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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 김군 유사 鳳岡金君遺事 학생 김용희(金龍熙)가 나를 따라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자기 선친의 가장(家狀)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선친께서는 신체가 매우 크고 모습이 매우 헌걸찼습니다. 얼굴은 넓고 입은 컸으며, 눈썹은 치켜 올라갔고, 수염은 아름다웠으며, 목소리는 우렁차 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말은 어눌하면서도 자상하셨습니다. 그 기상과 풍모가 사람들로 하여금 좋아하게 하였고 싫어할 수 없게 하였으며, 친근하게 하였고 소원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거처하거나 고을에서 처신할 때에 사람은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았고, 일은 쉽든 어렵든 가리지 않으셨으며, 상사(喪事)가 있으면 가련하게 여기며 도와주셨고, 재난과 우환이 있으면 다스리고 보호해 주셨으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풀어주고 구원해 주셨으니, 남의 근심을 걱정하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힘이 다하도록 주선하는 데 이르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일을 헤아리는 데 재주가 있으셨고 사람들에게 완곡하게 말씀하시는 데에 뛰어나시어 친척과 친구, 고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선친께 자문하여 처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대체로 분쟁을 해결하고 복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 일반 사람보다 뛰어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밖에서의 의로운 행실로 선생님께서 직접 보셨던 것이 아니신지요? 가친(家親)께서 백부의 양자로 나가 양부모를 섬기실 적에는 한결같이 정성과 삼감으로 그 뜻과 몸을 봉양하시어 수십 년 동안 집안에서 흠잡는 말이 없었으며,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시고 절기에 따른 예제(禮制)에 남은 유감이 없으셨으며,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성을 다하시고 제기(祭器)를 씻는 일을 반드시 자신이 직접 하셨습니다. 규방 안에서는 무람없는 습관이 없으셨고, 집안에서는 사치스러운 기풍이 없으셨으며, 집안사람을 근면과 검약으로 다스리셨고, 자손들을 시서(詩書)의 학과에 힘쓰고 현숙한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안에서의 의로운 행실로 선생님께서 보셨던 일이 아니신지요? 그러나 밖의 행실로 안의 행실을 미루어 본다면 또한 대략 짐작하여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은 머물러 있지 않아서 선친의 음성과 용모가 날로 멀어지니,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보존하고 추모의 정을 붙이기 위한 것으로 문자의 서술이 또한 없을 수 없습니다. 혹 이를 위해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시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시겠지요?" 하였다. 내가 그의 뜻을 가련하게 여겨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말하기를, "나 또한 들은 것이 있다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선친과 함께 앉아 있을 적에 어떤 객이 왔는데, 그대의 선친이 친척 집안의 생계 형편을 묻자, 객이 말하기를, '근래에 매우 곤궁합니다.' 라고 하니, 그대의 선친이 말하기를, '이는 좋은 소식이군요. 가난한 선비로 분수를 지키고 상도를 편안하게 여기니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충족하다고 했다면 반드시 옳지 못한 구함이 있었을 것이니 듣기를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네. 내가 옳은 말이라 여기고 탄복하며 칭찬해 마지않았다네. 또 일찍이 나를 경계시키며 말하기를, '나이가 들고 기운이 쇠약해지면 실수하기가 쉬우니, 만약 독서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부지할 수 있겠는가. 공의 근래 생활을 보건대 서책을 대하는 것이 드무니 자못 염려스럽네. 사람이 술을 마실 때에는 반드시 기운으로 술을 이겨야 하는데, 지금 공은 기운이 쇠약함에도 술 마시는 것을 줄이지 않으니 술로 곤욕을 당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내가 모두 탄복하여 마음에 새겨두었다네. 이 세 가지 말은 그대가 듣지 못했을 것이네. 이것으로 보건대, 이 말 외에도 또 듣지 못한 것이 없을 줄 어찌 알겠는가. 내가 만년에 이웃 마을에서 나의 공부를 도와주는 훌륭한 벗을 하나 얻었다가 근래에 이런 규범과 경계를 듣지 못하여 벗의 마음에도 오히려 한스러움이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자손이 된 입장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들은 것들을 모두 기록하여 가장으로 삼게나." 하였다. 군의 휘는 권일(權一)이고, 자는 권중(權中)이며, 호는 봉강(鳳岡)이다. 김씨(金氏)의 계보는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그 시조이다. 휘 충한(冲漢)은 호가 수은(樹隱)으로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고, 고려 말에 조선에 굴복하지 않아 남원(南原)으로 귀양을 갔으며, 개성(開城)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7대를 전해 내려와 휘 영전(永傳)은 호가 필암(蓽庵)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고, 능주(綾州)의 신산(薪山)에 우거하였다. 이분의 손자 대기(大器)는 호가 경재(警齋)로 진사(進士)이고,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신산에서 가승동(佳勝洞)으로 옮겨 왔다가 그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이분의 아들 명철(名哲)은 임진왜란 때 김대인(金大仁) 장군과 함께 예성산(禮聖山)에 웅거하여 적을 죽이고 이겼으니, 이 일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고조는 양욱(陽旭)이고, 증조는 사충(思忠)이며, 조부는 종만(鍾萬)이다. 양부는 석원(錫源)이고, 양모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동지(同知) 계환(桂煥)의 따님이다. 생부의 휘는 일원(鎰源)이고, 생모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상길(相吉)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정사년(1857)과 금상(今上 고종(高宗)) 갑진년(1904) 4월 20일이 군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날이다. 부인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시변(時釆)의 따님이다. 자녀는 4남1녀이니, 아들은 봉희(鳳熙)ㆍ학희(鶴熙)ㆍ용희(龍熙)ㆍ인희(麟熙)이고, 딸은 장흥(長興) 임태주(任泰柱)에게 출가하였다. 한우치(閒牛峙)에 장묘지를 썼다가 송석면(松石面) 탄현(炭峴)의 경좌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아아, 군의 인품과 재주가 말세에 보기 드문데 나이가 오십도 되기 전에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나 평소에 가졌던 뜻과 사업을 백에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비통하고 애석한 마음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난초 가지와 산초 가지가 무성하여 뜰에 가득하고, 용희가 또 뒤를 이어 사문(斯文)에 종사하여 한창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으니, 당시의 뜻을 계승하여 이루어 낼 날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金生龍熙從余遊。日以其先親家狀示之曰。先親身幹碩大。體相俊茂廣面大口。軒眉美鬚。聲弘而遠。言訥而詳。其氣象風度。令人可欲而不可惡。可親而不可遠。居家處鄕。人無親疏。事無難易。有死喪則扶戀之。有災患則營護之。有冤枉則伸捄之。其有以憂人之憂。樂人之樂。而周旋竭蹶者。無所不至。長於料事。優於諷人。親戚知舊。隣里鄉黨。事有未決者。無不待以咨處焉。盖其解紛剸劇。有以異於人。此行義之在外者也。非先生之所親見乎。家親出後伯父。事所後。志物之養。一於誠謹。數十年。庭無間言。喪致其哀。而時月之制。無有餘憾。祭致其誠。而漑濯之役。必自執之。閨房之中。無褻狎之習。庭除之間。無奢靡之風。御家衆以勤儉。教子孫以勉課詩書。親近賢淑。此行義之在内者。非先生之所見也。然以外推內。亦可以領略矣。日月不居。音容日遠。所以存其思而寓其慕者。文字之述。亦不可無也。或爲之不吝一言耶。余悲其意而不忍辭。因曰。吾亦有所聞。吾嘗與尊先君坐。有客至。君問其親戚家計活之狀。客曰。近日極困云。君曰。是好消息。以窮儒而守分安常。安有不困。若云充足。則必有所枉求。非所願聞也。余以爲格論。歎賞不已。又嘗戒余曰。年老氣衰。易致失墜。苟非讀書之助。何以扶持。見公近年罕對書冊。殊可慮也。人之飲酒。必須氣以勝之。今公氣衰而飲不減。其不爲酒困乎。余皆歎服而銘佩焉。此三言者。汝之所不聞也。以此觀之。此言之外。又安知無所未聞也。余晚接隣閈。得一強輔。近不聞此等規警。朋友之心。猶不能無恨。況爲子孫地乎。竝記所聞者。爲之狀。君諱權一。字權中。號鳳岡。金氏系出慶州。新羅敬順王。其始祖也。至諱冲漢。號樹隱。官禮儀判書。麗末不屈。謪南原。享開城表節祠。七傳諱永傳。號蓽庵。修義副尉。寓綾州之薪山。孫大器。號警齋。進士。受業于重峯趙先生。自薪山移佳勝洞。仍居焉。子命哲。壬辰之亂。與金將軍大仁。據禮聖山。殺賊得捷。事載邑誌。高祖陽旭。曾祖思忠。祖鍾萬。考錫源。妣珍原朴氏同知桂煥女。生庭諱鎰源。妣綾城具氏相吉女。哲宗丁巳今上甲辰四月二十日。卽君生卒也。配公州李氏時釆女。四男一女。鳳熙鶴熙龍熙麟熙。長興任泰柱。墓閒牛峙。移葬于松石面炭峴庚坐原。嗚呼。人品材局。叔世罕見。而年未五十。遽已告逝。使平日志業。百未一就。曷勝痛惜。蘭枝椒條。蕃衍盈庭。而龍熙又從事斯文。方進不已。安知當日之志。不有繼述成就之日乎。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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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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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심계 배군 유사 心溪裴君遺事 내가 사는 시골 마을에 중년의 벗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배군 흥묵(裴君興默)과 문군 송규(文君頌奎)가 이들이다. 두 군은 한 무리 중에서 영특함과 빼어남으로 뜻을 함께 하고 학문을 같이 하며 맹렬하게 분발하여 기세를 떨쳐나갔으나 불행히도 모두 멀리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는 배군의 조카 규덕(奎悳)이 찾아와 숙부의 행장(行狀)에 관한 글을 청하였다. 아, 내가 문군에 대해서는 사후의 글을 편술하여 그가 남긴 아들에게 부쳐주었지만, 유독 배군에 대해서만은 아직 짓지 못하고 있었다. 