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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일찍 출발하여 현치(玄峙)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용산(龍山登)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진촌(陳村)을 채 못 가서 김 대비(金大妃)35)의 부음(訃音)을 들었다. 진촌(陳村)에 도착하여 묵었다. 100리를 갔다. 죽산(竹山, 경기도 안성지역 옛 지명) 땅이다. 早發至玄峙朝飯, 抵龍山登酒幕中火, 未及陳村, 聞金大妃喪訃音, 抵陳村留宿。 行百里, 竹山地也。 김 대비(金大妃) 정조의 비(妃)인 효의왕후(孝懿王后, 1753~1821)를 말한다. 1762년(영조38) 10세 때 세손빈(世孫嬪)에 책봉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온후하고 청렴하여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21년 3 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예경자수효의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이고, 능호는 건릉(健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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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새벽에 출발하여 좌전(坐箭)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양지(陽地)36) 신주막(新酒幕)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용인(龍仁)37) 어후내에 이르러 묵었다. 100리를 갔다. 曉發至坐箭朝飯, 抵陽地新酒幕中火。 抵龍仁 어후내留宿。 行百里。 양지(陽地)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용인(龍仁) 지금의 용인시로, 한반도 및 경기도의 중심에 있으며, 동쪽은 이천시, 서쪽은 수원시와 화성시, 남쪽은 안성시·평택시, 북쪽은 성남시·광주시와 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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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아침을 먹고 새벽에 출발하였다. 은진(恩津) 삼거리(三巨里) 주막에 이르러 시내를 건널 때에 대석(臺石)이 얼어 있어 있는 바람에 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졌는데, 물이 무릎 위까지 차올라 옷이 모두 젖어버렸다. 겨우 냇가로 나왔으나 땅도 얼어 있었다. 이런 혹한에 해도 뜨기 전에 이런 변고를 만났으니, 어찌하여 이번 길에 나와 노복으로 하여금 왕래함에 이처럼 낭패의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간신히 1리를 갔는데, 젖은 옷이 굳어가고 발이 너무 시려서 걸을 수 없기에 버선을 벗으려고 하니 손가락이 굳어 벗을 수가 없었다. 노복을 시켜 간신히 벗고 얼어버린 버선을 새 버선으로 바꾸어 신었으니, 행로의 어려운 실상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시암(杮岩) 주점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요기를 하고 전주 삼례(參禮)에 이르러 묵었다. 90리를 갔다. 仍朝飯曉發, 抵恩津三巨里酒幕後。 越川之際, 臺石凍滑, 失足立水, 水過膝上, 衣下盡濕。 才出川邊, 卽地旋凍, 當此極寒, 朝前逢此變, 如何此行使我奴主往來, 致敗至於此境耶?艱行一里, 濕衣堅動, 脚足甚寒, 不能行步, 故欲脫襪子, 則指直不得脫。 使奴者艱脫, 凍襪換着新襪, 則行路之艱狀, 不可言。 抵杮岩酒店, 暫憩療飢, 抵全州 參禮留宿。 行九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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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十二日 날이 밝기 전에 길을 나서 삼례(參禮)에 이르렀다. 찰방(察訪, 김척)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병사(兵使) 부임하는 행차가 도착하여서 만날 수가 없었다. 병천(幷川)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전주에 이르니 비가 내렸다. 빗속을 뚫고 신원(新院)에 이르러 묵었다. 未明登程, 至參禮。 欲見察訪, 而兵使赴任之行來到, 故不得相面。 至幷川秣馬, 至全州雨作。 