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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안에게 부치다 寄汝安 사람들은 분수에 편안함이 좋다고 하지만 人言安分好일에 임해서는 말과 같지 않다네 臨事不如言낭당286)에 이르게 된 뒤에야 及到郞當後분수가 편안할 수 있음을 깊이 안다네 深知分可安백 번 참으며 가법을 보호해도 百忍保家法옛날에는 미진하다고 여겼네 昔謂未盡焉참는 것을 오히려 지금은 볼 수 없으니 忍猶今未見비로소 옛사람이 어렵게 여김을 알겠네 始識古人難을 집에 바둑 두는 사람은 어두웠으나 乙家當局暗태수가 곁에서 볼 땐 분명했네287) 太守傍觀淸얻기 어렵고 구하기 쉬운 이치는 難得易求理정녕 천명을 따르면 밝아지리라 定從天命明마음 알아주는 천륜의 친속은 知心天屬親예로부터 흔히 볼 수 없었네 從古不多覿쉬운 듯하나 도리어 어려우니 似易還復難궁구해도 얻지 못함을 늘 탄식하네 長嘆莫究得내가 들으니 필부의 뜻은 我聞匹夫志분육288)도 빼앗을 수 없다 하네 賁育莫能奪궁귀289) 때문에 바뀌었다면 如爲窮鬼移그 뜻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其志安足說옳고 그름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니 無是非非人원래 잠시도 버리는 것이 아니라네 元非暫棄者회우290)가 변고도 많은 날에 晦尤多故日육윤291)을 버렸다는 말 듣지 못했네 陸尹未聞舍큰 죄를 지으면 서로 버릴 수 있으나 大故可相棄놓아준다면 악역292)이라 말하리라 釋之謂惡逆이는 영원히 막아 끊을 일은 아니니 非玆永阻絶너무 각박한 것이 아니겠는가 無乃太爲刻 人言安分好, 臨事不如言.及到郞當後, 深知分可安.百忍保家法, 昔謂未盡焉.忍猶今未見, 始識古人難.乙家當局暗, 太守傍觀淸.難得易求理, 定從天命明.知心天屬親, 從古不多覿.似易還復難, 長嘆莫究得.我聞匹夫志, 賁育莫能奪.如爲窮鬼移, 其志安足說?無是非非人, 元非暫棄者.晦、尤多故日, 陸、尹未聞舍.大故可相棄, 釋之謂惡逆.非玆永阻絶, 無乃太爲刻. 낭당(郞當) 죄인을 묶는 쇠사슬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자기 논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한 채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승자박의 상태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낭당(鋃鐺)'이라고도 한다. 을(乙)……분명했네 옛 속어에, "곁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은 세심하고, 직접 바둑을 두는 사람은 판단이 헷갈리게 된다.〔傍觀者審, 當局者迷.〕"라는 말이 있다. 분육(賁育) 전국(戰國) 시대 제(齊)나라의 용사인 맹분(孟賁)과 주(周)나라의 역사(力士)인 하육(夏育)의 병칭이다. 맹분은 맨손으로 쇠뿔을 뽑았고, 하육은 천균(千鈞)의 무게를 들어 올렸다고 한다. 한(漢)나라의 충신 급암(汲黯)의 절의(節義)를 칭송하면서 "스스로 분육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뜻을 뺏을 수 없을 것이다.[雖自謂賁育, 弗能奪也.]"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汲黯傳》 궁귀(窮鬼)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송궁문(送窮文)에서 지궁(智窮)ㆍ학궁(學窮)ㆍ문궁(文窮)ㆍ명궁(命窮)ㆍ교궁(交窮)의 다섯 궁귀(窮鬼)를 내쫓으려다가 포기하고 그들을 상좌(上座)에 앉혔다는 말이 있다. 《古文眞寶 後集 送窮文》 회우(晦尤) 회암(晦菴) 주희(朱熹)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육윤(陸尹) 육상산(陸象山, 1139~1192)과 윤증(尹拯, 1629~1714)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육상산은 남송의 유학자 육구연(陸九淵)이다. 호는 존재(存齋) 또는 상산이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관직에 올랐지만 곧 물러나 귀계(貴溪)의 상산에 강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주자(朱子)와 대립하여 전체를 양분하는 학문적 세력을 형성했지만, 사상적 계보로는 모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학문을 계승했다. 저서에 어록과 서간, 문집을 수록한 《상산선생전집》이 있다. 윤증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ㆍ유봉(酉峯),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윤증(尹拯)이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을 스승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이 윤선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묘갈명을 소홀하게 지은 일로 인하여 스승과의 사이가 벌어져서 종국에는 배사(背師)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서인(西人)이 송시열을 두둔하는 노론과 윤증을 두둔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어 싸우게 되었다. 악역(惡逆) 부모 또는 조부모 등을 구타하거나 죽인 죄로, 《대명률(大明律)》에 정한 열 가지 큰 죄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죄이다. 열 가지 큰 죄는 모반(謀反)ㆍ모대역(謀大逆)ㆍ모반(謀叛)ㆍ악역(惡逆)ㆍ부도(不道)ㆍ대불경(大不敬)ㆍ불효(不孝)ㆍ불목(不睦)ㆍ불의(不義)ㆍ내란(內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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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실의 자에 대한 설 朴元實字說 정(鼎)이라는 그릇은, 귀[耳]는 양의(兩儀 음양(陰陽))를 본뜨고 발[足]은 삼덕(三德)132)을 본떴으며 몸체는 오행(五行)을 두루 갖추고 담긴 물건은 구주(九州)에 응하고 바탕은 금옥(金玉)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의리는 화덕(火德)과 풍덕(風德)을 나타낸다. 성인(聖人)이 만들고 종자(宗子)가 주관하니, 이것은 그릇 가운데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안에 채우고 있는 것이 조강(糟糠 지게미나 쌀겨), 소려(蔬糲 궂은쌀로 지은 밥) 같이 추잡하고 열악한 물건이라면 저구(苴屨 풀로 엮은 신발)에 장보(章甫)를 갖추고 토우(土偶 흙으로 빚은 인형)에 화려한 예복(禮服)을 입히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모름지기 명자(明粢)와 향기(香萁)133)로 밥을 짓고 양[柔毛]과 돼지[剛鬣]로 음식을 마련하고 다섯 가지 훈채(葷菜)와 여덟 가지의 조리법으로 맛을 조절한 다음에야 《주역(周易)》에 나오는 "정(鼎)에 음식이 담겨있다."134)는 뜻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상(法象)을 갖춘 지극히 귀한 기물(器物)에 이렇게 진귀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음식을 담으면 장차 천신 지기(天神地祇)에게 바치고 종묘에 제사를 지내 상제(上帝)와 선왕(先王)을 흠향하며, 흠향하여 드신 뒤의 은택이 천하에 미치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주역》에서 "정(鼎)에 음식이 담겨있다."라는 말 다음에 "가는 곳을 삼가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 까닭이다.아, 사람의 몸은 정(鼎)이라는 기물이며 도덕과 재업(才業)은 그 내용물이며, 군주의 신임을 얻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히는 것은 가는 곳이다. 박군(朴君)은 그것을 아는가? 박군 정현(朴君鼎鉉)이 원실(元實)을 자(字)로 삼았으니 그 뜻을 대체로 여기에서 취하였지만 나아가는 곳을 삼가는 뜻에 대해서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삼가 이 내용을 적어 보충한다. 힘쓰거라! 鼎之爲器也。耳象兩儀。足象三德。體周五行。物應九州。質具金玉。義著火風。聖人制之。宗子主之。此器之貴重者也。然其實於中者。若有糟糠蔬糲鹿雜劣惡之物。則其不類於章甫之苴屨。華袞之土偶乎。須以明粢香萁。供其炊爨。柔毛剛鬣。具其烹飪。五葷八珍。調其旨否。然後可以副羲經鼎有實之義也。以此法象至貴之器。具此珍重至美之饍。則將以薦之郊社。奠之宗廟。以享上帝先王。而其餕餘之澤。足以及於天下矣。此羲經所以鼎有實之下。有愼所之之語也。嗚呼。人之身。其鼎器也。道德才業。有其實也。得君澤民。其所之也。朴君知之乎。朴君鼎鉉表德以元實。其意蓋取諸此。而於愼所之之義有不及。故謹書此以足之。勉旃勉旃。 삼덕(三德) 정직(正直), 강극(剛克), 유극(柔克)을 이른다. 《서경》 〈홍범(洪範)〉에 "삼덕은 첫 번째는 정직함이요, 두 번째는 강으로 다스림이요, 세 번째는 유로 다스림이다."라고 하였는데, 채침(蔡沈)의 주(註)에 "강극(剛克)과 유극(柔克)은 위엄을 보이고 복을 주며, 주고 빼앗으며, 억제하고 드날리며, 올리고 물리치는 쓰임이다."라고 하였다. 명자(明粢)와 향기(香萁) 명자(明粢)는 종묘(宗廟)의 제사에 바치는 깨끗한 기장이고, 향기(香萁)는 제사에 쓰이는 기장이다. 《禮記 曲禮 下》 《周禮 春官 大祝》 정(鼎)에 음식이 담겨있다 《주역》 정괘(鼎卦) 구이(九二)의 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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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경의 자에 대한 설 鄭元卿字說 원(元)은 모든 선(善) 가운데 으뜸이다.124) 하늘에 있어서는 큰 시작의 뜻[義]이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온전히 하는 덕이다. 이것은 모든 변화의 중심이고 만물의 시초이며 무극(無極)의 은미함에 근원을 두고 천지 사이를 가득 채우고 마음의 은밀한 곳에 쌓여서 사물의 밖에 드러난다. 공자(孔子)가 이른 천지의 큰 덕125)이고 맹자(孟子)가 이른 하늘의 높은 작위이며 사람의 편안한 집126)이다. 책을 읽고 경적(經籍)을 연찬(硏鑽)하는 것은 이 이치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고, 놓친 마음을 수습하고 마음을 일깨우는 것은 이 마음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이치가 분명하면 취사(取捨)가 어긋나지 않고 마음이 보존되면 운용(運用)이 어지럽지 않다. 오랜 시일에 걸쳐 익숙해지고 중간에 끊이는 일이 없다면 하늘이 부여한 큰 덕과 높은 지위가 나에게 다시 온전할 수 있다.정군 현춘(鄭君鉉春) 원경(元卿)은 애산옹(艾山翁 정재규(鄭載圭))의 맏아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초례(醮禮)를 치르고 이름을 지을 때 '춘(春)' 자로 이름을 정하고 '원(元)' 자로 자(字)를 지은 것은 커다란 의리(義理)와 커다란 부담을 자신의 임무로 책임 지우고자 함이었다. 무궁한 애정과 면려의 뜻이 참으로 이와 같았다. 내가 비록 불초(不肖)하더라도 또한 그의 아버지와 벗인 사람이다. 