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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다시 들어가 알현하니 며칠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기에 옷깃을 여미고서, "어찌 감히 분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가지고 앞으로 가서 배움을 청하였더니, 장석(丈席)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중봉(重峯) 조선생(趙先生)57)이 항상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관솔58)을 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가던 중이라도 만약 배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관솔로 불을 밝혀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었네. 내가 비록 남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찌 한 마디 가르침을 아끼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어 교수(敎授)가 되어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으로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통하게 하셨다. 잠깐이나마 가르침을 받아도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듯한데, 더구나 오랫동안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행랑으로 나와 세 군자와 함께 머물렀다. 更爲入謁, 則以數日留連爲可云, 斂袵而對曰: "敢不依敎?" 而持擊蒙要訣, 進前請業, 則丈席曰: "昔重峯 趙先生, 常載要訣與明松而行, 雖行路之中, 若有請業之人, 燃其明松, 敎之不倦, 則余雖無爲人之師, 何靳一敎乎?" 仍爲敎授, 微辭奧旨, 令人心神, 豁然貫通。 暫時薰陶, 如在春風中, 而況於親炙之久者乎? 出來廊底, 與三君子同留。 중봉(重峰) 조선생(趙先生) 조헌(趙憲, 1544~1592)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금산전투(錦山戰鬪) 때 전사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게 배웠고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저서에 《중봉집》이 있다. 관솔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로, 불이 잘 붙으므로 예전에는 여기에 불을 붙여 등불 대신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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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아침을 또 준비해 주니 부담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서 편치 않다는 뜻을 누차 말씀드렸더니 또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제군(諸君)들과 함께 사랑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먼저 나왔다. 금 석사(琴碩士)가 밤이 깊은 뒤에 나와서 말하기를, "요청한 문자의 초고를 보여 주어서 보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기대하던 차에 이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朝飯又備給, 不勝不安, 故以不安之意, 累次陳達, 則亦以不然之意言及耳。 夕飯後, 與諸君入去舍廊, 移時奉話, 余則先出矣。 琴碩士深夜後出來而言曰: "所請文字記草出示, 故見而來矣。 " 企待之餘, 聞此喜消息, 忻幸忻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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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아침을 먹고 나서 오는 길에 윤동(輪東)에 들어가 성윤(聖允)의 길례(吉禮)를 묻고, 탄포(炭浦)로 출발하였다. 경수(敬叟) 씨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노송정(老松亭)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남면(南面)의 가산(佳山) 김이준(金履俊) 집에 들러 옷보따리를 찾았다. 오는 길에 석촌(石村)의 송계석(宋啓錫) 집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저물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食後來路入輪東, 問聖允吉禮, 而發炭浦。 逢敬叟氏, 暫話後, 至老松亭酒幕午飯。 入南面 佳山 金履俊家, 推尋衣褓。 來路入石村 宋啓錫家, 暫話後, 乘暮還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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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史要覽序 我國之人生於我國矇然於我國文獻而徒嘐嘐於中國糟粨者此實我國人之一大病也男子生而有弧矢之志中國一天地也三代以前都兪之治不可不學也三代以後盛衰之跡不可不監也聖賢文章可以師也英雄豪傑可以友也然而我國誠海外一褊邦也從古至今壯游中國與之幷駕驅馳者幾人薛仁貴以勇力著崔孤雲以文章聞李稼亭牧隱父子相繼以科第闡寥寥數千載之間不過是數三子而已焉則我國之産不逮中國人而然歟天限南北以長白山鴨綠江爲鐵甕城而然歟抑未知超邁卓犖之流以萬里長城有樊圃之瞿瞿而然乎否也蒙古契丹女眞之種反不在長城之外耶華人之罵我者曰鮮卑氐羌皆入中國稱皇稱帝而獨未聞你國之能如是者你國之人亦可以大言乎此雖出於戱侮而於我國人實是準的語也大冠濶袍坐而高談政事則曰虞夏聖賢則曰鄒魯英雄則曰漢魏文章則曰唐宋而攷其實行無一可摘不其近於優孟之效孫叔乎良可一太息也檀箕以前雖無文獻可徵而箕聖八條猶可稱誦羅麗之間制度稍具政事文學道德豪雋之多有可師可友者迄至于我朝名碩輩出禮樂文物燦然可述稱爲小中華然而階級漸降風氣太遜於勝朝勝朝之風氣較於羅句濟三國更覺落下一層而以若三國之風氣僅能自守而已終不能進取一步矣入於中國稱皇稱帝尙矣母論翶翔皇都入而爲周公召公出而爲方叔召虎者亦且漠然無聞則何况當今乎當今之士尋章摘句嘐嘐然願慕中國之古之人古之人者將欲何爲世不無道德文章之士而簡而拔之者伊誰苟有英雄豪傑之人則與世相違生無以保其身其可以大有爲乎此所以朝鮮之爲朝鮮而止也韓子曰策之不以其道食之不能盡其材鳴之而不能通其意執策而臨之曰天下無良馬鳴呼其眞無馬耶以是觀之古之中國亦何異於今之我國也孔子嘗欲居九夷而曰君子居之何陋之有又曰如有用我者吾其爲東周乎孔子雖不見用於當世而今之我國用孔子之道則我國其海外之東周乎昭陽赤奮若冬十二月下澣鈍人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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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일찍 