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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아침에 또 비가 와서 일찍 출발할 수 없었다. 너무 늦어져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니 정자 둘이 있는 큰길이 나왔다. 정자동(亭子洞)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오원천(烏院川)57) 가에 이르니 교량이 전부 부서지고 냇물이 크게 불어 있었다. 월천군(越川軍, 강을 건네주는 인부)을 붙잡고 건너는데 물이 어깨 위를 넘자, 마음이 몹시 위태롭고 두려웠다. 날이 저물어 굴암(屈岩)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70리를 갔다. ○朝又雨, 不得早發。 最晩後, 冒雨發程。 越一小嶺, 出雙亭子大路。 抵亭子洞午飯。 抵烏院川邊, 則橋梁盡破, 川水大漲。 以越川軍扶持以越, 而水過肩上, 心甚危怕矣。 暮抵屈岩店留宿。 行七十里。 오원천(烏院川) 전라북도 임실군에 있는 섬진강 상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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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새벽에 일어나니 말이 잘 먹지를 못해서, 나는 뒤처지고, 하서(夏瑞)와 김영택(金永澤)은 먼저 길을 나섰다. 나는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 저전우(楮田隅) 주점에 이르니 두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택(金永澤)과 작별하고 길을 나섰는데, 진창길에 무릎까지 빠졌다. 간신히 임실 운남(雲南)에 이르렀다. 하서(夏瑞)가 ▣촌(▣村)에 함께 들어가겠다고 하기에 그와 함께 들어가니 주인 최생(崔生)은 부재중이었다. 그대로 점심을 먹고 나니 하서(夏瑞)가 돈 5전(戔)을 노자로 도와주었다. 곧바로 출발하여 가단(柯斷)에 이르러 묵었다. ○曉起鬣者不善食, 余則落後, 夏瑞與永澤先發程。 余則仍朝飯發程, 抵楮田隅酒店, 兩友待我矣。 與金也作別登程, 泥路沒膝, 艱抵任實 雲南。 夏瑞同入-缺-村云, 故與之同入, 則主人崔生不在。 仍爲午飯, 夏瑞得五戔錢贐行, 故卽發抵柯斷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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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일찍이 출발하여 부내(府內)의 전성철(全聖哲) 집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북문 밖의 송민수(宋民洙) 집으로 가니 노원(魯源)이 법사산(法司山)에 간 바람에 만나지 못하였다. 그길로 그의 큰형 송약수(宋若洙) 씨 집으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그길로 출발하여 법사산으로 찾아갔다. 도중에 비를 만나 의관이 쫄딱 젖어 힘겨웠다. 노원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20리를 갔다. 밤에 비가 내렸다. ○早發, 抵府內全聖哲家朝飯。 往北門外宋民洙家, 則魯源出去法司山, 故不得相見。 仍往其伯氏若洙氏家暫話, 還來主人家。 仍爲登程, 尋往法司山。 中路逢雨。 衣冠盡濕艱。 魯源家留宿。 行二十里。 夜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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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출발하여 주릿재11)를 넘어 추동점(楸洞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사교(四橋)에 이르러 묵었다. ○發程越周老峙, 抵楸洞店中火。 暮抵四橋留宿。 주릿재 한자로 '주로치(周老峙)'라고도 한다. 벌교읍 추동리 대판이 마을 서쪽에서 존제산(尊帝山)을 넘어 율어면 유신리에 이어지는 고개이다. 긴 밧줄을 풀어놓은 것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새라고 하여 주릿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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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아 묵어가려다가 지난달 길을 떠날 때에 천노(千奴)의 병이 위중하였는데, 아직 그 사이 생사가 어떠한지 몰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서둘렀다. 부득이 길을 떠나 구룡정(九龍亭)에 들어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과역(過驛)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천노(千奴)의 병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나를 보고도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삼키는 것이 몹시도 참혹하였다. ○。 風日極不佳, 欲爲留宿, 而去月發行時, 千奴之病危重矣, 姑不知伊間生死之如何, 急於還家。 不得已發程, 入九龍亭暫話後, 抵過驛中火。 