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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숙 창암에게 올림 정묘년(1927) 4월 上鬯庵族叔 丁卯四月 어제 용동(龍洞)의 분간(分刊)에 대해 광주(光州)의 통첩(通牒)이 와서 보았는데, 유영선(柳永善)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용동과 진주가 서로 합친 것입니까? 당초에 용동이 간행을 진주와 달리 한 것은 이익을 다투어 설치했기 때문이라서 선사께서 손수 편정한 고본(稿本)을 따른다고 말한 것도 거짓이었을 뿐이니, 잠시 떨어졌다 잠시 합친 것은 본색이 저절로 드러난 것으로 괴상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별지에서 인용한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이 대전(大殿)에 올라가서는 서로 다투고 대전을 내려와서는 서로 즐거워했다는 일72)은 사례가 같지 않아서 대단히 어긋나고 망령스러우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기와 범중엄이 대전에 올라가서는 서로 다퉜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나라를 위한 것이나 다만 견해가 같지 않아서이니, 바로 공자가 조정에 있을 때에는 말을 분명하게 하신 뜻73)입니다. 그들이 대전을 내려온 이상 어찌 견해가 달라 말을 분명하게 했다는 이유로 서로 즐거워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당시에 조정에 같이 있었던 사람 중에 감히 송나라의 선황제가 오랑캐에게 항복할 뜻이 있었다고 무함하는 자가 있었다면, 한기와 범중엄은 반드시 법에 의거하여 죄를 바로잡기를 청한 이후에 그만두었을 것이니, 어찌 다투고 즐거워하는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우리들이 음성의 오진영과 처음부터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이 관련되지 않고 다만 문집을 간행하는 일을 목판으로 할 것인지 활자로 할 것인지와 호남에서 할 것인지 영남에서 할 것인지를 다투었을 뿐이라면, 한기와 범중엄의 고사를 인용할 만합니다. 지금 음성의 오진영이 선사께서 인가를 지시한 일이 있다고 무함한 것은 바로 신하가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할 뜻이 있었다고 무함하는 것과 똑같은 죄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그 죄를 성토하여 바로 잡았는데 다시 그들과 서로 즐거워한다면 어찌 스승을 무함한 자와 똑같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을 무함한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것이 유영선 무리의 완고한 견해이니, 나머지 귀신 소굴 속에서 술에 취하고 잠든 사람들이야 또한 꾸짖을 것도 못 됩니다. 고매하신 회봉(晦峰) 어른에 이르러서는 가까운 근처에 살아서 의리를 익숙히 들었는데도 오히려 높다랗게 통수(通首)라는 지위를 차지하여 자기도 모르게 함부로 말하고 의리를 어그러뜨리는 죄과에 빠졌으니, 대단히 한탄스럽고 애석합니다. 우리들은 이 어른에 대해서 모두 같은 마을에서 대대로 맺은 정의가 있으니, 다른 동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족숙께서는 또한 동갑으로 허물이 없으시니, 부디 편지 한 장을 보내 구원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昨見龍洞分刊, 光州通牒來到, 柳永善名, 參其中, 無乃龍晉之相合乎? 當初龍刊之貳晉, 爲爭利而設.其云遵手本者, 假之而已, 則宜其乍離乍合, 本色之自現也, 無足恠者.但其別紙所引, 韓范上殿相爭, 下殿相歡之事, 類例不倫, 極爲乖妄, 不容不辨.蓋韓范之上殿相爭, 均之爲爲國而只是所見不同, 正孔子在朝便便之意也.其下殿也, 豈有因異見便便之故, 而不相歡之理乎? 若使當時同朝者, 敢有誣宋之先帝有降虜之意者, 韓范必請據法正罪而後已, 豈容曰爭曰歡之可論哉?吾儕與陰震, 初無認誣之關, 而只爭稿事之或板或活若湖若嶺而已, 則可引韓范之故事也.今陰震之誣先師有認敎, 正臣子誣君降意之同罪也.吾儕旣已討正其罪, 復與之相歡, 則豈非同爲誣師者乎? 以誣師爲細故, 柳輩之見固也, 其餘人鬼窟裡醉寐者, 又不足責.至於晦峰高丈, 居在此近, 習聞義理, 而猶巍然居通首, 不覺陷於妄言乖義之科, 則甚可歎惜也.吾儕於此丈, 均有鄕井世契之誼, 非凡他同門比.叔主又同庚無間, 幸爲一書而救授之, 如何. 한기(韓琦)와……일 《춘추좌전(春秋左傳)》 成公 2年 송나라 재상 위공(魏公) 한기(韓琦)는 "범희문(范希文)과 부언국(富彦國)이 함께 앞에서 정사를 논할 때에는 곧장 서로 다투다가도 각기 헤어져서 궁전만 떠나오면 마치 다툰 적이 없는 것처럼 서로 화기(和氣)를 잃지 않으니, 이는 마치 '수레를 밀어 주는 사람〔推車子〕'과 같아서 그 마음은 항시 수레를 가게 하는 데에 있을 뿐이요, 자신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1 희문은 범중엄(范仲淹)의 자이며 언국은 부필(富弼)의 자이다. 조정에……뜻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가 종묘와 조정에 있을 때에는 말을 분명하게 하셨다.〔孔子在宗廟朝廷 便便言〕"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주희가 "종묘는 예법을 지키는 곳이고 조정은 정사를 행하는 곳이므로, 분명히 구별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반드시 상세하게 묻고 명확하게 말한 것이다.〔宗廟 禮法之所在 朝廷 政事之所出 言不可以不明辨 故必詳問而極言之〕"라고 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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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이장유흥에게 답함 경신년(1920) 與誠菴李丈裕興 ○庚申 삼가 생각건대, 병옹(炳翁 병암 김준영)은 순수하고 소박한 자질로 여러 해 동안 독실한 공부를 하였으니 우뚝하여 그 덕이 높고 깊숙하여 그 학문이 깊습니다. 광명정대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심사(心事)와 겸손하고 충일하며 엄중하고 삼가는 기상(氣像)으로, 사람을 사랑하기를 봄비가 벼의 싹을 적셔주듯이 하고 의리로 재단하기를 가을 서리가 풀을 떨구듯 하시는 데다 세상에 맞서 격렬하지도 않고 물들어 더렵혀지지도 않으며 자신을 높이 내세우지도 않고 낮추지도 않으시면서 중정(中正)과 확실(確實)을 절충하시니, 이것이 평생 논리를 세우고 자신을 처신해온 표준이었습니다. 제가 선생을 보건대, 자못 인의가 몸에 갖추어진 군자입니다.이와 같은 포부를 지니고 임하(林下)에서 늙어죽어 위로는 임금과 재상의 알아줌을 얻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사문의 맹주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덕을 아는 자가 드물어 훌륭한 명성이 드러나지 못했으니, 어찌 개탄하고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옛날에 부지런히 도를 구했던 뜻과 정성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베풀었던 선과 비통해 하며 세상을 근심했던 마음이 환히 유고 안에 실려 있으니, 만약 유고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선생의 마음이 죽지 않을 것이고, 유고가 공적으로 전해진다면 선생의 은택이 세상에 미칠 것입니다. 