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집지록 金華執贄錄 경자년(1900) 여름에 가군(家君)께서 불초한 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말씀하시기를,"내가 너를 가르친 이후로 밤낮 한결같은 마음으로 너를 옥성(玉成)1)시키고자 하였는데, 시문을 기억하고 외우는 학문을 하면 다만 속된 선비가 될 뿐이고 실질적인 공부는 성현의 학문에 있다. 듣건대 간재 전 선생(艮齋田先生)이 천안(天安)의 금곡(金谷)에 사는데 도덕과 학문이 세상의 추앙을 받는다고 하니, 네가 어찌 가서 스승으로 섬기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불초한 내가 공경히 훈계를 받들어 즉시 길을 떠나려 하였으나 예복이 완성되지 않아서 가지 못했다.윤8월 16일에 밖으로부터 뜰을 지나자 가군께서 말씀하시기를,"근래에 듣건대 간옹(艮翁)이 남쪽으로 떠나 부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하늘이 너에게 인연을 빌려준 것이니 빨리 찾아가 뵈어라."라고 하셨다. 이에 명하신 대로 부안에 이르러 선생이 있는 곳을 탐문한 다음 변산의 월명암(月明菴)에 도착하여 명함을 들이고 재배하였다. 강록(講錄)에 참여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정주교질장(周鄭交質章)을 강(講)하였는데 선생이 강록을 보고는 다시 성명을 살펴보았다. 그때 응강(應講)한 사람이 많아 이미 한밤중에 이르렀다.다음 날 아침에 선생이,"어제 《춘추좌씨전》을 외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자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시문(時文)2)은 무익하니 실학(實學)3)에 힘써야 하네."하면서 여러 가지로 예를 들어 비유함에 자상해 마지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도(道)를 향하는 마음이 있게 하였다. 얼마 뒤에 하직하고 물러나자 선생이 만류하여 하루를 더 머물렀다. 돌아가겠다고 아뢸 때에 선생이 말하기를,"이곳에서 그대의 집까지는 거리가 조금 멀지만 내가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을 방문한 고사4)에 따라 오로지 그대의 집에 가겠네."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29일에 선생이 나의 누추한 집에 방문하였는데 따라온 사람이 3, 40명이나 되었다. 다음 날 떠나려고 할 때에 '벽봉-가군의 호이다.-현자윤옥(碧峯賢子潤屋'ㆍ'지락막여독서 지요막여교자(至樂莫如讀書至要莫如敎子)' 등의 글자를 써서 가군께 드렸는데, 이는 대개 자식을 가르쳐 덕을 이루도록 권장하는 뜻이다. 여러 사우(士友)가 사제(師弟)의 예를 행하라고 권유하자 가군이 말씀하시기를,"옛사람이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책을 짊어지고 스승을 찾아갔던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이로 인해 스승을 정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되니, 문하에 나아가 집지(執贄)5)해야 예에 합당할 것입니다."하시고, 선생을 모시고 태인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라고 하셨다.마침내 10월 11일에 길을 떠나 17일에 금곡(金谷)에 당도하였는데, 먼 길에 바람을 맞고 높은 고개에서 눈길을 헤치며 고달팠던 상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금곡에 와서 가군의 편지를 선생에게 드렸으니,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아이가 공경히 예물을 받들고 문하에 나아가 절하게 되었으니 물 뿌리고 쓸며 소제하는 제자의 반열에 낄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운운."선생이 말하기를,"존대인(尊大人)의 편지가 이미 이와 같이 진중(珍重)하고 그대의 의지도 가상하니, 마땅히 《관선록(觀善錄)》6)에 이름을 쓰고 종신토록 서로 권면해야 하네."라고 하였다.다음 날에 집지하는 예를 행하였다. 정유몽 인창(鄭惟夢寅昌)ㆍ진사 오한근(吳漢根)ㆍ이희영 조원(李希潁祖遠)이 창찬(唱贊)하여 지도하고 선생이 구양남야(歐陽南野)7)의 말 뒤에 '직하승당(直下承當)' 네 글자를 써서 권면하였다. 내가 재배하고 큰 띠에 적어 두고서 그대로 머물며 공부를 하였다.일전에 "소자와 사석(師席)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자주 가르침을 받기가 어려우니, 사우(士友)를 좇아 인덕(仁德)을 보강한다면 도움이 또한 클 것입니다. 소자와 가까운 곳에 사는 선생의 문인 중에서 누구와 더불어 평생 상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독실(篤實)함으로는 그대 집안의 여극(汝克)8)만한 사람이 없고 정명(精明)함으로는 박형부(朴衡夫)9) 군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는 자주 상종하게나." 