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록 書紳錄 선생118)이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성인이 되기를 기약해야 하니, 마치 흙을 담아서 나루를 막고119) 아교를 달여서 해를 붙이고120) 삼태기로 흙을 퍼 날라 산을 옮기는121) 마음같이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였다. -신축년(1901)에 들은 것이며, 아래도 이와 같다.-나금계(羅錦溪)의 문인 중에 병든 사람이 있었는데, 금계가 묻기를 "병중에 공부는 어떻게 하느냐?" 하니,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자, 가르치기를 "병이 들지 않았을 때처럼 할 뿐이다." 하였다. -여기까지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을 때나 살아 있을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근심할 때나 즐거울 때나 모두 마땅히 한결같아야 하니, 이것은 공력을 쏟기가 가장 어렵기는 하지만 항상 이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한다면 일에 임하여 구차한 모습이 없을 것이다.【문】호복(呼復)122)할 때의 아무개와 부고(訃告)할 때의 아무개를 어떻게 구별합니까?【선생 답】호복할 때의 아무개는 살아 있을 때의 호칭을 따르는데 만약 그 사람이 호복하는 사람에게 백부와 숙부가 되면 '백부' 또는 '숙부'라고 부르고, 부고할 때의 아무개는 관직이 있으면 관직을 쓰고 관직이 없으면 '학생(學生)'이라고 불러야 한다.【문】《예기(禮記)》에 "외가의 친족은 두 가지 계통이 없다."라고 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계모(繼母)의 부모와 형제를 외조부와 외삼촌으로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답】옛날에 주자가 하숙경(何叔京)123)의 묘문을 지으면서 '외삼촌 등조(鄧祚)'라고 했는데 등씨는 곧 하숙경의 계모 형제이다. 주자가 이미 '외삼촌〔舅〕'으로 불렀으니 호칭은 불가할 것이 없으나 그를 위해 상복을 입는 것은 불가하다.【문】상복에 대해 여쭙니다. "어머니가 쫓겨나면 계모의 족당을 위하여 상복을 입고, 어머니가 죽으면 그 어머니의 족당을 위하여 복을 입는다."는 고주(詁註)의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마땅히 주(註)의 설을 정론으로 삼아야할 듯합니다. 만약 고(詁)의 설처럼 여긴다면 쫓겨난 어머니의 족당을 위해서는 상복을 입지 않게 되는데 단지 계모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계모가 살아있다면 계모의 족당을 위하여 상복을 입고, 죽었다면 쫓겨난 어머니의 족당을 위하여 상복을 입는데, 이는 계모의 생과 사로 쫓겨난 대의(大義)가 바뀌는 것이니, 어디에 그 두 가지 계통이 없다는 뜻이 있습니까?【답】맞다.【문】남의 후사로 나간 사람이 이번 달에 소후모(所後母 양모(養母))의 상을 당했는데 생부의 대상(大祥)이 다음 달에 있다면 대상 때에 제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제사에 참여한다면 복색을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답】평량자(平涼子)와 포직령(布直領)124) 차림으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예법의 뜻에 합당할 듯하다.【문】《사례편람(四禮便覽)》에 "동자(童子)에겐 관건(冠巾)과 수질(首絰)이 없다."라고 했는데, 관건은 그가 아직 관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수질은 관건과 구별이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허리에 이미 요질(腰絰)이 있으니 머리에 수질이 없다면 예의가 없을 듯합니다.【답】동자에게 수질(首絰)이 있어도 무방하다.【문】《가례(家禮)》ㆍ《상례비요(喪禮備要)》ㆍ《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모두 4대(代)를 제사지낸다고 하는데 《격몽요결(擊蒙要訣)》에는 3대만 제사지낸다고 하니, 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답】《가례》에는 본래 4대를 제사지낸다고 했으나 조선의 제도에는 3대만 제사지낸다고 했기 때문에 율곡은 당시 임금의 제도를 감히 어기지 못했던 것이다.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은 모두 율곡 이후에 나온 책인데 4대를 제사지낸다고 한 것은 《대명률(大明律)》에 상제(喪祭)는 《가례》를 따른다는 글이 있기 때문이다.【문】〈소학소지(小學小識)〉는 오늘날에 예전의 훈의(訓義)하던 때를 따라 당시에 간행을 명한 글을 얻은 것입니다. 훈의할 때에 선정전(宣政殿)의 훈의로 보면 말뜻이 통하지 않았고, 영조 때의 훈의로 보면 곧 말뜻이 통했습니다. 아래 글의 '명간(命刊)'은 곧 영조가 간행을 명한 것이기 때문에 극항(極行)125)하여 썼고 '훈의' 두 글자 또한 극항하여 썼으니, 그것이 영조 때의 훈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답】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다.【문】〈소학서제(小學書題)〉제2절에 "습관이 지혜와 더불어 자란다.〔習與智長〕"의 '지(智)'자는 지각(知覺)으로 말하는 것이 타당할 듯한데, 본문과 《집설(集說)》에는 모두 '지(智)'자로 되어있습니다. '지(智)'와 '지(知)'는 과연 분별이 있을 텐데 마땅히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답】이 '지(智)'자는 본래 사성(四性)126)으로 말할 수 없고 또한 지각(知覺)으로 말할 수도 없으니, 지식(知識)의 '지(知)'이다.【문】〈소학제사(小學題辭)〉제6절에서 '그 뿌리를 북돋는다.'는 《소학》의 쇄소응대(灑掃應對)127)의 가르침을 말하고, '그 가지를 뻗게 한다.'는 《대학》의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일을 말합니다. 이처럼 본다면 아래 글의 두 구절은 맥락이 서로 이어지는데 《집해(集解)》의 말은 미진한 듯합니다.【답】《소학》․《대학》과 연계시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문】〈입교(立敎)〉 제2장의 "간략하고 진실한 것을 청하여 익힌다.〔請肄簡諒〕"는 구절을 두고 《소학집성(小學集成)》에 공영달(孔穎達)128)과 육덕명(陸德明)129) 의 설이 있는데, 문세(文勢)로 따져보면 육덕명의 말이 조금 낫습니다. 또 이상 네 구절130)은 어린 시절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모두 가르치는 것으로써 말하였고, 이로부터 10년 후에는 조금 지식이 있기 때문에 모두 스스로 배움을 청하는 것으로써 말하였습니다.【답】그대의 견해가 옳은 듯하다.【문】〈입교(立敎)〉제7장의 육행(六行)과 육예(六藝)131)는 모두 순서가 있으나, 육덕(六德)132)의 순서는 뒤섞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답】이것은 가르침을 세우는 것을 말했기 때문에 지(知)를 먼저 말하고 인(仁)을 나중에 말했는데, 인(仁)은 사덕(四德 인의예지)의 인이 아니라 이것은 인자한 마음일 뿐이다. '성(聖)'을 집주(集註)에서 "통하지 않음이 없다.〔無不通〕"고 말했는데 또한 지나친 해석이며 이것은 매우 밝다는 뜻일 뿐이다. 의(義)ㆍ충(忠)ㆍ화(和)를 자세히 궁구해 보면 또한 저절로 선후가 있다.【문】〈명륜(明倫)〉제2장의 '모든 내외〔凡內外〕'에 대해, 《집해(集解)》에서는 비복(婢僕)만 가지고 말했으나, '범(凡)'자로 보면 한 집안의 안팎으로써 말한 듯합니다.【답】그렇다.【문】〈명륜(明倫)〉제12장에 ''준 것을 받다.〔受賜〕"가 두 번 나오는데 아래 글의 '갱(更)'자로 미루어 보면 윗글의 '사(賜)'자도 시부모가 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설(一說)에 위쪽의 '수사(受賜)'는 혹자가 준 것이라고 하니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답】위아래에 나오는 '사(賜)'는 모두 시부모가 내려준 것이다.【문】〈명륜(明倫)〉제15장의 정오(正誤)에 "'부모가 명하여 부르다.〔父命呼〕'부터 '얼굴 모양을 성하게 하지 않는다.〔色容不盛〕'까지 다섯 가지 일이다."라고 했으나 그 조목을 나누는 것은 분별하여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빨리 대답하고 느리게 대답하지 말라.〔唯而不諾〕"는 것을 한 가지 일로 삼은 것은 그 응답의 빠름을 말한 것이고, "손에 일을 잡고 있다.〔手執業〕"부터 "종종걸음으로 가지 말라.〔不趨〕"까지를 한 가지 일로 삼은 것은 그 추명(趨命)의 빠름을 말한 것이니, 아래 세 구절133)이 각자 세 가지 일이 된다면 어떻습니까?【답】방씨(方氏)의 설이 그대의 말과 같지는 않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대의 뜻이 나은 듯하다.【문】〈경신(敬身)〉제29장의 '마을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경례한다.〔入里必式〕'에 대하여, 마씨(馬氏)가 '부모의 마을'이라고 말했으나, 다른 사람의 마을로 통용해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답】통용해서 보는 것이 옳다.【문】〈가언(嘉言)〉제8장의 "거칠고 조급하면 성품을 다스릴 수 없다.〔險躁則不能理性〕"에 대해서, 《집설(集說)》은 '덕성(德性)'으로 해석하였으나 덕성은 곧 하늘에서 얻어 순수하게 선하여 악이 없는 것인데, 어찌 다스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답】마땅히 '기질의 성〔氣質之性〕'134)으로 보아야 하니, 《집설(集說)》이 잘못된 듯하다.【문】〈가언(嘉言)〉제38장의 "생일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풍악을 벌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生日不當置酒張樂〕"에 대해서, 만약 늙어서 가장(家長)이 되어 아들과 손자가 마련하려고 한다면 비감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잠시 금지시키지 말고 그 효성스럽게 봉양하려는 심정을 펴게 하는 것도 혹 하나의 방도가 되겠습니까?【답】내 입장에서는 마땅히 정자(程子)의 가르침을 굳게 지켜야 하지만, 아들과 손자의 입장에서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헌수하는 것을 경사로 여겨 반드시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이 끝내 들어주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중지하여 그 효자의 슬퍼하는 마음을 펴게 하는 것이 옳다.【문】〈가언(嘉言)〉제78장의 "청잠에 사람에게 떳떳한 본성이 있는 것은 천성에 근본한 것이다.〔聽箴 人有秉彛 本乎天性〕"에 대해서, 구결언해(口訣諺解)에는 '하니'로 되어 있어 아래 글의 "지각이 사물의 유혹으로 변화하여 마침내 그 바름을 잃는다."는 말뜻에 딱 들어맞지 않는 듯합니다. 게다가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는 주(註)에 "자연히 예가 아니면 듣지 않게 된다."라고 했으니, 이미 '자연(自然)'이라고 했다면 '물(勿)'자는 또 어디에 해당하는 것입니까?【답】내 생각으로는 "사람의 떳떳한 본성은 곧 하늘에서 얻은 것인데 지각이 사물에 유혹되어 그것과 함께 변화하여 마침내 바른 이치를 잃게 된다. 그러나 오직 저 선각자(先覺者)만이 우뚝하게 자립하여 정해진 방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배우는 사람 또한 마땅히 사특함을 막고 진실한 마음을 보존하여 예가 아닌 말은 삼가고 듣지 말아야 한다."라고 본다. 이 단락의 구결은 이 뜻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문】〈가언(嘉言)〉제87장에 "부귀할 상(相)을 바라지 않는다."의 '상(相)'자는 무슨 뜻입니까?【답】도암(陶菴 이재(李縡))은 '기상(氣象)'으로 말했으나, 내 생각으로는 '모양(貌樣)'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문】〈선행(善行)〉제34장의 "등유(鄧攸)는 그 자식을 버렸는데135) 죽은 아우의 아들은 온전히 보전하였다.〔鄧攸棄其子 而全亡弟之子〕"에 대해서, 그 아우와 우애가 있었으니 비록 좋은 일이라고 말하더라도 천륜을 끊었다면 어찌 대의(大義)에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양쪽을 온전히 할 수 없었다면 마땅히 그 자식을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뒤에 마침내 후사가 없었으니 웅씨(熊氏)가 비록 천명이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천륜을 끊어버린 까닭인 듯합니다.【답】이 장은 주 선생(朱先生)이 본래 《소학》에 싣지 않으려 했으나 유자징(劉子澄)136)이 실은 것이다. 천륜을 끊고 도리를 훼손하는 것을 미워하지 않았다면 주자가 어찌 싣고자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등유가 자식이 없는 것은 마땅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천도가 앎이 없어〔天道無知〕"라고 말한 것 또한 그 의도를 모르겠다.【문】허령(虛靈)은 마음의 체(體)이지만 마음을 성(性)에 대비시키면 마음은 마땅히 기(氣)에 속해야 하니 허령은 저절로 기(氣)가 됩니다. 《대학》 첫 구절의 소주(小註)에서 진북계(陳北溪)가 "이(理)와 기(氣)가 합한 것이 허령하게 된 까닭이다.〔理與氣合 所以虛靈〕"라고 말했는데, '소이(所以)'를 허령의 이(理)로 삼아 말한 것입니까?【답】곧바로 당체(當體)를 가리켜 말했다면 본래 기(氣)이겠으나 그 허령하게 된 까닭이라면 이(理)라는 것이 없겠는가. 생각건대 진씨(陳氏)의 말도 이러한 뜻인데 말을 만드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여 이와 기를 대립시켜 말하였기 때문에 선유(先儒)가 일찍이 그 온당치 못한 점을 논하였다.【문】성의(誠意)와 정심(正心) 두 장은 유독 장(章) 아래에 장구(章句)가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답】성의(誠意)는 홀로 하나의 전(傳)을 만들고 정심(正心)과 수신(修身)은 이어서 하나의 전(傳)을 만들었으니, 발례(發例)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두 장의 아래에만 장구가 있다.【문】8장의 맺는말과 9장의 시작하는 말은 모두 말을 되풀이하여 만든 것인데, 그 간절한 뜻이 다른 장보다 절실해서입니까?【답】수신(修身)은 자신의 일이고 제가(齊家)는 남에게 미루어가는 일이어서 서로의 거리가 조금 멀고 집과 나라의 관계도 그러하니 모두 말을 되풀이하는 방법을 쓴 것은 대개 간절한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문】평천하장(平天下章)에 맺는말이 없는 것은 다스림과 평정함이 똑같이 한 가지 일이기 때문입니까?【답】그렇다.【문】평천하장(平天下章)의 23절(節)은 마땅히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절은 혈구(絜矩)137)의 이치가 이와 같음을 말하였으니 마땅히 제1단락이 되어야 하고, 다음 두 번째 절은 혈구의 방법이 이와 같음을 말하여 윗글의 뜻을 반복해서 해석하였으니 마땅히 제2단락이 되어야 하고, 세 번째 절은 《시경》을 인용해 호오(好惡)와 득실(得失)을 제시하여 혈구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말하였으니 마땅히 제3단락이 되어야 하고, '먼저 덕을 삼가 하는 것〔先愼乎德〕'부터 '구범(舅犯)' 11절까지는 재용(財用)을 제시하여 혈구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말하였으니 마땅히 제4단락이 되어야 하고, 〈진서(秦誓)〉138) 이하의 다섯 절은 호오와 득실의 지극한 곳을 거듭 말하여 세 차례 인용한 《시경》의 뜻을 반복하여 해석하였으니 마땅히 제5단락이 되어야 하고, '생재(生財)'부터 종편까지는 재용(財用)의 지극한 곳을 거듭 말하여 제4단락의 뜻을 해석하였으니 마땅히 제6단락이 되어야 합니다. 이 뜻이 어떠합니까?【답】그대의 소견이 옳지만, 맨 앞의 두 절을 합하여 하나의 단락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하다.선생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시를 논하기를 "'반 이랑 네모난 연못에 한 거울이 열리니〔半畝方塘一鑑開〕'는 마음의 형체를 말하였고, '하늘 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누나〔天光雲影共徘徊〕'는 온갖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음을 말하였고, '묻거니 어이하여 그처럼 해맑을까〔問渠那得淸如許〕'는 마음이 어찌하여 이렇게 맑고 밝을 수가 있는가를 말하였고, '근원에서 생수가 솟아나기 때문일레〔爲有源頭活水來〕'는 마음이 맑고 밝은 까닭은 그 근원에 성(性)과 이(理)가 있기 때문임을 말하였으니, 만약 성과 이가 없다면 마음이 어찌 스스로 맑고 밝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아들과 손자가 혹 고하지 못하고서 남의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큰 소리로 엄히 꾸짖기를 "이것이 나를 청렴하지 못한 곳으로 빠지게 할 것이니, 불효가 무엇이 이보다도 심하겠는가." 하였다.가군(家君 후창의 아버지)의 편지에 "부자가 함께 글을 읽는다."는 말을 보고 눈물을 삼키며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선자(先子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시고 주자(朱子)와 송자(宋子 송시열(宋時烈))의 책 및 방손지(方遜志)139)의 글을 볼 때에 긴긴 밤 동안 구등(篝燈)140)을 켜고 강론하여 익히기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선자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어 다시는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집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글을 읽는 것을 볼 때마다 문득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하였다.스승과 제자가 되길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솔하게 할 수 없고 또 몇 년 상종하다가 나중에 정하더라도 늦지 않다. 농암(農巖)이 말하기를 '한 번 문하에 이르면 바로 스승과 제자라 부르는데 그 실상을 따져보면 아무것도 없다. 옛날의 이른바 생삼사일(生三事一)141)이 과연 이와 같았는가?' 하였으니, 이 말이 엄격하여 본받을 만하다. 나의 문인 연장희(延壯熙)142)는 나를 따른 지 여러 해에 제자가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으며 집을 옮겨 나를 따른 지 몇 년 동안 또한 그렇게 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난리를 당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이런 난리를 당해 피차간에 생사를 예측할 수 없어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정하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니, 그 사람이 큰일을 가벼이 하지 않는 모습 또한 사람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하였다."흔히들 예절, 예절 하는데 그것이 옥이나 폐백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흔히들 음악, 음악 하는데 그것이 종소리와 북소리를 말하는 것이겠는가."143)에 대하여, 나는 한 마디 말로 이어서 말하기를 "흔히들 학문, 학문 하는데 그것이 문자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하리라.기질(氣質)이 흐리고 어지러운 것은 본래 맑은 물이 티끌이나 오물로 뒤섞여 찌꺼기가 되는 것과 같지만, 그 맑고 순수한 모습은 그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병사(兵士)는 정예(精銳)를 귀히 여기고 숫자가 많은 것을 귀히 여기지 않으니, 배우는 사람도 그러하다. 정병(精兵)과 둔병(鈍兵)이 함께 진을 쳤을 때에 둔병이 패배하면 정병도 따라서 패배하게 된다. 잘 배운 사람과 잘 배우지 못한 사람이 동문(同門)일 때에 잘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허물이 있으면 잘 배운 사람도 그 나쁜 영향을 받는다.충성과 신의는 학문을 하는 큰 근본이다. 내가 일찍이 선사(先師 돌아가신 스승 임헌회(任憲晦))에게 들으니, "충성과 신의는 목숨과 관계되는 것이니 이 말을 마땅히 유념해야 한다. 비록 정자와 주자의 문장과 율곡의 성리설이 있다 하더라도 충성과 신의가 없다면 내가 무엇으로 이것을 관찰하겠느냐." 하였다.《중용》의 천명(天命)은 오로지 이(理)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밝음〔明〕을 말하지 않았고, 《대학》의 천명은 허령(虛靈)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밝음을 말하였다. 《중용》의 명덕(明德)은 성인이 덕을 이룬 것으로써 말하였고, 《대학》의 명덕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으로써 말하였다.다른 사람과 강론할 때에 합치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부득불 더 논의해 보되 절대로 모질게 다투어 변론하면서 나는 옳고 저 사람은 그르다고 해서는 안 된다. 옛날 매산 선생(梅山先生)144)이 선사(先師 임헌회)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강론할 즈음에 다른 사람과 내가 합치되지 않더라도 결코 이기려하지 말고 우선 내버려두는 게 좋다. 저 사람은 반드시 나더러 이기지 못했다고 말하겠지만 이런 말을 들었다한들 나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하였다.홍유범(洪由範)145)의 증조부는 효성과 사랑이 두루 지극하였다. 나이 13세에 땔감을 짊어지고 돌아오다가 부모가 서로 성내며 다투는 것을 보고 곧바로 문을 두드리며 노래하였다. 부모가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반드시 한 쪽이 이길 것이니 이것은 승전고(勝戰鼓)입니다." 하니, 부모가 듣고 서로 웃다가 다툼이 마침내 풀어졌다. 뜻밖에 13세 아이의 의견이 이와 같았는데 만약 옳고 그름을 따져서 그 다툼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반드시 다툼을 해결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진잠(鎭岑)의 두만촌(斗滿村)에 사는 김재로(金材老)는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일찍이 기름을 탁자 위에 두었는데 노모가 물로 여겨 땅에다 버리자 그 어린 아들이 놀라서 말하기를 "어째서 기름을 버리십니까?" 하니, 그 아내가 듣고 재빨리 가서 아이의 입을 가리고 끌고 나가 병과(餠果)를 주며 말하기를 "할머니가 기름인 줄 알게 되면 마음이 반드시 편치 않으실 것이니 조심하여 다시는 말하지 말거라." 하였다. 김재로가 밖에서 돌아와 그 아들이 병과를 먹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할머니에게 드릴 음식을 다 먹어버리는 것이냐?" 하니, 그 아들이 까닭을 말하였다. 김재로가 돌아와 그 아내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우리 노모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으니, 감히 절을 드립니다." 하였다. 이 두 사람의 효성은 옛사람에게 구하여도 듣기 어려우니, 부모를 섬기는 선비들은 마땅히 본받아서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선생이 제생(諸生)에게 묻기를 "공자가 광(匡) 땅에서 경계할 일을 당했을 때146)에 공자는 죽음을 면할 수 있으나 안자(顔子)가 장차 해침을 당할 경우, 공자는 죽음으로써 구원하려 하겠는가, 장차 피하려 하겠는가?" 하자, 임종두(林鍾斗)147)가 대답하기를 "마땅히 죽음으로써 구원하였을 듯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었을 때148)에 도적들이 자유를 죽이려 하였는데 공자가 때마침 이르렀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자, 내가 대답하기를 "자유가 이미 관직에 있어서 피할 수 없다면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의리에 마땅한 바이니, 공자가 죽음으로써 자유를 구원하는 것은 마땅치 않을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의 소견도 이와 같다." 하였다.물에 성인의 덕이 있는데, 만물을 길러주는 것은 인(仁)이고, 때에 맞게 물을 대어주는 것은 의(義)이고, 물을 대어 적당하게 조절해주는 것은 예(禮)이고, 두루 흘러 막힘이 없게 하는 것은 지(智)이고, 네 가지를 모두 충족해주는 것은 신(信)이다. 다섯 가지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위대하도다, 물의 덕 됨이여!매산(梅山 홍직필)은 의리로써 문인을 가르쳤고, 전재(全齋)149)는 예절로써 문인을 가르쳤기 때문에 매산 문인의 역행(力行)이 전재 문인에 미치지 못한다.김병주(金炳周)150)가 묻기를 "성(性)은 이(理)인데 장자(張子)는 이르기를 '태허(太虛)와 기화(氣化)를 합해서 성(性)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151) 하니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이(理)는 기(氣)와 합쳐지지 않아 본래 이(理)일 뿐인데 어찌 성(性)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조 감사(趙監司)가 완영(完營 전라 감영)과 합치되지 않은 것처럼 본래 조(趙) 아무개일 뿐인데 어찌 감사의 명칭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임종두(林鍾斗)가 묻기를 "무릇 천하의 일은 그 이치가 한 가지이니, 의술을 아는 이는 사람의 병을 보게 되면 반드시 약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가령 안자(顔子)가 노(魯)나라에 있을 때에 계씨(季氏)가 정사를 어지럽힌 것을 보았다면 노나라 임금에게 계책을 올려 크게 다스리게 하는 것이 의원이 병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의리에 해가 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그러하나, 가령 처녀가 의술을 알고 있는데 이웃집 남자에게 병이 있다면 사사로이 그 남자에게 치료방법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종두가 말하기를 "여자는 아무런 뜻이 없다 하더라도 혐의가 없지 않을 것이니 알려줘서는 안 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선비와 나라 임금의 관계 또한 처녀와 남자의 관계와 같으니, 자신이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 정사를 도모한다면 벼슬을 구한다는 혐의가 없지 않으리라." 하였다.성인이 덕을 닦는 것은 부유한 사람이 재물을 모으는 것과 같아서, 비록 오랫동안 쌓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긴다. 대개 도리의 무궁함만 알고, 나에게 있는 것이 넉넉하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인(仁)'자를 오로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곳이 있으니, 예컨대 "삼대(三代)가 천하를 얻은 것은 인(仁) 때문이고 천하를 잃은 것은 불인(不仁) 때문이다."152)와 같은 부류가 이것이다. -계묘년(1903)에 들은 것이며, 아래도 이와 같다.-"인(仁)을 자신의 임무로 여긴다."153)에서 '임(任)'자는 태어나서 처음부터 짊어지고 온 것이지 중간에 이 물건을 짊어지고 온 것이 아니기에, 아버지도 그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없고 아들도 그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없으며 단지 자신이 힘을 다해 짊어지고 가는 데 달려있다.천하의 인품(人品)에는 네 가지 등급이 있는데, 유가에서는 본성을 회복하는 것으로써 도(道)를 삼고, 불가에서는 마음을 밝히는 것으로써 도를 삼고, 세상의 학문하는 사람은 객기(客氣)로써 도를 삼고, 세속의 사람들은 몸을 봉양하는 것으로써 도를 삼는다.사람의 한 몸을 한 나라에 비유하면, 성(性)은 임금과 같고 마음은 재상과 같으며 이목구비(耳目口鼻)는 백관(百官)과 같다. 그 사이에서 주재하여 작용하는 것이 마음이니, 반드시 그 이목구비를 제어하여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면 엎어져 깨어지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주인이 되어 성(性)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다면 또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문】불가(佛家)에서 "사람의 몸은 허깨비 같은 살과 껍질이고, 사람의 마음은 허깨비 같은 식견이며, 사람의 본성은 진여(眞如)이다." 하였으니, 불씨(佛氏) 또한 마음을 도(道)로 인식하지 않은 듯합니다.【답】불씨가 "마음이 곧 부처이니 사람이 마음을 깨닫는다면 대지에 작은 흙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어찌 마음을 도로 인식한 것이 아니겠는가. 불가에 육식(六識)154)ㆍ칠식(七識)ㆍ팔식(八識)의 설이 있어 망령된 인식을 없애고 참된 인식과 계합하려 하였는데, 참된 인식이 바로 본각(本覺)155)이니 본각이 어찌 마음이 아니겠는가. 또 상산(象山)156)의 '마음이 곧 이(理)'라는 말을 선현(先賢 여기서는 주자)이 선학(禪學)으로 지목하였으나, 가령 불씨가 마음을 버리고 본성을 높였다면 상산을 선학으로 지목한 것 또한 그 사실과 맞지 않게 된다. 불씨의 이른바 '견성성불(見性成佛)'157)이 과연 천명(天命)의 성(性)을 인식한 것이겠는가. 달마(達摩)158)가 양(梁)나라 무제(武帝)에게 고하기를 "맑은 지혜가 오묘하고 원만하니 몸이 절로 비고 고요해진다.〔淨智妙圓 體自空寂〕" 하였는데, 다만 이 여덟 글자가 이미 불가의 오묘함을 극진히 표현했으니, 이것이 어찌 마음을 가리켜 본성으로 여기는 견해가 아니겠는가.【문】석씨(釋氏 석가모니)가 마음의 측면에서 공부해 가고 나도 마음의 측면에서 공부해 가는데, 만약 저 석씨를 의심하여 '심(心)'자를 꺼린다면 이는 전갈을 싫어하면서 지붕을 이는 것과 같습니다.