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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문적을 수정하고 용동의 이 참판 집으로 갔는데, 간행소의 유사가 문적을 다 산삭(刪削)하였으므로 종일 용동에 머물렀다. ○修整文蹟, 往龍洞李參奉家, 則刊所有司, 皆刪削文蹟, 故終日留龍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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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아침 전에 박영규(朴營奎)가 내려가므로 집에 편지를 써서 부쳤다. 밥을 먹기 전에 정동으로 가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밥을 먹은 뒤 회동으로 가서 송 장성을 만나, 그 삼촌 송익정(宋翼廷) 씨를 위문하고, 또 그 독자(獨子)의 상을 조문하였다. 송지순의 집으로 내려와 잠시 얘기를 하고 왔다. ○朝前, 朴營奎下去, 故修付家書。 食前, 往貞洞, 暫話而來。 食後, 往晦洞見宋長城, 慰其三寸翼廷氏, 又吊其獨子喪。 下來持淳家, 暫話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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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밥을 먹은 뒤 용동으로 가서 종일 놀며 쉬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구안(돈화문(敦化門) 앞길) 약방으로 가서 내일 거동(擧動, 임금의 행차)할 때 여기 와서 구경하겠다는 뜻을 언급하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食後, 往龍洞終日遊憩, 而來路, 往洞口內藥房, 以明日擧動時, 來此觀光之意言及, 而還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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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밥을 먹은 뒤 송상오를 조문하고 출발하였다. 만마동(萬馬洞)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절구 한 구절을 읊었다.만마동 산골에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萬馬關山落木秋)기암괴석은 길가에 우뚝우뚝 솟아있네(奇岩怪石路頭頭)무성한 신록은 단풍 든 계절만 못하니(繁陰不若丹楓節)누가 나보다 먼저 이 누정을 읊었을까(先我何人詠此樓)정자동(亭子洞)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부내(府內)의 전성철(全聖哲)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저녁참에 북문 밖으로 가서 송약수(宋若洙) 씨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그 아우 송민수(宋民洙) 씨 집에 들렀다. 그와 함께 주인집으로 와 잠시 얘기를 나누고 갔다. ○食後, 吊宋象五而發。 過萬馬洞, 吟一絶曰: "萬馬關山落木秋, 奇岩怪石路頭頭。 繁陰不若丹楓節, 先我何人詠此樓。" 抵亭子洞午飯。 抵府內全聖哲家留宿。 行六十里。 夕間, 往北門外, 見宋若洙氏暫話。 來路入其弟民洙氏家。 與之偕來主人家, 暫話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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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일찍 송현(松峴)29)으로 가서 안 교리(安校理)를 조문하고, 그길로 민 진사 집에 갔더니 부재중이었다. 그래서 예조에 갔는데 안리(安吏)는 궐에 들어가서 만나지 못했다. 다시 호동(壺洞)30)으로 갔으나 자직(子直)이 선산에 성묘를 가서 만나지 못하고, 그 아들만 보고서 돌아왔다. 다시 예조에 들어가 안리(安吏)를 만났는데, 다시 의논할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하니 가탄스럽다. 곧바로 나와 버렸다. 早往松峴, 吊安校理, 因往閔進士家, 則不在, 故往禮曹, 則安吏入闕不遇。 轉往壺洞則子直作楸行未遇, 只見其子, 因爲回來。 更入禮曹見安吏, 則決無更議之擧云, 可歎。 卽爲出來。 송현(松峴)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종로문화원 사이에 있던 고개로서,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재라 하고 한자명으로 송현이라고 하였다. 