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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 영모재 상량문 密陽朴氏永慕齋上樑文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그 생각 보존하니이에 전대에 지었던 것 보겠네뜻을 잘 계승하여 그 일 전술하니이에 오늘의 긍당이 있게 되었네이것이 자손이 우러러 사모하는 방법이요생도들이 학업을 익힐 장소를 얻게 되었네생각건대 밀양 박씨는 대대로 벼슬한 집안으로능주 서쪽 토구의 고을을 지켰네당부114) 같은 것은의리를 보관한 것 길이 받들고모 수 모 언덕에선영의 나무 그늘 대대로 보호하네한 구역 기둥과 글방은실로 진군의 정자115)이고백년의 구림은이 어찌 계씨의 침문이겠는가상로 내릴 때 처창한 생각116) 깃들이고조석으로 바라보며 절하는 정성 펼치네동상과 서실에서친척의 정 즐거워 하고봄가을 예서와 경서로자제들의 학업 점검하네이에 지은 지 오래되어서는기울고 넘어지는 근심 없지 않네담장은 다시 높아진 위태로움 보겠고서까래는 너무 지나치게 꺾임이 있네낙양의 정자117)는비록 족히 말할 것 없지만안영의 실려118)는절로 전수받은 것이 있네창업하고 보호하여자손들로 하여금 이을 수 있게 하고집을 지음에 법을 이루었으니선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네여러 의론이 일제히 같아공사를 바야흐로 일으키네일은 크고 힘은 부족하니옛날 그대로 따르려 하고세월이 오래되어 건물이 썩으니형세가 장차 다시 새롭게 하는데 이르네이에 깎고 세워계사119)와 당실의 위치 정하고저기에 도끼질 하고 톱질하여동량과 두공의 재목 실어오네목수들은 능히 그 책임 다하고마을 사람들은 즐거이 그 일에 달려가네혼중120)의 익진121)이이괘(離卦)의 문명한 상서에 응하고그림자 측량하니 갑경122)의 방향이라사방의 풍기가 모이는 줄 알겠네그런대로 합하고 아름다우니위나라 형의 선거와 같고123)높고 화려하니장노의 미송을 생각하네124)오직 명예를 길이 마칠 것을 헤아리니장차 며칠 되지 않아 이루어지네긴 들보를 들어 올림에짧은 노래 짓네어영차125)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126)문산의 맑은 기운 성대하네강루127)가 지척이라 추로128)를 바라보니성교가 넘쳐흘러 상서로운 기운 통하네어영차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붓같이 높은 봉우리 삼태성처럼 나열하였네만 리의 무민129) 가까이 바라보이니밤마다 달빛은 가을 연못에 비치네어영차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한 쌍의 벽학이 하늘에 들리도록 우네누가 장차 철곽으로 오랑캐 방어하여우리 의복을 오랑캐 복식으로 바뀌지 않게 할까어영차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지석의 맑은 강 쉼 없이 흐르네하늘 끝에서 북두성에 기대 서울 바라보니바라건대 질병 없이 천수를 누리기를어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위에는 덕산이 있어 첩첩의 산 열렸네즐비하게 늘어선 네 척의 봉분에천추토록 향기로운 제향 쇠하지 말라어영차 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아래엔 후손들 결사를 많이 맺었네구물의 청전130) 여기에서 볼 것이니대대로 이어서 성대하게 유아한 이 많겠네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는천지는 고문의 운수 되돌리고산천은 원기의 빼어남 내려주어자식은 효도하고 신하는 충성하여가문의 기업 영원히 전하고집집마다 현송하여대대로 사림의 법도 있게 하소서 追遠而存其思。聿覩前世之創。善繼志而述其事。玆有今日之肯堂。是子孫瞻慕之方。得生徒肄業之所。惟密陽簪纓之族。守綾西菟裘之鄕。若堂若斧。永奉衣履之藏。某水某邱。世護松梓之蔭。一區阿塾。實是甄君之亭。百年邱林。此豈季氏之寢。寓霜露悽愴之思。伸朝夕瞻拜之誠。東廂西室。悅親戚之情。春禮秋書。課子弟之學。玆當經歷之久。不無傾圮之憂。垣墉見復上之隉。榱桷有大過之橈。洛陽亭館。雖不足言。晏嬰室廬。自有所受。創業垂護。使子孫可繼。作室底法。念先考攸休。僉議齊同。功役方作。事巨力綿。非不欲於因舊。歲久物敗。勢將至於改新。鑿斯築斯。定階所堂室之位。斧彼鋸彼。輸棟樑欂櫨之材。梓匠能勝其任。閭里樂赴其役。昏中軫翼。應三离文明之祥。景測甲庚。知四方風氣之聚。始有富有。同衛荊之善居。輪焉煥焉。念張老之美頌。惟永終是度。將不日而成。聊擧修樑。爲述短唱。兒郞偉抛樑東。文山淑氣鬱蔥蔥。降婁咫尺瞻鄒魯。聲敎洋洋瑞彩通。兒郞偉抛樑南。高峰如筆列台三。嫠閩萬里膽望近。夜夜月廻秋水潭。兒郞偉抛樑西。一雙碧鶴聞天啼。誰將鐵郭防洋竺。毋我衣裳易介蹄。兒郞偉抛樑北。砥石江淸流不息。倚斗望京天一方。庶無疾病壽千億。兒郞偉抱樑上。上有德山開疊嶂。累累成行四尺封。千秋不替苾芬餉。兒郞偉抛樑下。下有雲仍多結社。舊物靑氈監在玆。承承濟濟多儒雅。伏願上樑之後。天地回古文之運。山川降元氣之英。子孝臣忠。永傳門戶之基業。家絃戶誦。世有士林之典章。 당부(堂斧) 분묘(墳墓)를 말한다. 《예기》 〈단궁(檀弓)〉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건대, 봉분하는 것을 마치 마루처럼 쌓아 올린 것이 있고……도끼날처럼 위가 좁게 쌓아 올린 것도 있었으니, 나는 도끼처럼 하는 것을 따르겠다.' 하셨다.[昔者, 夫子言之曰:吾見封之若堂者矣,……見若斧者矣, 從若斧者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진군(甄君)의 정자 송(宋)나라 때 서주(徐州)의 부호였던 진씨(甄氏) 집안이 진군(甄君)의 대(代)에 이르러 빈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다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함께 장사지내고 무덤 가에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을 담은 사정(思亭)을 지었다. 이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古文眞寶後集 卷10 思亭記》 상로(霜露)……생각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낙양(洛陽)의 정자 《주자서절요》 권5 〈답진동보(答陳同甫)〉에 "거센 바람이 불어 정자가 넘어졌는데, 마치 하늘이 때맞추어 일으킨 것 같습니다. 저 낙양의 정자야 심히 부러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大風吹倒亭子, 却似天公會事發. 彼洛陽亭館, 又何足深羡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안영(晏嬰)의 실려(室廬) 안영이 나무로 만든 한 칸의 방에 거처했다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7년에 "제(齊)나라 안환자(晏桓子)가 죽으니, 그의 아들 안영이 거친 상복을 입고 나무로 지은 한 칸의 방에서 거처하였다."라고 하였다. 계사(階戺) 섬돌 양 옆에 비스듬히 놓인 돌인데 당전(堂前)의 의미로 쓰인다. 혼중(昏中) 혼지중성(昏之中星)의 준말로, 28수(宿) 중 초저녁 하늘 중앙의 남방(南方)에 보이는 별을 말하는데, 이 별을 관찰하여 사시(四時)를 확정할 수 있다. 익진(翼軫) 이십팔수 가운데 익수(翼宿)와 진수(軫宿)로, 남방의 별이다. 갑경(甲庚) 길흉이라는 뜻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길하다는 의미이다.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의 선후갑경(先後甲庚)에서 "갑의 앞과 경의 뒤는 길하고 경의 앞과 갑의 뒤는 나쁘다는 것이다. 이 갑과 경의 앞뒤라는 것은 음양학설상 삼합(三合)의 설과 일치된다."라고 하였다. 그런대로……같고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에 거처하기를 잘하였다. 처음 소유하게 되자, '그런대로 모여졌다.'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그런대로 충분히 갖추었다.'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그런대로 충분히 아름답다.' 하였다.[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論語 子路》 높고……생각하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진(晉)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완성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美哉輪焉, 美哉奐焉!]'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윤(輪)은 높고 큼을 말한 것이고, 환(奐)은 많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영차 원문의 '아랑위(兒郞偉)'는 '어영차'의 의성어로, 상량을 어영차 올린다는 뜻이다. 또는 젊은 사람을 뜻하는 아랑(兒郞)의 복수형으로, 상량문에서 도목수(都木手)가 장인(匠人)들을 부를 때 상투적으로 쓰는 표현이라는 설이 있다.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옛날에 집을 지을 때 길일을 택하여 상량식을 하는데, 이때 친지들이 떡이나 기타 잡물(雜物)을 싸 가지고 와서 축하하면서 이것을 장인(匠人)들에게 먹인다. 그러면 장인의 우두머리가 떡을 대들보의 상하 사방으로 던지면서 상량문을 읽고 축원을 한다. 《文體明辯附錄 卷13 上梁文》 강루(降婁)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규성(奎星)과 누성(婁星) 두 별이 위치한 자리를 말한다. 춘분(春分) 무렵 초저녁에 나타난다. 추로(鄒魯) 추(鄒)와 노(魯)는 모두 춘추 시대의 국명(國名)으로,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맹자는 추나라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예교(禮敎)와 학문을 숭상하는 지방을 일컫게 되었다. 무민(婺閩) 무원(婺源)과 민중(閩中)의 병칭으로, 무원은 주자의 선대 고향이고 민중은 주자의 출생지인데, 곧 주자를 가리킨다. 저본의 '嫠'는 '婺'의 오자로 보고 수정하였다. 청전(靑氈) 푸른 모포라는 뜻으로, 선대로부터 전해진 귀한 유물이나 가문의 전통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 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王羲之列傳 王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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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田士狷 丁卯 음당(陰黨)이 선사의 원고를 고친 죄를 문식(文飾)하여 말하기를 "선사의 오묘한 도와 정밀한 의리는 문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만약 우리 몇 사람이 선사께서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전수한 것으로 개수하고 보완하지 않으면 원고를 완성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오호라! 선사의 80년 동안 진리를 쌓은 공부를 문사가 당신의 뜻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여겨서 반드시 저들의 개수와 보완을 기다린 후에 완성된다는 것입니까? 더욱 지극히 통절합니다. 陰黨文飾其改稿之罪曰, 先師之妙道精義, 有非以文字蓋者, 若非吾輩幾人以口傳心授者, 改補之, 稿不得完云.鳴呼.曾謂先師八十年眞積之工, 辭不足達其意, 必待渠輩改補而後得完乎.尢極痛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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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田士狷 丁卯 올해도 남은 날이 많지 않습니다. 하늘의 세월은 날마다 줄어들고, 세상의 어두움은 날로 심해지며, 머리털의 상설(霜雪)은 날로 더해지고, 눈앞의 죽음은 날로 핍박해 옵니다. 매번 송구봉(宋龜峰)의 '흉중의 계책은 끝내 무용하니 천하에 남아가 다신 살지 못하리라'는 시구를 낭송하면 비장하고 격렬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그대의 회포도 똑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새해에 만남은 정히 어느 곳일는지요. 바람을 맞으며 서글플 뿐입니다. 此歲又無多月矣.天之歲月日減一日, 世之黑暗日甚一日, 鬂邊霜雪日添一日, 眼前溝壑日迫一日.每誦宋龜峰胷中大計終無用.天下男兒不復生之句.未嘗不悲壯激烈.想高懷之亦一樣也.新歲常着, 定在何地.臨風冲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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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범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房玉範 丁卯 옛 사람들은 방소(方所)없이 널리 배워 일정한 스승이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섬기며, 돌아가시면 심상(心喪) 3년을 입는다.67)'라는 말을 보면 군부(君父)와 똑같이 존숭했으니 타인을 재차 스승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후세 사람들은 유현(儒賢)들에게 두루 배사(拜師)할 때마다 사제 관계를 정하는데,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가 죽은 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에게서 학업을 마쳤는데도 스승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니 이는 본받을 만합니다. 더구나 선사의 가르침에, 앞서 이미 한 스승을 함께 섬겼으면 지금 더 이상 사제 관계를 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그 도리가 더욱 정밀합니다. 古人雖博學無方而無常師, 若其服勤至死, 心喪三年, 與君父同尊之, 師宜不再稱於人也. 後世之歷拜儒賢, 輒定師生者, 未知其得當也. 近齋沒後, 梅山卒業于老洲而不稱師弟, 此可法也. 而況先師之訓, 乃謂前旣同事一師則不宜今復爲師生也, 其義尤精矣. 죽을……입는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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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명 【송기창을 격려함. 을축년(1925)】 弘和銘 【勖宋基滄 乙丑】 툭터진 하늘 땅의 너른 도량 키우고 恢恢然宏天地之弘量,훈훈한 봄 바람의 따뜻한 기운 지닐지니, 熙熙然存春風之和氣.온화한 기운은 복 쌓을 기반이고 氣和者積福之基,넓은 도량은 덕을 기를 그릇이네. 量弘者蓄德之器,덕 기르고 복 쌓음은 군자의 아름다움이니, 維德維福, 維君子休.그대 부디 힘써 넓고 따뜻함을 이루시라. 懋矣哉, 弘和之致也. 恢恢然宏天地之弘量, 熙熙然存春風之和氣。 氣和者積福之基, 量弘者蓄德之器, 維德維福, 維君子休。 懋矣哉, 弘和之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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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선생께 올림 上蘆沙先生 세전(歲前)에 천곡(泉谷) 편에 다시 편지 1통을 올렸는데 자취가 몹시 구차하고 소홀하였기에 황공한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인편이 돌아올 적에 나무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답서까지 보내 주시고, 또 누누이 가르쳐 준 말씀은 매우 간절하였습니다. 절하고 받고서 엄숙하게 읽고는 진정으로 감읍하였습니다. 대저 스승과 제자 사이는 실로 은혜와 의리가 두루 극진한 관계입니다. 여기에서 그 정을 다하지 않음이 있다면 비록 대중을 널리 사랑하고 두루 베푸는 행위가 있더라도 패덕(悖德)7)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형편없는 소자는 어버이 봉양을 부지런히 하는 일과 전수받고 강학하는 방도에 있어서 일찍이 조금이라도 남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았으니 소자가 지극한 은혜를 저버린 것이 큽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손을 저어 물리치지 않고 자식처럼 아우처럼 아껴주고 가르쳐 주시니 실로 천지와 같은 도량은 포용하지 않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송구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보낸 이후에 아무런 소식이 없는 가운데 해가 또 바뀌었습니다. 삼가 선생님께서 한가하고 편안히 쉬는 도체(道體)는 새해를 맞아 더욱 건강하십니까? 소자는 연로한 부모님을 봉양하며 한 해를 무사히 보냈으니, 사사로운 분수에 있어서 매우 다행입니다. 소자의 나이는 또 고인이 덕을 세운 나이가 되었지만 성취한 것을 따져보면 도리어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둔8) 아래 수준에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니, 어찌 백배로 공부하여 고인이 진취(進就)한 경지에 이르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어느새 개연히 망연자실합니다. 대저 소자의 오늘날 공부는 중단되기는 쉽고 계속하기는 어려우며, 개인적인 근심은 많고 실심(實心)은 부족합니다. 만약 이 한 관문을 통과한다면 발전할 가망이 있을 듯하지만 주저하고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끝내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지난겨울부터 차츰 독서와 궁리의 공부를 줄이고 매양 더욱 함양하여 근본을 세우는 계책으로 삼고 있는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답장을 덧붙임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요사이 특별한 활계(活計)를 하고 있음을 들었네. 본래 가장 좋은 법문(法門)은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助長)하지도 말라.[勿忘勿助]"라는 것과 "솔개는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뛰어오른다.[鳶飛魚躍]"라는 것이니, 여기에 재미를 붙여 힘쓰고 힘쓰는 것이 정히 좋네. 한 장의 종이에 어리석은 말을 대략 적어서 인편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부쳐 보내네.[문] '정주(定主)' 2자는 사람의 안배를 기다리는 듯하다.[답] 일찍이 생각건대, 《도설(圖說)》의 이 뜻은 《중용》에 이미 있으니, "진실로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응결(凝結)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네. 정하고 주로 하는 것은 바로 덕을 닦고 도를 응결시키는 일이네. 만약 도리가 천연적으로 있는 것이라 하여 마침내 인력이 개입되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재성(財成)과 보상(輔相)9)은 모두 헛말일 것이네.[문] "형이상하(形而上下)"의 "상하(上下)"는 전후(前後)의 뜻으로 간주한다.[답] '상하(上下)' 2자는 《논어(論語)》에 이미 있으니, "아래로 배워서 위로 통달한다."라고 하였네. 대개 도는 기(器) 가운데 있으니, 그 경계는 본래 말하기 어려우므로 성인이 '상하'라는 글자를 빌려서 형용하였지만 그 실상은 참으로 상하가 있는 것이 아니네. 상하도 오히려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한번 전환하여 전후로 여긴다면 도와 기가 이미 분리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학상달(下學上達)도 뒤에서 배워 앞으로 통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형이상하를 가지고 말하면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라고 한 주자의 이 한 조목은 과연 전후를 가지고 상하로 간주한 듯하지만, 정자와 주자의 평소 의론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은 듯하네. 머물러 두고 생각해야지 갑자기 한 가지 설만 고집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문] 마음은 크고 넓게 가지며 엄숙하게 가지는 것은 둘 다 보존하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기상(氣像)에서 체인(體認)하여 얻어야 한다.[답] 이곳은 다만 손진인(孫眞人 손사막(孫思邈))의 "담력(膽力)은 크고자 하고 마음은 작고자 해야 한다.[膽欲大心欲小]"라는 한 구절을 가지고 보면 절로 참되고 정확해지네. 기상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파악하지 못한 듯하네.[문] 칠정(七情) 외에는 정이 없다.[답] 마음이 발한 것 중에 기력(氣力)이 있어 계교(計較)할 수 없는 것이 대략 이 일곱 가지가 있네. 가령 한만(閒漫)하게 발동한다면 어찌 일찍이 일곱 가지에 그치겠는가. 또 칠정도 그 실제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두 가지 정이네.[문] 「기선악도(幾善惡圖)」[답] 조치도(趙致道)의 도(圖)를 말하는가? 사람의 평상적인 정으로 말하면 기(幾)가 처음 동했을 적에는 혹 쉽게 선악으로 이름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조씨의 뜻에 혹시 이런 점이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통서(通書)》의 본지가 아니네. 다만 하나의 '기(幾)' 자에 이르러 잠시도 멈추지 말고 선과 악을 나누어 쪼갤 뿐이네.[문] 마음을 수렴하고 관섭(管攝)한다.……[답] 생리가 두루 흐르고 지각이 날로 열린다는 설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듯하니 매우 좋네. 다만 인(仁)이 사덕(四德)의 으뜸이 되는 것은 어찌 반드시 이로 인해 이름한 것이겠는가. 歲前泉谷便。轉上一書。跡渉苟簡。繼而惶恐。及其便回。不惟不罪。而加以下賜復書。又其教語。縷縷懇惻。拜受莊讀。衷情感泣。夫師弟之間。固恩義兼盡之地也。於此有不盡其情。則雖有其泛愛博施之行。亦不免於悖德之歸況小子無狀。其於服勤就養之節。傳習講受之道。不曾有一毫髣髴於人者。則小子之所以辜負至恩者。重矣。然而先生不之揮斥。愛之敎之。如子如弟。固知天地之量。無物不包。而其感陳愧恧。實不知所以爲心也。信後寥然。歲又改次。伏未審先生燕申道體。迓新增康。小子奉老親。無事經歲。私分萬幸。犬馬之齒。且當古人立德之年。而究厥所造。反在十五志學之下。悠悠歳月。其安能百倍其功。以追古人進就之階級㢤。思之不覺慨然自失。大抵小子今日之功。易間斷而難接續。多私慮而少實心。若得過此一關。似有向進之望而進退上下之間。竟未過此闗去。奈何奈何。自去冬來。稍減讀書窮索之功。而毎加涵餋以爲立本之計。未知得否。更乞下敎伏望。答附畧曰聞比來做別様活計。自是太上法門。勿忘勿助。鳶飛魚躍。正好此處得滋味。勉之勉之。一紙瞽説起草。俟便已久。故茲付去。定主兩字。渉於竢人排定。竊嘗謂圖說此意。中庸已有之曰。苟不至德。至道不凝焉。定之主之。卽修德凝道之事。若以道理之天然自有。而遂欲不犯人力。則財成輔相。皆虛語矣。形而上下之上下。作前後意看。上下二字。論語已有之曰。下學而上達。盖道在器中。其界至。本自難言。故聖人借上下字。形容之。其實非眞有上下也。上下猶非眞有。況一轉而爲前後。則道器不旣離矣乎。下學上達亦可看作後學而前達乎。以形而上下言。豈無先後。朱子此一條。果似以前後看上下。程朱平日之論。恐不如此。留作商量。勿遽執一說如何。弘廣矝莊。難於併行。須於氣象上體認。此處。但以孫眞人膽欲大心欲小一句看之。便自眞的。氣象之云。恐沒把捉七情外無情心之所發。有氣力無計較者。大約有此七者。若閒漫發動。何嘗止於七耶。又七情。其實好惡兩情。幾善惡圖趙致道圖耶。以人之常情言之。幾之始動。或有未易以善惡名者。趙氏之意。或有此耶。然而此非通書本旨。但當於幾一字內。不留頃刻劈破善惡耳。收斂管攝云云生理周流知覺日開之說。似是自身経歴中出。甚善。但仁爲四德之長。豈必因此而名耶。 패덕(悖德) 《효경(孝經)》 성치장(聖治章)에 "그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을 패덕이라 한다.[不愛其親而愛他人謂之悖德]" 하였으니, 덕의(德義)에 어그러진 것을 패덕이라 한다. 열다섯……둔 《논어》〈위정〉에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스스로 섰고,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라고 하였다. 재성(財成)과 보상(輔相) 가득 차서 넘치는 것을 억제하고 모자라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충한다는 것으로, 《주역》〈태괘 상(泰卦象)〉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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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선생에게 올림 上蘆沙先生 절하고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봄이 깊어 가는 가운데 삼가 한가하고 편안히 쉬는 것이 모두 고르며 음식을 드시는 것은 줄어들지 않으시며 일어나고 주무시는 것은 평소와 같으며, 장구(杖屨)는 더욱 한가로우며, 수응(酬應)하는 데 수고롭지 않으십니까. 멀리서 삼가 사모하는 소자의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소자는 늙은 부모님을 봉양하고 책을 보며 날마다 그럭저럭 지낼 따름입니다. 지난번에 사상(沙上)에서 대치(大峙)에 도착하여 김석귀(金錫龜)10)를 조문하고 인하여 강론하고 토론하여 발명한 것이 많았습니다. 대저 이 사람 같은 지조와 식견은 소자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자리에서 공부하기를 청하여 물러나 그와 더불어 조용히 강론하였으니, 소자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말세에 다시 소자에게 이런 즐거움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 세상에서 스승으로 자임하는 자는 가르치고 전수할 때 대체로 옛글을 기억하고 들은 것을 가지고 강설하여 자질구레하게 안배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깊은 조예로 자득하여 대체(大體)를 두루 보아 말씀마다 본원(本源)에서 촘촘하게 내신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천만 칸의 큰 집에 많은 금은보화와 돈, 곡식을 갈무리해 두었다가 사람마다 필요한 대로 사용하더라도 고갈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소자가 진심으로 감복하여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대저 '인순(因循)' 2자는 학문하는 데 가장 병통이 됩니다. 혹은 진보하고 혹은 퇴보하며 자주 회복하고 자주 잃어서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하여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며 살필 줄 모르니, 일생을 망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소생은 이러한 병통에 얽매여 시간을 허비한 것이 이미 적지 않습니다. 소생의 나이는 지금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젊다고도 할 수 없으니, 일생의 득실이 다만 오늘날에 달려 있을 따름이니 어찌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지극한 가르침을 내려서 평소에 돌아보며 잘못을 바로잡는 자료로 삼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시기를 매우 간절히 바랍니다.지난번에 김석귀(金錫龜)와 태극(太極)을 논하면서 서로 막힌 곳이 있었는데, 김석귀가 인하여 선생님께서 전일 답한 말을 내어서 보여 준 것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습니다. "태극의 설은 대저 '위허이실(位虛理實)' 4자로 다 설명할 수 있네. 「태극도(太極圖)」 상면의 한 권자(圈子)에서부터 만물화생(萬物化生) 권자11)에 이르기까지 어찌 일찍이 확정된 계층과 등급이 실제로 있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위허(位虛)라는 것이다. 다섯 층의 권자가 모두 한결같이 순백하고 담담한 것이요, 원(員)은 족하여 흠결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이실(理實)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대개 통체각구(統體各具)' 4자는 본래 허위 쪽으로부터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이 「태극도」가 출현함으로부터 한두 선생이 발명한 뒤에 과연 이러한 의론이 있었습니까? 소자가 읽고 비록 만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서로 막혔던 곳이 풀린 것이 있었습니다. 또 김석귀와 신종구(申鍾求)가 강론한 말을 보니, 신종구는 태극의 제1권(圈)을 통체(統體)로서의 태극이라 하고 이하 네 권(圈)을 각구(各具)로서의 태극이라 했으며, 김석귀는 "목(木)은 만목(萬木)의 기(氣)이고 화(火)는 만화(萬火)의 기인데 오묘하게 합한 권(圈)은 또 천명(天命)의 성(性)이니, 이는 모두 통체이고 각구(各具)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미 김석귀의 설을 따르셨습니다. 소자가 처음에는 또한 옳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 이른바 통체(綂體)와 각구(各具)는 본래 허위(虛位)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김석귀의 말이 또한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태극의 다섯 권(圈)을 합하여 말하면 통체로서의 태극이요, 나누어 말하면 동하여 양을 낳는 것도 하나의 태극이니, 어찌 「태극도」의 다섯 권이 각구의 태극이 없다가 만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뒤에야 각구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통체와 각구가 각기 방소(方所)가 있으니 허위의 뜻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김석귀의 설을 따른 것은 신종구의 설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입니까?"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게 함을 도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음양의 권(圈)이고, "계속하여 하는 것은 선(善)이다."라고 한 것은 오행의 권이고, "갖추어 있는 것은 성(性)이다."라고 한 것은 만물의 권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 남녀의 권은 마땅히 어디에 속해야 합니까? 사람의 혈기(血氣)가 형체를 이룬 것은 곧 음양의 권이요, 사람의 오성이 감동하는 것은 바로 오행의 권이며, 사람이 만사에 두루 응하는 것은 바로 만물의 권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 남녀의 권은 또 마땅히 어디에 속해야 합니까? 선유(先儒)는 모두 하늘이 일월과 함께 모두 왼쪽으로 돈다고 하였으니, 왼쪽으로 도는 것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것을 이릅니다. 그러나 일월이 하늘에 닿지 못하고 1도(度)씩 물러나고 13도씩 물러나는 것12)을 가지고 관찰하면 일월이 왼쪽으로 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이르러서는 분명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왼쪽으로 도는 때가 있겠습니까.선생님께서 일찍이 소자에게 말씀하기를 "기가 만약 잠깐 동안 맑으면 잠깐 동안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없고, 하루 동안 맑으면 하루 동안 기질지성이 없게 된다. 안자(顔子)는 석 달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았으니13) 석 달 동안 기질지성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씀하기를 "예로부터 성현은 병이(秉彝)의 본성을 부여받은 것만 말하고, 항성(恒性)만 말했을 따름이다. 