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동유고》의 서문 【을해년(1935)】 《果東遺稿》序 【乙亥】 공자(孔子)께서는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탄식하며 무왕(武王)의 십란(十亂)을 이에 해당시켰고89),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없다고 탄식하며 자기와 안연(顔淵)을 이에 해당시켰으니90), 대저 성현의 재주와 학문을 좋아함은 얻기 어려운 것이 진실하다. 그런데 원기(元氣)가 날로 엷어지고 인재가 날로 쇠퇴하였으니, 나는 내심 세상의 선비 중에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도 또한 많이 얻기 어려움을 한탄하였다. 시험 삼아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들어 해당시킨다면 죽은 벗 과동(果東) 최군(崔君)이라 할 수 있겠다.처음 군이 나를 찾아와서 《시경》을 읽을 적에 매일 한 권을 과제로 삼고서 통틀어 열 달도 되지 않아 전질(全帙)을 다 마쳤고, 자서(子書)와 사서(史書)를 두루 읽을 적에는 눈이 지나가면 곧 기억하였으며, 또 도를 구하는 데에 뜻을 두어 침식을 잊은 채 분발하였다. 이에 내가 마음에 절로 탄복하며 말하기를,"오늘날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재주를 얻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앞날에 성취할 바를 자못 헤아릴 수 없구나. 비록 나아가 성현의 재주와 학문에 이르기를 구하더라도 또한 이상할 것이 없겠구나."하였다. 그런데 조물주가 재능을 시기하고 운명이 뜻과 어긋나서 19세에 기이한 병에 걸려 19년을 살다 죽을 줄을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아, 애석하다.죽기 3년 전 병세가 조금 좋아졌을 때에 내가 군을 들것에 실어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간옹 선생(艮翁先生 전우(田愚))을 뵙자, 선생께서 그를 매우 가상하게 여겨 《관선록(觀善錄)》91)에 이름을 쓰게 하고 권면하셨다. 그러나 이듬해에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군도 또한 얼마 뒤에 고인이 되어 전수 받은 가르침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슬프다.지금 이 유고 한 책은 젊은 날의 과정(課程)과 중년에 병으로 신음한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으로 지닌 바의 재주와 학문을 살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을 엮어서 굳이 남들에게 볼일 필요가 없겠지만 이것을 엮은 것은 집안의 대를 이은 아들의 효성과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아, 싹이 나고도 꽃이 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꽃은 피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선성(先聖)께서 탄식하셨는데92), 군이 이른 경지를 말하면 아마도 싹이 나고 꽃이 피는 사이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속담에 이르기를, "싹이 크게 나온 것을 보면 열매가 견실할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이 유고가 지닌 바의 학문을 살펴보기에 부족하다고 하여 군의 재주와 뜻까지 아울러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열매를 보지 않고서는 일찍이 싹이 컸음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말을 아는 자가 아닐 것이다.군이 옛적에 오래도록 나를 공경하여 내가 말한 것을 반드시 믿었고,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성대한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으니, 나 또한 군을 위해 3개월 동안 가마(加麻 관(冠) 위에 삼베를 두르는 일)를 하였고, 장사를 지내고 연제(練祭 사람이 죽은 지 한 돌 만에 지내는 제사)를 지냈으며, 연제를 지내고 대상(大祥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을 지내면서 상생(象生)93)에서 눈물이 강물을 쏟듯 흘러내렸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또한 오직 "공의 잘못된 믿음은 아마 학문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일에서 나왔을 것이고, 내가 매우 애통해하는 것은 실로 인재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뿐이다.이 책을 어루만지며 책머리에 느낀 점을 쓰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의 이름은 장렬(長烈)이고, 자는 성무(性武)이니, 전주(全州) 사람이다. 孔子歎才難而以武王十亂當之, 歎未見好學而以己與顔淵當之. 夫聖賢之才與好學, 難得固也. 元氣日漓, 人材日衰. 余則竊歎夫世之士子才且好學, 亦難多得矣. 試擧余所知而當之, 則惟亡友果東 崔君可焉. 始君來余讀詩經也, 日課一卷, 而通不旬月, 畢全帙, 博觀子史, 過目輒記, 而又志在求道, 憤悱忘寢食. 余心自折服曰: "今世安得有似此才? 誠前頭所就, 殆未可量, 雖進而求, 至于聖賢之才學, 亦不異矣. " 夫孰知造物猜材, 命與志違, 年十九而嬰奇疴, 而歷十九年而亡也? 嗚呼惜哉. 亡前三年病稍可, 余爲君舁至海上, 謁艮翁先生. 先生甚嘉之, 書名《觀善》而勖之. 然翌年先生沒, 君亦尋故, 無足以發所受者, 更可悲也. 今此遺稿一編, 出於少日課程、中年呻囈之餘者, 未可以此而觀所存. 亦不必輯爲人觀, 然輯焉者, 其嗣子孝思也. 噫, 苗而不秀, 秀而不實, 先聖有歎, 論君所至, 其在苗秀之間歟. 雖然, 諺有曰. 見苗之碩, 而知其實堅. 如以是編之不足觀所存, 幷不惜君之才志, 則是猶不見其實, 而曾不知其苗之碩, 非知言者也. 君昔久而敬, 余所言必信, 見訪必具盛饌以饋之. 余亦爲君加麻三月, 葬而練, 練而祥, 淚傾河於象生, 是曷故焉? 亦惟曰: "君之誤信, 蓋出好學一端. 余之深慟, 實以才誠難得爾. " 摩挲是編, 爲書所感于卷首, 覽斯文者, 必有知余心也. 君名長烈, 字性武, 全州人. 공자(孔子)는 …… 해당시켰고 난(亂)은 치(治)의 뜻으로, 십란은 주나라 무왕(武王)을 보필하던 10인의 신하, 즉 주공 단(周公旦)ㆍ소공 석(召公奭)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閎夭)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宮适)ㆍ문모(文母)를 말하는데, 《논어》 〈태백(泰伯)〉에서 "무왕(武王)이 말하기를 '나는 다스리는 신하 열 명이 있도다.' 하였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인재를 얻기 어려움이 그러하지 않은가. 당우(唐虞)의 시대나 되어야 이보다 많을 뿐이니, 부인이 있어 아홉 명뿐이로다.' 하였다.〔武王曰: '予有亂臣十人.' 孔子曰; '才難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라고 하여 공자는 문모를 무왕의 후비 읍강(邑姜)으로 보았다. 《書經 泰誓中》 학문을 …… 해당시켰으니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10실의 작은 고을에도 나처럼 충신한 사람은 반드시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하였고 《논어》 〈옹야(雍也)〉에서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인지 묻는 애공(哀公)의 질문에 공자가 답하기를,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한다는 자를 듣지 못하였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라고 하였다. 관선록(觀善錄)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제자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싹이 …… 탄식하셨는데 《논어》 〈자한(子罕)〉에 "싹이 나고도 꽃이 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꽃은 피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라는 구절이 보인다. 상생(象生) 궤연(几筵)을 말하는 것으로, 살았을 때와 똑같이 자손들이 받든다는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