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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初九日 보슬비가 내렸다. 細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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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일찍 출발하여 이천(泥川) 중저(中底) 주막에 이르러 임실의 한용(韓瑢)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아침을 먹었다. 화성읍(華城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갈산(葛山) 어귀에서 어떤 한 사람이 부르기에 돌아보니 바로 남원(南原)의 현대(顯大) 이문욱(李文旭)이었다. 이어 말에서 내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욱에게 말을 타게 했다. 과천(果川) 읍내에 이르러 잠시 쉬다가 남태령(南泰嶺)10) 아래에 이르러 당동(唐洞) 신준(申俊) 종형제를 만났는데,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고향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피차의 갈 길이 바쁘기에 집에 편지를 써서 보내지는 못하고, 단지 무사히 올라왔다는 소식만 말로 전하고 서로 헤어졌다.고개를 넘을 때 동행하는 마상객(馬上客)에게 살고 있는 곳과 성명을 물었더니, 한 사람은 충청도 문의(文義)11)의 덕지(德地)에 사는 범석(範錫) 오성홍(吳聖洪)이며, 또 한 사람은 금구(金溝) 백일(白日)에 사는 위팔(渭八) 강원달(姜元達)이라 하였다. 이에 통성명을 하고 보니 오 석사도 오촌(鰲村)으로 들어가는 집안사람이었다. 나중에 서로 찾아가기로 약속하고서 그대로 동행하였다. 승방(僧房) 주막에 이르러 임실(任實) 동행과 두 길손은 뒤쳐지고, 나는 길을 재촉하여 나루터에 이르러 즉시 나루를 건넜다.저녁에 청파(靑坡)의 박영대(朴永大) 집에 이르니 낙안 형님이 오늘 오전에 먼저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무사히 올라왔으니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웠다. 주인 내외(內外) 모두 별 탈이 없고, 동향(同鄕)에서 함께 온 이들도 별 탈 없이 올라와 성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즉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대로 묵었다. 110리를 갔다. 밤에 비가 내렸다. 早發抵泥川 中底酒幕, 逢任實 韓瑢, 暫話朝飯。 抵華城邑中火。 抵葛山前, 有一人呼之故顧見, 則乃南原 李顯大 文旭也, 仍爲下馬暫話, 使文旭騎馬, 至果川邑內暫憩, 至南泰嶺下, 逢唐洞 申俊從兄弟, 以落榜擧子下鄕人也。 暫話彼此行色忙迫, 故不得付書於家中, 只以無事上來之意, 口傳相分。 越嶺之際, 與同行以馬上客, 問其所居與姓名, 則一則忠淸道 文義 德地居吳範錫 聖洪也, 一則金溝 白日居姜渭八 元達也。 仍爲通姓名, 吳碩士亦爲入鰲村門庭之人也。 有後日相訪之約, 仍爲同行。 抵僧房酒幕, 任實同行與二客落後, 余則促行抵津頭, 卽爲越津。 暮抵靑坡 朴永大家, 則樂安兄主, 今日午前先爲入來留待矣。 亦爲無事上來, 幸幸。 主人內外俱無故, 同鄕同行, 亦爲無故上來, 入去城內云, 不卽相面, 可歎耳。 仍爲留宿。 行百十里。 夜雨。 남태령(南泰嶺) 서울에서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가던 길로서 삼남대로의 첫 번째 큰 고개이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호현(狐峴 여우재)이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 묘를 참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 고개 이름을 물었을 때 '여우고개'라는 이름을 거명하지 못했는데, 과천 아전이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여 '남태령'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문의(文義)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구 청원군 문의면) 지역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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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보책(譜冊) 두 질(秩)을 흥양(興陽) 하인 편에 보냈다. 送二秩譜冊於興陽下人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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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비가 갤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화옥(華玉)이 필시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대로 천평에 머물렀다. 