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암기 【정미년(1907)】 果菴記 【丁未】 외제(外弟) 자정(子貞)이 일찍이 나에 말하기를,"내가 거처하고 있는 암자에 '과(果)'로 편액을 하였으니, 형님께서 저를 위해 그 사실을 기록해주십시오."하였다. 내가 이에 응답하여 말하기를,"이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과'에서 무엇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세상이 여러 음(陰)이 양(陽)을 박해하는 시기여서 그대는 먹지 않고 남겨둔 큰 과일[碩果]을 보호하듯 하나의 양[一陽]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가?2)《예기》에 이르기를, '장차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한다.'3)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부모가 이미 돌아가신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지만'이라고 하였다면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신 자는 더욱 알 수 있다. 그대는 여기에서 취한 것인가?공자가 말하기를, '유(由 계로(季路))는 과감하니, 정사에 종사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4)라고 하였으니, 그대는 정사에 종사하는 데에 뜻을 두고서 계로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인가?아니면 세상의 혼란이 이미 극도로 심하여 큰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기를 은둔자처럼 과감하게 하려는 것인가?또는 혹 타고난 기질에 얽매여 대인(大人)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행하는 것을 반드시 과감하게 하여 오히려 선비라는 이름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낫다고 여겨서인가? 그대는 나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게나."하였다. 자정이 말하기를,"괴이하군요! 형님이여. 공자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행하여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백 번을 노력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면 자기는 천 번을 노력해야 한다. 이 방법을 과감하게 잘한다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강건해진다.'5)라고 하여 진실하게 당부하는 뜻을 다했으니, 이것이 학문을 하는 전체요, 덕에 들어가는 큰 방법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과감하게 잘한다[果能]'의 '과'가 있는 줄 모르고, '과' 중에 단지 한 가지 일로 말한 것과 성인이 달갑게 여기지 않은 '과'만을 취하여 견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제가 암자에 편액을 한 것은 대체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제가 사숙하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님께서 시험 삼아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그 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내가 이에 문득 깨닫고서 말하기를,"내가 알겠다. 무릇 성인이 성인이 되는 이유는 명철하고 강건하기 때문이고,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되는 이유는 우둔하고 유약하기 때문이니, 우둔하고 유약한 것을 변화시켜 명철하고 강건할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또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변화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배우고 물으며 백 번 천 번 노력하는 공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될 수 없고, 비록 배우고 물으며 백 번 천 번 노력하는 공부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과감하고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또한 될 수 없으니, '과'라는 한 글자는 천 마리 소보다 힘이 세고 열 마리 호랑이보다 용감하니, 바로 평범한 사람을 단련시켜 성인으로 만들어주는 성패의 기관이 된다.만약 과감하게 행하여 명철함과 강건함에 이를 수 있다면 음이 성대한 세상을 만난다 하더라도 저절로 하나의 양을 보호하고 지키기를 큰 과일처럼 할 수 있을 것이고, 선을 하려고 할 때에 저절로 부모를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할 수 있을 것이며, 뜻을 얻어 정사에 종사하게 되어서는 저절로 계로처럼 과감하게 행할 수 있을 것이니, 은둔자의 과감함6)이나 소인이 행실을 과단성 있게 하는 것7)은 또 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간옹이 명한 이유와 자정이 편액을 한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하였다. 자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지금에서야 비로소 '과암(果菴)'의 사실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는 남은 감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힘을 쓰는 방법은 공자가 다섯 가지 부조(不措)8)의 가르침을 두었으니, 내가 앞으로 스스로 힘쓸 것입니다."하였다. 外弟子貞嘗謂余曰: "吾所居之菴, 扁之以果, 兄爲我記其實." 余應之曰: "是不難.然余未知子奚取於果也? 今之世, 群陰剝陽, 子欲保一陽, 如碩果之不食耶? 《記》曰: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此爲父母已沒者言.然旣云'父母雖沒' 則其父母俱存者, 尤可知矣.子其有取於此耶? 孔子曰: '由也果, 於從政乎, 何有?' 子其有志於從政而學季路耶? 抑世亂已極, 不可以有爲, 故欲長往不返, 如隱者之果哉耶? 又或氣稟所拘, 不能爲大人, 則無寧所行必果, 猶欲不失士之名耶? 子其明告我." 子貞曰: "異哉! 兄也.孔子曰: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 人一己百, 人十己千, 又以果能此道, 雖愚必明, 雖柔必剛.' 致其丁寧之意.此爲學之全體, 入德之大方.兄不知有果能之果, 乃取果之只以一事言者及聖人所不屑之果而擬之, 何也? 吾之扁菴, 蓋出於此, 而亦非吾之所私艮齋 田先生之所命也.兄試思之, 必得其說." 余乃憬然而悟曰: "余知之矣.夫聖人之所以爲聖人者, 以其明且剛也; 凡人之所以爲凡人者, 以其愚且柔也.能變愚柔而爲明剛, 則凡人亦可以爲聖人矣.雖欲變之, 而不用學問百千之功, 未可也; 雖用學問百千之功, 而不果能用之, 亦未可也.果之一字, 大於千牛, 勇於十虎, 乃鍛凡鑄聖之成敗機關也.苟能果而致明剛焉, 則遇陰盛之世, 自能保守一陽而如碩果矣; 將爲善, 自能思父母而必果矣; 得志而從政, 自能如季路之果矣.至於隱者之果哉, 小人之行果, 又不足道矣.艮翁之所命, 子貞之所扁, 其以此哉." 子貞喜曰: "今乃記得果菴之實, 無復餘蘊矣.其用力之方, 夫子有五不措之訓, 吾方且自勖焉." 오늘날 …… 것인가 《주역》의 〈박괘(剝卦)〉는 5개의 음효와 1개의 양효로 구성되어 5개의 음이 하나 남은 양을 박해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고, 〈박괘 상구(上九)〉에 "마지막 남은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대한제국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박괘〉에 비유하고, 이에 대처하는 당시 선비들의 마음을 〈박괘 상구〉의 효사(爻辭)를 인용해 표현한 것이다. 선한 …… 행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지만 장차 선한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하고, 장차 선하지 못한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부모에게 수치와 욕을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父母雖沒,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將爲不善, 思貽父母羞辱, 必不果.〕"라는 내용이 보인다. 유(由)는 …… 있겠습니까 《논어집주》 〈옹야(雍也)〉 제6장에 보인다. 널리 …… 강건해진다 《중용장구》 제20장에 보인다. 은둔자의 과감함 원문의 "은자지과재(隱者之果哉)"를 국역한 것으로,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孔子)가 천하를 경륜할 뜻을 지니고 위(衛)나라에서 경쇠를 치고 있을 때에, 삼태기를 메고 문 앞을 지나가던 한 은사(隱士)가 그 소리를 듣고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두면 될 것이다.〔莫己知也, 斯已而已矣.〕"라고 말하자, 공자가 "과감하구나. 그렇게 처신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다.〔果哉! 末之難矣.〕"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소인이 …… 것 《논어집주》 〈자로〉 제20장에 자공(子貢)이 '선비[士]'의 세 번째 수준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말을 반드시 미덥게 하고 행실을 반드시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은 국량이 좁은 소인이지만 그래도 또한 그다음이 될 수 있다.'〔言必信, 行必果, 硜硜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다섯 …… 부조(不措) 《중용장구》 제20장 제19절에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댄 알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댄 분명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독실하지 못하면 놓지 않는다.〔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