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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4 卷之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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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욕회안》 서문 風浴會案序 "바람 쐬고, 목욕하고, 노래하며 돌아온다."144)라는 것은 인욕(人欲)이 깨끗이 사라지고 천리(天理)가 유행함으로써 마음이 평탄하여 드넓고 생기가 충만하여 활발하게 흘러넘치는 경지이니, 바로 증점(曾點)이 본 고원(高遠)한 곳이요, 이른바 요순(堯舜)의 기상이 느껴진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그 자취를 사모하되 그 마음을 잃어버렸고, 그 이름을 좇되 그 실상을 잊어버렸으며, 심지어 산에 오르고 강물을 마주하여 술 마시고 시 읊는 것을 이따금 여기에 견주며 과시하고 찬미하기까지 한다. 이는 자못 인욕이 다 없어지지 않으면 천리가 유행하지 않아 구구한 한때의 즐거움이 애초에 허랑방탕으로 귀결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음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남헌(南軒) 장자(張子 장식(張栻))가 말한 "읊으며 돌아온다.[詠歸]"는 말도 도의 본체를 보았다고 이를 수 있다. 맹자도 오히려 행동이 뜻을 받쳐 주지 못한 사람을 광자(狂者)라 하였는데, 하물며 이보다 못한 사람임에랴. 이러한 폐단을 설파한 것이 아니겠는가.정해년(1887)에 나와 고을 친구들이 과감하게 서석산(瑞石山)을 유람하고, 이로 말미암아 영귀회(詠歸會)를 설립했는데, 그 뒤 을사년(1905)에 우리 마을의 젊은이들이 또 서석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풍속회(風浴會)를 설립했다. 이것이 전후 20년간의 일이니, 어쩌면 이리도 꼭 닮은 것인가.정해년의 유람은 늘 이름만 훔치고 그 실상이 없음을 한탄하였는데, 모르겠지만 제공(諸公)들은 어느 쪽을 취할 것인가? 또 실상이 없는 자취를 좇아 답습할 것인가? 스스로 생각건대, 변변찮은 내가 벗들에게 미칠 정도의 착실한 점이 조금도 없이 도리어 허랑방탕한 풍속을 창도한 것인가?아, 천하의 형통한 사람들은 어렵고 막힌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 바라건대 제공들은 규범과 준칙 속에서 괴로이 검속하고, 연못과 얼음과 가득찬 물과 옥 위에서 전전긍긍하며 보존하여145) 한 치 한 푼을 축적하고 때와 날로 변화함으로써 위태롭던 것이 안정되고, 서툴던 것이 매우 익숙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세속을 초탈한 깨끗한 형상과 호탕하게 성대한 기상이 어느 때든 봄바람이 불어오는 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는 사이에 있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 풍욕회를 설립한 것이 앞으로 실상이 없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전날의 영귀회도 함께 빛날 것이니, 힘쓰고 힘써야 할 것이다. 風浴詠歸。是人欲淨盡天理流行底坦蕩蕩活潑潑也。乃曾點所見高處。所謂堯舜氣象也。後之人。慕其迹而遺其心。循其名而忘其實。至以登山臨水。文酒觴詠。往往比擬而夸美之。殊不知人欲不盡。則天理不行。區區一時之樂。未始不出乎放浪曠蕩之歸而已也。南軒張子所謂詠歸之語。亦可謂見道體矣。孟子猶以行不掩爲狂。而況下於此乎者。其非說破此敝耶。歲丁亥。余與鄕里知舊。果有瑞石之遊。因有詠歸之會。後乙巳。吾黨年少。又往瑞石。歸而設風浴之會。此是前後二十年間事。而何酷似乃爾也。丁亥之遊。常恨夫竊其名而無其實。未知諸公奚取焉。而又且循襲其無實之迹耶。自惟無狀。未有多少着實的及於朋友。而反以放浪曠蕩之風倡之耶。嗚呼。天下之亨。未有不自艱難窒塞中出來。願諸公苦苦檢束於規矩繩尺之中。兢兢持存於淵氷盈玉之上。分累寸積。時移日化。至於杌隉者妥帖。生澁者純熟。則其脫然灑落之象。浩然盛大之氣。將無時而不在於春風沂雩之間矣。然則今日風浴之設。將不至無實。而前日之詠歸。亦與有光焉。勉之勉之。 바람……돌아온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증점(曾點)에게 장래 포부를 물어보자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 6명 및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 연못과……보존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살얼음을 밟듯, 물 가득 찬 그릇을 받들 듯, 옥을 잡듯이 조심하여 잠시라도 이 같은 마음을 지녀 자신을 보존하라는 의미이다. 《시경》 〈소민(小旻)〉에 "전전하며 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고 하였고,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효자는 옥을 잡은 듯이 하고,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받들듯이 하여, 조심조심 공경하여 마치 감당하지 못하는 듯이 하고, 장차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듯이 해야 한다.[孝子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 如弗勝, 如將失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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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사우간독》 서문 希庵師友簡牘序 나의 벗 양군 여정(梁君汝正)이 사우(師友)와 평소 주고받았던 서찰을 편집해서 '사우간독(師友簡牘)이라 이름을 짓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외로이 떨어진 곳에서 홀로 공부하는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주고받은 서찰에서 바로잡아 경계해준 말뿐이고, 그 말을 또 아침저녁으로 보며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책으로 엮어서 열람하고 고찰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우리 그대가 서문을 써 주게나."하였다.아, 내가 젊었을 때에는 자못 스승을 섬기며 벗들을 따라다녔는데, 어느덧 태산은 기울어 무너지고,146) 벗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나도 또한 세상의 변고에 곤란을 겪으며 첩첩산중의 궁벽한 곳으로 물러나 칩거하게 되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생각하면 까마득하게 선천(先天)의 그림자처럼 무(無)의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지만, 때때로 옛 종이 뭉치 속에서 간혹 당시에 주고받았던 편지를 발견하고 시험 삼아 읽어보면 그 십 년 세월의 면모와 천 리 머나먼 길의 종적이 모두 뚜렷하게 떠오르며 마치 같은 방에서 자리를 함께하는 듯하였다. 또한 서로 기약하며 힘써 노력했던 뜻이 일찍이 이와 같았는데, 스스로 오늘날 성취한 바를 돌아보면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며 심장과 간담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아 매번 차례대로 편집하여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했지만, 아득히 세월만 흘려보내며 이루지 못한 지도 10여 년이 되어 간다.지금 보건대 여정이 뜻을 세움은 나보다 늦었으나 성취는 나보다 앞섰으니, 태만한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의 차이가 이처럼 현격한 것인가? 전수받아 익히는 일에 태만하지 않고 경계하여 바로잡아준 것을 잊지 않았으니, 또한 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만약 이 간독을 스스로 문집을 만들어서 남들에게 알려지는 데에 급급해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의 마음이 아닐 것이다. 여정은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하여 한창 나아가기만 하고 그치지 않으니, 어찌 이 간독을 얻은 것에 스스로 만족하여 대뜸 너무 이른 계책으로 삼겠는가. 행위는 같되 마음은 다름을 또한 여기에서 변별해야 한다. 余友梁君汝正。編其師友平日所與往復之書。名以師友簡牘走書於余曰獨學孤居所賴惟是往復規警之語。而其語又不可不朝夕觀省。故編爲卷帙。以便考閱。願吾子爲之序也。嗚呼。余於小少。頗事從逐。旣而泰山傾頹。朋知零散。