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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오촌(鰲村)에 들어가 절구 한 수를 지었다.십여 일 온갖 고초 겪은 끝에(萬苦千辛十日餘)이제야 간신히 인후한 고을에 이르렀다네(間關始到里仁廬)마을 앞 흐르는 냇물 드넓고 뒷산은 높은데(前川水闊山高後)그 사이 초가 있어 장자13)가 살고 있네(中有茅宮長者居)윤익(允益)이 차운하였다.고향을 뒤로하고 북쪽 향해 온 지 십여 일(背南首北十日餘)험한 여정 끝에 이곳에 이르렀어라(間關行色到此廬)물 따라 밀려온 자라가 이른 듯한 마을인데(水流鰲退格當村)그 위에 하늘이 내린 장자가 살고 있구나(其上天然長者居)이찬(而贊)이 용담(龍潭) 정재팔(丁載八)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객지에서 같은 도의 친구를 만나니(客裡相逢同道友)예전에 본적 없어도 더욱 오랜 친구 같아라(曾雖無面倍知舊)함께 모여 놀지도 못하고 도로 이별하는데(團遊未極還爲別)어느 때나 다시 손을 맞잡을른지 모르겠네(不識何時更握手)나도 그에게 주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오촌 문하 높은 제자 중 이런 사람 있다니(鰲門高弟有斯人)그 용모 단아하고 몸가짐 신중하여라(端雅其容謹飭身)오손도손 맘껏 즐기지 못하고 이별하는데(未極團欒旋贈別)푸르고 푸른 강가 나무 새봄을 둘렀구나(蒼蒼江樹帶新春)윤익이 주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객지에서 만난 사람과 친구를 맺었나니(客地逢人結親友)교분의 깊고 친밀함이 옛 친구 같아라(交契深密如故舊)가련타 한 자리에 모여 얼마간 얘기 나누는데(可憐一席多少話)머지않은 훗날 다시 손을 맞잡을 수 있으려나(早晩他時更握手)내가 차운하였다.고상한 친구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逢初敍話是高友)오랜 친구인 듯 한참을 앉아 회포를 풀었네(坐久論懷若故舊)몇날 며칠 밤 베개를 나란히 하여도 부족하니(聯枕數宵猶不足)회화나무 꽃 노래지면14) 다시 만나 손을 맞잡으세나(槐秋爲約又摻手)또 절구 한 수를 읊었다.선조의 일 경영하려 현자의 집에 이르렀는데(經營先事到賢門)다행히 저버리지 않고 정성스런 은택 베푸시네(幸被不遐眷眷恩)그믐 이래로 실컷 취하고 배불리 먹으니(承晦以來精醉飽)한 무더기 화한 기운15)에 사시가 훈훈하네(一團和氣四時薰) 入鰲村, 吟一絶曰: "萬苦千辛十日餘, 間關始到里仁廬。 前川水闊山高後, 中有茅宮長者居。" 允益次曰: "背南首北十日餘, 間關行色到此廬。 水流鰲退格當村, 其上天然長者居。" 而贊贈龍潭 丁載八韻曰: "客裡相逢同道友, 曾雖無面倍知舊。 團遊未極還爲別, 不識何時更握手。" 余贈之曰: "鰲門高弟有斯人, 端雅其容謹飭身。 未極團欒旋贈別, 蒼蒼江樹帶新春。" 允益贈之曰: "客地逢人結親友, 交契深密如故舊。 可憐一席多少話, 早晩他時更握手。" 余次曰: "逢初敍話是高友, 坐久論懷若故舊。 聯枕數宵猶不足, 槐秋爲約又摻手。" 又吟一絶曰: "經營先事到賢門, 幸被不遐眷眷恩。 承晦以來精醉飽, 一團和氣四時薰。" 장자 '장자(長者)'는 덕망이 있는 사람을 뜻으로, 여기서는 오촌 송치규를 가리킨다. 회화나무 꽃 노래지면 원문의 '괴추(槐秋)'는 홰나무 꽃이 누렇게 변할 무렵의 가을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 때 과거에 실패한 응시생들이 6월 이후 계속 장안(長安)에 머물러 공부하면서 서로 간에 시험 문제를 출제하여 실력을 점검한 뒤 홰나무 꽃이 노랗게 될 즈음에 해당 관원에게 새로 지은 글을 작성하여 천거되기를 원했으므로 '홰나무 꽃이 노래지면 수험생들이 바빠진다.[槐花黃, 擧子忙.]'라는 말이 유행했다. 《南部新書 卷乙》 한 무더기 화한 기운 사양좌(謝良佐)가 정호(程顥)의 인품을 평하기를 "명도 선생은 온종일 단정히 앉아 있을 때에는 흙으로 만든 소상과 같았으나, 사람을 대하면 완전히 한 덩어리의 화기셨다.[明道先生, 終日端坐, 如泥塑人, 及至接人, 則渾是一團和氣.]"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4 觀聖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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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아침을 먹기 전에 남평(南平) 댁에 가서 문병하고 왔다. 이는 병이 든 뒤에 처음으로 나갔다 들어온 것이다. 오후에 비가 온종일 내렸다. 朝前往南平宅, 問病而來, 此是病後, 初出入也。 午後雨作終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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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여러 날을 머물러 있으면서 청한 문자를 받아가려는 생각에 동행 윤익(允益)을 오후에 행장을 꾸려 내려 보냈다. 