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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재 유계원 기사비 慕賢齋儒契員紀事碑 영주(瀛州)의 우일(雨日)506)은 남쪽 지방의 명승지로, 산수가 영기(靈氣)를 모아 충신과 효자, 그리고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으니, 택당(澤堂) 문정공 이식(李植) 같은 명현도 또한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 대개 정릉(靖陵, 중종) 연간부터 장릉(長陵, 인조) 연간까지 모두 150여 년 사이에 마을에는 계(契)가 있었고 계에는 문서가 있었는데, 각(閣)에 문서를 보관하였다. 이에 학문을 강론하며 닦고 이에 시를 읊조리면서 연치(年齒)를 존중하되 벼슬은 존중하지 않았으니, 그 맑은 풍치가 목연(穆然)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규약을 따라 오래되어도 폐하지 않았는데, 각(閣)은 점점 낡아 오래된 각이 없느니만 못한 것이 또한 백여 년이었다.인릉(仁陵, 순조) 신유년(1811)에 이르러 각의 터에 나아가 재(齋)를 짓고 모현(慕賢)으로 편액 하였으며, 예릉(睿陵, 철종) 신유년(1861)에 중수하여 우일서당(雨日書堂)이라 편액 하였다. 어진 이를 존모하는 자는 반드시 책을 읽고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어진 이를 존모하니, 그 실상은 같다. 그 후로 훼손될 때마다 곧바로 수리하여 유지하면서 지켜온 것이 12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옛날의 마을 계는 폐지되어 강론하지 않으니, 이는 전현의 유허지를 드러내는 것은 성공하였지만, 전현의 규약을 지키는 것은 그러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오호라! 이것이 옳은가.이에 임오년(1942) 가을에 우일의 선비들이 개탄하면서 감회를 일으켜 이전 행적을 뒤따라 계회를 열어, 덕을 권하고 과오를 규간(規諫)하며 예로 사귀고 어려운 이를 구휼함을 여씨 향약에 온전히 의거하여 택당 등 제현들이 했던 그 당시와 같게 하니, 대단히 성대한 일이었다. 돌아보건대 상전벽해가 된 나머지 재(齋)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 삼십 년이다. 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은 말로 발의하여 "이 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기꺼이 부조를 하였다. 썩은 것을 바꾸고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며 기와를 뒤집고 섬돌을 쌓아 이전 크고 화려한 모습을 전부 회복하였으며, 남은 돈은 보관하여 오래토록 유지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 때가 광복한 뒤 기축년(1949)년이다. 나라의 운이 새로워지는데 이 재를 마침 보수하니, 하늘이 유풍을 부흥하려고 그 조짐으로 삼은 것인가.그 다음해 경인년(1950)에 전체 회원들의 자질(子姪)들이 서로 도모하기를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작정하면 아들은 기꺼이 집을 짓고,507) 아버지가 장작을 쪼갰는데 아들이 등에 지는 것508)은 옛날의 법도이다. 우리 후손들이 이 재에 대해 잘 유지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빗돌을 잘라와 쓰기를 "모현재유계원기사비(慕賢齋儒契員紀事碑)"라고 하였다. 비석이 이윽고 완성되자,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여러 회원들의 선현을 존모하는 정성509)은 참으로 훌륭하다. 제군들이 이렇게 후손들이 계속해서 수리해나갈 것을 권한 것은 또한 효성스런 생각에서 나왔다. 효성스런 생각이란 유학의 근본이니, 나는 유학이 장차 흥성할 조짐이 될 뿐만 아니라 두승산(斗升山)이 무너지지 않고 초강(楚江)이 길게 흘러 이 재, 이 비석과 함께 영원히 이름을 남길 것을 의심할 것 없다는 것을 알겠다. 한 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지역에 강과 산의 승경의 실상이 있으면 이에 명승지가 되고 사람이 문행(文行)과 아름다운 덕의 실상이 있으면 이에 명현이 된다. 원컨대 여러 어진 이들과 제군들은 한갓 재(齋)와 비석을 준공한 것으로 능사를 삼지 말고 모름지기 선한 이를 가까이하여 자신의 인을 돕는다는 계를 만든 본래의 뜻을 위주로 하여 종신토록 서로 힘쓰라. 그리고 종국에는 택당과 제현들의 의리와 문학으로 목표를 삼아 자신을 수양하여 실제 덕으로 만들며 후손에 전해주어 아름다운 이름이 되게 한다면 참으로 전현을 존모한다고 할 것이니, 장차 영원히 도를 전하며 유허지를 지키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瀛州之雨日, 南服名區, 山水之所鍾靈, 多毓忠孝鴻碩, 有若澤堂李文靖公之名賢, 亦出其中.蓋自靖陵至長陵凡百五十年間事, 洞有契, 契有案, 藏案於閣.於此焉講修, 於此焉風咏, 尙齒而不尙官, 其淸風穆然.洞之人遵其規, 久而不廢, 然寖不如舊閣之不存, 亦百餘祀.至仁陵辛未, 就閣之址, 築齋而扁以慕賢, 睿陵辛酉, 重修而扁以雨日書堂.慕賢者必讀書 ; 讀書者必慕賢, 其實一也.自是厥後, 隨毁隨補, 維持保護者, 再周甲有餘.然昔之洞契, 廢而不講, 是謂表前賢墟則得矣, 守前賢規則未也.烏乎! 可哉.於是壬午之秋, 雨之儒士, 慨然興感, 追前蹟而設契會, 勸德規過, 交禮恤難, 悉依呂氏鄕約, 一如澤堂諸賢當日之爲, 甚盛擧也.顧玆滄桑之餘, 齋幾乎不保者, 三紀.契中僉員, 一辭發議曰 : "是齋之至此, 吾儕責也." 乃銳然樂助.朽者易之 ; 欹者正之, 飜其瓦而築其砌, 盡復輪奐之舊, 留其餘金, 爲久遠之圖, 是則復國後己丑春也.邦運維新, 而是齋適修, 天其欲使儒風復興而爲之兆歟.粤明年庚寅, 僉員子姪, 相與謀曰 : "考作室而子構 ; 父析薪而子荷, 古之道也.吾後承輩, 於此獨無所事乎." 乃伐石而書之曰 : "慕賢齋儒契員紀事碑." 碑旣成, 請余文之.辭不獲, 則爲之言曰 : "僉員高景之誠, 固盛矣.諸君之爲此勸後之嗣葺也, 然亦出於孝思.孝思者, 儒學之本, 吾知其儒之將興, 非但爲兆, 斗山不崩, 楚水長流, 斯齋斯碑, 與之永名也, 無疑矣.抑有一焉, 地有流峙勝狀之實, 乃爲名區 ; 人有文行懿德之實, 乃爲名賢.願僉賢與諸君, 勿徒以竣功齋碑爲能事, 須以親善輔仁之設契本意爲主, 終身交勖, 究竟以澤翁諸賢之義理文學爲的, 修諸身而爲實德 ; 傳諸後而爲令名, 是可謂眞慕賢, 將傳其道於無窮, 其於保守遺墟也, 何有焉." 영주의 우일 지금의 정읍시 정우면이다. 아버지가……짓고 《서경》 〈대고(大誥)〉에서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대목에서 온 말이다. 아버지가……지는 것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의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아들이 등에 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선현을 존모하는 정성 '고경(高景)'은 고인의 큰 덕행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之,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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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정 기적비 怡心亭紀蹟碑 마음은 한 몸의 주인이 되며, 흡족함[怡]은 편안하여 만족스러운 것을 이른다. 사람이 그 마음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우면 이에 건강을 기를 수 있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한다면 이에 부모에 효도함이 된다. 그러나 세상에 이에 능한 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부친을 위해 지은 나씨의 이심정(怡心亭)이 어려운 일을 하였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정자는 정읍군 소성방 공평리에 있는데, 나제봉(羅濟奉), 제윤(濟潤) 군이 자신의 아버지 직재(直齋)가 만년에 휴양하는 장소인 소년봉(少年峰) 아래 초강(楚江)의 위에 지은 것으로, 옛날 시인 상관소용(上官昭容)의 '올라 바라보니 마음이 즐거워졌네.'510)라는 말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정자의 자리를 보면, 뒤 처마는 푸른 절벽을 어루만지고 앞 다리는 백 척 높이의 깎아지른 벼랑에 꽂혀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두 간(間)인데, 남북 간은 8척이고 동서간은 7척으로 합하여 당(堂)이 되는데 사방이 확 뚫렸다. 돌기둥으로 튼튼하게 하였으며, 철 난간으로 위험을 방비하였으니, 자못 웅장한 건물이다. 정서(正西)쪽으로 별도로 건물을 세웠는데 방과 회랑이 갖춰져 있으니, 완전하고도 아름답다고 하겠다. 대개 정자의 위치는 이전 살던 곳과 매우 떨어져 있어서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승경인데,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초강 일대로 파릉의 동정호와 같아서 올라가 바라보면 주인의 마음은 드넓어지고 정신은 흡족하니, 또한 악양루의 범중엄511)과 비슷하다.이에 옹(翁)에게 있어서는 그 마음이 흡족하며, 아들에게 있어서는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한 가지 일을 하여 사람에게 어려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었으니, 어찌 글로 기록하지 않으랴.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대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직재는 어려서 가난하였지만 부모님을 모시면서 뜻을 따랐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선비를 공경하고 예를 좋아하였다. 비록 아들이 멀리 나가 학문을 배웠지만 만년이 되어서야 조금 여유가 생겼으니, 문을 높게 만들어 손님을 맞아들이고 여비를 마련하여 산수를 유람하면서 집안일은 모두 아들에게 맡겼다. 세상에서 백 가지 일을 하면서 천 가지를 생각하고 천 가지 일을 하면서 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채워지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자와 비교할 수 없으니, 어째서 그런가? 만족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세상의 풍조가 새롭게 변하여 이익의 문이 열리고 의의 근원이 막혀 보통 집안의 자제들은 구시대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부형을 기롱하지 않은 자가 드물다. 지금 두 군(君)은 이런 것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자를 짓는 일에 먼저 뜻을 가지고 그 힘을 다하였으니, 비록 '독서가 바탕인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에 글로 남겨야 할 것을 보태어 이 정자를 보는 이들에게 고한다.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으니, 옛날에 별장을 만들고서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훼손하면 나의 자손이 아니다."라는 자512)가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별장을 지키는 것은 덕에 있지 경계하거나 맹서함에 달려 있지 않다. 만약 건물을 지은 자가 그 덕을 잘 마무리 짓지 못하고서 허물을 쌓으며 계승한 자가 선조의 덕을 생각하지 않고 잘못을 행한다면, 별장이 비록 보존되어도 숭상할 것이 못되는데, 더구나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음에랴! 나는 이 정자를 보고서 또한 이 정자에 대해 지금과 후대 사람들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덕을 지킬 것을 항상 생각하기를 바라니, 이것이 이심정을 지키는데 절실한 것이다. 이에 이름과 실제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정자를 영원히 지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빼버리지 말고 더욱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제봉이 장차 비석을 세워서 그 자취를 기록하려 할 때, 내가 같은 고을 사람이라 그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자주 찾아와서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그 자취를 갖춰 기록하는데, 이 세 번째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마지막에 실어 강조하였으니, 정자의 자취가 오래 가는 것은 실로 이것에 달려 있지 비석을 세우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한다. 직재의 이름은 광용(光鏞)이며, 순공(舜功)은 그 자이다. 心, 爲一身之主, 怡, 是安適之謂.人而安適其心, 斯爲養身, 子而安適親心, 斯爲孝親.然而世之能此者, 百不一焉, 此羅氏怡心亭之所以爲難也.亭在井邑郡所聲坊公坪之里, 羅君濟奉、濟潤營築其大人直齋晩暮休養所于少年峰下楚江之上, 取古詩人上官氏'登臨怡心'語而錫名者也.亭之爲處, 後榮摩蒼壁, 前脚揷百尺斷崖, 四周視之皆二間, 而南北間八尺, 東西間七尺, 合之爲堂, 而四通豁如也.石柱以爲固, 鐵欄以防危, 頗傑構爾.直其西別起屋, 房室廊序具焉, 完且美矣.蓋其所處, 逈絶故所, 觀者多勝狀, 而最是楚江一帶, 若巴陵之洞庭, 登臨之際, 主人之心曠神怡, 又彷彿乎嶽樓之笵公.於是乎在翁而爲怡其心, 在子而爲怡親心, 一擧而幷得人二難, 是烏可以不書也.雖然此非一朝而驀取者, 蓋有由焉.直齋少貧事親順, 勤儉治家, 敬士愛禮.縱子遊學, 晩而得稍裕, 則高門閭延賓客, 贏資斧遊山水, 幷家事聽子, 不與視世之百思千千思萬不充不饜者, 何如也.庶可謂知足者矣.自風潮之變新, 利竇濶, 義源塞, 人家子弟, 不以舊之人無聞知譏父兄者, 鮮矣.今二君, 不惟免夫於是, 又能先意乎此擧而盡其力, 雖曰 : "非讀書根基." 吾不信也.是皆重可書以告觀斯亭者.抑有一焉, 昔有置別庄而遺戒者曰 : "毁一草一木, 非吾子孫." 余謂保庄在德, 不在戒誓.若作之者, 鮮終其德而取累, 述之者, 罔念先德而取愆, 庄雖保, 不足爲尙, 况有未可知者乎.余有觀乎此, 亦願斯亭, 今與後之人, 常思保怡心之德, 切於保怡心之亭也.是乃知重輕於名實, 而所以永保其亭者, 尢爲可書而不但已也.濟奉將立碑, 以紀其蹟, 謂余爲同郡人知其事, 累至而求文.爲之悉書, 此三可書者, 而歸重於末, 俾知亭蹟久遠, 實在此而無待於碑爲.直齋, 名光鏞, 舜功其字. 상관소용의……즐거워졌네 당대 초기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아 재상에 오른 여류 문학가이다. 그녀의 〈유장녕공주유배지(遊長寧公主流杯池)〉에서 "바위 골짜기에 마음대로 올라 임하니, 눈이 맑아지고 다시 마음이 즐거워졌네."라고 하였다. 악양루의 범중엄 범중엄은 북송 때의 정치가이며 문학가로 사대부의 모범적 인물로 꼽힌다. 그가 등주를 다스릴 때 벗인 등종량(騰宗諒)이 좌천되어 악주(岳州)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악양루를 중수하고서 범중에게 기문을 부탁하자 친구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아 써 준 글이 〈악양루기(岳陽樓記)이다. 별장을……자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상(名相)인 이덕유(李德裕)는 평천장(平泉莊)이라는 별장을 지었는데, 대사(臺榭)가 100여 곳이나 되는 데다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다 모여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덕유는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이것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자손이 아니다."라 하였으나, 뒤에 그곳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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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3 卷之二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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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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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대부 동복현감 최공 묘지명【서문을 함께 싣다】 朝散大夫同福縣監崔公墓碣銘【幷序】 최씨는 중국의 대성(大姓)으로 동쪽으로 와서 팔도에 널리 퍼져 그 관향이 수십 개인데 전주로 관향을 삼은 씨족이 가장 번성하여 그들이 자리 잡은 곳에서는 모두 명망이 있는 종족(宗族)이 되었다. 고려 시중 문성공 휘 아(阿)를 계보의 시조로 삼은 자들은 영호남에 거주하였는데, 문성공의 네 번째 아들 중랑장 용봉(龍鳳)의 후손은 호중(湖中)에서 명망이 있었다. 중랑장의 증손인 전농소윤 휘 득지(得之)의 후손은 다시 호남의 고부에서 명망이 있었다. 소윤의 장남 휘 자목(自穆)이 고부의 장순리에 처음 거주하였다가 돌아가신 뒤에 분토동의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자손이 그대로 대대로 거처하여 지금은 그 수가 수 천이 되며 벼슬아치와 어진 덕을 지닌 인물들이 간간이 배출되어 끊어지지 않으니, 오호라 성대하도다.공은 조선의 집현전 제학 휘 담(霮)의 손자이며 중랑장 여산 송지손(宋智孫)의 외손으로, 진사로 벼슬에 나아가 조산대부 동복현감이 되었다. 일찍이 사헌부의 주방(主房)으로 있을 때 이전 사헌부 감찰로 있었던 소윤공을 잘 계승하였다고 칭송을 받았다. 승총(乘驄, 어사)으로 3년 주방으로 4달을 지냈는데 대궐의 호걸들이 엄숙하게 대하며 경외(敬畏)하였으니, 공이 또한 감찰이 되어 부친의 풍치(風致)를 잘 계승하였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영인(令人) 고부 이씨는 현감 운정(芸亭)의 따님으로 묘를 공과 합부(合祔)하였다. 