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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함 與趙士欽【鏞肅】 신안사(新安社)와 함월정(涵月亭)에서 두 번 강학하며 노닐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평소에 간절히 만나기를 바랐는데, 곧 서로 만나서 따를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떻겠습니까? 시문을 짓고 술자리가 베풀어진 자리에서 그대의 훌륭한 위의(威儀)를 볼 수 있었고 고상한 의론(議論)을 들을 수 있어서, 감동과 부러움이 마음에 가득해 지금까지 취한 듯합니다. 이별한 후 두세 달이 지났는데,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기쁘게 모시며 건강하게 온갖 복을 누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그리워하는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예전처럼 수고롭고 바쁜 사람일 뿐이니, 어찌 멀리 있는 벗을 위해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는 여러 어른을 모시고 있어서 운수가 좋고, 나이와 기력도 매우 성하고 자질이 넉넉합니다. 또 인망을 얻고 있어 책임감이 갈수록 무거워질 것입니다. 부디 엄하게 반성하고 통렬하게 채찍질해서 원대한 학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新安社涵月亭兩度講遊。此是吾儕勝事。況平日渴覿之餘。乃得渙然相接從容乎。文墨樽俎之間。得見威儀之盛。得聞議論之高。滿心感艶。尙今如醉。別來二三朔。未審重庭趨歡。體節百福。遠溯區區不任。義林是依舊勞碌人耳。何足爲遠朋擧似哉。左右方在層侍下好氣數。年力甚富。材質有餘。且人望所在。擔負愈重。切須猛省痛策。以究遠大也。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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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길【찬배】에게 답함 答金允吉【燦培】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항상 만나서 마음 놓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뜻밖에 그대의 안부편지를 받고, 감사하는 마음이 매우 컸으나, 문득 먼저 편지 보낼 수 없었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겨울철에 경학에 힘쓰는 체후가 매우 평안하신지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그립기가 그지없습니다. 저는 정신이 없고 노쇠해서, 사우들에게 말씀드릴 것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아! 시국의 상황이 이에 이르렀는데, 오직 그대들의 유학 기풍이 융성하게 일어나, 항상 우러러 바라보는 마음 이루다 할 수 없습니다. 또 근세의 두세 선생을 위해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는 행사가 있을 것인데, 언제쯤이나 일을 진행합니까? 이 역시 좋은 일입니다. 한 가닥 양맥(陽脈)이 훗날 크게 올 지역이 아닌 적이 없으니, 더욱 매우 부러울 뿐입니다. 南北涯角。恒切覯降。謂外得承惠問。區區感荷。旋愧其不能先之也。未詢冬令經體崇謐。遠溯無任。義林鹵莽荒廢。愧無以奉聞於士友間也。嗟惟時象至此。而惟貴中儒風蔚興。每不勝馳仰。又爲近世二三先生。將有壇享之擧。未知經紀早晏何居耶。此亦好事。一縷陽脈。未始非他日大來之地。尤切欽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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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에서 강회를 파하고 읊다【2수】 詠歸亭講罷吟【二首】 높디 높은 정자 동천을 누르니 (亭子高高壓洞天)속진의 시끄러움 이르지 않아 하루가 일 년 같네 (囂塵不到日如年)예를 때때로 익혀 더욱 주밀하였고 (節文時習加周密)의리를 궁구하여 더욱 온전히 하였네 (義理窮研更穩全)지금 세상에 어떤 사람이 먼저 꿈을 깨랴 (今世何人先覺夢)예부터 무슨 일이 가벼운 안개와 같았던가 (古來甚事等輕煙)유연히 강회를 마치고 배회하며 서 있으니 (悠然停講徘徊立)숲 사이 석양이 강석을 비추네 (萬樹斜陽下墨筵)느릿느릿 지는 해가 숲에 비춰 밝으니 (遲遲斜日入林明)조용히 흉금을 마음껏 털어놓네 (剩得從容暢敍情)들마다 모를 심으며 일이 지체될까 재촉하고 (野野秧移催役晚)집집마다 보리를 타작하며 풍년을 즐거워하네 (家家麥打樂豐成)늙어서 초년의 뜻을 부질없이 저버렸으니 (老年虛負初年志)후세에 누가 이 세상에 살다 간 줄 알리오 (後世誰知此世生)그래도 두 세 명의 벗이 예전처럼 남아 있어 (也賴二三朋舊在)매번 단란한 모임에서 괴로운 마음 편안해지네 (每從團聚苦懷平) 亭子高高壓洞天。囂塵不到日如年。節文時習加周密。義理窮研更穩全。今世何人先覺夢。古來甚事等輕烟。悠然停講徘徊立。萬樹斜陽下墨筵。遲遲斜日八林明。剩得從容暢敍情。野野秧移催役晚。家家麥打樂豐成。老年虛負初年志。後世誰知此世生。也賴二三朋舊在。