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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新齋信從錄(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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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遊編 金平默 字穉章 號重庵 逸監役 淸風人崔益鉉 字贊謙 號勉庵 文參判 慶州人趙性家 字直敎 號月皋 逸監役 咸安人金祿休 字 號莘湖 逸監役 蔚山人金致煕 字章汝 號愛日堂 光山人梁相鼎 字德三 號月坡 濟州人洪承台 字士文 號道川 豐山人鄭河源 字 號小蠧 晉州人文秉煥 字三佐 號樂窩 南平人梁相輔 字學汝 號 濟州人鄭 字 號蕖史 延日人曺毅坤 字 號東塢 昌寧人閔 㙾 字 號土窩 驪興人宋鎭鳳 字致承 號思服齋 礪山人奇陽衍 字 號農巢 文校理 幸州人高鎭壽 字聖甫 號知足齋 長興人曺秉萬 字會一 號晦溪 昌寧人高濟寬 字 號敬軒 長興人高濟安 字贊文 號竹軒 生己丑 長興人裴相涉 字君邦 號隱谷 生庚寅 達城人文錫魯 字國瑞 號樂軒 生癸巳 南平人洪埰周 字卿佐 號鳳南 生甲午 豐山人金錫龜 字景範 號大谷 生乙未 金海人吳壽華 字泰仲 號松庵 生乙未 寶城人裴元道 字應甫 號建齋 生乙未 達城人安澈煥 字汝涵 號月山 生 竹山人李贄鎬 字東賢 號芝南 生丙申 光山人安仁煥 字益顯 號鰲山 生丙申 竹山人李承灝 字道敏 號醉湖 生丙申 光山人崔琡民 字元則 號溪南 生丁酉 全州人鄭時林 字伯彥 號月波 生丁酉 光山人李鍾柱 字君三 號鰕西 生丁酉 慶州人盧頎錫 字化中 號隱農 生丁酉 光山人金佑鍾 字乃善 號龍巖 生丁酉 光山人宋演植 字德裕 號溪隱 生丁酉 洪州人曺琪承 字景原 號石井 生丁酉 昌寧人朴璟鎭 字孝三 號默軒 生丁酉 密陽人閔膺鎬 字士善 號服庵 生 驪興人梁益煥 字重慶 號默養齋 生癸卯 濟州人朴準彩 字禹瑞 號德軒 生己亥 密陽人金冀泰 字學魯 號山北 生庚子 金海人南相參 字文賢 號龍庵 生庚子 宜寧人朴準珪 字英仲 號醉軒 生辛丑 密陽人裴鉉奎 字極瑞 號溪窩 生辛丑 達城人朴準觀 字敬仲 號五峯 生辛丑 密陽人趙性宙 字季豪 號月波 生 咸安人宋英植 字德順 號台隱 生壬寅 洪州人金時豐 字聖文 號鶴軒 生壬寅 光山人高 榥 字汝學 號止齋 生壬寅 長興人金萬源 字明恩 號莘溪 生壬寅 慶州人鄭載圭 字厚允 號艾山 生癸卯 逸參奉 草溪人洪祐錫 字文玄 號愚齋 生癸卯 豐山人金顯玉 字豐五 號山石 生癸卯 金海人金成斗 字弘琡 號退憂亭 生癸卯 金海人安澤煥 字汝恩 號三希堂 生甲辰 竹山人尹滋鉉 字亨三 號訥窩 生甲辰 坡平人鄭在洪 字敬之 號耕讀齋 生甲辰 河東人具文謨 字文淑 號松澗 生甲辰 綾城人高楧 字敬學 號忍齋 生甲辰 長興人鄭琦鉉 字致弘 號晩翠 生甲辰 河東人曺喜霖 字正暄 號隱巖 生甲辰 昌寧人程善泓 字致五 號栗隱 生甲辰 韓山人李承琮 字君五 號龍溪 生乙巳 光山人金榮祚 字處中 號竹堂 生乙巳 晉州人程忠根 字振元 號敬庵 生乙巳 韓山人金榮昇 字德仲 號智山 生乙巳 晉州人奇宇萬 字會一 號松沙 生丙午 逸參奉 幸州人朴麟鎭 字學中 號愚忍堂 生丙午 密陽人李承奎 字元白 號聽溪 生丙午 光山人徐復基 字元陽 號敬庵 生丙午 利川人朴準珏 字欽汝 號靜齋 生丙午 密陽人曺仁煥 字元弘 號病隱 生丙午 昌寧人梁在弘 字聖之 號農軒 生丙午 濟州人任台奎 字士範 號德庵 生丙午 長興人鄭昌林 字敬方 號九溪 生丁未 光山人高濟鍾 字聖擧 號 生丁未 長興人趙翼濟 字士彬 號 生丁未 咸安人文載轍 字善一 號三坡 生丁未 南平人吳繼洙 字 號難窩 生 錦城人金萬根 字汝化 號鍾庵 生 道康人金福泰 字聖重 號龜湖 生丁未 金海人金榮祿 字處國 號松庵 生戊申 晉州人鄭志萬 字敬老 號南狂 生戊申 河東人白灝寅 字允執 號蘭汀 生己酉 水原人林昌會 字 號遯齋 生己酉 平澤人朴準元 字止三 號德窩 生己酉 蜜陽人洪祐震 字漢瑞 號靜山 生己酉 豐山人吳駿善 字德行 號後石 生 錦城人朴東鎭 字頌瑞 號碧溪 生庚戌 密陽人奇東翼 字鳳汝 號晩翠 生庚戌 幸州人鄭樂圭 字孟三 號景山 生庚戌 慶州人閔致亮 字周見 號稽樵 生庚戌 文持平 驪興人鄭冕圭 字周允 號農山 生壬子 草溪人梁奎煥 字文五 號石塢 生壬子 濟州人文達煥 字德卿 號遯齋 生壬子 南平人孫永烈 字文叔 號白巖 生壬子 密陽人金奎源 字文賢 號謹齋 生壬子 慶州人尹滋宣 字興瑞 號藍溪 生壬子 坡平人裴柄鎭 字聖道 號竹溪 生壬子 達城人姜仁馨 字士性 號五常軒 生壬子 晉州人金慶泰 字敬瑞 號愼齋 生壬子 金海人權雲煥 字舜卿 號明湖 生癸丑 安東人金章錫 字甫現 號鰕山 生癸丑 淸道人邢道烈 字應七 號野隱堂 生癸丑 晉州人奇 宰 字立夫 號植齋 生癸丑 幸州人李秉燮 字鳳瑞 號柏軒 生癸丑 公州人高濟中 字聖邦 號師峯 生癸丑 長興人文龍煥 字順集 號松巖 生癸丑 南平人具敎元 字文謙 號松溪 生癸丑 綾城人高容柱 字化國 號醒庵 生癸丑 長興人尹秉濯 字永淑 號伊村 生癸丑 南原人安國禎 字舜見 號松下 生甲寅 竹山人宋甲基 字榮煥 號南坡 生甲寅 洪州人閔洛植 字龜瑞 號淸川 生甲寅 驪興人朴準采 字雲汝 號農圃 生甲寅 密陽人李承榮 字益三 號松溪 生甲寅 光山人朴章鉉 字而顯 號菊圃 生甲寅 密陽人高濟遠 字浩然 號自怡軒 生甲寅 長興人李琪白 字光彬 號澗齋 生甲寅 全州人鄭在翰 字致鳳 號松灘 生甲寅 河東人奇宇蒙 字聖初 號山泉 生 幸州人文學天 字明甫 號白雲庵 生乙卯 南平人金斗源 字德彥 號農軒 生乙卯 慶州人梁在海 字順集 號華隱 生乙卯 濟州人崔昶烈 字性圭 號淸溪 生乙卯 朗州人任德鉉 字士範 號默窩 生乙卯 長興人高濟霖 字用汝 號海沙 生乙卯 長興人金淮斗 字致一 號愚溪 生乙卯 慶州人崔泰遠 字益和 號素軒 生乙卯 和順人金智泰 字聖祉 號愼庵 生乙卯 金海人曺秉琦 字聖甫 號梅湖 生乙卯 昌寧人高光善 字元汝 號弦窩 生 長興人邢學年 字敬集 號 生丙辰 晉州人李承鼎 字道常 號莘庵 生丙辰 光山人孫永謨 字子翼 號竹東 生丙辰 密陽人李敎聲 字權洪 號松庵 生丙辰 星州人具翼謨 字德潤 號竹軒 生丁巳 綾城人李承鶴 字子和 號靑皋 生丁巳 全州人李思韙 字春景 號池軒 生 全州人裴相龍 字雲瑞 號 生 達城人梁東周 字君贊 號鍾隱 生丁巳 濟州人金權泰 字成中 號瑞軒 生丁巳 慶州人裴鉉基 字敬玉 號晩隱 生丁巳 達城人金信泰 字敬之 號思庵 生丁巳 金海人權基德 字子厚 號三山 生丁巳 安東人尹秉玹 字致化 號愼庵 生丁巳 南原人裴成默 字處三 號竹窩 生丁巳 達城人李泰夏 字安中 號松齋 公州人李仁煥 字德哉 號敬軒 生戊午 公州人金錫夏 字夏玄 號菊軒 生戊午 金海人李敎敦 字弘中 號一菴 生戊午 星州人具吉謨 字德瑞 號利涉 生戊午 綾城人文頌奎 字啓元 號龜巖 生己未 南平人具赫謨 字瞻汝 號愼菴 生己未 綾城人朴鍾祺 字道賢 號蓮坡 生己未 密陽人金昞淳 字益祉 號石樵 生己未 金海人金相鐸 字德璋 號道谷 生己未 金海人姜義馨 字正行 號痴石 生己未 晉州人李承權 字道心 號莘齋 生庚申 光山人梁在龍 字道遠 號雲菴 生庚申 濟州人孫聲鏞 字泰重 號默菴 生辛酉 密陽人南基三 字德元 號梅軒 生辛酉 宜寧人全斗玉 字仲國 號隱巖 生辛酉 天安人盧昌錫 字禹言 號月坡 生辛酉 光山人裴元烈 字子允 號三愧堂 生壬戌 達城人金瑢淳 字星三 號淵淵齋 生癸亥 金海人程心泓 字士竹 號鍾軒 生癸亥 韓山人金應培 字士權 號三省堂 生癸亥 金海人高鎭圭 字敬寶 號晩覺軒 生癸亥 長興人具馹謨 字敬範 號德齋 生甲子 綾城人朴揆秉 字仁玉 號新庵 生甲子 密陽人具賢謨 字寬範 號德峯 生 綾城人李瑨錫 字聖三 號石汀 生丁卯 全州人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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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일신재 신종록 서 日新齋信從錄序 성학(聖學)1)에는 연원이 있으니 수사(洙泗)2)에서 시작하여 염락(濂洛)3)에서 성대했다. 세도(世道)의 명암(明暗)과 국가의 성쇠(盛衰)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음이 없다. 이는 실로 천지의 원기(元氣)요 정맥(正脈)이니 그 뜻이 어찌 무겁게 않겠는가? 우리 선생은 노문(蘆門)4)이 선성(先聖)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는5) 때를 맞아 입실조과(入室操戈)6)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7)의 심오한 말과 은미한 뜻을 홀로 터득하고 묵묵히 깨달았다.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는 서로 포함하고, 만수(萬殊)와 일본(一本)이 두루 융화한다.8) 이(理)가 장수(將帥)이고 기(氣)는 역졸(役卒)이니 주가 되는 것은 이(理)에 있다.'라는 이 적료(寂廖)한 몇 마디는 뭇 성현들의 비건(秘鍵)이다. 오직 선생이 마음으로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융통하고 활발하여 좌로 가도 우로 가도 근원을 만나니, 그 높은 조예와 바른 행실은 대곡(大谷)9)ㆍ애산(艾山)10) 두 옹과 함께 염문(濂門)의 양정(兩程)11)에 비견되었다. 다만 때가 어긋나고 명(命)이 어그러져 세상에 큰일을 할 수 없으니 광채를 숨기고서 후생 계도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남녘의 선비들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찾아오니12) 인도하고 격려하여 점차 연마하여 성취시켰다. 둔하고 막혀 열어주기 어려운 자는 점차 달통(達通)의 경지에 나아가게 하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은 자는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게 하였다. 혹 정좌(靜坐)하고 체험하게 하고 혹은 변론하고 반증13)하게 하여 각자 그 재질(才質)에 따라 계도하였다. 다만 문하(門下)의 생도들이 비록 독실한 바탕이 없지 않더라도 작은 성취에 안주하면 도의 극치에 나아가기를 추구할 수 없다. 더구나 다시 스승이 돌아가신14) 후 떨어져 산15) 것이 이미 오래되어 대의(大義)가 장차 어그러지고 선생의 가르침이 쓸어버린 듯 없어지게 된다면 어찌 탄식하고 애석해하지 않겠는가? 제생(諸生) 중에 의론하는 자가 있어서 말하기를 "우리 동문(同門)의 선비들이 이미 선생의 도를 계승할 수도 없고 또한 장차 옛날 수업하던 의리도 잊어버릴 것이니, 감히 선현들의 〈문생록(門生錄)〉을 본떠서 〈수업록(受業錄)〉을 만든다면 장차 제생을 흥기시키고 도를 추구하는 뜻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우리 동문 사람들은 속유(俗儒)들의 문구(文具)에 급급해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지 말고, 이제부터 더욱 더 격려하여 그 책을 책으로 여기고 그 도(道)를 도로 여겨서16) 광명정대한 영역을 끝까지 궁구한다면 후일에 야사씨(野史氏)가 〈유학연원편(儒學淵源編)〉에 채록해 넣을 것이니 어찌 다만 〈종유급문록(從遊及門錄)〉이 되는데 그치겠는가? 〈신종록(信從錄)〉을 장차 출판하게 되니 선생의 행장(行狀) 등 문자를 책의 첫머리에 놓아서 후생들이 덕을 상고하는 터전으로 삼노라.정묘년(1927) 6월 상순에 문인 제주(濟州) 양회락(梁會洛)이 삼가 쓰다. 聖學之有淵源。始於洙泗。而盛於濂洛。世之晦明。國之汚隆。未嘗不由於此。此實天地之元氣正脈。其義豈不重哉。惟我先生。當蘆門繼開之日。入室操戈。天人性命之奧言微旨。獨契黙悟。理分相涵。萬一圓融。理帥氣役。所主在理。此寂廖數語。爲千聖秘鍵。而惟先生。會之心而體之身。融通活潑。左右逢原。其造詣之高。踐履之正。與大谷艾山兩翁。擬之於濂門兩程。但時乖命舛。不得有爲於世。鞱光鏟采。以開迪後生爲己任。南方之士。近悅遠來。誘掖澈勵。漸摩成就。鈍滯難開者。使之漸進於圓通。造詣精深者。使之莫安於小成。或使之靜坐而體驗。或使之辨論而反隅。各隨其才質而導迪之。但脚下諸生。雖不無篤實之資。而安於小成。不能求造道之極。況復山頹之後。離索已久。大義將乖。使先生之敎。將歸於掃如。豈不歎惜哉。諸生中有議者。以爲吾同門之士。旣無以承先生之道。而亦將忘舊日受業之義。敢效先賢門生之錄。以修受業之錄。則將與起諸生。而有助於求道之志矣。嗚呼。惟我同門之人。勿規規於俗儒文具。以爲能事。自是後而益加激勵。書其書道其道。卒究於光明正大之域。則他日野史氏。採人于儒學淵源之編。豈止爲從遊及門錄而已哉。錄將入梓。以先生行狀等文字。冠之于首。爲後生考德之地云爾。歲丁卯六月上澣。門人濟州梁會洛謹書。 성학(聖學) 공자(孔子)의 학문을 말한다. 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가리킨다. 공자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제자들을 모아 강학하였다고 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와 너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부자(夫子)를 섬긴다.〔吾與女事夫子于洙泗之間.〕"라고 하였다. 이후 '수사(洙泗)'는 공자와 유가(儒家)의 대칭으로 쓰인다. 염락(濂洛) 염(濂)은 염계(濂溪)로 주돈이(周敦頤)가 살았던 곳이고, 낙(洛)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았던 낙양(洛陽), 송대의 성리학을 지칭한다. 노문(蘆門) 노사(蘆沙)인 기정진(奇正鎭)의 문파를 말한다. 기정진(1798~1879)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가 노사이다.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대성하였다.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진다. 선성(先聖)을……인도하는 원문의 '계개(繼開)'로, 과거 성현의 학문을 잇고 앞으로 올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 준다는 뜻이다. 주자(朱子)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공자의 덕을 찬양하면서, "옛 성인을 잇고 후대의 학자를 열어 줌은 그 공이 요순보다도 낫다.〔繼往聖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라고 하였다. 입실조과(入室操戈) 본래 상대의 논리를 써서 상대를 공격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스승의 학문을 배운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에 하휴(何休)의 저술을 정현(鄭玄)이 반박하자, 하휴는 이를 보고 "정강성(鄭康成 정현)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창을 들어서 나를 공격하였구나.〔康成入吾室, 操吾矛以伐我乎.〕"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65 鄭玄列傳》 천인성명(天人性命) 천도(天道)와 인사(人事), 인간의 본성과 천명을 말한다. 이일(理一)과……융화한다 이치는 하나이면서 현상은 만 가지로 다른 것으로,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을 말한 것이다. 《性理大全 理氣 總論》 대곡(大谷) 김석귀(金錫龜, 1835~1885)이다.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과 함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노사학파의 3대 제자로 불렸다. 문집으로 《대곡선생문집》이 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이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당시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문집으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염문(濂門)의 양정(兩程) '염문(濂門)'은 송나라 때 성리학을 창도한 주돈이(周敦頤)의 염계학파를 말한다. 염계(濂溪)는 주돈이의 호이다. 신유학의 기초 이론을 정리하였다. '양정(兩程)'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일컫는 말이다. 가까이……찾아오니〔近悅遠來〕 초(楚) 나라 섭현(葉縣)의 윤(尹)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이 사모하여 찾아오게 해야 한다.〔近者悅, 遠者來.〕"라고 한 말이 《논어》 〈자로(子路)〉에 나온다. 반증 원문의 '반우(反隅)'로,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나머지를 유추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한 모퉁이를 가르쳐 주었는데 나머지 세 모퉁이를 유추하여 반증하지 못한다면 다시 가르쳐 줄 수 없다.〔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하였다. 스승이 돌아가신 원문의 '산퇴(山頹)'로, 태산(泰山)이 무너졌다는 말인데 스승의 죽음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자신이 별세할 꿈을 꾸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문 앞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들보가 부러지겠구나. 철인이 죽게 되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다. 이후 태산이 무너진다는 것으로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禮記 檀弓上》 떨어져 산 원문의 '이삭(離索)'으로,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산 지 또한 이미 오래이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 하였다." 하였다. 그……여겨서〔書其書道其道〕 경서(經書)를 소중히 여기고 그 도(道)를 따라 행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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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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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행장 行狀 공의 휘는 의림(義林)이요 자는 계방(季方)으로 학자들은 일신(日新) 선생이라 칭한다. 정씨(鄭氏)는 그 선조가 광산인(光山人)으로 고려 때 찬성(贊成)인 휘 신호(臣扈)가 그 시조이다. 감사(監司)인 휘 인진(麟晉)이 처음 조선조에 벼슬을 하였고, 응교(應敎)인 휘 웅(熊), 절도사(節度使)인 휘 응규(應奎), 사직(司直)인 휘 연(演)은 호조 판서17)에 추증되어 3세가 연이어 현달하였다. 3대를 전하여 휘 찬(纘)에 이르러서는 벼슬살이에 담박하여 금성(錦城)18)에 은둔하면서 대대로 유자의 덕행을 독실하게 하였다. 증조 휘 채(埰)는 낭주(朗州)19)로 옮겼고 조부 휘 가석(加錫)은 금릉(金陵)20)으로 옮겼다. 선고(先考)의 휘는 제현(濟玄)으로 두 세에 걸쳐 수직(壽職)21)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부모를 충심으로 봉양하였으며 자식을 가르치는데 법도가 있었다. 일찍이 한양에서 유학할 때 "명예와 이익은 사람을 그르치니 우리 도(道)의 한 맥은 마땅히 산림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당세(當世)에 대한 뜻을 끊고 밭 갈고 글 읽는 것을 가계(家計)로 삼았다. 선비(先妣)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부친이 치성(致聖)으로 위남(葦南) 희중(熙中)의 후손이며 정숙하고 예절이 있었다. 헌종 을사년(1845, 헌종11) 11월 갑자에 능주(綾州)의 대덕동(大德洞) 집에서 공을 낳았는데 꿈에 달이 품속으로 들어왔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눈을 흘겨보지 않으며 항상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말하기를 "눈은 한 몸의 일월(日月)이니 일월이 어둡고 이지러지면 천지가 막히고 닫힌다."라고 하였다.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무렵에 글방 아이들이 《소학(小學)》을 읽는 것을 곁에서 듣고 능히 많은 뜻을 이해하고는 말하기를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이 치평(治平)의 근본이다."라고 하면서 손수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을 신중히 하였다. 일찍이 장로(長老)를 따르다가 화이(華夷)와 존양(尊攘)22)에 대해 듣고는 문득 묻기를 "똑같은 사람인데 어찌하여 화(華)와 이(夷)로 나눕니까?"라고 하니, 장로가 답하기를 "땅에는 안과 밖이 있고 풍속도 아름다운 것과 나쁜 것이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한참동안 묵묵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사람의 한 몸에도 또한 화(華)와 이(夷)가 있으니, 아름다운 것은 화(華)요 나쁜 것은 이(夷)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먼저 한 몸에 있는 화(華)를 높이고 이(夷)를 물리쳐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듣는 자들이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말은 노사(老師) 숙유(宿儒)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유문(儒門)의 대사업이 장차 이 아이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밖을 나가서 비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모두 달려가는데 홀로 서서히 태연자약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천지와 나란하고 나의 성(性)은 성현과 같으니 그 무거움이 어떠한데 가벼이 달려서 예용(禮容)을 잃겠는가?"라고 하였다. 매양 나가 놀면서 아이들이 어지럽게 노는23) 경우를 만나면 반드시 급히 돌아와 말하기를 "부모가 경계한 바였습니다."라고 하고, 장로들 곁에 있었으면 서서히 돌아와 말하기를 "부모가 좋아하는 바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고서 부모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지 않는다면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기쁘고 화순한 기색으로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며24) 찬 지 따듯한 지를 살폈다.25) 전후로 당한 상(喪)에서는 모두 애훼(哀毁)함이 심하였고 일과로 정하여 묘소에 올라갔다. 대대로 전해온 선대의 원고를 수집하여 소중히 보관하였다. 처음 입학하여 《효경(孝經)》을 배울 때 구절마다 훤히 이해하고, 이해하면 번번이 체험을 하니 통정공(通政公)이 그 지향하는 바가 있음을 알고는 다른 일로 방해되지 않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은 업(業)이 있는 것이 귀하고, 업은 성취가 있는 것이 귀하다."라고 하였다. 공은 이 말씀을 받들어 가슴 속의 경구(警句)26)로 삼고 조용한 데 처하여 애써 공부하면서 먹고 자는 것도 잊으며 많은 책과 경전을 상세하게 익히니 약관(弱冠)을 전후하여 학업이 이미 두각을 드러냈다. 이에 사조(詞藻)27)를 부화(浮華)한 것으로 여기고 공령(功令)28)을 자신을 자랑하는 것으로 여겼다. 가계(家計)를 꾸리는 데는 냉담하고 강송(講誦)을 다반사로 여기면서, 남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고, 남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을 즐거워하니 견식이 이미 시유(時儒)들보다 탁월하였다. 이 때 유학의 학술이 분열되어 성명(性命)의 학설이 제멋대로 터져 나오고 이기(理氣)의 학설이 어지러워져서 하늘은 주재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본원(本源)은 허위(虛位)가 되었다. 대략 제가(諸家)를 두루 고찰하고 실마리를 궁구하면서, 참된 지식과 실질적 식견도 없이 입으로 다투어 떠들어대는 것을 병폐로 여겼다. 24세 때인 무진년(1868, 고종5)에 노사(蘆沙) 선생을 사상(沙上)29)에서 배알하였는데 선생이 공을 한 번 보고는 자주 칭찬하며 말하기를 "타고난 자품이 화락하고 평이하며 식견이 매우 바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미(沙彌)가 병든 중의 문을 두드리는데 미목(眉目)이 시원하게 밝아 학문할 만한 기틀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계방(季方, 정의림)에게 그렇게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은 선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칼을 맞은 대가 쪼개지듯 시원스럽게 제가(諸家)의 쭉정이를 쓸어버리고 성철(聖哲)의 참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돌아와서 말하기를 "세상에 사도(師道)를 자임한 자가 모두 오류를 인습하면서 단지 한 쪽만을 보고서, 들은 것을 기술하고 강설(講說)하니 틈 사이의 빛과 한 국자의 물30)을 얄팍하게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오직 선생의 자질은 생지(生知)31)에 가깝고 도는 《중용(中庸)》에 근본을 두고서 곧바로 주자(朱子)를 접하여 대체(大體)을 세웠으니 말씀마다 본원(本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님이 없었다. 마치 큰 집 천만 칸에 허다한 황금과 비단을 저장해놓으니 사람들이 구하는 대로 따라 써도 다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라고 하였다. 제대로 보았고 제대로 말한 것이다. 한 번 보고 대번에 이렇게 일컬었으니 자기의 조예가 높고 깊으며 터득한 바가 참되고 절실하지 않다면 이처럼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찍이 개연(慨然)히 탄식하기를 "고금에 허다한 유지자(有志者)들이 가르침을 받을 터전을 얻고서도 오히려 탁 트이게 꿰뚫지 못한 것은 단지 중도에 그치는 것이 병폐였던 것이다. '일신우신(日新又新)'32)이 이 병폐에 대한 약이다."라고 하고 '일신(日新)' 두 글자를 자리 오른쪽에 걸어놓고 항상 보면서 힘을 다하였다. 이전에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도 개연히 탄식한 것은 안자(顔子)가 위연(喟然)히 탄식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니, 그 아래의 말들은 무궁한 스승의 도를 우러르며 따르고자 한33) 지극한 뜻이 아님이 없다. 묘계(妙契)의 관문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이 대개 여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여쭈니 답하기를 "또한 좋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세상과는 서로 잊고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34) 하나의 기틀이다. 다만 이곳에 입장을 확고히 정해야 비로소 의론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또한 허여함이 깊었다. 동문 중에 대곡(大谷) 김석귀(金錫龜)ㆍ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가장 사이가 좋았는데 대개 그 지향이 같고 견해도 같았다. 물러나서는 강해(講解)하고 나아가서는 질정(質正)을 받으면서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우니35), 항상 부자(夫子)의 미소를 띠게 하였다.36) 하루는 상자에 보관해 둔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꺼내 보여주셨는데 대개 선생의 심오한 이치를 편 것이었다. 이른 바 성(性)과 천도(天道)37) 및 제자들이 쉽게 들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세 군자가 이 때에 듣게 되었다. 선생의 뜻은 대략 "세상에 진절(眞切)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후세의 자운(子雲)과 요부(堯夫)38)를 기다렸는데, 세 사람은 견식이 있으니 내가 너희에게 숨길 것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일관(一貫)의 요지39)는 오직 증자가 들었고 태극(太極)의 묘리는 단지 양정(兩程)40)이 들었는데, 논자들은 이것을 선생이 도를 진전(眞傳)한 것이라고 여겼으니 대개 옳은 것이다. 애산(艾山)과는 서로 떨어진 거리가 십사(十舍)41)41)ㅍ 십사(十舍) : 사(舍)는 옛날 중국의 군제(軍制)에서 군대(軍隊)의 하루 행정(行程)인 삼십 리를 이르던 말이니, 십사는 삼백 리가 되는데, 일정하지는 않다.인데 매번 사문에서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만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개 그 기류(氣類)42)가 서로 감응하였기에 그 응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한 바탕 화합을 하면 조화로운 음악 가락43)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곁에 있던 사람들도 그 흥미진진한 모습을 보았다. 