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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화록 莘門話錄 계묘년(1903) 9월 22일 밤에 선생이 요통(腰痛)이 있어 신음하며 괴로워하였다. 나에게 명하여 이불과 베개를 안배하게 하고는 옷을 벗고 누워 아픈 곳을 누르게 하다가 곧 다시 일어나 앉아 나에게 말했다."지금 나랏일이 계란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하니 참으로 존망이 달린 때이네. 그런데 성상께서 재야의 독서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낭묘(廊廟)10)에 배치하고 참찬(參贊)의 벼슬을 제수하니 매우 성대한 일이네. 이로써 성덕이 진보하고 국운이 형통하기를 기대하였네. 오직 그들이 왕실에 마음을 다하고 그 끝을 신중히 하여 임금의 마음을 계옥(啓沃)11)하고 백성들에게 이로움과 혜택을 베풀기를 바랐네. 그렇다면 어찌 국가의 다행이 될 뿐이겠는가. 사림의 영광 또한 클 것이네. 그러나 출처(出處)의 정밀한 의리로써 논하자면 식자(識者)에게는 반드시 불만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네.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조정에서 장차 나를 부를 것이라고 하니 우려가 적지 않네. 생각건대 나는 참으로 재주와 덕이 없고 설령 재주와 덕이 있더라도 지금이 어찌 일을 할 만한 때이겠는가. 어제 이 대감(李大監) 성렬(聖烈)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비록 소명(召命)이 있더라도 마땅히 사양하고 한 발짝도 문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이 대감이 답하기를 '제가 전일에 입시하였을 때에 상께서 「곽(郭) 아무개12)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몰랐는데 그가 영남의 유명한 선비라고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田) 아무개13)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신이 우러러 존경하는 유현(儒賢)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께서 「내가 전 아무개를 발탁하여 임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유현을 발탁하여 임용하는 것이 어찌 성덕(盛德)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허례(虛禮)에만 얽매여 실상이 없게 된다면 천고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깊이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곽씨로 인하여 문장(文丈)14)을 물은 것이라 실제로 발탁하여 등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니, 문장에게는 필시 소명이 없을 것입니다. 운운.' 하였네.이제는 염려를 놓았지만 일은 미리 알기 어려운 법이니 끝내 소명이 없다면 참으로 개인적인 다행이네. 그러나 만약에 성심으로 돈유(敦喩)하기를 두세 번에 마지않는다면 몸은 비록 출사(出仕)하지 않더라도 정의(情義)가 있는 바에 또한 무심히 아무 일도 없으면서 한 마디도 진언하지 않기는 어렵네.만약에 진언한다면 《맹자》에서 이른바 '그 그른 마음을 바르게 한다.[格其非心]'는 것과 《대학》에서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을 먼저 거론하여 고하지 않을 수 없네. 《중용》에서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복장을 갖춰 입고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齊明盛服 非禮不動]'라고 한 것과 《예기》에서 '간사한 소리와 음란한 빛을 귀담아 두지 않고 눈여겨 두지 않고, 음란하고 사특한 예절이 마음에 접하지 않도록 한다.[奸聲亂色 不留聰明 淫樂慝禮 不接心術]'라고 한 것은 몸을 닦는[修身] 방법인데 상이 능하지 못한 것이니, 그 다음은 이것으로 고하여 관을 쓰지 않고는 대신을 보지 않게 하고, 또 무기(巫妓)를 내쫓아 궁중을 깨끗하게 하겠네. 첩을 아내로 삼는 것은 오패(五覇)도 인정하지 않은 것인데15) 어찌 후궁을 황후로 올릴 수 있겠는가. 이는 제가(齊家)의 큰 관건이니, 황후를 간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고하지 않을 수 없네. 그러한 뒤에야 국정의 득실을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집안이 다스려진 뒤에 국가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네.그러나 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성학(聖學)을 권면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경연(經筵)을 복설(復設)하여 강학을 그치지 않아야 하네. 이것이 《대학》에서 격치(格致)16)를 우선으로 삼은 까닭이네. 비록 이미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만약 실천이 충실하지 못하면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니, 이것이 《대학》에서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으로써 요체로 삼은 까닭이네. 이 두 가지는 또 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혹 천려일득(千慮一得)17)이 될까? 그대의 생각에는 어떻게 여기는가?" 癸卯九月廿二日夜, 先生有腰痛, 呻吟作苦. 命澤述安排衾枕, 解衣而臥, 使按痛處, 旋復起坐, 謂澤述曰: "今國事危如累卵, 誠存亡之秋也. 聖上擧在野讀書之士, 置之廊廟而授以參贊之職, 甚盛事也. 以此庶望聖德之進而國運之亨也. 惟祝其盡心王室, 克愼其終, 啓沃君心, 利澤生民也. 然則豈獨爲國家之幸? 士林之榮亦大矣. 然論以出處之精義, 則識者必有不滿矣. 有人傳言'朝家將召鄙人', 憂慮不淺也. 念此固無才德, 設有才德, 此豈可爲之時乎? 昨與李台【聖烈】書曰: '吾則雖有召命, 只當有辭而不出門一步地. ' 李台答曰: '某前日入侍, 上問「郭某何如人」, 某對「臣未嘗知, 而聞其爲嶺南名士也」. 「田某何如人」, 某對「臣所宗仰而儒賢也」. 上曰「吾欲陞用田某, 何如」, 某對「陞用儒賢, 豈非盛德事? 若縻以虛禮而無實, 則爲千古所笑, 可深戒也」. 此蓋因郭氏而詢及文丈, 非實欲陞用也, 文丈則必無召命. 云云. ' 今則可弛慮也, 然事難預知, 終無召命, 則誠私幸. 若誠心敦喩, 再三不已, 則身雖不出, 情義所在, 亦難恝然無事而不進一言也. 若進言, 則《孟子》所謂'格其非心'者, 《大學》所謂'正心'也, 不可不首擧以告之. 《中庸》曰'齊明盛服, 非禮不動', 《記》曰'奸聲亂色, 不留聰明, 淫樂慝禮, 不接心術', 此修身之法, 而上之未能者, 次當以此告之, 不使不冠而見大臣, 又使迸逐巫妓, 肅淸宮中. 以妾爲妻, 五伯之所不與, 豈可以後宮陞后乎? 此齊家之大關也, 不容不簡擇皇后, 是不可以不告也. 然後乃可言國政得失, 此所謂家齊而後國治也. 然欲知正心修身齊家之理, 聖學不可不勉, 當復設經筵, 講學不輟, 此《大學》所以格致爲先也. 雖已知之, 若行得未實, 終不濟事, 此《大學》所以誠意爲要也. 此二者又不可以不告也, 此或爲千慮之一得耶, 君意以爲如何?" 낭묘(廊廟) 조정의 정사를 의논하는 건물을 뜻하는 말로, 조선 시대에는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계옥(啓沃)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을 인도하고 보좌한다는 뜻이다.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셔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곽(郭) 아무개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을 말한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설을 이어받아 주리(主理)에 입각한 이기설(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고종(高宗)을 독대해서 구국의 의견을 상주한 것을 계기로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었다. 1919년 파리장서에서 대표로 추대되었다가 옥고를 치렀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여독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면우집》이 있다. 전(田) 아무개 저자의 스승인 전우(田愚)를 가리킨다. 문장(文丈)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부르는 존칭으로, 여기서는 전우를 가리킨다. 첩을……것인데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규구(葵丘)의 회맹(會盟)에서 제후들과 맹약한 다섯 가지 중의 하나를 말한 것으로,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보인다. 오패(五覇)는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ㆍ진 목공(秦穆公)ㆍ초 장왕(楚莊王)ㆍ송 양왕(宋襄王)을 가리킨다. 격치(格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준말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것이다. 천려일득(千慮一得) 어리석은 자도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한 가지쯤 좋은 꾀를 낼 수 있다는 뜻으로,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의 "지자도 천 가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잘못이 있고, 우자도 천 가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광부의 말이라도 성인은 채택한다고 하는 것이다.〔智者千慮, 必有一失; 愚者千慮, 必有一得, 故曰狂夫之言, 聖人擇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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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 찬정18)을 배알한 날의 기록 拜勉菴崔贊政日錄 임인년(1902) 가을에 내가 강회(講會)의 일로 신전(莘田)에 갔던 날에 사문(師門)에 여쭙기를,"면암 최 대감의 명절(名節)과 덕망은 지금 세상에서 태산북두(泰山北斗)19)와 같으니, 소자가 그 문하에 한 번 방문하여 용모와 태도를 뵙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더니, 사문이,"좋다."라고 하였다.이에 벗 방미경 환창(房美卿煥暢)과 동반하여 정산(定山)으로 향하려 하였다. 정산을 10리 못 미쳐서 면암 대감이 어제 포천(抱川)으로 가는 길을 떠나 오늘밤 공주(公州) 율정(栗亭)의 심 진사(沈進士)의 집에서 유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정산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곧장 율정에 이르렀으나 이미 출발한 뒤였다. 마침내 저물녘에 높은 고개를 넘어 밤에 황연동(黃蓮洞)에서 유숙하고, 새벽에 20리를 가서 사기점(沙器店)에 이르러 대감을 만났다. 종자(從者)를 통해서 명함을 전하고 배알한 뒤에 전의(全義) 방이동(芳彛洞)의 임 진사(任進士)의 집에 따라갔는데, 임 진사는 면암 대감의 사위이다. 이날이 9월 19일이었다. 종일토록 모시고 앉았는데 질문한 것이 있으면 모두 싫증을 내지 않고 응대하였다. 이처럼 존귀한 지위로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 이와 같이 부지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복하게 하였다.대개 이 어른의 절의(節義)는 평소에 앙모하던 것이라 이렇게 위태한20) 날을 당하여 절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방미경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청하기를,"지금 우리나라 삼천리가 섬 오랑캐의 손아귀에 들어간 데다가 단발의 변고까지 있으니 어떻게 처신하면 그 의리를 온전히 하여 치욕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면암 대감이 답하기를,"죽음으로 지켜 도를 잘 실천해야 한다[守死善道]21)는 것과 죽어도 변치 않는다[至死不變]22)는 가르침이 책에 구비되어 있으니, 다만 이 말씀에 종사하여 이해하고 강론하여 밝힌다면 어려움을 당하여 구차해지는 근심이 없을 것이네."라고 하였다.내가 가르침을 받고 물러나와 그의 문인 곽윤도 한소(郭允道漢紹)와 다소 이야기를 나눴는데, 곽윤도는 문식(文識)이 있고 좋은 사람이었다. 애초에 며칠 머무르며 면암 어른을 따르려 하였으나 여정이 급하고 도로 가운데서 뒤따르기가 편치 않아 다음날에 방미경과 함께 하직하고 신전으로 돌아왔다. 壬寅秋, 余以講會事至莘田日, 禀師門曰: "勉菴崔台名節德望, 今世山斗, 小子欲一拜其門, 瞻承容儀. " 師門曰: "善!" 於是與房友美卿【煥暢】同伴, 將向定山. 未及定山十里, 聞勉菴台昨啓抱川行, 今夜宿公州栗亭沈進士家. 乃舍定山路, 直至栗亭, 已發駕矣. 遂迫昏踰峻嶺, 夜宿黃蓮洞, 曉行二十里, 至沙器店遇之. 因從者刺謁, 隨至全義芳彛洞任進士家, 任勉台壻也. 是日九月十九日也. 侍坐竟日, 有所質問, 皆酬應不倦. 以若尊貴之位, 愛人下士, 如是其勤, 令人感服. 蓋此丈節義, 素所慕仰, 當此板蕩之日, 欲聞節義之敎, 與美卿同起身請曰: "見今東土三千里, 入於島夷之手, 而又有剃髮之變, 何以處身, 則可以全其義而不受辱乎?" 答曰: "守死善道、至死不變之訓, 具在方冊, 但當從事斯語, 理會講明, 則庶無臨難苟且之患矣. " 余拜受訖退, 與其門人郭允道【漢紹】, 有多少談話, 郭有文識可人也. 初欲數日留從勉丈, 行李悤遽, 道路之中, 追隨未便, 翼日, 與美卿辭歸莘田. 면암 최 찬정(勉菴崔贊政)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면암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격몽요결》ㆍ《대학장구》ㆍ《논어집주》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ㆍ사간원 정언ㆍ신창 현감(新昌縣監) 등을 역임하였으며,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76년 〈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마지막으로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태산북두(泰山北斗) 태산처럼 높이 숭앙하고 북두칠성처럼 우러러 존모한다는 뜻이다. 《당서(唐書)》 〈한유열전 찬(韓愈列傳贊)〉에 "한유가 작고한 뒤로 그의 말이 널리 행해져서,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받들었다.〔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위태한 원문은 '판탕(板蕩)'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사회가 혼란함을 뜻하는 말이다. 본디 주 여왕(周厲王)이 무도하여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동란(動亂)을 겪은 일을 읊은 《시경》의 작품명 〈판(板)〉과 〈탕(蕩)〉에서 유래하였다. 죽음으로……한다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죽어도 변치 않는다 강함을 숭상하는 자로(子路)에게 공자가 나라에 도가 없을 때의 진정한 용기에 대해서 일러 주면서 찬미한 말로, 《중용장구》 제10장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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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도산양록 華島山樑錄 임술년(1922) 7월 3일 을축.오전에 화도(華島)에서 급한 전보가 왔는데 선생이 병들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랍고 염려되어 아우 김억술(金億述) 및 조제원(趙濟元)과 길을 떠났다. 이기환(李起煥)도 소식을 듣고 현암(玄巖)에서 여기로 와서 동행하여 급히 창북점(滄北店)에 도착하였다. 김종호(金鍾昊)ㆍ김종섬(金鍾暹)ㆍ김귀락(金龜洛) 등과 선생의 손자인 전일순(田鎰純)도 모두 소식을 듣고 도착하였다. 해가 이미 저물고 조수가 아직 물러나지 않았기에 저녁밥을 먹은 뒤에 바다를 건너 강사(講舍)에 당도하였다. 선생은 병세가 대단히 위중하여 말소리를 못 내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제 병을 얻었을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다고 한다.김영익(金永益)이 나에게 말하기를,"선생께서 10여 일 전부터 노형(老兄)이 오기를 바라지 않은 날이 없어서 제생(諸生)으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어 오기를 재촉하게 하였으나, 그 편지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이렇게 늦게 도착하게 되었으니 한탄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몹시 안타까웠다. 선생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이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보고 싶은 생각에 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큰소리로 "김택술이가 왔습니다."라고 말했으나 전연 알아보지 못했다. 증세가 더욱 위중해져 바야흐로 변고를 기다리던 때에는 병구완을 하는 자가 몇 사람도 없다가 나의 일행이 들어오게 되자 겨우 고단(孤單)함을 면하였다. 의원이 와서 청서육화탕(淸暑六和湯)과 귀용탕(歸茸湯) 각 1첩을 썼으나 모두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4일 병인유시에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니 애통하고 애통하다. 임종을 모신 사람은 자손 이외에 문인(門人)이 모두 49명이었다. 선생이 만년에 항상 자손과 문인에게 말하기를,"무릇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죽음을 앞둔 사람의 선한 말이니,23) 너희들이 이를 잘 지킨다면 다시 유언을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하였는데, 아 결국 이와 같았다.이에 초종(初終)24)의 유사(有司)를 정했으니, 호상(護喪)은 최병심(崔秉心), 상례(相禮)는 김익용(金益容), 축(祝)은 이희진(李喜璡), 사서(司書)는 황찬규(黃瓚奎)ㆍ김택술(金澤述)ㆍ조제원(趙濟元) 등이며, 사화(司貨)는 서진영(徐鎭英)ㆍ김종희(金鍾熙)ㆍ유영선(柳永善), 습(襲)은 김낙두(金洛斗)ㆍ고재붕(高在鵬) 등, 서명정(書銘旌)은 김종호(金鍾昊)이며, 문인은 세 때를 먹지 않는다[三時不食]는 것을 의정(議定)하였다.이날 저녁에 염습(斂襲) 도구를 올렸다. 수의(壽衣)를 일찍이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때를 당해서 늦어지지 않았다. 관(冠)은 위모(委貌)25)-흰색 바탕에 흑색으로 선을 두른 것이다.-를 사용하고 복건(幅巾)26)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망건(網巾)27)은 검은 비단[黑繒]을 사용하였으며, 상의(上衣)는 북포(北布)28)를 사용하였으며, 심의(深衣)29)는 북포로 만든 행의(行衣)30)를 잇대었으며, 과두(裹肚)31)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웃옷[襖]과 바지[袴]는 솜을 둔 명주-설면자(雪綿子)32)이다.-를 사용하였으며, 한삼(汗衫)ㆍ홑바지[單袴] 또한 흰 명주를 사용하였으며, 요대(腰帶)는 검은 비단을 사용하였으며, 멱목(幎目)33)은 검정색 비단[緇帛]에 붉은색 안감을 사용하였으며, 악수(握手)34)는 주머니처럼 만들었고 양쪽 끝에 끈이 있으며, 버선[襪]은 솜을 둔 흰 명주-설면자이다.-를 사용하였으며, 행전(行纏)35)은 흰 명주를 사용하였고 네 끝에 끈이 있으며, 싸개[冒]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반함(飯含)36)에 진주를 사용하였고, 뿔비녀[角笄]를 사용하라는 것은 선생이 명한 것이었으나-뿔비녀는 선생의 선비(先妣) 양씨(梁氏)가 남겨준 물건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소나무비녀[松笄]37)를 사용하였으니, 이 비녀는 태조 황제가 손수 심은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또한 선생이 평소에 사용하던 것이다. 혼백(魂帛)은 속백(束帛)의 제도를 사용하였으며,38) 명정(銘旌)에 '간재전처사지구(艮齋田處士之柩)'라고 쓴 것은 또한 선생이 평소에 명한 것이지만, '구산(臼山)'으로 쓰지 않고 '간재(艮齋)'라고 하여 조금 어긋나게 된 것은 대개 갑작스러워 살피지 못해 그러한 것이다.5일 정묘.부고(訃告)하였다. 문인에게는 '간재 선생이 몇 월 며칠에 병을 얻어서[艮齋先生以某月某日得疾] …….'라고 하고, 지구(知舊)들에게는 '전일효의 왕대인 간재 처사가[田鎰孝王大人艮齋處士] …….'라고 한 것도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었다.소렴 유사(小斂有司)를 정했으니, 김진기(金鎭基)ㆍ김태희(金泰熙) 등이다. 오전에 소렴 도구를 올렸다. 상의는 도포를 사용하였는데 선생이 평소에 입은 것이며, 이불은 검정 명주를 사용하였는데 붉게 염색한 북포로 안감을 만들었으며, 효(絞)39)는 명주를 사용하였다.6일 무진.각항(各項)의 유사를 의정(議定)하였으니, 대렴(大斂)은 김방술(金邦述)ㆍ정만진(鄭滿鎭) 등이며, 제최복(製衰服)은 서병갑(徐柄甲)ㆍ정인현(鄭寅鉉) 등이며, 사빈(司賓)은 이병은(李炳殷)ㆍ김홍재(金弘梓) 등이며, 도빈(塗殯)은 신홍균(申洪均)ㆍ변복원(邊復源)이다. 무릇 이 여러 직임 중에서 습렴(襲斂) 이하부터는 그 이름만 헛되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 일을 행하는 경우가 적은 것 또한 오늘날 유자(儒者)의 유명무실한 한 단면이니 개탄스럽다.오전에 대렴 도구를 올렸다. 이불은 검정 명주를 사용하였고 붉게 염색한 삼베로 안감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바로 입관(入棺)하였는데, 관은 찰방(察訪) 박만환(朴晩煥)이 만들어 바친 것으로 판자의 품질이 우수하고 옻칠한 것이 두껍고 번들번들하였다. 그 중에 옻칠값 반금(半金)은 고부의 강계(講契) 중에서 마련해 준 것이다. 관의(棺衣)40)는 검은 천을 위로 하고 붉은 천을 아래로 하는 제도[上玄下纁]를 사용하였다. 오후에 강당의 북쪽 협실(夾室 곁방)에 빈소를 만들고 영좌(靈座)41)를 강당의 북쪽 벽 아래에 남향으로 봉안하였다.7일 기사.조곡(朝哭)42) 때를 이용하여 성복(成服)43)하였다. 내외복인(內外服人)이 도합 수십 인이고, 문인으로서 동시에 성복한 자가 백여 인이었다. 가마(加麻)44)는 단고환질(單股環絰)45)을 사용하였으며, 건대(巾帶 두건과 허리띠)는 희고 가는 삼베로 만드는 제도를 사용하여 복인의 건대와 같게 하였다.위차(位次)는, 오복인(五服人)은 동쪽 섬돌 아래에서 서향하고, 문인은 북향하되 동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이었으니, 이는 선생이 생존했을 때에 조석으로 참알(參謁)하던 위차를 사용한 것이다.석곡(夕哭)을 한 뒤에 산지(山地)46)를 의정(議定)하였다. 이병은(李炳殷)이 말하기를,"풍수(風水)의 이치는 사람마다 소견이 각자 다른 법이니, 반드시 자손과 문인들의 의견이 일일이 서로 들어맞기를 기다린 뒤에 정한다면 끝내 정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단독으로 주관해야 하니, 주상(主喪)47) 한 사람이 스스로 지사(地師)48)를 택하여 정하거나 혹은 문인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위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이 오로지 오진영(吳震泳)에 의지하여 주관하였다.오진영과 최병심(崔秉心)이 "영좌의 앞이 비좁아 전배(奠拜)가 불편하다."라고 하여 이미 동쪽 벽 아래 서향으로 옮겨 봉안하니, 여러 사람의 의론이 "살아있는 사람이 전배하기에 불편함으로 인해 신위 정면(正面)의 처소를 바꾸는 것은 크게 온당하지 않다. 게다가 내외의 자리와 빈주(賓主)의 자리가 곳곳마다 막히게 되니 다시 북쪽 벽 아래에 봉안해야 합니다." 하였다. 내가 "영좌가 바른 위치를 잃는 것은 이미 예가 아니고 전배가 불편한 것도 생각해야 할 바이니, 앞 벽을 터서 넓히고 창문을 다시 만들어 영좌를 환안(還安)49)한다면 이미 예에 알맞고 또 전배에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의 의론이 모두 그렇겠다고 여겼다.8일 경오.문인들이 벌여 앉아 가마록(加麻錄)을 쓰고 각 사람이 심상(心喪)50)할 연월수(年月數)를 정하였다. 선생이 평소에는 '스승의 상에 일체 3년의 복을 입는다.'는 것으로 정론(定論)을 삼았으나 만년에는 다시 선현(先賢)이 주장한 '정(情)의 정도에 따른다.[隨情淺深]'는 설을 좇았으니, 대개 문하에 들어온 젊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심상삼년(心喪三年)을 지낸다고 하면서 주육(酒肉)과 복암(服闇)51)을 대부분 평소처럼 하여 도리어 예교(禮敎)를 상할까 염려해서였다.오진영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스승의 상에 3년의 복을 입는다는 것이 본디 정례(正禮)입니다. 지금 비록 정에 따라 복을 입을지라도 1년을 밑돌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이는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에 3년으로 정하여 가감(加減)할 수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지금 이미 똑같은 법을 따르지 않는데, 또 '1년을 밑돌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면 위로는 정례(正禮)가 될 수 없고 아래로는 정에 따르는[隨情] 것도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여러 사람의 의론도 옳다고 여겨 각자 3년 이하의 연월수를 성명의 아래에 기록하였다. 나는 3년으로 기록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3년으로 기록한 자가 대부분이었으며 종유하여 가마(加麻)한 사람도 수십 인이었다.9일 신미.뜰에 벌여 앉아 충분히 의논하여 스승의 상에 상복을 입는 절목(節目)을 정하였다. 졸곡(卒哭)52)을 마친 뒤에 가마(加麻)를 벗고 흰색 두건과 흰색 허리띠로써 월수(月數)를 마친다. 출입할 때에는 종전의 칠립(漆笠 옻칠을 한 갓)을 쓰고 편지에서는 '심제인(心制人)'53)이라 일컫는다. 졸곡 이전에는 자녀의 혼인을 행할 수 없으며, 복을 벗기 전에는 남의 관빈(冠賓)54)이 될 수 없다. 부재모상(父在母喪)55)과 본생부모(本生父母)에 심상(心喪)을 입은 사람 및 담복(禫服)56)을 입은 사람은 참립(黲笠)과 참대(黲帶)를 착용하며, 스승의 상에 일이 있을 때에는 가마(加麻)ㆍ흰색 두건ㆍ흰색 허리띠를 착용한다.11일 계유.선생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 십여 일간에 지은 문자를 초고(草藁) 가운데서 수습하여 문고(文稿)에 실었다. 〈답김택술서(答金澤述書)〉로 미처 베껴 보내지 못한 것 1통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대체로 모두 연원(淵源)에 관련하여 대본(大本)을 밝히며 세도(世道)를 근심하고 문인들을 염려해서 지은 것이었다. 급급하게 지어서 한나절 만에 시 10여 수를 짓기도 하였으니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12일 갑술.조문을 받을 때에 중주인(衆主人)57)이 절하는지 절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중주인이 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인과 함께 절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지 빈객과 예를 행하는 것을 아울러 금하는 것이 아니다. 평일에도 절하는데 더구나 상을 당한 날임에랴. 그러니 주인이 조문을 받는 때를 당하여 선후로 빈객에게 절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다. 또 중주인이 이미 조문을 받을 수 없다면 마땅히 빈객과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먼저 절하거나 나중에 절해야 한다. 만약에 일체 먼저 절한다면 조문을 받았다는 혐의가 있게 된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다. 또 중주인이 절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예문(禮文)에 나타나 있으니 그저 예법을 따라야 할 뿐 다시 다른 설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었다. 서로 변론(辨論)하여 처음의 설로 정하였다.19일 신사.선생의 영정을 혼백의 왼쪽에 모셨다. 내가 사화실(司貨室)에 가서 부의록(賻儀錄)을 보니, 문인 가운데 정성을 다하지 않은 자가 많고 심지어는 도조(賭租)58) 2, 300섬을 거두면서도 돈 2, 3원을 낸 자도 있었다. 세상의 기풍이 이러하니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석곡(夕哭)을 마친 뒤에 산지(山地)를 익산(益山) 현동(玄洞)의 선영 아래로 의정(議定)하였으니, 사방으로 구해도 합당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9월 13일 계유를 장례식 기일로 정하였다.20일 임오.여러 사람의 의론이 "아침저녁으로 곡할 때에 지금 살아 계실 때 혼정신성(昏定晨省)하던 대로 으레 읍례(揖禮)를 행하고 있는데, 혼백이 영상(靈牀)에 있는 것은 곧 사람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읍례를 행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 아침에 곡할 때에는 자리에 나아가서 곡하고 혼백이 영좌에 나아가기를 기다린 뒤에 읍례를 행하며 저녁에 곡할 때에는 곡과 읍례를 행한 뒤에 혼백을 받들고 영상에 나아가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라고 하여, 이에 의거하여 행하였다.21일 계미.조문객 중에 미처 선생의 얼굴을 뵙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사람의 의론이 "비록 선생의 얼굴을 뵙지 못했더라도 그가 조문을 온 것이 현인(賢人)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궤연(几筵)에 들어가 절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나중에는 모두 이에 의거하여 행하였다.22일 갑신.59)이날부터 비로소 장례 도구를 준비하고 여러 사람이 서로 예서(禮書)의 장례와 우제(虞祭)60) 의절(儀節)을 상세히 살펴보았다. 선생에게 전배(前配)와 후배(後配)가 있었는데 세 분[三位]을 합장하라는 것은 선생의 유훈(遺訓)이었다. 그래서 장사를 지내는 날에 연기(燕岐)에 있는 두 분의 묘소를 천봉(遷奉)61)하여 합봉(合封)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문득 이번 장례 때문에 오히려 저들[일제]이 따져 물을 우려가 없지 않기에 적합하지 않고, 또 저들의 법에 저촉되면 하나의 일이 생겨나기에 추후에 합봉(合封)하는 것이 온당하였다. 다만 광중(壙中)을 팔 때에 회격(灰隔)62)을 넓게 만들어 세 분을 수용할 수 있게 하여 뒷일을 대비하기로 하였다.24일 병술.장사를 지내기 전 조문을 받을 때에 영좌 앞에서 상장(喪杖)을 짚느냐 짚지 않느냐에 대해 의논하였다. 김택술은 "《예기》의 '우제에는 상장을 짚고 방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虞杖不入室]'라는 문구로 보건대 상장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남진영(南軫永)은 본암(本菴)63)의 설에 의거하여 "장례의 전후를 막론하고 모두 감히 상장을 짚지 못한다고 하니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요사이에 문인으로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자가 많았으나 대부분 찬물(饌物)이 매우 약소하여 의모(儀貌)를 이루지 못했으며 종이는 질이 나쁘고 글자는 거칠어 성경(誠敬)이 크게 부족하였다. 유자(儒者)는 비록 가난하다고 하고 제문은 비록 마음을 전달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고 해도 가장 존귀한 스승의 상에 어찌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이에 오늘날 유자의 거칠고 구차한 일면을 볼 수 있겠다. 내가 사우(士友)들과 건의하여 이때부터는 제문에 글자가 조잡한 것은 고쳐 써서 고하고 찬물 또한 서로 일깨워 주어 너무 박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25일 정해.김노동(金魯東)이 편지를 보내와 가마(加麻)를 3개월 행하겠다고 하고, 먼 곳에 사는 사우들이 편지를 보내와 혹은 이미 백립(白笠)을 썼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답서에 이전의 근거가 없으니 금하라고 하였다.27일 기축.각처의 선생의 문자를 받아간 집에 통부(通訃 부고)하였다.8월 1일 임진.방상(方相)64)을 쓸지 안 쓸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김종희(金鍾熙)와 유영선(柳永善)은 "선생의 유명(遺命)입니다."라고 하면서 쓰지 말자고 주장하였으며, 최병심(崔秉心)은 "비록 유명이 있었다고 해도 예문에 나타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쓰자고 주장하였으며, 김택술은 "선생의 뜻은, 자정(自靖)65)하는 의리로써 검약함으로 처신하는 것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스승을 존숭하는 도리에서는 예문에 나타난 것을 쓰는 것도 이치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 우선 결정하지 못했다. -나중에 결국 방상을 썼다.-3일 갑오.상관(喪冠)을 개조해야 할지 여부를 논의하였다. 이번에 상관을 만들 때에 김익용(金益容)은 관의 바깥을 싸는[外裹] 설을 주장하고 오진영(吳震泳)은 관의 안팎을 싸는[內外裹] 설을 주장했는데, 오진영의 설에 따라 만들었다. 김익용이 나중에 편지를 보내와 개조해야 한다고 하면서 "《의례문해(疑禮問解)》에 상고할 만한 곳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강사(講舍)에 《의례문해》가 없어서 결정하지 못했다.또 동자에게 수질(首絰)66)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번 상사(喪事)에 동자도 이미 수질을 사용하였으나, 여러 사람이 《비요(備要)》ㆍ《편람(便覽)》ㆍ《예의속집(禮疑續輯)》 등의 책에 모두 수질을 사용한다는 문구가 없다는 이유로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유영선이 "선생의 〈국영환에게 답하는 편지[答鞠瑛煥書]〉에 동자가 수질을 사용한다는 정론(定論)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논의를 결국 중지하였다.4일 을미.조충현(趙忠顯)이 편지를 보내와 선생께 사시(私諡)67)를 올리자는 의론이 있었으나 호상소(護喪所)에서 불가하다는 뜻으로 답하여 보냈다.7일 무술.장례 기일을 문인과 지구(知舊)의 각처에 알렸다.9일 경자.여러 사람이 함께 상의하여 양례 유사(襄禮有司)를 차정(差定)하였다.도유사(都有司) : 오진영(吳震泳)부유사(副有司) : 서병갑(徐柄甲), 송의섭(宋毅燮)호상(護喪)68) : 이희진(李喜璡), 최병심(崔秉心), 이병은(李炳殷)집례(執禮) : 성기운(成璣運), 김택술(金澤述)축(祝) : 김종호(金鍾昊), 권순명(權純命) 등사서(司書) : 황찬규(黃瓚奎), 정대수(丁大秀) 등사빈(司賓) : 소학규(蘇學奎), 고제규(高濟奎) 등사화(司貨) : 허만헌(許萬憲), 조한규(趙瀚奎) 등수제문만사(受祭文輓詞) : 이상규(李相珪), 임철규(林哲圭) 등계빈(啓殯)69) : 이기환(李起煥), 최완철(崔完澈) 등조조(朝祖)70) : 김병구(金秉九), 김주용(金周鏞) 등조전(祖奠)71) : 박기양(朴覬陽), 김현술(金賢述) 등견전(遣奠)72) : 조제원(趙濟元), 권재기(權載璣) 등설악(設幄) : 문제중(文濟衆), 김억술(金億述) 등산역(山役) : 국영환(鞠瑛煥), 임학수(林學洙) 등봉현훈(奉玄纁) : 김달(金達), 이면하(李勉夏)사토헌관(祠土獻官) : 임병룡(林秉龍), 정돈영(鄭敦永)사토축(祠土祝) : 한덕련(韓德鍊)제주(題主)73) : 송기면(宋基冕)초우축(初虞祝) : 임감재(任坎宰)재우축(再虞祝) : 이유흥(李裕興)삼우축(三虞祝) : 김병현(金炳玹)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13일 갑진.이날은 선생의 생일이다. 조전(朝奠)을 할 때에 어육(魚肉)ㆍ떡ㆍ과일을 더 진설하여 다른 날과 차이를 나타내었다.26일 정사.집례소(執禮所)에서 장례ㆍ우제ㆍ졸곡제ㆍ부제(祔祭)의 홀기(笏記)74)를 정한 다음 전옹(全翁)75)의 장례 때에 선생이 정한 홀기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28일 기미.김 직각(金直閣) 상덕(商悳)이 지은 제문이 왔는데 그 문장이 간결하여 매우 좋았다. 제문에 이른 "큰 선비에게 명하더니 하늘이 사문을 망하게 하네.[大儒是命 天喪斯文]" 등의 구절은 더할 나위가 없었으나, 다만 "정현(鄭玄)76)을 곁마로 삼고 가규(賈逵)77)를 멍에 하니 호서와 호남의 인사들이 괵(虢)나라가 편작(扁鵲)을 얻은 것처럼78) 하였네.[驂鄭駕賈 兩湖人士 如虢得扁]" 등의 구절은 만족스럽지 않았다.9월 7일 정묘.내가 아우 김억술(金億述) 및 조제원(趙濟元)과 각기 전물(奠物)과 제문을 갖추어 궤연에 곡하며 고하였다. 그때는 장례 기일이 점차 다가와 모인 사람이 많고 제문도 많았지만, 신체를 훼손한 사람79)의 부조(賻弔)는 선생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물리쳤다.10일 경오.아침 상식(上食)80)을 마친 뒤에 따로 전(奠)을 차리고 계빈(啓殯)을 고하였으며, 계빈한 뒤에 조조(朝祖)를 행하고 영구(靈柩)를 청사(廳事)로 옮겼다. 제문이 더욱 많아 이루 다 읽을 수 없기에 다만 향안(香案) 앞에 펼쳐 놓았다.저녁 상식을 마친 뒤에 조전(祖奠)을 행하고 예법대로 기물(器物)을 진설하였다. 방상(方相) 2인, 시자(侍者) 2인, 명정(銘旌)81) 1, 영거(靈車) 1, 공포(功布)82) 1, 대여(大轝) 1, 운삽(雲翣)83) 1쌍, 집불(執紼)84) 80인-문인(門人)-, 상제(喪制)의 가마 2좌(座), 복인(服人)의 가마 2좌, 복인의 말[馬] 12필(疋), 문인의 말 50필, 빈객의 가마 3좌, 담여군(擔轝軍)85) 26인, 교군(轎軍) 14인, 역부(役夫) 20인.11일 신미.새벽에 영구(靈柩)를 대여(大轝 상여)에 싣고 견전(遣奠)86)을 행했으며, 견건을 행한 뒤에 상식(上食)하였다. 날이 밝기 전에 발인(發引)87)하여 바다를 건넜다. 날이 밝아질 무렵에 당북리(堂北里)에 이르니 주민 최 아무개가 술과 안주를 내와서 담여군과 교군에게 먹였다. 삼산점(三山店)에 이르자 흥양(興陽)에 사는 문인들이 노제[路奠]를 합설(合設)하였는데 매우 성대하였다. 저번에 비록 노제는 정례(正禮)가 아니니 일절 중지하기로 의논하였으나 전(奠)을 차려놓고 미리 기다리는 경우에는 받지 않을 수 없었다.군포(君浦)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김제 구산(龜山)의 나갑순(羅甲淳)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영구를 강당에 안치하고 상인(喪人)ㆍ복인(服人)ㆍ유사 중의 수임(首任) 수십 인 외에는 마을 사람의 집에 나뉘어 유숙하였다. 나갑순이 문인이 아닌데도 이처럼 정성을 다하니 감동되었다. 김제의 늙은 아전 조(趙) 아무개 등이 연명(聯名)으로 치전(致奠)하였으니, 모두 선생의 도덕이 사람들을 감동시킨 덕분이었다.12일 임신.일찍 출발하여 김제읍 황산리(黃山里)를 지나 신정촌(新井村)에 당도하였다. 마을에서 치전하였는데, 이를 주관한 사람은 정치상(鄭致祥)이었다. 아, 들에 살면서 농사에 힘쓰는 백성이 어떻게 선생을 사모하여 이렇게 성대한 전(奠)을 올리는가? 참으로 깊은 사랑과 큰 덕이 민심을 감화시킨 것이 아니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목천포(木川浦)에서 점심을 먹고 이리역(裏里驛)에 이르자 문인 왕병원(王秉瑗)과 지구(知舊)인 송용재(宋龍在)가 함께 치전하였다. 이곳은 큰 지방이라 문인과 빈객이 도중에 달려와 모인 사람이 많았는데 화도에서 영구를 따라온 사람들과 통합해 보니 합계가 1,500여 인이고 국내외 구경하러 온 남녀노소가 10,000여 인이었다.저물녘에 현동(玄洞)에 당도하여 영구를 산 위의 영악(靈幄)88) 안에 안치하였다.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이리(裏里)에서 계산한 것에 비해 갑절이나 더하고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세 배나 되어 음식점과 가가(假家)89)가 240여 곳이었다. 이날 밤에 비가 갑자기 내렸으니 군색한 상황을 형언할 수 없다.13일 계유.비가 그쳐 일기가 청랑(淸朗)하였다. 진시에 하관(下棺)하였다. 제주(題主)할 때에 앞면에는 '현조고처사부군신주효손일효봉사(顯祖考處士府君神主孝孫鎰孝奉祀)'라고 쓰고, 함중(陷中)90)에는 '고처사전공휘모자모신주(故處士田公諱某字某神主)'라고 썼다. 김택술이 "명정에 이미 별호(別號)를 썼으니 함중에도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론과 맞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산 아래의 재각(齋閣)에서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여론을 들어보건대 기미년(1919)의 인산(因山)91) 때에 온 나라의 사민(士民)들이 달려가 통곡한 것은 500년 종묘사직이 영원히 망했기 때문이고 이번에 장례식에 모인 사람이 많은 것은 4,000년 도학이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 말이 매우 비통하였다. 오후에 반혼(返魂)92)하고, 간신히 이리에 이르러 유숙하였다.14일 갑술.일찍 출발하여 오시에 김제읍에 이르렀다. 김제읍 사람 조면섭(趙冕燮)이 일행에게 밥을 대접하였으니, 이 또한 지금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달빛을 받으며 계화도에 이르니 달빛이 스산하고 텅 빈 산이 적막하여 위아래로 살펴보고 좌우로 돌아봄에 한없이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15일 을해.새벽에 재우제(再虞祭)를 행하였다. 문을 닫은[闔門] 뒤에 문인들이 주인과 함께 서향하지 않고 그대로 북향한 것은 초우제 때부터 이미 그러한 것으로 예의(禮意)에 매우 합당하였으나, 지금 오진영(吳震泳)과 성기운(成璣運)이 "주인과 함께 서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김택술이 "문인은 빈객입니다. 빈객은 다른 줄에 자리한다는 것이 예서에 이미 나타나 있고, 더구나 부인의 자리와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 보는 것은 크게 온당하지 못하니 이전대로 북향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니, 최병심(崔秉心)과 김종호(金鍾昊) 등 여러 사람도 그렇게 여겼다. 이에 서향하는 사람이 절반이고 북향하는 사람이 절반이어서, 한 장소의 예의(禮意)가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16일 병자.새벽에 삼우제를 행하였다. 문을 닫은 뒤에 오진영과 성기운 두 사람이 문인은 서향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여 사람들이 모두 따랐으나 나만 홀로 이전대로 북향하였다.17일 정축.새벽에 졸곡제(卒哭祭)93)를 행하였다. 문을 닫은 뒤에 여러 사람이 또 모두 서향하였으나, 김택술이 김익용(金益容)과 함께 이전대로 바르게 서서 북향하자 여러 사람 중에 따른 자가 절반을 넘었다.사화소(司貨所)에서 들어온 부의물(賻儀物)을 계산해 보니 베ㆍ종이ㆍ초[燭]ㆍ제기 등의 품목을 제외하고 돈이 4,000여 원이었다. 상장(喪葬)의 비용도 이와 같았으나 오히려 100여 원이 남았기에 내년 봄 합장할 때의 비용[合窆條]으로 획정하고 나머지는 상주(喪主) 두 집에 나누어 주었다.18일 무인.부제(祔祭)94)를 행하였는데 문인들은 참여하지 않았다.예전 선생이 군산(群山)에 있을 때에 수명이 군산과 같다는 꿈을 꾸었다. 해몽하는 자 중에 어떤 사람은 "군산에 90굽이[曲]가 있으니 마땅히 90세에 이를 것입니다." 하고, 어떤 사람은 "군(群) 자의 양(羊)은 팔(八)ㆍ십(十)ㆍ이(二)로 이루어졌으니 마땅히 수명이 82세에 이를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82세 설을 취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정말로 들어맞음을 면치 못하니 애통하다.듣건대 작년 겨울에 영남에서 목가(木稼)95)의 재변이 있자 설명하는 자가 "철인(哲人)의 액운이 있을 것이다." 하였고, 금년에 계화도 강당 앞의 살구나무에 꽃이 피지 않고 열매도 달리지 않아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일이라 여겼는데, 이제 선생이 갑자기 후학들을 버리니 군자의 죽음을 하늘이 먼저 경고하여 보여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〇 선생은 이미 헌정(獻靖)의 의리96)를 다하고 아울러 이조(夷啁)의 치욕을 당하지 않아 세도(世道)를 부지하고 천수(天壽)를 누렸으니, 근래의 유림(儒林)에서 찾아봄에 선생 한 사람뿐이다.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살아서는 내가 하늘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97)라고 한 것을 선생이 소유하였다. 壬戌七月初三日乙丑.午前, 自華島有急電, 乃先生病報也. 聞甚驚慮, 與弟億述及趙濟元發程. 李起煥亦聞報, 自玄巖到此同行, 急到滄北店. 金鍾昊ㆍ鍾暹、金龜洛等、先生孫鎰純亦皆聞報而到. 日已夕而潮未退矣, 夕飯後, 涉海抵講舍. 先生病勢, 萬分危重, 失語音不省人, 自再昨日得疾時已然云. 金永益謂澤述曰: "先生自十數日來, 無日不望老兄之來至, 使諸生專書促來, 而書未及達, 致此晩到可歎. " 澤述聞甚大恨. 未知先生所欲敎者何事, 而思見至此. 因大聲告曰"金澤述來矣", 全不省. 證益重, 方在待變中時, 侍疾者無幾人, 至是澤述一行入來, 乃免孤單. 醫來用淸暑六和湯、歸茸湯各一貼, 幷未奏效.初四日丙寅.酉時, 先生奄至下世, 痛矣痛矣! 侍臨終者, 子孫以外, 門人凡四十九人. 先生晩年, 常謂子孫門人曰: "凡我所言, 無非將死善言, 汝曹其善守之, 不必更求遺言. " 嗚呼! 其竟如斯也. 乃定初終有司, 護喪崔秉心, 相禮金益容, 祝李喜璡, 司書黃瓚奎、金澤述、趙濟元等, 司貨徐鎭英、金鍾熙、柳永善, 襲金洛斗、高在鵬等, 書銘旌金鍾昊, 議定門人三時不食. 是夕, 進襲. 以壽衣曾已製置, 故不臨時遲緩也. 冠用委貌【素質黑緣】, 不用幅巾, 網巾用黑繒, 上衣用北布, 深衣承以北布行衣, 裹肚不用, 襖、袴用紬有絮【雪綿子】, 汗衫、單袴亦用白紬, 腰帶用黑繒, 幎目用緇帛赬裏, 握手如囊制, 兩端有繫, 襪用白紬有絮【雪綿子】, 行纏用白紬, 四端有繫, 冒不用, 飯含用眞珠, 用角笄, 乃先生所命,【角笄, 先生先妣梁氏遺物故也. 】 不知所在, 用松笄, 此笄以太祖皇帝手植松作成, 而亦平日所用也. 魂帛用束帛制, 銘旌書之曰"艮齋田處士之柩", 亦平日所命, 而但不書臼山而曰艮齋, 此爲少違, 蓋悤遽未審而然也.初五日丁卯.訃告. 門人處云"艮齋先生以某月某日得疾. 云云", 知舊處云"田鎰孝王大人艮齋處士. 云云", 亦遵遺命也. 定小斂有司, 金鎭基、金泰熙等. 午前, 進小斂. 上衣用道袍, 平日所著者, 衾用黑紬, 而北布染絳爲裏, 絞用紬.初六日戊辰.議定各項有司, 大斂金邦述、鄭滿鎭等, 製衰服徐柄甲、鄭寅鉉等, 司賓李炳殷、金弘梓等, 塗殯申洪均、邊復源. 凡此諸任, 自襲斂以下, 多虛存其名, 而少實行其事者, 是亦今世儒者無實之一端也, 可歎. 午前, 進大斂. 衾用黑紬, 麻布染絳爲裏. 因入棺, 棺則朴察訪晩煥所造呈, 板品優美, 塗漆厚澤. 其中漆價半金, 古阜講契中備給者也. 棺衣用上玄下纁. 午後, 成殯于講堂北夾室, 靈座奉安于講堂北壁下南向.初七日己巳.因朝哭成服. 內外服人合數十人, 門人同時成服者百餘人. 加麻用單股環絰, 巾帶用白細麻布制, 同服人巾帶. 位次則五服人阼階下西向, 門人北向東上重行, 用先生生時朝夕參謁位也. 夕哭後, 議定山地. 李炳殷曰: "風水之理, 人人所見, 各自不同, 必待子孫門人一一相合而後定, 則終無其日. 此事單主, 主喪一人, 自擇地師定之, 或擇門人中一人, 委任可也. " 於是主喪, 專仗吳震泳爲主. 吳震泳、崔秉心以"靈座前狹窄, 不便奠拜", 已移奉於東壁下西向矣, 衆議以爲"因生人奠拜之不便, 易神位正面之處所, 大是未安. 且內外之次, 賓主之位, 在在窒礙, 當還奉於北壁下". 金澤述以爲"靈座之失正位, 旣是非禮, 奠拜之不便, 亦所當念, 當坼闊前壁, 改修牕戶, 還安靈座, 則旣得於禮, 又便奠拜", 諸議皆以爲然.初八日庚午.門人列坐, 書加麻錄, 定各人心喪年月之數. 先生平日, 以師喪一切三年爲定論, 晩年改從先賢隨情淺深之說, 蓋慮及門年少輩之名持心喪三年, 而酒肉服闇, 多如平日, 反以傷禮敎也. 吳震泳言於衆曰: "師喪三年, 本是正禮. 今雖隨情服之, 當不下朞年. " 金澤述曰: "此恐不然. 若以三年爲定, 不得加減則已矣, 今旣未遵一切法, 而又曰'不下朞年', 則是上之不得爲正禮, 下之不得爲隨情也. " 諸議亦以爲然, 各書三年以下年月數於姓名下. 澤述書以三年, 而他亦擧多三年者, 從遊加麻者亦數十人.初九日辛未.列坐庭中, 爛漫商確, 定師喪持服節目. 自卒哭後, 除加麻, 以白巾帶終月數. 出入時, 舊漆笠, 書詞中, 稱心制人. 卒哭前, 不得行子女嫁娶, 除服前, 不得爲人冠賓. 父在母喪、本生父母心喪人及禫服人, 持黲笠帶, 有事師喪時, 持加麻白巾帶.十一日癸酉.收拾先生下世前十餘日間所作文字於草藁中, 載諸文稿. 《答金澤述書》未及寫送者一度亦在其中, 蓋皆關淵源明大本、憂世道慮門人而作也. 汲汲著成, 至半日作詩十餘首, 有若前知者矣.十二日甲戌.以"受弔時, 衆主人拜不拜", 諸議紛紜. 衆主人不拜, 謂不與主人同拜, 非幷禁與賓爲禮也. 平日猶拜, 況此日乎? 當於主人受弔, 後先拜賓, 此一說也. 衆主人旣不敢受弔, 則當與賓計年高下, 或先拜或後拜. 若一切先拜, 則有受弔之嫌, 此一說也. 衆主人不拜, 旣著禮文, 只當遵禮, 不必更有他說, 此一說也. 互相辨論, 以初說爲定.十九日辛巳.奉先生影幀于魂帛之左. 澤述至司貨室, 見賻儀錄, 門人多不用誠, 至有收賭二三百石而出金二三圓者. 世風若此, 可勝歎哉? 夕哭後, 議定山地於益山玄洞先塋下, 以四求無可合處故也. 以九月十三日癸酉定葬期.二十日壬午.衆議以爲"朝夕哭, 今依生時定省, 例行揖禮, 則魂帛在靈牀, 卽人未起寢時也. 未起寢而行揖未安, 朝哭時, 就位哭, 俟魂帛就座後行揖, 夕哭時, 行哭揖後, 奉帛就床似穩", 依此行之.二十一日癸未.弔客中有未及承顔者, 諸議以爲"雖未承顔, 其來也, 出於慕賢, 宜令人入拜几筵", 後皆依此行之.二十二日丙申.自是日始治葬具, 諸人相與看詳禮書葬虞儀節. 先生有前後二配, 三位合窆, 遺訓也. 議於襄窆日, 遷奉燕岐所在二位墓合封, 而旋以今此襄奉, 尙不無彼詰之慮不宜, 又抵彼法, 生出一事, 追後合封爲穩. 但於穿壙時, 闊作灰隔, 可容三位, 以備後事.二十四日丙戌.議葬前受弔, 靈座前杖不杖. 金澤述以爲"以《禮記》'虞杖不入室'之文觀之, 不去杖爲得", 南軫永據本菴說以爲"勿論葬之前後, 皆不敢杖, 未知何者爲是". 近日, 多門人致奠告文者, 而率皆饌物薄略, 不成儀貌, 紙劣字蕪, 大欠誠敬. 儒者雖云貧窶, 祭文雖主達情, 莫尊師喪, 何不致虔之至此? 此可見今日儒者鹵莽苟且之一端也. 澤述與士友建議, 從此祭文紙本草率者, 改書以告, 饌物亦相告喩, 無至太薄.二十五日丁亥.金魯東書來, 行加麻三月云, 遠地士友書來, 或有已著白笠云者. 故自此答書 以無前據禁之.二十七日己丑.通訃于各處文字受去人家.八月初一日壬辰.論方相用不用. 金鍾熙、柳永善以"先生遺命", 主不用, 崔秉心以"雖有遺命 旣著禮文", 主用, 金澤述以爲"先生之意, 蓋以自靖之義, 儉約奉身, 無間於生死, 故有是命也. 然在弟子尊師之道, 以禮文所著而用之, 亦不害理", 姑未決定. 【後竟用之】初三日甲午.論喪冠當改與否. 今番造喪冠時, 金益容主外裹之說, 吳震泳主內外裹之說, 從震泳說造之. 益容後有書來, 謂當改造而曰"《疑禮問解》有可考處", 講舍中見無《疑禮問解》, 未得決定. 又論童子首絰有無. 今番喪事, 童子亦已用絰, 諸人以"《備要》、《便覽》、《禮疑續輯》等書, 幷無用絰之文", 謂當除去. 柳永善謂"先生《答鞠瑛煥書》, 有童子用絰之定論", 議遂止.初四日乙未.趙忠顯書來, 有私諡先生之議, 護喪所以不可之意答去.初七日戊戌.告葬期于門人知舊各處.初九日庚子.衆共商議, 差定襄禮有司. 都有司吳震泳, 副有司徐柄甲、宋毅燮, 護喪李喜璡、崔秉心、李炳殷, 執禮成璣運、金澤述, 祝金鍾昊、權純命等, 司書黃瓚奎、丁大秀等, 司賓蘇學奎、高濟奎等, 司貨許萬憲、趙瀚奎等, 受祭文輓詞李相珪、林哲圭等, 啓殯李起煥、崔完澈等, 朝祖金秉九、金周鏞等, 祖奠朴覬陽、金賢述等, 遣奠趙濟元、權載璣等, 設幄文濟衆、金億述等, 山役鞠瑛煥、林學洙等, 奉玄纁金達、李勉夏, 祠土獻官林秉龍、鄭敦永, 祠土祝韓德鍊, 題主宋基冕, 初虞祝任坎宰, 再虞祝李裕興, 三虞祝金炳玹, 餘不能盡錄.十三日甲辰.是日先生生朝. 於朝奠, 添設魚肉餅果, 以示異於他日.二十六日丁巳.自執禮所, 定葬虞卒祔笏記, 因全翁葬時先生所定笏而修潤之.二十八日己未.金直閣【商悳】祭文來, 其文簡潔甚好. 