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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와정기 【임오년(1942)】 栗窩亭記 【壬午】 면성(綿城 무안(務安))의 치소(治所)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청계방(淸溪坊) 삼노(三老) 마을에 '율와(栗窩)'라는 편액을 달고 나는 듯 높이 솟아 있는 정자는 바로 고(故) 율와 배공(裵公)이 학문하며 수양했던 정자이다.대체로 살펴보건대 세상 사람들이 정사(亭榭 정각(亭閣))를 세워 한가롭게 지내고 편안하게 쉬는 장소로 삼은 곳들은 흐르는 강물이나 우뚝한 산의 맑고 화려한 경관이라든지 바람이나 달, 안개, 노을 등이 아름다운 경치라든지 진기한 동식물 중에 마음을 기쁘게 하거나 성정을 적절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일체의 것들로 그 이름을 명명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또 뜻을 숭상하고 도를 구하는 것으로 은둔해 지내거나 세속을 일으키니, 힘쓰며 자립하거나 소요하며 스스로 즐기는 등의 여러 뜻을 문미 사이에 게시하는 것들은 모두 장소로 인하여 자신을 돌아보거나 이름을 돌아보며 뜻을 생각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면 혹 사치스럽고 과시하는 잘못이나 겉으로만 내세우는 혐의에 가까운 점이 없지 않다.그런데 오직 공만은 이와 다르게 자기의 호로 자기의 정자를 명명하는 데에 그치고, 외부의 것을 빌려 꾸밈을 다하는 허물이 없어 행동에 일삼은 바가 없는 마땅함(일삼는 바가 없이 행하는 마땅함)을 얻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을 숭상하는 데에 힘쓰느라 간혹 내면이 외면의 이름에 부합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허실이 도리어 어떠한가? 생존한 당시에 지닌 것이 진실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또한 오래 지속되었으니, 지금 공의 시대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사림(士林)들이 이곳에서 바람을 쐬며 시를 읊조리고, 자손들이 이곳을 지키고 보호하여 정자가 진실로 아무런 탈이 없이 유지되었다.공의 현손 창일(昌日)이 띠 풀을 제거하고 기와로 바꾸어 새롭게 중수할 때에 만성(晩醒) 정규병(丁奎炳)이 육위문(六偉文 상량문)으로 송축하였으니, 정자의 전말은 이것을 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 이 글을 가지고 300리 길을 달려 와서 나에게 정자의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한 사람이 있었으니, 공의 외증손 정군(丁君) 유진(有鎭)이 그 사람이었다.아, 순박한 풍모를 지닌 분이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으니, 어찌하면 조만간에 남쪽으로 유람하여 이 정자에 올라 봉산(烽山)과 푸른 바닷가의 끝에서 공의 유풍을 받들 수 있을까. 綿城治東三十里淸溪坊 三老之里, 有翼然高而顔以栗窩者, 卽故栗窩 裵公藏修之亭也.蓋嘗觀夫世之起亭榭, 爲燕閒芋寧之所者, 無不以流峙之明麗、風月烟霞之勝槩與夫動植物之珍奇一切可藉以怡心適情者而命其名.不然則又有以尙志求道, 隱居聳俗.凡諸勉勵自立、逍遙自樂之意, 揭楣者, 是皆於因境反身, 顧名思義, 不爲無助.然究極言之, 無或近於侈誇之失、標榜之嫌歟? 惟公則異於是, 以己之號, 名己之亭而止焉, 無假外致飾之累, 得行所無事之宜.其與世之務尙美名而或不能充副者, 虛實顧何如也? 惟其所存於當日者旣實, 故所傳於來許者亦遠.今距公世, 且將百年, 士林風咏, 子姓保守, 亭固無恙焉.公之玄孫昌日, 去茅易瓦而重新也, 丁晩醒 奎炳, 頌以六偉之文.亭之顚末, 觀此可詳.齎此文走十舍, 屬余以記亭者, 公之外曾孫丁君 有鎭其人.嗚呼, 淳風之死久矣.安得早晩南遊斯亭, 挹公遺韻於烽山、滄海之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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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 이장에게 답함 을축년(1925) 6월 答遠齋李丈 乙丑六月 저는 어른과 26년간의 동문인데 시비(是非)의 대관(大關)을 당하여 마치 보통 사람들 보는 듯 하면서 의심을 쌓아놓고도 질문하지 않으니,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입니다.85) 근래에 비로소 윤달에 보내신 편지를 받아 읽어보니, 나쁜 오진영과 반목하여 이별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울러 그가 죄에 대하 수복하는지의 여부를 묻지 않으시니, 덕이 있는 자는 분명 이러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괴상히 여겼습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어른께서 오진영과 이미 수교를 하고 근심스러운 일과 사모하는 일에 대해서 하성(下誠)의 예(禮)를 감당함이 없다면, 또한 세세한 이유를 알아 스승을 속였으나 이전 일을 후회한다하니 사람이란 진실로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이 같은 일이 있고 아울러 어른이 유서를 방치하여 잊어버렸다고 의심하며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다고 보증할 수 없어서 스스로 이전에 힘써 보호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며 스스로 부끄러워했습니다. 아, 어른이 만약에 동문의 보통사람이라면 어찌 반드시 색언이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돌이켜 보건대 평일에 스스로 기약한 것은 말하는 것마다 명도와 율곡선생의 고명함에 해당했고, 구하고자 한 것은 일마다 중용(中庸)의 지극한 선(善)이었습니다. 성리(性理)를 전문으로 한 것은 호론(湖論)과 낙론(洛論) 상의 견해라고 스스로 믿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덕성의 순수함과 언동의 법칙이 있음에는 또한 선사가 말한 적도 있고, 사람들이 이간질 하는 것도 없으니, 누가 간옹 문하에 노숙한 사람이요, 호남의 중망(重望)이라 여기지 않으리오? 마땅히 뛰어난 견해와 밝은 마음과 의연한 의리와 확연한 변론이 있어서, 뭇사람의 어리석음을 열어 밝히고, 뭇사람의 감정을 복종시키고 사문을 주도하고 세도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받은 유서에 근거해서 책의 발간을 인정하는 의론을 방지하지 못했고, 둘째로는 다섯 사람이 연재를 축출한다는 말을 하여서 뭇사람을 대할 수 없었고, 셋째로는 오진영이 세 사람을 꾸짖은 비난과 세 가지 설의 오류에 대해서 직접 글을 써서 명확히 한 것도 없는데 다시 사람들에게 말하고 행하설(杏下說)이 전적으로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마침내 털고 깨끗이 씻어버렸으니, 처음과 끝이 어긋나고 언사가 맞지 않아서 권형(權衡)이 있는 곳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어른이 노숙인이고 중망을 받았기 때문에 후진의 젊은 사람들이 바라보며 법칙으로 삼았습니다. 시비가 뒤섞이고 곡직이 전도되어 어지럽고 어수선하여86) 수습을 할 수 없습니다. 어른을 위해서 답답해하고 세도를 위하여 근심합니다. 전옹(全翁)을 속여서 세상과 화합하고 사랑을 취한 것은 김평묵(金平默)의 제문이 바로 이것이고, 선사를 인의(認意)와 인교(認教)로 속인 것은 음성 오진영의 필설(筆舌)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김 씨가 어찌 일찍이 스스로 전옹을 속인다 말하고, 오진영 또한 일찍이 스승을 속인다고 스스로 말했겠습니까? 그러나 김 씨의 속이는 말은 은밀하여 알기가 어려웠는데도 선사가 오히려 그를 참새처럼 쫓아버렸습니다. 오진영의 속임수는 직설적이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변명하여 비호하는 자와 아부하며 당이 되는 자가 있었으니, 또한 이상합니다. 이제 어른이 오진영을 용서하고 보호하며 협력하고자 하는 것은 선사의 홍화(弘和)를 체득하고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이니,【선사의 홍화를 체득하고 절도에 맞게 한다는 것은 보내온 편지의 말이다.】 선사께서 그 해에 김 씨를 비난한 일이 얼마나 힘들었기에 홍화를 버리고 좁아서 절도에도 맞지 않는 일을 행했겠습니까? 이것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공자가 옹저(癰疽)와 척환(瘠環)을 주인 삼았다면87) 어떻게 공자가 될 수 있으며, 만약에 선사가 인의(認意)와 인교(認敎)를 두었다면 어떻게 선사가 되었겠습니까? 