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제 행원 효술에게 답함 갑인년(1914) 答族弟行源 孝述 甲寅 과오만 날로 쌓인다는 말은 휘겸(撝謙)110)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학문을 근심하는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상성(上聖)111)이 아니니 누가 과오가 없겠습니까? 오직 고치는 것이 어렵고 두 마음 갖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이제 학인(學人)이 종신토록 독실하게 공부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이겠습니까? 그 과오를 고쳐서 다시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 과오를 짓지 않는 경지를 지나가면 곧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청컨대 과오가 쌓인다는 이유로 한갓 근심과 걱정을 품지 말고, 더욱 모름지기 심지를 크게 하고 마음속을 너그럽게 하십시오. 독서를 익숙하게 하며 함양을 두텁게 하여 맹렬히 성찰하고 진실 되게 실천하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참됨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하면112) 그 과오도 참되게 될 것이며, 쌓인 것도 사라지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쾌활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후세로 올수록 운수가 쇠퇴하여 인물이 묘연하니 집안의 자제로서 좋은 자리를 품수 받아서 가히 유학의 도를 짊어질 자가 참으로 적습니다. 만약 모처에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식량을 전대에 싸고 발을 묶어서 가서 만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이제 아우 행원은 명민한 자질과 강의(剛毅)한 바탕을 지녔으니 이 도를 짊어질 수 없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근자에 우리 가족 가운데서 이런 현자를 보게 되니 그 환희와 다행스러움이 어찌 단지 입에서 나올 뿐이겠습니까?113) 오직 바라건대 힘써 더욱 노력하여 높은 덕을 세우고 넓은 공업을 닦아서, 안으로는 가문의 명망을 더욱 번창하게 하고, 밖으로는 세도(世道)를 구축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게 하십시오.나 같은 사람은 옛날에 일찍이 외람되게 수사(洙泗)의 근원을 탐색하고 염락(濂洛)114)의 흐름을 따라서 7척 되는 작은 몸을 가지고도 수많은 성현들의 지극히 무거운 도를 감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풍수(風樹)115)의 환난을 만나서 혼백을 잃고 많은 식구들의 먹고 마시는 것을 마련하느라 손발이 부르트고 못이 박혀서 나이가 장년인데도 마음이 먼저 쇠퇴하였고 늙기도 전에 정기가 이미 짧아졌습니다. 그래서 매번 경서를 마주하여 완미하고 뜻을 찾을 때마다 새로 아는 것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옛날에 본 것까지 잇달아 잃게 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이제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니 학문과 살림하는 일을 합쳐 한 가지 일만 하라고 알려주시니, 이것은 진실로 지극한 논의라 참으로 알아서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일이 있으니 옛날의 성인으로서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경우 몸소 생업을 다스렸다는 분을 듣지 못했습니다. 비록 있었더라도 어찌 우리들처럼 아래로 일반 백성들과 동일하게 몸을 땀으로 적시고 진흙으로 발을 더럽히는 경우가 있겠습니까?아관(兒寬)116)처럼 경서를 끼고 호미질을 하는 경우와 동생(董生)117)과 같이 낮에 밭 갈고 밤에 책 읽는 경우는 그들의 지조가 견고하여 족히 천년 후의 사람들을 감동시켰지만 끝내 대도(大道)를 들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공맹과 정주를 기약했던 것이 이제는 마침내 아관과 동생의 무리가 되는 것에 그쳤으니 이것이 가히 크게 한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독서와 농사를 아울러 행하는 자를 능히 독행(篤行)이라고 일컫는 것은 가하지만 능히 도를 알았다고 일컫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118) 대저 학문하는 도리는 식견이 우선이고 팔조(八條)의 우선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으뜸입니다. 때문에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익숙히 읽고 넉넉히 생각하여 여유를 두고 맘껏 학문하여 천하의 이치를 궁구하고 천하의 변화를 곡진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실제적인 일에 증험하여 좌우에서 그 근원을 맞닥뜨리지 않음이 없으니,119) 이를 아는 것을 일컬어 도(道)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내 한 사람의 신분으로 독서와 농사의 힘을 나누게 되어 일찍이 하루하루 편하게 앉아 감투할 겨를이 없이, 한 가지 이치를 궁구하고 연구하여 자득한 흥취를 못 보게 되니, 그 도를 아는데 또한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미 도리를 알지 못하게 되면 일상생활에 행하는 바가 끝내 곁길로 떨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어, 그 이른바 독행이라는 것도 끝맺음을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더욱 한스럽습니다.