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정대부 중추부사 운파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通政大夫中樞府事雲坡金公墓碣銘【幷序】 우리나라는 과거로 사람을 취하는데 그러나 그 사람을 신중하게 발탁하고 또 중용한다. 장차 중용하려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발탁하지 않을 수 없고, 이미 신중하게 발탁하였기에 중용하지 않을 수 없다. 율곡 선생이 "비록 하늘을 통할 학문이 있고 남들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과거를 통한 이후에야 도를 행할 지위에 나아간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보면 국조 이래의 옛 일을 알 수 있다. 황감과(黃柑科)17)의 경우는 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한 번의 과거에 단 한 사람을 발탁하였는데 반드시 지식이 넓고 학문이 정수하며 정치의 계책이 다른 많은 선비들보다 뛰어난 연후에 취하였으니, 빈례(賓禮)로 다음 과거에 올려 보내는 예우의 절차18)가 매우 성대하였다. 대체로 이는 높은 명망에 걸맞게 정밀하게 인재를 선발한 것이다. 통정대부 중추부사 운파 김공 휘 운(氵運), 자 구이(久而)는 영조 을묘년(1775)에 전사마로 황감과에 합격하여 이름이 소장의 추천에 들어갔으니, 그의 문장과 경술이 당시에 뛰어난 것을 지금 상상할 수 있다.부녕 김씨는 계보가 신라 경순왕의 태자인 휘 일(鎰)에서 나왔으며, 고려 이부상서 휘 경수(景修)가 중시조이다. 그의 아들 휘 춘(春)은 부녕부원군으로 봉해졌다. 2대가 지나 휘 작신(作辛)은 부녕군에 연이어 봉해지니,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관향으로 삼았다. 휘 구(坵)는 문장과 도학이 한 시대의 으뜸으로 보문각태학사 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휘 여우(汝盂)는 문한학사로 시호는 충선이다. 원(元)에 들어가 성묘(聖廟)의 제도를 모사하여 아우인 승인(承印)에게 강릉에 서원을 만들게 하였다.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고려 말에 휘 광서(光敘)는 지고부군사를 지냈는데,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정(自靖)하였다. 본조에 들어와 휘 직손(直孫)은 한림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휘 석홍(錫弘)은 군수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지금까지가 공의 7대 이상이다.증조는 휘가 희수(希壽)로 선무랑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가 진창(震昌)이며, 부친의 휘는 세재(世載)이며, 모친은 남양 홍씨로 진사 석하(錫夏)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계유년(1693) 3월 9일 부안 월천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절륜한 재주를 지녀 능히 문장을 엮고 시를 지었으니, 당시에 신동이라 일컬어졌다. 장성하게 되자 스스로 경전을 가져다 읽으며 널리 배우고 밝게 분별하였다. 종숙(從叔) 양덕공이 벼슬을 하라고 권하였지만 따르지 않고 한묵(翰墨) 사이에서 유유자적하였다. 입을 열면 수천 마디의 말을 외웠고 붓을 들면 수만 마디의 말을 지었으니, 경향(京鄕)에서 모두 문원(文苑)의 대가라고 칭송하였다. 평양에서 유람할 때 지은 〈초운사(楚雲詞)〉는 노랫가락에 들어가서 지금도 전하고 있다. 공은 문장이 덕행과 경학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연마해서는 안 되는 것을 깨닫고서 오직 경(敬)을 유지하고 성(性)을 기르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한 시대의 명유들과 즐겨 사귀며 학문을 강마하여 갈고 닦아 아주 작은 것까지 분석하였으며 식견이 명확하여 사람들의 생각 너머까지 간파하였다.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 공과 건암(健菴) 김양택(金陽澤) 공은 항상 추켜올려 칭송하며 자신들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성리로 문답을 계속하였지만 그러나 벼슬아치들의 문에 급급하지 않은 채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뜻이 있었다. 화순(和順)한 자태는 덕의 빛이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가득하며 정대한 기운은 마음에 근본을 두고 말로 드러나니,19) 대개 그가 확충하여 양성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 그가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은 실로 제공들이 그와 함께 무리지어 나아가려고 하여 깊이 권하였기 때문이다.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경신년(1740)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에 이르러 그 슬픔이 극에 이르렀다. 널리 제가의 상례에 대해 논한 학설을 구하여 정선하고서 손수 베껴 《상례편람》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집안에 전하고 있다. 