연연(戀戀)하는 정이 아들을 보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유독 그 뜻을 밝혀주어 만에 하나라도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경은 밤낮으로 경계(警戒)하여 명명(命名)한 이 뜻을 저버리지 말라. 元者善之長也。在天爲大始之義在人爲全心之德。此是萬化之機軸。品彙之權輿。原乎無極之微。而塞乎天地之間。蘊乎方寸之密。而著乎事物之表。孔子所謂天地之大德。孟子所謂天之尊爵。人之安宅。讀書窮經。所以明此理也。收放喚惺。所以存此心也。理明而取舍不差。心存而運用不亂。久久積習。無容間斷。則天之所以賦畀者。大德尊爵。可以復全於我矣。鄭君鉉春元卿。艾山翁主器也。竊念其設醮而肇錫也。名之以春。字之以元。使大義理大擔負。責之爲己任。其無窮愛勉之意。固應如此。余雖無似。亦其父友之一也。戀戀視猶之地。獨不爲之發明其義以爲萬一之助乎。惟元卿夙夜惕厲。毋負此命名之義焉。 원(元)은……으뜸이다 《주역(周易)》 〈건괘 문언(乾卦文言)〉에 나오는 말이다. 천지의 대덕(大德)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지위라 한다."라고 하였다. 하늘의……편안한 집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인은 하늘의 높은 작위이고 사람의 편안한 집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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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寅二月 日 金載相 城主 壬寅二月 日 1842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6.5*6.5(정방형) 적색 3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2년(헌종 8) 2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재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42년(헌종 8) 2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재상(金載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김재상은 일도면 중방리(中方里)의 서쪽 기슭에 친산(親山)이 있어서 여러 해 동안 관리해 왔으며, 이곳에 다른 사람이 무덤을 쓴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바로 지난 해 12월에 그 친산의 섬돌 바로 아래 쪽에 누군가가 밤을 틈타 몰래 투장을 하고는 소나무와 향목을 마구 베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김재상은 밤낮으로 투장자를 물색하였지만 그 종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관에 소지를 올려 부디 관에서 투총을 파내어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안현감은 투장자를 잡아오면 대질 심문하겠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김재상은 그 뒤에도 같은 내용의 소지를 올렸으나 관으로부터 관굴(官掘)은 법에 저촉된다는 제사를 받았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임인년으로만 적혀 있으나, 다행히도 김재상이 여러 차례 시장(柴場)을 사면서 받은 명문(明文)들이 전하고 있어서 이를 토대로 위의 임인년을 1842년으로 추정하였다. (1815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1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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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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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扶安一道面堂北下里化民金載相右謹言至寃情由段近來偸葬者雖云許多而豈有甚於如此拶逼者乎民之先山在於中方里西麓累世繼葬守護矣今月初旬間不知何許人乘夜偸葬於民之親山階砌下不容尺之地而斫伐香木與播松豈有如此切迫者乎民罔夜搜探是乎矣永無形迹故不獲已掘漑計料以待偸葬者之自現緣由仰訴 處分行下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兼城主 處分辛丑十二月 日官(署押)(題辭)塚主搜覓以待本官還衙更訴事二十七日[官印][官印][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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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김채상(金彩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亥二月 日 金彩相 城主 辛亥二月 日 1851 金彩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6.5*6.5(정방형) 적색 3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51년(철종 2) 2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채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51년(철종 2) 2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채상(金彩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그는 지난달 우산내면(右山內面) 서두리(西斗里)의 뒷산 기슭을 같은 면에 사는 최흥득(崔興得)으로부터 매입하였다. 그리고 소지를 올린 바로 오늘, 김채상이 산일을 하러 개토(開土)한 곳에 가 보니, 하서면(下西面) 해창리(海倉里)에 사는 김봉관(金奉寬)이란 자가 장정들과 부녀자들까지 포함하여 수십 명을 데리고 무덤을 쓰지 못하게 막고 식주인(食主人)까지 두들겨 패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김재상은 관련 수표(手標)를 첨부하여 관에 소지를 올려, 차사(差使)를 보내 이같은 폐단을 막고 산일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관에서는 이에 대하여 최흥덕이 판 산의 경계와 김봉관이 산일을 막은 까닭을 적간(摘奸)하고 측량하여 그림을 그려서 보고하라고 면임(面任)과 동임(洞任)에게 지시하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신해년으로만 적혀 있으나, 다행히도 김채상이 '崇禎後丁卯', 즉 1867년(고종 4)에 최생원댁(崔生員宅)에 보낸 혼서(婚書)가 전하고 있어서 이를 토대로 위의 신해년을 1851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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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에 있던 날 여중이 찾아와 함께 얘기하다 2수 臺巖日, 汝重來訪共話【二首】 산에 깃든 손님 걸상이 먼지에 묻힌 지 오래인데 棲山客榻久埋塵친한 벗이 멀리서 나루를 건너오니 반가워라 却喜親朋遠涉津온갖 생각이 무엇인들 몸 밖의 물건 아니겠나 萬想孰非身外物백 년 인생에 뜻 맞는 사람을 얻기가 어렵네 百年難得意中人남국에 한 해가 저무니 함께 늙음을 재촉하고 歲闌南國同催老중천386)에서 양기가 움직이면 또 봄을 보리라 陽動重泉又見春무엇보다 서로 진보하는 것이 급한 일이니 最是相長爲急務회포가 있으면 곧장 자주 만나야만 하리라 有懷卽可盍簪頻분분한 세상길은 풍진 속에 어둑하고 紛紛世路暗風塵일렁이는 근심은 언덕 나루에 아득하네 漾漾憂情杳岸津쟁기 들었으나 어찌 밭가는 자와 같으랴 耒耟寧同偶耕者의관 갖춰도 독서인이 되기는 어렵다네 衣冠難作讀書人돈이 없어도 강가의 달을 살 수 있지만 乏錢猶買江頭月달력 없으면 어찌 산골의 봄을 알겠는가 無曆何知峽裏春속마음 얘기 못다 하고 그대가 또 떠나니 未了話心君又去초산 동쪽의 운수387)가 자주 눈에 들어오네 楚東雲樹入眸頻 棲山客榻久埋塵, 却喜親朋遠涉津.萬想孰非身外物? 百年難得意中人.歲闌南國同催老, 陽動重泉又見春.最是相長爲急務, 有懷卽可盍簪頻.紛紛世路暗風塵, 漾漾憂情杳岸津.耒耟寧同偶耕者, 衣冠難作讀書人.乏錢猶買江頭月, 無曆何知峽裏春?未了話心君又去, 楚東雲樹入眸頻. 중천(重泉) 땅 속의 깊은 곳을 이르는 말이다. 운수(雲樹)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에 "위수 북쪽엔 봄 하늘의 나무요, 강 동쪽엔 해 저문 구름이로다. 어느 때나 한 동이 술을 두고서 우리 함께 글을 자세히 논해 볼까?〔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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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에 유감이 있어 6수 除夜有恨【六首】 젊었을 때 시서를 읽어 뜻을 세움이 높아 少讀詩書立志高힘써 성현을 기약하며 노고를 사양치 않았네 勉期賢聖不辭勞무딘 자질로 쇠 녹이기 어렵다는 걸 누가 알랴 孰知頑質難融鐵작은 사욕을 칼로 끊어내지 못해 더욱 탄식하네 更歎纖私未斷刀슬픈 마음에 평소 허물과 후회만 쌓여가고 心悼平生尤悔積오묘한 도에 미혹 당해도 시종일관 조리있네 見迷妙道始終條올해 또 헛되이 세월이 지나가니 今年又是虛過矣쉰세 살의 나이가 내일 아침이로세 五十三齡在翌朝의로운 가르침으로 당년에 높이 출세했으니 義敎當年出世高두터운 은혜는 구로에 있을 뿐만 아니네 厚恩不但在劬勞지금까지 기대를 짊어져 옥처럼 만들었는데341) 迨玆負望成如玉지난날 부모상에 애통함은 칼로 베는 듯했네 念昔丁憂痛割刀행장은 겨우 이루어졌으나 정본이 더디고 實狀纔成遲定本무덤342)에 안장하니 막막하여 조리가 없었네 佳城永厝漠無條올해도 또 헛되이 세월이 지나가니 今年又是虛過矣밤새도록 잠 못 들어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네 竟夜難眠坐待朝생업을 패망시켰으니 죄가 높다고 말하지만 敗殘産業罪云高부친 조부가 집터 잡은 것도 이미 수고로웠네 父祖基廬亦旣勞모욕 당함은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쓴 것과 같고 見侮羞如蒙穢物상심하고 애통함은 예리한 칼로 자른 듯했네 傷心痛若刺銛刀새로 도모해 어찌 이전의 기량을 완전케 하겠는가마는 圖新那得完前器뿌리 북돋아주면 끝내 가지가 멀리 뻗음을 보리라 培本終看達遠條세상은 어지럽고 도가 궁해졌을 뿐이니 世亂道窮而已矣거의 깜깜한 밤에 맑은 아침을 기다리는 것과 같네 殆同黑夜望淸朝백년토록 우러러 볼 높은 구산343)이여 百年仰止臼山高모함을 밝게 배척하느라 노고를 꺼리지 않았네 明斥陰誣不憚勞근본을 어지럽혔다고 어찌 서책을 불태우랴 亂本那將書付火손수 쓴 원고를 목판에 새기지 못해 유감이네 手稿恨未梓刋刀일찍이 경서를 해설하니 근본과 말단을 알겠고 曾經說去知源委많은 변론을 편찬하니 줄기와 가지를 보겠네 衆辨編來見幹條또 이렇게 올해도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又是今年虛度矣이런 일이 없었다면 분명 맑은 조정이 되었으리 有無此事了淸朝사람의 집에서 높은 집안의 명성을 얻으려고 人家欲得家聲高자손을 착하게 가르치며344) 사랑으로 위로했네 式穀兒孫用愛勞예교의 남은 풍도는 쓸모없는 것345) 되었고 禮敎遺風歸土苴이익에 끌리는 말속은 사소한 것346)도 다투네 利拏末俗競錐刀만약 초학자가 그 뿌리를 배양하지 않는다면 如無初學培其本어찌 앞으로 그 가지가 뻗어가기를 바라겠는가 那望前頭達厥條이런 일은 지금과 같이 할 따름이니 此事如今而已矣한갓 삼대 성왕의 조정을 그리워할 뿐이네 徒思三代聖王朝큰 내는 어디에 있으며 또 산은 높은가 大川何處又山高중국의 장대한 경관은 노고 잊게 할 만하네 壯觀中州可忘勞신령함이 모인 노추347)는 성현의 집이요 靈萃魯鄒賢聖宅푸른 놀이 낀 연조348)는 협객들의 칼이네 霞靑燕趙俠流刀안목이 넓어지면 글은 기세가 창대해지고 藉寬眼孔文昌氣인정에 두루 통하면 이치에 조리가 있네 傍達人情理有條이제 그만이로다 때가 다르고 길은 험난하니 時異路難今已矣공연히 늘어난 흰 귀밑머리만 내일아침에 보겠네 空添雪鬢見明朝 少讀詩書立志高, 勉期賢聖不辭勞.