余亦困於世故。退蟄於窮山萬疊之中。回念過境。茫然若先天影子。銷散於有無之中。而時於舊紙堆。或値當日往復。試以讀之。其十年面貌。千里蹤跡。皆渙然若同堂合席。且相期勉勉之意。曾已如此。而自顧今日所就。不覺骨寒毛聳。而心膽墮地。每欲次弟編輯。以爲警省之資。而悠悠未就者。十有餘年。今見汝正志在我後。而成在我先。人之勤慢不相及。若是其懸耶。其傳習之不怠。規戒之不忘。亦可以見其一端矣。若以此謂自作文集。急知於人。則非其心也。汝正年富力强。方進而不已。豈得此自足。遽爲太早計者耶。同行異情。亦當於此辨之。 태산은……무너지고 스승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대들보가 쓰러지겠구나. 철인이 시들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병이 나 7일 만에 세상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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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연 정석에게 지어 주다 贈崔秉硏正錫 벽절산 속에 한 초당이 있으니 碧節山中一草堂등불 켜고 날 밝도록 학업에 힘쓰누나 焚膏勤業繼朝陽앵무새 같음을 경계한 상채의 말을 일찍이 들었고347) 戒存鸚鵡曾聞蔡사람과 소의 도리를 뒤섞은 자상을 다시 안타까워하네348) 道混人牛更病桑만약 전심하여 육예를 통달할 수 있다면 如使專心六藝透한 손으로 온갖 냇물 막는 게 어찌 어려우랴 何難隻手百川防나 같은 늙은이는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如余老矣亡無日훗날 그대 덕분으로 빛날 수 있기를 바라노라 願得他年賴以光 碧節山中一草堂, 焚膏勤業繼朝陽.戒存鸚鵡曾聞蔡, 道混人牛更病桑.如使專心六藝透, 何難隻手百川防?如余老矣亡無日, 願得他年賴以光. 앵무새……들었고 상채(上蔡)는 송(宋)나라 학자인 사양좌(謝良佐)의 호로, 정이(程頤)의 제자이다. 사양좌가 일찍이 당시 사대부들을 평하여 "명리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조금 쉴 수 있는 곳이니, 지금의 사대부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말만 잘하는 것이 참으로 앵무새와 같다.[透得名利關, 方是小歇處, 今之士大夫, 何足道? 能言, 眞如鸚鵡也.]"라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과……자상(子桑)을 자상은 도가(道家)의 무리인 자상백자(子桑伯子)를 가리킨다. 《논어집주(論語集註)》 〈옹야(雍也)〉에 중궁(仲弓)이 자상백자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그의 간략함도 괜찮다.[可也簡]"라고 대답하자, 중궁이 자상백자는 너무 간략한 것[太簡]이 아니겠냐고 말하였는데, 이 대목에 대한 주희(朱熹)의 집주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자상백자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거처하자, 공자가 그는 사람의 도리를 소와 말과 같게 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자상백자는 아마도 너무 간략한 자일 것이다.[家語記伯子不衣冠而處, 夫子譏其欲同人道於牛馬. 然則伯子蓋太簡者, 而仲弓疑夫子之過許與!]"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를 차용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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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달밤 雪月夜 눈 내린 빈산의 달밤은 참으로 더디 가는데 雪月空山夜正遲시혼은 흥을 타고 그 어디로 향해 가는고 詩魂乘興向何之가을 지난 동산의 국화는 예전 역사340)와 같고 經秋園菊同前史섣달 기다리는 다리 가 매화341)는 후일을 기약한다오 待臘橋梅結後期대숲 집 주인의 노래가 청절한 곳이요 竹館人歌淸絶處솔에 깃든 학의 꿈342)이 편히 이루어지는 때일세 松棲鶴夢穩成時남쪽 지방에 한 해가 저무는 걸 깜짝 놀라니 飜驚南國年光暮기러기의 울음소리에 일삼는 바가 있구나 鴻鴈聲中有所事 雪月空山夜正遲, 詩魂乘興向何之?經秋園菊同前史, 待臘橋梅結後期.竹館人歌淸絶處, 松棲鶴夢穩成時.飜驚南國年光暮, 鴻鴈聲中有所事. 예전 역사 국화를 유독 좋아했던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고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연명이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서문 말미에 "중추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지가 80여 일이었다. 일을 따라 마음을 순히 하였으므로 명명하기를 '귀거래혜'라 하니, 을사년(405) 11월이었다.[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라고 하고, 그 본문에는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리 가 매화 당(唐)나라 맹호연(孟浩然)의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다리는 장안(長安) 동쪽에 흐르는 파수(灞水) 위에 놓인 파교(灞橋)를 가리킨다. 맹호연이 일찍이 눈이 내리는 속에 나귀를 타고 파교에 가서 매화를 구경한 고사가 있었는데,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 이를 읊기를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으매 어깨가 산처럼 솟음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라고 하였다. 학의 꿈 세속을 초탈하고자 하는 뜻을 비유한다. 당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여이생론시서(與李生論詩書)〉에 "땅이 청량하니 학의 꿈은 맑고, 숲이 고요하니 중의 모습 엄숙하여라.[地涼淸鶴夢, 林靜肅僧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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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지 상덕재 선생 최공 묘지명 左承旨尙德齋先生崔公墓誌銘 선생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치호(致湖), 자는 평원(平遠)이다. 초휘(初諱)는 업(嶪)이었으며, 호는 상덕재(尙德齋),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때 동래후(東萊侯) 휘 지몽(知夢)이 그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조선에 입조(入朝)하였으니 관직은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운(雲)을 낳았는데, 호는 덕암(德庵)이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휘 득초(得超)에 이르러 장악원 정랑(掌樂院正郞)을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자혁(自赫)으로,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조부는 휘 추(湫)로, 호가 난계(蘭溪)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선고의 휘는 근지(近池)로, 호는 월계(月溪)이며, 사성(司成)을 지냈다. 모친은 여흥(驪興) 민씨(閔氏)로, 참의 민식(閔湜)의 따님이다. 명종(明宗) 갑자년(1564, 명종19) 10월 16일에 서울 남부(南部)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겨우 말을 할 만한 나이에 문득 시구를 지을 수 있었는데, 〈영오시(詠烏詩)〉에 "새 가운데 너는 효도할 수 있으니, 고인이 현자에 견주었네.[鳥中爾能孝, 古人比於賢.]"라고 하였다. 7세에 모친상을 당해 유인(孺人)에 대한 애도가 망극하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상복을 벗자 글방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었다. 스승이 그가 자주 내정(內庭)으로 들어가 혹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자가 평소 애태우며 그리워하는 마음은 반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반은 스승에게 향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스승이 기특하게 여겼다.