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유록 金剛山遊錄 예로부터 도인은 큰 소원을 가져 반드시 "천하의 좋은 인물을 모두 알고 천하의 좋은 산수를 모두 구경하고 싶다.[識盡天下好人物 觀盡天下好山水]"111)라고 하였다. 소황문(蘇黃門)은 종남산(終南山)과 황하(黃河)를 본 것을 구양공(歐陽公)을 본 것과 견주기도 하였으니,112) 산수 구경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중국인이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자, 내가 의아해하기를 중국에는 절로 오악(五嶽)이 있는데 금강산이 비록 빼어나더라도 어찌 이렇게까지 하였을까 하였다.근래에 기차가 서로 통하면서부터 나의 벗 중에 또한 중국을 보고 돌아온 사람이 많은데, 모두들 "중국의 산 중에 오악은, 높고 웅장하다는 말은 참으로 옳지만 그 기이하고 빼어남은 우리나라의 산보다 못한 점이 있다." 하였다. 대개 금강산은 우리나라의 산 중에서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 것이기에 중국인의 시는 과연 이유가 있으며, 해외의 여러 나라 산에 대해서는 내가 상고한 《영환지략(瀛寰志略)》113)으로써 예를 들건대 이미 말할 만한 것이 없음을 보았다. 이로써 말하자면 금강산이 동서양에서 유일한 명산임을 단연코 알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선유(先儒)인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ㆍ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이하 여러 선생이 모두 이 산을 구경하였던 것이다.나는 평소에 산수를 즐기는 버릇이 있어 금강산을 한 번 유람하는 것이 참으로 평소의 소원이었으나, 중년에 노친을 봉양하면서 멀리 나가 노니는 것을 경계하였고 근래에는 다시 세변(世變)이 이미 극에 달하여 옛 덕을 먹는114) 사자(士子 학자)가 마음껏 노닐 때가 아닌 듯하였다. 그래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금년 봄 홀로 떨어져 지내며 무료하던 차에 아우 조자정 제원(趙子貞濟元)이 나에게 함께 금강산에 가자고 청했다. 내가 생각건대 오늘날에는 좋은 인물도 때때로 그 법도를 바꾸지만 산수는 무정한 것이라 반드시 세변 때문에 그 좋음을 변치 않을 것이니 좋은 산수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좋은 인물을 보는 것보다 더 나은 점이 있으며, 게다가 옛사람 중에 시사(時事)를 상심하는 사람은 참으로 산수에 자취를 붙인 경우가 있으니 이번 여행이 의리에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내 조자정과 3월 그믐날에 길을 떠나기로 약속하였으나 오래도록 비가 내려서 4월 10일로 연기하였다. 벗 박선명 상구(朴善明塽九)와 서윤삼 종태(徐允三種台)가 내가 관동으로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가자고 청했다.기약한 날이 되자 박우(朴友)에게 사정이 생겨 갑자기 길을 떠나기 어렵게 되었고, 조자정은 어버이 기일이 내달 초에 있는데 왕래하는 날짜를 계산해보니 기일에 미치지 못할 듯하여 여행을 그만두었다. 내가 조자정에게 농담으로 말하기를,"일찍이 듣건대 금강산은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구경할 수 있다는데 그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남으로 인해 일을 망쳤다고 원망하고 탓하지는 않는가?"하니, 조자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인연이란 나로 인해 생기기에 하느냐 마느냐를 다툴 뿐이니, 비록 빠르고 늦는 차이는 있더라도 원래 있고 없음은 없는 법입니다. 나로 인하든 남으로 인하든 때와 장소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니 상황에 따라 편안해한다면 무엇을 망치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도를 터득한 사람의 말과 같음을 감탄하였다. 이에 조자정에게 말하기를,"그대의 흉금이 이미 티끌세상을 벗어났으니 금강산이 그 가운데 있네. 저 동해상에 울창하여 푸른 것을 비록 구경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무슨 상관이겠는가."하고서 서로 웃고 헤어졌다.마침내 이달 23일에 길을 떠났는데, 박우(朴友)는 먼저 출발하여 이미 중도에서 기다렸고 서우(徐友)와 박우의 아들 박근호(朴根浩)가 동행하였다.24일. 날이 저물기 전에 장안사(長安寺) 어귀에 당도하였다. 집에서 천여 리나 떨어져 있지만 연로(沿路)의 급행차를 탔기에 이처럼 빨랐던 것이다. 철원(鐵原) 이전에는 기차를 이용하였고 이후에는 전차를 이용하였으며 말휘리(末輝里)부터는 자동차를 이용하였다. 장안사에 10리 못 미처 이미 산세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는 차 안에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산속에 도착하기도 전에 눈이 번쩍 뜨이니 未到山中眼忽明산봉우리들을 옥 깎아 만든 걸 이미 알았네 已覺群峯玉刪成가면 갈수록 점점 참으로 멋진 곳에 들어가니 行行漸入眞佳境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번씩 모습을 바꾸네 一步移時一換形밤에 절 문 밖의 여관에서 묵었다. 여관이 절벽 아래의 계곡 가에 있는데 두 물줄기가 모여 흐르고 일만 소나무가 하늘을 찔러 밤새도록 들리는 것이 솔바람소리와 물소리뿐이라, 맑고 상쾌한 기분이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일행이 모두 좋다고 소리치면서,"이곳이 벌써 이러하니 만폭동(萬瀑洞)과 구룡연(九龍淵)처럼 멋진 곳은 또 어떠하겠는가."하자, 내가 말하기를,"이는 배우고 익혀서 기뻐하는 경지니, 덕을 이룬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또 말하기 어려운 것일세."하였다. 밤에 시 한 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동쪽 유람 한 자취가 너무나 더뎠던 것은 東遊一迹太遲遲모두 어지러운 세상일에 얽혔기 때문이네 總爲棼棼世故縻이제 금강산에 와서 산속에서 유숙하니 今到金剛山裏宿마음먹은 일을 끝내는 이루게 되었구나 有心終見事成時25일. 운주문(雲住門)을 거쳐 비로소 장안사에 들어갔다. 국세(局勢)는 비록 험준하고 웅장해도 기이한 경관은 보이지 않자 일행이 말하기를,"도리어 절 밖 여관 앞에서 본 것만도 못하구나."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아니다. 산이 깊을수록 숲이 더욱 빽빽하니, 이는 기이하지 않은 기이함[不奇之奇]이네."라고 하였다.전우(殿宇) 또한 꽤나 웅장하였는데 마침 불전(佛殿)을 중수하면서 그 위에 더 얽어서 2층을 만들었다. 절을 창건한 것은 대개 고려 중엽 이후인데, 혹 원나라 기 황후(奇皇后)의 원당(願堂)115)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대개 이번 여행은 오로지 산수의 승경을 탐색하는 데 있기에 절의 역사를 캐물을 것도 없었다. 동편 신선루(神仙樓)의 현판에 그 당시 사람들의 시작(詩作)이 많았으나 현판이 높이 걸렸고 글자가 작아 볼 수 없었고 또한 볼 필요도 없었다.장안사를 떠나 시냇물을 건너서 남쪽으로 오솔길로 들어가니, 바윗돌이 울퉁불퉁하고 수목이 무성하며 계곡물이 세차게 흐르며 돌에 부딪쳐 우레 소리를 내었다. 시냇가를 따라 가다가 이따금 길을 잃자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불어난 강물 가파른 골짜기에 우레와 천둥이 싸우는 듯하고, 푸른 나무 긴 덩굴에 해와 달이 어둑해라.[高江急峽雷霆鬪 翠木蒼藤日月昏]"라는 구절을 외우며 말하기를,"몸소 겪어본 뒤에야 새삼 옛사람의 시가 공교로운 것을 알았네."라고 하였다. 간간이 또 골짜기가 조금 트이고 숲이 조금 듬성하며 물이 더욱 맑고 돌이 더욱 희며 산봉우리가 더욱 기이한 곳을 만나면, 기이하고 웅장하며 맑고 빼어나다고 크게 외치니 사람 소리가 시냇물 소리와 서로 어우러지고, 바위에 걸터앉음에 산봉우리들이 머리를 숙여 읍하는 듯하여 즐거웠다.5, 6리를 못 가서 명경대(明鏡臺)가 있고 명경대 아래에 황류담(黃流潭)이 있다. 명경대는 커다란 바위가 평지에서 수십 장(丈)이나 솟아나 있고 사방이 수직으로 깎였는데 승려들이 명부(冥府 저승)에서 밝은 거울로 죄인을 상세히 살펴본다는 설에 의탁하여 이 이름을 따서 썼다. 황류담은 넓이가 2묘(畝) 가량 되는데 맑고 새파래서 좋았다. 또 이름을 따다가 황천강(黃泉江)이라 하는데 부호가(富豪家)의 여자들이 여기에 와서 대부분 물속에 동전을 던져 황천 가는 날의 노자(路資)로 제공한다고 한다.황류담 위 서남쪽은 바위 언덕이 가파른데 그 위에 편평한 바위가 사방으로 둘렀고 무너진 성이 있으니, 이곳이 신라 태자-스님이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하였다.-가 살던 곳이다. 흰 표목(標木)을 세워 '태자성(太子城)' 3글자를 썼고, 바위에는 '동경의열 북지영풍(東京義烈北地英風)' 8글자를 새겼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김공(金公)이 쓴 것이라고 한다. 그 곁에는 김광국(金光國)ㆍ김신국(金藎國) 등 여러 김씨의 제명(題名)116)이 있다. 황류담을 돌아서 건너 남쪽으로 조금 가니 길 왼편의 넓고 편평한 곳에 또한 표목이 있고 '신라고적(新羅古迹)' 4글자가 씌어 있는데 이곳이 태자 궁실의 유지(遺址)이고 산중 사람이 말한 대궐터이다.여기에서 남쪽으로 10리에 망군대(望軍臺)가 있다. 태자가 아버지에게 간(諫)하여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산으로 도망하여 들어왔으며, 그때 군사 삼억(三億)117) 명을 거느리고서 고려를 정벌하고자 산 아래에 주둔하고 이 망군대에 올라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이름을 얻었으며 골짜기 또한 '삼억'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신라사(新羅史)》118)를 살펴보건대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을 청하자 태자가 간하기를 '마땅히 충신 의사(忠臣義士)들과 함께 죽을 각오로 지켜 힘이 다한 뒤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일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러하니 형세상 보전할 수 없고 차마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과 뇌를 땅에 바르도록119) 하지는 못하겠다.' 하고는 끝내 태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태자가 통곡하며 하직인사를 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푸성귀를 먹고 살면서 일생을 마쳤다."라고 하였다. 《김씨보(金氏譜)》의 〈왕세계(王世系)〉에 실린 것도 그러하였으나, 고려를 정벌하려고 군영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는 여기에 와서 처음 들었다. 《신라사》에는 "그 이름을 잃어버렸다."라고 하였으나, 우리 《김씨보》에는 "휘(諱)는 일(鎰)이요, 일명 겸용(謙用)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자손이 부령 김씨(扶寧金氏)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우리 김씨의 선세(先世)에 또한 박식하고 높은 소견을 지닌 분이 많았으니, 휘(諱)를 적고 자손을 적을 때에 반드시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대개 태자의 열렬한 대의(大義)와 늠름한 영웅의 기풍은 참으로 찬사(贊辭)를 기다리지 않고도 드러나는 것이라 장차 억만세(億萬世)에 흠앙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오늘날 나라가 망한 뒤에 처한 상황이 그와 똑같음에랴. 무릇 떳떳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강개(慷慨)하여 슬퍼하는데 더구나 똑같이 경순왕에게서 나온 우리 김씨들은 어떻겠는가. 삼가 시 한 수를 읊어 감회를 적었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울며 간하고 돌아와 여기로 도망했는데 泣諫歸來入此逃지금까지 유적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네 至今遺迹未全銷동경120)의 왕기는 천 년 만에 다했으나 東京王氣千年盡북지121)의 영웅 기풍은 만 장이나 높네 北地英風萬丈高삼베옷 입고 풀에 앉아 홀로 고심하고 坐草衣麻心獨苦보루 쌓고 군영 바라보며 헛수고했네 望軍築壘力徒勞얼마나 많은 길손이 추모하며 슬퍼했나 幾多行客追傷感태자의 후손은 갑절이나 수심에 잠기네 一倍忉忉後裔苗감회를 적고 나서 드디어 망군대로 향했다. 중도에 위험하여 쇠줄을 매단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일행이 모두 꺼리면서 말하기를,"헤아려 보건대 우리들의 근력으로 어찌 이렇게 험준한 곳을 오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마루 끝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122)고 옛사람이 경계하였네. 이 망군대가 비록 매우 높아서 먼 곳을 바라보기에 적당하나 비로봉(毘盧峯)에는 크게 못 미치네. 비로봉에 한 번 오르는 것은 그만두지 못할 바가 있으니 여기는 놔두고 구경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였다.나는 오로지 그곳이 태자의 옛 자취이기 때문에 기어이 한 번 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망군대 위에는 이미 텅 비어 한 물건도 없고 험준함이 또 이와 같은데 어찌 굳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어기고 홀로 가겠는가. 다만 아래에서 쳐다보며 상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이내 오른쪽으로 돌아 영원암(靈源菴)에 들어가 조금 휴식하였다. 영원암은 매우 그윽하였는데 고려조 충혜왕(忠惠王) 때에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 사는 스님 전덕진(全德眞)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양과(兩科)를 겸하여 익혔으며 계행(戒行)이 꽤나 전일하였다. 지금 세상에 불가의 학문이 끊어진 것이 아마도 유문(儒門)과 똑같을 것인데 아직도 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가상한 일이다. 객승(客僧) 조혜산(趙慧山)은 전주에서 산다고 하는데 같은 도(道)의 사람이라고 하여 꽤나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전덕진이 영원암 앞에 보이는 산봉우리들을 가리키며 지장봉(地藏峯)ㆍ시왕봉(十王峯)ㆍ죄인봉(罪人峯)이라는 것에 대해 역력히 설명해 주었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이는 참으로 그대 불가의 설이오. 지하에는 본디 시왕(十王)123)이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의당 지하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이 산 위에 나와서 지낼 수 있겠는가. 이미 이 산에 있다면 다른 산에도 있어야 할 것이오. 만약 그러하다면 시왕이 장차 백왕(百王)이 되어서 도리어 가볍게 되지 않겠는가."하고,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왔던 길을 도로 찾는 사이에 이미 일행을 잃어버리고는 흩어져 옛 자취를 찾아 서로 부르고 서로 나타나 이따금 숨바꼭질을 하였으니 또한 우습다. 거의 해질 무렵에 비로소 장안사의 동쪽 평탄한 길로 나와서 구불구불 올라가 명연폭(鳴淵瀑)에 이르렀다. 폭포의 길이는 6, 7장(丈)이고 기세가 꽤나 웅장했으며 폭포 아래의 맑은 못은 더욱 깊고 넓어 구경할 만하였다. 일행 중에서,한평생 마음에 욕심 없다고 여겼으나 平生自謂心無慾여기 와서야 심지가 변하는 줄 알았네 到此方知心志遷바위 아래의 밝은 구슬 천만 곡을 巖下明珠千萬斛옮길 수 있다면 초당 앞에 옮겨 두리라 可移移置草堂前라는 절구시 한 수를 외우며 말하기를,"이는 내 마음을 먼저 알았다고 할 만하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듣건대 이 시는 간옹(艮翁 전우(田愚))이 금강산에서 지은 것이라고 하니 그대도 응당 알 것이네."하였다. 그러자 내가 말하기를,"일찍이 들은 바는 없으나 선사(先師)께서 젊었을 때에 일찍이 이 산을 유람하였으니,124) 이 시는 그때 지었을 것이네. 이는 무욕(無慾)의 욕(慾)이니, 비록 깨끗한 덕행에 해가 되지는 않지만 파선(坡仙)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취하여도 막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125)는 말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공(公)과 사(私)의 구별이 있는 듯하네. 이 시는 아직 젊었을 때에 지어서 지극히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고(詩稿)에 넣지 않아 듣지 못했을 것이네."라고 하였다.몇 리를 가서 삼불암(三佛巖)에 도착하였다. 거대한 바위를 깎아 큰 부처의 형상을 새겨 놓았는데 엄숙하여 경외할 만하였다. 3개뿐만이 아닌데도 이름을 '삼불'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옛것을 그대로 쓴 듯하다. 이전에 표훈사(表訓寺)에 당도하여 들어가지 않고 곧장 정양사(正陽寺)로 올라간 것은 시간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비록 바윗돌이 험하지는 않았으나 도리어 높고 가팔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이윽고 정양사에 도착하니, 경내가 뛰어나고 탁 트여 온 산 일대가 눈앞에 늘어서 등을 토닥이고 이마를 쓰다듬을 수 있다. 헐성루(歇惺樓) 난간 밖에는 나무를 깎아 여러 산봉우리 형상을 만들어 판자 위에 안치해 두었다. 봉우리의 대소(大小)와 고하(高下)에 따라 비로봉(毘盧峯)ㆍ영랑봉(永郞峯)ㆍ수미봉(須彌峯) 및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ㆍ천일대(天一臺) 따위였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고 그 이름을 기록하여 각각 그 방향으로 향하게 했으니, 두루 구경하지 않아도 눈에 뚜렷하여 유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소 정신과 힘을 줄일 수 있게 하였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이른바 "금강산에 들어가면 정양사만 구경할 것이니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라고 한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에 판상(板上)의 한 시에 차운하였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일만 이천 봉우리 진면목이 萬二峯眞面누대에서 역력히 보이는데 樓頭歷歷看행인은 이곳에 오르지 않고 行人不登此부질없이 금강산으로 가네 枉到金剛山이곳은 경치가 빼어나므로 제명(題名)과 제시(題詩)가 누대의 문미(門楣)와 들보에 가득하였으나 옛사람의 명작(名作)은 전혀 없었다. 