객지에서 서로 헤어지니 서글픈 마음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欲爲多日留連, 奉請文字受去之意, 同行允益, 午後治發下送。 客裡相分, 悵懷不可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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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四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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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伯應【在鍾】 潦暑正爾勞人。華翰飛到。便覺淸風襲人。煩襟爽然。示諭縷縷。足見憂時憫俗之苦心慤衷。出尋常萬萬也。天地蔑貞。冠屨倒置。擧世滔滔。而不惟念到此者。未之見。話到此者亦未之聞。今賢者於此。慨然有下泉之思。異日世道。或將有賴耶。如僕者衰朽已甚。冉冉下山之暉也。設欲以瑣力矯捄。而孰聽而孰信之耶。自愧其捧土以塞孟津也。歎何如之。卽審省餘經候珍重。仰慰十分。賢胤相守月餘。喜其天資端雅。文藝夙就。慰此山裏孤寂之懷。可喜可喜。顧此空疎。無以開發。奈何。方與孫兒課日做論體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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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李氏行錄 李氏系出陽城。上世有諱伯良官判尹。辭歸咸陽。以判書屢徵不起。其後有守義官刑曹正郞。弘俊兩世俱中司馬。考愚栻有操行。妣光山鄭氏。婦德甚備。孺人生於羅州興龍洞第。幼而姿稟敏慧。甚得父母心。及母氏見背。事繼母無所違忤。助幹家務。纖悉無遺。父奇愛之曰。使其男也。吾門其有望乎。年二十一爲羅州吳大洙妻。實襄平公自治之後。大明處士孝錫之八代孫。學生日善之子也。孺人旣歸。遭姑氏喪。哀戚動人。附身之具。下室之饋。克盡誠孝。事舅一以婉嫕而竭忠。滫瀡無所匱乏。家事壺務。綜理幷井。至於治圃組織。克勤不懈。家素貧。生理索然。而處之裕如。大洙從祖埉篤行士也。亟稱之曰賢哉吾宗婦。每於族戚。輒稱其善。孺人亦事之以誠。或遇異味。必先送之。歿後又致祭需。到老不廢。大洙少多奇疾。屢阽危㞃。孺人合藥行禱。無所不至。有夢感之異。竟得差復。孺人聰辨。有軒然男子風。其高識懿行。隨事而發者多。嘗値凶歲。無以資生。分口於姻戚。獨與一幼在家。或至數日不擧火。而無厭薄之意。見者嗟嘆。甲午匪擾。官軍出討。有散卒侵入閭里。孺人據理而責曰。不意官軍有此擧措。主將聞而嚴治。一里賴安。私弟喪耦。來託二子。孺人敎育成娶。無異已子。隣婦之觀感善良者數人。尤謹於奉先。每當忌辰。齋沐供奠。務爲蠲潔。戒諸子曰追遠之誠。豈敢不自盡乎。至於蔬果穀物。必先封祭品。嘗曰吾家爲四世宗。而尙關祭土。其安於心乎。遂積年拮据。至於累百金。而家人皆不知。一日聚夫黨曰。吾別有所蓄已有年。望須議置祭田。諸族驚嘆曰。是吾輩未遑而婦人能之。寧不愧忸云。孺人生於哲廟乙卯。卒於丁卯五月二十一日。葬在羅州本良面風峙後嶝乙坐原。有二男長龍根次鳳根。龍根有三女。長適羅州鄭海勉次長澤高益柱次未字。鳳根有二男三女。長準烈出後龍根。次恪烈。女幼。龍根幼少時。孺人以居隣孤陋。慨歎曰子幼而不導。父母之過也。使之就學難窩門下。時亦從余而無敢怠焉。孺人每見其所與遊者皆端士也。則喜形于色。極力供待。其終有所進就者。皆孺人之力也。鳴呼女而有士君子之行。古人謂之女士。今孺人自在家時。承順父母。句幹閨政。以至酒漿鍼縷。皆不習而能。旣行而孝於舅篤於夫。歲儉而能守其廉。世亂而能知其義。奉先以誠。敎子有法。其立心制行。能不囿於閨房如此。豈非古人所謂女士者耶。昔劉向悉收壺彝之美。以傳於後。惜乎今無劉向也。且世蓋貴耳而賤目。皆曰今人不如古人。噫。豈其然乎。茲掇平日所見聞以爲狀。以備知言者裁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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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敎官趙公行狀 公諱有昌字昌之號晚悟。趙氏籍漢陽者。爲東方著姓。高麗中書官諱之壽爲始祖。入我朝有諱仁沃開國定社功臣。漢山府院君諡忠靖。生諱賡司評。生諱瑞縣監。生諱元基進士。生諱孟生參判。生諱瑚判尹。生諱淡孫參軍。生諱世璜參奉。生諱忠恕主簿。寔公七世祖也。曾祖諱九命壽階通政。祖諱日新有文行贈掌令。考諱泰恒贈參判。妣慶州李氏有婦德。以英廟乙丑生公于咸平板橋里第。自幼天性孝友。善事父母。家甚貧。躬耕養親。甘旨無闕。承順無違。親癠嘗藥嘗糞。夜必禱天願代。迨其危㞃。兄基昌斫指灌血。僅得回甦。翌日疾復作。公又裂指出血。和米飮以進。能延三日之命。其遭大故。攀擗號痛。幾至滅性。鄕里感歎。及葬告于兄曰。老母宿患彌留。不可俱曠。兄則在家侍疾。弟則守墓終制。遂居廬次。未幾母病轉㞃。思生蕨菜。公泣往山陽雪坂。則數莖蕨芽忽然新抽。歸供滋味。人皆嗟異以爲孝感所致也。不幸遭憂。哀戚之節。一如前喪。葬而廬墓終喪。每値喪餘。祭需必親自供潔。以致如在之誠。若公可謂終身慕者歟。以正廟甲辰五月十日考終于寢。享年四十。葬在咸平海堡面角弓山艮首坤趾之原。配光山盧氏。墓同塋雙墳。擧二男震豹東豹。孫男五人。章柱湧柱承柱長房出。萬柱銀柱次房出。公其惟孝友于兄弟。盡事親之道。而山菜效異。求之古人。雪筍庶幾似之。公眞賢孝哉。惜乎湮沒草野。年又不求。天乎不能無憾。雖然民之秉彝。不遂終泯。鄕道公評。久而益明。至蒙天褒。