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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련 구락에게 답함 기미년(1919) 答金巢蓮 龜洛 己未 그대가 시를 써서 보여준 뜻을 때때로 한번 읊조리니 참으로 크게 탄식할 만합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산은 무너질 수 있고 옥도 부서질 수 있어도, 굳건한 마음은 변하면 안 된다고 여깁니다. 세속의 비웃음은 저들이 시끄럽게 비웃는 대로 맡겨두고, 높은 모자와 넓은 띠는 감춰서는 안 됩니다. 거세고 험한 파도와 같은 신풍조는 그대로 하늘에 닿든지 내버려두고, 우리 유학의 명맥177)이 끊겨서는 안 됩니다. 요컨대 그 밝은 하늘이 천추에 돌아오지 않더라도, 제자로서 학문에 힘쓰는 것은 끝내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이 글을 보면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산중에서 보내는 세월은 족히 기억할 만한 것이 없고, 오직 책상 위의 한 질의 서책으로 날마다 회옹(晦翁)의 가르침178)을 받듭니다. 때때로 백풍(伯豊)과 안경(安卿)179) 등 제공들의 강독이 있으니, 몹시 계발(啓發)180)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대와 더불어서 함께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示意時一諷詠, 良足浩慨.然僕謂岡可崩玉可碎, 鐵心石膓不可渝也.世笑俗嗤, 任爾喧聒, 冠峨帶博, 不可藏也.鯨濤鰐浪, 任爾滔天, 吾之洙泗一棹, 不可摧也.要之幷與皓天而千秋不返, 弟子之勉學, 終不可已也.高明見此, 又以爲如何.山中日月, 無足記者, 惟案上一部書, 日承晦翁之謦欬.時有伯豊安卿諸公之講貫, 殊有啓發之樂.而恨不與高明共之也. 유학의 명맥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 곡부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유가(儒家)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회옹(晦翁)의 가르침 《주자대전》를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풍(伯豊)과 안경(安卿) 후창의 제자이거나 친구들로 함께 《주자대전》을 강독하고 있는 것 같다. 계발(啓發)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마음속으로 통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으며,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되,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한다면 다시 더 일러 주지 않아야 한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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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하다 기미년(1919) 答族弟希淑 己未 보내온 편지에서 먼저 부로(父老)께서 서재를 설립하여 가르침을 세운 뜻이 이처럼 은근한데도 자제들이 면학하여 몸을 성취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니 이는 전 가문의 공통된 근심이다. 마지막엔 자신을 반성하고 질책하여 부형의 소망을 저버릴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바로 자기의 실질적인 병통을 근심한 것이다. 전 가문을 근심함은 인(仁)이고 자기를 근심함은 지(智)이니, 간절하고 부지런히 인지를 추구하는 자는 우리 희숙이로다. 그러나 전 가문의 근심은 서로 수양하고 면려함은 있지만 그 성취의 여부는 오로지 나에게만 있지는 않은 즉 희숙이 금일에 부지런히 애써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 것도 참으로 자기에게 있지 않겠는가.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가문의 부로가 되기는 오히려 가능해도 희숙의 부형은 더욱 능하기 어렵다고〔難能可貴의 뜻〕 여겼다. 가문의 자제가 성취가 없는 것은 오히려 설명할 수 있거니와 희숙의 성취가 없는 것은 이럴 이치가 없으니 어째서인가? 몸소 경작하며 학문에 힘써 오래도록 게을리 않는 분이 누가 희숙의 엄군(嚴君)과 같았으며, 공부와 학문을 쌓아 나아갈수록 더욱 독실함이 또한 희숙처럼 염족(厭足)하지 않는 자가 있었던가. 나는 이 때문에 말하기를 "희숙의 부형의 능하기 어려움으로 보아 희숙의 학문은 반드시 성취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석년(昔年)에 선자(先子 돌아가신 부친)께서 내가 학문에 열중하기를 위하여 머리가 세도록 집안일을 하시면서 쓴 것을 달게 여기고 장원을 개척하고 묘소를 경영하며6) 숙수(菽水)를 마시면서도 후회 않으시고 불초의 학문이 성취되어 가문의 명성이 창성하기를 바라셨다. 불초 또한 이를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큰일이라고 여겼다. 어찌 알았으랴, 학문은 성취하기 어렵고 생명은 유한하여 나의 학문과 부모의 생명 둘 다 기대할 수 없어 갑자기 천고의 한이 되었음을.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현양함도 헛된 지경이 되었고 자식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해 그 죄가 참으로 커서 천지를 우러르고 굽어봄에 회한한들 어찌 미칠 수 있으랴. 세월은 쉽게 잃고 좋은 기회는 지속되기 어려우니, 부디 고명한 그대는 나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때에 미쳐 일신의 학문을 완성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지어다. 분방(分房 집안이 나뉨)은 오래 되었지만 친아우처럼 여기므로 외람되이 속말을 드리니 깊이 헤아려 꾸짖지 말지어다.근자에 《의례》 일단을 읽고 지은 글은 전중(典重)하고 간아(簡雅)하여 고문의 기상이 있으니 희숙이 문사로 뜻을 전달함이 이와 같도다. 선비가 삼일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한다는 것이 진실 된 말이다. 문장은 도가 보존된 바가 아니나 문장이 아니면 또한 도를 전할 수 없다. 근일에 문장이 끊김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는데 그대가 여기에 뜻을 두고 보추(步趨)가 자못 심상하지 않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힘쓰고 힘쓸지어다. 來書, 首以父老之入齋設敎, 若是其勤, 而子弟之不勉學成身爲憂, 此則全門之通患也.終之反躳責已, 惴惴焉惧負父兄之望, 是乃憂一已之實病也.全門之憂仁也, 一已之憂智也, 懇懇勤勤求厥仁智者, 其吾希淑乎.然全門之憂, 交修胥勖則有矣, 而其成與否, 有不專在我, 則希淑今日之孜孜矻矻, 不得不措者, 又不亶在於一已乎? 吾嘗以爲全門之父老, 猶可能也, 希淑之父兄, 更難能也.全門子弟之無成, 猶可說也, 希淑之無成, 無是理也, 何也? 躬耕縱學, 久而不倦, 孰有如希淑之嚴君者乎, 積功累學, 愈往愈篤, 又有如希淑之不厭者乎? 吾故曰希淑父兄之難能, 而希淑之學之必成也, 昔年先子, 爲不肖縱學, 白首幹家, 苦以爲甘, 斥庄經斧, 啜菽靡悔, 庶冀不肖之學成而昌家聲也, 不肖亦以此爲報親之大者也.孰知難成者學? 有限者壽, 兩相不待, 遽作千古之恨, 立身顯親, 旣歸虛境, 闕修子職, 其罪孔大, 俯仰穹壤, 悔恨何及.流光易失, 好會難常, 幸高明視我爲覆轍折肱, 而及時成身, 毋胎後悔也.分房雖遠, 親弟是視, 猥進肺言, 深諒不讁.近讀儀禮一段爲文, 典重簡雅, 有古文氣味, 希淑辭達, 乃若是乎.三日刮目, 眞實語也.文非道之所存, 非文亦無以傳道.近日文絶,莫此爲甚, 而高明有志乎此, 步趨頗不尋常, 幸甚幸甚.勉之勉之. 장원을……경영하며 원문은 '斥庄經斧'인데 뜻이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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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族弟希淑 甲子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쌀알이 흩어져도 아낄 줄 모르다가 흉년엔 배가 텅 비어 흩어진 쌀알을 구해도 얻지를 못한다. 나는 현제(賢弟)에게 유시할 것이 있다. 한창 동당에서 무릎을 좁힐 때에는 착한 말이 양양하게 충만하여 변함없이 지속되리라 여기지만 급기야 소식이 끊겨 쓸쓸하게 앉은 연후에 전날의 놀이를 회상하면 천상의 즐거움 같다. 지난번에 준 두 편지는 감사하게 받았다. 전씨를 준엄하게 질책했으니 그 마음을 깨우겠고 정씨를 명백하게 유시한 것은 그의 미혹을 돌이킬 만하여 모두 후세에 전해져 떳떳할 만하다. 이와 같은데도 깨우치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면 또한 다시 어찌하겠는가. 이처럼 시비가 전도되고 착란한 날을 맞아 그대 같이 곧지만 각박하지 않고 상세하지만 번다하지 않는 문필(文筆)로 유연히 사람을 감동시키고 크게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다행히 동지 가운데 있고 더욱 더 다행히도 동종(同宗) 가운데 있는 것이 어찌 우연이랴. 나는 심히 기뻐하노라. 듣자니 올 겨울에 문장에 크게 힘을 쏟았다고 하는데 진실로 그러한가? 뿌리가 이미 견고하고 체재 또한 갖추어져서 일은 절반이지만 공은 반드시 배가 될 것이다. 힘쓰고 힘쓴다면 강하(江河)가 터지듯이 패연(沛然 세찬 모양)하여 막지 못함을 볼 수 있으리라. 나는 젊어서부터 문자에 자못 우활하고 게을러 힘을 다하지 않았다. 이제 이단을 물리치는 일을 당하여 문사가 뜻과 어긋나 전달하기 어려움을 느끼니 매우 스스로 후회하고 한스럽게 여긴다. 저들이 짊어진 죄가 산과 같은데도 교만하게 날뛰며 스스로 득의만만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그들의 해미(蟹尾)와7) 같은 글을 믿는 것이니 더욱 애통하고 가증스럽다. 그렇지만 천하의 시비는 의와 불의일 뿐, 저들이 글을 쓴다면 나는 나의 의(義)를 쓸 것이니 내가 어찌 저들을 두려워하겠는가. 기억하건대 옛날에 선사께서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오이견(吳而見 오진영의 자)의 글은 기이함을 숭상하여 본받을 것이 없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종현(鍾賢 김택술의 자)의 문장은 또한 스스로 뜻을 전달하니 삼가 기이함을 숭상하는 오이견의 글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비록 근본을 중시하고 기대와 면려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문장에 능하다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오이견의 문장을 취하지 않으신 뜻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두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할 것도 없으니 어진 아우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그대가 편지에서 용감하게 나아가고 견해가 분명하여 조용히 (사문의 도를) 발휘한다고 나를 인정하고 심지어는 전 호남의 명맥이 나 한 몸에 달려있다고 여기니, 그대는 나를 알지 못하는 자가 아니로되 인물평8)의 잘못됨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설사 몇 가지 근사한 것이 있어도 어찌 이렇게 여러 어른 가운데에서 우열을 따진단 말인가. 어찌 사체(事體)와 예의에 합당하겠는가. 내가 희숙이 나를 알지 못한다고 여긴 것은 곧 이 점에 있고, 마땅히 갈고 닦을 것도 이 점에 있다고 여기네. 