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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의 큰 잔칫날에 사의와 여안이 시에 개연히 차운하다 2수 彼人大宴日 士毅汝安有詩 慨然 次韻 【二首】 홀로 가을바람 맞으며 눈물 자욱 씻는데 獨倚秋風灑淚痕저 사람은 삼대가 이미 얽힌 뿌리라네 彼人三世已盤根어찌하여 팔도에 남아 하나 없는 것인가 胡無八域一男子제멋대로 붉은 깃발이 읍촌에 퍼져있네 任爾紅旗遍邑村이전에 병법을 배우지 못해 한스러워라 却恨從前未學兵금수401)가 밝은 하늘 더럽힘을 앉아서 보네 坐看蹄跡褻天明수명 늘릴 술법도 없어 거듭 탄식하는데 重歎難得長年術강가에는 우수수 낙엽 소리만 들리네 江上蕭蕭落木聲 獨倚秋風灑淚痕, 彼人三世己盤根.胡無八域一男子, 任爾紅旗遍邑村.却恨從前未學兵, 坐看蹄跡褻天明.重歎難得長年術, 江上蕭蕭落木聲. 금수 원문의 '제적(蹄跡)'은 금수(禽獸)의 발자국으로 악인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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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의 화를 입었을 때 감회를 적다 12월 1일 ○2수 被震禍時 識感 【十二月十日○二首】 스승은 간옹이요 부친은 벽봉269)인데 師曰艮翁父碧峯일찍이 도의로 몽매한 나를 가르치셨지 曾將道義敎昏蒙지금까지 조심조심 받들어 지녀왔으니 至今戰戰奉持去황천에서도 잘 모시고 따를 수 있으리 庶可泉臺好侍從사악을 내치고 정의를 지킴은 추성270)에서 본받고 斥邪衛正法鄒聖목숨 바쳐 스승을 높이는 건 예경에서 익혔다네 致死尊師講禮經부앙해도 이 마음 부끄러움은 없으나 俯仰此心無愧怍단지 학업을 정밀히 닦지 못해 탄식하네 只歎學業未硏精 師曰艮翁父碧峯, 曾將道義敎昏蒙.至今戰戰奉持去, 庶可泉臺好侍從.斥邪衛正法鄒聖, 致死尊師講禮經.俯仰此心無愧怍, 只歎學業未硏精. 벽봉(碧峯) 김택술의 부친 김락진(金洛進, 1859~1909)의 호이다. 추성(鄒聖) 맹자(孟子)를 가리키는데, 그의 고향이 추(鄒)이고 아성(亞聖)으로 칭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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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 허명갑을 면려하다 勉許秀才明甲 공부가 깊어지면 글맛이 항상 흘러 넘치고 功深書味常流露덕이 성대해지면 겸손의 빛290)이 더욱 길상하다네 德盛謙光更吉祥이 시를 긴요하게 여기고 반복해 읊조려서 喫緊此詩三諷咏평생 그대를 위해 보배로 삼아야 하리라 畢生爲汝作珍藏 功深書味常流露, 德盛謙光更吉祥.喫緊此詩三諷咏, 畢生爲汝作珍藏. 겸손의 빛 '겸광(謙光)'은 겸손한 덕이 밖으로 성대하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주역(周易)》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겸손하면 높은 이는 더욱 빛나고, 낮은 이도 사람들이 넘을 수 없으니, 군자의 끝마침이다.[謙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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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15)에서 현판 위의 시에 차운하다 實相寺次板上韻 불교는 예로부터 허와 공을 숭상했는데 佛尙虛空自古時어찌하여 절의 이름은 이와 반대인가 胡然寺號反於斯내악16)을 차지해 숨으니 마음속이 평온하고 占藏萊嶽中心穩삼한17)을 다 겪으니 지난 세월이 더디네 閱盡三韓往劫遲길손아 좋은 경치 없다고 말하지 말게나 行客休言無勝槪여러 암자들 다 이곳에서 갈라져 나왔지 諸菴皆得此分枝월사가 훌륭한 솜씨로 시 지어 남겼으니18) 月沙高手留詩跡우리 선조 계옹이 옛 친구를 만난 듯하네 吾祖溪翁見舊知-《월사집(月沙集)》에 이르기를 "변산(邊山)을 유람할 때 참봉(參奉) 김횡(金鋐)19)을 방문했다." 하였다.- 佛尙虛空自古時, 胡然寺號反於斯?占藏萊嶽中心穩, 閱盡三韓往劫遲.行客休言無勝槪, 諸菴皆得此分枝.月沙高手留詩跡, 吾祖溪翁見舊知.【《月沙集》云?遊邊山時, 訪金參奉鋐?.】 실상사(實相寺)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사찰이다. 내악(萊嶽)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변산(邊山)을 가리킨다. 삼한(三韓) 고대 우리나라 남부에 있던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말한다. 월사(月沙)가……남겼으니 《월사집(月沙集)》 제18권 〈부습유록(附拾遺錄)〉 에 〈변산을 유람할 때 참봉 김횡을 방문하여 술자리에서 시를 짓다〔遊邊山時歷訪金參奉鋐酒席口占〕〉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월사는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호이다.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ㆍ이식(李植)ㆍ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힌다. 김횡(金鋐) 본관은 부안, 호는 죽계(竹溪)이다. 생원시에 장원 입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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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 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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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오【원례】에게 답함 答李鉉五【原禮】 외지고 누추한 호남 구석의 진부한 늙은이가 무슨 영향력이 있기에, 먼저 편지를 보내주신 은혜를 베푸시면서, 이처럼 친절하고 정성스럽습니까? 저는 그대 스승과는 외람되이 동문의 교분이 있지만 버림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옛 친구는 갑자기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일 뿐입니다.121) 어찌 조금이라도 견줄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스승의 벗인 까닭으로 나에게 문안하는 것이라면 혹 괜찮겠지만 만약 그대의 스승을 섬겼던 것처럼 나를 섬기겠다고 한다면 실정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세상을 살아가는 상황이 점점 험난해지고 스승의 학설이 분열되어서, 후배인 젊은 학생이 향해 갈 곳이 없습니다. 오직 그대는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선생과 같은 스승을 구해 섬겨서, 밤낮으로 조용히 주도면밀하게 계도해주는 가르침을 받는다면 이것은 이 시대의 좋은 만남일 것입니다. 그대도 역시 마땅히 이처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어도, 간혹 지향하는 것이 바르지 않고 식견이 고르지 않아서 편벽되고 방탕하게 되는 귀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스승을 선별하지 않아 초래된 까닭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옛 사람이 '학문에 힘쓰는 것은 스승을 구하는 데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도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이미 스승을 구했다면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조예가 얕고 깊어지는 것은 다만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僻陋湖隅一腐朽。何足爲有無。而乃蒙執事者先施之惠。若是鄭重耶。愚於尊師門。猥有同門之契。而至見不棄者。以故舊之不寁也。豈可有萬一之比況哉。執事以師之友而見存。則或可而若事之如所事云耳。則非其情矣。如何如何。目今世路低險。師說分裂。後生小學。莫適所向。惟執事得師如艾山先生而事之。日夕從容。誘掖周至。此是今日之好際會。執事亦應如此否。人雖有志於學。而或趨向不正。見識不平至不免爲詖淫之歸者。無非所以不擇師之致也。古人所謂務學不如務求師者。非此義耶。執事旣已得之。則幸之又幸。而所造淺深。只在自己之勉不勉如何耳。 옛 친구는 …… 때문일 뿐입니다 《시경》 〈준대로(遵大路)〉에서 "큰길에 달려 나가 그대의 소매를 부여잡았노라. 나를 미워하지 말지어다. 옛 친구를 갑자기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느니라.【遵大路兮, 摻執子之袪兮. 我無惡兮, 不寁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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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운여에게 답함 答魏雲汝 이별한 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니 나뭇가지에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리워하는 슬픈 감회는 그대보다 내가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편지를 받았으니 그 지극한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또 어른들이 건강하시며 부모님을 모시며 잘 지내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참으로 소식을 듣고 싶었던 제 마음에 합치됩니다. 《주서절요(朱書節要)》는 유가의 참된 진리가 담긴 글【眞詮】로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께서 이른바, "도가 넓고 커서 어디서부터 착수해야 하는가? 오직 이 책이 입문하는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책이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께서는 이른바 "육경(六經) 이후로 그 뜻이 광대하고 분명한 것은 《주서절요》만한 것이 없다."라고 한 책입니다. 지금 그대의 과업(課業)은 이제 여기에 달려있으니, 힘쓸 곳을 알고 목표로 삼을 곳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밤낮으로 깊이 탐구하면서, 급히 보거나 많이 보기를 바라지 말고 오래도록 보며 그치지 않는다면, 저절로 딱 들어맞아 두루 이해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 유가의 풍습과 선비들의 기풍이 거의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으나, 오랫동안 알고 어울리던 이들을 보니 한 사람도 그것을 위해 떨쳐 일어나 담당하거나 왕성하게 힘을 쓰는 자가 없어, 평상시 개탄스러워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직 그대는 타고난 성품과 지향하는 뜻이 사우(士友)의 기대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지금 학문에 있어서의 조예도 또 이와 같으니, 벗들의 마음에 어떻게 위로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부지런히 힘써 주십시오.【질문】《대학(大學)》 전문(傳文)의 체재는, 모두 두 가지 일을 아울러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정심(正心)'을 말할 때 반드시 '수신(修身)'을 아울러 말했고, 수신을 말할 때 반드시 '제가(齊家)'를 아울러 말했습니다.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6章에서 '성의(誠意)'만 홀로 말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대답】치지(致知)와 성의(誠意)에는 '아는 것【知】'와 '행하는 것【行】'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의는 '다시 자신을 닦는 것【自修】'의 처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연이어 두 조목을 들지 않고, 특별히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誠其意】'라고 말했습니다.【질문】《맹자(孟子)》 「고자(告子)」 편에서 "사람들은 '임금이 똑똑한 체 하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人將曰訑訑, 予旣已知之矣】"라고 한 것에서, 원문(元文)으로 보면 '나는 이미 알고 있다.【予旣知之】'라고 한 것은, 마치 다른 사람이 '아는 체 한다【訑訑】'는 것을 일컫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원 보씨(輔氏)가 '내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 마음에서 싹튼 것이다.'라고 운운한 주석으로 보면, 마치 '잘난 체하는 것【訑訑】'이 자신을 일컫는 말인 듯합니다.【대답】'이이(訑訑)'에 주석에 대한 경원 보씨의 설을 별도의 한 뜻이니, 아마도 본문의 바른 듯은 아닌 듯합니다. 別後荏苒。秋風已在樹矣。悵恨之懷。賢未必非我也。謂外承書。其喜劇可知也。矧又庭候康寧。侍節衛重者乎。允愜區區願聞之情。朱書節要此是儒門眞詮。退溪所謂道之浩浩。何處下手。惟此書可以爲入頭處。蘆沙所謂六經以後。滂沛明白。無如此書。今左右課業。方在於此。可謂知所務而得所歸矣。惟願夙夜沈索。母欲速母欲多。久久不已。自有脗然浹洽處矣。嗚呼。儒風士氣。幾乎掃地。而竊觀知舊遊從。無一人爲之奮然擔當沛然用力者。尋常慨然久矣。惟左右資稟志趨。未嘗不爲士友之寄望。而今日之所造。又如此。朋友之情。安得不慰悅乎。千萬勉勉。大學傳文之體。皆兼言兩事。如言正心。必兼言修身。修身必兼言齊家。以至平天下。無不皆然而獨於六章單言誠意者。何義。致知誠意。有知行之別。而誠意又是自修之首。故不連擧兩條。而特言誠其意。告子篇。人將曰訑訑。予旣已知之矣。以元文看之。則所謂予旣知之者。似人稱訑訑者。然而以輔氏註予旣知之之意。萌于中云云看。則有若訑訑者。自稱焉。訑訑註。輔氏說。自是一義。恐非本文正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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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26) 기완 를 찾아갔다가 주인의 시에 차운하다 2수 訪李元浩【起完】, 次主人韻【二首】 학업이 가난 때문이 아닌 그대 흠모하니 欽君學業不爲貧한 번 만났지만 어찌 이전 친구만 못하랴 一見何曾遜夙親옛 나라의 산하에 은둔한 선비요 舊國山河遺逸士사문의 맥락을 계승한 사람이네 斯文緖脈繼延人전신27) 풍세를 굳이 두려워할 게 있으랴 錢神風勢何須畏석우28)는 정원에서 이웃이 되기에 좋네 石友園庭好作隣늘그막에는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晩節且當成結局이곳에 이르러 속세를 멀리 초월하였네 到玆方是逈超塵한평생 천하고 가난할 줄 스스로 알았지만 自分生平合賤貧학문이 거칠어 스승과 벗 저버릴까 걱정했네 學荒只恐負師親옛 청웅동에서 고아한 선비를 만나서 靑雄古洞逢高士백발에 새로 사귀어 한 사람을 얻었네 白首新交得一人대의는 시국 상심하여 설 땅이 없으나 大義傷時無地立작은 사욕 사라진 곳은 하늘과 가깝네 纖私淨處與天隣세한에도 서로 지켜주자고 맹세한다면 歲寒相守如有誓백리 길에 후진 밟기를29) 어찌 사양하리 百里何辭躡後塵 欽君學業不爲貧, 一見何曾遜夙親?舊國山河遺逸士, 斯文緖脈繼延人.錢神風勢何須畏? 石友園庭好作隣.晩節且當成結局, 到玆方是逈超塵.自分生平合賤貧, 學荒只恐負師親.靑雄古洞逢高士, 白首新交得一人.大義傷時無地立, 纖私淨處與天隣.歲寒相守如有誓, 百里何辭躡後塵? 이원호(李元浩) 원호는 이기완(李起完, 1891~1964)의 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강재(剛齋)이다.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靑雄面) 두복리(斗福里)에서 출생하였으며,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저서에 《강재집》 4권 2책이 있다. 전신(錢神) 금전(金錢)의 힘은 신물(神物)과 같다 하여 금전을 일컫는 말이다. 진(晉)나라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에 옛 속담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에 있어서랴.〔有錢可使鬼, 而況于人乎?〕"라고 하였다. 석우(石友) 벼루의 애칭(愛稱)이다. 송나라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부이섬연귀공양정(復以蟾硯歸龔養正)〉 시에 "꿈속에 누군가 〈식미〉를 노래하였는데, 깨어보니 벼루가 서재에 있네.〔夢裏何人歌式微, 覺來石友在書幃.〕"라고 하였다. 후진(後塵) 밟기를 원문의 '섭후진(躡後塵)'은 후면에 일어나는 먼지를 밟는다는 뜻으로, 존경하는 사람을 뒤따르며 모시는 것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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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년 생일에 감회가 일어 배율 1수를 짓다 戊寅生朝有感排律一首 오십오 년 전에 내가 처음 태어나 五五年前我始生하나도 이룬 것 없이 지금에 이르렀네 所成無一至今生학문 거칠어 강명함 부족한 게 한이고 學粗恨未明剛足기품이 약해 질병이 생길까 걱정이네 稟弱憂存疾病生망녕되이 백치로서 옛 현인 기약했으나 妄以白痴期古哲단결23)에 따라 장생하려는 것은 싫었네 厭從丹訣擬長生쉽게 혼미해지는 천리를 모두 잃었으니 易昏天理都歸喪다 죽어버린 인심을 누가 불러내 살릴까 盡死人心孰喚生보리 이삭 노래하며24) 고국을 슬퍼하고 秀麥有歌悲故國공경을 다해 향 사르며 선생을 지켰으니 瓣香致敬衛先生알아주지 않아도 유감없어 참으로 맛있고 不知無慍眞滋味홀로 서도 흔들기 어려우니 정히 통쾌하네 獨立難搖定快生몸에 있는 옷과 상투는 오직 본래 모습이고 袖髻在身惟本色서가에 가득한 시서는 평소의 생활이네 詩書滿架是平生남겨준 몸을 받들어 행함이 이와 같으나 奉行遺體如斯已늙을수록 생일에는 비통함이 배로 생기네 老去弧辰痛倍生 五五年前我始生, 所成無一至今生.學粗恨未明剛足, 稟弱憂存疾病生.妄以白痴期古哲, 厭從丹訣擬長生.易昏天理都歸喪, 盡死人心孰喚生?秀麥有歌悲故國, 瓣香致敬衛先生.不知無慍眞滋味, 獨立難搖定快生.袖髻在身惟本色, 詩書滿架是平生.奉行遺體如斯已, 老去弧辰痛倍生. 단결(丹訣) 신선이 먹는다는 단약(丹藥)을 제련하는 기술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술을 말한다. 보리 이삭 노래하며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터를 지나가다가 궁실이 다 허물어진 폐허에 벼와 기장 등의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은 노래인 〈맥수가(麥秀歌)〉를 불렀다는 것으로, 나라가 망한 슬픔을 노래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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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 영모재 중수기 密陽朴氏永慕齋重修記 이릉(爾陵 능주(綾州))은 예로부터 산수(山水)가 좋은 고을이라 일컬어졌고, 그 수려하고 맑은 기운이 서쪽 지역에 많이 모여 있었으니, 예컨대 천태산(天台山)이나 해망산(海望山), 문산(文山), 덕봉산(德峰山)처럼 헤아릴 만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덕을 체득한 중립의 모습으로 서쪽 지역의 아름다움을 다 얻은 것으로는 또 덕봉산만한 것이 없다.옛적 선묘조(宣廟朝 선조(宣祖)) 충신 박공(朴公) 휘 지수(枝樹)가 왕대인(王大人 조부(祖父)) 감찰공(察公)을 이곳에 장사지냈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산 아래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감찰공의 6세손 상언(尙彦)이 여러 종친들과 함께 산의 오른쪽 기슭에 나아가 안정(安亭)과 서로 마주보는 곳에 평탄한 한 곳을 얻어 몇 칸짜리 집을 지었는데, 덕봉과 안정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한편으론 덕안재(德安齋)라 일컬었고, 대대로 우러러 사모하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론 영모재(永慕齋)라 일컬었다. 