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孺人) 김씨(金氏) 묘갈명 –병서(幷序)- 孺人金氏墓碣銘【幷序】 내가 삼가 기억해 보건대 옛날 내가 겨우 10세가 되었을 때 선군(先君)께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를 계승하였고, 시집간 여자들도 현명함과 열행(烈行)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많았는데 근래에는 최준수(崔焌秀) 공 배언(拜言)의 배필이 된 너의 대고모(大姑母)가 특히 그렇다."라고 말씀하시고, 또 기억해 보건대 최씨 어른 아무개가 선군에게 "제가 어릴 적에 종숙모(從叔母)께서 남편이 병에 걸려서 허벅다리 살을 베어 낼 때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는 두려워서 떨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사람이 칼에 다쳐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 번번이 이전 일이 생각나서 기가 요동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선군이 말씀하신 너의 대고모와 아무개 어른이 말씀하신 종숙모가 바로 이 유인 김씨이다. 나는 나이가 어려 무지할 때였는데도 진실로 이미 선군 및 최씨 어른의 말씀을 마음으로 이해하였고, 장성해서는 이전에 듣지 못한 유인의 행실과 사적에 대해 더 듣게 되었다.대저 사람에게 아름다운 행실이 있으면 비록 시대가 멀고 교분이 소원하더라도 그를 위해 포양(褒揚)하고 논찬(論贊)하는 법인데, 하물며 내가 유인과 친족이고 시대가 가까움에 있어서이겠는가. 이에 글 한 편을 지어 후세에 전해 흠모하는 마음을 담으려고 한 지 오래였다. 어느 날 유인의 손자 최정렬(崔政烈)이 그의 선고(先考)가 지은 가장(家狀)과 송사(松沙) 기공(奇公 기우만(奇宇萬))이 기술한 유사(遺事)16)를 나에게 보여 주고 묘갈명을 청하니, 나는 이에 평소의 뜻을 이루게 된 것을 기뻐하여 사양하지 않고 행적을 서술한다.유인은 태어나면서 몸집이 풍만하고 컸으며 단정하고 장중하였다. 15세에 부친상과 조부 상을 함께 당했을 때는 슬픔을 극진히 하고 궤전(饋奠)을 정성스럽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최공에게 시집가서는 최공이 병을 많이 앓아 누차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유인의 정성스러운 간호에 힘입어 번번이 효험이 있었다.훗날 다시 병이 심해져 이미 혼절하였는데 유인이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었으나 효험이 없자 다시 손가락을 째어 또 똑같이 하니 점차 의식이 깨어나고 기가 회복되었다. 이에 오른쪽 허벅다리를 베어 탕을 끓여 올리니 회생하였다. 이윽고 공이 다시 위태로워지자 왼쪽 허벅다리를 베어 똑같이 하니 완쾌되어 10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50세에 남편 상을 당하고 장지가 20리 밖에 있었는데 여묘(廬墓)하려고 이미 상차(喪次)를 만들었으나 다른 사람이 "부인이 여묘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만두었다.시부모가 살아 계실 때 섬기지 못한 것을 항상 한으로 여겨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으니, 1년 동안 자주 뵙고 속절(俗節)과 생신에도 반드시 옷과 음식을 갖추어 올려 노년에 이르러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고비(考妣)의 기일에는 제물(祭物)을 마련해 보냈다. 아들 광각(光珏)이 요절하자 아내 고씨(高氏)가 수절(守節)하였는데 유인이 이를 가엾게 여겨 더욱 은의(恩誼)를 베풀고 고씨도 효성스럽고 공손하게 섬기니 고부(姑婦)가 서로 마음이 맞아 매우 사이가 좋았다. 광각은 최공의 전 배필의 소생이고 며느리도 시어머니보다 겨우 몇 살 어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유인이 며느리를 잘 대우하여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 더욱 삼간 것이다."라고 하였다.