어른이 아니면 오진영의 속이는 문장을 분별하겠습니까? 옹저의 속임수는 당시 호사자(好事者)의 설인데도 맹자가 오히려 통렬하게 비난을 했으니, 만약에 이 속임수가 공문(孔門)에 사숙한 항렬에서 만들어졌다면 맹자가 악을 미워하는 엄격함으로 그들과 화해하여 잘 지내는 것을 강구하고 위로하고 축하하는 예를 행하지 않은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속임수를 인가하는 일은 옹저와 척환의 일에 비할 때 크기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날 뿐 만이 아니니, 어른의 이번 일은 더욱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어른이 중용으로 자처한 것인데도 감히 이해하지를 못하고 깊이 의심을 하니, 두텁게 가려서 밝히기 어려운 경우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중용을 능히 하기 어렵고 백성이 능히 한 자도 드물다는 것은 공자도 일찍이 여러 번 탄식한 것입니다. 어른께서 비록 명철할지라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호광(胡廣)처럼 직언하지 못하는 전철88)을 밟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생각하여 뒤를 선하게 함으로써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광이 있게 해주신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충심을 말함에 간혹 직언으로 감정이 상하고 간절하게 들어주는 여부는 어른의 판단에 달려있습니다. 비록 감히 반드시 하지 않더라도 만약에 간곡하게 헤아리지 아니하여 먼저 저촉하여 범한 것이 있다면 목 베임을 당한다면 어찌 감히 다시 충간의 말을 하겠습니까.삼가 들으니, 어른이 "옛날에 유서를 함께 받은 사람이 10여 명 되는데 지금 기억하는 사람은 김종희(金鐘熙)와 유영선(柳永善)이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어른과 정재는 나이가 모두 많아서 둔 데를 잊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이 어린 김 씨와 유 씨도 잊어버려 내놓지 않는 것입니까? 옛날에는 참을 인(忍) 자를 백여 번 쓴 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잊을 망(忘) 자를 쓰는 이가 10여 명이 있으니, 괴상할 뿐입니다. 澤述於吾丈, 二十六年同門, 當此是非大關, 若視同恒人, 蓄疑而不質, 天必厭之.近始奉讀扐月下章, 蒙喩以與震賊合其睽離, 而并不問其服罪與否, 已怪其有德者之未必有言.旣而又聞丈與震已修, 其於憂戀, 無任下誠之禮, 則又知其細故, 誣師噬臍前事, 而竊歎人固未易知者.有如此而并以疑丈之忘置遺書云者, 未保其必然, 而自愧乎從前之力護無他也.噫, 丈若同門平常人, 則何必索言至此也? 顧乃平日之自期者, 言言是明道栗谷之高明也, 所求者, 事事是中庸之至善也.性理專門, 則未嘗不自信其爲湖洛以上之見也.至於德性之溫粹言動之有, 則又先師之所稱道, 而人無間然者矣, 孰不以為艮門老成, 湖南重望也? 宜其有卓然之見, 皦然之心, 毅然之義, 廊然之辨, 可以開群蒙服衆情, 主斯文裨世道者.而始之不能據所受遺書 以防認刊之議, 再之旣發五人黜練之言, 而不能對衆中之, 震詰三之斥, 震三說之繆, 罔手筆明的也, 而復對人說, 杏下說不可謂全無.終而拂拭之, 洗濯之, 始終參差, 言事枘鑿, 莫測其權衡之所存.惟其丈之爲老成重望也, 故後進少輩, 視以爲則.是非混淆, 曲直顛倒, 泯泯棼棼, 莫可收拾.竊爲長者悶之, 爲世道憂之.夫誣全翁, 以諧世取寵者, 金平默祭文是也, 誣先師, 以認意認敎者, 陰震之筆舌是也.然金何嘗自言誣全翁, 震亦何嘗自言誣艮翁? 然金之誣語, 隱而難知也, 先師猶逐之若鳥雀.震之誣, 直而不諱也.乃有分疏掩護者, 阿附爲黨者, 其亦異哉.今丈之恕震而欲保合者, 爲體先師之弘和, 而中於節度【體先師弘和, 中於節度, 來書語】, 則先師當年之斥金也, 何苦棄却弘和 而行此隘陋不中節之事乎? 此區區所未解也.若主癰疽瘠環, 何以爲孔子? 若有認意認敎, 何以爲先師? 非丈辨震誣文乎? 夫癰疽之誣, 時人好事者說, 孟子猶痛斥之, 若使此誣, 造自孔門私淑之列, 以孟子惡惡之嚴, 其不與之, 講修和好, 而行吊哀賀廢之禮, 必矣.而今認誣之於癰瘠, 大小之差, 不啻霄壞, 則丈之此擧, 尤區區所未鮮也.凡此皆丈之所自處以中庸者, 而敢以未鮮獻疑甚矣, 厚蔽之難開也.雖然中庸之難能而民鮮, 孔子之所嘗屢歎.丈雖明哲, 恐不可易言, 則所可慮者, 非胡廣之塗轍乎.幸加再思善後, 使慕愛者, 與有光焉如何? 言出赤心, 或傷直, 切聽否, 在尊裁.雖不敢必, 如不曲諒先以觸犯見誅, 豈敢復進忠諫之言哉?竊聞丈言, 昔年同受遺書者十餘人, 而今可記者, 金鐘熙, 柳永善.丈與靜齊 年皆耆老, 猶可曰忘置, 金柳之年少者, 亦皆昏忘而不出耶? 古有忍字百餘, 今有忘字十餘, 可恠也. 천염지(天厭之) 공자가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음란한 행위가 있었던 남자(南子)를 만나자 자로(子路)가 기뻐하지 않으니, 공자가 "내가 만약 잘못된 짓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라고 맹세했던 고사가 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민민(泯泯) 어리석어 이치에 어두운 모양, 물이 넓고 맑은 모양을 말한다. 옹저(癰疽)와 척환(瘠環)을 주인 삼았다면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 上)〉 주자의 주에 의하면, 공자가 노나라 사구를 하다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가셨다가 다시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는데, 송나라 대부인 사마상퇴(司馬向魋)가 공자를 죽이려 하므로 공자가 화를 피하려고 미복 차림으로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를 주인으로 정하신 것이다. 맹자의 말은 공자가 이렇게 곤액을 당하고 있는 때에도 주인 삼을 사람을 가리셨는데, 하물며 제나라나 위나라에서 아무 일도 없을 때에 어찌 옹저(癰疽)나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정하는 일이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호광(胡廣)처럼 직언하지 못하는 전철 여섯 임금을 섬기는 동안 후한 예우를 받았으나 임기응변에 능했을 뿐 직언을 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천하의 중용(中庸)을 지녔다."고 놀렸다. 《후한서(後漢書)》 권44 〈호광열전(胡廣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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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 이장에게 답함 을축년(1925) 10월 答遠齋李丈 乙丑十月 이제 어른이 첨좌(僉座)에 보낸 편지를 보니, 영남에서 문집을 발간하는 일을 논한 대목에 "유훈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바뀌지 않을 떳떳함이지만 일은 또한 때에 맞게 경중(輕重)함이 있다."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미 바뀌지 않을 떳떳함이라고 말했다면, 이것은 이른바 중용의 도요 천하의 이치로 다시 더할 것이 없는데, 마침내 다시 일종의 때에 맞게 경중하는 도가 있겠습니까? 또 선사께서 남기신 유서는 진실로 때에 따라 의리를 재단하고 저울질하여 경중을 맞추어 순수하게 중정(中正)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이나 선사께서 살아계셨을 때89)나 다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른께서 마침내 감히 유서를 가볍게 여기고 인가를 받아 발간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것은 때에 맞는 의리이다." 하시니, 그렇다면 선사의 유훈은 진즉 시중(時中)의 의리에 어두웠던 것이고, 또 말하기를, "여러 군자는 성인이 회통(會通)을 관찰하여 행한 전례(典禮)90)를 어기지 말라." 하시니, 선사께서 만난 지위의 고하는 자연 후세의 상론(尙論)91)이 있겠지만, 우리 제자들 입장에서는 선사를 믿기를 성인처럼 해도 들은 것을 높이고 아는 것을 행하는 도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지금 어른께서는 마음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당락을 이미 결판지어 마침내 말하기를, "나는 성인을 따르고 감히 우리 스승을 따를 수 없다." 