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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보냄 무자년 (1948) 與吳士益 戊子 듣자하니 서원을 건립하자는 통문이 귀측에도 도달한 것으로 아는데, 그들과 일을 함께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를 관찰할 때에는 그 집에 누가 머무는지를 보고, 외지에서 와서 벼슬하는 사람을 관찰할 때에는 누구의 집에 머무는지를 보라."88)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군자가 출사(出仕)할 때에는 먼저 추천해준 사람을 살펴야 하고, 남과 함께 일을 할 때에는 먼저 일을 주관하는 자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 서원의 일을 주관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선사를 무함하고 원고를 고치는 자와 혈당을 맺는 것도 부족하여, 또 천고의 흉악한 역적 완용(完用)의 적퇴비(賊退碑)를 사들여 선사의 묘갈로 만들었으니, 이 짓을 차마 한다면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온 세상의 공론 때문에 감히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가 간행한 〈연보〉 중 '묘갈명성(墓碣銘成)'의 '갈' 자는 바로 이 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니, 예전 그대로 일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또 저쪽이 증거로 내세운 이등박문(伊藤博文)의 동상을 때려 부수어 안의사(安義士)의 동상을 주조해서 만들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당연한 의리가 되니, 그만두었던 것은 심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은 매번 이 일이 전적으로 전(田)에게 달린 것이지 유(柳)가 아는 바가 아니라고 하는데, 어찌 유에게는 그렇게 후하게 대하면서 전에게는 이처럼 박하게 대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천석 집안에서 조상의 가업을 지키며 완성하는 자는 명철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또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친과 조부를 이어서 지키고 이루었던 것이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의 자세히 살피는 성격으로 볼 때에 비록 예사로 매매하는 것도 반드시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인데, 하물며 지금 이것은 사안으로 따지자면 중대사이고 재물로 따지자면 거액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무슨 돌인지 살펴보지도 않고 사들였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춘추》에서는 행위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나쁜 의도가 있으면 벌하였는데, 하물며 그 자취가 이미 드러난 것이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으로 그와 가까운 인사들은 비록 그를 매우 아끼고 공경하지만, 또한 이 일을 두고서는 큰 실수를 면치 못한다고 하였는데, 형만 유독 이처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악을 감추어주는 것[隱惡]'은 비록 매우 좋은 제목이지만, 의식적으로 공정하게 보이는 것도 심술에서는 크게 경계하는 것인데 다시 일이 대의(大義)에 관계된 것이겠습니까? 오직 그대가 깊이 헤아려 주길 바랍니다.【완용의 적퇴비는 왜가 망한 이후 그의 묘 앞에서 뽑아간 것이다.】 似聞建院通文來到貴邊,未知欲與之同事否? 孟子曰: "觀近臣,以其所爲主; 觀遠臣,以其所主." 是故士君子出仕,先觀薦主; 與人同事,先觀主事者.今之主院事者誰? 人人也血黨於誣師改稿而不足,又買取千古兇逆完用賊退碑,用作先師之墓碣,是可忍也,孰不可忍也? 今雖以擧世公論,而不敢不罷,然彼刊年譜中"墓碣銘成"之"碣"字,正指是石而言,則依舊是成事.且彼邊所證打破伊藤博文銅像鑄成安義士像者,自成一副當義理,則其罷之者非心服也.兄每謂此事專在於田,非柳所知,何厚於柳而薄於田也? 世之千石之家守成祖業者,非明斷亦不能爾.彼之繼父祖能守成,顧何如也? 以其詳審之性,雖尋常買賣,必不疎忽.况今於此事則重大,財則巨額也,豈有不探知何石而買之之理乎? ?春秋?誅心,况跡已著乎? 是以彼近人士,雖甚愛敬彼者,亦云此事則不免大失手,兄獨如此何也? 隱惡雖甚好題目,然有意爲公,亦心術上大戒,而復事係大義者乎? 惟兄深諒之.【完用退碑,倭亡後援去於其墓前者.】 조정의……보라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내가 들으니, '조정의 신하를 관찰할 때에는 그 집에 누가 머무는지를 보고, 외지에서 와서 벼슬하는 사람을 관찰할 때에는 누구의 집에 머무는지를 보라.' 하였다. 만약 공자가 옹저와 시인 척환을 주인으로 삼았다면 어떻게 공자라 할 수 있겠는가?[吾聞觀近臣, 以其所爲主, 觀遠臣, 以其所主. 若孔子主癰疽與侍人瘠環, 何以爲孔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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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보냄 경인년 (1950) 與吳士益 庚寅 일전의 편지에 박진호(朴震鎬)가 선사가 그의 조부 창암(蒼岩)에게 보낸 편지를 인쇄 배포하여 김용승(金容承)이 찬한 창암의 행장 중 "간옹에게 손색이 있다."는 말을 실증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너무도 통탄스러웠습니다. 대개 선사가 섬으로 들어간 것은 세상의 변란을 보기 싫어했기 때문이니, 이는 "태사(太師)는 제(齊)나라로 갔다."는 이하의 여러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가서 은둔했던 것89)과 같으며, 이것으로써 스스로 큰 법도를 세우기를 마치 범찬(范粲)의 수레90)나 문산(文山)91)의 다락처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이 편지는 아마도 섬을 나가는 것과 관련된 여러 의론의 가부를 물어서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어서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92)라는 극치를 구하고자 한 것이지, 반드시 섬을 나가고자 해서 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사의 문인이 된 자들은 다만 굳건하게 의론을 세워서 현자를 모욕하고 선사를 범하는 마음을 주벌해야 할 따름인데, 어찌 그 문으로 달려가 말을 좋게 꾸며서 마치 실제로 섬을 나가려는 마음이 있고 실제로 대덕의 법도를 넘는 일이 있는 것처럼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박군의 조부가 선사를 존모했던 입장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말했겠습니까? 권순명(權純命)과 유숙(柳塾)이 한 짓은 "우리 조부가 간옹(艮翁)을 존모했는지 여부는 우리 조부에게 물어본 뒤에 알 수 있다."고 박진호에게 비판을 받은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선사에게 누를 끼친 것으로는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저쪽이 하는 것은 매번 대부분 이와 같으니, 또한 매우 통탄할 뿐입니다. 형은 이미 금지하지도 못하고 또 그들과 함께 하니, 이는 매우 잘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日前見喩,朴震鎬之印布先師與渠祖蒼岩書以實金容承所撰蒼岩行狀中"艮翁有遜色"之語,聞極可痛.蓋先師之入島,惡見時變,若太師適齊以下諸人之避地,非以此自立大閑若范粲之車、文山之樓也.且是書也,想是詢及出島諸議之可否,以求"無適莫惟義比"之極致,非必欲其出島而問之也.爲先師門人者,只當毅然立論,誅其侮賢犯師之心而已,豈可趨門善辭,有若實有出島之心,實踰大德之閑? 而但在君祖尊慕之地,豈敢如此之云? 若權、柳之爲也,宜其得吾祖之尊慕艮翁與否問於吾祖然後可知之譏於震鎬也.其貽累先師,孰甚於此? 彼之所爲,每多如此,亦甚痛歎.兄旣不能禁止,又與之同伴,此不思之甚也. 태사(太師)는……것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태사 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 간은 초나라로 가고, 삼반 요는 채나라로 가고, 사반 결은 진나라로 가고, 북을 치던 방숙은 하내로 들어가고, 도고를 흔들던 무는 한중으로 들어가고, 소사 양과 경쇠를 치던 양은 해도로 들어갔다.[太師摯適齊, 亞飯干適楚, 三飯繚適蔡, 四飯缺適秦, 鼓方叔入於河, 播鼗武入於漢, 小師陽擊磬襄入於海]"라고 하였다. 범찬(范粲) 삼국 시대 위(魏)나라 충신으로 자는 승명(承明)이다. 태재중랑(太宰中郞)이 되었을 때 사마사(司馬師)가 국정을 잡고 위 제왕(魏齊王) 조방(曹芳)을 폐하여 금용성(金墉城)으로 옮기자, 병을 핑계하고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조정의 부름이 이어지자 미친 체하여 36년간 말하지 않고 수레 위에서 자며 땅을 밟지 않다가 생을 마쳤다. 《진서(晉書)》 권94 〈범찬열전范粲列傳)〉 문산(文山) 송나라 문천상(文天祥)을 가리키며 문산(文山)은 그의 호이다. 남송(南宋) 말기에 원병(元兵)과 싸우다 잡혀가 3년 동안 연경에 잡혀 있을 때 절의를 지켜 다락에서 내려가지 않고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결국 피살되었다. 《송사(宋史)》 권418 문천상열전(文天祥列傳)〉 가함도……뿐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공자(孔子)는 "군자는 천하의 일에 있어서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어서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無莫也, 義之與比]"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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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인 평오준철에게 답함 을해년 (1935) 答族人平吾準喆 乙亥 보내온 편지를 받들어 읽고 그 시종을 살펴보았더니, "선사에게 인의(認意)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변론을 하지 않더라도 무함한 것임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에 성토하는 글을 나오기 전에 이미 먼저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다만 공정한 마음으로 공론을 지키며 치우치지 않은 자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동조하지 못하고 자중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명(高明)이 의리에 입각하여 판단한 것은 훌륭하였습니다. 《좌전》에 이르기를 "군주와 부모에게 무례를 범한 자를 보게 되면 마치 새매가 참새를 쫓는 것처럼 한다."93)고 하였습니다. 대저 스승과 군주와 부모는 하나입니다. 원수에게 인가받으려는 뜻이 있었다고 선사를 무함한 것은 무례한 것에 비할 뿐만이 아닙니다. 고명은 일찌감치 마땅히 배척해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 먼저 곧바로 성토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새매가 참새를 쫓는 것과 같은 뜻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남이 성토하는 것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 마음이 공정하지 않고 의론에 치우친 점이 있다고 의심하여 그들과 일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관중(管仲)이 제(齊)나라 군주를 도와 초(楚)나라를 정벌해서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공을 세웠는데, 공자는 그가 인의(仁義)를 빌려서 공을 이룬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지만 "누가 그의 인만 하겠으며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힘입고 있다."94)는 찬사가 있었습니다. 만약 공자가 당시 열국의 군주가 되었다면 어찌 제나라의 군주와 재상이 공정한 마음이 아니었다고 해서 소릉(召陵)에서 주나라를 높이는 동맹95)에 참여하지 않았을 수 있었겠습니까? 천리와 인욕은 행위는 같으나 실정이 다릅니다. 비록 함께 일을 하더라도 그는 본디 사적인 것을 위하고 나는 본디 공적인 것을 위하니 두 가지가 서로 방해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주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대의(大義)이고,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도 대의입니다. 진실로 대의와 관계되고 똑같이 왕의 신하이고, 똑같이 문하의 제자라고 한다면 너는 사적이고 나는 공적임을 따지고 비교하여 차이를 두고서 "나는 자중하여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됨이 분명합니다. 제나라 군주가 시해를 당하고 삼환(三桓)이 참람하게 권력을 훔친 것에 대해 만약 진항(陳恒)을 토벌하고96) 삼도(三都)를 허물려는97) 청이 먼저 다른 사람의 사사로운 목적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공자는 이러한 이유로 자중하지 못해 자신을 속이게 될까 염려하여 토벌하고 무너뜨리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방증하고 차용한 것입니다. 맹자가 사설(師說)을 물리친 것과 같은 경우는 심지어 사람들이 모두 [양주와 묵적의 설을]막아야 된다고 말할 것98)을 바라기까지 하였지만, 어찌 모든 사람들이 공정한 마음과 치우치지 않은 의론을 갖추겠으며, 또한 어찌 자중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더불어 일을 함께 하기를 바란 것이겠습니까? 우옹(尤翁 송시열)이 박화숙(朴和叔 박순(朴淳))을 꾸짖어 말하기를 "만약 반드시 지언(知言)과 양기(養氣)가 맹자의 경지와 같아진 뒤에야 이단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사사(士師)가 된 뒤에야 군주를 시해한 역적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인류가 어찌 모두 이단이 되는데 이르지 않겠는가."99)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이미 지언과 양기를 할 수 없다면 용심(用心)과 지론(持論)이 어찌 모두 공정하고 치우치지 않는 곳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옹은 더불어 일을 함께 하기를 청하였으니, 어찌 자중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택당(澤堂) 이문정공(李文靖公 이식(李植))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만이 학문을 이어 받았고, 그 나머지는 당파에 휩쓸렸다."100)고 하였습니다. 지나치게 생각하여 도모하지 못함이 애석합니다. 아, 지난날의 일에 죽을힘을 내서 심력을 완전히 소진하고 큰 재앙을 만나 거의 죽을 뻔한 자로는 그 누가 나와 같은 자가 있었습니까? 내가 공적이었느냐 사적이었느냐, 치우쳤는냐, 공정했느냐는 지금과 후대의 평가를 공손히 기다려야 하고 저가 스스로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고명이 의론한 바로 헤아려 보면, 마음이 공정하지 않고 지론이 치우친 것은 또한 저만 같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명은 옛 사람처럼 함께 동거했던 친족이면서 벗으로서 함께 모여서 학문을 강습한 우의가 성기지 않았는데, 10여 년 동안 한 마디도 경계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저의 자만하는 소리와 성낸 낯빛이 사람들이 다가설 수 없게 하였음에도 미혹되어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인가 싶습니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 반성하고 돌이켜 구해야 할 점입니다. 저는 이미 은혜로운 경계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고 아울러 성대한 이러한 문자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피차간에 견해가 똑같은 줄로만 믿고서 일찍이 헤아리고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지난번 솔직한 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 살펴보건대, 이는 어찌 안색을 보지 않고 말한 장님[瞽]101)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미 말을 꺼냈으니, 청컨대 고설(瞽說)을 다하여 솔직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한 것에 대해 그대는 이미 마땅히 배척해야 할 죄라고 말했으니 굳이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호남과 영남에서 서로 간행을 한 것은 함께 목욕을 하면서 상대가 벌거벗은 것을 비웃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저 문고(文稿)를 인쇄하여 간행하는 것을 그가 알고서 금하지 않았으니, 그의 입장에서 말하면 비록 묵허(黙許)했다고 하겠지만 나의 입장에서 말하면 마땅히 내가 내 일을 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옳다 하여 이기기를 구하는 것을 습관적으로 하다가 성격으로 굳어진 오진영도 오히려 "천하에 어찌 침묵을 기뻐하지 않으면서 인허를 기뻐하는 것처럼 인지상정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견주어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대의 인정에 또한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선사의 "[청원하여 간행 반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작은 차마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고, 간행하지 않고 보관해두는 것을 크게 차마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이미 천리와 인심에 편안한 바가 아닙니다. 