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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일찍 출발하여 수달치(水㺚峙)3)를 넘어 돈탁(敦托)4) 나루를 건너 영남 하동(河東)의 선교(船橋) 저자 주변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아침 전에 30리를 갔다. 저자 안을 두루 둘러보았는데 곳곳에서 마주친 사람이 모두 생소하였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마륜(馬輪)의 일가 곡성(谷城)을 만났다. 전혀 생각지 못하게 이 일가를 만나 한없이 기뻤다. 그래서 절구 1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타향 사람이 무수히 많은 속에서(他鄕人海裏)갑자기 우리 종친을 만났다네(忽逢我宗親)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절로 기뻤는데(逢初心自喜)이별한 뒤 마음은 오히려 새롭구나(別後意猶新)그길로 작별하여 하동 진암(陣巖)5)의 성 부자(成富者) 우열(偶烈) 집에 이르렀다. 우열은 마침 병이 나서 만나지 못하고 다만 그 아들 필우(弼宇)를 만났다. 거기서 요기를 하였다. 주인이 객을 대접하는 것이 아주 소홀하였다. 출발하여 세곡(細谷)6)의 김 부자(金富者) 종이(宗頤) 집에 이르렀다. 김종이는 흥양의 점암(占岩)에서 이 읍으로 이거하였는데 학윤(學允)의 고모부이다. 본래 동향 사람인 데다 또 외가(外家)의 정의(情誼) 때문에 노소와 내외가 그지없이 환대하며 대접해 주어 아주 고마웠다. 아침을 먹은 뒤에 10리를 가서 유숙하였다. ○早發, 越水1)㺚峙, 越敦托津, 抵嶺南河東船橋市邊朝飯。 朝前行三十里。 周觀市中, 處處逢人, 皆生面目, 四顧無一人知者矣。 適逢馬輪谷城宗人。 千萬意外逢此宗人, 其喜可斗。 因吟一絶曰: "他鄕人海裏, 忽逢我宗親。 逢初心自喜, 別後意猶新。" 仍爲作別, 抵河東陣巖成富者偶烈家。 偶烈則適病不見, 只見其子弼宇。 仍爲療飢。 主人對客之, 甚爲疏忽。 移發, 抵細谷金富者宗頤家。 金卽興陽占岩移居于此邑, 而爲學允之姑母夫也。 本是同鄕之人, 又爲外家之誼, 老少內外, 歡接不已, 可感可感。 朝飯後, 行十里, 仍留宿。 수달치(水㺚峙) 광양 옥곡면에서 진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 광양에서 하동으로 가는 지방도가 있다. 돈탁(敦托)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오사리 돈탁 마을이다. 진암(陣巖)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진암 마을이다. 세곡(細谷)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 세곡 마을이다. 水 저본에는 '小'로 되어있으나 광양 지역의 지명 용례에 의거하여 '水'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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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0일(임오) 二十日 壬午 오늘은 입하(立夏)이다. 지곡(芝谷)의 정상원(鄭象源)・정종원(鄭琮源) 종형제가 경양(景陽)의 김영후(金永厚)와 함께 위문차 방문해주었다. 오후에는 함께 동행하여 지곡의 녹실(綠室)54) 어르신 댁에 도착했다. 〈지평공행장(持平公行狀)〉을 보여주어 그로 인해 기록한다.〈고(故)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오천(烏川) 정재건(鄭在楗)55) 행장(行狀)〉공의 이름은 재건(在楗)56)이고 자는 계주(啓周)인데, 본조 경술년(1910) 9월 4일에 살고 있는 옥과의 집에서 순절했다. 대개 이때에 섬 오랑캐가 창양(搶攘, 몹시 어수선함)하여 우리나라를 도둑질함에 8도가 윤상(淪喪, 모두 망함)하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다. 이에 구신(舊臣) 중에는 의리에 죽은 자가 거의 12~13명이었지만, 척촌의 비수를 가지고 목을 찔러 자살을 맹세함으로서 뜨거운 풍모와 늠름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게 한 것은 유독 충정공(忠貞公) 민영환(閔永煥)57)과 공 두 사람뿐이었다.공의 성은 정(鄭)으로, 영일인(迎日人)이다. 먼 조상은 이름이 균지(均之)인데, 고려에서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후대에 도 고관대작이 대대로 이어져 석학이 끊이지 않았으니, 3대를 전하여 문정(文貞)이 나왔고 2대를 전하여 정숙(貞肅)이 나왔으며, 또 4대를 전하여 문청(文淸)에 이르렀다. 문청은 곧 송강(松江) 선생이며, 선생의 8대 뒤에 공이 태어났다.문정은 이름이 사도(思道)이고, 고려 말의 명신으로 충실 근면하고 절의가 있었으며, 익찬공신(翊贊功臣)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올랐다. 오천군(烏川君) 정숙은 이름이 연(淵)으로, 우리 태종(太宗)・세종(世宗) 양조(兩朝)에 이르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함으로서 벼슬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가 되었고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되었다. 문청은 이름이 철(澈)로, 목릉(穆陵, 선조) 때 서인(西人)의 영수(嶺袖)가 되어 관직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고, 광국(光國)・평난(平難)의 두 공훈으로 책록되어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증조의 이름은 취하(就河)58)로, 영조 무오년(1738)에 사마 양시에 합격했고 호가 이간재(易簡齋)이다. 