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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재(永報齋) 관련 시모음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영보재(永報齋) 관련 시모음 영보재(永報齋) 관련 시를 모아놓은 것이다. 회산(晦山), 해사(海史), 초산(楚山), 석오(石梧), 석성(石醒) 등 5명의 시이다. 영보재(永報齋)는 송간(宋侃, 1417~1492)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800년(정조 24)에 후손들이 건립하였으며, 1920년과 1979년에 중수하였다. 송간은 호가 서재(西齋), 시호가 충강(忠剛), 본관이 여산(礪山)이다.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관직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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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이기두(李箕斗)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箕斗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箕斗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먼저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을 취득하였다. 그 직후에 또 임명된 관직이 통정대부이며 이어서 받은 것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다. 가선대부는 문관의 품계로서 종2품의 하계(下階)이다. 동지중추부사는 중추부에 소속된 종2품의 관직이다. 중추부는 실직의 관원이 없는 고위 명예직으로 구성되며 국왕과의 회의에 참여하는 일종의 고문기관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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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명에게 답함 병자년(1936) 答魏致明 丙子 세상의 풍파가 날로 급하고 심해져서 우리들의 목숨과 머리카락을 보호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마음속에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은 세상을 같이 살고 있는 동지들뿐입니다. 그러나 이 동지들이 역시 도대체 몇 명입니까? 그대처럼 곤궁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면서 선대의 규범을 실추시키지 않고, 창연하게 홀로 참된 본색을 보존한 자는 참으로 얻기 어려우니, 머리를 들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매번 관산(冠山)이 멀리 있어 오를 수 없음을 한스러워하였습니다.이러한 때에 그대로부터 과분한 은혜를 입어 갑자기 적막한 물가에 1폭 10행의 편지를 받아보니, 저를 뜻에 맞는 사람이라 허여하고 또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그대는 저와 비교하면 덕으로나 나이로나 진실로 크게 높고 매우 많으니, 어찌 그대가 저를 생각하는 것이 역시 제가 그대를 사모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또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하고 위로받은 나머지 부끄러운 마음 또한 심합니다. 이어서 때를 잘못 타고났다는 것과 일생동안 알려지지 못한 것을 슬퍼하셨는데,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탄식은 참으로 동병상련의 일이지만, 알려짐이 없다는 말은 어찌 그대에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틀림없이 이 고루한 저를 일깨워주기 위하여 비유적으로 말한 것일 뿐일 것입니다.편지를 받들어 두세 번 읽으면서 반성되고 계발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삼가 일찍이 본말과 시종을 궁구하여 공평하고 정직하게 논해보건대, 사람들의 이른바 '알려짐이 있다'는 것은 도를 기준으로 하지 사업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며, 실상을 기준으로 하지 이름을 기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귀하다 하여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빈천하다 하여 감춰지는 것도 아니며, 살아있다 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죽었다 하여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저절로 빈궁과 영달의 밖에 홀로 서서 길이 천지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옛날 사람으로 명예와 실상을 모두 갖춘 사람은 훌륭하여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지만, 실상이 비록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름이 인멸되어 전해오지 않는 자도 또한 어찌 한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유자는 세상이 혼란하고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오랑캐로 변하여 불의한 것을 먹지 않고, 분수를 지키고 도를 익히면서 성현을 따르는 것은 이미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또한 알려진 실상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지 이름이 없다고 해서 가볍게 여겨서는 옳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대처럼 노성(老成)하여 알려진 명성이 뭇사람과 다름이 있는 분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이제 치발(薙髮)의 재앙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참으로 기미를 보아 떠나고21) 낯을 보아 날아올라22) 도리와 형체를 모두 온전히 하며, 웅장(熊掌)과 물고기를 일찍 판별하여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한다면23) 소유하고 있는 명성의 실상이 이것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보내준 편지에서 장독(瘴毒)이 사방에서 닥치는 고통과 초목처럼 죽어간다는 한탄은 말할 거리가 못됩니다. 우리들이 목전에 힘써야 할 것은 단지 이와 같은 것뿐입니다. 설사 마을이 잇닿아 있어 아침저녁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이 밖에 어찌 더 이상 다른 할 말이 있겠습니까. 삼가 이런 뜻을 토대로 하여 보여주신 옛사람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어봅니다.고금의 사람조차도 벗이 될 수 있으니,남북을 어찌 다시 나누겠는가.마음과 마음이 똑같이 비추는 곳에는,편지가 없더라도 또한 소식을 들을 수 있네.아마 그대의 뜻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風潮日急, 吾儕之命與髪保, 知有歲日. 此日此懷, 只切念及於并世同志而已. 然此同志, 亦復幾人? 固窮守道, 不墜先範, 蒼然獨葆真色如尊執事者, 誠所難得, 則矯首南天, 每恨冠山之遠莫可攀.乃以此時, 過蒙尊惠, 一幅十行, 忽墜寂寞之濱, 既許以可意之人, 又歎以積阻顏面. 尊之於生, 以德以齒, 高固相萬也, 何尊之念生, 亦如生之慕尊? 而又先施之也, 感慰之餘, 愧亦深矣. 亦繼以遭遇之不辰․一生之無聞爲悲, 不辰之歎, 固所同病; 無聞之云, 尊豈有是? 是必警此孤陋, 而比譬言之耳.奉讀再三, 區區省發多矣. 盖窃嘗究本末始終, 而平正論之, 人之所謂有聞者, 以道不以事業, 以實不以名譽. 不爲富貴而顯, 不爲貧賤而晦, 不爲生而存, 不爲死而亾, 自有獨立窮達之外, 長在天地之間者矣.古人之名實俱存者, 尚矣勿言, 實雖存而名淹沒無傳者, 亦復何限? 今之儒者, 當世亂途窮無前之日, 不化於夷而食不義, 安分講道與聖賢爲從者, 已是難事, 而亦謂近於有聞之實, 不宜以無名而易之也, 况如尊之老成, 所得自有異衆者乎?且今薙禍, 所關甚大. 誠能見幾色擧, 理形兩全, 早判熊魚, 舍生取義, 則其爲有聞之實也, 莫大於是. 而來喻瘴毒四至之苦․草亾木卒之歎, 皆不足言也. 吾儕當下所勉, 只此而已. 縱使接鄉井而唔朝暮, 此外豈復有他哉? 謹將此意, 次所示古人詩曰 :今昔尙爲友朔南那更分心心同照處無信亦相聞想尊意亦以為然也. 기미를……떠나고 공자가 "기미를 앎이 그 신묘할 것이다. 군자는 위로 사귀되 아첨하지 않고 아래로 사귀되 모독하지 않으니, 기미를 아는 것이다. 기(幾)는 동함의 은미함으로 길(吉)·흉(凶)이 먼저 나타난 것이니,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하루가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知幾其神乎! 君子上交不諂, 下交不瀆, 其知幾乎! 幾者, 動之微, 吉之先見者也, 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하였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 낯을……날아올라 새가 사람의 나쁜 표정을 보면 날아올라 피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사람이 기미를 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새는 사람의 나쁜 표정을 보면 날아서 빙빙 돌며 관찰한 다음에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 하였다. 웅장과……취한다면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생선도 먹고 싶고 곰발바닥도 먹고 싶은데,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곰발바닥을 먹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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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성재욱에게 보냄 정축년(1937) 與安允成在旭 丁丑 옛날 사람들에게는 서로 들려줄 도의와 서로 도움을 줄 학술을 지녔는데, 길이 멀고 처한 형편이 달라서 만날 길이 없다면 간혹 때때로 편지로 서로의 뜻을 전달하면서 학문을 강론하여 서로를 증진시켰습니다. 그러므로 후세에도 이를 따라서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편지를 써서 고도(古道)를 실행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도의 역할을 하는 편지는 오로지 받을만한 자가 받고 보낼만한 자가 보내는 것이니, 그 밖의 사람이 감히 갑자기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삼가 들으니, 그대가 요즘 늑삭(勒削)24)의 변고에서 수립한 것은 절개가 높고 기개가 웅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운이 산처럼 용솟음치게 하고 기뻐서 잠 못 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 뜻은 웅장(熊掌)을 취하고,25) 믿음은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쳐서26), 나의 인을 이루자 저들이 저절로 범하지 못한 것은 몸을 희생하여 인을 이룬 것보다 더욱 귀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지역이 천리나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가서 축하하고, 이런 일이 옛날에 있었더라도 역시 마땅히 광세지감(曠世之感)27)을 느낄 것인데, 하물며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군에 거처하고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난과 질병 때문에 지체되어 아직까지 달려가 그대에게 인사드리지 못하고, 우선 이른바 고도의 역할을 하는 편지로써 우러러 그대에게 알리기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 불초한 제가 참으로 감히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그대가 받는 것이 옳기 때문에 편지를 보낸 것이고, 또한 혹시라도 실상을 은폐한 채 편지를 보내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사실을 기술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을 따름입니다.인하여 삼가 충언을 올립니다. 옛사람이 "절의는 도학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기개와 절개는 학문에서 나오는데, 학문만 보이고 기개와 절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작은 성취에 안주하여 도의 극치로 나아가는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들은 모두 도학이 지극히 존귀함을 말한 것입니다. 다만 그대는 이미 성취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더 이르지 못한 부분에 힘써서 온전한 덕을 갖춘 군자가 되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의 절조에만 뛰어난 선비가 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러러 기대하는 지극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자정(子貞)의 운에 차운하여 그대의 의리를 칭송한 시를 지은 것이 있으니, 이에 써서 올립니다. 古之人有道義可以相聞, 學術可以相資者, 而道遠勢殊, 無由相見, 則或有時而以書相通, 講學以取相長. 故後世因以不見, 而書爲古道. 然則古道之書, 惟可當者當之, 可致者致之, 非餘外夫人之所敢輒行者也.窃聞執事近日所樹立於勒削之變者, 節高氣壯, 令人氣湧如山, 喜而不寐, 其志取熊掌, 而信及豚魚, 既成我仁, 而彼自不犯者, 尢可貴於殺身而致之也. 雖地在千里, 猶將往賀; 事在前古, 亦當曠感, 而况生并世, 而居同郡乎? 然而貧病見掣, 尚未趍拜於座下, 先以所謂古道書者, 仰凂尊聽, 自惟無狀固所不敢. 然但以執事當之者爲可, 而亦或掩蓋致之者不可也耶? 恃是而無愧焉爾.因此而窃有所獻忠者. 古人云: "節義, 道學之籓籬; 道學, 節義之堂室." 又云: "氣節從學問中出, 但見學問, 不見氣節." 又云: "不可安於小成, 而不求造道之極致." 此皆言道學之至貴也. 惟執事勿以已成者自足, 加勉其所未至者, 求爲全德之君子, 不但爲一節之傑士. 不勝顒望之至. 曾有所次子貞韵, 以壯執事義者, 茲寫呈. 늑삭(勒削) 억지로 머리를 깎는 것으로, 단발령을 의미한다. 웅장(熊掌)을 취하고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생선 요리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요,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지 못할 바엔 생선을 그만두고 곰 발바닥을 취하리라.〔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이곳에서는 아마 취웅장이 사생취의를 가리키는 것 같다. 믿음은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쳐서 사람의 신의가 진실되면 무지한 돼지와 물고기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모두…하는 이 구절은 《서경(書經)》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보인다. 신의가 매우 무지한 돼지와 물고기에도 이른다는 의미이다. 광세지감(曠世之感)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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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명상구에게 보냄 무진년(1928) 與朴善明塽九 戊辰 3일 전 돌아가시는 길에 날이 급박하게 저물어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날씨가 갈수록 추워지는 요즘, 생활하시는 데에 신명의 가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럭저럭 지내지만 가족의 근심이 계속 이어져 끝이 없습니다. 학사에는 학생들이 흩어져 떠나가서 당우(堂宇)가 온통 비어 쓸쓸히 홀로 앉아 있노라면 몹시 무료합니다. 세모에 슬픔을 느끼고 쇠약해지는 것은 인정상 그렇지 않음이 없거늘, 하물며 저처럼 실의에 빠져 50년을 살아오면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 생각해보니 아득히 옛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어렸을 때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 17세에 일찍 과거에 급제할 것이고, 또 재성(才性)은 적지만 과거공부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듯 하니 자색 청색 인끈은 지푸라기 줍는 것 같이 쉽게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로 갑오년에 변란이 일어나 국가의 제도가 바뀜으로써 과거에 합격할 길도 없어지고 원대한 포부도 허사로 돌아가니 운명을 점친 자의 말을 증험하지 못했습니다.소사(蕭寺, 사찰)에서 스승 구산옹(臼山翁, 전우)을 배알하고《좌씨전》을 강론한 인연으로, 구산옹께서 곽림종(郭林宗, 郭泰)이 모용(茅容)을 방문한 고사29)를 인용하여 몸소 저희 집까지 오시니, 선친이 저에게 "'대인(大人)을 보는 것이 이롭다'30)는 말은 덕으로써 말을 한 것이지 전적으로 지위로 말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영광이 어찌 과거에 합격한 것만 못하겠는가? 네가 마침 17세가 되었으니 역시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 헛되이 남의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로 하여금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게 하였으니, 덕을 세우고 도를 이루며, 선현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는 것은 설사 (그 성과를) 기약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경서에 힘쓰고 몸을 훌륭하게 하며, 인을 구하고 의를 따르는 것은 크게 뒤쳐지고 싶지 않았습니다.