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42년 조재의(趙在儀)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寅陽月卄四日 在儀 壬寅陽月卄四日 趙在儀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2년(헌종 8)에 조재의가 사돈에게 보낸 서간 1842년(헌종 8) 10월 24일에 조재의(趙在儀)가 사돈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보내온 편지를 받고 상대방이 편안하니 기뻤다며 다만 손부(孫婦)가 목병으로 여러 날 아팠는데 전염병이긴 하지만 먹지 못하여 원기가 없으니 염려된다고 하였다. 낭진(廊珍)이 다시 퍼지니 더욱 걱정되는데 이 부근은 아직 그런 근심은 없지만 끝내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쇠약한 몸으로 추위를 만나 집에 칩거하고 있으며 양기가 전혀 없으니 가련하다고 하였다. 손자의 병은 멀리 떠나 있었던 증거로 체질도 취약한데 입직을 거듭하여 형해(形骸)만 보존하니 보기에 민망하고 안쓰럽다고 하였다. 손부(孫婦)의 신례(新禮)를 몇 달 물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 마음이 한시가 급한 것을 보니 더욱 서글프다고 하였다. 조재의(趙在儀)는 조응호(趙膺鎬)의 아버지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죽계 운에 차운하다 次竹溪韻 금오산 아래 죽계가 맑으니 (金鰲山下竹溪淸)중간에 주인에게 빌려 작은 글방을 지었네 (中借主翁小塾成)군자가 의젓하니 옥을 다듬은 듯하고231) (君子綠猗如琢玉)아손들이 즐비하니 성곽을 에워싼 듯하네 (兒孫密比似環城)추운 해 풍우 속에서 이름난 절개를 보겠고 (寒年風雨看名節)따뜻한 날 그늘 속에서 훗날의 영광을 보겠네 (暖日蔭茠視後榮)방에 들어가 의연히 옛 얼굴을 보니 (入室依然瞻舊額)나도 모르게 슬픈 감회 일어나네 (令人不覺感悲生) 金鰲山下竹溪淸。中借主翁小塾成。君子綠猗如琢玉。兒孫密比似環城。寒年風雨看名節。暖日蔭茠視後榮。入室依然瞻舊額。令人不覺感悲生。 군자가……듯하고 『시경』「위풍(衛風) 기욱(淇奧)」에 "저 기수 가의 언덕을 보니, 푸른 대가 아름답고 무성하도다. 문채 나는 군자여, 골각(骨角)을 끊고 간듯, 옥석(玉石)을 쪼고 다듬은 듯 하도다.[瞻彼淇奧, 綠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라고 하였다. 학문과 덕행을 연마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회갑일145)에 심회를 서술하다 回甲日述懷 이전 을사년에는 어린아이였는데 (前乙巳年赤子身)후일 을사년은 백발노인이네 (後乙巳年白髮人)백발이 거듭 생겨도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건만 (白髮重生如赤子)당에 오르니 우리 부모는 보이지 않네 (升堂獨不見吾親) 前乙已年赤子身。後乙巳年白髮人。白髮重生如赤予。升堂獨不見吾親。 회갑일 작자는 1845년(헌종11) 을사년에 태어났으며, 작자의 회갑은 1905년(고종42)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경중194)【준관】에 대한 만사 挽朴敬仲【準觀】 생을 마감하는 일 어찌 이렇게 빈번한가 (風燈草露何頻頻)인간 만사 영원히 이별하는 때일세 (萬事人間永訣辰)예부터 지하에서 돌아올 길 없었으니 (自古窮泉無返路)지금 깊은 밤 아직 새벽이 밝지 않았네 (至今厚夜不曾晨)좋은 벗 죽어 애통한 마음을 어이 감당하랴 (況堪良善云亡痛)후손이 남은 복 새롭게 받기를 고대하네 (佇見遺承餘祿新)병을 앓아 상여 끈 잡고 곁을 지키지 못하니 (吟病嗟違携紼役)멀리서 작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네 (遙瞻芍藥淚盈巾) 風燈草露何頻頻。萬事人間永訣辰。自古窮泉無返路。至今厚夜不曾晨。況堪良善云亡痛。佇見遺承餘祿新。吟病嗟違携紼役。遙瞻芍藥淚盈巾。 박경중(朴敬仲) 박준관(朴準觀, 1841~?)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중, 호는 오봉(五峯)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황생 경함195)【철원】의 수미시에 차운하다 次黃生景涵【澈原】首尾韻 황생을 보지 못한 지 지금 얼마나 되었나 (不見黃生今幾時)아득한 인사 더욱 쇠락해져 가네 (悠悠人事轉衰移)기운이 넘치는 청년일 때 공부를 넓힐 수 있으니 (靑年壯氣方克拓)백발의 늙은 나이에도 의심을 품네 (白首頹齡抱晦疑)행실은 반드시 말을 실천해야지 실행이 되고 (行必踐言爲實行)지식은 함양해야지 참으로 아는 것이네 (知從涵養是眞知)낡은 지팡이에 해진 나막신 신고 석양녘에 가니 (殘筇敞屐斜陽路)황생을 보지 못한 지 지금 얼마나 되었나 (不見黃生今幾時) 不見黃生今幾時。悠悠人事轉衰移。青年壯氣方克拓。白首頹齡抱晦凝。行必踐言爲實行。知從涵養是眞知。殘筇敞屐斜陽路。不見黃生今幾時。 황생 경함(黃生景涵) 황철원(黃澈原, 1878-1932)이다. 자는 경함, 호는 중헌(重軒)이다. 저서에 『중헌(重軒集)』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형응칠【도열】에게 답함 答邢應七【道烈】 서로 헤어진 지 매우 오래되고 한 해가 또 저물어가니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안절부절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즈음에 전팽(專伻)을 보내 안부를 물으시니 얼마나 위로가 되고 기뻤겠습니까. 보내신 편지로 부모를 모시고 지내는 체후가 강녕하심을 알았으니 더욱이 제가 바라던 바에 부합합니다. 아우는 예전처럼 보잘것없는 상황입니다만 이렇게 섣달그믐을 맞으니 외롭게 지내며 미치지 못하는 회한으로 마음을 다잡기가 어렵기만 합니다. 또한 흐르는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아 용모는 날이 갈수록 더욱 쇠약해지고 내일 아침이면 또 부들처럼 나약한 쉰 살의 늙은이가 됩니다. 