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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김양묵(金養默) 고신(告身)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同治三年四月二十一日 高宗 金養黙 同治三年四月二十一日 高宗 金養默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64년(고종 1) 4월에 국왕이 김양묵(金養默)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간원정언(行司諌院 正言)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 1864년(고종 1) 4월 21일에 국왕이 김양묵(金養默)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간원정언(行司諌院 正言)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堂下官)의 품계이다. 사간원은 사헌부(司憲府)와 함께 대간(臺諫)이라 불렀고, 홍문관(弘文館)과 함께 삼사(三司)라 하였고, 형조(刑曹)·사헌부와 함께 삼성(三省)이라 하였다. 정언은 사간원의 정6품의 관직이다. 통훈대부의 품계가 관직인 사간원정언의 품계보다 높았기 때문에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行)자를 표기하였다. 한편, 문서 배면(背面) 좌측 하단에는 '吏吏金貞益'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고신을 작성한 이조의 서리이며, 김정익는 서리의 이름이다. 부안 김씨 김양묵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배면을 보면 김정익뿐만 아니라 김형복, 김정호 등의 김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김씨 성이 대를 이러 부안 김씨 가문의 단골 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김양묵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1829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받았던 고신(告身)들이 그의 후손 가에 오늘날도 전하고 있다. 특히 그가 문과 응시 당시 작성했던 시권(試券)과 급제하여 받았던 홍패(紅牌)를 비롯하여, 고신 16점, 차첩 2점 등 20점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김응상(金膺相)과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와 증조할머니, 고조와 고조할머니 등이 받았던 고신 20점이 전하고 있는데 대부분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이 추증교지는 김응상이 고신을 받을 때마다 함께 받았던 것들이다. 고신 외에 김응상이 1819년부터 1855년까지 작성했던 호구단자(戶口單子) 7점도 전하고 있어서 그의 가족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응상은 생전에 부안현 남하면 돈계리에 내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오늘날의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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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김양묵(金養默)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十四年四月二十日 純祖 金養黙 道光十四年四月二十日 純祖 金養默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34년(순조 34)에 4월에 국왕이 김양묵(金養默)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지평(行司憲府持平)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 1834년(순조 34) 4월 20일에 국왕이 김양묵(金養默)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지평(行司憲府持平)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堂下官)의 품계이다. 사헌부장령은 사헌부의 정5품 관직이다. 통훈대부의 품계가 관직인 사헌부장령의 품계보다 높았기 때문에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行)자를 표기하였다. 한편, 문서 배면(背面) 좌측 하단에는 '吏吏金貞浩'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고신을 작성한 이조의 서리이며, 김정호는 서리의 이름이다. 부안 김씨 김양묵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배면을 보면 김정호뿐만 아니라 김형복, 김정익 등의 김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김씨 성이 대를 이러 부안 김씨 가문의 단골 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김양묵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1829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받았던 고신(告身)들이 그의 후손 가에 오늘날도 전하고 있다. 특히 그가 문과 응시 당시 작성했던 시권(試券)과 급제하여 받았던 홍패(紅牌)를 비롯하여, 고신 16점, 차첩 2점 등 20점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김응상(金膺相)과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와 증조할머니, 고조와 고조할머니 등이 받았던 고신 20점이 전하고 있는데 대부분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이 추증교지는 김응상이 고신을 받을 때마다 함께 받았던 것들이다. 고신 외에 김응상이 1819년부터 1855년까지 작성했던 호구단자(戶口單子) 7점도 전하고 있어서 그의 가족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응상은 생전에 부안현 남하면 돈계리에 내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오늘날의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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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김양묵(金養默) 고신(告身) 1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二十六年十一月二十日 憲宗 金養黙 道光二十六年十一月二十日 憲宗 金養默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46년(헌종 12) 11월에 국왕이 김양묵(金養默)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 1846년(헌종 12) 11월 20일에 국왕이 김양묵(金養默)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堂下官)의 품계이다. 사헌부장령은 사헌부의 정4품 관직으로 감찰(監察) 업무를 담당하였다. 통훈대부의 품계가 관직인 사헌부장령의 품계보다 높았기 때문에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行)자를 표기하였다. 한편, 문서 배면(背面) 좌측 하단에는 '吏吏金貞益'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고신을 작성한 이조의 서리이며, 김정익은 서리의 이름이다. 