부친이 돌아가시고31) 26세에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되니, 훌륭한 가업이 모두 사라지고 백발이 성성한 모친께서 당(堂)에 계시어 봉양하느라 7년 동안 몸소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경서를 읽는 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환과 곤고함이 좌우에서 볶아대어 옛날에 익힌 것도 수시로 잊어버렸으니, 새로운 지식을 어찌 논하겠습니까? 사람들이 "학문의 성취 여부는 운수가 있다"라고 한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거듭 상환(喪患)을 만나서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하고 돌아오니,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동서로 떠돌며 어느 곳에 이르러 정착해야 할지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땅이 없으니 부지런히 농사짓는 일과 어찌 친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다시 글을 읽으며 연구에 힘쓴 지가 1년여가 되었고, 이전에 했던 학문을 다시 다스려 점차적으로 옛것을 회복하였으며, 다시 정진하여 정미한 곳으로 나아가니 간혹 새롭게 얻은 부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또 분비(憤悱)32)가 계속 이어져 기필코 터득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습니다.용사(龍蛇)33)가 재앙을 고하여 스승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맹인이 도와주는 사람을 잃은 것 같았으니34), 갈팡질팡 어디로 가겠습니까? 학업을 마칠 길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가누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게다가 사문(師門)에 일이 많고 스승의 의리를 파괴하는 변란이 있음에 이르렀는데도 세상에는 믿을 만한, 훌륭한 문장이나 억센 주먹이 없었습니다. 저같이 졸렬한 사람도 차마 앉아서 보고 있을 수 없어서 함부로 제대로 말을 해야 하는 일에 참여하였지만, 저들을 복종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저들에게 노여움을 당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고 모멸을 수없이 당하였습니다. 이에 나를 돌이켜보고서 나에게서 허물을 구하니, 내 몸에 축적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허물을 구하고 비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운명과 사변이 반복무상하여 뜻과 학업을 성취하지도 못했는데 머리가 먼저 세어버렸으니 한탄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근년 이래로 조용한 곳에서 자신을 수양하며 만년을 마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학생들이 책상자를 짊어지고 이곳에 이르니, 다른 사람에게 베푼 선(善)은 없다 하더라도 독서한다는 명분은 오늘날 세상에 보기 드물기 때문에 그들을 허락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 지레 겁을 먹고(風聲鶴唳)35) 떼 지어 나오고 떼 지어 들어가며, 아침에는 유생의 규율을 배우고 저녁에는 세속의 습속을 답습하니, 불행히도 율곡의 이른바 '보탬은 없고 기롱만 산다'36)는 것에 가깝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교학상장(敎學相長)37)의 이익을 취하고자 해서이고, 또 7개월에 회복하는 씨앗38)이 있기를 바라서입니다. 만약 끝내 이와 같은 데서 그친다면 일찍이 그만두는 것이 더 나은 것만 못합니다.또 학업을 전수하고 질문에 대답함에 밤낮으로 끝이 없어 틈을 낼 여유가 없으니 그 우열을 가려서 그들 중에서 서로 가르치게 하고 싶지만,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그들에게 후대하고 박대하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고민만 할 뿐 끝내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분수에 있어서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기르는 공에도 진실로 큰 해로움이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이 세상에 살면서 달리 잘하는 일은 없고, 오직 책상 위의 많은 경전을 읽고 천하의 많은 의리를 궁구하면서 마음속에 많이 응축한 것을 써내어 평생의 뜻과 바람에 응하려 하지만 진실로 이처럼 부질없이 사라질까 두렵고, 실로 이 생애를 잘못 보낼까 슬픕니다. 삼가 이후로는 채서산(채원정)이 손님을 거절한 법문(法門)39)으로 자신의 수양만 관리하고 다른 사람이 와서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러나 간혹 간절하게 요구하며 그만두지 않는 자는 승척(繩尺)40)을 가지고서 규율하기를 마치 관씨(管氏)의 제자직(弟子職)과 진씨(眞氏)의 교자첩(教子帖) 및 석담(石潭)의 혁구습장(革舊習章) 등의 책처럼 하게 하여 하나씩 따라 실천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하면 잘하는 자는 훗날에 우뚝한 성취를 바랄 수 있고, 잘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오래되지 않아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방법은 거의 약간의 수고로움과 비난을 덜 수가 있고, 약간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궁한 처지에 한 해가 바뀌어서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었는데,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그 근심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형님의 빼어난 견해는 제가 미칠 바가 아니니, 감히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가르쳐주시겠습니까? 三昨歸程, 得無迫曛見惱? 天寒比劇, 起居有相. 弟狀且過, 而眷憂相續, 了無涯岸. 社生散去, 堂宇一空, 悄然獨坐, 殊甚無聊. 歲暮感悵向衰, 人情盖莫不然, 矧如弟之佗傺半百, 一無所成者乎? 追思曾經, 蒼蒼然若說古史.幼時談命者謂年十七當捷巍科, 且薄有才性, 於功令之業, 若不甚難, 紫拕青紆, 擬將拾芥. 夫何變生青馬, 國制更張, 龍點無路, 鵬圖歸虛, 談命者說不驗矣.夤緣蕭寺拜臼山翁而講《左氏傳》, 臼山翁引郭林宗訪茅容故事, 躳駕弊廬, 先人謂不肖曰: '利見大人, 有以德言者, 不專言位也. 今日光榮, 何下捷科? 汝適丁十七, 亦信談命者之不虛喫人飯.' 於是使之專意學問, 立德成道, 繼往開來, 縱不敢期, 劬經淑身, 求仁由義, 不欲多讓.風樹不待, 卄六當室, 青氊掃地, 白首在堂, 七載躳耕, 溫經無日. 加以憂患困衡, 左煎右熬, 舊得隨失, 新知奚論? 人之言曰"學之成否, 有數存焉", 信矣. 逮夫荐遭喪禍, 三載守墓而歸, 則家益剝落, 東漂西泊, 何所止届, 無計可爲. 然甘旨之供無地, 稼穑之勤奚親? 乃復尋數窮研之是務者爲有年, 申理前業, 漸次復舊, 進而向精微去處 或不無一斑新得矣. 方且憤悱相尋, 期期不得不措也.龍蛇告厄, 泰山奄頹, 瞽者失相, 倀倀何之? 慨卒業之無所, 不知何以爲心. 重以門墻多事, 至有破敗師義之變, 而世無大筆․麁拳之可恃者, 則如吾之孱劣, 不忍坐視, 妄與能言之役, 不惟彼之不服, 反遭其怒. 幾殞性命, 飽喫汙衊. 反以求之, 以所藏乎身者未足, 以求人非人故也. 復誰怨尢? 運命事變, 反覆無常, 志業未就, 髪先星星, 可勝歎哉?比年以來, 欲靜處自修, 爲收之桑榆之計, 忽有四面負笈之沓至, 顧無及人之善, 以讀書之名, 今世罕聞也, 故許之. 則率多風聲鶴唳, 旅進旅退, 朝受儒規, 暮蹈俗習, 栗翁所謂無補貽譏者, 不幸近之. 夫所貴乎教學者, 欲其取相長之益, 且望其卓然有七日種子者, 若終如此而止, 不如早已之爲得.且傳課酬問, 匝晝連夜, 無片隙可乘, 欲揀其優劣, 使自中相教, 則一視之下, 不無厚薄之嫌, 只得忍煩耐惱, 終無善策. 於自己分上, 研理養心之功, 實有大害. 自料生乎斯世, 無他能事, 惟欲讀了案上多少經傳, 究了天下多少義理, 寫了齊中多少蘊抱, 用酬生平志願, 誠恐若此乾沒, 實悲枉過此生. 窃欲從茲以往, 用蔡西山拒客法門, 只管自家進修, 不許別人來學. 其或懇求不已者, 純用繩尺而律之, 如管氏弟子職, 真氏教子帖, 石潭革舊習章等書, 使之一一循蹈. 其能者可望他日之卓然, 不能者自應不久而退. 此法庶可以省得幾分勞攘, 取得幾分效益矣.竆途換歲, 萬念灰冷, 惟此一事, 耿耿難裁. 吾兄超詣之見, 非弟所及, 茲敢質之. 未知何以見教? 곽림종이 모용을 방문한 고사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한 다음 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후한서(後漢書) 卷68 〈곽태열전(郭泰列傳)〉 그런데 《후한기(後漢紀)》 권23 〈효령황제기(孝靈皇帝紀)〉에는 "'경이 이와 같으니 바로 나의 벗이다(卿如此, 乃我友也)'라고 하고는 일어나서 마주 대하고 읍(揖)한 뒤에 학문을 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후한기(後漢紀)》는 진(晉)나라 원굉(袁宏)이 각종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사서(史書)로 모두 30권인데, 가정이 이 책을 많이 참고하며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인(大人)을……이롭다 《주역(主役)》 〈건괘(乾卦)〉 구오(九五) 효사(爻辭)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원문의 풍수(風樹)는 풍목(風木)과 갗은 말로 생전에 어버이께 효성을 다하지 못해 사후에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춘추 시대 때 공자(孔子)가 길을 가는데 고어(皐魚)라는 사람이 길에서 칼을 안고 슬피 울고 있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고 하고는, 서서 울다가 말라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권9 분비(憤悱) 분발(奮發)과 같음.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마음속으로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고, 표현할 길이 없어 애태우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나머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알려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에서 유래한 말이다. 용사(龍蛇) 용사세(龍蛇歲)는 십이지(十二支)의 진년(辰年)과 사년(巳年)으로, 사람이 죽는 액운이 든 해를 말한다.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서 지내는데, 하루는 꿈에 공자가 나타나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진년이고 내년은 사년이다.〔起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 참술(讖術)로 맞추어 보고 자신의 목숨이 다할 줄 알았더니, 실제로 그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5 〈정현열전(鄭玄列傳)〉여기에서는 스승인 전우의 죽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을 용사(龍蛇)의 변(變)이라고도 하였다. 맹인이...같았으니 《예기(禮記)》 〈중니연거(仲尼燕居)〉에 "예법이 없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소경이 아무 도움 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갈팡질팡하여 과연 어디로 가겠는가.〔治國而無禮, 譬猶瞽者之無相, 倀倀乎其何之?〕"라는 구절을 줄여서 인용한 표현이다. 풍성학려(風聲鶴唳) 겁을 집어먹은 사람이 당치 아니한 사물에도 놀라는 것을 의미함. 중국 동진(東晉) 때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비수(淝水)에서 대패하고 바람의 소리와 학(鶴)의 소리를 듣고도 진(晉)나라의 추병(追兵)이 아닌가 하고 놀랐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보탬은 없고 기롱만 산다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 〈서(序)〉에서 "내가 스승이 될 만한 게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처음 학문하는 사람들이 방향을 모르고, 굳은 의지도 없으면서 그냥 배우겠다고 한다면 피차에 도움 될 것이 없고 도리어 남의 조롱만 사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余慙無以爲師, 而且恐初學不知向方, 且無堅固之志, 而泛泛請益, 則彼此無補, 反貽人譏〕라고 하였다. 교학상장(敎學相長)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학문을 해 본 다음에야 자기의 재주가 부족함을 알게 되고, 가르쳐 본 다음에야 어려움을 알게 되나니, 부족한 줄을 안 다음에야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며, 어려움을 안 다음에야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서로 증진한다.' 한 것이다.〔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然後能自反也, 知困然後能自强也. 故曰:敎學相長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개월에……씨앗 《주역(周易)》 〈복괘(復卦)〉괘사(卦辭)에 "칠일 만에 되돌아오니, 갈 데가 있는 것이 이롭다.〔七日來復, 利有攸往〕" 했는데, 7일(日)의 일(日)은 월(月)의 뜻으로서 7개월 만에 음양이 서로 왕래 소장하다가 동짓달에 하나의 양(陽)이 발생하는 것을 이른다. 이는 양도(陽道)가 회복되는 시초로, 암울한 시대가 가고 문명의 시대가 오거나 소인의 득세가 끝나고 군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상징한다. 전우(田愚)가 "이 아이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실로 7개월 만에 회복될 씨앗입니다. 제가 본래 사도(師道)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 어찌 후배를 권면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此雖年少, 實七日復之種子. 愚固非有師道, 亦豈無奬勸後進之心〕"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篇》 권2 〈답신백삼(答愼伯三) 원성(元晟) ○갑인(甲寅)〉 채서산……법문 채원정이 서산에 머물 때 주자가 찾아가 만나보려고 했으나 채원정이 한결 같이 손님을 심하게 거절해서 만나보지 못했던 일을 가리킨다. 《朱子大全(주자대전)》 〈答蔡季通(답채계통)〉 승척(繩尺) 표준의 의미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선명에게 보냄 기묘년(1939) 與朴善明 已卯 일전에 저를 찾아주셨는데 제가 아픈 와중에 심수(尋數)41)를 일삼는 것을 보고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지만 어찌 몸을 보호할 것을 생각지 않는가?"라고 깨우쳐주셨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저를 아끼는 마음은 깊지만 저를 깊이 알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업(事業)'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마땅히 행해야 할 도에 나아가는 것을 '사(事)'라 하고, 고유한 덕을 완성하는 것을 '업(業)'이라고 하니, 이것은 우리 유자(儒者)의 사업입니다. 드러낼 만한 공명을 '사(事)'라 하고, 칭송받을 만한 이익과 은혜를 '업(業)'이라고 하니, 이것은 세속의 사업입니다. 우리 유자의 학문을 통하여 사업을 이룬다면, 비록 천지에 높이 내걸만한 공리(功利)가 있다고 할지라도 단지 그것이 도덕이 된다는 측면만을 보기 때문에 굳이 사업이라고 일컬을 필요는 없습니다. 세속적인 견해에 기반하여 사업을 이룬다면, 비록 무리에서 뛰어나고 세상에 높은 도덕이 있다고 칭송받더라도 결국은 공리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사업 역시 훌륭하다고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도덕으로 마음을 삼는 사람은 사업이 그 속에 있고, 사업으로 마음을 삼는 사람은 도덕과 멀리 떨어지게 되니, 처음에는 단지 한 생각의 차이이지만 끝내는 천리나 멀어지게 됩니다.저는 비록 무능한 사람이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저의 마음은 도덕에 있지 사업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형님께서는 제가 몇 권의 문장을 짓는 것을 사업으로 삼는다고 생각하고, 또 사업을 중시하고 성명(性命)을 경시하는 자인 듯하다고 생각하면서 저를 걱정하고 일깨워주시는데, 천하에 어찌 도에 뜻을 두면서도 책을 써서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부친의 유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불효를 범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 때문에 "저를 깊이 사랑하지만 저를 깊이 알지 못하시는 것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또한 옛날부터 충효로 큰 절개를 드러내고, 영웅으로 큰 이름을 날려 그 사업이 당세에 빛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랜 세월 지나면 침체되어 쉽게 사라지니, 문장은 또 작은 것이라 더욱 전해지기 어렵고 사라지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육일거사(六一居士) 구양수(歐陽脩)가 이미 언급했으니,42) 제가 비록 어리석지만 역시 이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또 극대화하여 말한다면, 성현의 위대한 사업이라고 할지라도 후천세계에서는 당연히 그 이름을 알지 못할 것이니,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업으로 이름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짓입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성현이 사업으로 자신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까닭은, 전해지는 것이 있다 하여 그것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해지는 것이 없다 하여 그것을 그만두는 것도 아닙니다. 