而其云"大儒是命, 天喪斯文"等句, 蔑以加焉, 但"驂鄭駕賈, 兩湖人士, 如虢得扁"等句, 不滿意也.九月初七日丁卯.澤述與弟億述及趙濟元, 各具奠物祭文, 哭告几筵. 時葬期漸近, 會者衆, 祭文多, 而毁形人賻弔, 以先生平日之訓却之.初十日庚午.朝上食後, 別設奠, 告啓殯, 啓殯後, 行朝祖, 遷柩廳事. 祭文益多, 不可勝讀, 只展於香案前. 夕上食後, 行祖奠, 陳器如禮. 方相二人, 侍者二人, 銘旌一, 靈車一, 功布一, 大轝一, 雲翣一雙, 執紼八十人,【門人】 喪制轎二座, 服人轎二座, 服人馬十二疋, 門人馬五十疋, 賓客轎三座, 擔轝軍二十六人, 轎軍十四人, 役夫二十人.十一日辛未.曉頭, 載柩大轝, 行遣奠, 奠後上食. 未明, 發引涉海. 平明, 至堂北里, 居人崔某出酒肴, 饋轝轎軍. 至三山店, 興陽門人合設路奠, 甚盛. 向雖議路奠非正禮, 一切停罷, 然其於設奠預待者, 不得不受也. 午飯于君浦, 夕至金堤龜山羅甲淳家留宿. 停柩講堂, 喪人、服人、有司首任十數人外, 分宿於村人家. 羅非門人, 而用誠如此, 可感. 金堤老吏趙某等聯名致奠, 無非先生道德感人之致也.十二日壬申.早發, 過金堤邑黃山里, 到新井村. 自村中致奠, 其主者鄭致祥. 噫! 野居務農之民, 何以慕先生而致此盛奠也? 苟非深仁大德有以感動輿情, 烏能致此? 午飯于木川浦, 至裏里驛, 門人王秉瑗、知舊宋龍在幷致奠. 此地大處也, 門人賓客中途赴會者甚衆, 統合自華島隨柩者, 計一千五百餘人, 內外國人老少男女觀光者萬餘人. 迫昏, 抵玄洞, 停柩于山上靈幄內. 會葬者, 視裏里所計, 加一倍, 觀光者三倍, 食店假家二百四十餘所. 是夕, 雨忽下, 窘束之狀, 難以形言.十三日癸酉.雨晴, 日氣淸朗. 辰時, 下棺. 題主, 前面書曰"顯祖考處士府君神主孝孫鎰孝奉祀", 陷中書曰"故處士田公諱某字某神主". 金澤述謂"銘旌旣書別號, 陷中亦書恐宜", 諸議不諧, 未果. 行初虞祭於山下齋閣. 聞之輿論, 己未春因山時, 擧國士民之奔赴痛哭者, 爲五百年宗社之永覆也, 今番會葬者之衆多, 爲四千年道學之永絶也, 此言絶可悲也. 午後, 返魂, 僅至裏里而宿.十四日甲戌.早發, 午至金堤邑. 邑人趙冕燮饋飯一行, 此亦今世罕見事. 乘月至華島, 月色蒼凉, 空山寂寞, 俯仰顧眄, 只有無窮之淚而已.十五日乙亥.曉頭, 行再虞祭. 闔門後, 門人不與主人西向, 仍爲北向, 自初虞時已然者, 甚合禮意, 而今吳震泳、成璣運以爲"當與主人共作西向". 金澤述以爲"門人賓客也. 賓客位別行, 已著禮書, 而況與婦人位, 東西相向, 大是未安, 當仍舊北向爲是", 崔秉心、金鍾昊諸人亦以爲然. 於是西向者半, 北向者半, 一場禮意不成貌樣.十六日丙子.曉行三虞. 闔門後, 吳、成二人硬主門人西向, 人皆從之, 澤述獨仍舊北向.十七日丁丑.曉行卒哭祭. 闔門後, 諸人又皆作西向, 金澤述與金益容仍舊正立北向, 諸人從之者又强半. 自司貨所打數所入賻物, 除布紙燭祭器等目外, 金四千餘圓. 喪葬之用亦稱是, 而尙有餘剩百餘圓, 以明春合窆條劃定, 餘分給于喪主二家.十八日戊寅.行祔祭, 門人不參.昔年先生在群山時, 有壽如群山之夢. 解之者, 或以爲"群山有九十曲, 當壽至九十", 或以爲"群字之羊, 從八從十從二, 當壽至八十二", 先生取八十二之說, 至今日不免果驗, 痛哉! 聞客冬嶠南有木稼之災, 說者以爲"有哲人之厄", 今年華島講堂前杏樹不花不實, 見者咸以爲異, 今先生奄棄後學, 君子云亡, 天先警示, 有如此矣. 〇先生旣盡獻靖之義, 幷不見夷啁之辱, 以扶世道, 天年考終, 求之近時儒林, 惟先生一人. 張子曰"存吾順事, 沒吾寧也", 先生有焉. 죽음을……말이니 거짓 없는 진실한 말이라는 뜻이다.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 "새가 죽을 때에는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착한 법이다.〔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라고 하였다. 《論語 泰伯》 초종(初終) 상례의 시작과 장례 준비 과정을 이르는 말로, 흔히 초상(初喪)을 의미한다. 즉 사람의 임종(臨終) 직전부터 임종의 확인,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 상주와 호상(護喪)을 세우고, 자손들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며, 부고(訃告)를 통해 임종을 알리는 것 등으로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위모(委貌) 원래는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소렴 때까지 머리에 쓰는 흰 비단으로 만든 소위모(素委貌)를 말한다. 복건(幅巾) 한 폭의 베를 사용하여 머리를 감싸는 모자의 일종이다. 망건(網巾) 조선 시대 때 성인 남자가 상투를 틀 때 머리털을 위로 걷어 올리기 위해 이마에 쓰는 건(巾)을 말한다. 말총을 직사각형으로 엮어서 만드는데, 윗부분을 당, 아랫부분을 편자라 하며, 망건에 달아 상투에 동여매는 줄을 당줄이라고 한다. 북포(北布) 관북(關北)의 마포(麻布)라는 뜻으로, 함경도에서 생산되는 올이 가늘고 고운 삼베를 말한다. 그중에서도 육진(六鎭)에서 나는 삼베가 가장 세밀해서, 한 필의 베를 발우(鉢盂) 안에 담을 수 있었으므로, 속칭 발내포(鉢內布)라고 했다 한다. 심의(深衣) 예전에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으로, 대개 흰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둘렀다. 행의(行衣) 소매가 넓고 검은 천으로 가장자리를 꾸민 두루마기를 말한다. 과두(裹肚) 염할 때 시신의 배를 감싸는 베를 말한다. 설면자(雪綿子) 누에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으로 '풀솜'이라고도 한다. 멱목(幎目) 멱건(幎巾)이라고도 하며, 시신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을 말한다. 악수(握手) 초상에서 소렴(小殮) 때 시신(屍身)의 손을 싸는 헝겊을 말한다. 행전(行纏) 바지나 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꿰어서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이다. 반함(飯含) 죽은 사람을 염습할 때에 입에다 구슬과 쌀을 물리는 일을 말한다. 소나무비녀 이 비녀와 관련된 〈송개명(松笄銘)〉이 《艮齋集前編》 권16에 실려 있다. 혼백(魂帛)은……사용하였으며 흰색의 명주를 묶어서 혼백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혼백은 흰 명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왼쪽에 죽은 사람의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오른쪽에는 졸년월일시(卒年月日時)를 써놓은 것으로, 신주를 만들기 이전에 신주를 대신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효(絞) 염포(殮布), 즉 염습할 때 시신을 단속하여 묶는 베로 만든 띠를 말한다. 관의(棺衣) 시체를 넣은 관을 싸는 천을 이른다. 영좌(靈座) 죽은 사람의 혼백을 모시는 자리를 말한다. 조곡(朝哭) 거상 중에 있는 사람이 소상(小祥) 때까지 이른 아침마다 궤연(几筵) 앞에서 곡(哭)하는 일을 이른다. 성복(成服) 상을 당한 뒤 초종(初終)ㆍ습(襲)ㆍ소렴(小斂)ㆍ대렴(大斂) 등을 마친 뒤 상복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가리킨다. 가마(加麻) 제자가 스승의 상(喪), 혹은 후배가 존경하는 선배의 상에서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헝겊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단고환질(單股環絰) 두건 위에 두르는 한 가닥 삼으로 꼰 둥근 테를 말한다. 산지(山地) 묏자리로 적당한 땅을 말한다. 주상(主喪) 상가(喪家)에서 제전(祭奠)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상주(喪主)를 말한다. 지사(地師) 지술(地術)을 알아서 집터나 묏자리 등을 잡는 사람을 말한다. 환안(還安) 다른 데로 옮겼던 신주를 제자리로 도로 모시는 것을 말한다. 심상(心喪) 상복(喪服)을 입지는 않으나, 마음속으로 슬퍼하면서 상인(喪人)처럼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복암(服闇) 어두운 데에서 일한다는 뜻으로, 남이 보지 못하여 자기만 알 수 있는 일을 함을 이른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효자가 어두운 데에서 일하지 않으며 위태로운 곳에 오르지 않음은 어버이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해서이다.〔孝子不服闇, 不登危, 懼辱親也.〕"라고 하였는데, 그 소(疏)에 "어두운 데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두운 가운데에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니, 첫째는 갑자기 비상한 일이 있을까 해서이고, 둘째는 남의 혐의를 받을까 염려해서이다. 그러므로 효자가 경계하는 것이다.〔不服闇者, 不行事於暗中, 一則爲卒有非常, 二則主物嫌. 故孝子戒之.〕"라고 하였다. '남의 혐의를 받을까 염려한다.'라는 것은 주로 부부간의 교접을 지칭한 것인바, 옛날 상주는 부부 관계를 가장 죄악으로 여겼으므로 후세에는 '복암'을 주로 부부 관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졸곡(卒哭) 삼우제(三虞祭)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이다.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받아서 지낸다. 심제인(心制人) 예법상 상복은 벗었으나 슬픔이 가시지 않아 대상(大祥)이 지난 뒤 담제(禫祭)까지 입는 복이 심제(心制)이며,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심제인이다. 관빈(冠賓) 관례(冠禮)를 주관하는 빈(賓)으로 초청받고 가서 경계하는 말을 해 주는 사람인데, 보통 학덕이 높은 이성(異姓)의 사람 중에서 선택한다. 부재모상(父在母喪)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경우의 상을 이른다. 본래 어머니의 상은 삼년복이나, 이 경우 자식들은 아버지가 상주(喪主)가 되므로 아버지에게 압존(壓尊)되어 기년복을 입는다. 담복(禫服) 상중에 있는 사람이 담제(禫祭) 이후부터 길제(吉祭)를 지낼 때까지 입는 옷을 말한다. 중주인(衆主人) 상주를 제외하고 상사를 주관하는 자손을 통틀어 말한다. 도조(賭租) 도지(賭地)라고도 하며, 남의 논밭을 빌려서 부치고 그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를 말한다. 갑신(甲申) 저본(底本)에는 '병신(丙申)'으로 되어 있으나, 앞뒤 일진(日辰)을 고려하여 바로 잡았다. 우제(虞祭) 장사를 지낸 뒤 망자의 혼백을 평안케 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장사 당일 지내는 초우(初虞), 다음 날 지내는 재우(再虞), 그다음 날 지내는 삼우(三虞)가 있다. 천봉(遷奉) 옮겨 모신다는 의미로, 묘소 또는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회격(灰隔) 관(棺)의 주위에 석회(石灰)를 채워 넣어서 단단한 벽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본암(本庵) 김종후(金鍾厚, 1721~1780)의 호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고(伯高), 다른 호는 진재(眞齋)이며,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시부(詩賦)로 문명(文名)이 있었고, 생원이 된 뒤에 성리학자로 이름이 났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과 경연관 등을 지냈다. 저서에 《본암집》이 있고, 편서에 《가례집고(家禮集考)》와 《청풍세고(淸風世稿)》가 있다. 방상(方相) 역귀(疫鬼)와 산천(山川)의 요괴(妖怪)를 몰아낼 때 신으로 분장한 사람인데, 네 눈을 황금빛으로 그린 탈을 쓰고 검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서 창을 들고 역귀를 찾아 몰아낸다. 장사(葬事)할 때는 앞에서 상여(喪輿)를 인도하고, 하관(下棺)할 때는 창으로 광중(壙中)의 네 모퉁이를 찔러 목석(木石)의 요괴를 몰아낸다. 자정(自靖) 스스로 분의(分義)에 맞게 처신하여 지조를 지킴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서경》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게 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뜻을 선왕에게 바친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보인다. 수질(首絰)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둥근 테를 말한다. 삼과 짚을 꼬아서 테를 만들어 남자는 두건, 굴건과 함께 쓰고 여자는 수질만을 쓴다. 사시(私諡) 지위가 낮아서 역명지전(易名之典)이 없는 학덕(學德)이 높은 선비에게 일가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올리는 시호(諡號)를 말한다. 호상(護喪) 상주를 도와 상사(喪事)를 주선하는 사람이며 배상(陪喪)이라고도 한다. 계빈(啓殯) 장례 절차에서 발인을 하기 위해 빈소(殯所)를 열어 영구(靈柩)를 꺼내는 의식이다. 조조(朝祖) 발인하기 하루 전 조전(朝奠)을 마친 뒤에 영구(靈柩)를 모시고 사당에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뵙게 하는 의식으로, 조묘(朝廟)와 같은 뜻이다. 조전(祖奠) 발인(發靷)하기 하루 전의 저녁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견전(遣奠) 조전(祖奠)을 행한 다음 날에 영구(靈柩)가 빈소를 떠날 때 지내는 제사이다. 제수를 진설한 뒤 술을 올리고 분향하며 고사를 읽고 곡한다. 《禮記 雜記上》 제주(題主) 신주를 쓴다는 뜻으로, 장례를 마치고 나면 주로 밤나무를 깎아 만든 신주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써서 궤연(几筵)에 모셨다가 삼년상을 마친 뒤 사당에 봉안한다. 홀기(笏記) 의식의 진행 순서를 적은 글을 말한다. 전옹(全翁) 임헌회(任憲晦, 1811~1876)를 말한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송치규(宋穉圭)ㆍ홍직필의 문인이다. 1858년(철종9) 효릉 참봉에 제수된 이래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노년에 대사헌과 성균관 좨주를 역임하였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홍직필의 낙론(洛論)을 계승하여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정현(鄭玄) 127~200. 후한(後漢) 강성인(康成人)으로, 경학(經學)에 정통하여 한대(漢代) 경학을 집대성하였고, 《모시(毛詩)》ㆍ《주례(周禮)》ㆍ《의례(儀禮)》ㆍ《예기》ㆍ《효경(孝經)》 등의 주석이 있다. 가규(賈逵) 30~101. 후한 때의 유학자로, 자는 경백(景伯)이고, 섬서성(陝西省) 평릉(平陵) 출생이다. 《좌씨전해고(左氏傳解詁)》ㆍ《국어해고(國語解詁)》를 저술하였고, 구양생(歐陽生)ㆍ대소하후(大小夏侯)의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이동(異同)이라든지 제(齊)ㆍ노(魯)ㆍ한(韓) 삼시(三詩)와 《모시(毛詩)》의 이동을 밝히고, 《경전의고(經傳義詁)》ㆍ《논란(論難)》을 저술함으로써 뒷날 마융(馬融)ㆍ정현(鄭玄) 등이 고문경서(古文經書)의 학문을 대성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다. 괵(虢)나라가……것처럼 구세주를 얻은 것처럼 하였다는 말이다. 편작(扁鵲)은 주(周)나라 때의 의원으로, 대표적인 명의(名醫)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일찍이 이미 죽어서 장사 지내기 직전인 괵나라의 태자를 삼양(三陽)과 오회(五會)의 혈에 침을 놓아 살려 낸 적이 있었다.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신체를 훼손한 사람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을 가리킨다. 상식(上食) 상가에서 아침저녁으로 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데에 올리는 음식을 말한다. 명정(銘旌)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이다. 일정한 크기의 긴 천에 보통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지낼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 묻는다. 공포(功布) 관(棺)을 묻기에 앞서서 관 위의 먼지를 털고 닦는 데 쓰는 삼베 헝겊이다. 이때 쓰이는 베는 대공(大功)이라는 굵은 베를 쓰기도 하지만 약간 고운 베를 쓰기도 한다. 발인하는 날에 잿물로 빤 베 3자[尺]를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 명정(銘旌)과 함께 영여(靈輿) 뒤, 상여 앞에 세우고 가면서 상여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운삽(雲翣) 발인 때 영구(靈柩) 앞뒤에 세우는 구름무늬를 그린 부채 모양의 물건을 말한다. 집불(執紼) 장례를 지낼 때 절친한 조객(弔客)들이 손수 상여 끈을 잡아끌며 돕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장례에 참여하여 장송(葬送)하는 것을 뜻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장례를 도울 때에는 반드시 상여 끈을 잡는다.〔助葬, 必執紼.〕"라고 하였다. 담여군(擔轝軍) 상여를 메는 사람을 말한다. 견전(遣奠) 조전(祖奠)을 행한 다음 날에 영구(靈柩)가 빈소를 떠날 때 지내는 제사이다. 제수를 진설한 뒤 술을 올리고 분향하며 고사를 읽고 곡한다. 《禮記 雜記上》 발인(發引) 장사 지내러 가기 위하여 상여가 집에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 영악(靈幄) 영침(靈寢)이나 영좌(靈座)에 둘러치는 휘장이다. 가가(假家) 임시로 지은 건물을 말한다. 함중(陷中) 신주 뒷면의 오목하게 파낸 홈으로, 여기에 죽은 이의 성명, 별호, 관직 등을 적는다. 기미년의 인산(因山)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1919)의 인산을 말한다. 인산은 임금이나 왕비, 또는 왕세자(王世子) 등의 국장(國葬)을 말한다. 반혼(返魂) 장사를 지낸 뒤에 죽은 이의 혼백을 다시 집으로 모셔 오는 일을 말한다. 졸곡제(卒哭祭)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뒤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또는 다섯 달, 일곱 달 만에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해 지내는 제사이다. 부제(祔祭) 졸곡 이튿날 망자의 신주를 받들어 조상의 사당에 잠시 함께 모셔 두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제사가 끝나면 신주를 다시 방 안에 모시고 있다가 죽은 지 2주년이 되는 대상(大祥)이 지난 뒤에 비로소 사당으로 옮긴다. 목가(木稼) 목개(木介)의 별칭으로, 추위가 심하여 나무에 얼음이 얼어붙어 갑옷의 형상을 이룬 것인데 현인(賢人)이 죽을 조짐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상고대라고도 한다.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지은 〈한기의 만사[挽韓琦]〉에 이르기를, "목가가 생기자 고관이 두려워 떨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산이 무너진 오늘 철인이 죽었도다.〔木稼曾聞達官怕, 山頹今見哲人萎.〕"라고 하였다. 《石林詩話》 헌정(獻靖)의 의리 은(殷)나라 미자(微子)가 은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기자(箕子)와 비간(比干)과 문답한 중에 '각자의 의리를 다하여 사람마다 선왕에게 자신의 뜻을 바칠 것이니, 나는 떠나 운둔할 생각은 없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신하의 도리를 다함을 말한다. 《尙書 微子》 살아서는……편안해지리라 살아서 천명에 순응해 도리를 지키는 것이 죽어서 편안해지는 방법이라는 말로,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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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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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동유록 華陽洞遊錄 화양동(華陽洞)은 청주(淸州)의 동쪽 80리-지금은 괴산(槐山) 지역이 되었다.-에 있는데 수석(水石)의 빼어남이 나라 안에 알려졌다. 수석이 참으로 빼어나지만 명성이 이처럼 자자한 것은, 대개 만동묘(萬東廟)98)가 이곳에 있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유적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한 번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임술년(1922) 3월에 호남의 유림에서 나를 대표인으로 추대해 만동묘의 향사(享祀) 여부를 가서 보게 되었다. 내가 이에 차를 타고 신탄역(新灘驛)으로 간 다음, 도보로 100여 리를 가서 청천리(靑川里)에 이르렀다. 먼저 함열 현감(咸悅縣監)을 지낸 송주헌(宋冑憲) 씨를 방문하여 물어보니, 무오년(1918) 가을 이후로 저들[일제]의 규제 때문에 향사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마을에 우암(尤菴) 선생의 사당이 있고 마을 뒤에는 또 우암 선생의 묘소가 있기에, 종손인 송철호(宋哲鎬)를 방문하여 그의 인도를 받아 사당에 들어가 배례(拜禮)를 행하고 영정을 봉심하였는데 연전(年前)에 본 대로사본(大老祠本)과 흡사하였다. 이는 대개 매우 늙은 모습을 그린 것인데 영채(英彩)가 오히려 사람을 쏘았다. 봉심한 뒤에 주인이 주안상을 마련하여 대접해 주었는데 예(禮)가 공손하고 음식물이 푸짐하며 매우 정성스러웠다.이윽고 또 우옹(尤翁)99)의 묘소에 나아가 절하였는데, 묘소는 응봉(鷹峯) 아래에 있으며 기세가 자못 웅장하였다. 권수암(權遂菴)100)이 지은 묘표(墓表)와 송성담(宋性潭)101)이 지은 추기(追記)를 읽었다. 남쪽으로 100여 보를 내려가서 정조(正祖)가 친히 짓고 쓴 신도비를 읽었는데, 비면에 큰 글자로 '유명조선국좌의정우암송선생지묘(有明朝鮮國左議政尤菴宋先生之墓)'라 씌어 있으며 비각은 세 칸이었다.만동묘의 향사가 폐지된 줄 알았지만 사당의 존엄함을 어찌 바라보지 않고 수석의 기이함을 어찌 완상하지 않아 오랜 소원을 저버리겠는가. 이에 동쪽으로 20리를 가서 화양동에 이르러, 서재생(西齋生) 김인호(金麟浩)의 인도를 받아 사당 안에 들어가 문을 열고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두 황제를 봉심하였다. 위차(位次)에는 모두 자리를 비워 두고, 다만 의자와 탁자를 항상 놓아두었다가 그때그때 지방(紙榜)을 설치하여 제사를 행한다고 한다. 서쪽의 한 자리를 비워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어떤 이는 "태조황제를 봉안하려 하였는데 그러지 못했다."라고 한다. 삭망(朔望)이 아니어서 분향례(焚香禮)를 행하지 못하고 사당문 밖으로 나와 이도암(李陶菴)102)이 지은 묘정비(廟庭碑)를 읽었다. 사당의 편액인 '만동묘(萬東廟)' 세 글자는 금으로 칠해졌는데 우리 고종황제의 글씨이다. 사당의 바깥문은 '양추문(陽秋門)', 재소(齋所)는 '유인재(惟寅齋)', 동재(東齋)는 '풍천재(風泉齋)', 서재(西齋)는 '경봉청(敬奉廳)'이라고 한다. 전묘(殿廟) 이외에는 모두 물이 스며들어 퇴락하였으며 양희문(陽曦門) 및 동재와 서재의 문은 한창 새로운 길을 내는 일 때문에 철거되었다.아, 우리나라 사민(士民)이 황제를 제사하는 것이 정밀한 의리로 헤아려 보면 비록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정강(靜江)의 우제묘(虞帝廟)103)와 초나라 사람의 소왕사(昭王祠)104)에 이미 전거(前據)가 있고, 게다가 만력 황제(萬曆皇帝 명 신종(神宗))가 다시 살려준 은혜105)와 숭정 황제(崇禎皇帝 명 의종(毅宗))가 순국한 의리는 어찌 하루라도 잊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천하에 오랑캐들이 날뛰는 날을 당하여 한 줄기 《춘추》의 의리106)를 우리 동방에 붙인 것 또한 충분히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대저 무슨 운수로 기나긴 밤에 들어가 섬 오랑캐들이 함부로 잔학한 짓을 하고 아울러 한 줄기 의리를 붙인 것마저 쓸어버렸는가. 다만 보건대 텅 빈 산 차가운 연기 속에 전묘만 홀로 섰고 해 지는 소나무 숲에 우는 새들이 제멋대로 오가니 서생이 여기에 와서 어찌 개탄하지 않겠는가.사당 아래 동편에는 예전에 화양서원(華陽書院)107)이 있어서 우암과 수암 두 선생을 제사하였으나 중간에 조정의 명으로 훼철되었다. 서편에는 우암 초당(尤菴草堂)이 있는데 서원에서 모시던 영정을 옮겨 봉안하였으며, 우암 선생이 평일에 사용하던 책상ㆍ목침(木枕)ㆍ단장(短杖)ㆍ기형(璣衡 혼천의(渾天儀)) 등의 물건이 모두 그 안에 있어서 완연히 그 당시에 가르침을 받드는 듯하였다.화양동의 수석에는 무릇 구곡(九曲)이 있는데, 모두 우옹이 이름을 지은 것이다. 화양동 입구에 들어가 먼저 경천벽(擎天壁)에 이르렀는데, 석벽이 수십 장(丈)이나 깎아지른 듯이 선 모양이 마치 손바닥을 편 것과 같아서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 시내를 거슬러 20리쯤 올라가서 운영담(雲影潭)에 이렀는데, 암석이 기괴하고 우뚝하여 물에 거꾸로 비친 모양이 구름 그림자와 같아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수십 보를 올라가 읍궁암(泣弓巖)에 이르렀는데, 우옹이 효종(孝宗)의 기일(忌日)을 당할 때마다 이 바위에서 통곡하고 형호(荊湖)의 고사108)를 인용하여 '읍궁'으로 이름을 지었다. 작은 빗돌에 우암 선생의 시를 새겨 놓았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이날이 무슨 날이던가 此日知何日외로운 충정을 상제가 굽어보리라 孤衷上帝臨이른 새벽에 통곡하고 나서 侵晨痛哭後무릎 안고 다시 길게 읊노라 抱膝更長吟바위의 10여 곳이 자연스레 움푹 파였는데 점점이 눈물을 떨군 흔적과 같아 기이하니, 그 당시 이 바위에서 곡할 때에 혹 이것에서 이름을 취한 것일까?또 읍궁암 위의 금사담(金沙潭)에 이르렀는데, 햇살이 모래 위에 비치면 황금처럼 영롱하기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금사담 위에는 깎아지른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서재가 있는데 '암서(巖棲)'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우옹이 지은 것으로, 경내가 깨끗하고 시야가 툭 틔어 사람의 이목을 상쾌하게 하였다. 서재 아래는 혹 폭마다 석병(石屛)이고 자리마다 반석(盤石)이라 새겨진 글자와 씌어진 이름을 이루다 셀 수 없는데, 그중에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武夷山空)' 8글자와 '충효절의(忠孝節義)' 4글자는 우옹의 글씨이고, '화양수석 대명건곤(華陽水石大明乾坤)' 8글자는 관찰사 윤헌주(尹憲柱)의 글씨이니, 대체로 한 골짜기의 빼어난 경치가 온통 금사담 한 굽이에 있다.남쪽으로 200보쯤을 올라가 개울을 건너 첨성대(瞻星臺)에 이르니, 석벽이 높이 서 있고 그 위에 세 개의 거대한 바위가 겹겹이 쌓인 형상이 별자리 같으며, 거기에 뜻을 붙인 것은 대개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의두시(倚斗詩)109)에서 나왔다. 절벽 사이에는 신종이 손수 쓴 '옥조빙호(玉藻氷壺)' 4글자와 의종이 손수 쓴 '비례부동(非禮不動)' 4글자가 모각(模刻)되어 있고, 또 우옹이 쓴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 8글자가 새겨져 있다.물을 건너 북쪽으로 가서 능운대(凌雲臺)에 이르렀는데, 거대한 바위가 허공에 솟아나온 기세가 구름을 뚫는 것 같기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 동쪽으로 몇 걸음 올라가 와룡암(臥龍巖)에 이르렀는데, 바위 위의 굴곡이 긴 구덩이를 이룬 것이 마치 용이 누워있는 형상과 같아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물은 건너 남쪽으로 가서 학소대(鶴巢臺)에 이르렀는데, 이 또한 하나의 석벽이고 작은 시냇물이 학소대를 감돌아 흘러 마디마디 작은 폭포가 된 것이 있을 뿐이지만, 일찍이 그 위에 학의 둥지가 있었기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절벽 가를 따라 시내를 거슬러 동쪽으로 1리를 가서 파곶(巴串)에 이르니, 편평하게 펼쳐진 반석이 밭 1경(頃)쯤 되며, 희고 깨끗하며 조금 번들거리는 것이 옥과 똑같으며, 물이 살짝 오목한 곳으로 흐르는 것이 파(巴) 자의 형태와 같으니 참으로 기이한 경관이다.대체로 구곡(九曲)을 통론(統論)해 보면 금사담과 파곶이 그 승경을 독차지했고, 물이 맑고 돌이 하얀 것은 구곡이 모두 그러하여 완상할 만하나 산의 돌로 말하자면 거칠고 빛이 검어 사람의 뜻에 차지 않으니, 이것이 흠이 될 만하다. 아, 이 산의 수석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어찌 이 산보다 나은 것이 없겠는가. 그러나 명성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니, 놀며 구경하는 사람이 어찌 산천의 승경만 즐기고 몸을 떨쳐 이름을 드날릴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우옹이 구곡에 대해 모두 시를 지었다고 하나 일찍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만 그 〈읍궁암(泣弓巖)〉과 〈암서재(巖棲齋)〉 시에 차운하였다. 암서재 위에 환장암(煥章菴)이 있는데, 두 황제의 수필(手筆) 진본(眞本)과 《송자대전》의 책판을 보관하였으나 연전(年前)에 병화[兵燹]로 불에 타버려 지금은 없고 대웅전 1좌(座)만 있다고 하기에 가보지 않았다. 이곳에서 10리 거리에 선유동(仙遊洞)과 옥연동(玉淵洞)의 승경이 남아 있고 이동고(李東皐)110)의 유적이 있지만, 여정[行李]이 바빠서 미처 구경하지 못했다. 華陽洞在淸州東八十里,【今爲槐山地】 水石之勝, 聞于國中. 水石固勝矣, 名若是藉藉者, 蓋以萬東廟在此也, 尤菴遺蹟在此也. 是所願一遊者, 而未暇及焉. 壬戌三月, 自湖南儒林, 推余爲代表人, 往觀萬東廟享祀與否. 余乃乘車, 至新灘驛, 步行百餘里, 至靑川里. 先訪宋咸悅冑憲氏問之, 則自戊午秋以後, 爲彼人拘禁, 享祀不免廢止云矣. 里有尤菴祠堂, 里後又有尤菴墓, 訪其宗孫宋哲鎬, 得其引導, 入祠堂行拜禮, 奉審影幀, 與年前所瞻大老祠本恰似. 蓋極老境所寫, 而英彩猶射人矣. 奉審後, 主人具酒案見待, 禮恭物豐, 極其殷勤. 旣又進拜尤翁墓, 墓在鷹峯下, 氣勢頗雄. 讀權遂菴撰墓表、宋性潭撰追記. 南下百餘步, 奉讀正祖親製親筆神道碑, 碑面大書曰"有明朝鮮國左議政尤菴宋先生之墓", 碑閣則三間也. 萬東廟享祀, 雖知廢止, 廟貌之尊, 安可不瞻; 水石之奇, 安可不玩, 以負宿昔之願也? 乃東行二十里, 至華陽洞, 得西齋生金麟浩引導, 入廟中, 開門奉審神、毅兩皇帝. 位次皆虛位, 而只常設椅卓, 臨時設紙榜行祀云. 其虛西一位者, 未知何意, 而或云"欲奉太祖皇帝, 而不果也". 以非朔望也, 故不行焚香禮, 出廟門外, 讀李陶菴撰廟庭碑. 廟額"萬東廟"三字, 以金塗之, 卽我高宗皇帝筆. 廟之外門曰陽秋門, 齋所曰惟寅齋, 東齋曰風泉齋, 西齋曰敬奉廳. 自殿廟以外, 幷皆滲漏頹落, 陽曦門及東西齋門, 方爲新路之役所撤. 噫! 我國士民之祭皇帝, 揆以精義, 雖未知果如何, 而靜江虞帝廟、楚人昭王祠, 旣有前據, 且萬曆再造之恩、崇禎殉社之義, 豈可一日忘者耶? 當天下夷狄之日, 寓一脈《陽秋》之義於我東土者, 亦足有辭於後世矣. 夫何運入長夜, 島夷肆虐, 幷與一脈寓義者而掃之? 但見空山寒烟, 殿廟獨立, 落日松杉, 啼鳥縱橫, 書生到此, 寧不慨歎? 廟下東偏, 舊有華陽書院, 奉祀尤、遂兩先生, 中以朝令毁撤. 西偏有尤菴草堂, 移奉書院所奉影幀, 其平日所用冊床、木枕、短杖、璣衡等物, 皆在其中, 宛然若親承謦欬於當日也. 洞之水石, 凡有九曲, 皆經尤翁命名. 入洞口, 先得擎天壁, 石壁削立數十丈如人開掌, 故得是名. 溯流上二里許, 得雲影潭, 巖石奇怪嵂屼, 倒水若雲影故名. 上數十步, 得泣弓巖, 尤翁每當孝廟諱辰, 痛哭此巖, 引荊湖故事, 名以泣弓. 有小碑刻尤菴詩, 詩曰"此日知何日? 孤衷上帝臨. 侵晨痛哭後, 抱膝更長吟". 巖上十餘處, 天然成坎, 點點若落淚痕, 可異也, 當日之哭於此巖, 或取於此歟? 又其上得金沙潭, 日照沙上, 玲瓏若金色故名. 潭上有斷巖, 巖上有齋, 額曰巖棲. 尤翁所作, 境落脫灑, 眼界通豁, 快人耳目. 齋下或幅幅石屛, 座座盤石, 刻字題名, 不可勝計, 而其中"蒼梧雲斷武夷山空"八字及"忠孝節義"四字, 尤翁筆, "華陽水石大明乾坤"八字, 觀察使尹憲柱筆, 蓋一洞勝槪, 都在金沙潭一曲也. 南上二百許步渡溪, 得瞻星臺, 石壁高立, 上有三巨巖, 累累疊複, 形如星宿, 而其寓意則蓋出於杜工部倚斗詩也. 崖間模刻神宗手筆"玉藻氷壺"四字、毅宗手筆"非禮不動"四字, 又刻尤翁筆"大明天地崇禎日月"八字. 隔水而北, 得凌雲臺, 巨巖聳出半空, 勢若凌雲故名. 又東上數武, 得臥龍巖, 巖上屈曲成長坎, 若龍臥形故名. 隔水而南, 得鶴巢臺, 亦一石壁, 而但有細澗繞臺而流, 節節作小瀑, 嘗有鶴巢於其上故名歟. 緣崖溯流, 東行一里, 得巴串, 盤石平鋪, 可田一頃, 潔白細潤, 與玉一樣, 水流于微凹處, 如巴字形, 眞奇觀也. 蓋九曲統論之, 則金沙潭、巴串獨擅其勝, 水淸石白, 九曲皆然, 是可玩也, 至於山石則麤黑, 不滿人意, 此可欠也. 嗚呼! 玆山水石, 非不佳矣, 豈無勝於玆山者耶? 而名不顯於世者, 以未遇其人也, 遊玩者, 豈可徒耽流峙之勝, 不思所以奮身揚名耶? 尤翁於九曲, 皆有詩云, 曾未得見, 故只次其《泣弓巖》、《巖棲齋》韻. 巖棲齋之上, 有煥章菴, 藏兩皇帝手筆眞本及《宋子大全》板, 而年前爲兵燹所燒, 今無存焉, 只有大雄殿一座云, 故不往觀. 此去十里, 餘仙遊洞、玉淵洞之勝, 有李東皐遺蹟, 而行李忙迫, 未及賞焉.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일찍이 민정중(閔鼎重)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를 얻어 가지고 와서 송시열(宋時烈)에게 주니, 송시열이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 절벽에 이것을 새겼다. 뒤에 송시열이 죽을 때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사당을 세워 의종과 신종을 제사 지내도록 하였는데, 이에 1704년(숙종30)에 권상하가 부근 유생(儒生)들과 함께 화양동에 만동묘를 짓고 제사 지냈다.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의 호가 우암(尤菴)이므로 그를 높여 부른 것이다. 권수암(權遂菴) 수암은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다른 호는 한수재(寒水齋),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이이(李珥),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호락논변(湖洛論辨)을 학파적 성격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에 《한수재집》ㆍ《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송성담(宋性潭) 성담은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의 호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다른 호는 심재(心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다.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문집에 《성담집》이 있다. 이도암(李陶菴) 도암은 이재(李縡, 1680∼1746)의 호이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다른 호는 한천(寒泉),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702년(숙종28)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숙부 이만성(李晩成)이 처형되자, 벼슬을 버리고 인제(麟蹄)의 설악(雪岳)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닦는 데 힘썼다. 1725년(영조1)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받자 소를 올려 소론(少論) 세력을 몰아낼 것을 청했으나, 영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용인(龍仁)으로 퇴거하여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저서에 《도암집》 등이 있다. 정강(靜江)의 우제묘(虞帝廟) 정강은 송대(宋代)의 부명(府名)으로, 지금의 광서성(廣西省) 계림(桂林)이다. 장식(張栻, 1133~1180)이 계림(桂林)의 태수가 되어 순임금의 사당인 우제묘(虞帝廟)를 세우자 주희(朱熹)가 〈정강부우제묘비(靜江府虞帝廟碑)〉를 지었다. 《朱子大全 卷88 靜江府虞帝廟碑》 초나라 사람의 소왕사(昭王祠) 당 헌종(唐憲宗) 14년에 한유(韓愈)가 지은 〈양주의성현역기(襄州宜城縣驛記)〉에 "동북에 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소왕정(昭王井)이라 하고, 이 우물 동북쪽으로 수십 보 밖에 소왕묘(昭王廟)가 있는데, 지금은 다만 초가(草家) 한 칸만이 있을 뿐이나 해마다 10월이 되면 백성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다시 살려준 은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 왜적을 물리침으로써 거의 망할 뻔한 조선이 다시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일을 말한다. 춘추(春秋)의 의리 《춘추》에서 강조한 주(周)나라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의리를 말한다. 화양서원(華陽書院) 1695년(숙종21)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ㆍ정호(鄭澔) 등 노론이 주도해 충청북도 괴산군 화양리에 설립했으며, 다음해 사액(賜額)을 받았다. 화양서원은 권세가 막강하여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려 폐해가 심하였는데,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다. 형호(荊湖)의 고사 형호는 형산(荊山) 아래의 정호(鼎湖)를 말한다. 황제(皇帝)가 여기에서 솥을 주조하고는 용(龍)의 수염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황제의 활[弓]만 땅에 떨어지므로 신하들이 그 활을 안고 통곡을 했다는 고사로, 전하여 임금의 죽음을 슬퍼함에 비유한 것이다. 《史記 封禪書》 의두시(倚斗詩) 두보(杜甫)의 시 〈추흥팔수(秋興八首)〉 중 제2수를 말한다. 그 시의 1, 2구에 "기부의 외로운 성에 지는 해 기울고, 언제나 북두성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네.〔夔府孤城落日斜, 每依北斗望京華.〕"라고 하였다. 이동고(李東皐) 동고는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의 호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다른 호는 남당(南堂),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1522년(중종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3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부제학ㆍ대사성ㆍ형조 참판ㆍ평안도 관찰사ㆍ대사헌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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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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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유록 金剛山遊錄 예로부터 도인은 큰 소원을 가져 반드시 "천하의 좋은 인물을 모두 알고 천하의 좋은 산수를 모두 구경하고 싶다.[識盡天下好人物 觀盡天下好山水]"111)라고 하였다. 소황문(蘇黃門)은 종남산(終南山)과 황하(黃河)를 본 것을 구양공(歐陽公)을 본 것과 견주기도 하였으니,112) 산수 구경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중국인이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자, 내가 의아해하기를 중국에는 절로 오악(五嶽)이 있는데 금강산이 비록 빼어나더라도 어찌 이렇게까지 하였을까 하였다.근래에 기차가 서로 통하면서부터 나의 벗 중에 또한 중국을 보고 돌아온 사람이 많은데, 모두들 "중국의 산 중에 오악은, 높고 웅장하다는 말은 참으로 옳지만 그 기이하고 빼어남은 우리나라의 산보다 못한 점이 있다." 하였다. 대개 금강산은 우리나라의 산 중에서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 것이기에 중국인의 시는 과연 이유가 있으며, 해외의 여러 나라 산에 대해서는 내가 상고한 《영환지략(瀛寰志略)》113)으로써 예를 들건대 이미 말할 만한 것이 없음을 보았다. 이로써 말하자면 금강산이 동서양에서 유일한 명산임을 단연코 알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선유(先儒)인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ㆍ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이하 여러 선생이 모두 이 산을 구경하였던 것이다.나는 평소에 산수를 즐기는 버릇이 있어 금강산을 한 번 유람하는 것이 참으로 평소의 소원이었으나, 중년에 노친을 봉양하면서 멀리 나가 노니는 것을 경계하였고 근래에는 다시 세변(世變)이 이미 극에 달하여 옛 덕을 먹는114) 사자(士子 학자)가 마음껏 노닐 때가 아닌 듯하였다. 그래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금년 봄 홀로 떨어져 지내며 무료하던 차에 아우 조자정 제원(趙子貞濟元)이 나에게 함께 금강산에 가자고 청했다. 내가 생각건대 오늘날에는 좋은 인물도 때때로 그 법도를 바꾸지만 산수는 무정한 것이라 반드시 세변 때문에 그 좋음을 변치 않을 것이니 좋은 산수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좋은 인물을 보는 것보다 더 나은 점이 있으며, 게다가 옛사람 중에 시사(時事)를 상심하는 사람은 참으로 산수에 자취를 붙인 경우가 있으니 이번 여행이 의리에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내 조자정과 3월 그믐날에 길을 떠나기로 약속하였으나 오래도록 비가 내려서 4월 10일로 연기하였다. 벗 박선명 상구(朴善明塽九)와 서윤삼 종태(徐允三種台)가 내가 관동으로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가자고 청했다.기약한 날이 되자 박우(朴友)에게 사정이 생겨 갑자기 길을 떠나기 어렵게 되었고, 조자정은 어버이 기일이 내달 초에 있는데 왕래하는 날짜를 계산해보니 기일에 미치지 못할 듯하여 여행을 그만두었다. 내가 조자정에게 농담으로 말하기를,"일찍이 듣건대 금강산은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구경할 수 있다는데 그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남으로 인해 일을 망쳤다고 원망하고 탓하지는 않는가?"하니, 조자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인연이란 나로 인해 생기기에 하느냐 마느냐를 다툴 뿐이니, 비록 빠르고 늦는 차이는 있더라도 원래 있고 없음은 없는 법입니다. 나로 인하든 남으로 인하든 때와 장소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니 상황에 따라 편안해한다면 무엇을 망치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도를 터득한 사람의 말과 같음을 감탄하였다. 이에 조자정에게 말하기를,"그대의 흉금이 이미 티끌세상을 벗어났으니 금강산이 그 가운데 있네. 저 동해상에 울창하여 푸른 것을 비록 구경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무슨 상관이겠는가."하고서 서로 웃고 헤어졌다.마침내 이달 23일에 길을 떠났는데, 박우(朴友)는 먼저 출발하여 이미 중도에서 기다렸고 서우(徐友)와 박우의 아들 박근호(朴根浩)가 동행하였다.24일. 날이 저물기 전에 장안사(長安寺) 어귀에 당도하였다. 집에서 천여 리나 떨어져 있지만 연로(沿路)의 급행차를 탔기에 이처럼 빨랐던 것이다. 철원(鐵原) 이전에는 기차를 이용하였고 이후에는 전차를 이용하였으며 말휘리(末輝里)부터는 자동차를 이용하였다. 장안사에 10리 못 미처 이미 산세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는 차 안에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산속에 도착하기도 전에 눈이 번쩍 뜨이니 未到山中眼忽明산봉우리들을 옥 깎아 만든 걸 이미 알았네 已覺群峯玉刪成가면 갈수록 점점 참으로 멋진 곳에 들어가니 行行漸入眞佳境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번씩 모습을 바꾸네 一步移時一換形밤에 절 문 밖의 여관에서 묵었다. 여관이 절벽 아래의 계곡 가에 있는데 두 물줄기가 모여 흐르고 일만 소나무가 하늘을 찔러 밤새도록 들리는 것이 솔바람소리와 물소리뿐이라, 맑고 상쾌한 기분이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일행이 모두 좋다고 소리치면서,"이곳이 벌써 이러하니 만폭동(萬瀑洞)과 구룡연(九龍淵)처럼 멋진 곳은 또 어떠하겠는가."하자, 내가 말하기를,"이는 배우고 익혀서 기뻐하는 경지니, 덕을 이룬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또 말하기 어려운 것일세."하였다. 밤에 시 한 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동쪽 유람 한 자취가 너무나 더뎠던 것은 東遊一迹太遲遲모두 어지러운 세상일에 얽혔기 때문이네 總爲棼棼世故縻이제 금강산에 와서 산속에서 유숙하니 今到金剛山裏宿마음먹은 일을 끝내는 이루게 되었구나 有心終見事成時25일. 운주문(雲住門)을 거쳐 비로소 장안사에 들어갔다. 국세(局勢)는 비록 험준하고 웅장해도 기이한 경관은 보이지 않자 일행이 말하기를,"도리어 절 밖 여관 앞에서 본 것만도 못하구나."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아니다. 산이 깊을수록 숲이 더욱 빽빽하니, 이는 기이하지 않은 기이함[不奇之奇]이네."라고 하였다.전우(殿宇) 또한 꽤나 웅장하였는데 마침 불전(佛殿)을 중수하면서 그 위에 더 얽어서 2층을 만들었다. 절을 창건한 것은 대개 고려 중엽 이후인데, 혹 원나라 기 황후(奇皇后)의 원당(願堂)115)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대개 이번 여행은 오로지 산수의 승경을 탐색하는 데 있기에 절의 역사를 캐물을 것도 없었다. 동편 신선루(神仙樓)의 현판에 그 당시 사람들의 시작(詩作)이 많았으나 현판이 높이 걸렸고 글자가 작아 볼 수 없었고 또한 볼 필요도 없었다.장안사를 떠나 시냇물을 건너서 남쪽으로 오솔길로 들어가니, 바윗돌이 울퉁불퉁하고 수목이 무성하며 계곡물이 세차게 흐르며 돌에 부딪쳐 우레 소리를 내었다. 시냇가를 따라 가다가 이따금 길을 잃자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불어난 강물 가파른 골짜기에 우레와 천둥이 싸우는 듯하고, 푸른 나무 긴 덩굴에 해와 달이 어둑해라.[高江急峽雷霆鬪 翠木蒼藤日月昏]"라는 구절을 외우며 말하기를,"몸소 겪어본 뒤에야 새삼 옛사람의 시가 공교로운 것을 알았네."라고 하였다. 간간이 또 골짜기가 조금 트이고 숲이 조금 듬성하며 물이 더욱 맑고 돌이 더욱 희며 산봉우리가 더욱 기이한 곳을 만나면, 기이하고 웅장하며 맑고 빼어나다고 크게 외치니 사람 소리가 시냇물 소리와 서로 어우러지고, 바위에 걸터앉음에 산봉우리들이 머리를 숙여 읍하는 듯하여 즐거웠다.5, 6리를 못 가서 명경대(明鏡臺)가 있고 명경대 아래에 황류담(黃流潭)이 있다. 명경대는 커다란 바위가 평지에서 수십 장(丈)이나 솟아나 있고 사방이 수직으로 깎였는데 승려들이 명부(冥府 저승)에서 밝은 거울로 죄인을 상세히 살펴본다는 설에 의탁하여 이 이름을 따서 썼다. 황류담은 넓이가 2묘(畝) 가량 되는데 맑고 새파래서 좋았다. 또 이름을 따다가 황천강(黃泉江)이라 하는데 부호가(富豪家)의 여자들이 여기에 와서 대부분 물속에 동전을 던져 황천 가는 날의 노자(路資)로 제공한다고 한다.황류담 위 서남쪽은 바위 언덕이 가파른데 그 위에 편평한 바위가 사방으로 둘렀고 무너진 성이 있으니, 이곳이 신라 태자-스님이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하였다.-가 살던 곳이다. 흰 표목(標木)을 세워 '태자성(太子城)' 3글자를 썼고, 바위에는 '동경의열 북지영풍(東京義烈北地英風)' 8글자를 새겼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김공(金公)이 쓴 것이라고 한다. 그 곁에는 김광국(金光國)ㆍ김신국(金藎國) 등 여러 김씨의 제명(題名)116)이 있다. 황류담을 돌아서 건너 남쪽으로 조금 가니 길 왼편의 넓고 편평한 곳에 또한 표목이 있고 '신라고적(新羅古迹)' 4글자가 씌어 있는데 이곳이 태자 궁실의 유지(遺址)이고 산중 사람이 말한 대궐터이다.여기에서 남쪽으로 10리에 망군대(望軍臺)가 있다. 태자가 아버지에게 간(諫)하여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산으로 도망하여 들어왔으며, 그때 군사 삼억(三億)117) 명을 거느리고서 고려를 정벌하고자 산 아래에 주둔하고 이 망군대에 올라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이름을 얻었으며 골짜기 또한 '삼억'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신라사(新羅史)》118)를 살펴보건대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을 청하자 태자가 간하기를 '마땅히 충신 의사(忠臣義士)들과 함께 죽을 각오로 지켜 힘이 다한 뒤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일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러하니 형세상 보전할 수 없고 차마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과 뇌를 땅에 바르도록119) 하지는 못하겠다.' 하고는 끝내 태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태자가 통곡하며 하직인사를 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푸성귀를 먹고 살면서 일생을 마쳤다."라고 하였다. 《김씨보(金氏譜)》의 〈왕세계(王世系)〉에 실린 것도 그러하였으나, 고려를 정벌하려고 군영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는 여기에 와서 처음 들었다. 《신라사》에는 "그 이름을 잃어버렸다."라고 하였으나, 우리 《김씨보》에는 "휘(諱)는 일(鎰)이요, 일명 겸용(謙用)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자손이 부령 김씨(扶寧金氏)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우리 김씨의 선세(先世)에 또한 박식하고 높은 소견을 지닌 분이 많았으니, 휘(諱)를 적고 자손을 적을 때에 반드시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대개 태자의 열렬한 대의(大義)와 늠름한 영웅의 기풍은 참으로 찬사(贊辭)를 기다리지 않고도 드러나는 것이라 장차 억만세(億萬世)에 흠앙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오늘날 나라가 망한 뒤에 처한 상황이 그와 똑같음에랴. 무릇 떳떳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강개(慷慨)하여 슬퍼하는데 더구나 똑같이 경순왕에게서 나온 우리 김씨들은 어떻겠는가. 삼가 시 한 수를 읊어 감회를 적었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울며 간하고 돌아와 여기로 도망했는데 泣諫歸來入此逃지금까지 유적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네 至今遺迹未全銷동경120)의 왕기는 천 년 만에 다했으나 東京王氣千年盡북지121)의 영웅 기풍은 만 장이나 높네 北地英風萬丈高삼베옷 입고 풀에 앉아 홀로 고심하고 坐草衣麻心獨苦보루 쌓고 군영 바라보며 헛수고했네 望軍築壘力徒勞얼마나 많은 길손이 추모하며 슬퍼했나 幾多行客追傷感태자의 후손은 갑절이나 수심에 잠기네 一倍忉忉後裔苗감회를 적고 나서 드디어 망군대로 향했다. 