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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찬구 우진에게 답함 계해년(1923) 答明粲九 宇鎭 癸亥 스승이 서거한 후로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요. 공산에 풀이 우거지고 가을 곡식이 익어 가는데, 어느덧 연사[練事 소상(小祥)]가 지나니 일신의 애통과 천추의 한이 확연(廓然)하여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천리 먼 곳의 편지를 받으니 어찌 편지를 읽고 눈물을 뿌리며 바람을 맞아 정이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스승을 그리는 애통한 정은 천성이니 천성은 내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각각 자신의 몸을 공경히 하고 상호 면려하여 선사의 학문을 지키고 반드시 돌아오는 태평시대를 기다리는 것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근일 제공의 행위를 보건대 혹 이를 도모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의견 차이를 인하여 끝내는 만촉(蠻觸)25)의 대립을 초래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운기(運氣)에 관계되고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지요. 일찍이 그 병통의 근원을 궁구해보니 기를 검속하여 이치를 좇지 못하고, 사사로움을 제거하여 공정함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 공정한 이치가 천하에 행하지 못한지가 오랩니다. 고명께서 스스로 근심하여 천루한 저에게 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닙니까. 요컨대 공정과 이치란 다만 일개 선(善)을 말할 뿐입니다. 마음을 비워 천하의 선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넓혀 천하의 선을 도우며, 마음을 고르게 하여 천하의 선을 보고 마음을 세밀하게 하여 천하의 선을 살피며 마음을 착실하게 하여 천하의 선을 실천하는 것이 기와 사사로움을 검속하고 제거하여 이치와 공정을 좇고 따르는 공부입니다. 진실로 능히 그럴 수만 있다면 어찌 덕이 나아가지 못할까를 근심하고, 제공이 그럴 수만 있다면 어찌 사도(師道)가 밝지 못할까를 근심하며, 천하 사람들이 그럴 수만 있다면 어찌 위육(位育)26)을 이루지 못할까를 근심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운기의 관섭(關涉)과 뭇 성품의 고르지 못함을 한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단지 가만히 자신을 닦아 나의 선을 다하고 나의 덕을 높일 뿐입니다.만물이 모두 화락하게 되는 기초는 나로 말미암아 세워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내가 뜻만 두고 이루지 못한 것을 들어 그대에게 드려서 과문(寡聞)한 나에게 묻는 뜻에 부응하니, 즐겨 듣고 깊이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山哭樑哀, 日月幾何? 空山草宿, 秋天穀升, 奄見練事之已過, 一體之痛, 千載之, 廓乎其罔涯也.乃於此時獲承千里書, 如之何不攬牋揮淚嚮風馳情也.嗚呼安仰之慟天也, 天吾無如之何矣.將恐將懼, 各敬爾身, 互相勉勵, 守先師之學, 待必返之天, 是爲盡在人之道也.竊觀近日諸公之爲, 乃或此之不圖.始因意見之參差, 終致蠻蜀之角立, 是亦運氣攸關, 非人力之致耶.蓋嘗究其病源, 由於不能撿氣而從理, 祛私而徇公也.噫公理之不行於天下也久矣.高明之所自憂而求之淺陋者, 亦非爲是耶? 要之曰公曰理, 只消道一善字是已.虛其心有以受天下之善, 廣其心有以與天下之善, 平其心有以觀天下之善, 細其心有以審天下之善, 實其心有以踐天下之, 是乃檢祛從循之功也.苟能爾也, 何憂乎德之不進, 諸公之能爾也, 何憂乎師道之不明天下, 人人而能爾也, 何憂乎位育之不遂也.雖然運氣之關, 衆性之不齊, 又非一人之所可如何? 只得闇然自修, 有以盡吾善而崇吾德焉.萬物一春之基, 未始不由我而立矣.區區有志而未能者, 擧而呈似, 以副問寡之盛, 想樂聆而深會也. 만촉(蠻觸) 장자(莊子)가 가상한 작은 두 나라 만(蠻)과 촉(觸)을 가리킨다. 장자의 설명에 따르면, 달팽이의 왼쪽 뿔에는 만씨(蠻氏)의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는 촉씨(觸氏)의 나라가 있는데, 서로 땅을 다투며 싸우다가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해서, 이후로 작은 이익이나 일을 가지고 부질없이 다투는 것을 풍자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莊子)》 〈칙양(則陽)〉 위육(位育)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될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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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찬구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明粲九 丙寅 저옹에 궁검을 통곡하고27) 세월이 얼마 되지 않아 또 용어(龍馭)가 승천하니28) 태평의 소망이 영원이 끊어졌고 어육(魚肉)의 참화가 장차 이르게 되었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르신 "만산 가운데서 통곡해도 오히려 부족하니 요컨대 구천(九泉) 아래 몸을 묻어야 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바람이나 쉽지 않은즉 오직 3년간 공경히 복상하며 망극한 애통을 풀어낼 뿐입니다. 한 쪽 의론에서 마땅히 복상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은 아마도 정미(1907년)에 선양을 받은 것이 따질 만하고 경술(1910년)에 나라를 잃은 것이 폄하할 만 하다고 여겨서 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절로 후세의 사가(史家)가 여하히 평가하는 일이지, 본국의 신민(臣民)이 감히 말할 바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송나라 휘종(徽宗)은 오국의 포로였으나 사마 박주변은 제복(制服)을 요청하였고, 남송의 고종(高宗)은 금나라의 신하이자 조카였지만 주자는 세실(世室)을 청하게 되었으며, 우리 인조(仁祖)는 성하(城下)의 치욕을 면치 못했지만 우암(尤庵)과 동춘당(同春堂) 제현이 조의 칭호에 이설이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복상반대의 설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미년의 선양(禪讓) 일은 내부의 적과 외부의 원수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상황(上皇 고종)의 강제명령에 핍박되어 사면할 수 없는 것으로, 일찍이 (황제를) 엿보거나 외람되게 도모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경술년의 일은 패망의 조짐이 점차 쌓여 이에 이르러 결과를 이룬 것으로, (고종) 자신이 초래한 것이 아닌즉 그 이른바 따질 만하고 폄하할 만 하다는 말은 감히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산양과 안락29)의 일을 인용하여 복상이 없음을 증명하는데,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산양은 땅을 별도로 분봉(分封)받은 것이 15년이고 안락은 온 집안이 낙양으로 옮긴지가 8년이라, 그 구신(舊臣)과 유민이 멀리 떨어져 소식이 통하지 않아 생사의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군주가 도성에서 거주하고 궁궐에 납시며 종묘의 향사(享祀)를 폐하지 않고 시종과 신료들도 의구한 것과는 다릅니다. 산양과 안락 두 분의 죽음엔 일체의 신민이 제복하고자 하여도 그 형세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위주(魏主) 조예(曺睿)는 오히려 산양을 위하여 소복을 입고 발상(發喪)하고 시호를 '효헌황제(孝獻皇帝)'라고 하였으니, 흉보(凶報)가 도착했다면 어찌 구신과 유민이 제복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선사(先師)의 경우 금일의 의론을 기다리지 않고 금일의 인심을 보지 않고도, 일찍이 3년 복을 마땅히 입어야 한다고 단정하셨으니 군자의 고견(高見)은 원래부터 스스로 정해졌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르기를 "옛 임금이 이미 훙(薨)하고 새 임금이 이어 조(殂)했다."고 하였는데, 훙조(薨殂) 두 글자는 일시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두 황제를 폄강(貶降)하는 실수30)를 느끼지 못한 것이니 급히 고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著雍之哭弓劒, 日月幾何, 又遭龍馭遽賓, 庶幾之望, 其永絶矣, 魚肉之慘, 其將至矣.來書所喩, 痛哭萬山中, 猶爲未足, 要之埋身九泉下者, 正吾人之願而未易, 則惟有虔服三年, 以洩罔極之痛而已.一種議論之謂不當服者, 似以丁未受禪之可議, 庚戌失國之可貶.然此則自有後世秉筆之權衡如何, 非本國臣民之所敢道也, 是故宋徽宗五國之俘虜, 而司馬朴朱弁卽議制服, 高宗金人之臣姪, 而朱子至請世室, 我仁祖不免城下之恥, 而尤春諸賢, 無異議於祖稱.此可以破其說矣.且也丁未事出於內賊外讐之脅迫, 上皇之强命而辭免不獲者, 非曾有覬覦冒圖之心.庚戌事, 由於積漸之敗亡, 至是結局, 而非自已以致之者, 則其所謂可議可貶者, 非惟不敢道, 亦不忍道也.或者至引山陽安樂事而證其無服, 則有大不然.山陽分地別封者十五年, 安樂擧家遷浴者八年, 其舊臣遺民, 落落隔遠, 聲息之莫通, 存沒之難的.有異乎今日, 吾君之居我都城, 御我宮闕, 而宗廟享祀之不替也, 侍從臣僚之依舊也.則其於山安二公之卒也, 雖欲一切制服, 其勢難也.然魏主叡猶且爲山陽素服發喪, 謚曰孝獻皇帝, 則凶報所到, 安有舊臣遺民終不制服之理乎? 至若先師, 則不待今日之商確, 不見今日之人心, 而早以當服三年爲斷, 可見君子高見元自前定也.來喩云舊君旣薨, 新主繼殂, 薨殂二字, 出於一時之未思, 而不覺貶降二帝之失, 亟改之如何? 저옹에……통곡하고 저옹은 십간 가운데 무(戊)를 가리킨다. 무오년(1918년) 고종의 서거를 의미한다. 용어가 승천하니 순종의 죽음인 듯하다. 산양과 안락 후한 헌제와 유비의 아들 유선이다. 폄강하는 실수 고종과 순종은 황제인데, 훙과 조는 제후의 죽음에 쓰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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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族弟希淑 甲戌 우리 아우는 근일에 학문사변의 공부가 다시 어떠한가? 여기 상황은 근래에 내 일신(一身)과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짐을 느낀다. 세밀하게 이 증세를 살펴보니 바로 도의(道義)에 대한 생각이 장차 가볍게 된다는 조짐이다. 대개 이는 방촌(方寸) 내에 본래 두 주인을 두고 두 가지 일을 아울러 주재함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증후(證候)를 마땅히 일찍 이겨내고 제거하여 부지불각 중에 가만히 자라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을 일러 "이것을 밝히는 것을 강이라고 한다[明此之謂剛]"라는 것이다. 만약 천천히 기다려 천취(遷就)하여 다스리고자 한다면 주기(主氣)는 약하고 객세(客勢)는 이미 강해져서 다스릴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다. 우리 아우는 본디 묻기를 좋아하고 또한 변론하기를 즐기니 혹 생각이 여기에 미쳤는가? (도의가) 그 행사(行事)에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의 스승을 높이고 무함(誣陷)를 변론하는 일이다. 지난번에 그대가 '우선 서서히 하자'고 말한 것들은 이제 모두 다시 변론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애초 반드시 이렇게 되기를 바라진 않았거늘, 끝내 이와 같이 된 것은 주객(主客)의 기세(氣勢)와 강약(强弱)의 분수를 일찍 변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우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김용승(金容承)의 고문(告文)이 나온 지 지금 이미 많은 해가 흘렀다. 비록 한둘의 곧바로 변론한 자가 있었지만, 우리 아우도 반드시 한마디의 표명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개 이 고문의 변괴는 가평의 김평묵이 지은 전옹(全翁 : 임헌회)의 제문(祭文)보다 못하지가 않다. 우리 아우는 이전에 이미 오진영을 성토했고 후일에 또 그 당여(黨與)까지 성토해서 사방에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다. 이렇게 그대의 이름을 모두가 아는데, 빠트리고 그 사이에 한마디 말이 없다면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말하겠는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단지 그만 둘 수가 없다. 대략 이렇게 언급하고 또한 근일에 스스로 깨달은 것을 개진하여 우리 아우가 더욱 힘쓰는 보탬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니 부디 살펴보고 아울러 회신을 바라노라. 吾弟近日問辨之工, 更復如何? 此狀比來覺得身家之念轉切.細察此候, 乃是道義之思將輕之漸.蓋方寸之內, 元不容有兩主而幷宰也.今此證候, 宜早克去, 不使潛滋暗長於不知不覺之中, 此之謂明此之謂剛也.若欲徐待遷就而治之, 則主氣弱而客勢已强, 無得治之日矣.吾弟固嘗好問, 而亦且樂辨, 或慮及此否? 其見於行事, 則今日吾輩尊師辨誣是也.往者其言姑徐徐者, 今皆不能復辨而止.其初未必欲其如此而終至如此者, 不能早辨主客氣勢强弱之分故也.未知吾弟以爲如何? 金容承告文之出, 今已許多年矣.縱有一二立辨者, 然竊以爲吾弟必不可無一言之表明.蓋此告文之變, 不下於嘉金祭全翁文.吾弟前旣討吳, 後又討其黨, 四方無不知名.以無不知名 而闕焉無復一言於其間, 則人將謂何? 於公於私, 俱不可但已.略爲及之, 且陳近日所自覺得者, 以爲吾弟有加無勉之助.幸爲察之, 幷望回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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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 김공 행장 경인년(1950) 華巖金公行狀【庚寅】 족제 기술(箕述)이 그 조부 화암공(華巖公)의 가장(家狀)을 안고 나를 찾아와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가장은 공의 조카인 경재(敬齋) 낙승(洛昇)이 찬술한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행장을 짓는다.공의 휘는 기현(璣炫), 자는 성우(聖佑)로 화암은 그 호이다. 김씨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 이부상서 휘 경수(景修)가 휘 춘(春)을 낳으니 춘은 부령 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졌다. 2대를 지나 휘 작신(作辛)이 부령군을 이어받아 봉해지니 부령으로 관향을 삼았다. 다시 2대를 지나 휘 구(坵)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으로 문장과 도의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들 휘 여우(汝盂)는 문한학사(文翰學士)로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인데, 원(元)에 들어가 성묘(聖廟)의 제도를 모사하여 강릉(江陵)에 서원을 만들었다. 5대를 지나 군사 휘 광서(光叙)는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니고 고향으로 완전히 물러났으니, 《충렬록(忠烈錄)》에 실려 있다. 3대를 지나 휘 직손(直孫)은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신도비를 지었다. 그의 아들 휘 석옥(錫沃)은 호가 매죽헌(梅竹軒)으로 진사가 되었으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는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선생이 묘갈명을 지었다. 그의 아들 휘 점(坫)은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의 문인으로 호가 매당(梅堂)이다. 진사가 되었으며 유일(遺逸)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명예와 절조를 갈고 닦아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 만사에서 "한 치의 철심(鐵心)이며 열 개의 향을 피운 듯."이라고 하였다. 8대를 지나 휘 영수(英洙)는 호가 성재(誠齋)로, 신재(新齋) 이도중(李度中)이 나라를 대표하는 훌륭한 선비라고 칭송하였으니, 공의 조부이다.부친의 휘는 문성(文性)이며, 모친은 고흥 유씨(高興柳氏) 영노(永老)의 따님과 의성 김씨(義城金氏) 관운(寬運)의 따님이다. 의성 김씨가 공을 12달 뱃속에 지니다가 순조 경인년(1830년) 5월 11일에 낳았다. 공은 골격이 준수하고 기상이 위엄이 있었으며 본성은 순후하고 추향은 올발랐다. 이를 갈 예닐곱 살 때부터 일을 처리함이 하늘이 낸 것처럼 자연스러웠으며, 세 형 두 누이 두 아우와 공손하고 우애함이 지극하여 어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나이 겨우 10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슬퍼하였으며, 연이어 모친상을 당하여 부친상처럼 슬퍼하니 사람들이 대련, 소련36)이라 칭하였다. 불행하게도 세 형이 차례대로 먼저 타계하자 부모상 때와 다름이 없이 애통해 하였으며, 여러 조카들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가르치고 양육하였다.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봉렴(鳳濂)의 따님으로 난치병을 앓아 사람들이 부인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불쌍하게 여겨 밤낮으로 정성으로 간호하여 정기를 회복하기를 기다리면서 끝내 버리지 않고 인하여 두 아들을 낳아 키우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선을 쌓아서 생긴 경사라고 하였다. 부인이 죽자, 우연히 두 아우들도 모두 홀아비가 되었는데 겨우 한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 세 집이 재산을 합쳐 같은 상에서 식사하고 같은 이불에서 자면서 경전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혹은 바둑과 술을 즐기면서 매우 화기애애하게 지냈으며, 또한 온화한 기운으로 집안의 여러 조카들을 대하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시비를 분별하고 의리를 지킬 때는 명백하고 곧으며 엄정하여 비록 맹분과 하육37)이라도 앗을 수 없었다. 공이 후진을 가르칠 때는 차근차근 정성을 다하여서 학문을 싫어하지 않게 하였으며 날마다 선으로 옮겨가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하게 하였으니, 문하에 찾아와서 성취한 자가 적지 않았다. 이것이 공의 평생 행적으로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를 돈독하게 한 대략이다.공은 홍릉(洪陵)38) 무자년(1888년) 12월 16일 타계하였으니, 정읍군 이평면(梨坪面) 궁동(弓洞) 선영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의 묘는 영원면(永元面) 탑촌(塔村) 남쪽 산기슭 묘좌의 언덕에 있다. 큰 아들 낙환(洛恒)은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덕을 이어받고 집안을 잘 다스렸다. 둘째 낙회(洛回)는 공의 아우 석현(奭炫)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낙환은 전주(全州) 이병규(李炳奎)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경술(慶述)과 판술(判述) 두 아들을 낳았는데, 판술은 공의 세 번째 형의 아들 재덕(在德)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형재(炯才), 형렬(炯烈), 형규(炯奎)는 경술의 아들들이다.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이다."39)라고 했으니 대저 선비가 학문을 하는 것은 성인을 배우려는 것이니, 성인이 성인이 된 까닭은 인륜을 다했기 때문이다. 공이 인륜과 의리에 독실함이 이와 같으니 신실한 마음으로 성인을 공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사(子思)는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한다."40)라고 했는데, 공은 인륜에 독실함이 더욱 부부 사이에 있으니, 도한 성인의 요도(要道)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의 시문을 보면 분명하게 이치가 순하고 환하게 빛이 나니, 생각하건대 공자가 가르친 문과 행 두 가지에 수레바퀴나 날개처럼 공부를 한 것을 미뤄볼 수 있다. 이는 글로 써서 행장으로 기록할 만하다. 族弟箕述, 抱其王考華巖公家狀, 請狀行文於余.家狀, 公之從子敬齋洛昇撰也, 乃據而爲文曰: "公諱璣炫字聖佑, 華巖其號也.金氏, 新羅敬順王之後, 高麗吏部尙書諱景修, 生諱春, 封扶寧府院君.再傳而諱作辛, 襲封扶寧君, 以扶寧爲貫.再傳而諱坵, 平章事, 文貞公文章道義聞天下.子諱汝盂, 文翰學士忠宣公, 入元摹聖廟制度, 創立江陵.五傳而至郡事諱光叙, 麗亡, 志存罔僕, 大歸貫鄕, 載《忠烈錄》.三傳而諱直孫, 僉正贈都承旨, 栗谷李先生撰神道碑.子諱錫沃號梅竹軒, 進士贈參判, 高峰奇先生撰碣銘.子諱坫, 一齋李先生門人, 號梅堂, 進士逸參奉, 砥礪名節, 不樂仕進, 重峯趙先生挽曰: "一寸鐵十炷香." 八傳而諱英洙號誠齋, 李新齋度中稱以一國善士, 公之祖考也.考諱文性, 妣高興柳氏永老女, 義城金氏寬運女, 孕脤公十二朔而生於純廟庚寅五月十一日.骨格俊秀, 氣像嚴威, 性度純厚, 趨向正直.自齠齔處事天成, 與三兄二姊二弟, 恭友俱至, 見稱於長老.年甫十歲, 遭外艱, 哀毁如成人, 連丁內憂, 一如前喪, 人稱大小連.不幸三兄, 次第先歿, 痛悼無異親喪, 誨育諸姪, 一如己出.夫人, 全州李鳳濂之女, 有貞疾, 人皆謂難宜其室, 公矜憐之, 晝宵曲護, 待其回精復氣而終不去, 因育二子, 鄕黨咸稱積善餘慶.及其喪, 偶與二弟俱鰥居, 僅娶一子, 三家合産, 食同案寢共被, 間談經義, 或對棋酒, 有大和之氣, 處群從接賓客, 亦一以和氣.至於辨是非守義理, 白直森嚴, 雖賁育不能奪.其訓後進, 諄諄懇懇, 使之不厭, 日遷善而不知其由, 及門而成就者不少, 此公生平行治正倫理篤恩義之大槩也.考終于洪陵戊子十二月十六日, 葬于本郡梨坪面弓洞先塋艮坐原.夫人墓, 在永元面塔村南麓卯坐原.長子洛恒, 承襲庭訓, 肖德克家.次子洛回, 出爲公弟奭炫後.