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02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寅二月五日 尹璂燮 壬寅二月五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1902년 2월 5일에 사생 윤기섭이 양가의 가족 안부를 여쭙는 간찰 1902년 2월 5일에 사생(査生) 윤기섭(尹璂燮)이 가천의 사돈댁에 보내 양가의 가족 안부를 여쭙는 편지이다. 사돈의 안부를 여쭙고, 자신은 어버이께서는 겨우 편안하시고, 형님은 치발(致發)한 지 오래되어 앙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며느리이자 자신의 딸이 무탈하다니 매우 다행이고, 아드님은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유백원동기에게 보냄 갑신년(1944) 與柳伯源 東起○ 甲申 옛날 완주에 있었을 때는 해마다 우리 누나에게 문후를 드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기묘년 가을에 인사드리고 돌아왔는데, 그 겨울에 막내 며느리가 크게 병이 나서 가산을 탕진하여 구원하는 바람에 이듬해 봄에는 농토가 없어 여덟 식구가 기아에 허덕였으며,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병은 더욱더 심해졌고, 시대가 소란스러워질수록 길은 더욱 막혀서 힘도 없고 경황도 없어서 문을 닫고 5, 6년 동안 쓰러져 있었으니, 우리 누나에게 문후를 드리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매번 동생과 아이들에게 "나는 비록 이와 같다지만 너희들은 어찌 가서 문후를 드리지 않는가?"라고 말했지만, 한 번도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종합해보면 동기(同氣)94) 간에 인륜의 정이 박한 허물은 실제로 제가 우리 누나 내외가 멀리 나를 버리고 만 리의 먼 곳으로 집을 옮긴 뒤 한 번도 편지를 보내지 않은 것을 초래했다는 점에 있으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잘 모르겠으나, 풍토로 인하여 기후가 다른 곳에서 칠순을 바라보는 노년에 다행히 건강에 이상은 없습니까? 고향을 생각하는 그리움은 어떻게 견디십니까? 북쪽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마음에 혼백이 녹고 애가 끊는 것은 하루에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생각해 볼 때, 우리 형제 여섯 명은 부모를 오래도록 모시는 복은 없을지라도, 지금 나이가 든 사람은 67세이고 젊은 사람은 46세인데 모두 생존해 있고, 아울러 배우자를 잃거나 자손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 형제의 복은 또한 드문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번 어머니의 기일이 있는 따뜻한 봄에 모두 모여서 제사 지내기를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똑같이 슬하에 있는 것처럼 하여 화락한 즐거움을 다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역시 궁핍한 사람이 봄이 다 가는 때에 쉽게 마련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금년 6월 6일이 되어 이 몸이 태어난 회갑의 아침에 반드시 이를 하려고 기약했는데, 우리 누나가 갑자기 이렇게 멀리 이사 갈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제는 끝났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잘 모르겠으나, 생전에 다시 서로 얼굴을 볼 기약이 있겠습니까? 이 몸은 농사를 짓지 않고 생산한 것도 없어서 몸을 거친 골짜기에 붙여 살면서 안으로는 처자식의 봉양이 없고 밖으로는 사귈 벗도 끊었습니다. 이렇게 지낸 것이 이제 몇 년이 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가지고 생각할 때 그 감정을 어찌 다시 낱낱이 말하겠습니까? 만약 끝내 버리지 않으셨다면 행여 답장이라도 주시기 바랍니다. 昔在完城日間, 年候我姊氏, 便成課例矣. 一自己卯秋拜辭而歸, 是冬而季子婦大病, 蕩產救護, 翼春而農土沒落, 八口飢餓, 加之年益衰而病益深, 時益騷而路益梗, 無力無况, 杜門自廢五六年, 闕侯我姊氏者, 是也. 每謂弟輩兒曹, 曰: "我雖如此, 汝等豈不可以往候乎?" 而一不見聽. 總言之, 同氣間薄倫, 咎實在我所以致我姊氏內外之遐棄, 移家萬里之遠, 而并無一書之及, 復誰之怨尢? 未知風土異候, 望七老年, 幸無損攝? 越鳥南柯之思, 何以堪之? 北望馳情, 魂銷而腸斷者, 一日而屢回也. 念吾同腹六人, 雖無久待父母之福, 然今老者六十七, 少者四十六, 皆得生存, 并無喪配偶無子孫者, 兄弟之福, 亦可謂罕觀矣. 每欲於先妣忌日春和之時, 齊會行祀, 若父母生時同在膝下, 而盡湛樂之歡, 是亦竆人竆春所未易辧者. 期至今年六月六日, 此身回甲生朝而必遂之, 孰謂我姊氏遽此遠移? 今焉已矣. 非惟此焉. 亦未知生前復有相靣之期否? 此身不農不產, 栖身荒谷, 內無妻子之養, 外絕賓朋之交者, 今爲數歲, 即此而可想, 其情復何枚道? 如不終棄, 或賜回音. 동기(同氣)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同聲相應 同氣相求〕"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극명에게 답함 경진년(1940) 與楊克明 庚辰 옛날 현자는 난세를 만나면 깊이 은둔하거나 멀리 떠나서 끝내 화를 면했습니다. 예컨대 하복(夏馥)이 임려산(林慮山)에서 나무를 가옥으로 삼은 것과47) 신도반(申屠蟠)이 양탕(梁碭)지역에서 자취를 끊은 것48) 등입니다. 오늘날이 그런 시절임에도 여전히 뒤처져 있습니다. 다만 그대는 날이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분연히 해냈으니 어찌 그리 용감하신지요? 올 여름 풍우로 그대의 정원에 감과 밤이 크게 손상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늘이 이것조차도 한미한 선비의 먹을거리로는 사치라고 여겨서 그것을 덜고자 했는가 하여 웃어봅니다. 나 또한 덕유산과 두류산, 두 산 사이에 뜻을 둔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한스럽게도 늙어서 이미 농사지을 힘도 없고 자손 또한 따르는 이가 없으니 어찌해야 하는지요? 한갓 간절히 그대를 부러워할 뿐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 또한 선비가 변란에 처하는 것이니 이치를 궁구하고 식견에 전진하여 몸을 완성하고 세상을 선하게 하는 유업(儒業)의 성취를 어찌 잠시라도 잊겠습니까? 바라건대 모름지기 성인의 훈계인 "즉이학문(則以學文)"에서 즉(則)자의 뜻을 체인하여 농사짓고 나무하는 여가에 부지런히 서적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리하여 날로 성실하게 공부하여 얻은 것과 의심나는 것을 풍(風)편에 보여주시어 강론상장(講論相長)의 이익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古之賢者, 遭亂世, 深藏遐擧, 卒以免禍.如夏馥之林慮樹屋, 申屠蟠之粱碭絶迹.今其時也, 而尙屬晩矣.惟賢不俟終日, 奮然能之, 何其勇也? 今夏風雨, 貴園柿栗想大損, 豈天以此謂寒士食侈而欲減之耶, 奉呵奉呵, 僕亦留意德裕頭流兩山之中久矣.但恨老矣, 旣不能服田, 子孫又無可從者, 柰何柰何? 徒切健羡而已.雖然此皆士之變處, 處變則然, 而至於窮理進識, 用究成身淑世之儒業, 何可須臾忘也? 望須深體聖訓則以學文則字之意, 耕樵餘力, 勤親簡編.日有慥慥, 以所得所疑, 因風示及, 資講論相長之益如何? 하복(夏馥)……것과 하복은 후한 때 사람이다. 영제(靈帝) 때 국정의 잘못을 거침없이 말했다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환관들의 미움을 사 체포령이 내린다. 이에 성명과 모습을 바꾸고 임려산(林慮山)에 들어가 품팔이꾼이 되어 살다가 죽었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夏馥》 신도반(申屠蟠)……끊은 것 은사인 신도반은 한나라가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 양탕(梁碭) 지역에 자취를 숨기고 은둔하여 살았다. 《後漢書 卷53 申屠蟠列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최여중 태일에게 보냄 병인년(1926) 與崔汝重 泰鎰 丙寅 근래에 비로소 그대가 봄날 용동(龍洞)의 간소(刊所)에 답한 편지를 얻어 읽어보니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며, 뜻이 간곡하고 의리가 엄격하며, 문장 또한 넓고 넓어서 사회적 지위가 있으니 그대의 진취와 수립이 이와 같은 줄 알지 못했습니다. 지난날 내가 어떤 사람에게 그대를 언급하여 "뭇사람들이 바야흐로 머리를 움츠릴 때에 서검(書檢)의 화를 함께 하였고, 동문들이 서로 무관심할 때에 제일 먼저 환난에 달려와 이치에 근거해 사람을 질책하여 스승을 어긴 죄를 바로잡아 시비(是非)를 드러내었고, 바른 도(道)로써 아버지를 깨우쳐 공사(公私)의 슬픔을 극진히 하니 예제(禮制)가 밝아졌다. 그러니 근자의 선비들 중 실제 학문에 힘쓰는 것을 나는 이 사람에게서 보았다."라고 말했더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대개 그대의 평소 자질은 겸손하고 겸손하여 말을 몸에서 내지 못하고,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하는 자와 같지 않았던가요? 말없이 몸소 실천하는 것이 만석군(萬石君)49)의 순수한 자질이며, 말 많은 자가 덕이 없다는 것이 공성(孔聖)의 지극한 훈계입니다. 자장(子張)의 기세당당함은 함께 인을 행하기 어렵고50), 신정(申棖)의 분노는 강함이 될 수 없다는51) 것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대저 하늘이 사람에게 순수지선(純粹至善)의 성(性)을 부여했으니, 비록 신명에 통하고 사해를 빛나게 하는 덕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내면의 일에 불과하여 본래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기욕(氣欲)에 가려져 그 본성을 상실한 자가 많습니다. 고로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기 때문에 효자를 기리고, 군주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충신을 포상합니다. 만일 오늘날 유적(儒籍)에 이름이 들어있는 자들이 모두 의(義)를 따르고 예(禮)로 행동한다면 그대가 비록 현명하다 해도 누가 그대를 이같이 특별히 공경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그대는 더욱 힘써서 순수지선의 성분을 확충하여 대덕(大德)의 성취를 기약하고, 소성(小成)에 안주하지 말아서 오늘날의 선비 가운데 돈실한 학문을 이루어주길 바랍니다. 나는 그대와 일찍이 동사(同社)에서 교학상장의 의가 있었기에 무릇 다른 동문들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대의 선을 보고 기뻐하여 나도 모르게 세세히 여기에 이르렀으니 깊이 진심을 헤아려 주리라 생각합니다. 近始得哀春間所答龍刋書, 讀之名正言順, 意懇義嚴, 文章亦恢恢然有地步, 不圖哀進就修立之如許也.日者鄙與人語及於哀曰, 書檢同禍於衆方縮首之時, 首先急難於同室越視之際, 據理責人, 正違師之罪, 是非以著, 以道喩親, 盡公私之哀, 禮制以明.近日衿紳中, 實地敦學, 吾於斯人見之矣, 聽者不以爲不然.蓋哀之素質, 非謙謙然言若不出身若不勝者乎? 益信不言躬行爲萬石君淳質, 而有言無德爲孔聖之至訓.子張之堂堂, 難與爲仁, 而申棖之悻悻, 未得爲剛也.夫天旣賦人以純粹至善之性, 雖通神光海之德, 究不過分內事, 本非異事.但爲氣欲之蔽, 而喪失其性者多矣.故以其有不愛其親者也, 而孝子旌以其有不敬其君者也, 而忠臣褒.如使今之托名儒藉者. 擧皆由之以義, 動之以禮.哀雖賢, 誰敬異之若此哉? 惟哀勉之, 充盡性分, 期就大德, 毋安小成.而作今士中敦實學也, 鄙於哀, 曾有同社相長之誼, 非比凡他同門故, 見其善而喜, 不覺縷縷至此, 想深諒實體也. 만석군(萬石君) 석분(石奮)은 한 경제(漢景帝) 때의 대부(大夫)인데 공경과 근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네 명의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만석군(萬石君)으로 불리었는데, 자식들을 훈계할 때 밥상을 마주한 채 가만히 먹지 않고 있으면 자식들이 서로를 책망하며 사죄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 자장(子張)…어렵고 자장은 춘추 시대 전손사(顓孫師)의 자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당당하구나, 자장이여! 함께 인(仁)을 행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신정(申棖)…없다 "공자가 '나는 아직 강(剛)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자, 혹자가 '신장(申棖)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신장은 욕심으로 하는 것이니, 어찌 강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라고 하였다. 