冒雨行至新院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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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밤에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아서 늦게야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났다. 우연히 세마(貰馬)를 얻어 노구암(老狗巖)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아침을 먹었다. 굴암(窟巖)에 이르러 화옥(華玉)을 막중(幕中)에 기다리게 하고 읍내로 들어갔다. 곧바로 주관(主官)을 만나고 나서 화옥을 오게 하여 함께 머물렀다. 夜雨不止, 晩後冒雨登程。 偶得貰馬, 至老狗巖, 秣馬朝飯。 至窟巖, 留華玉於幕中, 往邑內, 卽見主官, 因要華玉同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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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서둘러 밥을 먹고 길에 올랐다. 야당(野塘)에 이르러 우연히 김득성(金得成)의 아우를 만나 비로소 흥양(興陽)의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타고 오수(獒樹)에 이르러 곧장 증산(甑山)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요기하였다. 비가 계속 쏟아지니 한참을 머물며 쉰 뒤에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났다. 원산(圓山) 방 서방(房書房) 집에 이르러 묵었다. 의복이 비에 다 젖었다. 促飯登程。 至野塘, 偶逢金得成之弟, 始聞興陽消息。 大槩騎其馬, 至獒樹, 直來甑山, 秣馬療飢。 雨作連注, 移時留歇後, 冒雨作行, 至圓山 房書房家留宿。 衣服眞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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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吉 일찍 출발하여 신탄(新灘) 시장 근처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오촌(鰲村)8)에 도착하였다. 40리를 갔다.행랑에서 잠시 쉬면서 통자(通刺, 면회를 청하던 일)한 다음, 곧바로 들어가 장석(丈席)을 뵙고 올라온 연유를 말씀드렸다. 행랑으로 물러나와 용담(龍潭) 정재팔(丁載八)·황간(黃澗) 신협진(愼協眞)과 함께 묵었다. 早發至新灘市邊中火, 得達鰲村。 行四十里。小憩廊底通刺, 卽爲入謁丈席, 仍敍上來之由。 退來廊底, 與龍潭 丁載八、黃澗 愼協眞同留宿。 오촌(鰲村)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자라 모양이라 하여 자라울이라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에 오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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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장석(丈席)께서 비록 허락하지 않았지만 친히 행록(行錄)을 상고하여 자세하게 논평하였는데, 편차(篇次)가 뒤죽박죽이고 지운 글자가 꽤 있어서 긴요하지 않은 뜻이 있는 듯하였다. 이에 교정(校正)을 청했더니 《돈학집(遯壑集)》9)을 내보이시며, "이것은 바로 충강공(忠剛公, 송간(宋侃))의 왕복 서간인데, 비록 몇 편에 불과하나 오히려 행록 한 권보다 낫네."라고 말씀하셨다. 대략 산정(刪正)10)은 하였으나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니 걱정스럽다. 丈席雖爲不許, 親考行錄, 仔細評論, 以篇次之渾雜, 文字之頗鎖, 似有不緊之意。 故請以校正, 則出示《遯壑集》曰: "此是忠剛公往復書, 則雖數篇猶勝於行錄一卷云云。" 而略爲正刪, 然尙未蒙許, 悶悶。 둔학집(遯壑集) 조선 전기의 문신 송경원(宋慶元, 1419~1510)의 시문집으로 상·하 2권 1책이다. 1826년(순조26)에 초간본이 나왔고, 1921년에 중간본이 나왔다. 중간본의 책머리에 1920년에 쓴 김영한의 중간서문과 1826년에 쓴 송치규의 〈돈학실적서(遯壑實蹟序)〉가 있고, 책 끝에 윤태일의 발문과 송증헌의 중간발문이 있다. 상편에 시·서·논·기 등과 하편에 전·가장·행장·묘지 등이 실려 있다. 산정(刪正) 글의 쓸데없는 자구를 없애고 다듬어서 글을 잘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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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사환이 끝내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으니 걱정스럽다. 아침을 먹은 뒤에 만복(萬卜)이란 자를 얻어 짐을 지게하고 길을 떠났다. 사촌(社村)에 이르러 오위장(五衛將)을 조문한 뒤에 이 석사(李碩士)와 길을 떠나 벌교(筏橋)에서 점심을 먹었다. 