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고(祖考) 우신재 부군(又新齋府君) 묘표 –경진년(1940)- 祖考又新齋府君墓表【庚辰】 부군의 휘는 경순(景淳)이고, 자는 명헌(明憲)이며, 우신재는 호이다. 우리 김씨는 고려 이부 상서(吏部尙書) 휘 경수(景修)를 시조로 삼으니 부령(扶寧 지금의 부안(扶安))을 본관으로 삼은 이유는 상서공의 아들 휘 춘(春)이 부령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그 후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가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세상에 크게 알려졌으니 불교와 오랑캐를 배척한 것은 천추에 공이 있다. 아들 형부 상서(刑部尙書) 충선공(忠宣公) 휘 여우(汝盂)가 가학을 계승하고 국가에 공훈이 있어 동방의 명족(名族)이 되었다. 5세를 내려와 고부군사(古阜郡事) 휘 광서(光叙)에 이르러서는 고려가 망하자 의리상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하여 팔판동(八判洞)63)에 들어가 은거하였다가 후에 관향(貫鄕)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는데 자손이 그대로 그곳에 살았다.이 분이 휘 취({玉+就})를 낳았으니 본조에 들어와서 직장(直長)을 지냈다. 이 분이 휘 보칠(甫漆)을 낳았는데 16주(州)의 수령을 두루 맡고 도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으니 관직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2세를 내려와 휘 종(宗)은 생원(生員)이니,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뒤 은거하여 강학(講學)하면서 조정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고, 호는 매죽당(梅竹堂)이다. 다시 2세를 내려와 휘 횡(鋐)은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생원시에서 2위를 차지하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호는 죽계(竹溪)이다. 사림(士林)에서 추모하여 유천서원(柳川書院)에 모셔 제향(祭享)한다. 이 분이 휘 정길(鼎吉)을 낳았는데 역시 학행으로 참봉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다. 이 분들이 부군의 8세조 이상이다.6세조인 통덕랑(通德郞) 휘 세광(世光)이 처음 고부에 거처하였다. 조부 휘 인성(麟成)은 효로 정려(旌閭)되었으니,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부친 휘 석규(錫圭)는 식견이 넓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나 일찍 별세하여 드러나지 못했다. 모친은 여산 송씨(礪山宋氏) 석현(錫顯)의 따님으로 도봉(道峰) 세정(世貞)의 후손이다. 효행과 열행(烈行)으로 모두 알려졌다.부군은 순조(純祖) 을유년(1825, 순조25) 11월 24일에 태어났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조부의 복까지 중첩해 입고 승중(承重)하여 슬픔을 지극히 하여 어른처럼 상제(喪制)를 지켰다. 또 모부인이 여러 달 중한 병을 앓을 때는 밤마다 북두성에 간절히 기도하니, 이웃 마을에서 진실한 효도라고 감탄하며 칭찬하였다.이미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성심을 다하여 뜻을 어기지 않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드렸으니, 대체로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고 온청(溫凊)을 알맞게 하는 것으로 간략한 예절이었다. 이 때문에 모부인이 항상 칭찬하기를, "효성스럽구나, 내 아들아! 나는 일찍 과부가 되었고 또 매우 가난하지만 효도에 편안하여 걱정이 없구나."라고 하였다.부군은 고조의 종통을 계승하였기에 남은 유산이 자못 넉넉하였으나 일찍 고아가 되어 집안일을 담당하지 못한 탓에 전부 숙부의 차지가 되어버려 수전(水田) 6마지기만 남고, 조부의 묘지와 여러 대 조상을 제사 지낼 제수(祭需)를 마련하는 것도 거절을 당하였다. 열 식구가 죽만 먹으면서 온갖 고생을 겪었으나 원망하는 말은 전혀 없고 도리어 새 터에 거처를 정해 부부가 서로 가계를 다스려 농사에 힘쓰고 길쌈을 부지런히 하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끼니 20년 사이에 형편이 조금 여유로워졌다.