선생이 대곡(大谷)에게 일러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성(姓)이 같고 뜻이 같으며 사는 마을〔里〕의 이름도 같은데 매번 이렇게 자리도 같이 하니, 기록하여 훗날의 고사(故事)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자 모두 기뻐해마지 않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조차 누차 거르기 일쑤였다. 그러나 편안히 여겨 개의치 않고 그 즐거워하는 것을 바꾸지 않았으니 거의 도에 가까웠다.44) 원근의 배우는 자들이 믿고 따르며 책 상자를 지고 와서 학당에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도(師道)의 명망이 저절로 모였으나 겸손하여45) 빈 듯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생도를 계도하는 방도는 이런 것으로 혹시라도 허술히 하지 않았고, 상세하고 간절하게 인도하고 격려하여 점차 다듬어 이루게 하였다. 혹 고요히 앉고 체험케 하며 혹은 변론하고 반증46)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진전을 바랄만하면 기쁨이 안색에 드러났고, 둔하고 막혀서 깨우치기 어려우면 잘못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다. 나아간 경지가 정밀하고 깊은 자는 도와서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도록 하고, 국한되고 편협하게 보는 자는 가르쳐 달통의 경지에 나아가게 하였다. 훤하게 깨우쳐주니 듣는 자가 쉽게 깨우쳐서 고갈된 자는 두루 적셔지고 얽매인 자는 벗어났다. 절근(切近)하고 긴요한 곳은 교묘하게 천착하려 하지 않았고, 평탄하고 명쾌한 곳이라도 대략 흘려버리려 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책을 볼 때는 모름지기 마음에 붙게 하고 몸에 간절하게 하면 의미가 자연히 깊어진다. 범범하게 널리 읽고 애매모호하게 이해하여 귀결처가 없기보다는 차라리 정밀함을 지극히 하여 요해처를 차지함이 낫지 않겠는가. 한 치를 얻고 한 자를 얻어 가면 진보처가 있는 것이다. 독서가 어찌 문인재자(文人才子)가 되어 급제(及第)를 추구하고 봉록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으려는 것이겠는가. 단지 한 글자에는 한 글자의 유익함이 있고, 하루에는 하루의 진보가 있을 뿐이다. 아득한 만사는 흉중에 둘 것이 없고, 득실(得失)과 귀천(貴賤)47)은 저 하늘48)에 맡기는 것이다. 뜻이 서지 않으면 한 때의 선한 마음은 기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 조각을 새기는49) 것에 불과하며, 많은 경전의 격언과 중요한 말도 문구(文具)나 책방에 불과하다. 사람이 황금 조각이나 옥 부스러기를 얻어도 오히려 애호하여 실추할까 두려워하면서, 이 몸이 얼마나 중요한데 애호하는 방도를 다하지 않겠는가. 일언일행(一言一行)을 삼가지 않고 일각일시(一刻一時)를 삼가지 않으면 모두 스스로 그 몸을 잃으며, 스스로 거만한 자는 남이 반드시 업신여기고, 스스로 버리는 자는 남도 역시 버린다. 의리는 무한하고 사업은 무궁하다. 7, 8분(分)의 공부를 하면 7, 8분의 사람이 되고 10분의 공부를 하면 10분의 사람이 되니, 자기 지위의 고저(高低)는 자기 노력의 다과(多寡)에 달려 있다. 우리들이 이미 세상에서 큰일을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성현의 책을 읽고 성현의 도를 지켜서 붕우들과 함께 하고, 또 이를 후세에 전하여 사문(斯文)의 일맥을 무궁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이를 제2의(第二義)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무거운 짐은 한쪽 팔로 움직일 수 없고, 달려드는 물결은 한 줌의 흙으로 막을 수 없다. 비록 고치실ㆍ좁쌀ㆍ모발50) 같은 사소한 현능이나 두공(斗拱)ㆍ빗장ㆍ문설주51) 같은 하찮은 재목이라도 쌓고 쌓아 더욱 기발해지고 서로 의기투합한 연후에야 많은 세상사를 수습할 수 있고 많은 세교(世敎)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크게 입을 떠벌리며 이(理)를 말하고 기(氣)를 말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나아가서 옳은 것을 찾아 구하고 그른 것을 결연히 제거함만 못하다. 아마도 이것이 이기(理氣)의 실제 일일 것이다.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발현되어 가르침이 되었으니, 흐름을 따라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실천의 실제를 대략 엿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지인ㆍ생도들과 서석산(瑞石山) 정상에 올라서 풍영(諷咏)하고 돌아왔는데 유연(悠然)히 기우(沂雩)52)의 즐거움이 있었다. 많은 선비들이 정자를 지어 설강(設講)을 하고 '영귀(咏歸)'로 편액을 하였다. 오성사현(五聖四賢)의 초상을 봉안하고 매년 봄가을로 석채(舍菜)53)ㆍ여수(旅酬)54)ㆍ상읍례(相揖禮)를 마친 뒤에 청강하는 경학생(經學生)과 배우는 자들이 빙 둘러 모시고 질문을 하니 삼대(三代)의 유풍이 있었다. 영남(嶺南)55)을 한 번 유람하면서 애산(艾山)과 최계남(崔溪南)56) 등 제공을 만났는데 따르는 문인이 수 십 인이었고, 계남과 애산도 각기 모시고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 유명한 정자와 명승지를 두루 다녔는데 이르는 곳마다 경서를 갖고 묻고 논란하며57) 문답을 한 뒤에 도리(道理)를 익히고 연마하였다. 보는 사람들이 "추로(鄒魯)58)의 유풍이 모두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또 애산(艾山)과 계남(溪南) 및 족형인 월파(月波)와 약속하여 방장(方丈 지리산)의 종산(鍾山)에서 만났다. 영호남 선비들이 설강을 하고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59) 군자 서너 명이 절충하고 문답을 하는데 위로 선왕의 전례(典禮)부터 학문을 하는 절도에 이르기까지 설파하지 않음이 없었다. 삼산(三山) 권기덕(權基德)이 이를 모두 기록하여 〈종산강록(鍾山講錄)〉을 만들었다. 이날 술이 반쯤 거나해지자 공이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공문제자(孔門諸子)들이 대성(大聖)을 얻어 스승으로 삼고 대현(大賢)을 얻어 벗으로 삼으며 스승에게 묻고 벗에게 익혔다. 그 지극한 즐거움을 상상하면 천년 뒤에도 오히려 느끼는 바가 있다. 선비가 오늘에 태어나서 비록 당우(唐虞)의 임금60)과 고기직설(皐虁稷契)61)을 만나 대낮처럼 밝은 때에 토론62)을 할 수는 없더라도, 맹자(孟子)가 이른 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삼락(三樂)에 끼지 않는다.'63)고 하여 그 경중에 구분을 두었으니, 차라리 저것을 버릴지언정 이것을 잃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노사(蘆沙) 선생 같은 스승을 얻었고 대곡(大谷)ㆍ애산(艾山) 등 제군자와 같은 벗들을 얻어서 교화를 입고 은덕에 적셔졌다. 수사(洙泗)64)의 성대함을 옛날과의 거리가 이미 멀어진 날에도 직접 보게 되었으니 이는 일생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홀연 선사(先師)께서 돌아가시고65) 대곡(大谷)도 이어 세상을 떠났으며, 계남(溪南)과 애산(艾山) 제군자는 멀리 십사(十舍)의 밖에 있다. 그러니 대의가 칠십 제자66)의 몸에서 어긋나고, 떨어져 살면서 서하(西河)의 죄67)를 면치 못하는 것처럼 될까 두렵다. 원컨대 종산(鍾山)의 모임을 결성하여 1년에 한 번 만나는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승낙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워 이뤄지지 못했으니 사우(士友)들이 한스러워 했다. 조정에서 병자년(1876, 고종13)에 외교를 한 뒤로 해적들이 교통68)을 하게 되자 세도(世道)의 근심을 깊이 품고 유인(幽人)의 정조69)를 굳게 지켰다. 매번 비바람이 치는 밤이면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아서 장남헌(張南軒)70)의 "평생 비바람 치는 저녁이라, 매양 명절(名節)을 지키기 어려움을 생각하네."라는 시구를 크게 외우니, 처연하여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을미년(1895, 고종32) 8월의 사변71)이 있고 계속하여 단발령(斷髮令)72)으로 협박하는 일이 있자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이런 때의 일은 단지 목숨을 버려 죽는 한 길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애산(艾山)에게 편지를 급히 보내 함께 모여 의논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 봄에 내가 의병을 일으켜 토복(討復)하자는 것으로 능성(綾城)에 격문을 보냈다. 격문에 답해오기를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보다는 옥으로 부서지는 것이 나으며,73) 물고기도 바랄 바이지만 어찌 곰발바닥만큼 좋겠는가.74)"라고 하였다. 내가 무릎을 치며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 벗 정일신(鄭日新)의 말투이다. 절의가 마음에 뿌리하고 충용이 의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글귀를 지어 낼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격문의 내용을 듣고는 한 지방 사람들을 부르고 맹세문을 지어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진실로 한 푼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원수와 하늘을 함께 하는75) 수치를 갖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온 세상이 머리털을 자르는데 오직 청구(靑邱)76)의 한 편에서만 상투를 매는 것을 지키고 있다. 이 상투마저 만약 없다면 만세토록 비태(否泰)와 소식(消息)의 기틀은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란(論難)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저 쪽은 칼이고 우리 쪽은 고깃덩이니 반드시 요행이란 없을 것이다. 일명(一命)의 군자도 없는데 이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77)"라고 하였다. 공이 늠연히 말하기를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마다 토벌을 하는 것이 《춘추(春秋)》의 의리이니78) 의리를 논하고 힘은 논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가 의리를 지키는데 어찌 다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나는 금성관(錦城舘)에서 주둔하며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공이 필마로 와서 모여 함께 방략을 논의했고, 돌아가서도 여전히 여러 번 편지로 서로 면려하였다. 진을 광산관(光山舘)으로 옮기자 공과 다소의 뜻있는 선비들이 나와 함께 광산(光山)에서 사생(死生)의 계책을 세우려 했다가 선유(宣諭)79)를 듣고는 의병 군대를 파하고 중지하였다. 그런데 계속하여 의거를 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협박하는 명령이 있었으니, 대개 적신(賊臣)들이 임금의 권위를 끼고 조령(詔令)을 사칭하여 이런 짓을 한 것이다. 내가 의리를 함께 한 이들에게 글을 보내서 "이것은 우리 임금의 뜻이 아니다. 죽임에 나아가는 것은 의리가 아니니 종적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다."라고 하니 공도 그렇다고 하였다. 공이 산간을 떠돌다가 내가 체포되었다는 거짓말을 듣고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서 체포를 기다리며 말하기를 "의리상 혼자만 살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곧 거짓말이었음을 알고는 그 일은 묻어두고 묻지 않았다. 후배 계도를 자기의 임무로 삼고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은 감옥 안에서도 《상서(尙書)》를 배웠고80) 배 안에서도 《대학(大學)》을 배웠는데81) 어찌 세상이 어지럽다하여 강학(講學)을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한 달에 한 번 강학하는 학규를 정하여 혹 산재(山齋)에서 혹 계정(溪亭)에서 종일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때 영남 사람 권봉희(權鳳熙)와 최동민(崔東敏) 무리들이 시유(時儒)들의 뜻에 영합하여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 선현을 범하고 배척했다."라고 하면서 서로 어울리며 분분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해도 어찌 일월(日月)의 밝음을 손상하겠는가.82) 선현을 머리에 이고서 후배를 현혹하여 그 해로움이 없지 않으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율옹(栗翁)83)에 대해서 독실하게 믿고 높이 흠모하셨으니 여러 문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음(陰)과 양(陽)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84)는 한 구절은 계합하지 않는 바가 있어서 매양 유행(流行)의 한 측면을 폭넓게 보려 하셨다. 그런데 세유(世儒)들이 이 한 단락을 가지고 주기(主氣)의 증거로 삼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근원을 따져서 변론하여 통쾌하게 말씀한 것이다. '피음사둔(詖淫邪遁)85)과 전도(顚倒)86)되고 창피함'87)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뒷사람의 폐단을 밝히려 하신 것이다. 온공(溫公)은 《맹자(孟子)》를 의심했지만88) 그의 아들 강(康)은 경연(經筵)에서 《맹자(孟子)》를 강학할 것을 권했고,89) 유원성(劉元城)90)은 온공의 문인이지만 회와 구운 고기처럼 《맹자(孟子)》를 즐겨했다. 남헌(南軒)은 오봉(五峰)91)의 잘못된 곳을 분별했으며,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92)의 정설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다. 주자(朱子)는 '주자(周子)는 황로(黃老)와 같다.'고 했고, '정자(程子)는 황로의 유풍(流風)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것 또한 그 부사(父師)와 전현(前賢)을 무훼(誣毁)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전현(前賢)이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을 후현(後賢)이 변론하여 밝혔다면 바로 존모(尊慕)의 도리를 십분 다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권(權)과 최(崔) 등이 아는 바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남의 선비들에게 통고하여 그 죄를 분명히 알게 하였다. 또 호남의 선비들을 영귀정(咏歸亭)에 모아서 간절하게 변론을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당의 선비들은 금일의 변론을 한 번 보라. 이기설(理氣說) 같은 것은 그 득실을 후학들에게 맡겨둘 수 없으니 마땅히 곧장 살펴서 밝혀야 한다. 만약 자기는 식견도 없으면서 남을 따라 칭찬하고 비방한다면, 그대로 답습하고 구차히 하는 사이에, 이 몸이 편파적인 죄과에 빠지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것은 자신과 가문의 대계(大計)이니 어찌 이 한 가지 일만을 마치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시유(時儒) 몇 사람이 권(權)과 최(崔)의 여론(餘論)을 따라 반박하고 조목조목 변론했다는 것을 듣고, 조목을 따라 변론하여 밝혔는데 전문이 원집(原集)에 실려 있다. 그 말단에 이르기를 "근세에 주기론(主氣論)이 한 가지가 아니다. 태극(太極)을 분(分)이 없는 일(一)93)로 여기는 것이 있고, 오성(五性)94)을 기(氣)를 띤 사물로 여기는 것이 있고, 명덕(明德)95)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는 것이 있다. 일본만수(一本萬殊)96)를 말하면 만수(萬殊)는 기(氣)가 되고, 대본달도(大本達道)97)를 말하면 달도(達道)가 기가 된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람과 사물의 치우침과 온전함을 정분(定分)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재(主宰)와 묘용(妙用), 조리(條理)와 단락(段落)에서 한결같이 기(氣)를 중시하여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자식이 아비의 자리를 빼앗고, 아내가 남편의 자리를 빼앗고, 소인이 군자의 자리를 빼앗고, 이적(夷狄)이 화하(華夏)의 자리를 빼앗는 것 또한 하나의 예사(例事)가 될 것이다. 선사(先師)께서 이것을 두려워하여 주장을 발휘하여 척결하고 차례로 절충하였다. 그런데 일변의 논리만을 오히려 고집하니 단지 자기의 역량을 알지 못함을 드러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오늘날 동방에 주기(主氣)의 한 학설이 있는데, 종유(從遊)하는 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어떻게 가려서 대처할까요?"라고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벽계(蘖溪)98) 이(李) 선생의 척사위정(斥邪衛正)의 계책이 광명정대하여 우리 선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저술한 평소 말씀은 스스로 주재(主宰)가 되어 도기수역(道器帥役)99)의 분수를 밝히고 일종의 명기론(明氣論)을 배척하는 것이다. 이 또한 선사와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았으니 진실로 천하의 도(道)는 하나임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팔고 5조약100)을 강제로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근심하고 분노하여 소장을 썼다. 첫머리에는 섬 오랑캐는 물리쳐야지 화친할 수 없으며 나라의 적신들은 참해야지 용서할 수 없음을 말하고, 중간에는 종묘를 품고 사직을 위해 순절하는 의리를 말하여 임금의 마음을 굳건하게 하였으며, 끝에는 죽음을 바쳐 떠나지 않겠다는 의리를 말하였다. 소장을 이미 작성하였는데 유소(儒疏)101)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개연히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얼마 뒤에 면암(勉庵)과 애산(艾山)이 궐리방(闕里房)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듣고 말하기를 "나의 일을 의탁할 곳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궐리방의 약속도 저지되니 책상을 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접어(鰈魚)의 등 위의 한 조각 땅102)이 저들이 들어와 물고기를 그물질하는 곳이 되겠구나. 진(晉)나라가 화하(華夏)의 맹주였을 때 계씨(季氏)의 뇌물을 받고 소공(昭公)을 건후(乾侯)에서 죽게 했는데103) 지금 외딴 지역 오랑캐104) 부류들이 유독 그 뇌물에 취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우리나라 선비들의 여론이나 백성의 여론이 굳이 꺼리는 것이 없고 백성들은 위를 향하는 마음이 없다. 사람이 짐승으로 변했으니, 온 하늘 아래가 큰 오랑캐와 작은 오랑캐들이다. 신포서(申包胥)처럼 통곡105)을 한들 그 보존할 땅도 없어졌는데 초(楚)나라106)를 보존하려는 계책을 어찌 바랄 날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근심과 분노가 병이 되었다. 대개 천하가 침몰107)하여 갈 곳도 없었기에 사는 집을 서산(西山)으로 삼고 앉은 곳을 동해(東海)로 삼아, 차라리 굶어 죽고 동해에 빠져 죽겠다는 뜻108)을 누차 안색과 말에 드러냈다. 하루는 입으로 시를 읊기를 "노사(蘆沙) 선생의 병인년 상소는 대의가 삼엄하여 일월처럼 밝았으니, 당시에 만약 두세 가지 계책만 썼더라도 어찌 오늘날에 사직이 기울었으랴."라고 하였다. 또 읊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잃기로서니 어찌 지금만 같으랴,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엎어지며 해와 달도 잠겼구나. 문을 닫고 자정(自靖)109)의 계책만 있을 뿐, 서산과 동해는 찾아갈 것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문하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곳이 내가 입명(立命)110)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초상을 그리자고 청하니 공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께서 달가워하지 않은 것이었고, 더구나 지금은 온 세상이 재난에 빠져111) 무덤의 해골도 땅이 없는데 하필 헛된 초상을 남기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인들이 이르기를 "이 일은 생도들의 일이지 선생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사사로이 서로 어울려 초상화를 그려냈다. 공이 뒤에 알고는 찾아서 그 위에 쓰기를 "너의 생이 측은하구나. 의당 너를 두어야 할 곳은 두어(蠹魚)112)의 곁이로다."라고 하였다. 나라가 망했다는 기별을 듣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나라가 망하면 죽어야할 의리가 하나이니 신하가 사직에 죽는 것이었다. 지금 나라가 망함에는 죽어야할 의리가 둘이니 사람과 짐승이 나뉘는 때라 사람이라면 죽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땅히 문을 닫고 구멍을 막으며,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두발을 보존하며 우리의 도를 지켜서 자정(自靖)113)의 계책을 행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생도들이 병문안을 오니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서책을 가까이 하고 있는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무너져도 이 학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과(碩果)114)의 성쇠가 우리 당을 말미암지 않으면 장차 그것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곁에서 넌지시 아뢰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광택(光澤) 산인(山人)은 사영(四營)115)이 이미 궤멸된 이후에도 붙잡히지 않고 그 종적을 숨기면서 우리의 도(道)를 껴안고 있으니 굳이 필사의 계책을 지을 필요는 없겠습니다."라고 하니 답하기를 "군자가 의리에 대처하는 데에는 때가 있을 뿐이다.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하늘의 새나 바다의 물고기 같은 물건이 아닌데 오늘날 어찌 붙잡히지 않는 방법이 있겠는가. 광택 산인도 사람인데 그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제자 5~6인이 모시는데 공이 말하기를 "두심언(杜審言)이 말하기를 '조물주에게 고통을 받는다.'116)라고 하였는데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진실로 유쾌하다.117) 내가 죽은 뒤에 그대들은 내가 평소 권면하던 말을 잊지는 않겠지?"라고 하고는 자리를 바르게 하고 치관(緇冠)118)을 씌우도록 하고는 태연히 세상을 떠났다. 때는 경술년(1910, 순종3) 10월 10일 계유(癸酉)였다. 문인들이 백건(白巾)에 환질(環絰)119)을 두르고 신산(薪山) 뒤편 곤좌(坤坐)의 언덕에 안장하니 치전(致奠)과 뇌문(誄文)이 길에 잇달았다. 부인은 여흥 민씨(驪興閔氏) 치환(致煥)의 따님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워 내조(內助)가 있었는데 공에 앞서 세상을 떠나 모(某) 산에 안장하였다. 1남 상묵(尙默)은 일찍 죽었고, 세 딸은 광산(光山) 이진휴(李進休)ㆍ홍주(洪州) 송광수(宋光壽)ㆍ밀성(密城) 박경동(朴敬東)에게 시집갔다. 손자 2남은 헌규(憲圭)가 가업을 잘 계승하였고120) 범규(範圭)가 있으며, 손녀 하나는 남평(南平) 문제준(文濟俊)에게 시집갔다. 문하 제자들이 그 유문을 수습하여 판각(板刻)을 이미 마치고 또 언행 중에 평일에 드러난 것을 기초(起草)했다. 대개 소위 잘 관찰하고 잘 말한 것으로 예컨대 청수온직(淸粹溫直)ㆍ화엄온장(和嚴溫莊)ㆍ기량관홍(器量寬弘)ㆍ표리형철(表裏泂澈)한 것들이다. 성동(成童, 15세)의 나이를 전후하여 이미 시대의 중망(重望)을 졌으며 기른 덕(德)이 날로 성대해지고 참된 성심이 해로 쌓여갔다. 스승의 문하에 올라서는 그 진결을 터득하여 홀로 밝고 트인 경지에 섰다. 끽긴활발(喫緊活潑)하며, 재능을 품고 있어서 세상을 경륜하고 시대에 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상응하는 예우121)가 이르지 않아서 비록 사업에 발휘할 수는 없었으나 내면에 쌓여 덕행이 된 것이 아름다워 볼만하였다. 그 겉모습을 본 자는 몸가짐을 삼간 한 가난한 선비122)로 여겼고, 그 논하는 것을 들은 자는 경전을 읽는 한 노숙한 서생으로 여겼으며, 그 참으로 알고 실제로 본 자는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망정 한 가지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않은'123) 사람으로 여겼다. 뜻이 치택(致澤)124)에 있었는데 행해지지 못했으나 그 도(道)를 작게 쓰려 하지 않았다. 광휘를 감추고 문채를 없앴어도 비단옷의 아름다움이 날로 드러났다.125) 비록 홀로 그 자신을 선하게 하면서126) 곤궁하게 처했지만 바른 학문을 밝히고 선비들의 의취를 바로잡아 사문(斯文)을 도왔으니 그 공적이 어떠한가? 영민한 자질을 갖고도 지둔하게 공부를 하였으며, 관대하고 유쾌하게 마음을 쓰면서도 세밀하고 치밀하게 하였다. 주리(主理)를 가계(家計)로 삼고 지경(持敬)127)을 생애(生涯)로 삼았다. 조용한 가운데 깊이 생각하였으며 담담한 가운데 참된 재미를 가졌다. 그 마음가짐은 마치 창해가 비록 광활해도 그치지 않고 노를 저어가면 그 해안에 닿을 수 있고, 태산이 비록 높아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면 그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외로운 군사가 강한 적을 만나면 목숨을 버리고 앞으로 향하여 적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처럼 하였다. 쇠털이 그 섬세함을 싫어하지 않고 고치실이 그 치밀함을 싫어하지 않듯, 혹 올바르게 보고 뒤집어 보기도 하고, 혹 떼어놓고 보기도 하고 합쳐서 보기도 하면서 쉽게 풀리지 않는 공부에 항상 신고(辛苦)의 노력을 다하였다. 가까이서 취하고 멀리서 취하여128) 조리와 두서를 명백히 살피고129) 올바른 뜻과 곁가지의 뜻은 한계를 정연히 하여 지극히 쌓아나가니 얼음이 풀어지듯 시원스럽고 빗물이 적시듯 흡족하였다. 