보잘것없는 지업(志業)은 지금껏 성취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형께서는 부모님을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고 장수를 기원하면서 아우와 자제들이 공경스러운 태도로 나란히 모시고 있으니 하늘이 화락함을 도와주어 복과 상서(祥瑞)가 성대하게 이를 것입니다. 멀리서나마 한없이 경하(慶賀)드립니다. 分張許久。歲色且除。懷想之情。安得不憧憧。際玆專伻致存。何等慰悅。憑審侍省康寧。尤副願言。弟碌碌如前而當此歲除。惟是孤露靡逮之恨。有難爲心耳。且流先不貸。衰相日深。而明朝又作恰浦五十人。區區志業。未有所就。奈何竊想吾兄彩衣趨庭。獻壽盡歡。群弟諸郞。濟濟列侍。天相愷弟。福祥溱臻。遙賀萬萬。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복천110) 영신에 투숙하다 宿福川永新 준비 끝에 이제야 복천 유람을 하니 (經營始得福川遊)좋은 땅 가려 사는 주인옹에게 하례하네 (爲賀主翁擇地留)흰 구름은 한 곳의 도원 속에 떠있고 (白雲一處桃源裏)밝은 달은 삼경에 서석산 머리에 비치네 (明月三更瑞石頭)산은 명승지를 감싸 빙 둘러 우뚝 솟았고 (山護名區環壁立)물은 아름다운 기운을 거두어 굽이돌아 흐르네 (水收佳氣折旋流)거주하는 사람은 기억하겠는가 (寄語居人能記否)자주 서로 따르는 것 이번 가을부터 하리란 걸 (頻頻從逐自今秋) 經營始得福川遊。爲賀主翁擇地留。白雲一處桃源裏。明月三更瑞石頭。山護名區環壁立。水收佳氣折旋流。寄語居人能記否。頻頻從逐自今秋。 복천(福川)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同福)에 있는 내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홍장 덕여【우흡】에 대한 만사 輓洪丈德汝【佑洽】 오산이 우뚝하고 침계가 둘렀으니 (鰲山屹屹枕溪環)아, 우리 현인 떠나서 돌아오지 않네 (嗟我賢人去不還)지난날 자주 찾아뵌 정의가 있는데 (伊昔源源趨拜誼)어느 곳에서 다시 뵐 수 있을까 (未知何處更承顔) 鰲山屹屹枕溪環。嗟我賢人去不還。伊昔源源趍拜誼。未知何處更承顔。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담와【익제】의 회갑 운에 삼가 화운하다 謹步趙澹窩【翼濟】回甲韻 태어난 해 오래 되어 회갑이 되었으니 (先庚久矣後庚回)남극에서 상서를 바쳐 한 길이 열리네 (南極呈祥一路開)함안의 고택 청명절에 (咸安古宅淸明節)아들 둘과 손자 둘 번갈아 술잔을 올리네 (二子雙孫迭進杯) 先庚久矣後庚回。南極呈祥一路開。咸安古宅淸明節。二子雙孫迭進盃。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화암사 강회 華巖寺講會 두류산206)에 이르자 눈이 갑자기 밝아지니 (行到頭流眼忽明)표연히 속세 생각 사라진 줄 모르네 (飄然不覺出塵情)지세는 영험함이 많아 뭇 신선의 굴이 있고 (地多靈異群仙窟)산세는 관방이 되어 만 길의 성곽을 이루었네 (山作關防萬仞城)꽃 너머 멀리 천 리의 약속을 찾고 (花外遙尋千里約)등불 앞에서 각각 한 경전 강론하네 (燈前各講一經成)도리어 부끄러운 건 방장산207)에 다시 유람하는 내 (却慙方丈再遊客)명구의 품격을 올리지 못하는 것일세 (未使名區足重輕) 行到頭流眼忽明。飄然不覺出塵情。地多靈異群仙窟。山作關防萬仞城。花外遙尋千里約。燈前各講一經成。却慚方丈再遊客。未使名區足重輕。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을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05년 안홍선(安鴻善)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丑九月十七日 安鴻善 金生員 乙丑九月十七日 1865 安鴻善 金生員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을축년에 안홍선이 김생원에 보낸 서간. 을축년(乙丑年) 9월 17일에 당복(堂北) 제상(堤上)에 거주하는 안홍선(安鴻善)이 김생원(金生員)에게 보낸 간찰이다. 을축년은 1805년(순조 5)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안홍선으로부터 본 편지를 받았던 김생원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본 편지가 부안김씨 부안 문중에서 나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또한 부안에 거주하던 부안김씨의 일원이었음을 분명하다. 또 비록 수신인을 김생원이라고 지칭하였다고 그가 실제로 생원시 합격자였는지도 확실치 않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소과(小科)의 최종 시험에 합격하지 않고, 다만 생원시 혹은 진사시 초시에 합격한 자라 할지라도 생원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기 때문이다. 편지에서 안홍선은 우선 가을을 맞이하여 날씨가 차가워지고 있음을 언급하고 김생원에게 안부를 묻고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본인 어머니께서는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지만, 본인은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한편 본 편지를 받았을 때 김생원은 집을 떠나 있음이 분명하다. '여중(旅中)'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말이 끝난 후 안홍선은 본 편지를 보내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김병헌(金炳憲)이라는 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김병헌을 잘 알고 있으며, 김병헌이 올해 여름 전주(全州)에 있는 희현당(希顯堂)에서 공부할 때, 전라도 관찰사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러면서 복시(覆試)가 공정하게 운영된다면 김병헌이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안홍선이 김생원에게 김병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바는 알 수 없지만, 김생원에게 뭔가를 부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뭔가는 분명 과거와 관련이 있었을 법하다. 