독서할 적에는 손을 단정히 모으고 꼿꼿하게 않아 전심치지(專心致志)하되 송독하는 횟수는 한도가 있었으나 연구에는 일정한 한계를 두지 않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에서부터 제자백가 자(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충분히 반복 학습하여서 깊게 통달하고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다. 석담(石潭)1) 이 선생(李先生)이 성리학에 심오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가서 배웠다. 또 임공 숙영(任公叔英), 고공 용후(高公用厚), 홍공 입(洪公雴), 김공 반(金公槃), 고공 전천(高公傳川), 민공 성징(閔公聖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는데, 서로 충고하고 절차탁마하며 더욱 스스로 확충하여 훌륭하다는 명성과 명망이 당대에 자자하였다.계미년(1583, 선조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다. 을유년(1585)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지만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86)에 낭천(狼川)에 임명되는 명이 있었지만 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정해년(1587)에 과거에 급제하여 바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의 자질이 있고 요순의 지위가 있으며 요순의 백성이 있는데, 요순과 같은 은택이 나라에 두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宋)나라 신하 채침(蔡沈)이 말하기를 '후세의 군주가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제삼왕의 도에 뜻을 둔다면 그 마음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구한다.[求其心]'라는 석 자가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구하는 법은 선성(先聖)의 가르침이 서책에 매우 자세히 드러나 있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유현(儒賢)을 친히 가까이하여 아침저녁으로 강구(講究)하여 그 이치를 밝히고 그 실제를 행한다면 마음을 구하는 방법이 터득되고 다스리는 근본이 확립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무자년(1588)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訥)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어느 날 주상이 경연에 나아가 《서경》의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를 강론하다가 이어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라는 뜻을 물으니, 공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고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한마디가 또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는데 성상(聖上)의 물음이 여기에 미치니 감히 나라를 흥하게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경인년(1590)에 집의에 제수되었다. 과거 시험에서 사람을 선발할 적에 오로지 문예를 숭상하는 것을 보고 아뢰기를 "장구(章句)나 익히는 학문은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이 아니며, 문장을 짓는 기교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장구나 익히고 문장을 짓는 능력을 가지고 선비를 선발하면서 세상을 경영하고 잘 다스리는 효과를 바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임진왜란 때 상국(相國) 유성룡(柳成龍)이 공을 천거하여 서기(書記)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기무(機務)에 참여하여 계책을 내었기에 드러난 공적이 많았다. 병신년(1596)에 부친상을 당했고, 계묘년(1603)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되었으며, 을사년(1605)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 광해군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을 때 상소를 올려 직간하였는데, 그 상소 중에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한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에 광해군이 몹시 화를 내며 이르기를 "그대는 나를 진(秦)나라 이세(二世)에 견주는 것인가?"라고 하니, 천천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이세에 비견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신다면 이세의 행실을 따르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더욱 노여워하여 장(杖)을 치고 의금부에 3일 동안 가두었다가 사죄(死罪)에서 1등급을 줄여 진도(珍島)로 유배보냈다. 이에 연관된 시가 아래와 같다.의금부 서리 행차 재촉하여 남쪽으로 문 나서니 禁吏促行南出門이 몸은 살아서 향촌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此身生不返鄕村소슬하게 비바람 치는 지난밤 꿈에 蕭蕭風雨前宵夢상강으로 날아가 굴원을 보았네.2) 飛入湘江見屈原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즉시 유배에서 풀려나는 은혜를 입었고, 부제학으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장흥(長興)의 와리(瓦里)에 거처하며 산수를 즐기고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다가 정묘년(1627, 인조5) 10월 16일에 졸하였다. 와리 뒤쪽 산기슭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참의 민순(閔絢)의 따님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결(潔)은 참봉(參奉), 숙(淑)과 해(海)는 진사이다. 딸은 변극중(邊克中)과 김인복(金寅福)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12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 14세손 동민(東珉)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늘이 밝은 운을 열어주어 天啓照運명철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만났네. 明良際出금당과 옥서3)에서 玉署金堂군신 간에 정사를 논하고 문답하였네. 都兪密勿세상에 다 베풀지 못했는데 不竟厥施창오의 구름 아득하네.4) 梧雲茫茫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身不見容갑자기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네. 奄竄南荒우레치고 비 내리는 가운데 雷雨繼作동쪽 언덕에 누웠네. 因臥東岡먼 후대에 회상해 보면 追惟百世그 풍도와 운치 더욱 드러나리라. 風韻彌彰 先生姓崔。諱致湖。字平遠。初諱嶪。號尙德齋。貫朗州。麗朝東萊侯諱知夢。其鼻祖也。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是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至諱得超。掌樂院正郞。公之高祖也。曾祖諱自赫司醞寺直長。祖諱湫。號蘭溪。戶曹參判。考諱近池。號月溪。司成妣驪興閔氏參議湜女。明宗甲子十月十六日。生公于京之南部私第。幼有異質。穎悟過人。纔能言。便能綴句。詠烏詩曰。鳥中甭能孝。古人比於賢。七歲丁外艱。孺哀岡極。見者釀涕。服闋。就讀塾師。師見其頻入內庭。或久而不出。問其故。對曰。小子平日戀戀意。半是慈親半是師。師奇之。讀書端拱危坐。專心致志。誦數有程。硏究無方。自四書五經以至諸子百家。循環熟復。淹貫該洽。聞石潭李先生邃於理學。遂往學焉。又與任公叔英高公用厚洪公雴金公槃高公傳川閔公聖徵爲道義交。規警切磋。益自展拓。令聞令望。藉甚一時。癸未中司馬。除禮賓寺參奉。乙酉差江原道都事。以親老不就。旋除造紙署司紙。丙戌有狼川之命。又以親老不就。丁亥擢第。卽拜弘文館校理。上疏辭。略曰。殿下有堯舜之資。有堯舜之位。有堯舜之民。堯舜之澤。未洽於國家者何也。宋臣蔡沈之言曰。後世人主。有志於二帝三王之治。不可不求其道。有志於二帝三王之道。不可不求其心。然則求其心三字。豈非今日急先之務乎。求心之法。