洛恒, 娶全州李炳奎女, 生二男慶述·判述, 判述出爲公第三兄子在德後.炯才·炯烈·炯奎, 慶述男也.孟子曰: "聖人, 人倫之至也." 夫士之爲學, 欲學聖人, 聖之所以爲聖, 以其盡倫也.公之敦於倫義, 旣如此, 則可謂實心學聖矣.子思曰: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公之敦倫, 尤在夫婦, 則亦可謂得學聖之要道矣.且觀公之詩文, 犂然理順, 燁然有光, 想見其於孔子所敎之文行二者, 輪翼用功矣, 是可具書而以爲狀也." 대련, 소련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서 "소련과 대련이 거상(居喪)을 잘하여 3일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3개월을 해이하게 하지 않고, 1년을 슬퍼하고, 3년을 근심하였는데, 이들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맹분과 하육 맹분과 하육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장사인데, 맹분은 맨손으로 쇠뿔을 뽑았다고 하고 하육(夏育)은 1000균(鈞)의 무게를 들어 올렸다고 한다. 《後漢書 卷28 桓譚列傳》 홍능 고종의 능으로 여기서는 고종을 가리킨다.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이다 《맹자》 〈이루상(離婁上)〉에 보인다. 군자의……시작한다 《중용장구》 제12장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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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천 김공 행장 을축년(1925) 鶴川金公行狀【乙丑】 대한 광무(光武) 경자년(1900년), 신축년(1901년) 즈음에 간재(艮齋) 전우(田愚)41) 선생이 호남에서 도를 강론할 때 학천(鶴川) 김공은 당시 흰머리 노인으로 힘든 길을 걸어 월명(月明)과 봉서(鳳棲) 사이에서 종유하다가 마침내 종이와 폐백을 갖춰 스승의 예로 뵈었다. 공의 나이 당시 59세로 선생보다 2살 아래였는데, 선생이 그 도를 믿음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함을 가상하게 여겨 이윽고 진심으로 좋아하여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식자들은 말하기를 이십 년 이래로 많은 호남 학자들이 선생을 찾아와 배운 것은 공이 그 시작을 열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공의 타계하였을 때 선생이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내가 예전에 남주에 이르렀을 때 而余昔日到南州문득 처음으로 정자 스승 삼던 원명을 만났어라.42) 忽遇原明首事涪80년 동안 순수한 기운 八十年來純氣味백천재에서 좋은 벗과 노닐었지. 百千齋裡好朋遊이는 대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공의 아들인 진하(鎭夏)가 사실을 기록한 작은 책자 한 두루마리, 유고 세 책, 세계(世系) 한 책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불초는 글을 잘 짓지 못하여 선인의 행장을 초를 잡지 못하니, 비록 대단히 한스럽지만 다행히도 그 누구보다 선인을 잘 아는 어른이 있으니 원컨대 행장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했다. 조용히 생각하건대 공은 나와 동문이 된 지 20년이 되었으며, 또한 선친께서 칭송하신 덕성과 언동과 조예와 행업이 상세하지 않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중년 이전의 뜻과 행실은 고향 장로들의 견문과 유고의 수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충분히 실제 기록의 미비함을 보충할 수 있다. 돌아보건대 비록 내가 글을 잘 짓지 못하여 제대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공을 삶을 형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공의 휘는 형재(衡載), 자는 권중(權), 호는 학천이다.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羅敬順)의 왕자인 의성군 석(錫)에서 나왔다. 고려 태자첨사(太子詹事) 의성군(義城君) 용비(龍庇)는 백성들에게 큰 공덕을 세워 의성에 사당을 세워 제향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거익(居翼)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는데, 조선에 들어와 누차 우의정으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미(湄)는 직제학(直提學)으로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뒤에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운추(運秋)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는데,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교리의 아들 전현(傳顯)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이다. 부인 최씨가 세 아들 영(穎), 호(顥), 이(頣)를 거느려 호서의 문의(文義)에서 남쪽인 고부(古阜)로 와서 거주하였다.호(顥)는 부호군(副護軍)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참판 김석옥(金錫沃) 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다. 제민(齊閔)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시 정(軍器寺正)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강(忠剛), 호는 오봉(鰲峰)이다. 제안(齊顔)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문인으로 효행과 학문, 덕행이 사림의 모범이 되었으니 호는 죽헌(竹軒)이다. 셋째는 제삼(齊參)이다. 제맹(齊孟)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막내는 제남(齊南)이다. 각 형제의 자질(子姪)은 번창하여 호남의 명문가가 되었다. 죽헌은 공에게 10대조가 된다. 죽헌의 아들 성(晟)은 진사로 효행이 있었으며, 갑자년(1624년)43)에 의병을 일으켰다. 손자인 지서(地西)는 또한 효성과 학문이 있었는데, 갑자년과 병자년의 난리에 모두 의병을 일으켰다. 제운(濟運)과 창좌(昌佐)는 공의 조부와 증조로 또한 효성으로 알려졌다.부친은 인규(麟奎)이며, 모친은 남양 홍씨(南陽洪氏) 경철(景喆)의 따님으로 헌종 계묘년(1843년) 3월 28일에 우덕면(優德面) 학전리(田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대개 그 선대에 뛰어난 덕과 굳센 절조가 쌓였다가 공에게 전해졌으니, 영지(靈芝)는 참으로 그 뿌리가 있는 법이다. 사실의 기록에 "여러 곳의 선영을 세력가에게 빼앗겨 통곡하여 송사를 벌였으나 결국 돌려주게 되었으니, 집안 살림이 이로 인해 탕진되었다. 손수 농사짓고 나무를 하면서 간간이 경전을 읽었으며, 짚신을 짜서 어버이 음식과 제수를 마련하였다."라 하였으니, 사물은 정해진 운수가 있으므로 요컨대 계속해서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대응한 것이다. 항상 자손들을 훈계하기를 "음해하는 죄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악보다 크다. 선인도 간혹 후손이 없는데 이는 선대에 음해한 죄가 미쳤기 때문이다. 조심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또한 '빈부는 하늘이 정한 것이니, 하고픈 것이 결백하지 않으면 도리의 재앙의 해를 당하니, 마땅히 분수를 지키고 부지런하며 미리한다.[守分勤豫] 네 글자를 항상 마음에 담아둔다면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 아! 자질이 곧은 사람이 세상에 드물구나."라고 하였으니, 이런 말들을 본다면 그의 인물됨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공이 젊었을 때 과거공부를 익혔으나 곧바로 그만두고서 도학을 뜻을 두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44) 공을 찾아뵙고서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어 가문을 드날려라.'는 말을 들었다. 얼마 지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45) 선생이 덕이 높고 학문이 올발라서 세상의 유종(儒宗)이라는 것을 들었으나 그의 문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에 그의 문인 미재(薇齋) 정재필(鄭在弼), 춘산(春山) 정학원(鄭學源), 직헌(直軒) 김종순(金鍾順), 경당(敬堂) 유상준(柳相浚) 등과 학문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봄가을로 부풍(扶風)과 영주(瀛洲)46) 사이에서 강회를 열어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 일찍이 이상한 병에 걸려 4~5년을 치료하였으나, 이에 마음을 편히하고 분수를 지키며 진기를 조섭하여 기르니 두어 해 지나 병이 절로 나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예에 맞게 장사를 치렀으며 장서(葬書)를 보고서 마침내 손수 부모의 묘를 정하니 사람들이 그 지성에 감복하였다.내가 삼가 보아서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하면, 공은 입지(立志)가 견고하여 가난과 질병, 어려운 일을 실컷 겪으면서도 줄곧 마음씀씀이를 변하지 않았다. 진실된 마음은 안과 밖의 구분이 없었으니, 타인과 상대할 때 서로 경계를 짓지 않았으며 겉치레를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은 어눌하고 더듬거려서 잘 못하는 것 같았으나, 요컨대 자신이 경험하거나 연구한 것에서 꺼내어 함부로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가짐은 단정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늙어갈수록 더욱 정력이 굳건하여 옥 같은 광채가 청랑(淸郞)하였으며 앉거나 설 때 똑바르고 곧았다. 자신의 몸에 들이는 것은 검소하고 절약하여 거처와 복식은 대략만 갖추어 변변치 않았으나 또한 재물을 조금 남겨서 대비하기를 요하였다. 오호라! 이것은 모두 군자가 독실하며 청진(淸眞)한 덕이라 하겠다.그의 학문에 대해 말하자면, 한결같이 성실과 근면을 위주로 하며 경전 이외에 성리의 중요한 책을 모두 손수 베껴서 매우 많이 읽어 줄줄 외웠다. 경전의 의미가 의심스럽거나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없으면 깊이 사색하여 깨닫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서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으니, 요컨대 돈독하게 스승의 말을 믿어서 어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근사록(近思錄)》의 편목을 모방하여 고금의 격언과 선행을 모아서 《근행록(近行錄)》이라고 하였으며, 중간 중간에 자신의 말을 덧붙였으니 모두 학자에게 절실하고 타당한 것이다. 자신이 쓴 서문에서 "옛날 성현의 행실은 모두 경에 기본 하였으니, 경은 마음의 주재요 만사의 강령이다. 어찌 이에 마음을 다하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또한 많은 선비를 거느려서 영주강계(瀛洲講契)를 만들었으니, 그 규례가 엄격하여 자못 실제 효과가 있었다. 그가 지은 계안(契案)의 발문에서 "경으로 근본을 삼아서 엄숙하고 정제(整齊)한 상태에 몸을 두며 허명(虛明)하고 정일(精一)한 경지에 마음을 머무르며 경전을 궁구하고 의리를 강론함으로 보태서 그 앎을 지극히 하며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기고 성을 높여서 그 실제를 실천함으로 마쳐야 하니, 이 네 가지는 천고에 전해 내려온 지결이다."라고 하였으니, 오호라! 경에 거하고 이치를 궁리하며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성학의 요점이다. 공이 말한 천고에 전해 내려온 지결이란 것이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경은 또한 성학의 처음과 끝을 이루고 위와 아래를 관통하니 공이 말한 마음의 주재요 만사의 강령이라고 한 것이 더욱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이에서 공의 학문이 요점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바른 죽음' 한 구절에 대해서 더욱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대저 증자의 역책은 오히려 촛불은 잡은 동자가 대자리가 화려하고 깨끗하니 바꾸라는 청을 기다렸는데,47) 공이 이에 병이 위독한 지 오래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직접 일어나 목욕하고서 "죽은 뒤에 더러움으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종이와 붓을 찾아 유언을 써서 둘째 손자인 용락(庸洛)에게 주었으니, 그 대략을 들어보면 "인심은 다만 위태롭고 도심은 다만 은미하니, 스승을 택하고 벗에게 물으면서 의리를 강론하고 변론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기를 깊이 바란다."라고 하였다. 붓을 놓고서 자리에 누워 돌아가셨으니, 실로 임술년(1922년) 3월 13일로 80여 살의 수를 누렸다. 공은 비록 받은 기운이 강명(剛明)하여 남들보다 매우 뛰어났지만 올바르게 수양한 것이 이에 드러났다.모월 모일 임시로 우덕면 상학리(上鶴里) 서쪽 산기슭 모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흥성 장씨(興城張氏) 정휴(鼎休)의 따님이고 계비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진하(鎭夏)의 따님이다. 전주(全州) 최병귀(崔秉龜)는 장씨 소생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진렬(鎭烈)과 연안(延安) 이돈녕(李敦寧)에게 시집간 딸은 유씨 소생이다. 장남의 아들은 철락(喆洛), 용락(庸洛)이며 딸은 노진기(魯鎭)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아들은 근락(近洛), 상락(相洛), 재호(在浩)이다. 사위 최병귀의 아들은 직렬(直烈)이며, 사위 이돈녕의 아들은 의길(儀吉)이다.《서경》에서 "생각을 시종 학문에 둔다."48)라고 하였으며, 주자는 "한번 숨 쉬는 사이라도 오히려 이 뜻을 두고서 조금도 게으르지 않는다."49)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의 평생의 뜻을 적시한 말로,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옛날 이천(伊川)이 소강절(邵康節)의 묘지(墓誌)를 지으면서 "안락하게 거처하면서 완전히 성취하였다."는 한 마디 말로 핵심을 드러내었으니, 나는 《서경》과 주자의 두 마디 말로 또한 핵심을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오호라! 공이 돌아가신 지 네 달이 되었으니, 태산이 무너진 듯하다. 태산이 무너진 뒤에 음기가 하늘에 뻗쳐 도가 곧 망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공은 겸손하여 인화한 가운데서도 빼앗을 수 없는 굳센 절조와 강인한 의리를 지녔으며 우뚝한 치덕으로 동문들의 존망을 받았으니 만약 공이 오늘날 계셨더라면 반드시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듯이 정론을 주장할 것이며50), 사특한 무리들을 호랑이와 표범이 산에 꼼짝 못하듯이 내쫓았을 것이니 스승의 문을 빛내고 세도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에서 일어날 수 없으니, 슬프도다. 그러나 공의 풍운은 사라지지 않아서 장남 효근(孝謹)에게 그 전형이 남아 있으며, 용락(庸洛)이 또한 젊은 나이에 학문에 열중하면서 조상의 한 일을 계승하는데 뜻을 두었기에 연관해서 기록하여 공의 의방(義方)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을 아울러 드러내어 세상의 붓을 잡은 대가에게 고한다. 大韓光武之庚辛年間, 艮齋田先生講道于湖南, 鶴川金公, 時以老白首, 間關從月明鳳棲之間, 卒具書贄, 以師禮見.公之年, 蓋五十有九, 而少先生二歲, 先生嘉其信道之老彌篤, 旣心好而終身矣.識者謂'二十年來, 湖南學者之輻進先生, 未始非公之啓之也.' 公之沒也, 先生有誄曰: "而余昔日到南州, 忽遇原明首事涪.八十年來純氣味, 百千齋裡好朋遊." 蓋記實也.公之嗣子鎭夏, 以事實小錄一紙遺稿三冊世系一冊, 示澤述曰: "不肖無文, 不能草先人全狀, 雖甚恨, 幸有知先人深者莫如子, 願有以狀之也." 竊惟公爲余同門二十年, 而又先君之所善其德性言動造詣行業, 謂之不詳則未也.中年以前志行, 鄕長老見聞遺稿之手記在, 足以補實錄之未備, 顧雖人文之非堪, 庶可以狀公也.公諱衡載字權中, 鶴川號也.義城氏, 出新羅敬順王子義城君錫.高麗太子詹事義城君龍庇, 有大功德於民, 立祠義城而祀之.玄孫居翼, 政堂文學, 本朝累以右議政徵之, 不起.子湄, 直提學, 端廟遜位後不仕.子運秋, 文科校理, 文行藉甚.校理子傳顯, 司醞署直長, 夫人崔氏, 率三子穎·顥·頣, 自湖西之文義, 南來居古阜.顥, 副護軍, 贈刑曹判書, 娶叅判金公錫沃之女, 生五子.齊閔, 文科軍器寺正, 壬亂倡義, 贈吏判, 謚忠剛號鰲峰.齊顔, 河西金先生門人, 孝學德行, 模楷士林, 號竹軒.齊參.齊孟, 兵判.齊南.各房子姪蕃衍, 爲湖之望.竹軒於公, 十世祖也.竹軒子晟, 進士, 有孝行, 甲子倡義.孫地西, 亦有孝學, 甲丙之亂, 俱擧義.曰濟運, 曰昌佐, 公之祖曾, 亦以孝聞.考麟奎, 妣南陽洪氏景喆女, 以憲廟癸卯三月二十八日生公于優德面鶴田里第.蓋其先世偉德茂節之積, 而傳至于公, 靈芝信有根矣.實錄曰: "數處先隴, 見奪於勢家, 痛泣訟還, 而産業因此蕩殘.手自耘樵, 間讀經傳, 織屨以供親饌祭需." 物有定數, 要繼續適用.常訓子孫曰: "陰害之罪, 大於人知之惡.善人間或無後, 先世陰害之罪延及也, 可不愼哉." 又曰: "貧富天定, 所欲不明, 反爲禍害, 當以守分勤豫四字, 恒存胸中, 則可得保家矣.噫, 寂寥矣質直矣." 觀此, 可以三隅也.公之少也, 治擧文而旋卽棄之, 有志於道學, 拜蘆沙奇公正鎭, 聞'杜門讀書以揚門戶'之語.旣而聞全齋任先生德尊學正, 爲世儒宗, 而未及詣門, 乃從其門人鄭薇齋在弼·鄭春山學源·金直軒鍾順·柳敬堂相浚, 麗澤相資, 春秋會講于扶風瀛洲之間, 課年以爲常.嘗嬰奇疾, 刀圭四五載, 乃安心守分, 調養眞氣, 數年疾自瘳.其遭內外艱, 執喪如禮, 觀葬書, 竟手占二親墓, 人服其至誠.若乃澤述之所竊觀而心識者, 則其立志也, 堅確, 歷盡貧病憂難, 而終始不渝用心也.眞實無表裡, 與人袪畛域邊幅.發言也, 訥吃若不能, 要出經歷硏究而不可易.律身也, 整整自持, 老益精剛, 符彩淸朗, 坐立端直.自奉也, 儉約, 居處服食, 苟完無長物, 然亦要稍贏有備也.於乎, 旣皆君子篤實淸眞之德也.至言其爲學也, 則一以誠勤爲主, 經傳以外, 性理要書, 皆手自鈔, 劇讀熟誦.凡有經疑理晦, 極意思索, 不得不措, 俛焉日有孜孜, 不知年數之不足, 而要歸篤信師說而不違也.公嘗倣《近思錄》篇目, 輯古今格言善行, 名曰《謹行錄》, 間附己說, 皆切近的當.其自序有曰: "古之聖賢之行, 無一不在於敬.敬, 是一心之主宰, 萬事之綱領也, 盍於此盡意." 又倡率多士, 設瀛洲講契, 規例嚴密, 頗有實效.其所作契案跋曰: "以敬爲本, 置身於嚴肅整齊之地, 留心於虛明靜一之域, 輔之以窮經講義以致其知, 究竟于克己尊性以踐其實, 四者, 千古相傳之旨訣也." 嗚呼, 居敬窮理踐履, 固聖學之要.公所謂千古相傳之旨, 其不信然乎.敬, 又聖學之成始終徹上下, 公所謂一心主宰, 萬事綱領者, 尤不信然乎.於此, 可見公之學得其要矣. 至於'正終'一節, 尤有大焉.夫以曾子之易簀, 猶待乎執燭者華晥之請, 而公乃於寖革之久, 垂盡之際, 親起沐浴曰: "不以死後, 垢穢勞人." 又索紙筆書遺戒, 與次孫庸洛, 畧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擇師問友, 講義辨論, 不墜家聲, 是所深望." 釋筆就臥而逝, 實壬戌三月十三日也.壽八十雖.其禀氣剛明, 有大過人者, 而所養之正, 於是乎著矣.以某月日, 權葬于優德面上鶴里西麓某坐原, 配興城張氏鼎休女, 繼配高興柳氏子鎭夏女.全州崔秉龜妻張氏出, 鎭烈, 李敦寧妻柳氏出.長房男喆洛·庸洛, 女魯鎭基.次房男近洛·相洛·在浩.崔壻男直烈, 李壻男儀吉.傳說曰: "念終始, 典于學." 朱子曰: "一息尙存此志, 不容少懈." 蓋迹公生平之志, 斯其人也歟.昔伊川之狀康節也, '得安且成'一語而成之, 余於傳朱二語之得, 亦敢云爾也.嗚呼, 公沒四朔, 泰山頹矣.山頹之後, 陰沴漲天, 而道將亡矣.念公謙謙仁和之中, 有介然之操, 毅然之義, 不可奪者, 巋然齒德, 又居同門尊望, 使公而在今日者, 必能主張正論, 若鳳鳴朝陽, 屛伏邪徒, 如虎豹在山, 于光師門, 有裨世道也, 而九原不可作, 悲夫.雖然公之風韻不斬, 嗣子孝謹, 典型有在, 庸洛又妙年向學, 志存繼述, 牽連書之, 幷見公義方之及, 以告世之秉筆大人. 간재 전우 1841~1922.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이다. 재야에서 학문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暀嶝島)·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으며, 부안·군산 등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정자……만났어라 원문의 '부(涪)'는 송(宋)나라의 대학자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권세가의 눈에 거슬려 부주(涪州)로 유배되었다. 원명은 여희철(呂希哲)의 자로, 정이(程頤)와 나이가 서로 비슷하였지만, 정이의 학문을 깊이 존경하여 나중에는 스승으로 섬겼다. 갑자년 인조 1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가리킨다. 노사 기정진 1798 ~ 1879. 본관 행주(幸州), 자 대중(大中), 호 노사(蘆沙) 시호 문간(文簡)이다. 1842년 관직에 잠깐 나아갔으나 일주일만에 사직하였다. 40세 이후 그에게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그가 살았던 전라도를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수학하였다. 그의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다. 46세에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저술하였으며 이후 송대(宋代)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였다. 전재 임헌회 1811~1876. 본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 ·전재(全齋) ·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기(理氣)이원론(二元論)을 배격, 기(氣)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원론적인 주기파(主氣派)에 속했다. 저서로는 《고산문집(鼓山文集)》 《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부풍과 영주 부풍은 부안의 옛 이름이고 영주는 정읍의 옛 이름이다. 