每從團聚苦懷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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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 양공【재성】에 대한 만사 挽華奄梁公【在成】 어디에 고반237)이 있는가 (何處考盤在)화표의 학238) 만 겹이나 시름겹네 (華鶴萬疊深)몸은 초야에서 늙었고 (身世老漁樵)사업은 거문고와 책에 부쳤네 (事業付書琴)고상한 의리 향리에 드러났고 (高義著鄕里)맑은 의표 운림을 움직였네 (淸標動雲林)어찌하여 다 떠나 버렸나 (如何乘化盡)나를 버리고 찾지 않네 (棄我不相尋)옛 벗은 새벽별처럼 드무니 (故舊如晨星)교유함에 누구와 함께하랴 (交遊誰盍簪)병으로 변변치 않은 제물 올리지 못하고 (病違鷄酒奠)흰 구름 낀 봉우리를 슬피 바라보네 (悵望白雲岑)이 몇 줄의 만사를 지어서 (述此數行誄)눈물을 닦으며 한번 읊조리네 (拭淚試一吟) 何處考盤在。華鶴萬疊深。身世老漁樵。事業付書琴。高義著鄕里。淸標動雲林。如何乘化盡。棄我不相尋。故舊如晨星。交遊誰盍簪。病違雞酒奠。悵望白雲岑。述此數行誄。拭淚試一吟 고반(考盤)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산림에 은거하며 안빈낙도하는 은사의 생활을 즐긴다는 말로 쓰인다. 화표(華表)의 학 화표는 요동(遼東)을 가리킨다.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선도(仙道)를 배워 터득한 뒤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고향 땅에 돌아와서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다가 탄식하며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搜神後記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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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내범【영후】에게 답함 答白乃範【永厚】 은거하면서 의(義)를 행하시는 것을 평소에 익히 우러러 받들었는데 지난번에 여관의 많은 사람 사이에서 용모와 풍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날 찾아주신 뜻이었겠습니까. 뒤미쳐 생각하니 서글프고 허전함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습니다. 뜻밖에 영랑(令郞)이 제집 문에 이르러 은혜로운 명을 거듭 받았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수양하면서 지내는 체후가 원기 왕성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욱 듣기를 원하던 소식이었습니다. 한번 왕림하겠다는 말씀은 감사하고 송구스럽지만, 노년의 근력으로 어찌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서는 고역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영랑(令郞)이 매번 이렇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찾아오지만 다만 못나고 어리석어 도움을 드릴 만한 조그마한 지식조차 없습니다. 부끄러워 땀만 흐릅니다. 隱居行義。稔仰有素。而至於疇囊。暫接顔範於逆旅稠人之中。此豈當日委訪之意哉。追念悵缺。迄今未已。謂外令郞踵門。荐辱寵命。感戢曷勝。仍審靜體衛重。尤協願聞。一枉之敎。非不感悚。而老年筋力。何以能堪杖屨之役耶。令郞每此跋涉。而顧無狀倥倥。未有一知半解爲之幇助者。愧汗萬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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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계루에서 목은 이 선생의 판상 운66)에 차운하다 枕溪樓次牧隱李先生板上韻 강남에서 으뜸인 침계루에 (江南第一枕溪樓)먼 길손 올라 보니 흥이 그치지 않네 (遠客登臨興不休)속세에서 누리는 한평생의 화려함 (百年塵土繁華事)부질없이 흰머리만 재촉하게 만들었구나 (謾使人生催白頭) 江南第一枕溪樓。遠客登臨興不休。百年塵土繁華事。謾使人生催白頭。 침계루(枕溪樓)에서……운 침계루는 전라도 송광사(松廣寺)에 있는 누대이다. 이색(李穡)의 「침계루(枕溪樓)」시에 "구름 헤치고 한 번 침계루에 오르니, 곧 인간 세상의 만사를 멈추고 싶구나. 한나절 올라갔다 바로 돌아가니, 내일 아침 말에 오르면서 다시 고개 돌이키리.[破雲一上枕溪樓, 便欲人間萬事休. 半日登臨卽歸去, 明朝上馬重回頭.]"라고 했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40 順天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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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경오년 최명용(崔鳴瑢)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종교/풍속-관혼상제-혼서 庚午十二月初六日 崔鳴瑢 庚午十二月初六日 崔鳴瑢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경오년 12월 초6일에 최명용이 부안김씨 집안에 보낸 혼서. 경오년(庚午年) 12월 초6일에 최명용(崔鳴瑢)이 부안김씨(扶安金氏) 집안에 보낸 혼서(婚書)이다. 최명용은 자신의 아들 도철(道澈)의 신부 집에 이 문기를 예단과 함께 보냈다. 최명용은 아들 최도철의 혼사를 치루기 위해 이 문기를 작성하여 신부 집에 보냈다. 