부안 김씨 김양묵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배면을 보면 김정익뿐만 아니라 김형복, 김정호 등의 김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김씨 성이 대를 이러 부안 김씨 가문의 단골 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김양묵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1829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받았던 고신(告身)들이 그의 후손 가에 오늘날도 전하고 있다. 특히 그가 문과 응시 당시 작성했던 시권(試券)과 급제하여 받았던 홍패(紅牌)를 비롯하여, 고신 16점, 차첩 2점 등 20점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김응상(金膺相)과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와 증조할머니, 고조와 고조할머니 등이 받았던 고신 20점이 전하고 있는데 대부분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이 추증교지는 김응상이 고신을 받을 때마다 함께 받았던 것들이다. 고신 외에 김응상이 1819년부터 1855년까지 작성했던 호구단자(戶口單子) 7점도 전하고 있어서 그의 가족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응상은 생전에 부안현 남하면 돈계리에 내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오늘날의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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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안191)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노역으로 아주 고달프니 인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라는 말이 있어 그 때문에 안타까워서 시를 지어 위로하고 면려하다 汝安書來 有勞役甚苦人生幾何語 爲之憫然 詩以慰勉 말세에다 또 잔약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生於末刦又孱門먹고 사는 데 죽과 밥인 들 어찌 싫어하랴 食力何嫌供粥飧책 속의 스승과 벗은 끝내 의지함이 있고 卷裏師朋終有賴꿈속의 권세와 이익은 또한 할 말을 잊었으리 夢中勢利亦忘言모습은 초췌하니 창주의 노인192)이요 形容憔悴滄洲叟인생살이 쓰디쓰니 옹정의 마을193)이라 味況辛酸甕井村나도 병을 앓아 지금 염려하는 것이 같으니 善病而今同所慮한가한 날 기헌194)을 강독하는 게 참으로 좋으리 端宜暇日講岐軒 生於末刦又孱門, 食力何嫌供粥飧?卷裏師朋終有賴, 夢中勢利亦忘言.形容憔悴滄洲叟, 味況辛酸甕井村.善病而今同所慮, 端宜暇日講岐軒. 여안(汝安) 김택술의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의 자이다. 창주(滄洲)의 노인 창주는 전라북도 고부군 궁동면 창동리로 작자가 태어난 곳이자, 김억술(金億述)이 태어난 곳이다. 주희(朱熹)가 만년에 고정(考亭)에 살 때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짓고 자신을 창주 병수(滄洲病叟)라고 칭한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宋子大全 隨箚 卷1》 옹정(甕井)의 마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甕中里)를 말한다. 기헌(岐軒)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의 신하인 기백(岐伯)과 황제 헌원씨를 지칭하는데, 이들은 중국 의약(醫藥)의 시조로, 의약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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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기일에 익부201), 사익202)과 함께 밤새 추모하다 先師諱辰 與翼夫士益 達夜追慕 뜰의 오동잎 떨어져 가을 기운 새로운데 葉落庭梧秋氣新스승 돌아가신 지 22년이 되었구나 山頹二十二周辰오늘 밤은 백발의 노인 세 사람 한스러운데 今宵白髮三人恨옛날에는 성대한 문하에서 하나같이 스승 섬겼네 昔日華門一事身누가 다시 심의로 회암(晦庵)을 계승할 수 있을까203) 誰復深衣能繼晦공경히 향불 피우기 좋으니 진사도(陳師道)에게 부끄럽지 않네204) 端宜瓣敬不慙陳이곳은 일찍이 스승께서 소요하던 곳이니 此爲杖屨曾經地두악205)이 높고 높아 그 모습 스승 닮았네 斗嶽巖巖像肖眞 葉落庭梧秋氣新, 山頹二十二周辰.今宵白髮三人恨, 昔日華門一事身.誰復深衣能繼晦? 端宜瓣敬不慙陳.此爲杖屨曾經地, 斗嶽巖巖像肖眞. 익부(翼夫) 오해룡(吳海龍)의 자이다. 사익(士益) 오해겸(吳海謙)의 자이다. 누가……있을까 스승을 계승할 훌륭한 제자가 없다는 말이다. 회암(晦庵)은 주희(朱熹)의 호이다. 주희가 병이 들어 위독해졌을 때, 심의(深衣)와 저서(著書)를 제자 황간(黃榦)에게 넘겨주면서 "내 도(道)의 부탁이 여기에 있다. 이제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附錄 卷6 年譜副本庚申》 공경히……않네 스승을 연모하는 정성은 다른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다. 송(宋)나라의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스승 증공(曾鞏)을 위해 지은 시에 "예전 한 줄기 향을, 증남풍을 위해 공경히 사르노라.[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고 하였다. 증남풍은 증공을 이른다. 《後山集 卷1 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 두악(斗嶽)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소재한 두승산(斗升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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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184)에게 화답하다 2수 和石田【二首】 보배로운 시편 바람에 날려 홀연 문에 들어오니 瓊什颺風忽入門음식을 보내온 것 못지않게 감사하네 感珍不讓餽饛飧정교한 솜씨는 거의 오묘한 이치 전할 수 있지만 精工庶可傳三昧나의 서툰 솜씨는 한 마디 말도 보태기 어렵구나 拙手難能贊一言석전은 세속 선비 아님을 비로소 알겠고 始識石田非俗士구동은 이름난 마을임을 이미 들었다네 已聞龜洞有名村더운 여름철 천 리나 떨어져 있는 듯하니 炎天阻隔如千里어느 날 밤에나 달 아래 집에서 함께 읊을까 何夜同吟月下軒농사와 독서 겸하고 하나만 하지 않으니 兼治耕讀不專門〈하단〉을 여러 차례 읽고 소찬을 경계하네185) 三復河檀戒素飧거현처럼 늙어가니186) 비로소 잘못을 깨닫고 老去蘧賢方覺誤석분처럼 몸소 실천하니187) 어찌 말 많이 하랴 躬行石奮豈多言산수를 노래한 옛 곡조 유독 사랑스러우니 獨憐古調歌山水세상 사람들 촌스럽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何妨時人道野村그대 흉중에 이러한 뜻 간직함을 알고 있으니 知君胸中藏此志시 한편 힘써 완성하면 벽에 걸어두리라 一詩勉就揭楣軒 瓊什颺風忽入門, 感珍不讓餽饛飧.精工庶可傳三昧, 拙手難能贊一言.始識石田非俗士, 已聞龜洞有名村.炎天阻隔如千里, 何夜同吟月下軒?兼治耕讀不專門, 三復河檀戒素飧.老去蘧賢方覺誤, 躬行石奮豈多言?獨憐古調歌山水, 何妨時人道野村?知君胸中藏此志, 一詩勉就揭楣軒. 석전(石田) 황욱(黃旭)을 가리킨다. 하단(河檀)을……경계하네 하단은 《시경》 〈벌단(伐檀)〉편으로, 벼슬아치가 공로도 없이 나라의 녹을 먹어 군자가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풍자한 시이다. 소찬(素飧)은 하는 일이 없이 공밥만 먹는 것을 말한다. 