孰知頑質難融鐵? 更歎纖私未斷刀.心悼平生尤悔積, 見迷妙道始終條.今年又是虛過矣, 五十三齡在翌朝.義敎當年出世高, 厚恩不但在劬勞.迨玆負望成如玉, 念昔丁憂痛割刀.實狀纔成遲定本, 佳城永厝漠無條.今年又是虛過矣, 竟夜難眠坐待朝.敗殘産業罪云高, 父祖基廬亦旣勞.見侮羞如蒙穢物, 傷心痛若刺銛刀.圖新那得完前器? 培本終看達遠條.世亂道窮而已矣, 殆同黑夜望淸朝.百年仰止臼山高, 明斥陰誣不憚勞.亂本那將書付火? 手稿恨未梓刋刀.曾經說去知源委, 衆辨編來見幹條.又是今年虛度矣, 有無此事了淸朝.人家欲得家聲高, 式穀兒孫用愛勞.禮敎遺風歸土苴, 利拏末俗競錐刀.如無初學培其本, 那望前頭達厥條?此事如今而已矣, 徒思三代聖王朝.大川何處又山高? 壯觀中州可忘勞.靈萃魯、鄒賢聖宅, 霞靑燕、趙俠流刀.藉寬眼孔文昌氣, 傍達人情理有條.時異路難今已矣, 空添雪鬢見明朝. 옥(玉)처럼 만들었고 온갖 역경을 겪음으로 인하여 훌륭한 인격을 이루게 됨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가난하고 천함과 근심 걱정은 너를 옥처럼 갈고 닦아서 훌륭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는 말이 나온다. 무덤 원문의 '가성(佳城)'은 무덤을 뜻한다. 한(漢)나라 등공(滕公)이 말을 타고 가다가 동도문(東都門) 밖에 이르자 말이 울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발로 오랫동안 땅을 굴렀다. 사졸(士卒)을 시켜 땅을 파 보니 깊이 석 자쯤 들어간 곳에 석곽(石槨)이 있고, 거기에 "가성(佳城)이 울울(鬱鬱)하니, 삼천 년 만에야 해를 보도다. 아! 등공이여, 이 실(室)에 거처하리라." 하는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등공이 죽은 뒤에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西京雜記 卷4》 구산(臼山)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별호이다. 착하게 가르치며 원문의 '식곡(式穀)'은 자식을 착한 데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시경》 〈소완(小宛)〉에 "언덕 가운데의 콩을 서민들이 거두어 가는 것처럼, 명령의 새끼를 과라가 업어 데리고 가서 키우니, 그대도 아들을 잘 가르쳐서, 좋은 방향으로 닮도록 하라.[中原有菽, 庶民采之, 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하였다. 쓸모없는 것 원문의 '토저(土苴)'는 오물과 풀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쓸모없는 사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참된 도로 몸을 다스리고, 그 나머지로 국가를 다스리고, 그 찌꺼기로 천하를 다스린다.[道之眞以治身, 其緒餘以爲國家, 其土苴以治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사소한 것 원문의 '추도(錐刀)'는 작은 칼의 뾰족한 끝으로, 장부(帳簿)를 기재할 때 사용하는 도필(刀筆)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자잘한 이익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노추(魯鄒) 추로(鄒魯)로도 많이 쓰이는데 노(魯)나라는 공자(孔子)의 고국이고, 추읍(鄒邑)은 맹자(孟子)의 고향이므로 대개 공자와 맹자를 뜻한다. 연조(燕趙) 전국 시대의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로, 예로부터 비분강개하는 호걸들이 많이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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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필암서원360)에서 청음361)과 석주362)의 시에 차운하다 2수 筆巖書院次淸陰、石洲韻【二首】 정조는 밝은 군주의 큰 선생인데 正廟明君大老師자운과 함께 만났으니 어찌 그리 기이한가 子雲幷遇一何奇선생은 당시에 참으로 의리가 정밀했으니 先生當日眞精義저를 대장부라 말하기 어려우나 도는 알만하네 難語夫夫可道知도가 동방에 온 지 천 년에 선생이 태어나 道東千載降先生더욱 호남의 색채가 선명해졌네 尤是湖南色彩明출처363)는 이미 못 자를듯한 엄정한 의리였고 出處已嚴斬釘義문장은 다시 쇠를 던지는 소리364)가 있었네 文章更有擲金聲우뚝한 필암서원을 높은 산처럼 우러르는데 筆巖院屹高山仰맥동365)의 빈 터도 명승지로 전해졌네 麥洞墟傳勝地名오늘 와서 우러러 공경할 뿐만 아니라 非但今來瞻敬已간절하게 옛사람의 마음을 배우려 하네 區區欲學古人情 正廟明君大老師, 子雲幷遇一何奇?先生當日眞精義, 難語夫夫可道知.道東千載降先生, 尤是湖南色彩明.出處己嚴斬釘義, 文章更有擲金聲.筆巖院屹高山仰, 麥洞墟傳勝地名.非但今來瞻敬已, 區區欲學古人情. 필암서원(筆巖書院)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서원으로, 1590년(선조23)에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에 중건하였으며, 1662(현종3)에 사액을 받았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다른 호는 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낙향하였으며, 1640년(인조18)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만에 풀려났다. 대표적인 척화신(斥和臣)으로, 관직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저서에 《청음집(淸陰集)》이 있다.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이다. 정철의 문인으로, 제술관(製述官) 등을 역임하였다. 임숙영(任叔英)이 책문(策文)에서 유희분(柳希奮) 등을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하였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해남(海南)으로 귀양 가다가 죽었다. 저서에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있다. 출처(出處) 행장(行藏)와 같은 말로, 도를 펼 만하면 나아가 벼슬하고 그렇지 않으면 초야에 은둔하는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의 "쓰이게 되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게 되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쇠를 던지는 소리 원문의 '척금성(擲金聲)'은 척지금성(擲地金聲)의 줄인 말로, 매우 뛰어난 문장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의 문장가인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은 뒤에 친구인 범영기(范榮期)에게 "그대는 시험 삼아 이 부(賦)를 땅에 던져 보게나, 의당 금석 소리가 날 것일세.[卿試擲地, 當作金石聲.]"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56 孫綽列傳》 맥동(麥洞) 전남 장성군(長城郡) 황룡면(黃龍面)에 있는 마을로, 김인후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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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형【치운】에게 답함 答鄭士亨【治運】 '큰 허물을 없앨 수 있으련만【無大過】'89)이라는 말과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았네【不貳過】'90)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는 성인(聖人)이 스스로 겸손하게 여긴 말씀이고, 하나는 안자(顔子)께서 나아간 공이니 어찌 나란히 하여 같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밥은 정(精)한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食不厭精】'91)라는 것은 입을 즐겁게 하고 배를 채우려는 욕망을 극도로 추구한 것이 아닙니다. 호학(狐狢)의 갗옷92)은 가볍고 따뜻한 아름다움을 극도로 추구한 것이 아닙니다. 술은 한량하지 않고 마신다【惟酒無量】93)는 것은 술을 탐하도록 좋아하여 매우 심하게 취함을 이르는 것이 아니니 우(禹) 임금이 거친 음식을 먹고, 나쁜 의복과 나쁜 음식을 먹고 입은 것과 같은 종류와 어찌 서로 다르겠습니까?'마을에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답다.【里仁爲美】'94)라고 한 것은 군자(君子)가 거처하는 영원한 법칙입니다. '공자께서 구이에 살려고 하셨다.【欲居九夷】'95)는 것은 성인(聖人)이 세상을 근심한 통달한 권도(權道)입니다. 앞의 몇 가지 조목의 설에서 묻기를 좋아하는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억지로 밀거나 이끌고자 하는 병통이 없습니다. 이것은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 생각한다【切問近思】는 것에 있어서 다소 부족함이 없지는 않을 듯합니다. 대저 성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면 자연스럽게 의문점이 생기게 되니, 굳이 지엽적인 구두(句讀)에 견강부회하여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에 대해 나란히 견주는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無大過。不貳過。一則聖人謙己之言。一則顔子所造之功。豈可比而同之耶。食不厭精。非極口腹之欲。狐狢之裘。非極輕煖之美。惟酒無量。非耽嗜沈醉之謂。則與禹菲飮惡衣惡旨之類。有何相違背耶。里仁爲美。君子居身之常法。欲居九夷。聖人憂世之達權。數條說。可見好問之意。然或不無强排牽引之病。此於切問近思。恐不無少遜矣。大抵誠心爲學。則自然有疑。不必傳會於句讀之末。而爲此比竝對較於別無義味之地耳。如何如何。 큰 허물을 없앨 수 있으련만【無大過】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나에게 몇 년 더 수명을 허락하여 끝내 역을 배울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큰 허물을 없앨 수 있으련만.【假我數年, 卒以學易, 可以無大過矣.】"라고 하였다.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았네【不貳過】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오는 말로, "안회라는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더니,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라고 하였다. 