그러나 청전(靑氈)의 구물(舊物)9)이  이제 거의 200여 년이 되어 가는지라, 굳고 단단했던 것들은 풀어지고 느슨해졌으며, 칠하여 꾸민 것들은 더러워지고 흐릿해져서 다시 긍구(肯構)10)해야 할 우려를 끼치게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정해년(1887) 봄에 문중(門中)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 장래에 수리할 것을 도모하였으니, 준채(準彩)가 그 일을 관리하였고, 춘진(春鎭)이 그 공역(工役)을 감독하였으며, 현수(賢秀)가 그 재무를 맡았고, 인진(麟鎭)이 그 장부를 주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8개월 만에 공역을 마쳤다. 동쪽의 방(房)과 서쪽의 실(室), 앞의 대청과 뒤의 침실이 각기 옛 규모를 따라서 환하게 경관이 바뀌었으니,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사업을 잇는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자손으로서 이 재실(齋室)에 들어가는 자들은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니, 효제(孝悌)의 마음이 어찌 세차게 일어나지 않겠는가.맹자가 말하기를, "상ㆍ서ㆍ학ㆍ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재실은 선조를 사모하는 곳이고, 겸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히기 위한 방도이니, 고을의 서당이나 글방에 비해 그 소중함이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사람이 살아가며 책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으며, 선대가 자손에게 바라는 것은 무슨 일이겠는가? 한가로이 지내며 경치를 완상하는 것과 같은 무익한 유희를 경계하고, 문장을 꾸미는 것과 같은 쓸모없는 습관을 버리고서 항상 조고(祖考)를 대면하는 것처럼 엄숙하고 공경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한결같이 천서(天敍)와 천질(天秩)11)처럼 사람이 살아가는데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세운 다음에 책을 읽어 이것을 밝히고, 벗들을 모아 이것을 강습하여 마음에 보존하고 몸에 체득함으로써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으로부터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힘써 나아가 성취함이 있기를 기약한다면 선조를 길이 사모하고 사업을 계승하는 도리가 어떠하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단지 박씨(朴氏) 한 가문의 복일뿐만이 아닐 것이다.내가 이 재실에서 노닌 지 여러 해인데, 가만히 엿보건대 메뚜기와 산초나무처럼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넘쳐나고, 시례(詩禮)를 묻고 배우는 가풍이 성대하게 한창 펼쳐지고 있으니, 그 아름답고 상쾌하며 맑고 깨끗한 기운이 반드시 도와 발현하게 해주어서 자손들이 구양자(歐陽子)12)와 같은 한 사람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재실에서 노니는 자들은 각각 힘써야 할 것이다. 爾陵古稱山水鄕。其秀爽淸淑之氣。多聚於西方。若天台海望文山德峯。可數者非一。然體德中立。而盡得西方之美者。又莫若德峯焉。昔者宣廟朝。忠臣朴公諱枝樹。葬其王大人監察公於此。子孫因居山下。監察公六世孫尙彦與諸宗。就山之右麓。得一平坦與安亭相對處。構數椽屋子。以其在德峯安亭之間。故一稱德安齋。以其世世爲瞻慕之所。故一稱永慕齋。靑氊舊物。殆二百餘年于玆矣。鞏固者縱緩。塗飾者漫漶。有不免再貽肯構之慮。歲丁亥春。門議齊發。將謀葺理。準彩尸其事。春鎭董其役。賢秀掌其財。麟鎭主其簿。首尾八個月。工役告訖。東房西室。前廳後寢。各遵舊規。渙然改觀。其繼志述事。可謂至矣。爲子孫而入此室者。必有所感而孝悌之心。豈不油然而生乎。孟子曰。設爲庠序學校以敎之。皆所以明倫也。此室是思慕祖先之地。而兼爲諸子孫肄業之方。視諸鄕黨庠塾。其所重。不亦有間乎。人生所以讀書者。爲何事。先世所以期望於子孫者。爲何事。戒燕玩無益之遊。去纂組無用之習。嚴恭寅畏。常若對越祖考。一以天敍天秩人生日用合做底道理。立定課程。讀書以明之。會友以講之。存之於心。體之於身。自灑掃應對。至於窮理盡性。自愛親從兄。至於治國平天下。循循征邁。期有成立。則其於永慕似述之道。爲何如哉。此不但爲朴氏一門之福而已也.予遊此齋有年耳。竊覸其螽斯椒聊。至爲蕃衍。而詩禮問學之風。蔚然方張。其秀爽淸淑之氣。必有以助發。而所産將不止爲一歐陽子而已。遊此室者。其各勉焉。 청전(靑氈)의 구물(舊物) 청전은 푸른 모포라는 뜻으로 선대(先代)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물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영모재를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훔쳐 가려 하자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라.[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긍구(肯構)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선대가 지은 건물을 다시 중수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에,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천서(天敍)와 천질(天秩) 천서는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의 순서를 말하고, 천질은 존비(尊卑)ㆍ귀천(貴賤)의 등급을 말한다. 《書經 皐陶謨》 구양자(歐陽子) 송(宋)나라 문장가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말한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훌륭한 고문(古文)을 많이 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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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당기 愚忍堂記 박 사문(朴斯文) 학중(學中)은 천태산(天台山) 사람이다. 내가 젊었을 때에 여관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풍모와 거동이 단지 순박하고 예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어느덧 서로 만나지 못한 지 20년이 되었는데, 훌륭한 명성이 선비와 벗들 사이에 드러났다. 평상시에 우러러 사모하면서 어떻게 수양했기에 이런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생각하였다. 정해년(1887) 봄에 비로소 그의 집에 가서 보건대, 뜰과 책상, 창문 등은 말끔하게 먼지 한 점이 없었고, 주인은 날마다 평상복 차림으로 그 사이에서 우두커니 있었으며, 지란(芝蘭)과 옥수(玉樹) 같은 자제들은 향기로운 목소리로 나란히 서서 곁에서 모시고 있었으니, 그 몸가짐이나 행실의 실제가 또한 들었던 것보다 뛰어났다. 내가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경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주인에게 근래에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물으니, 주인이 말하기를, "나는 노둔하고 꽉 막힌 재질로, 눈으로는 흑백(黑白)의 색을 알지 못하고, 귀로는 궁상(宮商)의 음률을 구분하지 못하며, 마음으로는 시비(是非)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 어리석음이 어느 누가 나와 같겠습니까. 어리석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면 모든 행위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제멋대로 하는 것들이 아닌 것이 없게 되어 날마다 허물을 향해 달려갈 뿐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10여 년 이래로 통렬하게 스스로를 점검하여 세속의 맛, 예컨대 분노나 욕망, 폄훼, 명예, 재촉, 부탁, 분주함, 다툼 따위를 일체 끊어 버리고 감히 마음에서 싹틔워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분수를 따르고 역량을 헤아려 서책에 종사하며 허물이 적기를 바랐지만, 심지가 견고하지 못해 다시 풍부(馮婦)가 팔뚝을 걷어붙이는 일13)이 있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우인(愚忍)' 두 글자를 문미(門楣)에 걸어 놓고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점이 있었군요. 선생의 어리석음이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에는 어리석고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에는 지혜로우며, 오늘날 세상에 대처하는 데는 어리석고 옛것을 배우는 데는 지혜로우며, 명성과 이익에는 어리석고 도의(道義)에는 지혜로우니, 이른바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14)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있는 뒤에 행함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두운 가운데 날로 드러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 내가 지금 쇠약해졌지만, 다소의 일을 돌려보내고 선생을 따라 소요하며 이 생애를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朴斯文學中。天台山人也。予少時。遇於逆旅。但見其風儀淳古。已而不相見爲二十年。而令聞著於士友之間。尋常向慕。以爲何修而得此。丁亥春。始造其門。見庭除几牑。灑然無一點塵累。而主人日以便服。嗒然其間。蘭玉芳聲。濟濟侍側。其持守操履之實。又有浮於所聞。予不勝斂衽。問主人近來作甚工夫。主人曰。予以鈍滯之質。目不知皀白。耳不分宮商。心不解是非。其爲愚。孰如我者。愚而自用。不有以忍之。則凡百所爲。無非無知妄作。日趨於愆尤而已。是以十餘年來。痛自點檢。一切世味。如忿慾毁譽趨託奔競之類。不敢萌諸心而出諸口。隨分量力。從事簡編。庶幾寡過。而但心地不固。恐復有憑婦揚臂之擧。故以愚忍二字。揭諸楣。以爲常常自警之資也。予曰有是哉。子之愚也.愚於爲人而智於爲己。愚於處今而智於學古。愚於聲利而智於道義。所謂其愚不可及也。孟子曰有所不爲而後。可以有爲。宜其闇然而日章也。嗚乎。予今衰矣。願還多少事。從子逍遙以畢此生也。 풍부(馮婦)가……일 이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풍부는 진(晉)나라 사람으로, 맨손으로 범을 잘 잡았으나 이 일이 광포한 행위임을 깨닫고 선비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판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호랑이를 모퉁이에 몰아넣고 감히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금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려오니, 사람들은 모두들 기뻐했지만, 선비들은 비웃었다는 고사가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그……없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영무자(寧武子)를 칭송한 말이다. 위나라 성공(成公)이 무도하여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남들은 다 그 어려운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이를 구하여 마침내 자신도 온전히 하고 임금도 구제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었거니와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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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헌기 愚軒記 윤생 상린(尹生相麟)이 나를 따라 공부한 지 몇 해 되었는데, 하루는 천태산(天台山)의 내 거처를 방문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가친(家親)께서는 일찍이 별호(別號)를 자처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이처럼 노년에 이르러 문을 닫고 매우 적막하게 지내시는 때에 도리어 헌(軒)에 '우(愚)'를 표제(標題)하시고 친구들의 시를 얻을 때마다 아침저녁으로 읊조리며 마음을 달래는 바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친구 중에 가친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오직 어르신만이 계실 뿐이니, 바라건대 어르신께서 알고 계신 것을 따라 표제하신 뜻에 대해 약간의 말을 서술하여 옛사람이 그림을 가져다드린 것15)처럼 돌아가 가친께 바친다면 안색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내가 말하였다. "군의 가친께서는 젊고 장성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셨으며, 노년이 되어서는 도의를 좋아하셨기에 아름다운 명성이 고을에 드러나 어진 사람으로 추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굳이 어리석음을 자처하여 표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이미 어질게 여기는데 스스로 어질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지 않는데 도리어 스스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비록 겸손하고자 한 것일지라도 어느 누가 믿겠는가. 다만 평소에 실속이 없이 겉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일삼지 않으셨으며, 명성이나 권세를 쫓는 길에서 내달리지 않으셨고, 시비를 다투는 장소에서 오르내리지 않으시면서 분수에 따라 졸렬함을 지킨 채 한결같은 모습으로 노년에 이르셨으니, 헌(軒)의 호를 취한 뜻이 혹 여기에 있을 것이네. 비록 이러한 것을 어리석게 여길지라도 사람들이 어질게 여기는 것이 또한 어찌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반드시 나이가 더욱 많아질수록 지식과 생각이 더욱 정밀해지면서 몸을 드러내고 감추는 것과 말을 위험스럽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것에 이르러 때에 따라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어 그 끝맺음을 도모하는 계책으로 삼은 것이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음이 어찌 옛적에 이른바 '미칠 수 없다.'16)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 때에 시험 삼아 이러한 뜻으로 받들어 질정한다면 반드시 나의 뜻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네."라고 하였다. 尹生相麟。從余遊有年。一日過天台寓舍。告余曰。家親未嘗以別號自居。及此衰暮。閉門苦寂。乃題軒以愚。隨得知舊詩和。爲日夕諷詠遣懷之資。然在知舊。知家親心者。惟丈人在。願從丈人所。得序述所題之意若干語。歸以供親。如古人致畵。而庶幾解顔也。余曰。君之家嚴。少壯孝悌。老而好義。令聞著於鄕坊。未有不以賢人推之。則何必以愚自處而至此標爲也。人旣賢之。而不自賢焉。人不愚之。而乃自愚焉。雖欲謙謙。其孰信之。但其平日。不喜浮華。不事表襮。不馳逐於聲勢之途。不上下於是非之場。任分守拙。一昧到老。軒之取號。其或在是歟。雖欲以此爲愚。而人之賢之。又何嘗不在於此耶。必其年齡益邵。知慮益精。至於身之顯晦。言之危遜。不能不隨時加謹而爲圖維厥終之計者。亶在於是。然則是愚也。豈非古所謂不可及者耶。趨庭之日。試以此意奉質焉。想必不以爲非我意也。 옛사람이……것 북송 때의 문인 소순(蘇洵, 1009~1066)의 〈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에 "본디 나의 선친께서는 물건에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평소의 생활도 재계하듯 하시고, 말씀하시고 웃으시는 것도 꼭 필요할 때에 맞게 하셨는데, 다만 일찍부터 그림을 좋아하셨다. 자제와 문인들이 기쁘게 해드릴 만한 것이 없는지라 그 좋아하시는 그림을 서로 가져와 한 번이라도 선친의 얼굴을 펴시기를 바라였다. 그래서 비록 평민의 신분이었으나 모아진 그림이 공경들처럼 많았다.[始吾先君, 於物無所好, 燕居如齋, 言笑有時, 顧嘗嗜畫. 弟子門人, 無以悦之, 則爭致其所嗜, 庶幾一解其顔. 故雖為布衣, 而致畫與公卿等.]"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古文眞寶後》 미칠……없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영무자(寧武子)를 칭송한 말이다. 위나라 성공(成公)이 무도하여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남들은 다 그 어려운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이를 구하여 마침내 자신도 온전히 하고 임금도 구제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었거니와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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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홍공 행장 聾庵洪公行狀 공은 휘가 규주(圭周), 자는 경휴(卿休), 호는 농암(聾庵)이다. 홍씨(洪氏)는 세계(世系)가 풍산(豐山)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도첨의(都僉議)를 지낸 휘 간(侃)이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중엽에 휘 치(治)는 행의(行義)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휘 준(埈)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휘 경고(景古)는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은덕(隱德)을 지녀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휘가 영한(永漢)이고 조부는 휘가 희우(羲禹)이다. 고(考)는 휘가 수모(壽謨)이고 비(妣)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대현(大鉉)의 딸이다. 순조 을유년(1825, 순조25)에 능주(綾州)의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서 백부 수영(壽榮)의 후사로 나갔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처음에 서당에 나아가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을 읽으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발전하였다. 하루는 연로한 부모님이 매우 고생스럽게 일하는 것을 보자 바로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기를, "자식 된 자라면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커다란 직분이다. 어찌 편안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 늙으신 부모에게 봉양을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등, 직접 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매번 셋째 아우 채주(埰周)에게 경계하기를, "너의 재주와 성품은 내와 견줄 바가 아니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부모의 바람에 부응하고 또 네 형이 이루지 못한 소원을 위로해다오." 하면서 유학(遊學)하여 명유(名儒)가 되기를 권하였다. 