원고를 간행하는 일이 어찌 동문으로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선생에 대해서 평소에 기꺼이 감복하여 진실로 사문의 아성(亞聖)으로 생각했고 선생이 가르침을 베풀 적에도 또한 선생을 이렇게 일컬었으니, 이 어른의 이러한 은혜를 죽도록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유고를 간행하는 공역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꺼려서 사양하고 피하겠습니까? 이것이 명을 들으면 즉시 행하여 한 팔뚝의 힘이라도 도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모두 굽어 살펴주기를 바랍니다. 竊念, 炳翁以純粹樸茂之資, 用積累篤實之工, 卓乎其崇德, 淵乎其邃學, 光明磊落之心事, 謙沖儼恪之氣像, 愛人也, 春雨之潤苗, 裁義也, 秋霜之隕草.乃若不激不汙, 匪抗匪卑, 而折哀乎中正確實, 是其生平立論行己之準的也.以余觀乎先生, 殆乎其仁義具體之君子也.以若抱負, 老死林下, 上之不得爲君相之知, 下之不得主斯文之盟.知德者鮮, 令名不彰, 曷勝慨惜? 惟昔孜孜求道之志, 惓惓及人之善, 惻惻憂世之心, 班班載在遺稿中, 苟遺稿不泯, 則先生之心不死, 遺稿公傳, 則先生之澤被世.刊稿之役, 豈非同門後死之責歟? 澤述之於先生, 平日悅服, 誠居師門之亞, 而先生之施敎也, 亦稱此焉.此翁此恩, 沒世可忘? 苟可以爲功於稿役者, 豈敢憚勞而辭避也? 此所以聞命卽行, 庸助一臂之力也.綂希俯諒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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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의 매화를 보고 느낀 바 있어 임자년(1912) ○이하 동일하다. 見庭梅有感【壬子○下同】 선군께선 매화 심고 난간에 글을 쓰셨지만 先君種此傍書欄손때가 지금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手澤而今尙未殘농염함은 봄 늦게 피어도 방해될 게 없는데 濃艶無妨春晩見옅고 성글게 핀 꽃을 어찌 굳이 눈 속에서 보는가 淡疎何必雪中看숨어 사는 이는 예로부터 교유의 정 두텁고 幽人從古交情密시인은 원래부터 시품을 쏟아내기 어려운 법 騷客元來品寫難홀로 맑은 향기 완상한 지 삼 년 지났으나 獨賞淸香三載後처연한 슬픈 마음에 편안치는 않구나 悽然心事不能安 先君種此傍書欄,手澤而今尙未殘.濃艶無妨春晩見,淡疎何必雪中看?幽人從古交情密,騷客元來品寫難.獨賞淸香三載後,悽然心事不能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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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밤에 벗들과 만나 읊음 十月望夜遇友人吟 서리 맑고 잎 떨어지며 달 밝은 때 霜淸木脫月明時우뚝 호탕한 담소에 밤 깊어감 더디구나 磊落豪談趁夜遲가을 지나 맑은 강은 바닥까지 보이고 秋後澄江全徹底눈 내린 후 늦게 핀 국화 가지 꺾이지 않았네 雪餘晩菊不摧枝가난을 지키며 안연의 물175) 마시길 바라고 固窮願飮顔賢水세상을 걱정에 두보의 술잔176) 기울이네 憂世聊傾杜老巵천 년 전에 자유로웠던 소식의 흥을177) 放達千秋蘇子興한가로움이 몸을 맡겨 남들에게 알리리라 等閒付與別人知 霜淸木脫月明時,磊落豪談趁夜遲.秋後澄江全徹底,雪餘晩菊不摧枝.固窮願飮顔賢水,憂世聊傾杜老巵.放達千秋蘇子興,等閒付與別人知. 가난을……물이요 안빈낙도를 일삼는 안회(顔回)의 삶을 말한다. 세상을……잔이며 우국충정의 심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던 두보(杜甫)를 말한다. 천……흥을 방달불기(放達不羈)로 세상을 보냈던 소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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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손 어른 종순 에 대한 만시 挽一山孫丈【鍾純】 효도와 근신의 가풍이 초산에서 으뜸인 이가 孝謹家風冠楚山한나라 시대 석씨178)라는 것에 나는 이견 없노라 漢朝石氏我無間예문에 비를 뿌리니 짙푸른 빛 남아있고 芸門雨化遺藍碧돌아가신 후 자손들 깃처럼 눈물 흘리네 翰死雲仍落羽斑책상 위엔 몇 권의 책만이 예전 그대로 있고 案上殘篇依舊在술동이 앞엔 밝은 달이 몇 년 동안 있구나 樽前明月幾年間무슨 일 때문에 한 번 곡할 겨를이 없어 未遑一哭緣何事먼저 교분을 저버렸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愧負先交但厚顔 孝謹家風冠楚山,漢朝石氏我無間.芸門雨化遺藍碧,翰死雲仍落羽斑.案上殘篇依舊在,樽前明月幾年間.未遑一哭緣何事?愧負先交但厚顔. 석씨 석씨 집안은 석분(石奮)의 집안을 말하는데, 석분은 여러모로 살펴 두루 깊이 삼갔고 그 네 아들인 석건(石建), 석갑(石甲), 석을(石乙), 석경(石慶)도 효도하며 조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석경은 태복(太僕)으로 있을 때 한 무제(漢武帝)가 수레 끄는 말이 몇 필이냐고 묻자 채찍으로 세어 보고 난 다음 여섯 필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하니, 근신한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史記 卷103 萬石張叔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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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두승산에 올라 翌日上斗升山 아홉 떨기 부용꽃 바닷가에 피어 있고 九朶芙蓉聳海頭천년의 자라 등에는 영류 땅 자리했네 千年鰲背地靈流고요한 약암에는 저녁구름 묵고 藥庵寂寂暮雲宿아득한 신선 발자취에 외로운 달이 머무네 仙跡蒼蒼孤月留노승은 삼계217)의 꿈을 응당 볼 것이고 老釋應觀三界夢한 점 티끌도 백층의 누각엔 오르지 못하겠지 點塵不上百層樓뜬구름 같은 인생사 대개는 여유가 없어 浮生大抵無間隙다시 이 산에 오른 지도 어느덧 사십 년이라 再到玆山四十秋 九朶芙蓉聳海頭,千年鰲背地靈流.藥庵寂寂暮雲宿,仙跡蒼蒼孤月留.老釋應觀三界夢,點塵不上百層樓.浮生大抵無間隙,再到玆山四十秋. 삼계 중생이 사는 세계를 세 가지로 분류한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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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에게 답함 병자년(1936) 答田士狷 丙子 신헌(愼軒)이 몰래 사순(士順)과 자경(子敬)에게 준 편지에 여차여차 '감히 변명하지 못하고 항거하지 못함을 두려워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재(全齋)79)의 비문은 선사께서 친히 고친 것입니다. 