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천 김공 행장 을축년(1925) 鶴川金公行狀【乙丑】 대한 광무(光武) 경자년(1900년), 신축년(1901년) 즈음에 간재(艮齋) 전우(田愚)41) 선생이 호남에서 도를 강론할 때 학천(鶴川) 김공은 당시 흰머리 노인으로 힘든 길을 걸어 월명(月明)과 봉서(鳳棲) 사이에서 종유하다가 마침내 종이와 폐백을 갖춰 스승의 예로 뵈었다. 공의 나이 당시 59세로 선생보다 2살 아래였는데, 선생이 그 도를 믿음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함을 가상하게 여겨 이윽고 진심으로 좋아하여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식자들은 말하기를 이십 년 이래로 많은 호남 학자들이 선생을 찾아와 배운 것은 공이 그 시작을 열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공의 타계하였을 때 선생이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내가 예전에 남주에 이르렀을 때 而余昔日到南州문득 처음으로 정자 스승 삼던 원명을 만났어라.42) 忽遇原明首事涪80년 동안 순수한 기운 八十年來純氣味백천재에서 좋은 벗과 노닐었지. 百千齋裡好朋遊이는 대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공의 아들인 진하(鎭夏)가 사실을 기록한 작은 책자 한 두루마리, 유고 세 책, 세계(世系) 한 책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불초는 글을 잘 짓지 못하여 선인의 행장을 초를 잡지 못하니, 비록 대단히 한스럽지만 다행히도 그 누구보다 선인을 잘 아는 어른이 있으니 원컨대 행장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했다. 조용히 생각하건대 공은 나와 동문이 된 지 20년이 되었으며, 또한 선친께서 칭송하신 덕성과 언동과 조예와 행업이 상세하지 않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중년 이전의 뜻과 행실은 고향 장로들의 견문과 유고의 수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충분히 실제 기록의 미비함을 보충할 수 있다. 돌아보건대 비록 내가 글을 잘 짓지 못하여 제대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공을 삶을 형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공의 휘는 형재(衡載), 자는 권중(權), 호는 학천이다.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羅敬順)의 왕자인 의성군 석(錫)에서 나왔다. 고려 태자첨사(太子詹事) 의성군(義城君) 용비(龍庇)는 백성들에게 큰 공덕을 세워 의성에 사당을 세워 제향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거익(居翼)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는데, 조선에 들어와 누차 우의정으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미(湄)는 직제학(直提學)으로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뒤에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운추(運秋)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는데,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교리의 아들 전현(傳顯)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이다. 부인 최씨가 세 아들 영(穎), 호(顥), 이(頣)를 거느려 호서의 문의(文義)에서 남쪽인 고부(古阜)로 와서 거주하였다.호(顥)는 부호군(副護軍)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참판 김석옥(金錫沃) 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다. 제민(齊閔)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시 정(軍器寺正)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강(忠剛), 호는 오봉(鰲峰)이다. 제안(齊顔)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문인으로 효행과 학문, 덕행이 사림의 모범이 되었으니 호는 죽헌(竹軒)이다. 셋째는 제삼(齊參)이다. 제맹(齊孟)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막내는 제남(齊南)이다. 각 형제의 자질(子姪)은 번창하여 호남의 명문가가 되었다. 죽헌은 공에게 10대조가 된다. 죽헌의 아들 성(晟)은 진사로 효행이 있었으며, 갑자년(1624년)43)에 의병을 일으켰다. 