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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 김공397) 병주 을 애도하다 悼危齋金公【炳周】 성수산398) 속에는 저문 연기 자욱한데 聖壽山中鎻暮煙어찌 기미성 타고399) 갑자기 승천하셨나 胡然箕騎遽升天전념하여 추환400)처럼 학문을 즐겼으며 專心嗜學如芻豢기운 떨쳐 새매처럼 삿된 무리 공격했네401) 奮氣攻邪若隼鸇지금 세상에 다시는 진실한 선비 없으나 今世更無眞實士후세 사람들은 응당 성명을 전해야 하리 後人應有姓名傳공 생각에 시국 상심한 눈물이 더 나와 思公添發傷時淚뜻을 부친 애사를 모두 펴지 못하겠네 寄意哀詞未盡宣 聖壽山中鎻暮烟, 胡然箕騎遽升天?專心嗜學如芻豢, 奮氣攻邪若隼鸇.今世更無眞實士, 後人應有姓名傳.思公添發傷時淚, 寄意哀詞未盡宣. 위재(危齋) 김공(金公) 김병주(金炳周, 1869~1936)를 말한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백(文伯), 호는 위재이다.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으로 알려졌다. 저서에 《위재유고(危齋遺稿)》 7권 2책이 있다. 성수산(聖壽山)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에 있는 높이 876m의 산이다. 기미성(箕尾星) 타고 현인(賢人)의 죽음을 뜻한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은 도를 터득하고서 무정을 도와 천하를 모두 소유하게 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동유성을 타고 기성과 미성을 몰아 열성과 나란히 있게 되었다.〔傅說得之, 以相武丁, 奄有天下, 乘東維, 騎箕尾而比於列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추환(芻豢) 추는 초식(草食) 가축이고 환은 잡식(雜食) 가축으로, 맛있는 음식을 뜻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와 의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나보다 먼저 알았다. 그러므로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 음식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心之所同然者, 何也? 謂理也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새매처럼……공격했네 충성스럽고 용감한 자가 간악한 무리를 처벌해서 죽이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그 임금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를 보면 처벌하였는데, 마치 매와 새매가 새와 제비를 쫓는 듯이 하였다.〔見無禮於其君者, 誅之, 如鷹鸇之逐鳥雀也.〕"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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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앉아서 2수 夜坐【二首】 휘영청 밝은 달이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素月揚輝上碧峯들쑥날쑥 대와 잣나무는 그림자가 겹겹이네 參差竹柏影重重먼 길손은 일어나는 향수를 금할 수 없고 難禁遠客鄕愁動서동이 어떻게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겠는가 怎遣書童睡意濃지친 새처럼 높이 날아갈 생각 끊어졌고 絶意高飛同倦鳥신룡을 배워 편안히 수양할 마음 두었네392) 存心穩養學神龍외론 회포와 맑은 경치가 서로 어울린 곳에서 孤懷淸景相將處새벽종 울릴 때까지 홀로 난간 가에 앉았네 獨坐欄頭到曉鍾공자가 즐겼던 도는 정히 능하기 어려우니 宣尼樂道定難能연래에 팔 베고 눕는 것393)에 익숙할 뿐이네 但慣年來枕曲肱이미 몸을 초개처럼 가볍게 보았으나 已視身家輕似芥마음을 얼음처럼 차갑게 하지는 못하였네 不將心地冷爲氷빈산의 나그네 심사는 외로운 달을 맞았고 空山旅思當孤月시장에 널린 새 바람은 일만 등불에 빛나네 列市新風耀萬燈또 다시 우리 유문은 갈 만한 곳이 없으니 亦復儒門無可往얼마나 많이 휘감긴 등 넝쿨을 보게 될까 幾多纏繞見蘿藤 素月揚輝上碧峯, 參差竹柏影重重.難禁遠客鄕愁動, 怎遣書童睡意濃?絶意高飛同倦鳥, 存心穩養學神龍.孤懷淸景相將處, 獨坐欄頭到曉鍾.宣尼樂道定難能, 但慣年來枕曲肱.已視身家輕似芥, 不將心地冷爲氷.空山旅思當孤月, 列市新風耀萬燈.亦復儒門無可往, 幾多纏繞見蘿藤? 신룡(神龍)을……두었네 초야에 은거할 마음을 먹었다는 말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자벌레가 몸을 굽혀 움츠리는 것은 장차 몸을 펴기 위함이요, 용과 뱀이 숨는 것은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함이다.〔尺蠖之屈, 以求信也; 龍蛇之蟄, 以存身也.〕"라는 말이 나온다. 팔……것 빈한한 생활 속에서도 도를 누리는 즐거움을 말한다. 공자가 《논어》 〈술이(述而)〉에서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나니, 떳떳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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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 부호군 부군 행장 先考副護軍府君行狀 부군(府君)의 휘는 제현(濟玄), 자는 명서(命瑞)이다. 정씨(鄭氏)의 관향은 광주(光州)이니, 고려(高麗) 말기에 찬성사(贊成事) 휘 신호(臣扈)가 비조(鼻祖)이다. 7대를 전하여 휘 태(態)에 이르렀으니,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규(應奎)를 낳았으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으니,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모두 현조(顯祖)이다. 증조의 휘는 이도(履道), 조부의 휘는 채(埰), 선고(先考)의 휘는 가석(加錫), 선비(先妣)는 광산 이씨(光山李氏) 덕광(德光)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계해년(1803, 순조3) 5월 6일에 강진(康津) 월산(月山)의 우거하던 집에서 부군을 낳았다. 을해년(1815, 순조15)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병자년(1816, 순조16)에 현(縣)의 구상리(九祥里)에 우거하였다. 신사년(1821, 순조21)에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맞아들였으니, 춘채(春采)의 따님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무자년(1828, 순조28)에 어버이의 명으로 능주(綾州) 망방산(望防山)에 우거하였으니, 이는 소요를 피하여 먼저 조치를 취한 것이다. 경인년(1830, 순조30)에 주(州)의 대덕동(大德洞)으로 이사하였다. 