소싯적부터 같은 고을의 유사(儒士)인 옥계(玉溪) 김문규(金文奎) 공에게 나아가 수학하여 일찍 본원의 공부가 있었다. 거처를 정한 날에 《대학》 반명(盤銘)64)의 뜻을 취하여 '우신(又新)'이라 서재에 편액하고 "은거가 좋다는 것 일찍 알았는데 오늘에야 새로운 곳에 거처 정하였네. 명리(名利) 구하는 일에 마음 없으니 우리는 안빈(安貧)할지어다.[早知潛跡好 今日卜新隣 無心名利事 吾輩固窮貧]"라는 시를 짓고는 더욱 학문에 전심하여 부지런히 힘써 확연하게 날로 얻는 바가 있고 성대하게 달로 진전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홍릉(洪陵) 4년 정묘년(1867, 고종4) 2월 21일에 갑자기 졸(卒)하였으니 누린 수명이 43년에 그쳤다. 이때 나의 선고는 9세였다.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달천리(達川里) 뒤쪽 선영 아래 병좌(丙坐)에 장사 지냈다.부인은 영광 김씨(靈光金氏) 통정대부(通政大夫) 택려(宅麗)의 따님이자 순절신(殉節臣)인 대호군(大護軍) 해(該)의 9세손이다. 부인의 덕에 어긋남이 없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으니, 남편 상을 당한 뒤에도 조상의 제사를 공경히 받들고 정성껏 자손을 가르쳐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일남 낙진(洛進)은 학행이 있었고 유집(遺集)이 간행되어 배포되었다. 장녀는 광산 김재호(金在浩)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의성(義城) 김귀재(金貴載)에게 시집가 열행이 있으니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막내딸은 함안(咸安) 조기용(趙琪鏞)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택술(澤述), 봉술(鳳述), 만술(萬述), 억술(億述)이고, 손녀는 광산 김재봉(金在鳳), 고흥(高興) 유동기(柳東起)에게 시집갔다. 희현(熺鉉), 태현(泰鉉)과 밀양(密陽) 박진엽(朴鎭燁), 제주(濟州) 고동희(高東晞), 의성 김달우(金達宇)에게 시집간 딸은 맏사위의 자녀이다. 진렬(鎭冽)은 둘째 사위의 양자이고, 딸은 파평(坡平) 윤상국(尹相國), 광산 김오수(金鰲洙)에게 시집갔다. 제원(濟元), 제선(濟善)과 연일(延日) 정천원(鄭天源), 강진(康津) 김환복(金煥復), 광산 이주성(李周星), 전주(全州) 이▣▣(李▣▣)에게 시집간 딸은 막내 사위의 자녀이다. 형복(炯復), 형태(炯泰), 형관(炯觀), 형겸(炯謙), 형귀(炯龜), 형수(炯洙), 형락(炯洛), 형방(炯坊), 형식(炯湜), 형주(炯澍), 형호(炯濩), 형부(炯溥)는 증손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부군은 효제(孝悌)하고 충후(忠厚)한 성품을 지니고, 순수하고 신중하며 바르고 장중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정밀하고 상세하며 명민한 재주를 가졌고, 조심하고 부지런히 힘쓰는 공부가 있었다. 평소 마음을 쓰고 행실을 단속하는 것은 모두 이 네 가지를 체용(體用)으로 삼아 하늘이 규정한 예법과 유문(儒門)의 법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드물었는데 지금 하나하나 논할 겨를은 없다. 또 무릇 효란 모든 행실의 근원이고 인(仁)을 행하는 근본인데 부군은 이미 이를 극진히 하였으니 도가 이로부터 생겨났음을 의당 알 수 있다. 그러니 또 어찌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지난 계미년(1883)에 선고께서 부군의 효행을 들어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上言)하여 갑신년(1884)에 정려(旌閭)의 은전을 받았으니 일이 《삼강록》에 실려 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족려기(族閭記)〉를 지어 준 것도 유감이 없을 만하다. 그러나 감개가 드는 점이 있다. 지파(支派)가 종파(宗派)의 가산을 차지하는 짓이 어찌 사람이 할 일이겠으며, 또한 어찌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부군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하였으니 비록 옛날 일에서 찾아보더라도 그에 짝하는 일이 드물다.