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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豊六年丙辰四月十三日幼學金彩相前明文右明文事下西面吉音洞中麓族大母無后山近䖏右人用山次右山一麓捧價拾兩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某人中若有於左之端則以此憑考事山地主自筆幼學 申泰學[着名]證人幼學 梁檝[着名]〃保人幼學 高君化[着名]〃喪人 賓相鴻[不着]此亦中族叔道相氏用山時叅席幷許給事[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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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五年丙寅五月初三日 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䖏西道秩寬仁堤下惶字沓十七斗四升落只所耕三十八負四束五㐣累年耕食是如可勢不得已価折錢文㱏百肆拾伍兩依數捧上是遣新旧文三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相左則以此文告 官卞正事畓主 李載實[着名]證人 幼學李厚載[着名]筆 幼學金彩三[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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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豊六年丙辰五月二十日李允範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䖏傳來畓西道作中方西坪惶字丁十七斗四升落只所耕㐣折価錢文㱏百肆拾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意本文 丈並以如是新成文爲去乎日後如有紛紜之獘則持此文憑考事畓主 金秉權[着名]證人 朴應元[着名]筆 金采三[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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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道面堂北下里罪人金載相右謹言切迫情由段近來偸葬之習已成痼弊去辛丑年良中奄遭親山之變至于今五年晝夜搜覓尙未捉得而這間再三呈訴則 題音內捉來偸葬者對卞事敎是故搜探四方終無形跡勢將末由前呈所志帖連仰訴爲去乎自官掘移以雪幽明之寃千萬祝手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乙巳十一月 日官[署押](題辭)官掘係是法事初六日[官印][官印][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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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 들어가 읊다 入金剛山吟 삼신산이 해동에 있다고 들었는데 聞說三神在海東이 산의 절승이 그와 같구나 此山絶勝與之同일천 봉우리 하얗게 모여 눈이 덮인 듯 千峯白攢疑封雪일만 폭포 다투어 떠들어 세찬 바람 이네 萬瀑爭喧怒起風금강 개골 풍악 봉래로 때로 번갈아 변하고 剛骨楓萊交幻際유가 선가 도가 불가가 그 중에 왕래하네 儒仙道釋往來中산신령 또한 오늘날의 세태를 알아서 嶽靈亦識今時態공원을 만들어 세계로 통하게 하였네 許作公園世界通 聞說三神在海東, 此山絶勝與之同.千峯白攢疑封雪, 萬瀑爭喧怒起風.剛骨楓萊交幻際, 儒仙道釋往來中.嶽靈亦識今時態, 許作公園世界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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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훈사에서 짓다 題表訓寺 누가 이 절을 창건했는지 誰人創此寺일천 년이나 되었다 하네 云距一千年왕실에서 은사를 내린 것은 恩賜來王室법사들이 변경을 진압해서네 法師鎭徼邊누대는 꿩이 나래를 편 듯하고 樓臺飛翬翼종경소리는 용의 잠을 깨울 듯하네 鍾磬徹龍眠멋진 풍경을 시로 쓰기 어려우니 形勝難題得재주 없어 허연93)에게 부끄럽네 不才愧許燕 誰人創此寺, 云距一千年.恩賜來王室, 法師鎭徼邊.樓臺飛翬翼, 鍾磬徹龍眠.形勝難題得, 不才愧許燕. 허연(許燕) 당 현종(唐玄宗) 때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과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을 병칭한 것이다. 이들은 문장으로 세상에 유명해 당시 사람들이 연허 대수필(燕許大手筆)이라고 일컬었다. 《新唐書 卷125 蘇頲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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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년255) 동지 庚午冬至 살면서 동지를 몇 번 만났나 生逢幾南至만날 때마다 새 시를 지었네 逢輒賦新詩무엇을 하려고 시를 짓는가 賦詩欲何爲천시를 바꾸어 보려 해서지 爲有改天時나라의 운도 사람 일과 함께 邦運與人事하늘과 함께 변해 옮겨가네 與天同推移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에 빌며 虔心禱上天동지의 기약 묵묵히 기다렸지 黙待日至期세월 또한 이미 오래되었건만 歲月亦已久소식은 묘연해 알 길이 없네 消息杳莫知운은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나 運將去不回덕은 어찌 이리도 노쇠했는가 德何老且衰그 시가 도움을 못 주느니 與其詩無益차라리 다시 쓰지 않으리라 寧將不復爲이제부터 더욱 일도 줄어서 從此尤省事산중의 해는 절로 더디겠네 山中日自遲 生逢幾南至, 逢輒賦新詩.賦詩欲何爲, 爲有改天時.邦運與人事, 與天同推移.虔心禱上天, 黙待日至期.歲月亦已久, 消息杳莫知.運將去不回, 德何老且衰.與其詩無益, 寧將不復爲.從此尤省事, 山中日自遲. 