중도에 위험하여 쇠줄을 매단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일행이 모두 꺼리면서 말하기를,"헤아려 보건대 우리들의 근력으로 어찌 이렇게 험준한 곳을 오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마루 끝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122)고 옛사람이 경계하였네. 이 망군대가 비록 매우 높아서 먼 곳을 바라보기에 적당하나 비로봉(毘盧峯)에는 크게 못 미치네. 비로봉에 한 번 오르는 것은 그만두지 못할 바가 있으니 여기는 놔두고 구경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였다.나는 오로지 그곳이 태자의 옛 자취이기 때문에 기어이 한 번 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망군대 위에는 이미 텅 비어 한 물건도 없고 험준함이 또 이와 같은데 어찌 굳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어기고 홀로 가겠는가. 다만 아래에서 쳐다보며 상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이내 오른쪽으로 돌아 영원암(靈源菴)에 들어가 조금 휴식하였다. 영원암은 매우 그윽하였는데 고려조 충혜왕(忠惠王) 때에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 사는 스님 전덕진(全德眞)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양과(兩科)를 겸하여 익혔으며 계행(戒行)이 꽤나 전일하였다. 지금 세상에 불가의 학문이 끊어진 것이 아마도 유문(儒門)과 똑같을 것인데 아직도 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가상한 일이다. 객승(客僧) 조혜산(趙慧山)은 전주에서 산다고 하는데 같은 도(道)의 사람이라고 하여 꽤나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전덕진이 영원암 앞에 보이는 산봉우리들을 가리키며 지장봉(地藏峯)ㆍ시왕봉(十王峯)ㆍ죄인봉(罪人峯)이라는 것에 대해 역력히 설명해 주었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이는 참으로 그대 불가의 설이오. 지하에는 본디 시왕(十王)123)이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의당 지하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이 산 위에 나와서 지낼 수 있겠는가. 이미 이 산에 있다면 다른 산에도 있어야 할 것이오. 만약 그러하다면 시왕이 장차 백왕(百王)이 되어서 도리어 가볍게 되지 않겠는가."하고,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왔던 길을 도로 찾는 사이에 이미 일행을 잃어버리고는 흩어져 옛 자취를 찾아 서로 부르고 서로 나타나 이따금 숨바꼭질을 하였으니 또한 우습다. 거의 해질 무렵에 비로소 장안사의 동쪽 평탄한 길로 나와서 구불구불 올라가 명연폭(鳴淵瀑)에 이르렀다. 폭포의 길이는 6, 7장(丈)이고 기세가 꽤나 웅장했으며 폭포 아래의 맑은 못은 더욱 깊고 넓어 구경할 만하였다. 일행 중에서,한평생 마음에 욕심 없다고 여겼으나 平生自謂心無慾여기 와서야 심지가 변하는 줄 알았네 到此方知心志遷바위 아래의 밝은 구슬 천만 곡을 巖下明珠千萬斛옮길 수 있다면 초당 앞에 옮겨 두리라 可移移置草堂前라는 절구시 한 수를 외우며 말하기를,"이는 내 마음을 먼저 알았다고 할 만하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듣건대 이 시는 간옹(艮翁 전우(田愚))이 금강산에서 지은 것이라고 하니 그대도 응당 알 것이네."하였다. 그러자 내가 말하기를,"일찍이 들은 바는 없으나 선사(先師)께서 젊었을 때에 일찍이 이 산을 유람하였으니,124) 이 시는 그때 지었을 것이네. 이는 무욕(無慾)의 욕(慾)이니, 비록 깨끗한 덕행에 해가 되지는 않지만 파선(坡仙)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취하여도 막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125)는 말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공(公)과 사(私)의 구별이 있는 듯하네. 이 시는 아직 젊었을 때에 지어서 지극히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고(詩稿)에 넣지 않아 듣지 못했을 것이네."라고 하였다.몇 리를 가서 삼불암(三佛巖)에 도착하였다. 거대한 바위를 깎아 큰 부처의 형상을 새겨 놓았는데 엄숙하여 경외할 만하였다. 3개뿐만이 아닌데도 이름을 '삼불'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옛것을 그대로 쓴 듯하다. 이전에 표훈사(表訓寺)에 당도하여 들어가지 않고 곧장 정양사(正陽寺)로 올라간 것은 시간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비록 바윗돌이 험하지는 않았으나 도리어 높고 가팔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이윽고 정양사에 도착하니, 경내가 뛰어나고 탁 트여 온 산 일대가 눈앞에 늘어서 등을 토닥이고 이마를 쓰다듬을 수 있다. 헐성루(歇惺樓) 난간 밖에는 나무를 깎아 여러 산봉우리 형상을 만들어 판자 위에 안치해 두었다. 봉우리의 대소(大小)와 고하(高下)에 따라 비로봉(毘盧峯)ㆍ영랑봉(永郞峯)ㆍ수미봉(須彌峯) 및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ㆍ천일대(天一臺) 따위였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고 그 이름을 기록하여 각각 그 방향으로 향하게 했으니, 두루 구경하지 않아도 눈에 뚜렷하여 유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소 정신과 힘을 줄일 수 있게 하였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이른바 "금강산에 들어가면 정양사만 구경할 것이니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라고 한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에 판상(板上)의 한 시에 차운하였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일만 이천 봉우리 진면목이 萬二峯眞面누대에서 역력히 보이는데 樓頭歷歷看행인은 이곳에 오르지 않고 行人不登此부질없이 금강산으로 가네 枉到金剛山이곳은 경치가 빼어나므로 제명(題名)과 제시(題詩)가 누대의 문미(門楣)와 들보에 가득하였으나 옛사람의 명작(名作)은 전혀 없었다. 내가 그곳에 사는 스님더러 말하기를,"일찍이 듣건대 정호음(鄭湖陰)126)의 〈정양사(正陽寺)〉 시가 세상에서 회자(膾炙)되는데 현판에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고는, 그 시를 외우고 말하기를,"'일만 이천 봉우리를 훑어보고 돌아오니 쓸쓸한 낙엽이 가을 옷에 스치네. 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피우는 밤에 거원처럼 사십 년 동안의 잘못 깨달았네.127)[萬二千峯領略歸 蕭蕭落葉打秋衣 正陽寒雨燒香夜 蘧瑗方知四十非]'인데, 그것을 몰랐습니까?"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소승 또한 이 시를 들은 적이 있으나 종전에 이 누대에 이 시판(詩板)이 걸려 있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그 이유를 알 만합니다. 옛 사람은 뼈가 이미 썩었고 지금 사람은 완력(腕力)이 강하니, 조(趙)나라 깃발을 뽑아버리고 한(漢)나라의 깃발을 세우는128) 것을 어찌 군중(軍中)에서만 그렇게 하겠습니까. 한탄스러운 것은 권세에 따라 변하는 시도(市道)129)가 일만 산중에도 있다는 점입니다."라고 하였다. 호음의 시운을 사용해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지어 '헐성(歇惺)' 두 글자를 간단히 논파였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이 헐성루가 아니면 누구와 돌아갈까 微此歇惺誰與歸나그네가 먼지 옷을 떨치기에 좋구나 好敎遊子拂塵衣쉬고 깨닫는 중에도 허실이 구분되고 歇惺中也分虛實혜안으로 보면 옳고 그름이 분별되네 慧眼看來辨是非정양사는 작은 사찰인데, 육각전(六角殿)은 꽤나 정교하였고, 작은 돌탑 1좌(座)는 신라 때에 만든 것이며, 절 안에 인쇄하여 간직하고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모두 6,500여 책(冊)이라고 한다.이윽고 내려와 표훈사(表訓寺)로 들어갔다. 절이 매우 웅장하고 진밀(縝密)하여 부유한 사찰임을 알 수 있었다. 전우(殿宇)의 화려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중에 큰 종 2개와 쌀 40말[斗]을 쪄낼 수 있는 큰 구리 시루[銅甑] 1개가 있는데 시루는 광해군이 하사한 것이며, 나머지는 미처 자세히 구경하지 못했다. 표훈(表訓)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승려가 말하기를,"절을 창건한 사람이 신라의 승려 표훈입니다."라고 하였다. 형세는 둘러싸서 매우 긴밀하고 또한 꽤나 평평하고 넓으며 계곡물이 감아 도니, 장안사 터에 비해 더 넓거나 거의 맞먹었다. 절 남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서산선사비(西山禪師碑)와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가 지은 의심선사비(義諶禪師碑)가 있다. 또 수충각(酬忠閣)이 있는데, 나옹화상(懶翁和尙)ㆍ무학대사(無學大師)ㆍ서산대사(西山大師)ㆍ사명대사(四溟大師) 이하 국가에 공이 있는 여러 선사의 초상을 그려서 벽에 걸어 두었으며, 편액을 '수충'이라 한 것은 조정에서 명한 것이다. 비석과 수충각은 백화암(白華菴) 소관에 관계되는데 암자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밤에 영선교(迎仙橋) 안쪽 여관에서 유숙하며 〈표훈사(表訓寺)〉 시 한 수를 지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누가 이 절을 창건하였나 誰歟刱此寺일천 년이나 되었다고 하네 云距一千年왕실에서 은사가 내려온 건 恩賜來王室법사들이 변경을 진압해서네 法師鎭徼邊누대는 꿩의 날개를 편 듯하고 樓臺飛翬翼종소리는 용의 잠을 깨울 듯하네 鍾磬徹龍眠멋진 풍경을 시로 쓰기 어려우니 形勝難題得재능 없음이 허연130)에게 부끄럽네 不才愧許燕26일. 동쪽으로 올라가 만폭동(萬瀑洞)을 찾아가니 표훈사와 거리는 얼마 안 되었다. 커다란 바위 2개가 대치하고 또 커다란 바위 하나가 그 위를 가로로 덮었는데, 길이와 너비는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이것이 이른바 금강문(金剛門)이니, 하늘이 멋진 경치를 비호(秘護)하여 관문을 설치해서 지키는 것이 이처럼 일이 많았던가.3, 4리를 가니 골짜기 입구가 조금 트이고 양쪽 기슭과 바닥이 평평한 데에는 전부 흰 돌로 바닥을 만들었다. 비로봉ㆍ영랑봉ㆍ수미봉ㆍ내무재령(內霧在嶺) 등에서 흘러온 물이 여기에 이르러 기세가 더욱 맹렬하고, 돌이 가로질러 벽처럼 선 것을 만나면 문득 곧장 쏟아져 폭포가 되는데 여기서부터 위쪽으로 10리 넘도록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 이곳이 이른바 만폭동인데, 바위에 새겨놓은 양봉래(楊蓬萊)131)가 쓴 세 큰 글자가 이미 그 이름을 알려 주었고 또 양봉래가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여덟 큰 글자가 있는데, 모두 웅건(雄建)하고 꿈틀대어 용사(龍蛇)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빼어난 곳에 기이하고 빼어난 글씨였다.폭포의 길이가 비록 아주 높지는 않으나 이와 같이 많은 것은 얻기 어렵기 때문에 귀하게 여겼다. 폭포 밑에는 문득 물이 모여 맑은 못이 되어 여덟 개의 못[八潭]이 있는데, 흑룡담(黑龍潭)ㆍ벽하담(碧霞潭)ㆍ비파담(琵琶潭)ㆍ분설담(噴雪潭)ㆍ진주담(眞珠潭)ㆍ구담(龜潭)ㆍ선담(船潭)ㆍ화룡담(火龍潭)이라 부르니, 그 명명(命名)으로 인하여 못과 폭포의 실상을 대개 상상할 수 있다. 대개 폭포의 수가 만(萬)에 이르지 않은데도 '만'이라 한 것은 성대하게 말한 것이고, 못의 수가 팔(八)에 그치지 않은데도 '팔'이라 한 것은 골라서 말한 것이다. 폭포의 수많은 진주와 못의 면면이 밝은 거울은 투명하고 기이하고 장엄하여 형용할 수 없었으며, 맑은 물을 손으로 움켜 마시고 세수함에 일찍부터 생겨난 탁한 기운이 단번에 씻겨 내려감을 깨달았으며, 마음이 경치와 합하여 유연(悠然)히 돌아감을 잊었으니, 이에 옛사람이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즐거움132)이 따로 있어 종일토록 올라와서 굽어보아도 너무 즐기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절구시 한 수를 지었다.조각조각 유리요 수많은 진주라 片片琉璃斛斛珠못들과 폭포들이 새 그림을 펼쳤네 潭潭瀑瀑展新圖다소의 사람 마음을 씻어 깨우치니 洗醒多少人心目이를 만든 조물주가 어찌 뜻이 없었겠나 作此天工意豈無진주담 위에 새겨 놓은 옛 시 "맑은 시내와 흰 돌은 취향이 같으나 갠 달과 맑은 바람은 별도로 전하리.[淸溪白石聊同趣 霽月光風更別傳]"133)와 "세상 밖에서 지금 질탕함을 이루었으니 인간세상 어디인들 시끄럽지 않겠는가.[物外只今成跌宕 人間何處不啾喧]"134)라는 두 연(聯)은 우암(尤菴)의 글씨135)인데, 심획(心畵)을 어루만지니 완연히 어제 일과 같았다.대개 우옹(尤翁)이 이 산을 유람한 것은 만년(晩年)이었으니, 이에 상상컨대 그 당시는 비록 청란(淸亂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지만 오히려 나라를 스스로 보전하여 사방의 국경이 전란을 겪지 않았는데, 더구나 세상 밖에 뛰어난 이 산의 맑고 빼어난 것이 어찌 반점(半點)의 티끌이라도 용납하였겠는가. 선생이 쓴 것은 바로 실제에 딱 들어맞았다.지금은 나라가 망하여 삼천리 온 강토에 다른 종족[異類]들이 가득하고 이러한 깊은 산에도 오랑캐들이 즐비하니, 산천도 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개탄을 금치 못하고 '전훤(傳喧)' 두 글자를 사용하여 절구시 한 수를 지었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금강산의 빼어남은 육대주에 최고요 金剛絶勝六洲最우로136)의 명성은 백대까지 전해지네 尤老風聲百世傳당시 세상 밖에서 맑게 노닐던 곳이 當日淸遊物外地지금처럼 시끄러울 줄 누가 알았으리 如今誰識雜啾喧골짜기의 편평한 바위와 절벽 중에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곳에는 모두 고금 인물의 성명을 새겨 놓아 한 조각도 완전한 돌을 찾아볼 수 없으니, 아, 너무나 많다. 대개 이 산 일대에서 기이하고 빼어남이 있는 곳이면 그러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이 골짜기가 더욱 심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지으며 한번 탄식하고 말하기를,"누구나 똑같은 사람인데 누가 어질고 누가 어리석으며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며 누가 현달하고 누가 궁하며 누가 숨고 누가 드러났는가? 가령 이 골짜기에 성명을 써 놓은 것 중에는 우옹(尤翁) 이외에 김몽와(金夢窩)137)ㆍ오노주(吳老洲)138) 제현(諸賢)이 불후(不朽)한 명성을 가장 드러냈고, 그 외에도 명사(名士)와 고관이 많으나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처럼 많지는 않다. 생각건대 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 중에는 의당 어질고 선한데도 궁하여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 있겠지만, 또한 어찌 어리석거나 악한 사람이 없다고 보장하겠는가. 그러니 어찌 남의 이름을 깎아 없애고 자기의 이름을 새기는 자가 이따금 있다는 것을 살펴보지 않겠는가. 그 마음을 미루어 보면 집에 있어서는 남의 집을 빼앗고 나라에 있어서는 남의 나라를 빼앗을 것이니 어리석음과 악함으로만 논할 것이 아니다. 예전에 노사(蘆沙) 기공(奇公)139)이 이 산을 유람할 때에 어떤 사람이 제명(題名)하기를 청하자 '가령 내가 어질다면 산의 다행이고, 내가 어질지 못하다면 어찌 산의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하였으니, 이 말이 경절(警絶)하여 가슴에 새겨둘 만하다."라고 하였다.돌이켜 생각건대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은 궁하여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어리석고 악한 사람으로 돌아감을 면치 못할 것이니, 감히 제명하지 못한 것은 실로 노사의 말이 두려워서였다. 게다가 이렇게 혼란한 때를 당해서는 이미 드러난 이름도 오히려 숨기려고 하는데 무엇 하러 이름 없는 사람의 이름을 억지로 드러내겠는가. 이름을 이미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지어도 적지 않고 스스로 부르고 스스로 화답하였으니, 또한 하나의 맛없는 맛[無味之味]이었다.만폭동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으로 절벽 위에 임한 것을 보덕굴(普德窟)이라 한다. 바위틈을 파내어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서쪽 한 모퉁이의 땅이 움푹 꺼졌기 때문에 12자[尺] 길이의 구리 기둥을 만들어 세웠으니, 이 암자에 오르면 바람을 타는 것처럼 흔들거린다고 한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보덕굴의 외부를 보고서 내부를 상상할 수 있기에 들어가지는 않았다.만폭동을 다 구경하고 3리쯤 올라가니 마하연(摩訶衍)이 있는데 절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암자라고 하기에는 컸다. 경계와 형세의 원밀(圓密)함은 비록 표훈사에 미치지 못하지만 초절(超絶)함은 그보다 나았으니, 대개 여기에 이르면 이미 산의 중간에 걸터앉게 된다. 절 뒤에 백운대(白雲臺)가 있었으나 높은 곳에 올라가 비로봉(毘盧峯)을 보려 했기 때문에 올라가지 않았다.이에 길을 나서 남쪽으로 가서 묘길상(妙吉祥) 폐허를 지나고 사선교(四仙橋)를 건너 비로봉으로 오르려 할 때에 어떤 사람이 "먼저 외금강(外金剛)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올라가는 편리함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대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을 놔두고 유점사(楡岾寺) 길을 물으니 이곳에서 40리 넘게 떨어졌다고 하였다.백화담(白華潭)을 지나 내무재령(內霧在嶺)에 당도하였다. 그 사이에 험난한 길을 간 고생과 더위잡고 오른 어려움은 경복(更僕)140)하더라도 다 말할 수 없으니, 어제 명경대와 영원암으로 가는 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체로 이 산의 여러 승경은 가는 곳마다 절로 승경을 보존하였는데, 마침 도로를 닦고 있었으나 다만 장안사에서 영원암까지와 마하연에서 유점사까지는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짜기 안에는 나뭇잎이 싹트기 시작하고 철쭉이 아직 피지 않았으나 내무재령 위에는 풀이 났다가 금세 마르기에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여기는 여름이 한창인 날씨가 아닌가? 내가 이제야 산이 높은 것을 알겠다."하였다.내무재령의 안팎에는 늙은 전나무가 하늘까지 치솟아 얼굴을 젖혀야만 그 끝을 볼 수 있다. 전나무가 스스로 죽어 쓰러진 것 중에는 두 언덕에 걸쳐져 시렁이 된 것도 있고 사람이 그 위에 걸터앉으면 발이 그 절반에 머무는 것도 있기에 내가 또 탄식하며 말하기를,"내가 이제야 산이 깊은 것을 알겠다."하였다. 일행이 좋은 목재가 스스로 썩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말하기를,"이것들을 큰길이나 큰 항구로 가져가 집이나 배와 수레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하기에 내가 말하기를,"아, 어찌 이것만 그러겠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뛰어난 도량과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도 초야에서 곤궁하게 살다가 죽어 그 이름마저 사라진 사람을 어찌 다 셀 수 있겠는가."하였다.내무재령을 넘어 10리를 내려가서 은선대(隱仙臺)ㆍ신금강(新金剛)ㆍ십이폭포(十二瀑布) 등 여러 승경이 있다고 들었으나 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은데도 들어가 구경하지 않은 것은 시간이 부족해서 만은 아니었다. 원래 금강산인데 어찌 신금강이라 이르며 이미 만폭동을 구경하였는데 또 무슨 십이폭포이겠는가. 또한 일을 줄이려는 의도였다.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유점사에 들어가 사방의 경관을 둘러보니 과연 좋은 산천의 좋은 가람(伽藍)141)이었다. 먼저 산영루(山暎樓)에 오르니, 누대가 시내에 임하여 물이 난간 앞으로 곧장 흐르고, 또 물을 끌어다가 연못을 만들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누대에는 제명이 많았으며,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유기일(柳基一)142)과 같은 판(板)이었다. 절 안에 볼만한 고적(古蹟)이 많았으나 날이 이미 저물어 내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누대에서 내려와 다리를 건너 불가의 규정문(糾正門)을 나와서 밤에 여관에서 유숙하였다.스님 청암(靑菴) 김봉전(金奉詮)이 와서 함께 얘기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천 리 밖의 호남에서 여기까지 오기는 쉽지 않은데, 조대(措大)143)가 산수(山水)를 즐기는 취미가 대단합니다. 녹음(綠陰)이 비록 좋지만 오히려 단풍을 완상하는 것만 못하니, 어찌 가을 8월에 이 행차를 마련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이 산을 완상하는 데에 취미를 가지는 것은 그 맑고 험준하며 우뚝 솟아 티끌세상을 초탈하였기 때문인데 어찌 녹음과 단풍 사이에서 따지겠습니까. 단풍으로 말하자면 내 마을 근처의 내장산(內藏山)이 절로 한 빛깔 붉은 비단 병풍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얼굴이며 의복과 조화를 이룹니다. 온통 붉은 진기한 완상품은 아마도 다른 나무에 섞인 이 산의 단풍 숲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청암 스님이 말하기를,"이 산이 크게 번성한 것은 신라 시대이니 이른바 '팔만구암자(八萬九菴子)'라는 것도 이 때에 있었습니다. 지금 살펴보건대 수풀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곳에 쓰러진 암자 터가 많고 바위 벼랑의 편평한 곳은 모두 글자를 새긴 자국이었습니다."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만폭동에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수필(手筆)을 새겨놓은 것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요산요수인정야 여즉하위이곡(樂山樂水人情也余則何爲而哭)'을 새겨놓은 것이 있으나 지금은 글자가 마멸되어 보기 어려운데 조대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이것은 이 골짜기의 제각(題刻)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기이한 자취인데 애석하게도 내가 자세히 보고도 찾지 못했더니, 스님이 아니었으면 이것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하였다. 내가 묻기를,"예전에 듣건대 이 산중에 고승(高僧)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하니, 청암 스님이 말하기를,"한 번 새로운 풍조가 요동친 뒤로 유문(儒門)의 규모가 한 번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는 더욱 심하여 오계(五戒)144)를 지키는 자가 드무니, 어찌 고승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산에만 없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통틀어 모두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비록 그러하나 그중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자는 그래도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하니, 청암 스님이 말하기를,"부안(扶安) 내소사(來蘇寺)의 백학명(白鶴鳴)이 가장 뛰어났는데 불행히도 갑자기 죽었습니다. 지금 헤아릴 만한 사람은 7인인데 순창 구암사(龜巖寺)의 박영호(朴暎湖)가 으뜸이 되고, 무장(茂長) 선운사(禪雲寺)와 장성 백양사(白羊寺)에 각각 1인이 있고, 이 절의 김동신(金東信)이 그 가운데에 낄 만하고, 나머지는 서북도(西北道)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승가(僧家)가 도리어 우리 유가의 쓸쓸함보다 나으니, 우리 유가에는 이에 호응할 사람도 없습니다."하고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오늘날 불학(佛學)에서는 호남을 기북(冀北)이라 이를 만하나145) 우리 유학을 돌아보면 이와 같지 못하니 우리들이 부끄러움을 알 수 있네."라고 하였다. 또 청암 스님이 말하기를,"이 산의 고적(古蹟) 중에서 불가에 있는 것 이외에는 마의태자의 유사(遺事)가 가장 감상할 만합니다. 그분이 아버지에게 간하여 들어주지 않자 이 산에서 몸을 마친 것은 실로 역사책에 나타나 있어 삼한(三韓)의 인사들이 공송(公誦)하는 바이며, 군사를 양성하고 성을 쌓아 고려를 정벌하려고 했다는 것은 조대께서 어제 망군대에 갔을 때에 응당 들었을 것이니, 그 밖에 자세히 알지 못한 것을 제가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태자가 충의심에 격앙되어 한 번 훌륭한 일을 하기로 맹세하였으나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통곡하며 삼베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분이 죽은 곳은 수미암(須彌菴)이고 그분의 묘소는 비로봉 북쪽에 있는데, 산중의 사람들이 그 골짜기를 능내동(陵內洞)이라 일컫고 '나의 묘소를 보호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護我墓者獲福]'라는 태자의 유언을 서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산삼 캐기ㆍ농사짓기ㆍ재물 구하기ㆍ병을 치료하기 등 원하는 바가 있는 사람들은 사명일(四名日)146)에 앞다퉈 묘소의 풀을 베고 있습니다. 이 산의 아래 삼억동(三億洞)의 경주 김씨가 태자의 방손이 되므로 묘소에 와서 제사를 지냅니다. 소승이 마침 제사 때를 당하여 남은 음식을 얻었는데, 그때가 8월 16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태자가 죽은 뒤에 그의 부인은 비구니가 되었는데, 법호가 돈도부인(敦道夫人)이며 돈도암(敦道菴)을 세웠습니다. 세 아들도 모두 승려가 되었는데, 장자 실림조사(實林祖師)는 실림사(實林寺)를 세웠고, 차남 능인조사(能仁祖師)는 능인암(能仁菴)을 세웠고, 막내 보현조사(普賢祖師)는 보현암(普賢菴)을 세웠으니, 산중 사람들은 혹 실림태자(實林太子)ㆍ능인태자(能仁太子)ㆍ보현태자(普賢太子)라고 부릅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슬픈 표정으로 일어나 말하기를,"태자가 평생토록 헛수고만 하고 아무런 공적이 없으나, 그 하늘을 떠받치는 의절(儀節)을 어찌 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적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대개 청암 스님이 경주 김씨였기 때문에 태자의 일에 대하여 더욱 자세하게 알았으며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예전에 내가 집에 있을 때에는 태자가 항복하는 것에 대해 간언하다가 몸을 숨긴 일만 알았다가, 이윽고 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군사를 양성하여 고려를 정벌하려는 뜻을 지녔음을 알았고, 여기에 와서 그의 죽음ㆍ묘소ㆍ처자식의 자취를 모두 들었으니, 사람이 견문을 넓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하였다.또 생각건대 그 충절과 의열(義烈)의 전말이 깊은 산중의 스님들의 입에 부쳐 전해지고 역사책에는 실리지 않았으니 개탄스럽다. 비록 그러하지만 천여 년이나 지났는데도 산중 사람이 유적을 언급하면서 한숨을 쉬고 앞다퉈 묘소를 다듬으며 더욱 부지런하니, 이는 실로 충의가 사람을 깊이 감동시킨 데에서 나와 역사책에 훤히 드러난 자가 미치지 못할 점이 있다. 그가 말한 '나의 묘소를 보호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설은, 이러한 대절(大節)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따름인데 어찌 죽고 난 뒤의 일을 계산하였겠는가. 전설은 다 믿을 수는 없는 점이 있다. 그 묘소를 능(陵)이라 하고 살던 곳을 궐(闕)이라 하고 세 아들을 태자라고 한 것도 후세 사람들이 공경해마지 않았음을 보인 것이다.근래에 한 시인의 원고 중에 〈망군대〉 시를 보니 소서(小序)에 이르기를,"태자가 통곡하고 승려가 되었다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미 《신라사》에 보이지 않고 또 산승(山僧)의 입에도 전하지 않으며 엄숙한 봉분이 천년토록 무너지지 않았으니, 그 말이 너무나 근거가 없어 제동(齊東)에 붙여야 한다.147) 부인과 세 아들의 일에 관해서는 아마도 또한 이름을 의탁하여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던 일에서 나온 것이리라."하였다. 이에 생각건대 김씨 중에 경순왕(敬順王)에게서 함께 나온 자가 나라 안에 가득하니 태자의 황폐한 묘소에 나아가 비를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었고 물자를 마련하는 것도 매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겨를이 없어 저 황량한 산에 내버려두고 풀과 나무에 반쯤 묻히게 하였으니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는가. 어찌하면 뜻을 함께하는 자 몇 사람을 구해 그들과 도모할 수 있을까.27일. 조반(早飯)148)을 먹은 뒤에 다시 절 안으로 들어가니, 절에 '동국선종(東國禪宗)'이라는 편액이 걸렸고, 또 '동양제일가람(東洋第一伽藍)'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불전(佛殿)에 들어가 이른바 오십삼불(五十三佛)을 먼저 구경하였는데, 나무를 조각하여 느릅나무 뿌리를 거꾸로 세운 형상으로 만들고 상하좌우에 차례로 뿌리 위에 부처를 안치했으니, 매우 기이하였다.법호가 향암(香菴)인 스님이 말하기를,"옛날에 천축(天竺 인도(印度)) 사람이 금불(金佛) 53구(軀)를 주조하고는 석반(石盤)에 실어 인연을 따라 가다가 그치도록 하였습니다. 도중에 월지국(月支國)을 지나자 국왕이 자기 나라에 봉안하려고 하니, 부처가 왕의 꿈속에 말하기를 '내가 갈 곳이 있으니 너는 나를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 놓으니 부처가 우리나라 고성(高城) 포구에서 멈추었고 군수 노춘(盧春)이 부처를 맞이하여 이곳에 들여 놓았습니다.이곳에 용소(龍沼)가 있었는데 부처가 용을 내몰자 용이 화가 나서 느릅나무 뿌리를 뽑아 지상에 거꾸로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부처가 느릅나무 뿌리 위에 나란히 서자 용이 두려워하여 달아나니, 노춘이 마침내 용소를 메우고 절을 지었습니다. 여러 부처가 서 있었던 느릅나무 뿌리가 그대로 불전 안에 있었으니, 절 이름을 유점사(楡岾寺)라로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나중에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해 나무에 조각하여 바꾸었습니다. 절을 창건한 시기는 우리나라로는 신라 때이고 중국으로는 서한(西漢) 때인데 동한(東漢)의 영평(永平)149) 때보다 거의 100년이나 앞서니, 이른바 '동양제일가람'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운운."하였다. 불가의 말은 대개 허황하여 터무니없는 것이 많기에 향암 스님이 말한 것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이미 '동양제일'이라고 크게 써서 특별히 내걸었으니, 불교가 중국보다 먼저 들어왔다는 것은 헤아려 보건대 증거가 없지는 않다.오십삼불의 끝쪽에 백불(白佛) 하나가 있는데 일본왕이 주조하여 사명선사에게 준 것이라고 하였다. 벽 사이에 세워둔 옛 기폭(旗幅)은 노끈으로 그물을 만들고 털을 그물 사이에 흩어서 꽂았는데 무슨 털인지 모르겠고, 장대 머리의 삼지극(三枝戟)은 하나가 부서졌는데 이 또한 일본왕이 사명선사에게 준 것이라고 하였다. 향암 스님이 인하여 말하기를,"불가의 도가 높고 공이 큰 것은 유가에서 미칠 바가 아닙니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난리를 당하여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ㆍ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제공(諸公)과 같은 지략가(智略家)도 안정시키지 못한 것을 사명선사가 혼자서 동해를 건너가 거대한 물결이 가라앉게 하였으니,150) 이 또한 한 가지 일입니다. 우리나라 유가의 도학은 설홍유(薛弘儒)151)와 최문창(崔文昌)152)을 으뜸으로 삼는데, 설홍유는 고승(高僧) 원효(元曉)의 아들이고, 최문창은 심약(沈約)153)의 '공자는 그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그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究其致]'154)라는 말을 높이 받들었으며, 또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석가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角力]'155)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심지어 유가의 대종사(大宗師)인 공부자(孔夫子)가 '서방에 성인이 있다.[西方有聖人]'라고 일컬은 말이 《열자(列子)》에 보이는데도 세속의 선비를 만날 때마다 불교를 배척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는 자가 많으니, 어찌 이른바 '유(類)를 알지 못한다.[不知類]'156)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내가 보건대 향암 스님은 유가와 불가에 대략 통하여 으스대며 잘난 체하는 자여서 결판을 내려고 한다면 선 채로 말하는 사이에 설득해낼 수 있는 자가 아니었기에 다만 대략 설파하여 말하기를,"장자(莊子)와 열자(列子)는 공자를 비난하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일삼는 자이니 그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최문창은 과연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도학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에 있었던 것인데, 그의 문장과 인망(人望)을 추앙하고 탄복하여 지금까지 숭봉(崇奉)하는 것입니다. 퇴계(退溪) 선생 이하 여러 현인의 상론(尙論)157)이 있으니, 당신이 증명한 두 가지 말이 어찌 불교를 배척하는 유자(儒者)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또 웃으며 말하기를,"내가 예전에 구암사(龜巖寺)의 스님 박영호(朴暎湖)와 유가와 불가의 시비에 대해 언급하되, 나는 유교에 의거하여 불교를 배척하여 곧바로 유교는 옳고 불교는 그르다고 말했으며, 박영호는 항상 유교를 끌어다가 불교에 들여서 불교는 크고 유교는 작다고만 말했으니, 바로 한 번 끌어들이고 한 번 배척하는 사이에 이미 시비를 알 수 있는데 굳이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하였다.마침내 향암 스님과 작별하고 보장각(寶藏閣)으로 들어가 여러 물건을 모두 완상하였는데 과연 역대에 상으로 내려준 보배로운 물품과 절에서 전해오는 옛 물건들이 많아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다. 우리 조선조에 와서는 광해군이 하사한 은촉대ㆍ금촉대ㆍ화대(花臺) 등의 물품이 많고, 또 인목대비가 손수 초록(抄錄)한 불서(佛書) 1책(冊)이 있으니, 대개 생각건대 하나는 광해군이 만년에 잘못을 뉘우칠 때에 있었고 하나는 인목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변고를 만났을 때에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아조(我朝)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한다고 일컬었는데도 이미 왕가(王家)에서부터 이러하였으니, 초야에 묻힌 현인의 빈말[空言]이 아무리 절실한들 무슨 보탬이 되었겠으며, 저 고루 거각(高樓巨閣)이 내탕고(內帑庫)를 열어 도운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일만 산중에서 어떻게 이토록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였겠는가.보관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은 신라 남해왕(南解王)이 하사한 비취옥배(翡翠玉杯)인데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이한 완상품이었다. 이 남해왕의 연대에 의거하면 더욱 불교가 이 산에 들어온 것이 동한(東漢)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종전에는 다만 불교가 동양에 들어온 것은 동한의 명제(明帝) 때라고 말했을 뿐이니, 대저 동한에 앞서서 신라에 들어온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대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본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며 조야(朝野)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불가의 일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그럴 것이다. 보장각의 동쪽에 수충각(酬忠閣)이 있는데 그곳에서 봉안하고 있는 것이 표훈사와 똑같기에 들어가 구경하지 않았다.일행을 재촉하여 동구(洞口)로 나와서 머리를 돌려 다시 보니, 험준한 산은 바깥 휘장이 되고 고운 산봉우리는 안쪽 병풍이 되어 초절(超絕)하면서도 평평하고 둘러싸면서도 통하며, 높고 화려한 건물이 구름에 닿고 꿩이 나는 듯한 모습은 또 말할 필요도 없어 과연 좋은 산천에 좋은 가람(伽藍)이었다.생각건대 이렇게 세상에 드문 맑고 빼어난 곳을 유독 승려들이 주관하게 하고 우리 선비들은 관여함이 없으니 또한 매우 애석하다.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동양에서 사찰 설치한 건 이곳이 가장 먼저니 置刹東洋此最先거꾸로 꽂은 느릅나무 뿌리가 정히 아득하네 楡根倒揷正茫然일만 이천 봉우리는 풍악산을 차지했고 萬二千峯占楓岳오십삼불은 돌배를 타고 건너 왔다네 五十三佛渡石船역대에 상은을 받아 보배로운 물품이 많고 歷代賞恩多寶品누대에 가득한 제영은 혹 선현의 작품이네 樓滿題咏或前賢다시는 인간 세상의 맑고 기이한 곳을 再難人世淸奇地불가에 내주어 홀로 관할케 함은 어려우리 付與緇林獨管專대개 이 절은 산 위에 개국(開局)하였다고 이를 만하니, 마하연사에 비해 그 높이가 또 현격하다. 가까운 곳에 중내원(中乃院)ㆍ만경동(萬景洞)ㆍ선담(船潭)ㆍ구룡소(九龍沼)ㆍ송림사(松林寺)ㆍ학소대(鶴巢臺) 등 여러 승경이 있지만 급박하였기 때문에 구경하지 않았다. 그 학소대라고 하는 것은 윤달이 있는 해에는 학이 반드시 와서 둥지를 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데, 금년에 윤달이 있으므로 또한 이미 와서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았다고 하였다.동쪽으로 10리 남짓을 가서 개잔령(開殘嶺)을 넘었다. 개잔령의 서쪽은 문득 평지와 같으나 동쪽은 옛날 파촉(巴蜀)의 잔도(棧道)158)도 이것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걷기가 어려워 천천히 내려감에 머리가 아래고 엉덩이가 위인 줄만 알고 뒷사람을 돌아보니 천상(天上)에 있는 것 같았다. 내려오는 위험이 이미 이러하니 만약에 올라간다면 응당 청련(靑蓮 이백(李白))의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159)라는 탄식을 발할 것이다. 한낮이 지나서야 평지에 당도하니 바로 백천교(百川橋)였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여산은 높디높고 촉도는 험난하지만 廬岳高高蜀道難험준함이 이 산보다 더하지는 않으리 崎嶇未必過此山내려옴에 천 길 함정에 추락하는 듯 下來已墜千尋阱오를 때는 만 자 장대를 타야 하리라 上去應緣萬尺竿돌에 부딪치면 무릎이 깨질까 걱정하고 觸石幾愁雙膝碎벼랑에 임하면 가슴이 섬뜩함을 느끼네 臨崖還覺一心寒조심조심 나아가 끝내 험한 곳 넘으니 兢兢進步終踰險고생을 겪어야 안락함 보는 줄 알았네 辛苦方知見樂安자동차를 타려 했으나 만나지 못하여 천천히 걸어서 동쪽으로 가니, 점점 산이 열리고 골짜기가 트임을 느꼈고, 비로소 밭과 촌락이 나타나자 인간 세상임을 알았으며, 가슴속이 통창(通暢)하는 것이 며칠 동안 산중의 즐거움보다 나음을 느꼈다.보현동(普賢洞)을 지나 시랑리(侍郞里,)에 이르니, 하나의 작은 평야인데 그 가운데를 큰 시내가 관통하여 새삼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였고, 여러 산봉우리를 돌아보니 창연(蒼然)한 빛깔만 보였다. 예전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여기에 와서 금강산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면서 소동파(蘇東坡)의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160)라는 시구를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나, 실제로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금강산의 한쪽에 불과하였다.이윽고 또 30리를 가서 삼일포(三日浦)에 당도하니, 이곳이 이른바 관동팔경(關東八景)161)의 하나이다. 3면은 산으로 둘러져 있고 동쪽만 열렸는데 인력으로 그 중간에 둑을 쌓아 거울의 표면처럼 밑바닥이 평평하고 맑은 강 둘레는 10여 리쯤 되었다. 빙 둘러 있는 산은 모두 서른여섯 봉우리라고 하는데 산 하나가 삼일포 속으로 쑥 들어와 유람을 매우 유쾌하게 하였다.삼일포 안에 작은 섬이 있고 섬 위에 사선정(四仙亭)의 옛터가 있다. 삼일포의 사방 언덕 및 산 위에 있는 암석은 한 개도 사물의 형상이 아닌 것이 없으니, 대저 사람이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많고, 또 용이 나는 것ㆍ봉황이 춤추는 것ㆍ사자가 웅크린 것ㆍ거북이 엎드린 것ㆍ말이나 소가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형상이 다양하여 매우 특이하였다.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옛날에 사선(四仙)162)이 여기에서 3일간 놀다가 갔기 때문이라고 한다.대개 만폭동에는 사선기반암(四仙碁盤巖)이 있고, 비로봉 아래에는 사선교(四仙橋)가 있고, 여기에는 사선정이 있는데, 이 사선이 누구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라 때의 사람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둘러선 산 서른여섯 봉우리 안의 삼일포는 環山六六浦其中한쪽은 보배 거울을 새로 닦아 비워두었네 一面新磨寶鑑空언덕 가에 우뚝 선 바위는 사물을 닮았고 石峙岸邊爭肖物물속에 숨은 섬에는 배를 옮겨갈 수 있네 島藏水裏可移蓬물줄기가 동해로 통해 방사163)가 찾아오고 流通東海來方士땅이 봉래164)에 맞닿아 고운 바람 불어오네 地接蓬萊動綺風예전에 네 신선이 삼일 동안 즐겼는데 往昔四仙三日樂마침 이 한여름에 네 사람이 동행했네 適玆三夏四人同사랑스레 완상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해가 서산에 걸린 줄도 몰랐다. 밤에 고성군 안에서 유숙하였다.28일. 해금강(海金剛)에 가서 구경하였다. 해금강은 고성군 동쪽 10리 밖의 포구에 있으니, 바로 이른바 오십삼불이 멈췄던 곳이 여기이다. 기이한 섬과 괴상한 바위가 바다 및 서북쪽 기슭에 흩어져 우뚝 솟아 있는데, 송도(松島)ㆍ추도(秋島)ㆍ삼색도(三色島)ㆍ흑색도(黑色島)ㆍ수렴도(水簾島)ㆍ장경암(藏經巖)ㆍ노옹암(老翁巖)ㆍ불장암(佛掌巖)ㆍ초공암(梢工巖)ㆍ오선암(五仙巖)ㆍ용두암(龍頭巖)ㆍ구암(龜巖)ㆍ학암(鶴巖)ㆍ상암(象巖)ㆍ해만물상(海萬物相) 등이 볼 만하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서불(西佛)이 동쪽으로 건너 왔을 때에 신묘한 술법을 써서 여러 승경을 꾸며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승려들이 대중을 현혹시키는 데에서 나온 설이다.대개 전배(前輩)의 시가(詩歌)나 유록(遊錄)을 보아도 해금강이라는 명칭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오늘날 이처럼 자자한 것은, 아마도 근래에 일벌이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바다 가운데에 약간 뛰어난 경관이 있는 곳에 대하여 괴이하고 허황된 설을 수습하여 갖다 붙이고는 산금강(山金剛)의 대안을 만들어 유람하는 사람에게 한때 배를 띄우고 노는 즐거움을 제공한 것이리라. 대저 이러한 괴암기석이 어디엔들 있지 않겠는가마는 그것들이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뱃놀이에 도움이 되므로 한 번 구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에 작은 배 1척을 불러 중류(中流)에 띄워 놓았다. 때마침 바람이 잠잠하고 물결이 잦아들며 하늘이 맑게 개고 햇살이 해맑아서 심신(心神)이 상쾌하고 즐거우며 몸이 가볍고 맑아 큰 바다에 있는 것도 망각했으니, 마치 날개가 돋아나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배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대략 여러 승경을 보고 흥취가 다하려는데 우연히 소동파의 망미가(望美歌)165)가 나왔다. 이에 생각건대 소동파는 비록 세상에 불우한 자이지만 그래도 바라볼 미인(美人 임금)이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모두 바라볼 미인도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내 배 안에서 다음과 같이 〈해금강가(海金剛歌)〉 한 편을 읊었다.바다 가운데 금강은 장관도 많아 海中金剛多壯觀산금강보다 낫다고 다투어 말하네 爭道强似山金剛누가 하나하나 기암괴석 가져다가 誰將箇箇奇巖石사물 형상을 물 가운데 흩어놓았나 散作物形水中央이르되 부처가 동쪽으로 건너온 날 云是牟尼東渡日한 줌 묘술로 가지각색 꾸몄다네 一把妙術色色粧송도 한 점은 쪽풀처럼 푸르고 松島一點碧似藍추도는 마주 솟아 서리 엉긴 듯 희구나 秋島雙峙白凝霜노옹은 묵묵히 앉아 물고기 뛰는 걸 보는데 老翁默坐觀魚躍영불은 손바닥 펴고서 무엇을 생각하나 靈佛展掌何商量경서 천만 권을 쌓아 놓았으니 堆積經書千萬卷혹시 《황정경》이 제향166)에서 떨어졌나 倘或黃庭墜帝鄕삼색도와 흑색도에 또다시 수렴도요 三色黑色復水簾용두암 상암 구암 학암이 다시 상서 바치네 龍象龜鶴更呈祥배를 엎어 사람 빠뜨리자 정말 성낼 만하여 覆船溺人眞堪怒돌로 뱃사공을 벌주어 섬 곁에 두었네 石罰梢工置島傍듣건대 대지가 처음 열리던 날에 聞說大地肇判日물과 불과 흙과 돌을 한 자리에 끌어다가 水火土石盪一場순식간에 모두 써서 각각 형상을 드러내니 須臾盪盡各著形돌은 절로 우뚝우뚝 물은 넘실넘실했다네 石自矗矗水洋洋천축의 세존이 도가 비록 높다고 하나 天竺世尊道雖高어찌 인력으로 종전의 상태를 바꿨겠나 那將人力變舊常먼 길손은 다만 좋은 경치를 찾을 뿐 遠客只可探勝狀그 상세함을 역력히 궁구할 것도 없네 不須歷歷究厥詳아침에 거룻배 하나를 중류에 띄우니 朝來一葦泛中流동녘 하늘이 아득히 물빛에 닿아 있네 東天渺茫接水光청풍이 서서히 불어와 물결이 잔잔하고 淸風徐來波浪靜뱃전 두드리며 노래하니 미칠 듯 즐거워 扣舷發歌喜欲狂몸이 큰 바다 위에 있는 줄도 모르고 不知身在滄溟上겨드랑이에 날개 돋아 날 것만 같아라 但覺兩腋生羽翔배 멈추고 옷자락 잡고 내려서 다시 보고 停船攝衣下復觀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으니 흥취가 더 길구나 手摩足躡興添長다 구경하고 배를 돌려 돌아가려다가 觀盡回棹欲歸來차마 놔두고 가지 못해 다시 서성이네 不忍舍去更徊徨오선대 위의 소나무는 일산을 드리우고 五仙臺上松偃蓋구선봉 꼭대기의 구름은 평상 만들었네 九仙峯頭雲作牀신선은 이미 떠났으나 산은 남아 있어 仙人已去山猶在시절의 경물 기다리며 서로 잊지 못하네 留待時物不相忘적송자 따르고 싶던 이는 예전에 누구였나 願從赤松昔何人도리어 그 설이 황당해질까 걱정이네 還恐其說涉荒唐내가 옛 시 외우며 편안함을 경계하노니 我誦古詩戒太康제때에 바삐 가는 세월을 아껴야 하네 及時須惜歲月忙인생은 늙기 쉽고 이름은 칭찬받기 어렵나니 人生易老名難稱내 마음은 가는 곳마다 감상이 이는구나 余懷觸境生感傷서쪽을 바라봐도 미인을 볼 수 없고 西望美人不可見풍진만 하늘 한쪽에 자욱하구나 風塵漠漠天一方어떡하면 비린내 나는 세상 깨끗이 하고 安得廓淸腥羶世손수 이 바닷물 가져다 칼날을 씻을까 手將此海洗釼鋩호걸들이나 못난이들이나 말할 것도 없이 休道傑傑與庸庸영원히 한결같은 망양167)으로 함께 돌아가리 同歸浩劫一亡羊저 무지몽매한 석가의 무리를 보건대 睠彼空空釋家流오히려 기이한 자취 자랑하며 괜히 과장하나 尙詑奇迹謾誇張우리들은 절로 실질 공부의 경계를 두니 吾家自有實業界다만 스스로 힘써 의지168)를 가지는 데 달렸네 只在自强著脊梁광명한 해와 달은 똑같이 두루 비추고 光明日月同普照유구한 천지는 더불어 끝이 없는지라 悠久天地與無疆내가 해금강 보는 데 참으로 방법 있으니 我觀海剛眞有術몸을 돌이켜 유추하여 감당하려는 것이네 反身推類欲承當청컨대 그대는 한갓 기교함만 찾지 말고 請君莫徒探奇巧나의 〈해금강가〉 한 장을 들어보게나 聽我海剛歌一章노래를 다 짓고 나서 한 번 큰 소리로 부르고 문득 세상에 지음(知音)이 없는 것을 한하니, 물속의 어룡(魚龍)은 혹시 내 마음을 알까? 노래를 마치자 배를 돌렸다가 배에서 내려 입석점(立石店)에 들어가 쉬었다. 객점 사람이 점심밥을 마련해서 내왔는데 회(膾)에는 문어와 복어가 있었고 국에는 홍합이 있었다. 이 세 가지는 내 마을 근처 서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므로 그 신선한 것은 내가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어제 산중에 있을 때에는 항상 사삼(沙蔘 더덕의 뿌리)ㆍ석이(石茸) 등 평소에 드물게 먹던 세 가지 신선한 음식을 먹었고, 이제 해금강에 와서는 또 평소에 말려서 먹던 것을 먹었다. 요사이 동쪽 유람에 일행이 눈으로 기이한 장관을 실컷 보고 아울러 입으로 별미를 실컷 먹었으니, 속담에 이른 '금강산도 식후경'은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둔 말인 듯하였다.고성군을 돌아 지나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온정리(溫井里)에 이르렀다. 여기에 있는 온천은 목욕하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명산 아래 유명한 온천을 겸비했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여관의 성대한 상황이 도회지와 같았다. 남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어 신계사(神溪寺)로 들어갔다. 절이 산중의 넓고 평탄한 곳에 있는데, 뒤에 있는 작은 언덕이 큰 산을 가로막고 있으며 좌우의 자잘한 언덕이 또한 산기슭을 가려 골짜기 기운이 사랑스러웠고, 전각 또한 크게 지어졌다. 절에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원당(願堂)169)이 있는데, 정조(正祖)의 유학을 숭상하는 고견(高見)으로 필시 비례(非禮)로써 어버이를 높이지는 않았을 것이니, 혹시 일이 장조의 생전에 있었기 때문에 고치지 않았던 것일까?