밥은 정(精)한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食不厭精】 《논어》 〈향당(鄕黨)〉에 나오는 말로, "밥은 정(正)한 것을 싫어하지 않고, 회(膾)는 가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食不厭精, 膾不厭細.】"라고 하였다. 호학(狐狢)의 갗옷 여우와 오소리의 가죽으로 만든 고급 옷을 가리킨다. 술은 한량하지 않고 마신다【惟酒無量】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나오는 말로, "술은 한량하지 않고 마시되, 뜻을 어지럽히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하였다.【惟酒無量, 不及亂.】"라고 하였다. 마을에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답다.【里仁爲美】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로, 인후한 풍속을 지닌 마을을 골라 살겠다는 것이다. "마을에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다우니, 인후한 마을을 가려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구이에 살려고 하셨다.【欲居九夷】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로, "공자께서 구이에 살려고 하시니, 혹자가 말하기를, "그곳은 누추하니, 어떻게 하시렵니까?"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가 거처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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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장【황】에게 답함 答徐聖章【璜】 학문의 도는 아는 것【知】와 행하는 것【行】 두 가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그것을 행할 수 없으므로, 학문은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窮理】을 우선으로 삼습니다.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방법도 역시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니, 모든 천지의 만물과 고금의 사변 등, 내가 깊이 연구해서 지극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근한 것을 먼저 깊이 연구한 이후에 원대한 것에 이르고, 쉬운 것을 먼저 깊이 연구한 이후에 어려운 것에 이르는 것이 학문의 절도입니다. 청소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 앉고 눕고 가고 걷는 것, 신심(身心)과 성정(性情), 인륜과 일상생활의 사이에서부터 먼저 하나하나 음미하고 찾아내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어서 그만둘 수 없는 것과 그렇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이어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보고, 오늘 한 건을 깊이 연구하고 내일 한 건을 깊이 연구하며 나날이 이같이 해서 혹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서로 이어서 유추하게 되고 미묘한 것도 환하지 않음이 없어져 저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독서 역시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만약 《대학(大學)》을 읽으면, 먼저 성인이 대학을 지은 뜻이 무엇이고, 또 대인(大人)의 학문이 무엇이며, 명덕(明德)이 무엇이고, 신민(新民)이 무엇인지를 구해야 합니다. 한 글자마다 한 글자의 뜻을 구하고 한 구절마다 한 구절의 뜻을 구해서, 모두 아주 분명하게 해서 털끝만큼이라도 남은 의심이 없기를 구해야 하는데, 이것을 궁리(窮理)라고 합니다. 만약 마음에서 증험하고 몸에서 체득해서, 성현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고 성현의 행동을 자기의 행동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앎과 행동이 서로 융합되었을 때 체득하는 것에서 말하였으니, 오로지 궁리(窮理)에만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敬)과 존심(存心)은 두 항목의 일이 아닙니다. 경은 곧 보존하는 것이고 보존하는 것은 곧 이 경을 보존하는 것이니, 지극히 정미한 것에 처해서, 절대 조장(助長)하는 데 마음을 쏟아서 병폐가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자(程子)는 "앎을 지극히 하고서도 경(敬)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 않다.【未有致知而不在敬】"라고 하였으니, 경이 아니면 마음을 보존할 수 없고 마음을 보존하지 않으면 이치를 궁리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하는 것이니, 이치를 궁구하는 것【窮理】의 선후로써 논할 수 없습니다. 또 존양(存養)109)을 존심(存心)이라고 하면 괜찮지만, 성찰(省察)을 궁리(窮理)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성찰(省察)은 방미(防微)110)와 지기(知幾)111)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서 '단정하게 앉아 몸가짐을 추스른다.【端坐斂形】'라고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 씀씀이가 너무 지나쳐, 혹 천태산(天台山)에 은거한 사마승정(司馬承禎)을 좌치(坐馳)112)라고 비난한 일을 겪게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113) 따라서 단지 하루 12시간에 항상 상제(上帝)를 마주하고 큰 손님을 만나듯이 해서, 절대로 조금의 게으름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받들고 다른 사람을 대접하거나 만물의 변화에 순응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기만하거나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일이 없이, 진심을 쌓고 성실함을 길러서 천리(天理)와 분수(分數)로 하여금 날마다 기르고 길러 주(主)가 되게 하고 내재할 수 있게 한 이후에야 여기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낸 편지에서, 덕(德)을 이룬 이후의 일로 여긴 것은, 적절한 듯합니다. 그러나 어찌 덕을 이룬 이후의 일이라는 것에 핑계를 대고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경(敬)은 주일(主一)의 뜻이니, 초학자로서 오래도록 마음대로 한 상태에서 갑자기 주일하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사물의 드러난 자취에서 일정한 규율을 먼저 정해서, 이 일을 마주할 때는 다른 일이 있는 줄 모르고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다른 책인 있는 줄 모르며 이 이치를 깊이 연구할 때는 다른 이치가 있는 줄 모르게 해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면 점차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 문하의 가장 중요한 도리이니 힘쓰고 힘쓰기를 바랍니다.보낸 편지에서, 모두 스스로 내면에서 제재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자신의 사욕을 알아서 금지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앞뒤를 바꿔 말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천하의 일은, 그것이 천리가 되고 그것이 인욕이 되는 줄 안 이후에 극기복례의 일을 착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먼저 제재한 이후에 그것이 사욕인 줄 알겠습니까? 또 수응(酬應)하는 곳에는 매번 후회와 의혹이 많은 것은, 이 일이 오기 전에 생각이 어지러워서 초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억지로 굽히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식이 점차로 열리고 실천이 점차 확고해지면 자연히 매우 타당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함양(涵養)의 묘법은, 굳게 지키고 오랫동안 쌓아서 정신으로 융회하고 마음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니, 말로써 지도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일이 없을 때 생각이 삼대처럼 가득하면 가장 가라앉히기 어려우니,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손님을 하는 가운데 성실함을 기르고 진심을 쌓아서 차례대로 힘써 나갈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정심장(正心章)에 대해 말한 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착한 행동을 하라【遷善】'라는 것을 설명할 때 먼저 '허물을 고쳐라.【改過】'라고 하였고 '성실함을 보존하라【存誠】'라는 것을 설명할 때 먼저 '사악함을 막아라.【閑邪】'라고 하였으며 '예를 회복하라【復禮】'라고 설명할 때 먼저 '자신의 사욕을 이겨라.【克己】'라고 하였습니다.《맹자》 「고자 상」에서 '잡으면 보존된다.【操則存】'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나는 인심의 변화는 헤아릴 수 없이 오묘하다고 여긴 적이 있으나, 음양의 변화가 어떻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인(聖人)과 평범한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찌 단지 성인의 마음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겠습니까?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방법【窮理之方】은 진실로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따라 깊이 연구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특별한 하나의 일을 일으켜서 깊이 연구하기도 하니, 어찌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선후와 완급의 차례는 없어서는 안 됩니다.정자(程子)가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라고 하면 적절하지 않다. 다만 망령되이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면 적절하다."라고 하였으니, 보낸 편지에서 이른바 '다만 사악한 마음을 막아라.