하였다.11월 20일에 돌아가려 할 때 선생이 가군에게 답하는 편지에,"당신의 훌륭한 아들이 편지를 가지고 멀리서 찾아와 예물을 올리고 서로 만났습니다. 돌아보건대 제가 남을 이루어 주는 지혜는 없으나 만년에 준수한 선비를 얻었으니 복이 얕지 않음을 자축합니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또 학문의 진위(眞僞)를 분변하는 것으로써 〈증시(贈示)〉 1편을 지어 주었으니, 대개 나이 어린 초학(初學)이 뜻이 견고하지 않아 혹시 겉멋을 즐기고 박실(樸實)함을 싫어하는 병폐가 있을까 염려한 것이다. 庚子夏, 家君召不肖以前曰: "我自敎汝以來, 晝宵一念, 欲玉成汝身, 記誦詞章之學, 但俗儒而已, 實地上工夫在聖賢之學. 聞艮齋田先生居天安金谷, 道德學問, 爲世所推, 汝盍往師事之?" 不肖敬奉訓辭, 卽擬啓程, 以禮服未成不果. 至閏八月旣望, 自外趨庭, 家君曰: "近聞艮翁南駕留扶安. 天借汝緣, 亟往拜焉. " 於是承命, 至扶安, 探問先生所在, 轉到邊山月明菴, 納刺再拜. 參講錄, 講《左傳》周、鄭交質章, 先生觀講錄, 更詳姓名. 時應講者衆, 已至夜分. 翼朝, 先生曰: "昨誦《左傳》者誰也?" 澤述進跪席前. 先生爲說"時文無益, 實學可勉", 百端引喩, 諄諄不已, 使人自然有向道心. 已而辭退, 先生挽之, 復留一日. 告歸時, 先生曰: "此距君家雖稍遠, 吾用郭林宗訪茅容故事, 專到君家矣. " 余聞甚感激. 二十九日, 先生枉駕陋廬, 從者三四十人. 翼日將發, 書"碧峯【家君號】賢子潤屋"、"至樂莫如讀書, 至要莫如敎子"等字, 贈家君, 蓋勸以敎子成德之意也. 諸士友勸行師弟禮, 家君曰: "揆以古人千里負笈之義, 因而定師, 事涉輕忽, 詣門執贄, 乃爲合禮也. " 令陪先生, 至泰仁, 拜別而歸. 乃以十月十一日登程, 十七日, 抵金谷, 遠路觸風, 峻嶺穿雪, 困苦之狀, 不可勝言. 至則以家君書納先生, 書曰: "兒子敬奉禮贄, 進拜門下, 得備灑掃之列則幸矣. 云云. " 先生曰: "尊大人書, 旣如是珍重, 君志又可尙, 當書名《觀善錄》, 終身交勗也. " 翼日, 行贄禮. 鄭惟夢寅昌、吳進士漢根、李希潁祖遠唱贊指導, 先生書歐陽南野語後以"直下承當"四字勉之. 余再拜書紳, 因留做課. 間者問"小子距師席絶遠, 難於頻承敎誨, 從士友輔仁, 爲益亦大. 先生門人之在小子近地者, 誰可與始終相從也?" 先生曰: "篤實無如貴族汝克, 精明無如朴君衡夫, 君其數數相從也. " 及十一月念間將歸, 先生答家君書曰: "令子齎書遠來, 委質相見. 顧未有成物之智, 然晩得髦士, 自賀福分不淺. 云云. " 又以學問眞僞之辨, 作《贈示》一篇以賜之, 蓋慮年少初學, 志旣未固, 容有耽浮華厭樸實之弊也. 옥성(玉成) 학문과 인격이 시련을 통하여 귀한 옥처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그대를 빈궁하게 하고 시름에 잠기게 하는 것은, 장차 그대를 옥으로 만들어 주려 함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문(時文) 과거 시험(科擧試驗)에 사용하던 문체로, 이른바 팔고문(八股文)으로 불리던 문체를 말한다. 실학(實學) 절실하게 유용한 학문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중용장구(中庸章句)》 머리에서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책이 처음에는 일리(一理)를 말하고 중간에는 만사(萬事)로 분산되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일리(一理)로 합쳐진다. 놓으면 우주에 가득 차고 거두면 은밀하게 간직되어 그 맛이 무궁하니, 모두가 실학(實學)이다."라고 하였다. 주로 성리학에서 인격 수양에 초점을 맞춘 말로 쓰인다. 곽임종(郭林宗)……고사 임종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곽태(郭泰)의 자(字)이며, 모용(茅容)은 효자이다. 당시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볼 때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고 문인(門人)이 되는 것을 말한다. 관선록(觀善錄)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이다. 구양남야(歐陽南野) 남야는 구양덕(歐陽德, 1496~1554)의 호이다. 명(明)나라 강서(江西) 태화(泰和) 사람인데, 가정(嘉靖) 2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여극(汝克) 김연술(金淵述, 1860~1905)의 자(字)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호는 성암(成菴)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5권 2책의 《성암유고》가 있다. 박형부(朴衡夫) 형부는 박수(朴銖, 1864~1918)의 자(字)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중당(中堂)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중당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