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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벗 백건이 일찍 와서 이조 정랑 윤기의 족속이 윤 이랑(尹吏郞)에게 가서 편지를 가져왔는데, 대개 윤 이랑이 내가 직접 뵙고 청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청한 것을 의아스럽게 여겼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병세에 대한 사유를 자세히 진술하여 이조에서 숙직하고 있는 팔선(八仙)을 이조(吏曹) 직방(直房)7)으로 보냈다. 주동(注洞)의 종인(宗人) 자승(子昇)이 찾아와서 만났는데, 또 공전(工錢)8)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갔다.천노(千奴)가 오기만을 몹시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서 정득(貞得)에게 점을 쳐 보게 하였더니, 괘에 "이번 달 14일에 반드시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반드시 이와 같을 리는 없겠지만 오늘내일하면서 초순이 되도록 오지 않는다면, 연회일은 점점 다가오고 행기(行期, 길 떠나는 기한)는 지체되니 이를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오후에 조카 호(豪)가 노복과 말을 데리고 오니, 병중에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이조 낭청이 좌랑(佐郞) 윤기(尹愭)를 청득(請得, 청촉(請囑)하여 허락을 얻음)하려 하였기 때문에 궐내에 관고(官誥, 사령장)를 들여보냈는데, 오늘 정사를 아직 열기 전이라 옥새를 찍지 못하였으니 서글프고 한탄스러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이조의 색구(色驅)9)가 와서 만났는데, 흥양의 연회는 물력이 부족하여서 연회의 날을 3월 17일로 물려 정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러한 내용을 색구에게 분부하였다. 색구가 말하기를, "내연(內宴)10) 날짜를 만약 여러 날 뒤로 물린다면 불편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전에 정한 24일에 연회를 베풀기 위해 행차하겠다고 이미 공사(公事)를 발송했기에 중지하기도 어렵습니다, 만약 며칠을 물린다면 변통할 수 있는 방도가 있겠지만, 3월 보름 이후로까지 미루게 된다면 이는 곧 반드시 시행될 것이라고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조(本曹)가 별 탈 없이 출발할지를 미리 알 수도 없습니다."라고 하더니, "기한을 정한다면 그믐과 초하루 사이가 매우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즉시 관상감(觀象監)11)에 사람을 보냈더니 김 동지(金同知)가 다시 날을 택하여 왔다. 健友早來, 裁尹吏郞之族抵尹吏郞書來, 而盖尹吏郞, 以吾之不面請, 而轉請爲訝云, 盛陳吾病勢之由, 於吏曹直中, 故送八仙於吏曹直房。 注洞 子昇宗人來見, 又言工錢苟艱之狀而去。 千奴苦待不來, 故使貞得問卜, 則卦云"今十四日必來"云。 必無如此之理, 而今日明日, 拖至初旬而不來, 則宴日漸迫, 而行期滯遲, 此將奈何? 午後豪姪, 率奴馬而來, 病裡喜幸, 不可言。 吏郞請得尹佐郞 愭, 故入送官誥於闕內矣, 未及於今日開政, 不得安寶, 悵歎何極? 吏曹 色驅來見, 而興陽宴次, 物力不足, 故宴日以三月十七日退定云, 故以此意, 分付於色驅, 則色驅言 "內宴日, 若多日遲退, 則事多難便。 前定卄四日, 設宴行次之意, 已爲發公事難中止。 若退數日, 則可以有變通之道, 若至於三月望後, 則此卽之必行, 未可期也。 且本曹之無故發卽, 未可預知"云, "爲定限晦初間危好"云, 故卽送人於觀象監, 金同知更擇以來。 이조(吏曹)의 직방(直房) 직방은 조방(朝房)이라고도 하는데, 조정 관리들이 조회 시각을 기다릴 때 사용하는 방으로, 궁성(宮城) 밖에 관아마다 따로 있었다. 공전(工錢) 물건을 만들거나 수리해 준 대가로 주는 품삯을 말한다. 색구(色驅) 높은 벼슬아치가 부리는 하인의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를 이르던 말이다. 내연(內宴) 내진연(內進宴)의 약칭으로, 곧 내빈(內賓)을 모아 베푸는 잔치를 말한다. 관상감(觀象監) 조선 시대, 천문, 지리학, 역수(曆數), 기후 관측, 각루(刻漏) 등의 사무를 맡아보는 관청을 이르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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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又拈韻得七五兩律 老屋蒼凉雨意遙蟾光漏洩點雲消經秋遠峀尖尖石近臘寒梅艶艶條豪氣有誰肩北海健詞知爾體南朝ㅡ年荒店東風夢搔首長瞻漢上霄老樹庭生影雲移月入扉酒村孤犬吠江國數鴻飛歲色驚新曆天香憶舊衣店燈何事業千里未言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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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小溪宗人拈退漁韻【臘月十六日】 眉稜歸却睡痕迷把袂相看小竹棲山市漸冥䲭嘯急江天欲煖鴈嘶低憐君病榻猶新酒笑我輕鞵又凍泥一抹園田璚句裏不禁鄕思碧葱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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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이 선달(李先達)이 선물과 세찬(歲饌)을 보내왔다. 