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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二月 금년 봄 2월에 충강공(忠剛公) 선조 행록(先祖行錄)을 개간(開刊)하는 일로 오촌(鰲村, 송치규) 장석(長席)에게 서문(序文)을 청하기 위해 이찬(而贊), 윤익(允益)과 동행하여 오촌에 갔었다. 당시 장석이 마침 병환 중이라서 글을 받지 못하고 가을을 기약하고 돌아왔다. 이번 겨울 종중의 협의에서 또 나에게 갔다 오라고 하였으므로 11월 19일에 길을 나서 석촌(石村) 송계석(宋啓錫)의 집에 이르러 묵었다. 20리를 갔다. 今年春二月, 以忠剛公先祖行錄開刊事, 請序文於鰲村 丈席之意, 與而贊及允益, 同行往鰲村矣。 其時丈席, 適患身, 不得受文, 秋以爲期而來矣。 今冬宗議, 又以余往還, 故乃於十一月十九日發程, 抵石村 宋啓錫家留宿。 行二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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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아침 전에 이찬(而贊)이 오촌(鰲村)에게 부칠 서간(書簡)을 가지고 왔다. 형님들과 증아(曾兒)와 함께 유둔(油芚) 시장 근처로 가서 행장을 꾸리고 문중의 제종(諸宗)들과 작별한 다음 길을 나섰다. 낙안(樂安)의 평촌(平村) 주점에 이르러 묵었다. 20리를 갔다. 朝前而贊來付鰲村書簡。 與諸兄主及曾兒, 往油芚市邊治行, 與門中諸宗, 作別發程。 抵樂安平村酒店留宿。 行二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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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일찍 출발하여 직산(稷山) 삼거리 주막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소사(素沙) 주막9)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주막에 들어갈 때 보성(寶城)의 정영각(鄭永殼)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막으로 들어갔는데,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을 때 도중에 다시 만났다. 그길로 동행하여 수원(水原) 오산(烏山) 시장 근처에 이르러서 묵었다. 100리를 갔다. 어제 신은(新恩) 주막에 머물고 있을 때, 말을 탄 두 명의 길손과 함께 위아래 방에 머물렀는데, 오늘도 동행하여 위아래 방에 머물렀다. 早發至稷山三街酒幕朝飯。 抵素沙酒幕, 中火秣馬。 入幕之際, 逢寶城 鄭永殼, 暫話入幕, 中火後發程, 中路更逢。 仍爲同行, 抵水原 烏山市邊留宿。 行百里。 昨日留新恩酒幕時, 與馬上二客, 留上下房, 亦爲同行, 留上下房。 소사(素沙) 주막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소사마을에 있었던 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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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아침 전에 박종수(朴宗洙)가 와서 만나고 갔다. 오위장(五衛將)과 가교(柯橋)의 장우한(張羽漢)이 찾아왔기에 두 벗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장우한은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참여하였으나 회시(會試)를 보러 갈 방도가 없어서 나를 보고 말을 청하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내어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낙안(樂安)의 형님과 서소문(西小門)의 이 석사(李碩士) 집에 갔다가 잠시 쉬고 있는데, 안채에서 전하는 말에, 옛날을 생각해 보노라니 슬픈 마음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주인과 서소문(西小門) 안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정 진사(丁進士)의 사관(舍館)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주인집에 돌아왔다. 朝前朴宗洙來見而去。 五衛將與柯橋 張羽漢來見, 兩友仍朝飯。 張也參武科初試, 而見會試之道無路, 故見我請馬匹, 故不得已許給。 食後與樂安兄主, 往西小門 李碩士家暫憩, 自內間有傳語, 推念疇昔, 不勝悲懷。 與主人入西小門內酒家, 沽酒以飮, 往丁進士舍館暫憩, 午後出來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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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밥을 먹은 뒤 송화(宋燁) 군찬(君贊), 송낙의(宋樂義) 내직(乃直)과 나와 광암(廣岩) 객점에서 하서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참 있으니 하서가 과연 왔길래 술을 사서 함께 마시고 군찬과 내직 두 송씨와 작별하였다. 