贈旌有加。烏頭赤腳。炳烺一世。於是公之孝。國人皆知之。斯可以見天道矣。公之子若孫兟兟。多以孝行著。此豈非錫類之美耶。公曾孫相允持難窩公所撰墓文。謁余爲狀。難窩余同族而敬信者。其言可徵。遂掇其家狀而略加刪潤。以俊知德者考質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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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宋原孝【曾憲】 多病故人疎。況衰老兼病癈者乎。匪意猥蒙先施惠幅。其爲感謝。不下兼金百朋。仰審味道體候。一直淸穆。仰慰仰慰。駿善寒棲絶壑。木食澗飮。而年病俱深。以此未得晉參於宋子大全重刊所。他尙何論。所示云云。湖南儒林。已爲各自輸誠。不必更會。諒之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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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신미) 1811年(辛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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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춘 仲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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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춘 仲春 아! 이는 선고(先考) 절와부군(節窩府君)1)께서 우리 집안의 보첩(譜牒)과 선조 충강공(忠剛公)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일로 서행(西行)한 것을 기록한 일기(日記)이다.아! 선조가 아름다운 행적을 남겼는데도 자손이 그것을 기술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 선조를 잊어버린 것이요, 선조가 아름다운 행적이 없는데도 자손이 거짓말을 꾸며서 치켜세운다면 이는 자기 선조를 기만한 것이다. 잊어버린 것과 기만한 것이 비록 성격은 다르다 할지라도 불의(不義)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러므로 문인(文人)이나 학사(學士)들이 그 선조의 덕을 스스로 기술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스스로 그 세가(世家)의 실보(實譜)를 기술하여 선열(先烈)을 잊지 않았으며, 주자(朱子) 또한 위옹(韋翁)2)의 행록(行錄)을 기술하되 선조의 뜻을 기만하지 않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불초가 비록 옛사람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어찌 감히 거짓말로 꾸며 선조의 덕을 기만하겠는가.아! 우리 선고(先考)께서는 충효 집안의 명성을 잘 따라 선업을 빛내고 후손을 위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아 10여 년 동안 서울을 오르내리는 것이 거의 수십 차례였는데,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이 특별히 내려 백대(百代)의 보첩(譜牒)이 능히 완성되었다.아! 진실로 우리 선조의 순수한 충성과 아름다운 절의가 대범하고 특출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조정의 은전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우리 선고(先考)의 선조를 위한 성의(誠毅)가 지극한 것이 아니었다면 또한 어찌 그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선인(先人)이 뜻을 두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 이는 근대(近代) 양세(兩世)에 시호(諡號)를 청하는 일로 여러 차례 상언(上言)을 올렸는데 끝내 은전을 받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통탄스럽기 그지없지만, 깊이 생각해보건대 한 집안의 대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일의 형편상 끝내 쉽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혹 시운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아! 