후세에 도학(道學)이 밝지 못하여 성(性)이 악하다고 하는 자도 있고, 선악이 섞여 있다고 말하는 자도 있어 성선(性善)의 도가 천하에 밝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부득이 기질성(氣質性) 세 글자를 제기하여 사람의 불선은 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지 성에서 말미암지 않은 까닭을 밝혔다. 후인은 선유의 어쩔 수 없는 고심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주기(主氣)의 의론을 만들어 논하였으므로 곧 이단과 같은 데로 귀결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이(理)를 주장하는 학자의 큰 폐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자가 이 말씀을 삼가 지키고 또 스스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기질지성(氣質之性)은 불선한 곳을 가리킨다. 하지만 미발시(未發時)에 어찌 일찍이 불선의 단서가 있겠는가. 불선하다는 말을 붙이자마자 곧 미발의 때가 아니고, 기질지성을 말하자마자 또한 미발의 때가 아니다.'라고 여겼습니다. 지난번 선생님께서 정시림(鄭時林)에게 답한 별지를 보니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이 말하기를 '기질지성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함께 생겨난 것이지 때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소자가 이전에 들었던 것과 다른 듯한데 선생님께서 또 따라서 허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답장을 덧붙임평안하다는 글자는 매우 위로가 되네. 수서(袖書)를 가지고 온 자는 또 그대의 사촌이었는데 잠깐 보았지만 신수가 범상하지 않아 덕문(德門)의 복록을 알 수 있었으니, 더욱 축하할 일이네. 병든 나는 겨울 동안 방 안에서만 지내며 봄이 돌아와 문을 열고 산색을 볼 수 있다면 나의 일이 끝날 것이라고 고대하였는데, 지금 문이 이미 열렸지만 정신이 더욱 혼미하니, 기대와는 다른 쪽으로 흐르기에 웃음만 나네. 별지에 대해서 절목마다 답하고 싶었지만 안개꽃이 눈에 어른거려 침침하니 자세히 볼 수도 없는데, 더구나 답장을 쓰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말미에 한두 가지만 답할 따름이니, 직접 찾아와 주기를 바라네. 형질(形質)과 기질(氣質)에 대한 설은 그대가 떠나던 날 답답함이 남아 있어 대략 기록하여 인편을 기다리다가 지금 온 인편에 별지를 함께 부치네. 나머지는 뒤에 만날 때를 기다리네.신생(申生)의 통체(統體)와 각구(各具)의 설을 지금 살펴보니 불가함이 없을 듯한데 당시 무엇 때문에 김생(金生)의 의견을 따랐는지 모르겠네. 내가 사욕에 가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태극도(太極圖)는 조화로부터 곧장 말하였으므로 기화(氣化)와 형화(形化)의 차례가 있는 것이네. 인사(人事)에서 굳이 남녀의 권(圈)을 찾는 것은 너무 구애되는 것이 아니겠는가.왼쪽으로 돈다는 의심은 그릇되었네. 도는 것은 가서 다시 돌아오는 뜻이네. 하늘이 가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실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것이네. 기질이 때에 따라 있거나 없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래 내가 십분 동의한 것이 아니네. 일찍이 그대의 족인과 말한 적이 있었지만 무어라 말했는지 말의 맥락을 기억하지 못하겠네. 미발은 십분 징청(澄淸)할 때이니 기질을 한쪽에 숨어 있을 수 없네. 拜歸閱朔。春候向深。伏惟燕申偕適。飮饍無減興寢視常。杖屨益閒。酬應不勞。遠外伏慕。不任下誠。小子奉老看書。日以粗遣而已。向自沙上到大峙。吊金錫龜。因以講討。多所發明。大抵斯人之持守也見識也。小子之所罕見也。請業於三席而退。與之從容講討。小子之爲幸大矣。誰知叔世復有此樂屬於小子乎。嗚呼世之以師道自任者。其於敎授之際。多以記聞講說。淺淺排着。而惟先生深造自得。統見大體言言無非自本源上滴滴出來比如大厦千萬間。貯藏許多金帛錢榖。隨人所求。而用之不竭。此小子所以衷情感悅而不能自己者也。夫因循二字。最爲學問之病。或進或退。頻復頻失。今日如此。又明日如此。悠悠歳月不知所以察之。則其不至於枉了一生。小生只坐此病。浪費時日。已不少矣。犬馬之年。今不可謂晩。而亦不可爲早。則一生得失。只存今日矣。豈非可懼之甚者耶。伏乞下賜至誨。以爲平居顧諟之資。千萬向與錫龜論太極。有相礙處。錫龜因出先生前日所答語而示之。有曰。太極說話。大抵位虛理實四字。足以盡之。圖中上面一圈。至萬物化生圈。曷嘗有層等確定。此所謂位虛也。五層圈子。皆一味白淡淡底。圓足無欠缺底。此所謂理實也。又曰。蓋綂體各具四字。本自虛位邊說來者也。鳴呼。自此圖出。而一二先生發明之後。果有此等言論乎。小子讀之。雖不能領會其萬一。而相礙處。有將釋然者矣。且見錫龜與印鍾求有講論之語。鍾求以太極第一圈。爲綂體之太極。以下四圈。爲各具之太極。錫龜。以爲木是萬木之氣。火是萬火之氣。而妙合之圈。又是天命之性。則此皆綂體而非各具也云云。先生已從錫龜之說矣。小子初亦然之。後來思之。以先生所謂綂體各具本自虛位邊說來之義。推之。錫龜之說。亦似未安。合太極五圈而言之。則綂體之太極也。分以言之。則動而生陽。只是一太極。豈可謂太極五圈。無各具之太極。而至於萬物林林叢叢然後有各具者耶。然則綂體各具。各有方所。而非虛位之義也。先生從錫龜之說者。以其猶勝於鍾求之說耶。一陰一陽之謂道。卽陰陽圈也。繼之者善。卽五行圈也。成之者性。卽萬物圈也。然則其間男女之圈。當屬於何耶。人之血氣成形。卽陰陽圈也。人之五性感動。卽五行圈也。人之泛應萬事。卽萬物圈也。然則其間男女之圈。又當屬於何耶。先儒皆謂天與日月。皆左旋。左旋自西而東之謂也。然以日月之不及天而退一度退十三度者。觀之。則日月可謂左旋矣。至於天則分明是自東而西也。曷嘗有左旋之時耶。先生嘗敎小子曰。氣若霎時澄淸。則霎時無氣質之性。一日澄淸。則一日無氣質之性。顔子三月不違。則三月無氣質之性。又曰。從古聖賢。只說降衷。只說秉彛。只說恒性而已。後世道學不明。或有以性惡者。或有以善惡混者。而性善之道。不明於天下。故先儒不得已。而提起氣質性三字。以明人之不善。由於氣而不由於性之故也。後之人不知先儒不得已之苦心。反爲主氣論之。便同異端之歸。此今世論理家大獘也。小子謹守此說。而又自料于心曰。氣質之性。指不善處也。而未發之時。有何曾不善之端乎。纔着不善字。便非未發也。纔說氣質性。亦非未發也云矣。向見先生答時林別紙語曰。遂庵曰。氣質之性。與生俱生。非可以隨時有無云。此說與小子前所聞者。以有異。而先生又從而與之。何耶。答附平安字慰慰。袖書者。又是賢從。乍見五嶽非凡。德門福祿可知。尤以爲賀。病人冬日牢蟄。苦竢春還。開門得見山色。吾事已畢。今則戶已開矣。精神轉益陸沈。所希望。歸於錯料。可笑。別紙非不欲逐節奉答。而昏花翳眼。見亦不能仔細。況能作答語乎。其尾答一二而已。親至爲望。形氣二質說。公去之日。有餘鬱。草成俟便。今倂付所來別紙。留以竢後面。申生統體各具之說。以今觀之。似無不可。而當時緣何從金生。無乃吾茅塞而然耶。圖從造化直說。故有氣化形化之次第。人事上必尋男女之圈。不已拘乎。左旋之疑。誤矣。旋是去而復還之意。天之去而復還也。固自西而東矣。氣質之不隨時有無。本非吾之十分嚮服。曾所與令族人言者。不記其語脈云何。未發是十分澄淸時。不可以氣質藏在一邊。 김석귀(金錫龜) 1835-1885.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이다. 《맹자》에 통달하여 '김맹자'로 불렸다. 태극도(太極圖)……권자 「태극도(太極圖)」는 총 5층의 권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위가 제1층으로 태극 권역이며, 그 아래 2층이 음양 권역, 그 아래 3층이 오행 권역, 그 아래 4층이 남녀 권역, 그 아래 5층이 만물 권역이다. 권역이란 둥근 원을 말한다. 일월이……것 해와 달의 운행에 있어서 해는 천구(天球)를 따라 운행하여 날마다 1도씩 물러나고, 달은 날마다 13도씩 물러난다.《默山集 朞三百註解》 안자(顔子)는……않았으니 《논어》〈옹야(雍也)〉에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을 떠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를 뿐이다.'라고 하였다.[子曰: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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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선생께 올림 上蘆沙先生 지난번에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서 삼가 기후가 편치 못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삼가 너무나 놀랍고 염려되었습니다. 근래 청명하고 화창한 때 한가하고 편안히 쉬며 안정된 가운데 점차 편안히 일상을 회복하셨습니까. 소생은 깊은 산속에서 칩거하며 가난한 생활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새해를 맞이하였지만 나아가 문후를 여쭈지 못하고 편지는 심부름꾼이 없어서 인편이 있는 대로 전달하느라 이처럼 구차하고 소홀하니 매양 너무나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가문을 위한 계책을 가르쳐 주셨으니 소생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될 뿐만이 아니라, 참으로 뭇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며 바꿀 수 없는 지극한 의론입니다. 소생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지만 감히 여기에 종사하여 평생 몸에 절실한 계책으로 삼겠지 않겠습니까.성리서(性理書)는 근래 겨우 다 읽었지만 조금도 효과를 보지 못하였기에 읽지 않았을 때와 다른 점이 없었으니,17) 참으로 고인의 책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다시 한 책을 많이 읽어 주된 근본을 확고히 세울 계책으로 삼고자 하는데, 「시경」, 「서경」, 「예기」 가운데 어느 것을 위주로 해야 합니까? 김석귀(金錫龜) 어느 곳으로 이사했습니까? 동문 가운데 믿을 곳은 이 사람뿐인데 그는 너무나 가난하여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끝내 완전하게 성취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시림(鄭時林)은 이 사람과 흡사하니 또한 염려할 만한 일입니다. 여기에 김생 우종(金生佑鍾)이 있는데, 소생이 향리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며 교유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자품이 순실(純實)하고 화락하여 종친들은 효성스럽다고 하며 향당에서는 우애가 있다고 하니, 선비 가운데 만나기 쉬운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가난한 것이 김석귀, 정시림과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름에 상을 당해 여러 해 동안 파묻혀 지내다가 지금에서야 문하에 나아왔습니다. 대저 세간에 이러한 사람은 곤궁함이 매양 이와 같으니, 이 또한 일종의 기수(氣數)의 변고입니까? 정재규(鄭載圭)는 근래 왕래합니까? 다시 바라건대 도를 위해 더욱 건강하십시오.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하(夏)나라는 고대(古代)와 가까워 충성(忠誠)한 사람이 많았으므로 충(忠)을 숭상하였으나 충폐(忠弊)가 생겼기 때문에 질(質)로 구제하였고, 질폐(質弊)가 생겼으므로 문(文)으로 구제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文)과 질(質)은 서로 반대가 되니 질에 폐단이 생기면 마땅히 문으로 구제해야겠지만 충과 질은 서로 비슷하니 충에 폐단이 생긴 것은 또 어떻게 질로 구제하겠습니까.문중자(文中子 왕통(王通))가 말하기를 "동(動)한 것은 둥글고, 정(靜)한 것은 모나다."라고 한 것에 대해 정자가 말하기를 "이는 바로 거꾸로 된 말이다. 정의 체(體)는 둥글고, 동의 체는 모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문중자의 말이 불가하지 않은 듯한데 정자가 거꾸로 된 말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지난번에 다른 사람과 태묘(太廟)의 제도를 논하다가 인하여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제왕가(帝王家)는 진실로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 서로 계승하는 경우가 있고, 형제간에 서로 계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사이의 대수가 혹 친진(親盡)18)하지 않았지만 이미 4대가 넘은 경우가 있고, 혹 이미 친진하였지만 아직 4대가 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한결같이 통위(統位)의 순서를 위주로 하는 것입니까? 태자(太子)의 아들인 환왕(桓王) 임(林)과 그 조부 평왕(平王)은 함께 한 소(昭)가 되는 것입니까.19) 평왕이 소(昭)가 되면 환왕이 목(穆)이 됩니까? 차자 외병(外丙)은 그 동생 중임(仲壬)과 함께 한 목이 됩니까. 외병이 목이 되면 중임은 소가 됩니까?20)사람이 외지에서 사망하였다면 그 집에서는 실로 마땅히 부음을 들은 날에 대상(大祥)과 소상(小祥)을 치러야 합니다. 만약 그 아버지가 집에서 사망하였는데 그 아들이 외지에서 부음을 들었다면, 한 사람이 부음을 늦게 들었다는 이유로 대상과 소상을 물려서 행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을 벗는 것은 부음을 들은 달로 계산합니까?답장을 덧붙임두 통의 편지는 모두 뜻밖에 받았으니 계속 위로가 되네. 구차하고 소홀하다고 스스로 탓하는 것은 지나치네. 우리들이 서로 저버리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으니, 어찌 마땅히 달려와 문안하는 것을 공경으로 삼겠는가. 정월 이후에 감기가 들었는데 이제야 떨쳐 버렸지만 팔다리가 저리고 정신이 흐려지는 것이 날로 더 심해진다는 것 외에는 말할 만한 것이 없네. 김생(金生 김우종)은 자질은 훌륭하지만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애석하네. 이 한 사람을 가지고 보더라도 세간에 훌륭한 자질을 헛되이 저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계방(季方)은 이미 이 사람과 서로 친하니 힘이 닿는 대로 충간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네.충ㆍ질ㆍ문의 폐단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가 이미 이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정자(程子)가 계승하여 사용한 것이네. 그러나 헤아려 볼 점이 있으니 그 실상은 점점 여는 것이지 폐단을 구한 것이 아니네. 대저 계방(季方)이 말한 것은 충ㆍ질ㆍ문 3자의 본래 뜻에 대해서 자세함이 부족한 듯하네. 동(動)은 각각 성명(性命)을 바로잡는 것이니 방(方)과 비슷하고, 정(靜)은 혼연히 한 이치이니 원(圓)과 비슷하네. 정자의 설은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태묘(太廟)의 위차(位次)는 예부터 여러 사람이 논하였는데, 참으로 난처한 곳이 있어 갑자기 확정할 수 없고, 또 말하자면 그 설이 매우 장황하네.대상(大祥)과 소상(小祥)은 본래 그달 내로 날을 잡아 행하지만 기일(忌日)을 정하는 것은 후세에 간편함을 따랐네. 부음을 들은 것은 조금 선후가 있으니, 날을 잡는 법도 변통할 수 있네. 혹 연월이 차이 나면 대상과 소상은 탈복(脫服)을 기다려서는 안 될 듯하네.시와 서, 예를 지키는 것은 공자가 평소에 말한 것이니, 공자는 어째서 세 가지 가운데에서 하나를 골라 평소 말하지 않았겠는가. 계방의 이 질문은 온당한지 모르겠네. 向拜下復。謹伏審氣候有不安節。伏切驚慮。比日淸和。燕申休養。漸復安常。小生跧蟄窮峽。貧病因循。當此新年。而進不能供候。書不能專人。隨便轉達。苟簡如此。每切罪悚。向敎門戶之計。非但爲小生對症之藥。誠是衆人通法。不易之至論也。生雖不敏。敢不請事於斯。以爲平生切身家計也。性理書近纔卒篇。而無一毫見效與不讀時相別處。眞是枉讀了古人書也。更欲多讀一書以爲立定主本之計。則於詩書禮三者。以何爲主耶。金錫龜搬移於何地。同門所恃。乃有此人。而其窮甚。至於無以爲計。未知終當玉成否。鄭時林洽似此人。亦可悶。此去金生佑鍾。生之在鄕里間最所從遊者也。其資稟純實樂易。宗族稱孝焉。鄕黨稱弟焉。在翰墨間不易得之人也。但其窮與錫龜時林無異焉。且以憂患喪戚。積年汨沒。今纔進去門下矣。大抵世間此等人。其窮每每如是。此亦一種氣數之變耶。鄭載圭近有來往耶。更乞爲道增康。程子曰夏近古。人多忠誠。故爲忠忠。獘故。捄之以質。質獘。故捄之以文。文與質。自是相反。則獘於質者。固當捄之以文也。若忠與質。自是相近。則獘於忠者。又何捄之以質耶。文中子曰。動者圓。靜者方。程子曰。此正倒說。靜體圓。動體方。以今思之。文中之說。似無不可。而程子謂之倒說何如。向與人論太廟之制。而因有所疑。帝王家固有祖孫相承處有兄弟相承處則其間代數或有親未盡而已過四代者。或有親已盡而未滿四代者。則當一以統位之序爲主耶。太子之子桓王林與其祖平王。同爲一昭耶。平王爲昭則桓王爲穆耶。次子外丙與其弟仲壬。同爲一穆耶。外丙爲穆則仲壬爲昭耶。人有在外而亡。則其家固當以聞訃日。爲大小祥。若其父在家亡。而其子在外聞訃。則不可以一人聞計之在後。而退行其大小祥。但除服則計其聞訃月耶。答附再書皆出於意不到。續續披慰。苟簡自咎。過矣。吾輩不相負。別有所在。豈當以趨走問安爲敬耶。正歲後感冒。今始離却。痿痺昏忘。日甚一日。外無可言。金生可謂質美而未學者。可惜。以此一人觀之。世間虛負好姿質者。何限。季方旣與此人相熟。隨力納忠爲佳。忠質文之救獘。董子己有此設。而程子承用。然有可商量者。其實漸開而非救獘也。大抵季方所言。似於忠質文三字本旨。欠消詳。動則各正性命。有似於方。靜則渾然一理。有似於圓。程子之說指。是而言耶。太廟位次。自古論者不一。誠有難處。未可卒乍指定。又言之則其說甚長。大小祥。本是此月內卜日行之。用忌日者。後世之從簡便也。聞訃小有先後。則卜日之法。可以通之。其或差以年月。則大小祥。似不當延待脫服也。詩書執禮。子所雅言。孔子何不於三者中揀其一而雅言乎。季方此問。未知穩當。 읽지……없었으니 원문은 "與不讀時相別處"이다. "別處"는 문맥이 통하지 않아 "似"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친진(親盡) 제사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된 것을 말한다. 보통 임금은 5대, 평민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태자(太子)의……것입니까 환왕(桓王)은 평왕(平王)의 손자이다. 환왕의 부친인 설보(洩父)가 태자로 있다가 일찍 죽자, 평왕 사후에 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차자……됩니까 외병(外丙)과 중임(仲壬)은 모두 탕(湯)의 장자인 태정(太丁)의 아우이다. 태정이 태갑(太甲)을 낳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는데, 외병이 2년 동안 왕위에 있고 중임이 또 4년 동안 왕위에 있은 뒤에 태갑이 즉위했다는 것이 조기(趙岐)의 설이고, 탕이 붕어할 때에 외병은 나이가 2세이고 중임은 4세였으므로 나이가 조금 많은 태갑을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정이(程頤)의 설이다. 여기서는 조기의 설을 따라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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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암27) 김 어른【평묵】에게 올림 上重菴金丈【平黙】 《아언(雅言)》은 일찍이 어떤 사우의 집에서 겨우 한두 편을 보는 데 그쳤다가 근래 저의 고향에서 인쇄한 것이 있어 삼가 다 읽어 보았습니다. 아, 도가 밝아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훈고(訓誥)를 억지로 찾고 구이지학(口耳之學 천박한 학문)을 가져다 분변하기에 궁구한 것이 정밀하지 않아 의론이 더욱 번다하고 견해가 이미 치우쳐 논쟁이 더욱 많으니, 갈릴 대로 갈려 이렇게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게다가 이단과 사설(邪說)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도교와 불교에 견줄 정도가 아니어서, 백성들을 금수로 만들려고 하는 자가 천하에 가득하여 놀랍고 기괴한 일이 갖가지로 나옵니다. 실로 대단한 심력(心力)과 대단한 안목(眼目)으로 지혜가 만물에 두루 미치고 도가 일세에 으뜸인 자가 아니면 어찌 전복될 위기를 만회하여 한 잔의 물로 수레에 가득한 땔나무의 불을 끄는 것과 같은 근심을 면하게 하겠습니까. 노선생의 이 글은 오늘날 한 번 다스려질 운수를 감당할 수 있으니, 선생께서 수습하고 편집한 힘이 아니면 어찌 이에 미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선비들이 왕도(王道)를 귀히 여기고 패도(覇道)를 천하게 여기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칠 줄을 알아서 갑자기 혼란에 빠져드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이 또 어느 것인들 그 은택이 아니겠습니까. 제 선생님의 「답문편(答問編)」은 도를 밝혀 세도를 지킨 공이 「아언」과 더불어 조목이 같고 맥락이 같으니, 또한 근세의 한 경전입니다. 의림(義林)은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벗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게다가 시상(時象)과 풍속이 하루하루 갈수록 퇴폐해지니, 보잘것없는 사람이 누구에게 달려가며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오직 이 두 책을 받들고 산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서 자정(自靖)하는 구경(究竟)의 계책으로 삼을 따름입니다. 인사드리고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어 북쪽을 바라보며 슬퍼합니다.혹자가 "주기설(主氣說)은 실로 성선(性善)에 해가 된다. 그러나 일체 주리(主理)가 가령 기(氣)와는 간여하는 바가 없다면 악이 귀속될 곳이 없어 성선설(性善說)에 도리어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악은 이치상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본연(本然)이 아닐 따름이다. 이미 본연이 아닌데 기에 그 허물을 돌리니, 이것이 성현이 바로 여기에 나아가 분개설(分開說)28)을 주장하여 성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한 조목은 소생이 어떤 사람과 이처럼 문답한 것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러러 질정하고 싶은 것이 하나가 아니지만 삼가 조섭하지 못하는 가운데 번거롭게 해 드릴 듯하므로 여기에서 그치니,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雅言。曾於一士友家。僅見一二篇而止。近因鄙鄕有印來者。謹已卒篇矣。嗚呼。道之難明久矣。强探訓誥。取辨口耳。窮覈未精。而議論愈繁。見解旣偏。而辨爭愈多.分分裂裂。到此極矣。加以異端邪說。非楊墨老佛之比。而思以禽獸生靈者。瀰漫區宇。驚怪百出。苟非大心力大眼目。智周萬物。道冠一世者。安能挽廻幾覆之轍。而免於盃水車薪之憂哉。老先生此書。足以當今日一治之運。而非先生收拾編摩之力。何以及此。今日士類知有貴王賤伯。尊華攘夷而不至遽爾淪胥者。又孰非其賜哉。鄙師答問編。明道衛世之功。與雅言同條而共貫。亦近世之一經也。義林自師門逝後。朋知渙散。加以時象風色。日深一日。藐爾人斯。誰因誰極。惟有抱此二書。入山塞竇。以爲自靖究竟計耳。拜敎無階。北望馳悵。或曰。主氣之說。固害於性善。然一切主理。使氣無所干豫。則惡無歸屬處。而於性善之說。反有碍否。曰。惡固理勢之所不能無。但非本然耳。旣非本然。氣執其咎。此聖賢正就此處分開設。以明性之本善。右一條。小生與或人問答如此。未知何如。所欲仰質者。不一。而切恐欠攝之中。致有煩惱。故止此。悚仄悚仄。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1819~1891)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菴),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홍직필에게서도 수학하였다. 1880년(고종17)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분개설(分開說) 각기 다르다는 입장에서 부분적으로 분석하여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고 통틀어 이해하는 혼륜(渾淪)과 상대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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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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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선생에게 올림 上蘆沙先生 삼가 생각건대, 신원(新元)에 편안히 지내시는 기체는 새해를 맞아 건강하실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기력은 손상됨이 없어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고 응대함에 게으르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니, 문장이 어색해서 살짝 바꾸었습니다.) 비록 건장하여 자력으로 움직이는 자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실로 대군자(大君子)께서 평소 수양의 안정됨은 혈기가 흩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이 사문(斯文)을 묵묵히 도와주어 후생인 소자가 가르침을 받을 터전이 되게 하였으니 어찌 너무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소자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날이 오래되었고 선생님께서 지도해 주신 은혜가 지극하였지만 지금까지 성취한 것이 없으니, 소생이 젊을 때 기회를 많이 놓쳤을 뿐만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건강하시던 때 시간을 허비하게 한 것이 또한 어찌 적겠습니까. 매양 해가 바뀌는 때면 세월을 손으로 꼽아 보면서 더욱 회한이 마음에 교차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인하여 생각하기를 '고금에 뜻을 품은 허다한 사람들이 끝내 알려지지 못한 것은 다만 중단하여 힘쓰지 않은 소치이다. 만약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여 중단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겠는가. 선가의 시에 「이 몸을 이번 생에서 제도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서 이 몸을 제도하겠는가.[此身若不今生道, 更將何時道此身]」14)라고 하였으니, 가령 오늘 중단하여 힘쓰지 않아 알려지지 않은 자와 같게 된다면 이 생과 이 몸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일신(日新)' 2자로 재실 이름을 짓고 문미에 편액을 걸었습니다. 대개 늘 보고 성찰하자는 뜻이니, 어찌 감히 시속을 따라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지난번 가르침을 받을 적에 소생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을 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라.[與世相忘 從吾所好]"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소생의 병통에 딱 맞는 것입니다. 대저 소생의 집안은 중세(中世)에 쇠락하였기에 빈약하여 자력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형편인데 자손이 되어 어찌 가문을 위한 계책에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생각에 더욱더 구애되어 매번 공리(功利)와 계교(計較)의 사사로움에 빠져드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것입니다. 이후로 매양 이러한 생각이 날 때면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8자를 가지고 여러 번 암송하곤 하였는데, 날로 가슴속이 맑아져 얽매이는 사사로움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하니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그러나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밝아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으로 마음을 삼는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공자(孔子)는 어지러운 춘추 시대에 비록 지위를 얻지 못했지만 열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하루라도 세상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주자(朱子)는 송(宋)나라 말기 어지러운 때를 만나 비록 다스리는 지위에 있지 않았지만 공경(公卿)과 재상 사이에서 부지런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혹 시사(時事)가 한 번 어긋나 그 해가 무궁할까 두려워하였으니 주자의 마음도 일찍이 하루라도 세상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초학이 극기복례하는 설이 되니, 우리 문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활법(活法)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또 진재경(陳才卿)15)의 '초목의 부류는 성(性)은 있지만 인(仁)은 없다'는 설을 가지고 가르침을 청하니, 선생님께서 "진재경이 운운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소생은 이것으로 인하여 내심 '인이라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만물이 얻어서 사는 것이다. 피차가 충만하여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남음이 없고, 상하가 함께 유행하여 잠시도 정지하거나 멈추지 않으니 천지간에 생명을 가진 사물이라면 어찌 일찍이 인이 없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한 사물만 보고 이른바 인이라는 것을 구한다면 그 체(體)가 한편으로 치우치고 막혀서 혼연히 내면에 있는 인을 보지 못하고, 그 기가 혼매하여 애연(藹然)히 사물에 감응하는 인이 있음을 보지 못하니, 이른바 인이란 것을 장차 어디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인물동체(人物同體)라는 것은 「갖춘 것이 성이다.[成之者性]」16)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성을 갖추기 전에 실로 같지 않음이 없지만 성을 갖춘 뒤에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 기가 낳고 낳는 것을 가지고 두루 유행하여 그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였는데,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망연자실하여 더욱 답답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에 대해 또한 한 말씀 해 주시기를 너무나도 바랍니다. 봄 날씨가 따뜻해져 가니 도를 위해 건강에 유념해 주신다면 사림의 다행이겠습니다.답장을 덧붙임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가문을 위해 과거를 보고 싶은 마음을 그대가 이처럼 숨기지 않으니, 나도 어찌 스스로 외면한 채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겠는가. 얻을 것을 근심하고 잃을 것을 근심하지 않는 자를 그대는 보았는가. 득실을 근심하면서 가문을 일으킨 사람을 그대는 보았는가. 그렇다면 가문을 위한 계책도 여기에 있지 저기에 있지 않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기생집에서 예(禮)를 강론하고 백정이 예불(禮佛)을 드리는 격이 되네.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에 "사생(死生)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결한다면, 그 밖의 영욕(榮辱)은 알 수 있네.[以至死生皆處了 自餘榮辱可知之]"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해야 바야흐로 장부라네. 