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망실248)의 식물을 읊다. 10절 詠不忘室植物 十絶 뒤늦게 시드는 나무 없지 않지만 匪乏後凋樹너와 함께 이웃이 되었구나 與之接爲隣어찌 손때 묻은 것만 하겠는가마는 豈如經手澤심신을 하나로 합할 수 있어 좋구나 好作一心身-소나무[松]-이것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하니249) 無此令人俗옛 현인은 이미 먼저 내 마음 알았네 古賢獲已先창 앞에서 날마다 마주하고 있으니 窓前日相對어찌 평안하다는 소식 기다릴 것 있으랴 何待平安傳-대나무[竹]-푸른 수염 늙은이250)와 백중간이니 伯仲蒼髥老깨끗한 향기가 엇비슷하도다 潔香反覆勝대와 함께 삼익우(三益友)이니251) 益三竹與幷벗의 덕이 크게 차이 나지 않네 友德不逕庭-삼나무[杉]-예로부터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니 從古爲人愛응당 칠절252)에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應緣擅七絶나는 하나도 능한 것 없으니 一能於我無이 나무만 못함이 부끄럽구나 堪愧不如物-감나무[柹]-마음속에 생각하는 이는 누구인가 所懷伊何人천추의 도이 늙은이253)라네 千秋陶李翁유허가 마을 골짝에 전해 오니 遺墟傳里谷억지로라도 누추한 거처에서 함께 하고 싶네 强欲陋居同-밤나무[栗]-과일이 떨어졌다 말하지 말라 莫說果爲下신선 세계가 일찍이 여기에 있었다오 仙源曾在斯어떻게 하면 땅에 가득 심어서 安能種滿地곧 무릉254)처럼 되길 기약할까 便與武陵期-복숭아[桃]-붉고 둥근 모습 사랑스러우니 紫圓形可愛달고 신 맛이 되려 신선하네 甛酢味還新오릉중자255)를 비웃지 말라 莫笑於陵子지금 시대에 또한 짝할 이 드무니 今時亦罕倫-오얏[李]-궐리에 있는 선니의 행단(杏壇)256)을 尼壇在闕里어떻게 본받을 수 있겠는가마는 胡爾效嚬爲이 나무 진실로 싫지 않으니 此固未爲嫌성신을 오히려 기약할 수 있다네 聖神尙可期-살구나무[杏]-꽃이 화사하여 《시경》에 실렸으니 韡韡登周詩천륜으로 만세를 밝혔다네257) 天倫明萬世아 지금 형제들은 嗟哉今弟兄이 나무 대하매 어찌 부끄러움 없으랴 對此寧無愧-아가위나무[棣]-호상258)에는 사람 자취 멀고 湖上人蹤遠도산259)에는 시의 운치 끊겼네 陶山詩韻絶나는 황량하고 적막한 동산에서 而余荒寂園인물이 없음을 함께 탄식하네 俱歎病人物-매화[梅]- 匪乏後凋樹, 與之接爲隣.豈如經手澤? 好作一心身.【松】無此令人俗, 古賢獲已先.窓前日相對, 何待平安傳?【竹】伯仲蒼髥老, 潔香反覆勝.益三竹與幷, 友德不逕庭.【杉】從古爲人愛, 應緣擅七絶.一能於我無, 堪愧不如物.【柹】所懷伊何人? 千秋陶李翁.遺墟傳里谷, 强欲陋居同.【栗】莫說果爲下, 仙源曾在斯.安能種滿地, 便與武陵期?【桃】紫圓形可愛, 甛酢味還新.莫笑於陵子, 今時亦罕倫.【李】尼壇在闕里, 胡爾效嚬爲?此固未爲嫌, 聖神尙可期.【杏】韡韡登周詩, 天倫明萬世.嗟哉今弟兄, 對此寧無愧?【棣】湖上人蹤遠, 陶山詩韻絶.而余荒寂園, 俱歎病人物.【梅】 불망실(不忘室) 김택술이 1944년에 지은 토실(土室) 이름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아니하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한 구절을 차용하였는데, 난세(亂世)에 출처(出處)와 거취(去就)를 절도에 맞게 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後滄集 卷21 不忘室記》 이것……하니 소식(蘇軾)의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에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수척하게 하지만,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라고 한 구절에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9》 푸른 수염 늙은이 소나무의 별칭이다. 창염수(蒼髥叟)라고도 한다. 대와 함께 삼익우(三益友)이니 소식(蘇軾)의 〈유무창한계서산사(遊武昌寒溪西山寺)〉에 "풍천은 양부악이요, 송죽은 삼익우라네.[風泉兩部樂, 松竹三益友.]"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소나무와 삼나무를 동일시하여 말하였다. 참고로 주희(朱熹)는 부친의 이름인 '송(宋)'을 휘하여 '삼(杉)'으로 표기하였다. 삼익우는 세 가지 유익한 벗을 말한다. 칠절(七絶) 감의 일곱 가지 좋은 점으로, 첫째 수명이 긴 것, 둘째 잎이 풍성하여 그늘이 짙은 것, 셋째 새의 둥우리가 없는 것, 넷째 좀이나 벌레가 없는 것, 다섯째 단풍이 들었을 때의 아름다운 잎, 여섯째 먹음직스러운 고운 열매, 일곱째 낙엽(落葉)이 매우 비대(肥大)하여 글씨를 쓸 수 있는 점이다. 《本草 卷30 果部 柿》 도이(陶李) 늙은이 도암(陶菴) 이재(李縡)를 말하는 듯하다. 무릉(武陵)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가리킨다. 오릉중자(於陵仲子)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오릉에 살았던 진중자(陳仲子)로, 아주 청렴결백하였다.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초(楚)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李]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그에 대해 맹자는 "나는 제나라 인물 중에서 중자(仲子)를 으뜸으로 꼽는다. 하지만 중자를 어찌 청렴하다 할 수 있는가. 중자가 견지하는 지조를 유감없이 지키자면 물만 먹고 사는 지렁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於齊國之士, 吾必以仲子爲巨擘焉. 雖然, 仲子惡能廉? 充仲子之操, 則蚓而後可者也.]"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궐리(闕里)에……행단(杏壇) 궐리는 공자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다. 선니(宣尼)는 공자를 말하고, 행단(杏壇)은 공자가 제자들과 강학(講學)하던 곳으로, 단을 쌓고 그 둘레에 살구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행단이라고 하였다. 꽃이……밝혔다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아가위의 꽃이여, 꽃받침이 화사하지 않는가.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만 한 이가 없느니라.[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이다. 호상(湖上)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살았던 안동(安東) 소호리(蘇湖里)를 가리키는 듯하다. 도산(陶山)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만년에 강학했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가리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