부안에서 치러지는 어떤 시험에 김생원이 관여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시험에 응시하는 김병헌에게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면 그 시험은 어떤 시험을 말하는 것일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김병헌이 희현당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희현당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은 문과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김병헌은 문과를 준비하였던 것인데, 부안에서 치러지는 문과라면 당연히 초시를 의미한다. 아울러 안홍선이 본 편지를 보낸 시기가 9월 중순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안홍선이 언급한 문과는 을축년 9월 하순 혹은 10월 초에 부안에서 치러지는 문과 초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문과가 어떤 문과인지를 정확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다만 1806년(순조 6) 10월 하순에 복시와 전시를 치렀던 을축증광시(乙丑增廣試)의 초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할 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存問原丁未十月 日行縣監趙[官印](皮封)單子 一道堂北下里金 碩士炳憲宅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省禮月前 惠䟽尙此慰玩便後易月謹問侍奠體上神扶萬支 允友安侍耶區區溯仰之至 記下身病之經刦後餘祟尙多兒子間又重病今才出脚苦海滋味之若是辛酸耶咄咄先事之入啓甚慰荷且賀而其後事當另念仰副爲計以此信諒如何如何五筆之惠謹領多謝多謝許多說話信聞於雲巢兄企之撓甚不備上謝庚午餞春日 記下 安榏 謝䟽(皮封)扶 棠北 哀座執事回納磚洞安生謹謝䟽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기산에서 비에 길이 막혀 배율 한 편을 짓다 箕山阻雨 賦排律一篇 기산의 관사에 빗소리 오래도록 들리는데 箕山舘裏雨聲長5일 동안 못 돌아가 공연히 애간장 끊어지네 五日未歸空斷腸바람은 동남쪽에서 살랑살랑 불어오고 風自東南來習習구름은 서북쪽에서 아득하게 흩어지네 雲從西北?茫茫행색은 흡사 외딴 섬에 갇힌 듯하고 行裝恰似囚孤島고을은 되려 큰 바다 너머에 있는 듯하네 鄕邑還如隔大洋음식 먹음은 계옥처럼 곤란하여343) 안타까운데 憫爾供飧艱桂玉누가 적료함 깨뜨릴 거문고와 술을 보내 줄까 有誰破寂送琴觴한밤중에는 모기 굴에 있어 몹시 두렵고 中宵絶怕棲蚊窟긴 낮에는 무료하여 좀 먹은 책상을 쓰네 永晝無聊掃蠹床형악에서 하늘 감동시킨 이부344)를 생각하고 衡岳感天思吏部예천에서 날이 개길 빈 구양수345)를 생각하네 醴泉祈霽憶歐陽가고 멈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님을 비로소 알겠으니 始知行止非吾致모든 근심과 기쁨을 둘 다 잊으리라 都把憂欣付兩忘담헌이 있어 이 괴로움 함께 하기에 爲有澹軒同此苦시 지어 서로 위로하며 높은 당에서 읊노라 題詩相慰詠高堂 箕山舘裏雨聲長, 五日未歸空斷腸.風自東南來習習, 雲從西北?茫茫.行裝恰似囚孤島, 鄕邑還如隔大洋.憫爾供飧艱桂玉, 有誰破寂送琴觴?中宵絶怕棲蚊窟, 永晝無聊掃蠹床.衡岳感天思吏部, 醴泉析霽憶歐陽.始知行止非吾致, 都把憂欣付兩忘.爲有澹軒同此苦, 題詩相慰詠高堂. 음식……곤란하여 계옥(桂玉)은 계수나무 땔나무와 옥으로 지은 밥이라는 말로, 물자가 부족하여 생활하기 곤란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楚)나라 왕에게 "초나라의 밥은 옥보다도 비싸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도 비싸다. 지금 내가 옥으로 지은 밥을 먹고 계수나무로 불을 때고 있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今臣食玉炊桂, 不亦難乎?]"라고 불만을 토로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楚策3》 형악(衡岳)에서……이부(吏部)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한유(韓愈)가 형산(衡山)을 지나갈 적에 형악묘(衡岳廟)를 배알하면서 시를 지어 기원하자 날이 청명해졌다는 고사가 있다. 《韓昌黎集 卷3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예천(醴泉)에서……구양수(歐陽脩) 1056년 여름에 큰비가 내리자, 구양수가 송 인종(宋仁宗)의 명을 받고 예천궁(醴泉宮)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낸 고사가 있다. 《古文眞寶後集 卷6 鳴蟬賦》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매천집》 가운데 '만육의 유허297)를 지나다' 시를 보고 화운하여 그 뜻을 뒤집다 3수 見梅泉集中過晩六遺墟詩 步韻而反之【三首】 행영에서 개가 마치자 일곡이 꺾이니298) 凱罷行營日轂摧소매의 도서를 정신 차리고 정리하였네 袖中圖畵倩神裁노년에 풍월 읊는 중대산의 밤에 暮年風月中坮夜우산을 매입하기를 청한 일299) 후회하리라 應悔牛山乞得來-매천의 시-만육옹의 높은 절의 누가 꺾을 수 있으랴 六翁高節孰能摧응당 근거 없는 말은 이치로 분별해야하네 合把齊東以理裁만약 우산을 매입하기를 청했다고 한다면 若謂牛山曾乞得선생이 어떻게 천년토록 법이 될 수 있겠는가 先生何足範千來근거 없는 말은 바로 한 마디로 꺾을 수 있으니 齊東卽可一言摧정밀하게 가려 분별하기를 귀하게 여길 필요 없네 不待精詳貴擇裁오히려 행영에서 신하가 되었다면 尙作行營臣子日어찌 국토를 남에게 팔 수 있었으랴 豈將國土賣人來매천 시의 예봉은 꺾기 어렵다 말하니 梅詩鋒鏑道難摧아주 정밀한 문장은 귀신이 재단한 듯 精切措辭神鬼裁나는 신중히 생각하는 학문 없이 我惜其無愼思學어느덧 옛 현인을 저버려 애석하네 居然枉了昔賢來 凱罷行營日轂摧, 袖中圖畵倩神裁.