휘 검(檢)과 휘 최환(最煥)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데, 두 분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안 김씨 덕감(德鑑)의 딸로, 여행(女行)이 있었으며, 헌종(憲宗) 계묘년(1843) 5월 25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6~7세에 큰형과 작은 형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곁에서 기억하여 암송했는데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다. 8세 때는 ≪소학(小學)≫에 통달해서 아버지 설송(雪松)공은 그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임을 알고 기특하게 여겼다.이 해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애훼(哀毁)59)함이 성인과 같았다. 어머니를 잃고 큰형수 고씨(高氏)에게 맡겨져서 길러졌는데, 그를 섬기기를 어머니처럼 하여 종신토록 쇠해지지 않았다. 무진년(1868)에 설송공이 죽자 집상(執喪) 예를 다하였고 최질(衰絰, 상복)을 몸에서 벗지 않았다.이보다 앞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7경을 공부해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누차 떨어졌었다. 상복을 벗자[外除]60) 마침내 서울로 가서 성균관에 나가서 수십 년 동안 가난을 겪으면서 거친 나물만 먹었다.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데 공은 그것에 처한 것을 편안하게 여겨 조금도 어려워하는 낯빛이 없이 독서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니, 그 심지(心志)가 돈독함이 어려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었다.무자년(1888) 식년시(式年試)에 병과로 뽑혔고, 임진년(1892)에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으며, 9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 계사년(1893)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으니, 대개 이것이 공이 지내온 관직의 선후이다.공은 벼슬에 급급(汲汲)한 뜻이 없어 권세를 쫓지도 않았고 부탁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서울[長安]이 바다와 같아 거마(車馬) 소리가 떠들썩하였지만,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숨겨서 고요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만년에는 낙척(落拓)하여 향리(鄕里)로 돌아와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경전공부에 힘쓰고, 가동에게 일과를 주어 농사일에 힘쓰며, 세간(世間)의 일체 영욕(榮辱)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그 마음을 두지 않았다.사람들이 혹 기신(起身)하기를 권하면 곧 웃으면서 말하기를, "난(亂)을 만나 황야로 은거하는 것은 옛날에도 또한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 내게 무슨 서운함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굳게 누워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문청공(文淸公)61)의 충청우국지심(忠淸憂國之心)을 사모하여 그 당의 편액을 '소송(小松)'이라 하였다.기유년(1909) 봄에 군(郡)이 폐지되어 학교[鄕校]를 장차 철거하려고 하자,62) 공이 유생들을 모아놓고 개연(慨然)하여 이르기를, "국세(國勢)가 이에 이르러 부자묘(夫子廟)가 철거되니, 무릇 우리 고을 사람은 누구인들 통한(痛恨)하지 않겠는가? 내가 마땅히 봉소(封疏) 하리라."라고 하고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상소문을 이루었으나 마침내 일을 이루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다.임종한 날에는 의관을 바르게 하여 묘(墓)에 참배하고, 친우들을 방문하여 태연자약하게 담소하면서 근심하는 얼굴빛이 하나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사람들에게 닭을 잡아 점심 반찬을 만들게 하고 처자(妻子)와 함께 즐겁게 먹고 밖으로 나가니,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는데,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자 집안사람들이 비로소 놀라 급하게 찾아다녔다. 곧 사랑채의 고요하고 후미진 곳에 깨끗하게 소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손칼[手刀]로 자인(自刃)하여63) 피가 흘러 몸을 적신 채 조용히 의리를 위해 목숨을 버려 얼굴 모습이 살아있는 듯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휘둥그레지며 혀를 차면서 큰소리로 "충신이로다. 충신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부고가 나가자 원근(遠近)에서 들은 자들이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어진 사람이나 불초(不肖)한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친척을 애도하듯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그 유서(遺書)에 이르기를, "망국(亡國)의 신하가 구차하게 사는 것은 의리상 옳지 않다. 