식견이 통명(通明)하여 사리(事理)를 말하면 대체(大體)를 알았고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의(義)에 맞는 견해를 잃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옛날의 서적이나 역사서에 기록된 어질고 효성스러운 인물의 일과 행실을 말하면 기쁘게 듣고 마음에 잊지 않았으며, 우리나라 명문가와 훌륭한 사람들의 계파에 이르러서도 모두 상세히 설명하였다.재산이 자못 넉넉하였는데 만년에 이를 담당할 사람이 없어서 전곡(錢穀)의 수량과 길사와 흉사에 드는 비용을 직접 관리하고 살펴 정연하게 조리가 있었다. 베풀기를 좋아하여 유인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리는 이웃 마을 사람이 10여 집이었다. 비복(婢僕)17)에게도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고 고르게 옷과 음식을 주니 모두 부인을 경애하고 우러르며 경외하여 복종하였다. 고종 정해년(1887, 고종24) 12월 26일에 졸(卒)하였으니, 태어난 순묘(純廟) 신사년(1821, 순조21) 8월 19일부터 누린 수명이 67년이다. 묘소는 옥산(玉山) 뒤 해좌(亥坐) 언덕에 있다.김씨의 본관은 부령(扶寧 부안(扶安))이다.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구(坵)는 도덕과 문장으로 고려 때 이름이 드러났다. 고려 말기에 군사(郡事) 광서(光叙)는 망복(罔僕)의 절개18)를 지켰다. 본조에 들어와 매죽당(梅竹堂) 종(宗), 죽계(竹溪) 횡(鋐)은 도학(道學)으로, 참봉(參奉) 정길(鼎吉)은 충의(忠義)로 모두 세상에 알려졌으니, 유인의 8세 이상 선조이다. 조부 인성(麟成)은 효성으로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부친 유죽헌(幽竹軒) 석규(錫圭)는 비범한 자질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다. 모친은 여산 송씨(礪山宋氏) 석현(錫顯)의 따님으로 도봉(道峰) 세정(世貞)의 후손이고 효부(孝婦)로 알려졌다. 대개 유인 같은 분이 태어난 데에는 진실로 가문과 관계가 있다.최씨는 전주(全州)의 명망 있는 종족으로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다. 본조의 증(贈) 참판 덕촌(德村) 희정(希汀)은 학행(學行)과 충훈(忠勳)이 있었고, 그 후손은 대대로 충효를 서로 계승하였다. 유인은 덕촌의 12세손부(世孫婦)가 되었으니 유인이 시집간 곳이 또한 마땅함을 얻었다.아들 한 사람과 딸 네 사람을 낳았는데 아들은 병성(秉星)이고, 사위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인 행주(幸州) 기우번(奇宇蕃),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울산(蔚山) 김요경(金堯敬),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손인 연일(延日) 정해심(鄭海心), 하서의 후손인 울산 김만주(金晩柱)이다. 손자는 광각의 양자로 나간 경렬(暻烈), 희열(喜烈), 정렬(政烈), 진열(鎭烈), 성렬(成烈), 승렬(承烈)19), 호열(鎬烈)이다. 외손은 기준도(奇駿度), 김흥중(金興中)․김현중(金玄中)․김택중(金宅中), 정영원(鄭榮源)이다.아, 유인의 실제 행적은 유사와 천장(薦狀) 및 《삼강록(三綱錄)》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진실로 나 같은 친족의 말은 필요 없다. 오직 여러 번 그치지 않고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다리를 베어 낸 일은 남편을 섬기는 큰 절조인데 선배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헤아려 보면 또 도를 아는 군자는 어떻게 볼지 모르겠다.그러나 내 생각에 이 말은 자식이 이효상효(以孝傷孝)20)하는 경우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부인이 남편에 대해서는 의(義)를 위주로 삼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未亡人)이라 칭하니, 이는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했다는 말이다. 