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귀재기 【무인년(1938)】 夜歸齋記 【戊寅】 동생(董生) 소남(召南)이 동백산(桐柏山) 속에 은거할 때에 아침에는 나가 밭을 갈고, 저녁에는 돌아와 독서를 하니, 창려(昌黎) 한자(韓子 한유(韓愈))가 그 일을 노래하여 칭찬하고 그와 짝할 이가 없다고 탄식하였다.75) 그런데 1200여 년이 지난 뒤에 수산(壽山) 오병수(吳秉壽)가 죽산(竹山) 아래 벽송동(碧松洞)에 은거할 때에 밭을 갈고 또 독서하는 것이 한결같이 동생이 했던 것과 같았으니, 바로 그와 짝하였고, 이른바 '야귀재(夜歸齋)'라는 곳은 그가 독서했던 곳이다. 그래서 그의 벗인 나 김택술이 그를 위해 그 사실을 서재의 벽에 기록하여 말하였다."대저 사람이 밭을 갈지 않으면 굶게 되고, 학문을 학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니,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넓은 천하에 어찌 양쪽 모두를 겸하여 다스린 자가 적겠는가. 그런데 한자(韓子)가 유독 동자(董子)만을 일컬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의 품행과 도의, 재주와 기량이 관작과 봉록을 누릴 만하였음에도 밭을 일구는 속에서 곤궁하게 지냈기 때문에 탄식하고 찬미한 것이다.지금 수산의 가정에서의 행실이 순박하고 도타운 것에 대해서는 참으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거니와 재주와 기량에 대해서는 동생과 견주어서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서경》에 '효도하고 우애하여 정사에 베푼다.'라고 하였고, 또 내가 일찍이 그가 집에 거처하는 방법을 보고 그 다스림이 관직에 이행시킬 만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생과 수산이 모두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공적을 이룸에 대해서는 굳이 단정해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오직 논할 것이 있다면 동생은 뜻을 잃는 것에 대한 울적한 마음을 면치 못하여 연(燕)과 조(趙) 지방에 갔지만76), 수산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밭에서 일하며 자기 힘으로 먹고 사는 가운데 털끝만큼도 기미를 드러내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어찌 다만 그와 짝하는 데에 그칠 뿐이겠는가. 비록 그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한자의 붓을 얻어 이름이 천 년의 세월동안 드러났지만, 수산은 나의 졸렬한 글을 만나 썩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비록 그렇지만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으니, 한자가 동생을 찬미할 때에 단지 '책을 읽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반드시 '옛사람의 책을 읽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옛사람이란 누구인가? 바로 그가 평소에 일컬은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주공(周孔)이 이들이고, 그 책은 모두 천명(天命)의 정미(精微)한 깊은 뜻과 인사(人事)ㆍ윤리(倫理)의 떳떳한 도,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의 덕,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효험을 밝히기 위한 것들이었으니, 그 귀결을 요약하면 또 모두 근본으로부터 말단에 이르렀고, 내면을 중시하고 외면을 경시하였으되 동생의 학문은 이러한 옛사람의 책에서 힘을 얻는 것이 깊지 못하였다.수산이 만약 맑고 향기로운 서재의 창문 앞과 긴 밤을 밝혀주는 등불 아래에서 조용히 앉아 낭랑하게 외고 은미하게 읊조리며 깊이 사색하고 묵묵히 궁구하여 옛사람의 책에서 꺼림칙한 느낌이 없이 환하게 이치에 맞아 실제적인 견해가 되게 하고, 흔연하게 도를 터득하여 실제적인 소유가 되게 하며, 그것을 몸에 행하여 실제적인 덕이 되게 하고, 일에 조처하여 실제적인 업적이 되게 하여 순수하게 그것을 온전히 하고 우뚝하게 그것을 높게 한다면 실제를 보존한 바에 이름이 어찌 드러나지 않겠는가. 장차 오늘날과 훗날의 군자 중에 실제를 숭상하는 자가 일어난다면 공공연하게 수산의 이름을 칭송하며 길이 할 말이 있게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에 나의 글이 수산으로 인해 전해지는 것도 또한 동생이 한자로 인해 이름이 전해진 것과 같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구한 내가 바라는 것이다." 昔有董生 召南, 隱居桐柏山中, 朝出耕田, 夜歸讀書, 昌黎 韓子歌其事贊之, 而歎其無與儔矣.後千二百年餘而得吳壽山 秉壽, 隱居竹山之下碧松之洞, 耕且讀焉, 一如董生之爲, 則乃其儔也, 而所謂夜歸齋者, 其讀書所也.友人金澤述爲之記其事於齋壁曰: "夫人不耕則餒; 不學則昏.旣不可以偏廢, 則以天下之廣, 豈其少兼治者? 而韓子獨稱董子, 何哉? 以其行義才器, 可以享爵祿而困于耕, 故嗟歎而美之也.今壽山之內行淳篤, 固人無異辭, 至於才器, 未知比董生何如? 而《書》云: '孝友, 施於有政.' 且吾嘗見其居家之理, 而知其治可移於官矣.然彼此旣皆不見用, 而成績則有不必斷論者.惟是董生, 不免鬱鬱於失志, 至有燕、趙之行; 壽山則不然, 初無毫末幾微之色於服田食力之中.由是言之, 豈特其儔而已? 雖謂之過焉, 可也.然而董生得韓子之筆, 而名著千秋; 壽山遇余下劣之文, 而不能以不朽, 是可恨也.雖然, 有一焉.韓子之贊董生也, 不但曰: '讀書.' 而必曰: '讀古人書.' 古人者何? 卽其平日所稱堯、舜、禹、湯、文、武、周孔是也.其書也, 皆所以明夫天命精微之蘊、人事倫理之常、格致誠正之德、修齊治平之效.要其歸, 則又皆自本而至末, 重內而輕外, 而董生之學, 則不深得力於此故爾.壽山如能靜坐於淸齋芸牕之前、永夜篝燈之下, 朗誦微吟, 潛思黙究, 於古人之書, 犁然合理而爲實見, 欣然得道而爲實有, 以之行諸身而爲實德, 措諸事而爲實業, 純乎其全也, 巍乎其崇也, 則實之所存, 名豈不彰? 將今與後之君子, 有尙實者作, 公誦壽山之名, 而永有辭也必矣.於是乎余文之因壽山而傳, 亦當如董生之因韓子而傳名也, 此正區區之願爾. 동생(董生) 소남(召南)이 …… 탄식하였다 당나라 덕종 때 동소남이 진사과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주경야독하면서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자, 그의 벗 한유가 〈동생행(董生行)〉ㄹ르 지어 "아! 동생이여. 아침이면 나가 밭 갈고, 밤이면 돌아와 옛사람의 책을 읽도다. 종일토록 쉬지 못하였으니, 혹은 산에서 나무하며, 혹은 물에서 고기 잡네.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당(堂)에 올라 안부를 물으니, 부모는 근심스러워하지 않고, 처자식은 원망하지 않도다.〔嗟哉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동생은 …… 갔지만 한유가 지은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에 "연(燕), 조(趙) 지방은 옛날부터 강개하여 비장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일컬어졌습니다. 동생(董生)은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나 연이어 유사(有司)에게 인정받지 못하여 뛰어난 재능을 지닌 채 답답한 마음으로 이 지방에 가시는데, 그곳에는 반드시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을 것임을 나는 압니다.〔燕趙古稱多感慨悲歌之士. 董生擧進士, 連不得志於有司, 懷抱利器, 鬱鬱適玆土. 吾知其必有合也.〕"라는 내용이 보인다.《昌黎集 卷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