출발하여 부기(富機)47)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목천(木川)48)의 새 주막에 이르러서 개장국을 사서 점심을 먹었다. 김제역(金堤驛) 마을에 이르러 낙안(樂安)으로 가는 일행과 헤어졌다. 일행과 오촌(鰲村)으로 갈 참이라 고동령(高東嶺)을 넘어 전의(全義)49) 읍내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早發, 抵富機朝飯。 抵木川新酒店, 買狗羹午飯。 抵金堤驛村, 與樂安同行分路。 與同行作鰲村行, 越高東嶺, 抵全義邑內留宿行。 六十里。 부기(富機) 충청남도 서산군 음암면 부장리(富長里)의 옛 지명으로 추정된다. 부장리는 부다리(富多里)와 기촌(機村) 일부 등 세 마을이 합해져 이루어진 마을이다. 목천(木川)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 목천현(木川縣)이 되었다가, 다시 목천군을 거쳐 1914년 천안군에 통합되면서 목천면이 되었다. 1963년 천안시에 속하였고, 2002년 1월 1일 읍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른다. 전의(全義)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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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밥을 먹은 뒤 관정동으로 가서 우 참봉(禹參奉), 박 상인(朴喪人)과 잠시 이야기하였다. 그길로 용동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북치(北峙)로 가서 정학기(丁學璣)의 병문안을 하고 도로 용동으로 왔다. 비가 쏟아졌다. 비를 무릅쓰고 관정동으로 와서 유숙하였다. ○食後, 往冠井洞, 與禹參奉、朴喪人暫話。 仍往龍洞談話。 又往北峙問丁學璣病, 還來龍洞。 雨作。 冒雨來冠井洞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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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밥을 먹은 뒤 용동에 갔다가 또 북치의 정학기 집에 갔다. 그런데 매우 좋지 않은 기색이 있다는 말을 자세히 듣고, 몹시 걱정되었다. 저물녘이 되어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흥양관의 하인이 내행(內行, 부녀자 일행)을 데리고 올라왔는데, 집에서 온 소식이 한 글자도 없어 몹시 서글펐다. ○食後, 往龍洞, 又往北峙丁學璣家。 詳聞頗有風色之說, 可悶。 乘暮還主人家。 興陽官下人, 陪內行上來, 而無一字家信, 悵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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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밥을 먹기 전에 개간소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정동으로 왔다. 아침을 먹은 뒤 관정동으로 와서 율지와 함께 개간소로 갔다. 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참에 나와 청파로 왔다. ○食前, 往刊所相話, 而來貞洞。 朝飯後, 來冠井洞, 與聿之往刊所。 終日談話, 夕間出來靑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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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十二日 돈 문제가 급하므로 일찍 일어나 서둘러 묘동(廟洞)으로 찾아가서 공서(公瑞)와 상의하였더니, 말하기를, "구례(求禮) 이 석사(李碩士)와 상의해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통지하여 불러와 상세히 의논하였더니, 조금은 도모할 만한 형편이 되어 매우 다행이었다. 내일은 바로 선고의 기일인데, 집안에서 과연 별 탈이 없이 제사를 잘 지내런지 모르겠다.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워 묘동(廟洞)에서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동향(同鄕)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머물렀다. 早起以錢事之急, 促尋往廟洞, 與公瑞相議, 則云"以與求禮 李碩士相議"云, 故通奇請來詳議, 則稍有可圖之勢, 幸幸。 明日卽先考諱日, 而未知家中其果無故安行祀事耶。 心懷難抑, 自廟洞還來主人家, 與同鄕諸益同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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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밤에 비가 내렸다. 동틀 녘에 길을 나서 광정(廣亭)12)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공주(公州) 신점(新店)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금강(錦江)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다고 하니, 매우 염려스럽다. 길을 재촉하여 나루터에 이르자 배가 이미 도착해 있어서 다행이었다. 