하시며, 심지어 인가를 받아 발간하는 것을 성인이 회통을 관찰하여 전례를 행한 일이라고 하기까지 하시니, 그렇다면 이것은 선사의 유훈이 진즉 회통을 관찰하여 전례를 행함에 어두워서 성인에 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제자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선사의 이 유훈은 구구절절 오묘한 도이고 글자마다 정밀한 의리여서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니, 선사가 선사가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른께서 삼십 년 동안 망극한 은혜를 입었고 또 선사께 직접 유간(遺簡)을 받아 손때가 변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변모92)처럼 여겨서 버리고 저 쪽을 숭상하여 성인의 도라 여기니, 전날 가려 숨겼던 실상이 여기에 이르러 다 노출되어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애석하게도 당년에 붉은 글씨로 옥 같은 문장을 써서 선택하여 정중하게 부탁한 일이 헛수고가 되었으니, 훗날에 무슨 낯으로 지하에 계신 선사를 배알하겠습니까?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하고 검사국에 고소한 것은 이미 이루 다 벌줄 수 없고, 이제 마침내 진주에서 발간을 행하여 또 죄가 한층 더해졌는데, 어른께서 처신하시는 바가 이와 같으시니, 이에 오진영과 화합하고 오진영을 위로하는 것이 바로 진심이고, 오진영으로 하여금 죄를 인정하게 한다는 것은 엄호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알았습니다. 할 말을 다하여 서로 바로잡지 않으면 도가 드러나지 않으므로93) 감히 이렇게 우러러 고합니다. 어른께서 잘 살펴 깨달아서 생각을 바꾸어 함께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지 감히 서로 꾸짖고 탓하여 혐의와 노여움을 사려는 것은 아닙니다. 今見丈與僉座書, 論嶺刊事有云: "守遺訓, 固是不易之常, 而事又有因時輕重"者.夫旣曰不易之常, 則是所謂中庸之道, 而天下之理, 無以更加者, 乃復有一種因時輕重之道哉? 且先師之垂遺書也, 固因時裁義, 權輕稱重, 而粹然出於中正矣.今日之於先師時時, 未嘗有異也.丈乃敢輕遺書, 而重認刊, 謂"是爲因時之義", 然則先師之訓, 早已昧於時中之義也.又云, "僉君子, 無違聖人觀會通典禮." 夫先師所造地位之高下, 雖自有後世之尙論, 然在吾輩, 則信之如聖, 不害爲尊聞行知之道.今丈則心幟高揭, 立落已判, 乃曰: "我則從聖人, 而不敢從吾師", 至以認刊爲聖人會通典禮之事, 則是先師之訓, 早已昧會通典禮, 而反聖人者也.是豈弟子之所敢道乎? 蓋先師此訓, 句句妙道, 字字精義, 俟聖而不惑者.先師之所以爲先師者, 正在於此.丈承三十年罔極之恩, 且親受遺簡, 手澤不變, 乃弁髦此棄之, 崇彼爲聖道, 無乃前日掩匿之實狀, 到此盡露, 而欲諱不得耶? 可惜虛勞當年朱筆玉章, 選擇鄭重之託, 未知異日何顏, 拜謁於地下也?震之誣師, 訴檢, 已不可勝誅, 今之竟行晉印, 又加一層, 而丈之所以處之者, 乃如此, 於是乎, 深知和震吊震, 乃其眞情, 令震服罪, 不過爲遮護也.不直不見, 敢此仰告, 庶望丈之猛省憬悟, 改圖而同歸, 非敢相爲詬病, 而取嫌怒也. 선사께서 살아계셨을 때 저본은 "先師時時"로 되어 있는데, 문맥으로 볼 때 "先師在時"인 듯하여 이에 의거해 번역하였다. 회통(會通)을 관찰하여 행한 전례(典禮) 회통은 회합(會合)과 유통(流通)의 뜻으로 엉겨서 막힌 것과 뚫려서 통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성인이 천하의 동태를 살펴보고 회합과 유통의 상태를 관찰하여, 이에 맞게 제도와 의례를 행하게 하였다.〔聖人有以見天下之動, 而觀其會通, 以行其典禮〕"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 나온다. 상론(尙論)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을 논하는 것으로, 《맹자(孟子)》〈만장 하(萬章下)〉의 "천하의 선사(善士)와 벗하는 것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겨, 또다시 위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하한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변모(弁髦) 변(弁)은 치포관(緇布冠)으로 관례(冠禮)를 행하기 전에 잠시 쓰는 갓인데 관례가 끝나면 버리고, 모(髦)는 배안에서 자란 황새머리를 잘라 비단주머니에 넣어 머리 양쪽에 묶는데 부모가 별세하면 제거하기 때문에 한번 쓰고 나면 다시 쓰지 않는 버려지는 물건을 비유한다. 할 말을……않으므로 이 말은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묵자의 제자인 이지(夷之)가 맹자를 만나 토론을 청하자 맹자가 한 말로, 그 주에 "직(直)은 할 말을 다하여 서로 바로잡는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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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소 서장에게 보냄 정묘년(1927) 1월 與近小徐丈 丁卯元月 제가 몇 년 전에 호남에서 인가 없이 문집을 간행하게 되어 현동(玄洞)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최병심의 비문에 대해 악을 편든다고 어른에게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략 의리와 사실을 들어서 의리를 봄이 명확하지 못하고 남을 꾸짖음이 실정이 아니라는 말로 고하였으나, 어른께서 잘 이해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마 있다가 호남에서 스승을 무함한 일로 오진영을 성토할 때에, 어른께서 "석농(石農 오진영)이 우암(尤菴 송시열)과 매우 흡사하다."라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또한 가만히 한탄하며 "깨닫지 못한 것은 그래도 말할 수 있으나 의리를 봄이 명확하지 못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습니다.근래에는 어른께서 마침내 오진영의 편지를 보여주면서 "그가 사실은 원래 선사께서 말씀으로 하지 않으신 지시를 따른 것이다." 하셨으니, 이것은 사람들에게 인가를 받으라고 지시했다는 무함의 실상이 있음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근거를 어찌하여 여러 해 동안 감추어서 그의 죄를 숨긴단 말입니까? 이리하여 어른께서는 스스로 오진영에 대해 그 악을 편들고 스승을 잊었으니, 한갓 의리를 봄이 명확하지 못할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그러나 그의 죄는 이미 사실이고 끝내 달아날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이 어른의 충심을 유인하여 그 편지를 내놓게 하였으니, 어른에게 있어서도 끝까지 감추는 것보다는 나으니 저들의 죄를 알고 자신의 실수를 후회할 기회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간 일은 간해야 소용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바로잡을 수 있으니,96) 어른의 자처하는 도리에 있어 오직 속히 전날에 어둡고 어긋났던 사실과 지금 후회하고 깨달은 사실을 가지고 위로 현동에 있는 스승의 묘에 고하고 아래로 사우(士友)들에게 사죄하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澤述於年前, 以湖無認, 而有事玄洞也, 以黨惡崔碑, 見疑於丈.畧擧義理事實, 告以見義不明, 責人非情, 而未知丈之鮮悟與否.旣而湖之討吳以誣師也, 聞丈有石農, 酷似尤翁之語.又竊歎以爲不悟, 猶可說見義不明, 一至於此乎矣.近日則丈乃出示吳書所云,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 於人俾知有認誣之實, 如此實據.胡爲掩藏多年, 而匿其罪乎? 於是乎, 丈自是黨惡於吳而忘師, 不徒見義不明已矣.雖然彼罪旣實, 終不可逃.故天誘丈衷而出其書也, 在丈, 亦賢乎終於掩匿, 而足以見知彼罪而悔己失矣.往不可諫, 來猶可追, 在丈自處之道, 惟有亟將前日昧錯, 今者悔悟之實, 上告玄阡, 下謝士友而已. 지나간……있으니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나오는 말이다. 