《論語》 〈공야장(公冶長)〉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최여중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崔汝重 癸酉 '흑치(黑薙)의 재앙'52)에 보는 것마다 마음을 상하니 말도 차마하지 못하겠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복장을 변하게 하는 것이 장차 제도까지 변하게 하여 오랑캐 세상으로 몰아간다."라고 하신 말씀이 진실로 밝은 견해입니다. 저들이 색깔 옷을 조선의 옛 제도라 하여 권하는 것은 진실로 우리를 거짓으로 유인하는 술수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나라의 옛 복식이라 하여 따르는 것은 크게 생각이 밝지 못한 것입니다. 무릇 이 백의(白衣)는 고례(古禮)를 고찰해보아도 정색이 아니요, 국전(國典)을 참고해 보아도 숭상할 것이 아니어서 본래 구구하게 이것을 지켜야 할 이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시국이 바뀐 후 저들에게 심복하지 않겠다는 특별한 색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기자(箕子)도 백색을 숭상하여 수천 년의 유풍이 되었으니 족히 천하만국에 떳떳함이 되고 훗날 양기를 회복하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관계가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편지에서 "구한말의 유족(遺族)이 희미한 잔영으로 남고 오직 백의(白衣) 두 글자가 있는데 저들은 통쾌하게 아울러 말살하려고 한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또한 나의 말이기도 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질책할 것이 없고 우리 유자(儒者)된 자들은 죽음이 있을 뿐 어찌 차마 따르겠습니까? 오언절구 시의 비분한 묘사와 굳센 맹서는 세 번 반복하여 읽고 난 후에도 감격이 그치지 않아 나도 모르게 문득 보내온 시운을 따라 나의 뜻을 보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같은 뜻이기에 시가 이루어져도 다른 언사가 없으니 어찌 꼭 보위(步爲)할 것입니까? 비유컨대 새장에 갇힌 새가 서로 슬프게 호소할 따름이니 도리어 맥없이 웃습니다. 근자에 우리들 중 시에 뛰어난 자는 그대만한 이가 없습니다. 묘사가 정밀하고 결속이 견고하여 환히 빛나고 엄숙하게 울려서, 나는 실로 눈을 부릅뜨고 뒤쫓을 뿐이니 지적해 달라는 부탁은 논할 것이 못됩니다. 다만 시(詩)의 도(道)는 귀결점이 완순자적(婉順自適)에 있습니다. 그대는 현재 시의 용공이 비록 이와 같더라도 구경일착(究竟一着)에 종사하는 것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각초절(鑱刻峭絶)한 뜻은 넘치고 우유부진(優遊不盡)한 흥취가 적을까 두렵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시는 작은 도(道)이니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지 가운데 "처음 뜻을 저버릴까 근심한다."라는 공부초지(恐負初志) 4글자로 이는 사람의 심목(心目)을 깨웁니다. 생각건대 근자의 동지들 중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사람으로 가히 믿을만한 사람은 희숙(希淑), 자유(子由), 그대, 그리고 여안(汝安)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안은 목숨을 부지하는 데도 힘이 넉넉지 않으니 어느 겨를에 학업을 다스리겠으며, 자유 또한 빈궁하여 진덕수업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오직 희숙과 그대만이 다행히 이런 근심을 면하여 학업에 힘쓸 수 있는데, 희숙은 바야흐로 순풍에 돛단 듯 그 나아감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제 공부초지(恐負初志) 4글자를 그대에게서 얻어 이 학문이 사망하는 날에 도를 지키려는 마음이 더욱 견고함을 우러를 수 있으니 어떤 기쁨이 이와 같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뜻을 저버릴까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진실로 저버릴까 근심한다면 처자의 허물이 어찌 그대를 구속시킬 수 있겠습니까? 구속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로 덕에 나아가고 뜻을 지키는 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몸이 묶여 자주 사우(師友)를 따르지 못한다."라는 것으로 근심으로 삼는다면 옛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힘을 써야지 타인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두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자주 만나고 덜 만나는 일을 급급해하겠습니까? 대개 공(恐) 한 글자 가운데 무한한 공부가 들어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성인의 우근척려(憂勤惕慮)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공부하는 절차는 그대 또한 마땅히 알고 있을 터이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마음을 모으고 뜻을 더하는 여하에 달려있을 따름입니다. 黑薙之禍, 觸目傷心, 言之不忍.來喩所謂變黑將爲變制, 而驅之於左袵者, 眞明見也.彼以色衣謂朝鮮舊制而勸之者, 固詐誘我人之術也.我人之亦以爲故國服用而從之者, 何見義之不明也.蓋此白衣, 考之古禮而非定色.參之國典而非所尙, 本無區區守此之理.但在今日, 則爲換局後不心服之特色.而亦箕聖尙白, 數千年之遺風, 足以有辭於天下萬國.而爲他日陽復之基.是其關係, 豈不重且大歟? 來喩所謂舊韓遺族, 迷痕殘影, 惟有白衣二字, 而彼快於并滅者, 亦吾言也.餘人可無責, 爲吾儒者, 有死而已, 何忍於從之也? 五絶詩悲憤之寫, 剛毅之誓, 三復以還, 令人感激無已, 不覺輒步來韻以示志.然要之彼此一志, 詩成而無他詞, 亦何須步爲? 誓如籠鳥之相呼以訴悲爾, 還呵還呵, 第近日吾黨中工詩者, 無如賢者, 模寫精切, 結束緊固, 燁然而光, 鏘然而鳴, 吾實瞠乎後矣, 斤正非所論.但詩之道, 歸在婉順自適.今賢者見在用工, 雖不得不如此, 然有事於究竟一着, 不可不念.不爾恐鑱刻峭絶之意勝, 而少優遊不盡之趣耳.雖然, 詩是小道, 亦何足說? 最是書中恐負初志四字, 醒人心目, 念此近同志中.年下余而可恃者, 非希淑子由與賢者及汝安乎? 而安弟救死不贍, 奚暇治業, 由亦貧窮, 恐妨進修.惟希與賢者, 幸免此憂, 可以有爲, 希方順風張帆, 其進難量.而今又得此四字之喩於賢者, 可仰守道之心彌堅於斯文喪亡之日, 何喜如之? 雖然, 吾則以爲如不恐負則己, 苟能恐負, 妻孥之累, 烏得以覊絆之? 不惟不得以覊絆, 正所以爲進德酬志之地也.如以絆身而未得頻從師友爲憂, 則古人又有須用己力難仰他人之語.亦何必切切於頻踈之間也? 蓋恐之一字中, 有無限工夫在.究而論之, 聖人之憂勤惕勵, 亦不過此.其間工程節度, 在賢者亦當爲已見昭陵.玆不縷陳, 惟在會心加意之如何爾. 흑치(黑薙)의 재앙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오면서 강압적으로 시행된 단발령과 검은 서양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했던 사실을 의미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최여중에게 드림 을해년(1935) 與崔汝重 乙亥 무릇 사우(祠宇)는 서원이라 통칭하는데, 서원은 본디 독서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고, 독서는 의리를 강론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원은 반드시 강학하는 곳이 있고, 그 강의하는 것은 선현의 도(道)입니다. 이제 무함(誣陷)하여 인가를 내고 원고를 고쳐서 선사의 도의(道義)를 말살하려는 족속들과 더불어 사우의 일을 함께 한다면, 서원의 강당에서 독서하고 강의하는 것이 무명무실(無名無實)할 뿐 아니라 도리어 선사(先師) 도의(道義)의 명과 실을 이 서원 강당에서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니, 나는 그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여러 어른들이 저 무리들을 마주하여 선사의 진영이 엄숙하게 굽어보는 아래에서 무함하여 인가한 것과 원고 고친 것을 바로잡고 성토한다면 저들이 스스로 그 죄를 알아서 창을 되돌리고 음성을 배척한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장차 마간지론(馬肝之論)54)에 부쳐서 성리설이나 경전의 뜻을 두루 뭉실하게 논하면서 이것을 독서 강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무위할 것입니다. 나는 또 여러 어른들이 애초에 저들과 변론할 뜻이 없음을 알았고, 도리어 타인들이 무함하여 인가를 내고 원고를 고쳤다는 설을 끄집어내었으니, 화사(華祠)의 여러분들이 사우(祠宇)의 일에 방해를 초래할까 두려워했다고 여깁니다. 그런즉 그들의 마음가짐을 아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夫祠宇通稱書院, 書院本以讀書而得名, 讀書所以講義.故院必有講堂, 所講者乃先賢之道也.今與誣認改稿, 蔑先師道義者之血黨, 與同祠事, 則所謂讀書講義于院于堂者, 非惟無名無實, 反壞了先師道義之名實于院于堂, 吾不知其宅心如何也.今諸丈若對彼輩, 辨誣認討改稿於先師眞像儼臨之下, 彼自知其罪, 而倒戈斥陰則幸矣.如其不然, 則其將以是付之馬肝之論, 與之泛論性理經義而曰, 此是讀書講義, 則已極無謂.吾則以爲又知諸丈之初無意於與彼辯論, 而反恐他人惹出誣改之說, 而華祠僉席致妨祠事也, 然則其所宅心, 不難知也. 마간지론(馬肝之論) 말의 간(肝)은 원래 독이 있어서 먹지 못한다. 고기를 먹을 때에 말의 간을 먹지 않더라도 맛을 모르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즉 성인이 하는 일은 범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우선 제쳐 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의리를 모르는 것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晦庵集》 〈卷57 答陳安卿〉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공문서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공문서

土地所有權保存ニ付證明申請書一 不動産ノ表示一 所在地 始興郡 秀岩面 物旺里 淡字 六九七-一 宅地 九百四拾坪 不動産ノ價格金 六拾圓也一 所在地 上同 淡字 六九七-二 田地 貳百八拾六坪貳合 不動産ノ價格金 拾圓也一 所在地 上同 淡字 六九八 田地 壹百拾八坪五合五夕 不動産ノ價格金 六圓也一 所在地 上同 鱗字 六四 六四一 畓地 壹千九拾五坪壹合參夕 不動産ノ價格金 貳百圓也一 證明ノ目的 所有權保存一 所有者ノ住所氏名 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三統九戶 所有者 李宜容 (印)一 不動産ノ價格金 貳百七拾六圓也一 登錄稅金 八拾參錢也右土地ハ自己ノ所有ナルコトテ保存證明セラレ度別紙面テ添附レ此段及申請候也大正三年 七月 卅一日 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三統九戶 申請人 李宜容 (印)始興郡廳 御中證明濟證明官吏 始興郡守 尹弼永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을유년(1945) 答金聖九 乙酉 그대가 초상을 당한 후 이미 일주기가 되어 연제를 지낼 때 일찍이 몸소 조문하지 못하여 조문 편지로 대신하고, 그대 형님의 부음을 받은 후 시일이 또 이미 오래되었는데 조문 편지조차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인사(人事)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멀리서 은혜로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대 집안의 상사의 고통과 조국부흥의 바람을 간절히 말씀하셨는데, 저를 한 집안의 친척으로 여겨주는 것과 같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후의를 깊게 느꼈으니,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작고하신 그대 형님의 일생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도를 부흥시키고 강토를 회복하는 데에 쓰지 않은 계책이 없었건만 끝내 금년 7월 8일에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먼저 열흘 전에 죽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오늘의 기쁜 소식은 통괄적으로 말하면 온 국민의 보편적인 경사이고 단편적으로 말하면 당신 집안 일가의 경사라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대 선친과 선형의 밝은 충심은 죽을 때까지도 굳건함이 이미 이와 같았고, 모친을 여의어 상중에 있는 당신은 오십 년 동안 문을 닫고 스스로를 바르게 하였습니다. 