증자의……기다렸는데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증자(曾子)가 병으로 누웠는데, 증원(曾元)이 발치에 앉아 있었다. 동자가 촛불을 잡고 구석에 앉으면서 말하기를, '화려하고 깨끗합니다. 대부(大夫)의 자리입니까?' 하니, 증자가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계손씨(季孫氏)가 나에게 준 것인데, 내가 미처 바꾸지 못하였다. 원(元)아, 일어나 자리를 바꿔라.' 하니, 증원이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병이 위중하니 바꿀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아침이 되면 삼가 바꾸겠습니다.' 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함이 저 동자만 못하구나.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으로써 하고, 소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장에 탈 없이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할 뿐이다. 내가 무엇을 구하겠느냐? 나는 바른 것을 얻고 죽는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吾得正而斃焉 斯已矣]' 하였다 생각을……둔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니, 생각을 시종(始終) 학문에 두게 되면 자신의 덕이 닦아짐이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惟斅學半, 念終始, 典于學, 厥德修罔覺.]"라고 하였다. 한번……않는다 《논어》 〈태백(泰伯)〉의 "죽은 뒤에 그만둔다.[死而後已]"라는 구절에 대해 주자의 해석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봉황이……것이며 '조양(朝陽)'은 해가 처음 떠오르는 산의 동쪽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재덕이 출중한 인재가 조정에서 직간(直諫)하는 것을 비유하는 '조양봉명(朝陽鳳鳴)'의 뜻으로 쓰였다. 당나라 때 한원(韓瑗)과 저수량(褚遂良)이 무고(誣告)를 입어 억울하게 죽은 뒤로는 두려워서 감히 과감하게 간언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고종(高宗)이 봉천궁(奉天宮)을 짓는 것을 가지고 어사 이선감(李善感)이 처음으로 상소하여 극언하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기뻐하여 이를 "봉황이 조양에서 운다.〔鳳鳴朝陽.〕"라고 하며 칭탄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이는 원래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뫼에서 우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도다.〔鳳皇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舊唐書 卷80 韓瑗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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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재 이공 행장 경오년(1930) 精毅齋李公行狀【庚午】 공의 휘는 기노(驥魯), 자는 덕부(德夫)이다. 이씨는 계통이 영주(瀛洲)51)에서 나왔으니, 고려 문헌공 휘 경조(敬祖)가 시조가 된다. 조선에 들어와 집의(執義)로 장릉(莊陵, 단종)을 위해 자정(自靖)한 분은 휘 백첨(伯瞻)으로 중시조가 된다. 집의의 아들인 석지(錫祉)는 사직(司直)을 지냈는데, 강직함으로 세상에 존중을 받았다. 사직의 아들 장손(長孫)은 군수(郡守)를 지냈다. 군수의 아들 일(壹)은 진사(進士)였다. 이 분이 운령(雲齡)을 나으니, 운령은 재주와 행실로 추천되어 참봉(參奉)을 제수 받았다. 이 분이 첨지(僉知) 승종(承宗)을 낳았으니, 또한 행실과 의리로 칭송을 받았다. 3대가 지나 소심재(小心齋) 극수(克守)가 나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선생이 그 실학을 자주 칭송하였다. 이 분이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장춘(長春)과 숭(崇)과 진엽(鎭燁)은 소심재의 아들, 손자, 증손으로 대를 이어 학문과 행실이 있었다. 조부의 휘는 만록(萬綠)으로 효성으로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부친의 휘는 동익(東益) 호는 직재(直齋)로 근검하며 효우가 있었다. 모친은 부령 김씨(扶寧金氏) 봉각(奉珏)의 따님이다.공은 철종 신묘년(1831년) 5월 3일 태어났는데, 어려서 단정하고 엄숙하여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조금 자라 침중하고 과묵하였으며 서적 이외에는 달리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처음 삼종숙 산오공(山塢公) 동현(東顯)에게 배웠다가 다시 그의 아들 남강공(南岡公) 태로(泰魯)를 종유하며 학문을 강마하여 약관 전에 이미 근기(根基)를 세웠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뜻을 봉양함을 위주로 하였으며 두 형을 섬김에 화락하였다. 병인년(1866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정과 예를 지극히 하였으나 무자년(1888년)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집이 가난하고 흉년이 들어 장사를 검소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으니 이를 죽을 때까지 한스럽게 여겼다. 하루를 격하여 양친의 묘소에 참배하여 늙었다고 해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친족의 자제와 고을의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 총명하거나 둔한 것을 따지지 않고 성심으로 지도하여 자신의 책무로 여겨 수고로움을 꺼려하지 않았다. 본성이 진솔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며 평소 거처할 때 빨리 말하거나 황급한 기색을 띠지 않았으며 친하거나 소원하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따지지 않고 모두 온화한 안색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바르지 않은 자가 있으면 마음 속 깊이 미워하여 멀리하였다. 사람들이 시정의 득실이나 인물의 장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곧 침묵하고서 대답하지 않았다. 가난이 심하여 자주 밥을 굶었으나 똑바로 앉아 책을 보았으며, 집안사람들이 재물을 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서 이르기를 "남의 재물을 갚지 않고 불의한 삶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본분을 지키다가 죽겠다."라고 하였다. 항상 아들들을 경계하기를 "사람이 집에 거처할 때 절로 무한히 좋은 도리가 있어야 하니, 모름지기 이것은 부지런함과 삼감52) 가운데서부터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세도가 크게 무너지게 되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어 사특한 말들이 더욱 심해지자 '한후(寒後)' 두 글자로 자신의 당에 편액 하였으니, 대개 날이 추워진 뒤의 송백53)으로 스스로 기약한 것이다.을사년(1905년)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남쪽으로 오자 폐백을 바치고 제자의 예를 행하여 선생에게 나아가 배움을 바르게 하니, 선생이 정의재(精毅齋)란 호를 주었다. 이에 노성(老成)한 덕망은 동문들의 추존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인에 대한 학설이 중구난방이어서 선생이 항상 깊이 걱정하였다. 이에 공이 공자, 맹자가 인에 대해 언급한 여러 가지 말을 모아서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한 권으로 만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탐구할 바를 알게 하여 분쟁하지 않게 하니, 대개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편찬한 바를 모방하여 그 옛 이름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이다.54) 앉은 자리에 절실하고 중요한 글귀를 걸어놓고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며 뜰에 여러 화초를 심어 놓고 마음을 길렀으니, 모두 옛날 현인이 정완(訂頑)의 명55)을 짓고 뜰의 화초를 살핀 뜻56)과 같다. 속인들이 극심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싫어하였고 고단한 백성들이 어렵게 삶을 살아가는 것을 불쌍하게 여겼으며 항상 사람을 대할 때 인의도덕의 말로 반복하여 깨우쳐주었으니, 이는 또한 어진 군자가 순박함으로 되돌리려는 뜻이었다. 공의 학문은 전적으로 내면의 마음공부에 힘을 쏟았기에 문사로 드러난 것은 적지만 5언과 7언으로 영탄하여 읊조린 것은 비교적 많은데, 요컨대 모두 나라를 사랑하고 도를 걱정하는 충분(忠憤)과 염려하는 말이니 또한 변아(變雅)가 남긴 가락인가.병인년(1926년) 섣달부터 병으로 누웠다가 다음 해 정월 보름 즈음에 상구(喪具)를 장만하라 명하였다. 25일이 되자 아들에게 "오늘은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고는 부녀자들을 물리치고 새 옷을 입고서 염습과 장사할 때의 절차에 대해 다시 명하였는데, 과연 이날 돌아가셨으니 향년 74살이었다.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서당동(書堂洞) 정좌(丁坐)의 언덕 선영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영황(永璜)의 따님으로 자식이 없었다. 계비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환규(煥奎)의 따님으로 부덕을 갖춰 군자의 짝이 충분하였다. 세 아들은 시택(時澤), 시관(時寬), 시헌(時?)으로, 시헌은 중부(仲父)에게 출계하였다. 세 딸은 의성(義城) 김용채(金鏞采), 순창(淳昌) 설인호(薜仁鎬), 연안(延安) 이동녕(李東寧) 등에게 시집갔다. 시택은 부령(扶寧) 김연술(金淵述)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진(鍾珍), 종희(鍾熺) 두 아들을 두었다. 시관은 전주(全州) 이용복(李容馥)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규(鍾奎), 종소(鍾韶) 두 아들을 두었다. 사위 김용채는 정락(鼎洛), 진락(臻洛), 원락(元洛) 세 아들을 두었다. 사위 설인호는 아들 영태(永泰)를 두었다. 사위 이용복은 아들 ■■을 두었다.오호라! 공의 마음과 행실을 살펴보면 참으로 순고(淳古)하고 청후(淸厚)하며 외유내강(外柔內剛)하는 사람이다. 대개 공은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훌륭한 선조의 덕을 이어받았으니 참으로 공력은 반이지만 효과는 배가 되듯 쉽게 학문을 성취하였는데, 그러나 보이지 않게 노력하여 늙도록 독실하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공을 두터운 선은 넘치지만 명강(明剛)이 부족하다고 이르는 것은 바로 엄한 스승이 제자를 경계하려고 하여 지나치게 염려한 말인데, 어떤 이들이 실제 부족함을 지적한 정론이라고 여기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목상리의 집으로 공을 찾아뵈니, 공이 기뻐하면서 "그대가 나를 방문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네. 나는 학문이 없기 때문에 선비들이 대부분 그냥 지나가고 들어오지 않는데, 그대는 학문을 갖추었는데 도리어 나를 찾아주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는 비록 겸손한 말씀이지만 실로 세인들이 문장으로 사람을 취하는 풍조를 마음 아프게 여긴 것이다. 아! 이에서 또한 공이 숭상하는 것을 알 수 있다.시택(時澤)이 공의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는 우리 친족 종곤(鍾坤)이 지은 것인데 지나치게 소략한 실수가 있으니, 그대가 내용을 갖춰 거듭 찬술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내 생각건대 공과 동문이 된 지 20년이니 공을 참으로 잘 안다고 하겠다. 게다가 일찍이 공을 위해 〈한후당기(寒後堂記)〉를 지으면서 그 절조에 대해 탄복하였으니, 지금 덕을 드러내는 일에 어찌 감히 고사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주는 것'57)은 옛날의 도이다. 그러므로 공의 내강(內剛)을 드러내는 것은 전 선생이 정의재라고 호를 준 것에 어긋나지 않으니, 이로써 세상의 공을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公諱驥魯字德夫.李氏, 系出瀛洲, 以高麗文憲公諱敬祖爲始祖.以本朝執義, 爲莊陵自靖者, 諱伯瞻, 爲中祖.執義子錫祉, 司直, 以剛直見重於世.司直子長孫, 郡守.郡守子壹, 進士.生雲齡, 才行薦授叅奉.生僉知承宗, 亦以行義稱. 三傳而至小心齋克守, 師事尤菴宋先生, 先生亟稱其實學, 是爲公六世.曰長春曰崇曰鎭燁, 小心子孫曾, 連世文行.祖萬祿, 孝聞表宅.考東益, 號直齋, 勤儉孝友, 妣扶寧金氏奉珏女.以哲廟辛亥五月三日生, 幼而端莊, 異凡兒.稍長, 沈重寡默, 書籍之外, 無他好.始學於三從叔東顯, 復從其子南岡公泰魯講磨.弱冠前, 記2)立根基矣.事親以養志爲主, 奉二兄怡怡如也.丙寅丁母憂, 情禮俱盡, 戊子丁外艱, 家貧年凶, 送終儉薄, 以此爲終身恨.間一日拜兩親墓, 不以老而少弛.敎誨族子鄕少, 不問聰鈍, 誠心導率, 視爲己任 不憚勞.性眞率不飾邊幅, 平居無疾言遽色, 無親疎貴賤, 皆接以和顔.然有不正者, 則心惡而疎之.見人語及時政得失, 人物長短, 則嘿不酬答.貧益甚屢至絶火, 堅坐看書, 幷不許家人稱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寧守吾本分而死." 常戒其子曰: "人之居家, 自有無限好道理, 須是從勤謹中做去." 及世道一敗, 宗國幾危, 邪說愈恣, 以'寒後'二字, 扁其堂, 蓋以歲寒松柏自期也.乙巳歲, 艮齋田先生之南駕也, 納贄行弟子禮, 就正所學, 先生以精毅齋錫號.於是老成德望, 爲同門所推.時仁說多岐, 先生每深慮焉.公集合孔孟言仁諸說, 幷作一篇, 名曰《洙泗言仁錄》, 使讀者, 知所自究, 而不使紛爭, 蓋倣南軒所編, 而因其舊名也.座揭切要之言, 爲警省之資, 庭列群芳之物, 爲養心之需, 皆昔賢銘訂頑觀庭草之意也.嫉俗輩媒利之酷, 憫殘民保生之艱, 每對人以仁義道德之說, 反覆曉告, 此又仁人君子回淳反朴之志也.公之爲學, 專用心於內, 故著於文辭者少, 其發爲五七言咏歎者較多, 而要皆愛國憂道忠憤惻怛之辭, 其亦變雅之遺調歟.自丙寅臘月寢疾, 翌年正月望間, 令辦喪具, 至二十五日, 謂其子曰: "今日吾符到期也." 屛婦女著新衣, 更命以斂襲營葬之節, 果以是日卒, 享年七十四, 葬于扶安郡下西面書堂洞丁坐原從先兆也.配義城金氏永璜女, 無育, 繼配高興柳氏煥奎女, 有婦德, 克配君子. 三男, 時澤·時寬·時?出系仲父, 三女, 適義城金鏞采·淳昌薜仁鎬·延安李東寧.時澤娶扶寧金淵述女, 二男鍾珍·鍾熺.時寬娶全州李容馥女, 二男鍾奎·鍾韶.金壻男鼎洛·臻洛·元洛.薜壻男永泰.李壻男■■.嗚呼, 跡公心行, 洵淳古淸厚, 外柔內剛人也.蓋公得姿質之美, 先德之懿, 固有事半功倍之易, 然非有闇然自修, 到老冞篤之功, 何以至此.謂公厚善有餘明剛不足者, 乃嚴師戒人之過慮.或者認爲實際定論, 則失之矣.余嘗謁公於木上里庄也, 公喜曰: "不意子之訪我.我無文, 故士多過而不入, 子有文而顧訪我耶." 此雖自謙語, 實病世之以文取人也.噫, 是亦可以見公之所尙也.時澤, 以公家狀一通來示余曰: "此吾族鍾坤撰也, 而有失於太略, 子其重爲備述也." 余惟爲公同門二十年, 知公固悉矣.且曾爲公作〈寒後堂記〉, 贊服其所操, 今於狀德之役, 何敢固辭而不卒誠也.顧'微顯闡幽', 古之道也, 故表章公之內剛, 有不負田先生精毅之錫者, 用告夫世之淺知公者云爾. 영주 정읍 고부로 고부 이씨를 가리킨다. 부지런함과 삼감 《주자대전속집》 권8 〈큰아들 수지에게 주다.〔與長子受之〕〉에 "'부지런하고 삼간다[勤謹]'는 이 두 글자를 좇아서 올라간다면 좋은 일이 무한히 있을 것이니, 내가 비록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가만히 너를 위하여 이렇게 하기를 원하며, 두 글자를 등지고 내려간다면 좋지 못한 일이 무한히 있을 것이니, 내가 비록 말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지만 너를 위하여 이를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날이……송백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 남헌……것이다 장식이 《논어》와 《맹자》에서 인(仁)에 대해 말한 내용들을 뽑아서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을 지었던 것을 말한다. 《南軒集 卷14 洙泗言仁序》 정완의 명 장재(張載)가 지은 글이다. 당초에 장재가 서재의 동서 양쪽 창문 위에 폄우(砭愚)와 정완(訂頑) 두 개의 명(銘)을 걸어 놓고서 제생(諸生)을 경계시켰는데, 뒤에 논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다는 정자(程子)의 말에 따라 폄우를 동명으로, 정완을 서명(西銘)으로 개칭하였다. 《伊洛淵源錄》 뜰의……뜻 《근사록(近思錄)》 〈도체류(道體類)〉에 "천지가 만물을 내놓는 기상을 관찰한다.[觀天地生物氣象]"라는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말이 실려 있는데, 그 주(註)에 "주렴계(周濂溪)가 창 앞의 풀이 무성해도 베지 않으면서, 저 풀 역시 내 속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與自家意思一般]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은미한……것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오는 말로 "역은 지난 것을 드러내고 올 것을 보여 주며,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 준다.〔夫易 彰往而察來 而微顯闡幽〕"라고 하였다. 記는 旣의 오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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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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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가헌 박공 행장 을해년(1935) 可軒朴公行狀【乙亥】 가헌 처사(可軒處士) 박공의 아들 봉규(鳳圭)가 공의 행록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선부군께서 경술년의 변고 때 순국하였는데, 지금 26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덕을 형상하는 글이 없습니다. 선부군의 동문 가운데 선부군의 행적을 잘 아는 분을 찾아보아도 그대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그 일을 맡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공의 큰 절개는 충분히 오당(吾黨)을 빛낼 수 있다. 그 행장에 내 이름을 의탁하는 것은 영광이니 감히 사양하겠는가. 마침내 공을 위해 행장을 짓는다.공의 휘는 병하(炳夏) 자는 문혁(文爀)이다. 호는 가헌(可軒)이며 다른 호는 신암(愼菴)이다. 밀성 박씨(密城朴氏)는 계통이 신라 시조 왕에서 나왔다. 고려에 들어와 휘 현(鉉)은 3품의 규정(糾正) 벼슬을 지냈으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니 중시조가 된다. 조선에 들어와 휘 충원(忠元)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조상이다. 4대를 지나 교리 자응(自凝)이 나왔는데, 이 분이 공의 9대조이다. 고조는 기번(基蕃)이며, 증조는 양휘(揚輝)이다. 조부 준민(準珉)은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명수(明秀)이며, 모친은 김해(金海) 김씨 응휘(膺輝)의 따님으로 헌종(憲宗) 정미년(1847년) 2월 18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겨우 6~7세에 잡된 말과 잡스런 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항상 어른의 곁에서 공손하게 응대하니 부로(父老)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9살에 모친께서 오래 병을 앓자 쌀을 빻아 죽을 끓여 올리고 열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으니 보는 이들이 놀라며 그 천부적인 효성에 감탄하였다. 상을 당하자 마음을 다하여 슬퍼하였다. 11살에 승지공(承旨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재주가 약간 둔하여 그 형에 미치지 못하니, 부친께서 "큰 아이는 가르칠 만하지만, 작은 아이는 가르칠 수 없다."라 하였다. 이에 승지공이 "사람의 성취는 덕으로써 하는 것이지 재주로써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개는 덕이 있으니, 우리 가문을 창성시킬 자는 바로 이 손자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몸이 손상되어 거의 죽을 뻔하니, 집안사람들이 놀라 급히 구황을 써서 소생하였다. 3년 동안 죽을 먹었으며 사람들과 말하다가 그 부친에 말이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줄줄 흘리니, 사림에서 효행으로 천거하여 영읍(營邑)에 추천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이 극력 만류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여 그 호세(戶稅)을 면해주었다.갑오년(1894년) 동학이 일어났을 때,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고서 강학을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당시 식량이 다 떨어지게 되었는데, 동학교도 사람이 곡식을 보내주니 공이 의리를 들어 책망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두려워 물러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곤궁할수록 더욱 가난함을 지켜 남의 재물을 취하지 않는 것을 내 비로소 아무개 공에서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 해 겨울에 왕의 군대가 동학교도를 토벌하기 위해 공의 마을을 지나다가 책 읽는 소리를 듣고서 문에 들어왔다가, 공이 의관을 바르게 하고 책상을 마주하고 똑바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옷깃을 여미고 공손한 마음을 일으켜 "이는 군자의 집이다."