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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숙의 월명암 시에 차운하다 次希淑月明菴韻 외로운 절 얼마나 멀리 떨어졌나 孤寺何迢絶하늘 위를 가는가 의심한다네 却疑天上行눈 앞이 처음 한 번 상쾌하니 眼前初一快세상 밖이 바로 삼청326)이구나 物外卽三淸항해327)는 주렴에 닿아서 방울지고 沆瀣當簾滴구름 노을은 섬돌에 부딪혀 생기네 雲霞觸砌生내가 돌아가면 누가 다시 찾아오나 吾歸誰復到만고토록 달이 길이 밝겠구나 萬古月長明 孤寺何迢絶, 却疑天上行.眼前初一快, 物外卽三淸.沆瀣當簾滴, 雲霞觸砌生.吾歸誰復到, 萬古月長明. 삼청(三淸)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의 천계(天界)를 가리킨다. 이는 삼동교주(三洞敎主)가 사는 최고의 선경(仙境)이다. 항해(沆瀣) 밤중에 내리는 맑은 이슬 기운으로, 선인(仙人)이 마신다는 밤중의 기[夜半氣]를 말한다.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육기를 먹고 항해를 마심이여, 정양으로 양치질하고 아침놀을 머금는다.[飡六氣而飮沆瀣兮, 漱正陽而含朝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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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에서 즉흥으로 읊다 山齋 卽事 화살 바람에 가랑 눈이 하늘에서 내리니 箭風篩雪下天衢봄 추위 두려워서 화로를 안고 앉았네 却怕春寒坐擁爐한 바가지 음료로 배를 채워도 삶은 고기보다 달고 瓢飮充腸甘鼎肉솜옷도 몸에 맞으니 여우 갖옷보다 낫구나 縕袍適體勝裘狐시공부는 습관을 바꿔 당의 음률을 따르고 詩工轉癖追唐律이학은 정밀하기 어려워 송의 유학를 믿네 理學難精信宋儒때로 객이 찾아오면 책상을 청소하고 時有客來淸掃榻대자리를 담요로 바꿀 필요도 없다네 竹團不必換氍毹 箭風篩雪下天衢, 却怕春寒坐擁爐.瓢飮充腸甘鼎肉, 縕袍適體勝裘狐.詩工轉癖追唐律, 理學難精信宋儒.時有客來淸掃榻, 竹團不必換氍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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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생도들이 독서하는 것을 보고 見社生讀書 찬 서재에서 고생하며 모인 생도들 冷齋喫苦聚諸君한사코 어찌 하여 옛글을 읽는가 抵死胡爲讀古文밤새 비바람 치는데 닭이 우나니201) 鷄唱喈喈風雨夜알겠다 저는 남이 들어주기 바라지 않음을 知渠不要別人聞 冷齋喫苦聚諸君, 抵死胡爲讀古文.鷄唱喈喈風雨夜, 知渠不要別人聞. 밤새……우나니 난세에도 자기 할 일을 한다는 뜻이다. 원문의 '개개(喈喈)'는 닭이 우는 소리이다. 《시경》 〈풍우(風雨)〉에 "비바람이 싸늘한데 꼬끼오 닭이 우네.[風雨淒淒,雞鳴喈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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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이 있어서 짓다 2수 有爲而作【二首】 말을 듣건대 문단에 고각소리 높아지자 聞說騷壇鼓角高술은 바다처럼 많고 고기가 언덕을 이룬다네 酒多如海肉成臯공훈이 유학을 부지하는 데 있다 다퉈 말하고 爭云功在扶儒術시대를 밝히는 제일의 호걸이다 자랑삼아 말한다네 誇道明時第一豪기인205)은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고 畸人不是自爲高지친 학은 구고206)에 있을 줄 알 뿐 倦鶴徒知在九臯홀로 앉아 반초은시를 읊조리니207) 獨坐吟來反招隱이러한 소객이 한 때의 호걸이라네 任地騷客一時豪 聞說騷壇鼓角高, 酒多如海肉成臯.爭云功在扶儒術, 誇道明時第一豪.畸人不是自爲高, 倦鶴徒知在九臯.獨坐吟來反招隱, 任地騷客一時豪. 기인(畸人) 세상과 맞지 않고 예법에 구속되지 않는 탈속한 사람을 말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기인이란 인간 세상에는 맞지 않으나 하늘과는 짝하는 사람이다.[畸人者, 畸於人而侔於天.]"라고 하였다. 구고(九臯) 수택(水澤)의 깊은 곳을 말하는데,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울면 소리가 하늘까지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하여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짐을 비유하였다. 반초은시를 읊조리니 현인들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반초은(反招隱)'은 동진(東晉)의 시인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로 "작은 은자는 산림에 숨고, 큰 은자는 조시에 숨는다네.[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라고 하였다. 《文選 卷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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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이씨 묘갈명 孺人李氏墓碣銘 유인(孺人)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관향은 성주(星州)로,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후손이다. 증조는 지(沚), 조부는 성회(成檜)이다. 부친은 원형(元衡)이고, 모친은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경유(景裕)의 따님이다.유인은 천성이 온화하고 어질었다. 어릴 적에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자라서 처사(處士) 문세정(文世楨)에게 출가하였다.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섬길 적에는 조심하고 공경하며 삼갔으며, 순종하고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집안사람을 부리고 집안일을 처리함에 온화하고 근검(勤儉)하여 확실하게 정해진 규범이 있었다. 친가에 후사가 없는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후사를 잇는 데 애쓰고 힘써 너희 어머니로 하여금 지하에서 한을 품게 하지 말라. 만일 혹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받드는 것은 외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외손이 모시는 제사208)라는 이유로 태만하게 여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생을 마쳤다. 아들 관오(貫吾)는 문학과 행실이 있었다. 손자는 희복(喜復), 희점(喜漸), 희승(喜升), 희항(喜恒), 희모(喜模), 희성(喜成)이다. 증손 이하는 그 후손이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다.아,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물이 멀리 흐른다. 이 때문에 사람의 덕을 보고서 그 후손에게 복록이 있을 것을 알고, 자손이 창대한 것을 보고서 선조의 음덕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나는 문씨(文氏)가 오늘날에 자손들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 당시 유인의 내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7세손 재항(載恒)이 비석을 세우는 일로 그 후면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나는 비루하고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훌륭한 여사 보내 주어 貽以女士자손들 따르게 하였네.209) 從以孫子유인이 있었으니 孺人有焉만년 동안 밝게 전해지리. 昭垂萬年 孺人姓李。貫星州。興安君濟後。曾祖沚。祖成檜。考元衡。妣慶州崔氏。景裕女孺人天稟溫仁。幼有至行。長適處士文世楨。事舅姑奉君子。小心洞屬。承順無違。以至御家衆處家務。雍容勤儉。的有成規。常恨親家無嗣。語子孫曰。汝輩勉力。爲之繼後。無使汝母抱恨於地下。如或未爾。則守墓奉祀。非外裔之責乎。勿以非族之祀怠焉。某年月日終。子貫吾。有文行。孫喜復喜漸喜升喜恒喜模喜成。曾孫以下。其麗蕃衍。不能盡錄。嗚呼。根固者枝茂。源深者流遠。是以。觀人之德而知其有後祿。觀子孫之昌大。而知其有先蔭。吾知文氏祚胤綿延於今日者。未始非當日內助之爲也。曷不偉然。七世孫載恒。以將竪碣。請誌其陰。余以陋劣。辭不獲已。銘曰。貽以女士。從以孫子。孺人有焉。昭垂萬年。 외손이 모시는 제사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권3 〈답왕상서(答汪尙書)〉에 "송공은 외조부에게 후사가 없자 해마다 때맞춰 제사 지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두텁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친족이 아닌 자의 제사는 이치에 이미 온당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훌륭한……하였네 《시경》〈대아(大雅) 기취(既醉)〉에 "그 따름은 무엇인가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줌이로다.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로다.[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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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가 지은 노사선생 〈납량사의기의〉를 변석함 辨田愚所著。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 ○〈납량사의(納凉私議)〉1)"분(分)이라는 것은 이일(理一) 안에 있는 세세한 조리(條理)이니 이(理)와 분(分)은 층절(層節)이 있을 수 없다. 분(分)이 이(理)의 대(對)가 아니라 '분수(分殊)'가 곧 일(一)의 대이다."○〈납량사의기의(納凉私議記疑)〉"이 말은 얼핏 보아서는 의심할 만한 점이 없다. 다만 노사(蘆沙)의 〈기경도(奇景道)에게 답하는 편지〉에 이르기를, '하늘에 이 분(分)이 원래 없었다면 사람과 사물이 어디에서 얻어 편전(偏全)2)을 지니게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分)이 세세한 조리라고 한 것은 훗날 사람과 사물이 얻게 되는 편본연(偏本然)과 전본연(全本然)의 근원이 될 것이다.내가 생각건대, 편(偏)과 분(分)은 원래 일관(一串)된 것이 아니다. 분(分)은 일신(一身)의 귀나 눈, 손이나 발과 같고 편(偏)은 한쪽 귀만으로 듣고 몸이 한쪽만 기능하는 것과 같다. 분(分)은 일(一) 안에 본래 있는 이(理)이고 편(偏)은 기(氣)의 측면에서 전(全)의 대가 되는 성(性)이니, 똑같이 얘기하기 어려울 듯하다."○〈변(辨)〉이(理)에 분(分)이 있으므로 물(物)에 편전(偏全)이 있다. 이(理)에 분(分)이 없다면 물(物)이 어디에서 편전(偏全)을 얻겠는가. 지금 "분(分)은 일신(一身)의 귀나 눈, 손이나 발과 같고 일(一) 안에 본래부터 있다."라고 했으니 이 설을 가지고 밝히고자 한다.귀, 눈, 손, 발 등의 백해(百骸 모든 뼈)와 백체(百體 온갖 부분)이 합쳐져 일신(一身)의 전체를 이루고 사람, 짐승, 풀, 나무 등 만상(萬象 모든 형상)과 만물(萬物 온갖 사물)이 합쳐져 천지의 전체를 이룬다. 사람 몸의 전체를 이루는 이(理)가 본래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알면서도 천지의 전체를 이루는 이(理)가 본래 형체가 갖추어지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모르는가. 사람의 귀, 눈, 손, 발이 본래부터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새와 짐승의 깃, 털, 발굽, 뿔과 풀과 나무의 줄기, 잎새, 꽃, 열매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은 과연 천명의 본연(本然)이 아니겠는가. 분(分)과 편전(偏全)이 만약 일관(一串)되지 않다면 주자(朱子)는 어떻게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 주는 편벽됨[偏]을 말하였겠는가.3) 또 어떻게 사람과 사물이 태어날 때 그 부여받은 형체가 치우치거나 올바른 것은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다고 말하였겠는가.4) 한 귀로만 듣고 한 쪽 몸만 기능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기(氣)가 고르지 못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어찌 이를 인용하여 주장을 펼 수 있겠는가.○〈납량사의〉"주자(朱子)가 이르기를, '태극(太極)이라는 것은 상수(象數)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진 것을 일컫고, 형기(形器)가 이미 갖추어져 있으나 그에 관한 이(理)는 조짐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5)라고 하였다. 상수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아직 깨어지지 않은 일(一)이고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졌다면 분(分)이 이미 포함된 것이 아니겠는가. 형기가 이미 갖추어졌다면 이미 정해진 분(分)이고 그에 관한 이(理)는 조짐이 없다면 일(一)의 자재(自在)가 아니겠는가."○〈납량사의기의〉"알 수 없지만, 노사(蘆沙)는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진 것을 사람과 사물이 하늘로부터 받는 편전(偏全)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는가? 삼가 생각건대 이 구절에 담긴 뜻은 부자, 군신 관계가 생기기 전에 자(慈), 효(孝), 예(禮), 충(忠)의 이치가 이미 갖추어지고 사물의 미세함이 있기도 전에 사물의 미세함에 대한 이치가 이미 갖추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성인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일(理一) 안에 있는 분(分)과 수(殊)의 온전한 이치를 지니고 있고, 현인(賢人)과 중인(衆人)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온전하지 못한 약간의 이치를 지니고 있고, 지극히 어리석은 자와 매우 악독한 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전혀 바뀌지 않고 전혀 정리(情理)에 맞지 않는 이치를 지니고 있고, 조수 초목(鳥獸草木)은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치우치고 막힌[偏塞] 이치를 지니고 있어 각각 온갖 형상이 얻는 근원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노사(蘆沙)가 이른 '하늘에 원래 이 분(分)이 없었다면 사람과 사물이 어느 곳에서 얻어 이 편전(偏全)을 가지게 되었겠는가.'라는 것과 판연하게 차이가 나니 의심할 만하다."〈변(辨)〉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은 상수(象數)와 형기(形器)가 아닌 사물이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람에 관한 이치는 이미 갖추어지고 사물이 생기기도 전에 사물에 관한 이치가 이미 갖추어진 것에 대해서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저 사람이 이 의리에 대해서 반드시 모르는 것은 아니건만, 고의적으로 기질(氣質), 분수(分數), 지극히 어리석은 자, 매우 악독한 자 등의 말을 인용하여 그 설을 현혹되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남을 능가하려는 사사로움을 이루었다. 아, 마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러한 이치(理致)의 득실은 오히려 사소한 일이다.하늘은 덮어주는 일에 치우치고 땅은 실어주는 일에 치우치며 해는 낮에 치우치고 달은 밤에 치우치며 눈은 보는 일에 치우치고 귀는 듣는 데 치우치며 손은 쥐는 데 치우치고 발은 걷는 일에 치우친다. 밝디밝은 것으로 하늘을 보면 하늘이 온전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으로 하해(河海)를 보면 하해가 온전하며, 잎사귀 하나로 나무 한 그루를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온전하고, 하나의 사지(四肢)로 일신(一身)을 보면 일신이 온전하다. 세상에서 어떤 사물이 과연 편전(偏全)에서 벗어나겠는가. 이것을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에 다시는 본연이 없게 된 지 오래일 것이다. 또한 조수 초목이 이(理)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람은 어떤 사물이라서 유독 이(理)에 본래 있는 것이 되겠는가. 사람이 이미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慈), 효(孝), 예(禮), 충(忠)의 이(理)는 어찌 유독 본래 지니게 되고 어디에 이미 갖추었겠는가. 어찌 처리하는 데만 급급하여 살필 겨를을 두지 않는가.○ 〈납량사의〉"'성(性)은 같다.'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편전(偏全)의 성(性)을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분(分) 밖에 이(理)를 두는 것이다. 결국 같은 것을 주로 삼아 다른 것을 폐기한다면 성(性)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는 사물이 된다."○ 〈납량사의기의〉"낙가(洛家)6)들이 성(性)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충(忠), 효(孝), 인(仁), 양(讓)을 가리켜 '이것은 분(分)의 수(殊)이지 본연의 성(性)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분(分) 밖에 이(理)가 있고 성(性)은 용(用)이 없는 사물이 된다. 다만 '만상(萬象 모든 형상)의 성(性)은 체(體)가 본래 온전하며 배워서 아는 사람[學知]부터 날짐승, 들짐승, 초목의 발현에 이르도록 각각 하늘로부터 받은 기(氣)에 따라서 스스로 하나의 성(性)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한 칸을 못 미치는 것[未逹一間]7)에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一點子]8)에 이르기까지, 서로 비슷한 것[相近]에서 완전히 다른 것[絶不同]9)까지, 하늘이 내린 성인[天縱之聖]10)으로부터 지극히 어리석어 바뀌지 않는 사람[下愚不移]11)에 이르기까지 품류(品類)가 만 가지로 다르다.'라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모두 본연의 성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변〉기(氣)의 청탁(淸濁), 수박(粹駁)은 본래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지지만 온갖 사물이 생겨나고 편(偏)과 전(全)이 나뉘는 것 또한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지겠는가. 만약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진다면 콩은 오이가 될 수 있고 오이는 콩이 될 수 있고 말은 뿔이 날 수 있고 소는 갈기가 날 수 있다. 상제(上帝)가 주재(主宰)하는 것과 건도(乾道)가 각각 바로잡는 것[各正]12)은 과연 무슨 일이겠는가? 편(偏), 전(全), 분(分)이라는 말을 지키려다가 상제는 주재의 기능을 놓치고 건도(乾道)는 자기의 직임을 잃는 데 이른다면 옳겠는가, 그르겠는가?만상(萬象)의 성(性)은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하건만 발현(發現) 단계에 이르러 스스로 하나의 성(性)이 된다면, 이것이 과연 말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개의 성(性), 소의 성이 사람의 성(性)과 온전함을 함께하고 풀의 성(性), 나무의 성이 하늘의 성(性)과 그 위대함을 함께하다가 발현의 단계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하늘이 되고 사람이 되고 개나 소가 되고 풀이나 나무가 되겠는가. 말에 근거가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납량사의〉"천하의 성(性)은 온전하지[全] 않으면 치우쳤으니[偏], 참으로 온전하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은 성은 없다. 편(偏)과 전(全)이 모두 본연(本然)이 아니라면 천하에 그 본연의 성을 성으로 삼을 수 있는 사물은 하나도 없고 본연의 성은 영원히 허공에 매달린 비어있는 자리가 될 것이니, 장차 어디에 저 성을 쓰겠는가. 정통(正通)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의 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편색(偏塞)과 더불어 똑같이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 정통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개 분(分)이 없는 것을 일(一)로 여긴다면 그 폐단이 반드시 여기에 이르게 된다. 각정(各正)의 성(性)을 분수(分殊)에 떨어지고 형기(形器)를 범한 것으로 보아 일원(一原)으로 삼기에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갑변(甲邊)의 의론과 차이가 없을 듯하다."○ 〈납량사의기의〉"'기질(氣質)이 다르다면 천명(天命)의 성(性)에는 편전(偏全)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주자(朱子)는 '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다.'13)라고 하였다. 이것이 낙가(洛家)들이 근본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 만약 이를 비난하여 '천하의 성(性)이 편(偏)도 없고 전(全)도 없다면 비어있는 자리가 되는 데 불과하다.'라고 한다면 어찌 남의 말뜻을 다 파악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다양하게 살피지 않더라도 명확히 드러난다. '정통(正通)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本然)의 온전함[全]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편색(偏塞)한 것은 단지 본연의 편(偏)만 얻었을 뿐이어서 '천명의 성(性)에는 편전(偏全)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겠는가. 이를 바로잡아서 '정통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의 성을 온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의논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변〉주자(朱子)는 "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다."14)라고 하고, 또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그 부여받은 형체가 치우치거나 바른 것은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기 때문이다."15)라고 하였다. 모름지기 이(理)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또 이(理)는 편전이 없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연후에야 비로소 이치를 안다고 이를 수 있다. 천명의 성을 부여한 까닭은 본래 사람과 사물이 귀천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편전이 없음을 이른다. 만수(萬殊)의 분(分)이 일원(一原) 안에 성대하게 이미 갖추어진 것은 편전이 있음을 이른다.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만 알고 사람과 사물에 각정(各正)의 성(性)이 없다고 하거나,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다는 말만 알고 사람과 사물에 일본(一本)의 성(性)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하나를 고집하여 백을 저버리고 이것을 얻느라고 저것을 잃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입언(立言)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도리어 남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남을 비난하는가. 주자는 "각정(各正)은 만물이 태어나는 초기에 얻는다."16)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통(正通)한 자는 본연의 전(全)을 얻고 편색한 자는 본연의 편(偏)을 얻는 것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납량사의〉"편전(偏全)은 선(善)의 한쪽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마치 구멍에 크고 작음은 있더라도 달빛은 그대로이고, 그릇에 네모와 둥긂이 있어도 물의 성질이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어찌 본연이 아니겠는가."○〈납량사의기의〉"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벌과 호랑이와 원숭이의 인의(仁義)17)와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인의가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朱子)는 무엇을 가지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수연(粹然)은 사람과 사물이 다르다18)고 하였는가?"〈변〉저 사람[간재(艮齋)]은 편전(偏全)을 본연이 아니라고 여겨 "만물의 성(性)은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하다."라고 하였다. 편전을 도외시하고 '본래 온전하다'라고 말한다면 벌과 호랑이의 성(性)과 요순(堯舜)의 성은 과연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으니 창을 거꾸로 들고 자신을 공격한다고 이를 만하다. 사람과 사물은 분(分)이 다르다[分殊]고 말하면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한 것으로 반박을 하고,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다고 말하면 벌과 호랑이의 원숭이로 비난을 하니 또한 정론(定論)은 없고 그 사람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공격하는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납량사의〉"기질(氣質)은 선악을 겸하여 진흙에 섞인 물이 짙거나 맑은 정도가 백 겹이나 되고 창문 너머 비치는 달빛이 밝고 어두운 정도가 각양각색인 것과 같다. 편전(偏全)을 기질이라고 한다면 어찌 편전을 낮추는 것이 아니겠는가."○〈납량사의기의〉"요, 순, 공자의 온전함은 진실로 본연(本然)이다. 백이(伯夷), 유하혜(柳下惠)가 청(淸)과 화(和)에 치우친 것, 안연(顏淵)과 민자건(閔子騫)이 성인의 체식을 갖추었으나 미미했던 것,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겨우 일체(一體)만 지닌 것19)이 어찌 기질로부터 말미암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유형은 선악을 겸했다고 이를 수 없다. 사람조차 이와 같으니 하물며 미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지금 편전(偏全)을 기질로 여기려고 하지 않는다면 끝내 의심스러울 듯하다."〈변〉백이, 유하혜, 자유, 자하의 치우침은 기질의 선(善)한 부분이다. 걸(桀), 주(紂), 유(幽), 여(厲)의 포악함은 기질의 악(惡)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비록 선(善)이라는 한쪽 부분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약간 미진한 곳은 또한 선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도리어 단지 선한 부분만 들어서 선악을 겸하지 않았다고 이른다면 되겠는가. 편전(偏全)에 대한 언급은 다시 변론할 필요가 없다.○〈납량사의〉"기질의 성을 성으로 여기지 않는 군자들이 있는데,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의 성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은 군자들이 있도다!"○〈납량사의기의〉"'기질(氣質)의 성(性)을 성으로 여기지 않는 군자가 있다.'라는 말은 횡거 선생(橫渠先生 장재(張載))의 말에 근거한다. 선생은 또 일찍이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이 성(性)을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통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사물의 구별이 있고, 가려지는 것에 두텁고 옅음이 있으므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구별이 있다.'20)라고 하였다. 만약 위의 한 단락을 편색(偏塞)으로 여겨 본연의 성(性)에 귀속시키고 아래의 한 단락을 기질(氣質)로 여겨 성(性)으로 여기지 않는 등급으로 내린다면 문의(文義)나 사리(事理)가 모두 노사(蘆沙)의 말처럼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기질이 같지 않다면 천명의 성도 편전(偏全)이 있는가?'라고 묻자, 주자(朱子)는 '하늘이 부여한 성(性)은 편전(偏全)이 없다.'21)라고 하였으니, 편전의 성(性)이 어찌 주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근거한다면 남당(南塘)과 노사(蘆沙) 둘의 주장은 다시 자세히 논의해야 할 듯하고 천고 불변의 논의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변〉횡거 선생(橫渠先生)의 이 주장은 주된 의도를 오로지 인물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통함이나 가려짐과 열림이나 막힘[通蔽開塞], 두터움이나 옅음과 어려움과 쉬움[厚薄難易]의 구분에 두고 차례대로 얘기하였다. 