역시 단지 "마땅히 해야 할 도에 나아가는 것을 사(事)라고 하고, 고유한 덕을 완성하는 것을 업(業)이다."라고 하여, 오직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性)을 따르고 자신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따를 뿐이므로 비록 버리고 떠나고 싶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빈부와 귀천, 병건(病健)43)과 우락(憂樂)44)을 막론하고 모두 마땅히 사업을 행할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대성(大成)하면 성인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현인이 되고, 작게 이루면 사(士)가 됩니다.지금 제가 비록 가난하고 병이 들었지만 감히 게을리 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여전히 연구하여 기록하는 노력을 일삼는 것은 조금이라도 도에 대한 견해를 진척시켜 대략이나마 죽기 전에 도에 나아가고 덕을 이루는 사업을 축적하여 끝내 삼가고 조심하는 선비가 되는 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저 구구하게 문자로 이름을 전하는 것이 무슨 사업이 될 만한 것이 있다고 병중에 이 일로 정력을 다 써서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겠습니까? 다만 예로부터 붕우 간에 지기(知己)가 되는 일은 참으로 드문 일이고, 세상이 또 사업의 진위에 대해 어두운 것도 오래되었으니, 형님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 슬픕니다! 저는 비록 마음이 사업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유자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사업 같은 경우에는 어찌 끝내 마음이 없겠습니까?앞으로 붓 하나로 천성(千聖)이 도통을 서로 전한 뜻45)을 밝히고, 천고에 시비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안건을 결정하며, 올바름을 해친 이단(異端)과 잡류(雜流)의 해친 글들을 분별하고, 패제(悖弟)와 적자(賊子)들이 윤리를 상실한 죄를 성토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의를 숭상하고 재화를 뒤로 하며 외교관계를 닦고 전쟁을 종식하는 논설로 옛것을 끌어다 지금을 증명하고, 이치를 따지고 지난 자취를 증험하여, 그것을 입언하고 책으로 지어 일세를 깨우치고 천하에 배포한다면, 아마 조금은 이미 어두워진 도를 밝히고 이미 망가진 윤리를 부지하며 이미 혼란스러워진 세상을 구원하고 이미 곤궁해진 백성의 고통을 완화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선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바로 오늘날 저의 뜻입니다. 그러나 헐벗은 가난은 그 형세가 갖가지로 괴롭히고 필력도 없으며, 또 도와서 함께 이루어줄 동지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망망한 천지에서 배회하며 홀로 서서 긴 한숨만 쉴 뿐입니다. 심기가 촉발되어 감정이 일어나 말을 함부로 하여 형님의 눈을 더럽혔습니다. 부디 죄라고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日前委顧, 見弟病中有事尋數, 喻"以成事業則然矣, 獨不念保身乎?" 窃以爲愛我則深, 而知我則淺也. 夫事業有兩般, 進當行之道之謂事, 成固有之德之謂業, 此吾儒之事業也. 功名可著之謂事, 利惠可稱之謂業, 此世俗之事業也. 由吾儒之學而成事業, 則雖有掀天揭地之功利, 但見其爲道德, 而不必稱以事業也. 由世俗之見而成事業, 則雖稱有出類高世之道德, 究不出功利之念, 而事業亦不足壯矣. 故以道德爲心者, 事業在其中; 以事業爲心者, 去道德遠, 而只此一念之間, 終至千里其遙矣.弟雖無似, 乃若其心則在於道德, 不在事業. 今兄認我爲著得幾卷文字作事業, 而又重事業而輕性命者然, 悶慮而戒喻之, 天下安有欲著書傳名, 而不念親遺, 用犯不孝之志道者乎? 吾故曰: "愛我則深, 而知我則淺也."且自古忠孝大節․英雄大名, 其事業足以耀當世者何限? 然久則寢寢以易泯, 文章又其小者, 尢傳難而泯易也. 六一翁已言之, 弟雖癡呆, 亦不為是.又極而言之, 雖聖賢之大事業, 在後天地, 亦應不知其名. 夫人之於世, 欲以事業傳名者, 皆妄也. 雖然, 聖賢之所以以事業自爲與教人也, 則不爲其有傳而作之, 爲其無傳而輟之, 亦惟曰: "進其當行之道之謂事, 成其固有之德之謂業." 惟其率自家固有之性, 而循自家當行之路, 故雖欲舍去而不得也." 是以不問貧富貴賤․病健憂樂, 皆當有行事作業之地. 如此而大成則聖, 其次則賢, 小成則士.今弟雖貧病之中, 不敢怠忽間斷, 隨分有事於竆研記劄之功者, 欲以少進一斑之見, 畧資進道成德之事業於未死之前, 終不失爲謹飭之士爾. 彼區區文字傳名, 何足爲事業, 而以此弊精疲力於病中, 至於不保身命乎? 但從古以來, 朋友間知己, 固已鮮矣, 世又昧於事業之真假也久矣, 宜乎, 兄之有此言也. 嗟呼! 悲夫! 弟雖非心在事業者, 若吾儒自在之事業, 則豈終無心?盖將以一筆, 明千聖道統相傳之旨, 決千古是非未定之案, 辨異端雜流害正之書, 討悖弟賊子喪倫之罪, 并以尚禮儀後貨財修交好息戰爭之說, 援古證今, 質理驗跡, 立之言而著之書, 喻一世而布天下, 庶少得以闡已晦之道, 扶已斁之倫, 救已亂之世, 紓已困之民, 此正今日士子當行之事, 正今日弟之志也. 而赤立之貧, 其勢百掣, 筆亦無之, 並無同志助成者. 茫茫天地徘徊獨立, 只有喟然長吁而已. 觸機生感, 漫說瀆覽, 幸不以爲罪否? 심수(尋數)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책을 보는 일을 말한다. 육일거사(六一居士)……언급했으니 구양수는 "삼대와 진한으로부터 책을 저술한 사람이 많은 이는 백여 편에 이르렀고 적은 이도 삼사십편에 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만 흩어지고 사라지며 닳아 없어져서 백에 한둘도 보존되지 못했다. …… 결국에는 초목·금수·중인과 함께 똑같이 사라지는 데로 귀결되니, 말에 의지할 수 없음이 대체로 이와 같다.〔自三代秦漢以來, 著書之士, 多者至百餘篇, 少者猶三四十篇. 其人 不可勝數, 而散亡磨滅, 百不一二存焉. …… 而卒與三者, 同歸於泯滅, 夫言之不可恃也〕"라고 하였다. 〈송서무당남귀서(送徐無黨南歸序)〉 병건(病健) 병든 것과 건강한 것을 말한다. 우락(憂樂) 근심하는 것과 즐거운 것을 말한다. 천성(千聖)이 도통을 서로 전한 뜻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면서 말한 '유정유일 윤집궐중(惟精惟一允執厥中)'을 줄인 말로,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주자(朱子)는 유정(惟精)은 지(知) 공부, 유일(惟一)은 행(行) 공부에 소속시키고, 이 16자(字)를 '천성상전지법(千聖相傳之法)'이라 하여 도통(道統)의 원조로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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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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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명에게 답함 경진년(1940) 答朴善明 庚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형님을 방문하고 싶은데, 형님이 저하고 서로 친하여 의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매우 가소롭습니다. 맹자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리와 의이다."46)라고 했으니, 천하에 어찌 같지 않은 의리가 있겠습니까?"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이쪽이 옳으면 반드시 저쪽이 그르고 저쪽이 그르면 반드시 이쪽이 옳으니 만약 다른 사람이 옳고 내가 그르다면 나는 마땅히 견해를 바꾸어 그의 견해를 따라야 할 것이고, 만약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이 그릇되어 일깨워주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경우에는 관련된 것이 크니 마땅히 분별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그가 의리는 서로 같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가 인식하는 의리는 한 개인의 사적인 견해일 뿐 모든 사람들이 마음으로 똑같이 여기는 의리가 아닙니다. 오직 그는 자신의 견해만을 의리라고 여기고 자신의 신념을 옳다고 하기 때문에 역시 '누구나 똑같이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타인의 견해에 대하여 불복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의리가 아니어서 옳지 않다고 하며 배척하니, 이런 경우를 일러 의리를 알지 못한다 합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미 이와 같다면 역시 그만입니다. 그런데 지금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과 친한 사람을 방문하고 싶어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하여 약간의 사모하는 뜻을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또 무슨 경우입니까? 양화(陽貨)가 공자(孔子)에게 한 것47)처럼 잠깐 수단을 써서 형님으로 하여금 먼저 와서 자신을 만나게 하려는 게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더욱 가소롭습니다.이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형님이 스스로 나는 간재의 문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또한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이 이미 음성의 오진영과 당여가 되어 스승을 무함했다면, 의리는 천하에 누구나 인정하는 공변된 것이고, 선비는 공정한 의론이 있는 곳이니, 어찌 유독 간재의 문도에만 그 일이 해당되고, 다른 선비는 관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부친을 소를 훔쳤다고 무함하는 자가 있는데, 이웃집 사람이 형님에게 '나와 그 집은 친족이 아니니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 자식의 죄를 논하겠는가.'라고 말한다면 형님은 장차 그 말이 이치에 맞다고 인정하시겠습니까? 이 일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이점에 대해서도 또 생각해볼 일입니다.우연히 생각이 이에 미쳐서 대강 들어 삼가 서술하니 한강(寒江)형과 함께 보면서 그 정묘한 곳까지 살펴주시고, 불필요한 일을 한다고 비웃지 마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격물치지의 한 가지 일일 따름입니다. 某人之語人以欲訪兄, 而以與弟相親, 義理不同, 故不敢云云. 歸而思之, 甚可笑也. 孟子曰: "人之所同然者, 理也義也." 天下豈有不同之義理乎?準之以人心之同然, 而此是則必彼非, 彼是則必此非, 茍人是而我非, 則當改見而從之, 若我是人非, 喻之不改, 而所係者大, 則當辨斥之. 渠以義理爲不同之物, 則是所認以爲義理者, 乃一己之私見, 非人心之同然也. 惟其以己見爲義, 而自信為是, 故亦於人見之出於同然者, 非惟不服, 反以爲非義不是, 而斥之, 此之謂不知義理也. 雖然, 既如此則亦已矣. 今乃欲訪與所不是者相親人, 而畧示景仰之意, 以語夫人者, 又何也? 無乃乍用手段, 使其先來見己, 如陽貨之於孔子也耶? 若然則尢可笑也.此則既然矣, 至於兄所自言我非艮徒, 何關之有? 亦恐未安. 渠既黨陰而誣師, 則義者天下之公, 士者公論之所在, 豈獨艮徒有事, 而他士可無關乎? 人有誣其父盜牛者, 而其隣人復於兄曰: "我與其家非族親, 何關而論其子之罪乎云爾,' 則兄將許其言之合義乎? 何以異於是? 此又可思者也.偶念及此, 聊舉仰陳, 幸與寒江兄同看, 而究其極致, 勿以爲多事而笑之, 如何? 此實竆格之一事故耳. 사람들이……의이다 맹자는 "입이 맛에 있어서 똑같이 즐김이 있고, 귀가 소리에 있어서 똑같이 들음이 있으며, 눈이 색에 있어서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마음에 이르러서만 홀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이 없겠는가? 마음에 똑같이 옮게 여기는 것은 어떤 것인가? 리이며 의이다.〔口之於味也, 有同耆焉, 耳之於聲也, 有同聽焉, 目之於色也, 有同美焉. 至於心, 獨無所同然乎? 心之所同然者何也? 謂理也, 義也〕"라 했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양화(陽貨)가 공자(孔子)에게 한 것 양화가 공자를 만나려 하였으나 공자가 만나주지 않자 먼저 돼지를 선물로 보낸다. 이에 공자는 양화가 없는 틈을 타서 찾아가 사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교롭게 양화를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양화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 일은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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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신 신극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姜士愼 信極 辛巳 당신의 집안 가운데 100년 전에 휘(諱)가 석빈(碩彬)이란 분이 계신지요? 이제 듣자하니 《유현연원록(儒賢淵源錄)》을 간행하는데 그 가운데 저의 고조를 그 문인으로 기록하였다고 하니 이 무슨 일입니까? 강공(姜公)의 도학(道學)과 연원(淵源)은 제가 고루하기 때문에 부끄럽게도 일찍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고조는 비록 효성과 학문의 실제가 있었지만, 일찍이 제자의 집지(執贄)108)하는 예로써 같은 시대의 유문(儒門)에 출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간행하는 곳의 여러분들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참으로 괴이합니다. 이는 반드시 강공의 본손(本孫)이 청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데 억지로 제자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피차간에 모두 생색이 없어서 도리어 선조에게 누를 끼치고 죄를 얻을 것이니,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후 집안 아이를 보내서 탐지하게 하고, 기어이 저의 고조의 성(姓)과 휘를 〈문인록〉에서 끄집어 낸 후에 그만두고자 합니다.만일 저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시면 어찌 끝내 탈이 없겠습니까? 간절히 바라건대 좌하께서 그 사람109)을 잘 깨우쳐서 급히 바르게 귀결하게 하여, 아무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겨운 교분을 제가 믿고, 또 당신 집안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제 속마음을 이렇게 아뢰니, 행여 물 흐르듯이 보지 말기를 더욱 간청합니다. 貴族中, 限百年前, 有諱碩彬否.聞今刋儒賢淵源錄中, 以鄙之高祖, 錄爲其門人云, 此何事也.姜公之道學淵源, 坐此孤陋.愧未曾聞.鄙之高祖則, 雖有孝學之實, 未嘗以弟子執贄禮, 出入於幷世儒門矣.未知刊所諸人,何所據而爲此.絶可恠也.此必爲姜公本孫之所請.然非其實而强名之, 則彼此俱無生色, 反爲累先而獲罪, 可不懼哉.玆遣家兒探知, 期於㧞出鄙高祖姓諱而後己.如不見聽, 則豈終無事.切乞座下善喩其人, 亟爲歸正而無事如何.仰恃情契, 且在貴族中, 故如是衷告, 幸勿泛視更恳. 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 뵐 때에 예폐를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수(脩) 한 속(束) 이상을 가지고 와서 집지(執贄)의 예를 행한 사람에게는 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다. 그 사람 편집인으로 나의 고조를 〈문인록〉에 넣은 사람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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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族弟希淑 乙丑 은(隱)의 권순명이11) 음성의 오진영에게 준 편지에서 이르기를 "우리들은 사림(士林)에 화(禍)를 끼친 소인(小人)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음성의 오진영이 답하여 이르기를 "사람에 화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선사(先師)에게 누를 끼쳤다."라고 하였다. 이는 목리(木里)에서 말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아우도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는가? 진(秦)나라 영정(嬴政 진시황)도 시법(謚法)을 제거했고, 남곤(南袞)도 자기의 원고를 불살랐으니, 대개 고금에 악행을 행한 자는 스스로 그 죄를 알지 아니함이 없었다. 은의 권순명이 편지에서 '사림에 화를 끼친 소인'이라고 말한 것은 스스로 제공한 단사(斷辭)로서 여전히 남아있는 하늘의 떳떳한 이치에서 나온 것이다.(그러나) 음성의 오진영이 '사림에 화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선사에게 누를 끼쳤다'고 답한 것은 또한 사림에 화를 끼친 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고의로 경중(輕重)이 전도(顚倒)되고 착란(錯亂)한 말을 하여 사람을 현혹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가장 간교한 점이다. 선사를 사림에 대비하면 선사가 무겁고, '사림에 화를 끼친 것'을 '선사에게 누를 끼친 것'에 대비하면 '사림에 화를 끼친 것'이 무겁다. 이 이치가 분명한데도 저의 말이 이와 같으니, 그 꾀가 비록 간교하나 실제로는 마음이 곤궁하여 도피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대개 이 여덟 글자12) 사이에 자기의 기교를 드러내고 마음이 완악하고 험한 정상(情狀)이 다 노출되었다. 隱權與陰吳書云, 吾輩難免禍士林之小人, 陰答云, 不但禍士林, 累先師也.此是木上所誦云, 曾聞知否? 秦政除謚法, 南袞焚已稿, 蓋古今爲惡者, 未有不自知其罪矣.隱書禍士林小人, 是自供斷辭, 而出於天彞之猶存也.陰答不但禍士林累先師者, 亦自知禍士罪之莫逃, 而故爲輕重倒錯語以眩人也.