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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윤25)에게 보냄 與鄭厚允 방장산(方丈山)에서 헤어진 뒤 두 해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데 형의 체후(體候)는 동정(動靜)이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농사가 풍년이니 영남도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흉년이 거듭된 뒤라 위로가 될만할 듯하지만 시국이 이처럼 소란스러우니 앞으로 편안히 앉아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동문(同門)의 옛 친구들은 여기저기 흩어지고 남아 있는 이가 이제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모두가 노쇠하여 수백 리 먼 곳에 떨어져 지내느라 서로 소식도 접하지 못하고 어려움에도 서로 관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번 머리를 들어 동쪽을 바라볼 때마다 커다란 탄식을 이기지 못할 따름입니다. 면우(俛宇)26)가 세상에 나갔을 때 형도 더불어 나아갔으니 시사(時事)는 과연 어떤지, 처하는 곳은 또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자세히 알지 못하기에 늘 소식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합니다. 아, 눈앞에 닥친 시색(時色)이 진펄에서 위태로움을 기다리고27) 칼이 살갗에 이른28) 듯합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고 싶은 마음이 지금에 와서 절실합니다만 그럴 수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형은 근년에 산재(山齋)에 머무르셨습니까, 계정(溪亭)에 머무르셨습니까? 만년에 성정(性情)을 함양하는 운치, 영재를 키우는 즐거움이 작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지난가을에 계획했다가 이루지 못한 호남행은 올가을에 다시 도모하시는지요? 저는 해마다 묶여 있는 채 벗어날 수 없어 상황이 고달프기만 합니다. 새장 속에 갇혀 있는 날개(새)가 앞으로 마음껏 날아오르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정(咏亭)에 기와를 얹는 일을 마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경비를 아직도 갚지 못하여 매번 이것이 근심이었습니다. 일전에 송사(松沙)29)의 편지를 받았더니 가족을 데리고 금계산(金雞山)으로 들어갈 생각이며 금계산은 옥과(玉果)와 담양(潭陽) 등에 걸쳐있다고 합니다. 연간에 황생 철원(黃生澈源)30)과 의견을 주고받은 일이 있습니다. 대체로 황생은 "영(靈)은 묘용(妙用)을 주재(主宰)하지 못하고 묘용을 주재하는 것은 신(神)이다. 영은 온갖 사물의 이치를 갖추어 만사(萬事)에 응하지 못하고 온갖 사물의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우는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영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이(理)는 작용(作用)과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대체로 심(心)은 원래 허령(虛靈)한 것이고 허령한 것은 본래 오묘하게 합합니다. 이 때문에 당체(當體)로 보자면 기(氣)라고 하고 본체(本體)로 보자면 이(理)라 하고 묘처(妙處)로 보자면 신(神)이라고 합니다. 신(神)과 영(靈)이 어찌 일찍이 별도의 방향이나 처소가 있고 별도로 시기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황생은 여전히 그렇다고 믿지 않으니 또 제 견해에 잘못이 없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형께서 상세히 분변하여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대체로 심(心)은 기(氣)를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있고 이(理)를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있어, 진실로 각각 한 쪽만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다만 기(氣)를 위주로 말하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주장을 바로잡을 근거를 도리(道理)의 측면에서 자세히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선사(先師)께서 '정상(精爽)은 피상적인 것이다.'31)라고 말씀하신 까닭이고, 노형(老兄)이 '기(氣)를 자조(資助 돕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황생의 견해는 대체로 여기에 근원을 두면서도 지나쳐 이렇게 허령한 것은 심(心)이 아니라는 말까지 하였으니 옳겠습니까. 삼가 기억하건대 요 몇 해 사이에 형께서 황생에게 편지를 보내서 "묘용(妙用)의 운행과 정영(精英)의 발현이 곧 이른바 심(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제 생각에는 매번 의혹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묘용의 운행이 비록 이(理)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정영(精英)을 포괄하고 있으니 하단에 별도로 정영을 말하여 짝지은 것은 지나친 췌언(贅言)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理)만 말하고 정영은 간여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른바 이(理)는 작용(作用)으로 귀결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기자이(機自爾 기(機) 자체의 작용)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승(理乘 이가 기를 타고 주재하는 것)의 의리를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지난번에 면우(俛宇)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보았더니 간간이 지나치게 이(理)를 위주로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혼자 제멋대로 개탄하기를, "나에게 있는 도가 대공지정(大公至正)하더라도 한 번 전해지고 두 번 전해지다 보면 착오가 없을 수 없다. 하물며 나에게 있는 것이 먼저 잘못되었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후학들에게 이와 같은 폐단이 결코 없으리라는 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方丈一別。星霜再周。未審秋高。兄體動止何似。年形得稔。想嶺中如之耶。荐凶之餘。有若可慰。而時騷如此。未知前頭可以安坐飽喫否也。同門舊契。零星餘存。見無幾人。而又皆衰老。相滯於落落數百里之遠。音聞不相接。痛癢不相關。每矯首東望。不勝浩歎而已。俛宇之出。兄與同升。未知其時事果何如而所處又何如。遠未相悉。每切願聞。嗚乎。目前時色。如需之至泥。如剝之到膚。惠好同歸之思於斯爲切。而不可得。奈何奈何。兄近年住着在山齋乎溪亭乎。晩年恬養之趣。英育之樂。想有不淺淺者矣。前秋所營湖行而未就者。更於今秋圖之耶。弟年年絆已。出脫不得苦況苦況。未知縶籠之翼。其將有任意翶翔之日乎。咏亭蓋瓦了已有年。而債費尙未了刷。每以爲悶曰。前得松沙書。有絜家入金雞山中之意。山在玉果潭陽等地云耳。年間與黃生澈源有所論說者。蓋黃生以爲靈不能主宰妙用。而主宰妙用者。神也。靈不能具衆理應萬事。而具衆理應萬事者。神也。弟以爲如此。則靈爲無用之長物。理爲作用之別事。夫心合下是虛靈底。虛靈合下是妙合。是以以其當體則謂之氣。以其本體則謂之理。以其妙處則謂之神。神與靈。曷嘗是別有方所別有時節者哉云云。而黃生猶不信之然。又安知鄙見不有差誤處耶。願兄詳辨以示之也。大抵心有以氣言者。有以理言者。固不可各執一邊與之嘵嘵也。但在今世主氣之日。而所以捄之者。不得不於道理上加詳焉。此先師所以有精爽皮殼之語。老兄所以有氣爲資助之說。黃生之見。蓋源於此而過之。至爲此虛靈非心之語者。可乎。竊記頃年兄與黃生書。有曰妙用之行。精英之發。卽所謂心。此語於鄙意。每不能無疑。妙用之行。雖是理。而包精英在其中。下段別言精英以配之。不已贅乎。若曰專言其理。而精英無與云爾。則所謂理者。不其歸乎作用乎。此與說其機自爾。而繼言理乘之義。恐無異矣。曩見俛宇與人書。間間有主理太過處。私竊慨嘆。以爲道之在我。大公至正。而一傳再傳。猶不無差失。況在於我者。已不免先有差失乎。此後學之敝。不可保其必無也。如何如何。 정후윤(鄭厚允)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자이다. 또 다른 자는 영오(英五)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 애산(艾山), 물계(勿溪)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정방훈(鄭邦勳)의 아들로 1864년(고종1)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제자로는 정면규(鄭冕圭), 권운환(權雲煥) 등이 있으며, 합천 경덕사(景德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 49권이 있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호이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명원(明遠)으로 경상도 단성(丹城) 출신이다. 25세 때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903년 통정대부, 비서원 승에 제수되었고 저서로는 《면우문집(俛宇文集)》이 있다. 진펄에서 위험을 기다리고 《주역》 〈수괘(需卦) 초구(初九)〉에 "먼 들녘에서 기다린다."라고 하고, 〈구이(九二)〉에 "모래밭에서 기다린다."라고 하고, 〈구삼(九三)〉에 "진펄에서 기다린다."라고 하여, 점점 험난한 지역에 접근함으로써 위험에 빠지게 됨을 비유하였다. 칼이 피부에 이른 《주역》 〈박괘(剝卦) 육사(六四)〉에 "상을 깎아 살갗에 이르니 흉하다."라고 하고, 그 상전(象傳)에 "상을 깎아 살갗에 이르는 것은 재앙이 매우 가까워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27)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가학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1895년 이후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저항하였다. 황생 철원(黃生澈源)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능주(綾州) 운곡(雲谷)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경함(景涵)이며 호는 중헌(重軒), 은구재(隱求齋)이다. 정상(精爽)은……것이다 《노사집(蘆沙集)》 권6 〈답박형수(答朴瑩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사람의 몸으로 말하면 호흡(呼吸)의 나가고 들어옴, 영위(榮衛)의 오르고 내림이 모두 이 기(氣)입니다. 반드시 '기(氣)' 자 아래에다 '정상(精爽)'이란 글자를 붙여야 '심(心)' 자의 경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정상'이란 글자도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합니다.【就人身而言, 噓吸之出入, 榮衛之陞降, 皆是物也. 必氣字下, 著精爽字, 方說入心字境界.然精爽亦是皮殼說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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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윤에게 보냄 與鄭厚允 연전의 편지에 대해서 인편(人便)이 없어서 오랫동안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형의 체후(體候)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울분에 차 있고 감정이 격앙되어 여지가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이 때문에 몸이 손상되지 않기만 바랍니다. 