최명룡의 본관은 탐진(耽津)이지만, 어느 곳에 거주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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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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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76년 유학(幼學) 홍종하(洪鍾夏)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丙子年 洪鍾夏 金炳亮 丙子年 洪鍾夏 金炳亮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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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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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67년 홍성초(洪聖楚) 세음기(細音記) 2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丁卯年四月五日 洪聖楚 丁卯年四月五日 洪聖楚 金炳亮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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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 반조원64) 회고 林川頒詔院懷古 늦봄 즈음에 나그네 되어 배회하니 (爲客逶迤際暮春)가림65)에서 오늘 감회가 새롭네 (嘉林今日感懷新)당년의 문물은 모두 어디에 있나 (當年文物皆安在)십 리 적막한 물가에 안개만 자욱하네 (十里煙波寂寞濱) 爲客逶迤際暮春。嘉林今日感懷新。當年文物皆安在。十里烟波寂寞濱。 반조원(頒詔院)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 있는 마을이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금강을 따라 진군하던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당나라 고종의 조서를 반포하였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 임천현(臨川縣)에 속했다. 가림(嘉林) 충청도 임천(林川)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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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줄기로 시초를 대신하다 菊莖代蓍 우리나라에는 애초에 영험한 시초 없었으니 東國初無蓍草靈국화 줄기로 대신 써도 점괘가 신명하였네 菊莖代用亦神明괘분과 귀설260)로 하늘의 운세를 본뜨고 掛分歸揲象天運노소와 우기261)에 효가 이루어짐을 본다오 老少偶奇觀爻成점괘 묻는 자가 마음의 허물을 깨끗이 씻으면 問者洗淸心上累응하는 괘사는 메아리 소리 듣는 듯 빠르다네 應辭捷若響中聽중니께서 만년에 기뻐하심은262) 진실로 이 때문이니 宣尼晩喜良因是후학이 본받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부끄럽네 後學效嚬慙未能 東國初無蓍草靈, 菊莖代用亦神明.掛分歸揲象天運, 老少偶奇觀爻成.問者洗淸心上累, 應辭捷若響中聽.宣尼晩喜良因是, 後學效嚬慙未能. 괘분(掛分)과 귀설(歸揲) 《주역》 점을 칠 때의 방식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대연의 수가 오십이요 사용하는 것은 사십구이다. 이를 나누어 둘로 만들어서 천지를 본뜨고,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걸어서 삼재(三才)를 본뜨고, 이것을 넷으로 셈하여 사시(四時)를 본뜨고, 남은 수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윤달을 본뜬다.[大衍之數五十, 其用四十有九. 分而爲二, 以象兩, 掛一, 以象三, 揲之以四, 以象四時, 歸奇於扐, 以象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노소(老少)와 우기(偶奇) 노소는 《주역》 점을 치면 노음(老陰), 노양(老陽), 소음(少陰), 소양(少陽)의 네 가지 효가 나오는데, 노음과 노양은 변효(變爻)이고 소음과 소양은 불변효(不變爻)이다. 우기는 우수(偶數)와 기수(奇數)로, 기는 양이 되고 우는 음이 된다. 중니(仲尼)께서 만년에 기뻐하심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서괘〉, 〈단전〉, 〈계사〉, 〈상전〉, 〈설괘〉, 〈문언〉을 짓고, 《주역》을 하도 많이 읽어서 책을 맨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孔子晩而喜易, 序、彖、繫、象、說卦、文言, 讀易, 韋編三絶.]"