아우들, 여러 사촌 형제와 한마을에 모여 살아 대문과 담장이 서로 이어지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마주하여 은의(恩誼)가 매우 두터웠으며 일찍이 한마디 말로 서로 따지면서 화합을 해친 적이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겪으면 진휼하고 병에 걸리면 도와주고 죽어서 장례를 치르면 서둘러 달려가 같은 마을의 오랜 붕우에까지 이르렀으므로 모두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아들과 손자들에게 경계하기를, "집안의 흥성과 쇠퇴는 자손이 현명한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려있고, 자손이 현명하고 그렇지 못하고는 학문에 부지런한가 게으른가에 달려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스승으로 삼을 만한 덕을 지닌 자가 있다면 그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더라도 응당 가까이하고 가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하물며 집 안에 그런 인물이 있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너희 숙부는 평소에 입으로 하는 말에 가릴 것이 없고 몸으로 하는 행동에도 가릴 것이 없어 내가 매우 아끼고 있다. 너희들은 숙부를 모범으로 삼거라." 하였다. 숙부는 아마도 호가 봉남(鳳南)인 채주(埰周)를 가리키는 듯하다. 일찍이 해적(海賊)이 변경을 침범하여 시끄러운 소문이 크게 떠돌자 집을 버리고 도망가 숨는 백성이 많았다. 공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놓고 일깨우기를, "이웃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달려가 구원해야 마땅하다. 하물며 화란이 드러나지도 않았건만 성급하게 부모와 집안을 버린다면 이것이 인정이겠는가. 금수(禽獸)만도 못한 짓이다." 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감히 도망하는 자가 없었다. 공의 행의(行義)가 사람들에게 신복(信服)을 받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무자년(1888, 고종25) 7월 16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64세였다. 해하리(海鰕里)의 선영 아래에 장례를 치렀다가 나중에 우봉(牛峰) 뒤의 사좌(巳座)로 이장(移葬)하였다. 배(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광식(光植)의 딸로 좌상(左相)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 1411~1456))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이 뛰어났고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석(祐錫), 우전(祐銓)이고 딸은 문석휴(文錫休)에게 출가하였다. 계배(系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용(祐鏞), 우건(祐鍵)이고 딸은 최환필( 崔煥泌), 임봉우(林逢雨)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외모가 소박하고 예스러우며 풍의(風儀)는 대범하며 언사(言辭)는 간결하고도 어눌하며 행동은 간략하고 곧았다. 다른 사람과 큰소리를 내거나 곡직(曲直)을 따지지 않았고 일에 임하여 앞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시비와 훼예(毁譽)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듯하고 이해와 득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계책이나 농락, 간계와 부정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나 가무(歌舞)나 사치(奢侈), 유랑(遊浪)이나 방탕에 관한 것에는 일찍이 한마디 말도 섞지도 않고 한 발자국도 딛지 않았다. 오직 산골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자신의 의를 행하여 안으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면서 산수를 즐기고 농사를 지으며 여유롭게 세월을 보내는 것이 곧 평생에 걸쳐 계획하고 살아가는 방도였다. 오늘날 인심은 날로 부화(浮華)해지고 선비들의 풍습은 날로 보잘것없어지는 것이 수심(水深)이 더욱 깊어지듯 하니 당시에 선배가 보여준 풍도를 다시금 볼 수 없으리라! 이에 성인(聖人)이 선진(先進)을 따랐던 뜻이 우연이 아님을 비로소 알겠다. 뒤늦게 회포를 드러내는 것이 집안 간의 교분과 대대로 교유한 우호를 끝내 잊을 수 없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우석(祐錫)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내게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로 세상에 영구히 전할 계책으로 삼고자 청하였다. 내가 행장을 지을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로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해 삼가 이와 같이 적는다. 公諱圭周。字卿休。號聾庵。洪氏系出豐山。麗朝都僉議諱侃爲顯祖。中葉有諱治。以行義除厚陵參奉。諱埈。中司馬兩試。諱景古號枕漱亭。有隱德贈參判。曾祖永漢。朝羲禹。考壽謨。妣順天朴氏大鉉女。以純廟乙酉。生公于綾之牛峯里。旣長。出爲伯父壽榮后。天稟朴實。事親至孝。初就塾。讀擊蒙諸書。文理日進。一日見老親幹務甚勞。輒掩卷太息曰。人子之職。忠養爲大。豈安坐讀書。而被養於老親乎。於是漁樵耕稼。無不躬親爲之。以極甘旨之奉。每戒其三弟埰周曰。君之才性非我比。勉之以副父母之望。又以慰乃兄未就之願也。勸令遊學以成名儒。與羣弟諸從。聚居一巷。門墻相接。日夕聚對。恩誼甚洽。未嘗有一言相稽以失其和也。其有飢寒則賙之恤之。有疾病則扶之將之。有死喪則匍之匐之。以至隣里朋舊。無不各得其心焉。嘗戒子孫曰。人家興替。在子孫賢否。子孫賢否。在學問勤惰。又曰。有德可師者。雖在鄕隣。猶當親近遊從。況在家內乎。汝之叔父。平生口無擇言。身無擇行。吾甚愛之。汝等視爲表則也。叔父蓋指埰周號鳳南也。嘗有海賊犯邊。騷說大作。民多棄室奔竄。公招村人喩之曰。隣里有急當赴救。況禍色未形。而遽棄其父母室家者。此人情乎。曾禽獸之不若也。村人感之。無敢逃者。其行義之服於人。類如此。戊子七月十六日考終。享年六十四。葬于海鰕里先壠下。後移于牛峰後巳坐。配全州李氏光植女。左相文安公思哲后。極有婦德。生二男一女。祐錫祐銓。文錫休。系配金海金氏。生二男二女。祐鏞祐鍵。崔煥泌林逢雨。嗚乎。公體相質古。風儀坦夷。言辭簡而訥。施爲約而直。與人少欸曲。臨事少表襮。是非毁譽若不聞也。得失利害若不知也。凡機關籠絡詭譎回僻之人。聲技繁華遊浪曠誕之地。未嘗與之接一語着一步。惟是隱淪林樊。守吾分行吾義。使內不愧於心。外不愧於人。而山水桑麻。優哉游哉。乃其平生計活也。目今人心日就浮華。士習日就菲薄。如水益深。則先輩當日之風。不可得以復覩乎。於是乃知聖人從先進之意有不偶爾也。追言想感。非直爲通家之講。誼世之好。有不能終諼也。祐錫持家狀示余。因請一言。爲傳世不朽之計。余以非其人。牢辭不得。謹爲之說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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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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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계 문공 행장 梧溪文公行狀 행실이 돈독하면서도 문장이 화려하며 명리(名利)에 담담하면서도 바쁘게 경쟁하여 우뚝하게 일가(一家)의 법도를 이루어 대대로 이를 잃지 않고 지켜온 자를 근세에서 찾자면 오직 우리 고을의 오계(梧溪) 문공(文公)이 그런 인물이다. 문공의 휘는 봉환(鳳煥), 자는 익중(翊中)이고 오계(梧溪)는 공의 호이다. 고려조의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이 이름난 조상이고 중엽에 이르러 휘 자수(自修)는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지내고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증조는 휘가 혁진(爀鎭), 호가 오재(鰲齋)이고 조부는 휘가 영덕(永德)이고 본생조(本生祖)는 휘가 영수(永壽), 호가 죽와(竹窩)이다. 고(考)는 휘가 정휴(定休), 호가 긍재(兢齋)이다. 처음에 파평 윤씨(坡平尹氏) 휘 종진(宗鎭)을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재취(再娶)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식(栻)의 딸로 철종 기유년(1849, 즉위년) 10월 3일에 부춘(富春)의 우봉(牛峯)에서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양씨가 꿈에서 신인(神人)이 비단 주머니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너희 집안의 보물이니 조심해서 간직하거라." 하였는데, 이윽고 해산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자애롭고 온화하여 부모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히게 되자 매우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8세에 들에 나아가 새를 쫓다가 새 그물을 세워놓은 기둥에 "소호(少昊) 시대에는 새의 이름으로 관직을 삼았는데 네가 관명(官名)을 지니고서 어찌하여 나라의 싹을 해치는가."라고 적어놓아 보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죽와공(竹窩公)이 만년에 늘 병석에 누워 있었다. 공은 대인(大人)이 곁에서 모시면서 밤낮으로 힘을 다해 섬기는 것을 보고 매번 서당에서 돌아오면 그 수고를 대신하고 간혹 아우에게 하루씩 교대로 대신하게 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 가을에 벽산재(碧山齋)에서 책을 읽었다. 하루는 마음이 갑자기 놀라고 뛰어 마침내 급히 집으로 돌아와 죽와공을 뵈었더니 병이 이미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다음날 새벽 죽와공이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 가운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경오년(1870, 고종7) 가을 대인(大人)이 아주 심한 이질(痢疾)에 걸리자 대인이 한 숟갈을 들어야 공도 한 숟갈을 먹고 대인이 두 숟갈을 들어야 공도 두 숟갈을 먹으면서 지극히 근심하였고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기도 하였다. 의원이 자라 탕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자, 당시에 강물도 줄고 날씨도 추웠건만 공은 그물을 마련하여 자라를 구하려고 하였다. 마침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낮은 모래밭에 나와 있어 마침내 갖다 바치자 병이 과연 차도가 있었다. 임신년(1872, 고종9) 봄 대인이 또 병에 걸리자, 일어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공에게 이르기를, "네가 약질(弱質)의 몸으로 상례를 치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몸이 상하게 될 것이다. 거처나 음식 등, 몸을 보양하는 데 관계된 모든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네 아버지가 죽어서도 걱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말라." 하자, 공은 울음을 삼키면서 승낙하였다. 대인이 운명하자 스스로 남긴 당부를 생각하여 감히 마음껏 슬픔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인정과 예를 다 갖추었다. 홀어머니를 섬길 때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반드시 여쭙고 유순하고 곡진하게 어머니의 뜻대로 모셔 어머니를 대하는 도리를 잘 갖추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기일보다 며칠 전에 집 안팎에 훈계하고 술과 고기를 금하고 쓸고 닦아 정갈하게 하도록 힘을 쏟았으며 방에 들어가거나 문을 나서면서 감개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제사를 올리는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 셋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선행으로 인도하고 학문을 면려하는 것이 너그러우면서도 정성이 가득하여 한 번도 화락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경계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그 단서가 규문(閨門)을 먼저 바로잡는 데 달려있다. 규문이 올바르지 않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부부 사이에 절대로 허물없이 가까이하지 말고 반드시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화곡(花谷)과 임동(林洞)의 일족과 화수회(花樹會)를 만들어 수시로 친선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았다. 봉남(鳳南) 홍공(洪公)과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처음 학문에 나아갈 때부터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의심스러운 사항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며 병이 들거나 무슨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찍이 서로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봉남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의 복제(服制)인 심상(心喪)을 하였다. 구암(龜巖) 문송규(文頌奎)와는 도의(道義)로 교제를 맺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강론을 벌이고 학문을 익혔으며 서로 의기가 매우 잘 투합하였다. 고향 마을의 사우(士友)들과 모여 향음(鄕飮), 향사(鄕射), 강규(講規), 독법(讀法) 등의 예를 행하는 것을 봄가을의 상례(常例)로 삼았다. 병자년(1876, 고종13)의 흉년에는 공이 약간의 물자를 내어 굶어 죽을 지경에 놓인 향리(鄕里) 사람들을 진휼하였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대는 자신을 구원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하건만 도리어 남을 우선으로 삼으니 어찌 상정(常情)을 거슬러 명예를 구한다는 비난이 없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죽을 지경에 놓이지는 않았다. 넉넉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진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물을 중시하고 의리를 가볍게 여기는 장사치들의 상담(常談)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 계미년(1883, 고종20)부터 그 이후로 공이 우연히 병에 걸리더니 앞뒤로 8~9년에 걸쳐 차도가 있기도 하고 발병하기도 하고 심해지기도 하고 좀 덜하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고초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어버이를 섬기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 붕우에게 나아가 강론하고 익히는 방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자신의 힘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어 자기 몸에 병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의 좌우 벽에 태극도(太極圖), 서명도(西銘圖), 인설도(仁說圖), 경재잠도(敬齋箴圖)와 기타 요언(要言)과 격회(格誨)를 걸어놓고 몸소 상관(常冠)과 일상복 차림으로 중앙에 단정히 앉아 항상 눈으로 접하며 경계하고 성찰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경인년(1890, 고종27) 8월 29일 숙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 송석면(松石面) 성곡촌(聲谷村) 뒤에 있는 도지연(倒池蓮) 비탈 아래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능성 구씨(綾城具氏) 본수(本修)의 딸이고 계배(繼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 규환(奎煥)의 딸이다. 서씨는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재연(載淵), 재인(載寅)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아, 문씨(文氏)는 예전부터 지금껏 대대로 유학(儒學)을 계승한 유서 깊은 집안으로 죽와공(竹窩公)과 그의 아들 긍재공(兢齋公)은 모두 효우(孝友)와 행의(行誼)로 향리(鄕里)에서 이름이 높았다. 공은 선대인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행실을 삼가고 학문을 쌓아 가정에서 효제(孝悌)를 행하고 향리(鄕里)에서 충신(忠信)으로 이름이 나 문채가 화려한 한 고장의 선사(善士)였다. 지초(芝草)에 뿌리가 있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있음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내가 보잘것없는 처지로 욕되게도 공의 지우(知遇)를 입어 타계하실 때 손수 편지를 보내 남아 있는 아들의 학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진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재연(載淵)이 학문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으니 대대로 계승한 학문은 또한 장차 실추되지 않을 것이다. 공이 타계하고 3년이 지난 여름 재연이 중부(仲父)가 지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선친(先親)을 가장 잘 아시기로는 장인(丈人)만 한 분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행장(行狀)을 지어서 사가(私家)에서 대대로 전하는 실제 자취로 삼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 마음이 애처롭고 뜻이 가상하여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軒質行而輊文華。右恬退而左奔競。偉然爲一家之成法。世守而不失者。在近世惟吾鄕梧溪文公是耳。諱鳳煥。字翊中。梧溪其號也。麗朝江城君諱益漸爲名祖。至中葉有諱自修。官谷城縣監。腏享于鄕祠。曾祖諱爀鎭號鰲齋。祖諱永德。本生祖諱永壽號竹窩。考諱定休號兢齋。初娶坡平尹氏諱宗鎭女。無育再娶濟州梁氏諱栻女。以哲宗己酉十月三日。生公于富春之牛峯。先是梁氏夢神人遺以錦囊曰。此是汝家寶物。謹受而藏之也。已而解娩。天性慈詳溫雅。承順親意就傅上學。執業甚勤。八歲出野打鳥。書于鳥幕柱上曰。少昊之世。以鳥記官。爾帶官名。而何以害邦國之苗乎。見者奇之。竹窩公晩年常病在床。公見其大人侍側。晝夜服勞。每自書塾歸。輒代執其苦。或令其弟更日代之乙丑秋。讀書碧山齋。一日心忽驚動。遂急還家。見竹窩公病已危劇矣。翌日平明棄世。隣里莫不驚異之。庚午秋。大人患痢甚劇。一飯再飯。極其致憂。嘗糞甛苦。醫云鱉湯最良。時水落天寒。公擧網將求之。適有一大鱉。出在淺沙。遂持以供之。病果見差。壬申春。大人又遘疾。自知不起。謂公曰。汝以弱質。若欲執禮。必至傷生。居處飮食。凡係衛養之節。一一斟酌。不使乃父抱歸未忘之心。公飮泣諾。及遭故。自念遺托。雖不敢任情致毁。而必誠必愼。備盡情文。事偏慈。大小必稟。柔順委曲。甚得幹母之道。祭祀必先期數日。戒飭內外。絶酒肉灑掃洗濯。務令潔淨。入室出戶。愾然肅然。以致如在之誠。與弟三人友愛純篤。導之以善。勉之以學。從容懇惻。未嘗失和。嘗戒之曰。孝於父母。友於兄弟。其端在於先正閨門。閨門不正何事可行。夫婦之間。切戒狎昵之私。必以莊敬涖之。可見其效矣。與花谷林洞諸族。作花樹會。爲隨時講好之資。與鳳南洪公同里閈。自初上學。至老白首。質疑問業。疾病甚故之外。未始相離。及其沒也。服心喪之制。與文龜巖頌奎爲道義之交。往復講磨。相得甚深。會鄕坊士友。行鄕飮鄕射講規讀法等禮。春秋爲常。丙子荒年。公出若干力。以賙鄕里之濱死者。或曰。子將自救不贍。而反急他人。豈無矯情干譽之譏耶。公曰。吾雖不贍。尙不至濱死。若諉不贍而不急人。則此是賈兒販竪。重財輕義之常談也。自癸未以來。公偶然遘疾。或差或發。或加或減。首尾八九年。備經艱楚。而事親服勤之節。就友講討之方。未嘗不自力。不知病之在身也。居室左右。揭太極西銘仁說敬齋箴圖。及他要言格誨。自以常冠便服。