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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밥을 먹은 뒤에 박 상사(朴上舍)가 와서 말을 샀다고 하였으므로 7일에 길을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食後朴上舍來言買馬云, 故約以七日發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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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아침을 먹기 전에 근동(芹洞)에 가서 한참을 서로 이야기하고 왔다. 저녁에 김 참봉(金參奉)의 집에 가서 머물며 이야기를 나눈 뒤에 작별하고 왔다. 朝前往芹洞, 移時相話而來。 夕往金參奉家留話, 作別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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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아침을 먹기 전에 신정(新亭)의 복금(卜金)을 데리고 묘동(廟洞)으로 갔다. 돈 한 냥을 가지고 한용(韓溶), 야당(野塘)의 종인(宗人) 연영(延英)과 장방(長房)에 들어가 재록(載錄)하려는데, 《전라도원록(全羅道院錄)》은 규장각(奎章閣)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현(六賢)의 사적(事蹟)을 기록해 두었다가 후일 착실하게 써서 들이라는 뜻으로 누누이 부탁의 말을 하였으나 마음이 매우 편치 않았다.주인집으로 나와서 약간의 물품과 실기(實記)를 가지고 주인과 예조에 가서 안 동지(安同知)의 아들 인성(寅成)을 방문하였다. 그는 이제 막 예조의 서리가 되었다. 약간의 물건을 주고서 강성주(姜聖周)에게 예사문(禮斜文)22)을 써 달라 부탁했었다고 녹사(錄事)23)에게 말하자, "들어온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배광옥(裵光玉)과 정성들여 써서 들여 달라고 하니, 말씀하신 대로 처리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급히 묘동(廟洞)으로 가서 공서(公瑞)와 이 석사(李碩士)에게 내일 내려가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저녁에 경주인 집에 이르니 김계한(金啓漢)이 동행들과 오후에 먼저 출발하였다고 하니, 한탄스럽다. 해가 진 뒤에 남대문(南大門) 강지문(姜之文)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내일 동행하기로 약속하였다. 서소문(西小門)으로 나가 차동(車洞) 민 판서(閔判書)의 집으로 가서 주인 치항(致恒)과 함께 묵었다. 食前率新亭 卜金往廟洞, 持百兩錢, 與韓溶 野塘宗人延英, 入長房載錄, 則《全羅道院錄》入奎章閣云。 故記草六賢事蹟, 使後日着實書入之意, 累累言托, 而心甚不安也。 出來主人家, 與主人持略干物及實記, 往禮曹, 訪安同知子寅成, 則卽見今才禮曹 書吏也。 給若干物, 托姜聖周禮斜文云言錄事, 則答曰: "不無所入云矣。" 日後與裵光玉, 着實書入爲言, 則如敎爲計, 勿慮云云矣。 急往廟洞, 與公瑞及李碩士, 明日下去之意作別。 暮抵京主人家, 則金啓漢同行午後先發程云, 可歎耳。 日落後, 往南大門 姜之文所住處, 約以明日同行。 出西小門, 入車洞 閔判書家, 與主人致恒同宿。 예사(禮斜) 예조에서 양자(養子)의 청원을 허가해 주던 제도 또는 그 공문이다. 녹사(錄事) 조선 시대 중앙 관서의 상급 서리직이다. 의정부와 중추부에 나뉘어 소속되었으며, 문반의 관부에는 의정부에서 무반의 관부에는 중추부에서 나누어 파견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2품 이상의 실권이 있고 업무가 많은 관부나 대신들에게 배정되어 문서의 취급과 기록, 연락 업무, 공문서의 전달, 기타 잡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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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아침을 먹기 전에 회동(晦洞)에 가서 송영재(宋永載) 궤연(几筵)24)에 조문하였다. 상제(喪制) 지순(持淳)을 위로하고 실기(實記) 한 권을 주었다. 위채 사랑에 올라가 장성(長城) 숙부 송익형(宋翼亨) 씨를 만나니,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 매우 고마웠다. 실기(實記) 한 권을 주고, 여산제각(礪山祭閣)을 영건하는 일에 대해 말하자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추수한 뒤에 올라와 함께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이어 하직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난동(蘭洞)25)의 이 참의(李參議)에게 들렀다. 마침 낙동(洛洞)의 승지 이광헌(李光憲)과 종제(從弟)인 참판 이광문(李光文)이 와 있어서 한 자리에서 만났다. 