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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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이 회갑 날 준 시에 화답하여 사례하다 3수 步謝汝重甲日見贈韻【三首】 평생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끝내 펴지 못해 志學平生竟莫申흉중은 물욕에 덮이고 얼굴엔 티끌이 묻었네 胸中茅塞面侵塵수백 수천 수만 가지 일에 겁회243)가 차갑게 식고 百千萬事劫灰冷육십일 년의 세월에 머리가 새로 희었네 六十一年頭雪新장수하여 후배들 인도하였다 말하지 말라 長壽休言開後進재주 없는 나는 늘 선친을 욕보일까 두렵다네 不才常恐忝先親시를 주니 정성스러운 뜻에 감동하였지만 贈詩縱感慇懃意기대하고 칭찬함은 되려 나를 아는 이 아니라오 期獎還非知我人어찌 생각했으랴 나 태어난 갑신년 돌아올 줄 豈意我生回甲申잔약한 몸은 가벼운 티끌 하나의 신세도 못 되네 孱軀不啻一輕塵선친의 연세 짧았으니 그 슬픔 어찌 끝이 있으랴 先齡積短悲何極천한 목숨 유독 기니 부끄러움이 다시 새롭네 賤壽偏長愧却新해진 책에서 좀 벌레나 잡으니 견식이 없어서이고 敗册掃蟫無見識빈 산에서 사슴 길들이니 친한 벗이 끊겨서라오 空山馴鹿絶朋親오늘 아침 운당포(篔簹鋪) 시244) 짓고 〈육아(蓼莪)〉시 읊으며 篔題莪詠今朝事홀로 가슴앓이할 뿐 남에게 말하지 못하겠네 獨自傷心不語人내가 태어난 해는 까마득한 지난 갑신년이니 我降邈然前甲申상전벽해 이후로 세상의 비린 티끌 실컷 겪었지 滄桑以後厭腥塵오래된 사문 힘써 부지하니 참으로 애석하고 力扶堪惜斯文舊세상에서 신학문 배움을 슬퍼한 들 어이 하랴 心痛其如世學新비록 오래 살기를 가슴속으로 간절히 바라지만 縱切長年胸裡願슬하에 직접 닥칠 재앙을 차마 보겠는가 忍看先禍膝前親늙은이의 마음 언짢으니 어찌 안정될 수 있을까 老懷作惡何能定오늘날 선비로 처신하기 어렵구나 此日難爲士子人 志學平生竟莫申, 胸中茅塞面侵塵.百千萬事劫灰冷, 六十一年頭雪新.長壽休言開後進, 不才常恐忝先親.贈詩縱感慇懃意, 期獎還非知我人.豈意我生回甲申, 孱軀不啻一輕塵.先齡積短悲何極? 賤壽偏長愧却新.敗册掃蟫無見識, 空山馴鹿絶朋親.篔題莪詠今朝事, 獨自傷心不語人.我降邈然前甲申, 滄桑以後厭腥塵.力扶堪惜斯文舊, 心痛其如世學新.縱切長年胸裡願, 忍看先禍膝前親?老懷作惡何能定? 此日難爲士子人. 겁회(劫灰) 겁화(劫火)의 재라는 뜻으로, 재앙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가 일어나서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나온 검은 재에 대하여,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1 竺法蘭》 운당포(篔簹鋪) 시 운당포 벽 위에 쓰여진 시를 말한다. 주희(朱熹)가 젊은 날 운당포에서 쉬다가 벽에 "빛나는 영지여, 한 해에 세 번이나 피었네. 나는 홀로 무엇을 하였기에, 뜻이 있으나 이룬 게 없는가.[煌煌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라고 한 혜강(嵇康)의 〈유분시(幽憤詩)〉가 적힌 것을 보고는 자신의 뜻과 같다고 비통해한 고사가 있다. 《朱子大全 卷84 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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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남유고》 발문 鳳南遺稿跋 봉남옹(鳳南翁)39)이 이미 돌아가시고 그 손자 승환(承渙)40)이 유고를 수습하여 하루는 다산재사(多山齋舍)로 나를 방문하여 교감하고 편집하는 일을 청하였다. 나는 안목이 고루하다는 것으로 오래 동안 굳게 사양하였으나 다만 생각건대 옹은 나의 옛날 금석지교(金石之交)이다. 지금 유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비창(悲愴)하여 한 번 열람할 마음이 없지 않았다. 또 승환은 묘년[妙末]의 나이에 선대의 원고가 귀중한 줄 알고 그 민멸되고 흩어지는 대로 맡겨두려고 하지 않으니, 이 뜻은 지극히 우연이 아니다. 드디어 손 가는대로 교정하고 대략 재량하여 줄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두 달 만에 비로소 일을 마쳤으니, 그 시(詩)·사(詞)·서(書)·서(序)·기(記)·설(說)·문(文)·장(狀)이 모두 1책이다.오호라! 이것이 어찌 내가 손댈 수 있는 것이겠는가. 안목이 고루할 뿐 아니라 아울러 세상 일에 분주하여 능히 세심하게 정밀히 비교할 수 없었으니, 구슬을 버리고 돌을 남겨 두는 폐단이 없지 않을 줄 어찌 보장하겠는가. 그러나 나무 인형 만들 때 코를 크게 해 두면 장차 영근(郢斤)이 흙을 깎아내는 것41)이 없지 않을 것인데, 이것은 승환의 책임이니, 원컨대 돌아가 힘쓸지어다! 鳳南翁旣沒。其孫承渙收拾遺藁。一日過我於多山齋舍。請校勘編摩之役。余以眼目固陋。牢辭久之。但念翁是余疇昔金石之交也。今見遺墨。不覺悲愴。不無一番繙閱之願。且承渙以妙末之年。知先藁之爲重。而不欲任其泯散。此意極不偶然。遂隨手點校。略加裁減。首尾二朔。乃始斷手。其詩詞書序記說文狀總二冊子。嗚乎。此豈余所可犯手者哉。不惟眼目固陋。兼以世故鞅掌。不能細心精較。安保無遺珠藏石之獘也。然木偶大鼻。將不無郢斤之斲堊。此承渙之責也。願歸而勉之哉。 봉남옹(鳳南翁) 홍채주(洪埰周, 1834~1887)를 말한다. 자는 경좌(卿佐), 다른 휘는 종진(鍾鎭), 자는 응중(應仲), 호는 봉남,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자세한 내용은 《일신재집》 권18 〈봉남 홍공 행장(鳳南軒洪公行狀)〉에 보인다. 승환(承渙):홍승환(洪承渙, 1870~?)을 말한다. 자는 사증(士拯)이다. 영근(郢斤)이……것 영(郢) 땅 사람이 자귀질하여 흙을 깎는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시문을 잘 고치는 감식안을 말한다. 여기서는 정의림이 지은 글을 다른 유능한 사람이 수정해 줄 것이라는 뜻이다. 《장자》 〈서무귀(徐無鬼)〉에 "영인(郢人)이 장석(匠石)의 솜씨를 철저히 믿어 자신의 코끝에다 마치 파리 날개만 한 흙을 바르고는 장석을 시켜 그 흙을 깎아내게 하였는데, 과연 장석이 바람소리가 휙휙 나도록 자귀를 휘둘러 깎아냈는데도 흙만 깨끗이 다 깎이고 코는 아무렇지도 않았다."