때문에 《고변록(考辨錄)》 가운데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씨는 《고변록》에 기재된 것과 같은 세 선생의 질의(質疑)에 관해 설(說)한 것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비록 말하기를, "선사께서 이르기를, '사고(私稿)를 정리하여 바르게 하는 것은 오로지 이견(而見)80)을 의지했다고 말하기에 우리가 이것을 빙자해서 임의대로 스스로 개찬(改竄)하였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러나 다만 선사가 이정(釐正)이라 말하였지, 어찌 일찍이 개찬이라 말하였던 것인가요? 또한 오이견에게 맡겨 이정한 이 일은 임술년(壬戌年) 5월에 친히 이정하기 이전에 있었은즉, 이미 때가 지난 훈계에 속합니다. 이미 때가 지난 훈계이므로 마땅히 근거로 해선 안 됩니다. 저들의 설이 근거가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저들의 미풍에 겁을 먹고 먼저 근심하고 두려워 할 마음을 품으니, 어찌 이치를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기를 기르는 것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愼軒以陰與士順子敬書有所云云有懼其不敢封辨不得抗拒之意, 殊不然也.全碑是先師親改.故不言於考辨錄中.田不關傳三先生說質疑, 有如考辨錄所載矣.渠雖曰先師云私稿釐正, 專恃而見, 籍此而任自改竄, 然只曰釐正,何嘗曰改竄乎.且此在壬戌五月親自釐正之前, 則己屬過時之訓.而不當爲據也.彼說之無據也如此, 而㥘於威風, 先懷憂懼豈非見理不明養氣未充之故耶. 전재(全齋) 임헌회(1811 ~1876 )이다. 조선 말기의 학자이다. 이견(而見) 오진영의 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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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중일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蔡中一 戊辰 《이아(爾雅)》 〈석친(釋親)〉에 "잉손(仍孫)의 아들을 운손(雲孫)이라 한다."라 하고, 그 주석에 "가볍고 먼 것이 뜬 구름과 같다.[輕遠如浮雲]"라고 하였습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거론하신 "5대손을 내손(來孫)이라고 한다."라는 구절도 그 이하에 각기 다른 명칭이 있고, 《이아(爾雅)》에도 근거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71) 대개 8대손을 운손이라 하는 것이 가볍고 멀다는 이유로 이름을 얻은 이상 8대손 이후를 운(雲)이라 통칭하여도 문제될 것이 없겠고, 8대손 이전은 아마도 갑자기 칭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가볍고 멀다는 의미에 저절로 귀결될 것입니다. 《爾雅》〈釋親〉云: "仍孫之子曰雲孫." 註言輕遠如浮雲也. 來書所擧"五代孫曰來孫", 以下各有別名, 亦有《爾雅》可據. 蓋以八代孫爲雲孫, 旣以輕遠得名, 則八代以後通稱雲可無害, 而以前則恐難遽稱, 而自歸於輕遠也. 그 이하……있습니다 《이아(爾雅)》 〈석친(釋親)〉에 "아들의 아들은 손자(孫子)이고 손자의 아들은 증손(曾孫)이고 증손의 아들은 현손(玄孫)이고 현손의 아들은 내손(來孫)이고 내손의 아들은 곤손(晜孫)이고 곤손의 아들은 잉손(仍孫)이고 잉손의 아들은 운손(雲孫)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명칭에 대해 각각 "손(孫)은 후(後)의 뜻과 같고, 증(曾)은 중(重)의 뜻과 같고, 현(玄)은 친속이 아득하다는 뜻과 같고, 내(來)는 왕래하는 친족이라는 말이고, 곤(晜)은 후(後)의 뜻과 같고, 잉(仍)도 중(重)의 뜻이고, 운(雲)은 뜬구름처럼 가볍고 멀다는 말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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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기 【무인년(1938)】 藍溪記 【戊寅】 내가 벗 강여 장보(姜汝章甫)의 남계실(藍溪室)을 방문하였을 때에 주인에게 편액의 뜻을 어디에서 취했는지 묻자, 주인이 말하기를,"이는 간옹 선사(艮翁先師 전우(田愚))께서 써 주신 것인데, 당시에 물을 수 없었고, 또한 가르침을 듣지도 못했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거처하는 곳이 남산(南山)인 것을 인하여 음이 같음을 취했을 것이네."하니, 내가 말하였다."이는 반드시 우리 그대가 겸양하여 감히 편액의 뜻을 감당하지 못하고, 우선 이렇게 나에게 고하였을 것이네. 만약 그렇지 않고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다고 한다면 청컨대 한번 그 뜻을 말해 보겠네.남산은 본디 옛적부터 은둔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네. 때문에 주자가 〈초은조(招隱操)〉에 사용한 것이네.77) 주인 또한 은둔하는 사람이니, 은둔자의 집에 편액을 건다면 바로 거처로 삼고 있는 남산의 본래 있는 '남(南)'을 취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곁으로 가서 음이 같은 '남(藍)'을 취하였으니, 어찌 깊은 뜻이 있지 않겠는가.대저 천하의 의리는 무궁하고, 나아갈 덕은 높고 커서 또한 헤아리기 어려우니, 선사께서 비록 어진 선각자라 하더라도 지극히 정미한 식견과 헤아리기 어려운 덕을 제자에게 바라고서 자기보다 뛰어나기를 원하지 않음이 없었겠는가. 성현이 후학에게도 또한 그러할 것이네. 만약 나의 학문이 후대 사람이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긴다면 이는 우리 선사의 마음이 아닐 것이네. 나는 선사께서 이러한 점에서 아마도 '쪽빛 보다 푸르다'라는 옛 말의 뜻을 취하여 우리 그대에게 바란 것임을 알겠네.우리 그대는 안으로는 밝고 밖으로는 순박하여 크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니, 바라건대 그 밝음을 인하여 더욱 옳음과 그름의 근원을 구하고, 그 순박함을 인하여 더욱 도덕과 학문을 높이 쌓아서 지행이 함께 닦이고 내외가 한결같게 함으로써 지극히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도록 더욱 유념하게나. 이는 배우는 자가 감히 자신을 작게 여기지 않는 뜻이고, 제자가 선사의 뜻을 공경히 체득하는 도이니, 본시 천리의 바름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선사보다 뛰어나기를 구하는 마음을 품게 하여 먼저 스스로 인욕의 사사로움에 빠지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네." 余過姜友 汝章甫 藍溪之室, 問扁義之取於主人.主人曰: "此艮翁先師書贈者.當時旣不能有問, 亦不聞有敎.然竊意其因所居南山而取音同者爾." 余曰: "此必吾子謙讓, 不敢當扁意, 而姑以是告我也.如曰不然而誠如子言, 請得而一言之.南山固自昔隱者攸廬.故朱子用於招隱之操.主人亦隱者, 扁隱者之室也, 宜其直取所居南山自在之南, 不然而從傍去, 取音同之藍者, 豈無深意者存? 夫天下之義理無窮, 進德之高大亦難量, 師雖先覺之賢, 莫不以極精之識、難量之德望於弟子, 而欲其勝我? 聖賢之於後學亦然.如曰吾學已至後人無以復加, 則非吾先師之心也.吾知先師於此, 蓋取古語靑於藍之義, 而望於吾子也.吾子內明而外淳, 可以大進.惟願因其明而益求是非之源, 因其淳而益積德學之崇, 知行交修, 內外如一, 於以至乎極其高明者加之意焉.此在學者不敢自小之志、弟子敬體師意之道, 自是天理之正, 非欲人敢懷求勝先師之心, 而先自陷人慾之私也云爾." 