당신 막내 동생의 여러 해 동안 우울한 생각은 또한 어떠했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신장되었으니 살아 있는 사람이 이미 즐거이 쳐다보며 기염을 토해내니, 작고하신 분들의 혼령이 살펴봄이 또한 어찌 매우 밝아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이것으로 소회를 푸시어 절대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도리어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저는 질병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는데, 처음으로 통쾌한 일을 봤으니, 삼려대부 굴원처럼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고 싶었던 소원78)을 이룰 수 있음을 스스로 다행이라 여깁니다. 처음에는 병을 무릅쓰고 문하에 이르러 먼저 위로의 예를 드리고 아울러 소회를 모두 토로하려고 했는데, 끝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지 못한 채 다만 셋째 아들 형관을 보내 대신 가게 하니, 정말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다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들은 비록 매우 용렬할지라도 다행히 왜놈의 더러움엔 오염되지 않았으니, 원컨대 한 말씀 가르쳐주셔서 흥성할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自尊遭憂, 朞而練矣, 曾不躳吊而替以狀, 自承令伯氏訃音, 日亦久矣, 而狀且未遑.責以人事, 宜遭疎斥, 乃蒙遠賜惠狀.尊門喪禍之痛․祖國興復之幸, 說到懇至, 有若一家之親, 深感厚意, 不知攸謝.噫, 先伯氏一生, 承先庭遺志, 扶道復疆, 計無不至, 而竟未聞今年七月八日之喜報, 先逝於旬日前, 寧不悲哉? 雖然, 今日喜報, 統言則萬姓之普慶, 偏言則謂尊門一家之慶, 可也.先父兄炳然之丹, 至死蘊結既如是, 哀侍之半百歲, 杜門自靖, 令季氏積年壹鬱之思想, 又如何哉? 而乃一朝見伸, 生者既快覩而吐氣, 則神鑑亦豈不孔昭而悅豫乎? 幸願以是遣懷, 切勿過悲, 還以自慰, 如何? 澤述疾病垂死, 始見快事, 自幸遂屈三閭度世之願已耳.初欲力疾詣門, 先伸慰禮, 兼究所懷, 竟以不能自振, 而止送第三子炯觀替行, 殊切歉悚, 幸再恕之.兒子雖庸甚, 尚幸不染倭穢, 願一言之敎, 俾有興成也. 삼려대부……소원 주희(朱熹)가 유덕수(劉德修)에게 답한 편지에 "굴원이 지나간 일은 미칠 수 없고 앞으로 올 일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래 살아서 속진의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기를 원함이 있었으니, 이 또한 당시 사람들의 망녕된 일을 견디지 못하여 그들이 마침내 어떻게 되는지 보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매양 글을 읽다가 여기에 이르기만 하면 한 번 크게 웃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屈平以往者不及來者未聞, 而有長生度世之願, 亦是不堪時人之妄作, 而欲見其末梢作如何出場耳. 每讀至此, 未嘗不發一大笑也〕"하였다. 《주자대전속집(朱子大全續集)》 권6 〈답유덕수(答劉德修)〉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송기 【정미년(1907)】 庭松記 【丁未】 모든 생물이 생장하는 데에 다행스러운 것이 있고 불행한 것이 있으며, 또 불행 중에 다행한 것이 있고 다행 중에 불행한 것이 있으니, 내 집에 외따로 자라는 소나무로 징험해보면 그것이 진실로 옳음을 알 수 있다.이 소나무는 뜰 가의 거칠고 메마른 땅에서 생장하여 뿌리와 줄기가 이리저리 굽어지고 꺾여 재목답지 못하고, 가지와 잎이 서리서리 얽히고 막혀 뻗질 못하니, 다행이 깊은 산의 울창한 숲 속에서 생장하여 위로는 하늘을 찌르고 아래로는 천 사람을 덮어주는 것과 비교하면 불행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장인이 베거나 나무꾼이 자름에 미쳐서는 깊은 산에서 생장한 것은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리지만, 이것은 운치를 아는 시인이나 청렴한 선비에게 취해져 쉬거나 머무는 사랑을 받아 꺾이고 베어지거나 잘리고 뽑히는 우환이 없으니, 이에 다행 중에 불행한 점이 있고, 불행 중에 또한 다행한 점이 있다.아, 옛 군자는 불행스럽게도 깊은 골짜기나 머나먼 바닷가의 변방에 있을 때에는 가난하여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곤궁하여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인을 좋아하는 자가 일어나면 천거하여 묘당(廟堂)의 높은 자리에 두어서 녹봉으로 부유하게 하고 관작으로 귀하게 하며, 신의로 맡기고 공경으로 존숭한다.내가 비록 오늘날 세상에도 또한 옛 군자처럼 위에 있는 자에게 등용되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좋은 땅에서 자라지 못하였으나 끝내 사람의 사랑을 받는 소나무가 이러한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으니, 이것이 내가 감흥이 일어 마지않는 이유이고, 세한후조(歲寒後凋)의 절개1)는 우리 공자가 이미 찬양하였으니, 앞으로 날마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읊조릴 것이다. 凡物之生, 有幸者, 有不幸者, 又有不幸而幸者, 幸而不幸者.以余家所存孤松驗之, 知其信然矣.是松也, 生於庭除瘠埆之地, 本幹屈曲而不材, 柯葉鬱結而不揚, 視幸而生乎深山茂林之中, 上干雲霄, 下庇千人者, 可謂不幸也.然及乎匠石斬焉, 樵者伐焉, 則生乎深山者, 將一朝而盡, 而此則爲韻人淸士之所取, 有憩稅盤桓之愛, 而無敗伐剪拜之患.於是乎, 幸者有不幸矣, 不幸者亦有幸矣.嗟呼, 古之君子, 不幸而在荒谷絶海之濱, 貧不能自食, 窮不能自保, 幸而有好賢者作, 進而置之廟堂之上, 富之以祿, 貴之以爵, 任之以信, 尊之以敬.余雖不知今之世, 亦有如古之君子, 爲在上者所取.然今松之不生樂地而終爲人愛者, 有似乎此.此余所興感而不已者也.若其歲寒後凋之節, 吾夫子已贊揚之, 方且日三復焉. 세한후조(歲寒後凋)의 절개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맨 늦게 시드는 절개를 말하는 것으로,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맨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과암기 【정미년(1907)】 果菴記 【丁未】 외제(外弟) 자정(子貞)이 일찍이 나에 말하기를,"내가 거처하고 있는 암자에 '과(果)'로 편액을 하였으니, 형님께서 저를 위해 그 사실을 기록해주십시오."하였다. 내가 이에 응답하여 말하기를,"이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과'에서 무엇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세상이 여러 음(陰)이 양(陽)을 박해하는 시기여서 그대는 먹지 않고 남겨둔 큰 과일[碩果]을 보호하듯 하나의 양[一陽]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가?2)《예기》에 이르기를, '장차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한다.'3)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부모가 이미 돌아가신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지만'이라고 하였다면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신 자는 더욱 알 수 있다. 그대는 여기에서 취한 것인가?공자가 말하기를, '유(由 계로(季路))는 과감하니, 정사에 종사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4)라고 하였으니, 그대는 정사에 종사하는 데에 뜻을 두고서 계로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인가?아니면 세상의 혼란이 이미 극도로 심하여 큰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기를 은둔자처럼 과감하게 하려는 것인가?또는 혹 타고난 기질에 얽매여 대인(大人)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행하는 것을 반드시 과감하게 하여 오히려 선비라는 이름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낫다고 여겨서인가? 그대는 나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게나."하였다. 자정이 말하기를,"괴이하군요! 형님이여. 공자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행하여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백 번을 노력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면 자기는 천 번을 노력해야 한다. 이 방법을 과감하게 잘한다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강건해진다.'5)라고 하여 진실하게 당부하는 뜻을 다했으니, 이것이 학문을 하는 전체요, 덕에 들어가는 큰 방법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과감하게 잘한다[果能]'의 '과'가 있는 줄 모르고, '과' 중에 단지 한 가지 일로 말한 것과 성인이 달갑게 여기지 않은 '과'만을 취하여 견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제가 암자에 편액을 한 것은 대체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제가 사숙하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님께서 시험 삼아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그 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내가 이에 문득 깨닫고서 말하기를,"내가 알겠다. 무릇 성인이 성인이 되는 이유는 명철하고 강건하기 때문이고,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되는 이유는 우둔하고 유약하기 때문이니, 우둔하고 유약한 것을 변화시켜 명철하고 강건할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또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변화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배우고 물으며 백 번 천 번 노력하는 공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될 수 없고, 비록 배우고 물으며 백 번 천 번 노력하는 공부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과감하고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또한 될 수 없으니, '과'라는 한 글자는 천 마리 소보다 힘이 세고 열 마리 호랑이보다 용감하니, 바로 평범한 사람을 단련시켜 성인으로 만들어주는 성패의 기관이 된다.만약 과감하게 행하여 명철함과 강건함에 이를 수 있다면 음이 성대한 세상을 만난다 하더라도 저절로 하나의 양을 보호하고 지키기를 큰 과일처럼 할 수 있을 것이고, 선을 하려고 할 때에 저절로 부모를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할 수 있을 것이며, 뜻을 얻어 정사에 종사하게 되어서는 저절로 계로처럼 과감하게 행할 수 있을 것이니, 은둔자의 과감함6)이나 소인이 행실을 과단성 있게 하는 것7)은 또 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간옹이 명한 이유와 자정이 편액을 한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하였다. 자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지금에서야 비로소 '과암(果菴)'의 사실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는 남은 감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힘을 쓰는 방법은 공자가 다섯 가지 부조(不措)8)의 가르침을 두었으니, 내가 앞으로 스스로 힘쓸 것입니다."하였다. 外弟子貞嘗謂余曰: "吾所居之菴, 扁之以果, 兄爲我記其實." 余應之曰: "是不難.然余未知子奚取於果也? 今之世, 群陰剝陽, 子欲保一陽, 如碩果之不食耶? 《記》曰: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此爲父母已沒者言.然旣云'父母雖沒' 則其父母俱存者, 尤可知矣.子其有取於此耶? 孔子曰: '由也果, 於從政乎, 何有?' 子其有志於從政而學季路耶? 