그러나 그대의 뜻은 진실로 덕으로써 사랑해 주는데서 나왔으니, 도타운 뜻을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樂歲合哺鼓腹, 粒米狼戾, 而不知惜也.饑年饉秋, 腹枵然, 而求狼戾之米, 不可得也.吾於賢弟有喩焉.方其促膝于同堂, 昌言洋洋充然, 以爲常久也, 及乎鴈斷魚沈, 索然悄坐然後, 回想前遊如天上樂也.二書向荷投示, 責田峻切, 可警其心, 喩丁爽白, 可回其惑, 皆可傳有辭於後, 若此而不警不回, 則亦復何哉? 當此是非倒錯之日, 如君直不傷刻, 詳不失煩之筆, 有能油然感人轟然警人者, 幸而在同志中, 又尤幸而在同宗中, 豈偶然哉? 吾深喜之.聞今冬大肆力于文章云, 信然否? 根旣固矣, 體又具矣, 事將半而功必倍矣.勉旃勉旃, 江河之決, 吾見其沛然莫禦也.吾則於文字, 少頗迂懶不致力.今當言距之役, 覺得戞戞乎難達, 殊自悔恨.彼邊之負罪如山, 而驕騰跳踉, 自以爲得者, 徒恃若爾輩蟹尾之文, 尤極痛憎.雖然天下是非義與不義而已, 彼以其文, 我以吾義, 吾何畏彼哉? 記昔先師雅言曰, 吳而見之文, 尙奇不足法, 又謂之曰鍾賢之文.亦自達意, 愼勿效尙奇如而見文.此雖出於重本期勉, 而非謂澤述之能於文也, 然其不取吳文之意, 較然矣, 然則不惟不當畏.亦不足畏, 未知賢弟以爲如何? 若盛喩之以進勇見明, 從容發揮與我, 至謂全湖之命脈, 在我一身.君非不知我者, 月朝之失, 一至於此.設有一二近似者, 遽此軒輊於諸丈中, 豈當乎體禮? 吾以爲希淑之不知我者, 正在此處, 所當磨礱處, 亦在於此也.然其意則固出於以德之愛, 厚意曷不領納. 해미(蟹尾) 게가 기어가는 것처럼 가로로 쓰는 글자라는 의미로 한문 이외 영어 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물평 원문은 월조(月朝)로 월단(月旦)과 같아 인물평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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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재문계안 서문 【임오년(1942)】 思敬齋門契案序 【壬午】 우리 김씨(金氏)는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敍))이 처음 부안(扶安)의 석동산(席洞山)에 안장되고, 대호군공(大護軍公 김당(金璫))과 직장공(直長公)이 두 아들로서 부장되면서부터 두 파의 자손이 대대로 이곳에 계장(繼葬)되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자자하게 김씨 선조의 산이라 일컬었다.우리 파는 직장공에서 나왔는데, 첨지공(僉知公)과 임실공(任實公)이 분동(粉洞)에 따로 안장된 것을 제외하고는 5,6대 23여의 신위가 모두 석동에 있다. 직장공 묘사(墓祀)는 석동의 원 재실(齋室)에서 대호군공과 함께 군사공의 제삿날에 행하였고, 계장한 여러 신위는 분동파의 재실에서 나누어 희생과 제수를 받들어 올리고 같은 날에 합사(合祀)하였는데, 지역이 조금 멀어서 의례에 혹 허물이 있었다.이에 병인년(1926) 봄에 묘 근처에 따로 병사(丙舍)를 짓고 《논어》의 가르침을 취하여 '사경재(思敬齋)'라 이름을 붙였다. 비용은 죽계(竹溪 김횡(金鋐))과 화곡(火谷 김명(金銘)) 두 선조를 배향한 유천서원(柳川書院)의 옛 제전(祭田) 19마지기[斗落]를 매각한 금액에서 내고, 각 파에 배당하여 추렴한 것을 보태어 마련하였다. 비록 그럭저럭 완공하였지만 유지할 자본을 여전히 많이 갖추지 못한 지가 거의 20여 년이 되어갔다.속수옹(涑水翁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집안을 다스리는 자는 항상 조금씩 여분을 남겨 두어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종족의 일을 다스리는 자가 어찌 유독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생각지 못한 일을 기다릴 것도 없이 현재 갖추지 못한 것을 근심함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올해 10월 상정(上丁 매달 음력으로 상순에 드는 정의 날)에 제사를 지낸 뒤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제히 일어나 이 재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자는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빠짐없이 각기 약간의 금액을 내어 하나의 계를 세워 더욱 부지런히 축적하고 더욱 오래도록 전함으로써 가깝게는 현재의 근심을 풀고, 멀게는 재화가 넘쳐나기를 도모하였으니, 대체로 작년 가을에 10여 사람이 처음 창립한 것을 인하여 넓혀 확대한 것이다.성명을 나열해 쓰고 아울러 출연한 금액을 기록하여 '사경재문계안(思敬齋門契案)'이라 명명하고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청하니, 내가 말하였다."이런 계를 두다니, 훌륭한 일이다. 무릇 그런 뒤에야 제사에 공경함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안과 밖이 동일하고 처음과 끝이 온전해야 쇠퇴하지 않음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니, 감히 서문을 기꺼이 써서 서로 힘쓰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계는 선조를 길이 사모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세상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위함이 있어 행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후손이 장성하는 대로 해마다 추가해 넣을 것이니, 이것이 또 기록할 만한 훌륭한 규범이다." 吾金自郡事公始葬扶之席洞山, 大護軍公、直長公以二子祔焉, 兩派子孫, 世世繼之. 邦人藉藉稱金氏祖山. 吾派出自直長公, 而僉知公、任實公, 別葬粉洞以外, 五六世二十餘位, 皆在席洞. 直長公墓祀, 自席洞元齋, 同大護軍公, 行於郡事公祀日, 繼葬累位, 分自粉洞派齋, 奉進牲需, 合祀同日, 而地稍遠, 禮或有愆. 乃於丙寅春, 別築丙舍於墓近, 取論語之訓, 扁以思敬齋. 費出竹溪、火谷二祖柳川院舊日祭田十九斗落斥賣金, 助以各派排醵而成之. 雖苟完矣, 然維持之資, 尙多未備者, 殆將卄載. 涑水翁曰: "治家者, 常須稍存贏餘, 以備不虞, 洽宗事者, 何獨不然? 況不待不虞而現病未備乎? 是歲十月上丁, 行祀之餘, 僉議齊發, 凡祀祖于是齋者, 無遺老少, 各出若干金, 樹一契, 蓄之彌勤, 傳之彌久, 用圖近紓而遠贏, 蓋因昨秋十餘人草創而張大之也. 旣列書姓名, 幷記所出金額, 命之曰'思敬齋門契案', 請余序之. 余曰: "有是哉, 善物也. 夫然後於祭思敬乎. 外內一, 始終全, 庶保不替矣. 敢不樂爲之書而交勖焉. 玆契也, 出於永慕祖先, 而非如世人一時有爲而爲之者. 故隨其長成, 逐年追入, 是又善規之可書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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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계안 서문 【병인년(1926)】 尙志契案序 【丙寅】 자신의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 사람을 '지사(志死)'라 일컬은 것80)은 공자가 진실로 변화된 세상에 대해 말한 것이고, 맹자가 선비의 일삼는 바를 말하여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는 것으로 귀결시킨 것81)도 또한 쇠퇴한 세상을 뜻한 것이었다.세상의 풍속과 교화가 쇠퇴하면서부터 선비가 뜻을 고상하게 가지지 않음으로써 사욕의 문이 열리고 편안한 집[安宅]82)이 닫혔으며, 이욕의 길이 통하고 정도의 길이 막힌 지가 실로 오래되었는데, 게다가 앞에는 자신의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일이 발생하고, 뒤에는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 있는 상황까지 더해진다면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여 지조를 잃는 데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시대가 내려올수록 백성들이 더욱 거짓된 짓을 하면서 음흉하고 괴이한 무리들이 사욕의 문에 의거하여 편안한 집으로 인식하고, 이욕의 길을 달려 바른 길을 속이는데다가 목숨을 바치고 시신이 도랑에 버려지는 상황이 닥쳐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인륜을 어그러뜨리고 도를 해치는 죄악에 빠지는 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잇달아 일어나면서 거듭 천하와 후세를 그르치니, 아, 세도의 재앙이 또한 비참해졌다.영재인 친족 사의(士毅)ㆍ문경(文卿)과 임군 정로(林君貞老) 및 내 동생 여안(汝安)은 같은 스승을 두고 같은 마을에 살면서 뜻을 함께하였는데, 비참한 재앙을 목격하고서 그 근원이 선비들이 뜻을 잃은 데에 있음을 간파함으로써 저 무리들을 통렬히 배척하고 두려워할 줄을 알았으며, 자신들이 뜻을 고상하게 가지는 것이 오히려 신실하지 못할까 거듭 두려워하였다. 이에 함께 의논하여 규례를 내고 계안(契案)을 세워 '상지계(尙志契)'라 명명하고, 매년 양(陽)의 기운이 생겨나는 날(동지)에 서로 자득한 것을 강론하고 질정하였으니, 그 마음은 바로 쇠퇴한 물결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지주(砥柱)가 되고, 그 일은 이웃한 연못이 서로 물을 대주는 격이었다.내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말하였다."무릇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고, 몸을 주관하는 바이니, 바로 선악의 기관이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뜻을 세워라[立志]', '뜻을 지켜라[持志]', '뜻을 책망하라[責志]' 등의 말을 두었으니, 말은 비록 다르지만 뜻은 대체로 '뜻을 고상하게 가지라[尙志]'는 것과 같다.그러나 모두 이치를 궁구하고 선(善)을 밝히는 방도에 미치지 못한다. 오직 '배움은 뜻을 겸손하게 해야 하니, 힘써서 때로 민첩하게 한다.83)'라는 한마디 말만이 강론하고 생각하며 묻고 변별하는 일에 속하여 선비들의 급선무가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과 사욕, 의리와 이욕을 혹 변별할 수 없어 뜻에 얻지 못한 바가 있게 된 지가 오래전일 것이다.내가 생각하기에 뜻을 겸손하게 하는 것은 앎의 일이고, 뜻을 높게 하는 것은 행위의 일이며, 뜻을 겸손하게 하는 것은 시작의 일이고, 뜻을 높게 하는 것은 끝의 일이니, 청컨대 계안 내의 사람이 먼저 뜻을 겸손하게 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뜻을 고상하게 하는 데에서 공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在壑殺身之稱志士, 孔子固以言乎變也, 孟子言士之所事而以尙志爲歸者, 其亦衰世之意歟. 自世敎衰, 士不尙志, 私門開而安宅廢, 利塗通而正路塞者, 固已久矣, 而復加之以溝壑迫前, 刀鋸在後, 則其能成仁取義, 而不陷乎失身之罪者, 蓋無人焉. 逮夫近日, 世愈降而民滋僞, 乃有陰怪之流, 據私門而認安宅, 趨利塗而欺正路, 無刀鋸溝壑之迫, 而自陷悖倫賊道之惡者, 比肩接踵而起, 重以誤天下後世. 世道之禍, 吁亦慘矣. 族英士毅ㆍ文卿、林君 貞老、及家弟汝安, 同師同閈同志也. 目見慘禍, 鞠其源在士之喪志, 旣痛斥彼流, 而知所懼, 復懼吾之尙志尙未實, 議與發例立案, 命名曰'尙志契', 用每歲陽生日, 互相講質所得, 其心乃頹波之獨柱也; 其事則麗澤之相沃也. 余聞之喜而爲之言曰: "夫志者, 心之所之, 身之所主, 乃善惡之機關. 故古人有立志、持志、責志之云, 言雖殊, 而義槩同乎尙志. 然幷未及窮理明善之方. 惟'惟學遜志, 務時敏'一語, 屬乎講思問辨, 而爲士之急務. 不然, 仁私義利, 或不能辨, 而志有所不得尙矣. 余謂遜志, 知之事; 尙志, 行之事, 遜志, 始之事; 尙志, 終之事. 