李先達, 送饋歲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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翌朝又酬二疊 朝氣蒼凉竹下亭新詩欲動酒先馨臘歸梅忽先天白雲盡山仍舊日靑十畝桑麻應遠待一年風雨又虛經無端坐數餻湯碗大笑痴儂喫幾齡蕉罇淨洗俗華紛舊契新緣話兩君千里送年浮似夢一生違世誤於文知心中夜懸明月宿計東岡杳白雲短屐長帬爲誰弊商量萬事不如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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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陵享行氷湖舟中戱賦一絶【三月十五日寒食】 蕩漾東風漢水天不堪搖櫓老長年定知雷史逍遙日無限詩神戱那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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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製【奉謨堂展拜後又製賜閣臣 正月初十日】 珠室金床敬審廻宣呼學士到蓬萊靑春滿酌黃封酒特許懽游盡日陪謹賡春風依舊上林廻復見南臺與北萊羇旅亦知歌萬壽愛君非獨近臣陪玉樓條暢惠風廻萬彙敷榮洎草萊方外遠臣記存否時時香榻夢中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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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中戱吟【三月念八日三疊】 條風三月尙餘寒春意遲回萬木端一夜鑾輿新令下百忙花事雨珊珊百種綾羅不猒奢宮桃如妬杏如誇若無天上黃麻紙三月人間未見花弱蘭無力谷風前不遂羣芳鬪媚姸終看國香難自晦美人帬帶晩相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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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壁畵和水雲侍郞【參判在田字汝見自號水雲拈朱詩韻 閏三月十六日】 白雲流水橋舒緩騎驢客塵外一何閒俯看林下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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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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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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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영윤과 같이 자면서 실로 뜻이 맞아, 절구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어서 주었다.우연히 서로 만난 것이 기약해서 만난 것보다 나으니(偶與相逢勝有期)산은 온통 붉은 단풍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든 시절이라(山多紅葉野黃時)하룻밤 나란히 누워 자니 오히려 서글픈 마음만 남기에(一宵聯枕猶餘悵)은근한 마음으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지어서 주네(贈以慇懃惜別詩)영윤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벗이 먼 곳으로부터 와서 기약도 없이 만났으니(朋自遠方會不期)단풍 물들고 노란 국화 피는 마침 좋은 계절이라(丹楓黃菊正佳時)가슴에 쌓인 회포 다하지 못했건만 도로 이별하니(襟懷未盡還爲別)은근한 마음에 같이 술을 마시며 다시 시를 논하네(慇懃同酌更論詩)율지가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세 늙은이 옷깃 나란히 하여 기약이 있는 듯하니(三老聯襟若有期)마침 북쪽 기러기가 남쪽으로 가는 계절이로구나(正當北雁向南時)새벽 창가에 새벽달 희미해질 때 서로 헤어지니(曉窓殘月相分手)아쉬운 작별의 회한이 남아 시를 지어서 드리네(惜別餘懷贈以詩)그길로 헤어져 출발하였다. 여산(礪山)85) 읍 앞 객점에 이르러 밥을 먹기로 하고 황산(黃山)86)과 부여(扶餘)로 가는 노정(路程)을 물었다. 그곳에 들리는 것은 황산의 죽림서원(竹林書院)87)에 참배하고, 그길로 부여로 가서 생원 김호일(金浩一)을 찾아가는 일 때문이었다. 황산에 못미처서 중도에 길을 잃은 것이 수차례여서 간신히 찾아가 황산의 서원 밑에 이르렀다. 먼저 장암(場岩)에서 이 마을로 이거한 송문언(宋文彦)을 찾아갔다.