나는 명치(明治)64)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로 맹세하였으므로 9월 4일에 칼을 품고 죽는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당연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나의 죽음 때문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부지런히 주경야독하고, 우애를 더욱 두터이 하여 나의 가르침에 부응하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또 "나라를 위해 순절(殉節)하는 것은 신하의 직임이오. 내가 죽은 후 모름지기 세 아들을 잘 이끌어서 우리 집안을 잘 보존하도록 하시오."라고 했으니, 이것은 부인과 자식들에게 남긴 것이다.향년 68세로, 12일 모갑(某甲)에 본현 약천(藥川)65)의 진좌(辰坐, 동남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첫째 부인 배씨(裴氏) 묘와 같은 언덕의 십수보(十數步) 떨어진 곳에 따로 장사지냈으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공은 두 번 장가를 들었으니, 첫째 부인인 성주 배씨(星主裴氏)는 규현(奎賢)의 딸로 일찍 죽고 1녀를 두었다. 이 딸은 울산 김모씨에게 출가했다. 재취인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광태(光泰)의 딸로 옥계(玉溪) 진(稹)66)의 후손이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덕(氵悳)은 경주인(慶州人) 김모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숙(潚)은 서산인(瑞山人) 유영구(柳永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중부(仲父)에게 출계하였다. 익(瀷)은 양천인(陽川人) 허극(許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죽산인(竹山人) 박해창(朴海昌)에게 시집갔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비서랑(秘書郞)을 지낸 사람이다.아! 공께서는 품성이 순후(純厚)하고 용모가 단중(端重)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화순하고,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너그럽게 하였다. 비록 종이나 여대(輿臺, 하인)라고 할지라도 먼저 은혜롭게 하고 뒤에 잘못을 말했는데, 고구정녕하게 하며 급하게 말하거나 엄한 기색이 없었고 회초리로 때리지도 않았다.그러나 강직하고 방정한 몸가짐과 확고부동한 뜻은 분육(賁育)67)도 그 용맹함을 잃었고, 저양(雎陽)68)도 그 절조를 잃었으며, 문산(文山)69)도 그 충을 잃을 정도이다. 그러니 저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는 팔아먹고 적을 위해 주인에게 짖어댄 자들은 마음이 떨리고 쓸개가 찢어지며 부끄러워서 얼굴이 사색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자(韓子, 한유)가 말하길, "백이와 숙제가 없었다면 어지럽히는 신하와 해치는 자들이 후세에도 계속하여 나왔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공과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의 짝이 되지 않겠는가? 오호라, 아름답구나!삼가 임자년(1912) 봄에 족인 정해만(鄭海晩)70)이 찬술하다. 是日立夏也。芝谷鄭象源・琮源從兄弟。 與景陽金永厚。 慰問次枉臨。午後同爲作伴。 到芝谷綠室丈宅。 示以〈持平公行狀〉。 因以記之。故通訓大夫 司憲府持平 烏川鄭公 行狀。公諱再健。 字啓周。 本朝。 庚戌九月四日。 殉節于所居玉果之私室。蓋是時島酋搶攘。 竊我邦國。 八域淪喪。 宗社邱墟。舊臣之死於義者。 殆十二三。 而持尺寸之匕。 誓心穴頸。 烈風凜氣。 充塞乎天地。 獨閔忠貞永煥及公二人而已。公姓鄭。 迎日人。遠祖。 諱均之。 仕麗。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自後世襲冠冕。 名碩不替。 三傳而爲文貞。 再傳而貞肅。 又四傳而至文淸。文淸卽松江先生也。 先生之後八世而公生焉。文貞諱思道。 麗季名臣。 忠勤節義。 翊贊功臣。 政堂文學。 進賢館大提學。烏川君貞肅。 諱淵。 曁我太宗世宗兩朝。 以司馬筮仕。 正憲大夫。 兵曺判書。 贈議政府左議政。文淸諱澈。 穆陵時爲西人嶺袖。 官左議政。 策光國・平難二勳。 封寅城府院君。曾祖諱就河。 英廟戊午司馬兩試。 號易簡齋。諱檢。 諱最煥。 祖若考也。 兩世皆隱德不仕。妣扶安金氏德鑑之女。 有女行。 癸卯五月二十五日生公。公幼而聰穎絶凡。 兒六七歲時。 聞伯仲讀書。 從傍記誦。 無一字錯誤。八歲而通小學。 考雪松公。 知其爲遠大器。 奇之。是年丁母夫人憂。 哀毁如成人。失怙託邱嫂高氏鞠焉。 事之如慈母。 終身不衰。戊辰雪松公卒。 執喪盡禮。 衰絰不離身。先是以親命。 治七經。 屢屈不第。外除遂赴京。 就齋數十年喫貧。 藜莧苜蓿。人不堪其苦。 公處之晏如。少無難色。 讀書愈勤。 其心志之篤。 從少已然。戊子式擢丙科。 壬辰授副司果。 九月陞成均館典籍。 癸巳遷通訓大夫司憲府持平。 蓋公之歷官先後也。公仕䆠無汲汲意。 不趍權勢。 囁囑趦趄。長安如海。 車馬喧闐。 而閉戶歛跡。 寥寥如寒士也。晩年落拓歸鄕里。 敎兒而劬經傳。 課僮而勤畎畝。世間一切榮辱。 初不嬰其心。人或勸起。 則笑曰。 "遭亂遜荒。 古亦有人。 於我何憾?" 因堅臥不復出。慕先祖文淸公忠淸憂國之心。 扁其堂曰'小松'。己酉春。 郡廢而學校將毁。 公會儒生。 慨然謂曰。 "國勢至此。 夫子廟撤。 凡我鄕人。 孰不痛恨? 吾當封疏。" 期以身斃疏成。 而遂無事乃已。