주자가 …… 것이네 〈초은조(招隱操)〉는 주희(朱熹)가 《초사(楚辭)》의 〈초은(招隱)〉을 모방하여 지은 노래로,  "남산의 계수나무에 가을이 오니, 바람 구름이 어둑하네. 그 아래 가난한 늙은이 살고 있어, 나무 열매 먹고 시냇물 마시며 계절이 가는 줄도 모르네〔南山之中桂樹秋, 風雲冥濛. 下有寒棲老翁, 木食澗飮迷春冬.〕"라고 하여 남산을 은둔자가 머무르는 곳으로 지칭하였다.《朱子大全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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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遠齋) 이장희진에게 답함 임술년(1922) 答遠齋 李丈喜璡 ○壬戌 지난번 편지에서 "요순은 본성대로 하셨다.74)〔堯舜性之〕"와 "성실함으로 인하여 지혜가 밝아지는 것을 본성이라 한다.75)〔自誠明 謂之性〕"와 "본성대로 하고 편안하게 한다.76)〔性焉安焉〕"의 여러 '성(性)' 자를 총명예지(聰明睿知)의 천성(天性)으로 보신 것77)은 저의 견해와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서로 부합하니 매우 다행입니다. 만약에 사람마다 똑같이 얻은 본연의 성으로 본다면 "탕왕과 무왕은 몸으로 실천하여 본성을 회복했다.〔湯武身之〕"의 몸으로 실천한 것과 "밝은 지혜로 인하여 성실해지니, 교육을 통해 들어간다.〔自明誠 由敎入〕"의 들어간 것과 "회복하고 잡아 지킨다.〔復焉執焉〕"의 회복하고 잡아 지킨 것은 유독 본연의 성이 아닙니까? 본래의 문리(文理)와 어법(語法)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본성대로 한다.〔性焉〕"의 주에서 주자가 분명하게 "홀로 하늘에서 얻었다.〔獨得於天〕"라고 해석한 데이겠습니까? 《소학》에 이르러서는 "오직 성인은 본성대로 하는 분이다.〔惟聖性者〕"78)의 '성(性)을 보통 사람들의 무너진 성과 상대하여 글을 썼으니, 마땅히 본연의 성이 될 뿐입니다. 向敎, 堯舜性之, 自誠明謂之性, 性焉安焉, 諸性字, 看作聰明睿知之天性者, 深幸淺見之不約相符也.如作人人同得底本然性看, 則湯武身之之所身者, 自明誠由敎入之所入者, 復焉執焉之所復執者, 獨非本然性乎? 合下文理語法, 恐不如此.而况性焉註, 朱子明有獨得於天之訓乎! 至於小學惟聖性者之性, 與衆人頹性, 相對立文, 則當只作本然性已矣. 요순은 본성대로 하셨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 上)〉에, "요 임금과 순 임금은 성품 그대로 하신 분이고, 탕왕과 무왕은 몸으로 노력해서 실천한 분이다.〔堯舜性之也 湯武身之也 五覇假之也〕"라고 하였다. 성실함……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1장과 제22장에 "참되기 때문에 저절로 밝아지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참되게 되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천하에서 지극히 참된 사람만이 그 성품을 다할 수 있나니 그 성품을 다할 수 있게 되면……천지와 더불어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惟天下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可以與天地參矣〕"라는 말이 나온다. 본성대로 하고 편안하게 한다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성기덕장(誠幾德章) 제3에 나오는 글을 주희(朱熹)가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류(道體類)에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고, 올바르게 행하는 것을 의라고 하고, 조리 있게 행하는 것을 예라고 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는 것을 지라고 하고, 확고하게 지키는 것을 신이라고 한다.〔愛曰仁, 宜曰義, 理曰禮, 通曰智, 守曰信〕"라고 하여 다섯 가지 덕을 말한 뒤에, "이 덕을 천성적으로 타고나서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한다.〔性焉安焉之謂聖〕"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러……보신 것 《중용장구(中庸章句)》 제31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만이 뛰어나게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백성에게 군림할 수가 있다. 관유하고 온유하기 때문에 천하를 포용할 수가 있으며, 강인하고 꿋꿋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킬 수가 있으며, 엄숙하고 중정한 자세를 잃지 않기 때문에 공경히 대할 수가 있으며, 조리 있고 세밀하게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할 수가 있다.〔唯天下至誠,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주석에서 聰明睿知는 생지(生知)의 자질로 보고 寬裕溫柔는 인(仁), 發强剛毅는 의(義), 齊莊中正은 예(禮), 文理密察은 지(智)에 각각 소속시켰다. 이렇게 되면 齊莊中正의 中과 正이 모두 예에 속하게 된다는 말이다. 오직……분이다 주자가 쓴 〈소학제사(小學題辭)〉에 나오는 말로, "성인은 본성대로 하는 분이라서 하늘처럼 광대하니 털끝만큼을 보태지 않아도 모든 선이 충족된다.〔惟聖性者 浩浩其天 不加毫末 萬善足焉〕" 하였고, 다음에 성인과 상대하여 "보통 사람은 어리석어서 물욕에 가리니 마침내 벼리를 무너뜨리고 이에 안주하여 포기한다.〔衆人蚩蚩, 物欲交蔽, 乃頹其綱, 安此暴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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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 이장에게 보냄 을축년(1925) 2월 與遠齋李丈 乙丑二月 음성에서 속인 일이 있음으로부터 동문의 선비들이 편지를 보내어 책망하여 일깨우는 자가 있었습니다. 깨우쳐 줌에 듣지 않으니 계속 성토하는 자도 있었고, 망설이면서 중립하는 자도 있었고, 수수방관하며 침묵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또한 두둔하며 학대를 조장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책망하지 않고 성토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자신의 문자를 세워서 미래를 기다리기를 우리 어른이 하는 것처럼 하는 자를 사람들은 대부분 중도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의 천박한 견해로 보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억하건대 옛날에 선사가 유정석(柳正錫)의 일로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으니, 말하기를 "후진(後進)의 젊은 무리가 의심하고 헷갈린다는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이것은 현명한 선배들이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조숙재(趙肅齋)가 홍오곡(洪鰲谷)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문(儒門)이 쇄락했는데도 한 번도 떨치고 일어날 뜻이 없어서 노주(老洲)선생이 경계한 것을 면하지 못했고, 숨이 끊어져 죽으려는 사람이 기력이 끝남에도 한마디 성토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니, 만약에 이 일에 대해서 분노하여 격분할 줄 모른다면 칼과 톱이 몸을 찌르더라도 고통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위해 속인 일을 변론하는 것은 본래 큰 의리입니다. 