抑世亂已極, 不可以有爲, 故欲長往不返, 如隱者之果哉耶? 又或氣稟所拘, 不能爲大人, 則無寧所行必果, 猶欲不失士之名耶? 子其明告我." 子貞曰: "異哉! 兄也.孔子曰: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 人一己百, 人十己千, 又以果能此道, 雖愚必明, 雖柔必剛.' 致其丁寧之意.此爲學之全體, 入德之大方.兄不知有果能之果, 乃取果之只以一事言者及聖人所不屑之果而擬之, 何也? 吾之扁菴, 蓋出於此, 而亦非吾之所私艮齋 田先生之所命也.兄試思之, 必得其說." 余乃憬然而悟曰: "余知之矣.夫聖人之所以爲聖人者, 以其明且剛也; 凡人之所以爲凡人者, 以其愚且柔也.能變愚柔而爲明剛, 則凡人亦可以爲聖人矣.雖欲變之, 而不用學問百千之功, 未可也; 雖用學問百千之功, 而不果能用之, 亦未可也.果之一字, 大於千牛, 勇於十虎, 乃鍛凡鑄聖之成敗機關也.苟能果而致明剛焉, 則遇陰盛之世, 自能保守一陽而如碩果矣; 將爲善, 自能思父母而必果矣; 得志而從政, 自能如季路之果矣.至於隱者之果哉, 小人之行果, 又不足道矣.艮翁之所命, 子貞之所扁, 其以此哉." 子貞喜曰: "今乃記得果菴之實, 無復餘蘊矣.其用力之方, 夫子有五不措之訓, 吾方且自勖焉." 오늘날 …… 것인가 《주역》의 〈박괘(剝卦)〉는 5개의 음효와 1개의 양효로 구성되어 5개의 음이 하나 남은 양을 박해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고, 〈박괘 상구(上九)〉에 "마지막 남은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대한제국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박괘〉에 비유하고, 이에 대처하는 당시 선비들의 마음을 〈박괘 상구〉의 효사(爻辭)를 인용해 표현한 것이다. 선한 …… 행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지만 장차 선한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하고, 장차 선하지 못한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부모에게 수치와 욕을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父母雖沒,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將爲不善, 思貽父母羞辱, 必不果.〕"라는 내용이 보인다. 유(由)는 …… 있겠습니까 《논어집주》 〈옹야(雍也)〉 제6장에 보인다. 널리 …… 강건해진다 《중용장구》 제20장에 보인다. 은둔자의 과감함 원문의 "은자지과재(隱者之果哉)"를 국역한 것으로,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孔子)가 천하를 경륜할 뜻을 지니고 위(衛)나라에서 경쇠를 치고 있을 때에, 삼태기를 메고 문 앞을 지나가던 한 은사(隱士)가 그 소리를 듣고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두면 될 것이다.〔莫己知也, 斯已而已矣.〕"라고 말하자, 공자가 "과감하구나. 그렇게 처신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다.〔果哉! 末之難矣.〕"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소인이 …… 것 《논어집주》 〈자로〉 제20장에 자공(子貢)이 '선비[士]'의 세 번째 수준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말을 반드시 미덥게 하고 행실을 반드시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은 국량이 좁은 소인이지만 그래도 또한 그다음이 될 수 있다.'〔言必信, 行必果, 硜硜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다섯 …… 부조(不措) 《중용장구》 제20장 제19절에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댄 알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댄 분명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독실하지 못하면 놓지 않는다.〔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낙육재기 【경신년(1920)】 樂育齋記 【庚申】 태인(泰仁) 서쪽, 용산(龍山) 남쪽에 고 반포재(伴圃齋) 이공(李公)의 학당이었던 옛 터가 남아 있었는데, 그 5대손 재형(載珩)과 광범(廣範)이 종당(宗黨)의 자제들을 위해 그 터에 서재(書齋)을 지어 '낙육(樂育)'이라 명명하고 나에게 한 마디 말로 권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에 대해 추맹씨(鄒孟氏 맹자)가 천하에 왕 노릇 하는 즐거움도 그 보다 못하다고 하였는데,17) 이는 매우 큰일인지라 덕이 천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여기에 해당할 수 있거니와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또 영봉인(穎封人)을 들어 실증하였으니,18) 사람을 교화하는 한 가지 선이나 그릇을 완성해 주는 한 가지 재주라도 또한 이러한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고, 모든 천하 후진의 부형(父兄)과 스승, 존장이 된 자들은 큰 즐거움으로 스스로를 작게 여겨 자처하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광범은 이러한 의리를 깊이 아는 자일 것이다.반포공(伴圃公)은 영조와 정조의 태평성대한 때를 만나 일찍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지위가 3품(品)까지 올랐으니, 문장과 현명함, 재능이 반드시 세상에 우뚝하였을 것이다. 만약 이에 걸맞게 나아갔다면 금자(金紫)와 은청(銀靑)19) 등 어느 관작이든 될 수 없었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이것을 버리고 취하지 않았으며, 산림 속 여막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설치한 것은 학사(學舍)와 강단(講壇)이고, 일삼은 것은 후진을 이끌어 도와주는 것이며, 가르친 것은 효제ㆍ충신(孝弟忠信)과 궁리ㆍ수신(窮理修身)의 도였으니, 가벼운 일과 중대한 일 사이에서 즐거움으로 삼을 바를 잘 가렸다고 이를 만하다. 사람에게 미친 아름다운 은혜를 생각하면 진작하는 자들이 성대하게 배출되었을 것인데, 그 시대가 멀고 유풍이 아득하여 대강 고찰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지금 광범이 이 일을 한 것은 본디 자제들을 교육할 곳을 마련하고, 또한 선조의 일을 계승하기 위해서이다. 한 가지 일에 자애와 효성의 도가 갖추어졌으니, 어느 누가 가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천하의 일은 이름과 실상이 서로 걸맞기 어려우니, 실상이 있지 않으면 이름이 어디에 있겠는가. 청컨대 내가 '낙육'이라는 이름에 대해 인재를 기르는 실상을 논해보고자 한다.그 실상의 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오직 반포공이 가르친 효제ㆍ충신과 궁리ㆍ수신의 도가 이것일 따름이다. 대저 글을 널리 읽고 힘써 기억하며, 문장을 공교롭게 하고 언사를 화려하게 하도록 가르치고, 일의 공적을 중시하고 명예를 좇게 하여 세상에 팔리기를 구하되 자기에게 체득함이 없는 것은 비록 인재를 기른다는 이름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실상이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하고 어른에게 읍양(揖讓)의 예절을 지키며, 임금을 사랑하고 벗과 친하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자기의 사욕을 이기도록 가르쳐서 자신에게 덕을 갖추고 남에게 선을 미루어 가게 하는 것은 그 실상이 있고 그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고금의 교육계에서 이미 증험한 허상과 실상이다.그러나 근래에 서구의 학문이 한창 치성하고 풍조가 한번 바뀌게 되어서는 임금이나 어버이가 자신과 평등하다고 말하면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어버이에게 불효하는 무리들이 잇따라 나오고, 늙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말하면서 능멸과 모욕을 방자하게 행하며, 금전을 숭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간절하게 권면하고 어려움을 위급하게 여기는 풍조가 씻은 듯이 없어졌으며,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기이한 재주가 되어 하늘과 사람의 도가 어두워졌고, 몸을 닦는 것은 위생으로 간주되어 선왕의 예의가 무너졌다. 무릇 이것들은 모두 사람을 해치고 세상에 화를 끼치는 큰 환란이니, 더욱 통렬한 마음으로 싫어하고, 분한 모습으로 배척하여 물과 불처럼 여기며 밟아서는 안 되고, 독약처럼 여기며 먹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다.청컨대 광범은 강인하고 굳세며 순수하고 올바른 사람을 맞이하고 미친 풍조를 잘 막아서 이 서재에서 헛되이 겉만 꾸미는 군자를 끊어 버리고 단단하게 오직 실상만을 가르치길 바란다. 진실함이 쌓이고 오래도록 힘쓴다면 훗날에 큰 덕을 지닌 사람이 이 서재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진실로 그렇게 된다면 광범이 선조의 훌륭한 가업을 잇는 것은 참으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교육을 즐거움으로 삼는 공적이 또 어찌 횡거 선생이 영봉인을 허여한 것에 견주겠는가. 맹자가 말한 세 가지 즐거움 중 한 가지를 자신이 직접 소유하는 데에 진실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장차 눈을 씻고 그 날을 기다린다. 泰仁之西, 龍山之陽, 有故伴圃齋 李公學堂遺址.其五世孫載珩、廣範爲宗黨子弟, 就其址築書齋, 名之以樂育, 請余一言而勖之.余惟得天下英材育之, 鄒孟氏謂其樂, 王天下且爲之下, 此大小大事, 宜若德足爲天下師者, 乃可以當之.而橫渠先生, 又進穎封人而實之.則知一善之化人、一材之成器, 亦足以與此.而凡爲天下後進之父兄師長者, 不容以其樂之大者而自小不居也審矣.廣範其惟深知此義者乎. 蓋伴圃公當英、正盛際, 早捷巍科, 位陞三品, 文章賢能, 必有卓然乎世者.稱此而進, 金紫、銀靑, 何所不可, 乃舍此不取, 退藏林廬, 所設者學舍講壇, 所事者誘掖後進, 所以敎之者, 孝悌忠信、窮理修身之道也, 可謂擇所樂於輕重之間者也.想其嘉惠之及, 蔚然有作者之輩出, 而恨其世遠風邈, 無所槩攷也.今廣範之爲此擧, 固爲子弟敎育地, 而亦所以述先事也.一物而慈孝之道備, 夫孰不嘉尙之也? 雖然, 天下事, 名與實相稱之爲難, 實之不存, 名何有焉? 余於樂育之名, 請得以論育才之實.實之道烏乎在? 亦惟伴圃公所敎孝悌忠信、窮理修身之道是已.夫敎之以博文强記、巧文麗辭, 重事功徇名譽, 求售乎世而無得乎己者, 雖有育才之名, 而非其實也.敎之以定省揖讓、愛君親友、格致省克, 進德乎己而推善於人者, 是則有其實而副其名者也.此固古今敎育界已驗之虛實.至若近日歐學方熾, 風潮一變, 謂君親平等, 而亂賊接踵矣; 謂年老無用, 而凌辱恣行矣; 謂金錢是崇, 而切偲急難之風掃如矣.窮理歸於奇技, 而天人之道晦; 修身看作衛生, 而先王之禮壞.凡此皆戕人禍世之大患, 尤當痛心而惡之, 扼腕而斥之, 如水火之不蹈, 烏喙之勿食者也.請廣範延剛毅純正, 能障狂潮, 絶虛文之君子於是齋, 斷斷然惟實之是敎, 眞之積而力之久, 則安知異日不有大德人出自是齋中也耶? 苟其然者, 廣範箕裘之紹, 固不須言, 其樂育之功, 又豈橫渠所與穎封人比哉? 孟子所謂三樂之一者, 固不害爲身親有之也, 方且拭眸而俟之. 천하의 …… 하였으니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사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 실증하였으니 횡거 선생은 북송(北宋)의 성리학자 장재(張載, 1020~1077)로, 횡거는 그의 호이다. 영봉인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신하 영고숙(穎考叔)으로, 국경을 지키는 관리[封人]를 지냈기에 영봉인이라 하였다. 영고숙은 장공이 아우 숙단(叔段)의 반역을 편든 어머니 강씨(姜氏)를 유폐하고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후회한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효심을 미루어서 장공에게 미치게 하여 그 역시 효자가 되게 하였다는 고사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원년(元年)》에 전해지고, 《시경(詩經)》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행은 다함이 없다. 길이 너의 동류에게 주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구절이 있는데, 장재가 이를 인용하여 〈서명(西銘)〉에서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봉인이 동류에게 효심을 전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育英才, 潁封人之錫類.〕"라고 하였다. 