라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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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와 정공 가장〉 뒤에 적다 題靜窩鄭公家狀後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영특하고 빼어난 자질로 시례(詩禮)18)와 법필(法拂)19)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효제(孝悌)로 향리에 드러났고 장성하여서는 문학으로 붕우 간에 알려졌으니, 그 젖어들고 훈도를 받아 추향과 인도가 실로 남들과 다름이 있었던 것이다. 중년에 이르러 나아가 성담(性潭) 송 선생(宋先生)20)의 문하에서 스승으로 섬겨 차례로 강토(講討)하고 차례로 증정(證正)하여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변하며21) 정신으로 이해하고 통하게 하여 안목이 더욱 열려 넓어지고 심회가 더욱 펼쳐져 열리니, 원근의 종유하는 이들과 한 때의 여론이 자자하게 칭찬하며 추중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축적한 것은 족히 사물에 미치고 그 품었던 포부는 족히 세상에 쓰일 만했는데, 이에 능히 남쪽 끝 바닷가 모퉁이 사이에 품고 거두어 종정(鍾鼎)22)이 부유함이 되는 것과 헌면(軒冕)23)이 영화24)가 되는 줄 모른 채 여유롭게 노닐고 장수유식(藏修遊息)25)하였으니, 그 뛰어난 운치와 고상한 자취는 어찌 보통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오호라! 같은 도에 백 년 사이에 공과 같은 선진(先進) 숙유(宿儒)가 있었는데도 스스로 생각건대 비루하고 용렬하여 늙고 병들어 거의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이에 그 가장(家狀)을 읽어 볼 수 있었으니, 아, 또한 늦었도다! 한스럽게도, 능히 90리 길[三舍]을 지팡이 짚고 가서 당일에 거니시던 곳에서 그 정채(精采)를 상상하며 만분의 일의 뜻이나마 갚을 수 없었으니, 삼가 이 글을 써서 감회를 기록한다. 謹按。公以穎異秀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幼以孝悌著於鄕里。長以文學聞於朋友。其擩染薰蒸。趨向指引。固有以異於人者。至中身。進而摳衣於性潭宋先生之門。次第講討。次第證正。聚而辨之。會而通之。眼目益以開廣。衿懷益以展拓。遠近遊從。一時物論。無不藉藉稱道而爲之推重焉。其所積蓄。足以及物。其所抱負。足以需世矣。而乃能懷之卷之於南荒海曲之間。不知鍾鼎之爲富。軒冕之爲勞。而優哉遊哉。修焉息焉。其偉韻遐躅。豈常調人所可涯涘哉。嗚乎。同省百年間。有先進宿儒如公之人。而自惟陋劣。至於老病垂死之日。乃得其家狀而讀之。吁亦晩矣。恨未能策藜三舍。以想象其精采於當日杖屨之地。以酬萬一之意。謹書此而志感焉。 시례(詩禮) 가정교육 또는 가학(家學)을 뜻한다. 공자의 아들 이(鯉)가 뜰에서 공자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가 공자로부터 시(詩)와 예(禮)를 배웠느냐는 질문을 받고 또 그것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듣고서 물러나와 시와 예를 배웠던 일에서 유래한 말이다. 《論語 季氏》 법필(法拂) 법가필사(法家拂士)의 준말로, 법가는 대대로 법도 있는 집안을 말하고, 필사는 필사(弼士)와 같은 말로 보필하는 현신(賢臣)을 말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내부에는 법가와 필사가 없고, 외부에는 적국과 외환이 없는 경우는, 나라가 항상 멸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성담(性潭) 송 선생(宋先生) 송환기(宋煥箕, 1728~1807)를 말한다.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의 5대손이자 송인상(宋寅相)의 아들이다. 심성논변에서는 한원진(韓元震)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성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배워서……분변하며 원문의 '취이변지(聚而辨之)를 풀이한 말인데,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이(九二)〉 에 "군자는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변하며……이는 임금의 덕을 갖춘 사람이다.[君子學以聚之, 問以辨之,……君德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종정(鍾鼎) 종명정식(鐘鳴鼎食)으로, 사람이 많아서 식사 때가 되면 종을 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식사 시간을 알리고 솥을 벌여 놓고 회식을 한다는 뜻이다. 부귀한 집안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뜻한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마을에 들어찬 집들은 종을 치고 솥을 늘어놓고 먹는 집들이다.[閭閻撲地, 鍾鳴鼎食之家.]"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2》 헌면(軒冕) 고관(高官)의 거마(車馬)와 면복(冕服)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하여 높은 관작(官爵)을 말한다. 《장자》 〈선성(繕性)〉에 "헌면이 내 몸에 있는 것은 내가 타고난 성명이 아니요, 외물이 우연히 내 몸에 와서 붙어 있는 것일 뿐이다.