내가 그곳에 사는 스님더러 말하기를,"일찍이 듣건대 정호음(鄭湖陰)126)의 〈정양사(正陽寺)〉 시가 세상에서 회자(膾炙)되는데 현판에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고는, 그 시를 외우고 말하기를,"'일만 이천 봉우리를 훑어보고 돌아오니 쓸쓸한 낙엽이 가을 옷에 스치네. 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피우는 밤에 거원처럼 사십 년 동안의 잘못 깨달았네.127)[萬二千峯領略歸 蕭蕭落葉打秋衣 正陽寒雨燒香夜 蘧瑗方知四十非]'인데, 그것을 몰랐습니까?"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소승 또한 이 시를 들은 적이 있으나 종전에 이 누대에 이 시판(詩板)이 걸려 있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그 이유를 알 만합니다. 옛 사람은 뼈가 이미 썩었고 지금 사람은 완력(腕力)이 강하니, 조(趙)나라 깃발을 뽑아버리고 한(漢)나라의 깃발을 세우는128) 것을 어찌 군중(軍中)에서만 그렇게 하겠습니까. 한탄스러운 것은 권세에 따라 변하는 시도(市道)129)가 일만 산중에도 있다는 점입니다."라고 하였다. 호음의 시운을 사용해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지어 '헐성(歇惺)' 두 글자를 간단히 논파였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이 헐성루가 아니면 누구와 돌아갈까 微此歇惺誰與歸나그네가 먼지 옷을 떨치기에 좋구나 好敎遊子拂塵衣쉬고 깨닫는 중에도 허실이 구분되고 歇惺中也分虛實혜안으로 보면 옳고 그름이 분별되네 慧眼看來辨是非정양사는 작은 사찰인데, 육각전(六角殿)은 꽤나 정교하였고, 작은 돌탑 1좌(座)는 신라 때에 만든 것이며, 절 안에 인쇄하여 간직하고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모두 6,500여 책(冊)이라고 한다.이윽고 내려와 표훈사(表訓寺)로 들어갔다. 절이 매우 웅장하고 진밀(縝密)하여 부유한 사찰임을 알 수 있었다. 전우(殿宇)의 화려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중에 큰 종 2개와 쌀 40말[斗]을 쪄낼 수 있는 큰 구리 시루[銅甑] 1개가 있는데 시루는 광해군이 하사한 것이며, 나머지는 미처 자세히 구경하지 못했다. 표훈(表訓)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승려가 말하기를,"절을 창건한 사람이 신라의 승려 표훈입니다."라고 하였다. 형세는 둘러싸서 매우 긴밀하고 또한 꽤나 평평하고 넓으며 계곡물이 감아 도니, 장안사 터에 비해 더 넓거나 거의 맞먹었다. 절 남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서산선사비(西山禪師碑)와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가 지은 의심선사비(義諶禪師碑)가 있다. 또 수충각(酬忠閣)이 있는데, 나옹화상(懶翁和尙)ㆍ무학대사(無學大師)ㆍ서산대사(西山大師)ㆍ사명대사(四溟大師) 이하 국가에 공이 있는 여러 선사의 초상을 그려서 벽에 걸어 두었으며, 편액을 '수충'이라 한 것은 조정에서 명한 것이다. 비석과 수충각은 백화암(白華菴) 소관에 관계되는데 암자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밤에 영선교(迎仙橋) 안쪽 여관에서 유숙하며 〈표훈사(表訓寺)〉 시 한 수를 지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누가 이 절을 창건하였나 誰歟刱此寺일천 년이나 되었다고 하네 云距一千年왕실에서 은사가 내려온 건 恩賜來王室법사들이 변경을 진압해서네 法師鎭徼邊누대는 꿩의 날개를 편 듯하고 樓臺飛翬翼종소리는 용의 잠을 깨울 듯하네 鍾磬徹龍眠멋진 풍경을 시로 쓰기 어려우니 形勝難題得재능 없음이 허연130)에게 부끄럽네 不才愧許燕26일. 동쪽으로 올라가 만폭동(萬瀑洞)을 찾아가니 표훈사와 거리는 얼마 안 되었다. 커다란 바위 2개가 대치하고 또 커다란 바위 하나가 그 위를 가로로 덮었는데, 길이와 너비는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이것이 이른바 금강문(金剛門)이니, 하늘이 멋진 경치를 비호(秘護)하여 관문을 설치해서 지키는 것이 이처럼 일이 많았던가.3, 4리를 가니 골짜기 입구가 조금 트이고 양쪽 기슭과 바닥이 평평한 데에는 전부 흰 돌로 바닥을 만들었다. 비로봉ㆍ영랑봉ㆍ수미봉ㆍ내무재령(內霧在嶺) 등에서 흘러온 물이 여기에 이르러 기세가 더욱 맹렬하고, 돌이 가로질러 벽처럼 선 것을 만나면 문득 곧장 쏟아져 폭포가 되는데 여기서부터 위쪽으로 10리 넘도록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 이곳이 이른바 만폭동인데, 바위에 새겨놓은 양봉래(楊蓬萊)131)가 쓴 세 큰 글자가 이미 그 이름을 알려 주었고 또 양봉래가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여덟 큰 글자가 있는데, 모두 웅건(雄建)하고 꿈틀대어 용사(龍蛇)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빼어난 곳에 기이하고 빼어난 글씨였다.폭포의 길이가 비록 아주 높지는 않으나 이와 같이 많은 것은 얻기 어렵기 때문에 귀하게 여겼다. 폭포 밑에는 문득 물이 모여 맑은 못이 되어 여덟 개의 못[八潭]이 있는데, 흑룡담(黑龍潭)ㆍ벽하담(碧霞潭)ㆍ비파담(琵琶潭)ㆍ분설담(噴雪潭)ㆍ진주담(眞珠潭)ㆍ구담(龜潭)ㆍ선담(船潭)ㆍ화룡담(火龍潭)이라 부르니, 그 명명(命名)으로 인하여 못과 폭포의 실상을 대개 상상할 수 있다. 대개 폭포의 수가 만(萬)에 이르지 않은데도 '만'이라 한 것은 성대하게 말한 것이고, 못의 수가 팔(八)에 그치지 않은데도 '팔'이라 한 것은 골라서 말한 것이다. 폭포의 수많은 진주와 못의 면면이 밝은 거울은 투명하고 기이하고 장엄하여 형용할 수 없었으며, 맑은 물을 손으로 움켜 마시고 세수함에 일찍부터 생겨난 탁한 기운이 단번에 씻겨 내려감을 깨달았으며, 마음이 경치와 합하여 유연(悠然)히 돌아감을 잊었으니, 이에 옛사람이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즐거움132)이 따로 있어 종일토록 올라와서 굽어보아도 너무 즐기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절구시 한 수를 지었다.조각조각 유리요 수많은 진주라 片片琉璃斛斛珠못들과 폭포들이 새 그림을 펼쳤네 潭潭瀑瀑展新圖다소의 사람 마음을 씻어 깨우치니 洗醒多少人心目이를 만든 조물주가 어찌 뜻이 없었겠나 作此天工意豈無진주담 위에 새겨 놓은 옛 시 "맑은 시내와 흰 돌은 취향이 같으나 갠 달과 맑은 바람은 별도로 전하리.[淸溪白石聊同趣 霽月光風更別傳]"133)와 "세상 밖에서 지금 질탕함을 이루었으니 인간세상 어디인들 시끄럽지 않겠는가.[物外只今成跌宕 人間何處不啾喧]"134)라는 두 연(聯)은 우암(尤菴)의 글씨135)인데, 심획(心畵)을 어루만지니 완연히 어제 일과 같았다.대개 우옹(尤翁)이 이 산을 유람한 것은 만년(晩年)이었으니, 이에 상상컨대 그 당시는 비록 청란(淸亂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지만 오히려 나라를 스스로 보전하여 사방의 국경이 전란을 겪지 않았는데, 더구나 세상 밖에 뛰어난 이 산의 맑고 빼어난 것이 어찌 반점(半點)의 티끌이라도 용납하였겠는가. 선생이 쓴 것은 바로 실제에 딱 들어맞았다.지금은 나라가 망하여 삼천리 온 강토에 다른 종족[異類]들이 가득하고 이러한 깊은 산에도 오랑캐들이 즐비하니, 산천도 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개탄을 금치 못하고 '전훤(傳喧)' 두 글자를 사용하여 절구시 한 수를 지었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금강산의 빼어남은 육대주에 최고요 金剛絶勝六洲最우로136)의 명성은 백대까지 전해지네 尤老風聲百世傳당시 세상 밖에서 맑게 노닐던 곳이 當日淸遊物外地지금처럼 시끄러울 줄 누가 알았으리 如今誰識雜啾喧골짜기의 편평한 바위와 절벽 중에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곳에는 모두 고금 인물의 성명을 새겨 놓아 한 조각도 완전한 돌을 찾아볼 수 없으니, 아, 너무나 많다. 대개 이 산 일대에서 기이하고 빼어남이 있는 곳이면 그러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이 골짜기가 더욱 심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지으며 한번 탄식하고 말하기를,"누구나 똑같은 사람인데 누가 어질고 누가 어리석으며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며 누가 현달하고 누가 궁하며 누가 숨고 누가 드러났는가? 가령 이 골짜기에 성명을 써 놓은 것 중에는 우옹(尤翁) 이외에 김몽와(金夢窩)137)ㆍ오노주(吳老洲)138) 제현(諸賢)이 불후(不朽)한 명성을 가장 드러냈고, 그 외에도 명사(名士)와 고관이 많으나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처럼 많지는 않다. 생각건대 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 중에는 의당 어질고 선한데도 궁하여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 있겠지만, 또한 어찌 어리석거나 악한 사람이 없다고 보장하겠는가. 그러니 어찌 남의 이름을 깎아 없애고 자기의 이름을 새기는 자가 이따금 있다는 것을 살펴보지 않겠는가. 그 마음을 미루어 보면 집에 있어서는 남의 집을 빼앗고 나라에 있어서는 남의 나라를 빼앗을 것이니 어리석음과 악함으로만 논할 것이 아니다. 예전에 노사(蘆沙) 기공(奇公)139)이 이 산을 유람할 때에 어떤 사람이 제명(題名)하기를 청하자 '가령 내가 어질다면 산의 다행이고, 내가 어질지 못하다면 어찌 산의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하였으니, 이 말이 경절(警絶)하여 가슴에 새겨둘 만하다."라고 하였다.돌이켜 생각건대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은 궁하여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어리석고 악한 사람으로 돌아감을 면치 못할 것이니, 감히 제명하지 못한 것은 실로 노사의 말이 두려워서였다. 게다가 이렇게 혼란한 때를 당해서는 이미 드러난 이름도 오히려 숨기려고 하는데 무엇 하러 이름 없는 사람의 이름을 억지로 드러내겠는가. 이름을 이미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지어도 적지 않고 스스로 부르고 스스로 화답하였으니, 또한 하나의 맛없는 맛[無味之味]이었다.만폭동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으로 절벽 위에 임한 것을 보덕굴(普德窟)이라 한다. 바위틈을 파내어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서쪽 한 모퉁이의 땅이 움푹 꺼졌기 때문에 12자[尺] 길이의 구리 기둥을 만들어 세웠으니, 이 암자에 오르면 바람을 타는 것처럼 흔들거린다고 한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보덕굴의 외부를 보고서 내부를 상상할 수 있기에 들어가지는 않았다.만폭동을 다 구경하고 3리쯤 올라가니 마하연(摩訶衍)이 있는데 절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암자라고 하기에는 컸다. 경계와 형세의 원밀(圓密)함은 비록 표훈사에 미치지 못하지만 초절(超絶)함은 그보다 나았으니, 대개 여기에 이르면 이미 산의 중간에 걸터앉게 된다. 절 뒤에 백운대(白雲臺)가 있었으나 높은 곳에 올라가 비로봉(毘盧峯)을 보려 했기 때문에 올라가지 않았다.이에 길을 나서 남쪽으로 가서 묘길상(妙吉祥) 폐허를 지나고 사선교(四仙橋)를 건너 비로봉으로 오르려 할 때에 어떤 사람이 "먼저 외금강(外金剛)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올라가는 편리함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대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을 놔두고 유점사(楡岾寺) 길을 물으니 이곳에서 40리 넘게 떨어졌다고 하였다.백화담(白華潭)을 지나 내무재령(內霧在嶺)에 당도하였다. 그 사이에 험난한 길을 간 고생과 더위잡고 오른 어려움은 경복(更僕)140)하더라도 다 말할 수 없으니, 어제 명경대와 영원암으로 가는 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체로 이 산의 여러 승경은 가는 곳마다 절로 승경을 보존하였는데, 마침 도로를 닦고 있었으나 다만 장안사에서 영원암까지와 마하연에서 유점사까지는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짜기 안에는 나뭇잎이 싹트기 시작하고 철쭉이 아직 피지 않았으나 내무재령 위에는 풀이 났다가 금세 마르기에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여기는 여름이 한창인 날씨가 아닌가? 내가 이제야 산이 높은 것을 알겠다."하였다.내무재령의 안팎에는 늙은 전나무가 하늘까지 치솟아 얼굴을 젖혀야만 그 끝을 볼 수 있다. 전나무가 스스로 죽어 쓰러진 것 중에는 두 언덕에 걸쳐져 시렁이 된 것도 있고 사람이 그 위에 걸터앉으면 발이 그 절반에 머무는 것도 있기에 내가 또 탄식하며 말하기를,"내가 이제야 산이 깊은 것을 알겠다."하였다. 일행이 좋은 목재가 스스로 썩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말하기를,"이것들을 큰길이나 큰 항구로 가져가 집이나 배와 수레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하기에 내가 말하기를,"아, 어찌 이것만 그러겠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뛰어난 도량과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도 초야에서 곤궁하게 살다가 죽어 그 이름마저 사라진 사람을 어찌 다 셀 수 있겠는가."하였다.내무재령을 넘어 10리를 내려가서 은선대(隱仙臺)ㆍ신금강(新金剛)ㆍ십이폭포(十二瀑布) 등 여러 승경이 있다고 들었으나 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은데도 들어가 구경하지 않은 것은 시간이 부족해서 만은 아니었다. 원래 금강산인데 어찌 신금강이라 이르며 이미 만폭동을 구경하였는데 또 무슨 십이폭포이겠는가. 또한 일을 줄이려는 의도였다.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유점사에 들어가 사방의 경관을 둘러보니 과연 좋은 산천의 좋은 가람(伽藍)141)이었다. 먼저 산영루(山暎樓)에 오르니, 누대가 시내에 임하여 물이 난간 앞으로 곧장 흐르고, 또 물을 끌어다가 연못을 만들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누대에는 제명이 많았으며,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유기일(柳基一)142)과 같은 판(板)이었다. 절 안에 볼만한 고적(古蹟)이 많았으나 날이 이미 저물어 내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누대에서 내려와 다리를 건너 불가의 규정문(糾正門)을 나와서 밤에 여관에서 유숙하였다.스님 청암(靑菴) 김봉전(金奉詮)이 와서 함께 얘기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천 리 밖의 호남에서 여기까지 오기는 쉽지 않은데, 조대(措大)143)가 산수(山水)를 즐기는 취미가 대단합니다. 녹음(綠陰)이 비록 좋지만 오히려 단풍을 완상하는 것만 못하니, 어찌 가을 8월에 이 행차를 마련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이 산을 완상하는 데에 취미를 가지는 것은 그 맑고 험준하며 우뚝 솟아 티끌세상을 초탈하였기 때문인데 어찌 녹음과 단풍 사이에서 따지겠습니까. 단풍으로 말하자면 내 마을 근처의 내장산(內藏山)이 절로 한 빛깔 붉은 비단 병풍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얼굴이며 의복과 조화를 이룹니다. 온통 붉은 진기한 완상품은 아마도 다른 나무에 섞인 이 산의 단풍 숲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청암 스님이 말하기를,"이 산이 크게 번성한 것은 신라 시대이니 이른바 '팔만구암자(八萬九菴子)'라는 것도 이 때에 있었습니다. 지금 살펴보건대 수풀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곳에 쓰러진 암자 터가 많고 바위 벼랑의 편평한 곳은 모두 글자를 새긴 자국이었습니다."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만폭동에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수필(手筆)을 새겨놓은 것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요산요수인정야 여즉하위이곡(樂山樂水人情也余則何爲而哭)'을 새겨놓은 것이 있으나 지금은 글자가 마멸되어 보기 어려운데 조대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이것은 이 골짜기의 제각(題刻)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기이한 자취인데 애석하게도 내가 자세히 보고도 찾지 못했더니, 스님이 아니었으면 이것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하였다. 내가 묻기를,"예전에 듣건대 이 산중에 고승(高僧)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하니, 청암 스님이 말하기를,"한 번 새로운 풍조가 요동친 뒤로 유문(儒門)의 규모가 한 번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는 더욱 심하여 오계(五戒)144)를 지키는 자가 드무니, 어찌 고승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산에만 없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통틀어 모두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비록 그러하나 그중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자는 그래도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하니, 청암 스님이 말하기를,"부안(扶安) 내소사(來蘇寺)의 백학명(白鶴鳴)이 가장 뛰어났는데 불행히도 갑자기 죽었습니다. 