초(楚)나라의 은자(隱者)인 접여(接輿)가 공자에게 더 이상 정치에 간여하지 말라고 충고한 말로, '래유가추(來猶可追)'가 논어에서는 지금이라도 은거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의미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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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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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23년 이대순(李大淳) 우편물 수령증 3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12.2.13 趙壽煥 李大淳 (大正)12.2.13 趙壽煥 李大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이대순(李大淳)이 조수환(曺壽煥)에게 보낸 우편물의 수령증 1923년 이대순(李大淳)이 조수환(曺壽煥)에게 보낸 우편물의 수령증이다. 인쇄물이며, 상란 위에 우편물수령증(郵便物受領證)이라 되어 있다. 항목으로는 수령인씨명, 차출인숙소씨명, 우편물구별, 인수번호, 우편료, 중량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수취인은 조수환이며, 차출인은 시천리에 사는 이대순이고 도장을 날인하였다. 일부인(日附印)에는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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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오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姜良五 辛巳 《유현연원록(儒賢淵源錄)》을 개정하는 일은 존형의 동생의 말로는 비용이 100여원에 이르는 것을 어려움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잘 모르겠으나, 존형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만 알고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 말이니, 어찌 선비의 마음씀씀이겠습니까? 허위로 자기 조상을 높일 목적으로 다른 조상을 끌어다가 억지로 증명을 하여 두 집안에 막대한 수치심을 주고 있으니 그 죄는 천만금으로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돈 100원을 아껴서 과실을 바로잡아 바른 데로 돌리려 하지 않는다면 천하에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해로 말한다면 두 집안이 쟁론하며 변론하느라 왔다 갔다 하며 힘을 쓰는 해로움과 일없이 서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의 이로움은 금전의 손익과 경중에 비교해볼 때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깊이 생각하여 사적인 뜻을 빨리 버리고 속히 정의를 따른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淵源錄》改正事, 令弟之言以費至百餘圓爲難云. 未知老兄亦然否? 此則但知利害, 而不顧義理之說也, 豈士子之用心乎? 以虛僞尊已祖, 援人祖強證之, 以貽兩家莫大之羞恥, 其爲罪戾, 千金之難贖. 此之不恤, 乃惜百圓之金, 不欲改過而歸正, 則天下更有何說可話? 且以利害言之, 兩家爭辨往來費力之爲害, 與夫無事相安之爲利, 其親視金錢之損益輕重, 果何如也? 伏惟深念, 快舍私意, 亟從正義, 千萬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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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오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姜良五 辛巳 초봄에 존형의 형제가 우리 고조의 성휘(姓諱)를 사실이 아닌데도 기록하여 존형의 선조의 문인이라 연원도에 써놓았기 때문에 만나기도 하고 편지도 보내어 여러 차례 힐난했습니다. 존형은 이미 우리 고조의 이름을 뺀 뒤에 발간하겠다는 말을 하였는데, 존형의 동생이 또 비용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어렵다 하기에 저는 또 심지어 고조의 이름을 지우는 것을 허락했으니, 의리로나 형세로나 마땅히 시일이 지체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믿고 다시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른 집에서 그 책을 보니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한 것이 여전히 옛날처럼 그대로 있었으니, 비로소 존형의 형제가 한 번도 개정할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 고조의 자손은 비록 매우 졸렬할지라도 또한 백여 명 이하는 아니니 어찌 차마 선조의 수치를 좌시하며 편안하게 일없이 지낼 수 있겠습니까? 아주 큰 불행이라 할 것입니다. 존형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엔 허위로 조상을 높이다가 신명에게 죄를 짓고, 마침내는 또 비용을 꺼리다가 죄를 면하지 못했으니, 어찌 매우 생각이 없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뒷마무리를 잘하여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할 책임은 오직 존형의 형제에게 있으니 빨리 도모하시기를 바랍니다. 春初以執事兄弟冒錄鄙高祖姓諱, 爲貴先祖門人於淵源圖, 以面以書, 累度相詰. 執事既有拔出改刊之言, 令弟又以費夥爲難, 則澤述又至有墨抹紙塗之許, 以義以勢, 宜不容時日稍緩, 故信此不復慮矣. 今見那冊於人家, 則其所冒錄依舊自在, 始知執事兄弟, 曾不以改正爲意也. 世上天下寧有是事? 鄙高祖子孫雖甚孱劣, 亦不下百餘人, 豈忍坐視祖先之羞辱, 而晏然無事乎? 其爲不幸大矣. 執事試思之, 始既以虛僞尊祖, 得罪於神明, 終又憚費而不免其罪, 豈非不思之甚者乎? 雖然, 善後歸正之責, 惟在於執事兄弟, 幸亟圖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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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 공부한 여러 제자들에게 고함 【1925년 12월 10일】 告從學諸子 【乙丑十二月十日】 성현(聖賢)의 학문은 대륜(大倫)과 대의(大義)을 다할 뿐이니, 책을 읽는 것은 이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군들이 따라 배운 사람은 나이고, 나의 스승은 간옹이니. 오늘날 나의 일은 간옹의 대의를 밝히고 스승과 제자의 대륜를 다하는 것이다. 군들은 내가 오늘 한 말을 잊지 말고 부지런히 힘쓰고 전전긍긍하여 혹시라도 대의와 대륜에 죄를 짓지 말라. 이것이 간옹의 가르침을 받들어 성현이 전한 것을 실추시키지 않는 것이다. 聖賢之學, 盡大倫大義而已, 讀書者, 所以明此也. 君輩之所從學, 吾也, 吾之師, 艮翁也. 今日吾事, 所以明艮翁之大義, 盡師生之大倫也. 君輩毋忘吾今日之言, 孜孜兢兢, 無或得罪於義倫也. 此所以奉承艮翁之敎而不墜聖賢之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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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오헌명 【경인년(1950)】 三梧軒銘 【庚寅】 전날의 삼괴당(三槐堂)이 昔三槐堂,지금은 삼오헌(三梧軒)이네. 今三梧軒,전날과 지금 둘 다 삼인데 今昔三三,그 담은 뜻은 서로 다르네. 所志各般,회나무 밑에서는 공경을 기다리고210) 槐期卿相,오동나무 심고서는 봉황을 기다리니, 梧待鳳鸞,공경은 고귀한데 卿相固貴,봉황은 현명하네 鳳鸞維賢.고귀한 벼슬아치는 사람으로 말미암고 仕貴由人,고귀한 양민은 하늘을 본받아서네. 良貴則天,오동은 회나무에 견주어 보면 以梧視槐,크고 작음이 현격히 다르니, 大小殊懸,누가 그것을 처마 밑에 심었나, 誰其軒之,들녘 밭 이랑에 숨은 그대로세. 野圃隱君,문미에 오동 편액 몇 련 걸어 扁之于楣,그 자손 권면하려 한다네, 以勖其孫,누가 그를 위해 명문 지었나 誰其銘之,후창의 김택술 이라네. 金澤述云. 昔三槐堂, 今三梧軒, 今昔三三, 所志各般, 槐期卿相, 梧待鳳鸞, 卿相固貴, 鳳鸞維賢, 仕貴由人, 良貴則天, 以梧視槐, 大小殊懸, 誰其軒之, 野圃隱君, 扁之于楣, 以勖其孫, 誰其銘之, 金澤述云。 회나무……기다리고 회나무는 삼공(三公)을 상징하는데, 주(周)나라 궁정 밖에는 회나무 세 그루가 서 있어 삼공이 천자를 배알할 때 세 회나무를 마주하여 섰다 한다. 《周禮·秋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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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백 창식의 자사 【경오년(1930)】 崔光伯【昌植】字辭 【庚午】 수재 최창식(崔昌植)에게 崔秀昌植,관을 얹고 자(字)를 붙임에 旣冠而字,삼가 광백(光伯)을 주니 余欽光伯,창대한 빛의 뜻을 취하였네. 