하서와 동행하여 첩치(箑峙)를 넘어 굴암(屈岩) 아래 객점에 이르러 작별하였다. 도마교(逃馬橋)81) 주변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방동(芳洞)82)의 송렴(宋濂)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송상오(宋象五), 송재환(宋在煥) 두 사람의 유고에 조문하기 위해서였다. 30리를 갔다. ○食後, 與宋燁君贊、宋樂義乃直出來, 廣岩店待夏瑞來矣。 移時夏瑞果來, 沽酒相飮, 與君贊乃直兩宋作別。 與夏瑞同行, 越箑峙, 抵屈岩下店作別。 抵逃馬橋邊午飯。 抵芳洞宋濂家留宿。 入此洞者, 吊宋象五、宋在煥兩人之故也。 行三十里。 도마교(逃馬橋) 임실군 임실읍에서 내려온 시내에 놓인 나무다리로, 말이 건너다녔다 하여 도마교(道馬橋)라고 했다. 원문 '逃'는 저본의 오류로 보이나 확실치 않다. 방동(芳洞)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방수리 방동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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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일찍 출발하여 은산(殷山)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소로(小路)로 들어가서 험준한 고개 하나를 넘어 도산(道山)의 족질(族姪)인 송필흥(宋弼興)의 집에 찾아갔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려는데 주인이 한사코 만류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렀다. 30리를 갔다. 닭을 잡아 잘 대우해 주니 매우 기뻤다. 早發抵殷山朝飯。 入小路, 越一峻嶺, 訪道山族姪弼興家。 午飯欲爲離發, 則主人堅挽, 故仍留宿。 行三十里。 殺鷄以善待, 可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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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아침을 먹기 전에 정동(貞洞)의 이 석사(李碩士)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왔다. 아침을 먹은 뒤에 율지와 용동(龍洞)의 이 참봉(李參奉) 집에 갔더니, 참봉 경화(景華)가 순강원(順康園)18) 참봉(參奉)으로 이제 막 입번(入番)하였다. 그 아들 용준(龍俊)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명현록(名賢錄)》 개간(開刊)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이어 명례동(明禮洞, 지금의 명동(明洞))의 참판(參判) 박종정(朴宗正)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니 공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공서(公瑞)와 송 판서의 집에 들어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공서는 그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가고, 나는 주인집으로 나오니 옹포(甕浦)의 송격(宋格)이 내일 아침에 내려간다고 하므로 가서(家書)를 써서 부쳤다. ○食前往貞洞 李碩士家, 暫話而來。 食後與聿之往龍洞 李參奉家, 則參奉 景華, 以順康園 參奉, 才入番矣。 只與其子龍俊暫敍後, 仍議《名賢錄》開刊事, 仍往明禮洞 朴參判 宗正家, 暫話而來, 則公瑞來待矣。 暫話後, 與公瑞入宋判書家, 移時談話後, 公瑞往其所住處, 余則出來主人家, 則甕浦 宋格, 明朝下去云, 故修付家書。 순강원(順康園) 선조의 후궁으로 원종(元宗)의 생모인 인빈(仁嬪) 김씨(金氏)의 무덤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있다. 영조 대에 마련된 궁원제(宮園制)에 입각해 영조 31년 순강원의 명칭을 얻었다. 《光海君日記 5年 10月 29日》 《英祖實錄 31年 6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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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밥을 먹은 뒤, 일행과 대묘동(大廟洞)20)으로 가서 공서(公瑞)을 불러 종묘 문밖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원록(祠院錄)》을 다시 부탁할 생각으로 그길로 예조의 당직 부서로 가니 아전 배광옥(裵光玉)은 마침 출타하였고, 아전 안인성(安寅成)은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른 아전과 상의해보니, 배광옥이 없어 《사원록(祠院錄)》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食後, 與同行往大廟洞, 要公瑞暫話於宗廟門外。 以《祠院錄》更付之意, 仍往禮曹直府, 則裵吏光玉適出他, 安吏寅成昨年身故云。 故與他吏相議, 則裵吏不在, 不知《祠院錄》之在, 故還來主人家。 