【답】마음의 측면에서 공부하는 것은 본래 피차의 구분이 없는데, 다만 저 석씨는 영명각식(靈明覺識)으로 근본을 삼고 우리는 인의예지(仁義禮智)로 근본을 삼으니, 이것은 도리어 같지 않다.【문】지금 세상에 선학(禪學)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 도(道)를 해치는 것이 얼마나 큽니까?【답】저들이 비록 선학을 배운다 하더라도 마음을 보존하는 한 가지가 매우 정밀하여 오히려 우리 유가의 덕성(德性)을 높이는 것보다 낫지만 객기(客氣)에 부림을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한다.석씨(釋氏)의 이른바 '진여(眞如)'는 과연 우리 유가의 이른바 '천명지성(天命之性)'과 같은가? 우리 유가의 이른바 '성(性)'에 어찌 일찍이 공명영각(空明靈覺)의 형상이 있었는가. 저 석씨의 이른바 '성'에 어찌 일찍이 인의중정(仁義中正)159)의 이치가 있었는가. 그가 말하는 견성(見性)의 성(性)과 반야(般若)ㆍ여래(如來)ㆍ신통묘용(神通妙用) 등은 우리 유가의 이른바 '마음〔心〕'이라는 것에 불과하다.마음의 측면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유가와 불가가 다를 게 없다. 다만 우리 유가는 고요할 때는 도(道)의 본체를 보전하여 지키고 움직일 때는 의(義)의 운용을 극진히 펴는데, 저 불가는 고요할 때는 공명성적(空明惺寂)에 그치고 발동할 때는 또 성찰하여 사욕을 극복하거나 옛것을 따르며 법도를 지키는 것도 없으니, 이것이 다른 점이다. 대개 고요할 때에 도의 본체를 지키고 움직일 때에 의의 운용을 펼친다는 두 구절은 바로 우리 성인 문하의 한 가닥 정맥(正脈)이어서 이단(異端)과 속학(俗學)이 어지럽힐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도를 배운다고 말하면서도 이 두 가지 말에 의지할 때는 적고 어긋날 때는 많으니, 그 어긋날 때에는 도리어 석씨와 구별이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이단(異端)은 본래 종자가 없고, 마음의 주재와 작용이 성명(性命)의 이(理)에 근원을 두지 않으면, 바로 이것이 이단이다." 하였다.법관(法官)이 되어 죄 없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잘못 죽인다면 나중에 반드시 재앙을 받게 되니, 이는 천도(天道)가 그러한 것이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으니 선비가 글을 쓸 때에 혹 정밀하게 살피지 않아 선인(善人)을 잘못 배척한다면 그 재앙을 받는 것이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못하겠는가.선생이 제생(諸生)에게 묻기를 "선비가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을 혹자가 기롱하면서 '이윤(伊尹)과 같은 덕이 없으면서 이윤과 같은 출처(出處)를 모방하려 한다.'고 하면, 이 말은 어떠한가?"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이윤의 덕이 성대한 까닭은 출처가 의리에 합당한 것을 으뜸을 쳤기 때문인데, 후세 사람으로 이윤과 같은 출처를 배우는 자는 바로 이윤과 같은 하나의 덕을 지닌 것이니, 기롱을 가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듯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최장(崔丈)이 일찍이 이것으로 선사(先師 임헌회)를 기롱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자식을 가르칠 때에 마땅히 어진 이를 가려서 스승으로 삼아야 하고, 단지 문장을 잘하는 사람을 취하여 스승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사람이 자식을 가르치는 것을 볼 때마다 사람이 어진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피지 않고 단지 문장을 잘하는 사람을 취하여 스승으로 삼았다가 끝내 자식을 그르쳤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문】서인(庶人)의 아내를 유인(孺人)이라고 칭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 아니겠습니까?【답】《예기》에 이르기를 "예가 궁하면 동일하게 적용한다.〔禮窮則同〕"160) 했으니, 선비의 아내를 유인(孺人)이라고 칭할 수 있다면 서인의 아내 또한 유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주제넘은 짓은 아니다. 다만 상인(常人)이나 천인(賤人)의 아내는 유인이라고 칭해서는 안 된다."남의 후사가 된 자는 계모(繼母)가 살아계시면 계모의 족당을 외가의 친척으로 여긴다."는 것은 우암(尤菴)의 설이다. "후사로 들어간 사람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이지 어머니의 뒤를 잇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전모(前母)의 족당을 외가의 친척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은 본암(本菴)161)의 설이다. 매산(梅山 홍직필)과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등 여러 현인은 본암의 설이 준엄하고 엄정하여 따를 만하다고 하였다.선비의 견식(見識)에는 두 갈래가 있으니, 견해가 높고 지식이 바른 사람은 의리가 밝게 드러나 일처리가 마땅함을 얻고, 견해가 많고 지식이 넓은 사람은 세속의 풍습에 물들어 일처리에 착오가 많다.불가(佛家)의 시에 이르기를 "아미타불은 귀머거리가 아니건만, 아미타불을 외고 또 외니 그대를 어찌할꼬. 온 산에 비바람 치고 인적조차 없는데, 갑자기 만난 건 곧 자기 자신이라네.〔阿彌陀佛非聾漢 念念彌陀柰爾何 滿山風雨無人境 驀地相逢卽自家〕" 하였으니, 이것은 불교를 배우는 사람이 말할 적마다 반드시 아미타불을 일컫지만 세속의 번뇌가 소멸되는 날에 이르면 자기 자신이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우리 유가도 역시 그러하니, 성현을 배우는 사람이 말할 적마다 반드시 공자와 맹자를 일컫지만 사사로운 욕심이 말끔히 사라지고 도덕이 성대하게 수립될 때에 이르면 자기 자신이 곧 공자와 맹자가 되는 것이다.천지에 흠결이 생기면 반드시 성현을 기다려 보수하니, 천지는 하나의 집과 같고 성인은 집주인과 같다. 집이 파괴되면 주인은 반드시 자제와 동복(僮僕)을 계칙(戒飭)하여 나무와 돌을 실어 날라 고쳐 수리할 것이다. 천지에 흠결이 생기면 성인은 반드시 후생들을 훈계하여 인의(仁義)를 가르치고 예악(禮樂)을 바로잡아 보완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과 성인의 관계는 자제ㆍ동복과 집주인의 관계와 같으니, 그 가르침을 따르고 그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군자의 군(君), 나라 임금의 군(君), 군자의 자(子), 자남(子男)의 자(子)를 보면 옛날에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군(君)이 되거나 반드시 자(子)가 되었고, 덕이 없는 사람은 농부나 장인이나 소인(小人)이 되었다. 그래서 후세에는 반드시 군과 자의 지위에 있지 않더라도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고 칭하고, 군과 자의 지위에 있더라도 덕이 없으면 소인(小人)으로 지목하였다. 이는 구산(龜山)162)의 설에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데, 혹 '군(君)'자를 '나라 임금'의 군(君)으로, '자(子)'자를 '백성을 자식처럼 여긴다'는 자(子)로 여겼으니, 잘못이다.【문】아버지와 스승이 함께 앉아있을 때에 누구에게 먼저 절하고 누구에게 나중에 절합니까?【답】나이로 순서를 정한다.【문】아버지와 아들이 한 스승을 섬길 적에 아버지의 나이가 그 스승보다 많은데 한 자리에 함께 앉아있다면, 그 아들은 절할 때에 누구에게 먼저 하고 누구에게 나중에 합니까?【답】마땅히 그 스승에게 먼저 절해야 한다. 설사 증석(曾晳 증자의 아버지)의 나이가 공자보다 많더라도, 증자(曾子)는 결코 증석에게 먼저 절하고 공자에게 나중에 절해서는 안 된다.증자(曾子)의 역책(易簀)163)을 논하기를 "증자가 호흡이 곧 끊어지려 할 때에 한 번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부축하여 자리를 바꾸어 깔았으니, 그 용감한 행위가 어떠하였던가. 임종할 때에도 오히려 그러했거늘 하물며 평상시에 이미 잘못을 알았다면 힘써 고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증자가 역책한 한 가지 일을 항상 가슴속에 두고 생각하기를 '증자는 매우 위급하고 매우 어려울 즈음에도 오히려 이처럼 용감하게 결정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나는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허물이 있으면 고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해야 한다. 이것으로 마음을 세우고 힘써 행한다면 아마도 의거할 바가 있어 쉽게 효과를 얻게 되리라." 하였다.근세 이후로 한미한 후손과 쇠잔한 족속이 선계(先繼)를 잃어버린 경우에 우족(右族 명망 있는 집안)에게 붙여서 그 자신을 현달케 하려고 하니, 이것은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 죄이다. 나 또한 선계를 잃어버려 지극한 애통이 심장을 뚫는 듯했는데 다행히 선조의 영령에 힘입어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평생 남의 집안의 족보 서문을 쓰지 않았으나, 유독 잘못된 족보를 바로잡아 달라고 찾아와 청하면 곧 사양하지 않고 지었다. 어떤 사우(士友)들은 내가 부귀와 권세를 좇지 않고 한미한 문중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고, 곧 그 선대의 잘못된 족보를 고친 경우가 7, 8가구가 되었다. 나는 평생 세상에 보탬이 없었으나, 스스로 이 한 가지 일만은 세상의 교화를 크게 돕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다고 여긴다.선생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우옹(尤翁 송시열)에게 '만물은 모두 동정(動靜)이 있는데 매화의 동정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우옹이 '향기가 날 때는 동(動)이고 향기가 없을 때는 정(靜)이다.' 라고 답하였다. -여기까지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마치 합환초(合歡草)가 밤에는 꽃잎이 닫치고 낮에는 벌어지는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이 동정이다." 하였다. 내가 청하기를 "매화의 꽃과 잎이 모두 피었을 때는 동이고, 꽃도 없고 잎도 없을 때는 정인 것과 같은데, 이와 같이 말하면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우옹과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움직임 속의 동정을 말한 것이니, 그 근본을 미루어 가면 어찌 이와 같을 뿐이겠느냐. 매화나무의 싹이 흙 속에 있을 때는 정이고 싹이 흙 위로 나와 길게 자라는 것은 동이며, 아직 싹이 나지 않았을 때는 정이고 이미 싹이 나온 뒤는 동이다." 하였다.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은 생민(生民)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비․이슬․서리․눈이 그 가르침이 아님이 없는데 사람이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면 하늘이 반드시 재앙을 내려 깨우쳐 준다. 비유하면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스승이 제자에 대해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는데 자식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고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면 아버지와 스승은 반드시 노여움과 꾸짖음을 더할 것이다. 그래서 생민이 하늘의 재앙을 보고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면 하늘은 반드시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할 것이고, 자식과 제자가 아버지와 스승의 꾸짖음을 받고서 괴로워도 원망하지 않으면 아버지와 스승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논어》욕기장(浴沂章) 집주(集註)의 "만약 통달했다면 바로 이러한 기상일 것이다.〔若達却便是這氣象〕"에 대하여, 퇴계(退溪)는 '달각(達却)'으로 구두를 떼었고 후대 학자들은 또 대부분 '달(達)'자로 구두를 떼었는데, 내 생각도 '달'자로 구두를 떼는 것이 나을 듯하다.아버지가 계시는데 어머니 상을 당하여 15개월이 지났어도 담제(禫祭)를 지내지 않는 경우를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천(伊川) 선생164)이 '예(禮)는 한 번 잃으면 오랑캐가 되고 두 번 잃으면 짐승이 된다.'165)고 말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하였다.【문】종가와 멀리 떨어져 살고 사세(事勢)에 구애되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면, 지방(紙榜)으로 제사를 지내도 됩니까?【답】주자가 황자경(黃子耕)에게 답한 편지에 이에 관한 설명이 있다. 내 선친도 종가와 멀리 떨어져 살아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여겼는데 주자의 이 말을 따라 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바른 예법은 아닌 듯하다.【문】계모(繼母)의 부모에 대해서는 예법에 상복이 없으나 만약 어려서 그분에게 거두어 길러준 은혜를 입었다면 어찌해야 합니까?【답】흰 띠를 석 달 매어 정을 펴는 것이 좋겠다.사람이 어진 선비를 사랑하는 것은 꽃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비슷하다. 꽃의 오묘함은 그 빛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향기를 맡는 것인데 꽃을 꺾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면 잠깐 사이에 곧 시들어버린다. 어진 선비를 예로써 공경하지 않고 초빙하여 자기를 위해 부리면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여 선비가 선비답게 되지 못한다.우리나라 사람은 지위가 없는 사람을 '유학(幼學)'이라 하고, 심지어 자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일컬어 또한 '유학'이라고 하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 《예기(禮記)》에서 "사람이 태어나 10세가 되면 '유(幼)'라 하는데 이때 비로소 입학한다." 하였으니, 유학(幼學)이란 10세를 지칭했을 뿐이다. 그런데 8, 90세의 노인 또한 유학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유학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10세의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니, 어찌 망언이 아니겠는가.할아버지의 첩에 대해서 본래 상복이 없으나, 만약 거두어 길러준 은혜가 있다면 시마복(緦麻服)166)을 입는 것이 좋겠다.갑진년(1904, 광무8) 여름에 전라북도 안찰사 이(李) 아무개167)가 선생을 초빙하여 명륜당(明倫堂)에서 강회를 열었다. 선생이 〈공손추(公孫丑)〉 첫 장 집주(集註)에 나오는 양씨(楊氏)의 설을 논하기를 "양씨가 자신이 말 모는 것을 법대로 해서 짐승을 잡지 못한 것을 자로(子路)에 비유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짐승을 만나서 잡는 것을 관중(管仲)에 비유하였으니, 그 뜻은 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의 이치로 말하면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공자가 이미 '자로의 재주는 제후국의 부세(賦稅)를 처리할 수 있다.'고 칭찬했고, 자로도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작은 제후국이 대국(大國) 사이에 끼여 군사들이 쳐들어오고 기근까지 겹쳤을 때에 내가 그 나라를 다스린다면 3년 만에 백성들을 용맹스럽게 만들고 또 의로운 길로 향할 줄 알게 하겠다.'168) 하였다. 3년 동안 다스려도 오히려 또한 이와 같은데 하물며 40여 년이나 오랫동안 관중처럼 제(齊)나라를 다스렸다면 그 공적이 어찌 관중보다 못했겠는가. 이러한 뜻은 김인산(金仁山)169)이 이미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이후로 현인들 중에서 조정에 서서 국정을 맡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이것은 대개 조정에서 유학자는 정사를 보는 재주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래서 징벽(徵辟)170)하는 것은 외양만 꾸민 형식이었고 진심이 아니었다." 하였다.이로 인하여 안찰사에게 말하기를 "나의 이 말이 비록 시휘(時諱 당시에 꺼리는 일)인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서 수암 이후로 현인들이 국정에 맡았다면 결단코 장동(壯洞)ㆍ박동(璞洞)ㆍ운현(雲峴)의 두세 집안이 했던 바와는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비록 유학자는 정사를 보는 재주가 없다고 말하지만 현인들은 반드시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니, 진실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설령 시대가 나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차라리 깨끗함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오늘날과 같이 오랑캐의 신첩(臣妾)이 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 폐단은 학문과 정사를 둘로 나누어보는 데서 말미암습니다. 유학자는 '하늘의 이치에 통하고 남보다 뛰어난 학문이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이미 학문으로써 인재를 취하지 않는다면 어찌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공부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조정에서는 '유학자들은 단지 성명(性命)과 태극(太極)을 말할 뿐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어두우니 취하여도 쓸 곳이 없다.'라고 말하니, 두 가지가 상반되는데 어떻게 일을 이루겠습니까. 반드시 학문과 정사가 하나로 합치된〔學政合一〕 뒤에야 천하가 다스려져 편안할 것입니다." 하였다. -갑진년(1904, 광무8)에 들은 것이며, 아래도 이와 같다.-선생이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지만, 여러 예서(禮書)에는 '향을 피우고 무릎을 꿇는다.' 하였고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운다는 글이 없으니, 서서 향을 피우고 향을 피운 뒤에 무릎을 꿇어도 괜찮으며 나 또한 이대로 행하고 있다. 축문을 읽을 때에 《가례(家禮)》에는 '주인 이하 모두가 무릎을 꿇는다.'는 글이 없다가 《의절(儀節)》171)에서 처음 나왔는데, 지금 비록 온 세상이 공통적으로 행한다 하더라도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행하지 않아도 괜찮다. 돌아가신 부모의 기제(忌祭)에 먼저 재배하고 곡하여 슬픔을 다하거나 먼저 곡하여 슬픔을 다하고 재배하는 것이나 두 가지 다 행할 수 있다." 하였다.호남(湖南)의 학자들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규모(規模)로 인하여 몸단속에 힘쓰지 않으니 이것이 크게 염려스럽다. 예전에 우리 선사(先師 임헌회(任憲晦))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공손히 하는 일에 근신하여 비록 안방에 들어가더라도 의대(衣帶) 같은 옷차림을 바르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가 입이 닳도록 고하여 경계하는 까닭은 제군(諸君)과 더불어 선사의 법문(法門)을 삼가 지켜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문】소군(小君)172)의 상복을 벗기 전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지 않는데, 상복을 벗은 뒤에는 행할 수 있습니까?【답】상복은 벗었다 하더라도 궤연(几筵)이 철거되지 못했으니 행해서는 안 된다. 매산(梅山 홍직필) 선생이 내상(內喪)173)의 연제(練祭)174)를 마친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왕이 만들어 놓은 예법이 성행했을 때에도 감히 이처럼 하지 못했는데 지금 이렇게 법을 어기는 일이 벌어졌으니 세도(世道)가 쇠퇴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였고, 전재(全齋 임헌회) 선생도 말하기를 "국상(國喪)의 소상(小祥)을 마친 뒤에 신하와 백성들은 마땅히 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향음주례 또한 음악과 노래가 있으니 행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중용장구》에서 오륜(五倫)으로 '천하의 공통된 도〔達道〕'를 풀이했으니, 오륜이 바로 이(理)이다.어떤 사람이 삼달덕(三達德)175)을 가리켜서 이(理)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보통으로 추잡하고 어긋난 것이 아니다. 《맹자》〈진심장(盡心章)〉집주에서 "하늘의 이치를 알아 요절과 장수로 그 마음을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은 앎의 극진함이다." 하니, 바로 달덕(達德)의 지(知)이고, "하늘을 섬겨 몸을 닦아 죽음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인(仁)의 지극함이다." 하니, 바로 달덕(達德)의 인(仁)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처럼 말한다면 이 장(章)의 지와 인 또한 이(理)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자(知者)와 인자(仁者)가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따르기 때문에 이(理)라고 말한다면 괜찮다.《중용》에서 "천하와 국가를 고르게 다스릴 수도 있고, 관작과 녹봉을 사양할 수도 있으며, 서슬 푸른 칼날을 밟고 죽을 수도 있으나, 중용의 도는 잘 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이 세 가지는 천하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그 속에 들어있다. 오랑캐를 남김없이 다 물리쳤다 하더라도 중용의 도는 잘 하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유씨(柳氏)는 오랑캐를 오히려 물리칠 수 없는데 갑자기 권도(權道)로 중용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것인가. 대저 김씨(金氏)의 문인들은 한갓 절의(節義)와 사공(事功)만을 숭상하고 출처(出處)의 의리(義理)에 대해서는 도무지 묻지 않았으며, 홍씨(洪氏)와 백씨(白氏) 두 사람은 서슬 푸른 칼날을 밟고 죽었다고 할 수 있으나 중용에 대해서는 거리가 멀다.배우는 사람이 모름지기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래도록 생각하며 반복해서 사색하여 의심나는 곳이 있은 뒤에 선생이나 어른에게 질문하면 곧 한 번 듣고서 종신토록 체득하여 인식할 수 있다. 만약 전혀 사색하지 않고 이쪽저쪽 둘러보다가 갑자기 와서 질문한다면 질문하는 사람에게 애초에 알려고 애쓰는〔憤悱〕176) 공부가 없어서 비록 계발(啟發)해주는 가르침을 베푼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귀에 담아 마음에 보존할 수 없으니, 사색하는 길이 끝내 통하지 않을 것이다.도(道)는 높지도 멀지도 않는데, 지금 사람들은 어찌 한사코 비근(卑近)한 것을 싫어하여 할 것이 못된다고 여기고 갑자기 알기 어려운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말하는가. 어제 아무개가 한 말은 이러한 병통과 관련된 듯하다. 대저 배우는 사람이 어려운 것만 골라서 묻고 쉬운 것만 골라서 행하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현재 오랑캐 나라에 있다면 오랑캐 나라에서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한다.〔素夷狄 行乎夷狄〕'177)는 것은 비록 오랑캐 나라에서도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함을 말한 것이다. 평상시로 말하면 예컨대 말은 진실하고 미덥게 하며 행동은 독실하고 신중히 하는 것178)이 이것이고, 변란시로 말하면 예컨대 명(明)나라 말기의 사대부들이 머리털을 온전히 하고 죽은 것이 이것이다. 인하여 제생(諸生)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오랑캐의 자리에 있다가 머리털을 깎는 변란을 당했다면 차라리 목숨을 바칠지언정 머리털을 훼손할 수는 없으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맞추어 행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혹자가 이르기를 '오랑캐 나라에서 행한다는 것은 오랑캐의 행실을 행하는 것이다.' 하니, 의리로 헤아려보고 문세(文勢)로 살펴보아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기꺼이 오랑캐 짓을 하자는 말이니 애초에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하였다.김연술(金淵述)179)이 묻기를 "어떤 사람이 '가령 공자가 머리털을 깎는 변란의 세상을 당했다면 성인은 본래 권도(權道)에 통달한 분이니 반드시 머리털을 깎지 않다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어떻게 여기신지요?"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권도에 통달함을 가지고 성인을 말한 것은 대개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 만고에 떳떳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떳떳한 도리를 말하였다면 감히 마음을 내어 이러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권도에 통달함을 말했던 것이고, 이 사람은 명분상 성인의 권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실은 살고 싶은 사사로움을 이루려 한 것이다. 만약 성인의 성대한 덕은 절로 오랑캐를 감화시킬 수 있어 저들로 하여금 감히 손댈 수 없게 한다고 말했다면 괜찮을 것이다." 하였다.배우는 사람은 식견이 높다 하더라도, 그리고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일상의 자잘한 예절에 대해 신중을 기한 뒤에야 덕을 온전히 하게 된다. 사상채(謝上蔡)180)는 식견이 높아서 여러 선비들이 미칠 바 아니었으나 작은 예절을 삼가지 않았는데, 일찍이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예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며 말하기를 "용모를 바르게 하고 절차에 신중히 하는 것은 예의 근본이 아니다." 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선학(禪學)으로 흘러들었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개 성명이기(性命理氣)의 설만 숭상하면 일상의 자잘한 예절은 경시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경시하게 된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시절에는 단지 순박한 기상일 뿐이었고, 퇴계와 율곡의 시절에 성리설(性理說)이 크게 밝아진 뒤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질이 뛰어나서 함께 배울만한 자들은 단지 허공에 매달린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의 이치를 말할 뿐, 용모와 말투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없다고 여기니, 만약 큰마음과 큰 역량을 갖춘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순박한 경지로 되돌려 공자 문하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규모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논어》의 "진실로 인에 뜻을 둔다.〔苟志於仁〕"181)는 장을 논하고, 제생(諸生)에게 묻기를 "'의(矣)'자는 단정하는 말이니 마땅히 '악이 없다.〔無惡〕'의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인에 뜻을 둔다.〔志仁〕'의 아래에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인에 뜻을 두더라도 진실로 결연(決然)하지 않으면 악이 없을 수 없기에 단정하는 말인 '의(矣)'자를 '인에 뜻을 둔다.'의 아래에 둔 것이니, 결연히 인에 뜻을 둔 뒤에야 악을 없앨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참으로 《논어》의 문장이 절묘하니 이러한 곳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지금 세상의 배우는 사람들이 실제로 힘쓰지 않음을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날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부주(涪州)182)에서 돌아왔을 때에 문인들이 모두 오랑캐 풍습에 휩쓸렸으나 오직 사씨(謝氏)와 양씨(楊氏)183) 두 사람만 크게 진보해 있었다. 