그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 보고 한번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일신(日新)'이 어찌 좋은 말이 아니겠는가마는 모름지기 이곳에서 기초를 세워야 비로소 의론할 수 있네.사물마다 각각 하나로 규정짓지 못하는 곳이 있으니, 사람에게 있어서는 측은지심이 이것이네. 이 때문에 인자(仁者)가 보면 인이라고 하고, 지자(知者)가 보면 지라고 하니, 모두 측은지심이 있는데 사람의 인을 가지고 저 외물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런 이치는 없네. 伏惟新元燕申氣體。餞迓萬康。先生期耄之年。每見氣力無損。而終日泥塑。酬應不倦。雖强壯自力者。猶未及焉。固知大君子素養之定。有非血氣之所能移也。天之所以默佑斯文而爲後生小子受敎之地者。豈非至幸也哉。但小子從事之日。非不久矣。導迪之恩。非不至矣。而迄于今。無有所就。則不惟多失小生年富之時。而虛違先生康寧之日者。亦豈小哉。每當歲次翻易之時。則屈指歲日。而尤不無悔恨交中。因念古今有志許多人。終始無聞者。只是間斷不力之致也。若能日新又新。無容間斷。則豈至此乎。釋氏詩曰。此身若不今生道。更將何時道此身。若使今日間斷不力。而與無聞者同歸一域。則此生此身。更待何時乎。乃以日新二字。拈爲齋名。揭諸楣端。蓋常目警省之意也。豈敢爲循俗觀聽之美也。曩者敎席小生曰。與世相忘。從吾所好。此誠切中小生之病。大抵小生家。中世零替。弱不自存。爲人子孫者。安得無心於爲門戶之策乎。此念轉輾朋比。每不免有功利計較之私。此最害人心術。自後每有此念。以先生所敎此八字。三復思誦。目覺胸中灑然。無繫累之私。感感在心。曷敢忘諸。然若道成德立。可以濟世澤物之人。則以此爲心。不亦過乎。孔子當春秋昏亂。雖不得位。而周遊列國。未嘗有一日忘世之心。朱子當宋未喪亂。雖不在位。而勤勤往復於公卿宰執之間。或恐時事一差。其害無窮則朱子之心。亦未嘗一日忘乎世也。然則此爲初學克己之說。非吾門終始首尾通看活法耶。向又以陳才鄕草木之類。有性無仁之說。請業。先生曰。才卿云云。須不可曉。小生因此而自惟于心曰。仁者。天地生物之心。而物之所得而生者也。彼此充滿而無一毫之欠剩。上下同流而無一息之停掇。則天地含生之物。曷嘗有無仁者哉然今觀一物而求其所謂仁者則其體偏塞而未見有渾然在中之仁。其氣渾昧。而未見有藹然咸物之仁。則其所謂仁者。將於何處可說着乎。然則人物同體者。以成之者性以上說耶。若曰。成性之前。固無不同。而成性以後。亦有不異之可言。則以其氣之生生周流不息之謂耶。思之至此茫然增欝。伏乞此處。亦賜一段語。至祝至祝。春候向伸。爲道萬康。以幸士林答附略曰爲門戶禦侮。君之不隱情如此。吾亦安能自外而不輸情乎。患得而不患失者。君見之乎。患得失而能樹立門戶者。君見之乎。然則門戶之計。亦在此而不在彼。不能透打此關。千般萬般。皆歸娼家講屠兒禮佛。康節詩曰。以至死生皆處了。自餘榮辱可知之。如此方是丈夫人。君勿以爲己見之昭陵。更下一場大思量一陣大鏖戰。如何。日新豈非好語。而亦須此處。立定脚跟始可議到耳。物物各有一箇不容已處。在人則惻隱之心是也。是以仁者見之謂之仁。知者見之謂之知。都是此箇物事。若以人之仁去責那物則無是理矣 선가의……제도하겠는가 이 말의 출처는 당(唐)나라 때의 선인(仙人) 여동빈(呂洞賓)이 지은 게송(偈頌)의 일부분으로 원시인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과는 다소 글자의 출입이 있다. 진재경(陳才卿) 남송의 학자 진문울(陳文蔚)로, 자는 재경, 호는 극재(克齋)이다. 주희의 문인이다. 갖춘 것이 성이다 《주역》〈계사전 상(繫辭傳上)〉에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하니 이것을 계속 이어 가는 것이 선이요, 이것을 이루어 갖춘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 成之者性也.]"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본의(本義)에 "계(繼)는 그 발(發)함을 말하고 선(善)은 화육(化育)의 공(功)을 말하니 이는 양(陽)의 일이요, 성(成)은 그 갖추고 있음을 말하고 성(性)은 물(物)이 받은 것을 말하니, 물이 생기면 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각각 이 도(道)를 갖추고 있음을 말하니 음(陰)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周易傳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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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보냄 을해년(1935) 與吳士益 乙亥 음성 사람이 형에게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주었다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천하가 중화 세계인데 유자(儒者)가 중화인이 될 수 없다면, 천하가 즉시 오랑캐가 된다."라는 한 구절이 있는데, 형의 고견은 어떠합니까? 저는 크게 세도(世道)에 해롭다고 여깁니다. 지난번에 현광(玄狂 전일중(田鎰中)을 만났는데 그도 그렇다고 여겨서 마침내 .드디어 각각 하나의 변론이 있었습니다. 이에 적어서 바치니 만약 온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정정하여 보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공공(公共)의 의리이니, 진실로 음성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꾸며서 꾸짖어서도 안 되고, 또한 음성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혐의를 피하기 위해 침묵해서도 안 됩니다. 요컨대 다만 반드시 '공명(公明)' 두 글자에 입각하여 이 안건을 단정해야 합니다. 어떠합니까? 聞陰人投兄以《鄭節士傳》.其中"天下華而儒不能華,則天下即夷也"一語,高見見得如何? 鄙則以爲大爲世道之害.向見玄狂,亦以爲然,遂各有一度辨論.茲錄呈,如有未當,不憚訂示.此是公共義理,固不可以出於陰而工加訶責,亦不可以出於陰而避嫌含黙.要之只消道公明二箇字,斷得此案,如何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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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오 삼종에게 보냄 기사년(1929) 與劉省吾 三鍾 己巳 성오(省吾)여! 그대의 이름이 삼(三)이라고 해서 내가 그 때문에 공경하였나니, 한갓 글에 따라서 뜻을 취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삼성(三省) 가운데, 충신(忠信)이 근본이 되니 사람이 충신하지 않으면 일마다 모두 진실이 없어서 악행을 행하기 쉽고 선(善)을 행하기 어렵게 됩니다. 오늘날 사기가 성행하고 충신이 사라져서 안으로는 내 마음을 속이고 밖으로는 타인을 속입니다. 그리고 위로는 군주를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며, 스승을 속이는 데까지 이르러 꺼리는 것이 없어졌으니 지극히 개탄스럽습니다. 성호는 진실로 순신한 사람이지만 혹 세상의 풍조에 갇힐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거듭 부탁합니다. 오호라! 충신한 사람만이 가히 도(道)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아니면 도가 괜히 행해지지 않을 것이니, 부탁하건대 그대는 이 말을 여러 동학들에게 두루 일러주기 바랍니다. 省吾乎! 君名以三, 而余欽以此, 毋徒曰應文取義.三省之中, 忠信爲本, 而人不忠信, 事皆無實, 爲惡則易, 爲善則難.見今欺詐盛而忠信亡, 內而欺心, 外而欺人, 上而至於欺君欺親欺師而無憚, 極用慨歎.省吾固淳實人, 吾猶恐其或囿於世風也.玆復申囑焉.嗚呼! 忠信之人, 可以學道.苟非其人, 道不虛行, 請君徧以此諗諸同學諸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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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英齋酬唱 奇尨驚丱角。璀璨倒文星。鄕國多顔色。十年始拭靑。楚纊風前競。鄭蝥竹外登。吾儕寧不老。白髮謾層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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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취정131) 상량문 竹翠亭上樑文 묘소와 가까이 있으니절로 먼 조상 추모하여 바라보며 사모하는 장소이고상숙132)을 본떴으니또 학업을 익히며 지내는 방도가 되네그런대로 합하고 완전하니송도를 잘하였네133)가만히 생각건대 죽취산은호남의 승경이요범씨의 세장이네네 면에 시내와 산이 둘렀으니둘러 읍하고 안고 있는 형상 아님이 없고백 년의 선대 언덕이라맡아 지키고 호위하는 의식 쇠하지 않네죽은 이 섬기는 것은 생각을 다하는 것이니이 곳에 어찌 집이 없을 수 있겠는가해의 그림자를 헤아려보니음양 향배의 마땅함이 바르고기꺼이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집을 지으니규구 방원의 제도를 다하였네오직 편안히 거처하며 제자리를 얻었고아, 길일에 낙성하였네그 정한 것을 궁구해 보건대어찌 산수를 유람하며 감상할 계획이겠는가이 방에 들어와 지냄에글 짓고 술 마시며 한가로이 즐기기 위함이 아니네네 척의 높은 묘소 가까우니종신토록 길이 사모하는 마음 깃들이고주선하며 오르내림에서리와 이슬 내릴 대 처창한 마음 배나 간절하고출입하며 바라봄에누군들 아울134)의 망극한 한이 없겠는가더구나 장수135)할 별장이고길이 계술할 효성스러운 생각이 있음에야봄가을로 시서 읽어가정의 학문 실추 시키지 않고날로 달로 매진하여집안의 명망 더욱 높아지게 하네자신과 어버이를 위하는 것은또한 한 가지 일이고효도와 학문에 힘쓰는 것이또한 어찌 두 가지 일이겠는가선조께서 엄연히 임해 계신 듯하면감히 태만하고 소홀히 할 수 없고나아주신 분에게 욕됨이 없기를 생각하면성인과 현인이 될 수 있네오직 전형이 여기에 있으니바라건대 후손들은 잃지 말아야 하네어진 사람 계승하여정실136)의 아름다움으로 삼고군자가 문채나니더욱 세한의 절조137) 힘쓰네삼가 짧은 글을 지어긴 들보 올리는 것 돕네들보 동쪽으로 던지니만 리의 부상138)에 해가 이미 붉네연무가 사라져 모두 말끔해 지니이로부터 문명을 천하가 함께하리라들보 남쪽으로 던지니노인성의 광채 정히 드리워지네봉래전139)에 공경히 올리길 새로 도모하니수록과 강녕 누려 화락하고 또 즐겁길들보 서쪽으로 던지니아득히 저 한 쪽의 미인을 바라보네진령140)을 캐어 누구에게 줄 것인가한 길 거슬러 올라가려니 길이 막히고 또 높네들보 북쪽으로 던지니뭇 별들 빙 돌아 북극성 향하네덕으로 인도하면 이와 같음이 있으니삼라만상의 마음 얻지 못함이 없네들보 위쪽으로 던지니창창한 은하수 멀리 우러를 수 있네한바탕 거센 바람이 어둠을 쓸어내니사문이 세세토록 보존되어 무탈할 것이네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강물이 흘러 동남쪽 들로 들어가네일통의 조종141)인 온 천하가온갖 제도와 문물 중화로 실어 나르네삼가 바라건대천지가 순박함으로 돌아오고강산이 도와주며개미처럼 조술하여142)대대로 뛰어난 인재가 있으며종사143)가 이에 법도로 삼아대대로 아름다운 제향 계승하게 하소서 密邇墳塋。自是追遠瞻慕之所。依倣庠塾。又爲肄業修息之方。苟合苟完。善頌善禱。竊惟竹翠之山。湖鄕勝境。范氏世庄。四面溪峰。無非環揖拱抱之狀。百年邱隴。不替典守衛護之儀。事死所以盡思。此地靈容無室。揆日之景。正陰陽向背之宜。肯構而堂。盡規矩方圓之制。惟爰居而得所。差穀朝而落之。究厥相攸。豈是山水遊賞之計。入此室處。非爲文酒燕閒之娛。近四尺之有崇。寓終身之永慕。周旋陟降。倍切霜露悽愴之心。出入膽望。誰無莪蔚罔極之恨。矧爲莊修之別業。永言繼述之孝思。春詩秋書。家庭之學不墜。日征月邁。門戶之望愈隆。爲己爲親也。只是一事。務孝務學。亦豈有兩端。若先祖之儼臨。不敢慢不敢忽。思所生之無忝。可以聖可以賢。惟典刑之在玆。庶來裔之無失。賢人攸似。用爲庭實之佳。君子有斐。益厲歲寒之節。恭疏短引。助擧修樑。抛樑東。萬里扶桑日已紅。烟消霧除霍然盡。從此文明天下同。抛樑南。老人星彩正毿毿。新圖拜獻蓬萊殿。壽祿康寧樂且湛。抛樑西。逖彼一方望美兮。蓁苓采采云誰贈。一路溯洄阻且躋。抛樑北。衆星旋繞拱樞極。道之以德有如斯。職職云云無不得。抛樑上。雲漢蒼蒼遙可仰。一陣長風掃黑昏。斯文世世保無恙。抛樑下。江河流注東南野。一統朝宗率土濱。車書玉帛輸諸夏。伏願上樑之後。天地廻淳。江山助發。蛾子以述。代有俊茂之才。螽斯是繩。世襲芬苾之享。 죽취정(竹翠亭) 전라남도 광주시 생용동 죽취산 기슭에 있는데, 야옹(野翁) 범현식(范瀅植 1862~1923)이 지은 재사이다. 상숙(庠塾) 상고 때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로서 제왕의 벽옹(辟雍), 제후의 반궁(泮宮) 등 태학(太學)과 대칭되는 것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 교육하던 것에는 마을에는 숙이 있고, 고을에는 상이 있고, 지방에는 서가 있고, 나라에는 학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라고 하였다. 송도를 잘하였네 진(晉)나라 헌문자(獻文子)가 집을 짓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간 대부들 가운데 장로(張老)가 송축을 하고 이에 응수하여 헌문자가 기원한 것을 두고, 군자가 "송축도 잘했고 기원도 잘 했다.[善頌善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아울(莪蔚)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불초한 자식을 비유한 것이다. 《시경》〈소아(小雅) 육아(蓼莪)〉에 "길고 큰 아름다운 쑥인 줄 알았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저 천한 쑥이로다. 슬프고 슬퍼라 부모님이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수고하셨도다.[蓼蓼者莪, 匪莪伊蒿. 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장수(藏修) 장수유식(藏修遊息)의 준말이다. 정실(庭實) 조당(朝堂)에 진열한 진상 물품이라는 뜻으로, 조정이나 종주국에 바치는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세한(歲寒)의 절조 세한은 해가 저물어 가는 한겨울의 매운 추위를 이르는 말인데, 노년의 지조를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부상(扶桑) 동해 속에 있다는 신목(神木)이다. 해가 뜰 때 이 나뭇가지를 떨치고 솟구쳐 오른다 하여 해가 뜨는 곳이나 동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탕곡 위에 부상이 있어 열 개의 해가 목욕하는 곳인데 흑치국의 북쪽에 있다.[湯谷上有扶桑, 十日所浴, 在黑齒北.]"라고 하였다. 봉래전(蓬萊殿)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궁궐을 가리킨다. 진령(榛苓) 개암나무와 감초(甘草)이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감초가 있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로다. 저 미인이여! 서방의 미인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는 "서방의 미인은 서주(西周)의 훌륭한 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현자(賢者)가 나쁜 세상의 하국(下國)에서 태어나 서주의 왕을 그리워하여 지은 것이다." 하였다. 진령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저본의 '蓁'은 '榛'의 잘못으로 보고 수정하였다. 조종(朝宗) 본디 제후(諸侯)가 천자(天子)에게 가서 알현하는 것으로, 봄에 알현하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알현하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데,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 모여드는 것 역시 제후가 천자국에 조회(朝會)하러 가는 것과 같다 하여 조종이라 한다. 《서경》 〈우공(禹貢)〉에 "강수와 한수가 바다로 흘러가 모여든다.[江漢朝宗于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개미처럼 조술하여 아(蛾)는 개미이고 술(述)은 조술(祖述)하여 익힌다는 뜻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개미는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워 익힌다.[蛾子時術之]"라는 말에서 왔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 "개미는 작은 벌레이다. 개미의 새끼는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조술(祖述)하고 배워서 큰 개밋둑을 만든다. 이것으로 배우는 자도 오랫동안 학문을 쌓아서 큰 도를 이룸을 비유한 것이다.[蟻子小蟲, 蚍蜉之子, 時時術學銜土之事, 而成大垤. 以喩學者由積學而成大道也.]"라고 하였다. 종사(螽斯)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篇名)인데, 자손이 번성한 것을 의미한다. 그 시에 "메뚜기의 깃이 화락하게 모였으니, 너의 자손이 번성함이 마땅하도다.[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고 하여, 문왕의 비(妃)인 태사(太姒)가 투기하지 않아 자손이 번성함을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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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후재144) 상량문 歸厚齋上樑文 삼가 생각건대옛 무덤 새롭게 단장하니이에 현회에 운수가 있음을 보겠고후손이 지나간 선조의 일 이으니첨모에 방법이 없어서는 불가하네경영하여 기꺼이 집을 지으니영령이 오르내리며 자리에 계시네삼가 생각건대 좌승상 여양공145)은우리나라의 화려한 문벌이요고려조의 이름난 경상이네제치146)를 종으로 삼고 회암147)을 조로 삼으니현저하게 세덕의 아름다움 있고아버지는 청계148) 아들은 문절149)이니족히 계술의 아름다움 우러르겠네인부150)에 거주하였으니명성과 업적이 남쪽 고을에서 으뜸이고신안을 본관으로 하니후손들이 팔도의 산천에 퍼져있네오직 세월이 변천하니황발의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정승의 묘소라고 하고아, 능곡151)이 변하니백양152)의 역사 오래 전해져 초목들이 가리키네다행히 이 한 조각 지석이오백 여년 만에 드러났네수일 전에 두 명의 백옥 동자가거주하는 사람의 꿈에 신령으로 나타나고마침 이 때에 한 가닥 상서로운 기운이여럿이 의논하던 분묘에 잇닿았네확실하고 온전하니절로 신명이 수호한 것이고부합하기를 기다렸으니또한 성효의 감통으로 말미암았네당부153) 같으니묘소의 모양 다시 바꾸고이에 비갈을 세우니묘소의 의물이 비로소 갖추어졌네종족에게 도모하여사시로 제향하는 의식 거행하고관사에게 아뢰니산을 둘러 봉식154)하는 절도를 삼가네이곳은 선조께서 내려주신 땅이니추모하는 마음 어떠하겠으며더구나 의리를 보관하였으니소중함이 각별하네현인이 지나간 곳에오히려 노공의 무주 사당155)이 있는데선조의 유허에어찌 진군의 사정을 짓지 않겠는가몇 개월 사이에도모가 합하고 힘을 같이 하며한 가문의 사람들일을 즐겁게 하고 공에 나아갔네높고 화려하니장노의 미송에 부응하고조금 갖추고 많이 갖춤에위나라 형의 선거와 같네156)부엌과 욕실 대청과 정원은거의 대축157)이 예를 봉행하는 장소가 되겠고기둥과 글방, 당과 무는또한 족히 매년 종족이 모이는 규범을 행하겠네연음하며 낙성하여귀후라는 편액 걸고달려와 마주하니158)여재159)의 의형을 바라보네짧은 노래 지어들보 올리는 것 돕네어영차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십자천의 흐르는 물 맑기가 허공 같네부상에 머리 돌려봄에 요망한 기운 다 사라지니밝게 걸린 일월이 무궁하게 비추네어영차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천운산의 산색 쪽빛같이 푸르네위대한 명성 훌륭한 자취 오래도록 흘러 전하니주조160)는 천년토록 창해에 잠겼네어영차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우뚝한 국사봉에 저물녘 구름 깔렸네상서로운 광채 문명한 운수 끌어당기니저 강루를 봄에 별들이 규성에 모이네161)어영차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우뚝한 무등산이 한 지역 진압하네강호의 만 리에 토구를 경영하니충신의 연모하는 마음 북극성 향하지 않을 때가 없네어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어진 하늘은 일찍이 사문을 없애지 않았네건건162)하여 쉼 없음이 순환하는 것 같으니군자가 본받아 스스로 힘쓰네어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많은 강물 다투어 동남의 들로 달려가네겸손하면 능히 유익함을 받고 가득차면 손해를 부르니이 이치 분명한데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으랴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자손은 창대하고문학은 번성하며영령은 평안하여옛 터가 진실로 아름다움을 돌아보며형작163)이 향기롭고 깨끗하여해마다 제향함에 떳떳함이 있게 하소서 伏以舊塋就新。聿覩顯晦之有數。來孫繼往。不可瞻慕之無方。經營肯堂。陟降在座。恭惟左承相汝陽公。靑邱華閥。麗朝名卿。宗制置而祖晦庵。著有世德之美。父淸溪而子文節。足仰繼述之休。家佳仁夫。聲猷爲南州冠冕。鄕貫新安。苗裔編八域山川。惟星霜之迭遷。黃髮耆舊。相傳政承墳塋。嗟陵谷之變幻。白楊春秋。久貽樵牧指點。幸此一片誌刻。發於五百餘年。前數日兩箇玉童。現靈於居人之夢。適是時一條瑞氣。橫接於僉議之墳。堅確渾全。自是神明守護。等待符會。亦由誠孝感通。若斧若堂。墳樣改觀。乃碑乃碣墓儀始備。謀于族黨。擧四時奠享之儀。聞于官司。謹環山封植之節。此是貽降之地。追慕何如。矧伊衣履之藏。所重自別。賢人所過。猶有魯公撫州之祠。先祖遺墟。豈無甄君思亭之構。數月之間。合謀同力。一門之內。樂事赴功。輪焉煥焉。膺張老之美頌。少有富有。同衛荊之善居。庖湢廳庭。庶可爲大祝奉禮之所。阿塾堂廡。亦足行每歲合族之規。燕飮落成。揭歸厚之標榜。駿奔對越。瞻如在之儀形。短引以裁。修樑助抛。兒郞偉抛樑東。十字川流淸若空。回首扶桑氛祲盡。昭懸日月照無窮。兒郞偉抛樑南。天雲山色碧如藍。偉音遐躅流傳久。朱鳥千年滄海涵。兒郞偉抛樑西。國師峰屹暮雲低。祥光著換文明運。瞻彼降婁星聚奎。兒郞偉抛樑北。瑞石峰峰鎭一域。江湖萬里營菟裘。忠戀無時不拱極。兒郞偉抛樑上。仁天曾不斯文喪。乾乾無息如循環。君子法之以自强。兒郞偉抛樑下。群流爭赴東南野。謙能受益滿招虧。此理分明盍將把。伏願上樑之後。子孫昌大。文學蔚興。英靈妥安。睠舊土之信美。泂酌芳潔。修歲事之有常。 귀후재(歸厚齋)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장동리에 있는데, 주여경(朱餘慶)을 모시는 재사이다. 여양공(汝陽公) 주여경(朱餘慶)을 말한다. 자는 필유(必有), 호는 여양(汝陽),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청계공 주잠(朱潛)의 첫째아들로 남송에 있을 당시 이름은 여(余)였으나 고려로 온 이후 여경(餘慶)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고종 조에 은사과(恩賜科)에 올라 좌승상(左丞相)과 추밀원밀직사(樞密院密直司)를 지냈다. 제치(制置) 제치다원(制置茶院)을 지낸 주자의 8대조 주괴(朱瓌)를 말한다. 무원 주씨(婺源朱氏)의 시조로, 일명 고료(古僚)라고도 하며, 자는 순신(舜臣)이다. 당(唐)나라 천우(天祐) 연간 사람으로, 다원부군(茶院府君)이라고도 한다.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의 호이다. 자는 원회(元晦)이다. 청계(淸溪) 주잠(朱潛, 1194∼1260)의 호이다. 고려 후기의 귀화인으로 남송(南宋)의 한림원 태학사(翰林院太學士)이자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동국시조이다. 자는 경도(景陶), 본관은 송나라 강남동로(江南東路) 휘주부(徽州府) 신안현(新安縣)으로 오늘날의 중국 강서성 무원현이다. 1224년(고려 고종11년) 고려로 망명하였으며, 전라도 금성(錦城 : 지금의 나주(羅州))에 정착하여 신안 주씨의 동국시조가 되었다. 이후 무주(茂朱) 무풍면(茂豊面)을 거쳐 다시 전라북도 진안(鎭安) 주천면(朱川面) 신안촌(新安村)으로 은거하며 서당을 열어 인재를 기르고 학문 연구와 향풍 교화에 진력하였고 능주(綾州)에 돌아와 죽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주자묘(朱子廟) 경내의 동원사(東源祠),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의 주천서원(朱川書院)과 청계사(淸溪祠)에 배향되었다. 문절(文節) 주열(朱悅, 1227~1287)의 시호이다. 자는 이화(而和), 호는 죽수(竹樹)이다. 1260년(고려 원종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남원 판관(南原判官), 한림학사, 판도판서,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인부(仁夫)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옛 지명으로, 이릉부리(爾陵夫里), 죽수부리(竹樹夫里), 연주부리(連珠夫里)라고도 한다. 능곡(陵谷)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높은 언덕은 골짜기로 뒤바뀌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으로 변했도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백양(白楊) 무덤을 비유하는 시어(詩語)이다. 〈고시(古詩)〉에 "수레 몰아 동문 위로 올라가서, 북망산 묘지를 멀리 바라보니, 백양나무는 바람 속에 소소히 울어 대고, 넓은 길 양쪽에는 송백이 줄지어 섰네.[驅車上東門, 遙望郭北墓, 白楊何蕭蕭, 松柏夾廣路.]"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文選 卷29 古詩十九首》 당부(堂斧) 분묘(墳墓)를 말한다. 봉식(封植) 분묘를 봉축하고 주위에 나무를 심는 것을 말한다. 노공(魯公)의 무주(撫州) 사당 노공은 당나라 안진경(顔眞卿)의 봉호이다. 안녹산의 난리 때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으면서 상산 태수(常山太守)인 그의 종형 안고경(顔杲卿)과 함께 성을 굳게 지켜 오직 그 두 곳만 적에게 함락되지 않아 반격의 기반이 되게 하였으며, 뒤에 반란을 일으켜 여주(汝州)를 함락한 이희열(李希烈)을 회유하러 갔다가 그에게 수년 동안 구류되어 협박받던 끝에 굽히지 않고 순절하였다. 그가 죽은 지 272년 뒤인 1056년 송 인종(宋仁宗) 지화(至和) 3년에 지무주(知撫州) 섭모(聶某)와 통판무주(通判撫州) 임모(林某)가 그의 충절을 기린 나머지 안진경이 일찍이 그곳의 자사(刺史)를 지냈다 하여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증공(曾鞏)의 〈무주 안노공 사당기(撫州顔魯公祠堂記)〉에 보인다. 조금……같네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에 거처하기를 잘하였다. 처음 소유하게 되자, '그런대로 모여졌다.'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그런대로 충분히 갖추었다.'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그런대로 충분히 아름답다.' 하였다.[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論語 子路》 대축(大祝) '태축'이라고도 하는데,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관장하는 벼슬로 은(殷)나라 천관(天官) '육태(六大)' 가운데 하나이다. 달려와 마주하니 《시경》 〈주송(周頌) 청묘(淸廟)〉에 "하늘에 계신 분을 대하고, 사당에 있는 신주를 분주히 받든다.[對越在天, 駿奔走在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여재(如在) 《중용장구》 제16장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주조(朱鳥) 주작(朱雀)으로 남쪽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새, 혹은 봉황을 가리킨다. 별들이 규성에 모이네 송 태조(宋太祖) 건덕(乾德) 5년에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다섯 별이 규성의 별자리에 모인[五星聚奎]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복자(卜者)가 이것을 인재가 많이 배출(輩出)될 조짐이라고 하였다. 건건(乾乾)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는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다.[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형작(泂酌) 소박하지만 정성껏 차린 제수를 뜻한다. 《시경》 〈대아(大雅) 형작(泂酌)〉에 "저 길가에 괸 물을 멀리 떠다가, 저기서 떠내 여기에 붓는 정성만 지극하다면, 제사에 올릴 밥도 만들 수 있으리라.[泂酌彼行潦, 挹彼注玆, 可以饙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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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문 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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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6 卷之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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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 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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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선생언행록 日新齋先生言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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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 선생 언행록 日新齋先生言行錄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사(先師) 일신재(日新齋) 광산(光山) 정(鄭) 선생은 헌종 을사년(1845, 헌종11) 11월 7일 갑자에 죽수(竹樹)1) 대덕동(大德洞) 집에서 태어났다. 이 때 모부인 박씨(朴氏)의 꿈에 어떤 노인이 방으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나는 규성(奎星)의 정기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젖먹이 때 이름을 종규(鍾奎)-어떤 본에는 '달이 품속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그 탄생에 달과 별이 정기를 내리고 강하와 산악이 영기를 모았으니, 자질(姿質)이 뛰어나고 용모는 순수하였으며 그 애초의 선단(善端)으로 순박하고 진실함이 성대하게 드러났다. 5세 때에 이웃 노인이 장난으로 말하기를 "네가 고기를 먹고 있느냐?"라고 하자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나머지를 올려 노인에게 드렸다. 6세 때에 정원의 과일을 따는데 나쁜 것을 갖고 좋은 것은 양보하였다. 7세 때에 굶주려 지친 사람을 보고는 데려다가 먹을 것을 주었다. 8세 때에 외출을 하였다가 소나기를 만났는데 발걸음이 빠르거나 급하지 않았다.-선생의 선고인 통정공(通政公)이 일찍이 전한 말이다.- 9세 때에 입학하여 《효경(孝經)》을 읽었는데 몸이 엄숙하고 정신이 안정되어 항상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민첩하게 이해하였다. 사장(師長)에게 공손하였고 정결하게 물을 뿌리고 쓸었다. 장로(長老)들 곁에서 화이(華夷)와 존양(尊攘)의 의론을 듣고는 번번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일신상의 미악(美惡)도 화이(華夷)로 구분될 수 있으니 존양(尊攘)의 의리를 반드시 엄격히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장로들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비록 노숙한 사람이라도 설파할 수 없는 것이다.-글방의 스승인 안방(安枋) 공이 일찍이 칭찬하며 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갈 무렵의 어린 나이에도 우뚝하게 대인 같은 기상이 있었던 것이다. 10세 때에 명촌(明村) 황(黃) 처사(處士)-기현(紀顯)-에게 나아가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체수(滯祟)2)에 시달리다 돌아왔다. 13세 때에 관수재(觀水齋) 박(朴) 선생-영주(永柱)-에게 사서(四書)를 배워 읽었는데 1년이 채 안 되어서 섭렵(涉獵)하고 두루 관통하였다. 