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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소 서장병갑에게 답함 계해년(1923) 7월 答近小徐丈柄甲 ○癸亥七月 이전에 받은 편지에서 최병심(崔秉心)의 비문(碑文)94)에 대해 악을 편든다고 의심하셨는데, 일이 사실과 어긋나니, 군자가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됨95)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계화도에서 뵙고 대략 의리와 사실을 들어 아뢰었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쯤은 이미 훤히 알아 마치 구름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보는 것 같겠지요? 아니면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중에 있으십니까? 제가 어른에 대해 비록 노소(老少)의 다름은 있으나 삼가 도의로써 서로 기대하고자 합니다. 이제 심술(心術)과 크게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 어찌 서로를 알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우러러 받들어 질정하니, 대략 더불어 설파해 주셔서 답답함을 풀어주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前承下狀, 疑以黨惡於崔碑.事涉爽實, 不免'君子一言之不知.' 故頃於華拜, 略擧義理事實, 以稟白矣.未審今已快悟, 若披雲覩青? 抑尙在信疑之間耶? 澤述於丈, 雖有老少之異, 竊欲以道義相期.今於心術大關, 豈容不相悉之至此乎? 茲以仰質, 略與下破, 開鬱至望. 최병심(崔秉心)의 비문(碑文) 최병심이 간재를 대신하여 지은 〈율헌최공신도비문(栗軒崔公神道碑文)〉을 말한다. 율헌은 최병심의 선조 최득지(崔得之, 1379~1455)의 호이다. 오진영이 이 비문에 대해 〈편질동문제공(徧質同門諸公)〉에서 신도비문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라의 법도를 어겼고 식자들의 시비를 범했다."라고 비난하여 양측의 갈등이 심해졌다. 군자가……됨 이 말은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나온다.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되기도 하니,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君子一言以為知, 一言以為不知, 言不可不愼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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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기 【갑술년(1934)】 惺軒記 【甲戌】 고요한 가운데 어둡지 않은 것을 성(惺)이라 일컬으니 별이 밤에 밝게 빛나기 때문에 별 성(星) 자를 따른 것이다. 불가에서는 "주인공아 깨어있는가?"82)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개 유가와 불가는 비록 다르지만 모두 고요함의 공력이 있다. 그러므로 주자는 "그 도가 되는 까닭은 다르지만, 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깨어있게 하는 것은 똑같다."83)고 말했다. 율곡옹이 학문에 대해 논의한 데 이르러서도 '성성이란 어둡고 혼미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을 계승했다. 이에 '성성(惺惺)'이란 두 글자는 유학에서 하나의 대관(大關)이니 이에는 다른 말이 없다.지금 성헌(惺軒) 김공은 아침저녁으로 이를 염두에 두고 사는 곳에 편액으로 써서 걸어두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는 공부하는 데에 매우 절실했던 것이다. 그 절도와 기상은 선배들이 논했던 '가볍게 비춰 살펴보며84) 밝은 빛이 사방을 꿰뚫는다.'는 부류이니, 응당 애써 공부하고 체험한 바가 있었을 터임은 내가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내가 듣건대, 고요하면서 지각이 어둡지 않으면 움직이면서 품절(品節)이 어긋나지 않는다 한다. 대개 품절이 어긋나고 맞는 것은 일념의 기미 사이에 있어서, 사람이 미리 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고, 반드시 몸을 움직이고 일에 시행한 연후에야 어긋남과 맞음이 모두 다 드러나게 된다. 공은 유현(儒賢)의 가문에서 배우고 임천(林泉) 사이에 숨어 살았다. 평소의 행동에 의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적었으니 고요함의 공력을 바탕으로 지녀 거처에 걸린 편액의 의미에 능히 부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듣건대, 공은 배우면서는 항상 못 미칠 것을 걱정하고 덕은 만년에 더욱 높았다고 한다. 공의 지향으로 보면, 마땅히 자신이 능한 바에 안주하지 않고 그 이르지 못한 바를 늘리지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고요함이 성성하여 지극한 중(中)에 이르고, 움직임이 절도에 맞아 지극한 조화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 사고의 직분을 모두 갖추고 평소에 바라던 바를 이루었던 것이다.아! 위나라 무공(武公)은 나이가 많아서도 경계의 시 〈억(抑)〉편을 듣고,85) 공자는 성인이었지만 《주역》 공부 마치기를 소원으로 가졌다.86) 공은 연로하여서도 현철하니 아직도 더 애써 보실 만하다. 靜中不昧之謂惺, 星夜明, 故從星。 佛家言: 主人翁惺惺否? 敬是常惺。 惺法, 上蔡亦有語。 蓋儒佛雖殊, 俱有靜功。 故朱子曰: 其所以爲道則異, 所以喚醒此心則同。 至於栗翁論學, 則繼之以惺惺無昏昧之說。 於是乎惺惺二字爲儒學一大關, 而無異辭焉。 若今惺軒金公之日夕念玆, 至揭以扁居, 則其亦切於爲學者歟! 其節度氣象, 前輩所論輕輕照顧、炯炯四徹之類, 自應有用功體驗者矣, 吾不贅焉。 但竊聞靜而知覺不昧, 則動而品節不差. 蓋品節差中, 已在一念幾微之間, 而有非人之得以盡知者, 必待動之以身, 行之於事, 然後差中畢見。 公學於儒賢之門, 隱居林泉之間, 生平行動鮮不由義, 足以見靜功有素, 而能副扁居者。 但又竊聞學常恐其不及, 德彌高於晩節。 以公之志, 宜不安於己能, 而不增其未至也。 必也靜不昧, 而至於致中, 動中節而至於致和, 然後盡顧思之分職, 而酬平日之願念矣。 噫! 衛武之耄焉, 而進抑戒之詩, 孔子之聖焉, 而有卒易之願。 公雖老且賢尙可以加勉。 주인공아 깨어있는가 주자는 〈경재잠(敬齋箴)〉을 설명하면서 "서암화상(瑞巖和尙)은 날마다 '주인공아 성성(惺惺)히 깨어 있는가?[主人翁惺惺否]'하고 묻고 또 스스로 '성성하다[惺惺]'라고 대답한다."고 하고,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못한다."고 하였다. 그 도가……똑같다 주자가 서암화상의 일을 언급했을 때 누군가 질문하자 대답한 말을 채용하였다. [或問: 佛氏亦有此語.曰: 其喚此心則同, 其爲道則異.吾儒喚惺此心, 欲他照管許多道理.佛氏則空喚惺在此, 無所作爲, 異處在此。] 가볍게……살펴보며 이이가 성을 논하면서 "미발할 때의 기상을 가볍게 살펴보면 학문에 나아가고 마음을 기르는데 유익하다.[輕輕照顧未發時氣象, 則於進學養心,必有益。]"고 하였다.《聖學輯要》〈修己第二中〉 위 나라……듣고 춘추 시대 위 무공(衛武公)이 80이 넘은 나이에 자신을 경계하는 내용의 시 《시경》〈억(抑)〉편을 짓고 신하들을 시켜 날마다 곁에서 낭송하게 하였다 한다. 《국어》〈초어(楚語)〉 공자……가졌다 공자가 말년에 "내가 몇 년을 더 살아서 마침내 《주역》을 배운다면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고 했다. 《논어》〈술이(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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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재기 【갑술년(1934)】 一松齋記 【甲戌】 마음 하나에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는데 서민(庶民)은 어둡고, 오직 군자만이 알아서, 그것을 따라 덕을 이룬다. 다른 물건에 견주어보면 그 이치가 서로 비슷한 것이 있는데, 내가 비유해 볼 수 있다.당초에 방환정(房煥正) 공87)은 한 그루 반송이 큰 서까래와 작은 문설주 등의 재목감을 다 갖추었음을 보고, 그것을 가져다 은거하는 곳에 세 칸 집을 지었는데, 다른 나무는 쓰지 않았다. 심지어 죽은 후에 쓸 관의 널빤지에도 그것을 썼다. 이것은 군자가 덕을 이루는 것과 비슷하니, 한 마음 안에 효제(孝悌)ㆍ충신(忠信)과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 등이 모두 갖추어진 도리를 따른 것이며, 마음 밖의 다른 것을 빌리지 않았던 것이다.지금 용성(龍城)의 영촌(嶺村)에 있는 일송재(一松齋)가 바로 그 때 지은 것이다. 내가 일찍이 한번 그 집에 이르렀는데 공의 아들 동규가 나에게 그 일을 말해주며 기문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인(仁)을 잘 행하는 자는 외물로 인하여 자신을 살피고, 사람을 잘 보는 이는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을 안다. 듣건대 공은 집안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조행이 있어 종족과 향당의 법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일찍부터 공으로 하여금 성찰과 격물치지로 인을 행하는 공부에 힘쓰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공이 한 마음을 따라 온전한 덕을 이루어 낸 것이 마치 소나무 하나로 온 집을 지은 것과도 같음을 알겠다. 만약 자손들이 공의 집 짓기에서 깨우침을 얻어 덕을 이루고 선조를 빛나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곧 방씨의 일송재가 장차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이에 기문을 쓴다. 一心而具衆理, 庶民昧焉, 惟君子知之, 循之以成德。 就物而譬之, 理有相類者, 吾得以喩之。 始房公煥正相一株盤松, 棟樑之大, 扂楔之細, 材悉備者, 取以作燕處三架屋, 而不用他木。 至於身後壽板, 亦取用於是。 其亦有似乎君子之成德, 循一心中孝弟忠信修齊治平悉具之理, 而不假乎外也。 今龍城嶺村之一松齋卽當日所構者, 余嘗一至其家, 公之子東圭爲余道其事而請記之。 余惟善爲仁者因物而省身, 善觀人者推小而知大。 聞公有正家惠物之行, 爲宗黨法, 早使公致力於省格爲仁之學, 吾知其能循一心成全德, 若相一松而作全屋也。 若子孫取譬於公之作室, 有以成德而光先人, 是則房氏之一松齋將有辭於天下後世矣。 是可以記之。 방환정(房煥正) 호는 면강(勉强)이며,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 영촌마을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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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재기 【갑술년(1934)】 蒙養齋記 【甲戌】 정종섭(鄭宗燮)군이 월악산 아래 재실을 지어 그 아버지가88) 늘그막에 기거할 곳으로 삼고서는 칠사(七舍)89)의 길을 달려와 내게 말하였다: "아버님께서 일찌기 스스로 호를 짓고 구산(臼山 田愚의 호) 어른께서 그것을 위한 설(說)을 지어주셨습니다. 그 호 몽양(蒙養)의 편액을 재실에 걸었는데, 아들인 저는 그것을 기록하고자 합니다."내가 말하기를 "구산 어른의 호설(號說)은 간략하지만 그 내용을 다 갖추었다. 그런데 무엇 하러 기문을 다시 쓰겠는가? 꼭 써야 한다면, 그 호설을 따라가 뜻을 부연하여 마치 경(經)에 전(傳)을 붙이듯 해보면 괜찮을까?대개 몽(蒙)이란 어리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양육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늙어서도 어린이를 자처하며 양육을 바라는 것은 왜인가? 주인장은 옛날의 현자도 소학 동자(小學童子)90)를 자칭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아! 늙은이도 여전히 양육을 바라는데 하물며 혼몽한 어린이에 있어서랴. 이는 실로 스스로를 길러서 혼몽한 선비를 기르고자 함이니 그 뜻이 원대하구나!《주역》의 전에 이르기를, 어릴 때 바름으로써 기르는 것이 성인이 되는 공부91)라고하였다. 어린이가 성인(聖人)이 되고자 한다면 기르지 않을 수 없고, 기르는 것도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름이란 무엇인가? 