그 시에 "끙끙 박달나무를 베어, 하수(河水)의 물가에 놓아두니, 하수가 맑고도 찰랑이네.……저 군자여, 공밥을 먹지 않는도다.[坎坎伐檀兮, 寘之河之干兮, 河水淸且漣猗.……彼君子兮, 不素餐兮.]"라고 하였다. 거현(蘧賢)처럼 늙어가니 거현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인 거백옥(蘧伯玉)으로,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거백옥은 나이 50이 되어서 49년 동안의 잘못을 알았다.[蘧伯玉年五十, 而知四十九年非.]"라고 하였다. 석분(石奮)처럼 몸소 실천하니 석분은 한(漢)나라 때 사람으로, 만석군(萬石君)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자손이 잘못하면 굳이 말로 꾸짖지 않고 식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 고치게 하였다. 이를 두고 황태후가 "유자(儒者)는 꾸밈이 많고 질박함이 적은데, 지금 만석군의 집안은 말하지 않고 몸소 실천한다." 하였다. 《史記 萬石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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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부채를 읊은 시에 차운하다 次人詠扇 늘 더운 날에 쓰여 쌀 소금과 가치가 같아 常用炎天等米鹽혹리에게 통렬히 칼을 씌우네175) 却將酷吏痛加鉗장식은 제나라 비단176)을 짜서 내었고 衣粧織出齊紈柚뼈대는 위수 대나무177)를 베어 이루었네 骨質斬成渭竹鎌때로 남의 집에 들어갈 때 얼굴 가리기 좋고 時入人家遮面好밤에 귀찮은 모기 휘둘러 몸을 엄히 방비하네 夜揮蚊賊防身嚴백우와 청포178) 누가 다시 있는가 白羽靑蒲誰復在분분한 진세의 요기가 공연히 더해져 한스럽네 紛紛塵祲恨空添 常用炎天等米鹽, 却將酷吏痛加鉗.衣粧織出齊紈柚, 骨質斬成渭竹鎌.時入人家遮面好, 夜揮蚊賊防身嚴.白羽靑蒲誰復在? 紛紛塵祲恨空添. 혹리(酷吏)에게……씌우네 부채로 큰 더위를 물리쳤다는 말이다. 오대(五代) 때 범질(范質)이 벼슬하기 전에 다점(茶店)에 들어갔는데, 마침 여름이므로 손에 부채를 들었다. 그 부채에 글쓰기를 "큰 더위에 혹리가 가고, 맑은 바람에 고인이 온다.[大暑去酷吏, 淸風來故人.]"라고 하였다.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한 사나이가 앞에 와서 말하기를, "혹리(酷吏)를 어찌 큰 더위에만 비할 것이겠소. 상공(相公)께서 다른 날에 이 폐단을 깊이 살피시오." 하고는 가버렸다는 고사가 있다. 《古今事文類聚 續集 卷28 鬼擕扇去》 제(齊)나라 비단 제나라에서 생산되는 비단으로, 보통 둥근 부채를 가리킨다. 반 첩여(班婕妤)의 〈원가행(怨歌行)〉에 "지금 막 제나라의 흰 비단을 자르니, 희고 깨끗하기가 서리와 눈 같아라. 재단하여 합환의 부채를 만들었나니, 둥글고 둥근 것이 밝은 달과 같아라.[新裂齊紈素, 皎潔如霜雪.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라고 하였다. 《文選 卷27》 위수(渭水) 대나무 위수는 섬서성(陝西省) 부근에 있는 강으로, 기수(淇水)와 더불어 대나무가 많이 자라기로 유명한 곳이다. 백우(白羽)와 청포(靑蒲) 백우는 백우선(白羽扇)으로, 흰 깃털로 만든 부채이다. 《어림(語林)》에 "제갈량이 사마의(司馬懿)와 위수(渭水) 가에서 싸울 적에 흰 수레에 올라 갈건(葛巾)을 쓰고 백우선으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다."라고 하였다. 청포는 청색(靑色)의 부들자리[蒲席]를 말하는데, 옛날 임금의 내정(內庭)에만 이것을 깔았던 것으로, 간(諫)할 일이 있는 신하가 그 자리 위에 엎드려 간언(諫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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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의 원고 중에 '불초를 경계하다' 시에 삼가 차운하다-3수- 敬次先子稿中戒不肖韻【三首】 무척 한스럽네 도유221)의 봄이 막 열린지 恨切屠維春始開벌써 35년이나 지났구나 忽焉三十五年來많은 재물로 당시에 서적 천 권과 바꾸셨는데 籝金當日換千卷수레 가득한 불을 지금 한 잔의 물로 끄는 것 같네222) 車火如今救一盃저승에서 몇 번이나 남몰래 은혜 베푸셨을까 泉下幾施冥佑惠집안에서 재능으로 칭찬받지 못해 끝내 부끄럽네 家間終愧不稱才평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품속의 편지 平日最是懷中簡고송을 기대하고 버들 매화를 경계하셨지 期待高松戒柳梅일념으로 바른길 인도해 학문 성취 기대했는데 一念義方期學成인간 세상에 큰 소리로 울게 하였구나 須令人世放聲鳴처음에는 토대가 학문에 전념하기를 구하였고 初頭基址要專志결국에는 공부가 지극히 성실함에 이르렀으면 하셨지 究竟工夫到至誠풍수지탄 있으니 끝내 은혜 갚지 못함을 어이하랴 風樹其如無卒惠조롱박을 본떴으니223) 평생을 저버려 한탄스럽네 畵葫堪歎枉平生그래도 무첨과 결신의 책임224) 남아 있으니 尙餘毋添潔身責속세 끊고 물고기 새와의 맹약 홀로 찾으리라 絶俗獨尋魚鳥盟자나깨나 우리 선친 잊지 못하여 不忘寤寐我先人천지 사이에서 살며 애통한 마음 새롭구나 俯仰乾坤痛若新아이는 성취한 것 없이 이제 백발 되었으니 兒子無成今白髮옛날 청춘의 세월을 헛되이 보냈구나 光陰枉度昔靑春여생에 그저 스스로 마음 바탕 수양하리니 餘生只自治心地이 세상에서 누구와 함께 덕으로 이웃할까 此世誰同接德隣맹세컨대 평소 간곡한 가르침을 받들어 誓將平日丁寧訓남겨주신 몸 조심하며 일생을 마치리라 敬行遺體待歸眞 恨切屠維春始開, 忽焉三十五年來.籝金當日換千卷, 車火如今救一盃.泉下幾施冥佑惠? 家間終愧不稱才.平日最是懷中簡, 期待高松戒柳梅.一念義方期學成, 須令人世放聲鳴.初頭基址要專志, 究竟工夫到至誠.風樹其如無卒惠, 畵葫堪歎枉平生.尙餘毋添潔身責, 絶俗獨尋魚鳥盟.不忘寤寐我先人, 俯仰乾坤痛若新.兒子無成今白髮, 光陰枉度昔靑春.餘生只自治心地, 此世誰同接德隣.誓將平日丁寧訓, 敬行遺體待歸眞. 도유(屠維) 태세(太歲)가 기년(己年)에 있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기유년인 1909년을 가리킨다. 수레……같네 선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맹자가 "인(仁)이 불인(不仁)을 이기는 것은 물이 불을 이기는 것처럼 뻔하다. 그런데 오늘날 인을 실천하는 자는 한 잔의 물로 한 수레 가득한 땔나무의 불을 끄려고 하는 꼴인지라 꺼지지 않으면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仁之勝不仁也, 猶水勝火. 今之爲仁者, 猶以一杯水救一車薪之火也, 不熄, 則謂之水不勝火.]"라고 한 표현을 원용한 것이다. 조롱박을 본떴으니 주관이 없이 옛사람의 글만 흉내냄을 말한 것이다. 송(宋)나라의 학사 도곡(陶穀)이 글을 쓴 것을 보고 태조(太祖)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자못 들으니 한림이 지은 글은 모두 전인(前人)의 구본을 말만 바꾼 것이라 하니 이것은 곧 세속에서 이른바 '조롱박을 본뜬 것[依樣畫葫蘆.]'일 뿐이다. 어찌 힘쓴 것이 있겠는가."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東軒筆錄 卷1》 무첨(毋添)과 결신(潔身)의 책임 무첨은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고 한 데서 온 말이고, 결신은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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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신령(神靈) 및 부곽설(郛郭說)을 다시 이렇게 제기하니,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 뜻23)이 얕지 않다는 것을 족히 보겠네. 나는 가만히 다음과 같이 생각했네. 령(靈)을 오로지 말하면 신(神)이 령 가운데 있고, 신을 오로지 말하면 령이 신 가운에 있어, 실로 말할 만한 계분(界分)과 시절(時節)이 없네. 