此其最黠處也.先師對士林則師重, 禍士對累師則禍重.此理昭如而彼言如此, 其計雖黠, 實出窮遁也.蓋此八字之間, 閃巧頑險之情狀盡露矣. 은(隱)의 권순명 원문은 '隱權'으로 은이 들어가는 지명에 사는 권순명이란 뜻인데 지명을 찾지 못했다. 여덟 글자 원문의 '不但禍士林 累先師" 여덟 글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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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보냄 기사년(1929) 與族弟希淑 己巳 어제 백광오(白光五) 형이 내방(來訪)해서 이원재(李遠齋)의 말을 전하기를, "근자에 김희숙(金希淑)과 권고경(權顧卿 권순명) 두 사람이 우리 집에서 만났다. 내가 두 사람에게 통관(通款 마음을 열고 대화함)을 권했는데, 권고경은 말하기를 '실컷 타격을 받은 자가 감히 먼저 청할 수 없다.'고 하고, 김희숙은 말하기를 '선사(先師)를 섬긴 자로서 의리상 통관할 수 없다.'고 하니, 권고경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떠났다."고 하였다. 듣고 나니 우리 아우의 처의[處義 의(義)에 맞게 처신함]가 엄정함이 기뻤다. '오진영이 (선사의) 묘에 아뢰어 죄를 자복하는 것을 권순명이 저지한 것은 그 죄가 오진영의 죄보다 더하다.'는 것이 우리 아우의 평소의 말인즉, 금일의 처의도 내가 본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의리가 더욱 어두워지고 기강이 더욱 퇴패(頹敗)하여 옛날의 강직하고 올곧은[剛毅直方] 자들도 그 기개가 가만히 녹아 사라져 지위(脂韋)와 호도(糊塗)13)를 행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 때에, 이에 우리 아우의 의연한 일착(一著)이 사람의 심목(心目)을 일깨움이 이와 같으니 어찌 기쁘고 다행이지 않은가. 또한 시비가 오래되면 저절로 정해지기 때문에 오진영 쪽의 무리들이 비록 완험(頑險)하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는 자못 점차 그 죄를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단지 세월이 오래 지나면 이러한 중정(中正)한 의론이 이완되어서 죄를 사면 받고 용납 받으려는 이것이 본디 권순명이 바라는 바이다. 그러니 그가 '감히 먼저 (통관을) 청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원재(遠齋)의 경우 또한 일찍이 스승을 무함하고 원고를 어지럽혔다고 하여 오진영과 권순명의 무리를 성토하였는데도 여전히 스스로 화니대수(和泥帶水)14)를 의리로 삼아 다시 사람들이 훈초(薰草)와 악초(惡草)를 한 그릇에 담기를 바라니, 진실로 이른바 "이미 예에 맞게 스스로 처신도 못하고 또 예에 맞게 남을 대우하지 못한다."15)는 것이 이것이다. 나는 가만히 이를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긴다. 연전에 우형근(禹炯根)이 나를 배알 했을 때, 나는 꾸짖어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급기야 그가 뒤늦게 사죄했을 때에도 누워서 응대하지 않았다. 혹자는 내가 너무 지나치다고 의심했지만, 나는 후회한 적이 없었다. 이제 우리 아우가 처신한 의(義)를 듣고 이전 일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으니, 아우를 가상히 여기고 다시 내 자신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다시 원하건대 우리 아우는 무릇 일상생활에서 진덕수업(進德修業)하고 사특함과 올바름[邪正], 의와 리[義利], 선과 악[淑慝], 전아함과 속됨[雅俗]이 간여 된 즈음에는 모두 이 예(例)로 단정하여 꼿꼿이 우뚝 서고 순수하여 티끌 없는 군자(君子)를 성취하도록 하라. 昨得白兄光五來訪, 傳李遠齋言, 近金希淑權顧卿兩値於吾家.吾勸二人通款, 權則曰飽受打擊者, 不敢先請, 金則曰事先師者, 義不可以通, 權遂起身而去云.聞來竊喜吾弟處義之嚴正也.命沮震告墓服罪 其罪浮震, 吾弟雅言, 則今日之處義, 吾固知之.然見今義理益晦, 紀綱益頹, 舊日之剛毅直方者, 不免潛銷暗鑠而爲脂韋糊塗之時, 乃得吾弟毅然一著, 警人心目有如此者, 豈不喜幸? 且是非久則自定, 故震邊一隊, 雖云頑險, 其中亦頗有漸知其罪.只望日久月遠, 此中正論之弛緩赦罪而容與者, 此固命之所願也.其云不敢先請者宜矣.若遠公則亦嘗以誣師亂稿, 討震命輩矣, 猶自以和泥帶水爲義, 復欲人之薰猶同器, 誠所謂旣不能以禮自處, 又不能以禮處人者此也.竊爲之嗟惜也.年前禹炯根之拜吾也, 吾叱斥不受, 及其追謝也, 臥而不應.或者疑其爲過, 而不曾自悔矣.今聞吾弟所處之義, 益信前事之不至己甚, 旣庸欽尙, 復以自幸.更願吾弟凡干日用進修邪正義刋淑慝雅俗之際, 皆用此例斷定, 成就挺然特立粹然無瑕之君子人也. 지위(脂韋), 호도(糊塗) 지위(脂韋)는 미끈한 기름과 무두질한 가죽처럼 유약하게 군다는 뜻으로, 보통 구차하게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을 비유하고, 호도(糊塗)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화니대수(和泥帶水) 흙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뒤섞여 구분되지 않는 두루뭉술한 태도를 말한다. 이미 예에……못한다 《小學 嘉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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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함 기사년(1929) 答族弟希淑 己巳 지금 풍우(風雨)가 갑자기 몰아치고 시랑(豺狼)이 앞길을 막아 중도에 넘어진 자들이 어찌 한(限)이 있으랴. 그런데도 우리 아우는 정신을 떨치고 용맹하게 곧장 앞으로 나아가 갈수록 더욱 굳건하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비록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기뻐서 잠을 못 잤다는 나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부디 원컨대 더욱 면려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반계수록》은 얼마나 보았는가? 짐작하고 헤아려서 통행(通行)할 실질적인 뜻이 있음을 보았는가? 정전제(井田制)를 행하지 않으면 다스림이 모두 구차하다는 것은 고금의 정론으로 다른 말이 없는 것인즉, 반계(磻溪 유형원)의 균전설(均田說)도 비록 옛 제도는 아니지만 실로 정전(井田)의 뜻을 얻었다. 만약 선치(善治)를 원치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진실로 선치를 행하고자 한다면 이 균전설을 버리고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급박하게 부인(富人)의 전지(田地)를 빼앗아야 한다는 어려움은 횡거(橫渠) 때부터 이미 대처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다만 땅은 더 넓어지지 않고 사람은 날로 더 늘어나서, 전지는 한계가 있는데 사람의 요구는 끝이 없으니 또 어찌할 것인가. 중국의 진장형(陳長蘅)이 이르기를 "만약 큰 재해와 큰 난리, 큰 역병이 없다면 25년 사이에 백성의 인구는 마땅히 배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험 삼아 우리나라의 현 상황으로 계산하건대 이 말은 진실로 옳다. 그렇다면 형세 상 반드시 해마다 이미 주었던 전지를 나누고 빼앗아서 받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한 연후에야 일이 끝날 것이다. 그 사이에 분란(紛亂)과 생경(生梗)의 사단(事端)이 생각건대 또한 심할 것이다. 이치를 따라 순응하여 아무 탈 없이 행할 방도를 이미 정심(精審)하게 연구해보았는가? 행여 나에게 보여주기를 바란다.이곳의 장과(長課)는 현재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에 있는데 한번 거의 끝나간다. 그러나 권질(卷帙)이 호양(浩穰)하고 정력이 천단(淺短)하여 두루 망라하지 못했으니, 비유컨대 굶주린 자가 갑자기 성찬(盛饌)을 만나서 급급히 탐식(貪食)하느라 실제로는 그 참된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대개 팔가(八家)의 문장에 대해서는 모씨[茅氏 모곤(茅坤)]가 본디 상론한 것이 있다. 내가 (당송팔가문을) 살짝 맛본 바로는, 창려(昌黎 한유)의 문장은 기(氣)를 토해내면 무지개를 이루고 침을 뿜으면 비가 되어, 해상에 신기루가 일어나고 풀숲의 거미가 그물을 치는 것과 같아서 강대하고 기묘함이 각각 그 극진한 데 이르렀다. 읽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고 괴이하게 해서 감격하여 흥분시키는 희락(喜樂)의 정(情)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탁월하여 미칠 수가 없다. 유주(柳州 유종원)의 문장의 강함은 한유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강함이 아니라 날카로운 것이고, 묘함은 한유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묘함이 아니라 법식(法式)이 있는 것이다. 그 크고 기이함도 또한 장기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 기사의 핍진(逼眞)함과 의론의 절당(切當)함은 실로 문장가의 궤범(軌範)이다. 여릉(廬陵 구양수)의 문장은 문사와 이치가 모두 극진하고 기운과 법식을 지극히 갖춰서 화실(華實)을 겸하여 포괄하였으니, 비유하면 대인군자(大人君子)가 현단복(玄端服)을 입고 큰 띠에 홀(笏)을 들고 묘당 위에서 주선(周旋)하는 것과 같아서 그 착한 말과 좋은 계책, 반듯한 발걸음이 모두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 기상은 응중(凝重)하고 풍채는 뛰어나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지치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읽으면 깊이가 비록 다르나 총명한 자나 둔한 자가 모두 그 맛을 알고, 배움의 다소는 같지 않아도 솜씨 있는 자나 졸렬한 자나 모두 효과를 얻는다. 그러나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다 궁구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삼소(三蘇)의 문장에서 노천(老泉 소순)의 기굴(奇崛)함과 자유자재 함은 한유와 유사하고, 날카롭게 솟아서 범하기 어려운 기상은 유종원과 유사하나, 전형(典型)의 엄밀함과 단련(鍛鍊)의 정숙(精熟)함과 문채의 찬란함은 끝내 손색이 있으니 생각건대 혹여 만년(晩年)에 성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파(東坡 소식)의 기사(奇詞)와 웅론(雄論)은 창려와 비슷하고 풍신(風神) 꾸밈은 여릉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조예가 홀로 도달한 곳은 하늘이 돕고 신명이 발현한 듯하여 거의 인연(人烟 세속)의 말투가 아니다. 그러나 문사가 이치보다 과하고 문채가 그 바탕을 지나쳐 학문에 폐단이 없다고 이를 수 없다. 그 아우 영빈(瀕濱 소철)은 그 형 동파의 체제를 갖추었지만 미약한 자라고 이를만하다. 그 홀로 초연하여 정신이 발현된 것에 이르러서는 내가 참여하여 논할 바가 아니다. 왕안석(王安石)과 증공(曾鞏)의 문장은 비록 웅기(雄奇)한 기상과 문채의 발현은 적지만 경술(經術) 가운데 근본하고 한결같이 전형(典型)과 승묵(繩墨)에서 나와서 모두 유자(儒者)의 문장에 가까운데, 왕안석이 나은 듯하다. 팔가(八家) 가운데서 한유가 지극하고 구양수가 다음이다. 한유는 비유하자면 성인(聖人)의 신묘하여 알지 못하는 경지요, 구양수는 비유하자면 현인(賢人)의 성대한 덕이 날로 드러난 것이다. 성인은 사람마다 배워서 갑자기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인은 학문에 근거가 있고 성인에 들기가 가깝다. 나는 이 때문에 말하기를 "문장을 배우는 자가 만일 높은 재주가 아니라면 한유는 갑자기 배울 수가 없으니 여릉을 배워서 학업에 바탕이 있고 효과를 기약할 수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한다. 우리 아우는 한유를 배우다가 곤궁한 자이다. 이에 나의 어리석은 견해를 개진하니, 그대의 견해와 크게 차이가 없는지 모르겠다.금번 여름에 연달아 여안(汝安)의 편지를 받았다. 살펴보니 그 문사(文辭)가 점자 진보하고 취향(趣向)이 더욱 맑았다. 이를 확충하여 크게 하면 앞날이 거의 낙막(落莫 쇠락)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매우 기뻐하노라. 생각건대 종족(宗族) 가운데 그대가 이미 우뚝 두각을 드러내 용기를 돋아 앞장서 창도하고, 여안이 또 자기의 재주를 다 써서 그 뒤를 잇고자 하니 어찌 선령(先靈)의 음우(陰佑)가 아니겠으며, 우리 가문의 여경(餘慶)이 아니겠는가. 10대조에서 분가했다고 하여 소원한 족속이라 말하지 말라. 나는 그대를 친 아우처럼 보고 지도하여 함께 대도(大道)에 이를 것이니 그 두터운 기대를 가누지 못하겠노라. 顧今風雨驟至, 豺狼當前, 中途而踣躓者何限.而吾弟抖擻精神, 勇往直前, 愈往愈健, 此豈偶然者.雖謂之天意, 未爲過也.喜而不寐, 吾非虛言.幸願加勉, 副此專望也.《磻溪隨錄》看得幾何? 見有酌量通行之實趣否? 不行井田, 爲治皆苟, 古今定論而無異辭者, 則磻溪均田之說, 雖非古制, 實得井田之意.若不欲爲善治則已, 苟欲爲之, 舍是而不能也.亟奪富人田之難, 自橫渠已有處之有術之說.但地不加廣, 人日益衆, 田有盡而人之求無已則又柰何? 中國陳長蘅謂, 如無大災大亂大疫, 二十五年間, 民口當加一倍, 試以我國現狀計之, 此言良是.然則勢必逐年而分奪已授之田, 以給其未授者然後乃已, 其間紛亂生梗之端, 想亦甚矣.循理順應行所無事之方, 已得精審硏究否? 幸示及也.此中長課, 見在唐宋八家文, 而一遍垂畢.然卷帙浩穰, 精力淺短, 包羅不周, 譬如飢者之猝遇盛饌, 急於嚃羹嘬炙, 而實不知其眞味也.蓋八家之文, 茅氏固有詳論者矣.若乃區區一指之染嘗, 則以爲昌黎之文, 吐氣成虹, 噴沫成雨, 海蜃之起樓, 草蛛之結網, 剛大奇妙, 各極其至.讀之使人驚怪感奮, 喜樂亦不一其情, 而莫測端倪, 卓乎其不可及也.柳州之文, 剛或似韓, 而實則匪剛伊鑱, 妙或似韓.而實則匪妙伊法, 其大其奇, 又恐非所長也.然其記事之逼眞, 議論之切當, 實爲文章家軌範.廬陵之文, 詞理俱到, 氣法備至, 華實兼該, 譬如大人君子.端委紳笏, 周旋於廟堂之上, 昌言嘉模, 規行矩步, 無不中度.氣象凝重, 風釆秀發, 令人愛敬而不倦, 故讀之淺深雖殊, 聰鈍皆知其味.學之多少不同, 巧拙均獲其效, 然及其至則有不能究者也.三蘇之文, 老泉之奇崛自由, 有似乎韓, 鑱峭難犯, 有似乎柳, 典型之嚴密, 鍛鍊之精熟, 文釆之煒燁, 終有所遜, 意其或者晩成之故也.東坡之奇詞雄論, 彷佛昌黎, 風神色澤, 彷佛廬陵.而其造詣獨造處, 若天助神發, 殆非人烟口氣, 然恐詞勝其理, 文過其質, 不可謂學之無弊也.其弟瀕濱, 可謂具體於乃兄而微者, 至其超獨神發, 則非所與論也.王曾之文, 雖少雄奇之氣, 文采之發, 本之於經術之中, 而一出於典型繩墨, 俱近於儒者之文, 而王似爲優矣.八家之中, 韓至焉歐次焉.韓譬則聖人之神妙不可知者也, 歐譬則賢人之盛德日可見者也.聖非夫夫之可學而驟至者.賢人則學之有依據, 入聖爲近.吾故曰學文章者, 自非高才, 韓不可猝學, 不如學廬陵之業有地而效有期也.吾弟是困於學韓者.故玆陳瞽見, 未知不大逕庭於盛見否.今夏連得汝安書.見其文辭漸進, 趣向愈淸.充此以大之, 前頭庶不落莫矣, 吾甚喜之.念宗族中, 左右旣嶄然出頭, 鼓勇前倡, 汝安又欲竭駑步而繼其後, 豈非先靈之冥佑門戶之餘慶哉? 十世之分, 莫曰疏屬.視同親弟而指導之, 偕至大道, 不勝其厚望焉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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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함 경오년(1930) 答族弟希淑 庚午 지난날 금강산에서 보낸 편지는 바쁘고 피곤한 가운데 대략 한두 가지만 이야기하였거늘, 우리 아우는 무엇을 보고서 우화(羽化)한 신선(神仙)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닌 현인(賢人)과 변화무쌍한 문장으로 나를 기대하고 찬탄하기도 부족해 이어서 축하하고 부러워하는가. 신선은 본디 성현(聖賢)이 말하지 않는 것이고, 문장은 비록 도(道)의 오묘함을 발휘하지만 우리 유자(儒者)의 극치가 아닌데, 게다가 나는 늙어서 미칠 수도 없다. 다만 호연지기는 배우기를 원하는 바이다. 금강산이 맑게 솟은 것은 마땅히 나의 호연지기를 도와서 기를만 한데도, 자질이 잡박하고 공부가 소홀하여 일찍이 그 기운을 받아 기를 바탕이 없어서, 끝내 산은 산이요 나는 나라는 탄식으로 귀결되었으니, 그대가 나를 권장하여 언급한 말에 대해 부끄러워 대답할 수가 없다.우리 아우 같은 경우는 나이와 힘이 모두 건장하고 견문(見聞)이 부유하며 기상이 호매(豪邁)하니, 한 번 이 산에 올라 기절(奇絶)함을 받아들이고 보아서 시문(詩文)에 오묘함을 담는 것도 오히려 여가의 일에 속할 것이다. 그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와 땅에 서린 웅장함이 천지 사이에 가득 찬 호연지기를 도와 성취할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문장과 도의가 지극하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세속을 초월한 것이다. 신선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있다면 또한 세속을 초월한 사람일 것이니 어찌 꼭 우화등선한 자라야 하는가. 부디 급히 도모하여 나처럼 늙을 때까지를 기다리지 말기를 바란다. 학자는 모름지기 지보(地步)를 넓게 하고 심목(心目) 간에 터득한 연후에야 도를 말할 수 있다. 삼가 보통의 사람들처럼 귀로만 듣는 국한된 학문을 하지 말라.신라태자(新羅太子)16)의 유적을 공경히 받들어 살펴보았는데, '동경의열 북지영풍(東京義烈 北地英風)' 여덟 자의 전각이 완연히 어제 일과 같았다. 망군대(望軍臺)의 병졸들과 비로봉(毘盧峰)의 묘소도 뚜렷하게 가리킬 수 있어서 사서(史書)과 족보(族譜)에서 보지 못한 것을 다 들었으니 이 여행은 진실로 헛되지 않았다. 아, 태자의 고절대의(高節大義)가 진실로 천지에 뻗치고 일월처럼 빛나니, 상론(尙論)하는 자는 한(漢)나라의 유심(劉諶)17)에 견준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처신이 종용(從容)하여 효성을 손상시키지 않은 것은 유심보다 일격(一格)이 높다고 여긴다. 백세(百世) 후에도 감동치 않을 자가 없거늘, 하물며 후손이 되는 우리 입장에서 어찌 단지 방황 하고 차마 떠나지 못할 뿐이겠는가. 태자 때문에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양호(羊祜)18)는 큰 덕이 있지 않았고 양양(襄陽) 사람들 중에 가까운 친족도 없었지만, 단지 그 은혜가 사람에게 미쳐서 '타루비(墮淚碑)'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우리 태자의 대절(大節)은 삼한(三韓)을 빛냈으니 어찌 양호의 작은 은혜에 견줄 것인가. 경순왕(敬順王)에서 함께 나온 여러 김씨(金氏)들은 태자에 대해서 본손(本孫)이 아니다. (그러나) 방계의 후손이 팔도(八道)에 가득 찼는데, 천년이 흐르도록 여전히 돌조각에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볼 수가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일까. 