가령 이천으로 하여금 우리들과 사씨․양씨 두 사람을 비교케 한다면 안목을 틔어주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겠지만 대저 이것은 매우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예의범절을 행하는 사이에 예모(禮貌)를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웃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생이 정색을 하고 꾸짖기를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한지국(韓持國)184)과 동행할 때에 한씨의 자제들이 수행하면서 사사로이 웃고 떠들자, 이천이 꾸짖기를 '너희들이 어른을 수행하면서 감히 웃고 떠들다니, 한씨의 효성스럽고 근신하는 가풍이 쇠하였구나.' 하였다. 정석당(鄭石塘)이 일찍이 연산(連山)의 김씨(金氏)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려고 문밖으로 나왔을 때에 김씨 소년이 그의 의관(衣冠)이 넓고 커서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서로 어울려 웃자, 석당이 도로 들어가 불러서 꾸짖기를 '너희들은 법가(法家)의 자제들인데 감히 웃으면서 손님을 전송하느냐?' 하니, 주인이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대들은 모름지기 이런 아름답지 못한 습성을 절대 금해야 한다." 하였다.폐백을 갖추어 《관선록(觀善錄)》에 들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 일은 다만 마음의 허(虛)와 실(實)에 달려있을 뿐, 폐백의 있고 없음에 달려있지 않다. 내 나이 21세에 폐백을 갖추어 전옹(全翁 임헌회(任憲晦))을 찾아뵈었는데, 전옹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스승으로 자처한 적이 없었으니, 무릇 폐백을 가지고 오는 경우는 일체 받지 않았고 문인(門人)으로 부른 경우는 《문회록(文會錄)》에만 썼기 때문에 그대에게도 감히 받지 않는 것이다. 오직 그대는 물건을 폐백으로 삼지 말고 다만 마음을 폐백으로 삼아라.' 하였다. 나는 마음으로는 불만스러웠지만 감히 굳이 청하지 못하였는데 나중에 보아도 역시 한 곳에서도 받은 것이 없었다. 내가 비록 전옹에게 폐백을 바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세에 나더러 행실을 닦지 않아 전옹에게 누를 끼쳤다고 하면 내가 수긍하겠지만, 반드시 나를 전옹의 문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유문(儒門)에서 교유할 때에는 사람의 선악을 볼 뿐 색목(色目 사색당파(四色黨派))에 얽매여선 안 된다. 선배들이 이미 행한 일로 참고해 보면, 영남(嶺南)의 안(安) 아무개가 처음에 사계(沙溪 김장생)를 배척하였다가 나중에 곧 덕을 따르고 행실을 고쳤기 때문에 도암(陶菴 이재)이 그의 행장(行狀)을 지었고, 유시수(柳始秀)185)는 유위한(柳緯漢)186)의 후손인데 스스로 그 선조의 잘못을 알았기 때문에 화서(華西 이항로)가 받아들여 문인으로 삼고 매옹(梅翁 홍직필)이 서로 어울렸으니, 이상에서 여러 현인들이 남긴 일은 좇아 행할 만하다.계수(稽首)187)로 절하는 것은 임금ㆍ스승ㆍ아버지 앞에서만 행하지만, 당시 임금부터 태조(太祖)까지, 아버지부터 시조(始祖)까지도 모두 행할 수 있다. 스승은 그대들이 이미 나를 스승이라고 불렀으니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도 모두 행할 수 있으나,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와 숙재(肅齋 조병덕(趙秉悳))는 매우 존경하고 흠모하더라도 돈수(頓首)188)로만 행하는 것이 옳다.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ㆍ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ㆍ우암(尤庵)ㆍ사계(沙溪)ㆍ율곡(栗谷)ㆍ퇴계(退溪)는 또 전재와 매산 두 선생의 연원(淵源)이 있는 곳이고, 거슬러 올라가보면 주자(朱子)부터 이천(伊川)ㆍ명도(明道)ㆍ횡거(橫渠)ㆍ염계(濂溪)를 거쳐서 공자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ㆍ요 임금ㆍ순 임금ㆍ우 임금ㆍ탕 임금ㆍ문왕ㆍ무왕ㆍ주공까지 모두 계수(稽首)를 행할 수 있다.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동(動)을 위주로 해서 말한 것이지만 도심은 정(靜)에까지 관통한다. 발동하지 않았을 때〔未發時〕에 마음이 항상 깨어 있으면서 고요함을 간직하는〔惺惺寂寂〕189) 것이 도심이다.미발(未發)의 공부는 초학자가 착수하기 어려우니, 우선 형체와 자취가 있는 곳에서 법도를 따라 행하며 공부하는 것이 옳다.공경하여 한 번의 태만함도 용납치 않은 뒤에야 공경하는 마음이 태만한 마음을 이겼다190)고 말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태만한 뜻이 있으면 바로 태만한 마음이 공경하는 마음을 이긴 것이니, 의리와 욕망 또한 그러하다.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문인 중에 저녁 후에 물러나려고 하면서 절하는 예절을 행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수종재가 그만두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감히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니 스승의 예법을 시행할 필요가 없고, 또 그대가 절하면 내가 반드시 일어나 답례해야 하는데, 어찌 꼭 사람을 매번 일어서게 하려는가. 스승과 제자의 예법으로 말하더라도 본래 새벽과 밤에 절하는 절차는 없다. 대개 어버이를 섬기는 예법은 〈내칙(內則)〉에 잘 갖추어져 있으나 새벽과 밤에 절하는 절차가 없는데, 우리나라에서 신재(愼齋)191)가 처음으로 절하는 예법을 시행하여 마침내 세속의 예법을 이루었다. 대저 감히 신재가 행한 바를 타당치 않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다만 그것에 근거하여 경례(經禮)로 삼을 것까지는 없기 때문에 오촌(鰲村 송치규(宋穉圭))은 앉아서 절을 받을 곳이면 절을 받고 그밖에는 그만두게 했다."라고 하였다. -인용은 여기까지이다.-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명도(明道) 선생이 일찍이 칭송하기를 "강절(康節)이 이정지(李挺之)에게 술법을 배우면서 앉을 때에는 반드시 절하고 밥 먹을 때에는 반드시 난삼(襴衫)을 입었는데 야점(野店)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했다."192) 하였다. 앉을 때에 반드시 절하는 것이 새벽과 밤에 절하는 것보다 번거로웠으나 명도에게 칭찬을 받았으니, 새벽과 밤에 절을 하는 것은 더욱 그만둘 수 없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제자가 절할 때에 앉아서 손을 들어 답례해도 괜찮으니 어찌 꼭 매번 일어서야 하겠는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으로 말하면, 《내칙》에 절하는 절차가 없는 것은 아마도 옛사람이 어버이를 섬길 때에 응당 행해야 하는 절목이었기에 행하면 되었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선생을 길에서 만나 더불어 말하게 되면 마주하고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면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니, 여기에서 비록 절하고 읍(揖)하는 절차를 말하진 않았지만 어찌 절하거나 읍하는 예법이 없이 거만하게 선생을 마주할 리가 있겠는가. 또 당 부인(唐夫人)이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기며 아침마다 계단 아래에서 절하였는데,193) 주자가 이 내용을 《소학》에 실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섬김이 이와 같다면 자식이 어버이를 섬길 때에 유독 이와 같이 하지 않겠는가. 신재가 행한 바를 세속의 예법이라 하면서 이것에 근거하여 경례로 삼을 것까지는 없다 하고 마침내 행하지 않는다면, 주공(周公)의 《의례(儀禮)》에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이 이처럼 잘 갖춰졌으나 신랑과 신부가 교배례를 행하는〔婿婦交拜〕 글은 여기에 보이지 않는데 곧 후세에는 시행하는 예법이 되었으니, 이 또한 세속의 예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근거로 삼아 경례로 여길 수 없다고 하여 행하지 않아야 하는가?김관수(金觀洙)194)가 묻기를 "근세에 유가에서 서로 종유하는 법도는 집지례(執贄禮)195)를 행하여 스승과 제자를 정하면 '문인 소자(門人小子)'라고 칭하지만, 집지례를 행하여 스승과 제자를 정하지 않았다면 단지 '시교생(侍敎生)'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가 율곡(栗谷)에 대해 이미 스승과 제자가 정해졌는데도 오히려 시교생이라고 칭하고,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우암(尤庵)에 대해 스승과 제자가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소자라고 칭하였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 시교생이라는 호칭을 이미 정한 스승에게 쓸 수 없겠지만, 문인 소자의 호칭에 대해서는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정하지 못했더라도 그 문하에 출입하여 수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진실한 마음으로 복종하여 섬겼다면, 이것으로 칭하여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비록 오로지 호칭 사이에 달려있지는 않지만, 대저 선현들의 법도가 비교적 후세의 주도면밀함에 미치지 못하니 이러한 곡진한 예법은 후세에 이미 정한 관례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또 사계의 일은 스승과 제자를 정하기 전에 있었던 것 같다." 하였다.송군필(宋君弼)196)이 묻기를 "상읍례(相揖禮)의 법식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본래 영남의 유학자 이옥촌(李玉村)이 지은 것인데, 너무나 번거롭고 자질구레하였기 때문에 퇴옹(退翁 퇴계 이황)이 대략 삭제하고 윤색한 것이다. 문하를 멀리 떠나 퇴옹의 문집에 실리지 않게 되자, 옛 것에 근거가 없어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현이 저술한 글이 일실되어 전집(全集)에 실리지 않은 것이 많기도 하니, 우옹(尤翁 우암 송시열)이 평소에 저술한 것도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실리지 못한 게 많았던 것처럼, 문집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의심해서는 안 될 듯하다. 또 근거의 유무를 막론하고 의리에 합당하기만 하면 행할 수 있으니, 어찌 근거의 유무에 구애되어 이치에 합당한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정영겸(鄭永謙)197)이 묻기를 "아내의 숙부와 조카딸의 남편이 나이가 서로 같으면, 그들이 서로 어울리는 예절은 마땅히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마땅히 붕우의 예법으로 서로 어울려야 한다." 하였다.【문】율옹(栗翁 이이(李珥))이 나이가 젊은 자서(姊婿 누나의 남편)에 대해 매우 존경하여 앉을 때마다 반드시 그 아래에 있었으나 구봉(龜峯)198)은 옳게 여기지 않았으니, 마땅히 어느 쪽을 따라야 합니까?【답】율옹이 너무 지나친 듯하니 구봉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다. 어찌 누나의 존귀함으로 인하여 그 남편을 아울러 높일 수 있겠는가. 나보다 3, 4세 많더라도 절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서를 매우 높여 친형과 다름없이 하는 것은 본래 세속의 풍습이다.【문】기년복(朞年服) 이하의 상(喪)에서 이전의 상복을 벗지 못했는데 이후의 상복을 입게 되는 경우, 상복의 경중(輕重)이 같다면 평상시에 어떤 복을 입어야 합니까?【답】마땅히 신분의 높고 낮음으로 정해야 한다.심의(深衣)199) 제도는 학자들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재(全齋 임헌회)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심의의 설은 분분하기 그지없으나 그 제도는 이미 《가례》와 《상례비요》에 드러나 있고, 회옹(晦翁 주자)과 사계(沙溪 김장생)는 모두 대현(大賢)이니 두 선생이 정한 바를 따르면 허물을 적게 하는 방도가 될 만하다." 하였다. 선사(先師)의 말씀이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만든 심의 몇 벌은 그 제도가 각자 같지 않다. 수의(壽衣 죽어서 입는 옷)의 경우에는 《상례비요》를 따라 만들어 두었다.이병은(李炳殷)200)이 묻기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상을 함께 당한 사람이 여묘살이를 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아버지의 묘소에서 해야 합니까, 할아버지의 묘소에서 해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미 한 곳에서만 할 수 없고 또 장소를 나누기도 어려우며 또 이 일은 본래 올바른 예법이 아니다. 극한의 의리로 말하면, 집에 거처하면서 상례를 잘 치르고 여묘살이를 행하지 않는 것이 옳다. 여묘살이를 하려고 한다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위한 공동의 여막을 세워서 한 쪽으로는 할아버지 묘소를 바라보며 지키고 한 쪽으로는 아버지 묘소를 바라보며 지켜서 양쪽에 그 정을 펴는 것이 옳다. 만약 형편에 구애되어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단지 중(重)한 쪽을 따라 할아버지 묘소만 지키는 것이 바로 효자가 아버지의 마음을 따르는 게 된다." 하였다.《근사록(近思錄)》의 '공허하고 적막하여 아무 조짐이 없다.〔冲漠無朕〕'는 조항의 '도철(塗轍)'201)은 마땅히 만 가지 형상〔萬象〕의 '상(象)'자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예컨대 "끌어들여와 상(象)으로 들이도록 하는 것은 이미 이것이 상이니 다만 하나의 상의 이치만 있을 뿐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주자가 "습관이 지식과 함께 자란다.〔習與知長〕"라고 하였는데, 지식은 점점 자라나는 물건이다. 비록 공자의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있기는 하지만 8, 9세의 지식을 갑자기 성인의 지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점점 자라나서 천명(天命)을 아는 데에 이르게 된다.주자가 "글을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찬찬히 보고 나직이 읊조려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소리가 마음속에서 나오고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큰 소리로 읽는 것에만 힘쓴다면 소리가 목구멍과 혀 사이에서 나와 조금도 의미가 없게 된다.선생이 손수 규항(頍項)202)과 치포관(緇布冠)의 모양을 만들어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제도인데 《가례증해(家禮增解)》에 보이니 참고하면 알 수 있다. 나는 시제(時祭)를 지낼 때에 심의(深衣)를 입고 혹 이 관(冠)을 쓰기도 했다.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어 염습(斂襲)할 때에 혹 이 관을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다.' 하였다. 그대도 집에 거처할 때나 제사를 받들 때에 때때로 이 관을 써서, 점차 상고시대 의관의 제도를 회복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라." 하였다.글을 읽을 때에는 다만 전일(專一)해야 하니, 이 한 단락을 다 보지 못했다면 아래 단락을 서둘러 보아서는 안 된다. 또 《논어》와 《맹자》를 읽다가 《시경》과 《서경》을 인용한 곳에 이르러 의심스럽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어 《시경》과 《서경》을 참고해 보아야 한다면, 인용한 단락만 보고 위아래 단락은 절대 보아서는 안 된다.사람이 집에 있으면서 거처와 음식을 편안하고 사치스럽게 한 경우에는 혹 멀리 떠나서 강학(講學)하게 되면 각고의 공부를 하거나 담백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반드시 병이 나게 되니, 그대들은 집에 있을 때에 너무 안일하게 지내지 말아야 한다. 옛날에 서 문정공(舒文靖公)203)이 걸어서 스승을 배알할 때에 집에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바람에 빗질하며 빗물로 목욕하더라도204) 도리어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낡은 침상과 거친 음식도 모두 아름다운 정취입니다." 하였는데, 이 내용을 읽고 읊조릴 때마다 사람을 흥기시킨다.길(吉)함을 좋아하고 흉함을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도리어 예(禮)를 지키면 길하고 예를 어기면 흉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이 예를 어겨도 꺼려하지 않으니, 알지 못함이 심하다.지금 사람의 강학(講學)은 옛사람의 강학과 같지 않다. 옛사람의 강학은 마땅히 배워야할 것을 강론하고 일찍이 강론했던 것을 배워서 강론과 배움이 서로 합치하여 하나가 되는데, 지금 사람의 강학은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강론하더라도 강론은 강론대로 배움은 배움대로여서 강론과 배움이 서로 나뉘어 둘이 된다. 이보다 심한 것은 또 마땅히 배워야할 것을 강론하지 않고 심(心)과 성(性)의 명목(名目)만 강론하여 같고 다름을 다툴 뿐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중용》은 도를 밝히는 글이고, 《대학》은 강학하는 글이다." 하였으니, 그대들은 차라리 《중용》을 버리고 《대학》을 따라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를 익숙히 강론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김관수(金觀洙)에게 이르기를 "문장으로 말하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문장은 정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분명 목은(牧隱)205)ㆍ택당(澤堂)206)ㆍ오산(五山)207) 등 제공(諸公)보다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인들이 선생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은 제공과 비교할 바 아니니, 어찌 선생이 도덕의 숭고함, 출처의 정대함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서가 아니겠는가. 오직 그대는 힘써 진실한 덕에 나아가고 문사(文辭)를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선조의 미덕을 계승해야 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율옹(栗翁 이이(李珥))의 문장을 후세의 문장가들이 비록 숭상하지는 않지만, 이처럼 높고 높은 그 분의 도덕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후생이라면 누가 감히 하찮게 여기겠는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택당의 문장이 넉넉하긴 하지만 덕행 또한 높으니 문장으로만 논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명현(名賢)의 후손이 되는 사람은 몸가짐과 일처리가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어렵다. 한미한 문중의 사람은 비록 소소한 선행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 선조보다 어질기 때문에 좋은 명성을 쉽게 얻고, 잘못이 조금 크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반드시 꾸짖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명현의 후손은 비록 탁월한 덕행이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선조에 미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어짊을 칭찬하지 않고, 잘못에 대해서는 미세한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반드시 '아무개 현인의 후손으로서 행한 바가 이와 같단 말인가.'라고 하니, 어찌 그 선조를 생각하며 부지런히 덕을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8월 2일 밤에 선생이 제생(諸生)에게 말하기를 "내일은 순원황후(純元王后)208)의 기일(忌日)이고 또 큰형님의 기일인데, 나는 이 날에 소식(素食)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음식을 올릴 때에 생선과 고기를 두지 말라." 하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비록 벼슬하지 않은 선비라 하더라도 살아서 섬긴 임금의 기일을 당하면 예의(禮義)를 차려야 해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니, 이것은 선배들이 이미 행한 일이 있었다." 하였다.김종호(金鍾昊)209)가 묻기를 "송(宋)나라 제현(諸賢)들은 영특하고 호걸스러운 자질로써 선학(禪學)으로 들어가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에 도리어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답하기를 "끝내는 해로움이 있다. 우리 유가에도 본래 마음을 다스리는 오묘한 비결이 있건만, 어찌 꼭 다른 곳에 나아가 해롭지 않기를 구하는가? 우리 유가는 마음을 다스려 실상을 얻고, 선학은 마음을 다스려 허상을 얻는다." 하였고, 또 "석씨(釋氏)는 도리어 이치를 궁구하는 한 가지 공부가 없어서 일을 이루려 해도 이룰 수가 없다." 하였다.인생의 재앙과 복락이 모두 매장(埋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근거가 없음이 분명하다. 지금 왕도정치를 행하는 사람이 일어나서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북방에는 장사(葬師)210)의 술법을 쓰게 하고 남방에는 그 술법을 쓰지 못하게 하더라도, 명공(名公)․거부(巨富)․성현(聖賢)․문장(文章)이 어찌 북방에서 나오고 남방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천하고 용렬하고 악하겠는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제생(諸生) 중에 글을 읽으면서 몸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생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곡례(曲禮)〉에서 '앉을 적에는 반드시 편안히 한다.〔坐必安〕' 하였다. 유충정(劉忠定)211)은 담론하다가 때를 넘기더라도 몸이 기울어짐이 없었거늘 어찌 성현의 글을 마주하고서 머리와 몸을 흔들며 행동거지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형공(呂滎公)212)은 말하기를 '후생이 처음 배울 때에는 모름지기 기상(氣象)을 이해해야 하니. 기상이 좋을 때에는 온갖 일이 옳다.' 하였으니, 몸을 흔든 것은 모두 기상이 좋지 않은 것이다.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내가 일찍이 계전(桂田) 신 상공(申相公)213)을 뵈었는데 상공이 앉을 때에는 반드시 두 손을 가슴 높이에 두거나 혹은 두 무릎 사이에 두어 한나절이나 오래되어도 조금도 몸이 기울어지거나 흔들리는 모습이 없었다. 40여 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으니 이것이 90여 세에 이르도록 장수를 누리고 지위가 1품(品)에 오르게 된 까닭이었다. 여형공의 이른바 '귀하고 천하고 장수하고 요절함이 이로 말미암아 정해진다.'는 것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겠다." 하였다.성현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도(道)에 들어가는 방도로는 극기복례(克己復禮)214)ㆍ계구신독(戒懼愼獨)215)ㆍ구방심(求放心)216) 같은 종류가 있어 그 단서가 하나가 아니다. 배우는 사람이 극기복례의 방도로 공부한다면 오로지 여기에만 힘을 쓰고, 계구신독ㆍ구방심은 어떻게 공부하는 것인지를 묻지 않아야 한다. 무릇 읽고 있는 경전(經傳)을 가져와 극기복례의 자료로 만들어 오직 이 극기복례의 공부가 정밀하고 익숙해지면, 계구신독과 구방심은 공부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효험을 보게 된다. 계구신독의 방도로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으며, 구방심의 방도로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다.성인의 마음은 도(道)와 간격이 없으니 그 공부는 비록 배우는 자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만 못하지만, 그 근심하고 노력하고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 또한 한시도 그친 적이 없다. 배우는 자는 다만 마음의 운용이 도의 본체에 합치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한다.성인은 오히려 덕이 닦여지지 않고 학문이 강론되지 않고 의리로 옮겨가지 않고 허물이 고쳐지지 않음을 근심으로 삼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근심이 부족하거든 계속해서 울어야 한다. 나는 일찍이 중니(仲尼 공자)가 즐거워한 곳을 알고 싶다면 모름지기 먼저 중니가 근심한 곳을 알아야 한다고 여겼다.증자(曾子)는 대현(大賢)인데도 임종할 때에 스스로 "그 말이 착하다."217)라고 말하였고, 또 말한 "귀중히 여겨야할 도(道)"218)에 마땅히 그 오묘한 비결이 있어야 하는데 이내 용모(容貌)와 사기(辭氣)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용모와 사기가 도에 관계된 것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이것을 하나의 큰 일로 인식하여 조금도 소홀이 해서는 안 된다."하찮은 말도 살피기를 좋아한다.〔好察邇言〕"219)는 한 구절은 참으로 긴요하고 절실하여, 나는 일찍이 《서경》〈필명(畢命)〉편의 "능히 작은 일도 부지런히 힘쓰라.〔克勤小物〕"는 한 구절을 들어서 대구(對句)로 만들어 보았다.《대학》 전(傳) 8장의 맺는말이 다른 장과 다른 것은 이 장(章) 안에서 제가(齊家)를 직접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말을 되풀이하여 맺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여준 것이다.《논어》 '현현역색장(賢賢易色章)'의 '배우지 않았다.〔未學〕'220)는 실제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말일 뿐으로, "비록 임금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雖曰不要君〕"221)의 문세와 서로 같으니, 임금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찌 일찍이 실제로 임금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겠는가. 이러한 뜻은 선유가 이미 말하였다.《맹자》의 '혼자서 음악을 즐기는 것〔獨樂樂〕'과 '사람들과 더불어 음악을 즐기는 것〔與人樂樂〕'에 대해, 집주(集註)에서는 위쪽의 '악(樂)'자를 음악의 '악'으로 삼고 아래쪽의 '낙(樂)'자를 기쁘고 즐겁다는 '낙'으로 삼았으나 미진한 듯하다. 김인산(金仁山 김이상(金履祥))이 이를 바꾸어서 위쪽의 '낙'자를 기쁘고 즐겁다는 것으로 삼고 아래쪽의 '악'자를 음악으로 삼았으니 마땅히 이것을 따라야 한다.제생(諸生)이 사람이 많이 모인 가운데서 잘못 남의 신발을 신자, 선생이 말하기를 "'천만 명 속에 있어도 항상 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222) 했는데, 지금 이렇게 수십 명 가운데 있으면서 내가 있음을 알지 못하면 무슨 일을 이루겠는가?" 하였다.【문】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 상을 당한 경우에 길복(吉服)은 언제 입어야 합니까?【답】초상 때부터 계산하여 28개월에 이르러서 날짜를 택하여 묘소 앞에서 상복을 벗으며, 곡(哭)을 하고 하지 않음은 오직 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아버지 상의 길제(吉祭)223)에 역시 곡을 한다는 글이 없으니 곡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중용》의 글은 마치 살아있는 용이나 활동하는 범과 같아서, 용을 잡고 범을 때려잡는 솜씨가 있어야 곧 읽을 수 있다.이른바 "기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氣自爾 非有使之〕"라는 것이 사람이 젊어서는 기(氣)가 성하고 늙어서는 기가 쇠해지는 것과 같다면, 한 번 성해졌다가 한 번 쇠해지는 것은 기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어찌 이(理)가 참으로 성하게 하고 쇠하게 시킬 수 있겠는가. 한 번 성하고 한 번 쇠하게 하는 까닭이 바로 이(理)이다. 이것은 손가락으로 머리 빗질을 하면서 다음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손이 한 번 올라가고 한 번 내려가는 것은 기(氣)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만, 한 번 올라가고 한 번 내려가게 하는 까닭은 이(理)이니, 어찌 이가 참으로 올라가고 내려가게 시킬 수 있겠는가."만약 〈외필(猥筆)〉224)처럼 조종적막(操縱適莫)하는 능력을 한결같이 이(理)로 돌린다면, 천하의 일은 선(善)한 것은 항상 적고 불선(不善)한 것은 항상 많은데 불선한 일은 이(理)가 모두 그 허물을 책임지게 된다. 이에 이(理)는 선하게도 하고 악하게도 하는 사물이 되어 그 지위는 낮아져 높지 않게 된다. 성인의 마음이 근심하고 노력하고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은 기(氣)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보통사람의 마음이 게으르고 방자한 것도 기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만약 이(理)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게으르고 방자하게 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면, 성인이 지닌 마음의 이(理)로 하여금 어찌 보통사람이 지닌 마음의 이(理)와 다르게 하여 한 번은 근심하고 두렵게 시키며 한 번은 게으르고 방자하게 시키겠는가. 