臨終一日。 正衣謁墓。 歷訪親友。 談笑自若。 一無戚戚容。及歸。 命家人殺鷄爲午饍。 共妻子食盡歡而出。 人不以爲恠。及暮不歸。 家人始驚遑索之。 卽於廊舍靜僻䖏。 淨掃端坐。 手刀自刃。 血淋淋濺身。 從容就義。 顔貌如生。 見者皆瞿然。 吐舌嘖嘖謂曰。 "忠臣忠臣。" 訃出。 遠近聞者。 無知不知賢不肖。 莫不咨嗟涕洟如悲親戚。其遺書曰。 "亡國之臣。 義不可以苟生。吾誓不在明治之世。 故九月四日。 伏釼而死。" 又曰 "人生於世。 死於當死。 死而不死。汝等勿以我死動念。 勤苦耕讀。 友愛加隆。 以副我訓。" 又曰 "爲國殉節。 臣子之職也。我死後。 須導率三子。 保我家室。" 此遺夫人諸子者也。享年六十八。 十二日。 某甲。 葬于本懸藥川之負辰原。 與元配裴氏墓同岡。 異窆十數步近。 遺命也。公凡再娶。 星主裴氏奎賢女。 早沒有一女。 適蔚山金某。豊川盧氏光泰女。 玉溪稹後也。生三男一女。 長氵悳娶慶州金某女。 潚娶瑞山柳永耉女。 出后仲父。 瀷娶陽川許極女。女適竹山朴海昌。 文秘書郞。噫! 公性質純厚。 風儀端重。 對人以和。 御下以寬。雖婢僕輿臺。 先恩後誨。 諄諄然。 無疾言遽色。 捶楚不加焉。然剛方之操。 牢確之志。 賁育失其勇。 睢陽失其節。 文山失其忠。彼負恩賣國。 爲賊吠主者。 能不心戰膽裂。 而忸怩面死土色乎? 韓子曰。 "微二子。 亂臣賊子。 接跡於後世。" 如公者。 非若人之儔也歟! 嗚呼韙哉! 謹狀。壬子春。 族 鄭海晩。 撰。 녹실(綠室) 정해만(鄭海晩, ?~1913)의 호이다. 자는 성보(成甫),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정철(鄭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해춘(海春)이며,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서 살았다. 정재건(鄭在楗, 1843~1910) 자는 계주(啓周), 호는 소송(小松),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188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전적(典籍),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시국이 혼란해짐을 보고 사직하여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다가,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고 자결하였다. 健은 楗으로 바로 잡는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자는 문약(文若)이고, 호는 계정(桂庭)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7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21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서구 선진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신문명을 눈으로 체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양력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로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다. 취하(就河) 정취하(鄭就河, 1691~1759)로, 자는 회원(會源), 호는 이간재(易簡齋),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5대손이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친교가 있었다. 애훼(哀毁) 부모상을 당하여 몹시 슬퍼해서 몸이 허약해진 것을 말한다. 외제(外除) 외면으로만 상복을 벗고 속으로는 아직 슬픔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모의 상에 상기를 마치면 외제한다.(≪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 문청공(文淸公) 문청공(文淸公)은 정철(鄭澈, 1536~1593)의 시호이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정유침(鄭惟沈)으로,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1551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유배되었던 아버지가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全羅道) 담양(潭陽) 창평(昌平)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였다. 정철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임억령(林億齡)・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星山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기유(己酉)년 …… 하자 1908년에 옥과현을 폐지하고 창평군에 합하였다. 그 뒤 1914년에 다시 곡성군에 이속되었다. 손칼로 자인하여 정재건은 1910년 황현(黃玹)의 자결 소식을 듣고, "선비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정재건이 자결할 때 사용한 칼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명치(明治) 일본의 연호로, 1868~1912년에 사용하였다. 약천(藥川) 곡성군 입면 약천리를 말한다. 옥계(玉溪) 진(稹) 노진(盧稹, 1518~1578)을 말한다.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1546년(명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형조 참의・병조 판서・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분육(賁育) 춘추전국시대 용사(勇士)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이름이다. 