성리(性理)를 하늘에서 받아 마음에 갖춘 것,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다 마음이 있고 성(性)을 지녔으니, 이 마음으로써 이 성을 배우면 그 바름을 잃지 않음이 마땅하다. 그러나 세상 사람 중에 어리석어 밝지 못한 이들이 많으니, 왜 그런가?구하면서 합당한 정성[誠]이 없고 배우면서 제 방도를 쓰지 않으면, 마음의 지각이 성명(性命)의 이치에 통달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전해주는데 두번째 하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전해주지 않는다.92) 비록 점 치는 사람들의 말이지만 학자가 도(道)를 구함에 있어서도 미루어 생각해 볼만하다. 만약 지극한 정성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실히 생각하고 명료하게 강구하며 이른바 그 바름[正]을 구한다면, 마음의 영대(靈臺)가 본래 갖춘 그것에 신묘하게 통달하여 서둘지 않아도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이다.93) 이 어찌 시초(蓍草)로 점괘 뽑고 신명(神明)께 물어 응답을 얻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은가?이는 곧 양정(養正)의 공부에 노소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니, 구산 어른의 남은 논의를 보충하기에 족할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 아버님께 인사드리고 아뢰어서, 괜찮겠다 하시거든 이것을 몽양재(蒙養齋)의 기문으로 걸어두소. 鄭君宗燮築齋月岳山下, 爲其大人晩暮燕居所。 走七舍, 謂余曰: 大人用曾所自號, 臼山翁爲之說者, 扁齋以蒙養, 子其記之。 余曰: 臼翁說畧而盡矣, 記復何爲? 無已則就其說, 衍其義, 若經之有傳, 可乎? 蓋蒙者, 穉也。 穉之待養, 固也。 老而處蒙, 而欲其養, 何哉? 以古之賢者, 猶稱以小學童子, 主人翁已言之矣。 噫! 老而猶欲其養, 況穉蒙乎? 此實自養而養蒙士者, 其意遠哉! 在易之彖曰: 蒙以養正, 聖功也。 蒙而欲作聖, 不可以不養, 養之又不可以不正。 正者何? 性理之受乎天而具於心者, 是已。 人皆有心有性, 以此心學此性, 宜不失其正。 而世之人多蒙然不明者, 何? 求之不以其誠, 學之不以其方, 心之知覺不能通乎性命之理也。 初告再瀆, 瀆則不告, 雖爲筮者言, 學者之於道, 亦可以反隅矣。 若至誠一意, 愼思明講, 以求所謂正者, 以心之靈通乎所固具者也, 不疾而速。 豈不若揲蓍掛策, 叩神明而得其應哉? 此乃養正之功無間老少, 而足以補臼翁餘論者。 君其歸告於唱喏之際, 如蒙謂然, 請揭此爲蒙養齋記。 아버지 정태환(鄭泰桓)을 말한다. 1865~1937, 본관은 진양, 자는 용구(用九), 호는 몽양(蒙養)이며 함평군 월야에서 태어났다. 전우의 제자이다. 칠사(七舍) 210리로 82.5KM정도의 거리이다. 일사(一舍)는 대개 30리를 말하는데, 옛날 군대가 하루동안 갔던 거리가 이 정도였다고 한다. 《蒙養齋遺稿》 서문에 '몽양 정공이 함평의 월악에 은거했다.[蒙養鄭公隱居咸平之月岳。]'는 내용을 보아, 몽양재가 있는 월악산 아래란 함평 월야면 월악리이다. 함평에서 김택술이 있던 정읍까지의 거리이다. 몽양재는 鄭泰桓(1865-1937)을 말한다. 소학 동자(小學童子) 김굉필(金宏弼)은 평생 동안 《소학》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소학 동자'라고 하였다. 어릴 때……공부 《주역》몽괘(蒙卦)의 단사(彖辭)에 "어릴 때 바름을 기름은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고 하였다. 처음에는……전해주지 않는다 몽괘(蒙卦)의 괘사(卦辭)에 "처음 점친 바는 말해준다. 두번 세번 하면 혼잡해진다. 혼잡하면 말해주지 않는다.[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는 말이 있다. '독(瀆)'은 '濫, 褻, 混雜' 등으로 풀이된다. 신묘하게……것이다 《주역》〈계사전(繫辭傳)〉에 "신묘한 까닭에 서둘지 않아도 신속하고 행하지 않아도 이른다.[唯神也故, 不疾而速, 不行而至。]"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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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당기 孝堂記 효당(孝堂)이란 무엇인가? 효자의 집이다. 효자는 누구인가? 밀양 박씨이고 이름은 종순(宗淳)이며 자는 군화(君和)라는 사람이다. 이름과 자(字)로 말하지 않고 호로 부르는 것은 옛날부터 근거가 있다.무릇 사람이 이름이 있는데도 자(字)를 붙이는 것은 그 이름을 삼가기 위함이다. 그 사람이 덕행이 있어 현저하면 그 자도 아울러 삼가기 위해, 혹은 그 덕행을 일컫고 혹은 사는 마을로 부르기도 한다. 도잠(陶潛)94)의 정절(靖節), 왕통(王通)95)의 문중자(文中子), 주돈이(周敦頤)96)의 염계(濂溪), 정호(程顥)97)의 명도(明道), 정이(程頤)98)의 이천(伊川), 주인궤(朱仁軌)의 효우(孝友)99), 주희(朱熹)의 회암(晦庵)100), 방효유(方孝孺)의101) 정학(正學) 등이 이것이다.지금 박공의 덕을 칭하면서 그가 사는 당실(堂室)에 대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는 어찌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일없는 바를 행하는 것이102) 아니겠는가! 이는 실로 이른바 상의하지 않고 저절로 일치한 것이니, '아이들도 군실(君實)을 말한'103) 것이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아버지가 당(堂)을 지으려 준비하자 그 아들이 그것을 받들어 당을 지은 것이다. 박씨의 선대는 충효로 저명한데, 공이 그것을 계승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당실을 지은 것104)이다. 이제 공의 후예들이 증수(增修)하고 단청(丹靑)하면 이 효당(孝堂)이라는 이름을 대대로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계사년 삼월 하순에 부안 사람 김택술이 효당(孝堂)의 기문을 지어 공의 현손인 운서(雲瑞)에게 고하며 격려한다. 孝堂者, 何? 孝子之堂也。 孝子, 誰? 密陽朴公諱宗淳, 字君和其人也。 不名不字, 而稱號而呼其人, 古有據乎! 曰: 有夫人名而字之, 所以欽其名也。 如其人有德行表著, 幷欽其字, 或稱其德行, 或稱所居之里。 如陶元亮之靖節, 王通之文中子, 周茂叔之濂溪, 程伯子之明道, 程叔子之伊川, 朱仁軌之孝友, 朱元晦之晦菴, 方孝儒之正學, 是也。 今於朴公之稱德於所居, 室堂而呼之也, 豈不爲名正言順, 而行其所無事乎? 此所謂不謀而同, 兒童誦君實也。 抑余竊念若考作堂, 厥子肯堂。 朴氏之先世著忠孝, 公旣繼作室而肯堂矣。 若公後昆增修而丹雘之, 則孝堂之號雖世呼之, 未爲不可云爾。 癸巳窉月下旬, 扶安金澤述作孝堂記, 以告公之玄孫雲瑞而勖之。 도잠(陶潛) 진(晉)나라 때 사람으로, 자가 원량(元亮)과 연명(淵明)이고 오류(五柳)선생 및 정절(靖節)선생으로 부른다. 팽택령(彭澤令)을 하다가,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시골뜨기에게 허리를 굽힐까보냐!" 하며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했다. 왕통(王通) 수나라 때 학자로, 자신의 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들이 '문중자(文仲子)'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 주돈이(周敦頤) 송나라 때 학자로,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애련설(愛蓮說)〉로 유명한 성리학의 비조이자 문학가이다. 정호(程顥) 송나라 때 학자로,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이다. 동생 정이(程頤)와 함께 주돈이의 제자이며, 낙학(洛學)으로 불리는 북송 이학(理學)의 기초를 놓았다. 정이(程頤) 송나라 때 학자 정호의 아우로서, 자는 정숙(正叔)이고 이천(伊川)선생으로도 부른다. 주인궤(朱仁軌) 당(唐)나라 때 학자로, 자는 덕용(德容)이며, 효우(孝友)선생으로도 부른다. 주희(朱熹) 송나라 때 학자로, 자는 원회(元晦)ㆍ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방효유(方孝孺) 명나라 때 학자로, 자는 희직(希直)ㆍ희고(希古), 호는 손지(遜志)이며, 한중부(漢中府) 학교 '정학(正學)'의 교수를 하여 정학선생이라 불린다. 일없는 바를 행하는 것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우 임금이 물을 흘러가게 한 것은 그 무사한 바를 행하심이니, 만약 지혜로운 이가 또한 그 무사한 바를 행하면 그 지가 또한 크다 하겠다.[禹之行水也, 行其所無事也, 如智者亦行其所無事, 則智亦大矣。]"라는 말이 있다. 곧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치대로 행하기 때문에 마치 일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아이들도……말한 박공의 인덕을 아이들도 알았다는 말이다. 군실(君實)은 송나라 때 학자 사마광의 자(字)이다. 소식(蘇軾)이 사마광에 관해 쓴 시에서 "아동들도 군실을 말하고, 하인들도 사마를 아네.[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司馬溫公獨樂園〉]" 라고 하였다. 아버지의……지은 것 《서경(書經)》〈대고(大誥)〉편에 "그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방법을 갖추어 놓았는데, 그 아들이 집터[堂]를 돋우려 하지 않으면, 어떻게 집을 세울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이것을 '作室而肯堂'이라고 압축하여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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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음행기 【신사년(1941)】 安陰行記 【辛巳】 안음은 안의(安義)의 옛 이름이고 지금은 함양군에 속해 있다. 옛날, 아버님 벽봉(碧峯)공께서는 품은 마음이 맑고 너르셨는데 늘 말씀하시기를, "뜻이 맞는 두 서너 사람과 함께 좋은 산수를 유람하는데, 종이 두루마리[詩軸]를 만들어 인부의 품에 가득 안기고 아울러 붓ㆍ먹ㆍ벼루를 동자 등에 지워서, 아름다운 절경 만나면 곧 소회를 펼친 시를 지어 번갈아 수창(酬唱)한다. 그러면서 집에 돌아갈 줄을 잊는다면 그 어찌 즐겁지 않으랴!"고 하셨다.또 이어 말씀하시길, "안의현의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105)은 물과 돌이 남쪽 지방 가운데 가장 이름이 나서, 명현(名賢)과 달사(達士)들이 발걸음을 머무르고, 시인과 가객들이 완상하는 곳이라 한다. 이곳을 참으로 유람해보고 싶은데 미처 하지 못하였다."고 하셨다.아아! 선군계서는 평생 멀리 떠나는 것을 경계하시다가 중년에 수명을 다하시어,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어찌 그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님의 백 가지 중 하나도 못 닮았지만, 유독 산수를 좋아하는 것에는 약간 닮은 점이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비록 빈 겨를이 생겨도 어찌 차마 기뻐하며 선군께서는 미처 못 하셨던 것을 하며 즐기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이 어찌 선비들이 유람하고 구경할 시절인가? 그래서 가는 길이 경유하고 친구들이 요구하여 그럴 기회가 있어도 하지 못 한 것이 여러 번이다.그런데 생각해보니 사람들의 집안에서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시대의 형세가 꼭 다 같지는 않다. 그러면 의리와 관계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 형세에 따라 하는 것이 아마도 죄가 되기까지는 않을 것이다. 또 오늘날 산수는 어찌 다니며 구경만 하는 것인가? 이 또한 높은 봉우리나 깊은 골짜기에서 분기를 토하고 애달픔을 씻어내는 것에 불과하니, 마치 옛 사람이 말한 바의 동쪽 언덕에올라 휘파람 불고106), 황량한 언덕에서 통곡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돌려 금강산, 두류산, 변산, 서석산의 승경들을 모두 거쳐 구경하고 돌아왔는데, 특히 안음에서는 아버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 여러번 마음이 가 뒤돌아 보았다. 