雨意不霽, 故意謂華玉必不發行。 因留泉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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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저교(楮橋)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능측(陵側)에서 묵었다. 至楮橋中火, 留宿於陵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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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경신) 1800年(庚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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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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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九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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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새벽에 출발하여 남태령(南泰嶺)66)을 넘었다. 승방점(僧房店)67)에 이르러 떡을 사서 요기한 다음, 강을 건너 수청거리점(水淸巨里店)에 이르렀다. 아침을 먹은 뒤에 청파(靑坡)의 길가에 이르러 동행과 서로 헤어지고, 나는 박영대(朴永大)의 집에 들어갔다. 이어 주인과 요기하고 잠시 쉬었다가 서소문(西小門) 밖 이희(李)의 집에 갔으나 주인은 부재중이었다. 그런데 어떤 모르는 조관(朝官) 한 사람이 내게 묻기를, "흥양에 사십니까?"라고 하므로 내가 답하기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하자 이어 말하기를,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바로 회덕(懷德)68)에 사는 장소(長小) 송명규(宋明圭)인데, 주인과 친사돈 관계인 사람이었다. 가지고 온 민어(民魚)를 노비에게 들여보내니 안채에서 말을 전하였는데 전일의 정을 잊지 않았다고 했다.예조의 서리 안인성(安寅成)을 만나기 위해 예조에 갔더니 예조의 직방(直房)69)으로 들어갔다고 하므로 그길로 직방(直房)으로 갔다. 나는 문 밖에 서서 주인에게 통지하게 했더니 곧바로 나왔다. 선 채로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나서, 먼저 재록(載錄)했는지의 여부를 묻자 곧바로 재록하였다고 하였다. 술집에 함께 나가자고 청하자 옷을 입고 나왔는데, 곧바로 나오면서 《사원록(祠院錄)》을 가지고 나왔다. 직접 보니 과연 재록되어 있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대개 이번 여행길은 전적으로 이 일을 보기 위하여 왔기 때문에, 이 일이 이처럼 재록(載錄)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길로 함께 술집으로 나와 술을 사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액(賜額)을 청한 일에 대해 언급하였더니, 이 일은 큰일이라서 수령이 쉽사리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유생의 상소가 있더라도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기약을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 첩미(帖尾)에 대한 일도 언급하니, 그가 관계된 바가 아니어서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관장하는 사람과 상의해 보겠다고 하기에 내일 다시 오기로 약속을 하고 나왔다. 광교(廣橋) 경주인(京主人) 집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저물녘에 주인집으로 나왔다. 曉發越南泰嶺, 抵僧房店, 買餠療飢, 仍爲越江, 抵水淸巨里店。 朝飯後, 抵靑坡路邊, 與同行相分, 余入朴永大家。 仍爲主人療飢, 暫憩後, 往西小門外李家, 則主人不在, 而有不知朝官一人, 而問余曰: "在興陽?"云, 故答曰: "何以知之?" 仍曰: "有知之道"云, 故仍與敍話, 則乃懷德居宋長小 明圭, 而與主人親査人也。 持來民魚, 使奴婢入送, 則內間傳語出來, 不忘前日之意。 爲見禮吏 安寅成 往 禮曹, 則入去禮曹 直房云, 故仍往直房。 余則立門外, 使主人通奇, 則卽爲出來。 立談數語, 先問載錄與否, 則卽爲載錄云, 請與出去酒家, 則着衣出來矣。 卽爲出來, 而《祠院錄》持來, 親見則果爲載錄, 幸幸。 盖此行專以爲見此事而來矣, 此事若此載錄, 可幸可幸。 仍與出來酒家, 買酒相飮敍話, 仍說請額事, 則此事大事也, 倅難易成, 雖有儒疏, 畢成難期云矣。 又論帖尾事, 則渠非所關, 不可詳知, 與所掌之人相議云云, 故以明日更來爲約而出。 入廣橋 京主人家暫憩, 乘暮出來主人家。 