아들 분(汾)은 사직으로, 상장군에 추증되었다. 약(瀹)은 무과에 합격하였다. 운(沄)은 참판을 지냈다. 이외 정(淨)과 항(港)이 있다. 딸은 박적에게 시집갔다. 손자로는, 분의 아들인 명손(命孫)은 선천군수를 지냈다. 이외 명동이 있다. 약과 운과 정은 모두 아들이 없다. 항의 아들은 세택(世澤)이다. 명손의 아들 희윤(希潤)은 진사이다. 희정(希汀)은 판관을 지냈으며 호는 덕촌으로, 공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학행으로 서산사(書山祠)에서 배향되었다. 희숙(希淑)은 통덕랑으로 둘째 형을 따라 난리에 달려갔다가 순절하였다. 세택의 아들 한우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드러난 자만 기록하니, 직장 모암(慕菴) 안(安), 참봉 이순당(二順堂) 경행(敬行), 진사 국헌(菊軒) 덕일(德一), 찰방 송계(松溪) 천벽(天璧), 감찰 농은(農隱) 체(體) 등이 바로 이들이다.오호라! 공은 일찍이 부조(父祖)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계부(季父)인 연촌(烟村) 선생은 국조의 명현이니, 그가 배운 것은 마땅히 정밀하고 드넓어서 언행과 덕업으로 발한 것은 반드시 세상의 모범이 되었을 것인데 족보를 보아도 기록된 것이 없고 다만 '사헌부 주방은 잘 계승하였다.'는 한 마디 밖에 없으니 어찌 세대가 멀어졌다고 해서 전한 것이 없단 말인가. 아니면 전배들은 질박함을 숭상하여 문장으로 꾸미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기록하여 싣지 않은 것인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조상의 뜻과 일을 잘 계승한 것은 주공과 무왕의 달효(達孝)1)로 천하를 다스린 바탕이며, 선을 드러내고 악을 징계한 것은 필공(畢公)의 선정으로 명성을 세워준 원인2)이니, 사헌부의 주방으로 선조를 잘 계승한 것을 보면 어떤 행업(行業)이 이것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하늘이 그 덕에 보답하여 후손이 창대할 것이다.지금 묘갈을 세우는 날에 내가 공의 외손이 된다고 하여 명(銘)을 짓게 하는데, 나 자신을 돌아보면 비루한 식견에 문재(文才)도 없으니 어찌 사백 년 뒤에 이 일을 잘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직분상 책무를 맡으니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고부 동쪽의 분토동은 洞維粉土阜之東만세에 동복공을 모시기 좋아라. 萬歲好藏同福公두승산은 우뚝우뚝 저처럼 깎아지른 듯 드높으니 斗嶽巖巖節彼崇완연히 승총(어사)의 기상을 보는 것 같구나. 宛然氣像見乘驄빗돌에 시를 새겨 무궁한 세월에 보이노니 刻詩于石詔無窮한 집안의 뭇 자손들은 경건하게 제사를 지낼지어다. 闔境羣孫虔祀同 崔氏以中國大姓, 東來布濩八域, 其貫數十, 而貫全州者最盛, 所在皆爲望族.若其以高麗侍中文成公諱阿, 爲始譜之祖者, 居兩南, 而文成公第四子中郞將龍鳳之後, 則望于湖中.郞將曾孫典農少尹諱得之之後, 又望于湖之古阜.蓋少尹公長子諱自睦, 始居阜之長順里, 卒而葬于粉土洞向酉原, 子孫仍世居, 至今其麗數千, 簪組賢德, 間出不絶, 於乎休哉.公本朝集賢殿提學諱霮之孫, 中郞將礪山宋智孫之外孫, 以進士筮仕, 爲朝散大夫同福縣監.嘗主臺房時, 稱善繼少尹公之曾爲司憲府監察也.乘驄三年, 主房四月, 殿中豪傑, 肅然敬憚, 公亦爲監察能繼父風故云然也.令人古阜李氏, 縣監芸亭女, 墓祔公雙兆.子汾司直, 贈上將軍.瀹武科.沄參判.淨、港.女適朴迪.孫, 汾子命孫宣川郡守.命同.瀹、沄、淨俱無子.港子世澤.命孫子希潤進士.希汀判官號德村, 以功贈兵判, 以學行享書山祠.希淑通德郞, 隨仲氏赴亂殉節.世澤子漢佑以下不錄, 只錄其著者, 直長慕菴安、參奉二順堂敬行、進士對菊軒德一、察訪松溪天璧、監察農隱體, 是也.嗚呼! 公早襲父祖之訓, 而季父烟村先生, 國朝名賢, 宜其所學之精博, 而發爲言行德業者, 必多柯則于世, 而觀其譜乘, 無所見焉, 只有臺房善繼一語, 豈以世遠而無傳歟.抑以前輩尙質而不文, 故無事乎記載歟.是不可知.然善繼志事, 周、武達孝, 所以治天下; 彰善癉惡, 畢公善政, 所以樹風聲, 則臺房善繼之爲, 行業也孰大於是.宜天報其德而昌大後承也.今於樹碣之日, 以余爲公之外裔, 俾銘之, 顧以陋識無文, 何能爲役於四百年之後哉.但以職分見責, 其義有不敢辭者.銘曰 : "洞維粉土阜之東, 萬歲好藏同福公.斗嶽巖巖節彼崇, 宛然氣像見乘驄.刻詩于石詔無窮, 闔境羣孫虔祀同." 조상의……달효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효를 '달효(達孝)'라고 규정하고 그 효를 말하면서 "무왕과 주공은 누구나 칭찬하는 효자이시다. 효는 선인(先人)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인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中庸章句 第19章》 선을……원인 《서경(書經)》 〈필명(畢命)〉에 나오는 말로, 주(周)나라 강왕(康王)이 필공(畢公)에게 선을 표창하고 악을 구별할 것을 권하면서 명한 말이다. 즉 "선과 악을 구별하여 드러내고 선한 사람이 거주하는 마을을 정표하며, 선을 표창하고 악을 징치하여 선한 사람의 명성을 세워주어라.〔旌別淑慝, 表厥宅里, 彰善癉惡, 樹之風聲.〕"라고 하였다. 원래 명성을 세운다는 것은 선한 사람의 명성을 널리 알린다는 의미였는데, 이 글에서는 앞의 달효가 주공과 무왕이 천하를 다스린 근본이 된 것처럼 필공의 명성이 널리 전하게 된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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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홍주목사 율정 김공 묘갈명 【서문을 함께 싣다】 通訓大夫洪州牧使栗亭金公墓碣銘【幷序】 옛날 명종과 선조 시기에 명현(名賢)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호남에는 하서 김인후(金麟厚)와 일재 이항(李恒)이 있었고 영남에는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이 있었다. 여러 선생의 문하에는 또한 많은 선비들이 무리로 나와 추의 맹자와 노의 공자의 유풍이 빛났다. 당시에 통훈대부 홍주목사 율정 김복억(金福億) 공은 자가 백선(伯善)인데, 그도 이들을 스승을 삼아 그 사이에서 널리 배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오직 일재에 대해서는 같은 고을의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장 오래 섬겼는데, 공이 돌아가신 뒤 327년 정묘년에 사림들이 함께 의논하여 일재를 모신 남고서원(南皐書院)에 배향하니, 논하는 자들이 잘한 일이라 칭송하였다.김씨는 신라 왕실의 성에서 계출(系出)하였는데, 신라의 운명이 극에 달하자 여러 왕자들은 고려에 항복하였다. 그 중 도강백(道康伯)으로 봉해진 자가 있었으니, 강진 김씨는 이 사람에게서 시작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한성좌윤 휘 회련(懷鍊)은 개국공신에 참여하였으며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3대가 지나서 휘 윤손(潤孫)은 벼슬이 사정에 그쳤다. 증조 휘 희석(希奭)은 참봉으로 좌랑에 추증되었는데, 행동이 조심스럽고 성실하여 고을에서 칭송을 받았다. 부친은 휘가 약묵(若默) 호는 성재(誠齋)로, 젊어서 둘째 외숙 눌암(訥菴) 송세림(宋世琳)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윽고 자라서 면앙(俛仰) 송순(宋純), 하서(河西)와 벗이 되었는데 하서는 더욱 진심을 다하여 도의로서 사귀었으며, 돌아가시게 되자 그 무덤에 묘지명3)을 지었다.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은 집의에 이르렀다. 그가 한양(韓陽, 양주)를 다스릴 때 두 차례에 걸쳐 옷감4)을 하사 받았으며,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선비(先妣)는 여주 윤씨로, 현감 임형(任衡)의 따님이다.공은 가정 갑신년(1524)에 태어났다. 자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능히 집안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조금 장성하여 일재 이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당시의 제현들 예를 들면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신암 이준민 등을 모두 따르며 배웠다. 독실하게 공부하며 힘써 행하였으며, 학문의 경지가 매우 드넓었다. 을사년(1545) 윤 숙인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예를 따라 거행하였다. 무오년(1558)에 집의공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생활을 하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아우, 여동생과 재산을 나눌 때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고 그들에게는 후하게 하였다. 기사년(1569)에 효성과 우애로 천거되어 목청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곧이어 경기전 참봉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유년(157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병자년(1576)에 돈녕부 봉사가 되었다. 일재의 상을 당하여 세 달 가마복(加麻服)을 입었다. 신사년(1581)에 회덕 현감이 되어 치적이 매우 높아서 백성들이 빗돌을 깎아 송축하였다. 임기가 차자 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보고하자 임기를 1년 늘려주니 백성들의 바람을 따른 것이다. 정해년(1587)에 사옹원 판관이 되었다. 무자년(1588)에 창평 현령이 되었는데, 그 치적이 회덕에 있을 때와 같았다. 그밖에 한가로울 때는 지팡이와 나막신을 신고 산수 사이를 유람하였으니, 이웃 고을 수령인 최경회(崔慶會), 김부륜(金富倫), 오운(吳澐) 공 등과 함께 인근 고을의 명승지를 두루 미쳤으며, 예닐곱 사람이 〈성산계류탁열도〉를 만들어 인물을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 신묘년(1591)에 다스린 성적이 일등이 되어 김제 군수로 승진하였다.임진년(1592)에 조정의 의논이 남쪽 지방은 적에게 요충지가 된다고 하여 무장으로 공과 교체하였다.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오면서 '군부(君父)가 몽진을 떠났는데 신자(臣子)가 한가롭게 물러나 힘을 바치지 않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고서 이에 아우 주부공 경억(慶億), 친척 조카인 별제 대립(大立) 및 동향의 여러 공과 함께 의곡(義穀)을 모아 군중(軍中)으로 보냈으며, 솜옷을 많이 장만하여 동상에 걸린 명나라 군사를 구원하였다. 계사년(1593)에 또 다시 홍주목사로 승진하였다. 군사에 관한 일과 백성의 실정을 상황에 맞게 조치하였다. 학사를 중건하여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였으며, 월급을 덜어서 학생들의 식량을 돕게 하였다. 홍주는 좌윤공이 일찍이 다스리던 곳이다. 부친이 남긴 법도를 차례대로 거둬들여 폐하거나 실추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철비(鐵碑)를 건립하여 사모하니, 공이 백성들에게 사랑을 끼쳐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다. 늙고 병들었다고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다시 이천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이보다 전인 기축년(1589)에 정여립이 역모로 주살되자, 금구는 그의 고향이라고 하여 현이 폐지되었다. 갑오년(1594)에 옛 명칭을 되찾았으나, 또다시 전쟁의 병화를 겪은 데다가 거듭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대단히 잘 다스리는 자를 선발하였는데, 공이 군자감정에 있다가 이 선발에 뽑혔다. 금구는 공이 거처하는 태산(태인의 고호)의 인근 고을이다. 개인적인 일로 해를 끼칠까 두려워하여 공은 식솔을 거느리고 가지 않았으며,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편안하게 살게 하니, 일 년도 못돼서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행장은 텅 비어 물로 씻은 듯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길을 에워싸고 노래를 불러 기렸으며, 비석을 세워 기록하였다. 이 해에 나이가 70을 넘겨 더 이상 세상에 이바지할 뜻이 없었으며, 다만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를 즐길 뿐이었다.만력 경자년(1600) 11월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태인 수천동의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전 부인은 청주 한씨로 일찍 타계하여 자식이 없으며, 태인 동지에 있는 부친 현감 석년(錫年)의 묘 아래에 따로 장사지냈다. 계비(繼妃)인 전의 이씨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공량(公亮)의 따님으로 공의 묘에 합부(合祔)하였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응진(應辰)으로 자손이 없다. 그 다음은 응빈(應贇)으로 호는 오무재(悟無齋)이며 제용감 봉사를 지냈다. 광해군의 어두운 세상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자취를 감췄다. 후에 송산사(松山祠)에 배향되었다. 그 다음은 응현(應賢)과 응질(應質)로 모두 예빈시 참봉을 지냈다. 딸은 지평을 지낸 안동 김정일(金鼎一)에게 시집갔다. 또다시 네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응린(應麟)은 제용감 봉사를 지냈다. 응실(應實)은 첨지를 지냈다. 응빈(應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응상(應賞)은 주부를 지냈다. 딸들은 이기신, 무과에 합격한 조응남, 충의위 홍태길, 정옥 등에게 시집갔다.오호라! 공은 자질이 빼어나고 뛰어난데다 사우들과 학문으로 승화시켜서 지니고 있는 것은 깊고 무거웠지만, 평생 펼친 것은 겨우 작은 고을의 낮은 관료로 드러낸 것뿐이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공은 일찍이 '사우(四憂)'로 그 실(室)을 편액 하였는데, 그 기문을 쓴 자가 그 뜻을 평하기를 "죽을 때까지의 근심은 맹자가 근심하였던 것5)으로 자신과 도에 관한 것이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근심은 범공이 근심하였던 것6)으로 임금과 백성에 관한 것이다. 이 공을 보면 참으로 뜻을 숭상하는 선비로 죽을 때까지 근심을 지녔던 군자이다. 이 때문에 자신에 있어서는 학문을 자신에 이루었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효과를 드러내었으니, 이른바 어디에 간들 성공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에 해당한다. 군자는 근심을 풀어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니, 밖에서 이르는 것의 크고 작음, 두터움과 얇음이 어찌 공에게 손해나 이로움이 되겠는가."라 하였다.옛날에 비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읽을 수가 없다. 10대손 영채(永采)가 노사 기정진이 지은 행장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새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조인 죽계 부군은 공과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한 우의가 있으니 감히 그 일을 사양할 수 없다. 어진 후손으로 수고로이 이 일을 감독한 이는 종술, 환길, 준기 등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집안의 명성을 능히 이었으니 克家繼聲명문의 효자이며, 名門孝子도 있는 이에게 올바름을 배웠으니 就正有道사문(斯文)의 고사이며, 斯文高士선정으로 백성에게 은택을 끼쳤으니 善政澤民성조의 어진 신하로다. 聖朝良臣이 세 가지 정절을 갖췄으니 備三大節이에 완벽한 사람이라 이를지어다. 是謂完人 粤昔明、宣之世, 名賢幷作, 湖有河西、一齋, 嶺有退溪、南冥, 諸先生之門, 亦羣儒蔚興, 彬彬鄒、魯風.時則有若通訓大夫洪州牧使栗亭金公諱福億字伯善, 無不從師, 博學於其間.然惟於一齋, 同鄕密邇, 而事之最久, 公歿後三百二十七年丁卯, 士林同議, 配享於一齋南皐書院, 論者稱善.金氏, 糸出新羅宗姓, 羅命之革, 諸公子作賓于麗, 有封道康伯者, 康津之金始此.入我朝, 有漢城左尹諱懷鍊, 參開國勳謚忠敏.三世而諱潤孫, 官止司正.曾祖諱希奭參奉, 贈佐郞, 謹慤稱于鄕.考諱若默號誠齋, 少從仲舅宋訥菴世琳學.旣長友宋俛仰純及河西, 河西尢眷眷以道義相交, 沒爲銘其壙.登別試文科, 官至執義.其宰韓楊, 再承表裏之賜, 享武城書院.妣, 驪州尹氏, 縣監任衡女.公以嘉靖甲申生, 天資孝友, 克承庭訓.稍長師事一齋李先生, 一時諸賢, 如奇高峰大升、鄭松江澈、李新菴俊民, 皆從遊也, 篤學力行, 造詣溥博.乙巳, 丁尹淑人憂, 一遵成禮.戊午, 執義公下世, 廬墓三年, 一不到家.與弟妹析産, 薄己而厚彼.己巳, 孝友薦除穆淸殿參奉, 旋移慶基殿.癸酉, 中司馬.丙子, 敦寧府奉事.遭一齋喪, 加麻三月.辛巳, 監懷德縣, 治效茂著, 民磨崖以頌之, 官滿, 方伯啓聞, 加一年, 從民望也.丁亥, 爲司饔院判官.戊子, 昌平縣令, 其治如懷, 而暇日笻屐, 徜徉山水, 與隣宰崔公慶會、金公富倫、吳公澐, 曁隣邑名勝, 六七人作爲〈星山溪柳濯熱圖〉繪像題名.辛卯, 以治行第一, 陞金堤郡守.壬辰, 朝議以南方爲賊要衝, 替以武弁.公罷歸, 以爲君父蒙塵, 臣子不可以閒退不致力, 乃與弟主簿慶億族子別提大立及同鄕諸公, 募義穀輸送軍中, 多辦衣絮, 以救天兵之凍瘃.癸巳, 又陞洪州牧使, 軍務民情, 隨方措置, 重建學舍, 勸課儒生, 割月廩以助學糧.洪, 卽左尹公舊莅也, 遺規次第修擧, 無廢墜者.民建銕碑思之, 其遺愛之八人深如此.以老病辭歸, 除利川府使, 辭不赴.先是己丑汝立逆誅, 金溝以本鄕見廢.甲午, 復舊號, 新經兵燹, 重以歉凶, 朝廷選能治劇者, 公以軍資監正, 膺是選.金, 於公所居泰山比壤也, 恐以私累害, 公不以家眷自隨, 盡心民隱撫綏安輯, 未朞民獲蘇醒.