일찍이 듣건대 "음덕(陰德)이 있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보답하되, 살아서 보답을 받지 못한 사람은 복이 응당 그 후손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이미 살아서는 부귀영화를 보지 못하고, 40여 세에 별세하였으며 외아들이 어렸다. 후손으로 말하면 나의 선고는 수명이 겨우 중년(中年)으로 그쳤고 나의 형제와 자손 중에는 가문을 번창하게 할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는 부군의 덕이 생전이나 사후에 하나도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는 어떤 법을 따른 것인가. 삼가 통한을 이기지 못한다.예전에 현감 이정직(李定稙) 공이 지은 묘표가 있는데 소략한 문제가 있기에 삼가 다시 완성된 글에 근거해 거의 조금이나마 상세하게 하여 훗날 이것으로 비석 뒷면에 새기게 한다.경진년 2월 부군의 기일을 10일 앞둔 날에 손자 택술이 삼가 짓는다. 府君諱景淳, 字明憲, 又新齋, 號也。我金氏以高麗吏部尙書諱景修爲始祖, 其籍扶寧者, 以尙書公子諱春封扶寧君也。其後平章事文貞公諱坵, 以道學文章大顯于世, 斥佛劾胡, 功存千秋。子刑部尙書忠宣公諱汝盂, 繼家學有國勳, 爲東方名族。五傳至古阜郡事諱光叙, 而麗亡則義當罔僕, 入八判洞遯跡, 後歸貫鄕而終, 子孫因家焉。生諱[王+就], 入本朝直長。生諱甫漆, 歷典十六州, 討賊有功, 官至僉知。再傳而諱宗, 生員, 己卯禍後, 隱居講學, 不就徵辟, 號梅竹堂。又再傳而諱鋐, 進壯生二, 學行薦爲叅奉, 號竹溪。士林追慕, 立祠柳川。生諱鼎吉, 亦以學行爲叅奉, 丙子亂擧義旅。是爲府君八世以上。六世祖通德郞諱世光, 始居古阜。祖諱麟成, 以孝旌閭, 事載《三綱錄》。考諱錫圭, 識博行敦, 早世不彰。妣礪山宋氏, 錫顯女, 道峰世貞后, 孝烈俱著。府君生以純祖乙酉十一月二十四日。十一歲遭外艱, 疊服祖考, 承重致哀, 持制如成人。又當母夫人累朔沈疾, 每夜深禱北辰, 隣里歎賞誠孝。旣早失怙, 專誠養母, 以不違志, 遂所欲爲, 大致則甘旨之備、溫凊之適。乃疏節也。以故母夫人常稱之曰: "孝哉吾子也! 吾早寡且貧甚, 而安其孝, 無虞矣。" 府君爲繼高祖之宗, 世業頗饒, 而早孤未幹家, 盡爲叔父所占有, 只存水田六斗種落, 亦斥營祖考墓地、累代粢盛。十口饘粥, 備嘗艱苦, 而絶無怨言, 乃卜居新基, 內外交治, 明農勤績, 節食縮衣, 二十年間調度稍裕。自少從同郡儒士玉溪金公文奎學, 早有本源工夫, 卜居之日, 取《大學》盤銘義, 扁齋以"又新", 有詩曰: "早知潛跡好, 今日卜新隣。無心名利事, 吾輩固窮貧。" 尤專意學問, 俛焉孜孜, 犁然日有所得, 沛然月有所進, 而遽以洪陵四年丁卯二月二十一日卒, 壽止四十三。時我先考九歲。葬于井邑郡德川面達川里後先塋下丙坐。配靈光金氏, 通政宅麗女, 殉節臣大護軍該九世孫。配德無違, 治家有法, 晝哭後, 敬承宗祀, 誠敎子孫, 樹立門戶。一男洛進, 有學行, 遺集刋布。女長適光山金在浩。次適義城金貴載, 有烈行, 載《三綱錄》。季適咸安趙琪鏞。孫澤述、鳳述、萬述、億述, 女光山金在鳳、高興柳東起。熺鉉、泰鉉, 密陽朴鎭燁、濟州高東晞、義城金達宇, 長壻男女。鎭冽次婿繼男, 坡平尹相國、光山金鰲洙, 其女。濟元、濟善, 延日鄭天源、康津金煥復、光山李周星、全州李▣▣, 季婿男女。炯復、炯泰、炯觀、炯謙、炯龜、炯洙、炯洛、炯坊、炯湜、炯澍、炯濩、炯溥, 曾孫也。餘不錄。嗚呼! 府君有孝悌忠厚之性, 有淳謹端莊之資, 有精詳明敏之才, 有戰兢勤勵之功, 平生宅心制行, 皆以是四者爲體用, 鮮有不槩乎天秩之禮、儒門之規者, 今不暇枚論。且夫孝, 爲百行之源、爲仁之本, 府君旣盡此, 則道自此生, 宜可知矣, 又何待於論? 往在癸未, 先考擧府君孝行, 上言駕前, 甲申蒙旌閭之典, 事載《三綱錄》。艮齋田先生愚, 撰〈族閭記〉, 亦可以無憾矣。抑有所感慨者, 支占宗業, 豈人所爲? 亦豈人所堪? 然而府君不惟不以爲事, 幷不使人知有其事, 雖求之於古, 亦罕其儔。嘗聞有陰德者, 天報以福, 生不食報者, 應在其後。然而府君旣生, 不見富榮, 沒于强年, 而一子幼。其在於後, 則我先考, 壽僅中身, 不肖兄弟子姪, 無一人賢能以昌門戶者, 是則府君之德, 於前於後, 一不見報矣, 是遵何典? 竊不勝痛恨也已。舊有縣監李公定稙所撰墓表, 而病其疎略, 謹更據成文, 而庶得稍詳, 俾後日以是刻于碑陰。歲次庚辰二月府君諱辰前十日, 孫澤述謹撰。 팔판동(八判洞):〈송암 김공 묘표(松菴金公墓表)〉에는 팔판시동(八判寺洞)이라 되어 있다. 서희순(徐憙淳)이 편찬한 개성부(開城府)의 읍지인 《송경지(松京誌)》에 팔판시동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개성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고 고려 신하 8인이 이곳에 들어와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반명(盤銘):탕(湯) 임금의 반명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2장에 "하루 새로워졌으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