지금 헤아릴 만한 사람은 7인인데 순창 구암사(龜巖寺)의 박영호(朴暎湖)가 으뜸이 되고, 무장(茂長) 선운사(禪雲寺)와 장성 백양사(白羊寺)에 각각 1인이 있고, 이 절의 김동신(金東信)이 그 가운데에 낄 만하고, 나머지는 서북도(西北道)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승가(僧家)가 도리어 우리 유가의 쓸쓸함보다 나으니, 우리 유가에는 이에 호응할 사람도 없습니다."하고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오늘날 불학(佛學)에서는 호남을 기북(冀北)이라 이를 만하나145) 우리 유학을 돌아보면 이와 같지 못하니 우리들이 부끄러움을 알 수 있네."라고 하였다. 또 청암 스님이 말하기를,"이 산의 고적(古蹟) 중에서 불가에 있는 것 이외에는 마의태자의 유사(遺事)가 가장 감상할 만합니다. 그분이 아버지에게 간하여 들어주지 않자 이 산에서 몸을 마친 것은 실로 역사책에 나타나 있어 삼한(三韓)의 인사들이 공송(公誦)하는 바이며, 군사를 양성하고 성을 쌓아 고려를 정벌하려고 했다는 것은 조대께서 어제 망군대에 갔을 때에 응당 들었을 것이니, 그 밖에 자세히 알지 못한 것을 제가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태자가 충의심에 격앙되어 한 번 훌륭한 일을 하기로 맹세하였으나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통곡하며 삼베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분이 죽은 곳은 수미암(須彌菴)이고 그분의 묘소는 비로봉 북쪽에 있는데, 산중의 사람들이 그 골짜기를 능내동(陵內洞)이라 일컫고 '나의 묘소를 보호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護我墓者獲福]'라는 태자의 유언을 서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산삼 캐기ㆍ농사짓기ㆍ재물 구하기ㆍ병을 치료하기 등 원하는 바가 있는 사람들은 사명일(四名日)146)에 앞다퉈 묘소의 풀을 베고 있습니다. 이 산의 아래 삼억동(三億洞)의 경주 김씨가 태자의 방손이 되므로 묘소에 와서 제사를 지냅니다. 소승이 마침 제사 때를 당하여 남은 음식을 얻었는데, 그때가 8월 16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태자가 죽은 뒤에 그의 부인은 비구니가 되었는데, 법호가 돈도부인(敦道夫人)이며 돈도암(敦道菴)을 세웠습니다. 세 아들도 모두 승려가 되었는데, 장자 실림조사(實林祖師)는 실림사(實林寺)를 세웠고, 차남 능인조사(能仁祖師)는 능인암(能仁菴)을 세웠고, 막내 보현조사(普賢祖師)는 보현암(普賢菴)을 세웠으니, 산중 사람들은 혹 실림태자(實林太子)ㆍ능인태자(能仁太子)ㆍ보현태자(普賢太子)라고 부릅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슬픈 표정으로 일어나 말하기를,"태자가 평생토록 헛수고만 하고 아무런 공적이 없으나, 그 하늘을 떠받치는 의절(儀節)을 어찌 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적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대개 청암 스님이 경주 김씨였기 때문에 태자의 일에 대하여 더욱 자세하게 알았으며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예전에 내가 집에 있을 때에는 태자가 항복하는 것에 대해 간언하다가 몸을 숨긴 일만 알았다가, 이윽고 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군사를 양성하여 고려를 정벌하려는 뜻을 지녔음을 알았고, 여기에 와서 그의 죽음ㆍ묘소ㆍ처자식의 자취를 모두 들었으니, 사람이 견문을 넓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하였다.또 생각건대 그 충절과 의열(義烈)의 전말이 깊은 산중의 스님들의 입에 부쳐 전해지고 역사책에는 실리지 않았으니 개탄스럽다. 비록 그러하지만 천여 년이나 지났는데도 산중 사람이 유적을 언급하면서 한숨을 쉬고 앞다퉈 묘소를 다듬으며 더욱 부지런하니, 이는 실로 충의가 사람을 깊이 감동시킨 데에서 나와 역사책에 훤히 드러난 자가 미치지 못할 점이 있다. 그가 말한 '나의 묘소를 보호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설은, 이러한 대절(大節)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따름인데 어찌 죽고 난 뒤의 일을 계산하였겠는가. 전설은 다 믿을 수는 없는 점이 있다. 그 묘소를 능(陵)이라 하고 살던 곳을 궐(闕)이라 하고 세 아들을 태자라고 한 것도 후세 사람들이 공경해마지 않았음을 보인 것이다.근래에 한 시인의 원고 중에 〈망군대〉 시를 보니 소서(小序)에 이르기를,"태자가 통곡하고 승려가 되었다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미 《신라사》에 보이지 않고 또 산승(山僧)의 입에도 전하지 않으며 엄숙한 봉분이 천년토록 무너지지 않았으니, 그 말이 너무나 근거가 없어 제동(齊東)에 붙여야 한다.147) 부인과 세 아들의 일에 관해서는 아마도 또한 이름을 의탁하여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던 일에서 나온 것이리라."하였다. 이에 생각건대 김씨 중에 경순왕(敬順王)에게서 함께 나온 자가 나라 안에 가득하니 태자의 황폐한 묘소에 나아가 비를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었고 물자를 마련하는 것도 매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겨를이 없어 저 황량한 산에 내버려두고 풀과 나무에 반쯤 묻히게 하였으니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는가. 어찌하면 뜻을 함께하는 자 몇 사람을 구해 그들과 도모할 수 있을까.27일. 조반(早飯)148)을 먹은 뒤에 다시 절 안으로 들어가니, 절에 '동국선종(東國禪宗)'이라는 편액이 걸렸고, 또 '동양제일가람(東洋第一伽藍)'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불전(佛殿)에 들어가 이른바 오십삼불(五十三佛)을 먼저 구경하였는데, 나무를 조각하여 느릅나무 뿌리를 거꾸로 세운 형상으로 만들고 상하좌우에 차례로 뿌리 위에 부처를 안치했으니, 매우 기이하였다.법호가 향암(香菴)인 스님이 말하기를,"옛날에 천축(天竺 인도(印度)) 사람이 금불(金佛) 53구(軀)를 주조하고는 석반(石盤)에 실어 인연을 따라 가다가 그치도록 하였습니다. 도중에 월지국(月支國)을 지나자 국왕이 자기 나라에 봉안하려고 하니, 부처가 왕의 꿈속에 말하기를 '내가 갈 곳이 있으니 너는 나를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 놓으니 부처가 우리나라 고성(高城) 포구에서 멈추었고 군수 노춘(盧春)이 부처를 맞이하여 이곳에 들여 놓았습니다.이곳에 용소(龍沼)가 있었는데 부처가 용을 내몰자 용이 화가 나서 느릅나무 뿌리를 뽑아 지상에 거꾸로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부처가 느릅나무 뿌리 위에 나란히 서자 용이 두려워하여 달아나니, 노춘이 마침내 용소를 메우고 절을 지었습니다. 여러 부처가 서 있었던 느릅나무 뿌리가 그대로 불전 안에 있었으니, 절 이름을 유점사(楡岾寺)라로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나중에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해 나무에 조각하여 바꾸었습니다. 절을 창건한 시기는 우리나라로는 신라 때이고 중국으로는 서한(西漢) 때인데 동한(東漢)의 영평(永平)149) 때보다 거의 100년이나 앞서니, 이른바 '동양제일가람'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운운."하였다. 불가의 말은 대개 허황하여 터무니없는 것이 많기에 향암 스님이 말한 것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이미 '동양제일'이라고 크게 써서 특별히 내걸었으니, 불교가 중국보다 먼저 들어왔다는 것은 헤아려 보건대 증거가 없지는 않다.오십삼불의 끝쪽에 백불(白佛) 하나가 있는데 일본왕이 주조하여 사명선사에게 준 것이라고 하였다. 벽 사이에 세워둔 옛 기폭(旗幅)은 노끈으로 그물을 만들고 털을 그물 사이에 흩어서 꽂았는데 무슨 털인지 모르겠고, 장대 머리의 삼지극(三枝戟)은 하나가 부서졌는데 이 또한 일본왕이 사명선사에게 준 것이라고 하였다. 향암 스님이 인하여 말하기를,"불가의 도가 높고 공이 큰 것은 유가에서 미칠 바가 아닙니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난리를 당하여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ㆍ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제공(諸公)과 같은 지략가(智略家)도 안정시키지 못한 것을 사명선사가 혼자서 동해를 건너가 거대한 물결이 가라앉게 하였으니,150) 이 또한 한 가지 일입니다. 우리나라 유가의 도학은 설홍유(薛弘儒)151)와 최문창(崔文昌)152)을 으뜸으로 삼는데, 설홍유는 고승(高僧) 원효(元曉)의 아들이고, 최문창은 심약(沈約)153)의 '공자는 그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그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究其致]'154)라는 말을 높이 받들었으며, 또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석가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角力]'155)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심지어 유가의 대종사(大宗師)인 공부자(孔夫子)가 '서방에 성인이 있다.[西方有聖人]'라고 일컬은 말이 《열자(列子)》에 보이는데도 세속의 선비를 만날 때마다 불교를 배척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는 자가 많으니, 어찌 이른바 '유(類)를 알지 못한다.[不知類]'156)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내가 보건대 향암 스님은 유가와 불가에 대략 통하여 으스대며 잘난 체하는 자여서 결판을 내려고 한다면 선 채로 말하는 사이에 설득해낼 수 있는 자가 아니었기에 다만 대략 설파하여 말하기를,"장자(莊子)와 열자(列子)는 공자를 비난하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일삼는 자이니 그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최문창은 과연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도학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에 있었던 것인데, 그의 문장과 인망(人望)을 추앙하고 탄복하여 지금까지 숭봉(崇奉)하는 것입니다. 퇴계(退溪) 선생 이하 여러 현인의 상론(尙論)157)이 있으니, 당신이 증명한 두 가지 말이 어찌 불교를 배척하는 유자(儒者)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또 웃으며 말하기를,"내가 예전에 구암사(龜巖寺)의 스님 박영호(朴暎湖)와 유가와 불가의 시비에 대해 언급하되, 나는 유교에 의거하여 불교를 배척하여 곧바로 유교는 옳고 불교는 그르다고 말했으며, 박영호는 항상 유교를 끌어다가 불교에 들여서 불교는 크고 유교는 작다고만 말했으니, 바로 한 번 끌어들이고 한 번 배척하는 사이에 이미 시비를 알 수 있는데 굳이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하였다.마침내 향암 스님과 작별하고 보장각(寶藏閣)으로 들어가 여러 물건을 모두 완상하였는데 과연 역대에 상으로 내려준 보배로운 물품과 절에서 전해오는 옛 물건들이 많아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다. 우리 조선조에 와서는 광해군이 하사한 은촉대ㆍ금촉대ㆍ화대(花臺) 등의 물품이 많고, 또 인목대비가 손수 초록(抄錄)한 불서(佛書) 1책(冊)이 있으니, 대개 생각건대 하나는 광해군이 만년에 잘못을 뉘우칠 때에 있었고 하나는 인목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변고를 만났을 때에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아조(我朝)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한다고 일컬었는데도 이미 왕가(王家)에서부터 이러하였으니, 초야에 묻힌 현인의 빈말[空言]이 아무리 절실한들 무슨 보탬이 되었겠으며, 저 고루 거각(高樓巨閣)이 내탕고(內帑庫)를 열어 도운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일만 산중에서 어떻게 이토록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였겠는가.보관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은 신라 남해왕(南解王)이 하사한 비취옥배(翡翠玉杯)인데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이한 완상품이었다. 이 남해왕의 연대에 의거하면 더욱 불교가 이 산에 들어온 것이 동한(東漢)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종전에는 다만 불교가 동양에 들어온 것은 동한의 명제(明帝) 때라고 말했을 뿐이니, 대저 동한에 앞서서 신라에 들어온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대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본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며 조야(朝野)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불가의 일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그럴 것이다. 보장각의 동쪽에 수충각(酬忠閣)이 있는데 그곳에서 봉안하고 있는 것이 표훈사와 똑같기에 들어가 구경하지 않았다.일행을 재촉하여 동구(洞口)로 나와서 머리를 돌려 다시 보니, 험준한 산은 바깥 휘장이 되고 고운 산봉우리는 안쪽 병풍이 되어 초절(超絕)하면서도 평평하고 둘러싸면서도 통하며, 높고 화려한 건물이 구름에 닿고 꿩이 나는 듯한 모습은 또 말할 필요도 없어 과연 좋은 산천에 좋은 가람(伽藍)이었다.생각건대 이렇게 세상에 드문 맑고 빼어난 곳을 유독 승려들이 주관하게 하고 우리 선비들은 관여함이 없으니 또한 매우 애석하다.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동양에서 사찰 설치한 건 이곳이 가장 먼저니 置刹東洋此最先거꾸로 꽂은 느릅나무 뿌리가 정히 아득하네 楡根倒揷正茫然일만 이천 봉우리는 풍악산을 차지했고 萬二千峯占楓岳오십삼불은 돌배를 타고 건너 왔다네 五十三佛渡石船역대에 상은을 받아 보배로운 물품이 많고 歷代賞恩多寶品누대에 가득한 제영은 혹 선현의 작품이네 樓滿題咏或前賢다시는 인간 세상의 맑고 기이한 곳을 再難人世淸奇地불가에 내주어 홀로 관할케 함은 어려우리 付與緇林獨管專대개 이 절은 산 위에 개국(開局)하였다고 이를 만하니, 마하연사에 비해 그 높이가 또 현격하다. 가까운 곳에 중내원(中乃院)ㆍ만경동(萬景洞)ㆍ선담(船潭)ㆍ구룡소(九龍沼)ㆍ송림사(松林寺)ㆍ학소대(鶴巢臺) 등 여러 승경이 있지만 급박하였기 때문에 구경하지 않았다. 그 학소대라고 하는 것은 윤달이 있는 해에는 학이 반드시 와서 둥지를 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데, 금년에 윤달이 있으므로 또한 이미 와서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았다고 하였다.동쪽으로 10리 남짓을 가서 개잔령(開殘嶺)을 넘었다. 개잔령의 서쪽은 문득 평지와 같으나 동쪽은 옛날 파촉(巴蜀)의 잔도(棧道)158)도 이것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걷기가 어려워 천천히 내려감에 머리가 아래고 엉덩이가 위인 줄만 알고 뒷사람을 돌아보니 천상(天上)에 있는 것 같았다. 내려오는 위험이 이미 이러하니 만약에 올라간다면 응당 청련(靑蓮 이백(李白))의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159)라는 탄식을 발할 것이다. 한낮이 지나서야 평지에 당도하니 바로 백천교(百川橋)였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여산은 높디높고 촉도는 험난하지만 廬岳高高蜀道難험준함이 이 산보다 더하지는 않으리 崎嶇未必過此山내려옴에 천 길 함정에 추락하는 듯 下來已墜千尋阱오를 때는 만 자 장대를 타야 하리라 上去應緣萬尺竿돌에 부딪치면 무릎이 깨질까 걱정하고 觸石幾愁雙膝碎벼랑에 임하면 가슴이 섬뜩함을 느끼네 臨崖還覺一心寒조심조심 나아가 끝내 험한 곳 넘으니 兢兢進步終踰險고생을 겪어야 안락함 보는 줄 알았네 辛苦方知見樂安자동차를 타려 했으나 만나지 못하여 천천히 걸어서 동쪽으로 가니, 점점 산이 열리고 골짜기가 트임을 느꼈고, 비로소 밭과 촌락이 나타나자 인간 세상임을 알았으며, 가슴속이 통창(通暢)하는 것이 며칠 동안 산중의 즐거움보다 나음을 느꼈다.보현동(普賢洞)을 지나 시랑리(侍郞里,)에 이르니, 하나의 작은 평야인데 그 가운데를 큰 시내가 관통하여 새삼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였고, 여러 산봉우리를 돌아보니 창연(蒼然)한 빛깔만 보였다. 예전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여기에 와서 금강산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면서 소동파(蘇東坡)의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160)라는 시구를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나, 실제로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금강산의 한쪽에 불과하였다.이윽고 또 30리를 가서 삼일포(三日浦)에 당도하니, 이곳이 이른바 관동팔경(關東八景)161)의 하나이다. 3면은 산으로 둘러져 있고 동쪽만 열렸는데 인력으로 그 중간에 둑을 쌓아 거울의 표면처럼 밑바닥이 평평하고 맑은 강 둘레는 10여 리쯤 되었다. 빙 둘러 있는 산은 모두 서른여섯 봉우리라고 하는데 산 하나가 삼일포 속으로 쑥 들어와 유람을 매우 유쾌하게 하였다.삼일포 안에 작은 섬이 있고 섬 위에 사선정(四仙亭)의 옛터가 있다. 삼일포의 사방 언덕 및 산 위에 있는 암석은 한 개도 사물의 형상이 아닌 것이 없으니, 대저 사람이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많고, 또 용이 나는 것ㆍ봉황이 춤추는 것ㆍ사자가 웅크린 것ㆍ거북이 엎드린 것ㆍ말이나 소가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형상이 다양하여 매우 특이하였다.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옛날에 사선(四仙)162)이 여기에서 3일간 놀다가 갔기 때문이라고 한다.