먼 곳에서 걱정스러운 마음만 절실합니다. 아우는 지난여름 초에는 손자며느리의 상을 치르고 겨울 초입에는 집사람의 상을 치렀습니다. 1년 안에 질병과 시름이 거의 거르는 날이 없었으며 뒤이어 신병(身病)으로 여러 달에 걸쳐 고통을 겪고 있건만 아직도 이렇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제 상황이 참으로 의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은 말하지 않으니만 못하니 모두 그만두겠습니다. 이번에 보내주신 형이 찬술한 〈기의(記疑)〉32)는, 해박하고 적합하며 정밀하고 상세하며 명백하고 강직한 것을 보니 선사(先師)의 지결(旨訣)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일세의 몽매한 자들을 깨우치게 하신 것이 참으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 오늘날의 성안에 이러한 문장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한쪽 사람들이 본다면 세 치 혀가 있더라도 다시 무슨 말로 형을 힐난하겠습니까. 한쪽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아우처럼 오래도록 고심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던 자일지라도 안개가 걷히듯 확연해지니 어찌 위안이 되고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다만 시대의 조짐이 이와 같고 육신의 쇠함이 이와 같으니 강론과 토론의 자리에서 자주 뵙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쭙고자 하는 한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심(心)은 분명히 이(理)이고 영(靈)은 그 본지(本旨)입니다. 만약 영(靈)을 자조(資助)로 여긴다면 본지에 대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조목에 "성정(性情) 이외에는 다시 따로 심(心)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아마도 지나칠 정도로 명쾌하게 말씀하신 듯합니다. '인으로 사랑하고 예로 공경하고'33)에서 이 '이(以)' 자는 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 쌓인 회포가 가득하지만 종이에 세세하게 다 늘어놓을 수 없으니 그저 서글픔만 절실합니다. 어느 때가 되어야 한자리에 같이 앉아 이 마음을 펼치게 될까요? 농산(農山)34) 형은 근래 안부가 어떠십니까? 겨를이 없어 아직 안부를 묻지 못하였더니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年前書。無便未復久矣。未審兄體何似。憂憤慷慨。想無餘地。幸不以此致損否。遠外馳慮。徒切下情。弟去夏初哭孫婦。冬初哭室人。一年之內。疾病憂戚。殆無間日而繼以薪憂。數朔叫苦。尙此不退。殘年身況。誠難聊賴。時象不如不言。都閣之。兄所述記疑。荷此俯示。見其該洽精詳明白截直。使先師旨訣足以不墜於地。而開一世之瞽蒙者。甚不偶爾也。嗚乎誰知今日域中。有此等文字乎。使一邊之人見之。雖有喙三尺。更有何言相詰乎。不惟警一邊之人。雖如弟而宿苦疑菀。確然霧除。曷不慰幸。但時氛如此。身衰如此。未能源源於講討之末也。然有一節奉質者。心固理也。而靈其本旨也。若以靈爲資助。則其於本旨。果何如也。目曰。性情之外。更別無心。此等處。恐或不爲發之太快耶。以仁愛。以禮敬。此以字。非心之謂耶。積懷滿腔。不能縷悉臨紙只切悵恨。何時合席。以敍此意。農山兄近節何如。忙未修候。不安不安。 기의(記疑) 《노백헌선생문집(老栢軒先生文集)》 권28 〈잡저(雜著)〉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을 가리키는 듯하다. 전우(田愚)가 기정진의 〈납량사의(納涼私議)〉와 〈외필(猥筆)〉에 대한 변론을 지어 유포하자, 이에 대해 변무하는 글을 지어 기정진이 주리론의 입장에서 이이의 학설을 계승 보완하였음을 밝힌 글이다. 인으로……공경하고 《회암집(晦菴集)》 권67 〈잡저(雜著)〉 '원형이정설(元亨利貞說)'에 나오는 말이다.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성(性)이고, 생(生)하고 장(長)하고 수(收)하고 장(藏)하는 것은 정(情)이며, 원(元)으로 생(生)하고 형(亨)으로 장(長)하고 이(利)로 수(收)하고 정(貞)으로 장(藏)하는 것은 심(心)이다.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는 성(性)이고, 측은과 수오와 사양과 시비는 정(情)이며, 인(仁)으로 애(愛)하고 의(義)로 오(惡)하고 예(禮)로 양(讓)하고 지(智)로 지(知)하는 것은 심(心)이다.【元亨利貞性也, 生長收藏情也, 以元生以亨長以利收以貞藏者, 心也. 仁義禮智性也, 惻隱羞惡辭讓是非情也, 以仁愛以義惡以禮讓以智知者, 心也.】" 농산(農山) 정면규(鄭冕圭, 1850~1916)의 호(號)이며 정면규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사촌형인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의 문인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을 방문하여 충남 노성(魯城)에서 의거(義擧)를 계획하였으나 외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곽종석(郭鍾錫), 허유(許愈), 기우만(奇宇萬), 정재규(鄭載圭), 조성가(趙性家), 권병구(權秉球) 등과 서신으로 왕래하였으며 저서로는 《농산문집(農山文集)》 15권 8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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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四年甲午四月十四日金順弼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年年耕食是如可妻喪債急急故勢不得已西十作悚字畓五斗落只所耕七[負]五[束]㐣折價文貳拾伍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三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言之獘則以次文記告 官卞呈事畓主 朴春實[着名]訂筆 尹龍奎[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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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昨惠復拜悉又新惠如對淸儀卽拜審刻下仕候萬重仰賀仰賀弟狀公擾甚苦家憂連綿何歎如之示來民藉謄本依敎仰呈考覽而所謂担任面書記自陰正月以來久日缺勤金正成入家申告爲未整理於籍簿以玆老眼亦昧於處理且考入家申告與京城府民籍謄本而入家者與入家戶主間昭穆未詳執筆躊躇不得已以愚見所到登載於民籍後謄送者也詳覽後如有妄記處卽爲返送而其誤謬處指的示之如何如何旣已處理則京城府尹殿餘籍通知待担任書記出勤後使卽手續發付計料以此諒之如何如何餘不備謝上庚元月卄七日弟辛圭錫拜謝朝者出面時家兒更爲專送矣所懇事何以另念否雖有千萬難處之端拔例期施切企切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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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일35)【우만】에게 보냄 與奇會一【宇萬】 늦봄에 복중(服中)의 체후36)가 우위(友衛)하시다니 위로되고 그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장례를 치른 뒤 우제(虞祭)37)와 부제(祔祭)38), 그리고 졸곡(卒哭)39)이 차례대로 지나갔습니다. 아, 우리 선생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은 세월이 어느덧 지금에 이르렀습니까.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40) 같은 모슷ㅂ은 하루하루 멀어지고 면봉산(面凰山)의 새 무덤에는 이미 풀빛이 푸르릅니다. 애처롭게 남아 있는 이 목숨은 어리석기만 하니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아우는 정성이 깊지 못하고 형편에 구애받아 움막을 짓고 궤연을 모시지41) 못하고 급하게 되돌아와 내 집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이것이 한결같이 섬기는 도리42)이겠습니까. 아, 선생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고, 선생의 도를 실추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어찌 우리가 독실하게 힘을 다해야 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노형(老兄)께서 더욱 스스로 힘을 쏟아 덕을 상고하려는 천하 학자들의 행렬이 선생의 뜨락에 끊이지 않게 하고 모두 선생께서 훌륭한 손자를 두셨다고 한다면 노형(老兄)께서 선생의 뜻과 공업을 이어 나가는 것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당일에 문하에 이르렀던 선비들 또한 흩어지지 않고 귀의하는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주상이 내리는 치제(致祭)는 과연 이달 안에 거행하겠습니까?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일은 성급하게 논의하기 어렵더라도 1년, 2년의 기한을 두고 사방에서 널리 구하여 수합하고 교감한 다음에 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이미 완성되었을 때 거사(居士)라고 적은 것은 제 마음에 의혹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널리 듣고 예에 밝은 선비가 반드시 신중하게 살펴서 반드시 절충해야 하겠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물러나서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거사(居士)는 선생께서 평소에 자신을 낮추는 말이었으니 스승을 받드는 후학의 처지에서도 자신을 낮췄던 말로 스승을 일컫겠습니까. 유서(遺書)에 "노사 거사(蘆沙居士)로 충분하다."라고 하신 것은 주된 의미가 별도로 다른 데 있지 거사(居士)라는 두 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선생 같은 백세 종사(百世宗師)를 단지 거사라고 일컫는 것이 과연 온당하겠습니까. 또 명정(銘旌)43)에 이미 노사 선생이라고 일컬었으니 신주(神主)의 앞면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명정과 신주의 앞면이 달리 일컬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또 선유(先儒)의 논의가 있습니다. 다시 상의하여 확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春暮服體友衛。慰慕無任。襄奉之餘。虞祔卒哭。次第經過。鳴乎。我先生不在世者。歲月已至此耶。光風霽月。日遠一日。而凰山新阡。草色已靑矣。哀此餘生。蠢蠢奚依。弟誠淺勢拘。未得築場侍几。而遽然退歸。燕處私室。此其事一之道耶。鳴乎先生之望。不可負也。先生之道。不可墜也。此豈非吾輩慥慥盡力之日耶。惟老兄益加自勵。使四方學者考德之行。不絶於先生之庭。而皆曰先生有孫。則非但老兄之所以繼述者。至矣。而當日及門之士。亦將不至渙散。而有所依歸者矣。自上致祭。果爲月內行之耶。遺稿登刊。雖難遽議。限以一年二年。廣求四方收聚校勘然後。可以下手矣向於旣成時。書以居士者。於愚意不能無疑。但博聞長禮之士。極其愼審。必有所折衷者。而不敢開喙。退而思之。終始未瑩。夫居士者。先生平日所自謙者。則後學宗師之地。亦以自謙者稱之乎。遺書有云蘆沙居士足矣者。其主意。別有所在。而不在居士二字矣。以我先生百世宗師。只稱居士者。果為穩當耶。且銘旌旣稱蘆沙先生。則粉面亦當如之。銘旌粉面。不可二稱者。又有先儒之論矣。更加商確。如何。 기회일 회일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이다. 기우만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으로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이며 호는 송사(松沙)이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늦봄에 복중(服中)의 체후 조부인 기정진(奇正鎭)이 사망한 것이 1879년 12월이다. 여기서 말하는 늦봄은 1880년을 가리킨다. 