저양(雎陽) 당나라 현종(玄宗) 때 저양태수(雎陽太守)를 지낸 허원(許遠)을 말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장순(張巡)과 함께 저양성을 지키다가 몇 달을 포위당했으며 결국 성이 함락되어 함께 사로잡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을 말함. 송(宋)나라 말엽의 충신(忠臣)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수도 임안(臨安)이 원(元)에 함락된 뒤에도 단종(端宗)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군(元軍)과 싸우다가 잡혀 죽었다. 정해만(鄭海晩, ?~1913) 자는 성보(成甫), 호는 녹실(綠室),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정철(鄭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해춘(海春)이며,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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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갑신) 二十二日 甲申 맑고 바람. 오전에 녹실(綠室)에 들어가 고경(古經)을 토론하고 오후에 돌아왔다. 참봉과 더불어 잠깐 말을 주고받으며, 세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걱정하는 말을 하고 파했다. 고두강(高斗綱)72) - 자는 천경(天卿)이다 - 의 ≪회과당유고(悔過堂遺稿)≫를 보았는데, 장계(藏溪) -성명은 오이정(吳以井)73)이며 자는 명중(明仲)이다- 가 그를 추회(追懷)하면서 수필을 적은 것이 있어서 이에 그것을 기록한다.나의 벗 고천경(高天卿)은 인품이 매우 높고 쇄락하여 마치 얼음으로 만든 병에 비치는 가을 달과 같았고, 세상맛에 대해서는 담담한 것 같아서 물욕이 침범하지 못했다. 일찍이 나와 더불어 색욕을 논할 때 곧 이르길, '남녀 음양의 도는 다만 조화가 생생하는 묘일뿐이니, 어찌 여기에 정(情)을 해당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내가 그것을 듣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트여 마치 천 길이나 되는 구덩이 속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다른 무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미 이것에 대해서 철저히 알게 되었다.일찍이 임오년 여름에 나와 천경이 대자암(大慈庵)74)에 있으면서 ≪계몽(啓蒙)≫75)을 읽고 있었는데, 천경이 나에게 이르길, "그대는 음양이 하나의 기(氣)라는 묘리를 아는가?"라고 물어서 내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천경이 "다만 이처럼 경솔하게 응대하여 말하는 것은 옳지 않네. 모름지기 굴(屈)한 것은 음이 되고 편[伸] 것은 양이 되는 것은 단지 하나의 기가 굴신 왕복한 것일 뿐, 특별히 두 개의 기가 있어서 양이 되고 음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네."라고 하였다. 그 소견의 뛰어남이 이와 같았는데도 성취함이 없이 죽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도다. 陽而風。午前入綠室。 討論古經。 午後還。與參奉暫爲酬酌。 憂世俗之似是亂。 眞話而罷。看悔過堂【姓高字天卿】遺稿。 至藏溪【姓吳。 名以井。 字明仲】追懷隨錄。 因以記之。吾友高天卿。 人品甚高灑落。 如氷壺秋月。其於世味。 淡淡如也。 不爲物欲之所侵屈。嘗與余論色欲。 乃曰'男女陰陽之道。 只是造化生生之竗。 豈可當情於此?'云云。余聞之。 不覺爽然。 若超出於千仞坑塹中。 不是他徒說得如此。 已於此處透了。曾在壬午夏。 余與天卿。 在大慈庵。 讀啓蒙。 天卿謂余曰。 "君知陰陽一氣之竗?" 答曰。 "然。" 天卿曰。 "不可只如此草草應對說將去。須得屈而爲陰伸而爲陽。 只是一氣之屈伸往復而已。 非別有二氣爲陰爲陽者。" 其所見之超詣類如此。 而不克有成就而死。 可勝歎哉! 고두강(高斗綱, 1614~1643) 자는 천경(天卿), 호는 회과(悔過),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고경명(高敬命)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부천(傅川)이다. 오이정(吳以井, 1619~1655) 자는 명중(明仲), 호는 장계(藏溪),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희도(希道)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 복흥(復興)의 딸이다.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639년(인조 17) 사마 양과(司馬兩科)에 합격하고, 1640년 고두강(高斗綱)・정한(鄭漢)을 찾아 산사로 가서 함께 ≪주역≫을 강론하였다. 1650년(효종 1) 태학(太學)에 들어가 이듬해 정시(庭試)에 응하였으나 자급(資級)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력하였다. 유고로 ≪장계유고≫ 1책이 있다. 대자암(大慈庵)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의 상월정(上月亭)이 있던 자리가 원래 대자암 터라고 한다. 