문세(文勢)와 어맥(語脈)이 본연과 기질에 대해서 미칠 겨를이 없었으니 또 어찌 이 편전은 분(分)이 아니라는 오늘날의 주장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였겠는가. 기질에서 말미암은 편전(偏全)은 본래 성(性)으로 여기지 않지만, 이분(理分)에서 비롯된 편전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는가? 편언(偏言)의 인(仁)과 전언(專言)의 인22) 또한 주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주는[覆載生成] 편(偏)을 천지도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천고 불변의 논의는 아마도 개개인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자는 '사람과 사물의 성(性)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偏正)이 원래 다르다. 그러나 다른 가운데 또 각자 저절로 청탁(淸濁), 수잡(粹雜)의 다름이 있다.'23)라고 하였다. 상단(上段)에서 말하는 다름[不同]은 본연(本然)의 분(分)이고 하단에서 말하는 다름[不同]은 기질의 차이[異]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는 먼저 사람과 사물이 각각 얻는 분(分)을 말하고 다음으로 부여받은 기질이 다르기도 한 것에 대해서 말하였다. 횡거(橫渠)의 이 말 또한 이러한 뜻이다. 어찌 아래 한 부분에서 기질을 말한 것을 가지고 위 한 부분에 거짓으로 연결시켜 또 기질로 간주하겠는가.○〈납량사의〉"이(理)를 이미 만사의 본령이라고 했건만, 기(氣)는 어떤 물건이기에 유독 너는 하나로 보고 나는 다른 것으로 보아 서로 배치되는가? 근세의 여러 선생이 이(理)와 분(分)을 나누어 대체로 모두가 '너는 하나[一]로 보고 나는 다른 것[殊]으로 본다.'라고 의론을 벌였다. 그 폐해는 기(氣)가 이(理)의 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가 기의 제재를 받아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다.'는 한갓 헛된 말이 되었다."○〈납량사의기의〉"이일분수(理一分殊)는 본래 이(理)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분수(分殊)에 대해서 선현(先賢) 가운데는 곧바로 기이처(氣異處)를 가지고 말 한 자가 매우 많다. 지금 우선 틈새에 비친 해[日]로 비유하자면 틈의 길이와 크기는 본래 다르지만 단지 그 해일 뿐이다. 단지 그 해라는 것이 이일(理一)이고 틈이 각각 다른 것이 분수(分殊)이다. 이것은 앞의 일의(一義)와 병행이 가능하며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늘이 명한 성(性)이 비록 매우 온전하고 더할 나위 없이 선(善)하더라도 부여된 형기(形氣)의 차이를 어쩌지 못하여 누구도 본연(本然)을 완수할 수 없다. 비록 성(性)이 체(體)이고 기(氣)가 용(用)일지라도 역시 이(理)가 약하고 기(氣)가 강하기 때문에 가려짐이 없을 수 없다. 만약 분수(分殊)를 오로지 이(理)로 돌린다면 이(理)는 과연 기(氣)를 호령하고 기(氣)는 과연 이(理)에 순종하여 더 이상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가 없고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주장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변〉본원(本原)으로 말하자면 조리(條理)와 분수(分殊)가 본래 찬연하게 잘 갖추어졌으니 이것이 도기(道器)가 뒤섞이지 않은 곳이고 태극권(太極圈)24)이 배출(排出)된 까닭이다. 유행(流行)으로 말하자면 조리와 분수(分數)는 기(氣)에 나아가 그 실제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이 도기(道器)가 떨어지지 않는 곳이고 음양권(陰陽圈)과 오행권(五行圈)이 각각 갖추어지게 된 까닭이다. 선현 중에 기이처(氣異處)에 나아가 분수를 말하는 자가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틈새에 비치는 해로 비유하자면 틈에 길이와 크기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길이와 크기에 따라 비추는 빛은 본래 찬연하게 해에 갖추어져 있다. 빛이 형체를 이루고 자취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틈에 나아가 실제를 볼 수 있다.이(理)가 기(氣)의 주인이라는 말이 어찌 일찍이 작용(作用)이 있고 호령(號令)을 하는 것을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 이(理)가 없으면 그 일이 없고 그 이(理)가 있으면 그 일이 있다. 작용의 이(理)가 있으므로 기(氣)가 작용할 수 있고 호령의 이(理)가 있으므로 사람이 호령할 수 있다. 만약 조리(條理)와 분수(分數)를 모두 기(氣)에 귀결시킨다면 3백, 3천의 예(禮)25)가 모두 본연(本然)이 아니니 세교(世敎)와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미 '분(分)은 이(理) 안의 일이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분수(分殊)를 오로지 해가 비치는 틈에 돌리며, 이미 '천명(天命)의 성이 십분(十分) 온전하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분수(分殊)를 오로지 이(理)로 돌리지 않으니, '이(理)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일이며 '십분(十分)'이라는 것은 과연 몇 푼이나 되겠는가. '병행하면서 서로 장애가 되지 않음'을 알지 못하겠다.성(性)이 체(體)이고 기(氣)가 용(用)이라고 한다면 성(性)은 체(體)는 있지만 용(用)이 없는 사물이겠는가. 이와 같다면 정자(程子)가 이른바 '체(體)와 용(用)은 하나의 근원이다.[體用一原]'라는 것은 2개의 근원[二原]이 되고 이른바 '드러남과 은미함은 간격이 없다.[顯微無間]'26)는 것은 간격이 있게[有間]이 되고 이른바 '미응(未應)이 먼저가 아니고 이응(已應)이 나중이 아니다.[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27)라는 것은 선후(先後)가 있게 된다. 근세의 주기설(主氣說)은 잘못된 것이 대체로 여기에서 기인한다.만약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 때문에 이(理)가 주인이 아니라고 의심한다면 덕을 질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덕을 좋아한다는 말을 배척하고 성품이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폐기하는 것이니 그 설이 궁색함을 알 수 있다.○〈납량사의〉"오상(五常)이 사람과 사물에게 같은지 다른지는 결국 어디에서 정해지는가? 이것은 선각자(先覺者)의 말에 의해 정해진다. 주자(朱子)가 참으로 이것을 많이 논하였다. 《사서(四書)》에 대한 그의 주해(注解)와 설명에 보이는 내용은 직접 썼다는 점과 합당함으로 보자면 기록이나 편지에 견줄 바가 아니다. 《사서》의 주해에서 사람과 사물의 오상(五常)에 관해서 말한 것이 모두 세 곳이다.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에 반드시 이 이(理)를 얻은 뒤에 건순(健順)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있게 된다.'라고 말한 것은 《대학혹문(大學或問)》에 나온다.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에 각각 이(理)를 타고나서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의 덕으로 삼는다.'라고 말한 것은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나온다. 이 두 조목은 모두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설명을 하였으니, 문리에 대략 통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변별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 '얻어서 성(性)으로 삼는다.', '얻어서 덕으로 삼는다.'라고 한 것은 모두 모두 〈계사전〉에서 말한 성지자성(成之者性) 이하의 일에 속하지 계지자성(繼之者善) 이상의 일이 아니니, 주자의 의도는 사람과 사물의 성이 생겨날 때 이 오상을 동일하게 갖추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유독 《맹자》 '생지위성(生之謂性)' 장의 집주에서 '이(理)로 말하면 인의예지의 순수함이 어찌 사물이 온전히 얻을 바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전우(田愚)가 살피건대, '수연(粹然)'은 어떤 본에는 '품(稟)'으로 되어 있고 '이(以)'는 '이(而)'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곳이다. -전우가 생각건대, 이 주석 또한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위 문장에서 성(性)은 형이상자(形而上者)라고 하였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이 성(性)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이 성(性)은 무슨 성인가? 바로 이른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이다. 이는 《중용장구》와 《대학혹문》이 같다. 만일 '사물이 어찌 온전함을 얻었겠는가.'라고 한 것을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는 단안으로 여긴다면 《중용장구》의 다음 문장에서 어찌 '기품에 차이가 있으므로 과불급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대학혹문》의 다음 문장에서 어찌 '저 미천하여 사물이 된 것은 형기에 질곡되어 그 온전함을 확충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 두 조목은 또 모두 《맹자》 주석의 내용과 조금의 차이도 없다. 내가 생각건대, 세 곳은 모두 체는 같고 용은 다르다는 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물이 어찌 온전히 얻겠는가.'라고 말했을 뿐이지 '사물은 함께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또한 사람과 사물이 오상을 동일하게 지녔다는 말이다. 주자(朱子)가 이 주장을 한 것이 어찌 새로운 논의를 펼치기 좋아하여 인도(人道)를 만물과 동일시한 것이겠는가.대체로 이 이치 외에 더 이상 다른 이치는 없다. 따라서 단지 다만 위 성현에서부터 인성이라는 글자를 넷으로 쪼개고 만물에까지 일관시켰다고 해서 혐의쩍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전우가 생각건대, 이상의 논의는 낙가(洛家)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더라도 일(一)이면서 분(分)이 없다면 내가 말하는 일(一)이 아니다. 그래서 《중용혹문》과 《대학혹문》에서 곧 말하기를 '새와 짐승, 풀과 나무가 생길 때 겨우 형기(形氣)의 치우침만 얻고 전체를 관통하지 못했으니, 저 천하여 사물이 된 것들은 형기의 치우치고 막힘에 구애를 받아 그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다.'28)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이 일리(一理)를 함께 지니고 있더라도, 이(理)에서 다시 나뉜 한계[分限]가 없을 수 없음을 말한다. 기(氣)는 이 이(理)를 태우고 싣는 것이므로 형기를 떠나서 분(分)을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일(一)에 분(分)이 없었던 적이 없음을 여기에서 인하여 볼 수 있다.위와 아래의 이 문의(文義)를 합하여 보자면, 《맹자》 '생지위성(生之謂性)' 장의 집주와 또한 뜻이 다르지 않다. 후세 사람들이 각각 절반씩을 점유하여 올리고 내리고 하니, 이것이 어찌 주자가 예상할 수 있었던 바이겠는가. 이를 통해 물(物)과 아(我)가 오상(五常)을 균등히 가지고 있는 것은 이(理)의 일(一)이고, 오상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은 일(一) 안에 있는 분(分)임을 알 수 있다. 대개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으로부터 이(理)와 분(分)이 원융(圓融)하여 간극이 없기 때문에 만물에서 성(性)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선각자들이 성을 논할 때 이(理)가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이(理)가 같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서로 주장이 괴리되는 것이 아니다.공공의 관점에서 그 묘(妙)를 논할 때는 배출(排出)의 측면에서 말하고 참되고 분명하게 그 체(體)를 가리킬 때는 즉기(卽氣)의 측면에서 밝힌다. 배출(排出)의 측면이라면 이(理)는 본래 하나이므로 이일(理一)이 주가 되어 만수(萬殊)가 그 가운데에 포함되고, -전우가 생각건대, 치우치고 온전하지 않은 것을 만수(萬殊)로 보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즉기(卽氣)의 측면이라면 기(氣)가 이미 나누어지므로 분수(分殊)가 주가 되어 이일(理一)이 그 사이에 있다. 이로부터 말에 두 가지가 있게 된 것이지 어찌 성(性)에 다양한 층절(層節)이 있겠는가. 제가(諸家)는 이(理)와 분(分)이 일체(一體)가 되는 곳으로 인하여 깊이 착안하지 못하였다. 다름을 말하면 오상(五常)을 홀로 차지하려 하고 같음을 말하면 이내 편전(偏全)을 낮추어 보니, 털끝만큼의 차이로 천리(千里)가 어긋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납량사의기의〉"《중용혹문》, 《대학혹문》이 만약 미물(微物)만 단언(單言)하고 중인(衆人 평범한 사람)을 함께 거론하지 않았다면 노사(蘆沙)의 말과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 문장에서 지우(知愚)와 현부(賢否)의 기품(氣稟)이 다름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말하고 또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에는 혼잡(昏雜)한 바가 있어 받은 바의 바른 것을 온전히 할 방도가 없다.'라고 하고, 또 '이른바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이미 폐단이 없을 수 없어 온전함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미물은 통하지 못하여 확충한 방도가 없다.'라는 것과 말의 뜻이 일치하여 유별(類別)과 체례(體例)에 다름이 없으니 '통하지 못하여 확충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본연의 성(性)으로 귀결시키고 '온전히 할 방도가 없다', '온전함을 잃었다'는 것을 기질의 성으로 귀결시키면 공평함을 잃었다는 혐의가 있지 않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노사(蘆沙)에게 묻기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덕성(德性)이 균일한 것은 이(理)의 일(一)이고, 덕성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은 일(一)의 분(分)이다.'라고 묻는다면 장차 대답하기를 옳다고 하지 않겠는가."〈변〉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오성(五性 오상(五常))을 아울러 거론한 것은 3곳이다. 그래서 선사(先師)께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하문(下文)에서 있고 없음을 구분한 것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기품이 간혹 다르다."라고 한 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기품(氣稟)이 같지 않음을 구분한 것이다.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인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화육(化育)하고 생장(生長)하게 한다."라는 조에 있으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이 본연(本然)의 분(分)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체(體)는 같지만 용(用)이 다르다."29)라는 주장과 "성(性)은 체(體)이고 기(氣)는 용(用)이다."라는 주장은 동일한 권투(圈套, 올가미를 씌우는 수단)이니 많은 변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른바 낙가(洛家)와 같다는 것은 실제로는 같지 않다. 선사(先師)가 같다고 한 것은 곧 실(實)의 같음이고 제가(諸家)가 같다고 한 것은 도리어 허(虛)의 같음이다. 《중용혹문》과 《대학혹문》은 주로 천명(天命), 명덕(明德), 인물(人物)의 일원(一原)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시말(始末)의 곡절과 다과(多寡)의 분수(分數)를 구별하였다. 그래서 초목과 금수로부터 중인(衆人)과 현인(賢人)에 이르고 성인(聖人)이 본성(本性)을 발휘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쳤다. 어맥(語脈)과 차례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 본연(本然)과 기질(氣質)에 대해서는 원래 달리 주장하였으니 구별할 겨를이 없다.《중용장구》에 "사람과 사물은 각각 부여받은 이(理)를 얻는다."라고 하였다. 또 "사람과 사물은 각각 성(性)의 자연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대학혹문》에서는 "전체를 관통함이 없다."라고 하고 또 "그 본체를 확충할 방도가 없다."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중용장구》에 대해서는 포양을 하고 《대학혹문》에 대해서는 폄훼를 하였는가.대체로 《중용장구》에서는 부여받은 본연의 묘(妙)를 말하고 《대학혹문》에서는 부여받은 분수(分數)의 이(異)를 말하였다. 이제 폄훼한 것을 보고 본연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포양한 것까지 더불어 본연이 아니라고 여기겠는가. '온전히 할 방도가 없고', '온전함을 잃는다'는 것이 곧 《중용장구》에서 말하는 "기품(氣稟)이 다르기도 하다."라는 것이고 도를 닦고 교화를 펼치는 곳이 된다.○〈납량사의〉"본체(本體)이면서도 '확충할 수 없다.[無以充]'라고 하였으니 본체가 본성의 영역[性分]이 되는가, 아니면 '무이충(無以充)' 3자에 이르러 비로소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전체(全體)이면서도 '통할 수 없다.[不能通貫]'라고 하였으니 전체가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아니면 '불능관통(不能通貫)' 4자에 이르러 비로소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내가 말하기를, '본체와 전체는 곧 본성의 영역 중에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요, 확충할 수 없고 관통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그 본성의 영역 중에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다. 두 가지 사리(事理)는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인데 지금 반드시 둘로 나누어 논하려 하니 잘못되었다.'라고 하였다."○〈납량사의기의〉"'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형기(形氣)가 치우치고 막힌 병통이다. 지금 만약 반드시 성(性)의 분수(分殊)로 여긴다면 사람들을 의혹스럽게 할 것이다. 또 《대학》으로 논하더라도, '하늘이 백성을 낳으면서 모두에게 성(性)을 부여하였다.'라고 한 것은 본성의 영역 중에서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고, '기품(氣稟)이 가지런하지 않아서 모두 온전할 수가 없다.'30)라는 것은 본성의 영역 중에서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다. '허령(虛靈)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는 것은 덕의 영역 중에서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고, '얽매이고 가리워져 혼매하기도 하다.'31)는 것은 덕의 영역 중에서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니, 또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보는 이들이 깨달음의 계기가 되는 한 마디를 알려 주기 바란다."〈변〉'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이 어찌 주자(朱子)가 초목과 조수(鳥獸)는 요(堯)의 복식을 입지 못하고 요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해서 한 말이겠는가. 단지 천명(天命)과 명덕(明德)에 근거하여 보존하고 있는 서로 다른 분(分)이 이와 같음을 말했을 뿐이다. 사람이 요의 복식을 하고 요의 말을 하면 사람들은 장차 그를 성인으로 여길 것이다. 초목과 조수이건만 요의 복식을 하고 요의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장차 괴이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온전할 방도가 없고', '온전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본래 기품(氣稟)이 가려졌기 때문이니 '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이 사물 입장에서는 어찌 본연의 분(分)이 아니겠는가.○〈납량사의〉"'이(理)로 말하면 만물이 일원(一原)이어서 본래 인물에 귀천의 다름이 없다.'32)는 이 하나의 구절은 이른바 배출의 측면에서 그 묘(妙)를 말한 것이니, 이일(理一)이 주가 되는 것이다. '기(氣)로 말하면 그 바르고 통함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되고, 그 편벽되고 막힘을 얻은 것이 사물이 된다.'33)는 이 하나의 구절은 이른바 즉기(卽氣)의 측면에서 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니 분수(分殊)가 주가 되는 것이다."○〈납량사의기의〉"위 1절(節)은 하나의 성(性) 안에 온갖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어 하나의 성은 이일(理一)이고, 온갖 이치는 분수(分殊)이며 사람과 사물은 이 일원(一原)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비록 온갖 이치가 분수라 하더라도 사람과 사물의 귀천이 차이가 없음에 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에 근거하면 분편(分偏)을 가지고 비교 검토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자세히 알아야 하는 부분이다.- 아래의 1절은 도리어 기품(氣稟)에 관한 일만 집중적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대체로 아래 1절의 21자(字)는 이(理)가 실제적인 작용을 하는 곳을 가리킬 수 있는 일점일획(一點一劃)도 없이 노사(蘆沙)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의심할 만하다."〈변〉사람이 되고 사물이 되는 것이 본연의 분수(分殊)에 달려 있지 않다면 이른바 분수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일인가? 이른바 사람과 사물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과 사물의 구분[分]은 본래 일원(一原)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사람의 것도 단지 이 이(理)이고 사물의 것 또한 이 이일 뿐이다. 그래서 귀천(貴賤)의 다름이 없다고 한다. 사람과 사물의 구분은 본래 이미 미리 정해졌지만, 기(氣)에 의해 형체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그 실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기(氣)에 나아가 실상을 가리킨다."라고 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일음 일양(一陰一陽)을 도(道)로 여기고 정자(程子)는 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川流不息]을 도체(道體)로 여기고 주자(朱子)는 오행(五行)을 도(道)의 체단(體段)으로 여겼다. 사람이 이치에 통달한다면 천지에 가득한 형형색색(形形色色)이 도리가 아닌 것이 없다. 만약 정통 편색(正通偏塞)을 이(理)의 실체(實體)가 아니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理)라는 글자, 도(道)라는 글자, 태극(太極)이라는 글자를 말한 이후에야 비로소 이(理)라고 이르겠는가? 일점일획 운운한 것은 사람을 웃음 짓게 만든다.○〈납량사의〉"마음이 기(氣)의 분수에 해당하는 사안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갖춘 바는 성(性)이다. 마음이 성을 갖춘 것은 범인과 성인이 같지만, 마음이 성(性)을 극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범인과 성인이 다르다. 그 같음이나 다름이나 모두 그 중한 바가 성(性)에 있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은 곧 그 같은 것을 망각하고 그 다른 것을 주장하여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다르다.[聖凡異心]'는 설을 법문(法門)으로 삼았으니, 그 또한 성인의 뜻에 모순이 된다. 남당과 논변한 사람도 그 중한 바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고, 구구하게 그 광명(光明)한 마음의 분수(分數)를 비교하여 이로써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同聖凡之心]'라고 하려 하였으니, 벙통을 찌르지 못한 것이다."○〈납량사의기의〉"기질(氣質)이라는 것은 청탁 수박(淸濁粹駁)이 전혀 가지런하지 않고, 마음[心]이라는 것은 허령 신묘(虛靈神妙)가 유일무이(有一無二)하다. 남당(南塘)은 곧 이 두 가지를 변별할 수 없는 사물로 여겼다. 만약 광명(光明)에 우열 분수(優劣分數)가 없음을 지적하지 않고 단지 마음이 성(性)을 갖추는 것은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다는 점만 거론하여 변석한다면 남당(南塘)의 비웃음을 받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하물며 마음[心]이 성(性)을 갖추는 것은 미물(微物)도 그러하니 어찌 남당의 의심을 풀 수 있겠는가."〈변〉심(心)과 기질(氣質)은 판연히 다른 두 가지 사물이 아니다. 청탁 수박(淸濁粹駁)에 따라 그 허령함[靈]은 분수(分數)가 없을 수 없으니 본래 이것을 가리켜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이를 수 없고, 또한 광명(光明)한 것만을 마음[心]으로 인식하여 성인과 범인이 다르다고 이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중시하는 것 외에 다시 어찌 우열 분수(優劣分數)가 없는 사물이 하나라도 있겠는가. 아니면 혹시라도 형이하(形而下)의 명덕(明德)이 있겠는가. -임전재(任全齋)34)는 명덕(明德)을 형이하(形而下)로 간주하였다.-근세의 유자(儒者)들 가운데 기질(氣質)은 신체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또 허령(虛靈)은 기질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아서 '상제가 허령을 내려주니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라는 말이 있어 마침내 이것을 명덕(明德)으로 여기고 이것으로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그 빛이 번쩍번쩍하여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이단의 설과 어찌 구별이 있겠는가.무릇 기질(氣質)이라는 것은 단지 이 몸에 있는 음양(陰陽)의 모임이고 마음[心]은 곧 그것의 정상(精爽)이다. 기(氣)에 이미 청탁 수박(淸濁粹駁)이 있다면 그 정상은 분수(分數)가 없음을 용납하지 못하지만 다만 갖추고 있는 것은 성(性)이다. 이른바 본심(本心), 양심(良心), 인의심(仁義心)이 어찌 일찍이 성인과 범인의 다름이 있었는가. 지금 광명(光明)에 분수가 없다는 말을 보면 그 오류를 계승하고 착오를 답습한 것이 일조일석에 비롯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납량사의〉"찢어진 종이에서 녹문(鹿門) 임씨(任氏)의 의론 한 단락을 얻었는데, '다름을 말하자면 성(性)이 다를 뿐 아니라 명(命)도 다르다. 같음을 말하자면 성이 같을 뿐 아니라 도(道)도 같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얼핏 겉만 보면 사슴 곁에 있는 것이 노루이고 노루 곁에 있는 것이 사슴이라는 것35)과 같지만, 실제로는 도리의 근원을 물 샐 틈 없이 설명하였다.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이일분수(理一分殊)' 넉 자가 녹문에 힘입어 일맥(一脈)이 동방에서 추락하지 않았도다. 그의 전서(全書)를 얻어서 살펴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납량사의기의〉"이천(伊川)이 어찌 일찍이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성(性)을 논하였는가. 다만 〈서명(西銘)〉으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理)를 미루어 그 일(一)을 알게 하고 의리를 보존하여 분(分)을 세우게 할 뿐이었다.36) 양시(楊時)37), 이통(李侗)38), 주자(朱子)의 논의 또한 모두 이와 같다. 