손자인 지서(地西)는 또한 효성과 학문이 있었는데, 갑자년과 병자년의 난리에 모두 의병을 일으켰다. 제운(濟運)과 창좌(昌佐)는 공의 조부와 증조로 또한 효성으로 알려졌다.부친은 인규(麟奎)이며, 모친은 남양 홍씨(南陽洪氏) 경철(景喆)의 따님으로 헌종 계묘년(1843년) 3월 28일에 우덕면(優德面) 학전리(田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대개 그 선대에 뛰어난 덕과 굳센 절조가 쌓였다가 공에게 전해졌으니, 영지(靈芝)는 참으로 그 뿌리가 있는 법이다. 사실의 기록에 "여러 곳의 선영을 세력가에게 빼앗겨 통곡하여 송사를 벌였으나 결국 돌려주게 되었으니, 집안 살림이 이로 인해 탕진되었다. 손수 농사짓고 나무를 하면서 간간이 경전을 읽었으며, 짚신을 짜서 어버이 음식과 제수를 마련하였다."라 하였으니, 사물은 정해진 운수가 있으므로 요컨대 계속해서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대응한 것이다. 항상 자손들을 훈계하기를 "음해하는 죄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악보다 크다. 선인도 간혹 후손이 없는데 이는 선대에 음해한 죄가 미쳤기 때문이다. 조심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또한 '빈부는 하늘이 정한 것이니, 하고픈 것이 결백하지 않으면 도리의 재앙의 해를 당하니, 마땅히 분수를 지키고 부지런하며 미리한다.[守分勤豫] 네 글자를 항상 마음에 담아둔다면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 아! 자질이 곧은 사람이 세상에 드물구나."라고 하였으니, 이런 말들을 본다면 그의 인물됨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공이 젊었을 때 과거공부를 익혔으나 곧바로 그만두고서 도학을 뜻을 두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44) 공을 찾아뵙고서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어 가문을 드날려라.'는 말을 들었다. 얼마 지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45) 선생이 덕이 높고 학문이 올발라서 세상의 유종(儒宗)이라는 것을 들었으나 그의 문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에 그의 문인 미재(薇齋) 정재필(鄭在弼), 춘산(春山) 정학원(鄭學源), 직헌(直軒) 김종순(金鍾順), 경당(敬堂) 유상준(柳相浚) 등과 학문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봄가을로 부풍(扶風)과 영주(瀛洲)46) 사이에서 강회를 열어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 일찍이 이상한 병에 걸려 4~5년을 치료하였으나, 이에 마음을 편히하고 분수를 지키며 진기를 조섭하여 기르니 두어 해 지나 병이 절로 나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예에 맞게 장사를 치렀으며 장서(葬書)를 보고서 마침내 손수 부모의 묘를 정하니 사람들이 그 지성에 감복하였다.내가 삼가 보아서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하면, 공은 입지(立志)가 견고하여 가난과 질병, 어려운 일을 실컷 겪으면서도 줄곧 마음씀씀이를 변하지 않았다. 진실된 마음은 안과 밖의 구분이 없었으니, 타인과 상대할 때 서로 경계를 짓지 않았으며 겉치레를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은 어눌하고 더듬거려서 잘 못하는 것 같았으나, 요컨대 자신이 경험하거나 연구한 것에서 꺼내어 함부로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가짐은 단정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늙어갈수록 더욱 정력이 굳건하여 옥 같은 광채가 청랑(淸郞)하였으며 앉거나 설 때 똑바르고 곧았다. 자신의 몸에 들이는 것은 검소하고 절약하여 거처와 복식은 대략만 갖추어 변변치 않았으나 또한 재물을 조금 남겨서 대비하기를 요하였다. 오호라! 이것은 모두 군자가 독실하며 청진(淸眞)한 덕이라 하겠다.그의 학문에 대해 말하자면, 한결같이 성실과 근면을 위주로 하며 경전 이외에 성리의 중요한 책을 모두 손수 베껴서 매우 많이 읽어 줄줄 외웠다. 경전의 의미가 의심스럽거나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없으면 깊이 사색하여 깨닫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서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으니, 요컨대 돈독하게 스승의 말을 믿어서 어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근사록(近思錄)》의 편목을 모방하여 고금의 격언과 선행을 모아서 《근행록(近行錄)》이라고 하였으며, 중간 중간에 자신의 말을 덧붙였으니 모두 학자에게 절실하고 타당한 것이다. 