라고 하였다.경자년(1900년)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58) 선생을 고암(考巖) 강당에서 찾아뵈어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참여하였다. 임인년(1902년)에 고부(古阜)의 석천(石泉) 서재에 머물러 있었는데, 주인 김 아무개가 공의 움직이거나 고요히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모두 올바름에서 나온 것을 보고 감탄하면서 "내가 오늘에야 참 군자를 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계묘년(1903년)에 공주(公州)의 신전(薪田)에서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찾아뵈고서 스승과 제자의 예를 정하였다. 선생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59)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취하여 그의 거처를 '가헌(可軒)'이라 명하였다.부모의 묘소가 흥덕(興德) 사자봉(獅子峰) 아래에 있었는데 그 곁에 여막을 짓고서 몸을 마치려고 하였다. 이에 아우가 늙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렵다고 힘써 간하고 벗들이 또한 만류하매, 이에 묘 아래 마을에 수년 간 머물렀으니, 성묘하기 가깝기 때문이었다. 제사는 반드시 예로써 지냈으며, 비록 매우 가난하더라도 사 계절 정제(正祭)를 거행하니, 사우들이 모두 그 정성에 감복하였다. 갑진년(1904년)에 두승산(斗升山)60) 남쪽 안영리(安永里)로 이사하였는데, 마침 전 선생이 남쪽으로 내려와 천암(天巖)과 예천(禮川) 사이에서 도를 강하니, 공이 스승의 자리가 가까이 있는 것을 기뻐하여 왕래하면서 학문을 질정하면서 3일이 지나면 멀게 여기고 넘지 않았다.경술년(1905년) 7월에 나라의 상황이 위급하게 되어 합방한다는 말이 떠도니, 이에 고군산도(古君山島)의 전 선생을 찾아뵙고서 선생과 함께 자정(自靖)의 의리를 지키고 변고가 심해지면 죽으리라 하였다. 8월 11일 글을 써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내가 배운 것은 예와 의이다. 저들이 말하는 합방이란 것은 우리 백성의 강토를 빼앗고 우리 임금의 지위와 칭호를 없애서 방자하게 높게 되려는 것이니 대단히 예와 의가 없는 것이다.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을 모시는 나의 몸으로 어찌 저들의 노예가 되어 복종하며 섬기겠는가. 치욕을 받으며 사는 것이 어찌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깨끗이 하고서 예의의 귀신이 되는 것과 같으랴."라고 하였다.13일 집에 돌아와 합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15일 전 선생이 왕등도(旺登島)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는 왕등도로 가겠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천천히 배편을 기다려보지요."라고 하였다. 공이 또다시 부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금 서울로 가야하니 속히 여장을 꾸려주오. 가면 다시 집에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소."라고 하니, 부인이 "집안이 가난한데 그대 홀로 어찌 이렇게 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공이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그날로 편지를 써서 동지들과 영결하였다. 음식을 며칠 간 드시지 않고서 허리띠를 묶고 용모를 단정히 하여 말과 행동이 전과 다름이 없이 차분하였는데, 때때로 '경전을 안고서 통곡하며 산에 들어가 말라 죽는다.'는 등의 말을 외웠다. 이에 목욕한 뒤 머리를 빗으며 손톱을 깎고서 침상에 반듯이 누웠다가 19일 사시가 되자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흥덕 오호리(五湖里) 앞 산록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함풍 이씨(咸豊李氏) 왈담(曰淡)의 따님으로 덕성이 단정하고 한결같았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일남 삼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즉 봉규(鳳圭)이며 큰 딸은 광산(光山) 김덕준(金德俊)에게 시집갔으나 자식이 없어 남편이 죽은 뒤에 후사를 세워 며느리를 본 뒤에 남편을 따라갔다. 둘째는 서산(瑞山) 유학근(柳學根), 셋째는 전주(全州) 이홍열(李弘烈)에게 시집갔다. 종태(鍾泰)와 종호(鍾浩)는 손자이다.처음 내가 공을 알 때는 그 온화하고 우아한 용모를 보니 옷도 이기지 못할 것 같고 겸손한 말은 입에서 잘 내지 못할 것 같았으며 그를 종유하며 배우는 여러 제자들은 또한 모두 품위가 고상하고 단정하여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이 공의 제자일 줄 알 수 있었다. 대개 오래 지나도 다만 줄곧 온화하고 겸손함만 보았고 일찍이 사람을 두렵게 할 말한 의연한 기색이나 늠름한 말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변란을 만나게 되자 주저하지 않고 곰과 물고기를 구별하고61) 취하고 버릴 것을 정하였으니, 의리를 고담준론하며 스스로 기절(氣節)을 갖추었다고 하는 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대개 공의 학문은 안에 힘쓰고 밖에서 구하지 않았기에 수양이 두텁고 밖으로 맹렬하게 발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렇다면 공은 강개하여 자결한 부류가 아니라, 차분하게 수양한 자라 하겠다.그러나 어떤 이는 포의로 순국한 것에 대해 중도(中道)에 지나친 것이라고 의심한다. 대저 위나라 임금이 진나라를 황제로 섬기게 하려고 하니 노중련(魯仲連)이 말하기를 "저 진나라가 천하의 황제가 된다면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요 그 백성이 되지 않을 것이다."62)라고 하였다. 만약 이 당시에 진나라가 과연 황제가 되었다면 노중련이 어찌 헛된 말을 하였으랴. 또한 참으로 바다에 빠졌을 것이다. 노중련도 또한 선비로 벼슬을 하지 않던 자인데, 고금에 논하는 자들이 이에 대해 중도에 지나친 것이라고 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 공이 스스로 맹세한 글을 읽으니, 노중련이 신원연(新垣衍)에게 해주었던 말투와 비슷한데 비록 규모와 풍도(風度)가 서로 같지는 않지만 이 한 가지 의리의 관점에서는 공을 지금의 노중련이라 일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전 선생이 공을 위해 지은 만사를 보니 대단히 찬양하면서 "중도를 넘어 명성을 가까이 하였다고 부질없이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그 진심을 알 수 있다. 아! 공의 효성과 학문은 독실하여 참으로 사람들이 공송(公誦)하였으니 특별히 찬양하는 말이 필요 없는데, 다만 의리를 지켜 순국했던 일은 공이 이룬 큰일이거늘 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쓸데없는 말들을 하기에 특별히 자세하게 논하여 드러내어 입언하는 군자들에게 질정한다. 可軒處士朴公之子鳳圭, 以公行錄示余曰: "先子殉義于庚戌之變, 今爲二十有六年, 尙無狀德之文.求之先子同門而可徵者, 無如子, 子其圖之." 余惟公之大節, 足以有光吾黨, 託名爲榮, 其敢辭諸.遂爲之狀曰: "公諱炳夏字文爀, 可軒號也, 又號愼菴.密城之朴, 系出新羅始祖王.在麗, 有諱鉉, 官三品糾正, 謚武烈, 爲中祖.我朝, 有諱忠元, 官吏判, 謚文景, 爲顯祖.歷四世, 有校理自凝, 是爲公九世祖.高祖基蕃, 曾祖揚輝.祖準珉, 孝旌贈左承旨.考明秀, 妣金海金氏膺輝女.以憲宗丁未十二月二十八日生公, 甫六七歲, 無雜言雜戱, 常在長者側, 應對惟恭, 父老異之.九歲, 慈闈久病, 磨米煮粥, 十指出血, 見者驚之, 歎其孝愛天植.及丁憂, 哀戚盡情.十一歲, 受學于承旨公, 才稍鈍, 不及其兄, 其大人曰: "長兒可敎, 次兒不可敎." 承旨公曰: "人之成就, 以德不可以才.某也有德, 昌吾門者, 此孫也." 丙子丁外憂, 毁幾滅性, 家人驚惶, 急用狗膏得回甦.啜粥三年, 與人語及其親, 必潛然淚下, 士林擧孝行, 欲薦營邑, 公力止之, 里人感服, 共免其戶.甲午東亂, 閉戶歛跡, 講學益勤.時値乏食, 有匪人饋之以穀, 公據義責之, 其人惶蹙, 退語人曰: "窮益堅貧不取, 始見於某公." 是年冬, 王師討匪, 過公里, 聞讀書聲, 入門而見公衣冠整飾, 對案正坐, 歛袵起敬曰: "此君子家也." 庚子, 謁淵齋宋先生于考巖講堂, 叅鄕飮禮.壬寅, 留古阜之石泉書齋, 主人金某, 見動靜語默, 一出於正, 歎曰: "吾今日得見眞君子." 癸卯, 謁艮齋田先生于公州薪田, 定師生禮.先生取朝聞夕可之訓, 名其居曰, '可軒'.親墓在興德獅子峰, 欲廬側而終身, 其弟固諫以衰年難堪, 親友亦多止之, 乃留於墓下村數年, 爲其省瞻之近也.祭必以禮, 雖貧甚行四時正祭, 士友咸服其誠.甲辰移于斗升山南安永里, 田先生適南下, 講道於天巖禮川間, 公喜近師席, 往來就正, 三日爲踈.庚戌七月, 國勢危急, 有合邦之說, 乃拜田先生于古君山, 欲同守自靖之義, 變甚則繼之以死.八月十一日, 以書自誓曰: "吾之所學禮義也.彼所謂合邦, 奪吾人彊土, 削吾君位號, 肆然尊大, 無禮義之甚者.以吾尊君親上之身, 肯作彼之奴隷而服事乎.與其受辱而生, 孰若蹈海潔身而爲禮義之鬼哉." 十三日, 還家, 的見合邦之報.十五日, 聞田先生入旺島, 謂其子曰: "今, 吾作旺島行." 對曰: "徐待船便." 公又謂夫人曰: "吾今作京行, 速治裝, 行則似不還家." 夫人曰: "家貧, 子獨何以如此." 公默然無言, 以是日書訣同志.絶飮食數日, 束帶見3)容, 言動自若, 時誦'抱經痛哭入山枯死'等語, 乃沐浴櫛髮, 剪瓜仰臥床上, 至十九日巳時, 飮藥就義.葬于興德之五湖里前麓卯坐原.配咸豊李氏曰淡女, 德性端一, 治家有法.生一男三女, 男卽鳳圭, 女適光山金德俊無育, 夫死立後取婦後下從.次適瑞山柳學根, 全州李弘烈.曰鍾泰·鍾浩, 其孫也.始余識公也, 見其溫雅之容, 若不勝衣, 謙冲之言, 若不出口, 其從學諸子, 又皆循循雅飭, 不問可知爲公弟子.蓋久後而但見其一味溫謙, 而未嘗見毅然之色, 凜然之辭, 令人可畏者.及其遇變於一朝也, 判熊魚定取舍之易, 有非高談義理, 自許氣節者之所及.蓋公之學務諸內, 而不求於外, 故養之厚而發之烈如此, 然則公非慷慨殺身者流, 乃從容就義者也.然而或有以布衣殉國, 疑其過中者.夫魏君之欲帝秦也, 魯連有言曰: "彼秦而帝天下, 連有蹈海而死, 不願爲民." 若是時也, 秦果帝者, 連豈徒言之, 亦允蹈之矣.連亦士而非有位者, 未聞古今論者, 以此爲過中.今讀公自誓之書, 宛然魯連語新垣衍口氣, 雖其規模風略, 互有不同, 而就此一義, 則謂公爲今之魯連可也.然則人之疑公, 容有未之思歟.觀田先生挽公之詞, 極其贊揚而曰: "過中近名, 莫謾疑." 可以知之矣.噫, 公之孝學篤實, 固人所公誦, 而無待贊辭者, 惟是殉義一事, 爲公大致, 而不知者有言, 故論著之特詳, 以質于立言君子云爾." 연재 송병선 1836~1905.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아침에……좋다 《논어》 〈이인(里仁)〉에 보인다. 두승산 정읍 고부에 있는 산이다. 물과 물고기를 구별하고 웅어(熊魚)는 팔진미의 하나인 곰 발바닥과 어물 요리로, 이를 구별한다는 것은 생명과 의리를 둘 다 취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함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위나라……것이다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그가 조(趙)나라에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천자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천자를 참칭(僭稱)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 《史記 魯仲連列傳》 용모를 단정히 하다는 의미의 글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소심재 황공 행장 기묘년(1939) 小心齋黃公行狀【己卯】 공의 휘는 종복(鍾復), 자는 계양(啓陽)이다. 황씨(黃氏)는 계통이 창원(昌原)에서 나왔다. 고려 시중 휘 충준(忠俊)이 시조가 된다. 그 후에 휘 하응(河應)은 찬성사(贊成使)를 지냈다. 휘 신(信)은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다. 거정(居正)은 조선에 들어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효성(孝誠)은 삼등 현령(三登縣令)을 지내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사윤(斯允)은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지냈다. 징(澄)은 고원 군수(高原郡守)를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수(琇)는 영춘 현감(永春縣監)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경중(敬中)은 호가 오촌(梧村)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제수 되었으며 충청과 강원 감사를 지냈다. 흡(潝)은 광해군 때 정치가 혼란하자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을 배척하다가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인조가 반정한 뒤에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도성(道成)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윤(鈗)도 통덕랑을 지냈는데, 처음으로 청주(淸州)의 오근(梧根)에 거주하였으니, 이 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 연하(演河)는 학문과 행실이 있었다. 증조는 검(檢)이다. 조부는 인최(仁最)이다. 부친은 기정(基鼎)이며, 모친은 한산(韓山) 이씨 음애(陰涯) 자(耔)63)의 후손이다. 철종 무오년(1858년) 12월 10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어 남들보다 영특하였다. 8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가 없자 스스로 원근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배웠다. 겨우 《통감》을 마치자 문리가 크게 발전하여 경서는 모두 배우지 않고도 이해하였다. 약관 이후로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진천(鎭川)의 눌항(訥巷)으로 이사하여 거주하였는데, 가난이 더욱 심해 공부만 할 수 없었다. 이에 비루하고 하찮은 일을 닥치는 대로 부모를 위해 하였다.당시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같은 고을 갈탄(葛灘)가에서 도를 강론하였는데, 공은 때때로 자주 찾아가 인사를 드리면서 지극한 의론을 들어서 마음속 깊이 감동한 것이 5~6년이었다. 정해년(1887년) 가을에 이르러 책과 폐백을 바치고서 스승으로 섬길 것을 청하니, 선생이 그릇으로 여겨 매우 아끼면서 소심재(小心齋)란 호를 주어 권면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매우 가난한 가운데서도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으며 힘써 생계를 꾸려가는 여가에 경전을 궁구하고 이치를 연마하여, 정밀히 생각하여 옳음을 구하고 힘써 실천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니 학문이 날로 실제로 나아갔다. 이에 선생이 자주 칭송하였다. 을미년(1895년) 봄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를 따라 장사를 치렀다.임인년(1902년) 겨울에 다시 청주(淸州) 금계촌(金溪村)으로 이사하였고, 갑진년(1904년)에 청주 북목산(北鶩山) 아래 동성리(東城里)에 다시 집을 지어 이사하였으니, 바로 고향과 가까운 곳이다. 대개 여러 해를 타향살이 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었는데, 지금 이에 선영 아래로 돌아와 은거하여 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이에 사방의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서 책상을 이고 찾아와 집에서 그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날마다 제생들과 학문과 도를 강론하여 선(善)이 사람에게 미쳐 교화를 입은 자들이 많았으니, 절로 옆 사람은 알지 못하는 즐거움이 있었다.임술년(1922년) 7월 4일에 전 선생이 후학을 버리자 흰 두건에 띠를 두르고 소식(素食)을 하며 집밖에 거처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선생의 빈소를 향해 곡을 하며 한 해를 마쳤다. 공은 평소 거처할 때 병이 적어 늙을수록 더욱 강녕하였는데, 갑술년(1934년) 4월에 처음으로 앓기 시작하더니 다음해 2월 12일 돌아가셨다. 향년 78세였다. 집안에 조금의 식량도 없어서 장사지내는 비용을 모두 사우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시대 상황에 구애를 받아 천현(泉峴)의 선영 아래 술좌(戌坐)를 등진 언덕에 부장(赴葬)64)하였다. 문인 가운데 가마(加麻)65)한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첫째 부인은 순천 박씨(順天朴氏)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밀양 손씨(密陽孫氏)의 따님으로 부덕을 갖추었으며 남편을 어기지 않고 섬겼다. 장남은 효연(孝淵)으로 박씨 소생이다. 다음으로 충연(忠淵)과 신연(信淵)이 있으며, 딸들은 박정규(朴珵圭), 홍재일(洪在一), 박오규(朴五圭), 박성겸(朴性謙)의 아내가 되었으니, 손씨 소생이다. 손자 화수(華秀)와 창수(昌秀), 손녀 윤홍섭(尹洪燮)의 처 이은경(李殷敬)의 처는 큰아들의 아들딸이다. 면수(冕秀)는 둘째의 아들이며, 긍수(兢秀)와 연수(寅秀)는 막내의 아들이다.공은 기국이 넓고 크며 용모는 풍후하고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굳세며 언동은 간략하면서도 신중하였으니, 한번 보기만 하면 군자인줄 바로 알 수 있다. 천부적으로 남다른 자질을 얻었기에 스스로 높은 덕과 학문을 이루었다. 대개 공정을 마음에 두고서 활용을 명강(明剛)함으로써 하기에 그가 의리를 강론함이 이와 같고 논의를 세움이 이와 같으며 자신의 몸가짐이나 일을 처리함에 이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명칭과 이치의 분석할 즈음에 비록 선유의 말이라도 마음에 생각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억지로 따르지 않았으며, 시비를 변별할 때 비록 여러 사람들이 동조하는 의론이라도 의리에 따져보아 옳다고 여기지 않으면 이치를 굽혀 따르지 않았다.공이 형(形)과 기(氣)와 신(神)과 리(理)에 대해 논하기를 "사람이 천지가 쌓은 정기를 얻어서 형체를 삼으니 사지와 백체(百體)가 이뤄지고, 천지의 떠도는 기를 품부 받아 기로 삼으니 숨을 마시고 내쉬는 사이에 통하고, 천지의 신명을 말미암아 심으로 삼으니 정(情)과 의(意)와 지(志)와 려(慮)가 발하고, 천지의 명리를 따라 성으로 삼으니 인의예지가 선다."라고 하였다.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학설에 대해 논하기를 "호론이 명(命)이 같은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요, 낙론이 기(氣)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호론은 명이 비록 같지만 이미 기 안에 있으니 성(性)이 그에 따라 다르다고 여긴 것이요, 낙론은 성은 곧 이치이니, 비록 기 안에 있더라도 본체는 같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이 다투는 논의의 대략인데, 이가 기 안에 있는 것은 촛불이 대바구니 안에 있는 것과 같은데 대바구니의 두껍고 얇은 것을 보고서 촛불이 밝거나 어둡다고 끝내 말한다면 옳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맺기를 "호론은 기에 구애되어 리를 잘못 본 바탕에서 천명과 기질 사이에서 본연을 논하였기에 낙론에게 비난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식견과 의론의 대략이다.나라를 경영하고 다스리는 도리와 병사를 쓰고 군사를 운용하는 방법도 모두 널리 연구하여 두루 통하였으며 논을 저술하여 부류별로 편집하였으니, 그가 갖추고 있는 것은 참으로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선비의 그것이며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는 은자의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으로 세상에 능력을 팔거나 자랑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지니지 않았고 밖으로 귀하고 현달한 사람을 알지 못하였기에 숲속의 초가집에서 몸을 마쳐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공이 올바름을 지키고 의를 행하면서도 세상의 물정에 관심을 둔 것은 본래 그러함이 있었다. 만년에 이르러 조선이 무너진 것을 애통하게 여겨 비분강개하여 세상에 뜻이 없었는데, 어떤 일이든 간에 왜놈과 관계된 뒤에 이뤄진 것은 비록 선조를 받드는 큰일이라도 일체 그만두었으니, 시의(時義)에 밝아서 의연히 절조를 지닌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의 평생의 학덕을 들어 논하자면 모든 것이 공정하고 명강한 데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렇지 않은가.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음성(陰城)의 오진영(吳震泳)66)이 선생의 원고를 고쳐 선비를 해치는 변고가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위세에 달려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뱀과 지렁이가 무리를 이루듯 매와 개처럼 주인을 위해 사납게 굴 듯 박쥐가 이쪽저쪽 살피며 머뭇거리듯 하는 자들이 문하에 가득하였는데, 속임을 분별하여 죄를 성토하는 몇몇 사람만이 외롭게 서 있거늘, 오직 공이 서까래만한 붓으로 크게 써서 이르기를 "오진영은 사문의 난적이니, 그 무리들과 함께 모조리 내쳐야 한다."라고 봉황이 산등성이에서 울 듯 호랑이가 산에서 포효하듯 하였다. 이에 사설(邪說)이 물리쳐지고 스승의 무고가 씻어졌으며 간당(奸黨)이 두려움에 담이 쪼그라들고 선류(善類)들의 기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대저 간옹은 큰 스승이다. 