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서원을 참배하려는 뜻을 말하고, 이에 모두 원우(院宇)로 갔다. 수복(首僕)을 불러 분부하니, 수복이 재복(齋服, 재계할 때 입는 옷) 2벌을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재복을 입고 서원 마당에서 참배하고 신실(神室)로 들어가 봉심(奉審, 사당을 살핌)하니, 정암(靜庵), 퇴계(退溪), 율곡(栗谷), 우계(牛溪), 사계(沙溪), 우암(尤菴) 여섯 분의 선생이 배향되어 있었다. 신실(神室)의 처마 사이에는 '죽림서원'이라고 걸려 있었다, 강당 앞에는 작은 석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앞면에 팔분체(八分體)로 '황산서원비(黃山書院碑)'라고 적혀있었다. 서원 터와 원우(院宇)가 아주 넓고 훤했다.참배하고 나서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고, 송문언을 따라 황산 봉우리에 오르니 송림이 깊고 그윽한 곳에 정자 하나가 있었다. 처마에 '팔괘정(八卦亭)'88)이라는 편액이 있었다. 방안 사방 벽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 노 선생(송시열)이 그 당시 독서를 하던 당이었다. 지금도 독서하는 두서너 관동(冠童)이 있었다. 당 뒤의 수풀 사이 석벽에는 "청초안(靑草岸), 몽괘벽(夢掛壁), 일감당(一鑑塘), 삼계리(三桂里), 평주도(平疇島)"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노 선생의 필적이었다. 앞에는 큰 바다(금강(錦江)을 말함)가 있고 뒤에는 강경(江鏡)이 있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갈 길이 바쁜 관계로 상세히 보지는 못하고 그길로 내려와 술을 사서 서로 마시고 작별하였다. 송문언은 영윤이 알려준 사람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 급히 강경 마을 앞 나루를 건너 5리를 갔다. 또 굴암(屈岩) 나루를 건너 출발하였다. 석성(石城)89)의 마치(麻峙)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강경은 여염집이 즐비하고, 선박이 왕래하여 원산(元山)보다 못하지 않았다. ○與令倫同聯枕, 實是意同, 吟一絶以贈。 "偶與相逢勝有期, 山多紅葉野黃時。 一宵聯枕猶餘悵, 贈以慇懃惜別詩。" 令倫次曰: "朋自遠方會不期, 丹楓黃菊正佳時。 襟懷未盡還爲別, 慇懃同酌更論詩。" 聿之次曰: "三老聯襟若有期, 正當北雁向南時。 曉窓殘月相分手, 惜別餘懷贈以詩。" 仍爲分袂而登程。 抵礪山邑前店期飯, 問黃山扶餘路程。 仍入者, 欲爲審拜於黃山竹林書院, 仍向扶餘, 訪金生員浩一故也。 未及黃山, 中路失路者數次, 艱尋抵黃山院底。 先訪自場岩移寓於此村宋文彦。 敍寒暄後, 因言瞻拜書院之意, 則仍爲偕往院宇。 招首僕分付, 則首僕持來齋服二領。 故着齋服, 瞻拜院庭, 入神室奉審, 則靜菴、退溪、栗谷、牛溪、沙溪、尤菴六先生配享。 而神室楣間, 揭以"竹林書院"。 講堂前立小石碑, 前面以八分書"黃山書院碑"。 基址與院宇甚宏闊。瞻拜後, 書名《審院錄》, 隨宋文彦上黃山山峯, 則松林深邃之地, 有一間亭閣。 楣間扁以"八卦亭"。 房內四壁畵八卦, 卽老先生當日讀書之堂也。 而至今有數三冠童讀書矣。 堂後林間石壁, 刻"靑草岸、夢掛2)壁、一鑑塘、三桂里、平3)疇島" 皆是老先生筆。 前有大洋, 後有江鏡, 甚佳麗之地, 以行忙之致, 不能詳玩, 仍爲下來, 沽酒相飮而爲作別。 宋則令倫指示之人也。 日已夕矣, 急渡江鏡村前津, 行五里。 又渡屈岩津發。 抵石城麻峙店留宿。 行六十里。 江鏡閭閻之櫛比, 船隻之往來, 不下於元山矣。 여산(礪山) 전라북도 익산의 옛 지명이다. 황산(黃山)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이다. 죽림서원(竹林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1626년(인조 4)에 세워졌다. 1663년(현종 4)에 중건하였으며, 2년 뒤 1665년 사액되었다. 본래 창건 때에는 지명을 따서 '황산 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 서원에 제향된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의 6인이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儒賢)이라 하여 '육현 서원(六賢書院)'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팔괘정(八卦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 있는 누정으로, 1663년(현종 4)에 송시열이 건립하였다. 석성(石城)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이다. 掛 저본의 '桂'는 송병선(宋秉璿)의 《연재집(淵齋集)》 〈유황산급제명승기(遊黃山及諸名勝記)〉에 의거하여 '掛'로 수정하였다. 平 저본에는 없는 글자인데 송병선(宋秉璿)의 《연재집(淵齋集)》 〈유황산급제명승기(遊黃山及諸名勝記)〉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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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일찍 출발하여 석성읍 앞 콩죽 객점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부여읍 앞에 이르러 김호일이 사는 마을을 물으니 규암(窺岩)90) 마을에 산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규암 나루를 건너 김 생원 집을 찾아갔는데, 사랑채가 마침 비어있었다. 