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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박 상인(喪人, 상중에 있는 사람)이 맡은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는 바람에 일행과 뒤처져 율지, 여옥(汝玉), 자윤과 동행하였다. 아침 먹기 전에 비가 내렸다. 아침을 먹고 난 뒤에 비가 조금 갤 기미가 있어 그냥 짐을 꾸려 출발하였다. 청파(靑坡,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영대(永大) 집에 이르러 잠시 쉬고 나서 출발하였다. 강가에 이르니 비가 다시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강을 건넜다. 승방(僧房)41) 객점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남태령(南泰嶺)42)을 넘어 과천(果川) 고을 앞 주막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30리를 갔다. ○朴喪人以所營事未決之致, 仍爲落後, 與聿之、汝玉、子允作伴。 朝前雨。 朝飯後, 稍有開霽之望, 仍治發。 抵靑坡永大家, 暫憩後, 仍爲發程。 抵江頭, 則雨更作。 冒雨越江。 抵僧房店暫憩。 越南泰嶺, 抵果川邑前酒店留宿。 行三十里。 승방(僧房) 승방평(僧房坪)으로 보인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뒷산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고, 그 절 앞들에 있던 마을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승방뚤ㆍ심방뜰이라고도 불렀다. 남태령(南泰嶺) 서울에서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가던 길로, 삼남대로의 첫 번째 큰고개이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호현(狐峴)인데 정조가 사도세자 묘를 참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 고개 이름을 물었을 때 '여우고개'라는 이름을 요망스럽다 여겨 거명하지 못했는데 과천 아전이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였다. 이후 '남태령'으로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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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밥을 먹기 전에 개간소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정동으로 왔다. 아침을 먹은 뒤 관정동으로 와서 율지와 함께 개간소로 갔다. 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참에 나와 청파로 왔다. ○食前, 往刊所相話, 而來貞洞。 朝飯後, 來冠井洞, 與聿之往刊所。 終日談話, 夕間出來靑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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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淸辭 【幷小識】 