請案中人之先難乎遜志, 收功於尙志. " 자신의 …… 것 제나라 경공(景公)이 사냥을 나갔을 적에 대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깃발[旌]로 원유(苑囿)를 지키는 관리를 부르자, 그 관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공자가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아니하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칭찬한 말이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보이고,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삶을 구하여 인을 해치는 일은 없고,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루는 일은 있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는 말이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맹자가 …… 것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서 제(齊)나라 왕자 점(墊)이 선비는 무엇을 일삼느냐는 물음에 맹자가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라고 답한 말이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편안한 집[安宅] 인(仁)을 비유하는 말로,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인(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義)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 슬프다.〔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不居, 舍正路而不由, 哀哉.〕"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배움은 …… 한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배움은 뜻을 겸손하게 해야 하니, 힘써서 때로 민첩하게 하면 그 닦여짐이 올 것이다.〔惟學遜志, 務時敏, 厥修乃來.〕"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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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암유고》 서문 【갑신년(1944)】 《老可菴遺稿》序 【甲申】 옛적에 우리 선사(先師)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께서 속세를 떠나 부풍(扶風 부안(扶安))의 계화도(繼華島)에 은둔하며 학문을 강론하실 때에 같은 군에 거주하는 노가암(老可菴) 김공(金公)64)은 사원(詞苑 예문관(藝文館))의 거벽(巨擘)으로서 온 고을의 중망을 받고 있었음에도 깍듯하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섬겼으니, 당시 나이가 백발의 칠질(七耋 70세)로 선생보다 9살이 적었다. 선생께서는 공이 독실하게 도를 추구하는 것을 가상히 여기고 정부자(程夫子)가 여진백(呂進伯 여대충(呂大忠))을 일컬어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라고 했던 말을 취하여 이 호를 지어 주셨으니, 대체로 이는 실제의 기록이다.무릇 학문을 좋아하는 경지가 여러 가지 있지만, 오직 공자와 안연만이 가장 지극한 경지이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는 높고 커서 배우기 어려우니,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 안자의 경지가 바로 공부를 시작하는 요점이고, 또한 배워서 이를 수 있다.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평소 성품이 준엄한데다 만년에는 더욱 단정하여 중도에서 지나친 유소(有所)의 허물65)이 보이지 않았고, 엄격하게 담배를 끊는 것도 스승의 훈계를 벽에 건 날로부터 시작하였다. 이것으로 견주어 논하면 안자(顔子)를 잘 배웠다고 이를 만하니, 옛적에 "부지런히 힘써 늙음이 이르는 줄 모른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때문에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사문에서 예를 삼가고 의를 지켜 신명과 함께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만약 공에게 십수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다면 덕이 높아지고 명예가 퍼졌을 것이니, 어찌 다만 정자 문하의 여공(呂公)과 함께 일컬어질 뿐이겠는가.지금 이 유고(遺稿)는 흩어지고 사라진 나머지에서 겨우 한 권을 얻은 것이고, 또한 성병(聲病)66)의 작품이 많아 심오하고 미묘한 뜻이 발휘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성정(性情)의 근본과 말씀 중에 남긴 시문, 만년에 선사에게 나아가 질정한 기록에서 나온 것이니, 효자 자손(孝子慈孫)이 어찌 오래도록 전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나는 오랫동안 집안의 조카로서 공의 꿋꿋한 지조와 심오한 수양이 당시 선비들로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에 진심으로 감복하여 기꺼이 교정을 하고 서문을 지었다. 그러나 이 유고를 읽는 자들이 공의 존성(存省)67)의 정밀함과 지행(知行)의 실제를 미루어 궁구하지 않고 종묘와 백관68)이 모두 이 책에 있다고 한다면 공을 아는 자가 아닐 것이다. 선사(繕寫)하는 일이 끝났지만 간행하지 않고 기다린 것은 시대의 의리에 편치 못한 점이 있어 공이 평소 의리를 지켰던 뜻을 체득하기 위해서이다. 昔我先師艮齋 田先生, 遯世講道於扶風之繼華島, 同郡老可菴 金公, 以詞苑巨擘, 一鄕重望, 鋭然具弟子禮而事之, 時則七耋皓首而少先生九歲矣. 先生嘉其求道之篤, 取程夫子稱呂進伯老而好學尤可愛之語, 錫是號, 蓋實錄也. 夫好學有多般, 惟孔、顔其至者, 聖人高大難學, 顔子之不遷貳, 乃下手要點, 而亦可學而至. 竊觀公之素性峻厲, 而晩更平正, 未見過中有所之累, 斷烟之嚴, 自師訓揭壁之日. 以是類論, 則可謂善學顔子, 而古所謂俛焉孶孶, 不知老至者是已. 故公之沒也, 師門有謹禮守義神明與伍之贊. 如得假公十數年, 卒以遂願, 則德崇譽廣, 豈但與程門之呂公幷稱也哉? 今此遺稿, 僅得一卷於散逸之餘, 而亦多聲病之作, 無以見發揮奧妙之旨. 然是出於性情之本、咳唾之遺、及夫晩年就正之錄者. 孝子慈孫, 安得不思所以壽傳也? 澤述久爲門子姪, 心服介然之操、黯然之修, 非時儒所及, 樂爲役於校序. 然讀是稿者, 如不推究公存省之密、知行之實, 而謂宗廟百官, 盡在是編, 則非知公者也. 繕寫訖, 不付剞劂而待之者, 以時義有不安, 而體公平日守義之意云爾. 노가암(老可菴) 김공(金公) 근세 유학자 김낙필(金洛弼, 1850~1919)로, 노가암은 그의 호이고, 자는 여량(汝良)이다. 유소(有所)의 허물 네 가지 마음의 병통인 유소분치(有所忿懥)ㆍ유소공구(有所恐懼)ㆍ유소호요(有所好樂)ㆍ유소우환(有所憂患)을 말하는 것으로, 《대학장구》 전(傳) 7장의 "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는 것은 마음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성병(聲病) 시의 성률(聲律)이 맞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전하여 시를 가리킨다. 존성(存省) 존양(存養)ㆍ성찰(省察)의 준말로, 본성을 함양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미를 살핀다는 뜻이다. 종묘와 백관 학덕의 깊이를 비유하는 말로, 《논어》 〈자장(子張)〉에 "부자의 담은 몇 길이나 높아서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볼 수 없다.〔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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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당유고》 서문 【갑신년(1944)】 《中堂遺稿》序 【甲申】 글은 공령(功令 과문(科文))과 문장(文章), 도학(道學)의 구분이 있는데, 반드시 도학(道學)의 글이라야 비로소 자신을 완성하고 세상을 맑게 할 수 있다. 다만 선비들이 명예와 이익에 빠져 바른 학문으로 돌아오지 못할 뿐이다. 오직 호걸스러운 선비인 뒤에야 한 번 변하고 재차 변하여 세속의 습관에서 초탈한 다음에 도학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고(故) 중당 처사(中堂處士) 박공(朴公)69)이 그러한 분이다.공은 어린 시절에 학문할 기회를 잃고 늦은 나이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했지만, 부모의 상사에 흉년까지 겹쳐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가 이미 뛰어나 약관 남짓한 나이에 용을 잡고 여의주를 얻는 글 솜씨는 과거 시험장에서 적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후회하며 말하기를,"한 사람의 안목에 득실이 결정되는 것을 나는 부끄럽게 여기니, 고문(古文)을 지어 후세의 공정한 안목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바로 문장 공부에 힘을 쏟아 몇 년 동안 서한(西漢)ㆍ동한(東漢)ㆍ당(唐)ㆍ송(宋)의 문장을 두루 섭렵하였다. 얼마 뒤에 또 후회하며 말하기를,"문장가가 되는 것이 어찌 성현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하고, 마침내 문장을 통해 도를 밝히고, 결국에는 실제적인 학문으로 돌아와 의지하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보낸 뒤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에게 나아가 질정하였으니, 이 때 나이가 불혹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이에 이치를 보는 것이 밝아지고, 글을 짓는 것이 합당하여 스승의 문하에서 크게 인정을 받아 성대하게 두각을 나타냈다. 만년에는 식견이 더욱 정밀해지고 의론이 더욱 적절한 것이 실로 뭇 사람들이 추켜세우는 세속의 유학자와는 다름이 있었으니, 지금 이 유고에 실려 있는 글로 논해보겠다.스승 간재에게 올린 여러 편지들과 이씨(李氏)의 심리설(心理說)에 대해 논한 것과 영주(瀛州 고부(古阜)) 아래에서 문답한 것을 살펴보면 그 근본이 되는 종지(宗旨)가 스승의 전수로부터 터득함이 있었으니,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믿고 따로 한 학파를 세운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공교사(孔敎社)70)에 대해 논한 것과 홍(洪)ㆍ오(吳)의 논설에 대해 논변한 것을 살펴보면 일은 가능함을 구하지 않고, 공은 이룸을 구하지 않은 채 한결같이 바른 길만을 따랐고, 게다가 마치 불을 보듯 당시의 형세와 사물의 실정을 밝게 비추어 볼 수 있었으니, 일과 공적만을 중시하고 도의(道義)를 헤아리지 않다가 끝내 또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을 한 번 변하고 재차 변한 호걸의 선비이며, 도학의 글로 자신을 완성하고 세상을 맑게 한 분이라고 이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대체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으니, 말이 이미 훌륭하다면 덕 또한 알 수 있다. 