【但防邪意】'라고 한 것도 또한 이 뜻일 것입니다.독서할 때 틈틈이 휴양하는 것은, 단지 다른 생각을 그만두게 할 뿐만 아니라 근본을 배양하고 근원을 깨끗하게 하니, 진실로 마땅히 이와같이 해야 합니다. 夫學問之道。是知行二端而已。然不知則無以行之。故學以窮理爲先也。窮理亦非一端。凡天地萬物。古今事變。無非吾窮格處。然先近而及遠。先易而及難。此其節度也。自灑掃應對。坐臥行步。身心性情。人倫日用之間。先須一一玩索。見其所當然而不容已。與其所以然而不可易。今日格一件。明日格一件。日日如此。無客間斷則推類相次。無微不徹。而自當脫然矣。讀書亦窮理之一端。如讀大學。則先求聖人所以作大學之意是如何。且大人之學是如何。明德是如何。新民是如何。一字求一字之義。一句求一句之義。皆要了了分明。無毫髮餘疑。此之謂窮理也。若其驗之於心。體之於身以聖賢之心爲己心。以聖賢之行爲己行。此是知行交際體認上說。非可以專屬於窮理也。敬與存心。非兩項事。敬便存存便存。此處極精微。最不可着意助長以生病敗也。程子曰。未有致知而不在敬者。非敬無以存心。非存心無以窮理。存心是徹頭徹尾底。不可以窮理先後論也。且以存養謂存心則可。以省察謂窮理則不可。省察是防微知幾底說也。端坐斂形不思不語之云。非不好矣而但恐用心太過。或致天台山人坐馳之譏也。但一日十二時。常常如對上帝。如見大賓。母或有一毫怠慢。至於奉親接人。應物處事之間。無有自欺自斂之端。積眞養誠。使天理分數。日以長長。足以爲主爲內而後。可以得力於此矣。來喩以爲成德以後之事者。得矣。然豈可諉諸成德而不之自求乎。但敬是主一之義也。初學其在放心之久。猝難主一。先於事物粗迹上。先定劃一規矩應此事時。不知有他事。讀此書時。不知有他書。窮此理時。不知有他理。久久不已。且將漸次得力矣。此是聖門第一義。勉之勉之。示喩以爲皆得自內制之然後。知其私欲而禁之。此是倒說。夫天下事。知其爲天理。知其爲人欲而後。可下克復之功。豈有先制之而後。知其私欲者哉。又曰酬應處。每多悔惑。是事來前思慮紛紜之致也。此說固然。然思慮强伏不得。惟是知識漸開。踐履漸固。則自然見得妥帖矣。涵養之妙。持守積累。自當神會心得。非言說所可指授。無事時。思慮如麻。最難按伏。不如就日用應接上。養誠積眞。次第得力去。正心章云云。固然。故聖人說遷善。先言改過。說存誠先言閑邪。說復禮。先言克己。操則存云云。愚嘗以爲人心變化不測之妙。未嘗言陰陽變化云云矣。凡言聖人凡人之心如此。豈但指聖人之心而言者耶。窮理之方。固非一端。或隨其思慮之所起而窮之。或別起一事而窮之。何妨也。但其先後緩急之序。則不可無也。程子曰。謂之無思慮則不可。但無妄思可矣。來喩所謂但防邪意者。亦此義耶。讀書時。間間休養。非特爲要息外念。培本淸源。固當如此。大抵激勵奮發。勿使少有怠緩而後可。不然畵脂鏤氷。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심(本心)을 보존하고 본성(本性)을 기른다는 뜻이다. 《맹자》 「진심 상」에 "본심을 보존하고 본성(本性)을 배양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방미(防微) 잘못이나 나쁜 일을 경미할 때 막는 것이다. 지기(知幾) 일의 기미를 알아채는 것이다. 좌치(坐馳)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지만 잡념이 끊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혹 …… 두렵습니다 사마승정(司馬承禎, 643~735)은 당나라 현종ㆍ예종 때의 도사(道士)로서, 자는 자미(紫微)이고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다. 천태산에 은거해,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 도와 일체가 된 정신세계를 추구한다는 내용의 《좌망론(坐忘論)》 등을 지었는데, 정자(程子)는 "이것이 바로 좌치(坐馳)이다."라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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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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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채와유고》65) 서문 咬菜窩遺稿序 내가 젊었을 때에 무사재(無邪齋) 박(朴) 어른66)을 따라 공부를 하면서 교채와(咬菜窩) 선생의 경학(經學)과 행의(行義)가 우뚝하여 남쪽 지방에서 신망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나중에 선생이 편찬한 《심경(心經)》67)과 붉은 점으로 선별한 주해(註解)를 얻어 읽고 그 박식함과 정밀함이 사문(斯文)을 도울 수 있었음에 감탄하였다. 그 뒤로 또 중화(中和)와 비은(費隱) 등의 설(說)을 얻어 읽어 보니, 그 변석(辨析)과 발휘(發揮)가 공정하고 합당하여 당시 유가(儒家)의 주기(主氣)에 대한 비난을 배척할 수 있었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당시 뜻과 진실로 부합하였다.일찍이 근세(近世) 이후로 정자와 주자의 강토(疆土)를 지켜 구물(舊物)을 잃지 않은 사람은 오직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와 벽계(蘗溪 이항로(李恒老)) 두 사람뿐이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언론과 견해가 나와 약속하지도 않았음에도 합치되는 것이 이와 같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 선생에 대한 말을 들은 것이 이르지 않다고 이를 수 없고, 선생을 안 것도 늦지 않다고 이를 수 없으니, 산두(山斗)68)를 추억함에 어찌 미칠 수 없는 한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선생의 손자 학69)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함께 늙어가면서 끊임없이 서로 따르며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유고(遺稿)를 받들고 와서 외람되게도 현안(玄晏)70)을 부탁하였다. 내가 하찮은 식견으로 감히 그 부탁을 받들어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본디 알고 있었지만, 삼가 전후로 내가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한 이유를 서술하여 옛사람이 책심(責沈)한 뜻71)에 견주어본다. 余少從無邪齋朴丈遊。聞咬菜窩先生經學行義。偉然爲南服之望者久矣。最後得先生所撰心經及朱選註解。讀之歎其博洽精詳。足以羽翼斯文。最後又得中和費隱等說。讀之其辨析發揮。稱停的當。有以斥時儒主氣之非。而允合乎程朱當日之旨。嘗以爲近世以來。守程朱疆土而不失舊物者。惟蘆沙蘗溪兩先生而已。誰知先生言論見解。不約而合。有如是耶。嗚呼。聞先生不可謂不早。而知先生亦不可謂不晩矣。追想山斗。易勝靡逮之恨。先生孫壆。白首同衰。源源相從。一日奉遺稿。猥有玄晏之託。余以淺末。固知不敢承膺。而謹述前後鄙懷之所以慕仰愈至者。以擬古人責沈之意云爾。 교채와유고(咬菜窩遺稿) 조선 후기의 학자 민백우(閔百우(火+右), 1779∼1851)의 시ㆍ서(書)ㆍ제문ㆍ잡저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권두에 정의림(鄭義林)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증손 민영래(閔泳來)의 발문이 있다. 불분권 1책이고, 목활자본이다. 무사재(無邪齋) 박(朴) 어른 박영주(朴永柱, ?~?)로, 무사재는 그의 호이다. 정의림((鄭義林)이 어렸을 때 그에게서 사서를 배웠다고 한다. 심경(心經) 민백우가 《심경》에 대한 제가의 해설을 모은 《심경집해(心經集解)》를 말하는 것으로, 1888년에 민백우의 손자 민영래(閔泳來)에 의해 간행된 주석서이다. 권두에 기정진(奇正鎭)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안수록(安壽祿)ㆍ김문옥(金文鈺)의 발문이 있다. 4권 3책. 목판본이다. 산두(山斗) 태산북두(泰山北斗)의 준말로, 세상 사람들이 흠앙(欽仰)하는 훌륭한 사람을 비유한다. 《신당서(新唐書)》 권176 〈한유열전(韓愈列傳)〉에서 그에 대한 찬(贊)에 "한유가 작고한 뒤 그의 말이 크게 행해져,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받들었다.[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학 한자 표기는 土+學이다. 현안(玄晏)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號)로, 당시 좌사(左思)가 10년 동안의 구상을 거쳐 〈삼도부(三都賦)〉를 짓고, 황보밀이 서문을 써서 이를 크게 칭찬하자 부자와 귀족들이 서로 다투어 베끼는 바람에 낙양의 종이 값이 일시에 폭등하였다는 고사로 인해 후대에 훌륭한 글의 서문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晋書 卷92 文苑列傳 左思》 책심(責沈)한 뜻 당시의 현자(賢者)를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책하는 것을 뜻한다. 송(宋)나라 때 학자인 진관(陳瓘)이 당시의 명현(名賢)이었던 정호(程顥)를 알아보지 못하고 범조우(范祖禹)에게 물은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서 춘추 시대 섭공(葉公) 심저량(沈諸梁)이 공자가 어떤 분임을 모르고 자로(子路)에게 묻자 자로가 대꾸하지 않았던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고사에 의거하여 심저량을 책망하는 뜻으로 책심문(責沈文)을 지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書言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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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유고》 서문 芝南遺稿序 이 책은 고(故) 처사(處士) 지남공(池南公)의 유고(遺稿)이다.84) 공은 일찍부터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뜻을 품었으나 끝내 그럴 기회를 만나지 못하자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학을 궁구하여 의로운 행실이 드높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10여 년 뒤에 맏아들 승우(承愚)85)가 유묵(遺墨)을 수습해 적은 분량의 책을 만들고서 아우 승일(承一)을 보내 욕되게도 나에게 현안(玄晏 서문)을 부탁하였다.아, 부모님이 직접 심고 가꾸어 손때가 묻어 있는 뽕나무와 가래나무조차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사용하여 입 기운이 남아있는 그릇과 잔으로는 물도 마시지 않는데, 하물며 이 유고는 부친의 정신과 마음이 담겨있고, 생각과 가르침이 남아있는 것이니, 효성스럽고 자애로운 자손이 진귀한 보물처럼 보호하고 소장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어버이를 여의고 외롭게 지내면서 음성과 모습이 더욱 멀어진 날에 미칠 수 없는 부모에 대한 끝없는 슬픔을 위로하고, 마치 보이는 듯, 살아계시는 듯 느껴지는 정을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있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이 사당에 어버이의 글을 소장하고, 제사에 어버이의 가르침을 진설했던 것이 이런 뜻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이 유고는 권질(卷帙)이 간략하여 번다하지 않고, 문체가 질박하여 화려하지 않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말과 뜻은 진실한 마음에서 편편이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단지 한 집안의 자손들만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는 바탕이 될 뿐만이 아니니, 돌아가서 사우(士友)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此故處士芝南李公遺稿也。