매번 군에 대해 아는 사람이 나만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늙어가는 것이 염려스러울 때마다 죽기 전에 그의 지조와 행적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그의 집에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니, 비록 규덕의 요청이 없다 하더라도 잊지 않고 있었던 일이었다. 군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조용한데다 단정하고 자상하여 유희나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모님 곁에 있을 적에는 응대하는 것을 조심하였고, 밖으로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책을 읽는 데 매우 근면하였다. 그의 대인(大人) 은곡공(隱谷公)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어린아이를 기르는 온갖 것을 한결같이 옛사람이 학문 하던 차례를 따르게 하였고, 과거 시험을 위한 문장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거나 녹봉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지 않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여 문군과 종유하게 되어서는 서로 살펴보고 바로잡아 주면서 연마하고 훈도하여 서로 함께 날로 달로 매진하였다. 대체로 문군은 지혜가 열리어 도를 깨닫는 데 뛰어났고, 배군은 지조를 지키는 데 뛰어났으니, 이것이 서로 필요로 하고 도움이 되어 공공(蛩蛩)과 거허(駏驉)18)처럼 서로 없으면 안 되고 장님과 절름발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유였다. 살펴보건대, 군은 평소 집에 거처할 때에 밤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뜰을 청소하였고, 온화한 말과 기쁜 낯빛으로 어버이께 잠자리와 음식을 여쭈었다. 깨끗한 방 한 칸을 두어 사방 벽에 도서를 둘러놓고 구용구사(九容九思)와 〈동명(東銘)〉ㆍ〈서명(西銘)〉ㆍ〈경재잠(敬齋箴)〉19)과 같은 글을 좌우에 걸어 두거나 붙여 놓았는데 질서 정연하여 법도가 있었다. 매번 부지런히 일하고 여가가 있을 때마다 두 손을 맞잡고 단정하게 앉아 조용히 책을 대하면서 침잠하고 연구하여 밤으로 날을 이었으니, 대체로 거경(居敬)과 치지(致知)의 공부를 잠깐 사이에도 놓은 적이 없었다. 겸손함과 공손함으로 자신을 기르고 담담함과 침묵으로 스스로를 지키면서 강론하고 토론하거나 묻고 변별하는 것 외에는 한가로이 수작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낸 적이 없었으며, 제멋대로 방자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분분하게 다투는 곳은 가지 않았다. 그의 몸가짐이 구차스럽지 않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아아,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이러한 뜻이 있고, 이러한 뜻이 있으면 이러한 학문이 있기에 앞날의 조예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하늘이 수명을 빌려 주지 않아 중도에 떨어져 꺾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군의 처음 휘(諱)는 학순(學舜)이고, 자는 정일(正一)이다. 계보가 달성(達城)에서 나왔으니,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ㆍ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ㆍ달성군(達城君) 휘 운룡(雲龍)ㆍ금헌공(琴軒公) 휘 정지(廷芝)ㆍ회은(晦隱) 선생 휘 문우(文祐)가 모두 상계(上系)의 현조(顯祖)이다. 우재(寓齋) 휘 두유(斗有)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내다 장릉(莊陵 단종(端宗))이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자 능주의 대곡(大谷)에 은둔하였고, 자손이 그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휴재(休齋) 휘 상경(尙絅)은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내다 혼조(昏朝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조의 휘는 득효(得孝)이고, 증조의 휘는 이현(以絢)이며, 조부의 휘는 정채(廷綵)이다. 부친 휘 상섭(相涉)은 호가 은곡(隱谷)으로 세상에 은덕(隱德)이 있었고, 모친 영평 문씨(永平文氏)는 익충(益忠)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정사년(1857) 8월 27일과 을축년(1889) 7월 26일이 바로 군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날이며, 묘지는 본주(本州) 동쪽 방축(防築) 안 사좌(巳坐) 언덕에 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천호(天浩)의 따님이다. 뒤를 이을 자제가 없어 규덕의 동생 규상(奎祥)을 후사로 삼았다. 규덕과 규상이 한창 학문에 뜻을 두고 있어 군이 이루지 못한 뜻을 계승할 사람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을 써 보내어 더욱 힘쓰게 하였다. 余在鄕里。有中年友二人。裴君興默文君頌奎是已。二君以一隊英秀。同志同學。蔚然奮張。不幸皆遠已久矣。一日裴君從子奎悳。來謁其叔父狀行之文。嗚呼。余於文君。身後文字。編述之。付其遺胤。而獨於裴君。尚闕焉。每念知君者莫如我。而我老矣。未死之前。思記其志行之實。以貽其家。雖靡奎悳之請。所不忘也。君自幼沈靜端詳。不好戱美。在親側。應對惟謹。就外傳。讀書甚勤。其大人隱谷公奇之。蒙養凡百。一依古人爲學之序。而不令做時文。爲覓科干祿計。稍長與文君遊。相觀相規。磨礱浸灌。我日斯邁。爾月斯征。盖文君長於開悟。裵君長於持守。此其所以相須而交資。如蛩蚷之不可以相無。瞽躄之不可以相離也。見君平日居家。夙興夜寐。灑掃庭除。溫言怡色。問寢問饍。置淨室一間。四壁圖書。如九容九思東西銘敬齋箴之類。左揭右貼。秩然有法。每於服勤之餘。高拱危坐。靜對方冊。沈潛硏究。夜以繼日。蓋其居敬致知之功。未嘗有須臾之間。謙恭自牧。澹黙自持。講討問辨之外。未嘗出一語爲閒酬酢。身不接放浪之人。足不踐紛競之地。其持身不苟。類如此。嗚呼。有是入而有是志。有是志而有是學。前頭造詣。有不可量。誰知天不假年。而中道隕折哉。君初諱學舜。字正一。系出達城。文讓公諱祗沱。武烈公諱玄慶。達城君諱雲龍。琴軒公諱廷芝。晦隱先生諱文祐。皆其上系顯祖。至寓齋諱斗有文察訪。莊陵遜位。遯綾之大谷。子孫仍居焉。再傳休齋諱尙絅。文牧使。昏朝解印。高祖諱得孝。曾祖諱以絢。祖諱廷綵。考諱相涉。號隱谷。世有隱德。妣永平文氏益忠女。有女士行。丁巳八月二十七日。己丑八月二十六日。卽君懸弧與屬纊也。墓州東防築內已坐原。配南平文氏天浩女。無嗣。以奎悳弟奎祥爲後。奎德奎祥方志于學。君未就之志。紹述有人。書此歸之。以增其勉。 공공(蛩蛩)과 거허(駏驉) 공공과 거허는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전설상의 짐승 이름으로, 둘다 말 처럼 달리기를 아주 잘하여 항상 함께 붙어 다니면서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어서 달리지 못하는 짐승 궐(蟨)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궐을 등에 업고 달아나 궐에게 맛있는 풀을 얻어 먹었다고 한다. 《淮南子 道應訓》 구용구사(九容九思) …… 경재잠(敬齋箴) 구용은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예기》〈왕조(玉藻)〉에"발은 진중해야 하고, 손은 공손해야 하고, 눈은 단정해야 하고, 입은 무거워야 하고, 목소리는 차분해야 하고, 머리는 곧아야 하고, 기상은 엄숙해야 하고, 자세는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고 한 것이고, 구사는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생각으로,《논어》〈계씨(季氏)〉에 "볼 때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일은 경건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난 것은 묻기를 생각하고, 화를 낼 때에는 어려움을 당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을 볼 때에는 의리에 맞는가를 생각한다.[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라고 한 것이다. 〈동명〉과 〈서명〉은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가 서재의 동서 양쪽 창문 위에 걸어 놓고 재생(諸生)을 경계시킨 잠명(箴銘)으로, 〈서명〉은 하늘을 아버지로 삼고 땅을 어머니로 삼아 우리 모두가 한 형제라는 대동(大同) 사상에 입각하여 인의(仁義)에 어긋나는 완악한 자신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완(訂頑)〉이라 했던 것이고, 〈동명〉은 어리석음을 고친다는 뜻으로 〈폄우(砭愚)〉라 했던 것인데, 이러한 이름은 논쟁의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동명(東銘)〉과 〈서명〉으로 하자는 정이(程頤)의 제안에 따라 개칭한 것이다. 〈경재잠〉은 주희(朱熹)가 장식(張栻)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경(敬)을 위주로 한 사언시 40구를 지어 자신을 경계한 글로, 《주자대전》과 《심경(心經)》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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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죽곡 이군 유사 竹谷李君遺事 군의 휘는 승규(承奎)이고, 자는 내권(乃權)이며, 죽곡은 호이다. 이씨(李氏)의 선계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휘 순백(珣白)이 그의 먼 조상이다. 휘 선제(先齊)는 호가 전문(蕇門)으로,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고, 이분이 낳은 휘 조원(調元)은 호가 청심당(淸心堂)으로, 은일(隱逸)로 여러 번 부름을 받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으며, 이분이 낳은 휘 호선(好善)은 호가 면재(勉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열(烈)은 호가 졸암(拙庵)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으니, 이분들이 모두 그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고조 휘 영근(永根)은 호가 사촌(沙村)이고, 증조 휘 광우(光佑)는 호가 균헌(筠軒)이며, 조부 휘 면휘(勉徽)는 호가 묵재(黙齋)이다. 부친의 휘는 문호(文鎬)이고,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지환(之煥)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임술년(1862) 12월 25일이 군이 태어난 날이다. 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기며 어머니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고, 자신 또한 병이 많았지만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봉양하였는데, 부인이 군에게 병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군이 올린 맛난 음식을 간혹 도로 주면 군은 거짓으로 먹는 척하고 몰래 다른 그릇에 담아 두었다가 뒤에 다시 올렸다. 