공이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나는 말할 만한 것이 없지만, 마음 씀이 깨끗하고 정직한 것만큼은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아, 사람의 삶은 정직해야 하니, 정직하지 않는 삶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일 뿐이다.71)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고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것은 모두 정직일 뿐이니, 이것이 공의 본원이 되는 이유이다. 본원이 이미 섰으니, 어찌 도가 생겨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공이 처음에 공령과 문장을 위했다는 이유로 끝내 외면에 치우쳤다고 의심하는데, 공을 아는 자가 아니다.공이 원고를 수습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보존된 원고가 겨우 8책뿐이었는데,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또 3책을 잃어버리고, 지금 공의 아들 승구(承九)와 조카 승희(承禧), 사위 김형륜(金炯倫)이 보여주며 교정과 서문을 청한 것이 5책이었다. 내가 비록 질병과 자질구레한 일로 겨를이 없다 하더라도 평소 우러러 사모했던 마음을 생각하고, 또 지금 같은 세상에 이런 일에 참여하여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의 청에 힘써 부응하였는데, 그 가운데 삭제하고 남은 것이 또 3책에 불과하였다. 文有功令、文章、道學之分, 而必道學之文, 乃可以成身而淑世. 顧士溺於名利, 不反之正焉. 夫惟豪傑之士然後, 能一變再變, 超脫俗習, 而歸于道學. 故中堂處士 朴公, 其人也. 公幼而失學, 晩始上塾, 重以喪歉, 業不能專. 然天才旣高, 弱冠餘, 屠龍探驪之手, 無敵乎場屋. 旣而悔曰: "決得失於一夫眼, 吾恥之, 當爲古文, 俟後世公眼. " 乃肆力功文章, 汎濫乎兩漢、唐、宋者幾年. 旣而又悔曰. 與其爲文章之徒, 曷若爲聖賢之徒. 遂因文而明道, 竟歸實學. 久之就正于艮齋 田先生, 則年將不惑. 於是見理之明, 修辭之當, 大爲師門所與, 而蔚爲翹楚矣. 晩而識益精論益切, 實有異乎衆所推之世儒. 今以載是稿者論之. 觀於上師門諸書、論李氏心理說、瀛下問答, 則知其源頭宗旨, 有得乎師傳, 而與自信己見, 別立一派者異矣. 觀於論孔敎社、辨洪ㆍ吳說, 則知其不事求可、功求成, 而一循乎正經, 復能明時勢、燭物情, 若觀火然, 與事功爲重, 不計道義, 而卒亦無所成者異矣. 夫是之謂一變再變豪傑士, 道學文成身淑世者, 不其然乎? 蓋有德者, 必有言, 言之旣得, 德亦可知已. 公常自言: "吾無可道者, 用心白直, 庶無自愧. " 嗚呼, 人生也直, 罔生幸免. 天生萬物, 聖應萬事, 皆直而已. 斯其所以爲公本源, 本之旣立, 何道之不生也? 人或以公始爲功令文章, 疑其終涉文勝, 非知公者也. 公不屑收稿, 所存僅八冊, 而復失三冊於歿後. 今其子承九、從子承禧、壻金炯倫, 所示而請校序者爲五冊. 余雖病冗無暇, 念平日景仰之意, 且憫今之世無與相是役者, 爲之勉副其請. 其中刪餘之存, 又不過三冊焉. 중당 처사(中堂處士) 박공(朴公)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 박수(朴銖, 1864~1918)로, 중당은 그의 호이다. 공교사(孔敎社) 공자의 전통 유교를 국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로, 청나라 말 강유위(康有爲, 1858~1927)가 설립한 공교회(孔敎會)에 의해 시작되었다. 사람의 …… 뿐이다 《논어》 〈옹야(雍也)〉의  "사람의 삶은 정직해야 하니, 정직하지 않는 삶은 죽음을 요행히 면한 것일 뿐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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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합고》 서문 【을유년(1945)】 《杻晩合稿》序 【乙酉】 글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세상에 도움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 글이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면 비록 글이 많고 또 기교가 있다 한들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 그래서 군자는 글을 논할 때에 단지 세상을 도울 수 있는지 여부만을 살펴볼 뿐, 기교의 유무와 글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다.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72)에 대해 문장이 공교롭고 저술이 풍부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후주(後主)를 경계한 한마디 말73)은 천근하고 적막하다고 할 만하였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소학》에 그 말을 실은 것은 선악의 많고 적음에 대한 말이 이치에 절실하게 합당하여 사람에게 매우 유익했기 때문이다.내가 살펴보건대, 완산(完山) 이공(李公) 유애(杻崖)가 집안에 전한 요언(要言)에 이르기를,"사람됨이 효성스럽지 못하면 다른 것에 비록 일컬을 만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사사로운 명예나 이익일 뿐이니, 자식을 가르치느냐 가르치지 않느냐에 따라 집안의 흥망이 판가름된다."라고 하였으며, 그의 증손 만암공(晩巖公)이 아이들을 경계한 글에 이르기를,"물의 본성은 담담하여 티끌이 없지만, 변함에 미쳐서는 흐리게 하자마자 혼탁해지고, 사람의 본성은 혼연하여 사욕이 없지만, 가림에 미쳐서는 이익을 좇아 짐승이 되니, 물을 살펴서 그 폐단을 징계한다면 악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대저 두 공은 일찍이 풍부하고 화려한 글에 힘쓴 적이 없었지만, 집안을 훈계하여 윤리를 바르게 하고 덕행에 힘쓰게 한 것이 한결같이 모두 진실하고 간절하였으며, 그 말이 자효(子孝)와 부자(父慈)에 대한 능부(能否)의 극단이나 성리(性理)와 이욕에 대한 선악의 본말에 이르러 또 이처럼 분명하고 절실하였으니, 만약 주자의 뒤를 이어 《속소학(續小學)》을 짓는 자가 있다면 〈가언(嘉言)〉편에 이 말을 기록함으로써 세상을 돕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적에 함께하지 않으리란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유애(杻崖) 휘 진오(晉吾)는 은거하여 뜻을 숭상하였고, 만암(晩巖) 휘 창우(昌宇)는 집안에서의 행실이 본받을 만하였으니, 대체로 모두 세속 선비들이 표방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만암의 손자 기동(起東)이 요언과 경계의 말에 약간의 시문(詩文)을 합하여 《유만합고》를 완성하고 서문을 청하러 왔기에 내가 감히 두 글에서 각기 한마디 말을 드러내 밝히고 특별히 써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였다. 所貴重乎文者, 以其有補乎世也, 文而不能與此, 雖多且工焉, 亦奚以爲? 故君子之論文也, 只觀其補世與否, 不問巧拙多寡. 漢之昭烈, 未聞工文章富著述, 而其勅後主一言, 可謂淺近寂寥. 然朱子載之《小學》之編者, 以其善惡大小之云, 爲當理切而益人深也. 余觀完山 李公 杻崖傳家要言有曰: "爲人不孝, 他雖有可稱, 是乃名利之私. 敎子與不敎, 家之興亡判焉. " 及其曾孫晩巖公誡兒書有曰: "水性淡然無滓, 及其變也, 淆之則濁; 人性渾然無私, 及其蔽也, 趨利而爲禽獸, 觀於水, 懲其蔽, 則無惡. " 夫二公未嘗致力於贍麗之文, 然訓家以正倫理、勉德行者, 一皆眞實懇至, 而其說到子孝父慈能否之極端、性理利欲善惡之本末者, 又若是明切. 如有後朱子而作《續小學》者, 吾不信其不錄此於〈嘉言〉之篇, 而與補世益人之功也. 杻崖諱晉吾, 隱居尙志, 晩巖諱昌宇, 內行可法, 蓋皆非世儒標榜者比也. 晩巖孫起東輯要言誡書幷詩文各若干, 成《杻晩合稿》, 而來請玄晏. 余敢表章各一言于二書而特書之, 俾世之人知文字貴重之攸在. 소열제(昭烈帝) 촉한(蜀漢)의 첫 임금인 유비(劉備)로, 소열은 그의 시호이다. 후주(後主)를 …… 말 후주는 촉한의 2대 황제인 유선(劉禪)을 가리키며, 유비가 임종하려 할 때에 후주인 유선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악이 작다 하여 행해서는 안 되고, 선이 작다 하여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勿以惡小而爲之, 勿以善小而不爲.〕"라고 하였다. 《小學 嘉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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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시고》 서문 【갑신년(1944)】 《晩棠詩稿》序 【甲申】 시와 산문은 문체가 비록 같지 않지만, 말의 뜻이 전달되고 문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같으니, 시는 바로 운(韻)이 있는 글이고, 글은 운이 없는 시이다. 그러므로 풍(風)ㆍ아(雅ㆍ송(頌)의 311편과 4대(代)의 글 58편74)이 모두 정경(正經 유가경전(儒家經典))이 되고, 주공(周公)과 공자가 《주역》을 저술하면서 시와 산문을 함께 사용한 것이다.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그 사이에서 우열을 나누어서 다른 사람의 시집을 보고서 정밀함과 조잡함,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따지지 않은 채 문득 산문이 없다는 이유로 경시하는 것인가? 시를 경시할 수 있다면 "팔다리와 같은 신하가 기쁘게 일하면 머리와 같은 임금의 다스림이 흥기된다.75)"라는 노래가 어찌하여 대순(大舜)에게서 시작되었겠으며, "치우침이 없고 불공평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다."라는 구절이 어찌 〈홍범(洪範)〉에 올랐겠는가?나의 외종형(外從兄) 만당(晩棠) 김공(金公)76)은 평소 뛰어난 재주를 품어 과거 문장 중 시에 뛰어났지만 유사(有司 시험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세상의 도 또한 점차 무너져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자, 돌아가 은거한 채 뜻을 구하면서 지닌 뜻과 지나온 행적을 한결같이 시에 드러내어 마침내 전문(專門)을 이루었으니, 지금 산삭하고 편집한 《만당시고》 한 부가 이것이다.시를 지을 때에 주변의 정경을 통해 일을 기술하고, 감흥을 따라 심정을 서술하였는데, 요점이 말의 뜻을 전달하고 문장을 이루는 데에 있고, 애초에 공허함에 의지하여 밖으로 내달리거나 높이 부르짖어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모습이 없었다. 맑은 음향과 뛰어난 흥취는 초연한 체재(體裁)가 있었으며, 정밀하고 합당하며 안온하고 진실함은 주(周)나라 시대 시인의 뜻을 잃지 않은 점이 있었다.만년이 되어서는 금마산(金馬山)과 우성(紆城)77) 사이에서 떠돌며 머물렀는데, 뜻을 말한 작품이 더욱더 깊고 간절하여 두공부(杜工部)78)가 기주(虁州)79)에서 지었던 시와 비슷한 점이 있었으니, 빼앗긴 나라[山河]에 대한 한스러움과 고향[桑梓]에 대한 그리움이 또 어찌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있겠는가. 총괄하면 일가를 이룬 시학(詩學)이라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이 《만당시고》를 보는 자들이 세속의 선비들과 같은 견해를 없애고, 또 공의 시를 배우기를 바라니, 산문을 짓는 방법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얻게 될 것이다.