남태령(南泰嶺)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에서 과천시 과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의 경계가 되는 고개이다. 승방점(僧房店) 승방평(僧房坪)에 있었던 객점을 말한다. 승방평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뒷산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고, 그 절 앞들에 있던 마을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승방뚤・심방뜰이라고도 불렀다. 회덕(懷德)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지역의 옛 지명이다. 직방(直房) 조방(朝房)이라고도 하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조회(朝會) 때를 기다리느라고 모여 있던 방이다. 대궐문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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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새벽에 출발하여 황화정(皇華亭)에 이르자, 새벽빛이 이제 막 밝아왔다. 전라도의 첫 경계에 들어섰으므로 각각 시 한편을 지었는데, 공서가 먼저 읊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이제야 전라도 경내로 들어오니(始入全羅境)때마침 새벽빛이 막 밝아오누나(時當曉色新)우리 전라도 길이라 하니(道吾之道也)정신이 한층 더 상쾌해졌네(快活更精神)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경내로 들어서니 내 마음 한결 기쁘고(入境吾心喜)먼동이 트니 날이 점차 새로워지네(開東日漸新)오늘 아침 두 가지의 아름다움 함께하니(今朝兼二美)이제야 정신이 상쾌해지는구나(方覺爽精神)최진욱(崔震煜)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이른 새벽 우리 경내로 들어오니(凌晨入我境)고향의 맛 차츰차츰 생겨나 새롭네(鄕味漸生新)하늘이 어리석은 생각 한이 될 줄 알아(天知恨迷意)아침 햇살 비춰 정신을 맑게 하네(初日照精神)이어 대추(大棗)와 떡을 사 먹고, 최진욱과 작별하였다. 소로(小路)에 들어가 여산(礪山)의 심천(深川)에 이르러 일가인 송함보(宋涵甫)와 아침을 먹고, 이어 〈제각중건통문(祭閣重建通文)〉을 전하였다. 새벽에 출발하여 여산읍(礪山邑)에 이르러 호산춘(壺山春)79)을 사서 마시고 신점(新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삼례(參禮)에 이르러 묵었다. 70리를 갔다. 曉發至皇華亭, 曙色初明, 全羅初境, 故各作一聯, 公瑞先吟曰: "始入全羅境, 時當曉色新。 道吾之道也, 快活更精神。" 余次曰: "入境吾心喜, 開東日漸新。 今朝兼二美, 方覺爽精神。" 崔震煜次曰: "凌晨入我境, 節味漸生新。 天知恨迷意, 初日照精神。" 仍買棗餠相食, 與崔作別。 入小路至礪山 深川, 與宋涵甫同宗朝飯, 仍傳致《祭閣重建通文》。 曉發抵礪山邑, 買飮壺山春, 至新店中火, 至參禮留宿。 行七十里。 호산춘(壺山春) 찹쌀과 멥쌀로 세 번 빚은 술이다. 전라북도 여산(礪山)의 특주로서 여산의 별호가 호산(壺山)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술의 특징은 밑술을 두 번 담그고 다시 덧술을 하여 세 번을 담그는 데 있다. 조선 중엽 이후의 《산림경제》·《주방문(酒方文)》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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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아침을 먹기 전에 출발하려고 하니 송민수(宋民洙)가 돈 1전 5푼으로 아침밥을 사먹으라고 주었다. 노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다시 동(銅) 1관(貫)을 빌려 쓰기를 청하니, 송약수(宋若洙)가 한 젊은 종인(宗人)을 불러와 돈 2전을 가지고 오라 하면서 한 자리의 술값이나 하라며 도움을 주었다. 아침에 전성철(全聖哲)의 집에 이르러 아침을 먹은 뒤에, 유석하(柳錫夏)와 영윤(永允)을 데리고 함께 서문(西門) 안의 송덕진(宋德瑨) 집에 갔다. 그 사람은 바로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부내(府內)에 살고 있을 때 나주(羅州) 주인이 되었는데, 영저(營底)에서도 권세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예방 영리(禮房營吏)80)인 정읍(井邑) 이동환(李東煥)과 주객(主客) 사이의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몇 자 써주기를 청하자, 송덕진이 그의 가동(家僮, 어린 사내 종)을 불러 우리 두 사람을 영청(營廳)에 데리고 가서 예리(禮吏)에게 편지를 전하니 아전이 찾아내었다. 