성품이 예의를 좋아하였고, 또 남의 위급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여 친척이나 친구의 상사(喪事)에 반드시 남보다 먼저 달려가서 온갖 의절을 몸소 직접 지휘하였으며, 관례와 혼례는 반드시 옛날 예법을 따랐고 구차스럽게 세속을 따르지 않았다. 고을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거나 의례를 강론하는 모임이 있을 때에는 심한 병이 아니면 반드시 가서 그 의례를 도왔다. 어떤 친척이 전염병으로 죽고, 그 가족들도 모두 한창 고통스러워하자 군이 그들을 위해 염습하여 관에 안치하였고, 영남 사람이 〈외필(猥筆)〉의 말을 가지고 노사(蘆沙) 선생을 무함하자20) 군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함을 변박하여 억울함을 푸는 일을 하려고 했다가 일이 가라앉음으로써 그만두기도 하였다. 군은 목소리가 크고 시원한데다 언사가 아름답고 뛰어나 분쟁을 해결하고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는 데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으며, 나이 많은 어른을 공경하고 벗을 추양함에 이르러서는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듯이 하였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자기의 가난함을 알지 못하고 남의 가난함을 근심하였고, 자기의 선행을 알지 못하고 남의 선행을 부러워했으니, 대체로 선행을 즐거워하고 인의를 좋아한 것은 본래 성품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병오년(1906) 4월 26일에 세상을 떠나니, 중산(中山)의 선영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용희(鏞熙)의 따님으로 3남을 낳았으니, 철휴(哲休)ㆍ장휴(章休)ㆍ동휴(同休)이다. 아아, 군은 빼어나고 화락한 자질로 의기가 있고 기민함이 있어 함께 공부하고 선행을 할 만하였기에 내가 의지하며 만년의 벗으로 여겼는데, 만리를 굴러갈 바퀴가 반도 가지 못하고 갑자기 꺾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그의 아들이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니, 참담한 서글픔이 그날처럼 새로운지라 눈물로 붓을 적셔가며 그 대강을 기술하여 돌려주었다. 君諱承奎。字乃權。竹谷號也。李氏系出光山。尙書左僕射諱珣白。其遠祖也。有諱先齊。號蕇門。封慶昌府院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生諱好善。號勉齋。文科大司成。生諱烈。號拙庵。文科承旨。皆其名祖也。高祖諱永根。號沙村。曾祖諱光佑。號筠軒。祖諱勉徽。號黙齋。考諱文鎬。妣河東鄭氏之煥女。哲宗壬戌十二月十五日。卽君之寅降也。早失所怙。未得逮養爲至恨。事母盡誠。家貧甚。身又多疾。而血力服勤。以就其養。夫人悶其有疾。所進甘毳。或反賜之。君佯若食之潛置他器。後復進之。性好禮。又好副人之急。親戚知舊之喪。必先人奔往。凡百儀節。躬親指揮。冠昏必依古禮。不爲苟且從俗。鄕坊行飮射講聚之儀。非甚病。必往以相其禮。有族人以染疾沒。其家又皆方痛。君爲之襲斂而殯焉嶺人以猥筆語。誣蘆沙先生。君不勝忿鬱。將爲辨誣伸枉之擧。以事寢而止。君聲音弘暢。言辭英發。解紛剸劇.恢恢有餘。而至於敬謹長老。推讓朋友。身若不勝衣。言若不出口。不知己貧而憂人之貧。不知己善而羨人之善。蓋其樂善嗜義。素性然也。丙午四月二十六日卒。葬中山先隴負壬原。配咸安趙氏鏞熙女。生三男。哲休章休同休。嗚呼。君以秀爽愷悌之姿。有氣義有機警。可與共學。可與爲善。余倚以爲晩年之契。豈知萬里之轍。未至半途而遽爾摧折哉。今於其遺胤不朽之託。悲愴如新。和淚泚筆。述其梗槩而還之。 영남 …… 무함하자 노사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고, 〈외필〉은 기정진이 81세 때에 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대한 답설(答說)로 지은 글이다. 기정진은 〈외필〉에서 이이가 일찍이 언급한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은 기(氣)의 기제(機制)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정하는 자체는 기이지만 동정하게 만드는 것은 이(理)라고 단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自發性)을 비판하고 근원적인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이 글이 알려지자 권봉희(權鳳熙), 권명희(權命熙) 등 영남 지역의 노론들 사이에서 율곡을 모욕했다고 하여 문집의 훼판(毁板)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국문집총간 해제, 노사집, 노백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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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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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월담 처사 장공 유사 月潭處士張公遺事 공의 성은 장(張)이고, 휘는 정규(珽奎)이며, 자는 성팔(聖八)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니, 포음(圃蔭) 선생 휘 정필(貞弼)을 비조(鼻祖)로 삼았다. 포음은 본래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동쪽(신라)으로 와서 본국 사람 권공(權公) 행(幸)ㆍ김공(金公) 선평(宣平)과 함께 삼한(三韓)11)을 통합하는데 공적이 있어 안동 태사묘(安東太師廟)12)에 함께 배향되었다. 휘 연우(延佑)에 이르러 벼슬이 호부 상서(户部尚書)에 이르렀고 흥산군(興山君)에 봉해지자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그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휘 합(合)은 조선조에 들어와 선공감 정(繕工監正)을 지냈는데,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5대를 전해 내려온 휘 희성(希聖)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지냈으며, 문장과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명성이 드러났다. 이분이 낳은 휘 경한(景翰)은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갑자년(1604)에 적을 토벌하는데 공적이 있어 진무 공신(振武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분이 낳은 휘 운구(雲衢)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병자년(1636) 북쪽 오랑캐의 변란 때 나라가 화친을 맺고 신주(神州)가 침몰하는 것을 보자 개연(慨然)히 세상을 등진 채 복천(福川 동복(同福))의 산중으로 들어가 과축(薖軸)13)을 꾸미며 노년을 마칠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숭정(崇禎)14)의 숨어 사는 백성[逸民]'이라 하였으니, 공의 5대이다. 고조 치언(致彥)은 호가 일송(一松)으로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학생을 가르치는데 성취가 많았다. 증조 효지(孝智)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조부 한신(漢臣)은 호가 추와(秋窩)이다. 부친 욱(旭)은 호가 창파(滄坡)로 세상에 은덕이 있었으며, 모친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필달(馝達)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한데다 조용하고 아름다워 규문의 범절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정종(正宗 정조) 갑인년(1794) 4월 16일에 동복(同福) 학당리(學堂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온후하고 강직한데다 총명하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좋지 않은 옷이나 맛없는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농으로 하는 말이나 장난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감히 어리다고 그를 홀대하지 않았다. 7세 때 취학(就學)하여 천자문(千字文)을 배울 적에 종일토록 읽지 않아도 등지고 암송하는데 매우 익숙하였는데, 글방 스승이 말하기를, "너의 재능은 참으로 영민하다. 그러나 영민하여 읽지 않고도 암송하는 것은 우둔하여 많이 읽고 암송하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자, 이때부터 여러 차례 암송하는데 매우 부지런하였다. 조금 장성해서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읽어 글 솜씨가 매우 뛰어났는데, 순상(巡相 관찰사)이 도회(都會)의 시소(試所)를 설치하여 금성(錦城 나주)에서 선비들을 시험할 때에 공이 지은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고 이로 인해 그를 수레에 태워 함께 가려고 하자, 공이 부모님이 계시다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자자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직접 나무하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물이 흐르듯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따랐으며, 아침에 문안인사를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거나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의절이 잠깐 사이나 창졸간에도 처음부터 어긴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이 나면 지극한 정성으로 근심을 다하여 한데에서 기도하고 약을 맛보면서 밤까지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면서도 온갖 의절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젋은 시절에는 가난하여 봉양하지 못했고, 지금은 조금 넉넉하다고 할 만한데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종신토록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서 인하여 눈물을 떨어뜨리며 옷을 적셨다.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분가할 때에 논밭과 가옥, 세간살이들을 한결같이 설포(薛包)15)가 했던 것처럼 스스로 나쁜 것만 차지하였다. 만년에 하나의 서재를 지어 '모락재(慕樂齋)'라고 쓴 편액을 걸어 놓았으니, 대체로 추모하고 화락하게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거처하는 곳에 수십 이랑을 개간할 만한 황무지가 있었는데, 공이 마을 장정들을 감독하여 제방을 쌓게 하고 이웃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개간하도록 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지 않았다. 평소 생활이 담박하여 명리와 영화, 온갖 기이한 물건과 완상품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을 이롭게 하고 은택을 베풀거나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급급하였다. 