 어찌 아끼나 威靈何惜顯豐功 三分當日振英風, 廟貌胡爲在此中.義氣千秋山岳重, 苾芬一體華夷同.呑吳殲魏平生志, 赤面長髥不改容.東土腥塵如許日, 威靈何惜顯豐功. 관왕묘(關王廟) 삼국 시대 촉한의 명장으로 무안왕(武安王)에 추봉(追封)된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삼분(三分) 삼국 시대 유비(劉備)가 조조(曹操), 손권(孫權)과 중원을 삼분(三分)했던 형세를 말한다. 사당 원문의 '묘모(廟貌)'는 묘우(廟宇)와 신상(神像) 또는 진영(眞影)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관왕묘를 가리킨다. 붉은 …… 수염 관우(關羽)의 얼굴은 잘 익은 대추처럼 붉었고, 긴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공(美髥公)이라 불리었다. 비린내 먼지 원문의 '성진(腥塵)'은 누린내 나고 더럽다는 말로 오랑캐가 날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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