대개 인사는 기필할 수가 없고 기회는 놓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내가 절굉(折肱)120)하여 스스로를 징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그대에게 말씀을 드리니 한가할 때 더욱 채찍을 가하여 하루에 천리를 가도록 하십시오. 그대가 논하여 "제위(諸位)의 묘사(墓祀)121)에서 같은 날 함께 천향(薦享)122)하는 것은 불경스럽고 게을러서 선조를 공경하는 체제에 손상됨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옳고 옳습니다.123) 이것이 곧 부자(夫子)가 이른바 "체제에서 관주한 이래로 내가 보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124) 나도 또한 종전에 이 점을 불안하게 여겼지만 개정하자는 의론을 감히 발의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나의 행실이 평소에 비루하고, 나이가 낮아서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뒤로 쳐졌기 때문입니다.이제 우리 행원(行源)이 비로소 발의하게 되었으니 우리 행원의 그 선조를 공경하는 절실함과 의에 옮겨 실천하는 용기125)는 평범한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자가 말한 바, "적손이 차례대로 연일 제사를 행하자"고 하신 말씀은, 종묘의 위패가 훼철되지 않는 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친족관계가 다해서 묘지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거기에서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가문의 오늘날의 일로 논하건대, 제위의 자손들이 각각의 조상을 제사지내되, 종파(宗派)와 지파(支派)의 선후를 구애받지 말고, 아울러 날짜의 고르지 못한 것도 관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갑위(甲位)의 자손은 갑위에게 성의를 다하고, 을위(乙位)의 후손은 그 을위에게 정성을 다하면, 그 정례(情禮)의 올바름을 얻고 또한 인사에 있어서도 어려운 점이 없습니다. 나의 뜻은 이미 그대의 뜻과 대체로 서로 부합되니 자세하게 설파하진 않겠습니다. 행여 부디 문중이 모인 날에 모름지기 이 뜻을 가지고 들러서 완곡하게 어른들 앞에서 진달하여 기어이 듣고 따라서 실행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일시에 편리함만을 취하는 습속을 씻고, 백세(百世) 후에도 예(禮)를 다하는 규범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오늘에 달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성대한 거사가 아니겠습니까? 過誤日積, 認出撝謙, 而亦可以見憂學之勤也.然人非上聖, 孰無過誤.惟改之爲難, 不貳爲尢難.今夫學人終身慥慥者, 欲何爲也.改其過誤, 不復作爾, 過此便沒事.請勿以過誤之積, 徒懷憂疚, 更須大心志寬胸次.熟讀書厚涵養, 猛省察實踐履.如此眞積力久, 則過者其誠矣, 積者其消矣.豈不大快活乎.世降運衰, 人物眇然, 人家子弟, 禀得好資質, 可能負荷此道者絶少.如曰某處有斯人焉, 孰不欲槖糗裏足而往見之哉.今行源明敏之資, 剛毅之質, 不可謂不任此道者.而乃近於吾族見之, 其歡喜慶幸, 豈啻若自其口出哉.惟願勉加努力, 立崇德修廣業, 內而昌族望, 外而扶世道, 用副區區之望也.如澤述者, 昔嘗妄擬探洙泗之源, 浯濂洛之派, 將七尺眇然之軀, 任千聖至重之道.一朝風樹, 喪魂遞魄, 百口喫着, 胼手胝足, 年壯而心先頹, 未老而精已短.每對經玩索, 不惟新知之無得, 幷與舊見而隨失, 豈不哀哉.今承惠書, 乃以學問治産, 合爲一道見喩, 此誠至論, 固知佩服.但所恨者則有之, 古之聖賢, 如孔孟程朱, 未聞有躬治産業者也.雖或有之, 豈至如吾輩之下同編氓, 沾體塗足乎.若乃兒寬之帶經而鋤, 董生之朝耕暮讀, 其志操堅確, 足以感人於千載, 而未聞其終聞大道也.向之自期乎孔孟程朱者, 今究不過作兒董之流而止, 則此非大可恨者耶.故吾嘗曰書農兼治者, 謂之能篤行則可, 謂之能知道則未也.夫學問之道, 識見爲先, 八條之敎, 格致居首.故古之君子, 必熟讀剩思, 優遊厭飫, 窮天下之理, 盡天下之變.然後驗之行事, 無不左右逢其源, 此之謂知道.今乃以一人之身, 分力於書農, 曾無一日安坐講討之暇, 不見一理窮硏自得之趣, 其於知道不亦遠乎.旣不知道, 則日用所行, 終不免旁蹊之墮, 而其所謂篤行者, 安能保其克終乎.是又重可恨也.蓋人事不可必, 機會不可矣.此皆鄙所折肱而自懲者, 故聊以奉似, 幸於無事之時, 益加鞭策一日千里也.所論諸位墓祀, 同日幷薦, 煩褻懈怠, 有傷敬先之體者, 極是極是.而此正夫子所謂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者也.區區亦從前不安於此, 而不敢發改正之議者, 誠以行卑年淺而自後也.今得吾行源而始發之, 其敬先之切, 徙義之勇.匪夷所及也.然朱子所云, 嫡孫次第連日行祭, 此以宗未毁者言之.則初非擬論於親盡墓祀者.只以吾門今日之事論之, 諸位子孫, 各祭其祖, 不拘宗支派先候, 幷不關日子參差.甲位之孫, 盡其誠于甲位, 乙位之孫, 盡其誠于乙位, 則其於情禮, 旣得其正, 而亦無人事之難便矣.鄙意旣與高見大槩相符, 不須細破.幸於門會之日, 須將此意, 宛轉委曲, 陳達於長老前, 期於聽從而實行焉, 則洗一時取便之習, 立百世盡禮之規, 亶在於今日矣.豈非盛擧乎. 휘겸(撝謙) 겸손을 이른다. 《주역》〈겸괘(謙卦) 육사(六四)〉에 "겸손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無不利, 撝謙.]" 하였는데, 그 전(傳)에 "휘(撝)는 펴는 상(象)이니, 사람이 손으로 펴는 것과 같다. 동식(動息)하고 진퇴(進退)함에 반드시 겸손(謙巽)함을 펴야 한다.〔撝, 施布之象, 如人手之撝也. 動息進退, 必施其謙.〕" 라고 하였다. 상성(上聖) 으뜸가는 성인이다. 