갑오년(1834, 순조34)에 이씨(李氏)가 졸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에 다시 진원 박씨(珍原朴氏) 치성(致聖)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5)의 후손이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정미년(1847, 헌종13)에 백씨(伯氏)와 계씨(季氏)가 강진(康津)에서 주(州)의 묵계리(墨溪里)로 와서 우거하였다. 병진년(1856, 철종7)에 대덕동(大德洞)에서 품평리(品坪里)로 이사하였다. 정묘년(1867, 고종4)에 묵계리로 이사하였으니, 백씨, 계씨와 함께 만년에 서로 의지하면서 지낼 계획이었다. 무진년(1868, 고종5)에 불초 소생을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업하게 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백씨(伯氏)가 졸하였다. 정축년(1877, 고종14)에 박씨(朴氏)의 상을 당했다. 신사년(1881, 고종18)에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부직(付職)되었다. 계미년(1883, 고종20) 2월 2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4월 2일에 묵계리 화수치(火手峙) 미향(未向)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부군은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여 매우 지극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마음가짐이 성실하였으며 몸가짐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남과 담소를 나누는 경우가 적었고, 일을 만나면 꾸밈이 없었다. 집에 있을 적에는 한가롭게 상량(商量)하는 일이 적었고, 박에 나가서는 한가롭게 벗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았다. 무릇 세간의 바둑, 술자리, 질펀하게 노는 오락에는 한 번이라도 눈길을 둔 적이 없었고, 경박하고 괴이하며 남을 속이거나 허황된 말에는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으며, 이익을 꾀하고 영화를 탐하거나 아첨하고 청탁하는 자리에는 일찍이 한발 자국도 나아간 적이 없었다. 중년에 한번 한양에 가서 성곽, 궁궐, 산천 지리, 인물 풍속을 두루 보고 돌아왔다. 어버이를 떠나 밖에 거처한 적이 있는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빠뜨리지 않고 부모님을 뵈었다.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먼저 먹은 적이 없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백씨(伯氏)를 또한 어버이처럼 섬겼다. 만년에 한마을에서 세 형제가 함께 살았는데 나이가 모두 80세였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데도 함께 자고 마주 앉아 종일토록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은 생업이 있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비가 되어 끝내 내세울 만한 공이 없고, 농부가 되어 끝내 의뢰할 만한 재물이 없다면 이는 기물(棄物)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매우 독실하게 자식을 가르쳐 일찍이 다른 일로 학업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 평소 숙흥야매(夙興夜寐)하면서 종일 부지런하여 일찍이 나태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또한 편안하고 한가롭게 보내는 때가 없었다. 불초 소생이 매번 아침 문안을 여쭐 적에 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지 누워 계신 것을 보지 못했다. 하루는 선친께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자 하여 매우 일찍 갔지만 이미 엄연히 일어나 앉아 계셨으니, 40년 동안 슬하에 있으면서 하루라도 늦게 일어나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평생 각고의 노력으로 분발하고 진작하였기에 가계(家計)를 수립하여 가운(家運)이 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첫째 아들은 한룡(翰龍)이고, 셋째 아들은 상림(祥林)인데 재주가 매우 영특하여 크게 될 가망이 없지 않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오직 불초 소생만 남아 있는데 지금 노년이 된 나이에 낡은 습관을 따르고 나태하여 당시 아버지께서 바라던 뜻에 조금도 부응하지 못하였으니, 이 한 몸의 죄를 천지간에 어찌 용납하겠는가. 너무나도 죄송스럽고 죄송스럽다. 바라건대, 세상의 군자는 혹 가련하게 여겨서 그 자식이 불초하다는 이유로 그 아버지의 훌륭한 명성까지 폐하지 않기를 실로 바라 마지않는다. 府君諱濟玄。字命瑞。鄭氏系出光州。麗末贊成事諱臣扈。其鼻祖也。七傳至諱態官弘文應敎。是生諱應奎。官節度使。是生諱演。副司直贈戶曹判書。皆其顯祖也。曾祖諱履道。祖諱埰。考諱加錫。妣光山李氏德光女。以純廟癸亥五月六日。生府君于康津月山寓舍。乙亥丁內艱。丙子僑寓顯之九祥里。辛巳聘夫人全州李氏春采女。孝寧大君補后。戊子以親命寓居綾州望防山中。蓋避擾先着也。庚寅移州之大德洞。甲午李氏卒。乙未繼娶珍原朴氏致聖女。葦南熙中后。甲辰丁外艱。丁未伯氏季氏自康津來寓州之墨溪里。丙辰自大德洞移品坪里。丁卯移墨溪。從伯季爲晩年相依計也。戊辰命不肖受業于蘆沙奇先生之門。丙子伯氏卒。丁丑朴氏喪。辛巳壽陞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癸未二月二十五日考終。享年八十一。四月二日葬于墨溪之火手峙負未之原。嗚乎。府君天性至孝。生長艱難。備經百故。而盡心盡力。備極忠養。立心忠慤。持身勤儉。與人罕笑語。遇事無表襮。居家少閒商量。處世少閒追逐。非其力不食。非其義不顧。凡世間局戱酒致曠蕩流連之娛。未嘗一寓目焉。浮靡乖僻欺誣狂誕之說。未嘗一傾耳焉。聲利繁華趨附造請之地。未嘗一濡跡焉。中年一赴漢師。周見城郭宮室山川道里風土人物而歸。嘗離親寓外。雖相距迃遠。每月朔月望。省覲無闕。有新味。未嘗先食。親歿後。事伯氏。亦如之。晩年同住一巷三昆季。年皆八十。華顔白髮。連床對榻。終日竟夕。笑語怡怡。嘗言人貴有業。業貴有成。爲士而終無可述之功。爲農而終無可賴之資。則是棄物也。是以敎子甚篤。未嘗以他業間之。平居夙興夜寐。終日孜孜。未嘗有懈怠之色。亦未嘗有暇豫之時。不肖每晨省。常見其坐而未見其臥。一日欲先府君起。早早而往。已儼然起坐矣。在膝下四十年。未嘗見其有一朝之晏起也。平生刻勵勤苦。抖擻拮据。至於樹立家計。家運不競。一男翰龍三男祥林。才性通曉。不無可望。而皆至夭折。惟不肖是在。年紀暮大。因循荒怠。未副當日一分之志。此身罪戾。天地安容。痛死痛死。惟世之君子。或爲之哀憐。不以其子之不肖而倂廢其親之令名歟。實有望焉。 박희중(朴熙中) 1364-1446. 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박첨(朴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홍서(朴洪瑞)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박온(朴溫)이다. 