대저 이 산에는 4개의 큰 절이 있는데, 터[基址]로 논하자면 유점사가 으뜸이 되고 신계사가 그다음이고 표훈사가 또 그다음이고 장안사가 가장 아래이며, 사찰의 웅장하고 화려함과 창건한 시기가 오래된 것으로 논하자면 유점사가 또한 으뜸이 되고 표훈사가 그다음이고 신계사와 장안사가 가장 아래이다.밤에 골짜기 입구의 여관에서 유숙하였다. 여관 앞 높은 산봉우리 아래의 긴 골짜기에 흰색 물건이 수십 장(丈)이나 뻗쳐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흰 돌이나 사태(沙汰)로 여겼다가 자세히 보니 쌓인 눈이었다. 그런데 절 문 동쪽의 깊은 골짜기와 절벽에는 어디나 모두 그러하였으니, 대개 산의 북쪽 기슭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에 경탄하며 말하기를,"호남은 이 산에서 천 리에 불과한데도 기후의 차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무재령(霧在嶺)에서 보았던, 나뭇잎은 싹트기 시작하고 풀이 금세 마른 것은 오히려 괴이할 것도 없다. 일찍이 고시(古詩)의 '오월에도 천산에는 눈이 쌓이네.[五月天山雪]'170)라는 구절을 보고는 '다른 지방 먼 지역에 있어서 사람들이 보기 드문 것이므로 시인의 말에 실상과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다.'고 여겼는데, 우리나라 천 리 안에서 몸소 그것을 볼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만 겹 금강산이 장관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5월에 쌓인 눈도 보기 드문 기이한 경관이구나."라고 하였다.29일. 조반(早飯)을 먹은 뒤에 여장을 꾸리고 남쪽을 향해 갔으니,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다시 비로봉(毘盧峯)으로 오르기 위해서였다. 10리쯤 가서 하나의 석문(石門)을 만났는데 모양이 표훈사 동쪽에 있는 것과 같으나 더욱더 깊고 좁아서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것이 이른바 '외금강문(外金剛門)'인데, 하늘이 뛰어난 경관을 보호하고 아껴 안팎의 문까지 설치하다니 대단하였다.여기부터 위로는 길이 매우 울퉁불퉁하여 비록 정비를 하였지만 천연의 험난함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나무잔도[木棧]와 쇠난간으로 곳곳마다 방비하여 염려할 것은 없었다. 몇 리를 가서 옥류계에 이르렀는데 그 이름을 듣고 그 시내를 알 만하였다. 다만 이 산에 있기 때문에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니, 크게 어진 부형(父兄) 밑에서는 비록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더라도 크게 칭송받지 못한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또 비룡폭(飛鳳瀑)에 이르렀다. 폭포가 천여 척(尺) 산만한 깎아지른 절벽에서 떨어지는데 형상은 봉황이 머리를 든 것과 흡사했으며, 떨어지는 물이 많지는 않으나 가파른 바위에 부딪치므로 날아오르고 빙빙 돌아 나는 봉황의 날개처럼 되었으니, 처음 폭포의 이름을 지은 자가 참으로 잘 묘사하였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가느다란 폭포가 가파른 절벽에 걸려 細瀑懸巉壁드날려 돌며 봉황의 날개 되었네 揚旋作鳳翔자색 안개가 날아 거꾸로 오르고 紫烟飛倒上서설이 뿜듯이 처음으로 쏟아지네 瑞雪噴初雱언제 신묘한 도끼에 깎여졌다가 何日剜神斧이제 와서 속인의 눈을 긁어내나 玆來刮俗眶굶주려도 곡식을 먹지 않는다니 有能飢不粟이 물 마시고 배를 채울 만하리 飮此可充腸또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니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데 우르릉 쾅쾅대며 천둥이 하늘에서 진동하는 것과 같았으니 구룡연폭포(九龍淵瀑布)임을 알았다. 소리가 점차 가까워질수록 걸음걸이도 점차 나아가 멀리멀리 관망하니, 새하얀 것이 마치 천녀(天女)가 일천 자[尺] 누인 베[練布]를 아래로 드리운 것 같고 꿈틀꿈틀하는 것이 마치 풍백(風伯)이 한 쌍의 백룡(白龍)을 몰아 엎어지는 것 같아 참으로 놀랄 만하였다.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서 보니, 떨어지는 물은 그 수량(水量)이 냇물과 맞먹을 만하였고 서 있는 바위는 곧게 선 것이 곧장 절벽을 이루었다. 수량이 많기 때문에 소리가 웅장하고 바위가 곧게 서 있기 때문에 기세가 맹렬하였다. 폭포 아래에 형성된 커다란 돌절구가 물을 받아 한 빛깔 벽옥(碧玉) 연못이 되었는데, 그 넓이는 1묘(畝)쯤 되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어 벌벌 떨며 정신이 어지러워 감히 다가가서 보지는 못했으며, 우레처럼 울리는 소리에 귀가 멍멍하고 눈처럼 뿜어대는 물보라에 옷이 젖어 또한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주민에게 들으니 폭포의 길이는 300여 척이고 연못의 깊이는 45척인데 아홉 마리 용은 지금 없다고 하였다.동천(洞天)은 넓고 툭 트였으며 반석(盤石)도 좋은데, 바위에 우암(尤菴)이 손수 쓴 '노폭중사 사인현정(怒瀑中瀉使人眩精)'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고, 또 '천장백련 만곡진주(千丈白練萬斛眞珠)'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누구의 글씨인지는 몰랐다. 대개 감히 다가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바위 위에 오래 머물며 앉아서 보고 또 차마 놔두고 가지 못했다. 예전에 최북(崔北)171)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천하의 명사(名士)인 최칠칠(崔七七)은 천하의 명승지에서 죽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몸을 날려 연못으로 뛰어들었으나 곁에 있던 사람이 구해주어 죽지 못했다. 최북이 비록 미친 흥취의 부림을 받았으나, 이를 통해서 또한 구룡연폭포의 기절(奇絶)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읊었다.하얀 은하수를 거꾸로 쏟아 倒瀉白銀漢문득 벽옥 연못을 만들었네 翻成碧玉淵눈서리가 여름날에 날리고 雪霜飛夏日벼락이 갠 하늘에서 일어나네 霹靂起晴天눈이 놀라서 처음엔 멀리 바라보고 駭眼初望遠정신 어지러워 문득 다가가기 두렵네 眩精却怕前여산이 어찌 여기보다 낫겠는가 廬山那勝此그래서 나는 청련172)을 비난하네 而我非靑蓮여기에서 서쪽으로 골짜기 하나를 넘으면 팔담(八潭)의 승경이 있다고 들었으나 또한 만폭동에서 본 것과 대략 서로 비슷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구경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30리를 오르면 비로봉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행 중에 비사문(飛沙門)의 위험을 꺼려서 결연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서 결국 길을 돌아가기로 계획을 바꿔 신계사(神溪寺)로 되돌아갔으니, 비록 다리가 피곤해지는 것은 싫었지만 이로 인해 다 구경하지 못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조금 나았다.절 안에 김동신(金東信)이라는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와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일행이 모두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또 김동신이 너무 늙어서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기는 어렵다고 하기에 그만두고 말았으니, 이러한 명산에 들어와서 최고의 산승(山僧)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은 하나의 흠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승려 이외에도 도를 품고 재주를 지닌 채 깊이 은둔하여 드러내지 않은 선비가 혹 이 산에 있을 것인데도 만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일까? 아마 그를 만났는데 나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서 외면한 것인가? 아니면 근래에 이 산을 이민족이 더럽혀 다시는 예전의 금강산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곳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가버린 것일까? 한탄스러울 따름이다.삼선암(三仙菴)과 보광암(普光菴)이 이 근처에 있다고 들었으나 모두 구경하지 않았다. 한낮이 지나 걸음을 재촉하여 온정리(溫井里)로 나간 다음에 서쪽으로 돌아가서 갈봉점(葛峯店)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산길을 20리 가는 동안에 비록 기이한 구경거리는 없었으나 양쪽 절벽의 푸른빛과 온갖 시냇물이 또한 예사로운 경색(境色)이 아니었다. 지포(止浦)173) 선조의 〈분수령도중(分水嶺道中)〉 시 "두견새 소리 속에 청산뿐인데 종일토록 빽빽한 숲속을 헤치며 걷네. 한 시냇물 건너려면 몇 굽이였던가, 흐르는 물 보내고 나면 또 흐르는 물이네.[杜鵑聲裏但靑山 竟日行穿翠密間 渡一溪流知幾曲 送潺潺了又潺潺]"라는 두 연(聯)을 암송하고 말하기를,"선인(先人)의 시에서 이미 이곳의 경색을 묘사였으니, 후인이 비록 시를 짓고 싶은들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밤에 하늘빛이 아주 어둡지 않은 것을 보고 달빛이 있어서 그런가 의심하였으나 문득 그믐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흰 옥을 깎아낸 듯한 산봉우리들이 창문 앞에 둘러서서 영롱하게 서로 비추어 이렇게 밤에도 환하게 하는 것을 본 뒤에야, 참으로 이 산의 수려하고 신령함은 모르는 사람과는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을 알았다.5월 1일. 아침 일찍 몇 리를 가서 이른바 만물상(萬物相)에 올랐다. 대개 산봉우리와 암석의 기괴한 것이 여기에 모두 모여 있는데 만물과 모습이 닮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내가 〈만물상가(萬物相歌)〉 한 편을 지었으니, 이것을 보면 그 대강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장군의 갑주는 전장에 임한 듯하고 將軍甲冑臨戰陣깃발과 창검은 별과 해처럼 빛나네 旗幟鎗釰耀星日삼천 제자가 공자를 모시고 있으니 三千弟子陪聖師서가와 들보 채울 듯 서적이 쌓였네 盈架充棟積緗帙청묘에서 현상은 관면이 엄숙하고174) 淸廟顯相儼冠冕술동이며 제기들이 차례로 진열됐네 樽俎籩豆陳秩秩천상의 음악을 어느 날에 만들거나 勻天廣樂何日作우뚝한 숭아175)를 오히려 없애지 않았네 樅樅崇牙猶不輟촉대와 향로를 가지런히 배열해 두고 燭臺香爐排整齊승려들이 머리 숙여 부처에게 예배하네 群僧府首禮尊佛군왕이 사냥하고 깊은 밤에 돌아오니 君王田獵暮夜歸늘어선 횃불 천 자루가 이글이글 타오르네 列炬千把燄燄爇온갖 새는 펄펄 날며 다투어 뒤따르고 百鳥翩翩爭追隨봉황은 천 길을 날아 단혈에서 나오네 鳳翔千仞出丹穴여우 꿩 토끼가 놀라 안정하지 못하는 건 狐狸雉兎驚不定매와 사냥개가 사납게 채가고 물어뜯어서네 東靑韓盧搏噬烈뾰족뾰족한 필봉은 셀 수가 없고 尖尖筆鋒不可數비 온 뒤의 죽순은 어지러이 돋아나네 雨後竹笋亂抽出뾰족한 사슴뿔은 서로 끌어당기고 觺觺鹿角交相掎천 년 된 고목은 뼈대만 남아 있네 千年枯木但餘骨만물과 꼭 닮은 게 이것뿐만 아니니 酷肖萬物不止此어찌 낱낱이 필설로 형용하겠는가 那得箇箇形筆舌하늘에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謂天有心歟조물주가 사소한 데 애쓰지 않았을 테고 造化必不勞屑屑하늘에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謂天無心歟기교가 어찌 이처럼 치밀하겠는가 奇巧安能似此密그 이치는 막연하여 물어볼 수 없으니 厥理茫茫不可詰아마도 산하가 개벽하던 날에 應是山河開闢日밀반죽 빚듯이 많아 한둘이 아니었으리 有若磨麪紛不一뜻밖에 그 공교함이 자연히 이루어져 不期其巧自然成하늘 또한 그 실상을 알 수 없었으리 天亦莫能知其實속안으로 무단히 놀라 서로 바라보니 俗眼無端驚相視마음이 있고 없고를 다시 어찌 말하랴 有心無心更何說한번 지인이 만사에 응하는 걸 보게나 請看至人應萬事더욱이 비상함이 있어 신출귀몰하다네 更有非常神出沒도리어 일상 속에 기이하게 변한 곳이니 還是常中奇變處세상 사람들이 특별하게 볼 필요가 없네 不必世人看自別또 신만물상(新萬物相)과 오만물상(奧萬物相) 두 곳이 있지만, 아마도 또한 여기와 대동소이할 것이기에 가서 구경하지 않았으니, 대개 이곳에 이르러 외금강의 탐승(探勝)을 마쳤다.대저 비로봉 이남부터 내무재령 이내를 내금강이라 하고 비로봉 북쪽부터 내무재령 밖을 외금강이라고 하는데, 승경의 많고 적음은 내금강과 외금강이 서로 대등하였다. 농암(農巖)의 일기(日記)176)에서 "내금강은 바위가 많고 흙은 적으며, 외금강은 흙이 많고 바위는 적었다."라고 한 것은 실제가 아니었다. 하나의 금강산이 모두 바위인데 바위는 산의 골격이니 개골산(皆骨山)177)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실제적인 말이다. 그 '일만 이천 봉우리'라 한 것은 아마도 산 위의 돌부리가 뾰족뾰족 높이 솟아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산이 아무리 크다지만 어찌 실로 이름을 붙일 만한 봉우리가 이렇게 많이 있겠는가. 가령 내금강의 바위가 외금강보다 많고 외금강의 흙이 내금강보다 많다고 하는 것은 괜찮다.온정령(溫井嶺)을 넘고 신풍리(新豊里)를 거쳐 말휘리(末輝里)에 이르러서 차를 타고 다시 장안 여관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여행 도구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로봉까지는 40리 넘게 떨어져 있는데, 일행이 모두 농사일을 돌아가 점검하는 데에 급하고 게다가 오르기 어렵고 고생스러움을 꺼려서 다음날에 곧장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자 내가 말하기를,"비로봉은 금강산에서 가장 큰 볼거리인데, 노(魯)나라에 가서 십철(十哲)178)만 만나고 공자를 뵙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게다가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고 우물을 파더라도 샘물에 미치지 못하면 유시무종(有始無終)의 수치가 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하였는데, 이 두 가지 좋은 비유가 일행의 마음을 움직였다. 곧장 함께 길을 재촉하여 올라가 겨우 표훈사 앞에 당도하였으나, 해도 저물고 다리의 힘도 소진되어 이곳에서 유숙하였는데 일전에 묵었던 여관이었다. 여관 할멈이 자기의 친정이 전주이기에 우리를 같은 도(道) 사람이라고 하면서 곱절이나 더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밤에 아우 여안(汝安)179)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함께 올 수 없었던 한탄과 신라 태자의 유적에 서글펐던 마음을 대략 말하였고, 또 시 두 수를 지어 하나는 자정(子貞 조제원(趙濟元))에게 사례하고 하나는 족제(族弟) 희숙(希淑)-현술(賢述)-에게 부쳤다. 자정에게 사례한 시는 다음과 같다.좋은 일은 원래 마음대로 하기 어려우니 好事元難得自由이번 여행에 결국 그대와 짝하지 못했네 此行竟失與君儔동쪽으로 오니 곳곳마다 명승지가 많아 東來到處多名勝늙어 가며 울적함을 풀기에 조금 낫네 老去差强散鬱幽망망한 큰 바다는 어느 곳이 끝이런가 滄海茫茫何地限우뚝 솟은 금강산은 중천에 떠 있구나 剛山矗矗半天浮다시 높은 곳 올라 머리 돌려 바라보니 更登高處回頭望오늘 한 사람이 빠진 수심을 어찌하랴 其奈今朝少一愁희숙에게 부친 시는 다음과 같다.세상 밖에 있는 금강산 자취를 物外金剛迹조만간 함께 찾아가자 약속했네 聯筇早晩期굳센 용이 어찌 오래 칩거하랴 矯龍何久蟄고달픈 학 또한 높이 날아가네 倦鶴亦高飛구룡연폭포에서 마음 씻어내고 九瀑洗心處비로봉에서 마음껏 바라보았네 毘峯縱眼時그대보다 기묘한 이야기 적어 少君奇絶話머리 돌려 서글피 생각해보네 回首悵然思2일. 다시 만폭동ㆍ마하연을 지나 북쪽으로 꺾어 비로봉에 오르니, 바람이 일고 구름이 흩날려 비 올 기미가 매우 컸다. 그러나 이미 중도에 이르러 나아가기도 물러나기도 어려웠기에 할 수 없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바람 기세가 잠시 잠잠하고 구름 기운이 홀연 걷혀 정상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나의 신천지가 환하였다. 내가 일행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형산(衡山)에서 구름을 걷히게 하는 것180)은 한문공(韓文公)만 그러한 것이 아니네. 우리들이 비록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어찌 그것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겠는가."하였다.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니 서남북(西南北) 3면이 온통 산인데, 모두 높은 봉우리와 거대한 산으로 성(省)이나 군(郡)을 진호(鎭護)하는 것이라 생각되었으나 내려다보면 한 줌 한 줌 작은 언덕이 마치 자리에 깔아둔 콩과 같았다. 동쪽은 큰 바다인데 물이 하늘과 잇닿아 멀리 볼 수가 없었고 다만 하나의 편평한 호수처럼 보였다. 구름과 비가 눈[眼] 아래에서 나직이 맴돌고 하늘 바람이 뼛속에 파고들어 참으로 높은 곳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높은 곳으로는 백두산이 최고이고 이 봉우리가 그다음이다."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의 말일 것이다.옛날에 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181) 이는 처한 곳이 더욱 높으면 보이는 것이 더욱 낮음을 말한 것이니, 이 산에 올라와서도 평소 득실을 근심하고 비굴하게 처신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모르는 자는 참으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무력을 남용하여 남의 나라를 빼앗은 자들은 또한 무슨 마음인가? 아, 어떡하면 이웃나라가 각각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는 치세(治世)를 다시 볼까? 저 바다의 동쪽 일본을 바라봄에 회계(會稽)의 수치182)와 신정(新亭)의 눈물183)을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저들의 군상(君相)으로 하여금 이곳에 오르게 하여 그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살찌운 죄를 뉘우치게 한다면 얼굴 붉히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아니면 한갓 눈으로만 보고 마음으로 보지 않을지는 나 또한 알지 못하겠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시 한 편을 지었다.봉래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한 번 오르니 一陟蓬萊上上峯땅이 동해에 다하여 동쪽 땅이 다시 없네 地窮東海更無東눈 아래에 운하가 희어 갑자기 놀라고 乍驚眼底雲霞白머리 가에 일월이 붉은 줄 문득 알았네 忽覺頭邊日月紅득실이며 영고성쇠는 온통 헛된 꿈이요 得失榮枯都幻夢존망이며 흥폐도 모두 헛것이 되었구나 存亡興廢總成空중생들이 어떡하면 일제히 여기에 올라 衆生安得齊登此흉금을 넓게 열어 크게 공평함을 지을까 恢拓胸衿作大公저번에 청암 스님이 마의태자의 묘소가 비로봉 서북쪽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번에 배알해야겠다고 작정하여 묘소에 고하는 글까지 한 통 지어놓았다. 그런데 지금 보건대 수풀 가득한 산에서 길을 찾을 수가 없고 게다가 물어볼 사람도 없어 찾아가 성묘를 하려면 하루를 허비해야 했다. 한편 일행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화살과 같아서 오히려 비로봉도 포기하고 구경하지 않으려던 사람들이 어찌 내 말을 기꺼이 들어주겠는가. 천 리 머나먼 길에서 홀로 뒤에 처지는 것도 불편한 점이었다. 며칠 동안 바라던 것이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매우 서글프고 서운하였다. 다만 묘소에 고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니, 그 글은 아래와 같다.단군이 나라를 세운 지 4263년 세차(歲次) 경오년 5월 무인삭(戊寅朔) 2일 기묘에 먼 후손으로서 본관이 부령(扶寧)인 김택술은 분향재배하고 공경히 신라 왕태자의 묘소에 고합니다.아, 우리 선조여 嗚呼我祖천지의 굳센 기운이요 天地剛氣산천의 빼어난 영기로 河岳秀靈신라 말엽의 겁난을 만나 値羅末劫우리 선조께서 태어나셨네 我祖挺生고려는 나날이 강해져서 有麗日强삼한 땅을 석권하였으니 席捲三韓용맹한 군대가 남으로 내려옴에 貔貅南下그 기세는 산을 무너뜨릴 듯했네 勢若崩山부왕이 나라를 양보한 것은 父王讓國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일이나 事出無柰지극한 정성으로 충성스레 간언하고 赤誠忠諫대의로써 결단하였네 斷以大義일천 년 이어온 사직을 千年社稷가벼이 버릴 수는 없었기에 不可輕棄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서 背城一戰죽을 때까지 변치 않고자 했네 至死無二글자마다 비통한 마음이 담겨 字字惻怛하늘에 물어볼 만했으나 上蒼可質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言不見用시국이 바뀌고 말았네 時局變置묵묵히 의체184)를 궁구하건대 默究義諦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我適何地저 개골산을 바라보니 睠彼皆骨그 골짜기가 그윽하였네 有幽其谷삼베로 옷을 지어 입고 有麻其衣풀을 채취하여 먹으니 有草其食산도 슬퍼하고 물도 오열하여 山哀浦咽애통하게 곡하였네 有痛其哭따르는 자가 구름 같아 從者如雲군사가 삼십만이었으니 有軍三億저 송악을 바라보건대 視彼松岳어찌 하루라도 잊겠는가 豈忘一日타고난 운수는 정해져 있어 天數有定끝내 인력으로는 어렵기에 竟難人力망군대의 서쪽에 望臺之西성을 쌓고 집을 지었네 築城作室수미암에서 須彌之菴타고난 수명을 마쳤으니 天年以卒생애와 역사는 生平歷史모두 기술할 점이 있네 俱有可述비로봉의 북쪽에 毘盧之北엄숙한 무덤이 있으니 有肅塋域승려와 속인들이 달려와서 僧俗趨走다투어 초동과 목동을 금했네 爭禁樵牧곧은 충정과 큰 의리를 貞忠大義능히 이와 같이 이루었으니 能致是若예전에 한나라가 망할 때 在昔漢亡유심과 같은 점이 있었네185) 有若劉諶늠름한 기상이 넘쳐 나서 凜凜生氣고금에 외워서 전해지니 誦傳古今세상도 다르고 지역도 달랐으나 殊世異域공은 모두 한결같은 마음이었네 公乃一心동경의 의로운 충렬이요 東京義烈북지의 뛰어난 풍도라고 北地英風여덟 글자를 돌에 새기니 八字石刻상론이 공평하였네 尙論之公아아 嗚呼개골산의 승경은 皆骨之勝천하에 기이하고 빼어나며 天下奇絶간언하다 도망한 행적은 諫逃之蹟만고에 뛰어나 우뚝하네 萬古卓截이런 산에 이런 행적이 此山此蹟서로 어우러져 더욱 빛나 相得益章우리들이 와서 탐승하고 我來探勝그로 인해 묘소에 절하네 因拜斧堂일은 비록 인연을 따랐으나 事雖夤緣공경을 다하는 건 전일했네 致敬則專다만 산하를 돌아보건대 顧瞻河山이미 이전 모습을 바꿨으나 已改前色만난 상황이 똑같은지라 所値之同광감186)이 더욱 간절하네 曠感益切적막한 궁벽한 산에서 寂寞窮山제문 한 폭을 바치노니 獻文一幅진실한 마음 한 조각은 赤心一片고금에 없던 것이리라 無今無昔아아, 존령께서는 嗚呼尊靈부디 밝게 살펴주소서 庶垂鑑燭이날 저녁에 장안 여관으로 다시 와서 유숙하였다.3일. 회정(回程)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에 다시 세 가지 차187)를 잇달아 타고 갈 예정이다. 예전에 듣건대 단발령(斷髮嶺) 위에서는 금강산 전체의 진면목을 구경할 수 있지만 지금은 차를 타고 고개의 터널로 출입하기에 하얗게 눈이 덮인 모습과 훌쩍 티끌세상을 벗어난 형상의 전체를 보지 못한다고 하니 흠이 될 만하다.대저 궁실(宮室)을 살펴볼 때에는 먼저 외면의 대체(大體)를 본 뒤에 들어가서 많은 간가(間架 칸살)를 자세히 보는 법인데 사람을 살펴보는 것도 그러하다. 지금 나는 이와는 반대로 하여 먼저 산중의 세세한 경관을 보고 대체는 아직도 보지 못했으니, 소동파가 이른바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는 것을 여기서 증험할 수 있었다. 비록 그러하지만 산에 들어가 비로봉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것ㆍ유점사의 맑고 그윽함을 즐긴 것ㆍ정양사의 뛰어나고 탁 트임을 완상한 것ㆍ구룡연폭포와 만폭동의 기인한 장관에 소리친 것ㆍ만물상의 괴이하고 신묘함을 읊은 것 등 여섯 가지는 금강산의 큰 구경거리니, 대개 이 여섯 가지 구경거리는 이른바 '대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대저 이 산은, 충의로는 신라 태자와 김매월당(金梅月堂)의 유적이 있으며, 도학으로는 율곡(栗谷)ㆍ우암(尤菴)ㆍ농암(農巖)ㆍ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의 유람이 있으며, 문장으로는 최고운(崔孤雲)과 양봉래(楊蓬萊)의 필적(筆跡)이 있으며, 그 밖에 달관 명사(達官名士)들의 자취도 셀 수 없을 정도에 이른다. 그러나 당초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주인이 되어 산골짜기를 가득 채운 것은 불가의 사람들이다. '금강(金剛)'188)으로 산 이름을 붙인 데에서 살펴보면 이미 알 수 있으니, 비로봉ㆍ관음봉ㆍ지장봉ㆍ수미봉ㆍ법기봉 등의 명칭도 이와 같다. 청암 스님이 저번에 말한, '김 태자(金太子 마의태자)의 굳센 충의[剛義]에서 취하여 금강으로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일리가 있는 듯하나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문득 세계의 공원이 되어 불가에서 장차 주인노릇을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또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내가 시 한 수를 지어 온 산을 총괄하여 읊었으니, 시는 비록 격에 맞지 않으나 실제를 묘사한 것은 괜찮다. 시는 다음과 같다.듣건대 삼신산189)이 동해에 있는데 聞說三神在海東이 산의 절승도 동참할 수 있다네 此山絶勝得參同일천 봉우리 하얗게 모이니 눈이 덮인 듯 千峯白攢疑封雪일만 폭포 요란하니 바람이 세차게 이는 듯 萬瀑爭喧怒起風금강 개골 풍악 봉래로 번갈아 변할 때요 剛骨楓萊交幻際유선190)과 도가 불가가 왕래하는 중이네 儒仙道釋往來中산신령 또한 오늘날의 세태를 알아서 地靈亦識今時態공원을 만들어 세계로 통하게 하였네 許作公園世界通내가 이곳에 대해 또 한 가지 할 얘기가 있다. 대저 명산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뛰어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실로 초탈하게 외지고 멀어 사람들이 드물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밖의 선경[物外仙境]'이나 '별천지가 있다[別有天地]'로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전에 듣건대 금강산은 맑은 인연이 없는 사람은 이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탐욕스러운 놈이나 더러운 놈이라도 만일 돈만 있다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차바퀴와 사람의 발자취가 산과 바다를 이루니 선경이며 별천지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노승(老僧)이 '금강산의 맑은 유람이 파괴되었다.'고 탄식한 것은 그 뜻이 깊다고 하겠다.또 생각건대 이 산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부류에는 여관을 운영하는 자ㆍ안내자ㆍ사진을 찍는 자ㆍ글자를 새기는 자ㆍ가마를 메는 자가 있는데,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 모르나 내금강산의 장안사 동구(洞口)와 외금강산의 온정리에 여관을 짓는 것을 아직도 그만두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보건대 전국의 재산을 이 산에 낭비하는 것을 1년 동안 계산해 보면 또 얼마나 많은 거액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산에 의지하여 먹고사는 자들이 결국 우리나라 사람이니, 이른바 "초나라 사람이 잃어버리면 초나라 사람이 얻을 것이니 오히려 무방하다."191)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세를 살펴보건대 여관처럼 큰 이득이 있는 것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저들의 차지가 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대저 종(鍾)은 기뻐서 치면 소리가 즐겁고 슬퍼서 치면 소리가 애절하다.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도 그러하여 기쁜 마음으로 구경하면 장관(壯觀)이 되고 불평한 마음으로 구경하면 '비관(悲觀)'이라 할 만하니, 만일 비관이 된다면 또 어찌 구경을 일삼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 산의 티끌조차 없이 깨끗함과 산 너머 동해의 끝도 없는 물이라는 두 경관의 장엄함이 모두 한 곳에 모여 만고토록 변치 않았으니, 또 인정의 희비(喜悲)와는 애초에 무관하다. 산에 티끌조차 없어 나의 물욕을 없앨 수 있고 물이 끝도 없어 나의 덕량(德量)을 넓힐 수 있으니, 학자가 금강산을 한 번 구경하는 데에 끝내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인하여 온 산을 구경하며 느낀 점을 총괄하여 기록해서 뜻을 같이 하는 자가 미리 보는 데에 대비한다.경오년 5월 상순에 집에 돌아와서 정서(淨書)하다. 自古道人有大願, 必曰"識盡天下好人物, 觀盡天下好山水". 蘇黃門以見終南、黃河, 至比幷於見歐陽公, 則山水之觀之不可已也, 有如是夫! 唐人有"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之詩, 余疑中國自有五嶽, 金剛雖勝, 何至乃爾? 近自汽車交通, 余友亦多見中國而歸者, 皆言"中國之山如五嶽, 高雄則誠是矣, 而其奇絶則有遜於東國之山". 蓋金剛, 東國之山之最奇絶者, 則唐人之詩, 果有由矣, 至於海外列國之山, 則以余所考《瀛寰志略》例之, 已見其無足言矣. 以此言之, 其爲東西洋惟一名山, 斷可知已. 是以我邦儒先栗谷、尤菴、農巖以下諸先生, 無有不觀此山者矣. 余素有山水之癖, 金剛一遊, 固素願也, 而中年奉老, 戒在遠遊, 近復世變已極, 恐非食舊士子遊衍時. 是以欲往未果者累矣. 今年春, 索居無聊, 趙弟子貞【濟元】請余同往. 余惟今之世, 好人物亦有時而改其度, 若山水則無情者, 必不以世變而變其好, 則好山水之不可不觀, 更有甚於見好人物矣, 且古人之感傷時事者, 固有寓迹於山水者, 則今者之行, 似無害義. 遂與子貞約以三月晦日登程, 因天久雨, 退以四月十日. 朴友善明【塽九】、徐友允三【種台】聞余東遊, 亦請聯袂. 及期, 因朴友有故, 猝難啓行, 子貞以親忌在來初, 計往返日子, 恐不逮, 故罷行. 余戱謂子貞曰: "曾聞金剛, 有緣者乃得觀, 君其無緣者耶? 抑不以因人敗事, 有所怨尤否?" 子貞笑曰: "緣自己作, 只爭爲否, 雖有早晩, 元無有無. 因我因人, 時處則然, 隨寓安安, 何敗何尤?" 余聞之, 歎其有似得道者言. 乃謂子貞曰: "君之胸衿, 已脫塵埃, 金剛山在其中矣. 彼東海上鬱然而蒼者, 雖無觀, 亦何傷?" 因與相笑而罷. 乃以是月二十三日發旆, 朴友先發, 已俟中路, 徐友及朴友子根浩同伴. 二十四日. 未暮, 抵長安寺洞口. 距家凡千餘里, 而乘沿路急車, 故若是其迅也. 鐵原以前用汽, 以後用電, 自末輝里用自動. 未及長安十里, 已覺山形非常, 車中有詩曰: "未到山中眼忽明, 已覺群峯玉刪成. 行行漸入眞佳境, 一步移時一換形. " 夜宿寺門外旅館. 館臨絶澗, 兩水交流, 萬松參天, 終夜所聞, 惟松籟水聲, 淸爽殆非人境. 一行皆叫好曰: "此已如此, 其佳處若萬瀑、九龍, 當復如何?" 余曰: "此學習而悅境界, 到成德極處, 又難言. " 夜有一詩曰: "東遊一迹太遲遲, 總爲棼棼世故縻. 今到金剛山裏宿, 有心終見事成時. " 二十五日. 歷雲住門, 始入長安寺. 局勢雖峻雄, 未見有奇勝, 一行曰: "反不如寺外館前所見. " 余曰: "否. 山益邃而林益密, 此不奇之奇也. " 殿宇亦頗傑壯, 而方重修佛殿, 加構其上, 作二層矣. 寺之刱, 蓋在麗朝中葉以後, 而或云爲元奇皇后願堂而設. 蓋此行亶在探山水之勝, 則寺院歷史, 有不足究問也. 東偏神仙樓懸板上, 多有時人詩作, 而板高字細, 不可觀, 亦不必觀也. 離長安渡澗, 南入小徑, 巖石崎嶇, 樹木蒙密, 溪澗奔流觸石, 作雷轟聲. 沿溪而行, 往往失路, 誦杜工部"高江急峽雷霆鬪, 古木蒼藤日月昏"之句曰: "身親經歷, 然後益知古人詩工也. " 間復遇洞稍敞、林稍疏、水益淸、石益白、峯益奇處, 大叫奇壯淸絶, 人聲與澗聲相和, 跨石而坐, 群峯若俯首拱揖然, 可喜也. 行不到五六里, 有明鏡臺, 臺下有黃流潭. 臺則巨巖自平地聳立數十丈, 四方直削, 僧輩托冥府用明鏡照察罪人之說, 冒是名. 潭則廣可二畝, 澄綠可愛. 又冒名爲黃泉江, 豪富家女子來此, 多投錢水中, 供永歸日贐資云. 潭上西南, 石岸陡絶, 上有平巖四圍, 有頹城, 是爲新羅太子【僧云麻衣太子】所居處. 立白標木, 書"太子城"三字, 巖上刻"東京義烈, 北地英風"八字, 云是梅月堂金公所題. 其傍有金光國、金藎國諸金氏題名. 回渡黃流潭, 南行少許, 路左寬平處, 亦有標木, 書"新羅古迹"四字, 是爲太子宮室遺址, 山中人稱爲大闕址. 此南十里, 有望軍臺. 太子諫父不聽, 故逃入此山, 時率軍三億, 欲伐高麗, 留陣山下, 登此臺而望之, 故得是名, 洞亦有三億名云. 余嘗觀《羅史》, 云"敬順王請降于高麗, 太子諫曰'當與忠臣義士, 以死自守, 力盡而後已, 豈以一千年社稷, 一朝與人乎'. 王曰'孤危若此, 勢不能全, 不忍使無辜之民肝腦塗地', 終不聽. 太子哭辭而入皆骨山, 麻衣草食, 以終其年". 《金氏譜ㆍ王世系》所載亦然, 而伐麗望軍之說, 來此始聞. 《羅史》云"失其名", 而吾《金譜》云"諱鎰, 一云謙用", 又云"子孫爲扶寧金氏". 吾金先世, 亦多博識高見, 書諱書孫, 其必有據矣. 蓋太子之烈烈大義、凜凜英風, 固不待贊辭而著者, 將億萬世之所當欽仰, 矧此今日屋社後所遭之同乎? 凡有秉彝者之莫不慷慨悲怛, 況吾諸金之同出敬順王者乎? 謹賦一詩識感, 詩曰: "泣諫歸來入此逃, 至今遺迹未全銷. 東京王氣千年盡, 北地英風萬丈高. 坐草衣麻心獨苦, 望軍築壘力徒勞. 幾多行客追傷感? 一倍忉忉後裔苗. " 題罷, 遂向望軍臺. 中路聞有危險懸鐵索處, 一行皆憚之曰: "諒吾輩筋力, 何能陟此絶險? 且坐不垂堂, 古人有戒. 此臺雖極高宜望遠, 遠不及毘盧. 毘盧一陟, 在所不已, 則舍此不觀爲得. " 余則專爲太子古迹, 期欲一上, 然臺上旣空無一物, 而絶險又若是, 何苦違衆獨行? 但自下瞻望想象足矣. 乃右轉而入靈源菴少憩. 菴甚幽邃, 麗朝忠惠王時所刱云. 居僧全德眞兼治敎禪兩科, 戒行頗專一. 今世僧家學絶, 想與儒門一般, 而尙有如此人, 可尙也. 客僧趙慧山云居全州, 謂同道人, 款待頗厚. 德眞指菴前所見諸峯, 云地藏、云十王、云罪人者, 爲說歷歷. 余笑曰: "此固汝家說. 地下本無十王, 設有之, 宜在地下, 安得出居此山上? 旣在此山, 則他山亦應有之. 若然, 十王將爲百王, 而反不爲輕耶?" 相笑而別. 回尋來路間, 已忘失一行, 散覓舊蹤, 迭呼互出, 往往作迷藏之戱, 亦可笑也. 日幾晡, 始出長安東平路, 迤邐上去, 得鳴淵瀑. 瀑長六七丈, 勢頗壯, 瀑下澄潭, 尤深廣可玩. 一行中有誦一絶詩"平生自謂心無慾, 到此方知心志遷. 巖下明珠千萬斛, 可移移置草堂前"曰: "此可謂先獲我心也. " 顧謂余曰: "聞此是艮翁金剛山中作, 子應知之. " 余曰: "曾所未聞, 然先師少時, 曾遊此山, 此在其時歟. 此是無慾之慾, 雖無害於淸德, 比諸坡仙'淸風明月, 取無禁, 用不竭'之語, 猶似有公私之別. 此尙爲少時作而未得盡善, 故不入稿而未之聞歟. " 行數里, 到三佛巖. 剜巨巖, 刻大佛形, 儼然可畏. 非惟三箇而名三佛者, 想仍舊也. 前抵表訓寺不入, 直上正陽寺, 量日力也. 雖無巖石險, 却峻急若上天. 旣達於寺, 則境落超絶通豁, 全山一帶, 羅列眼前, 可以拊背撫頂. 歇惺樓欄外, 刻木作諸峯形, 安于板上. 隨峯大小高下, 若毘盧、永郞、須彌及日出、月出、天一臺等類, 而各異其形, 各識其名, 而各向其方, 不待周覽而瞭然在目, 使遊人可省多少神力矣. 農巖所謂"入金剛山, 只觀正陽寺, 餘不足觀"者, 豈非以此也歟? 乃次板上一韻曰: "萬二峯眞面, 樓頭歷歷看. 行人不登此, 枉到金剛山. " 以絶勝也, 故題名題詩, 盈樓楣樑, 而古人名作則絶無矣. 余謂居僧曰: "曾聞鄭湖陰《正陽寺》詩, 膾炙於世, 此無懸板何也?" 因誦之曰: "'萬二千峯領略歸, 蕭蕭落葉打秋衣. 正陽寒雨燒香夜, 蘧瑗方知四十非', 而其不知乎?" 僧曰: "小僧亦曾聞此詩, 從前未見此樓此板. " 余曰: "可知之矣. 古人骨已朽, 今人腕力强, 拔趙旗立漢幟, 豈獨軍中爲然? 所可歎者, 炎凉市道亦在萬山中. " 用湖陰韻, 偶成一絶, 單道破"歇惺"二字, 詩曰: "微此歇惺誰與歸? 好敎遊子拂塵衣. 歇惺中也分虛實, 慧眼看來辨是非. " 寺則小刹也, 有六角殿頗精巧, 一座小石塔, 新羅時所造, 寺內印藏《八萬大藏經》, 凡六千五百餘冊云. 已而下來入表訓寺. 寺甚雄壯縝密, 知其爲饒刹. 殿宇之麗, 自不必說, 中有大鍾二、大銅甑蒸米四十斗者一, 甑則光廟所賜, 餘未及詳玩. 問表訓何義, 僧曰: "刱者新羅僧表訓也. " 形勢周匝甚緊, 亦頗平豁, 澗流回抱, 比長安寺基, 加優幾格. 寺南數武地, 有月沙所撰西山禪師碑、靜觀齋所撰義諶禪師碑. 又有酬忠閣, 繪圖懶翁、無學、西山、泗溟以下諸禪師有功國家者肖像, 揭奉壁上, 扁云酬忠, 則是朝家所命也. 碑與閣, 係白華菴所管, 而菴則不入. 夜宿迎仙橋內旅館, 得《表訓寺》詩一首曰: "誰歟刱此寺? 云距一千年. 恩賜來王室, 法師鎭徼邊. 樓臺飛翬翼, 鍾磬徹龍眠. 形勝難題得, 不才愧許燕. " 二十六日. 東上尋萬瀑洞去, 距表訓未幾. 兩大巖對峙, 又一大巖橫覆其上, 長廣僅通行人. 是所謂金剛門, 天之秘護勝狀, 設門關而守之者, 乃若是多事歟? 行三四里, 洞口稍豁, 兩岸及平底, 全用白石爲地. 水自毘盧、永郞、須彌、內霧在諸峯而來者, 至此而勢益壯, 得石之橫截壁立者, 輒直瀉爲瀑, 從此以上十里强, 在在皆然. 是所謂萬瀑洞, 而石上所刻楊蓬萊筆三大字已報知其名, 又有蓬萊筆"蓬萊楓嶽元化洞天"八大字, 幷皆雄建蜒蜿, 龍蛇飛騰, 眞奇絶地, 奇絶筆也. 瀑長雖不甚高, 以其若是多者難得爲貴. 瀑下輒匯爲澄潭, 有八潭, 名曰黑龍、曰碧霞、曰琵琶、曰噴雪、曰眞珠、曰龜、曰船、曰火龍, 因其命名, 而潭瀑之實狀, 槪可想也. 蓋瀑不至萬而曰萬者, 盛言之也, 潭不止八而曰八者, 選言之也. 瀑之斛斛眞珠, 潭之面面明鏡, 瑩徹奇壯, 有難形喩, 手掬淸波, 且飮且盥, 覺得夙生葷血, 一洗洗下, 心與境會, 悠然忘歸, 乃知古人沂雩風浴, 其樂有在, 登臨竟日, 亦非太康也. 因有一絶詩曰: "片片琉璃斛斛珠, 潭潭瀑瀑展新圖. 洗醒多少人心目, 作此天工意豈無?" 眞珠潭上, 有所刻古詩"淸溪白石聊同趣, 霽月光風更別傳"、"物外只今1)成跌宕, 人間何處不啾喧"二聯, 尤菴筆也, 摩挲心畵, 宛然若昨日事. 蓋尤翁之遊此山在晩年, 因想當時雖經淸亂之後, 國家尙能自保, 四徼不見兵塵, 而況此山淸絶之超出物外者, 豈容半點塵氛? 先生所筆, 正得著題. 今焉國不爲國, 全疆三千, 異類充斥, 若此深山, 卉氈如織, 山河眞改色矣. 不勝慨歎, 題一絶韻, 用傳喧二字, 詩曰: "金剛絶勝六洲最, 尤老風聲百世傳. 當日淸遊物外地, 如今誰識雜啾喧?" 洞之平巖斷崖, 凡可刻字處, 皆今古人姓名, 覓不得一片完石, 噫其多矣. 蓋此山一帶, 凡奇絶所在, 無處不然, 而此洞爲尤甚焉. 余不覺喟然一嘆曰: "均是人也, 孰賢孰愚? 孰善孰惡? 孰達孰窮? 孰隱孰見? 若此洞所題, 尤翁以外, 如金夢窩、吳老洲諸賢, 最著不朽之名, 其餘亦多名士達官, 然不若一般無聞者之滋多矣. 想此無聞之中, 宜有賢善而窮不見者, 亦安保其無爲愚爲惡者乎? 盍觀此鏟人名而刻己名者, 往往而有乎? 推其心, 在家奪人家, 在國奪人國, 非可但以愚惡論也. 昔蘆沙奇公遊山, 有人請題名, 答云: '使吾賢, 山之幸也, 使不賢, 豈不爲山之羞乎?' 此言警絶可服. " 顧念如余之庸庸者, 非惟窮而無名, 將不免愚惡之歸, 其不敢題名者, 實蘆言是懼. 且値此喪亂之日, 已著之名, 猶將晦之, 何苦强露無名之名爲哉? 名旣不欲露, 故詩成亦不題, 但自唱自酬, 亦一無味之味也. 中萬瀑洞而南臨絶壁上者曰普德窟. 鑿巖罅而作小菴, 西一角地陷, 故作十二尺長銅柱立之, 登此菴, 搖搖若乘風云. 沿洞而上, 可以見其外而想其內, 故不入. 盡萬瀑洞而上去三里許, 有摩訶衍, 謂寺則小, 謂菴則大. 境勢之圓密, 雖不及表訓, 而超絶過之, 蓋到此已踞山之半高矣. 寺後有白雲臺, 登高處而以將觀毘盧也, 故不上. 乃取路而南, 歷妙吉祥廢址, 渡四仙橋, 將上毘盧峯, 有人謂"不如先觀外金剛, 歸路登之之爲便". 遂依其言, 舍毘盧路, 問楡岾程, 此去四十里强. 過白華潭, 抵內霧在嶺. 其間嶮阻之苦, 攀躋之艱, 非更僕所能盡, 非昨日明鏡、靈源之路比也. 蓋此山之諸勝, 所在自保勝, 會修治道路, 而惟長安之距靈源、摩訶衍之距楡岾, 姑未始役故也. 谷中木葉始芽, 躑躅未發, 嶺上草生而旋枯, 余歎曰: "此非夏將半天氣乎? 吾乃今知山之高也. " 嶺之內外, 老檜干霄, 仰面乃見其末. 其自死而仆者, 有亘兩岸作架者, 有人跨其上而足居其半者, 余又歎曰: "吾乃今知山之深也. " 一行見美材之自朽也, 皆曰: "恨不致之通衢大港而作宮室舟車也. " 余曰: "噫嘻! 何獨此也? 從古及今, 抱奇器異才, 窮死草莽而沒其名者, 何限也?" 踰嶺而下行十里, 聞有隱仙臺、新金剛、十二瀑諸勝, 距路不甚遠而不入觀者, 非惟日力之不足. 元是金剛, 奚謂新金剛? 旣觀萬瀑, 又何十二瀑? 亦省事之意也. 日已晡, 入楡岾寺, 騁目四觀, 果然是好山水好伽藍. 先登山暎樓, 樓臨溪, 水直檻前, 又引水爲池, 景致絶佳. 樓多題名, 而崔勉菴亦在其中, 而與柳基一同板. 寺中多可觀古蹟, 而以日旣暮俟來日. 下樓渡橋, 出緇林糾正門, 夜宿旅館. 有僧靑菴金奉詮來, 與之話曰: "湖南千里, 不易到此, 甚矣, 措大山水之癖也. 綠陰雖好, 尙不若丹楓之可玩, 盍於秋八月作此行?" 余曰: "所癖乎玩此山者, 以其淸峭聳拔, 超脫塵埃已, 豈足計較於綠陰丹楓間哉? 若丹楓則吾近之內藏山, 自有一色紅錦屛, 和人面目衣服也. 通紅底奇玩品, 恐强似此山楓林之尙雜他木也. " 靑僧曰: "此山大發昌, 在新羅時代, 所謂八萬九菴者, 在此時. 今觀林木蒙密處, 多廢菴之墟, 巖崖平正處, 皆刻字痕. " 因曰: "萬瀑洞有崔孤雲手筆之刻及梅月堂'樂山樂水人情也余則何爲而哭'之刻, 而今字剜難見, 措大其知之乎?" 余曰: "此爲此洞題刻中最古最奇之蹟, 而惜余不得諦視而得之, 非上人, 幷不知其有此也. " 余問: "昔聞此山中, 多有高僧, 今有幾人?" 靑僧曰: "一自新風潮紛盪之後, 非惟儒門規模之一變, 佛家尤甚, 持五戒者且鮮, 安得有高僧? 非惟此山無有, 通擧國皆然. " 余曰: "雖然, 就中屈指者, 還有幾人?" 靑僧曰: "扶安來蘇寺白鶴鳴最優, 不幸遽沒. 今則可數者七人, 淳昌龜巖寺朴暎湖爲首, 茂長禪雲寺、長城白羊寺, 各有一人, 此寺金東信可參其中, 餘在西北道. " 余曰: "僧家還勝吾家之落莫, 吾家則和此也無. " 顧謂一行曰: "今日佛學, 湖南可謂冀北, 顧吾儒學, 則不能乃爾耶, 我輩可以知愧矣. " 靑僧又曰: "此山古蹟, 在佛家者以外, 麻衣太子遺事, 最可感想. 其諫父不聽, 終身此山, 固見於史牒, 三韓人士所公誦, 養兵築城, 欲伐高麗, 措大昨日望軍臺行, 亦應聞之, 餘有未悉者, 我且詳言. 太子忠義所激, 誓一有爲, 知事不成, 痛哭麻衣而終. 其終在須彌菴, 其墓在毘盧峯北, 山中人稱其洞爲陵內, 相傳太子遺言'護我墓者獲福'. 故至今採蔘、力農、求財、療疾凡有所願者, 於四名日, 爭先剪艸. 此山下三億洞慶州金氏爲太子傍孫, 故來祭於墓. 小僧適當祭時, 得餕胙物, 時則八月十六日也. " 又言: "太子沒後, 其夫人爲尼, 號敦道夫人, 建敦道菴. 三子亦皆爲僧, 長實林祖師建實林寺, 次能仁祖師建能仁菴, 季普賢祖師建普賢菴, 山中人或稱實林太子、能仁太子、普賢太子矣. " 言罷, 愀然而作曰: "太子平生徒勞無功, 然其撑天義節, 豈可以事不成而少之哉?" 蓋靑僧是貫慶之金, 故於太子之事, 知之加詳而言之能悉矣. 余聞之, 自言于中曰: "向吾在家, 只知太子諫降竄身之事, 而已入山, 始知有養軍伐麗之志, 到此備聞其卒墓妻子之蹟, 人之見聞不可不博也, 有如是矣. " 又念其節烈之顚末, 寄傳於深山緇徒之口, 而不得史筆之舖張簡冊, 是可慨也. 雖然, 歷千餘年之久, 而山中人語及遺蹟而咨嗟, 爭先修墓而愈勤, 是固出於忠義之感人深, 而有烜赫史冊者之所不及也. 其云"護我墓獲福"之說, 以若大節, 爲其所當爲而已, 豈計身後哉? 傳說有不可盡信. 其謂墓爲陵, 謂居爲闕, 謂三子爲太子者, 亦見其後人尊敬之無已也. 近見一韻士稿中《望軍臺》詩, 有小序曰: "太子痛哭爲僧, 此何謂也? 旣不見《羅史》, 又不傳山僧之口, 而肅肅斧堂, 千秋不崩, 其言之無據甚矣, 當付之於齊東也. 若夫人三子之事, 想亦出於托名藏蹤不得已之擧矣. " 因念金氏之同出於敬順王者彌滿國中, 就太子墟墓, 立碑記蹟, 不容已也, 物力辦亦易易也, 而尙此未遑, 任他荒山, 半埋草樹, 豈非欠典? 安得同志者幾許人而與之圖乎? 二十七日. 早飯後, 復入寺中, 寺揭"東國禪宗"之額, 又揭"東洋第一伽藍". 入佛殿, 先觀所謂五十三佛, 刻木爲楡根倒立形, 上下左右, 次第安佛于根上, 甚可異也. 僧香菴號者爲言曰: "昔天竺人鑄金佛五十三, 載石盤, 使隨緣而止. 路過月支國, 國王欲奉安于其國, 佛告王夢曰: '我有去處, 爾其舍我. ' 王反佛于故處, 佛止於我國高城浦口, 郡守盧春迎佛入此. 此有龍沼, 佛驅龍, 龍怒拔楡根, 倒置地上. 諸佛齊立于楡根上, 龍恐懼而逃, 春遂塡沼作寺. 諸佛所立楡根, 仍在殿中, 寺名楡岾者以此. 後因屢度回祿, 刻木改之. 刱寺之時, 在東國爲新羅, 在中國爲西漢, 而先於東漢永平時, 且近百年, 所謂東洋第一伽藍者, 此也. 云云. " 佛家之言, 大抵多涉荒誕, 香僧所云, 雖不可盡信, 旣大書特揭以東洋第一, 則其佛入之先於中國, 料亦非無徵也. 五十三佛末邊, 有白佛一, 云是日本王鑄贈泗溟禪師者. 壁間立古旗幅, 用繩爲網, 用毛散揷網間, 未知何毛, 竿首三枝戟缺一, 亦云日王贈溟師者. 香僧因言: "佛家之道高功大, 非儒家所及. 當壬丁之亂, 智略如西崖、白沙諸公之未勘靖者, 溟師隻手東渡, 使鯨波妥帖, 此亦一端也. 我國儒家道學以薛弘儒、崔文昌爲首, 而弘儒是高僧元曉之子, 文昌則推尊沈約'孔發其端, 釋究其致'之語, 又有'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角力'之詩. 至於儒家大宗師孔夫子稱'西方有聖人'之語, 見於《列子》, 每見世儒, 多以斥佛爲能事者, 豈非所謂不知類者乎?" 余見香僧, 粗通儒佛, 悻悻自好者, 如欲究竟, 則非可立談間說得下者, 但略略道破曰: "莊、列以誚侮孔子爲事者, 則其言不足信. 文昌則果有是矣, 然此在東國道學未闡時, 推服其文章人望, 而尙今崇奉矣. 退溪以下諸賢尙論自在, 儞所證二言, 安足以噤得儒者斥佛之口乎?" 因又笑謂曰: "余昔與龜巖僧暎湖語及二家是非, 吾則據儒斥佛, 而直言儒是佛非, 暎常援儒入佛, 而但言佛大儒小, 卽此一援一斥之間, 而已足以知是非, 何必多辨乎?" 遂別香僧, 入寶藏閣, 歷玩諸物, 果多歷代賞賜寶品及寺中所傳古物, 不可枚擧. 在我朝, 光廟下賜銀銅燭臺、花臺等器爲多, 又有仁穆大妃手鈔佛書一冊, 蓋意一在晩年悔過時, 一在西宮遭變時也. 然我朝號稱崇儒斥佛, 而已自王家如此, 野賢之空言, 雖切奚補? 安知彼高樓巨閣非出於內帑所助乎? 不然, 顧此萬山中, 何以致此壯麗乎? 藏中最古物, 有新羅南解王所賜翡翠玉杯, 眞希世奇玩. 據此南解王年代, 尤可證佛入此山之先於東漢也. 從前但道佛入東洋在東漢明帝時而已, 夫孰知先於東漢而入於新羅乎? 蓋我邦士子之昧於本國而詳於中土, 在朝野史猶然, 況於佛家事乎? 宜其然也. 寶藏閣之東, 有酬忠閣, 其所奉安, 同於表訓, 故不入觀. 促一行出洞口, 回首更看, 峻山外帳, 姸巒內屛, 超絶而平, 周匝而通, 高築綺構, 雲連翬飛, 又自不必說, 果然是好山水好伽藍. 念此罕世淸絶之地, 獨使緇徒管領, 而吾儒則無與焉, 亦堪惜哉! 有一詩云: "置刹東洋此最先, 楡根倒揷正茫然. 萬二千峯占楓岳, 五十三佛渡石船. 歷代賞恩多寶品, 樓滿題咏或前賢. 再難人世淸奇地, 付與緇林獨管專. " 蓋此寺可謂山上開局, 視摩訶衍, 其高又懸絶矣. 近地有中乃院、萬景洞、船潭、九龍沼、松林寺、鶴巢臺諸勝, 而緣遽未觀. 其云鶴巢臺者, 以閏月之年, 鶴必來巢故名, 今年有閏, 故亦已來巢而生子云. 東行十里餘, 踰開殘嶺. 嶺以西, 便同平地, 以東則古之巴蜀棧道, 想不過此. 艱步徐降, 但覺首下尻上, 回視後人, 如在天上. 下來之危險, 已如此, 若上去則應發靑蓮難靑天之歎. 日過午, 始抵平地, 乃百川橋也. 有詩曰: "廬岳高高蜀道難, 崎嶇未必過此山. 下來已墜千尋阱, 上去應緣萬尺竿. 觸石幾愁雙膝碎? 臨崖還覺一心寒. 兢兢進步終踰險, 辛苦方知見樂安. " 擬乘自動車不遇, 緩步而東, 漸覺山開洞豁, 始有田疇村落, 知是人間世, 覺得胸次通暢還勝數日山中樂矣. 過普賢洞, 至侍郞里, 乃一小平野, 而大川貫其中, 更快人意, 回看諸峯, 但見蒼然一色. 昔農巖至此, 謂可以見金剛全面, 而引東坡翁"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廬山中"之詩而證之, 然其實此處所見, 不過金剛半面. 已而又行三十里, 抵三日浦, 此所謂關東八景之一. 三面環以山, 惟開東面, 用人力築防其中, 乃鏡面平底, 淸江周圍, 可十餘里. 山之環者, 凡三十六峯云, 有一岡斗入浦中, 甚快遊觀. 浦中有小島, 島上有四仙亭遺址. 浦之四岸及山上所在巖石, 無一箇非物形者, 大抵多人立者, 又有龍翔鳳舞獅蹲龜伏馬牛飮者, 不一其形, 此甚可異. 浦之得名, 昔有四仙遊此三日而去故云. 蓋萬瀑洞有四仙碁盤巖, 毘盧峯下有四仙橋, 此有四仙亭, 未知此四仙者誰誰, 而是新羅時人云. 有一詩曰: "環山六六浦其中, 一面新磨寶鑑空. 石峙岸邊爭肖物, 島藏水裏可移蓬. 流通東海來方士, 地接蓬萊動綺風. 往昔四仙三日樂, 適玆三夏四人同. " 愛玩不忍去, 不覺日在西矣. 夜宿高城郡內. 二十八日. 往觀海金剛. 海金剛在高城郡東十里外浦口, 卽所謂五十三佛所止處者是已. 奇島怪巖散峙海中及西北岸, 有松島、秋島、三色島、黑色島、水簾島、藏經巖、老翁巖、佛掌巖、梢工巖、五仙巖、龍頭巖、龜巖、鶴巖、象巖、海萬物相等可觀. 居人謂"西佛東渡時, 用妙術, 粧成諸勝", 此出僧輩惑衆之說. 蓋見前輩詩詠遊錄, 未聞有海金剛之名, 今日之若是藉藉, 意者近來好事者, 就此海中略有勝觀處, 收拾怪誕之說而傅會之, 作山金剛之對案而供遊人一時泛舟之樂也. 夫此奇巖怪石, 何地不有? 以其在海中, 而可藉船遊也, 故不得不一觀. 乃呼一隻小船, 放乎中流. 時適風靜浪息, 天晴日朗, 心神爽怡, 身體輕淸, 忘却在滄溟上, 若將化羽而擧也. 舟行一周, 略覽諸勝, 興且盡, 而偶然發坡仙望美之歌矣. 因思坡雖不遇於世者, 猶有可望之美人, 今我則幷無有美人之可望者, 詎不悲哉? 乃於舟中, 賦《海金剛歌》一篇曰: "海中金剛多壯觀, 爭道强似山金剛. 誰將箇箇奇巖石, 散作物形水中央? 云是牟尼東渡日, 一把妙術色色粧. 松島一點碧似藍, 秋島雙峙白凝霜. 老翁默坐觀魚躍, 靈佛展掌何商量? 堆積經書千萬卷, 倘或《黃庭》墜帝鄕? 三色、黑色復水簾, 龍、象、龜、鶴更呈祥. 覆船溺人眞堪怒, 石罰梢工置島傍. 聞說大地肇判日, 水火土石盪一場. 須臾盪盡各著形, 石自矗矗水洋洋. 天竺世尊道雖高, 那將人力變舊常? 遠客只可探勝狀, 不須歷歷究厥詳. 朝來一葦泛中流, 東天渺茫接水光. 淸風徐來波浪靜, 扣舷發歌喜欲狂. 不知身在滄溟上, 但覺兩腋生羽翔. 停船攝衣下復觀, 手摩足躡興添長. 觀盡回棹欲歸來, 不忍舍去更徊徨. 五仙臺上松偃蓋, 九仙峯頭雲作牀. 仙人已去山猶在, 留待時物不相忘. 願從赤松昔何人? 還恐其說涉荒唐. 我誦古詩戒太康, 及時須惜歲月忙. 人生易老名難稱, 余懷觸境生感傷. 西望美人不可見, 風塵漠漠天一方. 安得廓淸腥羶世, 手將此海洗釼鋩? 休道傑傑與庸庸, 同歸浩劫一亡羊. 睠彼空空釋家流, 尙詑奇迹謾誇張. 吾家自有實業界, 只在自强著脊梁. 光明日月同普照, 悠久天地與無疆. 我觀海剛眞有術, 反身推類欲承當. 請君莫徒探奇巧, 聽我《海剛歌》一章. " 歌成, 高唱一遍, 却恨世間無知音者, 水底魚龍倘識我心? 唱罷, 回棹下船, 入憩于立石店. 店人具進午飯, 膾有文、鰒二魚, 烹有紅蛤. 此三者, 吾近西海之所不産, 故其鮮者, 余所初食也. 昨在山中, 恒喫沙蔘、石茸平日所罕喫者, 今來海剛, 又食三鮮之素所薧食者. 近日東遊, 一行非惟目飽奇觀, 幷得口飽異味, 諺云"金剛山食後景", 似爲余準備語者. 回過高城郡, 西行三十里, 至溫井里. 此有溫泉, 浴之可療疾. 名山下, 兼名泉焉, 故來者雲集, 旅館盛況若大處. 南越小嶺, 入神溪寺. 寺在山中寬平處, 後有小岡遮巨山, 左右細阜亦掩山根, 谷氣可愛也, 殿閣亦傑構也. 寺有莊祖願堂, 以正祖崇儒之高見, 必不尊親以非禮, 抑以事在莊祖生前, 故不之改歟? 夫此山有四大寺, 論以基址, 楡岾爲首, 神溪次之, 表訓次之, 長安爲下; 論以梵宇壯麗、刱建久遠, 楡岾亦爲首, 表訓次之, 神溪、長安爲下. 夜宿洞口旅館. 見館前高峯下長谷中有白色物延長數十丈, 初以爲白石或沙汰矣, 諦視之, 乃積雪也, 而寺門以東凡深谷斷壑, 在在皆然, 蓋爲山之北麓故也. 余乃驚歎曰: "湖南之於此山, 不過千里, 而氣候之頓異, 乃至此乎? 霧在嶺所見之木始葉艸旋枯, 猶不足怪也. 嘗見古詩'五月天山雪'之句, 謂'在殊方絶域, 人所罕見, 詩人之詞, 容有浮實', 孰謂吾邦千里內, 身親見之乎? 非獨萬疊金剛之爲壯觀, 卽此五月積雪, 乃希覯之奇觀也. " 二十九日. 早飯後束裝, 指南而行, 爲觀九龍淵而轉上毘盧峯也. 行十里許, 得一石門, 形若表訓東所在者, 而益復深窄, 艱容一人. 此所謂外金剛門, 甚矣, 天之護愛勝觀, 至設內外之門歟! 自此以上, 路甚崎嶇, 雖經繕治, 奈何乎天險? 木棧鐵欄, 在在備防, 所慮則無矣. 行數里, 得玉流溪, 聞其名, 其溪可知. 但在此山中, 故不甚著, 大賢父兄之下, 雖有過人行, 不見盛稱者, 其若此歟! 越一岡, 又得飛鳳瀑. 瀑落懸壁可千餘尺山, 形似鳳擧頭, 水之落者不多, 而觸於巉巖, 故揚起回旋, 作飛鳳翔, 肇錫名者, 眞善狀也. 遂題一詩曰: "細瀑懸巉壁, 揚旋作鳳翔. 紫烟飛倒上, 瑞雪噴初雱. 何日剜神斧, 玆來刮俗眶? 有能飢不粟, 飮此可充腸. " 又越一岡, 聞有聲, 殷殷若雷霆之震於天上, 知是九龍淵瀑布也. 聲漸近而步漸進, 遠遠觀望, 皓皓若天女之下垂千尺練布, 蜿蜿若風伯之驅倒一隻白龍, 誠可駭也. 徐前而觀, 則水之落者, 其量可敵川; 巖之立者, 其直卽成壁. 水多故聲壯, 巖直故勢猛. 下成大石臼受水, 乃一色碧玉淵, 廣可一畝, 深不可測, 懍然眩精, 旣不敢迫視, 耳聾於雷吼, 衣沾於雪噴, 亦不能久留也. 聞之居人, 瀑長三百餘尺, 淵深四十五尺, 而九龍則今不在云. 洞天廣豁, 盤石亦好, 石刻尤菴手筆"怒瀑中瀉使人眩精"八字, 又有"千丈白練萬斛眞珠"八字, 此未知誰筆. 蓋雖不敢迫視, 久留石上坐觀, 又不忍舍去. 昔崔北到此曰"天下名士崔七七, 遇天下名勝而死", 因跳身投淵, 傍人救之, 得不死. 崔雖狂興所使, 因此亦可見其奇絶也. 乃賦一詩曰: "倒瀉白銀漢, 翻成碧玉淵. 雪霜飛夏日, 霹靂起晴天. 駭眼初望遠, 眩精却怕前. 廬山那勝此? 而我非靑蓮. " 自此西越一洞, 聞有八潭之勝, 而料亦與萬瀑洞所見者, 略相上下, 故不觀. 自此南上三十里, 則可到毘盧. 然一行中有憚飛沙門危驗而不決者, 乃改圖迂路計, 回到神溪寺, 雖嫌脚力之困, 然因此可探未盡之觀者, 爲差强也. 寺中聞有金東信高僧, 欲與一話, 而一行皆促歸程, 又金是隆老, 而難與酬酌云, 故且已之, 入此名山而未得山僧之最高者與之語者, 一欠事也. 且夫僧侶之外, 有抱道負才深藏不市之士或在此山, 而尙未之遇, 何哉? 豈遇之, 而以我爲不足與語者, 故外之歟? 抑以近日此山, 異類汚之, 非復前日之金剛, 故舍之而他去歟? 可恨也已. 三仙菴、普光菴, 聞在此近, 而幷不觀. 日過午, 催步出溫井里, 西轉而行, 至葛峯店而宿. 山行二十里, 雖無奇玩異觀, 兩壁蒼翠, 百度溪澗, 亦非凡境. 暗誦止浦先祖《分水嶺道中》詩"杜鵑聲裏但靑山, 竟日行穿翠密間. 渡一溪流知幾曲? 送潺潺了又潺潺. "二聯曰: "先人詩, 已寫此地境色, 後人雖欲有詩得乎?" 夜見天色不甚暗, 疑有月光, 而旋覺爲晦夜. 但見群峯之刪出白玉者, 環立牕前, 玲瓏相照, 致此夜明, 然後眞知此山之秀靈, 有難與不知者道矣. 五月初一日. 