우제(虞祭) 체백(體魄)을 떠난 혼령을 안정시키기 위한다는 뜻에서 매장 당일부터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신분에 따라 9번, 7번, 5번, 3번 지낸다. 《의례 기석례(旣夕禮)》에 "세 번 우제(虞祭)를 지낸다.【三虞】"라고 한 것에 대해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우(虞)는 상제(喪祭)의 이름이다. 우는 안정시킨다는 뜻이다.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정기는 가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효자는 그 혼령이 방황하지 않도록 세 번 제사를 지내 안정시킨다. 아침에 장례를 치르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우제를 지내는 것은 차마 하루라도 혼령이 돌아갈 곳이 없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虞, 喪祭名. 虞, 安也. 骨肉歸於土, 精氣無所不之, 孝子爲其彷徨, 三祭以安之. 朝葬, 日中而虞, 不忍一日離.】"라고 하였다. 부제(祔祭) 졸곡제 다음날 지내는 제사의 명칭으로, 소목(昭穆)의 반차에 따라 제사 지내는 것이다. 진호(陳澔)는 《예기집설(禮記集說)》에서 "부(祔)라는 말은 덧붙인다는 뜻이다. 부제(祔祭)란 조부에게는 다른 묘(廟)로 옮겨야 함을 알리고, 이번에 죽은 이에게는 이 묘로 들어가야 함을 알리는 것이다.【祔之爲言附也. 祔祭者, 告其祖父, 以當遷他廟, 而告新死者, 以當入此廟也.】" 하였다. 졸곡(卒哭) 우제(虞祭)를 모두 마친 다음 첫 번째 강일(剛日)에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슬픔이 줄어들어 이후로는 무시(無時)로 하던 곡을 그치고 조석곡(朝夕哭)만 하므로 졸곡제라고 한다. ≪의례 기석례(旣夕禮)≫의 "졸곡제(卒哭祭)를 지낸다.【卒哭.】"에 대해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졸곡(卒哭)은 삼우제(三虞祭) 뒤에 지내는 제사 명칭이다. 처음에는 조석곡을 하는 사이라도 슬픔이 밀려오면 곡을 하지만, 이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는 그치고 조석곡만 할 뿐이다.【卒哭, 三虞之後祭名. 始朝夕之間, 哀至則哭, 至此祭, 止也, 朝夕哭而已.】"라고 하였다. 화창한……밝은 달 황정견(黃庭堅)이 《산곡집(山谷集)》에서 주돈이(周敦頤)를 두고 "주무숙은 속이 시원스러워 비가 갠 뒤의 화창한 바람이나 밝은 달과 같다.【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인품의 뛰어남에 대한 비유이다. 움막을……모시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지만, 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한결같이 섬기는 도리 부모와 임금, 그리고 스승은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의 말 가운데 "백성은 부모, 임금, 스승 셋의 은혜로 살아가니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國語 晉語》 명정(銘旌) 생전에 사용하던 깃발이나 따로 마련한 비단 또는 베에 죽은 사람의 관직, 성씨 등 호칭을 써서 표시한 상례(喪禮)의 기물이다. 명(銘) 또는 명정(明旌)이라고도 한다. 《가례 상례 입명정(立銘旌)》에 "강색(絳色) 비단으로 명정(銘旌)을 만든다. 너비는 온폭이고, 3품 이상은 9자, 5품 이하는 8자, 6품 이하는 7자이다. '모관모공지구(某官某公之柩)'라고 쓰고, 관직이 없으면 살아 있을 때의 호칭을 따른다. 대나무로 깃대를 만들되 명정의 길이만큼 하여 영좌의 오른쪽에 기대 놓는다.【以絳帛爲銘旌. 廣終幅, 三品以上九尺, 五品以下八尺, 六品以下七尺. 書曰某官某公之柩, 無官即隨其生時所稱. 以竹爲杠, 如其長, 倚於靈座之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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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집안 아들에게 보임 示家兒 우리 선대는 신라와 고려 시대로부터 앞뒤 수천 년 동안 문학으로 벼슬을 하여 빛나는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일찍이 동방의 사대부 반열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내 위로 5~6대에 이르러 아주 사나운 운수172)를 만나 날로 쇠퇴하였으니, 증조부는 금남에서 낭주로 옮겨왔고 조부는 낭주에서 금릉으로 옮겨왔으며 선고(先考)는 금릉에서 능양으로 옮겨왔다. 반남에 남겨진 장원(莊園)은 풀이 무성하게 묵었으며, 가야산의 선영은 쓸쓸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쓸쓸하고 외로운 혼자 몸으로 떠돌아다니며 걸식하여 그 모욕을 받은 것이 적지 않으며 난처한 상황을 만난 것이 대단히 많았으니,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며 말을 하면 목이 매인다. 선고 부군은 아침부터 밤까지 걱정으로 부지런하여 조금도 쉴 틈이 없었으며 바람에 머리를 빗고 빗물에 목욕하면서173)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애써서 겨우 가계를 세워 자손들이 이어나갈 토대를 마련하였다. 아! 불초한 나는 혼매하고 어리석으며 명석하지 못하며 나약하고 게을러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나 자신의 측면에서는 심지(心志)가 통투하지 못하여 학문은 이룬 것이 없고, 집안의 측면에서는 대대로 전해지는 가업을 지키지 못하여 처자가 어려움에 처하였으니, 사방으로 떠돌며 남들에게 먹을 것을 의탁할 지경이 되었다. 오호라! 이 어찌 사람이란 말인가, 이 어찌 사람이란 말인가. 나라를 망친 신하와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공자가 확상의 향사례(鄕射禮)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174) 이렇게 집안을 망친 자는 또한 나라를 망치거나 전쟁에서 패한 부류가 아니겠는가. 자식의 처지에서 효도하지 못하고 사람의 처지에서 인(仁)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이전 습관을 통렬하게 고쳐서 천만의 죄 가운데 아주 조금이라도 그 허물을 줄이고자 하지만 흰머리의 노쇠한 나이에 정력이 미치지 못하니 천지를 우러러보고 굽어보며 잊지 않고 근심하는데 죽고자 하여도 죽지 못하고 있다. 오호라! 슬프도다. 이번 생은 끝났도다. 너는 다만 스스로 도모할 것을 생각하지 않느냐. 너는 경전과 역사를 대략 섭렵했으니, 도의 대경(大經)과 옛날 성패와 존망의 원인을 조금은 알 것이다. 또한 너도 나이가 곧 40이 되니, 자신의 시비득실과 세상의 길흉화복에 대해 많이 경험했을 것이므로 좋아해야 하고 미워해야 하는 것의 취하고 버리는 향배의 구분에 대해 대략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잘 모르겠지만, 너의 마음에 뉘우치고 깨우쳐서 척연(惕然)히 이전의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느냐. 아니면 멍청하게 깨우치는 것이 없이 자포자기를 당연하게 여기느냐. 천지의 성(性)을 품부 받고 부모의 기를 받아 장부로 태어나 선비의 신분으로 가문의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자손을 위한 무궁한 계책을 세워야 하는데, 무엇이 괴로워서 자신을 천박하다고 여기고 스스로 위망(危亡)을 취하여 탄탄한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달리며 인(仁)175)을 버리고 구덩이에 몸을 던져서 안으로 부모에게 치욕을 끼치며 밖으로 향리의 조롱을 불러들이려 하느냐. 네가 무언가를 하려하지 않는다면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만일 하려고 한다면 자신에게 절실한 병통을 알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은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직언을 좋아하였는데 너는 맛있는 술을 좋아하고 직언을 싫어하니, 여러 낭패가 어찌 이르지 않겠느냐. 군자는 고요함으로 덕을 기르는데 너는 항상 동작할 것만 생각하여 어지럽게 출입하니, 너는 한번 생각해 보아라, 평소의 허물이 어찌 일찍이 동작하는 것에서 온 것이 아니더냐. 《시경》에서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은 오직 덕의 기반이어라."176)라고 하였으며, 《논어》에서 "남과의 관계에서 공손하여 예의가 있으면 사해 안이 모두 형제일 것이다."177)라고 하였다. 대저 천기가 온화하면 만물이 번창하고 천기가 차가우면 만물이 시드니, 사람에게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온화함은 덕의 기반이 되며 사해가 귀의하게 됨에 이른다. 너는 쓸쓸히 외로운 몸이라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데, 성기(性氣)가 거칠고 얕은데다가 자상하고 온후한 뜻이 적어서 사물이 너를 친하게 대하지 않는데 어떤 사람이 너를 친하게 대하겠느냐. 이는 외로워 약한 가운데서도 더욱 외로워 약한 자이다. 많은 사람이 배반하고 친한 이도 떠나면 만승(萬乘)의 천자도 홀로 존재할 수 없는데, 더구나 필부임에랴. 이것이 내가 너를 위해 깊이 걱정하는 바이다. 근래 이래로 집안의 살림이 탕진되어 거함에 한 해를 잘 마칠 계책이 없고 움직임에 손 쓸 방법이 없으니, 너는 어떻게 늙은 부모를 봉양할 것이며 아들을 교육시켜서 위로는 자식 된 도리를 잃지 않고 아래로는 아비 된 책임을 잃지 않겠느냐. 만약 변고를 만나서 거처를 옮기게 된다면 예상의 귀신178)이 됨을 면치 못할까 두려우니, 자신 한 몸도 구원하지 못하는데 부모는 어찌할 것이며 처자는 어찌할 것인가. 이는 목전의 급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게으름은 만 가지 악의 근원이며, 부지런함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무익한 일은 하지 말며 무익한 사람은 가깝게 지내지 말며 한가로운 이야기를 줄이고 쓸데없는 출입을 생략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실제 일을 행하며 겸손과 공손함으로 몸가짐을 하고 온화함과 부드러움으로 집안을 이끌고 공경함과 조심함으로 사람을 대하며 자신에 대한 책망은 두텁게 하고 남에 대한 책망은 박하게 하며 행동함에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든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노력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가장 즐거운 일로 삼는다면, 어찌 만년의 공이 젊었을 때의 실수를 벌충하지179)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겠느냐. 옛사람이 초상을 치르면서 슬퍼하지 않는 자를 보고서 "이런 것을 일러 뿌리를 쓰러트린 것이라 하니, 자손이 창대하지 못할 것인져."180)라고 하였으며, 제사에 임하여 공경하지 않은 자를 보고서 "이런 것을 일러 조상을 망각한 것이라 하니, 조상을 망각하면 그 조상도 또한 자손을 잊어버리니 자손을 돕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그러한 이치이다. 대저 사람이 부모를 향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무한한 선의(善意)가 모두 이를 따라서 나오게 된다. 나는 약질로 병이 많은데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데다가 항상 밖에 있으니 어찌 될지 앞일을 알 수가 없다. 또한 지금 상황은 두려울 정도라 앞날에 일어날 일은 알 수가 없으니, 만약 부자간에 서로 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스러진다면 어찌 대단히 한스러울 일이 아니겠느냐. 이에 대략 속에 있는 마음을 기술하고서 미리 너를 위해 말하였는데, 옛사람이 편지 형식으로 준 의미를 본받았다. 잘 모르겠는데 백로처럼 잊어버리고 버려 버릴 것이냐, 아니면 무휼처럼 잊지 않고 기억하며 항상 보고서 평생 활용할 것이냐.181) 이것은 너에게 달렸다. 