일의 전말이 여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불초(不肖)가 감히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위의 기록은 햇수에 따라 기록되어 있어 혹은 물에 잠겨 자획(字畵)을 판별하기도 어렵고 혹은 먼지 속에 파묻혀 문리(文理)를 이해하기도 어려워 세월이 오래되면 장차 유실(遺失)되고 훼손되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러므로 감히 이를 수집하고 베껴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우리 집안의 유물3)로 만들고, 장차 우리 선고(先考)의 자손 된 자들로 하여금 그 일을 생각하여 척연(惕然)히 계술(繼述,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게 하고 이 책을 열람하여 출연(怵然)히 느끼고 사모하여 백세(百世)토록 실추되지 않게 한다면 또한 어찌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게 복록을 물려주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외람됨을 잊고 대강의 전말을 서술하였다.숭정기원 후 네 번째 신미년(1811, 순조11) 중춘에 불초고(不肖孤) 석년(錫年)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서행록(西行錄) ③ - 송석년(宋錫年) 嗚呼! 此先考節窩府君, 爲吾家譜牒與先祖忠剛公請諡事, 西行錄日記也。 噫!, 先祖有美實, 而子孫不述焉, 則是忘其先也; 先祖無美實, 而子孫飾虛辭稱道之, 則是誣其先也。 忘與誣雖殊, 其陷於不義則一也。 是故文人學士, 自述其先德者, 不可殫記。 太史遷自述其世家實譜, 而不忘其先烈, 朱夫子亦述其韋翁行錄, 而不誣其先志, 後世韙之。 不肖雖不敢望古人之萬一, 而安敢飾虛辭誣先德也? 嗚呼! 吾先考克遵忠孝家聲, 以光先裕後爲己責, 十餘年間, 上下京洛將至數十度, 而贈諡之恩典特蒙, 百代之譜牒克成。 噫! 苟非吾先祖精忠姱節磊落偉卓, 安能蒙朝家之全? 亦非吾先考爲先誠毅之極, 亦安能就其事乎? 但先人之有志, 未就者存焉。 近代兩世請諡事, 累呈上言, 終未蒙恩典。 庸是爲痛遺恨, 盖深竊想一家之大事, 同時幷成, 事勢之終未易而然歟? 抑或運會之不迴而然歟? 嗚呼! 事之顚末, 詳記於是錄, 則非不肖所敢贅者, 而竊恐右錄隨年隨記, 或水沈而字畵難辨, 或塵埋而文理難曉, 歲久年深, 將未免遺失而毁傷, 故敢此收集謄, 合爲一卷, 以爲吾家之靑氊, 將使爲吾先考之子孫者, 想其事而惕然繼述, 覽是編而怵然感慕, 以至百世而不墜, 則亦豈非承先貽後之道也耶? 玆敢忘猥, 略敍顚末。崇禎紀元後, 四辛未之仲春, 不肖孤 錫年, 泣血謹書。 절와부군(節窩府君) 송지행(宋志行)을 가리킨다. 부군(府君)은 죽은 아버지나 남자 조상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위옹(韋翁) 주자의 부친인 위재(韋齋) 주송(朱松, 1097~1143)으로, 남송 고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위재는 호이고 자는 교년(喬年), 시호는 헌정(獻靖)이다. 남송 고종 때 이부랑(吏部郞)의 벼슬을 지냈으나 간신 진회(秦檜)가 주도하는 금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하다가 폄적되었다. 저서로 《위재집(韋齋集)》 등이 있다. 청전(靑氈) 대대로 전승된 가업(家業)이나 한 유물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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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아침 전에 정동으로 가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밥을 먹은 뒤 용동으로 가서 종일 수정 문적을 보고 왔다. ○朝前, 往貞洞, 暫話而來。 食後, 往龍洞, 終日見修整文蹟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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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밥을 먹은 뒤 용동으로 가서 종일 놀며 쉬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구안(돈화문(敦化門) 앞길) 약방으로 가서 내일 거동(擧動, 임금의 행차)할 때 여기 와서 구경하겠다는 뜻을 언급하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食後, 往龍洞終日遊憩, 而來路, 往洞口內藥房, 以明日擧動時, 來此觀光之意言及, 而還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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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아침 전에 백운동(白雲洞)30)에 갔는데, 사서(司書) 이인필(李寅弼)은 광주(廣州)로 출타하여 그 조카 이정하(李正夏)하고만 작별하였다. 