실로 전인(前人)이 미처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유감이 없을 수 없다. 비록 우리 김씨의 능력으로 오히려 이 일에 참여할 수 있으나, 누가 동지들과 도모하고 힘을 합쳐서 이 좋을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거듭 탄식하노라. 曩日金剛書, 忙遽疲困中, 略掛一二, 吾弟何所見, 而以羽化之仙, 浩氣之賢, 變態之文章期, 贊之不足而繼以賀羨也? 仙固聖賢之所不道也, 文章雖可以發揮道妙, 而非吾儒極致, 且老矣無及.惟浩氣則所願學, 山之淸峭聳拔, 宜若助養吾氣, 而質駁工踈, 曾無受養田地, 竟歸山自我自之歎, 盛獎之及, 愧無以對.若吾弟者, 年力俱壯, 聞見富而氣豪邁, 試一陟此山, 奇絶之所領覽, 入竗乎詩文, 尙屬餘事.其高揷天, 其雄蟠地, 有以配成塞乎兩間之氣, 吾不疑也.文與道之至, 其人己超俗矣.仙子無則已, 有之亦超俗人是已, 豈必羽化者? 幸亟圖之, 無待如余之老也.學者須放着地步, 得之心目間然後, 可與言道.愼勿似一般耳食局煞學也.新羅太子遺跡, 敬得奉觀, 而東京義烈北地英風八字刻, 宛然如昨, 望軍之卒, 毗峰之墓, 歷歷可指, 備聞史與譜所未見者, 此行諒不虛也.噫! 其高節大義, 固已亘天地光日月矣, 尙論者, 比於漢之劉諶.然吾則以爲處得從容, 不傷孝思, 高諶一格也.百世之下, 宜莫不感, 矧在吾之爲後裔者, 豈但彷徨不忍去, 爲之墮淚而不禁也.羊祜非有大德, 襄陽人幷無懿親者, 徒以其惠及人, 而至有墮淚之碑.若太子之太節, 光輝三韓, 豈羊祐之小惠比也? 諸金之同出於敬順王者, 於太子非本孫, 則傍裔彌滿八城也, 而閱勢千餘, 尙不見片石紀實, 此曷故焉? 實不能無憾於前人之未遑.雖以吾金之力, 尙可以與此, 然疇能謀合同志, 成此好事, 重可嘆也. 신라태자(新羅太子)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삼베옷을 입고 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금강산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유심(劉諶)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인 유심(劉諶)을 가리킨다. 촉한이 위(魏)나라 장군 등애(鄧艾)의 침공을 받고 수도인 성도(成都)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유선은 항복할 것을 결심했는데, 유심은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유선이 듣지 않자 그는 유비(劉備)의 사당에 가서 통곡하고 처자(妻子)를 죽인 다음 자결하였다. 《三國志 卷33 後主傳》 양호(羊祜) 위(魏)나라 말엽에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순욱(荀彧)과 같이 나라의 기밀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진(晉)나라가 들어서자 거평후(鉅平侯)에 봉해졌고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로 10년간 나가 있었는데, 재임하는 동안에 둔전(屯田)을 실시하여 식량을 비축하면서 오(吳)나라를 정복하는 전략을 짰다. 평일에는 갑옷을 입지 않고 가벼운 갖옷에 허리띠를 느슨히 맨 차림으로 오나라 장수 육항(陸抗)과 사신을 교환하면서 원근을 안심시켜 강한(江漢)과 오나라 사람의 인심을 수습하였다. 그 뒤에 두예(杜預)를 추천하여 자신의 후임으로 삼았다. 그가 죽은 뒤에 남주(南州)의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고 통곡하였으며 그가 평생 노닐던 현산(峴山)에 비를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두예가 그 비를 타루비(墮淚碑)라고 이름을 붙였다. 《진서(晉書)》 34권 〈양호열전(羊祜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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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보냄 계유년(1933) 與族弟希淑 癸酉 현재 이곳에 오는 이가 얼마 되지 않아 고요히 거처하게 되니, 종전에 본원(本原)의 공부가 결여되어 착수할 만한 전지(田地 마음의 본바탕)가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 곧바로 마땅히 뜻을 용경(用敬)에 오로지 하여 미발(未發)의 기상을 함양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실천의 근본으로 삼고자 한다. 나는 이천(伊川)의 반나절 정좌(靜坐)는 실행하지 못하지만, 또한 때때로 눈을 감고 마음을 보존해서, 감히 마음을 내버리지 않고 점차 수렴하여 고요한 경계로 들어가니 기상(氣象)과 의사(意思)가 전날에 비해 다름을 느끼는 듯하다. 궁리하고 연구하는 공부에 있어서는 이미 나이가 노쇠하고 정기(精氣)가 천단(淺短)하니, 마땅히 간약(簡約)함을 돌이켜 구해야 할 시절이거늘, 또한 종전의 박학상설(博學詳說)19)의 공부가 없음을 깨달으니 비록 돌이켜 요약하고자 한들 어디에서 바탕을 취하겠는가. 아마도 편고(偏枯 반신불수)한 학문을 이룰까 두렵다. 그러나 이미 젊은 시절을 그르쳐서 뒤늦게 탓해도 어쩔 수 없으니, 우선 알고 들은 것 가운데 나아가 일맥(一脈)의 선자(線子)20)로 평일의 지해(知解)를 일관되게 하고 한 자루의 손잡이21)를 종신토록 패복(佩服)으로 삼을 수 있다면, 이 삶을 헛되이 보내진 않으리라. 나는 이렇게 범부의 졸렬하게 수양하는 법에 견주는데, 그러나 우리 아우의 큰 안목에 비웃음을 사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見此來者無幾, 可以靜處, 覺得從前欠却本原工夫, 無田地可得下手.欲卽今便當專意用敬涵養於未發, 特爲格致踐履之本.伊川之半日靜坐, 雖不得行, 亦且時時閉目存心, 不敢放下, 漸次收入靜界, 氣象意思, 似覺有異於前.至於窮硏之功, 旣已年衰精短, 恰當反求簡約時節, 而亦覺從前無博詳工夫, 雖欲反約, 何所取資? 恐成偏枯之學.然旣蹉却少壯, 追咎無及, 且就所知所聞中, 見得一脈線子可貫平日知解, 一把柄子可作終身佩服, 庶不至虛度此生.竊自附於下士拙修之法, 未知不見笑於吾弟大眼目耶. 박학상설(博學詳說) 《맹자(孟子)》에 보인다. 선자(線子) 선자는 양선(陽線)과 같은 뜻으로 동짓날 양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박학상설의 공부를 통해 얻는 성과를 비유하는 듯하다. 한 자루의 손잡이 본원 공부를 의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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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가승》의 서문 【임오년(1942)】 《晉州姜氏家乘》序 【壬午】 아버지는 자식의 하늘이니, 두 하늘이 없고, 할아버지는 사람의 근본이니, 근본은 하나일 뿐이다. 아버지와 자식은 오륜(五倫)의 으뜸이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같은 기(氣)를 전하는 관계이니, 만약 하늘을 둘로 하고, 근본을 둘로 한다면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리[人道]가 사라질 것이고, 사람이 살아나가는 이치[生理]가 끊어질 것이다.옛사람은 생존해 계신 어버이를 섬기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 이외에 선조를 받드는 의절에 관계된 것들에 대해서 모두 계속 생각하며 다른 데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상 계세(繫世)99)의 순서와 소목(昭穆)100)의 차례들은 삼가 기록해 지켜서 조정의 소사(小史)101)가 결정ㆍ변별하기를 기다렸고, 후손의 유래와 대대로 쌓아온 미덕의 진술이 뚜렷하게 소부(騷賦 시문(詩文))의 작품에서 나왔던 것은 모두 그 근본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혹 그 지킴을 잃게 되면 전전긍긍하며 단지 아는 것만을 기술하고 감히 적량공(狄梁公)과 주문공(朱文公)을 조상으로 삼지 않은 것102)이 송(宋)과 명(明)의 시대에 나타났던 것은 또한 근본이 둘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어찌하여 근래 이후로 간혹 까마득하게 오래전부터 있었던 조상을 버리거나 간혹 대대로 현존했던 조상을 끊어 버리고 여러 신위의 귀신을 몰아서 전 시대에 후사가 없는 남의 집안의 사람 아래로 나아가 억지로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라 명명하되 곽숭도(郭崇鞱)와 황악(黄渥)의 무리가 거짓으로 연합했던 일103) 뿐만 아닌 것을 꺼리지 않고 행하여 스스로 천륜과 근본을 끊는 자가 많은 것인가? 아, 교화가 밝지 못하여 인의(仁義)가 꽉 막히고, 간사함과 교활함으로 글을 놀려 사람을 악에 빠뜨린 자들이 여기에 함께 죄가 있을 것이다.우리 동문 강군(姜君) 동영(東泳)의 선조가 진양(晉陽 진주(晋州))의 옛 종족으로서 호남으로 옮겨 간 것이 장릉(長陵 인조(仁祖)) 병자호란 때에 있었으니, 이로 인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지금 군에 이르러 다른 파에 붙여서 족보를 만든 잘못을 깨닫고서 대인(大人)에게 아뢰어 고쳐 바로잡을 때에 우리나라 전체 강씨(姜氏)의 시조인 원수공(元帥公) 휘 이식(以式)을 받들어 책머리에 쓰고, 그 이하 알지 못하는 선조는 빼놓은 채 10대조 휘 회(檜)를 차례로 써서 중조(中祖)로 삼아 그 아래에 연달아 써서 자기와 아들에 이르렀고, 인하여 10대에서 같이 나온 종족과 함께 저절로 한 파의 족보가 완성되었다.이리하여 천륜이 바르게 되고, 큰 근본이 확립되었으며, 인(仁)과 의(義)가 아울러 얻어져서 산 사람의 이치가 다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었으니, 경사와 복록이 끝이 없고 문호가 창대해지리란 것은 계(契)를 잡고 기다릴 수 있다.104) 그런데 스스로 근본을 끊고도 미혹하여 되돌아올 줄 모르는 저 사람들은 비록 혹 한때를 보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비유하면 나무 위에 붙어 살아가는 식물이나 수면 위에 떠도는 부평초와 같으니, 우연히 풍상이나 파랑을 만나게 된다면 어찌 무너지고 흩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처로울 따름이다.군이 백 리 먼 곳에서 쇠약한 몸을 이끌고 와서 나에게 그 일을 서술하고 족보의 서문으로 삼기를 청하니, 내가 기쁘게 듣고 사양하지 않으면서 또한 말하기를, "《맹자(孟子)》에 '상도가 바르게 되면 백성이 떨쳐 일어나서 이에 사특함이 없어진다.105)'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 군의 이 일은 이미 상도가 바르게 됨을 얻은 것이다. 때문에 이 일을 기록하여 현재와 훗날의 강씨(姜氏)들에게 권면하고, 아울러 이 세상의 백성들이 떨쳐 일어나서 사특함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父者, 子之天也, 天無二焉; 祖者, 人之本也, 本一而已. 父子爲五倫之首, 祖孫爲一氣之傳, 若兩天而二本, 則人道蔑如, 生理絶矣. 古之人, 自事生追遠以外, 凡干奉先之節, 旣皆念念而不他適矣. 若乃父祖以上繫世之序、昭穆之次, 則謹書而守之, 以待朝家小史之奠辨. 至於苗裔之自、世德之陳, 班班出自騷賦之作者, 皆所以重其本也. 不幸而或失其守, 則兢兢然只述其所知, 而不敢祖狄梁公、朱文公, 猶見於宋、明之世者, 亦懼二其本故也. 夫何挽近以來, 或棄其冥冥自在之祖, 或截其世世現在之祖, 驅率累位之鬼, 而就人家前代無後之下, 强名以父子祖孫, 而不憚爲不啻韜、渥輩冒聯之爲而自絶其天本者之多也? 嗚呼, 敎化不明, 仁義充塞, 而奸猾舞文, 陷人於惡者, 與有罪焉. 吾同門姜君 東泳之先, 以晉陽故族, 轉徙湖南者, 粤在長陵丙子之亂, 而因以不振矣. 今至于君, 覺其附譜他派之誤, 告大人而改正之, 奉大東全姜始祖元帥公諱以式, 書之卷首, 而闕其下所不知, 次書十世祖諱檜爲中祖, 連書其下, 以至于己及子, 因與宗族之同出於十世者, 自成一派之譜. 於是乎天倫正大本立, 仁與義幷得, 而生人之理, 源源不窮. 慶祿之無疆, 門戶之昌大, 可執契而俟矣. 彼自絶根本, 而迷不知返者, 雖或可保於一時, 譬如木上之寄生, 水面之浮萍, 遇著風霜波浪, 而安得不敗散哉? 可哀也已. 君百里曳衰, 請敍其事爲譜序. 余喜聞而不辭, 且曰: "《孟子》有云: '經正則庶民興, 斯無邪慝. ' 今君此擧也, 旣得經正矣. 故書之爲姜氏今後勸, 幷有望於斯世之民興而無慝云爾. " 계세(繫世) 가족의 세대가 서로 이어져 온 계통, 즉 세계(世系)를 말하는 듯하다. 소목(昭穆)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를 이르는 말로, 시조의 1세(世)를 가운데 모시고 2ㆍ4ㆍ6세를 왼쪽 줄인 소에, 3ㆍ5ㆍ7세를 오른 줄인 목에 모신다. 조정의 소사(小史) 소사는 국사(國事)의 기록이나 계보 등을 맡아보던 주(周)나라 시대의 관명으로, 《주례》 〈소사(小史)〉에 "소사는 나라의 기록을 관장하여 세계를 정하고 소목을 변별한다.〔小史掌邦國之志, 奠系世, 辨昭穆.〕"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호적(戶籍)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리를 비유하는 말인 듯하다. 적량공(狄梁公)과 …… 것 적량공은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진 당(唐)나라의 명상(名相) 적인걸(狄仁傑)을 말하는데, 북송(北宋) 때에 적인걸의 후손 한 사람이 추밀사(樞密使) 적청(狄靑)에게 적인걸의 화상(畫像)과 고신 10여 통을 가지고 와서 적인걸이 그의 먼 조상이 된다고 하였지만, 적청은 "내가 어찌 한때의 영화와 존귀함을 빙자하여 감히 그분의 후예라고 하겠는가."하고는 적인걸을 조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290 狄靑傳》 주문공은 송(宋)나라 때 이학(理學)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로, 문공(文公)은 그의 시호이다. 명(明)나라를 창업한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옥첩(玉牒 보첩(譜牒))의 편수를 의논하면서 주문공을 조상으로 삼으려고 할 적에 휘주(徽州) 출신의 전사(典史) 주(朱) 아무개를 만나고서 문공의 후손이냐고 물었는데, 그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태조가 "한낱 전사임에도 경솔히 주자(朱子)를 조상으로 삼지 않는데, 우리 국가가 어찌 주자를 조상으로 삼겠는가.'하고서는 이전의 의논들을 모두 퇴각시켰다고 한다. 《五洲衍文長箋散稿 姓氏譜牒辨證說》 곽숭도(郭崇鞱)와 …… 것 곽숭도는 오대(五代) 때의 후당(後唐) 사람으로, 그가 추밀사가 되어 용사(用事)할 때에 재상 두로혁(豆盧革) 등이 그에게 아부하면서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는 본디 태원(太原) 출신으로 화음(華陰)에 이주하였고, 공은 대대로 안문(雁門)에 살았는데, 어떻게 분양왕의 지파가 되는가?"라고 묻자, 곽숭도가 "난리를 만나 보첩을 유실하였는데, 선인(先人)께서 분양왕의 4대손이 된다고 하였다."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해진다. 《舊五代史 卷57》 황악은 송나라 회계(會稽) 사람으로, 7세 이상의 보첩을 잃어버리자, 당시 소식(蘇軾)의 문하에 노닐어 소문 사학사(四學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황정견(黃庭堅)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황전(黃田) 출신이어서 형제의 항렬로 삼아 종계(宗系)를 합쳤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1 人倫部 同譜復合》 계(契)를 …… 있다 계는 둘로 나눈 부신(符信) 중 하나를 말하는 것으로, 앞으로의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상도가 …… 없어진다 《맹자》 〈진심 하〉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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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씨가승》 서문 【신사년(1941)】 《全州崔氏家乘》序 【辛巳】 옛적에 맹자가 이단(異端)을 물리칠 적에 '근본이 둘이다'고 배척하였고, 또 그 폐단을 미루어 말하면서 '짐승[禽獸]'이라고 하였으며106), 정 선생(程先生)이 말하기를, "사람은 선조에 근본을 둔다.107)"라고 하였으니, 두 설을 합해 보건대, 사람으로서 그 선조에 근본을 두지 않고 그 근본을 둘로 한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내가 살펴보건대, 세상이 쇠퇴한 이래로 문벌이 없는 집안이나 상민의 종족이 존귀하고 현달한 집안에 거짓으로 붙어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이롭게 하고 침해와 업신여김을 막는 경우가 이따금 있는데, 이는 이미 근본을 둘로 하는 죄를 범한 것이니,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도리가 아니다.그런데 말세의 수준으로 내려와서는 벼슬에 이롭거나 업신여김을 막는 등의 빙자할 만 한 것이 모두 없어졌음에도 남의 집안의 족보를 만드는 곳에 공공연하게 뇌물을 주고 족보 중에 수백 년 동안 후손이 없는 사람의 아래에 자신의 조상을 곧바로 쓰되 간혹 몇 대를 잘라 버리기도 하고, 간혹 몇 대에 걸쳐 이름을 날조하기도 하면서 연대 중에 오래된 것과 가까운 것을 취합하여 항렬의 어긋남이 없게 하는 데에 못할 짓이 없을 만큼 지극히 패악스럽고 교활하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자신의 조상을 버리고 근본을 영원히 끊어버리는 것이니, 사람의 형상을 하였으되 단지 금수일 뿐이다.비록 그렇지만 이런 무리의 사람은 원래부터 미천하고 용렬하여 무지한 데에 관계된 사람들인지라 또한 애처롭게 여길 만하지만, 이른바 선비로서 의관을 갖춘 채 의리를 이야기하고 족보를 만드는 곳에 높이 앉아서 스스로 《춘추(春秋)》의 필법을 잡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조그마한 것을 이롭게 여기고 금전으로 사람을 꾀어 짐승의 무리로 들어가게 하는 자는 그 죄가 더욱 심하니, 모두 나란히 벌을 주어야 하겠지만 의당 경중을 두어야 한다.아, 오늘날 족보의 폐단이 이처럼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나머지 또 배실(配室)의 정(正 본처(本妻))ㆍ측(側 첩(妾))과 자손의 적자(嫡子)ㆍ서자(庶子)가 문란해진 것이나 관직의 진위(眞僞)와 행적의 허실(虛實)이 뒤섞여 혼잡해진 것들을 어느 겨를에 논하겠는가.대체로 일찍이 통탄하면서도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을 방법이 없기에 삼가 한 종족의 파보(派譜)에서나마 법에 따라 족보를 만들어서 이런 폐단을 쓸어버리고 크고 작은 것들이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지만, 사람이 많으면 천리마저 이기는지라 또한 하지 못하고 단지 스스로를 깨끗이 하여 그런 폐단에 빠지지 않을 뿐이었다.