나 정암(羅整庵)39)에 이르러 비로소 이 4자를 내걸고 성명(性命)의 오묘함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가 말하기를, '기(氣)를 받은 초기에는 이(理)가 하나지만 형체를 이룬 뒤에는 분(分)이 달라진다.'40)라고 하였다. 이것은 노사(蘆沙)의 뜻과 거리가 멀다. 또 말하기를,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성(性)을 논하면 자연히 천명(天命)과 기질(氣質)이라는 두 명칭을 세울 수 없다.'41)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더욱 어긋나게 된다. 또 그가 이기(理氣)를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고 이기(理氣)가 두 가지 사물이라는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심하게 책망한 것은 더 말할 수가 없다.우리 동방의 임 녹문(任鹿門)이 또 나 정암이 말한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지취를 조술(祖述)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건(乾)의 건(健)이 곧 태극(太極)이고 건(健) 안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다. 곤(坤)의 순(順)이 곧 태극이고 순(順) 안에 원형이정이 있다. 원형이정은 곧 음양오행(陰陽五行)이다. 그러나 건(乾)의 원형이정은 여전히 건(健)일 뿐이고 곤(坤)의 원형이정은 여전히 순(順)일 뿐이다. 그렇다면 건(乾)과 곤(坤)의 태극은 자연히 서로 다름에 해가 되지 않는다.'42)라고 하였다. 또 인물성도(人物性圖)를 만들어 인권(人圈)에서는 오상(五常)과 태극(太極)을 자세히 적었지만, 물권(物圈)에서는 단지 태극만 적고 오상을 적지 않았다. 또 '혼연한 태극이 하나의 사물 안에 갖추어져 있다.'라는 주자의 학설을 논의하기를, '이것은 이 각일기성(各一其性)43)의 측면에서 천리(天理)가 완전하여 휴흠(虧欠)이 없다는 것을 이를 뿐, 하나의 사물이 온갖 이치를 구비했다는 것을 이르지 않는다.'44)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분수를 잘못 보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또 인성의 선함을 논하면서 '이는 기질 이외에 따로 선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45)라고 하였다. 이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노사(蘆沙)가 다시 살아나서 이를 본다면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리면서 장탄식을 할 것이다. 노주(老洲) 오 선생(吳先生)46)은 일찍이 나 정암과 임 녹문 양가(兩家)에 대해서 매우 많은 논의를 하였다. 이제 세 단락을 아래에 덧붙여 보여 노사 문하의 제공(諸公)이 자세히 보게끔 한다."○《노주집잡지(老洲集雜識)》에 이르기를, "정암(整庵)과 녹문(鹿門)이 똑같이 이(理)와 기(氣)가 하나의 사물임을 논하였지만, 정암은 이일(理一)에 비중을 두었고 녹문은 분수(分殊)에 비중을 두었다. 이일(理一)에 비중을 둔다면 자연스럽게 이(理)가 주가 되고 분수(分殊)에 비중을 둔다면 결국에는 기(氣)가 주가 된다. 이것을 가지고 득실을 비교하여 논하자면 정암이 아마도 흠이 적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정암과 녹문이 모두 추리(推理 이(理)를 미루어 감)의 관점에서 합일(合一)의 오묘함을 본 것은 얼핏 보자면 고묘(高妙)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궁극에는 모두 주기론(主氣論)으로 귀결되었다. 정암은 그래도 일일이 이 이(理)를 일으켜 세운 뜻이 있다. 하지만 녹문은 줄곧 기(氣)라는 한 자로 천하의 이(理)를 모두 덮어버리고는 다시는 이(理)가 이(理)가 되는 까닭을 궁구하지 않았다. 대체로 녹문의 견해는 실로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에 근본하였지만, 기(氣)에 대한 주장은 자못 정암을 능가한다."라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정암은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이(理)와 기(氣)를 말하는 저울로 삼았다. 그가 말하기를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고 도(道)는 형(形)이기 때문에 다르다.'라고 한 것은 매우 옳다.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다는 것은 바로 미발(未發)한 상태에서 이일(理一)을 가리키고, 도는 형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은 이발(已發)한 상태에서 분수(分殊)를 가리킨다. 녹문은 그의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조술(祖述)하면서도 유독 이 말을 심하게 배척하였는데 무엇 때문인가? 끝내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에 구애되어 성(性)과 도(道)에 비록 체용(體用)의 다름이 있더라도 일원(一原)의 동일함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하지 못하였다."〈변〉덕(德)에는 일정한 법이 없어 선(善)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법이 되며 선(善)은 일정한 주인이 없이 능히 한결같음에 합한다.47)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니 돌아감은 같으나 길이 다르다."48)라고 하고, "나의 도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꿴다."49)라고 하고, "그것의 사물됨이 변하지 않으니 사물을 냄이 측량할 수 없다."50)라고 하고, "널리 배우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장차 돌이켜 간략하게 말하고자 함이다.51)"라고 하였다.자세히 연구하고 상세히 완미하면 경전(經傳) 안에서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뜻을 말한 부분이 매우 많으며 이 마음[心]과 이 성(性)의 오묘함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님이 없다. 주자(朱子)는 "이(理)와 기(氣)에 대해서는 이천(伊川)의 말이 뛰어난데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하였다."52)라고 하였다. 이일분수는 곧 이천이 평소에 하던 말이지 이것이 어찌 〈서명(西銘)〉에 인하여서만 한 말이겠는가. 정자(程子)는 또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런 형체가 없지만, 온갖 형상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53)라고 하였다. 장자(張子)는 "성(性)이라는 것은 모든 사물의 일원(一原)이다."54)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성(性)을 논할 수 없겠는가. 양씨(楊氏)와 이씨(李氏)가 인의(仁義)를 가지고 이일 분수(理一分殊)를 논하였으니 어찌 나씨(羅氏)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것을 들어 성(性)을 설명하였겠는가.녹문(鹿門)의 건순 태극(健順太極)에 관한 학설은 해가 없을 듯하지만 '원형이정(元亨利貞)이 곧 음양오행이다.'라는 조항의 설은 이(理)와 기(氣)를 하나의 사물로 여기는 병통이 있다. 나 정암(羅整庵)의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고 도(道)는 형(形)이기 때문에 다르다.'55)라는 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성과 도는 비록 같지만[性道雖同]"56)이라고 하였다. 만물이 화생(化生)한 다음이라면 '비록 같다[雖同]'는 것의 '같음'은 이미 분수의 같음에 해당하니 어찌 형태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달라지겠는가? '형(形)' 자를 '기품이 혹 다르다[氣稟或異]'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형태와 기품은 그 의미가 현격하게 구별되니 녹문의 배척이 옳다. 다만 〈인물성도(人物性圖)〉와 기질(氣質)이 선(善)하다는 학설은 과연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그의 말까지 폐기할 수 없으니 하물며 이 말의 잘못 때문에 다른 말의 타당함까지 폐기할 수 있겠는가.○〈납량사의〉"제가(諸家)가 사람과 사물의 성(性)을 언급하면서 한결같이 모두 이(理)를 분(分)이 없는 것이라 여기고 분(分)은 기(氣) 때문에 생긴다고 여겨, 형기(形氣)를 벗어난 곳에다 이일(理一)을 제한시키고 형기에 떨어진 이후에다 분수(分殊)를 국한시킨다. 이에 이(理)는 이대로 있고 분(分)은 분대로 있어 성(性)과 명(命)이 단절된다."○〈납량사의기의〉"만약 낙가(洛家)가 태극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없고 성(性)에는 인의예지가 없다고 여겼다면 응당 '이(理)는 분(分)이 없는 사물이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만약 원형이정은 기(氣)로 인하여 비로소 존재하고 인의예지는 기(氣)에 의지하여 비로소 생겨난다고 여긴다면 '분(分)은 기(氣)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理)는 이대로 있고 분(分)은 분대로 있는 근심이 어디에 있겠는가?"〈변〉원(元)은 만물을 낳는 이(理)이고 두루 포용하고 보호하지 않음이 없으며, 형(亨)은 만물을 키우는 이(理)이고 조리와 등급이 찬연하고 밝게 드러나며, 리(利)는 만물을 완성하는 이(理)이고 제재와 차별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정(貞)은 만물을 갈무리하는 이(理)이고 대화(大和)를 보전하고 각각 성(性)과 명(命)을 바르게 한다. 이 이(理)는 하늘에서는 하늘의 이(理)가 되어 만물의 이치를 갖추고, 사람에게서는 사람의 이가 되어 만사의 이를 갖춘다. 이제 태극에 원형이정이 있음을 알면서도 원형이정의 이면에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과 자연(自然)의 분(分)이 있음을 모른단 말인가?사람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천하의 일을 주관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의 몸을 가지면 이 몸을 주관하는 자가 있어야 하니 군상(君上)이 이에 해당하고, 이 몸을 낳은 자가 있어야 하니 부모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의 앞뒤로 태어난 자가 있어야 하니 형제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과 짝을 이루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부부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과 동류인 자가 있어야 하니 붕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몸이 만물의 영장이라면 만물을 주재하는 이가 있어야 하고, 이 몸이 천지의 마음이라면 천지를 돕는 이가 있어야 한다. 사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하늘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늘에 대해 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에게서 관찰한다.하단(下段)의 〈외필변(猥筆辨)〉에서 이미 '기(機) 상의 이(理)만을 가리키면 태극이라 하고 사시(四時)의 기를 함께 거론하면 원형이정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반드시 사시의 기(氣)를 함께 거론한 뒤에야 원형이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기(氣)로 인하고', '기를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납량사의〉"지금 한 덩어리의 쇠가 있다고 할 때 이것으로 그릇을 만들 수 있고 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분수가 일(一)에 포함된 것이다. 이른바 찬연(燦然)하다는 것57)은 한편으로는 그릇을 만들 수 있고 한편으로는 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릇을 만드는 화로에 들어가면 그릇이 되고 칼을 만드는 화로에 들어가면 칼이 되어 각각 그 본분에 맞는 하나를 얻는다."○〈납량사의기의〉"가령 누군가가 말하기를, '경청로(輕淸爐)에 들어가면 하늘이 되고 중탁로(重濁爐)에 들어가면 땅이 되며 청수로(淸粹爐)에 들어가면 상지(上智)가 되고 탁박로(濁駁爐)에 들어가면 하우(下愚)가 되며 양강로(陽剛爐)에 들어가면 남자가 되고 음유로(陰柔爐))에 들어가면 여자가 된다. 이것은 각각 본연(本然)의 일(一)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장차 어떻게 변론하여 이를 물리치겠는가?"〈변〉사람이 되고 사물이 되며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 것은 쇠가 대야가 되고 사발이 되며 칼이 되고 검(劒)이 되는 것과 같다. 현자(賢者)가 되고 우인(愚人)이 되는 것은 쇠가 노구(爐鞲)의 긴밀함과 헐거움에 따라 단련(鍛鍊)의 정도가 정밀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한 것과 같다. 또 대야나 사발이 되고 칼이나 검이 되는 것이 쇠가 스스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주장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인가?"○〈납량사의〉"이미 분(分)을 기(氣)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고 여겼으니, 사람과 사물이 동일하게 오상(五常)을 지닌 것을 본연의 성[本然之性]이라 하고 편전의 성[偏全之性]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여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다고 논해도 괴이할 것이 없다."○〈납량사의기의〉"편전(偏全)과 통색(通塞)은 분수(分殊)의 분(分)과 등급상 다른 점이 있다. 분수(分數)는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기 전에 갖추어져 있지만, 편전(偏全)과 통색(通塞)은 도리어 부여받은 기(氣)에 달려있다. 또한 편전(偏全)은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학지(學知) 이하로는 기(氣)의 청탁(淸濁)에 많고 적음이 있고 이(理)가 온전하거나 빠지거나 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있다.'58)라고 하였다. 이제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게 오상을 지닌 것을 본연(本然)의 성(性)으로 여기고 이(理)가 온전하거나 빠지는 것을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떠한 장애가 있겠는가? 이와 같다면 사람의 성(性)에 대해서도 미루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변〉편전(偏全)으로 사람과 사물을 말하는 것은 본연(本然)의 분(分)이고 성인과 범인을 말하는 것은 기품(氣稟)의 이(異)이다. 만약 사람의 온전함을 본연이라고 하고 사물의 치우침을 기질이라고 한다면 사람만이 본연의 성(性)을 얻고 사물이 얻는 것은 기질의 성(性)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솔개가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뛰노는 것59), 물이 아래로 흐르고 불이 위를 향해 타오르는 것60)이 모두 본연이 아니게 되니 천하에 자기의 성(性)을 성(性)으로 지닐 수 있는 사물이 어찌 하나라도 있겠는가.분(分)은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편전(偏全)을 도리어 부여받은 기에 달려있다고 여긴다면 사람과 사물의 분(分)은 편전(偏全)을 버려두고 다시 어떠한 분(分)이 있겠는가. 그 주장이 막히는 곳을 알 수 있으니 너무나도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납량사의〉"오상이 사물에 따라 치우치거나 온전한[偏全] 것은 바로 이 이(理)의 본분이니,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편전(偏全)이 같지 않은데도 오히려 같다[同]고 하는 것은 마치 대야와 사발, 칼과 검(劍)을 쇠라고 한다면 같다고 할 때의 동(同)이지, 혼동해서 대야와 사발, 칼과 검의 차이가 없어서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편전의 성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릇이나 칼을 벗어나 쇠를 찾는 말이다."○〈납량사의기의〉"사람과 사물의 일원(一原)61)에는 오상(五常)이 있으니, 이것이 이(理)의 본분(本分)이다. 이제 오상(五常)이 기(氣)에 따라서 발현되는 과정에 전결(全缺)이 있는 것을 이(理)의 본분(本分)이라고 여기고 성(性)의 본연(本然)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주자(朱子)가 말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란 성(性)이 기질(氣質)에 떨어져 있는 것'62)이라는 것과 그 부류가 다르다. 이른바 기질(氣質)의 성(性)과 기질로 논하자면 대체로 성(性)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얼음이 녹는 듯 분명한 해석인데 두 주장이 서로 어긋남이 없겠는가?"〈변〉사람과 사람이 다르고 사물과 사물이 다른 것은 기질(氣質)의 편전(偏全)이고 사람과 사물이 다른 것은 본연(本然)의 편전이다. 주자(朱子)는 "사람과 사물의 편정(偏正)은 원래 다르다."63)라고 하였다. 정자(程子)는 인(仁)을 말하면서 "편언(偏言)하면 하나의 일이지만 전언(全言)하면 4가지를 포괄한다."64)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전(偏全) 또한 모두가 본연이 아니겠는가?○〈납량사의〉"'일(一)'로 '오(五)'를 견주어 보면 '오(五)'는 '일(一)'과 같고 '오(五)'로 서로 견주어 보면 분(分)이 여기에 존재한다. 산수(散殊)65)가 끝이 없다고 해도 모두 본분(本分)에 속하는 일이니 편전(偏全)을 낮추어 보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납량사의기의〉"일신(一身)의 관점에서 사지(四肢)를 보면 사지는 똑같이 일신이고 사지의 관점에서 서로를 보면 분(分)이 여기에 존재한다. 이것은 본래 그러하다. 그러나 어찌 사지와 분수(分殊)로 편전을 나누겠는가. 그래서 나는 분(分)과 편전(偏全)은 다르다고 말한다. 편(偏)을 말하고자 한다면 응당 사지가 마비되어 불편하거나 중풍이 들어 팔다리를 쓰지 못한 다음에야 비로소 편(偏)이라고 이를 수 있다. 낮춰보지 않고자 하더라고 그것이 가능하겠는가."〈변〉일신(一身)을 통틀어 말하자면 이일(理一)과 같고 온갖 부분을 가리켜 말하자면 분수(分殊)와 같다. 일신을 말하지만 백체(百體 온갖 부분)가 그 안에 있고 백체를 말하지만 일신이 그 안에 있으니, 일신 밖에 별도로 백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백체 밖에 별도로 일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일(理一)과 분수(分殊)가 각각의 범위가 있고 각각의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님이 이와 같다. 지금 일신을 사지(四肢)와 대립시켜 이일(理一)을 일신에 국한시키고 분수(分殊)를 사지에 제한하여 이일과 분수를 고정된 간격이 있는 사물로 여겼다. 이것이 본체는 같지만 작용은 다르므로 편전은 분이 아니라는 학설이 있게 된 까닭이다.○〈납량사의〉"《중용혹문》과 《대학혹문》에서 이미 음양오행설을 따라 그 강리(綱理 벼리가 되는 이)가 같음을 언급하고, 이어서 음양오행의 편전(偏全)으로 그 조건이 같지 않음을 언급하였다. 한때의 일을 앞뒤로 말하였으니 무슨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는가."○〈납량사의기의〉"음양오행의 편전은 본래 기질(氣質)에 속하고 건순오상(健順五常)의 조건은 본래 분수(分殊)에 속한다. 어찌 곧장 분수를 가리켜 편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다면 손발의 명칭이 다른 것을 편전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 되지 않을 듯하다."〈변〉장자(張子 장재(張載))가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군자는 성으로 여기지 않는다."66)라고 하였다. 이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본연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오행이 생겨날 때 그 성을 하나씩 갖는 것67)을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보았다. 이것은 장자(張子)의 말과 다르기는 하지만 각각 일의(一義)가 되기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본연의 분(分)이 아니라고 이를 수 없다. 간재의 〈납량사의기〉에서 이미 기질지성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고 음양오행의 편전을 기질에 귀속시켜 이른바 마비, 중풍과 같은 부류로 여겼으니 매우 말이 되지 않는다.그렇다면 양강 음유(陽剛陰柔), 수윤 화조(水潤火燥)68)가 모두 본연이 아니라는 것인가. 천지 만물은 있으면 다 있으니 인체(人體)의 사지(四肢)와 백해(百骸 모든 뼈)가 더할 수도 없고 감할 수도 없이 완벽하게 충족되어 비거나 빠진 부분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태극(太極)의 대전(大全)이고 조화(造化)의 묘용(妙用)이다. 만약 "음양오행은 부여된 기에 달려있고 때가 되면 배정될 뿐이다."라고 한다면 태극은 결과적으로 헛된 명칭이 되고 조화를 행하는 자가 너무 수고롭지 않겠는가.하늘이 만물(萬物)을 낳는 것은 사람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과 같다. 만사에 응하는 이(理)가 먼저 갖추어지지 않으면 인성(人性)의 본체에 흠결이 있게 된다. 만물을 낳는 이(理)가 먼저 갖추어지지 않으면 천명(天命)의 본원에는 소루함이 있게 된다. 천명의 본원과 인성의 본체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주자(朱子)는 "사람과 사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偏正)이 정녕 본래 같지 않다. 그러나 편정한 가운데 다시 절로 청탁혼명(淸濁昏明)의 차이가 있다."69)라고 하였다. 위 단락의 '본래 같지 않다.'는 것은 본연(本然)에 의한 분(分)이고 아래 단락의 '다시 절로 같지 않다.'는 것은 기에 따른 분(分)이다. 만약 위 단락과 아래 단락을 합쳐서 한결같이 기분(氣分)70)으로 귀결시킨다면 되겠는가. 凉議曰。分也者。理一中細條理。理分不容有層節。分非理之對。分殊二字。乃對一者也。○記疑曰。此語驟看。無可疑者。但蘆沙答奇景道書云。在天原無此分。則人物何處得來而有此偏全。然則此言分者細條理。將爲異日人物所得。偏本然全本然之源。愚意偏之與分。元非一串。分如一身耳目手足。偏如一耳獨聽。半身偏遂也。分是一中本有之理。而偏是氣上對全之性。恐難做一樣說也。理有分。故物有偏全。理若無分。物何自而有偏全乎。今曰分如一身之耳目手足。而爲一中之本有。請以此說明之。合耳目手足百骸百體。而爲一身之統體。合人獸草木萬象萬物。而爲天地之統體。知人身統體之理。本有於未生之前。而不知天地統體之理。本有於未形之前耶。知人耳目手足之本有。則鳥獸之羽毛蹄角。草木之枝葉花實。亦不可謂非本有矣。然則人物偏全。果非天命之本然乎。分與偏全。若非一串。朱子何以曰覆載生成之偏。又何以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合下不同耶。至若獨聽偏遂。此是氣失其平。而爲未成之物也。烏可援而爲說耶。凉議曰朱子曰太極者象數未形而其理已具之稱。形器已具而其理無眹之目。夫象數未形。則未破之一矣。而其理已具。則非分之己涵乎。形器已具。則旣定之分矣。而其理無眹。則非一之自在乎。○記疑曰未審蘆沙以其理已具。爲人物所稟偏全之源乎。竊意此句指意。恐是父子君臣未生之前。慈孝禮忠之理已具。事物微細未有之先。事物微細之理已具云爾。非聖人未生之前。已有理一中分殊之全理。賢人衆人未生之前。已有幾分未全之理。下愚大憝未生之前。已有十分不移十分乖戾之理。鳥獸枯槁未生之前。已有偏塞之理。而各爲萬象所得之源也。然則似與蘆沙所謂在天源無此分。則人物何處得來而有此偏全云者。判然殊別矣。可疑。盈天盈地。若大若細。無一物而非象數與形器也。然則人未生而人之理已具。物未生而物之理已具者。何足多辨彼於此義。必非不知。而故引氣質分數下愚大憝之語。眩混其說。以濟其一時忌克之私。噫。用心如此。此等理致之得失。猶是小事也。天偏於覆。而地偏於載。日偏於晝。而月偏於夜。目偏於視而耳偏於聽。手偏於持。而足偏於行。以昭昭而視周天。則周天爲全。以涓涓而視河。海則河海爲全。以一葉而視一樹。則一樹爲全。以一肢而視一身。則一身爲全。天下何物果有外於偏全者哉。以此爲非本然。則天下更無本然久矣。且以鳥獸草木。謂非理之所本有。則人是何物。獨爲理之所本有耶。人旣非本有。則慈孝禮忠之理。豈獨爲本有而已具於何處耶。豈以急於取辨而有不暇察也耶。凉議。曰性同者。吾不曰不然。而以偏全之性。爲非本然。則是分外有理也。遂主同而廢異。則性爲有體無用之物矣。○記疑曰。洛家若指性中發出來底忠孝仁讓。而曰此分之殊。非本然之性也。則分外有理。而性爲無用之物矣。但謂萬象之性。其體本全。而自學知以下。至於翔走枯槁之發見。各隨所稟之氣而自爲一性。由未達一間。至於一點子。由相近至絶不同。由天縱之聖。至下愚不移。其品有萬不齊。是安可皆謂本然之性乎。氣之淸濁粹駁。固隨遇而適然。萬物之生。偏全之分。亦隨遇而適然者乎。若隨遇而適然。則豆可以瓜。瓜可以豆馬可以角。牛可以鬛。上帝之主宰。乾道之各正。果是何事。欲守偏全分之語。而至於上帝失其宰。乾道失其職。可乎不可乎。萬象之性。其體本全。至於發見自爲一性。此果成說乎。然則犬之性牛之性。與人之性同其全。草之性。木之性。與天之性同其大。而至於發見而後。乃始爲天爲人爲犬牛爲草木耶。言之無謂。令人代赧。凉議曰。天下之性不全則偏。固未有不全又不偏之性也。偏全皆非本然。則天下無一物能性其本然之性者。而本然之性永爲懸空之虛位。卽將安用彼性矣。所貴乎正通者。以其得本然之性也。若與偏塞者。均之爲非其本然。則何正通之足貴乎。蓋以無分爲一。其敝必至於此。其以各正之性。爲落分殊犯形器。不足以爲一原。與甲邊之議。恐無異同。○記疑曰。問氣質不同。則天命之性。有偏全否。朱子曰。非有偏全。此洛家之所本也。今若譏之曰。天下之性。旣無偏又無全。則不過爲虛位云爾。則豈得爲盡人之言者耶。此不待多般而明矣。所貴乎正通者。以其得本然之全。然則偏塞者所得。只是本然偏矣。無乃與天命之性。非有偏全者。相盭矣。若改之曰。所貴乎正通者。以其能全本然之性。則似無可議矣。朱子曰。非有偏全。又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須知理之非有偏全。又知理之不容無偏全。然後方可謂識理矣。天命之性所以賦予者。固無人物貴賤之殊者。是無偏全之謂也。萬殊之分。森然已具於一原之中者。是有偏全之謂也。徒知非有偏全之語。而謂人物無各正之性。徒知合下不同之語。而謂人物無一本之性者。皆執一而廢百。得此而失彼者也。旣不能盡乎朱子立言之意。而乃反譏人以不能盡人言之意耶。朱子曰。各正得於有生之初。然則正通者。得本然之全。偏塞者。得本然之偏。又何疑乎。凉議曰偏全指善一邊。如孔隙雖有大小。而月光自若。盤盂雖有方圓。而水性無恙。豈不是本然。○記疑曰信斯言也。蜂虎果然之仁義。堯舜周孔之仁義。毫無殊別矣。然則朱子何以言仁義禮智之粹然者。人與物異乎。彼以偏全謂非本然。而曰萬象之性。其體本全。外偏全而言本全。則蜂虎之性。與堯舜之性。果無毫髮差殊。可謂倒戈而自攻。言人物分殊。則以其體本全駁之。言人物性同。則以蜂虎果然譏之。亦可謂無定論。而隨其人之所在而攻之者也。凉議曰氣質是兼善惡。如和泥之水。稠淸百層。隔窓之月。明暗多般。以偏全爲氣質。豈不低陷了偏全。○記疑曰堯舜孔子之全。固當爲本然。至於夷惠之偏於淸和。顔閔之具體而微。游夏之僅有一體。則豈非出於氣質乎。此類不可謂兼善惡也。人猶如此。況於微物乎。今不欲以偏全爲氣質。恐終可疑。夷惠游夏之偏。是氣質之善一邊也。桀紂幽厲之暴。非氣質之惡一邊乎。雖以善一邊言之。其些有未盡處。亦不可謂非未善也。今乃特擧善一邊。而謂之不兼善惡可乎。偏全之云。不須再辨。凉議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人物偏全之性。君子亦有不性焉者乎。○記疑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本橫渠先生語。先生又嘗言。凡物莫不有是性。由通蔽開塞。所以有人物之別。由蔽有厚薄。故有知愚之別。今以上一股爲偏塞。而屬於本然之性。下一股爲氣質。而降爲不性之科。恐文義事理俱難如蘆沙之言矣。問氣質不同。則天命之性。亦有偏全否。朱子曰。非有偏全。偏全之性。豈非朱子之所不性焉者乎。據此則南塘蘆沙兩說。似當更加商確。恐未可認爲千古不易之論也。橫渠先生此說。主意專在於人物賢愚通蔽開塞厚薄難易之分。而次第說來。其文勢語脈。於本然與氣質。有不暇及。又安知今日有此偏全非分之說。而豫爲準備之耶。偏全之出於氣質者。固不性焉。偏全之由於理分者。亦不性焉乎。偏言之仁。專言之仁。亦朱子不性焉乎。覆載生成之偏。天地亦不性焉乎。千古不易之論。恐非人人所得知也。朱子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然於不同之中。又各自有淸濁粹駁之不同。上段不同。是本然之分下段不同。是氣質之異。中庸章句。先言人物各得之分。次言氣稟或異。橫渠此言。亦是此義。豈以下一股言氣質。而賺連上一股。亦作氣質看耶。凉議曰理旣云萬事本領。氣是甚樣物事。乃獨你一我殊背馳去。近世諸先生圻開理分。大抵皆你一我殊之論。其蔽也。氣無聽命於理。理反取裁於氣。天命之性。徒爲虛語耳。○記疑曰。理一分殊。固是理中事。然分殊。先賢直就氣異處說者。極多。今且以隙日譬之。隙之長短大小。自是不同。然只是此日。只是此日。理一也。隙自不同。分殊也。此與前一義。可倂行而不相礙也。至若天命之性。雖十分大全。十分至善。無奈所賦形氣有異。莫能遂其本然。雖是性體而氣用。亦是理弱而氣强。故不能無蔽也。若以分殊專歸之理。則理果號令乎氣。氣果隨順於理。而更無不治之國。更無爲惡之人也。恐難如此立語。以本原而言。則條理分殊。固粲然已具。此道器不雜處。太極圈所以排出也。以流行而言。則條理分數。可以卽氣而見其實。此道器不離處。陰陽五行圈所以爲各具也。先賢多就氣異處。說分數者。此也。如以隙日譬之。隙雖有長短大小。而其長短大小必照之光。固燦然已具於日矣。至於光之成形著迹。則可以就其隙而見其實也。理爲氣主。曷嘗是有作用行號令之謂。然無其理則無其事。有其理則有其事。有作用之理。故氣能作用。有號令之理。故人能號令。若以條理分數。一歸於氣。則三百三千。皆非本然。其有關於世敎。爲何如哉。旣曰分是理中矣。而繼以分殊專歸於日之隙。旣曰天命十分大全矣。而繼以分殊不專歸於理。則所謂理中事。果何事。所謂十分者。果是幾分耶。未見其倂行而不相礙也。若曰性體而氣用。則性爲有體無用之物耶。如此則程子所謂體用一原。爲二原矣。所謂顯微無間。爲有間矣。所謂未應不是先。已應不是後。爲有先後矣。近世主氣之說。其失蓋原於此。若以不治之國爲惡之人。而疑理不爲主。則是見有媢德之人。而斥烝民好德之言。見有性惡之人。而廢孟子性善之說。可見其說之窮矣。凉議曰。五常人物同異。畢竟惡乎定。曰定於先覺之言。朱子之論此固多。其見於四子註說者。則手筆稱停。非記錄書疏之比。其言人物五常。凡有三處。曰人物之生。必得是理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者。