端坐其中。常目警省。日以爲常。庚寅八月二十九日。以宿疾終于正寢。葬松石面聲谷村後倒池蓮崎下巽坐之原。配綾城具氏本修女。繼配利川徐氏奎煥女。徐氏生二男一女。男載淵載寅。女幼。嗚乎。文氏素是詩禮古家。竹窩公及其子競齋公。皆以孝友行誼。聞于鄕里。公承襲先訓。謹身績學。孝悌行於家庭。忠信著於鄕里。蔚然爲一方之善士。芝根醴源。豈不信然。余以無狀。辱爲公知。臨歿手書。致其遺孤學問之託。余固知不敢承當。而追念悲悵。不覺涕零。然載淵立志向學。刻勵不怠。其世世繼述之業。又將不墜矣。歿後三年夏。載淵奉其仲父所撰家狀。示余而言曰。知先親最密者。莫如吾丈。願狀其行以爲私家傳世之實蹟也。哀其情嘉其志。不敢以非其人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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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처사 이공 행장 澗齋處士李公行狀 공의 휘는 기백(琪白), 자는 광빈(光斌), 호는 간재(澗齋)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전주(全州)에서 나왔으며 신라 시대에 사공(司空)을 지낸 휘 한(翰)이 시조(始祖)이다. 사공 이하 21대는 조정(朝廷) 왕실의 계통과 같으며 완풍군(完豐君) 휘 원계(元桂)에 이르러 처음으로 별자(別子)32)를 계승한 대종(大宗)이 되었다. 완풍군은 천우(天祐)33)를 낳았고, 천우는 관직이 병조 판서에 이르러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도공(襄度公)이다. 양도공은 굉(宏)을 낳았으며 굉은 관직이 부총제사(副摠制使)에 이르렀고 부총제사는 명인(明仁)을 낳았다. 명인은 주부(主簿)를 지냈고 담양(潭陽)의 풍서(豐墅)로 남하하여 살았다. 주부는 효상(孝常)을 낳았고 효상은 부사맹(副司猛)을 지냈으며 담양에서 영광(靈光)으로 이주하였다. 사맹(司猛)부터 8세가 지나 휘 상후(相厚)에 이르러 능주(綾州)로 이주하였는데, 상후는 공의 6대조이다. 증조부는 이덕(以德)이고 조부는 윤택(潤宅)이다. 고(考)는 문계(文繼)이고 비(妣)는 화순 최씨(和順崔氏) 봉권(鳳權)의 딸이다. 철종 갑인년(1854, 철종5) 10월 16일에 간리(澗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절조(節操)가 남달라 스스럼없이 굴거나 다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침착하고 차분하여 어른스러운 예의와 법도를 갖추었다. 스승에게 나아가34) 공부하게 되자 날마다 과정(課程)을 지켜 소소한 일로 그만두거나 거르는 경우가 없었다. 부모를 섬기는 것이 매우 근실하여 뜻을 받들고 물품을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고 상례(喪禮)를 봉행하는 데도 애통한 마음을 다하여 상례의 내용과 형식에 유감이 없었다. 기일(忌日)이 돌아와 산재(散齋)35)와 치재(致齋)36)를 올리면 몸을 깨끗이 하고 모든 제구(祭具)를 주관하며 밤 깊도록 단정하게 앉아 제사가 행해지기를 기다렸다.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과 슬퍼하는 안색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할 만하였다. 형제가 즐겁게 지내 화목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의지할 곳 없는 친척은 거두어 양육하기도 하고 도와주어 혼사를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향당(鄕黨)의 오랜 벗에게는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새해 첫날에 문안하는 일을 힘닿는 만큼 예를 갖추어 빠트리는 일이 없었다. 외가의 선조를 섬기는 것도 집안 선조를 섬기듯 하여 기일이 되면 반드시 가서 참여하였다. 외조카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자 매우 극진히 보살피고 도와주었으며, 가업(家業)을 남에게 빼앗기자 공이 관에 알리어 억울함을 바로잡아 편안히 살도록 해주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난 때는 자제와 족친들에게 사교(邪敎)에 물들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산속 골짜기로 난을 피했을 때 갑자기 적을 만나자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이것 아니더냐." 하고는 즉시 소 1척(隻)을 주면서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난이 평정된 뒤 누군가가 소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으나 공은 웃으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공은 평소에 담박하고 침착하며 말이 적었다. 일찍이 아우 상백(常白)과 산에 올라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한나절이 지나도록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우가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참된 생각, 고상한 정취가 절로 마음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객이 찾아왔으나 안부를 묻는 것 외에는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객이 떠나자 아우가 말하기를, "객을 대접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냉랭하십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서권(書卷)을 마주하고 고인(古人)과 얘기하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금인(今人)과 얘기를 하겠는가." 하였다. 상백(常白)이 일찍이 덕성(德性)을 수양하는 요체를 묻자, 공이 즉시 주자(朱子)의 〈경제잠(敬齋箴)〉과 범공(范公)37)의 〈좌우계(座右戒)〉를 써 주고 인하여 말하기를, "평소에 앉아 있는 자리에 걸어두고 항상 부사(父師)가 엄숙하게 내려다보듯 하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누군가가 "부모가 안 계시니 효도하고자 하여도 미치지 못한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돌아가신 뒤에도 살아계실 때처럼 섬기고 안 계실 때에도 계실 때처럼 섬기며 몸을 상하지 않고 자신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모두 효이다. 어찌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어린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집안사람이 공에게 꾸짖게 했더니 공은 아이들을 불러 앞에 앉히고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으면서 슬프고 참담한 기색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부모에게 불효하였다. 불효자의 자식이 또 불효를 저질렀으니, 이것은 예전에 불효한 죄에 대한 보답이다. 저 아이들에게 무엇을 벌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물러나 자신을 매질하고 스스로 새롭게 변하였다. "먹는 것은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 居無求安]38)", "일은 원칙 없이 무턱대고 따르지 않고 물건은 구차하게 취하지 않는다[事不苟從 物不苟取]", "경(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행동을 규범에 맞도록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39)", "신묘하게 밝히고 묵묵히 이룬다[神而明之 黙而成之]40)" 등을 벽에 적어놓고 항상 자신을 견주어 살폈다. 아들 건신(建身)이 범노공(范魯公)의 〈계자(戒子)〉시41)를 읽자, 공이 말하기를, "격언(格言), 요어(要語)가 이것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 너는 이 시 1편을 평생의 표준으로 삼아 오늘 아버지가 너에게 경계하는 것처럼 여기거라."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서로 왕래하며 교분을 맺은 사우(士友)들을 재숙(齋塾)으로 불러 모아 봄가을로 모여 강론을 펼치는 규약을 정하였다. 또 이웃 마을의 6, 7동지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서로 30일 동안 학습한 내용을 강론하였다. 아마도 늙어서 학업을 그만두는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때문에 식견은 늙어갈수록 더욱 심오해졌고 지조는 늙어갈수록 더욱 단단해져서 함께 강론을 펼친 사람들이 모두 "볼 때마다 진보가 있는 사람은 간재(澗齋)뿐이다."라고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몸은 요인(要人)과 접촉하지 않고 발길은 요문(要門)에 이르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경학(經學)에 힘을 기울여 자신의 뜻을 추구하며 물아(物我)와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내면서 인간 세상에 다시 이것과 바꿀 수 있는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 그 맑은 운치와 아득한 자취는 참으로 지금 시대를 살았던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42)라고 이를 만하다. 계묘년(1903, 광무7) 2월 23일 집에서 편안히 생을 마쳤다. 향리(鄕里)의 인사(人士), 부녀자, 어린아이, 노복들이 탄식하면서 애석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서로 알게 된 지가 20년에 가깝다. 그동안 서신을 주고받고 서로를 따르며 함께 유람하며 흉금을 털어놓는 일이 끊이지 않았지만, 일찍이 한 마디의 망령된 발언이나 한 번의 망령된 행동을 보지 못하였다. 병신년(1896, 건양1) 봄 공이 거의소(擧義所)로 나를 만나러 왔다. 인하여 책망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시사(時事)에 어두워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경거망동하는가. 하지만 평소에 서로 가깝게 지냈으니 어찌 위난 때문에 서로를 따르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원수에게 함께 대적하고 같이 죽는 것은 내가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으니, 이 일로 공을 알 수 있다. 다만 존심양성(存心養性)에 골몰하는 각종 공부가 근거할만한 바탕이 있어서 장차 얼마나 높고 큰 영역으로 나아갈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늘이 그의 장수에 인색하고 귀신이 그의 나이를 빼앗아가서 사문(斯文)과 사림(斯林)이 이렇듯 갑자기 복을 잃게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비통하다! 배(配)는 광산 이씨(光山李氏) 문호(文鎬)의 딸이며 모두 2남을 두었다. 장남 건신(建信)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를 아내로 맞았고 차남은 아직 어리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때 건신(建信)이 숙부에게 부탁하여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장례를 치를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묘갈(墓碣)이나 묘지(墓誌) 등 제반 문자(文字)는 반드시 먼저 행장(行狀)을 갖춘 다음 비로소 이를 근거로 지을 수 있습니다. 선인을 잘 알고 선인의 행장(行狀)을 지을 수 있는 분은 장인(丈人)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인하여 생각하니, 실제적인 덕을 갖췄건만 세상에 드날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벗의 책임이다. 하물며 죽어서 후세에 완전히 사라지게 하겠는가. 이에 건신의 청에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琪白。字光斌。號澗齋。李氏系出全州。以新羅司空諱翰爲始祖。司空以下二十一世。與國朝璿系同。至完豐君諱元桂。始爲繼別之祖。完豐生天祐。官兵曹判書。封完山君。諡襄度公。襄度生宏官副摠制副摠制。生明仁官主簿。南下潭陽豐墅居焉。主簿生孝常官副司猛。自潭移靈光。自司猛入世而至諱相厚。移綾州。是公六世祖也。曾祖以德。祖潤宅。考文繼。妣和順崔氏鳳權女。哲宗甲寅十月十六日。生公于澗里居第。幼有異操。不好戲狎。不好爭競。凝然有成人儀度。就傅上學。日遵課程。未嘗以小小事務。有所廢闕。事親甚謹。志物俱至。執喪致哀。情文無憾。遇忌諱之辰。致散齋潔。躬執凡具。竟夕危坐。以待行祭。其嚴敬之意。哀戚之色。可以感動傍人。兄弟湛樂。未嘗失和。親戚之無依者。或收而養育之。或助而昏娶之。至於鄕黨知舊。吉凶之問。歲時之存。隨力致禮。未有闕焉。事外先如己先。忌日必往參。表侄幼孤。撫恤甚至。家業見失於人。公爲之聞官辨枉。俾安其生甲午之亂。戒子弟族戚。勿染邪敎。逃難山谷。忽遇賊。公曰。汝等所欲非此物耶。卽以牛隻與之。少無吝色。亂平後。人有告牛在處者。公笑而不應。平居恬黙寡言。嘗與弟常白。登山遊賞。過半日而無一言。弟問其故。公曰。眞想逸趣。自在其心言語何爲。一日客來。寒喧外。不交一語。良久客去。弟曰。待客何其冷耶。公曰。對卷方與古人言。何暇與今人言。常白嘗問自修之要。公卽書朱子敬齋箴及范公座右戒以與之。因曰。揭之座側。常如父師之儼臨。則不爲無助也。人或言父母不在。欲孝靡及。公曰。事死如生。事亡如存。不虧其體。不辱其身。皆是孝也。奚謂靡及耶。一日兒子輩有爭端。家人令責之。公招置於前。不誚讓。有悲慙之色。人問其故。曰吾曾不孝於親。不孝之子。又爲不孝。此所以報前日不孝之罪也。於渠何誅。兒輩退而自撾。而自新焉。書食無求飽。居無求安。事不苟從。物不苟取。敬以直內。義以方外。神而明之。黙而成之。等語於壁上。常自鏡攷。子建身信讀范魯公戒子詩。公曰。格言要語。此外何有。汝以此詩一通。看作平生弦韋。如乃父今日之戒汝也。中年以來。遊從士友。排置齋塾。定爲春秋講聚之規。又與隣閈六七同志。一月一聚。相講三十日所課之書。蓋慮其老而廢業也。是以其見識老而益精。持守老而益固。至使同講之人皆曰。每見每有進益。惟澗齋是已云。身不接要人。足不到要門。勤耕服穡以糊其口。劬經力學以求其志。于于洋洋於物我形骸之表。而不知人間世復有何樂可以易此也。其淸韻遐躅。信可謂南州今日之高士也。癸卯二月二十三日。考終于家。鄕里人士。婦孺輿儓。莫不嗟惜。至有涕下者。嗚乎。余與公相知近二十年矣。其間往復從逐。游衍傾倒。非不源源。而未嘗見其有一言妄發一事妄行。丙申春。公來見我於擧義所。因責之曰。子何昧時而輕擧至此耶。然居常相從者。豈以危難而有不相從之理。同仇一死。吾所甘心云。此可以見公矣。但存養窮索。種種功夫。方有田地可據。而將趨乎崇深遠大之域。有不可量。誰知天嗇其壽。鬼奪其年。使斯文斯林遽此無祿耶。痛哉痛哉。配光山李氏文鎬女。擧二男。長建信娶濟州梁氏。次幼。公歿未葬。建信屬其叔父來曰。營葬有日矣。墓碣墓誌諸般文字。必先有行狀而後。乃可以據此而作。知先人熟而可以狀先人行者。其非丈人乎。因念人有實德而不揚於世者。此朋友之責也。況死而使之泯然於後乎。玆於建信之請。有不敢多辭云爾。 별자(別子) 제후의 중자(衆子)를 장자(長子)와 구별하여 별자라고 한다. 제후의 중자는 새로운 대종(大宗)의 시조가 된다. 천우(天祐) 이천우(李天祐, 1354~1417)이다.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태조 이성계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 1330∼?)의 둘째 아들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산재(散齋) 제사하기 전 외출은 하지만 말타기, 음악, 조문(弔問) 등을 하지 않음으로써 몸가짐을 경건하게 갖는 의절이다. 치재(致齋) 제사를 올리는 대상에 대하여 거처하던 곳, 말씀하던 모습, 즐기던 것, 지향하던 것, 좋아하던 음식 등 생전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경건하게 갖는 의절이다. 범공(范公) 송(宋)나라 범조우(范祖禹, 1041~1098)의 아들인 범충(范沖, 1067~1141)이다. 〈좌우계(座右戒)〉의 내용은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먹는 …… 않는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경(敬)으로 …… 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오는 말이다. 신묘하게 …… 이룬다 《주역》 〈계사전(繫辭傳) 상〉에 나오는 말이다. 범노공(范魯公)의 〈계자(戒子)〉시 범노공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노국공(魯國公) 범질(范質)을 가리킨다. 그 조카 고(杲)가 승진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시를 지어 주며 조급히 승진하려는 것을 경계시켰던 것을 말한다. 시의 내용은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로 불렸다. 이를 원용하여 간재(澗齋) 공을 서치에 빗댄 것이다. 《後漢書 卷83 徐穉列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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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우인당 박공 행장 愚忍堂朴公行狀 공의 휘는 인진(麟鎭), 자는 학중(學仲), 호는 우인당(愚忍堂)이다. 박씨(朴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으며 찰방(察訪)을 지낸 휘 위(蔚)가 그의 중조(中祖)이다. 찰방은 첨정(僉正)을 지낸 휘 맹성(孟誠)을 낳고, 첨정은 참의를 지낸 휘 영걸(永傑)을 낳고, 참의는 사맹(司猛)을 지낸 휘 억서(億瑞)를 낳고, 사맹은 감찰을 지낸 휘 지수(枝樹)를 낳았다. 지수는 임진년(1592, 선조25)의 충신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승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휘 천주(天柱)를 낳고, 주부는 휘 성소(成素)를 낳고, 성소는 휘 태흥(泰興)을 낳고, 태흥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휘 상언(尙彦)을 낳고, 첨지중추부사는 휘 필익(必益)을 낳았다. 필익은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경귀(慶龜)이고 조부는 휘 만환(萬煥)이다. 고(考)는 휘 재덕(在德)이고 비(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생고(生考)는 휘가 재응(在應)이며 백부(伯父)의 후사로 나갔다. 헌종 병오년(1846, 헌종12) 12월 30일에 벽지리(碧池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성실하며 성품과 기질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한결같이 양친을 섬겨 집안에서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부친1)이 일찍 세상을 떠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기고 부친을 추모하고 받드는 제사에 슬픔과 정성을 다하였다. 온화한 낯빛으로 어머니를 모시어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받들었으며 집안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어머니에게 여쭙고 난 뒤 행하였다. 기미년(1859, 철종10)에 여산 송씨(礪山宋氏)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조행(操行)을 갖춘 뛰어난 배우자로 내조를 잘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에 생고(生考 생부)가 세상을 떠나자 계부(季父)인 휘 재표(在杓)가 집안일이 학업에 장애가 될까 염려하여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고 공에게는 유학(遊學)하여 학업을 성취하게 하였다. 공은 계부를 매우 근실하게 섬겨 출입과 진퇴를 오직 계부의 명에 따랐다. 생고(生考)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래된 상자 안에서 우연히 돈을 빌려준 것과 관련된 문서를 발견하자 즉시 먹칠을 해버리고 말하기를, "저쪽에서 말을 하지 않는데 내가 말을 하면 기망(欺罔)의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인정에 편하겠는가." 