公夙抱經濟。終不見遇。而白首窮經。行義偉然。及其歿而後十餘年。胤子承愚。收拾遺墨。爲若干編。伻其弟承一。辱有玄晏之托。嗚呼。桑梓手澤之所經。而不敢慢焉。杯圈口澤之所存。而不能飮焉。況此精神心術之所寓。謨訓之所貽。而孝子慈孫寶護珍藏之心。爲何如耶。在風樹孤露。音容愈遠之日。所以慰靡逮網極之痛。而寓如見如在之情者。不可謂不在於此矣。古人之廟藏其書。祭設其訓。非此意耶。然是稿也。卷帙簡而不繁。文體質而不華。其立言命意。無非自赤際中片片出來。不但爲一家子孫寓慕之資而已。歸而與士友共之也。 이…… 유고(遺稿)이다 처사(處士) 지남공(池南公)은 이지호(李贄鎬, 1836~1892)로, 지남은 그의 호이다. 광주 이씨이고, 자는 동현(東賢)이며,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 유고(遺稿)는 《지남집(芝南集)》을 말한다. 서문은 정의림(鄭義林)이 썼고, 발문은 윤자현(尹滋鉉)과 정시림(鄭時林)이 썼다. 아들 승우(承愚)가 1967년에 간행하였다. 11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활자본이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http : //gjsgcc.or.kr 검색일 : 2022. 3. 7.》 승우(承愚) 1855~1919. 화순 출신으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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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재유고》 서문 無邪齋遺稿序 군자의 도는 진실로 두 가지로 귀결됨이 없지만, 일에 드러난 것은 각각 다른 점이 있으니, 만약 성공과 실패로 그 자질을 논하고, 출세와 침체로 그 덕을 논한다면 어찌 사람을 아는 것이라 하겠는가.우리 선생의 도덕과 조예는 진실로 후학들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예를 들면 뜻을 지킴이 확고한 것과 품고 있는 식견이 해박한 것, 행실이 독실한 것들은 근래에 찾아보아도 실로 드물게 보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먼 시골구석에서 나고 자라서 지방 수령이 천거를 할 수 없었고, 재상이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선생의 도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한 이유이다.여항(閭巷)의 선비들은 선생의 학문을 별개의 일처럼 여긴데다 또 사모할 만한 명성이 없다고 여겼으니, 어느 누가 기꺼이 좋아하는 바를 버리고 이처럼 쓸쓸한 사람을 따르려 했겠는가. 이것이 선생의 도가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한 이유이다.세 아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두 손자는 어린 고아로 흩어져서 타향을 떠돌아 다녔기에 계승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선생의 도가 집안에 전해지지 못한 이유이다.도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람에게 전해 주고, 사람에게 전해지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집안에 전해주는데,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여 시종 들려오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선생같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변고에 처한 한때의 운수뿐만 아니라, 험난한 일신의 운명도 여지가 없었다. 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살아서는 의로운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의로운 귀신이 될 뿐이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성내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면서 항상 여유가 있었던 이유이다.선생(先生)의 글은 담담하여 화려하지도 않았고, 졸렬하여 꾸밈도 없었다. 평소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일찍이 남을 위해 붓을 잡지 않았고, 혹시라도 서술할 글이 있으면 곧바로 산묵(散墨 자잘한 시문)을 던져주며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이 서술한 글에 갖추어져 있으니, 많이 지으면 군더더기가 되고, 잘못 지으면 어질러놓음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글이 남에게 전해져 암송되는 것이 매우 적었다.선생의 도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못했고, 또 글로 전해진 것도 없으니, 백세 뒤에 어느 누가 백세 전에 선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나 천하의 만물은 무릇 동류끼리 모두 서로 비슷하니, 무너지지 않는 산악에서 선생의 기상을 볼 수 있고, 마르지 않는 강물과 바다에서 선생의 도량을 볼 수 있으며, 길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서 선생의 지조와 절개를 볼 수 있고, 가없는 바람과 달빛에서 선생의 감회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의 도가 비록 한때에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천지 사이에 보존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아, 오늘날 이 책을 편집한 것은 선생의 뜻이 아니고, 또 후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산묵(散墨) 사이에 드문드문 있는 것이 비록 열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후세 사람으로서 어찌 사라지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내가 우매하여 참으로 그 사이에서 손을 댈 수 없지만, 문하의 반열에 있기에 그 책임을 사양하지 못했고, 게다가 그럴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문류(門類)를 나누어 정하고, 두 편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안목이 있는 자가 더욱더 바르게 해주기를 기다린다. 선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유고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옛사람이고, 도는 옛날의 도이지만, 그 기상과 위의(威儀)는 천지 사이에 있는 정기(正氣)가 모두 이것이라 하겠다. 君子之道。固無二致。而其所以見諸事業者。各有不同。若以成敗論其材。升沈論其德。則豈所以知人者哉。我先生道德造詣。固非後學所可擬測。而見於外者。如持守之堅確。抱負之該洽。操履之篤實。求之近古。實所罕見。然生長遐隅。剌史不能薦。宰相不知名。此先生之道。所以不行於世也。閭巷士子。視先生之學如別件事業。而又無聲勢之可以艶慕者。則孰肯捨所好而從此寥寥哉。此先生之道。所以不傳於人也。三郞繼逝。兩孫藐孤。分散流寓。繼述無聞。此先生之道。所以不傳於家也。不行於世者。必有傳於人。不傳於人者。必有傳於家。而彼此不遇。終始無聞者。其孰先生若也。不惟一時氣數之變。而一身命道之險。亦無餘地矣。先生嘗曰。生則爲義人。死則爲義鬼。如斯而已。復何恤焉。此其所以不慍不悔。而常有餘裕者也。先生之文。淡而不華。拙而不巧。平素非不得已。未嘗爲人下筆。或有所述。輒投諸散墨曰。古人之述備矣。多則剩。失則亂。是以其文字之傳誦於人者。絶少焉。先生之道。旣不傳於人。而又不有傳於文字者。則百世之下。誰知有先生於百世之上乎。然天下之物。凡同類者。擧相似。喬嶽不頹。可見先生之氣象。河海不渴。可見先生之宇量。松柏長春。可見先生之志節。風月無邊。可見先生之衿懷。然則先生之道。雖不顯於一時。而其存於天地之間者。豈有窮已哉。嗚呼。今日之編輯是書者。非先生之意。又非所以見知於來後也。特其零星於散墨之間者。雖十不一存。而爲後人者。豈可任其泯滅乎。余以愚昧。誠不足下手於其間。在門下之列。而不辭其責者。又無其人。故謹爲之分定門類。錄爲二篇。以竢後人有眼者。更加正焉。至於欲知先生者。則不必求於此。人則古之人。道則古之道。其氣象威儀。則正氣之在天地之間者。皆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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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회안》 서문 詠歸會案序 삼대(三代)72) 때 교화를 일으킨 실마리는 반드시 고을에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다섯 명씩 백성을 묶고, 아홉 등분씩 정전(井田)을 나누어 화합하고 함께 살면서 떠돌지 않게 하였고, 통속(統屬)하고 유지하여 혼란스럽지 않게 하였다. 집안에는 부형의 가르침이 있었고, 마을에는 삼노(三老)73)의 훈육이 있었으며, 학교에는 스승과 동학(同學)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골목에는 출입하는 벗들이 있었으며, 들에는 지키고 망보는 도움이 있었고, 향촌에는 양노(養老)와 양현(養賢), 삼물(三物)과 팔법(八法)74)이 있었으니, 무릇 출입하고 기거하는 것과 가고 머무는 것, 말하고 침묵하는 것 등이 애초부터 하루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풍속이 아름답고, 어진 인재가 많았으니, 후세에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아, 시대가 멀어지고 사람이 없어지면서 유풍(遺風)이 땅을 쓴 듯 사라져 고을과 마을 사이에 은덕(恩德)과 정의(情誼)가 서로 이어지지 않고, 권면과 경계가 서로 미치지 못하여 일반 사람들은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고, 선비들은 학문을 사사롭게 여겨 이단(異端)의 말과 행위가 끝없이 멋대로 흘러넘치는 데에 이르렀다. 