금자(金紫)와 은청(銀靑) 금자는 금으로 만든 인장(印章)과 자주빛 인끈을 뜻하는 '금인자수(金印紫綬)'의 준말이고, 은청은 은으로 만든 인장과 푸른 인끈을 뜻하는 '은인청수(銀印靑綬)'의 준말로, 모두 고관대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석음재기 【기미년(1919)】 惜陰齋記 【己未】 임자년(1912) 가을에 구산 선생(臼山先生 전우(田愚))이 경전을 안고 부풍(扶風 부안(扶安))의 계화도(繼華島)20)에 들어가자, 사방에서 속정(束脡)의 예21)를 행하며 찾아오는 선비들이 대체로 수백을 헤아릴 정도였다. 4년이 지난 병진년(1916)에 우리 문하의 부노(父老)들이 모두 말하기를,"계화도의 학사에 수용하지 못하여 우리 자제들이 계화도에 머물며 학업을 익히기가 어렵다."하고서 이내 장인을 불러 조그마한 서재를 세웠다. 서재가 완성된 뒤에 구산옹이 '석음(惜陰)'이라 명명하니, 내가 자제의 반열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에 감히 한 마디 말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권면하여 말하였다."서재의 이름이 어찌 대우(大禹)가 촌음(寸陰)을 아낀 뜻22)에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촌음을 아낀다[惜陰]'는 것은 어찌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쓴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성현의 성대한 덕과 위대한 업적은 모두 촌음을 아끼는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니, 유독 대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한 것은 대순(大舜)이 촌음을 아낀 것이고23), 밤을 이어 날이 새도록 우러러 생각하여 터득한 것이 있으면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 것은 주공(周公)이 촌음을 아낀 것이며24),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느라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은 것은 공자가 촌음을 아낀 것이고25), 의리를 찾기 어려워 세월을 흐르는 강물처럼 여긴 것은 회옹(晦翁)이 촌음을 아낀 것이다.옛 경전의 가르침에서 찾아보면 《주역》의 "종일토록 힘쓰고 저녁까지도 두려워한다."26)라는 것과 《서경》의 "안일함이 없는 것을 처소로 삼는다."27)라는 것, 《시경》의 "날로 나아가고 달로 진보한다."28)라는 것, 《논어》의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한다."29)라는 것 등이 어느 것 하나 이러한 뜻 아닌 것이 없으니, 위대하구나! '촌음을 아낀다'는 뜻이여.성현의 언행은 해와 별처럼 밝고, 아버지와 스승의 가르침은 정려(鼎呂)30)보다 무거우니, 이 서재에 거처하는 자들이 어찌 감히 편안함을 짐독(鴆毒)처럼 보고 부지런히 애쓰는 것을 생맥산(生脈散)31)으로 여겨서 밤낮으로 허물을 반성하며 제때에 몸을 완성하지 않고,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방종하며 세월만 헛되이 버리겠는가.송독하고 강론하며 글을 엮고 글자를 쓰는 것도 또한 배우는 사람이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선철(先哲)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의리와 선행에 그 노력을 다하지 않고, 오직 이런 것에만 힘쓰면서 촌음을 아끼는 데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마쳤다고 한다면 이는 절대로 부형과 선생의 지극한 뜻이 아닐 것이니, 이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歲壬子秋, 臼山先生抱經入扶風之繼華島, 四方之士行束脡而來者, 蓋百數計. 越四年丙辰, 我門父老咸曰: "華之舍不容矣.吾子弟在華, 其艱乎肄業." 乃召匠, 立小齋.齋旣成, 臼山翁命之曰惜陰.澤述在子弟列者, 乃敢一言勖同人曰: "斯齋之名, 豈非取諸大禹惜寸陰之義乎? 而惜陰云者, 豈非勤勵不息之謂乎? 余惟從古聖賢盛德大業, 皆從惜陰中做出來, 非獨大禹爲然.鷄鳴而起, 孜孜爲善, 大舜之惜陰也; 仰思繼日, 得之待朝, 周公之惜陰也; 好古敏求, 終日不食, 孔子之惜陰也; 義理難尋, 日月如流, 晦翁之惜陰也.求之典訓, 《易》之'日乾夕惕'、《書》之'所其無逸'、《詩》之'日就月將'、《語》之'學不如及', 何莫非此箇義諦, 大矣哉! 惜陰之旨也.聖賢言行, 炳若日星, 父師訓誨, 重於鼎呂.居是齋者, 敢不視燕晏如鴆毒, 服勤苦爲生脉, 夙夜省愆, 及時成身, 而徒自伈俔游泛, 枉獘流光也哉? 至於誦讀講辨, 綴文寫字, 亦學者之不容廢者.然若不於先哲所思所求之義與善者, 致其力焉, 惟是之務, 而曰惜陰之能事已畢, 則絶非父兄先生之至意也, 是不可以不知也." 계화도(繼華島) 부안군 계화면에 있었던 섬 계화도(界火島)를 말하는 것으로,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가 72세에 이곳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던 곳이다. 속정(束脡)의 예 제자가 글을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아갈 때 간단한 예물을 바치는 예절을 말한다.《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가 "속수의 예를 행한 자 그 이상에 대해서 내가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주에 "수(脩)는 포(脯)이니, 10정(脡)이 1속(束)이다. 속수는 지극히 박한 예물이지만 예를 갖추고 오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대우(大禹)가 …… 뜻 《진서(晉書)》 권66 〈도간열전(陶侃列傳)〉에 "대우는 성인이면서도 오히려 촌음을 아끼셨으니, 보통 사람의 경우는 마땅히 분음을 아껴야 할 것이다.[大禹聖者, 乃惜寸陰, 至於衆人, 當惜分陰.]"라고 하였다. 새벽닭이 …… 것이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하는 자는 순(舜)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탐하는 자는 도척(盜蹠)의 무리이다. 순과 도척의 구별을 알고자 한다면 다름이 없다. 이익과 선행의 사이인 것이다.〔鷄鳴而起, 孶孶爲善者, 舜之徒也; 鷄鳴而起, 孶孶爲利者, 蹠之徒也. 欲知舜與蹠之分, 無他. 利與善之間也.〕"라고 하였다. 밤을 …… 것이며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주공은 세 왕의 덕을 겸비하여 그분들이 행한 이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였다.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기를 밤으로 날을 이어서 하였고, 다행히 터득하시면 그대로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셨다.〔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라고 하였다. 옛것을 …… 것이고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는 선천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하였다. 종일토록 ……두려워한다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君子終日乾乾,夕惕若, 厲無咎.〕"라고 하였다. 안일함이 …… 삼는다 〈무일(無逸)〉에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훈계하기를, "아! 군자는 안일함이 없는 것을 처소로 삼는 것입니다. 먼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고 나서 안일하면 백성들의 의지하는 바를 알 것입니다.〔嗚呼! 君子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라고 하였다. 날로 …… 진보한다 〈경지(敬之)〉에 "나 소자는 총명하지 못하고 공경하지 못하나 날로 나아가고 달로 진보하여 학문이 계속해서 밝아져 광명에 이르고자 한다.〔維予小子, 不聰敬止, 日就月將, 學有緝熙于光明.〕"라고 하였다. 배움은 …… 한다 〈태백(泰伯)〉에 "공자가 말하기를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하면서도 오히려 때를 놓칠까 두려워해야 한다.'라 하였다.[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라고 하였다. 정려(鼎呂) 하(夏)ㆍ은(殷)ㆍ주(周)의 보기(寶器)인 구정(九鼎)과 주나라 종묘의 큰 종인 대려(大呂)로, 모두 크고 무거운 물건이다. 생맥산(生脈散) 인삼(人參), 맥문동(麥門冬), 오미자로 구성된 처방으로, 원기를 생기게 하는 성질이 있는데, 《동의보감》에 여름철에 이 세 가지 재료에 황기, 감초를 넣어 끓여서 물 대신 마시면 기력이 샘솟고, 폐를 깨끗하게 하며 심장의 열을 내려 준다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종양재기 【을축년(1925)】 宗陽齋記 【乙丑】 음양(陰陽)이 천지에 있으면서 대대(待對)가 되어 한 해를 이루니, 공이 비록 어느 한 쪽을 빠뜨릴 수 없지만, 그 공을 논하면 양은 폄을 주관하고 음은 움츠림을 주관하며, 양은 생육을 주관하고 음은 살육을 주관한다. 때문에 성인이 《주역》을 말할 때에 항상 양을 부축하고 음을 억제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음양으로 사람을 논하면 양은 군자가 되고 음은 소인이 되며, 음양으로 덕을 말하면 양은 선덕(善德)이 되고 길덕(吉德)이 되며, 음은 악덕(惡德)이 되고 흉덕(凶德)이 된다. 이리하여 '음양'이라는 두 글자는 숙특(淑慝 선악(善惡))의 큰 관건이 된다.최군 민열(崔君敏烈)은 만종산(萬宗山)의 남쪽에 거처하면서 지명을 인하여 '종양(宗陽)'으로 그 집의 편액을 삼았으니, 그 또한 성인의 뜻을 받아 이른바 '큰 관건'이라는 것을 안 자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동서(東西) 두 물결이 일으킨 비바람에 천지가 뒤집혀 삼강(三綱)32)이 무너지고 사유(四維)33)가 사라져서 세상이 이미 순전한 곤(坤)34)의 상태에 들어갔다. 비록 그렇지만 하늘에서 나온 도의 근원은 변하지 않고, 부여 받은 마음의 떳떳한 본성은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른바 '양(陽)은 다 없어질 이치가 없다'35)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때에 저 음을 곤란하게 하고 이 양을 강하게 하고자하는 뜻을 편액에 담았으니, 최군과 같은 사람은 그 뜻이 어찌 더욱 깊지 않겠으며, 그 관건이 어찌 더욱 크지 않겠는가.또한 군은 일찍이 육양 선생(六陽先生 전우(田愚))을 따라 배우면서 큰 제방이 되는 인도(人道)를 들을 수 있었고, 스승이 돌아가신 뒤로 일단의 음이 더욱 횡행하여 변괴가 관패(冠佩)36)의 사이에서 거듭 나오는 것을 목도하였으니, 비록 이 양을 종주로 삼고 저 음을 배척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또한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절실한 것으로, 단지 천하를 위해서 근심한 것만은 아니다.아, 육양이 바친 자정의 의리는 바로 화양(華陽)37)이 명나라를 존숭한 것이고, 또한 자양(紫陽)38)이 촉한(蜀漢)을 황제의 정통으로 삼고, 추양(秋陽 공자)39)이 중하를 안으로 삼은 것이다. 육양을 종주로 삼은 것은 바로 삼양(三陽)40)을 종주로 삼은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비록 그렇지만 양을 종주로 삼은 실상은 편호(扁號)와 기문, 명문 사이에서 기필을 취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먼저 내 마음 위에서 증험한 폄과 움츠림, 생육과 살육의 생각을 따라 흉덕과 악덕을 제거하고 길덕과 선덕에 나아가서 한 명의 군자다운 사람이 된 뒤에야 거의 종양재의 주인이 되는 것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군은 힘쓰기 바란다. 陰陽之在天地, 相待而成歲.功雖不可以偏闕, 論其功則陽主舒而陰主慘, 陽主生而陰主殺.故聖人之說《易》也, 常扶陽而抑陰, 其意可知也.是故以之語人, 則陽爲君子, 陰爲小人; 以之語德, 則陽爲善爲吉, 陰爲惡爲凶.於是乎陰陽二字, 爲淑慝之大關矣.崔君 敏烈居萬宗山之陽, 因地名而以宗陽扁其齋, 其亦受聖人之意而知所謂大關者乎? 顧今二洋風雨, 天地翻覆, 三綱頹墮, 四維喪絶, 世已入乎純坤矣.雖然, 出天之道源不變, 降衷之秉彛罔墜, 是所謂陽無可盡之理者非此乎? 于斯時也, 乃欲艱彼而强此, 寓之於扁額, 如崔君者, 其意豈不尤深? 其關豈不尤大乎? 且君曾從學于六陽先生, 得聞人道之大防矣.山頹之後, 一陰滋橫, 目見變怪之疊出乎冠佩間, 則雖欲不宗此而斥彼, 又可得乎? 是則尊師衛道之切己, 不直爲天下憂也.嗚呼! 六陽之獻靖, 卽華陽之尊明, 亦紫陽之帝蜀, 秋陽之內夏也.宗六陽, 乃所以宗三陽也, 豈不偉哉? 雖然, 宗陽之實, 不可取必於扁號、記銘之間.須先從吾心上驗慘舒生殺之念, 去凶惡而就吉善, 成得一箇君子人, 然後庶不愧爲宗陽齋主人.君其勖哉. 