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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아침을 먹은 후 출발하였다. 사동(蛇洞)77) 객점에 이르러 요기를 하였다. 오수(熬樹) 시장 주변에 이르러 술을 사서 마시고 잠시 쉬었다. 집에 있을 때 전해 듣기로 7월 대홍수에 오수 장터가 물에 잠겼다고 하던데, 지금 와서 보니 도로 주변 가옥은 부서져 파손된 곳이 많았고, 저자 주변 가게들은 모두 새로 지어졌으니, 예전에 들은 소문이 실로 허튼 말이 아니었다. 임실(任實) 국평(菊坪)78)의 하서(夏瑞) 집에 이르니 하서는 출타하고, 그 아들 전(椣)만 있었다. 저녁 무렵 하서가 들어왔는데 그 손자가 단독(丹毒)79)에 걸렸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대로 유숙하였다. 70리를 갔다. 점심 무렵 증산(甑山)을 지날 때 절구 한 구절을 읊었다. 율지가 다음과 같이 먼저 읊었다.예전에도 동행하고 오늘도 같이 가건만(昔日同行今又同)수척해진 몸과 쇠약해진 뼈마디에 서릿바람 두렵네(瘠身衰骨畏霜風)증산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갈림길이 많아(甑山路黑兼多歧)먼 데서 온 객 지팡이 멈추고 끊임없이 묻네(遠客停笻問不窮)내가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천 리 먼 노정에 두 지팡이 함께 가니(千里長程二杖同)때는 9월 국화꽃 피는 시절이라네(時維九月菊花風)조룡성 아래 증산의 길에는(鳥龍城下甑山路)붉은 단풍잎으로 단장한 산 풍경 무궁하네(紅葉粧山景不窮) ○朝飯後, 發程。 抵蛇洞店療飢。 抵熬樹場邊, 沽酒以飮暫憩。 而在家時, 傳聞七月大水 獒樹場墟爲水所浮云矣, 今來見之, 則路邊村家, 多有破傷之處, 市邊假家, 盡爲新造, 前日所聞 實不虛矣。 抵任實菊坪夏瑞家, 則夏瑞出他, 只有其子椣矣。 夕時夏瑞入來, 其孫兒之丹毒, 方在憂慮中矣。 仍留宿。 行七十里。 午過甑山時, 口號一絶。 聿之先曰: "昔日同行今又同, 瘠身衰骨畏霜風。 甑山路黑兼多歧, 遠客停笻問不窮。" 余次曰: "千里長程二杖同, 時維九月菊花風。 鳥龍城下甑山路, 紅葉粧山景不窮。" 사동(蛇洞) 전라남도 곡성군 고달면 대사리이다. 국평(菊坪)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국평 마을이다. 단독(丹毒)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고열이 나는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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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태평동(太平洞)의 송 진사(宋進士) 집에 가서 《장릉지(莊陵誌)》42)를 보고 싶다고 누누이 부탁하였더니, 다른 곳에서 구해 오겠다고 하기에 오후에 다시 오기로 약속하였다. 삼청동(三淸洞)의 승지 이헌기(李憲綺) 집으로 갔으나 승지가 궐내로 들어가 만나지 못하고, 그 아우인 주서(奏書) 헌위(憲緯)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동(壺洞)의 남상(南相) 집에 갔으나 남상(南相)도 입궐하여 만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도중에 길에서 공서(公瑞)를 만나 잠깐 이야기하다가 오후에 나오겠다고 하기에 좋다고 답하였는데, 종각에 와서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았다. 오는 길에 태평동에 들렀더니 진사가 《장릉지》를 얻어 오라고 종씨(從氏)의 집에 노복을 보냈는데, 잃어버려서 없다고 답하였다니 한탄스럽다. 곧바로 나와 주인집으로 갔는데, 공서(公瑞)가 찾아왔다가 우리들이 없어서 도로 들어갔다고 하니, 한탄스럽다. 往太平洞 宋進士家, 以《莊陵誌》得見之意, 累累言托, 卽求得他處云, 故以午後更來爲約。 往三淸洞 李承旨 憲綺家, 則承旨入闕內, 不得相面, 與其弟奏書憲緯暫敍。 往壺洞 南相家, 則南相亦入闕, 不得相面, 而來路逢公瑞於路上, 暫話以午後出來爲言, 故答以好矣, 而來待鍾閣, 終不來, 故來路入太平洞, 則進士以《莊陵誌》得來之意, 專爲送奴於其從氏家矣。 答以見失不在云, 可歎, 而卽爲出來主人家, 則公瑞出來, 以吾輩之不在, 還爲入去云, 可歎。 