또 간행하는 것만 전해지고 보관해둔 것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고문상서(古文尙書)》 이하는 모두 오늘날에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피차간에 상호 공과 죄가 있어서 서로 가릴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감히 묻건대 오진영에게 어떤 공이 있고 호남에 어떤 죄가 있습니까? 원고를 간행한 것이 오진영의 공이라고 말한다면 그가 선사의 글을 고쳐 어지럽힌 것은 그대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현동(玄洞)에서 간행한 것을 호남의 죄라고 말한다면 침묵을 기뻐하고 인허를 기뻐하지 않은 것은 오진영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과 그 죄가 서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무함을 변론하면서 선사의 누가 됨을 생각지 않고 이기는 것만 힘쓴다면, 거짓을 일러 바르다고 하는 것이 마치 위에서 논한 마음이 공정하지 않은 경우와 같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사람이 또한 능히 무함을 변론할 수 있으면 무함을 변론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심술이 은미하여 진실로 타인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이기는데 힘쓰는 사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시비(是非)를 결정하고 사정(邪正)을 정하는 날에 다만 마땅히 공자가 "그 행하는 바를 살핀다."고 하고 주자가 "선을 행한 자는 군자가 되고 악을 행한 자는 소인이 된다."라고 한 가르침102)에 의거하여 따르거나 따르지 않음을 결정해야 할 뿐입니다. 연유한 바를 관찰하고 편안히 여기는 것을 살펴서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그 실정을 숨길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절로 다른 날에 별도로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고명은 선사를 무함한 것에 대해 그다지 통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해가 이와 같은 것이니, 스승의 원통함을 지어낸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변론한 것이 선사의 누가 됨을 두려워한 것에서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양주와 묵적이 주장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도 오히려 그 폐단이 임금과 부모의 존재를 무시하는 데로 흘러갔습니다. 오진영이 인가와 관련하여 선사를 무함하고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은 바로 당일에 선사를 무시했던 것이 되니, 그 경중이 또한 서로 현격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고명은 이내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고 의심하니,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묻건대, 저 무리의 이른바 정재(靜齋)의 유서(遺書)라는 것에 대해 감히 가리켜서 석농(石農)에게 선사가 홀로 명한 것이 있었다고 하지도 못하고, 감히 가리켜서 유서가 없다고 하지도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난 것입니까? 이는 대단히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여자 종이 석개(石介)의 글씨를 몰래 익힌 것이다.'103)라는 등의 설을 꺼리고 실로 유서를 독실하게 믿으면서 '잘 헤아려서 하라.'고 하거나 '불언지교(不言之敎)'라고 한 등의 설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오진영의 이른바 "말은 구별이 부족하고 문장은 표현이 허술하였다.[語欠區別, 命辭疎忽]"라고 한 것은 과연 자신을 숨기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계책이 아니고 명백하게 무함을 자복하는 설이 되겠습니까? 그 무리가 무함을 믿고 그 수괴가 불복함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고명은 마침내 "양주와 묵적처럼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았고, 양주와 묵적처럼 많은 사람을 미혹함이 없었다."라고 하고, 결론을 맺기를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니, 누가 감히 다른 날에 불 꺼진 재에 입김을 불어서 불을 일으키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날은 논할 것이 없고 본디 많은 사람을 현혹시켰으니 활활 들판을 태우는 것처럼 그 기세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바로 오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신헌(愼軒)의 편지에 "영남의 당은 수백 인이고 호남의 당은 수십 인이다. 설령 호남이 많고 영남이 적더라도 건장한 오룡(五龍)이 날뛰는 한 마리 파리한 돼지를 이길 수 없는데104), 하물며 영남이 호남보다 열배는 많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명은 오히려 "맹자가 양주와 묵적에 대해 변론한 것처럼 반드시 힘써 변론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또 "이미 들어가 초제(招提)를 따랐다."105)는 기롱을 하였습니다. 감히 묻건대 "오진영과 그 당이 이미 우리에 들어갔다."고 한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만약 자복한 문자가 있다면 어찌 적어서 보여주지 않습니까? "말은 구별이 부족하고 문장은 표현이 허술하였다.[語欠區別, 命辭疎忽]"는 여덟 글자를 가리켜 우리로 들어온 증거로 삼는다면 이것은 자신을 숨긴 계책을 다스린 것이지 자복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의 말만 그러할 뿐이 아닙니다. 당초에 고명은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성토하여 배척한 자가 공이 있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모두 매우 의심스러운 말입니다.제가 듣기로, 고명의 이 편지는 나재장(懶齋丈)이 헤아려 수정하고 윤색하였으며, 연심장(鍊心丈)이 그 아들에게 "평오(平吾)의 편지는 말이 공평하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용심(用心)이 공평한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며 지론(持論)이 치우치지 않은 것도 다른 편지가 아님을 알겠습니다. 부북(扶北 부안)의 여러분이 많은 부정한 무리와 뒤섞여 있는 이런 시기에 이것으로써 한 지역의 정론(定論)을 삼았기 때문에 이런 마음 가득한 많은 의심을 낱낱이 들어 우러러 질문하여 공정한 의론을 더욱 들었으면 합니다. 바라건대 여러분들과 함께 살피고 같이 의론하여 일일이 밝게 가르쳐 주고 한쪽으로 치우친 사사로운 견해라고 단정하여 물리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편지의 말미에 "오랑캐의 재앙이 아침저녁 사이에 임박하여 있으니 동실(同室) 내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양주와 묵적도 똑같이 요순(堯舜)을 옳게 여겼고, 흑수(黑水)106)도 똑같이 공맹(孔孟)을 존숭하였으니, 애당초 동실이 아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맹자와 우암이 전국시대의 환란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넘쳐나며 청나라 오랑캐가 위협하여 상하가 위태롭게 떨던 때에 급급하게 변론하여 배척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외부의 재앙을 근절하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내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오랑캐의 재앙은 화를 당하는 것이 신명(身命)이고, 내부의 사문(斯文)의 재앙은 화를 당하게 되는 것은 심술(心術)입니다. 마음과 몸은 이미 내외의 구분이 있으니, 마땅히 우려해야 하는 것에 어찌 완급의 차이가 없겠습니까? 고명은 또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奉讀來敎,察其始終,則以爲"謂師有認意,不待辨而誣已明,故討章未出之前,已先言其當斥也.但以不知以公正之心持論不偏者爲誰,故不敢輕易左袒,而欲自重而不自欺也".異哉, 高明之裁義也! 《傳》曰: "見無禮於君親者,若鷹鸇之逐鳥雀." 夫師與君親一也.誣師以有意讐認,非無禮之比而已.高明早已知其當斥,而不先卽討斥,旣少鷹鸇之志矣.至於人之討之也,猶疑其心不公論有偏而不與之同事.試思之.管仲相齊君伐椘國,立尊周攘夷之功,孔子非不知其假借仁義而有"如其仁,如其仁,民到于今賴之"之贊.如使孔子爲當時列國之君,則豈可以齊之君相非公心之故不參於召陵尊周之同盟哉? 天理人欲,同行異情.雖與之同事,彼自爲私,我自爲公,兩不相妨.蓋尊周攘夷,大義也; 爲師辨誣,亦大義也.苟係大義,同爲王臣,同爲門弟之地,其不可計較於爾私我公之間而異之曰"我欲自重而不自欺也",明矣.齊君見弑,三桓僭竊,若使討陳恒、墮三都之請,先出於他人有爲之私,則孔子以此而恐其不自重而自欺也,不與於討墮之役歟? 然此猶是旁證借據.若乃孟子之闢邪說也,則至有望於人人之言距,豈以人人者皆有公正之心、不偏之論,亦豈不欲自重而不自欺也而望與之同事哉? 尢翁之責朴和叔曰: "若必知言養氣如孟子而後,乃能攘斥異端,則是必士師然後乃治弑君之賊,人類幾何其不盡哉?" 夫旣不能知言養氣,則用心持論,安得盡出於公正不偏? 然而尢翁請與之同事,豈不欲自重而不自欺也而然哉? 澤堂李文靖公論東西人事,而曰: "沙溪學也,其餘黨也." 惜乎其過慮而不之圖也.噫! 向者之役,出死力而竭盡心膂,遭大禍而幾殞性命者,孰有如鄙人? 吾之是公是私是偏是正,恭俟今與後評定,而非吾之所可自明者.但以高明所論者律之,心不公正,持論偏仄,宜亦莫如鄙人.而以高明僅過古人同居之親,加以麗澤之有誼,盍簪之不疎,十餘年間,曾不聞一言之箴規.意者鄙人訑訑之聲,悻悻之面,有足以拒人者,而迷不自覺歟? 此正內訟反求處也.鄙人則旣未聞惠箴之及,并不見盛作此等文字,故只信彼此之同見,不曾揣度疑難,而向呈率直一書矣.以今觀之,其何免未見顔色之瞽者也? 雖然,旣發端矣,請得以罄盡瞽說而質之.震之誣師,賢雖不討,旣謂當斥之罪,則不須更提.至於所謂"湖嶺互刊,同浴而譏裸"者,何也? 夫印行文稿,而彼知而不禁,則自彼言之,雖曰默許,自我言之,當曰吾爲吾事.故雖以震之自是求勝習與成性者,猶謂天下安有不快默而快認許之乖常人情哉? 今乃將此二者,比而同之,賢之人情,不亦乖乎? 以先師之"決是自辱"爲小不忍,以不刊而藏之爲大不忍,則旣非天理人心之所安.且刊行者獨傳,而藏之者不傳,則自?古文尙書?以下,皆不得傳至于今,豈有是理? 又謂之"彼此互有功罪而不相掩",則敢問震有何功,而湖有何罪也? 謂刊稿爲震功,則改幻師文,賢亦云然; 謂玄刊爲湖罪,則快默而不快認,震亦云然.其功其罪,安有不相掩者乎? 辨誣而不以師累爲念,而涉於務勝,則僞也之喩正,如右所論心不公正者.雖然,人也能辨誣,則辨誣已矣.其心術隱微,固非他人之所易知.果使出於務勝之私,當決是非定邪正之日,只當據孔子"視其所以"、朱子"爲善者爲君子,爲惡者爲小人"之訓,以從違之矣.觀所由,察所安,而使人不敢廋其情,自當別論於他日者也.大抵高明不甚痛迫於師誣,故持見如此,觀於不認做師寃而反恐辨之者爲師累,可見矣.楊墨之爲我兼愛,猶爲流獘之無君父; 震泳之誣認改稿,卽爲無師於當日,其輕重又不啻相萬也.高明乃以擬比不類疑之,吾不知其何說也.敢問其徒所謂靜齋遺書,不敢指以爲有石農獨命,不敢指以爲無遺書,從天降從地出? 可疑之大者.何憚爲女奴石書習等說,果是篤信遺書,而不以"料量爲之"、"不言之敎"之云爲是者乎?當人所謂"語欠區別,命辭疎忽",果是非逃遁眩人之計而爲明白服誣之說乎? 其徒之信誣,其魁之不服,固若是也.高明乃以爲"不自爲是如楊墨,無迷惑者衆如楊墨", 終之謂"不足取信,孰敢吹燼起火於他日乎?" 吾則以爲未論他日,自是惑衆,燄燄燎原,其勢之可畏者,正在今日.日前愼軒書有云: "領黨數百人,湖黨數十人.正使湖多而領少,五龍矯矯不能勝一羸豕之蹢躅,而况領多於湖十倍者乎?" 而高明猶有"不必力辨如孟子之於楊墨"之說焉,又加以"旣入從招"之譏焉.敢問"震及其黨旣入其苙"者,指何而言? 若有自服文字,何不錄而示之? 如指"語欠區別, 命辭疎忽"八字,爲入苙之證,則此治逃遁之計而非自服之說.不惟如吾言.當初高明之言其當斥, 而謂討斥者有功,何也? 此皆甚可疑也.竊聞高明此書,懶齋丈商訂修潤之,鍊心丈對家兒言平吾之書說得公平.然則吾知其用心公平者果非他人,持論不偏者亦非他書.而當此扶北僉座混同衆陰之秋,以此爲一方之定論,故凡此滿腹羣疑,枚擧仰質,欲以益聞公正之論.願與僉座同看共議,一一明敎之,不宜槩以偏私之見而揮之也.書末喩以"夷狄之禍,迫在朝暮,不可爲同室之鬪".然楊墨同是堯舜,黑水同尊孔孟,未始非同室也,而孟子、尢庵汲汲辨斥於戰國禍亂殺人盈野,淸虜威嚇上下懍懍之日者,何也? 正以欲絶外禍,宜先淸內故也.外而夷狄之禍,所禍者身命也; 內而斯文之禍,所禍者心術也.心身旣有內外,則所當憂者,豈不有緩急乎? 未知高明又以爲如何. 군주와……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기사에 "군주에게 예가 없는 자는 주살하되 매가 새를 뒤쫓아 낚아채듯이 하라[無禮於其君者, 誅之, 如鷹鸇之逐鳥雀也]"라고 하였다. 누가……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보인다. 공자는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되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만큼 어질겠는가. 누가 그만큼 어질겠는가.[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라고 하였고, 또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管仲相桓公覇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라고 하였다. 소릉(召陵)에서……동맹 소릉의 맹약은, 제 환공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사자 굴완(屈完)과 소릉에서 맹약을 매었는데, 이때 환공은 초나라가 주나라 왕실에 공물(貢物)을 바치지 않고 남쪽으로 정벌을 계속하는 죄를 물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4년 진항(陳恒)을 토벌하고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진성자(陳成子)가 자신의 임금인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공자가 목욕을 하고 조정에 나아가 애공(哀公)에게 고하기를 "진항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토벌하소서."라고 하였다. 삼도(三都)를 허물려는 노나라 삼가(三家 계손씨(季孫氏), 맹손씨(孟孫氏),숙손씨(叔孫氏))의 읍(邑)을 강등시킨 일을 말한다. 노 정공(魯定公) 13년에 공자가 삼가(三家)가 너무 참람하다 하여 숙손씨의 후읍(郈邑)과 계손씨의 비읍(費邑)과 맹손씨의 성읍(城邑)을 허물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사기(史記)》 卷47 〈공자세가孔子世家〉 맹자가……것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맹자는 "능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문도이다.[能言距楊墨者.聖人之徒也]"라고 하였는데, 주자의 주(註)에 "《춘추》의 법도에 따른다면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다 토벌할 수 있으니, 꼭 사사(士師)여야 할 필요는 없다.[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討之 不必士師也]"라고 하였다. 만약……않겠는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67 〈답박화숙(答朴和叔)〉에 보인다. 사계(沙溪)만이……휩쓸렸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203 〈택장이공시장(澤堂李公諡狀)〉에 "오늘날 율곡을 높이는 사람은 사계만이 그 학문을 이어받았고, 그 나머지는 당파에 휩쓸렸다.[今之尊栗谷者.沙溪學也, 其餘黨也]"라는 택당의 말을 원용하고 있다. 안색을……장님 《논어(論語)》 〈계씨(季氏)〉 에, 공자는 "군자를 모실 때 세 가지 허물이 있다. 말을 해서는 안 될 때 하면 조급함이고, 말을 해야 할 때에 하지 않으면 숨기는 것이고, 안색을 보지 않고 말하는 것을 장님이라 한다.[侍於君子有三愆, 言未及之而言, 謂之躁, 言及之而不言, 謂之隐, 未見顔色而言 謂之瞽]"라고 하였다. 공자가……가르침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가 말하기를 "그 행하는 바를 보며 그 연유하는 바를 관찰하며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피면 사람이 어찌 숨기겠으며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라고 하였다. 주자는 "그 행하는 바를 본다.[視其所以]"는 구에 대해 주(註)하기를 "선을 행하는 자는 군자가 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소인이 된다.[爲善者爲君子, 爲惡者爲小人]"라고 하였다. 여자 종이……것이다 송(宋)나라의 간신 하송(夏竦)이 여자 종으로 하여금 습자(習字)를 하도록 하여 석개(石介)를 무함하게 한 일을 가리킨다. 《송사(宋史)》 권432 〈석개열전(石介列傳)〉 건장한……없는데 《주역(周易)》 구괘(姤卦) 초육(初六)에 "아무리 파리한 돼지라도 언제든 날뛰려는 심보를 갖고 있다.