비록 그렇지만 여남은 집밖에 안 되는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이 나오고, 한 고을에도 반드시 착한 선비가 있어 예로부터 지금까지 훌륭한 사람이 없지 않았으니, 진실로 그들의 음성과 기색을 본받아 화합하면서 그들과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면 비록 삼대의 교화가 깨끗하게 사라져 완전히 무료한 시대에 있다 하더라도 나의 부족한 점을 다스리고 나의 훌륭한 점을 권면하는 데에 길이 없을까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정해년(1887) 중추(仲秋 음력 8월)에 내가 고을의 벗들을 따라 육칠 일에 걸쳐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유람하며 자못 바람을 쐬고 읊조리는 정취를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이별할 때에 한마디 말로 서로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거처하는 곳이 가깝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정이 두텁지 않은 것도 아닌데, 뿔뿔이 흩어져서 한 가지 선도 책망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의리도 강론하지 못한 채 이처럼 하염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평소 서로 알아주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만약 오늘의 모임으로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 규약을 정하여 남전(藍田)의 향약(鄕約)75)처럼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 백록(白鹿)의 학규(學規)76)처럼 서로 강학하여 때에 따라 서로 모여 차례대로 거행하되 헛된 명성으로 귀결되지 않고 하나하나 실효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찬성하였다. 이에 시골 마을에서 감당할 수 있는 제도와 재력을 따르고, 벗들이 모여 강학하는 방법을 덧붙여 참작하고 증감하여 오래도록 유지될 규례를 정하였다.아, 한편으로는 시골 마을이고, 한편으로는 벗들이지만, 우리들이 만년에 어렵게 이러한 모임을 거행함으로써 삼대의 유의(遺儀)를 그래도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나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운수가 궁박하여 다시는 사방에서 벗을 취할 만한 힘이 없어 궁벽한 집에 틀어박힌 채 그저 쓸쓸히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찌 이러한 상황에서 시골 마을의 벗들과 더불어 오르내리고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사이에서 노닐 줄 알았겠는가. 다만 용렬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외람되이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이것이 두려울 뿐이다.염계 주 선생(濂溪周先生 주돈이(周敦頤))이 말하기를, "지극히 높은 것은 도이고, 지극히 귀한 것은 덕이다."77)라고 하였는데, 벗들로 인해서 존귀하게 되었으니, 그 의리가 또한 소중하지 않겠으며, 그 모임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여러 벗들에게 바라니, 곧음과 신실함으로 서로 가르쳐주고 서로 알려주어서 내가 날로 나아가거든 너는 달로 나아간다면 고을의 풍속이 오직 평원(平原)만 아름답지 않을 것이고, 고을의 어진 인재가 오직 고령(古靈)에만 많지 않을 것이며78), 한 모퉁이에 있는 홍릉(紅綾 능주(綾州))도 또한 군자의 고을이 되지 않겠는가. 이 계(契)는 마침 서석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린 나머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인하여 영귀(詠歸)라 이름을 지었으니, 이 또한 여러 벗의 뜻이었다. 夫三代興化之端。必自鄕井始。是以五五其民。九九其井。使合同而不離。統維而不亂。家有父兄之詔。里有三老之訓。庠有師友之敎。巷有出入之友。野有守望之助。鄕有養老養賢三物八刑之法。凡出入起居。行住語黙。未始一日而離於正。此所以風俗之美。賢才之多。非後世之能及也。噫。世遠人亡。遺風掃如。鄕井之間。恩誼不相接。勸戒不相及。以至人私其身。士私其學。而異言異行。橫流滔滔。雖然。十室之忠。一鄕之善。亘古亘今。不無其人。苟能聲氣比和。與之源源。則雖在蕩然無聊之日。而所以攻吾闕勉吾善者。不患無其路矣。歲丁亥仲秋。予從鄕友之後。遊瑞石首尾六七日。頗盡風詠之趣。其別也。一辭相別曰。吾輩居非不近。情非不厚。而落落渙散。未有責一善講一義。如是悠悠。烏在其平生相知之意耶。若因今日之會。爲之面定規約。以德業相勸如藍田之約。講學相從如白鹿之規。隨時相聚。次第擧行。不爲虛聲所歸。而俾有一一實效如何。衆皆唯唯。於是因其鄕井之制力可及者。而附以朋友講聚之方。斟酌增減。定爲久規。嗚呼。一則鄕井也。一則朋友也。吾輩晩生。間關擧此。而三代遺儀。庶有親見之日。豈非幸耶。況義林孤露蹇滯。力不復取友四方。而跧蟄窮廬。只有離索待盡而已。豈知到此而與鄕井知舊。遊於升降進退切磋琢磨之間耶。但醜劣無狀。叨忝於一鄕善士之間。是爲可懼也已。濂溪周先生曰。至尊者道。至貴者德。因朋友而得貴且尊。其義不亦重乎。其聚不亦樂乎。願諸友維直維諒。胥訓胥告。我日斯邁。爾月斯征。則鄕俗之美。不獨平原。鄕賢之多。不獨古靈。而一隅紅綾。亦不爲君子之鄕耶。此契也。適成於瑞石風詠之餘。故因以詠歸名之。此亦諸友之意也。 삼대(三代) 중국 고대시대 때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는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이 다스렸던 하(夏)ㆍ은(殷)ㆍ주(周)나라 때를 가리킨다. 삼로(三老) 한(漢) 나라 때 교화를 관장하던 관직으로, 향(鄕)마다 한 사람씩 두었다. 《한서(漢書)》에 "백성 중에 50살 이상으로 덕행이 있고 사람들을 이끌어 선(善)을 행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삼로를 두었는데 향(鄕)에 한 사람이다. 향삼로(鄕三老) 가운데 한 사람을 가려 현삼로(縣三老)로 삼고서 현령과 승위(丞尉)와 더불어 정사로 가르쳤다."라고 하였다. 《漢書 高帝紀上》 삼물(三物)과 팔법(八法)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로 만민을 교화하고,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國學)에 올려 보낸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라는 말이 나오고, 또 "향학의 팔형(八刑)으로 만민을 바로잡는다.[以鄕八刑糾萬民]"라는 말이 나온다. 삼물은 삼사(三事)와 같은 말로, 육덕(六德)ㆍ육행(六行)ㆍ육예(六藝)를 가리키는데, 육덕은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를 말하고,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가리킨다. 팔형은 8종의 범죄행위에 대해 가해진 형벌로, 불효지형(不孝之刑)ㆍ불목지형(不睦之刑)ㆍ불인지형(不婣之刑)ㆍ부제지형(不弟之刑)ㆍ불임지형(不任之刑)ㆍ불휼지형(不恤之刑)ㆍ조언지형(造言之刑)ㆍ난민지형(亂民之刑)을 말한다. 남전(藍田)의 향약(鄕約) 남전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가리키는 것으로, 송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을 말한다.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德業相勸], 허물과 잘못을 서로 경계하며[過失相規], 예의와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에 서로 구휼한다.[患難相恤]"라는 네 조목이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6 善行》 백록(白鹿)의 학규(學規)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말한다. 주희가 지남강군(知南康軍)에 부임하였을 때 백록동서원을 중건하고 직접 강학하면서 학규를 제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오교(五敎)의 조목, 학문을 하는 차례, 수신(修身)의 요체, 처사(處事)의 요체, 접물(接物)의 요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晦菴集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지극히……덕이다 《통서(通書)》 〈사우상(師友上)〉에 보인다. 고을의……것이며 고령은 원래 산 이름이었는데, 송(宋)나라 때 문신이자 학자였던 진양(陳襄)이 고령서원(古靈書院)을 세우고 글을 읽었으므로 진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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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파보》 서문 豊壤趙氏派譜序 민가에서 보책(譜冊)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역사이니, 세계(世系)를 밝히고 종족(宗族)을 거두어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선이 문무(文武)의 계책과 공열(功烈)로 지켜온 5백 년 동안 사대부 집안에서 보책(譜冊)을 숭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조상을 높이고 근본을 중히 여기며,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혜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 성대하게 풍속을 이루었다.풍양 조씨(豊壤趙氏)는 우리나라의 큰 성씨로, 일파가 대대로 강진(康津)에서 살았는데, 조정의 반열에 올라 훌륭한 공적을 이룬 감사공(監司公)과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참판공(參判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절을 세운 주부공(主簿公) 같은 분들이 우뚝하게 빛났고, 그 나머지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 음관(蔭官), 문학(文學), 효행(孝行), 열행(烈行) 등으로 향리(鄕里)에서 칭찬을 받은 자들이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일파의 문벌과 신망, 명성과 업적 등으로 볼 때 또한 남쪽 지방에서 명망이 높은 종족이었다.보계(譜系)는 정종(正宗) 정사년(1797)에 처음으로 수찬(修撰)하였고, 50년이 지나 헌종(憲宗) 병오년(1846)에 다시 수찬하였으며, 병오년부터 지금까지 54년이 흐르면서 생존했던 사람은 죽고 어렸던 사람은 장성하여, 태어나고 죽은 날짜와 함자(銜字), 혼인, 무덤 등에 관한 기록이 잘못되고, 상고할 것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이에 문중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고, 충분한 상의 끝에 의론이 하나로 모아져서 경영하고 간행하는 일이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졌다.내가 생각건대 조씨의 보책이 일반 사람의 것과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으니, 족파(族派)가 번다하지 않고, 보책을 만드는 기간이 촉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근세 보가(譜家)의 경우에는 으레 대부분 족파를 넓히는 것에 힘써 원근(遠近)과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고 한데 섞어 한 편으로 만드니, 속임과 망령됨이 어느 것인들 극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조씨는 단지 도강(道康 강진의 옛 이름) 일파만 함께 하였으니, 규모가 협소한 것 같지만 친근한 이를 친근하게 하는 데에서 소원한 이에게까지 미쳐갔으니, 이치가 진실로 이와 같다.