저 피부(皮膚)처럼 표피적인 학문130)에나 공력을 쓰고 아침저녁으로 실효를 바라는 자가 어찌 그 심오함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타고난 바탕이 몹시 약한데다 어려서 병이 많아 힘써 매진하지 못하였는데, 거칠게나마 문자를 알고 대략 도리를 이해하는 것은 깊이 사색하고 완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생 소년들로서 받은 기품이 완후(完厚)한 자131)가 궁격(窮格)의 공부132)를 더한다면, 도에 나가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또 주서(朱書)에 마음을 붙이고 말하기를 "내가 많이 쇠해져서 피 흘려 싸우듯 공부를 할 수 있는133) 때가 아니다. 그러나 사색하는 능력 한 가지는 예전과 비교해 줄어든 것은 없다. 다만 심히 쇠잔해져서 힘써 행할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라고 하였다. 매양 생도들을 모아놓고 강의하고 예를 익히는 것 외에 나머지 일이 없었다. 혹이 이르기를 "모임에 참석한 자가 모두 진실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 명성을 좋아하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마음에 진실이 없으면 그 진실을 더욱 권면하고 행실에 실효가 없으면 더욱 그 실효를 책려해야 한다. 만약 명성을 좋아하는 혐의를 피한다면 선(善)을 행할 길이 없으니 어찌 이것을 혐의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함께 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안색은 온화하게 한다'134)는 것과 '안색은 장엄하게 한다'135)는 것이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오랫동안 공력을 들인 뒤에야 용모를 장엄하게 하는 것이 안색을 온화하게 하려는 생각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수렴하고 총괄하여 한 몸의 생리(生理)를 두루 흘러 통하게 하면 지각(知覺) 또한 날로 열린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를 아울러 선생에게 아뢰니 선생이 답하기를 "그것은 자신이 겪어본 가운데서 나온 것이니 매우 좋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마음 씀이 주밀하고 상세하며 향상되기를 잊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항상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으며,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136) 엄연히 생각하는 듯하고137) 어깨와 등을 세워 곧게 하였는데, 비록 심히 노쇠하고 병이 들어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다. 혹자가 이르기를 "병중에 고통이 없으십니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평일에 앉은 것이 이와 같고, 병 때문에 마음을 더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어찌 병 때문에 스스로 나태해지겠는가."라고 하였다. 형 하나와 동생 하나가 모두 일찍 죽었다. 자매와는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었는데 해마다 두 세 번은 가서 보고 정성을 다하였다.138) 종부제(從父弟)인 구계(九溪) 창림(昌林)이 학업을 같이하고 방소를 함께 하면서 늙도록 변함이 없었다. 족대부(族大父)인 석당공(石塘公)이 일찍부터 유림에 명망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무릇 서로 아는 사이에는 태어남에는 서로 기뻐하고 죽음에는 서로 슬퍼하였으며 예의(禮意)를 빠뜨림이 없었다. 친구가 죽자 유고를 수습하고 책을 만들어 그 아들에게 주었다. 그 어린 고아를 가르치면서 잘하면 가상히 여기고 능하지 못하면 안타깝게 여기면서 또 말하기를 "유명(幽明) 간에 도리를 저버릴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무사(無邪) 박(朴) 공은 어렸을 때의 숙사(塾師)였는데 해마다 반드시 성묘를 하였고, 각 집안의 상자에서 유문(遺文)을 찾아 점검하여 한데 모아139) 책을 만들고 손수 2본을 베껴서 그 집안 후손에게 돌려주고 하나는 집에 보관하였다. 허름한 토담집은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가릴 수 없었으며, 척박한 전답은 죽을 만들어 먹기도 부족하였으나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라면 마땅히 지푸라기 하나라도 취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새겨야 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천사만종(千駟萬鍾)140)이라도 돌아보지 않는 바가 있게 된다.141)"라고 하였다. 공이 문장을 지을 때는 말은 뜻을 전달하고142) 이치는 순조로우면 그뿐이고, 번잡하게 수식하는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선비들이 사부(詞賦)를 두고 경쟁하여 본원(本源)을 버리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어찌 정주(程朱)를 배워놓고 끝내 잡역부가 되겠는가. 반마가(班馬家)143)에 들어가 상객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까지 하였으니 대개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며 억제하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공의 문장을 두고 '포백(布帛) 같은 글이요 숙속(菽粟) 같은 맛이다.'144)이라고 추켜세웠으니, 선조를 드러내서 후세에 전하려는145) 자는 반드시 공의 신실한 문장을 얻으려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렸을 때 항상 병기(兵機)ㆍ산술(筭術)ㆍ율력(律曆)ㆍ풍토(風土) 따위에 마음을 썼으나, 뒤에 자신을 닦고 삼가는 것에도 미처 겨를이 없음을 깨닫고 점차 중지하였고 지금은 바로 냉담해졌다."라고 하였다. 운치 있는 물가나 이름난 산에서 바람을 쐬며 읊기를 좋아하였고, 따듯한 봄과 서늘한 가을에는 벗들을 이끌고 술을 갖고 가서 날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 그윽이 쌓인 심정을 쏟아냈으니 그 흉금이 초탈하여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다. 그 평일의 서소(書疏) 중에 강해(講解)한 문답으로서 간직할 만하고 빠뜨릴 수 없는 것 및 그 성품과 행실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원집(原集)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배우는 데 뜻을 둔 자라면 어찌 이 글들을 가지고 상고하지 않겠는가. 헌규(憲圭)와 문인들이, 내가 선사(先師)의 손자로서 공의 덕을 아는 데에는 의당 나만한 사람이 없다하여 공의 덕을 기술하는 글을 부탁하기에 삼가 그 문인이 기록한 것을 근거로 하고 대략 산삭과 윤색을 가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공이 일찍이 김대곡(金大谷)의 전(傳)을 지어 말하기를 "정주(程朱)로부터 세대가 멀어지자 의론하는 문파가 많아지니 후생(後生) 만학(晩學)들이 딱히 추향할 곳이 없다. 대공지정(大公至正)하고 여러 학설을 모아 절충함으로써 정주(程朱)의 강토를 예전처럼 넓고 말끔히 만든 사람으로 말하자면 노선생(老先生)이 바로 그런 분이다. 비록 그렇지만 선생의 문하에 공이 없었다면 천고토록 전해지지 않은 비결과 한 마음에 홀로 터득한 묘리를 거의 거두어 품고서 말할 곳도 없었을 것이니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이한 만남이라고 할 만하다. 그 평생을 살펴보건대, 가리켜 논의할 만한 출사(出仕)를 조금도 하지 않고 초연히 멀리 떠나서 시종 허물이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온갖 고난을 겪고 극성스런 야유에도 호탕하여 안색에 기미도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박문(博文)과 약례(約禮)146)를 함께 닦아 나가면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던 사람이 누구인가? 해박하되 잡스럽지 않고, 무성하되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가 있되 넘치지147) 않았고, 간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숙연히 공경하고 기쁘게 복종하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공과 대곡(大谷)ㆍ애산(艾山)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였으며 함께 진전(眞傳)을 전수받아서 성대하게148) 유문(儒門)의 의표가 되었다. 그 대곡(大谷)의 전(傳)을 쓴 것은 바로 자기의 전(傳)을 쓴 것이었으니, 내가 무슨 흠잡을 것이 있겠는가. 삼가 이것으로 끝을 맺고 묘도에 새길 자가 채택하기를 고하노라.숭정후 5주(崇禎後五周) 임자년(1912, 순종5) 동지(冬至)149)에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이 쓰다. 公諱義林字季方。學者稱日新先生。鄭氏其先光山人。高麗贊成諱臣扈其肇祖。監司諱麟晉。始仕國朝。應敎諱熊。節度諱應奎。司直諱演贈地官卿。三世連顯。三傳至諱纘。泊於仕進。遯錦城。世篤儒行。曾祖諱埰移朗州。祖諱加錫移金陵。考諱濟玄。兩世壽通政。忠養二親。敎子有法度。嘗遊漢師。謂名利誤人。吾道一脈。當在林下。遂斷當世意。耕讀爲家計。妣珍原朴氏父致聖。韋南熙中后。貞淑有禮。憲宗乙巳十一月甲子。生公于綾之大德第。夢月入懷中。生而聰穎。自幼目無睇視。常合眼默坐曰。眼爲一身上日月。日月晦蝕。天地否閉。甫能言。傍聽塾兒讀小學。能會多少義。乃曰灑掃爲治平之本。手執灑掃惟謹。 嘗從長老聞華夷尊攘。輒問均是人也。何分華夷。曰地有內外。俗有美惡。默念良久曰。人於一身上。亦有華夷。美者爲華。惡者爲夷。人當先尊攘一身上華夷。聞者大驚異之曰。嘗出外遇雨。羣兒皆奔走。獨徐緩自如曰。吾心參天地。吾性同聖賢。其重何如。而輕走失容耶。每出遊遇羣兒繳繞。則必遄返曰父母所戒。在長老之側。遲遲而歸曰父母所樂。常曰。自心其心。不心父母心。非佳子弟。愉婉定省。在視寒暖。前後喪皆毁甚。課日上塚。世傳先稿。蒐粹珍藏焉。始上學授孝經。逐句另解。解輒軆驗。通政公知其志尙有在。不使他業閒之。且曰人貴有業。業貴有成。受爲懷中?。處靜攻苦。忘食忘寢。羣書羣經。講貫詳密。弱冠前後。學已頭顱矣。於是以詞藻爲浮華。功令爲自衒。冷淡爲家計。講誦爲茶飯。味人所不味。樂人所不樂。而見識已卓然於時儒矣。于時儒術分裂 性命橫決 理氣汩亂 上天失主宰本源爲虛位衆嘗遊歷諸家 以究緖餘 而病其無眞知實見 而喙口爭爲二十四戊辰。拜蘆沙先生於沙上。一見而亟稱曰。天資樂易。識見已正。且曰沙彌來叩病僧扉。眉目通明可學機。吾於季方云爾。言下迎刃。掃諸家之釁粃。溯聖哲之異源。充然而歸曰。世之以師道自任者。皆承襲差繆。祇見一邊記聞講說。不過爲隙光勺水淺淺排着。而惟先生資近生知。道本中庸。直接朱子。建立大軆。言言無非自本源上流出來。如大廈千萬間。貯藏許多金帛。隨人所求而用之不竭。善觀而善言。一見而遽以是稱。非自家所造之崇深。所得之眞切。道不得如此。嘗慨然歎曰。古今許多有志者。得受敎之地。而猶不能洞豁貫熟者。只是閒斷爲病。日新又新。爲對病之藥。以日新二字揭座右。常目而致力焉。其無上事而慨然。與顔子喟然者。一串貫來。而其下說話。罔非仰鑽瞻忽。欲從末由之至意。透得妙契關。盖將在此。而因以書稟于先生。答曰。不亦善夫。此正與世相忘。從吾所好之一副機括。但於此處確定脚跟。始可議到。槪亦許之深也。同門有金大谷錫龜,鄭艾山載圭最相善。蓋其志尙同而見解亦同也。退而講解。進而就正。誾誾侃侃。常發夫子之莞爾。而一日出篋藏凉議猥筆以示之。蓋先生之蘊奧所發。而所謂性與天道。及門諸子所不容易得聞。而三君子至是得聞之。先生之意槪曰 世無眞切見解。以待後世之子雲堯夫。而三子者知見。吾可以無隱乎爾也。一貫之旨。惟曾子聞之。太極之妙。惟兩程聞之。謝者以是爲先生眞傳者。槪是耳。與艾山相距十舍。每師門不期而遇。非止一再。蓋其氣類相感。其應有如此者。其一場該洽。不啻宮商律呂。傍人亦見其津津。先生謂大谷曰。二君同姓而同志。居里同名。每此同席。可記之以爲異日故事。蓋喜之無已也。家窶甚。不恒厥居。簞瓢不啻屢空。而晏然不以爲意。不改其樂。殆庶乎。而遠近學者。信從負笈。以致黌舍不能容。師道之望自歸。而粥粥然若虛若無。導迪之方。不以是而或歇后。委曲懇到。誘掖激勵。漸磨成就。或使之靜坐而軆驗。或使之辨論而反隅。步趣可望則喜形於色。鈍滯難開則若癏在己。造詣精深者。贊其莫安於小成。局定偏見者。諭之使進於圓通。曉譬昭然。聽者易曉。枯渴者浹洽。繳繞者脫灑。切近喫緊而不欲巧曲穿鑿。寬坦明快而不欲活略流蕩。嘗曰看書。須要貼心切己。意味自然深長。與其泛濫閑汩而無所歸宿。曷若致精據要。得寸得尺。爲有進步處。讀書豈欲爲文人才子。爲覓第干祿計耶。只是一字有一字之益。一日有一日之進。悠悠萬事。無足置胸中。得喪軒輊。任諸彼蒼。志不立。則一時之善心。不過爲畫脂鏤冰。羣經之格言要語。不過爲文具書肆。人得片金零玉。猶愛護而恐其失墜。此身何等至重。而不盡愛護之方乎。一言一行之不謹。一刻一時之不謹。皆自失其身。自慢者人必慢之。自棄者人亦棄之。義理無限。事業無竆。做得七八分工夫。爲七八分人。做得十分工夫。爲十分人。自家地位高低。在自家用力之多寡。吾輩旣不得有爲於世。則所可爲者。讀聖賢書。守聖賢道。以與朋友共之。又以傳於後。以存斯文一脈於無竆。此不可看作第二義。重任非隻肘可運。奔波非捧土可塞。雖絲粟毛髮之賢。欂櫨店楔之材。積積愈奇。交驩相得然後。可以收拾得多少世事。裨補得多少世敎。大開口說理說氣。不如就日用事物。尋求其是。決去其非。似是理氣實事。蓋公躬行心得。發之爲訓。因流溯源。其踐履之實。槪可覰見矣。嘗與知舊生徒。登瑞石絶頂。風詠而歸。悠然有沂雩之樂。多士築亭。設講扁用詠歸。奉五聖四賢遺眞。每春秋舍菜。旅酬相揖。禮畢聽講。經生學者環侍質問。有三代之遺風。一遊嶠南。會艾山及崔溪南諸公。門人從者數十人。溪艾亦各有弟子陪從。名亭勝地。屨及殆遍。所至執經問難。答問之餘。講劘道理。觀者以爲鄒魯遺風。盡在是矣。後又約溪艾及其族兄月波會方丈之鍾山。嶺湖士。設講請益。三四君子。折衷答問。上自先王典禮。以至爲學節度。靡不說到。權三山基德並記爲鍾山講錄。是日酒半。公揚觶而言曰。孔門諸子。得大聖以爲師。得大賢以爲友。問於師講於友。想像其至樂。千載猶感。士之生於今日。雖不得唐虞之君。與皐夔稷契。都兪吁咈於亭午之日。以孟氏所謂王天下不與三樂。其輕重有分。寧可遺於彼。不可失於此。吾輩得師如蘆沙先生。得友如大谷艾山諸君子。薰蒸涵濡。親見洙泗之盛於去古已遠之日。是一生難再之遇。而忽焉先師奠楹。大谷繼逝。溪艾諸君子。又遠在十舍之外。大義恐乖於七十子之身。離索亦不免西河之罪。願結鍾山之會。以爲一年一遇之地。衆皆唯唯。而世亂而未諧。士友恨之。國朝自丙子外交之後。海寇交通。深懷世道之憂。固守幽人之貞。每風雨夜。衣服冠而坐。大誦張南軒平生風雨夕每念名節難之句。悽然若將泣下。乙未有八月之變。繼有毁髮脅制。奮然曰。此時事只有捐殉一路而已。馳書艾山。約與會議。丙申春。余以擧義討復。發檄綾城。答檄有曰瓦而全。不如玉而碎。魚之欲。曷若熊之美。余擊節而起曰。此吾友鄭日新口氣。非義節桹於心。忠勇發於義。則做不得此句來。及後叩之。果是也。及聞其檄召一方人。作誓言曰。我東方苟有一分人心者。孰不有共天之羞。况今四海淨髮。髮獨靑邱一片。得保撮髻。此髻若亡。則萬世否泰消息絶矣。難之者謂彼方爲刀。我方爲肉。必無幸矣。未有一命之君子。何有於是。公凜然曰。亂賊人人討之。春秋之義論義而不論力。君子之仗義。豈復有希覬哉。時余駐陣在錦城館。匹馬來會。與論方略。歸猶屢書相勉。及移陣光山館。公與多少志士。將同余于光山。爲死生計。聞宣諭罷兵而止。續有義擧諸人逮捕脅令。蓋賊臣挾天矯詔爲此也。余貽書諸同義。此非吾君之意。就戮無義。匿跡待時。爲深得計。公亦云爾。棲屑山間。聞余被逮。訛言。遂還家待逮曰義無獨生。旋聞爲訛而事亦寢不問。以訓迪後輩爲己任。謂生徒曰。古人獄中猶尙書。舟中猶大學。豈可以世亂而忘講學乎。定爲一朔一講之規。或山齋或溪亭。終日無倦。時有嶺人權鳳煕,崔東敏輩。承望時儒風旨。謂凉議猥筆。犯斥先賢。相與紛紜。公謂彼雖欲自絶。何損於日月之明。而頭戴先賢。眩惑後輩。不無其害。不可以不辨。乃曰先生於栗翁。篤信而尊慕。攷諸文集可見。但於陰陽動靜。其機自爾。非有使之一句語有所未契。每欲活看。以流行一邊。及見世儒執此一段。爲主氣證案。推原辨之謂發之太快。而其曰詖淫邪遁。顚倒猖披。所以明後人之弊也。溫公疑孟。而其子康勸講於經筵。劉元城其門人而嗜如膾炙。南軒辨五峯差處。勉齋或有違於考亭定說。朱子謂周子似黃老。謂程子有黃老流風。此亦可以誣毁其父師及前賢律之乎。前賢之偶失照管。後賢辨而明之。乃十分尊慕之道。此豈權崔輩之所知乎。通告嶺中章甫。使明知其罪。又會湖儒於詠歸亭。懇懇辨論曰。吾黨之士。試觀今日所辨。如理氣之說。其得失不可委之於後。當卽下究覈。若己無知見。隨人毁譽。則因仍苟且之頃。安知此身不陷於偏側之科乎。此則身家大計。豈止爲了此一事而已耶。又聞有時儒若而人。從權崔之餘論。有所記辨。駁爲條辨。 遂條辨駁。全文在原集。其末段曰。近世主氣之論不一。有以太極爲無分之一。有以五性爲帶氣之物。有以明德爲形而下。言一本萬殊則萬殊爲氣。言大本達道則達道爲氣。陰陽五行謂非本然。人物偏全謂非定分。主宰妙用。條理段落。一歸重於氣。氣奪理位。則臣奪君。子奪父。妻奪夫。小人奪君子。夷狄奪華夏。亦一例事。先師爲是之懼。發揮剔抉。次第折衷。而一邊之論猶齗齗。多見其不知量也。或問今日東方。有主氣一學。所從遊不可不愼。當何擇處。曰蘗溪李先生。其斥邪衛正之策。光明磊落。與我先師。同條共貫。所著雅言。所以自作主宰。明道器帥役之分。斥夫一種明氣之論。又與先師。若出一口。信知天下之道一而已。及聞賊臣賣國。勒成五條。憂憤忿草疏。首言島夷可攘而不可和。國賊可斬而不可貸。中言毅宗殉社之義。以堅上心。末言效死不去之義。旣成。聞儒疏不納。慨然焚稿。已而聞勉菴艾山。約會闕里。爲擧義之計。曰吾事有託矣。居無何。闕約亦沮。拍案而歎曰。鰈魚背上一片地。爲彼入網鱗哉。晉爲華夏盟主。而受季氏之賂。使召公卒於乾侯。今安知絶域鱗介之類。獨不醉於彼賂乎。我國之士論民論。亦必無所忌憚。民無向上。人化爲獸。一天之下。大倭小倭。包胥之哭。亦無其地。存楚之計。何望有日。憂忿成疾。盖以天下陸沈。無可往矣。居室爲西山。坐處爲東海。嗟殂之嘆。欲蹈之志。屢形於色辭。一日口占曰。蘆沙夫子丙寅疏。大義森嚴日月明。當時若用二三策。安有今朝社稷傾。又自古喪邦孰若今。天飜地覆日星沈。惟有杜門自靖計。西山東海不須尋。顧謂門弟子曰。此吾立命之地。門弟子請寫眞。搖手曰。先師之所不屑。矧今寰宇昏墊。塚骨無地。何必以虛影留之。門人謂此生徒事。非先生事。私相與寫出。後覺之。索之書其上曰。爾生可惻。宜爾置之蠧魚之側。及聞無邦之報。潸然下淚曰。古之亡國也。可死之義一。臣死於社稷。今之亡國也。可死之義二。人獸之判。人不可以不死。只當掩戶塞竇。衣吾衣存吾髮守吾道。爲自靖計而已。諸生問疾而來。強病扶坐曰。君輩能親近書冊乎。海枯山崩。此業不可忘。碩果消息。不由吾黨。將委諸何人。有從傍微禀者曰。光澤山人。不被執於四營已潰之後。隱其跡袍吾道。不必作必死計。曰君子之處義。時而已。何可同也。人非翼天鱗海之物。今日豈有不被執之術。光澤山人亦人其日奈何。疾革。弟子五六人侍。公曰杜審言言爲造化所苦。吾亦云爾。然吾死固快活。吾死之後。君輩能不忘吾平日勸勉之言乎。命正席整緇冠。恬然而逝。時庚戌十月十日癸酉。門人白巾環絰。葬薪山後坤原。奠誄相屬於道。夫人驪興閔氏致煥女。柔嘉有內相。先公圽。葬某山一男尙默早卒。三女適光山李進休洪州宋光壽密陽朴敬東。孫二男。憲圭克家。範圭。一女適南平文濟俊。門弟子收拾其遺文。剞劂已畢。又草其言行之著於平日者。蓋所謂善觀而善言者。若曰淸粹溫直。和嚴溫莊。器量寬弘。表裏泂澈。成童前後。已負時望。而養德日茂。眞誠歲積。及登師門。得其眞詮。獨立昭曠。喫緊活潑。懷抱才具。可以經世需時。而善價不至。雖不得發於事業。而蘊之爲德行者。約綽可見。見其外者以爲勅躬一措大。聞其論者以爲讀經一老生。而其眞知而實見者以爲寧學聖人而未至。不欲以一善成名。志在致澤而不行。不欲小用其道。韜光鏟采。錦絅日章。雖其獨善竆居。而其明正學正士趨。羽翼斯文。其功爲何如哉。以敏底質。做鈍底工。用寬快心。着細密地。主理爲宗計。持敬作生涯。從容中有深思量。平淡中有眞滋味。其執心如滄海雖關。撓棹不停則可達其岸。泰山雖屹。運步不駐則可躋其頂。孤軍遇勁敵。舍死向前。敵不死則我死。牛毛不厭其細。蠶絲不厭其密。或正倒看。或離合看。常用極辛苦不快活工夫。近取遠取。條緖斤斤。正義傍義。界限井井。積累之至。渙然如冰釋。洽然如膏潤。彼用工於皮膚。責效於朝暮者。何能髣髴其壼奧也。嘗曰吾稟質甚癯。小少多疾。不能努力趲進。而粗識文字。略曉道理者。潛思玩索。得於天性。以知後生少年受氣完厚者。加以竆格之工。則於進道也不難矣。晩年。又着心於朱書曰。衰甚非血戰攻堅時節。而思索一路。較昔無減。但摧頹之甚。不能力行。爲可歎。可歎每會生徒。講義習禮之外。無餘事。或謂彼在會者。未必皆有誠心。好名或不無其嫌。公曰。心有未誠。益勉其誠。行無實效。益責其效。若避好名之嫌。則無爲善之路。豈嫌於是而幷廢其所當爲者耶。嘗疑色溫容莊或相背。用力之久。始知容莊不在思溫外。收斂管攝。使一身生理。周流通徹。則知覺亦曰開。並擧似於先生。答曰。此是自身經歷中出。甚善。盡其用心周詳。不忘向上。有如此者。常夙興盥櫛。正衣冠尊瞻視。儼然若思。肩背聳直。雖衰病之甚猶然。或謂病裏得無苦惱。曰吾平生所坐如此。非以病而加之意也。亦何以病而自惰。一兄一弟皆早夭。姊妹相距非甚近。歲二三往見。致款洽。從父弟九溪昌林。同業共方。至老無替。族大父石塘公早有儒望。自少服事。凡於相知。生相慶而死相哀。禮意無闕。朋友死。收遺墨。編摩而遺其子。訓其孤幼。嘉善而矜不能。且曰。恐負幽明。無邪朴公。童子時塾帥。歲必展墓。搜檢遺文於各家巾衍。裒粹成袠。手寫二本。歸其家孫。一藏于家。環堵蕭然。不蔽風雨。薄田不足以供饘粥。而處之裕如。嘗曰。士當以一介不取意思。鏤在肝膈上。方於千駟萬鍾。有所不顧。其爲文章。辭達理順。枝蔓雕飭。所不屑焉。嘗病時士競詞藻遺本源。至謂寧學程朱。卒爲廝役。不欲入班馬家作上客。蓋救時抑揚之意也。是以當時以布帛之文菽粟之味推許之。而闡先乖後者。必欲得其信筆也。嘗曰小少嘗用心於兵機筭術律曆風土之類。後覺自己修勅。有不暇及。漸次銷歇。至今直是冷淡耳。韻水名山。雅好風詠。春暄秋凉。挈朋攜酒。竟曰而歸。以陶寫其幽菀。盖其襟懷飄灑。不爲世故所惹絆者然也。其平日書疏中講解答問。可有而不可闕者。與其照管性行。皆載在原集。今姑略之。有志於學者。盍就而攷諸。憲圭與諸門人。以宇萬爲先師之孫。知德宜莫余若。屬筆於狀德。謹据其門人所記而略加刪潤。序次如右。公嘗傳金大谷。有曰程朱世遠。議論多門。後生晩進。莫適所向。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老先生其人也。雖然若先生之門。未有公則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幾於卷而懷之。無可告語。而此可謂千載奇遇。觀其平生。無小小出脚。可以指議。而超然遐擧。始終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並臻。而天德王道有軆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而敬。怡然而服者何人。蓋公與大谷,艾山。一而二。二而一。同受眞傳。蒙然爲儒門之表率。其所以傳大谷者。適所以自傳也。吾何間然。謹以是終焉。以告表隧者採焉。崇禎後五周壬子陽復日幸州奇宇萬撰。 호조 판서 원문의 '지관(地官)'은 호조(戶曹)의 별칭이다. 금성(錦城) 전라도 나주(羅州)의 옛 이름이다. 낭주(朗州) 전라도 영암(靈巖)의 옛 이름이다. 금릉(金陵) 전라도 강진(康津)의 옛 이름이다. 수직(壽職) 조선 시대에 노인을 우대하여 주는 벼슬로, 노인직(老人職)이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존양(尊攘) 중화(中華)를 존중하고 이적(夷狄)을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어지럽게 노는 원문에는 '繳緩'으로 되어 있으나 문의가 통하지 않아,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 '繳繞'으로 되어 있는 것을 따라 번역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며 원문의 '정성(定省)'으로, 자식이 이른 아침에 부모님의 침소를 찾아 문안을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정돈해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모든 자식이 된 사람의 예는 겨울이면 어버이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이면 서늘하게 해 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편안하게 보아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는 것이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찬 지……살폈다 부모의 음식을 잘 살피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에 "음식을 올릴 적에 반드시 차가운지 따뜻한지의 적절함을 살피며, 상을 물리거든 드신 음식을 물으셨다.〔食上, 必在視寒暖之節, 食下, 問所膳.〕"라고 하였다. 가슴 속의 경구(警句) 원문의 '회중간(懷中簡)'은 '가슴 속의 간서(簡書)'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경계하는 문구의 의미이다. 《시경》 〈출거(出車)〉에 "국사가 어려움이 많아 편안히 쉴 수가 없네. 어찌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이 간서가 두렵다네.〔王事多難, 不遑啓居. 豈不懷歸, 畏此簡書.〕"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을 말한다. 공령(功令) 과거시험에 쓰이는 시문을 말한다. 사상(沙上) 스승인 노사 기정진이 있는 장성(長城)을 말한다. 틈……물 작고 하찮은 지식을 비유한 것이다. 생지(生知)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준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말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태어나면서 아는 자는 상등(上等) 자질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 자질이고, 많은 노력을 들여 배우는 자가 또 그 다음 자질이니, 많은 노력을 들여 배우지 않으면 백성으로서 하등(下等)의 자질이 된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라고 하였다. 일신우신(日新又新) 《대학장구》 전(傳) 2장에,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을 끌어와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又日新.〕"라고 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무궁한……한〔仰鑽瞻忽欲從末由〕 안연(顔淵)이 일찍이 공자의 도(道)가 한없이 깊고 커서 따라가고자 해도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인데, 정의림이 노사의 학문에 대해 감탄한 것을 이에 비유한 것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크게 탄식하며, "부자(夫子)의 도(道)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볼 때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 부자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해 주시므로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나의 재주를 다하니, 부자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한지라, 그를 따라가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라고 하였다. 내가……따르는〔從吾所好〕 부귀(富貴)와 같은 외물에 연연하지 않고 의리(義理)를 따를 것임을 말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부를 추구해서 얻을 수 있다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자의 일이라도 내가 또한 그것을 하겠지만,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리라.〔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라고 하였다.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우니 원문의 '간간은은(侃侃誾誾)'으로 아랫사람과 대화를 할 때 강직하고 윗사람과 말할 때는 부드럽게 간쟁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향당(鄕黨)에 있을 때 "조정에서 하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강직하게 하고, 상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간쟁하였다.〔朝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허씨설문(許氏說文)》을 인용하여 "간간은 강직(剛直)한 것이요, 은은은 화열(和悅)하되 시비는 다투는 것이다.〔許氏說文, 侃侃, 剛直也, 誾誾, 和悅而諍也.〕"라고 하였다. 항상……하였다 스승으로 하여금 만족스러운 웃을 짓게 하였다는 뜻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 다스리는 무성(武城)에 가서 현가 소리를 듣고 "공자가 빙그레 웃으셨다.〔夫子莞爾而笑.〕"라고 하였다. 성(性)과 천도(天道)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자공이 "부자의 문장은 들을 수 있었지만, 부자께서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하였다. 자운(子雲)과 요부(堯夫) 자운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字)이고, 요부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자인데, 보통 당대(當代)에는 알아줄 사람이 없어서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줄 만한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전한(前漢)의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어 놓고 "후세에 양자운(揚子雲 양웅)이 나면 반드시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하였고, 송대의 소옹(邵雍)이 《황극경세(皇極經世)》를 지어 놓고 "요부(堯夫 소옹)가 후세의 요부에게 드린다."