실기(實記)를 주었더니, 이광문도 책자를 청하였기 때문에 다음 인편을 기다렸다가 가지고 오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사액(賜額)을 청하는 일은 영읍(營邑)에 일을 고하는 날에 반드시 영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더니 답하시기를,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데 그 사이에 내가 뭘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말씀하시기를, "한포재 서원 건립에 관한 일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대사(大事)는 반드시 때가 있을 것이니, 후일을 기다려 상의하세나."라고 하였다.오는 길에 송유재(宋儒載)에게 실기(實記) 한 권을 주었더니, 각처에 지급할 것을 전달하겠다고 하기에 여섯 권을 부탁하였다. 오는 길에 학교동(學橋洞)26) 강화(江華) 송면재(宋冕載)의 집에 들러 그의 아들 지학(持學)을 만나 실기 한 권을 주었다. 이어 서소문(西小門) 밖 이희(李)의 집으로 나와 작별하였다. 차동(車洞)의 민치항(閔致恒) 집으로 내려와 작별한 다음, 아래채 사랑으로 가서 치명(致明)과도 작별하였다. 약현(藥峴)으로 가서 오위장(五衛將, 송인서(宋璘瑞)를 말함)과 작별하고 청파(靑坡)27)의 주인집으로 돌아왔다.강지명(姜之明) 부자, 강휘길(姜彙吉), 송순(宋淳)과 동행하여 오후에 길을 떠났다. 한강에 이르러 즉시 나루를 건너고 과천(果川)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30리를 갔다. 食前往晦洞, 吊宋永載几筵, 與喪人持淳致慰, 給實記一卷。 上上舍廊, 見宋長城叔翼亨氏, 則見我忻待, 可感可感。 給實記一卷, 仍說礪山祭閣營建事, 則待秋爲計, 秋成後上來同議爲可云矣。 仍辭來路入蘭洞 李參議, 則洛洞 李承旨 光憲及其從弟參判 光文適來會。 仍見一座上, 仍給實記, 則光文, 亦自請冊子, 故待後便持來爲言。 仍說請額事, 所營事之日, 必賴諸令監之力, 答曰: "力不及處, 則何其於間乎。" 仍說"寒圃齋建院事, 則何可易也。 大事必有時矣, 待後相議。 "云矣。 來路見宋儒載, 給實記一卷, 則各處所給, 以傳致爲言, 故囑六卷。 來路入學橋洞 宋江華 冕載家, 見其子持學, 給實記一卷。 仍出西小門外李家作別。 下來車洞 閔致恒家作別, 往下舍廊, 致明作別。 往藥峴, 與五衛將作別, 下來靑坡主人家。 與姜之明父子及姜彙吉、宋淳同行, 午後發程。 到漢江, 卽爲越津, 抵果川邑內留宿。 行三十里。 궤연(几筵) 궤연은 영좌를 말한다. 영좌는 영상(靈床)과 함께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모시기 위하여 초종(初終)에 설치하는 것이다. 즉 아침이 되면 영상에서 영좌로 혼백을 모셔 놓고, 밤이 되면 다시 영좌에서 영상으로 혼백을 모신다. 다시 말해 영좌는 혼백이 거처하는 곳이고 영상은 혼백이 취침하는 곳이다. 난동(蘭洞)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2가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 선조 때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이곳에 살면서 일가와 더불어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난정계연(蘭亭禊宴)을 자주 열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난정이문동(蘭亭里門洞)·난정동(蘭亭洞)이라 하고 줄여서 난동(蘭洞)이라 하였다. 학교동(學橋洞) 송면재(宋冕載)의 집을 방문하고 이어 이동하는 동선으로 볼 때 '학교동(學橋洞)'은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 있던 마을인 '학교동(鶴橋洞)'의 오기인 듯하다. 청파(靑坡) 서울 용산구의 청파동이다. 청파(靑坡)라는 이름은 '푸른 언덕'이라는 뜻인데, 청파동이 연화봉(蓮花峰)이라는 푸른 야산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조선 세종 때 명인인 청파 기건이 거주하였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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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새벽에 출발하여 사근천(肆覲川, 현 의왕시 왕림마을)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대황교(大皇橋)28) 근처에 이르러 동행과 용주사(龍珠寺)29)에 들어가 승려 정현(貞賢)을 찾아보았다. 정현은 바로 흥양 탑승(興陽塔僧)이었는데, 지금은 이 절에 있다. 천보루(天保樓)30)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나니 정현이 점심을 내왔다. 밥을 먹은 뒤에 육당(陸堂)의 부처를 완상하니 다른 것과 별다른 것이 없었는데, 불좌(佛座)31) 좌우에 쌍대 유리등(雙臺琉璃燈)이 있었다. 정현이 말하기를, "이 등은 바로 선왕(先王, 정조를 말함) 때 어전의 물건으로, 이 절에 하사하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쪽 편에 큰 목궤(木櫃)가 있어 열어 보니 또한 어전 책상(御前冊床)이었다. 