자신이 쓴 서문에서 "옛날 성현의 행실은 모두 경에 기본 하였으니, 경은 마음의 주재요 만사의 강령이다. 어찌 이에 마음을 다하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또한 많은 선비를 거느려서 영주강계(瀛洲講契)를 만들었으니, 그 규례가 엄격하여 자못 실제 효과가 있었다. 그가 지은 계안(契案)의 발문에서 "경으로 근본을 삼아서 엄숙하고 정제(整齊)한 상태에 몸을 두며 허명(虛明)하고 정일(精一)한 경지에 마음을 머무르며 경전을 궁구하고 의리를 강론함으로 보태서 그 앎을 지극히 하며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기고 성을 높여서 그 실제를 실천함으로 마쳐야 하니, 이 네 가지는 천고에 전해 내려온 지결이다."라고 하였으니, 오호라! 경에 거하고 이치를 궁리하며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성학의 요점이다. 공이 말한 천고에 전해 내려온 지결이란 것이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경은 또한 성학의 처음과 끝을 이루고 위와 아래를 관통하니 공이 말한 마음의 주재요 만사의 강령이라고 한 것이 더욱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이에서 공의 학문이 요점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바른 죽음' 한 구절에 대해서 더욱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대저 증자의 역책은 오히려 촛불은 잡은 동자가 대자리가 화려하고 깨끗하니 바꾸라는 청을 기다렸는데,47) 공이 이에 병이 위독한 지 오래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직접 일어나 목욕하고서 "죽은 뒤에 더러움으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종이와 붓을 찾아 유언을 써서 둘째 손자인 용락(庸洛)에게 주었으니, 그 대략을 들어보면 "인심은 다만 위태롭고 도심은 다만 은미하니, 스승을 택하고 벗에게 물으면서 의리를 강론하고 변론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기를 깊이 바란다."라고 하였다. 붓을 놓고서 자리에 누워 돌아가셨으니, 실로 임술년(1922년) 3월 13일로 80여 살의 수를 누렸다. 공은 비록 받은 기운이 강명(剛明)하여 남들보다 매우 뛰어났지만 올바르게 수양한 것이 이에 드러났다.모월 모일 임시로 우덕면 상학리(上鶴里) 서쪽 산기슭 모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흥성 장씨(興城張氏) 정휴(鼎休)의 따님이고 계비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진하(鎭夏)의 따님이다. 전주(全州) 최병귀(崔秉龜)는 장씨 소생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진렬(鎭烈)과 연안(延安) 이돈녕(李敦寧)에게 시집간 딸은 유씨 소생이다. 장남의 아들은 철락(喆洛), 용락(庸洛)이며 딸은 노진기(魯鎭)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아들은 근락(近洛), 상락(相洛), 재호(在浩)이다. 사위 최병귀의 아들은 직렬(直烈)이며, 사위 이돈녕의 아들은 의길(儀吉)이다.《서경》에서 "생각을 시종 학문에 둔다."48)라고 하였으며, 주자는 "한번 숨 쉬는 사이라도 오히려 이 뜻을 두고서 조금도 게으르지 않는다."49)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의 평생의 뜻을 적시한 말로,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옛날 이천(伊川)이 소강절(邵康節)의 묘지(墓誌)를 지으면서 "안락하게 거처하면서 완전히 성취하였다."는 한 마디 말로 핵심을 드러내었으니, 나는 《서경》과 주자의 두 마디 말로 또한 핵심을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오호라! 공이 돌아가신 지 네 달이 되었으니, 태산이 무너진 듯하다. 태산이 무너진 뒤에 음기가 하늘에 뻗쳐 도가 곧 망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공은 겸손하여 인화한 가운데서도 빼앗을 수 없는 굳센 절조와 강인한 의리를 지녔으며 우뚝한 치덕으로 동문들의 존망을 받았으니 만약 공이 오늘날 계셨더라면 반드시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듯이 정론을 주장할 것이며50), 사특한 무리들을 호랑이와 표범이 산에 꼼짝 못하듯이 내쫓았을 것이니 스승의 문을 빛내고 세도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에서 일어날 수 없으니, 슬프도다. 그러나 공의 풍운은 사라지지 않아서 장남 효근(孝謹)에게 그 전형이 남아 있으며, 용락(庸洛)이 또한 젊은 나이에 학문에 열중하면서 조상의 한 일을 계승하는데 뜻을 두었기에 연관해서 기록하여 공의 의방(義方)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을 아울러 드러내어 세상의 붓을 잡은 대가에게 고한다. 