冬十一月十一日壬子忽因南至差員之有事中止【通川守趙應和以差員濫把營待馬巡使論罪啓點】又替人之勞以近莅營下故也未能推委於人而時夜三更踏雪衝寒急遽前進二年南至之役亦有緣業而然歟效東坡軆戱賦上淸辭一闋其辭曰雪滿地兮如白氎月蒼蒼兮山千疊來胡爲乎履蠛蠓去胡爲乎幻蝴蝶神馬閃忽若飛龍兮顝不辨其毛鬣豐隆推轂而殷殷兮阿香導燭而爗爗句漏兮發雪漢兮朝涉鵰鶻之蜚不足以喩其形兮翼上征其何迅捷時瀏眸以下覽兮五山爲豆四瀆爲葉踏星辰兮聽履響掃靉霼兮煥眉睫洞天門而無礙兮朝玉臺而兢業皇穆穆其詔余兮汝往欽哉蒐獵夫何一怪兮恣猖獗虐下土兮弗安怗轇輵璇璣兮曀且霾嘯聚羣類兮行剽刦盲風淫潦之嬉戱爲樂兮更與旱魃瘧鬼而相追躡嗟玄縡之閉閼兮久未見二五之調而燮銜帝命以往殲兮儼萬靈之恭協耀千劒之鍔鍔兮鳴百弓之弦緤雲車桂禛恍惚莫狀兮又見山夔海龍之相扶挾須臾掃滅而廓淸明兮不俟兵刃之交接退繭繭而不自以爲功兮只有四澤之滂沛溥浹返淸淨以無爲兮仰天道之張歙集羣僊兮來相迎簇月珮兮錯雲屧帝嘉余以劬勞兮降蝌蚪之華牒顔咫尺而有喜兮渥璚露而沾浥俾出入乎魁台兮奎璧之府又管攝繄傴僂而愈恭兮懼跬步之躓跲嘆皇鑑之孔昭兮謂可礪而可檝胡塵區之迫隘兮老擊柝又彈鋏高翶翔兮玉宇認夫君之神愜悵丹竈兮何在瘞蕉鹿於殘堞其來其去是耶非耶行不自知其所依貼忽因剝啄以寤宿兮一刺使命也飛小帖診余夢而出門大笑兮不覺冠纓之絶兩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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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일찍 출발하여 노계(蘆溪) 주막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초치원(草致院) 저자 주변에 이르러 잠시 쉬고 나서 출발하였다. 연기(燕岐) 삼거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부강(浮江)과 매포(梅浦)를 지나, 신탄강(新灘江)을 건너, 저물녘 오촌에 도착하였다. 저녁밥을 먹은 뒤 들어가 장석(丈席)50)을 뵈니, 기후(氣候, 안부)가 요사이 평안하여 다행이었다. 외방(外房)으로 나와 목천 현감(木川縣監)을 지낸 송흠성(宋欽成)51)을 위문하였다. 목천은 작년 12월에 그 생부(生父) 상을 당하였다. 한참 동안 안부를 묻고 회포를 풀고 나와, 처소로 내려가 유숙하였다. 80리를 갔다. ○早發, 抵蘆溪酒店朝飯。 抵草致院市邊, 暫憩後登程。 抵燕岐三巨里午飯。 歷浮江及梅浦, 越新灘江, 暮抵鰲村。 夕飯後, 入謁丈席, 則氣候近得安寧, 幸幸。 出外房, 被慰於木川欽成。 木川前年十二月, 遭其生父喪矣。 移時敍暄出來, 下處留宿。 行八十里。 장석(丈席) 송치규(宋穉圭, 1759~1838)이다. 자는 기옥(奇玉)이고, 호는 강재(剛齋)이며, 본관은 은진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송시열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默)의 문인이다. 당시 오촌에 살아 '오촌 선생(鰲村先生)'이라고도 하였다. 송흠성(宋欽成) 1794~1862. 자는 흥경(興卿)이다. 송치규의 양자이다. 생부는 송득규(宋得圭)인데, 1827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恩津宋氏族譜 卷1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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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밥을 먹은 뒤 관정동으로 가서 우 참봉(禹參奉), 박 상인(朴喪人)과 잠시 이야기하였다. 그길로 용동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북치(北峙)로 가서 정학기(丁學璣)의 병문안을 하고 도로 용동으로 왔다. 비가 쏟아졌다. 비를 무릅쓰고 관정동으로 와서 유숙하였다. ○食後, 往冠井洞, 與禹參奉、朴喪人暫話。 仍往龍洞談話。 又往北峙問丁學璣病, 還來龍洞。 雨作。 冒雨來冠井洞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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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밥을 먹은 뒤 용동에 갔다가 또 북치의 정학기 집에 갔다. 그런데 매우 좋지 않은 기색이 있다는 말을 자세히 듣고, 몹시 걱정되었다. 