이 세 가지 물건들은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어 건릉(健陵)32) 아래로 가서 멀지 않은 곳에 능소(陵所)의 석물(石物)을 바라보니 또한 평생의 장대한 구경이었다. 길을 재촉하여 오산(烏山)33)에 이르러 묵었다. 80리를 갔다. 曉發抵肆覲川朝飯。 抵大皇橋邊, 與同行入龍珠寺, 訪貞賢僧, 僧乃興陽塔僧, 方在此寺者也。 臥天保樓就寢後, 賢也進午飯。 飯後玩陸堂佛, 則與他無別, 而佛座左右, 有雙臺琉璃燈, 而賢僧曰: "此燈卽先王以御前之物, 賜此寺者也。" 東邊有大木櫃, 而開示則亦御前冊床也。 此三物平生初見也。 仍往健陵下, 不遠之地, 瞻望陵所石物, 亦平生壯觀也。 促行抵烏山留宿。 行八十里。 대황교(大皇橋) 대황교의 본래 위치는 수원시 대황교동과 화성시 황계동의 경계에 있었는데,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 138번지 부근의 황구지천이다. 《대동지지》를 보면 대황교가 남쪽으로 15리, 건릉(建陵)의 영내에 있다고 하였다.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는 조선후기 현륭원의 능사로 창건된 사찰이다. 천보루(天保樓) 용주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1790년(정조14) 정조가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세우고, 이때 대웅보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로 함께 세워진 것이 천보루이다. 불좌(佛座) 부처가 앉거나 서 있는 대좌를 말한다. 건릉(健陵) 정조(正祖)의 능이다. 지금은 1821년(순조21)에 승하한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와의 합장릉(合葬陵)을 지칭한다. 오산(烏山) 경기도 남서쪽에 있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오산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오산(鰲山)이라 불렸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 중기에는 오미장(梧美場)으로 불리거나 다른 지방보다 까마귀가 유난히 많다고 하여 오산(烏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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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紫薇 紫薇山下聳詩肩緩緩疲驢故不鞭十里豊林孤店外一條淸澗小橋邊無官寂寞三年客有酒軒翩九月天可奈纖塵終未祛靑袍束縛正堪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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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開城留守南秉吉書【代校理姜長煥製】 王若曰當方面則不辭誰是二千石良吏遇盤根以別利睠彼五百年舊基肆移西臬之絳旛庸侈上都之玉節念松京爲三輔最在槿域以四都稱襟帶壯關隘之形特置管理營統轄舟車通水陸之路實爲大都會要衝聘燕之使价相隨而經用可不念也頑殷之習俗未悛當是時屬之誰乎惟卿早歲蜚英華閥蟬奕謙自牧於溫恭恬雅難爲弟兄蹇匪躬於躁濕險夷無忝祖考歷蘭臺而長國子譽望則隆試棠藩而超卿班眷注也篤玆授卿云云卿其袛服寵命勉恢令猷繭絲保障之咸勤宜軫民力之方困錢穀甲兵之豫備無曰穡事之屢豊於戱花潭褰帷採絃歌於一境竹橋駐節獎風聲於千秋故玆敎示想宜知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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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黃海監司朴齊憲書【代製同上】 王若曰耀卿月於崧陽之屛之翰移福星於海臬來旬來宣簡惟在心畀以方面睠彼黃海一道實是靑邱重藩環海山二十三州地産魚鹽銅鐵控圻關數千餘里勢若唇齒輔車唐舶之出沒無常孰贊經緯固密燕搓之往來相續每患杼柚其空惟卿世篤忠貞地同休戚夙抱經濟猶存老成人典型餘事文章綽有眞宰相風度歷蘭臺而長學校黑頭緋金分竹符而試居留素心氷蘗玆授卿云云卿其益勉遠慮恒存小心剛不吐柔不茹申明虞四岳考績遠乃猷顧乃德寅協漢三輔承流於戱蓬萊曉雲幾多北望而馳想芙蓉夜月宜體西顧而分憂故玆敎示想宜知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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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御賜白曆【十一月十八日冬至司憲府掌令時】 黃鐘消息雪窓朝一朶蓂花降紫霄敬授人時知在此於身何幸再逢堯【憲宗二年冬至承賜曆之恩故尾句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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懿昭廟享官戱賦一絶【十一月十八日冬至】 百丈風稜掌憲臣雝雝享拈更侵身循環一理陽生夜自慰雷翁宦味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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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淵子李時燮進甲韻【自漢北僑居春川其子蕉史奎承邂逅逆旅誦其韻而索和今年九月卽六十二歲覽揆之甲云】 