先聖謨訓。著於簡冊者。至爲詳悉。必須親近儒賢。夙夜講究。以明其理。以踐其實。則求心之法得。而爲治之本立矣。戊子除司諫院獻訥。尋遷司憲府掌令。一日上御經筵講夏五子之歌因問民惟邦本之義公對之甚悉。且曰。孔子云一言而興邦。一言而喪邦。今此一言。亦興喪之所由繫。而聖問及此。敢不爲興邦賀。庚寅拜執義。見科試取人。專尙文藝。啓曰。章句之習。非經綸之學。文詞之術。非治平之策。今取士於章句文詞之間。而望其有經綸治平之效。不其難矣乎。壬辰之亂。柳相國成龍。擧公爲掌書記。參謀機務。多有著績。丙申遭內艱。癸卯除世子侍講院輔德。乙巳移左副承旨。光海辛亥陞都承旨。抗疏直諫。疎中有嚴法刻刑等語。光海大怒曰汝比予於秦二世乎徐對曰殿下若愧比二世則勿行二世之行。光海愈怒。杖囚禁府三日。減死一等。流于珍島。因有詩曰。禁吏促行南出門。此身生不返鄕村。蕭蕭風雨前宵夢。飛入湘江見屈原。癸亥改玉。卽蒙解放。以副提學累徵。不赴。因居于長興之瓦里。以山水文酒自娛。丁卯十月十六日卒。葬瓦里後麓甲坐原。配驪興閔氏參議絢女。生三男二女。男潔參奉。淑。海進士。女適邊克中金寅福。孫以下不錄。十二世孫昌柱南杓十四世孫東珉。以家狀來謁誌銘。銘曰。天啓照運。明良際出。玉署金堂。都兪密勿。不竟厥施。梧雲茫茫。身不見容。庵竄南荒。雷雨繼作。因臥東岡。追惟百世。風韻彌彰。 석담(石潭)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별호이다. 상강으로……보았네 상강은 중국의 소상강(瀟湘江)으로,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유배되어 있다가 죽은 곳이다. 금당(金堂)과 옥서(玉署)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이곳에 학사들을 초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후대에는 한림원이나 한림학사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조선 시대에는 홍문관이나 규장각 등 문신들이 근무하는 곳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묘지명의 주인공인 최치호(崔致湖)가 홍문관 교리로 제수된 적이 있기 때문에 사용한 듯하다. 창오의 구름 아득하네 최치호를 인정해 주었던 선조(宣祖)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오운(梧雲)은 창오(蒼梧)의 구름이라는 말로, 창오는 순(舜) 임금이 묻힌 산 이름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머리 돌려 순 임금 향해 절규하노니, 창오의 구름이 정녕 시름겨워서.[廻首叫虞舜, 蒼梧雲正愁.]"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2 同諸公登慈恩寺塔》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모정 형공 묘지명 茅汀邢公墓誌銘 옥새 찍힌 교서(敎書)를 내려 격려하고 금을 하사하거나 품계를 더하였으니, 한(漢)나라 때 양리(良吏)가 여기에서 성대해졌다.5) 이는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이고 태평의 상징이니, 삼대(三代) 이하의 시대에서는 견줄 만한 왕조가 드물었는데, 오직 우리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즈음이 또한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권유하고 포상하는 전지(傳旨)가 날로 주군(州郡)에 내려지고 직분을 나누어 맡은 지방 관원이 날로 선(善)을 장려하자 어진 관리가 성대히 출현하고 칭송하는 소리 또한 자자하여 무궁한 아름다움에 이르렀다.모정(茅汀) 형공(邢公)은 또한 당시의 어진 관리였다.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호) 경인년(1530, 중종25)에 외직으로 나가 남평(南平)을 다스렸고, 계사년(1533, 중종28)에 하양(河陽)으로 옮겼는데, 치적이 으뜸이어서 특별히 은혜로운 유서(諭書)를 내렸다. 그 유서에 이르기를 "지금 관찰사 송흠(宋欽)6)이 아뢴 말에 따르면, 그대가 남평을 다스릴 때부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청렴하고 부지런함이 이미 드러나 그대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유서를 받았는데, 하교하기를 "그대의 청렴하고 탁월한 재주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표리 1습을 하사하니, 그대는 받들라."라고 하였다. 위로는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충성을 바치는 신하가 있어 구름이 용을 좇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이 의기와 기질이 맞는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났으니,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선비가 삼대(三代) 때 태어나지 못해 이미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이 태평성대에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우리 동방이 흥성한 시대에 태어나 위로 성스럽고 명철한 군주가 있고 아래로 온화하고 고상한 신하가 있었으니, 송흠(宋欽) 선생 같은 분이 추천하고 칭송하기를 이와 같이 정중하게 한 것은 옳다. 그 나머지 작위를 받지 못하고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 것이 어찌 공에서 보탬이 되거나 손해나는 일이겠는가.공의 휘는 자관(自寬), 자는 장백(長伯), 모정(茅汀)은 그의 호이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방(昉)이 그 중시조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정벌한 공로로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진양군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와 군철(君哲)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지냈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 경승(慶承)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은 용인(用仁)은 진사(進士)이다. 모친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11월 3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고아한 지조가 있으며 청렴하였다.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대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정축년(1517, 중종1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기묘년(1519)에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다. 남평(南平)과 하양(河陽)의 고을 원을 역임하였는데, 남평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향사(享祀)를 지냈다. 병오년(1546, 명종1) 3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남평 저포면(猪浦面) 하류촌(下流村) 안산(案山) 병좌(丙坐)에 장사 지냈다.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주부(主薄) 김숭령(金崇齡)의 따님이다. 신해년(1491, 성종22) 9월 2일에 태어났고, 무신년(1548, 명종3) 1월 18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현(世賢)이고, 딸은 각각 양응기(梁應箕), 조국성(曺國聖)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현은 자식이 없어 양씨(梁氏)가 외손으로서 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공의 문적(文蹟)은 병화에 유실되었는데, 만년의 것은 양씨의 집안에서 약간의 유고(遺稿)를 얻었다. 종(從) 9세손 도열(道烈)이 눈물을 닦으며 붓을 들어 그 일을 서술하고 이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호남의 군현을 다스렸고 分憂湖郡영남 고을을 맡아 다스렸네. 歷典嶺邑봄볕이 빛을 발하였으니 陽春動輝성상의 표창이 융성하였네. 天褒隆洽어진 관리 계속 전해짐에 良吏續傳누가 감히 공을 빠뜨리랴. 誰敢遺公훌륭한 풍도와 위대한 공적 英韻偉蹟무궁한 후대에 밝게 드리우리라 昭垂無窮 璽書勉勵。增秩賜金。而漢世良吏。於斯爲盛。此其明良之會。昇平之象。三代以下。鮮見其比。而惟我成宗中宗之際。亦庶幾焉。獎諭褒旨。日下州郡。而字牧分職。日勤於善。所以良吏蔚興。頌聲倂作。而用底于無疆之休也。茅汀邢公。亦當時之良吏也。靖陵庚寅。