대묘동(大廟洞) 서울 종로구 훈정동ㆍ묘동ㆍ봉익동ㆍ종로3가ㆍ종로4가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대묘인 종묘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대묫골ㆍ대뭇골ㆍ대묘동ㆍ묘동'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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手抄眉山蒐獵序 余於客夏僑居漢北楓下屋畏景爍爍恒潦淫淫顧無以自娛借主人書籍摘蘇長公事文之散出者手抄爲送夏之資旁有識之者曰子成名而年且衰矣以有限之精力空費於無益之書不其近於淫且愚乎古之杜武庫癖於左氏而子之癖於坡者抑何意見余以詩解嘲曰霧色長霖火色暉百坡於我弗相違抽毫正學蠅頭細運臂猶爭鶻翮飛自笑聞中緣底劇如癡坐上任他譏且書且讀役心欲不妨身家頓忘機居未幾何余出補東郵丞丞舍又寂如僧寺苦難自適搜破篋檢古籍手抄爛藁顧自如也仍復分類精寫間因事東征西馳越明年春正月始克成編凡幾十百條總爲一卷名之曰眉山蒐獵嗟乎昔我先君子恒言聰明不如鈍筆余今而後儘覺前言之不吾欺也余幼少時天資不甚魯鈍經史雜書過眼輒誦自以爲天下無難事忽焉年未半百舊聞新見都付亡羊恍然情神如墮雲霧縱欲收拾而不可得矣今此拭昏眸呵凍手而役役自苦者幸借未老之鈍筆欲以爲餘生之一半分聰明良可一歎後來嗣我者開卷而覽此序則庶或追感於先君子之格言而能使此翁之手澤得無爲蟲鼠之所點汚否唯彼坡翁之文章事實自有先哲定評不欲爲畵蛇之添足而盖文苑百體於斯約而該矣苟能詳味則欲學文章者亦豈曰全然無益也哉歲昭陽赤奮若春正月晦鈍翁書于丹邱之羽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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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새벽에 출발하였다. 공주 감영에 들어가 산성의 남문으로 들어가서 북문으로 나왔다. 곧바로 나루를 건너기 위해서였다. 모로원(慕露院)103)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광정(廣亭)104)에 이르러 나는 송상철(宋相哲) 집에 들어갔으나, 길보(吉甫)가 마침 집에 없어서 곧바로 나와 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차령(車嶺)105)에 못 미쳐서 중도에 길보를 만났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그길로 헤어졌다. 차령을 넘어 덕평(德坪)106)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曉發。 歷公州監營, 入山城南門出北門。 卽爲越津。 抵慕露院朝飯。 抵廣亭, 余則入宋相哲家, 吉甫適不在, 卽爲出來, 酒幕午飯。 未及車嶺, 逢吉甫於中路。 移時談話, 仍爲分袂。 越車嶺, 抵德坪留宿行。 六十里。 모로원(慕露院)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오인리 양달 마을에 있었다. 원래 명칭은 '모로원(毛老院)이다. 광정(廣亭)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이다. 차령(車嶺)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仁豊里)와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院德里)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덕평(德坪)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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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새벽에 출발하여 도토치(道吐峙) 아래 객점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실음소(失音所)107)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칠원(柒原)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100리를 갔다. ○曉發, 抵道吐峙下店朝飯。 抵失音所午飯。 抵柒原留宿。 行百里。 실음소(失音所)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수헐리이다. 성환에서 국도와 갈라졌던 옛길이 국도와 다시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마을로 한자 이름은 수헐리인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수헐원(愁歇院)'으로 되어 있고, 속칭 '실음소(悉音所)'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곳은 동쪽으로 5리 가면 직산 고을이 나타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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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香寺【幷序】 