早行數里, 登所謂萬物相. 蓋峯巒巖石之奇怪者, 都聚於此, 而肖相萬物, 故得是名. 余有《萬物相歌》一篇, 觀此可想其槪也. 歌曰: "將軍甲冑臨戰陣, 旗幟鎗釰耀星日. 三千弟子陪聖師, 盈架充棟積緗帙. 淸廟顯相儼冠冕, 樽俎籩豆陳秩秩. 勻天廣樂何日作? 樅樅崇牙猶不輟. 燭臺香爐排整齊, 群僧府首禮尊佛. 君王田獵暮夜歸, 列炬千把燄燄爇. 百鳥翩翩爭追隨, 鳳翔千仞出丹穴. 狐狸雉兎驚不定, 東靑韓盧搏噬烈. 尖尖筆鋒不可數, 雨後竹笋亂抽出. 觺觺鹿角交相掎, 千年枯木但餘骨. 酷肖萬物不止此, 那得箇箇形筆舌? 謂天有心歟, 造化必不勞屑屑. 謂天無心歟, 奇巧安能似此密? 厥理茫茫不可詰, 應是山河開闢日, 有若磨麪紛不一. 不期其巧自然成, 天亦莫能知其實. 俗眼無端驚相視, 有心無心更何說? 請看至人應萬事, 更有非常神出沒. 還是常中奇變處, 不必世人看自別. " 又有新萬物相、奧萬物相二處, 而想亦與此大同小異, 故不往觀, 蓋至此而外金剛探勝畢矣. 夫自毘盧峯以南內霧在嶺以內, 謂之內金剛, 毘之北內霧之外, 謂之外金剛, 勝狀多少, 內外相敵. 農巖日記謂"內山多石少土, 外山多土少石", 此非實際. 金剛一山都是石, 石者山骨也, 其名皆骨者, 乃實際語. 其云萬二千峯者, 想亦幷指山上石角之尖尖峭出者言, 山雖大矣, 豈實有可名之峯若是其多哉? 若謂之內山之石多於外山, 外山之土多於內山, 則可矣. 踰溫井嶺, 歷新豊里, 至末輝里, 乘車復入長安旅館, 爲行具在此也. 此去毘盧四十里强, 一行皆急於農務之歸檢, 且憚登陟之艱苦, 欲以翌日徑歸. 余曰: "毘盧, 金剛之第一大觀, 至東魯而但見十哲, 不見孔聖可乎? 且不聞爲山而虧一簣, 掘井而不及泉, 爲有始無終之恥乎?" 這兩段善喩, 動得一行心情. 卽共催行上去, 僅到表訓寺前, 日力脚力俱盡矣. 因宿于此, 乃日前舊館也. 館嫗以其親庭在全州, 謂我同道人, 款待一倍加厚. 夜作與舍弟汝安書, 略言未得同來之歎及感愴新羅太子遺迹之意, 又作二詩, 一謝子貞, 一寄族弟希淑【賢述】. 謝子貞詩曰: "好事元難得自由, 此行竟失與君儔. 東來到處多名勝, 老去差强散鬱幽. 滄海茫茫何地限? 剛山矗矗半天浮. 更登高處回頭望, 其奈今朝少一愁?" 寄希淑詩曰: "物外金剛迹, 聯筇早晩期. 矯龍何久蟄? 倦鶴亦高飛. 九瀑洗心處, 毘峯縱眼時. 少君奇絶話, 回首悵然思. " 初二日. 復過萬瀑洞、摩訶衍, 北折而上毘盧, 風雲起揚, 雨意孔大. 然已至半途, 進退兩難, 只得勇往直前. 已而風勢乍宿, 雲氣忽開, 比及絶頂, 朗然一新天地. 余戱謂一行曰: "衡山開雲, 非獨韓文公然也. 吾儕雖失於人, 豈其得於天者耶?" 擧目四望, 西南北三面都是山, 想皆高峯巨岳鎭省鎭郡者, 而俯視之, 抔抔培塿若席上舖豆. 東面則大海, 而水與天接, 不能遠視, 但見若一平湖矣. 雲雨低回於眼下, 天風砭入於骨裏, 儘覺其爲高處. 人言"東國高處, 白頭山爲最, 此峯次之", 應是實驗者言也. 昔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蓋言所處益高, 則所見益下也, 登玆山而不知平日患得患失狗苟蠅營之可恥者, 眞非人哉. 彼梯山航海, 窮兵黷武而奪人國者, 亦獨何心? 噫! 安得復見隣國各安其業之治世也? 睠彼海以東日本也, 會稽之恥, 新亭之淚, 豈可須臾忘? 但使彼之君相登此而如悔其奪人肥己之罪, 則安知不赧然慙愧也乎? 抑徒以目觀而不以心觀, 則吾又未可知也. 遂有詩一篇曰: "一陟蓬萊上上峯, 地窮東海更無東. 乍驚眼底雲霞白, 忽覺頭邊日月紅. 得失榮枯都幻夢, 存亡興廢總成空. 衆生安得齊登此, 恢拓胸衿作大公?" 向日靑僧說太子墓在毘盧峯西北, 故計以此時拜謁, 至作告文一度矣. 至今觀之, 滿山樹林, 無路可覓, 幷無人可問者, 待到尋省, 當費一日. 顧一行之歸心如矢, 尙欲舍毘峯不觀者, 其肯聽我乎? 千里遠行, 獨自落後, 亦所未便. 數日準擬者, 竟歸虛境, 甚是悵缺. 只錄告墓文如左, 其文曰: "維檀君立國四千二百六十三年歲次庚午五月戊寅朔二日己卯, 遠孫籍貫扶寧金澤述焚香再拜, 敬告于新羅王太子之墓曰: '嗚呼我祖, 天地剛氣, 河岳秀靈. 値羅末劫, 我祖挺生. 有麗日强, 席捲三韓. 貔貅南下, 勢若崩山. 父王讓國, 事出無柰. 赤誠忠諫, 斷以大義. 千年社稷, 不可輕棄. 背城一戰, 至死無二. 字字惻怛, 上蒼可質. 言不見用, 時局變置. 默究義諦, 我適何地? 睠彼皆骨, 有幽其谷. 有麻其衣, 有草其食. 山哀浦咽, 有痛其哭. 從者如雲, 有軍三億. 視彼松岳, 豈忘一日? 天數有定, 竟難人力. 望臺之西, 築城作室. 須彌之菴, 天年以卒. 生平歷史, 俱有可述. 毘盧之北, 有肅塋域. 僧俗趨走, 爭禁樵牧. 貞忠大義, 能致是若. 在昔漢亡, 有若劉諶. 凜凜生氣, 誦傳古今. 殊世異域, 公乃一心. 東京義烈, 北地英風. 八字石刻, 尙論之公. 嗚呼! 皆骨之勝, 天下奇絶. 諫逃之蹟, 萬古卓截. 此山此蹟, 相得益章. 我來探勝, 因拜斧堂. 事雖夤緣, 致敬則專. 顧瞻河山, 已改前色. 所値之同, 曠感益切. 寂寞窮山, 獻文一幅. 赤心一片, 無今無昔. 嗚呼尊靈, 庶垂鑑燭. '" 是夕, 復來宿于長安旅館. 初三日. 回程歸家, 復聯乘三車計也. 前聞斷髮嶺上, 可以觀金剛全體眞面, 今以乘車而穴嶺出入, 故未見其皓然封雪之色、飄然出塵之像之全體, 是可欠也. 夫觀宮室, 先看外面大體, 然後入而細看幾多間架, 觀人亦然. 今余則反是, 先見山中細觀, 而大體尙未見, 坡翁所謂"不識2)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3)山中"者, 於是乎可驗矣. 雖然, 入山而登毘盧之最高, 耽楡岾之淸邃, 玩正陽之超豁, 叫九龍、萬瀑之奇壯, 賦萬物相之怪妙, 此六者金剛之大觀也. 蓋此六觀, 則所謂大體卽在是矣. 夫此山, 忠義而有羅太子、金梅月之遺蹟, 道學而有栗、尤、農、老之遊, 文章而有崔孤雲、楊蓬萊之筆, 其外達官名士之迹, 至不可計. 然從初開荒作主, 彌滿山谷者, 佛家人也. 觀乎錫山名以金剛, 已可知矣, 毘盧、觀音、地藏、須彌、法起諸峯之名亦是已. 靑僧向謂"取金太子之剛義, 名以金剛"者, 似有理, 而恐非其實也. 今日便作世界之公園而佛家將不得作主, 此亦可觀世變也. 余有一詩, 統吟全山, 詩雖不格, 寫實則可矣. 詩曰: "聞說三神在海東, 此山絶勝得參同. 千峯白攢疑封雪, 萬瀑爭喧怒起風. 剛、骨、楓、萊交幻際, 儒仙道釋往來中. 地靈亦識今時態, 許作公園世界通. " 余於此, 又有一說焉. 夫所貴乎名山者, 非徒以水石奇絶, 實以超然僻遠, 人所罕到也, 故有稱之以"物外仙境"、"別有天地"者此也. 昔聞金剛山, 非有淸緣者不得到, 今則雖貪夫汚漢, 苟有錢者, 可朝發而夕至. 是以車轍人迹, 成山成海, 惡在其爲仙境別天乎? 老僧有發金剛淸遊破壞之歎者, 其旨深矣. 又念仰此山而生活, 有旅館者、案內者、寫眞者、刻字者、擔轎者, 蓋不知其幾多人, 內山之長安洞口、外山之溫井里築館者, 尙未已也. 由此觀之, 全國之財, 耗費此山者, 歲計之, 又不知其爲幾多巨額. 然其仰食者, 終是我人也, 則是所謂楚人失之, 楚人得之, 猶無傷也. 觀此頭勢, 至其大利所在若旅館者, 不幾年, 安知不爲彼人所占乎? 夫鍾, 喜而擊之則樂, 悲而擊之則哀. 遊觀亦然, 以喜心觀之, 爲壯觀, 以不平心觀之, 可謂悲觀, 苟爲悲觀, 又何事乎觀? 雖然, 此山之淨無氛埃、山外東海之水無際涯二觀之壯, 咸萃一處, 彌萬古而不改, 則又初無關於人情之悲喜. 山無氛, 可以鎖吾之物慾; 水無際, 可以恢吾之德量, 學者之於金剛一觀, 終有不可已者, 有如是矣. 因統記全山之所觀感者, 以備同志者之先覽焉. 庚午五月上旬日, 歸家淨題. 천하의……싶다 남송(南宋) 조사서(趙師恕)의 말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조사서가 나대경(羅大經)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세 가지 소원이 있는데, 첫째 소원은 세상의 좋은 사람을 모두 아는 것이요, 둘째 소원은 세상의 좋은 글을 모두 읽는 것이요, 셋째 소원은 세상의 좋은 산수를 모두 구경하는 것이다.〔某平生有三願: 一願識盡世間好人, 二願讀盡世間好書, 三願看盡世間好山水.〕"라고 하였다. 《鶴林玉露》 소황문(蘇黃門)은……하였으니 소철(蘇轍, 1039~1112)의 〈추밀원 한태위에게 올리는 편지[上樞密韓太尉書]〉에 보인다. 소황문은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지낸 송대의 학자 소철을 가리킨다. 《唐宋八大家文鈔》 영환지략(瀛環志略) 중국 청(淸)나라의 서계여(徐繼畬)가 편찬한 세계 지리서로, 1850년 간행되었다. 옛 덕을 먹는 조상의 음덕에 의해 먹고 산다는 말이다. 《주역》 〈송괘(訟卦) 육삼(六三)〉에 "옛 덕을 먹어 정하면 위태로우나 끝내 길하리라.〔食舊德, 貞厲, 終吉.〕"라고 하였다. 원당(願堂) 죽은 사람의 화상(畵像)이나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을 이르던 말이다. 제명(題名) 명승지에 온 것을 기념하여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삼억(三億) 실제로 30만을 이른다. 고대에는 10만을 '억(億)'이라 하였다. 신라사(新羅史)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를 말한다. 간과……바르도록 전쟁으로 참혹하게 죽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경(東京)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慶州)를 가리킨다. 북지(北地) 촉한 후주(蜀漢後主)의 아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을 말한다. 촉한이 위장(魏將) 등애(鄧艾)에 의해 항복하게 되자, 그는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옳다면서 항복을 반대하고 소열묘(昭烈廟)에 들어가 통곡하다가 자살하였다. 《三國志 蜀志》 마루……안 된다 안전에 유의하여 위험한 곳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패릉(覇陵)에 올라갔다가 험한 비탈길을 말을 타고서 질주해 내려오려 하자, 원앙(爰盎)이 "재산이 천금인 집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家累千金, 坐不垂堂.〕"라는 말을 인용하며 만류하였다. 《史記 袁盎列傳》 시왕(十王) 저승에 있다는 진광왕(秦廣王)ㆍ초강왕(初江王)ㆍ송제왕(宋帝王)ㆍ오관광(伍官王)ㆍ염라왕(閻羅王)ㆍ변성왕(變成王)ㆍ태산왕(泰山王)ㆍ평등왕(平等王)ㆍ도시왕(都市王)ㆍ오도전륜왕(五道轉輪王)을 말한다. 선사(先師)께서……유람하였으니 저자의 돌아가신 스승 전우(田愚)는 23세이던 1863년과 25세이던 1865년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파선(坡仙)의……않는다 파선은 동파(東坡) 신선으로, 소식(蘇軾)에 대한 미칭이다. 소식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속의 밝은 달은 귀로 들어오면 소리가 되고 눈에 담겨지면 색깔을 이루는데, 이를 취하여도 막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조물주의 무진장한 보배이다.〔惟江上之清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라고 하였다. 정호음(鄭湖陰) 호음은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의 호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로, 사간ㆍ부제학ㆍ예조 판서ㆍ대제학ㆍ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칠언율시에 능하였으며, 당시 문단에서 그와 신광한(申光漢)을 쌍벽으로 꼽기도 하였다. 저서에 《호음잡고》, 《조천록》 등이 있다. 거원(蘧瑗)처럼……깨달았네 자신의 과거사를 회고하여 현재까지의 잘못된 행위를 깊이 후회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거원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어진 대부(大夫)로, 자는 백옥(伯玉)이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거백옥은 나이 50세에 49년의 잘못을 알았다.〔蘧伯玉行年五十, 知四十九年之非.〕"라고 하였다. 조(趙)나라……세우는 후대 사람들이 옛 사람들의 시판(詩板)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시판을 걸어 놓은 행위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한신(韓信)이 조(趙)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공격할 때 배수진을 쳐서 조나라 군대를 성 밖으로 유인해 내는 한편, 날랜 기병(騎兵) 2,000명으로 하여금 비어 있는 성에 들어가 조나라의 흰 깃발을 뽑아 버리고 한(漢)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게 하였다. 성 밖으로 나온 조나라 군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한신의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성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붉은 깃발을 보고는 성이 이미 함락된 줄 알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시도(市道) 이익만 중히 여기고 의리는 망각하는 장사꾼의 태도를 말한다. 허연(許燕)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신인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과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을 가리키는 말로, 두 사람 모두 문장이 뛰어났기 때문에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로 일컬어졌다. 양봉래(楊蓬萊) 봉래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이다. 1546년(명종1)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철원 부사(鐵原府使) 등 주로 외직을 지냈는데, 회양 군수(淮陽郡守)로 있을 적에 금강산을 여러 번 유람하고 글씨를 남겼다. 서법은 해서와 초서에 두루 뛰어났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ㆍ김구(金絿)ㆍ한호(韓濠)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기수(沂水)에서……즐거움 물욕을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갓을 쓴 사람 5, 6인에다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하였다. 《論語 先進》 맑은……전하리 주희(朱熹)의 칠언율시 〈백록강회차복장운(白鹿講會次卜丈韻)〉 중 5, 6구이다. 세상……않겠는가 《회암집(晦菴集)》 권9에 나오는 칠언율시의 5, 6구이다. 제목은 〈승사탁장치주백운산거……(承事卓丈置酒白雲山居……)〉인데, 어느 본에는 〈백운사송저가백승(白雲寺送儲柯伯升)〉으로 되어 있다. 우암(尤菴)의 글씨 1662년(현종3) 3월에 송시열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쓴 것이라 한다. 《宋子大全附錄 卷4 年譜》 《宋子大全隨箚 卷9》 우로(尤老)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지칭한다. 김몽와(金夢窩) 몽와는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이다. 1684년(숙종10)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왕세제(王世弟)로 하여금 대리청정하도록 주청하였다가 소론들에게 불충으로 탄핵되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사사(賜死)되었다. 저서에 《몽와집》 등이 있다. 오노주(吳老洲) 노주는 오희상(吳煕常, 1763~1833)의 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800년(정조24) 천거로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되고, 황해도 도사 등을 지낸 뒤,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고 이후 찬선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저서로는 《노주집》이 있다. 노사(蘆沙) 기공(奇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으로, 노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이다. 조선 후기 대학자로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 철학을 수립하였다. 저서로 《노사집》ㆍ《답문유편(答問類編)》 등이 있다. 경복(更僕) 시중드는 하인을 번갈아 세울 정도로 주객(主客)의 담화가 길게 이어짐을 이른다. 애공(哀公)이 유행(儒行)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가 대답하기를 "갑작스레 헤아려 말해서는 다 얘기할 수 없고 자세히 다 얘기하려면 오래 머물러야 하니, 종을 번갈아 세우더라도 다 말할 수 없습니다.〔遽數之, 不能終其物, 悉數之乃留, 更僕未可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儒行》 가람(伽藍) 승가람마(僧伽藍摩)를 줄인 말로, 승려(僧侶)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을 말한다. 유기일(柳基一) 1845~1904.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ㆍ용서(龍西)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다.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척양록(斥洋錄)》 등의 저술 활동과 문인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는 《용서고(龍西稿)》가 있다. 조대(措大)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빈사(貧士)나 빈유(貧儒)와 같은 뜻이다. 오계(五戒) 불가에서 행하는 5가지 경계로, 생물을 죽이지 말고[不殺生], 훔치지 말고[不偸盜], 사음하지 말고[不邪淫],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不妄語], 술을 마시지 말 것[不飮酒] 등을 말한다. 호남을…만하나 중국의 기북(冀北)은 준마(駿馬)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유명한데, 호남은 기북처럼 고승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라는 말이다. 사명일(四名日) 한 해의 네 명일로, 정월 초하루[元朝]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ㆍ동지(冬至)를 말한다. 제동(齊東)에 붙여야 한다 황당무계하여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제동'은 제나라 동쪽 야인(野人)들의 말로, 근거가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맹자의 제자인 함구몽(咸丘蒙)이, 순(舜)이 천자가 되자 요(堯)와 고수(瞽瞍)가 순을 섬겼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맹자가 이는 제나라 동쪽 야인들의 말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 《孟子 萬章下》 조반(早飯)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간단하게 먹는 음식으로, 대개 죽을 먹었다. 영평(永平)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연호로, 58~75년에 해당한다. 거대한……하였으니 일본으로 하여금 침략의 야욕을 버리게 하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경파(鯨波)'는 왜적의 침략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주출강릉남포봉기정소윤심(舟出江陵南浦奉寄鄭少尹審)〉에 "바다에는 고래 물결이 무겁게 일고, 형양에는 기러기 그림자가 막혔어라.〔溟漲鯨波重, 衡陽雁影徂.〕" 하였다. 설홍유(薛弘儒) 설총(薛聰, 655~?)을 가리킨다. 신라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신라 3문장(三文章)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유학과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벼슬은 한림에 이르렀다. 고려 때 홍유후(弘儒侯)에 추증되었다 한다. 최문창(崔文昌) 최치원(崔致遠, 857~?)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이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 되었다. 심약(沈約) 441~513.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의 학자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무제(武帝) 때 상서령(尙書令)을 지냈으며,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을 잘하였으며, 장서(藏書)가 2만 권에 이르렀다. 《梁書 卷13 沈約列傳》 심약(沈約)의……다했다 《고운집(孤雲集)》 권2 〈진감화상비명(眞監和尙碑銘)〉에 보인다. 두 종교만이……어려웠다네 《고운집》 권3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에 보인다. 유(類)를 알지 못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손가락이 남들과 같지 않으면 이것을 싫어할 줄 알되 마음이 남들과 같지 않으면 싫어할 줄 모르니, 이것을 일러 유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指不若人, 則知惡之; 心不若人, 則不知惡, 此之謂不知類也.〕" 하였는데, 주희의 주(注)에 "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경중(輕重)의 등급을 알지 못함을 말한다." 하였다. 상론(尙論) 옛사람의 언행이나 인격을 논하는 것을 뜻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선사와 벗하고도 부족하여 옛사람을 상론한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파촉(巴蜀)의 잔도(棧道) 중국 사천(四川) 지방에 있는 험준한 절벽에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낸 길을 말한다. 청련(靑蓮)의……어렵구나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 구절을 말한다. 이백은 촉도(蜀道)의 형세를 형용하면서 "아! 위태롭고도 높아라, 촉도의 험난함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噫吁戲,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하였다. 여산(廬山)의……때문이라네 소식(蘇軾)의 시 〈제서림벽(題西林壁)〉에 나오는 구절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여덟 군데의 명승지로, 간성(杆城)의 청간정(淸澗亭)ㆍ강릉(江陵)의 경포대(鏡浦臺)ㆍ고성의 삼일포(三日浦)ㆍ삼척(三陟)의 죽서루(竹西樓)ㆍ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ㆍ울진(蔚珍)의 망양정(望洋亭)ㆍ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ㆍ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을 말한다. 사선(四仙) 신라의 네 국선(國仙)으로, 술랑(述郎)ㆍ남랑(南郎)ㆍ영랑(永郎)ㆍ안상랑(安祥郞)을 이른다. 대체로 효소왕(孝昭王) 때를 전후하여 활약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설에는 신라 이전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자주 강원도 지역으로 놀러 다녀 많은 유적을 남겨 놓았다. 방사(方士) 도사(道士)의 별칭으로, 선술(仙術)을 부리는 사람을 말한다. 봉래(蓬萊) 본래 동해에 떠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신선이 거주한다고 한다. 망미가(望美歌) 신하가 임금[美人]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내가 노래하여 말하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나무 상앗대로 물속의 달그림자를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네. 아득하고 아득한 내 마음이여! 미인을 바라보니 하늘 한쪽에 있네.'라고 하였는데, 객중에 퉁소를 부는 자가 있어 노래에 맞추어 화답하니.〔歌曰: 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 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라고 하였다. 제향(帝鄕)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로,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乘彼白雲, 至於帝鄕.〕"라고 하였다. 망양(亡羊) 다기망양(多歧亡羊)의 준말로, 여기서는 덧없는 인생을 마침을 뜻한다.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고 온 사람들을 다 동원하여 찾다가 못 찾고 돌아오기에 양자가 양을 찾았느냐고 묻고, 못 찾았다고 하니 양자가 "어째서 잃었는가?"라고 묻자, "갈림길 속에 다시 갈림길이 있어 나는 양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기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심도자(心都子)가 말하기를 "대도(大道)는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고, 학자는 방도(方道)가 많아 생명을 잃는다."라고 하였다 한다. 《列子 說符》 의지(意志) 원문의 '척량(脊梁)'은 등뼈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람의 의지를 가리킨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52에 "하물며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약한 때를 만났으니 더욱 의지를 굳게 가져서 굽힘이 없어야만 얻을 수 있다.〔況當世衰道微之時, 尤用硬着脊梁, 無所屈撓, 方得.〕"라고 하였다. 원당(願堂) 죽은 사람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던 일종의 법당(法堂)을 말한다. 오월에도……쌓이네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새하곡 6수(塞下曲六首)〉 가운데 첫째 시의 1구이다. 최북(崔北) 1712~1786. 본관은 무주(茂朱), 자는 성기(聖器)ㆍ유용(有用), 호는 성재(星齋)ㆍ기암(箕庵)ㆍ거기재(居其齋)ㆍ삼기재(三奇齋)ㆍ호생관(毫生館)이다. 조선 영조(英祖) 연간의 화가로, 그의 이름자인 북(北) 자를 파자(破字)하여 최칠칠(崔七七)로 불렸다 한다. 서울에 살면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렸고, 술과 유람을 매우 좋아하였다. 이익(李瀷)을 비롯하여 정범조(丁範祖)ㆍ남공철(南公轍)ㆍ천수경(千壽慶)ㆍ장혼(張混) 등과 같은 당대의 명류들과 교류하였다. 청련(靑蓮)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701~762)을 말한다.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지포(止浦) 김구(金坵, 1211~1278)의 호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차산(次山),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충렬왕 즉위 뒤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ㆍ참문학사(參文學事)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신종ㆍ희종ㆍ강종ㆍ고종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고, 당시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때에 일을 잘 처리하였다. 청묘(淸廟)에서……엄숙하고 종묘(宗廟)에서 제관이 예복을 엄숙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청묘는 종묘(宗廟), 현상(顯相)은 제사를 돕는 사람, 관면(冠冕)은 고관이 쓰는 예관(禮冠)을 말한다. 숭아(崇牙) 악기를 다는 틀에 설치하여 종이나 경을 다는 장치이다. 《예기》 〈명당위(明堂位)〉에 '은나라의 숭아〔殷之崇牙〕'라고 하고, 주에 "순(簨) 위에 나무를 깎고 그림을 그려 숭아 형태를 만들어서 종과 경을 거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농암(農巖)의 일기(日記) 《농암집(農巖集)》 권23 〈동유기(東游記)〉를 말한다.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철 이름이다. 십철(十哲) 공자(孔子)의 제자 중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열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안회(顔回)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ㆍ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염유(冉有)ㆍ자로(子路)ㆍ자유(子游)ㆍ자하(子夏)를 가리킨다. 여안(汝安) 저자의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의 자(字)이다. 형산(衡山)에서…것 옛날 한유(韓愈)가 형악(衡嶽)에 올라가 기도를 한 덕분에 운무가 걷혔다고 한 것을 말한다. 한유의 시에 "내가 찾아온 것은 마침 가을비 내리는 계절이라, 음기가 어둑하건마는 씻어낼 맑은 바람도 없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없이 기도를 올리니 뭔가 반응이 있는 듯도, 신명이 어찌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는가. 조금 있자 운무가 개며 드러나는 뭇 봉우리, 쳐다보니 우뚝하게 창공을 버티고 서 있구나.〔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默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靜掃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라는 구절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3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공자(孔子)가……여겼다 공자가 자연 속에서 높은 기상을 길렀다는 것으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회계(會稽)의 수치 원수에게 패한 수치를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에 오(吳)와 월(越)이 서로 원수로 지내던 중에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공격을 당해 패전(敗戰)하자, 회계에 있으면서 오왕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가 되기를 애원하여 겨우 살아나 마침내 보복을 하였다.《史記 卷42 越王句踐世家》 신정(新亭)의 눈물 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탄식하며 슬퍼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일찍이 동진(東晉)의 명사(名士)들이 신정에 올라가 연음(宴飮)하면서, 쇠잔한 국운(國運)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던 데서 온 말이다. 의체(義諦) 불교용어로서 진체(眞諦)와 같고, 가장 진실한 도리를 가리킨다. 예전에……있었네 위(魏)나라 군사가 대거 침입하여 후주(後主)가 항복하려 하자, 유심(劉諶)이 화를 내면서 "만약 힘이 모자라 패하게 되면, 부자 군신이 힘을 합쳐 성을 등지고 한번 싸우다가 사직과 함께 죽어 선제(先帝)를 뵙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반대하였으나, 후주가 끝내 항복하므로 유심이 유비(劉備)의 사당에 사실을 고하고 처자를 죽인 다음 자살한 일을 말한다. 《三國志 卷33 蜀書3 後主傳》 유심은 북지왕에 봉해졌던 촉한(蜀漢) 후주의 아들이다. 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데 대한 감회를 말한다. 세 가지 차 저자가 금강산으로 올 때 이용하였던 기차, 전차, 자동차 등을 말한다. 금강(金剛) 금강석을 가리키는데, 불교에서 그 단단하고 부서지지 않는 특성을 부처의 지혜나 불법 등의 상징으로 여겼다. 《大藏法數 卷41》 삼신산(三神山)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하는 선산(仙山)인데, 그 이름은 봉래(蓬萊)ㆍ방장(方丈)ㆍ영주(瀛洲)이다. 유선(儒仙) 유학(儒學)하는 사람으로 신선의 풍치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초(楚)나라……무방하다 득실(得失)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지니는 것을 뜻한다. 옛날 초나라 왕이 사냥하다가 활을 잃어버리자 신하들이 찾아오겠다고 하였는데, 왕이 "초나라 왕이 활을 잃어버리면 초나라 사람이 얻을 텐데 무엇 때문에 찾는단 말이냐?〔楚王遺弓, 楚人得之, 又何求乎?〕"라며 그만두게 하였다는 고사를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今 底本에는 "合". 《宋子大全》 卷101 〈答鄭景由〉ㆍ《圃陰集》 卷6 〈東游記〉 등에 근거하여 수정. 識 底本에는 "見". 《東坡全集》 卷13 〈題西林壁〉에 근거하여 수정. 此 底本에는 "廬". 上同.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두류산유록 頭流山遊錄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智異山)의 다른 명칭이니, 백두산(白頭山)에서 흘러온 맥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높고 크게 되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산은 남방의 호남과 영남 사이에 웅거(雄據)하여 우뚝이 높고 휑하게 깊어 전국에 있는 여러 산 중에 견줄 만한 것이 드무니, 중국의 형산(衡山)이 멀리 남쪽에 있지만 오악(五嶽)192) 중에서 가장 큰 경우와 비슷하다.삼신산(三神山)에 대한 전설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예로부터 동해(東海) 가운데에 있다고 전해지는데, 설명하는 자들이 우리나라의 금강산(金剛山)은 봉래산(蓬萊山), 한라산(漢挐山)은 영주산(瀛洲山), 두류산은 방장산(方丈山)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방외(方外)193)의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무리는 참으로 말할 것도 없고 유가(儒家)의 청아한 선비나 달통한 사람들까지도 한 번 지리산을 보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지난 갑진년(1904)에 선사(先師)194)를 모시고 남원에 도착하여 열흘 동안 머물렀는데 이 산의 입구와의 거리는 100리여서 가까웠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195) 어른이 산행(山行)을 가면서 나에게 따라가기를 요구하였는데 선사가 만류하며 말하기를,"이번 산행은 나 역시 가고 싶은 마음이 있네. 다만 국상(國喪)을 당하여 상복을 입은 몸으로 산을 유람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 훗날에 도모하세. 그대는 그때에 나와 동행하는 것이 좋겠으니 지금 객지 여관에서 그대를 놓치면 좌우 손을 잃는 것과 같기에 이렇게 만류하는 것이네."라고 하였다.대저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일은 예측하기 어려워 이듬해에 오적(五賊)196)이 나라를 팔아먹은 변고가 있었고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며 선사가 이미 섬에 들어가 자정(自靖)197)하여 임술년(1922)에 세상을 떠날 줄을. 지난 세월을 돌아보매 서글픈 마음이 끝이 없는데 이 산에 가자고 약속했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갑술년(1934) 봄에 궁하게 살며 무료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옛사람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다198)던 생각이 떠올랐으며 지리산을 한 번 유람하는 것은 참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마침 아우 조자정(趙子貞 조제원(趙濟元))이 나에게 함께 가자고 청하여 3월 19일 그와 함께 출발하였다.20일. 저녁에 순창(淳昌) 적곡(赤谷)에 도착하여 방조(傍祖)인 농암(礱巖)199)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바위에 새겨진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의 글씨 '마롱암관수당(磨礱巖觀水堂)' 여섯 글자를 보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취봉은 우뚝하고 백산은 푸른데 鷲峯矗矗柏山蒼사척 높이에 만고토록 감추었네 四尺之高萬古藏감나무 밤나무는 당시에 손수 심었고 柿栗當年皆手種숲 속의 고택에는 끼친 향기가 있네 林泉故宅有遺芳선생의 도학이 이렇게 높지 않았다면 不因道學高如許어찌 선비들이 오래도록 잊지 않겠나 那得衿紳久未忘농암의 바위에 새긴 글자 진중하나니 珍重礱巖巖刻字연원이 화양에서 왔음을 증명하도다 淵源足證自華陽밤에 산 아래의 친척의 집에서 잤다.21일. 남산대(南山臺)를 지나 귀래정(歸來亭)에 올랐는데, 귀래정은 신말주(申末舟)200) 공이 지은 것이다. 신공(申公)은 광묘(光廟 세조)의 훈신(勳臣)인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인데, 그의 형이 중대한 권력을 잡던 때를 당하여 무엇인들 구하면 얻지 못했을까마는 마침내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오직 의리만을 보고서 이곳으로 돌아와 은둔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고상하게 된 까닭이다. 광세지감(曠世之感)201)을 견디지 못하고 현판에 있는 송운(松雲) 강희맹(姜希孟) 공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정자를 짓고 돌아가 늙으려는 뜻은 作亭歸老意전원이 거칠어졌기 때문은 아니었네 不爲田園荒누추한 시골은 참으로 편안한 땅이요 陋巷眞安土고관대작은 분수에 지나친 것이었네 萬鍾是濫觴옥천의 물고기는 낚시질할 만하고 玉川魚可釣아곡의 고사리는 얼마나 향기롭던가 峨谷蕨何香광세지감이 오늘날에 많으니 曠感多今日올라가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네 登臨整我裳밤에 신씨(申氏)의 집에서 잤다.22일. 남원 유천(楡川)의 방진(房珍)의 집에 이르렀으니, 작고한 방복지 환영(房福之煥永)의 조카이다. 방복지가 죽었을 때 만사(輓詞)만 보내고 직접 찾아가서 곡(哭)하지는 못하였기에 지금 비록 3년이나 지났지만 지나던 길에 방문한 것인데, 방복지의 열 살 남짓한 아들도 죽어 후사가 끊어졌으니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23일. 방씨 집안의 노소(老少)가 나를 위하여 술을 사와 사계정사(沙溪精舍)202)에 놀러 가자고 청하였다. 정사는 방씨의 선조가 지은 것인데 지금까지400년 동안 대대로 지켜오고 있다. 판상(板上)의 제영(題詠)은 일재(一齋 이항(李恒))ㆍ남명(南冥 조식(曺植))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ㆍ상촌(象村 신흠(申欽)) 이하 명현들의 문장으로, 무려 100여 명의 작품이었다. 내가 남의 집안의 정자와 정사를 본 것이 많지만 대개 이처럼 성대한 경우는 없었으니, 또한 자손들이 그 집안을 대대로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한 수 지었다.오백년간 세업 이은 건 동방에 드문데 半千世業罕吾東문헌을 정사 안에서 징험할 수 있겠네 文獻足徵精舍中현판에는 선배들의 필적이 많이 있고 板上曾多先輩筆창문 앞에는 열 아름 소나무가 늙었네 牕前已老十圍松공명일랑 당시에 뜬구름처럼 경시하였고 鼎鍾當日浮雲薄강학은 서로 전해 다듬은 옥처럼 영롱했네 講學相傳琢玉瓏시험삼아 끝없이 흘러가는 사계를 보게나 試看沙溪流不盡덕 있는 집안에 남긴 음덕도 무궁하다네 德門遺蔭也無窮오후에 여러 벗과 용두정(龍頭亭)에 나가 놀았다. 용두정은 지당(池堂) 좌측 일대의 산등성이로, 모습이 용의 머리와 같아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는데, 옛날에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나의 방계 9대조인 좌망공(坐忘公) 김현(金灦)과 당촌(堂村) 황위(黃暐)203) 공이 이 마을에서 함께 살면서 모두 문과 장원이 되었으며 동시대에 남원 부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204) 공도 일찍이 장원급제를 하여, 세 분이 함께 이 정자에 모여 성대한 놀이를 하였다. 그 뒤에 민공의 손자인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도 대과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가 되었는데, 인근 고을의 수령으로서 일찍이 대과에 급제한 사람 2명과 잇달아 이 정자에 모여 그 선조의 성대한 자취를 추모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전한다. 단암이 이른바 "용두정 위에 용머리가 모였으니, 육십 년 사이에 두 번의 멋진 놀이였네.[龍頭亭上會龍頭 六十年間再勝遊]"라고 한 곳이 이곳이다. 땅이 이미 용머리의 모양과 비슷하고 사람이 또 용머리를 차지한 사람이 모여 사람과 땅이 서로 부합하였으니 일이 매우 기이하다. 마침내 단암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포의들이 영락한 채로 용두정에 모여 布衣零落會龍頭용두의 예전 놀이를 추억하며 말하네 追說龍頭昔日遊안개 낀 경치는 저무는 삼월에 어여쁜데 煙景堪憐三月暮세상 바뀌어 온갖 인연 끝난 걸 어찌할까 滄桑其柰萬緣休쌓인 회포는 정히 교산과 함께 우뚝하고 積懷定與蛟山屹깊은 한은 요수에 흘려보내기도 어렵네 深恨難將蓼水流만년에 한 말 술 따라주는 친구 있으니 晩有故人斟斗酒세속먼지 씻기에는 옥경루보다 나으리라 滌塵勝似玉京樓돌아오는 길에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생각건대 예전에 좌망공의 조부인 서계공(西溪公) 김협(金鋏)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서 살게 된 것은 진씨(晉氏) 집안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계공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좌망공은 장원급제를 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으며, 그분의 아우인 김호(金灝)도 진사가 되었으니, 그 또한 성대한 일이었다. 서계공의 아들인 김이길(金履吉)이 또 이언촌(伊彦村)의 동대(東臺)에 살았으므로 호를 동대라 하였다. 대개 이언과 지당 두 마을은 세상에서 일컫는 남원의 으뜸가는 터로서 각 성씨들이 함께 발원하였으며 명성이 다른 고을에까지 알려졌으니, 만약 서계공과 좌망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머물러 살았다면 그 복이 지금까지도 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여기에 나오지 않아 중엽에 쇠퇴하여 뿔뿔이 흩어져 살기에 다시 찾을 길이 없고 다만 노인들이 아무개 집안[某家]의 옛터라는 말만 서로 전하고 있으니, 방계 후손으로서의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서계공은 할아버지요 좌망공은 손자인데 西溪之祖坐忘孫이곳에서 살던 당시엔 또한 번성하였네 宅此當年亦盛繁진씨의 집안에서는 사위205)가 되었고 晉氏舘中爲玉潤용두 뽑는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네 龍頭科第占魁元이름난 터전은 이미 남의 물건 되었고 名基已作他人物남긴 자취는 노인들의 말에서 전해지네 遺蹟相傳故老言해질녘에 배회하며 세 번 탄식하는 것은 薄暮徊徨三歎息같은 뿌리인 선대에 감회가 일어서라네 有懷先世棣同根이날 밤에 유천에서 잤다.24일. 벗 방관(房琯)이 산에 들어가는 노정(路程)을 기록하였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운봉(雲峯)으로 나가는 길을 잡은 것은 내가 가장 높은 천왕봉(天王峯)에 먼저 오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여원치(女院峙) 아래에 이르러 우리 종족(宗族)이 사는 목동(木洞)과 내기(內基) 두 마을을 지나게 되었기에 먼저 내기에 사는 친척인 김성헌 영우(金惺軒榮禹)를 찾아가서 묵었다. 다음날 목동에 이르러 친척 어른인 김회산 양식(金晦山亮植)을 찾아가 뵈었는데 비 때문에 이틀을 묵었다.27일. 하늘이 비로소 갰다. 풍곡(風谷)에 들어가 충경공(忠景公 김익복(金益福))ㆍ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ㆍ도촌(陶村 김연(金沇))의 묘소에 참배하였는데 친척인 김영회(金榮會)가 앞에서 인도하였다. 묘소의 국세(局勢)는 빙 둘러싸고, 중건한 재실(齋室)은 굉장(宏壯)하여 사대부 집안의 선산(先山)이라고 할 만하였다. 대개 내가 30년 전에 잠시 이곳을 지났었는데 지금 다시 지나니 거의 새로운 모습 같았다.석양녘에 내기로 돌아와 묵었다. 내기라는 마을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맺힌 형국[結局]은 또한 이름난 터전이니, 김성헌의 선조 중에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급제한 분이 이 마을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28일. 떠나려고 할 때에 김성헌이 매우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오로지 산을 구경하기 위한 것인데 집을 떠난 지 열흘이 되었으나 아직 산 아래에도 도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오래 머물 수 있겠는가. 애써 사양하고 나오자 김성헌과 그의 아우 및 김영회가 5리쯤까지 전송하고 작별한 뒤에 10리쯤 가서 여원치(女院峙) 위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이 두류산으로 들어가는 주맥(主脈)이다. 그 서쪽에 봉우리 하나가 빼어나게 솟았고 위에 주지암(住智菴)이 있는데 초절(超絶)하여 구경할 만했으나 미처 보지는 못했다. 고개 이름을 '여원'이라 한 것은, 태조[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정벌할 때 이 고개를 지나갔는데 어떤 여자 도사가 대승을 거둘 날짜를 알려주었으므로 태조가 그 기이함에 감동하여 석벽에 여자 도사의 모습을 새기라고 명하고 그 위에 원옥(院屋)을 지어 수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운봉 현감이 돌에 새긴 기실문(紀實文)이 있다.운봉의 옛 읍을 지나 화수산(花水山) 아래에 이르러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206)를 보았다. 비석은 태조가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활로 쏘아 죽여서 왜구를 소탕한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이 지었다. 비석은 높고 크며 비각은 굉장하였으니, 지금 비록 나라가 망했지만 오히려 새로 단장하였다. 비각의 서쪽 석벽에는 태조가 당시에 써 놓은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또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옛일에 감동하고 오늘날의 일을 슬퍼하여 장편 고시(古詩) 한 수를 지었는데 글자 수가 많아 기록하지 않는다.비각에서 시내를 따라 내려가서 황산의 왜적을 평정했던 곳에 이르니, 아지발도의 핏자국이 바위에 스며들어 아직도 붉고 돌 위에는 말발굽이 밟은 흔적이 뚜렷하다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인월(引月) 시장을 거쳐 산내방(山內坊)에 들어갔다가 함양(咸陽)의 마천(馬川)에 이르러서 묵었다.여원치부터 이후로는 물길 따라 서쪽의 산이 모두 두류산인데, 비록 차례대로 올라가지는 못하였지만 산이 높고 물이 맑음을 알겠다. 하루 내내 푸른 절벽과 하얀 폭포 사이를 뚫고 가니 심신이 갑절이나 상쾌하였다.29일. 이른 아침에 곧장 천왕봉에 오르려고 할 때 도촌(島村)의 강주원(姜周元)을 찾아가 산으로 올라가는 노정을 물으니 천왕봉과의 거리가 40리라고 하였다. 안내자 1명을 사고 점심을 마련하여 싸서 몸을 떨쳐 일어나 힘을 내어 바쁜 걸음으로 올라갔으니, 산 위에는 묵을 만한 집이 없다고 하기에 당일에 돌아올 계획이었다.10리를 가니 '하동암(河東巖)' 세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는데, 옛적에 하동 군수가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다가 떨어져 상처를 입고는 이 바위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두려워서 수당(垂堂)의 경계207)를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제석당(帝釋堂)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통천문(通天門)의 잔도(棧道)를 지나 미시(未時) 초에 비로소 천왕봉 꼭대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천왕봉의 높이가 높다는 것을 알았지만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인데도 나뭇잎이 펴지지 않고 철쭉도 피지 않은 것은 아마도 높고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호남과 영남에는 대개 큰 산이 많지만 굽어보니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자그만하였다. 날씨가 맑을 때는 서쪽ㆍ남쪽ㆍ동쪽 삼면의 바다가 멀리 하나의 띠처럼 보이고, 일본의 대마도를 어렴풋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구름이 하늘과 잇닿아 혼연히 끝이 없어 안타까웠다.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산은 선산(仙山)이라 신선과 인연이 없는 사람은 정상까지 오르기도 전에 비와 안개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다. 나의 오늘 산행은 마침 그믐이어서 어둡고 비가 많은 것이 상례인데도 다행히 비는 맞지 않았으니, 아마도 하늘의 도움을 얻어 인연이 있었던 것인가. 또한 우습기만 하다.예전에 내가 금강산의 비로봉(毘盧峯)에 올랐고 오늘은 또 이 봉우리에 올라 보니, 이 봉우리가 비로봉보다 높음을 알겠다. 그런데 사람들이 비로봉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이라고 하지만 천왕봉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듣지를 못하였으니, 아마도 비로봉은 동북쪽의 위에 있고 천왕봉은 서남쪽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위 위에는 '일월대(日月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전후에 유람한 사람들의 제명(題名)208)이 많이 있다. 혹은 부자(父子)가 함께 제명하고 4대(代)가 나란히 이름을 써서 족보와 똑같은 경우도 있으니, 이것은 일벌이기를 좋아함이 지나친 것이다.아, 높은 곳에 오른 사람이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공자(孔子)는 태산(泰山)에서 천하를 작게 여겼으며,209) 주자(朱子)는 축융봉(祝融峯)에서 호탕한 기상을 드러내었으나,210) 지금 나는 뜻은 있어도 주견(主見)이 없으므로 얻은 것을 말할 수 없다. 주의(周顗)는 신정(新亭)에서 산하에 느낌이 있었고,211) 〈위시(衛詩)〉에 "서방에 있는 미인을 바라본다.[望美人於西方]"212)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날 당한 처지이다. 공자와 주자가 얻은 것은 바름[正]이고, 〈위시〉에서와 주의가 느낀 것은 변화[變]이다. 그 바름을 얻으면 변화를 만나더라도 그 중도(中道)를 잃지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시대의 변화를 슬퍼하여 혹 상심하는 데 이를 것이니, 이 또한 내가 힘써야 할 부분이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높구나 이 산의 꼭대기여 高哉此絶頂한 번 올라서 무엇을 하려는가 一陟欲何爲말하면 하늘 놀래킬까 걱정되고 語恐驚天上눈은 응당 땅 끝까지 다 보리라 眼應極地涯공자가 태산에 오른 날과 같고 宣尼泰嶽日주자가 축융봉에 오른 때와 같네 晦老祝峯時하지만 천추에 대한 나의 생각을 而我千秋想곁에 있는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傍人那得知조자정이 말하기를,"옛적에 병암(炳菴) 어른이 이 산의 반야봉(般若峯)에 올라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기분이 좋다고 외치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나 또한 성인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하였다. 