[羸豕孚蹢躅]"라는 말이 나온다. 오룡(五龍)은 다섯 용이라는 말인데, 이 괘가 초효(初爻) 외에는 다섯 개의 효가 모두 양(陽)이기 때문에 다섯 군자라는 뜻으로 오룡이라고 한 것이다. 이미……따랐다 초제(招提)는 절 또는 승려의 이칭이다. 두보의 유용문봉선사(遊龍門奉先寺)에 "이미 초제를 따라 노닐었고 다시 초제의 경내에 유숙한다.[已從招提遊 更宿招提境]"라고 하였다. 흑수(黑水) 윤휴(尹鑴)가 여주(驪州) 여강(驪江)에서 살았으므로 그를 배척해서 일컫는 말이다. 즉, 여(驪)는 검다[黑]는 뜻이 있으므로 흑(黑)으로 바꾸어 소인(小人)임을 암시한 것이고 강(江)은 물[水]이므로 이를 합하여 흑수라 한 것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 아무개에게 답함 갑자년 (1924) 答權某 甲子 보내온 편지에 음양모순(陰陽矛盾)과 조변석개(朝變夕改)의 소인으로 나를 지목한 것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고서 또 환란을 초래한 도적으로 나를 비기었습니다. 대저 생민이 있은 이래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선이나 악으로 이름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소인이나 도적의 이름을 얻는 것도 본디 쉽지 않으니, 우리 형의 은혜는 어찌 이리도 두터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름이란 것은 실질의 손님입니다.107) 만약 단지 그 이름만 누리고 그 실질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음식을 먹고도 그 맛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감히 질문하여 소인이 된 실질을 알고자 하니, 끝까지 가르쳐주기 바랍니다. 대저 내가 김용승(金容承)과 절교한 것은 내가 나의 일을 한 것인데 무슨 일을 입증한단 말입니까? 남이 김용승과 절교하지 않은 것은 그가 스스로 잘못한 것인데, 내가 어찌 그를 참견하겠습니까? 다만 음성의 오진영이 나에게 김용승을 당인으로 삼은 죄목을 뒤집어씌우고, 심지어 '영좌(靈座)에 들이지 말라.'는 설을 가지고 무함을 성토하고 제사에서 내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선사를 잊고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실질적 죄상은 생각지도 않았으니, 이미 말할 가치도 없었습니다. 형은 음성에 대해 복심으로 충직하게 믿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형의 편지에 "기쁘고 시원하게 씻어내었다."고 한 것과 음성의 편지에 "종현(鍾賢)의 처사가 옳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내가 김용승과 절교함에 그 기록이 있음을 증명하였고, 또 김용승이 연전에 한농노(漢農老)라고 부른 것과 마음속에 선사를 무시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김용승을 허용하여 다시 성토하지 않고 김용승에게 조용하게 잘못을 고칠 것을 권면한 것을 가지고 음성이 전후로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양측이 계속 대변(對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곧 "한 구의 몇 마디 말로 형을 팔고 참작해서 말을 한 뜻을 살피지 않았다."라고 하고, 곧장 들어가는 것을 밀치고 막은 일, 동문으로 받든 일, 제문을 성토한 것 등으로 음양모순과 조변석개라고 하였습니다. 또 오진영의 글에 "만약 이후에 선사를 범한다면 내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토죄하겠다."고 한 말을 살피지 않고, 감히 김용승과 절교하지 않은 것을 심술의 병통과 환란을 초래한 것으로 얽어맸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여러 가지를 참고하여 구해보아도 매우 괴이합니다. 대저 형이 죄를 판결한 것도 그 자체로 얼마간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구의 몇 마디 말이 죄가 된다면 전편의 마음을 통틀어 거론하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형의 이 편지 전편을 모두 읽어보니, "기쁘고 시원하게 씻어내었다."는 등의 말에 참작한 뜻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를 낱낱이 따져본다." 등의 말에도 저의 뜻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형을 판 것으로 김용승과 절교한 증거로 삼아 죄를 주었으니, 마음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곧바로 들어간 것은 그러하지만, 밀치고 막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스스로 돌이켜보아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108)고 했습니다. 어찌 물러나 기다리며 스스로 기가 꺾이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애당초 막았던 것이 없었으니, 또한 어찌 밀치고 막은 이치가 있겠습니까? 제가 실제로 죄가 있다면 음성 쪽의 여러 사람이 등 뒤에서 걷어차며 내쫓기를 형이 김용승에게 했던 것처럼 하는 자가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마침내 내가 변론을 한 번 하자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저는 이미 김용승과 절교를 했고, 김용승을 만나서 제문을 본 것은 곧 당일 풍파가 있은 뒤에 있었습니다. 형은 어떻게 김용승을 만나 제문을 본 죄를 미리 알아서 음성 쪽 사람들과 마땅히 영좌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벌을 정했단 말입니까? 그것도 또한 이른바 "지극히 성실하면 미리 알 수 있다."109)는 도인 것입니까? 또 그가 천리 멀리서 상제(祥祭)에 달려와 제문을 가지고 사죄를 하였으니, 단지 그가 멋대로 들어온 것을 추궁만 하고, 다시 그 글을 살펴서 진퇴를 결정해도 늦지 않았는데, 형의 무리들이 영전에서 먼저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찬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형은 이전 편지에 "김상(金庠 김용승)이 강리(講里)에 사죄하는 것을 뜻밖에도 기쁘게 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강리에 사죄를 한 것은 기쁘게 들었는데, 선사에게 사죄를 한 것에 대해서는 기쁘게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먼저 단지 곧장 발로 찼으니, 참으로 음성을 중시하고 선사를 경시한 것입니다. 저는 당일의 일을 늦게 비로소 와서 보았지만 이 의리에 대해서는 소견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미 김용승에게 경솔하게 곧장 들어간 것은 먼저 그 도리를 잃은 것이라고 질책하였고, 또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스스로 큰 죄에 빠졌다고 질책한 뒤에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제문을 읽게 하였습니다. 송춘계장(宋春溪丈)은 "글에서 노주(老洲)를 배척하고 자복하지 않는 것은 흠이 되는 일이다."라고 했는데, 저도 자세히 살펴보니 춘계장의 말이 진실로 옳았습니다. 다음날 또 그가 끝까지 "사우간(師友間)으로 선사를 대하였다,"는 설을 고치지 않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어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죄를 준다면 감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나눈 것은 있었지만 동문으로 대한 것은 없었으며, 제문을 본 것은 옳았지만 제문을 성토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형이 마침내 대략 서너 글자를 가지고 본래 면목을 바꾸었는데 마음을 먹고 한 것입니까? 이것은 형이 사람을 죄에 빠뜨린 것입니다. 또 호중(湖中)에 있었을 때에는 "성선(性善)【김용승의 옛날 자(字)라고 하는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김용승의 옛날 자인지도 모릅니다.】이 내방하였으니 나에게 술이 있다면 마셔야 하고 밥이 있으면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고 【정돈영(鄭敦永)이 신헌(愼軒)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선이 지난번 강리에 도착했을 때 내가 가서 보았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으며,【박창현(朴昌鉉)이 저에게 대답한 말인데, 이 때 정돈영(鄭敦永)과 오해겸(吳海謙)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김용승과 작별할 때에 간곡하게 나에게 방문을 부탁했다."고 한 자도 있었는데, 【이광규(李光珪)가 화도(華島)의 강변에서 김용승과 작별할 때 이 말이 있었는데, 김(金)은 "김용승과 당이 되는 것인데 어찌 하겠는가."라고 하였고, 이(李)는 "군은 다른 말을 꺼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저와 수십 명이 함께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 죄를 묻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친근하게 서로 그리워했습니다. 그런데 호남(湖南)에 있을 때에는 김용승이 잠깐 지나는 길이었는데 중벌이 갑자기 가해지고 엄한 성토가 뒤따랐으니, 또한 하나의 괴이한 일이었습니다. 아, 저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김용승이 애초에 오진영에게 보낸 선사를 무함하는 글을 꺼내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가 선사를 배반한 죄를 성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제(祥祭)에 달려간 처음에 음성을 성토한 말을 재차 꺼내지 않았다면 분명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호남인이 애당초 인의(認意)와 인교(認敎)로 음성을 꾸짖지 않았다면 김용성을 당으로 삼았다는 앙갚음이 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제를 치르는 날 재차 음성을 내치는 일이 없었다면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벌이 반드시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상천하에 오직 일음(一陰 오진영)만이 홀로 존귀하고 세상에 다시 우리 육양선생(六陽先生 간재)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음양모순과 조변석개, 심술의 병통과 환란의 초래[陰陽變改心病亂招]'는 형이 나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비록 사라지지 않을 대필(大筆)의 은혜를 지극히 감사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옹졸하고 융통성이 없는 저가 마침내 그 이유도 모르고서 염치없이 받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고, 또 저가 위에서 진술한 바가 어떠합니까? 괴이할 뿐입니다. 여러 의심을 이미 해소할 수 없다면 여덟 글자의 미명(美名)은 형과 음성 오진영에게 바치고 싶지만, 이미 주었는데 다시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천하에는 끝내 정명(定名)이 없겠습니까? 각각 스스로 자신의 심술과 언행 사이에서 돌이켜 구한다면 이 이름이 합당한지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처럼 뜨겁다가 얼음처럼 차갑기가 날로 심해집니다. 어느 날 강물이 줄어들어 돌이 드러나는 것처럼 진상이 밝혀지는 일은 아득히 정해진 기일이 없으니, 또한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다만 피차 죽고 나서 백 세대가 흘러 의론이 정해질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영남에서 문집을 간행하지 못하게 된 것은 뇌물과 관련한 분노와 비문과 관련한 유감 때문입니까? 호남이 인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뇌물과 관련한 분노와 비문과 관련한 유감이 만약 없었다면 비록 인가하지 않는 곳이 있더라도 장차 듣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오직 인가를 조심한 곳은 반드시 영남입니다. 영남의 의리라는 것은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비록 한심하지만 인가하지 않은 호남을 버리고 영남에서 일을 함께 한다면 하늘이 분명 싫어할 것입니다.위로 선사를 범했다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저의 편지에 "선사가 이를 조금도 생각지 않았는데 조만간 하라고 명했다는 것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라고 했던 것은 선사께서 분명 이러한 일이 없었음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천하는 문자가 똑같은데, 이를 두고 윗사람을 범한 말이라 한다면, 사람들 중 그 누가 이를 믿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來書以陰陽矛盾朝變夕改之小人目我,猶以爲未足也,又以亂招之盜賊律我.蓋自生民以來,林林蔥蔥,無善惡可名而沒者何限? 得小人盜賊之名,亦自不易,吾兄之賜一何厚也? 雖然,名者,實之賓也.若徒享其名,而不究其實,是猶食之而不知其味也.玆敢質之,欲知所以爲小人之實,幸有以卒敎之也.夫我之絶金,吾爲吾事,何事立證? 人不絶金,彼自失之,我何管他? 但陰吳之勒我以黨金之罪,至以几筵勿入之說,加之作討誣黜祀之報,而不念自家前後忘師黨金之實罪,已甚無謂.而兄之於陰,是腹心忠諒者.故引兄書"喜豁洒然"、陰書"鍾賢得之"之語,證吾絶金之有書; 又擧知其年前呼漢農老心中久無先師,而許金不復討,勉金安靜改過,證陰前後之黨金.此兩造對辨之不得已者,乃承以孤行單辭賣兄而不察遺辭斟酌之意,及排閑直入、逢承盍簪、討祭文爲陰陽變改.又以不察陰書"若後侵師, 吾并以千人討之"之語,而敢構以不絶金爲心病亂招.反覆思之,參互求之,深怪.夫兄之折獄奏當,亦自一般差異也.夫孤行單辭之爲罪,則通擧全篇之心不爲罪.兄之此書,通讀全篇,不惟"喜豁灑然"等語之不見有斟酌意,至於"歷數其罪"等語,有非盡鄙意者.今反以賣兄爲絶金之證見罪,反顧于中,能無愧負乎? 且直入則是然,而排閑則非其實也."自反而縮,雖千萬人吾往矣." 有何退待自沮之爲乎? 初無有拒閑者,則又何有排閑之理乎? 使此漢而有實罪也,則陰邊諸人踢蹴背後而逐之,如兄之於容承者,必有其人,乃被鄙辨一破而噤不得措一辭者,何也? 且弟旣已絶金矣,逢金而見祭文,乃在當日風波之後,兄何以預知逢金見文之罪,與陰邊人定不當入靈之罰也? 其亦所謂至誠前知之道歟? 且彼千里赴祥操文謝罪者,只當責其擅入,更爲之觀其文而進退之,未晩也.兄輩之拳踢,先動於靈前者,何也? 兄之前書,不曰金庠之謝罪講里儻喜聞乎? 謝罪乎講里則喜聞之,謝罪乎先師,則不惟不喜聞,乃先直踢之,其眞重陰而輕師也.弟於當日之事,晩始來見,然有見於此義也,故旣責金以率爾直入先失其道,又責以不聽吾言,自䧟大罪,乃令閱其文于衆中.宋春溪丈曰:"文中斥老洲不服,是爲欠事." 弟亦審視,春言良是.翌日,又聞其終不改師友之說,故知其末如之何,而斷置之矣.以此而見罪,則不敢辭矣.然通語則有矣,盍簪則未也,見祭文則是矣,討祭文則非也.兄乃略將數三字頓換本面目,有心哉? 兄之䧟人也.且在湖中,則有言性善【容承舊字云.此中人并與容承舊字而不知.】來訪,吾有酒則當飮之,有飯則當食之者【鄭敦永對愼軒云然.】; 有言性善之向到講里,吾往見之者【朴昌鉉對弟言,如此時鄭敦永、吳海謙在座.】; 有作別容承丁寧託以訪我者,【李光珪於華島江邊別容承有此言,金言其於黨金何, 李言君勿出別言.弟及數十人所共見聞者.】 非惟不問其罪,反與之爾我相眷戀.在湖南,則容承之風影乍過,重罰輒加,嚴討并隨,亦一可異也.噫,吾其知之矣.使金初不發封陰誣師之章,必不聲其倍師罪矣.再不發討陰言於赴祥之初,必不遭拳踢之加矣.使湖南人初無認意敎之責陰,黨金之報非所及也.再無黜陰於祥祀之日,黨金之罰必不到也.天上天下,惟一陰獨尊,不知世間復有我六陽先生,鳴呼痛哉! 蓋陰陽變改,心病亂招,兄之所以名我者,雖極感大筆不朽之惠,自念拙拙硜硜,竟不識所以然而冒受之,有非實心,且弟之右陳何也? 可異之.羣疑旣不可觧,則八字美名欲奉納於兄與陰吳,然想不欲旣與而還取.然則天下終無定名乎? 各自反求於心術言行之間,則可知斯名之當否矣.火熱氷寒日甚,一日水落石出,漠無定期,亦何可易也? 只當俟彼此蓋棺之日、百世論定之時而已.嶺刊之敗,爲賂怒碑憾耶? 爲湖之有不認耶? 賂怒碑憾之若無乎,雖有不認地,將如不聞也者,而惟認是謹者必嶺也.嶺之義理,固如是矣.吾雖無似,舍湖不認而同事於嶺,天必厭之.上犯先師,此何謂也? 鄙書所謂"曾謂先師少不念此而命遲速間爲之乎"者,明先師之必無是事也.天下之文同也,以此爲犯上語,則人誰信諸? 令人失笑. 이름이란……손님입니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이름이란 실질의 손님인데, 나보고 장차 손님이 되라고 하는 말인가.[名者, 實之賓也, 吾將爲賓乎]"라는 말이 나온다. 스스로……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맹자는 부동심(不動心)의 방법으로 용기에 관해 논하기를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하였다. 즉 자신이 떳떳하면 아무리 많은 사람도 두렵지 않다는 기상이다. 지극히……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4장에 "지극히 성실한 도(道)는 미리 알 수 있다. 국가가 흥성하려면 반드시 복된 조짐이 생기고, 국가가 멸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징조가 생긴다.[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孽]"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 아무개에게 보냄 갑자년(1924) 6월 與吳某 甲子六月 저는 귀측에서 호당(湖黨)으로 지목한 자이니 진실로 오래 전에 집사에게 배척을 당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구한 마음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기에 감히 이렇게 무릅쓰고 말씀드리니, 살펴주기 바랍니다. 