大學或問也。人物之生。各得所賦之理以爲健順五常之德者。中庸章句也。此皆不區分人物。一例說去。粗通文理者。初不難辨。且得以爲性。得以爲德之云。皆屬成性以下。而非繼善以上事。則朱子之意。明以人物之生爲同五常矣。獨於孟子生之謂性章集註。以理言之。則仁義禮智之粹然者。豈物之所得以全哉。【田愚按。粹然者。本作稟。以本作而】此爲區分人物處。【田愚按。此註亦不專於區分人物。何以言之。上文旣言性形而上者。人物之生。莫不有是性。是性何性。卽所謂仁義禮智之性也。是章句或問之同矣。如以物豈得全爲區分人物之斷案。則章句下文。豈不曰。氣稟或異。故不能無過不及之差。或問下文。豈不曰彼賤而爲物者。梏於形氣。而無以充其全矣乎。此二條。又皆與孟註之云。無些子異意。愚按。謂三處俱是同體異用之說也。】然而只曰物豈得全。不曰物莫得與。則此亦人物同五常之說也。朱子之爲此說。豈喜爲刱新之論。以同人道於庶類哉。蓋此理之外。更無佗理。是以直以從上聖賢。四破人性的字。一萬物而貫之。不以爲嫌也。【田愚按。以上所論。無不與洛家同。】雖然。一而無分。非吾所謂一也。故庸學或問。卽言鳥獸草木之生。僅得形氣之偏。而不能有以通貫乎全體。彼賤而爲物者。梏於形氣之偏塞。而無以充其本體之全。此言人物之性。雖同此一理。而理中之分限。不能無也。氣所以承載此理。故雖不離形氣而言分。而一之未嘗無分於此因可見矣。合此上下文義而觀之。其與生之謂性集註。亦非有異義也。後人各占二半。就生軒輊。此豈朱子之所能料哉。是知物我均五常者。理之一也。五常有偏全者。一中之分也。蓋自統體一極。理分圓融而無間。故其成性於萬物者。又如此。故先覺論性。有言理同理不同者。非相戾也。共公以論其妙。則排出而言之。眞的以指其體。則卽氣而明之。排出則理本一。故理一爲主。而萬殊涵於其中。【田愚按。以偏而不全者。爲萬殊。殊不可曉。】卽氣則氣已分。故分殊爲主。而理一存乎其間。自是話有兩般。何曾性有多層。諸家緣理分一體處。未甚着眼。說異則欲獨擅五常。說同則乃低視偏全。差以毫釐。謬以千里。豈不信乎。○記疑曰。庸學或問。若單言微物而不倂擧衆人。則猶或可如蘆沙之言矣。今其文明明言知愚賢否氣稟之異。而曰於其所謂性者。有所昏雜而無以全其所受之正。又曰。其所謂明德者。已不能無弊。而失其全矣。此與微物之不能通無以充者。語意一致。類例無二。而以不能通無以充歸之本然之性。無以全失其全。歸之氣質之性。則無亦有失其平之嫌乎。如有人質於蘆沙曰。聖凡均德性者。理之一也。德性有偏全者。一之分也。則將應之曰然乎否乎。就人物上倂擧五性字而言之者。有此三處。故先師云然耳。下文之區分有無。不須論也中庸章句氣稟或異非人物之區分。是就人物上區分其氣稟之不同。若人物之區分。則已在於上文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條。此亦可以知人物偏全爲本然之分也。同體異用與性體氣用之說。同一圈套。不足多卞。所謂與洛家同者。其實有不同焉。先師所謂同。卽實底同。諸家所謂同。乃虛底同。庸學或問。主言天命明德人物一原。而究別其源委曲折多寡分數。故自草木禽獸。至於衆人賢人。以至於聖人之盡性而乃已。其語脈次第。固應如此。至若本然與氣質。自是別說。有不暇區別。章句曰。人物各得所賦之理。又曰人物各循其性之自然。或問曰。無以通貫全體。又曰無以充其本體。何其褒於章句而貶於或問也。蓋章句言所稟本然之妙。或問言所賦分數之異。今見其貶者。以爲非本然。則倂與其褒者而以爲非本然耶。無以全。失其全。正章句所謂氣稟或異者。而爲修道立敎處也。凉議曰。本體而云無以充。本體爲性分耶。至無以充三字。始爲性分耶。全體而云不能通貫。全體爲性分耶。至不能通貫四字。始爲性分耶。曰本體全體。卽性分中理一處。無以充不能通貫者。卽性分中分殊處也。兩項事理。有則俱有。今必欲二而論之。謬矣。○記疑曰。無以充不能通貫。分明是形氣偏塞之病。今必以爲性之分殊。使人聽瑩。且以大學論之。天降生民。莫不與性。性分中理一處。氣稟不齊。不能皆全。性分中分殊處。虛靈具應德分中理一處。拘蔽或昏。德分中分殊處。如此說亦得否。請觀者爲下一轉語。無以充不能通。豈朱子歎草木鳥獸之不能服堯服言堯言而爲是說耶。只是據天命明德。而言其所存不同之分。有如此耳。人而服堯言堯。人將以爲聖矣。草木鳥獸而服堯言堯。人將以爲怪矣。然則無以全。失其全。在人固爲氣稟之蔽。無以充。不能通在物豈非本然之分耶。凉議曰以理言之。則萬物一原。固無人物貴賤之殊。此一節。所謂排出以言其妙。理一爲主也。以氣言之。則得其正且通者爲人。得其偏且塞者爲物。此一節。所謂卽氣以指其實。分殊爲主者。○記疑曰。上一節。言一性之中含具萬理。一性理一也。萬理分殊也。人物同此一原也。【雖萬言分殊。不害其無人物貴賤之殊。據此可見分偏之不可以相準。此一着最可領悟。】下一節却只專言氣稟事。蓋此二十一字。無一點一畵可指理之實處。而蘆沙之言如此。可疑。爲人爲物。不在本然分殊之中。則所謂分殊。果是何事。所謂人物。果從何處來。人物之分。固已具於一原之中。而人底只是此理。物底亦只是此理。故曰無貴賤之殊也。人物之分。固已素定。而至氣以成形而後。方見其實。故曰卽氣而指其實。孔子以一陰一陽爲道。程子以川流不息爲道體。朱子以五行爲道之體段。人苟達於理致。則盈天地形形色色。莫非道理也。今以正通偏正。謂非理之實體。則必言理字道字太極字而後。乃謂之理耶。一點一畵之云。令人可笑。凉議曰。心雖氣分事。而乃所具則性也。心具性。凡聖同。心不能盡性。凡聖異。其同其異。皆所重在性也。南塘乃忘其同者。主張其異者。以聖凡異心爲法門。其亦矛盾於聖人之意矣。與南塘辨者。亦不言其所重之有在。區區較其光明之分數。欲以此爲同聖凡之心。未爲箚着痛處。○記疑曰。氣質者。淸濁粹駁。有萬不齊。心者虛靈神妙。有一無二。南塘乃認兩者爲無辨之物。今不指其光明之無優劣分數。只擧心具性聖凡同者以辨之。其不被南塘之哂者鮮矣。況心之具性。微物亦然。何足以辨南塘之疑乎。心與氣質。不是判然二物。隨其淸濁粹駁。而其靈不能無分數。固不可指此而謂聖凡同。亦不可專認光明爲心而謂聖凡異。然則所重之外。更安有一物獨無優劣分數者乎。抑或有形而下之明德耶。【任全齋以明德爲形而下。】近世諸儒。多以氣質爲不囿於身體。又以虛靈爲不根於氣質。有上帝降靈坐在方寸之語。遂以此爲明德。以此爲同聖凡。此與異說其光爍爍死而不滅。何別。夫氣質者。只是此身陰陽之團聚。而心則其精爽也。氣旣有淸濁粹駁。則其精爽不容無分數。但所具者性也。所謂本心良心仁義心。何嘗有聖凡之異。今見光明無分之語。可知其承誤踵訛。非一朝一夕之故也。凉議曰。碎紙中。得鹿門任氏一段議論。苟言異則非但性異。命亦異也。苟言同則非但性同。道亦同也。此言驟看外面。殆若鹿邊者獐。獐邊者鹿。而其實說得道理原頭。無有滲漏。伊川理一分殊四字。賴此公而一脈不墜於東方歟。恨未得其全書而攷閱也。○記疑曰。理一分殊。伊川何嘗以之論性。只因西銘。使人推理而知其一。存義而立其分而已。楊李朱子所論。亦皆如此。至羅整庵始揭此四字。以爲性命之妙。無出於此。其言曰。受氣之初。其理惟一。成形之後。其分則殊。此與蘆沙之意遠矣。又曰。以理一分殊。論性。則自不須立天命氣質兩名。則其說更乖矣。又其認理氣爲一物。而深病乎朱子理氣二物之訓。則愈不可說矣。我東任鹿門。又祖述羅氏四字之旨。而其言曰。乾之健卽太極。而健之中。有元亨利貞。坤之順卽太極。而順之中。有元亨利貞。元亨利貞卽陰陽五行也。然乾之元亨利貞。依舊是健。坤之元亨利貞。依舊是順。然則乾坤之太極。自不害其不同也。又作人物性圖。人圈具書五常。太極物圈只書太極而不書五常。又論朱子渾然太極各具一物之說云。此謂卽此各一處。天理完全無所虧欠耳。非謂一物具萬理。此皆看得分殊之過。而至於如此。又論人性之善曰。此乃氣質之外。別有善底性也。此尤不可曉矣。使蘆沙復起見此。不覺蹙頞而長太息也。老洲吳先生。嘗有論羅任兩家者極多。今擧三段附見于下。使蘆門諸公看詳焉。○老洲集雜識曰。整庵鹿門均爲理氣一物之論。然整庵於理一看得重。鹿門於分殊看得重。看理一重。則自然理爲主。看分殊重。則畢竟氣爲主。以此較論得失。整庵殆其少疵矣乎。又曰。整庵鹿門皆從推理看得合一之妙者。驟看非不高妙。然其究也。皆歸於主氣。而整菴則猶有每每提掇此理之意。鹿門直以一氣字。盡冒天下之理。更不求理之所以爲理。蓋鹿門之見。實本於整菴。而其主張氣字。則殆過之耳。又曰。整庵以理一分殊。爲說理氣底枰子。其曰。性以命同。道以形異者。極是。性以命同。卽未發而指理一也。道以形異。卽已發而指分殊也。鹿門祖述其理一分殊。而獨深斥此語。何也。終是拘於人物之偏全。不能疏觀性道雖有體用之異。不害其一原之同也。德無常師。主善爲師。善無常主。協于克一。曰一致而百慮。同歸而殊塗。曰吾道一以貫之。曰其爲物不貳。則其生物不測。曰博學而詳說之。將以反說約也。細究而詳玩之。則經傳之中。說理一分殊義甚多。而無非所以明此心此性之妙也。朱子曰。理與氣。伊川說得好。曰理一分殊。理一分殊。卽伊川所雅言也。豈但因西銘而發哉。程子又曰。沖漠無眹。萬象已具。張子曰。性者萬物之一原此不可以論性耶楊李二氏以仁義論理一分殊是豈至羅氏始揭以說性耶。鹿門健順太極之說。恐無害。而其曰元亨利貞卽陰陽五行一條說。有理氣一物之病。羅整庵性以命同道以形異之說。有不可曉。中庸章句性道雖同。在化生萬物之後則雖同之同。已是該分之同。豈待形而後異哉。形字若作氣稟或異看。則形與氣稟。意義逈別。鹿門斥之是矣。但人物性圖及氣質之善之說。果不可曉。然不以人廢言。況以此言之失而廢他言之得乎。凉議曰諸家言人物之性。一是皆以理爲無分之物。分爲因氣而有。限理一於離形氣之地。局分數於墮形氣之後。於是理自理。分自分。而性命橫決矣。○記疑曰。若使洛家謂太極而無元亨利貞。性而無仁義禮智。則當曰理爲無分之物矣。若謂元亨利貞因氣而始有。仁義禮智待氣而始生。則當曰分爲因氣而有矣。今旣不然。則安有理自理分自分之患乎。元是生萬物之理。而包含徧覆。無不周徧。亨是長萬物之理。而條理等威。粲然宣著。利是成萬物之理。而裁制差別。無不恰當。貞是藏萬物之理。而保合大和。各正性命。此理也。在天爲天之理。而萬物之理具焉。在人爲人之理而萬事之理具焉。今知太極之有元亨利貞。而不知元亨利貞裏面。有人物偏全自然之分耶。人有一箇身。便須管着天下事。夫何故。有一箇身。必有主此身者。君上是也。必有生此身者。父母是也。必有此身先後生者。兄弟是也。必有此身對配者。夫婦是也。必有此身同類者。朋友是也。此身爲萬物之靈。則必有宰萬物之理。此身爲天地之心。則必有輔相天地之理。人猶如是。況於天乎。善言天者。必於人觀之。下段猥筆辨。彼旣曰單指機上之理則曰太極。兼擧四時之氣則曰元亨利貞云云。必兼擧四時之氣而后曰元亨利貞。則此非因氣待氣而何。凉議曰。今有一塊銅鐵。可以爲盤盂。可以爲刀劒。是分殊之涵於一。所謂粲然者。非東邊可爲盤盂。西邊可爲刀劍。則渾然。及其人盤盂爐而爲盤盂。入刀劒爐而爲刀劍。各得其本分之一。○記疑曰。假如有人言入輕淸爐而爲天。入重濁爐而爲地。入淸粹爐而爲上智。入濁駁爐而爲下愚。入陽剛爐而爲男。入陰柔爐而爲女。是各得其本然之一云。將如何辨破。爲人爲物。爲男爲女。是銅鐵之爲盤爲盂爲刀爲劒也。爲賢爲愚。銅鐵之遇爐鞲緊歇。而鍛鍊有精鹿也。且爲盤盂爲刀劒。是銅鐵之自爲邪。有主張者存乎否。凉議曰。旣以分爲因氣而有。則無怪其以人物同五常。爲本然之性。而偏全之性。爲非本然。有人物性同之論。○記疑曰。偏全通塞。與分殊之分。殺有不同。分雖具於天地人物未生之前。而偏全通塞。却繫於所賦之氣。且偏全非可單言於人物。亦可幷言於聖凡。故朱子言學知以下。氣之淸濁有多寡。而理之全缺繫焉。今以聖凡同五常。爲本然之性。而理之全缺者。爲非本然。有何窒礙乎。如此則人之性。可以三隅反也耶。偏全以人物言者。本然之分也。以聖凡言者。氣稟之異也。若以人之全謂本然。而物之偏謂氣質。則人獨得本然之性。物之所得。只是氣質之性而已耶。然則鳶飛魚躍。水潤火燥。皆非本然也。天下安有一物能性其性者耶。旣曰分已具於人物未生之前。而猶以偏全謂却繫於所賦之氣。夫人物之分。舍偏全而更有何分乎。可知其說之窮矣。不思之甚也。凉議曰。五常之隨物而偏全。乃此理之本分。何可同也。偏全不同。而猶謂之同者。如盤盂刀劒爲銅鐵則同之同。非以混同無盤盂刀劒而謂之同也。偏全之性非本然。離盤盂刀劒而求銅鐵之說也。○記疑曰。人物一原之中。有五常。此爲理之本分。今以五常之隨氣而發見有全缺者。謂之理之本分。而喚做性之本然。此與朱子性之在氣質者。其品不一。所謂氣質之性。與以氣質論則凡言性不同者。皆氷釋之訓。無或相戾乎。人與人不同。物與物不同。此是氣質之偏全。人與物不同。此是本然之偏全。朱子曰。人物偏正。固自合下不同。程子言仁曰。偏言則一事。全言則包四者。此言偏全。亦皆非本然耶。凉議曰。以一視五。五者同一。以五相視。分於是存。雖散殊之無窮。皆本分中事。欲低視偏全可乎。○記疑曰。以一身視四肢。四肢同一身。以四肢相視。分於是存。此固然矣。然豈可以四肢與分殊。分偏全乎。愚故曰。分與偏全不同。如欲言偏。當曰四肢或有痿痺不仁。癱瘓不遂。然後方可謂之偏。雖欲不低視得乎。統一身而言。則猶理一也。指百體而言。則猶分殊也。言一身而百體在其中。言百體而一身在其中。非一身之外別有百體。非百體之外。別有一身。理一分殊之非各有方所各有時節。如此。今以一身對四肢。而局理一於一身。限分殊於四肢。以理一分殊爲局定間隔之物。此其所以有同體異用偏全非分之說也。凉議曰庸學或問。旣從陰陽五行說來。言其綱理之一般。繼以陰陽五行之偏全。言其條件之不同。一時事而先後言之。有何可疑之端乎。○記疑曰陰陽五行之偏全。自屬氣質。健順五常之條件。自屬分殊。何可直指分殊爲偏全乎。若如此則手足之異名。而可謂之偏全。恐不成言。張子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此言氣質性之非本然也。朱子以五行之生。各一其性。爲氣質之性。此與張子之言。雖不同。而不害其各爲一義也。此則不可謂非本然之分也。彼旣以氣質之性。謂非本然。而以陰陽五行之偏全。歸之於氣質。而與所謂痿痺癱瘓者。同科。其無謂甚矣。然則陽剛陰柔。水潤火燥。皆非本然耶。天地萬物。有則俱有。如人身之四肢百骸。加不得。減不得。完全周足。無有空闕。此是太極之大全。造化之妙用。若曰陰陽五行。繫於所賦之氣。而爲臨時排定云爾。則太極果是虛位。而爲造化者。不已勞乎。天之生萬物。猶人之應萬事。應萬事之理。不先具。則人性之體。有欠闕矣。生萬物之理。不先具則天命之原。有疎漏矣。若曰天命之原。與人性之體。有不同云。則非愚之所知也。朱子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然於偏正之中。又各自有淸濁昏明之不同。上段合下不同。是本然之分也。下段又自不同。是隨氣之分也。今合上下段。而一歸之氣分可乎。 납량사의(納凉私議) 기정진(奇正鎭)이 1843년에 작성한 성리학 저술로,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설명하였다. 편전(偏全) 치우침과 온전함, 부분과 전체, 소와 대의 차이 등을 나타낼 때 쓰는 성리학 용어이다. 주자(朱子)는……말하였겠는가 《중용장구》 제12장에 "천지의 큼으로도 사람이 오히려 한스러워하는 바가 있다."라고 한 데 대한 주희의 집주에 "사람이 천지에 대하여 한스러워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주는 편벽됨과 추위와 더위, 재앙과 상서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人所憾於天地, 如覆載生成之偏及寒暑災祥之不得其正者.]"라고 한 것을 이른다. 사람과……않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보인다. 태극(太極)이라는……가리킨다 《주역전의대전》 〈역본의도(易本義圖) 복희팔괘차서지도(伏羲八卦次序之圖)〉에 〈계사전〉을 인용하여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았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 아래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주희(朱熹)의 말에 보인다. 낙가(洛家) 낙론 또는 낙파라고 한다. 심(心)과 성(性)에 대한 이해(理解)의 문제로 성리학자들이 대립하여 진행된 논쟁인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은 미발은 마음의 본체로서 순선(純善)하여 선악이 없고 사람과 물건의 성은 본연지성으로 이(理)와 같으므로 같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고, 호론(湖論)은 미발한 마음의 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으며 현실에 드러나는 본연지성은 기질의 맥락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과 물건의 성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에 있어 주로 서울ㆍ경기 지역에 거주한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외암(巍巖) 이간(李柬) 등이 한 파를 이루어 이를 낙론 또는 낙파라 하였으며, 충청 지역에 사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등이 또 한 파를 이루어 이를 호론 또는 호파라 하였다. 한 칸을……미치는 것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 권9 〈자한(子罕)〉에 "양씨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의 등급인 선인(善人)으로부터 선(善)을 충실히 하여 빛나는 등급인 대인(大人)에 이르기까지는 역행(力行)을 쌓아서 될 수 있지만, 대인이 성인이 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역행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안자가 성인의 경지에 한 칸을 못 미친 이유이다.[可欲之謂善, 充而至於大, 力行之積也. 大而化之, 則非力行所及矣. 此顏子所以未逹一間也.]' 하였다."라고 하였다. 일점자(一點子) 주희가 인물지성(人物之性)에 대해 논한 대목 가운데 "기(氣)는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예컨대 춥고 따스한 것을 느끼는 것이나,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아는 것이나,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나, 이익을 좇고 해를 피하는 것 등은 인(人)과 물(物)이 모두 같다. 반면에 이(理)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예컨대 벌과 개미의 군신은 단지 그 의(義)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며, 범과 이리의 부자는 단지 그 인(仁)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다.[氣相近. 如知寒煖, 識飢飽, 好生惡死, 趨利避害, 人與物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 有一點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 有一點子明.]"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朱子語類 卷4 性理1 人物之性氣質之性》 서로……다른 것 주희가 말한 이(理)와 기(氣)의 차이를 의미한다. "만물은 근원이 하나라는 점에서 논하면 이(理)는 같고 기(氣)는 다르다. 그러나 만물의 체(體)가 다르다는 점에서 살펴보면 기(氣)는 그래도 서로 비슷하지만 이(理)는 완전히 다르다.[論萬物之一原, 則理同而氣異. 觀萬物之異體, 則氣猶相近, 而理絶不同.]" 《朱子語類 卷4 性理1 人物之性氣質之性》 하늘이 내린 성인 《논어》 〈자한(子罕)〉에 자공(子貢)이 공자를 찬양하며 "진실로 하늘이 내신 성인이시다.[固天縱之將聖.]"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지극히……사람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唯上知與下愚不移.]"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건도(乾道)가……바로잡는 것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하늘의 도가 변화하여 각 생명의 타고난 성품이 바르게 길러지도록 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는 말이 나온다. 편전이……아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편전(偏全)이……아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사람과……때문이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보인다. 각정(各正)은……얻는다 《주역본의(周易本義)》 〈건괘(乾卦)〉에 보인다. 벌과……인의(仁義)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1, '인물지성기질지성'에 "기(氣)는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예컨대 춥고 따스한 것을 느끼는 것이나,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아는 것이나,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나, 이익을 좇고 해를 피하는 것 등은 인(人)과 물(物)이 모두 같다. 반면에 이(理)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예컨대 벌과 개미에게 군신간의 의리가 있는 것은 단지 그 의(義)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며, 범과 이리에게 부자간의 의리가 있는 것은 단지 그 인(仁)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다.[氣相近. 如知寒煖, 識飢飽, 好生惡死, 趨利避害, 人與物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有一點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有一點子明.]"라는 내용이 보인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다르다 《맹자집주(孟子集註)》 〈고자〉 주자주에 보인다. "성(性)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이(理)이고 생(生)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기(氣)이니, 성(性)은 형이상이고 기(氣)는 형이하이다. 사람과 물건이 태어날 때에 성(性)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없으며, 또한 기(氣)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없다. 그러나 기(氣)로써 말한다면, 지각과 운동은 사람과 물건이 다르지 않은 듯하지만, 이(理)로써 말한다면, 인의예지의 본성을 받은 것을 어찌 물건이 얻어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성(性)이 불선함이 없어서 만물의 영장이 되는 이유이다.[性者, 人之所得於天之理也; 生者, 人之所得於天之氣也. 性, 形而上者也; 氣, 形而下者也. 人物之生, 莫不有是性, 亦莫不有是氣. 然以氣言之, 則知覺運動, 人與物若不異也; 以理言之, 則仁義禮智之稟, 豈物之所得而全哉? 此人之性所以無不善而爲萬物之靈也.]"라고 하였다. 안연(顏淵)과……지닌 것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자하ㆍ자유ㆍ자장은 모두 성인의 한 지체를 가졌고 염우ㆍ민자건ㆍ안연은 그 전체를 소유하였으되 광대하지 못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모든……있다 《장자전서(張子全書)》 권14 〈성리습유(性理拾遺)〉와 《근사록》 〈도체편〉에 보인다. 하늘이……없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편언(偏言)의……인(仁) 편언은 다른 개념과 상대적으로 말한 것고 전언은 전체로 말했을 때를 가리킨다. 《주자어류》에 "편언이나 전언이라는 것은, 단지 인만 말했을 때에는 곧 체로서의 인을 말하지만, 의를 말했을 때는 곧 인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도리라는 것이다.[偏言、專言者, 只說仁, 便是體; 才說義, 便是就仁中分出一箇道理.]", "편언은 한 가지 일이고, 전언은 인ㆍ의ㆍ예ㆍ지 네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다.[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子語類 卷94 周子之書 太極圖, 卷95 程子之書1》 사람과……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나오는 말이다. 태극권(太極圈)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의 글을 지었다. 도의 맨 위가 1층으로 태극권이며, 그 아래 2층이 음양권, 그 아래 3층이 오행권, 그 아래 4층이 남녀권, 그 아래 5층이 만물권이다. 3백, 3천의 예(禮) 예의 조목이 많음을 형용하는 말로,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 백이고 곡례가 삼 천인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성경 한 가지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체(體)와……없다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은 정주학의 유명한 명제(命題) 중의 하나인데, 체(體)가 본질이요 본체요 이치[理]요 형이상(形而上)의 절대적 진리를 표상하는 개념으로서 미(微)를 그 속성으로 한다면, 용(用)은 작용이요 기능이요 자취[迹]요 형이하(形而下)의 현상 세계를 표상하는 개념으로서 현(顯)을 그 속성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녹문집》 권20 〈존존감기(存存龕記)〉에, 정이가 경(敬)을 주일(主一)로 설한 것에 대해서, 녹문이 "이것 역시 천기를 너무 누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其亦可謂太漏洩天機者矣.]"라고 평한 대목이 나온다. 미응(未應)이……아니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5에 "텅 비어 조짐이 없을 적에 이미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히 갖추어져 있으니, 미응(未應)이 먼저가 아니고 이응(已應)이 뒤가 아니다. 예를 들면 100자 되는 나무가 근본으로부터 지엽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꿰여 있는 것과 같다.[沖漠無眹, 萬象森然已具, 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 如百尺木, 自根本至枝葉, 皆是一貫.]"라는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새와……없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권1 〈경 1장(經一章)〉에 보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 이치로써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원이니 참으로 사람과 물에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없고, 기로써 말하면 바르고 통하는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되기 때문에 귀해지기도 하고 천해지기도 하여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다. 저 천하여 물이 된 것은 이미 치우치고 막힌 형기에 구속되어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고, 오직 태어나면서부터 바르고 통하는 기운을 얻은 사람만이 그 본성이 가장 귀하게 되기 때문에 방촌의 사이가 허령하고 통철하여 모든 이치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요순이 되어 천지에 참여하여 화육을 도울 수 있는 것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명덕이라는 것이다.[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 彼賤而爲物者, 旣梏於形氣之偏塞而無以充其本體之全矣, 唯人之生乃得其氣之正且通者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 蓋其所以異於禽獸者, 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讚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 체(體)는……다르다 호굉(胡宏, 1106~1161)의 《지언(知言)》에 보인다. 호굉은 호안국(胡安國)의 아들로서 양시(楊時)에게 배웠다. 그가 성(誠) 속에 이미 선과 악의 씨앗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석한 이른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체는 같고 용이 다르다.'고 주장한 설을 가리킨다. 하늘이……없다 《대학장구》 〈서(序)〉에 보인다. 허령(虛靈)하여……하다 《대학장구》 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욕(人慾)에 가려지면 때로 어두울 경우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하여야 한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라고 하였다. 이(理)로……없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경 1장에 보인다. 기(氣)로……된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경 1장에 보인다. 임전재(任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이다. 사슴……사슴이라는 것 왕안석(王安石)의 아들 왕방(王雱, 1044~1076)이 어릴 때 어떤 사람이 사슴과 노루를 한 우리에 넣고서 어느 것이 노루이고 어느 것이 사슴인지 묻자, 한참을 생각하다가 "노루 곁에 있는 것이 사슴이고, 사슴 곁에 있는 것이 노루입니다." 하니, 왕안석이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활달한 사유 방식을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古今說海》 그러나 주희(朱熹)는 《사서혹문》 〈논어혹문(論語或問)〉에서 경전을 해석함에 '어느 것이나 아는 바가 없어서 노루 곁 사슴, 사슴 곁 노루처럼 무한히 순환 반복하기만 하고 끝내는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한다.[彼此俱昧, 而欲互以相明, 如獐邊之鹿鹿邊之獐, 循環無端, 而卒無所决其偶.]'고 하여 피차간에 정확한 분변을 하지 못하는 병폐를 뜻함. 이천(伊川)이……뿐이었다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서명을 두고 "이치는 하나이나 분수가 다름을 밝혔다."라고 평한 바 있다. 《古文眞寶後集 卷10》 《近思錄 卷2 爲學》 양시(楊時) 1053~1135. 자는 중립(中立), 호는 구산(龜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사양좌(謝良佐), 유작(游酢), 여대림(呂大臨)과 함께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렸다. 그의 학문은 나종언(羅從彦)ㆍ이동(李侗) 등을 거쳐 주희에게로 이어져 이학(理學)의 형성 발전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구산어록(龜山語錄)》 등이 있다. 이통(李侗) 송나라 때 남검주(南劍州) 태생으로, 자는 원중(愿中)이며 통칭 연평 선생(延平先生)으로 불린다. 주자가 한때 그에게 수학한 바 있다. 그는 후학을 지도할 때, 강론(講論)보다는 말없이 앉아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송사(宋史)》 권428ㆍ《송원학안(宋元學案)》 권39. 나 정암(羅整庵) 명나라 때의 유학자 나흠순(羅欽順, 1465~1547)을 말한다. 정암은 호이고 자는 윤승(允升)으로,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과 이부 상서(吏部尙書) 및 예부 상서(禮部尙書) 등을 지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불교의 선학(禪學)을 연구하였으나 후에 주자학으로 돌아섰다. 저서에 《곤지기(困知記)》, 《속기(續記)》, 《나정암집》 등이 있다. 기(氣)를……달라진다 《곤지기(困知記)》 권상에 보인다. 이일분수(理一分殊)로……없다 《곤지기(困知記)》 권상에 보인다. 건(乾)의……않는다 《녹문선생문집》 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각일기성(各一其性) 《근사록》 권1 〈도체(道體)〉에 "오행은 한 음과 양이고, 음과 양은 한 태극이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각 그 성을 하나씩 간직하였다.[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라고 하였다. 이는……아니다 《녹문선생문집》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이것은……않는다 《녹문선생문집》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노주(老洲) 오 선생(吳先生) 오희상(吳煕常, 1763~1833)으로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 본관은 해주(海州),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저서에 《노주집》이 있다. 