만약 '신령(神靈)' 두 글자를 상대하여 거론해서 말하면 령은 체(體)와 가깝기도 하고 용(用)과 가깝기도 하니, 령은 비교적 실(實)하고 신은 비교적 허(虛)하네. 령은 비유하자면 거울의 밝음과 같아 연치(姸媸)와 대소(大小)를 갖추어 다 드러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신이네. 기가 아니면 능히 령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령할 곳이 없으며, 기가 아니면 능히 신(神)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신할 곳이 없으니, 령과 신은 실로 모두 이기가 합한 것이라, 그대의 논의에서 신을 형이상(形而上)으로 여기고 령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겨 령의 밖에서 별도로 묘용의 신을 구하여 이 심의 주재로 삼은 것과는 같지 않네. 이와 같다면 령 밖에 신이 있고 심 밖에 이가 있어, 령은 무용(無用)의 장물(長物)이 되고 이는 작용의 별사(別事)가 되니, 이것은 작은 병통이 아닌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대가 이미 나의 설을 믿지 않고 정자와 주자의 설이 만약 이와 같은 것이 있으면 당연히 따르겠다고 여기니, 여기에서 선현을 돈독히 믿고 또한 책을 오로지 의지하지 않음이 없는 뜻을 볼 수 있겠네. 그러나 또 정자와 주자의 설로 증명해 보건대, 《중용》에서 지성(至誠)의 도를 말하면서 귀신의 덕을 인용하여 밝혔네. 귀신이라는 것은 음양의 령이니, 이것은 령이 이의 묘용처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학》의 주에 "허령불매(虛靈不昧)……"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령이 문득 능히 주재묘용 하여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곳이 아니겠는가? 정자와 주자의 설이 이와 같이 분명한데 오히려 보고 살피지 않으니, 다시 어떤 설이 이것보다 분명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부곽설 또한 그렇지 않네. 심이 주재가 되는 것은 능히 응하기 때문이네. 이것으로 부곽의 뜻이라고 한다면 가하지만, 곧장 부곽을 주재한다는 뜻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하네. 또 《주자어류》는 문인이 기록한 것이니, 어찌 친필의 《주자대전》이 더욱 믿을 만한 것과 같겠는가? 그렇다면 부곽이 심통성정(心統性情)과 같다고 말한 것은 마땅히 너무 가볍게 본 것 같으니, 다시 상세히 살펴보기를 바라네. 神靈及郛郭說。復此提起。足見不得不措之意。有不淺淺。妄竊自謂。專言靈則神在靈中。專言神則靈在神中。固無界分時節之可言。若以神靈二字。對擧而言。則靈近體近用。靈較實。神較虛。靈比如鑑之明。具姸媸大小無不畢見。此神也。非氣不能靈。非理無所靈。非氣不能神。非理無所神。靈與神。固皆理氣之合者也。非若賢論以神。爲形而上。以靈爲形而下。而於靈之外。別求妙用之神以爲此心之主宰也。如此則靈外有神。心外有理。靈爲無用之長物。理爲作用之別事。此非小病。奈何奈何。賢旣不信鄙說。以爲程朱說若有如此。則當從之。此可見篤信先賢。亦不無專靠書冊之意也。然且以程朱說證之。中庸言至誠之道。而引鬼神之德以明之。鬼神者。陰陽之靈也。此非靈爲理之妙用處乎。大學註曰。虛靈不昧云云。此非靈之便能主宰妙用。且衆理應萬事處乎。程朱說分明如此。而猶不見省。更安有何說分明於此者乎。郛郭說亦未然。心之爲主宰。以其能應也。以此而謂郛郭之義則可。直以郛郭看作主宰義則不可。且語類是門人所記。豈若大全親筆之爲尤信乎。然則郛郭與心統性情同云者。似當輕輕看。更詳之爲望。 터득하지……뜻 《중용장구》 제20장의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생각할진댄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有不思, 思之, 不得, 不措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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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보93) 【장환】에게 답함 答李仁甫【長煥】 세월이 멈추지 않아 여름이 또 깊어졌네. 상중에 보낸 편지를 받고 인하여 이런 즈음에 상중의 절도를 보호하고 있는 줄 알았으니, 얼마나 위로되고 감사한 마음 지극하겠는가? 매번 생각건대, 그대가 연로한 어버이를 모심에 곁에는 형제가 없고 아래로는 자식도 적은데 크고 작은 집안일과 일상생활의 많은 실마리가 또 장차 어버이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는 사이에 자신을 얽매니, 그 고생하는 모습은 나를 대신 걱정스럽게 하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기수(氣數)에 관계 된 것이고 직분이 있는 것이네. 기수에 관계 된 것은 단지 심회를 너그럽고 평탄하게 하여 하늘에 맡겨야 할 것이고, 직분이 있는 것은 정히 마땅히 뜻을 독실하게 하고 사려를 경책하여 성취함이 있기를 기약해야 하니, 오늘의 곤궁함이 훗날 옥성(玉成)94)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오호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모하는 것이 없이 헛되이 살다가 헛되이 죽는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우리 당(黨)에 종유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며 몇 년이나 되었는데, 시종 독실하여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음이 두렵네. 생각건대 그대 또한 응당 생각이 여기에 미쳐 이것을 개연해 할 것이네. 또 더구나 영귀정(詠歸亭)을 운영한 지 십 년이 못 되어 선배 중 노성한 분들이 거의 모두 돌아가셨으니, 오늘날 지켜서 이루어야할 책임은 그대 주변의 한 무리가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쓰시게. 진학(進學)의 공부는 독서가 아니면 불가하고 독서의 방법은 경(敬)을 위주로 하지 않으면 불가하니, 수레바퀴와 새의 날개에서 비유를 취한 것이 매우 분명하네. 일용의 사이에 단지 이 두 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간단(間斷)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세간의 만사는 잠깐 사이에 변하여 사라지니,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것이 없고, 오직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것을 구경(究竟)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95) 이것은 우리들이 평소 늘 일컫던 말이 아니던가? 작은 것만 보고 큰 것에는 어두우며, 세월만 유유히 보내는 공통된 근심은 맹렬히 반성하고 통렬히 개혁하지 않으면 아마 능히 이 관문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日月不住。夏令又深。承疏。因審此際哀節支衛。何等慰感之至。每念哀侍在篤老下。旁無兄弟。下乏子男。而家事巨細。日用多端。又且絆已於蒙率之間。其困苦之狀。令人代悶。然此皆氣數所關。職分所存。氣數所關者。只要寬心坦懷。而付之於天。職分所存者。正宜篤志策慮。而期於有就安知今日之困。不爲他日之玉成哉。嗚乎士生斯世。無所猷爲。而虛生虛死。豈不可惜。吾黨遊從。爲幾許人。爲幾多年矣。而終始篤實可以寄意者。恐無多焉。想哀侍亦應慮及於此。而爲之慨然也。且況詠亭經始未十年。先輩老成幾盡凋零。而今日守成之任。非哀侍一隊人乎。勉之勉之。夫進學之功。非讀書不可。讀書之方。非主敬不可。車輪鳥翼。取譬甚明。日用之間。只將此二。端無有間斷如何。朱子曰。世間萬事。須臾變滅。皆不足置胸中。惟有窮理修身爲究竟法。此非吾輩平日稱道之言耶。見小闇大。悠悠通患。非猛省而痛革之。恐不能透脫此關也。 이인보(李仁甫) 이장환(李長煥, 1874~?)을 말한다. 