대방(帶方 남원)에 사는 족인 성헌(惺軒) 어른이 항상 내게 말하기를, "세 골짜기의 승경을 찾아가는 것은 소원은 아저씨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 골짜기107)란 화림동(花林洞)ㆍ심진동(尋眞洞)ㆍ원학동(園鶴洞)을 말하는데, 바로 위에서 말한 서상동과 북상동이다.작년 가을에 내가 성헌께 가서 앞서의 약속을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병이 난지 여러 삭이 되어 문 밖 출입을 못하셨다. 그래서 다만 길게 탄식하고 돌아왔다. 금년 사월 보름이 지나 남원의 산서(山西)에 갔다가 친구 사유 이한응(士裕李漢膺) 군을 방문했다. 이군은 나이 사십인데 수구(守舊)하였고 시문에 능하였다. 이야기가 세 계곡의 승경지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겨우 백여 리였다. 곧 두 사람의 뜻이 일치하여, 19일에 소매를 나란히 하고 길을 나서 준령을 세 개 넘고 내동(內洞)108)의 가곡(佳谷)에 가서 잤다. 20일에 준령을 두 개 넘어 추천(秋川)에 다다르니 곧 안의의 서상동으로 이른바 화림동이었다. 준령의 길이 험해 절뚝거리는 늙은 다리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터였지만 그래도 능히 버텨 넘긴 것은 종전에 유람을 원했던 마음으로 이겨낸 것이었는데, 스스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이 그 이른바 마음에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하는 것이었을까? 이틀간의 길에서 사유(士裕)와 시 몇 편을 창화(唱和)하였다.추천(秋川)이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족인 상집 김형돈(庠集金炯敦)을 찾아갔는데 마침 집에 없었으니 탄식한들 뭐하겠는가. 이 사람은 평소 의기가 있어 지난해에 의병 이석용(李錫庸)이109) 대구 감옥에서 죽자 빈한한 형편에도 가서 호상(護喪)하며 천리 길을 반장(返葬)110)해 오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었다. 그래서 영남과 호남의 사람과 선비들 모두가 찬탄하며 우러러보았다. 내가 오랫동안 그를 만나보기를 바랬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며, 족인으로서의 정의(情誼)뿐만은 아니었다. 이제 공교로운 엇갈림을 탄식하는 것은 이처럼 의로운 선비가 우리 종족 중에 있는데 생전에 한 번도 못 만날까 걱정해서였다. 이틀 밤을 재미없이 보내서가 아니었고, 완상(玩賞)을 이끌어줄 이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 아들 인철(璘喆)이 예의를 분명하게 차리고 접대함이 은근하여 또한 그 의방(義方)이 본래 온 데가 있음을 알수 있었다.다음 날 부근의 볼 만한 데로 이구평(尼丘坪)이라는 곳에 갔는데 세상에서 일컫기를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장래의 명당이라 하였다. 지대가 높고 평평하여 장유형(長乳形)111)을 이루면서 조금 기울어져 있다. 국세(局勢)는 빙 둘러 싼 환포형(環抱形)112)에 수구(水口)113)가 잠겨있고 안산(案山)이114) 정면에 마주하였는데, 다만 주룡(主龍 주산(主山)의 줄기)이 타고 오르지는 못하여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당국(當局)115)을 살펴보니 기상(氣像)이 썩 명랑하지 않으니, 내 생각에는 땅의 운세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하다. 사방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와서 새 터를 잡았다가 모두 패가하고 되돌아가서 빈 집과 무너진 가옥 몇 개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이 함께 세운 공자 사당 또한 퇴락하여 보존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22일 추천(秋川)을 출발하였다. 주인을 못 본 서운함에 시 한 수를 남겨 마음을 표현했다. 이로부터 남쪽으로 20리 가서 봉전리(鳳田里)에116) 이르렀는데 전씨의 거연정(居然亭)이117) 시냇물 속의 암석 위에 있어 마치 물 위에 배가 떠 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절벽 위에 숲이 무성하고 그늘이 넓고 짙어 당을 덮고 있었다. 돌 사이 푸른 못에서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앉아 있는 자리에 끼쳐오고 사면이 푸른 바위인데다 가벼운 안개가 옷을 적시니 싸늘해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현판에는 고산 임헌회(鼓山任憲晦)118)의 기문, 연재 송병선(淵齋宋秉璿)119)과 심석재 송병순(心石齋宋秉珣)120) 형제의 시가 있어 읽고 읊으며 그윽한 회포를 풀어내 보았다. 사문(斯文)도 상실되고 도(道)도 폐해지고 성세는 멀며 사람이 죽어 없어진121) 때를 당하여 선배들의 성명과 문자를 잠깐이라도 보니 또한 저절로 매우 기쁘고 마치 좋은 시절에 친히 가르침을 받는 듯했다.연재와 심석재 시에 대해 차운한 시 한 수를 썼다. 남쪽을 보니 한 걸음 쯤에 또 정자가 있어 가 보니 '군자'라는 편액122)을 써서 달았다. 금곡 송래희(錦谷宋來熙)의123) 시가 있고 또 전씨의 것도 있었다. 비록 거연정과 지척의 거리에 있지만 경치와 운치는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마치 풍수(風水)를 보는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습이 바뀐다는124) 것일까? 다시 남쪽으로 5리쯤 가 동호정(東湖亭)에125) 이르렀는데 또한 경치가 뛰어난 곳이고 장(章)씨가 지었다. 인철이 여기까지 전송와서 작별하고 돌아갔다. 서상동 구경은 여기서 끝난 것이다. 북상동 수승대(搜勝臺)의 기이한 절경이 세 계곡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인철에게 물어보니, 여기서 60리 정도의 거리라 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구경하지 않고 놓아두겠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거리가 조금 멀고 같이 온 이군이 오랫동안 머무르기 어려운 형편이었고, 또 이끌고 가 설명하며 흥취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근처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부득이 거기 가보기를 그만두었다. 아! 훗날 안문(雁門)의 불우함을126) 보상받을 그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구나.이로부터 동남쪽으로 나아가 안의의 옛 치소(治所)를 돌아보았는데, 광풍제월루(光風霽月樓)가 가히 볼 만했다. 생각해보니 이 곳은 한문장(韓文章)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燕巖朴趾源) 공이 목민관으로 있던 곳이다. 그래서 관청 건물이나 누정에 기문ㆍ제영 문자를 많이 걸었을 터이지만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격변 끝에 탈 없이 보전되지 못하였다. 지금은 그것을 찾아 볼 길이 없어, 다만 강산을 그리고 읊는 감흥으로 배회하며 바로 떠나가지 못 하였다. 다시 서남쪽으로 20리를 가서 덕곡리(德谷里)에 다다르니, 길 옆에 경수정(敬授亭)이 있는데 고려말의 충신인 덕곡 조승숙(德谷趙承肅) 공이 은거하면서 가르치던 곳이다. 그 종노릇 하지 않은 절개127)가 우리 할아버지 군사공(郡事公)128)과 하나임을 생각하여 오언절구 시를 지어 감상을 적었다. 개평(介坪)으로 건너가 정일두(鄭一蠹),129) 노옥계(盧玉溪)가130) 태어나 자란 곳을 물어 알아보고, 효리(孝里)로 가서 동문인 정재경(鄭在璟)131)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져서 여관에서 잤다.다음날 가서 정재경을 그의 새로 지은 거처 문산재(文山齋)에서 만났다. 문산재는 너럭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위쪽으로 작은 시내를 끼고 있고, 구조가 정채롭고 간결하였고, 기와를 덮었다. 몸을 깃들이고 마음을 기르기에 딱 좋은 장소여서 그 만년의 맑은 복을 축하해줄 만하였다. 그가 이끄는 대로 남계서원(灆溪書院)132)을 봉심하고, 강당에서 잠시 쉬고 나서, 다시 풍영루(風咏樓)에 올랐다. 두류산의 천 겹 봉우리와 큰 강의 외로운 배133) 같은 선생의 기상을 생각하며, 당시에 도를 아직 펼쳐보지도 못하고 먼저 사화의 그물망에 걸린 악운에 마음이 아파, 고개를 들었다 떨구며 목이 멜 듯하였다. 남계서원 옆에 청계사(淸溪祠)라는134) 사당이 보였는데 이는 탁영 김일손(濯纓金馹孫)의135) 영령을 모시기 위해 십 수년 전에 건립되었다 한다. 김일손은 평소 정여창을 따라 강론하였고 사화를 당하여 체포된 곳이다. 아! 저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 무리의 죄는 진실로 용납될 수 없으니, 그 때 점필재(佔畢齋 金宗直)가 어떤 글을 지은 것과 김일손이 그 글을 내보인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136) 사람을 시켜 곧바로 하늘에 물어보고 싶다. 남계를 떠나 함양읍에 도달하니 이미 정오였다. 고운 최치원의 숲[孤雲林]137) 안에 들어 더위를 피하니 이는 세상에서 함양 십 리 숲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서쪽으로 30리 가 길에서 족인 형원(炯元)을 만나 그 집에서 잤다. 집은 백전면 평리에 있는데 곧 상집(庠集)의 재종동생이다.다음날 봉현리(鳳峴里)에 이르러 여러 족인들을 방문했다. 여기 사는 족인이 20호 쯤이다. 전에 연재(淵齋) 문인이었던 낙상 김응문(洛相金應文), 낙종김윤중(洛鍾金允仲) 두 사람은 영남 우도의 망사(望士)인데 모두 이 마을에 산다. 지금 비록 그 명성을 이어가는 이가 없으나 또한 모두 능히 삼가고 지조를 지켜 옛 가문의 규범을 잃지 않았는데, 나를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술과 밥을 차려주는데 그 정이 가히 손에 잡힐 듯했다. 이리하여 봉현에 유숙하였다.25일, 준령을 두 개 넘어 장수(長水)의 노단리에 이르러 묵었다. 다음날 마치(馬峙)138)를 넘어 산서 마평에 이르르니 곧 사유 이한응(士裕李漢膺)이 사는 곳이다. 다음날 비가 와서 이한응의 종숙 서산 이풍호(瑞山李灃鎬) 어른을모시고 평온이 담화하고 함께 그 선인의 문집을 보며 보존할 것과 산삭(刪削)할 것을 상의하였다. 29일 마평을 떠나 5월 3일 집에 돌아왔다.이번 여행은 비록 세 골짜기를 두루 다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소원을 이루었고, 화림동을 간 일착도 안 한 것보다는 현명했다. 우리들을 위해 오늘 분기를 토하고 애상(哀傷)한 마음을 씻어내는 밑천으로 삼기에 족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다. 옛날 순임금이 요임금을 애모하여 어쩌다가는 담장 앞에서도 그 모습이 보이고, 국물 위에서도 그 모습이 비쳐 보였다고 하는데, 이 말은 사모함이 지극하면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는 것이다. 불효한 나는 늘 생각하기를,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못 해보셨는데, 나는 지금 이번 여행으로 아버님이 평생에 못 하신 것을 마침내 하고 있구나 하였다. 그러니 어떻게 아버님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산을 보고 물을 보았겠는가. 그런 즉 이 여행은 죄가 되는 데에 이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의 기운으로 감통(感通)하는 선군으로서는 흔연히 기뻐하고 좋아하셨을 지도 모른다. 나는 이리하여 특별히 선군을 생각하며 안음 여행기를 쓴다. 安陰, 安義古號, 今屬咸陽郡。 昔我先君碧峯公衿懷淸曠, 常曰: 與二三同志行遊好山水, 裁成軸紙, 盈一抱者, 幷中山之穎, 絳縣之玄, 端州之石, 載小奚背, 遇佳絶處, 輒賦詩暢懷, 迭相唱酬。 如是而忘歸, 豈不樂哉! 因又曰: 聞安義縣西上洞北上洞, 水石爲南中最, 名賢達士之所留跡, 騷人韻客之所翫賞, 是固所願遊而未能也。 嗚呼! 先君平生戒在遠遊, 壽止中身, 所願竟止於未能, 可勝痛哉! 竊念小子於先君百不一肖, 特於山水之好有畧同者, 然於孤露之後, 雖有暇及之勢, 豈忍自幸遂先君之所未能以爲樂? 矧乎今之日, 豈士子遊觀時哉! 以是道途所經, 知舊所要, 雖有其梯, 而未能焉者亦累矣。 但念人家父子所遭時勢未必皆同, 則除事關義理者外, 自當各隨其勢而爲之者, 恐不至爲罪。 且今日山水, 是遊觀也歟? 亦不過吐氣洩哀於高峯絶磵之際, 如古人所謂東皐舒嘯, 荒岡痛哭而已。 又以是回却前心, 如金剛、頭流、邊山、瑞石之勝旣皆歷覽而歸, 尤於安陰, 以先君有言, 每眷眷焉。 