저물녘이 되어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흥양관의 하인이 내행(內行, 부녀자 일행)을 데리고 올라왔는데, 집에서 온 소식이 한 글자도 없어 몹시 서글펐다. ○食後, 往龍洞, 又往北峙丁學璣家。 詳聞頗有風色之說, 可悶。 乘暮還主人家。 興陽官下人, 陪內行上來, 而無一字家信, 悵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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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아침을 먹은 뒤에 반송등(盤松登)에 가서 구관(舊官) 교리 남이형(南履炯)을 만났다. 동행과 함께 모화관(慕華館)15) 영은문(迎恩門)16)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추문(秋門)17)에 올라 잠시 쉰 뒤에, 나는 대묘동(大廟洞)에 가서 공서(公瑞)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사(金使)와 지종현(池宗玄)을 만나려고 기보(基甫)의 집에 갔으나, 두 사람 모두 부재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오는 길에 서울의 주인집에 들어가니 경주인(京主人)도 부재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주인집으로 왔다. ○食後往盤松登, 見舊官南校理 履炯。 與同行往慕華館 迎恩門, 來路登秋門暫憩後, 余則往大廟洞, 與公瑞暫話。 欲見金使及池宗玄, 往基甫家, 則兩人皆不在不見, 而來路入京主人家, 則京主人亦不在不見, 而來主人家。 모화관(慕華館)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던 객관(客館)으로,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는 태종 8년(1408)에 개경의 영빈관을 본 따 모화루를 건립하였다고 쓰여 있다. 그 후 세종 12년(1430)에 확장, 개수하여 모화관이라 개칭하였다.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추문(秋門) 경복궁 영추문(景福宮迎秋門)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서쪽에 있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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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새벽에 출발하여 희도원(希到院)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성환(成歡)34)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천안 신(新) 주막에 이르러 묵었다. 100리를 갔다. 曉發至希到院朝飯, 抵成歡午飯。 抵天安新酒幕留宿。 行百十里。 성환(成歡)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에 있는 읍명으로, 성환읍 성환리에 성환역(成歡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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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새벽에 출발하여 보성 대곡(大谷)의 이 석사(李碩士), 율촌(栗村)의 종인(宗人)과 동행하여 왈천(曰川)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부내(府內)의 서문(西門) 밖 전성철(全聖哲) 집에 이르자 진사 정여흠(丁汝欠)이 먼저 와서 이 집에 머물고 있었다.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여흠이 먼저 떠났다. 나는 공서와 북문 밖의 종인(宗人) 송민수(宋民洙) 집을 찾아가 제각통문(祭閣通文)을 전하고 유숙한 것은 영문(營門)의 《사원록(祠院錄)》에 재록하기 위해서였다. 