翌年, 辭歸, 裝槖如洗, 民咸擁道歌頌, 碑以記之.是年, 年踰七十, 無復供世意, 只以琴書自娛.萬曆庚子十一月, 考終于家, 葬于泰仁水川洞負子原.夫人, 淸州韓氏, 早沒無育, 別葬泰仁東池其父縣監錫年墓下也.全義李氏, 贈吏判公亮女, 祔公墓.四男, 長應辰無后.次應贇號悟無齋濟用監奉事, 昏朝政亂, 棄官晦跡, 後享松山祠.次應賢、應質俱禮賓寺參奉.女適持平安東金鼎一.又有四男四女, 應麟濟用監奉事.應實僉知.應賓武科早沒.應賞主簿.李奇臣、趙應男武科、洪泰吉忠義、鄭玊.嗚乎! 公生禀秀異, 濟以師友文學, 抱負深重, 而平生展布, 僅見於下邑散僚, 惜哉.雖然公嘗以四憂扁其室, 記之者評其義曰 : "終身之憂, 鄒聖所憂, 在於身與道也 ; 進退之憂, 范公所憂, 在於君與民也.觀此公, 眞尙志之士, 而有終身憂之君子也.是以在己而學成於己 ; 出仕而效著於國, 所謂無入而不自得者.君子貴乎解憂而酬志而己, 外至者之大小厚薄, 何足爲公損益哉." 舊有碣, 今不可讀.十世孫永釆示以奇蘆沙正鎭所撰行狀, 請余以新碣之銘.竊念吾祖竹溪府君, 與公有同年之誼, 不敢辭相役.其後孫之賢勞董役者, 淙述、煥吉、俊基云.銘曰 : "克家繼聲, 名門孝子.就正有道, 斯文高士.善政澤民, 聖朝良臣.備三大節, 是謂完人." 무덤에 묘지명을 지었다 《하서선생집》 권12에 있는 〈통훈대부양주목사금공묘명(通訓大夫楊州牧使金公墓銘)〉이다. 옷감 '표리(表裏)'는 옷 한 벌을 지을 수 있는 겉감과 안감을 말한다. 죽을……근심하였던 것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는 종신토록 근심하는 것이 있고, 일시적인 걱정은 없다. 종신토록 근심할 것은 있으니, 순 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순 임금은 천하에 법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하거늘, 나는 아직도 향인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곧 근심스러운 것이다. 근심스러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 임금과 같이 할 뿐이다.[君子有終身之憂 無一朝之患也 乃若所憂則有之 舜人也 我亦人也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 憂之如何 如舜而已矣]"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벼슬에……근심하였던 것 범공은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범공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묘당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의 먼 곳에 처하면 그 군주를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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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된 행조산대부 내자시 직장 은암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贈嘉善大夫戶曹參判行朝散大夫內資寺直長隱菴李公墓碣銘【幷序】 옛날 목릉(穆陵, 선조) 임진왜란 때 도성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어 거의 나라가 멸망 상태까지 가는 두려운 상황이었는데, 끝내 강토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사직을 편안히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명나라가 원조한 공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병을 일으킨 여러 공이 그 토대가 됨에 힘입은 것이다. 호남에 있어서는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이외에도 또한 순국하거나 공을 세워 우뚝히 칭송을 받는 사람이 많은데, 내자시 직장으로 호조참판 지의금부사에 추증된 은암 이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공의 휘는 수일(守一) 자는 경중(敬仲)이며, 은암은 자호이다. 임진년에 왜구가 날뛰자 의기를 떨쳐 장성의 남문 밖에 이르러 김경수(金景壽), 김홍우(金弘宇), 윤진(尹軫) 공 등과 의병을 일으키자는 논의를 발하여 도청(都廳)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문하여 전략을 세웠다. 집안 하인 의사(義士)를 거느리고 군량과 병서를 가지고서 곧바로 남문으로 가서 의곡(義穀)을 거둬 법성포로 나가 기효증(奇孝曾)에게 맡겨 조운(漕運)으로 행재소에 바치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곡식을 마련하여 좌의장 임계영(任啓英), 우의장 최경회(崔慶會) 공에게 보냈다. 이윽고 김제민(金齊閔), 유희진(柳希津), 윤횡(尹趪) 공 등과 함께 직산으로 내달려 왜적을 공격하여 수십 여 명의 목을 베었다. 방향을 바꿔 진위로 향하여 정탐꾼 15명을 사로잡았다. 용인에 이르렀을 때 경략 송응창(宋應昌)7)이 강화의 논의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여산을 지키면서 적의 길을 막았다. 당시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화의를 주장하여 대군을 철수하자, 공도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와 세상의 일에 관심을 끊고 고향에서 학도들을 가르쳤다.공은 문경공 일재 이항(李恒) 선생의 아들이다. 집안의 가르침에 무젖어서 학문이 고명하고 효성과 우애가 널리 알려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조정에서 추천하여 내자시 직장과 경양도 찰방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의거를 이끈 것은 원래 근본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일시적인 기절(氣節)을 떨쳐 일어난 것이 아니다.성산 이씨는 고려 성산부원군 휘 장경(長庚)의 후손이다. 성산군에서 4대가 지나 병조판서 평간공 휘 발(潑)이 나왔으니, 바로 문경공의 고조이다. 문경공은 영월 신씨 백수(伯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 갑오년(1534)에 공을 낳았는데, 계부(季父)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장원서 별제 휘 상(常)과 (令人) 광주 이씨, 광산 김씨가 바로 출계한 부모이다. 공은 향년 아흔셋으로 만력 병진년(1616)에 돌아가셨다. 참판으로 추증된 것은 의병을 일으킨 공 때문인데, 남문창의비와 《오산창의록》에 그 기록이 실려 있으며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 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언양 김씨로, 광국(匡國)의 따님이다. 묘소는 태인 남촌면 대산동 해좌에 합부(合祔)하였다. 아들은 철(澈), 열(洌), 식(湜), 약(瀹) 택(澤)이며, 딸은 조용창에게 시집갔다. 철의 아들은 비응(匪鷹)이다. 열의 아들은 비린(匪麟)과 비해(匪獬)이다. 식의 아들은 비호(匪虎), 비웅(匪熊), 비룡(匪龍), 비표(匪彪)인데 비룡은 출계하였다. 약의 양자는 비룡이다. 택의 아들은 지간(之幹)이다. 비룡의 현손인 성익星益)과 성열(星說)은 나란히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둘 다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났으며 문집이 간행되었다.오호라! 공은 집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계승한 효자가 되고, 나라에 있어서는 의병으로 임금에게 달려간 충신이 되며, 고을에 있어서는 세속의 모범이 되는 행실이 있었으며, 후생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진 가르침이 있었으며, 또한 끝내는 편안하게 물러나 맑은 기풍으로 사람을 감동시켰으니 여러 선을 두루 갖춰 그에 필적한 만한 이를 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삼백 년이 흘렀지만 비석에 드러내 새길 글도 마련하지 못하였는데, 10대손 쾌열이 이를 두려워하여 여러 친족들과 상의하여 비석을 만들어 무덤에 세우면서 아들 희삼을 보내 나에게 비명(碑銘)을 요구하였다. 이에 공의 덕행을 존모하는 생각8)을 이루 금할 수가 없어서 나의 미천함을 잊고서 삼가 글을 서술하여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인생의 큰 이치는 人生大致다만 충성과 의리로다. 惟忠與義의리는 능히 왜적을 토벌하고 義能討賊충성은 능히 나라에 보답하였으니, 忠能報國남문에 비석이 있으며 南門有碑오산에 사당이 있어라. 鰲山有祠많은 사람이 공을 칭송하니 萬口公誦백 대에도 경건히 제사하누나. 百世虔供다만 이 대산동에 惟此大山네 척의 봉분이 있는데, 四尺之墳바람이 감추고 물이 둘러 흘러 風藏水抱체백이 영원히 보존되리라. 體魄永保문경공의 묘소가 文敬大隧아주 가까운 근처에 있는데, 隣近尺地아버지가 짓고 아들이 계승하니 父作子述다만 주나라 왕실만이 그러한 건 아니도다.9) 匪獨周室누가 이 산기슭을 지나면서 孰過玆麓공경하는 마음 가지지 않으리오. 有不屬屬 昔在穆陵龍蛇之亂, 都城傾覆, 萬民魚肉, 懍懍然幾乎無國, 而卒乃保全疆土, 奠安宗社者, 人皆稱明朝援助之力.然實藉本國倡義諸公, 以爲根地.在湖南, 則金文烈、高忠烈以外, 亦多以殉以功, 卓然可稱者, 若內資寺直長贈戶曹參判知義禁府事隱菴李公, 其一也.公諱守一字敬仲, 隱菴自號也.壬辰, 倭寇陸梁, 奮義馳到長城南門外, 與金公景壽、金公弘宇、尹公軫, 倡發擧義之論, 以書往復都廳, 咨訪規畵.率家僮義士, 持軍糧兵書, 直赴南門, 收集義穀出法聖浦, 屬奇公孝曾, 漕納行在所.又自辦糧穀, 送乎左義將任公啓英、右義將崔公慶會.乃與金公齊閔、柳公希津、尹公趪, 馳進稷山, 攻倭敵斬數十級.移向振威, 捕得偵探者十五名.及至龍仁, 聞宋經畧應昌主和議, 還守礪山, 以遏賊路.時李提督如松, 議撤大軍, 公亦罷歸, 絶意世事, 訓誨鄕里.公, 文敬公一齋先生之子也.擩染庭訓, 學問高明, 孝友著聞, 模範鄕黨.朝廷薦授內資寺直長、景陽道察訪, 皆不就.義擧之倡, 蓋有所本, 非一時氣節之奮也.李氏, 星州人, 高麗星山府院君諱長庚后.星山君四世, 至兵曹判書平簡公諱潑, 則文敬公高祖也.文敬公聘寧越辛氏伯粹女, 生公於嘉靖甲午, 令出爲季父後, 掌苑署別提諱常, 令人廣州李氏、光山金氏, 其所後考妣也.公享年九十三, 而卒于萬曆丙辰.其贈參判, 以倡義功也, 有南門倡義碑、《鰲山倡義錄》, 享鰲山祠.配, 贈貞夫人彦陽金氏, 匡國女.墓, 泰仁南村面大山洞亥坐合封.男, 澈、洌、湜、瀹、澤, 女適趙用昌.澈男, 匪鷹.洌男, 匪麟、匪獬.湜男, 匪虎、匪熊、匪龍出系、匪彪.瀹系男匪龍.澤男之幹.匪龍玄孫星益、星說, 司馬聯璧, 俱以文行著, 有集刋行.於戲! 公在家而爲繩父之孝子 ; 在國而爲勤王之忠臣 ; 在鄕而有範俗之行 ; 在後生而有嘉惠之敎, 而又終始恬退淸風動人, 可謂衆善畢備而罕見其儔矣.顧其歲經三百, 不遑顯刻之文, 十世孫快烈爲是之懼, 議與諸族, 治碣樹阡, 遣其子喜三, 徵銘于余.不勝高山景行之思, 忘其輕微, 謹爲之敘而銘之曰 : "人生大致, 惟忠與義.義能討賊, 忠能報國.南門有碑, 鰲山有祠.萬口公誦, 百世虔供.惟此大山, 四尺之墳.風藏水抱, 體魄永保.文敬大隧, 隣近尺地.父作子述, 匪獨周室.孰過玆麓, 有不屬屬." 송응창(宋應昌) 명나라의 관료로, 자는 사문(思文), 호는 동강(桐崗)이다. 임진왜란 때 경략비왜군무(經略備倭軍務)에 임명되어 제독 이여송(李如 松)과 함께 48,000명 병력의 2차 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였고, 보급 등의 군무를 총괄했다.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한 이후 교전을 자제하면서 일본군과의 강화를 모색하였다. 덕행을 존모하는 생각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之,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고인의 큰 덕행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다만……아니도다 《중용》에서 공자는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선업을 잘 계승하였기에 그 효를 '달효(達孝)'라고 하면서 "무왕과 주공은 누구나 칭찬하는 효자이시다. 효는 선인(先人)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인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中庸章句 第19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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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진사 구암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成均進士龜菴李公墓碣銘【幷序】 옛날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의 은택도 5대가 지나면 사라진다."라고 하면서 공자에게 사숙한 것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겼다.10) 그런데 문경공 일재 이항(李恒) 선생은 5대가 지나 구암공 휘 성익(星益) 자가 익지(益之)인 분을 얻었는데, 역대 조상의 풍치가 남아 있고 어진 자손이 계승하는 성대함이 있으니, 어찌 선철이 이성(異姓)에게 학문을 전한 것보다 더욱 귀하지 않겠는가.대개 공은 순수(純粹)한 자질과 통달한 재주로 성현의 학문에 전력을 다해 깊이 생각하여 크게 발전하여 원대한 경지에 이를 것을 기약하면서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에 우암 송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바로잡아 성과 도의 근원에 대해 들었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선생과 막역지우가 되어 학문의 도움을 주며11) 서로 발전하였다. 이에 덕과 학문이 고명해지고 명성이 드높았다. 태학의 장의는 유림 가운데 정밀하게 가려 뽑는 자리인데 추천12)을 받아 올라갔으며, 문곡 김수항 공은 어진 재상인데 공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니, 이를 통해 공을 알 수 있다.장차 사문(斯文)의 종장과 조정의 재상이 될 날이 있을 것인데, 하늘이 더 이상 나이를 빌려주지 않아 이에 원릉(元陵, 영조) 임자년(1732) 12월 25일에 홍양의 장인 집에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다. 태인 남촌면 대산동 문경공의 묘소 옆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태어난 명릉(明陵, 숙종) 기묘년(1699) 정월 5일부터 향년 겨우 34세이다.공의 선조는 성산 사람이다. 5대 이상의 계보는 문경공의 묘갈에 실려 있다. 호조참의에 추증된 직장 수일(守一)은 문경공의 둘째 아들인데, 계부(季父) 별제 상(常)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식(湜)이며, 조부는 비룡(匪龍)이며, 부친은 통덕랑 효민(孝閔)이다. 모친은 여산 송씨로, 대징(大徵)의 따님이며 교리 세림(世琳)의 현손이다.계묘년(1723)에 공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아우인 칠봉공 성열(星說)도 나란히 합격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목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칠봉공이 돌아가시자, 공은 천륜의 지극한 정으로 그 뛰어난 재주를 매우 애석하게 여기면서 지나치게 슬퍼하고 애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절도를 넘어 세상에 더 이상 뜻을 두지 않았다. 노친을 모시고 광주 용산동 선영 아래에서 거처하면서 자호를 구암이라 하고 문을 닫아걸고 교유를 끊고서 오로지 수양에만 집중하였다.기유년(1729)13) 봄에 모부인께서 유행병을 앓으니, 공은 대변(大便)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주었으며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초상이 나자 홀로 산의 빈소(殯所)를 지키며 마음을 다해 곡벽(哭擗)14)하였으며, 자신의 몸을 흙이나 나무처럼 여기며 모두 일곱 달이 지나고 나서야 장사를 지냈다. 공이 효성과 우애에 돈독한 것은 천성적으로 그러하였는데, 질병이 찾아온 것은 실로 운명이다.부인은 평산 신씨로, 생원 명성(命晟)의 따님이다. 아들을 보면, 장남은 대령(大齡)이다. 차남은 대춘(大春)으로 칠봉공의 후사가 되었다. 큰 딸은 윤탁(尹倬)에게 시집갔다. 작은 딸은 찰방 김시서(金時瑞)에게 시집갔으니, 하서 선생의 현손이다. 대령의 아들은 적(迪), 규(逵), 섬(暹), 원(遠)이다. 대춘의 아들은 운(運), 손(遜), 수(邃), 준(遵) 구(逑)이다.오호라! 만약 공이 수를 누려 그 재주와 뜻을 채워서 마침내 성취하였다면, 다만 가학을 더욱 빛내고 세업(世業)을 드높여서 수암(遂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울러 스승의 학통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비록 대인(大人)에서 현성(賢聖)에 이르는 것15)도 사람들이 기이한 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거늘, 기수가 어긋난 것이 애석하니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공이 경전을 궁구하여 도를 본 것은 〈동정책(動靜策)〉과 〈심경찬(心經贊)〉에 나타나고, 윤리를 바르게 하고 정의(情誼)를 돈독히 한 것은 부모를 섬기고 형제자매를 사랑한 것에 있으며, 엄밀하게 자신을 살펴 사사로움을 이긴 것은 술을 미워하고 색을 멀리함에서 증험하며,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정한 것은 신해년 소장(疏章)에서 따져볼 수 있다. 공처럼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고 치우치지 않게 덕을 이룬 자는 또한 매우 적으니, 어찌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신 것을 안타깝게 여기랴. 공자는 "꽃이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해설하는 자들이 안연을 위하여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찍 죽는다고 하여 삼천 제자 가운데 덕행을 으뜸으로 칭찬하는 것에 무슨 해로움이 되겠는가. 