절의의 대관(大關)이 없다고 스승을 무고하는 것은 큰 죄인데, 크나큰 스승을 절의의 대관이 없다고 무고하는 것은 죄 가운데 더욱 큰 죄이며 천하의 커다란 변고이거늘, 공의 대의에 의지하여 큰 죄를 성토하고 큰 변고를 바로잡으니 이 또한 공의 공정하고 밝고 강건하게 처리한 일 가운데 큰 것이다.나는 공에 대해 비록 겨우 한 번 인사를 올렸을 뿐인데, 특별히 선생을 보호하는 의리에 뜻을 같이 해준 것에 깊이 감동하여 진심으로 공경하여 따랐다. 지금 공의 아들 신연(信淵)이 행장을 청하였는데, 일을 중대하고 나의 글은 가볍기에 다만 병으로 사양하니, 더욱 간절하게 청하면서 "부친께서 향촌에 곤궁하게 숨어 지냈으니, 그 덕을 아는 자가 드뭅니다. 어른과 부친은 이미 동문이며 또한 큰 변고를 당하여 수많은 군중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서도 뜻과 의리를 함께하였으니, 낱낱이 거론하지 않고 이 큰일만 들어보아도 그 누가 어른보다 부친을 깊이 알겠습니까. 이것이 천리를 왕래하면서 반드시 어른에게 행장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내가 "참으로 이것 때문이라면 감히 사양한다고 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장을 받아 펼쳐서 살펴보니, 문장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 많기에 인하여 공의 유고를 읽고서 대의를 파악하였다. 그리고서 공의 여러 아들들에게서 들은 바를 서술, 편차하여 문장을 완성하고 삼가 나의 의견을 첨부하여 평소 존경하고 신복한 뜻을 부친다. 公諱鍾復, 字啓陽.姓黃氏, 系出昌原.以高麗侍中諱忠俊, 爲上祖.厥後有諱河應, 贊成.信, 工部尙書.居正, 入我朝刑曹判書.孝誠, 三登縣令贈工曹參判.斯允, 平安兵使.澄, 高原郡守贈戶曹判書.琇, 永春縣監贈領議政.敬中號梧村, 文科翰林歷忠淸江原監司.潝, 光海政亂, 上疏斥爾瞻被錮.仁祖改玉, 贈執義.道成, 通德郞.鈗, 亦通德郞, 始居淸州之梧根, 是爲公之五代祖也.高祖演河, 有文行.曾祖檢.祖仁最, 考基鼎, 妣韓山李氏女陰涯耔后.以哲宗戊午十二月十日, 生公.幼有美質, 穎悟出倫.八歲遭外艱, 家貧無學資, 自能往來受學於遠近長者, 纔了《通鑑》, 文理大進, 經書皆不學而通.弱冠後, 爲養親移居鎭川訥巷, 貧益甚不能專學, 鄙細之事, 無不親爲.時艮齋田先生, 講道於同郡葛灘上, 公時常拜謁, 得聞至論, 心竊興感者, 五六年.至丁亥秋, 納書贄, 請師事之, 先生甚器重之, 錫號小心齋而勉之.公自是益自奮勵, 動心忍性於空乏之中, 窮經硏理於食力之暇, 務主於精思求是, 力踐爲己, 學日就實, 先生每稱許之.乙未春, 丁內艱, 執喪如禮.壬寅冬, 又移淸州金溪村, 甲辰復築室於淸州北鶩山下東城里, 卽故居近地.蓋累年棲屑, 奠居無所, 今乃歸隱先隴下, 爲終老計也.於是四方學者, 聞風負笈而來, 舍不能容, 日與諸生講學論道, 善及於人而見化者衆, 自有傍人不知之樂矣.壬戌七月初四日, 田先生棄後學, 白巾環絰, 食素居外, 朔望望哭, 以終期年.公平居少病, 老益康寧, 甲戌四月, 始示憊, 翼年二月十二日, 考終, 壽七十八.家無甔石, 資葬具皆賴士友助, 因時拘, 赴葬泉峴先塋下負戌原, 門人加麻者數十.前配, 順天朴氏女.後配, 密陽孫氏女, 有婦德, 事君子無違.男長孝淵, 朴氏出.次忠淵信淵, 女爲朴珵圭·洪在一·朴五圭·朴性謙妻者, 孫氏出.曰華秀·昌秀, 尹洪燮·李殷敬妻, 長房男女.曰冕秀, 仲房男.曰兢秀·寅秀, 季房男.公器宇寬大, 容貌豊厚, 性度和而剛, 言動簡而重, 一見可知爲君子人, 其資質之得於天者有異, 故德學之成於己者亦高.蓋以公正存心, 而用之以明剛, 故其講義也如是, 立論也如是, 行己處事也莫不如是.剖析名理之際, 雖於先儒之言, 求諸心而不得, 則不敢强從也.辨別是非之時, 雖於衆共之論, 揆諸義而不然, 則未嘗詭隨也.其論形氣神理, 則曰: "人得天地儲精以爲形, 而四肢百體成, 稟天地游氣, 以爲氣, 而喘息呼吸通, 因天地神明以爲心, 而情意志慮發, 順天地命理以爲性, 而仁義禮智立." 論湖洛說, 則曰: "湖非不知命同, 洛非不知氣異.但湖以爲命雖同, 而旣在氣中, 則性隨而異, 洛以爲性卽理也, 雖在氣中, 本體則同.此爭論大略, 終謂理在氣中, 猶燭在籠中, 見籠之厚薄而謂燭有明暗可乎." 結之以'湖拘氣迷理論本然於天命氣質之間, 故見非於洛', 此見識議論之梗槩也.經國制治之術, 用兵行師之法, 皆博究旁通, 著論而類編之, 其所具存, 固非不適用之世儒, 亦非往不返之隱者.然而內不萌沽衒之念, 外不識貴顯之面, 林薄蓬篳, 終身無悔, 其守正行義, 泊於世情者, 有素矣. 逮乎晩年, 痛宗國之傾覆, 悲憤慷慨, 無意生世, 凡於事爲, 涉於彼邊而後成者, 則雖奉先大事, 一切已之.其明於時義, 毅然有操者若此焉.擧公生平德學而論之, 總不外公正明剛者, 不其然乎.至於山頹後, 陰震誣認改稿戕士之變, 人皆趨勢畏禍, 蛇蚓結黨, 鷹犬助虐, 蝙蝠依違者, 環一門也, 幾箇人辨誣討罪者, 孑然而孤居, 惟公以如椽之筆, 大書之曰: "震, 師門之亂賊, 幷與其黨與而斥之." 若鳳鳴于岡, 虎嘯于山, 邪說以闢, 師誣以雪, 奸黨膽落, 善類氣甦.夫艮翁, 大宗師.無節義大關, 誣師大罪, 誣大宗師以無節義之大關, 罪之尤大, 而天下之大變也, 而公大義是仗, 大罪是討, 大變是正, 此又公公正明剛之大者也.余於公, 雖僅一拜面, 特於衛師之義, 深感同志, 心誠敬服, 今於公子信淵之請狀德也, 以事重文輕, 適足以爲病辭, 則其請愈懇曰: "先人窮沒邱園, 知德者鮮矣.子與先人, 旣爲同門, 又當大變, 同志義於千百群衆滔滔一流之中, 不待悉擧而卽此大者, 其相知也孰深焉.此所以往返千里, 必求於子也." 余曰: "苟以是也, 不敢言辭." 乃受其家狀而按閱, 則文多不備, 因取公遺稿, 領略大意, 幷書所聞於公之諸孤者, 謹次成文, 而竊附己見, 庸寓平日敬服之意云爾. 이자 1480~153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시호 는 문의(文懿)이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언관직에 발탁되어 수찬(修撰) ·교리(校理) ·사간 등을 지냈으며, 1517년 부제학 ·우부승지에 올랐다. 당시 조광조(趙光祖) 등 기호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도모했으나, 이들의 정치노선에는 따르지 않고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정치노선을 걸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사림파로 지목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음성에 퇴거하여 '음애'라 자호(自號)하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였던 김세필(金世弼) ·이약빙(李若氷) ·이연경(李延慶)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부장 예월(禮月)을 기다리지 않고 염(斂)을 하고 급히 장사(葬事) 지내는 것을 이른다. 가마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학생 김공 행장 –기미년(1919년)- 學生金公行狀【己未】 우리 김씨는 대대로 부안현(扶安縣)에 거주하였다. 고려에 있어서는 문장과 도학이 뛰어나고 유학의 성인을 높이고 불교를 배척한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가 있으며, 나라에 충성하고 문묘를 처음 만든 상서 충선공(忠宣公) 휘 여우(汝盂)가 있으며,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뜻을 두고서 관향으로 완전히 귀향한 고부(古阜) 군사 휘 광서(光敘)가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첨지 휘 보칠(甫漆)이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여 현감(縣監)에 녹훈되었다. 휘 숙손(淑孫)은 고을을 다스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진사 휘 종(宗)은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죽계 휘 굉(鋐)은 진사에 장원하고 생원에 2등하였으며, 도학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이 되었고 사림들이 사당을 세웠다. 참봉 휘 정길(鼎吉)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일으켰다. 중세에 고부에 이사하여 거주한 것이 2백 년에 가까운데 대대로 의를 행함으로 서로 힘써 고가(故家)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공의 휘는 재열(栽烈) 자는 경삼(敬三)이니, 죽계공(竹溪公)에게 십대손이 되며 참봉공(叅奉公)에 9대손이 된다. 나는 공의 집안 조카가 되어 30년을 모셨는데, 그 밖을 보면 탄솔하고 순박하며 말을 어눌하게 하여 행동이 조심스러우니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듯한데, 그 안을 살펴보면 자애롭고 신실하며 충후한 덕은 하늘에서 받은 것 같았다. 조부의 휘는 석우(錫禹)로 일찍 돌아가시고 조모 최씨(崔氏)는 절개를 지켰으며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다. 부친의 휘는 복한(復漢)으로 계모를 섬김에 매우 공손하였는데 또한 불행하게도 일찍 타계하였으니, 당시 공은 혈연단신의 어린아이였다. 계모인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최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최 부인은 성격이 엄하여 공이 잘못을 저지르면 문득 회초리로 때리며 용서하지 않았는데, 공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뜻을 공손히 받들었다.공은 젊어서 집안일을 맡아서 하느라 공부를 하지 못하였는데,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조금 여유가 생기자 선조를 받드는 제향과 제수, 제전(祭田)과 묘소를 쓰는 것과 석물(石物)에 관계된 것은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쓰는 것은 대단히 검약하니, 지나치게 검소하여 꽉 막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람에게 주거나 취하는 것은 너그럽고 넉넉함을 힘쓰고 작은 이익을 따지지 않았기에 평생 원망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후사로 들인 양자의 생부모는 촌수로 보면 실제로는 멀었는데 친족이 가난하여 이사 와서 함께 살면서 40년을 재산을 함께 쓰게 하면서도 절대로 은덕을 베푼다는 기색을 띠지 않았다. 그 어린 아들이 부모를 여의어 양육할 사람이 없게 되자, 공이 거둬서 길러 젖먹이에서 자라 학문을 배우며 아내를 맞이하고 분가할 때까지 줄곧 친자식처럼 대하였으니, 남의 어려움을 걱정함이 진심에서 나왔다. 공이 거처하는 백실리에 초상이 나면 친소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먼저 달려가 상사(喪事)를 주관하며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니,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아쉬움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집안사람부터 향리의 노소 상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기미년(1919년) 2월 9일에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헌종 병오년(1846년) 6월 1일에 태어나셨으니 향년 74세였다. 고부 우덕면(優德面) 배장산(拜將山) 을향(乙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여흥 민씨(驪興閔氏) 치중(致中)의 따님으로, 부덕을 두루 갖추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이에 친족의 아들 익술(翊述)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손자는 다섯 명으로 형근(炯根), 형환(炯鍰), 형종(炯淙), 형연(炯然), 형채(炯埰)이며, 손녀는 두 명으로 큰 손녀는 최재용(崔載庸)에게 시집갔고 작은 손녀는 아직 어리다. 증손으로 인철(仁喆)과 원철(元喆)이 있다.오호라, 공은 우리 가문에 공덕이 있는 사람이다. 선군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친족은 십 수 년 이래로 선영의 묘에 시제를 중도에 그만두었는데 다시 거행한 것은 실로 아무개 형이 주관하고 재무를 맡은 공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한 공의 효성이 멀리 친진(親盡)67)에까지 미친 것이다. 대개 공의 덕과 효는 본친(本親)에 두터이 하는 것을 용(用)으로 삼은 것이다. 공은 이를 갈 6~7살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의롭지 않은 한 가지 일이나 사납게 꾸짖는 한 마디 말도 남에게 가하지 않았다. 평소 책을 읽어 견문의 도움이 있지 않았는데도 이런 것을 능히 하였으니, 이 또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만일 학문에 종사하였다면 의리의 정수를 들었을 것이니 그 성취가 어찌 천품의 아름다움에 그치겠는가. 그러나 공의 어짊은 또한 가문의 내력과 관계되는데, 식자들은 일찍이 조모의 가르침을 받았고 선군의 효성을 보고 감화되었다고 하니 그 말을 속일 수 없다. 최 부인은 열부로 복한은 효성으로 일찍이 《유섬천재삼강록(儒剡薦載三綱錄)》에 올랐는데, 지금 익술(翊述)이 이미 충심으로 공을 봉양하고 또한 거상도 잘하니, 나는 이에서 '효자가 끊어지지 않아 길이 복을 준다'68)는 시인의 말을 믿게 되었으며 또한 공의 덕과 선으로 인해 후대에 경사가 많은 것을 징험하게 되었다. 吾金, 世家扶安縣.在麗, 文章道學, 尊聖斥佛, 而有平章事文貞公諱坵.忠王國刱文廟而有尙書忠宣公諱汝盂.志存罔僕, 大歸貫鄕, 而有古阜郡事諱光敘.逮至本朝, 僉知諱甫漆, 討李施愛, 錄勳縣監.諱淑孫, 治有異蹟.進士諱宗, 己卯禍後隱居不仕.竹溪諱鋐進壯生二, 以道學薦爲齋郞, 士林立祠.叅奉諱鼎吉, 丙子倡義.中世移居古阜者, 近二百年, 世以行義相勖, 不失故家風.公諱栽烈字敬三, 於竹溪公爲十世, 叅奉公九世.澤述爲門子姪, 事之三十載, 觀其外, 坦朴訥言, 恂恂若無, 能察其中, 則慈諒冲厚之德, 有得之天者.大父諱錫禹, 早沒, 大母崔氏, 守義保家有法.父諱復漢, 事繼母惟謹, 又不幸早世.時, 公孑然童幼也, 侍母海州吳氏, 養崔夫人, 極其誠, 崔夫人, 性嚴, 公有過, 輒施橽不貸, 公一意承順.少爲幹蠱失學, 力于稼穡, 得稍饒, 凡係奉先享薦置田營墓石儀, 靡不殫誠.自奉甚約, 疑於儉而固也.至於與人取予, 務從寬厚, 不較小利, 以故平生無怨言.所後子本親, 以屬則實遠, 族貧而徙從, 有無共之四十年, 絶無德色.其幼子失恃, 無以養, 公收鞠之, 自乳而長, 以至敎學授室析箸, 一如親子, 恤人之難, 出實心.公所居百室里, 有喪不問親疎貴賤, 爲之先往, 經劃喪紀, 惟力所及, 人多賴以無憾者.由是自家人, 以至於鄕里老少上下, 皆得其歡心焉.歲己未三月二十九日, 以疾卒, 距其生憲廟丙午六月一日, 享壽七十四, 葬于古阜優德面拜將山乙向原.娶驪興閔氏致中女, 婦德備至, 無育, 取族子翊述爲後.有孫男五人, 炯根·炯鍰·炯淙·炯然·炯埰, 孫女二人, 長適崔載庸, 次幼.曾孫, 仁喆·元喆.嗚呼, 公, 吾門有功人也.先君嘗曰: "吾族十數年來, 先墓歲薦之中廢而復擧者, 實某兄經理宗財之力." 斯又其孝之遠及於親盡也.蓋公之德孝, 爲本厚以爲用.自齠齔至于耆耋, 未嘗以一事之不義, 一言之惡詈, 加諸人, 素非有讀書聞見之益, 而乃能有斯, 斯不亦難得矣乎.如使從事問學, 得聞義理之精, 則其所就, 豈止得於天禀之美而已哉.雖然公之賢, 亦係其世類, 識者以爲早襲乎其大母之訓, 觀感乎其先君之孝者, 有不可誣也.崔夫人以烈, 復漢以孝, 曾登《儒剡薦載三綱錄》, 今翊述旣忠養公, 又善居喪, 余於是益信詩人之不匱永錫, 又以驗公之德善, 慶發於後昆也. 친진 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된 것을 이른다. 효자가……준다 《시경》 〈기취(旣醉)〉에서 "효자가 끊어지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선한 복을 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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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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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일산 손공 행장 一山孫公行狀 공의 휘는 종순(鍾純) 자는 치성(致誠)으로 일산(一山)은 그의 호이다. 손씨(孫氏)는 계통이 경상도 밀양부(密陽府)에서 나왔다. 신라 시대에 효자 손순(孫順)이 석종(石鐘)을 얻는 기이한 일이 있어서 왕이 집과 쌀을 하사하여 그 효성을 장려하였다. 죽은 뒤에 시호는 문효(文孝)이니, 이 분이 시조이다. 세대가 전해 내려와 광리군(廣理君) 긍훈(兢訓)은 고려 태조를 도와 높은 공적을 세워 밀양에 봉해졌다. 또다시 8대가 지나 문과에 급제한 사공 변(抃)은 청백리에 뽑혔으며 명신에 들어갔다. 또 4대가 지나 밀성군 빈(贇)이 나왔으며, 또 6대가 지나 문과에 급제한 목사 책(策)이 나왔으니, 바로 조선 시대이다. 목사의 현손(玄孫)인 영귀당(咏歸堂) 비장(比長)은 문과와 증시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충간했던 뜨거운 마음은 조정에서 으뜸이니69) 그 일이 《국조실록》에 실려 있다. 영귀당의 증손 도봉(道峰) 홍적(弘績)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지냈는데, 명종 을사년에 사국(史局)을 담당하여 당시 일을 곧바로 기술하여 여러 임씨들의 무고에 걸려들어 위원(渭原)70)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가시니, 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부안(扶安)의 옹정(甕井)에 서원을 설립하였다. 이 분이 참봉 승경(承憬)을 낳았는데 승경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양성(陽城)71)에서 순국하였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조부 경엽(景燁)과 부친 철우(哲宇)는 금곡(錦谷) 송능상(宋能相)72) 공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는데, 두 분 모두 효도로 정려를 받았다. 모친은 조양 임씨(兆陽林氏)와 나주 나씨(羅州羅氏)로 모두 맑은 덕을 지녔다. 공은 나씨의 소생으로 다섯 명의 형제 가운데 막내이다.공은 철종 갑인년(1854년) 5월 23일에 정읍현(井邑縣) 석산리(石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영민하여 14~5세가 되기 전에 사서(四書)를 통하여 또래들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부로(父老)들이 대성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정묘년(1867년)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14살이었는데, 어른처럼 상례를 치렀다. 장지를 정할 때 여러 형과 조카들이 한 방에 모여 필점(筆占)으로 구하였으나 모두 영험하지 않았다. 공은 아직 관례를 하지 않았기에 가장 마지막 차례가 되어 붓을 휘둘렀는데 영험함을 얻어 좋은 무덤의 터를 잡게 되니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응한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전곡(奠哭)의 여가에 《가례(家禮)》를 읽기를 멈추지 않으니 공의 예학이 정밀하게 되었다. 대개 이 때부터 일찍 부친을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서, 항상 찾으려고 하나 찾지 못한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였다.73) 기일을 만나면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고 오열하니 마치 처음 초상이 날 때처럼 하였다.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집안을 꾸리며 남은 힘으로 책을 읽어 의문이 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가 경연관 운창(芸牕) 박성양(朴性陽)74) 선생에게 나아가 질정하였다. 선생은 공을 한 번 보고서 그 마음이 표리여일하다는 것을 알고서 순(純), 성(誠) 일(一)의 세 글자로 이름과 자와 호를 지어주면서 가상하게 여겼다. 공은 선생을 깊이 믿고 종유하였으며, 선생이 타계하자 3개월 동안 가마(加麻)75)하였다.모친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병이 나자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밤에 허리띠를 벗지 않았다. 이렇게 석 달을 하니 몸이 수척해져 거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이에 여러 형들이 중도(中道)에 지나치다고 꾸짖자 이에 잠시 침소에 나아가 쉬었다.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주니 그날은 넘겼지만, 마침내 무자년(1888년) 11월 9일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공이 예를 지켜 장사를 치룬 것은 이전 부친상에서 이미 그러하였으니, 현재 정과 예를 다하고 그 법도를 엄하게 한 것은 실로 공에게는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공은 상을 마치자 종중의 모임에서 의논을 제시하기를 "이처럼 세도가 무너졌으니 영화를 어찌 구하리오. 다만 후생을 교육하여 선대의 업을 실추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돈을 갹출하여 계를 만드니, 불어난 재물이 자못 상당하여 집을 세워서 학문을 익힐 장소로 삼고 책을 구매하여 독서할 바탕으로 삼았다. 자질(子姪) 이외에 원근에서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많은 인재가 양성되어 대단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힘써 그들을 기쁘게 하여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본성은 이단을 물리치는데 엄격하였기에 방술(旁術)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저들도 기가 절로 죽어서 감히 자신의 방술에 대해 자랑하지 못하였다. 갑오년(1894년)에 동비(東匪)들의 기세를 올릴 때 호남이 가장 심하였고 그 중에서도 정읍이 더욱 심하였는데, 오직 공이 살던 마을은 침범하지 못하였다.친족의 자녀 가운데 가난하여 혼사를 치르지 못한 자가 있거든 공이 앞장서서 재물을 내었고 이어서 여러 친족에게서 거둬 도와서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마을에 공부할 때를 놓친 자가 있으면 밤에 공부하기를 권하여 가르치니, 사람들이 손 선생이라 불렀다. 근처에 고용한 노비들도 또한 정강성(鄭康成)의 집안 노비들처럼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76) 공은 조상을 추모함에 정성을 다하여 먼 시대 조상의 분묘의 의물을 험한 길을 찾아가 고생 고생하여 마침내 마련하였다. 