대저 인의(認意)와 인교(認敎)의 설에 대해서는 작년 가을 이래로 여러 장로들이 지극히 간절하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으니, 집사의 명철함으로 장차 오래지 않아 뉘우치고 고칠 것이고 젊은 제가 경솔하게 간여하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토해야 하고 절교해야 한다는 의론이 일어났을 때에도 또한 "우선 그치고 우선 기다려서 뉘우치고 고칠 날을 기다려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구회(九晦) 김용승(金容承)이 통문을 지어 서울로 들어갈 때에도 방문하여 간곡하게 고하고 고치지 않은 뒤에 돌리라고 권하였고, 동짓달 김지산(金志山) 부자의 편지에 절교하기를 권했으나 천천히 기다리며 답을 하지 않다가 유명(幽明)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거의 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도록 집사가 자복했다는 소식은 깜깜히 들림이 없고, 선사를 의심하고 비방하는 소리는 천지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충심을 바치는데 빨리 하지 않는 것이 정성을 잃은 것이고 선사를 높이는데 느슨한 것이 죄가 크다는 것을 절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성토하는 의론이 격렬하게 일어남에 집사가 편지을 통해 뜻을 보인 것은 "말에 구별이 부족하였다."라고 하고, "명철한 지혜와 깊은 생각이 없었다."라고 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이 의심과 비방을 분명하게 씻어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이것이 통렬하게 스스로 사죄하고 자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비록 저와 같은 몽매한 자도 중론의 대열에 달려가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감히 하지 않았던 것은 대상(大祥)의 제사가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한 번 대면하여 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다만 일이 있어 서로 어긋나고 분분하고 바빠서 평온하지 못해 만남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편지로 집사에게 먼저 전합니다. 澤述乃貴邊所目湖黨者,固知爲執事之斥絶久矣.區區之衷,有不能自已者,敢此冒達,幸裁鑑焉.夫認意、認敎之說,昨秋以來,諸長老之累書連牘,旣已恳至,以執事之明,將見非久之悔改而無待乎少者之儳言.至於當討當絶之議起也,則又曰 且止且待,以到悔改之日可也.故九晦金容承之製通入京也,勸之以委訪恳告,不悛而後發,至月金志山父子之書勸告絶也,遲俟不答,以致幽明之缺,觀此庶可諒此心矣.然迨將歲周,執事自服之報,寂然無聞,先師之疑謗,騰天而溢地,自覺效忠不早之爲失誠,緩於尊師之爲罪大也.今玆討議之峻發也,執事之以書見意者,不過曰"語欠區別", 曰"無明智遠慮",是可謂昭洗疑謗乎? 是可謂痛自謝服乎? 於是乎雖如澤述之蒙騃者,不得不趨與衆議之列,而猶不敢者,以祥會在近,尙可一面質也.但有故相違,紛悤未穩,有不可知,故敢以書先之于執事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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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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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아무개에게 답함 갑자년(1924) 7월 〇성토 전 答吳某 甲子七月○聲討前 답장을 받아보니, 곡절이 비록 많지만 그 큰 것을 총괄해보면, 정재(靜齋)의 스스로 인간(認刊)을 담당했다는 것과 옹서(甕書)의 법도를 벗어나 화(禍)를 전가했다는 것과 상빈(傷貧)‧뇌비(賂碑)‧경쟁(競爭)에서 변론과 성토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 것에 불과했고, 마지막에는 변괴(變怪)의 일과 무문(舞文)의 농간을 저희에게 돌렸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어찌 그렇겠습니까? 청컨대 대략 질정해 보겠습니다. 일찍이 집사가 계해년(1923) 8월에 정재에게 답한 편지를 본 적이 있었는데, "대신 인가를 받는 것에 대해 작년 가을에 의견을 수합할 때에 형도 사람들을 따라 허락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허락한 것이 스스로 담당한 것과 선창하여 따른 것과 결단하여 힘쓴 것과는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만큼 동일시할 수 없음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계해년 8월에 따라 허락한 것을 갑자기 갑자년 6월에 스스로 담당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정재가 인간을 담당하여 반대자를 막았다는 설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집사는 정재에게 대답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인의(認意)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자승(子乘)에게 답하기를 "선사가 반드시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어디에서나 선사를 무함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행하설(杏下說)110)로 논해 보면, 바야흐로 함재장(涵齋丈)이 인간(認刊)을 성토할 때에 집사는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는 명을 홀로 받들었다는 말을 지어내서 선사의 인교(認敎)를 입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 말을 동문 가운데 어떤 누가 지어냈던 모두 죄줄 수가 있으니, 대초(代草)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집사는 고제(高弟)이고, 일을 주관했고, 또 대초를 하였으며, 또 홀로 들었다고 스스로 말했는데, 누구와 죄를 분담하여 결사적으로 버티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법도를 벗어나 전가하고자 해도 해당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정재가 백이(伯夷)이던 도척(盜跖)이던 본디 하늘이 정해준 신분이 있는 것이니, 저나 집사가 억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난한 선비에게 책을 간행하는 곳이 돈이 생겨나는 숲이 아닌 것은 손금을 보는 것처럼 명백합니다. 정재가 비록 가난하다고 해도 또한 천치가 아닌데, 어찌 이를 몰라서 간행 장소를 옮겨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상빈(傷貧)의 마음이 하나이다.'라는 해명은 남을 모함하는 글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경존(敬存)이 뇌물을 주어 비문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뇌물을 받고서 비문을 지은 자는 누구입니까?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비(碑)를 강등하여 갈(碣)로 만들어 선사께 천고의 누를 끼쳤으니, 이것을 감히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집사가 비를 갈로 강등한 것은 비록 국법을 따른 것이지 뇌물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뇌물로 인해 강등했다는 설이 이미 나왔습니다. 비록 실제로 국법을 어겼다고 해도 살피지 못한 잘못은 작고 뇌물로 누를 끼친 것은 크니, 마땅히 처리를 합당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국법을 보지 않고 멋대로 선사의 글을 고친 것은 또한 감히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뇌비(賂碑)와 관련한 유감은 경존 뿐만 아니라 동문이 똑같이 여긴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이 선사에게 누를 끼치고 선사를 경시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 경쟁에는 두 가지고 있는데, 혈기의 경쟁은 있어서는 안 되지만 의리의 경쟁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의리가 아니고 집사의 무함이 진실이 아니라면 이미 끝내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師道)가 보존된 바로서 스승은 군부(君父)와 일체가 되고 하늘이 보는 것이 매우 밝아서 죄를 지은 자가 도망칠 수 없고 보면, 저희의 경쟁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경쟁하는 바는 바로 의리인데, 집사는 곧 그것을 습속이라 하니, 어찌 그리 어긋난단 말입니까? 아, 선사를 무함한 것이 변괴(變怪)가 아니고 무함을 변론한 것이 변괴입니까? 말을 교묘히 하고 잘못을 꾸미는 것이 무문(舞文)이 아니고, 말을 바르게 하고 죄를 성토하는 것이 무문입니까? 천 세대가 지난 이후에 반드시 이를 변론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아, 정직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모두 말하다보니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만약 집사가 선뜻 뉘우치고 자복한다면 곧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상(大祥)의 제사가 조금 지나서 비록 늦었다고 하지만 지금이라도 뒤미쳐 고친다면 선을 행함에 방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이 마음을 헤아려 알아주길 바랍니다.김용승(金容承)은 집사의 옛 벗이 아닙니까? 집사는 어떻게 그가 한농노(漢農老)라고 부른 것과 마음속에 선사를 무시한 죄를 알면서도 【집사가 송영숙(宋瑩叔)에게 답한 편지에 "이 사람이 연전에 한농노(漢農老)라고 불렀다."라고 하였습니다. 권고경(權顧卿)이 저에게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마음속에 선사를 무시한 것이 오래되었다."라고 하자, 내가 "어떻게 그것을 하는가?"라고 하니, 권고경이 "석농(石農)에게 듣고서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다년간 그를 엄호하며 공경하고 믿었으며 심지어 그를 초빙하여 선사의 원고를 교정하게 하였다가【집사가 김용승에게 답한 편지에 "편지를 보내 원고의 교정을 청하였고, 또 유사첩(有司帖)을 보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집사를 성토한 뒤에야 드러낸단 말입니까? 김용승이 무함을 성토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근래에 선사를 배반한 것과 함께 묻지 않기를 전날에 한농노라고 부르고 마음에 선사를 무시했던 때처럼 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집사가 김용승을 성토하는 것은 진정으로 선사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이전에는 김용승을 당으로 삼고 선사를 망각했다가, 지금에는 선사에 의탁해서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한 것이니,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김용승과 새로이 교유를 한 사이여서 이전에 한농노라고 부르고 선사를 무시했던 일에 대해서는 진실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오늘 제사에서 물리치고 무함을 변론한 도의가 공경할 만한 것을 보고서 그와 교유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 선사를 핍박한 그의 말을 보게 되었고 타일러 고치게 했으나 5일이 지나도 따르지 않으므로 마침내 편지를 보내 고치지 않으면 결단코 절교를 하겠다는 뜻을 보이고서 서로 갈라섰습니다. 비록 집사가 저를 증오하는 태도로도 또한 "종현(鍾賢)의 처사가 옳다."【집사가 권고경에게 답한 편지에 나오는 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상(大祥)을 지내던 날에 저를 끌어다가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자로 삼고 영좌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여 제사에서 내쳐진 집사의 대거리로 삼았단 말입니까? 깨우쳐주는 한 말씀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承來覆,曲折雖多,總其大者,不過曰靜齋之自擔認刊,甕書之越法嫁禍,辨討之出於傷貧、賂碑、競爭,終而歸鄙等於變怪之擧、舞文之奸.鳴呼其然? 豈其然乎? 請得以略質之.嘗見執事癸亥八月答靜齋書矣,不曰代認昨秋收議時,兄亦不隨衆許之乎? 隨許之於自擔、倡從、決勉之相懸,不可同年,尺童亦知.今焉癸八之隨許,忽爲甲六之自擔,此靜齋擔防之說,使人見信難矣.執事對靜齋而言"先師曾有認意",答子乘而曰: "先師敎不必深拘." 旣無適而非誣師矣.若以杏下之說論之,方涵丈討認之日,執事倡造獨承"世不可知,自量爲之"之命,立先師認敎之證者.卽此是罪,此語同門誰某倡造,皆可罪之,不必待代草也.况執事是高足矣,主事矣,且代草矣,亦自言獨聞矣,欲誰與分罪而抵死支撑乎? 此越法嫁禍之無所當也.靜齋之是夷是蹠,自有天定身分,非吾與執事之所得以强名也.但措大刊所非生金之藪,則若掌紋視者,靜齋雖貧,亦非天癡,豈不知此而欲移刊脫貧乎? 然則"傷貧一也"之解,難免爲䧟人之筆也.謂敬存納賂而得文,則其受賂而作文者誰也? 乃以此降碑爲碣,以成先師千古之累,是其敢爲者乎? 執事之降碣,雖云在典不在賂,賂降之說旣發,雖實違典,失勘小賂累大,宜其有所處之得當.未見國典而擅改先師之文,亦其敢爲者乎? 然則賂碑之憾,非獨敬存,同門之所同也,何也? 憾其累師輕師也.且競爭有兩般: 血氣競爭不可有,義理競爭不可無.謂辨師誣之非義也,執事之誣非眞也,則已終無柰.師道所存,君父一軆,天鑑孔昭,有罪莫逃,則鄙等之競爭,安可已也? 然則其所爭者乃義也,執事乃謂之習,何其乖也? 噫! 誣師者非變怪,而辨誣者變怪歟? 矯辭飾非者非舞文,而正言討罪者爲舞文歟? 千世在後,必有能辨之者.鳴呼! 不直則不見,故盡言至此.然若得執事幡然悔服,則便沒事.差過祥會,雖云晩矣,卽今追改,不害爲善.後諒此心告而見裁焉.金容承非執事舊要乎? 胡爲乎知其呼漢農老、心無先師之罪,【執事答宋瑩叔書曰: "此人年前呼漢農老." 權顧卿對澤述言曰: "此人心中無先師久矣." 吾曰: "何以知之?" 權曰: "聞諸石農而知之."】 而多年掩護敬信,至於聘校師稿,【執事答金容承書曰: "書請校稿,又致有司帖."】 及討執事之誣師後發之乎? 使金而不討誣,必與近日倍師而不問,如前日之掩漢農老、無先師也.然則今日執事之討金,是眞正爲師歟? 抑爲己歟? 在前則黨金而忘師,在今則憑師而爲己者,不其然乎? 澤述之於容承,則新交也,其前日漢農老、無先師,固有不可得而知者.但見今日却祭辨誣之義之可敬,而與之遊從,忽見其語逼先師,喩之使改,五日而不從,然後書示以不改必絶而相分矣.雖以執事之憎此漢,亦曰鍾賢之事得之,【執事答權顧卿書中語】 胡爲乎大祥之日,援此漢爲黨金而謂不當入靈,作黜祀執事之對擧乎? 請下一轉語. 행하설(杏下說) 간재집의 간행과 관련하여, 간재가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있을 때에 오진영에게 "힘을 헤아려 하라."고 명하였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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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아무개에게 답함【부안 여러 어른을 대신하여 지음】 갑자년(1924) 答吳某 代扶安諸丈作○甲子 이른바 인의(認意)는 제공들은 내가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듣지 않았고, 내가 손으로 쓴 글을 직접 보지 않았다.좌하(座下)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선사가 홀로 앉아있을 때에 오진영에게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고 명하였다."라고 한 것과 "선사가 일찍이 소자에게 반드시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라고 손으로 쓴 글을 이미 직접 보았는데, 이것은 "선사가 일찍이 인교(認敎)가 있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까? "선사가 일찍이 인교가 있었다."라고 한 손으로 쓴 글이 있기 때문에 좌하가 정재(靜齋)에게 대답한 말에 실제로 "선사가 일찍이 인의가 있었다."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직접 들은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나라 사람들이 나를 벌하는 것은 진실로 제공의 공이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이 선사를 의심하는 것은 제공의 죄가 아닌가? 이것은 제공이 선사를 무함한 것이지 내가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다.나라 사람들이 좌하를 벌하는 것과 선사를 의심하는 것은 이미 둘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좌하를 벌하는 자는 반드시 선사를 의심하지 않는 자이고, 선사를 의심하는 자는 반드시 좌하를 무함한 자로 여기지 않을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좌하와 선사의 관계는 그 형세가 양립할 수 없음이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선사가 결단코 의리를 망각하고 절개를 무너트리는 인의나 인교가 없었음은 실로 하늘이 알고 신명이 확신하는 것입니다. 좌하가 비록 선사를 무함한 죄를 면하려고 해도 가능하겠습니까? 