호정동(瓠井洞)으로 내려와 김병기(金秉耆)를 조문하고, 오면서 창정동(昌井洞)의 권중건(權中建) 집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삼청동(三淸洞)31)에 들러 이병하(李秉夏) 숙질(叔姪)을 조문하였다. 오면서 장생전교(長生殿橋)32)의 생원 이장구(李章九) 집에 들러 《장릉사보(莊陵史補)》33)를 보고, 충강공(忠剛公)34) 사적(事蹟)을 베껴서 왔다. 밥을 먹은 뒤 용동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다. ○朝前, 往白雲洞, 則李司書寅弼出去廣州, 只與其姪正夏作別。 下來瓠井洞吊金秉耆, 來入昌井洞權中建家暫話。 來路入三淸洞, 吊李秉夏叔侄。 來入長生殿橋李生員章九家, 見《莊陵史譜1)》, 謄忠剛公事蹟而來。 食後, 往龍洞, 午後還來。 백운동(白雲洞)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던 마을로서, 항상 흰 구름이 떠 있는 명승지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삼청동(三淸洞) 서울시 종로구의 중앙부에 있는 동이다. 지명은 도교의 태청(太淸)ㆍ상청(上淸)ㆍ옥청(玉淸)의 3위(位)를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장생전교(長生殿橋)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과 이화동 사이에 있던 다리이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필요한 관곽(棺槨)의 제작과 수선을 담당하던 관청인 장생전(長生殿) 앞에 이 다리가 놓여 있었으므로 '장생전 다리'라고 불렀다. 장경교(長慶橋), 장교(長橋) 등으로도 불렀다. 장릉사보(莊陵史補) 1796년(정조 20) 왕명으로 단종에 관한 사적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앞서 1791년 5월 왕명으로 이의봉(李義鳳)과 윤광보(尹光普) 등이 편집한 것을, 1796년 5월 왕명에 따라 이서구(李書九)ㆍ이의준(李義駿)ㆍ윤광보 등이 다시 교정하고,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의 실록을 참고하여 보고된 별단(別單)을 참조하여 이서구가 최종적으로 《장릉지(莊陵誌)》 9권 3책을 완성하여 바쳤다. 찬진 당시에는 서명을 '장릉지'라 했으나 '장릉사보'로 바뀐 것은 기존 《장릉지》와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강공(忠剛公) 송간(宋侃, 1405~1480)이다. 호는 서재(西齋)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세종ㆍ문종ㆍ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상을 마치고,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은거하였다. 補 저본의 '譜'는 사료에 근거하여 '補'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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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아침을 먹은 뒤 관정동에 가서 우 참봉(禹參奉)과 박상현을 만났다. 그 자리에 모르는 손님 서너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는 곳을 물으니 고부(古阜)에 산다고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두 사람은 김씨 성이고, 한 사람은 배씨 성이였다. 내가 정축년(1637, 인조 15) 호란(胡亂) 당시, 덕원 부사(德原府使)로 안변(安邊)에서 전사한 배공(裵公)113)이 누구인지 물이니, 그의 8대 조부라고 답하였다. 그 또한 우리 선조 승지공(承旨公)114)이 누구냐고 묻기에, 나는 나로서 5대조 되신다고 하였다. 모두 같은 날 전사한 분의 후손으로, 뜻하지 않게 만나 대대로 이어온 정의를 푸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서로 찾아볼 생각으로 그가 머무는 데를 물으니 창동 객점이라고 하였다.그길로 정동의 석사 이혜길(李惠吉) 집으로 갔다. 안부 인사를 나눈 후 그 조카 선(善)의 천연두가 어떤지 물으니, 낭패를 당해 참담하다고 하였다. 그길로 그 아우 집으로 가서 상을 당한 곡절을 위로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채에서 몇 가지 음식을 내와서 몹시 고마웠다. 그길로 묘동(廟洞)으로 가서 공서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에 용동의 참봉 이경화(李景燁)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이 곧 《성원현록(姓苑賢錄)》의 개간소였다. 