즉시 배에 올라 중류(中流)에 이르자 풍랑이 크게 일어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쳤는데, 배가 썩고 낡아서 사방으로 물이 새니 그 두려운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가까스로 강을 건넌 뒤 서둘러 채찍질하여 효포(孝浦)에 이르러 술을 사 마시고 요기를 하였다. 중도에 고읍(古邑)의 김 생원(金生員)을 만나 흥양(興陽)의 소식을 물었으나, 전혀 알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판치(板峙)에 이르러 해의 형세로는 정천(定川)까지 갈 수 있지만, 그곳은 시기(時氣)13) 때문에 정결한 집이 없다고 하므로 어쩔 수 없이 판치(板峙)에 머물렀다. 밤에 위 아랫집들을 보니 모두 등불을 밝히고 한밤중에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모두 병을 앓고 있는 집들이었다. 이날 90리를 갔다. 夜雨。 平明發程, 至廣亭朝飯, 公州 新店秣馬。 聞錦江水漲, 渡江未易云, 極可慮也。 催行至津頭, 則船已到泊, 可幸。 卽卽上船, 至中流, 風浪大作, 波濤跳入船中, 而船且朽傷, 四邊水漏, 其悚惧之狀, 不可言。 艱辛利涉, 促鞭至孝浦, 沽酒療飢。 中路逢古邑 金生員, 問興陽消息, 則專然不知, 可歎。 至板峙, 日勢則能進定川, 而時氣無一家乾淨云, 故不得已, 留板峙矣。 夜見上下家, 皆明燈中夜煎粥, 俱是方痛之家也。 是日行九十里。 광정(廣亭)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정안면(正安面)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시기(時氣) 때에 따라 유행하는 상한이나 전염성 질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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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동틀 무렵에 출발하여 저교(楮橋)까지 70리를 가서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삼례(參禮)까지 60리를 가서 묵었다. 이날 밤에 각 관(官)의 내행(內行)이 이 점(店)에 와서 머물고 있었기에 부득이 피폐한 막사로 들어갔다. 방문(房門)에 지창(紙窓)이 없는데다가 행인(行人)들이 많이 들어와 어수선하고 근심스러운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마저 들어오니 위태롭고 두려운 상황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開東發行, 至楮橋七十里, 朝飯秣馬, 至參禮六十里留宿。 是夜以各官內行, 來留此店, 不得已入疲廢之幕。 房無紙窓, 且行人多入, 紛擾憂惱中, 方痛者亦入, 危悚之狀, 何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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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주동(鑄洞)에 가서 송별하였는데, 용강(龍岡) 아객(衙客)42)이 내려오고 여러 사람들이 왔다. 往鑄洞送別, 龍岡衙客之下來, 諸人而來。 아객(衙客) 고을 수령을 찾아와 지방관아에 묵고 있는 손님을 이르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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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아침을 먹기 전에 청배(靑排) 상원(尙元)의 집에 갔는데, 흥양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 온 것이다. 밥을 먹은 뒤에 죽사(竹寺) 신종재(申宗才)가 지방군[鄕軍]으로 어제 들어와 가서(家書)를 전해 주었는데, 별 탈 없이 무사하다는 소식이어서 여러 달의 근심스럽던 마음을 조금 풀 수 있었다. 食前往靑排 尙元家, 欲探興陽消息而來矣。 食後竹寺 申宗才, 以鄕軍昨日入來, 來傳家書, 卽平信也, 稍解累月愁悶之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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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일찍 출발하여 삼례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부내(府內)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한여해(韓汝海)를 만나 영문(營門)에 소장을 올리는 일로 동행했던 사람을 몹시 기다렸다. 예조에 제출할 소장을 옷 보따리 속에 넣어 두었기 때문이었는데, 날이 저물 무렵 강문명(姜文明) 부자가 그의 일가 사람과 짐을 지고 왔다. 문서를 가지고 급히 남문(南門) 밖 주막에 가서 서장(書狀)의 초본을 썼으나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영(營)에 제출하지 못하고 서문(西門) 밖에 가서 강(姜)과 함께 머물렀다. 早發抵參禮朝飯, 入府內午飯。 逢韓汝海, 以呈營門事, 苦待同行者, 禮曹呈狀入衣褓中故也。 日暮時, 姜文明父子與其一家人, 負卜而來, 故持文書, 急往南門外酒幕書狀草, 而以日暮之致, 不得呈營, 往西門外, 與姜也同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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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일찍 출발하여 여해와 신곡(新谷)의 종인(宗人) 연규(延奎)씨의 집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여해가 나의 양식이 떨어졌다고 주인에게 말하였더니, 돈 한 냥을 내주었는데, 양식이 떨어진 끝이라 매우 감사하였다. 곧바로 출발하여 도마교(逃馬橋)42) 근처에 이르러서 여해와 작별하였다. 이어 곽평중(郭平仲), 평당(坪塘)의 종인 연영(延英)과 함께 굴암(屈岩)43)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평당(坪塘)44) 주막에 이르러 평중(平仲)과 작별하고 연영(延英)과 그 집에 들어가 묵었다. 50리를 갔다. 早發與汝海入新谷宗人延奎氏家朝飯。 汝海以吾絶粮之由言及主人, 則以一兩錢出給, 絶粮之餘, 多感多感。 卽發至逃馬橋邊, 與汝海作別。 仍與郭平仲 坪塘宗人延英, 至屈岩午飯。 