만년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마침내 자신의 수양을 위한 공부에 전념하여 격언(格言)이나 요언(要語)를 만나면 반드시 벽에 써서 항상 눈앞에 두고 보았으며, 늘 말하기를,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참으로 좋긴 하지만, 만약 기미를 살펴 혼자만의 생각을 삼가지 않는다면 좌치(坐馳)16)에 귀결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끝까지 사색하고 연구하였으며,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공부하는 것을 쇠약한 노년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았다. 규산(圭山) 조영승(曺瑩承)ㆍ상사(上舍 진사) 송정옥(宋廷玉)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여 사이좋게 지내며 끊임없이 학문을 강구하고 연마하였는데,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17)이 말하기를, "말세의 분주하게 다투는 풍속에서 욕심이 적은 선비를 보지 못했는데 오직 우리 고을의 장(張) 아무개만이 거의 이러한 선비에 가까울 뿐이다." 하였다. 병이 들었을 때에 집안사람이 의원을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태어나서 일컬을 만한 일이 없으니 죽는다 한들 무엇이 애석하랴. 또 내 나이가 예순하나로 장수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없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2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옥과(玉果) 율천(栗川)의 안산(案山) 두리봉(斗理峯) 사좌(巳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선산 유씨(善山柳氏)는 연수(年樹)의 따님으로 문절공(文節公) 미암(眉巖) 희춘(希春)의 후손이며, 온화하고 인자한데다 정숙하였으며, 부녀자로서의 덕행을 모두 갖추었다. 공보다 2년 뒤 7월 26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본현(本縣) 안심촌(安心村)의 주지봉(冑地峯) 사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동식(東植) 하나를 두었는데,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동식은 4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용(聲容)ㆍ태용(泰容)ㆍ채용(彩容)ㆍ익용(益容)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구(金在鳩)에게 출가하였다. 성용이 아들이 없어 둘째 태용의 아들 기홍(基洪)을 후사로 삼았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기선(基善)이다. 아아! 이처럼 빼어나고 맑은 자질로 학문의 힘을 겸하여 갈고닦으며 침잠하였기에 성취한 바가 크고 넓었다. 이 때문에 가정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흥기되어 행해졌고, 고을에서는 신의가 드러났으며, 친척들은 공의 온정을 생각하였고, 벗들은 공의 풍모를 앙모하였으니, 남쪽 지방의 뛰어난 선비요, 말세에 고상한 인물이라 이를 만하였다. 다만 산림 속에서 배회하고 언덕과 골짜기에 묻혀 지내며 세상을 경영할 뜻을 조금도 시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남긴 덕의 향기가 집안에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퍼져 있으니, 베풀지 않은 베풂이요, 공효가 없는 공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홍이 스승을 따라 학문에 힘써 한창 진보해 마지않으니 공의 뜻과 학업이 이 손자를 석과(碩果)의 씨로 삼아 후세에 더 큰 인물이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기홍이 가장(家狀)을 안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길 글을 청하니, 감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姓張。諱珽奎。字聖八。號月潭。以圃蔭先生諱貞弼爲鼻祖。圃蔭素以中州浙江人。渡海來東。與本國人權公幸金公宣平。有統合三韓之功。共享安東太師廟。至諱延佑。官户部尚書。封興山君。子孫因貫焉至諱合入我朝。官繕工監正。命禮葬。五傳至諱希聖。文典翰。以文章行義。著聞於世。生諱景翰。主簿。甲子討賊有功。錄振武功臣。生諱雲衢。通政。丙子北虜之亂。見國家媾和。神州陸沈。慨然謝世。入福川山中。裝點薖軸爲終老計。自謂崇禎逸民。是爲公五世。高祖致彥。號一松。學行著聞。教生徒多成就。曾祖孝智。階嘉善。祖漢臣。號秋窩。考旭。號滄坡。世有隱德。妣全州李氏馝達女。端淑靜嘉。壺範無闕。正宗甲寅四月十六日。生公于福之學堂里。溫厚剛方。穎悟秀爽。自幼不恥惡衣惡食。不作戱言戱動。人不敢以幼而忽之。七歲就學。授千字文。終日不讀。而能背誦甚熟。塾師曰。汝之才固敏矣。然敏而不讀而通。不如鈍而多讀而通也。自此誦數甚勤。稍長。遍閱經史。詞藻藹蔚。巡相設都會。試士於錦城。見公所製。大加稱賞。因欲載與俱去。公以親在不許。自是聲華藉藉。家貪甚。躬執漁樵。柔聲怡色。承順如流。晨昏定省之儀。冬夏溫淸之節。造次倉猝。未始有違。親有疾。至誠致憂。露禱嘗藥。夜不解帶。及遭艱。擗踊過哀。凡百儀節。一遵家禮。嘗曰。少日貧窶。無以爲養。今則可謂稍饒而親不在焉。此余終身之恨。因泣下沾衿。與其弟友愛甚篤。及析箸。田廬什物。自取荒頓。一如薛包之爲。晩築一齋。揭顏以慕樂。盖寓追慕湛樂之意也。所居有荒野。可墾數十頃。公董邑丁築堰。命隣里貧者。分以墾之而不專。其利平居恬澹於聲利芬華。凡百技玩。一無所好。至若利人澤物。周窮恤匱。汲汲如飢渴也。晩廢擧業。遂專心爲己。遇格言要語。必書諸壁以常目焉。嘗曰。終日靜坐固善。然若不察其幾而愼其獨。則其不爲坐馳之歸乎。是以窮索研究。日有課程。至衰老而不替也。與曺圭山瑩承宋上舍廷玉。交好甚密。講磨不輟。河圭南百源曰末俗奔競。未見有寡欲之士。而惟吾鄕張某庶幾焉。及其屬疾也。家人迎醫。公止之曰。生而無述。死且何惜且吾年六十一。不可謂不壽。復何望焉。竟以二月十七日考終。墓玉果栗川案山斗理峯巳坐原。配善山柳氏年樹女。眉巖文節公希春后。溫仁貞淑。婦德甚備。後公二年七月二十六日卒。葬本縣安心村冑地峯巳坐原。擧一男。曰東植。文行著世。東植有四男一女。曰聲容泰容彩容益容。光山金在鳩。聲容無男。以仲房子基洪爲後。側室子曰基善。嗚呼。以若秀爽之質。濟以學問之力。磨礱浸灌。所就宏贍。是以在家庭孝友興行。在鄉閭信義著聞。族戚懷其情。朋友仰其風。可謂南服之偉儒。叔世之高蹈。但婆娑林樊。沈淹邱壑。使經世之志。未得有少試焉。此爲可憾也已。然遺芬餘馥。傳之在家。播之在人者。不可謂非不施之施無效之效也。基洪從師力學。方進不已。安知公之志業。不以此爲碩果之種。而將大來於來許耶。基洪抱家狀。來謁不朽之文。不敢以非其人辭。 삼한(三韓) 후삼국(後三國)인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안동 태사묘(安東太師廟)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사당으로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삼태사, 즉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삼공신 묘(三功臣廟)라 하였는데, 1613년(광해군 5) 중건과 더불어 이름을 태사묘(太師廟)라 개칭하였다.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과축(薖軸) 은둔 생활을 뜻하는 것으로 《시경》 〈고반(考槃)〉에 나오는 '석인지과(碩人之薖)'의 '과(薖)'와 '석인지축(碩人之軸)'의 '축(軸)'을 합성한 말이다. 숭정(崇禎)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설포(薛包) 동한(東漢) 여남(汝南) 사람으로 형제들과 재산을 나눌 때 자신은 나쁜 것만 차지하고 좋은 것은 형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小學 善行》 좌치(坐馳)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로, 몸은 가만히 앉아 있지만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 치달리는 것을 말한다.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치행(穉行)·효일(孝一)이며 규남은 그의 호이다. 화순 출신의 실학자로 1803년(순조 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물을 뿜어 올리는 자승거(自升車)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완성한 공로로 세상에 알려져 1834년에 음직(蔭職)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고, 형조좌랑을 거쳐 석성현감에 나아갔으나 토호(土豪)와의 알력으로 인해 이듬해 보령으로 귀양갔다가 다음 해 바로 풀려나고 사헌부지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규남문집(圭南文集)》을 남겼으며, 작품으로는 〈만국전도(萬國全圖)〉·《영모화(翎毛畵)》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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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 강공 유사 溪沙姜公遺事 내가 시골 마을 사이에 있으면서 매번 여러 사람들이 모여 교유하며 이야기하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마치 한 입에서 나오듯 계사(溪沙) 강공(姜公)이 선인 군자(善人君子)라고 자자하게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내가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살펴보니, 사는 곳이 매우 외졌고 집은 질박하여 누추하였으나 신발이 뜰을 채우고 의관을 갖춘 사람이 자리에 가득하였으며, 공은 편한 복장에 촌스러운 두건을 쓰고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응접하여 굶주린 사람은 밥을 먹게 하고,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시게 하며, 추운 사람은 덮어주고, 병든 사람은 소생시켜 주어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이 각기 그 바람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손자 흥섭(興燮)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고 인하여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아아,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 훌륭한 행실과 위대한 절개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저술가의 필법이니, 나의 문장이 비록 이를 감당할 수 없겠지만, 예전부터 평소 공경하고 염모했던 입장에서 어찌 차마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의영(義永)이고, 자는 인교(仁敎)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 시조(始祖) 휘 이식(以式)은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수 양제(隋煬帝)의 동쪽 정벌 군사를 막았다. 휘 사진(思進)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원충(元忠)이다. 휘 구만(九萬)은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고, 시호가 정절(正節)이며, 처음으로 진주의 대봉산(大鳳山) 아래에 거주하였다. 휘 희경(希經)은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고, 시호가 문성(文成)이다. 휘 군보(君寶)는 봉산군(鳳山君)에 봉해졌고, 시호가 문경(文敬)이다. 