14세 때에 관례(冠禮)를 했고 가을에 향과(鄕科)를 치르고 돌아오더니 모부인에게 침구(針具)를 드렸다. 부인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 물건은 사자(士子)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라며 바로 물리쳤다. 이에 자당이 훈계하여 깨우치는 뜻이 엄중함을 깊이 느끼고 더욱 애써 글을 읽었다. 17세 때에 조용한 곳을 취해 산사(山寺)로 들어가서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역경(易經)》을 강해(講解)하였다. 20세 때에 통정공을 모시고 한성시(漢城試)3)를 보러 갔는데 도성의 사부(士夫)들이 으레 요로(要路)에 드나들면서도4)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몹시 수치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과거(科擧)5)에 대한 뜻을 끊고 쇄연(灑然)히 천고를 초월한 마음을 가졌다. 여주(驪州)로 가서 세안당(世安堂) 김(金) 함장(函丈)6)-병준(炳駿)-을 뵙고 경전의 뜻을 강구하며 듣고 물러 나왔다. 부여(扶餘)로 돌아가 족대부(族大父)인 석당(石塘) 선생-귀석(龜錫)-을 뵈었는데 이 어른은 경학(經學)에 밝고 사학(史學)에 박식하였다. 강습(講習)할 때 위기(爲己)와 위인(爲人)7)ㆍ존왕(尊王)과 출패(黜伯)8)의 분별과 더불어 치란(治亂)과 오륭(汚隆)ㆍ흥망과 성쇠의 유래를 들으니 흉금이 저절로 열려 트이고 지각(知覺)이 저절로 멀리 볼 수 있었다. 석당이 그 재성(才性)이 총명하고, 학술이 순정하며, 절조가 확고한 것을 보고서 이내 자부하며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영락한 우리 정(鄭) 씨가 장래에 큰 명성을 떨칠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 선대의 일과 가문의 계책을 깊이 의탁하였다. 돌아오려 할 때 '일신재(日新齋)'를 삼자부(三字符)9)로 써서 주면서 거듭 말하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다. 또 들으니, 같은 도(道)에 노사(蘆沙) 기(奇) 선생이 계시는데 그분의 도학과 문장은 사승(師承)이 없이 곧바로 수사낙민(洙泗洛閩)10)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귀의할 곳이 있어야 하니 너는 가서 스승으로 모셔라."라고 하였다. 24세 때인 무진년(1868, 고종5)에 글과 폐백을 받들고 노사 선생을 진원(珍原)의 사상(沙上)으로 가서 뵈었다. 선생이 예물 폐백을 받고 정면으로 자세히 보면서 안색에 기쁜 빛을 띠면서 말하기를 "'사미(沙彌)가 병든 스님의 문을 두드리는데 미목(眉目)이 시원하게 밝아 배울만한 기틀이로다.' 하였는데 내가 계방(季方, 정의림)에게 또한 그렇게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또 겸양하며 말하기를 "후학이 도에 들어가는 바른 문으로는 광활하고 명백하기로 《주서(朱書)》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사서(四書)ㆍ육경(六經)의 훈고(訓詁)와 주석(註釋)은 자주자(子朱子)11)의 모든 정력(精力)을 쏟아 모은 곳이다. 돌아가서 찾아보면 넉넉하게 남은 스승12)이 있을 것이니 어찌 노추(老醜)한 문에 올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선생의 가르침이 자상하여 양단(兩端)을 다 들어주는데13) 한 마디 말씀마다 본원(本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님이 없었다. 마치 큰 집 천만 칸에 허다한 황금과 비단을 저장해놓고 사람이 구하는 데로 응하여 써도 다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이에 충만하게 소득이 있는 것 같아서 이내 스스로 말하기를 "천덕(天德)과 왕도(王道), 양귀(良貴)14)와 지보(至寶)가 참으로 여기에 있구나. 낙민(洛閩)15)에서 태어나지 못하여 정주(程朱)16)를 직접 이어받지는 못하였지만 다행히 동방(東方)에서 태어나 노사(蘆沙)를 직접 이어받으니 노사가 바로 낙민의 정주이다."라고 하였다. 또 분연(奮然)히 뜻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천고의 앞과 천고의 뒤에 일생을 다시 살 수 없는 몸으로 어찌 종지(宗旨)를 직접 이어받아 내려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내 묵곡(墨谷)의 가숙(家塾)을 깨끗이 소제하고 '함양(涵養)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경(敬)을 써야 하고 학문을 진전시키는 것은 치지(致知)에 달려 있다.〔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는 두 문구 및 '일신재(日新齋)' 세 글자를 자리 오른 쪽에 크게 써 두고, 종부제(從父弟) 구계공(九溪公)-창림(昌林)-과 책상을 나란히 하면서 함께 연마하였다. 반나절은 책을 읽고 반나절은 정좌(靜坐)하여 전날의 번잡한 구이지학(口耳之學)17)을 깎아내 버리고 세유(世儒)의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 냈다. 공부는 먼저 《대학(大學)》부터 시작하여 읽기를 천 번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다. 항상 이르기를 "한 부의 책에 격치성정(格致誠正)18)의 공부와 수제치평(修齊治平)19)의 공효의 본말이 상세히 갖춰져 있고 조리가 분명하다. 배우는 자가 이것을 버린다면 그 규모를 정할 수가 없다. 《장구(章句)》에 근본을 두고 《혹문(或問)》을 참고하며 《강의(講義)》20)를 궁구하여 무릇 그 지의(旨義)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게 하되, 한결같이 경(敬)을 주(主)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敬)이라는 것은 성학(聖學)의 시작을 이루고 끝을 이루는 것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하고 정제엄숙(整齊嚴肅)21)하며, 항상 하늘의 상제를 마주한22) 것처럼 할 것이니 본원(本源)을 함양하고 총명(聰明)을 개발하는 것이 이 한 글자에 달려있다."라고 하였다. 《논어》의 근본, 《맹자》의 발양(發揚), 《중용》의 미묘함에 이르러서도 자주자(子朱子)를 스승과 법도로 삼아서 강구하여 밝히지 않음이 없었다. 《시경》에서는 성정(性情)과 사정(邪正)의 분별을 궁구하여 우유(優游)하고 함영(涵泳)하는 의취를 다하고, 《서경》에서는 위미정일(危微精一)23)의 관계를 살펴서 정사(政事)와 치란(治亂)의 근원을 고찰하며, 《주역》에서는 정문(正文)을 숙독하면서 정자(程子)의 《역전(易傳)》과 주자의 《본의(本義)》을 참조하고 고증하여 길흉(吉凶)ㆍ소장(消長)ㆍ진퇴(進退)ㆍ변역(變易)의 묘리를 완미하고 또 상(象)과 효(爻)를 관찰하였다. 《춘추삼전(春秋三傳)》24)에서 분명하게 결단하고 상세히 완미하며 익숙히 맛을 보아서 포폄(褒貶)ㆍ상벌(賞罰)ㆍ조종(操縱)ㆍ여탈(予奪)의 왕법을 살폈다. 그리고 《호전(胡傳)》25)에 더욱 조예가 깊었는데 《호전》은 의리를 주로 하기 때문이었다.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서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26)과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을 깊이 연구하면서 오히려 지리(支離)하고 산만하여 본령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병폐로 여겼다. 백가(百家)의 여러 서적은 만나는 대로 눈으로 보지 않음이 없되, 만약 도(道)와 무관하고 이(理)와 상관이 없으면 깊이 주의를 기울이거나 관심을 쏟지 않았다. 《오서오경(五書五經)》27)을 항상 돌려가며 정밀하게 보았다. 항상 등불을 밝혀 낮을 이어가면서28) 신묘하게 계합하여 마음으로 깨달은 곳에 이르면 책을 덮으며 눈을 감고 깊이 잠겨 조용하였으니 입정(入定)29)한 스님 같았다. 천인성명(天人性命)30)의 심오함과 현묘함ㆍ음양이기(陰陽二氣)의 대대(對待)31)와 유행ㆍ일리(一理)가 혼연(渾然)한 가운데 만수(萬殊)가 찬연(燦然)한 것에서부터 천서천질(天敍天秩)ㆍ천명천토(天命天討)32)ㆍ예악형정(禮樂刑政)ㆍ관혼상제(冠婚喪祭)에 이르기까지 고치실이나 쇠털처럼 작고 미세한 것도 철저히 탐색하고 정밀히 연구하였다. 그러나 감히 자신만을 믿지 않고 매번 사문(師門)에 질정(質正)한 연후에야 참으로 터득하였다고 비로소 믿었다. 노선생(老先生)께서 일찍이 답장하기를 "별지의 몇 조항은 명리(名理)의 핵심33)이 아님이 없지만, 스스로 돌아보건대 나의 혼미함이 이와 같은데, 어찌 그대와 함께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 특별한 공부를 한다고 들었는데, 본래 이것이 최상의 법문(法門)이니, 물망물조(勿忘勿助)34)와 연비어약(鳶飛魚躍)35)이라는 이런 곳에서 재미를 얻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다. 힘쓰고 힘쓰라."라고 하였다. 그 사문(師門)에 존중을 받음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일찍이 꿈에서 지은 한 구의 시에 이르기를 "강산의 옛 자태는 봄에도 여전히 남았고, 일월의 새로운 정기는 비 온 뒤에 더욱 맑구나."라고 하였는데 대개 그 일생의 성품이 온아(溫雅)36)하고 학술이 순결하였음을 그림처럼 볼 수 있다. 동문으로 대곡(大谷) 김(金) 선생-석귀(錫龜)-ㆍ애산(艾山) 정(鄭) 선생-재규(載圭)-이 있는데 가장 사이가 좋았다. 지향이 서로 같았고 도를 이해하는 것도 같았다. 강직하고 부드러우며37)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여38) 두루 흡족하고 기뻐하였으니 '세 사람이 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는 시(詩)는 진실로 허언이 아니다. 일찍이 을해년(1875, 고종12) 겨울에 사상(沙上)39)에 나아갔는데 애산(艾山)이 사흘 먼저 도착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 여름에도 진원(珍原)에 나아갔는데 애산이 또 사흘 먼저 도착해 있었다. 머나먼 반 천리 길이었으나 애초에 한 마디 약속도 없었다. 그러나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은 일이 한 번 두 번 되면서 마치 북채와 북, 그림자와 메아리와 같았으니 그 기류(氣類)40)가 서로 감응하여 그런 것이었다. 노선생(老先生)께서 대곡(大谷)을 돌아보며 일러 말하기를 "두 사람의 성씨가 서로 같고, 연령도 서로 비슷하고, 자질도 서로 유사하며, 사는 지역의 이름까지도 다르지 않다. 이는 세상에 드문 매우 기이한 일이니 어찌 각자 기록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각기 서로 그것을 기록하였는데 〈사동설기우록(四同說奇遇錄)〉이 이것이다. 이내 시를 짓기를 "사동설(四同說)은 못내 부끄러우나 가장 기이한 건 거듭 만난 인연이라네. 선생께서 기록하라 명하시니 이 뜻이 정말 깊도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노선생(老先生)께서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꺼내 세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진실로 천고의 성현들의 적전 비지(秘旨)인데 오직 노선생께서 홀로 제창하고 스스로 화답한 것으로 본원을 통찰한 것이다. 태극과 주재의 묘리ㆍ이수(理帥)와 기역(氣役)의 구분ㆍ이일(理一)과 분수(分殊)가 서로 포함하는 미묘함ㆍ만수(萬殊)와 일리(一理)가 원융(圓融)하는41) 뜻을 분석하여 판별하고 모아서 총괄하였다. 누차 말하고 반복한 것은 대개 노선생의 진결(眞訣)이었다. 일관(一貫)의 요지42)는 오직 증자가 들었고, 태극(太極)의 묘리는 단지 양정(兩程)43)이 전했는데 논자들은 세 사람을 고정(考亭)의 채황(蔡黃)44)이라고 하였다. 날마다 노선생을 모시고 앉았는데 마침 자리가 한가하고 밤이 고요해지자 넌지시 여쭈기를 "지금 보필하고 치택(致澤)45)하는 임무라면 누가 괜찮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노선생께서 말씀하기를 "경범(景範, 김석귀)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후윤(厚允, 정재규)과 계방(季方, 정의림)이 그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성문(聖門)의 제자(諸子)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정치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 질문한46) 은미한 뜻과 은연중 부합한 것이었다. 또 여쭈기를 "정사(呈辭)하여 세 번 체직되었고 무장(茂長) 현감의 직도 굳이 거절하셨는데 그 큰 뜻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노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는 신언(愼言)을 아는가?"47)라고 하더니 마침내 사군자(士君子)의 벼슬에 대한 출처 의리와 시국 상황이 그러할 수 없는 내밀한 의론을 상세히 논하였다. 노선생(老先生)께서 선생에게 숨기는 것이 없음을48) 증험할 수 있는 것이다. 덕망과 명성이 성대하게 드러나니49) 일세의 유자(儒者)들50)이 모두 선생을 알기를51) 원하였고 도백(道伯)과 고을 수령들도 매양 정성스런 예우를 지극히 하였다. 한후(韓侯) 치조(致肇)와 남후(南侯) 학희(學熙)가 공무로 요청하여 강례(講禮)와 음례(飮禮)을 설행하면서 선생을 빈사(賓師)52)의 지위로 높였다. 이내 술을 따르고 제기를 진설하며, 오르내리면서 절하고 읍(揖)하는 절차에 대해 밝아서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태도가 없었다. 강의하고 논변하며 문답하고 응대하는 데에도 명백하여 애매하거나 막히는 대목이 없었다. 그러니 모두가 일대 성대한 행사요 백세의 사표라고 칭송하였다. 두 후(侯)도 감탄하며 말하기를 "남녘 먼 귀퉁이에 이러한 간기(間氣)53)가 모였을 줄 몰랐다. 고아하고 현명함이 도성(都城)54)의 현인들에 가까운 것 같다. 남대(南臺)55)의 청직(淸職)은 바로 이 사람의 자리이다."라고 하면서 매양 고기반찬을 후하게 보내주었는데 통정공(通政公)이 집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통정공이 말하기를 "백성이 고을수령56)이 보내준 것을 받는 것은 지나치게 외람된 것이 아니더냐?"라고 하니 이에 이웃 친구들과 그 영예를 함께 누렸다. 기묘년(1879, 고종16)에 스승이 돌아가시는57) 고통을 당하여 문에 달려가 통곡을 하는데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백건(白巾)에 환질(環絰)58)을 두르고 예월(禮月)59)을 따라 장례를 모셨다.60) 대곡(大谷)ㆍ애산(艾山)과 함께 상례(相禮)의 지위에 있으면서 상례(喪禮)를 만든 원칙을 근본적으로 미루어보고, 마땅히 덜고 더할 것을 참작하면서, 의절(儀節)을 정해 집행하였다. 은전(殷奠)61)을 올리면서 고유문(告侑文)에 이르기를 "3대(三代)62) 여러 성인들 뒤에 공자가 일어났고, 염락(濂洛)63)의 여러 현철들 뒤에 주자(朱子)가 나왔으며, 동방의 여러 유현들 뒤에 선생께서 태어났습니다. 무성하게 배출된 뒤끝에 하늘이 한 사람을 내셔서 학문을 절충하고 집성하게 하여 사문(斯文)의 영원한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강하(江河)의 운수에 부응하고 산악의 영기가 모여 태어난 분으로서 5백년 지대지강(至大至剛)한 기운64)과 천만년 유정유일(惟精惟一)65)의 학문으로, 엄연하여 천 길로 우뚝 선 벽 같고 드넓어서 만곡(萬斛)66)을 포용하는 바다와 같습니다. 인(仁)은 봄의 생기(生氣)와 같았고 의(義)는 가을의 숙살기(肅殺氣)와 같았습니다. 좋은 금과 정련된 옥처럼 순정하여 새기고 다듬은 흔적이 없고, 맑은 바람과 개인 달처럼 깨끗하여67) 세속을 벗어난 의표가 있었습니다. 선생이 동서남북의 밖으로 나서고 도덕인의(道德仁義)의 본원에 앉아서, 통찰하며 밝히고 담소하며 지휘하니, 마치 모든 강의 미친 물결이 올바른 길을 얻어 도도하게 동쪽으로 흘러들어간 것68)과 같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만약 노선생(老先生)의 도에서 참으로 보고 실제로 체험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명료하고 통쾌할 수 있겠는가. 연제(練祭)ㆍ상제(祥祭)ㆍ담제(禫祭)ㆍ길제(吉祭)에 정성을 다하고 의례를 갖추어 참석하였고, 단지 노선생의 행한 의(義)와 말씀한 법도 가운데 생전에 일월처럼 빛났던 것에 강한(江漢)69)을 사모하는 뜻을 붙이고 종신토록 그렇게 할 것 같았다. 임오년(1882, 고종19)에 통정공의 상을 당하여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곡소리가 이어지지도 못하여70) 혼절하였다가 깨어나기도 했다.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고 상차(喪次)를 떠나지 않았다. 전(奠)을 올리고 곡을 하며 조문을 받는 틈에도 번번이 책상을 마주하여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을 익혔다. 죽을 먹은 뒤에 거친 밥을 먹고, 거친 밥을 먹은 뒤에 채소와 과일을 먹었으며, 채소와 과일을 먹은 뒤에 단술을 마셨으니71) 성왕(聖王)이 줄이고 낮춘 상례의 뜻을 굽혀 따른 것이었으나, 종신토록 지극한 고통은 마음에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모친상을 당해서도 또한 이와 같았다. 그 거처가 일정하지 못하여 대덕(大德)에서 품촌(品村)ㆍ묵곡(墨谷)ㆍ성동(星洞)ㆍ가산(佳山) 등으로 여러 번 옮겼다. 허름한 토담집은 쓸쓸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천사만종(千駟萬鍾)72)이라도 그 의(義)가 아니면 돌아보지 않으면서 구학(溝壑)의 뜻73)을 잊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안씨(顔氏)가 어찌 흙덩이처럼 책상을 마주하고 날을 마치면서도 쌀독이 자주 비는74) 것을 걱정하지 않았는가? 가난에 처하는 도리는 나의 분수를 따라 힘을 다하는 것이고 힘을 다한 뒤에는 내가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태연할 뿐이었는데 이는 선생의 말씀을 자신도 말한 것이다. 집안에 거처할 때를 말하자면 안팎으로 정숙하고 화목하고 화락하였다. 종족(宗族)을 대할 때는 단지 은덕(恩德)과 정의(情誼)를 돈독히 할 뿐 너와 나를 따지지 않았다. 선조를 제사하는 날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훈채와 생강을 맛보지 않았으며, 담배 도구를 가까이 하지 않고, 산재(散齊)와 치재(致齊)의 재계를 하니, 재계의 대상이 보이는 듯했다.75) 초하루76)에는 새벽에 일어나 세수 하고 머리 빗고 관을 쓰고 옷을 입고서 사당의 감실(龕室)77)에 배알하였다. 서실(書室)에 물러나 앉아서는 안석과 책상을 정돈하고 단정히 거처하며 조용히 침묵하여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였다. 앉을 때는 가부좌를 하고 손을 둥그렇게 마주 잡고 어깨와 등을 곧추 세우니, 엄연하여 우뚝 솟은 태산 같았다. 잠잘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무릎을 하나로 모으며 숨을 죽이고 반듯이 누우니, 잠잠하여 숨어 잠긴 거북과 용 같았다. 말할 때는 조급하거나 경솔하지 않고 빠르거나 사납지 않으니, 온화하여 따듯한 봄바람 같았다. 걸을 때는 몸이 곧고 발걸음이 활달하면서도 안정되고 느릿하니, 날개를 편 듯하고 옷자락도 가지런하였다.78) 마시고 먹을 때는 국과 밥의 배열에 바른 위치가 있고, 수저와 젓가락을 들고 놓는 것도 급하거나 느리지 않았으며,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가려서 먹지 않았고, 나물을 먹고도 모든 일을 한다79)는 뜻으로 항상 분발하였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지인들과 서로 만나 시운(詩韻)을 수창하는 곳에서는 주량에 일정한 양은 없었으나 다만 기분 좋게 취하면 그쳤다. 사람을 접할 때를 말하자면 공경히 대하여 온화한 기운이 넘쳤으니 친숙한 자는 기쁘게 복종했고 소원한 자는 흠모했으며, 난폭하고 사나운 자는 외경했고 오만한 자는 공경히 삼갔다. 따뜻한 봄과 서늘한 가을에는 지인들을 두루 찾았고 비록 나이가 적거나 한참 어려도 하나도 법도를 빠뜨리지80) 않았다. 상(喪)을 조문하고 경사를 축하할 때는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면서 몸소 갔으며 만약 무슨 일로 빠뜨리게 되면 글로 대신하였다. 매양 아름다운 산수와 한가한 정자에서는 번번이 심정을 붙여 회포를 쏟았고 구봉(九峰)의 깊은 곳과 오봉(五峰)의 기이한 절경, 천태(天台)의 그윽하고 외진 곳에서 여러 해를 은거하였다.81) 벽산(碧山)의 갠 달, 쌍산(雙山)의 맑은 바람, 칠송(七松)의 맑은 경치를 찾아 두루 돌아다녔다. 경서를 갖고 와서 강학하는 선비들이 믿고 따르며 마음으로 복종하니 글방에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師道)를 자처하지 않고 단지 강마(講磨)하면서 겸손하였는데 정성스럽게 반복하며 이끌어주고 연마하며 격려하였다. 독서할 때는 그들로 하여금 반드시 고요히 앉아 본원(本源)을 함양하고, 유영(游泳)하여 개발하고 깊이 잠겨 반복하며, 글자는 글자의 뜻을 찾고 글귀는 글귀의 뜻을 찾으며, 글귀를 합쳐 문장을 이루면 또 문장의 뜻을 찾고, 빨리 하려하지 말고 많은 것을 탐하지 말며, 터득하지 못한 것을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하나 몸에 돌이키도록 하였다. 경전의 뜻이 공허한 말이 되지 않도록 간절하고 부지런히 하면서 과정을 엄정히 세웠다. 편벽될까 염려되면 그들로 하여금 원활하게 소통하게 하였고, 협소하고 비루할까 우려되면 인도해서 흉금을 열어주고 경지를 넓혀주었다. 어렵사리 진보하는 것이 안타까우면 이끌어서 곰곰이 깊이 생각하게 하고 탁 트이게 멀리 보도록 하였다. 재주가 영민한 것을 알면 경계하여 지둔함을 지키게 하고, 박학에만 힘쓰는 병폐가 있으면 면려하여 깎아내도록 하였다. 혹 나아가게 하고 혹은 물러나게 하여 그 재질에 따라서 두터이 해주고 그 병폐에 따라 고쳐주었다. 선생은 항상 말하기를 "학문의 본령은 오직 뜻에 달려있다. 뜻이 한결같으면 기(氣)가 따르니 천하에 능하기 어려운 것이 없고 귀신도 장차 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학문은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지만 경중취사(輕重取捨)의 구분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슨 뜻을 세울 것인가. 학문은 주경(主敬)82)이 근본이지만 조사존망(操舍存亡)83)의 기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슨 경(敬)을 주로 삼겠는가. 학문은 힘써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정선악(邪正善惡)의 분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힘써 행할 것인가.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대학》의 시조리(始條理)84)가 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마음을 오래 보존하면 저절로 밝아진다."85)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생각해도 또 터득하지 못하면 신명이 와서 알려줄 것이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궁격(窮格)86)하여 그 진수를 터득하면 정신이 말끔해지고, 그 진수를 터득하지 못하면 정신이 수고롭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충신(忠信)을 주본(主本)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독서는 마땅히 본래의 문장 뜻을 신중히 지키면서 궁격(窮格)하고, 횡설수설(橫說竪說)로 공허한 것을 천착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고, 말하기를 "궁격(窮格)의 공부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성실이며 근면일 뿐이다." 하였고, 말하기를 "궁격(窮格)을 하되 실천이 없다면 기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 조각을 새기는87) 격이니, 행할 때는 용자부(勇字符)88)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진실로 담당(擔當)하고 세차고 빠르게 격려하여 천만인을 용동(聳動)시키는 정신과 기력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모름지기 일상에 절실하고 비근한 마음 속의 은미한 곳에 나아가서, 차례로 지선(至善)하고 딱 알맞은 곳을 궁격(窮格)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기우록(奇遇錄)〉을 보고 추억하며 감회에 젖어 말하기를 "공문제자(孔門諸子)들은 천하의 대성(大聖)을 얻어 스승으로 삼고 천하의 대현(大賢)을 얻어 벗으로 삼아서, 스승에게 묻고 벗에게 익히며 벗에게 익히고 스승에게 질정하였다. 굳세고 강직한89) 의표와 간곡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90) 즐거움은 천년 뒤에 상상해도 나도 모르게 감탄하여 흥기하게 된다. 비록 당우(唐虞)의 임금91)과 고기직설(皐虁稷契)92)의 무리를 얻어서 하늘이 대낮처럼 밝은 날에 토론93)을 할 수는 없더라도, 맹자(孟子)가 이른 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삼락(三樂)에 끼지 않는다.'94)고 한 뜻을 미루어 본다면, 차라리 저것을 버릴지언정 이것을 잃을 수는 없다. 내가 경범(景範)ㆍ후윤(厚允)과 사문에서 만난 것이 오래되었는데, 태극성명(太極性命)의 은미한 이치에서부터 삼백삼천(三百三千)95)의 다단한 예(禮)에 이르기까지 각자 들은 것을 진술하고 각자 본 것을 말하면서 익히고 질정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세의 대현(大賢)을 얻어서 스승으로 삼고 일세의 대유(大儒)를 얻어 벗으로 삼아 교화를 입고 은덕에 적셔져서 천고나 멀어진 날에 직접 수사(洙泗)96)의 성대한 위의를 보게 된 것이다. 이는 일생에 다시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로 천 백세토록 절대로 없거나 겨우 있는 법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태극설(太極說)〉을 지어 동지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태극(太極)은 천지의 종조(宗祖)요, 조화의 주재(主宰)이며, 만물의 근본으로 천하 고금에 인사(人事)의 준칙이다. 지극히 은미하고 지극히 오묘하여 일상생활에서 떨어질 수 없고,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긴절하여 실로 엄정한 천명에 근원한다. 세상의 치란(治亂)ㆍ사람의 현부(賢否)ㆍ습속의 오륭(汚隆)ㆍ일의 성패(成敗)는 단지 이 도리를 밝히느냐 밝히지 못하느냐 여하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성현이 경(經)을 짓고 전(傳)을 계술하여 천언만어(千言萬語)에 이르도록 이어지고 그치지 않은 것은 이 도리를 밝혀서 모두 사람마다 알 수 있게 하기위한 것이다. 오호라! 성인은 멀어지고 말씀은 사라졌으며 세교(世敎)가 밝지 못하니 혹 태극을 기(氣)를 띤 물건이라고 여기고, 혹은 오성(五性)97)을 기(氣)를 인하여 있다고 여기고, 혹은 명덕(明德)98)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고, 혹은 만수(萬殊)를 기(氣)가 나뉜 것으로 여기며, 달도(達道)99)를 기(氣)가 발한 것으로 여긴다. 이와 같다면 성정(性情)ㆍ체용(體用)ㆍ시종(始終)ㆍ본말(本末)에서 모두 기(氣)가 그 주인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태극(太極)의 주재(主宰)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도리(道理)는 형체가 없는 신묘한 것이니, 모름지기 조용히 깊게 탐색하고 오랫동안 존양(存養)100)을 쌓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을유년(1882, 고종22)에 사림들이 천거장(薦擧狀)을 올리는101) 논의를 펴자 선생이 듣고는 겸양하며 사람들을 타이르면서 "칠조개(漆雕開)처럼 현명한 사람도 오히려 '나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102)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칠조개보다 못하면서 어찌 이것을 자신할 수 있는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굳게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정해년(1887, 고종24)에 동지들과 함께 서석산(瑞石山)103)에 올라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수창하였는데 거의 기우(沂雩)104)의 아취가 있었다. 문생(文生) 송규(頌奎)가 말하기를 "이번 유람은 영귀(詠歸)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송규와 성리(性理)에 대해 논하면서 대략 많은 말을 하였는데, 그가 말한 '묘리(妙理)를 묘처(妙處)에서 구하지 않고, 비근하고 거친 곳에 나아가 구하더라도 묘리가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칭탄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참으로 이(理)를 본 말이다."라고 하였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이 사람이 죽자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哭)을 하였다. 제문을 지어 위로하기를 "계원(啓元)105)이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나는가?"라고 하면서 통곡을 하였다. 마침내 유문(遺文)을 수집하여 지극히 정밀하게 교감을 하고 친히 스스로 서문(序文)을 짓기를 "하락이수(河洛理數)106)와 천문물상(天文物象)을 즐겨 보았다."라고 하였고, 말단에 이르기를 "이것은 소장공(蘇長公)이 낙전(樂全) 선생의 문집을 교정한107) 뜻이니 그 정(情)이 또한 더 두터운 바가 있다."고 하였다. 붓을 잡고 글을 쓰면 사기(辭氣)는 평담하고 필법(筆法)은 단정했으며 그 문장은 포백(布帛) 같았고 맛은 숙속(菽粟) 같았다.108) 은미한 덕을 천양하는 글109)에 더욱 간절하게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세상에서 칭송하여 '신필(信筆)'이라고 하였다. 기축년(1889, 고종26)에 지은 대곡(大谷)의 전(傳)에 말하기를 "정주(程朱)로부터 세대가 멀어지니 의론하는 문파가 많아졌는데, 만약 대공지정(大公至正)하고 여러 학설을 모아 절충함으로써 정주(程朱)의 강토를 예전처럼 넓고 맑게 만든 사람이라면 오직 우리 노선생(老先生)이 그 분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하에 공이 없었다면 천고토록 전해지지 않은 비결과 한 마음에 홀로 터득한 묘리를 거의 품어 거두고서 말할 곳도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이한 만남이요, 세상에 드문 정신의 만남이다. 그 평생을 살펴보건대, 가리켜 논의할 만한 출사(出仕)를 조금도 하지 않고 초연히 멀리 떠나서 시종 허물이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온갖 고난을 겪고 극성스런 야유에도 호탕하여 안색에 기미도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박문(博文)과 약례(約禮)110)를 함께 닦아 나가면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던 사람이 누구인가? 해박하되 잡스럽지 않고, 무성하되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가 있되 넘치지111) 않았고, 간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숙연히 공경하고 기쁘게 복종하게 하던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선생과 대곡(大谷)ㆍ애산(艾山)은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였으며 함께 진전(眞傳)을 받아서 위대하게 유문(儒門)의 의표가 되었으니, 대곡(大谷)의 전(傳)을 쓴 것은 바로 자기의 전(傳)을 쓴 것이었다. 