그런데 지금 최군(崔君) 태일(泰鎰)이 편찬한 것을 보니, 똑같이 만육 선생(晩六先生) 9대손 좌윤공(左尹公) 휘 승적(承績)의 자손이 되는 족속(族屬)을 족보로 기록하되 법을 사용하고 폐단을 쓸어버리는 것이 한결같이 내가 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지라 그 훌륭함을 깊이 기리면서 내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옛적 현인이 말하기를, "단지 도가 있을 수 있다면 자기에게 있든 남에게 있든 관계치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을 먼저 안 것이라 하겠다.또한 군의 이 족보는 족속을 수록하는 것이 넓지 않되 도움이 되는 바가 있는 것이 병가(兵家)에서 이른바 정예로운 것을 귀하게 여기고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과 같으니, 족보를 만드는 데에 방법이 있다고 이를 만하고,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 여기에 있으니, 또한 장차 후일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아, 근래의 근본을 끊고 짐승의 마음을 지닌 세태에 형체를 훼손하고 성씨를 바꾸는 지금의 상황까지 더해져서 안팎이 모두 재앙에 처한 상황인데, 만약 일찍 우리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군의 마음을 집으로 삼고 군의 일을 행하게 했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지금은 음(陰)이 번성하여 혼란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 편찬이 훗날 양(陽)이 회복되어 다스려진 세상을 생각하는 징조가 되지 않을 줄 알겠는가. 그래서 그가 글을 청함에 내가 기꺼이 서문을 지어 주었다. 昔孟子之闢異端也, 斥之以二本, 而又推言其弊, 謂禽獸. 程先生有曰: "人本乎祖. " 合二說而觀之, 人而不本其祖而二其本, 則豈可謂人乎哉? 余觀世衰以來, 冷門常族, 冒附貴顯, 以利仕途, 防侵侮者往往焉, 此已犯二本, 而非人道矣. 降至末級, 幷無利仕防侮之可藉, 而公行賄賂於人家譜所, 直書其祖於譜中數百年無後人下, 或截去幾世, 或造名幾世, 取合年代久近, 俾無行列參差, 極其悖猾, 無所不至, 亦獨何心? 此卽棄其祖而永絶其本者, 人形而直禽獸耳. 雖然, 此輩人, 元係賤庸無知, 亦可哀也. 所謂士子而冠帶談義理, 巍然坐譜廳, 自詡秉春秋筆, 而利其些子, 阿賭誘人, 入於禽獸者, 厥罪更甚. 皆可比誅, 而宜有輕重. 嗚呼, 今之譜弊, 至於斯極, 其餘配室正側、子孫嫡庶之紊亂, 官職眞僞、行蹟虛實之淆雜, 又何暇論? 蓋嘗痛歎而矯之無術, 竊欲於一族之派譜, 譜之以法, 掃絶此弊, 若大若小, 一出於正, 而人衆勝理, 亦且不能, 但自潔而不入矣. 今觀崔君 泰鎰所編, 譜其同爲晩六先生九世孫左尹公諱承績子孫之族, 而用法掃弊, 一如余之所欲爲者, 深賞其善, 而愧己不能. 然昔賢云: "但得道在, 不係己與人. " 是爲先獲我心. 抑君此譜, 收族不廣, 與有助焉, 如兵家所謂貴精而不貴多者, 可謂作譜有術, 我師在此, 亦將有待焉. 噫, 近日絶本心獸之風致, 得目下毁形改姓, 表裏俱是之禍. 如早使我邦人, 皆能宅君之心, 行君之事, 豈至於是哉? 雖然, 今陰盛而亂極矣, 安知此編不爲異日復陽思治之兆也乎? 余故於其請文, 樂爲之序. 맹자가 …… 하였으며 《맹자집주》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맹자가 묵자(墨子)의 겸애(兼愛)를 주장하는 이자(夷子)의 원칙 없는 행동을 비난하면서 "하늘이 만물을 낼 적에는 근본이 하나가 되게 하였는데, 이자는 근본이 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天之生物也, 使之一本, 而夷子二本故也.〕"라는 말이 보이고, 〈등문공 하(滕文公下)〉 제9장 제8절에 "양주(楊朱)는 자신만을 위하니 임금이 없는 것이며, 묵가(墨家)는 두루 사랑하니 아비가 없는 것이다. 아비가 없고 임금이 없는 것은 금수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사람은 …… 둔다 《시경집전》 〈주송(周頌) 아장(我將)〉의 주(註)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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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가승》의 서문 【신사년(1941)】 《慶州金氏家乘》序 【辛巳】 사람은 조상에 근본을 두고 있으니, 조상은 당연히 존숭해야 한다. 그래서 《주례(周禮)》에 계세(繫世)를 정하고 소목(昭穆)을 분변하는 관직을 세운 것이다.108). 조상에 근본을 두고 나뉘어 종족이 되었으니, 종족은 당연히 친근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서 정자(程子)가 보계(譜系)를 밝히고 종족을 거두라는 가르침을 둔 것이다. 이것이 일반 백성들의 집안에서 족보를 만든 이유이다.종족이 비록 멀다 하더라도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자손이니, 조상의 마음을 체득하였기에 이에 친근하게 여기고자 한 것이고, 친근함을 똑같이 하고자 하였기에 널리 거두어 함께 기록하고 이를 '대보(大譜)'라 이른 것이니, 뜻이 참으로 선하다.그러나 세대가 멀어지면 자세히 기록하기 어렵고, 수가 많아지면 정밀하게 기록하기 어려운 것은 형세이고, 게다가 근대에는 사람의 감정이 그 사이에서 행해지는 바가 없지 않기 때문에 뒤섞여 나뉘고 어지럽게 변화되어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니, 이것이 어찌 족보의 본뜻이겠는가. 노소씨(老蘇氏) 소순(蘇洵))가 단지 4대의 친족만을 족보로 만든 것109)은 협소한 것 같다고 의심하겠지만, 일찍 이러한 폐단을 없애는 데에 견해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나는 일찍이 대동(大同)의 마음으로 폐단을 없애는 경계를 보존하면서 두 가지 사이에서 절충하고 참작하여 일파의 족보나 혹은 일파 내의 파보(派譜)를 만드는 것이 족보의 본뜻을 얻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오늘날 부풍군(扶風郡)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족보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경주 김씨는 대족으로 그 수가 전국에 두루 퍼져 있는데, 부풍에 거주하는 종족은 정숙공(貞肅公) 9대손 찬성공파(贊成公派)이고, 이 족보는 찬성공 6대손 성균 진사(成均進士) 휘 어룡(馭龍) 이하의 자손을 기록한 것이니, 세대가 가까워 상세하게 기록하기 쉽고, 수가 적어 정밀하게 기록하기 쉬운 것으로 이와 같은 것이 없다. 오직 수가 적고 세대가 가까운 종족을 정밀하고 상세하게 기록한 다음에 돈후한 마음을 미루어서 세대가 멀고 수가 많은 종족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으니, 이것이 참으로 조상을 존숭하고, 종족을 친근히 하며, 세속의 폐단을 없애고, 사법(史法)을 얻어서 한결같이 인위적인 목적이 없이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를 수 있다.일이 모두 끝난 뒤에 진사공(進士公) 9대손 홍무(弘武)가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는데, 그 일이 내가 일찍이 논했던 것과 같음을 기뻐하여 사양하지 않고 서문을 지었다. 대대로 쌓은 덕의 현저함과 규례의 바름과 같은 것은 편집한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에 겹쳐 진술하지 않았다. 人本乎祖, 祖當尊. 故《周禮》立奠繫世辨昭穆之官. 本祖而分爲族, 族當親. 故程子有明譜系收宗族之訓. 此人家族譜之所由作也. 蓋族雖遠, 自祖視之, 均是子孫. 體祖心, 斯欲親, 親欲均, 斯廣收同錄, 而謂之大譜, 意誠善矣. 然疏遠者難詳, 衆大者難精勢也. 加以近世人情, 不無有所爲於其間. 故錯分亂化, 弊不勝言, 豈譜之本意哉? 老蘇氏只譜四世之親, 疑若狹小, 而不爲無見於早去此弊也. 余嘗謂以大同之心, 存去弊之戒, 折酌於二者之間, 而作一派之譜, 或派中之派譜者爲得之, 若今日扶風郡 慶州金氏之譜是已. 慶州氏大族, 其麗遍全國, 居扶者, 貞肅公九世孫贊成公派. 而是譜也, 編自贊成公六世孫成均進士諱馭龍以下子孫, 則其近易詳, 寡易精, 莫此若也. 惟其精詳於寡近, 乃可推厚而達於遠衆. 是眞可謂尊祖親族, 去俗弊得史法, 一無所爲而出於理義者也. 功旣訖, 進士公九代孫弘武謁余以弁卷之文. 喜其事之同余所嘗論者, 不辭而爲之書. 若其世德之顯、規例之正, 備在編中, 玆不疊陳云爾. 주례(周禮)에 …… 것이다 《주례(周禮)》 〈소사(小史)〉에 "소사는 나라의 기록을 관장하여 세계(世繫)를 정하고 소(昭)와 목(穆)을 분변한다.〔小史掌邦国之志, 奠繫世, 辨昭穆.〕"라는 말이 보인다. 노소씨(老蘇氏) …… 것 노소씨는 송(宋)나라의 문장가 소순(蘇洵, 1009~1066)으로, 그는 고향인 미산현(眉山縣)에 보각(譜閣)을 짓고 미산 소씨(眉山蘇氏) 족보를 만들었는데, 그에 관한 내용이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 〈족보서(族譜序)〉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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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장씨세보》의 서문 【기축년(1949)】 《扶安張氏世譜》序 【己丑】 장씨(張氏)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으로, 우리나라에서 각기 관향(貫鄕)으로 삼은 곳이 모두 36곳이고, 부안(扶安)이 그 중 하나이다. 하루는 장강수(張康秀)군과 장형철(張炯澈)군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부안을 관향으로 하는 우리 장씨는 고려조 때 성대하여 이미 전해들은 것이 있고, 현지(縣誌)에 드러나거나 각 성(姓)의 선대 인척에 나타난 것도 또 뚜렷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가의 문적(文蹟)이 병화(兵禍)에 화를 당하여 먼 세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알 수 있는 것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낸 휘 익(翼)과 그 두 아들 성균관 생원 백란(伯鸞)ㆍ숙란(叔鸞) 이하 올 해에 이르기까지 400년인데, 세대로 보면 10여 세대입니다. 종족이 단출하고 식견이 어두워서 26년 전 갑자년(1924)에 우리의 관향과 우리의 조상을 버리고 인동(仁同) 장씨에 부보(附譜)하였으니, 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 종족이 그 잘못을 깊이 깨닫고 우리 족보를 빨리 수찬하여 바른 데로 돌이켰으니, 서문에 한마디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하니, 내가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말하기를,"공경할 만하다! 이 일이여."하였다. 옛적 우리 선조 문정공(文貞公) 조비(祖妣)의 외조(外祖)인 인용교위(仁勇校尉)가 부안(扶安) 장공 작영(張公綽榮)이었으니, 현감과 교위가 한 혈통의 조손(祖孫)인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선대의 정의(情誼)는 징험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삼가 일찍이 들으니, 약소국의 신하와 빈한한 선비의 아내, 미천한 종족의 후예는 각자 그 정도에 편안할 뿐이다110)고 하였으니, 만약 세력을 택하여 따른다면 이보다 더 큰 죄악이 없을 것이다. 미천한 후예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천년의 고족(古族)으로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연달아 오르고, 이곳을 관향으로 삼고 이곳에 거주하여 한 지역 사람이 함께 아는 바임에랴. 비록 설사 다른 종족을 끌어들여 부속하여 경상(卿相)의 귀족이 되고 만종(萬鍾)의 부족이 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천시와 모욕을 취하여 끝내 하교입유(下喬入幽)111)에 귀결됨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공자가 말하기를, "허물을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허물을 고침에 미쳐서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112)라고 하였으니, 남들이 비록 그 처음의 허물을 기롱한다 하더라도 나는 허물을 고친 것을 우러러 볼 것이니, 대체로 지금 이후로 장씨는 허물에서 벗어났다.《주역》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안은 후손에게 반드시 경사가 있다."113)라고 하였고, 《시경》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 것이 삿되지 않도다."114)라고 하였으니, 무릇 선은 허물을 고치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삿되지 않음은 인륜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나는 이번 일을 지난 이후로 장씨가 하늘의 경사와 복을 받아 종족이 번성하고 창대하여 명철한 무리가 배출될 것임을 알겠다.내가 평생 절대로 남의 집안의 족보 서문을 짓지 않은 것은 족보의 법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유독 이 족보에 대해서만은 사양하지 않은 것은 상도를 회복하고 정도로 돌아온 것이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안정시켜 세상의 교화에 도움이 있을 수 있음을 취해서일 뿐이니, 나머지는 물을 겨를이 없었다. 張氏中、東大姓. 在東國各得其貫者, 凡三十有六, 扶安其一也. 日張君 康秀、炯澈來言于余曰: "吾貫扶之張, 盛于麗朝, 旣有傳聞矣. 著於縣誌, 見於各姓先姻者, 又班班可考. 然惟其本家文蹟, 厄於兵燹, 遠代莫詳, 所可詳者, 自文科縣監諱翼及其二子成均生員諱伯鸞、叔鸞以下, 距今年爲四百, 世則十餘矣. 族單而識昧, 廾六年前甲子, 棄吾貫吾祖, 附譜於仁同之張, 嗚呼, 尙忍言哉? 今諸族深覺其誤, 亟修吾譜, 而反之正焉. 願有一言之助於弁卷也. " 余斂袵作而言曰: "可敬哉! 此擧也. " 昔余先祖文貞公祖妣之外祖仁勇校尉, 扶安 張公 綽榮也. 縣監之於校尉, 其爲一統祖孫, 雖不可知, 先誼則有徵, 豈敢辭諸?" 竊嘗聞之, 弱國之臣、寒士之妻、微宗之裔, 各安其正. 苟擇勢而從之, 惡莫大焉. 微裔猶然, 況以千年古族, 大小連科, 而貫斯居斯, 爲一方所共知者乎? 雖使援附於他, 貴爲卿相, 富有萬鍾, 猶不可爲, 況益取人賤侮, 竟作下喬入幽之歸乎? 孔子曰: "過不憚改. " 子貢曰: "及其更也, 人皆仰之. " 人雖譏其始錯, 吾則仰其更之. 蓋今而後, 張氏其免矣. 《易》曰: "積善之家, 必有餘慶. " 詩曰: "愷悌君子, 求福不回. " 夫善莫切於改過, 不回莫重於正倫. 吾知其歷玆以往, 張氏之受天慶福, 族繁而昌, 明哲輩出也. 夫余生平絶不作人家譜序, 以其無譜法也. 獨於是譜而不辭者, 取其反經歸正, 足以明天理定人心, 有補乎世敎爾, 餘不暇問也. 약소국의 …… 뿐이다 《주역》 〈곤괘(困卦) 구사(九四)〉 대한 정이(程頤)의 전(傳)에 "빈한한 선비의 아내와 약소국의 신하는 각자 정도(正道)에 편안히 할 뿐이다.〔寒士之妻、弱國之臣, 各安其正而已.〕"라는 구절이 보인다. 하교입유(下喬入幽) 높은 나무에서 내려와 그윽한 골짜기로 들어간다는 말로, 좋은 곳을 버리고 나쁜 곳을 선택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나는 그윽한 골짜기에서 나와서 높은 나무로 옮겼다는 말은 들었어도 높은 나무에서 내려와 그윽한 골짜기로 들어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吾聞出於幽谷,遷於喬木者,未聞下喬木而入於幽谷者.〕"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허물을 …… 우러러본다 《논어》 〈자장(子張)〉에 "군자의 허물은 일식ㆍ월식과 같아 잘못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볼 수가 있고, 허물을 고쳤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라는 자공의 말이 보인다. 선을 …… 있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보인다. 화락한 …… 않도다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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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김공 묘표 경인년(1950) 松菴金公墓表【庚寅】 근고(近古)에 봉산(蓬山) 아래 부풍(扶風 부안(扶安))에 덕을 숨겨 벼슬하지 않고 의(義)를 행해 세상에 모범이 된 선비가 있으니 송암 김공이 그 사람이다. 공의 말에 "서리와 눈에도 끄떡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이니, 이 때문에 하늘 아래 높이 서서 해를 가릴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호를 취한 것이 여기에 있으며 진실로 공자가 말한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늦게 시든다."75)라는 뜻으로 공의 뜻과 행실의 전체를 볼 수 있다.공이 돌아가시고 부안 하서면(下西面) 석하리(石下里)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낸 지 지금 거의 백 년인데 증손 김기술(金基述)이 비로소 묘표를 세워 나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비록 먼 친족이지만 어려서는 창동(滄東)의 글방을 함께 다녔고 늙어서는 성재(星齋)76)에서 함께 거처하여 동당형제(同堂兄弟)처럼 친해 내 증조의 일과 행적에 대해 익히 들어 상세히 알기 때문에 부탁하는 것이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사람의 글재주를 이유로 청하지 않고 이를 이유로 청하니 내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공의 휘는 유성(維聖)이고, 자는 성춘(聖春)이다. 부안 김씨는 가계(家系)77)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태자(太子) 휘 일(鎰)에게서 나왔다. 세대를 전하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도덕이 당세에 으뜸이었다. 6세를 내려와 고부군사(古阜郡事) 휘 광서(光敘)에 이르러서는 고려가 망하자 팔판시동(八判寺洞)78)에 들어갔다가 끝내 관향(貫鄕)으로 돌아갔으니, 일이 《충렬록(忠烈錄)》79)과 《송경지(松京誌)》80)에 실려 있다. 3세를 내려와 직손(直孫)에 이르러서는 한조(韓朝)81)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82) 아들 휘 석홍(錫弘)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이분은 기묘명현(己卯名賢)83)이다. 아들 휘 서성(瑞星)은 문과에 급제하고 검상사인(檢詳舍人)을 지냈으며 외직(外職)으로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아들 휘 만복(萬福)은 봉사(奉事)를 지냈는데 공의 8세조이다. 