대개 만폭동에는 사선기반암(四仙碁盤巖)이 있고, 비로봉 아래에는 사선교(四仙橋)가 있고, 여기에는 사선정이 있는데, 이 사선이 누구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라 때의 사람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둘러선 산 서른여섯 봉우리 안의 삼일포는 環山六六浦其中한쪽은 보배 거울을 새로 닦아 비워두었네 一面新磨寶鑑空언덕 가에 우뚝 선 바위는 사물을 닮았고 石峙岸邊爭肖物물속에 숨은 섬에는 배를 옮겨갈 수 있네 島藏水裏可移蓬물줄기가 동해로 통해 방사163)가 찾아오고 流通東海來方士땅이 봉래164)에 맞닿아 고운 바람 불어오네 地接蓬萊動綺風예전에 네 신선이 삼일 동안 즐겼는데 往昔四仙三日樂마침 이 한여름에 네 사람이 동행했네 適玆三夏四人同사랑스레 완상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해가 서산에 걸린 줄도 몰랐다. 밤에 고성군 안에서 유숙하였다.28일. 해금강(海金剛)에 가서 구경하였다. 해금강은 고성군 동쪽 10리 밖의 포구에 있으니, 바로 이른바 오십삼불이 멈췄던 곳이 여기이다. 기이한 섬과 괴상한 바위가 바다 및 서북쪽 기슭에 흩어져 우뚝 솟아 있는데, 송도(松島)ㆍ추도(秋島)ㆍ삼색도(三色島)ㆍ흑색도(黑色島)ㆍ수렴도(水簾島)ㆍ장경암(藏經巖)ㆍ노옹암(老翁巖)ㆍ불장암(佛掌巖)ㆍ초공암(梢工巖)ㆍ오선암(五仙巖)ㆍ용두암(龍頭巖)ㆍ구암(龜巖)ㆍ학암(鶴巖)ㆍ상암(象巖)ㆍ해만물상(海萬物相) 등이 볼 만하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서불(西佛)이 동쪽으로 건너 왔을 때에 신묘한 술법을 써서 여러 승경을 꾸며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승려들이 대중을 현혹시키는 데에서 나온 설이다.대개 전배(前輩)의 시가(詩歌)나 유록(遊錄)을 보아도 해금강이라는 명칭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오늘날 이처럼 자자한 것은, 아마도 근래에 일벌이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바다 가운데에 약간 뛰어난 경관이 있는 곳에 대하여 괴이하고 허황된 설을 수습하여 갖다 붙이고는 산금강(山金剛)의 대안을 만들어 유람하는 사람에게 한때 배를 띄우고 노는 즐거움을 제공한 것이리라. 대저 이러한 괴암기석이 어디엔들 있지 않겠는가마는 그것들이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뱃놀이에 도움이 되므로 한 번 구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에 작은 배 1척을 불러 중류(中流)에 띄워 놓았다. 때마침 바람이 잠잠하고 물결이 잦아들며 하늘이 맑게 개고 햇살이 해맑아서 심신(心神)이 상쾌하고 즐거우며 몸이 가볍고 맑아 큰 바다에 있는 것도 망각했으니, 마치 날개가 돋아나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배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대략 여러 승경을 보고 흥취가 다하려는데 우연히 소동파의 망미가(望美歌)165)가 나왔다. 이에 생각건대 소동파는 비록 세상에 불우한 자이지만 그래도 바라볼 미인(美人 임금)이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모두 바라볼 미인도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내 배 안에서 다음과 같이 〈해금강가(海金剛歌)〉 한 편을 읊었다.바다 가운데 금강은 장관도 많아 海中金剛多壯觀산금강보다 낫다고 다투어 말하네 爭道强似山金剛누가 하나하나 기암괴석 가져다가 誰將箇箇奇巖石사물 형상을 물 가운데 흩어놓았나 散作物形水中央이르되 부처가 동쪽으로 건너온 날 云是牟尼東渡日한 줌 묘술로 가지각색 꾸몄다네 一把妙術色色粧송도 한 점은 쪽풀처럼 푸르고 松島一點碧似藍추도는 마주 솟아 서리 엉긴 듯 희구나 秋島雙峙白凝霜노옹은 묵묵히 앉아 물고기 뛰는 걸 보는데 老翁默坐觀魚躍영불은 손바닥 펴고서 무엇을 생각하나 靈佛展掌何商量경서 천만 권을 쌓아 놓았으니 堆積經書千萬卷혹시 《황정경》이 제향166)에서 떨어졌나 倘或黃庭墜帝鄕삼색도와 흑색도에 또다시 수렴도요 三色黑色復水簾용두암 상암 구암 학암이 다시 상서 바치네 龍象龜鶴更呈祥배를 엎어 사람 빠뜨리자 정말 성낼 만하여 覆船溺人眞堪怒돌로 뱃사공을 벌주어 섬 곁에 두었네 石罰梢工置島傍듣건대 대지가 처음 열리던 날에 聞說大地肇判日물과 불과 흙과 돌을 한 자리에 끌어다가 水火土石盪一場순식간에 모두 써서 각각 형상을 드러내니 須臾盪盡各著形돌은 절로 우뚝우뚝 물은 넘실넘실했다네 石自矗矗水洋洋천축의 세존이 도가 비록 높다고 하나 天竺世尊道雖高어찌 인력으로 종전의 상태를 바꿨겠나 那將人力變舊常먼 길손은 다만 좋은 경치를 찾을 뿐 遠客只可探勝狀그 상세함을 역력히 궁구할 것도 없네 不須歷歷究厥詳아침에 거룻배 하나를 중류에 띄우니 朝來一葦泛中流동녘 하늘이 아득히 물빛에 닿아 있네 東天渺茫接水光청풍이 서서히 불어와 물결이 잔잔하고 淸風徐來波浪靜뱃전 두드리며 노래하니 미칠 듯 즐거워 扣舷發歌喜欲狂몸이 큰 바다 위에 있는 줄도 모르고 不知身在滄溟上겨드랑이에 날개 돋아 날 것만 같아라 但覺兩腋生羽翔배 멈추고 옷자락 잡고 내려서 다시 보고 停船攝衣下復觀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으니 흥취가 더 길구나 手摩足躡興添長다 구경하고 배를 돌려 돌아가려다가 觀盡回棹欲歸來차마 놔두고 가지 못해 다시 서성이네 不忍舍去更徊徨오선대 위의 소나무는 일산을 드리우고 五仙臺上松偃蓋구선봉 꼭대기의 구름은 평상 만들었네 九仙峯頭雲作牀신선은 이미 떠났으나 산은 남아 있어 仙人已去山猶在시절의 경물 기다리며 서로 잊지 못하네 留待時物不相忘적송자 따르고 싶던 이는 예전에 누구였나 願從赤松昔何人도리어 그 설이 황당해질까 걱정이네 還恐其說涉荒唐내가 옛 시 외우며 편안함을 경계하노니 我誦古詩戒太康제때에 바삐 가는 세월을 아껴야 하네 及時須惜歲月忙인생은 늙기 쉽고 이름은 칭찬받기 어렵나니 人生易老名難稱내 마음은 가는 곳마다 감상이 이는구나 余懷觸境生感傷서쪽을 바라봐도 미인을 볼 수 없고 西望美人不可見풍진만 하늘 한쪽에 자욱하구나 風塵漠漠天一方어떡하면 비린내 나는 세상 깨끗이 하고 安得廓淸腥羶世손수 이 바닷물 가져다 칼날을 씻을까 手將此海洗釼鋩호걸들이나 못난이들이나 말할 것도 없이 休道傑傑與庸庸영원히 한결같은 망양167)으로 함께 돌아가리 同歸浩劫一亡羊저 무지몽매한 석가의 무리를 보건대 睠彼空空釋家流오히려 기이한 자취 자랑하며 괜히 과장하나 尙詑奇迹謾誇張우리들은 절로 실질 공부의 경계를 두니 吾家自有實業界다만 스스로 힘써 의지168)를 가지는 데 달렸네 只在自强著脊梁광명한 해와 달은 똑같이 두루 비추고 光明日月同普照유구한 천지는 더불어 끝이 없는지라 悠久天地與無疆내가 해금강 보는 데 참으로 방법 있으니 我觀海剛眞有術몸을 돌이켜 유추하여 감당하려는 것이네 反身推類欲承當청컨대 그대는 한갓 기교함만 찾지 말고 請君莫徒探奇巧나의 〈해금강가〉 한 장을 들어보게나 聽我海剛歌一章노래를 다 짓고 나서 한 번 큰 소리로 부르고 문득 세상에 지음(知音)이 없는 것을 한하니, 물속의 어룡(魚龍)은 혹시 내 마음을 알까? 노래를 마치자 배를 돌렸다가 배에서 내려 입석점(立石店)에 들어가 쉬었다. 객점 사람이 점심밥을 마련해서 내왔는데 회(膾)에는 문어와 복어가 있었고 국에는 홍합이 있었다. 이 세 가지는 내 마을 근처 서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므로 그 신선한 것은 내가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어제 산중에 있을 때에는 항상 사삼(沙蔘 더덕의 뿌리)ㆍ석이(石茸) 등 평소에 드물게 먹던 세 가지 신선한 음식을 먹었고, 이제 해금강에 와서는 또 평소에 말려서 먹던 것을 먹었다. 요사이 동쪽 유람에 일행이 눈으로 기이한 장관을 실컷 보고 아울러 입으로 별미를 실컷 먹었으니, 속담에 이른 '금강산도 식후경'은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둔 말인 듯하였다.고성군을 돌아 지나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온정리(溫井里)에 이르렀다. 여기에 있는 온천은 목욕하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명산 아래 유명한 온천을 겸비했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여관의 성대한 상황이 도회지와 같았다. 남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어 신계사(神溪寺)로 들어갔다. 절이 산중의 넓고 평탄한 곳에 있는데, 뒤에 있는 작은 언덕이 큰 산을 가로막고 있으며 좌우의 자잘한 언덕이 또한 산기슭을 가려 골짜기 기운이 사랑스러웠고, 전각 또한 크게 지어졌다. 절에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원당(願堂)169)이 있는데, 정조(正祖)의 유학을 숭상하는 고견(高見)으로 필시 비례(非禮)로써 어버이를 높이지는 않았을 것이니, 혹시 일이 장조의 생전에 있었기 때문에 고치지 않았던 것일까?대저 이 산에는 4개의 큰 절이 있는데, 터[基址]로 논하자면 유점사가 으뜸이 되고 신계사가 그다음이고 표훈사가 또 그다음이고 장안사가 가장 아래이며, 사찰의 웅장하고 화려함과 창건한 시기가 오래된 것으로 논하자면 유점사가 또한 으뜸이 되고 표훈사가 그다음이고 신계사와 장안사가 가장 아래이다.밤에 골짜기 입구의 여관에서 유숙하였다. 여관 앞 높은 산봉우리 아래의 긴 골짜기에 흰색 물건이 수십 장(丈)이나 뻗쳐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흰 돌이나 사태(沙汰)로 여겼다가 자세히 보니 쌓인 눈이었다. 그런데 절 문 동쪽의 깊은 골짜기와 절벽에는 어디나 모두 그러하였으니, 대개 산의 북쪽 기슭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에 경탄하며 말하기를,"호남은 이 산에서 천 리에 불과한데도 기후의 차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무재령(霧在嶺)에서 보았던, 나뭇잎은 싹트기 시작하고 풀이 금세 마른 것은 오히려 괴이할 것도 없다. 일찍이 고시(古詩)의 '오월에도 천산에는 눈이 쌓이네.[五月天山雪]'170)라는 구절을 보고는 '다른 지방 먼 지역에 있어서 사람들이 보기 드문 것이므로 시인의 말에 실상과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다.'고 여겼는데, 우리나라 천 리 안에서 몸소 그것을 볼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만 겹 금강산이 장관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5월에 쌓인 눈도 보기 드문 기이한 경관이구나."라고 하였다.29일. 조반(早飯)을 먹은 뒤에 여장을 꾸리고 남쪽을 향해 갔으니,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다시 비로봉(毘盧峯)으로 오르기 위해서였다. 10리쯤 가서 하나의 석문(石門)을 만났는데 모양이 표훈사 동쪽에 있는 것과 같으나 더욱더 깊고 좁아서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것이 이른바 '외금강문(外金剛門)'인데, 하늘이 뛰어난 경관을 보호하고 아껴 안팎의 문까지 설치하다니 대단하였다.여기부터 위로는 길이 매우 울퉁불퉁하여 비록 정비를 하였지만 천연의 험난함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나무잔도[木棧]와 쇠난간으로 곳곳마다 방비하여 염려할 것은 없었다. 몇 리를 가서 옥류계에 이르렀는데 그 이름을 듣고 그 시내를 알 만하였다. 다만 이 산에 있기 때문에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니, 크게 어진 부형(父兄) 밑에서는 비록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더라도 크게 칭송받지 못한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또 비룡폭(飛鳳瀑)에 이르렀다. 폭포가 천여 척(尺) 산만한 깎아지른 절벽에서 떨어지는데 형상은 봉황이 머리를 든 것과 흡사했으며, 떨어지는 물이 많지는 않으나 가파른 바위에 부딪치므로 날아오르고 빙빙 돌아 나는 봉황의 날개처럼 되었으니, 처음 폭포의 이름을 지은 자가 참으로 잘 묘사하였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가느다란 폭포가 가파른 절벽에 걸려 細瀑懸巉壁드날려 돌며 봉황의 날개 되었네 揚旋作鳳翔자색 안개가 날아 거꾸로 오르고 紫烟飛倒上서설이 뿜듯이 처음으로 쏟아지네 瑞雪噴初雱언제 신묘한 도끼에 깎여졌다가 何日剜神斧이제 와서 속인의 눈을 긁어내나 玆來刮俗眶굶주려도 곡식을 먹지 않는다니 有能飢不粟이 물 마시고 배를 채울 만하리 飮此可充腸또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니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데 우르릉 쾅쾅대며 천둥이 하늘에서 진동하는 것과 같았으니 구룡연폭포(九龍淵瀑布)임을 알았다. 소리가 점차 가까워질수록 걸음걸이도 점차 나아가 멀리멀리 관망하니, 새하얀 것이 마치 천녀(天女)가 일천 자[尺] 누인 베[練布]를 아래로 드리운 것 같고 꿈틀꿈틀하는 것이 마치 풍백(風伯)이 한 쌍의 백룡(白龍)을 몰아 엎어지는 것 같아 참으로 놀랄 만하였다.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서 보니, 떨어지는 물은 그 수량(水量)이 냇물과 맞먹을 만하였고 서 있는 바위는 곧게 선 것이 곧장 절벽을 이루었다. 수량이 많기 때문에 소리가 웅장하고 바위가 곧게 서 있기 때문에 기세가 맹렬하였다. 폭포 아래에 형성된 커다란 돌절구가 물을 받아 한 빛깔 벽옥(碧玉) 연못이 되었는데, 그 넓이는 1묘(畝)쯤 되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어 벌벌 떨며 정신이 어지러워 감히 다가가서 보지는 못했으며, 우레처럼 울리는 소리에 귀가 멍멍하고 눈처럼 뿜어대는 물보라에 옷이 젖어 또한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주민에게 들으니 폭포의 길이는 300여 척이고 연못의 깊이는 45척인데 아홉 마리 용은 지금 없다고 하였다.동천(洞天)은 넓고 툭 트였으며 반석(盤石)도 좋은데, 바위에 우암(尤菴)이 손수 쓴 '노폭중사 사인현정(怒瀑中瀉使人眩精)'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고, 또 '천장백련 만곡진주(千丈白練萬斛眞珠)'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누구의 글씨인지는 몰랐다. 대개 감히 다가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바위 위에 오래 머물며 앉아서 보고 또 차마 놔두고 가지 못했다. 예전에 최북(崔北)171)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천하의 명사(名士)인 최칠칠(崔七七)은 천하의 명승지에서 죽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몸을 날려 연못으로 뛰어들었으나 곁에 있던 사람이 구해주어 죽지 못했다. 최북이 비록 미친 흥취의 부림을 받았으나, 이를 통해서 또한 구룡연폭포의 기절(奇絶)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읊었다.하얀 은하수를 거꾸로 쏟아 倒瀉白銀漢문득 벽옥 연못을 만들었네 翻成碧玉淵눈서리가 여름날에 날리고 雪霜飛夏日벼락이 갠 하늘에서 일어나네 霹靂起晴天눈이 놀라서 처음엔 멀리 바라보고 駭眼初望遠정신 어지러워 문득 다가가기 두렵네 眩精却怕前여산이 어찌 여기보다 낫겠는가 廬山那勝此그래서 나는 청련172)을 비난하네 而我非靑蓮여기에서 서쪽으로 골짜기 하나를 넘으면 팔담(八潭)의 승경이 있다고 들었으나 또한 만폭동에서 본 것과 대략 서로 비슷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구경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30리를 오르면 비로봉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행 중에 비사문(飛沙門)의 위험을 꺼려서 결연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서 결국 길을 돌아가기로 계획을 바꿔 신계사(神溪寺)로 되돌아갔으니, 비록 다리가 피곤해지는 것은 싫었지만 이로 인해 다 구경하지 못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조금 나았다.절 안에 김동신(金東信)이라는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와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일행이 모두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또 김동신이 너무 늙어서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기는 어렵다고 하기에 그만두고 말았으니, 이러한 명산에 들어와서 최고의 산승(山僧)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은 하나의 흠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승려 이외에도 도를 품고 재주를 지닌 채 깊이 은둔하여 드러내지 않은 선비가 혹 이 산에 있을 것인데도 만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일까? 아마 그를 만났는데 나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서 외면한 것인가? 아니면 근래에 이 산을 이민족이 더럽혀 다시는 예전의 금강산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곳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가버린 것일까? 한탄스러울 따름이다.삼선암(三仙菴)과 보광암(普光菴)이 이 근처에 있다고 들었으나 모두 구경하지 않았다. 한낮이 지나 걸음을 재촉하여 온정리(溫井里)로 나간 다음에 서쪽으로 돌아가서 갈봉점(葛峯店)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산길을 20리 가는 동안에 비록 기이한 구경거리는 없었으나 양쪽 절벽의 푸른빛과 온갖 시냇물이 또한 예사로운 경색(境色)이 아니었다. 지포(止浦)173) 선조의 〈분수령도중(分水嶺道中)〉 시 "두견새 소리 속에 청산뿐인데 종일토록 빽빽한 숲속을 헤치며 걷네. 한 시냇물 건너려면 몇 굽이였던가, 흐르는 물 보내고 나면 또 흐르는 물이네.[杜鵑聲裏但靑山 竟日行穿翠密間 渡一溪流知幾曲 送潺潺了又潺潺]"라는 두 연(聯)을 암송하고 말하기를,"선인(先人)의 시에서 이미 이곳의 경색을 묘사였으니, 후인이 비록 시를 짓고 싶은들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밤에 하늘빛이 아주 어둡지 않은 것을 보고 달빛이 있어서 그런가 의심하였으나 문득 그믐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흰 옥을 깎아낸 듯한 산봉우리들이 창문 앞에 둘러서서 영롱하게 서로 비추어 이렇게 밤에도 환하게 하는 것을 본 뒤에야, 참으로 이 산의 수려하고 신령함은 모르는 사람과는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을 알았다.5월 1일. 아침 일찍 몇 리를 가서 이른바 만물상(萬物相)에 올랐다. 