군친(君親)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고서도 팔짱을 끼고 좌시하는 것은 주자가 엄히 배척하였으니, 제자들이 선생에 대해서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만약 조금 다르다면 부모와 임금과 스승을 섬기는 의리79)는 땅을 쓴 듯이 없어질 것입니다."【숙재의 말은 여기서 끝난다.】라고 했던 말을 인용하여, 이를 통해 거듭 힘썼는데, 만약에 성토가 중도를 지나친다면 숙재가 어찌 노주 말을 인용하여 간절히 탄식하고, 선사가 어찌 숙재의 말을 인용해서 힘썼겠습니까? 유정석의 옴과 같은 작은 질병과 등애 같은 작은 근심에도, 선사가 오히려 이와 같이 했습니다. 이제 오진영에 대한 마음 깊은 곳의 근심과 승냥이와 늑대가 길목을 막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선사가 무덤 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용납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성토가 중도를 얻었음을 더욱 믿고, 더욱더 우리 어른이 성토하지 않는 것이 중도를 잃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어른이 스스로 세운 문장은 맹자(孟子)가 양주(楊朱)를 물리친 변론80)과, 한유(韓愈)가 불교를 배척한 문장81)이 여력을 남겨두지 않았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본 바로 기억하건대 다만 간단하게 몇 편의 대충한 말로 첫머리에 나온 것을 깨트리면 끝내는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어른은 동문의 노숙한 사람으로 중망을 받는 사람이니,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을 함에 뭇사람의 따름과 따르지 않음이 달려 있습니다. 따르고 따르지 않는 사이에 시비가 따라서 갈리니, 우리 어른의 입론의 문장이 뒷날을 기다려서 공적인 통문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비록 자못 무사한 일을 한다고 여길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너무 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지 통문에서 빠진 것과 드러난 행실과 변론한 문장이 없음만을 봅니다. 그러므로 호남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오진영을 애석히 여기고 선사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의심을 하고, 음당의 입장에서는 호남을 배반하고 음성을 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알려 말하기를, "원재(遠齋)가 일찍이 현암을 지지한 것에 대해서 맹세컨대 그 속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왕의 일에 대해서 후회한다."하고 하며 끌어다가 현암을 성토한 여러 사람들 속에다 나열하니【권순명이 조자정에게 답한 편지도 이와 같다.】 이것은 무슨 말로 오늘날과 훗날에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선생님을 대신하여 답답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지난여름에 현암이 어찌 음성의 오진영을 분별하여 성토하지 않는 것을 받들어 질문함에 대하여, 어른이 답장하여 말하기를, "저들이 나의 성리설이 선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바야흐로 죄목을 가하니 내가 어떻게 저들을 성토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리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식견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절대로 겸손하지 않고 스스로 방자한 마음이 아니라면 애초에 죄가 될 것은 없습니다. 비록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스승을 속인 자들이 무리를 지어 감히 그 득실을 논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오 씨가 속임을 성토한 혐의를 보복하고 싶어서 이를 들어서 이제야 죄를 추궁한다면, 보고 듣는 것이 미혹되지 아니하여 속마음을 다 드러내는 무리들이 나타날 것이니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또 군자의 마음 씀씀이는 스스로 돌이켜서 죄가 있다면 비록 수천 명이 나의 죄를 보상해 준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성토를 기다리지 않고 마땅히 스스로 성토할 것입니다. 내가 만약 죄가 없다면 비록 도끼가 앞에 있어서 몸이 살육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는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본디 죄가 없거늘 미리 다른 사람이 나를 억압할 것을 염려해서 사람들이 스승 속이는 것을 보고도 성토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성심으로 스승을 위하는 도리겠습니까? 근래에 최원(崔愿)·김세기(金世基)·정운한(鄭雲翰) 무리들이 호남 사람들을 엮어서 속이고 있는데, 차마 그 비참함을 눈뜨고 볼 수 없으니 사람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에 현암의 통문에 들어가면 반드시 성리설이 스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저들과 만날 것이라 하니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오호라, 우리 어른의 마음이 어찌 정말로 이와 같겠습니까? 이를 말한 자는 우리 어른의 마음을 모르는데 한 번 돌이켜보면 이왕의 말들을 후회한다는 것이 될 것이니, 그들이 우리 어른의 현명함을 칭찬하는 것은 우리 어른의 마음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이니, 진실로 한탄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래로 이런 말이 있는 것은 어찌 사람들이 다만 성토하지 않음과 편지로 책망하지 않는 것만 보고, 문자로 써진 것이 자못 몇 편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충심으로 고하는 것은 우리 어른이 같은 목소리로 성토하여 당원을 도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어른이 분명하지 않으면 놓지 않는다는 의리를 생각하여 널리 변론의 문장을 써서, 위로는 스승의 마음을 밝히고 다음으로는 저쪽에서 끌어대는 핑계를 끊을 수 있기를 바라서입니다. 