경오년 193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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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 大雪 남과 북이며 동쪽 할 것 없이 無南無北復無東희디흰 눈 끝없어 온통 한 색이네 皓皓茫茫一色同무슨 일로 순식간에 별세계 되었나 底事片時成別界문득 태극이 처음 나뉘나 의심하네 却疑太極肇分中푸르고 검은 점점 흔적 어디서 찾나 點痕蒼黑何由覓짐승들 한 마리도 다니지 못하네 隻物翔毛亦不通시인의 기이한 완상거리로 삼지 말고 莫作騷人奇玩賞천지 조화의 공을 알아야 하리라 要知天地造化功 無南無北復無東, 皓皓茫茫一色同.底事片時成別界, 却疑太極肇分中.點痕蒼黑何由覓, 隻物翔毛亦不通.莫作騷人奇玩賞, 要知天地造化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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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인【상린】에게 답함 答尹季仁【相麟】 지난번에 보내주신 편지에 오랫동안 답을 하지 못하였으니 불민함이 많습니다. 봉성(鳳城)에서 돌아온 뒤에 여러 날 동안 정신없이 바빠 잠깐의 틈이나 눈 깜빡할 시절도 없었으니, 그저 스스로 번민할 뿐이었습니다. 심기설(心氣說)에 대해 질문한 것은 마음에 의심스런 점이 있으면 대충 부질없이 넘겨버리지 않음을 볼 수 있었으니, 대단히 축하드릴 만합니다. 대저 김장(金丈)이 말한, '기(氣)는 심(心)에 있다.'는 한 구절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심(心)은 기(氣)로써 말하는 경우가 있고, 이(理)로써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이(理)로써 말한다면 그 본래 그러한 주재(主宰)하는 오묘함이 있으니 진실로 기(氣)를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기(氣)로써 말한다면 다시 어떠한 기(氣)가 기(氣) 안에 있겠습니까? 저는 이(理)가 마음에 갖춰져 있다고는 들었으나, 기(氣)가 심(心)에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계인(季仁)의 말은 병통이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인데 그는, "심(心)이 주재(主宰)하면 기(氣) 또한 따라 속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기(氣)란 어떠한 물건이기에 시절에 따라 따르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떨어지지도 섞이지도 않고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으니, 바로 이(理)와 기(氣)의 경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계인(季仁)은 심(心)과 기(氣)가 서로 섞인다는 실수를 보완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심(心)과 기(氣)를 서로 떨어뜨리는 실수에 빠져버렸으니 그 실수는 같은 것입니다. 덕(德)을 커다란 종에 비유하는 것 또한 그와 나란히 놓을 수 있습니다. 만약 큰 종에 비유한다면 큰 종은 바로 심(心)입니다. 아직 두드리지 않았지만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성(性)입니다.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데, 이것은 정(情)입니다. 두드리는 것은 외물(外物)에 의해 촉발되는 것입니다.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의(意)입니다. 만약 종을 치는 것을 심(心)이라 여긴다면 소리가 나는 것은 기(氣)라 할 수 있는데, 거의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없으니 피차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어떠합니까? 向書久未修答。不敏多矣。自鳳城返後。連日奔忙。無霎隙開睫時節。只庸自悶。所詢心氣說。可見心有所在。不草草浪過。可賀可賀。大抵金丈所謂氣在心中一句。不成說話心有以氣言者。有以理言者。若以理言。則其本然主宰之妙。固已不犯乎氣矣。若以氣言。則更有何氣在乎氣中乎。吾聞理具乎心。未聞氣在乎心者也。且季仁之言。未免有病。其曰心爲主宰。而氣亦隨屬。夫氣是何物。而有隨屬時節耶。不離不雜。不先不後。此理氣之界至也。季仁欲補心氣相雜之失。而反坐心氣相離之失。其失均矣。德哉洪鍾之喩亦左矣。若以洪鍾喩之。洪鍾是心也。未撞聲在。是性也。撞之聲發。是情也。撞之者。是外物觸之也。餘韻延連。是意也。若以撞之者爲心。聲之者爲氣。則殆不成比類。彼此無所據矣。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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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시집》 서문 除夜詩集序 아, 이 책은 고(故) 봉남 처사(鳳南處士) 홍공(洪公)이 종가(宗家)에서 섣달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며 느낀 감회를 읊고, 그 자제와 조카, 손자들이 이어 화답한 것이다.무릇 섣달그믐날 밤은 묵은해와 새해가 서로 갈마들어 사람의 마음에 슬픔과 기쁨이 쉽게 느껴지는 때인데, 공은 기애(耆艾)150)의 나이로 자신의 집에 편안히 앉아 자손들이 장수를 칭송하는 즐거움을 누려도 안 될 것이 없지만, 반드시 종가(宗家)에서 밤을 지새우며 새해를 맞이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다른 날에 비해 배가 되어 마치 선조의 영령이 와 계시는 것처럼 느끼는 마음의 정성을 부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공이 선조를 모셨으니, 자제된 자들이 어찌 부형(父兄)을 모시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서로 선창하고 번갈아 화답하는 것이 화기애애하고 질서정연하였다. 