장릉지(莊陵誌)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도 영월로 추방되어 죽기까지의 사실과 숙종 때 복위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1711년에 박경여(朴慶餘)와 권화(權和)에 의해 목판본 4권 2책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이 책은 1711년(숙종37) 당시 영월부사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誌)》 2권을 구지(舊誌)라 하고, 그 뒤 박팽년(朴彭年)의 9세손 경여가 권화와 함께 속지(續誌) 2권을 증보해 《장릉지》라고 개제하였다. 구지인 《노릉지》는 노산군(魯山君)의 능호(陵號)에 따른 것이고, 구지와 속지를 합편, 개제한 《장릉지》는 노산군이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된 뒤의 능호인 장릉(莊陵)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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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오촌(鰲村)에서 경성까지 삼백여 리라고 하는데, 이번 동행한 이들이 화양동(華陽洞)을 보고 싶다고 하니 백여 리 길을 돌아가야 했다. 일찍 출발하여 십치(十峙)를 넘어 청천(淸川) 장터에서 아침을 먹었다. 화양동(華陽洞)에 도착하여 경천벽(擎天壁)16)을 먼저 보고 다음은 운영담(雲影潭)17)을 보았다. 진덕문(進德門)으로 올라가 곧바로 환장암(煥章菴)18)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도포(道袍)를 입고 내려와서 서원(書院)의 유사방(有司房)19)인 소양실(昭陽室) 주인을 만난 뒤에 《심원록(審院錄)》에 서명하였다. 곧바로 만동묘 전직(萬東廟殿直, 만동묘를 지키는 사람)과 서원 창고지기를 불러 서원 문을 열고 자리를 깔아 공경히 알현한 뒤에 노선생(老先生) 영정(影幀)을 봉심하였다.다음은 만동묘(萬東廟)에 나아가 봉심하였는데, 묘우(廟宇)는 3칸으로 첫째 칸 후벽에는 해와 달을 그려 놓았고, 그 아래에 신종황제(神宗皇帝)의 허위(虛位)를 세워 놓았다. 둘째 칸에는 해와 달 그림 아래에 의종황제(懿宗皇帝)의 허위를 세워 놓았다. 교의(交椅, 신주를 모시는 의자) 아래에 긴 함[櫃子] 하나가 있기에 전직에게 물어보니, 축판(祝板)과 지방(紙榜)의 패문(牌文)이라고 하였다. 이에 하나하나 살펴본 뒤에 중문(中門)으로 나왔다.담장 아래의 왼편에 비각(碑閣)이 있기에 들어가 둘러보았다. 청옥석(靑玉石) 사면(四面)에 전후의 사적(事蹟)을 새겨 놓았는데, 글은 도암 선생(陶菴先生)20)이 지은 것이며 전서(篆書)는 유 상국(兪相國)21)이 쓴 것이었다. 한차례 읽어보니 아, 이 만동묘에 들어와 이 글을 보는 사람치고 누구인들 감회가 일지 않겠는가.두루 완상한 뒤에 세 번째로 금사담(金沙潭)22)을 보았다. 금사담 위에 한 칸짜리 정사(精舍)가 있었는데, 바로 노선생(老先生)이 그 때에 거처했던 암서재(巖栖齋)23)이다. 네 번째로 읍궁암(泣弓巖)24)을 보았다. 이 바위는 노선생이 효종대왕(孝宗大王)의 기일이 되면 눈물을 흘리던 곳이다. 읍궁암 위에 세워진 작은 돌비석에 선생의 절구 한 수가 새겨져 있었다.이날이 무슨 날이던고(此日知何日)외로운 충정 상제께서 내려다보시리(孤衷上帝臨)새벽에 일어나 통곡하고 나서(晨起痛哭後)무릎 안고 다시 길게 시 읊었노라(抱膝更長吟)시구는 윤헌주(尹憲柱)25)의 글씨로 쓰여 있다.환장암(煥章菴)에 올라가 승통(僧統)26)을 불러 운한각(雲漢閣)27) 어필(御筆)을 봉심하였다. 동쪽 벽에 '비례부동(不禮不動)' 네 글자 큰 글씨가 걸려 있고, 서쪽 벽에 '사무사(思無邪)' 세 글자 큰 글씨가 걸려 있었다. 판자 아래에는 8석(石)이 있는데 그것을 두드리면 각각의 소리가 난다 하여서 '팔음석(八音石)'이라고 하였다.두루 살펴본 뒤에 나와 어필함(御筆函)을 내어와 열어 살펴보니, 바로 만력 숭정(萬曆崇禎)의 어필(御筆) 3권, 정축년 대통력(大統曆) 1권, 어필 1자루가 있었다. 두루 완상한 뒤에 다섯 번째로 능운대(凌雲臺)28)를 보고, 여섯 번째로 망성대(望星臺)29)를 보았는데, 망성대의 오른쪽 벽에 '비례부동(不禮不動)'이 새겨져 있었다. 일곱 번째로 와룡암(臥龍巖)30)을 보고, 여덟 번째로 학상대'(鶴裳臺)'31)를 보았으며, 아홉 번째는 파곶(巴串)32)을 보았다. 그 가운데 기이한 절경은 파곶·학상대·망성대·운영담이었다.대저 화양동(華陽洞)의 수석(水石)들은 우리나라 제일 명승지 중 세 장관에 해당된다. 