비록 이(理)는 시킬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시키지 않는 시킴〔不使之使〕이 곧 이(理)이니, 이른바 '시키지 않는 시킴'이 바로 '그렇게 만든 까닭〔所以然〕'이다.홍약후(洪約厚)225)가 묻기를 "서원(書院)과 사우(祠宇)에서 선유(先儒)를 제사 지낼 때에 많은 선비들이 그 자손과 친족 중에 나이가 많고 학문이 깊은 사람을 추천하여 헌관(獻官)으로 삼는데, 축문의 연월일 아래에 마땅히 속칭(屬稱)226)을 써야 합니까, 아니면 문인(門人)이나 후학(後學)으로 칭하고 성명을 갖추어 써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자손과 친족은 헌작(獻酌)을 주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고 제사에 참여만 해야 한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서원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헌관은 으레 검은 유건(儒巾)227)을 쓰는데 국상 중에는 흰 유건을 써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흰 유건(儒巾)은 적절하지 않은 듯하니 마땅히 백립(白笠)228)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변복원(邊復源)229)이 묻기를 "부모가 사학(邪學 천주교를 가리킴)을 믿자 울면서 간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으니 아비를 업고 물에 빠져죽어 아비로 하여금 불의(不義)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는데, 이 말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육수부(陸秀夫)230)가 임금을 업고 물속으로 달려가 사직을 위해 죽게 하였고, 양산숙(梁山璹)은 어미를 업고 물에 뛰어들어 그 절개를 온전케 하였다. 지금 이 일은 육수부․양산숙 두 사람의 일과는 다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선사(先師 임헌회)께서 일찍이 '아비가 만약 흉악한 반역의 일을 모의한다면 아들은 울부짖으며 간쟁할지언정 고변(告變)해서는 안 되고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스스로 죽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으니, 반역을 모의해도 오히려 아비를 업고 함께 물에 빠져죽어서는 안 되고 스스로 죽을 뿐인데, 하물며 반역을 모의하는 일보다 못한 경우임에랴." 하였다.계전(桂田) 신 상공(申相公)231)과 입재(立齋) 송 상공(宋相公)232)은 근세의 어진 재상이다. 신공은 내가 평생 백숙부(伯叔父)처럼 존경하였고, 송공은 내가 인사드리지는 못했으나 흠모하는 마음은 신공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두 분은 노년에 한가로이 거처할 적에 모두 너른 소매의 상의(上衣)를 입지 않았으니, 이것은 내가 불만스럽게 여겼던 바이다. 대개 항상 너른 소매의 옷을 입으면 앉거나 누울 즈음에 참으로 불편한 점이 있다. 그러나 두 분이 또한 모두 항상 좁은 소매의 상의를 입는다면 두 소매 아래에 한 자의 베를 더 꿰맨다고 해서 무슨 큰 불편함이 있겠는가. 또 예의가 크게 밝은 세상에 살고 있다면 늙은 재상이 혹 이처럼 한다 해도 세교(世敎)에 큰 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예의가 온통 무너진 세상에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은 소매의 있고 없음에 달려있으니, 더욱 마땅히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을 굳게 지켜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을 엄격히 해야 옳다.《대학》서문에서 〈곡례(曲禮)〉ㆍ〈소의(少儀)〉ㆍ〈내칙(內則)〉ㆍ〈제자직(弟子職)〉이라고 운운한 것은 단지 곁들여서 말했을 뿐인데, 혹자가 제씨(齊氏)의 주(註)에 나오는 "이 네 편은 춘추시대에 지어진 것이다."는 설에 근거하여 "이 네 편도 모두 공자가 외워서 전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제자직〉 외에 〈곡례〉 등 여러 편은 분명히 한(漢)나라 학자들이 지은 것이니, 공자가 어찌 외워서 전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곡례〉의 "앉아 있을 때는 시동처럼 하고, 서 있을 때는 재계하듯이 한다.〔坐如尸 立如齊〕"는 구절에 근거함을 주자의 설에서 볼 수 있다.공명의(公明儀 노(魯)나라의 현인)는 맹자 이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관본(官本)233) 《언해》에서 맹자 때의 사람이라고 쓴 것은 잘못이다. "책임이 없을 것 같다.〔宜若無罪〕"는 한 구절은 맹자가 공명의의 말을 인용한 것이고, "책임이 적다고 한다.〔曰薄乎〕" 이하의 말은 공명의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문】아들이 몹쓸 병이 들어서 참최복(斬衰服)을 입을 수 없다면 그 손자가 곧바로 승중(承重)234)합니까? 아니면 본복(本服 본래 정해진 상복)을 입고 섭행(攝行 대리로 거행함)합니까?【답】우암은 주자의 설에 근거하여 승중하는 것을 바른 법으로 삼았으나, 주자는 본래 제왕가(帝王家)의 예법으로써 말한 것이니, 우옹이 사가(私家)의 예법에 증거를 삼은 것은 자세하게 살피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ㆍ매산(梅山 홍직필)ㆍ전재(全齋 임헌회) 등 여러 선생들은 모두 섭행하는 것을 옳다고 하였고, 나 또한 섭행하는 것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부합한다고 여긴다.【문】그렇다면 참최복과 축사(祝辭)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답】참최복은 재단하여 궤연(几筵)에 놓아두고 축사는 '아버지가 자식을 대신 시킨다.'는 관례를 사용한다.옛사람이 이르기를 "한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이 한 사람을 적게 아는 것만 못하다."235) 하였으니, 서로 사귈 즈음에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문】유자(儒者)의 자제 중에 혹 그 부형을 위해 조정에 알선하여 대관(臺官)의 직책을 구하여 얻은 사람이 있는데, 자제가 부형을 위하는 도리로 혹 이처럼 할 수 있습니까?【선생 답】이것을 어찌 굳이 물을 필요가 있는가. 부형이 즐거워하는 것이 도(道)에 있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자제되는 자 또한 마땅히 그 즐거워하는 것을 도와야 하고 마땅히 그 원하지 않는 바를 구해서는 안 되니, 이것이 부형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 것이다. 예컨대 우옹(尤翁 송시열)이 재앙을 당했을 때에 그 아들과 손자가 만약 어찰(御札)을 바쳐 면하기를 바랐다면, 이는 우옹의 마음을 체득한 것이 아니니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예전에 심운가(沈雲稼)236)가 일찍이 친하게 지내던 유자의 자제가 서울에 살고 있음을 보고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였으니, 그 부형이 명예를 가까이 한다는 허물을 얻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자식들과 손자들을 훈계할 적에 도성(都城)을 가까이 하지 말고 당시의 재상을 가까이 하지 말게 하였으니, 대개 혐의를 받을 우려가 있어 신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병오년(1906, 광무10)에 들은 것이며, 아래도 이와 같다.-"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237)는 구절에 대해, 주자는 매번 형체는 없으면서 이치는 있다는 뜻으로 보았는데, 오직 〈하손록(賀孫錄)〉에만 '무의 극〔無之極〕'이라는 한 마디가 있으니 이것은 확정되지 못한 의론이다.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말하면 성(性)은 형체가 없으면서 이치가 있는 것이니,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뜻이 바로 이와 같다.'명명덕(明明德)'238) 장구(章句)의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所得乎天〕"에서 '소(所)'자는 마땅히 '천(天)'자에서 구절을 끊어야 할 듯한데, 유 지평(柳持平 유중교(柳重敎))은 "만사에 응하는 것〔應萬事者〕"에서 구절을 끊어야 한다고 했으며, '이(以)'자를 '소이(所以)'라는 뜻으로 보아 대개 명덕(明德)이 이(理)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였으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장구의 '소(所)'자와 '이(以)'자는 위아래로 서로 나뉘어져 본래 '소이연(所以然)'의 뜻이 아니니, 비록 곧바로 '소이(所以)' 두 자를 쓰더라도 또한 다 이(理)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손이 물건을 잡거나 쥐게 하는 소이(所以)라고 해서 곧바로 손이 이(理)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어떤 부류의 학문에서는 마음을 지극히 높은 사물로 삼기 때문에 그 의론이 매번 이와 같으니, 만약 그들의 말대로라면 《중용》에서 어찌 하늘이 명한 것을 심(心)이라 하고 마음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괴이할 뿐이다.천하의 혼란은 모두 이끗〔利〕에서 시작되니, 하나의 '의(義)'자만 있어도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지만, 진실로 임금께서 애통한 조서(詔書)를 발표하여 "내가 우리나라를 이렇게 만든 것은 이끗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마땅히 의리를 숭상하고 이끗을 경시할 것을 생각해야 하니, 공경(公卿)과 백관부터 주군(州郡)의 관원까지 백성을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하며 의리가 없는 자가 있으면 하나하나 형벌로써 처단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처럼 몇 년을 하면 천명을 되돌리고 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은 기필할 수 없더라도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또한 매우 쉬울 것이다.근래에 내가 더러 싸라기로 끼니를 때운 것은 뜻하는 바가 있어서이니, 시사(時事)가 망극한 지경이 이르러 임금을 걱정하는 마음에 자연히 밥을 맛있게 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량한 골짜기에 은둔하여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며 초목의 껍질과 잎, 뿌리와 줄기를 캐서 굶주린 창자를 채우다가 마침내 나무를 붙들고 말라죽고자 해서였다. 성원(聲遠)239)이 나에게 이르기를 "불행하게 변고(變故)를 듣는다면 선생은 의리상 마땅히 자결할 것입니까?" 하였다. 그러나 흠종(欽宗)240)의 부음이 이르렀어도 주자가 일찍이 자결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 성원의 말이 완벽한 의리인지는 모르겠고 다만 중용(中庸)의 도를 행한 한 가지 일은 될 것이다. 성원이 또 이르기를 "만약 은둔을 한다면 선비의 의복을 버리고 백성들 속에서 떠돌아다니며 성명을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옳지만 선비의 옷을 버려야 한다는 한 조항은 옳지 않다. 나는 20세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하루도 선비의 옷을 벗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어찌 위급하고 어지럽다고 하여 대번에 버릴 수 있겠는가.신(申) 아무개가 죽산(竹山) 이(李) 아무개의 말을 듣고, 일찍이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아야 한다241)는 것은 말뜻이 관대하고 박절하지 않으니 성인의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볼 때는 반드시 예로써 하고, 들을 때는 반드시 예로써 하고, 말할 때는 반드시 예로써 하고, 행할 때는 반드시 예로써 한다고 말한다면, 박절하고 관대하지 않아 성인의 말이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옳지 않다. '필(必)'자를 박절하여 성인의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급박한 때라도 반드시 여기에 힘써야 하고, 경황 중에도 반드시 여기에 힘써야 한다."242)는 말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할 때에 반드시 예로써 해야 한다는 것과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는가. 이 또한 장차 성인의 말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대저 사람이 서로 어울려 지낼 적에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되니, 신씨는 이 아무개와 어울리다가 이미 이 말을 듣고 믿은 것이다. 또 선비가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작은 절개에 불과하니 마땅히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을 얻어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혀야 한다고 말한 것을 들었으며, 항상 내가 과거공부를 포기한 것을 세상을 잊었다고 여기고 근세의 현인들이 출사하지 않는 것을 졸렬함을 감춘다고 여겼다 한다. 지금 저 사람은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기에 세상을 잊고 싶지 않은데 마침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고 졸렬함을 감추고 싶지 않은데 마침 졸렬함이 드러났으니, 어찌 매우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근세의 선비들이 그 스승을 높이는 게 너무 공정하지 않아 심지어 "하늘 아래에 만고토록 오직 우리 화서(華西 이항로) 선생"이라 하고, 또 "억년이 가고 만년이 와도 우리 한주 부자(寒洲夫子)243) 같은 분은 없다." 하고, 유여성(柳汝聖)244)의 문인이 유여성을 칭송하면서 심지어 "주자와 송자(宋子 송시열)와 함께 짝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하였다. 이것은 모두 그 스승을 지나치게 높이면 사람들이 반드시 믿지 않고 도리어 그 스승의 허물이 됨을 모른 것이다.지금 세상의 학자들은 자신의 마음과 몸을 다스리지 않는 사람이 많고 다만 남의 심술(心術)에 나아가 실수나 나쁜 일을 찾아내니, 진보하여 성취하는 데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옛날에 선사(先師 임헌회)께서 항상 말하기를 "학자는 자기의 장점을 보지 말고 다만 남의 장점을 보아야 하며, 남의 단점을 보지 말고 다만 자기의 단점을 보아야 바야흐로 장족의 진보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깊은 맛이 있다. 나의 〈사명(四銘)〉245)에서 "남의 허물을 보면 소경처럼 하고, 자신의 사특함은 자세히 살피라."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뜻이다.나는 일찍이 가릉(嘉陵)246)의 문인들 중에 유성재(柳省齋)247)가 가장 우수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가릉에게 물었더니 "홍사백(洪思伯)248)이 마땅히 으뜸이니 홍사백은 명체적용(明體適用 본체에 밝고 실용에 알맞음)의 학문을 하였다."고 답하였다. 이것은 유성재가 선진이어서 다만 후진 중에서 홍사백을 으뜸으로 삼은 듯하다. 나는 또 일찍이 가릉의 후진 중에서 유기일(柳基一)249)을 으뜸으로 삼는 것을 의심하였는데, 나중에 유기일의 소행을 봄에 명체적용의 학문은 이미 따질 것도 없거니와 그의 흉독(凶毒)함은 비할 데가 없었으니, 가릉이 홍사백을 으뜸으로 삼은 것은 그럴 법하다.공자는 어지러운 나라에 거하는 방도를 말하면서 "말이 겸손해야 한다." 하였고, 조카를 위하여 사위를 고를 때에는 〈백규(白圭)〉를 하루에 세 번 외운 남용(南容)250)을 취하면서 "형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자사(子思)는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침묵으로써 자신을 보전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지금 우리들은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 태어났으니, 어찌 말을 매우 조심하여 재앙을 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리에 크게 관계되어서 우리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또한 생사와 영욕 때문에 두려워하고 어려워하여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되니, 이것이 정직하게 행동하여 죽어도 변치 않는 도리이다.당시 사람들 중에 선생이 괴이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이 그 말을 듣고서 "옛날에 이른바 괴이함은 참으로 괴이한 것이었으나 지금의 이른바 괴이함은 곧 옛날의 도(道)이다. 그래서 나는 삼대(三代) 이전에서 선비를 구할 적에는 오직 그가 괴이함을 좋아할까 걱정하는데, 삼대 이후에서 선비를 구할 적에는 오직 그가 괴이함을 좋아하지 않을까 걱정한다."라고 하였다.문인(門人) 중에 편지로 집지(執贄)하고 10년 동안 찾아오지 않는 자가 있자, 선생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스승과 제자는 사람의 큰 윤리이다. 지금 아무개가 천 리 밖에서 살고 있기에 단지 짧은 편지를 올리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정하였다. 그런데 1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니 스승과 제자의 윤리가 어그러졌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격식을 갖춰 예절을 행한 것은 다만 외양이고 말단일 뿐, 그 내면과 근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게 무엇인가. 대저 편지로 폐백을 삼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우니, 그 편지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고, 그 편지는 이와 같지만 그 마음은 도리어 이와 같지 않은지를 또한 알 수가 없다. 받아주는 사람도 어려운 처지가 될 뿐 아니라 행하는 사람 또한 진실한 마음으로 스승을 구하는 도리가 아니니, 문하에 이르러 절하고 뵙는 것이 더 온당하다." 하였다.사람은 고민되고 답답하고 우울하고 다급할 때에 마음속의 울화가 곧 움직이니, 오직 경건〔敬〕하면 마음속의 울화가 곧 내려간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경건이란 마음속의 물이다."라고 하였다.입계(入繼)한 아들을 위해 참최복(斬衰服)을 입는 것은 단연코 의심할 것이 없다. 그는 소생 부모를 위해서 강복(降服)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나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데, 나는 소생 부모가 아니라고 하여 그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면, 이는 아들로 보지 않는 것이다. 아들로 보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후사를 이었는가. 율곡(栗谷) 선생이 말하기를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후사를 이은 뒤에 아내가 아들을 낳더라도 마땅히 입계한 사람을 적자로 삼아야 한다." 하였으니, 만약 입계한 아들과 소생 아들을 구별하는 이치가 있다면 율곡이 어찌 이처럼 주장했겠는가. 이것은 분명한 증거로 삼을 만하다.《논어》〈학이(學而)〉의 첫 구절에 "어린애가 걸음걸이를 배울 적에 때때로 그것을 익힌다."라고 하였다. 한 걸음을 옮기자마자 곧바로 넘어지지만 금방 다시 익혀서 두 걸음을 옮길 수 있고 두 걸음에 넘어지지만 또 익혀서 세 걸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 그치지 않는다면 곧 웃으면서 스스로 기뻐할 것이니, 배우고 익히면서 기뻐하는 것이 바로 이것과 서로 비슷하다.소금을 혀에 놓으면 짜고 소금을 입술에 놓으면 짜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소금의 성질이 달라서이겠는가. 혀와 입술이 타고 있는 바의 기(氣)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본래 같으나 기(氣)로 인하여 다름이 있다는 하나의 비유를 삼을 수 있다.횡거(橫渠 장재(張載)) 선생이 "군사의 전략이나 군율에 대해서 평소에 예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지금 우리들은 지식과 역량이 모두 미치지 못하여 비록 대의(大義)를 내세워 외적을 토벌하지는 못하지만 또한 모름지기 보존해 지킬 계책과 방비할 계획을 대략 생각하여 고을의 민가를 위협하고 노략질하는 도적에 대비하는 것은 도리어 할 수 있을 것이다.시류배들이 이르기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이후로 현인들이 배출되지 않아 그 재주는 큰일을 해내기에 부족하다."고 하며 마침내 근세의 유현(儒賢)들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겼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함께 논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수암 이후의 현인들부터 근래의 유현들에 이르기까지 국정을 맡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의리를 숭상하고 이끗을 경시하며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사랑하여 국가를 안정되고 공고한 데에 두어 왜놈이 감히 와서 침범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설령 재주가 부족하여 왜놈을 방어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의리를 지키고 사직을 위해 죽어서 길이 후세에 할 말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끗을 앞세우고 의리를 뒷전으로 여기며 임금의 눈을 가리고 백성을 해롭게 하여 사직을 받들어 왜놈에게 넘겨준 저 이른바 재주가 넉넉하고 쓸모 있는 자의 소행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전후의 유현들이 어찌 일찍이 모두 재주가 부족하여 출사하지 않았겠는가. 그 시절을 만난 것과 의리로 처신하는 바가 절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대학》성의장(誠意章) '십목십수(十目十手)' 장구의 '상문(上文)' 두 자를 유씨(劉氏)는 《이간록(易簡錄)》에서 "윗글의 두 구절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증자(曾子)의 이 해설은 그 말뜻을 살펴보면 오로지 악을 행하는 자를 경계하여 말한 것이지, 첫 번째 구절을 아울러 밝혀서 착한 말을 해야 하는 뜻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유씨는 아래 구절에 있는 "선악을 가릴 수 없다.〔善惡不可掩〕"의 '선(善)'자로 이와 같이 파악한 듯하나, 이 '선'자는 곁들인 말로, 오로지 해로움을 말하여 "이해가 적지 않다.〔利害不少〕" 하고, 오로지 급함을 말하여 "혹 위급한 상황이 있다면〔脫有緩急〕"이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것 때문에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문】성인이 "나보다 못한 자와 벗하지 말라.〔無友不如己者〕"251)고 말하였는데, 내가 저 사람을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서 벗하지 않는다면 나보다 나은 사람은 또 반드시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서 벗하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다면 어찌 인(仁)을 돕는 유익함이 있겠습니까?【답】이것은 행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곧 마음으로 말한 것이다. 나보다 못한 자를 거절하여 그와 벗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자를 찾아서 그와 벗하려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한 것이다.화서(華西 이항로)는 《주역》 64괘(卦)에 나오는 "군자가 본받아〔君子以〕'의 '이(以)'자를 소이연(所以然)의 이(以)로 삼아 '이(理)'자로 간주하였으니, 대개 '소이연' 세 글자에서 '소(所)'자는 이(理)이고 '이연(以然)'은 마음의 기(氣)가 행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일관장(一貫章)252)에 나오는 문인(門人)은 공자의 문인이다.【문】성인의 마음은 혼연히 하나의 이(理)인데 마음을 위주로 하여 보아야 합니까? 이(理)를 위주로 하여 보아야 합니까?【답】마땅히 마음을 위주로 하고 이가 그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문】이것은 성인이 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히 행하는 것인데, 그 마음과 이가 간격이 없는 곳입니까?【답】그렇다."낳는 것을 성(性)이라고 이르니, 성은 바로 기(氣)이고 기가 바로 성이라는 것은 생(生)을 이른다."253)와 "막 성(性)이라고 말할 때에는 곧 이미 성이 아니다."254)라는 두 구절은 마치 "타는 것을 화(火)라고 이르니, 화는 바로 땔나무이고 땔나무가 바로 화라는 것은 연(燃)을 이른다. 막 화(火)라고 말할 때에는 곧 이미 화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유함이 매우 명백하니, 성이 아니라는 것은 완전한 성이 아님을 말하고, 화가 아니라는 것은 완전한 화가 아님을 말한다.《가례증해(家禮增解)》의 안설(按說)은 틀린 곳이 많다. 전옹(全翁 임헌회)이 일찍이 말하기를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는 《가례증해》를 지을 때에 옛것에 얽매여 자기 고집을 내세운 곳이 많다." 하였고, 계운(溪雲) 김장(金丈)255)도 대단히 불만스럽게 여겼으니, 이 글은 반드시 후세 사람의 정리를 거친 뒤에야 곧 세상에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중용》의 삼달덕(三達德 지(智)ㆍ인(仁)ㆍ용(勇))이 도심(道心)을 말하든 도리(道理)를 말하든 이처럼 논쟁할 필요 없이 단지 백문(白文 본문(本文))으로 읽어보아도 곧 도리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굳이 "이를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所以行之者三〕"의 '소이(所以)' 두 글자를 가지고 구실을 삼았다. 그러나 그 아래에 또 "이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所以行之者一〕"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구경(九經)256)의 '소이행지자일(所以行之者一)'과 문장의 형세가 딱 들어맞는데, 또한 '소이(所以)'자를 썼다고 하여 구경을 이(理)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나는 글을 볼 때에 의심스럽거나 모르는 곳에 이르면 주석에서 말을 허비하지 않고 다만 백문에서 문장의 형세를 알아차려 곧바로 의미를 설파하여 쉽게 이해하였으니, 이 방법이 매우 묘미가 있었다. -무신년(1908)에 들은 것이며, 아래도 이와 같다.-내가 처음 학문에 뜻을 둘 때에 다른 사람의 지도를 기다리지 않고 우연히 《퇴계집(退溪集)》의 "사람들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면하였다."는 말을 보고서 마침내 감동하여 뜻을 두었다. 나이 스무 살에 임 선생(任先生 임헌회(任憲晦))을 찾아뵈었으나 또한 큰 뜻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우선 사례(四禮)257)를 배워 가정에서 행하고 싶었다. 선생의 엄숙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고 선생의 가르침을 듣게 되자, 스스로 '예(禮)를 배우고자 한다면 사례뿐 아니라 마땅히 〈곡례(曲禮)〉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행동거지와 주선하는 것이 예에 맞아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확고하게 큰 뜻을 세울 수 있었다.'인(仁)'자를 옛 사람은 "두 사람이 인(仁)이 된다."고 풀이하였는데 이 말은 깊은 의미를 다 드러내지 못하였다. 자신에게 본래 곧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반드시 남을 사랑한 뒤에 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仁)이란 글자의 구조는 '이(二)'자와 '인(人)'자로 구성되었는데 '이(二)'자의 위의 획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 획은 땅을 상징하며,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 삼재(三才 천(天)ㆍ지(地)ㆍ인(人))의 덕에 참여할 수 있으면 인(仁)이 된다."고 여기니, 이처럼 해석해야 맞는 듯하다.하늘이 비를 내려 만물을 윤택하게 하지만, 제때가 아니거나 지나치게 많이 내리면 도리어 만물을 해롭게 한다. 스승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유익함을 주기 위해서이지만, 식견이 부족한 사람에게 갑자기 너무 높은 내용을 말해주면 도리어 등급을 뛰어넘어 치밀함이 결여되는 폐해가 있게 되니, 이것이 성현이 사람을 가르칠 때에 그 재질에 따라 이끌어주는 까닭이다.처마 앞에 빗물이 떨어져 물거품이 생기는 것을 보고, 문인에게 말하기를 "이(理)가 떨어져서 물거품을 만든 것인가? 