取昌光義.효제(孝悌)가 지극하여 孝弟之至,사해에 빛을 뿌렸으니 光于四海,성인 요순(堯舜)의 길은 堯舜之道,다만 효제일 따름이었네. 孝悌而已.이제 저 효(孝)와 제(悌)는 維孝若悌,무엇으로 힘쓸 것인가 何以用力,가로되 성(誠)과 경(敬)이니 曰誠與敬,이것이 힘좋은 손잡이이네. 是爲樞極.처음 가정에서 시작하여 始乎家庭,끝내는 성현을 이루니 終作聖賢,길이 계명(誡命)에 부응하여 永言配命,하늘의 복을 받으라. 受福于天.창대하고 광휘 빛내고 昌乎光乎,노력하며 시들지 말지어다. 勉哉無替,최씨 가문의 창대한 광휘 崔門昌光,나는 굳게 믿고 바라리라. 我執左契. 崔秀昌植, 旣冠而字, 余欽光伯, 取昌光義。 孝弟之至, 光于四海, 堯舜之道, 孝悌而已。 維孝若悌, 何以用力, 曰誠與敬, 是爲樞極。 始乎家庭, 終作聖賢, 永言配命, 受福于天。 昌乎光乎, 勉哉無替, 崔門昌光, 我執左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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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경 갑열에게 답함 임신년(1932) 答崔元敬 甲烈 壬申 이전에 이미 그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편지가 와서 또 그대의 품은 뜻을 상세히 알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만 나를 칭찬하는 곳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제가 위축되어서 불안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집안끼리 친분이 있어 아부하는 것이라 의심할까 두렵습니다. "자질이 둔하고 기질이 게을러 스스로 병통으로 여겨서 그것을 변화시키기를 추구한다."라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반성이 절실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자 하는 성대한 뜻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대개 이 병통은 사람마다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궁구하여 말하자면, 그대가 비록 현명하지만 제 생각에도 그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겸손에서 모두 나온 것만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대개 공통으로 근심하는 병에는 또한 공통으로 다스리는 약제가 있습니다. 듣건대 "총명예지(聰明睿知)가 모두 공경으로부터 나온다."92)라고 하였고, "군자가 위엄이 있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진다"고 하였습니다.93) 총명하면 둔한 자도 변화되고 강하면 게으른 자도 변화됩니다. 이미 밝아지고 강해지면 이것이 곧 중용의 지극한 공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경(敬)이라는 글자는 유문(儒門)에서 항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자가 범상하게 여겨서 기특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것이 미혹된 것입니다. 대개 사람이 통환의 병통을 매우 근심하지 않는다면 통치의 약도 매우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끝내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을 날이 가까운 것입니다. 통환의 병은 천하의 큰 병이고, 통치의 약은 천하의 영약입니다. 때문에 좋은 의사는 통치의 약으로 통환의 병을 구제합니다. 유문(儒門)의 병을 다스리는 것도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이제 그대가 약을 구하면서 경(敬)이라는 글자를 버리고는 다른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미 보았던 소릉(昭陵)이라 여겨서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前旣獲覩雅儀, 書來又詳志蘊, 何幸如之.但稱鄙人處, 太不停當.不惟鄙之瑟縮不安, 竊恐人之疑左右何好於通家之親也.至以質鈍氣慢自病而求其變化, 則省切學勤之盛可仰, 蓋此病人所通患.究而言之, 左右雖賢, 意亦有近似者, 非盡出於撝謙也.夫通患之病, 亦有通治之藥.蓋聞敬則聰明睿知, 皆由此出.又聞君子莊敬則日强, 聰明則鈍者燮矣, 强則慢者化矣.旣明且强, 乃中庸之極功也.雖然敬字爲儒門之所常談, 故聞者恬常而不之奇, 此惑也.夫人不甚憂通患之病, 不甚貴通治之藥, 此所以病終不療而死亡無日也.通患之病, 天下之大病, 通治之藥, 天下之靈藥.故善醫者, 以通治之藥, 救通患之病.儒門之治病, 何獨異也? 今於左右之求藥也, 未有舍敬字而可以他圖者, 幸勿以已見昭陵而忽之如何. 총명예지(聰明睿知)……나온다 《논어집주》 〈헌문(憲問)〉에서 주자가 장하주(章下註)로 인용한 정이의 말씀으로 "총명예지가 모두 이 공경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로써 하늘을 섬기고 상제에 제향하는 것이다.[聰明睿知皆由是出, 以此事天饗帝.]"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군자가……하였습니다 "군자가 장중하고 공손하면 날로 더욱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 《예기》 〈표기(表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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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 정장에게 답함 을축년(1925) 11월 答惟夢鄭丈 乙丑十一月 편지에, "스승을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대의가 있는 바다.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각수(刻手 간행 업자)에게 대신 인가 받게 해서 간행하기를 청한 것은 용서하고 오진영의 편지를 대신 초안한 것을 성토함에 미쳤으니, 선사를 무함한 죄를 자복하지 않고 있는 저 오진영이 옆에서 보고 의혹하는 바가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을 접하고 일을 처리함에 미쳐 반드시 천리(天理)를 다하여 한 터럭의 사심도 없어야 한다." 하신 말씀은 우러러 의리가 엄정하고 마음이 공평하여 지극한 의론이 같은 무리를 훨씬 뛰어넘었음이 있음을 알겠으니, 진실로 경복하는 바입니다. 다만 제가 충심을 올리는 사사로운 마음에 있어 삼가 자임하는 것이 간혹 무겁지 않고 사실을 근거하는 것이 간혹 상세하지 않고 남을 꾸짖는 것이 간혹 너무 높아서 자신을 처신하고 남을 대하는 도리에 십분 지극한 논의가 부족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외람되게도 이렇게 갖추어 다 말씀드리니 부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청도(淸道)의 간역(刊役)98)이 모든 문하(門下)와 공적으로 함께 도모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큰 문제는, 심혈을 기울인 스승의 원고를 원수에게 넘겨 인가를 구걸한 것이니, 정말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의 주모자뿐만 아니라 바른 말로 꺾어 깨뜨리지 못하는 자와 억지로 구차하게 동조하는 자까지 모두 마땅히 공적인 의론으로 성토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인이 죄를 지은 사안인 만큼 구차하게 동조한 자가 후회하여 등을 돌리고, 주모한 자가 깨달아서 그만둔다면 이에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어떤 일종의 거리낌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자가 감히 스승을 끌어들여 사람들의 공격을 막고 자기 죄를 벗어 스승에게 전가하려는 마음을 내서는 무함하고 증명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선사의 밝고도 빛나는 의리가 애매하고 어둡다는 의심을 받게 하였으니, 문인의 의리 상 마땅히 변론하고 성토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이전에 구차하게 동조한 사람이라도 진실로 피하고 혐의하여 성토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맑고 깨끗한 우리 어른의 처음부터 청도의 간역에 관여하지 않은 의리로 만약 그 대열에 끼기에는 부족하다며 겸손히 물러나 '앞장서 밝히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 하는 대의를 자임하지 않으신다면 스승의 의리가 밝혀지기 어렵고 공적인 논의가 행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도(世道)의 근심을 우리 자신에게 돌이켜 구해도 또한 옮길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청도 사람들이 아예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니, 스승을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혐의가 크게 불안해서일까요? 