丹邱丞以將事之役入雉岳洞門雪裏砯崖滑如水晶舍馬就便輿迫黃昏一老衲迎候忽見山凹裏蝸角小刹蕭條着地問其名則曰國香卽雉岳祠守護之刹而自國家歲降香祝此寺實主之因以得名云停輿而入經一宿眼界紆鬱別無可賞只有二三老髡其中曰聖益者頗能玄談娓娓可聽古有無錯禪師修戒此山適出山門路傍有母雉方乳忽見一大蠎盤回欲嚼師住杖謂蛇曰汝雖餒可不忍歟彼方乳矣母若見嚼則羣雛亦隨而畫以汝一口欲喫無罪之羣生可乎蛇乃移怒於師仍作人語曰吾實餒矣聽汝之言而欲活羣雉則替啖汝一箇身亦不可乎便張吻欲咬之師脫衣向前蛇更人語曰吾聞汝生佛也多神術云使我能聽法鍾於此地則當釋汝矣能然否盖師之所住刹與此地稍隔而日色方晝正非打鐘之時語未幾何忽聞法鍾之聲函胡鳴動歷歷中節蛇以爲神釋而去師歸問法徒則皆以爲雌雄雙雉俄忽飛來以尖嘴相爭啄鍾血流鍾下實不知其故也師愀然長嘆備述所經始知打鐘者出於乳雉之報恩也山以此錫名雉嶽至今相傳云云此說極涉荒唐而亦足爲山囱下破寂一資故戱錄之【寺名國享而享字不韻故換用香字】寂寥神宇南剝落小僧巢庭砌難容馬四山環而包凍林何紆鬱危石更碻磝只愛雪後景氷綃織江鮫舊號空帶香短壁見斗筲偪側如蝸殼黏着山之凹深鎖一洞門不見十里郊破瓦數間屋正似掩荒茅蕭瑟三兩髡䳡鷯托小梢尙能依神祠堅守太黏膠何處得齋飯供佛銅磬敲辛勤候老丞叉手禮相交今夕免荒凉小廚設大庖冠珮來肅肅桂醑又蘭殽煖堗坐妥怗雪風任颵颵半宵玄談裏賴渠塵念抛荒唐無錯說援古正嘐嘐惜爾頗聰慧未能透理爻緣底守空門大界嗟同胞枯木與死灰終歸一漚泡指證其然否雉山怳解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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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 書者六藝之一而書有六書象形指事會意諧聲轉注假借是也如今學者尠有知其法者易曰上古結繩而治後世聖人易之以書契百官以治萬民以察盖取諸夬史曰宓犧氏造書契以代結繩之政又曰史皇氏見鳥跡始制文字天雨粟鬼夜哭所謂鳥跡篆是也然則宓犧史皇以前無書可徵太古五龍攝提合雒連通叙命循蜚因提等諸紀從何而紀抑或後來浮誕之士增衍敷益創出無名之名矣歟是未可知也五帝三王之書以古文紀之則鳥跡蝌蚪之文後人誠䵝䵝難讀博學如倚相識奇如楊雄者流移摹楷書以誨後人乎否抑未知上世又別有楷書也已古文於今之世旣無所適用然學者亦不可不識倉籒氏古文諸法雖變化不一而其可疑者無可攷豐叔氏金石古文自汗簡文說文演說古經石經夏書古史此干塚石槨文華嶽碑商鼎周彛盤匜簠簋之文籒韻古世本岐陽石鼓大傳切韻集字羣玉古文凡百三十字其文蒼古簡嚴或怪怪奇奇多不可名狀盖自軒轅以來麟鳳龜龍嘉禾雲鳥星文之書特記瑞而已不可用史籒變古文爲籒書曰大篆至秦李斯壞古文爲小篆漢唐來諸作者十四家芝英飛帛金錯玉筋之類七曺劉王衛韋史之作又七皆非古文可見秦漢以降風氣淺薄不能效古嗟乎太昊蒼古之氣亡於秦歷漢氏無餘矣今也秦漢風氣亦難摹法何况古文上古未有文字結繩以記事庖犧氏始造書契謂刻木書字有龍瑞又作龍書史皇氏兄弟三人一造笁國字一造天宮字季曰倉頡造華字所謂始制文字是也見空階鳥跡又作鳥跡書神農氏有嘉禾瑞作穗書黃帝氏有雲瑞作雲書顓頊氏作科斗文字夏禹氏作獸篆務光作倒薤書又有奇字古文蒼古難知漢時楊雄識奇字鳳書龜書皆因古文紀瑞至周媒氏作墳書伯氏因鍾鼎古文作笏記文曰殳書古文不知作於何世而三代用之史佚作鳥書司星子韋作星書孔氏弟子作麟書皆從龜龍古文史籒變古文作十五篇曰籒書秦壞古文作刻符文字八體丞相斯作小篆始皇帝至以衡石量書文書繁上谷王次仲變古文爲書令隸人佐書曰隸書或云程邈作之邈出於徒隸故曰隸書隸書作而古文廢邈餙小篆作上方篆用之印璽王次仲減隸書作八分文字割隸書去八分法小篆取八分云秦胡毋敬因大篆變小篆漢孝武時甘泉産芝令陳遵作芝英篆曹喜【或作善】作垂露篆又作懸針篆書五經篇目唐時有碧落篆似小篆李陽氷善玉筋篆後世用之焉魯秋胡妻玩蚕作彫虫書【或曰楊雄作雕虫篆】漢時有鵠頭篆韋誕作剪刀篆史游造其極劉德昇觀星文作纓絡篆蔡邕見人以帚求書作飛帛文字韋誕【字仲將】又作金錯古錢等書晉衛瓘三世攻書作柳葉書王羲之以飛字龍爪形作龍爪書【盖古文變爲籒書籒書變爲小篆小篆變爲隸書隸書變爲八分八分變爲楷楷變爲行行變爲草至此而古文掃盡無餘矣章草漢杜伯度所作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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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일찍 출발하여 부기(富機)47)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목천(木川)48)의 새 주막에 이르러서 개장국을 사서 점심을 먹었다. 김제역(金堤驛) 마을에 이르러 낙안(樂安)으로 가는 일행과 헤어졌다. 일행과 오촌(鰲村)으로 갈 참이라 고동령(高東嶺)을 넘어 전의(全義)49) 읍내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早發, 抵富機朝飯。 抵木川新酒店, 買狗羹午飯。 抵金堤驛村, 與樂安同行分路。 與同行作鰲村行, 越高東嶺, 抵全義邑內留宿行。 六十里。 부기(富機) 충청남도 서산군 음암면 부장리(富長里)의 옛 지명으로 추정된다. 부장리는 부다리(富多里)와 기촌(機村) 일부 등 세 마을이 합해져 이루어진 마을이다. 목천(木川)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 목천현(木川縣)이 되었다가, 다시 목천군을 거쳐 1914년 천안군에 통합되면서 목천면이 되었다. 1963년 천안시에 속하였고, 2002년 1월 1일 읍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른다. 전의(全義)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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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여독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주인집에 머물렀다. 오후에 대로변으로 나가 요기를 하고, 그길로 관정동(冠井洞)으로 향하였다. 중도에 박상현(朴祥顯)과 공서(公瑞)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헤어져 돌아왔다. ○以路憊不能運動, 留主人家。 午後出去大路邊療飢。 仍向冠井洞矣。 