라고 했다. 일관(一貫)의 요지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일리(一理)가 만사(萬事)를 관통한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증자(曾子)를 불러 "삼(參)아, 내 도는 한 가지로 꿰뚫고 있다.〔參乎, 吾道, 一以貫之.〕"라고 하니, 증자가 이 의미를 즉시 이해하여 의심 없이 대답하기를 "예,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論語 里仁》 양정(兩程) 송(宋) 나라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주돈이(周敦頤)의 제자이다. 기류(氣類) 지기(志氣)가 비슷한 동류로,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의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그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則各從其類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조화로운 음악 가락 두 사람 사이가 음악이 화음을 이룬 것 같았다는 것이다. 원문의 '궁상(宮商)'은 오음(五音) 가운데 궁음(宮音)과 상음(商音)으로, 흔히 음률이나 악곡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율려(律呂)'는 육률(六律)과 육려(六呂)로 역시 음악의 뜻으로 쓰인다. 먹고……가까웠다 매우 가난했으나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고, 또 《주역》 〈계사전(繫辭傳)〉에는 "안연은 도에 가까울 것이다.〔顔氏之子, 其殆庶幾乎.〕"라고 하였다. 겸손하여 원문의 '죽죽(粥粥)'으로, 본래 유약하여 무능한 듯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겸손한 모양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의관이 바르고 동작이 신중하며……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며 유약하여 무능한 듯이 보이니, 그 용모에 이와 같은 점이 있다.〔儒有衣冠中, 動作愼,……其難進而易退也, 粥粥若無能也, 其容貌有如此者.〕"라고 하였다. 반증 원문의 '반우(反隅)'로,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나머지를 유추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의 "한 귀퉁이를 들어보였는데 나머지 세 귀퉁이로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주지 않는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는 공자(孔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귀천(貴賤) 원문의 '헌지(軒輊)'로 수레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헌(軒)이라 하고, 수레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을 지(輊)라고 한다. 《시경》 〈유월(六月)〉에 "융거가 이미 편안하니 지(輊)와 같고 헌(軒)과 같다.〔戎車旣安, 如輊如軒.〕"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귀천(貴賤)을 비유한 것이다. 하늘 원문의 '피창(彼蒼)'으로 《시경》 〈황조(黃鳥)〉에, "저 푸른 하늘이여. 우리 좋은 사람을 죽이도다. 만약 대속(代贖)할 수 있다면 사람마다 그 몸을 백번이라도 바치리라.〔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라고 하였다. 기름에……새기는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수로(殊路)〉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보람은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고치실ㆍ좁쌀ㆍ모발〔絲粟毛髮〕 하찮은 것들을 말한다. 두공(斗拱)ㆍ빗장ㆍ문설주〔欂櫨店楔〕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작은 소재들이다. 기우(沂雩) 기수(沂水)와 무우(舞雩)를 가리키는데, 초연히 산수 간에 노니는 즐거움을 언급할 때 나오는 지명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석채(舍菜) 석채(釋菜)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학교에 입학할 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채소류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전례(典禮)를 이른다. 여수(旅酬) 정제(正祭)가 끝난 뒤에, 제사에 참여했던 친족이나 빈객들이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 서로 공경의 예를 표하며, 술잔을 권하는 의례이다. 영남(嶺南) 원문의 '교남(嶠南)'으로 조령(鳥嶺) 이남(以南)인 영남(嶺南)을 말한다. 교는 중국의 교령(嶠嶺)으로, 우리나라의 조령을 교령에 비유한 것이다. 최계남(崔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을 말한다.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수학하였다. 경서를……논란하며 많은 선비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향사례가 끝나고 천자가 정좌하여 직접 강(講)하면 제유가 경서를 지니고 그 앞에서 묻고 논란하는데, 관대를 하고 홀을 꽂고 띠를 맨(搢紳) 사람들로 교문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饗射禮畢, 帝正坐自講, 諸儒執經問難於前, 冠帶搢紳之人, 圜橋門而觀聽者蓋億萬計.〕"라는 말이 《후한서》 〈유림열전(儒林列傳)〉 서문에 보인다. 추로(鄒魯) 공자(孔子)ㆍ맹자(孟子)의 학문을 말한다. 추(鄒)는 맹자의 출생지이고, 노(魯)는 공자의 출생지이다.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 원문의 '청익(請益)'으로,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솔선할 것이며 부지런히 해야 한다' 하자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셨다.〔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曰, 無倦.〕"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당우(唐虞)의 임금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가리킨다. '당우'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시대로, 곧 요순(堯舜) 시대를 가리킨다. 고기직설(皐虁稷契) 현신(賢臣)들을 가리킨다. 순 임금의 신하로 법의 집행을 맡았던 고요(皐陶), 전악(典樂)으로서 교육과 음악을 전담한 기(虁), 후직(后稷)으로서 농업을 담당한 직(稷), 민정 장관이라 할 사도(司徒)의 직책을 관장한 설(契)을 가리킨다. 토론 원문의 '도유우불(都兪吁咈)'로, 본래 군주와 신하가 서로 자유롭게 정사를 의논하고 의견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도(都)와 유(兪)는 찬성의 의미, 우(吁)와 불(咈)은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우가 말하였다. '아, 훌륭합니다. 제이시여. 자리에 있을 때를 삼가소서.' 제순(帝舜)이 말씀하셨다. '그 말이 옳다.'〔禹曰都帝, 愼乃在位, 帝曰兪.〕"라고 하였다. 또 《서경》 〈요전(堯典)〉에 "제가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말이 옳지 않다.'〔帝曰吁, 咈哉.〕"라고 한 예가 있다. 천하에……않는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수사(洙泗) 수강(洙江)와 사강(泗江)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강이다. 공자의 고향에 이곳과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공자의 학문 내지 학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돌아가시고 원문의 '전영(奠楹)'은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는 것으로, 죽음을 에둘러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공자가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전(奠) 올리는 것을 받은 꿈을 꾸고 자공(子貢)에게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 병으로 누운 지 7일 만에 별세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칠십 제자 공자의 제자 70명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노사의 걸출한 문하생을 뜻하는 말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는 말이 나온다. 떨어져……죄 무리와 헤어져 지낸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은둔해 있었는데, 아들이 죽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실명(失明)하였다. 증자(曾子)가 문병을 오자, 자하는 죄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이 찾아왔다고 한탄하였다. 이에 증자가 자하의 죄를 낱낱이 따지자, 자하가 그 말에 수긍하면서 "내가 지나쳤다, 내가 지나쳤다. 내가 벗들을 떠나 홀로 머물러 지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吾過矣, 吾過矣. 吾離羣而索居, 亦已久矣.〕"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병자년(1876, 고종13)에……교통 고종 13년(1876)에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 간에 맺은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으로 부산ㆍ인천ㆍ원산의 3항(港)을 개항하고 서울에 일본 공사관을 설치하게 된 일을 말한다. 유인(幽人)의 정조〔幽人之貞〕 '유인(幽人)'은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주역》 〈이괘(履卦) 구이(九二)〉에 "행하는 도가 평탄하니 그윽한 사람이라야 정하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라고 하였는데, 이는 굳센 정조를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장남헌(張南軒) 남송의 학자인 장식(張栻)의 호로,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이다. 을미년 8월의 사변 1895년 8월 일본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단발령(斷髮令) 일본이 1895년(고종32)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1월에 단발령을 내린 것을 말한다. 질그릇으로……나으며 차라리 정의(正義)를 위해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강한 절의를 비유한 말이다. 《북제서(北齊書)》 권41 〈원경안열전(元景安列傳)〉에 "대장부가 차라리 옥그릇으로 부서짐을 당할지언정,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大丈夫, 寧可玉碎, 不能瓦全.〕"라고 하였다. 물고기도……좋겠는가 생사(生死)의 선택에 있어 구차히 살기보다 떳떳하게 의리(義理)를 따라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원하고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가지겠다. 삶도 내가 원하고 의리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원수와……하는 원수를 갚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부모의 원수에 대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자며 벼슬하지 않고 더불어 천하를 함께하지 않는다. 시장과 조정에서 만나면 병기(兵器)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고 싸운다.〔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諸市朝, 不反兵而鬪.〕"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청구(靑邱)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일명(一命)의……있는가 '일명(一命)의 군자'는 최하급 관리를 말한다. 주대(周代)의 일명에서 구명(九命)까지의 관계(官階)에서 유래하였다. 최하급의 관직도 하지 않았으니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뜻이다. 난신적자(亂臣賊子)는……의리이니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의 "말로써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수 있는 이라면 성인의 문도이다.〔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 "《춘추》의 법도에 따른다면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다 토벌할 수 있으니, 꼭 사사(士師)여야 할 필요는 없다.〔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討之, 不必士師也.〕"라는 말이 나온다. 선유(宣諭) 임금의 유지(諭旨)를 선포하는 것이다. 옛사람은……배웠고 한(漢)나라 때 순리(循吏)인 황패(黃霸)가 하후승(夏侯勝)과 함께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간곡히 요청한 결과 하후승에게 《상서(尙書)》를 배워 뒤에 현달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5 夏侯勝傳 卷89 循吏傳 黃霸》 배……배웠는데 송나라의 충신 육수부(陸秀夫)가 금(金)나라 군사에게 쫓겨 남쪽 바닷가 애산(厓山)에서 떠돌던 위급한 상황에도 배 안에서 매일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써서 어린 황제에게 강독을 권했다. 애산(崖山)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먼저 처자식을 빠져 죽게 하고는 자신은 왕을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죽었는데, 이때 배 안에서 죽기 직전까지 강독했다고 한다.《宋史 卷451 陸秀夫傳》 저들이……손상하겠는가 험담하고 비방하여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비방하자 자공(子貢)이 "그러지 말라.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느니라. 다른 사람의 어짊은 언덕 같아서 넘을 수 있지만 중니는 해와 달 같아서 넘을 수 없느니라. 사람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하나 해와 달을 어찌 손상하리오. 다만 자기의 역량을 알지 못함을 보일 뿐이로다.〔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라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율옹(栗翁)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가리킨다. 음(陰)이……아니다 이이(李珥)가 〈성호원에 답함〔答成浩原〕〉에서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양이 동하면 이(理)가 동(動)에 타는 것이요 이가 동하는 것은 아니며, 음이 정하면 이가 정(靜)에 타는 것이요 이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陰靜陽動, 機自爾也, 非有使之者也. 陽之動則理乘於動, 非理動也, 陰之靜則理乘於靜, 非理靜也.〕"라고 한 내용이 있다. 《栗谷全書 卷10》 피음사둔(詖淫邪遁) 병폐가 있는 4가지 종류의 말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지언(知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맹자(孟子)는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하였다. 전도(顚倒) 저본에는 '顚側'로 되어 있으나 '顚倒'의 오기인 듯하다.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과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도 '顚倒'로 되어 있다. 피음사둔(詖淫邪遁)과 전도(顚倒)되고 창피함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기정진이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에서 "지금 사람들은 '도리(道理)' 두 글자를 아득하여 생각도 논의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몰아내고, 조금만 발현하고 환히 드러난 것이 있으면 한결같이 기(氣)에 속하게 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理氣)를 안다고 하고, 이렇지 않은 사람은 이기를 모른다고 하니, 헛된 이름과 과거의 말로 도를 말하고 이를 말하지만, 그 실상은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아 모든 사물의 본령으로 삼을 뿐이다. 이와 같다면 천하에 다시는 피음사둔이 없을 것이니 전도되고 창피함이 무슨 일엔들 없겠는가. 〔今人驅道理二字於冥漠不可思議之地, 而纔有發見昭著, 一屬之氣. 如此者爲識理氣, 不如此者爲不識理氣, 雖以虛名過去說, 說道說理, 而其實則氣奪理位, 爲萬事本領而已. 若是則天下更無詖淫邪遁矣, 顚倒昌披, 何事不有.〕라고 한 내용을 말한다. 온공(溫公)은 맹자(孟子)를 의심했지만 온공(溫公)은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으로, 사후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으로 부른다. 맹자(孟子)의 말에 대해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고 산정(刪正)한 《의맹(疑孟)》을 지었다. 그의……권했고 사마강(司馬康)은 사마광의 아들로, 철종(哲宗)에게 말하기를 '《맹자》는 글이 가장 순정하고, 왕도(王道)를 진술한 것은 더욱 살펴보기에 마땅합니다.〔孟子爲書最醇正, 陳王道, 尤所宜觀覧.〕'라고 한 내용이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후집(後集) 권7에 보인다. 유원성(劉元城) 송나라 때의 학자 유안세(劉安世)를 말한다. 원성은 그의 봉호이다. 자는 기지(器之),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남헌(南軒)은 오봉(五峰) '남헌'은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으로, 자는 경부(敬夫)이며 남헌은 그의 호이다. '오봉'은 호굉(胡宏, 1106~1161)의 호이다. 그의 자는 중인(仲仁)으로 제자로 남헌(南軒)을 두었다.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 '면재'는 송(宋)나라 문신 황간(黃幹)이다. 주자(朱子)의 제자이다.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齋)이다. '고정'은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만년에 거했던 곳으로, 고정서원(考亭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으면서 그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분(分)이 없는 일(一)〔無分之一〕 여기서 말하는 '분(分)'과 '일(一)'은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할 때의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말한다. 참고로 노사 기정진은 논란이 되었던 〈납량사의(納凉私議)〉에서 분(分)이 없는 일(一)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제16권 〈납량사의(納凉私議)〉 참조.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명덕(明德) 《대학장구》 경 1장에서 주희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在明明徳〕"를 풀이하면서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明徳者, 人之所得乎天而虚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일본만수(一本萬殊)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 다른 것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증자(曾子)에게 이르기를 "삼아, 우리 도는 한 이치로써 오만 일을 관철시키는 것이다.〔參乎 吾道一以貫之〕" 한 데 대하여,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뿐이니라.〔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충서(忠恕)를 논함에 있어, 서(恕)가 충(忠)에서 분파(分派)되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만수가 한 근본이 되는 것과 한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이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 나가서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서 허다한 지엽이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里仁》 《朱子語類 卷29》 대본달도(大本達道) 대본은 중(中)이고, 달도는 화(和)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벽계(蘖溪) 이덕수(李德壽)의 호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인로(仁老)이다. 선조의 덕으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1713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문의 현감(文義縣監)에 임명되고, 이후 대제학(大提學),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도기수역(道器帥役) '형이상'이 도(道), '형이하'가 기(器), 수(帥)는 이(理), 역(役)은 기(氣)를 말한다. 5조약 1905년(광무9) 10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조약(條約)을 체결한 조약을 말한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유소(儒疏) 유생들이 연명(連名)하여 올리던 상소를 말한다. 접어(鰈魚)의……땅 조선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나라 바다에 접어(鰈魚 가자미)가 난다 하여, 우리 나라를 접해(鰈海)니 접역(鰈域)이니 한다. 진(晉)나라가……했는데 노소공(魯昭公) 25년에 소공이 삼가(三家)의 핍박을 받아 제(齊)나라로 피신하였다가 노나라로 돌아올 때, 계씨(季氏)가 제나라에 뇌물을 써서 노 소공이 빨리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6년의 전(傳)에 "여름에 제후(齊侯)가 소공(昭公)을 노나라로 들여보내고자 하여 신하들에게 노나라 계씨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하였다.……〔夏, 齊侯將納公, 命無受魯貨.……〕"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계씨의 가신이 비단 두 필을 말아 폐백을 만들어 제나라 고기(高齮)를 통해 자유(子猶)를 움직여 소공이 순탄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소공은 결국 건후에서 죽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32년조 참조. 오랑캐 원문의 '인개(鱗介)'로, 비늘이 있는 물고기와 딱딱한 껍질을 지닌 개충(介蟲)을 가리키는데,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권78 〈양종전(楊終傳)〉에 "광무제(光武帝)가 서역(西域)의 나라들과 국교를 단절하여, 개린으로 하여금 우리의 의상으로 바꿔 입지 못하게 하였다.〔光武絶西域之國, 不以介鱗易我衣裳〕"라고 하였는데, 이현(李賢)의 주에, "개린은 먼 오랑캐를 비유한다.〔介鱗, 喻遠夷.〕"라고 하였다. 신포서(申包胥)처럼 통곡 '포서(包胥)'는 신포서(申包胥)로,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이다. 오자서(伍子胥)가 오(吳)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신포서가 진(秦)나라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러 가서 7일 밤낮을 통곡하니, 진(秦)나라 애공(哀公)이 감동을 받은 나머지 구원병을 출동시켜 구해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초(楚)나라 여기서는 조선을 비유한 것이다. 침몰 원문의 '육침(陸沈)'으로, 나라가 외적(外賊)에게 침입을 당하여 망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경저(輕詆)〉에 "환공(桓公)이 개연히 이르기를, '드디어 신주(神州)로 하여금 육침(陸沈)되게 하여 백 년 동안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왕이보(王夷甫) 등 여러 사람들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桓公慨然曰, 遂使神州陸沈, 百年丘墟, 王夷甫諸人, 不得不任其責.〕'"라고 하였다. 서산(西山)으로……뜻 무도한 세상에서 살 수 없어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원문의 '嗟殂'는 '嗟徂'의 뜻과 같다. '서산(西山)'과 '차조(嗟徂)의 탄식'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 즉 서산(西山)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기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저 서산에 올라, 그 고사리를 캐도다.……아아 떠나가리라, 천명이 쇠하였구나.〔登彼西山兮, 采其薇矣.……於嗟徂兮, 命之衰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동해(東海)'와 '욕도(欲蹈)의 뜻'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만약 포악무도한 진(秦)나라가 황제로 천하에 군림할 경우에는 "동해(東海)를 밟고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말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자정(自靖) 자신의 분의(分義)에 맞게 의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가 망해 가자 미자(微子)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자(箕子)는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게 하면서 사람마다 선왕에게 뜻을 바쳐야 할 것이니,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微子》 입명(立命)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맹자》 〈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절하거나 장수하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림은 명을 세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희의 집주에 "입명은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인위로 해치지 않음을 이른다.