휘 억귀(億龜)와 휘 몽열(夢說)은 증조와 조부이다. 부친의 휘는 상환(商煥)이고 모친은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달인(達仁)의 따님이다.공은 정조(正祖) 신해년(1791, 정조15) 1월 9일에 태어났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근검(勤儉)하여 비록 장가들어 분가한 뒤에도 고기 잡고 나무하여 부모와 큰형을 봉양하고, 따로 사는 막내 동생을 보살피고 자신을 돌보는 데는 매우 박하였으나 속으로 원망하는 소리가 없었다. 남은 힘으로 학문하여 일용할 거리로 삼고, 농사에 힘쓰고 집안을 다스려 가계(家計)가 자못 여유로워졌다. 일찍이 성년이 되지 않은 여자84)가 물에 빠지자 즉시 손을 잡아 구하는 것을 보고 혹자가 남녀 간에 구별이 없는 것인지 의심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서열이 높은 혐의가 있는 형수도 오히려 손을 잡아 구할 수 있는데85) 하물며 성인이 되지 않은 다른 집의 여자이겠는가."라고 하였다.흉년이 들었을 때는 인근의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곡식을 흩어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나만 홀로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좌시한다면 이것이 어찌 인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인년(1842, 헌종8)과 계묘년(1843)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했는데 당시에 나이가 50이 넘었는데도 상제(喪制)를 지켜 예(禮)을 준수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기애(耆艾)86)인데도 간고(幹蠱)87)에 부지런한 것은 자식의 도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찌 처자식을 위해 바쁘게 집안일을 돌보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이후로는 오직 서적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간혹 지구(知舊)나 집안의 친족과 함께 서로 만나 화락하게 지냈다.만년에 노비 두 사람을 불러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을 냄에 본래 차이가 없다. 나는 너희들이 대대로 노비인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하고는 재산을 넉넉히 주고 보내면서 말하기를,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며 부지런히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양인(良人)이 되어라."라고 하였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3월 25일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69세이다.부인은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기영(基英)의 따님이다. 장남은 우익(友翼)이고, 차남은 우현(友賢)이며, 고부(古阜) 이농술(李瓏述)은 사위이다. 우익의 양자는 세감(世鑑)인데 아들 하나로 기술(基述)을 두었다. 형렬(炯烈), 형면(炯冕), 형삼(炯三), 형창(炯昌)과 김해(金海) 김갑곤(金甲坤), 김해 김용석(金龍錫)은 기술의 아들과 사위이다. 우현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세감은 백부(伯父)의 양자로 나갔고, 시감(始鑑)은 아들로 정술(政述), 길술(吉述)을 두고, 전주 이규학(李奎鶴), 해주(海州) 오영권(吳永權), 고령(高靈) 신문구(申文求)는 사위이다.아, 공은 진실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는 어진 사람이다. 이웃을 구휼하고 노비를 풀어 준 일이 모두 인(仁)인데 인은 사덕(四德)을 포함하니 모든 행실과 선이 무엇인들 갖추어지지 않았겠는가.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공의 여러 행적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공이 소나무[松]로 암(菴)에 편액한 것을 보면 평소 숭상한 바는 강하고 굳세며 우뚝히 서는 데에 있을 듯한데 드러난 일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개 인자(仁者)는 사욕(私欲)을 극복하니 사욕이 극복되면 항상 만물 위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어 강하고 굳셈이 저절로 생겨나 의(義)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의 인덕(仁德)이 사욕을 극복한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의가 이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공을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도 옳다고 하겠다. 近古蓬山之下, 扶風之鄕, 有隱德不仕, 行義範世之士, 松菴金公, 其人也。公之言曰: "傲霜雪而獨立者, 松柏也, 所以能叅天蔽日。" 其取號者在此, 而實孔子所稱歲寒後凋之意, 可見公志行全體矣。沒而葬于扶安下西面石下里庚坐之原者, 今且百年, 曾孫基述, 始樹阡表, 俾澤述文之曰: "子雖遠族, 少而同滄塾, 老共處星齋, 親若同堂昆弟, 於吾曾祖事行, 稔聞而詳知, 故屬之也。" 余曰: "不以人文而以是, 則吾何能辭爲?"公諱維聖, 字聖春。扶寧金氏, 繼・(系)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傳至高麗平章事文貞公諱坵, 文章道德冠一世。六傳至古阜郡事諱光敘, 麗亡, 入八判寺洞, 終歸貫鄕, 事載《忠烈錄》、《松京誌》。三傳至諱直孫, 韓朝文科, 僉正, 贈都承旨。栗谷李先生, 撰神道碑銘。有子諱錫弘, 郡守, 贈吏曹叅議。是爲己卯名賢。有子諱瑞星, 文科, 檢詳舍人, 外守羅州牧。有子諱萬福, 奉事, 公八世祖。諱億龜, 諱夢說, 曾祖若祖也。考諱商煥, 妣海州吳氏, 達仁女。公生以正祖辛亥正月九日。孝友勤儉, 雖析箸後, 漁樵以供父母及伯兄, 周護季弟之異居者, 自奉甚約, 內無怨聲。餘力問學, 以資日用, 明農治家, 調度頗裕。嘗見及・(未)笄女溺水, 卽以手援, 或疑以男女無別。公曰: "嫂之尊嫌, 猶可手援, 况他家女未成人者乎?" 凶年散穀於隣近之無告者曰: "吾獨溫飽, 而坐視其死, 是豈人心哉?" 壬寅癸卯, 連丁內外艱, 時年五十以上, 猶能執制準禮。及至免喪, 謂諸子曰: "吾在耆艾, 猶勤幹蠱者, 子道然也。今則豈可爲妻孥役役營産也?" 自後惟以書籍自娛。間與知舊宗族相會和樂。晩年招謂奴婢二人曰: "天之生人, 本無差異。吾不忍汝等之世爲奴婢。" 資給産業, 而送之曰: "修身謹行, 勤力節用, 以成良人也。哲宗己未三月二十五日卒, 享年六十九。配全州柳氏, 基英女。男長友翼, 次友賢, 古阜李瓏述, 婿也。友翼繼男世鑑, 有一子基述。曰炯烈、炯冕、炯三、炯昌, 金海金甲坤、金海金龍錫, 基述子婿也。友賢二男三女: 世鑑出繼伯父, 始鑑有子政述、吉述, 全州李奎鶴、海州吳永權、高靈申文求, 婿也。嗚呼! 公固孝友仁人也, 恤隣放奴, 無非是仁。而仁包四德, 百行萬善, 何所不備? 公之羣行不及悉書者, 可推而知矣。然又觀公之扁菴以松, 則平日所尙, 似在剛毅特立, 而無所著見何也? 蓋仁者克私, 私克則常伸於萬物之上, 剛毅自生而爲義。人知公之仁德, 出於克私, 則知其爲義也莫著乎此矣。故余謂謂公爲仁義之人, 亦可也云爾。 날씨가……시든다:《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나는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았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군자의 지조는 환난을 당한 뒤에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성재(星齋):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 있는 김광서(金光叙) 묘의 재실인 취성재(聚星齋)이다. 취성재라는 이름은 명종조(明宗朝)의 문신 임억령(林億齡)이 부안 김씨가 살고 있는 옹정리(瓮井里)를 찾아서 "옹정에는 군자가 많은데 김씨 가문에는 덕성(德星)이 모였다."라고 칭찬한 글의 '취덕성(聚德星)'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1819년(순조19)에 세워진 것이 화재로 소실되고 1826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이 재실에서 사방의 선비들이 모여 들어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가계(家系):원문은 '繼'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系'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팔판시동(八判寺洞):〈조고 우신재 부군 묘표(祖考又新齋府君墓表)〉과 〈십칠세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사 부군 가장(十七世祖高麗奉正大夫知古阜郡事府君家狀)〉 등에는 '팔판동(八判洞)'이라 되어 있다. 아래에 보이는 《송경지》에는 팔판시동이라는 지명을 언급하는데 개성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고 고려 신하 8인이 이곳에 들어와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충렬록(忠烈錄):정확히 어떤 책인지는 미상이다. 〈화전 김공 묘표(花田金公墓表)〉와 〈선고 벽봉 부군 가장(先考碧峰府君家狀)〉 등에는 〈충의록(忠義錄)〉이라고 하였다. 다만 〈십칠세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사 부군 가장〉에서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채동열(蔡東說)이라는 인물이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과 관련된 기록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부록에 김광서의 이름이 있는데, 역임한 직임과 본관 정도의 짤막한 내용만 실려 있다. 송경지(松京誌):1830년(순조30)경에 서희순(徐憙淳, 1793~1857)이 편찬한 개성부(開城府)의 읍지이다.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낸 김육(金堉), 이돈(李墩), 엄집(嚴緝), 오수채(吳遂采), 정창순(鄭昌順), 서유방(徐有防), 윤숙(尹塾), 김문순(金文淳), 김이재(金履載), 서희순의 서(序)・발(跋)이 실려 있다. 개성이 고려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고려세기(高麗世紀)를 가장 먼저 편성하였고, 국조기사(國朝紀事)에서는 조선 태조(太祖) 대부터 편찬 당시의 순조 대까지 송경과 관련된 기사를 편집하였다. 유수 조(條)에는 판부사(判府事)를 지낸 정지(鄭地)부터 1829년에 부임한 서희순까지 총 302명의 지방관이 수록되어 있다. 한조(韓朝):보통 조선 시기의 사람이 서술한 글은 조선조(朝鮮朝)를 본조(本朝)라고 하는데 '대한제국(大韓帝國)'의 '韓'을 따와 조선조의 의미로 이렇게 칭한 듯하다. 율곡(栗谷)……지었다:《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17에 〈정언 증 도승지 김공 신도비명(正言贈都承旨金公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중종(中宗) 14년(1519) 기묘사화로 죽거나 유배 및 파직을 당한 사람과 사림(士林)을 두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성년이 되지 않은 여자:원문은 '及笄女'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及'을 '未'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형수도……있는데:《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기애(耆艾):노인을 가리키는 말로, 60세를 기라 하고, 50세를 애라 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하며, 60세를 기라 하니 사람을 부린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간고(幹蠱): 《주역(周易)》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훌륭한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을 것이다.[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범범하게 집안일을 주관하여 다스린다는 뜻으로 쓰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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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 김공 묘표 을유년(1945) 花田金公墓表【乙酉】 과거에 내가 부풍(扶風)의 화전(花田)에서 족형(族兄) 성암공(成菴公 김연술(金淵述))을 따라 노닐 적에 성암공의 둘째 아우가 예복(禮服)을 입고서 성암공에게 나아가 따라서 가묘(家廟)에 배알하고 이윽고 다시 형에게 절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버지처럼 지극히 공경하여 엄연하게 법도 있는 집안의 풍도가 있었다. 이에 성암공은 진실로 유학자들의 중망(重望)을 받는 분이고 둘째 아우 역시 양가(楊家)의 나한(羅漢)88)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40여 년이 지나서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족질(族姪) 김형해(金炯海)가 그의 아우 김형주(金炯周)의 아들 김환철(金環喆)을 보내 선고(先考)인 화전공의 묘문(墓文)을 청하였는데 공이 바로 성암공의 둘째 아우이다. 그 가장을 살펴보고 공을 더욱 자세히 알았으니 또한 행운이다.공의 휘는 복술(馥述)이고 자는 내관(乃寬)이다.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태자 휘 일(鎰)에게서 나왔다. 태자의 충의(忠義)에 대해서는 고금의 논하는 자들이 한(漢)나라 북지왕(北地王)89)에 비기며 더 낫다고 하였다. 고려 때는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가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크게 이름이 드러났다. 고려가 망했을 때는 군사(郡事) 휘 광서(光叙)가 망복(罔僕)90)의 큰 절개를 지켰으니 일이 《충의록(忠義錄)》에 실려 있다.본조에 들어서는 도승지 휘 직손(直孫)이 있으니 율곡 선생(栗谷先生)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이조 참의 옹천(甕泉) 휘 석홍(錫弘)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다. 사인(舍人) 청수재(淸修齋) 휘 서성(瑞星)은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다. 주부(主簿) 퇴우당(退憂堂) 휘 해(垓)는 임진년(1592, 선조25)과 갑자년(1624, 인조2)91) 두 차례의 난리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왕사(王事)에 부지런하였다. 이분들이 공의 10세조 이상이다. 부친 휘 한일(漢鎰)은 굳세고 발라 마음이 곧았던 옛사람의 유풍(遺風)이 있었으며, 모친 장흥 고씨(長興高氏)는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으니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묘갈명을 지었다.92) 이를 보면 공의 현명함은 대개 근원이 있는 것이다.공은 태어나면서 독실하였다. 부모상을 당했을 적에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니 비록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라도 반드시 형과 함께 성묘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는 기제사(忌祭祀)와 묘사(墓祀), 삭참(朔參)과 망참(望參)93)을 지낼 적에 부모가 살아 계신 것처럼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형을 정성으로 섬겨 온공(溫公)이 백강(伯康)에게 한 것처럼94) 공경하고 보호하였다. 부모의 묘소에 세울 석물(石物)을 땅을 팔아 스스로 마련하니 형이 "이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제지하자 "지파(支派)가 종파(宗派)를 섬기는 것은 예로 볼 때 또한 당연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글을 읽을 때는 《소학(小學)》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 책은 입신(立身)의 근본이니 진실로 능통할 수 있다면 학문은 과반이 이루어진 셈이다."라고 하여 자식과 조카를 가르칠 적에 다른 책을 쓰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한훤(寒暄)과 하서(河西)95)를 잘 배운 사람은 아무개이다."라고 하였다.몸을 단속하는 데 엄정하여 평소 장난치며 웃거나 눕는 일이 없었고 역(役)에 복무할 때도 상투를 드러내지 않았다. 청렴과 과묵함으로 스스로를 단속하여 뜻은 세상의 영욕(榮辱)에 빼앗기지 않고 입으로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자식을 경계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사에 부지런한 것이 본분상의 일이니, 부정한 학설과 잡스러운 종교는 몹시 혹세무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무오년(1918) 7월 24일에 병으로 임종하였으니 태어난 철종(哲宗) 계해년(1863, 철종14) 2월 19일부터 누린 수명이 56년이다. 화전 뒤 해방(亥方)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삼남을 두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형해, 형주이고, 막내는 형문(炯文)이다. 딸은 반남(潘南) 박문서(朴文緖)에게 시집갔다. 환철, 관철(貫喆), 명철(明喆), 준철(峻喆), 희철(熙喆), 휴철(烋喆)은 손자이다.아,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람마다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면 천하가 평안해질 것이다."96)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비록 큰 적이 이미 물러나고 강토는 잃은 것이 없으나 여러 당파가 서로 다투어 기강이 수립되지 않았다. 