평생의 뜻은 다만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 넉넉함 드리우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성취시키는 것뿐으로, 다른 것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주 굶주리는 근심을 타인은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공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물건을 사양하거나 받는 의리에 대단히 엄격하여 만일 마음에 온당하지 않다고 여기면 조금도 취하지 않았으니, 식자들이 만석군(萬石君)77)의 자질로 유공작(柳公綽)의 가법78)을 행하여서 이 둘을 겸하면서도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들보다 낫다고 하였다. 향도(鄕道)의 선비들이 사실을 기록하여 서로 추천하여 읍영(邑營)에서 상과 물건을 내렸는데,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서 상과 물건을 싸서 돌려보낸 것이 여러 차례였다.을사년(1905년)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이 평소 공의 이름을 듣고서 오래 친한 이처럼 대하였으며 돌아갈 때 글을 써서 장려하였다. 그 후로 공은 자주 편지를 보내 많은 것을 질정하였다. 공은 항상 문생과 자질(子姪)에게 말하기를 "이 마음이 한결같이 바르면 온갖 이치가 절로 밝아져서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자는 육행(六行)79)에 한 가지라도 흠결이 없는 연후에 바야흐로 학문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본령(本領)이니, 정성을 다해 사람을 가르친 것도 또한 이와 같다.기미년 11월 1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66세였다.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면서 "군자가 떠났구나."라고 하였으며, 붕우와 문생 가운데 가마(加麻)한 자들이 상당하였다. 석산(石山)의 뒷 산록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양(南陽) 홍씨 신영(信永)의 따님으로,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집안을 바르게 다스렸으며 한번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마땅히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덕원(德源)이고 차남은 행원(行源)이다. 덕원의 아들로 성하(聖夏)가 있고 사위로는 고광문(高光文)이 있다. 행원의 아들로는 성환(聖桓), 성훈(聖訓), 성근(聖根)이 있고 사위로는 이동열(李東烈)과 고광조(高光晁)가 있다. 성환의 아들로는 기선(淇宣)과 오선(五)이 있다.오호라! 공은 내 선친의 벗이다. 매번 공이 춘추에 성묘하러 올 때 반드시 길을 둘러서 찾아와 서로 매우 기뻐하였다. 처음에 내가 공에게 절을 올릴 때 나아가 아직 어렸는데, 그러나 공의 청아한 용모는 따뜻하면서도 굳세어 존경함이 일어났고 차분한 말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단정하고 장중한 선비임을 알았다. 공이 성묘하러 올 때가 되면 공과 선친이 대화하는 말을 자주 들었으니, 간곡한 진심에서 하는 말에서 학문이 지극하고 덕이 높음을 알 수 있으며 개연히 근심하는 말은 세상의 교화가 풀어지고 도가 사라진 것이었다. 정읍에서 오는 선비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공이 집과 향촌에서 행한 바는 옛날 법도를 따라 지금 세상에 드문 것으로 올바름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다. 이에 공이 마음에 지닌 바와 행한 바가 옛날 법도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른바 도를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겠다.지금 다시 공의 종손 성철(聖徹)이 지은 가장(家狀)을 얻어서 읽어보니 부모를 섬기고 상에 거하며 지결을 세워 마음을 전한 자세한 실상을 알게 되었으니, 이에 공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체(全體)를 잘 알게 되었다고 하겠다. 다만 이 가장은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하였지만 학문하는 과정에 대해 소략하며 아울러 논저의 요지 한 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학문하는 차례와 조예의 깊음, 귀숙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고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가장에서 '성리의 여러 책에 대해 정밀하게 연구하지 않음이 없으며, 《가례》와 《소학》 그리고 《상서》를 대단히 좋아하였다.'라 하였으니, 대저 격물치지의 방법은 성리에서 나오고 제가치국의 정치는 모두 위 세 책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 보면 공의 학문이 격물치지에 깊으며 그 아는 바를 미뤄 가정에 행하고 나라에 미친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유문(儒門)에서 서로 전하는 정법은 지와 행을 함께 닦는 것이니, 공이 이에 해당하지 않는가.대개 공의 자질은 원래 아름다운데다가 공부까지 지극하였으니, 세상에 크게 드러난 조상인 영귀당(咏歸堂)과 도봉(道峰)의 덕을 마음에 담고 명현인 운창(芸牕)과 간재(艮齋)에게 의심을 질의하였다. 시와 예를 길이 전하여 안으로 행실이 갖춰지고 학문의 문로(門路)가 올바름을 얻어 아름다운 은혜를 남겼으니, 아아! 훌륭하도다. 이 어찌 기록하여 세상의 입언군자에게 고하지 않으랴. 공의 맡아들 덕원이 나에게 행장을 청하였는데, 내가 비록 못났지만 선대의 깊은 우의를 생각하매 감히 사양하지 못하니 삼가 가장을 서술하고 나의 견해를 붙여 이상과 같이 찬술한다. 公諱鍾純字致誠, 一山其號也.姓孫氏, 系出慶尙道密陽府.新羅時有孝子孫順, 得石鍾之異, 王賜宅米褒之, 卒謚文孝, 是爲始祖.傳至廣理君兢訓, 佐麗太祖, 有嵬勳, 得是封.又八傳而文科司空抃, 選淸白, 入名臣.又四傳而有密城君贇, 又六傳而至文科牧使策, 則本朝時也.牧使玄孫咏歸堂比長, 文科重試, 副提學, 忠言偉烈, 卓冠朝端, 事在《國朝實錄》.咏歸曾孫道峰弘績, 文科翰林, 明宗乙巳, 掌史局, 直書時事, 爲群壬所構, 謫渭原卒, 士林追慕立祠扶安甕井.生叅奉承憬, 壬辰亂, 起義旅, 殉于陽城, 於公爲八世祖.祖景燁.考哲宇, 從遊錦谷宋文公門, 兩世幷以孝命旌.妣兆陽林氏, 羅州羅氏, 俱有淑德, 公羅氏出, 兄弟五人, 序居末.以哲宗甲寅五月二十三日, 生于井邑縣石山里第.才性穎悟, 未成童, 通四子書, 儕流莫及, 父老望大成.丁卯丁外艱, 年十四, 執喪如成人, 謀葬地, 諸兄若姪, 聚會一堂, 將以筆占求之皆未靈, 公未冠故最後及之, 乃揮筆得靈, 協吉永窆, 人異其誠感.奠哭之暇, 讀《家禮》不輟, 公之禮學致精.蓋自此日, 以早孤未養爲恨, 恒如有求不得之人.當忌辰, 淚哭嗚咽, 如袒括初.貧無以爲學, 餘力劬書, 疑輒記之, 就質于經筵官芸牕朴先生, 先生一見, 知其心事, 表裏如一, 以純誠一三字, 錫名字號而嘉之, 公服信從遊, 及沒加麻三月.事母夫人, 極其愛敬, 有癠, 少不離側, 夜不解帶, 凡三朔, 羸瘠幾生病, 諸兄責以過中, 乃暫就寢處以自扶.至革, 裂指注血, 得甦一日, 竟以戊子十一月九日, 遭艱.公之執禮, 在前喪已然, 則今之盡情禮嚴防限, 實又疏節也.喪畢立議宗中曰: "世降如許, 榮貴何求.惟敎育後生, 毋墜先業爲第一義." 乃醵金樹契, 其蓄頗鉅, 建齋爲肄業所, 購書爲讀書資.子姪外遠近來學者衆, 敎誨不倦, 因材有成多可觀.接人務用歡心, 不少簡忽, 然性嚴於闢異, 故凡以旁術至者, 幷不假顔, 彼亦氣自餒縮, 不敢售辯.甲午東匪之熾, 湖南最甚, 井邑爲尤, 而惟公一洞無汙.族子女貧未婚嫁者, 自公先捐, 繼排諸族而助之, 俾不失時.里人失學者, 勸夜學而敎之, 人謂孫先生.近地雇傭奴婢, 亦識字有如鄭康成家云.誠於追遠, 遠代墳墓儀物, 跋涉勤楚, 終底有成.平生志業, 惟在承先裕後, 修身成物, 他不念及.故屢空之憂, 人所不堪, 而處之晏如.尤嚴辭受之義, 苟係未安, 一毫不取, 識者謂萬石君質, 行柳公綽家法, 兼有而正己過之.鄕道章甫, 摭實交薦, 至有邑營賞物, 而不以自居, 封還以送者累矣.乙巳, 謁艮齋田先生, 先生素聞公名, 視若夙親, 歸則書以獎之.自後公有累度書面, 多所就質.恒語門生子姪曰: "此心一正, 則萬理自明, 天下無難事." 又曰: "學者, 於六行, 無一欠缺, 然後方可謂學." 此實公之本事, 故丁寧敎人者, 亦如是.己未十一月一日, 考終于家, 壽六十六, 遠近莫不嗟惜曰: "君子逝矣." 朋友門生加麻者, 若干人.葬于石山後麓艮坐原.配南陽洪氏信永女, 固窮宜家, 一不見憂色, 宜其爲君子配也.生二男, 長德源次行源.德源男聖夏, 壻高光文.行源男聖桓·聖訓·聖根, 婿李東烈·高光晁.聖桓男淇宣·五宣.嗚呼, 公, 我先人友也.每公春秋楸行, 必迂路而訪, 甚相歡焉.始余拜公, 年尙幼.然見公淸雅之容, 溫栗可敬, 安定之言, 倫脊無差, 心知其爲端人莊士矣.及其省事, 熟聽公與先人語者, 懇然之誠, 學至而德崇, 慨然之憂, 敎弛而道喪. 曁士從楚南來者, 皆言'公家鄕所行, 絶今遵古, 鮮不出乎正者', 知公所存所發, 無愧乎古, 所謂篤信好學者矣.今又得公從孫聖徹所撰家狀而讀之, 幷悉其事親居憂立訣傳心之詳, 於是乎公之全體始終, 可謂備知矣.但是狀也, 細述行治, 而畧於爲學節度, 幷不及論著要旨之一二, 無由考其進修次第, 造詣淺深, 歸宿在何何4)也.雖然有云'性理諸書, 無不精鍊, 酷好《家禮》《小學》《尙書》.' 夫格致之方, 出於性理, 家國之政, 具在三書, 卽此而觀公之功深格致, 而推其所知, 行之家而可及於邦國者, 槩可想也.儒門相傳定法, 知行交修者, 非此歟.蓋公天資旣美, 人功亦至, 念德乎咏歸道峰之顯祖, 質疑於芸牕艮齋之名賢, 詩禮永傳而內行備, 門路得正而嘉惠存, 猗歟盛矣.是烏可不書之, 以告世之立言家乎.公之嗣子德源, 請余以狀德之文, 顧雖無似, 念先誼之重, 不敢言辭, 謹按叙家狀, 而略附己見, 撰次如右云爾. 충간했던……으뜸이니 그 내용은 앞의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임압손공행장(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笠巖孫公行狀)〉에 보인다. 위원 평안북도에 있는 군이다. 양성 경기도 안성의 옛 지명이다. 금곡 송능상 1710 ~ 1758.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능(士能)이며, 호는 운평(雲坪)·동해자(東海子)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쌓아 약관에 명성을 떨쳤다. 윤봉구(尹鳳九)·이재(李縡)·임성주(任聖周)등과 교유를 맺었으며, 문인으로는 조카인 송환기(宋煥箕)가 유명하다.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났을 때는 스승 한원진의 설을 좇아 호론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동조하였다. 《주역》을 깊이 연구하였고, 예학에 밝았다. 시문집인 《운평집》이 있다. 찾으려고……못하였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서 "노(魯)나라의 안정(顔丁)은 부모의 거상(居喪)을 잘하였다. 부모가 죽은 처음에는 황급히 뛰어다니며 아무리 찾아도 부모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빈소(殯所)를 차린 뒤에는 부모를 멀리 바라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장례(葬禮)를 마치고는 마치 부모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안 되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슬퍼하였다.〔顔丁善居喪 始死皇皇焉如有求而弗得 旣殯望望焉如有從而弗及 旣葬慨然如不及其反而息〕"라고 하였다. 운창 박성양 1809~1890.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선(季善), 호는 운창(芸窓)이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지평·호조참의·동부승지·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가마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정강성의……한다 정강성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정현(鄭玄)으로, 강성은 그의 자이다. 그의 집안 노비들은 책을 읽을 줄 알아 평상시에 《시경》의 말을 인용하곤 하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文學》 만석군 만석군(萬石君)은 한 문제(漢文帝) 때에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고 경제(景帝) 때에 구경(九卿)에 이른 석분(石奮)을 가리킨다. 석분은 본디 공경하고 근신함으로써 임금의 총애를 입었던바, 그의 아들 건(建), 갑(甲), 을(乙), 경(慶) 또한 모두 아버지를 닮아서 착한 행실과 효도하고 근신함〔馴行孝謹〕으로 인하여 각기 이천석(二千石)의 벼슬에 올랐으므로, 경제가 이르기를 "석군 및 네 아들이 모두 이천석이 되었으니, 신하에 대한 높은 대우가 그 가문에 다 모였다.〔石君及四子皆二千石 人臣尊寵乃擧集其門〕"라 하고, 석분을 만석군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 유공작의 가법 당(唐)나라 하동 절도사(河東節度使) 유공작(柳公綽)에 대해서는 소학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유공작은 동생 유공권(柳公權)과 우애가 깊어 항상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였다. 유공작이 죽자 그의 아들 유중영(柳仲郢)은 한결같이 삼촌 유공권을 아버지같이 섬겼으며, 또 아버지의 가법을 받들어 잘 준수하였다. 《小學 善行》 유공작(柳公綽)의 아내 한씨(韓氏)가 고삼(苦蔘)과 황련(黃連)과 웅담(熊膽)을 섞어 환약을 만들게 한 다음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 공부할 때마다 이 환약을 입에 머금고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하였다. 《小學 嘉言》 유변(柳玭)'은 당(唐)나라 유공작(柳公綽)의 손자로, 가풍을 이어 효제(孝悌)와 예법(禮法)을 준수하였다. 자제들을 경계시킨 다섯 가지 조목이 《소학》 권5 〈가언(嘉言)〉에 실려 있는데, 그중에 "내가 보건대, 명문거족은 선조의 충성과 효도와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인해 성립되고, 자손들의 완악함과 경솔함과 사치와 오만함으로 인해 전복되었다. 성립하기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전복되기 쉬움은 터럭을 태우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자니 마음이 아프다. 너희들은 뼛속 깊이 명심하도록 하라"라 하였다. 육행 육행은 여섯 가지 행실로 효도함[孝], 우애함[友], 동성간(同姓間)에 화목함[睦], 이성간(異姓間)에 화목함[婣], 이웃간에 신실(信實)함[任], 서로 구휼함[恤]이다 《周禮 地官 大司徒》 이 말은 《소학》 〈입교(立敎)〉에도 보인다. '何'자 한 글자는 衍文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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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현범(李顯泛) 제문(祭文) 고문서-시문류-제문 從弟 從弟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종제가 쓴 종형 이현범의 제문 모년에 종제(從弟)가 쓴 종형(從兄) 이현범(李顯泛)의 제문(祭文)이다. 날짜는 미상이다. 종형은 자질이 강명(剛明)하고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스러웠으며 재주는 많았으나 단명(短命)하였다. 자신과 함께 연방(蓮榜, 과거합격자 명부)에 올랐고, 백부는 검소하게 사랑으로 길러주셨고, 선고(先考)께서 애지중지(愛之重之)하셨다. 한 가문을 주관하며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며 집을 가지런히 함에 법도가 있었다. 자신에게 어려서부터 매우 자상하게 경책(警責)해 주었으며, 모든 후생들이 의지하였으니, 친척들이 슬퍼하고 사우(師友)들이 탄식하며, 사사로운 정이 배나 깊은 자신은 애통해 하며 추모를 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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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이명찬(李明燦)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明燦 李明燦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이명찬이 남강 한헌, 토사 임중, 한탑 등으로 표현한 동일 인물이 수신자에게 보낸 3편의 안부편지 모년에 이명찬(李明燦)이 남강 한헌, 토사 임중, 한탑 등으로 표현한 동일 인물에게 보낸 3편의 안부편지이다. 날짜를 적지 않고 발신자의 이름은 적어놓았다. 1. 이명찬(李明燦)이 남강(南崗) 한헌(閑軒)에게 쌓였던 얘기를 펼쳐야 되지 않느냐고 하며, 서로 거리가 심히 멀지 않는 땅인데도 문득 쉽게 얻지 못할 일이니, 속세의 일은 진실로 이와 같다고 하며 서글피 탄식하고, 쇠함이 점점 심해서 연래(年來)로 양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2. 이명찬(李明燦)이 토사(土司) 임중(任中)에게 공무(公務)로 바빠서 창망(悵惘)하리라 생각하고 식구들 안부를 묻고, 자신은 그럭저럭 지내나 진세(塵世)의 어지러움과 짝을 하며 쇠퇴(衰頹)함이 날로 심해지니 앞으로 좋은 재미도 없을 것이 자연의 이치일 것이라는 내용이다. 3. 못난 사람[拙欠]이 한탑(閑榻)으로 곧바로 전한 편지로 여름에 종상(終祥, 대상)할 때에 가려고 했으나 심부름꾼이 두증(痘症)을 앓아 참석을 못하여 혐창(嫌悵)한 마음 그지없고, 자신은 시끄러운 세상이 오히려 겹쳐져 쇠한 모습이 갈수록 심해져 질병을 앓으며 버텨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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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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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익부에게 보냄 정묘년(1927) 與羅益夫 丁卯 익부가 나를 종유(從遊)한 지 이미 삼 년입니다. 옛사람은 대개 삼 년으로 하나의 큰 한계를 정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예컨대 "삼년유성(三年有成),55) 삼년고적(三年考績),56) 삼년학부지어곡(三年學不至於穀)57) 등의 유가 그것입니다. 익부는 과연 한 가지 소득이 있어서 손에 쥘 만한 것이 있는가요? 그렇지 않다면 익부가 세월을 허비한 것이 애석할 뿐 아니라 내가 사람을 잘못 인도한 것이니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옛사람은 20년 동안 하나의 노(怒)자를 다스리는데도 미진함이 있었다고 했으니, 익부가 만약 하나의 지(志)자를 결정해 옮기지 않았다면 그 공부가 민첩해 옛사람이 노(怒)자를 다스린 것보다 넉넉하여 삼년의 소득이 또한 많다고 할 것입니다. 대저 지(志) 한 글자를 이미 정했다면 백가지 방도가 모두 올곧을 것이니 이를지나 더 나아가면 위로는 성인이 되고, 다음은 현인이 되며, 또 그 다음은 선신(善信)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직 그 자질과 기량, 공부와 능력의 크기와 깊이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지(志)가 혹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면 비록 삼년 사이에 강변(講辨)의 웅패(雄沛)함이 강하(江河)와 같고, 문장의 아름답고 찬란함이 별자리와 같다 할지라도 어찌 소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익부는 스스로 자신의 뜻을 징험하여 앞날의 성취를 이루십시오. 나는 장차 익부가 삼년의 배움으로 종신토록 덕업을 쌓을 것이라고 예견해보겠습니다. 益夫之從我遊, 已三年矣.古人有爲多以三年定一大限, 如云三年有成, 三年考績, 三年學不至於毅之類是也.益夫果有一副所得可以藉手乎? 否則非惟益夫之費日爲可惜, 我之誤人亦可恥也.雖然昔之人, 有二十年治一怒字未盡者, 益夫若能定一志字, 移易不得, 則其下功敏速, 優於昔人治怒, 而三年之得, 亦已夥矣.夫一志旣定, 百度皆貞, 過此以往, 上而爲聖, 次而爲賢, 又其次而爲善信之人.惟在其才器工力小大淺深之如何爾.志或有未盡定者, 雖使三年之間, 講辨之雄沛若江河, 文章之麗爛若星斗, 尙何足謂有得乎? 請益夫自驗自志, 管取他日成就.吾將以益夫三年學, 卜終身德業. 삼년유성(三年有成)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가 자신이 등용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만일 나를 등용해 주는 자가 있다면 1년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니,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다.〔苟有用我者 朞月而已可也 三年有成〕"라고 하였다. 삼년고적(三年考績) 《서전》 〈순전(舜典)〉의 "3년마다 한 번씩 성적을 고사(考査)하였다.〔三載考績〕"라고 하였다. 삼년학부지어곡(三年學不至於穀) 《논어》 〈태백(泰伯)〉에 "3년을 배우고서도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자를 얻기가 쉽지 않구나.〔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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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오 석규에게 보냄 무진년(1928) 與洪燦五 錫奎 戊辰 대저 옥(玉)이 원석 가운데 있으면 한 개의 돌을 벗어나지 못하고, 목재가 산에 있을 때는 한그루 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숙련된 석공이 탁마(琢磨)하고 대장(大匠)이 승착(繩斲) 해야 규(圭 홀), 새(璽 옥새), 장(璋), 찬(瓚 제기) 등으로 각각 그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고, 동량(棟樑 마룻대와 들보), 각최(桷榱 서까래) 등으로 각 쓰임에 들어맞게 됩니다. 그리하여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을 완성할 수 없고, 나무는 먹줄을 따라야 바르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저 쪼고, 갈고, 먹줄을 대어 깎아냄에 그 헤치고 쳐내는 것이 매우 심하지만, 옥과 나무가 일찍이 원망하지 않는 것은 그 쓰임을 다하게 함으로서 그 본성을 이루어주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사람 또한 그러합니다. 만일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실로 꿈틀대는 한 동물일 뿐입니다. 