휘 한(漢)은 호가 금재(琴齋)로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휘 위구(渭龜)는 호가 모헌(慕軒)으로, 임진왜란 때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절개를 지키며 전사하였다. 이들 모두가 그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증조 휘 이희(爾熙)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재령(載齡)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휘 사회(士會)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모친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성인(聖仁)의 따님이다. 공은 순묘(純廟) 정해년(1815) 4월 12일에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너그러운데다 온후하며 마음이 여리고 자애로워 부모를 섬김에 효성과 봉양이 모두 지극하였고, 형제와 친척을 대함에 은덕과 정의가 융성하고 흡족하였으며, 벗들과 사귐에 신뢰와 의리의 행실이 드러났고,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더욱 급급하여 집안의 재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지 못했다. 경서와 사서(史書)를 널리 섭렵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고 풍부하였지만 벼슬을 구해 나아가는 것에 담담하였다.조비(祖妣) 문씨(文氏)의 열행(烈行)과 8대조 교관공(敎官公)의 효행(孝行), 9대조 모재공(慕齋公)의 충절(忠節)이 우뚝하고 뛰어났음에도 오랫동안 표창을 받지 못한 것을 공이 항상 한스럽게 여겼는데, 지난 무오년(1858)에 향도(鄕道)의 추천을 통해 증직과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는 은전을 받자 여론이 경사라고 칭하면서 모두 공의 효성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였다. 사곡산(沙谷山) 중에 집을 지은 것은 수석(水石)의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하게 만년을 보내려는 마음을 부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빈객과 벗들이 매일 찾아와 글과 술이 비지 않은 채 밤낮으로 수창하며 흥취와 즐거움이 넘쳐났다. 흉년을 만나 빈객 중에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공이 직접 약을 조제하여 소생시킨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낫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또 십여 사람이었는데, 공이 습렴(襲斂)을 갖추어 장례를 지내주었다. 이웃 마을에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수시로 곡식을 빌려주어 밥 짓는 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어떤 한 부인이 연로한데다 의탁할 곳이 없자 더욱 가엾게 여겨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임종할 날이 다가오자 빚 문서를 가져와 불에 태우면서 말하기를, "생전에 사람들에게 이롭게 한 것이 없는데, 어찌 죽고 나서 폐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계사년(1893) 7월 18일에 세상을 떠나니, 사곡의 안산(案山) 경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명천(命天)의 따님이고, 계배(繼配)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익필(益弼)의 따님이다. 안씨는 1녀를 두었는데, 공주(公州) 이계무(李季茂)에게 출가하였다. 노씨는 1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 병신(秉甡)은 참봉(參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지현(鄭祉鉉)과 제주(濟州) 양중묵(梁仲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흥섭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이것이 가장 내용의 대략이다. 아, 내가 일찍이 한 번 나아가서 보고 느낀 것은 단지 공이 쌓은 행실 중의 한 가지 일일뿐이지만, 이 한 가지 일로 가장 전체에 기술된 내용이 공에 대한 실제의 말이 아닌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탐욕이 날로 불어나고 잔인함이 고질이 되어 가는 때에 공처럼 장후(長厚)하고 너그러운 풍모를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고인의 유풍을 우러러 추억하니 단지 여생의 감회가 절실해질 뿐이다. 공의 자손들이 더욱 힘써 생전의 법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 余在鄕里間。每聞群聚遊談之言。無不以溪沙姜公爲善人君子。藉藉稱道。如出一口。一日余過而拜之。見其洞宇深僻。軒室襆陋。而屣履盈庭。衣冠滿座。公以便服野巾。應接如流。使飢者食之。渴者飮之。寒者庇之。病者蘇之。無不歡悅。各充其願。後二十餘年。公之孫興變。持示家狀。因有不朽之託。嗚呼。顯微闡幽。使至行偉節。不至淪沒。此著家筆法。余之文。雖不足以當此。而在平昔欽艶之地。豈忍以非其人辭。公諱義永。字仁敎。晉州人。始祖諱以式。以兵馬元帥。禦隋焬帝東伐之師諱思進。官平章事封靑城君諡元忠。諱九萬。封陽川君諡正節。始居晉之大鳳山下。諱希經。入我朝。官直提學諡文成。諱君寶。封鳳山君諡文敬。諱漢。號琴齋。官縣監。鄕人立祠享之。諱渭龜。號慕軒。壬辰從趙重峯先生立慬錦山。皆其名祖也。曾祖諱爾熙。贈司僕寺正。祖諱載齡。贈左承旨。考諱士會。贈戶曹參判。妣南平文氏聖仁女。公以純廟丁亥四月十二日生。天性仁恕溫厚。惻怛慈愛。事父母。孝養備至。處兄弟族戚。恩誼隆洽。與朋友交。信義著行。而於賙窮恤匱。尤汲汲焉。不知家力之不逮也。博涉經史。文詞贍富。於干進泊如也。祖妣文氏烈行。八世祖敎官公孝行。九世祖慕齋公忠節。磊落卓絶。而久未見褒。公常恨之。去戊午。因鄕道剡薦。得蒙贈貤表旌之典。物論稱慶。皆以爲公誠孝致然。築室於沙谷山中。以其水石幽閒爲晩年寄敖計也。賓朋日至。文酒不空。日夕酬暢。趣樂津津。遭飢歲。客有曳病而至者。公親調藥餌。使得甦活無數。未愈而死者。又十餘人。公爲具襲斂而葬之。隣里有飢者。必隨時假貸。俾無絶火。有一婦人。年老無托。甚加哀矜。使之寄留。臨歿取債券焚之曰。生而無所利於人。豈可死而貽其弊乎。癸巳七月十八日卒。葬沙谷案山庚坐原。配竹山安氏命天女。繼配光山盧氏益弼女。安有一女。適公州李季茂。盧有一男二女。秉甡。參奉。女適河東鄭祉鉉濟州梁仲黙。孫男與變。餘皆幼。此是狀辭大略也。噫。余之所嘗一造而觀感者。特其積行中一事耳。然以此一事。而知全狀所述。無非其實際語也。貪婪日滋。殘忍成痼。如公長厚寬博之風。安得以復見之耶。追仰遺韻。只切餘生之感。願公子孫益加勉焉。使當日典刑。無墜於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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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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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송곡 이군 유사 松谷李君遺事 군의 휘는 승일(承一)이고, 자는 성만(成萬)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송곡(松谷)은 그의 호이다. 고려조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 휘 순백(珣白)을 비조(鼻祖)로 삼아 4대를 전해 내려온 휘 선제(先齊)는 호가 필문(蓽門)으로,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낳은 휘 조원(調元)은 호가 청심당(淸心堂)으로, 은일(隱逸)로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연산조(燕山朝) 때에 상소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분이 낳은 휘 호선(好善)은 호가 면재(勉齋)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이분들이 모두 그의 현조(顯祖)이다. 고조 영복(永複)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증조는 광국(光國)이며, 조부 한미(漢微)는 호가 송와(松窩)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부친 남호(南鎬)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모친 장택 고씨(長澤高氏)는 진오(鎭五)의 따님으로, 철종(哲宗) 병진년(1856) 3월 13일에 신산리(薪山里)에서 군을 낳았다. 군은 용모와 체구가 대단히 크고 성격과 기질이 호쾌하게 시원스러워 그야말로 천인(千人)을 능가하는 기상이 있었는데, 성동(成童)이 되자 서책을 시렁에 묶어 놓은 채 날마다 젊은 협객들과 함께 말을 달리고 매를 날리며 놀이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대인(大人)이 이를 근심스럽게 여기고 족제(族弟) 지남공(芝南公)에게 말하기를, "옛적에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으니, 군이 그를 타일러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지남공이 이에 군을 불러 말하기를, "소는 밭을 가는 동물인데, 만약 밭을 갈게 할 수 없고 사람을 들이받는 것을 잘한다면 너는 그 소를 좋아하겠느냐? 말은 타는 동물인데, 만약 사람을 태울 수 없고 사람을 차고 무는 것을 잘한다면 너는 그 말을 좋아하겠느냐?" 하니, 군이 대답하기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남공이 말하기를, "해만 있고 유익함이 없으면 소나 말조차도 없애버리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세상에 해만 있고 사람에게 유익함이 없다면 성인(聖人)의 처벌을 면할 수 있겠느냐? 또 너에게 자식이 있는데 효도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너에게 동생이 있는데 공경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하니, 군이 대답하기를,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남공이 말하기를, "너의 마음이 이미 편안하지 않은데, 너의 부모와 형만 어찌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느냐. 옛적에 마 복파(馬伏波)는 만 리 먼 곳에서 편지를 보내어 형의 아들이 경박한 협객들과 소통하는 것을 훈계하였고21), 제갈 무후(諸葛武侯)22)는 대군을 손에 쥐고 몸이 전쟁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그의 아들에게 몸을 닦고 덕을 기르도록 훈계하였으니, 대체로 진실로 정대한 영웅들은 깊은 못 앞에 선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전전긍긍한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지금 너는 경박한 협객의 부류들과 떠돌아다니며 노는 습관을 만들어 위로는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처자식에게 고통을 주며 집안의 화를 불러들이고 자기 자신을 망치고 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이란 모두 다 편안함을 바라고 위험을 바라지 않으며, 복을 구하고 재앙을 구하지 않는 법인데, 너는 참으로 어떤 사람이기에 유독 위험을 편안하게 여기고 재앙을 이롭게 여기느냐?" 하니, 군이 다 듣기도 전에 깜짝 놀라고 빨리 깨달아 마침내 말은 저자로 돌려보내고 매는 들로 날려 보내주었다. 