〔立命, 謂全其天之所付, 不以人爲害之.〕"라고 하였다. 재난에 빠져 원문의 '혼점(昏墊)'으로, 재해를 입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서경》 〈익직(益稷)〉에 "홍수가 하늘까지 닿아 질펀하게 산을 삼키고 언덕을 넘으니 백성이 재난에 빠졌다.〔洪水滔天, 浩浩懷山襄陵, 下民昏墊.〕"라는 말이 나온다. 두어(蠧魚) 책을 갉아먹는 좀인데, 여기서는 서적을 뜻한다. 자정(自靖) 자정은 자신의 분의(分義)에 맞게 의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가 망해 가자 미자(微子)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자(箕子)는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게 하면서 사람마다 선왕에게 뜻을 바쳐야 할 것이니,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微子》 석과(碩果) 과일나무의 높은 가지 끝에 달려 있는 한 개의 큰 과일로서, 종자가 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군자를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았다.〔碩果不食.〕"라고 하였다. 사영(四營) 훈련원(訓鍊院)ㆍ금위영(禁衛營)ㆍ어영청(御營廳)ㆍ총융청(摠戎廳)을 이른다. 두심언(杜審言)이……받는다 생사는 운명이라는 것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唐)나라 두심언(杜審言)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 송지문(宋之問) 등 동료 문인들이 찾아가서 위문하자, "조화 소아에게 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甚爲造化小兒相苦, 尙何言.〕"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201 杜審言列傳》 나의……유쾌하다 죽어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죽음을 유쾌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치관(緇冠)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는 검은 베로 만든 관을 이른다. 환질(環絰) 저본의 '環經'은 '環絰'의 잘못인 듯하다. 한 가닥의 삼줄을 바탕으로 하고 다시 그것을 다른 삼줄로 감아 상복의 허리나 머리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禮記 雜記》 가업을 잘 계승하였고 원문의 '극가(克家)'로, 조상의 사업과 집안일을 잘 계승할 수 있는 훌륭한 자제를 지칭하는바, 《주역》 〈몽괘(蒙卦) 구이(九二)〉에 "구이는 몽매함을 포용해주면 길하고 부인의 말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니, 자식이 집안일을 잘하도다.〔九二, 包蒙吉, 納婦吉, 子克家.〕"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상응하는 예우 원문의 '선가(善價)'로, 좋은 값인데 능력에 상응하는 예우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궤에 담아서 감춰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파시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니, 공자가 "팔겠다, 팔겠다. 그러나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하였다. 가난한 선비 원문의 '조대(措大)'로 큰일을 조치할 수 있다는 뜻에서 가난한 선비를 가리킨다. 차라리……않은 이 말은 여대림(呂大臨)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애사(哀詞)를 지으면서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으로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고, 차라리 한 사람이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으로 자신의 병통을 삼을지언정 일시적인 이익으로 자신의 공을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寧學聖人而未至, 不欲以一善成名, 寧以一物不被澤, 爲己病, 不欲以一時之利爲己功.〕"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近思錄 觀聖賢》 치택(致澤)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준말로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비단옷의……드러났다 군자(君子)의 성대한 도(道)는 은은하게 가리어져 있으나 날로 밝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운 듯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반짝 빛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홀로……하면서 원문의 '독선(獨善)'인데, 독선기신(獨善其身)의 준말로, 세상에 나가 뜻을 펴지 못하면 자기 일신을 선하게 하는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옛사람은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가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나니, 곤궁하면 홀로 그 자신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여 뜻을 펴면 천하를 선하게 하였다.〔古之人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지경(持敬) 공경하는 마음을 항상 지니고서 지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성리학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가까이서……취하여 원문의 '근취원취(近取遠取)'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복희씨(伏羲氏)가 천지를 관찰하여 팔괘(八卦)를 만들 때를 설명하면서 "가까이로는 자신에게서 취하고 멀리로는 물건에서 취한다.〔近取諸身, 遠取諸物.〕"라고 하였다. 명백히 살피고 원문의 '근근(斤斤)'으로, 《시경》 〈집경(執競)〉에 "저 성왕과 강왕으로부터 곧 사방을 소유하시니 밝게 살피는 그 현명한 분이로다.〔自彼成康, 奄有四方, 斤斤其明.〕"라고 하였다. 모전(毛傳)에서는 "'근근(斤斤)'은 명백히 살피는 것이다.〔斤斤, 明察也.〕"라고 하였다. 피부(皮膚)처럼 표피적인 학문 '피부(皮膚)'는 표피적인 천근한 학문을 비유한 것이다. 《문자(文子)》 〈도덕(道徳)〉에, 노자가 말하기를 "상등의 학문은 정신으로 듣고 중등의 학문은 마음으로 듣고 하등의 학문은 귀로 들으니, 귀로 듣는 자는 학문이 피부에 있고 마음으로 듣는 자는 학문이 살에 있고 정신으로 듣는 자는 학문이 골수에 있다. 〔上學, 以神聽; 中學, 以心聽; 下學, 以耳聽. 以耳聽者, 學在皮膚; 以心聽者, 學在肌肉; 以神聽者, 學在骨髓.〕"라고 하였다. 후생 소년들로서 받은 기품이 완후(完厚)한 자 저본에는 "得於天性, 以知後生少年, 受氣完厚者"로 되어 있으나 문세가 순하지 않아서 "後生少年受氣完厚者"로 되어 있는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따라 번역하였다. 궁격(窮格)의 공부 궁(窮)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格)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하는데,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공부를……있는 원문의 '공견(攻堅)'은 학문을 잘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예기》 〈학기(學記)〉에 "학문을 잘하는 사람은 마치 목수가 견고한 나무를 다듬듯이 한다.〔善問者, 如攻堅木.〕" 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안색은 온화하게 한다 원문의 '색온(色溫)'으로, 군자가 생각하는 아홉 가지 일 즉 구사(九思) 가운데 "안색은 온화하기를 생각한다〔色思溫〕"는 것을 말한다. 《論語 季氏》 안색은 장엄하게 한다 원문의 '용장(容莊)'으로, 구용(九容) 즉 군자가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 가운데 '안색은 장엄하게 한다〔色容莊〕'는 것을 말한 것이다. 《禮記 玉藻》 의관을……하며 《주자어류》 권12에 "경에 대한 설은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단지 '정제엄숙'과 '엄위 엄각'과 '동용모 정사려'와 '정의관 존첨시'와 같은 이 몇 마디 말에 대해 충분히 음미하면서 실제로 공부를 해 나간다면, 이른바 '직내'와 '주일'의 상태가 자연히 이루어져서 굳이 안배할 필요도 없이 몸과 마음이 숙연해지며 안과 밖이 여일하게 될 것이다.〔敬之說, 不必多言. 但熟味整齊嚴肅. 嚴威儼恪. 動容貌. 整思慮. 正衣冠. 尊瞻視. 此等數語. 而實加功焉. 則所謂直內. 所謂主一. 自然不費安排. 而身心肅然. 表裏如一矣.〕"라고 하였는데, 정제엄숙(整齊嚴肅) 이하 정의관(正衣冠) 존첨시(尊瞻視)까지의 말들은 정이(程頤)가 주일(主一)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들이다. 엄연히 생각하는 듯하고〔儼若思〕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공경하지 않은 것이 없어, 엄연히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한다.〔毋不敬 儼若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정성을 다하였다 저본에는 '致欸洽'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致款洽'의 잘못인 듯하다. 한데 모아 저본에는 '裒粹'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裒稡'로 고쳐 번역하였다. 천사만종(千駟萬鍾) 사(駟)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뜻하며 종(鍾)은 용량의 단위로 한 섬에 해당한다. 따라서 천사만종은 아주 많은 봉록을 가리킨다. 지푸라기……된다 신념이 확고하여 부귀공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가 "이윤(伊尹)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요순의 도를 좋아하여 그 의가 아니고 그 도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말 천사를 매어 놓아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그 의가 아니고 그 도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으며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伊尹耕於有莘之野, 而樂堯舜之道焉. 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弗顧也, 繫馬千駟, 弗視也. 非其義也, 非其道也, 一介不以與人, 一介不以取諸人.〕"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 말이 뜻을 전달하고 원문의 '사달(辭達)'로,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공자가 "말은 뜻을 전달할 뿐이다.〔辭達而已矣.〕"라고 하였는데, 문장은 아름다운 수사보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반마가(班馬家) 문장가를 말한다. 반마(班馬)는 《한서(漢書)》를 쓴 반고(班固)와,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을 병칭한 말로, 한나라 때의 대표적인 문장가들이다. 포백(布帛)……맛이다 평범하면서도 맛이 깊고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문장을 말한다. 포백(布帛)은 옷감이고 숙속(菽粟)은 곡물인데,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송사(宋史)》 권127 〈정이열전(程頣列傳)〉에 정자를 찬미하여 "그 말씀의 아름다움이 포백과 숙속 같았다.〔其言之旨, 若布帛菽粟然.〕"라고 하였다. 후세에 전하려는 저본에는 '乖後'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垂後'로 고쳐 번역하였다.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학문을 배워 식견을 넓히고, 그 지(知)를 예(禮)로 요약하여 행(行)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하였다. 넘치지 저본에는 "隘"로 되어 있으나, 《대곡유고(大谷遺稿)》 권6 〈傳〉과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는 "溢"로 되어 있어 고쳐 번역하였다. 성대하게 저본에는 '蒙然'으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菀然'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동지(冬至) 원문의 '양복일(陽復日)'로, 순음(純陰)에서 양(陽)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날인데 동지(冬至)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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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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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門人編 竝私淑 李承愚 字寬汝 生乙卯 光山人李現圭 字玉見 生乙卯 全州人李承一 字成萬 生丙辰 光山人裴興默 字正一 生丁巳 達城人李常白 字光見 生丁巳 全州人朴奎鎭 字大圭 生戊午 密陽人朴采東 字珎汝 生戊午 順天人鄭在禹 字允範 生戊午 河東人朴祐東 字重八 生庚申 密陽人朴瑀東 字致邦 生庚申 順天人梁會洛 字處中 生壬戌 濟州人李承完 字乃權 生壬戌 光山人吳長燮 字永之 生壬戌 寶城人文宅煥 字仁中 生癸亥 南平人閔祐植 字世仲 生癸亥 驪興人金重培 字允達 生癸亥 金海人朴準基 字景立 生甲子 密陽人閔寬鎬 字子敬 生甲子 驪興人朴海鳳 字聖淑 生甲子 順天人吳昌鎬 字汝周 生甲子 寶城人朴孝東 字伯順 生甲子 密陽人朴冀鉉 字世顯 生甲子 密陽人洪承源 字允深 生乙丑 豐山人尹相麟 字季仁 生乙丑 坡平人尹秉燦 字贊洪 生乙丑 南原人鄭濟春 字文成 生乙丑 光山人方錫斗 字德興 生乙丑 溫陽人鄭淳綱 字善卿 生丙寅 河東人金良鉉 字舜佐 生丙寅 光山人金玉斗 字永道 生丙寅 慶州人尹秉煕 字聖運 生丙寅 南原人金箕璟 字子星 生丁卯 光山人李進休 字善仲 生丁卯 光山人朴魯三 字文華 生丁卯 密陽人洪秉憙 字彛元 生戊辰 豐山人李基休 字士溫 生戊辰 光山人林鎬應 字公直 生 平澤人文濟普 字世元 生 南平人趙來龍 字伯淵 生 咸安人洪祐鎭 字文寧 生戊辰 豐山人朴鍾遠 字士弘 生戊辰 密陽人金玉善 字德仲 生戊辰 淸風人李箕淳 字乃洪 生戊辰 全州人朴容東 字寬甫 生己巳 密陽人梁時默 字仲淑 生己巳 濟州人奇世搢 字士城 生己巳 幸州人朴準福 字德受 生己巳 密陽人金權晦 字允仲 生己巳 慶州人朴炳圭 字德璋 生己巳 密陽人洪承渙 字士拯 生庚午 豐山人鄭尙悳 字子元 生庚午 光山人金弘基 字毅伯 生庚午 晉州人姜晉燮 字子明 生庚午 晉山人金海錫 字宗汝 生庚午 金海人宋光壽 字子仁 生辛未 洪州人梁在源 字子涵 生辛未 南原人金相珎 字孝眞 生辛未 金海人白南寅 字明裕 生辛未 水原人宋鼎基 字禹三 生辛未 洪州人高吉相 字良汝 生辛未 長興人裴演默 字洛範 生辛未 達城人尹相義 字仁夫 生壬申 坡平人李承正 字臣汝 生壬申 光山人曺弼承 字仲直 生壬申 昌寧人鄭淳昱 字處中 生壬申 河東人朴鍾大 字元淑 生壬申 密陽人安圭澤 字斗三 生壬申 竹山人洪承澤 字子潤 生壬申 豐山人朴魯東 字應道 生癸酉 密陽人文載淵 字仁涵 生癸酉 南平人洪祐璟 字元仲 生癸酉 豐山人梁在福 字應五 生癸酉 濟州人洪祐鳳 字義仲 生癸酉 豐山人金相老 字長賢 生癸酉 光山人邢啓元 字景春 生癸酉 晉州人徐瑢洙 字學範 生癸酉 利川人高奉柱 字樑彥 生癸酉 長興人具敎純 字日聖 生癸酉 綾城人李長煥 字仁甫 生甲戌 公州人安昌燮 字慶伯 生甲戌 竹山人李基皓 字敬元 生甲戌 公州人閔泳觀 字德瞻 生甲戌 驪興人金昌洙 字子善 生甲戌 光山人安相翊 字治洪 生甲戌 順興人鄭淳鳳 字聖澤 生甲戌 河東人金東炫 字士彥 生甲戌 金海人吳在德 字景純 生甲戌 寶城人韓百彥 字卿賢 生甲戌 淸州人安東植 字致彥 生甲戌 順興人金善培 字允憙 生甲戌 金海人朴準奎 字景文 生乙亥 密陽人朴章東 字文一 生乙亥 密陽人鄭昌鎭 字大智 生乙亥 光山人李弘根 字聖擧 生乙亥 全州人金元基 字仁淑 生乙亥 晉州人朴軫鉉 字仁華 生乙亥 竹山人白昊寅 字景裕 生乙亥 水原人朴默鎭 字士淵 生乙亥 密陽人具益謨 字舜擧 生乙亥 綾城人具瑢謨 字子益 生丙子 綾城人梁會復 字士旭 生丙子 濟州人朴溫東 字元直 生丙子 密陽人程哲泓 字在安 生丙子 韓山人具敎萬 字文化 生丙子 綾城人金泳喜 字樂元 生丙子 慶州人鄭道欽 字士遵 生丙子 晉州人安鍾洛 字允五 生丙子 竹山人具敎胄 字子夔 生丁丑 綾城人安宗燮 字士仰 生丁丑 竹山人高光業 字致明 生丁丑 長興人金相鳳 字孝善 生丁丑 金海人朴柱東 字子咸 生丁丑 順天人曺泰承 字享純 生丁丑 昌寧人任喆鉉 字仁和 生丁丑 長興人裴鍾南 字敬洙 生丁丑 達城人孫載乙 字淑汝 生丁丑 密陽人金甲培 字奎三 生 金海人黃澈源 字景涵 生戊寅 長水人梁會澤 字子允 生戊寅 濟州人金權柱 字應七 生戊寅 慶州人鄭淳珎 字士玉 生戊寅 河東人尹在莘 字致俊 生戊寅 南原人金東炫 字泰泓 生戊寅 金海人金炯基 字光淑 生戊寅 晉州人李鍾昇 字東一 生戊寅 星州人范壽申 字益衡 生戊寅 錦城人裴洪基 字樂凡 生戊寅 達城人朴敬東 字直夫 生己卯 密陽人李燦鎬 字美中 生己卯 光山人梁海默 字乃源 生己卯 濟州人文在鳳 字采成 生己卯 南平人朴準敏 字子愼 生己卯 密陽人權春植 字範晦 生己卯 安東人朴善東 字元長 生己卯 密陽人崔璣炫 字贊一 生己卯 朗州人朴章鈴 字亨全 生己卯 密陽人韓百述 字亮舒 生己卯 淸州人朱基豐 字明允 生己卯 新安人李建信 字汝行 生庚辰 全州人朴炳海 字源方 生庚辰 密陽人金榮斗 字士辰 生庚辰 晉州人朴敏敎 字伯愼 生庚辰 密陽人吳東燮 字敬煥 生庚辰 寶城人孫永璘 字允瑄 生庚辰 密陽人朴夏淳 字官洪 生庚辰 密陽人任泰柱 字宇卿 生辛巳 長興人裴致默 字士遠 生辛巳 達城人吳在東 字陽路 生辛巳 寶城人宋淙珉 字士珍 生辛巳 新平人朴炳起 字明振 生辛巳 密陽人盧恭永 字子安 生辛巳 光山人朴炳淳 字仲賢 生辛巳 密陽人朴魯眞 字子聖 生辛巳 順天人金永鎬 字士範 生辛巳 義城人朴潤秀 字亨淳 生辛巳 密陽人金容玹 字泰益 生辛巳 金海人蔡洙瑄 字信裕 生辛巳 平康人金永皓 字大善 生辛巳 光山人丁商鎭 字泰鎭 生辛巳 羅州人文 炯 字子惺 生壬午 南平人高濟昇 字順明 生壬午 長興人閔泳根 字享晦 生壬午 驪興人高玎柱 字聲余 生壬午 長興人鄭柄林 字德和 生壬午 光山人金東洙 字德潤 生壬午 光山人裴完基 字仲則 生壬午 達城人金權成 字士集 生壬午 慶州人高光三 字明善 生壬午 長興人姜益燮 字子謙 生壬午 晉山人南斗鉉 字仁洙 生壬午 宜寧人張瀚洙 字壽兼 生壬午 興城人洪纘憙 字東奎 生壬午 豐山人朴俊東 字子彥 生癸未 蜜陽人具敎昌 字聖兪 生癸未 綾城人鄭壽林 字基采 生癸未 光山人安弘燮 字良立 生癸未 竹山人高翊柱 字允輔 生癸未 長興人具敎宣 字明執 生癸未 綾城人鄭炳欽 字顔淑 生癸未 晉州人朴潤瑗 字應舜 生癸未 密陽人閔泳淳 字允信 生甲申 驪興人朴準瑾 字公瑜 生甲申 密陽人梁會石 字永斗 生甲申 濟州人文在昌 字允章 生甲申 南平人梁璟燮 字會卓 生甲申 濟州人尹基燮 字士垣 生甲申 南原人金奎培 字允孝 生甲申 金海人黃啓周 字子玉 生甲申 長水人朱在厚 字甫久 生甲申 新安人金起淳 字奇三 生甲申 金海人鄭憲圭 先生孫 生甲申裴錫冕 字純文 生乙酉 達城人朴文采 字延京 生乙酉 密陽人崔南杓 字先敬 生乙酉 朗州人高在煥 字致賢 生乙酉 長興人金權乙 字亨仲 生乙酉 慶州人梁常默 字子善 生乙酉 濟州人曺重燁 字泰卿 生乙酉 昌寧人李淳在 字亨烈 生乙酉 全州人金在泰 字聖邦 生乙酉 金海人朴炫洙 字允采 生乙酉 密陽人李承福 字德受 生丙戌 光山人朴和東 字順元 生丙戌 密陽人尹定燮 字子運 生丙戌 南原人具秉祐 字允長 生丙戌 綾城人金昌鎭 字禹言 生丙戌 道康人李鍾祥 字子善 生丙戌 星州人尹在玩 字明俊 生丁亥 南原人金相鳳 字瑞弘 生丁亥 金海人黃義雲 字道行 生丁亥 長水人申彥暢 字鶴中 生丁亥 平山人文在煥 字明玉 生丁亥 南平人李東悅 字敬眞 生丁亥 全州人朴道東 字德吾 生戊子 密陽人梁會澤 字施雲 生戊子 濟州人朴奎東 字士文 生戊子 密陽人金鍾基 字大敬 生戊子 金海人梁在根 字 生戊子 濟州人具秉祐 字敬純 生戊子 綾城人朴道洙 字容俊 生戊子 密陽人曺有煥 字而現 生戊子 昌寧人李承郁 字達春 生戊子 韓山人鄭淳進 字允明 生己丑 河東人具敎丙 字向明 生己丑 綾城人鄭淳經 字子述 生己丑 河東人文濟俊 字泰彥 生庚寅 南平人鄭現采 字元實 生庚寅 晉州人朴慶柱 字同甫 生庚寅 珎原人朴炳殷 字尹卿 生辛卯 密陽人程百基 字公彬 生辛卯 韓山人尹相鎬 字子承 生辛卯 南原人朴潤亮 字炯舜 生辛卯 密陽人尹秉台 字成度 生辛卯 南原人金昌洙 字基玉 生辛卯 光山人高濟仁 字昭國 生壬辰 長興人金林鉉 字太彥 生壬辰 慶州人程丞煥 字齊煥 生壬辰 韓山人高光春 字善日 生壬辰 長興人崔鎭錫 字祥集 生壬辰 慶州人李承麟 字在三 生癸巳 光山人金正煕 字公直 生甲午 慶州人崔南均 字秉彥 生甲午 慶州人具哲祐 字士淑 生乙未 綾城人南坰伯 字京云 生乙未 宜寧人高濟雲 字龍淑 生乙未 長興人李弘信 字希遠 生乙未 全州人裴錫原 字秉文 生乙未 達城人具敎洛 字宗賢 生乙未 綾城人金奉鉉 字振洪 生乙未 慶州人朴南珪 字德汝 生丙申 密陽人高光度 字贊五 生丙申 長興人裴鍾球 字俊淑 生丁酉 達城人尹在泓 字士深 生丁酉 南原人高弼柱 字士良 生丁酉 長興人程璋煥 字德賢 生己亥 韓山人盧漢紀 字士綱 生己亥 光山人孫鍾彩 字和聞 生己亥 密陽人文濟仁 字如賓 生庚子 南平人崔秀均 字秉國 生辛丑 慶州人金形柱 字而卿 生癸卯 光山人盧桂邦 字萬善 生癸卯 光山人金圭炫 字復三 生丙午 金海人高光鳳 字明現 生丁未 長興人具敎賢 字用器 生己酉 綾城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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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장에게 올림 上勉菴崔丈 양생(梁生)이 돌아오는 편에 삼가 답장을 받고서 덕후(德候)가 매우 좋다는 것을 알았으니, 실로 멀리 있는 이의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소생은 궁벽한 시골에 칩거하고 있기에 안목은 열 길이 없고, 마음은 넓힐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사는 나날이 어지러워지고 쇠병은 날로 깊어지는 가운데 그대로 답습하며 세상일에 골몰하니, 소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다만 경기와 호남 사이에 큰 덕망을 지니신 한두 분이 산림에서 도를 지키며 후학을 가르치시니, 비록 한번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 말석에 나아가지 못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중암(重庵)과 성재(省齋) 두 어른의 근래 안부는 어떠하신지요? 의론이 같지 않은 것은 이보다 앞서 대략 그 설을 들었는데, 보내 주신 편지를 읽고서 비로소 참으로 그렇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또 자세한 것은 듣지 못했으니, 두 문하에서 변론한 것이 다만 '심(心)' 1자를 가지고 기(氣)와 이(理)로 구분하는 데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별도로 곡절이 있는 것입니까? 나머지 말을 한번 듣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어리석은 저는 일찍이 망녕되이 생각하기를 '심이라는 것은, 당체(當體)로 말하면 기의 허령한 곳이고, 실두(實頭)로 말하면 이의 오묘한 곳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理)로 말한 것이 있으니, 정자(程子)가 "심(心)은 생도(生道)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기로 말한 것이 있으니, 주자(朱子)가 "심(心)은 음양과 같다."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와 기로 말한 것이 있으니, 장자(張子)가 "심은 성(性)과 지각을 합한 것이다."라고 한 것34)이 이것입니다. 하늘과 같아서 형체(形體)로 말할 수 있고 주재(主宰)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벽계(檗溪) 선생의 말이 이와 같을 뿐만이 아니라 정자와 주자 등 여러 선생의 말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지금 어찌 유독 그 기가 됨만 보고 그것이 이가 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기가 이의 자리를 차지하여 크게 잘못되었으니 어디를 간들 막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른바 물칙(物則)의 구분을 알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또한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심은 물(物)이 되고 인(仁)은 칙(則)이 되며 심은 칙이 되고 신(身)은 물이 되니, 어찌 법칙이 있는데 물이 없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성옹(省翁)이 우연히 잘못 본 곳입니다. 아, 태극이 진면목을 잃고 이와 기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에 어두운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다행히 오직 벽계(檗溪), 노사(蘆沙) 두 선생이 참고하고 절충하며 주선하고 지휘하여 사문(斯文)의 명맥이 실추되지 않게 하였으니, 도가 행해진 지 몇 년 되지 않아 의론이 횡행하는 것이 문하의 고제자 사이에서 나올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중암(重庵)께서 세도를 근심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남김없이 토론하여 계속하여 그만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은 한계가 있고 개색(開塞)은 때가 있으니, 행함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마땅히 곡진하게 강론하여야 천천히 그 효과를 볼 것입니다. 또 마땅히 자기에게서 돌이켜서 '내가 고한 것이 그 마음에 불성실함이 있는가? 그 말에 아뢰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 의리에 밝지 않은 것이 있는가?'라고 반문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불가하다면 각자가 들은 바를 존중하여 더불어 분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저 천하의 시비는 잗단 말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시끄럽게 하면서 그치지 않는다면 스스로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마땅함을 잃을 뿐만이 아니라 또 지나치게 따르는 자가 장차 이로 인하여 사단을 일으킬 염려가 있게 될 테니, 이는 예부터 편당을 짓는 습속이 점점 격렬해져서 수습하지 못한 이유인 것입니다. 지난 역사에서 보면 분명하니, 어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평소 곧은 말과 곧은 행실이 당대에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또 내부에서 서로 어긋나 갑자기 더욱 배척하니, 또 틈을 노리는 자가 스스로 손을 쓸 계책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더구나 도리 쪽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속이고 사물을 해치며 터무니없고 법으로 삼지 못하는 설에서 나왔으니, 더욱 어찌 곡직을 비교하고 시비를 따지겠습니까. 