일찍이 손 가는대로 쓴 기록이 총 수백여 말이다. 말하기를 "음양(陰陽)이 대대(對待)112)하는 것은 교역(交易)이고, 유행(流行)하는 것은 변역(變易)이다.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유행하는 변역을 위주로 말하였다. 그러나 변역의 기(氣)는 곧 대대(對待)하는 교역(交易)의 기(氣)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性) 가운데는 단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가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효제(孝弟)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면 성(性) 가운데 효제(孝弟)가 없는 것 같으나, 4가지의 이면에는 세조리(細條理)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오행(五行)에서 목(木)을 말하면 송(松)ㆍ백(柏)ㆍ예(櫲)ㆍ장(樟)이 모두 이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수(水)를 말하면 강(江)ㆍ회(淮) 하(河)ㆍ한(漢)이 모두 이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몸속에 가득한 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113)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천지만물이 일체(一體)임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만약 몸을 떠나 밖에서 찾는다면 한 없이 망망하여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될 것이다. 사욕이 깨끗이 없어지고 생리(生理)가 온전하다면 미발(未發)의 때에는 천지와 한 몸이고, 이발(已發)114)의 때에는 천지와 함께 흘러간다. 이른 바 '공정하면 만물이 하나가 된다.'115)는 것과, 이른 바 '고요한 가운데서 만물을 관찰하면 모두 봄의 뜻이 있다.'116)는 것도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태극은 하나의 볼 수 있는 사물이 아니고, 하늘에 있으면 만물(萬物)의 총명(總名)이고 사람에게 있으면 만선(萬善)의 총체(統體)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음과 양 두 가지가 비록 아무리 많이 변하더라도 생리(生理)가 두루 흐름이 아님이 없고, 사람이 날마다 쓰는 것이 비록 농기구나 질그릇, 병기나 문서의 따위라도 생리(生理)에 필요한 도구가 아님이 없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117)고 할 때의 이 '명(命)'자는 기수(氣數)118)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한결같이 천리를 따르고 인위(人爲)를 범하지 않으며, 무릇 길흉과 영욕이 온 것에 대해 조금도 자초함이 없는 뒤에라야 명(命)에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이익을 보고 달려가지 않고 손해를 보고 피하지 않으며, 오직 의리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니 어찌 군자가 될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유기(游氣)119)는 어떤 기(氣)인가? 천지 음양의 기를 주로 삼으면 만물이 유기가 되고, 만물의 해당 몸체의 기를 주로 삼으면 음양이 유기가 된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사특함을 막으면 성(誠)은 절로 보존되고 사특함을 막는 것 외에 별도로 성(誠)을 보존하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120) 또한 그러하다. 다만 선(善)으로 옮겨가고 과오를 고치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일이긴 하지만, 모두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천리와 인욕(人欲)의 두 가지 길일뿐인 것이다. 천리가 아니면 곧 인욕이요, 인욕이 아니면 곧 천리이니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에 응하는 것은 잘한 것이 있고 잘못한 것도 있어서 만 가지로 다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인욕의 폐해가 대개 3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질이 치우치는 것이요, 둘은 이목이 가려지는 것이요, 셋은 남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다. 유약하고 혼탁하며 난폭하고 강경(剛勁)121)한 것은 기질이 치우친 것이요, 탐색(貪嗇)하고 빠져들고 경영하며 골몰하는 것은 이목이 가려진 것이요, 시기하고122) 잔인하며 괜히 교만하고 부끄러워하여 위축되는 것은 남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다. 3가지는 돌고 돌면서 이어지고 서로 조장하며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기질의 치우침이 그 본령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기질을 변화시킬 것을 말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뜻이 편협한 것이 있으면 광대한 생각으로 극복하고, 거짓된 것이 있으면 진실한 생각으로 극복하며, 태만한 것이 있으면 냉엄한 생각으로 극복하며, 사특한 것이 있으면 정직한 생각으로 극복해야한다. 날마다 이렇게 하여 선행을 행하는 힘이 충분히 그것들을 이길 수 있도록 한 연후에야 진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일본(一本)은 본디 천명의 전체이고 만수(萬殊)는 천명의 유행이다.123) 그렇다면 만수가 과연 기(氣)로 인하여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저번에 〈태극도설〉에서 '동(動)이 극에 달하면 정(靜)하고, 정(靜)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動)한다'는 말을 보고, 이것은 유행(流行)의 한 쪽만 말한 것이고 대대(對待)의 체(體)는 아닐 것이라고 가만히 의심하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동(動)하여〔動而〕' '정(靜)하여〔靜而〕'라는 것은 유행의 용(用)으로서, 소자(邵子)가 이른바 용(用)은 천지 이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양을 낳는다〔生陽〕' '음을 낳는다〔生陰〕'라는 것은 대대(對待)의 체(體)로, 소자(邵子)가 이른 바 체(體)는 천지 이후에 확립되었다는 것이다.124) 다만 일동일정(一動一靜)의 용(用)은 천지 이전에 일어나서 천지 이후에 유행하니,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뉜 뒤에 별도로 일개 유행의 기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정(靜)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動)한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이 몸은 나의 사물(私物)이 아니다. 무릇 몸이 보고 듣고 행하고 걷고 먹고 입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천기(天機)가 아님이 없다. 그러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뜻을 둔다면 천칙(天則)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인(仁)이라는 것은 본래 천연적으로 저절로 있는 물건이지 천지 만물과 일체가 되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생생(生生)과 지애(至愛)의 이치가 있게 되면 곧 천지 만물과 자연히 일체인 것이다. 예컨대 한 개의 종자가 단지 생생(生生)의 이치만 있으면 천지만엽(千枝萬葉)의 이치를 자연히 완비하게 되니 이것이 그 인(仁)이므로 일체인 것이다. 만약 시용(施用)된 곳으로 말한다면 또한 한 몸이었으므로 인(仁)이라 할 수 있다. 생생(生生)의 이치가 있으므로 부자(父子)의 나뉨이 있고 또한 부자(父子)가 일체이므로 자애하고 효도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왕년에 계원(啓元)과 이런 뜻을 논하면서 상당히 글을 주고받았는데 다소나마 귀결점이 없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먼저 날마다 쓰는 사물에 나아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궁구해 찾고 눈앞의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천리가 유행하는 것을 본 뒤에야 바야흐로 의거하여 지킬 곳이 있다. 만약 단지 고묘(高妙)한 곳만 향하면서 성(性)과 이(理)를 말한다면 도무지 모색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한 몸은 태극의 상(象)이고, 형기(形氣)는 음양의 상이며, 기혈골육(氣血骨肉)은 오행의 상이고, 백해만규(百骸萬竅)는 만물의 상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허공에 뜬 이치란 없기 때문에 또한 별도로 통체(統體)의 태극이 있지 않다. 다만 이것이 양에서 하나의 태극이 되고, 음에서 하나의 태극이 되며, 오행에서도 각기 하나의 태극이 되고, 만물에서도 각기 하나의 태극이 되는데, 음양과 오행과 만물을 합하여 통체의 태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통체의 태극이 각구(各具)125)의 태극보다 많지 않고, 각구의 태극이 통체의 태극보다 적지 않으니, 각구의 태극 가운데 저절로 이른바 통체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하늘이 만물에 대해서 사물마다 새기고 다듬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한만(汗漫)하게 절로 그러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천지만물은 단지 하나의 몸일 뿐이요 다시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신사체(一身四體)에 생리(生理)가 두루 흐르면서도 서로 관섭하는 바가 없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준기(準基)126)가 허다한 조리(條理)를 말했으나 어찌 항상 기억하여 일에 응할 때마다 또 신경을 쓰고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밝은 거울이 사물을 비출 때, 만상(萬像)이 거울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거울의 먼지와 때를 씻고 닦아서 청명하고 통철하게 한다면 사물이 비록 이르지 않아도 만상이 여기에 담겨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설이 아주 좋다. 다만 거울을 닦는 방도127)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실천하는 것에 공력을 쓰지 않고, 만약 단지 눈썹을 치켜뜨고 눈알을 부라리면서 벽을 향해서 마음을 관찰한다면, 반드시 허공의 적적한 곳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정(正)을 중(中)에 짝지우면 중(中)이 중요한 것이 되고, 의(義)를 인(仁)에 짝지우면 의(義)가 근본이 된다. 운운.' 하였다. 주자(周子)의 주정설(主靜說)128)로 본다면 정(正)과 의(義)를 주로 삼은 것 같은데, 주자(朱子)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왜인가? 음과 양이 서로 그 뿌리가 되는 것은 인(仁)과 의(義)가 서로 그 체(體)가 되기 때문이다. 정(正)과 의(義)를 근본으로 삼으면 중(中)과 인(仁)이 용(用)이 되고, 중(中)과 인(仁)을 체(體)로 삼으면 정(正)과 의(義)가 용(用)이 된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성(性)은 태극이고, 태극은 음양동정(陰陽動靜)의 본연의 묘리이다. 그러나 유독 미발(未發)의 상태를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왜인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미발의 상태가 성이 아니고 다만 미발의 상태에 갖춰져 있는 것이 성이다. 미발의 상태는 기(氣)가 발동하지 않아서 도의(道義)가 온전히 갖춰져 있으므로 성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일본(一本)은 이(理)로써 말한 것이고, 대본(大本)129)은 심(心)으로써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각구(各具) 중에 있는 것을 일본이 있다고 말한다면 괜찮지만, 대본이 있다고 말한다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사람은 태허(太虛)의 음양(陰陽)의 기에 근본하니 물고기는 물에 근본하고 물은 땅에 근본한 것과 같아서 그 동정과 호흡이 일찍이 잠시라도 끊어진 적이 없다. 운운."라고 하였다. 경인년(1890, 고종27)에 애산(艾山) 선생을 영남의 삼가(三嘉)130) 면동(免洞)에서 위문131)하였다. 준기(準基)ㆍ관호(寬鎬)ㆍ승환(承渙)이 선생을 모시고 면동의 상차(喪次)에 이르렀는데 두 어른이 서로 마주하여 한참동안 엎드려 곡을 한 다음 조용히 위로의 말을 하였다. 반 천리 떨어진 심우(心友)를 만났어도 단지 채소와 과일만 올리고 술과 고기132)는 갖추지 않았으니 현인 군자가 예(禮)로써 자처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우한 도리를 볼 수 있었다. 뇌룡정(雷龍亭)-남명(南冥) 선생이 창건했는데 애산(艾山)이 그 터에 중건한 것이다.-에서 설강을 하였는데 선생이 강사(講師)의 자리에 섰다. 모임에 참석해 강의를 듣는 선비가 수 백 명에 이르렀는데 밖에서 서로 말하기를 "의리가 명백하고 언론이 정대하니 애옹(艾翁 정재규)과는 난형난제이고, 곧은 법도와 엄한 위의(威儀)는 오히려 더하다."라고 하였다. 10여일 머물면서 〈유편(類編)〉의 심오한 뜻을 강의하고 논변하였다. 헤어질 때 애산은 당을 내려오지 않고 부복(俯伏)만 하고 전송하였는데 상중에 있는 몸이라 그런 것이었다. 진주(晉州) 월횡리(月橫里)에 도착하여 월고(月皐)133) 조(趙) 선생-성가(性家)-이 저술한 노선생(老先生)의 행장을 살펴보았다. 산천재(山泉齋)-남명(南冥)134) 선생의 강학소이다.-에 들어가 공자(孔子)ㆍ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 네 성현의 유상(遺像)을 봉심(奉審)한 뒤 방장(方丈, 지리산)의 제일봉(第一峰)을 우러러 보고 함양(咸陽)을 향해 출발하였다. 일두(一蠹)135) 선생을 남계(藍溪)에서 봉심(奉審)하려 했으나 길이 멀어서 하지 못하고 섬진강을 배로 건너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유편(類編)〉의 발문을 지어 쓰기를 "성현(聖賢)이 작위(作爲)를 하시되 하늘의 뜻에 앞서서 사람을 깨우쳐주지 않고 각각 때에 따라 가르침을 세우셨다.136) 이 때문에 풍기(風氣)가 열리자 문자가 만들어지고, 대박(大樸)137)이 사라지자 육경(六經)이 지어졌으며, 세교가 쇠퇴하자 사자(四子)138)가 쓰여 진 것이다. 성현이 멀어져 말씀도 사라지니 낙건(洛建)139)의 현철들의 글이 나왔다. 낙건의 뒤에 태어났으니 의당 그 설을 익히고 지켜야 하거늘, 어찌하여 의리가 막히고 의론이 횡행함이 이 때보다 심한 적인 없는 것인가? 이것이 〈유편(類編)〉의 글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라고 하였다. 신묘년(1891, 고종28)에 또 애산과 약속하여 종산(鍾山)의 사찰에서 만났는데 정월파(鄭月波)-시림(時林)-ㆍ최계남(崔溪南)-숙민(琡民)-ㆍ정농산(鄭農山)-면규(冕圭)-도 함께 와서 참여하였다. 각자 문하에 모시고 따라온 선비 또한 매우 많았다. 설강을 하고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140) 3~4 군자가 절충하고 문답을 하는데 위로 선왕의 전례(典禮)부터 학문을 하는 절도에 이르기까지 설파하지 않음이 없어서 자못 흥국사(興國寺)와 아호사(鵝湖寺)의 즐거움141)이 있었다. 〈종산강록(鍾山講錄)〉을 만들고 인하여 1년에 한 번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사림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임진년(1892, 고종29)에 사림들을 앞장서 움직여서 칠송리(七松里)에 정자를 세우고 '영귀(詠歸)'로 제액(題額)하였으니 대개 서석산(瑞石山)142)에서 노닐던 남은 뜻에서 근본한 것이다. 오성사현(五聖四賢)의 초상을 봉안하여 봄과 가을에 석채(舍菜)를 하고 인하여 예성의(禮聖儀)ㆍ견례의(見禮儀)ㆍ여수례(旅酬禮)ㆍ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또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 변례(變禮)ㆍ의례(疑禮)에 이르기까지 강론을 하며 청강하는 후학과 생도를 정성스럽게 반복하여 권면하였다. 비록 문단의 노숙한 이들이라도 대부분 의절(儀節)을 처음보고 감복하여 흠모하고 적셔져서 습관을 이루니 거의 3대(三代)143)의 유풍을 회복한 것 같았다. 영귀정의 기문(記文)에 이르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이 되는 도(道)를 추구하려 한다면 학문(學問)이 아니면 불가하고, 학문의 도는 스승과 벗이 아니면 불가하다. 이 때문에 스승과 벗을 가까이 하여 학문을 말미암으려고 하는 자들 또한 그 마땅한 장소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상서학교(庠序學校)144)는 본디 윤리를 밝히고 가르침을 세우는 터전이었는데 3대 이후로 인도하는 것이 예스럽지 않으니 이것이 서원(書院)이 생긴 까닭이다. 그러나 서원의 규칙 또한 옛날과 같지 않으니 오늘의 선비들이 종유(從遊)하여 수업(受業)하는 것이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듯하다."라고 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31) 동학(東學)의 소요가 횡행하면서 영귀정이 저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안송하(安松下)-국정(國禎)-에게 일러 말하기를 "당당하게 우리가 성인을 받들고 학문을 익히는 장소가 저 하찮은 무리에게 더럽혀졌구나."라고 하면서 서로 통곡을 하고 손을 잡고 영평(永平) 등의 지역으로 피난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 3월에 생도들을 이끌고 영귀정으로 가서 더러운 기운을 깨끗이 씻어내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고유하여 아뢰기를 "시운(時運)이 액운145)을 만나니 사설(邪說)이 그 사이에 치성하고, 사문(斯文)이 재액을 당하니 우리의 도가 추락합니다. 왕의 군대가 변경에 임하여 하늘의 토벌을 펼치고, 완악한 음기를 속히 제거하고 미약한 양기(陽氣)를 회복하여 빛나게 하소서. 학당의 뜰을 소제하여 의관을 성대히 하고 현송(絃誦)146)을 다시 찾으며 제기(祭器)147)를 진설하였습니다. 의례를 거행하려하니 일의 체모가 정중하므로 신위를 설치하여 향을 올리고 보잘것없는 정성을 공경히 고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또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과 향약(鄕約)을 시행하면서 문묘(文廟)에서 고유하기를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해지니 삿된 설들이 번갈아 일어나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고을은 오랑캐 땅이 되어갑니다. 하늘의 노여움이 혁연(爀然)하시니 우리의 무위를 떨쳐서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져 회전(會戰)한 날 아침에 청명하듯148) 하게하며, 성스러운 조정은 징비(懲毖)149)하고 어진 관리는 왕정을 펴게 하소서.150) 학규(學規)는 백록(白鹿)151)을 본뜨고 규약(規約)은 남전(藍田)152)을 따르니 지주(知州, 지방장관)는 받들어 힘쓰고 선비들은 분주히 듣습니다. 학당 건물을 깨끗이 소제하고 학당의 뜰을 말끔히 청소하였습니다. 길일을 택하여153) 엄숙히 재계하고 강의(講儀)를 거행하려 하면서 선사께 공경히 배알하며 감히 전말을 고하나이다."라고 하였다. 8월에 조령(詔令)을 사칭한 단발령(斷髮令)이 급하게 내려지자 결코 굴하지 않겠다154)는 뜻을 맹세하고 곤궁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155)는 의기를 가다듬으며 한 방면의 선비들을 불러 모았다. 맹세문을 지어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진실로 한 푼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원수와 하늘을 함께 하는156) 수치를 갖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온 세상이 두발을 깎고 오직 청구(靑邱)157)의 한 편에서만 상투 묶는 것을 지키고 있는데, 이 상투마저 만약 없앤다면 만세토록 비태(否泰)와 소식(消息)의 기운이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에 송사(松沙) 선생이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능성(綾城)에 보냈다. 선생이 답하기를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보다는 옥으로 부서지는 것이 나으며,158) 물고기도 바랄 바이지만 어찌 곰발바닥만큼 좋겠는가.159)"라고 하였다. 이때 송사(松沙)는 금성관(錦城舘)서 주둔하며 진을 치고 있었는데 선생이 필마로 가서 만나 함께 방략을 논의했고 돌아와서도 여전히 여러 번 편지로 서로 면려하였다. 진을 광산관(光山舘)으로 옮기자 선생과 다소의 뜻있는 선비들이 광산(光山)으로 가서 사생(死生)의 계책을 세웠는데 선유(宣諭)함을 듣고는 의병을 파하고 중지하였다. 정유년(1897, 고종34)에 아들 상묵(尙默)을 곡하였는데 참화를 맞아 타들어 가는 마음을 다시 무어라 말하겠는가? 그러나 이내 이치로 달래고 마음을 너그러이 눌러서 겉으로는 평탄한 것 같았다. 예종(禰宗)을 이어서 참최복을 입었고 달관하여 근심하지 않았으니 바로 동문(東門)의 현인일 것이다. 무술년(1898, 고종35)에 동지들과 약속하여 월강(月講)을 열었다. 각자 한 권의 책을 외우고 경전을 해석하고 뜻을 강론하면서 종일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배우기를 좋아하는 성의는 노년에 이르러 더욱 두터워졌다. 임인년(1902, 고종39)에 노선생(老先生)의 문집을 신안사(新安社)에서 간행하는데 애산(艾山)과 함께 가서 같이 교감(校勘)을 보았고 면암(勉庵)160) 최(崔) 선생-익현(益鉉)-도 와서 참여했다. 이때 영남사람 권봉희(權鳳熙)와 최동민(崔東敏) 무리들이 시유(時儒)들의 뜻에 영합하여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 선현을 범하고 배척했다."라고 하여 서로 어울리며 분분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하나, 어찌 해와 달의 밝음을 손상하겠는가?161) 머리에 선현을 이고서 후배를 현혹하여 그 해로움이 없지 않으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선사(先師)께서는 율옹(栗翁)162)에 대해서 독실하게 믿고 높이 흠모하셨으니 여러 문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163)는 한 단락은 계합하지 않는 바가 있어서 매양 유행(流行)의 한 측면을 폭넓게 보려 하셨다. 그런데 세유(世儒)들이 이 한 단락을 가지고 주기(主氣)의 증거로 삼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근원을 따져서 변론하여 통쾌하게 말씀한 것이다. 그 '피음사둔(詖淫邪遁)164)과 전도(顚倒)165)되고 창피함166)'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뒷사람의 폐단을 밝히려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영남의 선비들에게 통고하여 말하기를 "온공(溫公)은 《맹자》를 의심했지만167) 그의 아들 강(康)은 경연(經筵)에서 강학할 것을 권했고,168) 유원성(劉元城)169)은 온공의 문인이지만 회와 구운 고기처럼 《맹자》를 즐겨했다. 이천(伊川)은 명도(明道)170)의 《대학》 편차(編次)를 개정하였고, 남헌(南軒)은 오봉(五峰)171)의 잘못된 곳을 분별했으며,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172)의 정설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다. 주자(朱子)는 '주자(周子)는 황로(黃老)와 같다.'고 했고, '정자(程子)는 황로의 유풍(流風)이 있다.'고 했고, '장자(張子)는 석씨(釋氏)에 가깝다.173)'고 했고, 또 '《정몽(正蒙)》174)에 오류가 많다.'고 했다. 이러한 것들을 또한 그 아버지를 무훼(誣毁)하고, 그 형을 무훼하고, 그 스승을 무훼하고, 그 전현(前賢)을 무훼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을 가지고 율곡을 무훼했다고 한다면, 주자(朱子)의 《본의(本義)》175)는 정자(程子)를 무훼한 것이고, 회재(晦齋)의 《보유(補遺)》176)는 주자(朱子)를 무훼한 것인가? 율곡은 성정(性情)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변에서 또한 어찌 퇴계(退溪)의 설을 한결같이 따르지 않았는가? 전현(前賢)이 우연히 잘못 살핀 것을 후현(後賢)이 변론하여 밝혔다면 바로 존모(尊慕)의 도리를 십분 다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권(權)과 최(崔) 등이 아는 바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시유(時儒) 몇 사람이 권(權)과 최(崔)의 여론(餘論)을 따르며 반박하여 조목조목 변론했다는 것을 듣고, 선생이 마침내 조목조목 변론하여 밝혔는데 전문이 원집(原集)에 실려 있다. 그 말단에 이르기를 "근세에 주기론(主氣論)이 한 가지가 아니다. 태극(太極)을 분(分)이 없는 일(一)177)로 여기는 것이 있고, 오성(五性)178)을 기(氣)를 띤 사물로 여기는 것이 있고, 명덕(明德)179)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는 것이 있다. 일본만수(一本萬殊)180)를 말하면 만수(萬殊)는 기(氣)가 되고, 대본달도(大本達道)181)를 말하면 달도(達道)가 기가 된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182)을 정분(定分)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재(主宰)와 묘용(妙用), 조리(條理)와 단락(段落)에서 한결같이 기(氣)를 중시하여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자식의 아비의 자리를 빼앗고, 아내가 남편의 자리를 빼앗고, 소인이 군자의 자리를 빼앗고, 이적(夷狄)이 화하(華夏)의 자리를 빼앗는 것 또한 하나의 예사(例事)일 것이다. 선사(先師)께서 이것을 두려워하여 주장을 발휘하여 척결하고 차례로 절충하셨다. 그런데 저들이 일변의 논리만을 오히려 고집하니 단지 제 분수를 알지 못함을 드러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을사년(1905, 고종42)은 바로 선생의 회갑년이었다. 생일날 문하 제생들이 술잔을 잡고 헌수(獻壽)를 하는데 매우 많은 사람이 왔다. 선생이 시를 짓기를 "앞 을사년(1845)엔 갓난아이였던 몸이 뒤 을사년(1905)엔 백발노인 되었구나. 백발로 거듭 살아도 갓난아이 같은데 당에 올라도 다만 내 어버이 뵐 수 없도다."라고 하였는데 부모가 애써 길러준183) 뜻을 느낀 것이었다. 이때 위태로운 나라의 형세를 차마 말하겠는가?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팔고 5조약184)을 강제로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근심하고 분노하여 소장을 기초하여 완성했는데, 유소(儒疏)185)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개연히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면암(勉庵)과 애산(艾山) 두 어른이 궐리방(闕里房)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뒤미처 듣고 말하기를 "나의 일을 의탁할 곳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궐리방의 약속도 저지되니 책상을 치며 탄식하였다. 하루는 입으로 시를 읊기를 "노사(蘆沙) 선생의 병인년 상소는 대의가 삼엄하여 일월처럼 밝았도다. 당시에 두세 가지 계책만 썼더라도 어찌 오늘날에 사직이 기울었으랴."라고 하였고, 또 읊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잃기로서니 어찌 지금만 같으랴,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엎어지며 해와 달도 잠겼구나. 문을 닫고 자정(自靖)186)의 계책만 있을 뿐 서산(西山)과 동해(東海)는 찾아갈 것이 없도다.187)" 하고는 문하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곳이 내가 입명(立命)188)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기유년(1909, 순종2)에 문하 제자들이 사사로이 선생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뒤에 알고는 찾아서 그 위에 쓰기를 "너의 모습이 가증스럽고 너의 생이 측은하구나. 의당 너를 두어야 할 곳은 두어(蠹魚)189)의 곁이로다."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문을 닫으며 담 구멍을 막고,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두발을 보존하며 우리의 도를 지키면서 자정(自靖)의 계책을 행하였다. 경술년(1910, 순종3) 나라가 망했다는 기별을 듣고는 근심과 분노가 병이 되었다. 생도들이 병문안을 오니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내가 평소 독서를 권면하던 말을 잊지 않겠지? 석과(碩果)190)의 성쇠가 우리 당을 말미암지 않으면 장차 그것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10월 10일 계유에 정결한 옷을 입고 치관(緇冠)을 쓰고 자리에 반듯하게 누워서 가천(佳川)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문인들은 백건(白巾)에 환질(環絰)을 둘렀고, 치전(致奠)과 뇌문(誄文), 유문(侑文)이 잇달아 상차(喪次)에 가득했다. 송사(松沙) 선생이 위장(慰狀)을 보내 말하기를 "선인과 문하 생도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는데 우뚝하게 영광전(靈光殿)191) 같은 것은 오직 사문(斯文) 뿐이었습니다. 노환이 몹시 심했다고 이전에 듣고는 여뀌를 머금고192) 한 번 병문안을 하였는데 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곳의 저도 같은 병으로 발로 문턱을 넘을 수 없게 된 것이 거의 수개월이라, 밤낮으로 축원하여 다행히 약을 쓰지 않고도193) 빨리 나아서, 망해가는 사문(斯文)을 붙들어 세우고, 밝은 날이 오면 진퇴를 서서히 의논하길 기다렸는데, 하늘이 돕지 않았으니 이를 어찌 하리오? 지금 세상이 창해상전(滄海桑田)194)이 되어 살 땅도 없어지자 홀연히 떠나시어195) 비로소 물고기가 제 삶을 얻지196) 않음이 없는 격이겠지요. 그러나 연소한 후학은 젖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심정이니 그리움을 어찌 하리오?"라고 하였다. 또 고유문(告侑文)에 말하기를 "오호라, 슬픕니다! 우리 선자(先子)께서 끊어진 학문을 앞장서 밝히고 생도들은 남녘을 기울였는데 차례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 소견과 지식이 후세에 전할 만한 사람은 공과 노백 징사(老柏徵士)197)로서 영남과 호남에서 마주 서서 우뚝하게 지주(砥柱)198)가 되었습니다. 