還家則千奴之病, 至於危境, 見我不言, 只飮泣之至, 慘矣慘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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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밥을 먹은 뒤 출발하였다. 마을 앞을 나오니 집 아이가 내가 내려온다는 기별을 듣고 며칠 전에 나와서 사교(四橋)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월악에 들어왔다는 기별을 듣고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 사교로 와서 가교(柯橋) 댁에서 유숙하였다. 재동(齋洞) 귀산(龜山)66)이 모두 무고하다니 매우 다행이었다. ○食後發程 出村前。 則家兒聞吾下來之奇, 日前出來, 四橋留待矣。 聞昨入月岳之奇出來。 故仍爲偕來四橋, 留柯橋宅。 齋洞ㆍ龜山皆無故云, 幸幸。 재동(齋洞) 귀산(龜山)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 있는 재동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산 송씨 파족을 말한다. 재동파는 고흥 대서의 귀산파, 두원의 금성파, 동강의 대강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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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가아(家兒)를 데리고 과역(過驛) 시장 근처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신정(新亭) 정익후(鄭益垕)가 3전의 돈을 노자로 도와주었다. 오는 길에 구룡정(九龍亭)에 들어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사교(四橋)에 이르러 묵었다. ○率家兒抵過驛市邊中火。 新亭 鄭益垕以三戔錢贐行。 來路入九龍亭暫話, 暮抵四橋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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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아침을 먹고 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서령(西嶺)61)에 이르러 고개 아래 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옥은 추동(楸洞)62)에 들를 생각으로 먼저 갔다. 벌교(筏橋)63)에 이르러 여옥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옥이 와서 다 같이 동면(東面)64)으로 왔다. 정암정(鼎岩亭)에 이르자 비가 내렸다. 여옥은 곧바로 들어가고 우리 일행은 월악(月岳)65)으로 들어가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朝飯, 冒雨登程。 抵西嶺, 嶺下店午飯。 汝玉入楸洞之意先行。 抵筏橋留待汝玉矣。 非久汝玉果來, 偕來東面。 至鼎岩亭雨作。 汝玉則直入, 吾同行入月岳留宿。 行六十里。 서령(西嶺)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추동리 석거리재이다. 벌교에서 서울 방향으로 갈 때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이다. 추동(楸洞)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추동리이다. 벌교(筏橋)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이다. 동면(東面)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이다. 동강면은 옛 대강면(大江面)과 동면이 병합된 것이다. 월악(月岳)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오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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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정사) 二十三日 丁巳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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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무오) 二十四日 戊午 맑음. 가잠(佳岑)14)에 가서 삼회(三悔) 강봉회(姜鳳會)의 병을 문안하고 오경(五卿)을 방문하여 유숙하였다. 陽。作佳岑之行。 問三悔姜鳳會之病。 訪五卿留宿。 