자는 인보,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옥성(玉成) 학문과 인격이 시련을 통하여 귀한 옥처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주자가……하였으니 《회암집(晦菴集)》 속집(續集) 권4 〈답마기지(答馬奇之)〉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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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72) 【창섭】에게 답함 答安慶伯【昌燮】 지난번 보내준 한 통의 편지에 결국 답장도 못했는데 또 이렇게 편지를 받게 되니,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심정이 함께 생기네. 빼어나고 영특한 재주로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신 무고한 날에 있으니, 이것은 정히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있는 때이네. 어버이를 섬기는 한 가지 일은 자식이 입신(立身)하는 큰 절도이니, 독서와 학문은 어찌 이것을 밝혀 이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응대(應對)와 진퇴(進退), 온청(溫淸)과 정성(定省)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강구하고 실천하여 반드시 지당하고 흡족한 곳에 이르되 조금도 미적거리거나 유유범범한 뜻이 없다면, 고인이 이른바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겨난다."는 것이 거의 가까울 것이네. 더구나 그대 부친께서 이미 창시(創始)하셨고 그대 형제가 또 다시 계술(繼述)하니, 대대로 유가의 큰 집안이 되지 않겠는가?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하다는 것은 여기에 있을 뿐이네. 질문한 '격물궁리(格物窮理)' 이것은 가장 최초로 착수해야 할 것이니, '절문근사(切問近思)' 또한 이것을 벗어나지 않네. 이것을 놓아두고 이기(理氣)를 말하는 것은 등급과 절도를 뛰어 넘는 것이니, 실로 근래 학자들의 큰 병폐이네.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모사하는 것이니, 무슨 유익함73)이 있겠는가? 무릇 격물(格物)은 실로 한 가지 단서가 아니니, 혹 독서하여 그 의리를 궁구하고, 혹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득실을 분별하고, 혹 사물과 접하여 그 당부(當否)를 처리함에 소당연(所當然)을 궁구하여 그만두지 않고 소이연(所以然)을 궁구하여 바꾸지 않는 것이 있지 않아 이렇게 오래 쌓은 것이 많아진 뒤에는 절로 초탈한 곳이 있을 것이네. 초학자의 병통은 대부분 의도를 두어 조장하는데 있으니, 과연 능히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보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한 것처럼 하면 의도를 두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보존한 것이 절로 익숙할 것이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치지(致知)도 못하고서 갑자기 성의(誠意)를 하려는 것 이것은 등급을 뛰어 넘는 것이라, 힘써 억지로 행하는 자는 어찌 능히 오래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74) 이것을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네. 向書一度。竟未謝復。而又此承貺。感與愧倂。以秀爽開悟之才。在俱存無故之日。此正可與有爲之秋也。事親一事是人子立身大節。讀書學問。豈非所以明此而行此者乎。應對進退。溫淸定省。大小凡百。一一講究。一一踐行。必至乎至當恰好之地。而無一毫因循悠泛之意。則古人所謂本立而道生者。可庶幾矣。況春府丈旣已創始之。君兄弟又復繼述之。則其不爲世世斯文大家耶。周子所謂至尊至貴者。在此而已。俯詢格物窮理。此是最初第一着。切問近思。亦不越乎此也。舍此而曰理曰氣者。末嘗不是躐等凌節。實近日學者之大獘也。捕風摸影。何所禪益哉。大抵格物固非一端。或讀書而窮其義理。或論古今人物而辨其得失。或接事物而處其當否。莫不有以窮其所當然而不容已。與其所以然而不容易。積累多後。自當有脫然處矣。初學之病。多在於着意而助長。果能實見得是。實見得非。如好好色。如惡惡臭。則無待乎着意。而所存自熟矣。程子曰。未致知。遽誠意。是躐等也。勉强行者。安能持久。此當留念也。 안경백(安慶伯) 안창섭(安昌燮, 1874~?)을 말한다. 자는 경백,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유익함 저본에는 '선(禪)'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하여 '보(補)'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정자(程子)가……하였으니 《근사록》권2에 정이천(程伊川)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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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에게 답함 答洪士拯 지난 편지에 인편이 없어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풍영정(風詠亭)109)에서의 만남 역시 갑자기 취소되어 회포를 풀지도 못하였습니다. 편지에 있는 차문(箚問)의 뜻을 그 뒤에 생각해보니 슬픔과 서운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어버이를 모시며 경서를 공부하는 정황은 연이어 편안하신지요? 그리운 마음이 깊어집니다. 의림(義林)은 옛날부터 좋지 못한 재주뿐인데, 어찌 번거롭게 이끌어주시는지요. 《신안기행록(新安紀行錄)》 근래 비로소 읽어보니 완연히 몸이 방장산(方丈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있으면서 문장과 술 사이를 노닌 듯하였습니다. 말의 배치와 취사 선택, 그리고 묘사가 어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내 벗의 문사(文詞)에 대한 공력이 근년에 더욱 발전하였으니 또한 기뻐할 만합니다. 바라건대 더욱 힘을 쓰고 더욱 정밀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되【矧翔】110)은 【부모의 병이 나으면】 예전처럼 회복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걱정으로 인하여 일상적인 것을 변경시키고 병이 회복하면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을 특별히 말한 것일 뿐이니 다른 것은 족히 변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병이 들어도 감히 효를 잊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병이 나았다고 갑자기 그 효를 잊어버려서 마음대로 방탕하게 술을 마시는 데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잇몸이 드러나게 웃어 모습이 변하는 것을 꾸짖은 것이지 본래 마음대로 방탕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처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담소하던 모습을 생각한다.……"111)라고 하였는데 비록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사람은 그 슬픔과 그리움이 분명 다른 사람보다 곱절일 것입니다. 어찌 그 모습과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살아계실 때의 모습과 방불(髣髴)함이 없겠습니까? 시조(始祖)와 초조(初祖)의 제사는 체제(禘祭)와 협제(祫祭)로 하니 어찌 일찍이 그 음성과 용모를 볼 수 있었겠습니까? 다시 상세히 살펴야 합니다. 向書無便稽謝。而詠亭之遇。亦坐忽撓未敍。書中箚問之意。追後思之。不勝悵缺。未審侍中經履。連衛錦安。懸溯罙至。義林昔時伎倆而已。有何煩提。新安紀行錄。