비록 유풍(儒風)이 퇴락한 오늘날에도 믿고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기둥을 지탱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인데, 어찌하여 하늘은 사문(斯文)을 망하게 하려는 것일까요? 작년에 대형(大兄)을 곡했고 금년에는 노백헌(老柏軒)을 곡했으니 후생 학자들은 누구를 따라서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누구를 따라 선생의 도를 들을까요? 옛날 양정(兩鄭, 정의림과 정재규)이 기이하게 만났고, 또 문하(門下)에서 기이하게 만났으니 먼저 떠난 대곡(大谷, 김석귀)이 또한 그 일을 곁에서 기록했습니다.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의 심오한 뜻을 세 사람이 같이 모시고 같이 들었었지요."라고 하였다. 애산(艾山) 선생이 위장(慰狀)을 보내 말하기를 "운명이 진사(辰巳)199)에 닥쳐 존사문(尊師門)의 일신(日新) 선생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오호라! 재규(載圭)는 청년 때에 교분을 맺었는데 하나를 알면 반절만 이해하여 매번 뒷전200)이 되었는데, 죽는 한 가지 일까지도 나를 뒤처지게 하십니까?201) 지금 나라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음도 슬퍼할 일이 아니지만, 슬퍼하는 것은 뒤에 죽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고유문에 "망우(亡友) 일신(日新) 선생 정형(鄭兄)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달에야 비로소 실제 부음(訃音)을 받들었습니다. 신위를 만들어 한바탕 통곡을 하고 사람을 대신 보내 제문을 지어 곡하며 영결합니다. 오호라! 형은 지금 끝났구나, 나를 어찌 하리오? 나야 어찌 말할 것이 있으랴만 선사(先師)의 도를 어찌 하리오? 우리 선사께서 미처 전해지지 않았던 학문을 창도하여 이미 추락해버린 전통을 이었고, 이(理)를 주로 하여 기(氣)를 제어했으며, 성학(聖學)을 호위하여 이단을 배척했고, 고인(古人)에게 질정하여 후인(後人)을 기다리며, 우리 도의 중흥의 운에 부응하고 백성이 한 번 다스려지는 시기를 열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70제자가 죽기도 전에 대의가 크게 어그러지고,202) 맹자가 죽자 그 전수하는 것도 사라진 것은 어찌 계술(繼述)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형의 평생 근심이었는데 그것을 누구에게 맡기고 홀연히 떠나십니까?"라고 하였다. 오호라! 선생은 세상을 경영하고 시대에 쓰일 도(道)를 품었으나 상응하는 예우203)가 이르지 않아서 끝내 쓰이지 못했다. 선생의 입장에서는 평소 이를 서운해 하지 않았고 번민도 없었으나204) 후학의 입장에서는 어찌 사도(師道)가 흥기하지 못하는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 도덕과 문장과 언행 가운데 사업과 이력과 견문 사이에 드러난 것을 감히 말하건대 만분의 일은 서술하였다. 그러나 그 홀로 깨달은 그 진수(眞髓)로서 지극이 정밀하고 지극히 오묘하여 내면에 거두어 품으셨던 것들은 감히 만분의 일도 기술하지 못하였다. 오호라! 백세가 뒤에 있으니 덕을 아는 군자가 있다면 이것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서 거두어 품으셨던 진면목을 강론하기 바라노라.-선생의 맏손자 헌규(憲圭)와 종질 상덕(尙悳)이 치암(恥庵)205)과 홍승완(洪承渙)206)군과 함께 선생의 덕행과 행실이 오래되어 사라질까 두려워하여 준기(準基)에게 미루며 말하기를 "사문에 일찍 올랐으니 이미 직접 행동과 법도를 보았고 또한 도덕의 광휘에 친히 가르침까지 받았으니, 의당 사실을 모으고 선양하여 후세에 보여야 하는 것이 급한 책무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준기(準基)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위와 같이 찬술하였다.-문인 밀성(密城) 박준기(朴準基)가 삼가 쓰다. 伏維我先師日新齋光山鄭先生。以憲宗乙巳十一月七日甲子。生于竹樹之大德洞寓第。于時母夫人朴氏夢有老人入室曰。我奎星精云。故乳下名命以鍾奎。【一云月入懷中。】蓋其生也。月星降精。河嶽鍾靈。傑然姿質。粹然容像。厥初善端。淳眞藹見。五歲隣翁嬉曰。汝喫肉否。先生點頭。進其餘而饋翁。六歲掬園果。取劣而讓美。七歲見飢困人。引而餽食之。八歲出外。遇驟雨。步趨不疾遄。【先生考通政公嘗傳言。】九歲上學讀孝經。體疑神定。恒合眼默坐。敏於曉解。恭於師長。淨於灑掃。側長老聞華夷尊攘之義。輒對曰一身上美惡。亦華夷之分。尊攘必可嚴。長老驚曰雖老宿。不得說到。【塾師安公枋嘗稱傳。】在齠齔沖齡。屹然如大人氣像。十歲詣明村黃處士。【紀顯】授小學。困於滯祟而還。十三歲就觀水齋朴先生。【永柱】授讀四書。不期年涉獵融貫。十四歲加弁。秋自鄕科還。獻針具於母夫人。夫人呵責曰。此物非士子所關。卽却之。深感慈訓諷諭之嚴。益刻苦讀書。十七歲取靜入山寺。講解詩書易。二十歲陪通政公。赴漢城試。見都下士夫例以曳裾要路。而靦不知愧。心切恥之。遂絶意場屋。灑然有超趠千古之心。詣驪州。謁世安堂金函丈。【炳駿】講聞經義而退。回扶餘。謁族大父石塘先生。【龜錫】此丈明於經學。博於史學。講服聞爲己爲人。尊王黜伯之分。與治亂汚隆。興亡盛衰之由。胸襟自以開廓。知覺自以遠覽。石塘見其才性之聰慧。學術之純正。操履之堅確。乃自負心喜曰。零替吾鄭。將大名於來世。因深託以先世事門戶計。將歸。書贈日新齋三字符。申言曰。我非敎汝之人。且聞同省有蘆沙奇先生。其道學文章。不由師承。直溯洙泗洛閩之源。士生斯世。依歸有所。汝往師焉。二十四歲戊辰。奉書摯。趨謁蘆沙先生於珍原沙上。先生受禮摯。正面熟視喜形于色曰。沙彌來叩病僧扉。眉目通明可學機。吾於季方亦云爾。且謙讓曰。後學之所以入道正門。滂沛明白。無如朱書。而四子六經訓詁註釋。總子朱子精力注會處也。歸而求之。綽有餘師。何可費枉於老醜之門。因敎諭諄諄。竭其兩端。一言一語。無非自本源上滴滴流出來。如大廈千萬間。貯藏許多金帛。隨人所求而酬用不竭。於是充然如有所得。乃自語曰。天德王道。良貴至寶。眞在此矣。不生洛閩。不得親承程朱。幸生東方。親承蘆沙。蘆沙卽洛閩之程朱。且奮然勵志曰。以前千古後千古。一生不再之身。胡不親承其宗旨而來。乃淨掃墨谷家塾。大書涵養須用敬。進學則在致知兩句。與日新齋三字於座右。與從父弟九溪公。【昌林】連案同硏。半日讀書。半日靜坐。刊落前日口耳之繁。洗滌世儒糠粃之汚。用工先自大學爲始。讀之至於千遍而不已。常謂一部書。而格致誠正之工。修齊治平之效。本末詳具。條理分明。學者舍此。無所以定其規模。本之以章句。參之以或問。究之於講義。凡可以解釋其旨義者。無所不用其極。而一以敬爲主。且言敬者。聖學之所以成始成終。而主一無適。整齊嚴肅。常若對越。則涵養本源。開發聰明。在此一字。至於論語之本根。孟子之發越。中庸之微妙。無不以子朱子爲師法而講明之。於詩究性情邪正之分。盡優游涵泳之趣。於書審危微精一之際。考政事治亂之原。於易熟讀正文。而參互考證於程朱之傳與本義。以玩其吉凶消長進退變易之妙。且觀其象爻。而著決之於春秋三傳。詳玩熟味。以審其褒貶賞罰操縱予奪之王法。而尤邃於胡傳。以胡則主於義理故也。於周禮禮記。深究天理節文。人事儀則。而猶病其支離汗漫。難會得本領矣。百家諸書。無不隨遇眼閱。而若無關於道。不涉於理。則無甚注意而經心焉。五書五經。常循環精輪。屢焚膏繼咎。而至於妙契心會處。則俺卷瞑目。潛潛寂寂。若入定之僧。自天人性命蘊奧微玄。陰陽二氣對待流行。一理渾然中萬殊燦然者。以至天敍天秩。天命天討。禮樂刑政。冠婚喪祭。蠶絲牛毛。毫忽微纖。無不覈究精硏。然不敢信己。而每質正師門。然後始信其眞得及。老先生嘗答曰。別紙幾條。無非名理肯綮。自顧昏翳如此。安能與之上下其論。又曰。聞比來做別樣活計。自是太上法門。勿忘勿助。鳶飛魚躍。正好此處得滋味。勉之勉之。其見重於師門。類如是。嘗夢著一句詩曰。江山古態春猶在。日月新精雨更晴。蓋畵朕其一生性分之溫確。學術之純潔矣。同門有大谷金先生【錫龜】艾山鄭先生【載圭】而最相善。蓋志尙相同。聞道亦同。其侃誾切偲。該洽歡悅。三人合作一人身之詩。信不虛也。嘗乙亥冬。進沙上。艾山先三日至。丙子夏進珍原。艾山又先三日至。漫漫半千里。初無一言之約。然不先不後。至一至再。如桴鼓影響。其氣類相感應而然。老先生顧謂大谷曰。二君姓氏相同。年紀相近。材性相似。至於所居地名亦不異。此是曠世奇絶事。盍各記諸。各相記之。蓋四同說奇遇錄是也。仍有詩曰。堪愧四同說。最奇再遇緣。先生命以記。此意正淵淵。一日老先生出凉議猥筆。示三君子。此固千古聖賢宗傳秘旨。而惟老先生獨唱自和。洞見本源。太極主宰之妙。理帥氣役之分。理分相涵之微。萬一圓融之旨。柝以辨之。會以統之。屢言反復。蓋老先生之眞詮耳。一貫之旨。惟曾子聞之。太極之妙。只兩程傳之。論者以三君子謂考亭之蔡黃焉。日侍坐。適座閑夜靜。微禀曰。當今輔弼致澤之任。誰可其人歟。老先生曰。景範是也。又曰。厚允與季方其亞矣云。乃暗合於聖門諸子問爲邦與從政之微旨。又周呈辭三遞。固却茂長之職。其大義可得聞歟。曰子知愼言乎。遂細論士君子出處義理。與時象不然之密議。可驗得老先生於先生吾無隱乎爾也。德望聲譽。藹菀絅章。一世章掖。摠願識荊。道伯邑宰。每致禮勤。韓倭致肇南侯學熙。請以公事。設講禮飮禮。尊以賓師位。乃於樽勺俎豆。升降拜揖。燦然無遲疑迍邅之態。講辨論難。答問酬應。明白無依違晦塞之端。咸稱之以一代盛擧。百世師表。兩侯喟然曰。不知南荒遐隅。鍾此間氣。雅賢若近於輦轂。則南臺淸職卽是人也。每厚饋饌肉。以通政公在堂故也。通政公曰。民而受土主所饋。無乃過濫乎。因與隣友。共享其榮貴焉。己卯遭樑摧之痛。奔門痛哭。如喪考妣。白巾環絰。禮月襄奉。與大谷艾山居相禮位。推本制作之原。參酌損益之宜。定爲儀節以行之。致殷奠告侑。文曰。三代群聖之後。孔子作。濂洛群哲之後。朱子出。東方群儒之後。先生生。蓋天生一人於蔚興輩出之餘。使折衷集成。爲斯文萬世計者也。先生膺運河瀆。鍾靈山嶽。五百年至大至剛之氣。千萬古惟精惟一之學。儼口若壁立千仞。蕩蕩若海涵萬斛。仁如春生。義如秋肅。良金精玉。粹然無彫琢之痕。光風霽月。灑然有出塵之標。先生出於東西南北之外。而坐於道德仁義之源。洞見昭晣談笑麾之。如百川狂瀾。得其道而浩然東注也云。如非於老先生之道。眞見得實體驗來。安能乃爾直截痛快也。練祥禫吉。盡誠具儀而參。只寓江漢思慕。於行義言範。在世炳然如日星者。而若將終身焉。壬午丁通政公喪。攀號不偯。頓絶方蘇。不脫絰帶。不離喪次。奠哭受吊之暇。輒對案講喪祭禮。饘粥而疏食。疏食而菜果。菜果而醴酒。則俯從聖王除降之義。而終身至痛。則心恒存之。曾於內難也亦如之。不恒厥居。自大德至于品村墨谷。星洞佳山。屢度遷徙。而環堵蕭然。少不介懷。而雖千駟萬鍾。如非其義則不顧。而不忘在溝壑之志焉。嘗曰。顔氏豈塊然對案終日而屢空不憂耶。處貧之道。隨吾分盡力。盡力後我將何焉。但泰然矣。此自道先生之言也。以言乎居家。則外內整肅。雍睦和悅。待宗族。則只敦恩誼而不較爾我。祭先之日。不御酒肉。不味葷薑。不近烟具。散致齊戒。如見其所爲齊者焉。吉月晨興。盥櫛冠服。瞻謁祠龕。退坐書室。整頓几案。端居靜黙。如有所思焉。其坐也加趺圓拱。肩背竦直。儼口若泰嶽之矗立。其寖也齊兩手斂一膝。屛氣正臥。寂寂若龜龍之蟄潛。言語也不躁妄不疾厲。溫溫若春風之和暖。行步也體直武闊。安詳徐緩。翼如也襜如也。其飮食也羹飯行列有正位。匙箸擧措不頻緩。珍羞藜藿不揀取。而常激昻於咬菜做事底意。性愛酒。於知舊相迎詩韻唱和之地。盃勺無量。只醺洽而止。以言乎接人。則敬以待之。和氣融融。親熟者悅服。疏遠者欽慕。暴悍者畏敬。傲慢者恭謹焉。春暄秋凉。周訪知舊。雖年下最少。無一漏戞。而於問喪賀慶。尤勤恪身進。若甚故闕如。則以書替行。每於佳麗山水。閒曠亭榭。輒寓情瀉懷。而九峰深邃。五峰奇絶。天台幽僻。行藏乎屢年。碧山霽月。雙山淸風。七松淸景。杖屨乎殆遍。執經講學之士。信從思服。以致黌舍之不容。然不以師道自居。只以講磨謙之。諄複誘掖。琢磨淬勵。其於讀書也。必使之靜坐而涵養本源。游泳開發沈潛反復。字求字義。句求句義。合句成章。又求章義。毋欲速。毋貪多。不得不措。而一一反之於身。使經傳之旨不爲空言。惓惓娓娓。嚴立課程。慮其偏僻。則使之以圓闊疏通。憂其隘陋。則導之以展拓胸襟。開廣地步。憫其難進。則誘之以淵然深思。曠然遠覽。知其才敏。則戒以守鈍。病其務博。則勉以刊落。或進之或退之。因其材而篤之。隨其病而藥之。常曰。學問本領。惟在乎志。志一氣隨。則天下無難能。而鬼神其將通之。曰學問以立志爲先。然全不識輕重取舍之分。則立箇甚志。學問以主敬爲本。然全不識操舍存亡之幾。則主箇甚敬。學問以力行爲重。然全不識邪正善惡之別。則力行箇甚。此格物致知。所以爲大學之始條理也。曰存久自明。曰思之又思。思又不得。則神明來告。曰窮格而得其眞。則心神灑然。不得其眞。則心神勞苦。曰學者以忠信爲主本。曰讀書當謹守本文而窮格。毋以橫竪而鑿空。曰窮格之工。不在乎他。惟誠勤是耳。曰窮格而無踐履。則只畵脂鏤氷。行之貴勇字符。曰眞實擔當。奮迅激勵。有聳千萬人底精神氣力。曰須就日用切近心術隱微處。次第窮格得至善恰好處。追感奇遇錄。乃曰。孔門諸子。得天下之大聖以爲師。得天下之大賢以爲友。問之於師而講之於友。講之於友而質之於師。行行侃侃之儀。切切偲偲之樂。想像千載之下。不覺感歎而興起也。雖不得唐虞之君與臯虁稷契之徒。都兪吁咈於太虛亭午之日。以孟氏所謂王天下不與三樂之義推之。則寧可遺於彼而不可失於此久矣。余與景範厚允。遇於師門。自太極性命之微。至三百三千之多。無不各陳所聞。各道所見。而講之質之。得一世之大賢以爲師。得一世之大儒以爲友。薰蒸涵洽。親見洙泗盛儀於千古已遠之日。此不惟爲此生難再之遇。而實千百世絶無僅有之事也云。著太極說示同志曰。太極是天地之宗祖。造化之主宰。萬彙之根柢。天下古今人事之準則也。至微至妙。而不離乎日用之常。至近至切而實原乎天命之嚴。世之治亂。人之賢否。俗之汚隆。事之成壞。只在乎此箇道理明不明如何耳。是以聖賢作之經述之傳。以至千言萬語娓娓不已者。無非明此理而使人人得以見之。嗚呼。聖遠言堙。世敎不明。或以太極爲帶氣之物。或以五性爲因氣而有。或以明德爲形而下。或以萬殊爲氣分而以達道爲氣發。如此則性情體用。始終本末。無非氣爲之主。而所謂太極主宰者。果安在哉。但道理是無形之妙也。須從容沈索。積久存養。乃可以見之云。乙酉。士林發薦剡登徹之議。先生聞之。謙讓諭衆曰。賢如雕開。而猶云吾斯之未能信也矣。則況下於雕開。而豈有能信於斯矣之理乎。固挽而寢之。丁亥。偕同志上瑞石。風詠唱酬。殆有沂雩之趣。文生頌奎曰。此遊可名之以詠歸。與頌奎論性理。無慮多言。稱其所言妙不以妙處求。卽卑卽粗而妙無不在。曰此眞見理之言。戊子斯人也歿。設位而哭。操文而慰曰。啓元其將棄我而先耶。哭之慟。遂收集遺默。極精校勘。親自序之曰。好觀河洛理數天文物象。末段曰。此蘇長公所以校定樂全先生文集之義。而其情抑又有甚焉者云。凡把筆著書。辭氣平淡。筆法楷正。布帛其文。菽粟其味。而於闡揚幽微。尤極懇到記實。世稱道以信筆也。己丑著大谷傳曰。程朱世遠。議論多門。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者。惟我老先生其人也。然先生之門。若未有公。則其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不其幾於懷之卷之而無可告語耶。可謂千載奇遇。曠世神會也。觀其平生。無少少出脚可以指讓。而超然遐擧。終始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幷臻。而天德王道。有體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起敬。恰然自服者何人云。蓋先生與大谷艾山。一而三。三而一。同受眞傳。偉然爲儒門之表。率其所以傳大谷者。適所以自傳也。嘗隨手誌錄。總數百餘言。而曰陰陽之對待者。是交易也。流行者。是變易也。周子太極圖說。是主流行變易而言。然變易之氣。便是對待交易之氣。曰程子曰。性中只有箇仁義禮智。曷嘗有孝弟來。據此。似若性中無孝弟。然四者裏面。細條理都包在了。如五行言木則松柏櫲樟。都包在裏面。言水則江淮河漢。都包在裏面。曰程子曰。滿腔子是惻隱之心。於此見天地萬物一體。最爲的實。若去腔子外尋覓。浩浩茫茫無交涉云。夫私欲淨盡。生理渾全。則其未發也。與天地同體。其已發也。與天地同流。所謂公則一。所謂靜中觀萬物。皆有春意者亦此意。曰太極不是一箇可見之物。在天爲萬物之總名。在人爲萬善之統體。曰陰陽兩端。雖極萬變。而莫非生理之周流。人生日用。雖耒耟陶冶甲兵簿書之類。莫非生理所須之具。曰不知命。無以爲君子。此命字。指氣數而言也。人生一循天理。無犯人爲。凡吉凶榮辱之來。無一毫自取而後。可諉於命。知此則見利不趨。見害不避。惟知有義理而已。豈不爲君子乎。曰游氣何氣也。以天地陰陽之氣爲主。則萬物爲游氣。以萬物當體之氣爲主。則陰陽爲游氣。曰閑邪則誠自存。不是閑邪之外別有存誠也。克己復禮亦然。但遷善改過。自是二事。蓋發於心者。則天理人欲二途而已。非天理便是人欲。非人欲便是天理。無兩相對峙故也。應於事者。則有善底有過底。有萬不同也。曰人欲之害。大槪有三。一則氣質之偏也。二則耳目之蔽也。三則物我之形也。柔懦昏濁暴戾剛輕者。氣質之偏也。貪嗇浸淫經營汨沒者。耳目之蔽也。忌克殘忍虛驕羞縮者。物我之形也。三者輾轉因仍。相助益深。然氣質之偏爲其本領。故古人以變化氣質言之。曰意有所褊隘。則以廣大底意思克之。有所虛僞。則以眞實底意思克之。有所怠散。則以嚴疑底意思克之。有所邪曲。則以正直底意思克之。日日如此。使爲善之力。足以勝彼然後。可以有進。曰一本固天命之全體。而萬殊是天命之流行也。然則萬殊果是因氣而有者哉。曰向看太極圖說動極而靜。靜極復動之語。竊疑此是流行一邊說。而非對待之體。追後思之。動而靜而者。是流行之用。邵子所謂用起天地先者也。生陽生陰者。是對待之體。邵子所謂體立天地後者也。但一動一靜之用。起於天地之先。而行於天地之後。非分陰分陽之後別生一箇流行之氣也。是故。曰靜極復動也。曰此身非我私物。凡身之視聽行步。喫着語默莫非天機。纔着一毫私意。不是天則。曰仁者合下天然自有之物。不爲天地萬物一體而有也。然纔有生生至愛之理。則便是天地萬物自然一體。如一箇種子。只有生生之理。所以千枝萬葉之理。自然完具。此其仁故一體也。若以施用處說。則亦可謂一體故仁也。有生生之理。故有父子之分。而且父子一體也。故有慈孝之道。昔年與啓元論此義。頗費往復。不無小小歸宿。曰先就日用事物上。窮索得仁義禮智。見眼前至近天理流行然后。方有據守處。若只向高妙處。說性說理。都無着摸。曰一身太極之象。形氣陰陽之象。氣血骨肉。五行之象。百骸萬竅。萬物之象。曰無懸空之理。故亦不曾別有統體之太極。只是在陽爲一太極在陰爲一太極。在五行亦各一太極。在萬物亦各一太極。合陰陽五行萬物。爲統體之太極。然統體之太極。不多於各具之太極。各具之太極。不少於統體之太極。是各具中。自有所謂統體者。曰天於萬物。非物物刻而雕之也。亦非汗漫不關聽其自爾也。天地萬物。只是一體。更無分別。如人之一身四體。生理周流。無不相管。準基說許多條理。安能常常記念。應事時。又安能着意安排。比如明鏡照。物不成萬像常在鑑中。但洗磨塵垢。使淸明通徹。則物雖不至。而不可謂萬像不涵於此。未知何如。先生曰。此說固好。但磨鏡之方。不向格致踐履上用功。而若只撑眉努眼。向壁觀心。則必人空寂寂地去矣。曰朱子曰。以正配中。則中爲重。以義配仁。則義爲本云云。以周子主靜之說觀之。似以正義爲主。而朱子之言如是何耶。蓋陰陽互爲其根者。是仁義互爲其體故也。以正義爲本。則中仁爲用。以中仁爲體。則正義爲用。曰性卽太極也。太極是陰陽動靜本然之妙也。然獨以未發爲性何也。曰未發非性也。但具於未發者是性也。未發則氣不用事。而道義全具。故謂之性。曰一本以理言。大本以心言。故各具中謂有一本則可。謂有大本則不可。曰人根於太虛陰陽之氣。如魚根於水。水根於土。其動息呼吸。未嘗須臾間斷云云。庚寅慰艾山先生於嶺右三嘉之免洞。準基寬鎬承渙陪行抵免洞喪次。兩丈相向俯伏哭。良久。微敍慰唁。半千里心反之遇。只設菜果。而無臑酒炙鼇之具。可見賢人君子。以禮自處以禮處人之道矣。設講於雷龍亭。【南冥先生所刱建。而艾山因址重建。】先生居講師位。會參應講之士。至數百員。相語於外曰。義理之明白言論之正大。難元季於艾翁。而繩尺之直。威儀之嚴。猶加焉。留旬餘。講辨類編奧意。別來。艾山不下堂。只俯伏而餞。以哀疚在躬而然。到晉州月橫里。考閱月皐趙先生【性家】所述老先生行狀。入山泉齋。【南冥先生講學所】奉審孔周程朱四聖賢遺像。瞻仰方丈第一峰。而出向咸陽。意奉審一蠹先生於藍溪。而路迂未果。浮蟾津而還。夏四月著類編跋曰。先賢有作。不先天而開人。亦因時而立敎。是以風氣開而書契造。大機散而六經作。世敎衰而四子著。聖遠言湮。洛建群哲之書出。生於洛建之後。惟宜講守其說。而何義理晦塞。議論橫決。未有甚於此時。此類編之書所以出也。辛卯又約艾山於鍾山蕭寺。鄭月波【時林】崔溪南【琡民】鄭農山【冕圭】亦竝駕來參。各脚下陪從之士。亦甚衆。設講請益。三四君子。折衷答問。上自先王典禮。以至爲學節度。靡不說到。頗有興國鵝湖之樂。而有鍾山議錄。因以爲一年一遇之約矣。世亂未諧。士林恨之。壬辰倡動士林。建亭榭于七松里題以詠歸。蓋本於遊瑞石餘意。奉五聖四賢遺眞。春秋舍菜。因行禮聖儀。見禮儀。旅酬禮。相揖禮。且講冠婚喪祭以及變禮。疑禮且聽講後學生徒。諄複勸勉。雖詞垣老宿。多刱見儀節。感服欽賞。濡染成習。庶回三代遺風矣。記曰。士生斯世。欲求爲人之道。非學問不可。學問之道。非師友不可。所以親師友而道學問者。亦不可以無其所。庠序學校。固明倫立敎之地。而三代以降。導率不古。此書院所由起也。然書院之規。又不如古。則今日之士所從遊業。恐無以多乎此矣。甲午東擾跳梁。詠亭爲渠輩所據。謂安松下【國禎】曰。堂堂吾奉聖講學之所。爲彼幺麽所汚染耶。相痛哭。携手逃亂於永平等地。乙未三月。率諸生詣詠亭。灑滌氛穢。將行釋菜禮。告由先聖先師曰。運値陽九。邪說間熾。斯文在厄。吾道將墜。王師臨境。天討維揚。頑陰霍除。微陽回光。灑掃黌庭。衣冠振振。絃誦復尋。樽俎式陳。將以擧儀。事體鄭重。設位載香。敬告微衷。又與一鄕多士。行鄕約于文廟。告由曰。世衰道微。邪說交作。生靈塗炭。州里蠻貊。天怒斯爀。我武維揚。雲捲霧散。會朝淸明。聖朝懲毖。賢伯旬宣。規倣白鹿。約遵藍田。知州承勗。多士奔聽。灑掃庠宇。肅淸黌庭。吉蠲齊肅。將擧講儀。先師祗謁。敢告顚委。八月剃矯之急也。矢柏舟靡他之志。厲澤水不懼之氣。而徵召一方人士。作誓曰。我東方苟有一分人心者。孰不有共天之羞。況今四海淨髮。獨靑邱一片。得保撮髻。此髻若亡。則萬世否泰消息絶矣。丙申松沙先生以討復擧義發檄綾城。先生答曰。瓦而全。不若玉而碎。魚之欲。曷若熊之美。時松沙駐陣錦城館。先生匹馬往會。與論方略而歸。猶屢書相勉。及移陣光山館。先生與多少志士。往于光山爲死生計。聞宣諭。罷兵而止。丁酉哭胤子尙默。逆慘心燬。謂復何如。而乃遺理寬抑。外若坦然。爲繼禰宗而服斬。其達觀不憂。卽東門之賢歟。戊戌約同志設月講。各誦一卷書。解經講義。竟日不倦。其好學之誠。至老彌篤。壬寅刊老先生文集於新安社。往與艾山同視校勘。勉庵崔先生【益鉉】亦來參。時有嶺人權鳳熙崔東敏輩。承望時儒風旨。謂凉議猥筆。犯斥先賢。相與紛紜。先生曰。彼雖欲自絶。何損於日月之明。而頭戴先賢。眩惑後學。不無其害。不可以不辨。乃曰。先師於栗翁。篤信而尊慕。考諸文集可見。但於陰陽動靜。其機自爾。非有使之一段語。有所未契而每欲活看以流行一邊矣。及見世儒執此一段。爲主氣之證案。推原辨之。謂發之太快。而其曰。詖淫邪遁顚倒揖披。所以明後人之獘也。乃通古于嶺中章甫曰。溫公疑孟。而其子康勸講於經筵。劉元城其門人。而嗜如膾炙。伊川改定明道大學編次。南軒辨五峰差處。勉齋或有違於考亭定說。朱子謂周子似黃老。謂程子有黃老流風。謂張子近釋氏。又謂正蒙多差處。此亦可以誣毁其父。誣毁其兄。誣毁其師。誣毁其前賢。律之乎。若以此爲誣毁栗谷。則朱子之本義。爲誣毁程子。晦齋之補遺。爲誣毁朱子耶。栗谷於性情四七之辨。亦何不一從退溪之說乎。前賢之偶失照管。後賢辨而明之。乃十分尊慕之道。此豈權崔輩之所知乎。又聞有時儒若而人。從權崔之餘論。駁爲條辨。先生遂逐條辨明。而全文載於原集。其末段曰。近世主氣之論不一。有以太極爲無分之一。有以五性爲帶氣之物。有以明德爲刑而下。言一本萬殊。則萬殊爲氣。言大本達道。則達道爲氣。陰陽五行謂非本然。人物偏全謂非定分。主宰妙用。條理段落。一歸重於氣。氣奪理位。則臣奪君。子奪父。妻奪夫。小人奪君子。夷狄奪華夏。亦一例事。先師爲是之懼。發揮剔決。次第折衷。而一邊之論。猶斷斷。多見其不知量也。乙巳卽先生回甲之年也。晬日門下諸生。執觶獻壽。至無慮多員。先生詩之曰前乙巳年赤子身。後乙巳年白髮人。白髮重生如赤子。升堂獨不見吾親。蓋感其劬勞之意也。伊時國勢之岌嶪。尙忍言耶。聞賊臣賣國。勒成五條。憂忿草疏。旣成。聞儒疏不納。慨然焚稿。追聞勉庵艾山兩丈。約會闕里房擧義之計曰。吾事有託矣。居無何。闕約亦沮。拍案而嘆之。一日口占曰。蘆沙夫子丙寅疏。大義森嚴日月明。當時若用二三策。安有今朝社稷傾。又曰。自古喪邦孰若今。天飜地覆日星沈。惟有杜門自靖計。西山東海不須尋。顧謂門弟子曰。此吾立命之地云。己酉門弟子。私寫出眞像。後覺之索之。書其上曰。爾形可憎。爾生可惻。宜爾置之。蠹魚之側。自後掩戶塞竇。衣吾衣。存吾髮。守吾道爲自靖計焉。庚戌聞無邦之報。憂忿成疾。諸生問疾而來。强病扶坐曰。君輩能不忘吾平日勸勉讀書之言乎。碩果消息。不由吾黨。而將委諸何人。十月十日癸酉。着淨衣。加緇冠。正臥席。考終于佳川之寓舍。門人白巾環絰奠誄侑文。陵續盈喪次。松沙先生致慰狀曰。先人及門生徒。次第徂謝。巋然如靈光者。惟斯文而已。老患苦劇。前此聞之。含蓼一問。情不可已。而顧此同病。足不逾閾。殆數朔。日夜之祝。惟幸勿藥遄和。以扶將喪之斯文。庶待昭明之日。徐議進退。而天所不祐。其奈斯何。見今滄桑。無地可居。浩然觀化。未始非於魚得計。而年少後學失乳之情。介介奈何。又告侑文曰。嗚呼哀哉。吾先子倡明絶學。生徒傾南服。次第徂謝。其見而知之。可傳於後世者。公與老柏徵士。嶺湖對峙。屹然爲砥桂。雖儒風頹弛如今日。而所恃而無恐者。惟撑柱有人耳。何天欲喪斯文。去年哭大兄。今年哭老柏。後生學者。誰從而講先生之學。誰從而聞先生之道。昔年奇遇之兩鄭。又且奇遇於脚下。先逝之大谷子。又能在傍記其事。凉議猥筆之奧。三子同侍而同聞耶云。艾山先生致慰狀曰。運迫辰巳。尊師門日新先生。竟至於斯。嗚呼。載也靑年定交。一知半解。每每爲沙礫。至於返眞一事。亦使我後耶。到今萬分地頭。死非所哀。可哀者後死耳。又告侑文曰。亡友日新先生鄭兄。旣歿之翌月。始承實音。爲位一慟。替人操文哭訣。嗚呼。兄今已矣。奈我何。我何足道。奈先師之道何哉。我先師倡不傳之學。紹已墜之緖。主理而御氣。閑聖而闢異。質諸古而俟諸後。可以膺吾道中與之運。啓生民一治之期矣。雖然七十子未喪。而大義已乖。孟氏之沒。其傳泯焉者。庸非嗣述之無其人耶。此吾兄終身之憂。而屬之阿誰。遽然而逝耶云爾。嗚呼。先生抱經世需時之道。而善價不至。終不試用。在先生則素不慍無悶。而在後學則安得無師道不興之歎歟。其道德也文章也言行也。著於事業履歷見聞之間者。則敢曰敍述其萬一。而若其獨覺其眞。至精至妙。卷而懷之者。則無敢以名狀得萬分之一耳。嗚呼。百世在後。有知德君子者。庶因此而溯。講得卷懷底眞面也矣。【先生冢孫憲圭從姪尙愼與恥庵漢君承渙。懼先生之德行操履。久而泯晦。推於準基曰。早登師門。旣親見動作規矩。且薰炙於道德光輝。則宜捃摭揄揚以示來世。非所急之責耶。準基不獲辭。謹纂述如右。】門人密城朴準基謹識 죽수(竹樹) 능주(綾州)의 옛 이름으로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이다. 체수(滯祟) 먹은 음식(飮食)이 잘 삭지 않아 생기는 병의 빌미를 말한다. 한성시(漢城試) 문과(文科)와 생진과(生進科)의 초시(初試)로서 한성부(漢城府)에서 실시하던 시험이다. 요로(要路)에서 드나들면서도 '예거(曳裾)'는 옷자락을 끈다는 뜻으로, 권세가의 집에 출입하여 출세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추양전(鄒陽傳)〉에 "고루한 마음을 꾸미려고만 들었다면, 어느 왕의 문에서인들 나의 긴 옷자락을 끌고 다닐 수 없었겠는가?〔飾固陋之心, 則何王之門, 不可曳長裾乎?〕"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과거(科擧) 원문의 '장옥(場屋)'으로 과거(科擧) 시험장인데 여기서는 과거의 뜻으로 쓰였다. 함장(函丈) 스승의 강석(講席)을 칭하는 말로 여기서는 스승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만일 음식 대접이나 하려고 청한 손이 아니거든, 자리를 펼 때에 자리와 자리의 사이를 한 길 정도가 되게 한다.〔若非飮食之客, 布席, 席間函丈.〕"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위기(爲己)와 위인(爲人)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이에 상대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말한다. 위기지학은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위인지학은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하는 공부를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말이 나온다. 존왕(尊王)과 출패(黜伯)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覇道)를 내치는 것이다. 덕(德)으로 다스리는 것이 '왕도'이고,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패도이다. 맹자가 왕도와 패도정치를 비교하면서 "힘으로 인(仁)의 명분을 빌리는 것은 패자(覇者)이니 패자는 반드시 큰 나라를 소유해야 하고, 덕(德)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자(王者)이니 왕자는 나라가 클 필요가 없다.〔以力假仁者覇, 覇必有大國, 以德行仁者王, 王不待大. 湯以七十里, 文王以百里.〕"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삼자부(三字符) 좌우명 또는 자신이 지키는 학문의 요결을 말한다. 주자가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에게 성인의 도(道)로 들어가는 차례를 묻자, 병산은 "나는 《주역》에서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았으니 이른바 '불원복(不遠復)'이 바로 나의 삼자부이다." 하였다. 《心經 卷1 不遠復章》 수사낙민(洙泗洛閩) '수사'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노나라에 있었던 두 물의 이름인데, 공자가 이곳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낙민'은 낙양(洛陽)과 민중(閩中)으로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낙양에, 회암(晦庵) 주희(朱熹)는 민중에 살았으므로 곧 공맹(孔孟)과 정주(程朱)를 총칭한 것이다. 자주자(子朱子) 주자(朱子)를 말한다. 앞에 '자(子)'를 붙인 것은 후학(後學)이 높이는 칭호이다. 남은 스승 원문의 '여사(餘師)'로 배울 만한 스승이나 본받을 만한 곳이 많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주자의 책이 스승이 되어줄 것이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그대가 돌아가 찾기만 한다면 남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子歸而求之, 有餘師.〕"라고 하였다. 양단(兩端)을 다 들어주는데〔竭其兩端〕 자세히 가르쳐주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지만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물을 경우, 그가 아무리 무지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양쪽을 들어서 다 말해 준다.〔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하였다. 양귀(良貴) 참으로 귀한 것으로, 본래 간직하고 있는 덕성과 덕행을 이른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니, 조맹이 귀하게 해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人之所貴者, 非良貴也, 趙孟之所貴, 趙孟能賤之.〕"라고 하였다. 낙민(洛閩) 낙(洛)은 낙양(洛陽)으로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민(閩)은 민중(閩中)으로 주희(朱熹)가 거주하던 곳이다. 정주(程朱)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및 주희(朱熹)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구이지학(口耳之學) 배운 것을 그대로 남에게 옮길 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왔다가 곧장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라고 하였다. 격치성정(格致誠正) 《대학(大學)》의 이른바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을 말한다 수제치평(修齊治平) 《대학(大學)》의 이른바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장구(章句)에……강의(講義)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짓고 해설을 붙인 《대학장구(大學章句)》ㆍ《대학혹문(大學或問)》ㆍ《대학강의(大學講義)》를 말한다. 경(敬)이라는……정제엄숙(整齊嚴肅) 주희(朱熹)의 《대학혹문(大學或問)》에, "경이라는 한 글자는 성학의 처음과 끝이다.……그렇다면 이른바 경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힘써야 하는가? 정자는 이에 대해서 일찍이 '주일무적'으로 말하였고, 또 일찍이 '정제엄숙'으로 말하였다.〔敬之一字, 聖學之所以成始而成終者也……程子於此嘗以主一無適言之矣, 嘗以整齊嚴肅言之矣.〕" 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이란 마음을 한 지경에 집중시켜 어느 쪽으로도 이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또한 그의 '정제엄숙(整齊嚴肅)'이란 외모를 정돈함으로써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하늘의 상제를 마주한 원문의 '대월(對越)'로, 하늘에 계신 상제를 우러러 마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시경》 〈청묘(淸廟)〉에 "하늘에 계신 분을 대하고 사당에 계신 신주를 분주히 받든다.〔對越在天, 駿奔走在廟.〕"라고 하였다. 위미정일(危微精一)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이를 유가(儒家)의 도통(道統)인 '십육자심전(十六字心傳)' 또는 '천성상전심법(千聖相傳心法)'이라 강조한 이래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중시되었다. 《論語 堯曰》 《書經 大禹謨》 춘추삼전(春秋三傳)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관한 세 가지 주석서인 《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호전(胡傳) 남송(南宋)의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이 지은 《춘추전(春秋傳)》 30권을 가리킨다. 종래의 해석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주장에 입각해서 해설을 하였는데, 특히 주자학자(朱子學者)들에게 중시되면서, 전부터 전해 오던 춘추삼전(春秋三傳)과 함께 춘추사전(春秋四傳)으로 일컬어졌다. 천리(天理)의 절문(節文) 예(禮)를 말한다. 천리(天理)는 자연의 법칙을 뜻하며 절문(節文)은 조절해서 표현한다는 의미로, 자연의 법칙을 인간사에 적용하여 표현한다는 뜻이다. 오서오경(五書五經) 유학의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五經)에 《소학(小學)》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등불을……이어가면서 한유의 〈진학해(進學解)〉에 부지런히 독서하고 글을 짓는 모습을 묘사하여 "등잔불을 밝혀 낮을 이어가며, 항상 부지런히 힘써 해를 마친다.〔焚膏油以繼晷, 恒兀兀以窮年.〕"라고 한 것을 인용한 표현이다. 입정(入定) 불교의 용어이다. 스님이 고요히 앉아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천인성명(天人性命)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뜻한다. 대대(對待) 서로 상반되는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역》에서 음(陰)과 양(陽)을 대대관계(對待關係)라고 한다. 천서천질(天敍天秩)ㆍ천명천토(天命天討) 천서는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의 순서이고, 천질은 존비(尊卑)ㆍ귀천(貴賤)의 등급이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하늘이 펼쳐서 법을 두셨으니 우리 오전(五典)을 바로잡아 다섯 가지를 후하게 하시며, 하늘이 차례지어서 예를 두셨으니 우리 오례(五禮)로부터 시작하여 다섯 가지를 떳떳하게 하소서. 군신(君臣)이 함께 공경하고 화합하여 충(衷)을 함께 이루소서. 