근래에 또 선사의 신해년(1911) 유서(遺書)를 읽어보았는데, "만약 왜에게 청원하여 간행 반(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조심하여 애써 따르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 말과 뜻의 엄정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감히 다시 "헤아려서 하라",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등의 설과 경신년(1920) 유서의 " 반드시 이 일을 말한 것임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한 것은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태양이 있으니, 두렵고 두렵습니다.우김(牛金 김용승)이 노주(老洲)를 배척하였는데 ……머리를 숙이고 공손히 들었다.김용승의 일은 실로 좌하가 시킨 것입니다. 좌하가 분명하게 선사가 일찍이 인의와 인교가 있었다고 말하여 그것을 성토하였는데도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김용승은 선사를 따른 것이 오래지 않은 자로서 도리어 의혹이 생겨서 그 마음에 필시 "저 오 아무개는 직접 배운 것이 수십 년이었고 심지어 훗날의 일을 스스로 담당했던 자인데도 감히 이처럼 했다면 선사에게 실로 이 인의와 인교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용승이 선사를 배반한 것은 좌하가 시킨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근래에 벗들이 서신을 보내 김용승과 절교하고 말을 꺼내 김용승을 성토하게 된 이유인데, 김용승은 사죄를 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바람난 말과 소의 암수가 서로 찾아도 만날 수 없다."111)는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김용승으로 하여금 선사를 배반하게 한 죄를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들었다."는 말을 억지로 씌웠으니, 결단코 인지상정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습니다.더구나 지금 우김을 성토한 뒤따라 또 대거리하여 보복하였으니, 이는 곧장 우김을 당으로 여긴 것이지 참으로 선사를 변론한 것이 아니었다.작년 가을에 김낙두(金洛斗) 등이 연명으로 편지를 했고 이기환(李起煥)이 단독으로 편지를 했으며, 올해 봄에는 이기환이 재차 편지를 하여, 좌하의 죄를 변론하고 성토했는데, 이것이 또한 모두 김용승을 성토한 뒤에 있었던 것입니까? 좌하는 나이가 아직 육순도 되지 않았는데 세월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이렇게 심하게 혼매해졌습니까? 그러나 보내온 편지 가운데 "해를 넘기며 번갈아 일어나 감죄에 감죄를 더하였다."고 한 말로 살펴보면 이것은 혼매한 것이 아니라 음험한 것이었습니다. "감죄를 더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이미 성토했다는 것이고, "해를 넘기었다."고 했으니 이는 이미 예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김용승을 성토하기 전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남을 얽어매는 것에 급급해서 앞뒤가 모순되고 속마음이 드러난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귀착을 요약하면 또한 혼매한 것일 뿐입니다. "이 사람이 연전에 한농노(漢農老)라고 불렀다."고 한 것과 "이 사람의 마음속에 선사를 무시한 지가 오래되었다."라고 한 것은 좌하가 김용승의 죄를 들추어낸 것이 아니었습니까? 과연 그렇다면 김용승이 현자를 배척하고 선사를 배신한 죄인이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은밀히 비호하고 공경히 믿으며 다년간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더없이 중대한 선사의 원고를 교정하는 일에 그를 유사(有司)의 후보로 뽑아서 초빙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 김용승이 좌하가 선사를 무함한 죄를 성토한 뒤에야 하루아침에 그의 죄를 드러냈으니, 만약 그가 좌하를 성토하지 않았다면 장차 종신토록 잘 지냈을 것이다(것입니다.) 이에 오늘날 좌하가 김용승을 성토한 것이 선사를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를 배신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일을 따르면 김용승을 당으로 삼고 선사를 망강한 죄가 되고, 지금의 일을 따르면 자기를 중시하고 선사를 경시한 죄가 됩니다. 또 좌하가 기록한 것을 보면, "김용승이 내방하여 "그대가 비록 나를 절교하더라도 나는 그대와 절교하지 않겠다." 하였다."라고 했으니, 그가 좌하에게 사과한 것은 지극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김용승이 끝내 "사우간(師友間)으로 간옹(艮翁)를 대하였다,"라고 했으니, 그가 선사를 배신한 것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좌하가 이미 그가 다시 성토하지 않음을 허여하고 또 그를 권면하며 "미치광이처럼 경향을 쏘다니지 말고 조용하게 잘못을 고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김용승은 하나의 죄도 없는 것이고 단지 미치광이처럼 쏘다닌 잘못한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에게 사죄한 것을 기뻐하여 허여하고 그가 선사를 배반했던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만약 그가 자기에게 사죄하지 않았다면 또한 장차 그가 선사를 배반했던 것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또한 어찌 자신을 중시하고 선사를 경시하며, 김용승을 당으로 삼고 선사를 망각한 죄가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김용승을 당으로 삼은 것은 좌하에게 있었는데 도리어 저희들에게 돌린 것은 또한 인지상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오현수언(五賢粹言)》과 관련한 설에 대해, 제공들은 "불인하고 불의하고 표준을 뒤집고 만물을 해친다."라고 인식하여 성토했는데, 이는 내가 분수를 모르고 한결같이 선사의 설을 독실히 믿었던 죄이다.이미 "인은 혼자만 인하지 않고 의는 혼자만 의롭지 않다. 천지는 만물을 낳고 성인은 표준을 세웠다."라고 하였고, 또 "불인하고 불의하여 표준을 뒤집고 만물을 해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좌하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화답한 것으로 거리낌 없이 선사를 업신여기고 농락하는 도구로 삼은 것이니 이것이 그 죄입니다. 우리들은 단지 "《오현수언》에 관한 설은 일찍이 문자로 된 것을 보지 못했으니 근거하여 선사로 훈계로 삼을 수가 없다. 또 옛 책이고 옛날 간행된 《오현수언》은 오늘날 책이고 새로 간행되는 문고(文稿)와는 의례(義禮)가 같지 않으니 증거로 삼을 수가 없다."고 말할 따름입니다.'헤아려서 하라.' 등의 말은 내가 무함한 것이던 무함하지 않았던 것이든 막론하고 글은 최성(崔成)의 글인데, 마침내 최성과 당이 되어 나를 죄를 준다면 과연 옥사를 처리하는 정당한 법이겠는가.이른바 '선사가 홀로 앉아있을 때에 명을 받들었다."고 하는 것은 좌하가 독자적으로 지어낸 말이고 최성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홀로 선사를 무함한 죄가 됩니다."누구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고 있으니 왜의 달력을 비웃지 말라."고 운운한 것은 그 자체로 지금이나 이후의 처벌이 있을 것이니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所謂認意,諸公不親聞吾口語,不親見吾手筆.旣親見座下答人書"先師獨命震泳自量爲之"及"先師嘗敎小子不必深拘"之手筆,此非先師曾有認敎之謂乎? 以有"先師曾有認敎"之手筆也,故知座下對靜齋實有"先師曾有認意"之口語,而與親聞同也.國人之罪吾者,諸公固功也.國人之疑先師者,諸公非罪耶? 是則諸公之誣師,非吾之誣師.國人之罪座下者疑先師者,旣是兩對,則是知罪座下者必其不疑先師者也; 疑先師者必其不以座下爲誣者也.座下之與先師,其勢不兩立,則已較然矣.先師之決無忘義壞節之意與敎,實天鑑而神質,座下雖欲免誣師之罪,得乎? 近又奉讀先師辛亥遺書曰: "若請願於彼,爲刊布之計者,決是自辱,愼勿勉從." 其辭義嚴正也如此,尙敢復謂"料量"、"不拘"等說及庚申遺書"未知其必謂此事"者,非誣師乎? 天日在上,可畏可畏.牛金之斥老洲【止】俯首恭聽.金容承事,實座下使之也.座下分明言先師曾有認意、認敎,而討之而不見服,則彼以從師未久者,反生疑惑,其心必曰: "彼吳某親炙數十年,至以後事自擔者,乃敢如此,則無乃先師實有此意此敎歟?" 是則金之倍師,非座下使之而何? 此近諸友有書以絶金者,有言以討金者,至於金不謝罪,自退歸家,正所謂風馬牛不相及也.乃不念使金倍師之罪,而勒人以"俯首恭聽"者,絶非常情所出也.况今致討牛金之後,從又對擧而報復之,是直黨牛金,非眞辨先師也.昨秋金洛斗諸人聯書,李起煥單書,今春起煥再書,以辨討座下之罪者,亦皆在討金之後耶? 座下年未六旬,昏耄不記歲月之此甚耶? 然以來書中"經歲迭起,勘上加勘"之語觀之,非昏也乃險也.曰"加勘",則是旣討之矣; 曰"經歲",則是旣在昔矣.此非在討金前之明證耶? 急於構人,而不覺上下之矛盾,肝肺之綻露,要其歸則亦昏而已也."此人年前呼漢農老"、"此人心中無先師久矣"者,非座下數金罪語乎? 果爾,則金之爲斥賢倍師之罪人也久矣,乃隱護敬信多年無替,以至莫重師稿之校役也,望定有司而聘之,至於金討座下誣師之罪,然後一朝而發之,使其不討座下,將終其身好之矣.乃知今日座下之討金者,非爲倍師也,實爲倍己也.由前則爲黨金忘師之罪,由今則爲重己輕師之罪也.且見座下所錄云"金來訪而曰'君雖絶我,我不絶君'",其謝過於座下,則可謂至矣.然終是"以師友間處艮翁"云,則其倍師之罪依舊在也.座下旣許其不復討,又勉其"勿狂走京鄕, 安靜改過".然則金無一罪,而但有狂走之過也.此喜其謝己而與之而容其倍師之罪也.使其不謝己,又將不容其倍師矣.又豈非重己輕師、黨金忘師之罪乎?黨金之實在座下,而反歸之鄙等,又非常情所出也.《五粹》說,諸公認爲"不仁不義,倒極害物"而討之,是吾不識分數一例篤信師說之罪.旣曰: "仁不獨仁,義不獨義,天地生物,聖人立極." 又曰: "不仁不義,倒極害物." 此皆座下自唱自和,不憚以先師侮弄籠絡之具,此其罪也.鄙等但曰"五粹說,曾不見文字者,則不可據以爲訓.且五粹之古書昔刊,與文稿之今書新刊,義例不同,不可爲證也."料量等語,勿問吾誣不誣,書則崔書也,乃黨崔而罪吾,果得斷獄正法耶?所謂獨坐時承命云者,是座下之獨自撰造,而崔成不與焉,故獨爲誣師之罪也."誰家日月照臨,勿罵倭朔"云云,自有今與後之銊誅,不須論. 바람난……없다 서로 현격한 차이가 남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4년 기사에 "군주께서는 북해에 처하시고 과인은 남해에 처해 있으니, 이것이 마치 바람난 마소의 암수가 서로 찾아도 만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君處北海, 寡人處南海, 唯是風馬牛不相及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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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 後滄先生文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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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김장복한 에게 올림 경신년(1920) 上志山金丈(福漢) ○庚申 제가 일찍이 들으니, 선비 중에 인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나라의 대부 가운데 현명한 이를 섬긴다1)고 합니다. 사람은 본래 현명한 사람과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니 그 대부 가운데 현명한 사람이 있다고는 기필할 수는 없고, 현명함에도 분수(分數)가 있으니 그 현명함이 완벽히 구비되었다고는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대부의 신분이면서 현명함이 없는 자라면 참으로 어찌할 수 없거니와, 혹시라도 현명하기는 하지만 그 현명함이 완벽히 구비되지 못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그 나라에서 섬길만한 사람을 택하여 섬겨야 할 뿐입니다. 만일 현명한 대부가 여기에 있는데 우뚝히 큰 절개를 지니고 학문까지 겸비하고 있다면 그 현명함은 어찌 한 나라에서만 찾기 어려울 뿐이겠습니까? 거의 한 시대에 짝할 자가 드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비 가운데 이 나라에 살면서 이와 같은 현명한 이를 모시게 된다면 어찌 하나의 큰 행복이 아니겠습니까?위아래가 전도되고 멸망한 나라2)의 산천의 경관이 달라진 이후로 중화의 문화권에서 태어났어도 오랑캐 행실을 하고, 벼슬을 하면서도 효경(梟獍)3)같이 하는 자는 참으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간혹 고가(故家)의 세족으로 옛 음덕을 누리면서 명망을 지닌 자도 끝이 선한 자가 드물게 되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천리에서 불어오면 풀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고, 장강이 백 번 굽이치면 파도는 출렁출렁 뒤로 물러가건만, 오직 문하(門下)께서 나라를 위하는 일념이 단사(丹沙)처럼 찬란하여, 굳은 절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어 백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임천(林泉)에서 도를 강론하되 머리가 셀수록 더욱 돈독히 하니, 우뚝 유문(儒門)의 영광(靈光)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이른바 절개를 지니고 학문을 갖추고 있어 한 세대의 현자가 되었다고 한 경우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라 안의 지식인들이 누군들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고 동량처럼 믿으면서 현자를 섬기는데 마땅한 분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심지어 저처럼 어리석은 사람조차도 이에 의지하여 타고난 성품이 민멸(泯滅)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자나 깨나 어르신을 우러러 사모한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근심에 얽매이고 압박당하여 멀리 노닐려던 큰 뜻이 사그라들어 거의 다 사라진 채 목을 빼고 서쪽을 바라보면서 때때로 길게 탄식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일전에 찾아뵙고 통자(通刺)하였으니 참으로 숙원을 이룬 것이고, 넉넉히 포용해주심을 입고 후하게 계발을 받은 것은 생각지도 않은 일이라 몹시 감격스러웠습니다. '무실(務實)'4)이란 두 글자를 내려주신 것은 참으로 제 자신의 증상에 꼭 맞는 훌륭한 처방이므로 더욱 가슴에 새기고 싫증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는 삼가 마음속으로 감탄한 바가 있으니, 명분만 좇고 실질을 잊는 것이 선비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문제이지만, 이런 현상이 오늘처럼 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심(心)과 성(性)에 대하여 같다고도 하고 다르다고도 하면서 능사(能事)가 이미 끝났다고 말하지만, 존심양성(存心養性)5)에 대해서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으로 쏟아내는 웅변은 황하물이 터진 것과 같고, 붓으로 써내는 씩씩한 글은 찬란하게 문장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 평소의 말과 행동6)을 돌아보면 대부분 비난받을 만한 것들입니다. 이윤(伊尹)ㆍ주공(周公)의 사업과 관중(管仲)ㆍ제갈량(諸葛亮)의 정치에 대하여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 땅에 그릴 듯이 훤히 알아 실책이 없는 듯 하지만 작은 일에 대한 조처를 살펴보면 맞는 것이 없습니다. 속수(束脩)7)의 예를 행하고 명첩을 지니며, 스승과 벗을 좇을 때는 예절을 법도에 맞게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 형제들 사이에 예의를 베풀 때에는 크게 잘못합니다. 이것은 모두 근래 선비들의 폐단에 대한 대략인데 문하께서 깊이 걱정하여 바로잡고자 하시는 것입니다.스스로 우둔한 저를 돌아볼 때, 세상 유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점은 부족하고, 근심할 바의 폐단은 본래부터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재주는 없고 병폐만 있는 경우이니, 천하의 버릴 물건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또한 어찌 자포자기하고서 현명한 가르침에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더욱더 저를 엄격히 가르쳐 마침내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깊이 바랍니다. 竊嘗聞士之欲爲仁者, 必事是邦大夫之賢者. 夫人固有賢否, 未可必其大夫之有賢, 賢固有分數, 未可必其賢之具備. 使其大夫而無賢者也, 則固無如之何矣, 其或賢而有不具備者, 則只當於是邦中擇其可事者, 事之已矣. 如有賢大夫於此, 卓乎其有大節, 而兼之以學問, 其爲賢也, 豈直一邦而已? 殆一世而寡儔也. 然則士之居是邦而得是賢, 豈非一大幸福也耶?一自冠屨易位, 風泉異觀, 華產而夷行, 冠紳而梟獍者, 固不足道, 間有故家世族食舊而佩望者, 亦且鮮終. 疾風千里, 靡靡草偃; 長江百折, 滔滔波頹, 惟門下爲國一念, 炳然如丹, 一節終始, 九死靡悔, 講道林樊, 皓首彌篤, 巋然作儒門靈光. 向所謂有節有學而爲一代之賢者, 即其人焉. 凡在域中士類, 孰不山仰樑恃, 幸其事賢之得所也?至如澤述之蠢蒙者, 賴有不泯彝性, 是以寤寐景慕, 積有年所. 而貧與憂謀, 纏之壓之, 遠遊壯心, 澌滅殆盡, 引領西望, 時發長喟. 日前獻刺, 寔償夙願. 而優蒙容納, 厚受開發, 思出不圖, 固已感沐. 