내가 말하기를,"옛사람이 산꼭대기에 오른 것으로써 도(道)에 대한 조예가 지극한 데에 비유하였는데, 병암 어른은 도에 대한 조예가 지극한 것으로써 산꼭대기에 오른 것에 비유하여 자신이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을 마쳤음을 말한 것이니, 피차 바꾸어 말하는 사이에 자신이 힘쓰면서 타인을 권면하는 뜻을 볼 수 있네."라고 하였다.아, 북쪽을 바라보면 함양(咸陽)의 개평(介坪)이요, 동쪽을 바라보면 진주의 덕산(德山)이 모두 지척간에 있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상한 풍모를 움켜쥘 수 있으니, 아마도 이 산이 신령한 기운을 모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남쪽을 바라보면 남강(南江) 일대가 흰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한데, 김 문열공(金文烈公 김천일(金千鎰))ㆍ황 무민공(黃武愍公 황진(黃進))ㆍ최 충의공(崔忠毅公 최경회(崔慶會)) 삼장사(三壯士)가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에는 충성스럽고 굳센 혼백이 천고에 길이 남아 있으니, 명현(名賢)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죽은 것은 또한 산의 신령함이 시킨 것이리라. 여러 현인이 모두 재주와 뜻을 품고서 덕업을 닦고 쌓아 크게 등용되어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일이 어그러져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남명은 은둔하여 화를 면하였으나 일두는 사화(士禍)에 죽고 삼장사는 병난(兵難)에 죽었으니, 요컨대 모두 시변(時變)의 불행이다. 고금 천하에 변고가 이렇게 많았으니 나는 변고에 어떻게 할 것인가? 다만 뜻을 편안히 하여 대처할 뿐이다.배회하면서 두루 보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이날은 또 삼춘(三春)이 다하는 날이었다. 봄을 보내는 사람은 으레 반드시 높은 곳에 오르는데 마침 이날에 이렇게 아주 높은 곳에 올랐으니 이번에는 매우 아름다운 곳에서 봄을 보냈다고 할 만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천왕봉 위에서 청황213)을 전송하는데 天王峯上餞靑皇일월대 앞에는 또 석양이 지는구나 日月臺前又夕陽오는 길에서는 봄바람과 짝이 되었으나 來路東風同作伴봄은 가고 나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네 春歸我獨未歸鄕돌아가는 길이 금방 어두워질까 걱정되어 급히 하산하였으니, 침구와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하룻밤을 여기에서 묵어보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여기에는 집 모양 같은 돌담장과 시우(柴宇)214)가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밤을 지낼 계획을 세워 밤에는 노인성(老人星)을 보고 새벽에는 일출(日出)을 보는데 날씨가 쾌청하고 따뜻한 추분(秋分)을 택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미처 그것을 몰라 이런 실책을 저질렀다. 서둘러 내려와 백무촌점(白武村店)에 이르니 저녁밥을 내왔다. 식사를 마치고 쓰러져 누웠는데 너무 피곤하여 온몸이 매를 맞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마침내 스스로 웃으며 말하기를,"심하구나, 너의 산수를 좋아함이여! 누가 너에게 이렇게 하도록 하였는가? 번거로운 일을 자신이 만들었으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라고 하였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누가 장엄한 경관 좋다고 했던가 誰言壯觀好몸 고생이야 다시 비할 곳 없네 身苦更無比우습구나 영대의 주인215)이여 堪笑靈臺主스스로 한때의 상쾌함 구했구나 自求快一時이 시는 몸이 마음을 책망한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한때의 상쾌함을 구한 것이 아니라 非求快一時지자와 인자의 마음을 보려 하였네216) 要見智仁術내 진실로 사욕과 먼지 씻어냈으니 我苟淨私塵이에 너 또한 없어진 것을 알겠네 從知你亦逸이 시는 마음이 몸에 대답한 것이다.4월 1일. 백무(白武)를 떠나 직치(直峙)를 넘어가려고 덕평(德坪)을 찾아갔다. 지나는 곳을 보건대 조금 넓고 평평한 곳에는 비록 지대가 매우 높거나 골짜기가 아주 깊숙하더라도 더러 인가가 있었다. 대개 지금은 오랑캐가 정권을 장악하여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곳에 들어와 산을 개간하고 감자를 먹고 살며 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그런데 저들의 법령은 깊은 골짜기에도 들어가지 못함이 없으니, 산은 국유(國有)라고 하며 숲을 양성함이 매우 엄하여 숲을 태워 밭은 만드는 것도 금지하여 할 수가 없다. 깊은 산에서 얻는 것이 이것뿐인데도 오히려 구금(拘禁)을 당하니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비록 그렇지만 간혹 잡은 터가 온난(穩暖)하고 개간한 땅이 비옥한 경우도 있으니, 감자와 보리가 모두 풍성하고 약초밭도 좋으며 시장이 3, 40리에 불과하여 교역할 수 있기에 한 해를 마치도록 굶주림과 추위에 대한 근심이 없고, 아울러 저들의 사역(使役)과 조사를 당하지 않는다. 이것을 어찌 평지와 들판에서 저들의 농지를 소작하고 저들이 시키는 일을 하여 노예가 되고서도 오히려 죽음을 구제하기도 부족한 경우와 같은 선상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가령 내가 만난 밀양에서 온 민씨(閔氏) 4형제는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고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낙토(樂土)로 여기니, 아마도 산이 지극히 넓고 골짜기가 지극히 깊기 때문에 혹 이러한 곳이 있는가 보다. 나처럼 세상과 맞지 않은 사람은 정히 이곳에 들어와 요행으로 안온한 곳을 얻어 여생을 마칠 수 있겠으나, 다만 근력이 이미 노쇠하여 농사짓는 수고로움을 견딜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직치 아래에 이르러 갑자기 길을 잃어 진퇴유곡(進退維谷)이었다. 반나절 동안 암석과 가시덤불 사이를 헤치고 나가서야 겨우 화를 면하니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되었다. 정오가 지나서 이른바 덕평(德坪)에 당도하였다. 이곳은 하동(河東) 땅인데 지대가 너무 높고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처음 오는 사람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거주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이곳에서는 오곡(五穀)이 나지 않고 다만 청저(靑藷)만 생산되는데, 처음에는 청저가 매우 풍족하여 먹는 데에 여유가 있었으나 근년에는 바람이 많고 추위가 심하여 청저의 수확량이 줄어 양식 대기가 어렵게 되자 대부분 이사를 가서 20호나 되던 마을에 지금은 6, 7호만 남았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도 진퇴양난이지만 형편상 어찌할 수가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먹을 수 있는 뒤에야 외딴 지역에서 살 수 있는데 이 지역은 이미 먹을 것이 없으니 살 만한 땅이 아니다.이밖에 또 이른바 상세석평(上細石坪)과 하세석평(下細石坪)이 있는데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길지(吉地)로, 여기에서 30리 거리이다. 상세석평은 어제 천왕봉 정상에서 이미 바라보았는데, 산 위에 열린 국면이 덕평보다 지대가 높다. 그러나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였으며 좌우로 안온하게 감싸고 있어 바람을 가두는 것 같으며 국면의 안쪽은 매우 넓고 크며 순대(脣臺)를 이루고 있어 형세가 매우 오묘하였다. 하세석평 또한 그렇다고 한다. 예전에는 수많은 노송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었으나 근래에 모두 말라죽어 풀이 자라나는 곳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운수가 돌아왔다고 여겨 사람들이 간혹 들어와 살았지만 끝내 다시 되돌아간 것은 지대가 높고 추워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형이 이미 오묘한데다가 최고운(崔孤雲)의 유적이 있으니 한번 구경하는 것은 괜찮으나 길이 험하고 피로가 심하여 그만두었다. 이날 밤에 삼정리점(三井里店)에서 묵었다.2일. 당현(堂峴)을 넘어 칠불암(七佛菴)에 당도하였다. 암자는 매우 그윽하고 외진 곳에 있는데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왕자 7명이 이곳에서 성불(成佛)하였으므로 암자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수로왕은 중국 연대로 따진다면 서한(西漢) 시대에 해당되는데, 그의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보다 앞섰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내가 금강산을 유람할 때에 유점사(楡岾寺)를 기록하면서 이에 대해 이미 상세하게 논하였다.암자에는 아자방(亞字房)이 있으니, 하나의 큰 방 안에 높고 낮게 구획을 하고 아(亞) 자 모양과 같게 하였는데 하나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높은 곳과 낮은 곳이 모두 따뜻하며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담공선사(曇空禪師)가 만든 것인데, 이것이 비록 선가(禪家)의 작은 기술이지만 또한 매우 특이하다.도중에 삼신동(三神洞)의 서숙(書塾)을 지나게 되었는데, 숙사(塾師 훈장)인 박정규(朴貞圭) 씨는 정민화(鄭閩華) 아내의 아우로서 초면인데도 옛 친구와 같아 은근히 만류하였다. 백주(白酒)ㆍ황반(黃飯)ㆍ산나물ㆍ민물고기 등은 향긋하고 정갈하여 입맛에 맞아 며칠 계속된 피로가 감소하였으며, 나그네의 고달픔이 가지가지였으나 우연히 좋은 주인을 만나 하룻밤을 묵으니 그 안온하고 편안함은 문득 집으로 돌아간 것과 같았다.3일. 시내를 따라 내려와 세이암(洗耳巖)에 이르렀다. 이곳은 고운(孤雲)이 유람하던 곳으로 수석(水石)이 매우 기이하고 제명(題名)이 많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고인은 귀뿌리를 씻고도 남겠지만 高人洗得耳根餘속인의 공명심은 씻어낼 수가 없네 俗子名心洗未除고운이 노닐던 곳이라 하는 곳에는 云是孤雲遊賞地돌에 새긴 이름들 어지럽기만 하네 刻題石面紛紛如여기에서 20리를 가서 쌍계사(雙磎寺)에 들어갔다. 절이 두 계곡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의 안쪽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얻었을 것이다. 동구(洞口)의 좌우에 있는 석벽에는 '쌍계석문(雙磎石門)' 네 글자가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쇠지팡이[鐵杖]로 돌에 쓴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러했을까? 절은 겨우 중간 규모의 사찰인데 전각은 매우 화려하다. 문루(門樓)에 '청학루(靑鶴樓)' 세 글자가 걸려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이곳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생황을 불자 청학이 날아 왔기에 후세 사람들이 이 때문에 누각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마침내 판상(板上)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청학을 맞이하려고 누대를 세웠나니 爲迎靑鶴起樓臺세속 밖 신선이 몇 번이나 찾아왔나 物外仙人幾度來신선 떠나고 학도 돌아간 천 년 뒤에 仙去鶴歸千年後내가 여기서 배회할 줄 어찌 알았으리 豈知滄老此徘徊세상에서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십승(十勝)의 하나로서 만 명이 살 수 있고 삼재(三災)217)가 들지 않는다고 한다. 산꼭대기나 깊은 계곡을 샅샅이 찾아보고서 어떤 사람은 세석평전이나 덕평 등지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나 천여 년 전에 청학이 일찍이 이곳에 와서 청학루가 만들어지게 된 줄은 전혀 모르니, 청학루가 있는 곳이 바로 청학동이다.대개 화개(花開) 시장 위로부터 벽소령(碧霄嶺) 아래까지 상하로 4, 50리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고 있어 바람이 온화하며 토질이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곡식과 과일이 모두 구비되었고 담배가 많이 생산되기에 온 산 가운데 가장 낙지(樂地)로서 만 명이 생활할 수 있고 삼재가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니, 이곳이 아마도 청학동이 아닐까?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두류산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218)에서 '그대는 이제 청학동 사람이네.[君今靑鶴洞中人]'라고 한 것도 이 골짜기를 가리키니, 당시에 어찌 세석평전이나 덕평 등지와 같이 궁벽지고 매우 험하여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을 가리켜 운운하였겠는가.절 마당에는 옛 비석이 하나 있는데 고운이 지은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이다. 그 내용 중에,"여산(廬山)의 혜원(惠遠)은 논(論)을 지어 '석가여래와 주공(周公)ㆍ공자(孔子)는 출발점은 비록 다르지만 귀착점은 동일한데, 두 종교의 정수를 함께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둘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심약(沈約)219)은 '공자는 그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그 극치를 다했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체(大體)를 알았다고 이를 만한 자라야 비로소 함께 도(道)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부분을 읽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논평하였다.유학에는 대본과 달도220)가 있으며 儒有大本與達道허무적멸은 불가에서 보배로 여기네 虛無寂滅佛所寶동정과 체용은 본디 절로 다르기에 動靜體用本自殊섞어서 구분하지 않으면 모호해지네 混而無分已糊塗공자가 단초 열고 석가가 극치 다했다니 무슨 말인가 孔發釋窮是何言유학을 인용해 불교에 들여 불교가 도리어 높아졌네 援儒入佛佛反尊고운이 아마도 유가의 자식이 아니어서 孤雲豈非儒家子이름과 실상이 같지 않은 것은 아닐까 無乃名實不相似퇴계 이후로 연재와 간재에 이르기까지 退溪而後逮淵艮참으로 전해오는 천추의 의론이 있다네 良有以來千秋論여기에서 화개 시장을 거쳐 섬진강가에 이르렀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배들이 오르내려 가슴이 확 트이니, 산속의 유람과 비교해봄에 또 별다른 취미(趣味)였다. 그래서 일두(一蠹) 시의 "바람결에 부들은 가벼이 흔들거리고 사월의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어가네. 두류산 천만 겹을 다 구경하고 조각배 타고 또 큰 강물로 내려가네.[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라는 구절을 읊고서 조자정에게 웃으며 말하기를,"우리들은 겨우 산 하나만을 다 보았지 배를 타고 큰 강으로 내려가지는 못했으니 일두 노인의 풍류에는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겠네."라고 하였다. 일두의 시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안개 빛이 흥취를 도와 붓에 들어왔나니 煙光助興入毫柔푸른 나무 그늘 짙고 보리는 익지 않았네 綠樹陰濃麥未秋섬진강 물이 넘실넘실 만 장이나 솟으니 蟾水滔滔萬丈屹일두 옹의 높은 노래에 풍류를 상상하네 蠹翁高詠想風流강을 거슬러 올라 20리를 가서 송정점(松汀店)에서 묵었다.4일. 구례(求禮) 토지면(土旨面)을 지나며 이른바 금환락지형(金環落地形)이라는 새로운 명당을 살펴보았다. 각처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집터를 잡았으나 대부분 실패하여 떠났고 오는 사람들이 또 이어져 마을과 집들이 별처럼 널려 있고 바둑알처럼 놓여있는데 어느 곳이 진짜인지 모른다고 하니 도리어 허명무실(虛名無實)한 것이다. 그렇지만 요컨대 산과 물이 둘러 감싸고 사방의 들판이 광활하여 천 명이 살 만한 곳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여기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20리를 가서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갔다. 화엄사는 큰 사찰이며 2층 각황전(覺皇殿)은 매우 높다. 이는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자식을 위하여 복을 구하려고 사람을 시켜 짓게 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여래사리탑(如來舍利塔)은 매우 정묘(精妙)하였으며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였다. 마당에 있는 〈벽암선사비명(碧巖禪師碑銘)〉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221)이 지었다. 비문 안에 임진왜란 때 나라에 공로가 있음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는데, 그가 비록 승려이지만 임금을 위한 충성을 알았으니 가상한 일이다.또 북쪽으로 20리를 가서 수월치(水越峙)를 넘어 미국인의 피서실(避暑室)에 당도하였다. 집이 50여 곳이나 되고 돌로 지어서 외부는 견고하고 내부는 화려한데, 높고 크며 매우 험한 곳에 이처럼 집을 지었으니 많은 돈이 들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말로는 미국은 돈이 많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듯하다. 산 위의 형국은 산봉우리가 수려하고 시야가 확 트였으며 돌 사이에서 샘물이 나오는데 저울로 달아보면 그 무게가 다른 물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그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한다. 대저 누가 이곳에 이렇게 좋은 터가 있는 줄을 알았겠는가. 또한 미국인들에게도 감여술(堪輿術 풍수지리술)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매우 더울 때에 왔다가 더위가 물러가면 떠나는데, 여름철에는 문득 번화한 곳이 되며 골짜기에 사는 곤궁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용이 되어 작은 돈이라도 받게 됨을 기뻐한다고 하니, 우리 망국 백성들의 가련함이 슬프다. 이곳은 반야봉과의 거리가 이미 중반이 되는데, 바라보면 한 번 뛰어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오히려 20리나 된다. 사람들은 흔히 반야봉과 천왕봉이 지리산의 최고봉이지만 반야봉이 조금 낮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그 높은 곳에 올라보았으니 낮은 곳을 포기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5일. 여기에서 하산하여 구산령(九山嶺)을 넘어 구례 당곡(堂谷)을 거쳐 원우점(院右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또 둔산령(屯山嶺)을 넘어 남원 포암(包巖)의 정자경(鄭子敬 정영식(鄭泳寔))의 집에 이르러서 묵었다. 비록 두루 찾아보고 세세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이에 안팎의 전체 산을 대략 보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백두산에서 흘러온 맥이 남도를 진압하니 白頭流脉鎭南州중국에 있는 형산과 더불어 짝할 만하네 中國衡山可與儔일만 골짝에는 은하수 같은 폭포가 걸렸고 萬壑皆懸銀漢瀑일천 봉우리는 높이 옥경루에 닿을 듯하네 千峯高逼玉京樓신의 정령은 현인들을 얼마나 길러 내었나 精靈幾毓群賢出골짝은 깊고 넓어 오곡을 지을 논밭이 많네 深廣多治五穀疇등람할 때는 인자 지자의 마음 알아야 하니 登覽要知仁智術보고도 안 본 것과 같으면 부끄러운 일이네 看如不看也堪羞대개 내가 전에 보았던 금강산을 이 산과 비교해 보면, 금강산은 맑고 뾰족하며 우뚝 솟아 있고 지리산은 웅장하고 높으며 깊어서 광대한 점이 금강산보다 낫다. 금강산은 청명(淸明)한 군자가 세속의 번거로움을 벗어나 사람으로 하여금 속된 생각을 저절로 없애게 하는 것 같고 지리산은 장중(莊重)한 군자가 덕이 두텁고 학식이 넓어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속마음을 추측하기 어렵게 하는 것 같으니, 요컨대 학자들이 모두 취하여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다만 세상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이라는 설을 가지고 논하자면, 기이한 형상과 빼어난 모습은 당연히 금강산이 제일 앞을 차지하고 두류산이 그 아래에 해당된다.또 듣건대 영남과 호남 사람들이 서로 이 산을 자기의 도에 소속시키려고 하여 아직도 논의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개 차지하는 면적의 넓이와 앞뒤의 방향으로 본다면 마땅히 영남에 속해야 하고, 국가의 전례(典禮)인 남악묘제(南嶽廟祭)를 호남에서 지내는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호남에 속해야 하니, 아마도 이 산의 주맥(主脈)이 이미 호남에서 반야봉으로 들어가 먼저 주봉(主峯)을 일으키고 또한 호남 땅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태조가 천명(天命)에 응하여 날마다 명산(名山)에 기도하였는데 여러 산의 신령은 모두 응답하였으나 유독 이 산의 신령만 응답하지 않았기에 호남에 폄적(貶謫)되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말에 해당된다.그렇지만 나는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이 산은 한결같이 모두 중후하여 어긋난 기운이 없다. 그 가운데서 비교해서 논한다면 반야봉은 흙이 많고 돌이 적어 한결같이 수려하며, 천왕봉은 돌이 많고 흙이 적어 조금 가파른 바위가 많으니, 이 때문에 호남 사람의 마음은 유순하고 영남 사람의 마음은 굳세고 사나울 것이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6일. 포암을 떠났다.7일. 해질 무렵에 비로소 귀가하였다. 총 19일이 걸렸다. 頭流山卽智異山別名, 白頭之流脈, 至此而益高大, 故其得名以是焉. 此山雄據南服湖、嶺間, 巍然而高, 洞然而深, 在全國諸山, 罕與比倫者, 有似乎中州之衡山, 遠在南土, 爲五嶽中最鉅焉. 且三神山之說, 雖不可盡信, 古傳在東海中, 而說者以我國之金剛當蓬萊, 漢挐當瀛洲, 頭流當方丈. 故方外仙子道禪之流固無倫, 以至儒家之淸士達人, 未嘗不以一見爲快焉. 往在甲辰陪先師, 到南原地, 留止旬日, 距此山初頭百里而近. 炳菴金丈【駿榮】作此山行, 要余隨之, 先師止之曰: "此行, 吾亦有意. 但以國恤受衰之身, 遊山未安, 待後圖之. 君可於其時同余, 今於旅次舍君, 則如失左右手, 以此止之. " 夫孰知世事難測, 翌年有五賊賣國之變, 至於庚戌宗社永覆, 先師則早已入島自靖而考終於壬戌之歲乎? 俯仰今昔, 感愴罔涯, 而此山之約, 言猶在耳. 甲戌之春, 窮居無聊, 忽然動得古人沂、雩之想, 而頭流一遊, 固嘗所願者. 適趙弟子貞請余伴行, 乃以三月十九日, 與之登程. 二十日. 暮至淳昌赤谷, 拜傍祖礱巖先生墓, 觀巖刻尤翁筆"磨礱巖觀水堂"六字. 有詩曰: "鷲峯矗矗柏山蒼, 四尺之高萬古藏. 柿栗當年皆手種, 林泉故宅有遺芳. 不因道學高如許, 那得衿紳久未忘? 珍重礱巖巖刻字, 淵源足證自華陽. " 夜宿山下族人家. 二十一日. 過南山臺, 登歸來亭, 亭是申公末舟築. 申公是光廟勳臣叔舟弟, 當其兄手握重權之日, 何求不得? 而乃浮雲富貴, 惟義是視, 歸遯于此, 此其所以爲高也. 不勝曠世之感, 次板上松雲姜公【希孟】詩曰: "作亭歸老意, 不爲田園荒. 陋巷眞安土, 萬鍾是濫觴. 玉川魚可釣, 峨谷蕨何香? 曠感多今日, 登臨整我裳. " 夜宿申氏家. 二十二日. 至南原楡川房珍家, 故人福之【煥永】之姪. 福之沒, 但致緘辭, 未得親哭, 故今雖三年過久, 而歷路爲訪, 則福之子十餘歲者亦死, 後事落莫, 不忍言. 二十三日. 房氏老少, 爲余沽酒, 請遊沙溪精舍. 精舍, 房氏先祖所築, 而至今四百年世守. 板上題詠, 自一齋、南冥、蘇齋、月沙、象村以下名賢文章, 無慮百餘家. 余見人家亭舍多矣, 蓋未有若此之盛者, 亦足以見子孫之世其家矣. 遂次韻題一詩曰: "半千世業罕吾東, 文獻足徵精舍中. 板上曾多先輩筆, 牕前已老十圍松. 鼎鍾當日浮雲薄, 講學相傳琢玉瓏. 試看沙溪流不盡, 德門遺蔭也無窮. " 午後, 與諸友出遊龍頭亭. 龍頭亭卽池堂左一岡, 形如龍頭故名, 而舊有亭, 今廢. 余之傍九世祖坐忘公諱灦、堂村黃公暐同居此里, 俱登文科壯元, 同時南原府使閔公光勳亦嘗魁科者, 三人共會此亭, 作盛遊. 其後閔公之孫丹巖鎭遠亦登魁科而爲本府使, 與近邑守寄之曾爲魁科者二人, 繼會此亭, 追其祖盛蹟, 至今鄕人傳以爲美事. 丹巖所謂"龍頭亭上會龍頭, 六十年間再勝遊"者此也. 地旣似龍頭之形, 人又會龍頭之占, 人地相符, 事甚奇哉. 乃次丹巖韻, 題詩曰: "布衣零落會龍頭, 追說龍頭昔日遊. 煙景堪憐三月暮, 滄桑其柰萬緣休? 積懷定與蛟山屹, 深恨難將蓼水流. 晩有故人斟斗酒, 滌塵勝似玉京樓. " 歸路, 有所感于心者. 念昔坐忘公之祖西溪公諱鋏始居此里, 爲晉氏館甥故也. 西溪公登進士, 坐忘占魁科, 歷敭淸顯, 其弟諱灝亦爲進士, 其亦盛矣. 西溪公子諱履吉又居伊彦村東臺, 故號以東臺. 蓋伊彦、池堂兩村, 世所稱南原首基, 各姓俱發, 名聞他郡, 如得西、坐子孫世世奠居, 則其福, 至于今未艾也. 而事不出此, 中葉衰替, 蕩析離居, 無復可尋, 只有故老相傳某家舊址之言, 其在傍裔之感, 寧不悲哉? 有詩云: "西溪之祖坐忘孫, 宅此當年亦盛繁. 晉氏館中爲玉潤, 龍頭科第占魁元. 名基已作他人物, 遺蹟相傳故老言. 薄暮徊徨三歎息, 有懷先世棣同根. " 是夜宿楡川. 二十四日. 房友琯爲錄入山路程甚詳. 當路出雲峯, 以余欲先上最高天王峯也. 至女院峙下, 吾宗族所居木洞、內基兩村爲歷路, 先訪內基族人惺軒【榮禹】而宿. 翌日, 至木洞, 訪見族丈晦山【亮植】, 因雨信宿. 二十七日. 天始晴. 入風谷, 拜忠景公、在澗堂、陶村墓, 族人榮會前導. 墓所局勢之環抱, 重建齋舍之宏壯, 可稱士夫先山. 蓋余三十年前, 暫經此地, 至今再過, 殆若新面目矣. 夕陽, 還內基而宿. 內基爲里雖小, 結局亦名基, 惺軒之先, 大小科甲, 多出此里云. 二十八日. 將發, 惺軒挽止甚勤. 然今行耑爲觀山, 而離家一旬, 尙未到山下, 豈容久留? 苦辭而出, 惺軒與其弟及榮會送至五里許, 作別後, 行十里許, 到女院峙上, 此是頭流山入去主脈. 其西一峯秀出, 上有一菴名住智, 超絶可觀, 而未及見. 峙云女院者, 太祖征倭荒山時, 過此峙, 有一道姑告以大捷日時, 故太祖感其異, 命刻道姑像貌于石壁, 作院屋其上而守護之. 有雲峯縣監石刻紀實文. 歷雲峯舊邑, 至花水山下, 見荒山大捷碑. 碑是太祖射殺阿只拔都蕩平倭寇紀實, 而大提學金貴榮撰也. 碑高大, 閣宇宏壯, 今雖屋社, 尙爾一新. 碑閣西石壁太祖當日題名尙在, 亦閣而庇之. 感古悲今, 賦長篇古詩一首, 字多不錄. 自碑閣沿溪而下, 至荒山平賊處, 拔都血痕入石尙赤, 石上馬蹄踏痕宛然, 居人指示云然. 經引月市, 入山內坊, 至咸陽馬川而宿. 自女院峙以後, 隨水以西之山, 皆是頭流, 雖不能次第登臨, 已覺山高而水淸. 終日行穿蒼壁素瀑之間, 心神一倍爽快. 二十九日. 早朝, 將直上天王峯, 訪島村姜周元, 問山上路程, 距峯上四十里云. 買得案內者一人, 備裏午料, 奮身出力, 忙步以上, 山上無屋可宿云, 故當日回來計也. 行十餘里, 有巨巖刻"河東巖"三字, 昔河東郡守乘轎上山, 墮落見傷, 至此巖而死, 故名云. 聞此瞿然, 益謹垂堂之戒矣. 點心于帝釋堂, 經通天門棧道, 未時初, 始至絶頂. 儘覺高則高矣, 當此春夏之交, 木葉不敷, 躑躅未放, 豈非高寒所致乎? 湖、嶺兩省, 蓋多鉅山, 而俯視之, 藐然若丈人之於兒少矣. 天氣淸明時, 西南東三面之海, 遠見若一帶, 日本之對馬島, 隱隱可見云, 而是日雲靄接天, 渾無際涯可恨. 然而人言"此山仙山, 無仙緣者, 未到絶頂, 多爲雨霧所困". 余之今行, 適値晦日, 晦而多雨例也, 而幸不値焉, 豈其得於天而有緣者耶? 亦可笑也. 昔余上金剛之毘盧峯, 今又陟此峯, 覺得此峯之高於毘盧矣. 然而人稱毘盧爲我國第二高處, 天王則未聞焉, 豈以毘盧在東北上游, 天王在西南低下處故耶? 巖上刻"日月臺"三字, 多有前後遊覽人題名. 或父子同題, 至有四世聯書, 便同世譜者, 此好事之過也. 嗚呼! 登高者, 必有所懷, 古今所同. 尼聖小天下於泰山, 晦父發豪氣於祝融, 今余則有其志而無其見, 不足以道所得者. 周顗感山河於新亭, 《衛詩》望美人於西方, 此正余今日之所遭也. 尼、晦之所得者正也, 《衛》、周之所感者變也. 得其正, 則遭變而不失其中, 不然, 則哀於時變而或至於傷, 此又吾之所當勉者. 因有詩曰: "高哉此絶頂, 一陟欲何爲? 語恐驚天上, 眼應極地涯. 宣尼泰嶽日, 晦老祝峯時. 而我千秋想, 傍人那得知?" 子貞曰: "昔炳菴登此山般若峯上, 以杖拍地, 叫快曰'今日, 吾亦爲聖人', 此言何謂也?" 余曰: "古人以登山絶巓, 譬造道之極, 炳菴則以造道之極, 譬登山絶巓而言己登高之畢功也, 彼此交言之間, 足以見自勉勉人之意也. " 噫! 北望則咸陽之介坪, 東望則晉州之德山, 皆在咫尺, 一蠹、南冥之高風可挹, 豈非此山之鍾靈? 南望則南江一帶, 若鋪白練, 金文烈、黃武愍、崔忠毅4)三壯士投水殉節處, 忠魂毅魄, 千古長在, 非惟名賢之生乎此, 其死乎此者, 亦山靈之使歟! 諸賢皆抱負才志, 修蓄德業, 將大用而匡世, 而事謬不然. 南冥以隱遯得免, 一蠹死於士禍, 三壯沒於兵難, 要皆時變之不幸也. 古今天下, 變若是多, 吾於變, 何哉? 只得安意而處之而已. 徘徊周覽, 不覺日已晡矣, 而此日又三春終盡也. 餞春之人, 例必登高, 而適以是日, 登此極高, 今番可謂絶勝餞春. 有詩曰: "天王峯上餞靑皇, 日月臺前又夕陽. 來路東風同作伴, 春歸我獨未歸鄕. " 恐歸路迫昏, 速速下山, 甚恨不持寢具食物而來宿一宵於此也. 此有石墻柴宇如屋樣者. 故登此者, 例多爲經夜計, 夜見老人星, 曉見日出, 而要取秋分節天淸候暖云, 而余不及知, 致此遺算也. 催趲下來, 至白武村店, 夕飯進矣. 飯畢頹臥, 憊困殊甚, 渾身如經亂打, 不覺有痛聲. 乃自笑曰: "甚哉! 儞之癖於山水也. 孰使儞如此? 累自己作, 復誰怨尤?" 因題一詩曰: "誰言壯觀好? 身苦更無比. 堪笑靈臺主, 自求快一時. " 此身責心也. 又題曰: "非求快一時, 要見智仁術. 我苟淨私塵, 從知儞亦逸. " 此心答身也. 四月初一日. 離白武, 將越直峙, 訪德坪. 見所經, 稍寬平處, 則雖絶高極深, 往往有人家. 蓋今夷人執命, 民不聊生. 故流轉入此, 墾山食藷, 形若鳥獸, 苟延性命, 而彼之法令, 無深不入, 山稱國有, 養林至嚴, 禁不得焚林作田. 所取乎深山, 徒以此也, 猶見拘禁, 亦何能爲? 雖然, 間亦有占基穩暖墾土肥沃者, 藷麥幷豐, 藥圃亦佳, 市不過三四十里, 可以交易, 終歲無飢寒之憂, 幷不見彼之使役調査. 此豈可與平地通野, 佃彼田, 服彼役, 爲奴隸, 而猶救死不贍者, 同日語也? 若余所遇自密陽來者閔氏四兄弟養老敎子, 自以爲樂土, 蓋山至廣, 谷至深, 故容亦有如此處. 如余之與世氷炭者, 正可入此幸得穩處而終餘年, 但恨筋力已衰, 難堪鎌鍬之勞也. 至直峙下, 忽然失路, 進退維谷. 半日披穿乎巖石荊棘間, 幾殆僅免, 頭須爲白. 日過午, 抵所謂德坪. 此河東地, 地太高, 風太寒, 初來人不可久留. 問於居人, 則此地不生五穀, 只産靑藷, 其始藷甚豐, 食有餘, 比年風多寒甚, 藷少食艱, 率皆移去, 二十戶里, 今存六七, 所餘進退兩難, 勢無柰何者. 余惟食其地所産物, 然後可居乎絶地, 此地旣無其食, 則非可居之地. 此外又有所稱上下細石坪, 爲避亂吉地, 此去三十里. 上細石, 昨於天王峯頭, 已望見之, 山上開局, 地高於德坪, 然背北向南, 左右穩抱, 似得藏風, 局內甚廣大, 成脣臺, 形勢甚妙. 下細石亦然云. 舊有萬檜簇立, 近皆枯死, 爲草生地. 以故意其回運, 人或入居, 終復還去, 以高寒無食也. 但地形旣妙, 且有崔孤雲遺蹟, 一觀則可矣, 而路險憊甚已之. 是夜, 宿于三井里店. 初二日. 踰堂峴, 抵七佛菴. 菴甚幽僻, 駕洛國首露王子七人成佛於此, 故菴以是名. 首露王在中國年代, 爲西漢時, 而其子成佛, 則佛法之入東國, 先於東漢明帝時, 亦可知也. 余於金剛遊, 記楡岾寺, 論此已詳矣. 菴有亞字房, 一巨房內, 用高低作畫如亞字形, 一竈燃火, 高低幷溫, 歷數百年不變云. 是曇空禪師所造, 此雖禪家小術, 亦甚異也. 路過三神洞書塾, 塾師朴氏貞圭是鄭閩華妻弟, 初面如舊, 挽止殷勤. 白酒、黃飯、山菜、川魚, 香潔可口, 連日憊損, 旅瑣百端, 偶得賢主, 經宿一宵, 其爲穩便, 便同還家. 初三日. 沿溪而下, 至洗耳巖. 云是孤雲遊地, 水石甚奇, 多有題名. 有詩曰: "高人洗得耳根餘, 俗子名心洗未除. 云是孤雲遊賞地, 刻題石面紛紛如. " 自此行二十里, 入雙磎寺. 寺在雙磎合流之內, 故得是名歟. 洞口左右石壁, 分刻"雙磎石門"四字, 傳謂孤雲以鐵杖書石, 是果然否? 寺僅爲中刹, 而殿閣則甚華麗. 門樓揭"靑鶴樓"三字, 傳謂孤雲彈琴吹笙於此, 靑鶴飛來, 故後人因以名樓. 乃次板上韻, 題詩曰: "爲迎靑鶴起樓臺, 物外仙人幾度來? 仙去鶴歸千年後, 豈知滄老此徘徊?" 世稱智異山中, 有靑鶴洞, 爲十勝之一, 萬人可活, 三災不入. 窮搜深覓於絶頂邃谷, 或以細石、德坪等地當之. 然殊不知千餘年前, 靑鶴早已來此, 至作靑鶴之樓, 樓之所在, 卽爲靑鶴洞也. 蓋自花開市以上, 至碧霄嶺底, 上下四五十里, 山高谷深, 背北向南, 風氣溫和, 土沃水豐, 穀果俱備, 煙草多産, 可謂一山中最樂地, 萬人可活, 三災不入, 豈非此耶? 栗谷送人頭流山中詩云"君今靑鶴洞中人", 亦指此洞也, 當時豈指窮荒絶險人跡不到若細石、德坪等處而云云乎? 寺庭有古碑一座, 孤雲所撰《眞鑑禪師碑銘》也. 其中有曰: "廬峯惠5)遠著論, 以爲'如來之於周、孔, 發端6)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沈約有云, '孔發其端7), 釋窮其致', 眞可謂識8)其大者, 始可與語道9)矣. " 余讀此, 作詩論之曰: "儒有大本與達道, 虛無寂滅佛所寶. 動靜體用本自殊, 混而無分已糊塗. 孔發釋窮是何言? 援儒入佛佛反尊. 孤雲豈非儒家子, 無乃名實不相似? 退溪而後逮淵、艮, 良有以來千秋論. " 自此歷花開市, 至蟾津江上. 碧波洋洋, 舟楫下上, 胸次豁然, 視諸山中之遊, 又是別樣趣味. 因詠一蠹詩"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之句, 笑謂子貞曰: "吾輩僅得看盡一山, 未能舟下大江, 覺不及蠹老風流矣. " 用其韻, 題一詩曰: "煙光助興入毫柔, 綠樹陰濃麥未秋. 蟾水滔滔萬丈屹, 蠹翁高詠想風流. " 溯江而上, 行二十里, 宿松汀店. 初四日. 過求禮土旨面, 觀所謂金環落地形新名基. 各處人爭來占宅, 多見敗而去, 來者又續, 村村家家, 星布碁置, 未知何處眞的, 還是虛名無實. 然要之山水回抱, 四野廣闊, 爲千人可居地則足. 自此北向, 行二十里, 入華嚴寺. 寺是巨刹, 二層覺皇殿甚高, 云是隋煬帝爲子求福, 使人建築, 未知信然. 如來舍利塔甚精妙, 位置絶勝. 庭有《碧巖禪師碑銘》, 李白軒景奭撰. 碑中記壬亂有功國家甚詳, 彼雖緇徒, 知爲君之忠可尙也. 又北行二十里, 踰水越峙, 抵美國人避暑室. 室爲五十餘所, 築之用石, 外固內麗, 而高大絶險處, 築室如此, 可想費得許多金. 人道美國多金, 信然矣. 山上開局, 岡巒秀麗, 眼界通豁, 泉出石間, 權之以稱, 其重非比他水, 服之消百病云. 夫孰知此地有此好基址? 亦可見美人之有堪輿術也. 來以極暑, 暑退則去, 夏節便作繁華地, 峽中窮民, 爲其雇傭, 喜得些金, 哀我亡國遺黎之可憐也. 此去般若峯, 已到中半, 望之若一躍可到, 而尙爲二十里. 人多謂般若、天王爲智異最高, 而般若差低. 然則旣登其高, 何害舍低? 初五日. 自此下山, 踰九山嶺, 經求禮堂谷, 點心于院右店. 又踰屯山嶺, 至南原包巖鄭子敬【泳寔】家宿. 雖不能旁搜細探, 於是乎內外全山, 槪覽矣. 有詩曰: "白頭流脉鎭南州, 中國衡山可與儔. 萬壑皆懸銀漢瀑, 千峯高逼玉京樓. 精靈幾毓群賢出? 深廣多治五穀疇. 登覽要知仁智術, 看如不看也堪羞. " 蓋以余所曾見之金剛, 較量於此山, 金剛淸峭聳拔, 此山雄高深邃而廣大過之. 金剛有似乎淸明君子脫出俗累, 使人塵想自消; 此山有似乎莊重君子德厚識博, 使人難測底蘊, 要之學者皆可取而作師也. 但以世所稱三神之說論之, 奇形勝狀, 當首擅金剛, 而頭流居其下. 抑又聞兩南人互以此山, 屬之本省, 迄未論定. 蓋觀以據盤之廣狹、向背之方面, 則當屬之嶺, 觀以國典南嶽廟祭自湖致之, 當屬之湖, 豈以此山主脈, 旣自湖入般若, 爲先起主峯, 而亦在湖地故耶? 人言"太祖應天, 日祈禱名山, 諸山靈皆應, 獨此山靈不應, 故貶謫湖南", 此則當屬之齊東也. 抑余又有一說. 此山一皆厚重, 無乖戾氣. 就其中較論, 則般若峯多土少石, 一味秀麗, 天王峯多石少土, 稍巉巖磅礡, 此所以湖南人心柔順, 嶺南人心剛厲也歟. 欲以問于知者. 初六日. 離包巖. 初七日. 迫昏始歸. 首尾凡旬九日. 오악(五嶽) 중국 사람들이 신성시했던 다섯 개의 산으로, 동악 태산(泰山)ㆍ서악(西嶽) 화산(華山)ㆍ남악(南嶽) 형산(衡山)ㆍ북악(北嶽) 항산(恒山)ㆍ중악(中嶽) 숭산(嵩山)을 말한다. 방외(方外) 속세의 예의와 도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는 세상으로, 주로 유가에서 불가나 도가를 이른다. 선사(先師) 돌아가신 스승으로, 여기서는 저자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지칭한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이다. 임헌회(任憲晦)ㆍ신응조(申應朝)ㆍ송병선(宋秉璿)ㆍ박운창(朴芸牕)ㆍ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허통(許通)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세 번 찾아가 사제(師弟) 관계를 맺었다. 오적(五賊)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이지용(李址鎔)ㆍ이근택(李根澤)ㆍ박제순(朴齊純)ㆍ이완용(李完用)ㆍ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자정(自靖) 스스로 의리와 지조를 지키며 편안히 처신하는 것으로, 《서경》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선왕(先王)에게 뜻을 바칠 것이니, 나는 떠나가 은둔함을 돌아보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보인다. 기수(沂水)에서……돌아오겠다 도(道)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논어》 〈선진(先進)〉에 보인다. 기수는 노(魯)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물 이름이며, 무우는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농암(礱巖) 김택삼(金宅三, 1619~1703)의 호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계용(季用)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우암의 〈주자차의(朱子箚疑)〉를 교정하였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과도 절친하였다. 저서에 《농암유고》가 있다. 부안군 보안면 영전리 유천서원(柳川書院)에 제향 되었다. 신말주(申末舟) 1429~1503.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집(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며,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이다. 대사간ㆍ형조 참의ㆍ전주 부윤ㆍ진주 목사ㆍ창원 부사ㆍ경상우도 병마절도사ㆍ첨지중추부사ㆍ전라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세조(世祖) 즉위 이후에 순창에 낙향하여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광세지감(曠世之感)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감회를 이르는 말이다. 사계정사(沙溪精舍)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있는 정자로,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 1524~1589)이 조선 중기에 처음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여러 번 다시 지었다. 황위(黃暐) 1605~1654.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이다. 1638년(인조16)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이 되었고, 함경도 도사ㆍ평양 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역대 충절들의 사실을 모은 《정충록(旌忠錄)》이 있다. 민광훈(閔光勳) 1595~1659.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집(仲集)이다. 1616년(광해군8) 진사시에 급제하고, 1628년(인조6) 알성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정언과 지평 등을 거쳐 남원 부사ㆍ안변 부사ㆍ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원손을 호위한 공으로 통정으로 승진하여 호조 참의가 되었다. 사위 원문의 '옥윤(玉潤)'은 남의 사위에 대한 미칭이다. 진(晉)나라 위개(衛玠)가 악광(樂廣)의 딸에게 장가들자, 배숙도(裴叔道)가 "장인은 얼음처럼 맑고, 사위는 옥돌처럼 윤기가 난다.〔婦公氷淸, 女婿玉潤.〕"라고 찬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36 衛瓘列傳 衛玠》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1380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只拔都)를 물리치고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은 전북 남원 운봉현(雲峯縣) 동쪽 16리 황산에 있었으며,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지었다. 《東園集 卷3 荒山大捷之碑》 수당(垂堂)의 경계 안전에 유의하여 위험한 곳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패릉(覇陵)에 올라갔다가 험한 비탈길을 말을 타고서 질주해 내려오려 하자, 원앙(爰盎)이 "천금을 가진 집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千金之子坐不垂堂.〕"라는 말을 인용하며 만류하였다. 《史記 袁盎列傳》 제명(題名) 명승지에 온 것을 기념하여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는……여겼으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주자(朱子)는……드러내었으나 주희(朱熹)가 남헌(南軒) 장식(張栻)과 남악 형산(衡山)에 올라 지은 〈취하여 축융봉에서 내려오며 짓다[醉下祝融峯作]〉에 "내가 만 리 먼 곳에 와서 큰 바람을 타니 깊은 계곡과 층층 구름이 가슴을 씻어 주네. 석 잔 술에 호기가 일어 낭랑히 시 읊조리며 날듯이 축융봉에서 내려오네.〔我來萬里駕長風, 絶壑層雲許盪胸. 濁酒三杯豪氣發, 朗吟飛下祝融峯.〕"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의(周顗)는……있었고 망한 나라의 풍경을 대하고 눈물을 흘린 것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여러 명사(名士)들이 신정(新亭)에 모여 술을 마시는데, 주의(周顗)가 탄식하기를 "풍경은 다르지 않는데 눈을 들어 바라보니, 산하(山河)가 다르다.〔風景不殊, 擧目有江河之異.〕"라고 하니, 왕도(王導)가 얼굴빛을 변하며 "함께 나랏일에 힘을 바쳐 신주(神州)를 회복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초수(楚囚)처럼 맞대고 울기만 하는가?〔當共戮力王室, 克復神州, 何至作楚囚相對?〕"라고 한 고사가 있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서방에……바라본다 쇠퇴한 세상의 현자(賢者)가 흥성했을 때의 훌륭한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른다. 《시경》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 진펄에는 감초로다. 누구를 그리 생각하시는가, 서방의 고운 님이로다. 저 고운 우리 님은, 서방의 사람이시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다. 청황(靑皇) 봄을 주재하는 신(神)이라는 뜻의 시적인 표현이다. 봄은 동방(東方)과 청색(靑色)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동제(東帝)ㆍ동황(東皇)ㆍ청제(靑帝) 등으로 불렸다. 시우(柴宇) 땔나무로 얽어서 지은 집을 말한다. 영대(靈臺)의 주인 마음을 이른다.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 곽상(郭象)의 주에 "영대는 마음이다.〔靈臺者, 心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지자(智者)와……하였네 지혜로운 사람과 어진 사람이 산수(山水)를 즐기는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라고 하였다. 삼재(三災) 불교 용어로, 겁말(劫末)에 일어난다는 세 가지의 재난을 말한다. 도병재(刀兵災)ㆍ역병재(疫病災)ㆍ기근재(饑饉災)의 소삼재(小三災)가 있고, 화재(火災)ㆍ수재(水災)ㆍ풍재(風災)의 대삼재(大三災)가 있다고 한다. 율곡(栗谷)이……시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의 〈송이가겸유두류산(送李可謙遊頭流山)〉 시를 말한다. 심약(沈約) 441~513.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의 학자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무제(武帝) 때 상서령(尙書令)을 지냈으며,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을 잘하였다. 《梁書 卷13 沈約列傳》 대본(大本)과 달도(達道) '대본'은 큰 근본이라는 뜻으로 성(性)을 가리키고, '달도'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행하는 도로,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보인다.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이괄의 난 때 인조를 호종하였다. 청요직을 두루 거쳤고, 병자호란 때 예문관 제학으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다. 인조 후반 영의정에 올랐으나 효종 즉위 후 청나라의 견제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기도 하였다. 저서에 《백헌집》 등이 있다. 忠毅 底本에는 "□□". 《朝鮮王朝實錄》 英祖 29年 4月 23日에 근거하여 보충. 惠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慧". 端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致". 端 底本에는 없음.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 근거하여 보충. 識 上同. 道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至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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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8 卷之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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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晩隱黃公墓碣銘【幷序】 옛날 원릉(元陵, 영조) 시대에 미호 김원행(金元行) 선생은 덕이 높고 학문이 정대(正大)하여 사문의 종주가 되었다. 일찍이 그를 종유하는 만은처사 평해 황공 휘 전(壥) 자 사후(士垕)에 대해서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송하였으니, 이는 정자(程子)가 여진백을 칭송하였던 말이다.38) 지금 선생이 공을 칭송했던 말로 공의 평생을 추적해보면 또한 그 말이 마땅한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또한 자신이 좋아한 바를 미루어 그 아들 이재(頣齋) 선생39)을 명유(名儒)로 만들었으니, 그 실제 증거를 볼 수 있다.공은 자질이 매우 영민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숙부인 구암공 재중(載重)에게 학문을 배워 문한(文翰)을 일찍 성취하였다. 그러나 일곱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떨어져 마침내 포기하고 진실된 학문에 종사하였다. 당시 나이가 노년이었는데도 경전과 주자의 책을 철저하게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몸으로 알고 마음으로 깨달은 뒤에 그만두었다.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며 표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나이가 부족한 지도 모르는 자'40)에 해당한다. 이에 조예가 깊이 확충되고 두텁게 양성되었으니, 보고 감화를 받은 이들이 믿게 되고 명성이 일어나게 되어 선비들의 많은 기대를 받게 되었다. 두호 조정(趙晸) 공이 고암서원의 강회를 주관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병계 윤봉구(尹鳳九)와 백수 양응수(楊應秀) 등 제현들도 또한 모두 공을 인정하였다.일찍이 "상수도 비록 성인의 학문 중의 일이지만, 군자는 마땅히 경전을 위주로 삼고 이것을 그 곁에 두고 참고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논어》 한 권은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장자》로 사람들에게 작문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바로 말하기를 "《맹자》 일곱 편은 사람은 고무시키는 변화가 다채로워 사람으로 하여금 발을 구르며 뛰게 만드니, 이 또한 문장을 배우기에 충분한데 하필이면 《장자》이겠는가. 율곡의 《격몽요결》은 사람을 만드는 책이며, 우암은 주자의 정맥(正脈)이다."41)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식견의 올바름이요 학문의 힘이다.어버이를 섬길 때는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시거나 예로써 섬겼으며, 멀리 지내던 두 누이를 맞이하여 재산을 함께 공유하였다. 흉년에는 고을에 그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자가 많았다. 과거를 보러갈 때 분경(奔競)42)을 끊어버리면서 "출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어찌 임금을 섬기겠는가."라 하였다. 조정에서 갑오 이후의 배향하는 사원에 대해 훼철하라고 명령하자 구암사도 또한 그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사임(祠任)이 연수(年數)를 고쳐서 서원을 유지하려고 하자, "임금을 속이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젊었을 때의 올바른 행실로 본래 자질의 돈후하고 질박함이 이와 같았다.신묘년(1771)에 돌아가시게 되자 조동 앞 산기슭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향년 68세였다. 시조는 고려 참찬 휘 숙경(淑卿)이다. 부호군 뉴(紐)가 춘천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흥덕에 거주하였으니, 이 분이 6대조이다. 고조는 안촌 이후(以厚)로, 갑정(甲丁)의 두 난리43)에 의병을 모집했던 일이 《모의록(募義錄)》에 실려 있다. 조부는 취은(醉隱) 세기(世基)로, 기개와 절조로 세상이 이름이 났다. 부친은 산촌(山村) 재만(載萬)으로, 사부를 잘 지었다. 19살에 소장을 올려 우암을 구원하려 하였으니, 공의 어짊은 또한 출신 가문과 연계되어 있다. 산촌공의 처음 부인은 울산 김씨 태하(泰夏)의 따님으로 하서 선생의 5대손이다. 계비(繼妃)는 강진 김씨 복초(復初)의 따님으로 공을 낳았다. 공의 부인은 강진 김씨로, 통덕랑 백형(伯衡)의 따님이다. 익찬 윤석(胤錫)은 장남으로 곧 이재(頣齋)이다. 주석(冑錫)은 형과 함께 미호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으니, 바로 차남이다. 풍천 노엽(盧燁)은 옥계(玉溪)의 후손이며, 참봉 울산 김익휴(金益休)는 하서(河西)의 후손인데, 이들은 사위들이다.