가잠(佳岑) 현재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가잠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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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正月旣望翌夜與念珠洞沈斯文能彬擧酒酬韻順天月嶝丁生擎斗適來同和 【六首庚戌】 新雨多緣舊雨逢黃泥木屐邙幽蹤雪殘信報梅魂返春近香餘栢酒供不定詩魔應慘憺無端睡佛坐從容興酣留待東楹月滿案如鴉水墨濃故人行訪雪泥邊珍重枯笻似剡船纖雨乍經山窈窕淡霞初捲月澄鮮低昂三影殘盃裏滌蕩千愁短燭前軟話相酬良夜景神淸未暇惱春眠敲推自笑老髥稀宿癖寒床復拕衣鳥夢西溪春使返犬聲東郭酒人歸興闌燈下生紅焰坐久囱前滴翠微多謝故人多助我病中揮翰意如飛夜鷄高唱興猶餘雨雨溪家坐自如月嶝少年淸解飮珠村夫子老貪書麤豪霞彩眉端歛蘊藉風流腹裏儲休把此傖稱達士十秋爲客鬢毛疎葡萄墨點有情雲送雨山家解挽君禽舌澀成新一曲柳眉纖掃淡三分寂寥幾夜眠於月快活今朝飮以文相守支離相不捨午烟纔歇夕舂聞黃昏餘興在招僕濁醪賖寫懷拈茟杪澄念剔燈花我歌惟白雪君氣尙靑霞坐久形相忘畵中明月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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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병진) 二十二日 丙辰 추움. 다시 연화동(蓮花洞)에 사는 족숙 인현(麟鉉)을 방문하고, 이어서 이지오(李枝午)를 방문하여 점심밥을 먹고 옥전으로 돌아왔다. 寒。轉訪蓮花洞族叔麟鉉。 因訪李枝午。 午飯而還玉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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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陶泉面民人等上地主書 【地主見上】 伏以以孝聞於世者從古何限而童稚之孝穻於載籍童稚之以孝聞者亦或有之而裂指之至再至三者萬無一二豈非童稚之矇無知覺而裂指之最爲畏攝者乎苟有卓行之童稚而看作例套歸於泛忽則烏在其朝家旌褒之本意而亦不違守伯闡揚之常典也哉今於治下本面曰有一孝子姓李名哲文平日愛親敬長之道隆師勤學之行素所著聞而洎于再昨年癸卯春年纔十三猝當其父之暴疾耳無聞目無見口不能言語大命將隕之際哲文在傍號哭三次裂指竟至甦命噫彼以十三歲無知覺之童稚一者裂指猶所畏懾而 非一非二至于三次者豈非出天之誠而亦非拔萃之行乎裂指難於割股而此兒能然之難於斷指而此兒屢爲之而况竟救其父濱危之命乎此實載籍之穻有而世所萬無一二者也民等居在同面聽聆所聳不可 泛忽看過故玆敢齊聲仰籲於孝理之下伏願細細垂覽從公摭實以爲式年報營之地無任祈懇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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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山幕谷崔基中上地主書 【地主見上】 伏以竊伏問我賢侯莅玆南土崇奉先賢賁餙隧道光修廟宇古簡遺墨靡不闡顯藝林所在皆有精采則民雖百無肖似亦云藝林末流事係斯文抱得所懷不達于好賢之我侯而更待何時玆敢略綴荒蕪仰瀆神明幸賜垂察焉民之先高祖處士公諱衡自少私淑尤齋老先生之學而老先生己巳南征時民高祖跋涉往從于康津之晩德寺質疑辨感將至十數日事實顚末詳載於同時諸賢唱酬錄民高祖時有老親不得遠遊將欲歸養則辭退之日老先生勉以孝敬取羔羊跪乳之義特書羊巖二大字以贈之題其傍曰己巳尤齋書民高祖奉而歸刻諸石壁因號羊巖以表平日山仰之意石壁在於處士公所居窟燈山前臨龍江高可爲數十尺巖之南又築咏歸臺以寓風浴咏歸之義自是樵人行客亦指點而認得老先生筆蹟崔處士臺址者于今百有五十七年矣奈之何歲月寢久風雨之磨泐苔蘚之封蝕將至字畵之難記然則故處士巖號之迷茫猶屬來許之不肖老先生筆蹟之埋沒豈非斯文之不幸數仞巉巖如斗字畵以孱弱之力難可以重新倘伏蒙我賢神明再雕之澤則一片靑山我祖之名得大老而不朽大老之筆得我侯而有光此非民家一人之私寔出儒林衆公之論無任悚仄祈懇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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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아침 전에 문대(文大)씨와 종친들이 찾아와서 만났다. 아침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 구룡정(九龍亭)에 들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길을 나서 과역(過驛) 시장 근처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대곡(大谷)의 형님과 천노(千奴)를 만나 집안 소식을 처음 들었는데, 증아(曾兒)가 순종(唇腫, 입술이 붓는 것)이 아주 심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으니 걱정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 그길로 동행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朝前文大氏與諸宗來見。 食後發程, 入九龍亭。 暫敍後登程, 抵過驛市邊中火。 逢大谷兄主及千奴, 始聞家信, 則曾兒以唇腫大端云。 聞不勝悶慮, 仍爲同行歸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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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일찍 출발하여 전석치(磚石峙)를 넘어 오수(鰲樹)에 이르렀다. 나는 소로(小路)로 들어가 평당(坪塘)의 송연영(宋延英) 집에 이르렀으나 주인 부자가 모두 출타하여 만나지 못했다. 주막으로 나와서 점심을 먹고 있으니 뒤따라 당도하여서 다행이었다. 송연영(宋延英) 종형제를 마침 이 주막에서 만난 것은 요행이었다. 이어 작별하고 말치60)를 넘어 굴암(屈岩)에 이르러 묵었다. 早發越磚石峙, 抵鰲樹。 余則入小路, 抵坪塘 宋延英家, 則主人父子皆出他, 不得相面, 出來酒幕, 仍爲中火, 追後來到, 可幸。 延英從兄弟, 適逢此幕乃幸。 仍爲作別, 越斗峙, 抵屈岩留宿。 行七十里。 말치 원문의 '두치(斗峙)'는 전북 완주군 상관면과 임실군 관촌면과 진안군 성수면 사이의 고개이다. 