공의 이름은 희현(熺鉉)이고, 자는 정오(定五)며, 광산(光山)의 세가(世家)이니, 올해 춘추가 73세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대쪽 같아서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엄격하였고, 행실을 제재하는 것이 돈독하였으니, 이 또한 세속의 유자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詩之與文, 體雖不同, 其辭達章成則一, 詩乃有韻之文, 文乃無韻之詩. 是故風、雅、頌之三百十一、四代書之五十有八, 俱爲正經, 周、孔著《易》, 詩文幷用. 柰之何世之儒, 軒輊其間, 纔見人詩集, 不問精粗得失, 輒以其無文而輕之? 詩而可輕, 股肱喜哉元首起哉之歌, 奚始於大舜, 無偏無黨王道蕩蕩之句, 豈登於〈洪範〉乎? 我外從兄晩棠 金公, 素抱奇才, 於功令長于詩, 旣不遇於有司, 世道且交喪, 無可爲, 歸而隱居求志. 志之所存, 行之所歷, 一於詩發之, 遂成專門. 今所刪編詩稿一部是已. 其爲詩也, 因境記事, 隨感敍情, 要在達辭成章, 初無憑虛騖外高叫驚聽之態, 而淸響逸致, 有超然之體裁, 精當穩實, 有不失周代詩人之旨者. 晩而流寓於金馬 紆城之間, 則言志之作, 益復深切, 有似乎杜工部 虁州之工. 山河之恨, 桑梓之思, 又豈有古今之異也? 總之謂成家之詩學可焉. 吾願覽是稿者, 其無若世儒之見, 且學公之詩焉, 則作文之法, 亦不外此而得之矣. 公名熺鉉, 字定五, 光山世家, 今春秋七十有三. 性淸簡, 律己嚴, 制行敦, 此又非世儒所及也. 풍(風)ㆍ아(雅ㆍ송(頌)의 …… 58편 풍ㆍ아ㆍ송의 311편은 《시경》을 가리키고, 4대의 글 58편은 《서경》을 가리킨다. 《시경》은 공자가 주(周)나라 시대의 시가 3,000여 편 중에서 311편을 간추려 편찬한 것으로, 이 중 6편은 제목만 전해진다. 풍은 《시경》의 〈국풍(國風)〉을 말하는 것으로 주(周)나라 때 지방(地方)의 민요(民謠)이고, 아는 〈대아(大雅)〉ㆍ〈소아(小雅)〉를 말하는 것으로 조정에서 사용한 아악(雅樂)이며, 송은 〈주송(周頌)〉ㆍ〈상송(商頌)〉ㆍ〈노송(魯頌)〉을 말하는 것으로 선조의 공덕을 찬양한 종묘악(宗廟樂)이다. 《서경》은 우(虞)ㆍ하(夏)ㆍ상(商)ㆍ주(周) 4대의 정치를 기록한 것으로 모두 5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팔다리와 …… 흥기된다 순 임금이 고요(皐陶)에게 노래한 것으로 《서경》 〈익직(益稷)〉에 보인다. 만당(晩棠) 김공(金公) 근세 유학자 김희현(金熺鉉, 1872~1951)으로, 만당은 그의 호이고, 자는 정오(定五)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금마산(金馬山)과 우성(紆城) 금마산은 익산시 금마면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 해발은 100m 정도 이다. 우성은 미상이다. 두공부(杜工部) 당나라 때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을 지낸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를 가리킨다. 기주(虁州)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으로, 두보가 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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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 서문 【무인년(1938)】 門案序 【戊寅】 나라 안의 각 성(姓)의 집안에서 문중(門中)의 종족(宗族) 성명을 나열해 써서 작성한 기록을 '문안(門案)'이라 하는데, 이것이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모르고, 또한 그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다가 일찍이 우리 김씨(金氏) 종중(宗中)에서 소장하고 있던 200년 전 문안을 본 뒤에야 본조(本朝) 중엽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서식의 예를 보니, 단지 관례(冠禮)를 치른 사람만 기록하되 책의 지면에 하지 않고 별지에 써서 나열해 붙였고, 서족(庶族)은 한 격(格)을 내려 써서 붙였다. 그런 뒤에야 또 별지에 써서 붙인 것은 잘못이 있으면 이름을 쓴 별지를 뜯어 없애고, 잘못을 고치면 다시 붙여 남겨두기 위해서이고, 격을 내려서 쓴 것은 명분을 정하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 뜻이 훌륭하고, 그 법이 엄격하였으며, 당시 각 집안마다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그런데 그 뒤로 법이 점점 옛날 같지 않게 되면서 책의 지면에 직접 쓰고, 또 격을 내리지도 않았으니, 이미 잘못을 경계하여 바로잡거나 명분을 정하는 뜻을 잃어버렸다. 또 그 뒤로 관례를 치르지 않은 어린 아이까지 써서 숫자를 헤아리고 거주지를 기록하는 장부로 인식하였으니, 그 명칭만 있고 그 실상이 없어졌으며, 온 세상이 휩쓸리다시피 모두 그러하였다.지금 우리 김씨 일족은 수가 더욱 많아지고 거주지가 더욱 흩어진데다 상전벽해처럼 세상이 크게 변한 나머지 힘이 약해지고 시세에 구속되어 족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으니, 차라리 수를 헤아리고 거주지를 기록하는 예를 따라 분파조(分派祖) 직장공(直長公) 이하의 자손들을 합해 기록해서 하나의 문안을 만들어 문중에 보관하고, 또 여러 종족의 청을 들어 각기 한 부씩 베껴서 이를 살펴보고 기억하거나 생각하고 왕래하여 길 가는 사람이 되는 데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만 못한 것도 또한 시세가 그러해서이다.또한 명칭은 실상의 손님이니, 손님이 있다면 이에 주인이 없을 수 없는 것도 또한 이치이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곡삭(告朔)의 양(羊)을 없애지 않았고, 주자(朱子)는 양을 바치는 관습이 남아 있으면 '곡삭'이란 명칭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 실상이 이름으로 인하여 거행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85),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마음이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인륜이 없어짐에 따라 기강이 무너지고 명분이 문란해지면서 모든 백성들의 덕은 얇아지고 과실은 쌓여가니 매우 한심스럽다.이 문안에 들어간 사람은 그 명칭이 아직 존재함으로 인해서 그 실상을 생각하고 서식의 예 밖에서 반드시 종사함이 있다면 한 집안 내에서 인륜이 밝아지고 명분이 정해져서 온 세상으로 미루어 미쳐갈 수 있을 것이다. 전 시대 사람들이 문안을 만든 본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공효가 족보를 만든 것에 뒤지지 않을 것이고, 소씨(蘇氏)의 말처럼 효제(孝悌)의 마음이 생겨날 것이니86), 어찌 서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나의 이러한 마음도 또한 공자와 주자에게서 받은 것이다. 國中各姓之家, 列書門中宗族姓名, 以成案者, 曰門案. 此不知昉於何代, 亦不知其義意何在, 及嘗奉閱吾金宗中所藏二百年前門案, 然後知其自本朝中葉已有之矣. 見其書例, 只錄冠者, 不于卷面, 而別書列粘, 庶族則降一格書粘. 然後又以知別粘者, 所以備有過撤名, 改之還存也, 降書者, 所以定名分也. 其意善矣, 其法嚴矣, 當時各家, 莫不皆然. 其後法漸不古, 直書卷面, 又不降格, 則已失規過定分之意矣. 又其後幷書未冠弱稚, 而認作計數記居之簿, 則有其名, 無其實, 而擧世滔滔焉. 今吾金之族, 數益繁而居益散, 滄桑之餘, 力綿時拘, 譜未易就, 無寧從計數記居之例, 合錄分派祖直長公以下之孫, 爲一案, 而藏之門中, 又聽諸族, 各寫一件, 庶得考閱記識, 思念過從, 不至爲路人之歸, 亦時勢然爾. 且也名爲實賓. 旣有賓矣, 則斯不能無主, 亦理也. 是故孔子不去告朔之羊, 而朱子謂羊存, 則告朔之名不泯, 而其實因可擧. 此聖賢之心也. 世降倫喪, 綱頹分紊, 凡厥民生, 德薄而過積, 甚可寒心. 入是案者, 因其名之猶存, 而思其實於書例之外, 而必有事焉, 則將倫明分定於一門之內, 而推及於擧世矣. 前人成案之本意, 卽在乎是. 而其效有不讓於作譜, 而生孝悌心, 如蘇氏言者矣, 盍相與勖之? 噫, 吾之此心, 亦有所收於孔、朱云爾. 공자(孔子)는 …… 않았으니 《논어집주(論語集註)》 〈팔일(八佾)〉》에 의하면 주(周)나라 때에 천자가 제후에게 월삭(月朔 달력)을 반포(頒布)하면 제후는 이것을 조상의 사당에 보관하였다가 매월 초하루에 희생(犧牲)으로 쓰는 양(羊)을 사당에 바쳐서 초하루가 되었음을 고하는 것을 곡삭(告朔)이라고 한다. 노(魯)나라는 문공(文公) 때부터 이 곡삭의 예를 거행하지 않고, 단지 양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만 남아있었는데, 자공(子貢)이 실제적인 예를 행하지 않고 관습적으로 양만 죽이는 것을 의미 없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관습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孔子)는 "너는 그 양이 아까우냐? 나는 그 예가 아깝다.〔賜也, 爾愛其羊? 我愛其라禮.〕"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한 주자의 말은 양씨(楊氏)의 말을 인용한 주석에 보인다. 소씨(蘇氏)의 …… 것이니 소씨는 북송(北宋)의 문인 소순(蘇洵)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그가 지은 〈족보서(族譜序)〉에 "아, 우리 족보를 보는 자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嗚呼, 觀吾之族譜者, 孝悌之心, 可以油然而生矣.〕"라는 구절이 보인다. 《古文眞寶 後集 族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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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재유고》 중간 서문 【갑오년(1954)】 《無名齋遺稿》重刊序 【甲午】 나는 늘 세상 사람들이 문장으로 사람을 취하면서 그 사람이 이룩한 대체가 어떠한지를 궁구하지 않는 것을 병폐로 여겼으니, 아, 문사(文詞)는 사람에게 있어 지엽적인 것이다. 고금을 두루 살펴보건대, 책을 이룰 정도로 많은 문사가 있다고 해서 정인 군자(正人君子)가 된 사람이 한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문사가 많고 식견이 넓으면서도 간사한 소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한 사람이 또한 많았으니, 여기에서 취하고 버릴 바를 알 수 있다.무명재(無名齋) 강공(康公)87)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에 두루 올랐으며,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ㆍ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ㆍ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ㆍ매계(梅溪 조위(曺偉)) 등 여러 현인들과 함께 지조와 기개가 서로 맞았으며, 도덕이 함께 아름다웠으니, 참으로 문충공(文忠公) 필재(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의 택상(宅相 생질(甥姪))이자 고제(高弟)였다. 선생이 준 시에 이르기를, "자신을 낳아준 우리 집안에 참으로 욕됨이 없고, 나라의 빈객이 되어 바로 빛남이 있구나.[吾家自出眞無忝, 王國賓興正有輝.]"