만약 나라를 온전히 지켜 사람마다 모두 공처럼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고 학문과 농사를 아울러 힘써 자신을 수양해 외물을 부러워하지 않고 바른 도를 지켜 부정한 도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민족자치(民族自治)라는 것이니 하나로 정해져 기강을 수립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공이 죽은 때부터 또 거의 한 세대가 지나 풍조가 더욱 변한 탓에 원래대로 되돌리기 어렵다. 아, 어찌 구인(舊人)으로서의 감개가 없을 수 있겠는가. 始余遊從族兄成菴公于扶風之花田也, 見其二弟服上服, 詣成菴從謁家廟, 已又拜兄, 極其敬如父, 凜然有法家風, 意謂成菴固儒學重望, 而二弟亦楊家羅漢之流, 至今閱四十年餘, 而不能忘。日, 族姪炯海, 遣其弟炯周子環喆, 請其先考花田公墓文。公卽成菴公仲弟也。按其狀而知公益悉, 亦幸矣。公諱馥述, 字乃寬。扶寧之金, 出於敬順王太子諱鎰。太子忠義, 古今論者, 謂擬漢北地王而加善。在麗, 平章事、文貞公諱坵, 以文章道學大顯。麗之亡也, 郡事諱光叙, 守罔僕大節, 載《忠義錄》。入本朝, 有都承旨諱直孫。栗谷李先生撰神道碑。吏曹叅議甕泉諱錫弘, 是爲己卯名賢。舍人淸修齋諱瑞星, 歷敭淸顯。主簿退憂堂諱垓, 壬、甲二亂, 倡義勤王事。公十世以上。考諱漢鎰, 剛正有遺直風。妣長興高氏, 有女士行, 艮齋田先生銘墓。公之賢蓋有所自也。生而克篤。內外艱, 一遵禮制, 雖風雨日, 必同長公省墳。旣吉則忌․墓祀、朔․望叅, 致如在。誠事長公, 敬保之, 若溫公之於伯康。考妣墓石儀, 斥土自備, 長公止之曰: "此吾所當爲。" 對曰: "支之事宗, 禮亦當然。" 讀書以《小學》爲主, 曰: "此立身之本, 苟能通透, 成學過半。" 課子姪, 不以他書。人謂"善學寒暄、河西者某也"。律己嚴正, 平生無嬉笑偃臥, 執役亦不露髻。淸默自持, 志不奪世之榮辱, 口不言人之過惡。戒其子曰: "力學勤農, 本分上事, 邪說雜敎, 誣惑之甚者。"戊午七月二十四日, 以疾終, 距其生哲宗癸亥二月十九日, 壽五十六。葬于花田後負亥原。配全州崔氏, 有婦德。三男: 長次卽炯海、炯周, 季炯文。女適潘南朴文緖。環喆、貫喆、明喆、峻喆、熙喆、烋喆, 孫也。嗚呼! 孟子有言曰: "人人親其親, 長其長, 天下平。" 今我國家, 雖鉅敵旣退, 彊土無損, 列黨互爭, 統紀不立, 若得全邦, 人人皆如公孝悌爲本, 學農兼務, 自修而不慕乎外, 守正而不撓乎邪, 是卽所謂民族自治者, 其於定一而立紀也, 何有? 今去公沒, 又將一世, 風潮益變, 難於回障。嗟夫! 安得無舊人物之感焉爾? 양가(楊家)의 나한(羅漢):나한은 중국 북조(北朝) 때 사람인 양진(楊津)의 자이다. 양진은 형인 양춘(楊椿)과 우애가 두텁고 지극히 공경하였는데, 형이 없으면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먹지 않았고 형이 취해서 돌아오면 부축해 방에 눕힌 뒤 자신은 방문 앞에서 옷을 벗지 않고 안부를 살폈다. 《小學 善行》 북지왕(北地王):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인 유심(劉諶)이다. 후주가 성도(成都)에 침공한 위(魏)나라 등애(鄧艾)의 군대에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려 하자 유심은 화를 내면서 "만일 꾀가 없고 힘이 없어 반드시 패배하더라도 부자 군신이 성을 등지고 끝까지 싸워서 사직을 위하여 함께 죽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후주가 듣지 않자 선주(先主) 유비(劉備)의 사당에 가서 고하고 먼저 처자식을 죽인 다음 자신도 따라 죽었다. 《三國志 蜀書 後主禪傳》 망복(罔僕):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상(商)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기자(箕子)가 "상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하와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임진년과 갑자년:임진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로 달려가 의주까지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갑자년은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난 해로 이때에도 인조(仁祖)의 어가를 호위하였는데 이 공으로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었다. 간재(艮齋)……지었다:《간재집(艮齋集)》 전편 속(前編續) 권6에 〈유인 고씨 묘갈명(孺人高氏墓碣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삭참(朔參)과 망참(望參):모두 조상에 지내는 간략한 제사인데 삭참은 초하루에, 망참은 보름에 지낸다. 온공(溫公)이……것처럼:온공은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봉호(封號)이고, 백강은 사마광의 형인 사마단(司馬旦)의 자이다. 두 사람은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백강이 80세가 되자 온공은 형을 엄한 아버지처럼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보호하였다.[伯康年將八十 公奉之如嚴父 保之如嬰兒] 《小學 善行》 한훤(寒暄)과 하서(河西):한훤은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호이고, 하서는 김인후(金麟厚)의 호이다.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릴 만큼 《소학》에 심취하였고, 김인후는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하였다. 사람마다……것이다:《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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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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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학생 송공 묘표 學生宋公墓表 나의 동문(同門)인 벗 송사익(宋士翼) 우진(宇鎭)은 단정한 선비이다. 나는 그렇게 된 내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근세에 알려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여 매우 의심하였다. 어느 날 송우진이 선대인(先大人)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표를 청하였다. 내가 받아서 공경히 읽어보니 심지(心志)가 바르고 전일하며, 실천이 과감하고 독실하며, 식견이 높고 원대하며, 의리가 엄정하고 분명하여 유업(儒業)을 전문으로 익힌 사람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이른바 알려진 사람이었다. 다만 세속에서는 문장을 숭상하는데 공은 문장이 적었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실제에 어찌 손상이 있겠는가. 단맛이 나는 샘물에 근원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진실로 망언이니, 지금 묘표를 짓는 일에 대해서는 사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라는 바이다.공의 휘는 재규(在奎)이고, 자는 자성(自成)이다. 송씨는 홍주(洪州)를 본관으로 삼는다. 상세(上世)에 휘 평(枰)이 있으니 별시위(別侍衛)를 지냈다. 이후로는 대대로 고관(高官)을 지낸 사람이 있었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 인조(仁祖) 때에 이르러서 휘 두문(斗文)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연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내외의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니 공의 8세조이다. 부친의 휘는 덕기(德基)이고, 원배(元配)는 광산 노씨(光山盧氏)로 만권(萬權)의 딸이니 열행(烈行)으로 사림의 추천장이 있었다. 계배(繼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니, 이분이 공을 낳았다.공은 말수가 적고 약속을 지키는 것을 중히 여겼으며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 자신의 일처럼 마음을 다하였다. 일은 반드시 시작을 삼가고 마무리를 잘하였다. 심력(心力)이 견고하여 한번 행하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으면 만 마리 소도 되돌릴 수 없었다. 출입할 때 법도가 있어 찻집이나 술집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소싯적에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였는데 계집종들과 함께 김매기를 할 때 요염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추파를 던져 못하는 짓이 없는 계집종이 있는데도 전혀 돌아보지 않으니 동년배들이 돌부처라고 조롱하였다.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학문하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러워 하였는데 아들이 입학한 뒤에는 매번 날이 저물어 돌아올 때마다 그날 배운 글을 물어서 알고는 함께 수차례를 외워, 비록 힘들고 바쁘더라도 혹여 폐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칭찬하여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다."라고 하였다. 3년 뒤에 문리(文理)에 통하여 공사(公私) 간의 문서를 막힘없이 볼 수 있었다.농사에 힘써 좋은 밭을 얻어 경작하였는데 무자년(1888, 고종25)의 흉년 때 유독 수확이 있었다. 과부가 된 손윗누이와 아버지를 여읜 세 조카와 함께 한솥밥을 먹었고,97) 쌀을 덜어 별도로 비축하여 몹시 가난한 집이 아이를 낳거나 병이 들었을 때 주급(周急)하는 데 대비하였다. 임진년(1892)에 동향(同鄕)의 김 아무개라는 관리가 와서 공명첩(空名帖)을 주자 고사하며 말하기를, "이씨(李氏)의 백성이 어찌 김씨가 마음대로 주는 벼슬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김 아무개가 말이 막혀 손을 떨었다.갑오년(1894) 동란(東亂 동학혁명) 때 집안사람과 맹세하기를, "저들의 사술(邪術)이 백성을 미혹하는 것은 우선 따지지 않더라도 왕사(王師)에 저항하고 거스르면 반드시 큰 치욕을 당할 것이니 비록 죽더라도 결단코 사술에 물들지 않고 삼가 피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강요를 받아 당(黨)에 들어갔는데, 3일 동안 구금하고서 여섯 차례 맹렬하게 구타한 탓에 기절했다가 겨우 소생하였으나 끝내 동요하지 않았고 가산(家産)을 탕진하여 수개월 동안 와병하였다. 을미년(1895) 왕법(王法)이 다시 밝혀지자 집안 살림을 다스려 복구하였다.무술년(1898)에 모친상을 당하여 마음을 다해 애통해하였다. 무신년(1908, 순종1)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땅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에게 명하기를, "세도(世道)의 혼란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나 다행히 대군자(大君子)와 같은 세상을 사니, 따라가 학문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몸을 버리는 짓이다. 또 네가 《논어》를 읽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의탁함에 있어 친애할 만한 사람을 얻는다면 또한 그를 주인으로 섬길 수 있을 것이다.'98)라는 말이 있었으니 책을 읽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또한 무슨 보탬이 있겠느냐. 우리 집안이 유리(流離)하여 자손이 쇠잔한 나머지 선세(先世)의 유업(儒業)을 상실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내가 가장 한으로 여기는 바이다. 너는 모름지기 부지런히 공부하고 학문하여 나의 한스러운 마음을 네가 뜻을 확립할 부신(符信)으로 삼아 자신과 집안을 이루도록 하라."라고 하고서 마침내 예물을 마련해 익산(益山)의 미륵산(彌勒山)으로 보내 귀의할 곳을 정하였다.하루는 아들이 《소학(小學)》의 위장공취제동궁득신지매 장(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99)을 읽고 있었는데 공이 묻기를, "말이 어찌하여 번다하고 간결하지 않느냐?"라고 하니, 아들이 상세히 고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아마 정궁(正宮)의 소생이라는 뜻을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훗날 전 선생에게 질정하니 과연 그러하였다. 경술년(1910)의 변이 일어나자,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진 날에 죽지 않았다고 전 선생을 비난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변론하여 말하기를, "기자(箕子)와 미자(微子)는 주(紂)의 친족100)으로, 은(殷)나라가 망한 날에 죽지 않았는데도 공자(孔子)가 어진 사람이라고 허여하였다.101) 하물며 재야의 지위가 없는 유자(儒者)이겠는가."라고 하니, 들은 사람들이 모두 승복하였다. 대개 이를 보면 공의 뜻은 언행을 숭상하였으니, "심지가 바르고 전일하며, 실천이 과감하고 독실하며, 식견이 높고 원대하며, 의리가 엄정하고 분명하다."라고 한 나의 말이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공은 철묘(哲廟) 신해년(1851, 철종2) 10월 11일에 태어나 정사년(1917) 4월 24일에 졸(卒)하였으니 누린 수명이 67년이다. 정읍군(井邑郡) 산내면(山內面) 양하동(讓賀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연안 김씨(延安金氏)로 의수(義秀)의 딸이다. 장남은 우진이고 차남은 석진(碩鎭)이다. 딸은 연일(延日) 정대중(鄭大中), 전주(全州) 이병택(李炳澤)에게 시집갔다. 태환(泰煥), 태형(泰衡), 태우(泰釪)는 장남 소생이고, 태섭(泰燮), 태옥(泰鈺)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아, 이 양하동의 네 자 높이 봉분(封墳)에 嗚呼 此讓賀洞四尺之墳이름은 없고 실지가 있는 문인을 안장하였네 好藏無名有實之聞人 余同門友宋士翼宇鎭, 莊士也。余意其有來處, 而未聞其近世有聞人, 則甚疑之。日, 宇鎭以先大人家狀, 請表阡之文。余受而敬讀, 其心志正專, 踐履勇篤, 見識高遠, 義理嚴明, 有專門儒業之所不及者, 實余所謂聞人也。但以世尙文而公少文, 故名不聞, 然何損於其實? 人謂醴泉之無源者, 眞妄也。今於表文, 非惟不辭, 乃所願焉。公諱在奎, 字自成。宋氏貫洪州。上世有諱枰, 別侍衛。自後世有簪纓。至天啓甲子仁祖時, 諱斗文中司馬, 連登文科, 歷敭內外淸顯, 公之八世也。考諱德基, 元配光山盧氏, 萬權女, 以烈行有士林薦狀。繼配金海金氏, 生公。公寡言語重然諾, 爲人謀則盡心若己事, 事必謹始而克終。心力堅固, 一有所爲, 萬牛莫回。出入有方, 絶不入茶酒肆。少貧行傭, 與婢輩同耘, 有呈艶獻情, 無所不至者, 頓然不顧, 儕輩以石佛嘲之。常恨早孤失學, 及其子上學, 每於暮歸, 將其當日課文, 問而知之, 共誦數遍, 雖勞且忙, 未嘗或廢。人稱曰: "指穿石。" 三年通文理, 能看公私文簿, 無滯。力於稼穡, 得佃良田, 戊子大無, 特得大有。與寡姊三孤甥同釁・(爨)。捐米別貯, 待極貧家産娩及疾病時周急。壬辰, 同鄕金某官來授空名帖, 固辭曰: "李氏之民, 豈可受金氏擅爵乎?" 金語塞手戰。甲午東亂, 與家人誓曰: "姑勿論彼之邪術惑民, 抗逆王師, 必伏大戮, 雖死, 決不染。當謹避之。" 終被其勒要入黨, 三日拘囚, 六次猛打, 氣絶僅甦, 竟不動蕩, 盡家産累月臥病。乙未, 王章復明, 治産復舊。戊戌, 丁內憂, 哀痛盡情。戊申, 聞艮齋田先生避地入山, 命其子曰: "世道板蕩, 莫甚此時, 而幸得大君子幷世, 不思從學, 是自棄其身。且見汝讀《論語》, 有曰'因不失其親, 亦可宗也', 徒讀而不行, 亦何益哉? 吾家流離殘子之餘, 至失先世儒業, 吾所最恨。汝須勤攻學問, 以吾所恨之心, 爲汝立志之符, 成己及家也。" 遂辦下贄具, 送于益山彌勒山中, 定依歸。一日, 其子讀《小學》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問之曰: "語何煩而不簡乎?" 其子不能詳告。則曰: "疑示正宮所出之義也歟?" 後質田先生, 則果然。庚戌之變, 有譏田先生以不死國破君亡之日者, 則辨之曰: "箕子微子, 紂之親族, 不死殷亡之日, 而孔子許之以仁, 况在野無位之儒乎?" 聞者咸服。蓋觀乎此, 公之志尙言行, 則吾所謂正專、勇篤、高遠、嚴明者, 不其然乎? 公生于哲廟辛亥十月十一日, 卒于丁巳四月二十四日, 壽六十七。葬于井邑郡山內面讓賀洞亥原。配延安金氏, 義秀女。男長宇鎭, 次碩鎭。女適延日鄭大中、全州李炳澤。泰煥、泰衡、泰釪, 長房出; 泰燮、泰鈺、次房出。曾玄不記。銘曰:嗚呼! 此讓賀洞四尺之墳, 好藏無名有實之聞人。 한솥밥을 먹었고:원문은 '同釁'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釁'을 '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의탁함에…것이다:《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위장공취제동궁득신지매 장(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소학》 〈계고(稽古)〉에 보이는데 《좌전(左傳)》 은공(隱公) 3년 조의 기사를 수록하였다. 《소학》에 실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위장공이 제(齊)나라 세자 득신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장강(莊姜)이다. 아름다웠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위장공은 대규(戴嬀)에게서 아들을 보았는데 이 사람이 위환공(衛桓公)으로, 장강이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 또 공자 주우(州吁)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폐인(嬖人)의 자식으로, 위장공의 총애를 받아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며, 병기(兵器)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위장공은 금지하지 않았고 장강은 이를 미워하였다. 석작(石碏)이 위장공에게 주우를 금지하고 단속하지 않으면 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간언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기자(箕子)와……친족:기자는 주의 백부(伯父)이고 미자는 주의 서형(庶兄)이다. 공자(孔子)가……허여하였다:주가 폭정을 일삼자 기자는 노예가 되고 미자는 나라를 떠났는데, 이 둘과 간하다가 죽은 주의 숙부 비간(比干)까지 아울러 공자가 은나라에 세 어진 사람[三仁]이 있었다고 하였다. 《論語 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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