대개 산봉우리와 암석의 기괴한 것이 여기에 모두 모여 있는데 만물과 모습이 닮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내가 〈만물상가(萬物相歌)〉 한 편을 지었으니, 이것을 보면 그 대강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장군의 갑주는 전장에 임한 듯하고 將軍甲冑臨戰陣깃발과 창검은 별과 해처럼 빛나네 旗幟鎗釰耀星日삼천 제자가 공자를 모시고 있으니 三千弟子陪聖師서가와 들보 채울 듯 서적이 쌓였네 盈架充棟積緗帙청묘에서 현상은 관면이 엄숙하고174) 淸廟顯相儼冠冕술동이며 제기들이 차례로 진열됐네 樽俎籩豆陳秩秩천상의 음악을 어느 날에 만들거나 勻天廣樂何日作우뚝한 숭아175)를 오히려 없애지 않았네 樅樅崇牙猶不輟촉대와 향로를 가지런히 배열해 두고 燭臺香爐排整齊승려들이 머리 숙여 부처에게 예배하네 群僧府首禮尊佛군왕이 사냥하고 깊은 밤에 돌아오니 君王田獵暮夜歸늘어선 횃불 천 자루가 이글이글 타오르네 列炬千把燄燄爇온갖 새는 펄펄 날며 다투어 뒤따르고 百鳥翩翩爭追隨봉황은 천 길을 날아 단혈에서 나오네 鳳翔千仞出丹穴여우 꿩 토끼가 놀라 안정하지 못하는 건 狐狸雉兎驚不定매와 사냥개가 사납게 채가고 물어뜯어서네 東靑韓盧搏噬烈뾰족뾰족한 필봉은 셀 수가 없고 尖尖筆鋒不可數비 온 뒤의 죽순은 어지러이 돋아나네 雨後竹笋亂抽出뾰족한 사슴뿔은 서로 끌어당기고 觺觺鹿角交相掎천 년 된 고목은 뼈대만 남아 있네 千年枯木但餘骨만물과 꼭 닮은 게 이것뿐만 아니니 酷肖萬物不止此어찌 낱낱이 필설로 형용하겠는가 那得箇箇形筆舌하늘에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謂天有心歟조물주가 사소한 데 애쓰지 않았을 테고 造化必不勞屑屑하늘에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謂天無心歟기교가 어찌 이처럼 치밀하겠는가 奇巧安能似此密그 이치는 막연하여 물어볼 수 없으니 厥理茫茫不可詰아마도 산하가 개벽하던 날에 應是山河開闢日밀반죽 빚듯이 많아 한둘이 아니었으리 有若磨麪紛不一뜻밖에 그 공교함이 자연히 이루어져 不期其巧自然成하늘 또한 그 실상을 알 수 없었으리 天亦莫能知其實속안으로 무단히 놀라 서로 바라보니 俗眼無端驚相視마음이 있고 없고를 다시 어찌 말하랴 有心無心更何說한번 지인이 만사에 응하는 걸 보게나 請看至人應萬事더욱이 비상함이 있어 신출귀몰하다네 更有非常神出沒도리어 일상 속에 기이하게 변한 곳이니 還是常中奇變處세상 사람들이 특별하게 볼 필요가 없네 不必世人看自別또 신만물상(新萬物相)과 오만물상(奧萬物相) 두 곳이 있지만, 아마도 또한 여기와 대동소이할 것이기에 가서 구경하지 않았으니, 대개 이곳에 이르러 외금강의 탐승(探勝)을 마쳤다.대저 비로봉 이남부터 내무재령 이내를 내금강이라 하고 비로봉 북쪽부터 내무재령 밖을 외금강이라고 하는데, 승경의 많고 적음은 내금강과 외금강이 서로 대등하였다. 농암(農巖)의 일기(日記)176)에서 "내금강은 바위가 많고 흙은 적으며, 외금강은 흙이 많고 바위는 적었다."라고 한 것은 실제가 아니었다. 하나의 금강산이 모두 바위인데 바위는 산의 골격이니 개골산(皆骨山)177)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실제적인 말이다. 그 '일만 이천 봉우리'라 한 것은 아마도 산 위의 돌부리가 뾰족뾰족 높이 솟아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산이 아무리 크다지만 어찌 실로 이름을 붙일 만한 봉우리가 이렇게 많이 있겠는가. 가령 내금강의 바위가 외금강보다 많고 외금강의 흙이 내금강보다 많다고 하는 것은 괜찮다.온정령(溫井嶺)을 넘고 신풍리(新豊里)를 거쳐 말휘리(末輝里)에 이르러서 차를 타고 다시 장안 여관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여행 도구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로봉까지는 40리 넘게 떨어져 있는데, 일행이 모두 농사일을 돌아가 점검하는 데에 급하고 게다가 오르기 어렵고 고생스러움을 꺼려서 다음날에 곧장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자 내가 말하기를,"비로봉은 금강산에서 가장 큰 볼거리인데, 노(魯)나라에 가서 십철(十哲)178)만 만나고 공자를 뵙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게다가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고 우물을 파더라도 샘물에 미치지 못하면 유시무종(有始無終)의 수치가 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하였는데, 이 두 가지 좋은 비유가 일행의 마음을 움직였다. 곧장 함께 길을 재촉하여 올라가 겨우 표훈사 앞에 당도하였으나, 해도 저물고 다리의 힘도 소진되어 이곳에서 유숙하였는데 일전에 묵었던 여관이었다. 여관 할멈이 자기의 친정이 전주이기에 우리를 같은 도(道) 사람이라고 하면서 곱절이나 더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밤에 아우 여안(汝安)179)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함께 올 수 없었던 한탄과 신라 태자의 유적에 서글펐던 마음을 대략 말하였고, 또 시 두 수를 지어 하나는 자정(子貞 조제원(趙濟元))에게 사례하고 하나는 족제(族弟) 희숙(希淑)-현술(賢述)-에게 부쳤다. 자정에게 사례한 시는 다음과 같다.좋은 일은 원래 마음대로 하기 어려우니 好事元難得自由이번 여행에 결국 그대와 짝하지 못했네 此行竟失與君儔동쪽으로 오니 곳곳마다 명승지가 많아 東來到處多名勝늙어 가며 울적함을 풀기에 조금 낫네 老去差强散鬱幽망망한 큰 바다는 어느 곳이 끝이런가 滄海茫茫何地限우뚝 솟은 금강산은 중천에 떠 있구나 剛山矗矗半天浮다시 높은 곳 올라 머리 돌려 바라보니 更登高處回頭望오늘 한 사람이 빠진 수심을 어찌하랴 其奈今朝少一愁희숙에게 부친 시는 다음과 같다.세상 밖에 있는 금강산 자취를 物外金剛迹조만간 함께 찾아가자 약속했네 聯筇早晩期굳센 용이 어찌 오래 칩거하랴 矯龍何久蟄고달픈 학 또한 높이 날아가네 倦鶴亦高飛구룡연폭포에서 마음 씻어내고 九瀑洗心處비로봉에서 마음껏 바라보았네 毘峯縱眼時그대보다 기묘한 이야기 적어 少君奇絶話머리 돌려 서글피 생각해보네 回首悵然思2일. 다시 만폭동ㆍ마하연을 지나 북쪽으로 꺾어 비로봉에 오르니, 바람이 일고 구름이 흩날려 비 올 기미가 매우 컸다. 그러나 이미 중도에 이르러 나아가기도 물러나기도 어려웠기에 할 수 없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바람 기세가 잠시 잠잠하고 구름 기운이 홀연 걷혀 정상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나의 신천지가 환하였다. 내가 일행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형산(衡山)에서 구름을 걷히게 하는 것180)은 한문공(韓文公)만 그러한 것이 아니네. 우리들이 비록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어찌 그것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겠는가."하였다.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니 서남북(西南北) 3면이 온통 산인데, 모두 높은 봉우리와 거대한 산으로 성(省)이나 군(郡)을 진호(鎭護)하는 것이라 생각되었으나 내려다보면 한 줌 한 줌 작은 언덕이 마치 자리에 깔아둔 콩과 같았다. 동쪽은 큰 바다인데 물이 하늘과 잇닿아 멀리 볼 수가 없었고 다만 하나의 편평한 호수처럼 보였다. 구름과 비가 눈[眼] 아래에서 나직이 맴돌고 하늘 바람이 뼛속에 파고들어 참으로 높은 곳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높은 곳으로는 백두산이 최고이고 이 봉우리가 그다음이다."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의 말일 것이다.옛날에 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181) 이는 처한 곳이 더욱 높으면 보이는 것이 더욱 낮음을 말한 것이니, 이 산에 올라와서도 평소 득실을 근심하고 비굴하게 처신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모르는 자는 참으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무력을 남용하여 남의 나라를 빼앗은 자들은 또한 무슨 마음인가? 아, 어떡하면 이웃나라가 각각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는 치세(治世)를 다시 볼까? 저 바다의 동쪽 일본을 바라봄에 회계(會稽)의 수치182)와 신정(新亭)의 눈물183)을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저들의 군상(君相)으로 하여금 이곳에 오르게 하여 그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살찌운 죄를 뉘우치게 한다면 얼굴 붉히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아니면 한갓 눈으로만 보고 마음으로 보지 않을지는 나 또한 알지 못하겠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시 한 편을 지었다.봉래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한 번 오르니 一陟蓬萊上上峯땅이 동해에 다하여 동쪽 땅이 다시 없네 地窮東海更無東눈 아래에 운하가 희어 갑자기 놀라고 乍驚眼底雲霞白머리 가에 일월이 붉은 줄 문득 알았네 忽覺頭邊日月紅득실이며 영고성쇠는 온통 헛된 꿈이요 得失榮枯都幻夢존망이며 흥폐도 모두 헛것이 되었구나 存亡興廢總成空중생들이 어떡하면 일제히 여기에 올라 衆生安得齊登此흉금을 넓게 열어 크게 공평함을 지을까 恢拓胸衿作大公저번에 청암 스님이 마의태자의 묘소가 비로봉 서북쪽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번에 배알해야겠다고 작정하여 묘소에 고하는 글까지 한 통 지어놓았다. 그런데 지금 보건대 수풀 가득한 산에서 길을 찾을 수가 없고 게다가 물어볼 사람도 없어 찾아가 성묘를 하려면 하루를 허비해야 했다. 한편 일행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화살과 같아서 오히려 비로봉도 포기하고 구경하지 않으려던 사람들이 어찌 내 말을 기꺼이 들어주겠는가. 천 리 머나먼 길에서 홀로 뒤에 처지는 것도 불편한 점이었다. 며칠 동안 바라던 것이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매우 서글프고 서운하였다. 다만 묘소에 고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니, 그 글은 아래와 같다.단군이 나라를 세운 지 4263년 세차(歲次) 경오년 5월 무인삭(戊寅朔) 2일 기묘에 먼 후손으로서 본관이 부령(扶寧)인 김택술은 분향재배하고 공경히 신라 왕태자의 묘소에 고합니다.아, 우리 선조여 嗚呼我祖천지의 굳센 기운이요 天地剛氣산천의 빼어난 영기로 河岳秀靈신라 말엽의 겁난을 만나 値羅末劫우리 선조께서 태어나셨네 我祖挺生고려는 나날이 강해져서 有麗日强삼한 땅을 석권하였으니 席捲三韓용맹한 군대가 남으로 내려옴에 貔貅南下그 기세는 산을 무너뜨릴 듯했네 勢若崩山부왕이 나라를 양보한 것은 父王讓國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일이나 事出無柰지극한 정성으로 충성스레 간언하고 赤誠忠諫대의로써 결단하였네 斷以大義일천 년 이어온 사직을 千年社稷가벼이 버릴 수는 없었기에 不可輕棄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서 背城一戰죽을 때까지 변치 않고자 했네 至死無二글자마다 비통한 마음이 담겨 字字惻怛하늘에 물어볼 만했으나 上蒼可質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言不見用시국이 바뀌고 말았네 時局變置묵묵히 의체184)를 궁구하건대 默究義諦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我適何地저 개골산을 바라보니 睠彼皆骨그 골짜기가 그윽하였네 有幽其谷삼베로 옷을 지어 입고 有麻其衣풀을 채취하여 먹으니 有草其食산도 슬퍼하고 물도 오열하여 山哀浦咽애통하게 곡하였네 有痛其哭따르는 자가 구름 같아 從者如雲군사가 삼십만이었으니 有軍三億저 송악을 바라보건대 視彼松岳어찌 하루라도 잊겠는가 豈忘一日타고난 운수는 정해져 있어 天數有定끝내 인력으로는 어렵기에 竟難人力망군대의 서쪽에 望臺之西성을 쌓고 집을 지었네 築城作室수미암에서 須彌之菴타고난 수명을 마쳤으니 天年以卒생애와 역사는 生平歷史모두 기술할 점이 있네 俱有可述비로봉의 북쪽에 毘盧之北엄숙한 무덤이 있으니 有肅塋域승려와 속인들이 달려와서 僧俗趨走다투어 초동과 목동을 금했네 爭禁樵牧곧은 충정과 큰 의리를 貞忠大義능히 이와 같이 이루었으니 能致是若예전에 한나라가 망할 때 在昔漢亡유심과 같은 점이 있었네185) 有若劉諶늠름한 기상이 넘쳐 나서 凜凜生氣고금에 외워서 전해지니 誦傳古今세상도 다르고 지역도 달랐으나 殊世異域공은 모두 한결같은 마음이었네 公乃一心동경의 의로운 충렬이요 東京義烈북지의 뛰어난 풍도라고 北地英風여덟 글자를 돌에 새기니 八字石刻상론이 공평하였네 尙論之公아아 嗚呼개골산의 승경은 皆骨之勝천하에 기이하고 빼어나며 天下奇絶간언하다 도망한 행적은 諫逃之蹟만고에 뛰어나 우뚝하네 萬古卓截이런 산에 이런 행적이 此山此蹟서로 어우러져 더욱 빛나 相得益章우리들이 와서 탐승하고 我來探勝그로 인해 묘소에 절하네 因拜斧堂일은 비록 인연을 따랐으나 事雖夤緣공경을 다하는 건 전일했네 致敬則專다만 산하를 돌아보건대 顧瞻河山이미 이전 모습을 바꿨으나 已改前色만난 상황이 똑같은지라 所値之同광감186)이 더욱 간절하네 曠感益切적막한 궁벽한 산에서 寂寞窮山제문 한 폭을 바치노니 獻文一幅진실한 마음 한 조각은 赤心一片고금에 없던 것이리라 無今無昔아아, 존령께서는 嗚呼尊靈부디 밝게 살펴주소서 庶垂鑑燭이날 저녁에 장안 여관으로 다시 와서 유숙하였다.3일. 회정(回程)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에 다시 세 가지 차187)를 잇달아 타고 갈 예정이다. 예전에 듣건대 단발령(斷髮嶺) 위에서는 금강산 전체의 진면목을 구경할 수 있지만 지금은 차를 타고 고개의 터널로 출입하기에 하얗게 눈이 덮인 모습과 훌쩍 티끌세상을 벗어난 형상의 전체를 보지 못한다고 하니 흠이 될 만하다.대저 궁실(宮室)을 살펴볼 때에는 먼저 외면의 대체(大體)를 본 뒤에 들어가서 많은 간가(間架 칸살)를 자세히 보는 법인데 사람을 살펴보는 것도 그러하다. 지금 나는 이와는 반대로 하여 먼저 산중의 세세한 경관을 보고 대체는 아직도 보지 못했으니, 소동파가 이른바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는 것을 여기서 증험할 수 있었다. 비록 그러하지만 산에 들어가 비로봉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것ㆍ유점사의 맑고 그윽함을 즐긴 것ㆍ정양사의 뛰어나고 탁 트임을 완상한 것ㆍ구룡연폭포와 만폭동의 기인한 장관에 소리친 것ㆍ만물상의 괴이하고 신묘함을 읊은 것 등 여섯 가지는 금강산의 큰 구경거리니, 대개 이 여섯 가지 구경거리는 이른바 '대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대저 이 산은, 충의로는 신라 태자와 김매월당(金梅月堂)의 유적이 있으며, 도학으로는 율곡(栗谷)ㆍ우암(尤菴)ㆍ농암(農巖)ㆍ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의 유람이 있으며, 문장으로는 최고운(崔孤雲)과 양봉래(楊蓬萊)의 필적(筆跡)이 있으며, 그 밖에 달관 명사(達官名士)들의 자취도 셀 수 없을 정도에 이른다. 그러나 당초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주인이 되어 산골짜기를 가득 채운 것은 불가의 사람들이다. '금강(金剛)'188)으로 산 이름을 붙인 데에서 살펴보면 이미 알 수 있으니, 비로봉ㆍ관음봉ㆍ지장봉ㆍ수미봉ㆍ법기봉 등의 명칭도 이와 같다. 청암 스님이 저번에 말한, '김 태자(金太子 마의태자)의 굳센 충의[剛義]에서 취하여 금강으로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일리가 있는 듯하나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문득 세계의 공원이 되어 불가에서 장차 주인노릇을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또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내가 시 한 수를 지어 온 산을 총괄하여 읊었으니, 시는 비록 격에 맞지 않으나 실제를 묘사한 것은 괜찮다. 시는 다음과 같다.듣건대 삼신산189)이 동해에 있는데 聞說三神在海東이 산의 절승도 동참할 수 있다네 此山絶勝得參同일천 봉우리 하얗게 모이니 눈이 덮인 듯 千峯白攢疑封雪일만 폭포 요란하니 바람이 세차게 이는 듯 萬瀑爭喧怒起風금강 개골 풍악 봉래로 번갈아 변할 때요 剛骨楓萊交幻際유선190)과 도가 불가가 왕래하는 중이네 儒仙道釋往來中산신령 또한 오늘날의 세태를 알아서 地靈亦識今時態공원을 만들어 세계로 통하게 하였네 許作公園世界通내가 이곳에 대해 또 한 가지 할 얘기가 있다. 대저 명산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뛰어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실로 초탈하게 외지고 멀어 사람들이 드물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밖의 선경[物外仙境]'이나 '별천지가 있다[別有天地]'로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전에 듣건대 금강산은 맑은 인연이 없는 사람은 이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탐욕스러운 놈이나 더러운 놈이라도 만일 돈만 있다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차바퀴와 사람의 발자취가 산과 바다를 이루니 선경이며 별천지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노승(老僧)이 '금강산의 맑은 유람이 파괴되었다.'고 탄식한 것은 그 뜻이 깊다고 하겠다.또 생각건대 이 산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부류에는 여관을 운영하는 자ㆍ안내자ㆍ사진을 찍는 자ㆍ글자를 새기는 자ㆍ가마를 메는 자가 있는데,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 모르나 내금강산의 장안사 동구(洞口)와 외금강산의 온정리에 여관을 짓는 것을 아직도 그만두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보건대 전국의 재산을 이 산에 낭비하는 것을 1년 동안 계산해 보면 또 얼마나 많은 거액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산에 의지하여 먹고사는 자들이 결국 우리나라 사람이니, 이른바 "초나라 사람이 잃어버리면 초나라 사람이 얻을 것이니 오히려 무방하다."191)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세를 살펴보건대 여관처럼 큰 이득이 있는 것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저들의 차지가 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대저 종(鍾)은 기뻐서 치면 소리가 즐겁고 슬퍼서 치면 소리가 애절하다.