이에 떳떳이 할 말이 있을 것이다.공의 후손인 희전(喜鈿)과 재석(在錫)이 나에게 묘갈명을 요구하였다. 마음으로 간절히 존모하여 고사할 수 없었는데, 옛날에 행장을 짓지 않았기에 이에 본집에 실려 있는 행록의 초고와 서발 등에 의거하여 글을 짓는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자손이 조상의 업을 계승하는 것은 孫承祖緖술성공16)과 비슷하며, 似述聖公나이는 짧으나 덕이 높은 것은 年短德崇안연과 같아라. 顔淵是同한미하거나 현달하거나 마찬가지이니 微顯一致같은 부류가 아닌 것을 비교함이 잘못됐지. 擬匪匪倫크게 써서 빗돌에 새기면서 大書鑱石삼가 평론을 덧붙이네. 竊附尙論 昔鄒孟氏言, "君子之澤, 五世而斬."而自幸私淑於孔子.若文敬公一齋李先生, 五世而得龜菴公諱星益字益之, 則列祖風韻之存, 賢孫繼述之盛, 豈不尢貴於先哲之異姓相傳也哉.蓋公以純粹之資, 通達之才, 刻意覃思于聖賢之學, 期以大進遠到, 而不安於小成, 乃就正于尢庵宋先生之門, 得聞性道之源.與遂菴權先生, 爲莫逆交, 麗澤相長, 於是德學高明, 聲望藹蔚.太學掌議, 儒林極選也, 而登其薦剡 ; 文谷金公, 賢相也, 而勸之仕, 是可以知公也.斯文宗匠, 朝家碩輔, 將有其日, 而天不假年, 乃以元陵壬子十二月二十五日, 遽沒於洪陽聘家, 返葬于泰仁南村面大山洞文敬公墓側壬坐原, 距其生明陵己卯正月五日年, 僅三十四.公之先, 星山人.五世以上糸, 在文敬公墓碣.直長贈戶參守一, 以文敬公次子, 爲季父別提常后, 是爲高祖.曾祖湜, 祖匪龍, 考通德郞孝閔.妣, 礪山宋氏, 大徵女, 校理世琳玄孫也.以癸卯歲, 中司馬, 弟七峯公星說聯榜, 人皆聳瞻, 無何七峯公不淑, 公以天倫至情, 重惜其奇才, 哀傷慘慟, 不覺過節, 而無意於人世.奉老寓居于廣州龍山洞先壟下, 自號龜菴, 杜門息交, 專意進修.乙酉春, 母夫人患癘, 公嘗糞割指, 祈天願代.及喪, 獨守山殯, 盡情哭擗, 視身如土木, 凡七閱月而葬, 公之篤於孝友, 天性則然, 而疾病之來, 實命也.配, 平山申氏, 生員命晟女.男, 長曰大齡.次曰大春, 爲七峯公後.女長適尹倬.次適察訪金時瑞, 河西先生玄孫.大齡男, 迪、逵、暹、遠.大春男運、遜、邃、遵、逑.嗚呼! 使公享壽充其才志, 而卒其成就, 不惟增光家學, 隆其世業, 比肩遂翁, 幷接師統, 雖大而至於賢聖, 人不是異事, 惜其氣數之差, 人猶有所憾也.雖然公之窮經見道, 著於〈動靜策〉、〈心經贊〉 ; 正倫篤誼, 在於事父母愛弟妹 ; 省克嚴密, 驗於惡酒遠色 ; 好惡公正, 質於辛亥一疏.歷觀今古, 成德不偏, 如公者, 亦絶少矣, 何憾於早世不顯也.孔子曰 : "秀而不實." 說者謂爲顔淵而發.然顧何傷於首稱德行於三千乎.是可以有辭也.公之後孫喜鈿、在錫, 徵余銘墓, 心切景慕, 不能固辭, 而舊無狀文, 乃據本集所載行錄草及序跋而敘之.銘曰 : "孫承祖緖, 似述聖公.年短德崇, 顔淵是同.微顯一致, 擬匪匪倫.大書鑱石, 竊附尙論." 맹자가……여겼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 "군자가 끼친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기고, 소인이 남긴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긴다. 내가 공자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분의 정신을 여러 사람에게서 사숙했다.〔君子之澤, 五世而斬, 小人之澤, 五世而斬. 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이라 하였다. 학문의 도움을 주며 이택(麗澤)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추천 '천섬(薦剡)'은 추천장을 가리킨다. 섬계(剡溪)는 중국의 지명인데, 그곳에서 생산된 종이가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옛날에 그 섬지(剡紙)에다 추천하는 글을 적었으므로 섬이 사람을 추천하는 문서의 대명사가 되었다. 기유년 본문에는 을유(乙酉)로 되어 있는데, 성익의 생몰 연대를 본다면 1705년 을유년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내용과 맞지 않는다.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을(乙)이 들어가는 해는 을사년으로 1725년이며, 유(酉)가 들어가는 기유년은 1729년이다. 몰년이 1732년이라면 기유년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곡벽(哭擗) 곡을 하면서 가슴을 두드리는 것을 말한다. 대인에서 현성에 이르는 것 《맹자》 〈진심하(盡心下)〉에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선인이라 하고, 자기 몸에 선을 소유한 것을 신인이라 하고, 선을 충실히 보유한 것을 미인이라 하고, 충실하여 빛남이 있는 것을 대인이라 하고, 대인이면서 저절로 화한 것을 성인이라 하고, 성인이어서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신인이라 한다.〔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 充實之謂美 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술성공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리킨다. 원나라 때 기국(沂國)의 술성공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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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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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통정대부 중추부사 운파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通政大夫中樞府事雲坡金公墓碣銘【幷序】 우리나라는 과거로 사람을 취하는데 그러나 그 사람을 신중하게 발탁하고 또 중용한다. 장차 중용하려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발탁하지 않을 수 없고, 이미 신중하게 발탁하였기에 중용하지 않을 수 없다. 율곡 선생이 "비록 하늘을 통할 학문이 있고 남들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과거를 통한 이후에야 도를 행할 지위에 나아간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보면 국조 이래의 옛 일을 알 수 있다. 황감과(黃柑科)17)의 경우는 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한 번의 과거에 단 한 사람을 발탁하였는데 반드시 지식이 넓고 학문이 정수하며 정치의 계책이 다른 많은 선비들보다 뛰어난 연후에 취하였으니, 빈례(賓禮)로 다음 과거에 올려 보내는 예우의 절차18)가 매우 성대하였다. 대체로 이는 높은 명망에 걸맞게 정밀하게 인재를 선발한 것이다. 통정대부 중추부사 운파 김공 휘 운(氵運), 자 구이(久而)는 영조 을묘년(1775)에 전사마로 황감과에 합격하여 이름이 소장의 추천에 들어갔으니, 그의 문장과 경술이 당시에 뛰어난 것을 지금 상상할 수 있다.부녕 김씨는 계보가 신라 경순왕의 태자인 휘 일(鎰)에서 나왔으며, 고려 이부상서 휘 경수(景修)가 중시조이다. 그의 아들 휘 춘(春)은 부녕부원군으로 봉해졌다. 2대가 지나 휘 작신(作辛)은 부녕군에 연이어 봉해지니,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관향으로 삼았다. 휘 구(坵)는 문장과 도학이 한 시대의 으뜸으로 보문각태학사 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휘 여우(汝盂)는 문한학사로 시호는 충선이다. 원(元)에 들어가 성묘(聖廟)의 제도를 모사하여 아우인 승인(承印)에게 강릉에 서원을 만들게 하였다.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고려 말에 휘 광서(光敘)는 지고부군사를 지냈는데,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정(自靖)하였다. 본조에 들어와 휘 직손(直孫)은 한림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휘 석홍(錫弘)은 군수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지금까지가 공의 7대 이상이다.증조는 휘가 희수(希壽)로 선무랑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가 진창(震昌)이며, 부친의 휘는 세재(世載)이며, 모친은 남양 홍씨로 진사 석하(錫夏)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계유년(1693) 3월 9일 부안 월천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절륜한 재주를 지녀 능히 문장을 엮고 시를 지었으니, 당시에 신동이라 일컬어졌다. 장성하게 되자 스스로 경전을 가져다 읽으며 널리 배우고 밝게 분별하였다. 종숙(從叔) 양덕공이 벼슬을 하라고 권하였지만 따르지 않고 한묵(翰墨) 사이에서 유유자적하였다. 입을 열면 수천 마디의 말을 외웠고 붓을 들면 수만 마디의 말을 지었으니, 경향(京鄕)에서 모두 문원(文苑)의 대가라고 칭송하였다. 평양에서 유람할 때 지은 〈초운사(楚雲詞)〉는 노랫가락에 들어가서 지금도 전하고 있다. 공은 문장이 덕행과 경학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연마해서는 안 되는 것을 깨닫고서 오직 경(敬)을 유지하고 성(性)을 기르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한 시대의 명유들과 즐겨 사귀며 학문을 강마하여 갈고 닦아 아주 작은 것까지 분석하였으며 식견이 명확하여 사람들의 생각 너머까지 간파하였다.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 공과 건암(健菴) 김양택(金陽澤) 공은 항상 추켜올려 칭송하며 자신들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성리로 문답을 계속하였지만 그러나 벼슬아치들의 문에 급급하지 않은 채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뜻이 있었다. 화순(和順)한 자태는 덕의 빛이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가득하며 정대한 기운은 마음에 근본을 두고 말로 드러나니,19) 대개 그가 확충하여 양성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 그가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은 실로 제공들이 그와 함께 무리지어 나아가려고 하여 깊이 권하였기 때문이다.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경신년(1740)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에 이르러 그 슬픔이 극에 이르렀다. 널리 제가의 상례에 대해 논한 학설을 구하여 정선하고서 손수 베껴 《상례편람》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집안에 전하고 있다. 계해년(1743)에 상국 정우량(鄭羽良)과 상국 송인명(宋寅明)이 추천하여 동부주부로 승진하였으며 이조, 예조, 호조, 공조의 좌랑으로 옮겼다가 호조, 공조,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칠원, 연천, 지평, 대흥의 수령으로 나갔다.일찍이 "선비가 나아가 벼슬하는 것은 도를 위함이지 먹기 위함이 아니며, 임금을 위함이지 자신을 위함이 아니며, 나라를 위함이지 집안을 위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염치, 어짊, 공정함, 부지런함[廉仁公勤]' 네 글자를 좌우에 써서 걸어놓고 일에 임하여 공평하게 중심을 잡았다. 위로 대신(大臣)의 추향(趨向)을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았으며, 아래로 아전의 뜬소문에 미혹되어 그 마음을 흔들리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다스림이 치우치지 않아 일은 실제 이치에 부합하였으며, 아전이 간사한 행동을 할 수가 없어서 백성들이 실제 혜택을 받았으니, 다스림과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때 백성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였으며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다. 대개 관직에 있은 이후로 재물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은 것은 본성이 원래 맑고 검소하였으며 또한 가법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을해년(1755)에 조정에 들어와 사헌부 장령, 집의와 이조와 예조의 정랑이 되었다. 명석하고 영민하며 너그럽고 중후하여 동료들에게 성실하게 대하니, 묘당에서 서로 추천하여 장차 재상이 될 것이라는 명망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소장을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대신에게 요청하여 주연에서 7대조 옹천공의 일을 아뢰어 달라고 하여 이조참의에 추증을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미년(1763)에 임금이 특별히 통정대부 중추부사의 직함을 더하여 주었다. 경인년(1770) 11월 30일에 돌아가셔서 월천면 서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아내 숙부인 덕수 이씨는 선비 성(田成)의 따님으로, 동악 안눌(安訥)의 후손이다.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외아들 설(楔)은 진사이며, 딸은 전주 최파에게 시집갔다. 설의 아들 대회(大灰)는 문장으로 세상이 이름이 났다. 재회(再恢), 익회(益恢), 규회(奎恢), 제회(濟恢)는 모두 글을 잘 짓고 순수하며 조심스럽다. 파의 아들 희연(禧延)은 문과에 합격하여 지평을 지냈으며, 갑연(甲延)은 진사이다. 규회의 아들 봉효(鳳孝)는 진사인데,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오호라! 공은 경학을 단련하였고 문장이 넉넉하였으며 정치는 민첩하여 통달하였으니 나라의 재상에 오를 것으로 중망(衆望)을 받았는데, 소장을 올려 병을 고하면서 갑자기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이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남긴 글이 상자에 가득하여 은택을 베푼 도리와 치국평천하의 방법이 모두 이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가난한데다가 여러 차례 화재20)를 겪어서 잔편(殘編)으로 빠졌던 글들이 겨우 남아 별로 없으니 거듭 안타까운 일이다. 7대손 응봉(應鳳)이 이에 매우 애통해하며 좀먹고 타버린 나머지에서 수습하여 비로소 이백 년 뒤에 가장(家狀)을 완성하니, 아! 대단히 소략하도다.이 가장으로 나에게 비석으로 드러내 새길 글을 요청하였는데, 보잘 것 없는 내가 못나서 공의 바다와 같은 학문을 헤아리지 못하니 어찌 감히 공의 돌아가신 뒤의 큰일을 그르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간신히 가장을 만들었는데 지금 금석에 새기지 않는다면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손실되는 것이 더욱 많을까 두렵다. 그러므로 걱정을 함께 나누는 한 가문의 정의(情誼)로 보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명을 짓는다.선비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士之出仕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기 때문이지 爲國爲君녹봉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非爲祿食공은 한 마디로 말하였네 公之一言이치는 밝고 의리는 올바르니 理明義正하늘의 해나 달과 같도다 日月于天충분히 후대에 전할 만하여 自足傳後천만년 이어가리니 於千萬年공이 행한 다른 모든 업적을 凡厥事行어찌 묘갈로 드러낼 필요 있으랴 何待銘阡 我國以科擧取人, 然惟其人, 愼擢而又重用焉.將重用也, 故不得不愼擢 ; 旣愼擢矣, 不可不重用.栗谷先生曰 : "雖有通天之學, 絶人之行, 必由科擧而後進於行道之位." 觀此, 國朝以來之故事, 可知矣.至若黃柑之科, 則尢加愼焉.一番場圍, 只擢一人, 而必其識博學精, 政術治策, 獨冠多士, 然後取之, 賓興禮待之節, 甚盛, 蓋極選隆望也.通政大夫中樞府事雲坡金公諱[氵運]字久而, 英廟乙卯, 以前司馬登柑科, 名八章薦, 其文章經術, 卓冠當時, 今可想矣.扶寧金氏, 糸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 高麗吏部尙書諱景修, 爲中祖.子諱春, 封扶寧府院君.再傳而諱作辛, 襲封扶寧君, 子孫因以爲貫.有諱坵, 文章道學冠一世, 寶文閣太學士中書侍郞平章事, 謚文貞, 祠道東.諱汝盂, 文翰學士, 謚忠宣, 入元摹聖廟制度, 使弟承印創設於江陵, 享道東祠.麗末諱光敘, 知古阜郡事, 志懷罔僕, 歸鄕獻靖.入本朝, 諱直孫, 翰林贈都承旨.諱錫弘, 郡守贈吏曹參議, 是爲己卯名賢, 享道東祠.公七世以上也.曾祖諱希壽宣務郞, 祖諱震昌, 考諱世載, 妣, 南陽洪氏進士錫夏女.公以肅廟癸酉三月九日, 生于扶安月川里第.自幼有絶倫奇才, 能屬文著詩, 時稱神童.及長, 自取經傳, 博學明辨.從叔陽德公, 勸求仕不從, 自適於翰墨間.開口誦數千言 ; 下筆著數萬語, 京鄕俱稱文苑碩匠.遊平壤時, 有〈楚雲詞〉, 登於絃歌, 至今傳之.公悟文章無益於德行經學, 不可以修道, 惟以持敬養性爲本.樂交一時名儒, 講磨切磋, 析分毫釐, 識見明確, 出人意表.雷淵南公有容、健菴金公陽澤, 每推詡以爲不及.性理問答相續, 然而不汲汲於搢紳之門, 超然有脫俗之意, 和順之熊, 睟面盎背 ; 正大之氣, 根心發言, 蓋其充養者如此, 應擧登科, 實因諸公欲其彙征而深勸之也.拜成均館典籍, 庚申, 丁內憂遞歸.以早孤爲恨, 至是極其哀毁, 廣求諸家喪禮集說, 精選手抄, 名曰《喪禮便覽》, 傳于家.癸亥鄭相國羽良、宋相國寅明, 薦陞東部主簿, 轉吏、禮、戶、工四曹佐郞, 戶、工、刑三曹正郞, 出宰漆原、漣川、砥平、大興.常曰 : "士之出仕, 爲道非爲食 ; 爲君非爲己 ; 爲國非爲家也." 以廉仁公勤四字, 揭銘左右, 臨事公平中立.上不慕大僚之趨向而輕重其手 ; 下不惑吏胥之浮言而二三其心, 由是政體不偏, 而事合實理 ; 吏莫售奸, 而民蒙實惠, 治化大行.秩滿而歸, 民如失父母, 立碑頌德.蓋自居官以來, 不以貨帛自私者, 性固淸儉, 而亦家法然也.乙亥, 入拜司憲府掌令、執義、吏禮正郞, 明敏寬重, 克允同僚, 廟堂交口相薦, 將有碩輔之望.