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는 약관(弱冠) 언저리였지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처럼 남다른 면이 있었다. 종족(宗族)이 매우 번창하였으며 같은 마을에 함께 살면서 장유(長幼)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은의(恩義)가 두루 미쳐 모두가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인척(姻戚)과 옛 친구들에 대해서도 왕래하며 안부를 살피는 일을 언제나 그만두지 않았다. 외왕부(外王父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몇 묘(畝)의 땅을 사서 제사에 올릴 물품을 마련하는 데 이용하도록 하였다. 본생(本生)의 외왕부를 위해서도 이처럼 하고 외구(外舅 장인)와 외고(外姑 장모)를 위해서도 이처럼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만들고 물력(物力)을 비축하여 가난하고 살기 어려운 이들을 돕고 길사와 흉사에 힘을 보태며 묘제(墓祭)와 봄가을의 시제(時祭)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 그 힘을 미루어 방계 친족의 묘제에도 보탬이 되게 하였다. 육촌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살림이 어렵고 병도 나자 공이 데려다 부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뒤 가마에 실려 집으로 돌아갈 때는 관과 삽(翣)2)을 마련하여 도와주었다. 같은 마을에 아이를 낳게 된 부인이 굶주리다 이로 인하여 목숨이 끊길 지경이었다. 공이 그 말을 듣고 양식과 음식을 장만하여 돕도록 하여 어머니와 아이가 그 덕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걸객(乞客)이 왔다가 병이 들자 몇 달에 걸쳐 구호하고 치료해주는 것이 집안 식구가 병이 들었을 때와 차별이 없었고, 죽었을 때도 의복과 물건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떠돌며 빌어먹던 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죽어서 길가에 빈(殯)3)을 하였지만 오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길에서 슬프게 곡을 하고 있었다. 공이 불쌍하게 여겨 물자를 내어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가난한 일가 한 사람이 수십 민(緡)의 돈을 빌려 가 여러 해가 되도록 돌려주지 않았건만 또한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빌린 돈을 돌려주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마음에서 이 돈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잊어버렸는데 받는다면 어찌 쓸데없는 물건이 아니겠는가." 하고, 결국 받지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몸소 검약을 실천하고 남는 재물을 보존했다가 곤궁한 자들을 진휼하여 그동안 공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한 자가 적지 않았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노비가 오래도록 역을 치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풀어주었다. 일찍이 여자 노비 1명을 샀다가 양가(良家)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는 또한 풀어주어 돌려보냈다. 한번은 날아가던 꿩이 산짐승에게 쫓기다 처마 밑에 숨어 엎드려 있었다. 자식들이 잡아 바치자 공이 말하기를, "짐승이 의지할 데가 없어 사람에게 의지했건만 어찌 차마 죽이겠는가." 하고 풀어주도록 하였다. 근세(近歲) 이래로 먼 지역에서 온 매우 공교한 물건들이 시장에 현란하게 넘쳐나 서로 앞다투어 빠져들고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건만 공은 여태껏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다. 공은 선대의 계보(系譜)가 중조(中祖)부터 그 위로는 잃어버려 전하지 않았다. 중간에 선조 한 사람이 다른 집안의 계보를 끌어다 그 위에 붙였는데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공은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 몹시 두려워 최면암(崔勉庵)4), 기송사(奇松沙)5)(성과 호는 붙여 씁니다. 예) 이율곡 「지침」 이하 표시만 해두겠습니다.) 등 예를 아는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뒤 종족(宗族)에게 알리고 바로잡았다. 마을에 재력과 권세를 지닌 사람이 위세가 꽤 당당하였다. 그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은 끝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들 준기(準基)에게 허리에 차고 다니는 보도(寶刀)가 있었다. 하루는 그것을 잃어버렸는데 공이 말하기를, "가난한 유자(儒者)에게 보검(寶劒)은 본래 지나친 물건이니 잃어버리는 게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하고 돌이켜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루는 내가 두세 명의 벗과 공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며 앉아 있었다. 집안에 불이 나 실성(失聲)한 채로 다급한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공은 사내아이 종을 불러 불을 끄러 가도록 하더니 돌아와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공의 아우가 밖에 나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돌아와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잘못이 너에게 있으면 모욕을 당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고 잘못이 저쪽에 있으면 저쪽이 망녕된 사람이다. 망녕된 사람과 무엇을 따지겠느냐." 하였다. 아우가 말하기를, "잘못이 없는데도 모욕을 당했으니 역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공은 "모욕은 잘못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곧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동도(東徒 동학교도)의 난 때 그들의 위세가 매우 강하여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휩쓸렸다. 공이 친척과 오랜 벗들을 모아놓고 사정(邪正)과 순역(順逆),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의 분별을 설명하여 물드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른 일찍 과거를 준비하여 시문(詩文)을 드날렸으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유람을 하면서 종종 호탕한 풍운(風韻)을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세상일을 점점 많이 겪게 되면서 덧없는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서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세상과 교유를 끊었다. 병을 치료하는 여가에 《가례(家禮)》, 《심경(心經)》, 성리서(性理書) 등을 취하여 조용히 깊이 연구하고 차례대로 연역하면서 따뜻한 봄날에 얼음이 녹는 듯 유연히 스스로 즐거워하여 몸에 병이 깊고 적막하고 외로운 삶이 고생스럽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선영(先塋) 아래의 옛집을 고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마련해 놓고 일문(一門)의 자제들이 학업에 전념하는 장소로 삼았다. 만년에는 본채의 서쪽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즉이재(則以齋)라 이름 붙이고 자식들이 여력이 있을 때 글을 익히는 장소로 삼았다.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시문(時文)을 짓거나 과장(科場)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잘못은 나로 충분하다. 어찌 너희들까지 거듭 잘못되게 하겠느냐." 하였다. 날마다 독서와 궁리(窮理)로 자신을 다잡고 예법에 맞는 행실을 하고, 과정(課程)을 지도하여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현명한 사우(士友)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거리가 멀더라도 반드시 가서 종유하게 하였고 좋은 책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형편이 어렵더라도 반드시 사서 집에 두도록 하였다.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인간 세상에 명예와 영화, 영달(榮達)과 같이 좋은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남을 시기하거나 이기려는 생각이 마음에서 싹트지 않고 화를 내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고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온화하고 어질며 자애롭고 선량함이 온 식구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날을 맞을 때마다 아우들, 종형제들, 자식들, 조카들이 모시는 자리에서 모여서 마주하며 얼굴마다 표정이 화기애애한 것을 보면 마치 봄날에 온갖 꽃들이 활짝 핀 사이에 있는 것 같이 여겼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사람에게 만금의 재산이 있는 것은 선행 하나를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 소나 말에게 옷을 입혀 놓은 듯한 저들이 과연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홍범(洪範)〉의 오복(五福)에는 덕이 네 번째 순서에 있지만 실제로는 덕이 오복의 근본이다. 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복 가운데 덕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하였다. 매번 선(善)을 행하도록 정성껏 인도하고 일깨우는 데 공력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방 안은 네 벽이 텅 비고 소박하여 편지나 서첩(書帖) 외에는 다른 여분의 물건이 없었다. 집에 바둑판 하나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물이라 일컬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몰래 틈틈이 바둑을 두며 노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바둑판을 가져다 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성품이 예(禮)를 좋아하여 손수 제의(祭儀)를 베껴 일문(一門)의 자제들에게 주고 익히게 하였다. 속절(俗節), 삭망(朔望), 사시제(四時祭)에 대해서는 사라지고 거행되지 않던 것들을 정리하여 찬연함이 볼 만하였다. 또 언서(諺書)로도 1본(本)을 베껴 며느리와 딸들에게 주어 익히도록 하였다. 일문(一門)에서 관례(冠禮)를 치르는 자가 있으면 삼가(三加)의 예6)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매번 일문의 자제들에게 서사(書社)에 모여 향음(鄕飮), 강규(講規) 등의 의절(儀節)을 익히게 하였다. 평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경륜(經綸)은 대충대충 처리하지 않아 조리와 두서가 확실하였고 세속의 풍습에 얽매이지 않아 의리가 곡진하였다.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드러나고 감춰진 것이 다를지라도 요컨대 측은하게 여기고 자애롭게 대하고 남을 이롭게 하고 은혜를 베풀려는 마음을 벗어나지 않았다. 산림에 감추어진 면모가 세상에 조금이나마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 을미년(1895, 고종32) 6월 25일, 우인당(愚忍堂)에서 편안히 생을 마쳤다. 원근의 인사(人士)들이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조문(弔文)을 들고 와 곡을 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여항(閭巷)의 부녀자나 아이들, 시정(市井)의 장사꾼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탄식하면서 선인(善人)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8월 17일 정천(淨川) 뒤에 있는 가옥치(佳玉峙)의 술좌(戌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4남을 두었는데 준기(準基), 준회(準會), 준규(準奎), 준우(準遇)이다. 무릇 인(仁)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존귀한 작위(爵位)이고 사람이 사는 편안한 집이다.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 누군들 이 도리를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늘로부터 뛰어난 자질을 받고 학문의 공을 성취하여 가정에서는 효성스럽고 유순한 아들이고 향려(鄕閭)에서는 정직하고 신뢰받는 선비이며 남을 사랑하여 남에게 사랑받고 남을 공경하여 남에게 공경받으며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으며 지극히 너그러운 자리에 머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지에 노닐어 이르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고 삶과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을 나는 공에게서 보았다. 공은 예설(禮說)에 정통하고 경전(經典)의 본뜻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역사에 박학하고 사물의 이치에 정통하며 세사(世事)에 밝아서 함께 얘기하면 마치 샘물이 마르지 않고 세차게 흐르는 듯하였다. 공의 행의(行義)와 풍채는 진실로 사람들마다 모두 함께 보았고 함께 들었지만, 학문의 성취에 대해서 말하자면 두문불출하며 요양(療養)하는 10년 동안 이루어졌기에 부지런히 뒤따르던 자가 아니라면 그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아, 우리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비록 매우 쓸쓸하고 적막하지만, 무너진 세상, 쇠락한 풍조 속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한 가닥 실 같이 거의 끊어진 도맥을 지키고 조만간 젊은 후생(後生)들의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건만, 공이 조금도 머물지 않고 서둘러 우리를 버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남은 생이 쓸쓸하여 그저 눈물이 옷깃을 적실뿐이다. 아, 나를 아는 것이 공과 같은 사람이 없고 공을 아는 것이 나와 같은 자도 없다. 따라서 평소의 행적과 평소의 덕을 찬술하는 일에 대해서 사양을 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가 없다. 이에 감히 차례대로 서술하여 공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드러내지 못한 덕이나 갖추지 못한 행적은 준기(準基)가 응당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훗날 입언(立言)하는 자의 붓을 기다릴 것이다. 公諱麟鎭。字學仲。號愚忍堂。朴氏系出密城。察訪諱蔚其中祖。察訪生僉正諱孟誠。僉正生參議諱永傑。參議生司猛諱億瑞。司猛生監察諱枝樹。壬辰忠臣贈左承旨。旌閭。承旨生主簿諱天柱。主簿生諱成素。成素生諱泰興。泰興生僉樞諱尙彦。僉樞生諱必益。於公高祖也。曾祖諱慶龜。祖諱萬煥。考諱在德。妣水原白氏。生考諱在應。蓋出爲伯父後也。憲宗丙午十二月三十日。生于碧池里第。天姿朴實。性氣溫良。一事兩庭。庭無間言。嘗恨嚴庭早世。未及承顔。追遠事亡。極其哀誠。侍慈幃。色溫氣和。承順無違。家事巨細。必稟而行。己未委禽于礪山宋氏之門。女士好逑。極有內助。乙丑生考違世。季父諱在杓。慮其以家務妨學。凡百躬自幹理。而使公遊學以就其業。公事季父甚謹。出入進退。惟命是從。生考歿後。偶得出錢券文於故篋中。卽加墨抹曰。彼旣不言。自我言之。則是發其欺誣也。於人情安乎。戒家人勿言。是時公年爲弱冠左右。而其處事偉然已如此。宗族甚繁。同住一巷。長少內外。恩義周遍。各得歡心。至於姻戚故舊。往來存訊。隨時不廢。外王父沒。買爲數畝地。俾資奠獻之具。爲本生外王父亦如之。爲外舅姑亦如之。立門規蓄物力。使貧窮有助。吉凶有須。墳塋香火。春秋有賴。又推其力以及於傍親之墓。再從女弟。嫁而貧且病。公邀而養之。及沒。舁還其家。具棺翣而助之。隣里有婦人解娩。飢因垂絶。公聞之。具糧饌使救之。其母孩得以蘇活。有乞客來而病。數月救治。無間家衆。其死也具衣物而葬之。有人父子行乞。父死殯於道側。久而未葬。哀哭於道。公矜之。出力而營之。貧族一人貸去數十緡錢。積年不還。亦無一言及之。久後還之。公笑曰。吾心中忘此錢久矣。忘而受之。豈非剩物乎。遂不受。遇飢歲。必躬加儉約。而存其羸餘。以賙貧乏。前後賴活不少。家有世來奴婢。悶其久役而放之。嘗買一婢。聞其爲良家女。亦放還之嘗有飛雉爲山獸所逐。竄伏簷下。諸子拱之。公曰。物窮依人。豈忍殺之。令放之。近歲以來。遠方淫巧之物。眩溢市肆。競相耽服。公未嘗接目焉。公先系。自中祖以上。逸而無傳。中間族先一人。引他系而冒於其上。因仍未改者久矣。公大懼倫理之乖悖。往復於崔勉庵奇松沙諸識禮處。告于宗族而反正之鄕裏有豪富人。風勢頗張。累書請見。終不一往。子準基有所佩寶刀。一日見失。公曰。窮儒寶劒。本是過物。失之固當。了無追惜之意。一日余與數三朋友訪公。坐語良久。家內失火。失聲告急。公呼僮僕。使之往救。坐語如常。公弟出外。見辱於人。歸告之。公曰。曲在於汝。則見辱固當。曲在於彼。則彼是妄人。與妄人何計較之有。弟曰。直而見辱。不亦寃乎。曰辱在於曲。不在於直。東徒之亂。威虐甚熾。閭里靡然。公會親戚知舊。喩以邪正順逆利害禍福之分。使無所犯。早治功令。馳騁翰墨。以至文酒遊衍之際。往往有豪宕風韻。閱世漸久。浮想消歇。於是杜門閉帷。絶遊息交。養病之餘。取家禮心經性理等書。從容沈潛。次第紬繹。春融氷釋。逌然自樂。不知沈痾之在身。幽獨之爲苦也。修墓下舊構。儲四子五經。爲門子弟修息之所。晩築數椽於寢之西。命曰則以齋。以爲諸子餘力學文之地。敎諸子。不許作時文赴科場曰。誤我足矣。豈令再誤汝輩耶。日以讀書窮理。檢身飭行。指授課程。俾無放過。聞有賢士友。則程途雖遠。而必使往從之。聞有好文字。則事力雖艱。而必令買置之。其樂善好學。出於至誠。而不知人間世復有名華利達之爲好也。忌克之意。不萌於心。忿戾之氣。不形於色。鄙悖之聲。不出於口。溫仁子諒。闔室薰染。每閒居暇日。見其羣弟羣從諸子諸姪。聚對侍列。面面和氣。怡怡融融。如在春城萬花之中。嘗戒諸子曰。人有萬金之産。不如作一介善士。彼牛襟馬裾者。於人世果何爲也。又曰。洪範五福。德居其四。而其實德爲五福之本。吾以爲天下之福。莫過於德。每惓惓引喩所欲式穀者。無所不用其至。一室四壁。蕭散澹泊。簡墨書帖之外。無他長物。家藏一奕枰。人號寶物。一日見諸兒竊間圍戲。遂取其枰。碎而焚之。性好禮。手抄祭儀。賜門子弟習之。至於俗節朔望及四時之祭。修其廢墜。燦然可觀。又以諺書抄一本。賜婦女習之。門內有將冠者。令依三加而行之。每令門子弟。聚於書社。習鄕飮講規等儀節。平日經綸。著於施爲之間者。不涉苟簡而的有條緖。不囿俗習而曲有義理。雖大小有殊。顯晦不同。而要不出於惻怛慈愛利人澤物之心也。惜其沈晦林樊。不少槪見於世也。乙未六月二十五日考終于愚忍堂。遠近人士知不知。莫不痛惜。操文來哭者相續。至於閭巷婦孺。市井販傭。亦皆一辭嘖嘖。以爲善人逝矣。八月十七日。葬于淨川後佳玉峙戌坐原。有四男。準基準會準奎準遇也。夫仁者天之尊爵也。人之安宅。人生之初。孰不有此箇道理。而受之以姿質之美。濟之以學問之功。在家庭爲孝順之子。在鄕閭爲忠信之士。愛人而人恒愛之。敬人而人恒敬之。與世無怨。與物無競。處於至寬之地。遊於至順之境。無人不得生死活潑者。吾於公見之矣。公邃於禮說。謹於經旨。博於史學。精於物理。明於世故。與之言。滾滾若源泉之不渴也。行義風裁。固人人所共見所共聞。而若學問所就。則此是杜門養病十年間所得。非勤於從逐者。不能悉其裏許也。嗚乎。吾輩殘生。雖甚落莫。而相從於缺界頹波之中。以守一縷幾絶之脈。以待後生少年早晩消息。豈知公不少留。而遽爾相棄耶。餘生踽踽。只有淸血霑襟。嗚乎。知我者。莫如公。知公者。亦莫如我。其於述平生之行。撰平生之德。有不可辭而委諸他手也。玆敢序次以還其家。若其德之有未形。