덕(德)에는……합한다 《서경》 〈상서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보인다. 이치는……다르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천하가 돌아감은 같으나 길은 다르며,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니,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나의……꿴다 《논어》 〈이인(里仁)〉에 보이며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한 말이다. 그것의……없다 《중용장구》 제26장에 "천지의 도는 한마디 말로 다 할 수 있으니, 그 물건 됨이 변치 않는다. 그리하여 물건을 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널리……함이다 《맹자》 〈이루하(離婁下)〉에 보인다. 이(理)와……하였다 《주자어류》 권1, 〈이기(理氣)상〉에 보인다. 텅 비고……있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보인다. 성(性)이라는……일원(一原)이다 《정몽(正蒙)》 〈성명(誠明)〉에 보인다. 성(性)은……다르다 《곤지기속록(困知記續錄)》 권상에 보인다. 성과……같지만 《중용장구》 제1장 제1절 주희(朱熹)의 주에 "성과 도는 비록 같지만 기품이 혹 다르기 때문에 과하고 불급한 차이가 없을 수 없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른바……하다는 것 《주자대전》 권42 〈답오회숙(答吳晦叔)〉에 나오는 말이다. 해당 부분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의리를 이해하려면 모름지기 먼저 명의(名義)의 경계와 구분을 분석해 내어 각각 귀착할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음에 절로 관통처(貫通處)가 있을 것이니, 비록 '관통(貫通)'이라고 하였으나 혼연(渾然)한 가운데 이른바 '찬연(粲然)'한 것은 애초에 어지러웠던 적이 없었다.[理會義理, 須先剖析得名義界分, 各有歸著. 然後於中自有貫通處. 雖曰貫通而渾然之中所謂粲然者, 初未甞亂也.]" 학지(學知)……달려있다 《주자전서》 권43 〈성리(性理)〉에 나오는 말이다. 솔개가……뛰노는 것 《중용장구》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물이……타오르는 것 《서경》 〈홍범〉에 "첫 번째 오행으로 말하면, 첫 번째는 수(水)이고, 두 번째는 화(火)이고, 세 번째는 목(木)이고, 네 번째는 금(金)이고, 다섯 번째는 토(土)이다. 수는 윤하(潤下)이고, 화는 염상(炎上)이고, 목은 곡직(曲直)이고, 금은 종혁(從革)이고, 토는 이에 가색(稼穡)을 한다. 윤하는 짠 것이 되고, 염상은 쓴 것이 되고, 곡직은 신 것이 되고, 종혁은 매운 것이 되고, 가색은 단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일원(一原) 《주자대전》 권4 〈재거감흥 20수〉의 제20수에 "내가 전인의 가르침에 어두운 것은, 이 가지와 잎이 무성하기 때문이네. 분발하여 영원히 깎아낸다면, 일원에서 큰 공을 거두리라.[曰余昧前訓, 坐此枝葉繁. 發憤永刊落, 奇功收一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대전차의》의 '일원(一原)'에서 "정자의 〈이천역전서(伊川易傳序)〉에 '체와 용은 하나의 근원이다.'라고 하였다. ○웅씨가 말하기를 '이 편은 천도는 말을 하지 않고 성인은 말이 없는데, 후세에 말을 많이 하는 폐단을 논하였다.'라고 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건대, 〈감흥시〉는 처음에는 하나의 리를 말하고 중간에는 흩어져 만사가 되고 끝에서는 다시 합해져 하나의 리가 되니, 이것은 《중용》의 뜻이다.[程子易傳序 體用一原. ○熊氏曰, 此篇論天道不言, 聖人無言, 後世多言之弊. ○愚竊謂感興詩, 首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此中庸之義也.]"라고 하였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이란……있는 것 《주자전서(朱子全書)》 권42, 〈성리(性理)〉에 "기질의 성은 단지 이 성이 기질에 떨어져 있는 것이므로 기질에 따라 각각 하나의 성이 된다[氣質之性,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随氣質而自爲一性]"라는 말이 보인다. 사람과……다르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과 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이 정녕 본디 같지 않다. 그런데 편정한 가운데 다시 청탁혼명의 차이가 본래 있다.[人物之性, 其賦形偏正, 固自合下不同. 然隨其偏正之中, 又自有清濁昏明之異.」)" 편언(偏言)하면……포괄한다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 〈건괘(乾卦) 단사(彖辭)〉에서 "사덕의 원이 오상의 인과 같으니, 따로 떼어서 말하자면 네 가지 가운데 하나의 일이고 통틀어서 말하면 네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다.[四德之元, 猶五常之仁. 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라고 한 것에 근거하였다. 산수(散殊) 각양각색, 각각 구별이 있다는 말이다. 《예기》 〈악기(樂記)〉에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그 중간에 만물이 각양각색으로 산재하여 예의가 행해진다.[天高地下, 萬物散殊, 而禮制行矣.]"라고 하였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을……않는다 북송의 유학자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체를 이룬 뒤에 기질의 성이 있으니, 본래의 선으로 돌아가면 천지의 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의 성을 군자는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不性者焉.]"라고 하였다. 《張橫渠集 卷3 誠明篇》 오행이……갖는 것 《근사록》 권1 〈도체(道體)〉에 "오행은 한 음과 양이고, 음과 양은 한 태극이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각 그 성을 하나씩 간직하였다.[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라고 하였다. 수윤 화조(水潤火燥) 물이 축축한 곳으로 흐르고 불이 마른 곳으로 나아가는 성질을 말한다. 사람과……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과 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이 정녕 본디 같지 않다. 그런데 편정한 가운데 다시 청탁혼명의 차이가 본래 있다.[人物之性, 其賦形偏正, 固自合下不同. 然隨其偏正之中, 又自有清濁昏明之異.]" 기분(氣分) 개인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가지고 있는 원기(元氣)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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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우(田愚)가 지은 노사선생 〈외필변〉을 변석함 辨田愚所著。蘆沙先生猥筆辨。 전우(田愚)가 말하기를, "율옹(栗翁)이 일찍이 말하기를,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은 기(機)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지 누군가가 부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노사(蘆沙) 〈외필(猥筆)〉에서 이를 심하게 논박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주자(朱子)가 평소에 '이(理)에는 조작(造作)이 없다.'라고 하였고 동정은 조작이므로 율옹이 '기(機)가 저절로 그러하다.'71)라고 한 것이다. 주자가 또 '작용(作用)이 있으면 곧 형이하자(形而下者)72)이다.'라고 하였고 동정은 작용의 뜻이므로 율옹은 '기가 저절로 그러하다.'라고 한 것이다.공자(孔子)가 '하늘이 만물을 태어나게 할 때는 심겨진 것은 길러 주고 기울어진 것은 덮어준다.'73)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런데 주자는 도리어 말하기를, '이는 그렇게 하도록 하는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물이 태어나서 스스로 자라 나가는 과정이 흡사 그를 부지해주는 사물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쇠미해져서는 스스로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 흡사 그것을 밀어서 넘어트리는 것이 있는 듯하다. 이(理)가 본래 이와 같다.'74)라고 하였다. 맹자(孟子)가 분명히 '하늘이 만물을 낼 때 근본이 하나가 되게 하였다.'75)라고 했건만 주자는 도리어 '자연의 이치는 하늘이 그렇게 시킨 듯하다.'76)라고 하였다. 이윤(伊尹)이 분명히 '하늘이 이 백성을 낳았을 때 먼저 안 자에게 늦게 아는 자들을 깨우치게 하였다.'77)라고 했건만 주자는 도리어 '천리(天理)의 당연함은 마치 누군가가 그렇게 시키는 듯하다.'라고 하였다.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다만 사람들이 '사(使)' 자가 작용의 뜻을 갖는 것처럼 잘못 인식한다면 도(道)에 크게 해가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별도로 '약(若)', '흡사(恰似)', '비유물사지연(非有物使之然)'을 덧붙여 작용이 없는 '사(使)'임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율옹(栗翁)은 '누군가가 부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율옹이 어찌 전수받은 곳 없이 망령되이 말하였겠는가.또 예를 들어 '사람이 도(道)를 선양(宣揚)하는 것'은 '기(機)가 저절로 그러한 것'에 해당하고 '도가 사람을 선양하는 것이 아님'은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다'에 해당한다. 대체로 인심(人心)에 지각(知覺)이 있는 것은 음양 동정(陰陽動靜)의 기(機)이고, '도의 본체가 무위한 것'은 태극 자연(太極自然)의 묘(妙)이다. 주자(朱子)는 《집주(集註)》에서 장자(張子: 장재(張載))의 말78)을 실었지만, 후현(後賢)이 성(性)이 마음을 검속할 줄 모르는 것을 근거로 천명(天命)이 이미 소멸했다고 여기거나 마음이 성(性)을 다하는 것을 근거로 천명 외에 또 하나의 본령이 있다고 여기는데도 분연히 붓을 들어 꾸짖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만약 이(理)가 기(氣)의 주인이고 성(性)이 마음의 근본[心本]임을 논하자면, 율옹이 또 일찍이 '기(氣)가 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理)가 주재(主宰)한다.'79)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위(無爲)하면서도 유위(有爲)의 주인이 되는 것이 이(理)이다.'80)라고 하였다. 또 '누가 그 기(機)를 주관하는가. 아, 태극(太極)이로다!'81)라고 하였다. 이러한 유형은 한둘이 아니다. 사람들이 만약 이에 대해서 안다면 '기가 저절로 그러하다.[機自爾]'라고 하더라도 그 저절로 그러한 까닭은 여전히 이(理)이고, '누군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다.[非有使之]'라고 하더라도 '시키지 않으면서 시키는 것[不使之使]'은 여전히 이(理)이니, 그렇다면 어찌 〈외필(猥筆)〉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위연(魏延)과 양의(楊儀)가 함께 승상부(丞相府)에 있으면서 서로 어긋났던 변고82)가 발생하였겠는가?"〈변(辨)〉동정(動靜)을 곧바로 조작(造作), 작용(作用)으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동정(動靜)은 이기(二氣)의 양능(良能 본연의 능력)83)이니 어찌 조작이나 작용이 기력(氣力)을 범하고 배치(排置)하기에 힘을 쓰는 것에 견주겠는가. 하물며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이른 "움직이되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되 고요함이 없다.[動而無動 靜而無靜]"84)와 주자(朱子)가 이른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靜中有動, 動中有靜]"85)의 동정(動靜)이 모두 이(理)를 가지고 말하지 않았던가.이(理)는 이미 형체가 없으니 어찌 조작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理)가 이와 같으면 기(氣) 또한 이와 같고 이(理)가 저와 같으면 기(氣) 또한 저와 같다. 기(氣)의 동정(動靜)과 운행(運行), 이루어진 형체와 드러난 자취가 모두 이(理)가 하는 일이다. 이것이 무위(無爲)의 위(爲)이고 시키지 않으면서 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理)를 너무 지나치게 존중하여 작용(作用)으로 인식하는 것을 보고는 "누군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세상에서 기(氣)를 중시하는 것이 너무 심하여 제멋대로 쥐고 흔드는 데 이른 것을 보고는 "실제로 누군가가 그렇게 시킨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율곡(栗谷)의 편지, 노사(蘆沙)의 〈외필(猥筆)〉은 모두 시대의 상황에 따라 이치를 밝히기 위한 말이었다. 오늘날 말에 얽매어 뜻을 혼동하고 고집스럽게 멈추지 않는 자들도 그 마음이 모두 이치를 밝히기 위함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사람은 도를 선양할 수 있다.[人能弘道]', '마음은 성(性)을 검속할 수 있다.[心能檢性]'의 마음[心]은 신명(神明), 주재(主宰)86)를 이른다. 사람의 신명(神明)은 본래 이(理)와 기(氣)가 합해진 상태에서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둔 곳이 이(理)이고 중시하는 것이 이(理)에 있으니, 이른바 신명, 주재라는 것이 어찌 '기(氣)'라는 한 자로 완결(完結)지을 수 있겠는가. 지금 심(心)을 오로지 기기(氣機)87)로 간주하여 기(氣)가 이(理)를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을 증명한다면 성인의 말씀을 크게 업신여긴 것이다. '사람이 도를 선양한다.'라는 말은 인신(人身)의 측면에서 하는 말이고 '기(機)가 저절로 그러하다.'라는 말은 조화(造化)의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만약 '사람이 도를 선양한다.'를 '기(機)가 저절로 그러하다.'라는 말에 짝지어 "기(機)가 도를 선양할 수 있다."라고 하고 '도가 사람을 선양하는 것이 아니다.'를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짝지어 "도(道)가 기(氣)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과연 말이 되겠는가.전우(田愚)가 말하기를, "사물이 생겨나 저절로 자라고 저절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저절 로 자라고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종극에는 이(理)가 본디 이와 같기 때문이다. 음양(陰陽) 의 기(機)가 비록 저절로 움직이고 저절로 고요하다[自動自靜] 하더라도 저절로 움직이고 저절로 고요한 것 또한 이(理)가 응당 이와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깨닫기 어려운 이 치이겠는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주자(朱子)는 「자장자소(自長自消)」 다음에 「이자여차(理 自如此)」를 이어 놓았지만, 율옹(栗翁)은 이러한 일전어(一轉語)88)가 없기에 노사(蘆沙)의 의심을 초래하였다.'라고 하였다.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주자가 일찍이 '일기(一氣)가 유행(流行)하면 만물(萬物)이 스스로 생장(生長)하고 스스로 형색(形色)을 갖추니 어찌 일일이 단장을 하여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89)라고 하였다. '어찌 일일이 단장을 하여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는 곧 율옹의 '누군가가 부리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지만 율옹의 경우는 '이(理)는 본디 이와 같다.'라는 말을 더 하지 않았다. 이러한 율옹의 말을 또한 '스스로 가고 스스로 멈추어 천명을 거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꾸짖겠는가? 아니면 또한 '나는 기가 이(理)의 지위를 빼앗고 만사의 본령이 될까 두렵다.'라는 것으로 배척하겠는가?노사(蘆沙)는 '동(動), 정(靜)은 기(氣)이고, 동(動)하게 하는 것, 정(靜)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동(動)하게 하고 정(靜)하게 하는 것이 부려서 그러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이(理)가 부린다.'라는 것은 단지 근저(根柢)가 됨을 말할 뿐 기(氣)에 정의(情意)가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우옹(尤翁)은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일에 어찌 조작이 없겠느냐.'는 심명중(沈明仲)의 질문에 '이것은 본래 그러할 뿐이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고 음양오행의 운용과는 흡사하지 않다.'90)라고 답하였다. 지금 노사(蘆沙)의 견해는 확실히 심명중과 같고 노사가 '동(動)하게 하고 정(靜)하게 하는 것이 이(理)이다.'라는 것은 또 '발(發)하는 것이 기(氣)이다.'91)라는 율곡(栗谷)의 말과 어세(語勢)가 동일하니 어찌 기(氣)가 이(理)라는 인식으로 귀착되지 않겠는가.대체로 이(理)가 주재(主宰)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자재(自在)하는 것이고, 기(氣)가 동(動)하거나 정(靜)한다고 하더라도 실로 이(理)에 근본한다. 이것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이건 나중이건 천고 만고(千古萬古)에 바뀌지 않는 정리(定理)이다. 그래서 율옹은 '형(形)이 없고 위(爲)가 없지만 형체와 행위의 주인이 되는 것이 이(理)이고, 형체도 있고 행위도 있지만 형체도 없고 행위도 없는 것의 기(器)가 되는 것이 기(氣)이다.'92)라고 하고, 또 '형체가 있고 행위가 있어 움직임이 있고 고요함이 있는 것이 기(氣)이고, 형체가 없고 행위가 없어 동(動)에도 있고 정(靜)에도 있는 것이 이(理)이다.'93)라고 하였다. 이 말은 본말(本末)을 아울러 다하고 체(體)와 용(用)을 빠트린 것이 없다고 이를 수 있으니, 도(道)의 본체를 꿰뚫은 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이제 이처럼 간파(看破)하고 이처럼 체득(體得)하지 못하고 각각 주재(主宰)라는 한 가지 뜻만 위주로 삼아 이(理)에 조종(操縱)하는 힘이 있다는 것에 가까워지고 다시 이 기(氣)를 검속(檢束)하여 이(理)의 본연(本然)을 따르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 공부에 어찌 빈틈이 없겠는가. 또 그 설을 따른다면, 말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입[口]이고 말하게 하거나 침묵하게 하는 것은 성(性)이다. 내가 듣건대, 성(性)은 말하거나 침묵하게 하는 이(理)이고 입과 혀는 이에 따라 말을 하거나 침묵한다. 이것이 주자(朱子)가 이른 '이(理)에 동(動)과 정(靜)이 있기 때문에 -전우가 보건대, 이(理)에는 이 기(氣)가 동정(動靜)하는 이(理)가 있음을 말한 것이지 이(理)에 먼저 동정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의 앞뒤에 대해서 자세히 살피지 않고 이해하는 독자가 많다.- 기(氣)에 동(動)과 정(靜)이 있다.'94)라고 하는 것이다. -전우가 보건대, 위와 아래 두 구의 동정(動靜)은 모두 기(氣)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하나는 기(氣)에 속하고 하나는 이(理)에 속하여 2개의 동정(動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성(性)이 스스로 말을 하거나 침묵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이 때문에 고자(告子)와 석씨(釋氏)의 지각95)과 작용(作用)이 성(性)96)이라는 주장과 양명(陽明)의 '저 시청언동(視聽言動)할 수 있는 것이 곧 천리(天理)이다.'라는 주장은 모두 기(氣)를 이(理)로 인식하는 것으로 귀착되어 우리 성인(聖人)과는 다르다. 주자(朱子)의 〈답호계수서(答胡季隨書)〉에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성찰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성찰하는 이(理)는 성(性)에서 나오고 성찰할 수 있는 것은 심(心)이지 성(性)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 입언(立言)이 이와 같았겠는가. 사리(詞理)가 주도면밀하여 조그마한 흠결도 없지만 후인(後人) 가운데 〈외필(猥筆)〉의 설을 익숙히 들었던 자들이 착오를 일으켜 '스스로 가고 스스로 멈추어 성명(性命)을 거치지 않는다', '2개의 본령이 각각 스스로 핵심이 된다'는 내용 등으로 주자(朱子)에게 질문을 한다면 삼가 생각건대 노사(蘆沙)의 영령이 또한 당연히 저승에서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변(辨)〉주자가 "어찌 일일이 단장을 하여……"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말한 부분은 한둘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만물에 부여했지만 자신은 거기에 공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97)라고 하고 또 "하늘은 온갖 형상에 대해서 사물마다 조각한 것이 아니다."98)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일본(一本)의 측면에서 하는 말이고 주재(主宰)의 오묘함은 이미 윗부분에 놓여 있으니 어찌 주재함이 전혀 없이 스스로 생장(生長)하는 것을 이르겠는가. 이 때문에 "어찌 일일이 단장을 하여……" 다음에 있는 문장은 "단지 대원 대본(大原大本)에서 흘러나왔다."라는 구절이 있다. 지금 도리어 아래 문장을 제거하고 한 구절만을 적출하여 자기 주장을 펼치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막아내는 무기로 삼고 있다.이(理)는 작위(作爲)가 없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동(動)과 정(靜)은 이(理)이고 동(動)하게 하고 정(靜)하게 하는 것은 기(氣)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理)가 주재(主宰)한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동과 정은 기(氣)이고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라고 한다. 관점에 따라서 각각 말에 타당함이 있다. 하물며 율곡(栗谷)의 〈천도책(天道策)〉과 〈역수책易數策)〉에 "동(動)하게 하고 정(靜)하게 하는 것이 이(理)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율곡 또한 일찍이 기(氣)가 이(理)라고 인식하여 그런 것인가. 지금 율곡(栗谷)을 위해서 변호를 하면서 도리어 율곡을 기(氣)를 이(理)로 인식한 부류로 여겼으니 어찌하여 이처럼 정론(定論)이 없는가."이(理)에는 동(動)과 정(靜)이 있다."의 동과 정은 체(體)가 없는 동이고 체가 없는 정이다. 그래서 《통서(通書)》에서는 "움직이지만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지만 고요함이 없으며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99)라고 하였다. 주자(朱子)는 "이(理)의 동정(動靜)을 말하면,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는 것이 그 체(體)이고, 고요하면서 움직일 수 있고 움직이면서 고요할 수 있는 것이 그 용(用)이다."100)라고 하였다. 이 같은 주장은 한둘이 아닐 정도로 많다. 지금 이(理)에는 동정이 있다고 하면서 이(理)의 동정을 기(氣)의 동정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른바 이(理)라는 것은 유명무실한 사물이 아니겠는가. 그동안의 독자들이 모두 이를 살피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서는 천고의 독창적 견해라고 자부하였다. 무릇 이(理)를 내치고 기(氣)를 위주로 삼는 학문이 옛날에 과연 있었는가. 이것이야말로 천고의 독단적 견해라고 이를 만하다.주재(主宰)의 의미를 어찌 사소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이것은 천지 간에 하나로 통일되어 고금을 관통하는 지극히 엄중한 도리이다. 지금 "주재라는 하나의 의미만을 위주로 하여 이(理)에 조종하는 힘이 있다는 것에 가까워지고 다시 이 기(氣)를 검속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주재를 막연하게 보아 긴요하지 않은 하나의 사건이나 사물을 보는 것과 같으니 어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氣)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理)를 주로 하는 것은 곧 이 기(氣)를 검속하려는 것이건만, 기(氣)를 주로 여기면서 스스로 하는 것을 따른다면 이를 검속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理)를 주로 하는 것만이 비로소 소루함이 없건만 기(氣)를 주로 하면서 본원(本原)을 버려둔다면 소루함이 없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때가 된 다음에 말을 한다면101) 말하는 것은 입이고 말을 하게 하는 것은 이(理)의 주재이다. 예가 아니라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102) 침묵하는 것은 입이고 침묵하게 하는 것은 이(理)의 주재이다. 석씨(釋氏)가 기(氣)를 성(性)이라고 인식하고 양명(陽明)이 심(心)을 이(理)라고 인식한 것은 발(發)한 것의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개괄하여 성(性)으로 여긴 것이니 불가함이 분명하다. 선(善)에서 말미암은 지각 작용(知覺作用)과 시청언동(視聽言動) 같은 것도 이(理)라고 이를 수 없겠는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고 개괄하여 성(性)이라고 이르는 자들이 옛날의 고자(告子), 석씨(釋氏), 양명(陽明)의 부류이고 이(理)와 욕(欲)을 분별하지 않고 개괄하여 기(氣)라고 이르는 자들이 오늘날 스스로 천고의 독견(獨見)을 깨우쳤다고 이르는 자들이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성찰하는 것[自心自省], 이것은 주일무적(主一無適)103)을 이르는데 이 또한 어찌 전혀 주장하는 것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뜻이겠는가. 아, 구천에서 다시금 일어나지 못하니 주자(朱子)는 말이 없구나.전우(田愚)가 말하기를, "이치는 하나일 뿐이지만 기(氣)를 타면 그 나뉨이 만 가지로 다르다. 이것은 율옹(栗翁)의 설이다.104) 말하기를, '어찌 일(一)일 때는 애초에 탄 바가 없다가 만(萬)에 이르는 때에야 비로소 기(機)에 붙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만약 기(機)에 있는 태극(太極)을 단언(單言)한다면 이치는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사시(四時)의 기(氣)를 아울러 거론하여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말하자면 기(氣)를 타서 분(分)이 만 가지로 다를 뿐이다. 어찌 어제는 걸어 다니고 오늘은 말을 타는 것을 이르겠는가. 이제 〈외필(猥筆)〉에서는 도리어 말하기를, 「이것은 마치 태극(太極)이 아무런 주장이 없다가 문득 말이 앞에 있음을 보고 올라타는 것과 같다.」라고 하니 이것은 결코 율옹(栗翁)의 본의가 아니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말은 새옹(塞翁)이 얻은 것이지 원래 타던 말이 아니다. 그 뒤 형세상 반드시 이리저리 쏠릴 때 말의 머리만 쳐다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 또한 반드시 자세히 생각해야지 간단히 지나쳐 버릴 수 없다.대체로 사람은 모두 태극(太極)을 지니고 있지만, 기품(氣稟)이 이미 다르다면 욕(欲)이 발동하고 정(情)이 우세해져 이(利)와 해(害)가 서로 공격하는 근심이 가는 곳마다 있게 된다. 이때 이른바 원래 탔던 말의 주인은 이미 조종(操縱)하는 힘이 있고 또한 적막(適莫 하려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고집함)이 없는 것이 아닌데 -조종(操縱)과 적막(適莫)은 모두 〈외필〉에 보인다.- 어찌 이처럼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는 것이 오직 말에 달려 있게 되는 잘못이 생기겠는가. 이것은 마땅히 명백히 살피고 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향하는 곳을 마부가 어찌 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말을 사람들이 장차 믿지 않을 것이다. 아, 위태롭도다!"〈변(辨)〉일리(一理)는 사람의 일신(一身)과 같고 만리(萬理)는 일신(一身)의 백체(百體 인체의 온갖 뼈)와 같아 하나(一)라고 하여 부족한 것이 아니고 만(萬)이라고 하여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理)는 하나일 뿐이지만 사시(四時)의 기(氣)를 아울러 거론하여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말한다."라고 한다면 일(一)은 무분지일(無分之一)이니 반드시 아울러 거론한 다음에야 만리(萬理)가 된다. 