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도 그러하여 기쁜 마음으로 구경하면 장관(壯觀)이 되고 불평한 마음으로 구경하면 '비관(悲觀)'이라 할 만하니, 만일 비관이 된다면 또 어찌 구경을 일삼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 산의 티끌조차 없이 깨끗함과 산 너머 동해의 끝도 없는 물이라는 두 경관의 장엄함이 모두 한 곳에 모여 만고토록 변치 않았으니, 또 인정의 희비(喜悲)와는 애초에 무관하다. 산에 티끌조차 없어 나의 물욕을 없앨 수 있고 물이 끝도 없어 나의 덕량(德量)을 넓힐 수 있으니, 학자가 금강산을 한 번 구경하는 데에 끝내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인하여 온 산을 구경하며 느낀 점을 총괄하여 기록해서 뜻을 같이 하는 자가 미리 보는 데에 대비한다.경오년 5월 상순에 집에 돌아와서 정서(淨書)하다. 自古道人有大願, 必曰"識盡天下好人物, 觀盡天下好山水". 蘇黃門以見終南、黃河, 至比幷於見歐陽公, 則山水之觀之不可已也, 有如是夫! 唐人有"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之詩, 余疑中國自有五嶽, 金剛雖勝, 何至乃爾? 近自汽車交通, 余友亦多見中國而歸者, 皆言"中國之山如五嶽, 高雄則誠是矣, 而其奇絶則有遜於東國之山". 蓋金剛, 東國之山之最奇絶者, 則唐人之詩, 果有由矣, 至於海外列國之山, 則以余所考《瀛寰志略》例之, 已見其無足言矣. 以此言之, 其爲東西洋惟一名山, 斷可知已. 是以我邦儒先栗谷、尤菴、農巖以下諸先生, 無有不觀此山者矣. 余素有山水之癖, 金剛一遊, 固素願也, 而中年奉老, 戒在遠遊, 近復世變已極, 恐非食舊士子遊衍時. 是以欲往未果者累矣. 今年春, 索居無聊, 趙弟子貞【濟元】請余同往. 余惟今之世, 好人物亦有時而改其度, 若山水則無情者, 必不以世變而變其好, 則好山水之不可不觀, 更有甚於見好人物矣, 且古人之感傷時事者, 固有寓迹於山水者, 則今者之行, 似無害義. 遂與子貞約以三月晦日登程, 因天久雨, 退以四月十日. 朴友善明【塽九】、徐友允三【種台】聞余東遊, 亦請聯袂. 及期, 因朴友有故, 猝難啓行, 子貞以親忌在來初, 計往返日子, 恐不逮, 故罷行. 余戱謂子貞曰: "曾聞金剛, 有緣者乃得觀, 君其無緣者耶? 抑不以因人敗事, 有所怨尤否?" 子貞笑曰: "緣自己作, 只爭爲否, 雖有早晩, 元無有無. 因我因人, 時處則然, 隨寓安安, 何敗何尤?" 余聞之, 歎其有似得道者言. 乃謂子貞曰: "君之胸衿, 已脫塵埃, 金剛山在其中矣. 彼東海上鬱然而蒼者, 雖無觀, 亦何傷?" 因與相笑而罷. 乃以是月二十三日發旆, 朴友先發, 已俟中路, 徐友及朴友子根浩同伴. 二十四日. 未暮, 抵長安寺洞口. 距家凡千餘里, 而乘沿路急車, 故若是其迅也. 鐵原以前用汽, 以後用電, 自末輝里用自動. 未及長安十里, 已覺山形非常, 車中有詩曰: "未到山中眼忽明, 已覺群峯玉刪成. 行行漸入眞佳境, 一步移時一換形. " 夜宿寺門外旅館. 館臨絶澗, 兩水交流, 萬松參天, 終夜所聞, 惟松籟水聲, 淸爽殆非人境. 一行皆叫好曰: "此已如此, 其佳處若萬瀑、九龍, 當復如何?" 余曰: "此學習而悅境界, 到成德極處, 又難言. " 夜有一詩曰: "東遊一迹太遲遲, 總爲棼棼世故縻. 今到金剛山裏宿, 有心終見事成時. " 二十五日. 歷雲住門, 始入長安寺. 局勢雖峻雄, 未見有奇勝, 一行曰: "反不如寺外館前所見. " 余曰: "否. 山益邃而林益密, 此不奇之奇也. " 殿宇亦頗傑壯, 而方重修佛殿, 加構其上, 作二層矣. 寺之刱, 蓋在麗朝中葉以後, 而或云爲元奇皇后願堂而設. 蓋此行亶在探山水之勝, 則寺院歷史, 有不足究問也. 東偏神仙樓懸板上, 多有時人詩作, 而板高字細, 不可觀, 亦不必觀也. 離長安渡澗, 南入小徑, 巖石崎嶇, 樹木蒙密, 溪澗奔流觸石, 作雷轟聲. 沿溪而行, 往往失路, 誦杜工部"高江急峽雷霆鬪, 古木蒼藤日月昏"之句曰: "身親經歷, 然後益知古人詩工也. " 間復遇洞稍敞、林稍疏、水益淸、石益白、峯益奇處, 大叫奇壯淸絶, 人聲與澗聲相和, 跨石而坐, 群峯若俯首拱揖然, 可喜也. 行不到五六里, 有明鏡臺, 臺下有黃流潭. 臺則巨巖自平地聳立數十丈, 四方直削, 僧輩托冥府用明鏡照察罪人之說, 冒是名. 潭則廣可二畝, 澄綠可愛. 又冒名爲黃泉江, 豪富家女子來此, 多投錢水中, 供永歸日贐資云. 潭上西南, 石岸陡絶, 上有平巖四圍, 有頹城, 是爲新羅太子【僧云麻衣太子】所居處. 立白標木, 書"太子城"三字, 巖上刻"東京義烈, 北地英風"八字, 云是梅月堂金公所題. 其傍有金光國、金藎國諸金氏題名. 回渡黃流潭, 南行少許, 路左寬平處, 亦有標木, 書"新羅古迹"四字, 是爲太子宮室遺址, 山中人稱爲大闕址. 此南十里, 有望軍臺. 太子諫父不聽, 故逃入此山, 時率軍三億, 欲伐高麗, 留陣山下, 登此臺而望之, 故得是名, 洞亦有三億名云. 余嘗觀《羅史》, 云"敬順王請降于高麗, 太子諫曰'當與忠臣義士, 以死自守, 力盡而後已, 豈以一千年社稷, 一朝與人乎'. 王曰'孤危若此, 勢不能全, 不忍使無辜之民肝腦塗地', 終不聽. 太子哭辭而入皆骨山, 麻衣草食, 以終其年". 《金氏譜ㆍ王世系》所載亦然, 而伐麗望軍之說, 來此始聞. 《羅史》云"失其名", 而吾《金譜》云"諱鎰, 一云謙用", 又云"子孫爲扶寧金氏". 吾金先世, 亦多博識高見, 書諱書孫, 其必有據矣. 蓋太子之烈烈大義、凜凜英風, 固不待贊辭而著者, 將億萬世之所當欽仰, 矧此今日屋社後所遭之同乎? 凡有秉彝者之莫不慷慨悲怛, 況吾諸金之同出敬順王者乎? 謹賦一詩識感, 詩曰: "泣諫歸來入此逃, 至今遺迹未全銷. 東京王氣千年盡, 北地英風萬丈高. 坐草衣麻心獨苦, 望軍築壘力徒勞. 幾多行客追傷感? 一倍忉忉後裔苗. " 題罷, 遂向望軍臺. 中路聞有危險懸鐵索處, 一行皆憚之曰: "諒吾輩筋力, 何能陟此絶險? 且坐不垂堂, 古人有戒. 此臺雖極高宜望遠, 遠不及毘盧. 毘盧一陟, 在所不已, 則舍此不觀爲得. " 余則專爲太子古迹, 期欲一上, 然臺上旣空無一物, 而絶險又若是, 何苦違衆獨行? 但自下瞻望想象足矣. 乃右轉而入靈源菴少憩. 菴甚幽邃, 麗朝忠惠王時所刱云. 居僧全德眞兼治敎禪兩科, 戒行頗專一. 今世僧家學絶, 想與儒門一般, 而尙有如此人, 可尙也. 客僧趙慧山云居全州, 謂同道人, 款待頗厚. 德眞指菴前所見諸峯, 云地藏、云十王、云罪人者, 爲說歷歷. 余笑曰: "此固汝家說. 地下本無十王, 設有之, 宜在地下, 安得出居此山上? 旣在此山, 則他山亦應有之. 若然, 十王將爲百王, 而反不爲輕耶?" 相笑而別. 回尋來路間, 已忘失一行, 散覓舊蹤, 迭呼互出, 往往作迷藏之戱, 亦可笑也. 日幾晡, 始出長安東平路, 迤邐上去, 得鳴淵瀑. 瀑長六七丈, 勢頗壯, 瀑下澄潭, 尤深廣可玩. 一行中有誦一絶詩"平生自謂心無慾, 到此方知心志遷. 巖下明珠千萬斛, 可移移置草堂前"曰: "此可謂先獲我心也. " 顧謂余曰: "聞此是艮翁金剛山中作, 子應知之. " 余曰: "曾所未聞, 然先師少時, 曾遊此山, 此在其時歟. 此是無慾之慾, 雖無害於淸德, 比諸坡仙'淸風明月, 取無禁, 用不竭'之語, 猶似有公私之別. 此尙爲少時作而未得盡善, 故不入稿而未之聞歟. " 行數里, 到三佛巖. 剜巨巖, 刻大佛形, 儼然可畏. 非惟三箇而名三佛者, 想仍舊也. 前抵表訓寺不入, 直上正陽寺, 量日力也. 雖無巖石險, 却峻急若上天. 旣達於寺, 則境落超絶通豁, 全山一帶, 羅列眼前, 可以拊背撫頂. 歇惺樓欄外, 刻木作諸峯形, 安于板上. 隨峯大小高下, 若毘盧、永郞、須彌及日出、月出、天一臺等類, 而各異其形, 各識其名, 而各向其方, 不待周覽而瞭然在目, 使遊人可省多少神力矣. 農巖所謂"入金剛山, 只觀正陽寺, 餘不足觀"者, 豈非以此也歟? 乃次板上一韻曰: "萬二峯眞面, 樓頭歷歷看. 行人不登此, 枉到金剛山. " 以絶勝也, 故題名題詩, 盈樓楣樑, 而古人名作則絶無矣. 余謂居僧曰: "曾聞鄭湖陰《正陽寺》詩, 膾炙於世, 此無懸板何也?" 因誦之曰: "'萬二千峯領略歸, 蕭蕭落葉打秋衣. 正陽寒雨燒香夜, 蘧瑗方知四十非', 而其不知乎?" 僧曰: "小僧亦曾聞此詩, 從前未見此樓此板. " 余曰: "可知之矣. 古人骨已朽, 今人腕力强, 拔趙旗立漢幟, 豈獨軍中爲然? 所可歎者, 炎凉市道亦在萬山中. " 用湖陰韻, 偶成一絶, 單道破"歇惺"二字, 詩曰: "微此歇惺誰與歸? 好敎遊子拂塵衣. 歇惺中也分虛實, 慧眼看來辨是非. " 寺則小刹也, 有六角殿頗精巧, 一座小石塔, 新羅時所造, 寺內印藏《八萬大藏經》, 凡六千五百餘冊云. 已而下來入表訓寺. 寺甚雄壯縝密, 知其爲饒刹. 殿宇之麗, 自不必說, 中有大鍾二、大銅甑蒸米四十斗者一, 甑則光廟所賜, 餘未及詳玩. 問表訓何義, 僧曰: "刱者新羅僧表訓也. " 形勢周匝甚緊, 亦頗平豁, 澗流回抱, 比長安寺基, 加優幾格. 寺南數武地, 有月沙所撰西山禪師碑、靜觀齋所撰義諶禪師碑. 又有酬忠閣, 繪圖懶翁、無學、西山、泗溟以下諸禪師有功國家者肖像, 揭奉壁上, 扁云酬忠, 則是朝家所命也. 碑與閣, 係白華菴所管, 而菴則不入. 夜宿迎仙橋內旅館, 得《表訓寺》詩一首曰: "誰歟刱此寺? 云距一千年. 恩賜來王室, 法師鎭徼邊. 樓臺飛翬翼, 鍾磬徹龍眠. 形勝難題得, 不才愧許燕. " 二十六日. 東上尋萬瀑洞去, 距表訓未幾. 兩大巖對峙, 又一大巖橫覆其上, 長廣僅通行人. 是所謂金剛門, 天之秘護勝狀, 設門關而守之者, 乃若是多事歟? 行三四里, 洞口稍豁, 兩岸及平底, 全用白石爲地. 水自毘盧、永郞、須彌、內霧在諸峯而來者, 至此而勢益壯, 得石之橫截壁立者, 輒直瀉爲瀑, 從此以上十里强, 在在皆然. 是所謂萬瀑洞, 而石上所刻楊蓬萊筆三大字已報知其名, 又有蓬萊筆"蓬萊楓嶽元化洞天"八大字, 幷皆雄建蜒蜿, 龍蛇飛騰, 眞奇絶地, 奇絶筆也. 瀑長雖不甚高, 以其若是多者難得爲貴. 瀑下輒匯爲澄潭, 有八潭, 名曰黑龍、曰碧霞、曰琵琶、曰噴雪、曰眞珠、曰龜、曰船、曰火龍, 因其命名, 而潭瀑之實狀, 槪可想也. 蓋瀑不至萬而曰萬者, 盛言之也, 潭不止八而曰八者, 選言之也. 瀑之斛斛眞珠, 潭之面面明鏡, 瑩徹奇壯, 有難形喩, 手掬淸波, 且飮且盥, 覺得夙生葷血, 一洗洗下, 心與境會, 悠然忘歸, 乃知古人沂雩風浴, 其樂有在, 登臨竟日, 亦非太康也. 因有一絶詩曰: "片片琉璃斛斛珠, 潭潭瀑瀑展新圖. 洗醒多少人心目, 作此天工意豈無?" 眞珠潭上, 有所刻古詩"淸溪白石聊同趣, 霽月光風更別傳"、"物外只今1)成跌宕, 人間何處不啾喧"二聯, 尤菴筆也, 摩挲心畵, 宛然若昨日事. 蓋尤翁之遊此山在晩年, 因想當時雖經淸亂之後, 國家尙能自保, 四徼不見兵塵, 而況此山淸絶之超出物外者, 豈容半點塵氛? 先生所筆, 正得著題. 今焉國不爲國, 全疆三千, 異類充斥, 若此深山, 卉氈如織, 山河眞改色矣. 不勝慨歎, 題一絶韻, 用傳喧二字, 詩曰: "金剛絶勝六洲最, 尤老風聲百世傳. 當日淸遊物外地, 如今誰識雜啾喧?" 洞之平巖斷崖, 凡可刻字處, 皆今古人姓名, 覓不得一片完石, 噫其多矣. 蓋此山一帶, 凡奇絶所在, 無處不然, 而此洞爲尤甚焉. 余不覺喟然一嘆曰: "均是人也, 孰賢孰愚? 孰善孰惡? 孰達孰窮? 孰隱孰見? 若此洞所題, 尤翁以外, 如金夢窩、吳老洲諸賢, 最著不朽之名, 其餘亦多名士達官, 然不若一般無聞者之滋多矣. 想此無聞之中, 宜有賢善而窮不見者, 亦安保其無爲愚爲惡者乎? 盍觀此鏟人名而刻己名者, 往往而有乎? 推其心, 在家奪人家, 在國奪人國, 非可但以愚惡論也. 昔蘆沙奇公遊山, 有人請題名, 答云: '使吾賢, 山之幸也, 使不賢, 豈不爲山之羞乎?' 此言警絶可服. " 顧念如余之庸庸者, 非惟窮而無名, 將不免愚惡之歸, 其不敢題名者, 實蘆言是懼. 且値此喪亂之日, 已著之名, 猶將晦之, 何苦强露無名之名爲哉? 名旣不欲露, 故詩成亦不題, 但自唱自酬, 亦一無味之味也. 中萬瀑洞而南臨絶壁上者曰普德窟. 鑿巖罅而作小菴, 西一角地陷, 故作十二尺長銅柱立之, 登此菴, 搖搖若乘風云. 沿洞而上, 可以見其外而想其內, 故不入. 盡萬瀑洞而上去三里許, 有摩訶衍, 謂寺則小, 謂菴則大. 境勢之圓密, 雖不及表訓, 而超絶過之, 蓋到此已踞山之半高矣. 寺後有白雲臺, 登高處而以將觀毘盧也, 故不上. 乃取路而南, 歷妙吉祥廢址, 渡四仙橋, 將上毘盧峯, 有人謂"不如先觀外金剛, 歸路登之之爲便". 遂依其言, 舍毘盧路, 問楡岾程, 此去四十里强. 過白華潭, 抵內霧在嶺. 其間嶮阻之苦, 攀躋之艱, 非更僕所能盡, 非昨日明鏡、靈源之路比也. 蓋此山之諸勝, 所在自保勝, 會修治道路, 而惟長安之距靈源、摩訶衍之距楡岾, 姑未始役故也. 谷中木葉始芽, 躑躅未發, 嶺上草生而旋枯, 余歎曰: "此非夏將半天氣乎? 吾乃今知山之高也. " 嶺之內外, 老檜干霄, 仰面乃見其末. 其自死而仆者, 有亘兩岸作架者, 有人跨其上而足居其半者, 余又歎曰: "吾乃今知山之深也. " 一行見美材之自朽也, 皆曰: "恨不致之通衢大港而作宮室舟車也. " 余曰: "噫嘻! 何獨此也? 從古及今, 抱奇器異才, 窮死草莽而沒其名者, 何限也?" 踰嶺而下行十里, 聞有隱仙臺、新金剛、十二瀑諸勝, 距路不甚遠而不入觀者, 非惟日力之不足. 元是金剛, 奚謂新金剛? 旣觀萬瀑, 又何十二瀑? 亦省事之意也. 日已晡, 入楡岾寺, 騁目四觀, 果然是好山水好伽藍. 先登山暎樓, 樓臨溪, 水直檻前, 又引水爲池, 景致絶佳. 樓多題名, 而崔勉菴亦在其中, 而與柳基一同板. 寺中多可觀古蹟, 而以日旣暮俟來日. 下樓渡橋, 出緇林糾正門, 夜宿旅館. 有僧靑菴金奉詮來, 與之話曰: "湖南千里, 不易到此, 甚矣, 措大山水之癖也. 綠陰雖好, 尙不若丹楓之可玩, 盍於秋八月作此行?" 余曰: "所癖乎玩此山者, 以其淸峭聳拔, 超脫塵埃已, 豈足計較於綠陰丹楓間哉? 若丹楓則吾近之內藏山, 自有一色紅錦屛, 和人面目衣服也. 通紅底奇玩品, 恐强似此山楓林之尙雜他木也. " 靑僧曰: "此山大發昌, 在新羅時代, 所謂八萬九菴者, 在此時. 今觀林木蒙密處, 多廢菴之墟, 巖崖平正處, 皆刻字痕. " 因曰: "萬瀑洞有崔孤雲手筆之刻及梅月堂'樂山樂水人情也余則何爲而哭'之刻, 而今字剜難見, 措大其知之乎?" 余曰: "此爲此洞題刻中最古最奇之蹟, 而惜余不得諦視而得之, 非上人, 幷不知其有此也. " 余問: "昔聞此山中, 多有高僧, 今有幾人?" 靑僧曰: "一自新風潮紛盪之後, 非惟儒門規模之一變, 佛家尤甚, 持五戒者且鮮, 安得有高僧? 非惟此山無有, 通擧國皆然. " 余曰: "雖然, 就中屈指者, 還有幾人?" 靑僧曰: "扶安來蘇寺白鶴鳴最優, 不幸遽沒. 今則可數者七人, 淳昌龜巖寺朴暎湖爲首, 茂長禪雲寺、長城白羊寺, 各有一人, 此寺金東信可參其中, 餘在西北道. " 余曰: "僧家還勝吾家之落莫, 吾家則和此也無. " 顧謂一行曰: "今日佛學, 湖南可謂冀北, 顧吾儒學, 則不能乃爾耶, 我輩可以知愧矣. " 靑僧又曰: "此山古蹟, 在佛家者以外, 麻衣太子遺事, 最可感想. 其諫父不聽, 終身此山, 固見於史牒, 三韓人士所公誦, 養兵築城, 欲伐高麗, 措大昨日望軍臺行, 亦應聞之, 餘有未悉者, 我且詳言. 太子忠義所激, 誓一有爲, 知事不成, 痛哭麻衣而終. 其終在須彌菴, 其墓在毘盧峯北, 山中人稱其洞爲陵內, 相傳太子遺言'護我墓者獲福'. 故至今採蔘、力農、求財、療疾凡有所願者, 於四名日, 爭先剪艸. 此山下三億洞慶州金氏爲太子傍孫, 故來祭於墓. 小僧適當祭時, 得餕胙物, 時則八月十六日也. " 又言: "太子沒後, 其夫人爲尼, 號敦道夫人, 建敦道菴. 三子亦皆爲僧, 長實林祖師建實林寺, 次能仁祖師建能仁菴, 季普賢祖師建普賢菴, 山中人或稱實林太子、能仁太子、普賢太子矣. " 言罷, 愀然而作曰: "太子平生徒勞無功, 然其撑天義節, 豈可以事不成而少之哉?" 蓋靑僧是貫慶之金, 故於太子之事, 知之加詳而言之能悉矣. 余聞之, 自言于中曰: "向吾在家, 只知太子諫降竄身之事, 而已入山, 始知有養軍伐麗之志, 到此備聞其卒墓妻子之蹟, 人之見聞不可不博也, 有如是矣. " 又念其節烈之顚末, 寄傳於深山緇徒之口, 而不得史筆之舖張簡冊, 是可慨也. 雖然, 歷千餘年之久, 而山中人語及遺蹟而咨嗟, 爭先修墓而愈勤, 是固出於忠義之感人深, 而有烜赫史冊者之所不及也. 其云"護我墓獲福"之說, 以若大節, 爲其所當爲而已, 豈計身後哉? 傳說有不可盡信. 其謂墓爲陵, 謂居爲闕, 謂三子爲太子者, 亦見其後人尊敬之無已也. 近見一韻士稿中《望軍臺》詩, 有小序曰: "太子痛哭爲僧, 此何謂也? 旣不見《羅史》, 又不傳山僧之口, 而肅肅斧堂, 千秋不崩, 其言之無據甚矣, 當付之於齊東也. 若夫人三子之事, 想亦出於托名藏蹤不得已之擧矣. " 因念金氏之同出於敬順王者彌滿國中, 就太子墟墓, 立碑記蹟, 不容已也, 物力辦亦易易也, 而尙此未遑, 任他荒山, 半埋草樹, 豈非欠典? 安得同志者幾許人而與之圖乎? 二十七日. 早飯後, 復入寺中, 寺揭"東國禪宗"之額, 又揭"東洋第一伽藍". 入佛殿, 先觀所謂五十三佛, 刻木爲楡根倒立形, 上下左右, 次第安佛于根上, 甚可異也. 僧香菴號者爲言曰: "昔天竺人鑄金佛五十三, 載石盤, 使隨緣而止. 路過月支國, 國王欲奉安于其國, 佛告王夢曰: '我有去處, 爾其舍我. ' 王反佛于故處, 佛止於我國高城浦口, 郡守盧春迎佛入此. 此有龍沼, 佛驅龍, 龍怒拔楡根, 倒置地上. 諸佛齊立于楡根上, 龍恐懼而逃, 春遂塡沼作寺. 諸佛所立楡根, 仍在殿中, 寺名楡岾者以此. 後因屢度回祿, 刻木改之. 刱寺之時, 在東國爲新羅, 在中國爲西漢, 而先於東漢永平時, 且近百年, 所謂東洋第一伽藍者, 此也. 云云. " 佛家之言, 大抵多涉荒誕, 香僧所云, 雖不可盡信, 旣大書特揭以東洋第一, 則其佛入之先於中國, 料亦非無徵也. 五十三佛末邊, 有白佛一, 云是日本王鑄贈泗溟禪師者. 壁間立古旗幅, 用繩爲網, 用毛散揷網間, 未知何毛, 竿首三枝戟缺一, 亦云日王贈溟師者. 香僧因言: "佛家之道高功大, 非儒家所及. 當壬丁之亂, 智略如西崖、白沙諸公之未勘靖者, 溟師隻手東渡, 使鯨波妥帖, 此亦一端也. 我國儒家道學以薛弘儒、崔文昌爲首, 而弘儒是高僧元曉之子, 文昌則推尊沈約'孔發其端, 釋究其致'之語, 又有'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角力'之詩. 至於儒家大宗師孔夫子稱'西方有聖人'之語, 見於《列子》, 每見世儒, 多以斥佛爲能事者, 豈非所謂不知類者乎?" 余見香僧, 粗通儒佛, 悻悻自好者, 如欲究竟, 則非可立談間說得下者, 但略略道破曰: "莊、列以誚侮孔子爲事者, 則其言不足信. 文昌則果有是矣, 然此在東國道學未闡時, 推服其文章人望, 而尙今崇奉矣. 退溪以下諸賢尙論自在, 儞所證二言, 安足以噤得儒者斥佛之口乎?" 因又笑謂曰: "余昔與龜巖僧暎湖語及二家是非, 吾則據儒斥佛, 而直言儒是佛非, 暎常援儒入佛, 而但言佛大儒小, 卽此一援一斥之間, 而已足以知是非, 何必多辨乎?" 遂別香僧, 入寶藏閣, 歷玩諸物, 果多歷代賞賜寶品及寺中所傳古物, 不可枚擧. 在我朝, 光廟下賜銀銅燭臺、花臺等器爲多, 又有仁穆大妃手鈔佛書一冊, 蓋意一在晩年悔過時, 一在西宮遭變時也. 然我朝號稱崇儒斥佛, 而已自王家如此, 野賢之空言, 雖切奚補? 安知彼高樓巨閣非出於內帑所助乎? 不然, 顧此萬山中, 何以致此壯麗乎? 藏中最古物, 有新羅南解王所賜翡翠玉杯, 眞希世奇玩. 據此南解王年代, 尤可證佛入此山之先於東漢也. 從前但道佛入東洋在東漢明帝時而已, 夫孰知先於東漢而入於新羅乎? 蓋我邦士子之昧於本國而詳於中土, 在朝野史猶然, 況於佛家事乎? 宜其然也. 寶藏閣之東, 有酬忠閣, 其所奉安, 同於表訓, 故不入觀. 促一行出洞口, 回首更看, 峻山外帳, 姸巒內屛, 超絶而平, 周匝而通, 高築綺構, 雲連翬飛, 又自不必說, 果然是好山水好伽藍. 念此罕世淸絶之地, 獨使緇徒管領, 而吾儒則無與焉, 亦堪惜哉! 有一詩云: "置刹東洋此最先, 楡根倒揷正茫然. 萬二千峯占楓岳, 五十三佛渡石船. 歷代賞恩多寶品, 樓滿題咏或前賢. 再難人世淸奇地, 付與緇林獨管專. " 蓋此寺可謂山上開局, 視摩訶衍, 其高又懸絶矣. 近地有中乃院、萬景洞、船潭、九龍沼、松林寺、鶴巢臺諸勝, 而緣遽未觀. 其云鶴巢臺者, 以閏月之年, 鶴必來巢故名, 今年有閏, 故亦已來巢而生子云. 東行十里餘, 踰開殘嶺. 嶺以西, 便同平地, 以東則古之巴蜀棧道, 想不過此. 艱步徐降, 但覺首下尻上, 回視後人, 如在天上. 下來之危險, 已如此, 若上去則應發靑蓮難靑天之歎. 日過午, 始抵平地, 乃百川橋也. 有詩曰: "廬岳高高蜀道難, 崎嶇未必過此山. 下來已墜千尋阱, 上去應緣萬尺竿. 觸石幾愁雙膝碎? 臨崖還覺一心寒. 兢兢進步終踰險, 辛苦方知見樂安. " 擬乘自動車不遇, 緩步而東, 漸覺山開洞豁, 始有田疇村落, 知是人間世, 覺得胸次通暢還勝數日山中樂矣. 過普賢洞, 至侍郞里, 乃一小平野, 而大川貫其中, 更快人意, 回看諸峯, 但見蒼然一色. 昔農巖至此, 謂可以見金剛全面, 而引東坡翁"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廬山中"之詩而證之, 然其實此處所見, 不過金剛半面. 已而又行三十里, 抵三日浦, 此所謂關東八景之一. 三面環以山, 惟開東面, 用人力築防其中, 乃鏡面平底, 淸江周圍, 可十餘里. 山之環者, 凡三十六峯云, 有一岡斗入浦中, 甚快遊觀. 浦中有小島, 島上有四仙亭遺址. 浦之四岸及山上所在巖石, 無一箇非物形者, 大抵多人立者, 又有龍翔鳳舞獅蹲龜伏馬牛飮者, 不一其形, 此甚可異. 浦之得名, 昔有四仙遊此三日而去故云. 蓋萬瀑洞有四仙碁盤巖, 毘盧峯下有四仙橋, 此有四仙亭, 未知此四仙者誰誰, 而是新羅時人云. 有一詩曰: "環山六六浦其中, 一面新磨寶鑑空. 石峙岸邊爭肖物, 島藏水裏可移蓬. 流通東海來方士, 地接蓬萊動綺風. 往昔四仙三日樂, 適玆三夏四人同. " 愛玩不忍去, 不覺日在西矣. 夜宿高城郡內. 二十八日. 往觀海金剛. 海金剛在高城郡東十里外浦口, 卽所謂五十三佛所止處者是已. 奇島怪巖散峙海中及西北岸, 有松島、秋島、三色島、黑色島、水簾島、藏經巖、老翁巖、佛掌巖、梢工巖、五仙巖、龍頭巖、龜巖、鶴巖、象巖、海萬物相等可觀. 居人謂"西佛東渡時, 用妙術, 粧成諸勝", 此出僧輩惑衆之說. 蓋見前輩詩詠遊錄, 未聞有海金剛之名, 今日之若是藉藉, 意者近來好事者, 就此海中略有勝觀處, 收拾怪誕之說而傅會之, 作山金剛之對案而供遊人一時泛舟之樂也. 夫此奇巖怪石, 何地不有? 以其在海中, 而可藉船遊也, 故不得不一觀. 乃呼一隻小船, 放乎中流. 時適風靜浪息, 天晴日朗, 心神爽怡, 身體輕淸, 忘却在滄溟上, 若將化羽而擧也. 舟行一周, 略覽諸勝, 興且盡, 而偶然發坡仙望美之歌矣. 因思坡雖不遇於世者, 猶有可望之美人, 今我則幷無有美人之可望者, 詎不悲哉? 乃於舟中, 賦《海金剛歌》一篇曰: "海中金剛多壯觀, 爭道强似山金剛. 誰將箇箇奇巖石, 散作物形水中央? 