머리를 숙이고 기운을 가라앉힌 채 책을 끼고 학업을 청하여 《소학》부터 시작해서 사자(四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미쳐갔다. 겨울에는 화롯불을 쬐지 않았고,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여러 해 동안 밤에 베개를 베지 않았다. 닭이 울 때에 일어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침소에 문안을 드리며 추운지 더운지를 반드시 조심스럽게 살폈고 응대는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으며,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고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여 식사를 올리고 내림에 때에 맞추어 나아가고 물러났다. 평소에 한가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묵은 솜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며 담박한 것을 분수에 달게 여겼다. 여기저기 드나들며 집안일을 돌보고 곁에서 시중들며 물심양면으로 봉양을 다하였으며, 무자년(1888)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상사(喪事)를 치르는 의절에 예법과 슬픔이 모두 지극하였다. 다음해에 병을 얻어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4세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미좌(未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아!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뜻이 고원하거나 고지식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狂狷]과 함께할 것이다.23)"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고원하고 고지식한 사람의 의지와 기개는 우뚝하게 견고하고 강인하여 함께 나아가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예로부터 사업과 공명이 위대했던 인물은 이와 같은 기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말을 베어버린 김 각관(金角干)24)과 검을 꽂아 놓은 채 정진했던 이일재(李一齋)25)와 같은 사람이 모두 이러한 인물들이다. 군은 뛰어난 자질로 스스로 깨달아 잘못을 고침이 우레처럼 맹렬하고 선으로 옮겨감이 바람처럼 신속하였고, 한번 주장을 세워 죽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전일의 잘못은 햇빛에 나타난 눈이나 금옥(金玉)에 난 흠조차도 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그 자질이 옛날 광견(狂狷)이라 일컬었던 사람과 부합한 점이 있었지만, 지남공이 그를 지도하여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끝내 혼미하여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을 줄 또 어찌 알겠는가. 학문을 연마하고 침잠하여 확충하고 분발해 간다면 앞으로 수립할 것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인데, 운수가 궁박하고 수명이 짧아 중도에 요절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보건대,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지도하여 이끌어줌을 얻지 못하거나 천수를 얻지 못한 사람이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이끌어줌을 받지 못하고 천수를 얻는 것은 천수를 얻지 못하고 이끌어줌을 받는 것만 못하니, 공자의 이른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26)"라는 말을 보건대, 군은 유감이 없을 것이다.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재후(在厚)의 따님으로 3남을 두었으니, 계휴(桂休)ㆍ옥휴(玉休)ㆍ태휴(泰休)이다. 태휴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君諱承一。字成萬。貫光山。松谷其號也。以麗朝尙書佐僕射諱珣白爲鼻祖。四傳諱先齊。號蓽門。官至大提學封慶昌府院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燕山朝。抗疏不用。卽日賦歸。生諱好善。號勉齋。官至大司成。皆其顯祖也。高祖永複。贈禮曹參判。曾祖光國。祖漢微。號松窩。贈工曹參判。考南鎬。贈戶曹參判。妣長澤高氏鎭五女。哲宗丙辰三月十三日。生君于薪山里。容體碩大。性氣豪爽。鬱鬱有凌駕千人之氣。至成童。束閣書冊。日與俠少輩。馳馬飛鹰。流連不返。其大人憂之。謂族弟芝南公曰。古者易子而敎。君未可爲之諭之使返於正耶。芝南乃招以語曰。牛耕者也。若不可耕而善博觸人。則汝愛之乎。馬乘者也若不可乘而善踶囓人。則汝愛之乎。對曰未可也。曰有害而無益。牛馬且去之。況乎人而有害於世。而無益於人。則其可免於聖人之誅乎。且汝有子而不孝。則汝心安乎。汝有弟而不恭。則汝心安乎。對曰未可也。曰汝之心旣不安。則爲汝之父兄者。獨可以安於心乎。昔馬伏波萬里致書。以戒兄子之通輕俠。諸葛武侯手握重兵。身在戰陣。而戒其子以修身養德。蓋古之眞正大英確。無非自戰戰兢兢臨深履薄中出來也。今與輕俠之流。作浮浪之習。上以貽父母之憂。下以貽妻子之苦。招家戶之禍。速己身之亡。夫人之情。莫不欲安而不欲危。求福而不求災。汝乃何人。獨安其危而利其災也。聽未了。蹶然而驚。幡然而悟。遂歸馬於市。飛鷹於野。屈首降氣。挾冊請業。自小學爲始。及於四子六經。冬不爐。夏不扇。夜不枕者數年。雞鳴而起。問寢重廷。寒暄必謹。應對必恭。八廚滫灑。備辦甘毳。食上食下。進退須時。平居不接閒人。不打閒話。縕袍麤糲。分甘淡泊。出入幹蠱。左右服勞。以致志物之養。戊子遭內艱。執喪之節。易戚兩至翌年得疾。以十二月十日終。得年三十四。葬池洞前麓負未之原。嗚呼。孔子曰。不得中行而與之。必也狂狷乎。蓋狂狷志氣。磊落堅忍。可與進取也。自古人物。有大事業大功名者。無不有這般氣象。在我東如金角干之斬馬。李一齋之揷釼。皆是也。君以魁傑之姿。能自覺悟。改過如雷之猛。遷善如風之迅。一立脚跟。底死不退。回視前日之失。不足爲見睍之雪。金玉之瑕也。此其姿質。有合於古所稱狂狷者。而非有芝南公爲之指引.則又安知終不遠復也耶。磨礱浸灌。充拓而奮張之。則前頭樹立。有不可量。而運窮數局。中途夭閼。豈不可惜以此觀之。世之有英材。而不得其指引。不得其年壽者。又何限焉。然失指引而得年壽。不若失年壽而得指引。觀孔子所謂朝聞夕可之語。君可以無憾矣。齊河東鄭氏在厚女。擧三男。桂休玉休泰休。泰休奉家狀。有不朽之托。 마 복파(馬伏波)는 …… 훈계하였고 마 복파는 후한(後漢)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을 지낸 마원(馬援)으로 조카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 경박한 유협(遊俠)들과 사귀며 남을 비평하기를 좋아하자 편지를 보내어 호협(豪俠)한 두보(杜保)를 본받지 말고 신중(愼重)한 용술(龍述)을 본받으며 입을 조심하라고 간절하게 훈계하였다.《後漢書 卷24 馬援列傳》 《小學集註 卷5 嘉言》 제갈 무후(諸葛武侯)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인 제갈량(諸葛亮)으로, 무후(武侯)는 그의 시호이다. 중도를 …… 것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말이다. 말을 …… 김 각관(金角干) 김 각관은 신라 진평왕 시대에 각간을 지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김유신이 화랑시절에 기녀 천관녀(天官女)에 정신이 팔려 수련을 게을리하였다가 어머니 만명부인의 훈계(訓戒)를 듣고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는데, 어느 날 밤 말이 술에 취한 김유신을 태우고 예전 습관처럼 천관녀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김유신이 술이 깬 뒤에 검(劍)으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破閑集》 검을 …… 이일재(李一齋) 이일재는 이항(李恒, 1499~1576)으로, 일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항지(恒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젊은 시절에 무관에 뜻을 두었다가 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고,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고 한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일재에 관한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로 무관으로서의 뜻을 접고 학문할 당시 칼을 옆에 꽂고서 정신일도하에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아침에 …… 괜찮다 《논어》〈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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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계 김공 유사 雲溪金公遺事 공의 휘는 기현(奇鉉)이고, 자는 선화(善華)이며, 호는 운계(雲溪)이다. 김씨의 선계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니, 신라의 왕자 휘 흥광(興光)이 처음으로 광산에 거주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대(代)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는데, 문안공(文安公) 휘 양감(良鑑)과 문정공(文正公) 휘 태현(台鉉)이 가장 유명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여정(厲精)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이분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온 휘 처겸(處謙)은 호가 육행당(六行堂)으로 성균관에 올랐고, 부호군(副護軍)를 지냈으며, 광산에서 추성(秋城 담양(潭陽))으로 옮겨 우거하였다. 이분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온 휘 응(應)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훈도(訓導)를 지냈다. 이분이 낳은 휘 대기(大器)는 호가 만덕재(晩德齋)로,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을 스승으로 섬겨 경학(經學)과 행의(行義)로 한 시대에 중망을 받았으며, 구산사(龜山祠)27)에 배향되었다. 이분으로부터 2대를 전해 내려온 휘 성준(聲駿)은 병자란(丙子亂) 뒤에 복천(福川 동복(同福))의 성산(星山) 아래에 은둔하여 벼슬에 나아갈 뜻을 접은 채 산수(山水)에 자취를 의탁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이초(履初)는 효행으로 명성이 났고, 이분이 낳은 휘 광속(光涑)은 의로운 행실로 조정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덕조(德祖)이고, 증조 휘 백일(百鎰)은 호는 난산(蘭山)이며, 조부 휘 문추(文秋)는 호가 월천(月川)으로 세상에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 휘 재택(在澤)은 호가 애산당(愛山堂)으로,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시에 중망을 받아 여러 차례 천거에 올랐으며, 응교(應敎) 정희(鄭㵙)28)가 그의 행장을 짓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29)이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모친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방옥(邦玉)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철종(哲宗) 갑인년(1854) 7월 27일에 복천의 난산리(蘭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이미 성인으로서의 의절과 모습이 있었으니, 7세 때 대인공(大人公 부친)이 부모의 상을 당하고 다른 형제가 없었는데, 그의 물 뿌리고 씻는 의절과 제기를 진설하는 의식이 한결같이 대인의 뜻과 같았다. 