삼강(三綱)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綱領)으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한다. 사유(四維)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원칙, 즉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를 이른다. 순전한 곤(坤) 《주역》에서 여섯 효가 모두 음효(陰爻)로 이루어진 〈곤괘〉을 말한다. 양은 …… 없다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서 "박괘는 모든 양이 다 떨어져 없어지고 유독 상구 일효만 남아 있어 마치 큰 과일 하나만 먹히지 않아서 장차 다시 생겨날 도리가 있는 것과 같으니, 상구 일효 또한 변하면 순음으로 되어 버리긴 하지만, 양이 완전히 다 없어질 리는 없으므로, 위에서 변하면 아래서 생겨 잠시도 멈출 틈이 없는 것이다.〔剝之爲卦, 諸陽消剝已盡, 獨有上九一爻尙存, 如碩大之果不見食, 將有復生之理. 上九亦變則純陰矣. 然陽無可盡之理, 變於上則生於下, 無間可容息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관패(冠佩) 관리들이 착용하는 의관(衣冠)과 몸에 차는 장신구로, 관리를 비유한다. 화양(華陽) 송시열(宋時烈)의 별호로, 그가 60세 때에 충북 괴산의 화양서원에 은둔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일로 인해 별호로 사용되었다. 자양(紫陽) 주희(朱熹)의 별호로, 그가 1184년 복건(福建) 숭안(崇安)의 무이산(武夷山)에 자양서원을 짓고 한가로이 지낸 일로 인해 별호로 사용되었다. 추양(秋陽) 공자를 가리키는 말로, 증자가 공자의 덕을 칭송하여 "공자께서는 강한(江漢)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시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삼양(三陽) 화양 송시열과 자양 주희, 추양 공자를 가리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분재기 【임오년(1942)】 粉齋記 【壬午】 부풍(扶風 부안)에서 남쪽으로 7리 되는 곳에 위치한 석동산(席洞山)은 우리 17대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수공(奉正大夫 知古阜郡事公)께서 망복(罔僕)41)으로 은둔하셨던 고을이다. 이것을 인하여 이곳에 장사지내고, 두 아들 대호군공(大護軍公)과 직장공(直長公)을 부장하였는데, 풍수가 아름답다고 남쪽 지역에서 일컬어졌다. 석동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5리를 달려 간 곳이 분동산(粉洞山)이다. 직장공의 아들 첨지공과 손자 현감공(縣監公)을 이곳에 장사지냈고, 그 아름다움도 또한 석동산에 버금갔으니, 이곳이 우리 분파조(分派祖)의 선영이다.두 산에 모두 병사(丙舍)가 있는데, 석동산의 취성재(聚星齋)는 본디 석천(石川) 임문원공(林文元公 임억령(林億齡))의 "김씨 집안의 덕성이 모였네.[金門聚德星]"라는 시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분동산의 재실은 단지 지명을 사용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준 것이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예전의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었다.삼가 일찍이 생각건대, 공자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이 있은 뒤에 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자하가 "예(禮)는 뒤의 일이군요."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이에 대해 주석하기를, "예는 반드시 충신(忠信)을 바탕으로 삼으니, 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반드시 흰 비단을 우선으로 삼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42) 대체로 충신은 예에서 흰 바탕을 마련하는 것에 해당하고, 절의(節義)는 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해당하니, 당시 재실을 명명한 뜻이 비록 처한 형편과 환경을 따랐고, 일삼음이 없는 바를 행했다 하더라도 또한 성현의 가르침처럼 실제로 바탕을 숭상하고 꾸밈을 뒤로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줄 어찌 알겠는가.무릇 '재(齋)'란 것은 '가지런함[齊]'이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몸과 마음의 가지런함을 다하는 것이다. 제례(祭禮)로 말하면 슬프고 두려하며 마치 눈앞에 조상이 보이는 듯하고 계시는 듯 여기는 것은 충신의 바탕이고, 준조(尊俎)ㆍ변두(籩豆)와 오르내리고 절하며 무릎을 꿇는 것 등은 의절의 꾸밈이니, 만약 조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고 계시는 듯 여기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비록 의절의 꾸밈이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 베풀겠는가. 때문에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43)라고 하였고, 또 "예는 헛되이 행해지지 않는다."44)라고 하였으니, 이는 힘써야 할 바이다.더욱 일삼을 것이 있다. 첨지공이 나라에 세운 공훈과 현감공이 백성들의 정사에 드러낸 치적부터 군사공이 붙잡아 세운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윤리는 모두 충신(忠信)을 주로 하여 이룩한 것이니, 이 재실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봉영을 바라보며 추모하는 우리 모든 종족은 마음을 쓰고 말을 하는 것에서부터 고을에서 처신하고 세상에 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행동을 제재하고 몸을 세우는 모든 것들이 선조께서 힘쓰신 것을 주로 하여 겉모습과 본바탕 사이에서 먼저하고 나중에 할 바를 알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선조에 대한 제향을 잘하는 것이고, 선조를 생각하여 덕을 닦는 일을 잘하는 것이니, 재실의 이름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더 좋을 것이 있겠는가.구구하고 변변찮은 내가 감히 이것을 문미 사이에 기록하여 삼가 스스로 예전에 드러내지 못한 뜻을 드러낸 데에 부치고, 여러 종족들과 함께 힘쓰기를 바란다.재실을 중수한 일이 기사년에 있었는데, 그것이 원릉(元陵 영조) 때인지 인릉(仁陵 정조) 때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당시 육위문(六偉文 상량문(上樑文))이 있지만 그 창작이 어느 때에 있었는지는 더욱 자세히 알 수 없다. 維扶風南七里席洞之山, 我十七世祖高麗 奉正大夫知古阜郡事公罔僕遯鄕, 因葬于此, 而二子大護軍公、直長公祔焉.風水之佳, 稱於南方, 席山一支東走五里爲粉洞之山, 則直長公之子僉知公、孫縣監公藏焉, 其佳亦亞於席山, 而是爲我分派祖塋.二山蓋皆有丙舍, 席之聚星, 固取石川 林文元公"金門聚德星"之詩義, 惟玆粉齋, 但用地名, 而無所嘉錫, 何也? 舊無記, 不可考焉.竊嘗惟孔子曰: "繪事後素." 子夏曰: "禮後乎." 朱子釋之曰: "禮必以忠信爲質, 猶繪事必以粉素爲先." 蓋忠信者, 禮之粉地; 儀節者, 禮之繪事.當日名齋之意, 雖則隨遇因境, 而行所無事, 亦安知不實出於尙質後文, 如先聖賢之敎乎? 夫齋者, 齊也, 行祭而致齊乎此也.今以祭禮言之, 悽愴怵惕, 如見如在, 忠信之質也; 尊俎籩豆, 升降拜跪, 儀節之文也.如不致如見如在之誠, 雖有儀文, 將安所施? 故曰: "不誠無物." 又曰: "禮不虛行." 是所當勉也.更有事在, 僉知公之樹勳國家、縣監公之治著民政, 以至郡事公之扶植綱常, 皆主忠信而成之.凡吾宗族之入是齋而致潔, 瞻封塋而追慕者, 自宅心出言, 至於處鄕酬世, 凡所以制行立身者, 罔不以先祖所務爲主, 知所先後於文質之間, 則是爲能享其祖也, 能念祖修德也.其爲齋名之嘉錫, 孰尙於此? 區區無狀敢以是記之楣間, 竊自附於發前未發之義, 願與僉宗共勖焉.齋之重修在己巳, 其爲元陵、仁陵, 不可詳, 而有當時六偉文, 其創則尤不可詳在何時云.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하는 것으로, 은(殷)나라가 망하려 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공자가 …… 하였다 《논어집주》 〈팔일(八佾)〉 제8장에 보인다. 성실하지 …… 된다 《중용장구》 제25장에 "성(誠)이라는 것은 물(物)의 처음이자 끝이니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을 귀하게 여긴다.〔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라는 구절이 보인다. 예는 …… 않는다 《논어》 〈팔일(八佾)〉 8장의 주에 "양씨가 말하기를 '단맛은 조미를 받아들이고, 흰 것은 채색을 받아들이며, 충신한 사람이라야 예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 바탕이 없다면 예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한다는 말씀이다.' 하였다.〔楊氏曰:甘受和, 白受采, 忠信之人, 可以學禮. 苟無其質, 禮不虛行, 此繪事後素之說也.〕"라는 말이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승재기 【임신년(1932)】 以承齋記 【壬申】 부안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 김(金)은 모두 천성적으로 선조를 사모하여 재실과 묘갈을 크고 웅장하게 하며 향사(享祀)에 진실하고 부지런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고 하였으니, 여론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우리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이 처음으로 영주(瀛洲 정읍)의 창동(滄東)에 거주하면서 대를 이은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한 지 200년이 지났는데, 호수는 겨우 40호뿐이었고, 일찍이 조정에서 봉록을 받은 사람이 없었으며, 아울러 전답이 이어지고 곡식이 쌓여 있는 집이 별로 없었으니, 비록 문학과 덕행이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선조를 사모하고 받드는 것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창동을 빙 둘러 장사지낸 선조는 여러 대가 지나 친진(親盡)45)하였고, 묘사(墓祀)를 지낸 지도 또한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난 신축년(1901)에 선군께서 재계를 다할 곳이 없음을 근심하시고 가옥을 팔아 재실을 마련할 것을 논의하여 거의 성사되려다 바로 중지되었다. 그러나 의론이 일어난 뒤로 또한 진실로 여러 종족의 마음속에 맺혀 있다가 25년이 지난 병인년(1926) 가을에 의논이 비로소 모두 같아졌다. 여러 신위의 묘와 거리가 균등한 곳을 취하여 본 마을 충의공(忠義公)의 묘 아래에 체사(體舍) 오량(五樑) 4칸과 문랑(門廊 대문과 행랑) 삼량(三樑) 5칸을 건립하였는데, 종중의 돈 200원과 두 종파에 배당한 돈 500원, 각 이름으로 낸 의연금 500원, 총 1,200원을 사용하였으니, 아, 힘이 다하였고, 또한 그럭저럭 갖추게 되었다.대저 사람이 선조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제사를 지내는 데에 재계를 다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며, 재계할 곳이 없으면 재계할 수 없으니, 이것이 우리가 재실을 힘을 다하여 짓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내가 《중용》 귀신장(鬼神章) 제3절의 뜻을 취하여 '이승(以承)'이라 편액을 달았다. 이 재실에 들어와 진실하게 공경하여 마치 선조가 앞에 계시는 듯 진실하게 공경하는 도리에 소홀함이 있다면 이는 재실을 세운 본뜻이 아니니, 공경히 생각하기를 바란다.또 생각건대, 제사를 지내는 것은 참으로 사람의 큰일이거니와 반드시 몸을 세우고 덕을 이루어서 조상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참된 효이고, 그 덕을 이루고자 한다면 성현(聖賢)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서는 말미암을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집안의 자제들이 강학하는 일도 또한 이 재실에서 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배워서 전 성현을 이은 경지에 이른 뒤에야 그 선조를 크게 드러내니, '이승'이라 한 것은 《맹자》 호변장(好辯章) 제12절의 뜻을 겸하여 취한 것이다. 