서령(西嶺)을 넘어 기동(基洞)의 좌수(座首) 이형립(李亨立)의 집에 이르러 묵었다. 30리를 갔다. 使喚終未完定, 可悶矣。 食後得萬卜者, 負卜發程。 抵社村吊五衛將後, 與李碩士發程, 抵筏橋中火。 越西嶺, 抵基洞 李座首 亨立家留宿。 行三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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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아침을 먹은 뒤에 이 석사(李碩士)와 남문 밖의 주점(酒店)에 가서 관아의 한 사람을 기다렸다. 끝내 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영문(營門) 밖에 가서 마두 영리(馬頭營吏)를 불러 면회를 요청하도록 분부하였더니,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두서너 번 부탁의 말을 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인집으로 돌아왔다.저녁을 먹은 뒤에 임실(任實)의 하서(夏瑞)가 들어왔다. 올라올 때 서로 약속하였는데, 기일에 맞추어 도착하였으니 다행이었다. 그대로 함께 머물렀다. ○食後與李碩士, 往南門外酒店, 待衙家一人矣。 終不來故, 余則往營門外, 招馬頭 營吏, 以通刺之意分付, 則答曰: "極難"云。 數三言托, 而終無聽從, 故不得已還來主人家。 夕飯後, 任實 夏瑞入來, 上來時相約矣, 及期來到, 可幸。 仍與同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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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하서가 노복과 말을 거느리고 김제(金堤)5)에 갔다. 오후에 비 때문에 막혀서 영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주인집에 머물렀다. ○夏瑞仍率奴馬往金堤。 午後爲雨所阻, 不得入去營門, 仍留主人家。 김제(金堤) 저본의 '食堤'은 문맥상 지명으로, '金堤'의 오기로 보고 고쳐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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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八月 봄에 상경하였을 때 재동(齋洞)의 육충사(六忠祠)를 예조에 재록(載錄)하는 일로 예조에 소장을 올렸으나 육충사(六忠祠)가 아직도 사액(賜額)되지 않은 것이 은전(恩典)의 흠이었다.《사원록(祠院錄)》에 삼가 마땅히 써서 들여야 하니 이전에 받은 제사(題辭)를 재록(載錄)하기위해 장방(長房)59)으로 들어갔는데, 서리 배광옥(裵光玉)이 말하기를, "《사원록》 중 전라도권이 규장각(奎章閣)에 들어있으니 지금 바로 재록하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올 시기를 묻자 "조만간에는 기약할 수 없다"라고 하므로 직접 보지 못하고 돌아왔었다.이번 가을 문중에서 또 나더러 가서 만나라고 했기 때문에 8월 그믐날에 길을 나섰다. 가아(家兒, 아들)를 데리고 천노(千奴)에게 짐을 지게 하여 과역(過驛) 시장 근처에 이르러 요기하였다. 노송정(老松亭)에 이르자, 천노(千奴)가 다리 병이 난 탓에 도로 들여보내고 우연히 사교(四橋)의 상덕(尙德)을 얻어 짐을 지게 했다. 탄포(炭浦)에 이르자 비가 내려 가아(家兒)는 마륜(馬輪)으로 가고, 나는 곧 비를 무릅쓰고 사교(四橋)의 가교(柯橋) 댁에 이르러 묵었다. 春間上京時, 以齋洞 六忠祠 春曹載錄事, 呈于禮曹, 六忠祠之尙未宣額欠典也。 《祠院錄》, 謹當書入, 向事之題, 載錄次入長房, 則書吏 裵光玉曰: "《祠院錄》 全羅道卷, 入奎章閣, 則今方載錄, 無可奈何"云, 故問于出來之, "早晩無期"云, 故不得親見而來矣。 今秋門中, 又以余往見, 故八月晦日發程, 而率家兒, 使千奴負, 至過驛市邊療飢。 抵老松亭, 千奴以脚病之致, 還爲入送, 偶得四橋 尙德負卜, 至炭浦雨作, 家兒往馬輪, 余卽冒雨, 抵四橋 柯橋宅留宿。 장방(長房)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서리가 쓰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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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아침을 먹은 뒤에 대곡(大谷) 형님, 동재(洞哉)와 함께 남계(南溪) 정내성(丁乃成)을 찾아갔으나 내성은 서재(書齋)에 갔기에 잠시 정사문(丁思文) 씨를 만나 보았다. 서재(書齋)에 이르러 신 승지(愼承旨)의 서간(書簡)을 내성에게 전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물녘에 재동(齋洞)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은 뒤에 호치(虎峙)에 가서 대옥(大玉) 부모의 병환을 묻고, 그대로 머물렀다. 食後與大谷兄主及洞哉, 訪南溪 丁乃成, 則乃成去書齋, 故暫見丁思文氏。 抵書齋, 傳愼承旨書簡於乃成, 移時敍話, 乘暮入齋洞。 