帶方族惺軒翁常謂余曰: 三洞探勝, 願與叔同焉。 三洞者, 花林洞、尋眞洞、園鶴洞, 卽上所謂西上洞、北上洞也。 昨年秋, 余至惺軒, 意其踐前約, 則病已數朔, 不能出門, 只自悵歎而歸矣。 今年四月望後, 過南原山西, 訪舊知李君士裕【漢膺】。 李今年四十, 守舊而能詩文者, 語及三洞之勝, 則此去僅百餘里。 遂兩意一致, 以十九日聯袂登程, 踰峻嶺三, 抵內洞佳谷而宿。 二十日, 踰峻嶺二, 抵秋川, 卽安義西上, 而所謂花林洞也。 嶺峻路險, 老脚蹣跚, 宜不堪其苦, 而猶能支過者, 以從前願遊之心勝, 而不自知也。 豈亦所謂心有所好樂, 則不得其正者耶? 兩日間, 道中與士裕有唱和幾篇。 至秋川者, 爲訪族人庠集【炯敦】, 而適不在家, 何歎如之? 斯人也, 素有義氣, 昔年義將李錫庸之沒大邱監獄也, 以貧寒之勢, 爲其護喪, 千里返葬, 間關盡瘁。 嶺湖人士莫不欽仰。 余久所願見者, 以此也。 非但爲族誼爾。 今歎巧違者, 以若此義士之在吾宗族者, 恐生前之無一面, 非爲信宿之無味, 況翫賞之無指導也! 其子璘喆, 禮數分明, 接待殷勤, 亦見其義方有所也。 翼日行尋近處可觀, 所謂尼丘坪, 世稱將來名基冠國中者也。 當處高平, 成長乳而少傾斜, 局勢環抱, 水口關鎖, 案山正對, 但主龍未及乘, 尋不知如何。 而察其當局, 氣像殊不明朗, 意者地運未回歟? 四方有力人來占新基者, 皆敗家還去, 但有空家破屋幾處, 衆所共建之夫子廟亦頹落而難保矣。 二十二日發秋川, 悵不見主人, 留詩一首以表情。 自是南行二十里, 至鳳田里, 有全氏居然亭者, 在川澗中巖石上, 宛若舟泛水上。 入其中, 則岸上茂林繁陰罨堂, 石間綠潭冷氣逼座, 四面蒼壁輕嵐濕衣, 凜乎其不可留也。 板上有鼓山任先生記, 宋淵齋心石兄弟詩, 且讀且咏, 發舒幽抱。 當此文喪道廢世遠人亡之日, 乍見先輩姓名文字, 亦自喜甚, 宛若親承謦欬, 於無恙日也。 有次淵心韻一首。 見南便一武許, 又有亭, 往觀則扁以君子, 而有宋錦谷【來熙】詩, 亦全氏有。 雖與居然亭同在咫尺, 景狀韻致十不及一。 所謂如看風水移步換形者亦此耶? 又南行五里, 至東湖亭, 亦勝處, 而章氏有也。 璘喆送至于此而別去。 蓋西上洞之觀則止於此矣。 曾聞北上洞搜勝臺之奇絶爲三洞之首, 而問於璘喆, 則此去爲六十里, 豈其欲舍之而不觀? 顧念距離稍遠, 同伴李君勢難久淹, 且無近處人指引說明助發興致者, 以故不免罷其行。 噫! 未知他日補鴈門之踦者, 有其梯歟? 自此東南行, 歷安義舊治, 有光風霽月樓可觀。 念此地乃有韓文章大家燕巖朴公【趾源】字牧處, 凡於官廨樓亭, 想多記題文字, 而滄桑之餘能保無恙否? 無由搜觀, 但興江山文藻之感, 而徊徨不遽去也。 西南行二十里, 至德谷里, 路傍有敬授亭, 麗末忠臣德谷趙公【承肅】隱居敎授處。 念其罔僕之節, 與吾祖郡事公一體, 作詩五絶, 以述感想。 過介坪, 詢知鄭一蠹、盧玉溪生長之跡, 欲前進孝里訪同門人學岡鄭乃薰【在璟】, 而迫昏宿旅舍。 翌日往見乃薰於新築文山齋。 齋臨盤石, 上夾以小澗, 結構精灑而覆以瓦, 正好棲身養心之所, 可賀其晩年淸福也。 已而聽乃薰指引, 奉審灆溪書院, 少憩于講堂, 又登風咏樓。 想先生頭流千疊、孤舟大江之氣像, 傷當日道未及行, 先罹禍網之惡運, 俯仰上下, 誠可於邑。 灆院之傍見有淸溪祠, 云是濯纓妥靈而十數年來所建者, 濯纓平日從一蠹講論, 而遭禍時逮捕處也。 噫! 彼光墩輩罪固不容, 而當日佔畢之作某文, 濯纓之布某文者, 誠何意也? 令人直欲作天問也。 離灆院抵咸陽邑, 已午天矣。 納凉于孤雲林中, 是世所稱咸陽十里林, 而孤雲手植者。 西行三十里, 道遇族人炯元, 宿于其家。 家在柏田面坪里者, 乃庠集再從弟也。 翌日至鳳峴里, 訪僉族人。 族人居此者, 可二十戶。 前者淵齋門人應文【洛相】、允仲【洛鍾】兩氏, 爲嶺右望士者, 皆出此里。 今雖無繼其風聲者, 亦皆能謹拙操守, 不失古家規模, 見余喜甚。 輪致酒飯, 其情可掬。 因留鳳峴。 二十五日, 踰峻嶺二, 至長水魯壇里宿。 翌日又踰馬峙, 至山西馬坪, 卽士裕所居。 翌日雨, 陪士裕從叔瑞山丈【灃鎬】穩談, 同看其先集, 商議存刪。 二十九日, 離馬坪, 以五月三日歸家。 是行也, 雖不能徧觀三洞, 畢償夙願, 花林一著猶賢乎已。 而爲吾輩, 今日吐氣洩哀之資則足矣。 且在余則又有異者, 昔舜之慕堯, 或見於墻, 或見於羹, 此言思慕之至, 無時而不如見也。 余之不孝, 其念先君雖不能如此, 然今於是行之遂先君平日所未能者也。 安得不思我先君, 或見於山, 或見於水也? 然則是行不惟不至爲罪, 其在一氣感通先君之靈, 安知其不亦欣然而喜幸也耶? 余於是特以先君之思作安陰行記。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 서상동은 안의현 서쪽 끝에, 북상동은 북쪽 끝에 있다. 동쪽 언덕……불고 도연명(陶淵明)이 쓴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고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물 굽어보며 시를 짓는다.[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는 실의ㆍ체념하며 소요하는 뜻으로 썼다. 세 골짜기 화림동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에 있는 계곡, 심진동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계곡으로 용추계곡이라고도 하며, 원학동은 수승대(搜勝臺) 계곡이라고도 한다. 이 셋을 합쳐 안의의 세 골짜기라고 한다. 내동(內洞) 남원군 남생면(南生面)이었다가 지금은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이며, 안골로도 부른다. 이석용(李錫庸) 1878-1914. 초명은 이갑술(李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전라북도 임실 출신으로서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숨어 살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혔다. 2년 여 동안 대구 감옥에 있다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제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지내는 일. 장유형(長乳形) 땅의 형세가 마치 여인의 젖이 길게 늘어진 모양을 이룬 것을 말한다. 환포형(環抱形) 물이 명당으로부터 멀리 우회하여 감싸 안은 형세를 말한다. 수구(水口)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멀리 돌아 흘러서 하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좋은 혈(穴)을 이루는 조건의 하나이다. 안산(案山) 무덤의 혈 앞에 마주보는 산. 여기서는 이구평과 마주 대하고 있는 산을 말한다. 당국(當局) 해당 국(局)의 형세를 말한다. 풍수에서의 국(局)은 혈(血 정기가 흐르는 곳)과 사(砂 혈 주위의 형세)를 합친 것이다. 봉전리(鳳田里)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를 말한다. 거연정(居然亭)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화림동계곡에 있다.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모옥으로 지어 강학하던 곳이었다. 임헌회의 〈거연정기문〉 송병선의 〈거연정중수기문〉 등이 있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성리학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전우(田愚)의 스승이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 본관은 은진,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대전시 회덕 출신으로,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병순의 형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행되고 국권이 강탈당하자 자결하였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며, 송병선의 아우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었고,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사문도……없어진 주자가 쓴 〈소학제사(小學題辭)〉에 '세대는 멀어지고 사람은 죽고 없다.(世遠人亡)'는 어구가 있다. 김택술이 살았던 때가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성대했던 때는 멀어졌고 인걸들이 없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군자라는 편액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화림계곡에 있는 군자정이다. 전세걸(全世杰)과 전세택(全世澤)이 정여창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에 지었다고 한다. 거연정과 1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송래희(宋來熙) 1791-1867. 자는 자칠(子七). 송준길 후손. 《한비자집해》 〈유도(有度)〉편에 '처음에 알고 있다가 발걸음을 이동하여 풍경이 바뀌니 방향을 알지 못한다.[在始未必不知, 移步換形, 遂不能見。]'는 말이 있다. 동호정(東湖亭)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있는 정자.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했다는 동호 장만리(東湖 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9대손인 장재헌 등이 주도하여 1890년 경에 지었다. 안문(雁門)의 불우함 한나라 때 단회종이 안문 태수(雁門太守)에서 면직되고 서역으로 부임하게 되자 친구인 곡영(谷永)이 '빨리 돌아온다면 안문에서 면직된 불우함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한서(漢書)》 권70 〈단회종전(段會宗傳)〉 종노릇……절개 멸망한 나라의 신하가 의리를 지켜 새로운 왕조나 나라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조를 의미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때 기자(箕子)는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我罔爲臣僕。]"고 했다. 《書經》〈微子〉 군사공(郡事公)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령(扶寧)이고, 평장사(平章事) 김구(金坵)의 현손이며,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를 하였다. 정일두(鄭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으로 귀양 갔고, 갑자사회 때 부관참시 당했으나, 중종 때 복권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노옥계(盧玉溪) 노진(盧禛, 1518~1578)으로,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이다. 정재경(鄭在璟) 1881~1948, 자는 내훈(乃薰), 호는 학강(學岡)이다. 전우의 제자이며, 문집으로 《학강유고》가 있다. 남계서원(灆溪書院) 함양군 수동면에 있으며, 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져 사액 서원이 되었다. 두류산……외로운 배 정여창의 유일하게 전해오는 다음 칠언절구의 말을 인용하였다. "냇버들 바람에 나부껴 가벼이 한들거리고, 사월의 화개동엔 벌써 보리 가을이구나. 두류산 천만 봉을 두루 다 유람하고, 외로운 배 다시 띄워 큰 강 모래톱으로 내려가네.[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洲。]" 청계사(淸溪祠) 원래 1495에 김일손이 유생을 가르친 청계정사의 터에 1921년에 세운 사당이다.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점필재……넣은 것 김일손이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스승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을 말한다. 고운림(孤雲林) 함양에 있는 숲으로, 신라의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이 심어 만든 것이라 하며, 천년숲으로도 부른다. 마치(馬峙)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마평(馬坪)에서 번암면 국포리로 넘어가는 길목의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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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題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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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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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이공 전 병자년(1936) 晩翠李公傳【丙子】 공의 휘는 광우(廣雨), 자는 복일(復一), 자호는 만취(晩翠)로 한국 호남(湖南) 담양(潭陽)의 월산리(月山里)에 거주하였다. 