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사문의 기대가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연산군(燕山君) 무오사화 때에 여러 현인들과 함께 귀양을 갔다가 갑자년(1504)의 거듭된 사화에 여러 현인들과 함께 죽었으니, 공이 수립한 것이 어찌 광명정대하여 천고토록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한 첫 해에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니, 조정에서 기리고 숭상함이 컸고, 시호(諡號)와 철향(腏享 배향(配享))을 청하는 상소가 시대를 달리하며 여러 차례 나왔으니, 후학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문장(文章)의 경우에는 공에게 나머지 일에 속한 것이라 있든 없든 본래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하물며 사화로 갇혀 지낸 나머지 겨우 남아 있는 몇 편만으로도 오히려 온 솥의 맛88)을 증험할 수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공이 지닌 기개와 절조를 끊임없이 더욱 귀중하게 여겼기에 이미 인릉(仁陵 순조(純祖)) 갑신년(1824)에 간행하였고, 오늘날에 다시 간행하게 된 것이다.총괄하면 공이 평생 이룩한 대체는 이미 당시에 바른 도를 얻어 완전히 어질고 바른 군자다운 사람이었으니, 비록 명성과 지위에 다름이 있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알려지지 않는 것이 같지 않더라도 여러 현인들과 일체가 되어 덕이 같다고 이를 수 있음이 분명하니, 어찌 크게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후손 상원(祥源)과 용주(庸柱)가 나에게 서문을 청할 때에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않고 드러내 밝혀서 우러러 흠모하는 뜻을 붙이고 거듭 취하고 버리는 것에 어두운 세상 사람에게 고하였다. 余嘗病夫世之取人以文, 而不究大致之如何. 噫, 文詞之於人末也. 歷觀今古, 未聞有成書而爲正人君子者何限, 多文博識而未免奸宵者亦多, 則斯可以知所取舍矣. 無名齋 康公, 早捷巍科, 歷敭淸顯, 與寒暄、一蠹、濯纓、梅溪諸賢, 志槩之相須, 道德之幷美, 則實文忠公 畢齋 金先生之宅相高弟也. 先生贈詩有曰: "吾家自出眞無忝, 王國賓興正有輝. " 此可以見師門期待之重矣. 逮夫燕山戊午之禍, 與諸賢同配, 甲子再禍, 與諸賢同死, 則公之樹立, 豈不磊落光明, 足以有辭千古乎? 改玉之初, 特蒙諫長之贈, 則朝家之褒尙大矣, 請諡腏享之疏, 累發於異世, 則後學之尊慕切矣. 至於文章, 屬公餘事, 則元無損益於有無, 而况禍錮餘幾篇之僅存, 猶足以證夫全鼎之味者乎? 惟其有氣節, 尤貴重之不已, 旣刊於仁陵甲申, 而重刊於今日者也. 總之公生平大致, 旣得正乎當日, 而完爲賢正君子人, 則雖名位有殊, 顯晦不同, 未可謂非一體同德於諸賢也審矣, 烏可不大書之乎? 故於後孫祥源、庸柱之請余弁文也, 不以衰病辭而表章之, 以寓景仰之意, 重以告世之昧於取舍者. 무명재(無名齋) 강공(康公) 조선전기의 문신 강백진(康伯珍, ?~1504)으로, 무명재는 그의 호이고, 자는 자온(子韞)이며,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시호는 효량(孝良)이다. 온 솥의 맛 훌륭한 문장은 다 전하지 않고 일부만 전하는 것으로도 그 전체를 알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로,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고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안다.〔嘗一臠肉, 而知一鑊之味.〕"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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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동유고》의 서문 【을해년(1935)】 《果東遺稿》序 【乙亥】 공자(孔子)께서는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탄식하며 무왕(武王)의 십란(十亂)을 이에 해당시켰고89),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없다고 탄식하며 자기와 안연(顔淵)을 이에 해당시켰으니90), 대저 성현의 재주와 학문을 좋아함은 얻기 어려운 것이 진실하다. 그런데 원기(元氣)가 날로 엷어지고 인재가 날로 쇠퇴하였으니, 나는 내심 세상의 선비 중에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도 또한 많이 얻기 어려움을 한탄하였다. 시험 삼아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들어 해당시킨다면 죽은 벗 과동(果東) 최군(崔君)이라 할 수 있겠다.처음 군이 나를 찾아와서 《시경》을 읽을 적에 매일 한 권을 과제로 삼고서 통틀어 열 달도 되지 않아 전질(全帙)을 다 마쳤고, 자서(子書)와 사서(史書)를 두루 읽을 적에는 눈이 지나가면 곧 기억하였으며, 또 도를 구하는 데에 뜻을 두어 침식을 잊은 채 분발하였다. 이에 내가 마음에 절로 탄복하며 말하기를,"오늘날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재주를 얻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앞날에 성취할 바를 자못 헤아릴 수 없구나. 비록 나아가 성현의 재주와 학문에 이르기를 구하더라도 또한 이상할 것이 없겠구나."하였다. 그런데 조물주가 재능을 시기하고 운명이 뜻과 어긋나서 19세에 기이한 병에 걸려 19년을 살다 죽을 줄을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아, 애석하다.죽기 3년 전 병세가 조금 좋아졌을 때에 내가 군을 들것에 실어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간옹 선생(艮翁先生 전우(田愚))을 뵙자, 선생께서 그를 매우 가상하게 여겨 《관선록(觀善錄)》91)에 이름을 쓰게 하고 권면하셨다. 그러나 이듬해에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군도 또한 얼마 뒤에 고인이 되어 전수 받은 가르침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슬프다.지금 이 유고 한 책은 젊은 날의 과정(課程)과 중년에 병으로 신음한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으로 지닌 바의 재주와 학문을 살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을 엮어서 굳이 남들에게 볼일 필요가 없겠지만 이것을 엮은 것은 집안의 대를 이은 아들의 효성과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아, 싹이 나고도 꽃이 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꽃은 피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선성(先聖)께서 탄식하셨는데92), 군이 이른 경지를 말하면 아마도 싹이 나고 꽃이 피는 사이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속담에 이르기를, "싹이 크게 나온 것을 보면 열매가 견실할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이 유고가 지닌 바의 학문을 살펴보기에 부족하다고 하여 군의 재주와 뜻까지 아울러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열매를 보지 않고서는 일찍이 싹이 컸음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말을 아는 자가 아닐 것이다.군이 옛적에 오래도록 나를 공경하여 내가 말한 것을 반드시 믿었고,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성대한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으니, 나 또한 군을 위해 3개월 동안 가마(加麻 관(冠) 위에 삼베를 두르는 일)를 하였고, 장사를 지내고 연제(練祭 사람이 죽은 지 한 돌 만에 지내는 제사)를 지냈으며, 연제를 지내고 대상(大祥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을 지내면서 상생(象生)93)에서 눈물이 강물을 쏟듯 흘러내렸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또한 오직 "공의 잘못된 믿음은 아마 학문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일에서 나왔을 것이고, 내가 매우 애통해하는 것은 실로 인재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뿐이다.이 책을 어루만지며 책머리에 느낀 점을 쓰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의 이름은 장렬(長烈)이고, 자는 성무(性武)이니, 전주(全州) 사람이다. 孔子歎才難而以武王十亂當之, 歎未見好學而以己與顔淵當之. 夫聖賢之才與好學, 難得固也. 元氣日漓, 人材日衰. 余則竊歎夫世之士子才且好學, 亦難多得矣. 試擧余所知而當之, 則惟亡友果東 崔君可焉. 始君來余讀詩經也, 日課一卷, 而通不旬月, 畢全帙, 博觀子史, 過目輒記, 而又志在求道, 憤悱忘寢食. 余心自折服曰: "今世安得有似此才? 誠前頭所就, 殆未可量, 雖進而求, 至于聖賢之才學, 亦不異矣. " 夫孰知造物猜材, 命與志違, 年十九而嬰奇疴, 而歷十九年而亡也? 嗚呼惜哉. 亡前三年病稍可, 余爲君舁至海上, 謁艮翁先生. 先生甚嘉之, 書名《觀善》而勖之. 然翌年先生沒, 君亦尋故, 無足以發所受者, 更可悲也. 今此遺稿一編, 出於少日課程、中年呻囈之餘者, 未可以此而觀所存. 亦不必輯爲人觀, 然輯焉者, 其嗣子孝思也. 噫, 苗而不秀, 秀而不實, 先聖有歎, 論君所至, 其在苗秀之間歟. 雖然, 諺有曰. 見苗之碩, 而知其實堅. 如以是編之不足觀所存, 幷不惜君之才志, 則是猶不見其實, 而曾不知其苗之碩, 非知言者也. 君昔久而敬, 余所言必信, 見訪必具盛饌以饋之. 余亦爲君加麻三月, 葬而練, 練而祥, 淚傾河於象生, 是曷故焉? 亦惟曰: "君之誤信, 蓋出好學一端. 余之深慟, 實以才誠難得爾. " 摩挲是編, 爲書所感于卷首, 覽斯文者, 必有知余心也. 君名長烈, 字性武, 全州人. 공자(孔子)는 …… 해당시켰고 난(亂)은 치(治)의 뜻으로, 십란은 주나라 무왕(武王)을 보필하던 10인의 신하, 즉 주공 단(周公旦)ㆍ소공 석(召公奭)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閎夭)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宮适)ㆍ문모(文母)를 말하는데, 《논어》 〈태백(泰伯)〉에서 "무왕(武王)이 말하기를 '나는 다스리는 신하 열 명이 있도다.' 하였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인재를 얻기 어려움이 그러하지 않은가. 당우(唐虞)의 시대나 되어야 이보다 많을 뿐이니, 부인이 있어 아홉 명뿐이로다.' 하였다.〔武王曰: '予有亂臣十人.' 孔子曰; '才難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라고 하여 공자는 문모를 무왕의 후비 읍강(邑姜)으로 보았다.  《書經 泰誓中》 학문을 …… 해당시켰으니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10실의 작은 고을에도  나처럼 충신한 사람은 반드시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하였고 《논어》 〈옹야(雍也)〉에서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인지 묻는 애공(哀公)의 질문에 공자가 답하기를,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한다는 자를 듣지 못하였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라고 하였다. 