大韓光武之庚辛年間, 艮齋田先生講道于湖南, 鶴川金公, 時以老白首, 間關從月明鳳棲之間, 卒具書贄, 以師禮見.公之年, 蓋五十有九, 而少先生二歲, 先生嘉其信道之老彌篤, 旣心好而終身矣.識者謂'二十年來, 湖南學者之輻進先生, 未始非公之啓之也.' 公之沒也, 先生有誄曰: "而余昔日到南州, 忽遇原明首事涪.八十年來純氣味, 百千齋裡好朋遊." 蓋記實也.公之嗣子鎭夏, 以事實小錄一紙遺稿三冊世系一冊, 示澤述曰: "不肖無文, 不能草先人全狀, 雖甚恨, 幸有知先人深者莫如子, 願有以狀之也." 竊惟公爲余同門二十年, 而又先君之所善其德性言動造詣行業, 謂之不詳則未也.中年以前志行, 鄕長老見聞遺稿之手記在, 足以補實錄之未備, 顧雖人文之非堪, 庶可以狀公也.公諱衡載字權中, 鶴川號也.義城氏, 出新羅敬順王子義城君錫.高麗太子詹事義城君龍庇, 有大功德於民, 立祠義城而祀之.玄孫居翼, 政堂文學, 本朝累以右議政徵之, 不起.子湄, 直提學, 端廟遜位後不仕.子運秋, 文科校理, 文行藉甚.校理子傳顯, 司醞署直長, 夫人崔氏, 率三子穎·顥·頣, 自湖西之文義, 南來居古阜.顥, 副護軍, 贈刑曹判書, 娶叅判金公錫沃之女, 生五子.齊閔, 文科軍器寺正, 壬亂倡義, 贈吏判, 謚忠剛號鰲峰.齊顔, 河西金先生門人, 孝學德行, 模楷士林, 號竹軒.齊參.齊孟, 兵判.齊南.各房子姪蕃衍, 爲湖之望.竹軒於公, 十世祖也.竹軒子晟, 進士, 有孝行, 甲子倡義.孫地西, 亦有孝學, 甲丙之亂, 俱擧義.曰濟運, 曰昌佐, 公之祖曾, 亦以孝聞.考麟奎, 妣南陽洪氏景喆女, 以憲廟癸卯三月二十八日生公于優德面鶴田里第.蓋其先世偉德茂節之積, 而傳至于公, 靈芝信有根矣.實錄曰: "數處先隴, 見奪於勢家, 痛泣訟還, 而産業因此蕩殘.手自耘樵, 間讀經傳, 織屨以供親饌祭需." 物有定數, 要繼續適用.常訓子孫曰: "陰害之罪, 大於人知之惡.善人間或無後, 先世陰害之罪延及也, 可不愼哉." 又曰: "貧富天定, 所欲不明, 反爲禍害, 當以守分勤豫四字, 恒存胸中, 則可得保家矣.噫, 寂寥矣質直矣." 觀此, 可以三隅也.公之少也, 治擧文而旋卽棄之, 有志於道學, 拜蘆沙奇公正鎭, 聞'杜門讀書以揚門戶'之語.旣而聞全齋任先生德尊學正, 爲世儒宗, 而未及詣門, 乃從其門人鄭薇齋在弼·鄭春山學源·金直軒鍾順·柳敬堂相浚, 麗澤相資, 春秋會講于扶風瀛洲之間, 課年以爲常.嘗嬰奇疾, 刀圭四五載, 乃安心守分, 調養眞氣, 數年疾自瘳.其遭內外艱, 執喪如禮, 觀葬書, 竟手占二親墓, 人服其至誠.若乃澤述之所竊觀而心識者, 則其立志也, 堅確, 歷盡貧病憂難, 而終始不渝用心也.眞實無表裡, 與人袪畛域邊幅.發言也, 訥吃若不能, 要出經歷硏究而不可易.律身也, 整整自持, 老益精剛, 符彩淸朗, 坐立端直.自奉也, 儉約, 居處服食, 苟完無長物, 然亦要稍贏有備也.於乎, 旣皆君子篤實淸眞之德也.至言其爲學也, 則一以誠勤爲主, 經傳以外, 性理要書, 皆手自鈔, 劇讀熟誦.凡有經疑理晦, 極意思索, 不得不措, 俛焉日有孜孜, 不知年數之不足, 而要歸篤信師說而不違也.公嘗倣《近思錄》篇目, 輯古今格言善行, 名曰《謹行錄》, 間附己說, 皆切近的當.其自序有曰: "古之聖賢之行, 無一不在於敬.敬, 是一心之主宰, 萬事之綱領也, 盍於此盡意." 又倡率多士, 設瀛洲講契, 規例嚴密, 頗有實效.其所作契案跋曰: "以敬爲本, 置身於嚴肅整齊之地, 留心於虛明靜一之域, 輔之以窮經講義以致其知, 究竟于克己尊性以踐其實, 四者, 千古相傳之旨訣也." 嗚呼, 居敬窮理踐履, 固聖學之要.公所謂千古相傳之旨, 其不信然乎.敬, 又聖學之成始終徹上下, 公所謂一心主宰, 萬事綱領者, 尤不信然乎.於此, 可見公之學得其要矣. 至於'正終'一節, 尤有大焉.夫以曾子之易簀, 猶待乎執燭者華晥之請, 而公乃於寖革之久, 垂盡之際, 親起沐浴曰: "不以死後, 垢穢勞人." 又索紙筆書遺戒, 與次孫庸洛, 畧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擇師問友, 講義辨論, 不墜家聲, 是所深望." 釋筆就臥而逝, 實壬戌三月十三日也.壽八十雖.其禀氣剛明, 有大過人者, 而所養之正, 於是乎著矣.以某月日, 權葬于優德面上鶴里西麓某坐原, 配興城張氏鼎休女, 繼配高興柳氏子鎭夏女.全州崔秉龜妻張氏出, 鎭烈, 李敦寧妻柳氏出.長房男喆洛·庸洛, 女魯鎭基.次房男近洛·相洛·在浩.崔壻男直烈, 李壻男儀吉.傳說曰: "念終始, 典于學." 朱子曰: "一息尙存此志, 不容少懈." 蓋迹公生平之志, 斯其人也歟.昔伊川之狀康節也, '得安且成'一語而成之, 余於傳朱二語之得, 亦敢云爾也.嗚呼, 公沒四朔, 泰山頹矣.山頹之後, 陰沴漲天, 而道將亡矣.念公謙謙仁和之中, 有介然之操, 毅然之義, 不可奪者, 巋然齒德, 又居同門尊望, 使公而在今日者, 必能主張正論, 若鳳鳴朝陽, 屛伏邪徒, 如虎豹在山, 于光師門, 有裨世道也, 而九原不可作, 悲夫.雖然公之風韻不斬, 嗣子孝謹, 典型有在, 庸洛又妙年向學, 志存繼述, 牽連書之, 幷見公義方之及, 以告世之秉筆大人. 간재 전우 1841~1922.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이다. 재야에서 학문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暀嶝島)·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으며, 부안·군산 등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정자……만났어라 원문의 '부(涪)'는 송(宋)나라의 대학자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권세가의 눈에 거슬려 부주(涪州)로 유배되었다. 