생원으로 1401년(태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 《海東筆苑》에 오를 정도로 명필이었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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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집》86) 부록의 서문 晩羲集附錄序 정씨(程氏)는 중앙에서 활동하고, 영중(瑩仲)은 남동부에서 생장하여 서로의 거리가 먼데도 오히려 〈책심문(責沈文)〉을 지어 자신을 꾸짖었는데87), 나는 같은 고을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한 번도 만희(晩羲) 선생의 문하로 나아가 뵙지 못했으니, 만약 형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찌 단지 자신을 꾸짖었을 뿐이겠는가.아,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가 바로 내가 성동(成童 15세)이 될 무렵이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에 선생의 이름을 알았고, 장난치며 뛰어다녔을 때에 선생에 대한 풍문을 들어서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할 뿐만이 아니었지만,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하며 질병이 많아서 평소의 생활을 답습한 채 세월만 보내고 말았으니, 어찌 삼성(參星)과 진성(軫星)88)처럼 서로 마주하지 못하고, 제비와 기러기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을 줄 알았겠는가. 그러나 큰 종은 두드림이 끝나도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소리는 여전히 멀리 퍼지고, 사방을 비추는 촛불은 불이 꺼져도 심지에 남아 있는 불빛은 여전히 오래 탄다. 마을의 장로와 당시 문하에 있던 선비들을 따라 좇으면서 선생께서 주신 가르침을 받는 것이 또한 어찌 매우 얕겠는가.선생의 족손(族孫)인 재경(在慶)이 유고를 편집하고 목판에 새겨 간행하니, 이는 진실로 사림(士林)의 다행스런 일이다. 내가 변변찮은 식견으로 진실로 감히 이 일에 참여하여 들을 수 없지만, 평소의 뜻으로 헤아려보건대 또 한마디 말을 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스런 마음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程氏作於中土。瑩仲生長東南。相去遠矣。而猶作責沈文以自訟焉。義林居在同鄕。一未造謁於晩羲先生之門。若以瑩仲視之。則豈但自訟而已哉。嗚呼。先生卽世之日。卽義林成童左右歲也。孩提知名。遊戱聞風。不啻充然于中。而稚弱多疾。居常因循。豈知參軫不相待。蕪鴻不相及。有若是哉。然洪鍾罷叩。遺音尙遠。旁燭斂照餘輝猶久。其所以從逐於鄕里長老當日及門士。而受先生之賜。又豈淺淺哉。先生族孫在慶。編輯遺稿。鋟繡棗梨。誠士林之幸也。余以無狀。固不敢與聞於斯役。而揆以平素之意。又不可無一言以志慕仰之誠云爾。 만희집부록 《만희집(晩羲集)》은 화순 능주 출신의 조선 후기 학자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문집이고, 부록은 저자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12권, 부록 2권, 합 14권 6책이다. 1895년에 후손 재경(在慶)이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과 이건창(李建昌)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성대영(成大永)·안철환(安澈煥)·재경 등의 발문이 있다. 정씨(程氏)는……꾸짖었는데 정씨(程氏)는 북송의 유학자인 정호(程顥)로, 낙양(洛陽) 사람이고, 영중(瑩仲)은 북송의 유학자인 진관(陳瓘, 1057~1122)으로, 사현(沙縣) 사람이다. 진영중이 당대의 대학자인 명도(明道) 정호를 몰라보고 범순부(范淳夫)에게 물은 일을 부끄럽게 여겨, 공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몰라서 자로에게 물은 초나라 섭현의 심저량(沈諸梁)의 고사에 견주어 자신을 책하는 내용의 〈책심문((責沈文)〉을 지었다고 한다. 《書言故事》 삼성(參星)과 진성(軫星) 28수(宿) 가운데 하나로, 삼성은 서방에 있고, 진성은 남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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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1) 行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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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 통정대부 부군 행장 祖考通政大夫府君行狀 공의 휘는 가석(加錫), 자는 유경(裕卿), 또 다른 휘는 언복(彦福), 자는 자구(自求)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니, 고려(高麗) 말기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휘 신호(臣扈)가 비조(鼻祖)이다. 7대를 전하여 휘 태(態)가 있었는데,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규(應奎)를 낳았으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으니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판서의 5대손 가운데 휘 만철(萬喆)이 있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는 유(瑜)이고, 조부는 이도(履道)이고, 선고(先考)는 채(埰)이며, 선비(先妣)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이택(爾宅)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영조(英祖)) 갑신년(1764, 영조40) 11월 8일에 낭주(朗州)의 우거하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장수 황씨(長水黃氏) 익채(翼采)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가 다시 김해 김씨(金海金氏)에게 장가들었지만 모두 자식을 낳지 못했다. 다시 광산 이씨(光山李氏) 덕광(德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중년에 낭주(朗州)에서 금릉(金陵)으로 옮겨 우거하였다. 정미년(1787, 정조11)에 부친상을 당했고, 무신년(1788)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객지에 떠돌아다녀 외롭고 고달픈 몸 의지할 곳이 없었으니, 자신의 신세가 몹시 처량하여 길을 가다가 눈물을 흘렸다. 