옛사람의 이른바 '즐거운 일[樂事]'이나 '정겨운 대화[情話]'151)라는 것은 단지 평범하고 일시적인 사이의 일일 뿐이니, 어찌 여기에 견줄 수 있겠는가.1년이 지나 2년이 되고, 10년이 지나 20년이 되도록 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랫동안 이러한 관례를 좇아 따르며 바꾸지 않았으니, 그 가문의 법도와 규범을 이로 미루어 대략 알 수 있다. 홍씨(洪氏)에게 앞으로 훌륭한 후손이 있을 것이니, 삼가 이 서문을 써서 책 앞에 뜻을 보인다. 嗚呼。此故鳳南處士洪公。守歲於宗家。有感而作。而其子姪孫所賡和者也。夫歲除。是新舊遞代之交。而人情悲歡易感之時也。公以耆艾之年。便坐私室。以享子孫稱壽之樂。未爲不可。而必於宗家者。豈非慕先之心。有倍他日。而以寓如存之誠耶。公旣侍先祖。則爲子弟者。獨不侍父兄耶。此所以更唱迭和。而和氣融融。等威秩秩。古人所謂樂事情話。特尋常一時間耳。曷足以況此哉。一年而二年。十年而二十年。至公沒之久而遵循不替。其家模門規。推此可槪。洪氏其將有後乎。謹書此以見志於篇端云爾。 기애(耆艾) 노인을 지칭하는 말로, 60세를 기(耆)라 하고, 50세를 애(艾)라 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서 "50을 애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을 기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즐거운……대화 '즐거운 일[樂事]'는 이백(李白)이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복사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동산에 모여 천륜의 즐거운 일을 편다.[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인 듯하고, '정겨운 대화[情話]'는 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친척들과의 정겨운 대화를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근심을 해소한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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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곡사 유지322)에서 여러 선비의 시에 차운하다 次艮谷祠遺址多士韻 옛날 어느 해에 간곡에다 사우를 세웠던가 立祠艮麓昔何年남쪽 고을의 어진 노곡323)을 제향하기 위해서였네 爲有南州老谷賢묘목에 꽃이 피지 않으니324) 성효가 지극하였고 墓木不花誠孝至시옹325)과 덕이 같았으니 학문이 전일했다오 市翁同德學功專희생 올린 제단이 정결하니 선비들이 찾아오고 騂牲壇潔來章甫높이 솟은 홍살문이 우뚝하니 동천이 빛나는구나 紅箭門高耀洞天창의록에 빼어난 공적이 기록되어 있으니 倡義錄中偉然蹟우리 집안 선조326)와 함께 길이 전해지리라 與吾家祖永相傳 立祠艮麓昔何年? 爲有南州老谷賢.墓木不花誠孝至, 市翁同德學功專.騂牲壇潔來章甫, 紅箭門高耀洞天.倡義錄中偉然蹟, 與吾家祖永相傳. 간곡사(艮谷祠) 유지(遺址) 간곡사는 노곡(老谷) 유동수(柳東秀)를 제향하는 간곡서원(艮谷書院)의 사묘(祠廟)이다. 간곡서원은 부여군 임천면 간곡에 유동수를 제향하기 위해 향현사(鄕賢祠)를 창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732년(영조 8) 이 사우(祠宇)를 창의사(倡義祠)라 하였고, 1740년(영조 16)에 강학 장소로 서원을 창건하여 간곡서원이라 하였다. 1868년(고종5)에 조정의 서원훼철령으로 서원을 훼철하고, 단을 놓아 석채로써 구례를 따랐다. 1969년에 유지(遺址)에 사우와 서원을 복원하였다. 노곡(老谷) 유동수(柳東秀, 1579∼1654)로,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수보(秀甫), 호는 노곡이다. 병자년(1636, 인조14)의 호란(胡亂) 때 상주(喪主)의 몸으로 호남에서 의병을 모아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강화조약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고 귀가하였다. 1646년 유탁(柳濯)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산 현감(尼山縣監)으로서 이 사실을 미리 조정에 고발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묘목(墓木)에……않으니 시묘살이 3년 동안 어버이를 그리워하면서 흘리는 피눈물로 인하여 묘목에 꽃이 피지 않은 것이다. 시옹(市翁) 호가 시남(市南)인 유계(兪棨, 1607~1664)를 가리킨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병자호란의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신으로 유배되었다가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우리 집안 선조(先祖) 후창의 10대조인 김정길(金鼎吉, 1576~1645)을 가리킨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여러 동지들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며 청주(淸州)까지 진격하였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두문불출하여 세상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 일이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에 실려 있다고 하였다. 