원명은 여희철(呂希哲)의 자로, 정이(程頤)와 나이가 서로 비슷하였지만, 정이의 학문을 깊이 존경하여 나중에는 스승으로 섬겼다. 갑자년 인조 1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가리킨다. 노사 기정진 1798 ~ 1879. 본관 행주(幸州), 자 대중(大中), 호 노사(蘆沙) 시호 문간(文簡)이다. 1842년 관직에 잠깐 나아갔으나 일주일만에 사직하였다. 40세 이후 그에게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그가 살았던 전라도를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수학하였다. 그의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다. 46세에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저술하였으며 이후 송대(宋代)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였다. 전재 임헌회 1811~1876. 본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 ·전재(全齋) ·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기(理氣)이원론(二元論)을 배격, 기(氣)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원론적인 주기파(主氣派)에 속했다. 저서로는 《고산문집(鼓山文集)》 《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부풍과 영주 부풍은 부안의 옛 이름이고 영주는 정읍의 옛 이름이다. 증자의……기다렸는데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증자(曾子)가 병으로 누웠는데, 증원(曾元)이 발치에 앉아 있었다. 동자가 촛불을 잡고 구석에 앉으면서 말하기를, '화려하고 깨끗합니다. 대부(大夫)의 자리입니까?' 하니, 증자가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계손씨(季孫氏)가 나에게 준 것인데, 내가 미처 바꾸지 못하였다. 원(元)아, 일어나 자리를 바꿔라.' 하니, 증원이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병이 위중하니 바꿀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아침이 되면 삼가 바꾸겠습니다.' 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함이 저 동자만 못하구나.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으로써 하고, 소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장에 탈 없이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할 뿐이다. 내가 무엇을 구하겠느냐? 나는 바른 것을 얻고 죽는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吾得正而斃焉 斯已矣]' 하였다 생각을……둔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니, 생각을 시종(始終) 학문에 두게 되면 자신의 덕이 닦아짐이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惟斅學半, 念終始, 典于學, 厥德修罔覺.]"라고 하였다. 한번……않는다 《논어》 〈태백(泰伯)〉의 "죽은 뒤에 그만둔다.[死而後已]"라는 구절에 대해 주자의 해석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봉황이……것이며 '조양(朝陽)'은 해가 처음 떠오르는 산의 동쪽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재덕이 출중한 인재가 조정에서 직간(直諫)하는 것을 비유하는 '조양봉명(朝陽鳳鳴)'의 뜻으로 쓰였다. 당나라 때 한원(韓瑗)과 저수량(褚遂良)이 무고(誣告)를 입어 억울하게 죽은 뒤로는 두려워서 감히 과감하게 간언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고종(高宗)이 봉천궁(奉天宮)을 짓는 것을 가지고 어사 이선감(李善感)이 처음으로 상소하여 극언하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기뻐하여 이를 "봉황이 조양에서 운다.〔鳳鳴朝陽.〕"라고 하며 칭탄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이는 원래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뫼에서 우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도다.〔鳳皇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舊唐書 卷80 韓瑗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