기(氣)가 떨어져서 물거품을 만든 것인가?"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떨어져서 물거품을 만든 것은 기이고, 떨어져서 물거품을 만들게 하는 까닭은 이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옳다. 아는 사람에게 보게 하면, 이(理)가 떨어졌다고 말해도 되고 기(氣)가 떨어졌다고 말해도 된다. 모든 사물이 한 번 동(動)하고 한 번 정(靜)하는 것은 모두 이 기의 능력이지만 그렇게 되는 까닭이 이(理)임을 안다면, 마치 이(理)가 얼어서 얼음이 되고 이가 녹아서 물이 되고 이가 움직여서 말이 되고 이가 고요하여 침묵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모두 막힘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묻기를 "《논어》에 나오는 여러 '인(仁)'자는 성리(性理)로 말한 경우가 있고 성덕(成德)으로 말한 경우가 있는데, '은(殷)나라에 세 명의 인자가 있었다〔殷有三仁〕'258)와 '그가 인(仁)한지는 모르겠다.〔未知其仁〕'와 '어찌 인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焉得仁〕'와 같은 부류는 성덕을 가리켜서 말한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아니다. 단지 성리로 말했을 뿐이다. '옹(雍)은 인하나 말재주가 없다.〔雍也仁而不佞〕'259)의 집주에서 '인(仁)의 도는 지극히 커서 온전히 체득하여 그치지 않는 자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하였으니, 대개 체득한 것도 인의 도이고, 그치지 않는 것도 인의 도이다. 이 '인(仁)'자에 어찌 성리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내가 대답하기를 "삼인장(三仁章)의 집주에 '사랑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그 본심의 덕을 온전히 할 수 있다.' 하였고, 영윤자문장(令尹子文章)의 집주에 '이치에 합당하고 사사로운 마음이 없다면 인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거스르지 않는 것, 온전히 하는 것, 합당한 것, 체득한 것, 그치지 않는 것은 성리(性理)이며, 능히 거스르지 않고, 능히 온전히 하고, 능히 합당하게 하고, 능히 체득하게 하고, 능히 그치지 않는 것은 성리를 받들어 따른 공효입니다. 세 명의 인자(仁者)와 같은 부류는 성리(性理)와 심공(心功)을 합하여 말한 것이니, 덕을 이룬 인자를 가리켰다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이처럼 본다면 영윤장(令尹章) 집주의 '인의 본체를 몰랐다.〔未識仁體〕'는 것은 마땅히 인덕(仁德)의 체단(體段)으로 말한 것이지 온전히 성리(性理)로 말한 것은 아니다. 옹야장(雍也章)의 '인도(仁道)'의 '도(道)'자 또한 '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져 있다.〔吾道一貫〕'의 도(道)처럼 읽고 인(仁)의 본체의 뜻과 똑같이 보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인의 본체는 본래 그러하지만 인의 도는 도리어 성리로 말해야 할 듯합니다. 대개 본체를 온전히 하여 그치지 않는 것260)은 사람이 덕을 이루는 곳인데, 인(仁)의 도가 덕을 이루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면 본체를 온전히 하는 것과 그치지 않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하니, 선생이 "그 말이 옳다." 하였다.261)근래에 유가 학파가 서로 알력을 빚어 유언비어를 듣고서 실제 그렇다고 여겨 서로 더 공격하고 배척하니, 이러한 풍속은 매우 통탄스러운 일이다. 옛사람의 말에 "구르는 탄환은 구유(甌臾)처럼 오목한 곳에서 멈추고, 떠도는 말은 지혜로운 사람에게서 멈춘다."262) 하였는데,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면서 떠도는 말을 믿는 경우가 있겠는가.송늑천(宋櫟泉 송명흠(宋明欽))이 상중(喪中)에 있을 때에 병이 있어 고기를 먹었는데, 일찍이 족인(族人)의 장례에 모여서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질병 때문에 집에 있으면서 고기를 먹었지만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어찌 내가 예법을 무너뜨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허물을 본받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도 상중에 있을 때에 병이 있어 고기를 먹었는데 족인의 장례에 모여 고기를 먹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질병 때문에 집에 있으면서 고기를 먹었는데, 지금 어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해서 먹지 않아 내 마음을 스스로 속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것은 비록 전해오는 말이긴 하지만 지금 이것으로 두 분을 논한다면 늑천이 행한 바가 중도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집에 있으면서 고기를 먹었다고 말했으니 스스로를 속이지 않은 것이고, 그가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또 예법으로 풍속을 인도하는 뜻을 얻었기 때문이다. 퇴계(退溪) 선생도 그 아들이 어머니 상중에 있을 때에 병이 있어 고기를 먹도록 권하였고, 또 손님을 뵈면 먹지 말라고 경계하였다.무릇 강학(講學)은 옳은 것을 구하고자 할 뿐이니, 옛사람의 정론(定論)이라고 해서 억지로 따라서도 안 되고 또한 옛사람이 이미 죽었다고 하여 가볍게 여겨도 안 되며, 어리거나 천하다고 하여 그 말을 제어하여 억눌러서도 안 되고 또한 귀인이거나 어른이라고 하여 그 말을 높여서도 안 된다. 천지 사이에는 단지 위아래로 일관되어 정정당당한 바른 이치가 있어 현재 눈앞에 간직된 것과 발현되는 것은 그것에 의지하여 해나갈 뿐이다. 이 몸이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곧 어디에 떨어져 있을지 알 수 없다.선생이 그릇〔器盂〕을 옮겨 놓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태극(太極)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정(靜)하여 음(陰)을 낳는 것이다. 가서 옮겨 놓은 것은 동하여 양을 낳은 것이고, 옮겨 놓고 되돌아오는 것은 정하여 음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근원으로부터 말하자면, 태극의 동과 정이 여기에 이르렀으나 그릇이 능히 동하고 능히 정한 것은 어찌 사람의 기(氣)가 아니겠는가. 능히 동하고 능히 정한 것이 기이고 그렇게 만든 까닭이 바로 태극이라는 것을 안다면, 태극의 동정은 우선 놓아두고 태극이 더워지면 끓고 차가워지면 얼음이 된다고 말해도 이(理)에 해롭지 않다. 후세에 일종의 의론이 주자(周子)가 주장한 주된 뜻을 궁구하지 않고 '태극이 능히 동하고 정한다.〔太極能動靜〕'라고 떠들었으며, 주자(朱子)의 '태극은 이이고 동정은 기이다.〔太極理也 動靜氣也〕'라는 두 구절이 이미 이런 견해를 논파하였는데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저쪽에서 또 주자가 말한 '동하지 못하지만 능히 동하는 것이 이(理)이다. 이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기에도 동정이 있으니, 이(理)에 동정이 없다면 기에 어떻게 동정이 있겠는가.'263)라는 두 단락을 인용하여 이가 능히 동정한다는 증거로 삼았으나, 너무 모른 것은 주자의 이 말은 단지 동하지 못하지만 능히 동하는 이가 있고 또 이(理)에 이 기(氣)가 동정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 이가 능히 동정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개 동정(動靜)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왕래(往來)ㆍ어묵(語默)ㆍ호흡(呼吸)과 같은 종류이니, '동정' 두 글자를 왕래ㆍ어묵 등의 글자로 대신 바꾸어서 보면 다소 분명해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컨대 '오지 못하지만 능히 오는 것이 이(理)이고, 말하지 못하지만 능히 말하는 것이 이이며, 부르지 못하지만 능히 부르는 것이 이이다. 이(理)에 왕래(往來)가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왕래가 있는 것이니 이에 왕래가 없다면 사람이 어떻게 왕래할 수 있겠는가, 이(理)에 어묵(語默)이 있기 때문에 입에 어묵이 있는 것이니 이에 어묵이 없다면 입이 어떻게 어묵할 수 있겠는가, 이(理)에 호흡(呼吸)이 있기 때문에 코에 호흡이 있는 것이니 이에 호흡이 없다면 코가 어떻게 호흡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이가 능히 왕래ㆍ어묵ㆍ호흡한다고 말해도 되겠는가?" 하였다.내가 묻기를 "율옹(栗翁 이이(李珥))의 '음(陰)이 고요하고 양(陽)이 움직이는 것은 기틀이 저절로 그러할 뿐이지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는 말은 본래 평탄하고 명백하여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가 의심하였습니다. '기(機)'자를 단지 기(氣) 한 쪽으로 설명한 것은 또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석장(石丈)은 이(理)와 기(氣)를 합해서 보았습니다. 대저 이기설(理氣說)은 어려우면서도 쉽고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일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우니, 우리들 또한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것만 일삼지 말고 반드시 실지(實地)에서 몸소 실천해야 한다." 하였다.선생이 제생(諸生)에게 말하기를 "주자의 '대개 성(性)을 말한 것은 모두 기질(氣質)로 인하여 말한 것이다.'는 한 구절은 마땅히 기질(氣質)의 맑고 탁하고 순수하고 잡박한 성(性)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현공(懸空 가설(假設))하여 성(性)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마땅히 본연성(本然性)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주자가 서자융(徐子融)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 이(理)가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성(性)이라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 구절과 동일한 어세(語勢)이니 마땅히 본연성(本然性)으로 보아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이사온(李士蘊)264)이 일찍이 내게 이르기를 '예전에 《매산집(梅山集)》을 과천(果川)에서 교정할 적에 정자(程子)의 「낳는 것을 성이라고 이른다.〔生之謂性〕」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숙재(肅齋 조병덕)와 여러 사람들은 모두 기질성(氣質性)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전재(全齋 임헌회)만 본연성(本然性)을 주장하면서 줄곧 깨닫지 못하자, 나는 전옹(全翁)이 깨닫지 못한 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숙재와 여러 사람들의 설을 옳게 여겼다.' 하였다. 나는 전옹이 여러 사람의 의론을 어기고 본연성을 주장한 것은 다행스러움이 이보다 더 큰 게 없고 공로가 이보다 더 큰 게 없다고 여겼다. 전옹으로 하여금 불행하게 여러 사람들의 의론을 따르게 하였다면 어찌 본원(本源)을 잘못 알아 후생의 의혹을 늘리는 것을 면하겠는가. 그러나 이곳의 도리는 명백해서 알기 쉬우니 전옹으로 하여금 숙재와 여러 사람들을 따르게 하였더라도 후인들은 스스로 변통함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일에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전옹은 평생 예설(禮說)에 힘쓴 것이 비교적 많았고 성리설(性理說)에 힘쓴 것은 비교적 적었으며, 숙옹(肅翁)은 견식이 해박하고 책을 널리 보았으며 게다가 성리설에 온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반드시 전옹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그러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성리(性理)의 미묘한 곳은 하나의 생각이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다툴 뿐, 노력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되지 않는다." 하였다.주자가 일찍이 칭송하기를 "육구연(陸九淵)의 문인들은 기개와 절조가 있어 살아야 할 때에는 살고 죽어야 할 때에는 죽었다." 하였다. -인용은 여기까지이다.- 이는 마음을 이(理)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마음속의 의기(義氣)가 발현되어 곧장 나아가고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근래에 화서(華西 이항로) 문하의 사람들 중에 기개와 절조가 있는 사람 또한 이와 같았으니, 저쪽 사람들이 듣게 되면 반드시 불쾌한 기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식견과 언행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데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대저 저쪽 사람들은 대부분 거칠고 경솔하며 언론과 사행(事行)을 과장하여 걸핏하면 바람이 일었으니, 성전(星田)265) 문하에서 안정(安靜)되고 수약(守約)한 태도로 언론과 사행에 힘써 법도를 따른 것과는 모두가 상반되었으나, 오직 유성재(柳省齋 유중교) 한 사람만 조금 안정되었다. 아무개 어른이 이르기를 "가릉(嘉陵 김평묵(金平默))은 지나치고 성전(星田 임헌회)은 미치지 못하니, 나는 지나친 쪽을 따르겠다." 하였는데, 공자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씀이 성인의 가르침이 되기에 부족하단 말인가? 그저 스스로 웃을 뿐이다.호남에 사는 김한섭(金漢燮)266)은 선사(先師)의 문인인데 또한 일찍이 가릉과 교유하였다. 이 사람도 기개와 절조가 있어 갑오년(1894, 고종31)의 동학란(東學亂)에 강진 군수를 대신하여 성(城)을 지키다가 죽었다. 이 사람이 절개를 지키다 죽은 것이야 좋다면 좋은 일이나, 강진군에는 본래 수령이 있어 그 책임을 맡고 있는데 유생이 스스로 그 일을 대신하다가 죽었으니, 정밀한 의리로 보면 어떠한지 모르겠다. 이 사람의 이런 절의는 가릉을 따라 얻었으리라. 내가 묻기를 "이미 성전을 스승으로 섬겼고 또 가릉을 따라 배웠다면 정축년(1877) 제문의 일267)을 이 사람은 어떻게 처리하였을까요?"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모호하여 그 사이에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없었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제문에 대해 시비를 분별함이 없는 것을 보면 이는 단호한 결단을 내리는 기개가 없는 것인데, 나중에 절개를 세워 의리에 죽었으니 매우 괴이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정미재(鄭薇齋)268)도 정축년에 제문을 배척한 일은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식견이 도리어 낮은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미재는 순박하고 진실한 사람일 뿐, 그의 식견은 참으로 낮다. 정축년의 일은 직헌(直軒)의 구원에 힘입어 죽음을 당하는 낭패에 이르지 않았다." 하였다.【문】초종(初終)269)에 의복을 마련하지 못하여 염습(斂襲)을 다음날까지 미룬다면 소렴(小斂)을 같은 날에 행할 수 있습니까?【답】《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이렇게 되어있으나 내가 처상(妻喪)을 당했을 때에 의복이 갖춰지지 않아 염습과 소렴을 같은 날에 행하려고 하였더니, 선사(先師 임헌회)가 염습한 다음날에 소렴을 행하도록 하기에 내가 말씀대로 행하였다. 선사가 평생 사례(四禮)에 대해 힘껏 법도를 따르며 철한(鐵限)270)을 넘지 않았으니 외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융통성이 없는 사람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옛것을 좋아하는 군자는 또한 스스로 기꺼이 따를 것이다.【문】본생 부모의 외친(外親)을 위한 상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선생 답】《사례편람(四禮便覽)》에 상복이 없다고 하였으나 인정과 예의로 헤아려보면 한 등급만 내려서 상복을 입은 것이 중도에 맞을 듯하다.【문】사계(沙溪)가 맏아들 은(檃)의 후사를 세우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답】세상에 전하기로는, 임진왜란에 사계가 정산(定山)에 있었는데 은이 정산으로 가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피란 가서 난적(亂賊)에게 살해를 당했기 때문에 사계가 그 패륜을 미워하여 후사를 세우지 않았다 한다. 일찍이 이것으로 계운(溪雲) 김장(金丈 김낙현(金洛鉉))에게 물었더니 김장은 집안에서 그런 말을 들은 바 없다고 하였다.【문】《맹자》 곡속장(觳觫章)의 "내가 어찌 이것을 유쾌하게 여기겠는가.〔吾何快於是〕"라는 구절에 대해, 집주에서 '이것〔是〕'은 전쟁을 일으켜서 군사와 신하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가리켰는데 모두 다 '차(此)'자로 얼굴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욕심에 유혹되는 것이 유독 여기에 있다.〔欲之所誘獨在於是〕"에서만 다시 '시(是)'자로 썼으니, 이 '시'자는 전쟁을 일으켜서 군사와 신하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천하에 어질지 않은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어찌 이런 짓을 하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제(齊)나라 왕이 하고 싶은 것은 다만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의 조회를 받으며 중국에 군림하는 데에 있으나, 이 말은 바로 아래 단락에 있어서 호응이 되지 않는데 대뜸 여기에서 말하였으니, 결국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답】주자의 뜻은 결국 '시(是)'는 진나라와 초나라의 조회를 받으며 중국에 군림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문】'저울질을 한 뒤에〔權然後〕'의 구절에서 집주(集註)의 '본연의 권도(權度 저울과 자)'는 마음으로 말한 것입니까? 이치로 말한 것입니까?【선생 답】마땅히 이치를 갖춘 본심으로 보아야 한다.【문】집주에서 "권(權)은 저울과 저울추요, 도(度)는 길과 자요, 탁(度)은 헤아리고 재어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권도는 이(理)의 일정한 본체가 자재한 것이니 "법도를 넘지 않는다.〔不踰矩〕"는 '구(矩)'자와 뜻이 같고, 탁(度)은 사람 마음의 능한 바입니다. 지금 그 아래 구절을 이어서 "본연의 권도로써 헤아린다."고 하였다면, 이 본연의 권도가 어찌 이치가 자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선생 답】마음 또한 자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마음으로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대문(大文)의 '권도(權度)' 두 자는 이미 마음이 능히 저울질하고 재어보는 것이다. 주자 역시 "본연의 권도는 또한 이 마음일 뿐이다." 하였으니, 결국 마음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문】성인은 죽은 뒤에도 귀신의 응험(應驗)이 있습니까?【답】옛 현인이 이르기를 "어찌 일찍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귀신이 되어 오는 것을 보았겠는가." 하였으니, 성인은 천리(天理)를 순조롭게 받아들여 죽음을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에 죽은 뒤에 사람들에게 일종의 응험이 달리 없었다. 그러나 장수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젊은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억울한 여인이 죽음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일종의 기괴한 응험이 있다. 부처와 같은 경우도 그러해서 단지 이 마음의 광명을 얻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 기(氣)가 죽었다 하더라도 바로 소멸되지 않은 것이다.선생이 묻기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면 인(仁)을 극진히 하는 것이다.'의 '인(仁)'자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온전히 성리(性理)로만 보지 않고 인덕(仁德)의 체단(體段)으로 보는 것이 어떠한지요?"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가 '인(仁)은 도(道)이다.'라는 가르침을 남겼고,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道不遠人〕'의 집주에서 '도는 성(性)을 따를 뿐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 '인'자는 성리로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하였다.'귀신(鬼神)의 덕(德)'의 '덕(德)'자는 마땅히 '이(理)'자로 보아서는 안 되니, 단지 기(氣)의 능한 바로써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중용혹문(中庸或問)》의 "귀신의 덕이 성대한 까닭은 그 성(誠) 때문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덕(德)이 이(理)라는 증거로 삼았는데 이것은 증거가 될 수 없다. 만약 "성인의 덕이 성대한 까닭은 그 성(誠) 때문이고, 배우는 자의 덕이 성대하지 않은 까닭은 그 성(誠)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또한 덕을 이(理)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집주(集註)의 "덕이 된다는 것은 성정(性情)과 공효(功效)를 말한 것과 같다."에서 이 '성(性)'자는 '성즉리(性卽理)'의 성(性)이 아니니, 지금 사람이 아무개는 성정이 조급하고 아무개는 성정이 유순하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편의 큰 뜻은 13장부터 19장까지인데 모두 비은(費隱)271)을 말하였고, 지금 귀신장(鬼神章)은 귀신의 측면에서 이(理)의 유행(流行)을 말하였으니, 이 이치를 알게 되면 덕을 이(理)라고 해도 되고 덕을 기(氣)라고 해도 된다. 연비어약(鳶飛魚躍)272)같은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하늘에 솔개가 날고 못에 물고기가 뛰는 것은 기(氣)이고, 솔개가 응당 날고 물고기가 응당 뛰는 것은 이(理)이며, 순 임금과 문왕의 지극한 효도와 무왕이 천하를 소유한 것과 교사(郊社)273)와 종묘(宗廟)의 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이 보지 않은 것이 없으니, 참으로 가릴 수 없는 성(誠)이다. 집주에서 "음양이 합하고 흩어짐이 진실한 이치가 아님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진실이 아님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이(理)를 가리켜서 말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선생이 말하기를 "연회할 때 머리 색깔에 따라 연치의 차례를 정하면서 소목(昭穆)을 묻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장유(長幼)를 구별할 뿐이니, 이에 소목 가운데서 장유를 분별하는 것에 대해 선현이 이미 이런 의론을 남겼다."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선현의 말이 어떠한지를 논하지 말고 경문(經文)만 가지고 간파하면 곧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소목의 차례를 정할 때에 귀천과 장유를 굳이 따지지 않고, 관작에 따라 서열을 정할 때에도 소목과 장유를 굳이 따지지 않으며, 나이에 따라 서열을 정할 때에도 소목과 귀천을 굳이 따지지 않으니, 항렬과 나이의 서열을 정하는 규칙에 어찌 혹은 같고 혹은 다른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또한 이와 같이 보다가 나중에 견해를 바꾸었는데, 지금 다시 그대의 말을 들으니 달리 논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였다."우리의 도는 하나로 꿰뚫어져 있다.〔吾道一貫〕"의 '일(一)'을 선유(先儒)는 마음으로 보기도 하고 이(理)로 보기도 하였다. 주자의 설도 마음으로 말한 곳이 있고 이로 말한 곳도 있는데, 이러한 곳은 끝내 이해하기가 어려워 정견(定見) 또한 세울 수 없어 후현들이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말한 것이다. 단지 경문(經文)으로만 이해하면 곧 이해하기 쉬우니, 오도(吾道)의 '오(吾)'가 공자의 몸을 가리킨다면 일관(一貫)의 '일(一)'은 어찌 이(理)를 갖춘 공자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집주(集註)의 이른바 "성인의 마음은 혼연한 하나의 이(理)이다."라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이것으로 파악해가면 주자가 마음을 말하고 이(理)를 말한 여러 설들은 모두 활간(活看)274)하여 소통시킬 수 있다.백우유질장(伯牛有疾章)275)에 나오는 '무지(亡之)'를 율곡이 사망(死亡)이라는 뜻으로 썼기 때문에 나중에 선배들이 많이 그것을 따랐다. 그러나 선사(先師)는 "성인의 말은 박절하지 않는데 어찌 병든 사람을 마주하고 반드시 사망이라고 말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곁에서 선생을 모실 적에 대답하기를 "선생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사망이라는 뜻으로 썼다면 '망지(亡之)' 두 자를 아래로 합쳐야 하는데 문장의 형세가 온당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글을 지을 때에 반드시 싸우다 죽거나 스스로 죽거나 한 뒤에 죽었다고 했으니, 어찌 병으로 죽었는데 죽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대저 '망(亡)'자는 '무(無)'자의 뜻으로 쓰는 것이 매우 명백하여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무릇 일의 성취는 말을 많이 하는 데 있지 않고 단지 한두 마디 말로 진실하게 행하는 데에 달려있을 뿐이다. 신선(神仙)이 장수하는 까닭은 정신을 허비하지 않았을 뿐이고, 부유한 사람이 부유하게 된 까닭은 재물을 허비하지 않았을 뿐이며, 성인이 성대한 덕을 이룬 까닭은 악을 행하지 않았을 뿐이다.무신년(1908) 봄에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이 참포립(黲布笠)276)을 쓰고 있었다. 내가 묻기를 "선생이 참포립을 쓴 것은 국가 변란의 망극함을 애통해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하성(下城)277) 뒤에 신주촌(申舟村 신만(申曼))은 백포립(白布笠)278)을 쓰고, 이택당(李澤堂 이식(李植))은 평량자(平凉子)279)를 썼다. 주촌은 어머니와 형이 모두 오랑캐에게 죽었으니 처한 바가 참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이 있지만, 택당이 행한 바는 또 중도에 지나친 듯하여 작년 겨울에 병암(炳菴)280)과 의논하여 참포립을 쓰기로 정하였다." 하였다.시류배들이 산림에 은둔한 선생을 두고 나랏일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조롱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시류배들이 출처(出處)의 의리281)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 어찌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는가. 후세에 글을 쓰는 사람이 나오면 반드시 나를 신도반(申屠蟠)282)ㆍ제갈량(諸葛亮)283)ㆍ도연명(陶淵明)284)의 반열에 둘 것이니, 이것으로 자신(自信)할 뿐이다." 하였다. 先生曰: "學者, 必以聖人爲期, 如捧土塞津、煎膠粘日、畚土移山之心, 則必成矣."【辛丑所聞, 下同.】羅錦溪門人有病者, 錦溪問: "病中工夫, 如何?" 曰: "甚難", 曰: "只如無病時." 【止此】人之處世, 病健死生貧富憂樂, 皆當如一, 此雖用功最難, 常以此心存諸胸中, 無臨事苟且之態也.問: "呼復之某人, 訃吿之某人, 何別?" 先生曰: "復時之某人, 隨生時所稱, 若人於呼者爲伯叔, 則云'伯叔.' 訃吿之某人, 有官則書官, 無官則云'學生'是也."問: "《禮記》'外親無二統', 由此言之, 繼母之父母兄弟, 不當以外祖外舅待之." 曰: "昔朱子撰何叔京墓文, 有云'鄧舅祚', 鄧卽叔京之繼母兄弟也.朱子旣以舅稱之, 則稱號未有不可, 而爲之服, 則不可也."問服, 問: "'母出爲繼母黨服, 母死爲其母黨服', 有詁註兩說, 而恐當以註說爲正.若如詁說, 則不服出母之黨, 只爲繼母生而然也.繼母生則服繼母之黨, 死則服出母之黨, 是以繼母之生死, 易被出之大義也, 烏在其無二統之義乎?" 曰: "然."問: "出後者, 今月遭所後母喪, 而生父大祥在來月, 則大祥時可參祀乎? 若參祀, 則服色當如何?" 曰: "以平涼子、布直領參祀, 似合禮意."問: "《便覽》云'童子無冠巾、首絰', 冠巾則以其未冠故, 然首絰似與冠巾有別.且腰旣有絰, 則頭上無絰, 似涉無儀." 曰: "童子有絰無妨."問: "《家禮》、《備要》、《便覽》皆祭四代, 而《要訣》則只祭三代, 其不同何耶?" 曰: "《家禮》本祭四代, 而國制只祭三代, 故栗谷則不敢違時王之制也.《備要》、《便覽》幷在栗谷後, 而祭至四代者, 以《大明律》有喪祭從《家禮》之文也."問: "《小學小識》, 今於遵昔年訓義之時, 得當時命刊之書.訓義之時, 以宣政殿訓義看, 則語意不通, 以英廟朝訓義看乃通.