出莅南平。癸巳移河陽。以治平第一。特蒙恩諭。有曰。今仍觀察使宋欽所啓。知爾自爲南平時。薄賦愼刑。廉勤己著。民有去後之思。予甚嘉之。賜表裏一襲。以示褒獎之意。爾其體予至懷。終始不渝。明年春。又蒙諭。有曰。嘉爾淸白卓異。特賜表裏一襲。爾其頌受。嗚呼。上有願治之主。下有效忠之臣。雲龍風虎。何等盛儀也。士不生三代之上。旣不得與臯夔稷契都兪吁咈於太和照皞之中。則生於大東日中之世。上有聖明之君。下有儒雅之臣。如宋欽先生。而推引賞識。若是鄭重則可矣。其餘爵位之不揚。祚胤之不昌。曷足以加損於公也耶。公諱自寬。字長伯。茅汀其號也。麗朝平章事昉。其中祖也。再傳至公美。征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自晉陽君三傳至君哲。入我朝。官忠淸兵使。卽公之曾祖也。祖慶承。仕郞贈戶曹參判。考用仁進士。妣淸州韓氏。以弘治戊申十月三日生。公天資端詳。雅操廉潔。孝友文學。見重一時。丁丑中生員。己卯除中部參奉。歷宰南平河陽。南平民建祠。春秋享祀。丙午三月十九日卒。享年五十九。葬南平之猪浦面下流村案山丙坐。淑夫人光山金氏主薄崇齡女。辛亥九月二日生。戊申正月十八日卒。墓合祔。有一男二女。曰世賢。曰梁應箕。曺國聖。世賢無育。梁氏以外裔奉公祀。文蹟失於兵燹。晩於梁氏家得若干遺實。從九世孫道烈。抆淚沘筆以序其事。仍請余以誌墓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分憂湖郡。歷典嶺邑。陽春動輝。天寢隆洽。良吏續傳。誰敢遺公。英韻偉蹟。昭垂無窮。 조서를……성대해졌다 선제(宣帝)는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방관의 역할을 특별히 중시하여, 치적이 있는 지방관은 새서(璽書)로 권면하여 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은 품계를 높여 주고 관내후(關內侯)나 공경 대신(公卿大臣)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漢書 循吏傳》 송흠(宋欽) 1459~1547.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담양(潭陽)ㆍ장흥(長興)의 부사(府使),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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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만희당 처사 홍공 묘지명 晩喜堂處士洪公墓誌銘 아, 여기는 병좌병향(丙坐丙向)에 좌병향임(坐丙向壬)7)으로 혈(穴)과 봉분을 함께한 곳인데, 고(故) 만희당(晩喜堂) 홍공(洪公)과 그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의 무덤이다. 조금 내려와 정좌(丁坐) 언덕에 있는 것이 둘째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무덤이다. 공은 숙종(肅宗) 임진년(1712, 숙종38)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60세 되던 해에 졸하였다. 졸한 지 125년 뒤에 현손(玄孫) 형주(馨周), 기주(基周), 경주(慶周)가 무덤 앞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또 실제의 일을 기록하기를 도모하여 장차 무덤에 묘지명을 새기려고 행장(行狀)과 묘갈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금석문은 만년의 계책8)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소홀해질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선조를 향한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훌륭한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공의 휘는 이발(履潑), 자는 자함(子涵)이니, 세계(世系)는 풍산(豊山)에서 나왔다. 직학사(直學士) 휘 지경(之慶)이 그 현조(玄祖 5대조)인데,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대대로 그 미덕을 더하였다. 고조는 휘 준(埈)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는 휘 덕우(德遇)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경고(景古)인데,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천규(天奎)이고 호가 오은(鰲隱)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이인량(李仁亮)의 따님이다.공의 성품은 효성스러웠으니, 집이 가난하여 직접 집안 살림을 꾸렸고,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를 거행함에 지나치게 애통해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일찍 부친의 훈육을 받고 경전을 읽고 학업에 매진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면서도 막힘없이 시원스러웠으며, 의리를 행하여 환하게 빛났다. 오서육경(五書六經)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여러 설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회통(會通)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 역학(易學)에 심오하였으니, 순환하면서 복습하고 반복해서 깊이 연구하여 노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수(山水) 사이의 경치 좋은 곳에 초가집을 짓고 형제간에 다정하게 마주 보며 강론하고 토론하니, 원근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학당동(學堂洞)이라고 불렀다.아들 영구(永九)는 나씨(羅氏)의 소생이다. 아들 영범(永範), 영조(永兆)와 김양려(金陽麗)에게 시집간 딸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홍씨(洪氏) 일문(一門)은 자손이 번성하고 훌륭한 가법(家法)이 향리에 소문이 나서 학문에 뜻을 둔 많은 선비가 바야흐로 성대하여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만희옹(晩喜翁)과 같은 여러 선배가 선도한 힘이 아니겠는가. 유풍과 여운이 더욱 백세토록 뻗어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지금 은택이 사라지지 않았고 친분이 다하지 않았으니 좋은 방향으로 계승한 민첩함이 마땅히 이러함에랴. 우러러보면서 감동하는데, 감히 그 부지런한 뜻에 일부나마 힘써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은둔하여 곤궁하면 형통하니 遯肥困亨대대로 옛 음덕을 누렸네. 世食舊德무덤에 글을 실으니 載辭幽堂억만년 수를 누리리라. 用壽斯億 嗚呼。此坐丙而向壬。竝穴而同墳者。故晩喜堂洪公及共夫人羅州羅氏之藏也。稍下而負丁者。系夫人河東鄭氏窆焉。公以肅宗壬辰生。生六十歲而卒。卒一百二十五年。而玄孫馨周。基周慶周竪墳前短碣。又謀記實。將以銘諸幽竁。持行狀及碣文來。命於義林。此是金石萬年計也。托非其人。恐涉疏歇。而其向先追遠之誠。誠可謂能子能孫矣。公諱履潑。字子涵。系出豊山。直學士諱之慶。其玄祖也。文學行誼。世濟其美。高祖諱埈。贈掌樂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議。祖諱景古。號枕漱亭。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有隱德。妣仁川李氏仁亮女。公性孝。家貧躬幹。忠養備至。執喪過毁。廬墓三年。早襲庭訓。劬經績學。文詞贍暢。行義煒燁。自五書六經至程朱諸說。無不淹貫會通。尤邃易學。循環紬繹。至老不倦。結茅山水間。兄弟對床講討。遠近士子。聞風空集。人號其地爲學堂洞。子永九羅氏出。永範永兆女金陽麗。鄭氏出也。洪氏一門。椒聊蕃衍。而家法之美。聞于鄕邦。濟濟志學之士。方蔚然而未艾。此非先輩諸公如晩喜翁垂創之力歟。流風餘韻。加以亘百世而不泯。況今澤未斬而親未竭。其式穀似述之敏。宜乎內爾也。瞻感攸至。敢不勉副勤意之一二也。銘曰。遯肥困亨。世食舊德。載辭幽堂。用壽斯億。 좌병향임(坐丙向壬) 묘소의 방향을 말한 것으로, 병(丙 방위로는 남녘에 해당)을 등지고 임(壬 방위로는 북녘에 해당)을 향함을 의미한다. 만년의 계책 〈능고대(凌敲臺)〉 시에 "백 년 인생에 지었을 만년의 계책이여, 바위 위 옛 비석엔 푸른 이끼만 남았네.[百年應作萬年計, 巖上古碑空綠苔.]"라는 시구가 있다. 《唐百家詩選 卷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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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하여 제군에게 보이다 自叙示諸君 중유의 헤진 솜옷에 굴원의 관 높이 쓰고224) 仲袍弊弊屈冠峨흰 머리에 야윈 얼굴로 반평생이 지났구나 霜鬂蒼顔半世過도를 구할 땐 돌을 뚫는 것 같아 탄식했어도 求道堪歎同透石사람을 건네줄 땐 세파를 따르지는 않았네 涉人不肯輒隨波비바람 하늘에 가득하여 심회가 사납지만 滿天風雨心懷惡안개 노을 낀 벽지에도 살 계책은 많다네 僻地烟霞計活多도리어 부끄럽네 제군이 멀리서 왔는데 還愧諸君來自遠옆사람이 무성가225)에 잘못 견주는 것이 傍人錯比武城歌 仲袍弊弊屈冠峨, 霜鬂蒼顔半世過.