관선록(觀善錄)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제자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싹이 …… 탄식하셨는데 《논어》 〈자한(子罕)〉에 "싹이 나고도 꽃이 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꽃은 피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라는 구절이 보인다. 상생(象生) 궤연(几筵)을 말하는 것으로, 살았을 때와 똑같이 자손들이 받든다는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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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유고》의 서문 【을해년(1935)】 《蘭溪遺稿》序 【乙亥】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치의(緇衣)〉94)의 노래처럼 현인을 좋아하라."하였고,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서 한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95)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옛적 우리 간옹 선사(艮翁先師 전우(田愚))께서 바닷가 섬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나의 벗 난계(蘭溪) 손두선(孫斗宣)은 사는 곳이 매우 가까웠고, 사모하는 마음이 매우 깊었다. 시절마다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부터 한결같이 공급에 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치의〉의 시인이 옷을 지어 바치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어서 또 두 아들을 보내어 스승으로 섬기게 하면서 자신도 또한 가르침을 받들고 취하여 법으로 삼았다. 이러한즉, 마음으로 기뻐하고 복종한 것이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마음으로 기뻐하며 복종했던 것보다 못하지 않았다96).스승이 돌아가신 뒤에는 스승을 무함하고 원고(原稿)를 고친 자들과 의절하였고, 어지럽혀진 원본을 고증하고 변별하는 일을 행하였다. 이는 또 정도(正道)를 보호하고 사도(邪道)를 물리치는 데에 공이 있는 것으로, 당시 순일하게 스승으로 섬긴 자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대체로 그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대소(大小)와 시종(始終)이 진실하고 또한 갖추어져 있었으며, 이미 또 날마다 경전(經傳)을 가까이 하여 몸과 마음을 닦는 바탕으로 삼았으니, 자하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그가 배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 유고(遺稿) 한 부는 평소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학문을 했던 것의 대개이니, 만약 일을 줄이고 안으로 향하여 자신을 살피고 사욕을 극복하는 공부를 정밀하게 연구하면서 오래도록 장수하였다면 성취한 것이 어찌 다만 유고에 이미 드러난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대체로 뜻이 있었지만, 운명이 함께 도모해 주지 않아서 겨우 마흔 살[强仕]을 넘자마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아, 서글프다.옛적에 난계(蘭溪)가 오랫동안 나를 공경하여 서로 만날 때마다 번번이 배움을 구하는 말이 있었는데, 비록 감히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뜻만은 생각할 만하였으니, 지금 그의 아들 주택(周澤)이 서문을 청하는 것을 어찌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어루만지니, 마치 계화도(繼華島)와 관호(寬湖) 사이에서 그의 얼굴과 풍모를 대하며 부지런히 강학하고 토론하는 것처럼 의연하였다. 만약 오늘날에 살아 있었다면 여전히 삿됨과 바름, 옳음과 그름 사이에서 바른 의론을 더욱 견지하였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니, 탄식과 처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써서 돌려보내었다. 《記》曰: "好賢如〈緇衣〉. " 子夏曰: "賢賢易色,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 人之好賢, 豈不難哉? 昔我艮翁先師之入海也, 余友孫蘭溪 斗宣, 居之密邇, 慕之最深, 自時節候問, 以至於一應供給, 靡不用極, 不啻如詩人之造衣授餐已矣. 繼又遣二子師事, 身亦承敎而取法焉. 是則中心悅服, 不下七十子之於孔子. 至於山頹之後, 絶陷師改稿之人, 設亂本考辨之役. 此又功存衛闢, 有非當日純師之者所能及. 蓋其好賢之大小始終, 誠且備矣. 旣又日親經傳, 用資身心, 則不待子夏之言而知其有學矣. 惟此遺稿一部, 平日好賢爲學之槪梗槪槩也. 如得省事向裏, 硏精省克, 久以年歲, 則其所成就, 豈但如稿之已見者? 蓋有志焉, 而命不與謀, 纔踰强仕, 遽失其年, 嗚呼悲夫. 昔蘭溪久而敬余, 每相見輒有求益語. 雖不敢當, 其意可念. 今於其子周澤玄晏之請, 何忍辭諸? 摩挲是編, 依然如對顔範於華島、寬湖之間, 而亹亹講討也. 如使今日而在者, 尙當益持正論於邪正是非之間, 而惜乎其未也. 不勝歎息悽愴, 書此而歸之. 치의(緇衣) 《시경》의 편명으로, 현사(賢士)를 예우하는 내용이다. 어진 …… 이르겠다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마음으로 …… 않았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는 말이 보이고, 또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제자가 대개 삼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서 육예를 몸으로 통달한 사람이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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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풍칠노회록》의 서문 【기축년(1949)】 《扶風七老會錄》序 【己丑】 부풍(扶風 부안(扶安))은 우리 나리의 명승지이니, 봉래산(蓬萊山 변산(邊山))이 성대하게 높이 솟아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바다와 산에 모인 신령한 기운이 어진 사대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어떤 이는 문장과 덕행이 출중하였고, 어떤 이는 지조와 기개가 맑고 높았으며, 어떤 이는 풍류가 드넓고 컸다. 어진 덕에 대한 보답으로 모두 장수하고 강녕하며 한적한 복을 누렸고, 이따금 푸른 바다와 파란 산마루 사이에서 글을 짓고 술을 마시는 모임[文酒會]을 결성하였으니, 세상 밖에서 마음을 씻고 인하여 성명을 나열한 일을 전하여 고사(故事)로 삼았다. 숙종(肅宗) 갑신년(1680)의 봉산구로회(蓬山九老會)와 순조(純祖) 경인년(1830)의 부풍칠갑록(扶風七甲錄)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이는 모두 당(唐)나라의 향사(香社)97)와 송(宋)나라 기영(耆英)98)을 사모하고 숭상하여 그 사람들과 나란히 할 것을 생각한 것이니, 또한 훌륭한 일이었다. 그런데 경인년 이후로 재주갑(再周甲 120년)이 되기 2년 전인 무자년(1948)에 부풍의 인사들이 칠갑(七甲)의 모임을 이어 결성하였으니, 어찌하여 훌륭한 일이 이렇게 많은 것인가? 이 고을이 명승지임이 진실하다.칠순의 일곱 노인이 7월 7일에 내소사(來蘇寺)의 칠성각(七星閣)에서 노닐었으니, 기이하게도 여러 7을 총괄하여 수합하면 한결같이 경인년에 했던 것과 같다. 대체로 7은 희역(羲易)에서 소양(少陽)의 수이니, 노인인데다 또 노양(老陽)의 수 9를 사용하는 것이 어찌 소양의 수 7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전후 칠갑의 모임에서 9를 7로 바꾼 뜻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다만 뒤에 있었던 칠갑의 모임이 앞에 있었던 칠갑의 모임에 비해서 그 지위나 명망의 높고 낮음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풍조가 더욱 넘쳐나는 오늘날을 돌아보건대 옛날의 풍속과 관계된 것들을 대략이나마 볼 수 없는 이러한 때에 제공은 오히려 글로 벗을 모을 수 있었고, 자제와 조카들은 깊은 산 속에서 명승지를 유람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마련하여 각기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는 정성을 다할 수 있었으니, 경박한 풍속을 순박한 풍속으로 되돌리는 데에 함께 도움이 있는 것이 숙종과 순조의 밝은 세상에 비해서 더욱 귀하게 여길 만하였다. 나는 그런 까닭에 이를 듣고 부럽게 여기며 그 청을 사양하지 않고 회록(會錄)의 첫머리에 서문을 적었다. 扶風左海名區, 蓬萊之山蔚然而秀, 環三面以大洋之水. 海、山之鍾靈, 多出賢士大夫. 或文行出類, 或志氣淸高, 或風流弘長. 仁德所報, 擧享壽康閒適之福, 往往結文酒會於綠泓翠崢之間. 旣以洗心物外, 因列名姓, 傳爲故事. 若肅宗甲申之蓬山九老會、純祖庚寅之《扶風七甲錄》是也. 是皆慕尙乎唐之香社、宋之耆英, 而思齊其人, 則亦善物也. 庚寅後再周甲前二年戊子, 扶之人士續成七甲之會, 是何勝事之多也? 信乎玆鄕之爲名區矣. 七耋七人, 以七月七日, 遊蘇寺之七星閣. 總收衆七之奇, 一如庚寅之爲者. 蓋七者, 羲易少陽之數, 與其老而又用老陽九數, 曷若用七少陽數之爲可貴也? 前後七甲, 變九爲七之意, 其或在此歟. 但未知後甲之於前甲其位望之高下如何, 而顧今新潮愈漲, 凡係古俗, 畧不可見于斯時也. 諸公猶能以文會友. 子姪能辦濟勝之具於萬山之中, 各盡老老之誠. 其與有助於回漓作淳, 視肅、純晟世, 尤可貴也. 余故聞而艶之, 不辭其請而序于會錄之首. 향사(香社) 당(唐)나라 때에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향산(香山)의 승려 여만(如滿)과 함께 결성한 향화사(香火社)의 모임을 말하는 것으로, 백거이는 이때에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자칭하였으며, 또 다른 여덟 원로(元老)들과 구로회(九老會)를 결성하여 매양 서로 왕래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기영(耆英) 송나라 원풍 5년(1082, 문종36)에 문언박(文彦博)이 백거이의 구로회(九老會)를 본받아 낙양(洛陽)에서 연로하고 덕망 높은 인사들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베풀어 서로 즐겼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 또는 낙사기영회(洛社耆英會)를 말한다. 《宋史 卷313 文彦博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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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에게 보냄 정축년(1937) 與金 丁丑 당신의 조부 병암선생(김준영)의 유집 인쇄는 이제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어느 날 쯤 일이 끝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볼 때, 선생의 도덕과 학문은 이미 간옹선사(전우)가 노인오(노동원)에게 답한 편지에 논정한 바가 있는데, '위로 전옹을 계승했다'는 말이 있으니, 진실로 여타의 사람들이 감히 군더더기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제가 기꺼이 복종한 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 그 정도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진주에서 인쇄한 스승의 원고에 노인오에게 답한 편지가 삭제되었으니, 마음속으로 간절히 그들의 마음씀씀이가 착하지 않음을 한탄하고 애석해하였습니다. 