대자암은 고려 때 세워진 절인데 조선 초에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1457년 언양인(彦陽人) 김자수(金自修)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이곳에 상월정을 창건하여 손자사위인 함평이씨(咸平李氏) 이경(李儆)에게 양도하였고, 그 후 이경(李儆)은 사위 고인후(高因厚)에게 다시 양도하여 주었다고 한다. 계몽(啓蒙)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말함. 주희(朱熹)가 초학자를 위해 지은 ≪주역≫의 해설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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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병술) 二十四日 丙戌 맑음. 집에 돌아옴. 陽。還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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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병오) 十六日 丙午 [내용없음] [내용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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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정미) 十七日 丁未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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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무신) 十八日 戊申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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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기유) 十九日 己酉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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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병진) 二十七日 丙辰 약간 맑고 추움. 微陽而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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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정사) 二十八日 丁巳 맑다가 밤에 잠깐 비. 陽夜乍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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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을묘) 二十六日 乙卯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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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병오) 二十九日 丙午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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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새벽에 출발하여 덕평(德坪)39)에 이르자 막 동이 텄다. 천안(天安) 도리치(道理峙)40)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직산(稷山)41) 삼거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홍경(洪景)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새벽에 출발할 때 무열 씨가 먼저 다음과 같이 읊었다.집 남쪽 새벽닭 소리 귓전 가득 들리는데(屋南晨鷄滿耳聽)동녘에 아직 해는 뜨지 않고 별만 반짝이네(東猶不出啓明星)승려가 등불을 가지고 앞길을 재촉하니(有僧持燭催前路)앞에 펼쳐진 수많은 산은 푸르름을 갈아놓은 듯하네(當面群山只磨靑)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금계가 한 차례 우니 객이 먼저 듣고(金鷄一唱客先聽)길 안내 등불을 켜니 완전히 별처럼 보이네(指路點燈完似星)오르락내리락 산길의 어둠 속에서는(低仰山蹊冥色裏)연장자가 젊은 소년에 미치지 못하네(大年不及少年靑)오서 객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나그네 가장 먼저 새벽닭 소리 듣고 일어나니(旅客最先曉鷄聽)구름 낀 하늘에 비가 오려나 별이 보이지 않네(雲天欲雨未看星)승려는 등불로 길을 안내하며 여행길을 재촉하고(僧燈指路催行李)그림처럼 아름다운 수많은 산은 푸르스름하네(活畵群山影裏靑) ○曉發, 抵德坪始開東矣。 抵天安道理峙朝飯。 抵稷山三巨里中火。 抵洪景店留宿。 曉發時, 武說氏先吟曰: "屋南晨鷄滿耳聽, 東猶不出啓明星。 有僧持燭催前路, 當面群山只磨靑。" 余次曰: "金鷄一唱客先聽, 指路點燈完似星。 低仰山蹊冥色裏, 大年不及少年靑。" 烏栖客次曰: "旅客最先曉鷄聽, 雲天欲雨未看星。 僧燈指路催行李, 活畵群山影裏靑。" 덕평(德坪)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이다. 도리치(道理峙) 천안 남쪽에서 공주로 통하는 고갯길이다. 직산(稷山)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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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오전에 노원이 경순과 같이 왔다. 