暮年風月中坮夜, 應悔牛山乞得來.【梅詩】六翁高節孰能摧? 合把齊東以理裁.若謂牛山曾乞得, 先生何足範千來?齊東卽可一言摧, 不待精詳貴擇裁.尙作行營臣子日, 豈將國土賣人來?梅詩鋒鏑道難摧, 精切措辭神鬼裁.我惜其無愼思學, 居然枉了昔賢來. 만육(晩六)의 유허(遺墟) 만육은 최양(崔瀁, 1351~1424)의 호로,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이다. 외삼촌인 정몽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진안의 중대산(中坮山, 현 팔공산)에 들어가 3년을 은거하였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그를 친구로 대우하여 재상 자리에 불렀으나 거절하였다. 행영(行營)에서……꺾이니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됨을 말한다. 일곡(日轂)은 해 바퀴로, 흔히 임금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우산(牛山)을……일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할 마음이 있음을 알고 최양(崔瀁)이 우산을 매입하도록 청하여 그에게 절개를 굽힌 일을 가리킨다. 《後滄集 卷13 買牛山論》 우산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도중에 본 것을 기록하다 9수 道中記見【九首】 세 봉우리 마치 하늘의 삼태319)와 같으니 三峰有若天三台천고의 좋은 이름 조금도 어긋나지 않네 千古嘉名不少差별의 형상과 산악의 신령이 함께 모인 곳 星象嶽靈同溱處어떤 사람이 이곳에 상공을 모았나 何人鍾得相公來-천태산(天台山)-삼신산을 여섯 마리 자리가 이고 있다 들었는데320) 聞道三山戴六鼇어찌 고개 이름을 다시 오현이라 하였나 那能有峴更名鼇자라의 골각이 높은 언덕 이뤄 가련하니 可憐骨殼成高阜무겁게 눌러 죽게 된 자라 결국 보노라 壓重終看致死鼇-오현(鼇峴)-이름만 들어도 하늘과 나란함을 알 수 있으니 聞名可識與天齊오마321) 타고 오는 새 수령은 무척이나 걱정하였네 愁煞新官五馬蹄-새로 제수된 고부 군수(古阜郡守)가 어떻게 천치(天峙)를 넘을까 한탄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직접 보고서야 작은 언덕임을 알았으니 親見方知爲小阜사람의 헛된 명예와 같아 부끄럽구나 如人虛譽可羞兮-천치(天峙)-영주산 위에 신선이 있으니 瀛洲山上有仙靈명실상부하여 사람들 다른 말 않네 人不異辭符實名한 말 한 되와 바꾼 이 누구 집 자식이던가 換却斗升誰氏子부질없이 세속에다 마음만 길이 두게 하였네 空令長帶俗塵情-두승산(斗升山)-우뚝하도다 기암절벽의 선인봉 卓哉奇絶仙人峰옥부용322)을 깎아 푸른 하늘 지탱하였네 玉削芙蓉拄碧穹선인이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若道仙人無則已그렇지 않다면 정히 이곳에 자취 숨겼으리 不然定在此藏蹤-선인봉(仙人峰)-휴암의 손자가 들어가 숨은 해에323) 休菴肖抱入藏年옛날 전해지던 이름이 백갑산으로 바뀌었네 白甲山名變舊傳땅은 사람으로 인해 중해짐이 원래 이러하니 地因人重元如此매몰되어 어질다고 일컬어지지 않을까 두렵다오 沒不稱賢可瞿然-백갑산(白甲山)-흉년만 지속되면 풍년이 오는 법 無年偏得有年來흥덕이라는 방죽 이름 좋도다 興德堤名可矣哉수리 시설은 본래 위정의 방법인데 水利本爲爲政術우리들 일찍이 신경 쓰지 않았구나 我人曾不用心來-흥덕제(興德堤)-우뚝한 소요봉이 진세를 벗어났으니 逍遙峰屹脫塵區나 또한 소요하며 물외에서 노닌다오 我亦逍遙物外遊상칠 -흥덕현(興德縣)의 고호(古號)가 상칠이다.- 이라는 고을 이름 응당 까닭 있을 터 尙漆縣名應有以이곳에 이르니 장주를 생각나게 하누나324) 令人到此憶莊周-소요봉(逍遙峰)-화봉이 화살 모양 이루어 문명을 상징하니 火峰成矢像文明남쪽 고을 비춰 땅의 영험함을 길렀네 照得南州毓地靈다정하게 석묘를 조회하는 이 산을 늘 사랑하였는데 常愛多情朝席墓-석동산(席洞山)의 선묘(先墓)는 이 봉우리가 정면의 안산(案山)이다.-오늘 아침 이곳 지나매 두 눈이 청안이 되었네 今朝過此眼雙靑-화시산(火矢山)- 三峰有若天三台, 千古嘉名不少差.星象嶽靈同溱處, 何人鍾得相公來?【天台山】聞道三山戴六鼇, 那能有峴更名鼇?可憐骨殼成高阜, 壓重終看致死鼇.【鼇峴】聞名可識與天齊, 愁煞新官五馬蹄.【新除古阜郡守者, 歎何以踰天峙云.】親見方知爲小阜, 如人虛譽可羞兮.【天峙】瀛洲山上有仙靈, 人不異辭符實名.換却斗升誰氏子, 空令長帶俗塵情?【斗升山】卓哉奇絶仙人峰, 玉削芙蓉拄碧穹.若道仙人無則已, 不然定在此藏蹤.【仙人峰】休菴肖抱入藏年, 白甲山名變舊傳.地因人重元如此, 沒不稱賢可瞿然.【白甲山】無年偏得有年來, 興德堤名可矣哉.水利本爲爲政術, 我人曾不用心來.【興德堤】逍遙峰屹脫塵區, 我亦逍遙物外遊,尙漆【興德縣古號尙漆】縣名應有以, 令人到此憶莊周.【逍遙峰】火峰成矢像文明, 照得南州毓地靈.常愛多情朝席墓,【席洞山先墓, 此峰爲正案.】今朝過此眼雙靑.【火矢山】 삼태(三台) 삼태성(三台星)으로, 삼정승을 상징하는 별자리이다. 삼신산(三神山)을……들었는데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물에 떠 있는데, 여섯 마리의 자라가 산을 머리로 떠받들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列子 湯問》 오마(五馬) 한(漢)나라 때 태수(太守)가 다섯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부임하였던 데에서 유래하여 지방 수령을 뜻한다. 옥부용(玉芙蓉) 깨끗한 산봉우리를 형용하는 말이다. 