돌아오는 길에 관정동(冠井洞)에 들러 공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유숙하였다. ○朝食後, 往冠井洞, 見禹參奉及朴祥顯。 座上有不知客數三人。 故問其所居, 則居在古阜云。 故問其姓名, 則兩人以金爲姓, 一人以裵爲姓。 余問丁丑胡亂時, 德原府使戰亡於安邊裵公爲誰, 則答以渠八世祖。 而渠亦問吾祖承旨公爲誰, 故余以吾爲五世祖。 俱是同日戰亡人後裔, 意外相逢, 敍其世誼, 其喜可掬。 日後尋訪之意, 問其所住處, 則蒼洞旅店云矣。 仍向貞洞李碩士惠吉家。 敍暄後, 問其姪兒善痘與否, 則見敗云慘矣。 仍往其弟氏家, 慰其見慽之由暫話。 自內間出送數器饌以饋, 可感可感。 仍向廟洞, 與公瑞暫話後, 來龍洞李參奉景燁家談話。 此卽《姓苑賢錄》開刊所也。 來路入冠井洞, 與公瑞談話, 同留宿。 배공(裵公) 배명순(裵命純, 1597~1637)이다. 자는 수초(遂初)이고,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병자호란 때 퇴각하는 후금(後金) 군사의 뒤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南山驛)까지 이르러 강행군을 하던 중, 복병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무덤은 성주군 조곡에 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승지공(承旨公) 송심(宋諶, 1590~1637)이다. 자는 사윤(士允)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614년(광해군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에는 노모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전라도 병마우후(兵馬虞侯),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함북 병마절도사 이항(李沆) 휘하에서 척후장(斥候將)으로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횡포를 부리며 철수하는 후금군사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安邊南山驛)에서 전 ㆍ후 영장(前後營將)과 함께 분전 끝에 전사했다.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고, 고흥 서동사(西洞祠)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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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白浩卿【南發】 前書悤悤未修答。方深愧恨。忽又承問。仰認不較之盛。仍審花煦。省體百福。實叶遡禱。駿屛伏空山。不與病期而病至。悶苦奈何。受之之託。世無東萊。誰敢承當。愧恧。惟其天姿甚醞藉。於文義已見大旨。可謂二難。深爲古家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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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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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高光純 所示足見誨人不倦。而爲已甚切也。如吾老病昏惰者。亦增警發之氣。受賜多矣。定志保心之云。不惟勉於此者。未之見。話到此者。亦未之聞。今左右。乃能勇意銳進。於斯得力。何難於明誠地位耶。甚仰甚仰。求助云云。可謂求視聽於瞽聾也。但左右旣讀心近兩書。從古賢聖授受旨訣。盡在於此。捨此更無別樣法門。幸以此爲畢生眞詮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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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春哉【鶴宰】 書來宛對舊日顔面。因知進修之業。不廢佔畢可賀。駿病蟄山間。長時負堗。生涯敗闕。從可知矣。申冠金童。甚穎悟可愛。足見左右敎育之功。而終未免實來虛往。愧愧負負。前月往赴松沙葬所。經旬還山。則申金二生。不少待而旋發。不能無缺望。但未知渠輩利涉重津。能免疾恙否。懸懸。道途修敻。奉際似未易。須勿負可惜光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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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任良才【公淳】 樵山耕野。古人亦已行之。此是吾儒本分。於此得力。以其暇日。修其孝弟忠信。豈非學問事耶。吾則少不力於耕樵。而浪度一生。空然輥到不聞不知之科。悔恨曷追。胤友從遊三朔。認其所存。而顧此無狀。自誤而誤人。使質美年少。遠涉津海。浪費光陰可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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