自有陰誣事以來, 同門士有致書責喩者矣.喩之不聽, 繼以聲討者矣, 有依違中立者矣, 袖手舍嘿者矣.又有袒護助虐者矣.若乃不責不討, 只立自家文字, 以後來世, 如吾丈之爲者, 人多謂之得中.然以侍生淺見, 則殆以爲未也.記昔先師, 以柳正錫事, 與澤述書, 有曰: "後進少輩, 不無疑眩之慮, 此則賢輩, 不可不任其責也." 又引趙肅齊與洪鰲谷書, "儒門衰敗, 一無奮發底意, 而未免老洲先生所戒, 奄奄泉下人, 氣力而終, 未克出一口聲討, 若於此不知所以憤激, 則便是刀鋸在身, 而不知痛者也.爲師辨誣, 自是大義理, 見無禮於君親, 而拱手坐視, 朱子之所嚴斥, 則弟子之於先生, 寧有異同乎? 如曰'小異則生三事一之義, 掃地盡矣.'"【肅齋說, 止此】之說, 以申勉之, 若其聲討之過中也, 肅齊何以引老洲語而切歎, 先師何以引肅齊語而勉之? 柳正錫癬疥之疾, 蛟蟲之憂, 先師猶如此.今吳震泳心腹之患, 豺貇之當, 九原可作, 豈肯容之乎? 然則自信淺陋聲討之爲得中, 而益知吾丈不討之爲失中也.且吾丈所自立之文, 未知有如孟子闢揚之辨, 韓氏斥佛之文之不遺餘力者乎? 以吾之所睹記, 只將簡單幾篇略綽說, 破初頭一出, 而終不復發矣.蓋吾丈同門之老成重望, 一語一嘿, 衆之從違係焉.從違之間, 是非隨分, 吾丈之立文俟後, 而不入公通, 雖自以爲行所無事, 不爲已甚.然人但見其漏通而又無顯行辨文也.故以湖, 則疑其惜吳而不忠師, 以陰黨, 則意其背湖而向陰也.筆書而告諸人曰: "遠齋曾於主玄者, 誓言不參其中, 噬臍於已往", 引而并列於討玄者某某人中【權純命, 答趙子貞書, 如此】, 此則以何辭自鮮於今與後乎? 竊不勝代悶也.昨夏, 於玄巖, 以何不辨討陰吳奉質, 則文答謂, "彼輩, 以吾性說之不遵先師 方加以罪目, 吾安以討彼輩哉?" 此有決不然者.性說之未喩, 識見之不逮也, 絶非不遜自肆之心, 則元非所以爲罪者.雖曰有所未安者, 亦非誣師者輩之所敢議其得失也.若吳也欲報討誣之嫌, 擧此追罪於今日, 則視聽之, 未及眩, 而肺肝之徒呈露也, 奚益哉? 且君子之用心也, 自反而有罪, 則雖千人之褒賞我罪, 自若不待人討而當自討矣.我若無罪則雖鈇銊之當前, 身則受戮, 而我無愧也.若我本無罪, 而預慮人之勒我, 見人誣師而不之討, 是豈誠心爲師之道乎? 近日崔愿·金世基·鄭雲翰輩之構誣湖人, 惨不忍見, 人爭語曰: "遠齋, 若入玄通, 必遭性說違師之罪於彼輩矣, 可謂有先見之明也." 鳴呼, 吾丈之心 豈眞若是乎哉? 爲此言者, 其不識吾丈之心, 而一轉則爲噬臍已往之說矣, 其所以贊吾丈之明者, 乃所以昧吾丈之心也, 良可歎也.然邇來有此口者, 豈非以人之但見不聲討, 不書責, 而不見其所立文字之自有簡單幾篇者故耶? 侍生之爲此忠告, 非欲吾丈之同聲討, 助黨援.但欲吾丈之思不明不措之義, 廣立辨文, 上以明先師之心, 次之絶彼邊援引之口也. 생삼사일(生三事一) 낳아준 세 사람, 즉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을 섬기기를 똑같이 한다는 뜻으로, 《소학집주(小學集註)》 〈명륜(明倫)〉에 난공자(欒共子)가,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아가기에 섬기기를 똑같이 하여야 한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 주시고, 스승은 나를 가르쳐 주시고, 임금은 나를 먹여 주셨으니, 아버지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고 임금이 먹여 주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고, 스승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하니 낳아 주신 것과 똑같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가 양주(楊朱)를 물리친 변론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선성의 도를 보호하여 양주와 묵적을 막으며 부정한 말을 추방하여 부정한 학설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에서 나와 그 일에 해를 끼치며, 일에서 나와 정사에 해를 끼치니, 성인이 다시 나오셔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吾爲此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 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 聖人復起, 不易吾言矣.〕"라고 하였다. 한유(韓愈)가 불교를 배척한 문장 당 헌종(唐憲宗)은 즉위한 뒤 유학을 장려하여 한 때 당나라의 중흥기를 맞았으나 태자가 19세에 요절하자 비통에 빠진 나머지 불교와 도교에 빠져갔다. 봉상(鳳翔)에 있던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를 장안으로 모셔다 공양하려 한 것에 당시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있던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서 역대로 불교를 믿지 않았어도 임금들이 장수(長壽)한 예를 열거하고 불교의 폐단을 말한 다음 불골을 물이나 불속에 던져 버리라고 극간하였다. 이에 헌종이 대로하여 한유를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내보냈다. 《신당서(新唐書)》 권176〈한유열전(韓愈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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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 이장에게 보냄 을축년(1925) 4월 與遠齋李丈 乙丑四月 근래에 삼가 들으니 신해유서(辛亥遺書)는 선사의 수필을 거친 원본인데, 또한 우리 어른의 상자 속에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유언은 금등(金縢)에 의해서 그쳐졌고82) 위서(僞書)는 공씨의 벽에서 책이 나옴으로써 폐기되었으니,83) 옛날에도 그러했습니다.오직 우리 선사는 하늘이 그 마음을 보살피고 귀신이 그 유서를 보호하여, 함에 남겨지고 벽속에 감춰져 어디서나 빛나고 밝으니, 음성(陰城) 오진영의 간덩이가 아무리 단단할지라도 어찌 깨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깨져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청하옵건대, 우리 어른이 스스로 소홀하고 태만한 죄를 끌어다가 현동(玄洞)84) 선사의 묘에 고하십시오. 이는 그만둘 수 없는 일이며, 또 유서가 다시 발견된 이유를 널리 선포하여 "정재(靜齋 간재의 차자 전화구(田華九))의 유서는 감히 선사의 유서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악의적인 말을 막으십시오. 이 역시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近竊聞, 辛亥遺書, 經先師手筆之本, 又在吾丈篋中, 今始發見.流言止於金縢, 僞書廢於孔壁, 古亦然矣.惟我先師, 天監其心, 鬼護其書, 縢遺壁藏, 在在燦明, 陰膽雖硬, 安得不破? 破無餘.但請吾丈自引忘忽遅慢之罪, 告于玄阡, 不可已也; 廣布遺書再現之由, 以杜靜齊遺書不敢謂有等之惡口, 亦不可緩也. 유언은……그쳐졌고 유언이란 무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하여 주공이 섭정하자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이 주공을 모함하여 퍼뜨린 유언비어를 말한다. 