사랑 앞에서 서성거리니 소동(小童)이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김 생원의 거취를 자세히 물으니 주막에 갔다고 대답하였다. 소동과 주막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김 생원을 만났다. 안부를 묻기도 전에 하는 말이, 수백 리 밖에서 누추한 곳을 찾아준 것이 실로 뜻밖이라고 하였다. 이에 사랑에 들어가 안부를 물으니, 그간에 그 동생 김호선(金浩善)이 부인상을 당했다고 하였다.안채에서 삶은 밤 한 그릇을 대접해 주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모두 나룻가 객점으로 나와 술을 사서 마셨다. 수북정(水北亭)91)에 올라 잠시 구경하였는데 정자는 규암 절벽 위에 있었다. 난간 앞에는 백강(白江)92)이 흐르고, 정자 뒤에는 푸른 벼랑이었다. 곳곳이 높은 봉우리고 사방은 강모래로 정취가 가득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눈에 담긴 풍경은 흥양(興陽)의 쌍충사(雙忠祠)93)보다 더 아름다웠다. 정자의 사방 벽에 고인의 제영(題詠)이 많이 있었으나 바빠서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작은 나루를 건너 백강서원(白江書院)94)에 가서 참배하고 봉심하였다. 신독재(愼獨齋)95) 김 선생과 백강(白江)96) 이 선생이 배향되어 있었다.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었다. 그길로 백강 나루를 건너 김 진사 집으로 들어가 잠시 쉬고 나서 뱃사공을 불러 배를 타고 낙화암(落花巖)97)을 지나 고란사(皐蘭寺)98) 앞에 이르러 육지에 내렸다. 고란사에 오르니 암자는 큰 강가 절벽 아래 있었고, 낙화암은 그 왼쪽에 있고, 조룡대(釣龍臺)99)는 그 오른쪽에 있었다.사방에 펼쳐진 강과 산은 모두 정감에 젖게 하였고, 굽이굽이 흐르는 모래와 강물은 모두 아름답고 수려하였다. 절에는 책을 보는 관동(冠童)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유숙하였다. 30리를 갔다. 모래는 밝고 물은 푸르며 산은 수려하였지만, 평생 보아온 것이기도 하고 내가 갈 길이 바쁜 관계로, 여러 날 동안 머무를 수가 없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早發, 抵石城邑前豆粥店朝飯。 抵扶餘邑前, 問金浩一所居村, 則居在窺岩村云。 故越窺岩津, 訪金生員家, 則舍廊適空。 廊前徘徊之際, 有小童自內而出, 故詳問金生員去就, 則答以往于酒家。 偕小童往酒家, 路上逢金生員。 則寒暄前所言, 數百里之外, 委訪陋巷, 實是意外。 仍入舍廊, 得問伊間, 遭其弟浩善之妻喪云矣。 自內間待之以一器熟栗矣。 移時談話後, 皆出津頭店, 沽酒以飮。 上水北亭暫玩, 則亭在窺岩絶壁上。 檻前百江, 亭後蒼崖。 處處峯巒而面面江沙, 無非多情, 滿目景處, 勝於興陽 雙忠祠矣。 亭之四壁。 多有古人題詠。 而忙未記之可歎。 越一小津, 往白江書院, 瞻拜奉審, 則愼獨齋金先生、白江李先生腏享矣。 書名《審院錄》。 仍越白江津, 入金進士家, 暫憩後, 招津夫乘船, 過落花岩, 抵皐蘭寺前下陸。 上皐蘭寺, 庵在大江上絶壁下, 落花岩在其左, 釣龍臺在其右。 面面江山, 皆是多情;曲曲沙流, 盡爲佳麗。 寺有讀書冠童數人, 與之同留宿。 行三十里。 沙明水碧, 秀麗群山, 平生所見, 以吾行忙之致, 不得數日留連, 可歎可歎。 규암(窺岩)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이다. 수북정(水北亭)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 절벽 위에 있는 누각으로, 광해군 때에 양주 목사로 있던 김흥국(金興國)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었다. 백강(白江) 충청남도 부여의 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쌍충사(雙忠祠)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전기 무신 이대원(李大源, 1566~1587)과 정운(鄭運, 1543~1592)을 배향하였다. 백강서원(白江書院) 부산서원(浮山書院)을 말한다. 1719년(숙종 4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같은 해에 '부산(浮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뒤 군수 정연달(鄭然達)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에 의해 1980년에 복원되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이다. 자는 사강(士剛)이고,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이다.