공은 질박하고 성실하여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고 사람을 응대하며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일을 처리할 때 조금이라도 꾸미거나 자랑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성품이 부지런하며 농사일에 힘을 다하였고, 권세와 이익, 화려한 명성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자손을 가르치고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릴 적에 일을 분담시키고 맡겼으며1)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워서 성공하기를 책면(策免)하였다. 집안의 많은 어려움을 만나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돌아와 성현의 모훈(謨訓)과 고금의 사적에 대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자세히 살펴보아 그 의리의 지취를 넓혔다. 부인 이씨(李氏)는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인의 도덕과 규범에 대해서 빠뜨림이 없었다. 을해년(1815, 순조15) 7월 11일에 이씨가 졸하였다. 갑진년(1844, 헌종10) 9월 27일에 공이 졸하니, 향년 81세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성산(星山)에 장사 지냈다가 능주(綾州) 어시랑(御侍郞) 안산(案山)의 인좌(寅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모두 3남 1녀를 두었으니 이씨의 소생이다. 첫째 아들은 제철(濟哲)이고, 차례로 제현(濟玄)과 제일(濟馹)이며, 딸은 황상현(黃祥顯)에게 시집갔다. 장방(長旁)의 아들은 종림(宗林)·창림(昌林)·동림(東林)·희림(熙林)이고, 딸은 곽종협(郭宗協)·윤자승(尹滋升)에게 시집갔다. 차방(次旁)의 아들은 의림(義林)이고, 딸은 안모(安模)·이병성(李秉誠)·이광무(李光茂)·김장석(金章錫)·홍승명(洪承命)에게 시집갔다. 삼방(三旁)의 아들은 항림(恒林)이고, 딸은 김규원(金奎源)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손자 정의림(鄭義林)은 삼가 기술한다. 公諱加錫。字裕卿。一諱彦福。字自求。系出光州。麗末贊成事諱臣扈。爲鼻祖。七傳有諱態。弘文應敎。是生諱應奎。節度使。是生諱演。贈戶曹判書。判書五世有諱萬喆。卽公之高祖也。曾祖瑜。祖履道。考埰。妣天安全氏爾宅女。英宗甲申十一月八日。生公于朗州寓第。娶長水黃氏翼采女。系娶金海金氏。皆無育。系娶光山李氏德光女。中年自朗州寓居金陵地。丁未丁外艱。戊申丁內艱。流離客土。孤苦無依。其情景懇惻。行路涕零。公質實誠慤。行已酬人。接物處事。未嘗有一毫修飾表襮底意。生長艱難。性勤稼穡。而於勢利聲華。泊如也。敎子孫御家衆。分之以職。授之以事。而嚴立課程。責其成功。遭家多難。辛勤來歸。而於聖賢謨訓。古今事迹。隨暇考閱。以博其義理之趣。夫人李氏溫仁勤儉。閫範無闕。乙亥七月十一日李氏卒。甲辰九月二十七日公卒。享年八十一。壽陞通政。葬星山。移窆于陵州御侍郞案山負寅之原。擧三男一女。李氏出也。長濟哲。次濟玄濟馹。女黃祥顯。長旁男宗林昌林東林熙林。女郭宗協尹滋升。次旁男義林。女安模李秉誠李光茂金章錫洪承命。三旁男恒林。女金奎源。曾孫以下不錄。孫義林謹述。 맡겼으며 일을 맡긴다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주관하는 일과 비상시의 일을 말한다. 《常變通攷 卷3 居家雜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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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 부호군 부군 행장 伯父副護軍府君行狀 우리 선대는 해양(海陽 해남(海南)에서 금수(錦水)2)의 남쪽에 세거하였다. 절도공(節度公) 휘 응규(應奎)에 이르러 한양(漢陽)에 우거하였다. 절도공으로부터 판서공(判書公) 휘 연(演), 사복공(司僕公) 휘 창문(昌門)을 지나 하남공(下南公) 휘 찬(纘)에 이르러 한양에서 가족을 데리고 금수의 남쪽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다. 하남공으로부터 장사랑공(將仕郞公) 휘 시한(時罕), 남은공(南隱公) 휘 경통(璥通), 선랑공(善郞公) 휘 만철(萬喆), 학생공(學生公) 휘 유(瑜)·휘 이도(履道)를 지나 휘 채(埰)에 이르러 금수 남쪽에서 낭주(郞州)로 이사하였다. 통정공(通政公) 휘 가석(加錫)에 이르러 또 금릉현(錦陵縣)으로 이사하였다. 정종(正宗) 기미년(1799, 정조23) 3월 29일에 금릉현의 월산(月山) 우사(寓舍)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제철(濟哲), 자는 윤서(允瑞)이다. 천성이 낙천적이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행실이 일찍 드러났다. 9세에 선생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영특함이 남달랐다. 17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때 집안에 네 번의 상사가 있어 안으로는 부엌살림을 도맡아서 할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 음식을 장만하고 바느질하는 일, 땔나무를 하고 농사짓는 일을 모두 공이 직접 부지런히 해서 부친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부양하여 은의(恩意)가 매우 돈독하니 향리에서 모두 찬탄하고 칭찬하였다. 18세에 통정공을 모시고 같은 현(縣) 구상리(九祥里)로 이사하였다. 19세에 경주(慶州) 이씨(李氏) 아무개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이씨는 현숙(賢淑)하여 시부모 및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섬김에 매우 은의가 있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병술년(1826, 순조26)에 이씨가 졸하자 정해년(1827, 순조27)에 김해 김씨(金海金氏) 아무개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복상을 마치고 능주(綾州) 묵계리(墨溪里)에 우거하였다. 기유년(1849, 헌종15)에 장자 종림(宗林)이 죽었다. 경술년(1850, 철종1)에 김씨가 졸하자 일가족이라곤 4세 된 아이와 20세에 과부가 된 며느리뿐이었으니, 객지에서 외롭고 곤궁한 정경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당시 공의 나이는 이미 51세였는데, 며느리 양씨(梁氏)가 후손이 미약한 것을 염려하여 재혼하기를 권유하자, 공이 거절하지 못하고 임자년(1852, 철종3)에 조양 임씨(兆陽林氏) 아무개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병자년(1876, 고종13) 8월 6일에 졸하니, 부친의 묘소 계단 아래 장사 지내고 이씨, 김씨를 합장하였다. 공은 체상(體相)이 단아하였고, 풍도(風度)가 훤칠하고 의젓하였다.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남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고 너그러웠다. 화목한 정은 친척에게 흡족하게 젖었고, 화락한 기풍은 향리에 두루 퍼졌다. 