葱篴篁驂話已然朋徒留醉雪堆筵對眠風雨韋床上獨秀芝蘭謝砌前冠珮任他春夢客江山占得地行仙定知㶊養煙霞裏更挽烏紗少壯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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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竹僑鍚斅追挽【十一月初二日十疊】 箕師東渡八條興殷禮靑邱有足徵百世雲孫傳勿墜松燈手鈔細如蠅便覽名書印竹僑林樊樂志賦逍遙兒孫計活都無管圃叟溪丁暮復朝葛衫芒屩謝塵紛石痼泉盲臥白雲已矣當年經濟術菓園培植有空文德門高拱極南星妥怗龜床八十齡裸廟省墳三舍地不依笻力便康寧遐齡耋耄世相傳不賴靑城拘杞泉種德百年天有頰於公純嘏更稱全羽翮高張庇族親模楷旁達洎鄕鄰補苴牽架恒無已用力平居一字仁蘭陔架軸挿層層玉樹繁柯瑞氣凝榜鼓幾鳴南省解文垣一捷上黌升孝思揚先寢不甘星霜裏足抱璚圅貤官表楔平生志繼述今年有肖男月下篁扉警咳音軟雪襟話夜相尋淸濁滄浪無限感鯫生自詡最知心鹵風猨鶴不勝愁人去山空蕙張秋鷄酒竟違蒿里餞蒹葭漢上夢悠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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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陵將事之夜贈別李參奉泰應【臘月三十日一韻二疊】 山窓瀜洩九分春雀噪鳩鳴破寂新鏡裏鬢霜無限感明朝五十七年人典祀官銜春復春小靑門外又迎新無端悵別林齋下泉石關心似故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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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밤에 가랑눈이 내려 날씨가 매우 싸늘하였다. 夜微雪甚陰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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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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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初九日 최 석사(崔碩士)가 그대로 출발하였는데, 동행하지 못하니 너무 아쉬웠다. 아침 전에 정서(正書)하기 시작하여 아침을 먹은 뒤에 다 쓰고, 다시 《서재실기(西齋實記)》와 편차(編次)를 바로잡았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재원(齋院)의 이름은 '송씨세충사(宋氏世忠祠)'로 정하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고을에 남양(南陽)의 송씨(宋氏)가 있고, 그 선대에 세충(世忠)이라는 이름자가 있었기 때문에 대립되는 점이 있어 아직까지 편액을 걸지 못했었다. 이것을 혐의스럽게 여긴다면 다시 다른 이름을 정하여 써서 주겠다고 이미 여러 번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 답하기를, "어찌 이것을 가지고 혐의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또한 두 가지로 써서 주셨다.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공부했던 것은 다 읽었지만 너무 급하게 섭렵했다는 탄식을 면할 수 없는 것이 매우 흠이라 하겠다.저녁 때 대흥(大興)의 성영석(成永錫)도 왔는데, 사람 됨됨이가 신중하고 사랑할만한 데다가 나와 서로 아끼는 마음이 있으니 기뻤다. 저녁도 주인댁에서 준비해 주었다. 밥을 먹은 뒤에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을 고하였다. 장석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늙고 병들어 훗날 서로 만나기가 그다지 쉽지 않을 테니 무척 서글프다……." 하였다. 이에 내년 봄에 와서 뵙겠다는 뜻으로 말씀드렸더니, 장석이 "가을이 좋지만 거리가 6백여 리나 되니, 다시 만나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라고 하셨다. 자못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이 있었으나 애써 하직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와 흠성(欽成)과도 작별 인사를 하니 또한 마음이 서글펐다. 행랑채로 나와 머물다 율시 한 수를 지어 함께 고생한 사람들에게 주었다.오늘 처음 만났으나 오랜 친구 같아라(今始相逢若故舊)산에는 수북이 눈이 쌓이고 강물은 얼어붙었네(山多積雪水氷時)뭇 어진이들 모두 사문의 제자이니(群賢俱是斯門弟)참된 공부 실천하여 스스로 기약할 만하여라(踐履眞工自可期) 崔碩士仍爲發程, 不得同行, 大是欠事欠事。 朝前始正書, 食後畢書, 更正《西齋實記》與編次, 幸幸耳。 齋院號以宋氏世忠祠爲定, 則生所居鄕中有南陽 宋氏, 而其先世有世忠名字, 故仍爲枝梧, 尙未揭額, 以此爲嫌, 則更定他號書給之意, 曾已累此告白矣。 今日答以, "豈可以此爲嫌哉?" 亦以二件書給, 忻幸忻幸。 所業則盡讀, 而未免忙迫涉獵之歎, 欠事欠事。 