각수가 대신 인가 받게 해서 간행하기를 청한 문제는 한 번 현동의 선사 묘소에 고하고 한 번 많은 사람들을 수긍시켜서 스스로 자신의 죄를 자복했을 뿐만 아니라 은행나무 아래에서 독대했다는 말은 원래 대신 초안을 쓴 자가 지어내 제 입에서 나오고 제 손으로 쓴 것입니다. 각수가 대신 인가 받게 해서 간행하기를 청한 자가 애초에 이른바 선사께서 홀로 앉아계실 때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다른 서적이 각수가 대신 인가 받게 하고 대신 초안을 쓴 것과는 나란히 논할 수 없습니다. 또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선사께서 일찍이 인가 받을 뜻이 있으셨다."【오진영이 정재에게 대답한 말】, "선사께서 말씀하시는 즈음에 인가 받을 뜻을 내비치셨다."【오진영이 송병진에게 대답한 말】, "선사께서 일찍이 업자가 대신 인가를 받으면 저자는 관련이 없으니 깊이 구애할 필요가 없다고 지시하셨다."【오진영이 이자승에게 답한 편지】, "선사께서는 인의를 홀로 하지 않으셔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오현수언(五賢粹言)》과 예설(禮說)을 인가 받아 간행하게 하셨다."【오진영이 김용승에게 답한 편지】라는 말들은 오진영이 모두 한 말이고 최병심과 성기운이 말한 것은 없으니, 한 쪽을 놔두고 한 쪽을 성토함에 있어 자연 올바른 척도가 있을 것입니다. 강성하고 사나운 저 오진영이 끌어다 핑계대며 무함한 죄를 자복하지 않는 것은 이미 말할 것이 없으니, 옆에서 보고 의혹하는 바가 또한 여기에 있다면 더욱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천리를 다하여 터럭만큼의 사심도 없는 것은 성현의 성대한 덕이니, 학자가 진실로 이것을 표준삼아서 터럭만큼이라도 감히 스스로 용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 만약 반드시 우리가 이치를 다하고 사심이 없기를 기다린 뒤에야 스승을 높이고 도를 보호하는 의리를 밝힐 수 있다고 하며, 또 반드시 의리를 다하지 못하고 사심을 없애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스승을 높이고 도를 보호하는 의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주자의 이른바 "사람마다 성토할 수 있으니 반드시 성현일 필요는 없다."는 가르침이 천고에 바뀌지 않는 기준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 어른께서는 다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어제 다시 어른께서 현동의 첨좌(僉座)에게 보낸 편지에 "선사의 대고(大稿)는 차라리 발간하지 않을지언정 바름을 잃은 상태로 발간할 수는 없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니, 대의가 환하게 밝혀진 것이 중천에 해가 뜬 것과 같아서 많은 사악한 무리가 그 형체를 숨길 수 없고 세도가 의지할 바가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러러 존경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이길 길이 없을 뿐입니다.저들에게 모록(冒錄 거짓 기록)을 당한 것이 어찌 우리 어른뿐이겠습니까? 죽은 지 이미 3년이 된 이석승(李鍚升)도 면하지 못했으니, 이른바 '천하에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한바탕 웃고 박수칠 일입니다. 所示中, "爲師辨誣, 大義所在, 何可已也? 及赦請代, 討代草, 彼之不服, 傍觀所惑在此, 及接人處事, 必其有以盡天理無毫私之喩", 仰認嚴正之義, 公平之心, 極致之論, 有迵出等夷者, 誠所敬服.但在區區獻忠之私, 竊恐自任也, 有或不重, 據實也, 有或未詳, 責人也, 有或太高, 於自處處人之道, 有欠十分盡頭之論也.猥此備陳, 幸垂察焉.夫淸役之不謀全門公共, 猶是小事, 大之欲將心血所注底師稿, 投所讐而乞認, 誠不可說.非惟幾箇人主謀者, 凡不能正言折破, 及黽勉苟同者, 幷宜遭討於公議也.然此係門人之罪, 苟同者, 悔而背之, 主謀者, 悟而罷之, 斯可已矣.乃有何許一種無忌憚者, 敢生援師禦人, 脫罪嫁師之心, 誣之證之, 不一而足, 使先師皜皜炳炳之義, 受䵝䵝昧昧之疑.凡門人之義當辨討, 在所不已, 則雖前日之苟同者, 固不可避嫌而不討也, 况以吾丈淸淸椘椘, 初不關淸役之義, 若退托於不足齒數, 而不自任倡明何可已之大義, 則非惟師義之難明, 公議之不行, 爲世道之憂, 反求乎己, 無亦有遷.淸人都無一言相及之, 怒加之於爲師辨誣人之嫌之大不安者乎? 請代者, 非但有一告玄阡, 一服衆中, 而自首其罪; 杏下之說, 元是代草者之白撰, 出自自口, 錄自自手.請代者.初不參於所謂獨坐之時, 則固不可與他書之請代代草者, 比並論也.且非獨此也.曰: "先師曾有認意"【吳對靜齋說】, 曰: "先師帶著認意於言語之際"【吳對宋秉眞說】, 曰: "先師嘗敎業者代認著者無關, 不必深拘"【吳答李子乘書】, 曰: "先師仁義不獨, 使人認印粹言禮說"【吳答金容承書】等說, 吳之總有, 而崔成之所無也, 則一捨一討, 自有權衡.彼之強項悍戾, 援托不服, 已是無謂, 傍觀之所惑, 亦在乎此, 則尤所未喩也.盡天理無毫私, 聖賢之盛德也, 學者固準的乎是, 一毫不敢自恕.若謂必待吾之盡理無私, 然後可明尊師衛道之義, 又必以人之不能盡理無私, 不與其尊師衛道之義, 則朱子所謂, "人人得討, 不必聖賢"之訓, 不得爲千古不易者矣.未知吾丈, 復以爲如何.昨又讀丈與玄洞僉中書, 先師大稿, 寧可不刊, 不可失正而刊之語.則大義明彰如日中天, 群邪莫逃, 其形而世道其有所賴, 區區不勝景仰之私爾.爲彼冒錄, 豈獨吾丈? 沒已三年之李鍚升, 亦且不免, 所謂'天下無所不有者'此耶? 可笑可拍. 청도(淸道)의 간역(刊役) 청도는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을 말한다. 간재 사후에 간재의 아들인 전화구(田華九) 및 오진영(吳震泳), 최병심(崔秉心) 등의 제자들이 모여 경북 청도군에 간소(刊所)를 마련하고 간행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때 일제에 인가를 받아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는 간재의 유언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각수에게 대신 인가를 받게 해서 간행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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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 김장찬모에게 답함 경술년(1925) 答希菴金丈酇謨 ○庚戌 성현의 경전 중에 나오는 허다한 인(仁) 자는 이치의 이름으로 말한 것도 있고, 마음의 작용으로 말한 것도 있으니, 마땅히 각각 그 입언의 뜻을 따라서 보고 파악해야지 피차를 비교하여 명실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대학》의 '문왕의 오지(五止)'99)는 '지어지선(止於至善)'100)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인(仁), 경(敬), 효(孝), 자(慈), 신(信) 다섯 가지는 지선의 조목입니다. 주자가 "지선은 바로 사리의 당연한 극치이다." 했으니, 이것이 어찌 일찍이 터럭만큼이라도 마음의 작용을 범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치는 공부에 이르면 바로 마음의 작용이니, 사문이 인경(仁敬) 이하 다섯 가지를 오로지 성리로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논어》의 '충신독경(忠信篤敬)'101)과 《소학》의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102)와 《중용》의 '지인용(智仁勇)'103)과 《서경》 서문의 '덕인경성(德仁敬誠)'같은 것들은 모두 덕행심법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말한 것이니, 다시 상층의 공부는 없습니다. 