求道堪歎同透石, 涉人不肯輒隨波.滿天風雨心懷惡, 僻地烟霞計活多.還愧諸君來自遠, 傍人錯比武城歌. 중유의 …… 쓰고 중유(仲由)나 굴원(屈原)처럼 높은 뜻을 가지고 살았다는 뜻이다. '중유'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의 이름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해진 솜옷을 입고서[衣敝縕袍],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굴원'은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난 초(楚)나라 대부이다. 그가 지은 〈섭강(涉江)〉에 "내 어릴 적부터 이런 특이한 복장을 좋아했는데, 늙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네. 긴 칼 허리에 늘여 차고서, 우뚝 높은 갓 머리에 썼지.[余幼好此奇服兮, 年旣老而不衰. 帶長鋏之陸離兮, 冠切雲之崔嵬.]"라고 하였다. 무성가(武城歌)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악(禮樂)을 가르쳐 교화를 잘 시켰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현가(弦歌) 소리를 듣고는 칭찬한 일이 있다. 《論語 陽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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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 형공 묘지명 道谷邢公墓誌銘 공의 휘는 세영(世英), 자는 춘영(春榮), 호는 도곡(道谷)이다. 신라(新羅) 때 휘 옹(顒)이 있었는데, 당(唐)나라 학사로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왔으니, 이 분이 상조(上祖)이다. 중대 휘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로가 있어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으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이 분이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휘 문궤(文軌)를 낳았고, 문궤가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휘 찬(贊)을 낳았으며, 찬이 진사를 지낸 휘 군철(君哲)을 낳았는데, 군철이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경(慶)이니, 장사랑(將仕郎)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용인(用仁)인데, 진사이다. 선고(先考)는 휘 자홍(自弘)인데,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냈다. 모친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인데, 정덕(正德) 2년 우리 중종(中宗) 정묘년(1507, 중종2)에 공을 낳았다.공은 생래적으로 기개가 높고 도량이 넓으며,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우뚝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경전을 읽으면서 힘써 배웠는데, 더욱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에 관한 책을 깊이 연구하여 발휘하고 확충하여 사물의 본체와 작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은 구차하고 소홀한 뜻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한 일찍이 모질고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중년에 능주(綾州) 도동(道洞)으로 이사한 다음 산을 구입하여 정자를 짓고 시냇물을 끌어다 꽃을 심고 한가로이 노닐면서 그윽하고 빼어난 흥취를 두루 만끽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지만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향리에서 이름난 양학포(梁學圃) 제현과 서로 날마다 어울리면서 회포를 시로 읊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조정암(趙靜庵)이 본주(本州)에 귀양 오자 가서 위문하였다. 이를 인연으로 강론하고 질정하기를 끊이지 않고 하였다. 사약을 내리는 명이 이르자 슬퍼하고 상심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그 심정을 토로하였다.신사년(1581, 선조4) 10월 13일에 사제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5세이다. 죽동(竹洞)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니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공의 오른쪽에 있다. 계배(繼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같은 언덕 갑좌(甲坐)에 있다. 모두 3남이니, 응지(應祉), 응식(應植), 응희(應禧)이다.12세손 도열(道烈)이 못난 나에게 편지를 보내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만 고루(固陋)하고 용렬하여 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지만 유풍에 느끼는 바가 있어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도곡의 산은 道谷之山쉬고 노닐 수 있네. 可以棲遲도곡의 물은 道谷之水굶주림도 즐길 수 있네. 可以樂飢산은 높고 물은 유장하니 山高水長운치는 전과 다름이 없네. 風韻依然백세토록 생각나게 하니 百世興想지나는 사람 머무르네. 過者留連 公諱世英。字春榮。號道谷。新羅時有諱顒。以唐學士。浮海東來。是其上祖也。至中系諱公美。討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是生諱文軌。禮部尙書。是生諱贊。版圖判事。是生諱君哲。進仕於公爲高祖。曾祖諱慶。將仕郎贈戶曹參判。祖諱用仁。進士。考諱自弘。碧潼郡守。妣延安李氏。以正德二年我中宗丁卯生。公生而氣宇峻茂。孝友根天。稍長屹若成人。劬經力學。尤蓫小學近思錄及性理之書。發揮展拓。體用無闕。平生行已。未見有苟且簡慢之意。亦未嘗有斬絶矯激之行。中年移寓綾州之道洞。買山結亭。引流裁花。逍遙徜徉。備盡幽逸之趣。以學行除齋郞。疏辭不就與鄕裏名勝梁學圃諸賢。日相追逐。唱酬遺懷。己卯趙靜庵謞本州。往省之。因以講討問辨。源源不絶。及後命至。不勝哀傷。爲賦一絶詩以寫其情。辛巳十月十三日卒于居第。享年七十五。葬于竹洞艮坐之原。配韓山李氏某女。墓附右。繼配水原白氏某女。墓同原甲坐。擧三男曰應祉應植應禧。十二世孫道烈。走書不侫。謁誌墓之文。顧固陋微劣。固知不敢承當。而曠感餘風。有不忍終辭者。銘曰。道谷之山。可以棲遲。道谷之水。可以樂飢山高水長。風韻依然。百世興想。過者留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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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水山金聖則【義鉉】 世味頭俱白。鄕情眼復靑。前期知有限。何必淚空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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允性【金大源】兄故爲留行。又以惜別號韻。因酬之。 雛合本無邊。送迎互有連。淸遊繩此日。佳約筮明年。雪淺任踰嶺。木輕易渡川。歸餘多小思。茅屋夢依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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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立春前一日二日。寄允性兄。 天日會成歲。雄雌各守家。靑春吾已過。華髮子兼斜。晩學難尋道。先知易泳涯。罄懷應不遠。聊寄一梅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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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日夜懷允性兄 惡離常好合。不見意茫然。梅蘂經春發。