호동(壺洞) 종로구 원남동에 있던 마을로서, 황참의다리 동북쪽에 있는데 모양이 호리병과 같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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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僑老人韓錫斅醮甲讌【幷小序】 乙卯三月十三日卽竹僑老人醮甲也古云巹禮不賀回巹之禮亦可賀乎齒雖回巹琴瑟不調則不可賀也琴瑟雖調庭蘭不茁則不可賀也琴瑟調庭蘭茁而家甚窶無以爲禮則亦不可以受人之賀也今竹僑翁齒屆七十有六家室康寧兒孫林立亦有以庠捷鄕貢翩翻貽悅而家且不甚寠矣然則不可以不賀上以賀竹僑翁之享嘏下以賀羣子姓之衍慶云六十年前十六年二姓相姤卽靑春十六年後六十年白首重逢舊吉辰堂中琴瑟樂如何其舊孔嘉復若新春物與人亦孔嘉舊種庭樹花繽繽大兒年紀六十幾中男少男俱五旬孫曾無數立如竹頭角箇箇玉猉麐書櫓筆巢籍有聲餘事桑麻家不貧上堂獻壽餘波足斗酒十千聚比鄰煥苬凉簟錯文綺濶袍長帬圍六親南陔玉樹能餙慶禮云禮云速嘉賓烹炮龍鳳玉爲脂紫駝之峯水精鱗瓊章珠什堆滿床瑞石與之爭嶙峋人間此樂固罕有膾炙羊棗騰萬脣布衣作相不足貴白日昇僊難與倫擧世之人所大欲翁獨不廉享其純借向翁何如脫屣僑坐竹樹寂寥濱耕翁樵叟相低仰不求聞達甘沈淪百家禮䟽探根柢一部山林付經綸苟非得道寧如彼㶊神養氣自有眞韶顔雅齒期不老七十六年康彊身誰道十六加六十猶是先甲靑春人問豐年係生民之大本關國家之永命則豊年之爲瑞顧不大歟易著豊享之象詩有豊年之頌則取象作頌之義皆可明言歟神農敎耕後稷播穀則豊年果是人事之必致歟元日祈穀豊年之爲始也秋成報賽豊年之告功也其始其終皆有其道歟貢賦撤助豊年之定制也茨梁京坻豊年之爲樂也旣有其制則豊年必致於每歲旣有其樂則豊年果在於何時歟春秋之書有年者凡幾大武之樂屢豊者何由上古聖人之世未皆豊年後世昏亂之時或多有豊年則果是天數之適然歟豊年之謂天數則不稼不穡而亦可致豊年歟豊年由人事則或旱或澇而亦可致豊年歟大抵豊年者天之所以養斯民也聖人所以財成出治也粒我烝民由於豊年國有蓄積賴於豊年若是乎豊年之爲美也惟我東方盖自箕聖井田之後雖羅麗之際素稱富厚而徛我祖宗朝治法必以豊年爲先務逮我當宁以來歲致豊年黎民不飢克享大有之慶至於今年邦慶荐疊豊穰無前奈之何夏旱爲愆移秧失節雖賴圭璧之擧旋得慰洽之喜不失爲豊年而不無被災之處已登之處固可足食而受災之處將待拯救廟堂之籌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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邑之政將何以盡其方而得其要均豊年之慶歟諸生必有講究于中願聞其說 對愚謹按貨殖傳曰金穰木飢穰則病農蘇子亦曰穀太賤則傷農然則病農傷農固可爲上瑞歟粒米狼戻終有狗彘之不檢商賈遊食乃致蟊蠹之爲弊一斗之價三錢而難酬子母之贏息一畝之出千種而難起雇傭之惰慢以至編戶之持梁富家之連陌未嘗不由於豊則愚以爲無德之豊竟致無災之災矣雖然民農則樸樸則易用易用則四境安主位尊民農則重重則少私義少私義則公法立力專一民農則其産復産復則重徙重徙則死其處而無二慮民舍本而事末則不令不令則不可以守不可以戰后稷曰所以務耕織者以爲本敎也則農者天下之本食者小民之天先王旣思所以厚其生又思所以利其用旣思所以興其利又思所以除其害拳拳致豊之意如此百姓豈有不從事南畝而能致西成哉畢命之資富能訓指其豊也箕範之旣富方穀亦以豊也由此言之則年之爲豊無負於人而享豊之道不以其義則反以爲病農傷農矣愚生長於畎畝之中執此說而以待明問久矣何幸明問之及此耶迺言四年之大有曰豊盖稼穡小人之所依農作終歲之所苦五穀皆登然後可無艱食之患萬物均成然後始有恒産之樂靈芝鳳凰之瑞莫過於占豊景星慶雲之祥不踰於有年有是哉豊年之爲上瑞也是以自古聖君仁主政必先於務農治必貴於獲稔十日雨五日風調順陰陽之氣千斯倉滿斯箱占驗豐登之祥苟有一穀之不登一稼之不成謂有欠於大熟若有匹夫之或飢匹婦之或寒必自反於仁政然而和氣至而雨露風霜得其時則百穀用成乖氣降而旱蝗水澇不得其平則百穀用不成徒知農事之作在乎人而不知農功之成在乎天惟知災祥之降在於天而不知災祥之致由於人則吾之氣不順而天地之氣不順天地之氣不順而農事之祥無以致矣傳曰致中和天地位萬物育後之欲享豊登之樂者盍於致中和三字上勉旃請曰明問而臚列之易之上雷下火盖取豊亨之義詩之多黍多稌斯有豊年之慶若非羲皇之聖德則何以致豊亨乎苟非周王之晟化則曷以臻豊穰乎噫炎皇之耒耨以利天下邰后之播藝粒我烝民則此果由人事也噫元日祈穀年之始也秋成報賽歲之終也其始其終皆循其序也噫貢賦徹助三代之捐益也茨梁坻京曾孫之稼庾也則其制其時不必架床噫魯史之書有年當春秋之際其可多乎周樂之咏屢豊克殷商之餘豈無徵乎噫上古聖世未必皆豊後世亂世亦多有豊則或有天數之適然矣雖曰天數而不稼不穡則何以致豊乎專委人事則或旱或澇而豈可爲災乎大抵豊者天之所以養民也民者國之所託爲本也民事曰農而農者王業之本也故聖王所以財成出治而粒我烝民實由於豊國有蓄積亦賴於豊若是乎豊年之爲美也惟我東方粤自箕聖井田之後八家同井千里通烟洎于羅麗民知食力地無遺利徛歟我祖宗朝聖治以豊爲先務逮我當宁以來歲致屢豊黎民不飢克享大有之慶奈之何今年夏旱爲愆馬不載秧牛不服田終賴圭璧之擧旋致珠玉之慰不失爲豊年之慶而普天之下猶有憾焉則廟堂之籌當議發實藩邑之政必思捐廩救荒之策似不踰於此矣篇將終矣豊年之瑞不可諉之天數亦不可諉之人事惟在得其道而道在中和矣中者天下之大本也和者天下之達道也苟致中和之治則小康之休固不暇論大有之慶亦不足以致矣謹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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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먼 길에 지치고 동상례(東床禮)14)도 치렀기 때문에 이날 마침내 차동(車洞)에서 사도(蛇渡) 하인 편에 집으로 보낼 편지를 써서 부쳤다. 以路困及設東床禮, 故是日終車洞書付家信於蛇渡下人便。 