말하고 싶은 것은 참으로 이에 그치지 않는데, 그러나 네가 만약 기꺼이 이 말들을 받아들인다면 그 말하지 않은 것은 미뤄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만 이 한 편(編)의 말도 또한 무익할 것이다. 더 이상 많은 말을 어찌 하겠느냐, 모름지기 대단히 노력하여라.질문 : 〈홍범〉의 주에서 '본받아 진술한 것[法而陳之]'182)의 법(法)과 《한사》183)에서 말한 '그 모양을 본받는다.[法其象貌]'184)의 법은 같은 의미입니까.답변 : 앞에 것은 그 이치를 본받는다는 것이고 뒤에 것은 그 모양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다。질문 : 우(禹)가 〈낙서〉를 받고 다만 '9를 머리에 이고 1을 아래에 밟으며, 왼쪽이 3이고 오른쪽이 7이며, 2와 4가 어깨가 되고 6과 8이 발이 된다.'185)는 것을 본받고서 일찍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는데, 기자에 이르러 비로소 뜻을 미뤄 넓혀서 말을 보탰습니다. 이는 복희가 〈하도〉를 받고서 64괘를 그려서 나열하기만 하고 다른 말이 없었는데, 문왕 · 주공 · 공자에 이르러 비로소 괘사 · 효사 · 단사 · 상사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까.답변 : 그렇다.질문 : 태극이 움직여서[動] 양을 낳고 고요하여[靜] 음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유는 고요한 가운데 양이 있고 움직이는 가운데 음이 있다186)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태극의 동정은 선유가 말한 것과 같지 않습니까。답변 : 위의 한 단락은 두 체(體)가 상대하는 것이요, 아래 한 단락은 두 기가 서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질문 : 맹자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不動心]'을 말하면서 "뜻은 지극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 뜻을 잡아 지킨다."187)라고 하였는데, 이 단락에서 다만 뜻을 들어서 말한 것은 마음이 간 바에 나아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답변 : 뜻이란 기(氣)의 장수다. 천하의 모든 일이 어찌 뜻이 서지 않고서 성취한 것이 있겠느냐.질문 : '뜻은 도로써 안정시킨다.'188)는 것은 사물이 궁구해져서 앎이 지극한 일에 해당하며, "말은 도로써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일에 해당합니까.답변 : '뜻은 도로써 안정시킨다.'는 것은 마음에 관해 말한 것이고, '말은 도로써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은 행동에 대해 말한 것이다.질문 :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수신(誠意正心修身)은 명덕을 밝히는 것에 속하고,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는 신민(新民)에 속하니, 여덟 조목에서 '지극한 선에 그친다.'는 것은 오행에서의 토(土)나 사단에서의 신(信)과 같습니까.답변 : 말은 그럴 듯한데 비교한 대상은 아마도 정밀하지 않은 듯하다.질문 : 근래 들어 항상 이 마음을 수렴하여 억지로라도 침잠하는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만 본래 학문으로 얻은 힘이 없어서 언뜻언뜻 왔다 갔다 하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장난질을 하니, 눈에 보이고 귀에 보이며 생각이 일어나는 데로 따르는 것이 북소리,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릅니다. 이런 습관을 통렬하게 끊어내어 장차 어떻게 조금이라도 보존하여 지킬 방법이 있습니까. 또한 한가로이 노닒을 끊어버리며 세상의 교유를 멈추고 암실에 고요히 홀로 처해야만 이에 가능합니까.답변 : 이 단락에서 말한 것을 보면 누가 너를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하겠느냐. 그러나 장난질을 하면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면서 곧바로 다시 이전처럼 하니, 어찌 말한 것과 상반되느냐. 외면의 거친 과오를 오히려 그치지 못하는데, 내면의 언뜻언뜻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어떻게 끊어버리겠느냐. 그렇다면 너의 공부는 우선 평소 자신을 이기는 것에 두어야 한다. 我先世。自羅麗來。前後數千年。文學仕宦。奕葉相承。曾不多讓於東方士大夫之列。至五六世以降。運丁百六。日就衰替。曾王考自錦南移郞州。王考自郞州寓金陵。先考自金陵遷綾陽。潘南遺庄鞠爲茂草。伽倻先隴。寂若無人。零丁孤孑。流離假乞。其受侮之不少。遘憫之旣多。念之骨寒。言之哽塞。先考府君夙夜憂勤。不遑暇寧。櫛風沐兩。血心拮据。僅能成立家計。爲予孫可繼之地。嗟余不肖。昏愚不明。懦怠不振。在身則心志不通。學問無成。在家則世業不守。妻子無賴。至於流寓四方。寄口於人。嗚乎。此何人哉此何人哉。亡國之臣。敗軍之將。聖人不與矍相之會。則此敗家之子。亦非亡國敗軍之類耶。在子爲不孝。在人爲不仁。雖欲痛革前習。以爲一分寡過於千罪萬累之中。而白首頹齡。精力不逮。俯仰耿耿。覓死無地。嗚乎痛哉。此生已矣。汝獨不思所以自爲謀耶。汝略涉經史。粗知道之大經。及古成敗存亡之所以然。且汝年將四十矣。身之是非得失。世之吉凶禍福。多所經歷。則其可好可惡取舍向背之分。想有槪焉者矣。未知汝之心有所悔悟。而思惕然懲毖者耶。懵然無覺。甘於自暴自棄而已耶。稟天地之性受父母之氣。生爲丈夫。身爲士子。有門戶至重之責。有子孫無窮之計。何苦而自視菲薄。自取危亡。舍坦道而走荊榛。曠安居而投坑塹。內而貽父母之羞辱。外耳招鄕里之嘲訕哉。汝不欲有爲則已。如欲有爲。切已病痛。不可不知。古人惡旨酒而好直言。汝則好旨酒而惡直言。種種狼狽。何所不至君子靜以養德。汝則常思動作。紛紜出入。汝試思平日愆尤。何嘗不自動作中出來耶。詩曰。溫溫恭人惟德之基。語曰。與人恭而有禮。四海之內皆兄弟也。夫天氣溫溫。則萬物和暢。天氣冷冷。則萬物彫瘁。在乎人者亦然。此溫溫所以爲德之基。而至於四海歸之。汝以隻身煢煢。無賴無聊。而加以性氣粗淺。少慈祥溫厚之意。物不親我。人誰與我。此孤弱之中。尤爲孤弱者也。衆版親離。萬乘不能以自存。況匹夫乎。此吾所以爲汝深憂者也。近年以來。家業蕩然居無卒歲之計。動無措手之方。汝何以奉養老親。敎育子男。上不失爲人子。下不失爲人父耶。若遇事變。有小小移動。則恐不免爲翳桑之鬼。一身不足血。父母奈何。妻子奈何。此不可謂非目前急故也。怠者萬惡之源。勤者無價之寶。自今日爲始。不作無益之事。不近無益之人。少閒說話。簡閑出入。以實心行實事。以謙恭持身。以和順御家。以敬謹接人。躬自厚而薄責於人。行有不得。反求於已。俛焉孜孜。爲善最樂。則安知桑楡之功。不能盖東隅之失耶。古人見臨喪不哀者曰。此謂蹶本。子孫其不昌乎。見臨祭不敬者曰。此謂忘祖。忘祖則祖亦忘其子孫。不爲之祐矣此必然之理也。大抵人有向親之心。則自然有無限善意。皆從此出也。余弱質多病。年邁增甚。而恒在外次。人事難諶且時象凜凜。前頭遭遇。有不可知。若父子不相見。而遽爾溘然。則豈非大可恨耶。玆以略述肝鬲。豫爲汝道之。以效古人授簡之意。未知遺忘廢墜如伯魯乎。記念不忘。視爲平生受用如無恤乎。此在汝而已。所欲言固不止此。然汝若肯向此裏。則其不言者。可以推及。不然。只此一篇語。亦是無益耳。多言何爲。須千萬勉旃。洪範註法而陳之之法。與漢史所謂法其象貌之法。同義否。一則法其理。一則法其象。禹受洛書。只法陳其戴九履一。左三右七。二四爲肩。六八爲足。而曾無敷言。至箕子時。始推衍增益之。如伏羲受河圖。畵列六十四卦。而無其辭。至文王周公孔子。始有卦辭爻辭彖象耶。然。太極動而生陽。靜而生陰。以先儒靜中有陽。動中有陰言之。則太極動靜。與先儒所說不同。上一段。是二體之對待。下一段。是二氣之互藏孟子說不動心曰志至焉。又曰持其志。此段特擧志而言者。以就心之所之處而然否。志者氣之帥。天下萬事。豈有志不立而能有所成就者哉。志以道寧。物格知至事。言以道接。修齊治平事否。志以道寧。是心邊說。言以道接。是行邊說。格致誠正修屬明明德。齊治平屬新民。則止至善之於八條目。猶五行之土。四端之信否。語則似然。而比類恐不精。入近以來。每欲收斂此心。强着沈潛功夫。而但本不有定力。乍往乍來。放浪戲謔。隨耳目思慮。捷於鼓桴影響其於痛斷刻絶之所。將何以能保其一分持守之方乎。抑絶閑遊。息世交。而處於闇室幽獨之中。斯可矣否。觀此段所說。孰不以汝爲志於學乎。然戲謔放浪。旋復如古。何其與所說相反耶。外面麤粗之過。猶不能遏止。內面乍往乍來者。何以斷置。然則汝之功夫。先在日用克己上。 사나운 운수 '백육(百六)'은 106년을 가리키는데, 4500년이 1원(元)이고 1원 중에 5번의 양액(陽厄)과 4번의 음액(陰厄)이 있어 106년마다 액운이 찾아온다고 하였다. 《漢書 卷21 律歷志上》 바람에……목욕하면서 《장자(莊子)》 〈천하(天下)〉에 "우 임금은 몸소 삼태기와 보급을 가지고 구주(九州)의 강들을 바다로 흘러가게 하느라 장딴지의 살은 떨어지고 종아리의 털이 다 닳아 없어졌다. 소나기에 머리를 감고 거센 바람에 머리털을 빗질하였다.[禹親自操稾耜, 而九維天之川, 腓無胈, 脛無毛, 沐甚雨, 櫛疾風.]"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 객지를 떠돌며 온갖 고생을 겪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나라를……하였으니 확상은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궐리(闕里) 서쪽의 지명으로, 후대에 학궁(學宮)에서 사례(射禮)를 익히는 장소로 쓰였다. 공자가 확상의 포(圃), 즉 노나라 학궁 곁의 택지(澤地)에서 향사례(鄕射禮)를 행할 적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처럼 빙 둘러섰는데, 이때 자로(子路)에게 "패군(敗軍)한 장수와 망국의 대부와 인후가 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외에는 모두 들어오게 하라.[賁軍之將 亡國之大夫 與爲人後者 不入 其餘皆入]"라고 말하게 하자, 떠나는 자가 반 들어온 자가 반이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禮記 射義》 인(仁) 안거(安居)는 인(仁)을 가리킨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는 사람의 바른길인데,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않으며, 바른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 슬프도다![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不居 舍正路而不由 哀哉]"라는 말이 나온다. 온화하고……기반이어라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나오는 구절이다. 남과의……것이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사마우(司馬牛)가 일찍이 불량한 자기 형 환퇴(桓魋)를 걱정하여 말하기를 "남들은 다 형제가 있는데, 나만 형제가 없구나.[人皆有兄弟 我獨亡]"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나는 들어 보니,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고 하더라. 군자가 몸가짐을 공경히 하여 실수하지 않고, 남을 대해서도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한다면 사해의 안에 있는 사람이 다 형제처럼 되리니,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다고 걱정할 것 있겠는가.[商聞之矣 死生有命 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라고 하였다. 《論語 顔淵》 예상의 귀신 예상은 옛 지명인데,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것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영첩(靈輒)이 이곳에서 굶주리고 있는 것을 조돈(趙盾)이 지나다 보고 먹을 것을 주어 구제해 주었고, 그 뒤에 영첩이 진나라 영공(靈公)의 갑사(甲士)가 되어 위험에 처한 조돈을 다시 구제해 줌으로써 조돈이 죽음을 모면하였다.《春秋左氏傳 宣公2年》 만년의……벌충하지 《후한서(後漢書)》 권47 〈풍이열전(馮異列傳)〉에 "동우에서 잃었으나 상유에 수습한다。〔失之東隅 收之桑楡〕"라고 하였는데, 동우(東隅)는 동쪽 해가 뜨는 곳이니 젊은 시절을 말하고, 상유(桑楡)는 서방 해가 지는 곳으로 만년(晩年)을 비유한다. 이런 것을……것인져 《좌전》 양공(襄公)29년조에 "위(衛)나라 석공자(石共子)의 죽음에 그 아들 도자(悼子)가 슬퍼하지 않으니, 공성자(孔成子)가 말하기를 '이를 일러 그 근본을 뽑아 버리는 짓이라 하니,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다. 