서재(書齋)에서 묵고 있는데, 주인 송약수(宋若洙)의 백씨(伯氏)가 백대(百代)의 정의(情誼)로 반기며 우리 두 사람과 함께 술집에 직접 가서 술을 사 마시다가 주객이 모두 취해서 돌아왔으니 그 마음이 매우 살뜰하였다. 曉發與寶城 大谷 李碩士及栗村宗人同行, 抵曰川朝飯。 至府內 西門外全聖哲家, 丁進士 汝欠先來, 而留在此家, 而數時談話, 汝欠則發行, 而余則與公瑞, 訪于北門外宗人民洙家, 傳祭閣通文留宿, 欲爲營門《祠院錄》中載錄之意也。 留宿書齋, 而主人若洙之伯氏, 而忻然有百代之誼, 偕吾二人親往酒家, 沽酒相飮, 主客醉而歸, 其意最爲慰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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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晦日 새벽에 출발하여 소로(小路)로 들어가자 임실(任室) 방동(房洞)의 동종(同宗)인 송염(宋濂) 집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길을 나서려고 하니 주인이 한사코 만류하였다. 하늘에서도 가랑비가 내려 그 집에 그대로 머물렀는데, 통문 1건을 베껴서 맡겨 두고 차차로 전해 달라는 부탁의 말을 하였다. ]曉發入小路, 抵任實 房洞同宗濂家朝飯。 欲爲發程, 則主人固挽。 天又細雨, 仍留其家, 而通文一件謄出留置, 次次飛傳之意言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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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문적의 수정(修正) 때문에 주인집에 남아있었다. 오후에 정동(貞洞)21)에 갔는데 이 석사가 없었다. 다만 그의 아우 이훈(李壎)하고만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니, 석사 이혜길(李惠吉)이 혼자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이혜길이 집으로 가자고 청하기에 그와 함께 가서 그대로 유숙하였다. ○以文蹟之修正留主人家。 午後往貞洞, 李碩士不在。 只與其弟壎, 暫話而來, 則李碩士惠吉專訪來待矣。 夕飯後, 惠吉請往其家, 故與之偕往, 仍留。 정동(貞洞)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던 데서 '정릉동'이라 하였던 것을 줄여 정동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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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아침밥은 안채에서 음식을 내와서 몹시 고마웠다. 오후에 일행과 영추문(迎秋門)22) 안으로 가서 궐문 밖을 지나, 그길로 유동(油洞)23)으로 갔다. 도중에 일행을 남겨두고, 나는 조문하기 위해 아전 안인성의 집을 찾아갔는데 아전 안인성의 아들이 출타하였으므로 만나지 못하였다. 일행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와서, 함께 종각 근처로 왔다. 마침 공서을 만나 그와 잠시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朝飯自內間出饋, 感荷感荷。 午後與同行往秋門內, 過闕門外, 仍向油洞。 留同行於中路, 余則吊問次, 尋安吏寅成家, 則安吏之子出他, 故不見。 而還同行所留處, 與之偕來鍾閣邊。 適逢公瑞, 與之暫話而來。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西門)이며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 문무백관들이 주로 출입했던 문이다. 