동상례(東牀禮) 혼례를 치른 뒤에 신랑이 신부집에서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로, 동상례(東床禮)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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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아침을 먹은 뒤에 주동(鑄洞)에 가니 교리가 입직하여 만나지 못하고, 치회(穉會) 형제만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곧장 이문동(里門洞)15)의 장우(張友, 장씨 성의 벗)에게 갔으나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 또 팔패(八牌)에 가서 송상원(宋尙元)을 만나고 왔다. 食後往鑄洞, 校理入直不遇, 只見穉會兄弟。 來路直往里門洞 張友, 尙不來矣。 又往八牌, 見宋尙元而來。 이문동(里門洞)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에 이문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우리말로 '이문골', '이문안'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것이다. 서울에 이문이 설치된 것은 조선 세조 때로 도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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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귀남(龜南) 종객(宗客)과 흥양(興陽) 사람이 내려왔으므로 같이 청파(靑坡)로 가서 송별하고 왔다. 오전에 화옥(華玉)이 와서 보고 갔다. 마필(馬匹)을 샀다. 龜南宗客及興陽人下來, 故同往靑坡送別而來。 午前華玉來見而去。 買馬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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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동틀 무렵 길을 나서 수원(水原)을 지나가는데 그 성역(城役)의 번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석재(石材)로 길이 막혀 대로(大路)를 경유할 수 없으니 시내를 따라 우회하여 간신히 나와 중저점(中底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소사(素沙)에 이르자 바람이 크게 일어나 날리는 먼지가 눈앞을 가리므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100여 리 길을 왔으니 말에게 병이 생길까 걱정되어 이에 머물러 묵었다. 平明登程, 過水原, 其城役之煩巨, 不可勝言。 石材塞路, 不得由大路, 沿溪迂回, 艱辛出來, 至中底店中火。 至素沙, 風氣大作, 飛塵溢目, 不得前進, 且已行百餘里, 則恐馬生病, 因爲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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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주동(注洞)의 종인(宗人)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주자장인(鑄字匠人)을 다른 곳에 빼앗겨 사람을 시켜 그 기계(器械)를 빼앗아 오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환전(換錢)을 아직 손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어긋날 염려가 있으니 한탄스럽다.고향 사람 여러 명이 모두 찾아와서 보고 갔다. 전해 듣기로, 산양(山陽)의 안사강(安士剛)이 여점(旅店)에 와서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병 때문에 가서 볼 방도가 없으니 서글프고 한탄스러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注洞宗人來見爲言, "鑄字匠人之見奪於他處, 使人往奪其器械"云, 而以換錢之尙未入手, 故事有違之慮, 可歎。 鄕人數輩, 皆來見而去, 傳聞山陽 安士剛, 來留於旅店云, 而病無往見之道, 悵歎何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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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사동(沙洞)의 최생(崔生)이 찾아와서 만났다. 상원(尙元)이 주동(注洞)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한창 간행(刊行) 중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가서 만날 길이 전혀 없으니, 한탄스럽다. 