下文命刊, 乃英廟命刊, 故極行書之, 而'訓義'二字, 亦極行書, 則其爲英廟訓義可知." 曰: "不得不如此看."問: "《書題》第二節, '習與智長'之'智'字, 似當以知覺言, 而本文與《集說》, 幷作'智'字.智與知, 果有分別, 而當如何看?" 曰: "此'智'字, 固不可以四性言, 亦不可以知覺言, 是知識之知."問: "《題辭》第六節, '以培其根'言《小學》灑掃應對之敎, '以達其支'言《大學》修齊治平之事.如此看, 則下文兩節, 脈絡相續, 《集解》說, 恐覺未盡." 曰: "《小․大學》看似勝."問: "《立敎》第二章'請肄簡諒', 《集成》有孔、陸兩說, 而以文勢論之, 陸說稍勝.且已上四節, 在幼穉之時, 故皆以敎言之, 自此十年以後, 則稍有知識, 故皆以自請學言之." 曰: "盛見恐得."問: "第七章六行、六藝, 皆有次序, 而六德之序, 錯雜難曉." 曰: "此言立敎, 故先知後仁, 仁不是四德之仁, 只是這仁慈之心.'聖'集註云'無不通', 亦過也, 只是這通明之義.義、忠、和子細究之, 亦自有先後."問: "《明倫》第二章'凡內外', 《集解》雖但以婢僕言之, 然以'凡'字觀之, 則似以一家之內外言." 曰: "然."問: "第十二章兩'受賜', 以下文'更'字推之, 則上文'賜'字亦似舅姑之賜.而一說上受賜, 或者之賜, 恐不穩." 曰: "上下賜, 皆舅姑之賜."問: "第十五章正誤'自父命呼至色容不盛分爲五事', 而其目之分, 難以辨定.然以'唯而不諾'爲一事, 言其應之速也, 自'手執業'至'不趨'爲一事, 言其趨命之速也, 以下三節各自爲三事, 則如何?" 曰: "方氏說, 雖與盛喩不同, 余意盛喩似勝."問: "《敬身》第二十九章'入里必式', 馬氏雖云'父母之里', 然以他人之里通看, 恐不妨." 曰: "通看爲得."問: "《嘉言》第八章'險躁則不能理性', 《集說》以'德性'釋之, 然德性卽得於天而純善無惡者也, 何待於治之乎?" 曰: "當以氣質性看, 《集說》恐誤."問: "第三十八章'生日不當置酒張樂', 若老爲家長, 而子孫欲之, 則雖有悲感之心, 姑不禁止, 使伸其孝養之情, 或爲一道耶?" 曰: "在我當固守程子之訓, 在子孫則以置酒獻壽爲慶, 必欲爲之.然家長終不聽, 則亦當止之, 使伸其孝哀之心可也."問: "第七十八章'聽箴, 人有秉彛, 本乎天性', 口訣諺解作'하니', 下文'知誘物化, 遂亡其正'語意, 似不襯貼.且'非禮勿聽'註云'自然非禮勿聽', 旣云'自然'則'勿'字, 又何所當?" 曰: "余意以爲'人之秉彛, 乃得於天者, 而知爲物誘, 與之俱化, 遂亡其正理.然惟彼先覺之人, 乃能卓然自立, 知有所定向.學者亦當閑邪而存誠, 若其非禮之言, 則愼勿聽之也.' 此段口訣, 以此意定之, 恐好."問: "第八十七章'不要有富貴相'之'相'字, 何義?" 曰: "陶菴雖以'氣象'言, 余意以'貌樣'看似勝."問: "《善行》第三十四章'鄧攸棄其子, 而全亡弟之子', 其友於弟, 則雖曰善矣, 而其滅絶天倫, 則豈不關於大義乎? 寧不能兩全, 不當棄其子也.其後卒以無嗣, 熊氏雖云命也, 恐以絶倫故也." 曰: "此章朱先生本不欲載之於《小學》, 而劉子澄所載者也.若非有惡於絶倫傷理, 則朱子豈不欲載之也? 然則攸之無子, 可謂宜矣, 而時人所謂'天道無知'者, 又不知其意也."問: "虛靈是心之體, 以心對性, 則心當屬氣, 虛靈自是氣.《大學》首節小註, 陳北溪所謂'理與氣合, 所以虛靈'者, 以所以爲虛靈之理言耶?" 曰: "直指當體而言, 則固是氣, 然其所以爲虛靈, 則無所理耶? 想陳氏之說, 亦如此意, 而措辭不精, 以理氣對立而言, 故先儒嘗論其不安矣."問: "誠意、正心兩章, 獨有章下章句, 何意耶?" 曰: "誠意則獨作一傳, 正心修身連作一傳, 不可無發例, 故兩章之下, 獨有章句."問: "八章之結語、九章之起語, 皆反辭而措之者, 其丁寧之意, 有切於他章歟?" 曰: "修身是自己事, 齊家是推人事, 相距19)稍遠, 家之於國亦然, 皆用反辭者, 蓋示丁寧之意."問: "平天下章無結語者, 治平同是一事故歟?" 曰: "然."問: "平天下章二十三節, 當分爲六段看.首一節言有絜矩之理如此, 當爲第一段, 次二節言絜矩之方如此, 以覆解上文之意, 當爲第二段, 三引《詩》揭出好惡得失, 言絜矩之能不能, 當爲第三段, '先愼乎德'至'舅犯'十一節, 揭出財用, 言絜矩之能不能, 當爲第四段, 《秦誓》以下五節, 申言好惡得失之極, 以覆解三引《詩》之意, 當爲第五段, 自'生財'至終篇, 申言財用之極, 以解第四段之意, 當爲第六段.此意如何?" 曰: "盛見得之, 而但首二節, 合爲一段, 似好."先生論晦翁《觀書有感》詩曰: "'半畝方塘一鑑開', 言心之形體也, '天光雲影共徘徊', 言萬理咸備也, '問渠那得淸如許', 言心何以得此淸明也, '爲有源頭活水來', 言心之所以淸明者, 以其源頭有性理也, 若無性理, 心何自而得淸明乎?"子孫或有未及吿, 而受人之饋, 必厲聲大責曰: "是使我陷於不廉之地, 其不孝孰甚焉."見家君書"父子讀書"之語, 飮泣而言曰: "余昔侍先子, 看朱、宋書及方遜志文, 永夜篝燈, 講貫不輟.今則先子下世已久, 不可復得, 每見人家父子讀書, 輒不覺淚下."有求爲師生者, 先生曰: "此事不可輕爲, 且幾年相從, 而後定之未晩也.農巖曰'一番及門, 輒呼師生, 叩其實, 則蔑如也.古之所謂生三事一者, 果如是乎?' 此言嚴峻可法.吾門人延壯熙從余數年, 未嘗求爲弟子, 徙舍從余, 幾年亦然.當甲午之亂, 謂余曰'當此亂離, 彼此死生未可測, 願定師生之分', 其人之不輕於大事, 亦足爲人之法.""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鍾鼓云乎哉?", 余有一言而繼之曰: "學云學云, 文字云乎哉?"氣質之所以濁亂, 如本淸之水, 和以塵穢而爲渣滓, 其淸粹自在其中也.兵貴精不貴多, 學者亦然.精兵與鈍兵共陣, 鈍兵敗, 精兵亦隨而敗.善學者與不善學者同門, 不善者有過, 善者亦受其汙.忠信者, 爲學大本也.吾嘗聞諸先師曰: "忠信命脈所關, 此言當惕念.雖程、朱之文章, 栗谷之性理說, 若無忠信, 吾何以觀之哉?"《中庸》天命, 單主理, 故不言明; 《大學》天命, 主虛靈, 故言明.《中庸》明德, 以聖人成德言; 《大學》明德, 以人之固有言.與人講論, 如有不合, 只可更商, 切不可苦苦爭辨是我而非彼.昔梅山先生謂先師曰: "君於講論之際, 人我不合, 切勿求勝, 且宜置之.彼必謂我不勝, 雖聞此言, 於我有何損?"洪由範曾祖, 孝愛備至.年十三採樵而歸, 見父母相忿爭, 乃敲門而歌.父母問其故, 對曰"必有一勝, 此爲勝戰鼓", 父母聞而相笑, 其爭遂解.不圖十三歲兒意見如是, 若辨析是非, 欲解其爭, 則必無解爭之日矣.鎭岑斗滿村居金材老, 事母至孝.嘗置油於卓上, 老母以爲水, 棄於地, 其幼子驚言曰"何爲棄油", 其妻聞之疾往, 掩口引去, 與之餠果曰"祖母若知爲油, 心必不安, 愼勿復言." 材老自外至, 見其子食餠果曰"汝何喫盡祖母之供?" 其子語之故.材老歸拜其妻曰"安吾老母, 敢拜." 此兩人之孝求古罕聞, 吾黨之事父母者, 宜視以爲師也.先生問諸生曰: "孔子畏於匡, 若孔子得免, 而顔子將遭害, 則孔子將死救之, 將引避之?" 林鍾斗對曰: "恐當以死救之." 又問"子游爲武城宰, 盜賊欲害子游, 而孔子適至, 則又當如何?" 金澤述對曰: "子游旣在官, 不可避, 則爲國而死, 義所當然, 孔子似不當以死救之", 先生曰: "吾見亦如是矣."水有聖人之德, 長養萬物, 仁也; 灌漑以時, 義也; 灌以節中, 禮也; 周流無滯, 智也, 四者皆實; 信也.五者皆備, 大矣哉, 水之爲德也!梅山以義理敎門人, 全齋以禮節敎門人, 故梅門人之力行, 不及於全門人.金炳周問: "性是理, 而張子云'合虛與氣, 有性之名', 何也?" 曰: "理不合氣, 自是理而已, 安得謂之性? 如今趙監司若不與完營合, 自是趙某而已, 安得有監司之名?"林鍾斗問: "凡天下之事, 其理一也, 知醫術者, 見人之病, 必吿之以藥.若使顔子當魯之時, 見季氏亂政, 獻策于魯君, 使之大治, 與醫者之救病人無異, 恐不害義", 先生曰: "此則固然, 若使處女知醫, 而隣家男子有病, 則可私吿療方於男子耶?" 鍾斗曰: "女子雖無意, 不無嫌疑, 不可爲也", 先生曰: "士子之於國君, 亦如處女之於男子, 身不在位而謀政, 則不無求仕之嫌耶?"聖人之修德, 如富人之聚財, 雖至積累, 猶以爲未足.蓋徒知道理之無窮, 不知在我之有餘也."仁"字, 有專就心上說處, 如"三代之得天下也, 以仁, 其失天下也, 以不仁"之類, 是也.【癸卯所聞, 下同.】"仁以爲己任", "任"字是生初擔負來者, 非到來中間擔此物者也, 父不得以代其任, 子不得以代其任, 只在自家盡力負將去.天下之人品有四等, 儒者以復性爲道, 釋氏以明心爲道, 世之學人以客氣爲道, 流俗之人以奉養形體爲道.人之一身, 譬如一國, 性猶君, 心猶宰相, 耳目口鼻猶百官.其間主宰有爲者是心, 必須制他耳目口鼻, 使不縱其所欲, 則無覆敗之患.然若自主而不以性爲本, 則亦不濟事.問: "佛家謂'人身則幻肉殼, 人心則幻識, 人性則眞如', 佛氏恐亦非認心爲道." 曰:"佛氏所謂'卽心是佛, 有人識得心, 大地無寸土'者, 豈非認心爲道者耶? 佛家有六識、七識、八識之說, 欲滅妄識而契眞識, 眞識卽本覺也, 本覺豈非心乎? 且象山心卽理之說, 先賢目之以禪學, 若使佛氏去心尊性, 則象山禪學之目, 亦非其實也.佛氏所謂'見性成佛', 果是識得天命之性耶? 達摩吿梁武帝有云'淨智妙圓, 體自空寂', 只此八字, 已佛家之妙矣, 此豈非指心爲性之見耶?"問: "釋氏從心上做去, 我亦從心上做去, 若嫌彼而諱'心'字, 則是猶惡蝎而乘屋." 曰: "從心上做, 固無彼此之分, 但彼以靈明覺識爲本, 吾以仁義禮智爲本, 此却不同也."問: "今世多有禪學人, 害道甚大?" 曰: "彼雖禪學, 猶有存心一段極精細, 猶勝於吾儒之名爲尊德性, 而不免爲客氣所使也."釋氏所謂"眞如", 果與吾儒所謂"天命之性"同乎? 吾儒所謂"性", 何嘗有空明靈覺之象? 彼所謂"性", 何嘗有仁義中正之理乎? 其言見性之性與般若、如來、神通妙用之屬, 不過吾儒所謂"心"者也.從心上做起, 儒、釋無別.特吾儒靜而保守道體, 動而暢達義用, 彼則靜止於空明惺寂, 其發也又無省察克治、循塗守轍, 此所以異也.蓋靜守道體、動達義用兩句, 正吾聖門一條正脈, 而非異端俗學之所能亂也.然吾曹號爲學道, 而于此兩言, 依靠時少, 違戾時多, 其違戾時, 却與釋氏無別.故吾故曰"異端本無種子, 心之存主作用, 纔不原於性命之理, 卽是異端也."爲法官, 枉殺一不辜, 則後必受殃, 此天道然也.殆有甚焉, 儒者立文, 或不精審, 枉斥善人, 則其受殃, 豈在殺不辜之下?先生問諸生曰: "或有譏儒者不出仕曰'無伊尹之德, 而效伊尹之出處', 此言如何?" 澤述對曰: "伊尹之德所以盛, 出處合義, 居其首, 後人之學伊尹出處者, 便是有伊尹之一德, 恐不合加譏." 先生曰: "崔丈曾以此譏先師, 不知其何所道也."敎子當擇賢者爲師, 不可只取能文者爲師.每見今人敎子者, 不觀人之賢否, 只取能文者爲師, 卒以誤子, 可不謹哉?問: "庶人妻稱孺人, 無乃僭乎?" 曰: "《禮記》云'禮窮則同', 士之妻得稱孺人, 則庶人妻亦稱孺人, 不爲僭也.但常賤人之妻, 不當稱也.""爲人後者, 繼母存, 則以繼母黨爲外親"者, 尤菴說也."入後者, 嗣父之後, 非嗣母之後也, 當以前母黨爲外親"者, 本菴說也.梅山、老洲諸賢以爲本菴說峻正可從.士之見識有兩般, 高見正識者, 義理昭著, 處事得宜, 多見博識者, 染於俗習, 處事多錯.佛家詩云: "阿彌陀佛非聾漢, 念念彌陀柰爾何, 滿山風雨無人境, 驀地相逢卽自家", 此言學佛者, 言必稱彌陀, 然至於消落物累之日, 自家卽是阿彌陀佛也.吾儒亦然, 學聖賢者, 言必稱孔、孟, 而至於私欲淨盡, 道盛德立之時, 自家卽是孔、孟也.天地之缺齾, 必待聖賢而補, 天地如一屋子, 聖人如屋主.屋子破壞, 則主人必戒飭子弟僮僕, 運木輸石, 以改葺之.天地缺齾, 則聖人必訓迪後生, 敎仁義正禮樂以補之.然則吾輩之於聖人, 猶子弟僮僕之於屋主也, 可不遵其敎盡其力也哉?君子之君, 國君之君, 君子之子, 子男之子, 古者有德者, 必爲君, 必爲子, 無德者, 爲農工小人.故後世雖未必有君、子之位, 而有德則稱爲君子; 雖有君、子之位, 而無德則指爲小人.此有龜山說可考, 或以爲"君"字國君之君, "子"字子民之子誤矣.問: "父師同坐, 拜之先後如何?" 曰: "以齒爲序." 又問: "父子同事一師, 父之年高於其師, 而同在一席, 則其子拜之, 何先何後?" 曰: "當先其師.設使曾晳年高於孔子, 曾子決不當先拜曾晳而後孔子也."論曾子易簀曰: "曾子當氣息奄奄之時, 一聞人言, 扶而易之, 其勇爲如何哉? 其臨死之時猶然, 況在常時, 旣知其錯, 則可不用力而改之? 當以曾子易簀一事, 常常念在胸中曰'彼至急至難之際, 猶能勇決如此, 況我日用常行之間, 過則改之, 何難之有?' 以此立心, 而力行之, 庶有依據, 易爲得效."近世以來, 微裔衰族, 失其先繼者, 附於右族, 欲顯其身, 此難容於覆載之罪也.余亦以失繼, 至痛貫心, 幸賴祖宗之靈得反正焉.故平生不作人家譜序, 獨反正謬譜者之來請, 輒不辭而作也.士友中, 見余不趨貴勢, 固守微宗, 輒改其先世之謬譜者七八家.吾平生無補於世, 惟此一事, 自謂大補世敎而仰不愧天者也.先生曰: "有人問尤翁'萬物皆有動靜, 梅花之動靜, 何以知之?' 尤翁答曰'有香臭時是動, 無香臭時是靜'.【止此】以是推之, 如合歡草之夜合晝開, 便是動靜." 澤述請曰: "如梅花花葉俱發時是動, 無花無葉時是靜, 如此說如何?" 先生曰: "此則固然.然尤翁及余所道者, 皆言動中之動靜, 若推其本, 則豈但如是? 梅樹萌芽在土中是靜, 生出土上長長去是動, 未萌芽是靜, 已萌芽後是動."天之降災, 非惡生民也.雨露霜雪, 無非其敎, 而人不能循敎, 則天必降災以警之.譬如父之於子, 師之於生, 無非敎訓, 而子不能承父之訓, 生不能從師之敎, 父師必加怒責.故生民見天之災, 恐懼修省, 則天必悔禍, 子弟受父師之責, 勞而不怨, 則父師必底豫.《論語》浴沂章集註"若達却便是這氣象", 退溪以達却爲句, 後賢又多以"達"字爲句, 余意以"達"字爲句, 似愈.見遭父在母喪, 過十五月不禫者, 歎曰"伊川先生云'禮一失則爲夷狄, 再失則爲禽獸', 其此之謂乎?"問: "遠隔宗家, 拘於事勢, 不得往參于祭, 則以紙榜行之可乎?" 曰: "朱子答黃子耕書, 有此說.吾先子亦以遠隔宗家, 不得參祭爲恨, 及得朱子此語而行之.然恐終非正禮."問: "繼母之父母, 於禮無服, 然若幼而被其收養之恩, 則如何?" 曰: "素帶三月, 以伸情可也."人之愛賢士, 與愛花相似.花之妙者, 不翫其色, 聞其香, 折取爲己物, 則須臾便凋瘁了.士之賢者, 不敬之以禮, 招來爲己役, 則志降身辱, 士不得爲士矣.東人稱無位之人曰"幼學", 至於稱己之父祖亦曰"幼學", 殊甚可笑.《禮記》曰"人生十年曰幼學", 幼學者, 只十年之稱.而八九十歲老人, 亦稱幼學, 是何意味? 稱父祖以幼學者, 以其父祖作十歲人看, 豈非妄言耶?祖之妾, 本無服, 若有收養恩, 則服緦可也.甲辰夏, 全北按察李某, 延先生設講於明倫堂.先生論《公孫丑》首章集註楊氏說曰: "楊氏以範我不獲譬子路, 詭遇獲禽譬管仲, 其意則可謂正矣.以事理言之, 則有不然者.孔子旣稱'子路之才, 可治千乘之賦', 子路又嘗自言'千乘之國, 攝乎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用, 且知方也.' 三年爲之, 猶且如此, 況四十年之久, 如管仲之於齊國, 則其功烈, 豈下於管仲哉? 斯義也, 金仁山已言之.我東自遂菴以下, 群賢無一人立朝端任國政, 此蓋以朝廷謂儒者無政事之才, 其所徵辟者, 外飾文具, 非實心也." 因謂按察曰: "我之此言, 雖若時諱, 然我國若使遂菴以下, 群賢任之國政, 則決不如壯洞、璞洞、雲峴二三家之所爲也.何以言之? 雖謂儒者無政事之才, 諸賢必以忠君愛民爲心, 苟以忠君愛民爲心, 則國何有不治乎? 設或時不我與, 寧有乾淨而亡, 豈至如今日爲夷狄之臣妾乎? 其弊, 由於學政爲二.儒者以爲'雖有通天絶人之學, 朝廷旣不以學問取人, 則何必用功於經濟之術', 朝廷以爲'儒者只談性命太極, 昧於經濟, 取之無所用', 二者相反, 何以濟事? 必須學政合一, 然後天下可治安矣."【甲辰所聞, 下同.】先生曰: "今人多跪而焚香, 然諸禮書皆云'焚香跪', 無跪焚香之文, 立而焚香, 焚香而後跪可也, 吾亦依此行之矣.讀祝時, 《家禮》無'主人以下皆跪'之文, 始出於《儀節》, 今雖擧世通行, 好古者不行可也.考妣忌祭, 先再拜哭盡哀, 先哭盡哀再拜, 兩皆可行也."湖南學者, 因蘆門規模, 不務檢束, 此是大慮.昔吾先師謹於衣冠瞻視之間, 雖入內室, 未嘗不正衣束帶.吾所以苦口吿戒者, 欲與諸君謹守先師法門, 不墜於地也.問: "小君喪除服前, 不行鄕飮酒禮, 除服後, 可行乎?" 曰: "服雖除, 几筵未撤, 不可行也.梅山先生見內喪練後, 登科設樂者, 歎曰'先王禮法盛時, 不敢如此, 今有此等悖法之事, 可見世道之衰', 全齋先生亦言'國恤小朞後, 臣民不當設樂'.以此觀之, 飮禮亦有樂歌, 則其不可行明矣."《中庸章句》以五倫釋達道, 五倫卽是理也.或人指三達德爲理, 此言非常醜差.《孟子․盡心》章集註"知天而不以殀壽貳其心, 知之盡"者, 卽達德之知也, "事天而能修身以俟死, 仁之至", 卽達德之仁也.若如或說, 則此章知仁, 亦可謂之理也乎? 若以知者、仁者, 循天理之公, 故謂之理, 則可也.《中庸》云"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此三者, 是天下之至難, 則夷狄可攘雖不言, 亦在其中矣.夷狄雖攘盡無餘, 中庸不可能, 況柳氏之夷狄尙不能攘, 而遽自處以權而得中乎? 大抵金門人徒以節義事功爲尙, 至於出處義理, 都不問, 洪、白兩人, 可謂白刃可蹈, 至於中庸則遠矣.學者須是沈心積慮, 反覆思索, 有疑然處, 然後質問于先生長者, 乃能一聞而終身體認.若全不思索, 撩東劄西, 猝然來問, 則問者初無憤悱之功, 雖施以啟發之敎, 聽者不能入耳存心, 思索路徑, 終不通矣.道非高遠, 今人何苦厭卑近, 以爲不足爲, 遽談難知底太極性命之理? 昨日某人之言, 似涉此病.大抵學者, 只是問揀難底, 行揀易底, 如此不已, 終身不濟事."素夷狄, 行乎夷狄", 謂雖夷狄之中, 爲其所當爲.以平常時言, 則如言忠信、行篤敬是, 以變亂時言, 則如明末士大夫全髮而死是也.因謂諸生曰: "今吾輩見在夷狄之位, 如當剃變, 則寧有捐軀, 髮不可毁, 如此然後, 可謂素其位而行.或者云'行乎夷狄, 是行夷狄之行', 揆以義理, 觀以文勢, 全不成說.此甘心爲夷者之言, 初不可掛齒也." 金淵述問: "或者以爲'如使孔聖當剃變之世, 則聖人自有達權, 必不不削而死', 此言何如?" 先生曰: "或人之以達權言聖人者, 蓋以尊華攘夷萬古之常經也.若言常經, 則不敢生心發此等言, 故必言達權, 此人名遵聖人權, 而實濟欲生之私也.若曰聖人盛德, 自能感化夷狄, 使不敢犯手則可矣."學者見識雖高, 大德雖不踰閑, 必致謹於曲禮小節之間, 然後乃爲全德矣.謝上蔡見識之高, 非諸儒之所及, 然不謹於小節, 嘗不滿橫渠以禮敎學者曰"正容謹節, 非禮之本", 其流至爲禪學, 可不謹哉? 蓋徒尙性命理氣之說, 則曲禮小節, 不期輕而自輕矣." 以我東言之, 則暄、蠧之時, 只是淳朴之氣而已, 自退、栗之時, 性理之說大明, 逮至今日, 則資質超邁, 可與共學者, 只懸空說太極陰陽之理, 至於容貌辭氣之間, 視以爲無事, 如非有大心力者出, 不能回淳反朴, 而復孔門敎人之規模也.論《論語》"苟志於仁"章, 問諸生曰: "'矣'字是決辭, 宜在"無惡"之下, 而在"志仁"之下, 何也?" 澤述對曰: "雖志於仁, 苟不決然, 則未能無惡, 下決辭之'矣'字於志仁之下者, 言決然志仁, 然後可以無惡也", 曰: "固是《論語》文章絶妙, 此等處可見."歎今世學者不實用力曰: "昔伊川自涪州還, 門人皆流于夷狄, 惟謝、楊二人長進.如使伊川視吾輩和謝、楊二人也, 無了不足以開眼矣, 大抵此甚難甚難."禮數之間, 有見禮貌失措而笑之者, 先生正色責曰: "伊川與韓持國同行, 韓氏子弟從之私自笑語, 伊川責之曰'汝輩從長者而敢笑語, 韓氏孝謹之風衰矣'.鄭石塘嘗至連山金氏家, 將還出門外, 金氏少年見其衣冠寬大, 動止異常, 相與笑之, 石塘還入招而責之曰'汝輩以法家子弟, 乃敢笑而送客耶?' 主人大慙.君輩須絶禁此等不美之習."有具贄請入《觀善錄》者, 先生曰: "此事只在心之虛實, 不在贄之有無.余年二十一, 具贄謁全翁, 全翁曰'吾未嘗以師道自處, 凡以贄來者, 一切不受, 名以門人者, 只書《文會錄》中, 故於君亦不敢受.惟君勿以物爲贄, 但以心爲贄.' 余心雖未滿, 不敢固請矣, 後見亦無一處受之.余雖未得獻贄於全翁, 後世以余爲不修行有累全翁則可矣, 必無以余爲非全翁門人者矣."儒門相從, 觀人善否, 不拘色目.以前輩已行之事考之, 嶺南安某初斥沙溪, 後乃率德改行, 故陶菴作其行狀, 柳始秀, 緯漢之後, 自知厥祖之非, 故華西納爲門人, 梅翁與之相從, 以上諸賢之事, 可遵而行也.稽首拜, 只行於君師父之前, 自當宁至太祖, 自父至始祖, 皆可行.師則君輩旣號我爲師, 於全齋、梅山皆可行, 老洲、肅齋雖切尊慕, 只當頓首可也.近齋、渼湖、尤菴、沙溪、栗谷、退溪, 又全、梅兩先生淵源之所, 自溯而上之, 則自朱子歷伊川、明道、橫渠、濂溪至孔子、顔、曾、思、孟、堯、舜、禹、湯、文、武、周公, 皆可行稽首也.人心、道心, 皆主動而言, 然道心通貫於靜.未發時, 惺惺寂寂, 是道心也.未發工夫, 初學難於下手, 且從有形跡處, 循蹈規矩, 做工夫可也.敬而不容一怠, 然後乃可謂敬勝怠.纔有一毫怠意, 便是怠勝敬, 義欲亦然.守宗齋門人有夕後將退欲行拜禮者, 守宗齋止之曰: "吾未敢以師道自處, 不必以師禮施之, 且君拜則吾必起答, 何必使人每每起立乎? 雖以師生之禮言之, 本無晨昏拜.蓋事親之禮, 莫備於《內則》, 而晨昏無拜, 我國愼齋始行拜禮, 遂成俗禮.大抵非敢以愼齋所行爲未當, 但不必據以爲經禮也, 故鰲村當坐而受拜處則受之, 其他則止之."【止此】余意似不然.明道先生嘗稱"康節學術於李挺之, 坐則必拜, 飯則必襴, 雖在野店亦然".坐必拜之, 煩於晨昏之拜, 而見稱於明道, 則晨昏之拜, 尤不可廢, 可推而知矣.且弟子之拜, 坐而擧手答禮可矣, 何必每每起立乎? 若事親言之, 《內則》之無拜者, 想是古人事親之應行節目, 故不待言之而後行之也.如遭先生於道, 與之言則對, 不與之言則趨而退, 此雖不言拜揖, 豈有無拜無揖, 而偃然對先生之理乎? 且唐夫人事姑孝, 每朝拜於階下, 而朱子載於《小學》.婦之事姑如是, 則子之事親, 獨不可如是乎? 若以愼齋所行謂俗禮, 而不可據以爲經禮, 遂不行之, 則周公《儀禮》, 大綱細目, 若是具備, 婿婦交拜之文, 不見於此, 乃後世所行之禮也, 亦可謂俗禮, 不可據以爲經而不行乎?金觀洙問: "近世儒門, 相從規模, 行贄禮而定師生, 則稱門人小子, 不行贄禮而定師生, 則只稱侍敎生.然沙溪之於栗谷, 已定師生, 猶稱侍敎生; 農巖之於尤菴, 未定師生, 而猶稱小子.竊以爲今雖未可用侍敎生之稱於已定之師, 至於門人小子之稱, 雖未定師生之分, 出入其門, 數年受誨, 而實心服事, 則稱之以此, 似無不可", 曰: "師生之誼, 雖非專繫於稱號之間, 然大抵前輩之規模, 較不及後世之分明周密, 此等委曲之禮, 從後世已定之例可也.且沙溪之事, 恐是定師生之前也."宋君弼問: "相揖禮之式, 未知出自何人?" 先生曰: "此本嶺儒李玉村所撰, 而太涉繁碎, 故退翁略加刪潤者也.遠門以不載退翁集, 謂於古無據不行之.然先賢所著之書, 逸而不載於全集者或多, 如尤翁平日所著, 亦多未載於《宋子大全》者, 似不可以不見於文集疑之也.且無論據之有無, 只合義理, 則可以行之, 豈可拘於據之有無, 而不行合理之事乎?"鄭永謙問: "妻之叔父, 姪女之夫, 年齒相等, 則其相與之節, 當如何?" 曰: "當以朋友之禮相與也."問: "栗翁於年少姊婿, 極尊敬之, 每坐必在其下, 龜峯不以爲是, 當何所適從?" 曰: "栗翁似太過, 從龜峯之言可也.安可因姊之尊, 而幷尊其夫乎? 雖長我三四年, 不當拜也.東人極尊姊婿, 無異親兄者, 自是俗習也."問: "朞以下, 前服未除, 而遭後服者, 服之輕重同, 則常時持何服乎?" 曰: "當以尊卑爲定."深衣之制, 諸家所論不一, 莫知適從.然全齋先生嘗曰"深衣之說, 不勝紛紜, 然其制旣著於《家禮》、《備要》, 而晦翁、沙溪俱是大賢, 則從兩先生所定, 足爲寡過之道." 先師之言如是, 故吾家所裁深衣有數件, 而其制各自不同.至於壽衣, 則從《備要》裁置耳.李炳殷問: "父祖偕喪者, 欲廬墓, 則當於父墓乎? 祖墓乎?" 曰: "旣不可專於一處, 亦難分所, 且此事本非正禮.以極等義理言, 則居家謹禮, 而不行廬墓可也.如欲行之, 則父祖皆立廬舍, 一望守祖墓, 一望守父墓, 兩伸其情可也.若爲勢所拘, 不能然者, 只從所重, 而專守祖墓, 乃爲孝子順父之心也."《近思錄》冲漠無朕條"塗轍", 當以萬象之"象"字意看.如云"引入來敎入象, 旣是象, 却只是一箇象之理也."朱子云: "習與知長", 知是漸漸長去底物.雖以孔聖之生知, 八九歲之知, 不可遽謂聖人之知也.必是漸漸長去, 而至於知天命.朱子云: "讀書須要緩視微吟", 如此然後, 聲由心出, 而意味深長.若高聲之是務, 則聲出喉舌之間, 無些子意味也.先生手造頍項緇冠樣子, 授澤述曰: "此是古制, 而見於《家禮增解》, 可考而知也.吾於行時祭時, 服深衣, 而或用此冠.嘗謂家人曰'吾歿斂襲時, 或用此冠亦無妨.' 君亦居家之際, 承祭之時, 時用此冠, 以漸復上古衣冠之制爲心也."讀書只要專一, 如看此一段未了, 不可徑看下段.又如讀《論》、《孟》, 至引《詩》、《書》處, 有疑晦, 考看《詩》、《書》, 則只看所引之段, 上下段都不可看.人之在家, 居處飮食, 安泰華侈者, 或遠遊講學, 則不能攻苦食淡, 必致疾病, 諸君居家, 勿過爲安逸也.昔舒文靖公徒步謁師時, 遺書其家曰"櫛風沐雨, 反爲美境, 弊牀疏食, 總是佳趣", 每諷咏使人興起也.人莫不知好吉而惡凶, 却不知禮是吉而非禮是凶, 視聽言動, 不憚於非禮, 不知甚也.今人之講學, 與古人之講學不同.古人之講學, 講其所當學, 學其所嘗講, 講學相須而爲一, 今人之講學, 雖講其所當學, 講自講學自學, 講學相分爲二.甚於此者, 又不講其所當學, 而只講心性名目, 爭同爭異, 何益之有? 昔人云: "《中庸》明道之書, 《大學》講學之書", 諸君不如且舍《中庸》, 從《大學》上熟講修己治人之方也.謂金觀洙曰: "以文章言之, 則河西先生之文章, 非不精到也, 必不能不下於牧隱、澤堂、五山諸公.而後人之尊慕先生, 不與諸公比者, 豈非以先生道德之崇, 出處之正, 感人之深也乎? 惟君勉進實德, 不尙文辭, 趾承先祖之美也." 又曰: "栗翁之文, 後世文章家雖不尙之, 然其道德若是巍巍, 後生之尊慕者, 誰敢以此少之哉", 又曰: "澤堂文章雖有餘, 德行亦高, 不可但以文章論之也."爲名賢之裔孫者, 持身處事, 倍難於他人.微宗庸族之人, 雖有小小善行, 已足以賢於其祖, 故易得令名, 過失則雖稍大, 人必曰不足責也.名賢之裔孫, 雖有卓異之德行, 猶難及其祖, 故人不稱其賢, 至於過失, 則雖微纖之事, 人必曰以某賢之孫, 所行乃若是乎, 豈可不念厥祖而勤修德哉?八月二日夜, 先生謂諸生曰: "明日, 純元王后忌辰, 且舍伯諱日, 吾於此日, 未嘗不食素, 其於進食, 勿置魚肉", 因曰: "雖士人, 當逮事君王忌辰, 禮義所在, 不御酒肉, 此有前輩已行之事."金鍾昊問: "有宋諸賢, 以英邁豪傑之資, 多入禪學上用功, 莫是於治心之方, 却有不妨否?" 先生曰: "終是有妨.吾儒門中, 自有治心妙訣, 何須就他求不妨? 吾儒治心得實, 禪學治心得虛", 又曰: "釋氏却無窮理工夫一段, 所以濟事不得."人生禍福, 皆由葬埋者, 無據明矣.今有王者作, 中分天下, 令北方用葬師之法, 南方不得用之, 則名公巨富聖賢文章, 豈出於北方, 而南方之人, 皆貧賤庸惡乎? 必無是理也.諸生有讀書搖身者, 先生責之曰: "《曲禮》云'坐必安.' 劉忠定談論踰時, 體無欹側, 豈可對聖賢之書, 而搖頭掀身, 不謹威儀乎? 呂榮公言'後生初學, 且須理會氣象, 氣象好時, 百事是當', 凡此皆氣象之不好者也, 切宜戒之.余嘗見桂田申相公, 坐必拱手當心, 或置兩膝間, 至半日之久, 未嘗少有欹側搖動之象.積四十餘年, 終始如一, 此所以壽至九十有餘, 位躋一品者也.呂滎公所謂'貴賤壽夭之所由定'者, 於此可驗矣."聖賢敎人入道之方, 如克己復禮、戒懼愼獨、求放心之類, 不一其端.學者如從克己復禮做工夫, 只當專用力於此, 且不問戒懼愼獨、求放心, 是如何用功? 凡所讀經傳把來, 做克復之需, 只此克復工夫精熟了, 戒懼愼獨、求放心, 不待用功, 而自然見效矣.從戒懼愼獨上做工夫, 也是如此, 從求放心上做工夫, 也是如此.聖人之心, 與道無間, 其用功雖不如學者之戒愼恐懼, 然其憂勤惕厲之心, 亦未嘗一時少息.學者只爲心之運用, 不合於道之本體, 所以常存敬畏.聖人猶且以德不修、學不講、義不徙、過不改爲憂, 我輩當憂之不足, 而繼之以泣也.余嘗以爲欲知仲尼樂處, 須要先知仲尼憂處.曾子大賢也, 而其臨終時, 自言"其言也20)善", 又言"所貴乎道者", 宜其有妙訣, 而乃不出於容貌辭氣之間.然則容貌辭氣有關於道者, 豈不大哉? 學者當認做一大事, 而不可少忽也."好察邇言"一句, 儘覺緊切, 余嘗擧《畢命》21)"克勤小物"一句, 做對看.《大學》傳八章結辭, 與他章不同者, 以此章內, 不言齊家正面, 故反辭而結之, 以示丁寧之意.《論語》賢賢易色章"未學", 非實未學也, 只是外面說話, 與"雖曰不要君"文勢相同, 不要君, 是何嘗實不要君者乎? 斯義也, 先儒已言之.《孟子》"獨樂樂"、"與人樂樂", 集註以上"樂"字爲音樂之樂, 下"樂"字爲喜樂之樂, 似未盡.金仁山易之, 以上"樂"字爲喜樂, 下"樂"字爲音樂, 當從之.諸生於衆會中, 誤穿他人屨者, 先生曰: "'千萬人中, 常知有己', 今此數十人中, 不知有己, 做成何事?"問: "父在母喪, 服吉當在何時?" 曰: "自喪計之, 至二十八月, 擇日至墓前除之, 哭與不哭, 惟在行之者如何.然父喪吉祭, 亦無哭之之文, 不哭而除之, 似得宜."《中庸》之書, 如生龍活虎, 有屠龍搏虎手段, 乃可讀.所謂"氣自爾, 非有使之"者, 如人少則氣盛, 老則氣衰, 一盛一衰者, 氣之自爾也, 豈理眞能使之盛衰也哉? 所以一盛一衰者, 乃理也.因指櫛髮而言曰"手之一升一降者, 氣自爾也, 所以一升一降者理也.豈理眞能使之升降也哉?" 若如《猥筆》之以操縱適莫之權, 一歸之理, 則天下之事, 善者常少, 不善者常多, 不善之事, 理皆任其咎矣.於是乎理爲爲善爲惡之物, 而其位降而不尊矣.聖人之心憂勤惕厲者, 氣之自爾也; 常人之心怠惰放肆者, 亦氣之自爾也.若謂理能使之憂惕怠放, 則使聖人心之理, 豈與使常人心之理有異, 而一使之憂惕, 一使之怠放哉? 雖曰理不能使之, 然其不使之使, 乃理也, 所謂"不使之使"者, 卽所以然也.洪約厚問: "院宇享祀先儒時, 多士推其子孫及族人中年高學邃者爲獻官, 則祝文年月日下, 當書屬稱, 抑稱以門人後學而具書姓名?" 先生曰: "子孫族人, 不宜主獻, 只參祀可也." 又問: "書院祭享, 獻官例著黑儒巾, 則國恤中, 當著白儒巾乎?" 先生曰: "白儒巾, 恐非所宜, 無乃當著白笠耶?"邊復源問: "父母犯邪學泣諫, 而終不聽, 則負父溺死, 使父不陷於不義, 此說何如?", 先生曰: "陸秀夫負帝赴水, 使殉社稷, 梁山璹負母投水, 使全其節.今此事則與陸、梁二事不同, 不可爲也.先師嘗曰'父若謀爲惡逆之事, 子雖號泣諫爭, 不可告變, 擧兵之日, 自死可也', 謀逆猶不可負父同溺, 只自死而已, 況下於謀逆之事乎?"桂田申相公、立齋宋相公, 近世賢宰也.申公吾平生尊敬, 如伯叔父, 宋公吾雖未拜, 慕仰無異申公.然二公老年燕居, 皆不著廣袖上衣, 此吾所未滿者也.蓋常著廣袖, 坐臥之際, 固有難便.然二公亦皆常著狹袖上衣, 則兩袖之下, 加綴一尺布, 有何大段難便? 且在禮義大明之世, 則老卿宰, 雖或如此, 不至爲世敎之大害, 當禮義板蕩之世, 華夷之辨, 在於有無袖之間, 尤當固守先王之法服, 以嚴華夷之辨可也.《大學》序, 《曲禮》、《少儀》、《內則》、《弟子職》云云, 只是帶去說, 或有據齊氏註 "此四篇作於春秋"之說, 以爲此四篇亦皆孔子誦傳.然《弟子職》外《曲禮》諸篇, 明是漢儒所著, 孔子何得誦傳? 此據《曲禮》"坐如尸, 立如齊"節, 朱子說可見.公明儀, 孟子前人, 官本解作孟子時人者誤矣."宜若無罪"一句, 是孟子引公明儀之言, "曰薄乎"以下, 釋公明儀之意.問: "子有廢疾, 不能受衰, 則其孫直爲承重乎? 以本服攝行乎?" 曰: "尤菴雖據朱子說, 以承重爲正, 然朱子本以帝王家禮言, 尤翁之證於私家禮者, 未及細察而然也.同春、梅山、全齋諸先生皆以攝行爲得, 吾亦以爲攝行合於天理人情." "然則衰服、祝辭如之何?" 曰: "衰服裁之而置于几筵, 祝辭用'父使子'之例."古人云: "多識一人, 不如少識一人", 相交之際, 不可不愼也.問: "儒者子弟, 或有爲其父兄, 斡旋朝廷, 求得臺官者, 在子弟爲父兄之道, 或可如此否?" 先生曰: "此何須問? 父兄所樂, 在道而不願乎外, 則爲子弟者, 亦當助其所樂, 而不當求其所不願, 此是以父兄之心爲心也.如尤翁之受禍, 其子孫若進御札以求免, 則非所以體尤翁之心, 不可爲也.昔沈雲稼嘗見其所親儒者之子弟在京, 謂不當留此, 而促令歸之, 恐其父兄得近名之累也.吾每戒兒孫輩, 勿近都城, 勿近時宰, 蓋以嫌疑之際, 不可不愼也."【丙午所聞, 下同.】"無極而太極", 朱子每以無形而有理之意看, 惟《賀孫錄》有"無之極"一言, 此是未定之論.以在人者言, 則性是無形而有理者也, 無極而太極之義正如此.明明德章句"所得乎天", "所"字似當止於"天"字, 柳持平以爲止於"應萬事者"也, 因"以"謂此所以者也, 蓋以證明德之爲理, 此不成說話.章句"所"字、"以"字上下相分, 固非所以然之義, 雖直用"所以"二字, 亦有不盡以爲理者.如言手所以執持, 則亦可直謂手爲理乎? 蓋一邊學問, 以心爲極尊之物, 故其議論每如此, 若如其說, 則《中庸》何不言天命之謂心, 率心之謂道乎? 可怪也已.天下之亂, 皆起於利, 只有一"義"字, 可以息亂.今我邦雖謂末如之何, 苟得自上發哀慟之詔曰"我之所以致我邦之如此者, 尙利之故也.宜思尙義而下利, 自公卿、百執事, 以至州、郡官員, 如有害民利己而無義者, 一一斷刑, 少不容貸." 如是幾年, 則回天命, 寧社稷, 雖未可必, 收拾渙散之民心, 亦甚易也.近日, 余時或以米屑自養, 意有所在, 時事至此之極, 憂君之心, 自然食不能甘味.且欲隱遯荒谷, 不見於世, 採拾草木之皮葉根莖, 以充飢腸, 終至於抱木枯死也.聲遠謂余"不幸聞變, 則在先生義當自盡?" 然以欽宗凶音至朱子未嘗自盡觀之, 未見聲遠之言爲十分之義, 只有一事爲中庸之道.而聲遠又謂"若隱遯, 則去儒者衣服, 流離民間, 不露名姓", 此言然矣, 但去儒服一款則未可.吾自二十歲時, 至今四十餘年, 未嘗一日脫儒服, 今何可以危亂而遽去之耶?申某聞竹山李某之說, 嘗云: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語意寬而不迫, 所以爲聖人之言.若言視必禮, 聽必禮, 言必禮, 動必禮, 則迫而不寬, 未得爲聖人之言", 此殊不然.如以"必"字爲迫切而非聖人之言, 則如"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與視聽言動必禮, 有何少異? 此亦將以爲非聖人之言耶? 夫人之相從, 不可不謹, 申從李某, 旣聞此言而信之.又聞儒者不入科場, 不過小節, 當從科得官, 致君澤民之言, 常以余之停身爲忘世, 以近世諸賢不出爲藏拙.今渠則已登科出身, 不欲忘世, 而適足爲亂世, 不欲藏拙, 而適足爲露拙, 豈非可笑之甚者?近世士子, 推尊其師, 太沒稱停, 至曰"一天之下, 萬古之終, 惟我華西先生", 至曰"往億來萬, 未有如吾寒洲夫子", 柳汝聖門人之稱汝聖, 至曰"幷侔朱、宋, 未爲過也." 此皆不知過尊其師, 則人必不信, 而反爲其師之累也.今世學者, 多有不治自家心身, 只就他人心術上, 討索過惡, 其於進就也, 何益? 昔先師嘗曰"學者不見自己長處, 只見他人長處, 不見他人短處, 只見自己短, 方有長進", 此言深有味也.余之《四銘》所言"人過則矇, 己慝是䁎", 亦此意也."余嘗知嘉陵門人中, 柳省齋最優, 後問嘉陵則曰"洪思伯當爲首, 思伯是明體適用之學." 此似以柳是先進, 只就後進中以思伯爲首也.余又嘗疑嘉陵後進中柳基一爲首, 後來看基一所爲, 明體適用已無論, 其凶毒無比, 嘉陵之以思伯爲首者, 未爲不然也.孔子言居亂邦之道而曰"言孫", 爲姪擇婿, 則取南容之三復《白圭》, 而曰"免於刑戮." 子思則曰"邦無道, 其默足以容", 今吾輩生於天下無道之時, 豈可不十分愼言, 以免禍害也哉? 至於義理大關, 而我不得不言者, 則又不容以死生榮辱, 畏難噤嘿, 此則危行至死不變之道也.時人有謂先生好怪者, 先生聞之曰: "古之所謂怪, 固怪也, 今之所謂怪, 卽古道也.故余以爲求士於三代之上, 惟恐其好怪, 求士於三代之下, 惟恐其不好怪也."門人有書贄十年而不來者, 先生語人曰: "師生者, 人之大倫也.今某人居在千里之外, 只奉一尺之書, 以定師生.至於十年之久, 而尙無一番之來, 師生之倫, 可謂戾矣.其致謹於禮數之間者, 但外也末也, 其於內也本也之無何哉? 大抵以書爲贄者, 皆難受, 其書之出於自家與他人, 未可知, 其書如此, 而其心却不如此, 又未可知也.非惟受之者爲難在, 爲之者, 亦非誠心求師之道, 不如及門納拜之爲穩."人於悶塞鬱急時, 心火便動, 惟敬則心火便降.故余嘗曰"敬者, 心中之水."爲入繼子服斬, 斷無可疑.彼乃降其所生爲朞, 而爲我服斬, 我乃以其非所生, 不爲之斬, 則是不視以爲子也.不視以爲子, 則焉用取他子繼後? 栗谷先生言: "取他子繼後之後, 妻若生子, 則當以入繼者爲適", 若有入繼者與所生子有別之理, 則栗谷何以立言如此乎? 此可爲的證也.《論》學而首節曰"嬰兒學步, 時時習之." 