栢樽竟夕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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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오【규환】에게 보냄 與梁文吾【奎煥】 이장(李丈)에게 나아가 뵙고 부모를 모시고 지내는 안부가 강녕(康寧)하시다는 걸 들어 우러러 그립던 마음에 실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올해에는 자신을 얽어맨 것을 벗어 버리고 문을 걸어 닫고 주변을 깨끗이 치우셨으니 참으로 우리 형께서 큰일을 하려는 뜻을 품으셨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 성대한 기세는 장차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근래 《삼국지(三國志)》를 소중히 하신다고 하던데, 특별하고 괴이하며 꺼리는 바가 없는 술수에 탐닉하여 좋아하고 아끼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력이 미쳐서 득실을 따져서 궁리(窮理)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려고 하시기 때문입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라면 이것은 완물 상지(玩物喪志)14)이고 귀로 듣자마자 입으로 말하는 천박한 학문이며, 나중에 말씀드린 대로라면 또한 초학자의 역량이 미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모두가 우리 형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독서에는 본래 순서가 있습니다. 공자(孔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책과 같은 신심(身心)과 일용(日用)에 절실한 것을 우선 읽어서 명백하고 평이하며 더할 수 없이 가깝고 더할 수 없이 절실한 바탕에 근거하여 지키는 것이 있도록 한 다음에 세무(世務)를 처리하고 인물을 헤아려 바로잡을 수 있게 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이것저것 너저분하게 손대어 귀착하는 곳이 없기보다는 책 하나에 정밀함을 다하여 한 치 한 자만큼이라도 진보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주자께서 "잡서를 보지 말라. 정신이 분산될까 두렵다."15)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이릅니다. 아우도 바로 이 병에 걸려 부질없이 일생을 허비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뒤미쳐 생각하더라도 걱정을 떨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완할 계책이 없어 억지로 들은 얘기를 읊어 삼가 우리 형에게 아룁니다. 혹시 광망하다고 여겨 배척하지는 않으실까요. 卽拜李丈。詢叩省候康寧。實慰瞻耿。今年擺脫絆已。杜門掃却。固知吾兄有大有爲之志。而其所沛然。將有不家禦者矣。但近所尊閣。在於三國志云。以其耽於奇偉縱橫之術。而愛玩不置耶。將以餘力及之。而商略得失以爲窮理之一助耶。如前所云。則是玩物喪志。口耳之學也。如後所云。則又非初學力量所可及處。皆非所望於吾兄者。夫讀書固有次第。先其切於身心日用如孔孟程朱之書。使明白平易至近至切之地。有所據守而後。可以經理世務。商訂人物爲未晩也。與其汎濫閒汨。而無所歸宿。曷若致精一書。得寸得尺之爲有進步處也。朱子曰。勿觀雜書。恐分精力。正謂此也。弟正坐此病。亦未免枉過一生。追念耿耿。塡補無計。聊誦所聞。謹爲吾兄陳之。或不爲狂妄而斥之耶。 완물 상지(玩物喪志) 작은 기예에 탐닉한 나머지 원대한 뜻을 잃는 것을 말한다. 송유(宋儒) 사양좌(謝良佐)가 사서(史書)를 잘 외우며 박학다식한 것을 자부하자, 정명도(程明道)가 "잘 외우고 많이 알기만 하는 것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본심을 잃는 것과 같다.【以記誦博識, 爲玩物喪志.】"고 경계한 말이 《정씨유서(程氏遺書)》 3권에 수록되어 있다. 잡서를……두렵다 《회암집(晦庵集)》 권39 〈여위응중(與魏應仲)〉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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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 최재신(崔載信)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己酉閏四月 崔載信 城主 己酉閏四月 崔載信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기유년 윤4월에 최재신(崔載信)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도조(賭租) 빌미로 보리 144뭇을 베어간 최준보(崔俊甫)를 고발한 내용이다. 기유년 윤 4월에 상서면 다회리(上西面 多會里)에 사는 화민 최재신(崔載信)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최재신은 정당리(淨塘里)에 사는 최준보(崔俊甫)에게 밭 1두 5승락지를 빌리고 도조(賭租)를 콩(太)와 보리 각각 2두 5승으로 약속하고 경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전에 그의 아들 재용(載龍)에게 5냥을 빌려준 일이 있고, 8년이 지난 지금까지 간혹 받은 이자라야 겨우 2냥에 지나지 않았다. 작년 가을 추수 후 이 돈을 상계하고자 도조를 갚지 않았는데, 최준보가 이를 빌미로 자신의 아들과 자신을 찾아와 밭의 보리를 모두 베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을 잘 헤아려 일전에 재용이 빌려간 돈과 이들이 베어간 보리 144뭇에 대해 추급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소장을 접수한 부안현감은 2두의 콩을 갚지 않았다고 하여 백 뭇의 보리를 베어간 것은 지극히 부당한 일이니, 즉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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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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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 최재신(崔載信)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己酉二月 崔載信 城主 己酉二月 崔載信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기유년 2월에 최재신(崔載信)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최효대(崔孝大)가 이자 명목으로 늑탈해 간 조 2석을 추급해 달라는 내용이다. 기유년 2월에 상서면 정당리(上西面 淨塘里)에 사는 화민 최재신(崔載信)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최재신은 자신의 집이 본래 매우 가난하여 장사를 위해 지난 갑진년 같은 마을에 사는 최효대(崔孝大)에게 60냥의 돈을 빌려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박복한 나머지 하는 일마다 낭패하여 오히려 손해만 보았으나 빌린 돈을 갚지 않을 수 없기에 그해 가산을 처분하여 본전과 얼마간의 이자를 상환하였고, 남은이자 3냥 5전에 대해서는 서서히 갚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최효대가 이자를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세금을 내기 위해 간신히 마련해 놓은 조 2석을 늑탈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살펴 최효대가 늑탈해간 조 2석을 추급해 주길 청하였다. 부안현감은 비록 최효대가 마땅히 받아야 돈이나 세금을 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하므로 최재신이 세금을 납부한 후에 남은 것이 있다면 그 때 빚을 받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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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윤인부에게 적어 보이다 書示尹仁夫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첫 번째 절도(節度)이다. 학문과 공부만 그러할 뿐만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것을 만들어내더라도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나면서 공을 이룰 수 있었던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이것이 맹자(孟子)가 선을 실천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해서 모두 "닭이 울면 일어난다."120)라고 말한 까닭이다.