[軒冕在身, 非性命也, 物之儻來寄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영화 저본에는 '노(勞)'자로 되어 있으나 '영(榮)' 자의 잘못으로 보고 수정 번역하였다. 장수유식(藏修遊息)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游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장(藏)은 늘 학문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요, 수(修)는 방치하지 않고 늘 익히는 것이다. 식(息)은 피곤하여 쉬며 함양하는 것이고, 유(遊)는 한가하게 노닐며 함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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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효자 경수 사실〉 뒤에 적다 題曺孝子【暻洙】事實後 내 일찍이 당송(唐宋)의 고사를 보고 진신 사대부 가운데 한휴(韓休)26)·유공작(柳公綽)27)·노종도(魯宗道)28)·여공저(呂公著)29) 같은 제공들의 한 시대 가법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면서 이것은 천지가 문명(文明)하고 국가가 승평(昇平)한 때라고 여겼다. 선비가 이미 삼대(三代) 이전에 태어나지 못하였다면 내려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또한 다행이라 할 것이다. 시사(時事)가 변화함에 이르러 온 천하가 장사치여서 상인[棘人]의 소필(素韠)30)과 도인(都人)의 주직(綢直)31)을 지금은 볼 수가 없네. 당일의 기상을 뒤미처 상상해보면 사무친 그리움과 함께 돌아가고픈 소원이 어떠하겠는가.지금 고흥(高興)의 조 효자(曺孝子) 전 승지 경수(暻洙)의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절개는 실로 사람들에게 회자된 지 오래다. 그 훌륭한 숙인(淑人) 신씨(申氏)의 규문에서의 거동과 법도는 지극히 순수하고 갖추어져 남편을 받듦에 아름다움이 짝한다고 일컬어져 부부가 함께 정려와 포상을 받았다. 네 명의 아우 전수(典洙)·인수(仁洙)·문수(文洙)·기수(錤洙) 또한 모두 독서하고 몸을 단속하여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함께 은혜로운 명을 받았다.오호라! 당시 승평의 기상이 진신 사대부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오늘에 이르러 이에 시골 사우의 집안에서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록 음도(陰道)가 극성하게 된 날에 있더라도 이른바 "양(陽)은 다 없어질 이치가 없다."32)라는 것은 참으로 빈 말이 아닐 것이다. 옷깃을 여미던 끝에 삼가 권말(卷末)을 더럽혀 앙모하던 만분의 일의 뜻을 깃들인다. 余嘗觀唐宋間故事。歎搢紳士大夫如韓休柳公綽魯宗道呂公著諸公一時家法之美。以爲此是天地文明。國家昇平之會也。士旣不得生於三代之上。則降而生於此時。亦云幸矣。至於時移事變。大宇商商。棘人之素韠。都人之綢直。今不可得以見矣。追想當日之氣像。其菀結之懷。同歸之願。爲何如哉。今高興之曺孝子前承旨暻洙。至行偉節。固膾炙於人久矣。其齊淑人申氏。閫儀閨範。極爲純備。奉承君子。見稱匹休。夫婦俱蒙旌閭褒爵。有弟四人典洙仁洙文洙錤洙。亦皆讀書勅躬。友弟深至。倂蒙恩命。嗚乎。當日昇平之象。在於搢紳士大夫之間者。誰知至於今日而乃是得見於鄕曲士友之家乎。雖在陰道極盛之之日。而所謂陽無可盡之理者。信非虛語矣。歛衽之餘。謹塵穢卷末。以寓慕仰萬一之意云爾。 한휴(韓休) 673~740. 당(唐)나라 경조(京兆) 장안(長安) 사람으로, 자는 양사(良士)이며, 좌보궐(左補闕), 예부 시랑(禮部侍郞), 지제고(知制誥), 상서우승(尙書右丞)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정(時政)의 잘잘못에 대해 모두 극간하였기 때문에 현종(玄宗)이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게 되면 번번이 좌우에게 "한휴가 아느냐?"라고 물었는데,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휴의 상소가 올라왔다고 한다. 《新唐書 卷126 韓休列傳》 유공작(柳公綽) 765~832. 당나라 경조 화원(京兆華原) 사람으로, 자는 관(寬) 또는 기지(起之)이다. 문종(文宗) 때의 명신으로 자는 관(寬)이며 뒤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가법이 엄숙하여 《소학》 〈선행(善行)〉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노종도(魯宗道) 966~1029. 송(宋)나라 명신으로 자는 관지(貫之), 호는 퇴사암(退思巖),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벼슬은 해염령(海鹽令),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해염령 때 고을 동남항(東南港)이 인몰된 것을 다시 준설하여 백성들은 그 항구를 노공포(魯公浦)라 불렀다. 《宋史 卷286 魯宗道列傳》 여공저(呂公著) 1018~1089. 송나라의 명재상으로 자는 회숙(晦叔)이다. 구양수(歐陽脩)와 함께 강학하였으며, 진사에 합격한 후 영주 통판이 되고 여러 차례 어사중승(禦史中丞)을 지냈다. 