지난번 상경했을 때에 육충사(六忠祠) 열록(列錄)을 기록해 두었다가 《사원록(祠院錄)》에 재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은 아직도 선화당(宣化堂)에 있고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예리가, "안에서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착실히 기록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록을 직접 보지 못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매우 답답하였다.장흥(長興) 벽사(碧沙)의 역리(驛吏) 김방업(金邦業)은 재작년 오촌(鰲村)으로 가는 길에 마침 낙안 도중에서 만나 그대로 길동무하며 간 영저(營底)의 사람이다. 나와 정이 있어 육충사(六忠祠) 재록하는 일을 편지로 부탁하였는데, 그 조용한 때를 이용해서 예리(禮吏)에게 부탁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여 말했다. 돌아올 때 또 송덕진(宋德瑨)을 만나 다시 편지로 부탁하고는 그대로 출발하여 남문 밖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정자동(亭子洞)에 이르러 묵었다. 25리를 갔다. 食前欲爲離發, 則民洙以一戔五分錢, 買食朝飯之意給之。 路貰不足, 故更請一貫銅貸用, 若洙招來一少宗人, 二戔錢持來云, 而惠以一時之酒債矣。 朝到聖哲家朝飯後, 與携錫夏、永允, 偕往西門內宋德瑨家。 其人卽礪山之宋, 而居在府內時, 爲羅州主人, 而營底之有權者也。 其人與禮房營吏 井邑 李東煥, 主客相親之間, 故請以數字書, 則其人呼其家僮, 陪我二人往于營廳, 傳書于禮吏, 吏搜出。 頃者上京時, 書托六忠祠列錄, 欲載《祠院錄》矣。 右錄尙在宣化堂, 姑未出來, 故其吏言, "內待後出來之日, 着實載錄。"云, 故未得親見載錄而歸, 心甚㭗㭗。 與長興 碧沙驛吏金邦業, 卽再昨年鰲村之行, 適逢樂安路中, 仍爲作伴於營底之人也。 與我有情故, 書托六忠祠載錄事, 而乘其從容時, 言屬禮吏之意, 申申言之。 來時又見宋德瑨, 更爲書托, 而仍以發行, 抵南門外中火, 抵亭子洞留宿。 行二十五里。 예방 영리(禮房營吏) 예방은 조선 시대 지방관서에서 예전(禮典) 관계의 실무를 맡아보던 부서 또는 그 일에 종사하던 향리를 말하고, 영리(營吏)는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말단 관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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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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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龍淵【自九成臺三里】 壯哉奇哉俄者舞鳳飛鳳乃霸上棘門之兒戱也萬仞削壁蒼蒼黯黯中有一道白虹炫爛直掛銀淙玉沫從空亂落下有圓沼匯泓無底卽九龍所蟄云盈科而流爲千回萬折之澄潭門路可爲一里而滑巖欹側匍匐而進戰兢難持差跌一足則閻羅國判在頃刻欹巖稍平處有尤庵先生筆怒瀑中瀉使人眩轉八字九龍淵門外南有影子池【石上寬平處匯成小池不增不減照見九龍瀑之影恍惚尤奇故稱爲影子池今原判爲高城守時肇錫名鐫刻云】淵之上流乃八潭也列在萬仞壁上層層可觀云而憚於攀援未能往見可悵盖自神溪穿金剛門非不險矣而尙可以履涉自金剛門抵玉流洞往往有石磴斷截處便以棧道牽補危險難狀度玉流洞入九龍淵愈往愈險百丈斬絶之壁依一線層棧惴惴焉如集于木者不知爲幾周回劍閣之鳥道太行之羊腸未足以喩其險也雖然路愈險而景愈奇從古韻人之探奇忘險剔開危徑良有以也八潭之路加險於九龍淵云而奇景則想未必更加於九龍瀑也歟◌椒泉翁詩曰仄棧危梯瞥過輕晴虹忽見半空橫非惟石滑難移足却怕龍驚不敢聲珠沫散飛疑雨灑晶波直瀉激雷鳴先生筆蹟留巖面揮動雄豪勢可爭晴虹一道爛銀光掛壁鮫綃萬幅長白練四時何不息玉袍應裏九龍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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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隍堂【在掠庫與百川橋間】 關東之俗多尙叢隍所過峽中往往排置或以瓦屋或以石屋或以板屋或以屈皮屋或以薪屋茅屋麻屋不一其規過掠庫未到百川橋又有一城隍祠云是高城古太守盧春於擊舟巖邊迎楡樹上五十三佛奉之山寺今所謂楡岾寺是也盧春後捨身爲佛將向楡岾其妻亦從忽於路中逢雨謂其夫曰雨意如此以室中所曬木緜未及收斂可惜盧春笑顧曰嗟乎君猶有塵念未可以從我游諸天只在此間爲城隍神足矣便不顧而去其妻仍留此地爲叢祠神掠庫民歲歲崇奉如儀若不能祭祀豊潔則狗嶺運米之路每有虎火前犯之患楡岾寺僧徒亦備齋供燒香虔禱歲以爲常云望夫山色翠眉低寂寞荒祠落葉迷雨裏木緜能忘否西風蕙帶正凄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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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川橋【自掠庫十里】 此橋乃入金剛門路也從此山路險絶不可以車馬來往橋頭命僕夫送驛站使逶迤來待於長安寺便以僧輿前進僕夫相別離歇馬歸郵店可柰此膏盲燈燈不憚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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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蛇窟【自黃流潭東可爲一里許】 