경순이 내일 동행할 생각으로 극구 만류하였으므로 여산에 일행을 권하여 보내고, 나와 무열 씨와 경순이 함께 묵었다. 어제 전주에 들어갔을 때 무열 씨가 먼저 다음과 같이 읊었다.성조가 이 고을에서 개창하였으니(聖祖龍興自此州)패풍25)의 산수 형세 오래도록 남아있네(沛豊山水勢長留)우뚝한 사당에 아름다운 기운을 바치고(巋然殿廟呈佳氣)눈에 가득 봄꽃 만발한 명승을 유람하네(滿目烟花勝地遊)내가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호남을 낱낱이 헤아려 제일의 고을이니(歷數湖南第一州)신풍26)의 용덕27)이 이곳에 남아있네(新豊龍德此間留)눈앞에는 모두 번화한 물색이 있으니(眼前都是繁華物)소인묵객이 유람하며 몇 번이나 무릎을 치네(幾度騷人擊節遊)오서 객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아름다운 산과 수려한 강이 풍부한 전주라(佳山麗水饒全州)호남 좌도의 풍경이 이곳에 남아있네(湖左風烟此地留)의관이 모두 다 화려한 자제들이(衣冠摠是繁華子)객점에서 젊은 기생28)과 진종일 노니네(店錦纏靑盡日遊) ○午前魯源與敬純偕來。 敬純以明日同行之意堅挽。 故勸送同行於礪山, 余與武說氏及敬純同留。 昨日入完時, 武說氏先吟曰: "聖祖龍興自此州。 沛豊山水勢長留。 巋然殿廟呈佳氣, 滿目烟花勝地遊。" 余次曰: "歷數湖南第一州, 新豊龍德此間留。 眼前都是繁華物, 幾度騷人擊節遊。" 烏栖客次曰: "佳山麗水饒全州, 湖左風烟此地留。 衣冠摠是繁華子, 店錦纏靑盡日遊。" 패풍(沛豐) '풍패(豐沛)'라고도 하는데,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고향이므로 후세에는 제왕의 고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전주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대가 살던 곳이므로 패풍이라고 한 것이다. 신풍(新豐)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부친을 모셔 와 장안(長安)의 황궁(皇宮)에서 태상황(太上皇)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하였는데, 그 부친이 고향인 풍현(豐縣)을 못 잊어 하자 장안 부근에 새로운 풍현[新豐]을 조성(造成)하여 위로해 드렸다는 고사가 있다. 《西京雜記 卷2》 용덕(龍德) 임금의 덕을 말한다. 젊은 기생 원문 '금전(錦纏)'은 옛날 예인(藝人)이 가무를 끝내고 나면 손님들이 그 대가로 주던 비단, 즉 금전두(錦纏頭)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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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밥을 먹기 전 재복(齋服, 재계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서원 마당으로 들어갔다. 먼저 참배를 한 뒤에 들어가서 봉심(奉審)을 하니 위패는 -결락- 가장 높고 컸다. 하얗게 칠한 면에 "유명수군 -결락- 조선국 삼도통제사 증 영의정 -결락- 이 -결락- 공 신위(有明水軍【缺】 朝鮮國三道統制使贈領議政【缺】 李【缺】 公神位)"라고 쓰여있었다. 사우에는 '충렬사'라고 편액이 걸려 있었다. 참배한 뒤에 묘정비(廟庭碑)를 구경하였다. 묘각은 -결락- 문 안에 있었다. 묘문은 우암(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짓고, 동춘당(송준길(宋浚吉)) 선생이 글씨를 썼다. 이 비문에는 마땅히 우리 방계 6대조 수사공(水使公)7)의 사적이 들어가야 하는데, 수사공의 사적이 오롯이 빠진 것은 필시 글을 청한 사람이 수사공의 사적을 몰라서 글을 부탁할 적에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우리 송씨에게는 크게 흠이 되는 일이다. 승방으로 나와 아침을 먹은 뒤에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고, 사적 책과 홀기(笏記)를 찾으니, 책은, 승려 말로는 "서원에 있는 서책은 모두 함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승려가 열쇠를 가지고 출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보지 못하였으니, 흠사(欠事)이고 흠사이다.그길로 강당 문루에 이르니 '청해루(淸海樓)'라는 현판이 있었고 또 중수기문(重修記文)이 걸려 있었다. 또 여러 사람이 읊은 시문이 많았으나, 갈 길이 바쁠 뿐만 아니라 눈이 어두운 관계로 상세히 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서원 터를 두루 돌아보니 지형이 녹도(鹿島)의 쌍충사(雙忠祠) 터와 흡사하였다.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집들이 즐비하였는데 모두 서원의 소유물이었다. 참으로 명승지라고 이를 만하였다. 앞바다에는 세곡(稅穀)을 실은 조군선(漕軍船)이 많이 정박해 있었는데 차례차례 들어와 그 수가 20여 척에 달하였다. 이 또한 장관이었다.서원 옆에 또 하나의 비각이 있어서 들어가서 보니, 앞면에 큰 글자로 "자암 김 선생8) 적려 유허비(自菴金先生謫廬遺墟碑)"라고 쓰여 있었다. 뒷면에도 비음이 새겨져 있었으나 상세히 볼 수 없었다. 서원 아래는 또 남해와 하동 두 읍과 영남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의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모여 실어간다고 하였다. 