밝은 일월을 한 조각구름이 어찌 가리겠으며, 낮은 돌은 밟는 이도 낮아지는 법입니다. 계속해서 논쟁하여 해만 있고 보탬이 없기보다는 차라리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혀서 공격하지 않고 저절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처음에 이러한 내용으로 중암께 받들어 고하고자 하였는데 교분은 얕은데 말은 심오하니, 사체로 볼 때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문장(文丈)께서는 부디 강론하는 나머지에 조용히 서로 고하되, 말을 조심하는 경계를 지키고 비방을 막는 훈계를 생각하십시오.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훌륭한 계책을 고이 간직하신다면 세월이 오래될수록 더욱 신묘해지고 광채가 날 것이니, 먼저 가신 스승님의 도를 세상에 크게 밝혀 사방의 학자가 의지하고 앙망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궁벽한 시골의 천박한 자취가 얼마나 하찮습니까마는, 지우를 받은 친밀함으로 지나친 염려가 이에 이르렀으니, 너무나 참람하고 망녕되어 죄송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주십시오. 梁生廻。伏承下覆。仍審德候崇適。寶副遠情。生跧伏窮荒。耳目無由開發。胸懷無由展拓。加以世故日深。衰病日侵。因仍汨沒。恐無以免於小人之歸。但畿湖之間。有一二長德。守道林樊。獎進後學。雖未能一操几杖。趨走於唯喏之末。而所以爲究竟之計。實在於此矣。重庵省齋兩丈近節何若。其議論不同。前此粗聞其說。及讀下書。始知信然。而又未得其詳。未知兩門所辨。只在心一字爲氣爲理之分耶。抑別有委折耶。恨未得一聽緖餘也。愚嘗妄謂。心者言其當體。則氣之靈處也。言其實頭。則理之妙處也。是以有以理言者。程子云。心生道是也。有以氣言者。朱子云。心猶陰陽是也。有以理氣言者。張子云。合性與知覺是也。如天一也。而有以形體言。有以主宰言者也。此非獨檗溪先生之言如此。程朱諸先生之言。皆如此。今何獨見其爲氣而不見其爲理耶。氣占理位。大頭已差。則安往而不窒礙耶。且其所謂不知物則之分者。亦恐未然。心爲物。仁爲則。心爲則。身爲物。豈有有則無物之理乎。此是省翁偶失照管處。噫。太極失眞面。理氣昧界至者。久矣幸惟檗溪蘆沙兩先生。參訂折衷。指陳開揮。使斯文命脈。不墜於地。豈知行之未幾年。議論橫決。出於及門高弟之間哉。以重庵憂世衛道之心。宜其極言謁論。縷縷而不已也。然識量有分。開塞有時。行有不合。當委曲講討。徐來其效。又當反之於己。以爲吾之所以吿之者。其心有不誠歟。其辭有不達歟。其義有不明歟。然且不可。則各尊所聞。與之無辨。可也。夫天下是非。頰舌有非可辨。而若譊譊不止。則不惟自失語默之宜。且使過從者。將有夤緣生事之慮。此自古偏黨之所以轉輾層激而莫可收殺者也。前鑑昭昭。豈不可畏。平日之危言危行。恐不無見忤於時。而今又內相矛盾。遽加排擯。又安知無窺伺者。自以得下手之計也。況非道理邊語。而出於誣人害物無據不經之說。尤何足較曲直計是非也。日月之明。寸雲何傷。維扁斯石。履之亦卑。與其爭辨不置而有害無益。曷若靜而鎭之。不攻自熄之爲愈也。初欲以此。奉告重翁。而交淺言深。未知事體之何如。伏願文丈。幸於講聚之餘。從容相告。守括囊之戒。念息謗之訓。珠玉寶蘊。蓍龜珍藏歲。久年深。益神益光。使先先生之道。大明於世。而勿孤四方學者倚仰之情。如何。窮鄕賤迹。何等蟣虱。而受知之密。過慮及此。僭妄踰越。俟罪竢罪。伏乞下賜諒燭。 장자(張子)가……것 《장자전서(張子全書)》 권2〈정몽(正蒙) 1〉 태화편(太和篇) 제1에 "태허를 말미암아 천(天)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고, 기화를 말미암아 도(道)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으며, 태허와 기화를 합해서 성(性)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고, 성과 지각을 합해서 심(心)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由太虛有天之名, 由氣化有道之名, 合虛與氣有性之名, 合性與知覺有心之名.]"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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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장에게 올림 上勉菴崔丈 박생(朴生)이 돌아오는 편에 삼가 보내 주신 답장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절기가 바뀌어 추위의 위엄이 맹렬해지려는 때 삼가 일상의 기거는 충양(沖養)하시며 기체후는 더욱 만중하십니까. 중암(重庵)이 세상을 떠난 뒤에 홀로 쓸쓸히 지내는 마음은 더욱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유 사문(柳斯文) 용계(龍溪)는 학문이 깊고 행실이 고아하며 거처가 매우 가까워 강습하는 즐거움은 오히려 의지할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멀리서 사모하는 마음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소생은 신세가 더욱 위축되고 궁박함이 더욱 심합니다. 동문수학한 벗 가운데 학식과 행실이 정후윤(鄭厚允) 애산(艾山)과 같은 자와는 또한 회합하지 못하니 외롭고 쓸쓸하며 따분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급급하게 만년을 수습할 계책이 매우 아니니, 어찌합니까. 성재(省齋) 어른의 심설(心說)은 다행히 보여 주신 은혜를 입어 삼가 대략적인 것을 알았습니다. 근세 이래로 변론한 것이 많으니,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35)를 주장하거나 본연(本然)과 기질(氣質)의 동이를 주장하거나 일본(日本)과 만수(萬殊)의 동이를 주장합니다. 대개 갑(甲) 쪽에서는 같은 것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못하며, 을(乙) 쪽에서는 다른 것만 보고 같은 것을 보지 못하니, 이것이 다툼의 단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심(心)' 자와 같은 것으로 말하면 선덕(先德)이 기(氣)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 하나가 아니고, 이(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 하나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어찌 유독 기가 되는 것만 보고 이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간사한 무리들이 다투어 나와 오도(吾道)가 실낱같은 때 선비가 한 가지 선(善)이 있으면 바로 마땅히 돕고 인도하여 그 학업을 성취하게 해야 합니다. 더구나 한 마디 말이 어긋난 것은 실로 금이나 구슬의 작은 하자에 지나지 않는 데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오직 마땅히 조용히 강구하여 천천히 합치되도록 해야지 갑자기 내치고 문파를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근일에 과거(科擧)를 공부하는 선비 가운데 나아가 과거에서 합격할 길이 없으므로 물러나 자취를 학문에 의탁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구습에 젖어 혹 명예를 구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는 바로 근심스러워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군자가 남을 대하는 도량은 실로 찾아오는 것을 허여할 뿐 물러간 뒤의 일은 허여하지 않습니다. 저의 고향 유생으로 문하에 출입하는 자는 학업과 조예가 혹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천 리 멀리 가서 배우는 것은 정성이 가상하니, 부디 재주에 따라 가르쳐 주시어 각각 학업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 실로 구구한 이의 바람입니다. 朴生廻便。伏承下復。旣而時令改易。寒威將綮。伏未審燕處沖養。氣候增重。重庵逝後。離索之懷。想益難狀。聞柳斯文龍溪學邃行高。居且密邇。講聚之樂。尙有所聊。遠外馳想。不任下情。生身事益蹙。棲泊益深。同門知舊。學識行誼如鄭厚允艾山者。亦且不得相聚。踽踽涼涼。索然無味。甚非所以汲汲收桑之計也。奈何。省丈心說。幸蒙示及。謹悉梗槩矣。近世以來。辨論多端。或以人性物性之同異。或以本然氣質之同異。或以一本萬殊之同異。蓋印邊見其同而不見其異。乙邊見其異而不見其同。此所以惹起爭端也。至若心字。先德有以氣言者不一。有以理言者不一。今何獨見其爲氣而不見其爲理耶。然方此群邪競逐。吾道如綫之日。士有一善。卽當扶接導引。以就其業。況一言之差。固不過爲金玉之微瑖。惟宜從容講究。徐求其合。最不可遽加排擯。以立門庭也。近日功令之士。進無所售於科第。故退而托跡於學問者。不少。其舊習所狃。或不無干名要譽之獘。此正可憂者。然君子與人之量。固可與其進。而不可與其退也。鄙鄕儒生出入門墻者。其學業造詣。或有未及。而千里趨從。誠力可佳。須隨材授敎。各就其業。實區區之望也。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을 같은 것으로 볼지 다른 것으로 볼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권상하(權尙夏) 문하의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벌인 논쟁이다.]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 지방, 즉 충청도 일대에 거주하고,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 지방, 즉 서울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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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초토사40)【종렬】에게 올림 上閔招討使【種烈】 삼가 아룁니다. 천하의 이치는 하나일 따름입니다. 성(性)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이고, 도(道)는 군신부자(君臣父子)이고, 인(人)은 요순공맹(堯舜孔孟)이고, 교(敎)는 시서예악(詩書禮樂)이니, 이 이치 외에는 더 이상 다른 이치는 없고, 이 도 외에는 더 이상 다른 도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이단이며 사교(邪敎)입니다. 선유(先儒)가 "육예(六藝)의 학문과 공자의 말씀이 아닌 것은 모두 없애 버려서 세상에 함께 나오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기강이 하나로 될 수 있고 법도가 밝아질 수 있다."41)라고 하였고, 또 "사람이 의리의 근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백성들에게 해가 되어 백만의 시체가 쌓이고 흐르는 피가 천 리에 이어지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이 시비와 사정(邪正)을 판가름할 때 분변함이 매우 밝고 막는 것이 매우 엄격하여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는 자는 성인의 무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며, 또 옳지 않은 방도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는 죽여서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만고의 대방(大防)이며 역대의 지극한 경계입니다. 아, 근년에 이른바 동학(東學)이라는 것은 무슨 종교입니까. 예부터 이단이 많았지만 그 요사스럽고 허탄하며 비루하고 흉패한 것이 이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근래 백성들 가운데 도적과 금수로 돌변한 자가 날마다 천이나 만으로 헤아릴 정도이지만 군신 상하가 인습에 젖어 편안하게 여기며 금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흉악한 계략이 낭자하여 화색(禍色)이 하늘을 찌른 이후에야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합니다. 앞서는 한마디 말로 금할 수 있었지만 뒤에는 수만 명을 동원하더라도 힘이 부족하며, 앞서는 한 사람을 처벌하면 징계할 수 있었지만 뒤에는 수만 명을 죽이더라도 재앙이 풀리지 않습니다. 가령 이 역적이 무기를 들고 윗사람을 범하는 일이 없고 다만 사교(邪敎)를 가지고 몰래 서로 전파하는 것이 전일과 같았으면 아마도 조정에서 필시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윗사람을 범하는 것이 죄가 됨만 알고 사교가 윗사람을 범하는 근본이 되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를 배양하면서 가지를 잘라내며, 물의 근원을 탁하게 하면서 지류를 맑게 하는 것이 어찌 이치이겠습니까. 오늘날의 거조가 반란을 구제하고 폭도를 주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척사위정(斥邪衛正)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추향할 바를 알게 하는 것으로 말하면 오히려 강구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미 지난 진부한 자취를 뒤미처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날의 잘못이 바로 오늘날의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위한 계책은 정학을 높이고 천리를 밝히며, 사설을 배척하고 인심을 바로잡아 백성들로 하여금 이것은 따를 만하고 저것은 피할 만하며, 이것은 지향할 만하고 저것은 배척할 만함을 환하게 알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계속해서 되풀이하여 전혀 깨우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발각되는 대로 잡아서 무거운 형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교화된 자는 다 변화된 것이 아니고 태도를 바꾼 자는 결코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니, 후일의 화가 다시 오늘처럼 드러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합하(閤下)께서는 큰 의리에 밝고 큰 절개가 있어 성대하게 사방에서 추앙을 받으니, 사문(斯文)과 세도의 책임은 절로 사양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부디 집집마다 깨우쳐 주어 한 도(道)의 이목을 일신하고, 또 이 뜻으로 성상께 아뢰어 저지되지 또는 기각되지 않는다면 실로 종사와 생령들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伏以天下之理一而已。性則仁義禮智。道則君臣父子。人則堯舜孔孟。敎則詩書禮樂。此理之外。更無他理。此道之外。更無他道。外於此則異端也。邪敎也先儒有言曰。諸不在六藝之科孔子之術者。皆絶其道。勿使倂進。然後統紀可一。法度可明。又曰。人於義理之原。毫釐有差。則其爲生民之害。至於積尸百萬。流血千里。是以聖人於是非邪正之除。辨之甚明。拒之甚嚴。至謂能言拒楊墨者。聖人之徒。又謂。執左道以惑衆者。殺無赦。此是萬古大防。歷代至戒也。嗚呼。近年所謂東學。是何敎也。自古異端。非不多矣。而其妖怪狂誕。鄙俚凶悖。未有若是之甚者也。目下赤子化爲盜賊禽獸者。日以千萬計。而上下因循。恬不爲禁。至於凶計狼藉。禍色滔天然後。乃始興兵討之。前以費一辭而可禁。後則擧數萬衆。而力猶不贍。前以笞一人而可懲。後則誅數萬人。而禍猶未解。若使此賊無弄兵犯上之事。而但以邪敎。潛相傅染如前日。則恐朝廷必無興師討伐之擧。是則徒知犯上之爲罪。而不知邪敎之爲犯上之本也。培其根而剪其枝濁其源而淸其流豈理也哉。今日之擧謂之捄亂誅暴則有之矣。至於斥邪衛正。使民知所趨向則尙未之講也。今非欲追咎已往之陳跡。正以前日之失。乃今日之戒。爲今之計。莫若崇正學。明天理。斥邪說。正人心。使群黎百姓。昭然知此之可趨。彼之可避。此之可向彼之可背。或有襲訛踵誤。漫不回悟者。則隨現隨捉。旋以重典。不然則目今梗化者。未盡歸化。革面者未必革心。安知後日之禍。不更發如今日乎。伏惟閤下明大義。秉大節。蔚然爲四方所宗仰。斯文世道之責。自有所不得辭焉。須家喩戶曉。以新一路之耳目。又以此意。奏達天聰。不至見寢。則實宗社生靈無疆之福。 민 초토사(閔招討使) 민종렬(閔種烈)이다.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 동학군에 대항하여 성을 굳게 지킨 공으로 1894년(고종31) 10월 28일에 호남 초토사(湖南招討使)에 임명된 사실이 있다.《高宗實錄 31年 10月 28日》《承政院日記 高宗 31年 10月 28日》 선유(先儒)가……있다 이 내용은 한 무제(漢武帝) 때 동중서가 올린 대책(對策)에 나오는 말이다.《漢書 董仲舒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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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균【태중】에게 답함 答丁德均【泰重】 여러 달을 타향의 서당에 묵으면서 생계 때문에 대단히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 텐데,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 있는가. 서로 오랫동안 같이 살았으니 의지가 확고하고 추향이 구차하지 않음을 충분히 아는데, 만분의 일도 도움을 주지 못하니 부끄럽네. 이별한 뒤에 한 달 정도 지났는데 소식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한 마음을 더욱 풀 길이 없었네. 참으로 뜻밖에 한 통의 편지가 왔는데, 전달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도중에 옆으로 새지 않고130) 아무 탈 없이 우리 집으로 전달되었다네. 봉투를 열고 읽어보고서, 삼가 부모를 모시고 기거하면서 신령이 도와 건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나는 위안이 되어 마음이 놓이는데 실로 듣고 싶었던 바이네. 나는 서당을 그만 둔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본래 병을 요양할 계획이었으니, 어찌 다시 이전처럼 서당에 거하며 학도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겠는가. 세상이 이처럼 험난하니 대단히 통탄스럽네. 그러나 이 어찌 우리 같이 쇠잔한 인생이 알 바이겠는가. 삶과 죽음, 재앙과 복은 한결같이 저 하늘에 맡겨두고 다만 내가 해야 할 것을 닦아 미진한 단서가 없게 해야 하니, 이것이 옛사람이 말한 '평이한 도리를 행하면서 천명을 기다린다.'131)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현이 남긴 가르침은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충분히 힘을 쓸 만한 곳이네. 다만 하단의 '무슨 책을 먼저 읽고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는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네. 우리 벗의 명철함으로 과정과 절차, 수신하는 대강 등에 대해 먼저하고 뒤에 할 것의 순서를 알지 못함은 걱정할 것이 아니며, 다만 수립한 과정을 떠맡아서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뜻이 혹 조금이라도 물러날까 하는 것이네. 이것은 본령(本領)에 해당하니, 차선책을 마련해서는 안 되네. 이 뜻을 바라건대 우범(禹範)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만 리 앞길에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은데, 평범하지 않은 업적은 반드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니 힘쓰고 또 힘쓰시게나. 아득히 멀어 서로 만나기가 요원하니, 그리운 마음에 안타까울 뿐이네.대저 성(性)은 하나일 따름이네. 그러나 이른바 '하나[一]'라고 하는 것은 나뉨이 없다는 것을 이름이 아니네. 만약 이곳에 분명하게 본다면 이른바 개의 성, 소의 성, 사람의 성132)은 또한 처음부터 본연의 성이 아니네. 만약 본연의 성이 아니라면 개와 소의 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사람들이 그 같지 않은 것을 보고 으레 기질지성으로 귀결시키니, 이것이 근대 주기지설이 일어나게 된 까닭이네. 맹자가 고자와 변론할 때, 다만 사단만 들어서 성의 본래 선함을 밝혔지만 '악(惡)' 한 글자가 기인한 바에 대해서는 귀속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이 정자가 '성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았다.'133)는 말을 하게 된 것이네. 주자는 이르기를 "맹자가 은미하게 그 단서를 발하였으니, 대개 같지 않은 것[不同]은 참으로 이(理)가 나뉜 것인데, 같지 않은 곳에서 또한 그 기질을 볼 수 있다."고 하였으니,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數朔旅齋。討喫無限辛苦。而所得果何事耶。相聚之久。足以見其志意之牢確。趨向之不苟。而愧無以資其萬一之益也。別後有月。聲息莫憑。悵菀之懐。尢不知所以爲遺也。一書眞料外也。未知傳之者何人。而不沈不浮。無恙入吾廬耶。披玩以還。謹審侍省起居。神相萬祉。區區慰豁。實叶願聞。義林破齋歸巢。本爲養病計。豈復有居齋授徒如前日乎。世險如此。極可痛歎。然此豈吾輩残生所可與知者耶。死生禍福。一付彼蒼而。只修其在我者。俾無未盡之端。是非古人所謂居易俟命者耶。聖賢遺訓。是爲下手處。果如來喩。但下段何書爲先。何事爲先之云。竊恐未然。以吾友之明。其於課程節度。修省梗槩。不患不知其先後之所在。而但擔當堅立。勇徃直前之意。或不能無少遜耳。此是本領田地。不可作第二義觀。此意幸與禹範共更量之如何。萬里前程。所望非細。而非常之功。必待非常之人。勉之勉之。相奉悠遠無階。瞻望馳悵而已。夫性一而已矣。然所謂一者。非無分之謂也。若於此處見透。則所謂犬之性牛之性人之性。亦始非本然之性也。若非本然。則犬牛之性。何處得來。人見其不同者。例歸之於氣質。此近世主氣之說所以作也。孟子與告子辨。特舉四端。以明性之本善。而於惡一字所從來。未有歸屬。此程子所以有論性不論氣之語也。朱子謂孟子微發其端云者。盖不同。固理之分也。而於不同處。亦可以見其氣質矣。深思之如何。 도중에……않고 진(晉) 나라 은선(殷羨)이 예장군(豫章郡)의 태수(太守)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에 사람들이 100여 통의 편지를 주면서 경성에 전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석두(石頭)까지 와서 모조리 물속에 던져 놓고는 "가라앉을 놈은 가라앉고 떠오를 놈은 떠올라라. 내가 우편 배달부 노릇을 할 수는 없다.〔沈者自沈 浮者自浮 殷洪喬不能作致書郵〕"라고 하였다. 평이한……기다린다 앞의 〈답황정후(答黃正厚)〉에 보인다. 개의……성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고자와 맹자가 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으니 "고자는 '생을 성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맹자가 '그대가 생을 성이라고 하는 것은, 백을 백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가?'라고 물으니, 고자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맹자가 또 '백우의 백은 백설의 백과 같으며, 백설의 백은 백옥의 백과 같은가?'라고 물으니, 고자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맹자가 다시 '그렇다면 개의 성이 소의 성과 같으며, 소의 성이 사람의 성과 같은가?'라고 물었다.〔告子曰 生之謂性 孟子曰 生之謂性也 猶白之謂白與 曰 然 白羽之白也 猶白雪之白 白雪之白 猶白玉之白與 曰 然 然則犬之性猶牛之性 牛之性猶人之性與〕"라 하였다. 성을……않았다 고자와 맹자의 앞의 변론 이후 세 번째 장의 장하주에서 정자가 한 말이다. 즉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하지 않다.[論性不論氣, 不備; 論氣不論性, 不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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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숙【환현】에게 답함 答朴亨叔【恒鉉】 편지가 5월 한여름에 왔는데 답장은 8월 한가을에 보내니, 한 번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에 세월이 이처럼 빨리 흐르는가. 티끌 바다의 부평초 같은 인생이 이에 상심한다네. 삼가 생각해보니, 현재 자당(慈堂)께서는 강녕하시며 큰 형의 숙환은 차도가 있으신가. 효제를 행하면서 거처하는데 건강이 줄곧 좋은 지 멀리서 걱정하고 있으니, 항상 소식 듣기를 간절히 원하네. 나는 여름 동안 혈종(血腫)127)을 앓아 오랫동안 괴로워하였는데, 지금 겨우 괜찮아졌네. 대저 학문은 특별히 다른 종류의 일이 아니라 다만 평소 생활하는 가운데 부모와 어른을 섬기고 사물을 상대하면서 크건 작건 많건 적건 간에 의리를 따라서 이를 어기거나 잃지 않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일을 다 물리쳐버리고서 문자에 몰두한 뒤에야 학문이라 이를 수 있는가. 다만 전심하여 책을 읽지 않으면 의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행한 바가 간혹 사의(私意)에서 나오니, 그러므로 효제를 행한 남은 힘으로 학문을 해야 하는 것이네.128) 만약 이 마음을 굳게 지켜 외부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일에 대응함이 비록 번거로워도 남은 힘이 없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학문 연구에 방해가 될 것을 걱정하지 말고 다만 뜻을 빼앗길까 걱정해야 한다.'129)라고 했는데, 어찌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부지런히 힘써야 하네.이 리(理)가 있은 뒤에 이 사물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은 것이 아닌가. 마음이 아니면 성(性)을 볼 수 없으니, 마음이 성과 정(情)을 거느리는 것이 아닌가. 전자는 원두(源頭)에 대해 말한 것이고, 후자는 당체(當體)에 대해 말한 것이네.도와 리(理)는 같은 것이고, 형(形)과 기는 같은 것이네.무릇 사물이 가지고 있는 형(形)은 참으로 기인데, 실제로는 리(理)가 한 것이네. 그러므로 한 개의 '형(形)'자에 나아가 도(道)라고 하고 기(器)라고 하니, 상(上)과 하(下)는 다만 그 경계를 말한 것이지 실로 상하가 있는 것은 아니네.리(理)의 묘용을 신(神)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精神)의 신(神)과는 같지 않네. 신(神) 안에 리(理)가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알 수는 없는데, 나의 소견으로는 아마도 타당하지 않은 것 같네.칠정(七情)은 사람의 정에 이 일곱 가지가 있는 것을 통틀어 말한 것이요, 사단(四端)은 칠정의 가운데에 나아가 다만 선(善)한 쪽만을 가리키니, 칠정이 사단에서 발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잘못되지 않으랴.예를 들어 "오성(五性)은 기(氣)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만수(萬殊)는 본연이 아니니, 그렇다면 태극은 사람이 억지로 주재(主宰)라고 이름 붙인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것은 세유(世儒)가 상투적으로 하는 말버릇이네. 書出於仲夏。書復於仲秋。一徃復之間。光陰若是其飜耶。塵海浮生。無非所以傷心處。謹惟玆辰庭闈康寧。伯氏宿愼。進退何居。孝弟之餘。起居凡百。一直勝裕。遠外懸懸。每切願聞。義林夏間患血腫。爲苦者久矣。今纔見可耳。夫學問非別様物事。只是日用之間。事親事長應事接物。大小多少。遵循義理。勿違勿失而已。何嘗以掃却事物而汨沒文字然後。可以謂學哉。但專然不讀。則無以知義理之所在。而所行或出於私意。故不可不以餘力及之。若能堅固此心。不與外面事倶徃。則應事雖繁。而不患無餘力矣。古人所謂不患妨功。惟患奪志者。豈非謂此耶。勉勉焉。有是理而後有是物。則非太極生兩儀乎。非心無以見性。則非心統性情乎。一則源頭說。一則當體說。道與理一事。形與氣一事。凡物之有是形。固氣也。而實理之所爲。故就一形字。言道言器。上下特言其界至。非實有上下。理之妙用謂之神。其與精神之神差別也。神内有理之說。不知其出於誰氏。而以愚所見。恐欠妥當。七情。統言人之情有是七者。四端。就七情之中而特言其善一邊。以七情爲四端中發出者。豈不誤哉。若曰五性因氣有。萬殊非本然。則太極其非人之強名底主宰乎。此世儒口氣也。 혈종(血腫) 장기나 조직 속에 출혈하여 한 곳에 혈액이 괸 상태. 효제를……것이네 《논어》 〈학이(學而)〉에서 "제자는 들어가서는 효하고 나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나서도 여력이 있을 경우에는 학문을 하라.[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하였는데, 그 집주에서 "여력은 가일이란 말과 같다.