금등은 주공이 무왕 대신 죽기를 원해 제를 올리고 빌 때 썼던 축문과 일의 전말을 기록한 내용을 담은 함으로, 그 내용은 《서경(書經)》〈금등(金縢)〉에 나온다. 3숙의 유언비어로 주공의 위치가 불안해져 2년 동안 동쪽으로 나가 거처하였는데, 성왕이 금등의 글을 열어 보고 주공의 결백을 알게 된 일을 말한 것이다. 위서(僞書)는……폐기되었으니 위서란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사라진 유가의 경전이 한(漢)나라 이후에 위작된 것을 말한다. 노 공왕(魯恭王)이 궁을 넓히기 위해 공자의 구택(舊宅)을 헐다가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예기(禮記)》,《논어(論語)》,《효경(孝經)》 등이 나온 것을 가리킨다. 현동(玄洞) 전우의 묘소가 있는 익산 현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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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군 중일 동건 에게 보냄 贈蔡君中一【東建】 그대가 다시 돌아가지 못할 사람이 던 것이 기뻐 喜君却作未歸人삼일 묵을 동안 좋은 인연에 자주 무릎을 마주했네 三宿淸緣促膝頻별천지의 소나무와 대나무 속세 밖에서 늙어가고 別地松篁塵表老명승지의 샘과 바위는 그림 속에 새롭구나 名區泉石畫中新강류는 수없이 꺾여도 뜻은 동쪽으로 흐르며218) 江流萬折東歸志공자의 학문 천년 지나도 지위는 홀로 우뚝하네 孔學千秋獨立身아름다운 자질은 지금처럼 쇠퇴하고 적은 날에 美質如今衰少日진실로 책임을 지고 좋은 시절에 이르리라 實頭負荷及芳辰 喜君却作未歸人,三宿淸緣促膝頻.別地松篁塵表老,名區泉石畫中新.江流萬折東歸志,孔學千秋獨立身.美質如今衰少日,實頭負荷及芳辰. 강류는……흐르며 만절(萬折)의 강하(江河)는 만절필동(萬折必東)과 같은 말로, 중국의 황하(黃河)가 여러 번 굽이쳐 흐르지만 마침내는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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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순(李毅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卽日 李毅淳 大父 卽日 李毅淳 大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60_001 모년 족손 이의순이 대부에게 추운 날씨에 무사히 행차를 마쳐서 위로된다고 하고, 자신은 돈이 없어 이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간찰 모년 즉일(卽日)에 족손(族孫) 이의순(李毅淳)이 대부(大父)께 추운 날씨에 무사히 행차를 마쳐서 위로된다고 하고, 자신은 돈이 없어 이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편지이다. 편지 받은 그 날에 이의순이 대부께 얼음 얼고 눈이 내리는 가운데 여정을 별일 없이 행차하셨다고 하니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자신은 빈손인 자로 스스로 불쌍히 여길 뿐인데, 이 일은 돈이 있었다면 마침내 끝났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니 서글프고 탄식함이 어찌 끝이 있었겠느냐는 내용이다. 오른쪽 부분이 일부 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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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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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종예(李鍾乂) 등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六年陰閏二月十八日 李鍾乂 李馨淳 大正六年陰閏二月十八日 李鍾乂 李馨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7년 음력 윤 2월 18일에 이종예와 이의순이 이형순에게 보낸 영수증 1917년 음력 윤 2월 18일에 증주(證主) 이종예(李鍾乂)와 이의순(李毅淳)이 이형순(李馨淳)에게 보낸 영수증이다. 수령액과 용역의 계약금액, 날짜, 증주, 수령인 등이 차례로 적혀있다. 大憲錢 21원53전 중에서 금(金) 10원(円)을 먼저 영수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발급한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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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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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이대순(李大淳) 우편물 수령증 2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12.2.13 趙壽煥 李大淳 (大正)12.2.13 趙壽煥 李大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이대순(李大淳)이 조수환(曺壽煥)에게 보낸 우편물의 수령증 1923년 이대순(李大淳)이 조수환(曺壽煥)에게 보낸 우편물의 수령증이다. 인쇄물이며, 상란 위에 우편물수령증(郵便物受領證)이라 되어 있다. 항목으로는 수령인씨명, 차출인숙소씨명, 우편물구별, 인수번호, 우편료, 중량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수취인은 조수환이며, 차출인은 시천리에 사는 이대순이고 도장을 날인하였다. 일부인(日附印)에는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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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중일에게 답함 기묘년(1929) 答蔡中一 己卯 보내신 편지는 잘 보았습니다. 대개 지금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제자가 스승의 문집을 고치는 것은 만고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당신께서 원재(遠齋)의 문집을 고치는 것은76) 오진영(吳震泳)이 《간재집(艮齋集)》을 고친데서 배웠으니, 당신은 서둘러 본래 모습을 회복하고 간행은 천천히 하시는 것이 지극히 옳고 또 옳습니다. 그러나 권(權)이 산삭하고 원재 어른께서 변무(辨誣)한 글들을 함께 복구하지 않는다면 큰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그것은 원재 어른으로 하여금 스승의 무함(誣陷)을 변석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놀랍고 두려운 마음으로 잘못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示喩備悉. 蓋今天之下無變不有, 而最是弟改師文, 萬古所刱有. 而高〈明〉改遠文, 學得於吳改艮文, 高明之急復本而緩印行者, 極是極是. 然而不幷復權刪辨誣諸作, 則終不免罪大者在以使遠師爲不辨師誣之人故也. 宜加驚惕而無誤焉. 당신께서……것은 원문은 '高改遠文'이다. 