夕飯後往虎峙, 問大玉親患, 仍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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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다시 들어가 알현하니 며칠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기에 옷깃을 여미고서, "어찌 감히 분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가지고 앞으로 가서 배움을 청하였더니, 장석(丈席)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중봉(重峯) 조선생(趙先生)57)이 항상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관솔58)을 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가던 중이라도 만약 배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관솔로 불을 밝혀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었네. 내가 비록 남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찌 한 마디 가르침을 아끼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어 교수(敎授)가 되어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으로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통하게 하셨다. 잠깐이나마 가르침을 받아도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듯한데, 더구나 오랫동안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행랑으로 나와 세 군자와 함께 머물렀다. 更爲入謁, 則以數日留連爲可云, 斂袵而對曰: "敢不依敎?" 而持擊蒙要訣, 進前請業, 則丈席曰: "昔重峯 趙先生, 常載要訣與明松而行, 雖行路之中, 若有請業之人, 燃其明松, 敎之不倦, 則余雖無爲人之師, 何靳一敎乎?" 仍爲敎授, 微辭奧旨, 令人心神, 豁然貫通。 暫時薰陶, 如在春風中, 而況於親炙之久者乎? 出來廊底, 與三君子同留。 중봉(重峰) 조선생(趙先生) 조헌(趙憲, 1544~1592)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금산전투(錦山戰鬪) 때 전사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게 배웠고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저서에 《중봉집》이 있다. 관솔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로, 불이 잘 붙으므로 예전에는 여기에 불을 붙여 등불 대신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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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아침을 또 준비해 주니 부담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서 편치 않다는 뜻을 누차 말씀드렸더니 또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제군(諸君)들과 함께 사랑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먼저 나왔다. 금 석사(琴碩士)가 밤이 깊은 뒤에 나와서 말하기를, "요청한 문자의 초고를 보여 주어서 보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기대하던 차에 이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朝飯又備給, 不勝不安, 故以不安之意, 累次陳達, 則亦以不然之意言及耳。 夕飯後, 與諸君入去舍廊, 移時奉話, 余則先出矣。 琴碩士深夜後出來而言曰: "所請文字記草出示, 故見而來矣。 " 企待之餘, 聞此喜消息, 忻幸忻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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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아침을 먹고 나서 오는 길에 윤동(輪東)에 들어가 성윤(聖允)의 길례(吉禮)를 묻고, 탄포(炭浦)로 출발하였다. 경수(敬叟) 씨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노송정(老松亭)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남면(南面)의 가산(佳山) 김이준(金履俊) 집에 들러 옷보따리를 찾았다. 오는 길에 석촌(石村)의 송계석(宋啓錫) 집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저물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食後來路入輪東, 問聖允吉禮, 而發炭浦。 