纔移一步, 便顚了, 旋復習之, 移得二步, 二步顚了, 又習到三步.進進不已, 便笑而自喜, 學習而悅, 正與此相似.以鹽加舌則鹹, 以鹽加脣則不鹹, 此豈鹽之性不同? 以舌與脣所乘之氣有異也.此可爲人物性本同, 而因氣有異之一譬也.橫渠先生有"兵謀、師律, 素求豫備"之言.今吾輩知慮力量, 俱不逮, 縱未能仗義討賊, 亦須略思保守之策、備禦之計, 以備鄕黨閭閻劫掠之盜, 却可爲也.時輩謂"遂菴以後, 群賢之不出, 以其才不足以有爲", 遂以近世儒賢爲無用之人, 而不可與議於治國. 然苟使遂菴後群賢, 以至於近日儒賢, 得秉國政, 則必尙義而下利, 尊君而愛民, 置國家於安固, 讎夷不敢來侵.設使才有不足, 未能防禦讎夷, 亦必守義理、殉社稷, 永有辭於後世.決不肯先利而後義, 蔽君而害民, 至以奉社稷與讎夷, 如彼所謂才足而有用者之所爲也.且前後儒賢, 何嘗皆才不足而不出乎? 其時之所遇、義之所處, 自有不得不然者耳.誠意章十目十手章句"上文"二字, 劉氏《易簡錄》以爲"指上文兩節而言." 蓋曾子此訓, 察其語意, 專戒爲惡者言, 未可謂幷明第一節指爲善言之義也.劉氏似以下句有"善惡不可掩"之"善"字, 如此看去, 然此"善"字是帶去說, 如專言害而曰"利害不少", 專言急而曰"脫有緩急"之類, 不可以此而致疑也.問: "聖人言無友不如己者, 若我以彼爲不如己而不友, 則勝於我者, 又必以不如己而不友, 如此則安有輔仁之益乎?" 曰: "此非以跡言, 乃以心言.非謂拒絶不如己者而不之友也, 謂毋有求不如己者而友之之心也."華西以六十四卦"君子以"之22)"以"字爲所以然之以, 而做"理"字看, 蓋不知"所以然"三字, "所"字是理, 而"以然"是心之氣之所爲也.一貫章門人, 孔子門人.問: "聖人之心, 渾然一理, 主心看, 主理看?" 曰: "當以心爲主, 而理在其中看." 又問: "此是聖人生知、安行, 其心與理無間處?" 曰: "然.""生之謂性, 性卽氣, 氣卽性, 生之謂也"、"纔說性時, 便已不是性"二節, 如云"燃之謂火, 火卽薪, 薪卽火, 燃之謂也, 纔說火時, 便已不是火".如此譬喩甚明白, 不是性謂不全是性, 不是火謂不全是火也.《家禮增解》按說, 多錯處.全翁嘗曰"鏡湖於《增解》, 多泥古自用處", 溪雲金丈亦大段不滿之, 此書必經後人整理, 然後乃可通行於世.《中庸》三達德, 說道心, 說道理, 不用似此爭競, 只將白文讀之, 便可見說道理者, 必持來"所以行之者三"之"所以"二字爲藉口.然其下復云"所以行之者一", 此與九經"所以行之者一"文勢正相同, 亦可以其用"所以"字, 而謂九經爲理耶? 此不難知也.某看書, 至疑晦處, 不就注脚中費辭, 只就白文上看取文勢, 便與說破易曉, 此法甚妙.【戊申所聞, 下同.】某初志學, 非待他人指導, 偶看《退溪集》"勉人爲學"之語, 遂感發有意.年二十謁任先生, 亦非立得大志, 且欲學得四禮, 行于家庭.至觀先生威儀, 聽先生敎誨, 自念如欲學禮, 非惟四禮, 當自《曲禮》馴致於動容周旋中禮始得, 於是確然立得大志."仁"字, 前人訓"二人爲仁", 此語未盡底蘊.自身合下便有惻怛慈愛之心, 不必愛別人而後爲仁.余謂"仁之立字, 從二從人, 二之上畫象天、下畫象地, 人在天地間, 能成參三才之德則爲仁", 如此解之恐得.天之降雨, 爲潤澤萬物, 若非時而過中, 則反爲害物.師之敎人, 爲其有益, 而若見所未到者, 驟語過高, 則反有躐等徑略之害, 此所以聖賢敎人, 因其材而導之也.見簷前雨墜而成泡, 謂門人曰: "理墜而成泡乎? 氣墜而成泡乎?" 澤述對曰: "墜而成泡者氣也, 所以墜而成泡者理也." 先生曰: "是矣.使知者觀之, 說道理墜也是, 說道氣墜也是.若知凡物之一動一靜, 皆是氣之所能, 而其所以然者是理, 則如說理凍爲氷, 理消爲水, 理動爲言, 理靜爲默, 幷無所碍."問: "《論語》中諸'仁'字, 有以性理言者, 有以成德言者, 如殷有三仁、未知其仁、焉得仁之類, 似指成德言." 先生曰: "否.只以性理言.如'雍也仁而不佞'集註曰'仁道至大23), 非全體而不息者, 不足以當之', 蓋所體者, 仁道也; 所不息者, 仁道也.此"仁"字豈非性理之自在者耶?" 澤述對曰: "三仁章集註曰'不咈乎愛之理, 而有以全其本心之德', 令尹子文章集註曰'當理而無私心則仁矣.' 蓋所不咈、所全、所當、所體、所不息者性理也, 能不咈、能全、能當、能體、能不息者, 奉循性理之功也.三仁之類, 是合性理心功而言者, 則其指爲成德之仁者, 恐妥當", 先生熟思良久曰: "君言是也.如此看則令尹章集註'未識仁體', 當以仁德之體段言, 非全以性理言.雍也章'仁道'之'道'字, 亦讀如吾道一貫之道, 而與仁體義同看, 如何?" 澤述對曰: "仁體則固然, 仁道則恐還他以性理言.蓋全體不息, 是人成德處, 以仁道涉成德言, 則所全體、所不息者, 又何物耶?" 先生曰: "是矣."近時儒門, 互相傾軋, 聞流傳無根之言, 以爲實然, 而相加攻斥, 此風大可痛歎.古人有言曰: "流丸止於甌臾, 流言止於智者", 焉有智者而信流言也哉?宋櫟泉居喪, 有疾食肉, 嘗會族人葬, 不食肉曰: "吾以疾故, 在家雖食肉, 然今此衆人瞻視, 安可自我敗禮, 使世俗效尤耶?" 雲坪亦居喪, 有疾食肉, 會族人葬, 食肉曰: "吾以疾故, 在家食肉, 今安可以衆人所視而不食, 自欺吾心耶?" 此雖傳說, 然今以此論二公, 則櫟泉所行爲得中.旣言在家食肉, 則是不自欺也, 其以衆中而不食肉者, 又得以禮導俗之意.退溪先生亦於其子居母喪, 有疾勸食肉, 而又戒見客勿食矣.夫講學, 只要求是, 不可以古人定論而强從, 亦不可以古人已死而輕易, 不可以幼賤而制抑其言, 亦不可以貴長而推尊其言.天地間, 只有直上直下亭亭當當之正理, 現在眼前所存、所發, 只要依靠他做將去.此身若不依靠他, 便不知落在何方?先生見移置器盂者曰: "此便是太極動而生陽, 靜而生陰.其往而移置者, 動而生陽也; 移置而回來者, 靜而生陰也.然此從源頭說去, 太極動靜至於此, 器之能動能靜者, 豈非人之氣乎? 若知能動靜者氣, 而其所以然者乃太極, 則太極動靜姑舍, 說太極熱而爲湯, 冷而爲氷, 亦不害理.後來一種議論, 不究周子立言主意, 叫做說太極能動靜, 朱子'太極理也, 動靜氣也'二句, 早已劈破此見, 而猶不覺悟, 絶可怪也.彼邊又引朱子語'未動而能動者理也.理有動靜, 故氣有動靜, 若理無動靜, 氣何自而有動靜?'兩段, 以爲理能動靜之證, 殊不知朱子此言只謂未動而有能動之理, 又謂理有此氣動靜之理, 非謂理能有動靜也.蓋動靜者在人, 則往來、語默、呼吸之類也, '動靜'二字, 替換往來、語默等字看, 則覺得多少別白.如言未來而能來者理也, 未語而能語者理也, 未呼而能呼者理也.理有往來, 故人有往來, 若理無往來, 則人何自而有往來乎; 理有語默, 故口有語默, 若理無語默, 則口何自而有語默乎; 理有呼吸, 故鼻有呼吸, 若理無呼吸, 則鼻何自而有呼吸乎? 則謂之理能往來語默呼吸, 亦得乎?" 澤述問曰: "栗翁'陰靜陽動, 機自爾也, 非有使之'之言, 本是坦平明白, 無一毫可疑, 蘆沙疑之.'機'字之只以氣一邊說, 又不啻明白, 石丈合理氣看.大抵理氣說難而易, 易而難", 先生曰: "此事知之不難, 行之爲難, 吾輩且莫徒事口耳, 必要脚踏實地也."先生謂諸生曰: "朱子'凡言性者, 皆因氣質而言'一句, 當做氣質淸濁粹駁性? 抑以無懸空說得性者故云然, 而當做本然性?" 澤述對曰: "朱子答徐子融書, 以此理墮在氣質中而謂之性, 與此句同一語勢, 恐當只做本然性." 先生曰: "是矣.李士蘊嘗謂余曰'昔校《梅山集》於果川也, 論及程子「生之謂性」.肅齋及諸公皆主氣質性, 惟全齋主本然性, 而一向未悟, 士蘊蓋憫全翁之未悟, 而是肅齋諸公之說也.' 余謂全翁之違衆論, 而主本性者, 幸莫大焉, 功莫大焉.使全翁不幸而從衆論, 豈免錯認本源, 而增後生之惑耶? 然此處道理, 明白易見, 雖使全翁從肅齋諸公, 後人自有變通者矣." 因曰: "事有不可曉者.全翁平生禮說用力較多, 性理說用力較少, 以肅翁之淹識博觀, 且專力於性理之說, 宜其有必勝於全翁者, 而反不然, 何也? 蓋性理微妙處, 只爭一副思想到得與否, 不係用力之多少也."朱子嘗稱: "陸門人有氣節, 當生則生, 當死則死."【止此】是認心爲理, 故發得心中義氣, 直前不顧爾.近日華門諸人之有氣節者, 亦猶是也, 使彼邊人聞之, 必色然不悅.然實則見識言行古今一板, 安得而辭之乎? 大抵彼邊人率多麤率, 侈大言論事行, 動輒生風, 與星田門下之安靜守約, 言論事行務從規矩, 一切相反, 惟柳省齋一人稍安靜.某丈云: "嘉陵過, 星田不及, 吾從其過者", 余未知孔子"過猶不及"之言, 不足爲聖訓乎? 只自哂然而已.湖南金漢燮, 先師門人, 而亦嘗從嘉陵遊.斯人亦有氣節, 甲午東亂, 代本郡守, 守城而死.斯人節死, 好則好矣, 然本郡自有守臣任其責者, 而儒生自代其事而死, 於精義, 未知如何也? 此人此箇節義, 從嘉陵得來.澤述問曰: "旣師事星田, 又從學嘉陵, 則丁丑祭文事, 此人自處如何?" 先生曰: "含糊無皁白於其間矣." 澤述對曰: "觀祭文之無皁白, 則是無剛斷之氣, 而後來便立節死義, 殊可怪也." 又問: "鄭薇齋亦以丁丑斥祭文爲滄浪之自取, 其見識却低矮?" 先生曰: "薇齋只淳實人, 其見識固低矮.丁丑之事, 賴直軒之救, 不至大故狼狽耳."問: "初終衣服未備, 襲退至明日, 則小斂可同日行之?" 曰: "《便覽》雖如此, 然某遭妻喪時, 衣服未具, 襲小斂欲同日行之, 先師使之襲之明日行小斂, 某依敎行之矣.先師生平於四禮, 力循繩尺, 不踰鐵限, 自外人觀之, 似涉膠固.然好古之君子, 亦自樂從也."問: "本生外親服?" 先生曰: "《便覽》雖云無服, 然揆以情禮, 只降一等, 恐爲得中."問: "沙溪不立長子檃後, 何也?" 曰: "世傳壬辰之亂, 沙翁在定山, 檃不往定山, 向他地避亂, 爲亂賊所殺, 故沙翁惡其敗倫而不立後.嘗以此問溪雲金丈, 金丈以爲家庭間所未聞云矣."問24): "《孟子》觳觫章'吾何快於是'節, 集註'是'指興甲兵, 危士臣, 而一幷以'此'字換面.惟'欲之所誘獨在於是'復作'是'字, 此'是'字似非指興甲危士而言.雖有天下不仁之人, 豈有以此爲欲者哉? 齊王之所欲, 特在於朝秦25)、楚, 莅中國, 然此言乃在下段不應, 徑言於此, 未知竟當如何看?" 曰: "朱子意, 畢竟'是'指朝秦、楚莅中國言."問: "'權然後'節, 集註'本然之權度', 是以心言, 以理言?" 先生曰: "當以具理之本心看." 又問: "集註'權稱錘, 度丈尺26), 度量度'也.權度是理之定體自在者, 與不踰矩'矩'字同義, 度是人心之所能.今繼其下而曰'度以本然之權度', 則此本然之權度, 豈非理之自在者乎?" 先生曰: "心亦有可以自在言者, 此只是以心度心也.大文'權度'二字, 已是心之能權之度之也.朱子亦謂'本然之權度, 亦只是此心', 畢竟以心看, 恐是."問: "聖人死後, 亦有鬼神應驗否?" 曰: "昔賢云'曷嘗見堯、舜做鬼來', 聖人順受天理, 便安於死, 故死後別無一般應驗于人.若將帥死於戰場, 或少年暴死, 或冤女則不安於死, 故便有一般神怪應驗.如佛者亦然, 以其只要得此心光明, 故其氣雖死, 便不消滅也."先生問: "'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此'仁'字, 當如何看?" 澤述對曰: "不全以性理看, 以仁德之體段看, 如何?" 先生曰: "朱子有'仁是道'之訓, 而'道不遠人'集註謂'道者率性而已', 則此'仁'字以性理看, 恐得."鬼神之德"德"字, 不當以"理"字看, 只是以氣之所能言.人多引《或問》"鬼神之德所以盛, 以其誠故也"之言, 爲以德爲理之證, 此未足爲證也.如曰"聖人之德所以盛, 以其誠故也; 學者之德所以不盛, 以其不誠故也", 則亦可以德爲理乎? 集註"爲德猶言性情功效", 此"性"字非"性卽理"之性, 與今人說某也性情躁急, 某也性情柔順一般.然此篇大旨, 自十三章至十九章, 皆是說費隱, 今鬼神章, 就鬼神上, 說理之流行, 若知得此理, 則以德爲理也得, 以德爲氣也得.如鳶飛魚躍亦然, 鳶之飛、魚之躍是氣, 鳶之當飛、魚之當躍是理, 至於舜、文大孝, 武王有天下及郊社宗廟之說, 皆莫不如此看, 誠不可掩之誠.集註不曰"陰陽合散, 無非實理", 而曰"無非實者", 其不全指理而言可見.先生曰: "燕毛序齒, 非不問昭穆, 而只別長幼, 乃於昭穆中辨得長幼也, 先賢已有此論矣", 澤述對曰: "未論先賢說如何, 只將經文看破, 則便自可見.序昭穆時, 貴賤長幼, 必不問矣; 序爵時, 昭穆長幼也, 不必問; 序齒時, 昭穆貴賤也, 不必問矣, 序行序齒之規, 豈有或同或異之理乎?" 先生曰: "余初年亦如此看, 後來改見, 今復聞君言, 恐無容改評.""吾道一貫"之"一", 先儒或以心看, 以理看.朱子說亦有以心言處, 以理言處, 如此等處, 卒難理會, 定見且閣置, 後賢說同說異.只將經文理會, 便易曉, 吾道之吾, 指夫子之身, 則一貫之一, 豈非指夫子具理之心乎? 集註所謂"聖人之心, 渾然一理"者, 卽其意也.以此看定, 則朱子說心說理諸說, 皆可活看而通之也.伯牛有疾章"亡之", 栗谷作死亡之義, 故後來諸先輩多從之.然先師以爲"聖人辭不迫切, 豈有對病人, 而謂必死亡耶?" 余嘗侍側對曰"先生之言固然, 而作死亡義, 則'亡之'二字合下, 文勢不穩.古人立文, 必戰死自死, 然後云死之, 安有病死, 而云死之者乎? 大抵'亡'字作'無'字義, 甚明白無疑."凡事之成就, 不在多言, 只在將一兩言, 眞實行得而已.神仙之所以長壽, 不過曰不費精而已; 富人之所以致富, 不過曰不費財而已; 聖人之所以致盛德, 不過曰不爲惡而已.戊申春謁先生, 先生著黲布笠.澤述問曰: "先生之著黲笠者, 痛國變之罔極耶?" 先生曰: "然.丁丑下城後, 申舟村著白布笠, 李澤堂著平凉子.舟村母與兄俱死於胡, 所處固與他人有別, 澤堂所行, 又似過中, 昨冬與炳菴議定著黲笠矣."時輩以先生隱遯山林, 不顧國事, 諷責嘲哄, 無所不至.先生聞之曰: "時輩全昧出處之義, 何足與論耶? 後世有秉筆者起, 必處我於申屠蟠、諸葛亮、陶淵明之列矣, 以此自信而已." 선생 후창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가리킨다. 이하에서도 선생은 모두 간재를 지칭한다. 흙을……막고 작은 흙으로 맹진(孟津)의 세찬 물결을 막는 것을 비유하였다. 《명도유사(明道遺事)》에 "하수가의 사람들이 흙을 담아서 맹진을 막는 것과 같다.〔如河濱之人, 捧土以塞孟津.〕"는 말이 있다. 아교를……붙이고 육유(陸游)의 〈취향(醉鄕)〉 시에 나온다. 흙을……옮기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큰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북산(北山)의 우공(愚公)이 앞에 산이 가로막혀 통행이 불편하였으므로, 가족들과 함께 산을 옮기려고 매일 흙을 퍼 나르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산신령이 비웃었으나 자자손손 대대로 이 일을 행하겠다는 우공의 뜻을 알고는 천제(天帝)에게 보고하자, 이에 감동한 천제가 신력(神力)의 소유자인 과아씨(夸娥氏)를 내려 보내 그 산을 등에 업고 다른 곳에 옮기게 했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설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나온다. 호복(呼復) 사람이 죽으면 지붕 위에 올라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행해진다. 고복(皐復)이라고도 한다. 하숙경(何叔京) 주자와 교유하였고 학자들이 대계 선생(臺溪先生)이라고 칭하였다. 그가 죽은 뒤 주자가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저서에 《역설(易說)》․《논어설(論語說)》 등이 있다. 평량자(平凉子)와 포직령(布直領) 평량자는 상주가 쓰던 갓의 한 종류로, 대나무 껍질을 이용해 가늘게 쪼개서 위를 둥그렇게 만들었는데 '패랭이'라고도 부른다. 포직령은 베로 만든 직령인데, 직령은 외의(外衣)에 깃을 다는 양식 가운데 하나로, 곧은 깃을 말한다. 극항(極行) 존경의 표시로 임금을 상징하는 글자는 줄을 바꾸어 통상 한 자 올려서 쓰는데 이 줄을 '극항'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줄을 '평항(平行)'이라 한다. 사성(四性) 성리학의 주요 개념 중의 하나로, 인간의 본성인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를 이른다. 이러한 본성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ㆍ사양지심(辭讓之心)ㆍ수오지심(羞惡之心)ㆍ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실마리가 나오는데, 이를 '사단(四端)'이라고 한다. 쇄소응대(灑掃應對) 쇄소는 물을 뿌려 먼지를 적시고 청소하는 것이며, 응대는 어른 앞에서 대답하는 것으로 《소학(小學)》의 공부인데, 유가(儒家)에서 교육하고 학습하는 기본 내용 중의 하나이다. 공영달(孔穎達) 당(唐)나라 때의 학자이다. 수(隋)나라 양제(煬帝) 때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나 양제가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암살하려 하였다. 당대 유명한 경학자인 유작(劉焯)에게 배웠으며, 문장ㆍ천문ㆍ수학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위징(魏徵)과 함께 《수서(隋書)》를 편찬하였고, 왕명에 따라 고증학자 안사고(顔師古) 등과 더불어 오경(五經) 해석의 통일을 시도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찬술하였다. 육덕명(陸德明) 북송 때의 경학가로, 왕안석(王安石)에게 수학하였으나 신법(新法)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다. 고례(古禮)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왕숙(王肅)의 설을 위주로 하고 정현의 설을 배척하였다. 저서로는 《예상(禮象)》ㆍ《춘추후전(春秋後傳)》ㆍ《이아신의(爾雅新義)》 등이 있고, 문자학에 관한 《비아(埤雅)》가 있다. 이상 네 구절 바로 위에 나오는 "六年, 敎之數與方名. 七年, 男女不同席, 不共食. 八年, 出入門戶, 及卽席飮食, 必後長者, 始敎之讓. 九年, 敎之數日."을 가리킨다. 육행(六行)과 육예(六藝) 육행은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이며,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다. 《周禮 地官司徒 大司徒》 육덕(六德)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이다. 《周禮 地官司徒 大司徒》 아래 세 구절 아래에 "親老, 出不易方, 復不過時, 親癠, 色容不盛."의 세 구절을 가리킨다. 기질의 성〔氣質之性〕 성이원론(性二元論)에서 기질 속의 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송(北宋)의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창시하고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발전시킨 학설이다. 인간의 본성을 순선무악(純善無惡)의 본연지성(本然之性)과 유선유악(有善有惡)의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고찰한 것이다. 장횡거가 말하기를 "형체가 생긴 뒤에 기질지성이 있으니, 이를 잘 회복하면 천지지성이 보존된다.〔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하였다. 《性理大全 卷5 正蒙 誠明》 등유(鄧攸)는……버렸는데 진(晉)나라 사람 등유(鄧攸)의 자는 백도(伯道)인데, 그가 일찍이 석늑(石勒)의 병란(兵亂)을 만나서 어린 아들과 죽은 아우의 소생인 어린 조카를 데리고 피란을 가다가 도중에 자주 험난한 곳을 만나게 되자, 두 아이를 다 온전히 데려가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버리고 조카만 보호하여 데려갔는데, 그가 끝내 자식을 두지 못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슬퍼하며 말하기를, "천도가 앎이 없어 백도로 하여금 아이가 없게 하였다.〔天道無知 使伯道無兒〕"고 했다. 유자징(劉子澄) 남송의 유학자인 유청지(劉淸之, 1138~1195)로, 자징은 자이다. 주자의 문인으로 주자가 《소학》을 편찬할 때 그 일을 주간하였으며, 여조겸(呂祖謙)ㆍ장식(張栻)과도 교유가 깊었다. 저서에 《증자내외잡편(曾子內外雜篇)》․《제의(祭儀)》․《훈몽신서(訓蒙新書)》 등이 있다. 혈구(絜矩)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처지를 헤아린다는 뜻으로, 혈(絜)은 헤아린다는 뜻이고 구(矩)는 곡척(曲尺)을 의미이다. 윗사람이 입장을 바꿔 생각해서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유가(儒家)의 도덕규범을 말한다. 《대학장구》전10장 치국평천하장(治國平天下章)에 혈구지도(絜矩之道)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온다. 진서(秦誓) 《서경(書經)》의 맨 끝 부분 편명이다. 진 목공(秦穆公)이 정(鄭) 나라를 치려다가 진(晉)에게 크게 패하고는 이내 목공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여러 신하들에게 훈시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방손지(方遜志) 명나라 초기의 학자ㆍ정치가로 방효유(方孝孺, 1357~1402)를 말한다. 혜제(惠帝)를 섬겨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당대 제일의 학자라는 중망을 누렸으나, 1402년 연왕(燕王)이 황위(皇位)를 찬탈한 뒤 등극 조서를 작성할 것을 명하자, 이를 거부하여 족멸되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정확하며 문풍이 호방하고 웅건하여 당시 사람들이 즐겨 암송했다 한다. 저서로 《손지재집(遜志齋集)》이 있다. 구등(篝燈) 바람을 막기 위하여 불어리를 씌운 등이다. 불어리는 보통 대오리를 휘어서 만들었다. 생삼사일(生三事一) 낳아준 세 사람, 즉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을 섬기기를 똑같이 한다는 뜻으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도리를 말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1〉에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성인의 말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버이는 낳아 주신 분이고, 스승은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임금은 먹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民生于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는 말이 나온다. 연장희(延壯熙) 1871~?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경례(敬禮), 거주지는 충청도 괴산군 청안(淸安)이다. 흔히들……것이겠는가 예의 근본인 경(敬)을 버리고 말단인 옥백만 가지고는 예가 될 수 없으며, 악의 근본인 화(和)를 버리고 말단인 북과 종만 가지고는 음악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매산 선생(梅山先生) 매산은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호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응(伯應)이다.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공조 참의․성균관 좨주․대사헌․형조 판서를 지냈다. 성리학에서 정자(程子)의 심본설(心本說)을 극력 지지하고,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저서로 《매산집》이 있다. 홍유범(洪由範) 유범은 홍주후(洪疇厚, 1853~?)의 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거주지는 홍원(洪原),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공자가……때 노(魯)나라 양호(陽虎)라는 자가 일찍이 광(匡) 땅에서 횡포를 부렸는데, 공자의 얼굴이 양호와 비슷했으므로, 광 사람들이 공자를 양호인 줄 잘못 알고 포위했던 일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과 〈선진(先進)〉에 보인다. 임종두(林鍾斗) 1856~? 본관은 조양(兆陽), 자는 사혁(士赫), 거주지는 전주(全州)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자유(子游)가……때 《논어》 〈양화(陽貨)〉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 고을 원이 되었을 때에 공자가 무성으로 가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느냐.'라고 하였다.〔子游爲武城宰, 子之武城, 聞絃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割鷄焉用牛刀?"〕"라는 말이 나온다.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호이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다른 호는 고산(鼓山),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홍직필의 문인으로,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홍직필의 낙론(洛論)을 계승하여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저서로 《고산집(鼓山集)》이 있다. 김병주(金炳周) 186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문(仲文), 거주지는 전라도 임실(任實)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장자(張子)는……되었다 장자는 북송의 유학자 장재(張載)이다. 그의 《장자전서(張子全書)》권2 《정몽(正蒙)》〈태화(太和) 1〉에 "태허를 말미암아 천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고, 기화를 말미암아 도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으며, 태허와 기화를 합해서 성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고, 성과 지각을 합해서 심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由太虛有天之名, 由氣化有道之名, 合虛與氣有性之名 合性與知覺有心之名.〕"라는 말이 나온다. 삼대(三代)가……때문이다 《맹자》〈이루 상(離婁上)〉에 나온다. 인(仁)을……여긴다 《논어》〈태백(泰伯)〉에서 "인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는 말이 나온다. 육식(六識) 불교에서 말하는 6가지의 감각으로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을 가리킨다. 본각(本覺) 마음의 본체(本體)를 말한다. 마음의 지각(知覺)은 본래 자연적인 것이므로 본각이라고 한 것이다.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호이다. 육구연은 '심즉리(心卽理)'의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을 주창하여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천리인욕설(天理人欲說)에 대항하였는데, 이때부터 유학은 주(朱)와 육(陸)의 두 학파로 갈라졌다. 뒤에 육학은 왕양명(王陽明)에게 계승되어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하였다. 저서에 《상산집(象山集)》ㆍ《어록(語錄)》 등이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자기의 본성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아 실제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달마(達摩)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 중국에 들어온 인도의 승려로, 양 무제(梁武帝) 때에 영접하여 금릉(金陵)에 와서 불리(佛理)를 담론하고 강을 건너 위(魏)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한 후 성불(成佛)하였다고 한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傳燈錄》 인의중정(仁義中正) 주돈이(周敦頤)가 쓴 《성리대전》 《통서(通書)》 권1 〈도장(道章)〉에 "성인의 도는 인ㆍ의ㆍ중ㆍ정 뿐이다.〔聖人之道, 仁義中正而已矣.〕"라는 말이 나온다. 예가……적용한다 그 상황에 딱 맞는 예가 예문(禮文)에 규정되어 있지 않을 경우 비슷한 예를 원용해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의례주소》 〈상복〉의 소에 "일반 백성들까지도 똑같이 사의 예를 행하니 예가 없으면 똑같이 적용한다.〔至於民庶, 亦同行士禮, 以禮窮則同之.〕"라고 하였다. 본암(本菴) 김종후(金鍾厚, 1721~1780)의 호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고(伯高), 다른 호는 진재(眞齋)이다.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진사가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지평․장령․경연관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본암집(本庵集)》이 있고, 편서에 《가례집고(家禮集考)》ㆍ《청풍세고(淸風世稿)》가 있다. 구산(龜山) 북송의 유학자 양시(楊時, 1053~1135)의 호이다. 만년에 구산에 은거하여 구산이라 불렀고,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에게 학문을 배웠다. 저서에 《구산집》ㆍ《구산어록(龜山語錄)》ㆍ《이정수언(二程粹言)》 등이 있다. 역책(易簀) 스승이나 현인의 죽음 가리키는 말이다. 책(簀)은 와상(臥床)의 깔개로서 증자(曾子)가 병환 중에 대부(大夫)의 신분에 걸맞은 화려한 깔개를 깔고 있었는데, 임종(臨終)할 당시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깔개를 바꾸게 하고 죽은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이천(伊川) 선생 북송(北宋) 때 성리학자 정이(程頤, 1033~1107)이다. 하남(河南) 낙양(洛陽) 사람으로, 이천백(伊川伯)에 봉해져서 이천 선생이라 불린다. 정호(程顥)의 아우이며, 주돈이(周敦頤)의 문인으로, 이기(理氣) 철학을 제창하여 유학을 부흥시켰다. 저서에 《역전(易傳)》ㆍ《춘추전(春秋傳)》ㆍ《이정유서(二程遺書)》 등이 있다. 예(禮)는……된다 《이정유서(二程遺書)》권2 상에 나온다. 시마복(緦麻服) 상복(喪服) 제도에서 가장 가벼운 3개월 동안 입는 상복이다. 이(李) 아무개 이용직(李容稙, 1852~1932)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만(稚萬), 호는 강암(剛庵), 을사조약 때 분사(憤死)한 조병세(趙秉世)의 사위이다. 작은……하겠다 《논어》〈선진(先進)〉편에 나온다. 김인산(金仁山) 송나라 말기의 학자 김이상(金履祥, 1232~1303)으로, 인산은 그의 호이다. 주자와 면재(勉齋) 황간(黃榦)의 학통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저서에 《인산집(仁山集)》, 주요 저서에 《통감전편(通鑑前編)》ㆍ《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등이 있다. 징벽(徵辟) 예를 갖추어 불러서 벼슬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의절(儀節) 명(明)나라 구준(丘濬)이 지은 《가례의절(家禮儀節)》을 말한 것으로, 주자 《가례(家禮)》의 주석서이며,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이라고도 한다. 주희(朱熹)의 《가례》를 당시의 제도에 맞게 가감하고, 매 장(章)의 끝에 주석과 고증을 붙여 8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소군(小君) 주(周)나라 때 제후의 처를 일컫던 말인데, 여기서는 왕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내상(內喪) 왕비나 대비 등 여인의 상사를 말한다. 연제(練祭) 소상제(小祥祭)를 이르는 바, 첫 번째 기일(忌日)에 지내는 것이 원칙이나, 부재모상(父在母喪)과 내상(內喪)에는 11개월에 소상제를 지내고 첫 번째 기일에 대상제(大祥祭)를 지낸다. 삼달덕(三達德)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세 가지 덕으로 지(智)ㆍ인(仁)ㆍ용(勇)을 말한다. 《中庸章句 第20章》 알려고 애쓰는〔憤悱〕 원문의 '분비(憤悱)'는, 분(憤)은 깨닫지 못해서 분하게 여기는 것이고, 비(悱)는 말로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더듬거리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분하게 여기지 않으면 틔워주지 말고, 더듬거리지 않으면 말해 주지 말며, 한 귀퉁이를 들었는데 세 귀퉁이로써 그것을 되풀이해 알려고 하지 않거든 다시 가르치지 말라.〔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하였다. 