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ㆍ봉암(鳳巖)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세종의 7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이다. 저서로는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낙화암(落花巖)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는 바위로, 삼국시대 백제의 의자왕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절이다. 앞에는 백마강이 흐르고,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조룡대(釣龍臺)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 가에 있는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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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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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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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3일 初三日 ○아침을 먹은 뒤 관정동에 가서 우 참봉(禹參奉)과 박상현을 만났다. 그 자리에 모르는 손님 서너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는 곳을 물으니 고부(古阜)에 산다고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두 사람은 김씨 성이고, 한 사람은 배씨 성이였다. 내가 정축년(1637, 인조 15) 호란(胡亂) 당시, 덕원 부사(德原府使)로 안변(安邊)에서 전사한 배공(裵公)113)이 누구인지 물이니, 그의 8대 조부라고 답하였다. 그 또한 우리 선조 승지공(承旨公)114)이 누구냐고 묻기에, 나는 나로서 5대조 되신다고 하였다. 모두 같은 날 전사한 분의 후손으로, 뜻하지 않게 만나 대대로 이어온 정의를 푸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서로 찾아볼 생각으로 그가 머무는 데를 물으니 창동 객점이라고 하였다.그길로 정동의 석사 이혜길(李惠吉) 집으로 갔다. 안부 인사를 나눈 후 그 조카 선(善)의 천연두가 어떤지 물으니, 낭패를 당해 참담하다고 하였다. 그길로 그 아우 집으로 가서 상을 당한 곡절을 위로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채에서 몇 가지 음식을 내와서 몹시 고마웠다. 그길로 묘동(廟洞)으로 가서 공서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에 용동의 참봉 이경화(李景燁)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이 곧 《성원현록(姓苑賢錄)》의 개간소였다. 돌아오는 길에 관정동(冠井洞)에 들러 공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유숙하였다. ○朝食後, 往冠井洞, 見禹參奉及朴祥顯。 座上有不知客數三人。 故問其所居, 則居在古阜云。 故問其姓名, 則兩人以金爲姓, 一人以裵爲姓。 余問丁丑胡亂時, 德原府使戰亡於安邊裵公爲誰, 則答以渠八世祖。 而渠亦問吾祖承旨公爲誰, 故余以吾爲五世祖。 俱是同日戰亡人後裔, 意外相逢, 敍其世誼, 其喜可掬。 日後尋訪之意, 問其所住處, 則蒼洞旅店云矣。 仍向貞洞李碩士惠吉家。 敍暄後, 問其姪兒善痘與否, 則見敗云慘矣。 仍往其弟氏家, 慰其見慽之由暫話。 自內間出送數器饌以饋, 可感可感。 仍向廟洞, 與公瑞暫話後, 來龍洞李參奉景燁家談話。 此卽《姓苑賢錄》開刊所也。 來路入冠井洞, 與公瑞談話, 同留宿。 배공(裵公) 배명순(裵命純, 1597~1637)이다. 자는 수초(遂初)이고,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병자호란 때 퇴각하는 후금(後金) 군사의 뒤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南山驛)까지 이르러 강행군을 하던 중, 복병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무덤은 성주군 조곡에 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승지공(承旨公) 송심(宋諶, 1590~1637)이다. 자는 사윤(士允)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614년(광해군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에는 노모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전라도 병마우후(兵馬虞侯),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함북 병마절도사 이항(李沆) 휘하에서 척후장(斥候將)으로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횡포를 부리며 철수하는 후금군사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安邊南山驛)에서 전 ㆍ후 영장(前後營將)과 함께 분전 끝에 전사했다.