[餘力, 猶言暇日.]"라고 하였다. 학문‥‥걱정해야 한다 정이천(程伊川)이 "과거 공부를 한다고 해서 학문 연구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오직 자신의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科擧之事 不患妨功 惟患奪志]"라고 하였다. 《性理大全 卷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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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태휴】에게 답함 答李子謙【泰休】 붕우가 집을 떠나 이웃 서숙에서 머물고 있음을 이 편지를 받은 뒤에 비로소 알게 되었네. 이는 분명 책을 읽기 위한 생각에서 그러하였을 것이네. 더구나 어린 아동을 가르칠 때 네 가지 이익138)이 있음을 장자(張子)가 말하지 않았던가. 모름지기 가르치고 학문하는 여가에 이전 학업을 다시 익히면서 날마다 과정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 덕 있는 가문의 대대로 전해지는 시와 예의 학문을 현재에 있어서 계승할 자의 책임은 자겸과 그 주위 사람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자겸도 또한 응당 헤아렸을 것이니, 분발하고 노력함에 힘을 남기지 말게나.질문 : "망명한 사람은 보물로 삼을 것이 없고, 다만 어버이를 인하게 대함을 보배로 삼는다."139)는 말의 주에서 "인(仁)은 사랑함이다. '사랑한다[愛]'고 말하지 않고 다만 '인하게 대한다.[仁]'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답변 : '인(仁)'자는 뜻이 비교적 깊고 '애(愛)'자는 뜻이 비교적 얕네.질문 : 〈현현역색장(賢賢昜色章)〉140)에서 먼저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하고 뒤에 부모 섬김을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답변 : 《중용》에서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이 어버이를 친히 하는 것의 앞에 있고 사람을 아는 것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의 앞에 있으니,141) 또한 이 뜻과 같네. 故人之旅留隣塾。得此書而後。乃始知之。此必出於讀書之計而然也。況敎小兒有四益。非張子之言乎。須於斆學之餘。溫理舊業。俾有逐日課程如何。德門世世詩禮之業。在今日而可以繼述者。其責不在於子謙一隊人乎。想子謙亦應諒之。而奮發振勵。不遺力也。亡人無以爲寶。仁親以爲寶。註曰。仁愛也。不曰愛。而特言仁伺。仁字義較深。愛字義較淺。賢賢昜色章。先言賢賢。後言事父母。中庸尊賢在親親之先。知人在事親之前。亦是此意。 네 가지 이익 《근사록(近思錄)》 권10 〈정사(政事)〉 64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도 또한 유익함을 취할 수 있으니, 자기를 옭아매어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사람을 여러 번 가르침에 자신도 글 뜻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아이들을 대할 적에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공경하게 하는 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항상 자신으로 인해 남의 인재를 파괴함을 근심한다면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유익함이다'[人敎小童, 亦可取益, 絆己不出入, 一益也, 授人數數, 己亦了此文義, 二益也, 對之, 必正衣冠, 尊瞻視, 三益也, 常以因己而壞, 人之才爲憂, 則不敢墮, 四益也.]"라고 하였다. 망명한……삼는다 《대학장구》 전 10장의 〈강고(康誥)〉 단락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다. 현현역색장((賢賢昜色章) 《논어》 〈학이(學而)〉에 보이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중용에서……있으니 《중용》의 구경(九經)을 말하는 순서는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래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侯)로 존현이 친친의 앞에 있다. 《중용장구》 제20장 제6절에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을 닦지 않을 수 없으니, 자신을 닦을 것을 생각한다면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고, 어버이를 섬길 것을 생각한다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을 알 것을 생각한다면 천도를 알지 않을 수 없다.[故君子不可以不修身. 思修身, 不可以不事親;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思知人, 不可以不知天.]"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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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0 卷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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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9) 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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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경에게 답함 答任宇卿 새 봄이 저물어 가는데 소식이 없으니 애타게 그리운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인편에 편지 한 통이 이러한 때 전해지니 위안과 감사함을 어떻게 형용할지 모르겠네. 더구나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고 학문하면서 줄곧 건강이 좋다고 함을 알았음에랴. '자신을 얽어맨다.'3)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가난을 참고 견디는 본래 모습으로 면할 수 없는 것이네. 다만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말한 사익(四益)과 같이 하면서 실로 더욱 공부를 더한다면 그대가 말한 '망령된 계책'이란 것이 또 어찌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장담하겠는가. 마음이 흔들려서 사물에 이끌려 가버리는 것은 이 또한 보통 사람들이 다 같이 겪고 있는 걱정거리이네. 무릇 사물이 자신에게 닥쳐올 때 반드시 리(理)로 이겨서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네. 그러나 마음을 존양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가 없다면 이(理)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며, 또한 비록 알더라도 그 힘이 이기지 못하니, 이는 실로 일상생활에서의 제일가는 중요한 일이네. 힘쓰고 또 힘쓰게나. 향당의 학교를 '상(庠)'이라고 하고 주의 학교를 '서(序)'라 하며 나라의 학교를 '학(學)'이라고 하며, '교(校)'는 가르친다는 의미라네. 상(庠), 서(序), 학(學)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 아님이 없으니, 그러므로 연달아 거론하여 문장을 이룬 것이네. 또한 교(校)는 하(夏)나라의 학교이니, 헤아릴 때 빼서는 안 되네. 우(虞)는 순(舜)의 씨이며, 하(夏)는 우(禹)의 씨이니, 이는 상고 시대의 다른 씨족류의 의미이네. 은(殷)과 주(周)는 나라 이름이요, 씨족의 호칭이 아니네. 나의 견해가 이와 같은데, 잘 모르겠네만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나 독서는 반드시 대의를 힘써 궁구해야 하니, 만약 한 글자의 위 아래와 한 구의 같고 다른 곳에 대의가 있지 않으면 참으로 급급할 필요가 없네. 정자가 말하기를 "대개 문장을 이루려고 하면 형세가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하니, 반드시 매 글자마다 각각 그 의미를 구할 필요는 없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네. 가르치고 공부하는 여가에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존양하는 공부를 더하여 나의 힘으로 하여금 저 한가롭고 태만한 것을 이기게 하고 한가롭고 태만한 것이 나를 이기게 하지 말게나. 新春向暮。音聞寂然。懷想憧憧。曷以勝堪。便頭一幅。際此來至。慰豁感沃。又不知所以爲諭。矧詢重省學履。連序佳告者乎。且示絆已之云。此固固窮本色。而有不得免者。只得如橫渠四益之云。而實加功焉。則賢所謂妄計者。又安知不爲得計也。戚戚牽引。此亦衆人通患。凡事物之來。必以理勝而不與俱往。爲可爲可。然非有存養窮索之功。則不知理之所在。雖知之。而其力又不能以勝之矣。此實日用第一事。勉之勉之。黨曰庠。州曰序。國曰學。而校者敎也。庠序學。無非所以敎人者。故連擧成文。且校是夏學。而不可以關數也。虞是舜之氏。夏是禹之氏。此是上古氏別族類之義。殷與周是國名。非氏號也。鄙見如此。未知何如。然讀書必須務窮大義。若其一字上下。一句同異。非大義所存。固不必汲汲爾也。程子曰。盖欲成文。勢須如此。不必每字。各求其義。正爲此也斅學之暇。更加端莊存養之功。使吾之力。足以勝彼之優優。而勿爲優優之所勝也。 자신을 얽어맨다 《근사록(近思錄)》 권10 〈정사(政事)〉 64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도 또한 유익함을 취할 수 있으니, 자기를 옭아매어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사람을 여러 번 가르침에 자신도 글 뜻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아이들을 대할 적에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공경하게 하는 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항상 자신으로 인해 남의 인재를 파괴함을 근심한다면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유익함이다'[人敎小童, 亦可取益, 絆己不出入, 一益也, 授人數數, 己亦了此文義, 二益也, 對之, 必正衣冠, 尊瞻視, 三益也, 常以因己而壞, 人之才爲憂, 則不敢墮, 四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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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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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임우경에게 답함 答任宇卿 이전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못한 지가 석 달이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또다시 이번에 편지를 받게 되니 부끄러운 마음을 말할 겨를도 없네. 그런데 우리 벗은 그에 대해 따지지 않는 도량을 지녔는데, 이는 실로 일반적인 사람보다 만 배가 큰마음에서 나왔으니 고마움과 우러름이 함께 이르네. 지난번에 한번 만난 것은 오랫동안 격조한 뒤에 이뤄진 것인데 서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곧바로 헤어졌으니, '또한 이미 군자를 보았으니 내 마음 안정되네.'5)라고 할 수 있겠는가. 뒤미처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더욱 깊네. 잘 모르겠네만 집안에 돌아간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부모를 모시면서 건강은 줄곧 평안한가. 그렇다는 소식을 듣고픈 마음 놓을 길이 없네. 노쇠하고 저열하며 형편없는 나는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아주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려질 만한 것이 있겠는가. 두 장의 문목(問目)을 길게 나열하여 수백 조목에 이르는데 누에 실이나 소털처럼6) 남김없이 분석하였으니, 마음을 정밀한 곳에 두고 공부를 애써 부지런히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네. 이제부터의 성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질문들은 성인이 평소 한 말로 학자들이 항상 강론하며 토론해야 할 것들이네. 고답적이고 심원하며 학문의 단계를 뛰어넘는 논의들에 비하면 백 배 그 이상으로 절실하네. 다만 학문이 지리멸렬한 나는 이 질문에 대해 헤아려서 답할 만한 지식이 없으며 또한 어린 동몽들이 몰려들어 왼쪽에서 다투고 오른쪽에서 떠들어 잠시라도 고요히 있을 때가 없으니, 어찌 정밀하게 생각하고 세밀하게 고증하여 정성스럽게 질문한 우리 우경(宇卿)의 뜻에 만분의 일이라도 부응하겠는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 분명히 적지 않을 것이니, 바라건대 귀숙처로 삼지 말고 더욱 더 연구하여 다시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간절히 바라네. '의로써 바탕을 삼는다.'7)는 말에 대해,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네. 즉 주렴계는 〈태극도설〉에서 "성인이 중(中), 정(正), 인(仁), 의(義)로써 정하되 정(靜)을 위주로 하였다."라는 하였는데, 주자는 해석하기를 '중과 인은 동(動)에 속하고, 정와 의는 정(靜)에 속한다.'고 하였네. 그러므로 나는 공자의 '의로써 바탕을 삼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정(靜)자의 의미를 형용하였으니, 이는 비록 《논어》 본문의 뜻은 아니지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한 것은 참으로 그러한 예가 있네. 또한 의가 바탕이 되는 것은 동(動) 가운데의 정이 아님이 없으니, 간괘(艮卦)의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보지 못한다.'8)라는 의미와 같네. 내가 인용하여 활용한 뜻은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으니, 이치에 어긋난 지는 잘 모르겠네.질문 : 마음이 허령(虛靈)할 수 있고 신명(神明)할 수 있고 지각할 수 있고 정상(精爽)9)할 수 있는 것은 기(氣)가 하는 것입니다. 허령할 수 있는 까닭과 지각할 수 있는 까닭과 정상할 수 있는 까닭은 이(理)가 하는 것입니다. 능히 주재하는 것은 허령과 신명과 지각과 정상이 하는 것이요, 주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즉 성(性)과 이(理)가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심(心)이 이(理)와 기(氣)를 합한 것이라고 이르는 것입니까.답변 : 대단히 옳게 보았네. 주자가 이른바 '능히 지각하는 것은 기의 령(靈)이요, 지각하게 만드는 것은 심의 리(理)이다.……'10)라고 한 것은 또한 이러한 뜻이네.질문 : 정자는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는 것을 성(誠)이라 하였으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그 다음이라고 하였습니다.11) 또한 "감히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감히 태만히 하지 않으며 혹시라도 방 귀퉁이에서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한다는 것은 모두 경(敬)의 일이다."12)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과 경은 그 실상은 같은 것입니까.답변 : 감히 태만하지 않고 감히 자신을 속이지 않음을 경이라고 일러도 옳으며, 성이라고 일러도 또한 옳네. 만약 세밀하게 구분한다면 감히 태만하지 않는 것을 경이요, 감히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은 성이네.질문 : 하나에 집중하는 것[主一]을 경(敬)이라고 이르는데, 이에서 '일(一)'자는 심(心)이니, 일(一)은 리(理)요 주(主)는 심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답변 : 주(主)와 일(一)을 심이라고 해도 옳은 말이며 리라고 하여도 옳네. 만약 세밀하게 구분한다면 주는 심이요, 일은 리이네.질문 : 사특함을 막는 것과 성(誠)을 보존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 일입니다. 예를 들면, 담장을 보수하면 도적이 스스로 이르지 않을 것이니, 경(敬)은 담장이요, 사특함은 도적이요, 성은 집안의 물건입니다.답변 : 좋은 말이네.질문 : 사특함을 막아 성을 보존한다는 것은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것은 뜻이 성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자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은 성(誠)이다."13)라고 하였는데, 오씨(吳氏)가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을 성의에 해당시키고 사특함을 막아 성을 보존한다는 것을 정심(正心)에 해당시킨 것14)은 다만 사(思)와 존(存) 두 글자를 중시하였기 때문입니다.답변 : 그대의 논의가 옳으니, 오씨의 말은 과연 의심스럽네.답변15) : 사사로운 욕심[私欲]과 사특하여 망령됨[邪妄]은 참으로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네. 그러나 만약 구분지어 말한다면 사특하여 망령됨이 근본이 되고 사사로운 욕심은 지엽이 되니, 사욕이 없기는 쉽고 사망이 없기는 어렵네.질문 : "반드시 일삼아 노력을 하되 조장하지 말라."16)는 부분에서 맹자는 기를 기르는 것으로 말하였고, 정자는 마음을 기르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기르는 이외에 별도로 기를 기르는 것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을 기르면 기는 자연스럽게 커지게 됩니다.답변 : 마음을 기르는 것과 기를 기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 아니니, 모두 안팎과 동정(動靜)을 겸하여 말한 것이네. 예를 들면 맹자는 기를 기르는 것을 말하면서 "그 뜻을 잡고도 그 기를 해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그 뜻을 잡는 것은 경(敬)을 주장함을 이른 것이 아닌가. 맹자는 마음을 기르는 것을 말하면서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17)라 하였는데,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 의를 모으는 것이 아니겠는가.질문 : 명덕(明德)을 말하면 성정(性情)을 포함하여 그 안에 있고, 성정을 말하면 명덕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답변 : 성정은 체용(體用)을 나눠서 말한 것이요, 명덕은 체용을 통합하여 말한 것이네. 만약 '성정이 명덕을 포함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성정 밖에 또 다른 명덕이 있는 것이 옳겠는가.질문 : 지(知)는 심(心)의 신명으로 여러 이치를 오묘하게 운영하고 만물을 주재합니다.18) 심(心)은 사람의 신명으로 여러 이치를 갖춰서 만 가지 일에 대응합니다.19) 갖추고 응하는 것은 성정(性情)에 중점이 있고, 오묘하게 운영하고 주재하는 것은 심(心)에 중점이 있습니다.답변 : 지(知)로써 말하였으므로 '오묘하다.' '주재한다.'고 하였고, 심(心)으로써 말하였으므로 '갖추었다.' '대응한다.'고 하였으니, 그 실상은 같네. 어찌 심에 중점을 두거나 성정에 중점을 둔 구분이 있겠는가. 또한 심(心)은 지각하는 사물이니, 지각을 제외한다면 이 심(心)이 없네. 지금 '지(知)가 심과 성과 정을 거느린다.'고 하니, 대단히 말이 되지 않네. 어찌 우리 벗이 이처럼 보고서 논한단 말인가. 깊이 생각하길 바라네.질문 : "그 근본이 참되고 고요하며……"20)라고 한 것에 대해 주자는 "오성(五性)은 바로 진(眞)이며, 발하지 않았을 때가 바로 정(靜)이다."21)라고 한 것은 다만 거듭하여 말한 것이지만, 깊이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개 앞 단락은 태극의 원두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므로 먼저 진(眞)을 말한 후에 정(靜)을 말하였습니다. 아래 단락은 성분(性分)의 당체(當體)에 나아가 말하였으므로 먼저 미발을 말한 후에 오성을 말하였습니다. 이는 《중용집주》에서 "이(理) 또한 부여하였다."라 한 것은 진(眞)이며, "건순오상의 덕으로 삼았다."라 한 것은 오성(五性)인 것과 같습니다.22) 천지가 정(精)을 쌓아 오행의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되니, 또한 어찌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탄생시킴에 기로써 형체를 이루는 것에 해당하지 않겠습니까.답변 : 이 단락의 분변은 대단히 의의가 있네.답변23) : 하늘에 있어서 원, 형, 리, 정으로 성(性)을 삼고 따뜻함, 시원함, 추위, 더위로 정(情)을 삼는데,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 의, 예, 지로 성을 삼고 희, 노, 애, 락으로 정을 삼는 것과 같네. 하늘에 있어서 원과 형은 정이 되고 리와 정은 성이 되는데,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과 중이 정이 되고 의와 정이 성이 되는 것과 같네. 가로로 말하거나 세로로 말하거나 하늘과 사람과 사물이 모두 다 똑같네.답변 : 공용(功用)과 묘용(妙用)은 본래 다른 것이 아니네. 묘용은 공용에 나아가 특별히 그 묘처(妙處)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네.질문 : 주자가 말하기를 "나눠서 말하면 원과 형은 성(誠)의 통함이며, 리와 정은 성의 회복이다.24) 그 본체와 작용이 본래 있는 것이다. 작용으로 말하면 원이 주가 되고, 본체로 말하면 정이 주가 된다."25)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성의 통함과 성의 회복은 즉 '잇는 것은 선이요 이룬 것은 성(性)이다.'26)는 것에 해당하며 본체와 작용을 함께 말한 것입니다. 다만 이는 유행(流行)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만약 원두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원, 형, 리, 정은 체가 되고,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수확하는 것은 용이 되니, 태극이 주가 됩니다.답변 : 이는 유행이나 원두로써 말할 수 없네. 음양 동정의 단서로써 말하자면 리와 정은 체가 되고 오행 중의 하나를 각각의 성으로 삼은 것으로 말하자면 원, 형, 리, 정은 모두 체가 되네. 대개 오성은 서로 상대되는 것으로 말한 것이 있으며 유행으로 말한 것이 있네.27)질문 : 〈겸괘(謙卦)〉의 단사(彖辭)에서 "천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허한 것을 채워준다.……"28)라는 말 이하에서 천도, 지도(地道), 인도(人道) 등 모두 '도(道)'자를 말하였는데, 오직 귀신에서는 도(道)를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답변 : 하늘과 땅과 사람은 모두 형체로써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도(道)자를 말하였네. 귀신은 운용의 오묘함과 조화의 실권을 가지고 있으니, 그러므로 도자를 말하지 않았네. 한편 혹은 그 문장의 기세가 순한 것을 취하였을 수도 있네.질문 : 〈간괘(艮卦)〉의 상전(象傳)에서 "군자가 이를 본받아서 생각함이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29)라 하였으니, 무릇 사물이 닥쳐올 때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는 것과 마땅히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것이 모두 생각함이 그 지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답변 : 이에서 미뤄나가 아주 조금의 어긋남이나 한번 숨 쉴 때의 멈춤도 모두 그 지위에서 벗어난 것이네. 前書未復。至三朔之久。而又此承貺。私情愧恧。有不暇言。而吾友不較之量。實出尋常萬萬。感仰交至。向者一面。出於阻久之餘。而未交一語。旋卽告別。亦可曰亦旣見止。我心則降乎。追惟增悵。未審還庭有日。侍省節宣。連膺安吉。不任願聞之情。義林衰劣無狀。姑且捱過而已。安有一半分可聞者哉。問目二紙。娓娓臚列。至數百條。而蠶絲牛毛。分析無遺。如非宅心精細。爲學勤苦者。不能。從此進就。曷其量哉。況此是聖人所雅言。而學者所常講討者也。其有切於幽深高遠。躐等淩節之論。不啻百倍。但區區滅裂。無所知識可以上下於此。而又以蒙率叢冗。左鬧右聒。無霎刻靜帖時節。其安能精思細考。以副我宇卿勤意之萬一哉。其爲失答。想必不少。幸勿視爲歸宿。益加硏窮。復以見示如何。切望切望。義以爲質。鄙意以爲濂溪太極說。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朱子解之。以中與仁。屬之動。以正與義。屬之靜。故愚引孔子義以爲質之語。以形容靜字之義。此雖非論語本文之義。而斷章取義。固有其例。且義之爲質。未嘗不是動中之靜。如艮之不獲其身也。區區取用之意。不過如此。所未知其不至悖理否也。心之能虛靈。能神明。能知覺。能精爽者。氣之爲也。所以虛靈所以神明。所以知覺。所以精爽者。理之爲也。能主宰者。卽虛靈神明知覺精爽之爲也。所以主宰者。卽性理之爲也。此其所謂心合理氣者耶。見得甚好。朱子所謂能覺者。氣之靈。所覺者。心之理云云。亦此意。程子眞實無妄之爲誠。不欺其次。又曰。不敢欺。不敢慢。尙不愧于屋漏。皆是敬之事。然則誠敬其實一也。不敢慢不敢欺。謂之敬亦得。謂之誠亦得。若細分之。不敢慢是敬。不敢欺是誠。主一之謂敬。此一字是心。似不可謂一是理而主是心。主與一。謂之心亦得。謂之理亦得。若細分之。主是心。一是理。閒邪存誠。只是一事。如修其墻垣。則寇自不至。敬者垣墻也。邪者寇賊也。誠者家內什物。說得乎。閑邪存誠者。誠意也。思無邪者。意誠也。故程子曰。思無邪者誠也。吳氏則以思無邪。當誠意。以閑邪存誠。當正心者。只以思與存兩箇字爲重看。賢論得之。吳氏說。果可疑。私欲邪妄。固非二物。然苟欲分以言之。則邪妄爲根本。私欲爲枝葉。無私欲易。無私妄難。必有事焉。勿助長。孟子以養氣爲言。程子以養心爲言。然養心外。非別有養氣。養心。氣自然浩大養心養氣。非有異事。而皆兼內外動靜言之。如孟子言養氣而曰。持其志。無暴其氣。持其志。非主敬之謂耶。孟子言養心而曰。莫善於寡欲。寡欲非集義之云耶。言明德則包性情在其中。言性情則包明德不得。性情分體用言。明德統體用而言。若曰性情包明德不得。則是性情外。別有明德。其可乎。知則心之神明。妙衆理宰萬物。心則人之神明。具衆理應萬事。具應重在性情上。妙宰重在心上。以知言故曰妙曰宰。以心言故曰具曰應。其實一也。豈有重在心重在性情之分。且心是知覺底物事。除了知覺則無此心。今曰知者統心性情。不成說不成說。豈以吾友之見而所論如是乎。千萬人思。其本也眞而靜云云。朱子曰。五性便是眞。未發便是靜。只是疊說。然深究之不然也。盖上段是就太極原頭上說下來。故先言眞而後言靜。下段是就性分當體上說上去。故先言未發而後言五性。如中庸集註。理亦賦焉。是眞也。以爲健順五常之德。是五性也。天地儲精。得五行之秀者爲人。又豈非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氣以成形者耶。此段所辨。其有意義。在天以元亨利貞爲性。而以溫涼寒暑爲情。猶在人以仁義禮智爲性。而以喜怒哀樂爲情也。在天以元亨爲情。而以利貞爲性。猶在人以仁中爲情。而以義正爲性也。橫說竪說。天也人也物也。皆是一般。功用妙用。本非二物妙用是就功用中。特指其妙處而言。朱子曰。分而言之。則元亨誠之通。利貞誠之復。其體用固有在矣。以用言。則元爲主。以體言。則貞爲主。夫誠之通。誠之復。卽繼之者善。成之者性。而體用之云。但以流行邊說話。若以原頭說。則元亨利貞爲體。生長遂藏爲用。太極爲主。此不可以流行原頭言也。以陰陽動靜之端言。則利貞爲體。以五行各一之性言。則元亨利貞。均之爲體。盖五性有以對待言者。有以流行言者。謙之彖。天道虧盈而益謙以下。皆言道字。而獨於鬼神不言者何。天地人。皆以形體言。故言道字。鬼神有運用之妙。造化之柄。故不言道字。且或取其順文勢耳。象曰。君子以思不出其位。凡事物之來。不當爲而爲之者。所當爲而不爲者。皆思出其位也。推而至於一毫之差。一息之斷。皆爲出位。 