예전에 이른 "분수(分殊)는 분명히 본연(本然)의 분(分)이다."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태극(太極)이 정말 주재(主宰)를 하는데도 욕(欲)이 발동하여 정(情)이 우세해지는 것은 기습(氣習)의 폐해이다. 기습의 폐단 때문에 태극이 주재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것은 물이 이마 위로 튀는 것105)을 보고 물의 성품은 아래로 흐르면서 만물을 적셔주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록 욕(欲)이 발동하여 정(情)이 우세한 상황에 있더라도 겸연하게 부족하고 삭연하게 불안한 뜻은 그 안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 이것이 심령을 속일 수 없고 이(理)가 주재가 되는 까닭이다. 어찌 이것을 인용하여 이(理)를 위주로 하는 자들을 기롱하면서 "어찌 이처럼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는 것이 오직 말에 따르는 잘못이 생기겠는가."라고 하겠는가.전우(田愚)가 말하기를, "〈외필(猥筆)〉에 또 이르기를, '오늘날 이발(理發)이라는 말은 매우 금기로 여기고 기피 하면서 변화를 일으키거나 조리(條理)를 이루는 것을 보기만 하면 기(氣)라고 한다. 누가 주장(主張)하는지 물으면 「기(機)가 저절로 그렇게 하지 누가 부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이른바 이(理)는 어디로 떨어졌는지 물으면 타고 있다고 한다. 애초에 이미 그렇게 시키는 묘(妙)가 없고 마지막에 또 조종하는 힘이 없으니 의지하고 붙어서 탈 뿐이지 어떤 일을 하겠는가. 있어도 도움이 되는 게 없고 없어도 부족할 게 없다. 아, 가련하다! 그 원인을 궁구하자면 '승(乘)' 자가 본지를 잃은 데 근본하여 점점 이(理)가 가벼워지고 기(氣)가 무거워지다가 곧장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아 만사(萬事)의 본령이 되기에 이르고서야 그친다. 한 자의 본지가 잘못되어 그 화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106)라고 하였다.내가 생각건대, 율옹(栗翁)도 일찍이 '누가 그 기(機)를 주관하는가. 아, 태극(太極)이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일찍이 기(氣)를 만사(萬事)의 본령으로 여긴 것이겠는가. 또 '성(性)이 발하여 정(情)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외필〉에서 운운한 것은 율옹(栗翁)이 이미 보았던 소릉(昭陵)107)이다. 다만 율옹이 이발(理發)을 잘못이라고 여긴 것은 곡절(曲折)이 있지만, 실제로는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108)에 말미암아 말했을 뿐이다. 대체로 이(理)를 기저로 삼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기(氣)는 이(理)의 용(用)이다. 따라서 기발(氣發)일지라도 또한 이발(理發)이라고 이를 수 있으니 가는 것은 말이지만 주인은 사람인 것과 같다. 그래서 통언(統言)하자면 '사람이 간다.'라고 한다. 만약 기(氣)가 작용(作用)할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이(理)는 실로 정의(情意)가 없다. 그래서 선한 감정[善情]일지라도 다만 기발(氣發)이라고 이를 수 있으며, 타고 있는 것은 사람이지만 가는 것은 말이기 때문에 변명(辨明)하여 '말이 간다.'라고 한다.만약 이(理)를 주로 삼으면서 용사처(用事處)에 이르러 또한 기발(氣發)이라는 말을 쓰지 않도록 막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신하가 군주의 명령을 행하면 그가 행하는 일은 진실로 군주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행동하는 것은 결국 신하이지 군주가 아니다. 만약 기필코 행하는 일이 군주의 명이라는 이유로 신하의 행동을 가리켜 군주의 행동이라고 한다면 명칭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다. 하물며 성급하게 신하의 행동을 가리켜 신하가 군주의 지위를 빼앗았다고 여기고 주벌한다면 이것이 어찌 법리(法理)에서 나올 법한 일이겠는가."〈변(辨)〉변화(變化)하는 것이 기(氣)이건만 "건도(乾道)가 변화한다."109)라고 하고 유행(流行)하는 것이 기(氣)이건만 "천리(天理)가 유행한다."라고 한다. 어찌 이것을 명칭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한 적이 있는가. 기(氣)가 법도를 따르는 곳치고 이(理)가 유행하지 않는 곳이 없고 기(氣)가 법도를 따르지 않는 단계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기질(氣質)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저이가 말하는 신하의 행동이라는 것은 어쩌면 법도를 어긴 신하가 되지 않겠는가.율옹(栗翁)이 일찍이 "누가 기(機)를 주관하는가. 아, 태극(太極)이로다!"라고 하였다. 또 "무형 무위(無形無爲)하여 유형 유위(有形有爲)의 주재가 된다."110)라고 하였다. 또 "각양 각종의 정(情)은 모두 이(理)에서 나온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바뀔 수 없는 정론(定論)이다. 〈외필(猥筆)〉의 말은 또한 율옹이 이미 보았던 소릉(昭陵)이 아니겠는가. 다만 후대인들이 평상시의 정론(定論)을 버리고 단지 유행하는 측면에서 말한 한 조목의 설을 들어 자신의 주기(主氣)에 대한 증거로 성(性)은 체(體)이고 기(氣)는 용(用)이며, 체는 동일하지만 용은 다르다는 설을 펼쳐 인물(人物)이 태어날 때는 고정된 명분(名分)이 없고 음양오행(陰陽五行)은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다방면으로 논설을 펼치는 것이 요컨대 '기(氣)'라는 한 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기필코 율옹의 말을 인용하여 실증하였다. 아, 율옹이 평소에 펼쳤던 이(理)를 위주로 하는 내용이 어떠하였기에 후대인들의 견강부회에 의해 도리어 주기(主氣)의 부류가 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였는가. 그렇다면 율옹을 위해 변호한 자들 가운데 율옹의 죄인이 되지 않을 이가 몇이겠는가.전우(田愚)가 말하기를, "〈외필(猥筆)〉에서 거론한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태극이 양의를 낳는다.'라는 두 구절을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다만 '사람이 도를 선양(宣揚)할 수 있지 도가 사람을 선양하는 것이 아니다.'111)라는 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던가. 어느 하나를 고집하면서 어느 하나를 버릴 필요는 없을 듯하다. 삼가 일찍이 생각해 보니, 향인(鄕人)으로부터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기에 이르는 것이 어찌 천지의 조화를 빼앗는 경우가 아니었던가. 그들의 공부가 비록 마음에 보존되어 있더라도 그 본원은 한결같이 성(性)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도가 사람을 선양한다.'라는 것 또한 어찌 불가하겠는가. 그런데 성인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무릇 도는 '지극히 존귀한 실재'이고 '만물의 주재'이건만 도리어 이를 낮추어 작용(作用)이 있는 것과 같은 부류로 취급한다면 도(道)와 기(器)를 형이상과 형이하로 구분하는 것이 어지럽게 되고 이 마음이 분수를 넘보는 싹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아, 성인의 대의(大意)가 은미하도다! -이것으로 마음을 막아도 후세에는 여전히 이 마음을 대리(大理)로 보고 소리(小理)인 성(性)을 갖춘 것이라고 지칭하는 자가 있다.- 또 생각하자니 마음[心]이 할 수 있는 일은 '덕성(德性)을 존숭하고', '의리(義理)로 세교(世敎)를 부지(扶持)하며', '범인(凡人)을 성인(聖人)으로 만들고', '환간을 천도(天道)에 참여시키니, 마음의 공효가 사람에게 어느 정도인가. 비록 형이상(形而上)이라는 명칭을 빌어도 애석하게 여길 만한 일이 없는 듯하건만, 성인은 마음에 대해서 도리어 도(道)와 병행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석씨(釋氏)는 이(理)가 도(道)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늘 위, 하늘 아래에 오직 나보다 존귀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아(我)는 마음이 스스로를 아(我)라고 한 것이다. 마음은 매우 정밀하게 연마하더라도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런 형체가 없는112)[沖漠無眹] 도(道)에 비하면 결국 미미하게라도 형적이 드러난다. 대체로 마음의 허령[靈]과 도(道)는 원래 분변이 있어 그런 것이다. 성인이 마음을 가리켜 도(道)라 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 근엄한 의도가 어찌 이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우리 유자들의 첫 번째 의리(義理)이고 또한 첫 번째 방한(防閑 울타리)이다. 옛 철인에게 여쭙고 싶지만 이미 그러할 수 없으니 또한 같은 시대와 후대의 현자들에게 질정하기를 원한다."〈변(辨)〉사람은 본래 기(氣)로 이루어졌지만, 사람이 되는 까닭은 바로 이(理)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선양할 수 있다.'라는 것은 이(理)에 달려 있으며 기(氣)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지금 마음[心]을 전적으로 기분(氣分 기의 분수)으로 삼아 넘보지 못하도록 금하고 도(道)를 지존(至尊)으로 여겨 폄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의도는 근실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마음이 기(氣)가 된다는 것만 알고 이(理)가 된다는 것을 모른다면 주재 묘용(主宰妙用)의 권한이 모두 기(氣)에 귀속되고, 이른바 지존(至尊)이라는 것은 도리어 양존(陽尊 거짓으로 존귀한 것)이 됨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권한을 기(氣)에 귀속시켜 넘보게 하고서 넘보지 않기를 바라고, 그 지위를 양존(陽尊)하여 폄훼되도록 하고서 폄훼되지 않기를 바라니 가능하겠는가.성인이 마음을 가리켜 도라고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맹자(孟子)는 어째서 "인(仁)이 사람의 마음이다."113)라고 하고, 소자(邵子 소옹(邵雍))는 어째서 "마음은 태극(太極)이다."라고 하고, 정자(程子)는 어째서 "마음은 생도(生道)이다."114)라고 하고, 또 어째서 "하늘에 있으면 명(命)이라 하고 사람에게 있으면 성(性)이라 하며 몸에서 주재하면 심(心)이라 한다."115)라고 하고, 주자(朱子)는 어째서 "인(仁)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사람은 이를 얻어서 마음으로 삼는다……"라고 하여 병행하게 하였겠는가. 맹자, 소자, 정자, 주자가 유독 우리 유자들의 첫 번째 의리, 첫 번째 방한(防閑)을 염두에 두지 않아 그랬겠는가. 이(理)를 버리고 기(氣)를 위주로 하는 것을 첫 번째 의리로 여기며 이것으로 옛 철인에게 여쭙고자 하고, 또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질정하고자 하고, 또 후세를 기다리고자 하였으니 부질없이 심력(心力)을 낭비했다고 이를 만하다. 또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라는 이름을 어찌 사람에게서 빌릴 수 있겠는가.전우(田愚)가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천지 만물의 이(理)는 홀로 있는 것이 없고 반드시 짝이 있다.'116)라고 하였다. 누군가 주자(朱子)에게 '태극(太極)은 곧 무엇과 짝을 이룹니 까?'라고 묻자, 주자는 '태극은 곧 음양(陰陽)과 서로 짝을 이룬다.'117)라고 하였다. 〈외필(猥筆)〉의 제5단락에서 이 뜻을 바로잡아 논하여 '기(氣)와 이(理)를 상대로 삼아 거론하니, 이것은 성인의 말이 아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理)」 자를 보기만 하면 반드시 기(氣)를 찾아서 짝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래서 이(理)의 유행이라는 하나의 큰일이 모두 「기(氣)」 자의 영역에 속하게 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혼륜(混淪)하다느니 충막(沖漠 텅비고 고요함)하다는 말뿐이다. 이것이 두 개의 본령을 세운 시초이니 아, 슬프다.'라고 하였다.내가 생각건대, 노사(蘆沙)는 이(理)를 존중하여 이렇게 운운하였다. 그러나 사기(辭氣)에 오만함이 분수를 넘어서 성현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격식을 크게 손상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기(氣)가 이(理)를 잃은 부분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주자가 어찌 일찍이 성인을 비방하였으며, 어찌 일찍이 본령이 하나임을 비방하였던가. 그런데도 음양과 태극을 짝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또한 이(理)의 유행이라는 하나의 큰일을 빼앗아 기(氣)에게 부여하여 본령을 두 개로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고 말할 법한데, 노사의 「슬프다」라는 탄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변(辨)〉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에 존망(存亡)과 출입(出入)이 있다는 것은 성인의 말이 아니다."118)라고 하였다. 무릇 '쥐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사라지며 출입에 일정한 때가 없다.'119)라는 것이 공자(孔子)의 말이 아니던가. 하지만 정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단지 이(理)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지 공자의 말을 바로잡아 논한 것이 아니다. 지금 선사(先師)의 말도 단지 이(理)에 근거하여 말을 한 것이지 주자(朱子)의 말을 바로잡아 논한 것이 아니다. 정자의 말 또한 오만함이 분수를 넘어섰다고 이르겠는가, 또한 기(氣)가 그 이(理)를 잃었다고 이르겠는가.천하에는 참으로 짝이 없는 존위(尊位)가 있으니 나라에 군주가 있고 집안에 아버지가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 짝을 어떻게든 말하고자 한다면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또한 짝이 아니라고 이를 수 없다. '마음은 짝이 없다', '도(道)는 짝이 없다', '의(義)는 짝이 없다'라는 것이 모두 주자의 말이 아니던가. 지금 짝이 있다고 한 주자의 말을 단거(單擧)하여 선사가 이 뜻을 바로잡아 논하였다고 이르고, 슬프다는 탄식을 주자에게 가하여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니 군자가 되어 마음을 쓰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술수를 부리는 것이 사람을 두렵게 한다.전우(田愚)가 말하기를, "〈외필(猥筆)〉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유행하고 발현하고 변화하고 환히 드러나는 것이 이 도(道)의 작용이 아닌 경우가 없음을 분명히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 도의 작용'이라는 말은 따져보아야 할 듯하다. 주자(朱子)는 《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도체(道體)는 무위(無爲)하다.'120)라고 하였다. 우옹(尤翁)은 〈답인서(答人書)〉에서 또 이르기를, '이 이(理)의 본체는 정의(情意)와 조작(造作)이 없지만 작용의 단계에 이르러 정의와 조작이 있다.'121)라고 하였다. 두 선생께서 어찌 도(道)가 유행하고 발현하는 것을 몰라서 이처럼 말하였겠는가. 응당 이것을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막비차도지위(莫非此道之爲)'에 몇 글자를 첨가하여 '차도지근저추뉴(此道之根柢樞紐)'라고 한다면122) 더욱 상세하고 분명할 듯하니 어떠할지 모르겠다.-"〈변(辨)〉자연(自然), 당연(當然), 필연(必然), 능연(能然)의 '연(然)'이 도(道)의 소위(所爲)이다. 어찌하여 반드시 '손발을 움직이고', '작용이 있는' 다음에야 비로소 '위(爲)'라고 이르겠는가. 주자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소이(所以)가 모두 도체(道體)의 소위(所爲)이다."123)라고 하고 또 "한 가지 사물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진실한 이치의 소위(所爲)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위(爲)' 자도 다시 생각하고 의논해 보아야 하는가.전우(田愚)가 말하기를, "노사 기장(蘆沙奇丈)의 이기설(理氣說)은 근래 계운 김장(溪雲金 丈)124)이 보여준 변설(辨說)로 인해서 대략 한두 가지의 율곡 선생과 현저하게 대립하는 내용을 보았는데 매우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다. 대체로 그의 의도는 본래 '이(理)' 자를 높이고 싶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도리어 폄훼한 혐의가 있게 되었다.내가 삼가 생각건대, 모든 기(氣)에는 소위(所爲)가 있으면 반드시 소이위(所以爲)의 이(理)가 있는 다음에야 비로소 어떤 일이 일어난다. 이렇게만 말하면 이(理)가 기(氣)를 주재한다는 뜻에 대해서 이미 저절로 여유가 있게 된다. 지금 '이(理)' 자를 논하면서 '적막(適莫 하려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고집함)이 있다.'라고 하고 또 '조종하는 힘이 있다.'라고 하고 또 '일을 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분명히 유위(有爲)하는 사물이 되니, 어떻게 유위(有爲)하는 것의 주인이 되겠는가. 가령 그 설을 따른다면 다른 것은 잠시 차치하고 다만 당(唐), 은(殷)의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공자와 맹자의 빈천(貧賤),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가 청(淸)과 화(和)에 치우쳤던 것125), 안연(顏淵)과 염유(冉有)가 인(仁)과 도(道)에 미치지 못한 것126) 등에서 이른바 이(理)는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관장하였는가? 적막함이 없고 조종함이 없이 한결같이 그 기(氣)가 스스로 하는 것을 따르는 듯하니 괴이하고 괴이하다!안자(顔子)의 마음은 성(性)을 위주로 하여 날마다 부지런히 힘을 기울였고, 명도(明道)는 그의 화기(和氣)가 자연스러웠음을 칭찬하였다127). 비록 우리 부자(夫子)께서도 그 마음이 발하는 근원을 캐보자면 또한 한결같이 여기에 근본을 두고 일찍이 자기 마음대로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도리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랐지만 자연스럽게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초사(楚辭)》 〈천문(天問)〉128)에 주석을 달면서는 '한번 동(動)하고 한번 정(靜)하며, 한번 그믐이 되었다가 한번 초하루가 되는 것은 모두 음양이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129)라고 하였다. 그리고 《음부경(陰符經)》130)의 '인심기야(人心機也)'를 풀이할 때도 곧바로 '인심(人心)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 것이 기(機)이다.'131)라고 하였다. 정자(程子)와 주자 두 선생이 어찌 '기(氣)'와 '심(心)' 위에 다시 소이연(所以然)의 이(理)가 있다는 것을 몰라서 자연(自然)이라고 하였겠는가.또 성인께서 안자(顔子)를 칭찬하면서 '마음이 인(仁)을 어기지 않게 하였다.'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그의 마음은 인(仁)을 어기지 않았다.'라고만 하였다. 이것은 어기지 않는 소이연(所以然)이 성(性)에서 나오더라도 어기지 않는 기미[機]는 도리어 마음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약 노사(蘆沙)의 주장을 따른다면 인을 어기지 않는 때 이 이(理)는 또 무엇 때문에 이와 같게 하는가? 또 어긴 것을 깨닫고 인(仁)에 귀의할 때 자신의 마음으로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인(仁)에 귀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구방심명(求放心銘)〉132)의 '누가 놓아 버리고 누가 구하였으며', '뒤집고 엎는 것은 손이 하네.' 등의 말로 보자면 알 수 있다.- 아니면 이른바 이(理)라고 이르는 것이 이 마음이 인(仁)에 귀의하거나 인을 어기는 사이에 가까이하거나 멀리하려는[適莫] 의도를 가지고 이처럼 조종한다고 여긴다면 괜찮겠는가. 이것을 근거로 반복해서 미루어본다면 그의 주장에 잘못이 없을 수 없음을 알 것이다."〈변(辨)〉형체가 있는 일을 가지고 형체가 없는 오묘함을 형용하자면 말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형체가 없는 오묘함까지 아울러 없다고 여긴다면 이 도리는 공적(空寂)133)과 뒤섞이지 않겠는가. 이(理)는, 조종하는 형적은 없지만 조종하는 오묘함은 있고, 가까이하거나 멀리하는 형적은 없지만 가까이하거나 멀리하는 오묘함은 있고, 해낼 수 있는[做得] 힘은 없지만 해낼 수 있는 오묘함은 있다. 선인(善人)에게 복을 내리고 악인(惡人)에게 재앙을 내리며 차면 이지러뜨리고 겸손하면 보태 주는 것이 조종(操縱)이 아니겠는가.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나는 것이 적막(適莫)이 아니겠는가. 사시(四時)의 운행과 온갖 사물의 생성(生成)이 주득(做得)이 아니겠는가. 만약 음양오행, 만물의 모든 유형을 본연의 분(分)이 아니라고 한다면 조종(操縱)이 없고 적막(適莫)이 없고 주득(做得)이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당(唐)과 은(殷) 대의 가뭄과 홍수, 공자와 맹자의 빈천이 이 이(理)의 본연이라고 이를 수는 없지만, 또한 이세(理勢)134)가 그렇게 되도록 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도 없다. 이세(理勢)가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은 선철(先哲)도 천(天)이라고 하였다. 안자(顔子)의 화기(和氣), 부자(夫子)의 종심(從心) 또한 의리가 가득 차고 쌓여서 그렇게 되었으니, 어찌 이(理)가 주인이 되지 않고 한결같이 기(氣)에 맡긴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理)가 주인이 되지 않고 기(氣) 스스로 이와 같다면 어찌 도척(盜跖)의 마음만 법도를 어기지 않음이 없었겠는가. 안자가 인(仁)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성찰한 것도 이(理)가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이미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고 사람이 선하지 않은 것을 이(理)가 기(氣)를 주재하지 않은 증거로 삼고, 또 당나라와 은나라의 가뭄과 홍수, 공자와 맹자의 빈천을 이가 기를 주재하지 않은 증거로 보았다. 대체로 당나라와 은나라의 가뭄과 홍수, 공자와 맹자의 빈천은 곧 기수(氣數)의 일시적인 변괴일 뿐이다. 일시적인 변괴를 가지고 만고에 바뀌지 않는 상도(常道)를 의심한다면 성인(聖人)의 수많은 말씀이 모두 시험되지 않아 징험이 없는 기록이 될 것이다. 이(理)가 정녕 주인이건만 여전히 이(理)를 어기고 산란함에 익숙하게 되는 변괴가 있다. 하물며 기(氣)를 주인으로 삼고 주재함이 전혀 없다면 그 변괴가 어떠하겠는가. 주자는 선비의 문체가 부박한 것을 세도의 근심거리로 여겼으니, 하물며 도리와 심술에 관한 말은 어떠하였겠는가. 이른바 사람이 시비의 근원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그 재앙은 백만의 사람이 죽어 그 피가 천 리를 흐를 것이니 누가 오늘날의 우환이 아니라고 하겠는가.근래 주기설(主氣說)은 한둘이 아니다. 태극(太極)을 분(分)이 없는 일(一)로 여기기도 하고, 오성(五性)을 기(氣)를 띤 사물로 여기기도 하고, 명덕(明德)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기도 한다. 일본 만수(一本萬殊)135)로 말하자면 만수(萬殊)를 기(氣)라 하고 대본 달도(大本達道)로 말하자면 달도(達道)를 기(氣)라 한다. 음양오행을 본연이 아니라고 하거나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을 정분(定分)이 아니라고 하여 주재하는 오묘한 작용과 조리의 단락을 하나같이 기에 귀속시키기도 한다. 입론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기가 이의 지위를 빼앗았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기(氣)가 이(理)의 지위를 빼앗는 것으로 보자면 신하가 군주의 지위를 빼앗고 자식이 부모의 지위를 빼앗고 아내가 남편의 지위를 빼앗고 소인이 군자의 지위를 빼앗고 오랑캐가 중화(中華)의 지위를 빼앗는 경우 또한 마찬가지 사례이다. 선사께서는 오직 이것을 근심하여 도리를 밝혀내고 잘못을 제거하며 차례대로 절충하여 천만 갈래로 나뉜 것을 하나로 귀착되게 하였다. 그런데 한쪽의 논의는 여전히 다시 논쟁을 일으켜 '작용(作用)이 성(性)이다.'라거나 '마음의 습정(習靜 항상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구한다.' 등의 말을 인용하여 기롱하는데, 도체의 본연을 밝히고 태극의 주재를 보존하는 것이 작용인가, 습정인가? 그러나 도리(道理)는 반드시 한쪽의 논의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공론(公論)은 반드시 한 때의 말에 현혹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만 드러날 뿐이다. 하물며 기극(忌克)136)의 마음으로 취멱(吹覓)137)의 계책을 세운다면 하는 말이나 의론이 어찌 공평하고 통창(通暢)하여 치우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선비된 자라면 마땅히 한마음으로 몸을 닦고 반성하여 만 분의 일이라도 실줄기 같이 위태로운 도맥(道脈)을 지탱해야 하건만 도리어 이처럼 시끄럽단 말인가. 참으로 통탄스럽다. 田愚曰。栗翁嘗言陰陽動靜。機自爾。非有使之也。蘆沙猥筆深駁之。然以愚觀之。朱子雅言理無造作。動靜者造作也。故曰機自爾也。朱子又言纔有作用。便是形而下者。動靜者作用也。故曰機自爾也。孔子分明說天之生物。栽者培之。傾者覆之。而朱子却言此非有物使之然。但物之生。自長將去。恰似有物扶之。及其衰也。自消磨去。恰似箇物推倒他。理自如此。孟子分明說天之生物。使之一本。而朱子却言自然之理。若天使之然也。伊尹分明說天之生民。使先知覺後知。而朱子却言天理當然。若使之也。此何以故。只是恐人錯認使字爲作用之意。則害道大矣。故另下若字恰似字非有物使之然字。以見其無作用之使也。故曰非有使之也。栗翁豈無所受而妄言之哉。且如人能弘道。機自爾也。非道弘人非有使之也。蓋人心有覺。是陰陽動靜之機也。道體無爲。是太極自然之妙也。朱子於集註載張子語。而未聞後賢以性不知檢其心。爲天命已息。心能盡性。爲天命之外。又一本領。而奮筆肆罵也。若論理爲氣主。性爲心本。則栗翁又嘗言氣之所爲。必有理爲主宰。又曰。無爲而爲有爲之主者。理也。又曰孰尸其機。嗚乎太極。此類不一而足矣。人苟有見於此。雖曰機自爾也。而其自爾之所以然。則依舊是理也。雖曰非有使之。而其不使之使。則依舊是理也。何曾有魏延楊儀同府乖張之變。如猥筆之謂乎。以動靜。直喚做造作作用看。可乎。動靜是二氣之良能。豈造作作用。犯氣力費排置之比哉。況周子所謂動而無動。靜而無靜。朱子所謂靜中有動。動中有靜。此等動靜字皆非以理言之耶。理旣無形。安有造作。然理之如此。氣亦如此。理之如彼。氣亦如彼。氣之動靜運行成形著迹。皆理之所爲也。此是無爲之爲。不使之使也。見人之推理太過而認爲作用。則曰非有使之。見世之主氣太甚而至於獨擅。則曰實有使之。然則栗谷之書蘆沙之筆。皆所以因時明理之言也。未知今日之執言迷旨而斷斷不置者。其心亦皆出於明理否耶。人能弘道。心能檢性。此心字。是神明主宰之謂。人之神明。固是合理與氣而有者也。然所根在理。所重在理。則所謂神明主宰者。豈一氣字所能了當乎。今以心專喚做氣機看。以證其氣能制理之說。其爲侮聖言大矣。人能弘道。是人身上說也。其機自爾。是造化上說也。今以人能弘道。對其機自爾曰機能弘道。以非道弘人對非有使之曰非道使氣。則果可成說乎。田愚曰。物之生。雖曰自長自消。而其自長自消。究是理自如此。陰陽之機。雖曰自動自靜。而其自動自靜。亦是理當如此。此豈難曉之理乎。或言朱子於自長自消下。繼以理自如此。而栗翁無此一轉語。所以來蘆沙之疑。此又不然。朱子嘗曰。一氣流行。萬物自生自長。自形自色。豈是逐一粧點得如此。豈是逐一粧點得如此。卽栗翁非有使之謂。而更無理自如此之云。此亦將以自行自止不關由天命。罵之乎。亦將以吾懼夫氣奪理位而爲萬事本領。斥之乎。蘆沙曰。動者靜者氣也。動之靜之者理也。動之靜之。非使之然而何。竊謂理使云者。只是根柢之謂。非如氣之有情意者。故尤翁於沈明仲使動使靜。豈無造作之問曰。此不過曰自然而已。不似二五之運用也。今蘆沙之見。正與沈氏同。而其曰動之靜之者理。又與栗谷發之者氣。同一語勢。則豈不歸於認氣爲理乎。大抵理雖曰主宰。而實則自在。氣雖曰動靜。而實本於理。此前天地後天地。千古萬古不易之定理。故栗翁旣曰。無形無爲而爲有形有爲之主者。理也有形有爲而爲無形無爲之器者。氣也。又曰。有形有爲而有動有靜者。氣也。無形無爲而在動在靜者。理也。此可謂本末兼盡。體用無漏。非洞見道體者。其孰能與於此哉。今不能如是看破。如是體得。各只主主宰一義。而幾於理有操縱。不復檢束此氣。以循乎理之本然。則其功夫豈非有疎漏處乎。且如其說。則語者黙者口也。語之黙之者性也。吾聞性爲語黙之理。而口舌從而語黙。此朱子所謂理有動靜。【田愚按。謂理有此氣動靜之理。非謂理先自有動靜也。此句前後。讀者多不察而領會也。】故氣有動靜者也。【田愚按。上下兩句動靜。皆指氣言。非一屬氣一屬理。有兩箇動靜也。】未聞此性自會語黙也。是故告子釋氏之知覺作用是性。陽明之那能視聽言動。便是天理。皆歸於認氣爲理。而與吾聖人異矣。朱子答胡季隨書。有自心自省語。豈不知省之之理出於性。而其能省之者。心而非性。故立言如此。詞理俱到。無些子疵類。而後人有習聞猥筆之說者。誤以自行自止。不由性命。兩箇本領。各自樞紐等。奉疑於朱子。則竊意蘆沙有靈。亦應蹙頞於泉下也。朱子曰豈是逐一粧點云云。如此說處不一。如曰付與萬物。而已不勞焉。又曰。天之於衆形。非物物刻而雕之。此皆從一本上說來。而主宰之妙。已壓在上頭。豈漫無主宰而自生自長之謂哉。是故豈逐一粧點得下文。有只是大原大本中流出一句。今乃刪去下文。單摘一句以爲伸已禦人之話欛耶。以理無作爲者言。則曰動靜者理也。動之靜之者氣也。以理爲主宰者言。則曰動靜者氣也。