《後滄集 卷16 參奉府君祭壇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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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백형에게 부치다 寄省菴白兄 화문을 함께 나왔으니 우정이 가볍지 않고430) 同出華門誼不輕다시 제영431)을 배워 오래 공경할 수 있었네 更能久敬學齊嬰지난가을 역로에서 날 저문 것을 근심하며 前秋驛路愁天暮밤마다 강가의 정자에서 밝은 달을 보았네 每夜江亭見月明정밀한 식견은 응당 터럭 끝까지 분석하고 精識應臻毫縷析새로운 시는 거의 옥금을 연주하듯 울렸네 新詩幾奏玉金鳴서로 그리워하며 평안하단 소식 알리니 相思爲報平安字매화 대나무 맑은 바람도 똑같은 심정이리 梅竹淸風一樣情 同出華門誼不輕, 更能久敬學齊嬰.前秋驛路愁天暮, 每夜江亭見月明.精識應臻毫縷析, 新詩幾奏玉金鳴.相思爲報平安字, 梅竹淸風一樣情. 화문(華門)을……않고 성암 백형(省菴白兄)이 저자 후창 김택술과 함께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의 동문임을 말한 것이다. 화문은 화도(華島 계화도(繼華島))에 살았던 간재 전우의 문인임을 말한다.의 문하를 말하는데 화도에 간재 가 살았던 곳이다. 제영(齊嬰) 제(齊)나라의 재상 안영(晏嬰)을 말하며, 자는 평중(平仲)이다. 《논어 공야장》에서 공자(孔子)가 그를 칭찬하여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하였다. 오래되어도 공경하는구나.〔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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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경 석주 군에게 주다 贈權君禹卿【錫柱】 성학의 규모로 바른 학맥을 전하고 聖學規模正脈傳의관을 삼가 지키니 그 마음 오롯하네 謹持衣帶厥心專두 소매의 선왕 옷 입은 그대를 흠모하고 欽君雙袖先王服속사의 자리에 무리 지은 저들 부끄러워라 愧彼群居俗士筵언행을 따라가 보면 상투적인 일이 되었으니 從看言行歸一例모름지기 안팎이 온전케 되어야 하네 須將表裏致純然끝을 잘 마무리함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인데 克終最是爲難事엎어진 수레바퀴435)가 어지럽게 내 앞에 있네 覆轍紛紛在我前 聖學規模正脈傳, 謹持衣帶厥心專.欽君雙袖先王服, 愧彼群居俗士筵.從看言行歸一例, 須將表裏致純然.克終最是爲難事, 覆轍紛紛在我前. 엎어진 수레바퀴 원문의 '복철(覆轍)'은 앞사람이 실패한 전례(前例)를 뜻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졌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뒤에 다시 엎어지는 것이다.〔前車覆而後車不誡, 是以後覆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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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록〉을 읽고 감회가 일어 적다 閱奇遇錄有感而記 내가 일찍이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천하의 대성(大聖)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천하의 대현(大賢)을 만나 벗으로 삼아 스승에게 계발을 받고 벗과 강론을 하며 벗과 강론을 하고 스승에게 물어 바로잡았던 것을 생각해보니, 항항 간간(行行侃侃)한 위의(威儀)8)와 절절 시시(切切偲偲)한 즐거움9)이 천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상상이 되어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감흥이 일었다.비록 요(堯)나 순(舜) 같은 군주와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과 같은 무리를 만나 격의 없이 정사를 논하지는10) 못했을지라도 맹자(孟子)가 말한 천하에 왕(王)이 되는 것은 삼락(三樂)에 포함하지 않는 의리11)로 미루어 보자면 경중(輕重)과 저앙(低昂)의 분별은 차라리 저것을 버릴지언정 이것을 잃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천하의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내가 을해년(1875, 고종12), 병자년(1876) 연간에 선생의 문하에서 김경범(金景範)12), 정후윤(鄭厚允)13), 기회일(奇會一)14), 정주윤(鄭周允)을 만났다.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의 은미함으로부터 3백 경례(經禮), 3천 곡례(曲禮)의 다양함에 이르기까지 각기 들은 바를 펼치고 각기 본 바를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물러나서는 사실(私室)에서 강구하고 나아가서는 강석(講席)에서 질정(質正)하며 한 시대의 대현(大賢)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한 시대의 대유(大儒)를 만나 벗으로 삼아 넘치는 훈도(薰陶)를 받고 빠져들고 젖어 들어 옛날과 동떨어진 시기에 사수(洙泗 공자의 문하)의 성대한 법도를 직접 경험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로 천백 세(世)에 걸쳐 겨우 한두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아, 세월이 덧없이 흘러 이제 벌써 17년이 지났다. 선사(先師)께서 이미 타계하시고 김경범도 이어서 세상을 떠나고 남아있는 2~3자(子) 또한 멀리 헤어져 있다. 나 또한 가난과 질병으로 이곳저곳 떠돌아 옛 학문은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고 나이는 이미 늙고 정력은 이미 쇠퇴하였다. 병중에 묵은 종이 더미를 열람하다가 우연히 서문(序文) 1통(通)을 발견하였다. 이를 읽자니 부끄럽고 슬프고 분하여 스스로 제재하지 못하고 삼가 이 글을 지어 뜻을 보인다. 余嘗思孔門諸子。得天下之大聖以爲師。得天下之大賢以爲友。