行之有未備。則準基當有以補足之。以俟他日立言之筆也。 부친 소후부(所後父)인 백부(伯父)를 가리킨다. 삽(翣) 상여에 실린 관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부채 모양의 장식이다. 불삽(黻翣, '기(己)' 자가 등지고 있는 문양을 그려 넣은 것), 운삽(雲翣, 구름의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보삽(黼翣, 도끼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이 있다. 운삽은 화삽(畵翣)이라고도 한다. 빈(殯) 본래 대렴(大斂)을 마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서쪽 계단 위쪽에 묻어둔 관에 임시로 안치하는 상례의 절차이다. 여기서는 정식으로 빈을 한 것이 아닌 상황이므로 길가의 구덩이에 임시로 안치한 상태라는 뜻이다. 최면암(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하에서 배웠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삼가(三加)의 예 관례를 할 때 관을 세 차례 씌우는 예를 말한다. 《가례(家禮)》에 따르면,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 재가(再加)에는 사모(紗帽), 삼가(三加)에는 복두(幞頭)를 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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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행장(2) 行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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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 처사 안공 행장 松下處士安公行狀 공의 성은 안(安), 휘는 국정(國禎), 자는 순견(舜見), 호는 송하(松下)이다. 고려조의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7)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문성공의 증손(曾孫)인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은 공훈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竹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죽성군은 휘 면(勉), 호 쌍청당(雙淸堂)을 낳았고 쌍청당은 좌찬성을 지내고 이목은(李牧隱)8)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쌍청당은 휘 정생(挺生)을 낳았고, 정생은 본조에 들어와 관직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정생의 아들 휘 을겸(乙謙)이 영암군(靈巖郡)을 다스리게 되자 이로 인해서 남쪽 땅으로 옮겨 살았다. 을겸의 아들 휘 여재(汝再)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장흥(長興)에 우거(寓居)하였으며 자손이 이로 인해 장흥에 거주하였다. 직장공의 10대손인 휘 택인(宅仁), 호 회옹(海翁)이 덕을 쌓고 의를 행하여 향리(鄕里)에 널리 알려졌는데,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몽원(夢元)이고 조부는 휘가 수책(壽策), 호가 덕림(德林)이며 능주(綾州)로 이주하였다. 가업이 조금 넉넉해지자 선행을 좋아하고 남에게 잘 베풀었다. 고(考)는 휘 영({氵+潁}), 호 금방(錦舫)이며 비(妣)는 해주 최씨(海州崔氏) 수완(粹玩)의 딸이다. 생부(生父)는 휘가 협(浹), 호가 춘탄(春灘)으로 곧 금방공의 아우이다. 형제가 모두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철종 갑인년(1854, 철종5) 9월 9일에 능주의 칠송리(七松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와 용모가 단정하고 순수하며 성격과 기질이 온순하고 어질었으며, 부모를 곁에서 모시거나 명을 따르는 것이 공손하여 물이 흐르듯 하였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갑자기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반드시 단정하고 바르게 앉으며 움직임도 반드시 침착하고 차분하였으니 대체로 천품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6세에 조부상을 당하자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올릴 때 반드시 참여하고 빠지는 일이 없었다. 동학(同學) 가운데 굶은 아이를 보면 반드시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은 상에 함께 밥을 먹었다. 같은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면 돌아와 부모에게 고하여 진휼하게 하였다. 깊은 밤에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같이 고생하는 사람을 대접하였다. 공의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공은 두 집안에서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니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하지만 교만하고 경솔한 습성이 일체 마음에서 싹트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독서를 하는 절도(節度)는 지시나 감독이 심하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을 다하여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고 한결같이 과정(課程)을 준수하여(였으므로,)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되어서는 문장(文章)이 탁월하게 되었다. 집안이 대대로 본래 효성스럽고 근신(謹愼)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데다 집안의 영향을 받아 지켜 따르고 경륜을 키우는 것이 일반 사람과 크게 달랐다. 본생부모(本生父母), 소후부모(所後父母), 승중(承重)의 상(喪)9)을 치른 것이 앞뒤로 모두 15년이었지만 상례(喪禮)를 봉행하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의절(儀節)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내외의 친족 가운데 본래 곤궁한 이가 많아 끊임없이 진휼하는 것이 해마다 상례(常例)였는데 농토와 집을 마련해 주기도 하고 혼인을 도와주기도 하며 굶주리는 해에는 더욱 잘 보살펴 주었다. 같은 동네의 오랜 친구에 이르기까지 공의 덕으로 목숨을 부지한 자가 많았다. 빈객(賓客)이 이르면 매우 정성스럽게 맞이하고 매우 넉넉하게 대우하여 앉은 자리에는 술동이가 비지 않았고 문밖에는 찾아온 이의 지팡이와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비록 옹색하고 초라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찍이 냉대(冷待)하는 기색을 하지 않았다. 아픈 곳을 얘기하면 반드시 직접 약을 달였으며 치료가 끝난 뒤에야 보내주었다. 일찍이 어떤 이가 집안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찾아와 패악한 짓을 벌였지만, 공의 말을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사죄를 하고 돌아갔다. 하루는 머슴이 소를 때려 다치게 하여 소가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공이 그 상황을 듣고는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 소가 스스로 뿔로 들이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스스로 노사(蘆沙)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받지 못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기고 마침내 선생의 손자인 송사(松沙)10)와 문인인 최계남(崔溪南)11), 정월파(鄭月波)12), 정애산(鄭艾山)13)과 편지를 주고받아 강론을 펼치면서 선생이 남긴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자 사숙(私淑)의 의리를 기탁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노사(蘆沙)와 벽계(檗溪) 두 선생이 뒤늦게 근세에 나타난 것은 하늘의 뜻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세도가 이처럼 비루하고 스승이 전수(傳授)한 학설이 이처럼 분열되었건만, 정주(程朱)의 정맥(正脈)이 동방(東方)에서 천 년이 지나도록 끊어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두 선생의 힘 덕택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벽계(檗溪)의 문하14)에서는 김중암(金重庵)15), 최면암(崔勉庵)16), 홍여지(洪勵志)17) 등 여러 현자가 앞뒤로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보위하여 이 세상에 큰 공을 세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풍습을 따른 지 오래일 것이다. 우리 조정 500년의 강상(綱常)이 오늘날 전부 벽계의 문하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면암(勉庵) 선생에게 편지와 폐백을 올리고 학업을 연마할 길을 열었다. 하루는 고을의 수령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이 끝내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충고하기를, "사민(土民)이 되어 거만하기가 이와 같은가."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거만한 것이 아니라 사민(土民)으로서 분수를 지키는 것이 진실로 그러할 뿐이다." 하였다. 무릇 권세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마을 이웃에 있더라도 아득하게 대하며 상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오직 학문과 행의(行義)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만 관계가 소원할지라도 진심으로 좋아하고 서로 친숙하게 지냈다.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남전(藍田)의 향약18)과 백록동(白鹿洞)의 학규(學規)19)를 본받아 향음(鄕飮), 향약(鄕約), 강의(講儀), 독법(讀法)에 관한 의절을 봄가을로 상례로 삼아 여러 해 동안 거행하였다. 또 모여서 강론을 펼치는 장소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여러 벗과 서로 물자를 내어 정사(亭社)를 짓기 시작하였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공사(工事)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전부 직접 주관하였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지출과 수입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또 영남, 호남의 여러 벗과 실내가 넓은 재숙(齋塾), 예컨대 삼가(三嘉)의 뇌룡정(雷龍亭), 단성(丹城)의 신안사(新安社), 장성(長城)의 담대헌(澹對軒), 능주(綾州)의 영귀정(詠歸亭) 등을 골라 격년으로 모여서 강론을 펼치는 규정을 만들어 한두 차례 거행했지만, 세상이 혼란해져 그만두었다. 당시에 사설(邪說)이 점차 번성하였는데, 공은 일찍이 강회(講會)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를, "우리 중에서 사학(邪學)에 물든 자가 있다면 응당 성토(聲討)하고 내쳐야 한다." 하고 마침내 조례를 적어 재사(齋舍) 벽에 걸었다. 갑오년(1894, 고종31) 봄 사악한 무리가 고부(古阜)를 침범하고 연달아 주변 고을을 어지럽힌 뒤 진격하여 전주(全州)를 함락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가느다란 물줄기도 막지 않으면 결국 강수(江水), 하수(河水)가 되고 실타래도 끊임없이 이어지면 그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들을 이르지 않겠는가. 쑥대같이 잔약한 인생이라 큰일을 할 수는 없으니 자기 한 몸을 수양하는 계책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하였다. 가을에 사악한 무리가 더욱 기승을 부려 도처를 점거하고 모여 지내어 영귀정(詠歸亭)도 도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공이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서 나와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목을 놓아 대성통곡하기를, "한 줄기 희미한 햇살이 이곳에 의지했건만 이제는 이곳마저 빼앗겼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였다. 둘이 의논하여 적을 무찌를 계책 6~7조를 진술하여 관사(官司)에 바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대규모로 본주(本州)에 침입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마침내 자제, 친족, 동지(同志) 5~6인과 영평(永平) 지역으로 재난을 피하였다. 몇 달이 지나고 난이 평정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재산이나 기물이 약탈당한 것을 보고 나중에 그 상황을 매우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전혀 묻는 바가 없었다. 을미년(1895) 겨울 삭발령(削髮令)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이 탄식하기를,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는 머리카락을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지금이야말로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때이다." 하였다. 마침내 동지 여러 사람과 산에 들어가 자신을 수양할 계책을 세웠다. 병신년(1896, 건양1) 1월 정애산(鄭艾山)이 호남의 사우(士友)들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원수에 대적하자는 뜻을 알렸다. 얼마 뒤에는 기송사(奇松沙)가 대의소(大義所)를 설치한 뒤 도내(道內)에 통지하여 알리고 2월 30일에 각 고을의 병사를 광주(光州)에 모으기로 약속하였다. 공은 이 소식을 듣더니 즉시 달려가 군무(軍務)를 의논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뒤이어 본주(本州)에서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나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공은 광주에서 돌아와 운영과 계획에 자못 수고를 하였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고을의 논의가 합치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공이 여러 벗과 약속하기를, "송사(松沙)가 만 번 죽을 힘으로 이 일을 준비하였다.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가 비록 고을의 의병을 이끌고 달려가지는 못하더라도 오랜 벗 몇 명과 위난(危難)에 달려가 함께 죽을 계책도 세우지 못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벗들과 기일을 정하였다. 기일이 되기 2, 3일 전에 관동(關東)의 의병(義兵)이 무너지고 남쪽 지방이 동요하고 광주(光州)에서도 병사들이 흩어져 전황(戰況)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은 마침내 나와 보성(寶城)의 동복(同福) 등지로 재난을 피하였다가 한 달 남짓 지나서 돌아왔다. 앞뒤로 겪은 일이 매우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급하고 급박했지만, 뜻이 확고하고 생각이 차분하여 일찍이 압박을 받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을 수양하려는 일념은 단청처럼 빛나 온갖 시련을 겪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단발령(斷髮令)이 잠잠해지더라도 훗날의 화를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아니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또 어찌 한스럽겠는가. 옛사람이 배 안에서 《대학》을 읽은 것20)이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하였다. 마침내 서숙(書塾)을 청소하고 서적을 비치하여 날마다 강론과 연구에 힘을 쏟았다. 서숙이 매우 넓고 맡은 일이 쌓여있어 종종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일을 처리하고 난 뒤에는 편안히 서안(書案)을 마주하고 평상시처럼 책을 읽어 일찍이 터럭만큼도 마음에 구애받는 일이 없었다. 바람이 시원하고 달이 밝은 좋은 날을 만날 때마다 절친한 벗들과 한가롭게 이리저리 거닐거나 시를 읊으면서 아득히 속세를 벗어난 풍도(風度)를 보이거나 격앙되어 세상을 걱정하는 회포를 드러내었다. 무술년(1898, 광무2) 봄 나이가 비슷한 벗인 정창림(鄭昌林), 윤자선(尹滋宣), 김장석(金章錫), 이병섭(李秉燮), 김기수(金基洙), 이기백(李祺白), 이인환(李仁煥), 그리고 나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강론을 열기로 규약을 정하였다. 대체로 노쇠하고 떨어져 살다 보니 규약이 해이해지는 것이 두려워 이를 단속하려고 했던 듯하다. 10월 12일이 되어 윤자선의 집에 모여 《근사록(近思錄)》을 강한 뒤 하루를 묵고 헤어졌다. 또 하루가 지난 뒤 공이 위독하여 서둘러 갔더니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근사록》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이 죽을 때까지 이처럼 변하지 않았다. 인리(隣里)와 향당(鄕黨)의 남녀노소로부터 어린아이, 비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친척이 세상을 떠난 듯이 탄식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길에는 조문(弔文)을 들고 와 곡을 하는 원근에 사는 유자(儒者)들이 끊이지 않았다. 12월 3일, 살던 마을 오른쪽에 있는 방애동(方藹洞)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 세교가 쇠퇴한 이래로 덕을 온전히 지키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되었다. 의지가 굳센 자는 온화하고(함과) 유순함이 부족하고 순후하고 신실한 자는 활달함과 쾌활함이 부족하고 원만하고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청렴함과 강직함이 부족하다. 조화를 이루면서도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정직하면서도 세속과 절연(絶緣)하지 않으며 겸허하고 온화한 태도로 자신을 지키지만 범접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며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수양하지만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다잡는 것은 매우 신중하지만 남을 대하는 것은 매우 너그러우며 자신을 돌보는 것은 매우 간략하지만, 남에게 베푸는 것은 매우 두터워 《서경(書經)》에서 말한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다)[直而溫]21)',(는 것과) 《주역(周易)》에서 말한 '같으면서도 다르다[同而異]22)'는 것이 아마도 공이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이 때문에 안팎에서 원망이 없고 위아래가 서로 믿으며 말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고 베풀면 화답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거만하고 사나운 자는 멈출 줄 알고 교만하고 오만한 자는 공경할 줄 알고 탐욕스럽고 인색한 자는 수치를 알게 되었다. 