휴암(休菴)의……해에 휴암은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고, 그의 손자는 갑산공(甲山公) 백현민(白賢民, 1583~1654)이다. 백현민의 부친 백유함(白惟咸)이 정쟁(政爭)으로 부안(扶安)에 유배되자 함께 따라왔다가 덕흥(德興) 향반인 문경(聞慶) 송씨(宋氏)와 결혼하였는데, 처가에서 성내면(星內面) 당덕리(棠德里) 엄동(奄洞)에 있는 땅을 마련해주어, 정계 은퇴 후에 엄동에 정착하였고 훗날 엄골 백씨 문중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하누나 장주(莊周)가 〈소요유(逍遙遊)〉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莊子》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황폐한 고을 고부의 향교를 지나다 느낌이 일어 過古阜廢邑鄕校有感 우리 대한제국이 나라를 잃기 7년 전 我韓無國前七年이때 문화가 전부 사라지지는 않았지 于時文化未全滅거듭 이 고을의 어진 태수 만나니 重逢玆邑賢太守문옹325)의 정치가 온 경내에 넘쳐났다오 文翁政治闔境溢향교 관원이 향약례를 크게 설치하니 校官大設鄕約禮좋은 때인 천중절을 마침 만났다오 嘉辰適値天中節많고 많은 선비들 수천 명이 오니 濟濟多士來千數박대아관326)이 어찌 그리 정결한가 博帶峨冠何鮮潔노소 구분하여 질서정연하게 절하고 읍하니 拜揖秩秩分老少위의가 의젓하여 흐트러짐이 없었네 威儀蹌蹌無闕失정히 구경하는 자가 교문 에워싼 것327)과 비견되니 定擬觀聽圜橋門위차 정해 예의 익히는 것328)을 어찌 논할 것 있으랴 何論肄習爲綿蕝이때 참석한 사람 중에 내가 가장 어려 時余參會年最少몸소 예식 행하는 홀기(笏記)가 되었네 能以身作行禮笏구경하는 사람들 입이 닳도록 크게 칭찬하니 見者嘖嘖頗賞歎선친은 자리에 계시면서 내심 기뻐하셨네 先君在座內喜悅못난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참석하였겠는가 不才何曾與有力다행히 올바른 방법으로 끊임없이 교육 받은 덕분이지 幸蒙義方敎不輟예의를 다 마치고 연례를 파한 뒤 禮儀告成樽俎罷선친 모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초승달 따라왔지 陪親歸家趁初月아아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嗚呼日月曾幾何사십일 년이 그야말로 빨리도 지나갔구나 四十一年正忽忽옛날 예식을 행하며 모인 뜰을 차마 보겠는가 忍見昔時禮會庭한 길 높이의 무성한 풀을 베는 사람 없네 草深一丈無人掇산하의 모습이 변해 속이 타들어가고 山河異觀心已腐관과 신의 위치 뒤바뀌어329) 이가 더욱 갈리네 冠屨到置齒更切이날 이곳을 지나며 비로소 시 지으니 此日過此始有詩나이 먹고 난리 극에 달해 더욱 수심겹노라 年衰亂極益惙惙 我韓無國前七年, 于時文化未全滅.重逢玆邑賢太守, 文翁政治闔境溢.校官大設鄕約禮, 嘉辰適値天中節.濟濟多士來千數, 博帶峨冠何鮮潔?拜揖秩秩分老少, 威儀蹌蹌無闕失.定擬觀聽圜橋門, 何論肄習爲綿蕝?時余參會年最少, 能以身作行禮笏.見者嘖嘖頗賞歎, 先君在座內喜悅.不才何曾與有力? 幸蒙義方敎不輟.禮儀告成樽俎罷, 陪親歸家趁初月.嗚呼日月曾幾何? 四十一年正忽忽.忍見昔時禮會庭, 草深一丈無人掇.山河異觀心已腐, 冠屨到置齒更切.此日過此始有詩, 年衰亂極益惙惙. 문옹(文翁) 한 경제(漢景帝) 때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교화를 펼치고 학교를 일으켜 문풍(文風)을 크게 떨친 사람이다. 《漢書 循吏傳 文翁》 박대아관(博帶峨冠) 헐렁한 띠와 높은 관을 뜻하는 말로, 고대 유생이나 사대부의 복장을 가리킨다. 구경하는……것 교문(橋門)은 주위에 물이 흐르고 다리를 통해 네 개의 문으로 들어가는 태학(太學)을 가리킨다. "향사례가 끝나고 천자가 정좌하여 직접 강을 하면 제유가 경서를 지니고 그 앞에서 토론을 벌이는데, 관대를 한 진신들로 교문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饗射禮畢, 帝正坐自講, 諸儒執經問難於前, 冠帶搢紳之人, 圜橋門而觀聽者, 蓋億萬計.]"라고 한 말이 《후한서(後漢書)》 〈유림열전(儒林列傳)〉 서문에 보인다. 위차(位次)……것 한(漢)나라 초기에 숙손통(叔孫通)이 조정의 의례(儀禮)를 제정하기 위해 노(魯)나라의 유생(儒生) 30여 인을 불러들여서 그들과 함께 야외(野外)에서 띠풀을 묶어 세워 존비(尊卑)의 차례를 표시해 놓고 예(禮)를 강론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叔孫通列傳》 관과……뒤바뀌어 머리에 쓰는 갓이 아래에 있고 발에 신어야 할 신이 위에 있다는 말로, 상하(上下)와 존비(尊卑)의 위차가 뒤바뀐 것을 뜻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신천 민군 유사 新川閔君遺事 종족(宗族)들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향당(鄕黨)에서 공손하다고 칭찬한다는 그 말을33) 나는 들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 유유자적함을 법도로 삼으며 어진 이를 사모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포용한다는 그 말을34) 나는 들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 고(故) 신천(新川) 민군(閔君) 우식(祐植) 세중(世仲)이 그 사람이다. 군은 가학과 법도가 있는 집안35)에서 태어나 간난신고를 겪으며 자랐고, 몸소 밭 갈고 손수 호미질하며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한가한 날에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섭렵하고 옛사람의 위기지업(爲己之業)36)에 종사하였다. 그 후 최면암(崔勉庵)37)ㆍ 정애산(鄭艾山)38)ㆍ정월파(鄭月波)39)ㆍ기송사(奇松沙)40)를 종유하며 왕복강마(往復講磨)하면서 그 의리의 지취를 넓혔다. 아름다운 천부의 자질로 가정에서 전한 것을 이어받고 사우(師友)의 도움에 젖어서 그 마음을 세우고 처신하며, 사람을 응대하고 사물에 대처하는 데에 찬연(粲然)히 조리가 있고 의연(毅然)히 절도가 있었다. 