근세 보가(譜家)의 경우에는 보책을 만드는 기간이 늦거나 빨라 일정하지 않아서 혹 어제 마쳤는데 오늘 시작하기도 하고, 혹 아침에 간행하였다가 저녁에 폐기시키기도 하여 통문을 보내는 일이 연이어지고, 돈을 분배하여 거두어들이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런데 지금 조씨가 오십 년에 한 번씩 수찬한 것은 삼십 년의 규례와 비교하면 조금 느슨한 것 같지만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았으니, 이치가 또한 이와 같다. 이것으로 문중의 풍습이 두텁고, 마음을 쓰는 것이 치밀함을 볼 수 있다. 아, 선공(先公)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이대로 나아간다면 조씨의 문중이 어찌 창대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힘써야 할 것이다.창구(昌九)은 참판공 16대손인데, 문중 부형의 명을 받들고 와서 서문을 청하였다. 내가 진실로 받들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지만, 대대로 맺어온 교분이 무겁기에 감히 고집스럽게 사양하지 못했다. 譜於人家。亦一史也。所以明世系收宗族。而有補於世敎。爲何如哉。恭惟我朝。文謨武烈五百年。士大夫家。莫不崇譜規而尊祖重本。正倫篤恩。蔚然成風。豊壤趙氏東方巨姓也。而有一派世居康津。若監司公之立朝偉蹟。參判公之文學行義。主簿公之殉國立慬。磊落光明。而其餘文武官蔭。文學孝烈。見稱鄕里者。有不殫記。其門望聲猷。亦南州之望族也。譜系在正宗丁巳。始修之。至五十年而憲宗丙午。再修之。今距丙午爲五十四年矣。存者沒。幼者壯。生卒諱銜。昏娶墳墓。將不無失錄無稽之慮。於是門議齊發。爛商歸一。經紀刊釐。不勞而成。余謂趙氏之譜異於人者。有二焉。族派之不煩也。年限之不促也。近世譜家。例多務廣。不計遠近親疎。而混同一編。欺誣幻妄。何所不至。今趙氏只與道康一派共之。規模似若狹小。而親親及疎。理固如此。近世譜家。遲速無常。或昨訖而今始。或朝刊而暮毁。發通絡繹。排斂仍疊。今趙氏五十年而一修。較諸三十年之規。似若少緩。而矯當時之敝。理亦如此。可以見門風之厚而用心之密矣。嗚呼。諸先公之遺風餘韻。爲不食矣。率是以往。趙氏之門。安得不昌大乎。勉旃焉。昌九參判公十六代孫也。奉其門父兄之命。來謁弁卷之文。余固知非可以承當者。而世契之重。有不敢牢讓云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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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건당집》 서문 兩蹇堂集序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로 왜구의 변란으로 인한 재앙이 임진년보다 참혹한 적이 없었고, 충의로운 선비 또한 임진년보다 성대한 적이 없었다. 대체로 하늘이 기수(氣數)에 쫓겨 한 때 어지러운 운수가 없을 수 없지만, 어지러운 때에는 또 반드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다스릴 인재를 배출하여 부지하게 하였다. 예컨대 방책을 정하고 임금을 호종한 백사(白沙) 이문충(李文忠)79)과, 구원병을 요청하고 화급한 일에 부응한 서천(西川) 정충익(鄭忠翼)80), 왜적을 토벌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덕풍(德豊) 이충무(李忠武)81), 관리로서 지역을 지키다 순절한 천곡(泉谷) 송충렬(宋忠烈)82),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세운 중봉(重峰) 조문렬(趙文烈)83) 등과 같은 분들이 모두 우뚝하여 좀처럼 세상에 나오지 않을 분들이었다.지위는 낮지만 맡은 일이 많고, 녹봉은 적지만 일이 번다하게 많았던 분들의 경우에도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일을 주선하고, 힘이 다하여 쓰러질 때까지 여기저기 출입하다 끝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다하였다. 양건당(兩蹇堂) 황공(黃公)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으니, 어찌 선양(宣揚)되지 않은 명성과 지위나 공에게 걸맞지 않은 추증(追贈)과 포창(褒彰)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유묵(遺墨)이 흩어지고 없어져서 열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계사년(1893) 봄에 9세손 간(柬)이 그것을 가지고 천태산(天台山)의 집으로 나를 찾아와 교감의 일을 부탁하였다. 아, 나는 공에게 미생(彌甥 자매나 남매의 손자)이 된다.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선인(先人)을 모시는 곁에서 그분에 대한 실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자못 흥미진진하였는데, 어찌 어버이를 여의고 외로이 지낸 지 50년 만에 비로소 그분의 유고(遺稿)를 볼 수 있게 될 줄 알았겠는가. 또 간은 죽마고우로 총각 때에 헤어졌다가 머리가 하얗게 세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 슬픔과 위로되는 마음이 또 어떠하겠는가?평소 보고 들은 지식이 적어 생각이 좁고, 질병까지 더해져 정신과 근력을 수습해 끌어 올릴 수 없으니, 어찌 한 집안에서 후세에 길이 전할 일의 부탁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정감이 지극한 바인지라 차마 고집스럽게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였다. 이에 우선 문류(門類)를 나누어 한 책으로 정하여 돌려보내니, 원본과 대조하여 정밀하게 교정하고 극진하게 윤색하는 일은 담당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恭惟我朝開國以來。寇亂之禍。莫慘於壬辰。忠義之士。亦莫盛於壬辰。蓋天迫於氣數。不能無一亂之運。而其亂也。又必生撥亂之材以扶持之也。若白沙李文忠之定策扈聖。西川鄭忠翼之乞師副急。德豊李忠武之討賊制勝。泉谷宋忠烈之守土死節。重峰趙文烈之倡義立慬。皆卓犖不世之出也。至於位卑而任多。祿薄而事煩。上下周章。出入竭蹶。終致殺身殉國之節者。兩蹇堂黃公。亦其人也。烏可以名位之不揚。贈褒之不稱論之哉。遺墨散逸。所存未爲十之一。癸巳春。九世孫柬。持以過余於天台寓舍。屬以校勘之役。嗚呼。余於公爲彌甥也。是以自幼侍先人側。得聞其事實。頗津津焉。豈知風樹孤露五十歲。乃始得見其遺稿耶。且柬是竹馬舊交也。丱角相分。白首相逢。其悲慰之情。又何如哉。素以寡陋。兼滯病痼。精神筋力。收拾不上。安有可以擔當人家不朽之託者哉。但情感攸至。不忍全然牢却。於是姑分門類。定爲一冊而還之。若其讐校精訂。極其潤色。則在乎其人焉爾。 백사(白沙) 이문충(李文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으로, 백사는 그의 호이고, 문충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병 요청을 건의하였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다녀와 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서천(西川) 정충익(鄭忠翼)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 1538~1602)로, 충익은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우승지에 올라 선조를 의주(義州)에 호종하고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파견토록 했으며,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오자 영위사(迎慰使)로 그를 영접하는 한편, 평양에 머물러 있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서울의 수복을 재촉하는 등 국가의 최대 수난기에 탁월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덕풍(德豊) 이충무(李忠武) 德豐府院君(德豐府院君) 이순신(李舜臣, 1545~1598)으로, 충무는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둬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천곡(泉谷) 송충렬(宋忠烈) 송상현(宋象賢, 1551~1592)으로 천곡은 그의 호이고, 충렬(忠烈)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왜적에 맞서다 순절하였다. 중봉 조문렬(重峰趙文烈) 조헌(趙憲, 1544~1592)으로, 중봉은 그의 호이고, 문렬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했으며,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錦山) 전투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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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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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29년 김양묵(金養默) 차첩(差帖) 고문서-교령류-차첩 정치/행정-임면-차첩 道光九年十二月 吏曺判書 文科新及第承仕郞金養黙 道光九年十二月 吏曺判書 金養默 서울특별시 종로구 參議[着押]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29년(순조 29)에 이조에서 국왕의 구두지시에 따라 '문과 신급제 승사랑' 김양묵을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임명하면서 내린 첩. 1829년(순조 29) 12월 12일에 이조(吏曹)에서 국왕의 구두지시[口傳]에 따라 '문과(文科) 신급제(新及第) 승사랑(承仕郞)' 김양묵을 권지승문원(權知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임명하면서 내린 첩이다. 김양묵을 신급제라고 한 것은 그가 이 해 실시된 정시(庭試)에서 막 급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권지승문원 부정자의 직에 있었다는 것은 승문원 부정자의 직을 수습(修習)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문서의 배면(背面)에는 '吏吏 安致黙'이라고 적혀 있다. '이이'는 고신을 작성하는 이조의 서리로, 흔히 단골, 단골서리, 단골리로 불리웠다. 즉 김양묵의 고신을 직접 작성한 사람은 안치묵이었다. 이조와 병조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이들 정색서리(政色書吏)들은 지방 양반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김양묵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김응상(金膺相)이 받은 고신들도 다수 전하고 있으며, 김양묵의 홍패(紅牌)와 시권(試券)은 물론, 그의 아들 김기세(金基世)의 시권도 그의 문중에 전하고 있다. 특히 김응상의 호구단자 7건이 전하고 있어서 이들 부안김씨가의 가족생활을 살펴보는데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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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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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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