비록 평상시에 공의 면모를 몰랐던 자라 하더라도 흠모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다른 의견이나 헐뜯는 말도 없었다. 아, 인심(人心)을 얻고 인정(人情)을 신복(信服)하게 한 것은 고인(古人)일지라도 공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빈곤하고 지위가 미천하여 널리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뿐이다. '선행을 보면 목이 마른 듯하고 악행을 보면 뜨거운 물을 만지듯 하였다.[見善如飢渴 見惡如探湯]23)'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보았다. '마음에는 정한 바가 있고 행실에는 지키는 바가 있으며 부귀로도 더하지 못하고 빈천으로도 덜어내지 못한다.[心有所定 行有所守 富貴不足以益 貧賤不足以損]24)'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을 보았다. 만약 하늘이 몇 년의 수명을 더 내려주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주변에 영향을 끼쳤다면 어찌 정미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광채를 발산하여 사문(斯文)의 도맥이 오래 유지되고 세도(世道)의 희망이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애석하고 애석하다! 행실을 기록하고 덕을 형용하여 후세에 전하고 사라져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일이야말로 평소에 서로 왕래하던 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삼가 이처럼 대략을 기술하였다. 배(配)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영현(泳鉉)의 딸로 고봉(高峯) 문헌공(文憲公)의 후손이다. 3남 3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창섭(昌燮), 종섭(宗燮), 홍섭(弘燮)이고 딸은 오재동(吳在東)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둘은 아직 어리다. 公姓安。諱國禎。字舜見。號松下。麗朝文成公晦軒先生。其顯祖也。文成公曾孫文惠公諱元衡。以功封竹城君。子孫因貫焉。竹城君生諱勉號雙淸堂。官左贊成。與李牧隱爲道義交。雙淸堂生諱挺生。入本朝官直提學。子諱乙謙。宰靈巖郡。因寓南土。子諱汝再官直長。寓居長興。子孫因居焉。直長公十世孫諱宅仁號海翁。積德行義。鄕里著稱。卽公之高祖也。曾祖諱夢元。祖諱壽策號德林。移寓綾州家業稍溫。樂善好施。考諱氵+潁號錦舫。妣海州崔氏粹玩女。生父諱浹號春灘卽錦舫公弟也兄弟俱以孝友文學著名。以哲宗甲寅九月九日。公生于州之七松里第。儀容端粹。性氣溫仁。左右趨諾。承順如流。不戲色不暴怒。坐必端直。行必安詳。蓋其天稟然也。六歲遭王考喪。朝夕饋奠。必參無闕。見同學有飢者。必邀至家。同案共食。見隣里有飢者。歸告父母。俾有所恤。每深夜讀書。必具雞酒。以饋同苦者其風儀自幼如此。公以兩家一子。生長富饒。其慈愛可謂至矣。而驕易之習。未嘗一萌於心。奢華之物。未嘗一近於身。至於讀書節度。不甚提督而自能刻意孜孜。一遵課程。至於丱弁。文詞斐然。家世素以孝謹聞公以天姿之美。加以擩染之助。持循展拓。大異衆人。居所生所後及承重喪者。前後凡十五年矣。而執喪之節。送終之儀。必誠必信。終始如一。內外族戚素多貧乏。源源周恤。歲以爲常。或爲之備給田廬。或爲之助成婚姻。遇飢歲。尤加眷戀。至於隣里知舊。賴以存活者多。凡賓客之來。接之甚款。待之甚厚。座上杯樽不空。戶外杖屨常滿。雖寒乞遇之。未嘗以冷色加之。告病則必親煮藥餌。待其治療而後遣之。嘗有人怒門內一人。來肆悖惡。聽公言。不覺愧謝而去。一日。雇奴打傷其牛。幾斃。公聞其狀。佯若不知曰。此必非人所忍爲。必其牛之自觸致然也。中年以後。遂廢擧子業。專心性理之學。自以未及受業於蘆沙先生之門爲至恨。遂從先生之孫松沙及其門人崔溪南鄭月波鄭艾山。往復講磨。得聞其餘論。以付私淑之義。嘗曰蘆沙檗溪兩先生之晩出於近世者。天意甚不偶然。世道若是汗下。師說若是分裂。而使程朱正脈。不絶於東方千載之後者。未必非其力也。又曰。檗溪之門。金重庵崔勉庵洪勵志諸賢之前後斥邪衛正。大有功於斯世。不然。吾輩之爲被髮左袵久矣。孰謂我朝五百年綱常。在今日而不盡出於檗溪之門耶。遂上書贄於勉庵先生。以開講業之路。一日邑宰請見。公終不往。或規之曰。爲土民而倨傲如是耶。公曰。我非倨傲也。守土民之分。是所固然耳。凡聲勢之右於己者。雖在鄕隣。邈然若相忘。惟學問行義之勝於我者。則雖在疎遠。誠心愛好。綢繆相熟。與鄕裏士友。擬藍田及鹿洞規例。行鄕飮鄕約講儀讀法之節。春秋爲常。行之有年。又患講聚之無所。與諸友互相出力。經始亭社。首尾三年。凡百功費。皆自尸之。而無一人問其出入者。其見信於人如此。又與嶺湖諸友。擇齋塾寬闊如三嘉之雷龍亭。丹城之新安社。長城之澹對軒。綾州之詠歸亭。爲間年會講之規。一再行而以世亂止。時邪說漸熾。公嘗於講會席上。颺言曰。在吾儕而如有浸染邪學者。當鳴鼓而攻黜之。遂書條約。揭于齋壁。甲午春。邪類犯古阜。連撓旁邑。進陷全州。公聞之歎曰。涓涓不壅。終爲江河。綿綿不絶。或成網羅者。非是之謂耶。蓬蓽殘生。旣不能有爲。則只爲一身自靖之計可也。秋邪類益熾。在在盤聚。詠歸亭又爲賊所據。公不勝忿憤。要余相見於中路。放聲大哭曰。一縷微陽。所寄在此。而今乃見奪。吾輩其將安往乎。議陳勦除之策六七條。獻于官司。未幾。賊大入本州。禍不可測。遂與子弟族戚及同志五六人。逃難于永平地。數月亂平歸家。見生産什物。沒被侵掠。追知其狀甚悉。而一無所問。乙未冬。削令甚急。公歎曰。與其薙髮而生。何如存髮而死。舍魚取熊。此其時也。遂與同志諸人。爲入山自靖計。丙申正月。鄭艾山寄書湖南士友。示以同仇之意。旣而奇松沙設大義所。通喩道內。期以二月三十日。聚各邑兵於光州。公聞卽馳往。贊議戎務。繼而本州又謀擧義。余亦參其謀。公自光州還頗費經畫。未幾日。以鄕議不合而罷。公與諸友若曰。松沙出萬死之力。已設此擧。而勤王有日。則吾輩雖不能以鄕兵赴之。獨不可與知舊多少人爲赴難同死之計耶。遂與定期。前期數三日。關東義兵潰。南方繹騷。光州又罷兵。火色甚急。公遂與余逃難於寶城同福等地。月餘而還。前後所遭蒼黃震越。極其區測。而志定慮靜。未嘗有怵迫萎索之氣。至於自靖一念。炳然如丹。雖千生萬受。而有所不渝也。公曰。薙令雖浸。而後日之禍。寧可測耶。固知吾輩死亡無日。而朝聞夕死。又何恨焉。古人之舟中大學。良以是也。遂掃塾儲書。日以講討爲務。家戶深闊。事務叢委。往往有難堪耐處。而處置了後。晏然對案。讀書如常。未常有一毫介滯於中者。每當風月良辰。輒與朋知逍遙吟哦。悠然有出塵之標。慨然有傷世之懷。戊戌春。與年輩友鄭昌林尹滋宣金章錫李秉燮金基洙李祺白李仁煥及余爲一朔一講之規。蓋恐衰老離索。繩約廢弛。而爲此團束之也。至十月十二日。會于尹滋宣家。講近思錄一宿而別又一宿而公病馳往見之則氣息已絶。而近思錄猶在其手矣。好學之誠。至死不渝者如是。隣里鄕黨老少男女。至於童幼卑賤。無不咨咨涕洟。如喪親戚。遠近章甫操文來哭者。屬屬於道。十二月初三日。葬于所居村右方藹洞乙坐之原。嗚乎。自世敎衰。而德之難全久矣。剛毅者欠和裕。醇實者欠開爽。圓通者欠廉介。若夫和而不同於流。貞而不絶於俗。溫溫自持而有不可犯者在焉。謙謙自牧而有不可輕者存焉。檢身甚詳而待人甚恕。奉已甚約而施人甚厚。書所謂直而溫。易所謂同而異者。公其庶幾焉。是以內外無怨。上下相信。言之而人無不服。施之而人無不和。强梗者知戢。驕敖者知敬。貪吝者知恥。雖平日之不知面貌者。無不愛慕欽欽。無異言間辭。嗚乎。得人之心。服人之情。雖古之人。恐無以過之。但其窮約布素。而所及者不廣耳。見善如飢渴。見惡如探湯。吾聞其語而吾見其人矣。心有所定。行有所守。富貴不足以益。貧賤不足以損。吾聞其語而吾見其人矣。若使天假之年。從容優游。磨礱浸灌。豈不能究極精微。出治光彩。以壽斯文之脈。以係世道之望哉。痛惜痛惜。至於記其實狀其德。以傳諸後。不使任其泯沒。則此非平日遊從者之責也耶。玆不敢付諸別人。而謹述梗槪如是云耳。齊幸州奇氏泳鉉女。高峯文憲公之後。擧三男三女。男昌燮宗燮弘燮。女適吳在東。餘二幼。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 안향(安珦, 1243~1306)을 가리킨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최초의 주자학자라 할 수 있다. 이목은(李牧隱) 목은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자는 영숙(穎叔),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승중(承重)의 상(喪) 가통(家統)을 잇는다는 뜻이다. 맏아들이 아버지가 사망하여 가통을 계승하는 것은 물론 할아버지 생존 중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뒤에 할아버지가 사망하여 할아버지로부터 가통을 계승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 즉 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할아버지로부터 가통을 계승받아 할아버지에게 승중복으로 참최 삼년복을 하였다는 뜻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을 가리킨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손자이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최계남(崔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을 가리킨다.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 《계남집》이 있다. 정월파(鄭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을 가리킨다. 자는 백언(伯彦), 호는 월파(月波),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가리킨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벽계(檗溪)의 문하 벽계는 경기도 양근의 개울가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가 살던 곳이다. 이항로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성리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김중암(金重庵)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을 말한다.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菴),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최면암(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인이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홍여지(洪勵志) 홍재학(洪在鶴, 1848∼1881)을 가리킨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문숙(聞叔)이다. 남전(藍田)의 향약 남전은 남전 여씨(藍田呂氏)로, 송(宋)나라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등 여씨(呂氏) 4형제를 이른다. 이들이 그 고을 사람들과 자치 규범을 정하여 서로 지키기로 약속하였으니, 이것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이다. 백록동(白鹿洞)의 학규(學規)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을 다스릴 때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정하고 여기에서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동규(白鹿洞規)이다. 옛사람이 …… 읽은 것 남송(南宋) 때의 충신인 육수부(陸秀夫)는 원(元)나라 군대에 쫓겨 배를 타고 도망가면서도 《대학(大學)》을 강학(講學)하기를 권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경(講經)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고요(皐陶)가 우(禹)에게 말한 구덕(九德)의 하나이다. 구덕은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는 것[寬而栗],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것[柔而立], 성실하면서도 공손한 것[愿而恭], 가지런하면서도 공경스러운 것[亂而敬], 온순하면서도 굳센 것[擾而毅], 곧으면서도 온화한 것[直而溫], 간략하면서도 반듯한 것[簡而廉], 억세면서도 독실한 것[剛而塞], 용맹하면서도 의를 좋아하는 것[彊而義]이다. 《書經 皐陶謨》 같으면서도 다른 《주역》 규괘(睽卦)의 상(象)에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규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上火下澤, 睽. 君子以, 同而異.]" 하였다. 선행을 …… 하였다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마음에는 …… 못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권1 〈상로제일(相魯第一)〉에 나오는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용암 처사 김공 행장 龍巖處士金公行狀 공의 휘는 우종(佑鍾), 자는 내선(乃善)이다. 김씨(金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며 전리 판서(典理判書) 휘 광리(光利)가 비조(鼻祖)이다.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이 누대에 걸쳐 성대하였다. 고조는 휘 명천(命天)이고 증조는 휘 기성(起聲)이며 조부는 휘 윤광(潤光)이다. 고(考)는 휘가 재영(在{王+營})이고 비(妣)는 진양 정씨(晉陽鄭氏) 기택(基宅)의 딸이다. 헌종 정유년(1837, 헌종3) 1월 2일에 진해(鎭海)의 실안리(實安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총명함이 남달라서 부모가 몹시 중하게 여겼다. 이 해에 능주(綾州)의 용반촌(龍盤村)으로 옮겨 살았는데, 천 리 거리를 이사하고 집은 네 벽만 서 있을 정도여서 생계를 꾸리기도 힘들었지만, 대인(大人)은 자식을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여 온 힘을 쏟았다. 서당이 집에서 10여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돌을 치우고 나무를 베어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깊은 밤마다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스승과 동학(同學)들을 대접하여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조금 자라자 현능한 사우(士友)를 뒤따라 전국 각지를 유학(遊學)하게 하고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은 헤아리지 않았다. 공은 아버지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더욱 자신을 담금질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학문은 날로 더욱 풍부하고 해박해졌으며 문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성대해졌다. 덕망과 명성이 원근에 떠들썩하였고 같은 시대의 명사(名士) 가운데 교류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시 무사재(無邪齋) 박(朴) 선생25)이 같은 고을에 살았는데 공이 문하에 나아가 학업을 익히고 끊임없이 배행하여, 입으로 전하거나 마음으로 전한 핵심과 오묘한 뜻은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많았다. 박 선생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시문(詩文)이나 서화(書畫)에 대하여 더불어 종유(從遊)할 만하기로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하였다. 대인(大人)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급작스럽게 집안일을 꾸려 가게 되었다. 집에 지닌 것이 없고 빚만 산처럼 쌓였지만, 집으로 찾아와 빚을 독촉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마도 말하기도 전에 신뢰가 이미 갖추어져 사람들이 공을 매우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빚을 모두 상환하자 비로소 말하기를, "늘 이 일로 말미암아 좋지 않은 말이 선친(先親)에게 미치게 할까 두려웠다. 이제야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겠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공의 집에 가서 머물며 함께 학업을 닦았다. 하루는 공이 밖으로 나가서 저녁 무렵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곡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내가 나가서 보았더니 공이 계곡 옆 바위에 서 있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선군(先君)께서 술에 취해 저녁에 돌아오실 때마다 반드시 이 바위 위에서 서서 우룡(禹龍)[어릴 때 공을 부르던 이름이다.]을 불러 등에 업고 건너게 하셨다. 지금 저녁 무렵에 이곳에 이르자니 홀연히 당시의 정경(情景)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곡을 하고 눈물이 흘렀다." 하였다. 하루는 오래된 종이에서 선인의 수묵(手墨 친필)을 발견하고는 손에 쥐고 눈물을 쏟았다. 맏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고아를 거두어 혼사를 치르고 가산을 마련해 주어 자기가 낳은 자식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을해년(1875, 고종12)에 노사 선생(蘆沙先生)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선생이 공의 뛰어난 자질을 아끼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으로 보자면 세상에 좋은 자질을 지닌 자가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신묘년(1891, 고종28) 가을 영남과 호남 양도(兩道)의 사우(士友), 예를 들어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26),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27) 등과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화엄사(華巖寺)에 모여 며칠 동안 강마(講磨)를 하고 돌아갔다. 계사년(1893) 봄 계남과 애산이 능주(綾州)를 지나자 공은 그들을 영귀정(詠歸亭)으로 맞이하여 날이 저물고 밤이 다하도록 쉬지 않고 강론을 벌였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공이 먼저 가면서 석양 무렵에 묵계(墨溪)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애산 등 여러 벗이 품평(品坪)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옹점치(甕店峙)를 넘는데 고개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밀고 당기며 기어오르듯 하느라고 견딜 수 없이 목이 말랐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술과 음식 등을 장만하여 기다리는 공을 만나 일행이 모두 흠뻑 취하여 갈증을 풀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의 치밀함이 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 성인의 책이 아니면 보지를 않았고 상도(常道)에 맞는 인간이 아니면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예에 맞지 않는 곳에는 이르지 않았고 의에 맞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았으며 몸소 밭을 갈고 손수 김을 매어 자기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생도(生徒)가 사방에서 모여들자 재주의 어짊과 어리석음에 따라 차근차근 엄격하게 가르쳤다. 초야와 산림에 묻혀 지내면서도 한 시대의 문학적 기풍이 성대하여 매우 볼만 하였다. 