近始讀之。完然身在方丈白雲文酒遊歷之間也。其措辭去就。何其模寫至此也。吾友文詞之工。近年進進。亦可喜也。願益加勉力。精之又精如何。矧翔復故云云。特言其致憂變常。與夫疾止復故之義而已。他無足辨也。且以有疾而不敢忘孝如此。則豈以疾止而遽忘其孝。以至於任情縱酒者乎。又詈矧變貌。本非任情縱酒之謂也。思其居處。思其笑語云云。雖早而孤露。未及逮事者。其哀慕感想。必有倍於他人矣。豈以未見其音容笑語。而無髣髴如在之儀乎。始祖初祖之祭。若褅若祫。何嘗逮見其音容乎。更詳之。 풍영정(風詠亭) 광주의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김언거(金彦琚)가 지은 것으로, 그는 이곳에서 김인후, 이황, 기대승 등과 교유를 나누었다.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되【矧翔】 《소학(小學)》에 나오는 말로, 부모가 병중일 때 몸가짐의 도리를 가리키는데,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는다.【笑不至矧, 行不翔.】"라고 하였다. 그 거처하던 …… 모습을 생각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나오는 말로, "그 거처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담소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뜻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 좋아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 즐기던 바를 생각한다.【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耆.】"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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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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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0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辛未 辛未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의 망자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을묘생으로, 안장일은 신미년 7월 초5일이다. 상주는 아들과 3명의 손자들이다. 이 문서에는 또한 '凶葬不忌'라고 적혀 있다. 흉장은 옛날의 환장(還葬)을 뜻하는 것으로, 염을 마친 뒤에 곧바로 장사를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흉년(凶年), 악월(惡月), 천시(天屍), 지살(地殺)의 달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 또는 역병 시에 흔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병길(南秉吉, 1820~1860)이 관상감(觀象監)의 명과학(命課學) 분야 실무관원들과 함께 편찬한 ?선택기요(選擇紀要)?의 순장법(旬葬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산(山)이 열흘〔旬〕 안에 장사를 치르기에 불리한 데 해당되어도 역시 해가 되지는 않는다. 방(方)과 향(向)의 연운(年運)은 따지지 않고 다만 명폐일(鳴吠日)을 선택하여 장사를 치르면 길하다. 세상 사람들은 3일, 5일, 7일, 9일 만에 장사를 치르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을 흉장(凶葬)이라고 말하는데 꺼리는 것이 없어서 세상에서는 이것을 많이 사용한다. 비록 임시변통에 속하지만 필요에 따라 이롭게 사용하는 이치가 여기에 갖추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길일을 선택하여 파토(破土)하고 하루 안에 성분(成墳)을 마쳐서 흉신(凶神)이 그 방위를 지나가게 하고 가토(加土)하고 사묘(謝墓)하면 역시 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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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북계회 2수 山北契會【二首】 풍진 세상에 옛 사림은 영락했는데 風塵零落舊詞林적막한 물가를 무슨 일로 찾았는가 寂寞之濱底事尋봄옷 떨친 기우92)는 천 길의 기상이요 春服沂雩千仞像옛 거문고 속 산수93)는 평생의 마음이네 古琴山水百年心어떻게 꽃 아래서 흠뻑 취하지 않겠는가 那能花下無沈醉상쾌하게 산봉우리에서 한바탕 읊조리네 聊快峯頭一朗吟산북의 맑은 별장은 참으로 속세 밖이니 山北淸庄眞物外이문이 어느 곳에서 감히 다다르겠는가94) 移文何處敢來臨문을 나서자 마음이 맑고 편해 즐거우니 出門却喜意淸平날개가 돋아나 백옥경95)에 오른 것 같네 羽化如登白玉京일천 숲에서 웃는 꽃은 모두 고운 모습이요 花笑千林皆好面일만 나무에서 우는 새는 환영하는 듯하네 鳥呼萬樹若歡迎시가 절묘한 경치 만난 건 신이 도운 듯하고 詩當妙境神如助술로 쇠약한 몸 보호하니 힘이 약하지 않네 酒護衰身力不輕우연히 만난 동인96)은 인연이 더욱 소중하니 邂逅同人緣復重봉래산97) 찾아가는 해산 길은 쓸 데가 없네 鰲蓬不費海山程 風塵零落舊詞林, 寂寞之濱底事尋?春服沂雩千仞像, 古琴山水百年心.那能花下無沈醉? 聊快峯頭一朗吟.山北淸庄眞物外, 移文何處敢來臨?出門却喜意淸平, 羽化如登白玉京.花笑千林皆好面, 鳥呼萬樹若歡迎.詩當妙境神如助, 酒護衰身力不輕.邂逅同人緣復重, 鰲蓬不費海山程. 기우(沂雩)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인다는 말로, 산수간에 노는 즐거움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先進》 산수(山水)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탔다고 하는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으로, 〈아양곡(峨洋曲)〉이라고도 한다. 백아가 마음속에 '높은 산[高山]'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험준하기가 태산과 같다.[善哉! 峨峨兮若泰山.]" 하였으며, 백아가 마음속에 '흐르는 물[流水]'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광대히 흐름이 강하와 같다.[善哉! 洋洋兮若江河.]" 하였는데, 이를 지음(知音)이라 하여 친구 간에 서로 상대의 포부나 경륜을 알아줌을 비유하게 되었다. 《列子 湯問》 이문(移文)이……다다르겠는가 은거를 그만두고 세상에 나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남조(南朝) 송(宋)의 공치규(孔稚珪)가 북산(北山)에서 함께 은둔하던 주옹(周顒)이 벼슬길에 나서자 산신령을 가탁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그를 꾸짖었던 고사가 있다. 백옥경(白玉京) 천제(天帝) 혹은 신선이 상주(常住)하는 천상의 낙원으로, 옥루(玉樓)라고도 한다. 동인(同人) 서로 마음이 맞는 벗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동인괘(同人卦)〉를 풀이한 말에 "두 사람이 한마음이면 그 예리함이 쇠를 끊고, 한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봉래산(蓬萊山) 원문의 '오봉(鰲蓬)'으로, 여섯 마리의 큰 자라가 떠받치고 있다고 하는 세 개의 선산(仙山) 가운데 하나이다. 