動之靜之者理也。隨其地頭。語各有當也。況栗谷天道及易數策。有動之靜之者理也之語。栗谷亦嘗認氣爲理而然乎。今爲栗谷分疏。而反以栗谷爲認氣爲理之科。何其無定論若是乎。理有動靜。此動靜字。是無體之動。無體之靜。是以通書曰。動而無動。靜而無靜。非不動不靜。朱子曰。言理之動靜。則動中有靜。靜中有動。其體也靜而能動。動而能靜。其用也。如此說不一而多。今曰理有動靜。而以理之動靜。喚作氣之動靜。然則所謂理者。非有名無實之物耶。謂前後讀者。皆不能察。而自許以千古之獨見。夫黜理主氣之學。古果有之乎。此可謂千古之獨見也。主宰之義。豈可小之者哉。此是天地大一統。貫古貫今。至重至嚴底道理也。今曰只主主宰一義。而幾於理有操縱。不復檢束此氣云。視主宰藐然。若一箇沒緊要底物事。豈所重在氣而然耶。主理乃所以檢束此氣。主氣而聽其自爲。乃可謂檢束乎。主理乃可以無疏漏。主氣而遺却本原乃可謂無疏漏乎。時然後言。則語者口。而語之者理之主宰也。非禮勿言。則黙者口。而黙之者理之主宰也。釋氏之認氣爲性。陽明之認心爲理。是不擇所發之善惡。而槪以謂性也。其不可也固矣。若其知覺作用視聽言動之由於善者。亦不可謂之理乎。不擇善惡而槪謂之性者。古之告子釋氏及陽明之流也。不分理欲而槪謂之氣者。今之自謂得千古之獨見者也。自心自省。此是主一無適之謂。亦豈爲漫無主張而自行自止之意耶。噫。九原不作。朱子無語也。田愚曰。理一而已。乘於氣則其分萬殊。此栗翁說也。曰豈一之時。初無所乘。至萬之時。始上著機歟。曰不然。今單言機上之太極。則曰理一而已矣。兼擧四氣之時而言元亨利貞。則曰乘於氣而其分萬殊云耳。豈昔日徒行而今日跨馬之謂乎。今猥筆乃曰。此若太極漫無主張。忽見馬匹當前騰上者然。此決非栗翁之本意也。又曰。是馬爲塞翁之得。非元來所乘。此後勢必之東之西。惟馬首是瞻。此亦須消詳。未可草草打過。蓋人皆有太極而氣稟旣異。則欲動情勝利害相攻之患。往往而有。是時所謂元來乘馬之主人。旣有操縱之力。而亦非無適莫。【操縱適莫。此皆猥筆中。】奈何有此東西惟馬之失也。此宜明核而勘破。不然則其曰主之所向。僕焉得有不往者。人將不之信矣。嗚乎殆哉。一理如人之一身。萬里如身之百體。一非不足。萬非有餘。今曰理一而已矣。而兼擧四時之氣而言元亨利貞。然則一爲無分之一。必待兼擧而後爲萬里也。前所謂分殊固是本然之分者。顧安在耶。太極固主宰。而欲動情勝者。氣習之敝也。以氣習之敝。而疑太極之不爲主宰。何異於見水之過顙。而疑其性之不潤下也。雖在欲動情勝之中。而其歉然。不足索然不安之意。未嘗不在其中。此心靈之不可欺。而理之所以爲宰也。豈可引此而譏主理者曰。奈何有東西南北馬首之失也。田愚曰。猥筆又曰。理發二字。爲今日一大禁避語。而纔見行變化成條理者則曰氣也。問孰主張是則曰其機自爾。非有使之者。問所謂理者。落在何處。則曰乘之矣。始旣無使之然之妙。末又非有操縱之力。寄寓來乘。做得甚事。有之無所補。無之靡所闕嗚乎可憐矣。究其端由。原於乘字失其本旨。駸駸致得理輕氣重。直至氣奪理位。爲萬事本領而後已。一字之失。其禍乃至此乎。愚按。栗翁亦嘗言孰尸其機。嗚乎太極。此何嘗以氣爲萬事本領乎。又言性發爲情。則猥筆云云。栗翁已見之。昭陵也。但其以理發爲非者。却有曲折。實由理氣互發而云爾。蓋從理爲根柢上說。則氣爲理之用。故雖氣發亦可謂之理發。如行者雖馬而主者是人。故統而言之曰人行也。若據氣能作用上說。則理實無情意。故雖善情。但可謂之氣發。而乘者雖人而行者是馬。故辨而明之曰馬行也。若欲以理爲主。而至於用事處。亦禁不下氣發字。非其情實也。譬如臣行君令。其所行固出於君。然其行之。畢竟是臣而非君。如必以所行是君命。指臣行爲君行。則名不正而言不順矣。況遽指臣行二字。而爲臣奪君位誅之。則豈法理之所當出乎。變化者氣也。而曰乾道變化。流行者氣也。而曰天理流行。何嘗以此爲名不正言不順乎。氣之循軌處。莫非理之流行。至於氣不循軌而後。方說氣質。然則彼所謂臣行者。或不爲不軌之臣耶。栗翁嘗曰。孰尸其機。嗚乎太極。又曰。無形無爲而爲有形有爲之主。又曰。萬般之情。皆出於理。此皆不易之定論也。猥筆之言。亦豈非栗翁之已見之昭陵乎。但後之人舍平日之定論。而特擧流行邊一條說。以爲自己主氣之證案。至有性體氣用同體異用之說。以人物之生謂無定分。陰陽五行謂非本然。橫說竪說。要不出於氣之一字。而必引栗翁語以實之。嗚乎。栗翁平日之主理。顧何如。而爲後人所傳會。反若不免爲主氣之科。然則爲栗翁分疎者。幾何不爲栗翁之罪人也耶。田愚曰。猥筆所擧一陰一陽之爲道。太極生兩儀兩句。誰曰不然。但人能弘道。非道弘人。獨非孔子之言乎。恐不必執一而棄一也。竊嘗思之。自鄕人而至於爲聖爲賢。豈非奪天地之造化者乎。其功夫雖存乎心。而其本原一出於性。然則謂之道能弘人。亦何不可。而聖人之言如此。此宜深思其故。夫道是至尊之實而爲萬物之主者。乃降而與有作用者同科焉。則道器上下之分亂。而無以社此心覬覦之萌矣。嗚乎。聖人之指微矣哉。【此以防心。後世猶有此心自稱大理具小理者。】抑又思之。心之能事。至於敬尊德性。義扶世敎。鑄凡作聖。竪人參天。其有功於人何如哉。雖假以形上之名。宜若無可惜者。而聖人之於心。乃不肯與道齊頭幷脚。是又何故。釋氏不知理之爲道。而天上天下惟我獨尊。我是心自我。心雖磨鍊得極精細。比之沖漠無眹之道。畢竟微有跡。蓋靈之與道。原自有辨而然也。聖人不欲指心以爲道。其謹嚴之意。豈不以是歟。此是吾儒第一義理。亦第一防閑。欲奉質於囊哲。而旣未可得。亦願幷世與後來之賢者。與之是正。人固氣也。而其所以爲人者。乃理也。然則所謂能弘者。是在於理。而不在於氣。不其明矣乎。今以心專作氣分而禁不得覬覦。以道爲至尊。而俾不欲貶降。其意可謂勤矣。然徒知心之爲氣而不知爲理。則是主宰妙用之權。一歸於氣。而所謂至尊者。還不免爲陽尊矣。歸權於氣。使之覬覦而欲其不覬覦。陽尊其位。使之貶降而欲其不貶降。得乎。聖人不欲指心爲道。則孟子何以曰仁人心也。邵子何以曰心太極也。程子何以曰心生道也。又何以曰在天爲命。在人爲心。主於身爲心。朱子何以曰仁者天地生物之心。人得之以爲心云云。而使之齊頭幷脚也。孟邵程朱。獨不念吾儒第一義理第一防閑而然耶。以遺理主氣爲第一義理。而欲以質於囊哲。又欲正於倂世。又欲俟於來後。可謂枉用心力矣。且形上形下之名。豈人所得以假之者哉。田愚曰程子曰天地萬物之理。無獨必有對。有問於朱子曰。太極便對甚底。曰太極便與陰陽相對。猥筆第五段。正論此義云。把氣與理對擧。此非聖人之言。今人纔見理字。必覓氣來作對遇。於是理之流行一大事。盡被氣字帶去作家計。所餘者只混淪也沖漠也。此雙本領之履霜也。悲夫。愚按。蘆沙尊理而有此云云。然辭氣之間。陵轢過越。大損尊畏聖賢之體。此豈非氣之失理處乎。況朱子何嘗非聖人。何嘗非一本領。而把陰陽太極做對。此亦謂奪却理之流行一大事。以與氣字。而爲雙本領之履霜。而受蘆沙悲夫之歎者耶。程子曰。心有存亡出入。非聖人之言。夫操則存舍則亡。出入無時。此非孔子之言耶。然而程子云然者。但據理而言。非正論孔子之言也。今先師之言。但據理而言之。非正論朱子之言也。程子之言。亦可謂陵轢過越耶。亦可謂氣失其理耶。天下固有無對之尊。如國之有君家之有父是也。然必欲究言其對。則君之於臣。父之於子。亦不可謂非對也。惟心無對。惟道無對。惟義無對。此皆非朱子之言耶。今也單擧朱子有對之一言。而謂先師正論此義。欲使悲夫之歎。加於朱子之身。爲陷人之計。君子而用心如是乎。其機關籠絡。令人可怕。田愚曰。猥筆曰聖人的見流行發見變化昭著。莫非此道之爲云云。此道之爲四字。恐合商量。朱子於論語集註旣云道體無爲。尤翁之答人書。又云此理其體無情意造作。而至於用。則有情意造作也。二先生。豈不知道之流行發見而其言如此耶。此宜再入思議看也。【莫非此道之爲。若添數字此道之根柢樞紐。則似更詳明。未知如何。】自然當然必然能然之然。是道之所爲也。何必運手運脚有作有用而後。乃謂之爲耶。朱子曰。所以一陰一陽者。是皆道體之所爲。又曰。一物之中。自始至終。皆實理之所爲。此等爲字。亦可再入思議看耶。田愚曰。蘆沙奇丈理氣說。近因溪雲金丈所示辨說。槪見一二顯與栗谷先生角立極有不可曉處。大抵其意。本欲尊理字。而不覺其反有貶降之嫌矣。愚竊意凡氣有所爲。必有所以爲之理。然後乃有是事。只如此說。其於理爲氣主之義。已自綽有裕矣。今論理字而曰有適莫。又曰有操縱之力。又曰做得事。然則其爲有爲之物明矣。何以爲有爲者之主乎。設如其說它姑無論只如唐殷之水旱。孔孟之貧賤。夷惠之偏於淸和。顔冉之未及仁道此等處。所謂理者。却去何處。句當甚事。而乃若無適莫沒操縱。而一任其氣之所自爲者然。可怪可怪。顔子之心。方且以性爲主而日勉焉。而明道稱其和氣自然。雖吾夫子。苟原其心之所發。則亦一本於此。而未嘗自用也。而朱子却謂其從心所欲。而自然不踰矩。至其註楚辭天問則曰。一動一靜。一晦一朔。皆陰陽之所爲。非有爲之者。解陰符經人心機也之語。又直云人心自然而然者機也。程朱二先生豈不知氣字心字以上。更有所以然之理。而謂之自然也哉。且聖人之稱顔子不曰仁使心不違。而但曰其心不違仁。此無乃不違之所以然。則雖出於性。而其不違之機。却只在於心故歟。若如蘆沙之說。則其不違仁之時。此理又何爲使之如此。又其覺違而依仁也。謂自心自覺而自依之可乎。【此以求放心銘。孰放孰求(反)覆惟手等語觀之。可見。】抑謂之所謂理者。於此心依違之間。有適有莫之意。而操縱之如是云爾可乎。以此反覆推究。見其說之不能無失也耶。以有形之事。形容無形之妙。其言不得不如此。若倂與其無形之妙而無之。則是道理不其淪於空寂乎。理無操縱之形。而有操縱之妙無適莫之跡而有適莫之妙無做得之力。而有做得之妙。福善禍淫。虧盈益謙。非操縱乎。種豆得豆。種瓜得瓜。非適莫乎。四時運行。百物生成。非做得之妙乎今以陰陽五行萬物庶類謂非本然之分則宜乎謂無操縱無適莫無做得事也。唐殷之水旱。孔孟之貧賤。雖不可謂此理之本然。而亦不可謂非理勢之使然也。理勢使然。先哲亦謂之天。顔子之和氣。夫子之從心。亦義理充積而然。豈理不爲主而一任於氣之謂耶。理不爲主而氣自如此。則盜跖之心。奚獨無不踰矩乎。顔子之或有所違而自心自省。亦理之爲主也。旣以國之不治。人之不善。爲理不主氣之證。又以唐殷之水旱。孔孟之貧賤。爲理不主氣之驗。夫唐殷之水旱。孔孟之貧賤。乃一時氣數之變耳。以一時之變而疑萬古不易之常。聖人千言萬語。皆爲不試無驗之書矣。理固爲主。而猶有背理習亂之變。況以氣爲主。漫無主宰。其爲變。顧何如哉。朱子以士者文體浮薄。爲世道憂。況道理心術邊說話乎。所謂人於是非之原。毫釐有差。則其禍至於伏尸百萬流血千里者。誰謂非今日之憂也。近來主氣之說不一。有以太極爲無分之一。有以五性爲帶氣之物。有以明德爲形而下。言一本萬殊。則萬殊爲氣。言大本達道。則達道爲氣。或以陰陽五行謂非本然。或以人物偏全謂非定分。使主宰妙用。條理段落。一歸於氣。立論如此。而猶不曰氣奪理位得乎。氣奪理位。則臣之奪君。子之奪父。妻之奪夫。小人之奪君子。夷狄之奪華夏。亦其一例事也。先師惟是之憂。發揮剔刮。次第折衷。使千橫萬決。庶歸于一矣。而一邊之論。猶復齗齗。至引作用是性求心習靜之語以譏之。明道體之本然。存太極之主宰者。是作用歟。是習靜歟。然道理必不爲一邊之論所可移易。公論必不爲一時之言所可眩惑。多見其不知量也。況以忌克之心。爲吹覓之計。則其出言立論。安得公平通達無所偏倚乎。嗚乎此何時也。此何時也。爲士者。所宜同心修省。以扶如綫之脈於萬分有一之中。而乃反齗齗如是耶。誠可歎也。 기(機)가 저절로 그러하다 '기자이(機自爾)'는 서경덕(徐敬德)이 《화담집(花潭集)》 〈원리기(原理氣)〉에서 기(氣)의 모이고 흩어짐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다. 《장자》 〈천운(天運)〉에 '기(機)'가 보이는데, 곽상(郭象)은 주석에서 "저절로 그럴 뿐[自爾]이므로 그 까닭은 알 수 없다."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그 어원은 장자의 기(機)와 곽상의 자이(自爾)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기'는 동기(動機)ㆍ활기(活氣)의 뜻으로 정지한 상태가 운동으로 전환하는 필연적인 추세를 가리키고, 물질 운동의 한 계기로서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자능이(自能爾)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한 운동의 필연적인 내적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경덕은 이 말로 기(氣)의 동정(動靜)과 합벽(闔闢)을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기'의 속성은 시간적으로 시종(始終)이 없고 공간적으로도 무한(無限)하며 연속적으로 변화한다. 이이(李珥)도 기(氣)의 동정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 차용하였다. 형이하자(形而下者) 형이상(形而上)은 도(道)로서 무형(無形)인 것이고, 형이하(形而下)는 기(器)로서 유형(有形)인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형이상인 것을 도라 하고 형이하인 것을 기라 한다."라고 하고 정자(程子)의 주(注)에 "유형(有形)은 모두 기(器)이고 무형(無形)은 도가 된다."라고 하였다. 하늘이……덮어준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7장에 "하늘이 만물을 내는 데는 반드시 그 바탕으로 인하여 후하게 한다. 그러므로 심겨 있는 것은 길러 주고 기울어진 것은 덮어준다."라고 하였다. 이는……같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63 〈중용(中庸)〉에 보인다. 하늘이……하였다 《맹자》 〈등문공상(滕文公上)〉에 보인다. 자연의……같다 해당 구절에 대한 《맹자집주(孟子集註)》에 보인다. 하늘이……하였다 《맹자》 〈만장상(萬章上)〉에 보인다. 장자(張子 장재(張載))의 말 : 《논어집주》 〈위령공(衛靈公)〉에 "사람이 도(道)를 선양하지는 것이요, 도(道)가 사람을 선양하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한 경문에 대한 집주에 장재(張載)가 "마음이 성(性)을 다할 수 있으니, 이것은 사람이 도(道)를 크게 하는 것이요, 성(性)은 마음을 검속할 줄 모르니, 이것은 도(道)가 사람을 크게 함이 아닌 것이다.[心能盡性, 人能弘道也. 性不知檢其心, 非道弘人也.]"라고 한 말이 실려 있다. 기(氣)가……주재(主宰)한다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10 〈답성호원(答成浩原)〉에 보인다. 무위(無爲)하면서도……이(理)이다 《율곡선생전서》 권10 〈답성호원〉에 보인다. 누가……태극(太極)이로다 《율곡선생전서》 권1 〈이일분수부(理一分殊賦)〉에 보인다. 위연(魏延)과……변고 위연과 양의는 모두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 막하의 장수 이름이다. 제갈량이 죽자 각각 반역을 일으켰는데 결국 양의가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하여 한중(漢中)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三國志 卷40 蜀書 楊儀傳》 이기(二氣)의 양능(良能) 《중용장구》 제16장 제1절에 "귀신의 덕이 지극하다."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귀신은 음양 두 기의 양능이다.[鬼神者, 二氣之良能也.]"라는 장재(張載)의 말을 인용한 뒤, "두 기로 말하면 '귀'는 음의 영이고 '신'은 양의 영이며, 한 기로 말하면 이르러 펴짐은 '신'이 되고 돌아가 되돌아감은 '귀'가 되니, 그 실제는 같은 것일 뿐이다.[以二氣言, 則鬼者陰之靈也, 神者陽之靈也; 以一氣言, 則至而伸者爲神, 反而歸者爲鬼, 其實一物而已.]"라는 내용이 보인다. 움직이되……없다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제16, 〈동정(動靜)〉에 보인다. 고요함……있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4, 〈주자지서(周子之書)〉에 보인다. 신명(神明), 주재(主宰)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8 〈장자서(張子書)〉에서 "마음은 신명의 집으로 일신을 주재한다.[心, 是神明之舍, 爲一身之主宰.]"라고 하였다. 기기(氣機) 천지의 일정한 질서에 따라 운행하게 하는 자연의 기능을 가리키는데, 주희(朱熹)의 〈감흥시(感興詩)〉에 "사람의 마음은 오묘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드나드는 데 기기를 탄다.[人心妙不測, 出入乘氣機.]"라고 하였다. 일전어(一轉語) 원래는 불교에서 참선할 때 참선자가 미혹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말을 이르는 것으로, 사람들을 대오각성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말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일기(一氣)가……있겠는가 《주자어류》 권45 〈논어〉에 보인다. 이것은……않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05 〈답심명중(答沈明仲)〉에 보인다. 발(發)하는……기(氣)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0 〈답성호원(答成浩原)〉에 보인다. 형(形)도……기(氣)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0 〈답성호원(答成浩原)〉에 보인다. 형체가……이(理)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2 〈답안응휴(答安應休)〉에 보인다. 이(理)에……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56 〈답정자상(答鄭子上)〉에 보인다. 고자(告子)와……지각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고자가 '생(生)을 성(性)이라 이른다' 하였다.[告子曰生之謂性.]"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주자는 "생은 인물이 지각하고 운동하는 바의 것을 가리켜 말한다.[生指人物之所以知覺運動者而言.]"라고 하였다. 작용(作用)이 성(性)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홍주종(洪州宗)에서 내세운 말이다. '마음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나 본성이 없으며, 마음의 작용이 바로 마음의 본성이다.'라는 말이다. 만물에……않는다 《논어집주(論語集註)》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하늘은……아니다 《주자어류》 권45 〈논어〉에 보인다. 움직이지만……아니다 주렴계(周濂溪)의 《통서(通書)》 제16 〈동정(動靜)〉에 보인다. 이(理)의……용(用)이다 《주자어류》 권94 〈주자지서(周子之書)〉에 보인다. 때가……한다면 《논어》 〈헌문(憲問)〉에 "그분은 꼭 말을 해야 할 때가 된 뒤에야 말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의 말을 듣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라는 공자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예가……않는다면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보인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이(程頤)가 경(敬)을 설명하기 위해서 쓴 말로, 주일(主一)은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이고, 무적(無適)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는 것이다. 《이정수언(二程粹言)》 권상(卷上)에 "주일을 경(敬)이라 하고, 무적을 일(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理)는……다르다 "이(理)는 비록 하나이나 이미 기(氣)를 탔으므로 그 나뉨이 만 가지로 다르다.[理雖一, 而旣乘於氣, 則其分萬殊.]"라는 구절이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ㆍ서(書)》 〈답성호원(答成浩原) 임신(壬申)〉에 보인다. 물이……튀는 것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만약 물을 쳐서 튀어 오르게 한다면 이마보다 더 높이 올라가게 할 수도 있고, 격동시켜 흐르게 하면 산 위에 있게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발(理發)이라는……이르렀도다 《노사집(蘆沙集)》 권16 〈잡저(雜著)〉에 보인다. 소릉(昭陵) 수많은 학설을 모두 파악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황후인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능이다. 태종이 황후를 장사 지낸 뒤 후원(後苑)에 망대(望臺)를 만들어 놓고 늘 올라가 바라보다가 한번은 위징(魏徵)과 함께 올라갔다. 위징은 당 태종이 소릉을 가리키는데도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뗐다. 위징의 본의도 모르고 당 태종이 저것이 아니냐고 답답한 듯이 말하자 위징이 비로소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은 신이 진작부터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헌릉은 태종 어머니의 능이니, 이것은 태종이 어머니는 생각하지 않고, 부인만 생각한다고 꼬집은 것이다. 이리하여 태종은 울면서 그 망대를 헐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唐書 魏徵列傳》 이기호발(理氣互發)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는데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하는데 이(理)가 타는 것이라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가리킨다. 건도(乾道)가 변화한다 《주역》 〈건괘(乾卦) 단(彖)〉에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니, 대화(大和)를 보합(保合)하여 이에 이롭고 정(貞)하다."라고 하였다. 무형 무위(無形無爲)하여……된다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답안응휴천서(答安應休天瑞)〉에 보인다. 사람이……아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텅 비고……없는 《근사록》 권1 〈도체(道體)〉에 있는 말로, "지극히 고요하여 조짐이 없을 적에 만상이 빽빽하게 갖추어져 있다.[冲漠無眹, 萬象森然已具.]"라고 하였다. 인(仁)이……이다 《맹자》 〈고자 상〉에 보인다. 마음은 생도(生道)이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심은 생도이다. 이 마음이 있어야 이 형체를 갖추어 생하니, 측은지심은 사람의 생도이다.[心生道也. 有是心, 斯具是形以生, 惻隱之心, 人之生道也.]"라는 정이천(程伊川)의 말이 나온다. 생도(生道)는 생리(生理)와 같은 말인데, 이 생(生)에 대해서는 생생불궁(生生不窮)의 생, 생물위심(生物爲心)의 생, 생활(生活)의 생 등 해석이 다양하다. 하늘에……한다 《근사록》 권1 〈도체〉에는 '在天爲命'과 '在人爲性' 사이에 '在物爲理'가 더 있다. 천지……있다 《이정집(二程集)》 〈유서(遺書)〉에 보이는 정호(程顥)의 말이다. 누군가가……이룬다 《주자어류》 권95, 〈정자지서(程子之書)〉에 보인다. 마음에……아니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공자가 '잡으면 보존하고 놔버리면 달아나 출입에 때가 없으며 그 향하는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오직 마음을 말함이다.' 하였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정자는 "마음이 어찌 출입이 있겠는가. 다만 잡고 놓음으로 말한 것이다. 붙잡는 도는 경을 해서 안을 곧게 하는 것일 뿐이다.[心豈有出入? 亦以操舍而言耳. 操之之道, 敬以直內而已.]"라고 하였다. 쥐고……없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보인다. 도체(道體)는 무위(無爲)하다 《논어집주》 〈위령공(衛靈公)〉 주(注)에 보인다. 이 이(理)가……있다 《송자대전》 권104 〈답김중고(答金仲固)丙辰〉에 나오는 말이다. 본문은 "이 이(理)가 본체는 정의와 조작이 없고 작용에는 정의와 조작이 있어 스스로 그 지극한 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非謂此理其體, 則無情意造作, 而至於用, 則有情意造作, 自能到其極處也.]"로 되어 있다. 《간재집》 〈외필변〉에는 "莫非此道之爲, 若添數字云, 莫非此道爲之根柢樞紐, 則似更詳明.未知如何?"으로 되어 있다. 일음일양(一陰一陽)하는……소위(所爲)이다 《중용혹문》의 이 대목에서 "이른바 '성(誠)은 물(物)의 종시(終始)이니, 성실하지 못하면 사물이 없게 된다.'라는 것은 이(理)를 가지고 말하면, 천지(天地)의 이는 지극히 진실하여 한순간도 망녕된 적이 없기 때문에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 사물도 진실하지 않음이 없고, 한 사물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실리(實理)가 하는 바이다. 심(心)을 가지고 말하면 성인(聖人)의 마음도 지극히 진실하여 한순간도 망녕된 적이 없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 가지 일도 진실하지 않음이 없고, 한 가지 일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실심(實心)이 하는 바이다.[所謂誠者物之終始不誠無物者, 以理言之, 則天地之理, 至實而無一息之妄, 故自古及今, 無一物之不實, 而一物之中, 自始至終, 皆實理之所爲也. 以心言之, 則聖人之心, 亦至實而無一息之妄, 故從生至死, 無一事之不實, 而一事之中, 自始至終, 皆實心之所爲也.]"라고 하였다. 계운 김장(溪雲金丈) 김낙현(金洛鉉, 1817~1892)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정여(定汝)ㆍ계운(溪雲)이며 염계(念溪)는 호이다. 유신환(兪莘煥, 1801~1859)의 제자이다. 이조 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백이(伯夷)와……치우쳤던 것 맹자가 "백이는 성인 가운데 맑은 분이고, 이윤은 성인 가운데 자임한 분이고, 유하혜는 성인 가운데 화합한 분이고, 공자는 성인 가운데 시중을 한 분이다."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下》 안연(顏淵)……못한 것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가 말씀하기를,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는 날로 달로 거기에 이를 따름이다.' 하였다."라고 하였고, 염구가 "저는 부자(夫子)의 도(道)를 기뻐하지 아니함이 아니라, 힘이 모자랍니다." 하니, 공자가 "힘이 모자라는 사람은 중도에서 폐하나, 지금 너는 한계를 그어놓고 가지 않고 있다."라고 하였다. 명도(明道)는……칭찬하였다 정호(程顥)가 "공자는 원기이고, 안연은 봄의 생기이고, 맹자는 가을의 쌀쌀함까지 모두 드러난다. 공자는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안연은 후세에 '우직하게 어기지 않은 공부'를 보여 주었으니 자연스러운 온화함이 있어 말하지 않고 화한 분이다. 맹자는 재기를 드러내었으니, 또한 그때가 된 연후에 한 번 일어난 것이다.[仲尼元氣也, 顔子春生也. 孟子幷秋殺盡見, 仲尼無所不包, 顔子示不違如愚之學於後世, 有自然之和氣, 不言而化者也. 孟子則露其才, 蓋亦時然一作焉.]"라고 하였다. 《二程遺書 卷5》 천문(天問) 굴원이 지은 《초사(楚辭)》의 편명이다. 굴원이 초(楚)나라 조정에서 쫓겨난 뒤 근심 걱정 속에 산택(山澤)을 방황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며, 우주의 모든 사실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여 하늘에 묻는 형식으로 지은 글이다. 한번……아니다 주희(朱熹)의 《초사집주(楚辭集注)》 〈천문(天問)〉에 보인다. 《음부경(陰符經)》 황제(黃帝)가 찬술했다고 전해지는 도가류(道家類)의 책으로, 태공(太公), 범려(范蠡), 귀곡자(鬼谷子),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이전(李筌) 등이 주해하였다. 음(陰)은 암(暗), 부(符)는 합(合)이란 뜻으로 천기(天機)가 몰래 사기(事機)에 합치된다는 것인데, 이 책의 진위는 알 수 없다 한다. 주희(朱熹)는 제본(諸本)의 차이점을 살피고 그 글을 교정하여 《음부경고이(陰符經考異)》를 지었다. 인심(人心)이……기(機)이다 주희(朱熹)의 《음부경고이(隂符經考異)》 상편(上篇)에 보인다. 〈구방심명(求放心銘)〉 주희(朱熹)가 지은 〈구방심재명(求放心齋銘)〉으로, 《주자대전(朱子大全)》 권85에 수록되어 있다. 번양(番陽) 정정사(程正思)가 구방심재(求放心齋)를 건립하자 왕자경(汪子卿)과 축여옥(祝汝玉)이 이미 그 명을 지었고, 주자가 나머지 뜻을 수습하여 다시 이 명(銘)을 지었다. 공적(空寂) 모든 만물에 실체가 없어 생각하고 분별할 것도 없음을 말한다. 이세(理勢) 사리(事理)와 형세(形勢)를 아울러 이르며 자연의 운수를 뜻하기도 한다. 일본 만수(一本萬殊)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 다른 것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자어류》에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근본이 되는 것과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은,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나가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와 수많은 가지와 잎이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子語類 卷27 論語9 里仁篇下 子曰參乎章》 기극(忌克) 남을 시기하고 능가하려는 마음을 이른다. 취멱(吹覓) 털을 불어 흠을 찾듯 남의 흠을 찾는다는 뜻으로, 아주 사소한 것을 들춰내서 억지로 남의 결점을 찾는 행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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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1 卷之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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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2 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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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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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에게 적어 보이다 書示諸同志 태극(太極)은 천지의 종조(宗祖)이고 조화(造化)의 주재자(主宰者)이며 만물(萬物)의 기저(基底)이고 천하 고금(天下古今)에 걸친 인사(人事)의 준칙이다. 지극히 미묘하지만 일용(日用)의 상도(常道)를 벗어나지 않고, 지극히 가깝고 절실하지만 실로 천명(天命)의 엄중함에 근원을 두고 있다. 세상의 치란(治亂), 인물의 현부(賢否), 풍속의 오륭(汚隆), 일의 성패가 오로지 이 도리가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리(道理)는 형체가 없고 사람의 마음에는 가려짐[蔽]이 있다. 마음이 이미 가려졌다면 비록 형기의 거친 흔적마저 명백히 볼 수 없다. 하물며 형체가 없는 오묘한 도리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경(經)을 짓고 현인(賢人)이 전(傳)을 찬술하여 천언 만어(千言萬語)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펼쳤던 것은 이 이치를 밝혀서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삼대(三代) 이후로 세교(世敎)가 밝지 못하여 순경(荀卿), 양웅(揚雄)과 같이 세상에 드문 호걸조차도 기(氣)를 성(性)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니, 하물며 그들보다 못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오랜 세월 어둠에 뒤덮여 헤매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낙양(洛陽)과 민중(閩中)1) 사이에서 2~3명의 선각자가 역량을 발휘하여 성선(性善)의 뜻을 세상에 크게 밝혀놓았다.우리 동방에서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여러 선생께서 이를 독실하게 믿고 신중하게 지켜 노맥(路脈)이 안정되었다. 