평소에 조용하고 묵묵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고는 먹지 않았고, 의리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다. 세속을 따라 영합하지 않았고 시류를 좇아 아첨하지 않았다. 오직 한 표주박의 마실 것41)과 한 책상의 서책이 그 필생(畢生)의 살림살이였다. 몸을 숨기고 자취를 거두어 암연(闇然)히 스스로 닦으면서, 안으로는 그 환심(歡心)을 잃지 않았고 밖으로는 그 훌륭한 명성을 잃지 않았으니, 군을 알건 모르건 이구동성으로 추켜세우지 않음이 없었다. 임인년(1902, 고종39) 3월 28일에 생을 마쳤으니 태어난 계해년(철종14, 1863)과 거리를 따져보면, 향년 겨우 40세였다. 국수봉(菊秀峯)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민씨(閔氏)의 선계는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신라에서 고려까지 저명한 석학이 이어져서 동방(東方)의 거족이 되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이니, 이분이 남쪽으로 낙향한 조상으로 군에게는 15세가 된다. 증조의 휘는 치록(致祿), 조부의 휘는 사호(士鎬)이다. 부친의 휘는 영곤(泳坤)이요,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모(某)의 따님이다. 생부(生父)의 휘는 영석(泳碩)이요, 생모(生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종수(棕秀)의 따님이다. 군은 의령 남씨(宜寧南氏) 모(某)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계취(繼娶)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모(某)의 따님인데 2남 병하(丙夏)와 병엽(丙燁)을 두었다. 나는 군과 나이를 잊은 막역한 교분을 맺었었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한 지 8, 9년 되었을 때 병하(丙夏)가 벌써 관례(冠禮)를 하고 찾아와서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글 한 편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오호라! 군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제 그 외롭게 남았던 아이가 부쩍 자라서 관례(冠禮)42)까지 한 것을 보게 되니, 서글픈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또 어린 나이에 선친의 미덕을 천술(闡述)할 줄 알고 게다가 선친의 벗을 방문하였으니 기특하고 기특한 일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뜻은 장차 끝을 성대히 할 날이 있으리라. 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優遊以法。慕賢而容衆。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故新川閔君祐植世仲。其人也。君生於詩禮法拂之家。長於艱難辛苦之中。躬耕手鋤。以供親旨。餘日涉獵經史。從事於古人爲己之業。旣而從崔勉庵鄭艾山鄭月波奇松沙往復講磨。以博其義理之趣。以天資之美。承襲乎家庭之傳。擩染乎師友之助。其立心行已。酬人處物。粲然有條。毅然有節。平居恬靜簡黙。不妄言笑。不妄出入。非其力不食。非其義不取。不俯仰於世。不趨附於時。惟一瓢之飮。一床之書。其畢生家計也。潛身斂迹。闇然自修。內而不失其歡心。外而不失其令聞。知不知無不一口推詡。壬寅三月二十八日考終。距癸亥寅降。得年纔四十。葬菊秀峯子坐原。閔氏系出驪興。自羅至麗。名碩相望。爲東方鉅族。至諱懷參。號義庵。是爲落南之祖。於君爲十五世。曾祖諱致祿。祖諱士鎬。考諱泳坤。妣南平文氏某女。生考諱泳碩。妣全州李氏棕秀女。吾娶宜寧南氏其女。繼娶濟州梁氏某女。二男丙夏丙燁。余與君爲忘年莫逆之契。而幽明一別爲八九年。丙夏旣冠而來。以其家狀。請爲一言之役。嗚呼。不見君久矣。今見其孤孩漸長。至於突弁。悲愴之感。不覺潛涕。且以稚妙之年。能知闡述先徽。又能訪問先友。奇事奇事。未就之志。其將有大終之日也歟。 종족(宗族)들이……말을 선비다운 인물이라는 뜻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선비의 자격을 묻는 자공(子貢)의 질문에 공자가 "일가친척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마을 사람들이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유유자적함을……말을 여유 있고 관대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유자는) 유유자적함 법도로 삼으며, 어진 사람을 사모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포용하고 모난 점을 버리고 원만하게 지내니 그 관대함이 이와 같다.〔優游之法, 慕賢而容衆, 毁方而瓦合. 其寛裕有如此者.〕"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가학과……집안 원문의 '시례법필(詩禮法拂)'로,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범절을 이어오는 가문을 '시례지가(詩禮之家)'라 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공자가 아들인 이(鯉)에게 "시(詩)를 배웠느냐?〔學詩乎?〕" 하고 묻고, 또 한 번은 "예(禮)를 배웠느냐?〔學禮乎?〕"라고 하였다. '법필(法拂)'은 법도가 있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현사(賢士)를 뜻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안으로 법도 있는 세신과 보필하는 현사가 없고,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이런 나라는 항상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하였다. 