선을 보면 자신에게서 나온 것같이 하고, 악을 보면 자신의 병인 것처럼 하였다. 온화하고 화순한 자태는 늘 봄바람의 온화한 기상과 같았고, 의리와 사정(邪正)을 판단할 때는 목소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확고해서 동요시킬 수가 없는 점이 있었다. 가난한 형편에서 성장하여 몹시 근검절약하였다. 무릇 화려한 물건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고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집안 살림이 부족한지 알지 못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요역(徭役)이 있으면 반드시 남보다 먼저 하였다. 경사나 상사, 병문안하거나 조문할 적에는 반드시 제때에 맞추었다. 멀리 떨어진 묘소에 성묘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사방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쇠해지자 자질(子姪)로 하여금 수시로 대신 행하게 하였다. 동규(洞規)를 만들 적에는 여씨(呂氏)가 향리에 살면서 만든 규약3)을 모방하였고, 문안(門案)을 만들 적에는 정자(程子)가 친족을 통합한 의리4)를 따라서 행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는 친척은 친분이 소원하더라도 반드시 혼인을 주선하여 가계를 꾸리게 한 자가 10여 인이었다. 손님과 벗이 찾아올 때면 번번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매우 환대하였다. 백발에 소년 같은 고운 얼굴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으니, 그 기상과 풍채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여 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씨는 1남 2녀를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김씨는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종림(宗林), 창림(昌林)이고, 딸은 곽종협(郭宗協), 윤자승(尹滋升)에게 시집갔다. 임씨는 2남 1녀를 낳았으니, 동림(東林), 희림(熙林)이고, 딸은 이항무(李恒茂)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우리 집안은 몰락한 지 200여 년이다. 게다가 타향에서 떠돌면서 살 곳을 잃어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고 집안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선백부(先伯父)께서 평상시 길이 탄식하면서 매양 문호를 세울 계책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권계한 점이다. 백부께서 돌아가신 뒤에 몇 년 되지 않아 사상(死殤)이 잇따라 외롭고 쓸쓸함이 배로 더해졌다. 게다가 독서하는 가풍이 이로 인하여 사라져 조금의 성취도 없었으니, 이 어찌 선백부가 아이들에게 바란 것이겠는가. 선백부의 간절한 뜻을 생각하고 가문이 날로 쇠락해지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고 위축된다. 아, 우리 선백부의 감추어진 광채와 숨은 덕을 누가 수습하여 드러내서 명주(明珠)와 진완(珍玩 진귀한 기호물(嗜好物))이 푸른 바다 모래사장에 사라지지 않게 하겠는가. 惟我先世。自海陽。世居錦南。至節度公諱應奎。僑寓漢中。自節度公。歷判書公諱演。司僕公諱昌門。至下南公諱纘。自漢中。挈還錦南舊庄。自下南公。歷將仕郞公諱時罕。南隱公諱璥通。善郞公諱萬喆。學生公諱瑜。諱履道。至諱埰。自錦南。移寓郞州。至通政公諱加錫。又移金陵縣。以正宗己未三月二十九日。生公于縣之月山寓舍。諱濟哲。字允瑞。天稟樂易。夙著孝友。九歲就學。穎悟異常。十七歲丁內艱。是時家有四喪。內無主饋。外無執役。炊爨裁線之節。漁樵耕牧之務。無不躬親勤勞以適親體撫養諸弟。恩意甚篤。鄕里莫不嗟異。十八陪通政公。移于同縣九祥里。十九聘慶州李氏某女。李氏賢淑。事舅姑及小郞小姑。極有恩意。家有疾病。輒涕泣廢食。丙戌李氏卒。丁亥系娶金海金氏某女。甲辰丁外艱。服闋。寓居綾州墨溪里。己酉哭長子宗林。庚戌金氏卒。一家百口。只是四歲孩兒與二十歲寡子婦而已。客土孤苦。情景難狀。時公年已望六。子婦梁氏憂嗣續之微。勸之續絃。公不能拒。壬子系娶兆陽林氏某女。壽陞通政大夫副護軍。丙子八月六日卒。葬于考墓階下。李氏金氏合祔。公體相端粹。風度軒雅。立心忠慤。接物和裕。雍睦之情。洽於親戚。愷悌之風。遍於鄕閭。見善如己出。見惡如己病。溫溫愉愉。常如春風和氣。而於義理邪正之際。未嘗不聲氣嚴厲。確然有不可拔者。生長窮約。偏愛儉素。凡華麗之物。不入於家。而於施恤之節。不知家力之不足。公私徭役。必先於人。憂樂問唁。必趁其時。遠處墳墓。省掃無闕。四方知舊。存訊不替。及其衰老。使子姪隨時替行焉。立洞規以倣呂氏居鄕之約。立門案以修程子合族之義。族戚之無依者。分雖疎遠。必爲之昏娶。俾立家計者。十餘人。賓朋至。輒置酒而盡歡。紅顔白髮。言笑款款。其氣象風彩。令人可愛而不可忘。李氏生一子二女。皆夭。金氏生二子二女。子宗林昌林女郭宗協尹滋升。林氏生二子一女。東林熙林。女李恒茂。孫以下不錄。嗚乎。吾家零替二百餘年。加以轉泊失所。不自支存。此先伯父所以平居長歎。而每以門戶之計爲諸兒勉勉處也。伯父歿後。未幾年。死殤相繼。一倍孤弱。且讀書之業。因以汨沒。無有一就。此豈先伯父所望於諸兒者耶。念先志之懇惻。視家戶之日非。不覺哽塞而氣縮。嗚乎。我先伯父潛光隱德。誰能收拾而揄揚之。毋使明珠珍玩。淪落於滄海沙礫之間也耶。 금수(錦水)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과 장동면에서 시작되는 탐진강(耽津江)의 지류인 금강(錦江)을 이른다. 여씨(呂氏)가……규약 송(宋)나라 때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살고 있던 여대균(呂大鈞)이 제정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이른다. 문중과 향리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약으로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서로 사귐에는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 등의 조목을 정하였다. 정자(程子)가……의리 정자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가법(家法)은 한 달에 한 번 모여 족인(族人)을 통합해야 한다. 옛사람에게는 화수회(花樹會)가 있었는데, 위씨(韋氏) 집 안의 종회법(宗會法)을 취할 만하다.[程子曰: '凡人家法,須月爲一會,以合族. 古人有花樹,韋家宗會法,可取也.']" 하였다. 《近思錄 卷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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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扶安郡) 김방제(金邦濟) 등 산지입안(山地立案) 고문서-증빙류-입안 법제-소송/판결/공증-입안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0년(철종 11) 부안군 하동면 석동산 김방제 등의 산지에 대한 입안 부안군(扶安郡) 하동면(下東面) 석동산(席洞山)에 대한 1860년(철종 11) 12월 전라감사의 입안(立案)과 1860년(철종 11) 12월 24일에 전라감사가 부안김씨 김방제(金邦濟) 등에게 발급한 완문(完文), 김방제 등의 변무원정(卞誣原情)으로 이루어진 산송문서(山訟文書)이다. 1860년(철종 11) 12월 전라감사(全羅監司)의 입안(立案)은 부안군 하동면 석동산에 있는 김방제 등 부안김씨의 산지에 대한 것이다. 