이렇게 빼어난 경치를 일찍 보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처음에는 이곳에서 방향을 바꿔 진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자가 부족할 뿐 아니라 내기와 학윤이 도로 내려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갔다. 나루 앞에 이르러 김종이(金宗頤), 학윤과 헤어졌다. 돈탁(敦托) 나룻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내기와 함께 조진(助津) 나룻가로 들어갔다. 노량에 있을 때 다음과 같이 시 1수를 읊었다.지팡이 나란히 짚은 서너 길손이(聯笻三四客)오롯이 노량의 사당에 도착하였네(專到露梁祠)층계 사이 자리에서 공경히 참배하고(敬拜階間席)탁상 위의 신위(神位)에 봉심하였네(奉審卓上位)충심으로 임금을 지탱하였고(忠心撑北極)씩씩한 기상은 남쪽 지역을 덮었네(壯氣盖南陲)당시의 일을 추모하자니(追慕當時事)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不覺涕泗洟) ○食前着齋服, 而入院庭。 先爲瞻拜後, 入奉審, 則位牌【缺】 取爲高大。 粉以塗面, 書之以有明水軍【缺】 朝鮮國三道統制使贈領議政【缺】 李缺公神位。 祠宇扁以忠烈祠。 參謁後, 玩廟庭碑。 碑閣在【缺】 門內。 而碑文則尤菴先生撰, 同春先生書之。 此碑文當入我傍六代祖水使公事蹟, 而專沒水使公事蹟者, 必請文之人不知水使公之事蹟, 不告於請文時故也。 實如我宋之大欠事也。 出來僧房朝飯後, 書名《審院錄》, 推尋事蹟冊與笏記。 冊則僧曰: "院中所在書冊盡藏櫃中, 而開金僧將佩去出他云。" 故不得詳玩, 欠事欠事。 仍上講堂門樓, 則扁以淸海樓, 又揭重修記文。 又多諸人題咏, 而非但行忙, 以眼昏之致, 不得詳玩, 可歎耳。 周觀院基址, 則地形洽似鹿島雙忠祠基地矣。 主山與案山, 松楸鬱密, 村家櫛比, 而皆院中所有物。 眞可謂名勝之地。 前洋多泊載稅漕軍船, 次次入來, 其數至於二十餘隻。 此亦壯觀也。 院傍, 又有一碑閣, 故入玩, 則前面大字書自菴金先生謫廬遺墟碑。 後面, 又刻碑陰, 而不能詳玩。 院下, 又有南海、河東兩邑及嶺南左右道漕船, 來會此處, 載去云爾。 如此勝景, 恨未早見也。 仍爲暫憩, 初意, 則自此轉向晋州計矣。 非但路資之不足, 乃記與學允還爲下去爲言, 故不得已同行。 到津前, 與金宗頤及學允分袂。 而相會于敦托津頭爲約, 與乃記入助津頭。 當在露梁時, 吟一首曰: "聯笻三四客, 專到露梁祠。 敬拜階間席, 奉審卓上位。 忠心撑北極, 壯氣盖南陲。 追慕當時事, 不覺涕泗洟。" 수사공(水使公) 송희립(宋希立, 1553년~1623)이다. 송간(宋侃)의 6대손으로, 자는 신중(信仲)이고, 호는 삼규당(三規堂)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鹿島) 만호 정운(鄭運)의 군관으로서 영남지역에 원병파견을 주장하였다. 지도(智島) 만호가 되어 형 송대립(宋大立)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명나라 진린 제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송희립은 중상을 당하고 이순신은 전사했다. 자암 김 선생 김구(金絿, 1488~1534)이다.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ㆍ삼일재(三一齋), 시호는 문의(文懿),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11년에 별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한 뒤 좌승지ㆍ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다시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왔다. 저서로 《자암집(自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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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비가 와서 그대로 머물렀다. ○雨, 仍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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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기사) 六日 己巳 맑음. 향당(鄕黨, 태어난 시골마을)의 벗들을 방문했다. 陽。訪問鄕黨僚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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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신미) 八日 辛未 반은 흐리고 반은 맑음. 종일 벼를 말리느라 저물녘에 이르러서야 ≪주역≫을 보았다. 半陰半陽。終日乾租。 至暮觀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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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무진) 五日 戊辰 흐린 후 맑음. 가랑비가 간간이 내렸다. 오후에 설강홍(偰康洪)과 송평중(宋平中)이 왔다. 先陰後陽。微雨間之。午後偰康洪・宋平中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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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임자) 二十日 壬子 맑음. 돌아오는 길에 이종(姨從) 이승표(李承杓)의 처상(妻喪)을 위문하고 이어서 유숙했다. 陽。回路慰問姨從李承杓妻喪。 因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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