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고, 고흥 서동사(西洞祠)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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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몹시 추웠다. 얼어 죽은 사람들이 많다. 極寒極寒。 多有凍死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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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춥고 눈이 내렸다. 寒雨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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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初九日 아침에 안신환 2제(劑)를 복용했다. □□는 김 동지가 전후로 낸 약값이다. 朝服安神丸二劑。 □□金同知前後藥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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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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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8일 十八日 이른 아침에 길을 떠나 우연히 나주(羅州) 사람을 만났다. 그는 금호(錦湖)의 방손(傍孫)이라고 하였으므로 잠시 그와 집안 소식과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에 올라 길을 나섰는데, 빗방울이 이따금 떨어지고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반드시 비 올 징조가 있으니 걱정스러웠다. 채찍을 재촉하여 삼례(參禮)에 이르렀다. 찰방(察訪)인 김척(金戚)을 만나 보고자 하니, 병이 나서 약을 복용하였다는 문리(門吏, 문지기)의 말에 김척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나 보다고 생각하였다. 요기하고 조촌(助村)의 앞들에 이르니 비가 크게 내려 옷이 모두 젖었다. 간천(艮川)에 이르자 비가 바로 개었다.부내(府內)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서문 밖 여점(旅店)에 앉았다. 천노(千奴)에게 주인집에 가서 흥양(興陽)의 지자(持者)21)와 군휘(君徽)가 올라왔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게 하였다. 잠시 있다가 천노가 군휘를 데리고 왔으므로 함께 말을 타고 남문 밖 여점(旅店)에 이르러 안장을 풀고 여막에 들어가 유숙할 작정이었다. 즉시 첨지(僉知) 김지행(金持行)의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곧바로 여점(旅店)으로 돌아와 묵었다. 이날 50리를 갔다.밤에 흥양(興陽)의 소식을 상세히 물어보니, 연회를 베풀 비용이 터무니없다고 하였다. 비록 염려스럽다 하더라도 이랑(吏郞)이 이미 출발하였을 것이니 장차 어찌 하겠는가. 早朝發行, 偶逢羅州人, 云是錦湖傍孫, 故暫與敍族談話。 上馬登程, 則點雨時下, 天氣昏黑, 必有雨徵, 可悶。 促鞭至參禮, 欲見察訪 金戚, 則所謂門吏云有病服藥意者, 金戚之不欲見故也。 療飢至助村前野, 雨勢大作, 衣服盡濕。 至艮川, 則雨卽晴矣。 至府內下馬, 坐西門外旅店。 使千奴往主人家, 問興陽 持者及君徽上來與否矣。 須臾千奴引君徽而來, 故同與上馬, 至南門外旅店, 鞍入幕爲留宿計。 卽往金僉知 持行家, 暫與相話, 卽還旅店留宿。 是日行五十里。 夜間詳問興陽消息, 則設宴之資孟浪云, 雖爲憂慮, 然吏郞想已發行, 將奈何? 지자(持者) 지방 관아들 사이에서 공문이나 물건 따위를 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지자군(持字軍)이라고도 한다. 《韓國漢字語辭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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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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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2일 二十二日 잠시 원등(院登)의 도청(都廳)에게 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즉시 들어왔다. 暫往院登 都廳, 暫話卽爲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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