하늘이 덕(德)이 있는 자에게 명령하시거든 다섯 가지 복식으로 다섯 가지 등급을 표창하시며, 하늘이 죄가 있는 자를 토벌하시거든 다섯 가지 형벌로 다섯 가지 등급을 써서 징계하시어 정사를 힘쓰고 힘쓰소서.〔天敍有典, 勅我五典, 五惇哉, 天秩有禮, 自我五禮, 有庸哉. 同寅協恭, 和衷哉. 天命有德, 五服五章哉, 天討有罪, 五刑五用哉, 政事, 懋哉懋哉.〕"라고 하였다. 핵심 원문의 '긍경(肯綮)'으로, 사물의 가장 긴요한 곳을 이르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소의 관절 사이에는 빈틈이 있고, 나의 칼날은 두께가 없으니, 두께가 없는 그 칼을 빈틈이 있는 관절 사이에 집어넣으면, 그 공간이 넓고 넓어 칼을 놀릴 때 반드시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따라서 근육과 뼈가 엉켜 있는 핵심 부위〔肯綮〕에도 칼날이 다쳐 본 적이 없는데, 더구나 큰 뼈와 같은 것이겠는가."라는 백정의 말이 있다. 물망물조(勿忘勿助) 의리를 쌓는 데 있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쌓아 가라는 뜻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반드시 무슨 일을 하되 미리 기약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 말며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고 하였다. 연비어약(鳶飛魚躍)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관통하는 원리는 하나인 자연 만물의 이치를 가리킨다. 《중용장구》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하였다. 온아(溫雅) 원문은 '溫確'인데 문맥상 '溫雅'로 고쳐 번역하였다. 강직하고 부드러우며 원문의 '간은(侃誾)'으로 간간(侃侃)하고 은은(誾誾)한 것인데,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향당(鄕黨)에 있을 때 "조정에서 하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강직하게 하고, 상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간쟁하였다.〔朝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라고 하였다.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여 원문의 '절시(切偲)'로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인데, 《논어》 〈자로(子路)〉에 "붕우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며 형제간에는 화락하여야 한다.〔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하였다. 사상(沙上) 스승인 노사 기정진이 있는 장성(長城)을 말한다. 기류(氣類) 지기(志氣)가 비슷한 동류로,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의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그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則各從其類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일(理一)과……원융(圓融)하는 이치는 하나이면서 현상은 만 가지로 다른 것으로,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을 말한 것이다. 《性理大全 理氣 總論》 일관(一貫)의 요지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일리(一理)가 만사(萬事)를 관통한다는 말이다.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우리 도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꿴다.〔吾道一以貫之〕"라고 일러 준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도통을 전해 주는 한마디 요결을 뜻한다. 《論語 里仁》 양정(兩程) 송(宋) 나라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주돈이(周敦頤)의 제자이다. 고정(考亭)의 채황(蔡黃) '고정'은 송나라 주희(朱熹)가 만년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학하던 곳으로 주희를 일컫는 말이다. '채황'은 그의 제자인 채침(蔡沈)과 황간(黃榦)을 말한다. 치택(致澤)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준말로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제자(諸子)가……질문한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안연이 공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물은 것〔顔淵問爲邦〕'과, 《논어》 〈옹야(雍也)〉에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제자들이 '정치에 종사할 만 지〔可使從政〕'를 물은 내용이 있다. 그대는 신언(愼言)을 아는가 굳이 벼슬을 하지 않아도 말에 허물이 적고 행실에 후회가 적으면 녹봉이 그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벼슬해서 출세하는 방법을 묻는 자장(子張)의 질문에 대해 공자(孔子)는 "많이 듣고서 의심하는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어지고, 많이 보고서 위태로운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니,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녹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라고 하였다. 숨기는 것이 없음을〔吾無隱乎爾〕 스승이 제자에게 숨김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드러나니 원문의 '경장(絅章)'인데 은은하게 가려진 군자(君子)의 덕이 날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둑하여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반짝 빛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유자(儒者)들 원문의 '장액(章掖)'으로, 《예기》 〈유행(儒行)〉의 "저(공자)는 어려서 노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 옷을 입었고, 장성하여 송나라에 살 때에는 장보의 관(冠)을 썼습니다.〔丘少居魯, 衣縫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선생을 알기를 원문의 '식형(識荊)'으로, 한 형주(韓荊州)를 안다는 말인데 평소 존경하는 인물을 한번 만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당(唐)나라 한조종(韓朝宗)이 형주 장사(荊州長史)로 명망이 높아서 한 형주로 일컬어졌는데, 이백(李白)의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생전에 만호후에 봉해질 필요 없고, 오직 한 번 한 형주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다.〔生不用封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라는 말이 나온다. 빈사(賓師)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 임금에게서 빈객과 스승의 예우를 받으며 자문에 응하거나 학문을 강하는 사람을 이른다. 간기(間氣) 세상에 드문 영걸의 기운을 뜻한다. 정의림을 비유한 것이다. 맹자가 "오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태어나는데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인물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有名世者〕"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도성(都城) 원문의 '연곡(輦轂)'으로, 임금이 타는 수레 이름으로, 여기서는 임금이 있는 도성(都城)을 가리킨다. 남대(南臺) 조선 시대에 특히 은일(隱逸)로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사헌부의 장령(掌令), 지평(持平) 등에 천거되어 뽑힌 벼슬아치를 이른다. 고을수령 원문의 '토주(土主)'으로, 백성이 자기 고을의 수령을 이른 말이다. 스승이 돌아가시는 원문의 '양최(樑摧)'로, 대들보가 부러진다는 말인데 스승의 죽음을 비유한다. 공자(孔子)가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쓰러지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를 부른 뒤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禮記 檀弓上》 환질(環絰) 한 가닥의 삼줄을 바탕으로 하고 다시 그것을 다른 삼줄로 감아 상복의 허리나 머리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禮記 雜記》 예월(禮月)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장례하는 달을 말한다. 장례를 모셨다 원문의 '양봉(襄奉)'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에 이르기를 "정공(定公)을 장사 지내는데 비가 내려서 양사(襄事)를 하지 못하였다.〔葬定公, 雨不克襄事〕."라고 하였는데, 주에서 이르기를 "양(襄)은 성(成)이다."라고 하였다. 은전(殷奠) 큰 제사라는 뜻으로, 상례(喪禮)에서 평소에 올리는 조석전(朝夕奠)과는 달리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성대하게 올리는 전을 말한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대부와 사가 빈(殯)을 한 뒤에 임금이 조문 갈 경우에는 사람을 시켜서 미리 알린다. 그러면 주인은 은전의 예를 갖추고서 대문 밖에서 기다린다.〔大夫士旣殯而君往焉, 使人戒之. 主人具殷奠之禮, 俟于門外.〕"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은(殷)은 크다는 뜻이다. 조석(朝夕)에는 소전(小奠)을 올리고 매달 초하루에는 대전(大奠)을 올린다."라고 하였다. 정현이 말한 대전은 곧 은전이다. 《禮記注疏 卷45 喪大記》 3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나라를 말하는데, 이 시대를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여긴다. 염락(濂洛) 염계(濂溪)에 살았던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에 살았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킨다. 신유가(新儒家)를 대표하는 송유(宋儒)들을 말한다. 5백년……기운 세상에 드문 기운을 갖고 태어난 영걸(英傑)이라는 뜻으로, 맹자(孟子)가 "5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태어나는데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인물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有名世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유정유일(惟精惟一)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이를 유가(儒家)의 도통(道統)인 '십육자심전(十六字心傳)' 또는 '천성상전심법(千聖相傳心法)'이라 강조한 이래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중시되었다. 《論語 堯曰》 《書經 大禹謨》 만곡(萬斛) '곡(斛)'은 용량의 단위인데 만곡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것을 말한다. 맑은……깨끗하여 원문의 '광풍제월(光風霽月)로,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로, 인품이 고결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비유한다. 《산곡집(山谷集)》 권1 〈염계시(濂溪詩)〉의 서(序)에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를 평하면서 "용릉(舂陵)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가슴속이 깨끗하여 마치 비 온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다.〔人品甚髙, 胷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하였다. 모든……것 부정한 학설을 되돌려 놓은 공로가 있음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모든 강을 막아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미 거꾸로 흐르는 미친 물결을 되돌렸으니, 선생은 유학에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障百川而東之, 迴狂瀾於旣倒, 先生之於儒, 可謂有勞矣.〕"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강한(江漢) 돌아간 스승의 큰 덕을 칭송하는 말이다. 공자가 죽은 뒤에 제자들이 유약(有若)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공자를 섬기던 예로 그를 섬기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스승의 도덕을 칭송하며 거부하기를 "안 된다. 공자께서는 강한(江漢)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여 더할 나위가 없으시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곡소리가 이어지지도 못하여 원문의 '불의(不偯)'로, 기운이 다하여 곡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효경(孝經)》 〈상친장(喪親章)〉에, "효자가 부모상을 당해서는 곡을 할 때 곡소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으며 예를 행할 때 꾸미지 않으며, 말을 할 때 수사를 부리지 않는다.〔孝子之喪親也, 哭不偯, 禮無容, 言不文.〕"라고 하였다. 죽을……마셨으니 상례의 절차를 지켰다는 뜻이다. 《예기》 〈간전(間傳)〉에 "부모의 상에 우제와 졸곡제를 마치고서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으며, 기년에 소상제를 지내고서 채소와 과일을 먹으며, 또다시 기년에 대상제를 지내고서 초장이 있으며, 한 달을 사이하여 담제를 지내는데 담제를 지내고서 단술을 마신다.〔父母之喪, 旣虞卒哭, 疏食水飮, 不食菜果, 期而小祥, 食菜果, 又期而大祥, 有醯醬, 中月而禫, 禫而飮醴酒.〕"라고 하였다. 천사만종(千駟萬鍾) 사(駟)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뜻하며 종(鍾)은 용량의 단위로 한 섬에 해당한다. 따라서 천사만종은 아주 많은 봉록을 가리킨다. 구학(溝壑)의 뜻 '구학(溝壑)'은 도랑을 말하는 것으로,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학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아니하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지조를 굳게 지키는 것을 비유한다. 쌀독이 자주 비는 원문의 '누공(屢空)'으로, 가난한 살림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안회(顔回)는 거의 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자주 쌀독이 비었다.〔回其庶幾乎, 屢空.〕"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先進》 산재(散齊)와……듯했다 제사를 정성껏 치른 것을 말한다. 제사 때 재계(齋戒)하면서 선조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정성을 이른다. 정성이 간절하면 이에 감응하여 선조가 눈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안에 치재를 하고 밖에 산재를 해서, 제사하는 날에 제사하는 분의 거처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뜻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즐거워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기호하시던 것을 생각해서, 재계한 지 3일이 되면 비로소 위하여 재계했던 분 즉 선조를 볼 수 있는 것이다.〔致齊於內, 散齊於外, 齊之日,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嗜, 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라고 보인다. 또 《예기》 〈제통(祭統)〉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산재 7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고, 치재 3일로써 재계하는 것이다. 안정시킴을 재(齊)라 하니, 재(齊)란 정밀하고 밝음의 지극한 것이니, 그런 후에 신명과 교접할 수 있다.〔散齊七日以定之, 致齊三日以齊之, 定之之謂齊, 齊者精明之至也, 然後可以交於神明也.〕" 초하루 원문의 '길월(吉月)'로, 《논어》 〈향당(鄕黨)〉에 "초하루에는 반드시 조복을 입고 조회에 나갔다.〔吉月, 必朝服而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감실(龕室) 사당(祠堂) 안의 신주(神主)를 봉안(奉安)하는 곳이다. 날개를……가지런하였다 걸음걸이가 단정했다는 뜻이다. '익여(翼如)'와 '첨여(襜如)'는 모두 《논어》 〈향당(鄕黨)〉에 나오는 표현이다. "옷의 앞뒤 자락이 가지런하셨다.……나아갈 적에는 날개를 편 듯하셨다.〔衣前後襜如也.……趨進翼如也.〕"라고 하였다. 나물을……한다〔咬菜做事〕 청빈하게 살면서도 뜻을 잃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캐 먹고 살 줄만 알면, 어떤 일이라도 모두 행할 수 있다.〔人常咬得菜根, 則百事可做.〕"라는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의 말을 듣고는 강후(康侯) 호안국(胡安國)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는 말이 송(宋)나라 여본중(呂本中)의 《동래여자미사우잡지(東萊呂紫微師友雜志)》에 나온다. 법도를 빠뜨리지 원문의 '누알(漏戞)'로, '알(戞)'은 법도의 뜻이다. 《서경》 〈강고(康誥)〉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크게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不率大戛.〕"라는 용례가 있다. 은거하였다 용행사장(用行舍藏)의 준말로, 자신의 도를 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여 조정에 나아가기도 하고 은거하기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의 "써 주면 나의 도를 행하고 써 주지 않으면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경(主敬) 성리학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정이(程頤)는 주경 공부를 학문의 요체로 파악하면서 '경'을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정제엄숙(整齊嚴肅)'이란 외모를 말끔히 정돈함으로써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묶는 것이고, '주일무적(主一無適)'이란 마음을 한 지경에 집중시켜 어느 쪽으로도 이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조사존망(操舍存亡) 마음을 잡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맹자》 〈고자 상〉에 "공자가 말하기를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달아난다. 들어오고 나감에 일정한 때가 없어 그 방향을 알 수 없다.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 말이다.〔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하였다. 시조리(始條理) 조리(條理)를 시작하다는 것으로,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집대성이란 음악을 연주할 적에 금으로 소리를 퍼뜨리고 옥으로 거두는 것이다. 금으로 소리를 퍼뜨리는 것은 조리를 시작함이요 옥으로 거두는 것은 조리를 끝냄이다.〔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 金聲也者, 始條理也, 玉振之也者, 終條理也.〕"라고 보인다. 마음을……밝아진다〔存久自明, 何待窮索.〕 이는 정명도(程明道)의 〈식인편(識仁篇)〉 첫머리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궁격(窮格) 궁(窮)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格)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한다. 기름에……새기는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수로(殊路)〉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보람은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용자부(勇字符) '용(勇)'이라는 글자를 경구로 삼는 것이다. '자부(字符)'는 경전(經傳)이나 고인의 글 중에서 뽑아 자신의 학문과 덕행을 닦기 위해 지표로 삼는 경구(警句)를 말한다. 굳세고 강직한〔行行侃侃〕 《논어》 〈선진(先進)〉에 "민자가 옆에서 모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자로는 굳세었고 염유와 자공은 강직하니,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 行行如也, 冉有子貢, 侃侃如也, 子樂.〕"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간곡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切切偲偲〕 《논어》 〈자로(子路)〉에 "붕우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며 형제간에는 화락하여야 한다.〔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하였다. 당우(唐虞)의 임금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가리킨다. '당우'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시대로, 곧 요순(堯舜) 시대를 가리킨다. 고기직설(皐虁稷契) 현신(賢臣)들을 가리킨다. 순 임금의 신하로 법의 집행을 맡았던 고요(皐陶), 전악(典樂)으로서 교육과 음악을 전담한 기(虁), 후직(后稷)으로서 농업을 담당한 직(稷), 민정 장관이라 할 사도(司徒)의 직책을 관장한 설(契)을 가리킨다. 토론 원문의 '도유우불(都兪吁咈)'로, 본래 군주와 신하가 서로 자유롭게 정사를 의논하고 의견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도(都)와 유(兪)는 찬성의 의미, 우(吁)와 불(咈)은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우가 말하였다. '아, 훌륭합니다. 황제시여. 자리에 있을 때를 삼가소서.' 제순(帝舜)이 말씀하셨다. '그 말이 옳다.'〔禹曰都帝, 愼乃在位, 帝曰兪.〕"라고 하였다. 또 《서경》 〈요전(堯典)〉에 "화제가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말이 옳지 않다.'〔帝曰吁, 咈哉.〕"라고 하였다. 천하에……않는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다. 삼백삼천(三百三千) 예의 조목이 많음을 형용하는 말로,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가 삼천 가지인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성경 한 가지일 뿐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고 하였다. 수사(洙泗) 수강(洙江)와 사강(泗江)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강이다. 공자의 고향에 이곳과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공자의 학문 내지 학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명덕(明德) 《대학장구》 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라고 하였다. 주희(朱熹)는 "사람이 하늘에게서 얻은 것으로 텅 비고 영묘하며 어둡지 않아 온갖 도리를 갖추고서 온갖 일에 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풀이하였다. 달도(達道) 천하에 공통된 도를 말하는데, 《중용장구》 제20장에 "천하의 달도가 다섯 가지인데 이를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군신간, 부자간, 부부간, 형제간, 붕우간의 사귐 이 다섯 가지는 천하의 달도요, 지, 인, 용 이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敎也. 五者天下之達道也, 智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라고 하였다.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말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천거장을 올리는〔薦剡登徹〕 '섬(剡)'은 원래 진한(秦漢) 시대에 회계군(會稽君)에 속한 현인데, 그곳에서 종이가 생산되었다. 옛날에 그 섬지(剡紙)에 추천하는 글을 적었으므로 '천섬(薦剡)'이 추천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등철(登徹)'은 상주문(上奏文)을 임금에게 올린다는 말이다. 칠조개(漆雕開)처럼……없습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하도록 권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 하니, 공자가 기뻐하였다.〔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라고 하였다. 서석산(瑞石山)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 기우(沂雩) 기수(沂水)와 무우(舞雩)를 가리키는데, 초연히 산수 간에 노니는 즐거움을 언급할 때 나오는 지명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계원(啓元) 문송규(文頌奎)의 자이다. 하락이수(河洛理數) 《주역》의 상수역(象數易)을 말한다. 소 장공(蘇長公)이……교정한 소 장공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경칭이다. 낙전(樂全)은 북송의 문신인 장방평(張方平)의 호인데 소식이 평생 은인으로 여긴 사람이다. 소식(蘇軾)이 지은 〈낙전선생문집서(樂全先生文集敍)〉에 "오직 공의 문집을 구하여 내가 손수 교정해서 집에 보관하고, 또 그 대략을 논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릴 뿐이다.〔獨求其文集, 手校而家藏之, 且論其大略, 以待後世之君子.〕"라고 한 내용이 있다. 문장은……같았다 평이하면서도 맛이 깊었다는 것이다. 포백(布帛)은 옷감이고 숙속(菽粟)은 곡물인데,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송사(宋史)》 권127 〈정이열전(程頣列傳)〉에 정자를 찬미하여 "그 말씀의 아름다움이 포백과 숙속 같았다.〔其言之旨, 若布帛菽粟然.〕"라고 하였다. 은미한……글 죽은 이의 덕을 드러내는 행장이나 묘지명 같은 글을 말한다.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학문을 널리 익히고 예로써 행동을 단속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부자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하였다. 넘치지 저본에는 "隘"로 되어 있으나, 《대곡유고(大谷遺稿)》 권6 〈傳〉과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는 "溢"로 되어 있어 고쳐 번역하였다. 대대(對待) 서로 상반되는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역》에서 음(陰)과 양(陽)을 대대관계(對待關係)라고 한다. 몸속에……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근사록집해》 권1 〈도체(道體)〉에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미발(未發)의……이발(已發) 성리학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기 이전을 '미발(未發)', 이미 일어나서 동(動)할 때를 '이발(已發)'이라고 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라고 보이는데, 주자(朱子)는 "희ㆍ노ㆍ애ㆍ락은 정(情)이니, 이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으면 성(性)이다. 중(中)은 성(性)의 덕이고 화(和)는 정(情)의 덕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이후로 희ㆍ노ㆍ애ㆍ락은 정(情)으로 마음이 이발(已發)한 상태를 이르고, 성(性)은 마음이 미발(未發)인 상태를 이르게 되었다. 공정하면……된다 《근사록집해》 권1 〈도체(道體)〉에 "공정하면 하나가 되고 사사로우면 만 가지로 달라지니, 인심이 사람의 얼굴처럼 각기 다른 것은 다만 사심 때문이다.〔公則一, 私則萬殊, 人心不同如面, 只是私心.〕"라고 한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고요한……있다 《근사록집해》 권4 〈존양(存養)〉에 "고요한 뒤에 만물이 자연히 모두 봄의 뜻이 있을 볼 수 있다.〔靜後, 見萬物自然皆有春意.〕"라고 한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명(命)을……없다 《논어》는 〈요왈(堯曰)〉의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라는 공자의 말을 가리킨 것이다. 기수(氣數) 사람의 길흉(吉凶)ㆍ화복(禍福)의 운수를 말한다. 유기(游氣) 구름, 아지랑이, 안개 등등 공중에 떠다니는 기운을 말한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자신의 사욕을 이겨 천하의 공도(公道)인 예(禮)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하였다. 강경(剛勁) 저본에는 '剛輕'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剛勁'의 잘못인 듯하다. 시기하고 '기극(忌克)'은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는 것이다. 《좌전(左傅)》 희공(僖公) 9년에 "사사로이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으며 의심을 품지도 않고 이기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夷吾의 말에는 의심과 이기려는 뜻이 많으니, 나라를 안정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無好無惡, 不忌不克之謂也. 今其言多忌克, 難哉.〕"라고 하였다. 일본(一本)은 ……유행이다 일본은 하나의 근원으로, 도(道)의 본체이고 그것이 드러나는 현상은 만 가지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일본만수(一本萬殊)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소자(邵子)가……것이다 소자의 말은 《격양집(擊壤集)》 권14 〈관물음(觀物吟)〉에 "체는 천지 이후에 확립되었고 용은 천지 이전에 일어났다.