유동(油洞)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가에 있던 마을로, 기름을 파는 기름전이 있었으므로 기름전골이라 하고,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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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밥을 먹은 뒤 출발하였다. 북문 밖으로 가 잠시 송약수 씨를 만났는데 서울로 보내는 편지를 주었다. 그길로 출발하여 장대(將臺) 앞에 이르자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니 남문 밖에 사는 류하석(柳夏錫) 영윤(令倫)이었다. 내가 이미 부내에 들어섰으니 찾아가지 못할 것도 없는데, 갈 길이 바쁜 관계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왔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 무척 기뻤다. 그길로 동행하여 삼례(參禮)83)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물녘에 능측(陵側)84) 객점에 이르러 함께 유숙하였다. 50리를 갔다. ○食後發程。 往北門外, 暫見若洙氏, 則付京簡矣。 仍發, 抵將臺前, 則有呼我之人 。 故顧見, 則乃南門外居柳夏錫令倫也。 余旣入府, 則非不爲尋訪, 而以行忙之致, 未果而來矣。 忽於此地意外相面, 其喜可掬。 仍與同行, 抵參禮午飯。 暮抵陵側店, 同留宿。 行五十里。 삼례(參禮)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이다. 능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익산 쌍릉으로 보인다. 마한(馬韓)의 무강왕 및 왕비의 능이라고도 하고, 백제 무왕과 왕비의 능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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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밥을 먹은 뒤 길을 떠날 무렵, 마침 암자 아래를 지나는 상선(商船)이 있어서 어디로 가는지 물으니 공주로 간다고 하였다. 뱃사공을 불러 급히 배에 올랐다. 배를 띄운 지 몇 리 못 가서, 바람과 일기가 순조롭지 못해 도로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올랐다. 선덕(先德) 객점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삼거리 객점을 지나 발치(發峙)100)를 넘어 이인(里仁)101) 객점에 이르렀다. 잠시 쉬고 나서 우금치(于今峙)102)를 넘어 공주 화산교(花山橋)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70리를 갔다. ○食後, 離發之際, 適有商船之過菴下, 故問其所向, 則往于公州云也。 招津夫急登船。 浮江數里, 以風日之不順, 還下船登陸。 抵先德店午飯。 歷三巨里店, 越發峙, 抵里仁店。 暫憩後, 越于今峙, 抵公州花山橋店留宿。 行七十里。 발치(發峙) 충청북도 충주시의 직동과 살미면 재오개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 삼남대로로 통하는 대로의 첫 고개였다고 한다. 이인(里仁)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이다. 우금치(于今峙) 우금치(牛禁峙)를 말한다. 공주 분지의 남쪽 끝에 낮은 안부를 이루어 형성된 고개로 높이가 약 100m이며, 부여에서 공주 시내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다. 