《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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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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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02년 조(租)의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癸卯 十月十五日 山直 癸卯 十月十五日 山直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2년 산지기 등의 조(租)의 수량을 적은 장부 1902년 산지기 등의 조(租)의 수량을 적은 문서이다. 산지기와 준룡(俊龍), 복남(卜南)의 조를 각각 기록하였다. 조 아래에는 비용 내역을 적었다. 끝에는 이듬해 10월 15일의 산지기의 구조(舊租)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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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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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86년 이기두(李箕斗)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箕斗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箕斗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유학은 학교에 적을 둔 양반유생을 가리킨다. 임명된 관직은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당상관의 무관 품계이다. 행(行)은 행수법(行守法)이라는 인사 규정의 하나로서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경우 관직 앞에 이 글자를 붙인다. 용양위부호군은 중앙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하나인 용양위에 소속된 종4품의 무관직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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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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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05년 윤재진(尹在晉)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榴夏二日 尹在晉 可川伊彦宅 乙榴夏二日 尹在晉 可川伊彦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40_001 1905년 5월 2일에 윤재진이 아무개에게 집안의 근심 때문에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하고, 대나무를 보낸다는 추신이 있는 간찰 1905년 5월[榴夏] 2일에 윤재진(尹在晉)이 아무개에게 집안의 근심 때문에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하고, 대나무를 보낸다는 추신이 있는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날마다 집안의 근심이 생기고 사업을 억지로 일으켜보지만 잘 되지 않아 이 때문에 이렇게 편지로 면목(面目)을 대신할 자료로 삼는다. 노인 봉양하는 일은 배나 고민이라고 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부탁한 크고 작은 대나무를 바꾸어 보내는데 쓰기에 합당한지 모르겠다고 하며 가격은 6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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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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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八念五 尹璂燮 東床 壬八念五 尹璂燮 東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1902년 8월 25일에 윤기섭이 사위에게 풍두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보낸 간찰 1902년 8월 25일에 윤기섭(尹璂燮)이 사위[東床]에게 풍두(豐頭)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보낸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부모님 모시고 공부하느라 고달프리라 생각하는데, 자신은 머리가 계속 흔들리는 풍두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어 스스로 서글퍼진다고 하며, 가까운 시일에 한 번 돌아봐 주기를 원하는 자신의 바람에 부응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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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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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잡저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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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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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집지록 金華執贄錄 경자년(1900) 여름에 가군(家君)께서 불초한 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말씀하시기를,"내가 너를 가르친 이후로 밤낮 한결같은 마음으로 너를 옥성(玉成)1)시키고자 하였는데, 시문을 기억하고 외우는 학문을 하면 다만 속된 선비가 될 뿐이고 실질적인 공부는 성현의 학문에 있다. 듣건대 간재 전 선생(艮齋田先生)이 천안(天安)의 금곡(金谷)에 사는데 도덕과 학문이 세상의 추앙을 받는다고 하니, 네가 어찌 가서 스승으로 섬기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불초한 내가 공경히 훈계를 받들어 즉시 길을 떠나려 하였으나 예복이 완성되지 않아서 가지 못했다.윤8월 16일에 밖으로부터 뜰을 지나자 가군께서 말씀하시기를,"근래에 듣건대 간옹(艮翁)이 남쪽으로 떠나 부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하늘이 너에게 인연을 빌려준 것이니 빨리 찾아가 뵈어라."라고 하셨다. 이에 명하신 대로 부안에 이르러 선생이 있는 곳을 탐문한 다음 변산의 월명암(月明菴)에 도착하여 명함을 들이고 재배하였다. 강록(講錄)에 참여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정주교질장(周鄭交質章)을 강(講)하였는데 선생이 강록을 보고는 다시 성명을 살펴보았다. 그때 응강(應講)한 사람이 많아 이미 한밤중에 이르렀다.다음 날 아침에 선생이,"어제 《춘추좌씨전》을 외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자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시문(時文)2)은 무익하니 실학(實學)3)에 힘써야 하네."하면서 여러 가지로 예를 들어 비유함에 자상해 마지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도(道)를 향하는 마음이 있게 하였다. 얼마 뒤에 하직하고 물러나자 선생이 만류하여 하루를 더 머물렀다. 