후한의 공융은 조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 임금은 천종의 술이 아니면 태평 시대를 세울 수 없었고, 공자는 백고의 술이 아니면 지고의 성인이 될 수 없었다.〔堯不千鍾, 無以健太平, 孔非百觚, 無以堪上聖.〕"라고 하였다. 《孔北海集 書 與曹操論酒禁書》 이와 같이……오래하면 본문의 진력역구(眞積力久)는《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참되게 쌓아 가며 오래도록 노력해야만 학문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는데, 학문은 죽음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眞積力久則入, 學至乎沒而後止也.〕"라고 하였다. 근자에……뿐이겠는가 《서경》 〈진서(秦誓)〉에 "어떤 한 신하가 있는데, 그는 한결같이 정성스럽기만 할 뿐 다른 특별한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널찍하여 모두 받아들이는 것과 같아서, 남이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 자기가 지닌 것처럼 기뻐하고, 남에게 훌륭한 점이 있으면 자기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마치 자기 입에서 나온 것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다. 그런 자는 진실로 남을 잘 포용하여,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라는 말이 나오는데,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10장에도 이 말이 인용되어 있다. 수사(洙泗)……염락(濂洛) 수사는 노나라 곡부(曲阜)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아울러 일컫는 말로, 이곳은 공자가 강학 활동을 했던 곳이다. 여기서는 공자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염락(濂洛)은 송대의 성리학을 뜻하는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로,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자(朱子)를 통칭한다. 풍수(風樹) 부모가 돌아가셔서 봉양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제9권에, "고어가 말하기를,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 〔樹慾靜而, 風不止. 子慾養而, 親不待.〕"라고 하였다. 아관(兒寬) 한(漢)나라 무제때 사람으로 《漢書 兒寬傳》에 "아관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면 독송을 했다. [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라고 하였다. 동생(董生) 동소남(董召南)을 말한다. 안풍에 은거하여 주경야독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며 살았다. 한퇴지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었다. 이 때문에……아닙니다 이 말은 주경야독하며 행실이 도탑다고 평한 것은 옳지만, 주경야독하며 도를 알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며 농사보다는 학문만 하고 싶은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좌우에서……없으니 《맹자(孟子)》〈이루 하(離婁下)〉에 맹자가 학문에 있어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몸의 좌우에서 취하여 쓸 때 그 근원을 만날 수 있게 된다.〔取之左右逢其源.〕"라고 하였다. 절굉(折肱) '팔을 분지른다'는 뜻으로 친히 겪은 것을 말한다. 원문은 삼절굉(三折肱)으로 여러 차례의 어려움을 겪음으로써 결국 이를 극복하게 된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13년 조에,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군주를 치려 하자, 제(齊)나라의 고강(高彊)이 "세 차례 팔뚝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나서야 좋은 의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三折肱, 知爲良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묘사(墓祀) 묘지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천향(薦享)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대가……옳습니다 족제 행원이 후창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조상들의 묘 제사에서 전날 고조부 따로 하고 다음날 증조부를 모시는데, 같은 날 천향하는 것은 좀 불경스럽고 게을러서 선조를 공경하는 예를 손상시킨 점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을 이른다. 이것이……뜻입니다 《논어》〈팔일(八佾)〉에, 공자가 말하기를 "큰 제사를 지낼 때 강신(降神) 이후의 의식은 내가 보고자 하지 않는다.[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也.]"라고 하였다. 이것은 처음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성의가 점점 해이해지기 때문에 한 말이다. 본문의 사의(徙義)는 《논어》 〈안연편〉 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신을 위주로 하고 불의에서 정의로 옮겨 가는 것이 덕이 높아지는 길이다.〔孔子曰, 主忠信徙義崇德也.〕"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