동학운동 때 관군과 싸워 동학 농민군 10만 명이 전사한 역사적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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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戊辰事實 邑乘曰黃戊辰原州人初以私賤宣廟壬辰立軍功從良父沒居廬母病斷指舊主病甚當寒求鮒戊辰就淵叩氷跪坐仰天未幾魚自躍出戊申己丑前後國卹麻衣素食一如親喪朝廷嘉其忠孝立忠臣孝子之門其後韓西平【浚謙】金仙源【尙容】李澤堂【植】許觀雪【厚】李畏齋【端夏】諸賢作詩褒獎云余聞諸原人曰黃戊辰生有至性孝事父母家甚貧無以爲養托爲邑吏得升斗米以供家在文幕距邑四十里晝而行掾役夜而待退令歸省父母鷄鳴而起以赴朝參一夜之間行八十里日以爲常不憚往來一夕將往省忽有大虎寒路戊辰略無懼容徐語曰汝欲閷我乎我死固不足惜而但念我父母只有一子我我死之後我父母無所依賴是可恨也虎以頭向文幕以尾向戊辰低頭搖尾堅伏不起戊辰更徐語曰汝欲使我騎汝乎虎又搖尾不已戊辰試攝衣上乘虎忽飛騰向南須臾復堅伏不動戊辰定睛視之乃其所居巷門外也喜而跳下以手撫虎稱謝虎仍轉閃不知所之戊辰到家父母怪而問曰汝行較前夜何其太蚤戊辰恐其驚動對以退令差蚤夜分後又將赴公役出巷門外虎復以頭向邑搖尾向戊辰戊辰曰汝又欲代我之步乎但我家甚貧亦之畜狗無以爲報可慙仍整衣而跨閃忽間到邑門外自此以後虎如期來候夕則頭向南曉則頭向北以隨戊辰所向戊辰之騎而往來者亦且有日忽一夜戊辰在文幕假寐虎來見於夢而人語曰吾誤陷於忠州地某里穽中明朝命且盡矣君其亟來救之戊辰寤而異之告父母以邑事有急急穿衣履出洞門如期所候之虎杳無形跡仍直向忠州尋到某地朝日正高村人大聚方謀殺穽虎戊辰忙步疾呼曰容我一窺而殺之未晩也排圍而入遶穽高唱曰是我虎乎虎搖尾有聲戊辰曰是我虎也仍懇于村人請換以三斛米貸其命村人以爲痴狂迭相呵逐戊辰曰我乃原州筦庫吏而父母俱存者也苟放此虎而貽害于人則將以身代命爲父母憂可乎且食言而不償三斛米則將訴官汰任不得以養父母可乎便探袖中出紙墨書契券以爲左證里人乃稍稍退立以觀動靜戊辰卽擧手解穽機引虎而出虎出穽外嬉娛盤旋如畜狗之逢家主戊辰從而戒之曰如是一大靈物而何爲誤落於此機也從今以往慎勿更蹈拂拭撫摩酷似山人之馴鹿里人相顧大駭戊辰曰三斛米不可以不償仍率村丁偕到原邑出私俸米如數償之孔目以不參朝謁告官欲治通判將加之罪戊辰從頭至尾具以實吐引忠邑人爲證然後始乃大驚嗟異摭前後忠孝實行報于刺史刺史轉秦于朝特下官誥棹楔之典盖黃戊辰之闡揚實由於穽中之虎云原俗尙訛騎虎解虎之說不其近於浮浪歟虎孝獸也孝若格天信及雀魚何况孝獸乎邑之南䢖丹靑祠宇揚額曰忠孝祠題中門曰景仰門旌外門曰有名朝鮮忠臣孝子龍驤衛副司果黃戊辰之門照耀路傍聳人觀瞻于今數百年之久而邑吏敬奉春秋虔祀倘非實行之所感又安能若是之篤乎余故詳錄尾附于邑來之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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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吉 ○새벽에 출발하여 지지현(遲遲峴)110)에 이르자 막 해가 떠올랐다. 김노가 중병이 나서 일행과 짐을 나눠서 졌다. 간신히 사근평(肆覲坪)111)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김노가 주막에서 스스로 짐을 약간 졌다. 세동(細洞)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과천읍에 이르러 비를 만나 한참을 머물렀다. 비가 갠 뒤에 남태령 객점으로 올라갔다. 김노가 뒤따라와서 몹시 기뻤다. 이에 점심을 먹고 강을 건너는데 비가 다시 시작되었다. 모래사장 반도 못 가 비가 퍼붓듯이 쏟아져 옷자락이 흠뻑 젖었다. 간신히 식점거리(食店巨里)에 이르러 비를 피하였다. 비가 갠 뒤에 청파(靑坡)112)의 영대(永大) 집에 이르렀다. 의관과 짐 안의 물건들이 모조리 젖어 말할 수 없이 부아가 났다. 80리를 갔다. ○曉發, 抵遲遲峴始開東矣。 以金奴之大病, 分卜於同行。 艱抵肆覲坪店留。 金奴於酒幕自負略干卜。 抵細洞朝飯。 抵果川邑逢雨, 移時留連。 開霽後上南泰嶺店。 金奴追後來到, 可喜可喜。 仍爲午飯, 而越江, 雨更作。 沙場未半, 雨下如注, 衣裾盡濕。 艱抵食店巨里避雨。 開霽後, 抵靑坡永大家。 衣冠與卜中諸物盡濕, 憤不可言。 行八十里。 지지현(遲遲峴) '지지대고개'라고 불리는 곳이며 의왕에서 수원으로 넘어오는 길목이다. 지지현(遲遲峴)이라고 표기하는 곳이지만 본래는 '사근현(沙斤峴)' , '미륵현(彌勒峴)' 등으로 불렸다. 사근평(肆覲坪) 경기도 안양시이다. 