오호라! 공의 학문으로 벼슬로 현달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으니 비록 아쉬울 것 같지만, 그러나 큰 스승이 높이 평가하고 어진 아들이 몸을 세워 이름을 드날렸으니 절로 영원히 빛 날 것이다. 어찌 다만 한 시절 높은 벼슬44)에 비교하겠는가. 또한 일찍이 도에서 추천하여 능관(陵官)에 의망되었으며, 이재가 입대(入對)하던 날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라는 임금의 칭송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세상과 후세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8대 사손(嗣孫) 서구(瑞九)가 비로소 묘소의 빗돌을 장만하고서 나에게 글을 요청하였다. 나는 공이 위를 잇고 아래로 전하여 가학을 창대하게 만들었으니 타인의 가문에서는 보기 힘든 어짊에 대해 감탄하였기에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글이 졸렬하여 다 갖춰 서술하기는 어려워 그 요점을 대략 서술하니, 공의 덕과 학문을 상세히 살펴보고 싶은 이들은 어찌 족보와 행장, 유집에 나아가 고찰하지 않겠는가. 이에 명을 짓는다.은거하며 뜻을 구하니 隱求志이런 경우 보기 비록 드물지만, 見雖鮮선비는 학문에 대해 士於學마땅히 노력해야 하도다. 宜可勉좋아하여 멈추지 않으며 好無已종신토록 은거하였도다. 隱終身아들이 선(善)을 본받게 하여45) 式穀子훌륭한 인물46)로 만들었나니, 作席珍이것을 공이 구하였으니 是公求구하매 이르렀도다. 求而至만은이라 편액하니 晩隱扁비로소 부끄러움이 없어라. 始無愧빗돌에 새겨서 鑱之石영원히 밝게 보이노라. 永昭示 昔在元陵之世, 渼湖金先生, 德尊學正, 宗主斯文.嘗稱其從遊, 晩隱處士, 平海黃公, 諱壥字士垕, 爲老而好學, 此程夫子稱呂進伯語也.今以先生稱公者, 迹公平生, 則亦知斯語之爲得當.公又推己所好, 及其子頣齋先生, 俾成名儒, 其實驗可見矣.公天禀穎悟, 少孤, 學于叔父龜巖公載重, 文翰夙就. 然七擧而不中, 遂棄之, 從事實學.時年且老大, 經傳朱書, 劇讀精思, 體認心悟而後已.闇然自修, 不尙標榜, 庶所謂俛焉孜孜, 不知年數之不足者.於是造詣, 深充養厚, 觀感所孚, 風聲所興, 蔚爲儒望.杜湖趙公晸請主考巖講會, 尹屛溪、楊白水諸賢, 亦皆獎許.嘗曰 : "象數雖亦聖學中事, 君子宜主經傳, 而以此旁參." 又曰 : "《論語》一部最要." 聞人以《莊子》敎人作文, 則曰 : "《孟子》七篇, 鼓舞變化, 令人踊躍, 此亦足學文章, 何必《莊子》.栗翁《要訣》, 做人樣子, 尢翁, 朱子正脈." 此識之正, 學之力也.事親, 生死以禮, 邀致二姊, 共厥有無.荒年, 鄕里賴活者衆.赴擧時, 絶奔競曰 : "出身不正, 何以事君." 朝令撤甲午以後享祠, 龜巖祠亦在中, 祠任欲改年限圖存, 則曰 : "勿欺君也." 是皆少日行誼, 而素質敦實又如此.卒于辛卯, 葬于槽洞前麓負■原, 壽六十八.始祖高麗參贊諱淑卿.副護軍紐自春川南居興德, 是爲六世.高祖, 安村以厚, 甲、丁二亂, 募義兵事, 載《募義錄》.祖, 醉隱世基, 以氣節名世.考, 山村載萬, 長詞賦.年十九上疏, 救尢菴, 公之賢, 亦繫世類.山村公初配, 蔚山金氏泰夏女, 河西先生五世孫.繼, 康津金氏復初女, 生公.公之齊, 康津金氏, 通德郞伯衡女.翊贊胤錫其長男, 卽頣齋.冑錫與兄, 同師渼湖, 有文行, 次男也.豊川盧燁, 玉溪后 ; 參奉蔚山金益休, 河西后, 其婿也.嗚呼! 以公之學, 不得仕顯而聞世, 雖若可恨, 然宗師推重, 賢子立揚, 自耀久遠, 豈但一時靑紫比.且曾被道薦擬陵官, 而蒙'是父是子'之聖褒於頣齋入對日, 是可以有辭矣.八世嗣孫瑞九, 始具墓碣, 請余文之.余竊感嘆公上紹下傳, 昌大家學, 爲人門罕覯之賢, 故不能終辭.然文拙難於備述, 畧敘其大致, 欲詳究德學者, 盍就譜狀遺集而考焉.銘曰 : "隱求志, 見雖鮮.士於學, 宜可勉.好無已, 隱終身.式穀子, 作席珍.是公求, 求而至.晩隱扁, 始無愧.鑱之石, 永昭示." 정자가……말이다 진백(進伯)은 여대충(呂大忠)의 자이다. "여진백은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철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숙이 말하기를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는 원래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면 의지와 근력이 쇠해지게 마련인 데다 배워도 미치지 못할 걱정이 있고 배울 햇수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얼마 배우지 못하고 햇수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끝내 도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呂進伯老而好學 理會直是到底 正叔謂老喜學者尤可愛 人少壯則自當勉 至於老矣 志力須倦 又慮學之不能及 又年數之不多 不曰朝聞道夕死可矣乎 學不多 年數之不足 不猶愈於終不聞乎〕"라는 말이 주희(朱熹)가 편찬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0 낙양의론(洛陽議論)에 나온다. 이재 선생 황윤석(黃胤錫)의 호이다. 그도 또한 미호의 제자이다. 쉬지 않고……모르는 자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의 "높은 산은 누구나 우러러보게 마련이고, 큰길은 누구나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高山仰止 景行行之]"라는 구절에 대해서, 공자가 "시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큰길을 걸어가다가 힘이 다해서 계속 걸을 수 없을 때에야 중도에 그만둔다. 마찬가지로 몸이 이미 늙은 것도 잊고서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한다.[詩之好仁也如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라고 평한 말이 《예기》 〈표기(表記)〉에 나온다. 《맹자》……정맥이다 글로 보면 《맹자》 부분과 율곡, 우암에 대한 논의가 동시에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아마 서로 다른 시기에 한 말로 보인다. 분경(奔競) 벼슬을 청탁하기 위하여 세력 있는 집에 분주히 찾아다니며 엽관 운동(獵官運動)을 벌이던 일. 갑정(甲丁)의 두 난리 갑자년(1624)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년에 후금이 침입한 호란(胡亂)을 가리킨다. 높은 벼슬 '청자(靑紫)'는 푸른 인끈[青綬]과 자주색 인끈[紫綬]을 가리키는 것으로, 옛날 구경(九卿)은 푸른 인끈을, 공후(公侯)는 자주색 인끈을 사용하였는데 전하여 고관대작의 뜻으로 쓰인다. 《한서(漢書)》 권75 〈하후승전(夏侯勝傳)〉에 "선비가 경술에 밝지 못한 것이 흠이지, 만약 경술에 밝기만 하다면 고관대작을 얻는 것은 마치 몸을 숙여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士病不明經術, 經術苟明, 其取青紫如俯拾地芥耳.]"라고 하였다. 아들을……하여 《시경》 〈소완(小宛)〉에서 "너의 아들을 가르쳐서 선(善)을 하는 것을 본받게 하라.〔教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하였다. 훌륭한 인물 '석진(席珍)'은 재덕(才德)을 갖춘 선비를 의미한다. 《예기》 〈유행(儒行)〉에서 "유자는 석상의 진귀한 보배처럼 자신의 덕을 갈고 닦으면서 임금이 불러주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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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 강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止堂姜公墓碣銘【幷序】 옛날 장릉(長陵, 인조)의 병자호란 때 청계 강순(姜恂) 공이 의기를 떨쳐 병사를 모집하여 남한산성의 방비를 도왔다. 성하(城下)의 맹세47)가 있게 되자, 곧 남쪽 고창의 운곡으로 내려와 주자의 유상(遺像)을 받들고 강학하면서 의를 행하였다. 그의 셋째 아들 지당공 애(隘)는 자가 여정(汝貞)인데, 시와 예를 이어받고 가업을 계승하였으니48) 잘 계술(繼述)한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양에서 벼슬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떠돌다가 타향에 거처하게 되었으니 농사가 아니면 녹봉을 대신할 것이 없다. 어버이는 연로하신데 한갓 문사만 일삼는다면 자식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비루한 일을 감당하였는데, 낮에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밤에는 곧 쉬지 않고 책을 열심히 읽었다. 제생들이 모여 강론하는 날에는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참석하여 경전과 예에 대해 변석하였다. 이윽고 살림살이가 펴져서 맛있는 음식도 풍부해졌는데, 부모를 봉양하고 남은 힘으로 하는 공부도 또한 공부에만 매진하는 자들이 미치지 못하였다.청계공이 비록 세상에 뜻을 두지는 않았지만 나라의 근심거리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들으면 안색과 말투에 이따금 어두운 근심을 드러낼 때가 있으면, 공은 기미를 살피고 뜻을 받들어 극진한 위안의 말로 풀어드렸으며, 술을 마련하고 손님을 초대하여 답답함을 풀어드리기까지 하였다. 청계공이 붕우들을 대할 때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내가 막내를 사랑하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모친이 병이 나자 근심에 젖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으며, 대변을 맛보고 북극성에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를 모두 극진히 하였다. 삼년이 지나 부친의 상을 당하자 모친상 때처럼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거상(居喪)을 잘한다고 칭송하였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때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으며, 형을 공경하기를 부친을 섬기는 예와 같이 하였으며, 정성과 신의로 사람을 상대하였으며, 은혜와 위엄으로 아래 사람을 부렸으니, 이것이 대략적인 공의 행실이다.강씨는 진주에서 나와 나라의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고려 공목왕 때 대제학 회중(淮仲)이 이름을 드날렸고, 조선에는 참판 징(澂)과 한림 억(億)이 현달한 분이다. 사은당 명서(命瑞)와 성재 홍제(弘胤)는 모두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날렸으니, 이 분들이 공의 증조와 조부이다. 유인 밀양 박씨가 모친이다. 공은 영릉(寧陵, 효종) 갑오년(1654)에 태어나 명릉(明陵, 숙종) 계해년(1683)에 돌아가셨으니 나이가 겨우 서른이다. 본현(本縣)의 오서방 사거리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대구 배씨 문표(文豹)의 따님으로, 공보다 31년 뒤에 돌아가셨다. 묘는 합부하였는데, 봉분은 따로 썼다. 아들은 재상(再尙)이며, 딸은 심봉거(沈鳳擧)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석일(錫一), 준일(俊一), 수일(秀一) 등이며, 손녀는 고일문(高一文), 고천묵(高天默)에게 시집갔다.오호라! 공의 효도와 공손, 은택과 신의의 덕을 총괄하여 말하자면 인(仁)이다. 어진 자는 반드시 수를 누리는데 도리어 그렇지 못하였으니, 하늘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고 장성하여 힘써 행하여 항상 '조심하고 삼감[謹愼]' 두 글자를 외면서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평소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확충하여 나아간다면 큰 성취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인데 명수(命數)의 한계가 가로막으니, 이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후손이 번창하여 문행(文行)을 지닌 이들이 계속해서 나왔는데, 당대에 누리지 못한 보답이 반드시 후손에 돌아왔으니,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공의 7대손 경흠(冏欽)이 가장(家狀)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가장은 바로 공의 아들 위촌거사가 지은 것이니, 근거로 삼아서 쓸 수 있다. 이에 명을 짓는다.행하고 남은 힘으로 학문을 배우라는 건 行餘學文성인이 말씀하신 것이라.49) 稱自聖人꽃은 피었지만 열매 맺지 못하니 秀而不實또한 그것이 애석하도다. 亦厥攸惜다만 애석함과 칭송을 惟惜與稱공이 실로 겸하였으니, 公實得幷천백 년 이후로 千百其來어찌 떳떳하게 할 말이 없겠는가. 曷不有辭 粤昔長陵丙子之難, 淸溪姜公恂, 奮義募兵, 助守南漢.及其有城下之盟, 則遂南下高敞之雲谷, 奉朱子像, 講學行義.其第三子止堂公隘汝貞, 襲詩禮業箕裘, 可謂善繼述之肖子也.其言曰 : " 吾家世仕于京, 一朝漂寓, 非耕無以代祿.親老而徒事文墨, 子職闕." 乃躬執稼穡, 幷能鄙事, 日以爲常, 夜輒劇讀不已.諸生會講日, 撥冗參席, 辨釋經禮.旣而調度紓而甘旨豊, 餘力之學, 亦有專門者所不及.淸溪公, 雖無意乎世, 聞國憂民瘼, 往往發幽憂於色辭間, 公察意順旨, 極其慰釋, 至爲之置酒招賓, 以泄壹鬱.淸溪公對朋舊稱善曰 : "吾非愛季之私也." 母癠, 憂不遑食, 嘗糞祈辰, 丁憂, 哀禮俱盡, 越三年, 遭外艱, 亦如之, 人以善居喪稱之.奉先致如在之誠, 敬兄如事父之禮, 待人以誠信, 御下以恩威, 此公之行治大畧也.姜出晉陽, 爲國著姓.高麗恭穆公, 著大提學淮仲, 本朝參判澂、翰林億, 皆其顯者.思恩堂命瑞、惺齋弘胤, 俱以學行著, 是爲公曾祖祖.孺人密陽朴氏, 其妣也.公生于寧陵甲午, 卒于明陵癸亥, 年僅三十, 葬本縣五西坊四巨里負癸原.配, 大丘裵氏文豹女, 後公三十一年而卒.墓附以雙封.男再尙, 女適沈鳳擧.孫男, 錫一、俊一、秀一. 女高一文、高天默.嗚呼! 公孝悌恩信之德, 總言之則仁也.仁者必壽, 而反不然, 天固難諶.幼而嗜學, 長而力行, 常誦謹愼二字, 以自省.雃言 : "知而不行, 是爲未知." 充此而進, 大就可期, 而命限尼之, 此尢可憾也.然後承蕃碩, 文行相繼, 不食之報, 必返之, 天其在斯歟.七世孫冏欽, 示以家狀, 屬余銘墓.狀, 乃公之子渭村居士撰, 可據而書.銘曰 : "行餘學文, 稱自聖人.秀而不實, 亦厥攸惜.惟惜與稱, 公實得幷.千百其來, 曷不有辭." 성하(城下)의 맹세 적군이 성 아래에 임하였을 때 압박을 받아 항복한 굴욕적인 맹약을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桓公) 12년조에 "초(楚)나라가 교(絞)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성하지맹을 체결한 뒤에 돌아갔다."라고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에 "성하맹(城下盟)은 제후가 매우 수치스럽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청에게 굴욕적인 맹약을 체결한 것을 말한다. 가업을 계승하였으니 '기구(箕裘)'는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행하고……것이라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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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교관에 추증된 경재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贈童蒙敎官敬齋李公墓碣銘【幷序】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효자로 정려(旌閭)된 경재 이공은 휘가 필(苾) 자는 덕형(德馨)으로, 조선 명릉(明陵, 숙종) 시기에 태어나 원릉(元陵, 영조) 병인년(1746)에 돌아가셨다. 흥덕현 편월리 오른쪽 산기슭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 지낸 지가 223년이 되는데, 묘지에는 행적을 드러내 새긴 비석이 없다. 7대손 주범(周範)이 장차 비석을 세워 행적을 새기려고 하면서 공의 친족 후손인 종택(鍾宅)이 지은 가장으로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공의 문집 가운데 공에 대해 말하면서 "어질면서도 의롭다."라고 한 말을 읽었는데, 지금 가장의 글을 얻어 보매 더욱 자세하니 다행이다. 비록 내가 미천하고 글이 졸렬하여도 존모하는 마음은 깊으니, 어찌 사양하겠는가.공은 어려서 영민하고 장중하였으며, 성장하여 부모를 섬김에 뜻을 잘 받들고 존체를 잘 봉양하였다. 열여덟 살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곡하면서 우는 슬픔이 옆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초상과 장례의 예절은 주자를 따랐다. 때때로 모친을 뵙고서 잘 위로하여 마음을 편히 해 드렸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이전 부친의 상 때처럼 하였다. 부모의 제삿날에는 죽을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성묘하여 추위나 더위에도 폐하지 않았다. 아우가 세 명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재산이 많거나 적거나 함께 하니, 여러 아우와 제부(弟婦)들이 감화하여 또한 개인적으로 감춰두지 않았다. 둘째와 막내 아우가 일찍 죽자, 여러 조카들을 사랑으로 길러 자신이 낳은 아이들처럼 대하였다. 크고 작은 집안일은 셋째 아우에게 맡겼다. 자식과 조카들을 타일러 과부인 숙모를 섬기기를 최효분(崔孝芬)이 이씨를 받드는 것50)처럼 하였다. 종족(宗族)과 마을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 대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얼굴에 드러내놓고 배척하지 않고 의리로 차분차분 깨우치니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계사년(1713)에 많은 선비들과 동산서원(東山書院)을 창건하여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와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두 현인의 영위(靈位)를 모셨는데, 간사한 무리들이 훼철하려고 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헐뜯고 욕을 하였지만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신축년(1721)에 소장을 올려 소재(疎齋) 충문(忠文)51) 이이명(李頤命), 몽와(夢窩) 충문(忠獻)52) 김창집(金昌集), 한포(寒圃) 충민(忠愍)53) 이건명(李健命) 등을 늘려서 배향하기를 요청하니, 모두 남쪽 고을에서 제일 강직한 선비라고 칭송하면서 또한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 추천되어 능관(陵官)으로 의망되었다. 임인년(1722)에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이 화를 당하자, 천 리를 찾아가 위로하고 해를 넘기면서 함께 거처하니, 조야(朝野)가 칭송하였다.공의 선조는 함평 사람이다. 명종과 선조 시기에 대사간 죽곡 선생 휘 장영(長榮)이 세상에 현달하였는데, 둘째 아들 통덕랑 도곡 휘 유(瑜)가 다섯 번째 형 생원 낭곡 휘 억영(億榮)의 후사(後嗣)가 되었다가 정유재란 때 부안에서 순절하였으니, 이 분이 고조가 된다. 증조는 통덕랑 회당 휘 홍의(弘誼)이다. 조부는 미산 휘 시(時)로,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다. 부친은 월촌 휘 익방(益芳)으로, 효성으로 동몽교관에 추증되었으며 명을 내려 정려를 세웠다. 모친은 여산 송씨 지빈(之彬)의 따님으로 부덕이 높았으니, 대개 공의 어짊은 가문에서 기인한 것이다. 부인은 죽산 박씨 후증(後曾)의 따님이다.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외아들은 사호(師灝)로, 부친의 뜻을 능히 계승하여 소장을 올려 동산서원에 배향된 인물을 복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두 딸은 진주 정수탁(鄭守鐸), 수원 백상렴(白尙廉)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진규(震圭)이다.오호라! 공이 행한 일은 비록 당시에 선비들이 도에 천거하고 본읍 수령이 감영에 보고하여, 순찰사 권혁(權爀) 공이 장계로 조정에 올렸으나 미처 포장(襃獎)까지는 받지 못하였지만, 고종 계사년(1893)이 되어서 그 선고(先考)와 마찬가지로 벼슬이 추증되고 정려가 세워졌으니, 어찌 공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드러나서 전대 사람보다 더욱 빛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죽곡과 도곡의 후손으로 竹桃雲仍증자와 민자건54)의 생각과 마음을 지녔네. 曾閔思情체(體)가 서서 용(用)이 행해지니 體立用行동산서원이 완성되었도다. 東山祠成이름난 공들이 모두 칭송하고 名公咸稱선유는 좋은 평을 하였어라. 先儒有評성대하도다 추증과 정려 赫赫贈旌임금의 은혜 더욱 영광이니, 聖恩尢榮편월리 산기슭의 묘소는 月麓之塋영원토록 밝게 빛나리라. 永世光明 贈童蒙敎官, 旌閭孝子, 敬齋李公諱苾字德馨, 生于大韓明陵, 卒于元陵丙寅, 而葬于興德縣片月里右麓甲坐之原, 爲二百二十有三年, 而墓闕顯刻, 七世孫周範, 將樹石, 以銘行治, 以公族後孫鍾宅狀, 求文於余.余嘗讀頣齋黃公集中語及公, 謂賢而義, 而今得狀文而益詳, 幸矣.顧雖人微辭拙, 慕之則深, 豈敢辭諸.公幼而穎悟簡重, 長而事親極志體.十八遭外艱, 哭泣之哀, 動傍人, 喪葬之禮, 遵朱子.時見于母.善於慰悅.及丁憂, 一如前喪.考妣夫日, 終身不肉, 朔望展省, 寒暑不廢.有弟三人, 友愛尢篤, 有無共之, 諸弟與婦, 感化亦無私藏.仲季二弟俱夭, 撫育諸姪, 同己出.大小家政, 屬叔弟.詔子姪事募叔母, 若崔孝芬之奉李氏.於宗族鄕黨, 一以誠信.有不可意者, 不顯斥, 以義理諄諄開陳, 人皆服從.癸巳, 與多士創建東山書院, 妥白江、西河兩賢之靈, 奸人輩欲扌+毁撤, 詬罵萬方, 終不動.辛丑, 上疏延額疎齋李忠■公、夢窩金忠文公、寒圃李忠■公, 咸稱南州第一剛直之士, 且曰 : "忠臣求於孝子之門." 於是薦于朝, 擬陵官.壬寅, 屛山李公之被禍也, 千里致慰, 同處經年, 朝野稱之.公之先, 咸平人.明、宣之際, 有大司諫竹谷先生諱長榮, 顯于世, 以仲子通德郞桃谷諱瑜, 繼第五兄生員浪谷諱億榮后, 丁酉亂殉節于扶安, 是爲高祖.曾祖, 通德郞悔堂諱弘誼.祖薇山諱時, 有文行.考, 月村諱益芳, 以孝贈童蒙敎官, 命旌.妣, 礪山宋氏之彬女, 甚有婦道.蓋公之賢, 實世類之自也.配, 竹山朴氏後曾女, 墓祔.一男師灝, 克繼先志, 上疏請復東山院額.二女適晉州鄭守鐸、水原白尙廉.孫震圭.嗚呼! 公之事行, 雖在當日, 章甫道薦, 本倅營報, 巡使權公爀啓聞, 而未及蒙褒, 至于高宗癸巳, 贈官旌閭, 一如其先考, 豈非公論之久而益彰, 有光前人也歟.銘曰 : "竹桃雲仍, 曾、閔思情.體立用行, 東山祠成.名公咸稱, 先儒有評.赫赫贈旌, 聖恩尢榮.月麓之塋, 永世光明." 최효분이 이씨를 받드는 것 최효분에 대해서는 《소학》 〈선행〉에 그 내용이 나온다. 즉 "효분의 숙부 진(振)이 죽고 난 뒤에 효분 등이 숙모 이씨를 받들기를, 낳아주신 어버이 섬기듯이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따뜻함과 서늘함을 살피며 집을 나감에 아뢰고 들어옴에 뵈었으며, 집안의 세세한 일을 하나하나 물어보고 결정하였다. 형제가 출행하여 얻은 것이 있으면, 항상 아주 조금의 물건이라도 모두 이씨의 창고에 넣고, 사 계절마다 나누어 줄 때도 숙모 이씨가 결정하도록 하였다."라 하였다. 충문 원문에 '문(文)'자가 없는데, 보충하였다. 충헌 원문에 '헌(獻)'은 '문(文)'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오류로 바로잡았다. 충민 원문에 '민(愍)'자가 없는데, 보충하였다. 증자와 민자건 '증민(曾閔)'은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효행이 지극하였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孟子)는 증자에 대해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섬겼다고 할 수 있으니, 부모님을 섬길 때는 증자와 같이 하는 것이 좋다.[可謂養志也 事親若曾子者可也]"라는 말을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는 민자건에 대해 "효성스럽구나, 민자건이여. 사람들이 그 부모와 형제들의 칭찬하는 말에 트집을 잡지 못하는구나.[孝哉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라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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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헌 조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竹軒趙公墓碣銘【幷序】 죽헌 조공의 묘에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하는데, 종족의 후손인 한규(澣奎)가 공의 사손(嗣孫) 아무개의 명으로 유사(遺事)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유사를 살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조씨는 함안에 본관을 두었다. 고려 원윤 휘 정(鼎)이 시조가 된다. 고려가 망할 때 공조전서 금은(琴隱) 선생 휘 열(悅)이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절개를 지켰다. 2대가 지나 어계(漁溪) 선생 휘 려(旅)는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분으로 대총재55)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두 세대의 정충(精忠) 이후로 충효와 행의(行義)로서 대를 이어 명가(名家)가 되었다. 공은 금은의 9대손이며 어계의 7대손으로, 휘는 시전(時琠) 자는 윤보(潤甫)이며 죽헌은 자호이다. 5대조 내헌공(耐軒公)은 휘가 연의(淵義)로, 의금부 경력을 지냈으며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고조는 휘 정언(庭彦)으로 부사직을 지냈으며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 율헌공(栗軒公)은 휘가 택(澤)으로, 사재감정에 추증되었다. 조부 송재공(松齋公)은 휘가 면도(勉道)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한강(寒岡) 문목공 정구(鄭逑)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부친의 휘는 함번(咸蕃) 호는 월창(月牕)으로, 종숙부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에게 학문을 배워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모친은 인천 이씨 세(歲)의 따님과 전주 이씨 영철(英哲)의 따님이다.공은 효종 정유년(1657)에 태어났으니, 몸가짐이 남달랐으며 재주가 총명하였다. 학문을 배울 때가 되자 독실한 뜻으로 학업에 부지런하여 경사(經史)에 깊게 통달하였으며 문사가 정밀한 경지에 이르렀다. 족조(族祖)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선생을 위하여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시호를 요청하였다. 선비들의 의견은 공으로 주필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마침내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시호56)를 청하는 법은 참으로 정한 법식이 있는데, 또한 소장의 글이 명백하고 적절했기 때문이다.공의 효애(孝愛)는 하늘로부터 받아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예로써 섬겼으며 병을 간호할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선공(先公)의 병이 위태로울 때 죽순을 찾았는데 당시 너무 때가 일러서 죽순을 찾아 올릴 수가 없었다. 이것을 한으로 여겨 평생 죽순을 먹지 않았으며, 일찍 올라오는 대를 집에 심고서 제삿날에 반드시 올렸다. 상을 당해 병에 걸려 예를 다하지 못하자 다시 3년을 더하여 죽을 먹고 여묘살이를 하니, 사림들이 공의 행의(行誼)로 여러 차례 관찰사에게 추천하였다. 영조 병오년(1726) 2월 9일 돌아가시니, 향년 일흔이었다. 진주성 태동 안산의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진양 유씨 만희(萬熙)의 따님이다. 후비(后妃)는 경주 이씨 후도(後道)의 따님이다. 묘는 세 분을 합부(合祔)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항(杭)은 백부(伯父)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차남은 노(櫓)이다. 손자는 영대(榮大), 영윤(榮潤), 영룡(榮龍)이 있다. 딸은 노제광(盧梯光), 이몽상(李夢相)에게 시집갔다.오호라! 공이 효성과 학문으로 명성과 실상이 드러나서 좌해 명가의 명성을 능히 지켰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사는 마을에는 정려로 표창도 없었고 자신에게는 작록도 이르지 않았지만, 당시 유사가 밝지 못한 것이 공에게 어찌 손상이 되겠는가."이에 명을 짓는다.금은과 어계의 선덕 琴漁先德한강과 간송당의 연원으로, 寒松淵源효성과 학문은 惟孝惟學진실되면서도 순수하였어라. 旣實且純조상들의 영광이 있었으며 父祖有光현철들과 함께 돌아가리라. 賢哲同歸내가 빗돌에 새기노니 我鑱于石세상의 법도에 도움이 있으리. 世程可裨 竹軒趙公之墓, 將樹碣也, 族後孫瀚奎將公嗣孫■■之命, 齎遺事一通而來, 屬余銘之.辭不獲, 按而叙之曰 : "趙氏, 籍咸安.高麗元尹諱鼎, 爲上祖.麗之亡也, 工曹典書琴隱先生諱悅, 守罔僕之節.再傳而漁溪先生諱旅, 本朝端廟生六臣之一, 贈大冡宰謚貞節.兩世精忠之後, 連世以忠孝行義爲名家.公, 琴隱九世, 漁溪七世, 諱時琠字潤甫, 竹軒自號也.五世祖耐軒公, 諱淵義, 義禁府經歷贈戶曹參判.高祖諱庭彦, 副司直贈刑曹參判.曾祖栗軒公, 諱澤, 贈司宰監正.祖松齋公, 諱勉道, 同知中樞府事, 師事寒岡鄭文穆公.考, 諱咸蕃號月牕, 受業于從叔父澗松堂, 以學行著.妣, 仁川李氏歲女、全州李氏英哲女.公, 以孝廟丁酉生, 儀表異凡, 才思聰穎.及就學, 篤志勤業, 淹貫經史, 精臻辭筆, 爲族祖大笑軒先生, 倡多士請謚也.士論, 以公主筆, 竟得蒙允, 節惠之法, 固有定式, 而亦因疏辭之明白精當也.公孝愛天植, 生事以禮, 養病盡誠.先公疾劇, 思芛菜, 時早甚, 未得求進, 以是爲恨, 平生不食芛, 種早竹於家, 必薦忌辰.丁憂嬰疾, 不能盡禮, 更加三年, 歠粥居廬, 士林以公行誼, 累薦于方伯.以英廟丙午二月九日卒, 享年七十, 葬晉州省台洞案山負酉原.配, 晉陽柳氏萬熙女.后配, 慶州李氏後道女.墓皆祔.擧二男, 長杭, 糸世父后.次櫓.孫男, 榮大、榮潤、榮龍.女, 盧梯光、李夢相.嗚呼! 公以孝以學, 名與實彰, 克守左海名家之稱, 詎不盛哉.至於宅里闕旌表, 身不及爵祿, 當時有司者之不明, 於公何損哉." 銘曰 : "琴、漁先德, 寒、松淵源.惟孝惟學, 旣實且純.父祖有光, 賢哲同歸.我鑱于石, 世程可裨." 대총재 이조 판서를 달리 이르던 말이다. 시호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고 한 가지 선으로써 요약했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라고 하였다. 이는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그 이름을 높이되 여러 가지 선행을 다 들기 어려우므로 가장 큰 것으로 요약함을 이른다. 이 때문에 시호를 절혜(節惠)라고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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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金公墓碣銘【幷序】 부풍의 치소(治所)에서 5리 떨어진 망기산(望氣山) 동명당(東明堂)의 왼쪽 기슭 진좌(辰坐)의 언덕에 있는 봉분은 바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고(故) 부녕 김공 휘 시련(始鍊)을 모신 곳이다. 5대손 낙준(洛俊), 낙춘(洛春)이 여러 친족들과 함께 장차 묘갈을 다시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명문(銘文)을 요청하였다. 나는 이미 중공(仲公) 운암처사(雲菴處士)의 묘갈을 지었기에 굳게 사양하였는데, 그럴수록 요청함이 더욱 정성스러워 비록 늙고 병들어 위태로운 상태에 있지만 한 집안의 정의(情誼)로 감히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오호라! 공은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는데 죽계 선생이 자손에게 남긴 은택은 5대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으니,57)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효제를 두터이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공의 언행과 덕업을 기록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인데 족보에 보이지 않으니, 어째서 그런가. 다만 이것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자와 호, 돌아가신 해까지 누락되었으며 다만 원릉(元陵, 영조) 임자년(1732)에 태어났다는 기록만 있으니, 옛사람이 질박함을 숭상하는 풍조를 더욱 살펴볼 수 있는데, 지나치게 소략하니 탄식을 견딜 수 있으랴.홍릉(洪陵, 고종) 병자년(1876)에 자손이 귀하게 되어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선대의 계보와 대대로 쌓은 덕은 모두 같은 능성의 운암공(雲菴公) 묘비에 갖춰져 있으니 이에 기록하지 않는다. 부인은 숙부인에 추증된 전주 이씨로, 춘항(春恒)이 부친이다. 묘는 같은 등성이의 청룡등 묘좌(卯坐)에 있다. 아들은 셋으로, 안택(安澤)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진택(鎭澤)과 경택(慶澤)이 있다. 조양 임의배는 사위이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데 다만 세상에 드러난 자를 기록한다. 서각(瑞珏)은 호가 송은(松隱)으로, 효성과 학문이 뛰어나 고을과 도에서 서로 추천하였으며 수를 누려 통정대부에 올랐다가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승진하였기에 삼대를 추증하니, 안택의 아들이다. 지금 공의 자손은 대단히 번창 하였는데, 대부분 순박하고 삼가며 우아하고 조심스러움으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또한 공이 당대에 누리지 못한 것이 후손에게 보답되는 것을 증험할 수 있다. 이에 명을 붙인다.이름난 조상의 후예로 名祖之裔시와 예를 업으로 물려받았네. 詩禮之業샘이 깊으면 멀리 흘러가나니 源深流長후손이 번창하였도다. 後承蕃碩명당의 산등성이는 明堂之岡만 년토록 이어질 무덤인지라, 萬年攸宅묘갈을 삼가 마련하니 香大虔供영원토록 다함이 없으리라. 永世無斁 維扶風治五里, 望氣山東明堂之左麓負辰而封者, 卽故贈承政院左承旨扶寧金公諱始鍊之藏也.五世孫洛俊、洛春與諸族, 將改豎墓碣, 請余以銘.余已忝仲公雲菴處士墓, 固辭, 而其求也愈勤, 則雖老病濱危, 在一室之誼, 不敢終辭.嗚呼! 公早襲家庭之訓, 而竹溪先生遺謨之澤, 五世未斬, 則繼述先懿, 敦行孝悌, 乃其常事, 宜其有言行德業之可書者, 而譜無見焉, 何哉.不惟是已, 至於字號卒年之漏錄, 而只存元陵壬子之生, 則尢可以見古人尙質之風, 而太涉疎畧也, 可勝歎哉. 洪陵丙子, 以孫貴,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筳參贊官.先系世德, 具在同岡雲菴公碑陰, 玆不書.配, 贈淑夫人全州李氏, 春恒其父.墓同岡靑龍嶝卯坐.三子, 安澤贈戶叅, 鎭澤、慶澤.兆陽林義倍, 女也.孫曾以下, 繁不盡錄, 而只錄其著者, 瑞珏號松隱, 孝學卓異, 鄕道交薦, 壽階通政, 陞崇政同中樞, 追贈三世, 安澤男也.今公之子姓振振, 多以淳謹雅飭, 見稱於人, 亦可以驗公不食之報也.系之以銘曰 : "名祖之裔, 詩禮之業.源深流長, 後承蕃碩.明堂之岡, 萬年攸宅.香大虔供, 永世無斁." 자손에게……않았으니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 "군자가 끼친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기고, 소인이 남긴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긴다.〔君子之澤, 五世而斬〕"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죽계의 은택이 커서 여전이 남아 전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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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유재 소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昌裕齋蘇公墓碣銘【幷序】 옛날 간재 선사께서 완산에서 도를 강학하실 때 만재(晩齋) 소휘식(蘇輝植) 공이 있었는데, 선사께서 매우 즐겁게 그와 벗할 때 그 아들 열재(悅齋) 학규(學奎)가 따라왔었다. 만재공은 일찍이 진사에 장원하였으며 문장과 학식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열재도 또한 이른 나이에 성균관에 올랐지만 공부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명성이 드높았다. 후에 다시 간옹을 스승으로 정하여 우리 유림의 큰 기대를 받았다. 내가 생각건대, 아들이 부친의 덕을 이어받아58) 남쪽 지방의 명문가가 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아마도 그 선대에 은덕과 인을 쌓아서 그 토대가 되는 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근래 열재의 조부인 창유재 공의 가장을 얻어서 읽은 뒤에 감탄하면서 "그 원인이 있었도다! 이 분이 그것을 열어주었구나."라고 하였다.공의 휘는 성술(星述) 자는 군삼(君三)으로, 순조 갑자년(1804) 7월 14일이 태어난 날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충후(忠厚)하여 순수한 덕과 훌륭한 행실은 천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살펴보면, 어려서부터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마음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병이 나면 대변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면 예절에 맞게 슬퍼하였다. 기일에는 스스로 희생과 반찬을 장만하면서 좋은 제수를 바쳐59) 제사를 돕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선조를 받든 것을 살펴보면, 고조 이하의 제전(祭田)과 묘소의 의물(儀物) 등을 홀로 수고하여60) 마련하였으며, 친척들의 힘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애하는 것을 보면, 담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 거처하면서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 나눴다. 과부가 된 누이를 위하여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고 그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으로 대하였다.친족 간에 화목한 것을 보면, 나이가 장성하여 가난한 자를 시집보내고 장가들였으며, 곤궁하여 재산이 없는 자에게는 밭을 나눠주면서 살게 하였다. 흉년에 종친을 위한 진대(賑貸)를 만들어서 널리 진휼하였다. 벗을 대하는 것을 살펴보면, 베풀기를 좋아하여 인색하지 않았으며, 초상과 장례에 반드시 두텁게 부의하였다. 좋은 때 화창한 날이 되면 술을 차려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후진을 가르친 것을 살펴보면, 집의 살림을 다스릴 때부터 좋은 밭은 생각지도 않고 먼저 경적(經籍)을 구해 보관하여 자손들의 학업에 대비하였다. 마을의 자제 가운데 가르칠 만한 자가 있으면 학비를 도와주고 권장하여 성취한 자가 많았다. 일흔여섯의 수를 누리다가 기묘년(1879) 8월 2일 돌아가시니, 전주 봉서산 아래 용흥리 북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오호라! 여러 가지 선이 공에게 갖추어졌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효도이다. 사림들은 공이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61)을 지녔다고 하여 그 내용을 지방의 감영과 부(府)에 올렸으며, 상국 정범조(鄭範朝)가 도백으로 있을 때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고 행실이 삼가고 조심스럽다고 특별히 조정에 천거하였으니, 공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대저 효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근원이 있으면 흐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것 이외에 선조를 받들고 우애하고 화목한 것에서 벗을 대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까지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서 재물을 즐겨 사용하였으니, 요컨대 이러한 것은 모두 인후(仁厚)의 실제로 귀결되게 한 이후에야 그만두었다. 대개 공은 충효로 바탕을 삼았으니, 그러므로 실용에 드러난 것도 또한 두텁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두터우니, 그러므로 미루어서 행하는 것이 두텁지 않은 것이 없다. 《주역》에서 "곤의 두터움이 만물을 실음은 건의 끝없는 덕에 합한다."62)라 하였는데, 다만 땅이 두텁기 때문에 만물을 실으니, 사람이 두터우면 그 후손이 번창한 것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자손이 양 대에 걸쳐 지금과 후대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는 것은 마땅하며, 공의 어짊도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대개 당시의 여론은 공이 능히 가문을 창대하게 만들고63) 후손들에게 넉넉한 덕을 끼쳤다64)고 하였으니, 이에 자신의 집을 창유(昌裕)라고 호칭하는 것은 또한 공자가 말한 '기리는 바가 있으면 일찍이 시험하여 보았기 때문이다.'65)는 뜻을 얻은 것이다.소씨는 진주에서 나왔다. 고려 상호군 희철(希哲)이 시조가 된다. 소윤 천(遷)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만육(晩六) 최양(崔瀁)과 더불어 전주에서 자정(自靖)하였다. 대사간 곤암(困菴) 세량(世良)과 대제학 문정공(文靖公) 양곡(陽谷) 세양(世讓) 형제는 조선에서 현달하였다. 군수 련(連)은 을사사화 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주부 호선(好善), 도사 여형(汝衡)은 광해조 때 쫓겨났다. 이분들이 곤암의 아들, 손자, 증손이며, 공의 7대조 윗분들이다. 증조 덕소(德邵)는 효도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 원대(元大)는 학문이 뛰어났다. 부친 수광(洙廣)는 호가 담묵재(淡默齋)인데, 경학으로 이름이 났다. 모친은 전주 이씨 경삼(景三)의 따님이다. 공의 어짊은 또한 먼 조상으로부터 기인한 바가 있고 가까운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교육 받은 것이 있으니 영지는 참으로 뿌리가 있는 것과 같다.부인은 문화 유씨 기원(基源)의 따님으로, 단정하며 온순하고 매우 부지런하여 능히 남편을 도왔다. 무덤은 공의 묘소 서쪽 산록 골짜기 뒤에 있다. 아들로 장남은 휘식(輝植), 차남과 셋째는 휘정(輝楨), 휘백(輝栢)이다. 딸은 전의 이석관과 전주 최광욱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로 학규(學奎), 명규(命奎), 상규(祥奎), 승규(承奎), 장규(章奎)가 있는데, 명규는 출계(出系)하였다. 차남의 아들로 택규(宅奎)가 있다. 셋째의 아들로 명규가 후사로 들어왔다. 손녀와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나는 공에 대해 선대 인척(姻戚)의 정의(情誼)가 있다. 열재가 이 때문에 '일이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이니, 다른 사람에게서 글을 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서 나에게 공의 묘소의 비명(碑銘)을 짓게 하였다. 그 요구는 문장으로서 한 것이 아니라 정의로서 한 것이기에 감히 사양할 수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능히 창대한다는 것은 《시경》의 말이고 克昌云詩후손에게 덕을 드리운 다는 건 《서경》의 말이네 垂裕稱書옛날 은나라와 주나라는 在昔殷周선이 쌓여 경사가 후손에 전해졌도다 善積慶餘공은 아름다운 자질을 받아 公得美質행실에 뭇 선을 갖추었으니 行備衆善정성으로 효도와 우애하여 孝友以誠억지로 힘쓰지 않았어라 不待强勉친척에게 화목하고 구휼하며 睦恤宗黨후진에게 학문을 권장하였으니 獎學後輩그 전체를 총괄하자면 總厥全體오직 두터움[厚] 한 글자로다 惟厚一字이로써 몸을 닦고 집을 가지런함에 用此修齊옛날부터 이것을 법으로 삼았으니 古先是法집과 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家國雖殊한 이치로 부합하기에 一理符合그 창성하고 넉넉함이 마땅하니 宜其昌裕《시경》, 《서경》의 말과 같도다 若詩書言만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如謂不信자손의 어짊을 보시라 視子孫賢아 세상 사람들아 嗟世之人어찌 이를 거울삼지 않으랴 胡不鑑玆빗돌에 새겨서 刻之貞珉후손에게 알리노라 庸詔有來 昔我艮翁先師, 講道完山也, 有晩齋蘇公輝植, 先師與之友甚歡, 曁其子悅齋學奎, 從焉.晩齋公, 曾魁進士, 以文章學識著當世.悅齋, 亦早年上庠而學益勤, 蔚有聲譽.後復定師艮翁, 爲吾林碩望.余惟父子濟美, 爲南服名家者, 夫豈偶然.意其先有積功累仁, 以爲基本者, 比得悅齋祖考昌裕齋公家狀讀之, 嘆曰 : "有以哉, 此其啓之." 公諱星述字君三, 純祖甲子七月十四日, 其生也.生而禀質忠厚, 淳德懿行, 蓋出天性.孝親, 則自幼愛敬, 長而忠養.有癠, 嘗糞祝天.遭艱, 哀毁如制.夫日, 自備牲羞, 獻賢助祭, 以爲常.奉先, 則高祖以下, 祭田墓儀, 獨賢勞營備, 不待族親之力.友于, 則隔墻聯居, 與同飢飽.爲寡姊築室居之, 撫其子如己出.睦族, 則年壯而貧者, 嫁娶之, 窮無資者, 分田爲其生.歉歲, 設宗賑而廣賙.待知舊, 則喜施不吝, 喪葬必厚賻.良辰佳日, 置酒會集, 和氣藹然.敎後進, 則自治家時, 不謀良田, 先求經籍藏之, 備子孫學業.鄕黨子弟可敎者, 亦資學費獎勸, 多成就者.壽七十六而卒于己卯八月二日, 葬于全州鳳棲山下龍興里北麓壬坐原.嗚呼! 衆善備於公, 而大焉者孝也.士林以公有終身慕, 幷呈于營府, 鄭相國範朝, 道伯時, 以孝友卓異, 操行謹飭, 別薦于朝, 益信公之行之孚人深也.夫孝, 爲百行之源.有源則有流, 固也.孝親以外, 如奉先友睦, 以至待友敎人, 盡己之心, 而樂用物力, 要皆歸於仁厚之實而後已.蓋公以忠孝爲質, 故其見諸用者, 亦厚也.事親者厚, 故推而無所不厚也.《易》曰 : "坤厚載物, 德合旡疆." 惟地厚焉, 故萬物載, 人之厚者, 其後昌, 亦類是爾, 宜乎公之子孫, 兩世幷著令聞於今與後, 而公之賢愈顯也.蓋當時輿論, 以公克昌門戶, 垂裕後昆, 號其齋以昌裕者, 其亦得聖人所譽有試之意矣.蘇氏, 出晉州.高麗上護軍希哲, 爲始祖.少尹遷, 師事圃隱鄭先生, 與晩六崔公瀁, 自靖于全州.至大司諫困菴世良、大提學文靖公陽谷世讓兄弟, 顯于本朝.郡守連, 乙巳禍罷退.主簿好善、都事汝衡, 光海朝見黜, 困菴子孫曾, 而公之七世以上也.曾祖德邵, 以孝著.祖元大, 有文學.考洙廣, 號淡默齋, 以經學聞.妣, 全州李氏景三女.公之賢, 又遠有所自, 近有擩染, 靈芝信有根矣.配, 文化柳氏基源女, 端順克勤, 克助君子, 葬在公墓西鹿洞後.男, 長輝植, 次輝楨、輝栢.女, 適全義李錫寬、全州崔光旭.長房男, 學奎、命奎出, 祥奎、承奎、章奎.次房男, 宅奎.三房系男, 命奎.孫女及曾玄以下, 不盡錄.余於公, 有先戚誼.悅齋以是, 謂'事同一家, 不必求他人文.' 俾余銘公墓.其求也, 不以文而以誼, 不敢辭.銘曰 : "克昌云詩, 垂裕稱書.在昔殷、周, 善積慶餘.公得美質, 行備衆善.孝友以誠, 不待强勉.睦恤宗黨, 獎學後輩.總厥全體, 惟厚一字.用此修齊, 古先是法.家國雖殊, 一理符合.宜其昌裕, 若詩書言.如謂不信, 視子孫賢.嗟世之人, 胡不鑑玆.刻之貞珉, 庸詔有來." 아들이……이어받아 '제미(世濟美)'는 원래 후손이 전대의 업적을 계승하여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여, 그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다.〔世濟其美 不隕其名〕" 한 데서 나왔다. 여기에서는 아들인 열재가 부친인 만재의 덕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좋은 제수를 바쳐 '헌현(獻賢)'은 좋은 제수를 쓴다는 말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8 〈한여석에게 답함〔答韓汝碩〕〉에서 "고례(古禮)에 '헌현(獻賢)'이란 문구가 있다. 대체로 지자(支子)에게 두 희생(犧牲)이 있을 경우에 그중 좋은 희생을 종자(宗子)에게 드려서 제수(祭需)에 쓰도록 하는 것인데 정자(程子)께서 말한 '물질로써 돕는다.'는 뜻이다. 좋은 희생을 드려서 돕는다면 그 성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홀로 수고하여 '독현(獨賢)'은 원래 혼자서 나랏일을 위해 고생하며 동분서주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너른 하늘 아래 어떤 곳도 왕의 땅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땅 물가의 사람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는데, 대부들을 공평하게 쓰지 않고서, 나만 부려먹으며 홀로 어질다 하는구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홀로 제전과 묘의를 담당하였다는 의미이다.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 《맹자》 〈만장상(萬章上)〉에서 맹자는 "진정한 효자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법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사모했던 경우를 나는 위대한 순 임금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 하였다. 《주역》에서……합한다 〈곤괘(坤卦) 단전(彖傳)〉에 보이는 말이다. 능히…… 만들고 《시경(詩經)》 〈주송(周頌) 옹(雝)〉에서 "위로는 하늘을 편안케 하시고, 아래로는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셨다.〔燕及皇天, 克昌厥後〕"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후손을 가문으로 바꿔 사용하였다. 후손들에게……끼쳤다 후손에게 덕행을 많이 남겨 준다는 뜻으로,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아 후세에 덕행을 남겨 주소서.〔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공자가……보았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내가 남에 대해 누구를 비방하고 누구를 칭송하겠는가. 만약 칭송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험해 봄이 있어서이다. 이 백성들은 삼대 시대에 정직한 도로 행해 왔기 때문이다.〔吾之於人也 誰毁誰譽 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 斯民也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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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松隱金公墓碣銘【幷序】 지난 80년 전 을축년(1865)에 부안 유생 백홍진(白洪鎭) 등 39명의 사람들이 현감에게 효자 김공 휘 서각(瑞珏)의 행실을 기록하여 추천하였다. 그 글에서 "이와 같은 지극한 행실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을해년(1965)에 전라도 유생 권우헌(權宇憲) 등 44명의 사람들이 또다시 도순사에게 천거하면서 '대단히 가상(嘉尙)하다'는 말을 하였다. 당시는 홍릉(洪陵, 고종)이 막 즉위하던 때라 공의(公議)가 아직까지는 존재하였으니, 유생들이 추천했던 문서와 글은 충분히 그 내용을 믿을 수 있다. 