抵坪塘酒幕, 與平仲作別, 與延英入其家留宿。 行五十里。 도마교(逃馬橋)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에서 내려온 시내에 놓인 나무다리로, 말이 건너다녔다 하여 도마교(道馬橋)라고 했다. 굴암(屈岩)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평당(坪塘)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앞들이 넓고 연못이 있다 하여 지형을 따라 들땡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평당(坪塘)'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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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새벽밥을 먹고 동틀 무렵에 길을 떠났다. 순자강(蓴子江)을 건너 불노치(不老峙)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영귀정(咏歸亭) 마을 뒤편에 이르러 영귀정(咏歸亭)에 들어가려고 할 때 마침 길에서 송국필(宋國弼)을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영귀정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광청(廣淸)에 이르렀다. 마침 원동(院洞)의 이 석사(李碩士)를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이 석사는 그의 집에 들어가고, 나는 공서(公瑞)와 주막(酒幕)에 머물렀다. 주막에는 먼저 들어온 염상(鹽商) 한 사람이 있었다. 함께 이 석사 집 앞에서 머물렀다. 90리를 갔다. 仍曉飯平明發程, 越蓴子江, 至不老峙午飯。 抵咏歸亭村後, 欲入歸亭之際, 適逢國弼於路次, 數語而不入歸亭, 直抵廣淸, 適逢院洞 李碩士數語, 而李碩士入其家。 余則與公瑞留酒幕。 幕則有先入鹽商一人矣。 同留李之家前也。 行九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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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문대(文大) 씨, 미옥(美玉)과 유둔(油屯) 시장 근처에 갔더니 문중(門中)의 노소(老少)들이 내가 내려왔다는 기별을 듣고 몇몇이 모여 있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요기한 뒤에 짐을 지고 들어와 과역(過驛)에 이르자 날이 이미 저물었다. 밤을 틈타 집으로 돌아오니 밤은 이미 3경이었다. 與文大氏及美玉, 往油屯市邊, 則門中老少, 聞余下來之奇, 略干來會, 仍與移時談話, 療飢後, 負卜入來, 至過驛, 則日已暮矣。 乘夜還家, 夜已三更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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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새벽에 출발하여 진위(振威)108)읍 뒤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대황교(大皇橋)109)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화성(華城)에 미치기 전에 김노가 병이 났다. 간신히 북문 밖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70리를 갔다. ○曉發, 抵振威邑後朝飯。 抵大皇橋午飯。 未及華城, 金奴發病。 艱抵北門外留宿。 行七十里。 진위(振威) 경기도 평택시이다. 대황교(大皇橋)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에 있는 삼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던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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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吉 ○길을 나서 오수(鰲樹)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임실 국평(菊坪)2)에 이르러 마을 어귀의 주점(酒店)에 노복과 말을 머물게 하고 종인(宗人) 송기렴(宋基濂)의 집에 들어갔으나, 종인은 마침 출타 중이어서 데리고 오라고 그의 아들을 보냈다. 저물녘에야 들어왔기 때문에 길을 떠나지 못하였는데, 하서의 맏아들 전(椣)이 눈병을 앓은 지 지금 몇 달이 되어 현재 병으로 누워 있다고 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저녁을 먹은 뒤에 하서와 함께 노복과 말이 있는 주점(酒店)으로 나와서 묵었다. ○發程抵鰲樹中火。 抵任實 菊坪, 留奴馬於村前酒店, 入宗人基濂家, 則宗人適出他矣。 以偕來之意, 送其子矣。 乘暮入來, 故不得發程, 而夏瑞之長子椣, 以眼疾今至數朔, 方在病臥云, 爲之悶悶。 夕飯後, 與夏瑞出來奴馬所在酒店留宿。 국평(菊坪)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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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하서가 닭 한 마리를 가지고 와서 주막집 사내를 시켜 아침밥을 장만하여 올리라고 하였기에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말치[斗峙]를 넘어 노고암(老姑岩) 주점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부내(府內)에 도착하여 영주인(營主人) 집에 들어갔으나 주인은 흥양(興陽)으로 내려가고, 주인의 아우가 마침 집이 있었는데 접대하지 못한다고 하니 몹시 민망하였다. 어쩔 수 없이 서문(西門) 밖 전성철(全聖哲)의 집에 가서 묵었다. ○夏瑞持來鷄一首, 使酒幕漢供進朝飯云, 故仍朝飯發程。 越斗峙, 抵老姑岩酒店中火。 得達府內, 入營主人家, 則主人下去興陽, 主人之弟, 適有家而不得接待云, 可悶可悶。 不得已抵西門外全聖哲家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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