開之於師而講之於友。講之於友而質之於師。行行侃侃之儀。切切偲偲之樂。想像千載之下。不覺感歎而興起也。雖不得唐虞之君與皐夔稷契之徒。都兪吁咈於太虛亭午之日。以孟子所謂王天下不與三樂之義推之。則其輕重低昂之分。寧可遺於彼而不可失於此久矣。然則天下之樂。其有以大於此乎。余於乙亥丙子年間。與金景範鄭厚允奇會一鄭周允。遇於先生之門。自太極性命之微。至三百三千之多。無不各陳所聞。各道所見。退而講之於私室。進而質之於函席。得一世之大賢以爲師。得一世之大儒以爲友。薰蒸洋溢。涵濡浹洽。親見洙泗盛儀於去古己遠之日。此不惟爲此生難再之遇。而實千百世絶無僅有之事也。嗚呼。荏苒日月。已十有七年于玆矣。先師已沒。景範繼逝。其餘二三子。又且離違在遠。余亦貧病流離。舊學未就。年力已替矣。病中偶閱舊紙堆。得所贈序文一通。讀之感愧悲憤。有不自裁者。謹書此而見志焉。 항항 간간(行行侃侃)한 위의(威儀) 제자가 스승을 모시고 있을 때 굳세고 강직한 태도를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옆에서 모시는데 민자건(閔子騫)은 온화하였고, 자로(子路)는 굳세었고, 염유(冉有)와 자공(子貢)은 강직하니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라는 내용이 있다. 절절 시시(切切偲偲)한 즐거움 친구 간에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하고 격려하는 일, 서로 도의(道義)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일을 의미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어떠해야 선비라고 이를 만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며 화락(和樂)하면 선비라 이를 만하다. 붕우(朋友)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며 형제는 화락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격의……논하지는 원문은 '都兪吁咈於太虛亭午之日'이다. '太虛亭午之日'이 문맥에 맞지 않아 이 부분을 생략하고 번역하였다. 천하에……않는 《맹자》 〈진심상(盡心上)〉에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김경범(金景範) 경범은 김석구(金錫龜, 1835~1885)의 자이다. 김석구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경범, 호는 대곡(大谷)으로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맹자(孟子)》에 통달하여 '김맹자(金孟子)'로 불렸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담양군 대전면 대곡리(大谷里)로 이사하였고, 27년간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정후윤(鄭厚允) 후윤은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자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으로, 개화(開化)에 반대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기회일(奇會一) 회일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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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 둔와 박공 묘갈명 通德郞遯窩朴公墓碣銘 숨은 덕행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 가운데 그 공업이 그다지 기이하지 않고 그 명예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선조가 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은 보답이 이따금 후세 자손 사이에 드러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자손을 보고서 그 선조의 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둔와(遯窩) 박공(朴公)은 태어나 많은 일을 당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 마침내 천관산(天冠山)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독서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소요하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하였다. 세상에는 실로 명성(名聲)을 얻지 못했는데도 알려지는 경우가 있으니, 더구나 여기에 나아가 그에 대한 사실이 존재함을 아는 경우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심지어 죽은 뒤에 자손이 더욱더 번성하여 문학과 관직으로 성대함이 뒤따라 우뚝이 남쪽 고을의 명가가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공이 쌓은 공덕의 실상에 탄복하였으니, 단연코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공의 휘는 만윤(萬潤), 자는 중실(仲實)이니, 세계는 밀성(密城)에서 나왔다. 고려(高麗) 때 밀성군(密城君) 휘 언부(彦孚), 은산군(銀山君) 휘 영균(永均), 밀성군(密城君) 휘 천경(天卿),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 문정공(文貞公) 휘 부(敷)는 모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문정공 아우의 셋째 아들은 윤리(允利)인데, 좌찬성(左贊成)으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의 뛰어난 제자이다. 