백로처럼……것이냐 조 간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백로(伯魯)이고, 차남이 무휼(無恤)이었다. 어느 날 간자가 훈계의 말을 쪽지에 적어 각각 두 아들에게 주고서 잘 기억해 두라고 명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물어보니, 형 백로는 훈계의 말을 잊어버려 대답을 못 하였고 쪽지도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아우 무휼은 그 말을 암송하여 잘 알고 있었고 쪽지를 꺼내라고 하자 즉시 품속에서 꺼내어 아버지에게 올렸다.《十八史略 春秋戰國 趙》 본받아 진술한 것 《서경》 〈홍범〉의 주에서 "《한지》에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림에 하늘이 〈낙서〉를 내려 주므로 이것을 본받아 진열하니, 홍범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漢志曰 禹治洪水 錫洛書 法而陳之 洪範是也〕"라는 내용을 가리킨다. 한사 한나라의 사기, 즉 《한서(漢書)》를 가리킨다. 그 모양을 본받는다 미상. 9를……된다 〈홍범〉 장의 집전에서 구궁(九宮)의 수를 두고 "9를 머리에 이고 1을 아래에 밟으며, 왼쪽이 3이고 오른쪽이 7이며, 2와 4가 어깨가 되고 6과 8이 발이 된다. 이는 낙서의 수이다.[戴九履一, 左三右七, 二四爲肩, 六八爲足, 洛書之數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고요한……있다 명대의 전예형(田藝蘅)은 〈혼고시천역(混古始天易)〉에서 "태극의 처음에는 동정이 없다가 처음으로 동정할 때 천지간에 엉긴 것이 점차 녹아내리고 형체를 갖추어 점차로 운동을 하기 시작한다. 양은 동하여 위로 올라가 동하는 가운데 음이 있고, 음은 고요하여 아래로 내려가 정하는 가운데 양이 있다."고 하였다. 뜻은……지킨다 맹자가 공손추와 부동심(不動心)을 논하는 대목에서 말하기를 "의지는 기운을 부리는 장수이고, 기운은 몸을 채우고 있는 것이니, 의지가 첫째요 기운이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그 의지를 확고히 세우고도 또 그 기를 거칠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夫志氣之帥也 氣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持其志 無暴其氣〕"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뜻은 도로써 안정시킨다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에 이긴 뒤에 서려(西旅)에서 큰 개를 공물로 보내오자, 태보(太保)였던 소공이 〈여오(旅獒)〉를 지어 왕에게 경계한 내용 중 하나로, "뜻을 도로써 편안하게 하시며, 말을 도로써 대하소서.[志以道寧, 言以道接.]"라고 하였다. 《書經 旅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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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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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姑閣日前正采君許口喝想入聆矣八月四日扶庶第二0五五號堤堰水害復舊工事關ᄒᆞᆫ件은貴面亦當接見矣至於此面溢流石之頹潰等不但以應急修理而止요必要其貯金中應用乃已也以此以彼間如是拖長甚是關慮處則卽爲完決爲好爲好餘爲此不備八月五日弟辛圭錫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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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기회일에게 보냄 與奇會一 해가 바뀌는 때를 맞아 형의 체후가 약간 편안하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새해가 시작된 이래로 다시 편안한 일상을 회복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어떻게 달래고 계십니까? 형을 향한 그리움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의림(義林)은 지난번에 길을 나서지 못하여 이어서 설을 쇤 뒤 열흘 안으로 한 번 가서 마음에 쌓아둔 몇 가지 생각을 여쭈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몸의 병과 집안의 근심이 겹겹이 더해지고 가시지 않아 또 그대로 주저앉게 되었으니 한탄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의 거취는 근래 혹시 들으셨고 궐리(闕里)47)의 회합은 과연 또한 잘 이루어졌는지요? 형께서 장차 열읍에 통지로 알려 열읍에서 1만 명까지 연명(聯名)으로 상소하게 하려고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형의 진심 어린 정성이 사람을 감격하여 눈물짓게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향상(向上)의 뜻을 갖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이적(夷狄)으로 변한 자가 많습니다. 일제히 한목소리를 내고 분기(奮起)하여 모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있어 사방에서 반드시 빼앗고자 하는 땅이 아니며 반드시 빼앗고자 자는 오직 왜(倭)뿐입니다. 왜(倭)가 우리를 향해 침을 흘린 것이 어찌 일조일석의 일이겠습니까. 근래 우리가 쇠약해진 것으로 인해서 제멋대로 틈을 엿보아 침입하더니 개화(開化)라는 구호를 내세워 30여 년에 걸쳐 이루지 않은 계책이 없고 이루지 못한 뜻이 없었습니다. 온 나라의 병사를 쓸어버리고 온 나라의 재물을 다 소진하였으며 청나라 군대를 요동(遼東)으로 내치고 러시아인을 여순(旅順)에서 막아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이웃 나라를 보살피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단지 우리의 원조를 끊고 우리 땅을 뺏으려는 것입니다. 수많은 비용을 소모하고 여러 해의 노고를 거듭하여 산을 뚫고 골짜기를 메꾸어 철로(鐵路)를 깔고 전기선을 설치한 것도 어찌 통상(通商)을 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장차 판도(版圖)를 마련하고 관원(官員)을 두어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기 위한 계책입니다. 겸병(兼倂)하여 하나로 합치는 것이 그들의 커다란 욕망이고 이미 정해진 계책이니, 3천 리 강토는 이제 그물 안으로 들어간 물고기 신세입니다. 아득히 먼 시골에서 올린 소장(疏章)과 각 나라의 담판이 어찌 저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흔들 수 있겠습니까. 진(晉)이 화하(華夏)의 맹주가 되었는데도 계씨(季氏)에게 뇌물을 받아 소공(昭公)이 돌아오지 못하고 건후(乾侯)에서 죽게 하였습니다.48) 이제 절역의 오랑캐 무리가 유독 왜노(倭虜)의 뇌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미 그들의 뇌물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우리나라 백성과 선비들의 여론은 거리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뜻하지 않은 행운은 전혀 없습니다. 또 형께서 매번 크게 탄식하면서 "아무개, 아무개는 모두 나라를 위해서 죽었건만, 나만 죽지 않았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충의(忠義)로 인한 울분에 격앙되어 편안히 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죽을 수 있는 날은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꼭 그때 죽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겠습니까. 예전에 선생을 모실 때 "문산(文山)과 첩산(疊山)49)은 어찌하여 나라가 망하고 도성이 점령되는 날에 죽지 않고 도리어 몇 년 뒤 자살하라는 명을 받고 부름을 받은 날에 죽었습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선생께서 "처의(處義)가 어떠한지를 볼 뿐이다. 어찌하여 꼭 죽음이 이르고 늦음을 따지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형께서도 역시 일찍이 들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곽면우(郭俛宇 곽종석(郭鍾錫))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여 신하로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리를 자부하고 그날 대궐로 달려 나갔지만 끝내 낭패를 당하고 돌아와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거울로 삼을 만한 하나의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에는 확정한 계산이 없고 일에는 좋은 계책이 없으면서 우선 눈앞에 닥치는 일만 따르기에 힘을 쏟아 시선을 가리고자 한다면 이러한 지경에 이르지 않는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의리(義理)는 반착(盤錯)50)의 상황에서 잘못되기 쉽고 지기(志氣)는 전패(顚沛)되는 곳에서 버티기 어렵습니다. 바라건대 노형(老兄)께서는 이른지 늦은지 따지지 말고 진퇴를 따지지 말며 오직 자신의 뜻을 잃지 않고 자신의 절조를 굽히지 않는 것을 궁극의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옛날에는 나라가 망했을 경우에 죽을 수 있는 의리가 한가지라서 신하는 사직이 망하는 날 죽었습니다. 지금은 나라가 망할 경우에 죽을 수 있는 의리가 두 가지라서 신하는 사직이 망했을 때 죽고 선비는 사람과 금수로 갈릴 때 죽습니다. 그러나 사직이 망했을 때는 간혹 죽지 않고도 여전히 절조를 온전히 하는 자가 있지만, 사람과 금수로 나뉠 때는 죽지 않고 사람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금수의 구별은 사직의 멸망보다 중요하고, 도를 위해 죽는 의리는 사직을 위해 죽는 절의보다 중요합니다. 문을 잠그고 담 구멍을 막아놓은 채 나의 복식(服飾)을 입고 나의 두발(頭髮)을 보존하다가 치의(緇衣)를 입고 머리를 깎는 재앙51)이 아주 가까이 이른 뒤에 자신의 분수를 지키더라도 어찌 늦겠습니까. 제가 자처하는 생각은 이와 같습니다만, 득실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변고와 험액(險阨)을 당하여 더불어 마음을 얘기하고 의리를 강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오직 노형(老兄)만 우러러볼 뿐입니다. 바라건대 자세히 일깨워주어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돌아가는 은혜를 아끼지 않으시기를 천 번 만 번 바랍니다. 면암(勉菴)은 근래 상황이 어떠합니까? 연재(淵齋)52)는 서울에 간 지 여러 달이 지났으니 또한 이미 돌아왔겠지요? 전우(田愚)도 지난번에 상소했다고 합니다. 전날 출가하지 않았던 여식(女息)은 이제 시집을 가서 다른 집안의 며느리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부모가 괴이한 증상, 급작스러운 질병이 생겼을 경우 발광(發狂)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건만, 자식이 된 자가 수수방관하다가 기식(氣息)이 끊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질환을 물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의리이겠습니까. 한탄스럽습니다. 노신암(盧愼庵)53)은 요사이 거조(擧措)가 어떠합니까? 