이씨는 계통이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고려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본조에 들어와 세자 빈객(世子賓客) 석손(碩孫)159)은 장릉(莊陵, 단종)의 변란160) 때 담양에 은거하였다. 5대조 삼락당(三樂堂) 명석(命錫)은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161)을 스승 삼았으니, 학문에 연원이 있었다.부친은 선비 성종(誠鍾) 공이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를 자질을 지녀 겨우 이를 갈 나이에 이미 성인과 같았으며 스승에 나아가서는 학문이 날로 발전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집안 일을 도맡아 농사를 지었는데, 이윽고 조금 풍족해지자 종가를 위해 제전(祭田)을 사고 사당을 세웠으며, 또한 의전(義田)을 두어서 가난한 친척의 초상과 장례, 혼인에 보태주었다. 외조와 서당 선생을 위해 돈과 밭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며 영원히 모실 건물을 세웠다.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면서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하였으며, 궁핍한 이들을 구휼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들을 거둬 길러서 혼인하여 살림을 꾸리게 하였다. 떠도는 아이들을 교육하여 학문을 이루게 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쓰는 것은 대단히 검소하여 몸에는 장물(長物)162)이 없었으며, 다만 경사(經史)를 즐겼다.세상이 변란을 겪은 이후에 도학이 어두워진 것을 마음 아파하여 선왕(先王)과 선성(先聖)이 서로 전수한 옛날의 법칙을 굳건하게 지켜 자질(子姪)이 신학을 가까이 하는 것을 엄하게 금하였으니, 일체의 법문이 확고하여 꺾을 수가 없었다. 오호라! 시운이 한없이 악화되어 변고가 날로 심해져 저들이 우리 백성들의 머리를 깎으려 하니 공은 옛날 지켜오던 머리카락을 지켰다. 마침내 위협을 가하고 시배(時輩)들이 희희낙락하며 도왔으니, 공은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고 하여 강요하거늘 공은 더욱 엄격하게 거절하였다. 강요를 할수록 더욱 엄격하게 거절하니, 이와 같은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공은 이에 면할 수 없음을 알고서 가묘에서 통곡한 뒤 선친의 묘소에 절을 올리고 친척들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모욕을 받으며 사는 것은 의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여러 날을 곡기를 끊다가 약을 마시고 타계하였다. 바로 갑술년(1934년) 10월 19일로 나이 67세였으니, 이에 사람들이 모두 공을 절사(節士)라고 칭송하였다. 나는 애당초 공을 알지 못하는데, 백 리를 가서 그 영연(靈筵)에 곡을 하고 두 아들 상운(相運)과 상호(相瑚)에게 조문하였다. 상호는 더욱 전아하고 신중하니, 그 부친의 전형을 볼 수 있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천하에 도가 없으면 몸을 바쳐 도리를 위해 죽는다.'163)라고 했으니, 대개 도 밖에는 몸이 없는데 몸을 지닌 사람이 도를 그 밖에 있다고 여긴다면 사람이라 이를 수 없다. 도는 무엇인가. 몸에 있어서는 예의며 천하에 있어서는 중화이다. 세상이 망극한 때를 만나 중화의 제도를 지킬 수 없다면 이는 몸에 예가 없으며 도의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공이 머리카락을 지키다가 죽은 것이다.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긴다.'164)라고 하였으니, 공의 평소 행실을 보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킴이 이 이에서 근본 하였으며 한 때 비분강개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성인이 남루한 옷으로 송을 지나간 일165)에 대해 도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의심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주자는 '차분하게 하라는 건 참 좋은 말이지만 거기서 나쁘게 한번 변하면 구차한 안일함이 된다.'166)고 하였는데, 대개 성인이 아니면 방비해야 할 걱정을 근심하지 않으니, 매우 다급한 일을 겪다가 지켜야 할 바를 잃어버린 자를 나는 또한 많이 보았다. 공이 걱정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는가." 公諱廣雨, 字復一, 自號曰晩翠, 居韓國湖南潭陽之月山里.李氏系出慶州, 在麗文忠公益齋先生, 大顯于世.本朝世子賓客碩孫, 莊陵之變, 遯于潭.五世祖三樂堂命錫師遜齋朴公光一, 學有淵源.父, 士人誠鍾公, 生有異質, 甫齔己如成人, 就師而學日長.以家貧, 幹蠱服田, 旣而稍饒, 爲宗家置祭田立祠堂, 又置義田, 助給貧族之喪葬婚姻.爲外祖及塾師, 以金以田, 立享祀永遠之具. 開門接賓, 一以誠款, 幷賙其窮乏, 收養無託之孤, 經紀婚産, 敎育流離之子, 以至學成非一二.自奉甚約, 身無長物, 惟以經史自樂.自世變以後, 痛道術晦盲, 益守先王先聖相傳舊規, 嚴禁子姪勿近新學, 一切法門, 有確乎不可拔者.嗚呼, 時運罔極, 變故日甚, 彼欲薙, 守舊人髮, 竟加脅勒, 時輩又樂助之, 以公爲民望强之, 公拒之嚴, 愈强愈嚴, 如是者累矣.公知不可免, 痛哭家廟, 拜省先墓, 行訣族戚, 語人曰: "與其受辱而生, 不若守義而死", 遂絶食累日, 仰藥而逝, 乃甲戌十月十九日也, 而年六十七, 於是人咸稱公爲節士.余初不識公, 越百里哭其靈, 吊其二子相運相瑚, 瑚尤雅飭, 其父典型可見.論曰: "孟子有言, '天下無道, 以身殉道', 蓋道外無身, 身而外道, 不可謂人.道者何, 在身則禮義, 在天下則華夏.世値罔極, 華制不得守, 則是身無禮而外於道矣, 此公所以保髮而殉者也.有子曰: '本立而道生', 觀其生平制行, 足以知終節之本於是, 非出於一時慷慨者流也. 或有以聖人微服過宋之事, 疑其未盡道者, 非也.朱子曰: '從容雖是好題目, 一變則爲苟偸', 蓋非聖人, 則防慮不患, 其過倉卒而失其所守者, 余見亦多, 公之所慮, 不亦宜乎." 이석손(李碩孫) 자는 사언(士彥), 호는 돈암(遯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세종 때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단종이 손위(遍位)하자 장인 박연생(朴衍生)과 함께 담양(潭陽)의 월산(月山)에 은거(隱居)했다. 장릉의 변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가리킨다.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1655~1723.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사사하였다. 숙종 때 천거되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왕자사부(王子師傳)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산수를 즐기다가 영조 때 죽었다. 저서에 《손재집(遜齋集)》 《나소변무(羅疏辨誣)》 《진호문답(晉湖問答)》 《만덕창수록(晩德唱酬錄)》 등이 있다. 장물 진(晉)나라 왕공(王恭, ?~398)이 아버지를 따라 회계(會稽)에서 서울로 왔을 때 친한 벗 왕침(王忱)이 그를 찾아갔다가 그가 깔고 앉은 6자 너비의 대자리를 보고는 달라고 하였다. 왕공은 그가 떠난 뒤에 즉시 대자리를 거두어 보내주고 자신은 언치를 깔고 앉았다. 뒤에 왕침이 이를 알고 매우 놀라자 왕공이 "나는 평소에 남는 물건이 없네.〔吾平生無長物〕"라고 하였다. 《晉書 卷84 王恭列傳》. 좋은 물건이 없다는 의미이다. 천하에……죽는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도로써 몸을 따르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몸으로써 도를 따르나니, 도로써 남을 따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天下有道 以道殉身 天下無道 以身殉道 未聞以道殉乎人者也〕"라고 하였다. 유자가……생긴다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이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일단 확립되면 도가 자연히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효제가 바로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할 것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다. 《論語 學而》 성인이……일 공자가 송(宋)나라를 지나가려 하자 사마환퇴(司馬桓魋)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죽이려 하므로, '변복을 하고 송나라 땅을 지나갔다.[微服而過宋]'라는 고사이다. 《孟子 萬章上》 주자는……된다 이 말은 주자가 아니라 우암 송시열이 한 말이다. 《송자대전》 권29 〈여이사심(與李士深)〉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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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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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광 전 정축년(1937) 田玄狂傳【丁丑】 전사위(田士猬) 군의 휘는 일중(鎰中)으로 구산 선생(臼山先生)167)의 손자이며 정재공(靜齋公)의 차자(次子)이다. 행동이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현동(玄洞)에 거주하기에 호를 현광(玄狂)이라 하였다. 군은 성품이 얽매이지 않고 기가 굳세어 일찍이 법도로 자신을 검속하지 않았으며 비록 귀인이나 명사를 보더라도 비굴한 모습이 없었으며 부귀한 자 보기를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이처럼 대하였다. 또한 말이 곧아서 사람의 허물을 보거든 즉시 마주하고서 꾸짖으니, 이로 인해 사람들이 대부분 미워하였다. 외모를 보면 거칠고 소략하다고 마땅히 이를 만하지만 의를 보는 것이 대단히 정밀하여 중론이 분분할 때는 홀로 대단히 좋은 단서를 제시하여 끝내니, 이로 인해 문장을 지으면 또한 그와 같았다.오진영(吳震泳)168)이 스승을 속여 원고를 고친 일이 일어나자 스승 집안의 여러 손자들 가운데 오진영을 변호하는 자가 많았으며 심한 경우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직 군은 부친의 뜻을 좇고 공의(公議)를 따라 변석에 힘을 쏟았으니, 그 문장이 많은데 뜻이 대단히 엄격하고 문사가 대단히 마땅하여 우리의 기를 돋우고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은 타인들이 미칠 수 없었다. 처음에 오진영이 스승의 도장을 몰래 날인하여 파리에 글을 보낼 때 선사는 재앙과 모욕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염려하여 자진할 도구를 마련하고서 변고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 때 군이 크게 외치면서 "우리 조부가 만일 화를 면하지 못한다면 도장을 몰래 날인한 자는 머리를 베고 배를 가를 것이로되 그 죄는 그래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지경에 이르자 또다시 속여서 고친 것에 대해 극력 성토하니, 그러므로 오진영이 두루 살펴보고 더욱 그 무리들과 함께 온 힘을 쏟아 지칠 정도로 허물을 찾아 참소할 거리를 만들어169) 하지 못할 말이 없었다.군은 천부적인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 부지런히 책을 읽지 않아도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니, 글을 지으려 붓을 잡으면 곧바로 써 내려가 미리 구상한 자와 같았다. 