죽는 것도 오히려 당연한데, 하물며 남편을 위해 몸은 훼손해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어버이를 위하는 것과 남편을 위하는 것의 차이를 정할 수 있으며, 유인의 행실이 순수했음을 볼 수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위해 열행 있었으니 孝親烈夫이것이 유인의 큰 행적이네 是其大者은혜로운 덕과 밝은 식견 지녔으니 德惠識明온갖 선이 갖추어졌도다 衆善備也옛날의 명철한 부인과 비교하면 視古哲媛유인은 이러한 반열에 들리라 若是之班누가 묘갈명을 지었는가 誰其銘墓이 귀손21)이 지었네 有玆歸孫행여 아첨하지 않았으니 庶不阿好내 말을 믿을 수 있으리 可信其言 澤述竊記昔甫就傅時, 先君有言, 曰: "吾家世以文學行義相繼, 女適人亦多以賢烈聞, 而近則汝大姑爲崔公焌秀拜言之配者尤焉。" 又記崔丈某氏語先君曰: "吾少日適見從叔母, 夫病刲股時, 血淋漓狀, 恐懼戰栗不已。自後見人刀傷血流處, 輒思前事, 氣爲之動。" 先君所稱汝大姑, 某丈所稱從叔母, 卽此孺人金氏。余在幼騃, 固已心識先君及崔丈語矣。及長, 益聞孺人行治之前所未聞者矣。夫人有懿行, 雖在時遠而分疎, 尙爲之欽賞而論贊, 况余於孺人, 爲屬之親時之近者乎! 思欲立一文, 傳後而寓慕者久矣。日, 孺人孫政烈, 以其先考撰家狀、松沙奇公述遺事1)示余, 而請墓銘, 余乃喜遂素志, 不辭而敘之。曰: 孺人生而豊偉端莊, 年十五遭父祖偕喪, 能盡哀慽誠饋奠, 人咸異之。及歸崔公, 崔公多病累濱危, 賴孺人誠救輒效。後復病革旣絶, 孺人斷指注血, 無效, 再裂指亦如之, 漸覺氣復, 於是割右股湯進, 回甦。已而復危, 割左股亦如之, 乃得快復以延十年之壽。五十當晝哭, 葬在二十里外, 欲廬墓, 已作喪次, 人以爲"婦人廬墓, 非禮", 遂止之。常以不逮事舅姑爲恨, 專誠事母, 一歲累覲, 俗節晬辰, 必具獻衣食, 至老不倦, 考妣諱辰, 備送粢牲。子光珏夭, 妻高氏守義, 孺人憐之, 加以恩誼, 高亦事以孝謹, 姑婦相得甚宜。光珏, 崔公前配出, 婦又少姑僅數歲, 人皆稱"孺人之善視其婦, 以致事姑愈謹"。識解通明, 談事理知大體, 遇事難決處, 不失義見。人言往古書史賢孝事行, 喜聞而心不忘, 至於我東名家先德派系, 亦皆詳說之。貲産頗饒, 而晩年無人幹當, 錢穀之數, 吉凶之費, 親自管視, 井井有條。喜施與, 鄰里待而擧火者十數家。於俾・(婢)僕, 幷施恩威, 均給衣食, 無不愛戴而畏服者。高宗丁亥十二月二十六日卒, 距其生純廟辛巳八月十九日, 壽六十七。墓在玉山後亥坐原。金氏貫扶寧。平章事文貞公坵, 以道德文章顯于麗。麗季, 郡事光敘, 守罔僕之節。本朝梅竹堂宗、竹溪鋐, 以道學; 叅奉鼎吉, 以忠義, 俱聞於世, 孺人八世以上。祖麟成, 孝聞表宅。考幽竹軒錫圭, 有異資純行, 妣礪山宋氏, 錫顯女, 道峰世貞后, 以孝婦聞, 蓋其所生固係於世類。崔氏全州望族, 文成公阿后。本朝贈叅判德村希汀, 有學行忠勳, 其後世以忠孝相承。孺人爲德村十二世孫婦, 則其所歸亦得宜矣。擧男一人、女四人, 男秉星, 女壻幸州奇宇蕃, 蘆沙正鎭孫; 蔚山金堯敬, 河西麟厚后; 延日鄭海心, 松江澈后; 蔚山金晩柱, 河西后。孫暻烈, 光珏系男, 喜烈、政烈、鎭烈、成烈、▣◀(承)烈、鎬烈。外孫奇駿度、金興中․玄中․宅中、鄭榮源。嗚呼! 孺人實蹟, 具載遺事、薦狀及《三網之錄》, 固無待乎親屬如余者之言。惟是斷指刲股, 再四而不已者, 爲事夫大節, 而揆以先輩所論不一, 則又未知知道君子作如何觀? 然余則以爲此以人子以孝傷孝者言。若婦人之於夫則主義, 故夫死, 稱未亡人, 謂其當死而不死也。死且猶當, 况於其夫, 行毁不至死之事者, 不亦宜乎? 斯可以定爲親爲夫之異, 而見孺人之行純也。銘曰: 孝親烈夫, 是其大者。德惠識明, 衆善備也。視古哲媛, 若是之班。誰其銘墓? 有玆歸孫。庶不阿好, 可信其言。 송사(松沙)……유사(遺事):《송사집(松沙集)》 권49에 실려 있는 〈유인 김씨 유사(孺人金氏遺事)〉를 가리킨다. 비복(婢僕):원문은 '俾僕'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俾'를 '婢'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망복(罔僕)의 절개: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절개를 뜻한다. 상(商)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기자(箕子)가 "상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하와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승렬(承烈):원문은 '▣烈'이다. 《송사집》 〈유인 김씨 유사〉에 근거하여 '烈' 앞에 '承'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효상효(以孝傷孝):효성이 지극한 나머지 부모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지나치게 하여 병이 나거나 죽는다는 뜻이다. 귀손:여자가 자신의 조카의 아들을 칭하는 말이다. 《爾雅 釋親》 孺人金氏遺事 松沙先生文集卷之四十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