근래에는 직지(直指)54)의 위엄은 산읍(散邑)의 임시 아전에게도 행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왕조의 위엄을 떨치지 못하고 있으니 과연 나라에 평온함이 찾아오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온 나라 안에 비분강개하여 신포서(申包胥)55) 처럼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있는 자가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니 나라를 보존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실타래 같은 희망이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만, 또한 하늘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臨歲回便。聞兄體薄有不安之節。未審開歲以來。趁復安常否。時憂世慮。何以慰遣。傾溯無任。義林曩行未就繼以歲後旬內。擬爲一造。以質多少積蘊矣。以身恙家憂。層疊不霽。亦未免見停。歎恨何爲。艾山去就。近或得聞。而闕里之會。果亦利就否耶 。聞兄將欲通喩列邑。令列邑限萬人爲聯疏之擧。其苦懇血心。令人感涕。然民無向上者久矣。人化爲狄者多矣。其能齊聲奮聚。有幾人乎。我國僻在海隅。非四方必爭之地。而必爭者。獨倭也。倭之垂涎於我。豈一朝一夕哉。近因我之衰弱。肆然闖入。號爲開化。三十餘年。計無不遂。志無不得。掃一國之兵。傾一國之財。逐淸軍於遼東。距俄人於旅順者。豈恤隣爲哉。特以絶吾援而奪吾地也。糜距萬之費。積數年之勞。穿山塡壑。置鐵路而設電繩者。亦豈通商爲哉。將以設版圖置官員。爲朝往夕來計也。兼倂合一。此其所大之欲。已定之計。而三千里疆域。今爲入綱之魚矣。窮鄕之疏章。各國之談判。何足以動彼之一髮哉。晉爲華夏之盟主。而受季氏之賂。使昭公不返。而卒於乾侯。今安知絶域介鱗之類。獨不醉於倭虜之賂乎。旣醉其賂。則我國之民論士論。亦無足憚矣。以此以彼。絶無萬一之幸。且聞兄每太息曰。某某人皆死於國。我獨不死。柰何柰何。此固忠憤所激。按往不得處也。然前頭可死之日。想必不少。何必以不死於曩時爲可恨也。昔侍先生問。文山疊山。何不死於國亡城敗之日。而乃死於數年後賜死被召之日耶。先生曰。惟視處義之如何。何必以死之早晏爲計耶。想兄亦曾聞之矣。郭俛宇以主辱臣死自許。而卽日赴闕。竟未免狼狽而歸。其爲失望大矣。此非今日吾輩之一副前鑑也耶。心無定算。事無良策。姑欲勉循目前。以塞視瞻。則其不至於此者。幾希矣。義理易失於盤錯之際。志氣難持於顚沛之地。願老兄不計早晩。不計進退。惟以不失吾意。不屈吾節。爲究竟之策。如何。古之亡國也。可死之義一。臣死於社稷之亡。今之亡國也。可死之義二。臣死於社稷之亡。士死於人獸之判。然社稷之亡也。則或有不死而猶全其節者。人獸之判也。則未有不死而可以爲人者。此人獸之判。重於社稷之亡。殉道之義。大於殉社之節也。杜門塞竇。衣吾服。存吾髮。以至緇削之災。切近床膚而後。爲之自靖。亦豈爲晩乎。此區區自處之意如此。未知得失何居耶。當此變險。可與話心可與講義者。惟老兄是仰。幸細細示及。不惜惠好之歸。千萬千萬。勉菴近狀何如。淵齋赴京有月。亦已回轅否。田愚向亦上疏云。未知前日未嫁之女。今爲已嫁之婦耶。如父母有怪證急疾。發狂號呼。而爲子者。袖手恬視。至於氣絶而後。乃問其疾耶。此何義理。可嘆可歎。盧愼庵近日擧措何如。近來直指之威。不能行於散邑之一權吏。王靈之不振如此。未知果能使魯有鳩乎。擧國之內。想不無忿憤。慷慨。可與有爲如申包胥者。則安知存楚之日。必無其時乎。一縷懸望。惟在於此。而亦未知天意之何如也。 궐리(闕里) 노성(魯城)의 궐리사(闕里祠)를 가리킨다. 노성은 현재의 충청남도 노성면이다. 진(晉)이……하였습니다 춘추 시대 노나라 계씨(季氏)가 전횡을 저지르자, 소공(昭公)이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소공 25년에 망명하여 제(齊)나라로 갔다가 28년에 진(晉)나라로 가서 건후(乾侯)에 머물다가 32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 32년 조 참조. 문산(文山)과 첩산(疊山) 송나라가 원나라에게 멸망당했을 때 절의를 지켜 원나라에 벼슬하지 않은 문천상(文天祥, 1236~1282)과 사방득(謝枋得, 1226~1289) 두 사람을 가리킨다. 문천상의 자는 송서(宋瑞)ㆍ이선(履善), 호는 문산이다. 이종(理宗)과 익왕(益王)을 섬겼고, 임안(臨安)이 함락된 뒤에도 송나라 단종(端宗)을 받들고 근왕군을 일으켜 원군(元軍)과 싸웠으며, 위왕(衛王) 때 조양(潮陽)에서 패전하여 원군의 포로가 되어 연경에 3년 동안 억류되었다. 원나라의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신의 충절을 나타내고 죽었다. 《宋史 巻418 文天祥列傳》 사방득의 자는 군직(君直), 호는 첩산이다. 1256년에 문천상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였다. 직언을 좋아하여 가사도(賈似道)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났다가 1267년에 사면되었다. 1275년에 신주(信州)를 맡았을 때, 원나라 군대가 침공하여 성이 함락을 당하자, 당석산(唐石山)에 은둔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살았다. 송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 조정에서 누차 출사를 권했으나 굳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원나라 지방관이 억지로 호송하여 북경에 억류해 두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단식하다가 죽었다. 문집에 《첩산집》이 있다. 《宋史 卷425 謝枋得列傳》 반착(盤錯) '반근착절(盤根錯節)'의 준말로, 뿌리가 뒤엉키고 가지가 어지러이 교차된 것을 말하는데,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비유한다. 후한(後漢)의 우후(虞詡)가 "반근착절의 상황을 만나지 않는다면 칼이 예리한지 무딘지 분간할 수가 없으니, 지금이 바로 내가 공을 세울 때이다.【不遇盤根錯節, 無以別利器, 此乃吾立功之秋.】"라고 말한 고사에서 나왔다. 《後漢書 卷58 虞詡列傳》 치의(緇衣)를……재앙 나라가 망해 치의를 입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호이다. 송병선은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으로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큰아버지 송달수(宋達洙)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12월 30일에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연재집》이 있다. 노신암(盧愼庵) 신암(愼庵)은 노응규(盧應奎, 1851~1907)의 호이다. 노응규의 자는 성오(聖五),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이다. 허전(許傳, 1797~1886)의 문인이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7)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장악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과 내부의 반란으로 성이 함락되자, 아버지와 형은 살해되고 가산이 몰수되는 비운을 겪었다. 1902년 한때 조정의 관직을 맡은 적이 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다시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 결국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직지(直指) 지방에 파견되는 어사를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처음으로 조정에서 각 지방의 정사를 전담할 관원을 두어 그를 직지사자(直指使者)라 칭했던 데서 온 말인데, 그에게 수의(繡衣)를 입혔던 데서 직지수의사자(直指繡衣使者)라고도 칭하였다. 신포서(申包胥)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이다. 오자서(伍子胥)가 오(吳)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했을 때, 신포서가 진(秦)나라 조정에 가서 7일 밤낮을 통곡하며 호소한 결과, 구원병을 얻어 국난을 타개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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昨拜未穩今惠尤感 示事謹悉謄本籍一通更呈 照收如何如何視此者人異勤報告郡督促之必不遲緩矣梁鍾根所托望須另圖俾生光紫切仰耳餘擾不備候謝三月十九日弟辛圭錫拜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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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九年庚午三月十二日幼學 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䖏伏在西道秩悚字畓五斗落只所耕十負五束㐣以再字畓五斗落相換次加錢十三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二丈右人前永永許給是矣日後若有爻象則以此憑考事畓主自筆朴永秀[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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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이(理)는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만, 또한 신(神)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神)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또한 무엇입니까. 반드시 낱낱이 이해하여 바로 알아야 비로소 이(理)자의 본래 뜻을 틀림없이 깨닫게 됩니다. '신명(神明)' 두 글자에 대해서는 더욱 이(理)라고 말할 바가 아니니, 《맹자집주(孟子集註)》와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 이른바 '신명(神明)을 이(理)라고 보지 않은 것이 오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허령(虛靈) 아래에 단지 '이(以)'자만을 붙였는데, 그 위에 글에 이미 '소(所)'자가 있으므로, 쓸데없이 반복할 필요가 없으니【疊牀】,17) 소이(所以)의 뜻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은 본래 분명하게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억지로 소(所)자의 유무를 끌어다가 이(理)가 되고 기(氣)가 되는 증좌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나의 벗인 그대의 견해로 본다면, 뜻밖에 천착하다가 전하여 알게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덕(德)으로 도(道)를 응집하고 의(義)로써 이(理)에 처하여, 이(理)로 이(理)를 갖추었다는 설은, 도와 이는 사물에 산재해 있으나 덕과 의는 심상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란 것과 같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응집하다라고 하였고, 처하다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이(理)를 갖추는 바에 지반(地盤)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께서 말씀하시길 "성인께서 성(性)을 논하심에 심(心)을 인하여 발하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하였고, 또한 말씀하시길, "기(氣)가 아니면 형체가 없으니, 성(性)이 부여하는 바는 없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국자의 물을 저장하려고 할 때 그릇이 아니면 불가한 것이니, 어찌 물로써 물을 저장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항마다 낱낱이 받들어 답할 겨를이 없으나, 보내온 편지를 보니 나의 설을 주재(主宰)의 권한이 오로지 기(氣)에 귀속된다고 되어 있는데, 나의 설이 어떻게 그대에게 전달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신명(神明)을 이(理)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까. 