沙洞 崔生來見, 而尙元自注洞來言, "方張刊役"云, 而萬無往見之道, 可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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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나서 영정(咏亭)에 이르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3)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해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즉시 길을 돌려 지신천변(智申川邊)에 이르러 언갑(彦甲)을 만나 길에서 옷 보따리를 전해 주었다. 채찍을 재촉하여 용계(龍溪)4)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나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동막(東幕)마을5) 어귀에서 최장선(崔長善)과 박성헌(朴成憲)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채찍을 재촉하여 역동(驛洞)에 이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할 때였는데, 마구간이 없었기 때문에 어둠을 무릅쓰고 곡성(谷城)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早飯登程, 至咏亭暫話, 而見其景象, 極爲可憐, 寧不忍見。 卽爲回程, 至智申川邊, 逢彦甲, 路中傳給其衣褓。 促鞭至龍溪中火, 日已夕矣。 至東幕村前, 逢崔長善、朴成憲, 立談後, 促鞭至驛洞, 已黃昏時分, 而無馬廐, 故冒昏至谷城邑內留宿。 是日行六十里。 영정(咏亭)에……나누었는데 영정은 영귀정(詠歸亭)으로 순천시 주암면의 영귀마을에 있다. 이곳에 사매(舍妹)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온 가족이 병을 앓아 고통 받고 있어 이에 대한 이야기를 사매와 나누며 마음 아파한 것 같다. 용계(龍溪)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용계리이다. 동막(東幕)마을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서계리를 말한다. 서계리는 읍의 제일 위쪽에 있다하여 동막(東幕) 마을이라 하였는데, 서쪽에 계곡이 있다하여 서계리로 바뀌었다. 동막은 마을 서편의 형제봉(兄弟峰)이 동쪽을 향하여 장막을 쳐 놓은 듯한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지형이 형제장군이 군막을 치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유래 되었다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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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밥을 먹은 뒤 하서와 야당(野塘)으로 와서 송필동(宋弼東) 씨를 만났다. 이에 점심을 먹고 동행하여 계동(桂洞)80)의 송화(宋燁) 집으로 왔다. 저녁을 먹은 뒤 그 마을 종인(宗人, 먼 일가)인 상향(象亨), 상풍(象豊), 상정(象貞), 상의(象義), 상태(象台)가 다 같이 찾아왔다. ○食後, 與夏瑞偕來野塘, 見宋弼東氏。 仍爲午飯, 而同行來桂洞宋燁家。 夕食後, 其村宗人象亨、象豊、象貞、象義、象台, 皆來見。 계동(桂洞)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계수리 계동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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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새벽에 출발하여 여산 읍내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삼례(參禮)128)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물녘 전주부(全州府) 서쪽의 전성철(全聖哲) 집에 이르렀다. ○曉發, 抵礪山邑內朝飯。 抵參禮午飯。 暮抵府西全聖哲家。 삼례(參禮)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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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새벽에 출발하여 신안서원(新安書院)130)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슬치(瑟峙)131)에 이르러 떡을 사서 요기를 하였다. 두치(斗峙)132)를 넘어 평당(坪塘)에 들러 잠시 필동(弼東) 일가붙이를 보고 저물녘에 국평의 하서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90리를 갔다. ○曉發, 抵新院朝飯。 