《論語 述而》 현재……행한다 《중용장구》 제14장에 나온다. 말은……것 《논어》〈위령공(衛靈公)〉에 나온다. 김연술(金淵述) 1860~1905.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여극(汝克), 거주지는 전라도 부안(扶安)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며 《성암유고(成庵遺稿)》를 남겼다. 사상채(謝上蔡)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사양좌(謝良佐, 1050~1103)를 말한다. 하남성(河南省) 상채현(上蔡縣) 출신이어서 상채 선생으로 불렸다.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에게 수학하였고, 특히 정호의 학풍을 존숭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저서에 제자들이 편집한 《상채선생어록(上蔡先生語錄)》이 있다. 진실로……둔다 《논어》〈이인(里仁)〉에 "진실로 인에 뜻을 두면 악을 범하는 일이 없게 된다.〔苟志於仁矣, 無惡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부주(涪州) 송(宋)나라 때에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갔던 곳으로, 그곳에서 《주역전(周易傳)》을 저술하였다. 사씨(謝氏)와 양씨(楊氏) 사량좌(謝良佐)와 양시(楊時)를 말한다. 모두 이정(二程)의 문인이다. 한지국(韓持國) 지국은 송나라 사람 한유(韓維)의 자이고 호는 남양(南陽)이다. 한림학사ㆍ승지문하시랑 등의 관직에 있었으며 원우당인(元祐黨人)으로 몰려 균주(均州)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죽었다. 저서에 《남양집》이 있다. 유시수(柳始秀) 1826~1878.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희원(羲元),호는 심재(心齋)이다. 이항로의 제자이다. 유위한(柳緯漢) 1689년(숙종15) 1월 14일에 유학(幼學)으로서 상소하여 건저(建儲) 문제를 논하였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던 남인(南人) 계열의 인물이다. 같은 해 2월 3일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방면된 바 있었다. 《肅宗實錄》 계수(稽首) 고대 아홉 가지 배례(拜禮) 중 하나로, 가장 엄숙한 인사법이다. 절하는 사람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먼저 두 손을 모아 땅바닥에 닿게 한다. 그러고는 머리를 손에 이르게 하는데, 머리가 비교적 오랜 시간 바닥에 닿아 있게 한다. 돈수(頓首) 절을 할 적에 머리가 손에 닿는 즉시 다시 드는 것이다. 옛날에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에게 서신을 보낼 적에 쓰던 상투어인데, 상인(喪人)은 평인(平人)과는 다르므로 존경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 서신의 서두에 쓴다. 마음이……간직하는〔惺惺寂寂〕 불교 선종(禪宗)의 용어에서 나온 것인데, 송유(宋儒) 사량좌(謝良佐)가 "경은 항상 깨어 있게 하는 방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고 말한 뒤로부터 유가(儒家)에서 경(敬)을 해석하는 하나의 유력한 용어가 되었다. 《상채선생어록(上蔡先生語錄)》 권중(卷中)에 이 말이 나오는데,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서도 이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공경하는……이겼다 《대대례(大戴禮)》의 〈무왕천조(武王踐阼)〉에 실려 있는데, "공경이 태만함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을 이기는 자는 멸망하며, 의리가 욕심을 이기는 자는 사람들이 순종하고 욕심이 의리를 이기는 자는 흉하다.〔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라고 하였다. 신재(愼齋) 김집(金集, 1574~1656)의 호이다. 이이(李珥)의 학문을 계승하고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 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저서에 《신독재집(愼獨齋集)》․《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 등이 있다. 강절(康節)이……하였다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권5 〈강절선생(康節先生)〉에 나오는 내용이다. 강절은 송(宋)나라의 유학자 소옹(邵雍)의 호이다. 자는 요부(堯夫)이다. 이정지(李挺之)에게서 도가(道家)의 학문을 배웠고 상수학(象數學)을 정립하여 역학(易學)의 대가가 되었다. 저서에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가 있다. 당 부인(唐夫人)이……절하였는데 당(唐)나라 때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를 지낸 최관(崔琯)의 증조모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치아(齒牙)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자, 최관의 조모 당 부인(唐夫人)이 수년 동안 시어머니인 장손 부인에게 젖을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손 부인은 죽을 때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최씨의 가문이 어찌 창대(昌大)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김관수(金觀洙)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광국(光國), 호는 백헌(柏軒), 거주지는 전라도 순창(淳昌)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집지례(執贄禮) 제자가 스승을 처음 뵐 때 폐백(幣帛)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는 예를 말한다. 송군필(宋君弼) 군필은 송순보(宋淳輔)의 자이다. 본관은 진천(鎭川), 호는 평재(平齋), 거주지는 전라도 익산(益山)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정영겸(鄭永謙) 188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익(士益), 거주지는 전라도 무안(務安)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의 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고,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구봉집(龜峰集)》이 있다. 심의(深衣) 선비가 입던 웃옷이다. 대개 흰 베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드는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두른다. 허리 위는 네 폭, 허리 밑은 열두 폭으로, 춘하추동 사시와 1년 열두 달을 상징한 것이다. 이병은(李炳殷) 1877∼1960.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승(子乘), 호는 고재(顧齋)이다. 출생지는 전라도 완주(完州)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도철(塗轍) 길과 수레의 바퀴자국으로, 하나의 도리나 법도를 뜻한다. 규항(頍項) 규는 머리를 감싸 관이 벗어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것이고, 항은 규의 끈을 턱 밑에 매는 것이다. 치포관(緇布冠)의 부속물로, 관을 고정하는 비녀가 없기 때문에 규를 사용해 고정하고, 끈을 달아 턱 밑에 맨다. 서 문정공(舒文靖公) 남송 시대에 봉화(奉化) 사람 서린(舒璘)으로, 젊어서 노력하여 개과천선하고 장식(張栻)ㆍ육구령(陸九齡)을 따라 교유하였다. 주희(朱熹)ㆍ여조겸(呂祖謙)이 무원(婺源)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찾아뵈었다. 나중에 의주 통판(宜州通判)으로 벼슬을 마치고 죽었는데, 특지(特旨)를 내려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바람에……목욕하더라도 원문은 '즐풍목우(櫛風沐雨)'인데 오랫동안 객지에서 고생하는 것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ㆍ포훈전(鮑勛傳)〉에 보인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1354년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고 귀국 후 국학을 중영하고 성리학 보급에 힘썼다. 조선조에서는 벼슬하지 않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와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호이다. 문장에 뛰어나 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ㆍ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혔다. 저서에 《택당집》이 있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호이다.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여 명나라에서 그를 동방문사(東方文士)라 불렀다. 특히 시(詩)에 뛰어나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笠)의 문(文)과 함께 '송도삼절'로 일컬어졌다. 저서에 《오산집》․《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이 있다.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의 비(妃)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김종호(金鍾昊) 1874~?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윤청(允淸), 거주지는 전라도 익산(益山)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장사(葬師) 풍수설을 연구하여 묏자리 따위를 고르는 지관(地官)을 말한다. 유충정(劉忠定) 송(宋)나라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킨다. 원성(元城)에 살았기 때문에 유원성이라고도 한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어 일을 논함이 강직하니, 당시에 전상호(殿上虎)라고 불렸다. 《宋史 卷345 劉安世傳》 여형공(呂滎公) 송나라의 학자인 여희철(呂希哲)을 가리킨다. 어려서는 손복(孫復)․호원(胡瑗) 등에게 수학하였으며, 나중에는 이정(二程)과 장재(張載)에게 수학하였다. 《여씨잡기(呂氏雜記)》를 저술하였다. 계전(桂田) 신 상공(申相公) 신응조(申應朝, 1804~1899)를 말하며, 계전은 그의 호이고, 다른 호는 구암(苟菴)이다. 매산 홍직필의 문인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에 올랐다. 저서에 《구암집》이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 사욕을 이겨내고 본연의 예(禮)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자기 사욕을 이겨내고 본연의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자기 사욕을 이겨내고 본연의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그의 인을 인정할 것이다.〔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顏淵》 계구신독(戒懼愼獨) 사려(思慮)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물이 없는 미발(未發)의 상태에서도 항상 계신(戒愼)과 공구(恐懼)에 마음을 두어, 홀로 있을 때만이 아니라 남이 모르고 나만이 알고 있는 마음속의 생각까지 삼가는 것을 말한다. 《中庸章句 首章》 구방심(求放心) 달아난 마음을 구한다는 뜻이다. 맹자는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고 달아난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學問之道無他, 求放心而已矣.〕라고 하였다. 《孟子 告子上》 그 말이 착하다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에는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에는 그 말이 착한 법이다.〔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라고 한 고사에서 나왔다. 《論語 太伯》 귀중히 여겨야할 도(道) 《논어》〈태백(泰伯)〉의 "군자가 귀중하게 여겨야 할 세 가지의 도가 있다. 용모를 드러낼 때에는 사납고 오만함을 멀리할 것이요, 안색을 바르게 할 때에는 신실함에 가깝게 할 것이요, 말을 할 때에는 천박하게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斯遠暴慢矣, 正顔色斯近信矣, 出辭氣斯遠鄙倍矣.〕"라는 증자(曾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하찮은……좋아하다.〔好察邇言〕 공자가 순 임금의 덕을 칭찬한 말로, 《중용장구》 제6장에 "순 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하찮은 말도 살피기를 좋아하였으며, 악한 말은 숨겨 주고 선한 말은 널리 알리셨다.〔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라고 하였다. 배우지 않았다〔未學〕 《논어》〈학이(學而)〉에서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하였다. 비록……하지만〔雖曰不要君〕 《논어》〈헌문(憲問)〉에 나온다. 천만 명……한다 《심경부주(心經附註)》권3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에 나오는 허형(許衡, 1209~1281)의 말인데, 남을 따라 동요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 주체성을 확고히 지키는 것을 뜻한다. 길제(吉祭) 담제(禫祭)를 지낸 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로, 상주는 길제를 지낸 다음 날부터 상복을 벗고 평상복을 입는다. 외필(猥筆) 1878년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지은 성리학 저술이다. 주로 이기(理氣)의 주재와 동정의 문제를 다루었다. 홍약후(洪約厚) 1866~?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유박(由博), 거주지는 홍원(洪原)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속칭(屬稱) 속(屬)은 고조․증조․조부․부친 등과 같은 친속의 호칭이고, 칭(稱)은 관직이나 호를 뜻한다. 《二程文集 卷11 作主式》 유건(儒巾) 고대에 유생(儒生)들이 쓰던 일종의 두건으로, 명나라 때에는 통칭 방건(方巾)이라고 하였으며, 생원(生員)들의 복식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 때 유생들이 썼는데, 흑색의 베, 모시, 무명 등으로 만들었다. 백립(白笠) 흰 베로 싼 갓으로, 국상(國喪) 때 일반 백성이나 또는 대상(大祥)을 지낸 뒤부터 담제(禫祭)를 지내기 전까지 상인(喪人)이 쓴다. 변복원(邊復源) 1883~? 본관은 황주(黃州), 자는 순하(舜何), 거주지는 전라도 장성(長城)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육수부(陸秀夫) 송(宋)나라 말엽의 충신이다. 송나라가 원(元)나라에 의해 패망하자, 복주(福州)에서 익왕(益王)을 세우고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으며, 익왕이 죽자 다시 위왕(衛王)을 세우고 좌승상이 되었는데, 원(元)나라 군사가 송의 최후 보루이던 애산(厓山)을 격파하자,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는 칼을 들고 처자를 바다에 빠져 죽게 한 다음 곧 어린 황제 조병(趙昺)을 등에 업고 함께 바다에 빠져 죽었다.《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계전(桂田) 신 상공(申相公) 신응조(申應朝, 1804~1899)로, 계전은 그의 호이며 다른 호는 구암(苟菴)이다.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임오군란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후에 좌의정에 올라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에 《계전집(桂田集)》이 있다. 입재(立齋) 송 상공(宋相公) 송근수(宋近洙, 1818~1903)로, 입재는 그의 호이며 다른 호는 남곡(南谷)이다. 1882년(고종19) 5월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교섭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고, 1884년에 〈청환수의제변개지령소(請還收衣制變改之令疏)〉를 올리고 낙향하여 재상산림(宰相山林)이란 칭호를 얻었다. 1895년(고종32) 단발령에 단식으로 항의하였다. 저서에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가 있다. 관본(官本) 관부(官府)에서 판각하거나 소장한 서본(書本)을 말한다. 승중(承重) 상제(喪祭)와 종묘(宗廟)의 중책이 자손에게 전해지는 것을 말한다. 조(祖)의 입장에서는 전중(傳重)이라고 하고, 손(孫)의 입장에서는 승중, 혹은 수중(受重)이라고 한다. 한 사람을……못하다 명나라 학자 고반룡(高攀龍)의 《고자유서(高子遺書)》에 나온다. 심운가(沈雲稼) 운가는 심기택(沈琦澤, 1826~?)의 호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규(景圭)이다. 유신환(兪莘煥)의 문하에서 서응순(徐應淳)․민태호(閔台鎬)․김윤식(金允植)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성․형조 참판․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말이다. 주자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무극이라고 하고, 지극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태극이라고 한다."라고 주석하였다. 명명덕(明明德) 명덕(明德)에 대해 주자가 주해하기를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온갖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성원(聲遠) 이탁모(李鐸謨, 1857~?)의 자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흠종(欽宗) 북송의 마지막 황제로, 휘종(徽宗)의 아들이다. 금(金)나라의 침략으로 송(宋)나라의 도성인 변경(汴京)이 함락되어 흠종(欽宗)과 부왕인 휘종(徽宗)이 금나라로 끌려가 변을 당하였다. 예가……한다 《논어》〈안연(顔淵)〉에 나온다. 아무리……한다 《논어》〈이인(里仁)〉에 나온다. 한주 부자(寒洲夫子)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을 말하며, 한주는 그의 호이다. 숙부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배웠으며, 유치명(柳致明, 1777~1861)ㆍ김흥락(金興洛, 1827~1899) 등과 교유하였다. 주자와 이황의 주리론을 주로 하였지만,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외면적으로 동일한 심즉리설을 주장하면서 영남학파의 주류들에게 집중적인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에 《한주집》이 있다. 유여성(柳汝聖) 여성은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자이다. 본관은 고흥(高興), 호는 의암(毅菴),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사명(四銘) 간재 전우가 1900년에 지은 좌우명의 이름이다. 가릉(嘉陵) 경기도 가평의 별칭이며 이곳 귀곡(龜谷)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의 거처가 있었다. 유성재(柳省齋) 유중교(柳重敎, 1832~1893)를 말하며 성재는 그의 호이다. 본래 이항로의 고제(高弟)였는데 뒤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는 이항로의 심설(心說)에 반기를 들어 주리(主理)에서 떠났다. 한말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홍사백(洪思伯) 홍재귀(洪在龜, 1845~1898)로, 사백은 그의 자이다. 화서 이항로와 중암 김평묵에게서 배웠으며, 김평묵의 사위이다. 조선 말기 위정척사운동가이다. 유기일(柳基一) 1845~1904.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용서(龍西)이다. 1876년(고종13) 홍재구ㆍ유인석(柳麟錫)ㆍ윤정구(尹貞求) 등 화서학파 48인과 함께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척양록(斥洋錄)》 등의 저술활동과 문인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백규(白圭)를……남용(南容) 말조심해야 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흰 옥돌에 있는 흠은 갈아서 없앨 수 있거니와 이 말의 흠은 다스릴 수가 없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라고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에, 남용(南容)이 이 시를 하루에 세 번 반복해서 외우자〔三復白圭〕 공자가 칭찬하며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나보다……말라 《논어》〈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일관장(一貫章) 《논어》〈이인(里仁)〉에 나온다. 낳는……이른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나오는 말이다. 막……아니다 정호(程顥)의 말인데, 사람이 태어나서 비로소 성(性)이라 말할 수 있을 때에는 이(理)가 기질 속에 떨어져 있어 그 기질에 구애되기 때문에 이미 순수한 천명의 성〔天命之性〕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정전서(二程全書)》 권2와 《근사록(近思錄)》 〈도체류(道體類)〉에 나온다. 계운(溪雲) 김장(金丈) 계운은 김낙현(金洛鉉, 1817~1892)의 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며, 유신환(俞莘煥)의 문인이다. 저서에 《계운유고》가 있다. 구경(九經) 공자가 말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9가지 원칙으로, 몸을 닦는 것〔修身〕, 현자를 존경하는 것〔尊賢〕, 친족을 친애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군신을 체찰하는 것〔體群臣〕, 서민을 사랑하는 것〔子庶民〕, 백공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데서 온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柔遠人〕, 제후들을 포용하는 것〔懷諸侯〕을 말한다. 《中庸章句 第20章》 사례(四禮) 관례(冠禮)ㆍ혼례(婚禮)ㆍ상례(喪禮)ㆍ제례(祭禮)의 네 가지를 말한다. 수(隋)나라 왕통(王通)의 《중설(中說)》 권10 〈관랑(關朗)〉에 "집안을 바르게 하기를 사례로써 하니, 관ㆍ혼ㆍ상ㆍ제이다.〔正家以四禮, 冠婚喪祭.〕"라는 말이 나온다. 은(殷)나라에……있었다 세 인자(仁者)는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에 나라를 떠나 종사(宗祀)를 보존한 미자(微子)와 간언을 올리다가 주왕(紂王)에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과 노예가 된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논어》 〈미자(微子)〉에 나온다. 옹(雍)은……없다 《논어》〈공야장(公冶長)〉에 나온다. 본체를……것 성인(聖人)의 인(仁)의 경지를 말한 것으로,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기품(氣稟)과 사욕에 은폐됨이 없이 온전히 보존되고 유행하는 것이다. 《논어집주(論語集註)》 〈공야장(公冶長)〉 옹야인이불녕장(雍也仁而不佞章)에 "인(仁)의 도는 지극히 커서 체(體)를 온전히 하여 그치지 않는 자가 아니면 해당될 수 없다.〔仁道至大, 非全體而不息者, 不足而當之.〕" 하였다. 인(仁)의……하였다 이 구절은 문답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옛사람이……그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 따위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순자(荀子)》〈대략(大略)〉에 나온다. 아직……있겠는가 《주자대전(朱子大全)》권56 〈답정자상(答鄭子上)〉에 나온다. 이사온(李士蘊) 사온은 이진옥(李鎭玉)의 자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매산 홍직필의 문인이다. 성전(星田) 공주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임헌회(任憲晦)가 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을 말한다. 김한섭(金漢燮) 1838~1894. 본관은 영광(靈光), 호는 오남(吾南)이며, 이항로(李恒老)․임헌회(任憲晦)․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저술에 《오남문집》․〈벽사설(闢邪說)〉․〈통화변답(通貨辨答)〉 등이 있다. 정축년(1877) 제문의 일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죽음에 조문하기 위해 김평묵(金平默)이 지은 제문(祭文)의 내용을 전우(田愚)가 문제 삼아 되돌려 보낸 일을 말한다. 정미재(鄭薇齋) 미재는 정재필(鄭在弼, ?~1887)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임헌회의 문인이다. 초종(初終) 초상(初喪)이 난 뒤로부터 졸곡(卒哭) 때까지를 말한다. 철한(鐵限) 철판을 덧씌운 문지방을 말한 것으로,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어떤 제도나 규범의 한계를 말한다. 비은(費隱) 도의 작용은 크고 넓으나 도의 본체는 지극히 은미함을 이르는 말이다. 《중용장구》 제12장에서 "군자의 도는 넓고 은미하다.〔君子之道, 費而隱.〕"라고 하였다. 집주에서 "비는 용이 넓음이요, 은은 체가 은미함이다.〔費, 用之廣也;隱, 體之微也.〕"라고 하였다. 연비어약(鳶飛魚躍)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못에는 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관통하는 원리는 하나인 자연 만물의 이치를 가리킨다. 《시경》 〈한록(旱麓)〉에 "솔개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못에서 뛰네.〔鳶飛戾天, 魚躍于淵.〕"라 하였다. 교사(郊社) 천지(天地)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동지(冬至)에 지내는 것을 교(郊)라고 하고, 하지(夏至)에 지내는 것을 사(社)라고 한다. 활간(活看) 문구(文句)에 얽매이지 않고 융통성을 가지고 폭넓게 본다는 뜻이다. 백우유질장(伯牛有疾章) 《논어》〈옹야(雍也)〉에 "염백우(冉伯牛)가 병을 앓자 공자가 문병할 때 남쪽 창문으로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천명인가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伯牛有疾, 子問之, 自牖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라는 내용이 나온다. 참포립(黲布笠) 검푸른 베로 만든 삿갓을 말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어머니를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의 후사로 들어갔을 때 본생 부모를 위해 입는 심상(心喪) 차림이다. 하성(下城) 병자호란(1636, 인조14) 때 남한산성에 파천(播遷)한 인조가 이듬해인 정축년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일을 말한다. 하성은 성에서 내려간다는 의미로 항복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백포립(白布笠) 상중에 쓰는 흰 갓이다. 가늘게 쪼갠 대오리〔竹絲〕로 갓의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위에 흰 베를 둘러 만들었다. 평량자(平凉子) 상주가 쓰던 갓의 한 종류로, 대나무 껍질을 이용해 가늘게 쪼개서 위를 둥그렇게 만들었다. 패랭이․평량립(平凉笠)이라고도 한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1842~1907)의 호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이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田愚)에게 3번씩이나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 출처(出處)의 의리 나아가 벼슬하는 일과 머물러 집에 있는 일에 관한 의리를 말한다. 신도반(申屠蟠) 후한 때 당고(黨錮)의 화를 예견하고 자취를 감추었는데, 뽕나무를 기둥으로 삼아 집을 만들고 스스로 품팔이하는 사람처럼 살았다. 말년에 대장군 하진(何進)과 동탁(董卓) 등의 초빙을 뿌리친 채 절조를 보전하며 천수를 누렸다.《後漢書 卷53 申屠蟠列傳》 제갈량(諸葛亮)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유비(劉備)의 삼고초려에 감동하여 정치에 나와 촉한을 세운 인물이다. 도연명(陶淵明) 진나라가 망하고 유송(劉宋)이 서자 정절을 지켜 심양(潯陽)에 들어가 살았는데, 세칭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距 底本은 "拒". 문맥을 살펴 수정. 也 底本은 "之". 《論語․太伯》에 근거하여 수정. 畢命 底本은 "君陳". 《書經》에 근거하여 수정. 之 底本은 "之之". 문맥을 살펴 삭제. 大 底本에는 없음. 《論語集註》〈公冶長)〉에 근거하여 보충. 問 底本에 없음. 문맥을 살펴 보충. 秦 底本에는 "晉". 《孟子》〈梁惠王上〉에 근거하여 수정. 아래도 이와 같음. 丈尺 底本에는 "尺丈". 《孟子》〈梁惠王上〉에 근거하여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