신명이 비록 이(理) 자체는 아니지만, 이 이(理)의 호위병이요, 종복이니, 이(理)가 주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신하는 직책을 수행하여서 밥을 나르고 낭관을 때리는 일을 직접 행한다면, 그 위세가 나날이 줄어들어서 끝내 주재함을 잃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자(朱子)의 「왕장유에게 답하는 편지【答汪長孺書】」에 이르기를 "신령(神靈)이라는 두 글자는 성(性)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자(告子)가 말한 '타고나는 것이 성이다'라는 말과 불교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작용이 바로 성이다'라는 말은, 그 잘못이 바로 여기에 떨어졌기 때문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그대가 발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고통이 심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일찍이 편작과 화타【扁華】18)와 같이 일깨워주시니, 그 정성스러운 마음에 매우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편작과 화타는 갑자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만 이렇게 보내주신 편지 한 통은 아무래도 사양할 수 없으니, 편작과 화타의 좋은 약제가 될 것입니다. 다만 혼폐함이 심하여서 끝내 병을 키우고 치료를 기피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듯하니, 두렵고 두렵습니다. 선덕(先德)이 말하길 "신(神)은 생각으로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또한 "천지의 신묘한 변화를 궁구하여 아는 것【窮神知化】은 생각하고 힘쓰는 것만으로는 미칠 수 없다"19)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들과 같은 역량으로 어찌 감히 그 경지를 터득하겠습니까. 그러나 각자가 학설을 내세우고 억지로 변별하여 이에 이르면, 그 안목이 있는 자들이 옳지 못한 의논을 펼치는 것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도라는 것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라는 경문에 대한 주장의 장구(章句)에 "성의 덕은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性之德而具於心】"20)라고 하였는데, 회락(會洛)21)은, 성의 덕은 바로 도(道)의 체(體)를 말한 것이라 여겼으니, '성(性)' 다음에 또한 '덕(德)'자를 더한 것은 도의 체에 나아가서 극언(極言)하여 찬미(讚美)한 말입니다. 철원(澈源)22)은 덕(德)은 득(得)의 의미이고 결료(結料)의 뜻이라고 여겼으니, 아마도 도의 전체를 말한 듯합니다.성의 덕은 이른바 성의 도(道), 성의 이(理), 성의 선(善)과 같은 것입니다. 글에 의거하여 읽어 나가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찬미(讚美)라고 한 것은 진실로 마땅치 않고, 결과(結窠)라고 한 것도 또한 그 필연 됨을 모르겠습니다.회락(會洛)이 '미발일 때에 기질의 성(性)이 있다고 한다면 불가하지만, 기질의 성이 혹 미발일 때가 있다고 한다면 가하다'고 하였는데, 기질이 우연히 법도를 따른 경우입니다. 철원(澈源)이 '이미 기질의 성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미발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미 미발이라고 한다면 곧 기질의 성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기질의 성이라는 것은 혹 미발일 때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또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우연히 순박함을 회복한 것은 바로 본래 그러한 것이지, 기질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회락(會洛)이 '호랑이의 인(仁)은 가히 본연의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성의 본연이라고 하면 불가하다'라 하였고, 철원(澈源)은 '호랑이는 단지 인(仁)만을 알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말한다면 진실로 옳으나, 본연의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을 성의 본연이라고 한다면 불가하다'라고 하였는데, 그 인(仁)이라는 것이 성의 본연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노사(蘆沙)23) 선생이 이른바 개와 소가 다르지만 저들 또한 참되다【犬牛異處彼亦眞.】24)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만약 성의 본연이 아니면 이 사물들이 무엇으로부터 나온단 말입니까.철원이 '사람의 사지와 골격에는 정해진 수가 있고, 나무의 가지와 줄기에는 정해진 수가 없다'고 한 것은, 그 바름과 그름, 통함과 막힘을 구분한 것입니다. 회락이 '동물은 모두 정해진 수가 있는데, 식물은 모두 정해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수(鳥獸)는 정해진 수가 있고, 초목은 정해진 수가 없으며, 일월성신은 정해진 수가 있고, 산악유천은 정해진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번잡한 기(氣)는 정말로 그러합니다.회락이 '《중용》 서문에서 "두 가지가 방촌 사이에 뒤섞여 있어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二者雜於方寸之間 不知所以治之】"라고 하였는데, 선유(先儒)는 치(治)자를 논하여서 도심(道心)이 항상 일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 하여서, 즉 치(治)는 그 도심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으니, 이 설은 옳습니다. 철원은 이미 잡(雜)이라고 하였으면, 치(治)자는 잡(雜)자가 되어 발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명백합니다.칠정(七情) 또한 성악이 섞인 것이기 때문에 치(治)자를 배치한 것입니다. 理固不可以言神。亦容有不能不言神處。其不可以言神是如何。其不能不言神。又是如何。須一一理會得。乃於理字本旨。見得不差。至若神明二字。尤非所以言理。孟子集註及大學或問所謂神明不可作理字看久矣虛靈下只着以字。以上文已有所字。不必疊牀。而所以之義。自足故也。虛靈神明。本非判然二物。而强引所字有無。以爲爲理爲氣之證佐耶。以吾友高明之見。而不意穿鑿傳會。乃如是也。且德以凝道。義以處理。以理具理之說。不同道與理散在事物。而德與義。以心上說。故謂之凝。謂之處。若理之所具。非有地盤則不可。是故。朱子曰。聖人論性。無不因心而發。又曰。非氣無形。性無所賦。此可見也如貯一勺水。非器則不可。豈有以水貯水之理乎。今不暇逐條奉答。但來喩以鄙說謂主宰之權。專歸之於氣。未知鄙說何如。而至於乃爾耶。抑以神明謂非理故耶。神明雖非理。而乃是此理之輿衛也。僕役也。則理之爲主宰也。顧不自若矣乎。若君行臣職。而傳餐撞郞。親自爲之。則吾恐其威勢。日替而不得爲主宰矣。朱子答汪長孺書曰。神靈二字。非所以言性。告子所謂生之謂性。佛者所謂作用是性。其失正墮於此。不可不深究也。此言似爲今日賢者而發也。閔我之加痛。而喩以早尋扁華。其意甚感。然扁華不可遽得。而只此垂喩一幅。恐不得辭爲扁華之良劑也。但昏蔽之甚。竟不免爲護疾忌醫之歸。悚悚。先德曰。神不可致思。又曰。窮神知化。非思勉之能强。況以吾輩力量。豈敢覰却其藩籬也。然而梗自立說。强辨至此。其貽有眼者。不韙之議。想亦不少矣。道也者。不可須臾離。章句性之德而具於心。會洛以爲性之德。是說道之體。而性下又加德字者。就道之體。極言而贊美之辭。澈源以爲德得也。是結料之義。蓋言道之全體也。性之德。如所謂性之道性之理性之善云爾。據文讀過。其義自見。謂之贊美。固未穩。謂之結窠。亦未知其必然也。會洛以爲謂未發有氣質之性則不可。而氣質之性。或有未發時則可也。氣質之偶然循軌處是也。澈源以爲旣曰氣質之性。則當不可言未發。旣曰未發。則便不可言氣質之性。謂之氣質之性。或有未發時。亦似未安。偶然回淳。便是本然。着氣質不得。會洛以爲虎狼之仁。可以見本然之理。無乎不在。而謂性之本然則不可。澈源以爲以虎狼之只知仁而不知他言則固可。曰本然之理無乎不在。而謂之性之本然則不可。然其仁者。則非性之本然而何。蘆沙先生所謂犬牛異處彼亦眞者。此也。若非性之本然。則此物何從出來。澈源以爲人之肢骸。有定數。木之枝幹。無定數。蓋其正倒通塞之分。會洛以爲動物皆有定數。植物皆無定數是故鳥獸有定數。而草木無定數。日月星辰有定數。山岳川流無定數。繁氣固然。會洛以爲中庸序二者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先儒論治字。以爲道心常爲一身之主者。卽治也非治其道心也。此說是。澈源以爲旣曰雜。則治字是爲雜字而發。蓋言其明辨也。七情亦善惡雜焉。故下治字。 첩상(疊牀) 첩상가옥(疊床架屋)의 줄인 말로, 침대 위에 침대를 겹쳐 놓고, 지붕 위에 지붕을 얹는다는 뜻이다. 쓸데없이 반복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입니다. 《세설신어》 등에서 유래되었다. 편화(扁華)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명의인 편작(扁鵲)과 화타(華佗)를 말한다. 《성호선생사설(星湖先生僿說)》 24권에 나오는 말이다. 도라는 것은 …… 갖추어져 있다 《중용장구》 제1장 제2절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도는 일용사물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이치입니다. 모두 성의 덕으로서 마음에 갖추어져 있어서 사물마다 있지 않음이 없고 때마다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때문에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떠날 수 있다면, 어찌 '솔성'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所以不可須臾離也. 若其可離, 則豈率性之謂哉?】"라는 내용이 보인다. 회락(會洛) 조선 말기 유학자였던 양회락(梁會洛, 1862~1935)로,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철원(澈源) 조선 말기 유학자인 황철원(黃澈源, 1878~1932)으로, 자는 경함(景涵)이고, 호는 중헌(重軒)‧은구재(隱求齋)입니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2년(광무 6) 전라남도 구례(求禮) 천은사(泉隱寺)에서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과 강론을 벌였고, 스승 정재규의 권유로 「납량사의기의추록변(納凉私議記疑追錄辨)」 등을 지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리설(性理說)을 논박하였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분통하게 여기며 후학들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1932년 6월 20일 광주(光州)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헌집(重軒集)》 10권 4책이 있다. 노사(蘆沙)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기정진(奇正鎭, 1798~1879)으로, 자는 대중(大中)이고, 호는 노사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8, 9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3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증광시(增廣試)에 낙방하자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大家)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정신적 지주였다. 대표적인 저술로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노사집(蘆沙集)》이 있다. 개와 소가 다르지만 저들 또한 참되다 《노사집(蘆沙集)》 권2 〈오상영기회정(五常詠寄晦亭)〉에, "순 임금과 도척이 똑같이 사람으로서 가장 귀하고, 개와 소가 다르지만 저 또한 온전합니다. 다만 이 자의 진면목을 잃음으로 인연하여, 성 중에 나아가 헛되이 연구하느라 애쓴다.【舜跖同時吾最貴, 犬牛異處彼亦全. 