至若務實二字之贐, 實係此身對證之良劑. 尤當佩服無斁. 因此而竊有所感歎于心者, 蓋徇名而忘實, 士之通患, 而未有若近日之甚也.曰心曰性, 是同是異, 自謂能事已畢. 而以言乎其存養則蔑如也, 口頭雄辯, 沛然河決; 筆下健辭, 爛然成章. 顧其庸言庸行, 則多可訾也. 伊周事業, 管葛政治, 指掌畫地, 若無遺筭, 觀其措諸微事․細務, 則郎當也. 束脩齎刺, 從師追友, 禮序秩然, 歸而施措唱喏塤箎之間則大謬也. 此皆挽近士弊之大畧. 而門下之所深憂而思矯之也.自顧鈍拙, 幷乏世儒之所炫耀者, 其所患之弊則固自在也. 是所謂無是才而有是病, 天下之棄材也. 雖然, 亦安敢自處暴棄而不盡心於明訓? 惟乞益加箝錘, 有以卒成之也. 선비……섬긴다 자공이 인(仁)을 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공인(工人)이 자신의 일을 잘 하려면 반드서 먼저 그 기구(器具)부터 예리하게 수리하니, 이 나라에 살면서 대부(大夫) 중에 어진 이를 섬기고 선비 중에 인(仁)한 이를 벗해야 한다〔子貢問為仁, 子曰,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居是邦也, 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멸망한 나라 원문의 '風泉'은 《시경(詩經)》의 편명인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지칭하는 것으로, 모두 쇠망하는 나라를 서글퍼하는 감회를 읊은 시이므로 쇠망하는 나라를 걱정하거나 멸망한 조국을 그리워하는 것을 뜻한다. 효경(梟獍) 부모를 잡아먹는 새와 짐승을 말한다. 효(梟)는 흉악한 새로,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잡아먹고, 경(獍)은 흉악한 짐승으로 태어나자마자 아비를 잡아먹는다.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고 배신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실(務實) 실제적인 일에 힘쓴다는 의미이다. 존심양성(存心養性) 맹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다 하는 자는 그 성을 알 수 있고,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즉, 인간이 도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양심(良心)을 잃지 말고 그대로 간직하여, 도덕 본성을 키워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 평소의 말과 행동[庸言庸行] 〈문언전(文言傳)〉에서 "구이에서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라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가 말하였다 '용의 덕으로 딱 알맞은 자이다. 평상시의 말을 미덥게 하고, 평상시의 행동을 삼가며, 간사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여 세상을 좋게 만들고도 자랑하지 않으니, 덕이 넓어서 교화한다. 《주역(周易)》에서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덕이다.'〔九二曰, 見龍在田利見大人, 何謂也. 子曰, 龍德而正中者也, 庸言之信, 庸行之謹, 閑邪存其誠, 善世而不伐, 德博而化.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 君德也〕" 용언(庸言)과 용행(庸行)은 평상시의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주역(周易)》 〈건괘·문언전(乾卦·文言傳)〉 속수(束修) 공자가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나는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다.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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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김장에게 올림 경신년(1920) 上志山金丈 庚申 저는 호남의 비루한 유생입니다. 한 번 만나주시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도 이미 용문(龍門)에 오른 것처럼 영광스러운데 다시 사랑의 편지까지 내려주셨으니, 이는 상례를 벗어난 특별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부러진 재목이 큰 장인의 먹줄을 따르고 완고한 철이 훌륭한 대장장이의 용광로에 들어간 것과 같으니, 저에게는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때문에 말거리를 삼는 자들이 저를 지나치게 후하게 대접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문하를 의심하게 하여 누를 끼쳤으니, 저 또한 죄가 있습니다.옛날에 공자와 맹자가 사람을 가르칠 때 무언지교(無言之教)8), 불설지회(不屑之誨)9)와 같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 이외에는 혹시라도 말을 그만두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이른바 간곡하게 잘 타이르면서 이끈다는 것과 의문 나는 점을 서로 문답한다는 것이 이에 해당할 뿐입니다. 삼가 근세에 대인(大人)과 큰 덕을 지닌 사람을 살펴보니, 혹은 엄숙하게 우뚝 서있기도 하고 혹은 깊은 생각으로 묵좌하기도 하니, 방문하여 무엇을 청하려는 자가 머뭇거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의문 나는 점이 있어 질문하려는 자가 말을 머뭇거리다가 스스로 그만두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발원(發願)한, 지팡이 짚고 천리길을 나서려던 뜻이 자리 앞에서 잠깐 사이에 시들시들 꺾이기도 하니, 아마도 그들을 진작시키고 고무시키는 방법은 아닌 듯합니다.문하께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이들과 다릅니다. 온화한 말투는 마치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풍기는 것과 같고, 넘치는 화기(和氣)는 순한 막걸리에 취한 듯합니다. 그리고 충성스런 지조와 굳센 절개는 어떻습니까. 서리와 눈 속에서도 꿋꿋한 대나무ㆍ잣나무와 같은 지조를 지닌데다가 또 봄날의 따뜻한 햇볕과 같은 덕으로 보완하셨으니, 두터운 인(仁)과 애(愛)가 이처럼 겸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국내의 선비들이 기꺼이 문하께 달려와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는 이유이니, 제가 어리석더라도 역시 인의를 채우게 되어 지난날 인사드리고 물러나왔던 때에 갑자기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감격스럽고 다행스러움은 참으로 세도(世道)와 관계가 되니 저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보내주신 편지에서 맹자의 큰 공은 성선(性善)에 있고 심선(心善)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스승께 여쭈었을 때 마침 바삐 물러나오느라 끝까지 논의하여 결정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계발을 받고 대략 스승의 뜻을 짐작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먼저 제 뜻을 펴서 아뢰고 가르침을 구합니다.맹자의 큰 공이 성선에 있다고 하신 것은 실로 천고에 이미 정해진 공론이니 말해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성선의 의론이 큰 공인 줄만 알고 심선의 의론 또한 큰 공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므로, 마침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합니다. 맹자의 심선 의론이 어찌 〈부세자제다뢰(富歲子弟多賴)〉장에서의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다"10)는 말에 있을 뿐이겠습니까. 천하 사람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마음을 얻어서 리의(理義)를 즐길 수 있다면 이것이 어찌 사람의 마음이 모두 선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왜 심선의 의론에 공이 있다고 말했겠습니까? 사람이 물욕에 이끌려 용렬하고 악한 데로 돌아가려는 까닭은 자신의 심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사람들은 성인 보기를 마치 연못과 하늘의 차이와 같아 스스로 그 경지에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반사람과 성인은 그 성이 원래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만약 어떤 사람이 '너의 성은 요순처럼 선하다'고 알려준다면 어찌 기뻐 날뛰면서 그 욕심을 다스려 선을 회복하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일반사람들은 성인을 보면, 또 성이 비록 (성인들처럼) 선하다할지라도 성은 능동적으로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심에 있기 때문에 성인과 보통사람의 마음은 본래부터 같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성인에게 미치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의 선도 성인과 같다'고 알려주면 어찌 크게 기뻐 날뛰면서 더욱 저 악을 다스려 선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일러 맹자의 공이 또한 심선을 논함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비록 그러할지라도 성선과 심선은 둘로 나누어 구별할 할 수 없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심이 비록 선하다고 할지라도 선하게 되는 까닭은 지선한 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이 만약 이 성에 근원하지 않는다면 어디로부터 선을 얻겠습니까? 이것으로써 성선은 심선의 근본이고, 심선은 성선이 증험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선과 심선은 또 나란히 하여 똑같다고 할 수는 없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심이 이 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 근본은 선하지만, 무엇을 하는 것은 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말단의 경우 간혹 악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심이 본래 선하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심이 순선(純善)하다고 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맹자 또한 이미 '리와 의는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했으니, 마음이 곧바로 이 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이 말한 '성은 순선하고 마음은 본래 선하다'는 것은 리(理)와 기(氣)의 구분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니, 스승의 본뜻은 삼가 아마 이와 같을 뿐일 것입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澤述, 湖南鄙生也. 一被容接, 已榮登龍, 重之以耑垂寵牘, 出於拔例殊愛, 曲材之從大匠繩, 頑鐵之入良冶爐, 固澤述之幸也. 但因此而俾談者疑其有失厚之, 累於門下, 則澤述亦有罪焉.昔孔孟之教人, 自無言之教․不屑之誨, 有爲而發以外, 未嘗見言語之或舍也. 所謂諄諄善誘․難疑答問者是已. 窃觀近世大人長德, 或嚴嚴凝立, 或淵淵黙坐, 進請者趑趄而不敢, 質疑者囁嚅而自止, 使其平生發願千里杖策之志, 薾然沮喪於席間片餉之頃, 恐非所以振起皷舞之道也.至門下之接人則異於是. 藹然之辭若芝蘭之其香, 盎然之和如醇醪之是醉, 何其忠烈勁節? 霜竹雪柏之中, 又濟之以陽春光輝之德, 厚仁愛若是兼且備也. 此所以邦內士類樂趍門墙, 心悅而誠服, 澤述之蒙騃, 亦知飽仁充義, 而不欲遽離於曩日拜退之日也. 其爲感幸, 實關世道, 非直爲己私也.下喻鄒聖大功在於性善而不在於心善. 向稟於師席, 而時值忽忽辭退, 未承究論定案. 但於竅啟, 有所畧揣師意者, 故敢先布白求教.夫孟子大功之在性善, 固千古已定之公言也, 有不待言而知者. 但以人皆徒知性善之論之爲大功 而不知心善之論之亦爲大功. 故正欲表而出之, 使人知之也. 孟子心善之論, 惡乎在〈富歲子弟多賴〉章所謂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者是已? 天下之心, 既得與聖人之心無不同悅理義, 則此豈非人心皆善之謂乎? 胡爲而云, 心善之論有功? 夫人之所以甘徇物欲而歸於庸惡者, 由不知己心性之善故也. 凡人之視聖人, 若淵之於天, 自以爲不可及, 而曰'凡之於聖, 其性固自不同.' 如有告之者曰'爾性之善, 與堯舜同,' 豈不歡欣踊躍, 思欲制其欲, 而復其善乎? 凡之視聖, 又以爲性雖善矣, 性則無爲, 有爲之能, 都在於心, 而聖凡之心, 應自不同, 我何以及聖人乎? 如又有告之者曰'爾心之善, 亦與聖人同,' 豈不大歡欣大踊躍, 尢欲治其惡, 而反其善乎? 夫是之謂孟子之功, 亦在於心善之論也.雖然性善心善, 不可分而二之也, 何也? 心雖曰善, 其所以善者, 爲其具至善之性也. 心若不原於此性, 何自而有善乎? 是知性善也者, 心善之所本也; 心善也者, 性善之所驗也. 性善心善, 又不可比而同之也, 何也? 心具此性也, 故其本則善, 有爲而屬氣也, 故末或有惡. 是故謂心爲本善則可也, 謂心爲純善則大害也. 孟子亦既曰, 理義悅心, 則心之非直是理, 斷可知已. 要之老洲所謂'性純善而心本善', 理與氣之分, 一語約而盡之矣. 師席本意, 窃恐如是而已. 未知尊意以爲如何? 무언지교(無言之教) 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는 운행하고 만물은 자라난다.〔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라고 대답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불설지회(不屑之誨) 상대방을 탐탁지 않게 여겨 멀리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경각(警覺)시키는 가르침을 말한다. 맹자(孟子)는 "사람을 가르치는 데도 방도가 많으니, 내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가르침도 이 또한 가르침일 뿐이다〔敎亦多術矣, 予不屑之敎誨也者, 是亦敎誨而已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 성인은……알았다 맹자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리이고 의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다. 때문에 리와 의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맛있는 고기 음식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心之所同然者, 何也? 謂理也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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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형 김만당희현에게 답함 갑신년(1944) 答外從兄金晚棠熺鉉 ○甲申 이전 편지에 답장을 올리지 못한 무례함에 대해서는 책망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더구나 다시 은혜로운 편지를 매우 은근하고 돈독하게 내려주셨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깊이 사랑하시니, 새해의 즐거움 중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생각해보니 본가에는 친종형이 없고 이성(異姓)으로 종형이 몇 명 계시지만, 오로지 형님만이 80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돈독하게 사랑하심이 더욱 깊으니 늘그막에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제 나이가 회갑이 되었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 말씀을 듣자 마음이 처량하여 말씀하신 까닭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부친과 조부 이상 4대는 장수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형님께서 아시는 바이고, 5세조는 66세까지 사셨고, 9세조까지는 족보에 생졸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만약 장수하셨다면 이치상 어찌 기록하지 않았겠습니까? 10세조는 장수하여 70세까지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집안에서 회갑을 지낸 사람은 10세조 이후에 처음으로 있는 일이니, 어찌 애통하고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형님이 저를 축하하는 것이 오히려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차라리 말하지 않을지언정 무슨 말로 사랑해주신 것에 대해 보답하겠습니까. 다만 기억하건대 선군께서 임종 시에 저의 손을 잡고 "너의 증조는 32세까지 살았고, 너의 조부는 43세까지 살았으며, 나는 지금 51세이니 이미 차례로 10년씩 더해졌다. 이를 가지고 이후를 추론해본다면 너는 마땅히 60세를 넘길 것이고, 너의 아들은 70세를 넘길 것이며, 너의 손자는 80세를 넘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몹시 비통하여 읊조리고자 해도 차마 읊조릴 수 없고, 들려주려 해도 차마 들려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 나이가 이미 증험되었으니 자손들도 역시 장차 차례로 이를 따를 것입니다. 