책(冊)을 마주하면 반드시 단정하고 장중하며 바른 자세로 조용히 앉아 몸을 구부리지 않고 마음을 놓치지 않으며, 보고 또 보아서 그 내용이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는 듯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그 뜻이 마치 자기의 생각을 내놓는 듯하며, 반드시 욕심을 부려서 많이 알려고 힘쓰다가 소홀히 하여 서투르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앉거나 서는 것은 반드시 공경 장엄(恭敬莊嚴)하며 한쪽으로 기울거나 태만하지 말아야 하고, 말을 하는 것은 반드시 말수가 적으며 성급하고 경솔한 말을 하거나 큰 소리로 떠들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대하는 것은 반드시 온순함과 공경스러움을 다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오만하고 고집스럽거나 상대를 꺾으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고, 터럭만큼이라도 아첨하며 따르려는 의도가 있어서도 안 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의리(義理)의 가부를 보아야 하고 이해(利害)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그것을 위해 진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이처럼 거듭하여 하루하루 쌓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이치와 익숙해져서 근거로 삼아 힘을 얻을 곳이 있게 된다. 그러나 "요(堯)는 어떤 사람이고 순(舜)은 어떤 사람인가?", "저 사람이 장부이면 나도 장부이다."121)라는 마음을 북돋아 분발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그 일을 떠맡겠다는 뜻이 없다면, 앞의 저 말들 또한 억지로 안배(安排)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기름으로 그린 그림이고 얼음에 새긴 조각처럼 곧 사라질 뿐이다. 어찌 나의 소유라고 여기고 더불어 형이상(形而上)을 말할122) 수 있겠는가.윤군 인보(尹君仁夫)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데 요체가 될만한 말 한마디를 청하였다. 내가 어리석어 지닌 것이 없는 사람이라서 오직 선현(先賢)들이 이미 한 말을 열거하여 그 마음에 답한다. 인보(仁夫)는 특별히 주의해 주기 바란다. 夙興夜寐。此是日用行己第一節度。不惟學問功夫爲然。雖小小生産作業。未有早寐晏起而能有成者。此孟子於爲善爲利。皆以雞鳴而起。言之也。對冊務要端莊。靜坐不撓體不放心。看來看去。使其辭如誦已言。思來思去。使其義如出己意。切不可貪多務廣。忽略鹵莽也。坐立務要恭莊。不可傾倚怠慢。言語務要簡黙。不可躁妄諠譁。接人務要和敬兩盡。不可一毫有傲頑忮克之心。不可一毫有阿附媚宛之意。處事當見其義理可否。不當問其利害多少而爲之前却也。如是積累。日去日來。自然心與理熟。而有得力可據之地矣。然不有堯何人舜何人。彼丈夫我丈夫。激勵振拔。抵死擔當之志。則彼所云爲。亦不過勉强安排。旋消旋滅。如脂之畵。氷之鏤而已。曷足以爲吾有而與之語上哉。尹君仁夫請一言爲日用顧諟之要。余悾悾無所有。惟是擧先賢已成底說話。以塞其意。願仁夫加意焉。 모두……일어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힘쓰는 자는 순 임금의 무리요,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구하는 자는 도척(盜跖)의 무리이다. 순 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고 싶은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단지 이익을 탐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그 사이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요(堯)는……사람인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성간이 제 경공에게 이르기를 '저들도 장부이며 나도 장부이니 내 어찌 저 성현들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하였고, 안연이 말하기를 '순 임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라고 하였으며, 공명의가 말하기를 '주공이 문왕은 내 스승이다고 하였는데, 주공이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더불어……말할 《논어》 〈옹야(雍也)〉에 "중인 이상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도를 말해 줄 수 있지만, 중인 이하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그런 차원이 높은 도를 말해 줄 수가 없다."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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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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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안경우에게 써서 주다 書贈安景禹 학자(學者)는 우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을 매우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단정하고 의젓하며 고요하고 전일한 가운데 천리를 기르며150) 빈객을 맞이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체득하여 조금씩 쌓아가 세월이 깊어지면 눈앞의 사물은 이 도리가 아닌 것이 없다. 삼공(三公)의 지위로도 고귀함을 비유할 수 없고 만종(萬鍾)의 녹봉으로도 부유함을 견주지 못하며 천하의 모든 사물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 이로써 큰일을 처리하고 커다란 변고(變故)에 임하면 장차 그 기세가 패연(沛然)하여 일삼는 바가 없음을 행하게 될 것이다.151) "진정한 대영웅은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상황에서 출현한다."152)라는 말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늙도록 무지(無知)한 처지라 감당하지 못하여 부끄럽지만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또 그냥 그만둘 수가 없다. 삼가 일상생활에 절실한 학문의 절도(節度)를 적어 주어 이를 대신한다. 學者先須識得天理人欲之分。十分明白。養之於端莊靜一之中。體之於酬酢云爲之際。銖累寸積。日人月深。則眼前物事。無非此箇道理。不以三公而喩其貴。不以萬鍾而較其富。至於擧天下之物而無以尙之。以之處大事臨大變。將沛然而行其所無事矣。所謂眞正大英雄。自戰戰兢兢中出來者。豈欺我哉。白首倥倥。愧無以承當。而撫念事契。又不可以但已。謹述學問節度切於日用者。以塞之。 단정하고……기르며 주자의 《대학혹문》에 "단정하고 의젓하고 고요하고 전일한 가운데 이 마음을 보존하여 리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할 때에 이 리를 궁구하여 마음을 다하는 공부를 지극하게 한다.[存此心於端莊靜一之中, 以爲窮理之本, 竆此理於學問思辨之際, 以致盡心之工.]"라는 내용이 있다. 일삼는……것이다 맹자가 "지혜를 미워하는 것은 천착하기 때문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우 임금이 물을 흘러가게 하듯이 한다면 지혜를 미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 임금이 물을 흘러가게 한 것은 일삼는 바가 없이 자연의 형세에 따른 것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또한 일삼는 바가 없음을 행한다면 지혜가 또한 클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진정한……출현한다 《회암집(晦庵集)》 권36 〈답진동보(答陳同甫)〉에 다음과 같은 주자의 말이 보인다. 이를 축약한 것이다. "참으로 정대한 영웅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이라도 조심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眞正大英雄人. 然此一種英雄, 却是從戰戰兢兢, 臨深履薄處, 做將出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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