云是牟尼東渡日, 一把妙術色色粧. 松島一點碧似藍, 秋島雙峙白凝霜. 老翁默坐觀魚躍, 靈佛展掌何商量? 堆積經書千萬卷, 倘或《黃庭》墜帝鄕? 三色、黑色復水簾, 龍、象、龜、鶴更呈祥. 覆船溺人眞堪怒, 石罰梢工置島傍. 聞說大地肇判日, 水火土石盪一場. 須臾盪盡各著形, 石自矗矗水洋洋. 天竺世尊道雖高, 那將人力變舊常? 遠客只可探勝狀, 不須歷歷究厥詳. 朝來一葦泛中流, 東天渺茫接水光. 淸風徐來波浪靜, 扣舷發歌喜欲狂. 不知身在滄溟上, 但覺兩腋生羽翔. 停船攝衣下復觀, 手摩足躡興添長. 觀盡回棹欲歸來, 不忍舍去更徊徨. 五仙臺上松偃蓋, 九仙峯頭雲作牀. 仙人已去山猶在, 留待時物不相忘. 願從赤松昔何人? 還恐其說涉荒唐. 我誦古詩戒太康, 及時須惜歲月忙. 人生易老名難稱, 余懷觸境生感傷. 西望美人不可見, 風塵漠漠天一方. 安得廓淸腥羶世, 手將此海洗釼鋩? 休道傑傑與庸庸, 同歸浩劫一亡羊. 睠彼空空釋家流, 尙詑奇迹謾誇張. 吾家自有實業界, 只在自强著脊梁. 光明日月同普照, 悠久天地與無疆. 我觀海剛眞有術, 反身推類欲承當. 請君莫徒探奇巧, 聽我《海剛歌》一章. " 歌成, 高唱一遍, 却恨世間無知音者, 水底魚龍倘識我心? 唱罷, 回棹下船, 入憩于立石店. 店人具進午飯, 膾有文、鰒二魚, 烹有紅蛤. 此三者, 吾近西海之所不産, 故其鮮者, 余所初食也. 昨在山中, 恒喫沙蔘、石茸平日所罕喫者, 今來海剛, 又食三鮮之素所薧食者. 近日東遊, 一行非惟目飽奇觀, 幷得口飽異味, 諺云"金剛山食後景", 似爲余準備語者. 回過高城郡, 西行三十里, 至溫井里. 此有溫泉, 浴之可療疾. 名山下, 兼名泉焉, 故來者雲集, 旅館盛況若大處. 南越小嶺, 入神溪寺. 寺在山中寬平處, 後有小岡遮巨山, 左右細阜亦掩山根, 谷氣可愛也, 殿閣亦傑構也. 寺有莊祖願堂, 以正祖崇儒之高見, 必不尊親以非禮, 抑以事在莊祖生前, 故不之改歟? 夫此山有四大寺, 論以基址, 楡岾爲首, 神溪次之, 表訓次之, 長安爲下; 論以梵宇壯麗、刱建久遠, 楡岾亦爲首, 表訓次之, 神溪、長安爲下. 夜宿洞口旅館. 見館前高峯下長谷中有白色物延長數十丈, 初以爲白石或沙汰矣, 諦視之, 乃積雪也, 而寺門以東凡深谷斷壑, 在在皆然, 蓋爲山之北麓故也. 余乃驚歎曰: "湖南之於此山, 不過千里, 而氣候之頓異, 乃至此乎? 霧在嶺所見之木始葉艸旋枯, 猶不足怪也. 嘗見古詩'五月天山雪'之句, 謂'在殊方絶域, 人所罕見, 詩人之詞, 容有浮實', 孰謂吾邦千里內, 身親見之乎? 非獨萬疊金剛之爲壯觀, 卽此五月積雪, 乃希覯之奇觀也. " 二十九日. 早飯後束裝, 指南而行, 爲觀九龍淵而轉上毘盧峯也. 行十里許, 得一石門, 形若表訓東所在者, 而益復深窄, 艱容一人. 此所謂外金剛門, 甚矣, 天之護愛勝觀, 至設內外之門歟! 自此以上, 路甚崎嶇, 雖經繕治, 奈何乎天險? 木棧鐵欄, 在在備防, 所慮則無矣. 行數里, 得玉流溪, 聞其名, 其溪可知. 但在此山中, 故不甚著, 大賢父兄之下, 雖有過人行, 不見盛稱者, 其若此歟! 越一岡, 又得飛鳳瀑. 瀑落懸壁可千餘尺山, 形似鳳擧頭, 水之落者不多, 而觸於巉巖, 故揚起回旋, 作飛鳳翔, 肇錫名者, 眞善狀也. 遂題一詩曰: "細瀑懸巉壁, 揚旋作鳳翔. 紫烟飛倒上, 瑞雪噴初雱. 何日剜神斧, 玆來刮俗眶? 有能飢不粟, 飮此可充腸. " 又越一岡, 聞有聲, 殷殷若雷霆之震於天上, 知是九龍淵瀑布也. 聲漸近而步漸進, 遠遠觀望, 皓皓若天女之下垂千尺練布, 蜿蜿若風伯之驅倒一隻白龍, 誠可駭也. 徐前而觀, 則水之落者, 其量可敵川; 巖之立者, 其直卽成壁. 水多故聲壯, 巖直故勢猛. 下成大石臼受水, 乃一色碧玉淵, 廣可一畝, 深不可測, 懍然眩精, 旣不敢迫視, 耳聾於雷吼, 衣沾於雪噴, 亦不能久留也. 聞之居人, 瀑長三百餘尺, 淵深四十五尺, 而九龍則今不在云. 洞天廣豁, 盤石亦好, 石刻尤菴手筆"怒瀑中瀉使人眩精"八字, 又有"千丈白練萬斛眞珠"八字, 此未知誰筆. 蓋雖不敢迫視, 久留石上坐觀, 又不忍舍去. 昔崔北到此曰"天下名士崔七七, 遇天下名勝而死", 因跳身投淵, 傍人救之, 得不死. 崔雖狂興所使, 因此亦可見其奇絶也. 乃賦一詩曰: "倒瀉白銀漢, 翻成碧玉淵. 雪霜飛夏日, 霹靂起晴天. 駭眼初望遠, 眩精却怕前. 廬山那勝此? 而我非靑蓮. " 自此西越一洞, 聞有八潭之勝, 而料亦與萬瀑洞所見者, 略相上下, 故不觀. 自此南上三十里, 則可到毘盧. 然一行中有憚飛沙門危驗而不決者, 乃改圖迂路計, 回到神溪寺, 雖嫌脚力之困, 然因此可探未盡之觀者, 爲差强也. 寺中聞有金東信高僧, 欲與一話, 而一行皆促歸程, 又金是隆老, 而難與酬酌云, 故且已之, 入此名山而未得山僧之最高者與之語者, 一欠事也. 且夫僧侶之外, 有抱道負才深藏不市之士或在此山, 而尙未之遇, 何哉? 豈遇之, 而以我爲不足與語者, 故外之歟? 抑以近日此山, 異類汚之, 非復前日之金剛, 故舍之而他去歟? 可恨也已. 三仙菴、普光菴, 聞在此近, 而幷不觀. 日過午, 催步出溫井里, 西轉而行, 至葛峯店而宿. 山行二十里, 雖無奇玩異觀, 兩壁蒼翠, 百度溪澗, 亦非凡境. 暗誦止浦先祖《分水嶺道中》詩"杜鵑聲裏但靑山, 竟日行穿翠密間. 渡一溪流知幾曲? 送潺潺了又潺潺. "二聯曰: "先人詩, 已寫此地境色, 後人雖欲有詩得乎?" 夜見天色不甚暗, 疑有月光, 而旋覺爲晦夜. 但見群峯之刪出白玉者, 環立牕前, 玲瓏相照, 致此夜明, 然後眞知此山之秀靈, 有難與不知者道矣. 五月初一日. 早行數里, 登所謂萬物相. 蓋峯巒巖石之奇怪者, 都聚於此, 而肖相萬物, 故得是名. 余有《萬物相歌》一篇, 觀此可想其槪也. 歌曰: "將軍甲冑臨戰陣, 旗幟鎗釰耀星日. 三千弟子陪聖師, 盈架充棟積緗帙. 淸廟顯相儼冠冕, 樽俎籩豆陳秩秩. 勻天廣樂何日作? 樅樅崇牙猶不輟. 燭臺香爐排整齊, 群僧府首禮尊佛. 君王田獵暮夜歸, 列炬千把燄燄爇. 百鳥翩翩爭追隨, 鳳翔千仞出丹穴. 狐狸雉兎驚不定, 東靑韓盧搏噬烈. 尖尖筆鋒不可數, 雨後竹笋亂抽出. 觺觺鹿角交相掎, 千年枯木但餘骨. 酷肖萬物不止此, 那得箇箇形筆舌? 謂天有心歟, 造化必不勞屑屑. 謂天無心歟, 奇巧安能似此密? 厥理茫茫不可詰, 應是山河開闢日, 有若磨麪紛不一. 不期其巧自然成, 天亦莫能知其實. 俗眼無端驚相視, 有心無心更何說? 請看至人應萬事, 更有非常神出沒. 還是常中奇變處, 不必世人看自別. " 又有新萬物相、奧萬物相二處, 而想亦與此大同小異, 故不往觀, 蓋至此而外金剛探勝畢矣. 夫自毘盧峯以南內霧在嶺以內, 謂之內金剛, 毘之北內霧之外, 謂之外金剛, 勝狀多少, 內外相敵. 農巖日記謂"內山多石少土, 外山多土少石", 此非實際. 金剛一山都是石, 石者山骨也, 其名皆骨者, 乃實際語. 其云萬二千峯者, 想亦幷指山上石角之尖尖峭出者言, 山雖大矣, 豈實有可名之峯若是其多哉? 若謂之內山之石多於外山, 外山之土多於內山, 則可矣. 踰溫井嶺, 歷新豊里, 至末輝里, 乘車復入長安旅館, 爲行具在此也. 此去毘盧四十里强, 一行皆急於農務之歸檢, 且憚登陟之艱苦, 欲以翌日徑歸. 余曰: "毘盧, 金剛之第一大觀, 至東魯而但見十哲, 不見孔聖可乎? 且不聞爲山而虧一簣, 掘井而不及泉, 爲有始無終之恥乎?" 這兩段善喩, 動得一行心情. 卽共催行上去, 僅到表訓寺前, 日力脚力俱盡矣. 因宿于此, 乃日前舊館也. 館嫗以其親庭在全州, 謂我同道人, 款待一倍加厚. 夜作與舍弟汝安書, 略言未得同來之歎及感愴新羅太子遺迹之意, 又作二詩, 一謝子貞, 一寄族弟希淑【賢述】. 謝子貞詩曰: "好事元難得自由, 此行竟失與君儔. 東來到處多名勝, 老去差强散鬱幽. 滄海茫茫何地限? 剛山矗矗半天浮. 更登高處回頭望, 其奈今朝少一愁?" 寄希淑詩曰: "物外金剛迹, 聯筇早晩期. 矯龍何久蟄? 倦鶴亦高飛. 九瀑洗心處, 毘峯縱眼時. 少君奇絶話, 回首悵然思. " 初二日. 復過萬瀑洞、摩訶衍, 北折而上毘盧, 風雲起揚, 雨意孔大. 然已至半途, 進退兩難, 只得勇往直前. 已而風勢乍宿, 雲氣忽開, 比及絶頂, 朗然一新天地. 余戱謂一行曰: "衡山開雲, 非獨韓文公然也. 吾儕雖失於人, 豈其得於天者耶?" 擧目四望, 西南北三面都是山, 想皆高峯巨岳鎭省鎭郡者, 而俯視之, 抔抔培塿若席上舖豆. 東面則大海, 而水與天接, 不能遠視, 但見若一平湖矣. 雲雨低回於眼下, 天風砭入於骨裏, 儘覺其爲高處. 人言"東國高處, 白頭山爲最, 此峯次之", 應是實驗者言也. 昔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蓋言所處益高, 則所見益下也, 登玆山而不知平日患得患失狗苟蠅營之可恥者, 眞非人哉. 彼梯山航海, 窮兵黷武而奪人國者, 亦獨何心? 噫! 安得復見隣國各安其業之治世也? 睠彼海以東日本也, 會稽之恥, 新亭之淚, 豈可須臾忘? 但使彼之君相登此而如悔其奪人肥己之罪, 則安知不赧然慙愧也乎? 抑徒以目觀而不以心觀, 則吾又未可知也. 遂有詩一篇曰: "一陟蓬萊上上峯, 地窮東海更無東. 乍驚眼底雲霞白, 忽覺頭邊日月紅. 得失榮枯都幻夢, 存亡興廢總成空. 衆生安得齊登此, 恢拓胸衿作大公?" 向日靑僧說太子墓在毘盧峯西北, 故計以此時拜謁, 至作告文一度矣. 至今觀之, 滿山樹林, 無路可覓, 幷無人可問者, 待到尋省, 當費一日. 顧一行之歸心如矢, 尙欲舍毘峯不觀者, 其肯聽我乎? 千里遠行, 獨自落後, 亦所未便. 數日準擬者, 竟歸虛境, 甚是悵缺. 只錄告墓文如左, 其文曰: "維檀君立國四千二百六十三年歲次庚午五月戊寅朔二日己卯, 遠孫籍貫扶寧金澤述焚香再拜, 敬告于新羅王太子之墓曰: '嗚呼我祖, 天地剛氣, 河岳秀靈. 値羅末劫, 我祖挺生. 有麗日强, 席捲三韓. 貔貅南下, 勢若崩山. 父王讓國, 事出無柰. 赤誠忠諫, 斷以大義. 千年社稷, 不可輕棄. 背城一戰, 至死無二. 字字惻怛, 上蒼可質. 言不見用, 時局變置. 默究義諦, 我適何地? 睠彼皆骨, 有幽其谷. 有麻其衣, 有草其食. 山哀浦咽, 有痛其哭. 從者如雲, 有軍三億. 視彼松岳, 豈忘一日? 天數有定, 竟難人力. 望臺之西, 築城作室. 須彌之菴, 天年以卒. 生平歷史, 俱有可述. 毘盧之北, 有肅塋域. 僧俗趨走, 爭禁樵牧. 貞忠大義, 能致是若. 在昔漢亡, 有若劉諶. 凜凜生氣, 誦傳古今. 殊世異域, 公乃一心. 東京義烈, 北地英風. 八字石刻, 尙論之公. 嗚呼! 皆骨之勝, 天下奇絶. 諫逃之蹟, 萬古卓截. 此山此蹟, 相得益章. 我來探勝, 因拜斧堂. 事雖夤緣, 致敬則專. 顧瞻河山, 已改前色. 所値之同, 曠感益切. 寂寞窮山, 獻文一幅. 赤心一片, 無今無昔. 嗚呼尊靈, 庶垂鑑燭. '" 是夕, 復來宿于長安旅館. 初三日. 回程歸家, 復聯乘三車計也. 前聞斷髮嶺上, 可以觀金剛全體眞面, 今以乘車而穴嶺出入, 故未見其皓然封雪之色、飄然出塵之像之全體, 是可欠也. 夫觀宮室, 先看外面大體, 然後入而細看幾多間架, 觀人亦然. 今余則反是, 先見山中細觀, 而大體尙未見, 坡翁所謂"不識2)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3)山中"者, 於是乎可驗矣. 雖然, 入山而登毘盧之最高, 耽楡岾之淸邃, 玩正陽之超豁, 叫九龍、萬瀑之奇壯, 賦萬物相之怪妙, 此六者金剛之大觀也. 蓋此六觀, 則所謂大體卽在是矣. 夫此山, 忠義而有羅太子、金梅月之遺蹟, 道學而有栗、尤、農、老之遊, 文章而有崔孤雲、楊蓬萊之筆, 其外達官名士之迹, 至不可計. 然從初開荒作主, 彌滿山谷者, 佛家人也. 觀乎錫山名以金剛, 已可知矣, 毘盧、觀音、地藏、須彌、法起諸峯之名亦是已. 靑僧向謂"取金太子之剛義, 名以金剛"者, 似有理, 而恐非其實也. 今日便作世界之公園而佛家將不得作主, 此亦可觀世變也. 余有一詩, 統吟全山, 詩雖不格, 寫實則可矣. 詩曰: "聞說三神在海東, 此山絶勝得參同. 千峯白攢疑封雪, 萬瀑爭喧怒起風. 剛、骨、楓、萊交幻際, 儒仙道釋往來中. 地靈亦識今時態, 許作公園世界通. " 余於此, 又有一說焉. 夫所貴乎名山者, 非徒以水石奇絶, 實以超然僻遠, 人所罕到也, 故有稱之以"物外仙境"、"別有天地"者此也. 昔聞金剛山, 非有淸緣者不得到, 今則雖貪夫汚漢, 苟有錢者, 可朝發而夕至. 是以車轍人迹, 成山成海, 惡在其爲仙境別天乎? 老僧有發金剛淸遊破壞之歎者, 其旨深矣. 又念仰此山而生活, 有旅館者、案內者、寫眞者、刻字者、擔轎者, 蓋不知其幾多人, 內山之長安洞口、外山之溫井里築館者, 尙未已也. 由此觀之, 全國之財, 耗費此山者, 歲計之, 又不知其爲幾多巨額. 然其仰食者, 終是我人也, 則是所謂楚人失之, 楚人得之, 猶無傷也. 觀此頭勢, 至其大利所在若旅館者, 不幾年, 安知不爲彼人所占乎? 夫鍾, 喜而擊之則樂, 悲而擊之則哀. 遊觀亦然, 以喜心觀之, 爲壯觀, 以不平心觀之, 可謂悲觀, 苟爲悲觀, 又何事乎觀? 雖然, 此山之淨無氛埃、山外東海之水無際涯二觀之壯, 咸萃一處, 彌萬古而不改, 則又初無關於人情之悲喜. 山無氛, 可以鎖吾之物慾; 水無際, 可以恢吾之德量, 學者之於金剛一觀, 終有不可已者, 有如是矣. 因統記全山之所觀感者, 以備同志者之先覽焉. 庚午五月上旬日, 歸家淨題. 천하의……싶다 남송(南宋) 조사서(趙師恕)의 말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조사서가 나대경(羅大經)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세 가지 소원이 있는데, 첫째 소원은 세상의 좋은 사람을 모두 아는 것이요, 둘째 소원은 세상의 좋은 글을 모두 읽는 것이요, 셋째 소원은 세상의 좋은 산수를 모두 구경하는 것이다.〔某平生有三願: 一願識盡世間好人, 二願讀盡世間好書, 三願看盡世間好山水.〕"라고 하였다. 《鶴林玉露》 소황문(蘇黃門)은……하였으니 소철(蘇轍, 1039~1112)의 〈추밀원 한태위에게 올리는 편지[上樞密韓太尉書]〉에 보인다. 소황문은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지낸 송대의 학자 소철을 가리킨다. 《唐宋八大家文鈔》 영환지략(瀛環志略) 중국 청(淸)나라의 서계여(徐繼畬)가 편찬한 세계 지리서로, 1850년 간행되었다. 옛 덕을 먹는 조상의 음덕에 의해 먹고 산다는 말이다. 《주역》 〈송괘(訟卦) 육삼(六三)〉에 "옛 덕을 먹어 정하면 위태로우나 끝내 길하리라.〔食舊德, 貞厲, 終吉.〕"라고 하였다. 원당(願堂) 죽은 사람의 화상(畵像)이나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을 이르던 말이다. 제명(題名) 명승지에 온 것을 기념하여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삼억(三億) 실제로 30만을 이른다. 고대에는 10만을 '억(億)'이라 하였다. 신라사(新羅史)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를 말한다. 간과……바르도록 전쟁으로 참혹하게 죽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경(東京)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慶州)를 가리킨다. 북지(北地) 촉한 후주(蜀漢後主)의 아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을 말한다. 촉한이 위장(魏將) 등애(鄧艾)에 의해 항복하게 되자, 그는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옳다면서 항복을 반대하고 소열묘(昭烈廟)에 들어가 통곡하다가 자살하였다. 《三國志 蜀志》 마루……안 된다 안전에 유의하여 위험한 곳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패릉(覇陵)에 올라갔다가 험한 비탈길을 말을 타고서 질주해 내려오려 하자, 원앙(爰盎)이 "재산이 천금인 집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家累千金, 坐不垂堂.〕"라는 말을 인용하며 만류하였다. 《史記 袁盎列傳》 시왕(十王) 저승에 있다는 진광왕(秦廣王)ㆍ초강왕(初江王)ㆍ송제왕(宋帝王)ㆍ오관광(伍官王)ㆍ염라왕(閻羅王)ㆍ변성왕(變成王)ㆍ태산왕(泰山王)ㆍ평등왕(平等王)ㆍ도시왕(都市王)ㆍ오도전륜왕(五道轉輪王)을 말한다. 선사(先師)께서……유람하였으니 저자의 돌아가신 스승 전우(田愚)는 23세이던 1863년과 25세이던 1865년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파선(坡仙)의……않는다 파선은 동파(東坡) 신선으로, 소식(蘇軾)에 대한 미칭이다. 소식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속의 밝은 달은 귀로 들어오면 소리가 되고 눈에 담겨지면 색깔을 이루는데, 이를 취하여도 막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조물주의 무진장한 보배이다.〔惟江上之清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라고 하였다. 정호음(鄭湖陰) 호음은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의 호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로, 사간ㆍ부제학ㆍ예조 판서ㆍ대제학ㆍ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칠언율시에 능하였으며, 당시 문단에서 그와 신광한(申光漢)을 쌍벽으로 꼽기도 하였다. 저서에 《호음잡고》, 《조천록》 등이 있다. 거원(蘧瑗)처럼……깨달았네 자신의 과거사를 회고하여 현재까지의 잘못된 행위를 깊이 후회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거원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어진 대부(大夫)로, 자는 백옥(伯玉)이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거백옥은 나이 50세에 49년의 잘못을 알았다.〔蘧伯玉行年五十, 知四十九年之非.〕"라고 하였다. 조(趙)나라……세우는 후대 사람들이 옛 사람들의 시판(詩板)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시판을 걸어 놓은 행위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한신(韓信)이 조(趙)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공격할 때 배수진을 쳐서 조나라 군대를 성 밖으로 유인해 내는 한편, 날랜 기병(騎兵) 2,000명으로 하여금 비어 있는 성에 들어가 조나라의 흰 깃발을 뽑아 버리고 한(漢)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게 하였다. 성 밖으로 나온 조나라 군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한신의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성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붉은 깃발을 보고는 성이 이미 함락된 줄 알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시도(市道) 이익만 중히 여기고 의리는 망각하는 장사꾼의 태도를 말한다. 허연(許燕)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신인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과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을 가리키는 말로, 두 사람 모두 문장이 뛰어났기 때문에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로 일컬어졌다. 양봉래(楊蓬萊) 봉래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이다. 1546년(명종1)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철원 부사(鐵原府使) 등 주로 외직을 지냈는데, 회양 군수(淮陽郡守)로 있을 적에 금강산을 여러 번 유람하고 글씨를 남겼다. 서법은 해서와 초서에 두루 뛰어났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ㆍ김구(金絿)ㆍ한호(韓濠)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기수(沂水)에서……즐거움 물욕을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갓을 쓴 사람 5, 6인에다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하였다. 《論語 先進》 맑은……전하리 주희(朱熹)의 칠언율시 〈백록강회차복장운(白鹿講會次卜丈韻)〉 중 5, 6구이다. 세상……않겠는가 《회암집(晦菴集)》 권9에 나오는 칠언율시의 5, 6구이다. 제목은 〈승사탁장치주백운산거……(承事卓丈置酒白雲山居……)〉인데, 어느 본에는 〈백운사송저가백승(白雲寺送儲柯伯升)〉으로 되어 있다. 우암(尤菴)의 글씨 1662년(현종3) 3월에 송시열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쓴 것이라 한다. 《宋子大全附錄 卷4 年譜》 《宋子大全隨箚 卷9》 우로(尤老)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지칭한다. 