평소에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일을 반드시 부지런히 하였고, 응대할 때에는 반드시 공손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먼저 먹은 적이 없었다.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에는 자신의 몸으로 궤안을 대신하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상사(喪事)를 치를 때에는 애통함이 의례보다 더하였고, 인정과 형식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제사지내는 날을 만났을 때에는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제사지내게 한 적이 없었고, 정성과 정결을 다하여 여재(如在)30)의 뜻을 다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사자(四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대해 성대하게 암송하는 부분이 매우 많았고 연구가 매우 정밀하여 강학과 토론에 드러나고 저술에 나타난 것들이 모두 찬연히 빛나 볼 만하였다. 처음에는 공령(功令 과거 공부)을 업으로 삼았으나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마침내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문을 닫아걸고 종적을 감추어 서적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는 의복 띠를 반드시 바르게 하고 용모를 반드시 단정히 하였으며, 책상의 서책은 가지런하게 정돈하였고, 비록 벼루와 먹, 편지처럼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곳에 두어 어지럽게 놓아둔 적이 없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과 집기는 힘써 질박함을 따랐고, 즐기며 좋아할 만한 화려한 물건이나 먼 곳에서 나는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일찍이 한 번도 몸에 접하지 않았고 한 번도 집안에 들인 적이 없었다.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31)을 모방하여 동내 사람을 권면하고 이끌었으며, 항상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어 사방으로 유학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다 만년에 송사 기공(기우만)을 따르며 이택(麗澤)32)의 뜻을 붙였다. 원근의 분묘(墳墓)를 빠짐없이 살피고 청소하였으며, 묘갈(墓碣)을 갖추어 표지(表誌)하고 묘전(墓田)을 두어 향사(享祀)하였으며, 묘실(墓室)을 수선하여 우러러 사모하였다. 벗을 사귐에 그 사람의 선(善)ㆍ불선(不善)만을 볼 뿐, 부귀와 빈천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지 않았으며, 말과 낯빛을 바르게 하여 일찍이 아부하는 뜻이 없었고, 또한 특이한 행실도 없었다. 이 때문에 안팎에서 서로 믿고, 먼 사람이든 가까운 사람이든 모두 따랐다. 갑오년(1894) 비류(匪類)의 난(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난에 물들지 말도록 경계하여 사람들이 많이 그에게 힘입었다. 일찍이 여러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충신근근(忠信勤謹)' 네 글자는 진실로 몸을 지키는 데 으뜸인 부적이니, 절대로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는 의로운 행실을 앞세우고 문예(文藝)를 뒤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문예의 명성이 한 시대에 으뜸이 된다 한들 어찌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년(1892)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고, 다음해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으며, 병오년(1906)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본방(本坊)의 서촌(西村) 금옥동(金屋洞) 건좌(乾坐)에 안장하였다. 부인 신안 주씨(新安朱氏)는 양홍(陽鴻)의 따님으로, 2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영계(永桂)ㆍ영학(永鶴)이고, 딸은 창원(昌原) 정장섭(丁章燮)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자는 모두 어렸다. 아아, 나는 공과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 살았음에도 하늘 끝과 땅 모퉁이처럼 떨어져 지내다 갑자기 오늘과 옛날처럼 딴 세상의 사람이 되었는데, 오늘 그의 가장(家狀)을 읽게 되니 미치지 못한 추앙의 회포가 곱절이나 절실해진다. 영계가 나에게 글을 청하여 세상에 길이 전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대략 전말을 서술하였다. 公諱奇鉉。字善華。號雲溪。金氏系出光山。新羅王子諱興光。始居光山。自此官平章事者爲十餘世。文安公諱良鑑。文正公諱台鉉。最著焉。入本朝。有諱厲精。登科官漢城判尹。三傳至諱處謙。號六行堂。登庠官副護軍。自光寓于秋城。三傳諱應中。司馬官訓導。是生諱大器。號晩德齋。師事沙溪金先生。經學行義。望重一世。配享龜山祠。二傳諱聲駿。丙子亂後。遯于福川星山之下。絶意仕進。托跡山水。是生諱履初。孝行著聞。是生諱光涑。以行義聞于朝。贈童蒙敎官。於公爲五世祖也。高祖諱德祖。曾祖諱百鎰。號蘭山。祖諱文秋。號月川。世有隱德。考諱在澤。號愛山堂。孝友文學。見重於時。累登剡薦。鄭應敎㵙奇松沙宇萬撰狀與碣銘。妣廣州安氏邦玉女。有婦德。以哲宗甲寅七月二十七日生公于福川之蘭山里。公幼而岐嶷。已有成人儀樣。七歲大人公遭艱。而無他兄弟。其灑濯之節。陳設之儀。一如大人之意。平居晨昏必勤。應對必恭。得一味。未嘗先食。侍親癠。以身替几。晝夜不離。執喪哀毁踰禮。情文俱至。遇忌諱之辰。非有疾病。未嘗代人。致誠致潔。以盡如在之意。自少專心學問。於四子六經。誦殷甚多。硏究甚精。以至著於講討。發於著述者。皆粲然可觀。初業功令。親沒之後。遂不復應擧。杜門斂迹。以書籍自娛。常居衣帶必正。容貌必端。几案書冊。秩秩整勅。雖硯墨札翰之微。置有常處。未嘗混亂。若其器用什物。務從質樸。至於華麗玩好及遠方珍異之物。未嘗一接於身。一入於家。倣藍田呂氏鄕約。勸導坊內。嘗以家貧親老。不得遊學四方爲恨。晩從松沙奇公以附麗澤之義。遠近墳墓。省掃無闕。具墓碣以表誌之。置墓田以享祀之。修墓室以瞻慕之。其交朋友。視其人之善不善而已。不以富貴貧賤而有所取捨焉。正言正色。未嘗有阿附之意。亦未有崖異之行。是以內外相信。遠近咸服。甲午匪類之亂。公戒鄕里勿染。人多頼之。嘗戒諸子曰。忠信勤謹四字。實爲持身之元符。切不可斯須去身。又曰。士君子。當先行義而後文藝。不然。文名冠一世。何足貴哉。壬辰除義禁府都事。翌年陞敦寧府都正。丙午四月十五日考終。葬于本坊西村金屋洞乾坐。配新安朱氏陽鴻女。生二男一女。男永桂永鶴。女昌原丁章變。孫男皆幼。嗚呼。余與公同世矣同省矣。而厓角落落。遽作今古隔世之人。今讀其家狀。倍切追仰靡逮之懷。永桂請余文爲不朽計。辭不獲已。略敍顚末云爾。 구산사(龜山祠) 송순(宋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에 창건한 뒤에 송정순(宋庭筍)과 김언욱(金彦勗) 송희경(宋希璟)·김응회(金應會)·이안눌(李安訥)·송징(宋徵)·김대기(金大器)나무춘(羅茂春)임광필(林光弼)을 추가 배향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전에 화재로 전소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응교(應敎) 정희(鄭㵙, 1821~?) 고종2년(1865)에 식년시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거쳐 고종 22년(1885) 응교에 제수되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회일(會一)이며, 송사(松沙)는 그의 호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조부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으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재(如在) 부친이 계신 듯 제사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는 제사를 지낼 적에 선조가 계신 듯이 하였다.[祭如在]"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등 여씨(呂氏) 4형제가 고을 사람들과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고, 예의의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라는 네 조항으로 되어 있다. 《小學 卷6 善行》 이택(麗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못을 말하는 것으로, 서로 물을 대주듯이 붕우 간에 서로 강습하며 도움을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象)〉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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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을 상심하여 우연히 적다【7수】 傷時偶題【七首】 재앙의 단서는 외부에 있지 않으니 (厲階不在蕭墻外)오직 날로 부지런히 패망을 자초하네 (速敗招亡惟日勤)어찌하여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자제가 (如何喬木世家子)오랑캐가 되어 개국의 공훈을 세우고자 하는가 (甘作仇戎開國勳)입 다물면 누가 시집 안 간 처녀라고 하겠나 (緘口誰稱未嫁女)글을 보내면 혹 원수와 같은 사람이라 배척하네 (發文或斥同仇人)유문의 의리 이미 이와 같으니 (儒門義理已如此)다시 누가 있어 어버이를 저버리지 않으랴 (復有阿誰不後親)노사 선생의 병인년 상소174)는 (蘆沙夫子丙寅疏)대의가 삼엄하여 일월처럼 밝네 (大義森嚴日月明)당시 두세 가지 대책을 썼더라면 (當時若用二三策)어찌 오늘날 사직이 기울어졌겠는가 (安有今朝社稷傾)앞에는 긴 뱀이 있고 뒤에는 사나운 범이 있으니 (前有長蛇後猛虎)부모 잃은 어린 아이는 응응 우네 (孩兒失母泣呱呱)믿을 것이라곤 다만 위에 있는 하늘인데 (所恃只惟天在上)누가 원통하고 애통함을 청도 호소할까 (誰將哀怨訴淸都)아, 오늘이 어떤 날인가 (鳴乎今日是何日)만백성이 절명할 때라네 (萬萬生靈絶命辰)천 리 망망한 해내에 (環海茫茫千里地)어찌 한 대장부가 없는가 (胡無一箇丈夫人)마루 위의 서생은 이미 백발이 되었으니175) (堂上書生已白頭)어찌 이 때문에 이부 칠실의 근심176)을 지으랴 (何須爲此漆嫠憂)애석하구나, 요순 삼대의 문물이 (可惜唐虞三代物)도도히 흐르는 큰 물결에 다 쓸려가네 (盡歸洪水滔滔流)예부터 나라를 잃음이 어찌 오늘과 같았으랴 (自古喪邦孰若今)천지가 뒤집히고 해와 별이 어두워졌네 (天翻地覆日星沈)다만 문을 닫고 자정할 계책을 세울 뿐 (惟有杜門自靖計)서산이나 동해로 찾아갈 필요 없네177) (西山東海不須尋) 厲階不在蕭墻外。速敗招亡惟日勤。如何喬木世家子。甘作仇戎開國勳。緘口誰稱未嫁女。發文或斥同仇人。儒門義理已如此。復有阿誰不後親。蘆沙夫子丙寅疏。大義森嚴日月明。當時若用二三策。安有今朝社稷傾。前有長蛇後猛虎。孩兒失母泣呱呱。所恃只惟天在上。誰將哀怨訴清都。鳴乎今日是何日。萬萬生靈絶命辰。環海茫茫千里地。胡無一箇丈夫人。堂上書生已白頭。何須爲此漆嫠憂。