온갖 승경 등을 앉아서 들었기 때문에 나의 졸필(拙筆)로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가 없지만, 환장암 벽 위에 선생의 시가 있기에 부족한 솜씨나마 삼가 차운하였다.낙양산33)에 펼쳐진 화양 골짜기(華陽洞闢洛陽山)엄숙하신 황제 영혼 여기에 의탁했구나(穆穆皇靈寄此間)우암과 수암34)이 전후로 뜻을 두어(尤老遂翁前後意)여러 암벽들 별천지를 이루었도다(取諸岩壁別人寰)이찬(而贊)이 차운하였다.해동의 빼어난 절경 뽐내는 화양산(海東絶勝華陽山)중국 천지가 이 사이에 있었구나(中國乾坤在此間)만고강상 뜻을 붙잡아 세워(萬古綱常扶植意)선생의 높은 의리 속세를 벗어났네(先生高義出塵寰)윤익(允益)이 차운하였다.별천지가 낙양산에 빙 둘러 있고(別區環立洛陽山)대명의 일월이 그 사이를 비추네(大明日月照此間)이웃을 돌아보고 구하는 맘 끝이 없어(顧隣捄傍不朽思)두 황제의 영혼 속세를 벗어났도다(二帝靈魂出塵寰)환장암(煥章菴)에서 묵었다. 自鰲村抵京城三百餘里云, 而以此作行者, 欲見華陽洞之意, 逶迤百餘里。 早發越十峙, 抵淸川市邊朝飯, 得達華陽洞門。 初見擎天壁, 再見雲影潭。 上進德門, 直抵煥章菴中火。 着道袍下來, 院有司房昭陽室見主人後, 書名《審院錄》, 卽招萬東廟殿直及書院庫子, 開門設席。 祗謁後, 奉審于老先生影幀。 次詣萬東廟奉審, 則廟宇三間, 而第一間後壁畵日月, 其下設神宗皇帝虛位, 第二間日月之下, 設懿宗皇帝虛位, 交椅下有一長櫃子, 故問于殿直, 則盛以祝板與紙榜牌云, 故箇箇奉玩後, 出來中門。 墻下左邊, 有碑閣入玩, 則靑玉石四面刻前後事蹟, 而文則陶菴先生所製, 篆則兪相國筆, 一次讀下, 噫! 入此廟, 觀此書者, 孰不無興感之懷哉? 周玩後, 三見金沙潭, 上有一間精舍, 老先生居此時巖栖齋也。 四見泣弓巖, 巖卽老先生, 位孝宗大王諱日, 揮泣之處也。 巖上立小石碑, 刻先生詩一絶曰: "此日知何日, 孤衷上帝臨。 晨起痛哭後, 抱膝更長吟。" 之句而尹憲柱筆也。 上煥章菴, 招僧統, 奉審雲漢閣御筆, 則東壁掛非禮不動四大字, 西壁掛思無邪三大字。 板下有八石而扣之, 則各聲音云, 故謂之八音石。 遍觀後出來, 奉出御筆函, 開金審則卽萬曆崇禎御筆三卷, 丁丑大統曆一卷, 御筆一柄。 周玩後, 五見凌雲臺, 六見望星臺, 臺之右壁, 刻非禮不動。 七見臥龍岩, 八見鶴裳臺, 九見巴串, 其中奇絶者, 巴串、鶴裳臺、望星臺、雲影潭也。 大抵華陽之水石, 我東之第一勝處三壯觀, 百勝等坐聞, 故以吾拙筆, 不能摸寫其萬一耳。 煥章菴壁上有老先生韻, 故忘拙謹次曰: "華陽洞闢洛陽山, 穆穆皇靈寄此間。 尤老 遂翁前後意, 取諸岩壁別人寰。" 而贊次曰 "海東絶勝華陽山, 中國乾坤在此間。 萬古綱常扶植意, 先生高義出塵寰。" 允益次曰 "別區環立洛陽山, 大明日月照此間。 顧隣捄傍不枋思, 二帝靈魂出塵寰。" 宿煥章菴。 경천벽(擎天壁) 화양구곡의 제1곡인 경천벽은 화양동 계곡 어귀에 있으며 절묘하게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며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경천벽'이란 "하늘을 떠받치는 벽이다"는 의미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곧 의리"라는 숨은 뜻이 담겨 있다. 운영담(雲影潭) 화양구곡의 제2곡인 운영담은 경천벽에서 400m 정도 위에 있는 계곡이다. 맑은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고 있으며, 하늘의 구름 그림자가 계곡 물속에 맑게 비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환장암(煥章菴) 충청북도 속리산 화양계곡에 있던 암자 이름인데, 1907년경에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채운암(彩雲菴)이란 사찰이 들어서 있다. 《송자대전》 부록 제7권 연보의 〈숭정 47년(1674) 갑인, 선생 68세〉에 의하면, "노봉(老峯) 민공 정중(閔公鼎重)이 연경(燕京)에 가서 의종황제(毅宗皇帝)의 '비례부동(非禮不動)' 4자(字)를 쓴 수필(手筆)을 얻어 와서 선생에게 주었다. 선생이 드디어 시냇가 절벽에 모각하고 그 곁에 암자(庵子)를 세워 승려들에게 지키게 하고, 환장암(煥章庵)이라 이름하여 그 진본을 암자 속에 간직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유사방(有司房) 회계 및 기록, 제수 마련 및 점검, 제사 절차 협의, 회의 주관 등을 담당하는 유사들이 거처하는 방이다. 