이 재실에서 강학하면서 옛사람이 학문을 하는 방도에 전심하지 않는다면 그 이름과 뜻을 저버리는 것이 또한 클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바란다.아, 띠 풀로 지붕을 이고 흙으로 벽을 쌓은 이 하나의 집은 재력이 있는 사람이 웅장함과 화려함을 다하여 보기 좋게 지은 것과 비교하면 누추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 재실에 거처하는 자가 만약 제사를 지낼 때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안으로 선조를 잇고, 학문이 덕을 이루는 경지에 이르러 멀리 성현을 이을 수 있다면 그 가문의 창대한 명성이 장차 한 시대의 으뜸이 될 것이니, 조그마한 부귀의 녹속(祿粟)이 있고 없음을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종족의 후진들에게 깊은 바람이 있다.재실이 낙성된 뒤 7년, 임신년 정월 상순(上旬)에 나 택술이 기록하였다. 謂吾貫扶之金, 皆性於慕先, 豐壯齋碣、誠勤享祀, 甲於東方, 輿論然也.然惟我八世祖通德郞公始居瀛之滄東, 而後承之居此者, 年歷二百, 戶僅四十, 曾無立朝俸祿之人, 幷乏連田積粟之家, 雖其文行之不墜家聲, 至於慕先豐盛, 則末由焉.環滄而葬者, 累世親盡, 而墓祀亦已久矣.往在辛丑, 先君憂致齋之無所, 議買屋爲齋, 垂成而旋罷.然其議旣發, 亦固結于諸族心中, 越二十五年丙寅秋, 謀始詢同, 取累位墓道里之均, 就本里忠義公墓下, 立體舍五樑四間、門廊三樑五間, 用宗金二百圓、兩派排金五百圓、各名出義金五百圓、總一千二百圓也.噫, 其力殫矣, 亦苟完矣.夫人不祭祖非人; 祭不致齋非祭; 齋無其所, 不能齋.此吾齋所以不得不殫力而作也.故余取《中庸》鬼神章第三節之義, 扁之以以承.入是齋而有忽於誠敬如在之道, 則非立齋之本意也.其尙有以欽念哉.且惟祭固人之大事, 必也立身成德, 以顯其祖, 乃爲眞孝.欲成其德, 非學聖賢, 無由.故門子弟講學, 亦於是齋焉.蓋學而至於繼前聖, 然後大顯其先.其云以承, 兼取《孟子》好辯章第十二節之義也.講是齋而不專心於古人爲學之方, 則其辜負名義亦大矣.其尙有以警惕哉.噫, 此茅覆土築一箇屋, 視諸有力人致壯麗爲觀美者, 可謂陋矣.然居是齋者, 如能祭盡誠敬而內承祖先, 學至成德而遠承聖賢, 其家聲之昌, 將甲於一世, 規規富貴之祿粟有無, 何足道哉?余以是深有望於宗族後進云爾.齋成後七年壬申元月上旬日, 澤述記. 친진(親盡) 사당(祠堂)에 모시고 제사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 백성은 4대(代), 왕가(王家)는 5대가 넘으면 친진이 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분재토보송림기 【을유년(1945)】 粉齋土堡松林記 【乙酉】 맹자가 말하기를, "이른바 '오래된 나라[古國]'라 하는 것은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벼슬하는 신하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47)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비록 대를 이어 벼슬하는 신하를 주로 한 것이지만, 그 뜻을 궁구하면 오래된 나라에는 반드시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알 수 있다.나는 일찍이 이 구절을 읽고 "인가(人家)의 고족(故族)이 고족이 된 까닭은 서로 전해온 세덕(世德 대를 이어 쌓아온 덕)에 있고, 경관이 아름다운 조상의 선산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고족의 집과 무덤 옆에 또한 반드시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맹자의 뜻과 같다.우리 선조 첨지공(僉知公)과 현감공(縣監公) 두 대를 안장한 곳이 부안의 분토동(粉土洞)에 있고, 그 아래에 재실이 있는데, 재실 뒤에 있는 흙 보루와 소나무 숲은 외손 쌍백당(雙柏堂) 이충숙공(李忠肅公)48)이 본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에 장정들을 징발하여 축조하고 심어서 방어의 허술함을 보완한 것으로, 300년에 걸쳐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길러서 울울창창하였다.아, 이공은 명릉(明陵 숙종) 때 삼간신(三諫臣)49) 중 한 사람으로, 충직한 목소리가 조정과 재야에 진동하였다. 대저 충과 효는 일치하니, 외선조(外先祖)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도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미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 김씨(金氏)는 진실로 서로 전해온 세덕이 있는데, 외손으로 어진 이공을 얻었으니, 어찌 빛남이 있지 않겠는가? 또 그 분이 심은 높은 나무를 얻어 고족의 일단을 증험했으니, 어찌 거듭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대저 어찌된 일인지 근년 이래로 늙은 측백나무를 아끼고 애석하게 여기는 정50)이 점점 쇠퇴하고, 팥배나무를 베어내는 것에 대한 경계51)를 삼가지 않아서 거의 후산(後山)의 〈사정기(思亭記)〉의 염려52)를 범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여러 종족과 더불어 당시 이충숙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더욱더 아끼고 보호하여 큰 나무들이 더욱 많게 함으로써 이것을 본 사람들이 "효성스럽구나! 김씨여. 분암(墳菴 묘를 보살피기 위해 세운 암자)의 소나무조차 오히려 아끼는데, 하물며 그 선조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일컫기를 바라니,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이것이 선조를 생각하고 덕을 닦는 어진 후손이 되는 것이다. 어진 덕을 지닌 후손이 배출된다면 어찌 대를 이어 덕을 쌓아온 오랜 종족이 될 뿐이겠는가. 또한 장차 나라의 큰 나무가 될 것이고 대를 이은 신하가 될 것이다. 이에 기문을 짓는다. 孟子曰: "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之謂也." 此言雖主於世臣, 然究其意也, 故國之必有喬木, 則可知也.余嘗讀此而有言曰: "人家故族之所以爲故族者, 在世德相傳, 不在於祖山觀美." 然故族之家、丘壟之傍, 亦可知其必有喬木, 則若孟子之意也.我先祖僉知公、縣監公兩世之藏, 在扶安粉土之洞, 而其下有齋.齋後土堡松林, 外裔雙柏堂李忠肅公觀察本道時, 爲發民丁, 築之植之, 以補防虛疏者, 而歷三百年, 護養是松, 鬱鬱乎蒼蒼焉.於虖, 李公以明陵三諫臣之一, 忠直之聲, 震於朝野.夫忠孝一致, 致誠外先, 亦其孝親之推也.吾金氏固有相傳之世德, 而得李公之賢爲宅相者, 豈不有光? 又得其所植喬木, 以證故族之一端, 豈不重有辭乎? 夫何邇來, 老柏愛惜之情漸衰, 甘棠剪伐之戒不謹, 幾幾乎后山亭記之慮是犯, 可不懼哉? 願與諸宗深思當日李忠肅之意, 愈加愛護, 使喬木愈多, 觀者稱之曰: "孝哉! 金氏.墳菴之松, 猶愛之, 況於其祖乎? 苟能爾也, 是爲念祖修德之賢.賢德輩出, 豈惟世德之故族, 亦將爲國家之喬木、世臣也.是爲記. 이른바 …… 것입니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보인다. 쌍백당(雙柏堂) 이충숙공(李忠肅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로, 쌍백당은 그의 호이고, 충숙은 그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평(富平)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다. 1657년(효종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황해도ㆍ전라도ㆍ경상도 관찰사와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고, 세자빈객에 올랐으며,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저서로 《쌍백당집(雙柏堂集)》이 있다. 삼간신(三諫臣) 이세화와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양곡 오두인(陽谷 吳斗寅)을 말한다. 이들은 1689년(숙종15) 숙종(肅宗)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였을 때에 함께 강력히 반대하는 소장을 올렸다가 분노한 숙종의 친국을 받고 유배되었는데, 훗날에 이들을 충신으로 추앙하며 삼간신이라 일컬었다. 늙은 …… 정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은 백성이 가져야 할 우국충정을 뜻한다.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곁에 있는 오래된 측백나무를 보며 읊은 〈고백행(古柏行)〉에서 "제갈공명의 사당 앞 늙은 측백나무, 가지는 청동 같고 뿌리는 바위 같네.〔孔明廟前有老柏, 柯如靑銅根如石.〕"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팥배나무를 …… 경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선정(善政)을 베푸는 관리가 되도록 권면한 것으로, 주(周)나라 무왕(周武王) 때에 소공(召公)이 남국을 순행하며 정사를 다스리고 팥배나무 아래서 쉬어 갔었는데, 떠난 뒤에 백성이 그 덕화를 생각하고 그 나무를 사랑하여 지어 부른 "무성한 팥배나무를 베지 말고 꺾지 말라. 소백이 쉬시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敗, 召伯所憩.〕"에서 유래하였다. 《詩經 甘棠》 후산정기(后山亭記) 북송(北宋)의 문장가 후산(後山) 진사도(陳師道)의 〈사정기(思亭記)〉를 말하는 듯하다. 〈사정기〉는 진사도가 지은 글로 자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재실에서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10 思亭記》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순효비 이건기 【본손을 대신해서 짓다. 기묘년(1939)】 純孝碑移建記 【代本孫作. 己卯】 우리 선조 만휴당 선생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친이 등에 종기를 앓았을 때에는 입으로 고름을 모두 빼내어 낫게 하였고, 또 혀가 굽어지는 증세를 앓았을 때에는 동짓달에 제비가 날아오는 이변을 불러왔으며, 부모님의 상을 다해서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마 치셨다. 선조가 이를 듣고 가상하게 여기시어 본 고을의 남쪽 문 밖에 순효비(純孝碑)를 세우도록 명하시고 장악원 주부를 제수하자, 상소로 당시의 폐단을 진달하여 두터운 비답을 받았다. 사직으로 옮겨가서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날에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 홀로 상소하여 불가함을 말하여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올린 상소로 구원을 받고 풀려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창도하여 전쟁에 공이 있었고, 의곡(義穀)을 거두어서 행재소(行在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로 실어 보냈다.광해군이 즉위하였을 때에는 선생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전에 올린 상소를 혐의하여 순효비를 훼손하여 넘어뜨리고, 삼강록(三綱錄)에서 삭출하였으며, 자손들을 금고(禁錮)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감사 김공 존경(金公存敬)의 상소로 인하여 신원되고 금고에서 풀렸다. 정조조(正祖朝)에 비를 회복하라는 은전이 있어 현의 남쪽 5리에 있는 도동사(道東祠) 가까운 곳에 옮겨 세웠으니, 판서 서공 준보(徐公俊輔)의 비명(碑銘)이 있다.고종 갑술년(1874)에 충성과 효성이 뛰어나고 남다르다하여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하였고, 59년이 지난 임신년(1932)에 또 비를 옮겨 석동산의 취성재(聚星齋) 앞에 세웠으니, 종10대손인 나 택술의 추기(追記)가 있다.아, 선생이 평생 동안 세운 큰 절개에 대해서는 본래 선왕조 때에 포정(褒旌)한 것과 병필가(秉筆家)들이 찬양한 것이 있으니, 진실로 불초한 내가 감히 군더더기를 덧붙여 진술할 것이 아니지만, 다만 마음에 느낀 점이 있다.혼조(昏朝) 때에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당한 화가 참혹했으니, 천지가 청명해진 때에 선생이 수립하신 것으로 절혜(節惠)53)를 내려주고 후손을 등용하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도리어 그렇지 않았으니, 얻은 것이라곤 겨우 신원되고 금고에서 풀린 데에 그쳤다. 비석을 복구하라는 명과 삼품(三品)에 추증한 것도 또한 여러 세대가 지난 뒤에야 있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삼가 생각건대, 화를 당한 끝에 두려움에 처하여 본가의 심정을 위로 진달할 길이 없었고, 새로운 교화를 펼치는 초기에 정사를 다스릴 조목이 많아서 이러한 일에 미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니, 이것이 매우 한스럽다.