아, 유풍(遺風)이 점점 멀어지면서 미언(微言)이 쉽게 가리어져 태극(太極)이 기(氣)를 띤 사물이라고도 하고, 오성(五性)이 기(氣)로 인하여 있다고 하기도 하고, 명덕(明德)이 형이하(形而下)라고 하기도 하고, 만수(萬殊)가 기분(氣分)이라고 하기도 하며, 달도(達道)가 기발(氣發)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다면 성정(性情)과 체용(體用), 시종과 본말은 기(氣)가 주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른바 태극의 주재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대강(大綱)이 이미 어그러졌으니 나머지가 어떨지는 모두 알 수 있다.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이 몹시 애를 태우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미언(微言)이 가리어진 상황에서 이것을 밝혀놓았건만, 이제 이미 밝아진 뒤에 다시 드러나지 않게 되었으니 탄식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 이치를 강구하고 토론하여 눈앞에 밝게 드러나도록 했더라도 운용(運用)의 과정에 이르면 쉽게 잘못을 저지른다. 하물며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형기(形氣)가 거칠고 조악한 사물이니 정밀하고 순수한 민이(民彝 사람의 도리)에는 어떠하겠으며, 세도(世道)에는 어떠하겠는가.오직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께서 일찍이 이를 개탄하고 구원할 방도를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지으신 까닭이다. 변석(辯析)하고 회통(會通)하여 선철(先哲)의 미지(微旨)가 세상에 다시 밝게 드러나기를 바랄 만하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건만 영남의 권(權)2), 최(崔)3) 등 여러 사람이 어구(語句)를 지적하여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거짓된 사실로 전현(前賢)을 헐뜯었다. 이 사람들의 이 행위가 공심(公心)에 의해 일어났는지 아니면 시기와 혐의(嫌疑)에 부림을 당해서인지 모르겠다. 이제 《외필》이 간행되어 사방에 널리 퍼졌으니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애오(愛惡)가 차츰 쇠미해졌으니 공의(公議)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저 입을 닫고 혀를 묶어둔 채로 청정(淸靜)한 마음을 지키고 분변을 하지 않으면서 백세(百世) 뒤의 사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그러나 다만 오당(吾黨) 선비들이 오늘날 변론을 벌이는 이기설(理氣說) 등을 시험 삼아 본다면 어느 것이 득(得)이고 어느 것이 실(失)이라고 여기겠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후대에 맡길 수 없으며 즉시 사실을 규명해야 하는 일이다. 만약 자기는 지식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칭찬에 따라 편리함을 택하고 좋아하는 대로 편든다면 인습(因襲)과 구차스러움을 행하는 사이에 이 몸이 혹여 한쪽에 치우치는 죄과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도리(道理)는 형체가 없는 오묘함이다. 모름지기 침착하고 독실한 태도로 오래도록 존심 양성(存心養性)을 해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 힘쓰라! 이것이 학문(學問)의 기본 법칙이고 자신과 집안을 위한 중대한 계책이니 또 어찌 이 하나의 일만 해내고 말 뿐이겠는가. 太極是天地之宗祖。造化之主宰。萬彙之根柢。天下古今人事之準則也。至微至妙。而不離乎日用之常。至近至切。而實原乎天命之嚴。世之治亂。人之賢否。俗之汚隆。事之成壞。只在乎此箇道理明不明如何耳。然道理無形而人心有蔽。心旣有蔽。則雖形器粗迹。見且猶不得了了。況無形之妙乎。是以聖賢作之經。述之傳以至於千言萬語。娓娓而不已者。無非所以明此理。使人人得以見之。然三代以降。世敎不明。雖間世豪傑如荀卿揚雄之徒。猶不免認氣爲性。至有性惡之說。況其下者乎。百世長夜。擿埴倀倀。至宋。洛閩間有二三先覺出而發揮之。使性善之義大明於世。曁于我東。如靜退栗尤諸先生。篤信謹守。路脈坦然。嗚呼。遺風浸遠。微言易晦。或以太極爲帶氣之物。或以五性爲因氣而有。或以明德爲形而下。或以萬殊爲氣分。而以達道爲氣發。如此則性情體用始終本末。無非氣爲之主。而所謂太極主宰者。果安在哉。大綱旣差。餘皆可知。先聖先賢。苦心苦口。所以明之於旣晦之餘者。今不免復晦於旣明之餘。可勝歎哉。人於此理講之討之。使昭然在目。至運用之際。易致差失。況目前所見。無非形氣鹿粗之物。則其於民彝何。其於世道何。惟我蘆沙先生。嘗慨然於此。思有以救之。而納凉猥筆之書所以作也。析以辨之。會而通之。使往哲微旨庶幾復明於世。不意嶺中權崔諸人。指摘句語。眩惑視聽。以爲誣毁前賢。未知此人此擧是公心所發耶。是猜嫌所使耶。今猥筆之書。刊布在四方。有眼者。皆可得以見之。況時移歲久。愛惡稍衰。則所餘者公議而已。只有緘口結舌。守靜無辨。以俟百世之人可也。然惟吾黨之士。試觀今日所辨如理氣之說。以爲何者爲得。何者爲失。此則不可委之於後。而所當卽下究覈者也。若已無知識。而隨人毁譽。惟便是擇。惟好是阿。則因仍苟且之頃。安知此身或不陷於偏側之科乎。但道理是無形之妙也。須從容沈索。積久存養。乃可以見。勉之勉之。此是學問大法。身家大計。又豈足止爲了此一事而已耶。 낙양(洛陽)과 민중(閩中) 낙양은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민중은 주희(朱熹)가 거주하던 곳이다. 권(權) 《일신재집》 〈통고영남열읍장보문〉에 따르면 권봉희(權鳳熙)를 가리킨다. 최(崔) 《일신재집》 〈통고영남열읍장보문〉에 따르면 최동민(崔東敏)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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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기우록 湖上奇遇錄 갑술년(1874, 고종11) 가을에 친족인 사문(斯文) 백언(伯彦)4)이 사상(沙上)5)에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께서 계방(季方 정의림(鄭義林)의 자(字))의 안부를 매우 자세히 물으셨다. 인하여 서찰 봉투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삼가(三嘉)에 사는 정재규(鄭載圭)6)의 편지이다. 이 사람은 의림(義林)과 성씨도 서로 같고 나이도 서로 비슷하며 재능과 성격도 서로 닮았으며 사는 곳의 지명 또한 다르지 않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관했다가 의림에게 보이고자 한다.'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삼가(三嘉)에 정 사문(鄭斯文)이라는 현자가 있다는 말은 이보다 앞서 이미 익히 들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있고 나란히 사문(師門)의 칭찬을 받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정(私情)이 두려워 감히 사문의 뜻을 받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정 사문을 우러러 흠모하는 나의 마음은 이때부터 더해갔다. 이에 전편(轉便)을 통해서 삼가 통성명은 하였으나, 직접 뵙는 일까지는 아득하여 기약이 없었다.다음 해인 을해년(1875) 겨울 10월에 내가 사상(沙上)으로 가서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후윤(厚允 정재규(鄭載圭)의 자)이 3일 전에 당도해 있었다. 그다음 해 여름 4월에 내가 진구(珍邱)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후윤이 또 3일 먼저 당도해 있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이 꾀한다해서 되는 일이겠는가. 얼굴을 마주하고 약속을 하며 손을 맞잡고 언약을 하면서 매우 간절하게 둘이서 응낙하더라도 끝내는 서로 형편이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이다. 하물며 아득히 먼 500리 땅에서 애초에 한마디의 약속도 없던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으며 메아리처럼 합치된 것이 귀신과 같아 한 번, 두 번 기약이라도 한 듯이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예사로운 입장에서도 신기하고 절묘한 일이건만 도리어 함께 하는 것이 있고 스승에게 칭찬을 들었으니 참으로 진귀하고 소중한 일이다.선생께서 두 제자를 돌아보고 이르시기를, "이것은 세상에 드문 신기하고 절묘한 일이다. 어찌 각자 기록을 남겨서 잊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삼가 전말(顚末)을 서술하고 이로 인하여 후윤의 학문과 지절(志節)을 돌이켜 기억하자니 실로 나처럼 어리석은 자가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뒤로 이어진 기이한 우연이 이처럼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니 후윤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는 공자의 교훈7)을 고집스럽게 지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처럼 무능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은혜롭게 대하고 멀리하지 않으며 이끌고 일깨워주어 자기와 함께 돌아가도록 한다면 이처럼 세상에 드문 우연에 부응할 뿐만이 아니며, 또한 우리 선생께서 끊임없이 칭찬하신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네 가지가 같다는 말씀은 부끄럽지만 堪愧四同說두 번씩이나 만난 우연이 더욱 기이하구나 最奇再遇緣선생께서 기록으로 남기라 명하시니 先生命以記이 뜻이 참으로 깊고도 깊도다 此意正淵淵 歲甲戌秋。鄙族伯彦斯文。自沙上過余而言。老先生問季方安否甚悉。因指一幅封題曰。此是三嘉鄭載圭書也。此人與義林。姓氏相同。年紀相近。才性相似。至於所居地名亦不異。甚非偶然。故留此欲爲義林示之也。三嘉有鄭斯文之賢。前此蓋已稔聞。豈知醜差之身。與有所同。而倂見稱道於師門哉。私情悚惕。固知不敢承膺。而區區嚮仰之心。自此而有加矣。玆因轉遞。謹以姓名自通。而至於一番承接。則闊然無期。越明年乙亥冬十月。余往拜先生於沙上。厚允先三日至。明年夏四月。余往拜先生於珍邱寓舍。厚允又先三日至。是豈人謀所及哉。面以證期。手以置契。兩諾俱應。極其丁寧。而終至汗渙緯繣不如吾意者。十居八九。況漫漫半千里。初無一言之約哉。然不先不後。嚮合如神。至一至再。奉接如期。此在尋常之地。猶爲奇絶。乃有所同而見道於師門。曾是珍重者耶。先生顧謂二子曰。此是曠世奇絶事。盍各記諸以示不忘也。於是謹序述顚末。而因念厚允學問操守。實非如愚所可及者。然前後奇遇。若是種種。則厚允於母友不如之訓。似不當膠守矣。矜此不能。惠爾不遐。提挈警覺。俾與之同歸。則不惟爲副此曠絶之遇。而亦豈非我先生眷眷稱道之意耶。仍有詩曰。堪愧四同說。最奇再遇緣。先生命以記。此意正淵淵。 백언(伯彦) 정시림(鄭時林, 1833~1912)의 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월파(月坡)이다. 기정진의 문인으로, 보성(寶城)에 거주하였다. 사상(沙上) 기정진이 거처하던 노산(蘆山) 아래 하사(下沙)를 이른다. 정재규(鄭載圭) 1843~1911.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이다. 청계(淸溪)는 초계의 이칭(異稱)이다.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에 의한 개화운동이 시기상조임을 밝히고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유림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자고 호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후 최익현(崔益鉉)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자기만……교훈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가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배우는 것 또한 견고하지 못하다. 충(忠)과 신(信)을 주로 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마라."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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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중【봉환】에게 답함 答文翊中【鳳煥】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생각하기에 이 회합(會合)을 마련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강학(講學)을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예를 익히기 위한 것입니다. 회원(會員)들의 마음이 모두가 성의에서 나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뜻이 참으로 선(善)하고 그 거조(擧措)가 참으로 좋습니다.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면 더욱 정성을 다하도록 권면하고 행동에 실효(實效)가 없으면 더욱 그 효과를 독려하여 바로잡고 경계하며 벗끼리 서로 연마하고 바로잡아 주어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면 됩니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명예를 좋아한다는 혐의를 피하면 선을 행할 길이 없다."9)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명예를 좋아한다는 혐의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아울러 그만두겠습니까. 아우가 생각하기에도 예를 익히는 일은 의절이 매우 광대하여 갖가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우선은 중지하였습니다. 강규(講規)는 학자들의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여러 형에게 고하여 수일 동안 강규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강규에 관한 일까지 아울러 그만둔다면 한바탕 질펀하게 먹고 마시는 회합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형의 말씀대로 10년에 한 번 행하고 5년에 한 번 행한다면 형세상 반드시 날이 갈수록 해이해지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한서(漢瑞) 등 여러 벗과 충분히 상의하여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기 바랍니다. 중양절(重陽節)을 맞아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일은 실로 듣기를 바라던 일입니다. 다만 이 몸이 그때에는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일지를 모를 뿐입니다. 示喩謹悉。以愚思之。此會之設。一則講業也。一則習禮也。會員之心。雖不能皆出於誠。而其意則固善。其擧則固好。心有不誠。則益勉其誠。行無實效。則益責其效。規警切磨。俾不至於漫浪之爲可也。古人曰避好名之嫌。則無爲善之路。夫豈以好名之嫌。而竝廢其所當爲者哉。弟意亦以爲習禮一事。其儀浩大。有難種種。故姑爲停止。至於講規。則此是學者日用平常事。故告于僉兄擬爲數日之計矣。今若竝與講規一事而廢之。則其不爲一場酒食流連之會耶。若依兄敎。十年一行。五年一行。則其勢必日涉頹弛。不過幾年。蕩然無有。願與漢瑞諸友爛商歸好也。重陽泛菊。實所願聞。但未知此身其時作何處人耳。 명예를……없다 송(宋)나라 때 범순인(范純仁)이 한 말이다. 범순인이 일찍이 간신 장돈(章惇)의 비위에 거슬려 영주(永州)로 폄출되었는데, 그 당시 눈병을 앓아 완전히 실명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폄출 명령을 받고 기꺼운 표정으로 길에 올랐는데, 어떤 이가 명성을 가까이하는 짓이라고 하자, 이를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칠십의 나이에 두 눈이 모두 멀었으니, 만 리 길을 떠나는 것이 어찌 원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나의 마음이 다하지 않아서일 따름이다. 만약 명성을 좋아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한다면 선을 행할 길이 없을 것이다.【七十之年, 兩目俱喪, 萬里之行, 豈其欲哉? 但區區之愛君, 有懐不盡. 若避好名之嫌, 則無爲善之路矣.】"라고 하였다. 《宋史 卷314 范純仁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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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承嘉命許以令愛貺室僕之堂姪赫哲玆有先人之禮謹行納幣之儀 不宣伏惟尊照 上狀乙亥十二月初七日扶寧後人金直拜(皮封)崔生員上狀執事宅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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閱歲阻拜瞻仰政溸意表惠䟽忽至奉讀數回如敵良晤山川之綿邈不能間人心曲也矧審哀體動止連護万支覃節均得泰旺區區仰慰實愜願聞弟昨冬以家季憂擾幾涉危境近幸差復以身家以滯祟屢朔呻苦氣血從又脫落甚可畏也方試藥餌而亦未能其必效也就先孝事一層節示是大關嶺而旣已順過幸莫大矣然前頭之嶺尤有甚焉者將奈何奈何如渠病孱者有心而不能助一臂之力可恨可悵未知何以則爲好耳五筆中書不能如意之際繼而有功甚緊甚緊其緊不可量矣然吾傳本色俱是淸寒者此亦不容易得者其感且悚難以形喩也餘留不備謝禮庚午四月三日 弟安橓拜拜(皮封)堂邨 哀座執事觀峴謹謝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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忝親扶寧后人金彩相再拜忝親彩相白伏承尊慈不鄙寒微許以令愛貺室僕之第二孫洛恒玆有先人之禮敬遣使者行納幣之禮不備伏惟尊慈特賜鑑念謹上狀崇禎後丁卯四月十三日(皮封)上狀崔生員 執事 方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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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寧后人金載相再拜恭承嘉命許以 令愛貺室于僕之子龍煥年旣長成玆有先人之禮謹行納幣之儀不備伏惟尊照 狀上辛丑十一月二十九日(皮封)謹封上狀李生員 下執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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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경【달환】에게 답함 答文德卿【達煥】 세상에 얽매였던 곳을 떠나 고요한 곳으로 나아가니 새로 마련한 집터가 한가롭고 자유스럽습니다. 더구나 가을을 틈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 사귄 친구의 얼굴을 함께 대하였으니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돌아온 이래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형의 체후는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 또한 평온하신지요? 매양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이 절실합니다. 아우는 병세가 날로 심해져 바로 서산(西山)에 지는 해와 같으니 가련합니다. 아, 남은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으로 마땅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죽기 전에 좁은 소견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처지와 형편이 이와 같은 데다가 또다시 쓸쓸하고 적막하여 답답하고 의지할 곳도 없으니 어떠하겠습니까. 매양 세상일은 전부 쓸어버리고 형처럼 학식이 뛰어나고 견문이 넓은 또래들과 차분하게 서로 보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조물주가 평생에 걸쳐 곤궁했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특별히 만년에 여지를 갖게 해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습습니다. 악(惡) 역시 이(理)가 주재(主宰)합니다. 이것이 저의 본의는 아니지만 자세히 말하자면 역시 얘기할만한 곡절(曲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발(發)하여 곧게 이루어진 것은 분명히 이(理)가 주재한 것이고 곧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기(氣)가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위선(爲善)과 위악(爲惡)'의 분명한 경계입니다. 참으로 용납할 수 있는 다른 평설(評說)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理)라는 것은 본래 사물을 주재하되 그렇지 않은 때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위쪽의 반은 이가 주재하고 아래쪽의 반은 기가 주재한다면 그렇지 않은 때가 없다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분명 이의 본연(本然)이지만 튀겨서 이마 위로 올라가게 하고 힘을 가하여 산에 있도록 하는 것을 본연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또한 사리와 형세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맹자(孟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부림을 받고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부림을 받는 것을 모두 하늘의 이치라고 보았고,5) 주자(朱子)는 기화의 성쇠와 인사의 치란을 상리(常理)라고 하였으니6)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선을 따르면 길하고 악을 따르면 흉하며,7) 천리를 따르면 여유가 있고 인욕을 따르면 위태로우니8) 이(理)가 주재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理)에 나아가 깊이 탐구하여 말한 것입니다. 위의 한 조목과 각각 하나의 의미가 되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謝繫就靜。新寓蕭散。矧且乘秋溯涼。共對知舊積年之面。其慰豁之情。爲何如哉。歸來。月已再弦矣。未審兄體何如。惟憂亦平和否。每切願聞。弟病情日深。正是下山之日。可憐。嗚呼餘日幾何。固宜汲汲勉力。企得一管之見於未死之前。豈非至願。而身事如此。又復落落離索。無聊無賴。奈何。每欲掃却外事。與如兄年輩老宿之人。爲從容相觀計。而不可得。未知造物矜其平生蹇滯。而特許其晩年一副餘地耶。可呵。惡亦理爲之主宰。此非鄙之本意。而究言之。亦不無曲折可言處。發而直遂。固理之爲主。而其不直遂者。爲氣所勝故也。此是爲善爲惡八字界至也。固無他說之可容更評。然理者。是合下主宰物事而無時不然者也。今以上一半。理爲之主。下一半。氣爲之主。則烏在其無時不然者乎。比之水潤下。固理之本然。而其搏之以過顙。激之以在山。謂之本然則不可。而亦不可謂非理勢之使然也。孟子以小役大弱役强。同謂之天。朱子以氣化盛衰。人事治亂。謂理之常。此可考也。況惠迪吉。從逆凶。順理則裕。從欲惟危無非理爲之主也。此是就理上深探而究言之者也。與上一條自不妨各爲一義。如何如何。 맹자(孟子)는……보았고 《맹자》 〈이루 상〉에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소덕(小德)이 대덕(大德)에게 부림을 당하고 소현(小賢)이 대현(大賢)에게 부림을 당하며,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나라가 작은 자가 나라가 큰 자에게 부림을 당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부림을 당한다. 이 두 가지는 하늘(이치와 형세)이니,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보존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였다. 주자(朱子)는……하였으니 《맹자집주》 〈등문공 하(滕文公下)〉 제9장의 "천하에 사람이 살아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웠다.【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라는 구절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웠다는 것은 기화의 성쇠와 인사의 득실이 반복하여 서로 찾아오는 것이니, 이치의 떳떳함이다.【一治一亂, 氣化盛衰ㆍ人事得失, 反覆相尋, 理之常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선을……흉하며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선을 따르면 길하고 악을 따르면 흉하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천리를……위태로우니 정이(程頤)가 지은 〈사물잠(四勿箴)〉 가운데 동잠(動箴)에 '철인은 기미를 알아 생각할 때에 성실히 하고, 지사는 행실을 힘써 행함에 지조를 지킨다. 천리를 따르면 여유가 있고 인욕을 따르면 위험하니, 창졸간에도 능히 생각해서 전전긍긍하여 스스로 잡아 지키도록 하라. 습관이 성(性)과 더불어 이루어지면 성현과 함께 돌아가리라.【其動箴曰, 哲人知幾, 誠之於思, 志士勵行, 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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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아에게 부치다 4수 寄復兒【四首】 만물은 오히려 한몸인데 萬物猶同體하물며 친한 이에게 융숭한 사랑을 받음에랴 矧於親愛隆묵자는 머리부터 갈아서 발꿈치에 이르는데293) 墨生磨頂踵이것을 중도에 지나친 것은 아니라 하네 用此非過中친아버지와 숙부는 親父與叔父간발의 차이도 없다네 其間不以髮숙부를 배반함은 아버지를 배반함과 같으니 貳叔猶貳父아버지를 배반한다면 다시 무슨 말을 하랴 貳父更何說불손함은 악덕이니 不遜是惡德절로 사치하고 난폭함이 생기네 乃自奢豪生이를 만약 반우294)할 수 있다면 此若反隅得공경함은 검소함으로 이루어지리 恭敬由儉成너의 나이 불혹295)에 가까우니 爾年近不惑한평생 가운데 절반의 나이이네 中半一平生옛날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舊習如不改서글프게 끝내 성취함이 없으리라 可痛竟無成 萬物猶同體, 矧於親愛隆?墨生磨頂踵, 用此非過中.親父與叔父, 其間不以髮.貳叔猶貳父, 貳父更何說?不遜是惡德, 乃自奢豪生.此若反隅得, 恭敬由儉成.爾年近不惑, 中半一平生.舊習如不改, 可痛竟無成. 묵자(墨子)는……이르는데 묵자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인 묵적(墨翟)은 모든 사람을 평등히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맹자는 이를 극도로 비고아서 "자기의 정수리부터 갈아서 발 끝에 이르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한다."하였다. 《孟子 盡心上》 반우(反隅) 한 가지를 일러 주면 그와 유사한 것은 미루어 안다는 뜻으로, 《논어》〈술이(述而)〉에 "한 모퉁이를 들어 일러 주었는데 세 모퉁이를 반증하여 알지 못하면 더 이상 말해 주지 않는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하였다. 불혹(不惑) 나이 마흔 살을 말한다. 《논어》 〈위정(爲政)〉의 공자 말씀에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고, 마흔 살에 사리(事理)에 의혹(疑惑)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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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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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여안을 그리워하며 懷汝安 네가 집을 떠난 지 반년이나 되니 自汝離家半歲長내 마음은 서글프지 않은 날이 없었네 我心無日不悲傷전주283)에선 궁핍한 생활284)로 몸이 야위고 沛城桂玉身生瘦오산 골짜기에선 무더위로 땀방울이 떨어졌네 鰲峽蒸炎汗滴漿같이 병들어 급한 형편을 풀어주지 못해 同病未能紓方急가난이 싫어 혹 떳떳함을 잃을까 걱정했었네 厭貧恐或失其常어느 때나 휘장 맑게 하여 서실로 돌아갈까 何時淸帳歸書屋《시경》〈소완〉285)을 즐겨 강론하네 好講毛詩小宛章 自汝離家半歲長, 我心無日不悲傷.沛城桂玉身生瘦, 鰲峽蒸炎汗滴漿.同病未能紓方急, 厭貧恐或失其常.何時淸帳歸書屋? 好講《毛詩 小宛》章. 전주(全州) 원문의 '패성(沛城)'은 풍패(豐沛)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전주를 말한다. 풍패는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고향인 패(沛) 땅 풍읍(豐邑)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제왕의 고향을 말한다. 조선에서는 흔히 함경도 함흥(咸興)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왕족인 이씨(李氏)의 본향이라 하여 전주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궁핍한 생활 원문의 '계옥(桂玉)'은 계수나무 땔나무와 옥으로 지은 밥이라는 말로, 물자가 부족하여 생활하기 곤란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楚)나라 왕에게 "초나라의 밥은 옥보다도 비싸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도 비싸다. 지금 내가 옥으로 지은 밥을 먹고 계수나무로 불을 때고 있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今臣食玉炊桂, 不亦難乎?〕"라고 불만을 토로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楚策3》 시경(詩經) 소완(小宛)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세상의 난리를 만난 뒤에 몸가짐을 공손히 하여 날로 덕을 닦으며, 항상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화를 면하기를 경계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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