청파(靑坡)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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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東海碑帖子後【幷碑文】 陟州東海碑【以上五字舊本大字】陟州東海碑【以下新本小字】州古悉直氏之地在獩墟南去國都七百里東臨大海都護府使孔巖許穆書◌瀛海漭瀁百川朝宗其大無窮東北沙海無潮無汐號爲大澤積水稽天浡潏汪濊海動有曀明明暘谷太陽之門羲伯司賓折木之次牝牛之宮日本無東鮫人之珍涵海百産汗汗漫漫奇物譎詭宛宛之祥興德而章蚌之胎珠與月盛衰旁氣昇霏天吳九首怪夔一股颷回且雨出日朝暾轇轕炫煌紫赤滄滄三五月盈水鏡圓靈列宿韜光扶桑沙華黑齒麻羅撮髻蕭家蜒蛮之蠔爪蛙之猴佛齊之牛海外雜種絶黨殊俗同囿咸育古聖遠德百蛮重譯無遠不服皇哉凞哉大治廣博遺風邈哉【眉叟記言曰三陟國之極東海上窮處古悉直氏之墟去京都七百里海氣常暗多盲風海惡幽怪萬變乃作東海頌刻石海上凡一百九十餘言其頌曰云云】◌顯宗二年先生來守是邦撰篆東海碑立於汀羅島爲風浪激沈先生聞而改書今參考兩本大字用舊本小字用新本刻竪于竹串島時上之三十五年己丑春三月也【以上碑陰記】東海無潮而世以東海碑稱爲退潮碑者何也又云西邊人後爲陟宰惡其碑而投諸海中潮忽大至浦人大被其害許氏先知有此擧複寫一本刻于石而藏之空廨至是運而竪之潮乃退更無泛溢之患人以此稱許氏爲神異人往往推獎一口雷同浮世浮言至此之浮耶今觀其頌與篆譎奇險誕竊欲效古而駭俗譬之若怪禽異獸不適於用而亦足以眩人視聽想像其人固如是也已抑否乎碑陰記數行書未知其何人所記而尊許氏爲先生則可知其同黨人楷法不足掛眼而而其曰爲風浪激沈聞而改書等數句語適足爲一大證案故附于尾俾後來君子得不爲浮言之所惑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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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棲三聯【六月初十日】 背山溪上屋三笑免伶打【雷翁】弊轄投深井枯笻驀絶陘【石下】放歌欹白氎任志謝朱挺【霞村】彈劒猶長蒯撞鍾奈寸莛【雷翁】閑園評萬譜病枕注茶經【石下】巷近相傳屐村深不設扃【霞村】逢迎通竹逕呼應拍松櫺【雷翁】夏事浮疎雨年華邁迅霆【石下】檀罏凝紫篆蘚壁展蒼屛【霞村】草色閒雲護禽言老石聽【雷翁】桃笙抽左史梧几讀西銘【石下】籲俊欽殷序省刑仰漢囹【霞村】瑞禾談里老覃葛賦宮娙【雷翁】化俗譽無射宜家樂有刑【石下】木骸居似塑匏口守如甁【霞村】舊譜懷齊瑟新鋩待越硎【雷翁】畵廚遍顧陸詩墨對皐滎【石下】麋鹿甘棲壑夔龍任在廷【霞村】聞牕如白塢凉簟可黃庭【雷翁】鄕計能言鵡兒書始祝蚙【石下】拙謀山二酉過影燭三丁【霞村】夜夢歸靑瑣天章憶畵軨【雷翁】境虛身瀅澈路仄步伶俜【石下】松嶺雲常悅薇墻露自零【霞村】雨餘齋可舫風下榻如澪【雷翁】瀑石長梳白峰霞半罩靑【石下】孰憐桐欲㸑剛恨蕙先零【霞村】熨腹殘盃熟膏脣淡墨馨【雷翁】午炊三粥碗夕頓一羹鉶【石下】斷壁懸危笠虛塘放小舲【霞村】自嘲南國士不負北山靈【雷翁】嘴鈍宜金罰聲希許玉玎【石下】劇談揮短麈催律建危瓴【霞村】眼界能收拾心天更喚惺【雷翁】塵游嗟脚誤澗飮覺身寧【石下】苔跡班雕印松功翠結鈴【霞村】此翁無寂寞今夜有淸冷【雷翁】朱墨休公牒淸江理釣笭【石下】坐雲誰啖䉀流水我浮萍【霞村】短檠猶三影淸風又一銒【雷翁】虛樓疑海舶霽月似秋坰【石下】浼浼將韜跡呵呵欲忘形【霞村】小匏憐野蔌新麥憶村醽【雷翁】萬籟聽於鳥千塵視以蜓【石下】旅懷同瘦鶴秋信近疏螢【霞村】鼴肚思河飮龜醫笑楚洴【雷翁】榴陰零潔露竹影漏疎星【石下】老柳相経絡名花自嫮婷【霞村】英雄游博局天地坐郵亭【雷翁】遠客頻來訪痴童足使令【石下】門寂驢垂耳簷凉鷰刷翎【霞村】得意才非櫟隨時用似蘦【雷翁】手貧苽太苦胃薄水猶腥【石下】破榻迷蝴幻空階鬪蟻聆【霞村】入簷山窃窕穿箔月瓏玲【雷翁】鈴語村寥聞天光夜濎濙【石下】風蕉披倒帚雷菌散尖釘【霞村】歷歷寒鍾急搖搖小燭熒【雷翁】未衰摧忠氣多病變儀型【石下】石丈應經劫楓人不記齡【霞村】倘容燕士郭獨立漢姬邢【雷翁】野水耕秠秬春霏種木苓【石下】漸看人盡醉誰識我初醒【霞村】靜可肩棲鵲明能眼視螟【雷翁】投鞭尋杏店憩杖坐蘭汀【石下】短夜燈何去淸朝筆不停【霞村】樹高蟬語泛草滑馬毫駉【雷翁】嵐影疎簷洩霖痕淺臼渟【石下】梅書窺海鴈棣什咏原鴒【霞村】天籟聽南郭齊諧話北溟【雷翁】洞林常供箑庭草遞看蓂【石下】誕跡空追日愚謀誤鑿涇【霞村】茗香穿暗牖槐蔭補空廳【雷翁】壯志違蓬矢童年想革鞓【石下】薄材羞鶩刻畏路戎蜂荓【霞村】往事浮坳芥餘生擣卜筳【雷翁】視高常簡傲履坦肯竛竮【石下】醉歸躬廬歎時來自有侀【霞村】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1일 二十一日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는데, 이때는 첫추위라서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붙지 않았다. 