비를 세울 때에 전후로 장소를 달리 정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처음 현의 관할구역 내 사통팔달의 길 근처에 정한 것은 만백성이 함께 보기를 바란 것이었고, 중간에 사원(祀院)의 학사 근처에 정한 것은 많은 선비들이 흥기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세상이 달라지고 일이 변하게 되어서는 마지막으로 선대의 묘소 아래 종족이 모이는 곳에 자리 잡은 것은 바로 한 가문의 자손들이 대대로 보고 느끼게 하는 지극한 마음 때문이었다.《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54)라고 하였으니, 무릇 선생의 자손들이 서로 더불어 이 비를 읽고 몸에 닦아 선생의 덕을 계승하고, 또 한 집안으로부터 고을로 미루어가고 세상으로 미루어간다면 만백성이 함께 보고 많은 선비들이 흥기하는 실상이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惟我先祖晩休堂先生, 天性至孝, 親患背疽, 口吮汁盡而瘳, 又患舌鉤, 致冬月鷰至之異, 內外之艱, 廬墓盡制.宣祖聞而嘉之, 命立純孝碑於本縣南門外, 除掌樂院主簿.上疏陳時獘, 蒙優批.移司直, 光海建儲日, 排門獨疏, 言其不可.竄濟州, 三司交章, 伸救得釋.壬辰之難, 倡義旅, 戰有功, 收義穀, 輸行在.及光海卽位, 先生已沒, 以前疏嫌, 毁踣純孝碑, 削出三綱錄, 禁錮子孫.仁祖改玉, 因監司金公 存敬疏, 伸冤解錮.正祖朝有復碑之典, 移竪於縣南五里道東祠傍近, 有判書徐公 俊輔碑銘.高宗甲戌, 以忠孝卓異, 贈通政大夫吏曹參議, 後五十九年壬申, 又移碑竪於席洞山 聚星齋前, 有從十世孫澤述追記.嗚呼, 先生生平大節, 自有先王朝所褒旌、秉筆家所揄揚, 固非不肖之所敢贅陳, 惟所感則有之.當昏朝之時, 先生身後之禍酷矣.及夫天地淸明之日, 以先生之樹立, 宜有節惠之賜、錄嗣之恩, 而顧乃不然, 所得者, 僅伸冤解錮而止, 復碑之命、三品之亦, 在於累世之後, 何也? 竊意其禍餘懾處, 本家之情, 無由上達, 更化之初, 政目多端, 而不暇及焉, 是可恨者深矣.乃若竪碑之前後異處則有以, 始之於縣治通衢之傍者, 欲萬姓之共覩, 中之於祀院學舍之近者, 欲多士之興起, 是固君師敎民作士之深意也.至於滄桑之餘, 時異事變, 則終而止於先世丘壟之下宗族聚斯之所者, 乃一門子孫世世觀感之至情也.詩不云乎? "無念爾祖? 聿修厥德." 凡爲先生之孫者, 相與讀斯碑而修諸身, 有以繩武乎先生之德, 旣又自一門而推及于鄕于世, 則萬姓共覩多士興起之實, 其亦在斯歟. 절혜(節惠) 시호(諡號)를 뜻하는 것으로, 《예기》 〈표기(表記)〉에 "선왕께서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되, 한 가지 선으로써 절취하니, 이름이 행실보다 지나친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 恥名之浮於行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너의 …… 닦을지어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사익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吳士益 辛巳 형은 혹 근래에 음성의 오진영이 선사의 신도비(神道碑) 비문을 지었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유숙(柳塾)의 객이었던 자가 그 글을 보고서 제가 알고 있던 사람에게 말하기를, "글 가운데 가평(嘉平)의 김평묵(金平黙)을 배척하고 선사(先師 임헌회)의 무함을 변론한 것으로 간옹(艮翁)의 대사(大事)로 삼았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그렇습니까? 그러나 선사의 비문을 지으면서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으로 대사를 삼지 않는다면 이는 대우(大禹)의 비문을 지으면서 치수(治水)를 대사로 삼지 않는 것과 같고, 또 맹자의 비문을 지으면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친 것을 대사로 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옳겠습니까? 오진영의 글에서 서술한 내용은 또한 그 자체로 맞는 말입니다. 【연전에 제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 "선사가 스승의 무함을 변론한 것은 평생의 대사였다."고 하였는데, 형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오진영의 글로 살펴보면 또한 형이 생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선사가 스승의 무함을 변론한 것이 대사임을 알았으면서 마침내 스스로 자기의 선사를 무함하여 인가를 내어 원고를 출간하는 것과 관련하여 심지어 "인가를 금한 유서(遺書)는 위조이다."라고 하기까지 하여 대죄(大罪)에 빠진 것은 깨닫지 못하였고, 다시 [완산 검찰]에 고소하는 재앙을 일으켜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을 대사로 여기는 동문을 일망타진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마음이고 무슨 견해란 말입니까. 너무도 괴이한 일입니다. 주자는 왕안석(王安石)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세상에는 자연히 바꾸지 못할 공론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86) 전재(全齋 임헌회)와 구산(臼山 전우)은 똑같은 현인이고, 가평의 제문과 음성의 편지는 똑같은 무함이고, 벗을 해치고 선사를 무함한 것은 동일한 죄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하늘이 그의 붓으로 그의 무함한 죄를 밝혀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공론을 만들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지금은 우선 그 글에 나아가 말할 따름입니다. 옛날 임동만(任動萬 임진재任震宰))이 신모(申某)의 행장(行狀)을 이용해서 전옹(全翁 임헌회)의 시호(諡號)를 얻고자 도모하였는데, 선사가 그것을 금하고 말하기를 "차라리 시호가 없는 것이 나으니, 신모의 행장은 쓸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87) 나는 오늘날의 일에 대해 또한 감히 말하기를 "차라리 신도비가 없는 것이 나으니, 오진영의 글은 쓸 수가 없다."라고 하겠습니다. 아, 사인(士仁)의 의리에 대한 몽매함은 동만(動萬)보다 지나치고, 나의 사람됨 또한 선사가 아니니, 금하고자 해도 그 방도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兄或近聞陰震之撰先師神道碑乎? 有客於柳塾者見其文,而言於弟之所知曰"篇中以斥嘉金而辨師誣,爲艮翁大事"云,未知信然? 然作先師碑而不以辨師誣爲大事,則是猶作大禹碑而不以治水爲大事,作孟子碑而不以闢楊墨爲大事,其可乎? 震文所叙,亦自得之.【年前弟與兄書,謂"先師辨誣爲平生大事",則兄不以爲然.今以震文觀之,亦可見兄之不思也.】但旣知先師辨師誣之爲大事,而乃自誣己師,以出認刊稿,至謂"禁認遺書爲僞造",而不覺陷於大罪,更起訴禍,網打辨師誣爲大事之同門人者.此何心何見? 絶可怪也.朱子論王安石事,而曰: "天下有自然不易之公論." 蓋全齋、臼山同一賢也,嘉誄、陰書同一誣也,害友、陷師同一罪也,則無乃天以渠筆明渠誣罪,使之自作公論也歟? 雖然今且就其文言之爾.昔任動萬之欲用申某狀而圖得全翁謚也.先師禁之曰: "寧可無謚號,申狀不可用." 弟於今日事,亦敢曰: "寧可無神碑,震文不可用." 噫! 士仁之昧義過於動萬,弟之爲人又非先師,則禁之而無其道,奈何? 주자는……하였습니다 주자가 1199년 8월 하순에 진사석(陳師錫)이 남긴 서첩과 진관(陳瓘)이 올린 표문을 소재로 삼아 왕안석의 학술 경향을 비판한 것인데,《주자대전(朱子大全)》권70〈독양진변의유묵(讀兩陳諫議遺墨)〉에 보인다. 이것과 관련한 김택술의 의론은 《후창집(後滄集)》 권7 〈여조자정(與趙子貞) 병자(丙子)〉에 보인다. 옛날……하였습니다 《간재집(艮齋集)前編)》 권2 〈여임경유(與任景孺)〉에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사익에게 보냄 신사년 (1941) 與吳士益 辛巳 일전에 석리(石里)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동(安東) 김승규(金昇圭)가 짓고 해평(海平)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쓰고 은진(恩津) 송규헌(宋奎憲)이 전(篆)을 한 봉열 대부(奉列大夫) 왕자사부(王子師傅) 유공(柳公) 신도비(神道碑)를 보았는데, 돌아와서 국법(國法)의 관계(官階)를 살펴보았더니, 봉렬 대부는 4품이었습니다. 나는 일찍이 한쪽의 사람들이 선사가 지은 소윤(少尹) 최공(崔公)의 신도비에 대해 "국전에 합치되지 않는다. 2품 이상이라야 신도비의 격식에 맞으니 갈(碣)로 고쳐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주자대전》 〈위재행장(韋齋行狀)〉에 "공은 통의대부(通議大夫) 정(正) 제 4품의 관직이 추증되었으니 격식에 맞춰 신도비를 세워야 한다."는 글과 장남헌(張南軒)을 위해 신도비문을 지은 일을 들어 【위재의 통의대부는 그래도 4품이 되었지만, 남헌은 낭서(郎署)에 불과하니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증거로 삼아 말하기를 "선사는 주자를 사법으로 삼은 것인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에 말하기를 "이것은 송나라 조정의 일이고 우리 조정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율곡 선생이 지은 저의 선조 승지공(承旨公)의 신도비 및 상국(相國) 민기(閔箕)가 지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신공(申公)의 신도비를 들어 증거로 삼아 말하기를, "선서는 율옹을 사법으로 삼은 것인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리고 민공은 한 나라의 총재(冢宰)로서 어찌 국법을 몰랐겠는가? 우리 조정의 일이 아니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피차가 국전 등의 여러 글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끝내 비와 갈에 대한 법식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또 "어떤 무엄한 자가 국전의 분명한 글을 보지 않고 감히 우리 선사가 손수 정한 본문을 고치는가?"라고 말하고는 내버려 두고 더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말하기를 "2품이 되어야만 비로소 대비(大碑)를 세울 수 있다. 수백 년 이래 우리나라의 사대부 집안이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찌 선사만 유독 최씨 일을 위하여 위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김씨, 윤씨, 송씨 세 집안의 혹은 부친이 대제학이 되고 자신이 판서나 직각이 된 자는 유독 우리나라의 사대부가 아니란 말입니까? 이들이 오히려 국법이 있는 줄 모르고 유씨의 집을 위해 글을 짓고 글씨를 썼겠습니까?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짓게 만드는 일입니다. 앞서 열거했던 사례들로 살펴보면, 애당초 최공의 비문에 대해 의론해서 안 됨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그가 마침내 감히 선사가 늙어서 살피지 못하고 두루 식견이 없어서 국법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꾸짖음을 범하였다고 하면서 선사가 손수 정한 본문을 멋대로 고쳤으니, 마음속에 선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마음은 더욱 어그러지고 손은 갈수록 교활해져 마침내 진주본(晉州本)에는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통분하게 하였습니다. 우연히 유공의 신도비를 보고 이런 생각이 난지라 애오라지 받들어 묻습니다. 日前石里歸路,見安東金昇圭撰海平尹用求書恩津宋奎憲篆奉列大夫王子師傅柳公神道碑,而歸考國典官階,則奉列爲四品矣.弟曾於一邊人之以先師所作少尹崔公神道碑,謂"不合國典,二品以上乃得爲神道碑之式,而改之爲碣也",據《朱子大全‧韋齋行狀》"公贈官通議大夫正第四品,準格當立碑神道"之文及爲張南軒作神道碑事【韋齋之通議,猶得爲四品,南軒之不過郞署者,尢不須言.】 以證之曰: "先師之師法朱子,有何不可乎?" 彼乃曰: "此宋朝事,非我朝事." 則吾又引栗谷先生所撰鄙先祖承旨公神道碑及閔相國箕所撰通政申公神道碑以證之曰: "先師之師法栗翁,有何不可? 閔公之爲一國冡宰,而豈不知國典乎? 而不是我朝事乎?" 旣又彼此徧考國典諸書,而終不得見碑碣令式,則吾又曰"何許無嚴者不見國典明文,敢改先師手定本文乎?" 而置不復道矣.彼猶曰: "二品始得爲大碑,數百年來國朝士大夫家無不皆然,何得先師獨爲崔氏事而違之乎?" 然則今之金、尹、宋三家,或父爲大提學,身爲判書、直閣者,獨非國朝士大夫乎? 而尙不知有國典而爲柳氏家作之書之乎? 眞令人可笑.蓋以以上所列觀之,初不當以崔公碑事設論也,章章明矣.彼乃敢謂先師老不省博無識,破國典犯人罵,而任改手本,是可謂心中有師乎? 於是乎心愈悖而手轉滑,終至無所不至於晉州本,眞令人可痛.偶見柳碑,念到于此,聊以奉質耳.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