왕안석(王安石)이 제정한 청묘법(靑苗法)을 반대하였으며, 철종(哲宗) 때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제수되자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신법(新法) 폐지를 주장하다가 당쟁에 말려들어 추방되었다. 신국공(申國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소필(素鞸) 하얀 무릎 가리개로 상주의 상복이다. 도인(都人)의 주직(綢直) 도성 사람들의 성대했던 의용(儀容)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도인사(都人士)〉에 "저 서울 양반은 대립에 치포관(緇布冠) 쓰셨고, 저 군자의 따님은 머리숱 많고 예뻤는데, 지금은 볼 수 없는지라 내 마음 기쁘지를 않네.[彼都人士, 臺笠緇撮, 彼君子女, 綢直如髮, 我不見兮, 我心不說.]"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양(陽)은……없다 《주역》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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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암 김공 가장〉 뒤에 쓰다 書槐庵金公家狀後 조씨(晁氏)는 이도(以道)의 거듭한 경계를 따르고,33) 이씨(李氏)는 종악(宗諤)이 제정한 것34)을 좇아서 따라 지켜 잃지 않아 가법의 아름다움으로 중국 사대부의 모범이 되었다. 지금 회촌(會村)의 김씨(金氏) 또한 돈목(敦睦) 근칙(謹勅)으로 우리 고을의 명가가 되니, 대개 그 선대부 괴암공(槐庵公)이 창시한 덕분이다.내가 약관의 나이 때 통가(通家)35)의 자제로 책상 아래에서 공에게 인사드리고 자못 끊임없이 왕래하면서 그 몸은 후중하고 모습은 예스러우며 기는 온화하고 말씀은 엄격한 것을 보고 덕 있는 장자(長者)인 줄 알았다. 집안에서 존유(尊幼) 대소(大小)로부터 아래로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온화하고 즐거워 한마디도 패려(悖戾)한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자손들이 계승하여 감히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지금 30여 년이 되었다.공은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여 충신(忠信)을 입심(立心)의 근본으로 삼고 청근(淸謹)을 지신(持身)의 근본으로 삼고 근검(勤儉)을 어가(禦家)의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그 규구(規矩)와 승척(繩尺)을 이미 고인의 법문(法文)에서 얻은 것이다. 버려진 것을 지켜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 상을 받지 않은 것과 노인을 불쌍히 여겨 부역을 면제해 주고 그 사례를 받지 않은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덕이 두터운 것이어서 남들이 능하기 어려운 것이다. 안으로는 가정에서 효도하고 종족에 화목하며, 밖으로는 벗들에게 미덥고 고을에 화합하여, 돌아가신 뒤에도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준수하고 사림들은 그 풍성을 칭송하는 것은 누구인들 스스로를 경계하는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오호라! 소년(小年)이 대년(大年)에 미치지 못하고 후진(後進)이 선진(先進)만 못하니, 이것은 옛 사람이 이미 탄식을 일으킨 곳인데, 더구나 시대의 상황이 날로 타락하고 선비들의 추향이 날로 잘못되는데 선진과 대년의 질실(質實) 충각(忠慤)하고 박아(博雅) 장후(長厚)한 기풍을 볼 수 없단 말인가? 나는 공의 손자 장석(章錫)36)이 지은 가장(家狀) 한 편에서 광감(曠感)37)의 생각을 감당할 수 없어 삼가 몇 줄의 거친 말로 써서 기록한다. 晁氏因以道之申戒。李氏由宗諤之所制。遵守不失。以家法之美。爲中州士大夫之楷範。今會村金氏。亦以敦睦謹勅。爲吾鄕名家。蓋其先大父槐庵公創始之力也。余在弱冠。以通家子弟。拜公於床下。頗源源焉。見其體厚貌古。氣和言厲。可知爲有德長者。閤門之內。尊幼大小。下至婢僕。皆溫溫怡怡。未聞一言有悖戾之聲。公歿而子孫承襲之。不敢廢墜。爲三十餘年于玆矣。公嘗自警。以忠信爲立心之本。淸謹爲持身之本。勤儉爲禦家之本。此其規矩繩尺。已得古人之法文。至於守遺還主而不受其賞。悶老除役而不納其謝。皆德之厚而人所難能也。內而孝於家庭。睦於宗族。外而信於朋友。和於鄕井。以至身沒而子孫遵其敎。士林誦其風者。夫孰非自自警中出來耶。嗚乎。小年不及大年。後進不如先進。此是古人已所興歎處。況今時象日汚。士趨日非。而先進大年。質實忠懿。博雅長厚之風。不可得以見之耶。余於公之孫章錫所撰家狀一編。不勝曠感之思。謹以數行蕪辭。書以識之。 조씨(晁氏)는……따르고 《소학》 〈선행(善行)〉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 근세 고가에 오직 조씨가 이도가 자제를 거듭 경계함으로 인하여 모두 법도가 있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도(以道)는 조열지(晁說之, 1059~1129)의 자이다. 자호(自號)를 경우생(景迂生)이라 하여 흔히 경우(景迂) 선생이라 불렸다. 저서로는 《유언(儒言)》, 《조씨객어(晁氏客語》 등이 있다. 종악(宗諤)이 제정한 것 송나라 재상 이방(李昉, 925~996)의 집안은 자손이 몇 대를 거치면서 가족이 200여 명이 되었는데도 함께 기거하고 함께 식사하며 대가족 생활을 하였다. 전장과 상점 운영에서 나온 수입과 관직에 있는 자의 봉록을 모두 한 창고에 모아서는 식구 수대로 날마다 양식을 공급하였으며, 혼례와 장례에 소요되는 경비에도 모두 액수를 정하였다. 