居無何有疾, 上章致事, 請于大臣, 得筵奏七世祖甕泉公事, 行贈吏曹參議而歸.癸未, 自上特加通政大夫中樞府事, 卒于庚寅十一月三十日, 葬于月川西麓壬坐原.配, 淑夫人德水李氏, 士人[田+成]女, 東岳安訥孫, 墓合窆.一男楔進士, 女適全州崔[山+怕].楔男大恢, 以文聞世.再恢、益恢、奎恢、濟恢, 皆能文醇謹.[山+怕]男禧延文科持平, 甲延進士.奎恢男鳳孝進士, 亦以文聞.嗚呼! 公經學鍛鍊, 文章贍給, 政術敏達, 國之碩輔, 輿望所存, 而上章告疾, 遽爾致事, 是可恨也.然遺文盈箱, 致澤之道, 治平之具, 俱在於此, 而後承貧窶, 累經鬱攸, 殘編齾墨, 僅存無幾, 重可恨也.七世孫應鳳, 深痛乎斯, 收拾於蠹燼之餘, 始成家狀於二百年後, 噫! 其疎畧矣.以是狀求余顯刻之文, 余之無狀, 無以測公淵海之學, 豈敢病公身後大事.特念僅僅成狀者, 今不刻之金石, 恐逾遠而愈失, 故在一室同憂之誼, 有不敢辭者.銘曰 : "士之出仕, 爲國爲君.非爲祿食, 公之一言.理明義正, 日月于天.自足傳後, 於千萬年.凡厥事行, 何待銘阡." 황감과(黃柑科) 조선시대 관학(館學, 성균관과 四學) 유생의 사기를 높이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그들만을 응시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이다. 1564년(명종 19) 처음 시행된 것으로 매년 제주도의 특산물인 감귤이 진상되어올 때,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에 관학유생들을 모아놓고 감귤을 나누어준 뒤 시제(試題)를 내려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이 때 시험과목은 시(詩)·부(賦)·표(表)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였으며, 시험시간은 매우 짧았고, 합격자 역시 당일에 결정되었다. 합격자수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1인을, 영조 이후에는 대체로 2인을 뽑아 직부전시(直赴殿試) 혹은 직부회시(直赴會試)하였다. 빈례로……절차 빈흥(賓興)은 빈객으로 예우한다는 뜻으로, 주나라 때에 향대부가 소학에서 현능한 인재를 천거할 적에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에 올려 보낸 것에서 유래하여, 향시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례》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하는데,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정시(庭試) 아래 단계인 황감을 의미한다. 화순한……드러나니 '수면앙매(睟面盎背)'는 윤기가 도는 얼굴과 밝은 기가 넘치는 등의 모습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속에 뿌리하여, 그 얼굴빛에 나타남이 수연히 얼굴에 나타나며, 등에 가득하며 사체에 베풀어져서 사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행하여진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睟然, 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喩.]"라고 하였으니, 수양을 통하여 화평하고 밝은 기운이 겉으로 드러남을 형용하는 말이다. 화재 울유(鬱攸)는 화재를 맡은 신의 이름으로, 화기(火氣), 즉 화마(火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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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한성부 좌윤에 추증된 임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林公墓碣銘【幷序】 부풍(扶風, 부안)은 옛날부터 문사가 많기로 나라 안에 알려졌는데, 조선 건릉(健陵, 정조)가 우문 정책을 펼친 이후로 더욱 빛이 났다. 평택 임씨 가운데 부풍 남쪽 진동21)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능히 학문을 쌓고 행실을 가다듬어 널리 명성을 드러내었다. 학사의 경적(經籍), 식량과 땔감과 기름 등 공부하는 일체의 도구를 다 갖추어놓고서 자제들을 권장하였으며, 겸하여 사방의 선비들에게 도움을 주어 해마다 항상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학문에 전념케 하였으니, 학문이 뛰어나 조정에 현달한 자가 또한 그 가운데서 나오기도 하였으며 아울러 문향(文鄕)이라는 이름을 드날리는데 일조를 하였다. 처음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은 가선대부 한상부좌윤에 추증된 오위도총부 부총관 휘 도석(道晳) 자 자백(子白)에게서 나왔으니, 그 공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공의 시조는 당나라 학사 충절공 팔급(八及)이며 고려 시중 충정공 언수(彦修)가 중시조이다. 6대조는 조선의 직제학 맹의(孟義)의 연산군의 재앙을 만나 옥구로 숨어들어왔으며, 아들 만희(萬熙)가 부풍으로 이주하였다. 3대가 지나 득춘(得春)은 병자호란 때 나랏일로 죽음을 당하여 군자감정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조부이다. 부친은 여(汝)이며, 모친은 문과에 합격하여 판결사에 추증된 평산 신씨 백서(百瑞)의 따님으로, 공은 효종 신묘년(1651)에 태어나 숙종 을묘년(1675)에 돌아가셔서 시어산22) 서쪽 기슭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여양 진씨로, 군자감정 극성(克誠)의 따님이다. 묘는 같은 언덕에 봉분은 따로 썼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유곤(有崑)으로 행실이 바르고 점잖았다. 둘째가 유준(有峻)으로 수를 누려 동중추가 되었다. 셋째는 유우(有嵎)이며, 넷째는 유헌(有巘)이다. 막내는 유륜(有崙)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다섯 아들에게서 난 자손은 지금 4백여 명이나 된다.대개 공의 어버이 섬김은 대단히 효성스럽고 자신을 의로서 바로잡았으며 벗을 사귐에는 공손하면서 신의가 있었고 아래 사람을 부릴 때는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선조를 정성으로 받들어 제사를 영원히 지내는 근본을 세웠고 집안을 예로 다스려 자손들에게 아름답고 넉넉한 계책을 남긴 것은 행장의 글과 같으니 참으로 선을 쌓으면 자손에게 경사가 생기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일찍이 들으니 옛 사람의 말에 "천 사람의 눈을 열어준 자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학사를 세운 한 가지 일은 이미 중대한 일과 관계가 있으며 또한 대중과 공적으로 함께 나눈 것은 더욱 하기 어려운 일이니, 하늘이 후진을 열어준 덕에 보답하여 이처럼 후손을 창대하게 한 것은 당연하다할 것이다.7대손 양호, 명록, 백록 8대손 낙중 등이 나에게 이르기를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공의 일을 잘 알 것이다."라고 하여 묘지의 비명(碑銘)을 요구하니, 그 요구가 글을 잘해서가 아니기에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명을 짓는다.희문의 뜻이며23) 希文之志공택의 일이로다.24) 公擇之事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曠千百年누가 공과 같으랴. 疇若公焉이산은 울창하고 梨山蒼蒼봉해는 아득하여라. 蓬海茫茫풍치는 오히려 멀리 가니 風韻猶長어찌 그를 잊을 수 있으리오. 其何能忘 扶風, 自古以多文士, 稱於國中, 而逮夫有韓健陵右文以後, 益彬彬.平澤林氏之居治南眞洞者, 能績學礪行, 以著聞望, 有齋黌經籍, 糧饋柴油, 一應攻業之具, 無不畢備, 旣以獎勸子弟, 兼資四方之士, 歲常藏修以致學, 優而顯於朝者, 亦出其中, 而與有助於文鄕之擅名.其初設置規模, 出於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五衛都摠府副摠管諱道晳字子白, 厥功, 詎不偉哉.公以唐學士忠節公八及爲鼻祖, 麗侍中忠貞公彦修爲中祖.六世祖, 本朝直提學孟義, 遭燕山禍, 遯沃溝.子萬熙轉徙于扶.三世而至得春, 丙子亂死王事, 贈軍資監正, 是爲祖考.考汝, 妃, 贈判決事妣平山申氏文科百瑞女, 生以孝宗辛卯, 卒以肅宗乙亥, 葬于侍御山西麓子坐原.配, 贈貞夫人驪陽陳氏, 軍資監正克誠女.墓同原各兆.有五男, 長有崑, 有行誼.次有峻, 壽同中樞.次有嵎、次有巘.次有崙, 以孝載《三綱錄》.五房之孫, 今爲四百餘人.蓋公之事親克孝, 正己以義, 交友敬而信, 御下寬而嚴.奉先以誠而立享祀永遠之本 ; 治家以禮而貽子孫嘉裕之謨者, 有如狀文, 而固有積善餘慶之理.抑又嘗聞古人之言曰 : "開千人眼者, 必有後." 惟公興學一款, 旣繫大事, 而又與衆公共者, 尢爲難能, 天所以報開牖後進之德者, 宜昌後之若是也.七世孫讓鎬、命錄、百錄、八世孫洛中謂余, "居近而聆公之事." 俾銘于墓.其求也, 不以文, 無可辭.乃爲之銘曰 : "希文之志, 公擇之事.曠千百年, 疇若公焉.梨山蒼蒼, 蓬海茫茫.風韻猶長, 其何能忘." 진동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 시어산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와 부안읍 경계에 있는 산. 희문의 뜻이며 희문(希文)은 송대 범중엄(范仲淹)의 자이다. 인종 때 재상 안수(晏殊)는 각 주(州)와 현(縣)에 학교를 세우면서 범중엄을 그 책임자로 선발하였다. 공택의 일이로다 공택(公擇)은 송대 이상(李常)의 자이다. 어려서 여산(廬山) 백석승사(白石僧舍)에서 글을 읽었고, 과거에 급제한 후로는 소장했던 장서(藏書) 1만여 권을 보관하여 이씨산방(李氏山房)이라 이름을 짓고 그 책을 많은 학자들과 함께 보았다. 《송사(宋史)》 권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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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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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龜巖黃公墓碣銘【幷序】 국조의 유현 가운데 성리에 대해 말을 잘하고 은미한 것을 밝혀 드러낸 분으로 율곡 이외에 농암 김 선생이 그에 해당한다. 그 문하에서 공부한 자로 구암 선생 평해 황공이 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리(理)에는 악이 있지 않다. 기(氣)를 탈 때 리가 들쭉날쭉하여 나란하지 않으니, 과와 불급을 리의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천하에 어찌 리(理)밖의 사물이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한 "강후 호안국(胡安國)은 성(性)에 대해 선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25)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미 어긋났으니 그 사람도 또한 어긋난 것을 알 수 있다. 삼가 생각건대 이것으로 스승26)에게 질문하여도 반드시 큰 차이27)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라 하였다. 만일 공이 병과 가난에 얽매이지 않고 오랫동안 종유하며 깊이 강마하였다면 높고 드넓은 학문의 경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서로 얻은 것이 더욱 성대했을 것이니, 어찌 다만 '학문을 강마하고 덕을 떨친 것을 그대가 얻었다.'고 칭송한 것만 같았으랴.공의 휘는 재중(載重), 자는 원숙(元叔)이다. 먼 조상으로 고려 평해군 숙경(淑卿)이 있으며, 계속해서 벼슬아치들이 나왔다. 이후(以厚), 종혁(宗爀), 세기(世基)가 바로 위 삼대로, 세상에 높은 행실로 이름이 났다. 모친은 경주 김씨이다. 현종 갑진년(1664)에 공은 태어났다. 시와 예를 배울 때 훌륭한 자질을 받았기에 참으로 남다름이 있었는데, 뜻을 세우고 몸을 검속할 때 전적으로 실질을 숭상하였다. 젊었을 때 과거에 합격한 뒤에 학문을 다스리면 이름이 더욱 드러날 것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듣고서 귀를 더럽힌 듯하였으니 이미 근본을 갖추었다. 학문을 할 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진행하여 경(敬)으로 그 바탕을 삼았는데, 심성을 함양하고 학문에 나아가는 이천의 가르침28)을 목표로 삼았으며, 네 글자29)를 나눠 써서 각각 잠(箴)을 지었으니 이것에 치중하다가 저것에 소홀하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안팎의 동정(動靜)을 모두 평정하고 적확하여 이치를 따르는 것에 귀결되기를 힘썼으며, 또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분발하여 스스로 게으르지 않고 노력하였다.집안에서의 행실을 말하자면, 모친을 효성으로 섬겼으며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선조의 제사에 좋은 제수를 써서30) 정성을 다하였다. 사당을 보면 비록 멀더라도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 큰 형을 엄한 부친처럼 모셨으며, 아내를 공경하게 대하고 자식을 의리로 가르쳐서 가정이 엄숙하였다. 어사가 행의(行誼)로 천거하여 침릉에 의망(擬望)된 것이 두 번이다. 몸을 다스림에 대해 말한다면, 해뜨기 전에 일어나 몸을 씻어 정결히 하고 높은 관과 넓은 띠로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모습은 장엄하고 말은 엄하였으니, 바라보면 위엄이 있었지만 마주하면 온화하였다. 자신의 수양에 대해 말하자면, 일찍이 부친의 명으로 과거를 보러 갔었는데,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이익과 욕심이 모두 모인 곳이니 다시 올 수 없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부친이 옛날 은거하던 곳에 집을 지었다. 거북을 닮은 바위를 취하여 자호(自號)하고서 은둔하려는 뜻31)을 부쳤다. 살림살이가 휑하여도 여유롭게 거처하였다. 금천 나중기(羅重器) 등 여러 공들과 강호의 사귐을 맺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조리면서 삶을 즐겼다. 사람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정성을 다해 부드럽게 타일러 가르쳐서 스스로 그만두지 않게 하였다. 가르치는 조목은 자신이 배운 것으로 베풀었으니, 항상 선을 밝히고 자신을 성실하게 하여 밤낮으로 항상 깨어있으라고 권면하였다. 세상을 경영하는 식견에 대해서는 타인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매번 나라에 근심스런 일이 생기면 재야에 있다고 하여 무심하지 않았다. 숙종 경인년(1710)에 순무사가 백성을 잘못 위무(慰撫)하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연병책(練兵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평소 제갈량과 중봉 조헌을 존모하였는데, 꿈속에서 나타나 시문을 지을 정도이니, 이러한 가운데서 은연중에 그의 경세술을 대략 볼 수 있다.삼가 일찍이 논하건대, 공은 옛날 이른바 위기(爲己)의 학문을 하는 자이다. 그가 기록한 것은 모두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요, 구이(口耳)의 학문32)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앞에서 거론했던 핵심[源頭]의 논의가 바로 그 한 가지 예이다. 대개 공은 송암 기정익(奇挻翼) 공에게서 학문을 시작하였고 우암을 사숙하였으며 마침내는 농암의 문하에서 학문을 바로잡았으니, 비록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고 하지만 시작한 연원은 속일 수가 없다.오호라! 공은 이미 곤궁하여 하나도 세상에 펼쳐보지 못하였는데 게다가 수명(壽命)도 마흔다섯 살에 그쳤다. 고부군 남도리소 오좌(午坐)이 언덕이 공의 묘소이다. 부인은 진천 송씨로 아들 증현(增賢)을 낳았는데, 증현은 문장이 뛰었지만 20살에 공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딸은 나정태(羅廷泰)에게 시집갔지만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다. 그 밑은 비녀를 올릴 때 쯤 요절하였다. 계비(繼妃) 이씨는 아들 균(均)을 낳았는데, 균도 열 살에 요절하였다. 안팎의 혈육이 이에 모두 사라졌다. 보답함이 어긋나니 하늘은 어찌하여 그러한가. 그러나 공이 살아 있을 때 충분히 존귀하였고 명성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았다. 살아서 즐거웠으며 제자들이 이르렀고 죽어서 존모를 받아 사원에 배향되었다. 사원이 비록 훼철되었지만33) 장형(長兄)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공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지내면서 은혜를 받은 것처럼 똑같이 여기니, 이것은 공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지금 종9세손 서구가 또 비석에 드러내 새길 글에 홀로 담당하니34) 세상에 더욱 보기 드문 경우이다. 행장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지만 또한 학문에 뜻을 두어 아직 성취하지 못한 자이니, 공을 위해 허드렛일35)이라도 하길 간절히 원하기에 삼가 행장을 살펴서 글을 서술하면서 계보를 논하여 명을 짓는다.옛날 선각자를 보건대 相古先覺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였는데, 爲己而學지금의 선비들은 今之冠紳그 학문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네. 其學爲人자신을 위하면 참되어 爲己則眞이치를 궁구하며 몸을 닦고, 窮理修身남에게 보이기 위함이면 거짓되어 爲人則僞명성을 요구하지만 의리는 잃어버린다네. 要名喪義도도한 말세의 세속은 滔滔末俗저 돌이요 옥이 아니며,36) 伊石匪玊가파른 구암은 巖巖龜巖평범한 가운데 우뚝 솟았어라. 卓出陋凡저 따위 밖에서 이른 것은 彼哉外至내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匪我聽視전일하다 그 정성이여 斷斷其誠부지런하다 그 과정이여. 