只緣理字失眞面, 枉就性中費究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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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우리 경립(景立)이 병에서 나은 이후로 항상 한번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그럴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 정의(情義)가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말하기 어려운 신고(身故) 때문입니까? 슬픈 마음은 또한 단지 구구한 모임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력이 있을 때 문장을 하여 갑자기 잊어버리는 데 이르지는 않았는지요? 눈앞의 잡다한 일에 얽매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영남에서 보낸 편지는 일전에 월송(月松)33)이 가지고 왔는데, 편지를 통해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의 근황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 통의 서찰을 부쳤는데 수령하셨는지요. 선부군(先府君)의 종제(終制)34)가 멀지 않은 시기에 닥쳤으니 풍수(風樹)35)의 추모하는 마음이 끝이 없겠습니다. 이처럼 천하고 비루한 자에게도 평생 서로 이어져 두텁게 대해주심에, 며칠이나 지났다고 상생(象生)36)하는 곳을 또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 줄의 글을 지어서 영결(永訣)하는 끝없는 뜻을 가서 고하고자 합니다만 몸이 병마(病魔)에게 희롱을 당하고 있으니 과연 그럴만한 여유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의림(義林)은 봄 이후로 근력을 점점 빼앗겨서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는 듯이 지금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마치 매우 늙어서 심한 병에 걸린 사람과 같으니, 평생의 지업(志業)을 한 푼이라도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경립(景立)은 이때에 미쳐 점검하고 성찰하여 저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自吾景立出病以後。常欲一省而末由也。此其情義之不足耶。身故之難狀耶。悲傷之私。又不但爲區區會聚之久曠也。但未知餘力鉛槧。不至頓忘否。幸不以目前小小。惹絆捱過時日如何。嶺札。日前自月松來到。而知溪艾諸丈近節之安耳。四札付去。考領也。先府君終制。隔在不遠。風樹感慕之情。想無涯極。如淺陋者。係在平生相厚之地。而過了幾日。則象生之所。亦不得以見矣。擬以數行文。往告永訣無窮之意。而未知身戲病魔。果爲之饒貸否也。義林自春以來。筋力漸奪。如微雨漬衣。至於今日。如極老極病之人。而其於平生志業。無一分成就。是爲慨然耳。願景立趁此提省。毋至如此生也。 월송(月松) 이기환(李基煥, 1904~?)이다. 호는 월송(月松)이고 본관은 전주(全州), 거주지는 영광(靈光)이다. 기우만(奇宇萬)과 이종택(李鍾宅)의 제자이다. 종제(終制) 담제(禫祭)를 마치는 것을 가리킨다. 풍수(風樹)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상생(象生) 생전에 망자(亡者)가 사용하던 것들을 사용하는 등, 망자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의식을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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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지난번에 그대의 당숙(堂叔)께서 돌아가신 뒤로 그대로 막연하게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면서 상복을 입고 지내는 정황이 좋으며, 함애(咸哀)38)도 무양(無恙)하게 지내며 책을 읽고 있는지요? 양친이 모두 잘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은 복 있는 집안의 운수라고 할 것이지만 순식간에 기울어져 이와 같은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모든 일들은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어버이를 잃은 어린 것들을 어루만져주고 돌보아주십시오. 경립(景立) 또한 한 층 세상의 풍파를 겪게 되었습니다. 다만 오늘날 경립의 정세(情勢)는 그 부담이 실로 나머지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선친(先親)께서 부탁하신 뜻과 가문이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계책 및 사우(士友)들의 기대가 그대의 한 몸에 모여들었으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온갖 바쁜 일이 수없이 있어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책을 읽는 한 가지 일은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모쪼록 바라는 것은 1부(副)의 규구(規矩)를 뽑아 정리하여, 몸과 집안을 가장 잘 다스리는 계책으로 삼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의림(義林)은 병든 몸에 실낱같은 목숨이 붙어 있어 날마다 고단한 상황으로39) 나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다소간 자신을 책려(策勵)하여 구업(舊業)을 정리하여 만에 하나라도 뒤미처 보완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매번, "내 이럴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하였다."40)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슬픔과 한스러움이 마음속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경립은 나를 전철 삼아 경계하기를 바랍니다. 向者令堂叔返駕後。信息隨以漠然。不審重省下持服衛重。咸哀無恙讀字否。俱存無故。福家氣數。轉眄之頃。至於如此。人生萬事。有難料測撫孤恤哀。景立亦添一層世故矣。但今日景立情勢。其擔負。實有異於餘人者。先親付託之意。門戶禦侮之計。士友期待之望。萃於一身者。爲何如耶。雖百忙千撓之中。而讀書一事。斷不可已。望須折斷得一副規矩。以爲身家究竟之計如何。義林病軀殘喘。日就卷婁。雖欲策理多少。以爲追補萬一之地。而不可得。每讀知我如此。不如無生之語。而不覺悲恨塡中。幸景立視爲前車也。 함애(咸哀) 상중에 있는 조카를 가리킨다. 고단한 상황으로 원문은 '권루(卷婁)'인데, 외물을 좇아 자신의 심신을 고되게 만드는 것이다. 《장자》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이럴 …… 못하였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초지화(苕之華)〉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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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勿菴【白會洙】會干墨齋 新年三日一奇遊。白首相看洗玉舟。淸夜欲闌春意動。胸中氷炭片時休。十載歸來話舊遊。逢君披豁對虛舟。人生那得乘風翰。倏忽東西遇境休。人生太半彀中遊。山怕摧車水覆舟。歲暮方尋平易路。無思無慮日休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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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산을 유람하는 제군을 보내며 送諸君遊淨土山 일곱 봉우리 우뚝우뚝 낮 구름도 걷히니 七峯兀兀午雲晴오르기도 전에 먼저 눈이 홀연 밝아지네 未陟先應眼忽明큰 들이 북으로 통해 하늘의 바람 차갑고 大野北通天飃冷세 산은 서쪽에 접해 기이한 향기 맑도다 三山西接異香淸예로부터 신령한 경계는 원래 주인 없는데 古來靈境元無主누가 선종으로 억지로 이름을 지었는가371) 誰把禪宗强錫名이곳이 예전부터 유람하는 곳이라 했으니 云是曾年遊賞處오늘 기문을 지어 제군의 가는 길 보내네 今朝題記送君行 七峯兀兀午雲晴, 未陟先應眼忽明.大野北通天飄冷, 三山西接異香淸.古來靈境元無主, 誰把禪宗强錫名.云是曾年遊賞處, 今朝題記送君行. 누가 …… 지었는가 산의 이름이 불교에서 말하는 '정토(淨土)'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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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더위 속에 박근호ㆍ김용락 군과 함께 짓다 苦熱中 與朴君根浩ㆍ金君庸洛 共賦 폭염이 이글이글 금오492)가 노한 듯하니 虐炎赫赫怒金烏칡베 옷과 등나무 적삼에 땀이 스며 더럽네 絺服藤衫汗透汙대지가 큰 화로 같으니 응당 돌이 갈라지고 大地洪爐應石泐열흘 넘는 심한 가뭄에 벼가 마르니 어쩌랴 彌旬亢旱柰禾枯차가운 비로 타는 땅을 씻어주기 원하나니 願將冷雨洗焦土어떻게 가벼운 바람 타고 옥도로 오를까493) 安得輕風冲玉都월학 -월산과 학전은 김군과 박군의 거주지이다.- 이 나를 흥기시켜 가슴을 맑게 하고 月鶴起吾淸膈抱씩씩한 글이 용솟음치니 용 잡는 솜씨494) 보겠네 健詞水湧見龍屠 虐炎赫赫怒金烏, 絺服藤衫汗透汙.大地洪爐應石泐, 彌旬亢旱柰禾枯.願將冷雨洗焦土, 安得輕風冲玉都.月鶴【月山鶴田金朴所居】起吾淸膈抱, 健詞水湧見龍屠. 금오(金烏) 태양의 별칭이다.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있다는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옥도로 오를까 천제(天帝)에게 가서 비를 내려주도록 하소연하겠다는 뜻이다. '옥도(玉都)'는 도교에서 말하는 천제(天帝)의 거소이다. 용 잡는 솜씨[龍屠] 뛰어난 재능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주평만은 지리익에게서 용 잡는 법을 배웠다. 천금의 가산을 탕진하여 3년 만에 기술을 이루었으나, 그 교묘한 기술을 쓸데가 없었다.[朱泙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 三年技成, 而無所用其巧.]"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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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종제 성술에게 보이다 示三從弟聲述 어지럽게 흔들리는 풍조가 폭풍 같은 형세라도 紛盪風潮勢似飇단전63)의 한 기둥을 어찌 흔들 수 있으랴 丹田一柱豈能搖문채를 싫어하니 도리어 홑옷을 입는 것이고64) 惡文還可單衣絅담박함을 좋아하니 어찌 꼭 오미로 맛을 내랴 嗜淡何須五味調참된 공부를 증험함은 저문 밤에 알겠고 驗得眞工知暮夜근본 기운을 회복함은 새벽 아침에 보겠네65) 復來本氣見平朝이 중의 지극한 즐거움을 그대 만약 안다면 此中至樂君如識옥퉁소 소리를 듣는 선가를 바라지 않으리라 不願仙家聽玉簫 紛盪風潮勢似飇, 丹田一柱豈能搖.惡文還可單衣絅, 嗜淡何須五味調.驗得眞工知暮夜, 復來本氣見平朝.此中至樂君如識, 不願仙家聽玉簫. 단전(丹田) 본래는 도가(道家)의 용어로 이마, 명치, 배꼽의 삼단전(三丹田)이 있는데 여기서는 마음을 가리킨다. 문채를……것이고 비단옷의 문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홑옷 안에 은은하게 감추는 것을 말하는데, 군자의 도리가 날로 은은하게 빛남을 비유한다. '경(絅)'은 홑옷이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참된……아침 인의의 마음을 잘 길러서 보존해야 한다고 경계한 것이다. '참된 공부'는 곧 유학의 공부를 말한다. '모야(暮夜)'와 '평조(平朝)'는 외물을 접촉하기 전인 밤중과 새벽에 생긴 본연의 맑은 기운을 비유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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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4 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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