만약 그치는 것이 이와 같은 인(仁) 자가 된다면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일이 바로잡아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聖賢經傳中, 許多仁字, 有以理之名言者, 有以心之用言者, 當各從其立言之意看破, 不可擬比彼此以混名實也.大學'文王之五止', 是釋止於至善之義, 而仁敬孝慈信五者, 卽至善之條目也.朱子曰: "至善卽事理當然之極", 此何嘗犯一毫心之用耶? 至於止之之功, 則乃心之用也, 師門之以仁敬以下五者言性理者此也.若乃論語之忠信篤敬, 小學之知仁聖義忠和, 中庸之知仁勇, 書序之德仁敬誠, 皆以德行心法之已成者言, 更無上面用功.如止之之爲此等仁字, 皆可謂以心之用言者也.伏乞一一回訂焉. 문왕의 오지(五止) 오지는 다섯 가지 그친 것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 전3장에서 주 문왕(周文王)의 덕을 찬미하며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부친이 되어서는 자에 그치고, 국인과 사귐에는 신에 그쳤다.(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子止於孝 爲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라고 한 말을 압축한 것이다. 지어지선(止於至善) 《대학장구(大學章句)》 경 1장의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라고 하였는데 지극한 선에 그친다는 뜻이다. 충신독경(忠信篤敬)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서 있을 때는 충신 독경이 앞에 와 있음을 볼 수 있고 수레에 탔을 때는 충신 독경이 멍에에 기댐을 볼 수 있어야 하니, 이와 같은 뒤에야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라 했는데, 《논어집주(論語集註)》에 "그것이란 충신과 독경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其者, 指忠信篤敬而言〕"라고 하였고, 또 "충신과 독경에 대하여 잊지 말고 계속 생각하면서 어디에 있든 간에 항상 눈에 보이는 것처럼 해야 한다.〔其於忠信篤敬, 念念不忘, 隨其所在, 常若有見〕"라고 하였다.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 《소학(小學)》 〈입교(立敎)〉에 나오는 말로, 만민을 교육하는 향삼물(鄕三物)의 하나인 육덕(六德)의 조목이다. 지인용(知仁勇)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천하에 공통된 도가 다섯인데, 이것을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형제와 벗의 사귐, 이 다섯 가지는 천하에 통하는 도이다. 지(智)ㆍ인(仁)ㆍ용(勇) 이 세 가지는 천하(天下)의 공통된 덕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五者 天下之達道也 知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 一也〕"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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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 김장에게 답함 경술년(1925) 答希菴金丈 庚戌 인, 경, 효, 자, 신 다섯 가지를 마음의 작용으로 해당시키는 것은 제 견해에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제 견해로는 주자가 이 다섯 가지를 사리의 당연한 극치로 여겼기 때문에 성리로 해당시킨 것입니다. 존자의 가르침에 "이치와 하나가 되는 마음도 이치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으로 해당시켰다." 하셨는데, 삼가 제 생각에는 일이 만약 이치에 맞으면 정미한 심을 리의 당연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의 모습이 공손하고 발걸음이 신중한 것과 조적거처(粗跡去處)도 리의 당연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이 다섯 가지는 주자가 이미 사리의 당연한 극치라고 했고 명덕과 신민의 표준은 바로 그칠 데를 아는 것으로,104) 집주(集註)의 '마땅히 그쳐야 할 바의 경지'105)인 것입니다. '사물에 나아가 궁구하는 것〔格物〕'은 집주의 '사물 이치의 지극한 곳〔物理之極處〕'으로, 전2장의 '지극함을 쓰지 않는 데가 없다.106)〔無所不用其極〕'는 '극(極)' 자이니, 이는 단지 천연의 본래 있는 이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이를 알고 궁구하고 사용하여 '즙희경지(緝煕敬止)'107)의 공부에 이른 연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仁敬孝慈信五者, 以心之用當之者, 不能無疑於淺見也.蓋淺見以朱子以此五者, 爲事理當然之極.故以性理當之.尊誨謂 "與理爲一之心, 亦可謂理之當然, 故以心之用當之." 竊以爲事苟合理, 非惟精微之心, 可謂理之當然, 如手容恭足容重粗跡去處 亦可謂理之當然也.但此五者, 朱子旣謂事理當然之極, 而明德新民之標的, 則是乃知止, 集註所當止之地也, 格物, 集註物理之極處也.傳二章無所不用其極之極字也, 此只可謂天然自在之理而已.至於知之·格之·用之, 敬止之功, 然後始可謂心之用耳. 명덕과……것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 경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에 있으며 지선에서 그치는 데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하였는데, 집주에 "명명덕과 신민을 모두 마땅히 지선의 경지에서 그쳐서 옮기지 말아야 한다.〔明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之地而不遷〕"라고 한 것을 말한다. 마땅히 그쳐야 할 바의 경지 《대학장구(大學章句)》 경(經) 1장(章)의 '지지(知止)'에 대한 주(註)에 "지(止)란 마땅히 그쳐야 할 바의 경지, 바로 지선이 있는 곳이다.〔止者, 所當止之地, 即至善之所在也〕"라고 하였다. 지극함을 쓰지 않은 데가 없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전2장에 보인다. 즙희경지(緝煕敬止)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의 "깊고 원대한 문왕이여, 아, 언제나 광명하시고 공경하여 머무신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 한 데서 온 말로, 문왕의 덕을 찬탄한 것인데, 이것은 《대학(大學)》 전삼장(傳三章)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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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답함 答悅齋蘇丈 癸酉十二月 계유년(1933) 12월물으신 영당(影堂)56)의 일은, 제가 10월 그믐에 신헌(愼軒)의 편지를 얻어 논의가 이 일에 미쳤는데, 호남과 영남에 모두 통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답장에 이르기를, "음성 오진영의 무리에게 통보하여 의논하는 것은 의리상 매우 온당하지 않다. 저들이 선사의 큰 것을 들어 무함하고 훼손하는데, 우리가 마침내 저들과 작은 것들에 대해 일을 함께 한다면 어찌 어긋나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들으니 나옹(懶翁)과 신재(愼齋) 두 어른이 가까운 읍을 두루 다니며 이미 성금할 기록을 받았으니, 성금을 받는 행위가 이 일를 의논하기 전에 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근래에 두 어른을 뵙고서 그 뜻을 알아보았는데, 이른바 의리에 대해서 그다지 명쾌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결론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른은 스승을 무함한 자와 함께 도모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니, 이치를 보는 것이 밝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 바름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며 제 의견과 같음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下詢影堂事, 澤述於十月晦間, 得愼軒書, 議及此擧, 而有湖嶺皆通如何之問.