집안의 자제들에게 이러한 일을 분담하여 맡게 하였는데, 이러한 가정 경제의 제도는 이 재상의 아들인 한림학사 이종악(李宗諤, 964~1012)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小學 善行》 통가(通家) 대대로 사귀어온 집안이나 인친(姻親)의 사이를 말한다. 장석(章錫) 김장석(金章錫, 1853~?)을 말한다. 자는 보현(甫賢), 호는 하산(鰕山),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오래 지난 세월에 대한 감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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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송진택(宋鎭澤)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子十月日 宋鎭澤 泰仁官 甲子十月日 宋鎭澤 泰仁縣監 전라북도 태인군 泰仁官[着押] 2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편, 『조선시대 전라도의 감사·수령명단』,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5.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864년(고종 1) 10월에 송진택(宋鎭澤)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64년(고종 1) 10월에 전주(全州)에 사는 송진택(宋鎭澤)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송진택의 어머니 산소가 태인 남면(南面) 반룡촌(盤龍村)에 있는데 지난해 9월 태인현에 사는 김요흠(金堯欽)이 이곳에 투장(偸葬)을 했으므로 송진택은 태인겸관에게 정소(呈訴)하여, "사실을 적간(摘奸)한 뒤에 김가를 잡아가두고 보고하라"는 제음(題音)과 그해 10월 그믐 안에 굴거(掘去)하겠다는 김요흠의 수표를 받았다. 그러나 기한이 지나도 굴거하지 않자, 송진택은 태인현감에게 다시 정소하여 "사실을 조사하고 잡아 오라"는 제음과 1월 그믐까지 굴거하겠다는 김요흠의 수표를 받았다. 그러나 김요흠이 또 다시 기한을 어기자 송진택은 태인겸관에게 다시 정소해 "사실을 조사하고 독굴하기 위해 잡아오라"는 제음과 9월 그믐까지 굴거하겠다는 수표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굴거하지 않으니 김요흠을 잡아다 가두고 투총(偸塚)은 즉각 굴거해 달라고 송진택은 태인현감에게 다시 정소하였다. 이에 태인현감은 김요흠을 잡아오라고 지시하였다. 송진택은 1863~1864년 사이에 태인겸관과 태인현감에게 번갈아 소지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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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化民宋鎭澤右謹言民之慈母墳山在於泰仁南面盤龍村前麓而㝎山直守護矣不意去年九月良中本縣居金堯欽偸埋其親於民之親山單白虎壓逼之地故具由仰訴於井邑 兼城主則 題音內摘奸後金哥捉囚報來事 行下故往示 題音則同堯欽自知理屈限十月晦內掘去之意成標以給故姑爲寬限矣限日已過尙不掘去故更告于本縣 城主前 題內査實捉來 行下故往示題音則同堯欽累累懇乞以正月晦內掘去之意更爲成標以給故又爲寬限矣限日又過尙不掘去故前後文蹟帖連仰訴伏乞行下向敎是事兼城主 處分甲子二月 日▣▣官[着押][題辭]査實督掘次▣▣(捉來)事山在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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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에서 묵으며 宿佳谷 서쪽에서 온 길이 푸른 시내로 통하니 西來一路碧溪通가곡의 안개 노을이 푸른 강에 비치네 佳谷煙霞映綠紅어진 주인은 시상이 속된 매임 아니나 賢主韻情非俗累서생은 이름이 텅 비어 부끄럽네 書生名字愧虛空길손의 집 떠난 고생을 말하지 말게나 休言客子離家苦도리어 산천의 기력 돕는 공을 느꼈네 還覺山川助氣功다시 심진동 속으로 들어가니 更向尋眞洞裏去의건에 솔솔 맑은 바람이 일렁이네 衣巾習習動淸風 西來一路碧溪通, 佳谷烟霞映綠紅.賢主韻情非俗累, 書生名字愧虛空.休言客子離家苦, 還覺山川助氣功.更向尋眞洞裏去, 衣巾習習動淸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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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천에 제하다 2수 題藥泉【二首】 이 샘물을 마시는 자로 하여금 能令飮此者온갖 병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면서 百病自退移사람 마음에 거짓이 많은 병은 人心多病詐어째서 함께 치료하지 않는가 胡不幷與治이는 약천에게 묻는 것이다.마음병은 의리로 나을 수 있고 心病義可愈몸의 병은 약으로 고쳐야 하네 身疾藥當移세상 사람들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世人吾其柰자기 마음은 결국 스스로 다스려야지 自心竟自治이는 약천이 대답한 것이다. 能令飮此者, 百病自退移.人心多病詐, 胡不幷與治?【問藥泉】心病義可愈, 身疾藥當移.世人吾其柰? 自心竟自治.【藥泉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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