계해년(1743)에 상국 정우량(鄭羽良)과 상국 송인명(宋寅明)이 추천하여 동부주부로 승진하였으며 이조, 예조, 호조, 공조의 좌랑으로 옮겼다가 호조, 공조,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칠원, 연천, 지평, 대흥의 수령으로 나갔다.일찍이 "선비가 나아가 벼슬하는 것은 도를 위함이지 먹기 위함이 아니며, 임금을 위함이지 자신을 위함이 아니며, 나라를 위함이지 집안을 위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염치, 어짊, 공정함, 부지런함[廉仁公勤]' 네 글자를 좌우에 써서 걸어놓고 일에 임하여 공평하게 중심을 잡았다. 위로 대신(大臣)의 추향(趨向)을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았으며, 아래로 아전의 뜬소문에 미혹되어 그 마음을 흔들리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다스림이 치우치지 않아 일은 실제 이치에 부합하였으며, 아전이 간사한 행동을 할 수가 없어서 백성들이 실제 혜택을 받았으니, 다스림과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때 백성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였으며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다. 대개 관직에 있은 이후로 재물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은 것은 본성이 원래 맑고 검소하였으며 또한 가법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을해년(1755)에 조정에 들어와 사헌부 장령, 집의와 이조와 예조의 정랑이 되었다. 명석하고 영민하며 너그럽고 중후하여 동료들에게 성실하게 대하니, 묘당에서 서로 추천하여 장차 재상이 될 것이라는 명망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소장을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대신에게 요청하여 주연에서 7대조 옹천공의 일을 아뢰어 달라고 하여 이조참의에 추증을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미년(1763)에 임금이 특별히 통정대부 중추부사의 직함을 더하여 주었다. 경인년(1770) 11월 30일에 돌아가셔서 월천면 서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아내 숙부인 덕수 이씨는 선비 성(田成)의 따님으로, 동악 안눌(安訥)의 후손이다.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외아들 설(楔)은 진사이며, 딸은 전주 최파에게 시집갔다. 설의 아들 대회(大灰)는 문장으로 세상이 이름이 났다. 재회(再恢), 익회(益恢), 규회(奎恢), 제회(濟恢)는 모두 글을 잘 짓고 순수하며 조심스럽다. 파의 아들 희연(禧延)은 문과에 합격하여 지평을 지냈으며, 갑연(甲延)은 진사이다. 규회의 아들 봉효(鳳孝)는 진사인데,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오호라! 공은 경학을 단련하였고 문장이 넉넉하였으며 정치는 민첩하여 통달하였으니 나라의 재상에 오를 것으로 중망(衆望)을 받았는데, 소장을 올려 병을 고하면서 갑자기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이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남긴 글이 상자에 가득하여 은택을 베푼 도리와 치국평천하의 방법이 모두 이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가난한데다가 여러 차례 화재20)를 겪어서 잔편(殘編)으로 빠졌던 글들이 겨우 남아 별로 없으니 거듭 안타까운 일이다. 7대손 응봉(應鳳)이 이에 매우 애통해하며 좀먹고 타버린 나머지에서 수습하여 비로소 이백 년 뒤에 가장(家狀)을 완성하니, 아! 대단히 소략하도다.이 가장으로 나에게 비석으로 드러내 새길 글을 요청하였는데, 보잘 것 없는 내가 못나서 공의 바다와 같은 학문을 헤아리지 못하니 어찌 감히 공의 돌아가신 뒤의 큰일을 그르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간신히 가장을 만들었는데 지금 금석에 새기지 않는다면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손실되는 것이 더욱 많을까 두렵다. 그러므로 걱정을 함께 나누는 한 가문의 정의(情誼)로 보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명을 짓는다.선비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士之出仕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기 때문이지 爲國爲君녹봉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非爲祿食공은 한 마디로 말하였네 公之一言이치는 밝고 의리는 올바르니 理明義正하늘의 해나 달과 같도다 日月于天충분히 후대에 전할 만하여 自足傳後천만년 이어가리니 於千萬年공이 행한 다른 모든 업적을 凡厥事行어찌 묘갈로 드러낼 필요 있으랴 何待銘阡 我國以科擧取人, 然惟其人, 愼擢而又重用焉.將重用也, 故不得不愼擢 ; 旣愼擢矣, 不可不重用.栗谷先生曰 : "雖有通天之學, 絶人之行, 必由科擧而後進於行道之位." 觀此, 國朝以來之故事, 可知矣.