여러 해 동안 탕약(湯藥) 시중을 드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로써 평소에 학문을 익힌 힘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이런 일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디에 정성을 기울이겠는가.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하면 장차 평생에 걸쳐 후회하게 될 것이다. 힘쓰거라." 하였다. 한 우인(友人)이 고을의 수령이 되자 그를 아는 사람이 현(縣)의 관아(官衙)를 매일 드나들었다. 공이 경계하기를, "옛날에 원찬(袁粲)28)이 포의 시절에 사람을 만나 그와 꽤 친하게 지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찾아갔으나 원찬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알던 고을 수령이 포의 시절에 만난 원찬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사람을 정도(正道)로 바로잡은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항상 좋은 산수를 꾸미는 것을 여생을 보내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거처를 옮겨 한천(寒泉)의 산중(山中)에 은거하여 곤궁하게 지내면서 봉청리(鳳聽里)라고 이름을 붙였다. 평소 관아에 발길을 하지 않았고 고을 수령을 만나지 않았으며 모든 명예나 이익, 영예나 현달에 대하여 담박하였다. 이때가 되어서는 더욱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교유를 끊고 서적(書籍)에 정신을 집중하고 아름다운 경치에 회포를 풀었다. 물아(物我)를 벗어나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뿌리가 감춰진 나무, 광채를 간직하고 있는 구슬과 같았다. 무술년(1898, 광무2) 10월 1일에 세상을 떠나 보성(寶城)의 복내진척(福內眞尺) 금성곡(金聲谷)의 유좌(酉坐)에 묘를 썼다. 배(配)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석진(碩鎭)의 딸로 2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낙부(洛富), 낙인(洛麟)이고 딸은 이서일(李瑞一), 조병채(曺秉采), 정덕홍(鄭德洪), 박선동(朴善東), 위계옥(魏啓玉)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인 두용(斗榕), 기용(基榕)은 큰아들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공은 순후하고 성실하며 신중하고 정성스러웠으며 성정(性情)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었다. 사람을 접하면 온화한 태도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물을 접하면 진실한 마음이 동물(사물)을 감동시켰다. 남에게 간언하여도 그가 비방으로 여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만들어도 그 사람이 괴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교만한 자는 스스로 굴복하고 험담을 하는 자는 스스로 그만두었다. 공이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태이더라도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고 경박한 장난조차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왕래하며 친교를 맺어 진퇴(進退)에 서로를 의지하고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서로 안부를 묻고 득실에 대해서 서로 충고를 주고받았다. 인연을 끈끈하게 맺어 가장 가깝고도 오랜 관계이지만 한 번의 언행조차 의리를 벗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은 사문(斯文)의 순유(醇儒)이고 요즘 세상의 일민(逸民)이라고 이를 만하다. 평소에 알고 지낸 옛날 벗들 가운데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벗의 지행(志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그들을 위하여 행적을 찬술한 것이 많았지만, 유독 공에게만 미치지 못하였다. 몸은 병들어 한 올의 실타래같이 위태로운 숨결인지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다면 백세(百世) 뒤에 다시 공을 아는 자가 누구일지가 늘 두려웠다. 인하여 인품과 재능의 대강을 이처럼 기술하였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공에게 영합하려는 뜻이 있겠는가. 공의 풍도에 대해서 듣고 공의 의리에 탄복한 자는 응당 알 수 있을 것이다. 公諱佑鍾。字乃善。金氏系出光山典理判書諱光利。其鼻祖也。文學仕宦。世代煒燁。高祖諱命天。曾祖諱起聲。祖諱潤光。考諱在王+營。妣晉陽鄭氏基宅女。憲宗丁酉正月二日。生公于鎭海之實安里。生而岐嶷。穎悟異常。父母甚器之。是歲移寓于綾州龍盤村。千里遷徙。四壁徒立。調度辛勤。而大人以敎子一事爲十分專務。齋距家爲十里餘。伐石斬木。以坦其路。每於深夜。親齎酒饌。往饋其師及同學者。以慰其勤苦。稍長。令從賢士友。遊學四方。不計家力之不贍。公敬承親志。益自激勵。未始有須臾之或怠。是以問學日益贍博。詞華日益斐蔚。聞望聲輝。藉藉遠近。一時名士。無不願交。時無邪齋朴先生在同鄕。公造門肄業。源源陪從。其口傳心授。肯綮蘊奧。多人所未及者。先生嘗語人曰。翰墨間可與遊從。惟此人而已。大人歿。公猝然當家。家無所有。而積債如山。然未見有一人臨門索債者。蓋信在言前。人已信之也。未幾年。了還其債。乃曰。常恐緣此而使不美之言。及於先親。今而後。可以舒脚眠矣。余嘗往住公家。同硏一日。公出外。日昏不至。忽有哭聲自外聞。余出見之。公立於溪邊石上。問其故。公曰。昔先君每乘醉暮還。必立此石上。呼禹龍【公小字】使負而渡之。今乘昏到此。忽念其時情景。不覺哭泣之發也。一日見先人手墨於舊紙。執之泫然。伯氏早歿。撫其幼孤。爲之成昏設産。無間已出。乙亥往拜蘆沙先生。先生愛其姿質之美。因語人曰。以此一人觀之。世上好姿質何限焉。辛卯秋與嶺湖兩道士友。如崔溪南琡民鄭艾山載圭。會于方丈之華巖寺。講磨數日而歸。癸巳春。溪南艾山過綾州。公邀會于詠歸亭。講討娓娓終日竟夕。臨發公先行。約以夕陽遇墨溪。艾山諸友至品坪小憩。踰甕店峙。極峻急。扶携躋攀。不勝困渴。至嶺上。見公具酒饌等候。一行皆洽醉解渴。其處事糾密多如此。不觀非聖之書。不親非常之人。不到非禮之地。不取非義之物。躬耕手鋤。自食其力。敎授生徒。四方坌集。隨才賢愚。循循雅勅。山林巖穴之間。一時文學之風。蔚然可觀。有人在積年侍湯之中者。公語其人曰。此可以見平日學問之力。爲人子者。於此而不用其誠。惡乎用其誠。如有一毫之不盡。將爲畢生之悔。勉之。一友人爲邑宰。所知每出入縣衙。公戒之曰。昔袁粲遇人於野。頗與之款。後其人往見之。袁粲拒之不納。安知邑宰前日之知。非袁粲野外之遇乎。其勉人以正。皆此類也。常欲粧點好山水爲終老計。乙未移營薖軸於寒泉山中。名之曰鳳聽里。平日不到城府。不見邑宰。凡聲利芬華澹如也。至是益沈晦。杜門斂迹。絶息交遊。遊心於詩書之間。騁懷於風月之中。嗒然充然。如晦根之木。蘊輝之珠。戊戌十月一日卒。墓寶城福內眞尺金聲谷酉坐。配坡平尹氏碩鎭女。二男五女。男洛富洛麟女適李瑞一曺秉采鄭德洪朴善東魏啓玉。孫斗榕基榕長旁出。餘皆幼。嗚乎。公淳實謹慤。沈靜寡黙。接人而和氣薰人。接物而誠意動物。諫人而人不以爲謗。勞人而人不以爲厲。驕敖者自屈。浮放者自戢。凡公之所在。雖稠座紛雜之中。爭競不生。戲褻不作。其見重於人如此。余自童丱。至老白首。出入相友。進退相須。吉凶相問。得失相規。夤緣綢繆。最親且久。而未見其一言一行有不出於義理者。公可謂斯文之醇儒。今世之逸民。余於平生知舊先我逝者。哀其志行之無傳。爲之撰述其行者多矣。而獨於公未之及焉。常恐一縷病喘。朝夕溘然。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因以述其行治之梗槪如此。豈有一分阿好之意。聞公之風而服公之義者。當有以知之。 무사재(無邪齋) 박(朴) 선생 박영주(朴永柱, 1803∼1874)를 가리킨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無邪齋), 관수재(觀水齋)이다.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이다. 정의림(鄭義林)ㆍ이지호(李贄鎬)ㆍ최인우(崔仁宇)ㆍ공병주(孔炳柱)ㆍ조병호(趙秉浩)ㆍ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 《무사재집》이 있다.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원찬(袁粲) 420~477. 남북조 시대의 송(宋)나라 사람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묵양재 양공 행장 黙養齋梁公行狀 공은 성이 양(梁), 휘가 익환(益煥), 자가 중경(重慶)이며 관향(貫鄕)은 제주(濟州)이다. 당요(唐堯) 시대에 양을나(良乙那)가 한라산(漢挐山)으로 내려와 탐라국(乇羅國)을 세우고, 신라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대대로 작위(爵位)와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동방(東方)의 명망 있는 성씨가 되었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휘 팽손(彭孫)29), 호 학포(學圃)가 교리(校理)를 지냈는데 세상에서는 기묘 명류(己卯名流)로 일컬으며 조정암(趙靜庵) 선생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팽손은 교위(校尉)를 지낸 휘 응기(應箕)를 낳았으며, 응기는 호조 참판에 추증된 휘 산립(山立)을 낳았다. 산립은 첨정(僉正)을 지낸 휘 인용(仁容)을 낳았으며 송석정(松石亭)을 짓고 독서를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인용은 진사(進士) 휘 위남(諱渭)을 낳고 위남은 참봉에 제수되고 효성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위남은 휘 우전(禹甸)을 낳았으며 우전은 덕을 숨기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우전은 휘 지해(之瀣), 호 익우(益愚)를 낳았으며 지해는 우암(尤庵) 송(宋) 선생3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월곡(月谷)의 옛 전장(田莊)에서 송석정으로 나와서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그 지역에 집안을 이루었다. 지해는 휘 대하(大夏)를 낳았고, 대하는 현감을 지낸 휘 익조(益祖)를 낳았다. 익조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성헌(成憲)을 낳았는데,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가 일현(一鉉)이고 조부는 휘가 찬호(贊浩)이다. 고(考)는 휘가 식(栻)으로 문장과 덕행으로 당대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비(妣)는 장흥 마씨(長興馬氏) 언모(彦模)의 딸로 헌종 기해년(1839, 헌종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체구가 넉넉하고 얼굴이 둥글며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엄숙하고 장중하며 목소리가 크고 맑았다. 어려서부터 포부와 신조를 지니고 있어 말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으며 집안에서 효(孝)를 행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을 표하는 의절(儀節)을 어기지 않았다. 집안이 평소 청빈(淸貧)하여 대그릇과 표주박에 담긴 음식조차 자주 거르는 형편이었으나 몸소 농사를 지으며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시(詩)와 예(禮)에 밝은 명문가인데다 원림(園林)과 수석(水石)이 빼어난 곳에 살고 있어 평소에 왕래하는 선비나 사계절에 노닐며 즐기는 사람들로 뜨락에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지만, 공은 주선하는 일에 힘을 다하고 접대에 정성과 예우를 갖추어 환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간간이 한가한 날에는 가숙(家塾)을 깨끗하게 치우고 아우인 덕환(德煥)과 책상을 마주하고 함께 학업을 연마하며 과정(課程)을 그치지 않았다. 평소에 인륜을 소중히 여기고 학식과 품행을 갖춘 선비를 숭상하며 권세나 이익에 빌붙지 않고 영예나 현달을 추구하지 않아 함께 교유한 자들은 모두 누추한 골목의 빈한한 벗들이었다. 남과 어울리는 것은 온화하면서도 정직하여 업신여기거나 예모 없이 대하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공정하면서도 너그러워 애매하거나 대충대충 넘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종족(宗族)에게 사랑을 받고 붕우에게 신뢰를 받고 향리(鄕里)에서 흠모를 받았다. 대체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이치가 의심스러우면 공에게 의지하고 자문(諮問)하여 결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중년에 아내를 잃었는데 여러 자녀가 모두 어린 나이였다. 그 정황이 애처로웠지만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이유로 너그럽게 대하지 않았다. 가숙(家塾)을 열고 스승을 맞이하여 자녀 교육에 매우 힘을 기울이며 말하기를, "평생의 소원은 오직 글을 읽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매번 경계할 때마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 독서를 하면서 나물 먹고 물 마시는 것조차 부족하였지만 학업은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들은 예전보다 배가 부르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이를 수 있건만 나태함이 더해서야 되겠느냐. 글을 읽고 행동을 삼가며 집안의 좋은 자손이 되는 것이 부모의 뜻을 봉양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삼생(三牲)과 팔진미(八珍味) 같은 진수성찬으로 부모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공은 호방하고 기개가 넘쳤지만 남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늙어서는 더욱 외롭게 지내면서 묵양(黙養)을 자호(自號)로 삼아 만년에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을 기탁하였다. 원계(遠溪)로 연재(淵齋) 송(宋) 선생31)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또 면암(勉庵) 최(崔) 선생에게 편지와 폐백을 올려 끝까지 의지하고 우러러 받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부절이 들어맞듯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았다. 선대(先代)의 전장(田莊)을 중수(重修)하여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어 아우와 노년에 이르도록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겼다. 좋은 계절이나 명절을 만날 때마다 근처의 옛 친구를 불러 산 경치가 보이고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은거하는 삶의 회포를 풀었다. 갑진년(1904, 광무8) 11월 23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나 우봉(牛峰)의 왼쪽 기슭 선영 아래 갑자(甲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혁주(赫周)의 딸이고 계배(系配)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기수(箕秀)의 딸이다. 모두 3남 5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회종(會宗), 회윤(會潤)이고 딸은 이기무(李基茂), 박재현(朴梓鉉), 임노일(林魯一), 김모(金某), 오모(吳某)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나와 공의 관계는 부친과 조부 때부터 대대로 교분(交分)이 있고 어린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다. 옛날 공의 선대인(先大人) 형제를 기억해보면 나이가 많고 덕이 깊어 풍도(風度)와 운치(韻致)가 뛰어났으며 내 선인(先人)과 사이좋게 지내며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불초(不肖)한 내가 만년에 이르러 또 공의 형제와 함께 늙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선대 때와 같으리라고 어찌 알았겠는가. 다만 공이 좀 더 세상에 남지 않고 보잘것없는 나만 뒤에 남았으니, 나의 끝없는 한이 어찌 우리 고장의 불행에서 그치겠는가. 회윤(會潤)이 조카 일승(一承)을 시켜 가장(家狀)을 지니고 나에게 와 영원히 후세에 전할 문장을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보잘것없지만, 공을 잘 알기로는 진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어찌 감히 자꾸 사양하면서 서로 왕래했던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이에 눈물을 훔치고 붓을 적시어 적어 보낸다. 公姓梁。諱益煥。字重慶。貫濟州。唐堯時。良乙那降于漢挐山。建國乇羅。至羅麗。世襲爵勳。爲東方著姓。至中葉有諱彭孫校理號學圃。世稱己卯名流。與趙靜庵先生。同享竹樹院。是生諱應箕校尉。是生諱山立贈戶曹參判。是生諱仁容僉正。築松石亭。以文籍自娛。是生諱渭南進士。除參奉。以孝旌閭。是生諱禹甸。隱德不仕。是生諱之瀣號益愚。受學尤庵宋先生之門。自月谷舊庄。出居於松石亭。因家焉。是生諱大夏。是生諱益祖縣監。是生諱成憲通德郞。於公爲高祖。曾祖諱一鉉。祖諱贊浩。考諱栻。世著文行。妣長興馬氏彦模女。以憲宗己亥生。公體厚面圓。風儀峻整。聲音弘亮。幼有志操。言笑不凡。入孝出恭。未有闕儀家素淸貧。簞瓢屢空。躬幹耕稼。備盡忠養。以詩禮名家。兼有園林水石之勝。平日過從之士。四時遊賞之人庭屨常滿。公周旋竭蹶。接待款厚。無一人失歡。間以餘日。淨掃家塾。與弟德煥對兀連業。不廢課程。平日愛好人倫。敦尙儒雅。不附勢利。不趨芬華。所與遊皆坊曲寒友生也。其接人和而正。不見有侵侮好狎之意。其處事公而恕。不見有依違苟且之狀。是以宗族愛之。朋友信之。鄕里慕之。凡事有所難。理有所疑。無不待以咨決焉。中年喪耦。諸子女皆幼。其情景可哀。而少有過差。不以愛憐而有所假借。開塾邀師。敎之甚力曰。平生所願。惟是文種不絶。每戒之曰。吾兄弟幼而讀書。咬菜飮水。猶爲不充。而課業不敢有懈。今汝輩比前日。可謂飽暖而怠惰過之耶。讀書勅行做人家好子孫。此是養志之大者。不然。三牲八珍。何足爲孝也。倜儻寡諧。老益踽凉。自號黙養。寓晩年自遣之意也。拜淵齋宋先生於遠溪。又上書贄於勉庵崔先生。以付究竟依仰之計。與奇松沙宇萬鄭艾山載圭。契遇甚密。往復不絶。重修先庄。栽花種竹。與其弟到老白首。日夕湛樂。每遇良辰佳節。招致備近知舊。婆娑徜徉於山色水聲之中。以敍幽逸之懷。甲辰十一月二十三日。以宿疾終。葬牛峰左麓先塋下甲坐原。配豐山洪氏赫周女。系配天安全氏箕秀女。擧三男五女。男會宗會潤。女李基茂朴梓鉉林魯一金某吳某。孫以下不盡錄。嗚乎。余於公。爲父祖世交。丱角舊遊。記昔公先大人兄弟。耆年淵德。風韻偉然。而與我先人。遊好源源。豈知不肖晩年。又得與公兄弟同衰相從如當日耶。但公不少延。而沙石在後。區區無窮之恨。豈止爲吾鄕之不幸也。會潤伻其姪一承。抱家狀。託以不朽之文。自惟無狀。而知公之深。則固不後於人矣。豈敢多讓而謂非從遊者之責乎。抆淚泚筆。書以還之。 휘 팽손(彭孫)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을 가리킨다. 자는 대춘(大春)이고,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1630년(인조8)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18) 순천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저서로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있다. 우암(尤庵) 송(宋) 선생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이름은 시열(時烈),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에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연재(淵齋) 송(宋) 선생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말한다.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ㆍ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저서로는 《연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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