찬성공의 5세손은 계문(啓文)인데,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처음 호남의 장흥(長興)에 거주하였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경립(景立)은 공조 참의이고, 조부 인적(仁績)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며, 부친 세장(世章)은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행주 기씨(幸州奇氏)로, 기수흥(奇壽興)의 따님이다. 영묘(英廟) 경술년(1730, 영조6)에 부(府)의 종정리(鍾亭里) 사제에서 공을 낳았고, 정묘(正廟) 신축년(1781, 정조5) 1월 20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남하면(南下面) 동촌(洞村) 뒤 술좌(戌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분성 김씨(盆城金氏) 김덕해(金德海)의 따님이다. 모두 아들 셋을 두었으니, 이형(履亨), 이중(履重), 이덕(履德)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현손(玄孫) 희원(凞元)이 내가 교유한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그 종제 희준(凞俊)을 보내 묘갈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름다운 나무는 뿌리 감추고210) 嘉木晦根좋은 옥은 광채 품고 있네. 良玉蘊光음덕에 대한 보답으로 不食之報후손이 번창하리라. 後錄彌昌 人有隱德而不需於世者。其功業不甚奇也。其聲稱不甚異也。而積累不食之報。往往發見於後嗣子孫之間。是以。觀乎子孫而其先德可知也。遯窩朴公。生丁多故。備經百艱。遂入天冠山中。杜門讀書。敎授生徒。婆娑徜徉。聊以卒世。世固有不得其名而知之。況進於此而識其實之所存哉。至於身後而螽斯椒聊。愈益蕃衍。文學科宦。從以蔚興。偉然爲南州之名家。於是而人服公積累之實。斷斷有不可誣者矣。公諱萬潤。字仲實。系出密城。麗朝密城君諱彦孚。銀山君諱永均。密城君諱天卿。入我朝。文貞公諱敷。皆其顯祖也。文貞弟三子曰允利。左贊成。佔畢齋金先生高弟。贊成五世孫曰啓文。軍資監正。始居湖之長興。卽公之高祖也。曾祖景立。工曹參議。祖仁績。漢城左尹。考世章。同中樞。妣貞夫人幸州奇氏壽興女。英廟庚戊。公生于府之鍾亭里第。正廟辛丑正月二十日考終。葬南下面洞村後戌坐原。配盆城金氏德海女。擧三男曰履亨履重履德。孫以下不能盡錄。玄孫凞元。以余有游從之舊。伻其從弟凞俊。謁碣銘之文。不敢辭。銘曰。嘉木晦根。良玉蘊光。不食之報。後錄彌昌。 아름다운……감추고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가 주희의 자(字)를 원회(元晦)라 지어 주며 남긴 축사에 "나무는 뿌리를 감추어야 봄의 자태가 찬란히 펴지고, 사람은 몸을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찐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고 하였다. 《屛山集 卷6 字朱熹祝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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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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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행 전라도좌우후 조공 묘갈명 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墓碣銘 아, 이곳은 고(故) 가선대부 행 전라도 좌우후 조공 휘 종성(鍾成), 자 문익(文益), 호 해은(海隱)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공은 태어나서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양친을 효성으로 섬겨 구체(口體)의 봉양과 심지(心志)의 봉양을 위해서는 힘을 다해 주선해서 다 갖추어 드렸다. 병을 간호할 적에는 지극히 근심하여 팔을 휘저으며 걷지 않고, 웃을 때 잇몸을 드러내지 않았으며,211)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병세에 대한 차도를 알아보았다. 이에 효성이 하늘에 감응하여 산 꿩이 뜰에 떨어지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거의 목숨을 해칠 정도였고, 부친과 모친상에 모두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향리에서 안타까워하여 지속적으로 천거하였다.집안이 본래 너무나 가난하였는데, 공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재물을 모아 집안 살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친족과 이웃의 가난하고 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끼는 바가 없어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11월 8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이다. 정해년(1887, 고종24)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경인년(1890)에 6품으로 올랐으며, 계사년(1893)에 전라도 좌우후(全羅道左虞侯)에 제수되고, 이해 가을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임인년(1902)에 가선대부에 올랐다. 관직에 있을 적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며, 힘써 폐단을 제거하였으니, 집집마다 칭송하여 갈수록 더욱 자자해졌다. 병오년(1906) 12월 28일에 집에서 별세하였으며, 현(縣)의 입암리(笠巖里)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조씨(趙氏)의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고려(高麗)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휘 지수(之壽)가 시조이다.