또한……안정되네 《시경》 〈초충(草蟲)〉에 "찌르르 찌르르 우는 풀벌레며, 팔짝팔짝 뛰는 메뚜기로다。군자를 만나 보지 못한지라, 근심하는 마음 아프노라. 또한 이미 군자를 보며, 또한 이미 군자를 만난다면, 내 마음 안정되도다。〔喓喓草蟲, 趯趯阜螽。未見君子, 憂心忡忡。亦旣見止, 亦旣覯止, 我心則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누에 실이나 소털처럼 원나라 학자 오징(吳澄, 1249~1333)이 주희의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畫像讚)〉을 본떠 주희의 화상을 그려 놓고 〈회암선생 주문공 화상찬(晦庵先生朱文公畵像讚)〉을 지었는데, 거기에 "현묘하고 은미한 의리는, 누에실과 소털처럼 자세히 분석했네. 마음은 넓고 넓어서,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았네. 호걸스러운 재주요, 성현의 학문이었도다. 경성과 상서로운 구름이요, 태산과 교악이셨네.[義理玄微, 蠶絲牛毛. 心胸恢廓, 海闊天高. 豪傑之才, 聖賢之學. 景星慶雲, 泰山喬嶽.]"라고 하였다. 의로써 바탕을 삼는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군자는 의로써 바탕을 삼고, 예로써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라고 하였다. 간괘의……못한다 《주역(周易)》 〈간괘(艮卦)〉에서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보지 못하여 그 뜰을 지나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으리라.〔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라고 하였다. 정상 주자는 심을 기(氣)의 정상(精爽)이라 하였다. 능히……리이다 《주자어류》 권5 〈성리〉2에 보인다. 진실하여……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근사록》 〈도체(道體)〉에 보인다. 감히……일이다 《심경(心經)》에서 《주역(周易)》의 '경이직내(敬以直內)'를 논한 부분에서 정자는 "주일(主一)을 경이라 이르니, 안을 곧게 한다는 것은 바로 주일의 뜻이다. 감히 속이지 않으며 감히 태만히 하지 않으며 혹시라도 방 귀퉁이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한다는 것은 모두 경의 일이니, 다만 이것을 보존하여 함양하면 오래 할 경우 자연히 천리가 밝아진다.[主一之謂敬, 直內乃是主一之義. 至於不敢欺, 不敢慢, 尙不愧于屋漏, 皆是敬之事也. 但存此涵養, 久之, 自然天理明.]"라 하였다. 생각에……성이다 《논어》 〈시삼백(詩三百)〉장의 주에서 정이천이 한 말이다. 오씨가……해당시킨 것 오씨는 임천 오징(吳澄)이다. 그가 말하기를 "정자가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 성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사' 자는 사욕과 악념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천리만 있고 인욕이 없으며 선만 있고 악이 없는 것, 이것이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간사함이 없으면 망녕되지 않으며 망녕되지 않은 것을 성이라 이르니, 《대학》의 조목으로 말하면 성의의 일이다. 《주역》 〈문언전〉에 '사를 막아 그 성을 보존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사' 자는 사욕과 악념을 말한 것이 아니다. 성이란 성인의 망령됨이 없는 진실한 마음이다. 외물이 밖에서 접해 오매 그것을 막아서 안을 범하지 않게 하여, 안의 마음이 두 갈래로 가지 않고 잡되지 아니하여 성이 저절로 보존되는 것이니, 《대학》의 조목으로 말하면 정심의 일이다.[程子謂思無邪者, 誠也, 此邪字, 指私欲惡念而言. 有理無欲, 有善無惡, 是爲無邪. 無邪, 斯不妄, 不妄之謂誠, 以大學之目, 則誠意之事也. 易文言傳曰閑邪存其誠, 此邪字, 非私欲惡念之謂. 誠者聖人無妄眞實之心也. 物接乎外, 閑之而不干乎內, 內心不二不雜, 而誠自存, 以大學之目, 則正心之事也.]"라고 하였다. 《心經附註 卷1 易 閑邪存誠章》 답변 질문은 싣지 않고 답변만 실었다. 반드시……말라 《맹자》 〈호연지기〉의 조장(助長) 부분에 보이는 말이다. 욕심을……없다 《맹자》 〈진심하〉에 보인다. 지는……주재합니다 《대학장구》 서의 '인의예지의 성〔仁義禮智之性〕'에 대한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주석에서 주자가 인의예에 대해서는 풀이를 하였는데 유독 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없다고 하면서 "일찍이 주희의 뜻을 취하여 보충하기를, '지는 심의 신명이니 중리를 묘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 하였다.〔嘗欲竊取朱子之意以補之曰 智則心之神明 所以妙衆理而宰萬物者也〕"라는 말이 보인다. 심은……대응합니다 《대학장구》의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고〔大學之道 在明明德〕"에 대하여 주희는 주에서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불매하여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그 근본이 참되고 고요하며 《근사록》 〈위학(爲學)〉에서 정이천이 한 말로 "천지가 정기를 축적하여 만물을 내는데, 이때 오행의 빼어난 기운을 얻은 것이 바로 사람이 되니, 그 근본은 역시 참되고 고요하다고 할 것이다.〔天地儲精 得五行之秀者爲人 其本也 眞而靜.〕"라 하였다. 오성은……정이다 주자는 "본(本)은 본체(本體)이며, 진(眞)은 인위(人僞)가 섞이지 않은 것이다……오성(五性)이 곧 진(眞)이고 발하지 않았을 때가 곧 정(靜)이다.[本是本體, 眞是不雜人僞……五性便是眞, 未發時便是靜.]"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30 論語》 《晦庵集 卷42 答胡廣中》 이(理)……같습니다 《중용장구》 경 1장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른다."라고 한 데 대한 주희의 주에 "명(命)은 영(令)과 같고, 성은 바로 리이다. 하늘이 음양(陰陽)ㆍ오행(五行)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하매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리 또한 부여하니 명령함과 같다. 이에 사람과 물이 태어나매 각기 부여받은 리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健順)ㆍ오상(五常)의 덕을 삼으니,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이다.〔命 猶令也 性 卽理也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於是 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라고 하였다. 답변 질문은 실려 있지 않고 답변만 있다. 이후로 이와 같은 경우가 다시 나오면 주를 달지 않는다. 나눠서……회복이다 주자가 인용한 이 말은 원래 주돈이의 《주원공집(周元公集)》 권1 〈통서(通書)〉에 보인다. 나눠서……된다 《주역》 〈건괘〉 단사(彖辭)의 주에 보이는 말이다. 잇는……성이다 《주역》 〈계사전 상〉에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하니 이것을 계속 이어 가는 것이 선이요, 이것을 이루어 갖춘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 成之者性也]"라 하였다. 원형이정은……있네 이와 같은 질문이 《노사집》 권8 〈답정국언(答鄭國彥)〉에 보인다. 이에 대해 노사는 "원형 운운한 것은 춘하추동과 같고, 인의 운운한 것은 동서남북과 같으니, 대체로 유행하는 것과 상대되는 것은 본래 같은 맥락이다."라고 답하였다. 천도는……채워준다 《주역》 〈겸괘(謙卦) 단(彖)〉에 이르기를 "천도는 차서 넘치면 허물어뜨리고 겸허하면 더해 주며, 지도는 차서 넘치면 변화시키고 겸허하면 계속 흘러가게 하며, 귀신은 차고 넘치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주며, 인도는 차고 넘치면 싫어하고 겸허하면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라 하였다. 군자가……않는다 《주역》 〈간괘(艮卦)〉에서 "산이 거듭함이 간이니, 군자가 본받아 생각함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兼山, 艮, 君子以思不出其位.]"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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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노사 선생1)에 대한 제문 祭蘆沙先生文 삼대(三代) 시대 여러 성인이 나온 뒤에 공자께서 나오셨고, 염락(濂洛)2)의 여러 철인이 나온 뒤에 주자가 나왔고, 동방의 여러 유자들이 나온 뒤에 선생께서 태어나셨으니, 대개 하늘이 성대하게 일어난 뒤에 한 사람을 낳아 절충하고 집성하게 하여 사문(斯文)을 위한 만세의 계획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의리는 어두워져 막히고 추향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 진 것이 이에 춘추(春秋) 시대와 남송(南宋) 때 보다 심함이 있으니, 하늘이 선생으로 하여금 한번 다스려지는 운수를 담당하게 한 것은 또 어찌 우연이겠습니까.오호라! 선생께서는 운수에 응한 것이 황하와 같고 신령함을 모은 것이 산악과 같아 오백 년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기와 천만 년의 오랜 유정유일(惟精惟一)3)의 학문은 장엄하기가 마치 암벽이 천 길 높이 솟은 것과 같고, 넓고 아득하기가 마치 바다가 만곡(萬斛)을 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仁)은 봄기운이 생동하는 것 같고 의(義)는 가을 기운이 엄숙한 것 같습니다. 좋은 금과 정결한 옥처럼 순수하여 조탁한 흔적이 없고 광풍제월(光風霽月)4)처럼 깨끗하여 속진을 벗어난 모습이 있습니다. 출처[行藏]는 나라의 시운과 관계되었고 문장(文章)은 천지의 원기에 참여하였습니다. 곡절이 만 번 변하였으나 응답함은 큰 종소리가 메아리에 응하는 것 같았고 현우(賢愚)가 다르지만 교육시킴은 조물주가 빠뜨림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오호라! 성인이 멀어지고 말씀이 인몰되며 세도는 떨어지고 풍속은 오염되어 사람들이 그 의론을 달리하고 선비는 그 학문을 사사롭게 여겨 종횡으로 분열되어 천만 갈래로 나누어졌습니다. 오직 선생께서는 동서남북의 밖으로 나와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의 근원에 앉아 밝은 견해로 분명하게 비추어보고 담소하며 물리쳐 마치 백천(百川)의 미친 물결이 그 길을 얻어 호연(浩然)히 동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습니다.오호라! 나라에서 의뢰함이 시귀(蓍龜)5)와 같았고 사람들이 우러르기를 마치 태산북두같이 하고 백성들이 바라보기를 마치 상서로운 해와 구름같이 보았는데, 어찌 원로를 남겨두지 않아 이 세상으로 하여금 갑자기 안방(安放)의 애통함6)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까.소자가 선생을 섬긴 지 지금 십여 년입니다. 아껴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꾸짖으시고 바라심에 그 간절한 마음 지극히 하셨는데, 소자가 보답한 것은 어떤 일입니까? 빙호수월(氷壺水月)7)을 다시 볼 수 없으니, 규구(規矩)와 준승(準繩)8)을 어디에서 본받으랴. 태산이 무너지자 개미언덕이 높아지고 태양이 사라지자 반딧불이 빛을 내니, 사문과 세도가 장차 어느 곳에 멈출지 모르겠습니다.오호라! 선생께서 계시지 않지만 그 행의(行義)와 언범(言範)이 세상에 남아 해와 별같이 빛나니, 이것이 갱장(羹墻)의 사모9)와 강한(江漢)의 생각10)을 깃들여 장차 여기에서 몸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오호라! 흠향하소서. 三代群聖之後。孔子作。濂洛群哲之後。朱子出。東方群儒之後。先生生。蓋天生一人於蔚興輩出之餘。使折裏集成。爲斯文萬世計者也。況義理之晦塞趍向之多門玆有甚於春秋南宋之時。則天之所以使先生當一治之運者。又豈偶然哉。嗚呼。先生膺運河瀆。鍾靈山岳。五百年至大至剛之氣。千萬古惟精惟一之學。儼儼若壁立千仞。蕩蕩若海涵萬斛。仁如春生。義如秋肅。良金精玉。粹然無雕琢之痕。光風霽月。灑然有出塵之標。行藏係邦國之時運。文章參天地之元氣。曲折萬變。而酬答如洪鍾之應響。賢愚不齊。而敎育如化工之無遺。嗚呼。聖遠言湮。世降俗汚。人異其論。士私其學。縱橫分裂。千蹊萬逕惟先生出乎東西南北之外而坐於道德仁義之源。洞見昭晣。談笑摩之。如百川狂瀾。得其道而浩然東注也。嗚呼。邦國賴之若蓍龜。士林仰之若山斗。輿民望之若瑞日祥雲。豈不憖遺。使斯世遽遭安放之痛也耶。小子事先生。十數年于玆矣。其愛之敎之。責之望之。極其懇惻。而小子之所以報答者。爲何事也。氷壺水月。不可復覿。規矩準繩。於何可倣。泰山頹而邱垤高。大明沒而螢爝光。斯文世道。將不知稅駕於何地。嗚呼。先生不在。而其行義言範之在世。炳如日星。此可以寓羹墻之慕江漢之思。而將終身於斯焉。嗚呼。尙饗。 노사 선생(蘆沙先生)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염락(濂洛) 염(濂)은 염계(濂溪)로 주돈이(周敦頤)가 살았던 곳이고, 낙(洛)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았던 낙양(洛陽)을 말한다. 유정유일(惟精惟一)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제위(帝位)를 넘겨주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書經 大禹謨》 광풍제월(光風霽月)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로, 인품이 고결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비유한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주돈이(周敦頤)를 평하면서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가슴속이 깨끗하여 마치 비 온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시귀(蓍龜) 점을 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 껍데기를 말하는데, 옛날에 일의 시비와 길흉을 점치던 것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을 뜻하며, 나아가서 모든 의문을 판별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안방(安放)의 애통함 스승이 세상을 떠나 의지할 곳이 없어진 데 따른 애통함을 말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꺾이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빙호수월(氷壺水月) 빙호추월(氷壺秋月)과 같은 뜻이다. 얼음으로 만든 호리병에 맑은 가을 달이 비친 것과 같이 티 없이 고결한 정신을 뜻하는 말로, 주자(朱子)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인품을 형용한 말에서 나왔다. 《朱子大全 祭延平李先生文》 규구(規矩)와 준승(準繩) 규(規)는 원(圓)을 만드는 기구요, 구(矩)는 방형(方形)을 만드는 기구이며, 준(準)은 측평기(測平器)요, 승(繩)은 먹줄이다. 갱장(羹墻)의 사모 국과 담장을 보기만 하여도 사모하는 마음이 든다는 말로 돌아가신 선왕이나 현인을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함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적에 요 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러 그리워하여 앉으면 담장에서 요 임금을 보았고, 밥을 먹으면 국에서 요 임금을 보았습니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墻, 食則睹堯於羹.]"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강한(江漢)의 생각 스승을 애타게 추모는 생각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증자(曾子)가 공자를 찬미하여 "선생님의 덕은 강수(江水)와 한수(漢水)로 씻는 것과 같고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고 깨끗하여 더할 수 없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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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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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대부 석당 선생11)에 대한 제문 祭族大父石塘先生文 선생은 몇 세대에 한번 나오는 기상과 하늘이 준 빼어난 재주로 멀리로는 수사(洙泗)12)의 전함을 거슬러 올랐고 가까이로는 낙민(洛閩)13)의 실마리를 궁구하여 안으로는 종애(鍾崖)14)와 노학(老學) 같은 어진 선조의 학업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사계(沙溪)15)와 제강(堤江16)) 같은 선정의 통서를 접하여 연원이 이미 바르고 문로가 매우 컸습니다. 이(理)와 의(義)가 밝고 정밀하여 하늘과 사람의 깊은 뜻에 묵묵히 계합하였고, 도(道)와 덕(德)이 높고 높아 일찍 공보(公輔)의 명망17)을 지고 있었습니다. 둥글고 모난 규구(規矩)로 만고의 모양과 법도를 보존하고, 봄같이 온화하고 가을 같이 엄숙하여 사시의 원기를 갖추며, 봉장(封章)18) 항의(抗義)하여 음양의 숙특(淑慝)을 구분하고, 글을 저술하여 어리석음 깨우치니 족히 경전에 우익(羽翼)이 되며, 아름다운 산수에 오매(寤寐)의 즐거움 길이 맹세하고, 서울[洛陽]의 옥백(玉帛)19)은 초빙[聘辟]하는 명을 부질없이 수고롭게 하였으며, 동산에 해가 지니 다시 창생의 희망이 없고, 하루 저녁에 기둥을 꿈꾸어20) 갑자기 철인(哲人)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오호라! 사문은 누구를 의지하며, 세도는 어디를 우러르겠습니까? 우리 집안은 백여 년부터 이래로 날로 쇠퇴하였습니다. 선생께서 일찍이 이를 위해 개연해 하여 집안을 위한 계획으로 소자에게 거듭 당부한 것이 간곡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오늘 갑자기 소자를 버리고 소자로 하여금 의귀할 곳이 없게 하는지요. 받은 말씀 마음에 남아 있어 비록 저버리지 않고자 하나 누가 조치하여 인도해 주며, 누가 성취시켜 줄 것입니까? 사문과 세도의 걱정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고, 집안의 계책은 어찌하며 저를 위한 계획은 어찌하겠습니까? 모습이 영원히 막혔고 전형(典刑)은 살필 곳이 없습니다. 성묘하며 곡하니 호산(湖山)이 처량하고 암담합니다. 슬픈 마음 엮어 제문을 잡고서 감히 제사를 올립니다. 先生以間世之氣。天挺之才。遠溯洙泗之傳。近究洛閩之緖。內而襲鍾崖老學賢祖之業。外而接沙溪堤江先正之統。淵源旣正。門路甚大。理明義精。默契天人之蘊。道尊德高。早負公輔之望。規圓矩方。存萬古之樣轍。春溫秋肅。備四時之元氣。封章抗義。分陰陽之淑慝。著書開蒙。足羽翼於經傳。嘉林山水。永矢寤寐之樂。洛陽玉帛。虛勞聘辟之命。東山落日。無復蒼生之望。夢楹一夕。遽遭哲人之萎。嗚呼。斯文誰賴。世道安仰。吾門自百餘年來。日就衰替。先生嘗爲之慨然。而以門戶之計。申申於小子者。不啻懇惻。豈今日遽棄小子。而使小子俾無所依歸耶。受言在心。雖欲不負。而誰其指引之。誰其成就之。斯文世道之憂。固不可勝言。而門户之策奈何。自身之計奈何。儀容永隔。典刑無稽。展墳號哭。湖山凄黯。綴哀操文。敢奠侑儀. 석당(石塘) 선생 정의림의 족대부(族大父) 정귀석(鄭龜錫, 1790∼?)을 말한다. 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노(魯)나라에 있었던 두 물의 이름인데, 공자가 이곳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므로, 곧 공자 및 유학(儒學)을 일컫는다. 《禮記 檀弓上》 낙민(洛閩) 낙(洛)은 낙양(洛陽)으로 정호(程顥)·정이(程頤)가, 민(閩)은 민중(閩中)으로 주희(朱熹)가 거주하던 곳이다. 종애(鍾崖) 정부(鄭敷, 1659~1712)의 호이다. 자는 대재(大哉),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호이다. 자는 희원(希元),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서인 명문의 대학자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였고, 인조반정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써 아들인 김집(金集)을 비롯해 송시열(宋時烈), 이유태(李惟泰), 장유(張維) 등 걸출한 서인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제강(堤江) 충청북도 제천(堤川)의 황강(黃江) 가에서 강학한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ㆍ한수재(寒水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로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660년(현종1) 진사가 되었고, 스승 송시열이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는 상황 속에서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청풍 산속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1703년부터 1717년까지 해마다 대사헌,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에 임명되었고, 1721년(경종1)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한수재집》 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공보(公輔)의 명망 대신이 될 것이 기대되는 명성과 인망을 이른다. 공보는 삼공(三公)과 사보(四輔)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삼공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이르고, 사보는 전의(前疑)·후승(後丞)·좌보(左輔)·우필(右弼)로 군주의 좌우에서 보필하는 신하들이다. 봉장(封章) 밀봉하여서 올리는 건의를 말한다. 고대에 관료들이 임금에게 기밀의 사안을 건의할 때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검정 주머니에 담아서 밀봉하여 올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봉사(封事)이라고도 한다. 옥백(玉帛) 예의를 갖추어 어진 이를 부르는 것을 뜻한다. 기둥을 꿈꾸어 사람이 죽는 꿈을 말한다. 공자가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제수를 받는 꿈을 꾸고[夢坐奠於兩楹之間]' 얼마 뒤에 죽은 고사에서 유래한다. 《禮記 檀弓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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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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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윤계인에게 답함 答尹季仁 편지에 답장이 늦어진 채 지금 벌써 몇 달이 지났습니다. 궁벽한 곳에 우거하느라 세상의 습속에 빠졌으므로 그 퇴락한 모습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겠습니다. 혹독한 더위가 위세를 거두고 시원함이 잠깐 생겨나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부친의 기력은 강녕하시며, 시봉하는 정황은 기쁘고 즐거우며, 체후는 더욱 다복하신지요? 가르치고 배우던 시절에 소견이 얕지 않으니 매번 성대히 축원하였습니다. 의림(義林)은 긴 여름 동안 숨 가쁜 더위에서 온갖 고생을 하였는데, 지금은 가을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나 또 학귀(瘧鬼)가 번뇌롭게 하여 원기를 다 빼앗긴 채 골골하며 죽을 지경일 따름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여러 조목의 문목(問目)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날 마주하고 공부할 적에 이미 논파(論破)했던 것들이 아닌지요? 이에 사의(謝儀)를 써서 감히 함께 언급합니다. 예(禮)에서는 증조부(曾祖父)는 현고부(顯考父)로, 고조부(高祖父)는 황고부(皇考父)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의 주(註)에서는, "현고(顯考)에게는 사당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기(氣)가 지(志)를 움직이는 것은 마치 사람이 지나치게 취하면 뜻이 어지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완물상지(玩物喪志)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志)가 기(氣)를 움직이면 사람이 장중하고 공경함이 날로 강해지는 것과 같으니 덕(德)을 행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이것입니다. 부리지포(夫里之布)87)는 곧 한 사람의 지아비와 1리(里)에 부과되는 세금이니, 만약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벌하여 이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합니다. 전국(戰國) 시대에 이미 이를 벌하였습니다. 또한 시장이나 주택이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가을볕을 여름볕처럼 하는 것은 아마도 매우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정삭(正朔)을 고치되 월수(月數)를 고치지는 않았으니, 하물며 여름을 가을로 고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맹자(孟子)》에, "이 기(氣).……"88)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몰라 감히 억측하여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맹자(孟子)가 경추씨(景丑氏)에게 가서 묵은 것은 장차 현인을 감히 부를 수 없는 뜻을 말하여 제(齊)나라 왕이 그것을 듣게 하려고 한 것이었지, 맹중자(孟仲子)의 둘러대는 말을 따르려고 하였던 것이 아닙니다.89) 一紙稽復。今幾月矣。居寓僻左。墮在世臼。其頹落之狀。卽此可驗。酷炎收威。新凉乍生。未審尊庭氣力康寧。侍旁怡愉。節宣增祉。斅學時節。見到不淺。每用翹祝。義林長夏喘暑。喫盡苦況。今則秋涼入戶。而又爲瘧鬼所惱。元氣見奪。㱡㱡欲盡耳。奈何。問目諸條。未知向日面穩時。業已論破耶。玆修謝儀。敢此倂及。禮以曾祖爲顯考。以高祖爲皇考。故中庸註曰。顯考無廟。氣動志。如人過醉亂志。玩物喪志是也。志動氣。如人莊敬日疆。作德心逸是也。夫里之布。是一夫一里之布。若有無業之人。則罰之使出此布也。戰國時。旣有此所罰。又一切施之於市宅之民。秋陽之爲夏陽。似甚不然。古者。改正朔而不改月數。況可改夏爲秋乎。在孟子是氣云云。愚所未瑩。不敢臆說。宿景丑氏。將以語不敢召之義。使齊王聞之也。非爲欲遂仲子之權辭也。 부리지포(夫里之布)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부과하는 부포(夫布)와 뽕나무나 삼(麻)을 심지 않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이포(里布)를 가리킨다. 이 기(氣)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 上)」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특징을 설명한 부분을 가리킨다. 맹자가 …… 것이 아닙니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 2장인 장조왕장(將朝王章)의 내용으로, 임금이라도 현인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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