夕時大興 成永錫, 亦爲入來, 爲人愼重可愛, 厥亦於吾有相愛之情, 可喜。 夕飯亦以主人宅備給, 食後夜深奉話, 仍爲告別, 則丈席曰: "吾老且病矣, 日後相面稍間未易, 甚悵云云。" 故以明春進拜之意, 仰告則丈席曰: "秋則好矣, 而六百餘里之程, 更面豈可易也?" 頗有悵缺之意, 强爲拜辭, 退與欽成作別, 亦有悵意。 出來廊底, 留咏一律, 贈同苦諸人曰: "今始相逢若故舊, 山多積雪水氷時。 群賢俱是斯門弟, 踐履眞工自可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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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행랑에 머물렀다. 留廊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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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몹시 추웠다. 행랑에 머물렀다. 저녁을 주인댁에서 마련해 주니 참으로 고마웠다. 極寒。 留廊底。 夕飯自主人宅備給, 感荷良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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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석사 최수일이 객들로 번잡한 탓에 정서(正書)하지 못하고 내일 일찍 출발하겠다고 하였다. 모레 동행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일의 형세가 급박하여 동행할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까웠다. 以客煩之致, 不得正書, 明日早發云, 故約以再明日同行爲言, 則事勢急矣, 不得同行云, 可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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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아침을 먹고 늦게 길을 떠나 광암(廣岩) 주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자생(者省) 도산(道山)45)에 들어갈 때 김이준(金履俊) 부자와 김계한(金啓漢)이 뒤쫓아 와서 만났는데, 이들은 말이 병이 나서 여산(礪山) 땅에서 뒤처졌던 사람들이었다. 적막한 가운데 이렇게 동향(同鄕) 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이어 그의 말에 옷 보따리를 맡기고 곡성(谷城) 읍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도산(道山)의 족질(族姪)인 필흥(弼興)의 집에 들렀으나, 필흥(弼興)이 마침 부재중이라 아이를 보내서 불러 오게 했다. 먼저 책자가 왔는가를 물었더니, 즉시 왔다고 하니 다행스러웠다. 책자는 올라갈 때 이 집안에 전달해 달라고 주주막(周酒幕)에 부탁한 것이다. 전달되지 않았으리라46) 생각했는데, 마침 왔다고 하니 몇 마디 말을 한 뒤에 곧바로 출발하여 중진원(中津院)47)을 건넜다. 저녁에 곡성 읍내에 도착해서 동행을 만나 함께 묵었다. 70리를 갔다. 仍朝飯晩後發程, 抵廣岩酒幕午飯。 入者省 道山之際, 金履俊父子及金啓漢追來相逢, 此則馬病落後於礪山地者也。 寂寥之中, 逢此同鄕之人, 其喜幸可斗。 仍付衣褓於其馬, 約以谷城邑內相逢。 入道山族姪弼興家, 則弼興適不在, 送兒請來。 先問冊子來云, 則卽來云幸幸。 冊子上去時, 以此家傳致之意, 付託於周酒幕也。 意謂浮沈矣, 果來云, 數語後, 卽發渡中津院。 暮抵谷城邑內, 逢同行同留宿。 行七十里。 자생(者省) 도산(道山) 자생과 도산은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근처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전달되지 않았으리라 원문의 '부침(浮沈)'은 인편으로 보내 편지가 전해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은선(殷羨)이 예장군(豫章郡)의 태수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에 사람들이 1백여 통의 편지를 주면서 경성에 전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석두(石頭)까지 와서 모조리 물속에 던져 놓고는 "가라앉을 놈은 가라앉고 떠오를 놈은 떠올라라. 은홍교가 우편배달부 노릇을 할 수는 없다.[沈者自沈, 浮者自浮, 殷洪喬不能作致書郵.]"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世說新語 任誕》 중진원(中津院) 중진(中津)은 순자진(鶉子津)으로, 곡성군 북쪽으로 10리 되는 남원(南原) 경계의 대로(大路)에 있었고, 순자원(鶉子院)은 순자진(鶉子津) 언덕 위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섬진강을 건널 수 있게 설치된 중진원교(中津院橋)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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