도암 선생(陶菴先生) 이재(李縡, 1678~1746)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이다. 1702년(숙종28)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신임사화에 숙부 이만성(李晩成)이 처형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인제의 설악에 들어가 성리학을 닦는 데 힘썼다. 1725년(영조1),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받자 소를 올려 소론 세력을 몰아낼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용인으로 퇴거하여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저서로 《도암집》 등이 있다. 유 상국(兪相國) 유척기(兪拓基, 1691~1767)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다.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고 동래(東萊)에 안치(安置)되었다가 1725년(영조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났다. 1739년 우의정에 오르자, 신임사화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연좌되어 죽은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 두 대신의 복관(復官)을 건의해 신원(伸寃)시켰다. 금사담(金沙潭) 화양구곡 중 제4곡이다.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 하여 '금사담'이라고 한다. 암서재(巖棲齋) 1666년 송시열(宋時烈)이 제4곡인 금사담(金砂潭) 절벽 위에 정면 세 칸 규모의 작은 서재를 짓고 북재(北齋) 또는 암재(巖齋)라고 불렀는데, 훗날 우암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 의해 암서재(巖棲齋)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우암이 말년을 보내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으며, 우암 사후 우암의 제자들에게 강학 장소로 활용되었다. 읍궁암(泣弓巖) 화양계곡 제3곡에 있다. 《송자대전부록(宋子大全附錄)》 〈기술잡록(記述雜錄)〉 '채지홍(蔡之洪)'조에, "우암이 해마다 효종의 휘신(諱辰)인 5월 4일이면 반드시 이 바위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고 곡을 하였기 때문에 '읍궁(泣弓)'이라 이름하였다.[先生每年五月四日諱辰, 必西望哭, 臨於此巖, 故名以'泣弓'.]"라고 하였다. 윤헌주(尹憲柱) 1661~1729. 자는 길보(吉甫), 호는 이지당(二知堂)이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봉사(奉事)를 지내고, 1698년(숙종24) 알성 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정언(正言)·헌납(獻納)을 거쳐 도승지·형조 판서·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북도 안무사(北道按撫使)로 나가 무신난을 토평한 공으로 1748년(영조24) 분무 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승통(僧統) 교단과 승려를 통솔하는 승려의 관직을 말한다. 운한각(雲漢閣) 송시열(宋時烈)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을 민정중에게 받아 1674년(현종15)에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기고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그곳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능운대(凌雲臺) 화양구곡 중 제6곡이다.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망성대(望星臺) 제5곡 첨성대로,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인데, 그 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니 이름하여 첨성대라 했다.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첨성대라 한다. 와룡암(臥龍巖) 제7곡인 와룡암은 긴 바위의 모습이 꼭 용이 드러누워 있는 듯한 모양새를 가졌다 하여 와룡암이라 부른다. 