문맥을 살펴 '高'뒤에 '明'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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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金 東吉 乙丑 구천이 회계(會稽)에 깃들어 살고,82) 전단이 즉묵(卽墨)에 있을 때에83) 어떠한 심정이었고 어떠한 괴로움이었던가요? 그런데도 끝내 강한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온전한 제(齊)나라를 회복시켰습니다. 이제 그대의 괴로운 마음도 학업계의 회계와 즉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탁연한 공부를 목전에 행하여 훗날 전체의 공효를 거두지 못한다면 회계의 구천일뿐이고, 즉묵의 전단일 뿐입니다. 이는 한갓 수고롭고 무익한 것이니 무슨 가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句踐之棲會稽, 田單之在卽墨, 何等心力? 何等辛苦? 然而卒以滅强吳復全齊.今子之辛苦心力, 可謂學業界稽墨.不能下卓然之功於目前, 收全體之效於異日, 稽之踐而已, 墨之單而已.徒勞無益, 烏足尙哉? 구천이……살고 월왕 구천은 부차에게 패배하여 회계에 숨었다가 버티지 못하고 오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 후 치욕을 씻기 위하여 쓸개를 핥으면서 부국강병에 힘썼다. 그리하여 끝내 부차를 꺾고 패자(覇者)가 되었다. 《史記 越王句踐世家》 전단이……때에 전단은 연나라 장군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할 때 즉묵(卽墨)에서 맞서 싸운 장군이다. 성 안의 소 천여 마리를 모아 뿔에 칼을 장식하고, 몸에는 용의 그림을 그리고, 꼬리에는 기름을 묻히고, 결사대 오천 명을 뒤따르게 했다. 소의 꼬리에 불을 붙이자 소는 미친 듯이 적진을 향해 달려갔고, 결사대가 뒤따르면서 연나라 군대를 궤멸시켰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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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안에게 고함 【1925년 11월 29일】 告汝安 【乙丑十一月二十九日】 강을 건널 것을 만약 이루었다면 치욕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의리도 잃지 않았을 것이네. 할 수 없는 것이야 없겠지만 당사자가 있지 않으면 남은 사람들에게 뻗쳐 미쳐갈 것이네. 장검(張儉)이나 노천(老泉)의 일56)과 같은 것은 부끄러우니 백방으로 생각해도 단지 조용히 스스로 대처하는 한 가지 방법만이 있을 뿐이네. 渡江若遂, 則旣不遭辱, 亦不失義. 無不可爲, 但當事者不在, 延及其餘. 如張儉老泉事者可恥, 百爾思之, 只有從容自處一道而已. 장검(張儉)이나 …… 일 고소를 피해 달아나 친구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자결하는 일을 말하는 듯하다. 장검(115~198)은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사람으로 중상시(中常侍) 후람(侯覽)과 그 모친의 죄악을 탄핵한 일로 후람의 미움을 받고 무고를 당해 친구 공포(孔褒)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공포가 이 일로 연좌되었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張儉》 노천은 김식(金湜, 1482~1520)의 자인 듯하다. 그는 조광조(趙光祖)ㆍ김안국(金安國) 등과 도학 소장파(道學少壯派)를 이루어 제도 개혁에 힘썼으나 기묘사화가 발생하면서 선산(善山)에 유배되었고,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달아나 거창에 숨어 지내다가 자결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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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기 【을유년(1945)】 舂隱記 【乙酉】 벗 사천(士千) 송광엽(宋光燁)은 방아를 찧는 곳에 은둔한 자였다. 내가 그 때문에 용은(舂隱)이라 그의 호를 지어주었는데, 어떤 사람이 촌스럽다고 기롱하니, 내가 말하기를,"아니, 그렇지 않다. 옛 현인 중에 본디 포은(圃隱)ㆍ목은(牧隱)ㆍ도은(陶隱)ㆍ야은(冶隱)의 호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옛날에 채소를 가꾸고 가축을 기르거나 도자기를 굽고 쇠를 불렸다는 것은 명분이고,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방아를 찧는다는 것은 사실인데다 또 뒤이어 그것을 호로 삼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촌스럽지 않는가."라고 하니, 내가 말하였다."아니, 그렇지 않다. 사람의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고, 오늘날의 변고는 고려 말기 때보다 덧없으니, 그대는 채소를 가꾸고 가축을 기르거나 도자기를 굽고 쇠를 불리는 것만 유독 명분에 가탁한 것이고, 오늘날 방아를 찧는 것은 실제로 먹고 사는 일인 줄 어찌 알겠는가. 또한 사람이 의리를 지키는 것은 각기 그 분수를 따르는 것이니, 만약 옛날의 현인이 궁벽한 시골의 미천하고 빈한한 선비였고, 오늘날 사람이 벼슬과 봉록, 넉넉한 재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또 포은ㆍ목은ㆍ도은ㆍ야은이 함께 그것을 실제로 일삼지 않고, 용은이 명분에 가탁하여 실제의 일을 버리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그대는 한갓 옛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것이 절개인 줄 알고 명분에 가탁하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며, 오늘날 원수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사는 것이 잘하기 어려운 줄 모르고 실제의 일을 이름으로 삼은 것을 촌스럽게 여기니, 또한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 혹 용은이 내면의 바탕이 외면의 꾸밈보다 뛰어난 사람이기에 그가 바탕과 꾸밈이 조화로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하여 그 사람됨을 촌스럽게 여긴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宋友 士千 光燁隱於舂者.余故以舂隱號之.人有譏其野者.余曰: "否, 不然.古之賢者, 固有圃隱、牧隱、陶隱、冶隱之號也." 曰: "古之圃牧陶冶名也, 匪實也.今之舂實矣, 又從而名之, 不亦野乎?" 曰: "否, 不然.人性無古今之殊, 今日之變, 浮于麗末.子安知圃牧陶冶之獨爲托名, 而今之舂之實爲其食乎? 且人之守義, 各隨其分.使古賢而爲窮閻寒畯, 今人而有官祿餘資, 子又安知圃、牧、陶、冶之不幷事其實, 舂隱之不托名舍實乎? 子徒知古人不事二君之節而高其托名, 不知今日不親讐自食力之難能, 而野其名實, 其亦未之思也.抑舂隱質勝文者, 以其不得爲彬彬君子而野其人, 則不以爲不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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