〔體在天地後, 用起天地先.〕라고 보인다. 《근사록집해》 권1 〈도체(道體)〉에 인용되어 있다. '소자'는 소옹(邵雍)으로, 북송의 성리학자인데 《주역》에 정통하였다. 통체의 태극이 각구(各具) '통체'는 총체 혹은 전체라는 말과 같고, '각구'는 만물 속에 각기 하나의 태극이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대개 합해서 말하면 만물 전체가 하나의 태극이요, 나누어 말하면 일물이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라는 주희의 말이 나온다. 준기(準基) 박준기(朴準基)로 자는 경립(景立)이며 정의림의 문인이다. 거울을 닦는 방도 마음을 닦는 방도를 비유한 것이다. 주정설(主靜說) 마음을 고요히 하여 외물(外物)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주자(周子)는 송나라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로,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성인은 중ㆍ정ㆍ인ㆍ의로써 정하되 정(靜)을 주로 하여, 사람의 극을 세우셨다. 〔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立人極焉.〕"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희는 주정이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안정시켜 스스로 주재(主宰)가 되게 한 것이다.〔正是要人靜定其心, 自作主宰.〕'라고 설명하였다. 《朱子語類 卷94 周子之書》 대본(大本) 하늘이 명한 성(性)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이 미발한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해서 다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니, 중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하였다. 주희는 이 구절에 대해 주석하기를 "대본은 하늘이 명한 성이니, 천하의 이치는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도의 체이다.〔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 皆由此出, 道之體也.〕"라고 하였다. 영남의 삼가(三嘉) '영우(嶺右)'는 경상우도(慶尙右道)로 조선 시대 경상도의 서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삼가(三嘉)'는 합천(陜川)의 옛 이름이다. 위문 1889년(고종26) 3월에 모친상을 당한 정재규를 위문한 것이다. 술과 고기 원문의 '노주(臑酒)'는 본래는 난주(暖酒)인데 데운 술을 말하고, '자오(炙鼇)'는 구운 자라인데 고기를 비유한 것이다. 《소학(小學)》 〈가언(嘉言) 광명륜(廣明倫)〉에, 송나라 여릉왕(廬陵王) 의진(義眞)이 무제(武帝)의 상중에 있으면서 장사(長史) 유침(劉湛)이 들어오자 장사 유침이 들어오자 '술을 데우고 바다조개를 굽도록 하자〔命臑酒炙車螯〕' 유침이 일어나면서 '이미 예로서 자처하지도 못하고 또 능히 예로서 남을 대하지도 못하십니다.〔旣不能以禮自處, 又不能以禮處人.〕'라고 한 일이 나온다. 월고(月臯) 조성가(趙性家)의 호이다. 자는 직교(直敎),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지리산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한말의 급변하는 과정에 유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이다. 사후에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7)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호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이다.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살았다.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성현(聖賢)이……세우셨다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지은 〈춘추전서(春秋傳序)〉에 "2제(堯‧舜) 이전에는 성현이 대대로 나와서 때에 따라 작위를 하시되 풍기를 마땅하게 맞추고, 하늘의 뜻에 앞서서 사람을 깨우쳐주지 않고 각각 때에 따라 정사를 세우셨다.〔二帝而上, 聖賢世出, 隨時有作, 順乎風氣之宜, 不先天以開人, 各因時而立政.〕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近思錄 卷3 致知》 대박(大樸) 태초의 질박한 대도(大道)를 말한다. 사자(四子)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언행록이라 할 《논어》, 《대학장구》, 《중용장구》, 《맹자》를 가리킨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05에 "사자는 육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요, 《근사록》은 사자로 올라가는 계단이다.〔四子六經之階梯, 近思錄四子之階梯.〕"라고 하였다. 낙건(洛建) 낙양(洛陽)과 복건(福建)으로, 정자(程子)는 낙양에서 살고 주자(朱子)는 복건에서 살며 강학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 원문의 '청익(請益)'으로,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솔선할 것이며 부지런히 해야 한다' 하자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셨다.〔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曰, 無倦.〕"라고 하였다. 흥국사(興國寺)와 아호사(鵝湖寺)의 즐거움 학문을 강론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원문의 '흥국(興國)'은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로 북송(北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에 있던 사찰인데, 북송의 대학자들인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이곳에서 종일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二程遺書 卷2 上》. '아호(鵝湖)'는 신주(信州)에 있는 사찰 아호사(鵝湖寺)를 말하는데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이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宋史 卷434 陸九淵列傳》 서석산(瑞石山)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 3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나라를 말하는데, 이 시대를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여긴다. 상서학교(庠序學校) 중국 고대의 교육기관으로, 상은 주(周)나라, 서는 상(商)나라, 교는 하(夏)나라, 학은 삼대(三代)가 모두 동일했다. 《孟子 滕文公上》 액운 원문의 '양구(陽九)'로, 흔히 큰 액운을 뜻한다. 4617년을 주기로 순환하는 1원(元)에서 106년에 처음으로 발생되는 양액(陽厄)을 가리키는 말이다. 《漢書 卷21上 律歷志上》 현송(絃誦) 수업하고 송독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에 《시경(詩經)》을 배울 때에 거문고와 비파 등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로 불렀는데 이를 현가(絃歌)라 하고, 악기의 반주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 하였는데, 이 둘을 합하여 '현송(絃誦)'이라고 칭한다. 제기(祭器) 원문의 '준조(樽俎)'는 제사(祭祀) 때에 술을 담는 '준(樽)'과 고기를 담는 '조(俎)'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제수를 가리킨 것이다. 회전(會戰)한……청명하듯 적을 정벌한 것을 말한다. 《시경》 〈대명(大明)〉에 "이때 태사(太師) 상보(尙父)가 마치 매가 날 듯하여, 저 무왕 도와서 상나라를 정벌하니, 하루아침에 아침 청명했도다.〔維師尙父, 時維鷹揚, 涼彼武王, 肆伐大商, 會朝淸明.〕"라고 하였다. 징비(懲毖) 지난 일을 교훈 삼아 훗날의 일을 삼간다는 뜻이다. 《시경》 〈소비(小毖)〉에 "내가 징계를 당했으므로 훗날의 일을 삼가노라.〔予其懲而毖後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왕정을 펴게 하소서 원문의 '순선(旬宣)'으로, 《시경(詩經)》 〈대아(大雅) 강한(江漢)〉에, "임금이 소호에게 명하시어 정사를 두루 펴라 하시다.〔王命召虎, 來旬來宣.〕"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지방관이 왕정(王政)을 펴는 것을 말한다. 학규(學規)는 백록(白鹿)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을 다스릴 때 손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정하고 여기에서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동규(白鹿洞規)이다. 《朱子大全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규약(規約)은 남전(藍田) 중국 북송(北宋)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인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을 말한다. "덕과 업을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한다.〔患難相恤〕"라는 등의 네 조목을 골자로 하는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善行》 길일을 택하여 원문의 '길견(吉蠲)'으로, 《시경》 〈천보(天保)〉에 "길일을 잡아 정결히 술밥을 지어 이것을 효성으로 제향하네.〔吉蠲爲饎, 是用孝享.〕"라고 하였다. 결코 굴하지 않겠다〔栢舟靡他〕 '백주(柏舟)'는 《시경》 〈용풍(鄘風)〉의 편명으로, 본래는 과부가 죽을지언정 개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읊은 것인데, "둥둥 떠 있는 저 잣나무 배여, 황하 가운데에 있도다. 저 다팔머리 드리운 분이시여, 실로 나의 짝이시니, 죽을지언정 맹세코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으리라.〔汎彼柏舟, 在彼中河. 髧彼兩髦, 實維我儀. 之死, 矢靡他.〕"라고 하였다. 곤궁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澤水不懼〕 원문의 '택수(澤水)'는 《주역》의 〈곤괘(困卦)〉로, 곤궁한 상황을 말한다. 《주역》의 〈곤괘(困卦) 상(象)〉에 "못에 물이 없음이 곤이니, 군자가 본받아 명(命)을 지극히 하여 뜻을 이룬다.〔澤无水困 ,君子以, 致命遂志.〕"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전(程傳)에서 "군자가 곤궁할 때를 당하여 방비하고 염려하는 도(道)를 다하였음에도 면할 수 없다면 이는 명(命)이다. 마땅히 명을 미루어 지극히 하여 뜻을 이루어야 한다. 명의 당연함을 알았다면 궁색(窮塞)과 화환(禍患)에 마음을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의(義)를 행할 뿐이다." 하였다. 원수와……하는 원수를 갚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부모의 원수에 대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자며 벼슬하지 않고 더불어 천하를 함께하지 않는다. 시장과 조정에서 만나면 병기(兵器)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고 싸운다.〔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諸市朝, 不反兵而鬪.〕"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청구(靑邱)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질그릇으로……나으며 차라리 정의(正義)를 위해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강한 절의를 비유한 말이다. 《북제서(北齊書)》 권41 〈원경안열전(元景安列傳)〉에 "대장부가 차라리 옥그릇으로 부서짐을 당할지언정,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大丈夫, 寧可玉碎, 不能瓦全.〕"라고 하였다. 물고기도……좋겠는가 생사(生死)의 선택에 있어 구차히 살기보다 떳떳하게 의리(義理)를 따라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원하고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가지겠다. 삶도 내가 원하고 의리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이다. 어찌……손상하겠는가 험담하고 비방하여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 편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비방하자 자공(子貢)이 "그렇게 하지 말아라.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느니라. 다른 사람의 어짊은 언덕 같아서 넘을 수 있지만 중니는 해와 달 같아서 넘을 수 없느니라. 사람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하나 해와 달을 어찌 손상하리오. 다만 자기의 분수를 알지 못함을 보일 뿐이로다.〔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라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율옹(栗翁)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가리킨다. 음(陰)이……않다 이이(李珥)가 〈성호원에 답함〔答成浩原〕〉에서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양이 동하면 이(理)가 동(動)에 타는 것이요 이가 동하는 것은 아니며, 음이 정하면 이가 정(靜)에 타는 것이요 이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陰靜陽動, 機自爾也, 非有使之者也. 陽之動則理乘於動, 非理動也, 陰之靜則理乘於靜, 非理靜也.〕"라고 한 내용이 있다. 《栗谷全書 卷10》 피음사둔(詖淫邪遁) 병폐가 있는 4가 종류의 말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지언(知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맹자(孟子)는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하였다. 전도(顚倒) 저본에는 '顚側'로 되어 있으나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을 참고하여 고쳐 번역하였다. 피음사둔(詖淫邪遁)과 전도(顚倒)되고 창피함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기정진이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에서 "지금 사람들은 '도리(道理)' 두 글자를 아득하여 생각도 논의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몰아내고, 조금만 발현하고 환히 드러난 것이 있으면 한결같이 기(氣)에 속하게 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理氣)를 안다고 하고, 이렇지 않은 사람은 이기를 모른다고 하니, 헛된 이름과 과거의 말로 도를 말하고 이를 말하지만, 그 실상은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아 모든 사물의 본령으로 삼을 뿐이다. 이와 같다면 천하에 다시는 피음사둔이 없을 것이니 전도되고 창피함이 무슨 일엔들 없겠는가. 〔今人驅道理二字於冥漠不可思議之地, 而纔有發見昭著, 一屬之氣. 如此者爲識理氣, 不如此者爲不識理氣, 雖以虛名過去說, 說道說理, 而其實則氣奪理位, 爲萬事本領而已. 若是則天下更無詖淫邪遁矣, 顚倒昌披, 何事不有.〕라고 한 내용을 말한다. 온공(溫公)은 맹자(孟子)를 의심했지만 온공(溫公)은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으로, 맹자(孟子)의 말에 대해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고 산정(刪正)한 《의맹(疑孟)》을 지었다. 그의……권했고 사마강(司馬康)은 사마광의 아들로, 철종(哲宗)에게 말하기를 "《맹자》는 글이 가장 순정하고, 왕도(王道)를 진술한 것은 더욱 살펴보기에 마땅합니다.〔孟子爲書最醇正, 陳王道, 尤所宜觀覧.〕"라고 한 내용이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후집(後集) 권7에 보인다. 유원성(劉元城) 송나라 때의 학자 유안세(劉安世)를 말한다. 원성은 그의 봉호이다. 자는 기지(器之),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이천(伊川)은 명도(明道) 이천(伊川)은 정이(程頤), 명도(明道)는 정이의 형인 정호(程顥)이다. 남헌(南軒)은 오봉(五峰) '남헌'은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으로, 자는 경부(敬夫)이며 남헌은 그의 호이다. '오봉'은 호굉(胡宏)의 호이다. 그의 자는 중인(仲仁)으로 제자로 남헌(南軒)을 두었다.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 '면재'는 송(宋)나라 문신 황간(黃幹)이다. 주자(朱子)의 제자이다.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齋)이다. '고정'은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만년에 거했던 곳으로, 고정서원(考亭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으면서 그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장자(張子)는 석씨(釋氏)에 가깝다 장자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로,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이다. 석씨는 불교를 말한다. 그는 한동안 불교와 도가의 서적을 연구했다가 정호(程灝)ㆍ정이(程頤) 형제와 교제하면서부터 유교 연구에 전념하였다. 정몽(正蒙) 장재(張載)의 저서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논했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 《주역》을 해석한 책으로 정자는 《역전(易傳)》을 지었고, 주자가 다시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지어 서로 차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회재(晦齋)의 보유(補遺)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고, '보유'는 그가 저술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를 말한다. 《대학장구보유》는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朱熹)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분(分)이 없는 일(一)〔無分之一〕 여기서 말하는 '분(分)'과 '일(一)'은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할 때의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말한다. 참고로 노사 기정진은 논란이 되었던 〈납량사의(納凉私議)〉에서 분(分)이 없는 일(一)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제16권 〈납량사의(納凉私議)〉 참조.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명덕(明德) 《대학장구》 경 1장에서 주희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在明明徳〕"를 풀이하면서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明徳者, 人之所得乎天而虚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일본만수(一本萬殊)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 다른 것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증자(曾子)에게 이르기를 "삼아, 우리 도는 한 이치로써 오만 일을 관철시키는 것이다.〔參乎 吾道一以貫之〕" 한 데 대하여,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뿐이니라.〔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충서(忠恕)를 논함에 있어, 서(恕)가 충(忠)에서 분파(分派)되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만수가 한 근본이 되는 것과 한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이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 나가서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서 허다한 지엽이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里仁》 《朱子語類 卷29》 대본달도(大本達道) 대본은 중(中)이고, 달도는 화(和)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 주희(朱熹)의 《대학혹문(大學或問)》 권1 〈경 1장(經一章)〉에 "그 이치로써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원이니 참으로 사람과 물(物)에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없고, 기로써 말하면 바르고 통하는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된다.〔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라고 하였다. 부모가 애써 길러준 원문의 '구로(劬勞)'로, 부모의 은덕을 말한다. 《시경》 〈육아(蓼莪)〉에 "슬프다 우리 부모, 나를 낳아 기르느라 고생이 많으셨네.〔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하였다. 5조약 1905년(광무9) 10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조약(條約)을 체결한 조약을 말한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유소(儒疏) 유생들이 연명(連名)하여 올리던 상소를 말한다. 자정(自靖) 자신의 분의(分義)에 맞게 의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가 망해 가자 미자(微子)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자(箕子)는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게 하면서 사람마다 선왕에게 뜻을 바쳐야 할 것이니,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微子》 서산(西山)과……없도다 현실을 외면하여 피해 숨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한 것이다.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는,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채미가(采薇歌)〉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위(魏)나라 사자(使者)인 신원연(新垣衍)과 담판을 하면서, 만약 포악무도한 진(秦)나라가 황제로 천하에 군림할 경우에는 "동해(東海)를 밟고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말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卷83 魯仲連鄒陽列傳》 입명(立命)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맹자》 〈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절하거나 장수함에 의심하지 않아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림은 명을 세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희의 집주에 "입명은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인위로 해치지 않음을 이른다.〔立命, 謂全其天之所付, 不以人爲害之.〕"라고 하였다. 두어(蠧魚) 책을 갉아먹는 좀인데, 여기서는 서적을 뜻한다. 석과(碩果) 과일나무의 높은 가지 끝에 달려 있는 한 개의 큰 과일로서, 종자가 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군자를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았다.〔碩果不食.〕"라고 하였다. 영광전(靈光殿) 원문의 '영광(靈光)'으로,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공왕(恭王)이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 세운 궁전인데, 홀로 남은 원로(元老)나 석학(碩學)을 비유한다. 후한(後漢) 왕연수(王延壽)의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 서문에 "서경의 미앙과 건장 등 궁전이 모두 파괴되었는데도, 영광전만은 우뚝 홀로 서 있었다.〔西京未央建章之殿皆見隳壞, 而靈光巋然獨存.〕"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여뀌를 머금고 원문의 '함료(含蓼)'로, 쓴 약재인 여뀌를 맛보며 병을 돌본다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선주전(先主傳) 주(注)에 배송지(裴松之)가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인용하여 "인심을 결집하는 이유를 보건대 어찌 단지 술을 버리고 추운 이를 어루만지며 여뀌를 머금으며 병을 돌보는 데 그치겠는가.〔觀其所以結物情者, 豈徒投醪撫寒含蓼問疾而已哉.〕"라고 하였다. 약을 쓰지 않고도 원문의 '물약(勿藥)'으로,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에 "구오는 잘못이 없는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나을 것이다.〔九五, 无妄之疾, 勿藥有喜.〕"라고 하였다. 창해상전(滄海桑田)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할 만큼 큰 변화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본이 조선을 삼킨 것을 비유한 것이다. 떠나시어 원문의 '관화(觀化)'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 〈지락(至樂)〉에 "사람의 생명은 빌린 것이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다. 사생은 주야의 교대와 같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함께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마침 변화가 나에게 미쳤으니 내가 또 어찌 싫어할 것인가.〔生者假借也. 假之而生, 生者塵垢也. 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而化及我, 我又何惡焉?〕"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물고기가……얻지 원문의 '어어득계(於魚得計)'로, 물고기가 강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처럼 자유를 얻은 것을 말하는데, 정의림의 죽음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진인(眞人)을 설명하면서 "개미에게서는 지혜를 버리고, 물고기에게서는 계책을 얻으며, 양에게서는 의지를 버린다.〔於蟻棄知, 於魚得計, 於羊棄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노백 징사(老柏徵士)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를 말한다. '징사'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은사(隱士)를 말한다. 지주(砥柱) 중국 하남성(河南省) 삼문협시(三門峽市)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산으로,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것이 기둥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에 비유된다. 진사(辰巳) 현인(賢人)의 죽음을 의미한다. 후한 때의 경학자(經學者)인 정현(鄭玄)이 어느 날 공자가 "일어나라, 일어나라, 금년의 태세는 진에 있고, 내년의 태세는 사에 있다.〔起, 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일러 준 꿈을 꾸고 나서 참서(讖書)로 맞추어 보고는 스스로 자기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는데, 이윽고 병이 깊어져서 죽었기에, 뛰어난 사람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뒷전 원문의 '사력(沙礫)'으로, 모래와 자갈인데, 자신의 지식이 뒤떨어졌다는 겸사이다. 진(晉)나라 왕탄지(王坦之)와 범계(范啓)가 서로 앞을 양보하면서 걸어가다가 뒤에 처지게 된 왕탄지가 "곡식을 까불며 바람에 날리면 겨와 쭉정이가 앞에 있게 마련이다.〔簸之颺之, 糠粃在前.〕"라고 한마디 하자, 범계가 "조리질을 하며 물에 흔들면 모래와 자갈이 뒤에 있게 마련이다.〔淘之汰之, 沙礫在後.〕"라고 응수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排調》 죽는……하십니까 자신보다 앞서 죽었다는 뜻이다. 원문의 '반진(返眞)'은 죽음을 말한다. 송나라 진관(秦觀)의 〈한추밀부인만사(韓樞密夫人挽詞)〉에 "천상에서 화려한 큰 집이 열렸는데 홀연 구산의 참다운 세계로 돌아갔네.〔天上華屋開 丘山忽返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0제자가……어그러지고 '70제자'는 공자의 걸출한 제자들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부자께서 돌아가시자 미언이 끊어졌고, 70제자가 죽자 대의가 어그러졌다.〔夫子沒而微言絶, 七十子喪而大義乖.〕"라고 하였다. 상응하는 예우 원문의 '선가(善價)'로, 좋은 값인데 능력에 상응하는 예우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궤에 담아서 감춰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파시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니, 공자가 "팔겠다, 팔겠다. 그러나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하였다. 서운해……없었으나 《논어》 〈학이(學而)〉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말과,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함이 없고, 세상이 즐거우면 도를 행하고 세상이 걱정스러우면 물러난다.〔不見是而無悶, 樂則行之, 憂則違之.〕"라고 한 것을 말한 것이다. 치암(恥庵) 《일신재집(日新齋集)》 권14에 〈치암기(耻庵記)〉에 자가 윤여(允汝)로 나오고, 권5 〈김윤여에게 답함-규홍-〔答金允汝-奎洪-〕〉라는 편지를 참고할 때 김규홍의 호가 치암이고, 자가 윤여인 듯하다. 홍승완(洪承渙) 《일신재집(日新齋集)》 문인록에 자가 사증(士拯)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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