孶孶其程오직 옳은 것만 추구하니 惟是是求신명과 짝이 되도다. 神明與儔세상의 눈이 지혜롭지 못하니 世眼不慧누가 실제를 알리오. 誰識實際어두운 가운데서도 드러나니 而闇然章밝지 아니한가 그 빛이여. 不顯其光낙척하다가 말하지 말라 罔曰落拓공은 하늘의 벼슬37)을 누렸어라. 公有天爵후손이 다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罔曰嗣替공의 제사는 영원히 지내리니. 公祀永世묘소 아래에 크게 써서 大書墓下몽매한 자들에게 밝게 고하노라. 明告昧者 國朝儒賢, 善言性理, 發微闡幽者, 栗翁以外, 農巖金先生, 其人也.遊其門者, 有龜巖先生平海黃公.其言有曰 : "理非有惡, 及其乘氣, 參差不一, 以過不及, 謂非理本然可, 謂之非理, 則天下豈有理外物哉." 又曰 : "胡康侯謂'性不可以善言.' 頭腦旣差, 知人亦差.竊以爲以是質之皐比, 必不逕庭." 如使不困以病窮, 久從而熟講焉, 則其高廣著顯, 相得益章, 豈但如講磨振德得之足下之獎己哉.公諱載重, 字元叔.遠祖, 高麗平海君淑卿, 繼有簪纓.曰以厚、曰宗爀、世基, 其三世, 世著高行.妣, 慶州金氏. 顯宗甲辰, 公之生也.承詩禮, 禀美質, 固自有異, 而立志撿身, 專在實地.少日, 人有勸以決科治學名益顯者, 則聽之若浼, 旣本之則有.其爲學也, 知行幷進, 敬以貫之, 準的乎伊川涵養進學之訓, 分書四字而各有箴, 恐其偏重於此而致疎於彼也.故凡內外動靜, 務皆平正的確, 歸於循理, 而又警惕策勵, 自强靡懈.以言乎內行, 則事母以孝, 喪而廬墓.先祀獻賢克誠.望祠堂雖遠必下馬.事長公如嚴父, 對妻敬訓子義, 閨庭肅肅, 御史擧行誼, 薦之擬寢陵者再.以言乎律身, 則未明而起, 盥濯潔淨, 高冠博帶, 端坐終日, 貌莊而言厲, 望儼而卽溫.以言乎自修, 則嘗以親命一赴擧, 退而曰 : "利欲都會, 不可再至." 遂築室先公舊遯, 取巖有肖龜者自號, 寓藏六之意.生計蕭然, 處之裕如.與羅金川重器諸公, 爲江湖交, 觴咏而樂.以言乎敎人, 則諄諄懇懇, 使自不已.其科條, 則以所學者施之, 常以明善誠身日夕惺惺勉之.至於經世之蘊, 則非人所測然, 每國有可憂, 不以草莽而恝然.肅宗庚寅見巡撫使撫馭失方, 至有私議鍊兵策.雅慕武侯重峰, 發夢寐而著詩章, 其中亦隱約可見矣.窃嘗論之, 公, 古所謂爲己之學者.其所記箚, 皆由心得, 非出口耳, 向所擧源頭之論, 其一也.蓋公發端於松巖奇公, 私淑乎尢翁, 終焉就正農門, 雖其學成之自力, 淵源所自, 不可誣也.嗚呼! 公旣窮不一試, 又壽止中身有五, 古阜郡南桃李所午原, 其藏也.配, 鎭川宋氏, 生子增賢, 有文, 年二十, 先公夭.女適羅廷泰, 早歿無育.次將笄而夭.繼配李氏生均, 亦十歲而夭.內外血遺, 于是盡矣.報施之錯, 天曷故焉.雖然公之所存, 自足尊貴, 聲望孚人, 生而悅而及門 ; 沒而慕而祭祠, 祠雖禁撤, 長公子姓, 寔繁有昌, 斧堂護享, 一視所蒙, 是可以有辭矣.今從九世孫瑞九, 又獨賢於顯刻之役, 尢罕覯也.示以行狀, 屬余以銘之.余匪其人, 亦志學而未成者, 追切執鞭之願, 謹按狀而叙, 論系以銘曰 : "相古先覺, 爲己而學.今之冠紳, 其學爲人.爲己則眞, 窮理修身.爲人則僞, 要名喪義.滔滔末俗, 伊石匪玊.巖巖龜巖, 卓出陋凡.彼哉外至, 匪我聽視.斷斷其誠, 孶孶其程.惟是是求, 神明與儔.世眼不慧, 誰識實際.而闇然章, 不顯其光.罔曰落拓, 公有天爵.罔曰嗣替, 公祀永世.大書墓下, 明告昧者." 강후……하였는데 호안국은 《지언(知言)》에서 "성은 선악으로 말할 수 없다."라 하였는데, 이 말은 고자(告子)의 견해와 같다고 하여 비판을 받았다. 《대산집(大山集)·답김도언(答金道彦)》 스승 고비(皐比)는 호랑이 가죽을 이르는데, 북송(北宋)의 학자 장재(張載)가 항상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서 《주역》을 강론하였으므로, 스승이 강학(講學)하는 자리를 이르게 되었다. 큰 차이 '경정(逕庭)'의 경(逕)은 문밖의 길이요, 정(庭)은 방 아래의 뜰로서 그 거리가 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너무나도 현격하게 차이가 나서, 상식에 가깝지 않다.[大有逕庭, 不近人情.]"라고 하였다. 심성을……가르침 이천이 "함양에는 모름지기 경으로써 해야 하고 배움을 진전시키는 것은 치지에 달려 있다.〔涵養須用敬 進學在致知〕"라고 하였다. 네 글자 이 글에서는 적시하지 않았는데, 내용상으로 보면 지(知), 행(行), 경(敬), 관(貫)으로 보인다. 좋은 제수를 써서 '헌현(獻賢)'은 좋은 제수를 쓴다는 말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8 〈한여석에게 답함〔答韓汝碩〕〉에서 "고례(古禮)에 '헌현(獻賢)'이란 문구가 있다. 대체로 지자(支子)에게 두 희생(犧牲)이 있을 경우에 그중 좋은 희생을 종자(宗子)에게 드려서 제수(祭需)에 쓰도록 하는 것인데 정자(程子)께서 말한 '물질로써 돕는다.'는 뜻이다. 좋은 희생을 드려서 돕는다면 그 성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은둔하려는 뜻 장육(藏六)은 귀장륙(龜藏六)의 준말로, 거북이가 위험한 상황을 만나면 머리, 꼬리, 네 발 등 여섯 곳을 두꺼운 갑각(甲殼) 안에 감추는 것처럼, 수행자도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잘 단속해야 한다는 불교의 교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雜阿含經 卷43》 구이의 학문 배운 것을 그대로 남에게 옮길 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왔다가 곧장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라고 하였다. 사원이 비록 훼철되었지만 고창의 구동서원(龜東書院)은 평해 황씨 사우로, 황이후, 황세기, 황재중, 황윤석, 황수경 등을 제향 한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8년에 중건되었다. 홀로 담당하니 '독현(獨賢)'은 원래 혼자서 나랏일을 위해 고생하며 동분서주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너른 하늘 아래 어떤 곳도 왕의 땅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땅 물가의 사람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는데, 대부들을 공평하게 쓰지 않고서, 나만 부려먹으며 홀로 어질다 하는구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비석 만드는 일을 홀로 맡았다는 의미로 쓰였다. 허드렛일 '집편(執鞭)'은 말채찍을 잡는 하찮은 일을 가리킨다. 《논어》 〈술이(述而)〉에 "부가 만약 인위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내가 또한 하겠다마는, 만약 인위적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종사하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라는 공자의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황공을 위해 비명을 짓겠다는 말이다. 도도한……아니며 《포박자》에서 "진실과 허위가 뒤바뀌고 보옥과 막돌이 뒤섞였다. 그래서 이 점을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늘의 벼슬 '천작(天爵)'은 사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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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박역굴(朴汝ㄱ屈) 등의 임야매매명문(林野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二月卄三日 朴{汝/ㄱ}屈 光緖三年二月卄三日 朴{汝/ㄱ}屈 전라남도 보성군 朴{汝/ㄱ}屈 외 3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77년 2월 23일에 박역굴(朴汝ㄱ屈) 등 4인이 선산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임야매매명문(林野買賣明文) 1877년 2월 23일에 박역굴(朴汝ㄱ屈) 등 4인이 선산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임야매매명문(林野買賣明文)이다. 변고가 있는 해를 당해 모든 자손이 살아나갈 길이 없어 종회 의논에 의거해 본군 문전면 가천촌 가력동 선산 금양국내(禁養局內)를 전문 11냥에 영영 방매하면서 발급한 증서이다. 산주(山主)의 기록이 있는데, 한량 박역굴과 약수, 득추, 순철 등이다. 이름 아래에 수결이 있다. 매득자의 직역과 성명은 기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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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명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魏致明 癸酉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의 〈거병서(去病書)〉19)를 먼 곳까지 부쳐주셨는데 마디마디가 적절하고 타당하며 하나하나가 약석(藥石)같은 말입니다. 그 문장에서 말한 '병을 제거하는 방법'은 가장 잘 형용하였으니, 손을 씻고 경건하게 읽자니 반성하고 깨우친 점이 많습니다.사람들은 "이 늙은이(위백규를 가리킴)가 추수(推數)를 전공하여 참위설(讖緯說)을 지어 전하기까지 했다"고 말하면서 일찍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선생 문하에 출입한 것을 의심하였습니다. 연원이 단정한데 어찌 한쪽으로 치우쳐 나아감을 면하지 못하고 이렇게 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이 글을 읽어 보니, 평상시의 언행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의 평정하고 적실(的實)함에는 참으로 이와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대 선친20)을 위해 〈다암처사묘갈(茶嵒處士墓碣)〉을 쓰는 것은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런데도 저에게 그 일을 부탁한 것은 사람들의 이른바 '택술에게 시키면 약간의 문사(文辭)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이 미천하고 말이 경박하며 존귀하지 않고 미덥지 않습니다. 게다가 문사마저도 없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저를 깊이 아꼈기 때문에 생각이 한번 잘못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만두십시오. 그만두십시오. 存齋〈去病書〉, 荷此遠寄, 而言言切當, 箇箇藥石. 其云"去病", 最善名狀, 盥讀, 反省警發多矣.人言"斯翁專於推數, 至作讖緯而傳之", 嘗疑其出自渼門. 淵源端正, 豈至於不免偏就乃爾? 人言有不可信. 今讀此書, 乃知其平正的實, 不出乎日用言行之間, 果有如此者也.尊先公〈茶嵒處士墓碣〉, 何等大事? 而託之於澤述者, 不省所謂使澤述而稍有文辭, 人微言輕, 不尊不信. 而况并與文辭而無有乎? 此殆相愛之深, 而不覺一念之誤也. 已之已之. 거병서(去病書) '거병'은 이경(李㯳)의 어렸을 때의 자(字)로, 문언능(文彦能)에게 출가한,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의 큰누이의 외손자이다. 이 글은 위백규가 63세였던 1789년(정조13) 가을에 지은 것인데, 몸의 질병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옛 경전을 인용하여 훈계하였다. 이경은 생후 몇 달 만에 어미를 잃어 위백규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위백규가 거병이라고 부른 것은 오래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존재집(存齋集)》 권24 〈연보(年譜)〉 선친 위영복(魏榮馥, 1832~1884)을 말한다. 자는 방서(芳瑞)이고 호는 다암(茶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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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선두선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孫明先 斗宣○ 丁卯 인택(仁澤)의 언덕에서 저 연꽃봉오리를 바라보았을 때 얼마나 무성했습니까? 제가 보지 못한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멀리 생각해볼 때 망가진 잎과 부러진 연뿌리가 낭자하게 눈밭에 널려 있어 쓸쓸히 사람의 정취를 감쇄시킬 것입니다. 아! 식물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너[연꽃봉우리]를 생각하는 것은 이 식물과 관련된 일이 친구를 위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친구인데 유독 간절히 생각하여 식물에까지 미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조석으로 함께 인택가에서 읊조리고, 시물(時物)을 보고 느끼는 사람이 진실로 내 동생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멀리 그리워하는 이러한 한 생각이 반곡(盤谷)과 계유(繼裕)의 사이를 날마다 왕래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홀연히 외람되게도 편지를 보내주시니, 혼정신성(昏定晨省)98)하시는 가운데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정황을 아는 것 이외에 40세에 내부로 수습하여 정돈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진보한다는 등의 말을 보았습니다. 그 위로와 기쁨 은 속인에게 말해주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한때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될 뿐만이 아닙니다. 옛말에 "노인의 학문은 촛불을 켠 것과 같다."99)고 말하였고, 또 "늙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더욱 사랑스럽다"고 말했으니, 형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40세가 비록 늦었다 하더라도 위나라 무공이 95세에 〈억(抑)〉이라는 시를 지어 경계한100) 일로 보건대, 사실은 늙지 않고 젊으니 촛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지 사람의 재주와 뜻이 어떠한가에만 달려 있습니다. 힘쓰기를 바랍니다.김씨의 일은 자세하게 듣지 못했는데 정말로 형의 말씀과 같다면 역시 하나의 유문(儒門)의 변란입니다. 김씨가 억지로 자기 선조를 높이려고 망령스럽게 이 일을 거행한 것은 정말로 경악할 만합니다. 본가(本家)에서 조상에게 허물이 미칠 것을 생각하지 않고 허락한 것도 역시 부당한 것입니다. 이치에 의거하여 깨우쳐서 그만두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따르지 않더라도 문인들이 공적으로 함께 성토하는 데에 이르면 아마도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선사에게 누가 된다면 곧 누가 되는 것이지만, 음성의 오진영이 선사께서 인가해줬다고 무함하여 원고를 고치고 의절을 깨뜨리며 뜻을 미혹시킨 것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무함하고 고쳤는데도 성토하지 않는다면 선사의 마음은 천고토록 밝혀지지 않을 것이니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제향을 함께 하는 일은 그대가 거행한 것이 아니고 이를 허락한 자의 과실이니, 실제로 선사의 덕에 손해를 끼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는 그만두어도 될 것입니다. 仁澤之陂, 瞻彼菡萏, 何其穠矣? 自我不見, 日月幾何? 遙想敗葉折藕, 狼藉雪裡, 索然落人意況矣. 噫! 植物何與, 而乃爾之思, 非管是物者爲故人故歟? 均是故人, 而其獨思之切而及乎物者 何也? 非朝夕與之吟澤畔, 感時物者, 實吾舍弟故歟? 盖此憧憬一念, 無日不往來於盤谷繼裕之間, 忽辱惠翰, 仰審省定百福之外, 見有四十收飭警發進步等語. 其爲慰喜, 盖有難與俗人道者, 非但爲一時之安報也. 古語曰"老人之學, 如炳燭", 又曰"老而好學, 尢可愛"者, 兄即其人歟. 盖四十雖云晚矣, 以衛武公九十五而作抑戒觀之, 其實非老伊少, 亦無待炳燭也. 只在當人才志如何爾. 幸惟勉.金事姑未聞其詳, 果如盛喻, 則亦一儒門之變也. 金之強尊其祖, 而妄舉此事, 固可駭. 本家之不念累及於祖而許之, 亦無謂也. 據理喻之而罷之, 則善矣. 雖其不從, 至於門人之公共聲討, 恐不必然. 此於先師累則累矣, 有非陰震誣認改稿破節幻旨之比. 誣改而不討, 則先師之心, 千古莫白, 不得已也. 若同享之, 非賢舉之, 許之者之過, 實無損於先師之德, 此不可以已乎? 혼정신성(昏定晨省) 부모의 잠자리를 봐 드리고 아침에 안부를 여쭙는 일이다. 곧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함을 뜻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는 말이 나온다. 노인의……같다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사광(師曠)에게 묻기를, "내 나이 칠십이라 배우고자 해도 이미 늦은 듯하다."라고 하니, 사광이 말하기를 "어찌 촛불을 밝히지 않습니까?……신은 들으니,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돋아 오를 때의 햇빛과 같고, 장성하여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의 햇빛과 같으며, 늙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촛불을 밝혀 밝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촛불을 밝혀 밝게하는 것이 어둠 속에 길을 가는 것과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何不炳燭乎……臣聞之少而好學, 如日出之陽; 長而好學, 如日中之光; 老而好學, 如炳燭之明. 炳燭之明, 孰與昧行乎?〕" 하였다. 