김몽와(金夢窩) 몽와는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이다. 1684년(숙종10)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왕세제(王世弟)로 하여금 대리청정하도록 주청하였다가 소론들에게 불충으로 탄핵되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사사(賜死)되었다. 저서에 《몽와집》 등이 있다. 오노주(吳老洲) 노주는 오희상(吳煕常, 1763~1833)의 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800년(정조24) 천거로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되고, 황해도 도사 등을 지낸 뒤,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고 이후 찬선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저서로는 《노주집》이 있다. 노사(蘆沙) 기공(奇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으로, 노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이다. 조선 후기 대학자로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 철학을 수립하였다. 저서로 《노사집》ㆍ《답문유편(答問類編)》 등이 있다. 경복(更僕) 시중드는 하인을 번갈아 세울 정도로 주객(主客)의 담화가 길게 이어짐을 이른다. 애공(哀公)이 유행(儒行)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가 대답하기를 "갑작스레 헤아려 말해서는 다 얘기할 수 없고 자세히 다 얘기하려면 오래 머물러야 하니, 종을 번갈아 세우더라도 다 말할 수 없습니다.〔遽數之, 不能終其物, 悉數之乃留, 更僕未可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儒行》 가람(伽藍) 승가람마(僧伽藍摩)를 줄인 말로, 승려(僧侶)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을 말한다. 유기일(柳基一) 1845~1904.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ㆍ용서(龍西)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다.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척양록(斥洋錄)》 등의 저술 활동과 문인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는 《용서고(龍西稿)》가 있다. 조대(措大)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빈사(貧士)나 빈유(貧儒)와 같은 뜻이다. 오계(五戒) 불가에서 행하는 5가지 경계로, 생물을 죽이지 말고[不殺生], 훔치지 말고[不偸盜], 사음하지 말고[不邪淫],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不妄語], 술을 마시지 말 것[不飮酒] 등을 말한다. 호남을…만하나 중국의 기북(冀北)은 준마(駿馬)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유명한데, 호남은 기북처럼 고승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라는 말이다. 사명일(四名日) 한 해의 네 명일로, 정월 초하루[元朝]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ㆍ동지(冬至)를 말한다. 제동(齊東)에 붙여야 한다 황당무계하여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제동'은 제나라 동쪽 야인(野人)들의 말로, 근거가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맹자의 제자인 함구몽(咸丘蒙)이, 순(舜)이 천자가 되자 요(堯)와 고수(瞽瞍)가 순을 섬겼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맹자가 이는 제나라 동쪽 야인들의 말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 《孟子 萬章下》 조반(早飯)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간단하게 먹는 음식으로, 대개 죽을 먹었다. 영평(永平)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연호로, 58~75년에 해당한다. 거대한……하였으니 일본으로 하여금 침략의 야욕을 버리게 하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경파(鯨波)'는 왜적의 침략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주출강릉남포봉기정소윤심(舟出江陵南浦奉寄鄭少尹審)〉에 "바다에는 고래 물결이 무겁게 일고, 형양에는 기러기 그림자가 막혔어라.〔溟漲鯨波重, 衡陽雁影徂.〕" 하였다. 설홍유(薛弘儒) 설총(薛聰, 655~?)을 가리킨다. 신라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신라 3문장(三文章)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유학과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벼슬은 한림에 이르렀다. 고려 때 홍유후(弘儒侯)에 추증되었다 한다. 최문창(崔文昌) 최치원(崔致遠, 857~?)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이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 되었다. 심약(沈約) 441~513.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의 학자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무제(武帝) 때 상서령(尙書令)을 지냈으며,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을 잘하였으며, 장서(藏書)가 2만 권에 이르렀다. 《梁書 卷13 沈約列傳》 심약(沈約)의……다했다 《고운집(孤雲集)》 권2 〈진감화상비명(眞監和尙碑銘)〉에 보인다. 두 종교만이……어려웠다네 《고운집》 권3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에 보인다. 유(類)를 알지 못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손가락이 남들과 같지 않으면 이것을 싫어할 줄 알되 마음이 남들과 같지 않으면 싫어할 줄 모르니, 이것을 일러 유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指不若人, 則知惡之; 心不若人, 則不知惡, 此之謂不知類也.〕" 하였는데, 주희의 주(注)에 "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경중(輕重)의 등급을 알지 못함을 말한다." 하였다. 상론(尙論) 옛사람의 언행이나 인격을 논하는 것을 뜻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선사와 벗하고도 부족하여 옛사람을 상론한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파촉(巴蜀)의 잔도(棧道) 중국 사천(四川) 지방에 있는 험준한 절벽에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낸 길을 말한다. 청련(靑蓮)의……어렵구나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 구절을 말한다. 이백은 촉도(蜀道)의 형세를 형용하면서 "아! 위태롭고도 높아라, 촉도의 험난함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噫吁戲,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하였다. 여산(廬山)의……때문이라네 소식(蘇軾)의 시 〈제서림벽(題西林壁)〉에 나오는 구절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여덟 군데의 명승지로, 간성(杆城)의 청간정(淸澗亭)ㆍ강릉(江陵)의 경포대(鏡浦臺)ㆍ고성의 삼일포(三日浦)ㆍ삼척(三陟)의 죽서루(竹西樓)ㆍ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ㆍ울진(蔚珍)의 망양정(望洋亭)ㆍ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ㆍ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을 말한다. 사선(四仙) 신라의 네 국선(國仙)으로, 술랑(述郎)ㆍ남랑(南郎)ㆍ영랑(永郎)ㆍ안상랑(安祥郞)을 이른다. 대체로 효소왕(孝昭王) 때를 전후하여 활약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설에는 신라 이전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자주 강원도 지역으로 놀러 다녀 많은 유적을 남겨 놓았다. 방사(方士) 도사(道士)의 별칭으로, 선술(仙術)을 부리는 사람을 말한다. 봉래(蓬萊) 본래 동해에 떠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신선이 거주한다고 한다. 망미가(望美歌) 신하가 임금[美人]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내가 노래하여 말하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나무 상앗대로 물속의 달그림자를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네. 아득하고 아득한 내 마음이여! 미인을 바라보니 하늘 한쪽에 있네.'라고 하였는데, 객중에 퉁소를 부는 자가 있어 노래에 맞추어 화답하니.〔歌曰: 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 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라고 하였다. 제향(帝鄕)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로,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乘彼白雲, 至於帝鄕.〕"라고 하였다. 망양(亡羊) 다기망양(多歧亡羊)의 준말로, 여기서는 덧없는 인생을 마침을 뜻한다.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고 온 사람들을 다 동원하여 찾다가 못 찾고 돌아오기에 양자가 양을 찾았느냐고 묻고, 못 찾았다고 하니 양자가 "어째서 잃었는가?"라고 묻자, "갈림길 속에 다시 갈림길이 있어 나는 양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기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심도자(心都子)가 말하기를 "대도(大道)는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고, 학자는 방도(方道)가 많아 생명을 잃는다."라고 하였다 한다. 《列子 說符》 의지(意志) 원문의 '척량(脊梁)'은 등뼈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람의 의지를 가리킨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52에 "하물며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약한 때를 만났으니 더욱 의지를 굳게 가져서 굽힘이 없어야만 얻을 수 있다.〔況當世衰道微之時, 尤用硬着脊梁, 無所屈撓, 方得.〕"라고 하였다. 원당(願堂) 죽은 사람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던 일종의 법당(法堂)을 말한다. 오월에도……쌓이네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새하곡 6수(塞下曲六首)〉 가운데 첫째 시의 1구이다. 최북(崔北) 1712~1786. 본관은 무주(茂朱), 자는 성기(聖器)ㆍ유용(有用), 호는 성재(星齋)ㆍ기암(箕庵)ㆍ거기재(居其齋)ㆍ삼기재(三奇齋)ㆍ호생관(毫生館)이다. 조선 영조(英祖) 연간의 화가로, 그의 이름자인 북(北) 자를 파자(破字)하여 최칠칠(崔七七)로 불렸다 한다. 서울에 살면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렸고, 술과 유람을 매우 좋아하였다. 이익(李瀷)을 비롯하여 정범조(丁範祖)ㆍ남공철(南公轍)ㆍ천수경(千壽慶)ㆍ장혼(張混) 등과 같은 당대의 명류들과 교류하였다. 청련(靑蓮)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701~762)을 말한다.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지포(止浦) 김구(金坵, 1211~1278)의 호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차산(次山),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충렬왕 즉위 뒤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ㆍ참문학사(參文學事)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신종ㆍ희종ㆍ강종ㆍ고종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고, 당시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때에 일을 잘 처리하였다. 청묘(淸廟)에서……엄숙하고 종묘(宗廟)에서 제관이 예복을 엄숙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청묘는 종묘(宗廟), 현상(顯相)은 제사를 돕는 사람, 관면(冠冕)은 고관이 쓰는 예관(禮冠)을 말한다. 숭아(崇牙) 악기를 다는 틀에 설치하여 종이나 경을 다는 장치이다. 《예기》 〈명당위(明堂位)〉에 '은나라의 숭아〔殷之崇牙〕'라고 하고, 주에 "순(簨) 위에 나무를 깎고 그림을 그려 숭아 형태를 만들어서 종과 경을 거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농암(農巖)의 일기(日記) 《농암집(農巖集)》 권23 〈동유기(東游記)〉를 말한다.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철 이름이다. 십철(十哲) 공자(孔子)의 제자 중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열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안회(顔回)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ㆍ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염유(冉有)ㆍ자로(子路)ㆍ자유(子游)ㆍ자하(子夏)를 가리킨다. 여안(汝安) 저자의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의 자(字)이다. 형산(衡山)에서…것 옛날 한유(韓愈)가 형악(衡嶽)에 올라가 기도를 한 덕분에 운무가 걷혔다고 한 것을 말한다. 한유의 시에 "내가 찾아온 것은 마침 가을비 내리는 계절이라, 음기가 어둑하건마는 씻어낼 맑은 바람도 없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없이 기도를 올리니 뭔가 반응이 있는 듯도, 신명이 어찌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는가. 조금 있자 운무가 개며 드러나는 뭇 봉우리, 쳐다보니 우뚝하게 창공을 버티고 서 있구나.〔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默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靜掃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라는 구절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3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공자(孔子)가……여겼다 공자가 자연 속에서 높은 기상을 길렀다는 것으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회계(會稽)의 수치 원수에게 패한 수치를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에 오(吳)와 월(越)이 서로 원수로 지내던 중에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공격을 당해 패전(敗戰)하자, 회계에 있으면서 오왕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가 되기를 애원하여 겨우 살아나 마침내 보복을 하였다.《史記 卷42 越王句踐世家》 신정(新亭)의 눈물 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탄식하며 슬퍼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일찍이 동진(東晉)의 명사(名士)들이 신정에 올라가 연음(宴飮)하면서, 쇠잔한 국운(國運)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던 데서 온 말이다. 의체(義諦) 불교용어로서 진체(眞諦)와 같고, 가장 진실한 도리를 가리킨다. 예전에……있었네 위(魏)나라 군사가 대거 침입하여 후주(後主)가 항복하려 하자, 유심(劉諶)이 화를 내면서 "만약 힘이 모자라 패하게 되면, 부자 군신이 힘을 합쳐 성을 등지고 한번 싸우다가 사직과 함께 죽어 선제(先帝)를 뵙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반대하였으나, 후주가 끝내 항복하므로 유심이 유비(劉備)의 사당에 사실을 고하고 처자를 죽인 다음 자살한 일을 말한다. 《三國志 卷33 蜀書3 後主傳》 유심은 북지왕에 봉해졌던 촉한(蜀漢) 후주의 아들이다. 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데 대한 감회를 말한다. 세 가지 차 저자가 금강산으로 올 때 이용하였던 기차, 전차, 자동차 등을 말한다. 금강(金剛) 금강석을 가리키는데, 불교에서 그 단단하고 부서지지 않는 특성을 부처의 지혜나 불법 등의 상징으로 여겼다. 《大藏法數 卷41》 삼신산(三神山)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하는 선산(仙山)인데, 그 이름은 봉래(蓬萊)ㆍ방장(方丈)ㆍ영주(瀛洲)이다. 유선(儒仙) 유학(儒學)하는 사람으로 신선의 풍치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초(楚)나라……무방하다 득실(得失)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지니는 것을 뜻한다. 옛날 초나라 왕이 사냥하다가 활을 잃어버리자 신하들이 찾아오겠다고 하였는데, 왕이 "초나라 왕이 활을 잃어버리면 초나라 사람이 얻을 텐데 무엇 때문에 찾는단 말이냐?〔楚王遺弓, 楚人得之, 又何求乎?〕"라며 그만두게 하였다는 고사를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今 底本에는 "合". 《宋子大全》 卷101 〈答鄭景由〉ㆍ《圃陰集》 卷6 〈東游記〉 등에 근거하여 수정. 識 底本에는 "見". 《東坡全集》 卷13 〈題西林壁〉에 근거하여 수정. 此 底本에는 "廬". 上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