逢敬叟氏, 暫話後, 至老松亭酒幕午飯。 入南面 佳山 金履俊家, 推尋衣褓。 來路入石村 宋啓錫家, 暫話後, 乘暮還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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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史要覽序 我國之人生於我國矇然於我國文獻而徒嘐嘐於中國糟粨者此實我國人之一大病也男子生而有弧矢之志中國一天地也三代以前都兪之治不可不學也三代以後盛衰之跡不可不監也聖賢文章可以師也英雄豪傑可以友也然而我國誠海外一褊邦也從古至今壯游中國與之幷駕驅馳者幾人薛仁貴以勇力著崔孤雲以文章聞李稼亭牧隱父子相繼以科第闡寥寥數千載之間不過是數三子而已焉則我國之産不逮中國人而然歟天限南北以長白山鴨綠江爲鐵甕城而然歟抑未知超邁卓犖之流以萬里長城有樊圃之瞿瞿而然乎否也蒙古契丹女眞之種反不在長城之外耶華人之罵我者曰鮮卑氐羌皆入中國稱皇稱帝而獨未聞你國之能如是者你國之人亦可以大言乎此雖出於戱侮而於我國人實是準的語也大冠濶袍坐而高談政事則曰虞夏聖賢則曰鄒魯英雄則曰漢魏文章則曰唐宋而攷其實行無一可摘不其近於優孟之效孫叔乎良可一太息也檀箕以前雖無文獻可徵而箕聖八條猶可稱誦羅麗之間制度稍具政事文學道德豪雋之多有可師可友者迄至于我朝名碩輩出禮樂文物燦然可述稱爲小中華然而階級漸降風氣太遜於勝朝勝朝之風氣較於羅句濟三國更覺落下一層而以若三國之風氣僅能自守而已終不能進取一步矣入於中國稱皇稱帝尙矣母論翶翔皇都入而爲周公召公出而爲方叔召虎者亦且漠然無聞則何况當今乎當今之士尋章摘句嘐嘐然願慕中國之古之人古之人者將欲何爲世不無道德文章之士而簡而拔之者伊誰苟有英雄豪傑之人則與世相違生無以保其身其可以大有爲乎此所以朝鮮之爲朝鮮而止也韓子曰策之不以其道食之不能盡其材鳴之而不能通其意執策而臨之曰天下無良馬鳴呼其眞無馬耶以是觀之古之中國亦何異於今之我國也孔子嘗欲居九夷而曰君子居之何陋之有又曰如有用我者吾其爲東周乎孔子雖不見用於當世而今之我國用孔子之道則我國其海外之東周乎昭陽赤奮若冬十二月下澣鈍人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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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일찍 출발하여 부기(富機)47)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목천(木川)48)의 새 주막에 이르러서 개장국을 사서 점심을 먹었다. 김제역(金堤驛) 마을에 이르러 낙안(樂安)으로 가는 일행과 헤어졌다. 일행과 오촌(鰲村)으로 갈 참이라 고동령(高東嶺)을 넘어 전의(全義)49) 읍내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早發, 抵富機朝飯。 抵木川新酒店, 買狗羹午飯。 抵金堤驛村, 與樂安同行分路。 與同行作鰲村行, 越高東嶺, 抵全義邑內留宿行。 六十里。 부기(富機) 충청남도 서산군 음암면 부장리(富長里)의 옛 지명으로 추정된다. 부장리는 부다리(富多里)와 기촌(機村) 일부 등 세 마을이 합해져 이루어진 마을이다. 목천(木川)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 목천현(木川縣)이 되었다가, 다시 목천군을 거쳐 1914년 천안군에 통합되면서 목천면이 되었다. 1963년 천안시에 속하였고, 2002년 1월 1일 읍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른다. 전의(全義)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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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밥을 먹은 뒤 관정동으로 가서 우 참봉(禹參奉), 박 상인(朴喪人)과 잠시 이야기하였다. 그길로 용동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북치(北峙)로 가서 정학기(丁學璣)의 병문안을 하고 도로 용동으로 왔다. 비가 쏟아졌다. 비를 무릅쓰고 관정동으로 와서 유숙하였다. ○食後, 往冠井洞, 與禹參奉、朴喪人暫話。 仍往龍洞談話。 又往北峙問丁學璣病, 還來龍洞。 雨作。 冒雨來冠井洞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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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밥을 먹은 뒤 용동에 갔다가 또 북치의 정학기 집에 갔다. 그런데 매우 좋지 않은 기색이 있다는 말을 자세히 듣고, 몹시 걱정되었다. 저물녘이 되어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흥양관의 하인이 내행(內行, 부녀자 일행)을 데리고 올라왔는데, 집에서 온 소식이 한 글자도 없어 몹시 서글펐다. ○食後, 往龍洞, 又往北峙丁學璣家。 詳聞頗有風色之說, 可悶。 乘暮還主人家。 興陽官下人, 陪內行上來, 而無一字家信, 悵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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