위기지업(爲己之業)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말한다.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하였다.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면암(勉菴)은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艾山)은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정월파(鄭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으로 월파(月波)는 호이다. 자(字) 백언(伯彦),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으로 송사(松沙)는 호이다. 자는 회일(會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다. 한……것〔一瓢之飮〕 안빈낙도의 삶을 뜻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골목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건만,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관례(冠禮) 원문의 '돌변(突弁)'으로, 20세가 되어 관(冠)을 쓰는 것을 가리킨다. 《시경》 〈보전(甫田)〉에 "예쁘고 아름다운 머리 딴 총각을 얼마 후에 보면 돌연 관을 쓰고 있다.〔婉兮孌兮, 總角丱兮, 未幾見兮, 突而弁兮.〕"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공즙 자명 朴公楫字銘 고종이 내를 건넘에오직 부열이 노가 되었네63)계옥64)하고 도용65)하여공훈을 드리운 것이 빛나고 빛나네박생 제동이삼가66)를 마쳤네공즙으로 자를 지으니사모하는 바가 부열이네이미 그 사람을 사모하려면먼저 그 학문을 배워야 하네그 학문은 무엇인가유적에 실려 있네사랑을 세우되 어버이로부터 하며공경을 세우되 어른으로부터 하네67)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뜻을 두면68)도가 그 몸에 쌓이리라이것을 따라 가면무엇을 건넌들 이롭지 않으리오이름을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여오직 부열을 닮도록하라 高宗濟川。惟說作楫。啓沃陶鎔。垂勳煒曄。朴生濟東。三加告畢。字以公楫。所慕惟說。旣慕其人。先學其學。其學惟何。載在遺籍。立愛惟親。立敬惟長。終始典學。道積厥躬。率是以往。何涉不利。顧名思義。惟說是似。 고종이……되었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일찍이 현상 부열(傅說)에게 이르기를 "내가 만일 큰 냇물을 건너려거든 그대를 사용하여 배와 노로 삼을 것이며, 만일 해가 큰 가뭄이 들거든 그대를 사용하여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若濟巨川, 用汝, 作舟楫; 若歲大旱, 用汝, 作霖雨.]"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書經 說命上》 계옥(啓沃) 정성을 다 바쳐 임금을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삼고는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내 마음에 대도록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說命上》 도용(陶鎔)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고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는 것처럼 인재를 배양해서 육성한다는 뜻으로, 보통 대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비유로 쓴다. 삼가(三加) 삼가례(三加禮)로, 관례를 말한다. 관례에는 관을 세 차례 갈아 씌우는데, 맨 처음에는 치포관(緇布冠)을 씌우고 다음에는 피변(皮弁)을 씌우고 마지막에는 작변(爵弁)을 씌운다. 이하는 관례로 풀이하였다. 사랑을……하네 《서경》 〈이훈(伊訓)〉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부터……두면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가르침은 배움의 절반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학문에 뜻을 두면 그 덕이 닦여짐을 자신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惟斅學半, 念終始典于學, 厥德修罔覺.]"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 동몽교관 박공 유사 贈童蒙教官朴公遺事 공의 성은 박(朴)이고, 휘는 종안(鍾安)이며, 자는 도현(道賢)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다. 신라(新羅) 밀성대군(密城大君)이 별자(別子)를 계승한 선조이고, 중엽에 이르러 휘 울(蔚)이 찰방(察訪)을 지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지수(枝樹)는 감찰(監察)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마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는 10대 선조가 된다. 고조는 경시(慶始)이고, 증조 장환(章煥)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으며, 조부는 재희(載禧)이다. 