《설원(說苑)》 〈건본(建本)〉 위나라……경계한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나이 95세가 되었는데도 자신을 경계하는 〈억(抑)〉을 지어 사람을 시켜 날마다 곁에서 외게 하여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시경(詩經)》 〈억(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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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환병형에게 답함 을묘년(1915) 答尹德煥炳馨 ○乙卯 제가 처음에 족하를 만났을 때 앙연한 표정과 따뜻한 용모를 보고 사랑과 존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심중에 대해 여쭤보니 깊은 지식과 표연한 사상은 시류배에 비할바 아님을 알았습니다. 옥류동과 계화도 사이에 주선하면서 흡연한 정과 유연한 즐거움은 일찍이 오랜 친구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정이 바뀌어 영남의 구름과 호남의 달이 가고 머무름이 무상하니, 암연한 혼백과 유연한 감회는 또한 인정이 진실로 그러한 것인데, 고의(高義)와 중도(中道)를 삼가 낮추고서 편지를 홀연히 보내주시어 협연한 은혜와 충실한 감정을 마음끼리 서로 비춰주니, 이별하여 헤어진 고통을 느낄 수 없게 합니다. 이별한지 한 달이 지났으니 우러러 생각할 때 신의 도움으로 객수의 오랜 고달픔은 물에 씻은 듯하고, 대인의 여유로움을 살펴보건대 구도의 간절함은 또한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가 세상에 오랜 시간 동안 길이 보존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터득하는 것이 매우 드무니 무엇 때문입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뜻이 있는 사람은 적고 뜻이 없는 사람은 많아서 천하의 공통된 근심이 됨으로서 함께 공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진실로 말할 꺼리도 안 됩니다. 저 간혹 그 뜻이 없지는 않은데 기질이 아름답지 못하여 변화의 효과를 보지 못한 자도 있고, 혹은 뜻도 있고 재주도 있는데 질병이 점점 깊어져서 연찬(硏鑽)의 공을 들일 겨를이 없는 자도 있으며, 이 세 가지를 모두 구비하고 있는데 가난하고 궁핍하여 홀로 떨어져 살아 고루하다는 한탄을 면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 몇 가지와 연좌된 자는 고금인물에 모두 존재하였지만 초목과 함께 썩어버렸으니 진실로 한탄할 만합니다. 이제 족하는 약관의 나이에 발원하여 천리의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방문을 했으니 그 뜻은 돈독하지 않다 말할 수 없습니다. 견해는 민첩하고 총명하니 곤란에 빠진 뒤에 분발할 필요도 없고, 움직일 때마다 승척에 의지할 필요도 없으니, 재주는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강장한 몸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수 있고, 선대가 물려준 귀중한 유업은 유학을 도울 수 있으니, 가난과 질병에 대한 근심은 고려한 가치도 없습니다. 족하는 무량한 상복(上福)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사다리를 얻고도 오히려 용맹하게 나아가 극치에 이르러 이른바 도라는 것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상천(上天)이 베푼 지극한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족하는 두려워하며 생각하기 바랍니다. 제가 들었는데 군자가 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취향이 올바른 것이라 하니, 취향이 바르면 언행과 사업은 하나도 바름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끝내는 성현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취향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잘 꾸며서 말마다 이치에 가깝고 미봉하여 일마다 사람을 기쁘게 할지라도 끝내는 도학의 진체와는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표(嶺表)는 추노(鄒魯)의 고향이라 예부터 일컬었는데101), 근래에 와서 현인의 은택과 점점 멀어지고 도술이 점점 어두워져서 '심이 곧 리이다'는 설에 한 번 오염되자 전성(全省)에 두루 퍼졌습니다. 리라는 것은 지존지수하고 순선하여 악이 없는 것이고, 심이라는 것은 신령스럽고 지각이 있어서 공적인 것도 할 수 있고 사적인 것도 할 수 있습니다.102) 만약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심을 잡고서 순선하여 악이 없는 리라 부른다면, 심을 스승삼아 멋대로 쓰고 미친 듯이 멋대로 하는 것에 이르지 않는 자는 거의 드뭅니다.103) 족하의 현명함으로는 응당 취향(趣向)의 사정(邪正)에 대하여 훤히 알 것이니 제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어떻게 취사할 것을 알 것입니다. 풍기(風氣)에 휩싸이지 않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웠습니다. 저 하늘에 넘칠 듯한 풍조가 70개 주에 흘러넘치고 있으니, 노를 젓는 사공이 비록 잘 건너갈 수 있다 하더라도 언덕 위에 있는 사람이 본다면 어찌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족하는 또한 성존덕성(聖尊德性)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오늘날의 급선무로 삼는다면 훗날에 맹자처럼 말을 잘 하여 이적을 물리친 공을 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두터이 돌봐주심에 감격하여 속마음을 쏟아내어 이에 이르렀고,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게 되었으니 간곡히 이해해주시고 비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僕之始遇足下也, 見其昂然之表溫然之容, 令人愛敬. 已而, 叩其中, 則淵然之識飄然之思, 知其非流輩比也. 得與周旋乎玉流繼華之閒, 而浹然之情逌然之樂, 曾不遜於舊要矣. 及其時移事嬗, 嶺雲湖月, 去留無常, 則黯然之魂悠然之懷, 亦人情之固然, 而枉屈高義中道, 赫蹏颺風來墜, 浹然之惠充然之感, 心心相照, 殊不覺分張之苦也. 啟旆踰月, 仰想神佑, 利稅宿憊如洗, 觀感大人之餘, 求道之切, 亦應大異前日也. 夫道之於世, 亘古長存, 而人之得之者, 甚鮮何也? 從前以來, 有志者少, 無志者多, 所以爲天下之通患, 而不可與共學者也. 如此者, 固無足道矣. 厥或有不無其志而氣質不美, 未見變化之效者, 厥或有志且才矣, 而疾病侵尋, 不暇研鑽之功者, 厥或有三者俱得, 而貧竆索居, 不免固陋之歎者. 坐此數者, 汨盡古今人物 而同腐草木, 良可歡也. 今足下發願於弱冠之餘, 訪道於千里之遠, 志不可謂不篤矣. 見解敏妙, 不待困衡趍步, 不茍動依繩尺, 才不可謂不美矣. 強壯之身足以勝重任, 青氊之業足以資遊學, 則貪病之憂, 又不足恤也. 足下所遇, 可謂無量上福, 得如此之梯, 而猶不勇進造極, 以得所謂一箇道者, 則真是靠負上天鐘愛之至恩也. 惟足下惕念焉. 竊聞君子所貴乎道者, 趍向是已, 趍向既正, 則言行事業, 無一不出於正, 而終可入聖賢之域. 趍向不正, 則雖粧撰, 得言言近理, 彌缝得事事悅人, 竟與道學真諦相去遠矣. 嶺之表, 古稱鄒魯之鄉, 而挽近以來, 賢澤漸遠, 道術浸晦, 心理一派, 殆遍全省. 盖理者至尊至粹純善而無惡者也, 心者能靈能覺, 可爲公可爲私者也. 若把或公或私之心, 呌做純善無惡之理, 則其不至於師心自用猖狂自恣者, 幾希矣. 以足下之明, 應已瞭然於趍向之邪正, 不待僕言而知所取舍矣. 不囿風氣, 從古爲難. 彼滔天風潮 震盪於七十之州, 副手梢工, 雖能利涉, 自岸上人觀之, 豈不爲慮? 請足下且將思聖尊德性之訓, 爲今日之急務, 則異時立孟氏能言距之功, 正自不難也. 感於厚眷, 傾蘊至此, 不覺觸人眼目, 幸曲諒而密秘也. 영표(嶺表)……일컫었는데 영남을 가리킨다. 영남은 원래 중국의 남쪽 지방인 대유령(大庾嶺) 등 오령(五嶺)의 남쪽에 있어서 붙인 명칭인데, 우리나라도 경상도가 조령(鳥嶺)ㆍ죽령(竹嶺)ㆍ추풍령(秋風嶺)ㆍ육십령(六十嶺) 등의 밖에 있다 하여 영남이라 칭한 것이다. 심이라는……있습니다 전우는 "심은 영각지물(靈覺之物)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믿어 大本으로 삼을 수는 없고, 반드시 성명에 근원하여 도심이 되어야 비로소 한 몸의 주재가 될 수 있다.〔心者, 不過是靈覺之物, 不可信之爲大本, 故必以原於性命者, 爲道心而始得爲一身之主矣〕"고 말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篇》 권2 〈답최자경(答崔佐卿)〉. 심을……드뭅니다 전우는 "'심'이 저절로 '리'됨을 알고 임의대로 행하면, 이것이 실제의 행동으로 '기'를 주재하고 거짓으로 '주리의 학'을 이름붙인 것이다〔心自認爲理, 而任意行之, 此爲實行主氣, 而假名主理之學也〕"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3 〈답전상무(答田相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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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문제창에게 보냄 병인년(1926) 與羅在文濟昌 ○丙寅 상주가 선조고의 장례식 때 신주를 세울 수 없었던 것은 본래 저들이 압력을 가하여 서둘러 하관을 하느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니, 혹시라도 오늘날 세상에 예가 폐지되어 초래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나중에 신주를 만들 것을 계획했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만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의 의미를 따져보면, 사람이 처음 죽었을 때 혼기가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옷을 가지고 혼을 부르고, 속백(束帛)104)으로 죽은 사람을 받들어 그 형체를 돌이켜 광중 안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신혼(神魂)이 더욱 표탕하여 일정함이 없으면 속백은 오래 보존하여 길이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무로 만든 신주를 세워 대신하고, 우제를 지냄으로써 안정시킵니다. 만약 장례 지낼 때 나무 신주를 세우지 않은 채 혼백(魂帛)을 받든다면 삼년 동안 혼백을 묻은 뒤에는 신이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하늘로 올라가고 땅으로 내려가서 구름처럼 떠돌고 바람처럼 떠다닐 것입니다. 자손들이 이점까지 생각한다면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가(禮家)들은 장사를 지낼 때에 나무로 만든 신주를 받들지 않는다면 장례를 마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장례에 나무로 만든 신주를 세우지 않았으면 아뢰는 글도 또한 감히 짓지 않았으니, 신과 인간 사이의 정과 예의와 관련된 중요성이 도대체 어떠합니까.일단 갑오동란 때에 집집마다 신주를 묻은 뒤로부터는 이미 신주를 다시 받들 수 없고, 또 새로 만들 생각도 하지 못하여 하관하는 날에 이르러 새로 신주를 세운 사람은 천 명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만약 한두 명이라도 예를 중시하고 풍속을 불쌍히 여기는 선비가 큰 절차를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를 듣고서 마치 나무를 엮고105) 끈을 묶는106) 일처럼 케케묵은 설을 늘어놓으니, 단지 채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진부하고 우활하다 이릅니다.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짐승 같은 무리가 가득하고 예의가 사라져서 온갖 죄악이 하늘에 가득한 풍조 때문이니 갈대 하나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한 번도 이런 것을 가지고 강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니, 사람들에게 한갓 비웃음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취향이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친구에 대해서만 더불어 말하여 간혹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주인 당신이 바야흐로 성현의 실학으로 자식들을 힘쓰게 하고 학교를 세우고 경적(經籍)을 쌓아 장차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두운 시절의 한 점 빛과 같으니, 어찌 다만 이쪽을 향할 따름이겠습니까? 이것이 즐거이 그 일에 대해 고하여 그 아름다움을 빨리 이루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아마 역시 헤아려주시고, 기꺼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哀侍之不能立主於先祖考襄禮者, 固緣彼壓渴窆之未遑, 而或無爲今世禮廢之致也歟. 竊聞以追造爲料, 而尚未之及者, 何也? 盖原禮意, 人之始死, 魂氣離散, 故復之以衣, 奉之以束帛, 反其形歸窀穸, 神魂尢飄蕩無定, 而束帛不足以久存永依. 故立主生而代之, 行虞以安之. 若葬不立主, 而仍奉魂帛, 則三年埋帛之後, 神何所憑依? 上天下地, 其將雲遊風颺矣, 爲人子孫念到于此, 豈不痛傷? 故禮家以葬而不奉主者, 爲不成葬. 葬不立主, 告辭又不敢剏製, 其爲神人情禮之關重, 顧何如哉? 一自甲午東亂, 人家埋主之後, 既不能還奉, 又不思改造, 至於窀穸日, 新立者又千無一焉. 如有一二重禮悶俗之士, 爲言大節之不可闕, 則聽之爲蒼古之說, 有若構木結繩之事, 不惟不見採, 反謂之腐迂. 此盖數十年來, 蹄跡充斥, 禮義淪喪, 滔天之風潮, 非一葦之可抗也. 故弟則未嘗以此強喻, 夫夫徒取其譏. 惟於朋知, 趣味近向此邊者, 說與而或見從矣. 哀侍方勉子以聖賢實學, 齋黌之峙, 經籍之積, 將聳觀聽也, 則此黑窣地一点光, 豈但此邊之向而已哉? 此所以樂爲之告, 而亟成其美者也. 想亦見諒而樂聞也. 속백(束帛) 묶어서 한 묶음으로 만든 5필(匹)의 비단을 이른다. 옛날에 빙문(聘問)이나 궤증(饋贈)에 사용한 예물(禮物)이다.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는 피백(皮帛)을 손에 든다."라고 하였는데, 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주에 "피백(皮帛)란 것은 비단을 묶은 다음에 가죽으로 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속(束)이라는 것은 10단(端)이다. 매단(每端)의 길이가 1장(丈) 8척(尺)인데, 모두 두 끝을 합하여 말면 총 5필(匹)이 되기 때문에 속백(束帛)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나무를 엮고 나무를 엮어 새집을 만들어 산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상고 시대에는 사람들이 적고 금수는 많아서, 사람들이 금수와 충사의 피해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에 성인이 나와 나무를 엮어 둥지를 만들어서 피해를 면하게 하니, 사람들이 기뻐하며 그를 천하에 왕이 되게 하고는 유소씨라고 불렀다.〔上古之世, 人民少而禽獸衆, 人民不勝禽獸蟲蛇. 有聖人作, 構木爲巢, 以避群害, 而民悅之, 使王天下, 號曰有巢氏〕"라는 말이 나온다. 끈을 묶는 문자가 없던 태고 시대에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부호를 삼아서 행했던 소박한 정치 형태를 말한다. 신농씨(神農氏)가 이 결승의 정사를 행하다가, 복희씨(伏羲氏) 때에 이르러 팔괘를 긋고 나무에 새긴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서 서계(書契)의 정사를 행했다는 기록이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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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련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巢蓮 辛酉 이전 편지에서 물으신 말씀은 내가 감히 선사의 가르침에 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심이 축적되어서 부득불 생각하고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만일 기질성(氣質性) 세 글자를 기운성(氣運性)이라고 간주한다면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이제 기질성 가운데 성(性)이라는 한 글자를 기운성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기질성 세 글자를 기운성으로 간주하면, 성(性)과 기(氣)가 각각 한 글자씩 점유하여 성은 이치(理致)의 실자(實字)가 되니, 이는 기질에 구애되는 이치가 됩니다. 만일 기질성의 성의 한 글자로써 기운성으로 간주한다면, 성과 기가 한 글자로 합성되어 성은 자음의 허자(虛字)에 불과하게 되니, 이는 기질의 기운을 일컫는 것이 됩니다. 실리(實理)와 사법(詞法)에 구해보아도 온당치 못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이제 보내온 편지를 보니 기운성이 세 글자를 해석한 것인지, 한 글자를 해석한 것인지, 분간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기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해당시켰으니, 아마도 간재선생의 뜻을 살피지 못한 듯합니다. 만약에 기의 측면에 나아가 말한 것을 가지고 기운성이라고 일컫는다면, 그 말한 것이 어찌 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도리어 기질에 구애되는 리라는 설이 됩니다. 어찌 선사가 침묵하여 리를 말하지 않는 본뜻이겠습니까? 만약 또 이와 같다면 종전에 설한바, 기질성 세 글자도 무엇인들 기의 측면에 나아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건대, 따로 기운성이라는 제목을 세워서 사람을 불러 일깨우려하겠습니까? 부디 자세히 헤아려서 교시해 주시기 바랍니다.노주(老洲)181)는 천명지성(天命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두 가지 성을 체일(體一)182)과 용수(用殊)183)로 나누었습니다. 