그 내용은 "부안현 김방제는 소윤(少尹)의 본손인데 소윤묘가 있는 산지를 외손인 최가에게 빼앗기고 한성부(漢城府)와 전라감영에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최씨가 석동산에 차장(借葬)한 것은 원래 2총이었는데 후손을 대대로 장사를 지내더니 심지어 소윤(少尹)의 묘 아래까지 압장(壓葬)하였다. 최씨의 외선산(外先山) 늑탈은 풍속을 경계하는 측면에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4명의 최씨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소윤의 묘문(墓門)을 개척(開拓)하며, 산지는 정계를 정하고, 소나무도 함께 본래의 주인(主人)인 김민(金民)에게 주어 영원히 수호하게 한다. 이 송사는 경영(京營)의 관문(關文)과 감결이 있고 제교(題敎)가 있으며, 일의 전말과 산의 형편에 관해서는 원보(原報)에 있으니 뒷날에 상고하기 위해 아래에 열거한다. 지금 이후로 최씨는 무덤만 그들의 것이니 사표(四標) 내의 풀 한 포기 나무 하나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입안을 만들어 준다."라고 하였다. 입안 아래에는 원보초(原報草)라 하여 부안현감의 첩보(牒報)가 첨부되어 있다. 부안현감은 먼저 김방제의 소장을 요약한 뒤 산지를 친심(親審)한 결과를 보고하고, 감영에서 입안(立案)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첩보하였다. 김방제 소장 내용은, "석동산은 김방제의 13세조 소윤공 김세영(金世英)과 그의 동생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敍)가 먼저 터를 잡았고, 좌우에 묘가 있어 대대로 수호하였다. 그러다 소윤의 손서인 최생명(崔生明)과 현손서인 최계성(崔繼成)을 소윤공과 군사공의 무덤이 있는 곳에 차장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중간에 소윤공의 자손이 미약하고 흩어져 살게 되자 최씨들이 소윤공의 묘 전록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1848년(헌종 14)에 최진하(崔鎭夏) 등이 소윤공의 묘문을 쪼아내고 용미에 길을 내었으므로 정소(呈訴)하였더니, 당시의 송관(訟官)이 최씨측을 두둔하고, 최씨들이 외가에서 분급 받았다고 억지를 부려 소윤공의 묘를 주인 없는 무덤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안현감은 한성부와 전라감영의 지시에 따라 김씨와 최씨를 산 아래에 대령하여 친심(親審)한 결과를 보고하였다. "소윤묘 전후좌우에 나무가 빽빽하고, 최씨들은 소윤공의 묘 조금 먼 곳에 최생명의 무덤이 있는데도 여기는 놔두고 소윤공묘의 용미와 섬돌 밑에 7총을 압장하였다."고 하였다. 압장한 7총은 최민에게 분부하여 즉시 파내도록 하고, 사표(四標)를 정하고, 아울러 소나무도 김씨측에 추급하도록 입안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외선산을 늑탈하려고 도모한 최겸석(崔謙錫) 등은 법률에 따라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첩보하였다. 부안현감의 첩보 뒤에는 1860년(철종 11) 12월 18일의 전라감사의 제사(題辭)와 1860년(철종 11) 12월 12일의 부안현감의 제사, 1860년(철종 11) 12월 20일의 부안현감의 결안제교(決案題敎)가 기록되어 있으며, 1860년(철종 11) 12월 24일에 전라감사(全羅監司)가 부안김씨 김방제(金邦濟) 등에게 발급한 완문(完文)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감사의 완문 내용은, "부안 석동산에 있는 김방제(金邦濟)의 선조 소윤공의 묘 한 켠을 외손(전주최씨)의 차장을 허락하였는데 그 외손의 손자인 최진하(崔鎭夏)・최광벽(崔光璧)・최익경(崔益坰) 등이 계장(繼葬)을 하고, 위조문권을 만들어 소윤공묘가 있는 산 전국(全局)과 송추(松楸)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제 등 부안김씨들은 산지와 송추를 다시 찾아 줄 것을 한성부(漢城府)에 탄원하였고, 한성부(漢城府)에서는 부안현으로 관문에 보내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사 결과 전주최씨들이 은혜를 저버리고 산지를 늑탈하려 한 일이 탄로 났다. 지금부터 최익경 등은 사표 내를 다시는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완문을 만들어 준다."고 하였다. 김방제 등 부안김씨에게 부안(扶安) 석동산(席洞山)의 점유를 인정해 준 것이다. '완문(完文)'은 어떤 사안에 대해 조사 후 관청의 재량에 따른 처분을 담은 문서이고, '입안(立安)'은 어떤 일에 대해 공증을 해주는 문서이다. 전라감사의 완문 뒤에는 김방제(金邦濟)・김성풍(金性豊)・김정규(金鼎奎)・김상익(金相翼) 등의 변무원정(卞誣原情)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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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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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위치균【계두】에게 답함 答魏致均【啓斗】 남쪽에서 머물러 있는 구름120)을 바라보니 달려가고픈 마음이 가득 할 때 뜻하지 않게 한 통의 편지를 받았으니, 감사하고 상쾌한 마음을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편지를 받고서 조부모님과 부모의 건강을 살피며 지내는 상황에 신의 보살핌으로 복이 많은 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멀리서 바라는 마음에 부합합니다. 저는 늙고 병들어 나약해져서 아뢸만한 것이 없습니다. 늘 친구들의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과 그대 고을의 많은 선비의 융성함을 생각할 때마다, 계속해서 교류함으로써 만년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다소의 도움거리로 삼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서, 공자의 상(喪)에 "자공(子貢)이 홀로 3년을 더 거처했다.【子貢獨居三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상복을 더 입었다.【加服】'고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러러 사모하는 처지에 차마 갑자기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3년을 더 머문 것입니다. 