答謂, "通議陰黨, 義甚未安, 彼方擧先師之大者, 而誣毀之, 吾乃與之同事乎小者, 豈不舛乎?" 俄聞懶愼二丈, 周行近邑, 已受誠金之錄, 夫孰知其受金之行, 乃在議事之先乎? 此見二丈, 探其意, 則於所謂義者, 殊不明快, 未知如何究竟也.吾丈之不欲與誣師者同謀, 仰見見理之明, 守義之正, 而深幸淺見之同也. 영당(影堂) 초상을 모시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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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올림 上悅齋蘇丈 丙子 병자년(1936)지난 가을에 음성 오진영이 편찬한 《정절사전(鄭節士傳)》을 보니, 후론(後論) 가운데 그가 주장한 말이 상식적이지 않고 추잡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친구 전사견(田士狷)과 상의하여 논의를 세웠으며, 근래에 또 음성에서 온 변증서(辨證書)의 글을 반박하였습니다. 이에 함께 기록하여 올리니,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쪽이 이미 사문의 죄인이고 보면 그가 주장하는 말의 득실은 마땅히 경중을 따질 것도 없어서 변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저들의 무리가 나라 안에 가득하여 견식과 문장이 선사보다 낫다고 그를 높이고, 심지어 간옹의 문집은 고치고 첨가한 진주본이 나온 뒤에야 완벽하게 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기까지 하니, 그 잘못된 말이 어찌 사람들을 믿게 하고 세상을 해롭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의리에 있어서는 그의 이른바 견식과 문장 가운데 큰 병폐가 있는 것을 보는 대로 반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문장과 식견을 아울러 취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한 연후에 사도(師道)를 보호하고 세교(世教)를 부지하는 최선이 될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존장의 뜻은 어떠신지요? 昨秋, 見陰震所撰, 鄭節士傳, 後論中語, 其所立言, 有非常醜差者.故與田友士狷商議立論, 近又有駁破自陰來辨證書之文矣.茲并錄呈, 下覽若何? 蓋彼旣爲師門罪人, 則其立言得失, 宜若無所輕重, 而不足辨者, 但其徒黨, 充滿域中, 尊之以見識文章優於先師, 至有謂艮翁之稿, 待晉印改添而後, 得爲完善者, 則其言之失, 豈不足以信人而害世乎? 在吾輩之義, 其所謂見識文章之有大害病者, 隨見駁破, 使人知并與文識而無足取, 然後乃爲衛師道扶世敎之盡善也.未知尊意, 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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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재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崔欽齋 丙寅 화도수정본은 결코 예기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에 저는 서로가 자세히 알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현동본(玄洞本)입니다. 존자께서는 제가(諸家)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도판(新都板)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도판은 인가를 받은 것이니, 절대로 우리들이 마땅히 취하여 읽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소장본은 우리 것이 아니니, 신도판에 들어가지 않았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반드시 현동본을 많이 베껴서 나누어 소장한 이후에 우리의 의리를 지키고 우리 것을 만든다면 허물도 없고 근심도 없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手本決無不虞之喩, 竊悶其不相悉也.鄙之所慮者, 玄本也, 尊乃以諸家藏新都板當之, 都則認也, 決非吾輩之所當取讀.他藏則非吾有也.安知不收入於都而不復出耶? 必多寫玄本, 分藏然後, 守吾義, 作吾有, 可以無累無虞焉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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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 병태의 자사 【을해년(1935)】 金元中【炳泰】字辭 【乙亥】 저 땅 아래 하늘 있는 태괘(泰卦)295)는 惟地天泰,그 덕성이 중(中)을 숭상하고, 厥德尙中,사람의 도리에다 미루어 보면 推之人道,그 역시 중(中)을 잡음에 있으니, 亦在執中,동족의 아들 김병태(金炳泰)에게 族子炳泰,원중(元中)을 자로 붙여주네. 欽以元中.도(道)는 정심하고 미묘하여 道惟精微,그 중(中)을 알기 어려우니, 難識者中,어떻게 그것을 알아볼까 識之以何,격물(格物)하고 치지(致知)함에 있네. 在格致中.격물이 지선(至善)에 이르면 格到至善,곧 그 중(中)을 볼 것이고, 卽見其中,집중(執中)이 원숙함에 이르면 中到熟處,천지의 조화에 참여하리니, 參天地中,그 단서의 첫머리를 물어 問厥端始,경전 속에서 찾아 보소. 求經傳中. 惟地天泰, 厥德尙中, 推之人道, 亦在執中, 族子炳泰, 欽以元中。 道惟精微, 難識者中, 識之以何, 在格致中。 格到至善, 卽見其中, 中到熟處, 參天地中, 問厥端始, 求經傳中。 태괘(泰卦) 《주역》의 〈태괘(泰卦)는 땅[地] 밑에 하늘[天]이 있어 지천태괘(地天泰卦 )라고 말하는데, 그 〈상사(象辭)〉에 "하늘과 땅이 사귀는 것이 태이다.[天地交泰]"라고 하였는데, 천지의 기운이 크게 통하여 만물이 생장(生長)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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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포28) 知止浦 봉래산을 등지고 푸른 바다 낀 채 俯臨滄海背蓬山산과 바다 중간에 한가로운 곳 얻으셨네 山海中間得地寬밀물 물러가니 물고기와 새우 물가에 가득하고 潮退魚鰕堆ㅁ渚가을 깊어가니 감과 밤이 상자 가득 쌓이네 秋深柿栗積箱盤높고 낮은 촌락들은 안개와 노을 속에 있고 高低村落烟霞裏멀고 가까운 서재들은 소나마 잣나무 사이에 있네 遠近黌齋松柏間지포옹께서는 머물 곳을 아셨기에 云是浦翁知止處지금 순박한 풍속으로 완악한 이들 청렴하게 하네29) 至今淳俗可廉頑 俯臨滄海背蓬山,山海中間得地寬.潮退魚鰕堆ㅁ渚,秋深柿栗積箱盤.高低村落烟霞裏,遠近黌齋松柏間.云是浦翁知止處,至今淳俗可廉頑. 지지포 고려의 문인 김구는 일찍이 중서시랑 평장사의 직책에서 물러나 고향 선학동(仙鶴洞)으로 돌아가 인근 변산포에서 새로운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이곳을 '지지포'라고 하였다. 완악한……하네 맹자가 "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이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이는 흥기하게 된다." 하였다. 《孟子 萬章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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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 장렬 에게 줌 贈崔性武【長烈】 이십 년을 태악 동쪽에서 성장하여 卄載生長台岳東견문과 도량은 아직 넓지는 못하다네 見聞器局未能洪어리석은 마음이나 옛사람과 같아지려 하고 痴心欲與前人合졸렬한 성품이나 속된 무리를 따르지 않았네 拙性難隨俗輩同책상 마주할 땐 흰 해를 버리는 것55) 도리어 미워하고 對案還憎抛白日스승을 따를 땐 봄바람에 앉은 일56) 헛되이 저버렸지 從師虛負坐春風절실하게 교분 맺어 서로 권면함이 뜻 없지 않지만 切偲相勉非無意어찌 공연히 부끄러운 마음만 드는지 其柰空空反愧中 卄載生長台岳東,見聞器局未能洪.痴心欲與前人合,拙性難隨俗輩同.對案還憎抛白日,從師虛負坐春風.切偲相勉非無意,其柰空空反愧中. 흰……것 세월을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백일(白日)'은 시간 또는 세월을 말한다. 봄바람에……일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춘풍(春風)'은 '춘풍화우(春風化雨)'의 준말로 훌륭한 교육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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