中路逢朴祥顯及公瑞, 談話後, 相分還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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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아침 전, 공서가 내려가는 김에 김노와 고부의 김 생원을 데리고 출발하였다. 밥을 먹은 뒤 10냥을 가지고 개간소로 가서 냈다. 오후에 나와서 창동의 배진환(裵珍煥)이 머무는 곳에 들렀더니, 배진환은 출타하였다. 남문으로 나와 차동(車洞)115)으로 가니 주인이 출타하였다. 이에 아랫사랑으로 가서 주인 민치명(閔致明)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도로 창동으로 왔는데 배진환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로 남문으로 나와 율지와 함께 주인집으로 왔다. ○朝前, 公瑞下去次, 率金奴與古阜金生員發程。 食後, 持十兩錢往刊所納錢。 午後出來, 歷訪倉洞裵珍煥所住處, 則裵也出他。 出南門, 往車洞, 則主人出他。 仍往下舍廊, 與主人閔致明暫話, 還來倉洞, 則裵也不來。 還出南門, 與聿之出來主人家。 차동(車洞) 중구 의주로1가ㆍ순화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수렛골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추모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태어난 터에 비석을 세우고 그를 추모했던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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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먼저 출발하여 소사(素沙)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성환(成歡)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천안(天安) 삼거리(三巨里)에 이르러 해남(海南) 최진욱(崔震煜)을 만나 함께 머물렀다. 90리를 갔다. 先發抵素沙朝飯, 抵成歡中火。 抵天安三巨里, 逢海南 崔震煜同留。 行九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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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일찍 출발하여 용계(龍溪)75)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곡성(谷城) 읍내에 이르러 요기를 하였다. 남원 자생(者省)76)의 원산(圓山) 필흥(弼興) 집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70리를 갔다. ○早發, 抵龍溪朝飯, 抵谷城邑內療飢。 入南原者省圓山弼興家留宿。 行七十里。 용계(龍溪)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근처이다. 자생(者省)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근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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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새벽에 출발하여 금강(錦江)을 건너려는데, 하늘이 아직 밝지 않아 달빛이 희미하고 듬성듬성 별빛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사공을 불러 금강을 건너와 판치(板峙)에서 아침을 먹었다. 초포(草浦)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올목(兀木)에 이르러 묵었다. 90리를 갔다. 曉發越錦江, 天未曉而月色依微, 疏星錯落。 呼船工渡來, 而至板峙朝飯。 至草浦中火, 至兀木留宿。 行九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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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아침을 먹기 전에 백운동(白雲洞)에 사는 주서(注書) 이인필(李寅弼) 숙질(叔侄)에게 갔다가 주인집으로 나왔다. 낮에 행장을 꾸려 김노(金奴)를 보내면서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부쳤다. 오후에 동행과 문내(門內)에 들어가서 나는 정동(貞洞)의 이 석사(李碩士, 이희(李))집에 갔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가 술과 떡을 사서 권하니 매우 감사하였다. 이어 주인집으로 나왔다. ○朝前往白雲洞 李注書 寅弼叔侄, 出來主人家。 午間治送金奴, 修付家書。 午後與同行入門內, 余則往貞洞 李碩士家。 而仍與之相話, 買酒餠以勸, 多感多感。 仍爲出來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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