《맹자(孟子)》「고자 하」의 "이이여기지지(訑訑予旣知之)"에서 '여(予)'자에는 '인장왈(人將曰)' 3자가 이미 위의 문장에 있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서로 묻는 것이, 벗들과 학문을 익히고 닦는 의리이고 나아가 그대가 공부하는 과정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서할 때는 먼저 대의에 통달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대학》을 읽는다면, '명덕(明德)'은 어떤 것이고 '신민(新民)'은 어떤 것인가 하는 종류를 통달해야 하고, 그 글자의 뜻이나 문장의 구두와 같은 것은 소소하게 보고 이해해야지, 성급하게 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단정하고 엄숙한 자세로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길러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끊어짐이 없게 하면 독서(讀書)와 궁리(窮理)는 더욱 힘을 얻을 것입니다. 南望停雲。馳懷多時。一角珍緘。獲之不意。感豁之私。有難形喩。因審重省餘經履。神相多祉。實副遠望。義林衰病淟涊。無足奉聞。每念吾友天姿之美。貴鄕多士之盛。恨未得源源。以爲收桑多少之助也。子貢獨居三年。恐非加服之謂。想是瞻慕之地。而不忍遽去故也。訑訑予旣知之。此予字。人將曰三字旣在上文。則恐非別人也。疑難相問。此是朋友講磨之義。而尤可見賢者課程之有在也。然讀書先須務通大義。如讀大學。則如明德是如何。新民是如何之類。若其字義句讀。小小見解不必汲汲爲也。更須端莊存養。隋時隨處。無所間斷。則讀書窮理。尤宜爲力矣。 머물러 있는 구름 친구를 가리키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정운(停雲)〉 서문에서 "정운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시이다.【停雲思親友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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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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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다시 앞의 운자로 회포를 적어 가석에게 부칠 때 마침 섣달그믐 밤이어서 疊前韻述懷 寄可石時 適除夜 두어 칸 초가집엔 책상 하나에 책이 있고 數間茅屋一床書먹고 입을 것도 없으나 태연히 앉아 있네 無食無衣坐自如단양에선 보내준 보리 양식132)에 얼마나 의지했나 幾賴丹陽遺麥斛촉군에서 쇠수레에 실어 보냈다 말하지 말라 休言蜀郡載金車예전에 소진의 형수는 전후가 달랐다133) 들었으니 曾聞蘇嫂異前後적공의 빈객이 친소가 다름134)도 괴할 것 없다네 不怪翟賓殊戚疎이 밤에 누가 있어 함께 이야기할거나 此夜有誰堪共語후창135)은 홀로 후창과 함께 살고 있거늘 後滄獨與後滄居 數間茅屋一床書, 無食無衣坐自如.幾賴丹陽遺麥斛? 休言蜀郡載金車.曾聞蘇嫂異前後, 不怪翟賓殊戚疎.此夜有誰堪共語? 後滄獨與後滄居. 단양(丹陽)에선……양식 송(宋)나라 범요부(范堯夫)가 보리 500곡(斛)을 배에 싣고 오다가, 단양(丹陽)에서 친구인 석만경(石曼卿)이 두 달 동안이나 상(喪)을 치르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배에 실은 보리를 모두 석만경에게 내준 뒤에 자신은 단기(單騎)로 돌아왔다는 고사를 말한다. 《冷齋夜話 卷10》 소진(蘇秦)의……달랐다 소진은 전국 시대 합종(合從)을 주장하여 육국(六國)의 재상이 되었으나, 한때는 진나라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가죽옷과 황금이 모두 다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오자 형수와 아내가 그를 냉대하였다. 《史記 卷69 蘇秦列傳》 적공(翟公)의……다름 한(漢)나라 때 적공(翟公)이 처음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는 빈객(賓客)들이 문을 메웠는데, 그가 파면되자 문 밖에 새그물을 칠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그러다 뒤에 다시 정위에 임명되자 빈객들이 예전처럼 앞다투어 찾아왔다고 한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후창(後滄) 이 문집의 저자인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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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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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세밑에 열재 어른이 〈노회〉시 세 편을 부치면서 화답을 요구하기에 차운하여 드리다 3수 歲暮悅丈寄《老懷》詩三篇索和 次韻以呈【三首】 때까치 울음소리129)와 게걸음 같은 글씨에 鵙舌之音蟹步書온 세상은 도도하게 취해서 미친 듯하네 滔滔擧世醉狂如백성 죽이고 나라 삼키려 포탄으로 놀라게 하고 鏖民呑國驚彈礮바다에 숨고 하늘 날며 함정과 전차로 위협하네 潛海飛天嚇艇車이미 문명은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하는데 且已文明云莫上윤리에 대해선 어찌 온통 소홀한 것인가 其於倫理柰全疎어느 때나 성인이 나와 사람의 도리를 세워 何時出聖扶人道동서에서 만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으려나 安奠東西萬姓居평생 성인의 글 아닌 건 거들떠보지 않아 不識生平非聖書칠순에도 더욱 돈독하지만 결국 어찌 될꼬 七旬彌篤竟何如책상머리엔 붙어사는 좀 벌레만 볼 뿐 床頭只見親蟫蠹책 속에는 말과 수레를 모을 방법 없다네 卷裏無緣簇馬車천년동안 전수한 것을 실추시킬 수 없어서 千載授傳難棄墜마음을 존양성찰130)하나 허술할까 걱정이네 一心存省恐虛疎난리 땐 군자를 그리워함이 더욱 간절하니 亂時愈切思君子치의131)를 만들어 산촌에 사는 분께 보내려네 願造緇衣送峴居문득 천시를 보니 책력이 다하고 忽見天時盡曆書총총히 가는 세월은 골짜기의 뱀과 같네 光陰遽遽壑蛇如몇 년의 망령된 생각을 세 솥에 늘어놓는데 何年妄想列三鼎지난 자취에 헛된 공은 다섯 수레에 가득찼네 往跡虛功盈五車물을 마셔도 박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는데 飮水非憂生計薄단약 달이며 되레 방술이 소홀할까 두려웠네 煮丹却怕術方疎수답하여 새로 시 지으며 좋은 일 많았으니 奉酬新什多佳況내 몸은 혼자 쓸쓸히 지낸 것이 아니었네 不是吾身在索居 鵙舌之音蟹步書, 滔滔擧世醉狂如.鏖民呑國驚彈礮, 潛海飛天嚇艇車.且已文明云莫上, 其於倫理柰全疎?何時出聖扶人道, 安奠東西萬姓居?不識生平非聖書, 七旬彌篤竟何如?床頭只見親蟫蠹, 卷裏無緣簇馬車.千載授傳難棄墜, 一心存省恐虛疎.亂時愈切思君子, 願造緇衣送峴居.忽見天時盡曆書, 光陰遽遽壑蛇如.何年妄想列三鼎, 往跡虛功盈五車.飮水非憂生計薄, 煮丹却怕術方疎.奉酬新什多佳況, 不是吾身在索居. 때까치 울음소리 듣기가 아주 나쁜 왜가리 소리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남만(南蠻) 지방 사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비유하였다. 