대개 공자가 대효(大孝)를 칭할 때 반드시 '덕은 성인'이라는 말66)로 본다면 이보다 아래인 효를 논할 때는 또한 마땅히 그 덕의 성취한 바를 따라 고하(高下)를 정하게 된다. 문서에서 기록한 바 '부모의 뜻과 존체를 봉양하고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지냈다.'는 것 이외에 또한 '《소학》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사물(四勿)과 삼성(三省)67)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는 말에 의거하여 그가 성취한 것을 따져보면, 어찌 충분히 학문을 한 군자가 되지 않겠는가. 이로서 논하자면, 공은 한 가지 선에만 치우친 효가 아니라 이에 자신을 성취한 완전한 효68)라고 하겠다.공의 자는 인서(寅瑞) 호는 송은(松隱)으로, 계보는 고려 평장사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선생 휘 구(坵)의 후손에서 나왔으며, 고려 말 충신 고부군사 휘 광서(光敘)의 13대손이며, 조선 유일(遺逸)로 참봉에 뽑힌 죽계(竹溪) 선생 휘 굉(鋐)의 7대손이다.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추증된 휘 참(墋)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휘 시련(始鍊)과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된 휘 안택(安澤)이 그의 바로 위 삼대(三代)이다. 모친은 정부인에 추증된 동래 정씨 상철(相喆)의 따님이다.공은 정조 경신년(1800) 8월 5일에 태어나 여든의 수를 누려 통정의 직급이 더해졌으며 후에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승급되었으며 위로 삼대에 벼슬이 추증되었다. 홍릉(洪陵, 고종) 정축년(1877) 10월 17일에 돌아가셔서 명당리 왼쪽 산기슭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내는 정부인으로, 덕수 이씨 노직(魯直)의 따님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태석(泰錫)은 수를 누려 통정대부가 되었다. 홍석(泓錫)은 호가 송암(松菴)으로, 수를 누려 통정대부 좌승지가 되었다. 막내는 용석(庸錫)이다. 딸은 세 명인데, 해주 오윤방과 청주 한광섭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네 명으로, 영기(永基)는 큰 아들에서 나왔고, 영철(永喆)은 둘째 아들에서 나왔으며, 영규(永奎)와 영풍(永豊)은 셋째 아들에서 나왔다. 외손은 여섯 명으로, 종노(鐘魯), 화녀(和汝), 영숙(和淑), 종손(鐘遜)은 오 서방에서 나왔고, 규석(圭錫)과 규룡(圭龍)은 한 서방에서 나왔다. 증손을 들어보면, 낙요(洛堯), 낙순(洛舜), 낙우(洛禹)는 영기에서 나왔다. 낙종(洛鍾), 낙성(洛成), 낙호(洛鎬), 낙준(洛俊), 낙진(洛辰)은 영철에서 나왔다. 낙춘(洛春), 낙무(洛武), 낙상(洛祥)은 영규에서 나왔다. 낙인(洛仁), 낙철(洛哲), 낙근(洛根)은 영풍에서 나왔다.낙성과 낙춘이 나에게 비석에 새겨서 드러낼 묘도 문자를 부탁하였다. 공은 나의 고조와는 6촌 아우가 된다. 이미 공에 대해 익히 들었으며, 정의(情誼)상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하기에 마침내 명을 짓는다.태어나 남다른 자질을 지녔으니 生有異質참된 효가 하늘에서 내려졌구나 誠孝根天《소학》 한 책으로 小學一書평생 몸가짐을 하였으며 生平律身사물과 삼성으로 四勿三省증자와 안자를 자나 깨나 잊지 않고서 寤寐曾顔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시거나 부모를 섬길 때 事親生死오직 예를 따랐도다 惟禮是循집안에 아름다운 범절이 전해지니 家垂懿範조심하여 선조를 욕보이지 말라 戒勿辱先목이 마르듯 곤궁한 이를 구휼하니 周窮如渴인을 넓혀 타인에게 미쳤으며 推仁及人우아한 행동은 세상에 뛰어나 行誼超世사람들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누나 人無間言이에 많은 선비들이 是爲多士공정하게 글을 지어 올렸으니 公正狀文빗돌에 옮겨 새겨서 移鑱于石천년토록 길이 고하노라 用詔千春 往在八十年前乙丑, 扶安儒生白洪鎭等三十九人, 狀薦孝子金公諱瑞珏于縣監.其題曰 : "似此至行, 可謂出類拔萃." 後十年乙亥, 全羅道儒生權宇憲等四十四人, 又薦于都巡使, 亦得極爲嘉尙之題.時在洪陵初服, 公議猶在, 是狀是題, 足爲信筆.蓋觀乎孔子稱大孝, 必以德爲聖人, 則下此而論孝, 亦當隨其德之所就而定高下也.據狀所書, '志體之養, 葬祭以禮'之外, 有'《小學》律己四勿三省爲己任'之語, 究其所就, 豈不足爲學問中君子人乎.以是論之, 公非一善之偏孝, 乃成身之全孝也.公字寅瑞號松隱, 系出高麗平章事文貞公止浦先生諱坵之後, 麗末忠臣古阜郡事諱光敘之十三世孫, 本朝逸選叅奉竹溪先生諱鋐之七世孫.贈通訓大夫司僕寺正諱墋,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諱始鍊, 贈嘉善大夫戶曹參判諱安澤, 其三世也.妣, 贈貞夫人, 東萊鄭氏相喆女.公, 生以正廟庚申八月五日, 壽八十, 加通政階, 後陞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追贈三世, 卒于洪陵丁丑十月十七日, 葬于明堂里左麓卯坐原.配, 貞夫人, 德水李氏魯直女.男三人, 泰錫壽通政.泓錫號松菴壽通政左承旨.庸錫.女三人, 海州吳潤邦、淸州韓光變.孫四人, 永基長房出, 永喆次房出, 永奎、永豊三房出.外孫六人, 鐘魯、和汝、和淑、鐘遜, 吳出.圭錫、圭龍, 韓出.曾孫, 洛堯、洛舜、洛禹, 永基出.洛鍾、洛成、洛鎬、洛俊、洛辰, 永喆出.洛春、洛武、洛祥, 永奎出.洛仁、洛哲、洛根, 永豊出.洛成、洛春, 屬澤述以墓道顯刻之文.公於我高祖, 爲六從弟行, 旣稔聞, 誼當爲役, 遂爲之銘曰 : "生有異質, 誠孝根天.《小學》一書, 生平律身.四勿三省, 寤寐曾顔.事親生死, 惟禮是循.家垂懿範, 戒勿辱先.周窮如渴, 推仁及人.行誼超世, 人無間言.是爲多士, 公正狀文.移鑱于石, 用詔千春." 공자가……말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7장에 공자가 이르기를 "순은 위대한 효자이셨도다. 덕은 성인이시고, 존귀함은 천자이시고, 부유하기로는 사해 안을 다 소유하시어, 오래도록 종묘의 향사를 받으시고, 자손이 오래도록 보호를 받게 되었느니라.[舜其大孝也與 德爲聖人 尊爲天子 富有四海之內 宗廟饗之 子孫保之]"라 하였다. 사물(四勿)과 삼성(三省) 사물(四勿)은 안자(顔子)의 예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지 말라는 것을 가리키고, 삼성(三省)은 증자가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도모하는 데 진실되지 못하지는 않았는가? 벗과 사귀는데 믿음이 없지는 않았는가?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등을 가리킨다. 자신을 성취한 완전한 효 《공자가어》에서 공자가 애공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인인(仁人)은 사물의 이치에 지나치지 않게 하고 효자는 사물의 이치에 지나치지 않게 하니, 이 때문에 인인이 어버이를 섬기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게 하며 하늘을 섬기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게 합니다. 이 때문에 효자는 자기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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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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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백에게 보냄 경인년(1950) 與金周伯 庚寅 형이 권순명을 데리고 나에게 와서 그와 화해시키려는 의도는 좋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사(先師)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권순명에게 "만약에 간옹께서 인가받으라는 뜻을 지니셨다면 어찌 간옹선생이 되셨겠습니까?"라고 하니, 권순명이 내 무릎을 어루만지며 온화하게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온당치 않습니다. 이제 그만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우리들이 맹자가 공자를 존중하듯이 간옹을 존중한다면 무슨 온당치 않음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공자가 위나라에서 옹저(癰疽)를 주인 삼았다면48) 어떻게 공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자, 권순명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후에 다시 편지로 질문했는데도 답장이 없었고, 계속 음성의 오진영을 존경하며 믿었습니다. 근래에 친구 정교원(鄭喬源)이 '은행나무 밑 대나무 평상에서 말한 것이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애매하게 대답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필 나한테 묻습니까?"라고 말하고, 바쁜 일이 있어 가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나가버렸습니다. 그의 뜻을 살펴보건대, 선사께서 인가받으라는 뜻을 지니셨다는 그의 말이 뚜렷하니, 이는 어찌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내가 저들과 30년 동안 절교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절교된 것은 단지 이 하나의 일 때문이고, 저들이 사람을 보내와 화해를 청한 것이 한 번이 아닌데 끝내 응하지 않은 것도 단지 이 하나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70이 되어 죽게 된 때에 갑자기 이 일을 잊고 스승을 무함한 자들과 함께 화해를 한다면 어찌 똑같이 스승을 무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만약 이전의 견해를 통렬히 고쳐서 반기를 들어 오씨를 성토하고 선사의 묘소에 달려가 고하고서 동문의 여러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사과한다면 내가 장차 가서 만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들이 비록 나를 찾아온다 하더라도 어찌 얻는 것이 있겠습니까?형은 이 일에 대하여 이전에 있었던 양쪽의 시비에 대하여 다소간 말한 것이 있는데, 지금 화해시키려 하는 것은 그들이 잘못을 고쳤는가의 여부를 묻지도 않고 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나 일처리 하는 의리에 대해서는 그 마음의 변화를 완전히 알기 전에는 절대로 가볍게 허락할 수 있는 이치는 없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형은 이미 저 사람과 인친관계를 맺어 친밀함이 더욱 절실하니, 반드시 성심으로 그들을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선뜻 뉘우치고 깨달아 끝내 사문(師門)의 죄인이 되지 않게 한다면 나도 그들과 화해할 날이 있을 것이니 오직 이것을 바랄 뿐입니다. 兄之欲携權就我, 與之和解者, 意亦善矣. 但此事非關吾身, 關乎先師. 吾嘗語權曰: "若有認意, 何以爲艮翁?" 權按吾膝而溫言曰: "如此則未安, 已之已之." 吾曰: "吾輩之尊艮翁, 若孟子之尊孔子, 有何未安? 孟子豈不曰: '孔子主癰疽, 何以爲孔子乎?'" 權無言. 後又書質, 亦無答, 而一向尊信陰吳. 近於鄭友喬源杏下竹床說有無之問, 模糊不對而曰"如此說, 何必問我?", 方傯忙當去即出. 觀其意, 其謂先師有認意者躍如, 則是豈不爲誣師乎?吾之與彼三十年不絕而自絕者, 只爲此關, 自彼遣人請和者非一, 而終不應者, 只爲此關. 今於七旬將死之日, 忽然打破此關, 與誣師者共和, 則豈不同爲誣師乎? 彼若痛改前見, 反旗討吳, 走告先師之墓, 輪謝同門諸人, 吾將往見, 亦無不可. 不然, 彼雖就我, 安所得乎?兄於此事, 從前之兩邊是非, 有多少云云之說, 今之欲和解者, 亦非謂不問其改革與否而爲之? 然處事之義, 未悉其心面變化之前, 萬無輕許之理矣. 雖然, 兄既與其人通家而親益切, 必將誠心喻之, 使之幡然悔悟, 不終爲師門罪人, 則吾之和解亦有其日, 惟是之望焉爾. 맹자가……삼았다면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만장이 물었다. '혹자가 이르기를 공자가 위나라에서는 옹저를 주인으로 섬겼고, 제나라에서는 내시인 척환을 주인으로 섬겼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다〔萬章問曰 : 或謂孔子於衛, 主癰疽, 於齊主侍人瘠環, 有諸乎? 孟子曰 : 否. 不然也. 好事者爲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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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백에게 답함 신묘년(1951) 答金周伯 辛卯 어제 편지에서 권씨가 저를 보러온다고 하였다가, 잠시 후에 다시 "호남과 영남의 시비를 따지는 말을 야기한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므로 그만둔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매우 가소롭습니다. 맹자께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49)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자께서도 "학문을 하는 것은 단지 잘못을 없애고 옳은 것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50) 하셨으니, 옳은 것과 잘못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더라도 시비를 가릴 수 있는데, 하물며 저에게 있는 경우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든 일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부모나 스승과 관계된 일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제가 기꺼이 사람답지 않은 사람51)이 되어서 학문을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한 죄를 성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권순명은 30년 동안 오진영을 존경하고 믿으면서 나를 배척하여 "오진영에게 스승을 무함한 죄를 억지로 더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한테 와서 화해를 하자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종전에 저지른 큰 잘못이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면 어찌 입을 열어서 목구멍을 보이는 것처럼 분명하게 어제가 그르고 오늘이 맞다고 말하지는 않고, 반대로 시비를 서로 질문함에 밑바탕이 폭로될까 두려워하여 독을 남긴 채 봉투를 봉함하는 것처럼 가리고 막아 원한을 숨기고 타인을 벗하는52) 데에 귀착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찌 선비의 마음 씀씀이이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분별하지 않을지언정 분별하면 분명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53)고 하였습니다. 지금 기왕에 오고자 한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니, 피차간에 할 말을 다하고 논의를 다하여 의리를 끝까지 완벽하게 규명하고서 깨끗한 곳에 몸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미 후회하는 마음이 싹튼 기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니,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아! 오늘날 학문을 익히는 것이 참으로 이와 같단 말입니까? 이상할 따름입니다. 어제 만났을 때 자리가 좀 멀었고, 말하기는 병중이라 더욱 어려워 자세하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에 다시 편지를 보내오니 삼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昨枉喻以權欲來見我, 而旋復曰"恐其惹出湖嶺是非說, 則沒滋味, 故罷之", 其言極可笑. 孟子不云乎? "無是非之心, 非人也." 朱子不云乎? "爲學只要去非求是." 是與非在人, 猶當是之非之, 况當於我者乎? 凡事猶然, 况事關父師者乎? 使我甘作非人而不欲爲學則已, 不然, 安得不討吳誣師之罪乎? 權則三十年來尊信吳也, 斥我謂"勒加吳以誣師之罪矣." 今欲來我而親和者, 何意? 如云覺其從前鑄錯之非也, 則何不分明說昨非今是, 若開口而見咽, 反慮是非相質, 底蘊畢露, 欲掩覆遮攔, 若留毒而封皮, 不憚爲匿怨友人之歸? 是豈士子之用心乎? 孔子曰: "有不辨, 辨之, 不明不措." 今既欲來則正好, 彼此極言竭論, 以究義理十分到頭, 立身於潔凈之地. 不此之爲, 坐失悔心已萌之機, 更待何時? 鳴呼! 今之講學, 固如是歟? 可異也已. 昨唔時, 坐次稍遠, 語音病中益艱, 未由詳達. 茲復書申, 伏惟諒察. 시비를……아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학문을……것이다 주희는 "학문하는 것은 다만 정성을 다하고 오래도록 견디면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굳이 딴 생각하여 앞뒤를 잴 필요가 없다〔爲學只要致誠耐久, 無有不得, 不須別生計較, 思前算後也〕"라고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60 〈답임숙공(答林叔恭)〉. 사람답지 않은 사람 앞에서 말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원망을……벗하는 공자는 "말을 잘하고 낯빛을 좋게 꾸미며 지나치게 공손하게 함은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 원망을 감추고서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라 했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분별하지……않는다 《중용장구(中庸章句)》의 제20장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우면 능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묻지 않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분변하지 않을지언정 분변하면 분명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아서,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여야 한다. 과연 이 도에 능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진다.〔有不學 學之 不能不措也 有不問 問之 不知不措也 有不思 思之 不得不措也 有不辨 辨之 不明不措也 有不行 行之 不篤不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剛〕"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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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병수에게 답함 정축년(1937) 答吳極卿秉壽 ○丁丑 근래에 나아가 배알했는데, 자취는 우연인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모색한 것입니다. 받들어 대면함에 있어 꾸밈없이 정성껏 맞아 주시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씀을 해주시니 안색은 오랜 친구와 같고 마음은 전일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일생의 사귐을 정하고 세 잔의 술로 세 희생의 피를 대신하니, 제 소원이 비로소 이루어지고 바람이 성취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궁핍한 인생에서 즐거운 일은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년에 익우(益友)를 얻은 것은 개인적으로 다행이니, 복분(福分)이 적지 않습니다.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이 흡족했는데 우러러 두터이 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할 겨를도 없이 먼저 보내주신 편지를 또 받았습니다. 비할 데 없는 한때의 거친 논설을 인자(仁者)가 정중히 말해주는 예로 간주해주시고, 심지어 '하늘이 우리 노형을 사랑하여 다시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는 말씀을 하시니, 베풀어준 것은 없는데 보답만 받는 것 같아 부끄러워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산에 있는 돌이 비록 거칠지라도 옥을 가는 데에는 유용하고54), 초나라 수도 영에서 보낸 편지가 비록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연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니55), 형 같은 사람은 취하여 미루어나가는 것56)을 잘하여 인을 실천하는데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아! 사람이 서로를 아는 것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선비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편지로 교류한다고 명분을 삼고는 더러 자신의 학문을 믿고 잘난 체 하여 정성껏 접대하려 하지 않기도 하고, 더러 단점과 졸렬함을 감춘 채 물어서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죽을 때까지 추종하면서도 끝내 겉으로는 노나라와 위나라처럼 가까이 지내지만 속으로는 연나라와 월나라의 거리만큼 먼 것을 면하지 못하는 자들은 역시 도대체 무슨 마음입니까? 저는 평소에 이런 무리들이 하는 짓을 부끄럽게 여기고 항상 옛사람 대장부의 심사(心事)를 사랑하여 '푸른 하늘에 뜬 밝은 해는 사람마다 볼 수 있다'57)는 말씀과 같은 내용을 삼가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우리 형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주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만사는 순식간에 변하고 사라지니 모두 마음속에 담아둘 만한 것은 없고, 오직 책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는 것58)이야말로 구경법(究竟法)59) 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늙었고 세상과는 어긋났습니다. 푸른 등불 아래 누런 책을 보면서 옛 철인이 남긴 단서를 찾고, 차가운 물과 가을의 밝은 달에서 이 마음이 철저히 밝은 것을 보아서 이른바 구경법이라는 것을 구하니, 우리 형과 함께 서로 권면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책은 다만 읽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이치는 다만 궁구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니, 요컨대 마땅히 스스로 터득한 지취(志趣)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보내준 편지에서 말씀하신, 기쁨을 얻은 것도 많고 의심나는 것도 많다는 것이니, 생각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무릇 기쁨과 의심이 절반인 경우가 자득할 수 있는 방아쇠가 됩니다. 모두 의심만 하고 즐거워할만한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정말로 의심일 뿐입니다. 모두 기쁘기만 하고 의심나는 것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참된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의심나는 것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는 것에 투영시켜서 통하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참으로 기뻐하면서 자득할 수 있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내온 편지에서는 어찌 기뻐할 것과 의심나는 것을 한두 가지 언급하여 강론하면서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으십니까? 이후에는 다시 이렇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頃者造拜, 跡若偶緣, 心則積營. 及其承接也, 則削邊之欵, 由中之辭, 面如舊而心惟一, 一言以定一生之交, 三杯以替三物之血, 願始遂而望不負矣. 自以爲竆生快事, 無過於此. 而晚得益友, 私幸, 福分不淺. 歸猶充然, 仰謝厚賜之不暇, 乃承先書. 將一時荒蕪無倫之說, 看作仁者鄭重贈言之例, 至有天惠我老兄, 更起精神之喻, 無施受報, 愧不敢當. 然他山之石雖麁, 而功於攻玉; 郢都之書雖誤, 而資於治燕, 若兄者可謂善取譬而巧爲仁也. 嗟呼! 人之相知, 貴相通心, 士子爲尢甚. 彼名爲文字之交, 而或恃學自高, 不肯欵接, 或護短藏拙, 恥於問學, 終身追逐, 而卒不免靣魯衛而心燕越者, 亦獨何心? 區區平生羞作此輩之為, 常愛古人大丈夫心事, 如青天白日, 人得見之之語, 竊願學之. 而今始遇於吾兄, 何幸何幸? 朱夫子不云乎? '世間萬事, 須叟變滅, 舉無足置胷中, 惟有讀書竆理, 爲究竟法,' 吾儕俱老矣, 且世與違矣. 青燈黃卷, 尋曩哲之遺緒; 寒水秋月, 見此心之照徹, 以求所謂究竟法者, 願與吾兄交勖焉. 雖然, 書不可以徒讀, 理不可以徒竆, 要當有自得之趣. 此則來書所謂得喜處多, 得疑處亦多者, 已思過半矣. 盖喜疑相半, 自得之機關, 皆疑而不知有可喜, 固是疑也. 皆喜而不知有可疑者, 亦未爲真喜. 若能將可疑者反映於可喜者而通之, 則是可謂真喜而爲自得也. 今於來書, 胡不以可喜可疑者一二示及, 而作講明相長之資也? 後勿復然是望. 다른……유용하고 《시경(詩經)》에서는 "학이 구고에서 울거든 소리가 들에 들리니라. 고기가 잠겨 깊은 못 속에 있고 혹은 물가에도 있도다. 즐거운 저 동산에 심어놓은 박달나무여, 그 아래 낙엽이 떨어지는구나. 타산의 돌은 숫돌이 될 수 있느니라.〔鶴鳴于九皐, 聲聞于野. 魚潛在淵, 或在于渚.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蘀. 它山之石, 可以爲錯〕"라 했다. 《시경(詩經)》 〈소아·학명(小雅·鶴鳴)〉 초나라……되었으니 원래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와전(訛傳)하는 것을 이른다. 옛날 중국의 영(郢) 지방 사람으로 연(燕)나라 상국(相國)에게 편지를 쓴 자가 있었는데, 등불이 어둡자 옆 사람에게 촛불을 들라고 말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편지에 '촛불을 들라'고 썼다. 그런데 연나라 재상이 그 편지를 받아 보고는 기뻐하기를, "촛불을 들라는 것은 현자를 천거하여 쓰라는 말일 것이다." 하고는 곧 임금에게 아뢰어 그대로 실천하니, 연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 좌상(左上)〉 취하여……것 공자가 "무릇 인자(仁者)는 자기가 서고자 할 때 남을 세우며,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면 남을 도달하게 한다. 가까운 자신에게서 취하여 먼 곳의 남에게 미루어 간다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하였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푸른……있다 숨김없이 솔직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안동의 늙은 아전 권후중(權後重)이 상납색(上納色)으로 서울에 올라와 송시열을 만나고는 송시열의 거취(去就)에 대해 말하였다. 그 뒤에도 가끔 왕래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손수 "청천백일 인득이견지(靑天白日人得而見之)" 여덟 자를 대자(大字)로 써 주었다.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8 책을……것 《주자어류(朱子語類)》 권8에는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을 수양함〔窮理修身〕'이라고 되어 있다. 구경법(究竟法)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뜻하는 불가(佛家)의 용어로, 최고 경지의 원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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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吳極卿 戊寅 《역》의 상수(象數)에 대해 의문난 점을 하문하시니, 삼가 학문이 부족한 사람에게 묻는 훌륭한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역》 중에 온축된 의리의 대원천에 대하여 옛날의 학자가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면서 버려두지 않은 것은 이것을 밝히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금세의 학자는 모두 반쯤 올라가다가 떨어져서 끝까지 궁구하지 못하는데 오직 우리 형만이 이것에 대해 깨달음이 있어서 근원까지 궁구하려고 하니 역학에 대하여 평생 동안 축적된 학문이 존경스럽습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정밀히 연구한 공은 보통사람이 미치지 못할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고 다행입니까. 저 같은 사람은 소질이 우둔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가깝고 작은 것을 먼저 연구한 이후에 원대한 것을 탐구하려고 하여 매번 스스로 마음속으로 "주역이라는 책은 공자 같은 대성인도 말년에 이르러서야 좋아했고 주자 같은 대현인도 읽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였으니, 우리 같은 몽매한 학자가 어찌 감히 쉽게 말하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선례에 따라 읽어보긴 하였지만 하도(河圖) 낙서(洛書)와 상수의 변화가 정미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찍이 하루의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훌륭한 질문을 하셨는데 억지 변론으로 받들어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이유로 끝까지 침묵한다면 강론하여 도움을 받는 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이렇게 답장을 하니, 부디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른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답장하지 않은 이전의 여러 사람의 편지와 똑같이 여겨 일례로 보지 마시고 이번 기회를 통하여 미달한 점을 깨우쳐주시면 어떻겠습니까?생성설에 대한 저의 견해는 오행의 생성은 부드러운 것으로부터 강한 것이 되었다는 생각합니다. 물이 가장 부드럽고 불이 조금 강하여 금, 목, 토에 이르렀으니 점점 단단해지고 강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순서는 어쩔 수 없이 "1이 수를 낳고, 2가 화를 낳으며, 3이 목을 낳고, 4가 금을 낳으며, 5가 토를 낳았다"60)고 한 것입니다. 탄생의 순서가 이미 이와 같으니 완성의 순서는 또한 어쩔 수 없이 '6이 수를 이루고, 7이 화를 이루며, 8이 목을 이루고, 9가 금을 이루며, 10이 토를 이룬다'61)고 한 것입니다. 아마도 별도의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답장하여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俯詢大易象數之疑, 謹悉問寡之盛意. 盖《易》中所蘊義理大源頭處, 古之學者審問慎思而不措者, 所以明此也. 今世之學, 舉皆半上落下, 不克究竟, 惟吾兄有見於此, 而欲究源頭, 平生積累, 在於易學, 可仰. 竆索精研之功, 匪夷所及, 何幸何幸? 如弟者, 非惟素質鈍根, 亦竊欲先近少而後遠大, 每自語于心曰'大易之書, 以孔子之大聖, 至晚年而喜; 朱子之大賢, 有難讀之訓, 我輩蒙學, 何敢易言'? 以是雖曾隨例讀過, 而圖書象數之變精微去處, 未嘗有一日之功. 今盛問之下, 固無以強說奉對者. 但因此而終於含嘿, 則無以開講論受益之路. 故謹此有覆, 幸勿以來書所謂無著落, 同不答之前日諸人書, 一例看過, 因以喩其未達, 如何? 生成說, 淺見以爲五行之生, 自柔而成剛, 水最柔火差剛, 至木至金至土, 則浸堅剛. 故其序不得不曰: "一生水, 二生火, 三生木, 四生金, 五生土矣." 生之序既如此, 則成之序又不得不曰'六成水, 七成火, 八成木, 九成金, 十成土矣.' 恐非有別指也, 幸有以覆教之也. 1이……낳았다 《주역(周易)》의 수리(數理)에 의하면, 하늘은 홀수이고 땅은 짝수이다. 주희가 오행(五行) 생성의 이치를 말하면서 "하늘은 일(一)로서 수(水)를 낳고, 땅은 이(二)로서 화(火)를 낳고, 하늘은 삼(三)으로서 목(木)을 낳고, 땅은 사(四)로서 금(金)을 낳고, 하늘은 오(五)로서 토(土)를 낳는다.〔天一生水, 地二生火, 天三生木, 地四生金, 天五生土〕"라고 하였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1 〈태극도설주(太極圖說註)〉 6이……이룬다 성수는 오행상성(五行相成)의 수로 6, 7, 8, 9, 10이다. 《주역정강성주(周易鄭康成注)》에 "양과 음은 각각 짝이 없으면 서로 이루지 못하므로 땅의 6이 북쪽에서 수를 이루어 하늘의 1과 어우르고, 하늘의 7이 남쪽에서 화를 이루어 땅의 2와 어우르고, 땅의 8이 동쪽에서 목을 이루어 하늘의 3과 어우르고, 하늘의 9가 서쪽에서 금을 이루어 땅의 4와 어우르고, 땅의 10이 가운데에서 토를 이루어 하늘의 5와 어우른다.〔天一生水於北 地二生火於南 天三生木於東 地四生金於西 天五生土於中 陽無耦陰無配 未得相成 地六成水於北 與天一幷 天七成火於南 與地二幷 地八成木於東 與天三幷 天九成金於西 與地四幷 地十成土於中 與天五幷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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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吳極卿 戊寅 오행생성설(五行生成說)에 관해서는 제가 잠실 진씨(진식)의 설을 보니 부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그것에 근거하여 논했으니, 근거가 없다고 하여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형이 이른바 '수(水)가 비록 부드러우나 화(火)보다 더 허한 것은 없고, 토(土)가 비록 강할지라도 금(金)보다 더 단단한 것은 있지 않으니, 어찌 강유로써 선후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드럽고 빈 것 사이에도 말할 만한 은미한 것과 드러난 것이 없지 않고, 강하고 단단한 것 속에 또한 볼만한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다면, 선후의 구분에 어찌 이치가 없겠습니까? 생(生)과 성(成)을 범범하게 설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굳이 1이 낳고 6이 완성한 까닭을 말했다면 처음에 낳았기 때문에 1이 낳았다고 말하고 5를 사이에 두고 이루기 때문에 6이 완성했다고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와 비슷하니 또한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정밀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면재 황씨(황간)의 의론에는 '처음엔 단지 하나의 수(水)였는데 수가 따뜻해진 후에 화(火)가 되었으니, 이것들이 어머니이다. 목(木)은 수(水)의 자식이고, 금(金)은 화(火)의 자식인데, 이것이 바로 네 개의 순서이니, 일찍이 이런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62)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견은 어떠하십니까? 저의 견해가 진씨의 설명만큼 명백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오행의 순서는 채구봉(채침)이 〈홍범〉주에서 논한 것이 잠실 진씨의 설과 부합하니 참고할 만하다. ○경진년 5월 5일에 추기하였다.】 五行生成說, 弟見潛室陳氏之說, 而有契焉. 故敢據以為論, 恐不可以無根據而棄之也. 兄所謂水雖柔而莫虛於火, 土雖剛而莫堅於金, 豈可以剛柔分先後者, 非曰不然. 但柔虛之1)間, 不無微著之可言; 剛堅之中, 亦有大小之可見, 則先後之分, 豈無其理? 不曰泛說生成, 而必曰一生六成之故, 則始生故曰一生, 隔五而成故六成, 餘皆倣此, 亦豈有別般精蘊於其間耶? 勉齊黃氏之論, 則有曰初只是一箇水, 水暖後便是火, 此箇是母, 木是水之子, 金是火之子, 是四者之序, 亦未嘗無此. 於高見又如何? 鄙見恐不如陳說之明白耳.【五行次序, 蔡九峯〈洪範〉註所論, 與陳潛室說相符, 當參考 ○庚辰五月追識】 면재……없습니다 아마도 김택술은 이항로의 〈태극도설소주기의(太極圖說小註記疑)〉를 보고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문은 《화서집(華西集)》 〈태극도설소주기의太極圖說小註記疑〉에 보인다. 之 원문은 '之之'인데, 의미상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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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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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함 갑술년(1934) 答族弟希淑 甲戌 편지를 보고 매우 기뻐한 것은 기꺼이 서로 강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만 첫 번째 의제에서 말하기를 "정견(定見)은 구차하게 동일할 수 없고, 소집(素執 평소의 뜻)은 구차하게 추구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을 지금의 강명(講明)하는 일에 일컫는다면 나로 하여금 끝내 장차 소망이 없게 만들 것이다. '의아심을 갖고[藏其疑訝]'부터 아래로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有所難辭]'에 이르기까지의 한 대목의 말과 뜻은 완연히 삼연(三淵 김창흡)이 지은 〈의상중구서(擬上仲舅書)〉의 기미(氣味)이다. 진실로 그대의 정견과 소집이 이와 같으니, 차라리 우선 느슨하게 시일을 기다리는 것을 마치 새가 알을 품어 천천히 기혈을 감동시켜 들이는 것처럼 해서 중도(中道)의 오묘함을 성취하는 것이 십분 합당한 도리가 될 것이다. 내가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태양증(太陽證)이 발작하고 또 지의(遲疑)의 습관을 이루면 그대로 태타(怠惰)하고 위미(委靡)한 지경에 함몰되어서, 도리어 한 건의 큰 그릇된 일을 초래할까 두려워 이 때문에 끝내 다시 논하는 것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을 성토할 때는 그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을 살펴야 한다.'는 말은 옳다. 오진영은 진실로 심복(心腹)의 질병이요 소장(䔥墻 : 내부)의 적이다. 김용승도 어찌 다르겠는가. 오진영은 '스승에게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하였고 김용승 또한 '선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오진영은 스승의 절의를 무함하여 깨트렸고, 김용승 또한 선사(先師)의 학술을 고문으로 배척하였다. 이 밖에 피차의 어지러운 일들을 거의 모두 거론하여 비교하긴 어려우나, 단지 한 가지 일이라도 경중을 따져 그 성토를 완급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김용승이 소장(䔥墻)에서 화를 일으킨 것도 오진영과 동일하거늘 어찌 사문(師門) 밖의 졸개라고 하는가. 그가 사문 밖에서 자립한 것은 화를 끼친 이후의 일이니 이는 사문 밖에 서서 화를 끊임없이 짓는 자이다. 오진영은 사문 내에 서서 화(禍)를 끊임없이 짓는 자이다. 비록 사문 내외(內外)라는 차이는 있지만 모두 소장(䔥墻)의 변란에 관계되어 화가 그치지 않는 점은 동일하다. 하물며 오진영의 인무(認誣)는 변론이 쉽지만, 김용승이 학술을 배척한 것은 밝히기가 어렵다. 비록 우리 아우처럼 밝은 자도 또한 '완급경중(緩急輕重)'이라는 말을 두어 속임 당함을 면치 못한 것을 더욱 볼 수가 있다. 김용승이 스승을 배반하고 모독하는 고문(告文)을 지은 것은 과연 진실로 자기의 유감을 풀려고 하는데서 나온즉, 그의 죄는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지은 것보다 심한 점이 있다. 단지 문도가 아니라고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선사의 학술을 배척함에 여지가 없었거늘, 우리 아우는 작은 질병으로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문밖의 졸개를 억지로 맞아 읍을 했다.'고 말했는데, (김용승의 잘못을) 변척(辨斥)한 것을 '읍을 해서 맞이했다.'고 한 것은 천하에 있지도 않고 고금에 처음 듣는 것이다. 이 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다른 일은 오히려 무엇을 바라겠는가. 백세(百世)의 공론은 비록 세상에서 나오지만, 우리가 간여하지 않으면 그 공정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는 것은 사사로움일 뿐이다. 한 사람의 사사로움이 점차 행해지면 백세의 공정도 장차 기댈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옛날부터 '의(義)를 듣고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23)라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우의 신상에 이르러서 이미 '공(公)'자가 없으니, 오히려 어느 겨를에 백세(百世) 후에 김용승의 죄를 논할 것을 바라겠는가. 양묵(楊墨)의 말도 애초에는 또한 어지러운 사설(辭說)에 불과했으나 끝내 천하에 가득 찼다. 하물며 김용승이 설한 바는 또 한때의 어지러운 사설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선사의 학술을 배척하여 다시 세상에 밝혀지지 않게 하였고 사문의 쇠잔한 명맥을 박상(剝喪)하였으니 '사람의 불인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는 전날 그대의 유시와 진실로 같다. 사문난적 오진영이 단지 자신만을 해치는 것과 비교해보면 서로 큰 차이가 난다. 우리 아우는 경중의 권도(權道)를 잃은 것이 분명하다. 혹자는 성토하고 혹자는 성토하지 않으니 어찌 모순이 아니겠는가. '오진영을 성토한 일을 김용승에게 시행하라고 한 것은 있고, 김용승을 용서하라는 것으로써 오진영에게도 은혜를 베풀라고 하면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두찬진진(杜撰陳瑧)24)'의 인용은 온당하지 않다. 정자(程子)가 위에 있으면서 따지지 않은 것은 제자가 아래에 있는데 더불어 변론함은 이것이 도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전(生前)과 사후(死後)도 또한 저절로 분별이 있으니 변무(辨誣)를 가히 그칠 것인가? 예전에 만일 정자의 신후(身後)에 문인의 변론이 없었다면 정자가 지금처럼 정자로 추앙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맹자(孟子)가 양묵에 대한 변척에서 유독 불공대천의 원수와 같이 여겼다는 것은 있었지만 다른 것은 듣지 못했다. 어찌 그 충역(忠逆)과 부자(父子)의 분수로써 변척에 힘을 더하였으랴. 가령 김용승이 기극(忮克)하는 마음을 내서 선사를 생전에 흥분하여 매도했더라면 당시엔 절로 선사가 계셔서 높이는 듯하지만, 선사를 모독하는 고문이 금일에 있게 된 것은 마땅히 변명해야 한다. 우리 아우는 한유(韓愈)의 문장을 숙독한 사람이다. 한유의 글 중에 이르기를 "면면히 이어지다, 점차 약해져서 사라지게 되었거늘 이러한 때 그 사설(邪說)을 고무하여 틈을 타니, 오호라 그 불인(不仁)이 심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미 불인하다고 하고 또 심하다고 하였으니, 즉 곧바로 위급한 지경에 있어서 오악(惡惡)의 정(情)이 또한 더욱 절실하였던 것이다. 우리 아우 또한 이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거늘, 이제 '오악의 정이 또한 다시 절실한 것은 형세이지 의리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선사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눈으로 부사(父師)가 무함(誣陷)(誣告)를 입은 것을 보고도 변명하고 성토할 줄 모르는 자는 칼로 갈라도 아픔을 모르는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매우 미워한다는 말씀이다. 일이 부사(父師)에 관계되면 매우 미워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에 맞고, 다른 일 없이 미워하기를 심하게 하면 난(亂)을 일으키는 법이다. 인용한 한씨와 구씨, 진씨와 유씨의 일은 잘못이다. 저들은 의론으로 대대(對待)한 것이고 김용승은 침범하고 배척하여 윗사람을 범한 것이니 어찌 나란히 견주어 동일시하는가. 만일 구양수가 〈계사(繫辭)〉를 의심하여 아울러 공자까지 의심하고, 유씨가 《중용》 주(註)를 의심하면서 아울러 주자(朱子)까지 병통으로 여겨서, 한결같이 배척하기를 김용승이 선사에게 한 것처럼 했다면 한씨와 진씨가 어찌 성문(聖門)의 적이요 사문의 적이라고 성토하지 않고 아무 일 없이 그쳤겠는가. 우리 아우는 한・구・진・류가 소집(素執)을 구차히 같게 하지 않았고, 같지 않더라도 똑같이 현인이 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김용승에 대한 일에 견주었다. 그리고 탄식하며 "그만이로구나! 다시는 이 사람을 볼 수 없다." 하는 것에 자신을 해당시켰다. 우리 아우는 진실로 현명하거니와 김용승 또한 진실로 현인이 되어, 다시 분붕(分崩)하고 괴란(壞亂)한 검극(劍戟 다툼)의 장이 없게 돼서 참극의 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그대 쪽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다만 흠모하고 찬탄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만약 김용승의 모독하는 고문이 선사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선사가 어찌 가평 김평묵의 전옹에 대한 제문을 배척하여 물리쳤겠는가. '독고(瀆告)'의 독(瀆)이라는 글자에서 누를 끼쳤다는 것을 저절로 볼 수 있다. 전서(前書)에서 이르기를 "수립(修立: 몸을 닦아 세움하고 이름을 드날려 천하 후세에 아무개의 말이 가히 믿을만하다는 것을 알게 할 뿐입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비록 말이 많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는 분명 마땅히 말을 적게 하고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서 곧 우리가 수립(修立)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전서로 보건대, 수립은 근본이고 변무(辨誣)는 지말(枝末)이라고 하였거늘 이제는 변무가 근본이고 수립이 지말이라고 하여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나의 말을 살펴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매우 부끄러워서 땀이 난다. 선사가 가평 김평묵의 〈제매산문(祭梅山文)〉을 보고서, 곧바로 변척하기를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여력을 남기지 않은 것이 어찌 일을 벌이기를 좋아해서 그랬겠는가. 또한 반드시 심히 부득이한 점이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군자는 대개 변척하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이어서 변명까지 하니 그 또한 아마도 전배(前輩)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우리 아우도 이러한 곳으로 침침히 달려 들어가니 나의 마음에 안타깝게 여긴다. 내가 감히 한씨와 진씨가 구씨와 유씨에게 대처한 것과 동일하게 하지 못한 것은, 나의 경우가 단지 의론의 작은 일이 아니라 실로 사문의 도적을 방과하는 것에 관련 된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돌이켜 생각할 바탕이 될 수 있겠는가. 見書甚喜, 以其肯相講論也.但初題謂定見不可以苟同, 素執不可以苟求, 此非不然, 謂之於今所講之事, 則使我殆將無望.藏其疑訝以下 至有所難辭一節, 語意宛然是三淵擬上仲舅書氣味.信乎其有定見素執也, 如此則無寧姑且緩之以待時日, 如鳥抱卵, 徐使氣血感入以成中字之妙, 是爲十分恰好道理.非不知此, 不免而我太陽證發, 又恐遲疑成習, 仍䧟怠惰委靡之科, 反得一件大差事來, 是以卒復論之.討賊審其輕重緩急之說當矣.吳固心腹之疾也, 䔥墻之賊也.金何異也? 吳言師有認敎, 金亦言先生可易.吳則誣破師義, 金易告斥學術.餘外彼此之紛紜, 殆難悉擧而比較, 只有一事容有輕重而緩急其討者乎.金之起於䔥墻, 亦與吳同也, 何以云門外卒乎? 若其自立於門外, 則貽禍以後事.是立於門外而作禍不已者也, 吳則立於門內而作禍不已者也.雖有門內外, 而俱係䔥墻之變, 禍之不已則同也.何況吳之認誣易辨 而金之斥學難明.雖明如吾弟者, 亦不免有緩急輕重之說, 而爲所瞞過, 尤可見矣.金之倍師瀆告, 果然亶由逞憾而發, 則其爲可罪, 更有甚於無知而妄作矣.非但自處以非門徒而已.斥其學術, 無復餘地, 吾弟以爲疥癬之疾何也? 門外之卒强之迎揖之云, 以辨斥爲迎揖, 天下所未有, 古今所初聞.此猶如此, 他尙何望? 百世之公雖自世, 而吾不與焉, 則公不在吾而, 在吾者私而已.一人之私漸行, 而百世之公, 亦將無賴, 所以古有無勇之譏者也.到吾弟身上, 已無公字, 尙奚暇望百歲之後論其罪乎? 楊墨之言, 初亦不過胡辭亂說, 而竟至盈天下.况金所說, 又非一時胡亂之比.排斥先師學術, 不復明於世, 剝喪斯文殘脈, 人之不仁, 胡至此極, 誠如前日所喩矣.較諸震賊只好自賊, 相萬萬也.吾弟失輕重之權也審矣.或討或否, 豈非矛盾乎? 胡不以討震者, 施之於金則有之, 不以宥金者惠之於震則莫是, 杜撰陳瑧之引不當矣.程子在上而不與之較者, 弟子在下而乃與之辨, 是不成道理.生前死後, 又自有別辨, 其可已乎? 向使程子身後, 無門人之辨, 程子之爲程子, 未可知也.孟子於楊墨之辨, 獨有如不共戴天之讎, 其他未聞也.豈以其忠逆父子之分而辨之加力哉.使金出忮克而奮罵於先師生前, 則自有先師在似推詡, 瀆告之文在於今日, 則在所當辨明矣.吾弟熟讀韓文者.有曰綿綿延延, 浸以微滅, 於其時也, 鼓其邪說而乘之, 嗚呼! 不仁甚矣.旣曰不仁, 而又謂之甚, 則以其正在危急之地, 而惡惡之情, 亦復轉切也.吾弟非不知有此, 而今曰惡惡之情, 亦復轉切勢也, 非義理何也? 先師嘗曰目見父師被誣, 而不知辨討者, 是刀截而不知痛, 此疾之已甚之辭也.事關父師則疾之已甚, 乃爲中道無他而以甚則亂也, 所引韓歐眞劉事誤矣, 彼以議論對待, 此以侵斥犯上, 安可比而同之? 使歐而疑繫辭, 幷疑孔子, 使劉而疑中庸註, 而幷病朱子, 一於排斥如金容承之於先師, 則韓眞豈不以聖門之賊師門之賊討之.而但於無事而己乎? 吾弟謂韓歐眞劉素執不可苟同, 而不同者亦不害爲同爲賢人, 比於對金之事.嗟歎以已矣乎, 不復見斯人以自當之.吾弟固賢矣, 金亦同爲賢人, 無復分崩壞亂劍戟之場, 免夫慘極之禍, 因風想望, 只切歆嘆.金之瀆告, 不爲先師之累, 則先師何以斥退嘉金祭全翁文乎? 於瀆告之瀆字, 累自可見矣.前書云修立揚名, 使天下後世知某之言爲可信者耳.若不如是, 則雖多亦奚益哉? 此分明宜寡無多之謂, 正以吾輩無所修立故也.以前書觀之, 則修立爲本, 辨誣爲末, 今曰辨誣爲本, 修立爲末, 至謂不見察乃至於此, 甚庸愧汗.先師於嘉金祭梅山文, 見卽輒辨, 不淹晷刻, 不遺餘力, 豈好多事而然哉? 亦必有甚不得已者, 存乎其間耳.今之君子, 槩以不辨爲是, 從以爲之,.其亦優勝於前輩而然歟? 吾弟亦欲駸駸於此科, 心竊悶之.不敢自同於韓眞之處, 歐劉所遭, 不但議論之小事, 實關放過師門之賊之爲大故故也.此亦可以爲反隅之資歟? 의(義)를……것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제사 지낼 만한 귀신이 아닌데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두찬진진(杜撰陳瑧) 뜻이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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