반드시 엄한 스승에게 채찍질을 받고 외경하는 벗에게 연마와 질책을 받은 연후에 현성(賢聖), 호걸로 각각 그 그릇을 완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하고, 간언(諫言)을 따라야 성인이 된다."58)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승과 벗의 채찍과 질책은 석공과 목수의 갈고 깎아내는 것에 비하면,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안마하는 것보다도 훨씬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채찍과 질책을 받는 자가 자신을 해칠까 의심하여 마음을 편안케 가지지 못한다면 덕업이 무엇을 쫓아 정밀하고 완숙하게 되겠습니까? 그대 형제는 약관의 나이에 두각이 뚜렷하니 진실로 사람 가운데 소중한 보배요, 빼어난 목재입니다. 그러니 원하건대 더욱 깎고 쪼는 다스림을 받아들여서 규장(圭璋)과 동량(棟樑)의 쓰임을 이루기 바랍니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말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공을 돕고자 합니다. 夫玉之在璞, 未離乎一箇石, 材之在山, 未離乎一箇木.及乎良工琢磨之, 大匠繩斲之, 圭璽璋攢, 各致其美, 棟樑桷榱, 各中其用.故曰 玉不琢, 不成器, 又曰木從繩則正, 夫琢磨之繩斲之也, 其戕賊椓喪, 亦已甚矣, 玉與木之不曾怨者, 以盡其用而遂其性也.惟人亦然.苟不學問, 則實不離乎蠢動一物而已.必也鞭策於嚴師, 淬礪於外友, 然後賢聖豪傑, 各成其器.故曰不學不知道, 又曰從諫則聖.然師友之策礪, 其視工匠之琢斲焉, 不啻爬痒按痛之不若.而受之者, 乃或疑其厲己而不安意焉, 則德業安從而得精熟哉? 君之昆季, 弱冠嶄然, 誠人中之重寶秀木.吾願其益受鑿沙斤錫之治, 俾成圭璋棟樑之用.故爲是說, 助其進修之功. 배우지……된다 "옥은 조탁하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道.]"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거룩해진다[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서경》 〈열명(說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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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병진년(1916) 上艮齋先生 丙辰 '성(性)은 서로 비슷하다[性相近]'고 한 말에서의 성은 기질지성(氣質之性)입니다. 기질지성이 비록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된 것은 바로 그 기질의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을 따라 그러한 것이니 이 또한 기질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래 장의 주(註)에서는 단지 기질만을 말하고 '성(性)' 자는 쓰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이른바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80)고 한 것입니다.율곡(栗谷)이 만약 당초에 품수한 기질만 말했을 뿐이라면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지금 기질지성이 발용(發用)하는 데 나타난 것을 가지고 품수할 때를 기준으로 앞서 말한다면 진실로 처리할 수 없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아마도 율옹(栗翁)의 뜻은 각기 다른 성은 본래 발용한 뒤의 일이고 각기 다르게 된 까닭은 당초에 이러한 기질을 품수하였으므로 발용함에 미쳐서 이러한 기질지성이 된 때문인 것인 듯합니다. 이는 '당초에 품수한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된다'라고 할 때의 성과 같고, 당초에 하늘에서 품수한 기질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초에 품수한 것은 단지 기질일 뿐이라는 뜻이 분명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만약 이처럼 융통성 있게 보지 않고 사람과 동물이 기품(氣稟)이 달라 서로 다른 성을 품수하였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즉 사람과 동물이 품수하여 성이 된 것은 바로 하늘의 명(命)이고 천명(天命)은 하나의 근본인데 지금 사람마다 다른 성을 받고, 동물마다 다른 성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른바 천명이라는 것은 장차 본령(本領)이 천만 개로 나뉘어 자잘하기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태극(太極)의 용(用)은 원래 다름이 있어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이 서로 다르게 되는 근본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즉 태극이라는 것은 본래 진실(眞實)하여 거짓이 없고 체(體)와 용(用)이 하나의 근원인지라 만물의 뿌리가 되는 것인데 지금 그 용(用)이 갖가지로 달라 기질지성이 다르게 되는 근본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하늘에 이미 치우친 태극(偏太極)과 온전한 태극(全太極), 아름다운 태극(美太極)과 추악한 태극(惡太極)이 있는 것이니 이러한 태극이 어찌 족히 만물의 뿌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性相近之性, 是氣質性. 氣質性雖曰不外乎本然性, 然其人人而自爲一性者, 乃隨其氣質之剛柔緩急而然也, 是亦氣質而已. 故下章註, 只言氣質而不著'性'字, 此正張子所謂'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也.栗谷若只言當初禀受氣質而已, 則夫孰敢疑之? 今以氣質性之見於發用者, 早言於禀受時, 誠有區處不得之慮矣. 然竊恐栗翁之意, 以各異之性, 固發用以後事, 而其所以各異者, 以其當初稟如此之氣質, 故及其發用而爲如此之氣質性也. 此如曰隨當初稟受氣質, 而自爲一性之性也, 非謂氣質之性, 當初禀受於天也. 然則其當初禀受者, 只氣質而已之意, 瞭然在其中矣.若不如此活絡看, 而以爲人物異氣稟, 受異性, 則人物之所受而爲性者, 卽在天之命也. 天命者一本也, 今曰人人而受異性, 物物而受異性, 所謂天命者, 將千萬本領, 而不勝細碎矣. 又以爲太極之用, 元自有殊而爲人物氣質性異之本, 則太極者, 眞實無妄而體用一源, 所以爲萬物之根柢也, 今曰其用萬殊, 而爲氣質性異之本, 是在天已有偏太極全太極美太極惡太極, 烏足爲萬物之根柢乎? 장자(張子)가……있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체가 있게 된 뒤에 기질지성이 있으니, 이를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形而後, 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2 〈위학(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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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정사년(1917) 上艮齋先生 丁巳 선비(先妣)의 가장(家狀)에 제발(題跋)을 지어 주신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니 제 목숨을 다하여도 갚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선비(先妣)의 아름다운 행실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선생님의 성대한 덕이 남의 선행을 즐겨 말하셔서일 것입니다. 아! 저의 어버이는 효경(孝敬)과 인선(仁善)의 덕이 있으셨지만 불행히도 장수와 복록(福祿)을 누리지 못하고 궁핍한 삶에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으니 이것은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말씀과 아름다운 행적이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의 글을 얻어 영원토록 불후하게 되었으니 비록 한이 없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이 있고 없는 사이에서 저는 장차 어떤 마음을 품어야겠는지요? 오직 도를 밝히고 몸을 깨끗이 하여, 안으로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실질을 갖추고 밖으로는 성현(聖賢)의 학문을 계승한다면 어찌 스승과 어버이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이제 이후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더욱 궁구하고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더욱 힘써서 도가 밝아지고 몸이 깨끗해지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감히 태만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이 때문에 근년 들어 추위와 굶주림이 몸에 사무칠수록 구렁에 시체로 뒹굴겠다는 조수(操守)는 더욱 굳건해지고 분서갱유(焚書坑儒) 같은 재앙이 박두할수록 머리를 잃겠다는 지조(志操)는 더욱 굳세집니다.81) 이는 감히 말만 잘하여 선생님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차마 더없이 소중한 유체(遺體 어버이가 남긴 몸)를 더럽고 욕된 지경에 빠뜨리지 못해서입니다. 이런 의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만날 일을 기다렸다가 대처할 뿐입니다. 다만 일상에서 말하고 행할 때에 마땅히 강구(講究)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눈만 뜨면 바로 잘못 보고 걸음만 옮기면 번번이 발을 헛디뎌서 심중(心中)에 위태롭고 불안한 생각이 많고 안정되고 여유로운 의취(意趣)가 적음을 느낍니다. 무릇 이렇게 쉽게 알 수 있고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상 생활의 엉성한 일들조차도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천하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고 천하의 위대한 사업(事業)을 세우겠습니까?아! 만약 이 일에 뜻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더욱 마음을 기울이려고 하면서도 더욱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심력(心力)을 열심히 써서 분비(憤悱)82)를 이기지 못하는데 끝내 스승을 받들고 어버이를 드러내지 못할까 두려워서 감히 스승님께 숨기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로 여겨 살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긴요하지 않은 외람된 말로 여겨 버리시겠습니까? 선비(先妣)의 행록에 '집안의 부녀(婦女)를 가르친다[敎內眷]'는 교훈이 있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이에 언해(諺解)를 올립니다만, 말이 비속(卑俗)하고 전아(典雅)하지 않아 부끄럽고 송구할 뿐입니다. 先妣家狀蒙賜題跋, 恩出不圖, 隕首莫報. 此蓋先妣之懿行, 有以感夫人心, 而先生之盛德, 有以樂道人善也. 鳴呼! 小子之二親有孝敬仁善之德, 不幸而不壽祿, 窮約困瘁而終, 此固可恨矣. 然嘉言美蹟, 幸而得先生筆, 而不朽千載, 雖謂之無恨, 可也. 然則有恨無恨之間, 小子將何以爲心? 惟有明道淑身, 內有立揚之實, 外紹賢聖之學, 豈非少報師親之恩者乎? 從玆以往, 益究其所未知, 益勉其所未能, 誓到明淑之地, 而不敢怠也. 是故比年來凍餓切膚, 而溝壑之操愈堅, 焚坑迫頭而喪元之志愈勵, 非敢能言以欺先生. 實不忍以莫重之遺體, 置諸汙辱之地也. 此箇義諦, 旣已知之, 第俟前頭所值而處之. 但日間云爲之際, 所當講究而踐行者, 開眼便錯見, 擧步輒失足, 覺得心中杌楻不安之意多, 妥帖自在之趣少. 凡此日用粗跡易知易行者, 尙如此, 將何以窮天下之至理, 建天下之大業乎? 噫! 苟無志於此事則已, 其欲益加意, 而益不能者, 何也? 小子以此, 煞用心力, 而不勝憤悱, 懼終無以承師而顯親, 敢以不隱乎皐比之下, 不審先生以爲由中之出而察之乎? 抑以爲不緊猥言而棄之乎? 先妣行錄, 至有'敎內眷'之訓, 尤切感激, 茲諺翻呈上, 而但詞語俚俗不雅是爲愧悚. 추위와……굳세집니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자가 이르기를 '의지가 굳은 선비는 곤궁하여 자기 시체가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맹한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분비(憤悱) 분(憤)은 마음속으로 뭔가를 통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하고, 비(悱)는 입으로 말을 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논어(論語)》〈술이(述而)〉에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고, 입으로 말해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거니와,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이로써 세 귀퉁이를 유추해서 알지 못하면 다시 더 말해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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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정사년(1917) 上艮齋先生 丁巳 요즘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는데, 근래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바다 가운데는 추위가 더욱 심한데 잠자리와 음식 및 제반의 일들은 손실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매번 집 뒤의 작은 언덕에 올라가서 계화도를 바라 볼 때 마다 마치 책상을 대하고 있는듯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종기로 인한 고통과 저의 혹독한 재앙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 진흙을 바른 조그만 여막집에 칩거하면서 하는 일은 없는데 다만 몸이 상중에 있어 실상이 없을까 두려워 항상 마음속으로 반성하면서 "네가 슬픔이 마르고 격식이 모자라서 예(禮)가 부족한 것인가? 이것은 부친을 생각하는 마음에 태만한 것이니, 진실하지 못한 죄 중에서 큰 것에 해당합니다. 네가 진정을 숨기고 형식을 갖추어 명예를 구하는가? 이것은 부친을 속이는 것이니, 진실하지 못한 죄 중에서 더욱 큰 것에 해당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니, 다소 득력처(得力處)가 있는 듯 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거상(居喪) 한 가지 일을 이렇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에서 마음을 보존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기분을 따르고 욕심에 이끌려서 의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위천(違天)이라 부르고, 구차하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여 명예를 구하는 것은 기천(欺天)이라고 부르니, 위천과 기천의 죄는 모두 이 몸을 성실히 하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단지 하나의 성(誠)을 세울 수 있다면, 어렵지 않고 우활(迂闊)하지 않은 길이 눈앞에 있어 따라갈 수 있고, 마음 편히 날마다 쉴 수 있는 효과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대학》에서 말한 성의(誠意)이고,《맹자》가 말한 사성(思誠)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익혀서 암송한 것이지만, 일찍이 하루도 여기에 대해 실제로 힘을 쓴 적이 없어서 구체적인 일로써 행동하는 공력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후로는 성(誠)이라는 한 글자를 공부하는 칼자루로 삼고서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지만, 이미 아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에 따라서 노력한다면 거의 위천과 기천으로 귀착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가 선생께서 제가 마음을 보존하고 행실을 다스리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 어긋난 점이 있으면 지적하여 통렬하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근래에 《주례(周禮)》한 부(部)를 읽다가 그 육관(六官)의 소속 직책들이 〈주관(周官)〉의 치(治)·교(敎)·예(禮)·정(政)·금(禁)·토(土)83)의 관장(管掌)으로 기준해 보면 대부분 혼란스러워 차서(次序)를 잃어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선유(先儒)들이 혹 주공(周公)의 경(經)이 아니라고 의심하거나 혹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책이라고 여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손지(方遜志)가 이른바 제후들이 자신들에게 해가 됨을 미워하여 그 전적을 없애버리고 난 나머지에서 나와 한대(漢代)의 유자(儒者)가 보충한 데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마도 정확한 의론인 듯합니다. 그가 편차(編次)를 고증한 목록은〈주관(周官)〉에 증험해 보면 딱딱 맞아서 믿을 만합니다. 다만 서문(序文)에서 그 대략만 논했을 뿐 미처 모든 직책을 다 열거하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분직(分職)하고 분류한 것에도 간혹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간에 제가 그 범례를 신중히 따라 육관(六官)의 모든 직책을 다 들어 다시 편차를 고증하여 한 두 가지 의심스러운 것을 고쳐 이미 편목(篇目)을 완성하였기에 고친 차례의 편목에 의거하여 한 본을 필사하고 다시 그 뒤에 논설(論說)을 붙여 동지들에게 질정(質正)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천박한 견해와 망령된 의론이 한갓 경서를 어지럽혔다는 비난만 받을까 두려운 데다 눈앞에 닥친 시급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比天大雪, 近年所無. 海中寒冱益劇, 不審寢膳諸節無或見損否. 每陟廬後小堆, 遙望華嶹, 若對案然. 念先生之癃疾, 痛小子之酷禍, 時有泣下而不覺也. 蟄伏堊廬, 無所猷業, 但身在執喪, 懼其無實, 常自省于中曰: "爾有歇哀缺文, 以闕禮矣乎? 是則怠親也, 不誠之大者也爾. 有矯情飾文, 以要名矣乎? 是則欺親也, 不誠之尤者也." 以此二者自勉, 庶求無愧於心, 覺有多少得力處. 因思非但居憂一事爲然也, 凡吾人之日間, 存心處事, 任氣牽欲, 不循義理者, 其名曰違天, 苟難悅人, 以干名譽者, 其名曰欺天, 違天欺天之罪, 均在不誠其身. 但能立得一箇誠, 則自有不艱不迂之途在前可由, 而見心逸日休之效, 此則大學之誠意, 孟子之思誠是也. 是固前日之所講誦, 而未嘗一日實用力於此者, 以未曾有因事省發之功也. 竊欲從茲以往, 將一誠字作用工之欛柄, 若其識所未逮者, 固無如之何, 而但於已知處, 隨事努力, 庶免違天欺天之歸也. 伏乞先生細察於宅心制行之間, 指摘其慝, 而痛加糾正也.近讀《周禮》一部, 而見其六官諸屬之職, 凖之以〈周官〉治敎禮政禁土之掌, 多紛紜失序. 先儒之或疑非周公之經, 或以爲未成之書, 良以是也. 而方遜志所謂'出於諸侯惡去之餘, 而成於漢儒之所補'者, 恐確論也. 其所考次目錄, 證之〈周官〉, 鑿鑿可信. 但論其大略於序文, 而未及悉擧諸職. 且分職從類之閒, 猶或有可疑者. 故間嘗謹遵其例, 悉擧六官諸職, 更爲考次, 而改動其一二可疑者, 已成篇目, 欲依更次篇目, 寫去一本, 復着論說於其後, 以質同志. 但恐陋見妄論, 徒取亂經之譏, 且非目下之急務, 故不敢率爾耳. 치(治)·교(敎)·예(禮)·정(政)·금(禁)·토(土) 《주례(周禮)》의 여러 주석서를 보면 '금(禁)·토(土)'는 '형(刑)·사(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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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을묘년(1915) 上艮齋先生 乙卯 보낸 편지에서 성은 기의 성이요, 기는 성의 기라는 두 구절에 대해서 저는 아마 선생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것은 기질이 갖추고 있는 성리이고, 기라는 것은 성리를 싣고 있는 기질입니다. 이와 같다면 리에 장애가 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리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도 말이 더욱 절실할 것이니, 어찌 감히 이전의 현인이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천(정이)의 '다만 사람이 품부받는 것을 풀이한 것이다'라는 한 구를 전적으로 성의 기를 말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마도 다시 상량해 보아야 할 듯 합니다. '다만 사람이 품부받는 것을 풀이한 것이다'라는 것은 바로 생지위성을 풀이한 것입니다. 생지위성과 천명지위성을 대비해보면 생지위성은 기질지성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품부 받았다는 것은 또 아래 문장의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을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 성의 기라고 운운하였으니, 이는 다만 아직 병통에 이르지 않은 이 성이 실려 있는 기를 이르는 것입니다. 병통이 없는 성의 기로써 가지런하지 않은 품수를 해석한다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사람의 성(性)은 순수(純粹)하고 지선(至善)하여 애초에 한 점의 하자도 없습니다. 기질(氣質)이 구속하고 물욕이 가리우게 되면 이 성은 이로 인하여 함몰되고 손상됩니다. 그러나 그 함몰되고 손상된 것은 기욕(氣欲)이지 성이 아닙니다. 다만 기욕에 가로막혀 순선한 본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함몰되고 손상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지극히 밝은 해와 지극히 맑은 물이 구름과 안개에 가리고 모래와 진흙에 뒤섞여 밝고 맑은 체(體)가 이 때문에 혼탁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혼탁해진 것은 구름과 진흙이지 해와 물이 아닙니다. 