형님께서 외가가 침체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 혹시라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생일이 아직 멀었는데 마침 형님의 편지를 받으니 심기가 촉발되어 부모님 봉양을 다하지 못한 아픔을 절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 내일 아침은 선군의 휘신(諱辰)13)입니다. 시절의 변화를 느끼며 자신을 돌이켜보니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까지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묵묵히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前書闕覆, 無禮可誅, 尚矣無誅, 矧復惠教, 殷切周摯甚矣. 兄丈愛我之深也, 新年喜樂, 無過於此. 且念本無親從, 有異姓從若而人, 而惟兄丈親愛, 八耋愈篤, 勝於親從, 暮年慰幸, 亦何加此?至於賤年回甲之云, 聞之戚戚, 莫省所喻. 父祖以上四世無壽, 兄丈所知, 五世祖六十六世, 至九世譜無生卒, 如得其壽, 理豈不錄? 惟十世祖壽至七十, 然則吾家囬甲, 十世後初有, 豈不痛且怪焉? 今兄丈所以祝我者, 無乃反爲病我也耶? 念到于此, 寧欲無言, 將何辭以答見愛也? 但記先君臨終, 執不肖手有言曰 : "汝曾祖壽三十二, 汝祖四十三, 吾今五十一, 既遞加十年矣. 推此以往 汝當逾六十, 汝子逾七十, 汝孫逾八十." 此言絕悲, 誦不忍誦, 聞不忍聞. 然今賤年已見驗, 則子孫亦將次第準此, 而兄丈之希望外家不替者, 其或在斯歟?弧日尚遠, 適奉尊書, 觸發心機, 匪莪之痛, 自不能住. 且明晨即先君諱辰, 感時撫躳, 何以爲心? 茲不覺罄情至此. 伏想有以默會而憐之也. 휘신(諱辰) 기일(忌日)이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재일(齋日)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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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오신윤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姜良五 信倫 ○辛巳 일전에 저는 존형의 동생이 편지로 물은 것에 대하여 답장을 보냈습니다. 지금 《유현연원록(儒賢淵源錄)》을 발간했는데, (그곳에) 기재된 존형의 친척 중 모씨는 존형이 은혜를 입은 죽헌공(竹軒公)이라는 것을 저의 아들에게 들어 알았습니다. 좀 더 일찍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타당하지 못한 점이 있는 사실을 편지로 보낸 것을 한스러워했습니다. 마음에 매우 미안합니다만, 이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존형의 집안에 있었기 때문에 존형의 형제가 끝내 도의로 판단하여 별일이 없게 되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우리 고조는 단지 평생토록 집안에서 의를 실천하셨기 때문에 일찍이 같은 시대의 유문(儒門)에게 문인이라 일컬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는 이미 온 고을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존형의 집안과 왕래한 일은 마땅히 고조가 강씨와 재혼한 뒤라야 합니다. 죽헌공이 정조 기미년에 돌아가셨다 들었으니, 재혼한 때는 10여 년 뒤에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 고조는 정조 계묘생이니 죽헌공이 죽었을 때는 17세였으므로 그 문하에 출입한 때가 재혼한 후에 시작되지 않고 반드시 일찍 아이 때부터라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이런 저런 것을 따져보면 죽헌공의 문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사실이 아닌데 억지로 문인이라고 명명한다면 거짓을 저지르게 되니, 선조를 예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요즘 허위의 풍조가 성행하여 이를 말하며 통탄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설사 금지시킬 수는 없을망정 차마 그것을 돕겠는가?" 이것은 존형께서, 존형의 동생에게 준 저의 편지를 보고 저의 아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발췌하여 개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존형이 이미 이와 같은데 동생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오히려 억지로 핑계꺼리를 만들어 "동생의 병이 회복되길 기다렸다가 발간소로 보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미 책을 만들었다면 편리대로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사적인 이해와 편리로 인하여 통쾌하게 의를 행하지 못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늙었습니다. 오직 정대(正大)하게 마음을 세우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행하여 우러러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굽어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서 지하에 계시는 선성(先聖)과 선조(先祖)에게 돌아가 인사드리는 것을 책무로 삼아야 할 뿐이니, 어찌 터럭만큼의 사적인 뜻을 그 사이에 용납하겠습니까? 일이 중대하니 바라건대 반드시 존형이 당일로 늙은 몸을 부축하여 직접 가서 분명히 올바르게 바로잡은 이후에 답장해주셔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공손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日前鄙與令弟書中所問. 今刊《儒賢淵源錄》所載貴族中某位, 聞諸家兒, 知其爲尊兄所蒙祖竹軒公, 恨不早知其然, 以致書不妥當. 心甚未安, 猶以事不在他, 而在兄家, 諒兄伯仲終以道義裁定, 而至於無事爲幸也. 盖鄙高祖平生, 只是居家行義, 未嘗稱門人於并世儒門, 既一鄉之所共知. 至與尊門往來, 則宜在再卺姜氏之後. 而聞竹軒公沒在正廟已未, 則再卺之日在十餘年後矣. 且鄙高祖正廟癸卯生, 而竹軒沒時, 爲十七歲, 則難信出入尊門, 不始在卺後, 而必早自成童時矣. 以此以彼, 竹軒門人, 可知非實, 非實而強名之, 則其不涉於虛僞, 而事先不以禮乎. 近日虛僞風盛, 言之痛歎, 吾儕縱不能禁, 忍助之乎? 此尊兄所以見鄙與令弟書, 對家兒言. 然則即爲拔出改正爲可者也. 兄既如此, 弟復何言? 但猶有靳托底意, 曰: "待弟病復常後送刊所." 曰若已結冊, 則難便. 是不免利害便否之私, 而行義之未快也. 吾儕今老矣. 惟以立心正大行事光明, 仰不愧天俯不怍人, 歸拜先聖先祖於地下爲務而已, 豈容一毫私意於其間哉? 事係重大, 望須尊兄即日扶老親往, 明白歸正後, 回示之, 千萬拱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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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 종원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林貞老 鍾元 乙丑 편지를 받고 탁월한 의리와 빛나는 문장으로 나처럼 음성인의 간담을 도끼로 깨트리고자 하는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대의 의리는 이미 우러러보았지만 문장이 이렇게 빛나는 것은 오늘 이후 처음 보았습니다. 예전에 우리 정로(貞老)를 깊이 알지 못했던 일이 부끄럽습니다. 이 의리와 문장을 확충시켜 나간다면 우레처럼 날카롭고 바람처럼 빠르게 앞길로 나아가 산악처럼 우뚝하고 햇살처럼 환한 목표를 향해 사특함을 변별하고 정도(正道)를 지켜서 성인을 이어 태평시대를 열 사람이 바로 그대일세. 그런데도 무엇을 돌아보며 다른 것을 구하시는가? 선사(先師)의 도를 밝히고 춘추(春秋)의 대의를 세우는 것은 나 자신부터 주장하는 것이니, 어찌 다른 사람을 의지하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인품이 낮고 학문이 얕아 족히 경중이 될 수 없음에도 갑자기 사문의 망극한 변을 만나 음기가 홀로 높고 여섯 양기가 막혀있는데, 세상에 확연히 양묵(楊墨)을 물리쳤던 맹자 같은 사람이 없어서, 불초한 내가 나서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고 힘을 다해 분별하여 성토하다가 큰 화를 입게 되었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그대가 편지에서 "의를 밝히고 세상을 선하게 했다."라는 말씀은 어찌 감히 그렇다고 하겠습니까만, 스승을 잊고 적에게 아부했다는 것만큼은 두려워하고 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또 실질 없는 명성과 공(功)이 없는 포상을 장황하게 선양하여 심지어는 "귀의하여 의지하고 우러러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코 선생님께 아부하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마도 세풍에 구속되지 않아서 끝내 모른 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겠는지요? 아니면 윤리 강상이 끊어지고 무너져서 스승을 무함(誣陷)하고 도적에게 붙은 자들이 도도하게 횡행하는데 여전히 몇 사람이 그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 세도의 다행이요, 뜻을 숭상하는 동지라 여겨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중에 부지불식간에 나에게 경도된 것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그대의 정(情) 또한 슬프다 할 수 있겠습니다. 보낸 편지 가운데 지나치게 칭송하고 지나치게 겸손한 말은 나의 뜻에 마땅치 않습니다. 오직 옛사람에게 스스로 기약할만하지 못하지만 차마 세속의 흐름에 자포자기 못한다는 그 절실함이 실로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에 뚜렷이 내 귀에 들어와 처연하게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내가 평일에 기대했던 것과 서로 부합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 속(俗)이라는 한 글자가 사람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속이 무엇인가요? 무릇 도의(道義)를 헤아리지 않고 시절을 따라 스스로 편한 것이 곧 그것입니다. 오직 스스로 편한 것이 그 소재이기 때문에 쉽게 빠져들고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도를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천만 악과 사특함이 모두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요사이 음성 오진영 일파의 무함(誣陷)질과 패악이 세상의 재앙이 된 것은 결국 스스로 편함을 헤아린 것도 아니면서 크게 제멋대로 한 것이니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진실로 마음으로 세속의 생각을 끊고 몸으로 세속의 습속을 끊는다면 말과 행동이 닦아져 시절에 따르지 않고 옛것을 본받으며, 스스로 편하지 않고 옛것을 쫓아 오로지 도의로 나아갈 수 있으니, 또한 어찌 고인(古人)을 기약할 수 없겠습니까? 이것이 나와 그대가 함께 힘써야 할 것이니 원컨대 서로 힘써서 일생을 마칩시다. 그대가 편지에서 말한 "상화(相火)가 병의 빌미가 되었다."56)라는 것은 아마도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속이 답답해 그렇게 된 듯합니다. 그대처럼 견해가 밝은 사람이 그러한 병이 있을 줄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저 청년시절에 씩씩하게 도모할 것은 마음껏 유람하고 널리 배우며 천하의 좋은 인물들을 두루 사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견문을 넓히고 천하의 좋은 산수를 마음껏 보면서 문장을 계발시키는 것이 어찌 지극한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사람 사는 일에는 달고 쓰고 권면하거나 나태한 차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옛사람이 몸소 농사짓거나 품팔이하면서도 경전을 놓지 않은 자가 있었고, 오래도록 병을 앓으면서도 학업을 성취한 자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학동을 가르치는 일은 구속되는 일이긴 하지만 밝은 창 앞에 편안히 앉아 날마다 서책을 가까이하는 일이니, 농사짓고 품팔이하며 여러 해 병을 앓는 사람과 비교해보면 어찌 여력이 없겠습니까? 비록 자신보다 나은 이는 없다 할지라도 가르치면서 학업의 반은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고뇌하고 마음을 태우면서 상화가 빌미가 되는 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소강절(邵康節 소옹)선생은 "분수에 편안하면 치욕이 없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께서는 "이치를 따르면 넉넉하다."라고 했는데, 비록 그대는 "학문을 근심함이 절실하고 이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그 편안하고 순종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안분순리(安分順理)" 4글자가 그대의 화를 내리는 좋은 약재라고 말합니다. 의가(醫家)에서 말하는 독서를 금하고 생각을 끊는 것이 그대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유의하십시오. 다시 바라노니 여행이 편안하고 덕이 진보하여 안으로는 마음이 넉넉하고 밖으로는 몸이 건강하여 제 마음의 기도에 부응해 주기를 바랍니다. 辱書, 有以見卓然者義, 燁然者文, 斧破陰膽之同聲.義固已仰, 文之燁然, 今而後始見.愧夫前此猶不深知吾貞老也.充此之義之文而進, 雷厲風迅之前途, 嶽喬日朗之究境, 辨邪衛正繼聖開平, 卽其人焉, 何待乎環顧求覓? 明先師之道, 立春秋之義, 卽自我主之, 何待乎賴人? 至於此漢, 豈足爲有無, 陋劣膚淺, 猝當師門罔極之變, 一陰獨尊, 六陽壹鬱, 世無鄒聖拳踢之廓如也, 則顧此無似, 雖欲不爲能言之徒而得哉? 竊不自量, 竭力辨討, 至被大禍而不悔.明義淑世, 豈敢云然, 忘師附賊, 是懼是免.高明乃以無實之名, 非功之褒, 張皇鋪揚, 至有歸有依仰不阿所好等語, 何哉? 無乃不囿世風, 終難坐在裏許而不之覺耶? 抑以綱絶倫斁, 陷師黨賊, 滔滔皆是, 而尙有幾箇人拔出其流, 爲世道之幸, 志尙之同, 故悲喜交極而不覺傾倒歟? 然則高明之情, 亦可謂戚矣.盖來書中, 若溢美退托之屬, 無有以當鄙意者, 惟雖未能自期於古人, 亦不忍自棄於流俗之言, 爲切實由中, 螢然入耳, 戚然動心.而一與此漢之平日自待者相符, 何其幸歟? 噫! 俗之一字, 爲陷人穽也久矣.俗者何也? 凡不揆道義徇時自便者是己.惟其自便所在, 故易入而難出.不揆諸道, 故千惡萬慝, 皆從此生.至於近日陰震一隊之誣悖禍世, 究亦不揆自便之大肆也, 甚可畏也.苟能心絶俗念, 身絶俗習, 則發言制行, 將見不徇時而傚古, 不自便而從古, 粹然一出於道義, 亦何古人之未能期哉? 此吾與子之所共勉者, 願與交勖而終身焉.喩及相火作祟, 似因訓蒙鬱墊致然.不意吾賢昭明見解之有此也.夫在靑年壯圖, 縱遊博學, 交盡天下好人物.而恢斥聞見, 觀盡天下好山水, 而助發文章, 豈不是至願? 但人事有甘苦勸逸之殊.故古之人, 有躬耕行傭而帶經者, 積年善病而成業者.矧此訓蒙, 雖云絆縶, 安坐明窓, 日親簡編, 其視耕傭積病者, 豈無餘力乎? 雖云勝己則無, 又不有學半之益乎, 又何至於惱惱煎煎相火之作祟乎? 邵子曰安分無辱, 程子曰順理則裕, 雖切於憂學而非關利欲, 其不安且順則均矣.吾故曰安分順理四字, 是降火之良劑.醫家所云禁讀絶思, 非所以治美愼者也? 幸試留意.更祈旅安德進, 內腴外睟, 慰此心禱. 상화(相火)가……되었다. 심(心)은 화(火)에 속하는데, 심은 몸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는 장기(臟器)이므로 군주지관(君主之官)이라 하고 심화를 군화라고 한다. 상화는 군화와 상대되는 말로, 간(肝), 담(膽), 신(腎), 삼초(三焦)의 화를 통틀어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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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준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蘇 在準 丙寅 나는 졸렬하고 견해가 얕아 백에 한 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어서 본래 남의 본보기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고 음성의 적들을 주토(誅討)하여 첩첩 깊은 재앙의 그물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친척이나 지인들도 두려워서 피하며 감히 가까이하지 않는데, 고명한 그대께서 일찍이 교분이 없었는데도 먼저 편지를 주시니 참으로 정성스러움이 지극합니다. 게다가 "의를 높여서 굽히지 않고 바른 깃발을 높이 세우셨다."라고 찬탄하시고 "성인 공자께서도 광(匡)땅에서 경계하는 마음을 두시고 진(陳)땅에서 곤액을 당하셨다."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돌아보건대 비록 이를 감당하지 못하겠지만 그대의 높은 풍모는 실로 오늘날 처음 보는 바입니다. 또 오진영의 죄를 논하면서 "도깨비 같은 놈이 스승을 무함(誣陷)하고 도리어 주인을 물어서 양기를 사라지게 했다."라고 판단하시고, 저에게는 "형벌을 받더라도 웃음을 머금고 만년의 절개를 성취하기 바란다."라고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옛날에 이른바 "인자(仁者)만이 사람을 미워하고, 군자(君子)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러러 공경하고 굽어서 사례하는 것이 단지 높은 풍모가 사람을 감동시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대는 나이가 아직 젊은데도 견해와 덕이 이와 같으니, 훗날 마침내 선사의 도를 전하고 7일의 우레 소리를 울릴 자가 두류산(頭流山) 아래 용성군(龍城君) 보절방(寶節坊)57)의 소재준(蘇在準)이 아니겠습니까? 