可惜唐虞三代物。盡歸洪水滔滔流。自古喪邦孰若今。天翻地覆日星沈。惟有杜門白靖計。西山東海不須尋。 병인년 상소 기정진이 1866년(고종3)에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즉 프랑스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한강 연안과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건을 일으켰을 때 올린 소(疏)를 이른다. 마루……되었으니 두보(杜甫)의 시에 "마루 위의 서생은 공연히 머리만 세었을 뿐, 바람결에 몇 번이나 향내 맡으며 우노매라.[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3 芻虞歎』 이부(嫠婦) 칠실(漆室)의 근심 춘추 시대 노(魯)나라 칠실 고을에 과년한 처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나라의 임금이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의 근심이지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뜻하는 말이다. 서산(西山)이나……없네 은(殷)나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자, 서산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채미가(采薇歌)」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가 있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동해 바다를 밟고서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하였다. 『史記 伯夷列傳, 魯仲連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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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朱晉之佳約今申尹之芳緣謹請小春尊體百福仰慰且祝苐事星帖依 敎書呈下領如何餘續后源源不備伏惟尊照上謝狀甲戌十月二十三日申哲秀 再拜謝(皮封)謹拜上謝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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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祖父丈喪事復夫何言苐春府丈衰齡居憂必多損節以是獻慮卽拜 先施惠狀謹審秋涼侍中服候連護萬相堂上諸節萬支仰慰斗大弟今月五日之內以痘憂六歲瓦二歲璋俱見敗此何身數此何貌樣寧欲無言 示事行悉而以道査下去矣姑未知末稍事狀而以此周旋如何從此當有卽通于營門計耳十柄筆謹領多謝甚手戰不備謝狀上家伯則間作東峽之行姑未還次故惠書留置耳己巳八月二十二日 弟 安榏 答拜上(皮封)金碩士 朞服座前 回納安洞安生謝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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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암을 만났다가 바로 이별하다 遇白省菴旋別 이별과 만남은 뜬구름 같다 하지 마소 莫言離合等雲浮이별과 만남은 본래 자신에게 달렸나니 離合從來在自由천 리에도 정신 통하면 한 자리와 같고 千里通神如一席이웃도 취향이 다르면 다른 고을과 같네 比隣異趣卽他州머리털은 예절에 관련되어 마음이 중국 높이고 髮關禮節心尊夏사특함과 무함을 물리친 붓은 가을처럼 깨끗하네 筆斥邪誣潔如秋당면한 시의를 서로 힘써야 할 형편이라 時義當頭相勉地되레 홀로 지내는 것이 싫어 걱정이 되네 飜嫌索處作憂愁 莫言離合等雲浮, 離合從來在自由.千里通神如一席, 比隣異趣卽他州.髮關禮節心尊夏, 筆斥邪誣潔如秋.時義當頭相勉地, 飜嫌索處作憂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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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님에게 화답하다 和二客 늘그막에 옛 안개며 노을을 홀로 맡았으니 白頭獨管舊煙霞행장301)이 갬과 흐려짐 같다 말하지 말게 休道行藏等霽蓑진동의 계곡물은 천 리 멀리 흘러가고 眞洞溪流千里遠오주의 가을달302)은 백년이나 떠 있네 吳洲秋月百年多선비의 모습은 정녕 궁한 시절에 드러나고 士標定自窮途見학문의 힘은 마땅히 늘그막에 더해야 하네 學力端宜暮境加누런 국화 맑은 술동이는 오늘 밤 이후로 黃菊淸樽今夕後날 추워진 뒤에 혹여 후창의 집을 기억하리 歲寒儻記後滄家 白頭獨管舊烟霞, 休道行藏等霽蓑.眞洞溪流千里遠, 吳洲秋月百年多.士標定自窮途見, 學力端宜暮境加.黃菊淸樽今夕後, 歲寒儻記後滄家. 행장(行藏) 용행사장(用行舍藏)의 준말로, 자신의 도를 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여 조정에 나아가기도 하고 은퇴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는 말이 나온다. 오주(吳洲)의 가을달 달을 보면서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백(李白)의 〈송장사인지강동(送張舍人之江東)〉 시에 "오주에서 달을 보거든, 천리 밖에 서로 생각하기를 바라네.〔吳洲如見月 千里幸相憶〕"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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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를 지나며 감회가 일어 10세조 참봉공(參奉公)422)이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주에 이르러 이미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過淸州有感【十世祖參奉公, 丙子亂倡義兵, 到淸州聞已講和, 痛哭而歸.】 내 선조의 병자 정묘년 군사를 아득히 생각하니 緬思吾祖丙丁師이 고을에 도착하여 통곡하고 돌아왔네 行到玆州痛哭歸성 아래에서 맹약 맺었던423) 당시의 일에 城下之盟當日事예나 지금 한스러워한 남아가 몇이던가 古今恨殺幾男兒 緬思吾祖丙丁師, 行到玆州痛哭歸.城下之盟當日事, 古今恨殺幾男兒? 참봉공(參奉公) 학행으로 추천되어 군기감 참봉(軍器監參奉)을 지낸 김정길(金鼎吉, 1576~1645)을 말한다. 성……맺었던 성 밑까지 쳐들어온 적군과 맺는 맹약이라는 뜻으로, 항복한 나라가 적국과 맺는 굴욕적인 맹약을 이른다. 여기서는 병자호란 때에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게 항복한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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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그믐날에 仲春晦日 강마을에 봄옷 입을 철이 다가왔는데 江鄕節近服春衣누구와 동풍에 시 읊조리고 돌아올까 誰與東風風詠歸따스함 쬔 물고기는 용감히 뛰는 걸 과시하고 灑暖魚顋誇勇躍겨울 지낸 솔개는 높이 날기를 겁내네 經冬鷰翅㤼高飛새로 나온 경색은 좋은 날에 이르지만 生新物色佳辰至옛날 회상하는 내 삶은 좋은 정황 드무네 感舊吾生好況稀도잠이 한 말517)은 도리어 뒤바뀐 말이니 元亮有辭還倒說세상이 나를 어긴 게 아니고 내가 어겼네 世無違我我人違 江鄕節近服春衣, 誰與東風風詠歸?灑暖魚顋誇勇躍, 經冬鷰翅㤼高飛.生新物色佳辰至, 感舊吾生好況稀.元亮有辭還倒說, 世無違我我人違. 도잠(陶潛)이 한 말 동진(東晉)의 도잠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고향 율리(栗里)가 있는 심양(潯陽)으로 돌아가면서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 다시 수레 타고 나가서 무엇을 구하리오.〔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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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이 절사 광우 가 머리털 때문에 순절했다는 말을 듣고 聞晩翠李節士【廣雨】殉髮 바람과 조수가 온 세상311)을 요동치니 風潮震盪大瀛寰화이는 이 관계에서 볼 뿐이네 獨見華夷係此關화망건 선생은 천고의 벗이 되었고 畫網先生千古友대한의 남은 백성들은 옛 모습이네 韓邦遺庶舊時顔역사책에 빛나고 있음을 분명히 알겠으니 懸知炳炳史編上도랑에서 구구하게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莫說區區溝瀆間만취당이란 이름을 끝내 저버리지 않아 晩翠名堂終不負당당한 눈 속 잣나무가 산에서 빼어나네 亭亭雪柏秀高山 風潮震盪大瀛寰, 獨見華夷係此關.畵綱先生千古友, 韓邦遺庶舊時顔.懸知炳炳史編上, 莫說區區溝瀆間.晩翠名堂終不負, 亭亭雪柏秀高山. 온 세상 원문의 '영환(瀛寰)'은 영해 환우(瀛海寰宇)의 준말로, 온 세상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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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괴이하게 여기며 自怪 안개와 노을 낀 십주374)가 어디메뇨 煙霞何處是十洲찾아갈 인연도 없고 이미 늙어버렸네 去訪無緣已白頭깊이 숨어 누가 시냇가 사슴과 친했던가 深隱誰曾親澗鹿기심 잊으니 또한 물새들과 친할 수 있네 忘機亦可狎沙鷗세상을 경영해도 도무지 의지할 데 없고 經營世上都無賴하늘가의 세월은 항상 쉬이 흘러가네 歲月天邊每易流우리들은 멀리 떠나갈 사람375)이 아닌데 不是吾人長往者지금은 괴이하게도 초연한 유람을 원하네 如今自怪願超遊 煙霞何處是十洲? 去訪無緣已白頭.深隱誰曾親澗鹿? 忘機亦可狎沙鷗.經營世上都無賴, 歲月天邊每易流.不是吾人長往者, 如今自怪願超遊. 십주(十洲) 바닷속에 선인(仙人)이 산다는 섬으로, 곧 조주(祖洲)ㆍ영주(瀛洲)ㆍ현주(玄洲)ㆍ염주(炎洲)ㆍ장주(長洲)ㆍ원주(元洲)ㆍ유주(流洲)ㆍ생주(生洲)ㆍ봉린주(鳳麟洲)ㆍ취굴주(聚窟洲)를 말한다.《海內十洲記》 멀리 떠나갈 사람 세속을 피해 은거하는 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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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현광을 회상하며 憶玄狂 어찌하여 반년 동안 영주에 누워 있었나 胡然半歲臥瀛洲그대의 묵은 병 걱정에 내 머리 희어졌네 憂子沈疴白我頭돌아보면 모기도 와서 도와준 적 없었는데 回顧曾無來援蚊일생동안 걸핏하면 갈매기에게 의심받았네 一生動輒見疑鷗북쪽으로 돌아가 처자식의 봉양을 받겠지만 北歸縱有妻兒養말세의 풍속이라 의인 협객을 만나기 어렵네 末俗難逢義俠流세상 덮을 뛰어난 재주 도리어 빌미가 되니 蓋世高才還作祟음양의 기운으로 원래의 유람 힐난하려 하네 欲將二氣詰元遊 胡然半歲臥瀛洲? 憂子沈疴白我頭.回顧曾無來援蚊, 一生動輒見疑鷗.北歸縱有妻兒養, 末俗難逢義俠流.蓋世高才還作祟, 欲將二氣詰元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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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수차 水車 기발한 생각으로 누가 처음 제작하였을까 巧思誰能始製裁두레박이 판경대에 서로 즐비하네 桔橰相比判卿臺밖은 달 형체를 이루어 둥글둥글 걸었고 外成月體團團掛안은 벌집처럼 만들어 겹겹으로 펼쳤네 內作蜂房疊疊開사람이 중간 빈 데에서 판 밟으며 걸으면 人在中空踏板步물이 일순간에 기계를 돌아 흘러 나오네 水從頃刻轉機來어느 해에 제도를 반포한들 효과 없을까마는 何年頒制還無效지금에 쓰기 이로우니 한이 문득 배가 되네 利用如今恨却倍 巧思誰能始製裁? 桔橰相比判卿臺.外成月體團團掛, 內作蜂房疊疊開.人在中空踏板步, 水從頃刻轉機來.何年頒制還無效? 利用如今恨却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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