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휘 온(溫)이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참봉에 추증된 휘 사보(士普)이고, 조부는 휘 참봉에 추증된 휘 제채(濟采)이며, 부친은 공조 참판에 추증된 휘 인경(仁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선산(善山) 임씨(林氏)로, 임상원(林相原)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원도(李源道)의 따님이다. 공은 연안 차씨(延安車氏) 윤백(允伯)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 3녀를 두었으니, 기원(基元)은 전서(典書), 용원(龍元)은 주사(主事)이다. 사과(司果)인 경주(慶州) 김원영(金元永), 사과인 경주 김기활(金琪活), 임천(利川) 서선재(徐善才)가 사위이다. 장자의 아들은 병연(炳燕), 차자의 아들은 병선(炳善)이다.기원이 족인(族人) 병두(炳斗)를 보내 묘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되지 않아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술하여 명을 짓는다.입암의 기슭에 笠巖之麓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네. 有崇四尺효자가 묻혔으니 孝子之藏현인의 유택일세. 賢人攸宅지나는 사람 가리키고 行路指點초동이 공경할 줄 아네. 樵牧知敬봄가을로 제수 올리니 春秋苾芬자손들이 한없이 번성하네. 子孫繩繩 嗚呼。此故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諱鍾成。字文益。號海隱衣履攸藏也。公生有至性。孝事兩親。凡口體之奉。心志之養。周旋竭蹶。無不畢給。侍疾致憂。不翔不矧。嘗糞甛苦。以試差劇。孝感攸至。至有山雉下庭。執喪過毁。幾於傷生。居盧墓側。前後六年。鄕里感傷。剡薦相續。家素貧甚。公勤儉積累。以起産業。然於族戚隣里周窮恤匱之節。無所係吝。各得其心。純廟庚寅十一月初八日。卽其寅降也。丁亥除禁府都事。庚寅陞六品。癸已拜全羅道左虞侯。秋陞通政。壬寅陞嘉善。其在官。愛民施惠。務祛敝瘼。家稱戶頌。久愈藉藉。丙午十二月二十八日考終于居第。葬縣之笠巖里亥坐原。趙氏本漢陽人。麗朝僉議中書事諱之壽爲始祖。漢川府院君良節公諱溫。其中系顯祖也。曾祖贈參奉諱士普。祖贈參奉諱濟采。考贈工曹參判諱仁敬。妣貞夫人善山林氏相原女。系妣貞夫人全州李氏源道女。公娶延安車氏允伯女。擧二男三女。曰基元典書。曰龍元主事。曰慶州金元永司果。曰慶州金琪浩司果。曰利川徐善才。長房男炳燕。次房男炳善也。基元伻其族人炳斗。來謁隧道之文。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狀而纂次之如右云爾。銘曰。笠巖之麓。有崇四尺。孝子之藏。賢人攸宅。行路指點。樵牧知敬。春秋芯芬。子孫繩繩。 팔을……않았으며 《소학》 〈명륜(明倫)〉에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장성한 아들은 머리를 빗지 않으며, 다닐 때 팔을 벌리고 흔들어 대면서 활기차게 걷지 않으며,……웃되 잇몸이 보이도록 크게 웃지 않는다.[父母有疾, 冠者不櫛, 行不翔,……笑不至矧.]"라는 내용이 보인다. 본래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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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 손공 묘갈명 石南孫公墓碣銘 공의 휘는 처상(處祥), 자는 사은(士隱), 호는 석남(石南)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는데, 다. 신라(新羅)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어졌다. 조선에 들어와 휘 책(策)이 있었으니,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현손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제학을 지냈다.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은거하였는데, 공에게는 10대조가 된다. 고조는 휘 시웅(始雄)으로, 동지중추부사이고, 증조는 휘 흥신(興新)으로, 부호군(副護軍)이다. 조부는 휘 덕효(德孝)로, 진사이고, 부친은 휘 몽두(夢斗)이다.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시규(文始奎)의 따님인데,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공은 을축년(1805, 순조5) 3월 1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기개가 빼어나고 도량이 넓었다. 서당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번거롭게 훈장(訓長)이 감독하지 않아도 대여섯 번 이상을 송독(誦讀)하였다.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글과 글씨는 보는 자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길 정도의 수준이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고 힘써 농사지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나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일하고 남은 힘이 있거나 고 한가한 날이면 두 아우와 함께 방을 쓸고 책상을 맞대어 토론하고 송독하였는데 공부하는 데 확실하게 과정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 대인(大人)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대부분 부모를 영화롭게 하려는 계책이다. '나는 네가 나를 잘 봉양하는 것만 말할 뿐이지, 네가 나를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옛사람이 자식에게 경계한 말이 아니더냐.205)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 또한 그러하니, 너희도 더 이상 서로 경쟁하는 곳에 마음을 허비하지 말라."