그러나 글이 완성되면 미진한 곳이 있나 생각하여 반복하여 자세히 살폈으니, 살피고 나면 끝내 고칠 곳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산문은 비록 문사와 이치가 모두 훌륭하더라도 모름지기 풍신(風神, 감염력)이 좋아야 비로소 잘 된 작품이며, 시는 새로운 의사가 있어야 바야흐로 시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매번 시를 지을 때는 진부한 말이 없도록 힘썼으며 산을 깎아내듯 생각을 깊이 하였다. 대개 시는 산문만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의미를 잘 담아낸 곳은 아름다운 것이 많았으니, 예를 들면 "새봄 경치에 시 천 수, 고국의 산하에 눈물 만 줄기.[新春物色詩千首, 舊國山河淚萬行]"라는 구절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타인의 시를 평할 때는 보이지 않는 허점이나 아주 작은 잘못도 군의 눈에서 피할 수 없었으니, 친한 관계인 경우는 자세하고 정밀하게 가르쳐주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싫증을 내지 않고 더욱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부형처럼 군을 친애하였다.군은 비록 행동을 검속하지는 않았지만 부정한 일을 저지른 자는 자신을 더럽힐 듯하여 멀리하였다. 바둑이나 장기 같은 것은 또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남의 집에 들어가면 먼저 책을 살펴보았는데 만약 처음 보는 책이 있다면 날이 저물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다 읽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으니, 대개 군의 강기박문(强記博文)은 이런 벽(癖)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현재 국중 선비라고 일컫는 아무개 등은 실제로는 모두 둔재이다. 만약 우리들이 조금 여력이 있어서 그 정도 공부하였다면 어찌 그들 정도에서 그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조선 오백 년 동안 단연코 다른 사람은 없으니 학문에 일생의 심력을 쏟아 부은 사람은 다만 우리 조부인데, 마땅히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손꼽기가 어렵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다소의 의견 가운데 성리, 학술, 정치에 관련된 것을 세 권의 책으로 저술하여 후대의 지식이 있는 자를 기다릴 것이니, 능히 성공할 지는 잘 모르겠다."라 하였다.군은 숙질(宿疾)을 앓았으니 병자년(1936년) 가을에 우리 집에서 머물며 요양하였다. 밤에 일어나 신음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 병의 빌미는 부조가 속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형제처럼 벗하는 그대가 바로잡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 해 11월 18일 전주의 우사(寓舍)에서 타계하였으니, 향년 46세이었다. 두 아들로 창기(鬯淇)와 은기(殷淇)를 두었다. 정축년(1937년) 봄에 내가 조자정(趙子貞), 최여중(崔汝重)과 함께 손주택(孫周澤)을 동반하고서 군의 영연(靈筵)에 곡을 하였는데, 당시 두 아들은 자리에 없었고 군의 종질 세기(世淇)가 맞이하였다. 곡과 조문의 예를 마치자 군의 부인인 정씨가 문안에 서 있다가 세기에게 말하기를 "너의 종숙부가 임종할 때 후창(後滄) 선생을 보기 원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라고 하고는 곧 두 아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면서 말하기를 "훗날 우리 집에 사문(斯文)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후창 선생에게 찾아가 처리하라 하였으니, 너는 이 말을 후창 선생에게 고하라."라고 하였다. 이른바 후창은 바로 나이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였으니, 면결(面決)하지 못해 죽은 이나 산 사람이나 아쉬움을 남긴 것이 한스럽다.군은 큰 기에 콧날이 높았으며 마른 얼굴에 성긴 수염을 지녔으니 그 조부와 대단히 비슷하다. 모습이 비슷하니 재주 또한 비슷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만일 힘써 공부할 여건이 되었다면 공자 문하의 자사(子思)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곤궁하게 굶주리며 떠돌아 다녔으며 생애 또한 짧았구나. 비록 그러나 조부가 당한 큰 무고를 씻어 내고 대의를 밝혀 후대로 하여금 대종사(大宗師)가 됨에 의심이 없게 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논한다면 자사(子思)가 되지 못한 것은 애석하지만 또한 이것으로 위로가 된다.삼가 생각건대 예전에 선사의 편지를 받들었을 때 "전에 일중을 가르치니 광자(狂者)170)와 같았다. 이것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그대가 인정하였으니, 스스로 부끄럽고 한편으로 다행하다."라고 하였다. 군이 중행군자(中行君子)는 되지 못하더라도 광자가 된 것은 선사께서도 또한 다행으로 여겼다. 오진영이 비록 신임(辛壬) 연간의 원고에서 이 편지를 빼버렸으나 군에게 어찌 손상이 되며 저에게 어찌 이익이 되리오, 다만 그의 시기와 악독함을 드러낼 뿐이다. 오호라! 군은 행실이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아 현광이란 호에 걸맞게 되었지만, 또한 그 행실이 큰 뜻과 말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현광이 되는 바이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증석(曾晳)이 계무자(季武子)가 죽었을 때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으며, 오이 밭의 김을 매다가 오이 뿌리를 다치니 큰 몽둥이로 때렸는데,171) 그 행위를 보면 유문의 법도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공자가 얻고 싶어 했던 광자로 인정하였으며 증삼(曾參)은 칠십 제자의 반열에 들었다. 지금의 현광을 논하는 자들은 문득 유자 법도의 밖에서 스스로 노닌 것으로 그를 무시하는데, 이를 증씨와 비교하면 어떻겠는가."나와 현광은 재주의 총명과 아둔함은 상대가 되질 않고 도량의 넓고 협소함은 또한 다른데, 한결같이 법도의 길을 따르게 하려고 하고 한결같이 비루함에 얽매인 선비가 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면 행동거지가 마치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서로 반대여서 서로 싸우는 사람처럼 말이 어긋났을 것인데, 그런대도 시종 우호가 좋은 것은 나는 그의 곧고 신실한 것172)에 도움을 받고 그는 나의 교묘하게 계교하지 않음을 취한 것이다. 8~9년 전에 현광이 나에게 약속하기를 '피차간에 손을 바꿔서 전을 짓자.'고 하였는데 미처 실천하지 못하였다. 지금 이 전을 완성함에 만약 현광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저 내용은 맞고 저 내용은 틀렸다."라고 하여 말을 들은 즉시 곧바로 고쳤을 것이니, 마치 초상화를 그리는 자가 사람의 지적을 듣고서 진본(眞本)을 완성하는 것과 같이 하였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슬프도다. 그러나 모방해 본 뜨는173) 졸렬함으로 모과를 던져 줌은174) 만년에 있었으나 용면175)의 뛰어남으로 경거(瓊琚)의 보답은 영원히 받을 희망이 없으니 훗날 저승에서나 요구할 수 있으리라. 더욱 더 슬플 따름이다. 田君士猬, 諱鎰中, 臼山先生之孫, 靜齋公之次子, 自以行不掩言而居玄洞, 故號玄狂.君性不羈氣岸高, 未嘗以繩墨自檢, 雖見貴人名士, 無卑屈態, 視富者若無有, 又口直, 見人有過, 輒面折之, 由是人多疾之.觀其外, 宜謂麤略, 至見義理却精細, 衆論紛然, 獨據極端究竟, 因而爲文, 亦如之.及吳震泳誣師改稿事, 作師門諸孫多護吳, 甚者至不可說, 惟君遵父志從公議, 討辨是力, 其文蓋多, 而義極其嚴, 辭極其當, 足以增吾氣, 驚彼膽者, 人不可及.始震之冒署師銜, 投書巴里也, 先師慮禍辱不測, 至備自盡具待變, 君大言之曰: "吾祖如不免禍, 冒署者可斬頭剮腹, 而罪猶餘." 至是又力討誣改, 故震周視之, 益甚與其徒, 疲勞吹覓, 增成箕錦, 無所不至.君天才超越, 少不勤讀, 然能博覽强記, 爲文操筆立書, 若宿構者然.然文成, 慮有未盡, 反復詳審, 審己亦竟無加點處.常曰: "文雖辭理俱盡, 亦須風神好始得, 詩則有生新意思, 方始詩." 每爲詩, 要無陳語, 窮思若鑿山然.蓋詩不如文, 然意到處, 多絶佳者, 如'新春物色詩千首, 舊國山河淚萬行'之句, 膾炙人口.評人詩文, 隱疪纖纇, 毫莫逃眼, 在相親則爲之詳示精點, 於少輩尤懇懇不倦, 受惠者親愛如父兄.君雖不檢束, 涉不正者, 若浼焉.至如碁博, 亦不近, 平居手不釋卷, 入人家先求冊子, 若初見者, 則至日夕鷄晨, 不了不輟, 蓋其强博以有此癖故也.嘗曰: "今所稱國中士某某, 其實皆鈍才, 使我少有餘力及此, 豈若彼而止." 因曰: "國朝五百年間, 斷然無他, 盡一生心力於學問者, 惟我祖考, 宜爲最選, 其難矣乎." 每喟然曰: "吾有多少意見, 欲以有關性理學術政事者, 著書三冊, 以待後之知者, 未知其能成乎否." 君抱宿疾, 丙子秋, 留養弊廬, 夜起呻吟, 謂余曰: "吾疾祟, 父祖受誣, 兄弟相友, 可治之乎." 竟以是年十一月十八日, 終於全州寓舍, 壽四十六, 有二子鬯淇殷淇.丁丑春, 余與趙子貞·崔汝重, 介孫君周澤, 哭君之靈, 時二子不在, 君從姪世淇對, 哭吊禮訖, 君內子鄭氏, 立門內語世淇曰: "汝從叔臨終, 願見後滄先生而不可得", 則召二子而前曰: "他日吾家有事關斯文者, 則往問後滄先生而處之, 汝其以此告於後滄先生也." 所謂後滄, 卽余也. 聞之絶悲, 恨不得面訣而致憾幽明也.君長身隆準, 瘦面疎髥, 酷似其祖, 貌之所似, 才亦如之, 固理也.如使力學, 尼門之思, 在玆矣.惜乎, 其窮餓棲屑, 年又促之, 雖然惟其祖大誣是雪, 大義是明, 俾百世不疑其爲大宗師, 執此而論, 惜其未然者, 亦可慰也.竊念昔承先師之書, 有曰: "前喩鎰中, 狂者一流, 此老夫不及知, 而君許之, 自愧且幸", 君雖不得爲中行, 其爲狂者, 先師亦幸之矣.震雖削出此書於辛壬之稿, 於君何損, 於渠何益, 只見其猜險也已.嗚呼, 君旣行不掩言, 所以止於玄狂, 亦以其有行不能掩之大志言, 所以爲玄狂也.夫論曰: "曾晳, 季武子死, 倚門而歌, 鋤瓜傷根, 撾之以大杖, 觀其擧措, 絶不似儒門規模, 猶許以孔子所欲得之狂者, 而參在七十子之列.今之議玄狂者, 輒以自放儒規外外之, 以之視曾氏爲何如也." 余與玄狂, 才之聰鈍不敵, 量之濶狹亦異, 一欲只循塗轍之跡, 一欲不作拘陋之儒, 行止反對, 如燕越, 言語衝突, 若爭鬪然, 而終始交好者, 我資其有直諒之益, 彼取我無機變之巧.八九年前, 玄狂約余, 以'彼此換手爲之立傳', 而未及踐矣.今於是傳之成, 若玄狂而在, 必曰: "某處中某處錯", 隨聞隨改, 若寫照者之聽人指摘以成眞本, 而不可得, 悲夫.雖然畫葫之拙, 木爪之投, 晩此有之而龍眠之竗, 瓊琚之報, 則永無可望, 他日可索之於泉臺也乎.重可悲夫. 구산 선생 간재 전우(1841~1922)의 호이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참소할 거리를 만들어 '기금(箕錦)'은 작은 허물을 부풀려서 다른 사람을 참소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항백(巷伯)〉에 이르기를, "조금 문채가 있는 것으로, 이 자개 무늬 비단을 이루었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 하고, 또 "조금 벌어진 것으로, 남쪽의 기성을 이루는도다.〔哆兮侈兮 成是南箕〕"라고 하였다. 광자 광자(狂者)는 큰소리는 잘 치는데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하지 못할 바에는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라고 하였다. 증석이……때렸는데 증석은 계무자(季武子)가 죽었을 때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맹자가 이르기를, "금장이나 증석이나 목피(牧皮)와 같은 자들이 공자께서 말씀하신 광(狂)이다." 하였다. 《孟子 盡心下》 일찍이 증삼(曾參)이 부친 증점과 함께 오이 밭을 김매던 도중에 실수로 오이 뿌리를 끊자 증점이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증자가 땅에 쓰러져 실신했다가 깨어났는데,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순(舜)과 고수(瞽瞍)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작은 회초리를 들면 화가 풀릴 때까지 다 맞고, 큰 몽둥이를 들면 얼른 피해 달아나야 한다.〔小棰則待過 大杖則逃走〕"라고 증자를 타이른 일화가 전한다. 