다만 구름과 진흙에 구애되어 밝고 맑은 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혼탁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성은 기욕을 제어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54) 함몰되고 손상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선한 리는 끝내 기욕이 더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함몰되고 손상된다고 하더라도 그 본체(本體)는 본래 그대로 있습니다. 下示性者, 氣之性, 氣者, 性之氣二句, 竊恐先生之意. 蓋曰性者, 氣質所具之性理也, 氣者, 性理所載之氣質也. 如此則不惟無礙於理也, 其於理氣不相離之妙, 說得尤切, 豈敢以前賢之不言有所疑貳也. 但以伊川止訓所禀受一句, 專說性之氣, 則恐合更商. 蓋止訓所禀受, 是正釋生之謂性者. 而生之謂性與天命之性對擧, 則其以氣質性言者, 可知也. 然則其所禀受者, 又非下文剛柔緩急之謂乎? 今此性之氣之云, 是但謂此性所載之氣未及乎病痛者也. 以無病之性之氣, 釋不齊之所禀受, 似不相稱, 未知如何?人之性, 純粹至善, 初無一點之疵. 及其氣質拘之, 物欲蔽之, 此性以之汨亂鑿喪矣. 然其所汨鑿者, 氣欲也, 非性也. 特爲氣欲之障, 而不見純善之體. 故謂之汨鑿也. 譬如至明之日, 至淸之水, 爲雲霧之掩, 沙泥之混, 明淸之體, 以之昏濁矣. 然其所昏濁者, 雲泥也, 非日水也. 特爲雲泥之礙, 而不見明淸之體, 故謂之昏濁也. 蓋性不能制氣欲, 而使之聽命. 故有汨鑿之累. 然其純善之理, 終非氣欲之所可汙衊者. 故雖曰汨鑿, 而其本體固自若也. 성은……때문에 주자의 성리학에서 性과 理는 철저하게 無爲의 실체이며 원리이다. 간재는 주자의 이러한 성리의 특성을 계승하여 리는 無爲하고 기는 有爲하다고 한다. 주자와 간재에 있어 성과 리는 역동성과 활동성이 없는 원리와 실체일 뿐이다. 性과 理는 心이라는 지각작용과 格物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성은 기욕을 제어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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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병진년(1916) 上艮齋先生 丙辰 저는 바람 불고 눈 내리는 길을 힘들게 걸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옛 병이 아직 사라지지 않던 차에 새로운 근심이 함께 일어납니다. 노인은 병상에 누워 있고 어린 자식들은 괴로이 울어대어 온 집안에 근심이 밀려들어 아득히 끝이 없습니다. 이에 더하여 사나운 호랑이는 밖에서 잡아먹으려 하고, 궁핍한 귀신은 안에서 멋대로 구니, 우환(憂患)이 극에 달해 유소(有所)의 병55)이 날 지경입니다. 늘 기쁜 정신을 기르고 즐거운 곳을 홀로 찾는다는 말[常養喜神, 獨尋樂處]56)을 외울 때마다 기를 만한 때가 없고, 찾을 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그저 스스로 마음속으로 번뇌하였습니다. 이에 한 걸음 내딛어 천천히 생각하고서야 비로소 명수(命數)는 피할 수 없고 겪는 일을 편안히 여길 것과 밖에서 온 것이 매우 가볍고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매우 귀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심지(心地)가 청정해지고 일이 없어 유소의 병이 족히 근심거리가 되지 않아서 기쁜 정신을 비로소 기를 수 있고, 즐거운 곳을 비로소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요사이 힘쓰면서 터득한 것이기 때문에 공손히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찌 제가 스스로 이룩한 것이겠습니까?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예전부터 줄곧 문하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니 얼마나 감사하며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율곡(이이) 선생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중에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발한 것57)이라는 두 구절의 말은 정확한 의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암선생의 사단칠정(四端七情說) 논변은 의심이 드는 곳이 있어 논해보았지만, 진실로 깨우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기품에는 비록 청탁의 같지 않음이 있지만, 그 근본은 본래 맑았습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천지는 음양이라는 두 기의 순환이니, 처음에는 약간의 혼탁함도 있지 않았습니다. 떠도는 기가 분란해지자 어둠과 밝음이 일정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이 이 떠도는 기(氣)를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품수 받은 기도 청탁이 같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떠도는 기의 본원은 음양이라는 두 기의 지극히 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기의 처음엔 맑은 것만 있고 흐린 것은 없다는 질문을 인정했습니다.《맹자혹문》에서 또 "사람이 저녁에 휴식을 하면 그 기가 다시 청명해진다"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추론해보면, 사람의 기질은 본디 맑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맑았다고 할지라도 구르고 막히며 뒤집어지게 되어 운행이 뒤섞여 버리면 청탁이 발하는 것이 각각 다르게 되어 선과 악의 구분이 생기게 됩니다.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리(理)를 따라서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리(理)를 따르지 않고 발한 것입니다. 성인의 기(氣)는 지극히 맑아 탁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발한 것이 모두 선하여 처음부터 한 터럭의 악한 것도 없습니다. 중인(中人) 이상의 기(氣)는 맑은 것이 많고 탁한 것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청기(淸氣)로부터 발한 선정(善情)이 항상 많고, 탁기(濁氣)로부터 발한 악정(惡情)이 항상 적습니다. 중인 이하의 기는 탁기가 많고 청기가 적습니다. 그러므로 청기(淸氣)로부터 발한 선정(善情)이 항상 적고, 탁기(濁氣)로부터 발한 악정(惡情)이 항상 많습니다. 매우 완고한 자는 간혹 한 점의 선정을 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지극히 탁한 기운도 삽시간에 맑아져서 본원을 회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58)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들은 저 탁한 것을 바꾸어 저 맑은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마음을 한결같이 선에 두고서 악함을 없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곡의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보통사람이라도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없으니, 청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천리(天理)가 성(性)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느낌에 따라 바로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완고한 사람이라도 남이 자기 아버지를 해치는 것을 보면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데, 이때 탁기가 가득 차게 되지만 이는 천성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이 발출되면, 탁기가 발한 것이라도 또한 선정이 있다고 말합니다.59) 그렇다면 비록 발한 기가 탁하다고 할지라도 타고 있는 리는 곧바로 나올 수 있습니다. 걸어가고 있는 말이 갑자기 달린다고 하더라도 타고 있는 사람은 홀로 편안하게 앉자 있을 수 있습니다. 천하(天下)의 리(理)가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건대, 농암은 다만 선악의 정을 모두 기에 돌리고서 리의 실체를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리가 공허히 주재함이 없는 적이 없고, 기(氣) 또한 리(理)에게 명을 듣는다는 등의 설을 끝까지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혹 확대되어 크게 잘못된 학설이 후대에 한 번 전해져 리가 참으로 주재할 수 있고 리가 그 기를 관섭(管攝 관할하고 통섭함) 할 수 있다는 설이 있게 되면 이를 어찌하겠습니까?60) 율옹(이이)은 "정(情)의 선한 것은 청명의 기를 타서 천리를 따라 곧바로 나왔고, 정(情)의 악한 것은 비록 또한 리에 근본하고 있다 하더라도 더럽고 혼탁한 기에 가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농암처럼 악의 정을 리에 두지 않고 모두 기에 돌리는 것입니까?농암(農巖)은 북계(北溪) 진순(陳淳)의 능연(能然), 필연(必然), 당연(當然), 자연(自然)의 말을 인용하여 리(理)가 주재(主宰)함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61) 그러나 '필(必)' 자, '당(當)' 자, '자(自)' 자에는 애초에 주재한다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능(能)' 자가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데, 그 본문에 '안에 이 리(理)가 있은 뒤에 밖으로 드러나 이 일을 할 수 있다'62)는 말을 살펴보면 '능' 자는 마땅히 구체적인 일에 소속시켜야 할 듯합니다.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각각 하나의 성을 갖는다[各一其性]'는 말은 다만 천지의 조화(造化)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도구와 오행(五行)의 순선(純善)한 성(性)을 말한 것일 뿐이지,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자는 〈서자융에게 답한 편지[答徐子融書]〉에서 도리어 이 설을 인용하여 사람과 동물은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性)을 이루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정씨(鄭氏 정세영)와 박씨(朴氏 박창현) 등의 사람들이 인용하여 그들의 증거로 삼는 일을 초래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삼가 제가 〈서자융에게 답한 편지〉의 본뜻을 살펴보니, 서자융은 동물에는 단지 기질지성만 있고 본연지성은 없다고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자가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이 비록 같지 않은 점이 있지만 이렇게 같지 않은 점은 바로 본연지성이 그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性)이 된 것이지 본연지성 밖에 별도로 기질지성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대개 이 기질지성은 아마도 물은 차갑고 불은 뜨거우며,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부드러우며, 말은 달리고 소는 밭을 가는 것이 본연(本然)을 해치지 않음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지 돌연히 사람의 혼명(昏明)과 동물의 순악(馴惡)을 언급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므로 주자(周子)의 이 설을 인용하여 단지 '각일(各一)'의 뜻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읽는 자들은 글을 가지고 본뜻을 곡해(曲解)하지 않으면 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小子風天雪程, 閒關歸家, 而舊患未消, 新憂幷興. 老人委牀, 稚子呌苦, 滿室澒洞, 渺無際涯. 加之以猛虎食其外, 窮鬼肆乎內, 憂患之極, 幾成有所之病. 每誦'常養喜神, 獨尋樂處'之語, 歎其無時可養, 無處可尋, 徒自懊惱乎方寸也. 於是放下一步, 緩緩地思量, 乃知命數之莫逃, 而所過之可安, 外至者之甚輕, 而固有者之甚重, 便覺心地淸淨無事, 有所之病, 不足爲慮, 而喜神於是乎可養, 樂處於是乎可尋矣. 此小子近日用力而有得者, 故拜上逹. 然此豈小子之所自致者哉? 原其所自, 莫非向來親炙門下之力也, 何感何幸?栗谷先生, 人心道心說中, 善者淸氣之發, 惡者濁氣之發二句, 竊以爲的確之論. 農嚴四七辨, 不免疑而論之, 誠所未喻也. 人之氣禀, 雖有淸濁之不一, 卽其本淸而已. 何以知其然也? 天地二氣之循環, 初未嘗有一半分濁. 及其游氣之紛擾也, 乃有晦明之不常, 而人得是游氣而生, 故所禀之氣, 亦有淸濁之不齊. 然游氣之本, 又是二氣之至淸者也. 故朱子旣許氣之始有淸無濁之問. 孟子或問, 又曰: "人暮夜休息, 則其氣復淸明." 以此推之, 人之氣質, 本淸可知也. 雖然滾汨騰倒, 運行交錯, 則淸濁之發, 各殊而善惡之分生焉. 善者淸氣之循理而發者也, 惡者濁氣之不循理而發者也. 聖人之氣, 至淸無濁, 故其發皆善, 而初無一毫之惡. 中人以上之氣, 多淸少濁. 故善情之發乎淸氣者常多, 而惡情之發乎濁氣者常少. 中人以下之氣, 多濁少淸. 故善情之發乎淸氣者常少, 而惡情之發乎濁氣者常多. 至於冥頑之甚者, 或有一點善情之發者. 其至濁之氣, 亦霎時淸而復其本也. 是故人之爲學, 所以易其濁而反其淸. 使吾心之發一於善而無惡. 是所謂變化氣質也. 此乃栗翁之意然也. 若曰常人之見孺子入井, 無不惻隱之際, 不待淸氣, 而天理根性者, 隨感辄發. 冥頑之人見人害其親, 思欲仇之之時, 濁氣充塞而天性最重故. 眞心發出則是濁氣之發, 亦有善情之謂也. 然則雖謂之所發之氣, 雖濁而所乗之理, 直出可也. 雖謂之所行之馬雖逸, 而所乗之人, 獨安亦可也. 天下之理, 安有如此哉? 竊念農巖之意, 直恐以善惡之情, 一歸之氣, 而無以見理之實體. 故乃以理未嘗漫無主宰, 氣亦聽命於理等說, 到底發明. 然若或推之, 大過一傳, 而有理能眞有主宰, 理能管攝其氣之說, 則如之奈何? 且栗翁固亦曰: "情之善者, 乘淸明之氣, 循天理而直出, 情之惡者雖亦本乎理, 而爲汙濁之氣所掩." 此何嘗以善惡之情, 不本之理, 而一歸之氣, 如農巖之所慮乎?農巖引陳北溪能然必然當然自然之語, 爲理有主宰之語. 然'必'字'當'字'自'字, 初未見有主宰底意. 惟'能'字最難區處, 而詳其本文'中有是理然後, 能形諸外, 爲是事'之語, 則'能'字似當屬事上看.周子'各一其性', 只言造化發育之具五行純善之性, 未及乎人物氣質之性. 朱子〈答徐子融書〉, 乃引此說, 以爲人物隨氣質而自爲一性之證. 此所以來鄭朴諸人之引爲渠援也. 然竊詳徐書本意, 子融方以物只有氣質性, 而無本然性爲疑. 故朱子答謂人物氣質之性, 雖有不同, 然此不同者, 卽本然性之隨其氣質, 而自爲一性者, 非外本然之性而別爲氣質之性也. 蓋此氣質性, 恐只指如水寒火熱․男剛女柔․馬馳牛耕之不害本然者言, 不遽及於人之昏明․物之馴惡也. 故借引周子此說, 只證其各一之義也. 讀者不以辭害意可也. 未知如何? 유소(有所)의 병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7장에 "마음에 분치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공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우환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마음에 분치(忿懥), 공구(恐懼), 호요(好樂), 우환(憂患)이 있어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늘……말 《명유학안(明儒學案)》 권61 〈동림학안(東林學案)4〉에서 명나라 말엽 오종만(吳鍾巒)이 망국의 선비가 지닐 처세에 대해 답하면서 한 말이다. 율곡……발한 것 이이는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발한 것이나 그 근본은 다만 천리일 뿐이다〔善者, 淸氣之發也, 惡者, 濁氣之發也, 其本則只天理而已〕"라고 말하였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4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 지극히……있습니다 기질이 아무리 탁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념 간에 경책하면 선한 기질의 본원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비록 완고한……있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타인에게 해를 입을 때 부모를 위하여 복수심이 드는데, 이때 비록 그 기는 매우 탁하지만, 부모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善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가 참으로……이를 어찌하겠습나까 율곡의 기호학에서는 理無爲(性無爲)를 주장하기 때문에 理(性)의 능동성을 긍정할 수 없다. 북계(北溪)……했습니다 《농암속집(農巖續集)》 권하(卷下)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 나온다. 안에……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57 〈답진안경(答陳安卿)〉에서 북계 진순이 주자에게 올린 문목(問目)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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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已未 기미년(1919)삼가 선생께서 창암(蒼巖, 김낙규)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난 뒤, 〈면암연보(勉菴年譜)〉중에서 면암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선생께 편지를 보내 일을 함께하자 했는데 선생께서 응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직한 기풍을 지닌 면옹(勉翁)이 죽은 지 10년이 채 안 되어 실상과 어긋나는 문장이 돌연 그의 문하에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면암 어른이 편지를 쓰려고 했던 당시에 임씨가 그것을 막고 좨주(祭酒)를 도모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이상래(李相來)가 직접 들은 것과 송정용(宋楨鏞), 김교윤(金教潤)이 전한 말이 뚜렷하여 차이가 없으니 참으로 창암이 편지에서 한 말과 같습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전일건(田鎰健)과 저(김택술(金澤述)를 보내 진중(陣中)에 있는 면암 어른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했던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내용 중에 "면암 대감이 나이 80세에 군대를 이끌고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 죽으려고 하니, 내가 비록 그 일을 함께할 재주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 머문 것을 보고도 편지 한 장 써서 위문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대단히 편치 못할 것입니다."1)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요. 창의소(倡義所)에 갔는데 만약 《명의록(名義錄)》에 이름을 올린다면, 저는 조부모님도 살아 계시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전일건은 허락하지 않았겠습니까.정말로 면암 어른이 먼저 편지를 보냈다면 선생의 답서에서 어찌 한 글자도 물음에 답하는 말이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손자로 하여금 《명의록》에 이름을 올리게 하였다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한 얼마나 깊을까요. 면암 편지의 존재 여부와 선생의 마음을 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선생께서 실제로 면암의 편지를 보고도 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응하지 않은 것은 또한 재주와 형세를 헤아렸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지키는 의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병을 일으킨 것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며 의리를 지키는 것[守義]2)이 전적으로 그른 것이 아닙니다.처음부터 자신에 호응하지 않은 다른 사람을 지적하여 나의 스승만이 홀로 어진 것을 드러낸 것도 옳지 않은데, 더구나 애당초 선생에게 일을 함께 하자는 편지도 보낸 적이 없으니, 어찌 응답한 여부에 대해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인데 반드시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하며 거짓된 것을 사실이라고 우겨서 후대에 공적으로 전하려고 한다면 매우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伏見先生抵蒼巖書, 知〈勉菴年譜〉中, 有起義時, 貽書先生共事不應之語.不圖斯翁忠直之風, 不待身後十年而爽實之文, 遽出於其門下也.當日勉丈之欲作書也, 林氏之沮之以方圖祭酒之說, 李相來之親聞, 宋楨鏞金教潤之所傳, 歷歷不差, 信有如蒼書中所云者.且先生不記送鎰健與澤述致書勉丈陣中時訓辭乎? 豈不曰"勉台八耋, 從戎以死報國, 吾雖才之不能共事, 見留近地, 拜闕一書相問, 心甚未安"? 往至義所, 若使參名義錄, 則澤述有重堂在, 不可擅爲, 鎰健則許之也乎? 果勉丈有先施者, 書中胡無一句辭答之語乎? 而必令愛孫而參名, 則其欽祝冀成之意, 又何如也? 勉書有無先生心事, 此可知矣.借使先生實見勉書而不應, 其不應者, 亦各有所度之材勢, 又不無所守之義理, 未必舉義之專美, 守義之全非.初不宜表出別人之不應, 用彰吾師之獨賢, 况於先生初無共事之書, 又何應不應之可論也? 乃必欲以無有爲, 馮虛作實, 公傳道之於後世, 不亦異乎? 면암 대감이……것입니다 《추담별집(秋潭別集)》 권1 〈여최면암(與崔勉菴)〉의 편지를 요약한 내용이다. 의리를 지키는 것[守義] 여기서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과 상대되는 의미로 거병하지 않고 개인적인 의리를 지킨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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