근래에 다시 선사의 〈눈 내리는 군산에서 김덕경을 추억하다[羣山雪中憶金德卿]〉80)라는 시를 읽어 보니, "장차 후사를 누구에게 의탁하여 맡길 것인가, 누가 귀신도 정말 알기 어렵다고 말하겠는가마는, 하루아침에 뜻을 품고 황천으로 들어갔구나. 옛날에 들으니 노숙한 선승(禪僧)이 자신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을까 한밤중에 울었다고 하니81), 늙은 나 홀로 서서 마음속으로 슬퍼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노인오에게 답한 편지에서 '크게 애통해하며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한 말과 같습니다. 말로 부족하여 편지에다 썼고 편지에 표현하는 것도 부족하여 시로 읊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선사의 애통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저는 더욱더 간절히 노인오에게 보낸 답장을 뺀 것에 대해 개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겨울에 문하생이 된 자와 외손 되는 사람이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거나 괴상하게 여기는 말도 없고 낯빛도 없었으니, 국량이 커서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이른바 '자손의 입장에서 어찌 애통해하고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라는 말이 성정의 바름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씀씀이는 이치와 사심의 구분이 있어서 동일하게 애통하고 한스러운 일이라도 단지 일신의 무함이나 비난에 관련된 일이면 굳이 애통해하거나 한스러워 할 필요가 없지만, 부사(父師)의 손상과 폄훼에 관련된 일이면 애통과 한스러움이 없을 수 없으니, 이런 뜻은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사가 군산에서 쓴 시는, 잘 모르겠으나 당신은 보았습니까? 이를 외워 고하고 아울러 소회를 언급했습니다. 先王考炳菴先生集印役, 今至何境? 當以何時了畢? 竊念先生之德學, 既有艮翁先師答廬仁吾書之所論定, 而有上續全翁之語, 則固非餘人之所敢贅陳.惟是澤述之悅服, 亦非餘人之可比倫.所以晉印師稿, 盧書之見刪也, 心切慨惋於其用心之不美矣.近又得先師《羣山雪中憶金德卿》詩, "擬將後事相託任, 孰謂鬼神實難知.一朝齎志入黃壞, 昔聞禪宿中夜泣, 老我獨立心恫僘"之句, 正與答盧書同一慟喪予之語.言之不足, 而發於書疏, 書疏不足, 而發於詠歎者有如是, 先師之慟如是也, 故吾所以益切慨惋於刪減盧書也.然而昨冬, 見爲門人與外孫者聞其語, 畧無驚怪之辭色, 是未知量弘而然歟.高明所謂在子孫, 豈無痛恨之心者, 爲得性情之正矣.夫人之用心, 有理私之分, 同一痛恨, 關一身之誣毀, 則不必有; 關父師之損貶, 則不可無, 此意不可不知也.先師羣山詩, 未知高明見否? 爲此誦告, 幷及所懷耳. 눈……추억하다 이 시는 현행 《간재집(艮齋集)》에는 없다. 옛날에……하니 "曾聞禪宿夜中泣, 忽見潭州城裏降. 性命綱常都錯亂, 何人大筆鼎能扛?" 《간재집(艮齋集)전편》 권17 〈우심(憂心)〉 '曾聞禪宿夜中泣'은 주희(朱熹)가 황직경(黃直卿)에게 답한 편지에 있는 '古之禪宿, 有慮其學之無傳, 而至於感泣流涕者, 不謂今日乃親見此境界也'를 원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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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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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4년 목수 조병정(曺秉淀)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戌舊十一月二十一日 趙秉淀 李氏門長 甲戌舊十一月二十一日 趙秉淀 李氏門長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4년 11월 21일에 목수 조병정(曺秉淀) 등이 상량(上樑)에 쓸 물품을 보내달라고 이씨문장(李氏門長)에게 청하는 간찰(簡札) 1934년 11월 21일에 목수 조병정(曺秉淀) 등이 상량(上樑)에 쓸 물품을 보내달라고 이씨문장(李氏門長)에게 청하는 간찰이다. 국한문혼용체이다. 제각(祭閣)의 상량(上樑) 때 귀 문중에서 사례(事例)로 준 건기(件記) 중 당목(唐木) 1필과 초대(草代) 1원을 진작 하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밤낮으로 매우 절실해 이에 고하니 선조를 위하는 물품을 내려주어 빈 당(堂)에서 먼저 밤마다의 수심을 풀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발신인은 목수들로서 조병정을 비롯하여 모두 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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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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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용동리 등 소재 토지의 추봉기(秋捧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戊午 藍石 戊午 藍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용동리 등 소재 토지의 추봉기(秋捧記)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용동리 등 소재 토지의 추봉기(秋捧記)이다. 시기별 추봉 기록이 섞여 있다. 토지 소재지와 면적, 작인(作人), 조(租)의 수량 등이 기재되어 있다. 토지 소재지는 용동리와 반석리, 장산리, 가정평 등이며, 작인은 김봉우, 이종신, 윤성운, 이처중 등이다. 또 시기별 식리(殖利)에 대한 기록도 있다. 각 면에는 크게 가위 표시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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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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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86년 이유원(李有源)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有源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有源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학생 이유원을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학생 이유원을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유원은 이기두의 부친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때 부친의 직역은 학생이었다가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학생은 유학(幼學)이 죽어서 사용하는 호칭이다. 가선대부는 문관의 품계로서 종2품의 하계(下階)이다. 이조참판은 이조에 속한 종2품의 벼슬이며, 의금부에 소속된 종2품의 관직인 동지의금부사직을 겸하였다. 가선대부 앞의 증(贈) 자는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릴 때 붙이는 글자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증직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아들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고(考)는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추증조에서 '종친 및 문무관으로 실직 2품 이상은 3대를 추증한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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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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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9년 선영준(宣永準)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同治八年正月十三日 宣永準 同治八年正月十三日 宣永準 전라남도 보성군 宣永準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9년 정월 13일에 선영준(宣永準)이 대송(大松)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1869년 정월 13일에 선영준(宣永準)이 대송(大松)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이다. 유래해 온 대밭을 여러 해 동안 집안에서 이용하다가 이사하게 되어 문전면 가천촌에 있는 논밭의 큰 소나무 1주를 전문 7냥에 영영 방매하면서 발급한 증서이다. 전주는 선영준이며 자필(自筆)하였다. 이름 아래에 수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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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11년 이지용(李志容)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亥九月十九日 李志容 可川李 辛亥九月十九日 李志容 可川李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9월 19일에 시하생 이지용이 객사에서 묵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고충을 전한 간찰 1911년 9월 19일에 시하생 이지용(李志容)이 객사에서 묵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고충을 말한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객사(客舍)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병으로 신음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미천한 몸으로 공의 문하에 어울리지 않지만 평소에 정성스럽게 보호해주는 것을 함부로 믿어서 백리도 멀다 하지 않고 왔는데, 진실로 한 푼도 취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이와 같을 수 없다. 이에 회정(回程)한 후에 어찌 만나서 토론할 때가 없겠느냐는 내용이다. 추기가 있는데 황향(黃香) 13매(枚)를 보낸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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