《孔子家語 六本》 곧고 신실한 것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고 손해되는 벗이 셋이 있으니, 정직하고 신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고 하였다. 모방해 본 뜨는 '화로(畫葫)'는 의양호로(依樣葫蘆)의 준 말로 새로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과거의 것만 본뜨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한림학사 도곡(陶穀)이 오랜 기간 한림원에서 발휘한 자신의 재질을 자부하면서 지위가 낮은 것에 불만을 품고 은근히 승진을 바라고 있던 중에, 태조(太祖)로부터 "그가 지은 글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지어 놓은 것을 살짝 말만 바꾼 것일 뿐이다.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매달린 조롱박을 보고 그럴듯하게 본떠서 그려내는 것[依樣畫葫蘆]'일 따름이니, 그가 힘을 쓴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라는 핀잔을 받자, 스스로 옥당(玉堂)의 벽에 이 내용을 반추(反芻)하면서 원망하는 시를 지어 붙여 놓았는데, 태조가 이 시를 보고는 중용하지 않으려는 뜻을 더욱 굳혔다는 고사가 전한다. 《東軒筆錄 卷1》 모과를 던져 줌 원래는 상대방이 보내 준 아름다운 시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못난 작품을 가리킨다. 《시경》 〈목과(木瓜)〉에 이르기를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아름다운 옥으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용면 북송 후기의 화가인 이공린(李公麟)의 호로 그의 자는 백시(伯時)이다. 원부 3년 (1100) 신경통으로 퇴직하고, 고향 용민산에 은거, 그림에 전념했다. 가장(家藏)의 법서∙명화를 배웠으며, 서는 진 행 초를 잘 하였고 화는 고개지(顧愷之), 육탐미, 장승요 등에게서 배워, 백화의 안마(鞍馬) ∙ 불상 ∙ 인물을 잘 그렸고, 산수화에도 뛰어나 '송화 중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 북송 중기까지 별로 거들떠보지 않던 오도현류의 백화(白畫) 인물화를 부흥하여 문인화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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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경 전 병자년(1936) 金泰卿傳【丙子】 김태경(金泰卿)의 휘는 천용(千容)으로 나의 친척이다. 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자모(慈母)를 따라 부안(扶安)에서 고부(古阜) 달천(達川) 외가가 있는 마을로 이사하였다. 열 대여섯이 되어 모친이 앉은뱅이로 폐인이 되자 태경은 밥을 지어서 올렸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타인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아침밥을 지을 때 모친의 점심밥까지 함께 지어서 갔으며 낮이 되면 따뜻한 밥을 얻어서 집으로 가 바꿔 먹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주인이 그 효성을 가상하게 여겨 두 그릇의 점심밥을 준비해 주었다. 모친의 옷은 자주 세탁하여 사람들이 그 더러움을 볼 수 없었으니 십 년을 한결같이 하였다가 아내를 둔 이후에 그만두었다. 이에 미곡상이 되어 쌀가마를 지고 매며 고생하였는데, 몇 해가 지나 조금 살림이 펴게 되자 모친은 배부르게 편안히 지내다가 돌아가셨다.공은 본성이 자애롭고 착하여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남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자신이 그러한 듯 여겼다. 일찍이 흉년에 저축한 것을 털어서 한 지역의 대단히 가난한 자들을 구하니, 그 지역 사람들이 나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50살이 되어도 아들이 없자 어떤 사람이 집을 고쳐 지어 길한 방향을 향하면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여, 목재가 이미 갖춰지고 일하는 날짜도 정해졌다. 그 때 문득 변산(邊山)의 증조 이하의 친족 묘가 있는 종인의 산판(山坂)이 장차 타인의 소유로 매각된다는 말을 듣고서 "이 산이 한번 세도가에 들어가면 우리 선조의 묘소는 잘 보존되기를 기약할 수 없다. 집을 지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그 방술은 믿기 어려우며, 비록 참으로 믿을 만하다 하더라도 일에는 급하고 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마땅히 집 짓는 것을 그만두고 저것을 도모해야 하니, 만약 운명이 있다면 후에 응당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에 집을 지을 돈을 가져다가 산을 샀다. 이것은 내가 목도한 것이다. 임신년(1932년) 2월 9일에 타계하였는데, 아들이 없이 타계하였기에 종질 낙연(洛淵)을 후사로 삼았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태경은 행위는 다른 것은 누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집을 짓는 것을 그만두고 산을 산 것은 하기 어려운 일이다. 대저 아들을 낳은 것은 사람의 큰 바람이다. 방술을 믿는 것은 일반 사람이라면 면하기 어려운 것이며,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은 사람들이 서로 남에게 미루기 십상이다. 이에 일생 동안 한 가지 바람이었던 길이 후손에게 전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친척들이 함께 하여 홀로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빠른 시일에 성취하였으니, 이는 학문하며 도를 강론하는 선비는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태경은 능히 하였다. 이 때문에 '하기 어려운 것'이라 이르는 것이다. 이른바 '비록 혹자는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겠다.'176)는 것을 나는 이 사람에게서 보았다. 한편 또 생각건대, 태경은 평소 나와 진심으로 좋아하여 무릎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해가 지는 것을 몰랐으니, 대개 내가 학문이 있다고 잘못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비록 좋아하는 상대가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마음은 학문을 좋아함에서 나왔으니, 마음이 이미 학문을 좋아하면 행실도 반드시 도에 가까운 것은 이치의 자연스러움이다. 그렇다면 태경은 또한 배우지 않았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金泰卿, 諱千容, 余宗人也.幼喪父隨慈母, 自扶安移居古阜達川外親之里.至成童, 母病躄爲廢人, 泰卿炊飯供之, 貧甚, 傭於人家, 朝炊時幷作母午飯而去, 及午取溫飯歸家, 易食之以爲常, 主人嘉尙其孝, 爲之備二盂午飯.母之衣裳, 頻頻澣濯, 人不見其汙, 十年如一日.及至有室然後已.乃爲米穀商, 擔負作苦, 數年得稍紓, 母享安飽而歿.性慈善喜施與, 見人飢寒, 若己有之.嘗於儉歲, 傾貯以救一坊極貧者, 坊人立木碑頌德.年五十而無子, 人言改作室向吉, 方生貴子, 材木旣備, 設役有日矣.忽聞曾祖以下族葬所在宗人山坂之在邊山者, 將賣却爲他人所有曰: "此山一入勢家, 吾先墓難必安保, 作室生子, 其術難信, 雖眞可信, 事有緩急, 當舍此而圖彼, 若有運命, 後當生子", 乃移作室金以買山, 此余所目覩.以壬申二月初九日卒, 以無子而卒, 以從姪洛淵繼後.論曰: "泰卿之行也, 其他可能也, 罷作室而買山者, 是難能也.夫生子, 人之大欲, 信術, 常情不免, 而衆共之事, 人之所相推托者也.乃遽舍一生單望永久傳後之謀, 亟成諸族一般非所獨當之事, 此學問講道之士所難能, 而泰卿能之, 是以謂之難也.所謂'雖曰未學, 吾必謂之學'者, 余於斯人見之矣.抑又念泰卿平日, 與余心好, 促膝相話, 不覺日移, 蓋誤認余有學而然也.雖所好者, 非其人, 乃其心出於好學, 心旣好學, 則行必近道, 又理之自然.然則泰卿, 亦可謂未學而好學者歟." 비록……하겠다 《논어》 〈학이(學而)〉에서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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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답함 答小心黃丈 庚午 경오년(1930)용동본은 선사의 수본(手本)과 고증하여 분별해보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을 들어보니, 전고는 원고에 따라 출판했다고 할 수 있으나 후고는 따져보지 않고 첨가하여 넣기도 하고 진주본의 혼란함을 따르기도 하여 크게 진면목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용동 사람들의 소행은 스승을 무함한 한 가지 사항을 제외하더라도 유훈을 어기고 원고를 어지럽힌 등의 일이 진주 사람들과 동일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동래 여조겸이 중립(中立)의 간악함을 논했는데, 마치 요즈음 우리 문하의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말인 것 같습니다. 지금 기록하여 보여주신 것은 아무개, 아무개 등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어 그들의 간담을 깨뜨릴 만하고, 보여주신 오진영의 일은 날마다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었는데, 어느 일이나 있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지산(志山) 김공의 아들 성구(聖九)가 말하기를, "오진영은 일생 학문을 하여 사림을 음해하고 헐뜯는 것으로 끝을 맺었으니, 좋고도 좋은 마무리라 할 수 있다." 했는데, 이제 또 평장(平葬)33)을 하여 조모의 유해를 잃어버렸는데도 편안하게 보통 사람과 똑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 역시 좋은 마무리에 해당하는 한 가지 일이니, 안이나 밖이나 공으로나 사로나 모두 갖추어져 흠결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龍本, 未及考辨於手本, 然聞其內容, 則前稿可謂依原稿刊出, 後稿則無難添入, 或從晉亂, 大失本面云.蓋龍人所爲, 除誣師一欵以外, 其違訓亂稿等事, 與晉一也, 復何言哉? 東莱論中立之奸, 似爲近日吾門依違者, 準備語也.今蒙錄示, 可使之聞於某某諸人, 破其奸膽也, 吳事之示, 日聞其不聞, 無事不有者也.志山金公之子聖九言: "震泳一生學問, 以構訴士林成終, 可謂好好結局." 今又平葬而失祖母骸, 晏然同平人, 此亦好結局一事, 可謂內外公私具備無欠也. 평장(平葬)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매장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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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에게 답함 갑술년(1934) 答李愼軒 甲戌 일찍이 보니, 선사께서 마땅히 개정할 문자가 있으면 반드시 문하에 있는 사람에게 묻거나 혹은 편지로 각처에 상의한 후에 정했으며 홀로 개정하여 원고를 수정한 적은 없었습니다. 전재(全齋 임헌회)의 비문을 개정한 본은 본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날을 의논하여 묘도의 비석에 새긴 것이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으니 원고를 수정한 여부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른의 편지에 "다른 글 중에 개정하고 미처 수정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화도수정본14)이 혹 그런 것 같다." 하였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전재의 비문이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뭇사람이 개정한 것을 알았던 일을 미루어 다른 글이 홀로 개정하여 아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고 여깁니다. 