말치 또는 마치(馬峙)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진안 마령 사람들이 말을 타고 가던 길목이어서 '마치'라 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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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일찍 출발하여 오원(烏院)61)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한참 밥을 먹고 있을 때에 보성(寶城)의 공서(公瑞) 종인(宗人)이 왔다. 만나서 쉬었다가 그길로 동행하여 쌍정자(雙亭子)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부내(府內)에 도달하여 전성철(全聖哲)의 집에 머물렀다. 70리를 갔다. 早發抵烏院朝飯。 方食之際, 寶城 公瑞宗人來, 相逢息後, 仍爲同行, 抵雙亭子中火。 得達府內, 留全聖哲家。 行七十里。 오원(烏院) 관촌(館村)의 옛 지명이다. 고문헌에 관촌(館村)은 등장하지 않고, 임실의 북쪽 경계 지점에 있었던 상북면·하북면과 '오원역(烏原驛)' 또는 '오원(烏院)'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지리지》에 오원이 임실의 역으로 수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역(驛)이 2이니, 오원(烏原)·갈담(葛潭)이다. "라고 하였다. 관촌은 객지에서 묵는 숙소라는 뜻인 객관(客館)의 뒷 글자에서 유래가 됐으며, 원(院)이나 역(驛)은 상당히 큰 규모의 국립 여행자 숙소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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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아침을 먹은 뒤에 선화당(宣化堂)에 들어갔더니 순상(巡相)이 내아(內衙, 지방관아에 있던 안채)에 들어갔다고 하여 책방(冊房)으로 들어가 각처의 책객(冊客)8)과 이야기하였다. 오후에 순상(巡相)이 선화당(宣化堂)에 나왔으므로 선화당(宣化堂)에 들어가 남겨 둔 서간(書簡)과 《충효록(忠孝錄)》을 찾은 다음 하직하고 나오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길을 나서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食後入宣化堂, 則巡相入內衙云, 入冊房與各處冊客談話。 午後巡相出宣化堂, 故入宣化堂, 推尋所留簡牘與《忠孝錄》, 仍爲下直而出來, 日已夕矣。 不得發程仍留。 책객(冊客) 고을 수령의 비서(秘書)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으로 관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사로이 임용하였다. 책방(冊房)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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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밤에 비가 내렸다. 순상(巡相) 내행(內行)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에 보은(報恩) 윤 석사(尹碩士, 윤제대(尹濟大)), 연산(連山)의 이 석사(李碩士)와 공북루(拱北樓)7) 아래에 가서 구경하고 왔다. ○夜雨。 巡相內行入來云, 故食後與報恩 尹碩士及連山 李碩士, 往拱北樓下, 觀光而來。 공북루(拱北樓)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었던 누각을 말한다. 조정에서 조령(朝令)을 받들고 사람이 내려올 때 부윤(府尹)이 나가 맞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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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밥을 먹은 뒤 사헌(士憲)과 각교(㰌橋)로 갔다. 송 판서를 만나니, 여산(礪山)의 석회 채굴을 금지하는 일로 전주 부윤에게 서간을 보냈다고 하였다. 또 장단(長湍)의 산소에 떼를 바꾸는 일로 나중에 통문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길로 반송방(盤松坊)으로 가서 구관(舊官) 남이형(南履炯)118)을 만나 그 형의 궤연에 조문하였다. 오는 길에 차동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결락- 남묘(南廟)119)에 들러 둘러보고 왔다. ○食後, 與士憲往㰌橋。 見宋判書, 則以礪山禁灰掘事, 折簡於完伯云。 又言長湍山所 改莎草事。 從後發通云矣。 仍往盤松坊。 見舊官南履炯, 吊其兄几筵。 來路入車洞暫話, 而入【缺】 南廟, 周玩而來。 남이형(南履炯) 1780~1854. 자는 광보(光甫)이고,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813년(순조 13) 증광시에 입격하였다. 의주 부윤을 지냈다. 남묘(南廟) 서울 용산구 도동 남대문(南大門) 밖에 있는 관우(關羽)를 제사지내는 곳으로 '남관왕묘(南關王廟)'라고도 한다. 선조(宣祖) 31년(1598)에 세웠으며, 광무(光武) 3년(1889)에 불에 타 버렸다가 3년 뒤에 다시 지었으나, 6ㆍ25 전쟁(戰爭) 때 불타서 1957년에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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