부친 효원(孝源)은 효성으로 마을에 정문이 세워졌고, 모친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순길(順吉)의 따님으로 문강공(文康公) 광전(光前)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5월 17일에 정천리(淨川里)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천성이 순박하고 진실했으며, 성격은 온화하고 인자하였다. 곤궁함 속에서 나고 자라 온갖 고생을 두루 겪으면서도 응대하거나 일을 주선하는 것이 물이 흐르듯 민첩하고 넉넉하여 일찍이 부모님의 뜻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형제가 넷이었는데, 서당에 가서는 나란히 함께 앉아 형과 아우가 서로 매진하며 날마다 분량을 정해 공부하였고, 밤이 되면 긴 베개와 커다란 이불을 함께 하며 애초에 서로 떠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온갖 일을 힘을 다해 주관하고 다스려서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바쳤고,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공이 이미 늙은 나이임에도 몸이 훼손될 정도로 너무나 지나치게 슬퍼하며 인정과 예법, 형식과 슬픔에 빠뜨린 의절이 없었다. 평상시 거처할 적에는 무익한 일이나 유람은 하지 않았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자면서 근면하고 검약하였다. 남의 훌륭한 점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겼고, 남의 나쁜 점을 보면 자기의 병통인 것처럼 여겼으며, 친척과 친구들의 좋거나 나쁜 일, 기쁘거나 슬픈 일에 안부를 묻고 도와주는 데 정성스럽고 넉넉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언제가 한번은 어떤 사람이 엽전 수십 꿰미를 빌려가고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미 돌려주었다고 속이자, 공이 그와 더불어 따지지 않고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서책을 살 때에는 값을 흥정하지 않고 말하기를, "성인의 경전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어찌 저자거리에서 사고파는 것처럼 하겠는가." 하였다. 이웃 사람이 밤에 집으로 들어와 조세 가마니를 훔쳐가는 것을 공이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하고서 집안사람들에게 누설하지 말도록 경계시키며 말하기를, "어찌 한 섬의 조세 때문에 남을 헤아릴 수 없는 곤경에 빠트리겠는가." 하였다. 계미년(1883) 1월 26일에 삶을 마쳤고, 묘지는 서창촌(西倉村) 왼쪽 산기슭 신좌(辛坐)이며, 갑오년(1894)에 동몽교관(贈童蒙教官)에 증직되었다. 배(配)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태원(泰元)의 따님으로 명고(鳴皐) 임전(任錪)의 후손이고 부덕(婦德)이 있었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경주(慶州) 이진기(李鎭基)에게 시집갔다. 계배(系配)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재원(載元)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조용한데다 유순하고 착했으며 규중의 법도를 두루 갖추었다. 1남3녀를 낳았으니, 아들 윤동(潤東)은 군수를 지냈고, 딸은 신평(新平) 송연심(宋淵心)과 이천(利川) 서용수(徐鎔洙), 능성(綾城) 구교주(具教周)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의 평생을 더듬어 보건대 효성과 우애로 화락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약한데다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니, 이것이 뜻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 법으로 가정에 훌륭한 계책을 남기고 고을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나게 한 이유이다. 계승시켜 나아갈 전통을 남김이 이미 이와 같으니, 산초 열매나 메뚜기 알처럼 번성한 자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질 경사를 또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윤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公姓朴。諱鍾安。字道賢號野隱。新羅密城大君爲繼别之祖。至中葉有諱蔚。察訪。四傳至諱枝樹。監察。壬辰之變。殉節旌閭。贈左承旨。於公爲十世。高祖慶始。曾祖章煥。文章鳴世。祖載禧。考孝源。孝旌閭。妣珍原朴氏順吉女。文康公光前后。純廟甲申五月十七日。公生于淨川里第。天資朴實。性氣溫仁。生長窮約。備經辛苦。而應對周旋。敏贍如流。未嘗一咈親意。兄弟四人。就塾連業。我邁爾征。日有課程。夜則長枕大被。未始有違。家間凡務。殫力幹理。以供菽水。內外艱。公已耆艾。而致毁過甚。情文易戚。未有闕儀。平居不作無益之事。不爲無益之遊。夙興夜寐。克勤克儉。見人之善若己出。見人之惡若己病。親戚知舊。吉凶歡戚。存訊賙恤。無不款洽。嘗有人貸去錢數十緡。久後誣以已還。公不與之辨。卽折其券。買書冊不上下價曰。聖經至重。豈若市井買賣之爲。隣人夜入家竊租苞。公若不見也。戒家人勿泄曰。豈以一石租而陷人於不測乎。癸未正月二十六日終。墓西倉村左麓辛坐。甲午贈童蒙教官。配豊川任氏泰元女。鳴皐錪后。有婦德。生一女適慶州李鎭基。系配河東鄭氏載元女。貞靜柔惠。閫儀備至。生一男三女。男潤東郡守。女適新平宋淵心利川徐鎔洙綾城具教周。孫以下不錄。嗚呼。迹公平生。孝友愷弟。勤儉質慤。是其立心行己之則。而所以貽佳謨於家庭。著令聞於鄉閭者也。垂統可繼。旣已如此。則螽斯椒聊。綿綿餘慶。又豈可量哉。潤東持家狀過余。託以不朽之文。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