무함을 변론한 사람의 말을 문집에서 빼고 싶어서 너무 엄중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저 음성 오진영의 재앙이 치성할 때 몇몇 사람들의 목숨을 어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오늘날 준비해 놓은 자결할 약이 아직도 상자 속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데 반드시 빼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겠지요? 曾見先師有當改文字, 詢及在門, 書商各處, 然後定, 未嘗獨自改定而釐稿.若全齊碑之改本, 自是僉議累日, 顯刻墓道, 人人皆知者, 稿本釐否, 不須論.尊喩"他文之有改, 而未及釐正, 華本似或然之"云, 未然.鄙意以爲正可推此全碑僉議衆知之改, 知他文之無獨改無知者之理矣.欲除去辨誣者之語, 謂爲太重, 亦何意也? 彼陰禍之方熾也, 幾人性命, 豈意得保? 今日準備自裁之藥, 尚在篋中, 若是而不當謂必欲除去乎? 화도수정본 전우가 직접 수정하고 편집한 문집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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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심에게 보냄 신유년(1921) 與崔欽齋 辛酉 삼가 들으니, 군주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여 여전히 상복을 입고 계시다 하는데, 이를 옛 근거에 증명해보면 송나라의 현인들이 휘종과 흠종에 대하여 한 것과 왕부(王裒)가 그 아버지에게 한 것 같은 경우에 일찍이 원수를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복을 벗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만약 원수를 가슴 아파하여 상복을 계속 입고 있다면 거처하고 출입하며 말하고 웃으며 음식을 먹는 것부터 일체의 세상일에 답하고 사물에 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평상시와는 크게 다르게 하여 거의 폐인과 같게 한 이후에 명실이 상부할 것입니다. 복수는 기약이 없고 인사는 다단하니 어찌 다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존자의 처지는 노인을 모시고 있어 봉양을 해야 하니 분명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고, 혼례와 제사도 얼마 안 있어 있을 터인데, 일마다 얽매이고 장애가 있다면 대처하기 어려울까 걱정입니다. 부디 다시 생각하여 재단하시기 바랍니다. 竊聞, 痛君讐之未復, 尚爾持服云, 蓋證之古據, 如宋賢之於徽欽, 王裒之於其父, 未嘗以讐未復, 而服不除.且若痛讐而持服, 則自居處出入言笑飲食, 以至一切酬世應物, 必大異於平常, 而殆同乎廢人, 然後乃爲名實相副, 復讐無期, 人事多端, 此豈不更難矣乎? 況如尊之地, 奉老就養, 必無方矣.續卺承祀, 將有日矣, 恐節節掣礙, 區處難下也.幸再思而裁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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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온재 진호의 자사 【기사년(1929)】 朴韞哉【珍浩】字辭 【己巳】 옥은 보배이니 玉爲寶,함궤에 담아두고 韞于櫝;유사(儒士)는 진귀하니 儒有珍,덕을 품고있네. 韞其德.덕은 옥에 견주니 德比玉,옛 현철의 말씀이네. 聞先哲.박진호(朴珍浩)는 朴珍浩,그 자질 온윤(溫潤)하여 溫其質,온재(韞哉)를 자로 주노니 欽韞哉,그 취한 뜻이 절실하네. 取義切.옥을 잘 간직하지 않으면 玉不韞,기와 자갈에 가까워지고 視瓦石;덕을 잘 지니지 않으면 德不韞,기량(器量)이 비루하고 협소하네. 器陋狹.간직하고 기다리면 藏而待,그 값이 억을 넘고 價不億;쌓았다가 풀어 펴면 積而發,큰 공업(功業)을 이루네. 富有業.사위의 덕을 드러내며 表甥德,장인은 힘써 격려하니 舅用勖,바라건대 돌아보며 생각하고 庶顧思,노력하며 지치지 말기를. 勉無射. 玉爲寶, 韞于櫝; 儒有珍, 韞其德。 德比玉, 聞先哲。 朴珍浩, 溫其質, 欽韞哉, 取義切。 玉不韞, 視瓦石; 德不韞, 器陋狹。 藏而待, 價不億; 積而發, 富有業。 表甥德, 舅用勖, 庶顧思, 勉無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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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지포 선생25)의 묘를 참배한 뒤 느낀 바 있어 2수 拜先祖止浦先生墓有感【二】 송경에선 불교의 세가 하늘 닿을 듯였으나 松京佛學勢滔天큰 도로써 능히 원각편을 배척하셨네26) 大道能排圓覺篇사악한 말들 지금처럼 온천지 가득하니 邪說如今盈宇內옛 현인이 중천에서 일어나지 않음이 한스럽네 昔賢恨未起重泉왕의 호복 보고 어찌 예법 가볍게 여기냐 하시니 見王胡服禮何輕당당히 탄핵하여 오랑캐 담을 서늘하게 하셨네 彈劾堂堂賊膽驚몇 무리가 지금 강씨의 자손인가27) 幾輩而今康氏子바라건대 고려사에 김 선생을 보시게나 請看麗史金先生 松京佛學勢滔天,大道能排圓覺篇.邪說如今盈宇內,昔賢恨未起重泉.見王胡服禮何輕?彈劾堂堂賊膽驚.幾輩而今康氏子,請看麗史金先生. 지포 선생 고려시대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를 말한다. 큰……배척하셨네 최항(崔沆)의 명으로 지은 《원각경(圓覺經)》 발문에 김구가 시를 썼는데, 이 시가 최항의 뜻을 거슬렸다하여 좌천된 사건을 말한다. 몇……자손인가 원문 '강씨(姜氏)'는 태조의 계비(繼妃)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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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복지 환영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房福之煥永 ○丙寅 방장산(方丈山)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자는 편지의 말씀은 저도 오랫동안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래로 마음이 상쾌해지며 산들산들 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오히려 한편으로는 예전에 선사를 모실 적에 함께 구경 가자고 이끌었을 때 병공(炳公, 김준영)을 따라 나서지 못했던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이제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마음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일은 한번 기회를 놓치면 뒤에는 이와 같이 쉽게 도모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형과 저는 모두 노쇠하였으니 어찌 늙기 전에 나란히 한번 천왕봉(天王峰)과 반야봉(般若峰)의 정상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方丈風咏之喻,是積營而未得者.聞來心爽,習習欲風,却恨曾被先師待時同賞之挽而不得追炳公之躅也.至今二十年餘,未嘗不往來於心.凡事一失機會,後不易圖有如此者.念兄我俱衰矣.安得迨未老前聯袂,一上天王、般若之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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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 족숙에게 올림 을축년(1925) 11월 上涵齋族叔 乙丑十一月 조카가 스승을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망과 후회가 없습니다. 다만 아직 완비되지 못한 스승의 원고를 수습하는 일과 시비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는 일을 어떤 사람에게 부탁해야 할까요? 전에 정재(靜齋 전화구)를 만났을 때 저에게 "뒷일이 막막함을 면할 수 없다." 하였는데, 때로 한번 씩 생각하면 또 막연하여 한번 씩 한숨을 쉽니다. 姪爲師致死, 少無怨悔, 但師稿之收拾未備也, 是非之詳記顚末也, 屬之何人? 向見靜齋, 言鐘賢"不免後事茫蒼", 時一念之, 又曠然一欷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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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윤명 영환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鞠潤明瑛煥 ○甲戌 오늘날 인심은 망극하고 의리는 꽉 막혀 음성의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하고 원고를 고치는 변고에 대해 같은 목소리로 변론하고 성토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록 이전에 이미 변론하고 성토했던 사람 중에서도 점차 지키던 것을 바꾸어 처음에는 한 명의 괴수만 제거하고 나머지 무리들과는 소통하자는 의론이 있다가 얼마 후에는 한 명의 괴수까지도 소통하자는 의론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다면 선사의 억울함은 끝내 설욕되어 밝혀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존형만이 우뚝 변하지 않고 변론하고 성토하기를 더욱 엄하게 하셨으며, 잠깐 만나 말을 나누는 사이에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견해를 바꿔주니 진실로 높이 우러르는 바입니다. 지난겨울에 처신하신 바는 의리가 곧고 말이 씩씩하여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강직하게 확립된 것을 알아 억지로 구속할 수 없게 하셨으니, 비록 옛사람의 완전한 절개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항상 벗들을 대해 존형의 일을 말하며 동문의 빛이라고 스스로 축하했습니다. 절개를 지키고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리이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다시 식견이 밝은 것에 관계됩니다. 매번 절개를 지키는 자를 보면 식견이 밝지 못해 오점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컨대 이미 능한 것으로 스스로 만족해하지 마시고 반드시 명확하게 분별하는 공부에 더욱 힘을 써서 원만하고 아름다운 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見今人心罔極, 義理晦塞, 陰人誣師改稿之變, 不惟不肯齊聲辨討, 雖前日已行辨討者之中, 稍稍變其所守, 初有除一魁而通餘黨之論, 旋復作并通一魁之論, 如此則先師之冤枉, 終無雪白之日矣.此將柰何? 惟尊兄卓然不變, 辨討愈嚴, 至於立談之間, 使人發蒙而改見, 誠所景仰.昨冬所處, 又義直辭壯, 使異類, 知其剛立, 不可強勒, 雖古人全節, 何以加此? 常對知舊, 道尊兄事, 自賀同門生光.蓋守節辨誣, 同是一義, 而辨誣更係識明.每見守節者, 以識不明, 以致玷累者多.願勿以已能而自足, 必須加勉於明辨之功, 以成圓美之德, 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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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族弟希淑 甲子 저들은 영남의 인간(認刊)9)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는데, 이는 진실로 사공(事功)을 중시하고 도의를 따지지 않은 것이다. 만일 영남의 인간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면 우리 선사의 글자와 구절 하나하나가 충심과 혈성을 쏟았거늘, 간행반포를 청원한다면 결단코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유서가 되어 영원히 먼지와 좀 사이에 매몰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뒤늦게 차가워진다. 彼邊以嶺認刋之不順就爲恨, 此眞事功爲重而不計道義者, 苟嶺認刋之順就也.已我先師字字句句, 瀝忠漉血, 請願刋布, 決是自辱之遺書, 將永埋沒塵蠹之中矣.念到于此心, 爲之追寒. 인간(認刊) 간재의 문집을 일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간행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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