라고 하니, 공이 마침내 문을 닫고 장막을 드리운 채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수신(修身)을 위한 학문을 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하며 연구하여 체득하고 실천함에 서로 그 힘을 쏟아 날로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배위(配位)는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유광인(柳光仁)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느 날 공이 병환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유씨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노친을 잘 봉양하며 어린아이들을 잘 키우고, 내가 죽는 것을 한스러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기절하였다. 유씨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공의 입에 흘려 넣어 소생하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졸하였다. 유씨는 뒤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전혀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극구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노친(老親)이 살아 계시고 아이들이 품 안에 있는데 다만 부군(父君)께서 임종 때 한 말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유씨가 멍하니 한숨을 쉬고 말하기를 "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부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 마침내 일어났다. 장례를 치른 뒤에 부지런히 집안 살림을 꾸리며 정성을 다해 시어른을 봉양하니, 향리에서 칭찬하여 효열부(孝烈婦)라고 일컬었다. 향리에서 추천하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공의 묘소는 호암면(虎巖面) 우비등(牛鼻嶝) 계좌(癸坐) 언덕에 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부군을 따라 죽으려 한 뜻에 따라 합장하였다. 인용(麟鏞)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는데 군수를 지냈다. 손자는 참의관(參議官) 영렬(永烈), 진사인 영하(永夏), 그리고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영렬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천하고 용렬한 데다 병으로 문장 짓는 것을 폐하여 감히 청에 응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지만 예전부터 서로 두터운 우의가 있었기에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 쌓고 의로움 행하였지만 積善行義오히려 덕을 감추었네. 尙絅晦根그 보답 누리지 않고 不食厥報후손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효자의 덕행 잘 전해주니 錫類式穀후손의 복 창성하리라 後祿以昌문암에 있는 무덤에 門巖斧堂해마다 늘 제향 올리네 歲事有常 公諱處祥。字士隱。號石南。孫氏系出密陽。自羅至麗。奕葉相承。入我朝。有諱策。文科。官牧使。至玄孫諱比長。文科官弘文提學。燕山朝。退休于扶安葛村。於公爲十世祖也。高祖諱始雄。同中樞。曾祖諱興新。副護軍。祖諱德孝。進士。考諱夢斗。妣南平文氏始奎女。壺儀備至。公以乙丑三月一日生。天稟醇厚。氣宇秀爽。就塾上學。不煩提督。而誦數甚勤。綴文揮毫。文與筆。見者驚異之。家貧甚。躬耕力穡以供菽水。以餘力暇日。與其二弟。掃室連榻。講討誦習。的有程曆。累中鄕解。輒屈禮部。其大人戒之曰。人之赴擧。多爲榮親計也。吾謂汝以善養。不謂汝以祿養。此非古人戒子語耶。吾之所望於汝者亦然。汝亦勿復費心於紛竸之間也。公遂杜門下帷。專心爲己。存養硏究。體認踐履。交致其力。日就邃密。配高興柳氏光仁女。閫範無闕。一日公屬疾幾危。顧柳氏曰。善養老親。善育稚孩。我死無恨。言訖而絶。柳氏血指注口。得甦數頃而卒。柳氏誓以下從。絶不飮食。家衆防之甚力。且曰。老親在堂。稚孩在懷。獨不念夫君臨沒之言乎。柳氏曠然太息曰。與其遂吾之志。不若遂夫之志也。遂起焉。視奠之餘。勤理家務。備盡忠養之節。隣里歎賞。稱以孝烈婦。鄕道剡報。續續不絶。公墓在虎巖面牛鼻嶝癸坐原。夫人之沒。從下從之意。爲之合封焉。有一男曰麟鏞。官郡守。孫男曰永烈。議官。曰永夏。進士。曰永吉。曰永鎭。曰永實。曾孫以下不盡錄。永烈抱家狀。請爲碣銘之文。余以淺劣。病廢鉛槧。其不敢承膺久矣。而在平昔相厚之義。有不忍終辭。銘曰。積善行義。尙絅晦根。不食厥報。垂裕後昆。錫類式穀。後祿以昌。門巖斧堂。歲事有常。 나는……아니더냐 정이(程頤)가 문인인 윤돈(尹焞)에게 "그대는 노모가 계시니, 과거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윤돈이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그의 어머니는 "나는 네가 잘 봉양하는 것만 알지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吾知汝以善養, 不知汝以祿養.]" 하였다. 이후 윤돈은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宋史 道學列傳 尹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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