돌아가겠다고 아뢸 때에 선생이 말하기를,"이곳에서 그대의 집까지는 거리가 조금 멀지만 내가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을 방문한 고사4)에 따라 오로지 그대의 집에 가겠네."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29일에 선생이 나의 누추한 집에 방문하였는데 따라온 사람이 3, 40명이나 되었다. 다음 날 떠나려고 할 때에 '벽봉-가군의 호이다.-현자윤옥(碧峯賢子潤屋'ㆍ'지락막여독서 지요막여교자(至樂莫如讀書至要莫如敎子)' 등의 글자를 써서 가군께 드렸는데, 이는 대개 자식을 가르쳐 덕을 이루도록 권장하는 뜻이다. 여러 사우(士友)가 사제(師弟)의 예를 행하라고 권유하자 가군이 말씀하시기를,"옛사람이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책을 짊어지고 스승을 찾아갔던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이로 인해 스승을 정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되니, 문하에 나아가 집지(執贄)5)해야 예에 합당할 것입니다."하시고, 선생을 모시고 태인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라고 하셨다.마침내 10월 11일에 길을 떠나 17일에 금곡(金谷)에 당도하였는데, 먼 길에 바람을 맞고 높은 고개에서 눈길을 헤치며 고달팠던 상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금곡에 와서 가군의 편지를 선생에게 드렸으니,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아이가 공경히 예물을 받들고 문하에 나아가 절하게 되었으니 물 뿌리고 쓸며 소제하는 제자의 반열에 낄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운운."선생이 말하기를,"존대인(尊大人)의 편지가 이미 이와 같이 진중(珍重)하고 그대의 의지도 가상하니, 마땅히 《관선록(觀善錄)》6)에 이름을 쓰고 종신토록 서로 권면해야 하네."라고 하였다.다음 날에 집지하는 예를 행하였다. 정유몽 인창(鄭惟夢寅昌)ㆍ진사 오한근(吳漢根)ㆍ이희영 조원(李希潁祖遠)이 창찬(唱贊)하여 지도하고 선생이 구양남야(歐陽南野)7)의 말 뒤에 '직하승당(直下承當)' 네 글자를 써서 권면하였다. 내가 재배하고 큰 띠에 적어 두고서 그대로 머물며 공부를 하였다.일전에 "소자와 사석(師席)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자주 가르침을 받기가 어려우니, 사우(士友)를 좇아 인덕(仁德)을 보강한다면 도움이 또한 클 것입니다. 소자와 가까운 곳에 사는 선생의 문인 중에서 누구와 더불어 평생 상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독실(篤實)함으로는 그대 집안의 여극(汝克)8)만한 사람이 없고 정명(精明)함으로는 박형부(朴衡夫)9) 군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는 자주 상종하게나." 하였다.11월 20일에 돌아가려 할 때 선생이 가군에게 답하는 편지에,"당신의 훌륭한 아들이 편지를 가지고 멀리서 찾아와 예물을 올리고 서로 만났습니다. 돌아보건대 제가 남을 이루어 주는 지혜는 없으나 만년에 준수한 선비를 얻었으니 복이 얕지 않음을 자축합니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또 학문의 진위(眞僞)를 분변하는 것으로써 〈증시(贈示)〉 1편을 지어 주었으니, 대개 나이 어린 초학(初學)이 뜻이 견고하지 않아 혹시 겉멋을 즐기고 박실(樸實)함을 싫어하는 병폐가 있을까 염려한 것이다. 庚子夏, 家君召不肖以前曰: "我自敎汝以來, 晝宵一念, 欲玉成汝身, 記誦詞章之學, 但俗儒而已, 實地上工夫在聖賢之學. 聞艮齋田先生居天安金谷, 道德學問, 爲世所推, 汝盍往師事之?" 不肖敬奉訓辭, 卽擬啓程, 以禮服未成不果. 至閏八月旣望, 自外趨庭, 家君曰: "近聞艮翁南駕留扶安. 天借汝緣, 亟往拜焉. " 於是承命, 至扶安, 探問先生所在, 轉到邊山月明菴, 納刺再拜. 參講錄, 講《左傳》周、鄭交質章, 先生觀講錄, 更詳姓名. 時應講者衆, 已至夜分. 翼朝, 先生曰: "昨誦《左傳》者誰也?" 澤述進跪席前. 先生爲說"時文無益, 實學可勉", 百端引喩, 諄諄不已, 使人自然有向道心. 已而辭退, 先生挽之, 復留一日. 告歸時, 先生曰: "此距君家雖稍遠, 吾用郭林宗訪茅容故事, 專到君家矣. " 余聞甚感激. 二十九日, 先生枉駕陋廬, 從者三四十人. 翼日將發, 書"碧峯【家君號】賢子潤屋"、"至樂莫如讀書, 至要莫如敎子"等字, 贈家君, 蓋勸以敎子成德之意也. 諸士友勸行師弟禮, 家君曰: "揆以古人千里負笈之義, 因而定師, 事涉輕忽, 詣門執贄, 乃爲合禮也. " 令陪先生, 至泰仁, 拜別而歸. 乃以十月十一日登程, 十七日, 抵金谷, 遠路觸風, 峻嶺穿雪, 困苦之狀, 不可勝言. 至則以家君書納先生, 書曰: "兒子敬奉禮贄, 進拜門下, 得備灑掃之列則幸矣. 云云. " 先生曰: "尊大人書, 旣如是珍重, 君志又可尙, 當書名《觀善錄》, 終身交勗也. " 翼日, 行贄禮. 鄭惟夢寅昌、吳進士漢根、李希潁祖遠唱贊指導, 先生書歐陽南野語後以"直下承當"四字勉之. 余再拜書紳, 因留做課. 間者問"小子距師席絶遠, 難於頻承敎誨, 從士友輔仁, 爲益亦大. 先生門人之在小子近地者, 誰可與始終相從也?" 先生曰: "篤實無如貴族汝克, 精明無如朴君衡夫, 君其數數相從也. " 及十一月念間將歸, 先生答家君書曰: "令子齎書遠來, 委質相見. 顧未有成物之智, 然晩得髦士, 自賀福分不淺. 云云. " 又以學問眞僞之辨, 作《贈示》一篇以賜之, 蓋慮年少初學, 志旣未固, 容有耽浮華厭樸實之弊也. 옥성(玉成) 학문과 인격이 시련을 통하여 귀한 옥처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그대를 빈궁하게 하고 시름에 잠기게 하는 것은, 장차 그대를 옥으로 만들어 주려 함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문(時文) 과거 시험(科擧試驗)에 사용하던 문체로, 이른바 팔고문(八股文)으로 불리던 문체를 말한다. 실학(實學) 절실하게 유용한 학문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중용장구(中庸章句)》 머리에서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책이 처음에는 일리(一理)를 말하고 중간에는 만사(萬事)로 분산되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일리(一理)로 합쳐진다. 놓으면 우주에 가득 차고 거두면 은밀하게 간직되어 그 맛이 무궁하니, 모두가 실학(實學)이다."라고 하였다. 주로 성리학에서 인격 수양에 초점을 맞춘 말로 쓰인다. 곽임종(郭林宗)……고사 임종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곽태(郭泰)의 자(字)이며, 모용(茅容)은 효자이다. 당시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볼 때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고 문인(門人)이 되는 것을 말한다. 관선록(觀善錄)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이다. 구양남야(歐陽南野) 남야는 구양덕(歐陽德, 1496~1554)의 호이다. 명(明)나라 강서(江西) 태화(泰和) 사람인데, 가정(嘉靖) 2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여극(汝克) 김연술(金淵述, 1860~1905)의 자(字)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호는 성암(成菴)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5권 2책의 《성암유고》가 있다. 박형부(朴衡夫) 형부는 박수(朴銖, 1864~1918)의 자(字)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중당(中堂)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중당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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