와룡암은 능운대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학소대(鶴巢臺) 저본의 '학상대(鶴裳臺)'는 화양 제8곡 '학소대(鶴巢臺)'의 오기로 보고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학소대는 청학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하여 학소대라 명명하였는데, 와룡암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파곶(巴串) 화양계곡의 마지막 절경인 제9곡으로, 계곡 전체에 희고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으며, 그 위로 흐르는 물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여 파천이라고도 부른다. 낙양산 충북 괴산군 화양리에 있는 산이다. 화양동은 속리산 서쪽 기슭 낙양산(洛陽山) 아래에 있다. 수암 원문의 '수옹(遂翁)'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로, 본관은 안동,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인이다.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묘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향하였다. 저서에 《한수재집(寒水齋集)》, 《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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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차동(車洞)의 민 판서(閔判書) 집에 가서 주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후근의 집으로 돌아와 묵었다. 往車洞 閔判書宅, 與主人暫敍, 還來厚根家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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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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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鏡臺【自地藏東數里】 雖不如須彌塔之奇而方正矗立照耀溪壑亦不負玉鏡之名一日明鏡一曰業鏡高可千尺廣可十丈其下有黃流潭南邊有極樂門一名金剛門築石礫爲小城呀然闢一小門或云新羅王子巽國來居今有遺址僧徒妄稱爲地獄門者抑何意趣【臺後水邊石刻題名】有形無影半空懸浮世流名正媚姸可笑觀音安用鏡虛無衲子謾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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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藏庵次楣上韻【自鳴淵五里長安寺屬庵】 着在山腰可以容膝有翠頂樓新構精灑【豊恩國舅趙公萬永捐財建此樓云】揭石厓題咏【石厓卽豊恩號】庵後有地藏峯東北望釋迦峰鳧巖南數里有長安寺六塵歸曠漠澄念坐寒雲石氣樓頭見鍾聲月下聞靑袍脫何在白衲與爲羣百塔明朝路知應又望君【揭板】〇初六日癸丑晴〇朝發地藏庵二十里水簾洞二十里靈源庵中火二十里海恩庵宿所【終日准陽支應〇本邑宗人履益又與同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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鳧巖【在地藏庵東北路傍數里許】 千仞岡頂有一拳石彷佛如鳧古之錫名者亦云巧矣問爾何心性不浮玉鏡潭欲爲仙鶴否兀兀在空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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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流潭【在玉鏡臺下】 一曰玉鏡潭水色差黃謂之黃流猶或可也而僧徒相傳爲黃泉江者是何怪說不其近於汚穢名山耶玉鏡臺前水澄淸可濯纓阿誰饒舌子誤錫黃泉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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歇營下 