체일은 이미 리의 체일인즉, 용수도 유독 리의 용수가 아니겠는지요. 간재선생 문하에서 기질성의 성이라는 글자를 기운성이라고 간주한 것은 곧 사람들이 리라는 글자를 겸대(兼帶)하여 볼까 꺼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여기에서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유사하지 않는 듯합니다. 보낸 편지에서 "리가 없는 기는 애매모호한 어법이고, 사문의 본의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만약 이와 같다면, 천하에 어찌 리가 없는 와석(瓦石)이 있겠으며, 리가 없는 분양(糞壤)이 있겠습니까?184) 리는 어디에도 있지만, 와석과 분양을 가리켜 리라 이름 한다면, 또한 어찌 올바른 말이겠습니까? 보내온 편지에서 "이 성(性)이 악(惡)에 어지럽혀지면 마땅히 기질성이라고 말해야 하고, 이 물이 진흙에 탁해지면 마땅히 진흙물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은 정히 나의 설과 같습니다. 만약 성을 기운이라고 해석하면, 다만 마땅히 기질이라고 말해야지, 기질성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다만 마땅히 진흙이라고 말해야지, 진흙을 진흙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맑은 물이라고 일컬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노주의 설과 같습니다. 만일 이 또한 "원초의 물이다" 라고 말한다면 어찌 이치에 해가 되겠습니까? 만약 혼탁하기 때문에 침묵하여 원초의 물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이 물은 과연 샘 가운데의 물이 아니고 중간에 사람이 만든 물이라는 뜻입니까? 그러므로 나의 견해로는 가만히 생각하기를 기질성이 비록 잡박하지만 성은 성이고 또 진흙물이 비록 혼탁하지만 물은 물입니다.노주가 논한 기질성은 기의 측면에서 설한 것이라는 것을 누가 감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그 결론은 요컨대 기라고 말하지 않고 요컨대 성이라고 말하였은즉, 그 이름을 세우고 조목을 결정하는 것이 리에 있습니까? 기에 있습니까? 했을 때, 리에 있는 것입니다. 기질성의 경계를 말하자면 마땅히 기라고 말해야 하고, 본연성의 경계를 말하자면 마땅히 리라고 해야 함을, 내가 비록 자질과 재주가 둔하지만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미 그 성이 되는 바는 기질성도 성이 되고, 본연성도 성이 되는 것은 같기 때문에, 진실로 그 기를 겸하여 가리켰다고 하여 성이라는 명칭을 불허해서는 안 됩니다. 선사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아마도 다만 기질성과 본연성이라는 경계의 구별만 주장하고, 그 성이 동일하여 하나라는 것을 빠뜨리는 혐의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견우인성(犬牛人性)의 성을 《주자대전》에서는 비록 기질성이라고 간주했지만,185) 《주자집주》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순수함은, 사람과 물(物)이 다르다는 글로써 보자면, 이는 기를 따라 달리 나타나는 본연성으로, 선악을 겸한 불성(不性)의 성186)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외람되게 이 견우인성의 성(性)이라는 글자는 기질성으로 보아도 맞고 본연성이라 간주해도 옳다고 생각합니다.지금 이를 인용하여 사문에서 지척한 것이 악에 물들여진 성이라 논한다면 그것은 층위가 다른 듯하니, 이 내용은 마땅히 따로 논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리와 기를 밝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찌 식견을 증장하고 실천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매번 근일에 이기(理氣)를 설파하는 자들의 체신과 처사를 보면, 반드시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낫지 못하고, 혹은 미치지도 못하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어찌 성인이 이른바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잘하지만, 말을 잘한다고 꼭 덕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187)라는 것이 이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가만히 그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습니다. 매번 사람들과 명리를 강론하고 변명하는 즈음에는 나의 마음을 돌이켜 돌아보고 전전긍긍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유자(儒者)의 강변(講辨)은 시대의 폐단을 구하고 세상의 화를 그쳐 힘쓰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성과 심을 논하면서 심하게 다투는 것이 근세 유문(儒門)의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풍속은 금수와 같게 되어서 윤리강상(倫理綱常)이 끊어지고 파괴된 것이 금일 천하의 화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절대로 명목(名目) 사이의 부질없는 쟁변에 힘을 쏟아서 오래 쌓인 시대의 폐단을 조장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마땅히 윤리강상 위에 급급하게 뜻을 쏟아서, 크게 일을 처리할 방도를 세워 절반이라도 세상의 화란을 그치게 해야 합니다. 이 뜻을 우리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前書之詢, 非敢有貳於師訓, 但以疑之蓄也, 故不容不思問.蓋如以氣質性三字作氣運性,則孰敢疑之.今以氣質性性之一字, 作氣運性, 故有所未達.何也.以氣質性三字作氣運性, 則性與氣, 各占一字, 而性爲理致之實字, 是謂氣質所拘之理致也.以氣質性性之一字, 作氣運性, 則性與氣, 合成一字, 而性不過爲字音之虛字, 是謂氣質之氣運也.求之實理與詞法, 恐有所未䌥也.今承來喩,不分氣運性是解三字與一字, 槩以就氣上言者當之, 似未察先生之旨也.若以就氣上言者, 謂祉氣運性.則其所言者, 豈非理乎.是則還是氣質所拘之理之說也.豈先生禁不言理之本意乎.且若如此, 則從前所說氣質性三字, 孰有不就氣上言者, 另立氣運性題目, 欲以喚醒人乎,幸細商而更敎也.老洲以天命氣質兩性, 分體一與用殊.體一旣是理之體一, 則用殊獨非理之用殊乎.師門之以氣質性性字, 作氣運性者, 非正恐人帶着理字看乎, 此之謂疑.若不相似然者.來喩, 非謂無理之氣是混淪語法, 又非師門本意, 若如此則天下又安有無理之瓦石, 無理之糞壤乎.然指瓦石糞壤而名之曰理, 則豈成說乎.來喩此性爲惡所汨, 則當曰氣質性, 此水爲況所混, 則當曰沙泥水.二句正鄙說也.若必訓性以氣運, 則只當曰氣質, 不當曰氣質性, 只當曰沙泥, 不當曰沙泥水也.謂之本淸之水則不可者, 誠如老洲說.如曰此亦, 原初之水, 則又何害理.苟以混濁之故, 禁不言原初之水.則此水果非泉中之水, 乃中間人造之水耶.故淺見竊以爲氣質性雖雜, 而性則性爾, 沙泥水雖, 混而水則水爾.老洲之論氣質性, 就氣上說去者, 孰敢曰不然.但其決案, 不曰要之是氣, 而曰要之是性, 則其所以立名定目者, 在理乎在氣乎, 言氣質性地頭, 當曰氣.言本然性地頭, 當曰理.鄙雖鈍根, 亦豈不知.但旣曰其所以爲性者,一則固未嘗以其兼指氣而不許性之名也.如師訓, 則恐不無但主地頭之別, 而遺却其性一之嫌也.犬牛人性之性, 大全雖作氣質性, 以集註仁義禮智之粹然, 人與物異者觀之, 是隨氣異見之本然性, 非兼善惡之不性之性也.故妄以爲此性字, 做氣質性亦得, 做本然性亦得.今引此以論師門所指爲惡所汨之性, 似非其倫, 此則又當別論也.夫所貴乎明理氣者, 豈非欲長識見而資踐履乎.然而每見近日能說理氣者之行已處事, 未必有勝於餘人, 而或不及爲, 絶可怪也.豈聖人所謂有言者不必有德者此耶.僕見此等人, 心竊恥之, 不欲蹈其餘轍.每與人講辨名理之際, 反顧于己心, 有所兢兢也.儒者之講辨, 務在救時之獘.而息世之禍,性鬪心戰飛失揮戟者, 非近世儒門之獘乎.禽風獸俗, 絶綱破常者, 非今日天下之禍乎.爲今之計, 絶不可肆力於名目間閒爭辨, 以助積久之時獘.正宜汲汲注意於倫綱上大理會,息得一半分世禍也.此意吾輩不可以不知也.高明以爲如何.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다. 인물성동이론에 있어서는 인(人)과 물(物)은 근본적으로 이(理)가 같을 뿐만 아니라 신(神)도 동일하다고 전제하고, 그 동일하지 않게 나타나는 이유는 형기(形氣) 때문이라 하여 호론의 인물성이설(人物性異說)을 반대하고, 낙론의 인물성동설(人物性同說)을 일원분수(一原分殊)로 설명했다. 체일(體一) 본체가 하나라는 말이다. 용수(用殊) 작용이 다르다는 말이다. 천하에……있겠는가 와석분양(瓦石糞壤)은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서 동곽자가, "이른바 도(道)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장자는 없는 데가 없다고 하면서,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있고, 피에도 있고, 기와나 벽돌에도 있고, 똥이나 오줌에도있다네.〔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惡乎在? 莊子曰, 無所不在. 東郭子曰, 期而後可. 莊子曰, 在螻蟻. 曰,何其下邪?曰,在稊稗. 曰,何其愈下邪?曰, 在瓦甓. 曰, 何其愈甚邪?曰, 在屎溺.〕"라고 하였다. 견우인성(犬牛人性)……간주했지만 《맹자집주(孟子集註)》 〈고자 상(告子上)〉의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 가운데 '사람과 사물의 성에 차별이 없다'는 고자의 논리를 반박하여 맹자가 말한 "그렇다면 개의 성이 소의 성과 같으며 소의 성이 사람의 성과 같은가?〔然則犬之性, 猶牛之性, 牛之性, 猶人之性與?〕"라고 한 대목에 주자의 주(註)는 "맹자가 또 말하기를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개와 소와 사람이 모두 지각이 있고 능히 운동을 하니 그 성이 다를 것이 없다.'고 하니, 이에 고자가 스스로 그 말이 그른 것을 알고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孟子又言, 若果如此, 則犬牛與人, 皆有知覺, 皆能運動, 其性皆無以異矣. 於是告子自知其說之非, 而不能對也.〕"라고 하였다. 선악을 겸한 불성(不性)의 성 기질지성 (氣質之性)이다.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 본래의 성품을 본연지성 또는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고 했을 때, 이에 대하여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품을 말한다. 장재((張載,1020~1077)는 저서 《정몽(正蒙)》 〈성명(誠明)〉편에서 "형체가 있은 뒤에 기질의 성이 있으니, 이를 잘 회복하면 천지의 성이 그대로 보존된다[形而後有氣質之性,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라고 하였다. 즉,'기'는 궁극적인 실재인 '태허'로 정의되며 기가 양의 영향을 받으면 표면으로 떠올라 그 기운을 퍼뜨리며, 음의 요소가 강하면 기는 침잠하여 물질세계의 구체적인 것들을 응축·형성한다고 말했다. 덕이……아니다 《논어》 헌문(憲問)에 "덕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이에 합당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꼭 덕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 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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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0 卷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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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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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 현술에게 답함 무오년(1918) 答族弟希淑 賢述 戊午 덕행과 문장, 학업을 합일해야한다는 말에서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는 성대한 뜻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생각하기를 덕행은 문장과 학업을 포함하지만 학업과 문장은 덕행을 포함하지 못한다고 여긴다. 때문에 세 가지에 각각 치력(致力)한다면 끝내 합일되기 어렵거니와 오로지 덕행에 힘쓴다면 두 가지는 합일을 기약하지 않아도 합일할 것이다. 때문에 말하기를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1)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온축하여 덕행이 되고 실행하여 학업이 된다."2)고 하였으니 참으로 미더운 말씀이다. 요순과 문왕 주공은 큰 덕행으로 빛나는 문장과 드높은 공업을 이루었으니 가장 으뜸이다. 공자와 안자 이하의 여러 성현은 문장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으나 곤궁하여 지위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천하를 제도하진 못했으나 옛 성인을 이어 후학에게 길을 열어준 공적은 요순보다 뛰어나다.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여상(呂尙)과 제갈공명(諸葛孔明)의 학업이 저같이 탁월한 것은 그들이 성인의 도를 참여하여 들었고 몸소 군자의 덕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훈(伊訓)과 열명(說命)3), 단서(丹書)와 출사표(出師表)4)의 문장이 또한 후인의 보배가 된 것이다. 저 한유는 비록 문장에 뛰어난 자이나 끝내는 성현의 무리로 중시하는 바가 여기 덕행에 있었기 때문에 홀로 제자(諸子)의 으뜸이 되었고 불교를 배척한 학업 또한 위대하였다. 위앙(衛鞅)과 왕맹(王猛) 같은 족속이나 유주(柳州 유종원)와 미산(眉山 소동파)의 무리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은 자들로 비루하여 끼어 줄 것이 없다. 공문(孔門)의 사과(四科)5)에서 문학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나 정사의 중유(仲由)와 염구(冉求)가 어찌 일찍이 덕행에 힘쓰지 않았으랴. 오직 그 힘쓸 바 덕행에 전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학과 정사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덕행의 안연과 염옹(冉雍)이 문학과 정사에 짧다고 말한다면 확실한 의론이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오로지 덕행에 힘쓰면 문장과 학업 두 가지는 저절로 합일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내온 문장을 보니 문사가 씩씩하고 뜻이 확고하여 족히 나약한 사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세운 과목의 중요성의 여부와 용력(用力)의 전일함과 느슨함에 있어 혹 구별이 작기 때문에 나의 어리석은 견해를 개진하니 살피고 정정하여 회교(回敎)하기 바라노라. 德行文章事業合一之喩, 可見不安小成之盛.然吾嘗以爲德行包文章事業, 事業文章不能包德行.故三者各致其力, 則終難合一.專務德行, 則二者不期合而自合矣.故曰有德者, 必有言, 又曰蘊之爲德行, 行之爲事業, 亶其信哉.堯舜文周之大德, 煥乎之文, 魏乎之功, 尙矣.孔顔以下諸聖賢, 文固在玆, 而窮不得位, 故雖無康濟天下, 繼開之功, 賢乎堯舜.伊傳呂葛之業, 如彼卓然者, 以其與聞聖人之道, 而躬行君子之德也.故伊訓說命丹書出師表之文, 亦足爲後人拱璧.如韓愈氏, 雖工於文者, 終是聖賢之徒, 而所重在此, 故獨擅雄於諸子, 而闢佛之業, 厥亦偉矣.至若衛鞅王猛之屬, 柳州眉山之類, 棄本逐末者, 陋矣不足齒.如孔門之四科, 遊夏之文學, 由求之政事, 何嘗不務德行者哉? 惟其所務不專, 故止於此而已.然謂顔冉之德行, 短於文與政, 則非確論也.此所謂專務德行則二者自合者也.竊觀來章, 辭壯志確, 足以起懦.然於立科之賓主, 用力之專歇, 或少區別, 故爲陳瞽見 諒訂回敎也. 덕이……말이 있다 《논어》 〈헌문(憲問)〉에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으나 훌륭한 말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온축하여……된다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누편(陋篇)〉에 "성인의 도를 귀로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그것을 몸에 쌓아 두면 덕행이 되고, 밖으로 행하면 사업이 된다. 저 문사만을 일삼는 사람은 비루하다.〔聖人之道 入乎耳 存乎心 蘊之爲德行 行之爲事業 彼以文辭而已者 陋矣〕"라는 말이 나온다. 《근사록(近思錄)》 〈위학(爲學)〉에도 실려 있다. 이훈(伊訓), 열명(說命) 《서경》의 편명이다. 〈이훈〉은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훈계한 내용이고, 〈열명〉은 은나라 고종(高宗)과 부열(傅說)에 대한 글이다 단서(丹書), 출사표(出師表) 《단서》는 주 무왕(周武王)이 즉위할 때 강태공(姜太公)이 올린 경계의 말씀이다. 《출사표》는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이 북벌(北伐)할 적에 2대 황제 유선(劉禪)에게 올린 표문으로 우국충정의 내용이 담긴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공문(孔門) 사과(四科) 《논어》 〈선진(先進)〉에 보면 공자께서 제자들을 평하여 "덕행(德行)에는 안연과 민자건, 염백우와 중궁이고, 언어(言語)에는 재아와 자공이고, 정사(政事)에는 염유와 계로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와 자하이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이를 공문 사과(孔門四科)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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