抵瑟峙賣餠療飢。 越斗峙, 入坪塘, 暫見弼東宗人。 暮抵菊坪夏瑞家留宿。 行九十里。 신안서원(新安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에 있는 서원이다. 선조 21년(1588)에 주희와 한호겸(韓好謙)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슬치(瑟峙)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과 완주군 상관면의 경계가 되는 고개이다. 두치(斗峙) 전라북도 임실과 오수를 잇는 고개로 '말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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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날이 채 밝기 전에 길을 나서 정천(定川)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였다. 비가 올 것 같아 걱정스럽다. 효포(孝浦)11) 어귀에서 흥양(興陽) 김형갑(金衡甲)을 만났다. 서울에서 온 자들이 지나가는 편에 구두로 소식을 전했다. 채찍을 재촉하여 금강(錦江)을 건너 신점(新店)에서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未明登程, 至定川秣馬, 而似有雨意, 可悶。 至孝浦前路, 逢興陽 金衡甲。 自京來者, 口傳消息於過去便。 促鞭渡錦江留新店。 是日行百里。 효포(孝浦)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신기동이다.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 향덕(向德)이 살았던 마을이 계룡면 신기리인데, '효포' 또는 '효가리(孝家理)'라고 불리게 된 것은 향덕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그의 허벅지 살을 베어낸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이곳 효포에서부터 남쪽으로 널티, 경천역, 노성으로 이르는 길은 전통시대의 역제가 폐기될 즈음에 발발한 동학농민전쟁을 치른 역사적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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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晦日 ○출발하여 묘치(猫峙)133)를 넘어 대초정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광천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나는 원동(院洞)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출발하였다. 저물녘 무동정(舞童亭)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90리를 갔다. ○發越猫峙, 抵大抄亭朝飯。 抵廣川午飯。 余則入院洞暫話後發程。 暮抵舞童亭留宿。 行九十里。 묘치(猫峙) 전라남도 화순군의 동면ㆍ이서면ㆍ동복면이 만나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순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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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吉 ○새벽에 출발하여 사미정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구암(龜岩)134) 앞에 이르러 율지는 곧장 동림으로 향하고, 나는 장수동(長壽洞)으로 향하였다. 알룡치(謁龍峙)의 강이백(姜利伯) 집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마을 뒤 고개를 넘어 수동(壽洞)에 이르렀다. 우선 별 탈 없이 손자가 잘 자라고 있어 다행이었다. 수동 마을 앞에 이르러 마침 류 서방(柳書房) 원거(元擧)를 만났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흥양 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음날 동행할 생각으로 함께 들어가 유숙하였다. ○曉發, 抵四美亭朝飯。 至龜岩前, 聿之直向東林。 余則向長壽洞。 入謁龍峙姜利伯家午飯。 越村後嶺, 抵壽洞。 姑無故孫兒善長, 幸幸。 至壽洞村前, 適逢柳書房元擧。 問向何處 則作興陽云。 故明日同行之意, 偕入與之同留。 구암(龜岩)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구강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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