營下諸吏來相探候輒有問金剛景者錄問答語戱得兩絶督郵相別久候吏款情多忽問金剛色當秋果若何萬二千峰景難言片刻間知應九秋客夢踏玉京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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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橋路中【橫城原州交境自橫城邑十里】 吾曾說原州無十里之郊豈意此地有如許平原廣野乎驕驤白馬蹴纖塵後擁前呵去去人極目長郊如髮路山明水麗更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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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原州【自曲橋三十里】 却望幷州是故鄕雉嶽山西路迷茫見鶴城秋聲黃葉老石氣白雲淸日煖郊猶稻村饒峽又甍丹邱何處是嗟我督郵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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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丹邱【自營下五里餘】 諸史雁鶩行坐我藍田廳壁夜靜仙樓定若僧團圓月色掛孤燈海山笻屐抛何去依舊藍田一老丞〇自安昌發行統計往還日子爲三十五日程途爲二千二百二十餘里詩什凡二百七十篇【附】椒泉翁禾積淵詩曰【禾積淵在永平】三面臨淵太截危形如禾積又如龜果然名下無虛士怪底人間有此奇落葉秋聲多瑟瑟掛林夕照下遲遲金亭蒼玉知相近準擬令行幷所之〇金水亭詩曰【金水亭亦在永平】金水亭何在翼然翠壁頭溪山眞絶勝風景又深秋幽邃村容靜平廻野色浮歸思何太遽斜日下芳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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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一論 澗外疑無地山中別有天荒蹊纔一線欹屋或三椽老犬嘷叢薄羸牛理石田小輿搖不定半作武陵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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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一論 木柄長鑱理綠蕪烟霞嶽色頓然無如今始信移山術枉杷愚公號曰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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指羅村 木石窮山裏居如遯世民斷崖何所業活計正悲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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鴒[原+鳥]庵 故訪琳宮短屐來寒雲迎客上崔嵬洞穿危石三千疊路入層溪十二回煮茗空床叅白衲看花曲砌掃蒼苔知應一夜諸天雨爽豁今朝爲我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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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宿二水頭【自月溪十里】 江樹蒼凉晩色浮行人欲斷店烟稠靑眸點檢千峰面白酒留連二水頭萬瀑波濤來兩岸五臺消息在中流炎塵四月淸冷坐客夢迢迢海上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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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永恩府院君金台【汶根】書 頃者進候歲已闌矣伏不審此際氣體候萬安伏禱區區靡任下忱侍生雪路衝寒纔得無撓返郵而當此窮臘殘郵收刷逐日擾惱伏悶何達外遷事曾所冒昧仰瀆矣想在下念中而累於此時如蒙一言之惠則受賜大矣秪俟裁量之如何耳餘壑蛇漸近伏祝迓新萬休不備伏惟下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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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浪浦【自二水頭五里】 淡烟濃柳眼珠靑五月寒江泛泛舲峯出中洲如小島店懸西岸似高亭東湖流水緣何厚上國觀風路又經三日奔忙鞍馬客片時塵念頓然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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