그대의 편지 가운데 "기질을 바로잡기 어려워 사욕이 틈을 타고 일어나며, 깊은 분노가 절로 가득차서 전전긍긍하며 편치 못합니다." 등의 말이 있습니다. 이는 편지가 왕래하는 가운데 저절로 나오는 의례적인 말이 아니고, 실제 애써 공부하고 맹렬히 성찰한 깊은 체험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과 능력으로도 먼저 어렵게 여기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대의 견해와 덕이 그처럼 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확충해보면 전면의 성취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끝내 선사의 도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대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세간의 영재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시대의 풍조를 초탈하여 이 도에 뜻을 둔 자는 드뭅니다. 도에 뜻을 둔 자는 있지만 탁연히 독립하여 시종일관 절개를 지킨 자는 더욱 드뭅니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똑같은 길로 도도히 흘러서 그 파란을 돌이키고 그 역류하는 물길을 막는 이가 없습니다. 그대는 재주와 뜻이 모두 우뚝하여 이러한 사실을 개탄한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타락한 풍속을 일으키고 도탄에 빠진 천하를 구제하고자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장차 우뚝 솟은 두류산의 빼어난 경치를 그대의 흔들리지 않고 꺾이지 않는 덕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오직 그대는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편지에서 이르길 "여러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내 얼굴을 한 번 보았다."라고 했는데 나는 그대의 눈길에 화답조차 못했습니다. 또한 서로가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서로 강학하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어찌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글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획이며, 마음은 내면이고 얼굴은 외면입니다. 이미 그 마음을 얻었으니 얼굴을 못 본들 무엇이 슬프겠습니까? 하물며 그 마음의 소리와 마음의 획으로 구해본다면 그대의 모습과 풍채를 오히려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나 스스로를 위로할 따름입니다. 走陋拙踈淺, 百無一能, 本不足爲人取.竊不自量, 誅討陰賊, 深入重重禍網.人之親知, 亦且畏避不敢近, 乃高明先施於未曾通款之地, 極其殷摯.至以抗義不屈赤幟一竪贊之, 孔聖之畏匡困陳慰之.顧雖不敢當, 高明之高風, 實今之初睹也.且其所論震罪者, 直以鬼魊誣師反噬滅陽斷之, 所勗賤子者, 終以含笑斧鑊成就晩節望焉.是則古所謂仁者之惡人君子之愛人非耶? 仰欽俯謝, 又非但以高風之動人也.高明年尙少, 而之見之德也, 已如此, 他日卒傳先師之道, 轟雷聲於七日者, 非頭流山下龍城郡寶節坊蘇在準乎? 乃知書中氣質難矯, 私欲闖發, 深自憤懣, 兢惕不寧等語.非往復間自道例談, 實出眞地苦工猛省深體之餘.惟其之心之力, 先難之若是也, 故有之見之德之斯大也.充此而進, 前頭所就, 其可量乎.吾故曰卒傳先師之道者, 乃高明也.噫! 世間英才, 不爲少矣.能超脫時風, 而志乎斯道者鮮矣, 志乎道者有矣.能卓然獨立終始一節者, 尤鮮矣.此所以滔滔一轍, 回瀾障川之無其人也.高明才志俱卓, 慨歎乎此者蓋久.而思欲以起末俗之衰, 濟天下之溺也.吾將以屹屹頭流之秀色, 較看於高明撓不動摧不折之德也.惟高明加勉焉.來書謂一面陋顔於衆中, 而鄙於英眄, 和此亦無.遠地盍簪, 未易前期, 曷勝於邑? 然文心聲也, 筆心畫也, 心內也面外也.旣得其心, 未面何傷? 况持此心聲心畵而求之, 其風儀顔采, 猶有可想者乎.用是自慰而已. 용성군(龍城君) 보절방(寶節坊) 일제 강점기 때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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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범 진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房玉範珍 丙寅 대상(大喪)58)의 졸곡(卒哭)은 7개월 뒤에 지내야 하니59) 지금 법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 지극히 옳고 지극히 옳습니다. 그러나 졸곡은 공적인 상(喪)이나 사적인 상을 막론하고 애통한 마음을 줄이는 일입니다. 더구나 예월(禮月)에 날을 점쳐서 따로 기일을 안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는 곧 부장(報葬)하면서 졸곡의 기일을 기다리는 것이니 상순(上旬)이나 중순(中旬)을 써서 길일을 급하게 잡는다는 혐의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하순(下旬)을 써야 아마도 인정과 예의를 다할 듯합니다.선사께서는 무오년(1919년, 고종의 승하) 대상에 다음해 6월 18일을 졸곡의 기일로 삼으셨는데, 이는 월초부터 9번 우제(虞祭)60)를 지내는 달을 계산하여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주제넘은 소견에는 "부장한 경우 서둘러 우제를 지내고, 졸곡제는 예월을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61)"라고 예경(禮經)에 드러난 이상, 졸곡을 지낼 달에서 우제를 지낼 날짜를 뒤미처 계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번 9월 하순 중 강일(剛日)을 골라 모여서 망곡례(望哭禮)를 지내겠습니다. 평소 선사께 미처 여쭈어 질정하지 못한 것이 절로 안타깝습니다. 大喪卒哭之宜用七月, 而不從今式, 極是極是. 而卒哭, 無論公私喪, 是奪情之事. 況非禮月筮日之自有排期者, 乃是報葬而俟期者, 則不宜用上旬中旬以近渴吉之嫌, 當用下旬, 恐盡於人情禮意. 先師於戊午大喪, 以翼年六月十八日爲卒哭之期, 此則自月初計九虞月子而然. 然區區妄見以爲: "'報葬、報虞, 卒哭必俟禮月.' 旣著禮經, 則不必追計虞祭日子於卒哭之月也." 故敢於今番擇九月下旬中剛日, 相聚望哭. 自恨未及稟質於先師平日也. 대상 이해 4월 26일 순종 황제가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임금의……하니 사(士)는 3개월에 장례하고 그 달에 졸곡제를 지내며, 대부(大夫)는 3개월에 장례를 하고 5개월에 졸곡제를 지내며, 제후(諸侯)는 5개월에 장례를 지내고 7개월에 졸곡제를 지낸다. 《禮記 雜記下》 김택술은 조선을 여전히 중국의 제후국으로 여긴 것이다. 9번 우제 이는 황제가 지내는 우제(虞祭)의 횟수를 가리킨다. 서둘러……한다 서둘러 장사 지낸 경우[報葬]에는 서둘러 우제를 지내고[報虞], 석 달이 지난 뒤에 졸곡제를 지낸다. 《禮記 喪服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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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범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房玉範 丙寅 강론에 동참할 수 없다는 말씀은 비록 안타깝지만 그곳이나 이곳이나 모두 성현의 책이 있고 시비(是非)를 가리는 천성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밝은 본심에 돌이켜 구하고 이치가 지극한 가르침에 질정한다면, 사람의 마음은 똑같이 옳다고 여기고,62) 선철(先哲)의 말씀은 나를 속이지 않아63) 가는 곳마다 환히 아는 것64)이 곧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는 믿을만 하니 멀리서 권면할 따름입니다.저더러 간옹[艮翁,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진짜 제자라는 말씀은, 아, 이 무슨 말입니까. 선사께서 헤아릴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것을 눈으로 보고도 분변(分辨)하고 토죄(討罪)하여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함정에 빠트린 자만 패악한 제자일 뿐만 아니라 구제하지 않은 자도 패악한 제자임을 면치 못합니다. 제가 무함(誣陷)을 토죄한 것은 화를 당하여도 후회가 없으니, 패악한 제자임을 면하기만 해도 다행일 것입니다. 어찌 진짜 제자임을 감히 바라겠습니까. 未由同榻講貫之喩, 雖則可恨, 彼此皆有聖賢之書, 亦同具是非之性, 苟能反求本心之明, 質之理到之訓, 則人心之所同然, 先哲之不我欺, 觸處洞然, 卽此而在矣. 此可以相恃而遙勉爾. 艮翁眞弟之云, 烏是何言? 目見先師之陷於不測, 而不辨討而救之, 不惟陷之者之爲悖弟, 亦不救者之不免爲悖弟. 吾之討誣, 遭禍而無悔, 僅免爲悖弟卽幸矣. 安敢望眞弟也? 사람의……여기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즉 의리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다. 따라서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孟子 告子上》 선철의……않아 맹자가 "공명의는 '주공이 문왕은 나의 스승이라고 했으니,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리오.'라고 하였다."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가는……것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께서 "내가 안회(顔回)와 종일토록 이야기해 보니, 내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인 것 같았다.그러나 물러간 뒤에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니, 내가 말한 바의 이치를 충분히 드러내 밝히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라고 하신 경문(經文)에 "안자(顔子)는 자품이 침착하고 순수하여, 성인에 대해서 체단(體段)을 이미 갖추었다. 공자의 말씀을 들으면 묵묵히 이해되고 마음으로 깨달아 닿는 곳마다 환하여, 스스로 조리가 있었다."라고 주자가 주석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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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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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憑後證書右證事은 始興郡(舊安山郡) 秀巖面 物旺里前坪 淡字 六九七-二田 貳百八十六坪二合 同字 六九八田 壹百拾八坪五合五夕 宅地同字 六九七-一 九百四十坪 鱗字 六四一 六四 畓壹千九十五坪一合三夕 合結 㐣 富川郡 蘇內面 茂芝里 族弟宜容이가 證明을 提出인바 此是先山設亨田畓 故로 右畓을 宗中名下로 證明提出리 可ᄒᆞ기로 門議가 齊?ᄒᆞ야 此意을 說渡茂芝里族弟宜容 則事體當然이라 ᄒᆞ고 卽時右田畓證明件을 持來ᄒᆞ기로 此證書을 作成홈大正五年 陰十一月 十一日 全南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 門長 族兄 冕容 (印)全南○ 長洞里 立會人 敎仁 (印) 敎燮 (印)族弟 和容 善容 (印) 宜容 (印) 福容 前右田畓은 六世祖 五世祖 三位祭田也證明費 七圓을 族弟 宜容가 先用 故計給홈<피봉>全羅南道 寶城郡 文德面 龍岩里 五二○ 李洪淳 殿京畿道 富川郡 蘇萊面 ?? 李百淳 ? 安山勿頃洞移轉文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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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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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京鄕路左 拜謁已久 隔歲阻信 鬱陶之懷 曷有其極 伏未審春寒 尙峭靜養 氣體候迓新萬祉 大小宅內諸節 均吉否 並伏溸區區無任之至 族弟 姑依宿昔 而別無大警 是爲私幸耳 就物旺里諸宗 亦爲一安 而所在宗畓 昨年洪水 所敗不小 數次防備 而尙未完築 鄙處宗人 若非?(貧)寒 宜當販費防築 而百尺竿頭 勢無奈何 ??以仰達 以此下諒 費冗條參拾원付送 起境築岸 以爲完畓之地 千萬切企切企耳 餘在續後傳信 姑留不備上丙寅 二月 初八日 族弟 宜容(印) 拜上<피봉>全羅南道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 李冕容氏 殿 大至急急京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李宜容 大正十五年 舊二月 初八日 出付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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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임오년(1942) 答金聖九 壬午 저는 재주가 매우 졸렬하여 세상에서 화합하며 지내는 사람이 적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나와 사귀다가도 좀 지나서는 나에게 취할 만한 점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유독 그대만이 견문이 넓고 교유가 넓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될수록 더욱 더 친하게 대해주시니, 무엇 때문입니까. 감격하면서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의 유문(儒門) 대가(大家)의 자손들을 살펴보면 선조의 학문을 제대로 계승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대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급한 풍조가 뜨겁게 들끓는데도 오히려 주장을 고수하며 60년까지 끌고 온 사람도 드무니, 이 때문에 불쌍히 여기어 같은 심정을 느낀 것입니까. 비록 그렇더라도 저는 실로 늙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으니, 설사 그 나이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제 여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먹는 것이 줄고 살이 빠지며 정신이 나가고 생각이 막히는 것 등은 일일이 말할 겨를도 없습니다. 나이를 따져보고 힘을 헤아려보니 앞날에 가망이 없고, 허물을 반성하고 신세를 슬퍼하니 평소의 뜻은 허위가 되었습니다. 그대는 저보다 15세가 적고 겨우 40세를 넘겼으니 바로 발전하여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여 얼이 빠지고 의리를 구명하기 어려워서 부친과 선사를 저버릴까 두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에게 도움을 구하니 무엇 때문입니까? 궁핍한 길을 만난 것으로 말하자면 누가 심하고 누가 심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한쪽은 노인을 섬기고 아이를 기를 책임이 있고, 다른 한쪽은 부친이 죽고 자식이 장성했으니, 근심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쪽은 노인이 편안하며 아이가 즐겁고 다른 한쪽은 부인이 비난하고 자식이 어긋납니다. 이것은 또한 깊은 근심 속에 깊은 기쁨이 있는 것이고, 얕은 근심 속에 깊은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실로 동병상련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갓 근심하고 한탄하며 범범하게 서로를 구하기보다는 곧바로 눈앞에 행해야 할 일에 대해 진실한 마음으로 강구하고 익혀서 잘못을 빚어내지 않는 것이 더욱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는 이미 집안의 생계를 잊어버리고 푸른 산속에 살며 문을 닫아걸고 있으니 인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는 곳이 오히려 마을과 가까워서 차마 듣거나 보지 못할 일과 편치 않은 의리와 관련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간절하게 깊은 산이나 먼 바다로 높이 날아가고 멀리 떠나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다만 신세가 종손이라서 여러 대의 조상 신위에 제사를 받드는 때에 몸소 참가하지 않는 것은 윤리를 무너뜨릴까 두렵기 때문에 가벼이 감행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정밀한 의리로 알려주기 바랍니다. 僕於才最劣, 于世寡合, 故人雖始與之交, 既而以其無可取, 或異見而棄之, 獨以足下聞見博而交遊廣, 久而愈親者, 何也? 不能以感焉而不致疑也.竊觀今世儒門大家子孫, 繼述先學者, 惟足下在, 此固有辭今後, 而急潮熱沸, 猶能撕捱, 而輥到六十者亦鮮, 故爲之矜憐而同情也歟? 雖然, 僕誠老矣.人生七十古來稀, 縱使及之, 今餘幾何? 食減肉敓, 精遁思窒, 不暇枚言.計年量力, 前頭無望; 訟諐悼躳, 素志歸虛.乃以足下少僕十五歲, 僅過強年, 正可進成之日.有"鼎敗神喪, 義理難究, 懼負父師"之語, 而求助於僕, 何哉? 至於竆途之遭, 未知孰甚孰否.而一則有老幼事育之責, 一則既親沒而子壯, 宜其憂之有淺深.然一則老安而幼樂, 一則室讁而庭違.是又深憂中有深喜, 而淺憂中有深憂也.蓋吾人于斯世也, 實同病而相憐也.與其如此徒爾憂歎, 泛泛相求, 曷若直以目下當行, 實心講習, 不至鑄錯之爲愈乎? 今僕既忘家累, 棲碧閉戶, 宜其與人事無關.然所棲尚近家里, 不無聞見之不忍、處義之難安, 切欲高飛遠走於竆山絕海之中, 令人不知所終.但念身爲宗孫, 累世祀板奉祭之時, 身不與祭, 恐乖倫理, 故不敢率爾, 未知如何則可乎? 幸以精義指示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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