玉鏡臺後轉一回絶壁間有兩穴一曰黑蛇窟一曰金蛇窟巉巉一石腰洞徹雙圓窟脩鱗尙在不我有狙徠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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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源庵【長安寺屬庵自水簾洞二十里】 山日過午復尋般若高嶝過王子城東入澗壑跋涉艱險亦不知爲幾周遭行到靈源但是空庵蕭蕭落落別無奇景【庵無守僧而菁田茂密無厭郵卒走相採掇可嘆】庵之東邊有拜席巖可坐數人而埋荒草中西邊有玉燭臺可爲數仞曾有一僧修戒於其上云而峭直如塔難可躋登指路僧擧手指牛頭峯馬面峯白馬峯遮日峯閻羅峯天王峯鬼王峯丞相峯將軍峯判官峯童子峯卒吏峯罪人峯云云非徒峯名詭誕亦無神異供眼可嘆落葉靈源洞庵空賓作主緇徒影如從指尖露無數玉燭與拜席往事證佛祖次第十王峯歷歷談冥府沙門何詭誕白玉被點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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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恩庵復用佛地庵韻【在長安寺東隅自靈源二十里自地藏纔數里】 長安寺之屬庵而寺與庵相接庵宇新構精潔可宿【豊恩捐財新構云】額號乃豊恩所書前面有長庚峯峯腰古有庵今廢又有觀音峯其下有庵乃比丘所住云十年楓岳夢一夜海恩庵宿願仙蹤躡奇緣佛契參老巖抽玉筍殘葉染紅藍可奈羈摩客明朝悵出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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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寺 寺是大刹有二層佛殿又有二門樓西曰泛鍾東曰神仙樓外有萬川橋寺在內金剛初境平臨一壑可謂宏傑而但風雨閱劫未免荒凉僧數亦不夥可嘆【泛鍾樓上木刻題名】千里長安人九秋長安寺長安若慕名恐有紅塵意昔謂長安寺迢迢在九天而今定睛看只是白雲邊〇初七日甲寅晴〇碧谷徐尙書【憙淳】一行來到椒泉翁緣此更留一宿【終日准陽支應宗人履益告歸】〇銀溪丹邱兩驛人馬自數日前來待【又宿於海恩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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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아침 전에 임실 종인(宗人) 연영(延英)이 찾아왔는데, 기쁜 나머지 절구 한 수를 읊었다.천 리 먼 길에서 백대의 친척 만나(千里相逢百代親)처음 만나 기쁜 마음은 천륜에서 나온 것이리(逢初心喜自天倫)더구나 또 이번 길에 고락을 함께하니(況又今行同甘苦)그 누가 우리 세 사람의 깊은 정 만하랴(深情其孰我三人)남원(南原)의 문욱(文旭)도 찾아왔다. 이에 아침을 먹고 나서 문욱은 용산(龍山)으로 가고, 나는 낙안 형님, 임실(任實) 종인(宗人)과 묘동(廟洞)에 임실(任實) 사관(舍館)에 갔다. 한용(韓溶)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한우(韓友)와 진사 오우상(吳羽常) 집에 가서 예조에 소장 올릴 일을 논의하였는데, 실기(實記) 제장(製狀)을 보겠다고 하여 실기(實記) 한 권을 그의 집에 남겨 두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남계(南溪) 정민채(丁敏采)의 안부(安否)를 물었더니, 서간(書簡)을 가지고 왔는데 다른 곳에서 오는 바람에 가져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내일 가지고 다시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니 답하기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곧바로 출발하여 신 승지(愼承旨)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종묘동(宗廟洞)의 조 지사(趙知事) 집에 갔다. 보성(寶城)의 종인(宗人) 귀환(龜煥)을 찾아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형 두환(斗煥)이 어제 도성에 들어왔다고 하기에 곧바로 만나 예조에 올리는 일을 말하였더니 그도 좋다고 하였다. 나는, "들어가는 것이 적지 않다는데 빚을 얻을 길이 없으니 여기에서 만약 주선할 방도가 있으면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길로 성균관으로 가서 관인을 찍은 다음 날이 저물어서야 주인집에 돌아오니 오위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인수(朴寅洙)도 와서 함께 묵었다. 朝前任實宗人延英來見, 忻喜之餘, 吟一絶曰: "千里相逢百代親, 逢初心喜自天倫。 況又今行同甘苦, 深情其孰我三人。 " 南原 文旭亦來。 仍朝飯, 文旭往龍山, 余則與樂安兄主及任實宗人, 往廟洞 任實舍館。 與韓溶暫話後, 與韓友往吳進士 羽常家, 論其呈禮曹事。 見實記製狀之意, 置實記一卷於其家, 暫話後, 問南溪 丁敏采安否, 故書簡持來, 而自他處來到, 故未袖而來, 則明日袖, 而更來如何。 答曰: "明日更來而出。" 卽發入愼承旨家, 暫話後, 往宗廟洞 趙知事家。 訪寶城宗人龜煥暫敍, 則其兄斗煥, 昨日入城云, 故卽爲相面, 說及呈禮曹事, 則亦曰好矣。 余曰: "所入不小, 而得債之道無路, 自此若有周旋之道, 則變通爲可。" 仍往成均館打印, 乘暮還主人家, 則五衛將來待矣。 朴寅洙亦來同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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