창고지기가 전하는 말을 들으니, 어제부터 사람과 말이 비로소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얼음이 이제 막 얼어서 맑기가 유리와 같아 맑은 모래와 흰 돌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 위태로운 상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먼저 노복과 말을 건너가게 한 뒤에 강을 건너 평지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몇 마장을 지나지 않아서 신창(新倉)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채찍을 재촉하여 하행정(下杏亭) 주막에 이르러 잠시 말에게 꼴을 먹이고 곧바로 산으로 향했다. 절까지 10여 리를 채 못 갔는데 여승(輿僧)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수레를 타고 곧장 보현사(普賢寺)74)에 이르러 관음전(觀音殿)에서 묵었다. 이날 50리를 갔다. 乘氷渡江, 是時初寒, 氷不緊凝。 聞倉直所傳, 則自昨日人馬始渡云, 而淸氷初合, 淨若琉璃, 明沙白石, 歷歷可數, 其危凜之狀, 不可盡言。 先渡奴馬, 後乃渡江, 方踏平地, 始有生意。 不過數馬場, 到新倉朝飯。 促鞭至下杏亭酒幕, 暫時秣馬, 卽爲入山。 未到寺十餘里, 輿僧已來待矣。 遂下馬乘輿, 直到普賢寺, 觀音殿留宿。 是日行五十里。 보현사(普賢寺)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의 묘향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초기인 968년(고려 광종19) 창건 당시에는 매우 작은 사찰이었다고 한다. 1028년(고려 현종19) 이후부터는 탐밀(探密)과 굉확(宏廓)이 243칸의 건물을 이룩하여 묘향산의 대표적인 가람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역대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과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귀중한 기록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또한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당시 청허휴정은 경상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 보관되어 있던 석가여래사리를 보현사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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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與石下及【松下李參奉鳳震石隱宋相璟景玉霞村沈宜煥拈淸律酬和七月六日】 風簾搖樣小林西落落秋人坐不齊塵事忽驚頭半鶴童年空憶眠中屛銷愁只可芭蕉飮得句何難柿葉題溪鳥尙餘春夢否隔窓絲筦兩三啼詩緣不薄小樓中萬木扶疎雨色空短筆驚人鳴鼓角香蔬迎客泛商宮鳥呤慣熟閒多日蟬語橫斜晩有風極目秋雲何漠漠季鷹非獨憶江東從衡屐齒破幽居月又今宵舊約如槖弊尙謀留客酒窓閒不掩敎兒書千林欲瘦蟬聲裏老屋初醒雨點餘詩緖以君還太苦可憐髭髮二分疎小屋淸於近水樓自疑魂夢在凉州放歌一夜寧無醉造字千年誤有愁老去餘音猶白雪浮生短髮又金秋炎雲欲斷還堪悵坐見疎螢帶月流苽盤欲乞巧思新短燭無眠下土臣送漏鷄人何信息逢秋牛女更精神流年五十猶稱鈍大市尋常不售珍定識愚溪千載老寂寥應笑此中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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