맹자가 이르기를 "지금 남만의 왜가리 혀를 놀리는 사람이 주장한 것은 선왕의 도가 아니다.〔今也, 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존양성찰(存養省察) 본성을 함양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악(善惡)의 기미를 살핀다는 뜻이다. 공자는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져 일정한 시간과 방향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마음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하며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를 강조했다. 《孟子 告子上》 또 "숨어 있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것이 없기에 군자는 혼자만 아는 마음을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하였는데, 이는 움직였을 때〔動〕의 성찰 공부를 말한 것이다. 《中庸章句 第1章》 치의(緇衣) 현자(賢者)를 좋아하는 정성을 뜻한다. 《시경》 〈정풍(鄭風)〉의 편명으로, 현자를 좋아하여 검은 옷, 즉 치의를 만들어 주고 음식을 대접한다는 내용을 읊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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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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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자학회안》 서문 資學會案序 옛적에는 15세에 학교에 들어가서 40세에 이르러 벼슬에 나갔는데,152) 그 사이 25년 동안 일신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학교에 의지하였다. 이 때문에 뜻이 정밀해지고, 학업이 온전하여 성취함이 쉬웠다. 그런데 학교의 행정이 폐지되어 거행되지 않게 되면서 선비들이 안심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져 이리저리 의식(衣食)을 꾀하는 데 급급하여 뜻이 나뉘고, 학업이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성취가 있기를 바라고자 한들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우리 마을의 정기현(鄭基鉉)과 김권준(金權俊), 김덕희(金德熙) 세 젊은이들이 약간의 재력을 갹출해 합쳐서 계(契)를 만든 지 이미 몇 년째 되어 가는데, 하루는 나에게 찾아와 계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 젊은이들은 모두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영재들이고, 한창 진보하여 그침이 없는 자들이니, 그 뜻이 반드시 재화를 탐해 이자를 불릴 것을 꾀하고, 또 술과 안주를 마련해서 모여 노니는 즐거움을 위함이 아닐 것이다. 어찌 집안에만 있으면 사세(事勢)와 재력이 혹 미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이 계를 만들어서 서적과 먹 등 학업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원근의 선비들과 종유(從遊)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삼대(三代)153) 시대의 선비를 기르던 규범은 이미 볼 수 없지만, 당시 선비들이 스스로를 위해 도모했던 것도 응당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자학(資學)이라 이름을 짓는 것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있다. 선(善)을 권면하고 인(仁)을 도우며, 충심으로 알려주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줌이 이것이다. 한갓 저것만 도움이 되는 줄 알고, 이것이 도움이 되는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이는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보존하는 것이며, 내면에 소홀하고 외면에 급급해하는 것이니, 이를 더더욱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바라건대, 제군들은 쑥대와 삼대처럼 서로 부축하여 지탱해주고, 옥과 돌처럼 서로 갈고 다듬어 주면서 오래도록 지켜보아 변하지 말고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서 같은 무리의 물고기가 용과 돼지154)로 나뉘게 되는 데 이르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古者十五而入學。至四十而出仕。其間二十五年。一身所須。皆資於學。是以志精業全。易於成就。自學校之政。廢而不擧也。爲士者。無所聊賴。營營衣食。志分業奪。如此而欲望其有成。不亦難乎。吾黨有鄭基鉉金權俊金德熙三少年。出若干力。合而作契。已有年矣。而一日向余。請其所以名之者。余竊覸三少年。皆學文英秀。方進而未己者也。其志必不爲貨利牟殖之計。又爲杯盤遊聚之娛。則豈不以家居事力。或有不逮。故姑爲此擧以爲文墨支用之需。遠近遊從之費耶。三代養士之規。旣不可見。則士之所以自爲謀者。亦不應不如是矣。然則名之以資學。不亦宜乎。然學之所資。有大於此者存焉。責善而輔仁。忠告而善道。是已。徒知彼之爲資。而不知此之爲資可乎。是遺其大而存其小。緩於內而急於外。此尤不可以不知也。願諸君扶持之如蓬麻。琢磨之如玉石。視久勿替。偕之大道。毋使同隊之魚。至有龍猪之分焉。 옛날에는……나갔는데 〈대학장구서〉에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부터 공, 경, 대부, 원사의 적자와 백성들 중에 준수한 사람들이 모두 대학에 입학하여 그들에게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쳤다.[及其十有五年, 則自天子之元子衆子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與凡民之俊秀, 皆入大學,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라고 하였고,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40세가 되면 관직에 나아가고, 70세가 되면 관직에서 물러난다.[四十始仕, 七十致仕.]"라고 하였다. 삼대(三代) 중국 고대시대 때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는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이 다스렸던 하(夏)ㆍ은(殷)ㆍ주(周)를 가리킨다. 용과 돼지 용은 준수한 사람을, 돼지는 노둔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일컬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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