至若黃柑之科, 則尢加愼焉.一番場圍, 只擢一人, 而必其識博學精, 政術治策, 獨冠多士, 然後取之, 賓興禮待之節, 甚盛, 蓋極選隆望也.通政大夫中樞府事雲坡金公諱[氵運]字久而, 英廟乙卯, 以前司馬登柑科, 名八章薦, 其文章經術, 卓冠當時, 今可想矣.扶寧金氏, 糸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 高麗吏部尙書諱景修, 爲中祖.子諱春, 封扶寧府院君.再傳而諱作辛, 襲封扶寧君, 子孫因以爲貫.有諱坵, 文章道學冠一世, 寶文閣太學士中書侍郞平章事, 謚文貞, 祠道東.諱汝盂, 文翰學士, 謚忠宣, 入元摹聖廟制度, 使弟承印創設於江陵, 享道東祠.麗末諱光敘, 知古阜郡事, 志懷罔僕, 歸鄕獻靖.入本朝, 諱直孫, 翰林贈都承旨.諱錫弘, 郡守贈吏曹參議, 是爲己卯名賢, 享道東祠.公七世以上也.曾祖諱希壽宣務郞, 祖諱震昌, 考諱世載, 妣, 南陽洪氏進士錫夏女.公以肅廟癸酉三月九日, 生于扶安月川里第.自幼有絶倫奇才, 能屬文著詩, 時稱神童.及長, 自取經傳, 博學明辨.從叔陽德公, 勸求仕不從, 自適於翰墨間.開口誦數千言 ; 下筆著數萬語, 京鄕俱稱文苑碩匠.遊平壤時, 有〈楚雲詞〉, 登於絃歌, 至今傳之.公悟文章無益於德行經學, 不可以修道, 惟以持敬養性爲本.樂交一時名儒, 講磨切磋, 析分毫釐, 識見明確, 出人意表.雷淵南公有容、健菴金公陽澤, 每推詡以爲不及.性理問答相續, 然而不汲汲於搢紳之門, 超然有脫俗之意, 和順之熊, 睟面盎背 ; 正大之氣, 根心發言, 蓋其充養者如此, 應擧登科, 實因諸公欲其彙征而深勸之也.拜成均館典籍, 庚申, 丁內憂遞歸.以早孤爲恨, 至是極其哀毁, 廣求諸家喪禮集說, 精選手抄, 名曰《喪禮便覽》, 傳于家.癸亥鄭相國羽良、宋相國寅明, 薦陞東部主簿, 轉吏、禮、戶、工四曹佐郞, 戶、工、刑三曹正郞, 出宰漆原、漣川、砥平、大興.常曰 : "士之出仕, 爲道非爲食 ; 爲君非爲己 ; 爲國非爲家也." 以廉仁公勤四字, 揭銘左右, 臨事公平中立.上不慕大僚之趨向而輕重其手 ; 下不惑吏胥之浮言而二三其心, 由是政體不偏, 而事合實理 ; 吏莫售奸, 而民蒙實惠, 治化大行.秩滿而歸, 民如失父母, 立碑頌德.蓋自居官以來, 不以貨帛自私者, 性固淸儉, 而亦家法然也.乙亥, 入拜司憲府掌令、執義、吏禮正郞, 明敏寬重, 克允同僚, 廟堂交口相薦, 將有碩輔之望.居無何有疾, 上章致事, 請于大臣, 得筵奏七世祖甕泉公事, 行贈吏曹參議而歸.癸未, 自上特加通政大夫中樞府事, 卒于庚寅十一月三十日, 葬于月川西麓壬坐原.配, 淑夫人德水李氏, 士人[田+成]女, 東岳安訥孫, 墓合窆.一男楔進士, 女適全州崔[山+怕].楔男大恢, 以文聞世.再恢、益恢、奎恢、濟恢, 皆能文醇謹.[山+怕]男禧延文科持平, 甲延進士.奎恢男鳳孝進士, 亦以文聞.嗚呼! 公經學鍛鍊, 文章贍給, 政術敏達, 國之碩輔, 輿望所存, 而上章告疾, 遽爾致事, 是可恨也.然遺文盈箱, 致澤之道, 治平之具, 俱在於此, 而後承貧窶, 累經鬱攸, 殘編齾墨, 僅存無幾, 重可恨也.七世孫應鳳, 深痛乎斯, 收拾於蠹燼之餘, 始成家狀於二百年後, 噫! 其疎畧矣.以是狀求余顯刻之文, 余之無狀, 無以測公淵海之學, 豈敢病公身後大事.特念僅僅成狀者, 今不刻之金石, 恐逾遠而愈失, 故在一室同憂之誼, 有不敢辭者.銘曰 : "士之出仕, 爲國爲君.非爲祿食, 公之一言.理明義正, 日月于天.自足傳後, 於千萬年.凡厥事行, 何待銘阡." 황감과(黃柑科) 조선시대 관학(館學, 성균관과 四學) 유생의 사기를 높이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그들만을 응시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이다. 1564년(명종 19) 처음 시행된 것으로 매년 제주도의 특산물인 감귤이 진상되어올 때,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에 관학유생들을 모아놓고 감귤을 나누어준 뒤 시제(試題)를 내려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이 때 시험과목은 시(詩)·부(賦)·표(表)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였으며, 시험시간은 매우 짧았고, 합격자 역시 당일에 결정되었다. 합격자수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1인을, 영조 이후에는 대체로 2인을 뽑아 직부전시(直赴殿試) 혹은 직부회시(直赴會試)하였다. 빈례로……절차 빈흥(賓興)은 빈객으로 예우한다는 뜻으로, 주나라 때에 향대부가 소학에서 현능한 인재를 천거할 적에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에 올려 보낸 것에서 유래하여, 향시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례》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하는데,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정시(庭試) 아래 단계인 황감을 의미한다. 화순한……드러나니 '수면앙매(睟面盎背)'는 윤기가 도는 얼굴과 밝은 기가 넘치는 등의 모습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속에 뿌리하여, 그 얼굴빛에 나타남이 수연히 얼굴에 나타나며, 등에 가득하며 사체에 베풀어져서 사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행하여진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睟然, 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喩.]"라고 하였으니, 수양을 통하여 화평하고 밝은 기운이 겉으로 드러남을 형용하는 말이다. 화재 울유(鬱攸)는 화재를 맡은 신의 이름으로, 화기(火氣), 즉 화마(火魔)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